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엇을 가지고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6-8)
미가 선지자는 남 왕국과 북 왕국 모두를 향하여 예언한 주전 8세기의 예언자입니다. 대게 이 사람이 예언을 한 것이 주전700년경이라고 보니까 히스기야 왕 말기 정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히스기야는 정말 하나님이 낸 거룩한 군주였습니다. 그래서 산당을 훼파하고 그리고 모든 우상들을 찍어버리고 놀라운 신앙의 개혁을 이룬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왕들과 마찬가지로 말년에 접어들어서는 급격히 신앙이 약화되고 성령으로 시작한 자기의 임금으로서의 사역을 육체로 마치게 되는 비극을 보게 됩니다.
어쨌든 미가는 미가서 전체에서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부분적으로 예언을 했고 대부분의 예언은 모두 유다 백성들을 향한 예언이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유다 백성들에게 자기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서 이 가나안에까지 와서 이 땅을 유업으로 삼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해주셨는가 하는 것을 상세히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미 6:5)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싯딤과 길갈의 일과 모압왕 발락의 일과 발람의 일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케케묵은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 아마 연대로 치자면 약700년은 족히 이전에 일어났던 그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압왕 발락의 일과 브올의 아들 발람의 이야기를 떠올려 추억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발락이 발람을 꾀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발람선지자를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많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발람의 그 같은 잘못된 행동을 막으셔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는 자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복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성경은 싯딤과 길갈의 사건을 기억하라고 말하는데 싯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기 전 마지막으로 진을 친 곳의 이름이고,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 속에서 제사장들이 앞서가서 요단강 물을 마르게 하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를 건넌 다음에 여리고 점령을 앞에 두고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율법에 충성할 것을 다짐하면서 할례를 받았던 곳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옛 세대들은 다 할례를 받았지만 죽었습니다. 새로 태어난 세대는 왜 그런지 할례를 안 받았습니다. 그 할례 받지 않은 세대들이 이제 요단을 건넌 다음에 할례를 받는 장면입니다.
결국 그러면서 거기서 이제 ‘이제는 애급에서의 모든 수치를 굴려버렸다’고 합니다. 길은 ‘똥’이고 갈은 ‘굴러가다’입니다. 그러니까 똥을 굴려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수치를 굴려버릴 것을 다짐한 곳이었습니다. 결국 싯딤과 길갈이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6절에 가서 가상적으로 ‘내가’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내가’가 누구인가? 이것은 선지자는 아니고 또 하나님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 ‘내가’라는 말하자면 가상적인 1인칭을 써서 이스라엘 백성중의 하나 그 대신 그 사람은 이스라엘 속에 지금 유행하고 있는 모든 신앙인들의 의식을 반영해주는 가상적인 ‘나’라는 사람을 등장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그 사람을 통해서 말하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주 문학적인 기법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무엇을 근심하는지를 6절, 7절에서 보여주고 그 다음에 이제 8절에 가서는 그 선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시는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제가 다시 한 번 6절을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매 몸의 열매를 드릴까” 이것이 가상적인 ‘나’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말씀하시기를-거기에 대해서 가상적인 사람의 질문에 대해서 가상적인 답변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내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보이시는 것(추구하시는 것을 말합니다)은 오직(히브리 성경에는 오직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골격을 잡고 이제 하나씩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오늘을 살아가는 현재의 삶은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자신들을) 인도해 오셨는지를 깨닫는 것에 비례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면서 늘 반복해서 모세를 통해서 당부하신 말씀은 그것이었습니다. ‘잊지 말라!
