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음과 위로
2023년
주일오전예배
설교기간 | 2023년 06월 18일 – 07월 16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3년 07월 25일
목 차
1.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시 42:1) 2023.06.18. 주일오전예배 9
2.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시 42:2) 2023.06.25. 주일오전예배 16
3. 눈물을 흘린다는 것(시 42:3) 2023.07.02. 주일오전예배 25
4. 마음이 상한다는 것(시 42:4) 2023.07.09. 주일오전예배 33
5.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시 42:5) 2023.07.16. 주일오전예배 41
<설교 프레임>
찾음과 위로1 2023. 6. 18 주일 낮 예배
<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 >
“하나님이여 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I. 본문 해설
이 시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로 알려져 있다. 다윗이 쓴 시(詩)인데 고라 자손이 간직했다는 주장도 있다.
아마도 이 시는 다윗왕이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고 있을 때 쓰여진 시일 것이다.
그때 다윗은 급히 왕궁을 빠져나와 요단강 건너편 남의 나라 땅으로 망명길을 떠나야 했다. 이 시는 다윗과 동행했던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이 쓴 것으로 여겨진다.
고라 자손은 광야 시대에 고라가 모세를 대적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징벌을 받은 족속이었다.
고라는 레위의 증손이었는데 다단과 온이라는 사람들과 힘을 합해 당(黨)을 만들어서 지도자 모세에게 반역했다(민 16:1).
하나님은 이들을 악하게 보시고 크게 징벌하셨다. 땅이 입을 벌려 이들을 삼켰고(신 16:32), 또한 땅에서 불이 일어나서 250명을 불태워 버렸다(신 26:10).
그러나 고라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죽지는 않았다. 성경에서 후손들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고라의 집안은 이런 슬픈 역사를 간직한 살아왔다.
그런데 이들에게 가문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것은 다윗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된 때였다.
고라 자손들은 힘을 다해 다윗을 도왔다. 왕위에 오르자 다윗은 그들을 성전(聖殿)에서 섬기는 사람들로 임명해 주었다.
II.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
살아 있는 인간의 육체에는 갈망(渴望)이 있다. 배고플 때는 음식을 갈망하고 목마를 때는 물을 찾는다.
또한 누군가 보고 싶을 때는 그리운 사람을 찾는다. 이것이 인간 정신이다.
인간의 영혼(靈魂)에도 이러한 갈망이 있다.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그분을 향한 갈망이 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의 사랑 안에서 살고자 하는 교제의 갈망이 있다.
이러한 영혼의 갈망은 거듭난 신자에게는 더욱 뚜렷하다. 왜냐하면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 갈망을 못 느끼는 것은 마음의 감각이 죄(罪)로 인해 둔해졌거나, 정신이 분산되어 마음이 딴 데 팔려 있기 때문이다.
고난 속에서 시인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반역을 일으킨 원수를 저주하시고 왕국을 돌려 달라는 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의 마음과 영혼의 상태를 조용히 고백(告白)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여 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A. 목마른 사슴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가을이 사슴들의 교미기다. 이때 수컷 사슴의 신체에는 아주 뚜렷한 변화(變化)가 일어난다. 그것은 사슴이 발정기 때에 겪는 극심한 목마름이다.
이때가 되면 숫사슴은 짝짓기를 포기하고 물을 찾아 헤매게 된다. 들판에는 물이 흔치 않기에 때로는 광야를 가로질러 달린다.
너무 기진해지면 샘이나 시냇물의 신기루가 보이고 사슴은 그리로 달려간다. 그러다가 지쳐서 쓰러진다.
이때에 사슴은 본능적으로 죽을 때까지 앞발로 땅을 파다가 숨을 거둔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는 목마름이 있는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깊은 갈망(渴望)이 있는가?
두 사람을 비교해 보라. 뛰어난 지식을 가졌지만 미지근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과 단순한 믿음이지만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다.
한번 생각해보라. 그 두 사람 중 누구를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겠는가?
*금식 기도와 탕수육
B. 갈급한 영혼
타는 듯이 목마른 사람처럼, 시인의 영혼은 하나님을 갈망했다. 여기서 “영혼(靈魂)”은 인간 심령의 가장 깊은 곳을 가리킨다.
마음은 영혼의 기능이니, 곧, 지(知)∙정(情)∙의(意)다. 이로써 인간은 보이는 것들과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알고 느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 시인의 영혼은 하나님과 격리되어 있었다. 좁힐 수 없는 거리감으로 소외(疏外)되어 있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랬다.
a.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과 같은 상황 때문이었다.
b. 성소를 떠나 있어서 제사 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갈급함”은 “타아로그( )”인데, 이는 “(목마름 등으로) 헐떡거리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은 시인의 영혼 안에서 온 마음으로 느끼는 갈망을 보여준다.
그의 이 헐떡이는 목마름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갈급함이었으니, 영혼의 원초적인 갈망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그분을 아는 지식(知識)이 없기에 고통을 받는다.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며 집착하고 상처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목말라야 할 것에는 목마르지 않고, 그러지 말아야 될 것에 갈증을 느끼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불행(不幸)의 원인이다.
그러나 신자는 이런 갈망으로 하나님을 찾도록 부름받은 사람이다. 우리의 죄와 마음에 붙은 세상(世上) 사랑은 하나님과 뜨거운 사랑의 교제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비록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를 찾는 자를 만나 주신다. 거기에 하나님의 위로(慰勞)가 있다.
“…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下)
시인은 고요히 하나님을 찾았다. 야단법석을 하면서 무슨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련 속에서 고요히 자기 자신 속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바라보며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간절히 갈망하는 울부짖음을 들었다.
이것은 몰입(沒入)이나 자아 이탈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性品)의 빛 아래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때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그분께 대한 낯섦과 거리감만 남는다.
삶에 대한 말 할 수 없는 깊은 공허감이 거기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도 한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 사람들이었다.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했고, 만져 주심을 바랬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는 갈망이 있었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에는 눈물이 있었다.
그것은 심령의 가난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만 의지(世上)할 수밖에 없었고 상하고 깨어진 마음으로 십자가의 주님을 찾았다.
III.적용과 결론
지금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갈망(渴望)하는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는가? 그분을 뵈옵기를 열망하는가?
우리의 마음을 모으자.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자. 반드시 우리를 만나 주실 것이다. 은혜를 주실 것이다.
찾음과 위로2 2023. 6. 25 주일 낮 예배
<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2)
I. 본문 해설
시인은 큰 시련 속에서 자기 마음의 깊은 심정(心情)을 하나님께 고백하였다. 이어서 자기의 간절한 소원을 고백한다.
그것은 마음의 껍질을 스치고 지나가는 가벼운 욕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갈망이었다.
감각적인 욕구는 장마철 강물에 떠내려가는 부유물(浮遊物)과 같다. 물의 흐름을 따라 이리저리 그냥 떠내려가기에, 거기에 있는가 하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2)
흔히 사람들은 사는 게 힘들어서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고 말한다. 시련이 겹치고 고난이 커서 하나님을 갈망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앙(信仰)이 무엇인가? 바로 그런 위기의 때를 위한 것이 아닌가?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없기에 신앙이 필요한 게 아닌가? 그때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가 아닌가?
II.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찾는 갈망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한다.
신자로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 않을 이가 없다. 그러나 도대체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시인의 영혼(靈魂)은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았다. 인생의 위기 앞에서 처절하도록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혼의 목표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었다.
A. 인간의 영혼
영혼이란 무엇인가? 인간 영혼에 관한 논의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a.영혼이란 무엇인가? b.영혼과 신체의 관계인 심신론(心身論) c.영혼의 능력, 곧 기능에 관한 논의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영혼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한 예로, 호메로스는『일리아스』(Ilias)라는 책에서 “죽은 사람 가슴에 꽂힌 창을 빼낼 때 그 끝에 횡경막과 함께 영혼도 따라 나왔다”고 한 것이다.
플라톤은 ‘영혼불멸설(靈魂不滅說)’을 주장했고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책들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영혼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a.필멸적 부분 : 신체를 움직이는 자연적 원리
b.불멸적 부분: 인간의 고유하고 영원한 형상.
어떤 물건이 몇 가지 구성 요소(要素)로 되어 있는지를 알려면 그것을 만드는 공장을 가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인간 존재는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
“여호와 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를 그 코에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영혼은 하등한 기능과 고등한 기능으로 나뉜다. 영혼의 가장 고등한 기능이 바로 하나님을 알고 느끼고 사랑하는 것이니, 그럼으로써 행복에 이를 수 있다.
B. 하나님을 갈망함
시인의 영혼은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였다. 갈망은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 아니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목마름이다.
인간은 어차피 하늘과 대지(大地)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하기에 우리의 삶은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고, 사랑하고 기뻐하며 이별하고 슬퍼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합당한 질서 안에서, 무엇인가 갖고 싶고 누리고 싶은 욕망(慾望)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무 두려움과 가책이 없이 마음껏 누려라. 명랑한 삶을 살아가라.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분복(分福)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잠세적인 것이다. 영혼의 양식은 진리의 말씀이고,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交際)로써 만족을 누린다.
하늘의 영원한 행복을 이 땅 위에서도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이다. 즐겁게 하지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으로는 결코 행복에 이를 수 없다.
*사용함(uti)와 누림(frui)의 질서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만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C. 살아계신 하나님
그러면 시인은 무엇을 갈망하였는가? 무엇 때문에 타는 듯한 열망(熱望)으로 주께 매달렸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시 42:2上)
어떤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살아 계신”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너무나 폭넓게 사용된다.
이 표현은 생명이 없는 이방신(異邦神)이나 우상과 대조된다. 모세는 가난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였다.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들을 섬기리라”(신 4:28)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이 벨사살 왕에게 한 말을 기억해 보라.
그는 신상들을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단 5:23) 생명 없는 존재로 묘사했다.
시인이 만나고 싶었던 하나님은 관념(觀念) 속의 하나님이 아니었다. 천상에 있을 뿐 내 인생에 관여하지 않는 형식상의 절대자도 아니었다.
그가 만나고 싶었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었다. 또한 누군가로부터 부여 받은 생명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누구에 의해서도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생명(生命)의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다.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남의 나라에 우거하며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시인이 간절히 바라던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이 땅위에 그분의 통치가 이뤄지는 것이었다.
당신의 질서(秩序)대로 만물과 만사를 다스리고 통치해 주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자기를 긍휼히 여기셔서 역사해 주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였다.
당신의 현실(現實)을 불행하게 하는 문제가 무엇인가? 힘겨운 인생을 사는 것은 현실이 힘들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 사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면, 우리 중 누가 십자가를 찾았겠는가?
한 인간으로 이 세상(世上)에 살아있는 것이 외롭지 않았더라면, 우리 중 누가 예수를 믿었겠는가?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후에도 죽을 것 같은 삶의 수많은 고비들을 넘기며 살아왔다. 거기서 믿음으로 주님께 간절히 매달릴 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다.
“주님의 모든 열망이 저를 향하고 있기에 나도 모든 열망을 다해 당신을 향하나이다 … 제 마음의 눈을 고정시켜 당신만을 바라볼 때 … 당신의 감미로운 달콤함이 그토록 사랑스럽게 저를 감싸는 당신의 품이 없었다면, 주여 저의 생명이 무엇이겠사옵나이까?”
