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행하는 신앙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으니라 (신 5:27)
녹취자 : 김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두려움이 휩싸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러한 사건을 경험한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모여 있는 가운데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존재 앞에 서 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제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못하도록 해 주시고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그 분이 우리에게 하시고 싶어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다 들은 후에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들려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다 준행하겠습니다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향해서 애원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몇 가지 신앙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이 될 만한 중요한 진리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지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니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이렇게 하나님 앞에 틴원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의 종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런 방식으로 인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 때에 불쑥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애굽을 떠나서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땅으로 가야 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개인적으로 한사람 한사람 인격적인 승복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인도해 가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인도하시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동체 전체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도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루어 가시는 방법과 교회 전체를 다루는 하나님의 방법은 일치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일치 하지 않을 때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행해서 모세를 보내시면서 그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히 그 애굽을 떠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한 사람 모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그리고 모세는 와서 그 뜻을 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이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한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이 끝나고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있어서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인도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숨기셨을 리는 없습니다. 숨기셨을 리가 없죠. 그러나 그들은 오랫동안 노예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모세가 와서 그들에게 말할 때 조차도 그들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향해 마음이 닫쳐져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었죠.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의문이 생기죠. 그러면 모세는 원래부터 그렇게 마음이 열리고 신령한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가. 그렇지는 않다는 거죠. 모세가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눈을 뜨고 그리고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을 알게 될 때까지 모세는 40년 가까운 기간 동안을 그 미디안 광야에서 예전에 왕족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목동의 생활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 하나는 그저 그곳에서 짐승이나 치면서 그냥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거다. 하나님의 관계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며 40년의 세월동안 잃어버린 것도 많이 있었지만 얻은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 다니엘은 그저 포로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왕도 아니었고 특별히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을 숙명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살피던 다니엘은 이제는 고역의 때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의 조국으로 돌아가게 하실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읽어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누구에게만 열리고 누구에게는 닫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 모두가 진리를 깨달아 알아서 최상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죠. 그러나 눈이 어두워서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혹은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하나님을 통해서 공동체를 향한 자기의 뜻을 보이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따라가게 만듭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공동체에 전달될 때 사람들이 그것을 수긍하지 않는 경우가 수긍하는 경우보다는 더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의 음성을 거절하고 심지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의 역사가 일어나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사한 그러한 불신앙 때문이죠.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이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들의 신앙을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혼자서 알아서 잘 믿는 방식으로 그런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서부터 하나님께로 부름받고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신령한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전할 하나님의 음성을 받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인지를 가르쳐 줌으로써 그 가르침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만든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인도하실 때에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자신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은 이 기독교 신앙에서는 자칫하면 사람에게 메이기 쉬운 거예요. 사람의 노예, 사람에게 매이고 사람에게 속한 자가 되기 쉬워요. 