(찬양)
그러나 한 가지 잊지는 말아라
죄인 된 너희를 구원하신 여호와를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대대로 전승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으로 암송하며 고백하여야할 신앙고백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누가 너희들에게 너희가 누구냐? 묻거든 너희는 이렇게 말하라(자손들에게)― ‘우리는 원래 유리하던 아람사람들이었는데…….’ 하면서 아브라함의 선택으로부터 시작해서 애급 땅에서 노예 살이를 하다가 구원을 받아서 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서 융성하게 된 것까지를 쭉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될 영적인 제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일러주기에 앞서서 800년 가까운 7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그 때에 이루어졌던 이스라엘을 향해 하신 하나님의 그 오랜 역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싯딤의 일과 길갈의 일과 그리고 모압왕 발락, 그 다음 브올의 아들 발람의 모든 일들을 이들에게 상세히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불변하는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삶의 태도는 우리의 신앙고백에 묶여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껏 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과거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하고 계십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과거라고 생각하는 그 일이 옛날에는 현재였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그것이 현재였을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한없이 감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발락의 꾀와 발람의 저주를 막아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싯딤과 길갈에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해주실 때 그들은 여호와는 과연 의로우시다고 찬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신앙의 고백을 늘 오늘 되새기면서 그 신앙의 고백을 현재적인 것으로 재연하며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여러분들은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한때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던 사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추억의 신앙이 아닙니다. 추억의 종교가 아닙니다. 과거의 꿈을 먹고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랜 이전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던 것을 자랑하고 그것을 되새기면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며 살아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과거에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구원을 받았고 그 사랑을 지금도 느끼며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오늘 그리스도에게 묶여서 살아가며 내일도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 그리스도와 떨어질 수 없는 사람, 그 사랑의 줄로 결박된 사람, 그 사랑이 강건하여 살아있게 하는 사람’
그래서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것을 지금 느끼고 지금 자신의 삶속에서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내 인생에 찾아오시고 그리고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나를 만나주셔서 내 인생을 위기와 고난으로부터 건져주시고 내 인생의 오류와 그리고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진리의 빛을 보게 하셔서 나를 구원해주시는 그 하나님을 오늘 우리들이 체험하고 그 신앙고백이 여전히 오늘 우리의 것이 되도록 되뇌며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을 잘 읽어보시면 참 놀라워요. 무슨 얘기냐 하면 백성들이 은혜를 받지 못한 채 살아갈 때에는 하나님께서 바로 얼마 전에 자기들을 위해서 놀라운 일을 해주셨는데도 그것이 그들의 찬송의 제목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놀랍게 역사해주셨는데도 그게 방금 전의 일어났는데도 지금의 나에게 찬송제목이 안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면 오래전에 이루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수 십 년, 혹은 수 백 년 간격을 뛰어넘어서 오늘 이스라엘 언약 백성들의 가슴속에 말하자면 현재적인 감화로 타오르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일일이 다 댈 수 없지만 하나만 증거를 대자면 에스라에서 그 같은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 만에 예루살렘에 당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서 처음에 예루살렘에 올라오던 그 뜨거운 결심을 다 잃어버리고 그 땅의 원주민들과 함께 잡혼을 하고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유행하는 모든 죄악을 답습하는 불행한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들은 바로 얼마 전에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그 임금을 통해서 놀라운 정책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셔서 돈까지 대주면서 자신들의 생애에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그 본토로 돌아가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고향이 있습니까? 서울입니까? 서울은 고향이라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런 사람들은 고향이라고 해봐야 느끼는 것이 없습니다. 몇 년 전에 고성에 있는 통일전망대에 갔습니다. 진짜 맨눈으로 봐도 북괴군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입디다. 행글라이더 하나 타면 20분정도면 사뿐히 넘어갈 수 있는 그런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냥 멍하게 이렇게 쳐다보면서 기껏 해봐야 ‘참 아름답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중에 내려오면서 ‘아! 쪼개진 이 조국이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합쳐질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하얀 머리카락을 한 할머니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북녘 땅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북녘에 두고 온 통장이 생각나서 입니까? 고향? 그래봐야 이제 못 가본지 한 50년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70년……. 돌아갈 때 그 감격이 어땠겠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은 뭐라고 했느냐하면 여호와께서 크게 감동시킨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올라가서 성전을 짓기 위해서 기초공사를 할 때 모든 젊은이들이 기뻐 뛰면서 노래하고 노인들은 통곡하면서 울부짖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조금 전입니다. 잠시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지금은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에스라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 성전에 엎드려서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왜? 이 백성들이 이렇게 범죄 하였는데 내가 어떻게 성전에 들어가랴?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맨 앞에 엎드려서 한없이 통곡하며 우니까 그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각성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깊은 회개와 죄에 대한 각성은 전염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단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각성되고 나니까 말하자면 에스라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뭐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느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포로 중에 끌려가는 중에 우리를 조금 소성케 하셔서 고토로 돌아오게 하신…….’ 이 모든 것들을 에스라가 과거를 추억하면서 더욱 서럽게 흐느끼면서 울었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문맥이 쭉 9장부터 10장까지 나옵니다.