Nicolaus of Cusa, The Vision of God, (NY; Cosimo Classic, 2007), 17.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시련과 고통의 때에 꿈도 꿀 수 없었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았는가? 그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는가?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고요히 가슴에 손을 얹고 지난 날을 생각하라. 하나님이 어떻게 고아처럼 버려진 그대에게 당신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셨는지를 생각하라.
참된 신앙은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존재(存在) 자체에 대한 완전한 기쁨과 만족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자기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셨겠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신다.
III.적용과 결론
우리가 위기에 처한 때, 아무도 도울 이 없이 고아처럼 버려진 것 같은 때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때다.
이제껏 알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곧 지금 여기 살아계셔서 내 인생(人生)에 개입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다.
죽은 믿음으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다.
찾음과 위로3 2023. 7. 2 주일 낮 예배
< 눈물을 흘린다는 것 >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I. 본문 해설
시인은 환난(患難) 속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하나님을 갈망했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은 바뀐 것이 없었다.
여전히 시인은 남의 나라 땅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은 반역자들에게 짓밟히고 있었다.
그의 소원은 다윗이 왕권을 회복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성막(聖幕)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었다.
망명지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며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의 기도는 비탄의 눈물로 이어졌다.
II. 눈물을 흘린다는 것
A. 비난과 조롱
시인에게 가장 큰 슬픔은 하나님의 성소(聖所)를 떠나 있어서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마음은 밖으로부터의 걱정과 안으로부터의 염려로 가득 찼다. 슬픔은 그 마음에서 흘러나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더욱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시인(詩人)의 슬픈 마음을 찌르는 것은 외부로부터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이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시인은 망명생활 중에도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았다. 그런 시인의 모습을 이방인들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경건한 시인에게 물었다.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물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만약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이토록 경건하게 그분을 섬기는 너희는 왜 나라를 잃고 우리 땅에 망명을 왔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버리셨느냐?”
시인은 이런 질문에 아무 대답(對答)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울며 매달렸건만, 예루살렘으로부터 희망을 담은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상황(狀況)에서, 변함없이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기억하라! 때로는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고 아무것도 변함이 없는 것 같은 때가 있다.
그때는 마치 밝은 해가 뜨기 직전 어두운 때와 같다. 그러나 그런 때가 바로 우리의 순전한 믿음이 필요한 때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침묵의 시련 속에서 우리의 믿음(faith)의 크기와 마음의 진실함을 측정하신다.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헤아리신다.
다시 말해서 침묵(沈默) 속에서 우리도 모르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크기를 당신의 저울에 달아보신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때에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계시는 것일까? 단지 우리가 현실의 고통을 얼마나 견디는지 달아보시고만 계시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비록 상황에는 아무 변화가 없고, 비록 현실(現實)은 전혀 바뀌는 게 없었지만, 하나님은 시인의 마음에 두 가지를 주셨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과 하나님을 향한 갈망(渴望)이었다. 이것들은 믿음이 약해지면 때때로 흔들리고 분산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인이 하나님을 찾으며 마음을 쏟아놓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평강(平康)을 누렸다. 현실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고 고난으로 가득찼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화(平和)에서 오는 샬롬(Shalom)이었다. 그러나 그냥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평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평안할수록 더욱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는 거룩한 평안이었다.
B. 신앙과 눈물
깊은 시련 속에서 시인은 눈물을 흘렸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갈망이 커질수록 시인은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럴수록 더욱 시인의 마음은 그분께 모아졌다.
때로는 거짓으로 지어내는 눈물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참된 눈물은 진실(眞實)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악인에게는 자기반성의 눈물이 없고, 의인에게는 언제나 그러한 눈물 속에서 산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기 때문이다.
눈물을 쏟으며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다.
자기 서러움에 우는 것은 은혜 없이도 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갈망하며 눈물을 쏟는 것은 은혜(恩惠) 없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이며, 은혜의 역사다.
자격을 갖춘 사람이 상응하는 공로 때문에 받는 것은 은혜가 아니다.
은혜는 그렇게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거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호의(好意)며, 사랑의 정동(情動)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지치고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눈물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남의 나라 땅으로 쫓겨나 망명 온 처지에서 시인이 만난 이방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시 42:3)
이처럼 조롱하듯 비웃는 그들의 말에 시인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눈물만 흘렸다. 시인은 밤낮없이 울어야 했다.
“…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下)
이는 시인이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는 이 시련의 날에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여 금식(禁食)하며 하나님을 찾았음을 암시한다.
이때 시인이 흘린 눈물은 값싼 자기 설움의 눈물이 아니었다. 한 가지 소원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듯하여 물처럼 쏟는 눈물이었다.
그것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시인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아파했다.
사람이 이런 슬픔을 극(極)에 달하도록 느낄 때면, 자신이 모든 사물과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홀로 버려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시인은 그럴수록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었다.
시인은 비참한 마음으로 식음을 전폐한 채 하나님(God)을 간절히 찾았다.
시인에게 유일한 양식은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뿐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이런 눈물이 있는가? 하나님 외에 이 세상(世上)에 있는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슬픔 때문에 쏟는 눈물이 있는가?
한 3일 아니, 단 하루 만이라도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자 매달린 적이 있는가? 몸부림친 적이 있는가?
진실하게 두 볼에 흐르는 눈물은 마음을 보혈의 피로 깨끗하게 하신다.
첫사랑의 때를 기억해 보라. 모든 일이 형통(亨通)하면 감사해서 울었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움을 간구하며 울었다.
우리 신앙(信仰)에서 첫사랑의 때는 눈물의 때였다. 다시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던 순간도 언제나 눈물의 때였다. 그때마다 주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한 경험
그때 우리는 눈물이 있는 신앙을 가졌다. 자신의 존재의 미천함 때문에 울었고, 또한 자신의 도덕적 비참함 때문에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비참함 사이에서 느끼는 절망감(絶望感)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사랑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밤낮으로 눈물로써 자신의 양식을 삼은 이유였다.
은혜는 거저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찾기에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간절히 만나고자 하는 자를 만나주신다.
III.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간절한 마음에 응답(應答)하신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와 은혜의 신비한 연합 속에서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주신다.
그래서 참으로 은혜받은 사람은 그것이 오직 하나님의 선물임을 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그분이 거저 주시는 사랑 밖에는 자랑할 것 없다.
울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며, 신령한 이유로 통곡하게 하심도 하나님이시니, 좋은 일에 하나님을 높이고 나쁜 일에 자기의 허물을 고백(告白)하자. 눈물이 있는 신앙으로 돌아가라!
찾음과 위로4 2023. 7. 9 주일 낮 예배
< 마음이 상한다는 것 >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시 42:4)
I. 본문 해설
시인은 두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양식(糧食)으로 삼았다. 이방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고 시인에게 물었다.
그 조롱 섞인 질문은 시인의 마음을 더욱 큰 슬픔에 복받치게 하였다. 그래서 눈물을 쏟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방인에게 무시당하는 서러움의 눈물이 아니었다.
하나님 성소(聖所)를 떠나 있어서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기에 흐르는 눈물이었다. 그의 눈물은 시냇물처럼 흘렀다.
이어서 시인은 자신이 더욱더 깊은 슬픔에 잠기지 않을 수 없던 이유(理由)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던 때의 회상이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시 42:4)
II. 마음이 상한다는 것
그 은혜(恩惠)로웠던 때를 추억할 때마다, 시인의 마음은 더욱 찢어질 듯 아팠다. 도대체 왜 그 회상의 기억이 고통을 불러왔을까?
하나님의 은혜의 현재적 경험뿐 아니라, 그 경험(經驗)에 대한 회상 또한 언제나 사랑의 정동(情動)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늘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살고자 하는 성도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현재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과 매 순간, 과거에 받은 은혜를 회상(回想)하는 것이다.
A. 마음의 상함
그러면 시인이 과거를 기억하면서 그토록 마음이 상(傷)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여기서 그가 경험한 “마음의 상함”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1. 자연적 의미
첫째로, 자연적인 의미에서의 상함이다. “상하다”라는 말이 마음이나 기분(氣分)과 관련해서 사용될 때는 “상처를 받다, 화가 나다, 우울해지다, 억눌리다”라는 뜻을 갖는다.
2. 신령한 의미
둘째로, 신령한 의미에서의 상함이다. 이때 “상하다”라는 말은 자신의 비참(悲慘)함을 깨달아 슬프고 아픈 마음이 된 상태다. 이는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이 마음이 무너진 것을 가리킨다.
특히 이러한 “마음 상함”의 경험의 핵심은 이제껏 자기를 의존(依存)하던 마음이 깨어지는 것이다.
이는 시인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너무 비참하게 느낀 나머지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을 보여준다.
a. 언어적 의미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라고 번역된 부분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나는 나의 영혼을 내 위에 쏟아 버렸습니다”(시 42:4, KNJ 私譯)
b. 비참함의 인식
성경에서 “마음이 상하다”라는 표현은 뜻밖의 어려움 때문에 절망(絶望)하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거나(시 22:14), 자신을 의존하던 마음이 무너져 버린 상태를 묘사한다(애 2:19).
따라서 여기서 “마음이 상하다”라는 말은 현재의 비참함에 낙심하는 상태를 가리키는데, 여기에는 율법(律法)을 통해 자기의 죄를 인식하는 것을 포함한다.
시인은 지금의 현실(現實)을 그 옛날의 다른 경험, 즉 말할 수 없이 은혜로웠던 기쁨으로 성도들을 섬기던 때와 비교하였다. 신령한 의미에서 현재 자신의 비참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시인 자신의 힘으로는 그 상황(狀況)을 바꿀 수 없었다. 자기를 의존하던 마음이 사라졌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依支)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시인이 자기의 “마음을 물처럼 쏟아 버렸다”고 할 때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B. 상함의 이유
1. 기쁨을 기억함
반역의 무리들에게 쫓겨 온 이방의 땅에서 과거의 기뻤던 순간을 기억했다. 그것은 “성일(聖日)을 지키는 무리”와 함께 성소로 올라가며 기쁨과 감사로 찬송하던 기억이었다.(시 42:4)
그때의 은혜로운 상황은, 지금 남의 나라 땅에 망명하여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처지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때와 비교할 때, 시인은 영적으로 가련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인의 심정(心情)은 찢어지는 것 같았고, 그의 마음은 물처럼 쏟아져 버렸다.
믿음의 선조들이 핍박 속에서 곤고할 때마다 자주 행했던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더불어 나눴던 은혜의 기쁨을 회상하는 것이었다.
또한 시인은 바로 선조들의 그런 경건한 관습을 따라 성도들과의 행복했던 교제(交際)의 때도 회상하고 있었다.
원수들에게 핍박을 받아 마음이 상하게 되었을 때, 또 다른 시에서 시인이 했던 일도 바로 그것이었다.
자기를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기억(記憶)하고 구원의 은혜를 회상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시 143:4-5)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우리가 걸어온 인생길에 대한 회상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았던 추억이다.
여러분에게 이런 신령한 기쁨의 때가 있었는가? 하나님의 집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경배하던 때가 언제였는가?
우리의 예배(禮拜)를 받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행복했던 때는 언제인가?
