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2022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22년 2월 13일 – 3월 20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2년 5월 24일
목 차
1. 어떤 명랑함입니까?(눅 12:16-31) 2022.02.13. 주일오전 16
2.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허무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전 9:1-4) 2022.02.20. 주일오전2부 28
3.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허무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전 9:1-4) 2022.02.20. 주일오전4부
43
4. 왜 내가 울어야 하나?-삶의 불행을 뻥 차버리는 길(삼하 12:15-23) 2022.02.27. 주일오전
68
5. 왜 나는 혼자인가?-사랑하면서도 외로운 그대에게(고전 13:3) 2022.03.06. 주일오전2부
85
6. 왜 나는 혼자인가?-사랑하면서도 외로운 그대에게(고전 13:3) 2022.03.06. 주일오전4부
104
7. 어떻게 자유롭게 살 것인가?-삶의 속박으로 힘겨워하는 그대에게(요 8:31-32) 2022.03.13. 주일오전2부
126
8. 어떻게 자유롭게 살 것인가?-삶의 속박으로 힘겨워하는 그대에게(요 8:31-32) 2022.03.13. 주일오전4부
142
9. 참 자유를 누리는 길(갈 2:20) 2022.03.20. 주일오전2부 173
10. 참 자유를 누리는 길(갈 2:20) 2022.03.20. 주일오전4부 181
<설교 프레임>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1 2022. 2. 13 주일낮예배
< 어떤 명랑함입니까? >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 12:16-31)
I. 본문해설
인생은 기쁨과 슬픔의 계곡 사이에 걸쳐진 밧줄이다.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자주 우리의 희망을 배신(背信)한다. 그래서 때때로 현실은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불신 이웃을 향한 최고의 전도는 예수를 믿는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잃어버린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진지함과 명랑함이다.
인생이 심각(深刻)하지 않았다면 결코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것이기에 신앙은 진지한 것이다.
또한 올바로 예수를 믿으면 명랑(明朗)하게 된다. 명랑하다는 것은 “생각과 생활이 비관적이지 않고 밝고 환하다”는 뜻이다.
II. 어떤 명랑함입니까?
이 설교를 하게 된 동기(動機)가 있다. 그것은 진지하지도 않고 명랑하지도 않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다.
진지하지 않으면 명랑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그렇지도 못하다. 경건하지도 않으면서 우울하다.
그런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은 묻는다. “예수 믿는 게 사는 데 도움이 됩니까?”
A. 하나님 없는 명랑함
본문에는 그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실려 있다. 부자인 그의 태도는 하나님 없는 명랑함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농사를 짓는 그는 풍년(豐年)을 맞이했다. 너무 많이 추수되어서,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8-19)
어리석은 부자는 천성적(天性的)으로 밝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뜻밖에 그는 새로 창고를 더 짓고 늘어난 소출을 쌓아두기로 했다. 고민은 해결되고 더 큰 명랑함이 깃들었다.
잠시 고민했으나 그는 이내 행복(幸福)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는 명랑함이었다.
1. 세상을 전부로 여김
첫째로, 세상(世上)을 전부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었다.
육신(肉身)만 생각했다. 자기의 몸의 진정한 주인인 영혼(靈魂)에 대한 성찰이 없었다. 그에게는 보이는 세계와 감각하는 육체가 전부였다.
이런 세계관을 가진 그에게 최고의 행복은 최대의 쾌락(快樂)이었다. 풍족한 재물로 매일 잔치를 벌이는 꿈을 꿨다.
그는 말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자”(눅 12:19).
그러나 인생은 매일 잔치를 연다고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모든 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 짝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서로 다른 둘이 짝을 이루면서 서로를 잘 설명해준다. 대지와 하늘,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감각과 예지.
어리석은 부자는 명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지함이 없는 명랑함이었다. 그런 명랑함에는 드러나지 않는 우울(憂鬱)함이 따라다닌다. 세상을 전부로 여기기 때문이다.
2. 죽음을 생각하지 않음
둘째로, 그는 죽음(death)을 생각하지 않았다.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둬들였으나 거기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했다.
때가 되면 곡식이 자라고 추수되는 것처럼, 자기 인생도 끝나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20)
그의 명랑함은 재물을 통해 세속적 기쁨을 누리는 데서 온 것이었다. 더 많은 재물이 더 많은 기쁨을 주리라는 희망이 주는 명랑함이었다.
그것은 마치 침몰(沈沒)하는 배의 갑판 위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과 같다.
배와 함께 가라앉을 운명에 눈 감은 채 오직 몸으로만 반응하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죽음의 심연(深淵) 위에서 밧줄을 타는 것이다. 언젠가는 줄타기가 끝나고 떨어진다. 살아있는 자로서 죽음을 알아야 한다. 죽음의 그림자에 삶을 비춰보는 것이 지혜(知慧)다.
B. 하나님 있는 명랑함
이 비유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염려에 관한 것이다. 세상 백성들은 먹고 입고 마실 것을 염려하느라 우울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염려하지 않고 명랑하게 살아야 한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눅 12:24)
1. 하나님을 신뢰함
첫째로, 하나님을 신뢰(信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땅에 사셨을 때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해준다.
예수님은 먹고 입고 마실 것 때문에 우울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분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재물을 많이 쌓아두셨기 때문이 아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사랑 안에 사셨기 때문이다. 까마귀도 먹이시고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세상살이에 무심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실 때에 돈 맡을 자까지 정해두지 않으셨는가?
믿음은 삶에 명랑함을 준다. 만약 명랑함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faith)이 아니다.
믿음은 세상 현실 너머에 하늘 소망이 있다고 가르쳐준다. 성령 안에서 그 천국을 누리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내 인생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하는 것이다. 이 확신(確信)이 명랑함을 가져다준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실수가 없으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초월적 신앙을 갖는다.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일체의 낙관으로 인생사를 본다.
세상을 보는 모든 비관적 시각은 하늘 은혜로 세례 받아야 한다. 그때 무신론적 비관은 유신론적 낙관(樂觀)으로 바뀐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하나님 없는 비관과 명랑함은 사라지고, 하나님 있는 낙관과 명랑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유익(有益)이다.
2. 소명으로 살아감
둘째로, 소명(召命)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이다.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을 때, 잘되면 교만했고 그렇지 않으면 낙심했다.
그러나 이제는 삶의 관점이 바뀌었다.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명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 우리의 소명을 따라 살기에 적합한가?
탐욕(貪慾)을 버려야 한다. 그러면 먹고 입고 마시는 일에 대한 염려로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낙관적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믿음으로 사는 명랑한 삶은 하늘나라의 소명을 따라 살기에 적합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일체의 명랑함으로 한 가지 인생의 목적(目的)을 위해 집중하며 살아가야 한다. 거기서 삶의 보람을 느껴야 한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 12:31)
우리가 태어난 것은 결코 우연(偶然)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 꼭 필요해서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그런 우리의 쓸모를 찾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부르심(calling)을 깨닫고 거기에 이바지하며 인생을 사는 것이다.
모든 것이 소명이다. 태어나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소명이다. 그 부르심 안에서 내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명랑함을 갖게 된다.
세상의 근심과 허무를 십자가 피(血)에 담금으로써, 신본주의적 명랑함을 되찾는다. 그것을 경험하며 살게 하는 것이 은혜(恩惠) 생활이다.
잠시 지나는 인생을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기쁨 속에서 살아간다. 때로는 예기치 못한 시련과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모두 더 큰 하나님의 계획(計劃)을 드러낼 것이기에 우리는 우울하지 않다.
땅에 살고 있으나 거기에 매이지 않기에 명랑함은 계속될 수 있다. 우리의 사랑은 하늘나라에 있으니 그 소망으로 더욱 위로를 받으라.
III. 적용과 결론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 위에 있게 하라. 그리고 모든 지식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이어지게 하라.
세상에 대한 염려나 우울함이 거룩한 명랑함을 잃어버리게 하지 말라.
잠시 있다가 사라질 인생이지만 영원을 향해 살게 하신 것에 감사하라.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2 2022. 2. 20 주일낮예배
<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 9:1-4)
I. 본문해설
본문은 인생의 두 가지 운명(運命)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하나는 삶의 모호성과 죽음의 확실성이다.
인간은 하늘과 대지 사이에 살고 있다. 하늘은 자신의 존재의 토대이며 삶의 목적을 말해주지만, 두 발을 디딘 채 살고 있는 곳은 대지(大地)다.
하늘과 단절한 대지의 명랑(明朗)함은 쉽게 선택하지만 근거가 없고, 대지와 단절한 하늘 명랑함은 근거는 있으나 현실적이지 않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II.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여기서 하늘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대지는 보이는 세계를 가리킨다. 하늘은 초월적 가치를, 대지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現實)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두 세계를 창조하셨다. 보이지 않는 천상세계과 보이는 지상세계이다. 이것은 둘이 서로 맞짝을 이루면서 서로를 반영하고 있다.
하늘과 대지, 영원과 시간, 불멸과 사멸, 하나님 나라와 세상나라가 그것이다.
인간이란 영원이라는 죽음의 심연(深淵) 위로 드리워진 시간이라는 밧줄을 타고 걷는 존재다. 우리는 그 밧줄 위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A. 인간의 현실
지혜자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인간의 삶을 관찰했다. 그 결론은 인간이 산다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전 1:13)
미래가 불확실하기는 의인이나 지혜자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 한결같지 않더라는 뜻이다.
또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의인(義人)이나 악인에게나 마찬가지니, 순결한 자와 불결(不潔)한 자, 제사 드리는 자와 제사 드리지 않는 자가 모두 괴로움을 겪더라는 것이다.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3)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죽을 운명을 가지고 살아간다. 둘 다 괴로움과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간다. 이것이 인생이 허무(虛無)한 이유다.
이 지혜자 솔로몬은 말하기를 자신은 금과 은을 원 없이 소유했으며, 지혜에서도 뛰어났고, 자기 눈이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아니했으며, 즐거워하는 것을 막을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전 2:8-10).
그러나 그 결국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이 모두 헛된 일이었음을 고백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누구나 사람으로 태어나 더 잘 살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도 아무 소득이 없다고 말한다. 근심과 수고는 슬픔으로 이어질 뿐이라는 것이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B.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그러면 도대체 지혜자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라고 가르치는 것인가?
인생은 죽음의 심연을 가로지르는 밧줄을 타는 것이다. 시간(時間)의 밧줄 위에 서 있는 인간은 그 줄은 다 타보지도 못한 채, 죽음(death)의 심연으로 떨어지건만 삼킨 자는 말이 없다.
살아있는 자는 생(生)을 말하나 죽음(死)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에 삶에 대해 말해줄 수 없으니 어디서 답을 얻을 것인가?
1. 하늘(heaven)을 생각함
현대인의 관심은 물질적 풍요와 평안이다. 하늘을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를 휩쓸고 있는 사상은 허무주의(虛無主義)다.
허무주의는 기존의 가치는 찢어버렸으나, 의지하고 살아갈 새로운 가치는 아직 찾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근거를 묻지 않기로 했으니 인생의 목적도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자기가 스스로 태어나지도 아니 하였으니, 어디서 스스로 자기 삶의 근거를 찾는다는 말인가?
* 물속에서 발이 닿지 않는 두려움
현대인들에게 소확행이 폭넓은 공감을 얻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생에서 하늘을 생각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나면, 범인(凡人)들에게야 순간의 즐거움 말고 더 가치 있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삶의 근거가 없음에서 오는 허무와 불안(不安)을 달래기 위해 일시적 즐거움을 찾는다. 나쁜 것은 아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방향까지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인생에서 살아있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내가 예상하지 못하는 때에 죽는다는 것이다.
* 죽음학의 개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 K. Ross)
그런데 삶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나, 그것보다 더욱 확실한 죽음(death)은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파스칼은 말한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내가 곧 죽으리라는 것.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내가 모르는 것은 이 피할 수 없는 죽음 자체다.” 파스칼.『Pensées』단장 194번
인간은 인생의 죽음과 비참(悲慘)을 스스로 고칠 수 없기에,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죽어야 할 운명(運命)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을 스스로 양해하기로 했다. 무엇 때문일까?
“죽음은, 위험이 없이 죽는 것을 생각할 때보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때 더욱 견디기 쉽다” 파스칼.『Pensées』단장 166번
하늘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의 빛 아래서 자신의 삶을 보지 못한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진리라는 것을 허물어 버렸다. 지난 세기의 뛰어난 사상가인 버트란트 레셀(B. A. W. Russell)은 자신의 평생 과업이 진리(眞理)를 허무는 일이었다고 했다.
헤겔은 “새로운 시대는 신이 죽었다는 느낌과 함께 올 것이다”라고 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누구보다도 인간의 실존(實存)에 관심이 많았지만 인간이 갈 길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허무주의는 예견된 것이었다.
1967년 1월 14일, 약 3만 명의 히피들이 골든게이트 파크에 모였다.
같은 해에 약 10만 명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모였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었지만, 노동에 반대하고 마약 복용의 자유를 부르짖음으로써 미국의 도덕적 대공항을 가져왔다.
이들은 1970대 초반까지 미국 전역에 약 1만개 이상의 공동체에 75만 명이 모여 함께 생활하였다.
그들은 허무주의를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nowhereness, nothingness, nobodyness를 부르짖었으나 인생에 무슨 답을 주었는가?
죽음(death)은 삶보다 확실한 사실이다. 인간이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지는, 설명되지 않는 죽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참으로 인생의 의미(意味)를 찾기 전까지는 사람으로 사는 게 아니다.
“…어떤 도시에 가서 …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14)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단지 그냥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인간은 왜 그렇게 살았는지에 대해 창조주에게 대답해야 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러므로 하늘을 생각하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을 지으신 것을 깊이 생각하라.
잊지 말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당신 인생(人生)의 의미를 묻고 일상의 가치(價値)를 찾으라. 그것이 허무에 빠지지 않는 길이다.
2. 대지(大地)를 생각함
인생은 허무하다. 그러나 허무를 느끼는 것만으로 현실을 살아낼 수 없다.
하늘에서는 영원(永遠)과 불변이 지배하지만, 대지에서는 변화(變化)와 생성이 지배한다. 인간은 그 지배 안에 있다.
거기서 살다보면 모든 일이 일어난다. 좋은 일뿐 아니라 가장 나쁜 일도 일어난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만큼 인생의 통증은 크다.
살아있기에 모든 것을 겪는다. 기쁜 일은 순간이고 슬픈 일은 지속된다. 그래서 살아있다는 것은 슬픈 일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세상은 공평(公平)의 법칙으로 모두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이 용기를 얻고 유신론자들은 확신을 잃기도 한다.
아무도 개인적인 미래를 알지 못한다. 그런 불확실성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신자에게나 불신자에게나 동일하다. 그러나 악인은 무슨 삶을 살든지 거기에는 근거(根據)가 없다. 그것이 더 무서운 것이다.
비참한 것은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미친 마음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다.
“…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3)
온전히 하늘 가치를 믿는 사람만이 대지를 생각할 여유를 갖는다. 대지를 인정하고 살아도 하늘 가치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확신이 깊은 사람일수록 자신에게 회의(懷疑)를 느낄 수 있고,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사랑을 반성(反省)할 수 있다.
우리는 운명(運命)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을 안 믿더라도 운명 따위는 믿지 말라. 대지 위의 삶의 모든 진취성을 사라지게 한다.
차라리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고 믿으라. 그 속에서 자기만의 고유한 인생을 예술작품(藝術作品)처럼 완성해 간다고 믿으라.
어떻게 하면 온전히 자신이 인생의 주체(主體)가 되어,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생각하라.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삶이다. 거기서 당신의 삶의 보람을 찾으라.
경건하지도 않은데 우울하고, 심각하기는 하지만 진지하지는 않다. 그것을 깊이(depth)라고 생각하지만, 인생의 무게(weight)일 뿐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늘 일어난다. 그것을 빨리 해석(解釋)하고 소화하지 못하기에, 정신은 우리의 것이 아닌 다른 시간에 매인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후회에 매이고, 오지도 않은 미래의 불안(不安)에 묶인다. 그 동안 유일한 시간인 현재는 누리지도 못한 채 흘러간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짧게 느껴진다. 사실은 인생이 짧은 게 아니라, 우리가 방황하면서 허비(虛費)하는 시간이 길었던 것이다.
늘 좋은 일이 일어나길 꿈꾸고, 때로는 이를 위해 신앙에 호소하지만 현실은 번번이 우리의 희망을 배신(背信)한다.
그러나 살다가 보면 이전에 우리가 상처 받은 나쁜 일들이 꼭 필요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지 않는가?
모든 나쁜 일의 의미를 다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잘 모를 때조차도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좋게 해석하라.
그 해석의 능력이 신앙의 깊이다. 욕심(慾心)을 버리라. 말씀과 기도의 은혜(恩惠) 속에 사는 자에게 해석 능력이 있다.
혹시 당신이 믿음을 갖기 싫다면, 강한 의지를 가지고 그 혼란과 허무(虛無)를 물어뜯어버리라. 그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라.
* 양치기와 뱀의 비유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믿으라. 은혜(恩惠)를 받으라. 둘 다 싫거나 못하겠다면, 행복한 짐승처럼 살든지 불행한 인간으로 살든지 그것은 오롯이 당신 자신이 홀로 감당할 몫이다.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인생은 여전히 고통(苦痛)의 바다지만, 오늘 내가 살아있는 것은 선물이다. 살아있는 것은 여전히 하늘이 주신 목적(目的)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으나 통증(痛症)은 선택하기에 달렸다”
믿고 알고 생각할지라도, 여전히 인생은 고통(苦痛)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통증은 거의 안 느낄 수도 있다.
아니, 그것을 기쁨과 환희로 승화시킬 수 있다. 이것이 신앙의 비밀이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행복(幸福)을 갈망하지만, 그것은 결코 보석을 손에 쥐듯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過程) 그 자체가 행복이 아니겠는가?
오늘 하루 아침햇살에 눈뜨고, 한낮에 누군가를 만나고, 한 끼 음식을 먹고, 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가?
나의 눈을 채우는 온갖 물상(物像)들과 들리는 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굴을 스치는 바람 한 점도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라! 살아있음에 감사하라. 죽은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특권(特權)이 아닌가?
어제의 후회(後悔)로 오늘을 물들이지 말고, 내일의 염려(念慮)로 오늘을 우울하게 살지 말라.
인생의 행복은 저 하늘 아래서 매일 누리는 대지의 삶의 명랑함에 있다.
* 사형수의 마지막 식탁
천국(天國)은 세상보다 완전하지만, 지상(地上)에서 누리는 기쁨은 여기만의 고유한 것이고, 우리는 대지에 살고 있다.
하늘의 복락을 참되게 바라는 사람은 현실의 고통을 피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기쁨을 지금 대지(大地)에서 앞당겨 맛보는 사람이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 9:4)
성경은 하늘(heaven)의 관점에서 대지(大地)를 바라보고 대지의 관점에서 하늘을 바라본다. 삶을 긍정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세상에서 자기가 즐거워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살아있는 인간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전 3:22)
III. 적용과 결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내세적 금욕주의와 현세적 방탕주의는 어느 것도 성경이 가르치는 삶이 아니다. 지혜자는 이 두 지평을 다음과 같이 통합한다.
“하나님이 너를 창조하셨고 네 인생의 목적을 주셨음을 잊지 말라. 괴로운 날이 있겠지만 명랑하게 살라. 일찍 죽은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라. 오래 살면 괴로운 일도 그만큼 많겠지만, 오래 살면서 즐거운 인생을 살라. 그것이 행복이다”
살아서 눈뜨면 오늘은 살아있는 것이다. 그래도 내가 살아있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살고 싶었던 내일이 아닌가?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라.
하나님을 믿은 것에 감사하라. 오늘 하루를 즐거운 마음으로 살라. 하늘의 가치(價値)를 믿고 오늘을 믿음으로 명랑하게 살라.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3 2022. 2. 27 주일낮예배
< 왜 내가 울어야 하나? >
- 삶의 불행을 뻥 차버리는 길 -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삼하 12:15-23)
I. 본문해설
고통 없는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마치 파도 없는 바다를 상상하는 것과 같다.
삶 자체가 고통(苦痛)의 바다인데 어찌 불행이라는 파도가 없겠는가? 그것은 단지 강력한 희망의 욕구일 뿐, 현실적이지 않다.
잠시 비관적인 생각이 들게 하는 작은 불행으로부터, 절망(絶望)을 가져다주는 큰 불행까지 항상 만나는 게 인생이다. 신자의 삶도 다르지 않다.
본문은 다윗왕이 불륜(不倫) 관계에 있던 밧세바와 동침해서 낳은 어린 아이가 죽는 장면을 보도하고 있다.
다윗은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아이는 죽었다. 그의 생애에 이처럼 큰 불행(不幸)이 어디 있었는가?
II. 삶의 불행을 뻥 차버리는 길
다윗은 그 아이를 사랑했다. 살릴 수 있다면 자기 목숨도 바쳤을 것이다. 반역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을 생각해보라.
그 자식은 천하의 역적이었다.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한 인간 쓰레기였다.
반역을 일으켰던 무리들이 토벌되었다는 승전(勝戰)의 소식이 아들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과 함께 전해졌다(삼하 18:32).
그런 인간 말종(末種) 같은 아들이 죽었을 때조차 다윗은 통곡하면서 말했다.
“…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그렇다면 다윗은 사랑하는 밧세바에게서 낳은 바 되어 죄 없이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했겠는가?
그는 이처럼 큰 불행을 만났다. 그러나 거기서 절망(絶望)하고 쓰려지지 않았다. 바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일어섰다. 이것이 믿음이다.
A. 경계를 분명히 하라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일과 그럴 수 없는 일에 대한 경계(境界)를 분명히 하라. 바꿀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막아라. 그 가능성(可能性)이 단 0.01%밖에 안된다고 할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라.
그것이 자기 인생을 사는 자세다. 쉽게 포기하는 자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아이가 병 들었다. 죽음은 이미 예언되었다. 비록 불륜을 통해 낳은 자식이었으나, 다윗의 애정(愛情)은 각별했다. 그는 하나님께 매달렸다.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삼하 12:16)
얼마나 간절히 매달렸는지 신하들이 다윗왕의 건강을 염려할 정도였다.
그들은 왕을 부축하여 일으키고자 했으나, 다윗은 그들의 간청을 거절했다. 마치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죽기로 작정한 아비와 같았다.
다윗은 비록 아이의 죽음(death)이 예언되었을지라도, 자기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이사야 선지지가 죽을 것이라고 선고했던 히스기야왕도 통곡과 눈물의 기도로 다시 살지 않았는가?(왕하 20:1)
당신에게 불행이 다가올 때 무력(無力)하게 기다리지 말라. 그것은 결코 자기 인생을 책임 있게 사는 게 아니다.
최선을 다해서 막아라. 그게 안 되면 방향(方向)이라도 바꾸도록 애를 쓰라. 한 번밖에 없는 당신의 인생이 아닌가?
그러나 불행(不幸)을 피할 수 없는 때도 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B. 불행의 통증을 줄이는 법
우리는 불행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겪어야 하는 고통(苦痛)이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 불행의 고통을 느끼는 통증은 너무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작은 불행에서 통증(痛症)을 크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큰 고통(苦痛)에서 작게 느낀다.
1. 미련(未練)을 버리라.
이미 일어난 불행에 대해 미련을 버리라. 후회하지 말라. 현재의 시간에 충실하지 못하면, 이 시간은 또 과거가 되어 후회하게 된다.
이미 처한 불행으로 현재의 삶을 낭비하지 말라. 죽은 자식(子息)을 만져서 무엇 하랴. 땅에 묻어버리라. 인생의 한 막(幕)을 끝내라.
아이는 죽었다. 다윗은 왕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음식(飮食)을 차리게 하였다. 아비로서 사랑이 부족했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아이’()를 너무 사랑했으나 이미 일어난 불행에 묶여서 죽은 자처럼 사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안 것이다.
아이는 죽었어도 다윗은 자기의 삶(life)을 살아야 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받은 훈련(訓練)이었다. 이상하게 여기는 자들에게 말했다.
“…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삼하 12:22-23)
아이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쉽게 마음을 접어버리는 걸 보면서 우리는 의심하게 된다. “진짜 그 죽은 아이를 사랑하긴 사랑한 걸까? 7일 동안 드린 금식기도는 진심이었는가?”
의심하지 말라. 다윗의 기도는 슬펐고 금식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이를 데려가셨을 때, 그는 미련을 버렸다. 그것이 믿음이다.
2. 현실(現實)을 대면하라
불행한 일이 일어났어도 현실(現實)을 먼저 생각하라. 과거는 흘러간 시간 속에 접어버리고, 지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라. 당신의 인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비록 선지자가 아이의 죽음을 예고했지만, 다윗은 그렇게 매달리면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시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이는 죽었다.
다윗처럼 당신에게 불행한 일은 이미 일어났고, 그대는 새로운 출발점(出發點)에 서있다고 생각하라. 오직 그대의 현실을 직시하라.
눈앞의 현실을 살아낼 사람은 오직 그대 자신밖에 없음을 기억하라.
어떤 불행을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때, 당신에게 살아갈 힘을 줄 수 있는 방식으로 해석(解釋)하라.
다른 이들이 겪는 모든 불행을 자신도 겪을 수 있음을 생각하라. 그것은 모든 인류가 겪는 바임을 기억하라.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자주 생각하여, 그것들과 친숙(親熟)해지도록 노력하라.
불행을 생각하는 일이 두렵게 느껴질 때는 기도하고, 겁나지 않을 때는 감사하라. 미래의 불행을 감당할 정신(情神)의 힘을 키우라.
불행은 피할 수 없다. 불행은 고통을 준다. 그래서 사는 것은 아프다. 그러나 어떤 불행도 당신의 인생(人生)을 뿌리 채 흔들게 하지는 말라.
이제껏 어떻게 살아온 인생인데, 여기서 이렇게 쓰러질 수는 없지 않은가?
크나큰 아픔으로 절벽에 매달린 것 같은 때, 마지막 희망(希望)의 밧줄마저 놓아버리고 싶을 때조차도 당신의 인생은 너무나 소중하다.
우리가 대지에 살아있는 한 살아가야만 한다. 용기 내어 현실을 대면하라.
3. 일상(日常)을 계속하라
아이는 죽었다. 신하들은 사실을 숨겼으나, 다윗이 눈치챘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그는 금식기도를 그쳤다. 그리고 그는 다시 본래 자기의 일상(日常)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첫째로는, 몸을 씻었다. 7일 동안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던 몸을 깨끗이 씻었다.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기름을 발랐다. 자신의 용모(容貌)가 슬퍼했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싫었다. 거울 앞에 앉아 조용히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다윗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이제 마음으로 떠난 아이와의 인연을 끊고 있었다.
셋째로는, 의복(衣服)을 갈아입었다. 구약에서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은 정결케 하는 의식과 관련이 있다(창 35:2). 왕의 의복이었다.
넷째로는, 여호와의 전에 가서 경배(敬拜)했다. 하나님께 대들고 따지는 대신, 그는 하나님의 집을 찾았다.
거기서 홀로 경배를 드렸다. 자기에게 일어난 불행(不幸),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찬송했을 것이다.
이미 일어난 불행으로 잃어버린 것은 빨리 잊으라. 괜히 세상에 앙심을 품지도 말라.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이 당신 마음의 상처(傷處)만 깊어진다. 불행이 일어난 과거는 바꿀 수 없지 않은가?
힘들겠지만, 당신의 눈을 현실(現實)로 돌리라. 일상의 삶을 계속하라.
지금 겪는 불행에 너무 힘들어서, 큰일을 생각하기 힘들 때는 짧게 끊어서 생각하라. 오늘만, 이 시간만 살아내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정신(情神)의 줄을 놓지 말라. 주님을 찾으며, 우선 눈앞의 사소한 일에 집중하라.
“며칠 전 남편이 죽었다. 나는 딸아이의 흰 운동화를 빨고 있다. 쓰다 버린 칫솔로 구석구석 빡빡 문지르며 때를 벗긴다. 매 순간 멀미에 구토하듯 슬픔이 치밀어 오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욕실의 천정을 바라본다. 고무장갑을 낀 손 팔뚝으로 눈물을 훔친다. 다시 칫솔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이까짓 일은 해서 뭘 한단 말인가?’ 이렇게 묻지 않기로 했다. 사소한 일에 나마 정신을 쏟지 않으면 슬픔의 심연에 풍덩 빠져 죽어버릴 것 같아서다” 김남준, <남편이 죽었다>
주변을 청소하고 정리(整理)하라. 사소해 보이는 일에 집중하라. 씻고 입고 마시고 걷는 것과 같은 일에 집중하라. 그리고 기도하라.
커다란 슬픔이 밀려올 때 자신에게 고백하라. “이것도 나의 인생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큰 불행을 겪었어도 내 삶은 끝나지 않았다. 인생은 계속되어야 한다.
덧없는 대지(大地) 위에서 펼쳐지는 인생에서, 때로는 희망(希望)을 갖는 것이 절망하는 것만큼이나 덧없을 때가 있다.
신앙심(信仰心)이 없더라도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나마 인생길에서 통증을 줄이는 길이다.
불행의 고통이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있다. 그때는 자신의 삶을 남의 인생처럼 바라보는 초탈(超脫)을 연습하라.
아무리 큰 불행이 닥쳐와도 “나에게 왜 이런 일이…”라고 원망(怨望)하듯이 묻지 말라. 여기서 죽지 않으려면 슬픔을 삼키라.
많이 울지 말라. 자주 울면 불행(不幸)도 그대를 우습게 본다. 당신이 먼저 불행을 우습게 여겨라. 그것이 인생을 가볍게 하는 것이다.
부모형제, 친구들, 지인들, 나아가 모든 인류가 그렇게 불행(不幸)을 겪으며 살다가 죽어갔음을 기억하라. 위로가 될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쉽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의 그런 눈물에 관심(關心)이 없다.
또 당신 얘기에 귀를 기울여 함께 울어준들 그것이 당신의 인생(人生)의 무게를 덜어줄 수 있겠는가?
“모두들 혼자다”(Alles ist allein). 나의 인생길을 대신 걸어줄 사람은 없다. 주님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시지 않는다.
누구의 동정(同情)도 기대하지 말라. 인생길에서 타인의 동정이라는 것은 그저 불행이라는 길가에 놓인 망가진 의자(椅子)일 뿐이다.
도저히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것 같은 때 잠깐 앉는 곳이다. 곧 다시 일어나 나의 인생길을 가야한다.
눈앞에 있는 상황이 당신이 살아내야 할 현실이고 인생(人生)임을 기억하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하라. “동정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지만 나는 그 동정을 의지해서 살지 않는다”
하나님을 찾으라. 차라리 하나님 앞에서 울라. 마음을 바꾸어 주신다.
불행을 만났을 때, 통증을 덜어주신다. 오히려 재 대신 화관(花冠)을, 슬픔 대신 기쁨의 옷을 입혀 주신다(사 61:3).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아닌가?
III. 적용과 결론
이제껏 수많은 고통의 파도(波濤)와 싸우면서 여기까지 살아왔다. 이제까지 살아남았으니 한 번 더 풍랑을 겪은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한번 불행을 만난 것으로 우리의 소중한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욱이 우리는 그 험한 인생의 바닷길을 혼자 헤치고 오지 않았다.
이제껏 삶의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God)이 함께해 주시지 않았는가?
은혜를 구하자! 인생의 항해(航海)가 끝나는 순간까지 그분과 동행하자.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4 2022. 3. 6 주일낮예배
< 왜 나는 혼자인가? >
- 사랑하면서도 외로운 그대에게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I. 본문해설
자살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이 한없이 외롭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는 자신에 대해 고도로 정신(精神)을 집중한 결과다.
진리의 빛 없이 자아를 응시하고자 할 때, 그것은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철학자들도 자아에 대해 쉽게 정의 내리지 못했다.
“일단 생각해 보라”, 혹은 “일단 살아보라”, 그러면 “그것이 당신의 자아(自我)를 보여줄 것이다”라고 말한다.
외로운 사람은 사랑받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왜 사랑하면서도 외로운 것일까? 어떤 사랑(love)을 해야 외롭지 않을 수 있을까?
기독교적 사랑의 경전(經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고(마 22:39), 또 하나는 “사랑은 언제나…”로 시작하는 고린도전서 13장이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자기의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도록 희생(犧牲)할지라도, 그것이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II. 사랑하면서도 외로울 때
종종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외롭게 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외로움은 누군가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감정을 동반한다. 그것이 때로는 버려졌다는 느낌으로까지 나아간다.
자살하는 사람들 중 93.4%가 사전에 자살(自殺)의 신호를 보낸다고 한다.
갑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죽고 싶다”,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거나, 소중히 여기던 물건들을 남에게 주거나 내버리는 행동이다.
일단 자살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나면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된다. 미운 사람이나 보고 싶은 사람이 없고 그냥 무(無)로 돌아가고만 싶어진다.
외로움이라는 것도 살아야겠다는 의지(意志)가 남아 있을 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외로움은 삶의 허무감과 그것에 대항해서 의미를 찾으려는 감정 사이의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끝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더 이상 허무(虛無)의 감정에 대항할 힘이 없을 때,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명랑하게 살기 위해서는 의욕(意欲)을 잃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어떤 때 삶의 의욕을 갖거나 상실하는지를 유심히 살피면서 자기의 마음을 돌보아야 한다.
A. 왜 나는 혼자인가?
“왜 나는 혼자인가?” 이 질문은 한 인간이 제 정신으로 돌아올 때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맨얼굴이기 때문이다.
1. 서로 다른 존재로 창조됨
첫째로, 근본적인 이유다. 그것은 각 사람이 서로 다른 존재(存在)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인과 구별되어 독특한 자기를 가진 존재로 세상에 태어난다.
아무도 같은 자아(自我)를 가질 수 없고 자기 이외에는 모든 사람이 타인이다. 누구든지 타인에 대해 낯선데 그것은 일종의 단절감이다.
인류가 범죄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에게는 타인에 대한 낯섦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자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을 멀리 떠났음
둘째로 실제적인 이유다. 그것은 하나님(God)을 떠났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기에 외로운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이 깊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했더라면 누릴 수 있었을 행복(幸福)의 크기를 보여준다.
* 오래된 시골 마을을 보는 정서
죄(罪)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파괴했다.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사탄의 유혹은 오히려 크나큰 소외를 가져왔다. 그것은 하나님과 자연, 그리고 심지어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다.
이는 영혼의 생명(生命)으로부터의 소외였다. 이로써 다른 사람을 올바르게 사랑할 마음의 힘을 잃어버렸다.
지성은 눈 멀고 감정은 육욕으로 들끓고 의지는 악으로 향하게 되었다.
죄로 말미암아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疏外)되었다. 이웃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잃어버려 외로운 존재가 되었다.
3. 세속주의와 현대인의 외로움
현대인의 외로움은 세속주의(世俗主義)와 관계가 깊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간을 소비와 이를 위한 노동에 내몰리게 함으로 더욱 외롭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세속주의를 가져왔다.
세속주의(secularism)란 사회의 제도를 세우거나 운영함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理性)을 초월하는 모든 가치 기준을 배제하는 것이다.
사상은 놀라움에서 생긴다. 자연에 놀라면 자연사상이, 인간의 삶에 놀라면 윤리사상이, 사회에 놀라면 정치사상이 생긴다.
그러나 이제 현대인에게 더 이상 놀랄 일이 없다. 정신은 감각에 매여 있고 과학(科學)은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게 된다. 이것이 세속주의다.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간은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고, 욕망(慾望)은 증대하였다. 현대인의 관심사는 물질적 풍요와 개인의 평안함이다.
이런 세속주의는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대사회의 풍조다.
감각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현대인은 외로움을 느낄 때, 정신으로 하여금 그것을 성찰(省察)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정신을 팔게 만든다. 때로는 너무 두려워서 그런 질문에 직면하는 것을 회피하려고 한다.
영혼(靈魂)에는 고등한 기능과 하등한 기능이 있다. 그 고등한 기능 때문에 인간은 동물과 구별된다.
이로써 선악을 분별하고 대지의 삶을 하늘의 가치로 성찰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정신이 세속주의에 오염될 때, 영혼의 고등한 기능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여 곤충과 같은 상태로 떨어지게 된다.
인간은 순간순간 가슴을 파고드는 허무와 외로움의 감정을 달랠 수 없다.
현대인들은 이처럼 외롭기 때문에 사랑의 욕구도 크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찾는 것은 기껏해야 자기만족적 사랑이다.
사랑은 관계(關係)의 기술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습득하기 어려운 삶의 기술이다. 현대의 세속화된 개인주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을 점점 습득하기 어렵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사랑(love)에서 많은 실패를 경험한다. 더욱이 인간은 물질적 풍요와 개인적 평안함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사랑만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우리는 정신없이 살아간다. 이런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매 순간 눈에 보이는 세상 사물들에 빼앗기는 정신(精神)은 시간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때로는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두려워서 회피하려고 한다. 이것은 모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答)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어찌 그 답(答)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렇게 정신을 빼앗는 사물들로부터 잠시 물러나 보라! 우리는 자신이 대지(大地) 위에 홀로 있는 외로운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다.
현대인이 감각적인 것들에 몰두하며 물질(物質)의 소비와 오락, 개인적인 평안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하는 것도 이것을 잊기 위해서다.
* 불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
더욱이 이러한 외로움에서 벗어나보기 위해 자극적 쾌락에 맛을 들이고 나면, 더욱 큰 자극을 받아야 삶의 허무(虛無)를 잊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인의 쾌락주의는 일종의 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B. 외롭지 않은 사랑
우리는 어떻게 해야 외로움(loneliness)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떤 사랑을 해야만 외롭지 않을 수 있을까?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 각각 자기만의 주체(主體)로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
마치 인류가 모두 다른 땅에 살아도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듯이. 사람은 서로 달라도 하나의 사랑으로 함께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
인간의 비극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없어서다.
현대인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이전 시대보다 더 많이 잃어버렸다. 정염(情炎)은 커졌지만 관계 맺는 능력은 작아졌다.
더욱이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외로운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1. 환상에서 벗어나라
첫째로, 그릇된 환상(幻像)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 없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환상이 있다. 이 환상 때문에 사랑하면서도 외롭게 된다. 이것은 주체의 환상과 희생의 환상이다.
a. 주체의 환상
이것은 사랑함으로써 다른 사람과 일체를 이룰 수 있다는 환상이다.
이는 서로의 주체(主體)를 상실하고 통합되어 버리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참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또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은 좋지 않다.
자기의 주체성을 잃어버리면 사랑을 할 수도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누군가를 아무리 사랑해도 자기의 삶은 자신 밖에 살아낼 사람이 없다. 아무리 사랑해도 나는 자기(自己)고 그는 타인(他人)이다.
사랑에는 의존(依存)의 감정이 수반되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단지 상대방 때문에 만족한 상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주체로서 각자 자기 인생의 의미를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b. 희생의 환상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犧牲)하면서 빠지는 자기만의 환상이다.
사랑의 자리는 마음이다. 사랑할 때 정염과 함께 근심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정이다. 이것이 없으면 희생도 헌신도 없다.
참된 사랑은 자신이 남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나 환상에 빠진 사랑은 그것을 기억한다. 또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할 때, 한(恨)으로 승화시키려고 한다.
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의 순도(純度)나 깊이와 연관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이 아니다.
* 군대 간 아들 생각에 편히 못 잠
군대 간 아들의 현실과 부모인 나의 희생은 아무 인과관계(因果關係)가 없다. 그렇게 해야 스스로 마음이 편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을 한 자신을 스스로 대견스럽게 여긴다. 이것은 성경적 사랑이 아니라 지성감천(至誠感天)의 사랑이다.
희생의 환상은 자기 인생의 주체성(主體性)을 잃게 하고 명랑한 삶을 해친다. 더욱이 현재라는 소중한 자기의 시간을 허비하게 한다.
이러한 희생의 환상 속에서 사는 것은 매우 해롭다. 그것은 자기의(自己義)에 빠지게 하고 한(恨)의 정서를 갖게 한다.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도, 그런 사랑을 하는 자신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때 우리는 사랑한 것만큼 상처를 받고 외로워진다. 사랑은 삶에 의미를 주고, 살아갈 힘을 준다.
그러나 희생의 환상에 빠지면 사랑 때문에 삶의 명랑함을 잃어버린다.
더 위험한 것은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하고 지배하려고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들에게 가르친다.
“부모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부모의 사랑에 부담을 느껴 자기 삶을 포기하지 말라. 때로는 부모 말을 듣는 것이 인생을 망치는 길이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다. 그런데 자식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의 목숨이 아니라 주체성이다. 그래야 자기의 삶을 살 수 있다.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도, 불행해지는 것도 모두 사랑 때문이다. 그냥 사랑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랑을 해야 한다.
인간이 희생(犧牲)의 환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올바른 사랑이 아니다.
2. 하나님 사랑을 앎
오늘 본문에 의하면 사랑(love) 없이도 자신의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랑 없이 어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나름대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육욕적 사랑이지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은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에게 있던 이전의 사랑을 떠나 완전히 다른 사랑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중심으로 한 사랑에서 벗어나 하나님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우리 스스로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다.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전히 옛사람의 사랑이 남아있지만, 끊임없이 그것을 버리고 새 사람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지 못해 외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므로 외로운 것이다. 이미 마음 안에서 하나님께 충분히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다.
그는 사랑의 계명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한다. 삶의 의미를 사랑 받는 데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데서 찾는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III. 적용과 결론
당신이 대지(大地) 위에서 혼자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잊지 말라. 당신만이 아니라 모두들 혼자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라.
아무도 당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누군가를 의지(依支)해야 겨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말라.
자기의 인생을 지탱할 수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법이다.
사랑하면서도 외로운가? 희생하면서 상처를 받고 있는가? 대지 위에서 인간의 삶이 다 그런 것이다.
대지에 충실하라. 그러나 그것을 당신의 모든 희망(希望)으로 삼지는 말라.
하나님(God)의 사랑으로 돌아가라. 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랑하게 사는 법을 배우라. 인생의 의미를 사랑 받는 데서 찾지 말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찾으라.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5 2022. 3. 13 주일낮예배
< 어떻게 자유롭게 살 것인가? >
- 삶의 속박으로 힘겨워하는 그대에게 -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I. 본문해설
명랑한 삶을 살려면 자유인(自由人)이 되어야 한다. 자유로운 사람이 모두 명랑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롭지 않고는 명랑하게 살 수 없다.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면 아무리 많은 재물(財物)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여야 한다. 우리가 자유롭지 않으면 예술작품(藝術作品)으로서의 삶을 살 수 없다.
II. 어떻게 자유롭게 살 것인가?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당신은 이 세상(世上)에 속하지 않으셨으며, 아버지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으며, 하나님이 항상 당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 8:30).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자유가 없다면 자기 인생을 살 수 없다. 그러면 자유(自由)란 무엇인가?
“자유(自由)란 타인에게 속박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다.”
A. 우리를 속박하는 것
인간이 유한(有限)한 존재라는 사실 자체가 속박이다. 한계가 있다는 그 자체가 그것을 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한하다. 육체(肉體)로는 드넓은 우주에서 한 점 같은 존재로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묶여야 하고,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늙고 사멸한다.
또한 정신(精神)으로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속박 아래 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는 오직 신(神)에게만 있다. 따라서 자유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자유로 향한다.
육체의 속박은 물질과 기술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의 속박은 그것들로써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를 속박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1. 우리 밖에서
첫째로, 우리 밖에 있는 속박(束縛)이다. 먼저 우리 바깥에서 속박하는 것들이 있다. 사회의 도덕과 관습으로부터 타인의 평가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이 우리를 속박한다.
도덕(道德)이나 관습에는 때로는 거기에 영원하고 불변하는 가치를 가진 것들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도덕의 빛이다.
그러나 그 외 그것들의 대부분은 그 시대의 문화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도덕과 관습(慣習)들은 인간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이바지해야 하는데, 때로는 그것들이 주는 속박 때문에 인간은 자유를 잃어버리고 더 불행(不幸)해지기도 한다.
* 유행이나 타인의 평가가 주는 속박
특히 현대인들은 타인(他人)의 평가를 중시 여긴다. 따라서 유행이 가지고 있는 힘도 강해진다. 이것은 바로 자기 인생을 작품처럼 살지 않고 상품(商品)처럼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지(大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인생의 의미는 하늘과 맞닿아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물질주의(物質主義)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정신은 감각적 사물에 매여 있기 때문에 자기를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가 없다.
자유를 그리워하지만 참으로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현대인에게는 꿈꾸는 자유와 현실의 속박 사이에서 살아있는 것 자체가 번뇌(煩惱)가 된다. 이것들은 밖으로부터의 속박이다.
2. 우리 안에서
둘째로, 우리 안에 있는 속박이다. 이것은 죄(罪)와 본성의 속박이다.
죄는 하나님 대신 자기(self)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도 참된 자아가 아니라, 이기적이고 병리적인 자아(自我)를 사랑하는 것이다. 죄는 우리 본성 안에서 역사한다.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이 필요하지만 악을 행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선을 행하도록 교육(敎育)하지 않고 내버려둔 아이가 선하고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지 않은가?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5)
인간은 비할 데 없이 위대(偉大)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천한 존재다.
인간의 위대함과 비천(卑賤)함은 함께 가르쳐져야 한다. 둘 중 하나만 가르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위대한 줄 알지 못하면 자신이 비천하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며, 비천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다시 위대해지는 길을 찾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 말씀하셨다. 그들이 주님 말씀 안에 거하면 참으로 제자가 되고 진리(眞理)를 알게 될 것인데, 그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이다(요 8:31-32).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아직 제자가 되지 않은 것처럼, 또한 그들이 아직 자유롭게 되지 못한 것처럼 말씀하신다. 무엇 때문일까?
이는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自由)롭게 되는 것이 어느 한 순간에 다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롬 7:23-24)
이는 진리를 아는 것도, 자유로워지는 것도 일생(一生) 동안 이뤄져야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병리적인 자아와 지속적으로 싸워야함을 보여준다.
그런 과정 속에서 진리를 알고, 자유를 얻음으로써 존귀(尊貴)한 인간으로서 자기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예수 믿고 구원을 얻는 순간 우리는 이중(二重)의 자유를 얻게 된다. 신분과 상태의 자유가 그것이다.
신분(身分)으로는,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상태(狀態)로는 마음과 영혼의 자유를 얻게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과 영혼의 상태는 그렇게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2-13)
구원을 통해 얻은 자유는 끊임없이 성화(聖化)의 과정을 통해 거룩해져야 한다. 그럼으로써만 마음과 영혼은 자유를 누리게 된다.
B. 자유롭게 사는 길
1. 부당한 속박을 거부함
첫째로, 부당한 속박(束縛)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 사회는 도덕과 관습에 의해 지탱된다. 이것은 개인의 창의성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참으로 그것이 올바른 도덕(道德)이라면 그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인간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로서 수많은 이해관계 속에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도 도덕과 관습, 양심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에 무조건적인 지배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 사회의 법과 도덕들 중에는 얼마든지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 오던 도덕(道德)과 관습에 대해 “왜 그래야 하는가?”라고 질문할 동기를 가져야 한다.
정신적으로 성장하면서, 인간은 그것들을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결코 생각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어떤 것도 하나님이 주신 개인의 자유보다 더 뛰어난 가치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도덕과 사회관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권위(權威)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코 자유로운 주체로서 살 수 없다.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아갈 수 없다.
이때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기준은 성경(聖經)이다. 성경이 명백히 말하는 도덕에 대해서는 그 유용성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심정의 이해와 이성의 숙고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도덕(道德)과 관습에 대해서는 그 권위의 근거를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생각 없이 복종하지 말아야 한다.
정당한 권위 없이 부당하게 자유(自由)를 빼앗거나 억압하는 것들에 대해 항거하지 않으면 결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의 근거(根據)를 의심하고 회의하는 것은 단지 항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함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인으로 살도록 주신 정신(精神)이다.
* 노예와 자유정신의 제거
우리는 인간이다. 하나님의 형상(形狀)을 따라 창조된 존귀한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인격적으로 알고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두려움과 공포에 벌벌 떠는 노예정신이나 세상밖에 모르는 세속정신으로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것은 속박에 굴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도덕과 사회관습에 아첨하며 살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조차도 인격적이고 주체적이길 바라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信仰)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자기 인생과 사회에 대해 숙고하는 이성을 가지고, 명령하는 도덕과 관습이 가진 권위의 근거에 대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도덕과 관습을 부정하고 해체(解體)하는 일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새로운 도덕과 관습을 건설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주체로서 예술작품 같은 자신의 인생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2. 현실을 긍정함
둘째로, 현실(現實)을 긍정해야 한다. 주어진 현실을 무조건 부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 삶은 이상(理想)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매달리는 것이 된다.
아무리 높은 이상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실현 가능성이 없거나 현실 안에서 그것을 추구하는 구체적인 삶(life)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상일 뿐이다.
잊지 말라. 당신은 하늘과 대지 사이에 있는 존재(存在)다. 두 발로 대지를 밟은 채, 그 위에 펼쳐지는 당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술작품은 사물(事物)로 있으나 그것을 통해 작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듯이 삶은 대지 위에서 펼쳐지지만 의미(意味)는 하늘로부터 주어진다.
먼저 당신의 현실을 직시하라. 행운과 불행, 그것이 원해서 있든지 원치 않는데도 있든지 당신의 현실을 인정하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아니 사랑하기까지 하라. 그리고 바로 거기를 당신 삶의 출발점(出發點)으로 삼으라.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 지금 당신의 현실이 아무리 나빠도 당신의 인생은 계속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解析)을 가지라. 지금 당신의 현실에 있는 모든 것은 필요해서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필요치 않아서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믿음을 가지라. 당신의 삶의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당신 삶의 변화는 시작된다. 그보다 나은 방법이 있겠는가? 우리가 살아있는 한 살아가야 하지 않는가?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최악(最惡)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긍정(肯定)하라. 거기서 죽으려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당신이 인생을 살아가려면 지금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막연한 세상을 향해 앙심(怏心)을 품거나 구체적으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것은 결코 당신의 삶을 나아지게 못한다.
그러면 당신에게 남는 것은 불만과 원한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절망(絶望)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위한 선택지가 아니다.
3. 의지를 소유함
셋째로, 의지(意志)를 가지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살고 싶다는 욕구(欲求)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생존(生存)이나 자기만족을 위한 욕심이 아니다. 스스로 보다 의미 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고자 하는 욕구다.
* “그 돈이 있으면 나는 안 죽겠다”
감각(感覺)의 강물에 빠진 채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인생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한 인간의 사유의 깊이는 인간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를 공감하는 것이다. 끝없는 인간 고독(孤獨)의 깊이를 공감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고독의 심연(深淵)을 보고 절망을 느낀 사람이다.
거기서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안 사람이며, 대지에서 발견한 허무를 하늘의 의미(意味)로 극복한 사람이다.
* 파스칼의『팡세』의 깊이
그런 사람의 인생에 대한 가르침은 결코 쉽게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자신의 피로 쓰여진 작품이다.
“펜으로 쓰여진 글은 피로 읽혀질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 그 운명같이 주어진 허무(虛無)와 고독을 이겨낼 힘이 없다는 것이다. 현실을 살아낼 힘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직 육체의 욕망(慾望)에 들까불리며 오락이나 쾌락으로 현실을 회피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허무와 고독 위에 더 무거운 욕정의 죄를 지고 있다. 어찌 인생이 가볍게 되길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이미 자유로운 주체(主體)로서 자기 인생이라는 작품을 만들기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메뚜기와 같이 살다가 죽음의 불길에 연기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괴롭거나 허무할 것이며 쾌락(快樂)의 순간이 끝나고 나면 더 깊은 어둠 속에 혼자 버려져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또 내가 서 있는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한 채 곤충 같이 살아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知慧)가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은혜(恩惠)를 주시는 것이다.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다”
이 일은 진리(眞理)를 앎으로써 이루어진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 있다. 자유가 있다.
은혜는 은혜를 속박(束縛)하는 부당한 도덕과 관습에 맞설 용기와 함께, 보다 온전한 도덕과 관습을 세워갈 힘을 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감동과 함께 주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 때 주어진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요 8:32).
여기서 “안다”는 것은 한 순간에 파악된 이해(理解)나 단순한 지적인 동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진리에 대한 인격적 체화(體化)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우리 마음과 인격이 진리의 분신(分身)이 되어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며 살아있는 말씀의 경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보다 크신 이가 없으니 그분 자신이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진리는 우리로 하려금 자기가 누군지를 깨닫게 하고 참으로 자유로운 주체로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 마른 뼈와 같은 자들을 다시 살리신다.
진리(眞理)를 알면 새 힘이 생긴다. 은혜는 능력(能力)이다.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쾌락으로 도망치다가 더 깊은 죄의 늪에 빠진 사람들에게도, 돌이켜 다시 자기 인생을 살아갈 힘을 주신다.
세상에 대한 헛된 기대를 버리게 하고 대지(大地)에 충실하며 살 수 있도록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신다.
대지는 우리로 하여금 허무(虛無)에서 하늘을 바라보게 해주지만, 하늘에서 발견한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대지로 내려오게 해준다. 그리하여 대지의 삶에 충실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해준다.
그때 우리는 운명(運命)의 굴레에 매인 노예가 아니라, 그것을 힘차게 끊어버리고 스스로 자기 인생을 살게 된다.
죄의 멍에를 지고 혹사당하던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나서 마치 어린 아이가 놀이하듯이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가 되게 한다.
그런 사람에게 대지는 어떤 속박(束縛)의 운명도 지배할 수 없는 곳이다. 그를 구속하는 운명 따위는 없다. 오직 예수와 하나 되어 살아가는 자유로운 존재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word)을 온 인격으로 경험하며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된다. 그는 사람에게 사랑 받기를 구하는 대신 사랑하기를 갈망한다.
그는 대지의 삶이 불완전하고 유한함을 인정하고 이해한다. 그에게 그러한 대지는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된다.
대지에 충실하기 때문에 더욱 하늘 소망(所望)으로 충만하게 되고, 하늘 소망 때문에 대지 위의 삶을 소중히 여긴다.
애착하는 것 없이 대지를 사랑하며, 소망하는 것 때문에 하늘을 바란다. 심지어 자신의 죽음(death)도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자기의 죽음조차 이어지는 우주적 생성(生成) 과정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인이며 어제의 자기(自己)를 극복한 사람이다. 또 내일은 오늘의 자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인간이다.
그런 사람은 살아서는 하나님을 보여주며 죽어서는 참 인간을 보여준다.
III. 적용과 결론
아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무한 대지에 터무니없는 기대(期待)를 가지고 살다가 절망에 이르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복(福)된 하늘에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자기 인생의 근거도 모른 채 살다가 허무하게 죽어 가는가?
우리는 결코 그렇게 살도록 창조(創造)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되었다.
이것이 오늘도 우리가 인생(人生)의 의미를 묻는 이유다. 하나님께 인생을 살아갈 은혜(恩惠)를 간구하는 이유다.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6(끝) 2022. 3. 20 주일낮예배
< 참 자유를 누리는 길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I. 본문해설
삶의 명랑함은 자유롭고 만족한 생활에서 온다. 하나님 없는 명랑함은 자유를 찾다가 속박으로 떨어진다.
속박 받는 인간의 삶은 대부분 자기 욕심을 따라 자유(自由)를 추구하다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精髓)를 맛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참된 자유를 누리는 길은 무엇인가?
II. 참 자유를 누리는 길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갈라디아교회는 두 가지 이단적 사상들에 의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율법주의(律法主義)의 도전이었다. 그 추종자들은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한편으로는 율법폐기론(Anomism)이었다. 그 추종자들은 우리가 구원 받아서 자유하게 되었으니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두 가르침 모두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것들 어느 것도 참 자유에 이르는 길이 아니었다.
참된 자유(自由)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Christ) 안에 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는 은혜 안에서 사는 데 있다.
그 은혜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하나 된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다.
A. 그리스도와 함께
첫째로, 그것은 그리스도(Christ)와 함께하는 자유다. 이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신자는 거듭나는 순간, 영적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敎會)의 지체가 되며, 삼위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신자의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연합이다. 이로써 신자는 성령(聖靈) 안에서 영원히 그리스도와 한몸으로 살게 된다.
영적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히고 또한 그의 부활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상)
1. 십자가에 못 박힘
바울은 자기가 예수와 함께 죽은 경험을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συνεσταύρωμαι)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갈 2:20상)
이는 현재완료의 시제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 왔나니…” 사건(事件)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것이 주는 영향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구원 받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데는 두 측면이 있다. 죽음(death)과 부활이다. 즉, 하나는 그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분의 부활(復活)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나눠지지 않는다. 신자는 구원 받을 때 이 둘을 함께 경험한다. 이 십자가 부활의 비밀을 경험하지 않고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자유를 빼앗아가는 속박은 죄(罪) 때문에 생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罪) 때문이다. 우리의 죄를 멸하심으로써 영원한 자유(自由)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우리가 지은 죄(罪)에 대한 대가를 율법에 따라 지불하였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진실로 믿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천 년 전, 예수의 죽음(death)이 나의 마음 안에서 실재화(實在化)된다. 그 죽음과 함께 죄된 자아도 함께 죽는 것을 경험한다.
모든 죄를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의미를 따라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생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그의 십자가 죽으심에 참여한다.
2. 다시 살아남
이처럼 십자가에서 죽는 경험을 하고 나면,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부활(復活) 생명의 경험이다.
이천 년 전, 예수를 죽음에서 살린 생명의 능력이 내 마음 안에서 실재화된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해 살 수 있는 자유가 생긴다.
이전에는 죄에 대해서 살아 있었다. 그리하여 자기 욕심을 따라 살았다.
이것이 속박이었다. 자기 욕심(慾心)을 따라 살 때는 자유로운 것 같았으나 그것은 기껏해야 일시적인 육체의 만족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 만족이 끝나면 마음에는 곧 더 큰 욕망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써 마음은 더 큰 욕망의 속박(束縛)을 받아 자유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영혼과 마음은 죄를 향하여 죽게 된다. 또한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을 경험한다. 신자는 이런 방식으로 자유롭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love)의 힘이며 영혼의 권세다.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생명의 성령의 능력을 주신다.
우리를 죄와 무능, 비참한 속박에서 건져내사 자유인으로 살게 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모든 불쌍한 자들을 섬기게 한다. 또한 십자가에 죽으실 자기의 운명(運命)조차 사랑하셨던 예수처럼 자유인으로 살게 하신다.
이것이 보혈(寶血)의 능력이다. 이로써 자신이 예수 안에, 예수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며 살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유다. 마음의 죄가 죽고 은혜는 충만하게 역사하는 사람이 자유(自由)를 누린다.
성령 충만을 통해서 부어주시는 예수의 생명은 모든 죄의 욕심과 영적 죽음을 몰아낸다. 충만한 생명은 사랑이다.
신자의 삶에서 예수(Jesus)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이런 경험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된다.
매순간 예수의 죽음에 참여하고, 또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라. 거기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B. 믿음으로 살아감
둘째로, 그것은 믿음(faith)으로 살아가는 자유다.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연합의 경험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현재적 경험이다.
이것은 병리적 자아(自我)를 사랑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자아와 예수를 사랑하려고 하는 건강한 자아와의 끊임없는 싸움 속에서 이루어진다.
경건의 비밀은 이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자신이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1. 육체로 삶
“이제 내가 육체(肉體) 가운데 사는 것은…”. 이것은 그리스도(Christ)와 함께 죽고 다시 살리심을 얻은 신자의 현실을 보여준다.
비록 구원 받았으나 그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다. 이 육체는 죄(罪)와 결별할 수 없는 인간의 육체다.
그것은 죄성으로 물들어 있고 악의 유혹을 받아 굴복할 수 있는 육체다.
이것은 신령한 것보다는 감각적인 것들에 이끌리고 죄의 유혹에 굴복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육체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모순적 현실이다.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고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나 여전히 죄가 남아 있다.
그래서 한순간도 은혜 없이 살 수 없다. 매일 죄와 싸워 이겨야 한다.
신자는 세상에 있는 동안 옛사람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새 사람으로 옛사람을 이기는 반복적 승리를 통해서만 자유를 누리게 된다.
2. 믿음의 삶
하나님은 이러한 모순적 현실(現實) 속에서 신자가 참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을 주셨다.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하)
아무리 우리 안에 남은 죄(罪)가 기승을 부리고 세상의 유혹이 파도처럼 밀려와도 믿음으로 살면 이것들을 능히 이기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세상(世上)에 사는 동안 그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나, 결코 노예(奴隸)처럼 속박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반드시 하늘의 능력(能力)으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자라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살지 아니하면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참된 자유(自由)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 안에서 살아가는 데 있다. 그 실제적인 연합은 우리의 사랑(love)에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신자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계속해서 자유롭게 사는 길이다.
그러면 자유롭기 위해서는 무슨 믿음(faith)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a. 하나님 사랑을 믿음
그것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하)
비록 내가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지만 자유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希望)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나타난 사랑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신자는 이 사랑에 붙잡혀 살아야 한다. 우리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무죄(無罪)한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죄에 사로잡힌 채 살지 않을 수는 있다.