결국 무엇을 말하고자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면 과거에 일어난 일인데도 오늘 우리의 삶에 강하게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전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행하신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을 위기와 고난가운데 건져주셨던 일, 어떻게 살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의 빛을 비추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무엇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의 모든 방황을 신앙 안에서 종식시켜 주셨던 그 놀라운 은혜와 그리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셨던 그 하나님의 크고 넓은 사랑, 오늘 우리를 묶어서 그래서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할 때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알지 못합니다. 너무 쉽게 하나님의 과거의 베푸셨던 은혜와 자기에게 허락해주셨던 그 놀라운 은혜의 특권들과 영적인 축복들과 그리고 삶을 위해서 공급해주셨던 그 수많은 눈에 보이는 은혜와 그리고 보이지 않는 모든 영적인 은혜에 베풀어 주신 것들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다시 돌이키는 일들은 먼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베푸셨던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살아가는 인간들이었을까? 여러분 생각해 보셔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세 가지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가상적인 ’나‘라는 사람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고민한 다기보다도 생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바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번째 생각하는 바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어떻게 나아갈까하는 것을 고민하면서 그들은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 그것을 가지고 고민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불러주신 것이 전혀 자기들의 의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의 영혼을 변화시키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달은 것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한없는 무가치와 그리고 두 번째는 자기를 불러주신 그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런 공로 없고 선택받을 만한 이유가 없는 자신들의 모습과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 독점적으로 베풀어주신 신앙의 놀라운 축복들 사이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살고 충성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모습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으로서 단위를 갖추게 되는 것은 애급에서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태어났습니다, 430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아브라함과 그리고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집안의 직계 손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때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나왔고 또 요셉을 역사 속에서나 어렴풋이 알고 있는 새로운 세대들이 태어났습니다. 조상들로부터 아브라함의 선택으로부터 이르는 요셉의 영광스러운 애급에서의 높아짐에 대한 역사를 듣지 않았을 리는 없지만 그러나 그들은 태어날 때 한 가지 딱지를 붙이고 태어났습니다. 노예였습니다. 그들이 아이를 낳는 것은 주인의 재산을 증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생명은 애급사람들의 소유였고 자기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기억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찾아가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바로의 손에서 너희를 구해내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너희를 애급의 땅에서 기적적인 능력으로 너희를 나의 편 팔과 내 손으로 너희를 품어서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어서 나름같이 너희를 업어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업어 나르지 아니하였더라면……. 너희가 어떠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잊고 있었습니다. 그들만이 그랬습니까? 우리도 잊고 있습니다. 뭘 하고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내가 무엇이 되어있었겠습니까? 생각하면서 그랬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생각나는 사람들은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뒤를 돌아서 고향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그러나 그 고향도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 때 그 고향은 아니어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고향처럼 생각하고 가지만 세상은 여러분들을 벌써 자기들을 버리고 떠난 것을 압니다. 당신은 이런데서 살 사람이 아니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은 사람들로서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나 같은 죄인을 예수 만나게 해서 새로운 사람 되게 하시는 구속의 놀라운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상상할 때에 가슴이 섬뜩한 충격이 우리에게 밀려와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를 만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어떤 인생을 살았겠습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한참 잘 나갔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인생이 비비꼬이고 막판으로 몰렸다면 어떤 꼴이 되었을까? 