교회에서 자신이 섬길 수 있는 지체들이 있어서 말할 수 없이 기뻤던 순간은 언제인가? 지금도 그런 기쁨을 향한 갈망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런 자신의 영적인 무기력에 마음 아파하며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있는가?
시시때때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渴急)한 것 같이 은혜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는가?
시련 중에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와주셨기에 기뻐했던 순간을 기억하라. 그리고 지금의 마음과 비교해 보라.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어떠한 사랑으로 당신 인생의 고비마다 인도해 오셨는지를 생각하라.
그런 은혜의 기억과 영적으로 현실의 격차를 인식(認識)하고 나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결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섬김을 기억함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의 날에, 시인은 은혜로웠던 지난날의 섬김을 추억하였다.
그때 그는 성일(聖日)이 되면 하나님을 예배하러 오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다. 감사의 찬송을 드렸다.
이러한 성도 섬김의 기억 때문에 시인은 더욱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갈망으로 마음이 불타올랐다.
시인은 그때처럼 다시 성소에서 기쁨으로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행복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인의 소원(所願)은 단순하였다.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다.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찾는 진정한 기쁨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에 속한 것인가, 혹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가?
III. 적용과 결론
여러분 마지막 소원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던 때가 가장 행복했는가?
이 세상에서 값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섬김의 때가 언제였는가?
마음 깊이 벅차오르는 희열, 그 거룩한 기쁨을 회복하고 싶지 않은가?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며 가슴 벅차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가? 이를 위해 마음을 다해 간절히 기도(祈禱)하라.
찾음과 위로5_끝 2023. 7. 16 주일 낮 예배
<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 >
“내 영혼아 네가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하리로다”(시 42:5)
I. 본문 해설
지난주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예배(禮拜)하고, 성도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성소에 올라가던 시절을 회상하였다.
그 은혜로운 때에 대한 기억에 시인의 마음은 심히 상(傷)하였다. 신령한 의미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처럼 여전히 이전처럼 하나님 만나기를 갈망(渴望)하고 있지만, 아직 그분의 얼굴을 뵙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아픔과 시련 속에서 시인은 오직 한 가지 결단을 하였다. 그것은 시련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所望)을 두겠다는 믿음의 결단이었다. 이 결단은 영혼과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II.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을 갈망했지만, 자기에게 아무 도움도 주시지 않을 것 같은 하나님의 침묵(沈黙)이 계속되었다.
시인에게 그 시간들은 가혹하리만치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그토록 외롭고 아프던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A. 영혼과 대화함
첫째로, 자기 영혼과의 대화(對話)를 시도하였다. 여기서 “영혼”은 “마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나님을 신뢰하고자 하는 자아(自我)는, 그리하지 않으려는 또 다른 불신의 마음을 설득(說得)하고자 하였다.
이 대화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고 있는 자신의 또 다른 마음을 위한 것이었다.
1. 두 개의 자아
시인은 마치 자신 안에 두 개의 자아(自我)가 있는 것처럼 대화하고 있다.
이것은 한 사람이 단 하나의 인격(人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은 오직 하나의 인격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인격이란 이성적 본성을 가진 개별적 실체다(Persona est naturae rationalis individua subustantia).”
A.M.T.S. Boethius, c.480-c.525,「본성의 차이점과 위격들에 관하여」(Liber de differentia naturae et personae), 1343.
따라서 그것은 시인 바깥에 있는 영혼(靈魂)과의 대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시인 자신의 두 마음 사이에 오고간 대화였다.
한 마음은 하나님의 약속(約束)의 말씀을 붙들고 희망으로 살고자 하였으나, 또 다른 마음으로는 눈앞의 닥친 현실에 낙심하고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싶어하였다.
예루살렘으로부터는 아무런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인의 마음은 더욱 더 파리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인만의 경험이 아니다. 믿음이 매우 좋다고 인정받은 성도들조차도 때로는 겪는 일이다.
시인의 낙심하는 마음은 극복해야 할 자신의 불신앙적인 자아였고, 여기서 그것을 “영혼(靈魂)”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또 다른 마음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가 마땅히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것은 낙심(落心)하는 마음과는 정반대의 마음이었다.
마음은 어떠한 불행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또 다른 자아였다.
이는 눈앞의 현실이 아니라 약속(約束)의 말씀을 따라 살려는 마음이었다.
시인은 믿음의 마음으로써, 낙심하는 영혼을 설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무리 침체에 빠진 신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마음에는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성향(性向)이 있다.
또한 이와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려 하는 마음의 성향이 있다. 이는 중생(重生)과 함께 주어지는 것인데, 그것은 또한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성향이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즉각적으로 부여받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중생 시에 그 영혼(靈魂) 안에 직접 심으신 것인데, 최초로 회심(回心)할 때 비로소 그것을 의식하게 된다.
중생한 사람의 마음에 심겨진 영적 생명이 어떤 경우에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 하는 것처럼, 신자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성향(inclinatio credendi) 또한 어떤 경우에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은혜 안에 거하는 생활에 따라서 그것이 약해지거나 강해질 수는 있다.
식물인간에게도 생명이 있는 것처럼, 아무리 침체된 신자일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을 돌아보자.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자주 신령한 것보다는 세상의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가?
우리의 마음은 오직 감각(感覺)으로 보이는 것들에 집중하고, 그것을 육신적으로 해석하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세속적인 마음의 상태다.
그런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 앞에서 수시로 불안해 하게 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이는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現實)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믿음(faith)으로 살려는 자아와 불신앙(不信仰)으로 살려는 자아 사이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시인 또한 당시 두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가운데 이 시를 쓰고 있었다.
2. 영혼의 불안
시인의 영혼은 불안(不安)해 하고 있었다. 이는 믿음 없이 현실을 바라보며 느끼는 마음 한구석에 일어나는 낙심 때문이었다.
“내 영혼아 네가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시 42:5上)
낙심한 그의 마음은 불안하였다. 우리에게도 이런 때가 얼마나 많은가? 현실에 낙심한 나머지 저녁에 눈을 감으면 그 다음날 아침 천국에서 눈을 뜨고 싶은 때가 왜 없겠는가?
시인들도 그랬다. 더욱이 다른 시편들에서 그들은 종종 자기들이 당시 겪고 있는 시련(試練)과 불행이 혹시 하나님이 자신을 영영 버리셨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근심하였다(시 77:6-9).
또 다른 시편에서는 범죄해서 징계를 받을 때, 시인은 주의 언약 안에서 끊어져 영원히 버림받는 것은 아닐까 낙담하기도 했다(시 6:1).
그때마다 시인은 자기에게 은혜(恩惠)를 베푸시던 그 옛날의 일들을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을 생각하였사오며…이는 나의 잘못이라 …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시 77:5-11)
때때로 가혹하리만치 힘겨운 현실 속에서 칠흑 같은 인생(人生)의 밤을 지날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그때 마음은 어떠한가?
현실을 이겨내는 믿음의 마음인가, 거기에 쉽게 굴복하는 불신의 마음인가? 그때 마음을 굳세게 하라. 믿음을 주시도록 간구하라!
B. 희망으로 설득함
다행스럽게도, 그때 시인(詩人)은 이런 불신앙으로 그의 마음 전부가 아주 흔들리기까지는 아니하였다.
이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의 마음이 시인 안에서 우세하였기 때문이었다.
“…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하리로다”(시 42:5下)
1. 소망으로 설득함
이런 갈등 속에서 시인은 불신앙으로 낙심(落心)하는 마음을 믿음의 마음으로 간곡히 설득하였다.
“어찌하여 낙심하며…어찌하여 불안해 하는가”(시 42:5)
지금 시인의 눈앞에 전개될 정치적 상황에는 어떠한 낙관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가장 절망적일 때에 육신(肉身)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게 하는 힘이 아닌가?
“사람은 오직 자기 마음으로써만 분명하게 볼 수 있다(On ne voit bien qu’avec le coeur).”
Antoine de Saint-Exupéry,「어린 왕자」(Le Petit prince), 66.
우리는 하루에 몇 번씩 두 마음 사이를 오간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고 싶은 믿음이 있는가 하면, 현실로부터 도망쳐 내 마음대로 살아 버리고 싶은 불신앙이 그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변덕스러운가? 심지어 두 마음 사이의 갈등에서 오는 피로감이 극도에 달할라치면, 문득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가? 이때가 바로 우리 믿음의 마음이 백기(白旗)를 든 때다.
그러나 기억하라! 아무리 어려운 현실을 만날수록 거룩한 희망으로 자신의 마음을 설득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이것은 자기 암시가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근거로 한 설득이다. 믿음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롬 10:10).
이 역할을 잘 하게 하는 것이 바로 소망(所望)이니, 소망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말미암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믿음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두 마음이 공존(共存)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믿음으로 살려는 마음과 현실(現實)에 비관하여 인생을 포기하려는 마음이다.
때로는 이 마음이 저 마음보다, 때로는 저 마음이 이 마음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데, 이는 은혜 생활의 열렬함 여부에 달려있다.
신자의 마음 안에서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두 축이 있다. 그것은 죄 죽임(mortification of sin)과 은혜 살림(vivification of grace)의 실천이다.
*은혜 생활 : 죄 죽임과 은혜 살림
우리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라. 하나님이 인도(引導)하지 않으셨는가?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죽음의 고비들을 넘기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힘겨운 현실에 낙심하는 마음을 믿음으로 설득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비록 우리는 약하나 힘을 주시는 주님 때문에 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을 이겼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좋으신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길 것이라는 희망(希望)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인생은 바다와 같다. 쉼 없이 바람 불고 파도치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은 늘 평안할 날이 없다.
그런데 마음이 시험(試驗)에 들면 단지 육신의 눈에 비치는 파도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약속을 믿는 마음은 풍랑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주님을 본다.
우리에게 마음을 주신 것은 믿음을 갖게 하심이다. 그 믿음으로 현실을 해석하고 희망으로 낙심하는 영혼을 설득하라고 주신 것이다.
육신(肉身)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 때문에 희망을 갖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특권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불신자와 다를 게 무엇이 있겠는가?
내가 믿음이 없어서 포기한 지점이 바로 하나님께서 은혜(恩惠)로 시작하시는 지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실 때, 은혜(恩惠) 없이 우리 바깥에서 이루지 않으시고, 그 은혜와 함께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 이유다.
2. 도우심을 찬송함
시인 안에서 이 두 마음은 거칠게 싸웠다. 그것은 눈앞에 있는 현실을 두고 벌어진 싸움이었다.
한쪽은 우리 마음을 희망(希望)으로, 또 한쪽은 낙심(落心)으로 이끌고자 서로 잡아당기는 싸움이었다.
결국 시인은 이 싸움에서 믿음의 마음으로 이겼다. 그것은 은혜의 승리였으니, 시인에게 절망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찬송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우리가 고통 속에서 방황할 때조차도, 하나님은 당신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래서 모든 절망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勝利)한 사람들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껏 우리를 도와주신 하나님을 믿자!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어떠할지라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도우심을 믿으며 살아가라.
마치 폭풍 속에서도 요동치는 배의 키를 놓지 않는 항해사처럼 믿음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붙들라.