만약 죄에 사로잡혀 산다면, 나는 자유로울 수도 없고 주체적으로 살 수도 없다. 더욱이 나만의 인생을 작품(作品)처럼 살아갈 수 없다.
참 자유는 하나님의 사랑(love)을 믿는 신앙 안에 있다. 신자는 이 사랑을 현재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
b. 예수의 희생을 믿음
그것은 또한 나를 위한 예수의 희생(犧牲)에 대한 믿음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
그의 희생의 크기를 보면서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자기 인생을 소중히 여기며 잘 살고 싶어진다.
우리를 구원(救援)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다. 아들을 친히 보내사 우리를 위해 대신 죽게 하신 사랑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생명(生命)이신 그분이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 생명으로써 자유를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세상에서 많은 시련과 고통을 당할 때마다, 그 고난(苦難)을 예수의 십자가 고난에 투사하라.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다시 살라!
이로써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힘이 죄의 속박보다 뛰어남을 깨닫는다.
이 모든 일이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순종(順從)할 때 일어난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의 옛 자아(自我)이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면서 자기는 깨어지고 예수를 닮아가게 된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신자는 그 믿음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
우리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죽으신 예수 보혈의 능력을 믿으라. 모든 죄에서 나를 건져 자유를 주시는 것을 믿는 신앙 안에서 살라!
III. 적용과 결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실 때 우리는 온전한 자유(自由)를 누린다. 그때 비소로 나는 내 인생의 진정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경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완전한 자유를 누린다.
삶과 죽음, 불행과 행복을 넘어서서 자유로운 주체(主體)로서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떠나므로 잃어버린 자유를 그리스도께 돌아와 다시 찾으라. 자기의 인생을 자유인으로 살라.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2(2022.02.20._주일오전(젊은이 버전-긴 설교))
1. 어떤 명랑함입니까?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 12:16-31)
I. 본문해설
인생은 기쁨과 슬픔의 계곡 사이에 걸쳐진 밧줄입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자주 우리의 희망을 배신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현실은 우리에게 상처를 줍니다. 불신 이웃을 향한 최고의 전도는 예수를 믿는 여러분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잃어버린 두 개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지함과 명랑(明朗)함입니다. 우리가 인생이 심각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했던 우리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이니, 심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일체의 진지함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올바로 예수를 믿으면 명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명랑하다는 것은 생각과 생활이 비관적이지 않고, 밝고 환하다는 뜻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고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았기 때문에 이런 명랑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II. 어떤 명랑함입니까?
제가 이 설교를 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지하지도 않고 명랑하지도 않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입니다. 진지하지 않다면 명랑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그렇지도 못합니다. 경건하지도 않으면서 매우 우울합니다. 수도사처럼 살아가면서 행복하지도 않고, 경건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은 묻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좀 되십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명랑함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될 것이 어떤 종류의, 무엇으로 말미암는 명랑함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A. 하나님 없는 명랑함
첫째는 하나님 없는 명랑함입니다. 본문에는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의 태도는 하나님 없는 명랑함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보여줍니다. 농사를 짓는 그는 어느 해에 뜻밖의 수확을거두었습니다. 풍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고민이 생겼습니다.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는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새로운 희망을 주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8-19). 이 부자는 천성적으로 아주 밝고 낙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새롭게 창고를 더 짓고, 늘어난 소출을 쌓아 두기로 했습니다. 고민은 해결되었고, 그는 더 명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결코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는 도피적인 명랑함이었습니다.
1. 세상을 전부로 여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는 먼저 세상을 전부로 여겼습니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상과 보이는 세상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의 생각은 육신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세속주의를 잘 보여주는 전형입니다. 자기 몸의 진정한 주인이 영혼이라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보이는 세계와 감각하는 육체가 그에게는 전부였기 때문에 많은 소출을 거두었을 때 기껏 생각해낸 것은 창고를 헐고 더 크게 지은 다음 그 곡식으로 물건을 사다가 바꿔서 가득 쌓아 놓고 매일 잔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세계관을 가진 그에게 최고의 행복은 최대의 쾌락이었습니다. 풍족한 재물로 매일 잔치하는 꿈을 꾸며 행복해 하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9). 이 부자의 고백은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눅 12:19). 얼마나 고달팠으면 그는 평안히 쉬는 것이 숙제였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는 즐거워하는 것이 숙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이 매일 잔치를 연다고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모든 세계는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놀랍게 짝을 이루면서 이 세계는 저 세계에 대한 설명을 주고, 보이지 않는 저 세계는 보이는 세계를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인데 놀랍게 짝을 이루면서 서로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현실과 의미를 발견하고, 의미를 따라 현실을 살고, 현실 속에서 의미를 찾는 사유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대지와 하늘,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감각과 예지, 현실과 의미, 이 모든 것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 있으나 떼어놓을 수 없이 서로 연관을 이르며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의미의 하늘과 현실의 대지 사이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둘 중에 하나를 무시할 수 없고, 또 둘 중에 하나만 취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하늘로부터 의미를 물으며 땅으로부터 현실을 헤쳐 나가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삶을 예술처럼 살아가도록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명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는 세계와 자신의 육신을 전부로 여겼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영혼도 먹고, 마시고, 즐겁고, 잔치하는 것으로 영원히 쉼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극단적인 물질주의자였고, 극단적인 세속주의자였습니다. 명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없는 명랑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생각이 없었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일체의 진지함이 없는 너무나 가벼운 명랑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명랑함 뒤에는 언제나 드러나지 않는 우울함이 따라다니게 마련입니다. 한 세계를 가지고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 중에도 예수 믿기 전에 술을 많이 드시던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대개 신나는 술자리는 아침이나 점심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밤에 이루어집니다. 은은한 불빛 아래서 좋은 사람들과 모여 앉아서 술을 마십니다.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잠시 후에는 술이 술을 부르고, 다음에는 술이 사람을 불러서 마셔버립니다. 그리고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흥청망청 술을 먹어 댑니다. 그때 그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것은 낮의 즐거움, 일하는 기쁨에 비할 데가 없습니다. 환락의 즐거움이고, 유흥의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잠이 듭니다. 그리고 새벽에 눈을 떠보니 친구들은 다 떠나갔습니다. 어느 여관방에 혼자 옷도 못 벗고 드러누워 있고, 뒤에는 술병과 술주전자들이 돌아다니고, 여기저기 휴지가 흩어져 있는 곳에서 홀로 눈을 뜹니다. 머리는 터지는 것 같고, 온몸이 쑤시고, 목은 조갈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때 터질 듯한 두통 속에서 눈을 뜬 현실의 쓸쓸함과 외로움과 우울함은 그 전날 밤의 명랑함에 비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그렇게 아침에 술 깨는 시간에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사람이 아니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날 밤도 그 사실을 잊고 다시 또 옛날의 즐거움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하나님 없는 명랑함에는 언제나 드러나지 않는 우울이 따라다닙니다. 그런 명랑함은 결국 회피하는 명랑함이지 현실을 직면하게 하는 명랑함이 아닙니다. 한 세계밖에 모르고 그 세계를 전부로 여기기 때문에 어떠한 설명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세상을 전부로 여겼기 때문에 명랑했으나 그 명랑은 결국 도피적인 명랑함이었고, 일시적인 명랑함이었지, 진정으로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명랑함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2. 죽음을 생각하지 않음
더욱이 그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 소출은 곡식들의 죽음이었습니다. 씨 뿌리고, 자라고, 꽃 피우고, 열매를 맺고, 무르익습니다. 흐드러지게 무르익고 나면 가을에 농부들은 낫을 가지고 가서 그 곡식을 베어 냅니다. 결국 곡식으로서의 일생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추수되어 온 곡식들은 살아 있는 곡식의 죽음의 끝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곡식단을 받아 들면서 자신도 언젠가는 추수될 때가 있고, 자신의 인생도 막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몰랐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을 아는 것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에 끊임없는 도피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 그래서 그는 날마다 현실이 잔칫날이기를 원했고, 그 잔치 속에서 현실을 잊으며 명랑함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돈을 벌고 농사를 짓는 모든 일이 바로 이러한 명랑함을 위해서 쓰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적인 기쁨을 누리는 데서 오는 명랑함이었습니다. 그건 항구적인 것도 아니었고 영혼의 근본적인 치유책이 되지 못하는 명랑함이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큰 배가 지나갑니다. 그 배가 '쿵'하고 암초에 걸려서 결국 배가 찢어지고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워낙 크니까 배는 천천히 기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짐들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배는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그때 평생을 너무 신나게 춤추는 것을 취미로 여기고 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갑판에 아주 경쾌한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지금 기울어져 가는 배 위에 있다는 위험을 아는데, 몸은 그 노래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기울어져 가는 갑판에서 그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고 있는 것입니다. 춤을 추는 동안 배가 기울어 가고 있고, 자신은 침몰하는 배와 함께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회피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배와 함께 가라앉을 운명에 눈을 감은 채 오로지 몸으로만 반응을 하면서 춤을 추고 있는 그 사람과 같은 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인의 삶입니다.
재주꾼이 서커스를 합니다. 그리고 밧줄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는 떨어져도 안 죽을 수 있는 넓은 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몸에 착 붙는 옷을 입고, 그 밧줄 위를 걸어갑니다. 이것은 연극입니다. 떨어져도 밑에 있는 그물이 받쳐주기 때문에 생명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확신을 갖지 않으면 연기를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바로 죽음의 심연 위에서 밧줄을 타는 것입니다. 앞으로 가는 것도 위험하고, 뒤로 돌아서는 것도 위험하고, 제자리에 서있는 것은 더 위험합니다. 밧줄에 올라간 모든 태어난 사람은 떨어질 때가 있는데, 그 밑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죽음이라는 심연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직면하는 것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에 이 사람은 소비가 주는 명랑함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들이 오늘날 중산층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인 소비의 수준이 17세기 왕족들이나 누릴 수 있는 정도의 소비생활을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사실 소비가 모든 사람에게 대중화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물건은 대부분 수공업으로 만들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귀족들이나 왕족들은 돈이 많기 때문에 어떤 생각나는 물건 있으면 장인에게 주문을 해서, 돈을 많이 주고 만들어서, 그것을 자기가 누릴 수 있었지만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그걸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비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사람들이었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생산에서 의미를 찾았습니다. 그런 생산에 종사하는 것을 자기의 업(業)으로 삼은 것입니다.
직업(職業)이라고 할 때 업(業)은 '하늘이 내린 일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농사를 짓는 게 자신의 업(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이 주신 자기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보람을 농사를 지어서 잘 가꾸고, 그것을 생산해내는 데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그 자체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이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그 사람이 농사를 지어서 물론 그걸 팔아서 돈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비할 수 있는 재화가 그렇게 많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저희 어렸을 때만 해도 아버님이 사냥을 가시면 돈을 안 가져가고 성냥, 양초, 양말, 이런 것들을 가지고 가십니다. 왜 그러냐면 산골에서는 돈이 통용이 안 됩니다. 그걸 들고 몇 십리 길을 걸어서 장날이나 가야지 쓸 수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는 장날도 그렇게 매번 가는 장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돈에 대한 욕심이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사를 잘 짓고 거기에서 보람을 느끼고 사는 것입니다. 대장장이가 물건을 만들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수의 물건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일주일 내내 일을 해도 정해진 양 밖에 물건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물건을 만들어서 농산물과 바꾸어 먹고, 구두와 바꾸고, 의복과 바꾸면서 물물교환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던 때는 사실 인간의 행복이 소비에 있다는 말을 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생산에서 의미를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업을 자기가 소명으로 느꼈는데, 아버지도 그렇게 느끼고, 할아버지도 느껴서 그 업을 계속 이어 올 때, 그것을 가업(家業)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직업(職業)이라는 말의 직(職)라는 것은 스테이터스(Status)입니다. 사회적인 신분입니다. 업(業)은 하늘이 내린 일입니다. 직(職)은 사회에서 준 것이고, 업(業)은 하늘이 준 것입니다. 그 둘 사이에 조화를 이루면서 사는 것이 직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산업혁명 전까지는 삶의 의미를 생산에서 찾았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보는 중요한 시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얼마나 소비하느냐 보다는 내가 어떤 것을 생산하느냐, 그리고 인생의 의미도 무엇을 자꾸 소비하는 데에서 찾는 게 아니라 무엇을 자꾸 만들어 내는 데서 (찾았습니다.) 그게 꼭 농산물이나 칼이나 낫이나 호미,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뭔가 예술작품처럼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뭔가 남이 못할 일들을 해내면서 살아가는 거기에서 인생의 의미를 많이 찾았던 것입니다. 이게 건강한 삶이었습니다.
산업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어마어마 물건들이 생산되기 시작합니다. 어마어마하게 생산이 되고, 생산된 것들이 구매가 되고, 판매가 되면서 자본이 형성되고, 자본이 세계를 움직이는 소위 자본주의 사회에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특징이 생겼습니까? 이제는 그렇게 업으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열심히 수공업으로 가방 하나를 만들어 갖고 갔는데, 시장에 나가보면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것이 훨씬 싸고, 훨씬 튼튼하고, 훨씬 품질이 좋습니다. 사람들이 내가 만든 것에 별로 귀 기울여 주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그 공장에서 나온 물건이 팔리는 가격에 팔아서는 원가도 안 나옵니다. 사람들이 그런 생산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는 일이 점점 힘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소비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소비를 합니다. 여러분, 백화점 풍경을 보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주면 갖겠지만, 가방 하나에 비싼 것은 1억 5천만 원씩 하고, 보통 것은 천몇백만 원씩 가는 가방을 사기 위해서, 다 잘 사는 사람들인데, 새벽에 노숙자 도시락 받는 사람들처럼 백화점에 쭉 둘러서서 새벽부터 파카를 입고 덜덜 떨면서 기다리는 것을 보면 기이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아무도 그 사람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런 걸 사는 사람들을 질타하거나 비난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사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욕을 하겠습니까? 자기 마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가 갖고 싶으면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심리를 한번 들여다보자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에 3천만 원, 4천만 원 혹은 7천만 원, 8천만 원씩 하는 가방을 사고 심지어는 그것을 하루에 몇십만 원에 빌려 주는 데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들고 있을 때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우린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편리성에서라고 말한다면 별로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현대의 소비 개념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소비의 개념은 어떤 생산 활동을 위해서 그것을 소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뭘 먹어도 이것을 먹고 힘을 내서 내일 농사를 지으러 가야 된다.' 그리고 '내가 더 좋은 구두를 만들기 위해서 진짜 좋은 칼을 사야 된다.' 이런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그런 좋은 명품 가방을 가지고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럴까? 그래서 어느 사회학자가 말하기를 '현대인이 소비할 때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소비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좋은 명품 가방을 들 때 가방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가방을 들 수 있는 사람들의 그룹에 내가 들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고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많은 외제 차들이 다니고 있습니다. 지금 많이 나아졌지만 우리나라 차가 신통치 않을 때 BMW, 벤츠, 이런 차들이 막 돌아다니면 젊은 사람들이 너무나 타고 싶어 합니다. 왜 그 차가 타고 싶으냐 하면, 그런 차가 국산차보다 너무 좋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의미를 소비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를 가든지 부자들이 타는 차를 내가 탔으니, 내가 이것을 소비하는 동안에는 나도 이 세계에서 부자들의 그룹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소비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심리가 현대인에게 다가오는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허무주의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은 엄청난 허무주의입니다. 니체는 1844년생이고, 지금이 2022년이니까 거꾸로 계산을 해보면 지금으로 140여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나타나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 사람이 먼저 말한 건 아니고 이미 헤겔이 얘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고 발칵 뒤집혔습니다. 지금은 신이 죽었다고 얘기하면 아무도 놀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이 있는 것에 대해서 그 당시 사람은 관심이 있었는데 지금은 관심도 없습니다. 타살인지 자살인지 그런 것도 관심 없습니다.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이 허무한 것입니다. 모든 기존의 가치관들을 다 부서뜨리고 파괴해 버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허무한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찾아낸 것이 소비입니다. 매일매일 소비하면서 의미를 소비합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우리의 인생에 도움을 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소비하는 동안에만 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가방을 맨 처음에 사서 들고, 메고 백화점을 나오는 동안에는 세계에 있는 명품을 소비하는 사람의 그룹 속에 자기가 있다는 걸 느낍니다. 그러나 집에 들어가서 하고 사는 집안의 꼴을 보면 다른 모든 것들은 평범 이하의 삶입니다. 그 다음에 또 다른 의미를 찾기 위해서 어떤 것을 다시 또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는 소비 생활을 해야 될 것인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끊임없이 노동을 해야 됩니다. 돈이 없으면 소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것을 소비하는 나의 감각, 그것을 소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동하는 나만 있고, 그 사이에 주체인 내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없이 세상의 물질로 명랑함을 누리며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끝입니다. 곱고 아름답던 배우가 10년, 20년 지나고 보면 '저렇게 늙었을까'라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허무하게 느껴지는데, 본인은 거울을 보며 얼마나 허무하게 느끼겠습니까? 잘나가던 어느 스타가 거울을 보면서 눈물 흘린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기가 언제 이렇게 늙었을까?' 슬프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없는 명랑함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우린 그 이상의 무엇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금욕주의, 극단적인 방탕주의, 모두 성경적인 견해가 아닙니다. 어떻게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인생을 살면서 의미를 찾는 하늘에 대한 감각이 매몰되지 않고, 의미에 도취한 나머지 현실에 감각이 없는 사람도 되지 않는 중용의 길이 무엇인가? 성경이 우리에게 얘기하는 진정한 낙관적인 삶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가? 여기에 답을 갖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여러분에게 주는 지혜이고 유익인 것입니다.
B. 하나님 있는 명랑함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 있는 명랑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공교롭게 이 비유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명한 염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공중 나는 새, 그리고 들에 핀 백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여기서는 까마귀로 나오지만 어쨌든 염려에 관한 것입니다. 세상 백성들은 그렇기 때문에 먹고, 입고, 마실 것에 대해서 염려합니다. 소비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은 그냥 기본적인 인간이 누릴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먹을 것,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입을 것,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마실 것에 대해서 염려합니다. 자기 능력이 거기에 미치지 못할 때 끊임없이 우울해지게 됩니다. 또 능력이 있어서 그것을 충분히 조달할 수 있을 때, 마치 아주 갈증이 나는 목마른 뜨거운 여름날에 차가운 설탕물을 마신 것처럼 그는 또 다른 목마름에 타는 목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염려하지 않고 명랑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눅 12:24).
1. 하나님을 신뢰함
결국 하나님 있으면서, 하나님 때문에 명랑하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땅에 사셨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먹고, 입고, 마실 것 때문에 우울해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아주 많은 재물을 부지런히 쌓아두셨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셨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탐욕이 없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까마귀도 먹이고, 들풀도 입히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잘 돌보시겠냐는 것이 당신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살이에 무관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생활할 때는 재정을 담당하는 제자를 지목하셔서 돈 통을 관리하게 하실 정도로 용의주도하셨습니다.
믿음은 삶에 명랑함을 줍니다. 만약 명랑하지 않다면 그것은 예수를 잘못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세상 현실 너머에 하늘 소망이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신앙생활은 성령 안에서 천국을 앞당겨서 지금 누리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나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내 인생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신앙의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풍랑이 일어서 내 인생의 배가 흔들리는 때는 있지만 결코 어디로 떠내려가거나 좌초하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의 닻을 그리스도께 내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실수가 없으십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초월적인 신앙 안에서 낙관적으로 살아갑니다.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비극과 고통 속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일체의 낙관으로 인생사를 바라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든 비관적인 사유는 하늘 은혜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때 무신론적인 비관은 유신론적인 낙관으로 바뀌게 되고, 무신론적인 낙관은 유신론적인 낙관으로 바뀌게 됩니다. 결국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낙관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 때문에 낙관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하나님 없는 비관과 명랑함은 사라지고 하나님 있는 낙관과 명랑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유익인 것입니다. 이런 낙관과 소망을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느끼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가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 소명으로 살아감
그러면서 우리는 소명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을 때 잘되면 교만했고, 잘 안될 때는 낙심했습니다. 결국 잘된 것도 우리의 인생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고, 잘 안된 것도 우리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우리 육체의 번영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요동치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았습니다. 정함이 없는 마음에 어찌 행복이 깃들겠으며, 모든 것을 누린다고 한들 마음에 안정이 없는데 어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기울어져 가는 갑판 위에 들리는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어찌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삶의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명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삶이 우리를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살기에 적합한 삶입니까?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일에 대한 염려로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비결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낙관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때만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고, 믿음으로 살 때만 우리가 이런 명랑함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명랑한 삶은 하나님 나라의 소명을 따라 살기에 아주 적합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일체의 명랑함으로 자신의 인생에 한 가지 목적에 집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 12:31).
우리가 태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꼭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온 인류가 살았던 어떤 사람의 인생과 같은 인생이 아닙니다. 이후에 살게 될 어떤 사람들도 내 삶을 반복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나는 독특한 나 자신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연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남의 인생과 바꿀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고, 그 앞에서 엄숙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체의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서 아무도 살아 주지 않는 자신의 독특한 인생을 예술 작품처럼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일생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과거의 일들도 우리가 후회해서는 안 됩니다. 일어난 모든 것들은 결국 오늘날 내가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과거를 재해석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오늘을 긍정적으로 살 수 있고, 명랑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시간에 마음을 뺏기는 동안에 우리 현실의 시간은 흘러간다.”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고, 오지 않은 미래의 일도 우리의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바람에 정작 유일하게 있는 현재의 시간에는 충실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렇게 산 오늘은 결국 내일 후회할 어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반복이 어찌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독특한 부르심을 깨닫고, 거기에 이바지하면서 인생을 사는 데서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소명입니다. 태어나고 살아있는 것, 심지어 죽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부름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 안에서 내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이 땅과 모든 우주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태어나고, 살고, 고통을 겪고, 기쁨을 만나고, 슬프고, 괴로워하고, 마지막에 죽는 것조차도 모두 하나님의 품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태어나기 전이나, 태어난 후에나, 죽은 후에나 그분의 품 안에 있는 것이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 속에서 현실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그 모든 것들 속에서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선을 느끼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있는 명랑함인 것입니다. 세상의 근심과 허물을 그리스도의 피에 담금으로써 신본주의적인 명랑함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것을 경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어느 한순간에만 일어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염려하고 근심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걸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 아래 한 번 담가 보는 것입니다. 푹 담가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꺼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지는 것이면 우리가 그렇게 울며불며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필연적으로 결국 슬픔과 기쁨, 고통과 괴로움을 경험하고, 매일매일 현실로부터 상처를 받고 자신의 기대를 배신하는 인생이 펼쳐지는 것을 목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마다 그런 모든 경험을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 아래 담가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피에 담가서 잃어버린 의미는 나에게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피에 담가도 살아있는 의미는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의 근심과 염려, 기쁨과 고통을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에 매일매일 담그는 이 행위가 바로 우리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욕심과 번민에 가득 차 있다가도 말씀의 은혜를 받고 흠뻑 울면서 회개하고 나면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매우 단순해집니다. 그리고 신령해집니다. 그리고 잠시 있을 것과 영원히 있는 것 사이에 구별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들이 하나님 없는 명랑함에 울고 웃던 삶을 벗어나서 하나님 있는 명랑함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많은 사람은 설득함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받을 때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의 느낌이 우울하고, 부정적이고, 그러면서도 세상 욕심은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사람들은 그 속에서 악취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있는 명랑함을 되찾는 삶을 살 때 그 속에서 사람들이 향기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환희, 기쁨, 감격, 설레임, 희열, 이런 단어를 언제 사용해 보셨습니까? 이런 단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결국 생각은 우리의 언어를 통해서 생각이 떠오릅니다. 떠오른 생각은 언어를 통해서 구체화되어 우리에게 정동(情動)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런 단어들을 거의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런 단어들을 물질적인 소비에만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런 기쁨과 희열, 환희와 감격, 설레임, 이런 것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있는 명랑한 삶입니다.
금욕주의와 극단적 방탕주의는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이 아닙니다. 종종 하나님은 상위의 목적이 없이 그냥 그것 자체만을 즐기는 것을 기뻐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물건이 있습니다. 소비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만들어 내신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본적인 원리에 있어서는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는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실제 삶 속에서 '내가 오늘 먹는 거친 밥 한 그릇, 내가 오늘 먹는 좋은 식당에서 한 그릇의 식사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쓸 것인가?' 이것을 질문할 때 오늘 먹는 이 요리가 어떤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리한 것을 먹으면서 오래간만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도 즐거우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매일매일 똑같은 밥을 주다 어느 날 좋은 식당에 데려가서 아주 맛있는 것을 작심하고 사줍니다. 아이가 언제 먹어 보냐는 듯이 막 기쁘게 퍼먹습니다. 그럴 때 엄마는 비웃듯이 '너 오늘 먹는 이 한 그릇이 네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고 먹느냐?" 이렇게 묻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식이 그걸 먹고 즐거워하는 것 자체가 부모가 보는 기쁨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신앙의 타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향해 가더라도 매일매일 걸어가면서 우리들이 항상 우울한 삶을 살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영원을 향해 가고 있는 순례자도 아름다운 들꽃의 모습을 보며 잠시 길가에 앉아서 꽃을 쓰다듬으며 감격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계곡 사이에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환호성을 지를 수도 있는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매 순간순간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적인 영역에서도 감상하면서, 하나님께 고마워하고 즐거워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질을 소비하고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영원을 향하여 가는 길을 방해하지 않고, 영원을 향해 가는 길에 대한 열심이 가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을 무시하지 않게 하는 중용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명랑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나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명랑함은 소명입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 하나님 없는 사람들보다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과 다른 이유 때문에 행복해 하고, 그들과 다른 이유 때문에 즐거워하고, 그들이 감격해 하는 것과는 다른 이유 때문에 감격해 하는 기쁨, 그들은 소비하므로 보람을 느끼지만, 우리는 생산하므로 기쁨을 느낍니다. 영원한 것들 속에서 순간적인 것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아름다운 것들 속에서 영원을 사색하며 살아가는 당당한 삶,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아무것도 무시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존중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여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 이것이 하나님 있는 명랑함인 것입니다. 그 명랑함은 결코 세속적이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인 명랑함입니다. 그 명랑함 때문에 우리는 현실의 삶을 일부러 우울하게 살지도 않지만, 일부러 없는 명랑함을 가짜로 지어내지도 않는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는 자유로운 명랑함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잠시 지나는 인생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 속에서 살아가고, 때론 예기치 못한 시련과 고통을 만난다 할지라도 결국 이것은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울하지 않은 것입니다. 땅에 살고 있으나 거기 매이지 않기에 우리의 명랑함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사랑은 하늘나라에 있으니 그 소망으로 더욱 더 위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보람을 자신의 명랑한 삶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는 기대를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 명랑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는 삶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교적인 생활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 때문에 명랑한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위에 있어야 하고,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결국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진리가 좋은 것이면 그 진리를 누리는 우리의 삶이 명랑하지 않고 우울한 것이 어찌 좋은 것일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대한 염려와 우울함 때문에 거룩한 명랑함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십시오. 잠시 사라질 인생이지만 즐거움은 있으니, 영원을 향하여 살게 하신 것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의 의미를 찾아가며 명랑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명랑한 삶의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근원에 대해서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우리들의 삶을 보면서 그들이 감격하는 우리를 발견하고, 환희와 희열에 가슴 벅차 하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때, 그들도 지루한 하나님 없는 명랑함 대신 하나님 있는 명랑함을 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선교적인 삶인 것입니다.
2.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 허무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 9:1-4)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를 설교하면서… 오늘날 신자들은 세상의 풍조와 성경의 교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합니다. 세상처럼 타락할 용기도 없고 성경처럼 살아갈 믿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울하면서도 진지하지 않고, 진지하지는 않은데 명랑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즐거움 앞에서는 선악과 앞에서 머뭇거리던 하와와 같지만, 그녀만큼 담대하게 저지르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선악과 따위에 등 돌리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될까요? 금욕주의와 방탕주의라는 벼랑 사이에서 자유를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 설교는 방황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것입니다. 마음을 기울여 듣는다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여러분의 인생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기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노예 김남준 목사 드림]
I.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인생의 두 가지 운명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모호성과 죽음의 확실성입니다. 인간은 하늘(heaven)과 대지(大地)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하늘은 자신의 존재의 토대이며 삶의 목적을 말해 주지만, 두 발을 디딘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대지입니다. 하늘과 단절한 대지의 명랑함은 쉽게 선택하지만 근거가 없습니다. 대지와 단절한 하늘의 명랑함은 근거는 있지만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II.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하늘(heaven)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대지(大地)는 보이는 세계를 가리킵니다. 하늘은 초월적인 가치를, 대지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두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늘나라와 지상의 나라입니다. 두 나라는 실체와 그림자처럼 너무 닮아 있습니다. 하늘과 대지, 영원과 시간, 불멸과 사멸,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이것들은 서로 맞짝을 이루면서 서로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또 서로에 대해서 대답을 해줍니다. 인간이란 영원이라는 죽음의 심연 위로 드리워진 시간이라는 밧줄을 타고 걷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 밧줄 위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A. 인간의 현실
먼저 우리들이 인정해야 될 것은 인간의 현실입니다. 지혜자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을 관찰했습니다. 그 결론은 인간이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허무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전 1:13) 미래가 불확실하기는 의인이나, 지혜 있는 자들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악한 사람들, 미련한 사람들에게만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인간에게 지금 사랑을 받고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 사랑을 받을지 혹은 미움을 받을지, 이것은 한결같은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지금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덧없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마찬가지로 일어납니다. 순결한 자나 불결한 자나, 제사를 드리는 자나 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나, 모두 괴로움을 겪더라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예배를 드리러 오는 교인이든, 예배를 드리러 오지 않는 교인이든,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기는 매한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지혜자는 말합니다.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3) 이것이 결국 대부분의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죽을 운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고 의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괴로움의 바다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도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일찍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얻었고, 한 나라의 왕이 되어서 모든 것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은과 금을 원 없이 소유했으며, 지혜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나 다른 나라 왕들이 지혜를 배우기 위해 방문했을 정도였습니다. 자기 눈이 원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없었으며, 즐거워하는 것을 막을 사람이 없이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다고 전도서 2장(10절)에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껏 살아본 그 결국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놀라운 지혜를 가진 솔로몬은 그렇게 살아 본 모든 즐거웠던 삶이 헛된 것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2장 11절에서 말합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든지 지금보다는 더 잘 살아보려고 욕망을 가지고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결국 마지막에 도달하는 결론은 아무 소득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근심과 수고는 슬픔으로 이어질 뿐이라는 것이 오늘 인생을 달관한 이 지혜자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즐거워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기뻐하면서 살지만, 그 바닥을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은 고통과 허무였다는 것입니다. 바닥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 아니라, 인생의 최정상에서 한 나라의 제왕이 되어 모든 것을 누리고 산 지혜자 솔로몬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B.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결국 인간은 하늘과 대지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지혜자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라고 가르치는 것입니까? 인생은 죽음의 심연을 가로지르는 밧줄을 타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밧줄 위에 서 있는 인간은 그 줄을 다 타 보지도 못한 채 죽음의 심연으로 떨어지건만, 삼킨 심연은 말이 없습니다. 살아있는 자는 생(生)을 말하나 죽은 적은 없기에 죽음에 대해 말해줄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죽었기에 죽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삶에 대해서는 들려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답을 찾을 것입니까? 결국 하늘과 대지 사이에 있는 존재는 하늘과 대지를 동시에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 하늘(heaven)을 생각함
현대인의 관심은 물질적인 풍요와 평안입니다. 도무지 하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별 볼일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를 휩쓸고 있는 사상은 허무주의입니다. 그래도 100년, 200년 전에는 허무주의라는 어마어마한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는 위험한 징조라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허무주의의 바다에 살고 있기 때문에 허무하다는 것이 현대인들에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허무를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허무주의는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허무주의는 그래서 기존의 가치를 찢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의지하고 살아갈 가치는 아직 못 찾은 것입니다. 자신의 근거를 묻지 않기로 했으니 인생의 목적도 발견할 수 없는데, 스스로 그 목적을 찾아가라고 하는데, 어떻게 인간이 스스로 인생의 목적을 찾아가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태어나지도 않은 존재가 어떻게 스스로 자기 삶의 근거를 찾는다는 말입니까?
수영을 잘 못하는 사람은 저의 말에 깊이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어떻게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물속에 들어갔는데 손을 놓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섰는데 발이 물의 바닥에 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이 입을 넘어서 코 위로 넘쳐 가라앉는다는 느낌이 들 때의 그 공포는 1,000m 물속에 있는 거나, 2m 물속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근원이 닿지 않는 무시무시한 두려움, 그것은 죽음의 공포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유행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소확행(小確幸)'입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입니다. 이 세 글자에는 아주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현대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반어법적으로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소((小)'라는 것은 소소(小小)하다'는 것입니다. '사소(些少)하다' 그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큼지막한 행복은 포기한 것입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런데, 세속적 관점에서 포기한 것입니다. '나는 오늘 그냥 기차 타고 춘천에 놀러 가야지. '거기서 소소한 행복을 느껴야지.'라고 말합니다.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유럽을 여행할 것 같은 행복은 나에게 올 것 같지 않은 것입니다. 자가용 비행기까지는 그만두고 그냥 비즈니스 클래스라도 타고 여행해 보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그런데 될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까 거창한 것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또 철학적인 의미에서는 인생의 행복 중 진정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소한 행복이 아니라 아주 확실하고 근원적인 행복인데, 그거를 얻으면 춘천을 가든지, 유럽을 가든지, 그게 문제가 아닐 정도로 행복한데, 그것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배하고 있는 사상이 허무주의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물을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눈물 나는 글자가 '소(小)'입니다.
그 다음은 '확(確)'입니다.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작지만 확실하다.' 뭐가 확실하다는 것입니까? 현대인들이 '소확행'이라고 할 때 '확실하다'는 것은, '오늘 내가 인생의 의미를 찾았다.' '나의 죽음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깨달았다.' '내가 죽은 후에라도 이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기를 원하는지 깨달았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확실한 것은 오직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것만 확실한 것이다.' '너와 나의 사랑, 영원히 있을 가치, 민족의 앞길, 인류의 미래, 개나 줘버려라.' '확실하게 남는 것은 오늘 보고, 입고, 먹고, 마시고, 만지고, 감각하는 것, 그것만 확실하다.' 이런 뜻입니다.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내리는 가장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행(幸)', 마지막은 '행'인데 행복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은 이미 관점 자체가 다릅니다. 이 행복은 '정신적이고, 영적이고, 영원히 지속될 그따위 행복에 대한 관점은 개나 줘라.' '그런 것은 있지도 않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니, 그 불확실한 것을 내가 찾아가면서 인생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그 행복은 내가 오늘 즐거운 것, 그것입니다. 악인에게도 고통받기 전 즐거운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행복은 뿌리를 찾을 수 없는 그런 행복입니다. 그게 현대인들이 말하는 '소확행(小確幸)'입니다. 이것이 폭넓은 공감을 얻는 것도 결국 허무주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하늘을 생각하지 않기로 다짐을 하고 나면, 뛰어나지 않은 범인(凡人)들에게는 순간의 즐거움 말고는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삶의 근거가 '없음'에서 오는 허무와 불안을 달래기 위해 일시적인 즐거움을 찾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우연히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운동화 한 켤레가 4억 3천만원에 팔렸습니다. 루이비통에서 한정판으로 100개를 만들었는데, 리세일(resale)을 해서 중고 매장에서 4억 3천만 원에 팔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집 한 채 값인데, 그 운동화를 신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지릅니다. 왜냐하면, 그걸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살 이유가 있느냐, 이런 걸 현대인들은 안 묻습니다. 내가 즐겁고, 내가 능력이 닿으면 쓰는 것입니다. 이게 소확행을 지향하는 현대인의 심리입니다.
결국 인생의 허무와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 일시적인 즐거움을 찾습니다. 이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가려면 뭔가 욕구하는 바가 있어야 됩니다. 나쁜 욕구보다는 좋은 욕구를 가져야 되지만, 좋은 욕구와 나쁜 욕구가 딱 갈라지듯이 나쁜 욕구는 하나도 없고, 좋은 욕구만 꽉 차 있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그건 진짜 성자의 반열에 들어갈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입니다. 대게 보면 식욕하고 똑같습니다. 뭘 먹고 싶다는 식욕이 생기면, 몸에 좋은 것도 먹고 싶고, 몸에 나쁜 것도 먹고 싶은 것입니다. 이게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도 욕구가 없다면 인생을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고, 입고 싶은 것도 없고, 마시고 싶은 것도 없으면 죽음을 향해 가는 우울증입니다. 그러니까 적당한 욕구가 있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게 세속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삶의 방향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살아있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예상하지 못하는 때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1926년에 태어났고, 2004년도에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E. K. Ross)라는 영국계 미국인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면 학자입니다. 그가 전공한 학문이 '죽음학(thanatology)'입니다. 지금은 '죽음학', '임종학'이라는 것이 널리 보급이 되었지만, 저분은 거의 선구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저분이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가 1960년대였습니다. 그때는 '죽음학'이라고도 하고, 혹은 '죽음에 근접하는 학문'이라고도 얘기를 했는데, 전공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황무지와 같은 곳에서 죽음의 의미를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지를 연구한 사람입니다. 20개가 넘는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사람 밑에서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졸업한 사람이 12만 명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버드에서도 강의를 했습니다. 엄청난 학자였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눈 돌리지 않는 '죽음학'이라는 분야에 눈을 돌려서 피할 수 없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고, 고통의 무게를 덜어주면서 평안하게 죽도록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떡합니까? 이 사람이 노년에 암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가르쳐 준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죽음을 도저히 못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에 괴로워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패닉(panic) 상태로 들어간 것입니다. 사람들이 물어봤습니다. ‘로스 교수님, 당신은 이제까지 아무도 못한 일을 했습니다.’ ‘수많은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죽음의 의미를 가르치고, 죽음에 앞서서 두려움을 물리치고 평화를 얻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왜 그러십니까?’ 그랬더니 퀴블러 로스 교수가 말했습니다. ‘여태까지 내가 본 것은 남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죽음입니다.’ ‘내가 여태까지 죽음이라는 무서운 사자를 다루었지만 그것은 남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창살에 갇혀 있는 사자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마침 이 죽음에 직면하고 보니 이것은 창살을 찢고 나와 나를 찢어 갈기기 위해서 덤벼드는 사자를 보는 것 같아요. 이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자기의 팡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내가 곧 죽으리라는 것.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내가 모르는 것은 이 피할 수 없는 죽음 자체다.” 파스칼.『Pensées』단장 194번 인간은 인생의 죽음과 비참을 스스로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죽어야 할 운명의 눈을 감아 버리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서로 그렇게 하는 것을 양해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연세 많이 드신 분은 누가 죽어도, 문상을 안 가도 결례가 아닙니다. 절대 결례가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이나 딸, 며느리가 죽었을 때 그 어른이 안 나타나도 절대 예법에 어긋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오래 살아오면서 죽음을 앞둔 노인이 죽음에 직면하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두려운지를 알았기 때문에 예법에서 예외로 해준 것입니다. 안 가도 됩니다.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은 굳이 갈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팡세는 또 다른 단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죽음은, 위험이 없이 죽는 것을 생각할 때보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때 더욱 견디기 쉽다” 파스칼.『Pensées』단장 166번 그래서 생각하지 않을 때 훨씬 쉬운 것입니다.
하늘(heaven)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의 빛 아래서 자신의 인생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빛 아래서 자신의 인생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생얼굴을 한 번도 못 본 것입니다. 최근에 중국에서 이혼소송이 났습니다. 결혼하고 몇 달이 지났는데 아주 우연히 아내의 생얼굴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상상도 못하던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사기라고 하면서 이혼소송을 했습니다. 이혼 판단이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들이 우리 인생의 생얼굴을 보는 것이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진짜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진리라는 것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지난 세기의 뛰어난 사상과 버트런드 러셀(B. A. W. Russell)은 자신의 평생 과업이 진리를 허무는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헤겔(G. W. F. Hegel)은 ‘새로운 시대는 신이 죽었다는 느낌과 함께 올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누구보다도 인간의 실존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갈 길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를 허무주의의 물결이 덮어버린 것입니다.
1967년 1월 4일이었습니다. 약 3만 명의 히피(hippie)들이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 파크에 모였습니다. 같은 해 약 10만 명 이상의 많은 사람이 그 시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었지만, 노동을 반대하고, 마약 복용의 자유를 달라고 부르짖음으로써 미국의 도덕적 대공황을 가져왔습니다. 이들은 1970년대 초반까지 미국 전역에 약 1만 개 이상의 공동체에 75만 명이 함께 모여서 생활했습니다. 그들은 허무주의를 온몸으로 실천한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들이 부르짖은 구원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Nowhereness.' '아무것도 아니다.' 'Nothingness.' '아무것도 없다.' 'Nobodyness.' '아무도 없다.' 이렇게 세 가지를 부르짖었지만, 그것이 어떻게 인생의 답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히피(hippie) 운동에 목을 걸고 열광하던 젊은이들이 이제는 70대, 80대 노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여전히 그들도 그때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겠습니까?
죽음은 삶보다 확실한 사실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허무한지는 설명되지 않는 죽음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기까지는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도시에 가서 …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14)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를 하고, 돈을 남기고, 돈을 벌면 이렇게 저렇게 즐거움을 누리며 쓰자고 인생을 설계하는데, '오늘 밤에 하나님이 네 영혼을 취하면 너의 계획이 어떻게 되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그냥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모든 인간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분명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러므로 잊지 마십시오. 하늘을 생각하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을 지으신 것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결코 한 순간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당신의 인생은 설명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여러분 인생의 의미를 묻고, 그 의미 안에서 일상의 가치를 찾으십시오. 이것이 허무에 빠지지 않는 삶인 것입니다.
2. 대지(大地)를 생각함
그 다음에 우리는 대지(大地)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은 너무나 허무합니다. 그러나 허무를 느끼는 것만으로는 현실을 살아 낼 수가 없습니다. 허무 그 자체는 우리의 온 몸과 마음에 의욕을 앗아가고 우리를 무너뜨려 버리기 때문에 허무감만으로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heaven)에서는 영원과 불변이 지배하지만, 대지(大地)에서는 변화와 생성이 다스립니다. 인간은 바로 그 대지 위에 있습니다. 거기서 살다보면 모든 일이 일어납니다. 좋은 일뿐만 아니라 가장 나쁜 일도 일어나고, 예상했던 일뿐만 아니라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내 인생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겪습니다. 그런데 놀랍습니다. 기쁜 일은 너무나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고, 슬픈 일은 오래도록 지속됩니다. 그래서 살아있다는 것은 인생의 대합실에서 비극이라는 열차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더군다나 세상은 공평과 정의의 법칙으로는 모두 설명되지 않습니다. 악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평안을 누리고 죽어 가는가 하면, 의로운 사람은 살아서도 고통을 당하고. 죽을 때도 눈을 감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이 용기를 얻고, 유신론자들은 확신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아무도 개인적인 미래를 미리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불확실성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신자에게나 불신자에게나 모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무슨 삶을 살든지 거기에는 근거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더 비참한 것은 끝까지 마음이 악으로 가득 차서 짐승처럼 미친 체 살다가 죽어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3)
온전히 하늘의 가치를 믿는 사람만이 대지를 생각할 여유를 갖습니다. 대지를 인정하고 살아도 하늘의 가치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확신이 깊은 사람은 회의를 느낄 자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회의를 느껴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만 자기의 사랑을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너무나 확실해서 흔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운명을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안 믿더라도 운명 따위는 믿지 마십시오. 개나 줘 버리십시오. 대지 위의 삶에 모든 진취성이 사라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자기에게 설득하십시오. 그 속에서 자기만의 고유한 의미를 가진 인생을 예술 작품을 완성하는 것처럼 살아간다고 믿으면서 사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어버이날이 다가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물 받은 멋있는 생화로 된 카네이션을 꽂고 나타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유치원에서 어린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색종이를 오려서 어설프게 만들고, ‘어버이 감사합니다’, 삐뚤빼뚤 연필로 쓴 글씨가 적혀있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촌스러운 꽃을 가슴에 달고 자랑스럽게 나타납니다. 그 사람도 자기 자녀가 만든 카네이션 꽃보다는 화원에서 파는 예쁘고 비싼 카네이션 꽃이 훨씬 예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의미가 다릅니다. 그것은 공장에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거는 자기가 사랑하는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딸이 엄마를 생각하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정성껏 만든 것입니다. 멋있는 생화 카네이션은 돈만 주면 박스로 사올 수 있지만, 이거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의미를 느끼며 당당하게 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공장에서 생산된 카네이션 같은 인생을 살도록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한 송이의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만드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삶입니다. 어떻게 하면 온전히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지문처럼 살아갈 수 있을지를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삶입니다. 이전에 인류 중 누구도 받지 못한 삶이고, 앞으로 태어날 인간 중 누구도 부여받을 수 없는 삶입니다. 여러분이 살면 그 작품이 태어나는 것이고, 살지 않고 내버려 두면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경건하지도 않는데 우울하고, 심각하기는 한데 진지하지는 않은 것이 오늘날의 신자입니다. 이걸 자기네들은 깊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깊이가 아니라 인생의 무게입니다. 납덩이를 달고 인생의 바다에 떠 있는 사람입니다. 미친 듯이 자기의 몸은 수면 아래로 빨려 내려갑니다. 살아 보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몸부림을 쳐서 얻어내는 부력보다는 밑에서 납덩어리가 당기는 중력이 더 크기 때문에 결국은 물속에 잠겨 갑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우리의 인생에서 늘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빨리 죽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나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어.' 이런 말 많이 하는 사람이 단명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렇게 생각하라고 해.' 이런 사람들이 장수합니다.
공식 기록으로 117세를 살았던 캐나다에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장수의 비결이 뭐냐고 물으니까, 당연히 먹는 거, 이런 걸 얘기할 줄 알았습니다. '남의 일을 참견하지 마. 오래 사는 비결이야.' 그래서 가장 좋은 인생의 예방주사는 남에게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들이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미리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 생각에 사로잡혀서 인생을 우울하게 사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암에 걸려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 바짝 마른 신부 아버지가 깨끗한 양복을 입고, 신부의 손을 붙들고 조심조심 걸으면서 웨딩마치에 맞춰서 들어옵니다. 죽기 며칠 전 인생의 마지막에 딸을 시집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앉아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이나 그 다음날은 죽습니다. 그런데도 이 신부 아버지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만큼은 내 딸이 시집가는 날이니까 한없이 즐거워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나를 압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평균 수명이 남자는 80세, 여자는 82.8세정도 된다고 합니다. 점점 늘어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중 절반만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절반은 그 이전에 이미 진작 죽고, 절반만 그 이상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병, 죽음, 위험, 사고, 모든 불행과 배신, 고통,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을 빨리 해석하고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은 우리의 것이 아닌 다른 시간에 매이는 것입니다. 현재는 칼날 같은 박막(薄膜) 위를 지나가지만 있는 것이라고는 현재 밖에 없는데, 우리는 어리석게도 바꿔놓을 수도 없는 과거를 후회하느라고 인생의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염려하느라고 우리의 시간을 낭비합니다. 그리고 나면 박막(薄膜)의 칼날 위를 흘러가는 오늘이라는 이 시간은 또 잠시 후에 우리가 염려해야 할 과거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현실성이 없는 우리의 시간이 아닌 것을 고민하고 걱정하면서 사는 동안에 정말 우리의 시간은 단 1시간도 살아내지 못하면서 24시간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짧게 느껴집니다. 사실 인생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방황하면서 허비하는 시간이 길기 때문인 것입니다.
늘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꿈꾸고, 때로는 이를 위해 신앙에 호소하지만 현실은 번번이 우리의 희망을 배신합니다. 그러나 살다가 보면 이전에 우리가 상처받았던 나쁜 일들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모든 나쁜 일의 의미를 다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시간은 이런 대답을 우리에게 주지 않고 흘러갑니다. 그러나 잘못될 때조차도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것을 좋게 해석하는 능력이 신앙의 능력입니다. 그 해석의 능력이 신앙의 깊이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모든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다고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말씀과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사는 자에게 해석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게 오늘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도 한 분이 지방에 사시는 분인데, 열린교회 설교를 듣고 먼 길을 걸어서 등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정말 은혜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건강하던 그 분이 갑자기 암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낫기 위해서 온갖 치료를 다 해봤지만 결국은 임종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에 심방을 갔습니다. 다행히 정신이 또렷하셨습니다. 매우 힘들었지만, 얼굴에는 평화가 넘쳤습니다. 예배를 인도하고 내가 물었습니다. "집사님, 두렵지 않으세요?" 활짝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그러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잖아요." "두렵기는 뭐가 두렵습니까?" "이제껏 태어나서 주님의 은혜로 이렇게 감사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 쓰여진 것처럼 주님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너무 너무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을 갖기 싫다면 방법이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적으로 강한 의지를 가지고, 그 허무를 물어뜯어 버리는 것입니다. 어느 철학자가 자기의 유명한 책에서 양치기와 뱀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 책의 주인공은 득도를 한 사람입니다. 득도를 한 사람이 어느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괴상한 광경이 펼쳐진 것입니다. 양을 치던 목동이 사지를 뒤틀면서 괴로워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득도한 사람이 '도대체 쟤가 왜 저러나.'하고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이게 무슨 일입니까? 팔뚝보다 훨씬 더 엄청나게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목동의 입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입속으로 대가리를 쑥 집어넣어 가지고 목동의 혓바닥을 깨물어서 아예 삼켜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목동은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이거를 떼어내려고 몸부림을 쳤는데, 이미 깊숙이 들어가서 이게 나오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득도한 사람이 달려가서 그 꼬리를 잡아당기면서 함께 도와주어서 빼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몸을 뒤틀면서 죽어 가는데,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물어라.' '물어뜯어 부숴버려라.' 이 사람이 양치기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양치기가 온 힘을 다해서 이빨로 확 물어뜯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 그 커다란 뱀 대가리가 박살이 나고 아작이 나버리는 것입니다. 뱀이 꼬리를 늘어뜨리고 죽어 버렸습니다. '퉤', 뱉어 버렸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목동의 얼굴에서 환한 빛이 나면서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나오는 뱀은 끊임없이 허물을 벗습니다. 그것이 고대의 사람들에게는 그 뱀이 불변(不變), 영원의 상징이었습니다.
무엇을 설명하는 거냐면 허무주의입니다. 하나님이 없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니까 영원이라는 무서운 뱀 같은 것이 확 입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를 어떻게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용기를 발휘해서 그것을 씹어서 아작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영원 같은 건 없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것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확 씹어서 토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하늘은 없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상은 없다'. '나는 나 좋은 대로 살아간다.'라고 결심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의 담력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뱀 대가리를 씹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용기는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게 되는 분들은 여기 없습니다. 결코 그런 사람들은 예수 안 믿습니다. 여러분은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예수를 잘 믿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어떠한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났다 할지라도, 일어나는 모든 것이 때로는 고통스러운 질병과 사고와 죽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이라 할지라도, 이게 모두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 다 못하겠다면 짐승처럼 살든지, 불행한 인간으로 살든지, 그것은 오롯이 당신 자신이 혼자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결코 그 삶은 쉬운 삶이 아닙니다. 그 삶이 쉬었더라면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인생은 여전히 고통의 바다지만, 오늘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내가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훨씬 더 이 세상이 예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두 번 반복해서 읽을 테니까 귀에 담으십시오. '인생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통증은 선택이다.' '인생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통증은 선택이다.' 믿고, 알고, 생각할지라도, 여전히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믿고, 알고, 생각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통증을 아주 조금만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 심지어는 그 통증을 기쁨과 환희로 승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앙의 비밀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행복을 갈망하지만 그것은 결코 보석을 손아귀에 넣는 것처럼 내가 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행복이라고 믿는 그것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인생의 즐거움이고, 기쁨 아니겠습니까? 오늘 아침 창문을 두드리는 아침 햇살에 눈을 뜹니다. 그리고 숨을 쉽니다. '흠, 하아' '아침이 밝았구나.' '하나님이 오늘을 나에게 선물로 주셨구나.' 한 낮에 누군가를 만나고, 한 끼 안 먹어본 음식을 먹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그 일을 하고 살며, 내가 염려해줄 수 있는 사람,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나와 인생의 무게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선물입니까? 어제 죽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한번 산책을 하면서 팔을 벌려 보는 것입니다. 함께 산책하는 사람은 없어도 두 팔을 벌리며 숨을 쉬는 것입니다. "흠, 하아" 불어오는 겨울바람, 눈부신 햇살, 때로는 저녁때 내리는 눈꽃송이들, 그리고 이제 막 싹이 나기 시작하는 어린 나뭇가지들, 온갖 색깔의 물상(物像)들이 나의 눈을 가득 채우고, 내 코에 이런저런 냄새를 실어 나릅니다. 그리고 내 귀에 온갖 재잘거리는 소리들이 들립니다.
그것을 느끼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 대지를 누리지 못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얼굴을 스치는 겨울바람 한 점에도 예사롭지 않은 자연의 섭리를 느껴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이렇게 살아서 이 바람을 맞고 있다는 사실에 무한한 감사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놀라운 특권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놀라운 자신의 생명 그 자체의 환희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한 풍경, 한 끼의 식사, 한 잔의 차, 한 폭의 그림, 한 가락의 노래, 그리고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하늘의 구름까지도 우리에게는 너무 너무 신비한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제 죽은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놀라운 특권을 내가 누리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긍정하고, 나를 태어나게 하시고, 여기에 머물게 하시고, 이 모든 만물의 물상을 느끼고, 감각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몸을 절대로 하찮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몸이 없으면 여러분의 인생도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려면 몸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40대 중반 쯤 된 결혼하지 않은 형제자매들을 만났습니다. 모두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목사님, 우울해요.'. '몸이 젊을 때 같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몸은 앞으로 점점 더 그대들을 배반할 것이다.' '지금이 가장 좋은 때다.' '좀 더 나이 들면 약을 달고 살아야 되고, 심하면 기저귀를 차고 다녀야 되고, 심하면 일주일에 서너 번씩 병원에 가야 되고, 더 심하면 병원에 갇혀 있어야 된다.' '이렇게 원하는 곳에 너희들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생각하라.' 어제 후회로 소중한 오늘을 물들이지 말고, 내일의 염려로 값진 오늘을 우울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인생의 무게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저 하늘 아래서 하늘을 향해 부끄러움이 없이 매일매일 대지 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의 빛에서 삶을 보면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정말 놀라운 특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州)마다 다르겠지만 미국에는 죄수를 사형에 처할 때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다고 합니다.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건 아니고, 교도소에서 들어줄 수 있는 것으로, 마지막으로 엄마를 만나게 해 달라든지, 아니면 담배를 한 대 피운다든지 등을 허락을 해 주는데, 가끔 마지막 식사를 뭘 하고 싶으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이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면 약25달러 정도 범위 안에서 그 사람에게만 스테이크를 만들어서 그날 사형 당하기 전 마지막 식사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판에 스테이크와 샐러드가 나오고, 빵이 나옵니다. 그리고 아마 도구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칼과 포크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식사가 끝나고 형장으로 끌려갑니다. 마지막으로 거기에 앉아서 등심스테이크 자르는 것입니다. 서걱서걱 서걱서걱 자르고, 거기에 스테이크 소스를 잔뜩 바르고 겨자까지 얹어서 입에 넣어서 씹어 먹습니다. 미국산 고기와 힘줄, 기름이 함께 씹히면서 우적우적 하는 느낌이 들고, 평생 익숙해진 고기의 느낌이 혀 사이에 돌면서 소스와 함께 어우러져 목구멍은 자꾸 그것을 잡아당깁니다. 그리고 맛있는 스테이크 한 점을 넘깁니다. 그리고 한 점, 두 점 먹고 마지막 한 점이 남았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식사는 여태까지 먹어본 수많은 스테이크 식사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온 정신과 마음을 집중해서 스테이크에 맛을 느끼고, 그리고 그 스테이크를 마지막으로 즐긴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인생을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내가 먹는 한 끼, 오늘 내가 웃으며 만나는 내 친구,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주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즐기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내가 이렇게 살아서 이것들을 감각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격하는 마음이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 있는 한 이 대지에 발을 딛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앙도 별로 없으면서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삶을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장난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행복한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지에 충실하게 살아가면서 하늘로 자신의 대지에서의 삶의 의미를 연결하는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세상보다 완전하지만 지상에서 누리는 기쁨은 여기만의 고유한 것이고, 우리는 지금 두 발을 딛고 대지 위에 살고 있습니다. 하늘의 복락을 참되게 바라는 사람들은 현실의 고통을 피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대지에서 하늘의 기쁨을 앞당겨 맛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허무를 이야기하던 전도자는 그 허무를 뛰어넘는 한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 9:4) 살아있는 것 그 자체가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는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하늘(heaven)의 관점에서 대지(大地)를 바라보고, 대지(大地)의 관점에서 하늘(heaven)을 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사람은 대지 위에서의 삶을 긍정합니다. 거기에 몰입하기 위해 하늘의 가치를 배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치 때문에 현실을 더욱 하나님 앞에 즐기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자기가 즐거워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행복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전 3:22) 그게 인생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오늘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우리의 힘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고, 미래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오는 것이 아니니 소망을 가지고 지켜볼 뿐입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지만 우리의 현재는 미래에 있지 않고 지금에 있습니다. 지금 이 대지 위의 삶을 긍정하며 우리의 불행과 행복, 그리고 우리의 염려와 모든 일어날 것들에 대해서 완전히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이웃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언제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우울함 때문에 오늘 살아 있는 순간을 하나님 앞에 허비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며, 내 인생은 그분의 온전하신 섭리 안에서 굴러갈 것이라고 생각하면, 꺾으면 부러질 갈대와 같은 존재, 훅 불어 버리면 꺼질 등불의 마지막 불꽃같으면서도 여전히 생명을 욕구하고, 타오르기를 꿈꾸며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살아있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없이 감사한 감격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태어나지 못한 사람이 무수히 많은데 그중에 수억 분에 일의 확률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하늘을 알게 하시고, 대지에 눈 뜨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찾는 길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삼킬 듯이 달려오는 인생의 모든 불행을 능히 이길 수 있는 하늘의 소망을 갖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어제 데려 가실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하나님은 나에게 하게 하실 일이 남으셨는지 어제 죽은 사람도 많은데 오늘은 내가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너무 감사한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시류(時流)에 쓸려 내려가도 나는 살아있는 물고기가 되어 흐르는 물을 거스르며 끊임없이 물길을 거슬러 거슬러 바위에 내 몸을 부딪치며 위로 위로 거슬러 연어가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듯이 내 정신의 고향을 찾아갈 수 있는 영혼의 힘을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과 같은 인생인데도 그것을 가련하게 생각하는 대신 들풀로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그 들풀이 온 벌판에 바람을 느끼며, 햇살을 받으며, 비를 맞으며, 이슬을 머금으며, 새로운 세상을 감촉하며 살아가는 기쁨을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내가 살아 있는 것은 가슴 벅찬 선물입니다. 어제 죽은 사람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인데, 그는 내일을 못 만났고, 우리는 살아서 그가 못 누렸던 내일을 누리고 있습니다. 모레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굳이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은 주님의 손에 있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내 인생은 너무나 아름다움과 경외로 가득 찬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악한 인간들의 불행한 삶과 고통, 죄악이 삼킬 듯 부패한 냄새를 진동하지만,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 몸에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상처와 같은 것이고, 생명의 기운은 그거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힘으로 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것과 질병적인 죽음에서조차도 우리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나는 소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탐냄으로 시기하거나, 질투하거나, 미련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것, 나에게 있게 하신 것, 나에게 누리게 하신 것, 내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세상, 맹인이 된 사람은 간직하지 못하고 죽은 세상을 나는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합니다.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그리고 햇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이파리 하나에도 나는 가슴 떠는 흥분을 느끼며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사람을 축복합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생명의 특권을 누리라고, 이렇게 살아서 이 세상을 누리고,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특권인지, 얼마나 한정된 사람에게만 준 놀라온 특권인지 나는 그들에게 말하기 위해서 아직 살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게 주신 가족, 내게 주신 친구, 그리고 우연히 만나는 이웃, 그리고 내가 도움을 주면 좀 더 덜 불행해질 사람들, 그리고 마음의 기쁨을 느껴 말할 수 없이 즐거워 할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는 그 자체가 생의 환희입니다. 그리고 살아있으므로 나는 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으니, 살아 있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죽어가는 사람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신앙은 별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하늘로부터 여기에 왔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연을 날립니다. 바람을 맞으면서 연이 높이 올라갑니다. 연줄이 팽팽해지면서 마지막에는 연이 거의 눈에 안 보일 정도로 작은 점이 되기까지 올라갑니다. 하늘로 하늘로 올라갑니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연을 날리는 사람은 쾌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더 높이 올라가는 연을 흔들면서 달리는 어린아이의 그 마음은 날리다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는 아이의 스트레스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높이 날아갑니다. 그게 바람 때문에 높이 멋있게 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줄을 끊어 버리면 금방 곤두박질쳐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성은 대지에 두 발을 디딘 영성이어야 합니다. 바람을 받으면서 높이 올라갈수록 줄을 풀어 줍니다. 자유롭게 날게 만들어 주지만, 그러나 여전히 연줄은 팽팽해야 됩니다. 늘어지면 떨어집니다. 팽팽해야 됩니다. 이 연줄이 대지(大地)고, 하늘로 그 연을 날려 올리는 바람이 바로 하늘(heaven)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앞에 주어진 한 끼는 그냥 한 끼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오감으로 하나님이 나를 살아 있게 하신 것에 감격하며 누리는 한 끼입니다. 그런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 한 끼를 즐기고, 한 시간을 즐거워하고, 오락을 즐겨도 살아있음을 충만하게 느끼며, 오락을 하면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살아있음을 충만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한 가지 일을 하고 나면 살고 싶다는 욕구가 내 안에 가득 하도록, 그 사람들만 이웃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고, 인류를, 사회를 조금이라도 낫게 하기 위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드리고 싶은 말씀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내세적인 금욕주의나 현실적인 방탕주의는 모두 쓰레기 같은 것들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아서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지혜자는 삶의 허무와 오늘 살아 있는 기쁨을 어떻게 연결해야 될지 다음과 같이 통합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창조하셨고, 네 인생의 목적을 주셨음을 잊지 말아라." 하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괴로운 날이 있겠지만 명랑하게 살아라." "일찍 죽는 사람 부러워하지 말아라." "오래 살면 괴로운 일도 있겠지만 오래 살면서 즐거운 인생을 살아라." "이것이 네가 누릴 행복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살아서 눈 뜨면 오늘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맞이하십시오. 매일매일 일상이 진부한 하루하루가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어제와 같은 날이 지루하게 반복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제와는 전혀 다른 날이 오늘 내게 주어졌다 생각하십시오. 선물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오늘의 놀라운 특권이라고 말하십시오. 오늘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더욱이 하늘을 믿지 않음으로 대지 속에서 방황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오늘 하루를 즐거운 마음으로 사십시오. 하늘의 가치를 믿고, 믿음으로 명랑하게 사십시오. 그것이 인생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명랑하게 사는 여러분을 보면서 많은 사람은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서 눈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얼마나 신성한지에 대해서도 눈뜨게 될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을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궁금한 마음이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3.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 허무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수 5:9)
녹취자 : 김세나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를 설교하면서… 오늘날 신자들은 세상의 풍조와 성경의 교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합니다. 세상처럼 타락할 용기도 없고 성경처럼 살아갈 믿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울하면서도 진지하지 않고, 진지하지는 않은데 명랑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즐거움 앞에서는 선악과 앞에서 머뭇거리던 하와와 같지만, 그녀만큼 담대하게 저지르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선악과 따위에 등 돌리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될까요? 금욕주의와 방탕주의라는 벼랑 사이에서 자유를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 설교는 방황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것입니다. 마음을 기울여 듣는다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여러분의 인생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기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노예 김남준 목사 드림]
Ⅰ. 본문 해설
본문은 인생의 두 가지 운명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삶의 모호성과 또 다른 하나는 죽음의 확실성입니다. 인간은 하늘과 대지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하늘은 자신 존재의 토대이며 삶의 목적을 말해 주지만, 두 발을 디딘 채 사는 곳은 대지입니다. 하늘과 단절한 대지의 명랑함은 쉽게 선택하지만, 근거가 없고, 대지와 단절한 하늘의 명랑함은 근거는 있지만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 중대한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Ⅱ.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우리는 하늘과 대지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여기에서 하늘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리고 대지는 보이는 세계를 가리킵니다. 하늘은 초월적인 가치를 대지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두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상 나라와 지상 나라입니다. 두 나라는 맞짝처럼 마주 있고 하나는 다른 하나를 보여 주고, 또 다른 하나는 보이는 그 세계를 설명해 줍니다. 하늘과 대지, 영원과 시간, 불멸과 사멸,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영원이라는 죽음의 심연에 밧줄 위를 타고 걷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 시간의 밧줄 위에서 가는 것도 위험하고, 뒤로 돌아서는 것도 위험하고, 서 있는 것은 더더욱 위험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그 밧줄 위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A. 인간의 현실
먼저 인간의 현실입니다. 지혜자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을 관찰하였습니다. 그 결론은 인간이 산다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라.” 즉, 괴로운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기는 의롭게 산 사람들이나 지혜자 같은 뛰어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을지 아무도 알지 못하니, 지금은 그렇지만 다음에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또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마찬가지니, 순결한 자와 불결한 자, 제사드리는 자와 제사드리지 않는 자, 요즘 말로 하면 예배드리러 나오는 사람이나 예배드리러 안 나오는 사람이나 모두가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라.”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죽을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 다 괴로움과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에 살다가 갑니다. 이것이 인생이 허무한 이유였습니다. 이 지혜자 솔로몬은 말하기를, 자신은 금과 은을 원 없이 소유해 보았으며 지혜에서도 매우 뛰어나 다른 나라의 임금들이 그의 지혜를 배우고자 달려올 정도였고, 자기 눈이 원하는 모든 것을 보기를 금하지 아니하였으며, 즐거워하는 것을 막을 사람이 없었다고 자기 생애를 돌아봅니다. 그러나 결국 무엇이 남았겠습니까? 그것이 모두 헛된 일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조금 더 행복해 보려고, 잘 살아 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근심과 수고는 슬픔으로 이어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다.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입니다.