둘 다 생각하는데 결론은 뭐냐 하면 복음의 빛으로 보면 신나게 잘나갔던지, 막장으로 갔던지 그 차이는 복음의 빛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 꿈꾸듯이 한창 잘 나갔다면 이제 뭐 어느 학교에서 선생이나 하면서 담배하나 찍 꼬나물면서 문학이 어떻고, 소설이 어떻고 하면서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가끔 잡지에서 연세대에서 외설 시비로 한참 문제를 당했던 어느 교수의 이야기를 열심히 싣는 것들을 가끔 봅니다. 아마 내가 잘나갔더라면 그런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인생들을 주님이 우리를 구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혜로 살았고, 그리고 지금 살아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의 원동력은 금이나 은같이 썩어질 것들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가상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갈꼬?’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일날 여러분 교회에 나올 때 무엇을 가지고 나오십니까? 주정헌금을 가지고 나오십니까? 많아봐야 삼만 원도 안 되는 그 주정헌금……. 무엇을 가지고 나오십니까?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나와야지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에 들어오는 입장료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무엇을 가지고 나오시겠습니까? 고은 옷을 입고 나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쁜 화장을 하고 나오시겠습니까? 돈을 들고 나오시겠습니까?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백을 가지고 나오기를 기뻐하십니다. 어떤 고백? ‘하나님 주님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을 가지고 이 성전에 들어옵니다. ‘하나님 나 같은 죄인이 방배동 뒷골목에 있는 여름이면 물 나오는 이 교회에 지하계단을 내려서 이 25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에 발을 들여놓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런 고백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 보십시오. 예! 찬송을 하면 눈물이 나고 기도를 하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불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기가……. (웃음) 믿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우리 중에는 그런 사람도 없지만…….) 두둑이 들어있는 헌금봉투나 의지하고 잘 차려입은 옷이나 의지하고 시간 늦지 않았다는 것을 의지하고 그리고 들어와서 버티고 앉아있다면 이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무엇으로 여호와 앞에 나아갈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너희 자신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란 말입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마음, 나의 은혜를 그리워하는 마음, 나로부터 오늘도 너희에게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영위하게 만들어주는, 그 무엇이 나로부터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 너의 마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너의 생각, 그것을 간절히 사모하는 나머지 상해버린 너의 마음……. 그것이면 나는 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때 미가시대 때의 하나님이 오늘 김 목사 시대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시대의 하나님이 오늘 한국교회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어제나 오늘이나 또 내일이나 영원토록 변치 아니하고 동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그 성품은 다르게 나타나 보일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성품은 동일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문을 들어섭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배시간에 예배를 드릴 때보다도 예배가 끝나고 난후에 더 행복해보입니다. 아쉬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해방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당신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랑할 그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필요로 하고 당신의 은혜를 원하고 그리고 당신 자신의 은총을 갈망한 나머지 상해버린바 된 마음을 가지고 당신의 집을 찾아 나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오늘 이 시간에도 기뻐하시고 기도를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진정한 예배는 교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 동안 우리의 삶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시간에 달랑달랑되어서 들어와 가지고 허겁지겁 들어와서 ‘오늘도 설교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겠지!’ 그리고 집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설교자도 싫어하시고 그런 회중도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믿는 진정한 신앙의 요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실로 지루할 정도로 보여주셨지만 그러나 그것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까?’ 그들은 제물을 염려했고 그리고 제사 드리는 것을 염려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며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거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린 사람입니다.
