마음이 상한 자 곁에 계시는 하나님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시34:18上)
기도라고 하는 나무는 고난이라고 하는 밭에서 자라는 한 그루의 식물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가지면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가 매우 깊어집니다. 저는 이제껏 존경할만한 기도의 사람들을 몇 명 만났습니다만 그분들의 공통점은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다 그것이에요. 그러면 이런 질문 하나 떠오르지 않아요? 고난 당한 사람이 모두 다 기도의 사람들이었는가? 그것은 아니다 이거지요. 그분들이 고생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그분들만큼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어느 점보는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어요. 약 50이 넘었겠다 생각되는 사람들은 무조건 고생을 많이 했구려 험악한 세월을 보냈구려 그러면 야 족집게다 그런대요. 아니 그 때 일제 시대를 겪고 6.25를 겪었는데 고생 안한 사람이 어디 있냐 이거예요. 그런데 당신 참 고생 많이 했구려 라고 해 주면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눈물이 핑 돌면서 그래 내 인생은 고생이 심했지 라는 그런 생각이 든다 이거예요. 이 세상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많이 있어요. 근데 고생을 한 모든 사람이 경건한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거예요.
오늘 이 34편은 제가 매우 애송하는 시편입니다. 시편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인생은 정말 황량하기 짝이 없었을 거예요. 기도도 안 되고 성경을 읽어도 잘 안 들어오고 책을 읽어도 공상만 떠오르고... 그럴 때는 다 덮어버려요. 다 덮어버리고 한적한 곳에 물러서서 시편을 펼쳐요. 그리고 마음에 와 닿는 시편을 마음의 소리를 넣어서 천천히 낭송해 보세요. 그러면 그 시편을 한 편 두편 읽어가는 가운데 우리의 모래밭과 같이 건조했던 마음에 촉촉이 습기가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더라 그런 얘기죠. 그런데 왜 아멘을 안해요? ^^ 다시 할께요. 기도가 안 되고 마음이 모래밭처럼 건조해 질 때에는 시편을 읽으세요. 읽으면 마음이 촉촉해져요. 이 34편, 제가 아주 애송하는 시입니다.
근데 이 무대가 뭐냐하면 다윗이 사울이 하도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니까 가드 지방으로 도망을 갑니다. 말하자면 지명수배가 내린 것이지요. 도망을 왔는데 사람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요. 자기를 잡아서 넘기려고 하는 것 같아요. 도대체 다윗이 누구길래 그러느냐. 그 사람이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애들이 부르는 그 노래의 주인공입니다. 그래? 그런 거물이 왔단 말이냐? 그리고 눈빛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윗은 지혜로운 사람이라 갑자기 미친 척 하는 것이지요. 더럽게 침을 흘리면서 수염에 바르고 문에 긁적이면서 완전히 정신병자 행세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왕이 이 무슨 다윗이냐 정신병자이냐 우리나라에 미친놈이 부족해서 저런 놈을 데리고 왔냐 당장 쫓아내라 그래서 체포되어 넘겨지는 대신 도망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 시를 지은 거예요. 그래서 이 시의 제목이 뭐냐면 이 시편 34편 머리에 뭐라고 되어있냐면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흔히 인용하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라는 그 유명한 구절이 여기 있는 거예요. 한 번 다윗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다윗은 그렇게까지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것 같아요. 다윗이 뭘 잘못했어요? 다윗이 이렇게 고난을 받는 이유는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울이 하나님의 신이 임하고 기름부음바 된 이 다윗을 미워하면서 죽이려고 몸부림치는 장면이잖아요. 그것을 여기서 보여주는 것이에요. 다윗이 정말 자기를 위해서라면 이렇게까지 미친 척 하면서 정신병자 노릇을 하면서까지 자기의 생명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거예요. 이제는 그러나 주께 기름 부음 바 된 주님의 종이 되고 나니 이제는 자기의 인생이 자기의 인생이 아니에요. 사는 것이 살고 싶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죽고 싶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나 죽으나 그는 이제 여호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생에 친척이 있어요? 누가 있어요? 자기를 보호해 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게 인생의 막판까지 가서 정신병자 행세까지 해야 하는 구차한 인생을 사는 큰 비참한 상황에서 이 시인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았어요. 그 하나님만이 진실로 선하시고 그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는 마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고 체험한 것이에요. 고난의 학교에서 기도의 나무가 자란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렇죠? 고난의 학교에서 기도의 나무가 자란 것이에요.