시인처럼 믿음의 마음으로 영혼을 설득하라. 시련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은혜의 항구에 닻을 내려라! 이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III. 적용과 결론
어떤 처지에 있든지 이 모습 그대로 갓난아이처럼 주님의 가슴을 파고들라. 있는 모습 그대로, 그분의 가슴에 안기라.
하나님의 품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완전한 안식처(安息處)다. 거기서 하나님이 사랑으로 안아주시고, 우리는 쉼을 누린다.
자기의 젖먹이를 가슴에 품은 착한 엄마처럼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이것이 바로 시련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사는 우리가 오직 도우시는 하나님께만 소망(所望)을 두어야 할 이유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1 (2023.3.26._주일오전)
1.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찾음과 위로 1(2023.06.18._주일오전)
이 시는 표제에 “고라자손의 마스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스길'이라는 것은 '지혜롭게 하는 시'라는 뜻입니다. ‘고라자손’이라는 것은 아마도 이 시편 42편의 저자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학자들은 사실은 이 시는 다윗의 작품이고, 고라 가문의 사람들이 간직했기 때문에 이런 표제어가 나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는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고 있을 때 쓰여진 시인 것 같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자신의 보좌를 찬탈하리라고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방비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일을 계획했고, 한편으로는 재판을 받으러 가는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기 시작했고, 충성스럽게 섬겼던 다윗의 부하들을 하나씩 둘씩 마음을 돌려 반역의 무리에 가담시켰습니다. 드디어 거사가 일어났을 때, 다윗은 급히 왕궁을 빠져나와 요단강 건너편 남의 나라 땅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 시는 아마도 다윗과 동행했던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이 쓴 것으로 여겨집니다. 고라자손은 광야 시대에 고라라는 사람이 모세를 대적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징벌을 받은 족속이었습니다. 고라는 레위의 증손이었는데, 다단과 온이라는 사람과 힘을 합해 당을 만들었고, 당시 지도자인 모세를 반역하였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이들을 매우 악하게 보셨고, 본보기로 크게 징벌하셨으니, 이전에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무서운 징벌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지진이 일어났고, 고라의 자손이 진치고 있던 땅이 갈라지면서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 또 땅에서 지진으로 말미암는 불길이 일어나서 그의 자손 250명을 불태워버렸다고 신명기 2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고라 집 안의 모든 사람이 그 당시에 죽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의 후손들이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고라의 집안은 이렇게 한때 반역을 하여 하나님께 끔찍한 징벌을 받은 패역한 집안이라는 슬픈 역사를 간직한 채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가문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된 때였습니다. 이때 고라의 자손은 힘을 다해 다윗을 진심으로 도왔습니다. 이 일에 고마움을 느낀 다윗은 왕 위에 올랐을 때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로 임명해 주었습니다.
II.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
오늘 읽은 시편 42편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어서 주님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시편 중 하나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에는 갈망이 있기 마련입니다. 배고플 때는 음식을 갈망하고, 목마를 때는 물을 찾습니다. 또 누군가 보고 싶을 때는 그리운 사람을 찾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영혼에도 이러한 갈망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니 삼라만상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고, 그것들은 정신이 없으니 고향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의 품을 기억하기에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그분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막연한 그리움과 드넓은 대지 위에 혼자 버려졌다는 외로운 느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품으로부터 인간이 유래한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의 사랑 안에서 살고자 하는 교제의 갈망이 모든 인간에게 있고, 그분의 품으로 돌아갔을 때만 고향에 돌아간 것 같은 평안함을 느끼기에 지금 이 시대에도 전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갈망은 거듭난 신자에게 더욱 뚜렷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들의 마음에 깊이 심겨졌고, 회심을 통하여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과 용서가 무엇인지를 깊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오늘날 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면서 그리스도를 찾는 마음이 없고, 성도이면서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 교육을 아무리 잘하고 경쟁력을 갖추어 성공한 아이로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그 아이가 이십 년 후에 여러분을 보고 싶어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자녀 교육에 실패한 것입니다. 확실하게 실패한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그리워하는 예가 있느냐고요? 왜 없습니까? 저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생에 너무 힘겨운 일을 만났을 때, 너무나 막막하고 아무도 내 편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사람들은 그분이 살아계시든지 돌아가셨든지 가슴에 손을 얹고 '엄마'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그립기 때문입니다. 결국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못 느끼는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마음의 감각이 죄로 인해 다른 것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한1서 2:15)
고난 속에서 시인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기름 부은 종 다윗 왕을 몰아내고 반역을 일으킨 원수를 처단해달라는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빨리 돌아가게 해달라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마음과 영혼의 상태를 그냥 조용히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 합니까
A. 목마른 사슴
그는 목마른 사슴이 되었습니다.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주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왕권이나 나라보다 하나님의 얼굴을 먼저 구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가을이 사슴들의 교미기입니다. 이때가 되면 수컷 사슴의 신체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발정기 때 겪는 극심한 목마름입니다. 처음에는 짝짓기를 위해서 수사슴들이 모이고 날카롭게 간 뿔로 서로 목숨을 건 싸움을 하면서 짝을 차지하려고 하지만 일단 목마름이 엄습하게 되면 짝짓기도 포기하고 물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들판에는 물이 흔치 않기 때문에 때로는 광야를 질러 달려갑니다. 너무 기진해질라치면 샘이나 시냇물의 신기루가 보이고 사슴은 그것이 진짜 물이 있는 곳인 줄 알고 달음질쳐 갑니다. 그러면 더 멀리 신기루는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다 지쳐서 쓰러집니다. 이때 사슴은 본능적으로 죽을 때까지 앞발로 땅을 파다가 눈을 부릅뜨고 숨을 거둡니다. 시인은 이렇게 죽어간 사슴의 무리를 보면서 어린 시절부터 팔레스타인에 살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대적인 갈망인지를 표현할 수 있는 극한의 비유를 들어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우리에게 정말 하나님께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까? 주님 만나기를 원하는 타는 듯한 목마름이 있습니까? 그분이 얼굴을 가리우시면 근심하고, 그분이 얼굴을 보여주시면 말할 수 없는 감격에 마음이 물처럼 흐르는 기쁨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깊은 갈망이 있습니까? 그런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본 것이 언제입니까?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그런 마음으로 찬송하고,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읽은 것이, 설교를 들은 것이 언제입니까? 두 종류의 사람을 비교해 보십시오. 뛰어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미지근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둥 마는 둥 하는 사람과 단순한 믿음이지만 뜨거운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 만나기를 갈망하며 흐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이 두 종류의 사람 중 누구를 찾아가서 안아주시겠습니까?
신학을 하기 전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주님을 새롭게 만나서 간절히 주님을 찾고 싶었습니다.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10일을 금식하겠다고 작정을 했습니다. 직장을 다니고 일을 다 하면서 10일을 굶는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주일을 금식해 본 적은 있지만 열흘에 도전한 것은 그때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틀쯤 지났습니다. 그런데 사무실에 앉아 있는 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얀 종이 위에 빽빽하게 글씨를 쓰고 있는데 모두 음식이었습니다. 먹고 싶은 모든 것을 적고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직원들이 '김 선생님, 식사하러 가시죠.' 그런데 저는 '네, 먼저 가시죠.' 그러고 앉았는데, 구내식당에서 음식 냄새가 흘러내려 왔습니다. 도저히 못 참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뛰쳐나와서 명동에 있는 탕수육 집에 갔습니다. 그리고 탕수육을 시켰는데, 첫 한 개의 탕수육이 내 영혼을 녹였습니다. 너무너무 맛있었습니다. '아, 이거야!' 두 번째는 별로였고, 세 번째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먹다가 젓가락을 놓고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화장실에 가서 문을 잠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정말 사랑하는데, 이 배고픔조차 이기지 못하는 비천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제가 너무 미웠습니다. 두 손가락을 번갈아 목구멍 깊이 집어넣고 뱃속에 있는 모든 걸 토해버렸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에 앉아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결국 10일 금식은 못했지만 분명하게 깨달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아, 인간에게 욕망이라는 것이 이렇게 크구나!' '하나님은 바로 이런 욕망으로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시는구나!' 그런데 제 마음은 먹고 마시는 것들에는 그렇게 크게 열망하면서 하나님은 정작 그렇게까지 열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한동안 깊은 시름에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B. 갈급한 영혼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갈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는 듯이 목마른 사람은 물 이외에 아무것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어렸을 적 본 풍경이 생각납니다. 시골에 아낙네가 머리 위에다 대나무, 싸리 같은 것들로 만든 바구니나 채를 큰 것을 이고 쓰러지지 않도록 끈을 이빨에다 깨물고, 뒤에는 어린아이를 업었다기보다는 그냥 매달려 있는 상태로 뜨거운 여름에 시골 동네를 다니면서 '바구니 사세요.', '채 있어요.' 그럽니다. 그러다가 어느 마당에 들어서서 '주인어른, 물 한 모금 먹고 갈 수 있을까요?' 그러면 시골 사람들이 달려 나와서 그 바구니를 받아주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줍니다. 그러면 아기도 목마를 텐데 아기 먼저 물 주는 엄마는 없습니다. 먼저 자신이 한껏 물을 먹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생각이 나서 물을 먹입니다. 그게 60년도 더 된 옛날의 한 어느 풍경인데, 그게 또렷이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그렇게 갈망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가슴을 쳤습니다. '하나님, 저도 한때는 이렇게 주님을 갈망했던 사람입니다.' '그 갈망의 불꽃이 제게 남아 있습니까?' 여기에서 영혼은 문자 그대로의 영혼이라기보다는 인간 심령의 가장 깊은 곳을 가리킵니다. 마음은 영혼의 기능입니다. 곧 지정의(知情意)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보이는 것들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도 알고 느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금 시인의 영혼은 하나님과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좁힐 수 없는 거리감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소외된 것을 느꼈습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랬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빼앗기고 법궤도 거기에 남겨둔 채 왕과 함께 망명의 길을 떠났습니다. 망명의 길을 떠나자 망명지에 있는 이방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시다면 너희는 왜 왕궁에서 쫓겨나 여기에 이르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더냐?' (이렇게) 조롱하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성소를 떠나 있기 때문에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오직 한 곳, 성막에서만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그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예배를 드릴 수 없었으며,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즐겨 하나님께 드리던 제사조차 드릴 수 없는 이방의 땅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시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데 어찌 가슴이 찢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마음이 불타 식음을 전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갈급하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타아로그'(תַּעֲרֹ֥ג)인데, 이는 목마름 등으로 '헐떡거린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시인의 영혼 안에서 온 마음으로 느끼는 갈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이 헐떡거리는 목마름은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에게 아름다운 집을 주마.' '너에게 금은보화를 안겨주마.' '너에게 예쁜 아내를 주마.' 이런 것으로 채워줄 수 있는 갈망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던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감격하였던, 바로 그렇게 영혼의 빈 잔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 자신의 임재의 교제, 그 달콤함이 아니고는 대치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목마름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깨닫기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목마름을 간절히 느끼지만 그 찾아야 할 대상이 하나님인 줄 모르기에 세상 사랑과 환락을 찾기를 하나님처럼 하고 있으니, 누군가가 말했다고 하는 묘한 격언, 한 남자가 사창가에 문을 두드릴 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한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영혼에 만족을 주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빈 영혼을 가득 채워 후회하지 않는 기쁨으로 우리의 심령을 충만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고백할 때 이미 이 사실을 알았고, 이 세상에는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만이, 변전하는 세상에서 불변하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 달콤함만이, 나에게 영원한 만족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깊이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분을 아는 지식이 없기에 고통을 받습니다.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며 집착하기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목말라야 할 것에는 목마르지 않고, 그러지 말아야 될 것은 갈증을 느끼는 존재가 되었으니, 이것이 인간 불행의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이러한 갈망으로 하나님을 찾도록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대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십자가에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와 마음에 붙은 사랑은 하나님과의 뜨거운 사랑의 교제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비록 흉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모든 것을 용서해주시고, 결코 죄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를 찾는 자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의롭던 바리새인이 못 만난 하나님을 가슴을 치며 회개하던 죄인인 세리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下) 시인은 고요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야단법석하며 무슨 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시련 속에서 고요히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영혼의 상태를 바라보며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간절히 갈망하는 영혼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의 소원을 그 영혼에 합치시켰습니다. 그리고 온 마음과 온 몸을 다해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이것은 결코 몰입이나 자아 이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의 빛 아래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본 것이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그분께 대한 낯섬과 거리감만이 남았습니다. 