여러분 오랜 동안 목양을 해오면서 저는 가금 불현듯이 저를 찾아오는 양떼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언가 억제할 수 없는 가슴에 있는 이야기들을 안고 먼 길을 찾아와서는 제 앞에 앉자마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우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사연을 들을 때까지 말할 때까지 나는 그저 묵묵히 그들의 울음을 지켜볼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나와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의 삶은 하나님 앞에 영적인 삶이 아니었는데 들어오면서 열린교회 간판을 보는 순간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고 그리고 일주일 동안에 겪었던 모든 슬픔과 기쁨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마치 탕자가 아버지 앞에 돌아와서 그 아버지가 아들을 얼싸안았을 때 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엄청난 변혁이 이루어져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 예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가상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상의 나는 현재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갈까?’ 하나님의 관심과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오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상한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그것으로 하나님은 받아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일주일 동안에 애통하는 자로 사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과 죄를 이기며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늘 실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애통해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하게 호소하는 그런 깨뜨려지는 마음이 삶의 지성소 속에서 있는 삶을 살아갈 때 그 때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깊이 마음이 녹으며 우리는 최상의 헌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하나 고민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여러분 신앙이 본질을 잃어버리게 될 때 그 때에 사람들은 형식으로 본질을 대신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형식으로서 내용의 상실을 보상하려는 그런 값싼 외식의 종교심리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한 사람들은 이미 영적인 본성이 외식을 너무 싫어합니다. 닭살이 돋는다고요. 구역질이 나고……. 진실하지 않은 사람들은 외식을 즐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기껏 생각해낸 것이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입니다. 여러분 수양은 무엇입니까? 제물로 쓰이는 것입니다. 기름은 무엇입니까? 잡아가지고 그 속의 기름을 떼어내서 하나님 앞에 불태워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도 천천, 만만 이렇게 나갑니다. 결국은 무엇입니까? 물량주의적인 신앙이라는 것이 바로 외식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신앙의 내용이 없는 곳에 그런 외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몇 년을 교회 다녔는데……. 오늘 진실하게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리면서 그 안에서 신앙의 참다운 의미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몇 년을 교회 다녔는지 그런 것을 생각할 머리가 없습니다. 몇 년을 교회 다녔으면 뭐합니까? 다닌 그 세월이 수고와 슬픔밖에는 없는데……. 누구에게? 목회자에게! 무슨 자랑할 세월이 있겠습니까? 내가 교사를 몇 년을 했는데……. 오늘 지금 자기의 부족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이 영혼을 섬기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연수 같은 것을 헤아릴 시간이 없습니다.
한 가지 기도제목에 대해서 몇 년을 기도해왔는데……. 매일매일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지 못하는 힘없는 자신의 기도의 세계를 보며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더 큰 기도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의 싸움을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몇 년을 기도했는지 그런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두 형식이 만연하던 시대의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 천천, 만만 하는 이 모든 숫자는 재물을 드리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일 때에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식으로 사고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상적인 의문, 질문이 하나님 앞에 모두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속죄의 문제였습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내 허물을 인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이것은 이방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기의 자식을 신에게 제사로 드리거나 신에게 바쳐서 자기가 그 덕으로 축복을 입는다는 사상은 이방적인 사상입니다.
여러분 힌놈의 골짜기라고 하는 곳에서 몰렉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자녀들을 불에 태워서 바쳤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말하자면 그 신의 진노로부터 자신들의 자식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모면하고자 하는 동기였습니다. 자식들의 희생을 통해서 자기가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사행심어린 생각 때문에 그들은 이 무모한 행각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악하고 사악할 뿐만 아니라 이교도적인 생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이 죄와 죄 용서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처럼 이교도적인 생각에 젖어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죄를 끊임없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커다란 용서를 놀랍게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따금 일어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접근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접근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죄를 용서해주시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진정으로 자기 속에 있는 그 무엇을 바쳐서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진정 새롭게 하고 싶어 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실리아 슈링크(Basilea Schlink) 같은 사람은 말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용서받기를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에 대한 모든 대가를 치를지라도 그 고통 없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기보다는 대가를 모두 지불하고도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누리고 살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회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죄 사함을 위해서 기도하지만 그러나 죄 사함의 놀라운 은혜를 영혼 속에 인침 받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된 회복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정한 우리의 구속, 죄로부터 진정한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받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진정한 죄의 사유하심이 내가 바치는 그 무엇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깨뜨려진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가상적인 한 사람의 질문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의 사상이 얼마나 허망한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 세 가지 중의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개적으로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들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 여호와께서 네게 추구하시는 것이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정으로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미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절과 7절에 계속되고 있는 가상적인 ‘나’로 대변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해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 앞에 ‘주님 잘 몰랐습니다. 그 때는 정말 제가 주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무지는 우리의 변명의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후일에 우리 마음대로 자행자제하며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난 다음에 껍질밖에 없는 인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잘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내가 네게 묻겠느니 ‘내가 나의 사랑하는 종들을 보내어서 너에게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내가 너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부지런히 네게 일러주었을 때에 너는 깨닫고자하였느냐?’ 여러분들의 책임을 누구도 나누어서 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무엇이 선한 것임을 네게 보이셨다.’ 히브리 성경에는 완료형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미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네가 이런 질문하기 전에 이미 명백하게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정말 기뻐하시는가하는 것을 머릿속에서 상상을 가지고 고민을 하면 이런 엉뚱한 상상이 나오지만 주님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한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며 주님의 진리 앞에 다가오면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끔 알려주셨습니다.