B.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그러면 도대체 모든 것이 헛되고, 모든 영광과 번영, 영화도 헛된 것이라면 도대체 지혜자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겠습니까? 인생은 죽음의 심연을 가로지르는 밧줄을 타는 것입니다. 시간의 밧줄 위에 서 있는 인간은 그 줄을 다 타보지도 못한 채 죽음의 심연에 떨어지건만, 삼킨 그것은 말이 없습니다. 살아가는 자는 생을 말하나 죽음에 대해서는 가본 적이 없으니 말해 줄 수 없으니, 죽은 자는 죽었기에 죽음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있으나 살아 있지 않으니 삶에 대해 들려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디에서 답을 얻을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이 외로운 이유이고, 고독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헤쳐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1. 하늘(heaven)을 생각함
제일 먼저 하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관심은 물질적인 풍요와 평안함입니다. 하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별 볼 일이 없습니다. 현대를 휩쓸고 있는 사상은 허무주의입니다. 그런 허무주의가 휩쓸고 있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100년, 200년 전에는 허무주의에 침몰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밀려오는 것이 쓰나미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비명을 지르고 경고를 내 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허무주의의 물에 모두 떠 있기 때문에 이제 새롭게 허무주의에 대한 경고가 들리지 않습니다.
허무주의는 매사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허무주의는 기존에 있는 가치를 찢어 버렸지만, 자기가 의지하고 살아갈 새로운 가치는 아직 찾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허무주의에 삼킨 바 될 때에 역사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근거를 묻지 않기로 했으니, 이제 그러한 것을 가르쳐 줄 가치가 없으니, 인생의 목적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스스로 태어나지도 아니하였으니 어떻게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의 근거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 누가 도대체 내가 어디로부터 왔으며, 왜 살아 있고, 나는 무엇을 향해 가는지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은 제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저는 수영을 잘 못 합니다. 20m 정도는 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주 혼신의 힘을 다해야 15m 정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수영을 맨처음 배울 때, 수영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데리고 강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손을 잡아 주고 발장구를 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물에 뜹니다. 그리고 한번 스스로 해 보라고 손을 놓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몸이 가라 앉습니다. 정말 무서울 때가 언제인가 하면 발이 땅에 닿지 않을 때입니다. 그때 엄청난 공포심이 들고, 몸이 내려가면서 물이 목을 지나서 입술을 지나서 코 위로 넘어갈 때의 그 두려움은 2m 물속에서 느끼는 것이나 1000m 바다에서 느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시무시한 공포가 확 밀려옵니다.
현대인들은(에게) 이 허무주의는 결국 바닥을 안 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허무주의에 빠졌을 때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껴야 합니다. 무시무시한 공포를 안 느끼려고 몸부림칩니다. 그것이 바로 데카당스가 추구하는 환락, 퇴폐입니다. 현실적 쾌락에 자기 몸을 맡김으로써 미래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유행하는 말이 ‘소확행’(小確幸)입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쓰고 있는 이 말속에서 제가 현대인의 정신사를 읽어 줄 테니까,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사용하십시오. 소, 확, 행. 무엇입니까? 큰 소리로 대답해 보십시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모두 알고 있는 말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소’입니다. 여기에서 ‘소’는 ‘작다’는 의미입니다. 큰 대를 못 쓰고 소를 썼을까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속적인 의미입니다. 여행을 갑니다. 그런데 능력이 안 됩니다. 그래서 겨우 양평을 여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양평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깝지 않습니까. 그래서 전철과 시외버스를 타고 자가용 없이 양평을 여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입니다. 그런데 옆에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이, 비즈니스 편으로 북유럽을 여행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확행’입니다. 그런데 나는 비행기 편을 끊을 여유도 없고, 매일 벌어먹고 사느라고 14박 15일 시간도 낼 수 없고, 더구나 영어도 못하기 때문에 북유럽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포기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입니다.
두 번째, 정신적인 의미에서는, 행복하려면 근본적인 행복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구직을 하는데 두 직장에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한 직장에서 일당 20만원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회사에서는 350만원을 주겠다고 합니다. 350만 원 주는 회사는 3년 계약이고, 일당 20만원 주는 회사는 20만원을 주고 일을 조금 더 잘하면 25만 원까지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 잘릴지는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20만 원짜리 직장을 택하겠습니까? 350원 짜리 직장을 택하겠습니까? 자유롭게 대답을 해 보십시오. 당연히 안정적인 직장을 택할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행복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소’가 왜 ‘소’인가 하면 근원적인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유사행복, 내가 진짜 행복하려면 내 인생의 의미를 알고 무엇인가 감격스러울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살 가치가 있고, 정말 좋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확신이 있다,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없어서 ‘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는 정신에서 육체로 격이 떨어진 것이고, 육체 속에서도 돈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작은 것입니다. 아주 능력 있는 사람들은 ‘소확행’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모두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그 다음에 ‘확’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확실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이 확실하다는 것입니까? ‘소확행’은 이러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북유럽은 못 가도 양평은 산책을 한다. 자가용은 없어도 전철은 탄다. 그리고 동네에 앉아서 무엇인가 먹는다. 그리고 내가 비록 돈은 조금 벌지만, 악착같이 모아서 호캉스를 보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급여를 모두 모아서 좋은 호텔에 가서 잠깐 사용합니다. 그러한 것을 ‘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확’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확실한가 하면, 육체적으로 감각적으로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소’는 큰 것을 찾을 수 없다는 의미이고, ‘확실하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감각에 국한된 것이니까 정신적인 그 무엇을 못 찾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행’은 육신의 즐거움, 감각의 쾌락입니다. 무슨 보람이든지 나의 행동을 100년 후에도 기념할 만한 위대한 행동을 한다는 식의 그러한 ‘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소확행’이라는 낱말 자체가 허무주의의 짙은 그림자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생에서 하늘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다시 말해서 의미를 생각하지 않기로 다짐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미를 생각하면 내가 누구인지 물어야 하고,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야 하고, 그러면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늘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기로 다짐을 하고 나면, 범인들 즉 평범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순간의 즐거움 말고는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삶의 근거 없음에서 오는 허무와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 일시적인 즐거움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에서 무엇인가 일시적인 즐거움, 그리고 육체적인 즐거움을 찾는 것이 모두 돌을 던져야 할 정도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회개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결국 살아있는 인간은 의욕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의욕은 의지와 욕구입니다. 의지와 욕구가 있어야지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삶의 의욕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선한 것만을 의욕 하거나 나쁜 것만을 의욕 하거나, 양날의 칼처럼 갈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내가 식욕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옵니다. 아무것도 싫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약도 먹고 운동도 하고 했더니 식욕이 회복되었습니다. 사람이 몸에 좋은 것만 먹고 싶어 합니까? 식욕이 회복되면 몸에 좋은 것, 몸에 나쁜 것,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먹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의욕이 생겼는데, 이것이 완전히 선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의욕만 충만하게 생기고 악에 대해서는 일도 의욕이 안 생기면 최고의 훌륭한 케이스이지만, 이러한 사람은 한 세기를 뒤져도 몇 사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의욕은 필요하면서도 또 주의해야 하는 성질을 갖습니다. 그래도 의욕이 없는 것은 의욕이 있는 것보다 매우 위험합니다. 여러분들의 친구 가운데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고 어디도 가고 싶지 않고 무엇도 보고 싶지 않은 사람 있을 것입니다. 우울증 환자입니다. 매우 가까이 다가간 것입니다. 놔 두면 정신이 병 들어서 나중에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삶의 욕망이 완전히 제로가 된 상태가 바로 죽음이 지배하는 정신상태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에 와서 대표 기도하면서 회개할 때, 일주일 동안 살면서 무엇인가 의욕 했던 것들을 통째로 회개할 필요는 없습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었던 것, 예쁜 것을 갖고 싶었던 것, 보고 싶었던 친구를 그리워했던 것, 내가 즐겨 하던 오락에 잠깐 빠졌던 것, 이것은 회개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자체가 삶의 긍정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복들입니다. 이게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의욕이 무방향성입니다. 의욕 자체는 우리에게 삶을 어디로 가야 한다고 아주 올바르게 가르쳐 주지는 않습니다. 최악의 경우 방향이 전혀 잘못되었는데 의욕이 어마어마하게 넘칠 때 인간은 엄청난 사건을 만들고야 맙니다.
인생에서 살아있다고 하는 사실만큼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죽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예상하지 못하는 때에, 내가 예기치 못하게 꿈꾸지 않았던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1926년에 태어나 2004년에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라고 하는 여성 학자입니다. 이 사람의 전공은 ‘사나톨로지-죽음학’입니다. 이 사람이 사실은 현대 죽음학의 개척자입니다. 문을 연 선구자입니다. 더군다나 이 여성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때가 1960년대였습니다. 그때는 정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다 먹고 사는 일에 너나할 것 없이 매달렸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죽음은 생각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산업화의 경쟁에 내몰렸던 시대였습니다. 지금 우리와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인간이 돌보는 자 없이 쓸쓸하게 죽어가는 그 죽음이라는 사건이 얼마나 무서운 사건인가 착안하면서 ‘죽음학’이라는 것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원래 맨 처음에는 ‘죽음 가까이 있음의 학문’이라고 하였습니다. ‘nearness to death’입니다. 연구를 하였습니다. 정말 획기적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20여개가 넘는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엘리자베스 로스의 가르침을 받고 졸업을 한 사람이 12만명, 그리고 수많은 책을 썼고, 마지막에는 하버드 대학에서까지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암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암에 걸려서 죽는데 죽어도 자신의 죽음을 못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르쳤던 죽음학 과는 정반대로 반응을 하면서 거의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물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죽음학을 창시해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평안히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비참하게 죽지 않고, 존엄하게 죽을 수 있도록 지도해주고, 평화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이렇게 반응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말할 때, 로스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내가 죽음학을 연구하였지만 그 죽음은 남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나의 죽음인데, 둘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내가 연구하던 죽음학에서의 죽음은 우리에 갇힌 사자였고, 그리고 지금 내가 맞이하고 있는 죽음은 그 우리를 뜯고 뛰어 나와 나를 물어뜯고 있는 죽음입니다.”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죽음의 진실성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두 가지 이유입니다. 너무 힘든 것이기 때문에 서로 말하지 않기로 묵약을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진짜 죽음의 밑바닥을 경험해 본 사람은 그것을 말하기 전에 이미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진실을 들려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삶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보다 더 확실한 죽음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그의 유명한 「팡세」단장 194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내가 죽으리라는 것,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내가 모르는 것은 이 피할 수 없는 죽음 그 자체다.”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 보다도 더 확실한 엄연한 사실로 내 앞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죽음과 비참을 스스로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죽어야 할 운명의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을 서로 양해하기로 약조한 것입니다.
연세가 많이 든 노인이 굉장히 친한 지인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문상을 안 가도 결례가 아닙니다. 나이 80세가 넘으면 결례가 아닙니다. 딸이 죽었어도 엄마, 아빠가 장례식장에 나오지 않는 것은 결례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왜 그러한 도덕이 생겼습니까? 그러한 것을 양해해 주는 너그러운 마음이 왜 이 죽음에 관한 도덕에서 생겨난 것이겠습니까? 그것이 나이가 많아서 곧 죽을 날을 앞둔 사람에게 늙은 친구의 죽음을 본다고 하는 것은 죽음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을 등 떠미는 것과 같은 공포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이 양해하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세 드신 분은 누가 죽어도 안 나타나도 그것은 결례가 아닙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팡세」단장 166번에서 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위험이 없이 죽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때 더욱 견디기가 쉽다.” 그래서 파스칼이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해할 수가 없다. 시장에 가면 몇 만원만 주면 먹을 수 있는 고기를 그렇게 많은 군사를 끌고 돈을 들이고 해서 굳이 사냥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말하면 죽음을 잊어버리는 한 회피 수단으로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소확행’ 이것 또한 파스칼에게 ‘소확행’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물으면 결국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말 것입니다.
하늘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의 빛 아래에서 자기 삶을 보지 못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진리라는 것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지난 세기에 뛰어난 사상가였던 버트런트 러셀은 자신의 평생의 과업이 진리라고 부르는 것을 허물어 버리는 일이었다고 하였습니다. 헤겔은 새로운 시대는 신이 죽었다는 느낌과 찾아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누구보다도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지만, 그러나 그 실존에 대한 관심과 탐구가 인간의 갈 길에 대해서는 일도 가르쳐 주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그 실존주의의 파도가 끝나고, 제방이 무너지자 결국 허무주의가 밀려왔습니다.
1967년 1월 14일 약 3만 명의 히피들이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파크에 모였습니다. 같은 해 10만 명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였습니다. 겉으로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며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었지만, 노동에 반대하고 마약 복용의 자유를 부르짖음으로 미국을 회복 불가능한 도덕적 대공황 상태에 이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1970년대 초반까지 미국 전역에서 약 1만 개 이상의 공동체를 이루며 75만 명이 모여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그들은 온몸으로 자기 시대의 허무주의를 실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언젠가 설교 시간에 잠깐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만, 미국에 가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홀리데이인’이라는 호텔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썩 좋은 호텔은 아니고, 브랜드가 있는 중저가 호텔이었습니다. 도시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제가 간 곳은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은 다 부서진 탁자들이 즐비하게 있는 거지같은 곳이었습니다. 집회를 끝내고 들어가서 샤워를 다 하고 기도를 하고 누워 있다가 미국 날씨는 어떻게 되나 툭 하고 눌렀습니다. 눈을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뭐냐 하면, 성인 채널이었습니다. 야한 장면이 나온 것이 아니라 한 800명 정도 되는 사람이 콘서트홀 같은 곳에 모여서 토크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못 보았습니다. 그 800명이 10대부터 80대까지 있는데, 모두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채 토크쇼에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사회자가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채 인터뷰를 하고, 패널들이 토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참 들여다보다가 툭 끄면서 슬픔이 저 깊은 데서 밀려왔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북유럽에서 공개방송 했던 것을 녹화해서 미국의 성인 채널에서 방영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히피들의 정신이었습니다.
히피들이 부르짖었던 세 가지 구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Nowhereness-아무데도 없음’, ‘Nothingness-아무것도 아님(혹은 없음)’, ‘Nobodyness-아무도 아님’입니다. ‘Nowhereness, Nothingness, Nobodyness’를 부르짖었지만, 그것이 인생에 무슨 답을 주었겠습니까. 우리나라에도 그 당시 온 짐을 싸들고 거기에 가서 공동생활을 하던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그때 그 젊은이들이 지금 80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전히 그 생각을 가지고 사는가 말입니다.
죽음은 삶보다 확실한 사실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가는 설명되지 않은 죽음을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기 전까지는 진짜 사람이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소확행’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야고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도시에 가서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그냥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왜 그렇게 살았는가에 대해서 창조주에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므로 하늘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그리고 당신을 지으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수억 분의 일의 확률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당신의 인생의 의미를 묻고 일상의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허무에 빠지지 않고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숙한 인간은 근거 없는 희망에 들뜬 사람이 아니라 죽음의 심연을 온 마음을 다해 들여다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살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그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인생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는 그 지름길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은 것이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예수 믿은 것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나중에 배우게 된 것이고, 교회에서 가르쳐 준 것이지 처음 구도의 문을 두드린 여러분들이나 저나 모두 내가 죽을 것 같아서 구도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지금도 그 고민이 계속 되고 있습니까? 고민이 없다면 저는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답을 찾았습니까? 여러분들은 그 답대로 살고 있습니까? 도대체 왜 사십니까? 어차피 죽을 인생인데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땅 아래 있는 모든 사건은 대지 위에서 일어나지만, 의미는 하늘에서 부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이 세상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예수를 생각하며 내가 왜 구원받았는지 기억해야 인생의 좌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일이 많지 않지만, 호주 같은 곳에서는 숲이나 사막의 여행을 떠났다가 길을 잃어서 물을 못 마셔서 죽는 사람들이 1년에도 수시로 나옵니다. 핸드폰도 안 터집니다. 지도같은 것을 다 준비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밤은 저물어 오는데 남쪽인지 북쪽인지 어디로 가야지 도시로 가는 길인지 불분명합니다. 계속 돌고 헤매다가 물을 못 찾아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나침반입니다. 하늘의 의미. 하나님께서 계시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만드셨고, 내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이것이 좌표입니다. 좌표만 있으면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2. 대지(大地)를 생각함
그리고 이제 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은 허무합니다. 그러나 허무를 느끼는 것만으로는 현실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서는 영원과 불변이 지배하지만, 대지에서는 변화와 생성이 지배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그 변화와 생성 안에 있습니다. 거기에서 살다보면 모든 일이 일어납니다.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나쁜 일도 일어납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만큼 인생의 통증은 매우 큰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빨리 죽습니다. ‘아니, 어째 그런 일이?’ ‘어떻게 사람 사는 세상에서 그러한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그러한 일이?’ ‘어떻게 나에게 이러한 일이?’ 이러한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은 빨리 죽습니다. 단명합니다. 누가 오래 사는지 아십니까? ‘그럴 수도 있지.’ ‘세상은 넓은데 뭔 일이 안 일어나겠어?’ ‘그러라고 그래.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오래 삽니다.
117세까지 살았던 캐나다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장수의 비결을 기자가 물었더니, 먹는 것과 마음가짐에 대하여 이야기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퉁명스럽게 한 마디 던졌습니다. “오래 살고 싶습니까?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통증이 밀어닥칩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친구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이 여러분에게는 왜 일어나면 안 되는 것입니까? 무슨 근거입니까? 친구는 사고로 죽었는데, 여러분이 사고로 죽지 않는다고 하는 확신은 그 일이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되는 것은 합리적입니까? 인간의 수명이 많이 발전하여 남성의 기대수명이 80세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것도 지금 있는 사람이 아니라 태어나는 사람들 기준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훨씬 더 빨리 죽는다고 봐야 합니다. 여성은 82.4세쯤 된다고 합니다. 그게 사람들이 그 통계를 보면서 여성들이 ‘아, 내가 82.4세쯤 살겠구나.’ 생각하는데 착각입니다. 그것은 금년에 태어난 아이들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것보다 빨리 죽습니다. 설령 82.4세라고 칩시다. 그래도 절반은 그 전에 다 죽고 절반만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반에 내가 들어갈지 안 들어갈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그리고 내게 일어나는 일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미리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사건을 맞이하였을 때 어마어마한 통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사고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그 통증 때문에 사람이 못 살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육체가 부서지기 전에 정신이 먼저 부서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한 일이 나에게 내일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삶의 고통을 줄일 수 있습니다.
살아있기에 모든 것을 겪습니다. 기쁜 일은 순간이고 이상하게 슬픈 일은 오래 지속이 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은 시간이라는 대합실에서 비극이라는 열차를 기다리는 것과 유사합니다. 세상을 공평의 법칙으로만 설명하려고 들면 도대체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살 수가 없습니다. 평생을 악을 저지른 인간이 평안하게 죽고 꽃가마에 쌓여서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를 받으며 화려한 장지로 떠나고 의를 위해 온몸을 내던졌던 사람이 걸레처럼 던져져 짐승의 밥이 됩니다. 그러니까 공평과 정의 하나를 가지고 인생의 모든 위로를 삼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은 용기를 얻고 유신론자들은 확신을 잃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개인의 미래를 미리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불확실성은 신자에게나 불신자에게나 악인에게나 의인에게나 똑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악인은 무슨 삶을 살든지 거기에서 근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의로운 사람은,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고통은 똑같이 겪지만, 그러나 거기에서 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를 아주 죽지 않도록 만드는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 ‘근거없음’ 이것은 죽음과 커다란 불행 앞에서 그 죽음이나 불행 자체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것입니다. 더 비참한 것은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미친 마음으로 살다가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모든 일들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온전히 하늘 가치를 믿는 사람들만이 대지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습니다. 대지를 인정하면서 살아도 하늘 가치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확신이 깊은 사람만 자기가 신념하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품을 수 있는 여유를 갖습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 사랑이 올바른 사랑인가 반성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운명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정 하나님을 믿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그 믿음을 운명으로 데려가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스스로 운명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운명 따위는 개에게나 주라고 하십시오. 대지 위의 모든 삶에 진취성을 사라지게 하는 옴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운명은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있는 사람은 예수와 함께 손잡고, 확정되지 않은 내 인생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정론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예정된 것 아닙니까?” 성경을 잘 보면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서 말할 때, 앞을 보면서 예정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예정되었을까?’ ‘나의 30년 뒤의 인생은 어떻게 예정되었을까?’ 그러한 식으로 성경이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뒤를 돌아보면서 ‘내가 그렇게 19살의 인생을 끝내기 위해서 약을 먹고 죽으려 했는데 결국 살아났다, 그것이 알고 보니까 내가 죽으려고 했고 내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나는 진짜 죽으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살려 주셨고 그것도 알고 보면 나에게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삶의 고귀함을 가르쳐 주라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계획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정을 전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역망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도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이렇게 여러분들이 와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인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이것이 언제 흔들릴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는 우연인 것처럼 살았는데, 살아보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필연을 가지고 인도해 오셨다고 생각될 때, 그때 내가 여기에 서 있는 것이 아주 확실해 집니다.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걸어온 지나온 모든 날에 대해서 잘못 산 적은 있지만 후회할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과거의 하나님의 은총의 기억을 돌아보면서 내 마음에 불 지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운명은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이 우리 앞에 자유로 주어졌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살아보니까 나 자체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나 자체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더러운 욕망과 세상의 탐욕과 지상의 행복에 몰입하면서 살지만, 하늘에 대해서는 관점이 없기 때문에 네비게이션 없이 광야를 달려가는 트럭처럼, 그리고 인공위성의 GPS없이 망망한 대해를 항해하는 배처럼 갈 길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운명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개척하면서 살아가라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능성입니다. 그것을 나 혼자서는 도저히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로 내 마음에 가득 차는 그것이 참된 자아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병적인 자아와 건강한 자아가 언제나 둘이 투쟁을 합니다. 이 싸움은 죽어서 눈을 감는 그 날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만약에 적절히 우리가 싸워서 이기면 이 병든 자아가 있어도 있는 대로 살아갑니다. 조금씩 몸이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갑니다. 코로나 걸려도 이렇게 살아서 설교하지 않습니까? 살아가고 파도처럼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적으로 커져서 나를 뒤집어 버리면 살 수가 없게 됩니다. 병적인 자아가 나를 주장할 때 나는 자유인이 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개망나니처럼 날뛰어 살지만 내 삶은 정념의 노예가 된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노예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입니다. 그 싸움은 언제나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개척해 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그 삶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버이날이 되면 자식들이 부모님 가슴에 꽃을 달아줍니다. 돈을 많이 벌면 아주 멋있는 생화에 예쁜 리본이 달린 근사한 제품이 있습니다. 그것을 엄마들이 달고 나옵니다. 어떤 엄마는 그것을 안 달고 너무 촌스러운 것을 달고 나옵니다. 유치원에 들어간 딸이 어버이날 엄마, 아빠 가슴에 달아준다고 색종이로 오려서 유치원에서 만들기 시간에 만들어서 되지도 않는 풀칠을 해서 꽃을 만들고 꼬불꼬불한 글씨로 “엄마, 사랑해.”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결코 예쁘지 않다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비싼 생화를 다는 것보다 유치원 딸이 만들어 준 것을 달고 다니는 것을 더욱 기뻐합니다. 이 엄마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해 보고, 이 카네이션을 여러분들의 인생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훌륭하게 살았던 누군가의 인생을 살라고 그렇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든 작품 같은 인생이 하나님께 최고의 카네이션입니다. 그러한 자기의 인생을 해치면서 하늘 아래에서 의미를 생각하고, 대지 위에서 그 뜻을 찾으면서 이 지상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을 하찮게 여기면 안 됩니다. 몸이 없으면 여러분들의 인생도 없습니다. 평생을 매우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돌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여러분 자신의 몸을 아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여러분들의 인생도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이 내가 이렇게 해치면서 어떤 의미에서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나의 인생을 만들어 가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것을 너무너무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아모르파티’입니다. 유행가 가수의 ‘아모르파티’가 아니라 그것이 바로 운명에 대한 사랑입니다. 호메로스가 제일 먼저 이야기하였고, 나중에 이것을 니체가 인용하였습니다. 자기의 운명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찍이 인류가 누구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써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인생의 가치이고, 인생을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나은 방법이 있으면 여러분들이 찾아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은 ‘나? 대기업에 들어간 사람만 못해.’ ‘나? 금수저 물고 태어난 애만 못해.’ ‘나? 연봉 1억 받는 사람에 비교도 안 되는 3천만 원 연봉이야.’ ‘나? 좋은 승용차도 없어.’ ‘나? 예쁜 여자친구도 없어.’ ‘나? 공부도 많이 못 했어.’ 그것과는 작품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 가슴에 유치원 딸이 만들어 준 가짜 카네이션은 엄마에게는 세상에 어떤 생화와도 비교가 될 수 없는 존재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딸이 그렸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거기에 부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은 인류 역사에서 누구도 살아본 적 없고, 이후에 태어날 어떤 인간도 살아가지 않을, 누구도 살지 못할, 누구도 살도록 허락되지 않을 여러분들 자신의 삶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상품처럼 굴리는 사람들이 끊임없는 비교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제 기사를 보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명품 운동화인데 중고시장에서 4억 9천만 원에 팔린 운동화가 있었습니다. 노란색 운동화인데, 그것이 100켤레 한정판으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4억 9천만 원짜리 운동화를 신고 싶겠습니까? 그것이 아파트 한 채 값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삽니다. 왜 입니까? 다른 데에서는 의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돈이 많아서 그것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치를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대체적인 가치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샀다고 하는 성취감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속에 있는 정신상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작품으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상품화하는 것입니다. 상품은 새로운 것이 나오면 그 상품은 가치가 뚝 떨어집니다. 그 자체의 기억이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컴퓨터를 15년을 사용했는데 여러분들이 새로운 컴퓨터를 들여놓게 되었을 때 그 컴퓨터를 버리지 못하고 바꾸지 못한다면 컴퓨터가 소중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죽은 애인과 주고받았던 연서가 가득 들었든지, 아니면 비트코인이 남모르게 천 개쯤 있었든지,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없으면 그것은 쓰레기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많은 사람들을 상품처럼 대합니다. 의미는 없습니다. 그냥 옛날 사람, 이러이러한 이익을 주고받았던 사람, 인간관계, 그것으로 해석을 하고 끝납니다. 더 이익을 주고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싹 갈아탑니다. 환승 연애가 그래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러면 도대체 무엇입니까? 결국 자기 자신의 인생을 예술 작품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 인간은 결국 상품 취급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진부한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면서 시간이라는 커다란 돌멩이를 놓고, 한 손에는 정을 들고, 한 손은 팔을 걷고 망치를 붙든 것입니다. 그것을 깨면서 자신이 원하는 조각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조각은 비교 불가한 물건입니다.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 이래 하나만 있는 작품입니다. 더군다나 그것은 내 인생입니다.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이 누구에게나 반복되는 것이라면, 사람을 굳이 이렇게 만드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각각 다 다른 인생을 살 것이고, 거기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깔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러한 환상적인 빛깔을 보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라고 하는 존재를 창조하셨으니까, 나는 비교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월하다는 의미에서 비교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코 나는 다른 사람의 들러리나 서는 엑스트라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장인의 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다듬어 가는 기술이 바로 기독교 신앙에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 묻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이야기가 설교처럼 들리기도 할 것이고, 인생 강의처럼 들리고, 길고 지루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여기에 나의 피를 토했습니다. 내 뼈를 갈아 넣었습니다. 내 핏줄을 다 녹여 넣었습니다. 내 골을 다 갈아서 뿌렸습니다. 그 피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인생의 진실을 성경에 입각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행한 인생을 살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작품처럼 훌륭하게 태어난 인생을,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뛰어난 상품도 되지 못하는 인간으로서 그렇게 비굴하게 살다가 죽는다면 엄마, 아빠가 너무나 가엾지 않으십니까? 가엾은 어머니 왜 날 낳으셨냐고 물어봐야 소용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은 여러분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공장에서 만드는 것은 작품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상품이라고 부릅니다. 작가가 직접 만든 것이 곧 작품입니다. 이 작가는 작가라고 누가 인정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작품이라고 만들면 그것이 최고의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작품이 요구하는 것은 주체성입니다. 누군가가 사고를 가지고 나의 이러한 생각을, 사상을, 느낌을 담은 어떤 형체를 만들어야 하겠다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고, 그리고 조형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때리고 부수고 그리고 칠해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결국 여기에서 주체성의 문제가 대두가 됩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소확행을 추구하는 사람이 과연 자신의 삶에 주체가 되는 사람인가 묻고 싶습니다. 그것이 정말 주체성이 있는 것인가 묻고 싶습니다. 부자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부자들의 행동양태를 가만히 보니까, 어떤 사람은 부자는 엄청 구두쇠라고 부르는데, 제가 만난 부자들은 안 그렇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이 많으니까 펑펑 쓸 것이라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를 보고 놀라운 행동양식의 통일성을 발견하였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라면 한 그릇이 내게 지금 필요하고 만족을 주면 천만 원이라고 해도 먹습니다. 그런데 내게 필요가 없으면 금덩어리를 500원에 준다고 해도 안 삽니다. 철저하게 판단이 어디에 매여 있는가 하면, 나의 효용에 매여 있습니다. 주체적이라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도 이야기 하였습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나 독신이다. 나 돈도 좀 있다. 그래서 내가 노동을 안 해도 글을 쓰면서 먹고 살 수 있다. 그런데 너희들은 경제적인 여유 없으면 자유도 없다.” 그 삶의 허무를 이야기 한 철학자가 솔직 담백하게 털어 놓습니다. 부자들의 행동양태가 그러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의 필요입니다. 그것이 주체적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너무 좋다, 너무 유행이다, 행복하다고 이야기 해도 내가 동의하면 모두 안 해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동의를 해도 내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나는 과감하게 “나는 싫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거 사 놓으면 무지하게 돈이 되는데?” “내가 싫다고 하잖아!” 줄을 딱 긋는 것이 정신적으로 주체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생각할 때 돈이 많으면 다 주체적으로 될 것 같습니까? 권력이 있으면 주체적으로 될 것 같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소유의 유무, 지위의 높낮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정신상태, 자세의 문제입니다. 제가 직원들과 밥을 먹으러 가면 제일 싫어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자, 뭐 먹을래?” “아무거나요.” 나는 정색을 하고 묻습니다. “너는 왜 너의 의견이 없니? 안 된다. 우리 모임에서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먹을지 말해라. 너 자신의 자유의지로 결정을 해라. 짬뽕이니, 짜장이니?” 비싼 것을 말하면 안 됩니다. 돈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말해야 합니다.
주체적인 삶은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진 것 없고, 인류대학을 못 나오고, 인류 그룹의 직장을 다니지 않아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두 가지입니다. 너무 성격이 지랄맞고 까칠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무시하면 항상 문제를 만듭니다. 이것 말고, 그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무엇인가 확고한 아우라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천박하게 까칠하지는 않은데, 왠지 무시하면 안될 것 같은 엄숙함과 무게를 그 사람에게서 느낍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신에 있는 힘이 바깥으로 기운이 되어서 뻗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길거리에서 주차하다가 주먹다짐하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욕을 먹고 돌아서도 왠지 저 사람에게는 ‘욕 했으면 안 됐었다.’라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아우라, 그리고 무엇에도 요동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확고한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그 비밀이 바로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주체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체가 없는 사람은 영원히 얼라입니다. 변덕스러운 검은 고양이 네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결코 자유로운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주체성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 자기 한 일에 대해서 절대 책임을지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발뺌을 하고 핑계를 대고 빠져 나오려 합니다. 그럴수록 이 사람의 인생은 더욱 비참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주체적인 삶입니다. 거기에서 당신의 삶의 보람을 찾아야 합니다.
경건하지 않은데, 그러면 명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울합니다. 진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쾌활해야 하지 않습니까. 심각하지 않은데 쾌활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진지하지도 않습니다. 자기는 그것을 신앙의 깊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깊이가 아니라 인생의 무게를 더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늘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어떻게 그런 일이?’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어서 일어난 일이고, 남에게 가능한 모든 일은 나에게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을 빨리 해석하고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것이 아닌 시간에 매달립니다. 우리의 것이 아닌 시간이 어디입니까? 박막의 칼날 위를 시간이 흐르는데 지나가 버린 과거, 이것은 우리가 바꿀 수 없습니다. 고칠 수 없습니다. 되돌려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생각하느라 현재를 거의 누리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개나 주라고 그러십시오. 후회, 쓸 데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회한과 한탄, 모두 필요 없는 일입니다. 하고 싶었으면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했어야 합니다. 이미 일어났습니다. 지나갔습니다. 돌아보면 되돌아볼수록 현재를 낭비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또 우리의 것이 아닌 시간은, 미래입니다. 미래의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진짜 자기가 염려하는 일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도 물론 모릅니다. 똑같은 확률로 나쁜 일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진짜 모릅니다. 어떤 심리학자들의 레포트에 의하면 인간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미래에 대해서 너무 불안해하는 일들 중 통계적으로 10개 중 하나만 실제로 일어난다고 합니다. 놀라운 확률 아닙니까? “It’s OK!”를 노래했던 그 가수 영상에서 본 것 기억하실 것입니다. 뇌암에 걸렸는데, 0.2% 확률이 있다고 하면서 “It’s OK!” 얼마나 제로와 비교되는 확률인가 희망을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또 일어날 일이라면 우리가 막을 수 없고, 우리가 막을 수 없는 일이라면 염려할 필요가 없는데, 물처럼 흘러가는 현재라는 시간은 전혀 누리지 못한 채 과거에 매여서 끊임없는 후회와 오지도 않은 시간의 불안 속에서 떠나보내고 나면 지금 흘려 보낸 시간이 잠시 후에는 후회할 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면서 결국 자신의 인생을 창작할 기회를 모두 놓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그 시간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흐릅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흘러가 버립니다.
40대 싱글로 있는 청년들을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만났는데 삶의 의욕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목사님 몸이 옛날 같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막 웃었습니다. “갈수록 더 할 거다.” 그리고 “몸이 안 좋다고 하는데, 어디가 안 좋니? 원하는 데 너희들 마음대로 걸어가고 앉고 싶은 데 다 앉고, 가고 싶은 데 다 가고 살아가는데 나이가 더 들면 이제 가고 싶어도 못 가고 누군가 휠체어에 떠밀려 데려가지 않으면 갈 수 없이 병원에 갇혀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른 아침부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병원에 출입해야 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모든 인류가 다 그렇게 겪으면서 살았다. 오늘이 너의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다. 그것을 잊지 말아라.” 그런데 보면 몸을 위해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화장도 하고, 운동도 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도 먹고, 건강을 회복하고 싶으면 건강에 초점을 맞춰서 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하기가 싫습니다. 저절로 샘솟듯 솟아나는 건강은 10년도 안 됩니다. 10대, 12-13세부터 시작해서 여성은 23세부터 늙기 시작하는 것 아십니까? 거기에서부터 이제 떨어지는 것입니다. 남성은 25세부터입니다. 10년도 안 됩니다. 스스로 에너지가 발생해서 솟아나는 것은 그것 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는 지극정성으로 관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몸이 없으면 인생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들은 그렇게 내 것도 아닌 시간에 나 자신을 쏟아 부으면서 인생이 짧은 것이 아니라 내가 허비하는 시간 때문에 인생이 짧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늘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꿈꾸고, 때로는 이렇게 되기 위해서 신앙에 호소하기도 하지만, 현실은 번번이 우리의 신앙을 배신합니다. 그래서 현실은 우리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살다가 보면 예전에 우리가 정말 나쁜 일이요, 나의 상처라 생각했는데 ‘아, 그게 정말 필요한 일이었구나.’ 깨달을 때가 꽤 많습니다. 인생을 요만큼 밖에 안 살았는데도 여러분들 안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 우리도 다 알 수 없는 어떤 신비한 지혜 속에서 우리의 인생의 나쁜 것들을 좋게 만드는 요소가 우리의 인생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나쁜 일들의 의미를 당장 다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다 모를 때 조차도 하늘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좋게 해석을 하면서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신앙의 힘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깊이입니다.
욕심을 버리십시오. 땅 밖에 없는 것처럼 ‘소확행’이나 추구하면서 사는 곤충같은 삶에 거부의사를 분명히 하십시오. 그리고 또 다른 의미에서 나는 행복을 찾아 사는 사람이라고 선언하십시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매일 매일 은혜를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자기 인생을 하늘과 연관 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해석의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죽어도 그렇게 믿기 싫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하면서 인생의 허물을 극복하면서 살기 싫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가르쳐줄테니 도움이 되면 이것을 듣고 기독교를 끊으십시오.
어느 철학자가 자신의 이야기책 속에서 쓴 것입니다. 제목은 「수수께끼와 환영」입니다. 거기에 양치기 한 명이 등장합니다. 득도를 한 어떤 사람이 길을 가고 있는데 저 멀리서 양치기 소년 하나가 막 온몸을 미친 사람처럼 흔들고 있습니다. 왜 저러나 황급히 가보았습니다. 어린 소년이 양을 치니까 어린 젊은이쯤 되었을 것입니다. 나이가 몇 살인지는 안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팔뚝 두 개 겹친 것 만한 어마어마한 구렁이, 뱀이 양치기 소년 입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혓바닥이고 뭐고 깨물면서 물어뜯는 것입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가 뱀을 잡고 잡아당겨 보는데 뱀이 미끄러집니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얼마나 힘차게 대가리를 입속에 집어넣는지, 대가리가 크고 들어갈 때 빽빽하게 들어가서 안 나오는 것입니다. 득도한 사람이 미친 듯이 달려가서 이 무슨 일이냐고 뱀을 함께 잡아 당겼습니다. 뱀이 빠졌으면 좋았을텐데 이 뱀은 오히려 더 깊이 들어가고 절대 빠지지 않습니다. 그 순간 양치기 소년과 그를 도와 주려는 사람, 두 사람다 깊은 낙심이 빠지게 됩니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깨물어라! 물어 뜯어 버려라! 대가리를 아작을 내 버려라!” 득도한 사람의 귀에 말입니다. 그 사람이 그 것을 스피커처럼 재방송을 하였습니다. “양치기 소년이여, 물어뜯어라. 씹어버려라. 씹어서 아작을 내 버려라.” 그 이야기를 듣고 양치기 소년이 초인적인 힘이 불끈 솟았습니다. 확 깨물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무시무시한 뱀이 이 소년의 입 속에서 씹혀서 아작이 났습니다. 소년이 확 하고 뱉어 버렸습니다. 뱀 대가리 부서진 것과 피와 살점이 확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때 환한 빛이 이 소년을 둘러싸면서 이 소년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오는데, 이 소년은 예전의 양치기가 아니었습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이 뱀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아십니까? 수많은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차 있는데, 뱀은 영원의 상징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뱀이 매년 허물을 벗습니다. 그 자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영원히 계속됩니다. 무엇을 하면서 하늘의 가치를 다 부정하고, 대지만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고 하니까 턱 하고 걸리는 게 있는 것입니다. 걸리는 것이 뭐냐 하면 영원이라는 현실 아닌 현실입니다. 시간은 흘러도 결국 영원은 남는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나 자신도 그러하다라고 하는 영원에 대한 생각이 무서운 구렁이가 되어서 소년을 확 삼키는 것입니다. 해결책이 뭐냐 하면 그것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에이씨, 그 따위 개나 주라 그래.’하면서 확 씹어 아작을 내어 핏덩어리를 확 뱉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보기에는 어마어마한 순교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무신론자가 무신론을 극복을 하기 위해서 엄청난 인류 역사의 몇 사람이 보여 주지 못하였던 그러한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러니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이야기를 듣고 기독교를 끊고 살아가십시오. 살 수 있으면.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그것이 안 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살아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한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면 ‘소확행’ 따위에 감복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거나 세상의 허무주의에 빠져서 그렇게 퇴락의 길을 걷지 않습니다. 4억 9천만 원짜리 운동화를 사고 싶어서 목매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교회 바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만큼이나 생각이 없습니다. 50보, 100보입니다. 믿는 사람은 믿음이라는 풍조에 떠밀려 가면서 자기가 왜 믿는지 생각하지도 않고 한 시간 설교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분산되어 있습니다. 도를 찾는 사람들이 그게 무엇입니까? 부끄럽지 않습니까? 지금 피와 살을 갈아서 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졸음이 옵니까? 조는 것은 자유입니다. 인생의 고민이 더 길어질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언제 예수를 찾아 본 적 있습니까? 구도의 길을 찾았지만 구도를 걸어가 본 적 있습니까?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그들과 똑같은 상품의 삶을 살면서 키재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오늘날 명랑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삶의 이유입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 그것을 보면서 “당신은 이 소년처럼 했는가?”라고 묻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분명히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나는 이미 도달하였다 함도 아니요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라. 그 소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노라.”라고 말하였을지 모릅니다.
결국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답은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말도 되지 않는 현실을 해석하면서 살기 위해서 우리의 이성이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답을 얻어도 당연히 이 속에 있는 이 마음은 또 다른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 합치하기가 어렵습니다. 너무나 어렵습니다. 결국 어떤 문제에 도달하게 됩니까? 우리에게 있는 답은 그 소년처럼 그렇게 뱀 대가리를 씹어 아작을 낼 정신의 힘이 모자란다면,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때로는 슬픈 일이 일어나고, 어려운 일이 일어나고,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면서 내가 다 헤아릴 수 없는 내 인생의 의미가 하늘에 정초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속에 눈앞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심지어 내가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50대가 넘으셨는데, 열린교회 설교를 듣고 방송으로 은혜를 너무 받으셔서 지방에서 우리교회까지 올라와서 등록을 하셨습니다. 정말 말씀 하나 붙들고 행복하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 텐데 암에 걸리셨습니다. 치료하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결국 모두 무의로 돌아갔고, 그리고 이제 오늘 저녁이나 내일 길면 모레까지 사실 예정이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가 너무 큰 슬픔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이 어떻게 방황하다가 어떻게 열린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말 거룩하게 살고 삶의 모든 부분까지라도 하나님께 바치고 싶어 하셨던 분이셨는가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래서 한스러워서 물었습니다. “집사님, 두렵지 않으세요?” “뭐가요? 목사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잖아요. 뭐가 두렵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만나고 너무 행복하게 살았고, 걸어온 삶 발자국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간증이었답니다. 그리고 나는 오늘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는 그 하나님의 나라로 영광 가운데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활짝 웃어 주었습니다. 나는 매일 그분처럼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살아있는 동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로스처럼 죽는 순간에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여러분들에게는 그것이 의외의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서 해석의 능력을 키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리는 이 대지에 디디고 있지만, 이 대지 자체를 소망의 근거로 삼으면 우리의 존재는 참을 수 있는 가벼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둘 다 하기 싫다면 행복한 짐승처럼 살든지, 불행한 인간으로 살든지, 그것은 오롯이 당신의 몫입니다.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인생은 여전히 고통의 바다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내가 살아있는 것은 확실한 선물입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여전히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유효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 반복할 테니까, 가슴에 새겨두십시오. “인생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으나 통증은 선택이다.” “인생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으나 통증은 선택이다.” 아무 생각 없이 여러분들이 진리에 무관심한 채 인생을 성찰하지도 않고, 상품처럼 인생을 살고 생각 없이 교회에 다니면 어마어마한 통증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그를 파괴하기 전에 그가 느끼는 주관적인 통증이 그의 내면의 세계를 파괴해 버립니다.
우리는 흔히 멘탈이 강하니, 약하니, 그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정확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무감각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해피고 럭키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은 멘탈이 아닙니다. 생각없음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no mentality입니다. 멘탈없음. 멘탈이 있다고 하는 것은 맨정신으로 치열하게 사유하면서 인생의 죽음이라는 심연의 밑바닥을 내려다 보면서도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강함, 이것이 멘탈입니다. 그것이 강해야지만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이 어떻게 없을 수 있겠습니까? 아주 심하게 이야기 하면, 내가 내일 죽을 수도 있고, 내가 너무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이 떠올리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입니다. 젊은 어머님께서 혼자 되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해서 이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 어떤 자매처럼 결혼을 했는데, 불과 몇 년 만에 남편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이 아니라, 그게 공정하게 우리의 인생을 눈을 부릅뜨고 볼 때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묻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들이 절대적으로 예외가 되어야 한다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러한 불행이 여러분들에게 임하지 않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장벽이라도 치고 있습니까? 모두 빗겨가야 한다고 하는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이어령 교수의 말에 의하면 세 사람 중 한 명이 암으로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33%의 확률이 나는 빗겨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이성적인 근거가 아니라 그냥 자기 희망의 강렬한 바람입니다. 차마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생각한 적이 없는 사람은 그때 어마어마한 통증을 느낍니다. 고통이 그를 삼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통증이 그를 파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노회 목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 아들이 병원에 모시고 갔습니다. 진료를 받는데 “환자분 잠깐 나가 계세요.” 얘기를 듣고 아들이 걸어 나오는데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버지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뭐 그렇게 심각해 하니? 이름 가진 병이라고 하니?” 나이 드신 목사님이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도 목사입니다. 아들이 고개를 푹 숙이며, “네, 아버지.” “걱정마라. 치료 안 받는다. 집에 가서 저녁이나 먹자.” 그리고 돌아가시는 전날까지 아파트 앞에서 전도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멘탈 갑입니다. 다음 시간에 설교할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나는 지금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TV나 매스미디어에서 받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인생에 관한 관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많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통증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온갖 상상을 다 해 보는 것입니다. ‘내가 유언도 못 남기고 사고로 죽는다면?’ ‘내가 암에 걸린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데 이혼을 한다면?’ ‘나의 사랑하는 자식이 죽는다면?’ ‘부모가 돌아가신다면?’ ‘우리 집이 쫄딱 망한다면?’ 모든 것을 상상하고 마음에 다짐하는 것입니다. ‘아무 일이나 오라 그래라. 내가 맞이하겠다.’ 또한, 맞이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것을 바꿔 놓을 수 있다면 당연히 할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바꿔 놓겠습니까? 그것을 무엇으로 고쳐 놓겠습니까? 사고 일어나서 죽을 사람이 다시 한 번 그 길을 운전해보라고 하면 같은 사고가 나겠습니까? 안 납니다. 그런데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국 그것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담대하게 말합니다. 제가 매일 하는 훈련입니다. 불의의 일이 일어난다고 치자. 마지막에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오라 그래라.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면 큰 소리라도 쳐야지 가오가 안 빠지지 않습니까. 내가 그것을 고칠 수 있다면 쫓아가서라도 고칩니다. 내가 사정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라면 막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기도합니다. “하나님, 불의의 사고로 죽지 않게 하시고, 아내와 남편이 아픈데 죽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합니다. 기도해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할 수 있는 것은 ‘오라 그래.’ 우리는 운명을 믿지 않지만, 운명이 그렇게 지어져 있다고 한다면 ‘에이, 그러라 그래. 그것도 내 인생의 일부야.’ 어차피 문장의 마침표를 찍지 않고는 문장 완성이 안 되는 것처럼 죽지 않고는 우리의 인생도 마감이 되지 않습니다. 언제 찍힐지 모르는 마침표처럼 두 줄 만에 찍느냐, 다섯 줄 만에 찍느냐 그 차이입니다. ‘오라 그래라.’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근심과 걱정으로 둘러쌓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게 됩니다. ‘일어나려면 일어나라고 해.’ 그리고 마음속에 평정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왜 우리가 낙관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뱀 대가리를 씹어서 아작을 내서 그러한 억지가 아니라, 결국 우리는 태어나고, 살고, 늙고, 사고를 만나고, 불행해지고, 행복해지고, 심지어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는 것까지 모두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 품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 나의 삶이 허락하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나는 나의 인생이라는 예술작품을 만들어 가는 장인으로서 살다가 장인으로 죽는 것입니다.
가장 고귀한 것은 누구를 본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아주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위대한 위인은 내가 나로 살게 하기 위해서 참고 자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빛깔이 다른 광채를 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갑니다.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차지만, 그러나 자기가 갖는 신앙과 생각의 여부에 따라서 고통을 거의 안 느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 고통을 기쁨과 환희로 승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비밀입니다. 사람이니까, 헤어질 때 눈물이 나고 죽을 때 아쉬운 점도 있겠지만, 그러나 결국 이 세계 자체가 생성과 소멸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거기에서 내가 사라져 간다는 것은 또 다른 내가 잉태해 간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갈망하는 바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보석 한 개를 손에 쥐듯이 그렇게 소유할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은 오히려 자기가 정말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말하자면, ‘나’라고 하는 장인이 주체가 되어서 나의 모든 생각과 사상과 마음을 내 인생이라는 조각에 담으면서 완전한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 기가 막힌 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하는 기대 속에서 오늘도 물집이 터지는 손으로 망치를 두들기고 여기저기 잘못 두들겨서 얻어 맞은 멍든 손으로, 그래도 정을 붙들고 바위에 대는 용기, 그리고 두들기는 일관된 열심, 이것을 할 수 있는 의욕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그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시적인 이 세상의 기쁨이나 쾌락에서, 거기에서 어떤 환락을 맛보는 사람들은 결코 이러한 구원의 가치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행복을 찾아가면서 살 수 있다는 것, 이러한 것을 행복이라고 느끼는 것 자체가 내가 살아있다고 하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선물입니다. 기적과 같은 선물입니다. 오늘 아침에 창문을 두들기는 햇살을 받으면서 눈을 뜹니다. ‘아침이구나!’ 살아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한낮에 누군가를 만나고 한 끼의 식사를 합니다. 한순간 한순간을 예술처럼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 눈 뜬 그 아침이 어제와 똑같은 아침이면 그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은 무엇인가 달라. 어제 맛보지 못한 새로운 시간이.’ 그리고 아침에 자기를 살아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누구를 만납니다. ‘정말 시간이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아무개를 만나는구나.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한 끼의 식사도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기회입니다.
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미국의 어느 주에는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소원을 들어준다고 합니다. 살려달라고 하는 소원은 못 들어주지만, 사소한 소원 정도는 들어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면회하고 싶습니다.’ 라든지, ‘애인을 면회하고 싶습니다.’ 라든지, ‘담배를 한 대 피우겠습니다.’ 라든지, 그러한 소원을 들어줍니다. 그러면서 먹고 싶은 마지막 식사를 선택하게 합니다. 대부분의 죄수들이 스테이크를 선택한다고 합니다. 스테이크가 나옵니다. 마지막 세수를 하고, 깨끗이 씻고 새 집행복으로 갈아입고 마지막 식탁을 혼자 받습니다. 두툼한 스테이크가 따끈따끈한 소스가 위에 확 뿌려져 나오고, 여기에 야채가 나오고, 플라스틱으로 만들었을 나이프와 포크가 나옵니다. 평소처럼 스테이크를 자릅니다. 쓱싹쓱싹 잘라서 입에 딱 넣고, 오물오물 깨물어 먹습니다. 미국산 소고기의 독특한 질깃질깃한 육질과 힘줄, 고소한 기름이 함께 섞이면서 입안에서 액체가 되어 확 흩어지면서, 핏속으로 확 빨려 들어가면서, 정신에 새로운 기운이 확 돋아납니다. 한점 두점 먹습니다.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먹는 스테이크는 그 사람이 여태껏 먹었던 수천장의 스테이크, 수백번의 식사에서 맛보았던 스테이크와는 완전하게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 왜? 죽음이라는 문턱에서 마지막 차려놓은 스테이크입니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매끼를 그렇게 즐거워하면서 밥을 먹는 것입니다. 의미를 부여하면서, ‘아, 오늘 이 식탁은 나에게 말할 수 없이 식탁이다.’ 살기 위해서 겨우 때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스테이크가 아니라 비록 자장면 한 그릇, 볶음밥 한 그릇, 김치찌개 하나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대하면서, ‘아, 내 생애 한 번 밖에 없는 식사야.’ 매끼가 생애 한 번 밖에 없는 식사입니다. 더군다나 내 앞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친구가 앉아 있습니다. 그와 함께 먹는 이 식사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산책을 하면서 봄이 오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느낍니다. 철 이르게 피어난 프리지아와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을 보면서, 색깔로 내 눈을 꽉 채우고 들려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나는 소리로 내 귀를 가득 채우고 두 팔을 벌리면서 봄이 오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그때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이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게 진짜 질높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명품 백 하나를 사겠다고, 아침부터 백화점을 수건 돌리기 하듯 뱅글뱅글 돌아도 그것 하나만 명품이고 자기는 짝퉁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삶 전체가 명품이 되는 길을 찾아야지, 그것 하나만 갖다놓고 명품을 꿈꿀 수 있겠습니까. 가장 훌륭한 작품은 자기 이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인생보다도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도 맹목적인 희생이 아니라, 자기라는 작품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살아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느끼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있었는데, 빨간색 색맹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는 떡볶이가 하얀 물건으로 느껴집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빨간 떡볶이의 빨강을 느낄 수 있는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사물들과 물상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채우면서 내 안에 삶의 의욕을 북돋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정말 어제 죽은 사람에게 미안하다.’ 이 마음을 가지고 오늘 하루를 내 인생이라는 작품을 아름답게 써 가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천국은 세상보다 완전하지만, 지상에서 누리는 기쁨은 여기만의 고유한 것이고 우리는 두 발을 대지에 딛고 살고 있습니다. 하늘의 복락을 참되게 바라는 사람은 현실의 고통을 피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늘의 기쁨을 이 대지에서 앞당겨 살고 맛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산자들 중에 들어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하늘의 관점에서 대지를 바라보고, 대지의 관점에서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억지도 살아가는 것처럼, 하기 싫은 숙제를 하는 것처럼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는 내 인생이라는 예술작품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너무너무 고결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세상에서 자기를 즐거워하며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살아있는 인간의 행복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큰소리로 읽어봅시다. 시작.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있음에 너무 감사하면서 특권처럼 매일매일 살아있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살아있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 하는 것을 느끼면서 더 많이 보고, 듣고, 즐거워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내 인생의 의미와 대화하면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나, 그러나 그것에 의해서 내 인생이 뿌리 채 뒤흔들리는 것 같은 근본이 없는 인생을 살지 않겠노라고 하며 살면서, 자신의 사유에 자신의 피를 갈아 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쓸 수 없는 자신의 인생의 작품을 써 가는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내세적 금욕주의나 현세적인 방탕주의는 어떤 것도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내일은 없는 것처럼 오늘을 살거나 오늘은 없는 것처럼 내일을 꿈꾸는 것도 모두 허망한 것들입니다. 결국 지혜자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삶의 지혜를 요약하면, 하늘이라는 지평과 대지라는 지평이 이러한 식으로 융합이 되면서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창조하셨고, 네 인생의 목적을 주셨음을 잊지 말아라. 괴로운 날이 있겠지만 명랑하게 살아라. 일찍 죽은 사람을 부러워 하지 말라. 오래 살면 괴로운 일도 그만큼 많겠지만, 오래 살면서 즐거운 인생을 살아라. 이것이 너의 인생의 행복이다.” 라고 말입니다.