고린도교회가 그렇게 잘못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고 난 그리스도파, 바울파라고까지 말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원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해서 바울을 포함해서 아볼로를 포함해서 게바까지 그분들의 공통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에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대언해주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던 분들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인도하시는 방법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였을 때 이런 이상한 일들이 교회에 일어나게 된 것이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줍지 않은 민주주의도 교회 안에서는 추방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보일 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승복하는 것과 인간에게 복종하고 굴종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목양을 받아도 성도가 될 자격이 없어요. 그것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향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게 하지 마시고 당신이 올라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에게 전해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가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도 깨달음이 없는가.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기도를 하면서 진리에 대한 독특한 깨달음을 가질 수 없는가. 물론 가질 수 있죠. 그러나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아무리 유능한 목회자 아래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힘들 거예요. 있어요. 틀림없이 있고 그것이 우리 교회에 커다란 재산이 되요.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도 무릎을 꿇고 성경을 펼줄 알고 일러주는 사람이 없어도 성경을 읽으면서 그 뜻을 찾아내고 그리고 그에게 촉구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순종하며 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신령한 결심이 생겨나는데 어떻게 귀한 재산이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회를 인도해 나가시고 우리의 신앙의 생활을 지도해 나가는 보다 중요하고 그리고 탁월한 방편은 하나님께서 예배 중에 주어지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가신다는 것이죠. 이 시대에는 그러면 모세가 아니면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깨닫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알만큼 아는 사람들이고 볼만큼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공동체가 기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경험했고, 후일에는 회개할 때 어떠한 역사가 일어나는지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신앙에 중요한 유산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덩어리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공동체를 향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하시는 통로는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종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사상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오늘처럼 민주주의를 좋아하는 시대에는 제가 드리고 있는 이 말씀이 왠지 귀에 거스리고 쉽게 용납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용납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 아멘 하며 그 말씀을 받아들이며 살려고 하는 것이 의식이 있는 어떠한 사람들에게는 인간을 추종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그의 느낌이고 생각일 뿐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성도들은 사람에게 단지 인간의 정에 끌려 매이는 것과 그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진리 때문에 매이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안다 이런 말씀입니다. 이것은 고전적인 방편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여러분들은 이제껏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에 사람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매우 특별하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반드시 이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아서 전하는 사람과 그 말씀을 자기 혼자서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난 형제들과 함께 한 가족이 되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들으면서 신앙이 자라게끔 된 것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저에게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내가 존경하는 설교자도 없고 신앙의 깊은 영향을 끼친 신앙의 본받을만한 선배도 없었다고 한다면 나는 그러면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죠. 나는 주님을 사랑 할 수 없습니까. 그렇지 않죠. 사랑할 수도 있고 그리고 신앙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요.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하는 가운데 신앙만 자란 것이 아니라 뭔가 참된 신앙의 생명을 가로막게 하는 그 무엇이 마음속에서 함께 자란 것이죠.
일찍이 부모를 여의신 분들에게는 가슴아픈 일들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부모를 일찍이 여의고 혼자서 천신만고 끝에 그 풍파 많은 세상을 이기면서 이제 인생을 성공적으로 일구어낸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그렇게 난관을 큰 역경을 부모를 잃어버린 서러움, 외로움, 고독을 이기면서 정말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는 삶을 일구어 내어서 소위 이야기 하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자수 성가 했다 그렇게 인정받게 되었죠. 그것은 우리들이 비난할 것이 없어요. 문제는 그렇게 하면서 철저하게 자기 이외에는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고 사랑을 줄 사람이 없는 속에서 처절하게 투쟁하듯이 싸우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만큼이라도 성공하게 되었지만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는 역시 잃어버린 것들이 엄청 많다는 것을 기억해요. 물론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죠. 인정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사는 가운데 그가 정말 마땅히 지냈어야 할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고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마음이 자라게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자란 아이들은 커서도 반드시 자기 소신이 부족하고 주위의 눈치를 보는 버릇이 생겨나게 됩니다.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런 식으로 인생을 처세하면서 사는 것이 그러한 환경에서는 그 아이를 살려 놓은 거예요. 그런데 자기를 살려 놓은 그 삶의 방식이 또 한편으로서는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소신껏 주체성을 인생을 살아야 할 그 때에 가서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크게 병들게 만들어요. 이런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나이가 먹을수록 두 가지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요. 그게 뭐냐 하면 정말 좋은 집안에 태어나야 되겠다. 이것을 바꿔서 이야기 하면 우리가 좋은 부모가 되어야 겠다. 왜냐하면 인간의 운명의 거의 80%이상을 부모가 좌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단은 마지막 때가 되면 가정을 파괴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아주 확실하게 그 가정에 저주를 심는 방법이에요. 그리고 두 가지가 뭐냐 하면 처음 믿을 때부터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다. 