여러분들보다 훨씬 더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도 신령하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들보다 나이도 어리고 여러분들보다 신앙의 연조가 없는 나이어린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예배 드려야하는 것을 영적인 본성으로 깨달아 압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미 고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이 고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이미 보여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쓰인 ‘나가드’라는 그 단어는 사역형으로서의 ‘나가드’라는 단어는 이것은 ‘공포하다’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만민이 알도록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공개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어떻게 살아가야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몰랐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알려주셨습니다. 좋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이 못 깨달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삶의 기로에서 방황하고, 참된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할 때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보내주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은밀하게 말하거나 수수께끼처럼 말하거나 학벌이 높은 사람들만 알아듣도록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보다 훨씬 더 못 배운 사람들이 이 교회에서 회심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변명할 것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들도 하나님 앞에 주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를 알게 되었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주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를 오랜 신앙생활 속에서 경험하게 해주셨습니다. 알지도 못하던 우리 속에 있는 비밀한 일들을 보여주셔서 우리를 타이르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일러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웁니다. 책을 읽고, 말씀을 듣고, 공부하고, 지체들을 통해 우리를 권면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알려고 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 아직까지도 머릿속으로 여러분들의 사고를 가지고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될까를 가지고 아직도 고민하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아직까지도 동물적인 감각을 의지해서 판단하려고 하십니까? 무엇으로써 우리 속에 가득 쌓여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가로막고 오늘도 능력 있고 어두운 세상을 이기며 불꽃처럼 살아가게 만드는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그 놀라운 그 원동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하지 못하는 그 죄의 문제를 종식시키지 못하게 하는지를 아직도 동물적인 감각을 의지하여 판단하고 생각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얼마나 많이 슬퍼하고 얼마나 더 많이 피를 흘리고 그리고 얼마나 많은 어두운 길에서 절망해야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에게 이미 알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에 착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고 싶어 하시는 일은 여러분들에게 이미 가르쳐준 그 일을 생각나게 하시고 싶은 것입니다.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것도 하나님이 이미 가르쳐준 것들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기운 나게 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셔서 우리를 어루만지시고 하나님이 고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가? 어떻게 예배하기를 원하시는가? 어떻게 죄 사함 받기를 원하시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시는가? 이것을 사모하면서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결국은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미 모두 보이셨다. 이미 너에게 무엇이 선한 것인지…….(이 선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너희에게 다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모세가 있었고,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모세와 선지자 외에 그리스도도 계시고 사도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관점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 선하신 것이 무엇인가로 우리의 관점이 옮겨져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 선하신 것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그리워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는 그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주신 사람들이 살아가야할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우리를 위하여 대속 제물로 주신 것은 이제는 결코 살아도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신 그분을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으로 삶의 목표와 가치가 뒤바뀌는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눈에 좋은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해석해서 편의 주의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형식적인 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여전히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하는 그런 생각의 쪼가리들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방법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그릇된 방법으로 나타날 적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를 향해서 선에 대해서 눈을 돌리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너희에게 보이셨나니” 우리의 관점을 하나님의 선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제껏 우리의 삶의 관점이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유익을 받을까?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을까? 