살아서 눈을 뜨면 오늘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비하게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특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살아있는 것을 누리십시오. 그래도 내가 살아있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지만 살지 못한 그 날이 아닌가. 그리고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내가 세계를 느끼고, 지상에 있는 모든 사물을 감각하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만나고, 심지어 이 세상에 험한 꼴을 꼴을 보고 사는 것 조차 감사하십시오. 왜냐하면 그 험한 꼴을 보면서 내가 가진 신앙이 얼마나 고결한 것인가 깨닫고, 정말 이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 아닙니까? 너무 감사하면서 하루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사람과 함께 한 시대를 살아가지만, 누구에 의해서도 휩쓸리지도 않고, 누구의 노예도 되지 않고, 누구의 종, 누구의 하인, 누구의 수종자, 누구의 똘마니도 되지 않는, 나만의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발을 땅에 굳게 디디고, 두 손을 향해 하늘을 들고, 하늘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은 사람으로서 두 발을 딛고 사는 이 세계를 긍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나는 왜 이러한 집안에서 생겨났을까?’ 이러한 소모적인 쓸데없는 고민들은 모두 개나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땅을 디디고 있는 이 현실을 깊이 인정하면서, 자기가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긍정하는 그것으로부터 여러분들의 인생이 출발하는 것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긍정하지 못해서 자신의 인생을 출발도 하지 못한 채 방황하다가 인생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매일매일 회개 기도하라고 우리를 불러주신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마음으로는 동의하지도 않는 죄를 입으로 계속 주절거리면서 형식적으로 회개하라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말고, 심지어 당신 자신에게도 속박받지 말고 자유인으로서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도 현실은 긍정해야 합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그래도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긍정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회개의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진솔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한번 넘어졌다고 해서 거기에서 밟혀 죽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정말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기까지 그렇게 사랑하셔서 여러분들을 사셨지만, 그것좀 희생하고 길러 줬다고 여러분들의 인생의 목을 비틀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그러한 불학무식한 우리의 부모들을 닮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한없는 자비를 베푸시고, 그리고 우리가 그릇된 길로 갈 때는 때로는 때리시고, 어루만지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예수와 함께 주체적으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떠나가고 나면 결코 반복되지 않을, 보석처럼 고귀한 나의 인생을 일분일초도 남기지 않고 내가 살아있음의 의미를 찾으며 그 의미를 나의 온 삶으로 구현해 내며, 그 작품성에 있어서 나는 인류 역사에 빛날 한두개의 작품속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미켈란젤로는 미켈란젤로이고, 나는 나지.’ ‘다빈치는 다빈치이고 나는 나지.’ 내가 그들을 흉내 낸들 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 되겠습니까?
내 인생에는 아무 관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남에게 임시로 보여 주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인생이 이렇게 살면 불행해진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부정적인 교화거리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나처럼 살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긍정적인 교화의 모사체로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나는 오직 한 분의 관객으로 충분합니다. “네가 거기 있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네가 그렇게 살았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네가 태어나지 않은 세상 보다는 네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창조한 세상이 더 예쁘게 되었단다.”라고 말해 주실 수 있는 한 분이 계시면 족한 것입니다. 내가 넘어졌던 때를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 해도 나는 상관없습니다. 내 인생이 거기에서 끝났으면 손가락질해도 좋지만, 나는 일어섰고, 그리고 나는 변함없이 내 길을 갑니다. 거기에서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으며, 거기에서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장래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과거에 이미 주어지고 일어난 것은 내 힘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그것들이 내 인생에 교훈은 주지만, 그것들이 나의 올무가 되어서 현실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게 할 것이라고 하는 모든 저주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 저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라.’ 그야말로 나는 그 목동처럼 모든 저주들을 이빨로 씹어서 아작을 내서 뱉어 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한 사람으로서 살아있는 자존감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20시간 준비했습니다. 내 혼을 갈아 넣었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들이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그리고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인지, 온 천하 모두를 주고도 결코 살 수 없는 고귀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인지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를 그렇게 존귀하게 하는 근원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만드셨기에, 주님이 보고 계시기에, 내가 주님 앞에 살기에, 그리고 ‘나’라는 ‘내 인생’이라는 이 예술 작품이나 누구도 대신해서 만들어 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인생에 유일한 창조자로서 완전한 자유를 꿈꾸며 그 예수의 손을 꼭 붙들고, 우리의 길을 오늘도 걸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삼켜 버린 불행한 일, 내게 일어나겠으면 오라고 하십시오. 고통스러운 일 생겨난다면, 생겨나게 내버려 두라고 하십시오. 나의 창작하는 영혼은 이미 내 마음속에서 거대한 불길이 되어서 그까짓 고통이라는 물방울이나, 혹은 장난처럼 내던지는 한 바가지의 불행이라는 물 따위에는 꺼질 수 없이 타오르는 불꽃이 되고 있으니, 그까짓 것 오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흔들림 없이 우리는 걸어갑니다.
양치기 소년은 가보지도 않은 어두운 미지의 영혼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뱀 대가리를 아작을 냈지만, 우리에게 불확실한 미래가 아닙니다. 천국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품에 있다는 것,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주님이 나보다 날 더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나는 믿으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나를 꺾을 수 없다고 믿으면서 그 예수 때문에 한 발자국 뚜벅뚜벅 옮겨 놓는 것입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올 종말이 아니라 내일까지 남아있는 오늘 하루에 감사하면서 뚜벅뚜벅 걷노라면 우리의 아우라를 불행도 알고 피해 가지 않겠습니까? 운명도 우리의 아우라에 눌려서 엎어지지 않겠습니까? 살아있는 날 동안에 삶을 누리십시오. 말할 수 없이 즐거워하십시오. 죽은 모든 사람에게 삶을 자랑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사십시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우리의 인생이 여전히 끝날 그 순간까지 누구에 의해서도 누추하다고 여김을 받지 않는 그러한 당당한 자유로운 주체로서,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나 비록 가진 돈 많지 않고 권력이 탁월하지 않고 미모가 빼어나지 않고 가문이 훌륭하지 않아도 누구도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으며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나처럼 방황하던 사람들에게 웃으며 등을 두들겨 주며 “괜찮아. 괜찮아. 한 번쯤 넘어진 것 괜찮아.” 그러면서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너그러움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예수를 전하는 동기가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들은 너무너무 아름다운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너무 소중한 존재이니, 소중한 하루를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왜 내가 울어야 하나?
-삶의 불행을 뻥 차버리는 길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삼하 12:15-23)
바다는 멀리서 보면 그저 수평선이 있는 큰물일 뿐입니다. 드넓고 고요해 보이지요. 그러나 작은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보면 전혀 다른 얼굴을 만납니다. 끊임없이 바람이 불고 쉴 새 없이 파도가 칩니다. 때로는 질풍과 노도로 가득합니다. 인간에게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 때문에 혹은 세상의 불완전함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인류의 고통을 줄이려는 노력은 고귀합니다. 불행은 피할 수 없고 거기엔 항상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통증은 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훈련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삶을 위한 대비책입니다. 불행 한번 만났다고 거기서 소중한 인생을 끝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번 주일설교는 <내가, 왜 울고 있나? - 인생의 불행을 뻥 차 버리는 길>입니다. 내용은 무겁지만, 인생만큼 무겁지 않습니다. 그것을 설교는 쉽게 다루지만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울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정신을 집중 한 채로 말씀을 들으십시오. 마침내 당신의 인생을 살아갈 지혜의 빛과 사랑의 힘을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하나님이 당신을 너무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의 노예 김남준
I. 본문해설
고통이 없는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마치 파도가 없는 바다를 상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삶 자체가 고통인데 어떻게 불행이라는 파도가 없겠습니까? 그런 상상은 단지의 강력한 희망의 욕구일 뿐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잠시 잠깐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하는 아주 작은 불행으로부터 절망의 벼랑 끝까지 나를 내모는 큰 불행에 이르기까지 항상 만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신자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불륜 관계에 있던 밧세바와 동침해서 낳은 어린아이가 죽는 장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간절히 금식하며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칠 일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결국 속절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생애에 이처럼 큰 불행이 어디에 있습니까? 많은 비극과 슬픔을 만나고 상처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았지만, 그러나 이보다도 그에게 가슴 아픈 일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자신의 삶을 계속해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연(敢然)히 일어서서 자기의 가던 길을 걸어감으로써 우리가 아는 믿음의 사람 다윗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II. 삶의 불행을 뻥 차버리는 길
누구나 다 이런 삶의 불행을 만납니다. 그런 삶의 불행을 어떻게 생각하고 다루어야 하겠습니까? 다윗은 그 아이를 너무 사랑했습니다. 만약 살릴 수 있었다면 자기 목숨도 버렸을 것입니다. 다윗은 심성이 상처받으며 외롭게 성장해 왔기 때문인지 그의 자식 사랑은 유별났습니다. 그에게 반역을 일으켰던 아들 압살롬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뱃속으로 낳은 아들이 아버지 다윗을 죽이고 왕이 되겠노라고 반역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동지처럼 함께 따라다녔던 군인들도 배신하고 다윗을 향해 칼을 겨누었습니다. 그 자식은 천하의 역적이었습니다. 더욱이 왕궁을 차지한 후에는 아버지가 거느리고 있던 후궁들과 대낮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동침했던 인간쓰레기였습니다. 그렇게 반역을 일으켰던 무리들이 토벌되었다는 승전의 소식은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다윗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런 인간 말종 같은 자식이 죽었을 때조차도 다윗은 그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삼하 18:33)
그렇다면 다윗은 사랑했던 여자 밧세바에게서 낳은 바 되어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가던 그 어린아이를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했겠습니까? 우리말 성경에는 그냥 '아이'라고 나오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아들'로 나옵니다. 그리고 남자아이였습니다. 그러니 다윗에에 그 아이가 얼마나 아까운 아이였겠습니까? 그 당시는 더군다나 남아(男兒)를 선호하는 시대였으니, 다윗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에게 아마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서 절망하고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불행을 다루면서 이 험한 인생의 바다를 지나야 할지 본보기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A. 경계를 분명히 하라
먼저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일과 그럴 수 없는 일에 대한 경계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다가오는 불행을 막을 수 있다면, 그리고 이미 일어난 불행 중 무언가를 바꿀 수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에너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 가능성이 0.001% 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자기의 인생을 사는 자세입니다.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어떠한 희망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아이가 병들었습니다. 나단 선지자에 의해 이 아이의 죽음은 이미 예고되었습니다. 비록 불륜을 통해 낳은 자식이었지만 다윗의 애정은 각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안타깝게 매달렸습니다.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삼하 12:16) 얼마나 간절히 매달렸던지 신하들은 다윗의 건강을 염려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저러다 우리 왕이 쓰러지셔서 결국 돌아가시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늙은 신하들이 가서 왕을 부축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고정하시라고 일으켜 세우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그 간청을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그 아이와 함께 죽기로 작정한 아비처럼 그는 처절하게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다윗은 비록 아이의 죽음이 예언되었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불쌍하게 보셔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다윗이 험한 인생의 바다를 헤쳐 오면서 한두 번 겪은 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20장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히스기야 임금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길이 남을 선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왔습니다. 그리고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하나님의 또 다른 말씀이 임했습니다. "돌아가라, 히스기야에게 가서 15년을 더 산다고 전하거라."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정녕 죽으리라" 선지자가 선언하고 난 다음에 히스기야 왕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벽을 향하여 마주 앉아서 그는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하나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가 조금만 더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었습니다. 아마도 죽는 것이 무서웠을 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뛰어난 청사(靑史)에 길이 남을 만한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자기가 죽으면 혼란하게 될 이스라엘의 역사를 미리 바라보고 나라를 위해서, 이 백성을 위해서 좀 더 살기를 간구했던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의 울부짖는 기도를 불쌍히 여기셔서 뜻을 바꾸신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도 그 뜻을 바꾸실 것이라고 다윗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당신에게 불행이 다가올 때 무력하게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지만 사실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결코 자기의 인생을 책임 있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지 누구도 여러분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살아있는 한 자신의 인생이라는 작품을 완성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온 불행, 그리고 이미 닥친 불행이라도, 그것을 줄일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막고, 최선을 다해서 방어해야 됩니다. 그게 안 되면 불행의 방향이라도 바꾸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한번 밖에 없는 여러분의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불가항력적일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이 찾아온 불행, 그리고 도저히 피할 수 없이 운명처럼 다가오는 불행도 있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맞이해야 합니다. 그게 불행을 뻥 차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그 불행 속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비웃듯이 이겨내며, 결국은 나의 인생을 완성해 갈 수 있겠습니까?
B. 불행의 통증을 줄이는 법
우리가 불행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불행 자체가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불행은 모두 고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불행의 고통이 우리를 똑같이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자매가 자살을 했습니다. 740 만원을 보이스피싱 당하고 자살했습니다. 그 돈은 사실을 그 자매에게 전 재산이었습니다. 정규직도 못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모은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이스피싱 당해서 모두 날렸습니다. 자살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꽤 큰 사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쫄딱 망했습니다. 결국은 살던 집까지 빼앗기고, 월세로 나앉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불행의 크기가 740 만원 날리는 불행의 크기가 큽니까? 아니면 수십억을 전부 다 날려버리고 가족과 함께 단칸방으로 내쫓긴 불행이 더 큽니까? 총량(總量)적으로 볼 때,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후자가 훨씬 더 큽니다. 그런데 이 형제는 신앙은 별로 없었지만 낙관적입니다. '아. 힘드네요.' '아. 정말 힘드네요.' '몇 번 이런 일을 당해 봤지만, 진짜 힘듭니다.' '근데 어떻게 해요.' '사업을 하다보면 돈을 벌 때도 있고, 쫄딱 망할 때도 있죠.' '산 입에 거미줄 칠하겠어요?' '다시 열심히 살아야죠.' 불행의 크기도 다르고, 통증을 느끼는 것도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면 불행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우리는 노력해서 막아야 됩니다. 오늘 내가 너무 이 음식을 좋아하는데 절제를 하는 것도 미래의 불행을 막는 길입니다. 밤에 끝나고 나면 진짜 운동하기 싫습니다. 그런데도 6킬로, 7킬로 걷는 것은 내가 좋아서라기보다도 그렇게 안 함으로써 나중에 찾아올 건강을 잃는 불행에서 내가 치러야 할 대가보다는 이게 가벼운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야 됩니다.
그러나 때론 이런 걸로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불행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이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통증을 줄이도록 훈련되는 것입니다.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해병대가 너무 멋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훈련이 세기로 유명한 데가 해병대와 공수부대입니다. 물론 UDT라든지 (더 특수한 부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그 두 부대가 대표적입니다. 해병대를 너무 가고 싶어 했습니다. 선배를 만났습니다. 해병대 출신 선배입니다. '선배님, 나 해병대 가고 싶은데.' '해병대 어때요?' '어휴, 너 거기 가지마.' '거기는 사람이 갈 데가 아니야.' '너무 힘들어.' '왜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니?' '그냥 논산으로 가.' 그래도 해병대가 너무 멋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선배를 만났는데, 선배가 해병대가 얼마나 훈련을 무섭게 하는지 얘기를 해주는데, 다음 얘기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입니다. 옛날이었습니다. 30년, 40년 전 일입니다. '많이 죽어.' '내 동기들도 줄 타다가 두 명이나 떨어져 죽었는데 신문에도 안 나오더라.' 그래서 자신은 도저히 해병대 갈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고 싶었습니다. 6개월 동안 선배를 만나서 해병대가 얼마나 고생스러운지 얘기를 다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막상 해병대를 갔습니다. 그래서 이제 바짝 졸았습니다. '아, 내가 훈련 3일째에 죽을 수 있다.' 가서 훈련을 다 받고 끝났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면, '말한 것보다 그렇게 힘들진 않네.' 그게 왜 그런 것입니까? 6개월 동안 쭉 들으면서 정신 훈련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텔레비전을 켜면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와 정반대입니다. '좋은 것만 생각하세요.' '당신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개뿔, 문 열고 나가는 소중한 존재가 아닌데, 현실이 나를 그렇게 대우를 안 해줍니다. '꽃길만 걸으실 겁니다.' 자꾸 좋은 얘기만 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처럼 이렇게 진실한 얘기를 해 주면 텔레비전을 끕니다. 그러면 광고가 안 들어옵니다. 광고가 없으면 돈이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탤런트들 월급을 못 주고, 아나운서들 생활비를 안 줍니다. 방송국 운영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장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진실을 들려주면 장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팩트(fact)입니까? 진짜 우리의 앞길에 꽃길만 있습니까? 좋은 것만 생각하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까? 잘 될 거라고 스스로 어깨를 다독이면 진짜 잘 됩니까? 그런 미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팩트(fact)는 팩트(fact)고, 다독이는 것은 자기가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상상을 해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으면, 좋은 얘기만 계속 듣는 사람에게 왜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전해오는 이런 이야기들을 간파면서 그 의도가 무엇인가라는 것을 읽어 내고, 거기에 물들지 않으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주체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의 통증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이런 얘기를 할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해 놓고 왜 우리 보고 자꾸 어려운 일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하십니까?' 그것이 같은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과 거기에 사로잡혀서 자기가 삶에 지장을 받고 정신이 무너지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나라가 전쟁을 할 때 전쟁하는 지휘관이 전투에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하고 전투를 시작하면 미친 장군 아닙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어떤 경우에 우리 가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지 이깁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 얘기이기 때문에 두 이야기가 모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 미련(未練)을 버리라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이 뭐냐면 미련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말입니다. 이미 일어난 불행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미련을 버려야 됩니다.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의 시간에 충실하지 못하면 결국 오늘 그렇게 흘려버린 시간은 내일 과거가 되고, 여러분은 내일이라는 현재에서 또 과거를 염려하게 됩니다. 결국은 하루도 현재를 살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은 현재라는 칼날 위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과거를 회고함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이미 처한 불행으로 현재의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죽은 자식 만지지 마십시오. 묻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인정하십시오. '인생의 1막은 내가 졌다.' 그리고 딱 막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뒤에 가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다음 막을 준비하는 배우가 되십시오. 그리고 3막에 올라서는 2막에서 실수한 것 모두 잊어버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3막을 연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3막에 등장한 배우가 2막의 실수를 곱씹고, 4막에 등장해서 3막과 2막을 곱씹으면서 어떻게 연기를 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조명이 꺼지고 막이 내려도 관객 중 아무도 박수 치지 않습니다. 그런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아이는 죽었습니다. 다윗은 왕궁으로 돌아와서 음식을 차리도록 명령했습니다. 일주일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했으니 왕을 위해서 얼마나 정성스러운 식탁을 차렸겠습니까? 왕의 식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비로서의 사랑이 부족했던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를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일어난 불행에 묶여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다윗은 오랜 훈련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일어난 불행한 일에 그의 정신이 묶여 버렸다면 이미 오래전에 그는 폐인이 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가시밭길 같은 인생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일(一)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 자기를 조금도 아껴 주지 않는 형들, 그리고 무시하는 가정의 풍조, 자기를 사랑했던 여인에게서조차도 버림을 받고 무시당하는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심지어 이후에 아들이 반역을 일으키고, 자기가 가장 믿었던 군인들이 반란의 대열에 동참하고, 자기 뱃속으로 낳은 딸이 자기 뱃속으로 낳은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소식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만약에 그것에 그의 정신이 다 사로잡혀서 묶여 버렸다면 과거에 체포가 되었다면 그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살해 버리든지, 정신이 돌아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이 바로 훈련이 가져다준 믿음이었습니다.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받은 정신의 훈련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불행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대부분의 사람은 사실은 불행이 망친 게 아니라 통증이 망친 것입니다. 똑같이 불행한 집에 태어났는데, 한 아이는 그 불행을 딛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아이는 불행한 가정환경을 탓하면서 계속해서 인간의 밑바닥을 훑으면서 삽니다. 결국 차이는 통증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불행이 우리를 부서뜨린다고 하더라도 그건 우리의 몸 밖에 못 부서뜨립니다. 내가 빈 몸으로 도로를 건너는데 120킬로로 차가 달려오면 내가 부딪혀 충돌해서 그냥 죽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밖에 우리를 못 죽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통증은 우리의 몸이 하나도 상하지 않았는데 우리의 정신을 다 파괴해서 폐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불행을 뻥 차서 축구공처럼 날려버리는 방법,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게 가능하면 누구나 축구를 배워서 다 날려 버리지, 어디 있습니까?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고독, 외로움, 무일푼, 부채(負債), 환승연애를 풍선으로 만들어 놓고 발로 차서 터뜨리는데, 생쇼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터뜨리고 발로 차서 날아가는 불행일 것 같으면, 이 세상에서 누가 불행해지겠습니까? 인생이 그런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국은 자기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정신의 근력을 키워야 되는 것입니다. 통증을 안 느끼게끔 (키워야 합니다.)
2014년도에 수술을 했습니다. 4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처방을 내려 주는데 간호사가 와서 '환자님, 이 약은 진짜 아플 때만 드셔야 되요.' '마약입니다' 작은 병원에서는 주지도 않습니다. 진짜 마약입니다. 야전에서 폭탄이 날라와서 툭 하고 팔 하나가 날아갑니다. 그럼 막 미친 듯이 병사가 (고통 때문에) 죽어 갑니다. 아직 팔 하나 끊어졌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지혈을 했는데 통증이 너무 심합니다. 그러면 그때 놓는 게 마약입니다. 아주 강력한 마약을 주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뭐냐면, 전쟁터에서 팔 다리가 부러졌을 때는 마약이 통하지만, 인생에서 통증을 이기는데 마약을 사용했다가는 큰일 나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통증을 못 이겨서 마약 주사를 다섯 번만 맞으면 약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안 아파도 그거 없이 살 수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약이 (그런 것입니다.) 해 보셨습니까? 마약의 중독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만약에 중독이 되면 환각이 오고, 통증이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대신 뭐냐면 자기의 인생을 사는 주체는 될 수 없습니다.
'소확행(小確幸)', 마약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먹지도, 입지도, 마시지도 말라고 말하는 게 아니란 거 아실 것입니다. 기분 좋게 한 끼를 먹고, 친구와 함께 산책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멋있게 사십시오. 인생을 즐기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하늘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식의 소확행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소확행이 하늘의 의미를 못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마약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오락, 뭐가 나쁩니까? 권하지는 않지만, 절제하면서 게임 한 판 하는 거, 저는 안 하지만, 권할 생각도 없지만, 나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춤이나 노래를 배우고 한번 재밌게 놀아 보는 거, 뭐가 나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자기 인생의 의미를 하늘에 비추어서 생각하는데 방해할 정도가 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게 정신의 근육을 길러서 통증을 덜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자기가 무장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자산입니다. 꽃길만 걷는 사람 절대 없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행복한 일만 일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생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플래시(flash) 세례를 받으며 꽃가루 뿌림을 받는 때는 인생에 하루밖에 없습니다. 결혼식 하는 날, 하루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30분입니다.
다윗은 아이가 죽은 다음에 왕궁으로 돌아와 근사한 식탁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신하들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대답합니다. "···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삼하 12:22)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삼하 12:23) 깨끗이 그 아이와 마음의 인연을 끊은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여러분이)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정신의 힘이 강해지는 비결입니다. 아이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쉽게 마음을 접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의심하게 됩니다. 진짜 그 죽은 아이를 사랑하긴 사랑한 걸까? 7일 동안 드린 눈물의 금식기도는 진심이었나? 의심하지 마십시오. 다윗의 기도는 진심의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을 때 그는 미련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미련을 남기고, '이랬다면 이랬을 텐데.' '이렇게 했어야지, 이렇게 되는 거였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렇게 하면서 인생을 허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깨끗이 딱 정리하고, 새 인생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 때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안드레아 보첼리가 어렸을 때 축구를 하다가 친구가 찬 공에 얼굴을 맞았습니다. 그 축구공에 두 눈 자체가 터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시력을 회복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회복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신력이)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내가 이제 눈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극복하는 데 1시간 동안 흠뻑 눈물을 쏟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나는 보지 못해도 살아가야 된다고 다짐했다.' 그게 그 사람을 결국 파바로티 음악회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하고, 크로스오버 뮤지션(Crossover Musician)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만들어서 세계적인 팝페라(Popera)의 거장이 되게 만든 정신이었던 것입니다. 미련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미련을 가질 그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해서 현재 일에 쏟으십시오. 그러면 내일은 오늘처럼 시름에 잠기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2. 현실(現實)을 대면하라
두 번째는 현실(現實)을 대면하라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이 일어났어도 현실을 먼저 생각하십시오. 과거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 접어 버리십시오. 지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십시오. 당신의 인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살아있다면 살아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살아가지 않았다면 결국 그 고통을 내일 다시 돌려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이의 죽음이 예고되었지만 다윗은 그렇게 울며 매달리면 하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죽었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즉시 미련을 버리고 아이를 잃은 그 현실에 직면했습니다. 당신에게 다윗처럼 불행한 일이 일어났고, 당신은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지난 과거 말고, 오직 모든 힘을 다해서 오늘 현실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당신 앞에 펼쳐진 현실을 살아낼 사람은 오직 당신 자신밖에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밤하늘의 불꽃처럼 화려하지 않은 생(生)이어도 상관없습니다. 수많은 관객이 박수 쳐주는 무대 위에 인생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너무 고귀하게 생각하고, 이것이 아무도 할 수 없는 나만의 작품을 만드는 길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 어떤 카네이션보다도 여러분이 살아온 인생의 발자국에 새겨진 작품과 같은 카네이션을 기쁘게 달아주시는 엄마라고 생각해보십시오.
피할 수 없이 불행을 만났을 때 아주 중요한 팁(tip)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어떤 불행을 만나서 도저히 살아갈 힘이 없을 것 같을 때는 당신에게 살아갈 힘을 줄 수 있는 방식으로 해석을 하십시오. 그게 응급처치입니다. 전쟁터에서 다쳤을 때, 위생병이 의사가 아닙니다. 응급처치 요령이 있습니다. 그걸 따라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응급처치를 한 후에 병원으로 후송을 하는 것입니다. 응급처치가 안 되면 병원에 와도 이미 죽었습니다. 그 응급처치가 뭐냐 하면 어떤 어려움을 만나고 너무 힘이 들 때 똑바로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여러분에게 살 힘을 잃어버리게 하는 방식으로 해석하지 말고, 살 힘을 주는 방식으로 해석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그런 해석을 해야 됩니다. 그게 응급처치입니다. 다른 이들이 겪는 모든 불행이 여러분에게는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달려오는 열차 앞에서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열차 없다'라고 얘기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현실이 아닙니다. 다가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은 죽고, 병들고, 이혼하고, 고통 받고, 사고가 나고, 그리고 갈등 속에 사람들과 헤어지는 일들이 지금 예배드리는 시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왜 나는 안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까? 오늘 34분마다 한 사람이 자살을 하는데,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뉴스가 안 됩니다. 오늘 아무도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뉴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그런 일을 당한 사람도 몇 달 전까지는 우리처럼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런 일은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어났습니다.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불행과 고통을 당할 때 이게 나만 새롭게 겪는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부모, 친구, 그리고 지인, 심지어 모든 인류가 겪으면서 살아온 그 길을 나도 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게 저한테는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외국에 나가면 예쁜 카페도 물론 가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거 보다 제가 더 좋아하는 곳은 역사가 많이 서려 있는, 그리고 지금은 약간 폐허 비슷하게 된 곳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스코틀랜드 같은데 가서 그런 유적지를 가만히 바라보면 수많은 사람이 그 모진 바람 속에서 힘겹게 자기의 인생을 살았던 그림이 다 떠오릅니다. 그리고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내가 얼굴도 모르는 그 많은 세대를 살고 갔던 외로운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모질고 거친 들판에서 한 줌의 곡식을 생산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씨를 뿌리고, 자연과 싸우고, 심지어는 쳐들어오는 외적들과 싸우면서 힘겹게 자신의 삶을 지탱해 가던 가엾은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서 내가 지금 여기에 서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때 아주 아련한 동지애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인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불행을 피할 수 없는 아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와 같은 존재임에는 우리 모두 마찬가지라는 사실 때문에 동지애가 느껴집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능력이 거기 밖에 안 되는 거니까, 거기서 멈추십시오. 너무 두렵고,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나의 삶을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이 겁이 나면 멈추십시오.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 불행에 대해서 생각하십시오. 아주 작은 게 내 맘대로 안 되는 것부터, 아침에 통근 버스를 놓치고, 그리고 내가 예약한 식당이 잘못 예약되어서 식당에 못 들어가는 작은 상상부터 시작해서, 내가 실직을 하는 일, 내가 큰 병에 걸리는 일, 그리고 식구들이 사고를 당하는 일, 내 사업이 커다란 타격을 받아서 휘청거리는 일, 생각하십시오. 그게 감당할만하면 더 밀어 보십시오. 내가 어느 날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혈액암 4기라는 소식,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소식, 모든 불행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되면, 극단으로 밀어붙이십시오. 그래서 인류의 종말이 오는 순간까지 밀어 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의 불행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까지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두 내 인생에서 발생 가능한 범위 안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축되고 삶이 칙칙해질 것 같습니까? 그것은 끝까지 생각을 안 한 사람입니다. 힘이 모자라서 입니다.
그런데 그걸 다 받아들이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후~,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구나.' '올 테면 오라고 해라.'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 드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의 통증을 줄이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간의 꽃길과 가시밭길에 대해서 다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어느 것이 내일 내게 현실이 되어도 너무 들뜨지도 않고, 풀썩 주저앉아서 죽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도 안 느끼는 사람이 되어 가야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것들이 다 변해도 근본적으로 자신이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닻을 그리스도에게 내리고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신앙의 유익입니다. 그래서 불행을 생각하는 일이 만약에 두렵게 느껴진다면 그때는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게 겁나지 않고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때에는 찬송을 부르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간다면서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걱정 없다면서요? 진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불행에 닥친 어느 순간에 갑자기 되는 게 아닙니다. 어떤 한 사람이 불행이라는 시기를 딱 만났을 때 그가 그 이전까지 어떻게 인생을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 왔는가 하는 걸 전체적으로 테스트 받는 순간입니다. 결국은 거기서 인생의 바닥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미래의 불행을 감당할 수 있는 정신의 근력을 키워야 됩니다. 피할 수 없는 불행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불행은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 자체가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픕니다. 그러면 어떠한 불행도 여러분의 인생을 뿌리째 흔들리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됩니다. 여기까지 어떻게 살아온 인생인데, 여기서 이 정도에서 쓰러질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운명을 믿지도 않지만, 운명에게 외치십시오. '잠깐, 내 작품이 아직 안 끝났다,' '기다려라.' '내 인생이라는 작품이 아직 안 끝났다.' '내게 시간을 다오.' 그러나 현실은 가혹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크나큰 불행의 아픔을 느낍니다. 절벽에 매달린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마지막 희망의 밧줄마저 힘이 없어서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기억하십시오. 그때조차도 여러분의 인생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그리고 작품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대지에 살아있는 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불행이 닥치더라도 용기를 내어서 그 현실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진짜 싸움을 잘하는 집사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진짜 잘 합니다.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험한 일을 하기 때문에 가끔 주먹다짐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폭력을 하는 사람들과 싸워야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싸움에 대해서 한 수를 저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주먹다짐하는 싸움을 잘 합니다.' '비결이 뭔지 아십니까?' 배우고 싶지도 않지만, 자기가 말하고 싶어 하니까, 뭐냐고 했더니 여러 가지가 아니라 딱 하나라고 했습니다. 눈을 어떤 경우에도 감지 않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눈퉁이를 얻어맞으나, 뜨고 얻어맞으나, 차이는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그 주먹이 티가 아니기 때문에, 티끌이라면 눈을 감으면 안 들어오지만 주먹은 눈동자를 날려버립니다. 그래서 감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보고 있으면 주먹이 다가오고 피해가는 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일격을 할 기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인생도 똑같은 것입니다. 불행이 닥칠 때 절대 눈을 감지 마십시오. 똑바로 뜨고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게 현실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자매들은 그런 용기가 충만한 남성을 만나야 됩니다. 그래서 고생을 안 합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업고 다니려면 일생이 고생입니다. 현실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행을 멈춰버리는 방법입니다.
3. 일상(日常)을 계속하라
마지막 세 번째는 일상(日常)을 계속하십시오. 아이는 죽었습니다. 신하들은 사실을 숨겼습니다. 다윗은 눈치 챘습니다. 그는 금식기도를 그쳤습니다. 그리고 아주 깨끗하게 자기 일상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피 한 방울 없는 아버지 같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고난의 세월을 살면서 지나가 버린 과거에 연연하는 것이 어떻게 현재의 인생을 망치는지 너무 잘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 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일 먼저 그는 몸을 씻었습니다. 7일 동안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금식을 일주일, 2주, 3주, 심지어 40일을 하면, 금식하는 사람 몸에서 시체 냄새가 납니다. 금식하면서 몸에 있던 노폐물과 독소들이 몸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시체 썩은 냄새 같은 것이 납니다. 금식하는 사람 방에 들어가면 (냄새가 납니다.) 그것을 깨끗이 씻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도 정리하는 것입니다. 조용히 산에 묻는 것으로 끝내는 것입니다. 마음에 묻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도 마음에 묻고 살지 마십시오. 바보짓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둘째, 기름을 발랐습니다. 자신의 용모가 오랫동안 슬퍼했던 모습으로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이 싫었습니다. 거울 앞에 조용히 앉아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그의 마음으로 죽은 아이와 인연을 끊고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로는 의복을 갈아입었습니다. 구약에서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은 창세기 35장에 보면 정결케 하는 의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의 모든 불결을 깨끗이 씻어 내고, 새 옷을 갈아입고, 예전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살겠노라는 결의의 표현입니다. 그것을 벗고 무엇을 입었겠습니까? 파자마를 입었겠습니까? 추리닝을 입었겠습니까? 다윗이 누구입니까? 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땀과 눈물이 범벅된 그 옷을 다 벗고, 그리고 왕의 옷을 입은 것입니다. 아이가 그 난리를 치는 동안에 국사를 돌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밀렸을 것입니다. 조용히 이제 자신은 원래 소명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불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Show must go on. 장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쇼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행한 일이 일어났어도 그것이 인생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의 옷을 갈아입고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더욱이 거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의 자리였습니다.
넷째로는 여호와의 전에 가서 경배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매달리며 간절히 울부짖었는데, 왜 죄도 없는 그 아이를 데려가셨냐고, 차라리 날 죽여 버리시지 왜 그 자식을 데려가셨냐고 대들며 따지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하나님의 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 홀로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아이가 왜 죄 없이 죽어야 했는지 모두 이해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몰랐습니다. 그러나 묻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좋으신 하나님, 완전한 지혜의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당신이 보기 좋은신 뜻대로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사실에 자신의 불행을 씻었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고통스러운 일,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찬송했을 것입니다.
이미 일어난 불행으로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까? 빨리 잊어버리십시오. 그것에 연연하면서 일상이 깨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일상을 유지하는 것, 하던 대로 하면서 사는 것은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 불행을 뻥 차버리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더욱이 대상도 없으면서 괜히 세상을 향하여 앙심을 품는 일 같은 것은 하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결국 여러분의 마음에 상처만 더 깊어질 뿐입니다. 불행이 이미 일어난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말은 쉽지만, 실천은 힘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눈을 현실에 초점을 맞춰야 됩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을 계속 해야 됩니다.
Show must go on. 내 인생은 큰 불행의 파도에도 불구하고 계속 되어야 합니다. 지난주 우리의 용어로 말하자면, '다시 나의 작품 활동은 제기 되어야 된다.' 잠시 멈췄던 그 작품 활동을 계속해야 합니다. 다시 정을 들고, 수없이 망치에 잘못 얻어맞아서 멍든 오른손을 다시 차가운 돌멩이에 대고, 불행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이를 악물고 자기의 작품을 완성해 가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그런 성숙한 인간이 되려고 믿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 없이 성숙한 인간이 되는 길이 확실히 그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앙을 통해서 그 성숙한 인간의 길에 이르기 위해서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겪는 불행이 너무 너무 힘들어서 큰일을 생각할 수 없다면 아주 작은 일부터 생각하십시오. '오늘은 뭘 먹을까?' '오늘은 커튼을 빨아야지.' '오늘은 이발을 해야지.' '오늘은 마트에 가서 저녁 찬거리를 사다 놔야지.' '아참, 나 손톱 손질도 하러 갈 꺼야.' '아참, 나 와이셔츠도 하나 푸른 옥색으로 사고 싶어.' 이런 일에 집중하면서 일상은 불행에도 불구하고 계속 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여러분의 정신의 줄을 놓지 마십시오. 대신 붙들어 주는 사람 없습니다. 힘들 때 주님을 찾으며 우선 눈앞에 사소한 일에 집중하십시오.
제가 쓴 글 한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며칠 전 남편 죽었다.' 나'는 딸아이의 흰 운동화를 빨고 있다.' '쓰다 버린 칫솔로 구석구석 빡빡 문지르면 때를 벗긴다.' '매 순간 멀미에 구토하듯이 슬픔이 치밀어 오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욕실의 천장을 바라본다.' '고무장갑을 낀 손 팔뚝으로 눈물을 훔친다.' '다시 칫솔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에잇, 이까짓 일은 해서 뭐 한단 말인가 ?' '이렇게 묻지 않기로 했다.' '사소한 일에나마 정신을 쏟지 않으면 슬픔의 심연에 풍덩 빠져 죽어 버릴 것 같아서다.' 주변을 청소하십시오. 그리고 정리하십시오. 맘에 들지 않는 물건을 버리십시오. 목욕을 하십시오. 바람이 부는 날이면 머리를 자르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신발을 신으십시오. 사소해 보이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씻고, 입고 마시고, 먹고, 걷는 것과 같이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와 자신의 마음에 덮칠 때 고백하십시오. '이것도 나의 인생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주일날 설교를 했고, 그중에 한 자매가 글을 써서 청년부에 보냈습니다. 여러분 중에 있으실 겁니다. "목사님, 지난주일 설교가 최소한 한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저는 요즘 계속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들으며 저는 살아야 되겠다고 다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 형제가 쓴 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너무 실망하고 힘이 없었는데, 목사님 설교를 다 듣고 나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저는 용기라고 부르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냥 에이 씨, 한번 내 인생 붙어보자는 깡이 생겼습니다." 그게 우리가 가져야 될 마음입니다.
큰 불행을 겪었지만 내 인생이라는 작품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압니다. 인생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덧없는 대지 위에서 펼쳐지는 인생의 바다에서 때로는 희망을 갖는 것이 절망하는 것만큼이나 덧없을 때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덧없는 대지 위에서 펼쳐지는 인생길에서 때로는 희망을 갖는 것이 절망하는 것만큼 덧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 희망이라는 게 뭐냐면 하나님의 도움 없이 무엇인가 내 육신의 일들이 잘 돌아가므로 내 인생이 피어날 수도 있다는 그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망하는 것만큼이나 덧없는 것입니다. 그런 걸 인생의 자원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개나 주라고 하십시오. 신앙심이 없더라도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그나마 인생길에서 통증을 줄이는 길이고, 상처를 덜 받는 길입니다.
불행의 고통이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자신의 삶을 남의 인생처럼 바라보는 초탈(超脫)을 연습해야 합니다. 이럴 때는 (혼자서) 산에 오르십시오. 높은 산까지 안 올라가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타박타박 걸으십시오. 바람이 불고, 머리는 잘랐고, 눈물은 흐릅니다. 타박타박 걸어서 야트막한 산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동네를 바라봅니다. 그러면 자기 발아래 동네의 모습이 아스라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골목길에서는 아파트 한 동의 벽밖에 안 보였는데, 올라가면 손바닥만 한 동네가 들어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인생 거기에 두고 왔다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나는 내 인생을 떠나서 이 언덕에 올라와 있다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객관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납니다. 그게 초탈(超脫)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바둑을 둬 보셨습니까? 장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기하게 뒤에서 훈수 두는 사람은 다 보이는데, 플레이하는 자기 자신은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훈수를 두는 것입니다. '아, 이쪽에다 두라니까, 이쪽으로.' 그래서 한번 자기가 인생이란 장기판을 두면서 수(手)가 안 떠 올 때, '너 여기 좀 대신 있어.' 뒤에 가서 한번 위에 서서 자기 인생의 장기판을 보는 것입니다. '아, 저러다가는 차(車), 포(包)가 떨어지겠구나.' 생각하면서 묘수(妙手)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다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때는 눈물 씻고, 삼키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은 나 아니면 살아 줄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라고 원망하듯이 묻지 마십시오. 이 대지에서 그냥 쓰러져 죽지 않으려면 슬픔을 삼키십시오. 그리고 너무 자주 울지 마십시오. 너무 자주 울면 불행도 여러분을 우습게봅니다. 불행이 여러분을 우습게보기 전에 여러분 자신이 불행을 깔보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인생의 무게를 덜어내는 길입니다. 부모 형제, 친구들, 지인들, 고려 시대, 조선 시대, 신라 시대, 에도 시대, 스코틀랜드, 남미의 부족들, 아프리카 원주민, 러시아 동토의 에스키모까지, 이런 불행을 겪으면서 다 지구 표면을 살다가 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그들 중에 한 사람이니 내가 언제 죽을는지,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 수 있으랴, 이렇게 마음을 풀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용기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이 세상이 더 아름답기 때문에 나를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 '이제껏 걸어온 인생의 길에서 수많은 피해와 슬픔과 고통, 모래를 씹는 것 같고, 화약을 삼키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삶의 과정에서도 당신 품에 나를 안아 주셨던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 환난이나 ···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그 어떤 것도 나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커다란 용기가 안에서 확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깡이 아닙니다. 깡이 아니라 대담한 용기가 솟아나면서, 나를 삼킬 듯이 밀려오는 불행보다는 내가 더 크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육신을 삼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내 정신은 그것 위에 날고 있는 독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불행조차도 비웃을 수 있는 극복의 정신을 갖게 됩니다.
사람 앞에서 쉽게 눈물을 보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눈물을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분의 눈물에 관심도 없습니다. 낮에 손잡고 여러분의 눈물 흘리는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함께 울어 주던 사람이 8시에는 연속극 보면서 웃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Alles ist allein. 모두들 혼자다. 그게 인생입니다.
나의 인생길을 대신 걸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혹시 있다 하더라도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내 작품에 손대지 마라.' 내가 지금 비록 잠시 작품 활동을 멈추고 있지만, 미켈란젤로도 와서 내 작품에 손대는 싫습니다. 나는 내 작품을 만드는 중이지 미켈란젤로와 합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 없습니다. '너는 네 일이나 해라.' 내 인생 길을 대신 걸어줄 사람 없습니다. 함께 걸어줄 사람, 웃기지 말라고 하십시오. 누가 여러분의 인생길을 함께 걸어 주겠습니까? 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엄마는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지 모릅니다. 아빠는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서 전 재산을 내놓을지 모릅니다. 딱 거기까지입니다. 여러분을 너무 사랑하면 엄마 아빠가 거기까지 해줄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너무 사랑하면 심장을 떼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입니다. 함께 못 갑니다. 각자 자기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타고난 운명입니다. 심지어 주님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시지 않으십니다. 대신 살아 줄 것 같으면 내가 불행을 당해서 울고불고할 때 나를 잠시 하늘나라의 보좌에 앉히시고 당신이 내려오셔서 걸으신 다음에 평정이 된 다음에 다시 업어 오시면 되지 않습니까? 누가 불행 중에 하늘나라 올라갔다 온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일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가 아닙니다. 나의 인간이라는 이 지위가 얼마나 위대한 자리인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전시회에 가니까 써 있습니다. '대가(大家)의 작품입니다.' '접근하지 마시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나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 하는 이야기도 세상에서 여러분에게 속삭여주는 이야기하고는 정반대일 것입니다. 충격이 되더라도 들으십시오. 세상에서는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서로 동정해주라고 가르쳐줍니다. 나는 다른 해석을 내놓고 싶습니다. 누구의 동정에도 기대지 마십시오. 그런 거 필요 없다고 선언하고 사십시오. 동정이라는 것을 비유를 하자면, 인생이라는 끝없는 긴 길의 길가에 놓인 망가진 벤치 같은 것입니다. 계속 걷는데, 힘이 있을 때는 계속 걷는데, 이제 도저히 더 걸을 힘이 없습니다. 사면을 돌아봐도, 흙이고 가시덤불이고, 앉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벤치 하나가 있습니다. 하도 오랜 세월이 흘러서 왼쪽 다리가 부러지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리가 너무 아프면 거기에 잠깐 걸터앉기라도 해야 되지 않습니까? 남의 동정은 그런 용도입니다. 이용하십시오. 그런데 아주 잠깐입니다. 그리고 동정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신의 모든 아픔을 공감하고, 자신의 인생을 외롭지 않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인생의 약이 아니라 독입니다. 자기를 하나님 앞에 홀로 서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시 일어나서 자기의 인생길을 가야 합니다.
또 하나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대목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들어야 되는데, 바보 같은 우리는 그것을 수동태로 해석합니다. '이웃에게 그들의 몸과 같이 너는 사랑을 받을지니라.',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 정신은 처음부터 한 인간으로써 불행을 직면하며 살기에는 모자라는 정신입니다. 그런 정신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인생 그 자체가 거칠고 외로운 들판을 아무 도움도 없이 혼자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없어도 주님의 사랑을 마음속에 느끼면서 인생길을 예수를 충만하게 느끼면서 외롭지 않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당신의 상황은 당신을 장인으로써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돌멩이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정신은 그것을 쪼아내어 작품을 만들어 가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여러분이 나를 동정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여러분의 동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감연(敢然)이 용기를 내어서 자기의 자리에 우뚝 서는 것입니다. '나는 살아내리라.' '살아낼 수 있다.' '예수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그러면서 하늘 아래 나 홀로 있는 것 같은 순간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존재를 쏟아 놓으며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 자신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지혜의 빛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는 나 자신의 의지를 힘으로 가득 채워서 이 세상의 불행을 비웃으며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불행을 만났을 때 통증을 덜어줍니다. 오히려 재 대신 화관을 씌워 주시고, 슬픔 대신 기쁨의 옷을 입혀 주신다고 이사야 61장 3절이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 아니겠습니까?
Show must go on. 불행을 만나도 우리의 일상은 계속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일어나고, 먹고, 마시고,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불행을 통해서 아직도 내게 밝혀지지 않은 의미는 그냥 있는 그대로 접어두고,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의 근원보다는 오늘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이 거친 인생길에서 고사리 같은 내 손을 붙들고 계시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보이는 세상보다 더 신뢰하기 때문에 용감하게 눈물을 삼키며 한걸음의 발걸음을 떼어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이제껏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를 지나왔습니다. 온갖 불행과 시련의 파도, 풍랑과 태풍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배는 너덜너덜해졌고, 깃발은 다 찢어지고, 돛대는 부러졌습니다. 그래도 살아남아서 오늘이라는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 가야 할 뱃길에는 또 다른 풍랑과 유명한 해적들이 기다린다고 말하지만, 이미 이만큼 겪으면서 살아왔는데 그런 일을 한두 번쯤 더 겪은들 우리의 인생길이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그런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나는 살아있는 한 살 수 있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 '나는 숨 쉬고 살아있는 대지 위의 내 인생 기간 동안 만나는 모든 사람을 동정하고, 나처럼 불행을 만나는 모든 사람을 가엾이 여기고, 그들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돕고 사랑하리라.' '그런데 나는 그런 거 필요 없다.' 그러면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번 불행한 것을 만났다고 해서 우리의 소중한 인생을 여기에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온 손이 피멍이 들도록 우리 인생이라는 작품 조각해 왔는데, 그 수없이 만난 풍랑 중 한 번을 더 만났다고 여기에서 망치와 정을 다 집어던지고 깨뜨리다만 바위 옆에서 피를 토하고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 고귀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저의 지난달, 예전에 저처럼 방황하고 있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 신앙이라는 풍조에 떠밀러 가지만 자기 것이라고는 일(一)도 없는, 생각 없는 그리스도인들, 그런 얼굴을 떠올리면서 울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혼자 고통의 바닷길을 헤치고 지나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결코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배 왼편을 때리고, 오른편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쏟아지는 파도 속에 하얗게 질리면서 배의 방향타를 잡고 벌벌 떨면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태풍 속에 동행자도 없고, 내 인생의 배에는 나 혼자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따뜻한 손길이 오른쪽 어깨에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항해하고 있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씀하십니다.) '네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아멘.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 망망한 대해에 내 인생이라는 배에 동승해 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두려워서 사는 것보다는 죽기를 원했고, 때로는 이렇게 사는 것이 무서워서 저렇게 살고 싶었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거 때문에 현실을 비관하면서 현재를 낭비했습니다. 모두 내 인생을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나의 오른쪽 어깨 위에 당신의 팔을 얹으시고, '너는 가라.' '저기 폭풍과 흑암을 헤치고, 저기 등대의 불빛을 가라.' (이것을) 가르쳐 주고 계셨다는 사실을 은혜를 받은 후에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폭풍도 무섭지 않습니다.
(찬양)
새벽 닭 울 때 나 괴로웠소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소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 텐데
그 찬송을 부르며 우리는 고난을 이기고, 불행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제껏 삶의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지금도 그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파멸하기 위해서 온 우주가 무장을 할 필요가 없다.' 고 한 파스칼의 말처럼 아주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고백처럼 나는 상한 한 마디의 갈대고, 꺼져 가는 등불의 심지와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위로를 받습니다. 이렇게 연약하지만 내 인생이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태어나고, 살고, 불행을 만나고, 극복하고, 마지막 숨을 거두고, 영원한 나라에 있는 그때까지 내 인생 전체가 하나님 사랑의 품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불행을 만나지만 우리는 거기서 무릎을 꿇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죽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아무리 큰 불행을 만나든지, 은혜를 구합시다. 그리고 인생의 항해의 바다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예수와 함께 동행하며 작품 같은 여러분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왜 나는 혼자인가?
-사랑하면서도 외로운 그대에게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고전 13:3)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네 번째 설교를 하면서.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외롭습니다. 추운 겨울밤에 보아주는 이도 없이 홀로 바람에 떨고 있는 한 그루 나무처럼...아무도 사랑하는 이가 없어도 외로운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여전히 홀로 남겨진 자신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이번 설교에서는 인간은 왜 외로운지...그리고 어떻게...외롭지 않은 사랑을 할 수 있는지를 다룹니다. 사랑하면서도 외로운 것은 사랑에 대한 환상 때문입니다. 이 설교를 통해 그것들을 깨뜨려 버리고 외롭지 않은 사랑으로 당신만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는 이레 동안 내내 여러분들은 제 마음에 있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새 힘을 얻으소서... - 그리스도의 노예 김남준.
I. 본문해설
자살하는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한없이 외롭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에 대해 고도로 정신을 집중한 결과입니다. 진리의 빛없이 자아(自我)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은 마치 끝없는 물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철학자들도 자아(自我)에 대해 쉽게 정의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단 생각해보라.’ 또 어떤 사람은 ‘일단 그냥 살아 보라.’ '그러면 그것이 당신의 자아(自我)를 보여줄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외로운 사람은 사랑 받지 못해서 외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왜 사랑하면서도 외로운 것입니까? 어떻게 사랑을 해야 외롭지 않을 수 있습니까? 기독교적인 사랑의 경전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고, 또 하나는 “사랑은 언제나 ···”로 시작되는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3) 자기의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도록 희생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랑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오늘 우리의 주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I. 사랑하면서도 외로울 때
종종 혼자 있는 것이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외롭게 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이 너무 많고 정신없을 때 흩어진 정신을 모으기 위해 혼자 있는 것이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외로움은 누군가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감정이며, 때로 심하면 이것은 나는 버림받았다는 느낌으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자살하는 사람 중 93.4%의 사람은 이미 자살 전에 신호를 보낸다고 합니다. 예전에 없이 갑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든지,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한다든지,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남에게 주거나 정리해 버리는 행동 같은 것입니다. 일단 자살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나면 그때는 외로움에 대한 모든 생각을 끝낸 것입니다.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됩니다. 자살을 결심하고 나면 미운 사람이나 보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어지고 그냥 조용히 무(無)돌아가고 싶어집니다. 미워할 기운도 그리워할 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살아야 되겠다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내 마음에 남았을 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볼 때 외로움은 삶의 허무감과 그것에 대항해서 의미를 찾으려는 감정 사이에 있는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끝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더 이상 허무의 감정에 대항할 수 없을 때 인간은 쉽게 죽음을 선택하게 됩니다.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명랑하게 살기 위해서는 의욕을 잃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잘 관찰해서, 살면서 어떤 때 내가 삶의 의욕을 느끼는가, 그리고 어떤 때 삶의 의욕을 내가 상실하게 되는가를 유심히 살피면서 자기 자신에게 맞춰줘야 됩니다. 그래서 힘이 너무 없으면 삶의 의욕을 빼앗아 가는 환경에서 자기를 약간 거리를 두어야 됩니다. 그게 삶의 의욕을 보존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A. 왜 나는 혼자인가?
자, 이제 여기서 본격적으로 우리는 이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왜 나는 혼자인가?' 이런 것들은 사실 우리에게 쉽게 떠오르는 질문이 아닙니다. 정신없이 살고 있고 우리는 제 정신이 아닌 상태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런 질문은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외로운 모습이 우리 인간의 맨얼굴이기 때문입니다.
1. 서로 다른 존재로 창조됨
그러면 도대체 난 왜 혼자입니까? 제일 먼저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각각 서로 다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타인과 구별되어 독특한 자기를 가진 존재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아무도 같은 자아(自我)를 가질 수 없으니 쌍둥이로 태어난 아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서로 다른 자기(自己)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이 타인입니다. 이것은 결국 타인에 대한 낯섦을 가져옵니다. 낯섦은 일종의 단절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타인에 대한 낯섦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인간을 불행으로 몰아넣고 끊임없이 자신을 남으로부터 더더욱 소외시키는 의도적인 행동으로까지는 가지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인간은 각기 독립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멀리 떠났음
실제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고, 그래서 외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느끼는 깊은 외로움은 역설적으로 하나님 안에 있었더라면 누렸을 행복의 크기가 얼마나 큰가를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우리나라나 혹은 외국의 낯선 곳에서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 아주 작은 마을을 좀 멀리서 바라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거기서 뭘 느끼냐 하면 이렇게 척박하고 힘든 땅, 지금보다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을 그 옛날에 자연조건과 싸우며 또 외적과 싸우며 사는 것은 굉장히 고단하고 힘든 삶이었을 텐데, 자기 인생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힘겹게 살았던 사람들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그 사람의 흔적들이 묻어 있는 집, 길, 건물, 이런 것들 속에서 아주 짙은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아주 싸한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또 그들이 느꼈을 외로움 때문에 나도 외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정서는 결국 하나님을 떠난 다음에 인간의 죄가 인간을 얼마나 외롭게 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는 사랑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사단의 유혹은 오히려 커다란 소외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사람으로부터 소외되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어서 자기가 누군지를 알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영원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진 것이었고, 이로써 다른 사람을 올바르게 사랑할 마음의 힘까지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성은 눈멀고, 감정은 육욕으로 들끓고, 의지는 악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죄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결국 이웃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올바르게 사랑 받지도 못하고 올바르게 사랑할 수도 없으므로 사람들 속에 섞여 살면서도 자신은 그 모든 사람들 속에서 무인도처럼 떨어져 있어서 관계의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는 외딴 섬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3. 세속주의와 현대인의 외로움
이런 오늘날 현대인의 외로움은 세속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간은 소비하는 풍조에 내몰리게 되고, 끊임없이 소비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계속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물질문명의 발달은 결국 세속주의를 가져왔습니다. 세속주의란 술 먹고 타락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의 제도를 세우거나 운영함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모든 가치의 기준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상이나 철학은 놀라움에서 생깁니다. 자연을 보면서 놀라면 자연에 대한 사상이 생기고, 개인의 삶을 보면서 깜짝 놀랄 때 윤리사상이 생깁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면서 놀라게 될 때, 그때 사람들은 정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의 지평, 눈에 보이는 현상을 꿰뚫고 있는 일관된 어떤 법칙들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현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은 감각에 매어 있고, 과학은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과학은 산업혁명 이후 한 3세기 동안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때와 지금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물질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18세기에는 우주를 보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물질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IT 와 AI로 이어지는 이러한 사회는 그때는 꿈꾸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실현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만하게 된 것입니다. 과학이 모든 것을 밝혀 주기 때문에 이제 비밀은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은 우리가 알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는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을 대신해서 이제는 가치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인간은 18세기보다 훨씬 외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예전에는 전쟁과 기근 그리고 가난으로 죽어갔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자살로 죽어갑니다. 그리고 현대병으로 죽어갑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었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결국 세속주의 안에서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고 말했지만 그 모든 것이라는 것은 물질 밖에 없습니다. 물질만 상당히 많은 부분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두는 아닙니다. 해줍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해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물질만 연구한다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우리의 정신은 물질로만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육체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마음은 과학이 아무리 발달되었어도,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은 그만큼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이 이성으로 찾아낼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아는 데 있어서는 역시 과학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많은 과학 기술이 우리의 육체를 편안하게 해 주지만 마음까지 어떻게 편안해지는지 과학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과학의 발달로 자동차 문 여는 것까지 전부 다 자동으로 만들어 놓고 인간은 비만에 시달립니다. 아무도 없는 지하실의 캄캄한 데서 러닝머신을 미친 듯이 뛰면서 땀을 흘립니다. 자동으로 찐 살을 수동으로 빼내기 위해서 또 돈을 쓰고 소비를 해야 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심지어 심하면 약까지 먹으면서 살을 빼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갈 곳을 잃습니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고, 놀랄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럴수록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더 놀라운 것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더 외로워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과학은 그 물질을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상이 바로 세속주의입니다. 더욱이 자본주의의 발달과 물질문명의 발달은 세속주의와 함께 개인주의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이제는 개인의 풍요로운 삶, 그리고 개인적인 평안함보다도 더 뛰어난 가치를 가진 것은 없습니다. 욕망은 증대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인간은 아주 개인주의적이 되어서 물질적인 풍요와 편안하게 살아가는 삶, 이것을 매우 중시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주의입니다. 그런데 막스 베버(M. Weber)가 얘기한 것처럼 세속주의는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이나 똑같이 일어납니다. 결국은 예수 믿는 사람이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세속화는 이미 정해진 대세입니다.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사조(思潮)에 거스를 수 있는 어떤 정신적이고, 심정적인 것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도 거대한 이 조류에 떠밀려 쓸려 나아가는 물방울 하나 같은 존재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으면서도 사람들이 점점 예수 믿는 것을 통해서 인생의 답을 찾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감각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현대 정신은 이 물질적인 것을 거의 전부로 여깁니다. 결국 물질을 초월하고 이성을 초월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런 속에서 인간이 종종 외로움을 느끼지만 그것은 정신으로 하여금 그 외로움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자신이 그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성찰하고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에 정신이 팔리게 만들고, 때로는 두려워서 그런 질문에 직면하는 것을 회피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포로들이 잡혀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끌어내어 바깥에 끌고 나가서 한 사람씩 참수를 합니다. 그래서 죽는 비명소리가 들려 옵니다. 사람들은 모여서 어떡하면 저 죽을 운명에서 0.01%라도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이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까를 생각하는 대신에 모여 앉아서 화투를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막고 오락을 하면서 자기에게 임박한 죽음을 피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화투를 치는 사이에도 어김없이 문은 열리고 3번 소리가 들립니다. 3번 달린 죄수가 끌려 나가서 또 죽임을 당하고 나면 4번을 호출 할 텐데, 마지막 둘이 남을 때까지 화투를 치는 것입니다. 오락에 빠진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정직하지 못한 오늘날 세속주의와 개인주의, 물질주의에 빠진 현대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별로 그와 다르지 않게 살아 온 사람들로 오늘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영혼에는 고등(高等)한 기능과 하등(下等)한 기능이 있습니다. 하등(下等)한 기능은 먹고, 마시고, 입고, 감각하고, 추우면 추위를 느끼고, 더우면 더위를 느끼는 것들입니다. 고등(高等)한 기능으로 우리는 비로소 물질세계 너머에 있는 의미를 발견합니다. 또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알고, 기억하고, 사랑하는 것이 고등(高等)한 기능입니다. 이 기능 때문에 인간은 동물과 구별됩니다. 여러분, 양떼목장을 가보면 양들이 있습니다. 그 양이 아침에 풀밭에 나와서부터 어둑어둑해서 들어갈 때까지 하는 일이 계속 풀을 먹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기지개 켰다는 양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코를 땅에 처박고 계속 먹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 양에게 다른 삶이란 없습니다. 의미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먹습니다. 멀리서 보면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는 광경이 너무 목가적(牧歌的)이고 아름답지만, 거기에 막상 들어가 보면 똥으로 된 지뢰밭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으니까 그것들을 계속 배설합니다. 그러니까 씹으면서, 계속 배설하면서, 씹는 것입니다. 한번 영국에 집회 갔다가 너무 아름다운 목장이 보여서 들어갔다가 나오지도 못하고 들어가지 못하고 똥밭에서 하여튼 죽을뻔했습니다. 순 똥 천지였습니다. 그렇게 사는 게 동물입니다. 결국 생각 없이 인간이 살면 양은 풀을 뜯지만 우리는 그보다 약간 고급진 인간의 문명으로 만든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텔레비젼, 영화, 영상, 옷, 자동차, 이런 등등에 코를 박고 살면서 정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런 세속주의에 오염될 때, 고등(高等)한 영혼의 기능을 거의 사용하지 않을 때 인간의 뇌는 거의 곤충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마음 안에는 빈 잔이 있습니다. 시편 23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이 잔은 영혼의 잔입니다. 잔칫집 문맥입니다. 잔치 집에서 제일 좋은 술을 혼주(婚主)가 내오고, 그것을 마음껏 따라서 철철 넘치도록 부어 주는 인심 좋은 잔치집 광경을 그려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 안에는 하나님이 아니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빈 잔과 같은 갈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거의 미친 것처럼 살아가는 방탕한 삶의 이유도 결국 알고 보면 영혼의 빈 잔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광기와 무서운 폭력, 그리고 잔인함을 즐기는 인간의 가학적인 행동, 심지어는 가학적인 대우를 받아야 거기서 비정상적인 만족을 느끼는 메조키즘(Masochism), 이런 모든 것들은 결국 인간 영혼의 빈 잔이 그 무엇으로 올바로 채워지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광기입니다. 인간 영혼의 빈 잔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지 않으면 인간은 그런 광기 속에 사로잡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미친 듯이 방황을 해도, 그리고 하나님이 없다고 울부짖어도 결국 마지막에 언뜻언뜻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의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느낍니다. 그래서 그것을 잊게 해주는 오락이나 쾌락, 그리고 정신을 딴 데 팔고 사는 산만한 것들이 잠깐이라도 치워지고 나면 그 다음에 외로운 빈 잔을 자기가 직시(直視)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깊은 고통과 무서운 외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가슴을 파고드는 허무감과 외로움의 감정을 달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그렇게 외롭기 때문에 사랑의 욕구가 매우 큽니다. 예전에는 자기가 외롭다, 사랑하고 싶다, 이런 감정들을 바깥으로 마구 표현하는 것 자체가 매우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일리(一理)도 있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그런 거를 자주 표현하는 것은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주체성이 함양(涵養)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쉽게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산업화와 물질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사람들이 다 관계 속에 살았습니다. 대가족 사회에서 가족들과 관계를 맺고, 친척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것이 자기 개인을 방해하고 힘들게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 관계에 충실하면서 서로 양보하고, 사랑하고, 의무감을 느끼면서 자신의 삶을 지탱해 갔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혈연관계나 지연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 자기를 스스로 살아내야 하는 힘이 많이 배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파트에 살면 십 년을 살아도 위층에 누가 사는지 모릅니다. 옆집은 어떻게 떡이라도 갖다 주면서 알지 모르지만, 위층, 그 위층 사람은 더더욱 모릅니다. 십오 년을 살아도 3층 위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완전한 단절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외롭기 때문에 인간은 사랑의 욕구가 매우 큽니다.