삶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깊은 공허감이 거기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한때는 이렇게 하나님께 목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 회심할 때 여러분이 얼마나 맑은 영혼으로 하나님만을 찾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예배는 천상의 기쁨이었고, 주님을 만나는 기도의 행복은 세상에 있는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번영과 영광이 지푸라기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주시고 예수가 내 안에 살아계시건만 우리는 주님의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들고 싶었습니다. 주님이 나를 당신의 가슴 속에 품어주시기를 그리워하며 몸부림쳤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오직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더 깊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 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그런 간절한 소원으로 우리의 마음을 쏟으며 주님을 찾고 목말라 했을 때, 하나님은 수백 번의 예배 속에서도 보여주시지 않던 당신의 임재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고통과 마음의 질병으로 아파하는 우리들, 어디로 해가야 할지는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힘을 찾을 수 없었던 우리들에게 우리가 찾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오랫동안 침체에 빠져 있었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곤고하십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남모르는 죄를 짓고 마음에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까? 근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이렇게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두 팔을 벌리시는 어머니 같은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악이 아니라 선이고, 우리의 불행이 아니라 행복입니다. 무엇을 했든지 당신의 품에 도망치는 그 사람 마음 안에 그분이 찾아오셔서 흐르는 눈물을 그 뺨에서 씻어주시고, 그를 당신의 품에 안아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심장의 박동을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변함없는 사랑으로 오늘도 여러분 곁에 계셔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할 때였습니다. 민주화운동으로 학교는 휴교를 하고, 저는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최대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나를 당신의 생명보다 사랑해주시던 할머니는 대장암 말기 선고를 받고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계셨고, 공무원 퇴직금을 모두 털어서 얻은 전세는 사기를 당하고 길거리로 쫓겨날 지경이 되어서 우리 부부는 모두 원형탈모증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최루탄 가스를 먹고 기관지염이 생겨서 의료보험도 없던 시절에 수입이라고는 달랑 강사료 십오만 원이었는데 만 오천 원씩 서울역까지 가서 치료받아야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의사가 처방전에서 마이신을 빼면서 '병원에서 사면 비싸니 약국에 가서 사면 한 알에 오백 원씩 싸게 살 수 있으니 가서 사십시오.' 우리 부부가 얼마나 초라하게 보였으면 의사가 그런 배려를 했겠습니까? 저는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갈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뜻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을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5층 채플실에 올라갔습니다. 뜨거운 무더위로 가득한 방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날이 대부분이었고, 거기서 저녁 시간을 저는 짧으면 한 시간 반, 길면 두 시간 반을 기도했습니다. 저는 원래 통성기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고요히 기도하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너무 위기에 닥치자 그런 스타일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자리에 앉으면 눈물이 강물처럼 쏟아졌고, 나의 목소리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나팔 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나면 속옷부터 겉옷까지 모두 바가지로 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았고, 채플실의 의자는 물로 흥건했습니다. 그리고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계단 아래로 걸어 나오고 있을 때 항상 이런 찬송이 내 마음에 들렸습니다.
(찬양)
인간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정녕 내 꿈은 참되리라
계단에 주저앉아서 두 번째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새겼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내 마음의 슬픔을 아시는 유일한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전 처음 마음으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줄 것이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 후로도 많은 시련을 만나고 때로는 제가 잘못한 적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셔서 30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했고, 지금은 이 목회의 끝자락에 서 있게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자기를 찾는 자에게 당신이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을 안아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그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여러분이 되기를 마음 다해 당부드립니다.
2.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2)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찾음과 위로 2(2023.06.23._주일오전)
시인은 큰 시련 속에서 자기 마음의 깊은 심정을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이어서 간절한 소원을 말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껍질을 스치고 지나가는 가벼운 욕구가 아니었습니다. 무엇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갈망이었습니다. 육체의 감각적인 욕구는 장마철 강물에 떠내려가는 부유물과 같습니다. 물의 흐름을 따라 이리저리 그냥 떠내려가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가 하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렇지만 시인의 마음속에 있었던 갈망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길과 같은 것이었고, 무엇으로도 멈추게 할 수 없는 불꽃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2)
흔히 사람들은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시련이 겹치고 고난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위기의 때를 위한 것 아닙니까? 자기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이 있기에 신앙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을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까?
II.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찾는 갈망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합니다. 신자로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도대체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인의 영혼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했습니다. 그는 커다란 인생의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왕궁은 잃어버렸고 악한 자들은 예루살렘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과 함께 이 시인은 남의 나라에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위기 앞에서 이 시를 쓴 것입니다. 그런 위기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했습니다. 그 갈망의 목표는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A. 인간의 영혼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이 ···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시 42:2) 영혼이란 무엇입니까? 많이 듣지만 그 영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거의 배우지는 못하는 것이 우리들 아닙니까? 인간 영혼에 관한 논의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영혼이란 무엇인가? 영혼의 존재와 실제에 관한 질문입니다. 두 번째는 영혼은 신체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소위 철학에서 심신론(心身論)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영혼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즉 영혼은 어떤 기능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입니다.
역사적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영혼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 한 예로 호메로스(Homeros)는 『일리아스(Ilias)』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죽은 사람의 가슴에 꽂힌 창을 빼낼 때 그 끝에 횡막과 함께 영혼도 따라 나왔다" 즉 호메로스 같은 사람이 생각하기에 영혼은 가슴이나 등 어딘가에 있어서 튼튼한 줄처럼 우리의 사지백체(四肢百體)를 꽉 붙들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죽고 나면 몸이 확 풀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플라톤은 영혼불멸설을 주장했고, 또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표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칼빈도 반복하였습니다. 그런데 플라톤의 책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그가 영혼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필멸(必滅)적인 부분입니다. 즉 이것은 신체를 움직이는 자연적인 원리입니다. 이것은 영혼에 속하기는 하지만 육체가 죽을 때 그것도 함께 죽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불멸(不滅)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고유하고 영원한 형상으로서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불멸한 상태로 하늘에 속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영혼은 함께 사라진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질료와 형상이 같이 있기 때문에 결국 질료인 육체가 사라지면서 형상인 영혼도 함께 없어진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렇지만 지성(知性), 인털렉트(intellect)는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로 영혼에 관한 논의를 끝냅니다.
그러면 성경은 인간의 영혼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인간 영혼의 본질이 무엇인지, 또 그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철학적으로, 물리학적으로 가르쳐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 관심사가 영혼의 기능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어떻게 될 때 그 영혼이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것인지 등등에 관해서만 말합니다. 아마도 성경은 영혼에 대해 그렇게 가르쳐주는 것으로 우리가 사람다운 삶을 살기에 충분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어떤 물건이 몇 개의 구성요소로 되어 있는지를 알려면 그걸 만드는 공장에 가보면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인간 존재는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것을 육체로 삼으셨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창조 행위로서 영혼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둘을 결합하자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영혼에는 하등한 기능과 고등한 기능이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보고, 듣고, 감촉하고, 냄새를 맡는 것은 영혼의 하등한 기능입니다. 영혼의 고등한 기능은 세계의 의미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객관적으로 반성하는 능력입니다. 영혼의 가장 고등한 기능은 바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행복에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지 않다면 우리의 모든 관심사는 감각적인 것에 몰입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는지,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고통을 겪는지 모른 채 그 불행의 이유를 소유에서만 찾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과 육체에 있어서 영혼은 육체의 생명이고,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생명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영혼의 고등한 기능으로 성찰하고, 그 영혼이 깨끗하고 건강한지를 반성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힘입어 우리의 영혼이 만족과 행복을 누리는 상태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B. 하나님을 갈망함
시인의 영혼은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였습니다. 갈망은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것이 아니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어떤 목마름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의 영혼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았고, 그의 몸은 흙으로부터 빚어졌으니, 영혼은 천상의 것을 필요로 하고, 육체는 지상의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시간과 공간 안에 묶여 있고, 사랑하고 기뻐하며, 때로는 이별하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의 강물 저편으로 떠나보내고 눈물을 흘립니다. 죽은 자의 생명은 살아있는 자들의 죽음이 되어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결국 인간의 삶에는 괴로움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던 때는 그러한 평안함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고, 역경에 처할 때면 그 괴로움 때문에 아파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과 대지 사이에 있는 존재이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결국 땅의 것과 하늘의 것 모두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합당한 질서 안에서 무언가 갖고 싶은 것이 있고, 누리고 싶은 것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아무 두려움과 가책이 없이 마음껏 누리십시오. 그리고 잠시 있다가 사라질 육체를 지닌 인간이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며 명랑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이 땅에 있는 것들을 누리십시오.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분복입니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우리의 육체에 만족을 줄 수 있지만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영혼의 양식은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그 진리의 말씀을 통해 생명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누림으로써만 완전한 만족과 쾌락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영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때문에 행복을 누리고, 그 행복을 이 땅에서 먼저 경험하며, 또 우리 육체의 감각적인 것들을 사용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우리를 즐겁게 하지만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으로는 결코 영원한 행복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을 사용하든지 우리는 마지막으로 사랑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어거스틴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인간 불행의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했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사용할 것과 누릴 것을 바꾸는 데서 비롯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둘로 나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는 사용해야 할 사물입니다. '우티'(uti)라고 하는데, '사용함'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들은 전기를 이용해서 밥솥에 쌀로 밥을 만듭니다. 다시 말해서 밥을 만들기 위해 밥솥을 사용하고, 만들어진 밥은 우리의 식탁에 올라 우리의 영양을 위해 사용됩니다. 사용된 영양은 우리의 에너지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고, 그 힘으로 우리는 노동을 하고 일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다 사용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사용의 대상이 아닌 누림의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목표가 없는 행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누림', '프루이'(frui)입니다. 젊은 시절 어거스틴은 인간조차도 하나님을 누리는 데 사용되어야 할 사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누림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그는 하나님뿐 아니라 인간 또한 이 누림의 대상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 안에 형제 이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형제를 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 안에 하나님 말고 누가 계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누리는 사람만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앙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시인은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갈망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 하나님으로부터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은 마치 돌가슴, 철마음, 경연대회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눈물이 없습니다. 주님을 찾는 목마름이 부족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에 목말라 하지 않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무뚝뚝한 얼굴로 예배에 와서 주님을 만나지도 못한 채, 무엇을 알지도 못한 채 돌아갑니다. 무엇을 해도 이 세상에서 마음을 쏟으며 세상의 즐거움을 찾았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많이 흘러도 영혼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니 인생이 바뀔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리한 삶을 살아갑니다.