그러니까 고난이 닥치고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지 고난과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하나님 원망하고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면 하나님께 두 번 범죄한다는 결과가 된다는 이런 말씀이에요. 그러면서 다윗이 그렇게 도망 나오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겠어요? 한 번 다윗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한 번 생각을 해 보세요. 얼마나 서러웠겠어요? (*2) 정말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라고 묻고 싶지 않았겠어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로서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발견해요.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가까이 하시는가 그리고 누구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하는 깊은 깨달음을 얻어요. 그래서 다윗의 시편을 읽고 깊이 묵상하면 신약성경이 열린다고요. 복음이 열려요. (*2)시편 23편 같은 것을 잘 읽으면 요한복음이 열려요.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아주 중요한 영적인 원리를 터득해요.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는가 마음이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신다. 마음이 상했다. 우리도 그런 말 많이 쓰잖아요? 마음이 상했어. 라는 것은 여기서 쓰는 뜻이 아니에요. 말만 고상하게 했지 성질난다는 뜻이거든요. 마음이 너무 상하더라= 성질이 되게 나더라. 하나님께서는 성질부리는 사람 가까이 오시지 않으셔요. 성령은 성질부리는 사람 가까이 계시지 않으셔요. 그리고 성령을 가장 근심시키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질부리는 것이에요. 혈기와 성질부리는 것이에요.
청교도들이 그들의 거룩한 삶에 있어서 그들이 얘기하는 소위 quietness 침잠, 평정,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 잠잠함, 온유, 이런 것들에 대해 많이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그렇게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길이 하나님과 살아있는 교제 속에서 사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오늘 성질부렸죠? 오늘 혈기 부렸죠? 왜 대답을 안해요? 있죠?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먼저 기도를 해요. 여기서 상함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표현하자면 실컷 두들겨 맞아서 어른들 말로 어혈이 든 상태를 말합니다. 큰 돌멩이에 쾅 찧거나 몽둥이에 두들겨 맞으면 어혈이 든다고 하잖아요? 꺼멓게 되어서 살갗은 손만 대도 자지러지게 아픈 상태가 되잖아요? 여기서 상했다라고 하는 것은 그런 말이에요. 박테리아가 들어와서 푹 썩었다 그런 말이 아니에요. 상처를 입어서 두들겨 맞아서 손상된 것을 말해요.
이건 영적으로 보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어떤 감정 어떤 터치에 의해 매우 예민하게 된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범죄 전문가들에 의하면 지갑을 뒷주머니에 꽂고 다니는 것은 전문적인 절도범들에게는 가지시오 하는 거래요. 왜 그러냐 하니까 인간의 신체 중에서 가장 감각이 더딘 부분이 엉덩이래요. 그렇다고 이걸 배에 차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어쨌든 엉덩이 부분이 가장 감각이 더딘 부분이라 꺼내가도 모른다는 거예요. 근데 여기서 얘기하는 상황은 평소에는 이런 피부였는데 두들겨 맞으면 어혈이 들어서 훅 하고 바람이 건드려도 매우 아픈 상태가 되잖아요? 그런 마음이 된 사람에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냐? 이런 뜻이죠. 고난을 받고 어려움이 많을 때 이 세상에 대한 소망이 많이 끊어져요. 하나님 없이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던 배부른 신앙생활을 거두어 버리죠. 그리고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냐면 아 난 참 비참한 사람이다 주님이 아니시면 아무 희망이 없구나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그래서 살 소망이 모두 끊어지면서 어떤 마음이 생기냐 하면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이 생긴 거예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면 주님의 눈 빛 하나에 희망을 갖고 절망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상해서 아주 예민해지면 주님이 한 마디 말씀, 아프지? 그 한마디 말씀에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들어오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서 사라진 것 같을 때 반대로 좌절감이 확 밀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우리를 위해 흘리신 십자가 공로 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런 마음이 상한 마음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상한 마음이 될 때 우리의 기도는 기도하자마자 하늘로 쭉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말하는 것 같은 기도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기도에 있어서는 대가가 되었다 기도를 거의 떼었다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 않아요.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도 있고 아무리 오랫동안 기도 속에서 산 사람이라도 내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도 속에서 거절하실 수도 있어요. 오랜 동안 기도 속에서 산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안 들으시는 거절의 경험들을 더 많이 가지고 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몸에 붙는 기술과 숙달로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언제나 이렇게 상한 마음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가 주를 위해서 주님만을 섬기며 살아왔던 옛날도 시야에서 모두 잊혀지고 오직 생각나는 것은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어 드리고 싶은데 나에게는 힘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깊이 절망하거나 오늘 다윗처럼 주님을 위해 살고 싶은데 원수들이 박해와 압제에 둘러싸여서 자기는 사랑하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한없는 고통과 원통함을 하나님 앞에 토해 놓는 그런 마음, 영혼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변화되지 않는 영혼을 바라보면서라도 서 있어야 되는 아픔이 가져다주는 그 진통 때문에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 처절하도록 상한 마음이 되는 그런 마음. 거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이거지요.