인류 문학사에서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 남녀의 사랑입니다. 어느 때나 그것이 강조되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문화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그런 것들이 호소력을 갖는 때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요즘에 유행하는 것이 초등학교만 다녀도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어본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이성에 대한 갈망을 이야기하고, 노래나 연극, 음악, 문화, 예술, 의상, 모든 것들 속에 그런 그리움들이 진하게 묻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런 사랑이 더 많이 깨집니다.
스위스를 한번 갔었습니다. 8시밖에 안됐는데 도시가 철수를 했습니다. 민방위 시간처럼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습니다. 뭘 사고 싶어도 가게가 없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이 없냐고 했더니 이 나라는 가정을 너무 중시하기 때문에 해지고 퇴근하면 다른 데를 들러서 가는 법이 없고 바로 집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술집도 없거니와 종종 술집이 있지만 거기서 술을 마시는 사람은 다 관광객이지 현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뜨악했던 것은 이혼율이 55%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아, 퇴근하고 바로 집에 들어가서 싸우는구나.' 그렇게 가정을 중시하면 이혼을 안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쉽게) 이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나라도 역시 그런 세속적인 풍조를 그대로 따라갑니다. 저는 지금 이혼하는 게 나쁘다, 좋다 그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사랑에 대한 욕구는 굉장히 커지지만,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이 그런 사랑을 많이 받고 많이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의 사랑의 욕구가 크지만 그런 마음으로 참는 사랑은 기껏해야 자기만족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은 관계의 기술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매우 습득하기 어려운 삶의 기술입니다. 더욱이 현대의 세속화된 개인주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을 습득하기가 점점 어렵게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위에 보시면 도무지 소통할 수 없는 절망적인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을 아주 많이 만나게 됩니다. 시집갔는데 이런 사람을 시어머니로 만난다든지, 아니면 장가갔는데 장모님이 그런 사람이라든지, 아니면 친구를 사귀었는데 친구가 그런 사람인 경우에는 진짜 인생이 꼬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는데 놀라운 건 그 사람들은 자기 정신상태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욕구는 현대인들이 엄청 커지지만 그런 사람들과의 사랑에서 오히려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런 사회의 풍조는 드라마를 봐도 잘 나타납니다. 옛날에 고전적인 로맨스 드라마가 나오면 항상 재벌은 아니고 재벌의 2세 쯤 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꼭 사랑을 하는데 다른 재벌의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 회사 직원, 점원, 심지어는 매점에 아가씨, 이런 사람하고 사랑에 빠지게끔 설정합니다. 그리고 그려냅니다. 그런데 옛날에도 그런 것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결말은 너무 쉽습니다. 그렇게 지체 높은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남자가 가진 것 없고 가난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결국 끝까지 집안에서 그런 건 허락을 안 합니다. 끝까지 방해합니다. 그러면 재산이고 상속이고 다 필요 없다고 집어치우고 맨몸으로 그 여자에게 달려가서 끌어안고 서로 사랑하면서 생선가게를 하든지, 슈퍼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소설과 드라마의 고전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 보십시오. 어떤 드라마를 봐도 인물을 그렇게 설정해 놓고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자에게 달려가는 남자 하나도 안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게 '시크릿 가든'입니다. 아무 것도 안 잃어버립니다. 결국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런 고전적인 각본으로 쓰면 현대인들의 가슴에 일(一)도 다가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감격하는 사람은 최소 60대 이상의 사람들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만 상대로 드라마 장사를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광고가 젊은 사람들이 쓰는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데 원가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 그것이 오늘날 시대의 정신입니다. 그런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현대인들에게는 아주 원시시대의 가치관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60세 이상 되신 분들은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문화적으로 살펴보면, 세속주의와 개인주의라는 특성을 생각해보면, 사랑의 이러한 특징은 필연적입니다. 결국은 물질적인 풍요와 개인적인 평안,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사랑의 즐거움만 취하길 원합니다. 사랑에서 꿀을 빨기만 원하는 것입니다.
사랑 자체가 처음부터 그런 게 아닙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결심한다는 것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꽃이 피는 적도 있지만, 가시밭길도 나타나고, 돌밭도 나타나는데, 그게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꽃밭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 꽃길만 주지는 못했습니다. 당신도 못 준 것을 누구에게 달라고 요구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의미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더더욱 그런 것을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현실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현실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고, 너무나 인간에게는 기댈 수 없는 큰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의 정염(情炎)도 뜨겁지만 실망도 너무 많이 하고, 상처도 너무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사랑하지만 끊임없이 깨어지고, 끊임없이 이별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거기서 또 상처를 받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없이 매일 매일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이런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매 순간 보이는 세상의 사물에 눈을 빼앗기는 정신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산산이 부서져 갑니다. 때로는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 자체가 너무 두려워서 회피하려고 합니다.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고, 너무나 많은 절망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유럽 사람들에게 복음을 심각하게 전합니다. '인생이 무엇인가?' 그러면 질문을 합니다. 'Why are you serious?' '무엇이 심각하냐?' '왜 그런 것들까지 생각하면서 인간을 골머리 아프게 하는 거냐?' '그냥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며 하루하루 살아가면 되는 거지.' 이런 생각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인생의 뼈아픈 질문들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하늘(heaven)이 없이 대지(大地) 위에만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사실은 대지가 무엇인지도 잘 모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어마어마한 무게를 오락과 쾌락, 그리고 정신을 딴 데 파는 분산(奔散) 같은 걸로 극복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것들은 정말 무엇인가에 취해 있고 미쳐 있지 않으면 맨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너무 무서워서 못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 세상의 감각적인 사물에 취하고 취미, 오락, 유흥, 이런 것들에 취하면서 정신을 끊임없이 분산(奔散)시키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는 그런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정신을 빼앗는 사물들로부터 잠시 물러나 보십시오.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대지(大地) 위에 홀로 있는 너무나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이 감각적인 것들에 몰두하며 물질을 소비하고, 오락에 빠지고, 개인적인 평안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하는 것도 결국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기 위해서입니다.
캠핑을 가서 불을 피워 놓습니다. 모깃불이라고 합니다. 곤충들 때문에 피워 놓습니다. 모닥불을 피면 이산화탄소가 나옵니다. 그런데 벌레들이 이산화탄소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등산을 가면 이상하게 날파리와 곤충들이 우리 코끝에서 뱅글뱅글 돕니다. 여기서 이산화탄소가 나오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산화탄소가 나오면 그걸 따라서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다 소모되고 나면 위험한데 다시 불쪽으로 오는 것입니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더욱이 전기등 같은 것을 달아놓으면 나방 같은 것들이, 벌레 같은 것들이 와서 부지직 타 죽습니다. 냄새가 나면서 타 죽습니다. 그런데 그런 위기를 겪고 충격을 받고 나방이 도망갑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옵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을 도망가는 사이에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불을 좋아하는 자신의 감각 하나가 미끼가 되어서 미친 듯이 등으로 날라 들어서 마지막에는 결국 부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감전돼서 다 죽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이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극적인 쾌락에 맛을 들일 수 있는 좋은 환경이 설정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삼십 년 전으로만 돌아가도 오락거리가 별로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우리 고등학교 쯤 다닐 때 테트리스 게임이 나왔습니다. 아이들이 동전을 넣으면서 테트리스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라고 해도 아마 지루해서 안 할 것입니다. 노동이 무슨 오락입니까? 그리고 더 뒤로 돌아가면, 거기서부터 한 30 년 뒤로, 60년 뒤로 돌아가면 진짜 오락 기구가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딱지치기 하고, 구슬치기 하고, 땅에서 윷놀이나 하면서 노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투나 하든지 아니면 투전판에서 뽑기나 하든지, 그런 것들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술이 발달되면서 엄청나게 많은 놀이 기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속에 무슨 게임의 세계가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세계들이 펼쳐지면서 인간이 말하자면 이런 허무한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많은 통로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거기서 수많은 폐인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PC방 폐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기서 수많은 폐인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오늘날 주식을 안 하면 못사는 이유도 나는 이런 식으로 심리적으로 설명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억수로 벌겠다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그거를 하는 동안에 심장이 쫄깃쫄깃해지면서, 주가(株價)가 떨어지고 올라가는 거 하면서 아이들이 수업을 하다가 폰을 들고 바깥으로 튀어 나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식을 팔아야 한다고 나가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아이들, 중학교 아이들, 심지어 초등학교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그걸 또 부모들은 '그래, 너는 지금부터 자본에 대해서 공부해야 돼."라고 한다는데, 그거 아닙니다. 그 아이에게 자본에 대한 공부를 그렇게 시키는 게 아니라 인생에 대한 공부를 시켜서 자기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하고 성찰하고, 이 세상을 견디며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는 것입니다. 그게 부모가 해야 될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람들은 쫄깃쫄깃해지는 맛에 그걸 보면서 하는 동안에는 최소한 이런 허무에 관한 질문들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 사람들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이제는 더 큰 쾌락에 자기 몸을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약의 사용이 전 세계적으로 점점 (어마어마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외국에 가보면 휴지통에 '마약한 후에 별도의 통에 주사기를 버리시오.'라는 구절은 아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보편화 되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기도 쉽습니다. 우리나라가 좀 엄격하지만, 우리나라도 던지기 수법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고, 값도 매우 쌉니다.
결국 이런 현대인의 쾌락을 추구하는 쾌락주의는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을 쾌락이라는 어떤 종교를 통해서 이성이 아니라 뛰어 넘어 보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생각하면 그 약에 빠져서 폐인이 되고 나면 인생이 아무것도 도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으로 접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외로운 이유이고, 또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결국 외롭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B. 외롭지 않은 사랑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외롭지 않은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입니다. 결국 우리가 외로움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떤 사랑을 해야만 외롭지 않을 수 있을까? 인간은 처음부터 관계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자기만의 주체를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살 수 있도록 창조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넓은 땅덩어리에 흩어져서 각각 자기의 대지(大地) 위에 발을 디디고 살아갑니다. 서로 다른 장소에 있지만 우리 모두 동일한 대기(大氣)를 숨 쉬면서 겨우 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서로 다른 곳에 살고,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을 호흡함으로써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인간의 비극은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없는데 인간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사랑을 갈구 하지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정염(情炎)은 엄청나게 커졌지만 관계를 맺는 능력은 훨씬 작아졌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외롭다고 하면 이해를 하겠는데,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혹은 누군가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하는 데도 여전히 외롭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혼자 있는 것 같은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1. 환상에서 벗어나라
두 가지를 설명하는데, 첫째는 환상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릇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환상이 있습니다. 이 환상 때문에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주기까지 많이 사랑하면서도 결국은 철저히 자기가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외로워하게 됩니다. 이 환상은 주체의 환상과 희생의 환상입니다.
첫째는 주체(主體)의 환상입니다. 이것은 사랑을 전적으로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사랑을 함으로써 나와 저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서로는 주체를 상실하고 융합되어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의 이상(理想)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또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쓰지 말아야 될 단어 가운데 하나가 '사랑에 빠진다'입니다. 이건 사랑에 빠지는 사람 그 자체를 불가항력적으로 만듭니다. 마치 호숫가에 서 있는 사람의 등을 떠밀어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풍덩 빠졌기 때문에 자기가 빠진 운명을 호수의 물에 맡겨야 되는 것 같은 그림을 그려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빠진 것만이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비인간적인 표현입니다. 주체성을 가지고 사랑해야지만 사랑인 그 사실을 호도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주체성을 잃어버리는 사랑을 꿈꾸는 사람은 주체의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내가 온전한 내 주체의 도달하게 된다.' '내가 사랑함으로써 내가 저 사람을 조금 더 주체적이 되게끔 만들어야 된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주체를 뭉개 버리고 융합이 되어 버린다고 환상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랑의 극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남녀가 사랑해서 아무리 많이 육체관계를 가져도 역시 하나가 된다는 것은 느낌일 뿐이지, 일이 끝나고 나면 각자 자신의 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로 서로 관계를 나누고, 서로 사랑하고, 거기서 어느 정도는 우리가 한 마음이 되어 간다고 느낄 수 있지만, 돌아서고 나면 그는 그고, 나는 나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사랑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제일 바보 같은 말이 '저 사람은 내 마음을 너무 몰라 줘.'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원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알아주는 것이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알아준다는 사실에 감격을 해야 됩니다. 몰라준다는 사실을 너무 당연하게 여겨야 합니다.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이 '그걸 꼭 말을 해야 되냐?'라고 반문하는 사람입니다. 말을 안 하면 모릅니다. 자기도 모르면서 왜 다른 사람에게는 알기를 강요합니까? 그 사람이 독심술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의 마음을 꿰뚫어 보면서 그것을 다 해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본인은 누구에게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또한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도 그 사람에게 해주고 싶을 때는 가끔은 물어보십시오. "내가 이렇게 해줘도 괜찮겠느냐?" 의외로 여러분이 엄청난 희생을 지불하며 그 사람에게 좋게 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는데, 그 사람이 전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깜짝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서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인간입니다. 결국 사랑이라는 것도 한 사람이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좀 더 온전한 자기 주체가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융합을 꿈꾼다는 것은 아주 치기(稚氣) 어린 것입니다. 사춘기 때나 몽환(夢幻)에 빠져서 그런 걸 느끼는 것이지, 밥술이나 먹은 사람들은 그런 생각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 의미심장한 구절이 나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 (고전 13:5) 그런데 우리는 너무 사랑하면 예의 같은 것은 뭉개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예의의 껍질이 남아 있으면 그것은 진정한 융합을 이룬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케미(chemistry)가 잘 안 맞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아무리 그 마음에 사랑이 끓어 넘쳐도,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있고, 그와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규모(規模)를 갖춘 사랑,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도 우리의 주체성은 뭉개면서 들어오셔서 점령군처럼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시고 사랑의 깃발을 휘날리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두드리십니다. 예수님이 어떤 문을 두드리고 있는 장면이 그려진 그림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 요한계시록 3장 20절을 그림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 문을 잘 보면 나무문입니다. 그런데 손잡이가 없습니다. 바깥에서 확 잡아당길 수 있는 문이 아니라 안에서 걸개를 풀고 열어주어야지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도 결국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함으로 주체성을 잃어버린 우리들을 하나님을 앎으로 주체성을 회복하게 해서, 주체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열고, 주체적으로 그 사랑을 받아 들여서,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있고, 나는 나로 있으면서, 서로 주체 간에 사랑을 나누게끔 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면 우리 모든 인간의 사랑은 바로 이런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랑을 본 받으면서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폭력도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서 정신적인 폭력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아무리 사랑해도 자기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이 결코 살아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그를 사랑해도, 나는 자기(自己)고, 그는 타인입니다. 자기(自己)는 자기(自己)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라고 부르는 것 자체도 말하자면 언어의 혼돈이고 모호성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自己)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에는 의존의 감정이 수반되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삶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지 상대방 때문에 만족한 상태가 아닙니다. 각자 서로 다른 주체로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각자 찾아가는 과정이 사랑하는 과정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 상태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자기가 성숙되고 완성되어가는 기쁨이 없으면 함께 찾아가는 과정을 계속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루하고 싫증이 나기 때문에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주체의 환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사랑을 꿈꾸면 꿈꿀수록 미완숙한 인간이 되고, 사랑을 더 많이 하게 되면 하게 될수록 자기 인생의 본 뜻에서 멀어진 삶을 사는 또 다른 정신적인 폐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희생의 환상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면서 빠지는 자기만의 환상입니다. 사랑의 자리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사랑할 때 정염(情炎)과 함께 근심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정입니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이웃집 아저씨를 만나고, 얼굴도 모르는 다른 동네 사람을 신호등 앞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 때문에 근심하지 않습니다. '저분이 간밤에 편안히 주무셨을까?' '아침은 혹시 굶지 않으셨을까?' 우리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까? 혹시 그 사람이 '나 밤에 잠 못 잤습니다.', '나 아침 라면으로 때웠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가슴 아프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우린 그 사람에 대한 근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할 때 그 사람에 대해서 뭔가 염려하게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긍휼이고 사랑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이런 감정이 없으면 결국 희생도 헌신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참된 사랑은 자신이 남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난히 자기 아내에게 잘 한다고 자랑하는 남자들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준 것은 기억이 안 나는 것입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에게 진짜 헌신적으로 살았는데, 자식이 물어봅니다. '엄마, 아빠, 너무 감사해요.' '엄마, 아빠의 인생에는 저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정말 엄마 아빠의 희생 위에 제가 이만큼 컸어요.' 그렇게 얘기할 때 부모는 '무슨 소리를 하니, 나는 그런 적 없다.' '그리고 우리가 뭘 잘 해줬니, 그냥 니가 잘 자라 줬지.' 그게 진짜 자식을 사랑한 부모입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부부 싸움할 때 나오는 게 뭐냐면 맨날 과거의 일입니다. 과거에 자기가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 남편이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지, 그거를 알고 보니까 장부책에 아예 써 놨습니다. 코앞에 들이대면서 자기가 얼마나 희생 했는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런 걸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게 사랑의 감정입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기억해 줘도 나는 기억이 없습니다. 내가 좋아서 한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환상에 빠진 사람은 희생의 환상에 사로 잡혀서 이것에 대한 대가를 기대합니다.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을 때 그것을 아무에게도 보상받지 못한 한(恨)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깊이 한(恨)이 될 때 그 사랑은 아주 높은 순도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사랑은 매우 깊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선한 것을 하고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주님께로부터 신세진 것만 생각나지, 주님을 위해 자기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희생의 환상이 어디에서 나오냐 하면 자식들이 군대 갈 때 나타납니다. 자식이 하도 집에서 뒹굴 거리면서 속을 썩입니다. 그러면 '요즘 군대는 저런 놈 안 잡아가고 누구를 잡아가나.'라고 생각합니다. '허긴 저런 놈 잡아 가봐야 나라가 지켜질 리가 없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맨날 군대나 가라고 그랬는데 어느 날 영장이 나옵니다. 그러면 엄마 가슴이 철렁하는 것입니다. '이 자식이 가서 진짜 고생을 하는구나.' '헤어져야 되는구나.' 그리고 마지막 날 아침에 작별의 시간에 밥을 해 먹이면서 엄마는 계속 눈물을 흘립니다. 한 2주일쯤 돼 가지고 마음을 좀 다스릴 때쯤 됐는데 소포가 옵니다. 뜯어보니까 군대 가서 아들이 벗은 옷을 군대에서 보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왜 보내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에도 보내주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꼭 보내주었습니다. 그것은 부모를 향해 고문하는 것입니다. 그걸 뜯어보고 나서 옛날에 '요즘 군대는 저 놈도 안 잡아가나?'그렇게 말했던 것을 너무 가슴 아프게 후회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에 밥을 먹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자는 것입니다. 누워 있다가 갑자기 퍼뜩 아들이 그 추운 겨울에 마룻바닥에서 모포 하나 깔고 자는 것이 (생각납니다.) 요즘 군대 그렇지 않고, 다 보일러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슬며시 일어나서 도저히 거기서 못 자겠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윗목으로 갑니다. 윗목에 가서 아들을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기도를 많이 했으면 기도가 펑펑 나올 텐데, 평소에 별로 은혜 생활도 안 했습니다. 올라가서 윗목에 앉았는데 춥기만 하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5분 만에 까딱까딱 졸다가 새벽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온몸이 삭신이 쑤시고, 그리고 온 몸이 오그라드는 것처럼 춥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환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희생의 환상입니다. '아, 내가 드디어 아들의 고난에 동참했구나.' 군대 가서 고생하는 아들과 윗목에 물러나서 5분 기도하다가 밤새도록 꾸벅거리고 졸아서 온몸이 쑤시는 것 사이에는 아무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희생의 환상을 간직하면서 자기 장부의 대출 쪽에 빨간 글씨로 기록을 해 놓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한 밤을 새우고 윗목에서 지냈다.' '널 생각하면서.' 그것을 적어 놓는 것입니다. 안 잊어버립니다. 사랑은 잊어버리는 건데, 안 잊어버립니다. 결국은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참 사랑의 감정이 시킨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라는 이야기입니까? 자식은 군대 가서 개고생을 하고, 눈을 치우고, 겨울에 고생을 해도 엄마 아빠는 그것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편안하게 먹고 놀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뭐냐면 그게 너무 길어집니다. 희생의 환상에 너무 오래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 사람은 자기 삶을 못 삽니다. 자기 삶을 못살고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이상하게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랑이 순수하고 매우 깊다고 평가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런 엄마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적으로 보면 가장 바보 같은 사랑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데, 그 시간을 아들 생각에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허비하면서 살아가는 현실은 얼마 안 되면 자기가 또 후회해야 할 과거가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그런 엄마를 생각하면서 군대 생활에 지장을 받아서 탈영이나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이런 것들을 계속해서 주고받으면 사람의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기서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사랑 자체가 그런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에 울컥울컥 아들 생각이 나고, 눈물이 나고, 설거지 하다가도 눈물을 씻고 하는 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지 못할 정도로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고, 환상 속에서 계속 살면서 자신이 엄청난 일을 자식을 위하고 있다고 자기 의를 쌓아 가는 과정은 결국 자기 자신을 망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나는 또 그 아들을 아파하면서 나의 주체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서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자기의 주체를 꽃 피움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생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랑이 진정으로 자녀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생의 환상은 자기 인생의 주체성을 잃게 하고 명랑(明朗)한 삶을 해칩니다. 더욱이 현재라는 소중한 자기 시간을 허비하게 만듭니다. 이런 희생의 환상 속에 사는 것은 매우 해롭습니다. 성공하면 자기 의(義)에 빠지게 되고, 실패하면 한(恨)의 정서에 사무치게 되는 것입니다. 울화병 같은 것이 생기고, 마음의 병이 되고, 우울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자식들에게 이런 비정상적인 사랑을 하면서 자식이 승복을 안 할 때 이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엄마만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엄마는 너를 위해 목숨이라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걔네들한테 엄마 목숨 필요 없습니다. (엄마 목숨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진짜 엄마가 목숨을 버려서 자식을 구원해야 될 그런 때가 있습니까? 일어나지도 않는 일, 그리고 가능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펴십니까? 그리고 희생의 환상에 사로잡힐 근거를 마련하게 됩니다. 심지어 부모들이 잘 하는 말 가운데 자녀를 아주 오그라들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누가 낳으라고 했습니까? 누가 키우라고 했습니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부모인 우리는 자식을 사랑한 것만큼 상처를 받고 엄청난 외로움에 빠집니다. 너무 희생적이고 자식밖에 모르는 외골수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마지막에는 상처를 받습니다. 결국 사랑이라는 것은 삶에 의미를 주고 살아갈 힘을 주는 건데, 이런 희생의 환상에 빠지고 나면 삶의 명랑(明朗)함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의 생각은 과거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나는 얘기합니다. 자식들이 좀 못된 애들은 이런 위험이 없습니다. 엄마가 아무리 희생해도 몰라주는 애들은 덜 위험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심성이 매우 착합니다. 그래서 매일 자기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고, 운동화 빨고, 고생하는 엄마, 돈 벌어오는 아빠를 생각하면서 늘 가슴에 부채의식(負債意識)을 가지고 있는 애들이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절대적인 통계는 아니지만 어렸을 때 공부 잘하고 엄마 아빠 마음에 꼭 맞게 행동해서, 선생님의 마음에 꼭 맞게 행동을 하고 모범생으로 자라서 거의 애완견처럼 사랑을 받던 애들이 의외로 결혼을 잘 못합니다. 그리고 직장생활도 의외로 못합니다. 왜냐하면, 남에 의해서 세팅(setting)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인생에서 만나는 형언할 수 없는 다양한 상황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지 기본기가 안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학교 다닐 때 껌 씹고 놀고, 선생님 속도 썩히고, 부모들 있기 그 애 때문에 몇 번이나 학교 찾아가서 선생님한테 싹싹 빌던 애들은 의외로 이혼 잘 안 하고 이상하게 좋은 대로 시집가고, 좋은 여자 만나서 삽니다. 그것이 공부를 안 하고 까불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공부만큼 중요한 다른 것을 부모가 정해 놓은 틀을 떠남으로써 경험한 것입니다. 부모의 틀을 떠나면 요구되는 게 뭐냐면 자기가 결정을 해야 됩니다. 주체적이어야 합니다. 주체에 대한 훈련이 되는 것입니다.
더 나쁜 것은 부모들이 그렇게 사랑을 하면서 한(恨)의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恨)이 맺힐 정도로 그런 방식으로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해 놓고 자식의 삶에 개입하고, 지배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들에게 가끔 이렇게 가르칩니다. "부모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부모의 사랑에 부담을 느껴 자기 삶을 포기하지 마라." "때로는 부모의 말을 듣는 것이 네 인생을 망치는 길이다." 그래서 아이를 어려서부터 주체로 존중해주고, 부모가 생각하는 자기의 틀에 아이를 끼워 맞추지 않도록 배려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공부하기 싫으면 하지 말게 두십시오. 공부 안 하면 조금 시간 지나면 다시 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공부가 그 아이와 안 맞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버려 두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양한 것들을 접촉하면서 아이들이 무엇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는지 스스로 결정하게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교육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가 어떤 아이가 되어서 어떤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그런 윤곽이 이미 엄마 아빠의 마음에 너무 뚜렷하기 때문에 이걸 양보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혼에 대해서도 막 죽자고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부모들 굉장히 많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엄마의 목숨이 아닙니다. 주체성입니다. 주체성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못 살아 가는 것입니다. 주체성 있어야 자기 삶을 살아갈 텐데 말입니다.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도, 불행해지는 것도 모두 사랑 때문입니다. 그냥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올바른 사랑을 해야 됩니다. 희생에 사로잡히면 인간은 결코 올바른 사랑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 속에서 사랑은 한(恨)되고, 한(恨)은 상처가 되어서 또 다른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성경이 그리고 있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사랑을 앎
그러면 이제 해결의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사랑 없이도 자기의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이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나름대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육욕적인 사랑이지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전에 사랑을 떠나 완전히 다른 사랑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중심으로 한 사랑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한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스스로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옛 사람의 사랑이 남아 있어서 자기중심적이 되지만 끊임없이 그것을 버리고 새 사람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육욕적 사랑에서 천상의 까리따스(caritas)로 돌아가는 과정이 우리 자신을 완성해가는 과정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아니, 강아지 하나라도 볼을 부비고 사랑하고 돌보는 사랑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외로움을 이런 방식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랑의 계명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삶의 의미를 사랑받는 데서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서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0)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대지(大地) 위에 혼자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살아왔습니다. 아무도 당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를 의지해야 겨우겨우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자기의 인생을 지탱할 수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법입니다. 자, 어떤 한 사람이 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지려고 합니다. 도와달라고 비명을 지릅니다. 내가 힘차게 손을 내밀어서 그 사람의 손을 잡았습니다. 조건이 뭐냐면 손잡은 그 사람이 미끌미끌한 이끼 묻은 바위나 혹은 얇은 진흙 위에 있을 때는 손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같이 굴러 떨어집니다. 잡아주기 위해서는 자신이 든든하게, (확고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자기 무게를 지탱 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려 주겠다고 손을 내민 사람은 40킬로짜리 여성인데, 비 오는 날 이끼 낀 바위 위에 두 발을 고무신 신고 딛고 있고, 살려 달라고 손을 내민 사람 90킬로짜리 거부가 벼랑 끝에 매달려 있습니다. 마지막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 손을 안 잡았더라면 벼랑 끝에서 그래도 죽진 않을 텐데 함께 한 덩어리가 되어 미끄러져서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제일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이 삶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주체적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자매들이 아주 훌륭한 직업을 가져서 사회적인 비전(vision)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랑으로 충만한 가정에 살아서 자기가 돌봄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물려받을 유산도 별로 없고, 집안은 콩가루 집안이라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그때 누군가를 만나서 결혼이라도 해서 이 상황을 휙 떠나버려야 되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외 없이 그런 사람들이 도달하는 곳은 결코 아주 아름다운 결혼 생활이 아닙니다. 그래서 얘기합니다. 혼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결혼할 때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혼자서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둘이 합해져서 아주 행복하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무게가 사실은 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무게를 해결 못한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겠다고 손을 내밀 때, 헤엄 못 치는 사람이 물속에서 두 손을 마주 잡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차라리 각개전투로 각자 미친 듯이 풍덩거리면서 살아남는 게 확률이 높지 그렇게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바로 자기 자신이 확고하게 자신의 삶의 터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서 어떠한 삶의 상황에서도 때로는 괴롭고 힘들겠지만 단일한 한 주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자기가 살아날 수 있는 생존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대지(大地) 위에서만 찾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대지(大地) 위에서는 물질적인 것 밖에 찾을 수가 없습니다. 감각적인 것 밖에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해줄 수는 있지만 육체와 감정의 국한된 것이고, 그것이 우리 삶의 근거를 어쩔 수 없습니다. 사건은 땅에서 일어나지만 의미는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대지(大地) 위에만 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하늘(heaven)과 대지(大地) 사이에 서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지(大地)에 충실하되, 우리 삶의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는 하늘(heaven)에 우리 삶의 근거를 함께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땅은 쉽사리 변하고, 물러가고, 꺼지고,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삶의 기반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heaven)의 빛을 받으며 대지(大地)의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확고하게 자기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쓰러진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사랑이 되고, 주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그를 붙들어 줄 수 있는 사랑이 됩니다. 풍랑에 끊임없이 배회하고 부서지려는 배를 항구에 묶어두는 밧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 대지(大地)에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의 닻을 그리스도께 내렸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사랑의 맛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진실입니다.
사랑하면서도 외롭다? 결국은 누군가가 그를 괴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희생하면서도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결국 희생의 환상에 빠져서, 주체의 환상에 빠져서 자기가 그리고 있는 사랑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끝은 매우 바람직스럽지 않습니다. 인간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자기 인생의 의미를 구성해 가는 데 있어서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미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의 위로를 받아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이런 끊임없는 방황과 고뇌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지(大地) 위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것이었으며, 죽어간 모든 사람들도 그런 고뇌 속에서 살았고, 지금 살아있는 사람도 모두 그런 고민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됩니다.
대지(大地)에 충실하십시오.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몸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그것을 몸으로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을 특권처럼 여기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당신의 모든 희망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대지(大地)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지(大地) 밖에 없는 것 같은 방식으로 대지(大地)에 충실하면 세상과 함께 우리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도 은혜 받은 때가 있으셨습니까? 상처 많이 받지 않고는 하나님을 찾았을 리가 없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었을 리가 없습니다. 외롭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면서 주님께 사랑을 해 달라고 눈물 흘린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그러다가 주님을 깊이 만났는데 그런 외로움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우리를 외롭게 한 어떤 사람들이 와서 우리를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외로움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을 모두 정돈해 준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충분하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 때문에 자식을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면, 남편은 사라져도 하나님은 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가 없어져도 그리스도는 자신의 마음에 남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라질 사람을 향한 사랑이 하늘로 이어지는 영원한 사랑이 되는 비결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가지고 우리는 주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났던 자식과 남편과 아내와 교회의 지체와 많은 사람들은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었던 훌륭한 도구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가지고 가야 될 것은 그 사람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사랑해 줘도 묻힌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향한 사랑은 목적이 없는 사랑입니다. 알아줄 사람이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모두 하나님께로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모든 삶의 동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홀로 있는 느낌을 받으십니까? 인생은 그런 거라고 발로 차 버리십시오. 인정을 해 버리십시오.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꽃이 있습니다. 며칠 뒤에 시듭니다. 어떻게 꽃이 이럴 수 있냐고 질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꽃의 운명은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가 지나면 썩고, 병들고, 결국 시들어 버리는 것이 꽃으로 태어난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시든 꽃조차도 밉다고 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생명을 뽐내다가 죽는구나 하면서 측은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우리가 왜 유한하냐, 왜 우리가 사랑하는데 그 사람은 내 사랑을 모르느냐, 그런 이야기를 넋두리처럼 반복하고 있는 동안에 여러분의 소중한 인생의 시간은 낭비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의 삶을 명랑(明朗)하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은 그만큼 의미로부터 멀어지고, 행복으로부터 멀어진 채 흘러가는 물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아무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왜냐하면, 왼발을 담그고 뺐다가 오른발을 집어넣었는데, 이미 그 강물은 흘러가 버렸습니다. 우리의 시간도 그런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 살아 있어서 맞이하는 한순간 한순간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소중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순간을 하나님 때문에 명랑(明朗)한 삶을 살고,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특권처럼 느끼며 매일매일 의미를 발견해 가서 결국 이 대지에 충실하면서 살지만 대지에 모든 꿈을 다 올인(all in)하고 망할 것이냐, 흥할 것이냐를 건 사람이 아닙니다. 하늘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하늘의 가치에 도움을 받으면서 그 빛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꿈꾸고, 사라져가는 것들을 접촉하면서 영원을 생각하며, 그 속에서 영원을 미리 맛보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특권입니다. 어제 죽은 사람은 오늘 그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살아 있는 이 순간에 대해서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님이 89세를 일기(一期)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썼고, 인터뷰하는 모든 광경을 제가 영상으로 모두 보았습니다. 암에 걸리고 나서 아무 치료제도 쓰지 않고, 치료를 모두 거부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옆에 있는 사람에게 "3월이면 나는 없을 거다." "내가 이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으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너무 아름다웠다고 전해다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고맙다고 전해다오." 그렇게 질병으로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아름다웠다고 유언을 남길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고맙다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유언을 남길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오늘을 명랑(明朗)하게 살아간 사람이 아니면 누가 그걸 남길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너무너무 소중합니다. 여러분뿐만이 아니라 여러분을 가장 괴롭히는 자의 인생도 너무너무 존귀하고 소중합니다. 그것을 인정하면서 짧은 세월 동안 살아있는 것에 한없이 감사하며, 흘러가버린 지난날에 우리의 정신을 소비하지 말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우리의 정신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오늘이라는 이 순간에 명랑(明朗)함을 유지하면서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 이 세계에 함께 숨 쉬고 호흡하는 모든 것들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여러분이 인생을 살다가 너무 아름다운 인생이었다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의 인생이었다고 고백한다면, 오늘날의 이 고민이 얼마나 가치 있는 고민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 안에서 영원한 사랑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왜 나는 혼자인가?
- 사랑하면서도 외로운 그대에게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고전 13:3)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네 번째 설교를 하면서.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외롭습니다. 추운 겨울밤에 보아주는 이도 없이 홀로 바람에 떨고 있는 한 그루 나무처럼...아무도 사랑하는 이가 없어도 외로운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여전히 홀로 남겨진 자신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이번 설교에서는 인간은 왜 외로운지...그리고 어떻게...외롭지 않은 사랑을 할 수 있는지를 다룹니다. 사랑하면서도 외로운 것은 사랑에 대한 환상 때문입니다. 이 설교를 통해 그것들을 깨뜨려 버리고 외롭지 않은 사랑으로 당신만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는 이레 동안 내내 여러분들은 제 마음에 있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새 힘을 얻으소서... - 그리스도의 노예 김남준.
I. 본문해설
자살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이 한없이 외롭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도로 정신을 집중한 결과입니다. 진리의 빛 없이 자기를 응시하고자 할 때 그것은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들도 자아(自我)에 대해 쉽게 정의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단 생각해보라.’ 어떤 사람은 ‘일단 살아보라.’ ‘그러면 그것이 당신의 자아(自我)를 보여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외로운 사람은 사랑받지 못해서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어떤 사람은 사랑하면서도 외로운 것입니까? 도대체 어떤 사랑을 해야 외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적 사랑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 “···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라는 말씀입니다(마 22:39) 또 하나는 “사랑은 언제나”로 시작하는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자기의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몸까지 불사르도록 희생하는데도 그것이 사랑이 아닐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아이러니(irony)입니까?
II. 사랑하면서도 외로울 때
그러면 도대체 사랑하면서도 외로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종종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만, 외롭게 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신없이 바쁘고 여러 가지 일로 번잡할 때 마음의 쉼을 얻기 위해서 혼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더욱이 외로운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외로움은 누군가로부터 소외받았다는 감정이고, 때로는 그것이 버림받았다는 느낌으로까지 나아갑니다. 자살하는 사람들 중 93.4%의 사람들은 이미 자살하기 전에 자살할 것이라는 신호를 보낸다고 합니다. 갑자기 주변 사람에게 ‘죽고 싶다.’ 혹은 뜬금없이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거나, 아주 아끼던 물건을 사람들에게 주거나, 정리하는 행동 같은 것입니다. 일단 사람이 자살해야 되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나면 생(生)에 대한 집착을 놀랍게 빨리 버리게 됩니다. 그에게는 미운 사람이나 보고 싶은 사람도 없고, 조용히 그냥 빨리 무(無)로 돌아가고만 싶어집니다. 외로움이라는 것도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남아 있을 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적으로 외로움은 삶의 허무감과 그것에 대항해서 의미를 찾으려는 감정 사이에 있는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끝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더 이상 허무의 감정에 대항할 힘이 없을 때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죽음을 선택하게 됩니다. 명랑(明朗)하게 살기 위해서는 의욕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의 삶을 살피면서 내가 어떤 때, 어떤 상황에서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생기는지, 그리고 어떤 때에 이 의욕이 심각하게 상실되는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환경 속에 여러분을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결국 그래야만 자기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A. 왜 나는 혼자인가?
우리는 이런 고전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나는 혼자인가? 이 질문은 한 인간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에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정신이 아닌 채로 보냅니다. 감각적인 사물들에 빠져서, 자기 일에 빠져서, 그리고 영원(永遠)과 무한(無限)에 대한 어떤 느낌도 없이 현재의 삶에 단편적으로 매달리게 될 때, 우리는 ‘나는 왜 혼자인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맨 얼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은 왜 외로운 것입니까?
1. 서로 다른 존재로 창조됨
첫째는 서로 다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각 사람이 서로 다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결국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인과 구별되어 독특한 자기(自己)를 가진 존재로 세상에 태어납니다. 아무도 같은 자아(自我)를 가질 수 없으니, 일란성 쌍둥이라도 자아(自我)는 두 개지 하나가 아닙니다. 자기 이외에는 모든 사람을 타인이라고 부릅니다. 누구든지 타인에 대해서 낯선데, 이것은 자기와 구별되는 일종의 단절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지 않았을지라도 여전히 자기와 타인의 구별은 남았을 것이고, 역시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결국 서로 낯섦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람을 존재로 구별시켜줄 뿐만 아니라 또한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멀리 떠났음
더 실제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의도하신 자리에서 떠나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외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은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큰 행복을 누렸을까 하는 행복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의 크기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느꼈을 행복의 크기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낯선 동네에 가거나 혹은 외국에 갔을 때 아주 작은 시골 마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역사가 아주 오래된 마을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거기에 서보면 척박한 환경에서 끊임없이 질병에 시달리며, 왜적의 침입에 고생하며, 그 속에서 질기게 목숨을 이어왔던 그 마을 사람들이 떠올려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려운 자연환경과 싸우며 끈질기게 자신의 삶을 살아냈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도 외로운 것을 알았을 것이고, 자기는 왜 혼자일까 하는 의문에 빠졌을 것입니다.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런 질문도 던져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아마 답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속으로 설움을 삼키듯이 자기의 존재의 무게를 삼키며 살아냈던 사람들의 흔적이 건물과 집, 그리고 유적에 묻어있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깊이 숙연해집니다.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들이 살았을 아프고 쓰라린 삶이 아주 싸한 상처가 되어 마음을 스치고 가는 그 느낌이 저는 너무 좋습니다. 나에 대해서 생각을 해주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사단의 유혹과는 정반대로 결국 커다란 소외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였고, 사람으로부터 소외였으며, 자연으로부터 소외였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자기 자신도 스스로에게 낯선 존재가 되는 형벌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외로움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외로움 때문에 인간은 절망에 이르게 되고, 거기서 인간은 결국 죽음이 삶보다 편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살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 죽음을 행복하다고 느끼게 될 때 그 감정의 고통은 무엇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결국 영혼의 생명으로부터 소외된 것입니다. 이로써 사람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소용돌이처럼 인간은 그 불행 속에 빨려 들어 물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감정의 요동 속에 지성은 눈멀고, 정서는 육욕으로 들끓고, 의지는 악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존재의 근원도 모른 채 누군지도 모르는 것에 노예가 되어, 자기 자신도 아니고 자기도 아닌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 눈먼 존재가 된 것입니다. 결국 죄로 말미암아 사랑 자체인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웃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도 없고, 자기를 올바르게 사랑할 수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자신의 근원에 대해 알 수 없고, 자기가 돌아갈 목적에 대해서도 알 수 없는 가운데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유일한 희망이 사랑인데, 그 사랑을 잃어버렸으니 인간이 어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인간은 자기가 혼자라는 사실에 대답도 얻지 못한 채 곱씹으며, 삼키며, 거기에서 오는 설움과 고통을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감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3. 세속주의와 현대인의 외로움
이러한 인간의 외로움은 세속주의와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현대인의 외로움은 세속주의와 관계가 깊습니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간은 소비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더 노동으로 내몰리면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없는 바쁜 존재가 되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물질을 누리기 위해서 수고하고 정신까지 반납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이 세상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고,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속주의인 것입니다. 세속주의란 술 마시고 방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주의란 사회의 제도를 세우거나 운영함에 있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모든 가치의 기준을 일체 배제하는 것을 세속주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상은 놀라움에서 생깁니다. 자연을 보고 놀라워하면서 자연에 대한 사상이 생겨납니다. 그 놀라운 것들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어떤 법칙들을 찾아내는 것이 결국 과학의 탄생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 개인의 삶을 보고 놀라면서 윤리에 대한 사상이 생겨나고, 또 사회에 놀라면서 정치사상이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이제 현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놀랄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궁금한 것은 오직 물질인데, 물질에 대한 모든 것은 과학이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정신은 감각에 매어 있고, 감각에 매이게 하는 모든 물질의 법칙에 대해서는 과학이 설명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보이는 세계는 물질세계가 전부이고, 그 모든 물질세계는 과학에 의해 해명이 되기 때문에 무엇인가 놀라운 것이 없습니다. 놀라운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와 물질이 관계를 맺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을 가질 수가 없게끔 물질로 쏠린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것이 세속주의라고 불리는 사상입니다. 이미 이것들은 인류의 모든 삶의 방면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속주의가 지배함으로써 결국 모든 것이 인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게 됩니다. 이것이 세속주의입니다.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해서 인간은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로운 삶은 더더욱 인간의 욕망을 증대시켰습니다. 현대인의 관심사는 오로지 물질적인 풍요와 개인의 평안함, 이것뿐입니다.
이런 세속주의는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가 버립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들만 세속주의에 빠진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도 이런 세속주의에 빠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감각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현대인은 외로움을 느낄 때 정신으로 하여금 그 외로움의 근원을 성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정신을 팔게 만듭니다. ‘인간이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 자체가 너무 두렵기 때문에 그런 질문에 직면하는 것 자체를 회피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영혼에는 고등(高等)한 기능과 하등(下等)한 기능이 있습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온도를 느끼고, 그리고 추위와 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영혼의 하등(下等)한 기능이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고, 사랑하고, 기억하는 것은 영혼의 고등(高等)한 기능이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등(高等)한 기능 때문에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가 됩니다.
짐승들은 의미를 찾지 않습니다. 여러분, 푸른 풀밭에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양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파란 하늘 아래 떠 있는 조각구름과 함께 풀을 뜯는 양 떼의 풍경은 목가적(牧歌的)이고 아주 평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짐승은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잘 때까지 끊임없이 먹습니다. 언제 양이 하늘을 쳐다보면서 기지개 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오직 눈 뜨면 감을 때까지 계속해서 자신의 주둥이로 끊임없이 먹습니다. 그래서 양떼가 있는 풀밭에는 가면 안 됩니다. 먹으면서 끊임없이 배설해서 아름다운 풀밭이 사실은 모두 폭탄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는 한번 그런 목장에 갔을 때 너무 아름다워서 풀밭에 들어갔다가 나오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엄청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똥 천지입니다. 그러나 짐승은 그렇게 풀을 뜯으면서도 이 행동이 자신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가 코로 끊임없이 냄새를 맡는 것이 취미이지만, 그렇게 하면서 이 냄새가 자기 인생에 무슨 의미를 주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계속 그 행동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영혼의 고등한 기능을 가지고 이 의미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선악을 분별하고 대지(大地)의 삶을 하늘(heaven)의 가치로 성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정신이 세속주의에 오염될 때 영혼의 고등한 기능은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결국 뇌는 곤충과 같은 상태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관심은 먹고, 입고, 마시고, 즐기고, 보는데 모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순간순간 가슴을 파고드는 허무와 외로운 감정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랠 수가 없습니다. 시편 23편 5절에서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결국 이것은 잔칫집의 문맥입니다. 잔칫집에서 혼주(婚主)가 이제까지 모두 있었던 어떤 포도주보다도 가장 좋은 포도주를, 감추어 두었던 것을 가지고 오고, 아낌없이 주인은 손님들에게 따라줍니다. 하객들은 잔에 잔을 부딪치며 그 포도주를 마시며 즐거움에 취하는 풍경을 5절이 그려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인간 영혼의 빈 잔입니다. 하나님 아니면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빈 잔입니다. 결국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들여다보면 인간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은 사람은 끊임없는 공허와 고통, 그리고 많은 허무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완벽하게 오락을 즐기고 먹고, 마시고, 입고, 즐거워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무리 정신을 딴 데로 팔아도, 결국 어느 순간에 그것이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불현듯 영혼의 빈 잔은 자신 앞에 의식되기 시작합니다. 그때 인간은 얼마나 자기가 공허한지를 느끼게 됩니다. 때로는 그 공허를 이길 수 없는 커다란 좌절과 공포로 이어지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이처럼 외롭기 때문에 사랑의 욕구도 매우 큽니다. 모든 인류의 역사에서 마르지 않는 문학의 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남녀 간의 사랑입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발달된 문명과 문화 속에서 모든 분야에 남녀의 사랑에 대한 강조들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영화와 드라마, 소설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보는 게임과 모든 과학의 기술 속에도 이런 인간의 욕망이 녹아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외롭기 때문에 이러한 사랑에 더욱더 심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도 조국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아니면 부모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동포에 대 사이라든지,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교회의 지체들에 대한 사랑이든지, 이런 것들이 고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외로움 속에서 달래줄 수 있는 이성 간의 사랑에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람들은 열렬히 사랑을 찾게 됩니다. 노래로부터 시작해서 음악, 연극, 미술, 심지어 게임, 영화,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사랑이라는 주제는 가장 긴급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사랑에 대한 갈망을 더욱더 마음속에 불붙이고 있습니다.
요즘 너무 웃기는 풍조가 뭔지 아십니까?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도 모두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를 갖는 것이 유행입니다. 중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왜 중학교 2학년, 3학년이나 되어야 눈을 뜨던 이성에 대한 관심이 초등학교, 심지어는 유치원 수준까지 내려가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사회 심리학적으로 어른들의 외로움이 아이들에게 전파된 것입니다. 그런 소속감을 갖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물론 걔네들의 사랑이라는 것이 성숙한 어른들의 이성 간에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모방, 하나의 밈(meme)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사회 심리학적으로 외로움을 느끼는 범주가 이미 어른들뿐 아니라 청소년,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내려가면서 결국 그런 문화의 풍조에 사람들이 물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다, 나쁘다,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현대인이 어마어마한 외로움에 쌓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중에서 그렇게 불타는 사랑, 풍덩 빠지는 사랑을 한 번쯤 갈망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서 찾는 것이 과연 진짜 온전하게 우리를 성숙시키고 행복하게 하는 사랑일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심각한 회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찾는 사랑이 기껏해야 자기만족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서로 사랑함으로써 무엇인가 우리들이 아직 도달해보지 못한 보다 성숙한 자기로 발전하자는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니라, 외로움을 달래주는 도구로서 너를 사용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외로움을 사라지게 해줄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지 나는 상관이 없다는 식의 사랑이기 때문에 만족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잠시 우리들이 고통을 잊기 위해서 복용하는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은 처음부터 관계의 기술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습득하기는 매우 어려운 기술입니다. 모두 딱 맞아 떨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정말 엄친아였습니다. 그리고 너무 모범적이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학까지 한 번도 빗나가지 않고 훌륭하게 직장 경쟁까지 뚫고 좋은 직장을 가진 자매가 결혼을 하면 의외로 불행해집니다. 오히려 껌 씹고 놀던 애들이 불행해지지 않을 남자를 기가 막히게 만나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삽니다. 그게 절대적인 통계라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이걸 통해서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올바른 길을 똑바로 걷던 사람들은 결국 자기 틀 속에 딱 갇혀 있어서 자기의 생각과는 다른, 엄밀하게 말하면 엄마의 생각과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너무 제한적입니다. 그런데 껌 씹고 놀던 애들은 껄렁껄렁한 애들부터 시작해서 별 애들을 다 만나보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가지가지 한다는 것을 진작부터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해서 포기할 것을 먼저 터득하고, 기대 걸어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껌 씹던 애들에게는 환상이 없습니다. 냉정한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주고받는 기술들을 어려서도 빨리 습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세속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은 개인주의입니다. 개인주의가 물질적인 면에서 특히 개인주의입니다. 나누어서 깐부가 된다는 것은 오징어 게임에서나 나오는 것이지 세상에서 깐부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깐부는 누구입니까? 요새는 남녀가 결혼해도 깐부 안 합니다. 오징어 게임에서 하는 것입니다. 각기 다른 통장을 가지고 일정한 생활비를 출자하고, 공동생활하고, 공동 경비를 가지고 사는 게 오늘날 사정입니다. 모르십니까? 난 알고 있는데, 왜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그게 현실입니다. 개인주의입니다. 세속화된 것만 해도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기 매우 어려운 조건인데, 세속화 위에 불리한 여건이 하나 더 생긴 것입니다. 그게 개인주의입니다. 원래 개인주의자들은 사랑에 빠질 수 없습니다.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타적인 사람이 사랑을 하는 거지, 극도의 개인주의에 빠진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극도의 개인주의라는 사실을 마지막에 알게 되었을 때 결혼을 하더라도 결국 마지막의 평가는 쓰레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속화뿐만 아니라 개인주의까지 겹쳤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의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사랑을 시작하면 많은 실패를 겪습니다. 어려서부터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이고, 양보하는 훈련이 전혀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껌 씹던 애들은 그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사람이 안 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길은 하나가 아니라는 이해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보고 지금 나이에 껌 씹으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아무리 씹어봐야 인생 안 바뀝니다. (차라리) 말씀을 씹으십시오.