C. 살아계신 하나님
그러나 오늘 이 시인을 보십시오. 참을 수 없는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현실이 너무 불행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면 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시인은 도대체 무엇을 갈망하였습니까? 무엇 때문에 타는듯한 열망으로 주께 매달렸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시 42:2上) 어떤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살아계신'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너무나 자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수식하는 '살아계신'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죽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표현은 문학적으로 생명이 없는 이방신이나 우상과 대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래의 불신앙에 관해 심각하게 경고하였습니다.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신 4:28)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이 벨사살 왕에게 한 말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는 왕을 꾸짖으면서 신상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생명 없는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따라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신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눈높이에서 하나님이 충만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시인이 만나고 싶었던 하나님이 바로 그런 하나님이었습니다. 관념 속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천상에 있을 뿐 인생에 관여하지 않는 그런 하나님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형식적인 절대자가 아니었습니다. 시인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하나님은 누구였습니까? 그분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하나님은 누군가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을 가지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도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교회 한 자매가 어느 날 기도를 하는데, 옛날 교회에서 친하게 지냈던 언니가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끝난 후에 정말 오래간만에 전화를 걸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기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나더니 이어서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언니, 왜 그래?' '아무개야, 내가 지금 막 화장실에 들어가서 면도칼로 동맥을 끊으려고 하는 순간에 네 전화를 받았어.' 왜 그러는 것입니까? 왜 사람들은 한 번밖에 없는 소중한 인생을 그렇게 자살로 마감하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고통스럽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자살을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고통스럽다는 이유 때문에만 죽지 않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로부터 끊어져 우주 공간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외로움입니다. 그것은 곧 생명의 소멸을 뜻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활동하고, 욕구를 느끼고, 이동하려 하고, 무엇인가를 소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생명이 사라진 시체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썩어갈 뿐입니다. 그 자매가 아이까지 있는데, 그 젊은 자매가 왜 화장실에서 그 꽃다운 나이에 면도칼로 동맥을 끊어버리고 인생을 하직하려고 했겠습니까? 살아갈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힘은 육체의 힘이 아닙니다. 육체의 힘은 오늘 밥 한 그릇만 잘 먹어도 솟아납니다. 그러나 그 자매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런 육체의 힘이 아니라 영혼의 힘이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영적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을 '사랑'이라고도 말합니다. 에드워즈는 영적인 생명의 측면에서 사랑을 보았고, 어거스틴은 사랑의 측면에서 생명을 보았지만, 사실 이 둘은 함께 있는 것이니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생명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남의 나라에 우거하며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시인이 간절히 바랐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예루살렘을 회복시켜 달라고 매달리지 않았습니까? 왜 원수들을 파멸하시고 다윗 왕을 복위시켜달라고 매달리지 않았습니까? 그 대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분의 얼굴을 뵙기를 원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쳐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만 바라볼지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어떠한 시련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만나면 그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실 것이며, 이 땅 위에 그분의 통치의 질서를 펼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거기에는 악인이 설 자리가 없으며, 자신들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만이 그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질서대로 만물과 만사를 다스리고 통치해주실 그날을 그렇게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긍휼히 여기셔서 역사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견디고 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을 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 생명 때문에 이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실을 불행하게 하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현실이 힘들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가벼워야지만 육체의 무게를 견디며 명랑한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육체도 무거운데 정신과 영혼의 무게가 더 무겁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무거운 가방을 맨 사람이 물속에서 저절로 가라앉듯이 그렇게 현실의 바다 위에서 가라앉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무거움은 결국 사랑의 무거움입니다. 사랑해야 할 하나님 대신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느끼는 무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사는 것은 원래 힘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입니다. 적어도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온 후에는 이것이 싫든 좋든 우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의 현실의 불행함 때문에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찬란한 빛으로 나타났습니다. 인생을 사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면 도대체 누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렇게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겠습니까? 한 인간으로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만약 외롭지 않았더라면 우리 중 누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 묻은 손을 붙들고 그분의 품에 안겼겠습니까?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후에도 우리는 죽을 것 같은 삶에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살아왔습니다. 어떤 때는 거짓된 세상 욕망 때문에 스스로 미끄러졌습니다. 그래서 불행하게 되었고, 고통을 받았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을 위해 큰 꿈을 가졌습니다. 그 거룩한 열망 때문에 시련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든지 믿음으로 주님께 간절히 매달릴 때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중에 나를 기억하고 계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나를 위해 당신의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신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1401년에 세상에 태어나서 1464년에 죽은 독일의 철학자요 신학자이며 천문학자인 동시에 과학자였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오목 렌즈를 만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중세의 부패한 교회를 치열하게 비판하며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근세 철학의 문을 열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쿠자의 니콜라우스(Nicolaus of Cusa)였습니다. 니콜라우스는 자신의 책, 『하나님을 바라봄』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인상 깊은 고백을 남겨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주님의 모든 열망이 저를 향하고 있기에 나도 모든 열망을 다해 당신을 향하나이다 ··· 제 마음의 눈을 고정시켜 당신만을 바라볼 때 ··· 당신의 감미로운 달콤함이 그토록 사랑스럽게 저를 감싸는 당신의 품이 없었다면, 주여! 저의 생명이 무엇이겠사옵나이까?”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책 전체가 위대한 철학자요, 과학자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어린아이 같은 갈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한때 우리는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와 불행에 쫓겨 어디론가 도망을 쳤고, 이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이 천길 벼랑 끝에 두 발을 딛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내딛으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고, 몸을 돌이켜 그들과 맞서는 것은 곧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결심했습니다. '인생이 나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렇게 연약한 인간입니다.' '이렇게 비참한 죄인입니다.' 메아 쿨파, 메아 막시마 쿨파(Mea culpa. mea maxima culpa) ‘나의 죄, 나의 큰 죄 때문이옵나이다.’ 그렇게 무릎을 꿇고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그 벼랑 끝에서 우리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어 당신과 함께 죽음의 계곡을 날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분해하는 원수들을 발아래 둔 채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음의 계곡 위에서 생명의 비행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비로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의 손으로 만든바 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매일 사는 것이 그분 사랑의 돌봄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의 때였기에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꿈꿀 수도 없었던 방식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지금 하나님이 아니시란 말입니까? 그때 나를 도우셨던 하나님이 지금은 주무십니까? 지금은 죽으셨습니까? 지금은 침묵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고, 언제나 우리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시고 눈물 흘리시건만, 우리의 감은 눈 때문에 그분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고, 우리가 막은 귀 때문에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막힌 코 때문에 그분의 달콤한 향취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여러분의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고요히 가슴에 손을 얹으십시오. 그리고 지난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때 고아처럼 이 세상에 버려졌던 우리를 어떻게 찾아오셨고, 쓰러진 우리를 어떻게 일으켜 세우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희망을 잃어버린 우리를, 살아있음에도 죽음이 생명보다 친숙하게 느껴졌던 우리에게 어떻게 찾아오셔서 희망을 주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참된 신앙은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용하여 하나님 아닌 것들을 누리려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존재 자체에 대한 완전한 기쁨이고 만족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살아있어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만져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은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어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는 하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생각하면 비로소 여러분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해서는 안 되겠구나!'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그냥 우리를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기억하기만 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세상에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니, 이는 우리의 죄를 위해 스스로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우리를 향해 냉랭한 적이 없었으며,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둔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27편에서 고백했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같이 쓸모없는 죄인들을 위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할 때 나도 그 세상 안에 있었으니,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에는 오직 우리가 전부였습니다. 모든 열망을 다해 우리를 향하셨기에 우리도 모든 열망을 다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가 위기에 처할 때 아무도 도울 이 없이 고아처럼 버려진 것 같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거기서 그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껏 알고 있던 바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 곧 지금 여기 살아계셔서 내 인생에 개입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입니다. 어린 청소년들을 데리고 숲속으로 캠프를 갔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일곱 시 반에 시작된 예배가 한 시 반에 마쳤습니다. 아이들은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어제 저녁에 어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한 어린 학생이 손을 들었습니다. '전도사님, 어제까지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셨어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내 마음에 계셔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으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제가 유언처럼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마치 실연당한 사람이 연인을 그리워하며 찾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주님을 만져보게 해달라고, 주님을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찾으십시오.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고 현실을 넉넉히 이기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눈물을 흘린다는 것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찾음과 위로 3(2023.07.02._주일오전)
시인은 환란 속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하나님을 갈망했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은 바뀐 것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시인은 남의 나라 땅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은 반역자들에게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시인의 소원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다윗이 다시 왕권을 회복하고 위엄 있게 예루살렘 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막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망명지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II. 눈물을 흘린다는 것
그래서 시인의 기도는 비탄의 눈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시편 본문에서 시인은 많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A. 비난과 조롱
그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시인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신앙은 바로 이러한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그분은 항상 주님을 위해 땀 흘리며 일하셨고, 영혼을 위해 흘리는 불쌍히 여기는 눈물이 있었으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피까지 주를 위해 바쳤습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행복해지려고 애쓰지, 예수를 믿고 그분의 사랑 때문에 예수처럼 액체의 생애를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특히 기도의 눈물이 없는 것은 교회가 메말라가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피 흘려 주님께 바치셨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의 피를 받으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을 먼저 받으셨던 것입니다.