생각했다면 오늘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폭풍우와 같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선을 향해 눈을 돌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신 명백한 삶과 죄를 용서받는 회개의 삶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헌신의 삶에 있어서 진정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여러분 생각하십시오. 오늘 선지자는 잘라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까?’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화해가 무너져있는 신앙생활 속에서는, 무너진 영적인 생활 속에서는, 이런 이스라엘의 진지한 고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 이 무너진 관계들을 회복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 무너진 관계위에 쌓여졌던 모든 형식적인 신앙생활과 그리고 껍질만 화려하게 색칠하는 모든 사악한 종교생활과 이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을 보존해보려고 하는 모든 사행심 어린 생각들이 하나님 앞에 파괴되지 않으면 이들은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그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존재들로(불쾌한 존재들로)변했는데 이들의 고민이 하나님 앞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데 그 사람이 하는 고민이 무슨 선한 것이 있겠으며 혹시 또 선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를 가르쳐준 은사가 한 분 계셨습니다. 학교에서는 늘 데모도 있고 정치적인 일도 있으니까 젊은 선생님들이 아마 그 선생님을 아주 많이 반대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게 아주 마음이 굉장히 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집무실에 앉아있는데 조교 한 학생이 선물을 들고 왔습니다.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젊은 선생님들이 선생님의 선생님이신 대 스승님께 스승의 날 돈을 모아서 자그마한 선물을 했습니다.” “거기다 두고 가라.” 지나가고 난 다음에 선물보따리를 홱 집어던지면서 “낯이 간지럽다.” 그 사람을 기뻐하지 않는데 그 사람이 내 마음에 기쁨을 주지 않는데 그 사람의 생각과 바치는 것이 내게 무슨 기쁨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라” 짐승과 우양과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 기쁨을 주는 존재로 변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거룩한 삶입니다. 그러면서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삶의 전 과정을 선지자는 특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의 존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삶의 현장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삶입니다. 구별된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볼 수가 없는 삶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세월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속이고자 하였습니까? 입술로 하나님을 속이고자 하였습니다. 화려하게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을 속이고 싶어 하였습니다. 스스로 대견해하는 커다란 대회로서 하나님을 속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도 속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과 구별되는 예배를 나한테 드리는 것이 나에게는 의미가 없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참된 은혜는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구별된 삶을 살도록 능력의 원천을 공급해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능력의 원천을 힘입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주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선하게 여기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싸우듯이 이 삶의 길을 걸어서 하나님을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다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다운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 마음이 나에게로 향하였다면 삶의 열매로 내게 보여 달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깊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하나님이 베풀어주셔서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셨는지를 기억하고 삶의 굽이굽이마다 우리의 인생이 고통과 좌절 속에 있을 때에 말없이 다가오셔서 우리를 건져 새사람을 만들어 주시고 병들어 죽어가던 우리들을 고치셔서 하나님의 친 백성을 삼으셨던 그 놀라운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이 입술의 열매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열매를 하나님께서 맺히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다운 독특한 맛을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끊임없이 언제나 싸우며 이 길을 걸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 가운데 오실 때까지 하나님 자신을 추구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으로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여러분에게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미 보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기도하며 깨달았던 그 놀라운 도전들……. 이제는 녹슬어 버렸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그 도전들은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언제까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깨우시고 은혜 주셔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어느 날 어느 시에 하나님이 어떤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여기에 있게 하셨는가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잊힌 기도의 제목들을 새롭게 붙드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에 부응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삶과 넘치도록 부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한순간의 경솔한 생각과 범죄로 떠나보낸 그 모든 죄를 회개하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고대하며 그런 회복을 진정으로 사모하는 사람답게 싸우며 거룩한 삶을 살아서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추구가 진심임을 하나님 앞에 보여주시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