당연히 현대 정신 자체가 물질적인 풍요와 개인적인 평안함입니다. 이제는 국가, 사회, 민족, 그런 거에 대한 관심도 없습니다. 세월이 점점 지나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도 없어집니다. 누가 자기의 삶을 좀 편안하게 해줄 것인가를 가지고 정치가도 선택을 하는 시대가 도입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적인 풍요와 개인적인 평안을 해칠 수 있다면 조국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조국도 없습니다. 유럽에 가보면 프랑스 같은 데서 부자들이 국적을 러시아로 옮깁니다. 왜냐하면, 세금을 너무 많이 때리는데, 저기서는 조금만 받겠다는 것입니다. 조국도 갈아타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도 바꾸고, 애인도 환승하는데, 그까짓 조국 갈아타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이쪽에서는 돈 많이 가진 사람을 죄인 취급하는데, 저쪽에서는 말하자면 은혜로운 사람 취급을 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현대인에게)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니까 물질적인 풍요와 개인적인 평안함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것들을 양보하면서 사랑한다는 것을 미친 짓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감동을 주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옛날에 시계를 30년 전으로만 거꾸로 올라가면 그때도 말하자면 연애 소설, 로망(roman) 문학이 (있었습니다.) 원래 '로망(roman)'이라는 것 자체가 프랑스 말로 ‘소설’이라는 뜻입니다. 소설 중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중세 기사들의 사랑을 다루는 이야기를 원래 프랑스어로 '로망(roman)'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게 낭만이 되었고, 낭만주의라고 얘기하는 '로망(roman)'이 된 것입니다. 30년 전에 로맨스 소설을 만난다면, '로망(roman)'이 영어로 '로맨스(romance)'가 된 것입니다. 로망 소설을 만난다고 하면 이런 것입니다. 그때도 굉장한 재벌의 아들이 있습니다. 사랑을 하는데 다른 재벌의 딸을 사랑하면 그게 큰 문제가 안 되는데 이루어지기 굉장히 힘든 인연에 있는 여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가게의 점원이라든지, 아니면 자기 집에서 일하는 하인이라든지, 하여튼 사회적인 지위나 모든 면에서 어울리지 않는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집 안에서 그 결혼을 반대합니다. 사랑을 반대하고 결혼을 합니다. 엄청난 박해를 받고 여성은 심지어 핍박을 받고 살해의 위협까지 받습니다. 그때 그 소설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장면이 뭐냐 하면, 이 남자가 드디어 가족들에게 선언을 합니다. '난 유산도 필요 없고, 나는 이 집 안에서 숟가락 하나 올려놓지 않겠다.' 그리고 훌훌 털고 가서 그 여자의 사랑의 품에 안깁니다. 그래서 재벌의 집에 태어난 아들이 그다음 날부터 생선 가게를 하거나, 구멍가게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소설이 결말이 나는 것입니다. 그게 감동이 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걸 쓰면 아무도 그 드라마를 안 봅니다. 그 정신을 잘 보여주는 게 이미 오래전에 상영되었지만 '시크릿가든'이 그런 걸 보여준 것입니다. 그 남자가, 현빈이 뭘 포기했습니까? '길라임'을 사랑함으로 포기한 게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포기 안 합니다. 결국 마지막에 사랑을 쟁취하게 되는 것, 심지어는 그 사랑을 버리고 물질적인 풍요와 개인의 평안함을 유지하는 것, 그게 현대인에게 훨씬 더 스토리거리가 있고, 사람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미 다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목숨보다 널 사랑한다는 고백을 원하지도 않고, 시대의 풍조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 버리고 너를 사랑해.'라고 하면, 자매가 말하기를 '다 버린 너는 내가 버릴 거야.' '네가 그걸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건데, 다 버린다면 내가 뭣 하러 너를 갖겠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현대의 세속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정서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런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정신이 아주 번뇌에 가득 차 있고 정신없이 자기의 사물들을 따라다니면서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에 오락이나 쾌락, 심지어는 자기가 하고 있는 덧없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이런 인생의 문제를 살펴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 큰 방에 죄수들이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1번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한 사람이 끌려 나가서 저기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합니다. '으악'하고 죽는 소리가 들립니다. 참수해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지금 방 안에 20여 명의 죄수들이 모여 있습니다. 정상적이라면 두려움에 덜덜 떨고 0.01%라도 여기서 탈출할 방법이 무엇인가를 연구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그 소리를 듣는 대신 모두 모여서 큰 소리로 떠들면서, 술 먹으면서, 화투를 치는 것입니다. 2번 하면 잠시 놀랐다가, 한 사람이 끌려가는 것을 보고, '계속해. 광 팔아.' 그리고 고스톱은 계속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현대인의 모습에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매 순간 보이는 세상의 사물들에 빼앗기는 정신은 시간과 함께 허공 중에 산산이 부서져 버립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를 (회피합니다.) '너는 왜 혼자인가?' '너는 왜 사는가?' '너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너의 죽음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 자체가 너무 무서워서 회피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자기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들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질문에,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 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정신을 빼앗는 사물들로부터 잠시 마음이 물러나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대지(大地) 위에 홀로 서 있는 외로운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도 내가 되어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나 비슷한 사람도 되어줄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의 무게를 대신 짊어줄 사람,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좋은 결혼 상대를 고르려면 혼자 행복하게 사는 사람을 찾아야 됩니다. 외로운 사람 찾지 마십시오. 혼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의존하는 사람을 찾지 말고, 여러분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이성 가운데 배우자를 찾아야 됩니다. 어떻게 보면 결혼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진 사람 말고, 결혼할 이유가 별로 없는 사람하고 결혼해야지 행복하게 삽니다. 그래야만 사랑에 있어서 서로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훈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랑을 통해서 무엇인가 서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이 감각적인 것들에 몰두하면서 물질의 소비와 오락, 개인적인 평안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가 혼자라는 엄연한 대지(大地)의 사실을 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캠핑을 가게 됩니다. 모기나 벌레, 모기들이 특히 많이 옵니다. 무엇을 피웁니까? 모깃불을 피웁니다. 모깃불을 피우면 모기들이 신기하게 없어집니다. 특히 (불길보다도) 연기가 좀 많이 나는 쑥이나 이런 것들을 태워야 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모닥불을 피우면 이산화탄소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위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 벌레들이 이산화탄소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물려고 왔다가 향기로운 이산화탄소가 발생하니까 그걸 따라서 계속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얼만큼 올라가고 난 다음에 다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물어뜯으려고 왔는데 또 이산화탄소가 나오는 것입니다. 올라갔다가 내려온 줄 모르고 다시 타고 (계속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등산을 하면 이상하게 모기 같은 벌레들이 내 코앞에서만 뱅글뱅글 도는 경험해본 적 있으십니까? 이산화탄소를 좋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더 극단적인 경우는 전기로 곤충을 지지게끔 태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곤충이 아주 밝은 빛을 보고 왔다가 부지직하고 타 죽습니다. 나방 같이 큰 것도 날아왔다가 데여서 놀라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어김없이 몇 미터 가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조금 아까 그 불에 고통을 받았던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불빛이 엄청나게 감각을 잡아끄니까 자기도 모르게 잡아당겨져서 그곳으로 돌진하고, 마지막에 (감전되어서) 장렬하게 타서 죽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극적인 쾌락에 맛을 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게임이나 약물 중독, 아니면 오락, 이런 것들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몰라서 그렇지 PC방 폐인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PC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 거의 폐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거를 과감하게 고발을 안 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것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키면서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중독의 문제들이 심각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도 거기에 몰입하는 것이 질병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지 말아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맛을 들이고 나면 그다음에는 더욱더 큰 자극을 받아야만 삶의 허무를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아주 잘 사는 나라만 마약을 했는데, 지금은 잘 사는 나라, 못 사는 나라, 미국부터 시작해서 아프리카까지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호주나 유럽에 가보면 ‘마약을 한 주사기는 쓰레기통에 버리지 말고 이 통에 따로 넣어주십시오.’라는 팻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보편화되어 있고, 약을 구하는 것도 어렵지도 않습니다. 한 5달러 정도만 주면 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거 구하는 거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던지기 수법으로 해서 송금하고 나면 누가 어떤 장소에 갖다 놓고, 그거를 가지고 사람들이 마약에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욱더 자극을 원하게 되고, 결국 그 자극에서 깨어나면 더 깊은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인간은 더 강도 높은 자극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쾌락주의는 일종의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것들에 대한 답을 구하고 탈출하지 않으면 인간은 영원히 자기 외로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삶을 지탱할 수 없는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겠으며, 사랑한들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B. 외롭지 않은 사랑
그러면 외롭지 않은 사랑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외로움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떤 사랑을 해야 외롭지 않을 수 있을까?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독자적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른 땅에 살고 있지만 똑같은 대기(大氣)를 호흡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르게 태어났지만 하나의 사랑을 호흡함으로써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인류 사회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숨통이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비극이라는 것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타락은 사랑의 크기를 줄인 게 아니라 방향을 바꿔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불행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이전 시대보다 현저하게 더 작아졌습니다. 정염(情炎)은 커졌지만 관계를 맺는 능력은 훨씬 더 미약해졌습니다. 더욱이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외로울 때, 그것은 우리에게 풀릴 수 없는 숙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더 커다란 고통입니다. 내가 아무도 사랑할 수 없어서 외로운 것은 어느 정도 승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목숨 바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를 그 사람이 외롭게 하고, 내가 거기서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인생의 절망과 패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에 대해 기대도 하지 않았던 사람은 절망도 안 합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냥 곤충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엄청난 사랑의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이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고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1. 환상에서 벗어나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사랑의 아이러니(irony)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환상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각 그릇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이런 환상이 아주 많습니다. 이 환상 때문에 사랑하면서도 외롭게 됩니다. 이 환상은 주체의 환상과 희생의 환상입니다. 주체의 환상은 사랑을 이해할 때 사랑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느냐면, 사랑함으로써 나는 저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구호적(口號的)인 표현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다’ 등등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런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학적인 의미에서 사용되는 것이지 물리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사용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에 대한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느냐면,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면 자기의 주체를 서로 포기하고 서로 융합이 되어 하나가 된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그 사랑이 극도에 달할 때 그런 환각에 빠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환각은 현실을 이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환각은 깨어나는 때가 있고, 깨어나는 때가 없으면 그것은 환각이 아닙니다. 환각은 깨어나는 때가 있고, 깨어나면 어김없이 마주해야 되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바람피우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게 내버려둬라.’ ‘년 안에 헤어진다.’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결국 그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특히 젊은이일 때 한창 로망에 사로잡혔을 때는 그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합니다. 그래서 1950년대, 60년대, 70년대에 소위 이야기하는 연애지상주의 같은 것들이 일본을 강타하고,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문예적인 사조들도 그래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함으로써 둘이 융합되어 하나가 되고, 세상에 대한 어떤 망각을 제공받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러분 이 나이가 되었어도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그런 사랑을 꿈꿉니다. 특히 정해진 틀 속에서 폭넓은 인간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왔고 억눌렸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더 절실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두 글자를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꿈 깨.” “그런 사랑은 없다.” “그것은 환상이다.” 그리고 그 주체의 환상은 사랑할수록 엄청난 비극을 가져옵니다. 그런 주체의 환상에 빠진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연애할 때 엄청나게 집착하는 남자들입니다. ‘어디 갔었어?’ ‘뭐 먹었어?’ ‘누구랑 대화했어?’ ‘주소록에 누가 있어?’ 이런 거 등등 캐묻는 사람들 있습니다. 주체의 환상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거의 의부증 수준의 의심증을 가지고 남자친구의 피를 말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모두 사랑에 대한 주체의 환상에 빠졌기 때문에 그런 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뭘 먹었든지, 누구를 만났든지, 혼자 있든지, 둘이 있든지, 자기 주체적인 것입니다. 그거를 왜 자기가 통제를 해야 됩니까? 그런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잠시일 뿐이지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독립적인 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또 다른 독립적 인격을 가진 사람과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지 말아야 될 표현 가운데 하나가 ‘사랑에 빠진다.’라는 것입니다. 그건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심각한 침해입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지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지는 것은 자기를 버린 몰입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서, 못 누렸던 것을 온전히 누림으로써,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은 마치 이런 것입니다. 아주 넓고 깊은 호숫가에 간신히 서 있는 사람을 확 떠밀어서 사랑이라는 큰 연못에 풍덩 빠지게 되니까, 자신의 힘으로 주체할 수 없어서 그 물의 힘을 따라 허우적거리고 있는 상태가 ‘빠졌다’라는 문학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주체성에 대한 심각한 훼손입니다. 그런 것들을 그리면서 연애를 생각하고, 결혼을 생각하고, 사랑을 생각하면, 그것은 여러분을 절대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주체성과 양립될 수 없는 종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랑은 가장 고상함 동시에 가장 저속한 것으로, 동시에 두 얼굴을 가지고 우리에게 나타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주체적인 인격이 만나서 또 다른 주체인 인격을 사랑하는 것이니까, 한 사람이 주체성을 잃어버리면 결국 그 사랑은 함몰되고 마는 것입니다. 주체성을 잃어버린 사람의 사랑은 이미 그 사랑이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게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나면 사랑을 할 수도 없고, 사랑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장(張)인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 (고전 13: 5上) 우리는 생각합니다. 사랑에 몰입이 되어서 두 사람이 융합이 되어 합쳐지고 나면 예의의 선(線)도 없고, 범절의 선(線)도 없고, 도덕의 선(線)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걸 용납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할수록, 그 사랑이 너무 깊어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사랑이면 사랑일수록, 상대방이 상대방이라는 것과 자기가 자기라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법도와 선(線)을 지키고 인간의 인격에 대해서 갖추어야 할 존엄성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방식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아무리 사랑해도 자기의 삶은 그 사람이 살아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할 이 대지(大地) 위에 명제는 사랑에 의해서 말하자면 삼킨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나는 자기(自己)이고, 그는 영원히 타인입니다.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의존의 감정이 어느 정도는 수반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것은 신뢰의 감정이 없는 사랑이니까 온전한 인격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의존이 자기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종류의 의존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들도 굉장히 안 좋은 얼굴이 뭐냐 하면, 사랑에 너무 빠져서 얼굴에 힘이 빠져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을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위험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인생을 위험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너무 목마른 사람이 아니라, 사랑 안 해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하고 사랑해야 됩니다. 그래야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체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 자기도 주체성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게 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오늘날 가르치는 사랑의 정신과는 매우 상반된 가르침을 내가 여러분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얘기가 아닙니다. 성경이 바라보는 인간관에서 나오는 사랑에 대한 견해입니다. 사랑은 단지 상대방 때문에 만족한 상태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주체로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 자체가 나를 완성해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끊임없는 자기부정(自己否定) 속에 살아야만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나 얼마나 예뻐!’ ‘얼마나 큰 금수저 물고 태어났어!’ '주먹만 한 거 물고 태어났잖아!' '더욱이 얼마나 공부를 잘해!' '얼마나 똑똑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날씬하고...' '얼마나 좋아!' 이렇게 생각하고 거기에 멈추면 인간은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그 상태에서 빠져나가는 자신만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보면서 다른 사람이 박수를 치며 칭찬해도, 거기서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발견하고, 내일은 내가 오늘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자기부정(自己否定)의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간이 자기를 극복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자기를 극복하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고, 그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말하자면 주체의 환상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비전(vision)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체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결국 그 주체를 어디다 맡겨버리고 주체 없는 사람이 되어서 남의 품속에서 사랑의 노리개로 살아가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건강한 의식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거저먹는 것 같은 사랑으로 만족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결국 환상이라는 것을 성경이 아니라 살다가 부딪혀 보면 금방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환상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대의 커플들이 뜨겁게 사랑하면서 (수없이) 금방 금방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지속성이 없습니다. 인내가 없습니다. 결국은 성경이 얘기하는 사랑의 참된 특성을 갖지 못하고 감각적인데 치우치고, 현대의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와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사랑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를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사랑에 대해 부르짖고, 사랑에 대해서 열망하면서도, 결국 인간은 자기의 마음 하나 얹어놓을 수 있는 편안한 사랑의 안식처를 사랑이라는 것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주체로서 나의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한 과정에서 이 사람을 만났고, 사랑하는 과정 자체가 나를 성숙하게 하는 과정이고, 사랑을 해서 마지막에 얻는 결과는 사람 하나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지금은 없는 나를 수확하는 것이라는 마음으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런 성숙한 인생의 견해를 가진 사람을 같은 또래 나이에서 찾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그런 걸 못 찾겠다고 투덜거리는 자매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결혼을 하지 않거나, 위인전을 읽으면서 위로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 다 싫으십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누구를 만나든지 진리의 동지애(同志愛)가 되어서 서로를 자극하며, 깨닫게 하며, 진리의 빛으로 나아가는 사랑을 해야 됩니다. 더 하고 싶은 얘기는 있지만, 그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다음에 버려야 될 두 번째 환상이 있는데, 희생의 환상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을 하면서 빠지는 자기만의 환상입니다. 사랑의 자리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사랑할 때 정염(情炎)과 함께 근심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정(情)입니다. 건널목 앞에서 만난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 그리고 동네에서 오가다가 한 번씩 만나는 어떤 아저씨, 그런 사람을 내가 은행 앞에서 잠깐 스쳤다가 만났다고 해도 이런 질문은 안 합니다. ‘저 사람 밥 먹었을까?’ ‘간밤에 편안하게 잤을까?’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닐까?’ 그런 생각 안 합니다. 왜냐하면, 나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 사람이 와서 ‘저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어요.’ 그랬다면 ‘아, 그러셨어요?’ '그러시든가 말든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잘 잤어?’ 몇 번을 잘 잤다고 했는데 ‘못 잤지? 못 잤지?’ 하면서 캐묻는 것입니다. ‘내 생각하며 못 잤지?’ ‘마음에 괴로운 일이 있어?' '아침은 먹었어?' '라면 먹었어.' 근심하면서 '왜 라면을 먹어. 몸에 나쁜 것을.' '정식으로 밥을 차려 먹어야지.' 차려주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건 무엇입니까? 사랑의 감정에는 언제나 염려의 정서가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사랑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있어야만 상대방을 위해 희생할 공간도 생기고, 헌신할 여지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너무 큽니다. 그래서 그런 염려 때문에, 불안 때문에 도저히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올바른 사랑의 분량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흔히 보면 애인 사이에도 걸핏하면 다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어떻게 해줬는데.'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데.' '내가 얼마나 많은 걸 포기하고 너를 사랑했는데.' 심지어 남편이 얼마나 아내에게 잘해주는지 돌아다니며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가 한 걸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 마음에 있는 사랑에 대한 욕구 때문에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자기의 사랑 때문에 혜택을 입었다는 생각을 추호도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진짜 자식을 올바르게 많이 사랑하는 부모는 나중에 자식들이 미안해합니다. '엄마 아빠, 엄마 아빠의 일생은 저희를 위한 희생의 연속이었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나는 그런 적 없다.' '너희들이 잘 자라줬지.'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상한 사랑으로 자식을 사랑한 사람은 그걸 모두 장부책에 써놓는 것입니다. 널 위해서 내가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를 기록해 두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을 때 이것을 한(恨)으로 승화시킵니다. 그래서 많은 한(恨)을 품고, 그 한(恨)을 모두 견뎌내는 가슴 아프고 슬픈 모습 자체가 사랑의 순도와 깊이를 입증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들이미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자신은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그것만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자, 어떤 남녀가 너무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한 사람이 암에 걸렸습니다. 결국은 두 달 만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자를 데리고 침대 옆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면사포를 씌워주고, 예물을 나누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 여자를 너무 잊지 못해서 일평생을 홀로 쓸쓸하게 살다가 그 여자 무덤 옆에 묻혔습니다. 우리는 그걸 보면서 ‘야, 그 남자의 여자를 향한 사랑은 정말 진실하고 순수했구나.' ‘깊이가 대단했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내고 나서 '결혼식까지 해주고 나서 죽은 다음에 두 달 만에 결혼했다더라.' 그럴 때는 '아, 저거 옛날에 그렇게 그리워하고 눈물 흘린 거 다 가짜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자신은 전자의 선택을 절대로 안 합니다. 그런데 그걸 미화(美化)하고, 한(恨)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아주 고귀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에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주 굉장히 도덕적이라고까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희생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성경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자,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이 녀석이 속만 썩이고 돈만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빈둥거리고 놀고, 공부도 안 하고, 돈도 안 벌고, 학교도 못 들어갔습니다. 엄마가 너무 속상해서 말합니다. '도대체 요즘 군대는 저런 놈 안 잡아가고 뭘 하나.' '하긴 저런 놈 잡아가야 나라가 지켜질 리가 없지.' 그리고 군대나 가라 하고, 지원서나 내라고 하면서 아들을 야단칩니다. 결국 때가 되니까 징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징집 영장이 날아왔습니다. 엄마의 가슴은 싸해집니다. 하루하루 날이 다가옵니다. 훈련소로 보내는 마지막 날 아침에 따뜻한 밥을 해놓고, 엄마는 차마 먹지 못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아들도 시무룩한 표정이 돼서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군대에 들여보내고 장거리를 운전해서 올 때는 뒤에서 계속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2주일쯤 돼서 마음을 다스릴 때쯤 됐는데, 덜컹하고 소포가 날아온 것입니다. 그놈이 벗어놓은 옷을 나라에서 부쳐준 것입니다.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옛날에는 꼭 부쳐줬습니다. 그건 부모를 향한 두 번째 고문입니다. 마음이 가라앉을 만한데 소포를 뜯어보니까 아들의 향취가 느껴지는 마지막 입은 옷입니다. 끌어안고 또 한참을 웁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서 엄마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지금 추운데 나무로 된 침대에서 모포 한 장 덮고...' 지금 그런 군대 없습니다. 뜨듯하게 보일러 잘 들어옵니다. 집보다 오히려 더 편한 군대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어미가 돼서 여기서 자나...' 그리고 윗목으로 올라가서 쭈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뭐 할 게 있습니까? 가족들은 다 자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싶은데, 기도도 평소에 많이 했으면 잘할 텐데, 기도도 안 했습니다. 5분 기도하다가 졸았습니다. 한참 졸고 나니까 새벽이 훤하게 밝은 것입니다. 온몸이 쑤시는 것 같고 관절이 결립니다. 그런데 거기서 뿌듯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들의 고난에 동참했구나.' 그런데 아들이 군대 가 있는 것과 자기가 윗목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관절이 쑤시도록 아픈 아침을 맞이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얘기를 할 때 많은 사람이 '저 엄마는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엄마다.' '나도 저렇게 본 받아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아들 군대 보내고 뜨듯한 데서 푹 잤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책하는 마음까지 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희생의 환상입니다.
내 얘기는 일단 군대 보냈으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까짓 자식 잊어버리고 명랑하게 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사랑은 그럴 수 없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설거지 하다가도 끊임없이 아들이 생각이 납니다. 고무장갑을 끼고 그릇을 닦다가도 울컥하고 아들 생각이 나서 빨리 달려가서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아들 사진을 보고 한 번 어루만진 후에야 다시 눈물을 훔치고 걸레질을 할 수 있는 게 자식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간직한 엄마의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에 대한 그런 방식의 사랑이 너무나 지나치고, 심지어는 그것을 한(恨)으로 승화시키는 것 자체가 너무 아름답게 생각된 나머지 오늘이라는 하루를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을 정도가 된다면 그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무엇인가 병적인 사랑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엄마들은 나중에 반드시 그 자식한테 상처를 받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받게 돼 있습니다. 그건 당연한 귀결입니다. 얼마나 당연하냐면 당구공을 세게 쳤는데 쿠션이 생기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가장자리에 맞으면 반드시 튀어나오게 되어 있지, 거기 딱 달라붙는 당구공은 없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에 매우 익숙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미화(美化)합니다. 결국 성경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것은 지성감천(至誠感天)의 사랑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자기가 쓸데없는 일이라도 마음을 다 바쳐서 하면 하늘도 감동을 받는다는 식의 사랑 방식입니다. 한(恨) 풀기 식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아를 소비하는데 사랑을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렇게 자기 주체성을 상실하고 결국은 마지막에 삶의 명랑성을 해치게 됩니다. 더욱이 현재라는 자신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시간인데, 현재라는 시간을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랑의 깊은 슬픔과 집착에 빠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신 것은 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사랑하게 하신 것이지 죽으라고 사랑하게 하신 게 아닙니다. 이러한 희생의 환상 속에서 사는 것은 매우 해롭습니다. 결국 실패하면 한(恨)의 정서를 갖게 되고, 성공하면 자기 의(義)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도, 그런 사랑을 하는 자신도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절대로 하지 말아야 되는 이야기가, 부모 자식 간에 뿐만 아니라 애인 간에도,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당신을 위해 어떻게 희생했는데.’ 이런 생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때 우리는 사랑한 것만큼 상처를 받고 외로워지게 됩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를 주고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인데, 이런 희생의 환상에 빠지면 오히려 사랑 때문에 삶의 명랑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히려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명랑한 삶을 살았을 사람입니다.
더 위험한 것은 그런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삶의 주체성에 간섭을 하고,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려고 할 때 그것은 매우 커다란 비극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흔히 자식 보고 얘기를 합니다. 자식이 뭔가 말을 안 들으면, '이 세상에서 나만큼 너를 사랑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엄마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 우리에게 부모의 목숨이 필요한 순간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게 왜 필요합니까?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엄마의 목숨이 왜 필요합니까? 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지 엄마가 목숨을 버리면 내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순간이, 그런 사건이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까? 필요도 없는 걸 엄마는 자꾸 죽겠다고 합니다. 아이는 받지도 못할 것을 미안한 마음을 계속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생각을 계속 따라가는 것입니다. 결국 그 아이의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에 폭발하게 되고, 결국 그런 사랑을 받은 것 자체가 사랑받은 그 아이에게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들에게 가끔 이렇게 가르칩니다. “부모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부모의 사랑에 부담을 느껴 자기 삶을 포기하지 말라.” “때로는 부모 말 듣는 것이 인생 망치는 길이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의 목숨이 아니라 자기 주체성입니다. 자기 인생을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주인이 되어 헤쳐 나갈 수 있는 주체성, 그것을 길러주는 것이 바로 진정한 교육입니다. 그것을 어려서부터 교육시켜서 아이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오히려 엄마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인생이 아니라 자기가 주체적으로 인생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나는 한도 안에서 그를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비주체적인 성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보고 나고도 나서도 저 여자하고 결혼하고 말지를 엄마 보고 결정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만나면 인생이 심하게 꼬이는 것입니다. 고난의 길입니다. 그런 사람 만나지 마십시오. 그래서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 당신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과 사랑하려고 노력을 해라.” “그러면 그 사람은 당신을 완성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인생도, 그 무게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형제자매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집안도 매우 우울합니다. 가정불화가 많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집에 들어와도 마음 기댈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마어마하게 직업적으로 잘 나가서 거기에 정신 팔고 살 정도는 또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서 미래에 대한 어마어마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럴 때 받는 유혹이 뭐냐 하면 ‘이 환경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힘든 집안, 칙칙한 분위기에서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면 좀 편안하게 살 수 있고, 그러면 내 인생의 무게가 가벼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은 자기 혼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남하고 사랑에 빠질 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서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하고 만나서 사랑에 빠져도 그 사람을 불행하게 하고 자신도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을 만나고, 뛰어난 사람을 만나도, 여러분 인생의 문제는 그 사람이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인생의 짐을 나누어질 수 있습니까? 누가 그걸 나누어지겠습니까? 그게 나누어집니까? 사춘기 때 정신이 거의 분열증이 올 정도로 세계에 대해서 회의가 느껴지고, 도덕에 대해서 반감이 들고,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지식에 정초(定礎)할 수 없을 때, 그때는 목숨을 버릴 엄마도 못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누가 그걸 나누어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때만 그렇습니까? 그때 처음 열린 세계의 틈바구니 사이로 진실을 본 것입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춘기가 지났으면서도 그런 환상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굉장히 불안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내 인생은 어떤 훌륭한 사람을 만나서 사랑에 빠져도 내 인생의 무게를 대신 짊어 주지는 않습니다. 무게를 잠시 잊게 해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잊어도 깨고 나면은 곧바로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짊어져야 되는데, 어떻게 해서 그런 것들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아주 분명한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탱할 수 없는 사람은 사랑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서로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되면 결국 인간은 자기의 무게를 지탱하는 힘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중력(重力)입니다. 중력(重力)은 끊임없이 우리를 잡아당깁니다. 뛰어다니는 것보다는 걸어가는 게 쉽고, 걸어 다니는 것보다는 서 있는 게 쉽고, 서 있는 것보다는 앉아 있는 게 쉽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누워 있는 게 쉬운 것입니다. 중력에 저항을 안 할수록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를 이겨내려면 중력을 이기는 어떤 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필요한 것입니다.
명랑한 삶을 사는 것을 춤추는 것에 비유한다면, 스텝 하나 옮겨놓고 팔 하나 흔드는 것, 무용의 모든 동작이 중력과의 싸움입니다. 중력을 이겨내야만 춤출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의 무게를 이기는 방식은 남에게 받는 사랑이 그걸 해결해 주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될 것 같으면 끊임없이 이 사람 저 사람 쫓아다니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인생의 무게를 이기는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자신과의 싸움이고, 자신이 스스로 풀어야 할 엄숙한 인간의 숙제입니다. 이런 거를 풀지 않은 채 인생을 살게 되면 남의 인생에 무게를 더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삶입니다.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도, 불행해지는 것도, 모두 사랑 때문입니다. 그냥 사랑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올바른 사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희생의 환상에 사로잡혀서 살아갈 때, 그것은 올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비극적인 사랑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런 걸 버려야 됩니다. 진짜 온전한 사랑을 하고 (싶으십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진짜 올바른 사랑을 하고 싶다면,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말해야 됩니다. ‘나는 너의 사랑이 필요 없다.’ ‘너의 사랑 없이도 내가 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게 성숙한 사랑입니다.
인간이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도, 그것 때문에 인간이 외로움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 목숨을 버려주어도, 그것은 자신을 이기게 만들지 못합니다. 결국 이기게 만들어주는 것은 사랑의 힘인데, 사랑받는 힘이 아니라 사랑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랑은 그만두고라도 개 한 마리라도 있어서 돌봐주어야 할 의무감을 느끼고, 그것이 기쁜 사람은 그 개 때문에라도 안 죽습니다. 그것이 사랑이 주는 어떤 희망의 효과입니다. 사랑을 함으로써 결국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사랑에도 목숨을 거는 일은 없어야 됩니다.
그리고 사랑은 목숨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목숨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에는 오히려 주체적인 결단과 인격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 번에 죽어버리는 것 가지고는 사랑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사랑하면서 오히려 매일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삶을 살 때 그 사랑이 의미 있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존적인 사랑을 하면서도 의존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미끼로 자기를 끊임없이 의존해서 자기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방식으로 남을 사랑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정신적인 폭력입니다. 영혼에 대한 폭력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성화(聖畫) 중에 보면 예수님이 등불을 들고 어느 집 문을 두드리는 장면이 그려진 그림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유명한 그림입니다. 그게 계시록 3장 20절에 나오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를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문을 잘 보면 손잡이가 없습니다. 아무 손잡이가 없는 문입니다. 그런데 문이 닫혔습니다. 그걸 두드리는 것입니다. 걸개가 안에 있어서, 안에 있는 사람만 주체성을 가지고 걸개를 벗기고 문을 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해서 사람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분이 뭣 하러 그러시겠습니까? 그냥 구둣발로 뻥 차고 뚫고 (부수고) 들어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 하십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감히 그렇게 안 하시는 일을 우리가 인간에게 그렇게 강요한다는 것은 대단히 정신적인 폭력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런 사랑에 대한 잘못된 견해 때문에 희생양이 됩니다. 인생을 망칩니다. 사랑을 못 받아서 인생을 망친 사람이 많은 게 아닙니다. 올바르지 않은 방식으로 사랑을 하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불행으로 인생이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거에 대한 성숙한 견해를 가지고 끊임없이 고민해야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것들이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충격은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잘못된 인식에, 그릇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적인 사랑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환상을 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참다운 주체로서 나는 내 인생의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삶의 사태들, 심지어는 내가 목숨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사랑의 관계조차도, 나를 어제보다 나은 인간으로 이르는 성숙의 기회로 삼으면서 살아가야 되겠다는 결심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러려면 사실은 우리에게 사랑이 넘쳐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이 자기에게서 자가발전 되어서 솟아오르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사랑을 받는 게 좋지, 하는 게 좋겠습니까? 꽃다발을 들고 갈 때도 기쁘다는 이야기는 받은 기쁨이 있으니까 들고 가는 게 좋은 것입니다. 자기한테 욕설을 퍼붓고 물건이나 내던지는 사람한테 꽃다발을 들고 가는 것은 사실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은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랑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됩니다. 그런 환상에서 깨어나서 독립적인 주체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주체로 돌아가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연 나에게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내게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한 경험을 얘기해보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공유하고 있는 경험입니다. 집안에서 상처를 받고, 인생에서 수많은 좌절을 겪었습니다. 회심하기 전에 저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스스로 성찰하면서 인생관이 확립되지 못한 데서 오는 불안감, 그리고 신에 대한 반감, 자기 운명에 대한 저주와 폭력과 같은 사회 환경에 대한 저항 같은 것들이 자기의 정신을 산산이 찢어놓고,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거기에서 막 미치도록 절망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상처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는지를 깨닫고, 자기 밖에 오셔서 두드리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그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 은혜에 충만한 마음을 가졌던 때를 회상해 보십시오. 누구의 사랑에 목마르십니까? 나는 주님께만 사랑받으면 충분히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그 상태가 오래 못 가니까 문제입니다. 그것입니다. 결국 아주 주체적으로 사랑을 하는 것을 설명을 다 듣고 보면, 주체가 없이 흐물거리며 융합이나 꿈꾸고 환상에 빠져서, 주체의 환상, 희생의 환상에 빠져서 사랑하는 그 사람이, 오히려 너무 너절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걸 모두 극복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나 아름답고 훌륭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로 돌아와 보면 무슨 힘으로 내가 그 멋있는 사랑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게 문제입니다. 문제는 자신 안에 그럴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내가 사랑하지만 결코 그에게 기대지 않고, 그리고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나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서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얼마나 멋있는 사랑입니까?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죽음의 두려움에도 매이지 않는, 그런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그런데 그런 삶은 얼마나 힘든 삶입니까? 자기 자신에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자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2. 하나님 사랑을 앎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자기의 모든 것을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남에게 유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유익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이 어떻게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구제하게 내어주고, 자기의 몸까지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이 사랑이 없이 가능하겠는가? 사랑이 없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나름대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욕적인 사랑이지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하나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을 가지고 내가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에게 있던 이전의 사랑을 떠나 완전히 다른 사랑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중심으로 한 사랑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우리 스스로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전히 은혜 아래 살아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옛사람의 사랑이 우리에게 남아 있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그것을 부정하고 버리면서 새 사람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인간의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육신 중심의 사랑을 버리고 영적인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인간은 이 딜레마를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누군가를 사랑한 사람만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외로운 것입니다.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려도 외롭지 않습니다.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주 날 버리지 않네
그는 사랑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삶의 의미를 사랑받는 데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데서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1서 4장은 말합니다. “···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0下) 아우구스티누스의 오래된 이야기가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 보십시오.” “형제 이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해 보십시오.” “하나님 말고 거기에 누가 있겠습니까?” 이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은 지평의 융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당신이 대지(大地) 위에 혼자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무리 사랑을 나누어도 결국 자신의 존재의 짐을 나누어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십시오. 더군다나 그 사랑을 도피처로 생각하는 것은 인생 패배자들이 상상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것은 실현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만이 혼자가 아니라 인류 역사의 모든 사람들이 혼자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겸손히 받아들이십시오. 아무도 당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의지해야 겨우겨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자기의 인생을 지탱할 수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법입니다.
자, 한 사람이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나 좀 살려달라고 소리 소리를 질렀습니다. 불쌍해서 어떤 사람이 손을 내밀어서 그 사람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미끄러지는 사람을 건져주려면 자신이 확고하게 서 있어야만 그를 건져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살려주겠다고 손을 내민 사람은 40킬로그램의 자매입니다. 비 오는 날 이끼가 잔뜩 쌓인 벼랑 끝 바위 위에 고무신을 신고 서 있습니다. 그런데 아래로 떨어지려고 손을 붙든 사람은 90킬로그램의 남자입니다. 그 여자가 그 남자를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함께 벼랑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견고하게 서 있는 법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매이지 아니하고, 대지(大地)와 하늘(heaven) 사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존하여 굳게 서 있을 수 있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중력을 이기고 춤출 수 있는 사람, 명랑한 삶을 위해서 댄스(dance)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그 사람이 비로소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붙들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잡아당겼는데, 손 잡아준 사람이 자기보다 약할 때, 그는 자기 위에 쓰러져서 인생의 무게를 더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완성된 인간으로 나아가는 부단한 삶의 여정은 나의 행복만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의 행복과도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인간같이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날 때 그도 행복하지 않고, 주위에 있는 어떤 사람도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도 참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삶을 살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게 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하시려고 예수를 믿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는 그 사람의 본래의 자리로 도저히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게 오늘날까지 보여지는 모든 슬픈 세속화의 역사이고, 허무한 철학의 역사고, 예술의 역사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결국은 답을 찾지 못하는 끊임없는 의문 속에서만 아름다움을 찾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답을 찾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사랑하면서 외롭다면, 또 희생하면서도 상처를 받고 있다면, 여러분의 사랑이 정말 올바른 사랑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묻고 물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것이 대지 위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삶이라는 한계도 인정할 수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모두 대답을 찾을 수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하늘(heaven) 아래 허공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하늘(heaven) 없이 대지(大地) 위에 서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대지(大地)와 하늘(heaven) 사이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다리는 대지(大地)를 딛고 있으나, 머리는 하늘(heaven)을 향해야 합니다. 사건은 땅에서 일어나지만, 의미는 하늘(heaven)에서 결정됩니다. 결국 나는 땅을 디디고 살아가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사랑을 하면서도 주체의 환상이나 희생의 환상에 매몰되어 자기 주체성을 잃어버리는 비루한 인간이 되지 않고 아름다운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땅 자체에서 나오는 자원 때문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는 자원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만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안 사람만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지(大地) 위에 두 발을 딛고 있으니, 대지(大地)에 충실한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매일매일 살아있는 날을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몸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렇게 모든 사물들을 느끼고 감각할 수 있다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십시오. 그렇지만 그것을 당신의 모든 희망으로는 삼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지(大地) 위에 서 있지만 우리의 삶은 대지(大地) 위에서 끝나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십시오. 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랑하게 사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현실에 충실하게 살면서도 끊임없이 나의 인생이 영원을 향해 가고 있는 한 여정 속에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십시오. 인생의 의미를 사랑받는 데서 찾지 말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찾으십시오. 거기서 어제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는 보람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 어떻게 자유롭게 살 것인가?
-삶의 속박으로 힘겨워하는 그대에게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자유는 칼의 양날입니다.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도, 행복해지는 것도… 자유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채 행복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속박받은 채 행복해질 수는 없습니다. 육체의 자유는 과학과 기술이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것들이 더 좋은 물건을 더 많이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신의 자유는 물질의 풍요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의 자유는 단지 도덕과 관습에 굴복하거나 감각적 세계에 빠진 채 살아가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자유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인생을 쉽게 살게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혜는 노예처럼 속박받으며 살던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현실을 긍정하며 놀이하는 아이처럼 스스로 명랑한 인생을 살게 합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예술 작품처럼 완성하게 해주십니다. 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속박에서 벗어나소서. 참으로 고귀한 당신의 신분에 어울리는…자유로운 인생을 사소서. 그리스도의 노예 김남준.
I. 본문해설
명랑한 삶을 살려면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유로운 사람이 모두 명랑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롭지 않고는 명랑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자유롭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술가와 같습니다.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해야지만 자신의 인생을 작품처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II. 어떻게 자유롭게 살 것인가?
그러면 어떻게 자유롭게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깊이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 8:31下)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자유가 없다면 자기 인생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유란 무엇입니까? "자유란 타인에게 속박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A. 우리를 속박하는 것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속박하는 것입니까? 인간이 유한(有限)한 존재라는 사실 자체가 속박입니다. 한계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유한(有限)합니다. 육체로는 드넓은 우주의 한 점 같은 존재로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묶여서 존재하고,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고 사멸합니다. 또 정신으로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속박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유는 오직 신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에 대한 관심은 절대적인 자유가 아니라 상대적인 자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자유, 이것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육체의 속박은 물질과 기술에 의해 해결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기술은 물질을 사용해 더 많은 물건을 값싸게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신의 속박은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정신을 속박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1. 우리 밖에서
우리 바깥에서 속박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회의 도덕이나 관습으로부터 타인의 평가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이 우리를 속박합니다. 도덕이나 관습에는 때때로 영원하고 불변하는 가치 있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도덕의 빛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런 빛을 인간에게 안 주셨다면 인간의 세상은 짐승들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외에 대부분의 것들은 그 시대의 문화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도덕과 관습들은 인간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이바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것들이 주는 속박 때문에 인간은 자유를 잃어버리고 더 불행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타인의 평가를 중시합니다. 안 그러는 것 같지만 많은 현대인들이 이것에 민감합니다. 그래서 유행이 가지고 있는 힘도 강해집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자기 인생을 작품처럼 살지 않고 상품처럼 살아가게 만듭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대지 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인생의 의미는 하늘에 있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물질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정신은 감각에 매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자기를 성찰할 수가 없습니다. 자유를 그리워하지만 참으로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현대인에게는 꿈꾸는 자유와 현실의 속박 사이에서 살아있는 것 자체가 번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바깥으로부터 우리를 속박하는 것입니다.
1. 우리 안에서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이것은 죄와 본성의 속박입니다. 죄는 하나님 대신 자기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참된 자아가 아니라 이기적이고 병리적인 자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본성 안에서 역사합니다.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교육이 필요하지만, 악을 행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 없다는 사실만 보아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과 선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 12:35) 인간은 비할 데 없이 위대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천(卑賤)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위대함과 비천(卑賤)함은 함께 가르쳐져야 합니다. 둘 중 하나만 가르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위험한 줄 알지 못하면 자신이 비천(卑賤)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비천(卑賤)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다시 위대해지는 길을 찾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말씀 안에 거하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인데, 그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미 믿었는데도 아직 제자가 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이 아직 자유를 얻지 못한 것처럼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진리로 말미암아 획득되는 자유가 어느 한 순간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에 일평생을 예수만 위해서 산 사람의 표본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까지도 복음을 위해 모두 바치며 헌신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밀한 자신의 마음의 세계에 대해 비밀스러운 고백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3)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롬 7:24上)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자신의 생명을 예수 위해 내어드렸는데도 여전히 죄의 법이 자기를 사로잡아서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는 모순을 그는 경험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믿고 자유를 얻어도 끊임없이 진리 안에서 거하고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결코 그 자유를 항구적으로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를 믿고 자유를 누리는 모든 과정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진리를 아는 것도, 자유로워지는 것도 일생 동안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병리적인 자아와 지속적으로 싸워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도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투쟁의 과정 속에서 은혜를 경험함으로 자유를 얻고, 그럼으로써 존귀한 인간으로써 자기만의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순간 우리는 이중(二重)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신분의 자유와 상태의 자유입니다. 신분으로는 죄인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상태로는 죄에 얽매여 있던 마음과 영혼이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 번 얻은 하나님 자녀의 신부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영혼의 상태는 그렇게 고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 (롬 8:12上)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수신자들을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명백히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만약에 육신의 정욕을 따라서 살면 마음과 영혼은 자유를 잃어버리고 죽은 자처럼 되고,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자유가 다시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구원을 통해 얻은 마음과 영혼의 자유는 끊임없이 성화의 삶을 사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마음과 영혼의 자유를 매 순간 누리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B. 자유롭게 사는 길
1. 부당한 속박을 거부함
자, 그러면 자유롭게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나는 세 가지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부당한 속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회는 법과 도덕과 관습에 의해 지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자유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것들은 참다운 올바른 도덕이라고 믿습니다. 그럴 경우에 그것은 하나님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수많은 이해관계에 얽힌 채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질서를 유지하며 사는 것도 법과 도덕, 관습, 그리고 양심의 덕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에 무조건 지배를 받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든 법과 사회의 도덕과 관습 속에는 얼마든지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 오던 도덕과 관습에 대해 왜 그래야만 하느냐고 질문할 용기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면서 인간은 그것들에 대해 의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코 생각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보다 더 뛰어난 가치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법과 도덕과 사회의 관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려고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권위가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것들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기 전에는 사회의 법과 도덕, 관습, 익숙해진 습관들을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그걸 모두 지킨 것은 아닙니다. 지킬 만큼 지키고, 못 지키는 거 못 지키면서 살고, 못 지킨 것만큼 책임을 지거나 가책을 느끼면서 살아온 것이 예수 믿기 전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다음에는 자기 앞에 펼쳐진 사회의 법과 제도, 도덕과 관습, 이런 모든 것들을 전부 동원해서 하나의 체에 걸러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코 자유로운 주체로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 체가 바로 성경입니다.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지, 무엇을 거부해야 될지를 성경을 통해서 걸러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거를 통과하는 것들은 우리들이 상당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양심을 따라서 그걸 받아들이는 삶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고 새롭게 써가는 도덕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성경을 통과 못합니다. 성경에 위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는데 도덕이나 사회의 관습이 나에게 그런 자유를 억압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자신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나에게 엄청난 속박을 강요하느냐는 비판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과의 사이에서 고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법이 있다면 그 법을 지키지 않으면 당장 벌이 가해질 것입니다. 그 법을 어기는 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것이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것이라면 처벌을 받더라도 우린 그 법에 순종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은 이유입니다. 이 세상의 법을 바꾸고, 이 세상의 도덕을 고치고, 관습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가치의 기준들이 하나님에게 부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죄 많은 세상에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도덕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잘 지켜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심정(心情)의 이해와 이성의 숙고 속에서 심사숙고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도덕과 심지어 성경이 금하는 도덕과 관습에 대해서는 그 권위의 근거를 의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 없이 복종하지 말아야 됩니다. 정당한 권위 없이 부당하게 우리의 자유를 빼앗거나 억압하는 것들에 대해 항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들의 근거를 의심하고 회의를 품는 것은 단지 항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보다 더 완전하고 나은 사회를 만들고, 개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좋은 법조인은 법을 잘 해석해서 피고를 이롭게 할 것인가, 원고를 벌 줄 것인가, 이런 것만 고민하는 사람이 좋은 법조인이 아닙니다. 주어진 법을 잘 해석해서 이것을 가지고 각각 자기에게 의뢰를 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과 함께 이 법 자체가 올바로 제정된 것인지에 대해서 의심과 비판의 눈길을 보낼 수 있는 법조인이 좋은 법조인입니다. 그리고 그 법을 올바르지 못하다면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인으로 살도록 주신 정신입니다.
로마 시대를 생각해 보면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노예는 자유정신을 가지고는 노예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노예의 집안에서 노예의 자식이 태어나면 특별히 교육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노예로서 교육을 받고 부모의 삶을 통해서 노예의 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지켜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유정신을 가진 사람이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전쟁입니다. 전쟁에서 지면 패전국의 많은 귀족들이나 자유인이 승전국에 끌려가서 노예가 됩니다. 이 사람들은 한 번도 노예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노예로서의 삶이 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노예는 사실 노예를 부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별 쓸모가 없습니다. 노예는 노예의 정신으로 가득 차야 됩니다. 그런데 노예가 자유정신으로 차 있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이런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교화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유인인데 노예가 된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수용해서 자유정신을 모두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동원되는 것이 무자비한 폭력입니다. 그리고 학대입니다. 사람이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 같은 무지막지한 폭력과 학대를 당하고 나면 왜라고 묻는 비판 정신이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좋아졌다고 하지만 옛날에 보면 군대에 가서 6개월만 지나면 거의 생각을 안 하는 군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상관이 너무 무섭기 때문에 내 의사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상관의 뜻대로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서 내가 칭찬을 받을 수도 있고, 구타를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6개월이면 그 비판의 정신들이 싹 없어집니다. 왜 이런 걸 해야 되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위에서 하라고 하면 자기가 왜 해야 되는지도 모르면서도 하는 것입니다. 6개월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무자비한 폭력과 학대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정신을 박탈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주인이 명하는 대로 복종하는 기계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노예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노예처럼 살기 위해서 세상에 보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귀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인격적으로 알고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벌벌 떠는 노예 정신으로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또 세상밖에 모르는 물질주의의 정신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모두 속박에 굴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도덕과 사회 관습에 아첨하면서 기생하며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당신께 순종할 때조차도 비인격적이고 강요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순종조차도 인격적이고, 주체적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유를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당신은 율법 아래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당신은 하나님이신데도 결핍으로 가득 찬 세상에 오셔서 속박을 받으신 채 사셨습니다. 자기는 얽매이고 우리는 구원하여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었습니까? 구원받은 대가로 무엇을 내놓으라고 주님이 거래를 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더니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보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 이외에는 어디에서도 자유로운 기쁨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먼저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어떻게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의를 위해서 사는 병기로 우리 자신을 드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동시에 자신의 인생과 사회에 대해 숙고하는 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명령하는 도덕과 관습이 가진 이 권위의 근거에 대해 질문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단지 도덕과 관습을 부정하고 해체하는 일만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사회의 도덕과 관습들을 소화해서 그것을 성경의 말씀으로 갈라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도덕을 새롭게 세워가고,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자유인으로서의 너무나 당연한 의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주체로서 예술과 같은 작품을 자신의 인생으로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것들에 항거하면서 살 수 있는 비판의 정신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비판의 정신없이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의 도덕과 관습의 노예가 되어서 거기에 억눌린 채 인생의 무게를 느끼며 살아가는 자유를 잃어버린 존재들이 됩니다. 그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결국 그 속에서 자유를 잃어버린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쾌락에 빠지거나, 오락으로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허무한 일에 자기를 굴복시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노예처럼 자신도 원하지 않는 짐을 짊어지고 강요받은 삶을 사는 동안에 자기의 인생은 살지 못하고 세월을 과거로 흘려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비판적인 정신을 가지고 여러분을 속박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정말 내가 속박받아야 되는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야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나는 이 짐들 중 어느 것들을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복종해야 하는가를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고민하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해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비판의 정신을 가지고 칼날과 같은 사고로 자신의 삶을 분석하고, 자기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서 다가오는 바깥에 있는 수많은 속박과 자신 안에 있는 속박들과 싸워가지 않으면 결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는 그렇게 간단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자유롭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유롭지 않다면 살아있어도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생존하는 것이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판적인 정신을 가지고 여러분을 짓누르고 속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이것이 진짜 정당한 것인지, 내가 이 속박을 느끼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를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근거 없다고 판단이 되면 과감하게 무게를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명랑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성찰의 과정 없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예가 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2. 현실을 긍정함
두 번째는 현실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현실을 무조건 부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 삶은 이상(理想)이 아니라 허공에 매달리는 것이 됩니다. 아무리 높은 이상(理想)을 가졌다 할지라도 실현 가능성이 없을 때는 공상이 되는 것입니다. 현실 안에서 그것을 추구하는 구체적인 삶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망상(妄想)이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늘(heaven)과 대지(大地)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두 발로 대지를 밟은 채 대지 위에서 태어나고, 대지 위에서 죽어갈 사람입니다. 인생이라는 모든 드라마는 천국이 아니라 지상에서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정된 시간 안에서만 펼쳐지는 것이지 무한정 펼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술 작품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술 작품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사물입니다. 그림, 조각, 영상, 그리고 여러 가지 수의 작품들, 등등 모든 예술 작품은 사물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깊은 의미를 들여다보면서 예술 작품을 감상합니다. 사물로 있지만 그 사물을 통해 작가의 정신세계를 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대지 위에서 펼쳐지는 우리의 삶은 예술 작품이고, 그것은 하늘과 맞닿은 우리의 정신이 살아낸 삶입니다. 그래서 결국 삶은 대지 위에서 펼쳐지지만, 그 삶의 의미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당신의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그리고 행운과 불행, 그것이 원해서 있든지, 원치 않는데도 있든지, 당신의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있는 그대로 그것을 사랑하기까지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를 당신 삶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신앙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처해 있는 현실이 아무리 나빠도 여러분의 인생은 계속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은 자기가 처한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있는 현실의 모든 것들이 우연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너무 화가 나고 힘이 들어서 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맞닥뜨린 이 상황, 굳이 이렇게 되지 않아도 됐는데 이렇게 됐다.' '저 사람은 내가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우연히 만났다.' '이러 이러한 삶의 상황들은 얼마든지 다른 상황일 수 있는데 이것이 나에게 우연히 다가오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원하는 데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한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여러분은 번뇌에 사로잡혀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그거는 이미 흘러가 버렸습니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은 그냥 정직하게 인정을 하고, 내가 이것을 받아들이고 가야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쿨하게 인정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모르지만 내게 지금 있는 것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지금 없는 것은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 현재로는 그렇다.'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지금 있는 것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지금 없는 것은 지금 현재로는 없어도 괜찮은 것이다.' 이런 생각을 담대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우연이 아니라 일종의 필연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왜 거기에 있을까?’ 이 생각을 해보면 굉장히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음으로 극복해야 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그때는 그게 왜 없었는지 너무 고민했거나 혹은 그때는 그게 왜 거기 있어서 나를 괴롭게 했는지 고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세월이 흘러가 보니까 그때 없었던 것도, 있어야 했던 것도,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물론 죽을 때까지 못 깨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획 없이 그러지는 않으셨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리고 내가 비록 그 모든 의미를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나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없는 것을 없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현실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부터 여러분의 삶의 변화는 시작됩니다. 그보다 나은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최악이라고 치겠습니다. 그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 긍정해야 합니다. 거기서 죽으려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살려고 한다면 그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다음과 같은 것들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현실이 전개되지 않았습니다.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또 안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하면, 누구에게 그런 능력이 있겠습니까? 현실을 안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지막 하는 게 뭐냐 하면, 그냥 막연히 세상을 향해 앙심을 품는 것입니다. 대상도 별로 없습니다. 세상이라는 추상적인 것에 대해서 아주 근거도 없는 불명확한 앙심을 품는 것입니다. 그 앙심의 칼은 세상에 심장을 겨누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그 칼날이 돌아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상처를 받으며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자신의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필이면 내가 왜 이 나라에서 태어났을까?’ ‘왜 가엾은 어머니는 날 낳으셨을까?’ ‘다른 애를 낳지.’ ‘나는 왜 성격이 이 모양일까? ‘나는 왜 이런 집안에서 양육받았을까?’ ‘나는 왜 나를 불행하게 한 그 친구와 손잡고 사업을 했을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데 결국 특정하게 원망할 대상을 골라낼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엾은 엄마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날 낳았는데, 엄마 잘못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나라에서 태어났는데, 이 나라가 나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대상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라고 뭉뚱그려놓고 앙심을 품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걸 생각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앙심을 품고 대상도 없이 어떤 복수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 한 인간의 정신세계가 파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해서 효과가 나타난다면 한번 해보십시오. 그런데 가엾은 엄마를 왜 날 낳으셨냐고 원망해야 엄마가 답을 줄 수 없지 않습니까? ‘나는 왜 이 시대에 태어났을까?’ ‘성격이 이럴까?’ 그 칼날이 세상을 겨누고 있지만 사실은 세상을 겨누는 게 아니라 자기 목을 겨누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에 자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사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그건 인생 낭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람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 때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집요하게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묻고 싶습니다. 그 사람을 원망해서 그 사람이 산산이 파괴되었다고 치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받은 손해나 상처가 그 사람이 비참해진 것 때문에 나에게 다시 돌아옵니까?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게 원한이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사는 것은 전혀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게 하는 그야말로 노예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인정을 하고 포기해야 됩니다. 거기서부터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남는 것은 불만과 원한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응답해주지 않습니다. 그 끝은 자기 파괴와 절망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죽기 위한 선택지는 될 수 있겠지만, 살기 위한 선택지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실 세계에서 이기면서 살려면 긍정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무한 긍정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허리가 아프다면 부러지지 않은 사람을 생각하며 아픈 정도로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됩니다. 그렇게 감사하고 아픈 허리를 고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아야 됩니다. 아직 여러분이 발견하지 못한 의사들이 많습니다. 저를 보십시오. 이십 년 동안 허리로 고생을 하고, 고통을 받았는데, 의사 한 사람 만나서 이렇게 건강하게 다니지 않습니까?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아직 길이 많습니다. 그런 길을 찾으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선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사업에 실패해서 가난한 전셋집으로 저택에서 이사를 가게 됐다면, 사글세도 못 들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거기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을 향해 앙심을 품고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결국 그 칼날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긍정의 노래를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앙심과 원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것도 그에게 기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한 번 넘어졌으면 넘어진 거지, 거기서 죽으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인생을 생각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아! 망가진 내 인생.‘ 과거에 망가졌으니까 지금이라도 일어서서 성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과거에 망가진 건 내가 돌이킬 수도 없는데, 그것 때문에 미래의 삶까지 망가지도록 저당 잡히고 산다면 (이 세상에서) 살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으로도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삶의 기쁨과 소망을 앗아갈 수 없는 방식으로 인생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현실을 긍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을 바라보면서 거기에서 삶의 위로를 발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역경을 만나도 짓밟히지 않는 자유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거를 가져야 됩니다. 그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영향력이 굉장히 큽니다.
버나드 쇼(G. B. Shaw)라는 영국의 극작가가 『인간과 초인』이라는 희극을 씁니다. 거기에 보면 회의주의자와 낙관주의자의 대조가 나옵니다. 포도주를 놓고 한 병을 따라서 서로 대작을 하며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따를 때마다 포도주 병을 보면서 ‘이제 이것밖에 안 남았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퍼마셨는데도 아직까지도 반이나 남았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마음을 가지고 현실을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훨씬 다른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간에 지금 내가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이 대지 위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기쁨, 그리고 삶의 명랑함, 이것들을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과거의 일 때문에 빼앗기는 일은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우리는 살아갈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웃기는 얘기 같지만 방금 생각이 나서 예를 들겠습니다. 사업을 쫄딱 망했습니다. 200평 저택에 살던 사람이 단칸방, 전셋집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데, 이사를 하고 짜장면을 시켰습니다. 그 짜장면이 너무 맛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의 긍정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지하실 단칸방에서 먹는 짜장면이 너무 맛있다는 현재의 기쁨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어떤 힘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비관을 해봐야 이미 망한 사업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현실에 대한 긍정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 자리에서 출발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면서, '저 사람은 저런 처지에 놓여 있는데.'라고 생각하면 자신이 더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너의 인생은 너의 인생이고, 나의 인생은 나의 인생입니다. 상품을 만드는 생산자들은 끊임없이 남의 상품을 많이 관찰합니다. 왜냐하면, 선풍기 하나를 만드는데 경쟁사에서 어떤 모델을 내어놨는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피카소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사람은 아무리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작품을 만들어도 남의 것을 훔쳐보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아무도 만들지 못한 작품을 자기가 지금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하고 비교하는 것은 상품으로서 인생을 사는 정신이고, 작품으로서의 인생을 사는 정신은 남의 것을 비교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인생을 살았어도 그게 내 인생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현실을 긍정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걸 받아들이고 나면 그다음에 살아야 되겠다는 의욕이 생기는 것입니다.
3. 의지를 소유함
마지막 세 번째가 의지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살고 싶다는 욕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욕구와 의지가 없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진짜 그야말로 목숨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움직이는 식물인간입니다. 이것은 단지 생존이나 자기만족을 위한 욕심이 아니라 스스로 보다 의미 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그 욕구가 우리에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지 혹은 어떤 취미 생활을 하든지 다 좋습니다. (그런데) 어떤 환경에 자기를 두면 살 의욕이 모두 사라지면서 가라앉는 그런 환경이 있습니다. 그런 환경을 조심해서 기억했다가 될 수 있으면 그런 상황에 여러분을 두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아도 삶의 의지와 욕구가 떨어지는데, 그렇게 해서 삶의 의지와 욕구를 더 없애버리고 나면 너무 충만한 사람이면 괜찮겠지만 별로 없는 사람이 그러면 말하자면 깊은 절망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엄청나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아이티(IT) 계통에 있는 부자 한 분이 세상을 등지셨습니다. 작년을 기준으로 하면 이건희 회장 다음으로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에 돌아가셨을 때 남긴 재산이 8조 5천억이라고 했는데, 상상할 수 없는 액수입니다. 이자 같은 거 필요 없이 그냥 쌓아놓고 돈을 써도 1억씩 쓰면 365억이고, 10년을 쓰면 겨우 3,650억입니다. 100년을 쓰면 3조 6,500억입니다. 그러면 결국 15조라는 돈은 500년 정도를 쉬지 않고 매일 1억씩 쓸 수 있는 돈입니다. 어떤 사람이 댓글을 올렸는데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 ‘나 같으면 그 돈 있으면 절대 안 죽는다.’ 그렇게 댓글을 올렸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당연히 그 사람에게 살아야 되겠다는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돈을 소비하고, 그 돈을 가지고 뭔가를 누리는 데서 찾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돈을 가졌음에도 죽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보면 인간을 정말 살아있게 하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신비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결국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살아야 되겠다는 의욕이 하나도 없을 수 있구나.' '아주 큰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하나도 없을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면서 우리는 사람으로 살아 있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만드는 의지의 원천이 어디인가에 대해서 궁금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각의 강물에 빠진 채 살아가는 인간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인생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습니까?
한 인간의 사유(思惟)의 깊이는 인간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를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 세상에 아무도 나의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결국 신앙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끝없는 인간의 고독에 깊이 공감하는 깊이만큼 그 사람은 인생이 무엇인가를 성찰한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고독의 심연을 보고 절망을 느낀 사람입니다. 거기서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대지에서 발견한 허무를 하늘의 의미로 극복한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인간에 대해 쓴 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파스칼의 '팡세'만큼 인간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파스칼은 섬뜩하리만큼 무서울 정도로 인간의 고독의 심연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심연을 그의 책을 따라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들여다보면 그는 그 심연으로 몸을 던져서 죽어버리든지 아니면, 그 심연에서 구원받을 길을 찾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글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이 아닙니다. 아주 엄청난 깊이를 가지고 쓴 것입니다. 더군다나 파스칼은 일평생 동안 과학자로, 물리학자로, 그리고 작가로서 성공한 삶을 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생애 전체가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말년에는 엄청난 통증에 시달리면서 통증을 잊기 위해서 수학의 공식을 풀 정도였습니다. 사이클로이드(cycloid)라는 수학이 있습니다. 그것을 매일매일 정기적으로 두통이 날 때마다 거기에 몰두하면서 두통을 잊어야 될 정도로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았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예수는 믿었는데, 책도 안 읽고, 공부도 안 하고, 사색은 더더욱 안 합니다. 그래서 껍질은 딱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속은 다 벌레가 파먹어서 세상 정신으로 꽉 찼습니다. 다만 세상 사람하고 다른 것은 껍질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교회에 와도 동질감을 느낍니다. 자기 같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나가도 동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껍데기는 그리스도인인데 속의 정신이 그대로 세속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 껍데기만 딱 통과하고 나면 놀랍도록 세상 사람들과 일체된 것 같은 친밀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사람이 속까지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왔을 때 자기가 뭔가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받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세상에서 찾고 추구하던 가치를 이번에는 교회에 와서 찾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운동장만 바뀌었을 뿐이지 삶은 똑같은 삶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 세속주의를 따라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그런 점에서 인간의 깊은 고독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미 벌써 19세기 말, 20세기에 생겨나게 될 실존철학과 현대정신의 토양을 이미 제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원천이 된 것입니다. 그 깊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의 인생에 대한 가르침은 결코 쉽게 쓰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피로 쓰인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런 격언을 생각나게 합니다. “먹으로 쓰여진 글은 피로 읽혀질 수 없다.” 피로 쓰여진 글만이 피로 읽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고독한 것도 알고, 자신이 정말 비참한 존재라는 것도 알았는데, 문제는 운명처럼 주어진 허무와 고독을 이겨낼 힘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현실을 살아낼 힘이 없는 겁니다. 더욱이 오직 육체의 욕망에 덜 까불리며 오락이나 쾌락으로 현실을 도피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허무와 고독 위에 무거운 욕정의 무게를 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인생이 어찌 가볍게 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자유를 상실했습니다. 이미 자신의 삶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자기 인생이라는 작품을 만들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메뚜기와 같이 살다가 죽음의 불길에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릴 사람들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엔 괴롭거나 허무할 것입니다. 쾌락의 순간으로 도망칠 수는 있지만, 끝나고 나면 더 깊은 어둠 속에 혼자 버려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가 서 있는 여기는 어디인가?' '대지는 무엇이며, 하늘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너무나 근본적인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불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비처럼 세상 물질의 소비나 쾌락, 그리고 세상의 오락과 같은 데 곤충처럼 날아들면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폐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깨달을 수가 없고, 깨달은 사람들은 그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는 무엇입니까?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 일은 진리를 앎으로써 이루어지고, 은혜는 힘이기 때문에 은혜가 주어지는 곳에는 속박으로부터 놀라운 해방이 있습니다.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죄 가운데 살다가 주님을 만나고 깊이 은혜를 받고 나면 두 가지가 아주 뚜렷해집니다. 그게 뭐냐 하면, 희미하게 보이던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고 하는 사실과 두 번째로는 자신의 마음과 영혼이 매우 가벼워졌다는 해방감입니다. 그게 은혜가 하는 역할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는 결국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아무리 인생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골똘히 사색을 한다고 할지라도 이 은혜가 없이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 자유를 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자기를 속박하는 모든 부당한 힘에 항거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온전한 도덕과 관습을 사랑의 힘으로 세워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의 감동과 함께 주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안다는 것은 한순간에 파악된 이해나 지적인 동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진리를 인격적으로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처럼 은혜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마음과 인격이 진리의 분신이 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며 살아있는 말씀의 경험입니다.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고 참으로 자유로운 주체로 살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마른 뼈와 같은 자들도 이 은혜를 받으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소경과 같은 사람이 이 은혜를 받으면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면 새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은혜는 능력입니다.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가 없기 때문에 사실은 인생이 무거운 것입니다. 심지어 이 무게를 피하여 쾌락으로 도망을 칩니다. 더 깊은 무게를 느끼며 죄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은혜는 돌이켜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은혜는 하늘에 대해 눈 뜨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대지에 대한 헛된 기대를 버리게 하고, 대지에 충실하면서 살도록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지만, 대지가 줄 수 없는 것을 대지에게 기대하지는 않게 만들어줍니다. 우리의 많은 인생에 대한 실망은 대지가 줄 수 없는 것들을 대지에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깊이 실망하고 그것이 삶의 의욕을 앗아갑니다. 대지는 우리로 하여금 허무를 느끼면 그 허무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늘을 바라게 해줍니다. 대지 자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대지에서 받는 은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발견한 의미는 다시 대지로 내려오게 합니다. 설명을 드리자면 이런 것입니다. 누구든지 대지 위에서 삶이 아주 행복하다면 아무도 예수를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자기 뜻대로 안 되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이 대지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결국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천상에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게 아니라 이 지상에서, 대지 위에서 펼쳐지는 삶 속에서 자기의 한계를 느끼고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하면서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비로소 이 대지 위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 대지가 결국 (지평선에서) 하늘과 만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 대지를 내려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대지에서 대지를 바라보는 것과는 아주 사뭇 다른 그림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게 영혼과 마음의 자유입니다. 그런 정신의 자유를 누린 사람은 반드시 대지로 다시 내려옵니다. 왜냐하면, 결국 자신의 경험은 하늘에 속한 것이지만 자신의 인생은 하늘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대지 위에서 펼쳐지는 것이니까 다시 대지로 내려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지 위에서 이제는 대지만이 아니라 대지와 맞닿아있는 하늘을 느끼면서 그 지평선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전과 같이 대지가 해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그걸 대지에 희망을 걸지 않습니다. 그 희망은 하늘에 두고, 대지 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대지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거는 대지가 해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대지에 기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도저히 대지가 해줄 수 없는 것을 대지에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실망하게 되고 좌절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대지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한계입니다. 처음부터 대지가 그것까지는 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세상이 나를 배신했다거나, 나를 속였다거나, 혹은 세상이 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원래 그런 거라고 받아들입니다. 그거는 대지에게 해결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신앙으로 하나님께 해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지 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이 깊으면 인생을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반복될 수 없는 단회(單回)적 인생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국 천상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대지 위에서 전개됩니다. 태어날 때 시작이 되고 죽을 때 우리의 인생은 끝이 납니다. 우리의 대지에서의 삶이 편지지라면 우리의 인생은 그 편지지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사연을 써가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편지는 무한한 것이 아니라 장수(張數)가 정해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페이지를 쓰고 인생이 끝이 납니다. 어떤 사람은 열 페이지를 쓸 수 있지만,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주어진 동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경험하고 나면 그것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쓸 수 없는 사연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라는 편지지의 한계는 딱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촌음(寸陰)을 아껴 쓰면서 자신의 삶 전체가 아름다운 사연이 되게끔 써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한한 인생이라는 편지지를 엎드려 졸고, 침을 흘리고, 아니면 개발 새발 그리면서, 낙서를 하면서,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너무 가엾은 것입니다. 저렇게 살아서 마지막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소비하고, 세상의 권력을 향유하는 모든 것들은 인생을 놓고 보면 한마당의 어지러운 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편지의 내용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지 위의 삶에 충실해야 할 이유를 대지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운명의 굴레에 매인 노예가 아니라 그것을 힘차게 끊어버리고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운명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에게조차도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백번 양보해서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치겠습니다. 그런데 그 운명은 깨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아름다움은 운명처럼 여겨졌던 벽들을 허물면서 새로운 길을 내는데 인생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운명이라는 벽을 허물며 투쟁하면서 길이 아니었던 곳에 새로운 길을 내며 걸어가는 운명 자체를 오히려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자유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도 불평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묵묵히 지고 가는 노새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사람이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운명의 굴레를 벗어버림으로써 아무 속박도 없는 놀이하는 어린아이처럼 변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다른 건 아이에게 숙제를 내줄 수 있어도 놀이는 숙제를 내줄 수 없습니다. ‘너 30분 동안 놀아야 된다.’ ‘이런 놀이를 해야 된다.’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밥을 먹던 아이도 놀이가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밥숟가락을 팽개치고 그 놀이 속에 뛰어들어서 심취합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행복합니다. 그리고 자율이 아닌 타율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춤추며 놀이하는 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운명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하나님 은혜의 힘으로 사는 사람이 인생을 심취한 놀이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달콤한 일이 있는 것만은 아니지만, 쓰디쓴 맛을 보지만, 그런 점에서 아이의 놀이와는 다르지만, 그러나 그것을 양념이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그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면서 자신의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지에 충실하면서 살지만 대지가 전부가 아니라는 마음이 이미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대지는 어떠한 속박이라는 운명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를 구속하는 운명 따위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와 하나 되어서 오늘도 자기의 독특한 인생을 살아가는 자유로운 존재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 인격으로 경험하고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그는 사람에게 사랑받기를 구하는 대신 사랑하기를 갈망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나면 사랑을 받고 싶어지는 게 아니라 사랑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성숙한 인간은 사랑받기를 갈망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고 싶어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좀 극단적으로 몰아붙이자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로부터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이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 자율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사랑의 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대지의 삶이 불완전하고 유한하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대지는 하늘가는 밝은 길이 되는 것입니다. 대지에 충실하기 때문에 하늘 소망으로 충만하게 되고, 그 소망 때문에 대지 위에서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오늘 하루 호흡하고, 숨 쉬고,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세계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 한 끼의 식사와 한 잔의 물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그것입니다. 이어령 교수가 얼마 전에 별세하셨습니다. 살아생전에는 단신 책도 사인해서 보내주고 그러셨는데 돌아가셨습니다. 한 번 뵙고 싶었는데 도저히 (너무 아프셔서) 그런 길이 차단되었습니다. 돌아가시면서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아름다웠다. 고마웠다.” 두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결국 주체적으로 인생을 살아간 사람의 마지막 고백입니다. 대지를 사랑하되 대지를 애착하지 않으면서 사랑한 사람은 대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압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에 너무 감사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훨씬 낫습니다. 나는 죽은 위대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살아있는 평범한 농부가 되고 싶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감사하면서 내 눈에 가득 들어오는 이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오늘 만나는 한순간의 인연에 감사하면서 살아있음을 마음껏 느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대지에 애착하지 말아야 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소망하는 것 때문에 하늘을 바라게 되고, 자기의 죽음조차도 즐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죽음조차도 이어지는 우주의 생성 과정의 일부임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죽는 것이 또 다른 우주 속에서 모든 것들이 살아나는 과정이고, 말(言) 마디 하나가 끝나는 것은 다음 오는 말(言) 에 이어지면서 의미를 만드는 것처럼, 내 육신의 존재도 결국 어느 날 이 대지 속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사라지는 나는 한마디의 음표가 되어서 다음에 태어나는 또 다른 사람의 생명과 연결이 되어 우주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될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삶뿐만 아니라 죽음 자체도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대지와 결별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만이 대지의 삶을 즐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유인이며 어제의 자기를 극복한 오늘의 사람이고, 그는 또 내일은 오늘의 자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인간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살아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죽어서는 진정한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이럴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너무 신비해서 밑도 끝도 없는 무시무시한 인간의 고독과 소회(所懷)를 모두 잊어버리게 만들 수 있으리만치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런 고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은혜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껍질이 그리스도인이고, 훌륭한 교리를 추종하고 사는 사람이고, 또 그리스도인에게 허락되지 않는 죄는 결코 짓지 않는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여러분 안에 은혜가 지배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어쩔 수 없이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야 되고, 모순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지 위에서 인간의 삶의 명랑함을 모두 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데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데 결코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데 주체적이지는 않고 노예적입니다. 결국 생각으로는 예수를 믿어서 예수 믿는 사람의 껍질을 가지고 있어도 그 속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모순적인 인간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없고, 죽어서는 사람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는 어제의 자기를 오늘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고, 내일의 자기는 오늘을 극복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어서는 우리가 행복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외로 예수를 믿은 사람 중에 너무나 소수만이 가슴 벅찬 행복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결국 그 해답을 우리는 은혜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힌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허무한 대지 위에 터무니없는 기대를 가지고 살다가 절망에 이르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된 하늘에는 아무 기대를 가지지 않으면서 자기 인생의 근거도 모른 채 살다가 허무하게 죽어 가는지 보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유롭고 행복한 존재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인생의 의미를 묻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은혜를 간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대해서 많은 사색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매 순간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내가 참 자유로운 주체로 작품과 같은 내 인생을 살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 은혜로 세상을 이기며 자유인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 어떻게 자유롭게 살 것인가?