시인에게 가장 큰 슬픔은 하나님의 성소를 떠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를 드려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밖으로부터의 걱정과 안으로부터의 염려로 가득 찼습니다. 경건한 슬픔은 그 마음에서 흘러나와 폭포수처럼 쏟아졌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자신의 마음대로 멈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시인의 슬픈 마음을 찌르는 것이 있었으니, 이는 외부로부터 쏟아지는 비난과 조소의 화살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시인은 망명생활 속에서도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 시인의 모습을 이방인들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시인에게 물었습니다. 한두 사람이 물은 것이 아니었으니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만약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너처럼 경건하게 그분을 섬기는 하나님은 왜 너희를 이렇게 버려두셨느냐?' '왜 나라를 잃어버리고 우리 땅에 망명을 오도록 내버려 두셨느냐?' '혹시 하나님이 너희를 버리신 것이 아니냐?' '너희가 하나님의 진노를 샀느냐?' 시인은 퍼부어지는 이런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흐느끼며 매달렸지만 예루살렘으로부터 희망을 담은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종종 이런 때가 있습니다. 박해, 끊임없는 시련이 겹칩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시련과 괴로움이 연속해서 밀려오고, 너무 의지할 곳이 없어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릴라치면 저 양심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송사의 소리가 있습니다. '네가 그렇게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들으실 줄을 아느냐?' '네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도 못한 처지에 뻔뻔스럽게 어려움을 만나니까 이제야 하나님을 찾느냐?' '백날 기도해봐라.' '너 같은 것은 이미 죄인으로 분류되어 하나님의 눈앞에서 없어졌느니라.' 이때 계속 기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변함없이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며 기다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 같고, 간구해도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그분의 침묵은 사실은 웅변인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우리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은 침묵의 때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웅변하고 계시는 때이며, 그때는 마치 밝은 해가 뜨기 직전, 어두움이 짙은 때와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낙심하고 모든 것의 끈을 놓아버립니다. 언제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절대 고통스러워서 목숨을 끊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숨을 거두게 하는 결정은 너무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라 아무도 자신을 도울 수 없다는, 자기 홀로 우주 공간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다는 고독감과 외로움이 그로 하여금 생을 마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바로 그런 때야말로 순전한 믿음이 필요한 때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는 그 시련 속에서 우리 믿음의 크기와 마음의 진실함을 측정하십니다. 얼마나 하나님 당신만을 간절히 의지하는지 헤아려 보십니다. 다시 말해서 침묵 속에서 우리도 모르는 우리 믿음의 크기를 당신의 저울에 달아보신 후, "이것이 너희의 믿음이다." 하고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흔히 욥은 너무나 의롭지만 억울하게 고통을 받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욥이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욥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그런 메시지가 아닙니다. 욥은 자기 의에 갇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전부인 줄을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단에게 그의 믿음의 순전함을 자랑하셨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련을 통해 욥 안에 얼마나 참되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으며, 자기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결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높고, 위대하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임을 보여주셔서 욥으로 하여금 더 큰 신앙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직 욥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시절, 위로하려고 찾아온 친구들의 비난이 화살처럼 쏟아 부어졌습니다. 그는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탄식하며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욥 23:8)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9)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단지 현실의 고통을 우리가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바라보고만 계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상황에는 아무 변화가 없고 현실은 전혀 바뀐 게 없었지만 하나님은 시인의 마음에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평안과 갈망이었습니다. 물론 이것들도 믿음이 약해지면 흔들리고 흩어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하나님을 찾으며 마음을 쏟아 붓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렸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슬픔이 밀려오기는 하였으나 불안하지는 않았고, 그의 마음은 평화를 누렸습니다. 현실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고 고난으로 가득 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평강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샬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평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평안할수록 더욱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게 하는 거룩한 평강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비난을 받거나 때로는 조롱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이유 때문에 멸시받고 조롱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혹은 우리의 잘못과 오해가 섞여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멸시를 받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께로 피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마을마다 하나님은 도피성을 만드셨습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거나 혹은 잘못한 사람들이 사람들의 보복을 받기 전 도피성에 피하면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도피성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사람들은 모든 일이 잘 되고 잘나갈 때는 모두 친구인 듯 행세합니다. 그러나 정작 어려운 일을 만나면 사람들은 발뒤꿈치를 들고 배반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인이 이방인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으며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왜 그런지 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에게 마지막 희망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의 품을 파고들고, 주님께 눈물을 쏟으며, 그 비난과 조롱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며 주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환란의 날에 그분의 품으로 피했고, 그분의 품으로 피하면서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간절하게 갈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위해 쌓아두신 은혜, 곧 환란 속에서 주님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서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 달려가 그분의 품에 안겼더니 하나님은 당신의 품 안에서 은밀한 곳에 그를 숨겨주셨습니다.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해주셨고, 비밀의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시인은 환란을 당하기 전보다 환란을 당한 후에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멸시와 욕, 고난과 시련, 비난과 조롱을 통해서라도 우리에게 당신의 인자하심을 보이십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낙심하지 말고 우리 주님의 품을 파고드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신앙과 눈물
깊은 시련 속에서 시인은 울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갈망이 커질수록 시인의 눈에서는 더 많은 눈물이 흘렀습니다. 눈물이 흐를수록 시인의 마음도 녹아내렸고 더욱 하나님 한 분께 영혼의 시선을 집중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거짓으로 지어내는 눈물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참된 눈물은 진실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반성의 눈물입니다. 의인에게는 언제나 그런 눈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언제나 잘할 때나 잘 못할 때나 성령 충만할 때나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나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희망은 자기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네
눈물을 쏟으며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 은혜의 선물입니다. 자기 서러움에 우는 것은 은혜 없이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런 눈물도 마음을 후련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 앞에 울고 세상 앞에서 흐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주님의 품에서 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며 눈물을 쏟는 것은 이제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주님 이외에는 내가 기댈 수 있는 분이 없다는 마지막 호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이며 은혜의 역사입니다. 자격을 갖춘 사람이 상응하는 공로 때문에 그것을 받는 것은 은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은혜는 그렇게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거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넘치는 호의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곧 신앙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사랑의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묵상하며, 나 같은 죄인이 받은 이 구원의 은혜가 너무나 이상한 것이다,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은혜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지치고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눈물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마음에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남의 나라 땅으로 쫓겨나 망명을 와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처지에서, 시인이 만난 이방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조롱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시42:3) 이처럼 조롱하듯이 비웃는 그들의 말에 시인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 눈물은 서러운 통곡이 되었고, 통곡은 눈물의 강물이 흐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슬픈 것 때문에 슬펐고, 이 슬픔을 멈출 수 없다는 그 슬픔 때문에 둘을 겹친 비애에 그의 마음은 녹아내리며 밤낮없이 울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下) 이는 시인이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무 희망이 없는 절망의 날에 낙심하여 주저앉는 대신에 눈을 들어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시련의 날에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굶주린 채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당신이 나를 만나주시지 않으면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결단의 기도가 아니었겠습니까? 이때 시인이 흘린 눈물은 값싼 자기 설움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소원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듯하여 물처럼 쏟아지는 눈물이었으니, 면도칼로 심장을 갈가리 오려내는 것 같은 슬픈 눈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을 만나고, 그분께 자신의 모든 사정을 토하고, 그분께서 이 모든 잘못된 질서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아 달라고, 한 번만 그분께 호소하는 것이 시인의 전부 소원이었습니다.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시인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아파했고, 그의 흐느낌은 눈물의 시냇물로 바뀌었고, 그의 흐느낌은 통곡으로 변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이런 슬픔을 극에 달하도록 느낄 때 삼탈(三脫)현상이 옵니다. 탈물(脫物)현상이 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를 못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은 절망 이외에 아무것도 무서워하는 게 없습니다. 두 번째는 탈인(脫人)현상입니다. 사람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속에서 사랑할 힘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혈육도 아득히 먼 옛날 기억에서 사라진 사람보다도 낯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탈현(脫現)현상이 일어납니다. 현실이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사람이 목숨을 끊을 때 고통 때문에 목숨을 끊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에 바로 이러한 이탈 현상, 자기가 완전히 고립된 외로운 존재고, 우주 공간에 어떤 도움의 가능성도 없이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도록 내동댕이쳐졌다는 절망감이 마지막 목숨을 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 지점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지점입니다. 거기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 갈리는 것입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동댕이쳐져 버리고 하나님의 도움이 끊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함께 망명의 길을 올랐던 다윗 왕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절대 고립의 순간에 시인은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었습니다. 이것은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직관이었습니다. 그냥 그럴 수밖에 없는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본능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누구이든지 간에 갑작스러운 일을 만나거나 비극을 만났을 때 ‘엄마’ 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신자의 마음속에는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는 본성이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비참한 마음으로 식음을 전폐한 채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굶주린 시인에게 유일한 양식은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입 꼬리를 타고 입 속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니 이것이 그의 유일한 양식이었습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우리에게는 이런 눈물이 없는 것입니까? 아직 그리스도 예수가 이 세상에 오지 않은 때조차도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의 얼굴을 찾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의 십자가의 피로 아버지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모두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눈물 없이 건조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리에게는 이런 눈물이 없는 것입니까? 눈물 흘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품 안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눈물 흘릴 새도 없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너무너무 즐겁기 때문입니까? 둘 중 어느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압니다. 지금 우리에게 왜 이런 눈물이 없는 것입니까? 한때는 우리도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했고, 땀을 흘리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면 우리의 생명까지도 그분 앞에 드릴 결심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그런 시절은 지나가고 우리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슬픕니다. 더 많이 그 사람을 사랑해줄 수 없기 때문에 슬프고, 더 많이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슬픈 것이니, 슬픔을 동반하지 않는 사랑은 지어낸 사랑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런 눈물이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우리의 마음에 쌓인 죄가 우리의 양심에 비계가 되었고, 우리의 마음을 돌같이 만들어서 하나님이 아무리 어루만지셔도 눈물 흘릴 수 없는 마음의 병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세상에 있는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슬픔 때문에 쏟는 눈물이 있습니까? 우리가 한때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예배를 드리러 와서 찬송을 드릴 때면 언제나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찬송가가 바로 나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나 사실은 내 마음을 주님께 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내 마음에 있는 소원을 그분께 쏟아놓는 시간이었습니다. 통증을 동반했으나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에 우리는 감격스러워 울었던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울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눈물 흘릴 수 없을 때 설교자가 대신 울어주게 하셨습니다. 내가 아파할 수 없을 때 주님 자신이 탄식하며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서 통증을 느끼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우셨습니다. 우리는 그 심정을 이해하는 순간에 우리의 눈물보가 터뜨려져 주님 앞에 물처럼 쏟아졌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한 삼일, 아니 단 하루만이라도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매달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행복하지도 않고, 마음에는 수많은 기도 제목들이 있고,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서 나의 인생은 뒤틀어지는 것 같고,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도 고통을 받는데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몸부림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메아 쿨파, 메아 맥시마 쿨파(Mea culpa, mea maxima culpa)” 나의 죄, 나의 큰 죄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진실하게 눈물 흘리는 신앙이 아니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사람들의 도덕적인 수많은 행실보다 죄 짓고 손에 피 묻힌 채 당신의 품을 찾아 눈물 흘리는 죄인들이 주님을 더 먼저 만납니다. 거짓 없이 두 볼에 흐르는 눈물은 그의 마음을 보혈의 피로 깨끗이 씻어줍니다.