그래서 관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놓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저는 오늘 아침에도 기도하가 그런 묵상을 했어요. 몸이 좀 편안하지 않은 상태이긴 했습니다만.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뭐냐하면 정말 언제든지 무릎을 꿇었을 때 우리가 오늘 이 시편 34편에서 이야기하는 것같이 하나님 때문에 마음이 상한 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 부서지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우리에게 없어도 아마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수 십 년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 세상 살면서 단 한 달도 이렇게 상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 상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자기와 가까이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헨리 스쿠갈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신자의 삶을 ‘깨뜨려짐’이라고 묘사를 했어요. 그래서 몇 달 전에 양평에서 목회자 모임에서 강연을 하면서 제가 그랬어요. 교회 부흥을 비결을 묻는 곳에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목회자의 자기 깨어짐이 있는 곳에서 교회는 선다. 이상한 공식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깨뜨려진 세계가 있고 부수어지는 세계가 있는 교회 깨뜨려지고 부수어지는 심성이 있는 교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교회가 서고, 깨뜨려질 줄 모르는 마음을 가진 목회자와 부서지지 않기로 다짐한 성도들이 있는 교회의 영적인 교회는 무너진다. 그런 공식이 성립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늘 옛 사람의 성품을 버리지 못해서 고통을 당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싶은 우리의 옛 성품.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서 이제는 다시는 우리의 삶에 영향을 행사하도록 허락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옛 자아들, 그리고 옛 소망들 이런 것들이 살아서 역사하는 이유는 .....( 뒷면으로 돌렸는데 내용이 연결되지 않음)
그래서 오늘 시인 다윗이 마음이 상한 자에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고 한 말이나 청교도 헨리 스쿠갈이 살아있는 신자의 특징이 깨뜨려진 마음이라고 하는 표현이나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이 눈물에 고인 성도의 눈을 가지지 않고는 천국을 바라보며 살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은 모두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신앙생활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입었을 때에는 이렇게 다윗처럼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죽을 목숨에서 건져내지잖아요? 그랬기 때문에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위기를 만나면 그 위기 때문에 하나님 바라볼 수밖에 없어서 깨뜨려진 마음이 되고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을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이 붙잡으신 손을 놓으시면 아무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는 항상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지만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매달릴 때는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넘치는 위로가 있어요.
사람으로부터 오는 위로는 항상 불안정해요. 오늘은 내 마음을 위로하고 내 마음을 안위해 주던 사람이 내일은 변하여 그 말로 내 마음을 찌르는 비수가 되게 하는 변화무쌍한 것이 인간이 인간을 향해 가지고 있는 태도예요. 그러나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그 소망과 기대를 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고정시키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 상한 마음으로 드리는 언제나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만족을 그 상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속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보화,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 관계, 그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상한 마음이 되어서 기도로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이 가까이 계시고 고난을 통해서 받은 상처를 능가하는 사랑과 자비의 체험을 기도 속에서 할 수 있게 되도록.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보다도 가장 소중한 것이다 이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마음이 부요하면서 의롭게 살아온 사람들의 기도보다는 죄 가운데 살아왔어도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의 진실한 기도소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시는 성품을 가지고 계신 것이에요.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아야 되겠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의 건강함을 반듯한 교회 생활이나 그 다음에 이런 저런 일들을 위해 봉사하는 판에 박힌 섬김을 가지고 측정할 때가 얼마나 많아요? 그러나 오늘 우리 시인 다윗은 자신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또 하나의 척도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뭐냐하면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상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는 사람들인가 이걸 보여주는 것이지요.
상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서 짧은 기도 속에서도 언제나 주님의 시선을 끄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 주에 하반부를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