-삶의 속박으로 힘겨워하는 그대에게
(젊은이 버전-긴 설교)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자유는 칼의 양날입니다.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도, 행복해지는 것도… 자유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채 행복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속박받은 채 행복해질 수는 없습니다. 육체의 자유는 과학과 기술이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것들이 더 좋은 물건을 더 많이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신의 자유는 물질의 풍요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의 자유는 단지 도덕과 관습에 굴복하거나 감각적 세계에 빠진 채 살아가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자유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인생을 쉽게 살게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혜는 노예처럼 속박받으며 살던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현실을 긍정하며 놀이하는 아이처럼 스스로 명랑한 인생을 살게 합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예술 작품처럼 완성하게 해주십니다. 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속박에서 벗어나소서. 참으로 고귀한 당신의 신분에 어울리는…자유로운 인생을 사소서. 그리스도의 노예 김남준.
I. 본문해설
명랑한 삶을 살려면 먼저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유로운 사람이 모두 명랑하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 없이는 명랑하게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자유롭지 않다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예술가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술 같은 인생을 살려고 한다면 반드시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자유롭게 살 것인가?
II. 어떻게 자유롭게 살 것인가?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커다란 감동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요 8:31下)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진리가 없다면 자기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자유란 무엇입니까? 자유란 타인에게 속박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속박하는 것입니까?
A. 우리를 속박하는 것
우리를 속박하는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 자체가 속박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 자체가 속박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계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유한합니다. 육체로는 드넓은 우주에 한 점 같은 존재로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어야 하고,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늙고 사멸해야 합니다. 또 정신으로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속박 아래에 있습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는 오직 신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유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상대적인 자유입니다. 즉,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범위 안에서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속박은 기술이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의 속박은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정신적으로 속박하고 있는 것입니까?
1. 우리 밖에서
우리 밖에 있는 속박입니다. 사회의 도덕과 관습, 그리고 타인의 평가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의 속박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도덕이나 관습에는 때때로 영원하고 불변하는 가치를 가진 것들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도덕의 빛입니다. 그러나 그 외에 대부분의 것들은 그 시대의 문화 속에서 형성된 것들입니다. 도덕과 관습은 인간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이바지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들이 인간을 속박함으로 자유를 잃어버리게 하고, 불행해지게 하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은 안 그런 것 같지만 타인의 평가를 매우 중시합니다. 그래서 유행이 가지고 있는 힘도 매우 강합니다. 이것은 결국 현대인이 자신의 인생을 작품처럼 살지 않고 상품처럼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지 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인생의 의미는 하늘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물질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정신은 감각적인 사물에 매여 있기 때문에 자기를 객관적으로 성찰하지 않습니다. 자유를 그리워하지만 참으로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현대인에게는 꿈꾸는 자유와 직면한 현실의 속박 사이에서 살아있는 것 자체가 번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밖으로부터 오는 속박인 것입니다. 때로는 법과 사회의 제도가 우리를 속박하고, 우리에게 복종을 강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에게 속박이 되는 것입니다.
2. 우리 안에서
두 번째는 우리 안에 있는 속박입니다. 이것은 죄와 본성의 속박입니다. 죄는 하나님 대신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참된 자아가 아니라 이기적이고 병리적인 자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본성 안에서 역사합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이 필요하지만, 악을 행하는 데는 그런 훈련이 필요 없고 자연스럽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도록 교육하지 않고 내버려 둔 아이가 선하고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본성과 선악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 12:35)
인간은 비할 데 없이 위대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천(卑賤)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위대함과 비천(卑賤)함은 함께 가르쳐져야 합니다. 둘 중에 하나만 가르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위대한 줄 알지 못하면 자신이 비천(卑賤)하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고, 비천(卑賤)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다시 위대해지는 길을 찾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안에 거하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인데, 그러면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었는데 아직 제자는 되지 않은 것처럼, 또 그들이 진리를 알았지만 아직은 자유롭게 되지 않은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는 진리로 말미암는 자유가 어느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진리를 알고 자유를 누리는 것 자체가 긴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일생을 복음을 위해 헌신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에 자기가 겪은 은밀한 고뇌를 다음과 같이 비밀스러운 말로 우리에게 고백해 줍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3)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 (롬 7:24) 결국 이 사람의 고백에 의하면 자기가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신의 인생을 모두 드렸지만, 살면서 자기 안에 있는 죄의 법이 자기를 삼킬 듯이 밀려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그 힘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깨달은 고뇌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유를 얻었지만 잃어버렸고,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자유를 갈망하는, 끝없는 자유를 향해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진리를 아는 것도, 자유로워지는 것도, 일생 동안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자신의 병리적인 자아와 지속적으로 싸우면서 진리를 알아가고, 또 자유를 얻어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를 알고 자유를 얻음으로써 존귀한 인간으로 자기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순간 이중(二重)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신분의 자유와 상태의 자유가 그것입니다. 신분으로는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태에 있어서는 마음과 영혼이 죄에 얽매여 있던 상태에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 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자녀의 신분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영혼의 상태의 자유는 그렇게 고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 (롬 8:12上)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3) 무슨 뜻입니까?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도록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해 준 사람들인데, 그 형제들을 향하여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합니다. 영혼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이기면 살리라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지만 마음과 영혼의 자유를 유지하며 사는 일은 끊임없이 죄를 죽이고,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사는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마음과 영혼은 속박을 벗어버리고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게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B. 자유롭게 사는 길
1. 부당한 속박을 거부함
첫째는 부당한 속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회는 법과 도덕과 관습에 의해 지탱됩니다. 이것은 개인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참으로 올바른 도덕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으로 왔다고 믿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런 지식을 인간에게 주시지 않으셨다면 사람의 사회는 동물의 세계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사회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도탄에 빠지지 아니하고 이만한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도 결국 법과 도덕과 관습, 그리고 인간의 양심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의 법과 도덕들 중에는 얼마든지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사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슬람 사회는 나면서부터 여성과 남성에 대한 아주 깊은 차별이 존재합니다. 여성에게 과연 인권이 있을까 할 정도로 억압받고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사회의 법이 되었고, 도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자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그 도덕적인 체제에 굴복하도록 훈련되고 정신이 세뇌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체제에 반항하는 여성을 불순하게 여기고, 그 사람들을 처벌해야 된다는 편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한 사회의 법과 도덕 혹은 관습이라는 것은 이처럼 사람을 거의 세뇌시켜서 모든 사람을 복종시키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 사회가 유교를 건국의 이념으로 택한 것은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함께 있습니다. 밝은 면은 우선 조선 시대에 그런 건국이념을 가지고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정의와 대의(大義)에 대한 아주 놀라운 감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롭고 올바른 것, 그리고 명분이 있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의로운 민족 심성을 우리에게 각인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건국의 가치로 생각하는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더욱이 거슬러 올라가면 단군 조선이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세웠다고 하는데, 나라가 자신의 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을 건국의 이념으로 세운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동남아에 있는 국가 중 가장 정의에 대한 감각이 그래도 예민한 나라가 한국입니다. 불의(不義)하면 꼴을 못 봅니다. 대통령이라도 감옥에 집어넣어야 하고, 정권이라도 광화문에 나가서 횃불을 들고 뒤집어엎어야만 잠을 잘 수 있는 민족성을 갖게 된 것이 직접적으로는 조선 시대의 건국이념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유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후에 성리학의 이상(理想)이 왜곡해서 들어오면서부터 조선 사회는 남존민비(男尊民卑), 관존민비(官尊民卑) 같은 사상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여성들의 인권이 짓밟히고 평등과 자유를 잃어버린 사회가 됩니다. 결국 그것이 도덕이 되고 관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고통의 대가를 지금까지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사회 속에는 성차별의 구조가 존재합니다. 이 구조가 없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엄연한 차별이 존재합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 사회 속에 광범위하게 묵인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된 것도 조선 시대에 세워진 도덕의 질서와 관습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관성입니다. 이것도 고쳐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도덕과 관습은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문화의 힘을 타고 스며들어와서 놀라운 지배력을 행사하며 우리를 압박하고 속박하여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억압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 오던 사회의 법과 도덕과 관습에 대해 왜 그래야 하는가, 질문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특히 정신적으로 성장하면서 인간은 그것들을 의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코 생각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이 주신 개인의 자유보다 더 뛰어난 가치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도덕과 사회의 관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권위가 정말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를 되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힘든 세상에서 그나마 자유를 얻으며 살아가는 비결 중의 하나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법부터 시작을 해서 도덕, 사회의 관습, 그리고 자기가 있는 조직의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자신에게 복종을 강요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그것들에 복종하며 살았습니다. 또 어떤 것은 복종을 못 했습니다. 그러면 처벌도 받고, 때로는 가책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체에 모두 올려놓고 걸러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걸러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근거를 가진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것을 지키면서 살 때 사회는 창조의 목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거기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기가 하나님 사랑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체에 걸러지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강요될 경우, 우리는 저항해야 합니다. 동시에 성경은 그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말을 했는데, 우리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그것이 합당한지를 되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소한의 억압만 존재하도록 우리는 그것을 재해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때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기준은 성경입니다. 성경이 명백히 말하는 도덕에 대해서는 유용성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심정의 이해와 이성의 숙고 속에서 아주 진지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도덕과 관습에 대해서는 그 권위의 근거를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생각 없이 복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무게를 더하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권위 없이 부당하게 자유를 빼앗거나 억압하는 것들에 대해 항거하지 않으면 결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근거를 의심하고 회의를 느끼는 것은 단지 항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더욱더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 모든 사회의 도덕과 관습들을 재해석해서 그것들의 필요 없는 속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받아야 할 속박에는 복종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새로운 도덕을 써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어제와 똑같은 세상이 아닌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 어제 받았던 속박이 아닌 새로운 자유 속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도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인으로 살도록 주신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의 정신없이는 우리는 결코 자유인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로 돌아가면 노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성경이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은 굳이 노예로 훈련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가는 삶 자체가 노예로서 살아가기 위한 아주 훌륭한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통해서 노예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모두 몸으로 체득하게 되고, 자기도 노예의 운명에 복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노예에게는 결국 자유의 정신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평생을 자유인으로 살았는데 갑자기 노예가 되는 상황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전쟁에서 일어납니다. 승전국은 패전국의 귀족과 높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노예의 옷을 입었고 당장 노예의 일에 종사하고 있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유정신으로 충만합니다. 평생 누구의 종이 된 적이 없고, 주체가 되어서 자유롭게 자기네 왕국에서 권세를 누리며, 종을 부리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노예의 옷을 입고 있어도 정신이 자유인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노예로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이런 자유인을 노예로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자유인들을 집단 수용하고 노예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 제일 먼저 주어지는 것이 비인격적인 대우와 무지무지한 폭력과 학대입니다. 더 이상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폭력으로 휘몰아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윗사람의 지시를 받게 되고, 즉시 순종하는 것이 몸에 체득됩니다. ‘왜 이런 지시를 내리지?’ ‘내가 왜 이 지시를 받아야 하지?’ ‘이 지시가 옳은 것인가?’ 이렇게 추론할 수 있는 자유는 없습니다. 그 판단을 내릴 수도 없거니와 판단을 내려도 그 판단을 실행할 자격이 그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저의 젊은 날을 회상해 보면 군대에 가서 개월만 있으면 자유정신이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어떤 지시를 받을 때 모든 기준이 명령하는 상사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만약에 상사의 마음에 맞게끔 일이 안 되면 바로 구타가 날아오고 기합이 들어갑니다. 그 고통이 너무 두렵기 때문에 어떡하든지 그 상사의 입맛에 맞추어서 모든 일들을 되게 하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군인 정신입니다. 결국 그렇게 되면 자기가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시 군대도 우리에게 명암을 함께 가져다줍니다. 그 어두운 면 중의 하나가 자유정신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아주 젊은 나이에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입니다. 그 형상의 가장 고귀한 부분 중 하나가 지성적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의지적으로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왜 그거를 따먹게 내버려 뒀냐고 사람들이 비난을 합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위대하게 보셨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당신은 선악과를 따먹는 걸 안 기뻐하시지만 인간이 따먹으면 따먹을 수도 있게끔, 그 정도의 자유를 인간에게 준 것입니다. 그 자유는 결국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자율 없이는 결코 누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젊은 시절에 가장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사실은 가장 속박받는 사람들입니다. 뭐든지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하고, 뭐든지 탐닉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결국 자신이 탐닉하는 것에 언젠가는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 벌벌 떠는 노예 정신, 물질밖에 모르는 세속 정신으로서는, 결코 자유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원하셨던 삶은 그런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속박에 굴복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도덕과 사회 관습에 아첨하면서 적자생존하며 살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조차도 인격적이고 주체적이길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무릎 꿇기를 싫어하는 사람의 정강이를 군홧발로 차시거나, 경배하기 싫어하는 인간의 머리끄덩이를 붙들고 땅바닥에 처박으시면서 절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게끔 내버려두십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기계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의 경배 행위가 아닙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유 속에서 스스로 선택하여 진심으로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경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동시에 자기의 인생과 사회에 대해서 숙고하는 진지한 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명령하는 도덕과 관습이 가진 권위의 근거에 대해 질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자유인은 누군가에게 하나님이 말씀으로 명령하시지 않은 일에 대해서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를 억압하거나, 속박하거나, 그를 무시하는 것은, 자유인이 할 행동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각각 생각이 다르고, 각각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 부당한 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도 자유인이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단지 도덕과 관습을 부정하고 해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새로운 도덕과 관습을 건설하려는 창조적인 과정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주체로서 예술 작품 같은 자신의 인생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겉만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세계와 정신의 구조가 불신자들하고는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당연히 예수를 믿는 그 순간 다른 가치관, 다른 세계관, 다른 인생관을 가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살아가면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껍질로는 그리스도인으로 있는데, 속은 다 벌레가 파먹었습니다. 껍데기는 내버려 두고 속을 다 파먹어서 세속정신으로 꽉 차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세상에 나아가서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껍질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세상 사람과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껍질이 아니라 내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가치관과 세계관, 인생관이 놀랍게 일치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인생관과 가치관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가치관, 인생관이라는 것이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종종 모순을 느끼지만 굳이 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지막 희망은 교회에 왔을 때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교회에 많아야 됩니다. 내가 껍질은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리스도인과 함께 대화를 해보니까, 나는 그리스도인과 정말 다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수준이 그 정도가 아닙니다. 안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도 이질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껍데기만 남겨두고 교회도 세속화되었고, 세속적인 세상은 세속 그대로 있는데, 나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교회에 와서는 세상을 느끼고, 세상에 가서는 교회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예배드리러 올 때 예배용 가면을 쓰고 예배를 드리고, 끝나고 나면 그 가면을 벗고 다시 자기의 고향인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교회에 왔을 때조차도 자기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것을 심사숙고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 훈련이 안 되어 있습니다. 성경도 안 읽습니다. 책도 안 읽습니다. 명상은 말할 것도 없고, 묵상도 안 합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것에 대한 가치 판단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인생에 대해서 아주 결정적이고 중요한 설교를 해도 사람들의 정신은 이 가르침 자체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운 무게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수학의 퍼즐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것을 흘려버리면서 시간을 지나버립니다. 그러는 동안에 삶의 무게는 전혀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의 가치가 무엇이고,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도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세속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지식이나 사상의 체계가 없어도 열렬한 기도와 눈물 속에서 사는 사람은 무식하게라도 순종하며 살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안 합니다. 결국 세상 사람과 차이가 나는 것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과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분 이외에는 아무런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가 없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세속주의 때문에 고민하지 않습니다. 거대하게 쓰레기더미가 홍수에 떠내려가는 것처럼 그 시대의 법, 사회, 제도, 이런 것들에 함께 떠밀려가는 것입니다. 함께 떠내려가니까 고뇌가 없습니다. 그냥 그 시대의 유행을 좇아서 물질을 소비하고, 즐거운 쾌락을 찾습니다. 그리고 굳이 죄를 짓는 쾌락이 아니더라도 감각적인 사물에 매입니다. 그 시대의 유행을 따라가면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어울리고 살아가면, 그것이 자기가 외로움을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것은 주체적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어로 ‘쉬스케마티조(suschmatizw)’입니다. 그 단어는 붕어빵을 찍어내는 것, 그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동사입니다. 틀 속에 금속을 부어서 똑같은 제품을 만들어 내는 걸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시대에 태어나면 모두 그 시대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틀에 찍히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노예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버리고도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자유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모두 목숨까지 버릴 정도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율법 아래서 율법이 있는 자처럼 복종하면서 사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율법을 따라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오직 하나의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끊어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그 대가로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우리에게 주신 것은 무한한 자유입니다. 아무 데나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으니까 그런 걸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모든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나니까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자유인이 되고 나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유하기를 버리고, 오히려 그 자유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겠다고 선택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현실에 대한 항거가 있습니까? 왜 사회가 이렇게 흘러가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그리고 반항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의 법질서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고 관성을 가지고 있는 말도 되지 않는 도덕 관습에 대한 비판적 정신이 (있습니까?) 그리고 모든 사람을 자연스럽게 복종시키는 사회의 관습에, '도대체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그런 삶을 강요하느냐?'고 물어볼 수 있는, 반문할 수 있는 용기가 여러분에게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자체가 무서운 인생의 무게가 되어서 여러분을 짓누를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법과 사회의 도덕과 관습을 따라가지 않고 항거하는 것이 어마어마한 부자유로 느껴집니다. 마치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물에 몸을 맡기고 발장구만 치면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지만, 거슬러 보려고 몸부림을 치면 어마어마한 힘이 드는 것처럼, 이 사회의 관습과 제도에 굴복하며 살지 않고 항거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고 인생의 무게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알고 보면 자기가 의식을 놓고 무의식적으로 거기에 복종하고 떠내려가다 보면 결국 그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인생의 무서운 무게가 되어서 자기를 짓누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사회의 인습이 주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이해가 잘 안 되십니까? 그러면 (이해하기 쉽게) 하나만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저희들이 젊었을 때만 해도 장남은 자기 가정에 대해서 무한 책임을 졌습니다.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부담감은 장남이 돼보지 않은 사람, 그리고 그런 도덕 관습에 복종해보지 않은 사람은 못 느끼는 무게입니다. 차남은 절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무언가 한 방면에서 창의적이고 똑똑했던 사람들은 모두 장남 중에는 별로 없습니다. 차남입니다. 장남은 자기의 길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을 생각해서 너무 공대(工大)를 가고 싶은데, 상고(商高)를 가야 됩니다. 돈을 벌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은데, 할 수 없이 여상(女商) 가서 공부하고, 주판을 배우고, 은행에 취직해야 됩니다. 이것이 장남, 장녀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도대체 그게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다행히 아버지가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 장남에게 모두 물려줍니다. 그러나 우리같이 아무것도 부모가 가진 것이 없을 경우에는 어차피 못 받기는 마찬가지인데, 장남만 그 짐을 짊어져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요즘 사회에서 되돌아보면 그때 가졌던 장남으로서의 무한 책임 의식은 미친 짓입니다. 자유를 짓누르는, 누가 지운 적도 없는 짐을 자신이 스스로 관습 속에서 짊어지고 무한 부담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압박이고 도전입니다. 그런 근거도 없는 것들이 우리를 압박하는 것에 대해서 항거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결국 오늘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삼십 년 후에 지불만기로 갚게 되어 있는 부채를 끊임없이 끌어다 쓰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 나는 (사회에 대해서) 그런 비판 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신문을 놓고 읽으면서 계속 내 머릿속에 오래 새겼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속지 말자. 속지 말자. 속지 말자.’ 그러면서 신문을 읽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을 켜면서, ‘현혹되지 말자. 현혹되지 말자.’ 그러면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매스 미디어 정신에 아예 찍혀버려서 똑같이 신문이 하고, 방송이 하는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비판 정신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부당한 속박을 발견하고 그 무게부터 먼저 덜어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신앙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당하게 여러분을 속박하는 근거 없는 압박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걸 덜어내야 됩니다. 여러분에게 장남이 있어서 그런 짐을 지고 있다면, 그런 사람도 거의 없겠지만 내가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장남한테 재산을 몰아주도록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찌감치 그런 짐을 내던져버리고 자유로운 삶을 사십시오. 형제들이 n명이면 n분의 1씩 책임을 지고 각자 자기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다 갖다버리라는 것입니다. 여성에 대한 편견도 마찬가지고, 어린아이들에 대한 편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근거가 없는 것들에 대해서 항거하고, 그 짐을 덜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여러분이 결코 인생의 무거운 짐에 질식해서 자유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항거해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는지 물어야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해주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그들의 자유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만 책임 있는 자유인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2. 현실을 긍정함
두 번째로는 현실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현실을 무조건 부정하기만 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은 이상(理想)이 아니라 허공에 매달려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끊임없이 과거에 대한 후회,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쓸데없는 기대 속에서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지 못한 채 흘려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높은 이상(理想)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실현 가능성이 없거나 현실 안에서 그것을 추구하는 구체적인 생활이 동반되지 않을 때 그것은 공상입니다. 그래서 먼저 여러분의 인생의 무게를 줄이려면 현실을 긍정해야 되는데, 현실을 긍정하려면 이런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나의 의지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에 대해서는 접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내가 고치고 바꿀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는 정신을 가져야 됩니다. 그것이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상(理想)이 큰 나머지 자신의 현실에 대해서 끊임없는 불만과 고통으로 가득 찬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현재는 계속해서 과거 때문에 쓸모없이 소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불안하기 때문에 현재를 또 허비합니다. 그리고 오늘 허비한 시간은 내일 과거가 됩니다. 그러면 내일은 또 오늘을 후회하면서 내일을 버립니다. 결국 오늘이라는 인생을 한 번도 살지 못한 채 허공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왜 이 나라에서 태어났을까? 내가 왜 여자로 태어났을까? 내가 왜 장남으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이런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가엾은 어머니는 왜 나를 낳으셨을까? 이런 것들은 질문해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가엾은 엄마가 어떡하겠습니까? 원해서 낳았습니까? 태어났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난 성격이 왜 이럴까?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꿀 수 없는 것들, 돌려놓을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집착하면서 고민하는 것은 결국 인생에 무게만 더할 뿐이고, 한 발짝도 그 사람의 인생을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당한 어떤 불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행을 쉽게 얘기하면 풍자의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인생 자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논리로 대하려고 하면 머리가 터져서 죽어버립니다. 그러니까 풍자로, 해학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결국 자신이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수 있는 시점도 싫으나 좋으나 현실이고, 자기가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대지도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허리가 망가져서 아픈 사람은 그나마 걸어 다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업에 망해서 저택에서 살다가 전세방으로 쫓겨난 사람은 사글세도 얻지 못해서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을 보면서 감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 자체를 너무 힘들어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사업이 망한 것, 건강을 잃어버린 것은 내 힘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현실을 인정하고 여기에서 돌이켜야 되는 것입니다. 해학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자,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망했습니다. 망해서 결국 단칸방으로 다섯 식구가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그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혼자 드러누워서 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잘살았던 때의 화려한 저택을 생각하며 비참한 심경에 빠져서 고뇌하고 밥도 안 먹습니다. 결국 우울증에 걸립니다. 결국 자신의 인생이 거기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습니까? 잠시 생각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쫓겨나서 다섯 명의 가족이 한 방 안에 옹골옹골 모여 있습니다. 이백 평 저택을 살던 사람이, 도우미를 두고 밥을 차려 먹던 사람이, 이제는 짜장면을 한 그릇씩 시켜서 먹습니다. 짜장면의 감미로운 맛 때문에 자기가 저택에서 쫓겨나서 지하 단칸방으로 왔다는 사실을 잠깐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해학의 여유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야! 진짜 이 짜장면 맛있다.’ ‘지하실에서 먹으니까 더 맛있구나.’ 그런 해학의 정신이 우리 속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서 어떤 숨구멍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인생을 마주할 때 한판 붙겠다는 결심으로 싸우지만, 나이가 들면 싸우지 않고 그냥 (팔꿈치로) 툭 치고 그 사람을 지나쳐 가야 되겠다는 지혜도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해학, 풍자, 코미디, 이것을 좋아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거의 필수 과목과 같은 것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것이 가지고 있는 기제(機制)가 무엇인지를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거기까지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결국은 현실을 긍정해야 됩니다.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더 나쁘게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고마워하면서, 삶의 의지가 꺾이지 말아야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늘(heaven)과 대지(大地) 사이에 있습니다. 두 발로 대지(大地)를 밟은 채 그 위에 펼쳐지는 당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예술 작품은 사물입니다. 조각, 그림, 수예, 음악, 심지어는 영상까지도, 어쨌든지 모두 사물입니다. 예술 작품은 사물로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감상하는 이유는 사물 너머에 있는 것을 보면서 감탄하기 위해서 감상하는 것입니다. 사물 너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을 창작한 작가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는 기쁨입니다. 그게 감상(鑑賞)입니다. 결국 삶은 대지(大地) 위에서 펼쳐지지만, 의미는 하늘(heaven)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상품을 만드는 사람은 비교를 많이 합니다. 오늘 내가 선풍기를 하나 내 공장에서 생산해 냈으면, 그걸 생산하기 전 바로 앞까지 나온 모든 회사의 선풍기를 비교하면서, 그것을 기준으로 좀 더 나은 상품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래야 시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카소는 '커닝(cheating)'을 안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남의 것을 보고 베끼지 않습니다. 자신 속에 있는 정신세계에 무한한 창작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있는 것도 다 창작을 못하는데 왜 남의 것을 보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상품 같은 인생을 살려고 한다면 끊임없이 '커닝(cheating)'하십시오. 그리고 흉내 내보십시오. 살아도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에 작품 같은 인생을 산다면 여러분 자신 속에서 창작의 정신을 일깨워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의 삶이라는 큰 돌멩이를 갖다 놓고, 한 팔에 정을 들고, 망치를 들고, 그것을 부수면서 파괴적인 창조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부수면서 자기 정신 속에 있는 어떤 것들을 자신의 인생 속에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창조적인 삶입니다. 바로 그런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르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하는 그 자체 때문에 여러분은 못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나는 결코 같을 수가 없고, 그의 인생이 아무리 수많은 사람에게 박수를 받는 인생이어도 나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과 비교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자기만의 작품을 창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박수를 치든지, 욕을 하든지, 그건 각자의 평가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창조된 것입니다.
화장실에 있는 (조그만) 유화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많이 파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드는지 아십니까? 프린트한 게 아니라 직접 그린 것입니다. 수십 개를 걸어놓고 여러 아르바이트생이 한 사람은 수평선 그리면서 지나가고, 다음 사람은 구름만 그리면서 지나갑니다. 그다음 사람이 배를 그리고, 그다음 사람이 파도를 그리고, 거품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다음 사람이 부두를 그립니다. 그렇게 해서 한꺼번에 수십 개씩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값이 엄청 쌉니다. 불과 만 원, 만 원이면 사서 화장실에 걸어놓을 수 있는 그림입니다. 이게 작품이 아닙니다. 작품을 빙자한 상품입니다. 작품 같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그것은 나만 만들 수 있는 작품입니다. 거기에서 자신의 인생의 존재의 가치를 느끼고, 그 속에서 한없는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인생을 내가 살아왔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도 수많은 현실이 쌓이고 축적되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과거가 아닙니다. 과거도 언젠가는 현재였고, 미래도 언젠가는 현재가 됩니다. 미래가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그 미래를 우리가 앞서가서 살 수는 없습니다. 현재로 흘러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서 우리 현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우리는 미래로부터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 들어가는 수많은 칼날 같은 삶 속에서 자신이 작가의 정신을 가지고 살면서 결국 우리의 인생이라는 창작물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니까 오늘 내가 여기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대지 위에 서 있다는 것은 아주 엄숙한 소명입니다. 내 인생을 살아내야 된다는 아주 진지하고 놀라운 소명입니다. 여기서 나의 창조적인 삶을 속박하고 억압하는 모든 질서에 대해서, 더군다나 성경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모든 그릇된 권위와 나를 억압하는 모든 권세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는 정신을 가져야 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유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너무 필요한 것입니다. 몇 번만 굴복하고, 오랜 세월 동안 굴복하는 것이 운명이 되어버리고 나면, 자유정신의 싹이 모두 잘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립니다. 노예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가 명령하고 강제해야지만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변하면 그 사람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똑바로 서서 자기를 존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됩니다. 나의 삶이라는 것은 누구와 비교될 수 없으며 엄숙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인류 역사상 아무도 살아본 적이 없고, 누구도 살아가지 않을 단 한 사람으로서 내가 여기에 부름을 받고 서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도 살아있는 날 동안에만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현실에 대한 무한 긍정이 (어떤 상황에서도)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어려움을 만났을 때 거기서 인생을 끝내고 죽어버리려고 하면 이런 말 들을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자살을 해서, 더 이상 고통을 안 보고, 이 꼴 저 꼴 안 보고, 무(無) 사라지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럴 순 없지 않습니까? 또 대부분 그럴 용기까지 가진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삶에 대해서도 비겁하고 죽음에 대해서도 비겁한 것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행복하겠습니까? 뭐가 행복하겠습니까?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이 내게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서 긍정해야 됩니다. 그래서 행운과 불행이 원해서 있는 것이든지, 원치 않는 데도 있든지 간에, 그 현실을 그대로 인정해야 됩니다. 있는 그대로,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받아들이지만 말고 아예 사랑해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우연에서 필연으로 가는 사고가 신앙에서 요청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것, 이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이렇게 태어난 것에 대한 끊임없는 후회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존재로 태어날 수도 있었는데, 내가 왜 이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이런 사회에서 내가 왜 여자로 태어났을까? 혹은 남자로 태어났을까? 가엾은 어머니는 왜 나를 낳으셨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 이것을 우연적인 것으로 내게 주어졌다고 보면, 내 힘으로 한 것도 아닌데 후회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기 힘으로 돌리지도 못하면서 현실을 긍정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신앙의 눈으로, 하나의 필연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믿음 생활하다 보면 이런 경우가 있지 않으십니까? 옛날에 어떤 일을 겪었는데 너무 그게 싫었습니다. 그리고 상처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보니까 그 일이 나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을 도입해 옵니다. 내가 이 집안에서 우리 엄마의 딸로 태어난 것, 그것을 필연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에 있기 때문에 나에게 그렇게 하셨다.’ ‘내가 이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것도 하나님이 꼭 필요해서 나를 그렇게 만드신 필연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우연은 바꿀 수 있었던 것이고, 때로는 바꿀 수 있는 것이지만, 우연은 많은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필연은 패러다임이 없습니다. 그냥 이유가 없이 반드시 그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자신의 인생에 있는 모든 현실을 필연으로 받아들이므로 자유를 반납하라는 뜻이 아니라, 다 이유가 있어서 그것은 거기에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것들 중에 없어도 좋은 것은 없고, 없는 것들 중에 있어야 하는 것들은 없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현실을 긍정하기가 훨씬 쉬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 몰라서 그렇지, 내가 이 성격으로 태어난 것은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안 되면, 안 되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젊은 시절을 불행하게 보낸 것도 무엇인가 나에게 불행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함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그것을 필연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필연으로 존재하면 그것들은 바뀔 수가 없고, 내가 바뀌어야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유연성이 생겨나고, 현실에 대해서 긍정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필연성에 대해서 상당한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이것들을 필연이라고 주장을 해도 그게 누구의 의지 때문에 필연이 되는지를 모릅니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이것은 상처로 남고, 아니면 극복해야 할 부담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대지에 살고 있어서 대지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없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나에게 움직일 수 없는 기둥처럼 만드신 것은 내가 모르는 더 놀라운 지혜와 계획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나면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훨씬 쉬워지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최종적인 답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믿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사실만큼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좋은 현실을 긍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한 번 여러분이 제안해보십시오.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연한 것들을 항상 고칠 수 있고 바꿀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바람처럼 흘러가는 현실을 못 살게 하는 삶의 구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인생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부담 정도로 생각하면서 살지 말고, 아예 그냥 필연적으로 있는 것을 사랑하기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거기를 여러분 삶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 인생을 살다가 넘어졌습니다. 혹은 내 의지가 아니라, 내가 웅덩이에서 태어나버렸습니다. 그렇다고 거기서 우리의 인생을 끝낼 순 없지 않습니까? 넘어졌어도 결국 인생의 길을 가야 되고, 웅덩이에서 태어났어도 기어 나와야 합니다. 결국 넘어진 사람은 넘어진 그 지점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면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땅 때문에 땅에 넘어졌지만, 결국 땅을 딛고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웅덩이에서 태어났지만, 결국 평지가 아니라도 거기가 출발점이 되어야만, 그 웅덩이의 바닥을 밟아야만, 웅덩이 바깥으로 기어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긍정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최악의 삶이라도 마지막에 남은 희망은 그것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현실이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넘어졌으니, 여기를 딛지 않으면 일어설 수 없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현실이 아무리 나빠도 인생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내리는 것이 긍정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것을 긍정하고 나면 놀라운 힘이 생깁니다.
교회에 어느 구역장이 있는데, 매일 기도했다고 합니다. 구역 식구들이 코로나 때문에 못 모이니까, 모든 것을 극복하고 모두 모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더니, 구역원이 하나씩 하나씩 코로나에 걸리는 것입니다. 얼마 지나고 나니까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코로나 걸리고 나니까 면역력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은 해석하기 나름인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결국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현실에 있는 모든 것은 필요해서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아직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제가 늘 하는 말로, 주님이 주신 것 중에는 버릴 것이 없고, 주님이 주시지 않은 것 중에는 가질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게 현실에 대한 긍정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발판으로 삼는 것입니다. 현실을 긍정하는 것으로부터 당신 삶의 변화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면서 커닝(cheating)할 필요 없습니다.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최악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긍정하십시오. 거기서 죽으려면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살려면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더욱이 하지 말아야 될 것이 이런 것입니다. 인생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됩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공정한 판단을 못 하고 혼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도 안 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 그때 딱히 누구 때문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떠오르는 단어가 ‘세상’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욕이 붙습니다. ‘이놈의 세상’이라는 욕이 붙습니다. 그리고 특정할 수도 없는 세상에 대해서 앙심을 품는 것입니다. 복수심을 갖고 앙심을 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앙심을 품는 세상이라는 것이 존재하질 않습니다. 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가 처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칼을 겨눕니다. 자기는 세상에 칼을 겨눴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허공을 휘둘러도 세상은 그 칼에 목이 찔리지 않습니다. 그 칼은 결국 자기를 향해 되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생-망’이라는 현대의 단어가 대표적으로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번 생애는 망했다.’라는 것입니다. 다음 생애가 있습니까? ‘웃기네.’ 다음 생애가 어디 있습니까? 윤회를 믿는 것도 아니고, 윤회되어도 사람으로 윤회될 확률은 어마어마하게 희소한 것입니다. 세상은 이번 세상밖에 없는데, 이번 세상은 망했다고 아예 단정해 버리고 나면, 삶에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인생은 그런 식으로 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불특정한 세상에 대해서 앙심 같은 것을 품으면서, 복수심 같은 것들을 가지고 꿈꾸면, 결국 그것이 자기 정신을 파괴시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좀 더 나은 사람은 구체적으로 자기에게 고통을 가져다준, 비극을 가져다준 사람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지독하게 미워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봅시다. 자기에게 불행을 가져다준 사람을 미워한다고 치겠습니다. 미워하는 자기 소원대로 돼서 그 사람이 장렬하게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평안과 행복이 오겠습니까? 안 옵니다. 왜냐하면, 복수가 성취될 때 인간에게 행복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은 사랑에 있지 미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 쓸모없는 짓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군가 때문에 인생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사람을 미워하고 있으십니까? 그게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겨누는 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쓸데없는 상상을 할 시간에 좀 더 창조적인 인생을 살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세상에 대해 앙심을 품지도 말고, 특정한 사람에 대해 미운 마음을 가지고 살지도 말아야 됩니다. 툴툴 털어버리고 이렇게 해야 합니다. ‘아참, 살다 보니까 별 게 다 있네.’ 쫄딱 망한 부자가 지하실 방 안에서 다섯 식구가 모여서 짜장면을 먹으면서 ‘정말 지하실에서 먹는 짜장면 맛있지.’라고 할 수 있는 해학의 여유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다음 순간을 기다리면서 오늘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을 향해 앙심을 품고 누군가를 구체적으로 원망하면서 복수의 칼을 갈면서 사는 것은 우리의 행복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파멸을 위한 선택지는 될 수 있지만, 우리의 삶을 위하는 선택지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는 속박에 항거하라. 두 번째는 현실을 긍정하라.
3. 의지를 소유함
마지막 세 번째는 의지를 소유하라.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살고 싶다는 욕구입니다. 그걸 유지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욕구와 의지는 방향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삶의 욕구와 의지가 많이 있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옳은 길로 간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어떤 악인에게는 살아야 되겠다는 욕구 때문에 더 많은 사람에게 악을 행하게 되고, 살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의 행복을 짓밟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의지는 그 자체로서는 방향이 없는 일종의 칼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쥔 사람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선하게 혹은 악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단지 생존을 위한 욕심이나 자기만족을 위한 욕망이 아닙니다. 스스로 보다 의미 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고자 하는 방향성이 정해진 욕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면서 지혜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뭐냐 하면 나도 잘 모르는데 어떤 상황과 환경 속으로 들어가면 형언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선하게 살아야 되겠다는 의지가 생기고, 잘 살아야 되겠다는 욕망이 일어나는 환경이 있습니다. 거기에 여러분을 자주 두도록 노력을 하십시오. 그런데 반대로 어떤 음악이나, 어떤 삶의 상황에 들어가면, 이상하게 살아야 되겠다는 의지가 가물가물 꺼져가고, 살고 싶다는 욕구가 희미해지는 환경이 있습니다. 거기를 수영할 때 소용돌이로 여기고 피해 가야 됩니다. 그런 지혜를 스스로 자기 자신이 익혀야 됩니다. 그것이 삶의 에너지를 유지하는데 아주 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한국 IT와 게임 산업을 이끌었던 재벌 중 한 사람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드렸습니다. 작년 기준으로 그분의 재산이 이건희 씨 다음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쉽사리 올라갈 수 없는 어마어마한 부(富)의 대열에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결국은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간 그때를 기준으로 남겨 놓은 재산이 8조 5천억이라고 합니다. 계산을 해보니까 이자 필요 없이 현금을 창고에 쌓아두고, 매일 1억씩 꺼내 써도 하루면 1억이고, 1년이면 365억입니다. 10년을 써야만 겨우 3천6백5십억입니다. 100년을 쓰면 3조 6천500억입니다. 결국 약 250년 정도를 쓸 수 있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50세를 1세대로 치면, 6세대가 쉼 없이 매일 1억씩 쓰고도 남는 돈을 남기고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접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때로는 돈일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칠백몇십만 원을 보이스피싱을 당하고 그 자매가 자살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경우에 보이스피싱을 당해서 칠백몇십만 원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안 죽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답을 얻게 되냐면 때로는 돈이 인간이 삶을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이유가 돈이 있는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나왔을 때 수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습니다. 뭐라고 썼느냐면 ‘어이씨, 나는 그 돈이 있으면 안 죽는다.’ ‘절대 안 죽는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를, 살아가는 힘 자체를, 소비하고 재물로서 자기가 무언가를 누리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돈이 있는 것 자체가 죽을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죽는 사람에게는 그 돈이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궁금하게 생각되는 것은, 도대체 너무 신비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실패와 상처가 많은 대지 위에서 계속하게 만드는 힘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확실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사실 하나는 돈 자체 때문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 때문이 아니면 미모 때문도 아닐 것입니다. 권력 때문도 아닐 것이고, 재능 때문도 아닐 것입니다. 그 이외에 어떤 우연한 특징 때문에 한 인간으로서 대지 위에서 살아가야 되겠다는 동기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결론입니다. 그 돈이 있으면 안 죽겠다는 사람에게 돈을 주어도 결국은 소비하는 것 때문에 자신이 매일매일 살아가지, 인생에 있어서 그 돈 때문에 올바른 길을 가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지와 욕구의 크기가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방향성이 그것을 결정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감각의 강물에 빠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돈이 있는데 왜 죽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기에는 너무나 즐겁고 쾌락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돈은 그런 기회를 엄청나게 많이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에 그걸 두고 가는 것이 너무나 아까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인생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한 인간의 사유의 깊이는 인간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존재인지를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사람 중에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아무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터득해내는 것입니다.
끝없는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의 깊이를 공감하는 것이 인생을 바로 아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고독의 심연을 보고 절망을 느낀 사람입니다. 거기서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아는 사람만이, 허무한 인생을 대지의 힘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희망을 갖느냐 하면 벌판에 서서 요만한 데서 대지를 바라보면 땅밖에 안 보이지만, 넓은 자연으로 가서 보면 대지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하늘이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지평선이 나옵니다. 내가 서 있는 땅에서는 대지와 하늘이 완전히 떨어져 있지만, 지평선에서는 하늘과 대지가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결국 자신이 대지에서 발견한 깊은 허무에 대한 해답을 하늘에서 찾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사건은 땅에서 일어나지만 의미는 하늘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인생을 끊임없이 대지 위에 충실하고, 대지 위에서 매 분초마다 순간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순간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로부터 자기가 살아가는 의미를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대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생겨납니다. 이게 결국 어떻게 보면 사유의 힘이지만, 종교적으로 보면 이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우리의 인생을 슬기롭게 사는 비결입니다.
인간의 고독한 현실과 인간 존재의 외로움에 대해서 쓴 책을 많이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팡세’를 능가하는 책은 결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팡세’에 필적할 수 있는 정도의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이라고 할까, 나머지는 거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만큼 파스칼은 인간의 깊은 외로움의 심연을 들여다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내려가 본 적이 없는 바닥까지 내려가서 정직하게 고독한 존재로서 인간 실존의 심연을 들여다본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갈망이 누구보다도 컸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뭐냐 하면 껍데기는 그리스도인인데, 속의 정신은 세속의 정신이 다 갉아먹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에서 관심을 끄는 모든 주제들이 그대로 교회에 와서 아주 중요한 토론의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두 사회에 대한 차별성이 없습니다. 교회와 세상이라는 것 사이에 차별성이 없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가 뭐냐 하면, 그리스도인이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책도 안 읽고, 생각도 안 합니다. 성경이라도 열심히 읽어야 되는데, 성경도 안 읽습니다. 아예 무식하게 기도라도 열심히 해야 될 텐데, 이것저것 몰라도 다 필요 없고, 아버지 아버지하고 매달려야 될 텐데, 그것도 안 합니다. 그러니까 껍데기는 그리스도인인데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 안에 있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비참하고 고독한 존재인지를 들여다보는 성찰이 아니라, 언뜻언뜻 나방의 눈에 들어온 불빛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한창 힙(Hip)한 관심사, 요즘은 이걸 먹는 데더라, 여기 놀러 간다더라, 이런 걸 입는다더라, 이런 액세서리를 가진 데더라, 이런 책을 읽는 데더라, 그런 것들이 반짝반짝하는 불빛으로 들어와 있을 뿐이지, 이것이 속에서 질서를 가진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런 현실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고가 안 생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무언가 체제가 있어야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체계와 어울리는 현실을 봤을 때 이것을 항거하고 저항할 수 있는 어떤 내적인 욕구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자체가 무질서하고 그냥 순간순간 감각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체화(體化)되어 버렸기 때문에 현실이 굴러가도 그게 특별히 나의 물질적이고, 나의 소비적인 것에 관여하여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한, 나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한, 그런 것을 저항하면서 살아야 될 어떤 필요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사성을 기대하는 것은 가능성이 없는 희망입니다.
무엇보다도 전혀 공부를 안 합니다. 책을 안 읽습니다. 현대 속에 살면서 생성되는 수많은 용어와 수많은 생각이 어떻게 잘못됐는지 비판하기보다는 불빛을 따라가다가 전깃불에 지지직 타는 나방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불빛을 따라서 미친 듯이 쫓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기독교 사상이 세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상의 렌즈가 없으니까 사회를 보면서 비판할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비판을 해봐야 자기를 중심으로 일시적인 자기 생각에서 이야기하는 것이지 체계를 가진 사상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들여다보는 것을 너무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도 혼자 있지 못합니다. 휴대폰만 떨어져도 너무 불안한 것입니다. 무언가 계속 감각을 가득 채우지 않고는 홀로 조용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홀로 조용히 있는 것이 인간에게는 굉장한 수양의 기회이고 자기반성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성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글을 읽어도 모두 펜으로 쓴 글만 읽는 것입니다. ‘팡세’와 같은 저작은 쉽게 쓰인 책이 아닙니다. 자기의 피와 살을 갈아서 쓴 책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고 쓴 글입니다. 그래서 이런 격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먹으로 쓰여진 글은 피로 읽혀질 수 없다.” 피로 쓰인 글은 (생각 없는 사람들에 의해) 종종 먹으로 읽힐 수 있으나, 먹으로 쓰여진 글은 결코 피로 읽혀질 수가 없습니다. 피로 쓰여진 글만 피로 읽힐 수 있는 것입니다. 피로 말한 것만 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피로 말한 것이 말로 받아들여질 수는 있지만, 말로 한 것이 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피로 써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 운명처럼 주어진 허무와 고독을 이겨낼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조금만 더 생각을 하고, ‘팡세’ 같은 것이라도 누가 깨우쳐주는 사람이 있어서 모여서 공부를 하고 깊이 들여다보면, 자기가 혼자 읽을 때 못 느꼈던 인간의 깊은 고독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는 못 느끼지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껴도 문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깊은 고독 속에 있고, 소외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살게 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육체의 욕망에 덜 까불거리며 오락이나 쾌락으로 현실을 회피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국 허무와 고독 위에 더 무거운 욕망의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인생이 가볍게 되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신의 인생을 살기를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진맥진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메뚜기처럼 불빛을 향하여 날아들다가 결국 죽음이라는 불길에 연기가 되어서 사라질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괴롭거나 허무할 것입니다.
쾌락의 순간이 끝나고 나면 더 깊은 어둠 속에 내동댕이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또 내가 서 있는 여기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아무 답도 얻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자유를 꿈꾸지만, 무지(無知)라는 무거운 납으로 만든 추가 달려서 헤엄도 못 치는 사람과 함께 묶여 바다에 던져졌으니, 어떻게 그 바다에서 헤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사람에게 새로운 의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가 가지고 있는 효과입니다. 그래서 이런 정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다." 하나님의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음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의지의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의지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올바른 방향까지도 잡아줍니다. 그래서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는데, 자유케 한다는 얘기는 속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속박되어 있는 사람을 자유롭게 해방시켜준다면, 진리가 묶인 힘보다는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풀어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능력을 진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 은혜의 힘입니다. 이 은혜의 힘은 신비합니다. 그래서 아주 놀랍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여러분이 아마 회개하고 은혜를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두 가지 경험을 누구나 똑같이 하게 됩니다. 깊이 회개하고 은혜를 받게 되면 맑아졌다는 느낌과 가벼워졌다는 느낌입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는데 아주 맑아진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비 오는 날 자동차를 운행하는데 와이퍼가 망가졌습니다. 그러면 운전을 할 수가 없습니다. 빗방울이 계속 떨어지면서 창문을 흐리게 해서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와이퍼가 싹 쓸고 지나가면 선명하게 밖의 시야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 것처럼 회개하고 은혜를 받고 나면 지성적으로 아주 혼탁한 상태에서 맑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아주 명료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효과가 뭐냐 하면 아주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인생이 천금만금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짐을 대신 짊어져 준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내 인생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기 때문에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는 순간에 아주 굉장히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짐이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현실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가엾은 어머니는 여전히 그 어머니고,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 남자로 태어난 것, 장남으로 태어난 것, 이런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것, 공부 못하는 것, 등등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예전에는 어마어마한 무게였는데, 이것이 하나도 무게로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게 자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짊어질 수 있는 놀라운 힘이 그의 의지 속에 주어진 것입니다. 예를 들면 킬로그램을 든다고 할 때 우리가 들 때에는 굉장히 무거운 거지만, 킬로그램을 넉넉히 드는 역도 선수에게 킬로그램은 우리가 도너츠 하나 드는 것만큼 가벼울 것 아닙니까? 그런 의지의 놀라운 힘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어제 임직하실 분들이 같이 스터디를 했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 나오는 나눔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나눔에 대한 이야기가 물질에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데, 나도 나누어야 됩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 자체가 굉장히 물질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이 물질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때, 정말 여러분의 인생을 바꿔놓고 살아갈 힘을 준 것이 모두 돈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돈의 도움을 별로 안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별로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받은 것은 (없습니다.) 누가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고 교회에 헌금한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나에게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인생을 바꿔놨던 것은 내게 없는 어떤 정신적인 것을 내게 나누어 주었을 때, 내가 놀랍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빈부의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인 자원을 포함해서 정신적인 자원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를 고용한 사장님이 인간으로 도저히 살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나는 회사의 청소부로 사는데,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충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내가 나누어 줄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는 우리를 가볍게 하는 것입니다. 짐 자체를 없애버려 주는 게 아닙니다. 짐 자체는 그냥 있는데 놀라운 의지의 힘을 주어서 생(生)의 건설적인 욕구를 불러일으켜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장구한 세월을 통해서 적금 붓듯이 조금씩 조금씩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때는 한순간에 인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면도칼을 손목 위에 올려놨던 사람이 그걸 버리고 회개하고 인생을 살아봐야 되겠다는 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의 신비입니다.
은혜의 힘이 없다면, 우리가 머릿속으로는 아무리 세상 사람과 다른 생각을 해도 마지막에 산출되는 우리의 삶은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머리에 생각은 있지만 힘이 없어서 못 만드는 사람이나, 생각이 없어서 아예 안 만드는 사람이나, 못 만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있는 곳에는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현실에 대한 긍정을 이런 식으로 배우라는 것입니다. 바꿀 수 없는 부모를 바꾸고, 바꿀 수 없는 성격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성격이 어때서 (그러십니까?) 나쁜 것도 있지만, 좋은 것도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여러분보다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 의해서 환치(換置)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 그것을 버립니까? 그것을 미워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곱사등이에게 혹을 떼어버리는 것은 그의 영혼을 박탈하는 것이다." 있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여러분이 여러분인 것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오히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은혜는 그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는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놀라운 초청입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문제는 우리의 의지가 방향을 못 잡는 것입니다. 방향을 잡았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망가지는 것입니다. 결국 조금 몰라도 은혜를 많이 받고,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면, 많이 알고 그렇게 살 힘이 없는 사람보다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진정한 행복은 식자(識者)들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무명(無名)의 성도들이 그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인생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현실을 긍정하고, 거기에서 소명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은혜는 속박하는 모든 부당한 도덕과 관습에 맞설 용기와 함께 보다 온전한 도덕과 관습을 세워나갈 창조적인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써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운명이라는 걸 믿지 않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만 운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운명 같은 것은 없다고 우리는 믿어야 됩니다. 운명이 있으면 하나님이 그 운명 아래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또 하나의 신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걸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백번 양보해서 운명 비슷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허물어버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딴 길로 못 가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운명의 벽을 통과하면서 없었던 길을 내고, 운명이라는 것이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살기 위해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힘이 결국 하나님 사랑의 감동과 함께 주어집니다. 말씀을 알 때 주어집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여기서 ‘안다’는 것은 한순간에 파악된 이해나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이건 오히려 히브리인의 사고의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안다’는 것은 남녀가 서로 성적인 결합을 통해서 서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이미 깊은 체험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진리가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또 어떤 젊은이들은 철학책을 끼고 삽니다. 한 번 또 맛을 들리면 거기는 나름대로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메뚜기처럼 이 철학자에서 저 철학자로 뛰어다니면서 부지런히 책을 읽습니다. 읽는 동안에 지식이 늘어나고 말의 유희는 현란해지지만, 그게 그를 도탄에서 구해주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해도 그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은 결국 진리를 아는 것, 그것을 깊이 경험한 것 없이는 자유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다’라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인격적인 체화(體化)입니다. 자기가 체질적으로 그 진리를 경험해내는 것입니다.
비유를 한다면 이런 것입니다. 소고기를 먹으면 시간 후에 에너지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스테이크는 사실 저녁때 먹는 게 맞는다고 합니다. 섭생학적으로는 아침에 먹어서 다 태워버려야 되지만, 소화되는 동안에는 에너지가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는 저녁때 먹으면 그다음 날 아침에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건 실제로 제가 느낍니다. 만약에 어떤 말씀에 대한 지식이 스테이크라면, 그것을 내가 먹고 그다음 날 그것이 나에게 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이 ‘진리를 안다’는 뜻입니다. 말씀에 대한 인격적인 체화(體化)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처럼 은혜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마음과 인격은 진리의 분신이 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며, 살아있는 말씀의 경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보다 크신 이가 없으니, 그분 자신이 진리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빛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가 누구인지를 객관적으로 깨닫게 하고, 자유로운 주체로 살 수 있는 은혜를 줍니다. 마른 뼈와 같은 자들을 다시 살려냅니다. 진리를 알면 새 힘이 생깁니다. 은혜는 그래서 능력입니다.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기 때문에 인생이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힘이 모자라기 때문에 인생의 무게가 무거운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인생의 무게를 지고 살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언젠가 한 번 들은 이야기인데, 강남에서 아줌마들이 모여서 아주 화려한 식사를 하고, 예쁜 카페에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남편이 얼마나 잘해주는지, 자기네 집이 얼마나 부자인지, 애들이 얼마나 공부를 잘하는지, 얘기를 합니다. 서로 경쟁적으로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여자가 갑자기 분위기를 깨면서 한숨을 푹 쉬면서 ‘나는 인생을 왜 사는지 모르겠어?’ 자기 남편이 사회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지만 얼마나 모순적인 인간인지, 자기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애들이 공부는 잘하고 출세는 했는데, 얼마나 부모를 하찮게 여기는지,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있는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나도, 나도, 나도, 나도,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결국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그것입니다. 인생의 무게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상정(想定)할 때 저 사람은 진짜 인생에 무게가 없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사람도 수시로 자살을 생각해야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생의 무게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무지무지한 무게입니다. 그리고 이 무게는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중력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여러분이 결국 중력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 오랜 세월이 지나면 뇌가 중력 때문에 찌그러집니다. 그리고 뇌 속 윗부분에 공간이 생겨나게 됩니다. 어렸을 때는 골이 꽉 찼는데 중력에 눌려서 내려앉아 가는 것입니다. 누구나 인생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있지도 않은 사람을 상정(想定)하면서 ‘저 사람은 좋겠다.’ 그런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앙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은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인생의 무게가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미모 때문에, 혹은 젊음 때문에, 가문 때문에, 자기의 사회적인 성공 때문에,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열등감을 느끼고, 그 속에서 비교의식을 가지면서 여러분 스스로 괴로워하면서 살아가십니까? 그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도 무슨 여러분의 인생에 도움이 됩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건 괜찮지 않습니까? 아주 나보다 미모가 뛰어난 사람을 보면서, ‘야! 얼굴은 곱지만 마음은 숯덩이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돈이 많아도 ‘돈은 많지만, 너도 인생의 무게는 정말 무겁겠구나.’ ‘얼마나 무겁겠냐?’ ‘그러니까 저렇게 소비에 몰두하고 살지.’ 그러면서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됩니다. 부러운 사람을 생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인생의 무게를 줄이는 일에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무게를 줄이는 비결은 뭐냐 하면, 무게 자체를 우리가 객관적으로 줄이는 것은 도덕과 자신의 환경에 대해서 항거하면서 어느 정도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무게는 그런 방식으로 법을 고치고 사회의 관습을 뜯어 바꾼다고 해서 인생의 무게 자체를 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가 글을 썼습니다. 그 사람이 <나는 pc방 폐인이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젊은 시절에 pc방에 매일 가서 pc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의 폐인이 된 것입니다. 그게 결국 무엇입니까? 허무한 습관 자체가 인생의 무게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결국 도저히 자기의 주체적인 삶을 못 사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인생이 무거워서 무거운 게 아닙니다. 또 인생이 무겁다고 하면 무겁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느냐고 한번 물어보는 것입니다. 누가 가벼운 사람이 있습니까? 한번 찾아와 보십시오. 제가 상을 드리겠습니다. 인생이 가볍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여러분이 찾아오시면, 나는 그의 뇌가 가볍다는 걸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없습니다. 모두 인생의 무게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나의 인생의 문제는 인생의 무게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이 무게에서 나를 지탱해줄 수 있게 하는 힘이 나에게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힘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디서 그런 힘을 찾겠느냐 이것입니다. 자신의 물질의 궁핍의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재산을 모으면 됩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은 건강을 다시 회복하면 됩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인생을 살아가게 만드는 힘은 돈이나 육체적인 건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가지고 자신이 살아갈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의 중력은 (그 무게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린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춤을 추는 것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람이 춤을 춥니다. 중력의 법칙은 우리를 끊임없이 땅 아래로 끌어내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발을 쳐들고 춤을 추고, 손을 들고 춤을 추고, 우리의 몸을 돌리면서 춤을 추는 동안, 우리는 중력을 벗어남으로써 손동작, 발동작, 몸동작을 하면서 아름다운 춤사위를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춤추는 것 같은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자원의 힘을 공급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을 운명처럼 여기던 노새 같았습니다. 노새는 뭔가 빈 수레로 가면 불안한 것입니다. 무거운 짐이 잔뜩 짊어져서 헉헉거리며 가는 것이 자기의 운명처럼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진리로 말미암아서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은혜의 힘으로 놀이하는 아이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엄마가 ‘너 이 놀이를 하면서 분을 보내라.’ 애들은 절대로 그 말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놀이는 강요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흥에 겨워서 할 때, 그것이 진정한 놀이가 되는 것입니다. 밥을 퍼먹다가 놀이가 생각이 나서 숟가락을 던지고 장난감 앞에 가서 혼자 놀이를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심취합니다. 그때 혼자 키득거리고 웃으면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동안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이는 기쁨과 자율성으로 꽉 차는 것입니다. 누가 시키는 게 아니라 스스로 속에서 에너지가 나와서 창조적으로 삶을 싫증 날 때까지 즐기는 것입니다. 결국은 진정한 자유인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누가 강요하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내가 순장이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런 너울을 뒤집어쓰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내 자신이 무거운 짐을 짊어질 어떤 운명을 타고난 노새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놀이하는 아이처럼 자유롭게 춤을 추듯이 즐거워하면서 자기가 주체적으로 놀이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개입해서 놀이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순간 아이는 흥이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자유인의 삶입니다.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진리고, 진리가 주는 은혜의 힘이 우리에게 그런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중력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우리가 춤출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의 근본적인 무게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사라질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은혜를 항상 유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무게는 어느 순간에 되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춤출 수 있습니다. 현실을 긍정할 수 있고, 현실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내는 것 이외에 우리가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미워하지 못할 바에 차라리 끌어안고야 만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적극적으로 포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자기의 고유한 인생을 코끝에 호흡이 남아 있는 동안에 자기가 위대한 예술의 혼을 자신의 인생에 불어넣으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에게 역사상 길이 남을 인물이 되고, 그런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부담은 전혀 느끼지 마십시오.