성경적인 환경에서 성경적인 원리를 따라서 신앙생활을 해야지 막 굴러먹은 신앙생활을 하면 결국은 인간이 고쳐지지 않는 것처럼 결국은 신자도 안 고쳐지는 것이다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나는 이 두 가지만 만족시킬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행복하게 사는 조건에 90%가량 만족을 시켰다고 생각을 해요. 적어도 자기 바깥에 있는 조건을 생각하면. 여러분들 가운데도 정처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혼자서 신앙생활한 사람들 있죠. 여러분들은 스스로 심각하게 자기를 돌아보면서 내가 얼마나 신앙적인 결점이 많은 사람인가 눈떠야 합니다. 동가식서가식 하면서 이 교회 가서는 찬양을 배우고 저 교회 가서는 제자훈련을 받고 이 교회 가서는 예배를 드리고 저 교회 가서는 기도회를 따라 다니는 이런 식의 신앙생활, 그러면서도 목자는 한 사람도 없는 그리고 뼈저리게 사랑하는 공동체에 소속해 본 적도 없고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나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에요. 이 영적인 생명과 신앙이라는 것은 델리케이트 하기 짝이 없어요. 아주 섬세한 거예요. 대충대충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섬세하게 그렇게 서로 모든 원리들이 연결이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정말 잘 살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정말 잘 될 수가 없는 거죠.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보고는 하나님께로 올라가라고 말하고 자신들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 하였을 때 이것은 물론 모세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며 자신들은 허물이 많은 인간이라는 고백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방식이 이 때 시작된 방식이 아니라 이전서부터 이미 시작된 방식이었고 지금까지 계속되는 방식이란 것입니다. 모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곧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떠한 것이었겠습니까. 모세에도 개인적인 사생활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는 모든 것이 똑같은 권위로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성경으로 볼 때 모세는 근엄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모든 목자가 그러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짐을 짊어진 그 부담을 한없이 무겁게 생각하면서도 자기의 백성을 끔찍이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모와 같이 말이죠. 그도 아마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근엄한 황제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군림하지는 않았습니다. 함께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있었고 인생에 있어서 기고한 시간들을 귀담아 듣는 시간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판단해 주어야 하는 때도 있었죠. 그러나 모세가 아무리 그러한 개인적인 시간들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일단 하나님의 뜻을 대언해주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신 그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는 그 순간 만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로부터 들려오는 가르침을 듣는 그 순간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이 열린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주도적인 말씀이 무엇인지 느끼고 있습니까. 지금 현재 우리 공동체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음성을 듣고 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열린교회를 향해서 이러이러한 말씀을 하고 계시다라는 줄거리를 여러분들이 붙들고 있느냐는 것이죠. 관심이 있습니까. 나도 상황이 다르고 너도 놓여있는 상황이 다르고 저 지체, 이 지체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이 다 달라도 우리 모두를 향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지금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 우리 문제가 아무리 다양하고 달라도 우리 모두 공통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서서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듣고 있는 그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도를 한다고 해도 교회 전체를 위해서 목회자를 위해서 전심으로 기도하지 않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제가 지금 드린 이 말씀에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즘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어떠한 의미에서 성경을 풀어서 여러분들에게 설교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은 주님이 공동체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바를 정확하게 듣는 것, 그래서 전하는 그 말이 사람에게 있는 계획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향해서 하시고 계신 그 말씀을 적기적시에 그대로 전달해 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의 마음에 찍히는 것, 그래서 그것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을 향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 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모든 공동체의 온 식구들의 공통적인 반응을 얻어낼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 이것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 공동체를 향해서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실까.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당신을 믿고 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일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는 언제나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시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는 것이 우리의 최대의 중요한 기도 제목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또 한 가지 사실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공동체는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해야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게 다 들려주시면 우리가 그대로 행하겠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은혜를 더 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깨달으려고 깨달은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할 때 하나님의 그 말씀은 우리에게 더 풍부한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머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온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나아갈 때에 우리에게는 단지 설교 시간에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 보다도 풍부한 깨달음들이 우리들에게 다가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에게 들려오기만 하면 전심으로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것을 맹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이스라엘에서 이러한 마음을 보인 것이 몇 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여러분 너무나 잘 알고 계시죠. 이 현장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우리에게 향하여 주신 하나나미의 말씀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주시고 또 깨닫게 하시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