여러분 모두는 아름다운 꽃밭에 있는 한 송이의 꽃입니다. 꽃밭이 아름다운 것은 중간에 서 있는 바나나나무 때문이 아니라, 활짝 핀 수국 한 송이 때문이 아니라, 모든 꽃들이 서로 어울리면서 아름다운 꽃밭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꽃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없으면 그 꽃밭은 꽃밭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태어나지 않았던 세상은 지금 세상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있으므로 이 세계의 의미는 달라진 것입니다. 그런 유일한 단독자로서 여러분은 여기에 대치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삶에 대해서 긍정하고, 모든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대해서 온몸으로 항거하면서, 마지막까지 자유의 정신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 힘을 성경은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우리가 놀랍게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생의 무게가 어디 갔느냐는 듯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살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오늘 그런 은혜를 받고 삶의 무게를 전혀 안 느끼는 무중력의 인간이 되었어도, 내일 다시 나의 병리적인 자아를 사랑하고 이기적인 자아에 집착하면 인생의 무게는 또다시 찾아옵니다. 그러면서 결국 아무리 큰 자유가 아무리 많이 내게 주어지고, 내가 아무리 이 세상의 인생의 무거운 무게의 중력에서 벗어난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의지하며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자유를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매 순간, 매 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네
바짝 메마른 벌판이나 산 같은 마음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의 근심과 걱정이 동해안에 산불처럼 나를 다 태우고 지나갑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찾습니다. 도저히 자신의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자기 자신이 짐을 질 수 없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보아도 자기는 혼자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인생의 무게를 져줄 사람이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무게를 모르고, 무게를 아는 사람은 짐을 대신 지어줄 의사가 없습니다. 지어줄 수도 없습니다. 마지막에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대지에서 고통받지만, 대지는 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마지막 어느 한 순간 마음이 찢어지면서 폭발하듯이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 나는 내 인생의 무게를 견딜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겨우 이런 존재로 창조되었고, 내가 어느 때까지 슬픔 속에서 운명 같은 이 고뇌를 짊어지고 살아야 됩니까?’ 주님 앞에 탄식하면서 눈물을 쏟아놓습니다. 그때 마음은 찌꺼기들이 다 씻겨 내려가면서 내 인생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오롯이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힘으로는, 이 모습으로는 도저히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보이는 것입니다.
(찬양)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를 도우실 수 있는 한 분이 주님 당신뿐입니다.’ ‘내가 두 발을 대지에 딛고 살아가고 있으나, 대지는 나에게 힘을 주지 않습니다.’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그럴 때 주님이 보혈의 피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서,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기진했던 영혼에 놀라운 힘이 주입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전에 내가 아니라 현실을 넉넉히 극복할 수 있는 나, 이렇게 쉽게 극복할 수 있는 현실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외로워하고 눈물을 흘렸는가 생각하면서, 눈물을 닦으며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의 보좌 앞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비밀을 세상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도 이 은혜에 대해서, 이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은 너무 많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복된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지금도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당신께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이 은혜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게 하고, 대지에 충실하게 살면서도 대지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소망을 줍니다. 대지는 우리로 하여금 허무에서 하늘을 바라보게 해주지만, 하늘에서 발견한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대지로 내려오도록 만들어 줍니다.
설명을 드리자면 이런 것입니다. 결국 대지에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우리는 대지밖에 없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결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혼자서 넉넉히 살 수 있는 사람 중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도저히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대지의 현실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피를 말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심지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자 하는 유혹까지 받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 대지에서 현실의 해결책을 찾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돈으로도, 젊음으로도, 미모로도, 가문으로도, 명예로도, 권세로도, 이 세상의 어떤 자원으로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그의 정신과 영혼은 하늘로 들리어지는 것입니다. 대지의 삶이 괴로워서 예수를 믿게 됐는데, 그의 정신은 대지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하늘로 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대지를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대지 위에 서서 보던 대지와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대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대지 위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던 아름다움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대지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고, 대지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넓은 세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불현듯 그는 다시 대지로 내려갈 소명을 느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하늘에 많은 것을 체험해도 하늘에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은 대지 위에서 기록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다시 대지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보는 대지는 이미 하늘에서 본 대지에 대한 영상을 간직한 대지이기 때문에 똑같은 대지이지만 어제 바라보았던 나의 대지는 오늘 바라보고 있는 이 대지와는 다른 대지입니다. 그래서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전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너무 값지고 고귀하다는 사실은 유한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유한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결국 대지의 삶에 충실해야 할 이유를 대지에서 못 발견했는데 하늘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걸 소명으로 느끼면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운명이라는 굴레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힘차게 끊어버리고 그 운명의 벽을 박차고 뛰어나가서 새로운 길을 만들면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유인의 모습을 거기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 진리와 은혜 없이는 자유인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의 멍에를 쥐고 혹사당하던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나서, 마치 어린아이가 놀이하듯이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항구적인 자유가 아닙니다. 내가 어제 이런 자유를 누렸어도 오늘 내가 병리적인 자아를 사랑하고, 세상에 탐닉하고, 육욕에 빠지면, 나는 오늘, 어제의 자유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유는 끊임없이 자신이 하늘로부터 공급을 받으며 병리적인 자아와 싸워서 이기고, 건강한 자아와 더불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순종하는 삶 속에서 인생의 허무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힘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씨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마음을 쏟아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 없이는 누구도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이 걸린 문제입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힘을 받으면서 살아간다고 할 때 세상에 어떤 것도 여러분의 인생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대지는 어떠한 속박의 운명도 지배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를 구속하는 운명 따위는 없습니다. 그리고 운명은 결국 부수고 깨뜨려서 그 운명을 파괴하며 살 수 있다는 인간의 자유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허상일 뿐입니다. 오직 예수와 하나 되어서 살아가는 자유로운 존재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 인격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힘이 바로 이 은혜에서 나옵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을 때 그는 사랑받기를 구하는 대신 사랑하기를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두 마음을 함께 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면 비난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연약하면 나 같은 사람에게 사랑받기를 원할까?' '저 사람이 저렇게 곤고하게 살아가니 사랑이 필요하겠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랑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생각은 여러분 자신은 사람의 사랑을 의지해야지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결핍에서 나오는 것이고, 은혜의 부족에서 오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사랑받고 싶은 욕심이 모두 사라지고, 사랑하고 싶은 욕구만 생겨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불쌍함은 생각나지 않고, 불쌍한 모든 사람이 생각나서 그들 때문에 눈물 흘리게 만들어주는데, 다른 사람은 내가 불쌍해서 더 울지만, 나는 그 사람이 불쌍해서 더 울게 만드는 것이 은혜의 비밀입니다.
그는 대지의 삶이 불안정하고 유한함을 인정합니다. 이때 고통을 주는 대지는 그에게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됩니다. 대지에 붙은 욕심을 떨쳐버릴 수 있는 기회이고, 대지에 충실하기 때문에 더더욱 하늘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 소망 때문에 오늘 하루 펼쳐진 대지 위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앞에 들어오는 거리의 풍경, 자연의 광경, 한 끼 먹는 식사와 따뜻한 차 한 잔, 그리고 나의 코를 스치는 냄새와 시야에 들어오는 색깔과 귀에 들리는 소리와 감촉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살아있는 환희를 느끼면서 살아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매일매일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이고, 과거 따위에 집착해서 현재를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 같은 것은 그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애착하는 것 없이 대지를 사랑하게 되고, 소망하는 것 때문에 하늘을 바라게 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죽음조차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죽음조차도 이어지는 우주적 생성 과정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은 한 음표이고, 자기가 죽음으로 그다음 음표가 등장하고, 한 단어가 끝나고 자기가 죽음으로 그다음 단어가 등장함으로 하나의 구절이 완성되고, 구절은 이어져서 문장이 되고, 문장은 이어져서 문단이 되고, 문단이 이어져서 한 권의 책이 되는 것처럼, 자신은 그 책을 써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한 단어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만족하며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에게 삶과 죽음의 격차는 종이 한 장 차이이고, 아이들이 땅바닥에 분필로 그려놓은 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자유인입니다. 어제의 자기를 극복한 사람입니다. 또 내일은 오늘의 자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인간입니다. 그런 사람은 살았을 때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고, 죽은 다음에는 참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 은혜로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힘을 삼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허무한 대지에 터무니없는 기대를 가지고 살다가 절망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나 많은 것을 이 대지에 기대하지 마십시오. 대지는 우리가 지나가는 곳이지 우리의 영원한 집이 아닙니다. 대지에 충실하되, 애착을 버리십시오. 대지를 사랑하되, 집착을 버리십시오. 영원히 있는 곳이 아니라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그러나 영원히 살 사람처럼 대지를 대하십시오. 한계와 가능성을 함께 인정하십시오. 하늘에서나 품을 수 있는 욕망을 대지 위에 투사(投射)하지 말고, 대지 위에서 구현할 수 있는 인생의 의미를 하늘로 투사(投射)해 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마십시오. 대지 위의 삶은 대지 위의 삶이고, 하늘의 삶은 하늘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대지 위에서 써가는 한 통의 편지와 같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편지지가 주어지지만, 그 편지지는 무제한이 아닙니다. 그 편지지는 천상에서는 주어지지 않고, 오직 지상에서만 주어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두 장이 주어졌을 뿐이고, 어떤 사람에게 열 장이 주어지지만, 끝나는 지점이 있기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결국 주어진 편지와 같은 우리 인생의 공간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로 가득 채우고,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우리 순례의 기록들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 인생이라는 편지지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 편지지는 하늘나라에서는 받을 수 없는 것이니, 이 땅에서 쓸 수 있는 사연을 하늘나라에서는 적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사람들과 만남의 행복과 즐거움, 한 끼 먹는 식사와 한 잔의 음료수, 오늘 내 눈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하늘과 떠가는 구름, 새싹들의 합창 소리 같은 것들은 천국에서 들을 수 없습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편지에 가득 채울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말씀을 읽는 시간만 이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산책하고, 밥을 먹고, 취미 활동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우정을 나누고, 그리고 삶의 고락을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하나님 앞에 훌륭한 사랑의 사연이 되는 것이고, 연서(戀書)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글을 쓰는 순간 내내 행복합니다.
작가로서 말하자면 독자들이 내 책을 읽고 감탄할 때쯤이면 나는 그 책에 대한 감동이 끝났습니다. 다른 감동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벌써 구판입니다. 옛날 판입니다. 더군다나 늦게 사서 읽은 사람은 내 마음속에서 그것이 싹 사라지고 난 다음에 작가의 마음에도 없는 것을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매 순간 기록해 나가는 것입니다. 성스럽고, 거룩하고, 어마어마한 헌신, 선교적인 열정, 교회를 향한 희생과 헌신, 이런 것들만 그 칸을 메운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의 사랑하는 애인이 처음 편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당신만을 생각한다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면 여러분이 그 편지를 읽을 마음이 나겠습니까? 가식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 편지는 우리의 모든 삶으로 가득 채워가는 삶의 편지입니다. 숨 쉬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리고 춤추고, 감격해하고, 슬퍼하고, 눈물 흘리고, 즐거워하는, 모든 순간 하나하나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면서,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받으실 만한 사연이 되는 것이고, 매우 아름다운 내 인생이 홀로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써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그 편지지가 모두 끝났을 때 ‘참 좋았다.’ 그리고 펜을 내려놓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이어령 교수님이 마지막에 “아름다웠다. 고맙다.”라고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 많은 시련을 겪고 결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쓰라린 대지의 기억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아름다운 화음이 되어서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되고, 그리고 하늘에서 조차도 나를 한때 이 세상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신 우리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인이 유한한 대지 위에서 부르는 무한한 노래입니다. 그리고 부정 대신 긍정의 노래이고, 좌절하는 대신 춤추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러면서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정말 아름답게 내게 없는 것으로 나 아닌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 고뇌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참된 나로 돌아가서 진실된 나로 살고, 마지막에 죽는 그 순간에 내 인생에 일어났던 수많은 모든 일들이 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내게 있었던 모든 일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다 한 사물에 대한 형상이 되어서 나의 인생이라는 캔버스 위에 그려지고, 그리고 나는 그 아름답고 현란한 색채를 보면서 내가 걸어가고 있는 동안에는 한 번도 대지 위에서 느낀 적이 없는 마지막 아름다운 종합적인 완성을 보면서 스스로 자신이 살았던 인생에 대해서 감탄할 때 우리는 나 자신을 향한 찬양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놓고 보면 우리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얼마나 고귀한지 모릅니다.
누구 특정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제 마음에 흐르는 눈물이 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을 향한 눈물입니다.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싶습니다. ‘그러지 마라.’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너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란다.’ ‘네가 보는 대지는 대지의 한 면일 뿐이고, 하늘 위에서 대지를 봐라,’ ‘이 대지는 너무너무 아름다운 곳이고 천국에 있는 천사들도 인간으로 살았던 우리의 특권을 부러워할 것이다.’ ‘아직은 죽지 마라.’ ‘지금은 아니다.’라고 손목을 잡고 싶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나와 똑같은 동정의 마음을 그 사람들에게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편지를 쓰십시오. 메시지를 보내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삶으로 초청하십시오.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직은 얼마나 살 만한 인생인지,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존귀한 사람으로 태어났는지, 삶의 모든 희망이 끊어진 것 같고 삶의 기대가 송두리째 없어진 것 같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게는 은혜라는 지혜의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때문에 그 사람들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살아있는 이때가 순간임을 기억하고,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껏 살아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그 모든 것 때문에 나에게 이 대지 위의 삶을 허락하신 우리 주님을 찬송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쁘고 즐거운 시간에만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괴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이것 또한 우리의 인생의 음악의 한 마디를 만들어 내어서 그 슬픈 가락 때문에 음악 전체가 아름다운 음악이 되게 만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음악과 같은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면서 우리 하나님을 찬송할 그날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말합니다. 자유를 되찾으십시오. 현실에 항거하십시오. 그리고 현실을 긍정하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받으십시오. 이 은혜의 힘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넉넉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 참 자유를 누리는 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여섯 번째 - 설교를 끝내면서 자유 없이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명랑하게 살 수 없겠죠. 우리는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시리즈 여생의 마지막 여정을 떠납니다. 그동안 대지와 하늘 사이에서 있음에 떨었고, 밀려오는 불행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사는 길을 찾았습니다. 나는 왜 혼자 세상에 버려진 것 같은 존재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길을 구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참 자유를 누리는 유일한 길에 들어서고자 합니다. 아무 데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디도 없는 것 같은 자유를…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발견할까요? 이 마지막 여정에서 그 길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이 시리즈를 준비하는 내내 어린양께 같은 여러분은 제 마음에 있었습니다. 이 설교를 위해 많이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노예 김남준.
I. 본문해설
삶의 명랑함은 자유로운 생활에서 옵니다. 하나님 없는 명랑함은 자유를 찾다가 속박으로 떨어집니다. 속박 받는 인간의 삶은 대부분 욕심을 따라 살다가 자유를 잃어버려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인 자유를 맛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명랑한 삶을 위한 참된 자유를 누리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II. 참 자유를 누리는 길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갈라디아 교회는 두 가지 이단적인 사상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율법주의의 도전이었습니다. 그 추종자들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율법폐기론자들이었습니다. 그 추종자들은 구원받아서 자유하게 되었으니, 이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두 가르침 어느 것도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참 자유에 이르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참 자유는 율법을 지키거나 지키지 않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자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자유는 은혜 안에 사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삶으로써 예수와 사랑으로 하나 된 가운데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갈라디아 2장 20절은 기독교 역사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와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한 신자가 자유롭게 살 수 있는지, 여전히 죄에 둘러싸이고 불완전한 세상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A. 그리스도와 함께
첫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유입니다. 이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순간 영적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께 접붙여집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의 지체가 되며, 하나님은 이 생명을 교회에 부어주시고, 지체인 우리는 그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삼위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영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연합입니다. 이 연합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고, 이 성령님을 통해서 신자는 예수와 한 몸이 되어 교회의 지체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과 그와 함께 부활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갈 2:20 上)
1. 십자가에 못 박힘
십자가에 못 박힘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예수와 함께 죽은 경험을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부분은 '쉬네스타우로마이(συνεσταύρωμαι)'라는 그리스어입니다. 현재 완료시제입니다. 정확히 번역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 왔나니”라는 뜻입니다.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것이 현재까지 영향을 주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데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이고 하나는 부활입니다. 즉, 이 죽음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둘 중 하나만 획득될 수 없으며 둘이 나눠지지도 않습니다. 구원받을 때 이거를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비밀을 경험하지 않고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자유를 빼앗아가는 속박은 죄 때문에 생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리고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형벌을 받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율법의 저주를 받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를 멸하심으로써 영원한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유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속박하는 율법 아래서 태어나셨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화해를 얻으실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당신이 짊어지시고 우리를 품에 안으신 채 우리가 마땅히 당하여야 할 형벌을 예수가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게 될 때 우리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비록 죽으신 분은 예수지만 그 죽음이 나의 영혼 속에 그대로 실재화(實在化)되어서 예수가 죽는 것 같은 똑같은 고통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사랑의 연합이 가져다주는 죽음의 고통의 공유(共有)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놀랍게 이 모든 걸 다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데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느껴지면 하나님이 내가 슬퍼하고, 아파하고, 고통 받을 때, 생생하게 느끼시는 그것이 우리에게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교통이라고 실제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예수의 죽음이 우리 속에 스며들어 와서 실제로 그 죽음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엑추얼라이즈(actualize)’, 재현이 되는 것입니다. 활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진짜 죽음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힌 사형 집행이 예수의 육체의 생명을 거둬갔듯이, 영적으로 오늘 예수 믿는 내 마음속에 스며들어오는 예수의 죽음의 기운이 그동안 예수에게 대항하면서 살아왔던 나의 모든 죄를 죽이는 역할을 하면서 스며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하는 영혼의 상태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속박 받으며 살고 자유를 잃어버리며 살아왔던 것이 뭐냐 하면 내 마음대로 살려고 했던 욕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데 불순종하며 살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짓습니다. 그 행한 죄는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죄의 벌이 되어서 양심의 가책을 무디게 만들고 또 더 큰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이것들이 순환 작용을 하면서 결국 우리는 자유를 잃어버린 채 얽매인 삶을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함께 참여함으로써 죄를 버리고 인생의 의미를 따라 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2. 다시 살아남
그다음에 또 한 측면이 다시 살아남입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경험을 하면 그다음에 부활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나면 동시에 그 죽음의 기운이 함께 나의 모든 죄를 죽이고, 그것과 함께 동시에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재현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죄에 대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살 때는 자유로운 것 같았지만 사실 일시적인 만족에서 오는 자유였고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그것이 끝나고 나면 더 큰 욕망이 고개를 듭니다. 이로써 마음은 속박을 받으며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영혼과 마음은 죄를 향해 죽게 됩니다. 예수와 함께 부활을 경험합니다. 신자는 이런 방식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끊임없이 한 번 이루어지면서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사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가 가지는 한계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아무리 신앙생활을 탁월하게 잘하고 예수를 위하여 죽는 데까지 가겠다고 말할 수 있었어도 그것은 그때 믿음이었고, 그때 자유였고, 오늘은 오늘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죽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내가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오늘날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이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은 경험을 하고 눈물을 흘리든지 아니면 그걸 경험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원통해서 눈물을 흘리든지 해야 되지 않습니까? 안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믿는 구석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굳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만 매달려서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 있고, 건강이 있고, 예배 끝나고 나면 나에게 즐길 수 있는 휴일의 프로그램이 있고, 그렇게 사는 것이 그래도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부요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대단히 관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납니다. 그런데 만났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죽은 것이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아주 깊이 깨달을 때, 그때 스며들어오는 것은 이 세상에 어디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고통입니다. 내가 대학에 떨어졌을 때도, 입사에 실패할 때도, 남편이 사업을 말아먹었을 때도, 자식새끼가 가출을 했을 때도, 절대 안 된는 남자하고 결혼하겠다고 딸이 우기면서 나타날 때도 못 느꼈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찬양)
손과 발 날 위해 못 박혔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니 이제 내가 산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 예수와 일체되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와 함께 죽고 깊이 눈물을 흘리며 예수의 고통을 내가 끌어안을 때, 끌어안는 것만큼 내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불끈하고 일어나면서 죽었던 나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의 사랑이 충만하게 밀려옵니다. 그때 여러분에게 두려운 게 있었습니까? 현실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히 나와 함께 이 삶을 헤쳐 나가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결국은 사랑의 힘입니다.
그런 사랑의 힘이 어떻게 생기는지 보십시오.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세상으로부터 좀 떨어져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B. 믿음으로 살아감
마지막 두 번째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와 함께 다시 죽고, 다시 사는 경험은 현재적으로 계속돼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병리적인 자아를 사랑하려는 나쁜 마음과 예수를 사랑하려는 건강한 자아와의 끊임없는 싸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경건의 비밀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는 자신은 예수 안에 있어서, 예수를 사랑함으로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1. 육체로 삶
그런데 이제 이것이 뭐냐 하면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육체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고 말합니다. 이건 예수와 함께 죽고 살리심을 얻은 신자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내가 예수의 생명이 나를 부활의 능력으로 살려냈지만 여전히 나는 육체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육체라는 말은 결국은 죄와 분리된 육체가 아니라 죄에 물들 수 있는 육체, 언제든지 죄와 친화적인 육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박을 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보다는 감각적인 것에 끌리고, 유혹에 굴복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육체입니다. 새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나, 여전히 죄가 남아 있고, 여전히 죄와 싸우며 한순간도 죄를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모순적인 현실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있는 동안에 옛 사람을 짊어지고 살아야 됩니다. 그렇지만 새 사람으로 옛 사람을 이기는 반복적인 승리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살고, 예배 시간에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으면서, 항상 하나님 앞에 열렬한 기도로 살면, 아주 쉽게 이기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라고 말씀하셨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2. 믿음의 삶
그리고 그 삶은 육체를 가진 삶인 동시에 믿음의 삶입니다. 이러한 모순적인 현실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을 주셨는데,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하반절이 말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 안에 남은 죄가 기승을 부리고, 유혹이 파도처럼 밀려와도, 믿음으로 살면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죄와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없고,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는 또 그 유혹에 굴복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결코 우리가 예전처럼 노예와 같이 속박을 받으며 살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질병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도 암세포가 대부분 있다고 합니다. 십만 개가 한 군데 모이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합니다.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삽니다. 아무리 신자라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자유를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는 예수와 하나 된 연합의 삶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예수와 하나 되는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신자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계속해서 자유롭게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믿음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자기를 다 주신 분이시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로 나타났다는 그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찬양)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정말 소중한 존재, 내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왜냐하면, 돈, 외모, 젊음, 지위, 능력, 이따위 것들을 가지고 나를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반열에 못 들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그런 여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압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있는 예수의 사랑이 성령과 더불어 내게 증거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 의해서 짓밟히기에는 너무 고귀한 사람이고, 내가 사라지고 나면 이 세상의 의미가 바뀔 정도로, 이 세계가 세계 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존재이고, 더군다나 누구도 나 닮은 사람이 없고, 누구도 내가 살아있어서 빛낼 영광에 필적할 만한 영광을 빛낼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보다 더 밝은 빛을 낸다고 사람들이 인정해 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가 내 삶을 살 수 없다는 점에서 내 삶은 양보할 수 없이 독특한 삶인 것입니다.
비록 화려한 생활 아니고, 꽃피는 향기로운 생활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찬란하게 드러나는 영광스러운 불꽃같은 생활이 아니어도, 오늘 피었다지는 한 들풀로, 주님의 사랑의 숨결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만족을 찾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돈에 굴복하거나, 명예에 굴복하거나, 지위에 아부하기 위해서 자존심을 팔아먹고 누추하게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내가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삽니다. 오늘 밤에도 나의 육신의 정욕은 나를 괴롭힐지 모릅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에 있는 것들이 나를 유혹하고, 그 속에서 내 영혼은 피곤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모레면 또 눈앞에 전개되는 다른 사람들의 넉넉한 삶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내가 비참하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안개와 같은 것들입니다. 안개와 같은 것들이 회개의 눈물에 의하여 씻기고 그리고 내가 주님의 형상을 바라보노라면 그것들이 비로소 헛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파기와 같이 깨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리고 거기에 영원히 변함이 없는 하나님이 언제나 거기 계셔서 내 인생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자기 아들을 주시면서 까지, 자기 아들을 율법의 사슬에 묶어 십자가에 형벌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자유인이 되게 하시고 싶으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오롯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 가운데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나는 희망을 갖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신자는 이 사랑에 붙잡혀 살아야 합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무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죄를 지으면 용서받으면 될 것이고, 더 큰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를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 사랑 때문에, 꺼져가는 심지의 불꽃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우리는 꺾이는 자 같으나 서 있을 것이며, 꺼져가는 자 같으나 여전히 불붙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일체의 모든 죄를 미워합니다. 세상과 함께 살다가 죽기보다는 예수와 함께 죽고 살기를 원합니다. 이 충만한 생명을 마음속에 온전히 누리면서 자유를 구가하는 가운데 나는 작품처럼 살고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별로라고 말해도 자기 아이가 만든 어설픈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한없이 자부심을 느끼는 사랑하는 엄마처럼, 하나님은 나의 이 비천한 삶의 작품을 당신의 가슴에 카네이션처럼 달고 “네가 살아서, 네가 너로 살아있어서, 그래서 네가 살아있는 동안에 내가 행복했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어떤 아름다운 꽃보다 아름다운 꽃다발이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 자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신앙 안에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사랑을 현재적으로 매일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 생명이신 그분이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생명으로 우리가 무엇에도 노예가 되지 않고 완전한 자유인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그 사랑에 의해서만 매어 누구에게도 속박 받지 않는 결코 노예가 된 적이 없이 주체로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언젠가는 우리 인생의 막이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날은 우리가 모든 부자연스러운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날일 것입니다. 대지의 삶을 즐거워하고 감사하며 살았지만 이제 그것과 결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들은 감사하긴 했지만 그림자들이었고 우리는 비로소 죽음의 터널을 지나 눈부신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대지 위에서 보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의 그림자의 본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본체는 얼마나 아름답고 눈부신지 다시는 이 대지가 생각나거나 그립지 않을 것입니다. 대지에서는 하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 날들이 있었지만, 하늘에서는 이 대지를 그리워하며 눈물 흘릴 날들이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완전한 행복이 그 하늘에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에 저의 간절한 소망은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 명랑함을 회복하고 사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는 믿음으로 살고, 죽어 있을 때는 사랑으로 영원히 사는 여러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었고, 이 말씀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자원으로 활용하며 사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라 여러분의 몫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놀라운 자유 그리고 놀라운 명랑함의 가능성을 모른 채 여전히 죄의 시궁창에 머리를 처박고 비루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을 보시면서 주님은 눈물을 흘리고 계실 것입니다. 원래 비천한 자가 비천하게 살면 주님도 우시지 않을 텐데 너무나 존귀하게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비루하게 사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는 한없이 고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자기를 산산이 찢어 그 피로 우리를 구하시고, 찢으신 살로 우리에게 떠먹여 죽음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주님의 보혈의 은혜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보혈의 능력은 죽은 자 같은 우리를 옛날에도 살렸으니 또한 지금도 살릴 것을 믿는 것은 지금도 죽은 자들을 살려내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관심사는 우리가 단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산자답게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십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처럼 놀라운 자유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으로 체험하며 주님 앞에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주 앞에 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 참 자유를 누리는 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여섯 번째 - 설교를 끝내면서 자유 없이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명랑하게 살 수 없겠죠. 우리는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시리즈 여생의 마지막 여정을 떠납니다. 그동안 대지와 하늘 사이에서 있음에 떨었고, 밀려오는 불행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사는 길을 찾았습니다. 나는 왜 혼자 세상에 버려진 것 같은 존재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길을 구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참 자유를 누리는 유일한 길에 들어서고자 합니다. 아무 데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디도 없는 것 같은 자유를…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발견할까요? 이 마지막 여정에서 그 길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이 시리즈를 준비하는 내내 어린양께 같은 여러분은 제 마음에 있었습니다. 이 설교를 위해 많이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노예 김남준.
I. 본문해설
삶의 명랑함은 자유롭고 만족한 생활에서 옵니다. 하나님 없는 명랑함은 자유를 찾다가 속박으로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죄의 속박을 받는 인간의 삶은 거의 모두 욕심을 따라 자유를 추구하다가 굴러 떨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신자보다 반드시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II. 참 자유를 누리는 길
그러면 도대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참된 자유, 그것을 누리는 길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시간으로 이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갈라디아 교회는 두 가지 이단적 사상에 의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율법주의의 도전이었습니다. 그 추종자들은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인데, 나중에 마음이 변하여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주장은 교회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율법폐기론이었습니다. 그 추종자들은 우리가 구원받아서 자유하게 되었으니 율법을 전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르침 모두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것도 참된 자유에 이르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자유는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따라서 엄격한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율법을 어기고 방종하게 사는 사람들도 자기 자신의 정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방법은 자유를 얻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그것이 자유라는 사상에 많이 젖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 말씀의 선을 넘고, 세상과 교회 사이를 들락거려도 전혀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참된 자유는 율법을 지키고 어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이 속박 받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는 은혜 안에 사는 데 있습니다. 그 은혜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과 하나 된 가운데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그 자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갈 2:20 上)
A. 그리스도와 함께
제일 먼저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자유는 그리스도 없이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죄로 속박 받고 있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사랑의 연합을 이루는 데서 비롯되는 자유입니다. 즉, 죄와 결탁된 삶을 버리고 예수와 연합되는 데서 오는 자유입니다. 거듭나는 순간 영적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신자는 연합됩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며, 삼위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신자의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과 생명의 연합입니다. 이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로써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인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또 그가 살아나신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갈 2:20 上) 자기와 그리스도 사이에 구별이 없어진 것처럼 자기는 예수 안에 살고 예수는 자신 안에 산다고 말합니다.
1. 십자가에 못 박힘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와 함께 죽은 경험을 먼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어로 '쉬네스타우로마이(συνεσταύρωμαι)'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이건 현재 완료 시제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때 이후로 계속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 왔나니", 이런 뜻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것이 주는 영향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미 오래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신 모습으로 뵙는 그 순간 예수가 왜 죽으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그 효과가 아직까지도 사도 바울의 마음에 살아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자신을 묶어, 예수 죽은 곳에서 자기도 죽고, 예수 매달린 곳에서 자기도 매달리는 은혜의 체험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죄도 없으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그 대답을 사도 바울은 인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자기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즉, 자기의 죄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죄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그 죄가 자기가 사랑하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사랑해서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가져온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죄에 대해서 계속 십자가에 못 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구원받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데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죽음과 부활입니다. 하나는 그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신자는 구원받을 때 십자가에서 함께 죽음과, 그 죽음에서 함께 살아남을 동시에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자유를 빼앗아가는 속박은 모두 죄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멸하심으로써 영원한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율법의 요구에 따라 지불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자, 예수도 모르고, 십자가도 모르고, 복음도 알지 못한 채, 무지무각(無知無覺)하게 살았습니다. 그가 교회 안에 살았든지, 교회 밖에 살았든지, 그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복음의 말씀이 그의 귀에 들립니다. 예전에는 그 말씀이 그냥 귓전을 스쳐갔는데, 귀를 통하여 가슴을 후벼 파며 들어오게 됩니다. 나는 죄인이고,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나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실 때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품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야 할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고 우리를 죽이는 형벌의 칼은 우리를 끌어안은 채 당신이 찔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를 흘리며 죽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영혼과 마음속에서 느낍니다. 그때 예수는 죽고 나는 살아있지만, 신기하게 예수가 죽임을 당하는 몸의 고통이 내 몸의 고통인 것처럼 영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그대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그 고통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참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아이가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너덜너덜하게 떨어지고 피가 사방에 흐릅니다. 시체 비슷하게 된 아이를 안고 뛰는 엄마는 분명히 몸은 아이의 몸이 아닌데 아이가 상처를 받아 느끼는 모든 고통, 아니 그것보다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정신적으로 느낍니다.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죽임 당하신 분은 예수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온 몸으로 다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느낌에 있어서 예수와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효과가 생기냐 하면, '무엇 때문일까?' '분명히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왜 이렇게 끔찍한 고통을 당하며 모욕 속에서 죽어 가시는 것일까?', 스스로 반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은 예수에게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마음이 생기냐면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예수가 큰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시게 한 장본인이 자기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때까지 살아왔던 모든 삶 속에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한 미움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그 죄를 지은 사실에 대한 깊은 후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도 지워버릴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과거에 죄를 지은 것에 대한 깊은 슬픔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슬픔을 느껴도 예수의 그 고통을 멎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내가 사랑하는 예수를 위해서 섬기지는 못할망정 왜 죄를 지어서 그분에게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가져왔을까를 생각을 해볼 때 그것은 모두 내가 예수 없이 자유롭게 살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유를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최초로 자기에 대한 배신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일평생 믿고, 의지하고, 살아온 의리 때문에 예수도 대적했는데, 알고 보니까 이것이 나에게 가져다 준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죄의 무지무지한 속박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신을 믿었던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예수께 옮겨버리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천 년의 간격을 뛰어넘어서 나의 마음속에 실재화(實在化, actualize)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의 죽음이 내 마음속에서 실행되면서, 도저히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자기의 죄 때문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생생하게 경험하는데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죄와 함께 죄 된 자아도 함께 죽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의미를 따라서 살아야 되겠다는 최초의 주체성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비로소 누가 주인이 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비로소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도 자신은 또 자기를 신뢰하며 살아가야 됩니다. 그 자기는 옛날에 내가 죄 짓고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잃어버리게 만들었던 자아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무릎을 꿇으면서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소위 얘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로드십(Lordship)',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해서 복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는 주체를 내가 무릎을 꿇은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그 연합 안에서 나의 주체성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야기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하지도 못하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양보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구원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집니다. 무지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을 가리고 있는 그 무지가 교회 안에도 역시 똑같이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먹고, 입고, 마시고, 감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어도 진리에 대해서는 드라마 하나보다도 관심이 없습니다. 더욱이 진리를 값비싼 진주로 여겨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사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 대가로 소중한 인생을 방황하면서 삶의 명랑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낄낄거리고 웃으면서 예수를 영접한 사람이 없는 이유입니다. 이 엄청난 기독교의 비밀이 선포되는 이 시간에 여러분은 머리 위에 얼음으로 가득 찬 바케스(bucket)에 물이 확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도대체 여러분에게 흥미를 끄는 일이 무엇입니까? 진리를 말해도 꺼떡꺼떡 졸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도 흐리멍덩하고, 설교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해도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그런 삶을 얼마나 살면 여러분이 변화가 되겠습니까? 무지무지한 속박을 느끼면서 살다가 살다가, 이제는 그것이 운명이려니 하고 사는데, 그게 인생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너무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자유를 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고, 세상에서 엄청난 성공과 부를 이루고, 물질로서는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도 비할 데 없는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산다고 하더라도 나는 일(一)도 부럽지 않습니다. 나는 내게 주신 영혼의 명랑함, 그리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말할 수 없는 자유가 주는 명랑함을 더 소중하게 여기겠습니다. 이렇게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에 예수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은 심한 통곡과 눈물, 슬픔 속에서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생에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회심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딱 한 번이지만 구원받은 신자의 모든 삶은 이 경험의 반복 속에서 영위(營爲)되는 것입니다. 영위(營爲)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물이 없는 신앙생활은 허위(虛僞)에 흐르기가 쉬운 것입니다. 자기의 비참함에 대한 눈물, 자기 같은 사람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눈물이 없는 삶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참된 주체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비밀은 슬픔 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 속에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의 마음에는 기쁠 여유가 없고, 기쁨으로 가득 찬 사람의 마음에는 고통이 깃들 틈새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성은 이 두 가지가 공존합니다. 그래서 과거를 돌아보면 예수 앞에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예수는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는데 나는 왜 이것밖에 살지 못할까?'라는 마음으로 가슴을 쥐어뜯는 통증이 있을 때, 그때가 사실은 가장 큰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던 때였습니다. 가득 찬 기쁨으로 살았던 때입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가진 삶을 산 것입니다.
2. 다시 살아남
십자가에서 죽는 경험을 하고 나면, 두 번째는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못 박혀서 서서히 피가 모두 빠져나가서 결국 죽음을 맞이하시게 됩니다. 하필이면 그 죽음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유는 뭐냐 하면, 단 하나입니다. 인류가 그때까지 고안해낸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입니다. 현대에도 그보다 더 잔인한 사형 방법은 없습니다. 이집트는 관속에 사람을 산채로 넣고 식인 벌레를 집어넣어서 오랫동안 죽음을 뜯어먹게 하는 형벌도 십자가의 형벌에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방법이라고 했는데, 십자가는 더 고통스러운 방법입니다. 오죽했으면 로마인들이 야만인이던 시절에 만든 법이고, 오죽했으면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로마인에게는 이 형벌을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인류 최고의 고통스러운 형벌로 죽으면서, 그 죽음이 스며들어오면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진심으로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 못할 일을 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이 나의 인생의 모든 고통의 근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를 사랑함으로써,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분을 인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 때문에 기절할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회심의 경험입니다. 그렇게 죽게 될 때,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고통의 단계까지 내려갔다고 생각됐을 그때에, 그리고 더 이상 죄를 향해서는 티끌만큼 또 살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할 그때가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때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부활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는데,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 와서 모든 죄를 죽이는 본질이 뭐냐 하면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천 년 전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오늘 내 마음속에서 재현시키셔서 영적으로 죄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 끝나고 나면 더 이상 죽일 것이 없습니다. 그때 거기에서 성령의 능력은 죽은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리는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체가 되어서 무덤에 눕히셨는데, 성령의 능력으로 온몸에 생명이 충만하게 부어지면서 예전의 생명을 이기는 놀라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그게 아무도 보지 못할 때 무덤 속에서 성령과 함께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보지 못한 일인데 똑같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절망으로 가득 차서 도저히 살 희망을 갖지 못했던 사람이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자신의 환경이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부활의 능력이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전에는 죽음이 두려워서 죄에 굴복했으나, 이제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와 함께 죽으면 예수와 함께 살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에게 그 확신을 인(印)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보증으로서 성령을 내 안에 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고도 살다가 낙심하고 시험에 들 때가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신기합니다. 도저히 살 것 같지 않고 죽고자 하는 유혹이 내 마음에 어른거리고, 낙심하는 일들이 내 마음에 가득 찹니다. 나 자신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슬픈 마음을 안고 예배당에 와서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보니까 결국 내가 믿음이 너무 약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십자가의 경험으로 돌아갑니다. 나의 죄를 회개하며 주님 앞에 눈물을 흘리니, 예수께서 다시 내 안에 사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일생을 내가 주님의 손잡고 여기까지 걸어오기를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시련과 고난의 파도와 풍랑을 겪었는데, 이런 일을 한 번 더 겪는 것이 내 인생에 무슨 변화를 가져오겠는가?' 담대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 것이라는 희망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이천 년 전 예수 부활의 능력을 내가 여기서 경험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회개가 없는 신앙생활이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면 예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는 회개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예수와 함께 사는 부활의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어제 태만하게 예배드리던 사람이 이번 주에도 똑같이 예배를 드립니다. 무슨 영혼의 유익이 있겠습니까? 민방위 교육처럼 참석하는 그 예배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으십니까? 못 만나고 간 날은 울어야 될 것 아닙니까? 안 그렇습니까? 예배가 끝나고 나면 어떤 사람은 예수를 만나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만나고 싶어서 왔는데 못 만났으면, '내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이면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지도 않을까?' '예배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졸기만 하고 간 나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아주 멀어졌나 보다.' '주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라도 생겨서 거짓말로라도 울어야 할 것 아닙니까? 누구를 위해서 예배를 드리십니까? 눈물 한 방울 없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 마음속에 진정한 자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의 정서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불효자식이 누군지 아십니까? 가슴 아파하는 엄마의 마음을 티끌도 나누어 갖지 못하는 자식이 불효자식입니다. 효자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서 부모가 말을 안 해도 공감하는 자식이 효자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안에서 내 안에 예수 부활의 능력이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예전에 죄에 지고, 유혹에 굴복하고, 그리고 노예가 되어서 살던 속박 받던 모든 삶은 결국 힘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건장한 운동선수가 다섯 살배기에게 밧줄로 묶일 리가 없습니다.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런 아이들에게 그렇게 순순히 묶일 수가 없습니다. 힘이 없어서 우리가 속박 받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힘을 (주십니다.) 영혼과 정신의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육체의 속박을 받는 것에만 주목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이 있고, 많은 권력이 있고, 그걸 소비할 수 있는 젊음이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에 익숙해지면서 우리의 영혼은 점점 더 결박됩니다. 그것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이 결국 자신의 영혼의 속박을 괴로워하다가 해결책을 못 찾는 것이 현대인의 풍요 속에 정신의 빈곤입니다.
예수를 죽음에서 살린 부활의 능력이 나를 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죄에 대해서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이것이 속박이었습니다. 욕심을 따라 살 때는 자유로움 같았지만, 일시적인 육체의 만족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만족으로써 욕망의 불길을 끄려는 것은 타오르는 불길을 기름으로 끄려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마치 뜨거운 여름철에 진한 설탕물로 갈증을 달래보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만족이 끝나면 마음에는 더 큰 욕망이 생기게 되고, 마음은 그 욕망에 속박을 받아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죄를 향해 죽게 됩니다. 또한 예수와 함께 다시 살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신자는 능력으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의 힘이며 영혼의 능력입니다.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생명의 능력을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와 무능, 비참과 속박에서 건져내셔서 자유인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섬기게 하십니다. 또한 십자가에 죽으실 자기의 운명조차 사랑하셨던 예수님처럼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자유롭게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혈의 능력입니다. 이로써 자신이 예수 안에, 예수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뉘우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결코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 회개의 눈물 속에서 하나님이 다시 은혜 주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오늘날 진정한 회개와 눈물이 없는 교회 생활은 교회가 얼마나 세속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그림입니다. 많은 사람은 교회가 자신의 상처를 달래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것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위로를 받을지 고통을 받을지는 주님이 결정하십니다. 환자는 아프면 수술대에 올라가서 조용히 눕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의사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의 껍데기를 고치는 종교가 아니라 근본을 고치는 종교입니다. 나는 이 점에 있어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일이었습니다. 큰 신앙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교회에 관심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빠지지 않고 서너 살 될 때부터 교회에 고모들의 손에 이끌려서 다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고모가 항상 주일이면 종이에 싸서 동전 한 두 개 정도를 내 손에 쥐어주며, '이거 꼭 교회에 가서 헌금해라.'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 번도 그 지시를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 많은 기독교에 실망을 느끼면서도 오랫동안 교회를 떠날 수 없었던 이유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초등학교 학년, 학년인데, 교회에 가면 사람들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저희 동네 바로 옆에 있던 교회는 가마니를 깔고 가건물로 된 곳에서 한 백여 명의 성도들이 박수를 치면서 예배를 드렸는데, 우는 정도가 아니라 (교인 전체가)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도 목사님이 교육을 많이 받고 세련된 분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어린 아이가 들어도 말이 투박하고,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약간 무대포(無鐵砲) 같은 설교였던 걸로 기억이 합니다. 어쨌든지 간에 두 주먹을 불끈 쥐지 않고는 설교를 하시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나고 나면 약속이나 한 듯이 온 교회 안이 통곡으로 뒤덮였습니다. 그것이 그 교회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가는 교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늘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이게 1962년, 63년, 64년도, 그때 일입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 그런 예배당에 들어가면 여기는 무엇인가 세상과 구별되는 곳, 세상에는 없는 무엇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어린 아이의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랑 속으로 뛰어 들어갈 수 있었으면 너무 좋았을 텐데, 혹독한 죽음에 이르는 방황을 안 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걸 못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신기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는 무서웠습니다. 저들은 모두 만나는 하나님을 나만 못 만난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완벽하게 눈물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를 믿음에 있어서 두 가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의 고통으로 인한 눈물, 예수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는 기쁨의 눈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도 예수 믿는 사람들 욕 많이 먹었습니다. 가게 하는 사람은 예수 믿으면서 가게 외상값 떼어 먹는다고 욕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쌀집 하며 예수 믿으면서도 되를 속인다고 욕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가면 언제나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통곡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세계 어디서도 쉽게 보기 어려운 광경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회개의 눈물의 통곡 소리가 제 기억으로는 최소한 1980년도(초반까지는) 계속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회개의 눈물이 사라지면서 부활의 기쁨이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우리는 자유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서 부어주시는 예수의 생명은 모든 죄의 욕심과 죽음을 몰아냅니다. 이 생명은 사랑입니다. 신자의 삶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부활의 경험은 한 번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우리의 마음은 세속에 물들고, 눈물을 차마 씻기도 전에 우리는 또 다른 죄를 크든 작든 짓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민한 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보다는 우리 육신의 느슨한 삶을 좋아합니다.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다시 사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모든 연주자들은 악기를 연주하기 전에 먼저 조율부터 합니다. 바이올린의 줄을 팽팽하게 해서 딱 맞춘 다음에 연주를 시작합니다. 이런 조율의 시간이 예배의 시간,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 순간 진정한 회개 속에서 예수의 죽음에 참여하고, 또 거기서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부활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죄로 가득 찬 세상에 살면서도 죄에 사로잡히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만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할 때는 있지만, 예수를 완전히 버리고 세상의 품에 안겨버리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매 순간 버리고, 비우고,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매 순간 붙들고, 끌어안고, 사랑하고, 살아갑니다. 매 순간 흐느끼고, 눈물 흘리고, 통곡하면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운명을 함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사랑이 참된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예수와 함께 함'이(첫 번째였습니다.)
B. 믿음으로 살아감
그리고 두 번째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 무엇이 "그런즉"이라는 것입니까?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선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뭐냐 하면 참된 자유의 삶은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부활의 경험은 현재적으로 계속 되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시험도 예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우리는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일평생 내려놓을 수 없었던 상처, 욕심, 탐욕, 그리고 악한 욕망들을 예수와 함께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히지 않은 나는 병리적인 자아를 사랑하려는 이기적인 자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에 다시 살아납니다. 이때 경험하는 나는 건강한 '나'입니다. 그런데 그 '나'는 예수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기뻐하시는 '나'이고,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나'입니다.
그런데 참된 회개의 경험이 옅어지고 나면 또다시 살아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내가 육체 가운데서 산다"고 할 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육체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하늘나라에서 영(靈)으로만 산다면 이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리적인 자아와 예수와 하나가 된 건강한 자아 사이에 끊임없는 싸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상태가 좋을 때는 이 갈등이 비교적 아주 작은 것들로 일으키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서 기본적으로 사는데 갈등이 있습니다. '여보, 왜 월급이 비어?' '여보, 당신 나 모르게 용돈 챙기는 거 아니야?' '같은 회사 다니는 다른 사람은 연말에 보너스가 이만큼 나왔다는데, 왜 당신은 날 이만큼밖에 안 갖다줘?' 이런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이렇게 사과하고, 사과를 받으면서,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자, 이러면서 사는데도 작은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관계가 아주 심각합니다. 그러면 그 갈등의 크기가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그래서 도장을 찍자는 거야?' '그래? 애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기다리라고?' '그때까지 기다릴 거 뭐 있어. 중학교 졸업할 때 도장 찍지.' '나는 당신 없어도 살고, 이렇게 사느니 나 진짜 혼자 사는 게 나아.' (이런) 험한 얘기가 오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 내 인생 최고의 실수는 너 같은 놈 만난 거다.' 이런 식으로 오가면, 이것은 갈등이 굉장히 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뭐냐 하면 작은 회개를 무시합니다. 작은 회개를 무시하니까 이 죄가 계속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판에 건강한 자아와 병리적인 자아 사이에 일어나는 이 갈등이 사소한 수준, 금방 화해하고 봉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훨씬 더 커서 근본적으로 신앙을 버리느냐 마느냐 하는 단계까지 나갈 정도로 굉장히 커다란 죄를 가지고 갈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쉽게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거기서 온갖 부작용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갈등을 참고 견디는데 은혜에 의해서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 그것이 마음의 병이 되고, 육신으로 굳어지고, 도저히 그 압박을 견딜 수가 없어서 오락으로 쾌락으로 향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그것으로 해결되지도 않을 때 정신병 증세까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정신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오래된 통계이기는 한데, 물론 거기에는 그런 정신병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사람도 있겠지만, 정신병에 심하게 시달리는 사람의 %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예수를 잘못 믿으면 정신적인 질병을 막는 데 신앙이 거의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내 자신이 내 안에서 갈기갈기 찢겨졌는데 혼란이 안 일어나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가 있습니다.
1. 육체로 삶
그래서 사도가 얘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 上) 그렇게 승리의 선언을 했는데 안타깝게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고 말합니다. 이 육체는 그냥 살코기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죄 된 육체입니다. 구원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는 죄와 결별할 수 없는 육체입니다. 죄성에 물들어 있고, 유혹을 받아 굴복할 수 있는 육체입니다. 그 육체는 신령한 것보다는 감각적인 것에 이끌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자극을 받기보다는 육체의 유혹에 굴복하기 쉬운 마음을 가진 육체입니다. 그래서 그 육체가 마음의 육체적인 성격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모순적인 현실입니다. 새 사람으로 태어났고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나, 여전히 죄가 남아 있고, 그 죄는 내 안에 역사합니다. 한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는데도 그 죄는 내 안에서 융성해서 나를 죄 가운데로 사로잡아가는 법이 됩니다. 그러니까 한순간도 은혜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뛰어난 신자라도 말입니다. 마치 아무리 훌륭한 명의라고 할지라도 수술하는 내내 자기 손을 소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의 배를 갈라놓고 만약에 오염된 손으로 만져서 균이 들어간다면 치명적입니다. 수술이 아무리 예술처럼 끝나도 그 환자는 치명적인 어려움에 당합니다. 그러니까 의사가 유능한 것과는 상관없이 하는 일이, 수술하는 내내 끊임없이 자기 손을 소독하는 것입니다. 이건 유능함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기독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사람들은 회개하고 죄를 뉘우치는 것 자체가 매우 비인간적인 요구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로 물들면 우리의 손은 마이다스(midas)의 손이 됩니다. 무엇이든지 손을 되면 무엇이든지 죄에 물들어서 오염시켜버립니다. 죄로 가득 찬 사람이 사업을 하면 욕망으로 사업을 합니다. 죄로 가득 찬 사람이 이성을 사귀면 쾌락을 즐기려는 마음으로 곤두박질칩니다. 그리고 죄로 가득 찬 사람이 결혼을 하면 상대방을 지배하고 짓밟으려고 한다는 얘기입니다. 모든 좋은 것들이 죄 때문에 망가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것을 씻어내는 일을 외과 의사가 하듯이, 우리에게 그것이 놀라운 은혜로운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씻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셔서 다시 살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모두 사모해야 될 것은 회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을 통해서 주님이 예전에 없던 새로운 생명의 힘을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것 없이는 자유를 얻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죄와 싸워서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일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사람은 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일이 고통스럽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고 이겼을 때 그 마음에 밀려오는 감미로운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함,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품 안에 사랑받으며 있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분이 나를 품에 안으신 사랑의 포옹을 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주는 달콤함 같은 것들을 느낀다면 그것이 비인간적이고 힘겨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때문에 애통하고 괴로워하는 여러분을 보고 싶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죄에서 자유를 얻고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시는 것, 그게 주님의 가장 커다란 소원인 것입니다.
2. 믿음의 삶
그다음에 마지막 두 번째가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순적인 현실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下) 우리 안에 남은 죄가 아무리 기승을 부리고, 유혹이 파도처럼 밀려와도, 믿음으로 살면 이것들을 능히 이기고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나, 결코 노예처럼 속박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반드시 하늘의 능력으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신자라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현재를 살지 않으면 그는 현재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 자유는 사랑에서 옵니다. 마지막 불치병에 걸리셔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납니다. 정말 고통스러우실 텐데 얼굴이 편안하십니다. 그리고 아들의 손을 잡습니다. 또 며느리가 옆에 있습니다. 외동아들입니다. '아무개야, 나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마라.' '네가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서 예수님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착하게 사니, 나는 이제 여한이 없단다.' 그게 자유입니다. 사랑이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어 갑니다. 그런데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합니다. '내가 철천지원수를 남기고 그가 잘 사는 것을 보니, 내가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구려.' 속박입니다. 사랑만이 자유를 줍니다.
(찬양)
손과 발 위해 못 박혔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나면 대부분의 것들은 아무래도 괜찮은 것입니다.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사랑이 주는 자유입니다. 그런 자유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주 놀라운 비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놀랍다 하나님 지혜의 부유함이요"라고 더 이상 말을 못 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롱하듯이 말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도대체 허구 많은 죽음 중에 메시아라면 왜 죽냐?' '허구 많은 죽음 중에 십자가의 죽음은 도대체 뭐냐?' '나무토막 두 개와 밧줄 하나를 가지고 종교의 상징으로 만들었다니.' '이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렇게)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라운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면 모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런데 그 통로를 통과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그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나에게 말해주는 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죄를 버리고 거룩하게 순결한 마음으로 예수를 위해서만 살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을 우리가 가질 수 있지 않습니까? 영원히 못 갖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회개하는 순간에는 그런 마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진짜 아무 욕심도 없다고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때가 왜 없겠습니까? 나는 있다고 봅니다. 지금 이 순간 고백할 수 있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고백하면서도 나를 대단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떨어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얼굴과 어깨에 모두 맞으면서 눈을 들어보면 결국 내가 용서받은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심지어 내가 죄를 버린 것도 저 십자가의 능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자유를 잃어버리고 결국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혼란 속에서 살아온 역사가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규명해보고자 무던히 애를 쓴 게 결국 철학의 역사고, 그걸 규명해 보려고 몸부림 친 게 심리학의 역사입니다. 그 모순적인 자신을 사람들에게 공감의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문학이고 예술입니다. 특별히 예술 중에서는 음악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바로 그런 것들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의 어찌 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 깊은 공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학, 예술, 철학, 이런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공감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마지막에 진짜 우리가 자유롭다는 사실을 어디서 깨닫느냐 하면 내가 예수 안에 있고 예수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입니다. 그때 진정한 자유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거는 예수가 나를 묶어 매고 나를 땅에 묻어버리고 예수가 사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너무 사랑하고, 예수가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의견의 온전한 일치, 의지의 합일(合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진짜 성령 충만하고 예수 사랑에 완전히 잠겨 있을 때 내가 진짜 살고 싶었던 삶은 예수가 살게 하시고 싶었던 그 삶과 완벽하게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착각을 하게 되느냐면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가 사시는 것이다." 이 완전한 사랑의 고백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얘기하지 않습니까? '너 어때?' '난 좋아' '나는 네가 좋으면, 난 다 좋아.' 일체의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의 역할입니다. '예수님이 좋으시면, 나는 다 좋습니다.' '예수님 바깥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이것을 비기독교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나, 실존 철학자들을 비롯해서 니체 같은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인간성에 대한 아주 더러운 억압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유롭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가 구속을 가져다주고, 속박을 가져다주어서 자신이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그 사람들도 철학을 찾았고, 사상을 찾았고,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그 비밀을 기독교에서 아주 단순하게 얘기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깨달은 그 사람은 진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짜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믿음이냐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下) "··· 나를 사랑하사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 3:16 上)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도, "···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 그랬습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비록 내가 여전히 육체 가운데에 살지만 자유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타난 사랑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서 감격적으로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 확증은 뒤집힐 수 없는 법원에서의 증언이나 판결 같은 것입니다. 신자는 이 사랑에 붙잡혀 사는 것이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무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자유를 억압받지 않을 정도로는 살 수 있습니다. 웬만한 사람은 암세포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한 개도 없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십만 개 이상만 뭉치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된다고 합니다. 죽고, 살고, 죽고, 살고, 생기면서, 건강한 몸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죄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만약 죄에 사로잡혀 산다면 나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도 아닌 다른 내가 주체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나와 병든 나 사이에 갈등이 나를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로 괴롭히는 것입니다. 자기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렇게 내버려둔 채 신자의 삶을 살려고 할 때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참 자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 안에 있습니다. 이 사랑을 현재적으로 풍성하게 경험함으로써, 그 사랑을 믿고 살아감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또 하나는 예수의 희생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그랬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살아갈 때 여러분 자신을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몸을 하찮게 생각하고, 영혼을 더 하찮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몸을 사랑하는데 그릇된 방식으로 몸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영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자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생각하면서 어마어마한 희생을 주고 사고 싶으실 정도로 내가 소중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가엾은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나를 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신 그리스도 사랑의 크기와 넓이 때문에 내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혼과 몸, 이 땅에 딱 한 번 전개되는 자신의 인생을 소중히 여기며 살 수 있는 희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사랑은 말로만의 사랑이 아닙니다. 아들을 친히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 죽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마지막 구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멸망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지옥 안 간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생명이신 그분이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생명으로서 자유를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많은 시련과 고통을 당할 때마다 그 고난을 예수 십자가의 고난에 투사(投射)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많은 시련과 고난을 당하지만 내가 예수를 사랑합니다. 그때 내가 고난을 당하면서 예수를 묵상할 때 예수의 고난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와 하나 되어서 그 고난의 계곡을 지나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이 주신 자유의 힘이 죄의 속박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옛 자아이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면서 자기는 깨어지고, 예수를 닮아가게 됩니다. 이게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보혈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모든 죄에서 여러분을 건지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를 주십니다. 신앙 안에서 사십시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들이 자유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결국 생명입니다. 사람이 질병에 걸려서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만큼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게 됩니다. 그때 피부는 가랑잎처럼 바스락거리면서 야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검었던 수염과 머리털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하고, 탱탱하던 피부는 늘어집니다. 그리고 눈의 안력(眼力)이 흐려지면서 모든 육체의 기능이 가라앉게 됩니다. 호흡도 가빠지게 되고,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도 불편해지게 됩니다. 마치 모닥불이 다 꺼지고 추운 겨울의 들판에서 사위어지는 것처럼 꺼져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꺼져가는 모닥불을 누군가 다가와서 가랑잎을 얹으면서 다시 살려냅니다. '후우, 후우' 불이 다시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꺼져가는 영혼에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실 때, 생명만 불어넣으셨을 뿐인데 놀랍게 그 생명은 피부의 색깔을 변하게 만듭니다. 가랑잎처럼 바스락거리던 피부를 탱탱하게 만들고, 안광(眼光)의 빛을 되찾게 만듭니다. 호흡이 거친 기운으로 호흡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머리의 색깔까지도 흰머리에서 검은 머리로 변해갑니다. 그리고 욕망이 생기고,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아주 놀라운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방법입니다. 생명의 능력이 없이 우리는 결코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엄청난 용사 삼손이 머리털을 뽑히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을 때 힘없이 괴롭힘을 당하던 모습을 보십시오. 결국 문제는 생명의 기운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남으로 여러분이 이런 생명을 누리고 자유롭게 살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실 때, 그때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때 나는 인생의 진정한 주체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경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완전한 자유가 있습니다. 삶과 죽음, 불행과 행복을 넘어서서, 어떠한 삶의 상황에서도 자유로운 주체로서 죽음을 비웃듯이 내려다보며 살 수 있는 자기만의 인생을 그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남으로 잃어버린 자유를 다시 찾으십시오. 예수께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 자유가 있는 신앙생활로, 진정한 살아있음의 기쁨을 느끼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며 시리즈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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