첫 사랑의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모든 일이 형통하면 나 같은 사람에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는지 감사해서 울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리 주님밖에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에 기도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나면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울지 말라고 다독거려 주셨습니다. 실패한 자에게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신앙에서 첫사랑의 때는 눈물의 때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사랑이 많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던 순간도 언제나 그 자리는 눈물에 젖어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우리는 그때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캄캄한 천장을 찢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무지한 마음을 열어주셨고, 그 찢어진 천장 사이로 일찍이 본 적이 없던 눈부신 진리의 빛이 우리의 마음에 비췄고, 그 진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 은혜가 감사해서, 그 자유를 찾은 삶이 행복해서 우리는 울었던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계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소원이 없었고, 소원이 있다면 나를 잡으신 주님의 손이 결코 나를 떠나지 않는 것과 고사리처럼 주님의 손에 붙잡힌 내 손이 그분의 손목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눈물이 있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수시로 울었고 어디서든지 눈을 감으면 주님은 내 마음에 찾아와 주셨습니다. 눈물로 기도할 때마다 그 눈물 속에 세상의 시름과 고통은 씻겨나갔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엄혹할지라도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신비한 힘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샘솟듯 솟아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했습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아무것도 갖고 싶은 것이 없었고, 오직 주님은 내 것이고 나는 주님의 것이 되고 싶었습니다. 우리 존재의 미천함 때문에 울었고, 또 우리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비참한 존재인지를 깨달으며 울었습니다. 이러한 벌레만도 못한 인간을, 강도만도 못한 사람을 당신의 품으로 불러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눈을 뜨면 눈물로 기도를 드리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들기 전 주님의 사랑에 눈물을 지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의 그 눈물이 저를 낙심 속에서도 살게 만들었고, 버림받은 것 같은 인생의 끝자락에 서 있을 때조차도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써서 여러분을 살리신다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똑같이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비참함 사이에서 느끼는 절망감을 눈물 아니고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설교를 하는데 나도 내 설교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울었습니다. 그래서 두드리면서 얘기했습니다. "조용히 하십시오." "지금은 울 때가 아니라 깨달을 때입니다." 진정을 시켰습니다. 억제된 슬픔이 교회당을 가득 메웠고 설교가 끝났을 때 천장을 찢고 성령이 임하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런 눈물의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겉으로 기도하는 1만 명의 군중집회보다 한 사람이 교회 한 구석에서 가슴을 찢으며 흐느끼는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사랑의 응답 말고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시인이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 눈물로 자기의 양식을 삼은 이유였습니다. 은혜는 거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응답으로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흐느낄 수 없는 사람에게 눈물 흘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가슴을 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슴을 쥐어뜯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에게 희망을 갖고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부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처럼 눈물이 있는 신앙을 다시 회복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간절한 마음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와 은혜의 신비로운 연합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참으로 은혜받은 사람들은 그 모든 좋은 것이 오직 하늘의 아버지께로부터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합니다. 그분의 끝없는 깊이와 넓이의 사랑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으로 당신도 사랑하고 있다고 간증합니다. 울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며, 신령한 이유로 통곡하게 하심도 하나님이십니다. 좋은 일에 하나님을 높이고 나쁜 일에 자기의 허물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눈물이 있는 신앙으로 돌아가 주님 앞에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4. 마음이 상한다는 것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시 42:4)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찾음과 위로 4(2023.07.09._주일오전)
시인은 두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양식 삼았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시인에게 물었습니다. 조롱 섞인 이 질문은 시인의 마음을 더욱 큰 슬픔에 복받치게 하였습니다.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방인들에게 무시당하는 서러움의 눈물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소를 떠나 있어서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고 있는 이유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시냇물처럼 흘렀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자신이 슬픔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던 때의 회상이었습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시 42:4)
II. 마음이 상한다는 것
이 은혜로웠던 때를 추억할 때마다 시인의 마음은 상했습니다. 찢어질 듯 아파왔습니다. 도대체 그 회상의 기억이 왜 고통을 가져왔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사랑의 정동으로 출렁거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적으로 은혜를 경험할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서 출렁이면서 물결처럼 일어나게 됩니다.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지금 내가 은혜를 못 받고 있는데, 은혜받았던 경험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은혜 주셨는지를 회상할 때 그 회상은 언제나 기억을 불러오고 그 기억 속에서 그때 느꼈던 사랑의 감정이 다시 출렁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망적인 현재를 다시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살고자 하는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현재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과 매 순간 과거에 받은 은혜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A. 마음의 상함
그러면 시인이 과거를 기억하면서 마음이 상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가 여기서 경험한 ‘마음 상함’이란 무엇이었습니까? 다음과 같이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우선 자연적인 의미에서의 설명입니다. ‘상하다’라는 말이 마음과 기분에 관련해서 사용될 때는 그 의미가 ‘상처를 받았다, 화가 났다, 우울해진다, 억눌린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령한 의미로 사용되면 마음이 상했다는 것은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고 슬프고 아픈 마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이것은 주체할 수 없이 마음이 무너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현실을 헤쳐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가난해진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 상함의 경험의 핵심은 이제껏 자기를 의존하던 마음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내세우던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내세울 것이 없고 자기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마음이 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할 때 그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참하게 느낀 나머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탱할 수 없게 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어적으로 보면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그리고 나는 나의 영혼을 내 위에 쏟아 버렸습니다."(시 42:4, KNJ 私譯) 성경에서 ‘마음이 상하다’라는 표현은 시편 22편 같은 데 보면 뜻밖에 어려움을 만나서 절망하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거나, 혹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비참함을 깨달아서 자기가 스스로 의존하던 마음이 모두 무너져버려서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상태를 묘사하는데, 이게 예레미야애가 2장 19절에 나오는 용례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마음이 상하다'라는 말은 시인이 현재의 비참함에 낙심하는 상태를 가리키는데, 여기에는 자기의 죄를 인식한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현실을 옛날에 다른 경험, 즉 말할 수 없이 은혜로웠던 기쁨으로 성도들을 섬겼던 때와 비교합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상황이든 신령한 상황이든 시인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철저히 깨어지면서 자기를 도저히 의존할 수 없는 마음이 되고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되니 하나님이 그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것입니다.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시인이 자신의 마음을 물처럼 쏟아버렸다고 할 때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마음을 물처럼 쏟아놓은 적이 있습니까? 분명히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강한 사랑에 붙들려서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인생에서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고 때로는 숨조차 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일상인 줄 알았던 그 모든 일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께만 붙잡히기 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만 안기기를 원했습니다. 그분의 품에서만 있기를 원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분의 가슴과 같은 완벽한 장소는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렇게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을 때 여러분은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멀리 버리신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다시 만나주셨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하나님의 그 큰 사랑에 눈 뜨면서 마음이 깨뜨려졌던 때를 회상해 보십시오. 산산이 부서지고 마음은 물처럼 녹아내렸습니다. 이제 나는 어떤 의로운 것도 발견할 수 없고, 자랑할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나를 결코 붙들어 줄 수 없고, 그것이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미친 듯이 붙들고 살아왔던 그것도 사실은 내 인생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시인의 바로 그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은 물같이 녹아내렸고, 눈물은 비처럼 쏟아졌습니다. 마음은 울고 있었고 이 세상 어디에서도 위로받을 수 없는 깨어진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갈망하고 있는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을 보고 만나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장 상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사람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가운데도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을 분명히 가지고 있고, 매주 예배 나오고 심지어는 교회에서 집사, 권사, 심지어는 장로, 목사가 되었는데도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나쁜 사람의 공통점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깨어지는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입니다. 겉모습은 각이 잡혔습니다. 결코 그들은 신문에 날 범죄를 저지른다든지 사람을 죽인다든지 그렇게 안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잘못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을 별로 안 하는 것입니다. 공통점은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도 자기 깨어짐이 반복되면 훌륭한 성도가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도도 계속해서 깨어지지 않으면 그는 나중에 괴물 같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바로 그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B. 상함의 이유
그러면 도대체 그렇게 마음이 상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먼저 그는 반역의 무리들에게 쫓겨 온 이방의 땅에서 과거에 기뻤던 순간을 기억했습니다. 그것은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함께 성소로 올라가며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찬송하던 기억이었습니다. 그때의 은혜로운 상황은 지금 남의 나라 땅에 망명하여 더부살이하고 있는 처지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영적으로 가련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을 성소에서 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정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마음은 물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핍박 속에서 곤고할 때마다 자주 했던 경건의 실천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옛일을 회상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해주셨던 역사를 회고하고, 또 자신과 함께 동행해 주셨던 은혜의 기쁨을 추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러한 선조들의 경건한 습관을 따라 자신에게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고, 또한 성도들과 함께 행복했던 교제의 때도 회상하고 있었습니다. 원수들에게 핍박을 받아 마음이 상하게 되었을 때 또 다른 시에서 시인이 했던 일도 바로 회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을 기억하고 구원의 은혜를 추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시편 143:4)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시 143:5) 이것이 바로 시인이 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걸어온 인생의 길에 대한 회상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서 보살핌을 받았던 사랑의 추억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신령한 기쁨의 때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드리는 것과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기뻤기 때문에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찬송하던 때가 있었습니까?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행복해서 눈물이 앞을 가리고 예배가 끝나도 떠나지 못하고 흐느끼던 때가 있었습니까?
어느 연주회 광경이었습니다. 연주가 모두 끝났습니다. 그런데 관객 중 몇 사람은 못 일어났습니다. 손수건으로 계속 눈물을 닦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이 세상에 인간이 지은 음악을 들으면서도 그 음악회가 끝났을 때 저렇게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못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에서는 그런 일들이 왜 이렇게 드물게 일어날까? 의문이었습니다. 저는 만약에 예배의 감격이 없었다면 30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여기에 계속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한 설교 중 단 한 편도 저는 남의 것을 베낀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한 모든 설교는 일주일이나 이주일 전 하나님이 저에게 들려주신 설교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낙심한 나에게 힘을 주시고, 무지했던 나의 눈을 떠 나를 바라보게 하셨고, 사랑하기 힘들었던 사람들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들을 때 저는 목자가 아니라 한 마리의 어린 양이었습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주일 저녁이면 몸은 부서질 것 같지만 천국의 은혜로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예배를 받아주셨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형편없는 허물 많은 죄인에게도 찾아오셔서 말씀을 들려주신다는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상한 마음이 되어서 결국은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워했던 사람은 용서했고, 낙심했던 마음은 격려를 받았습니다. 고통스러웠던 마음은 하나님이 이 고통을 통해서 나의 가는 길을 인도하시고 오직 그가 아시나니 이 고통을 겪은 후에는 정금같이 될 것이라는 소망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살아온 30년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잘못한 것, 여러분의 마음에 고통을 주었던 모든 것은 내가 잘못해서 있었던 일들이고, 은혜롭고, 감격스럽고, 너무나 행복했던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남성교구에 한 구역이 있었는데 구역장을 비롯해서 구역 전체가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또 심지어는 설교에 대해서도 비판하던 구역이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그 일에 앞장섰던 한 사람이 기적처럼 주일예배 시간에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구역 속에 들어가서 구역원들에게 간증을 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고, 자기가 한 일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눈물을 흘리면서 간증했습니다. 그때 거기 있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 큰 두려움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두려움이냐 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그럼 그 하나님은 나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그게 계기가 되어서 그 구역이 도미노처럼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는 것은 우리 개인의 일일 뿐만 아니라 다른 지체들을 위한 일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전도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차돌 같아서 예배 시간마다 나오지만 절대 회심을 안 하던 남자 성도가 있었습니다. 부인은 은혜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남편은 차돌같이 은혜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 집 아들이 청년이었는데 아버지하고 똑같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기적적인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고 회심했습니다. 아침밥을 먹는데 아버지가 "오늘은 네가 기도 좀 해라." 그래서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식사 감사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아직도 주님을 못 만나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들이 식탁에서 펑펑 눈물을 쏟으면서 자기를 위해 장시간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때 들었던 느낌이 뭐냐고 물었더니 똑같았습니다. 무서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몇 주 전까지 자기와 똑같았던 아들이 어느 순간 기도가 터지면서 눈물을 쏟아내며 아침 식탁에서 자기의 영혼 때문에 흐느끼는 것을 보면서 '아! 하나님은 살아있고, 나는 잘못된 자리에 있구나.' 이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시인은 성일에 하나님께 제사해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었고 또 하나의 기쁨은 섬김이었습니다. 성도들을 이끌고 하나님을 만나러 성소로 올라가고 있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시를 쓴 사람은 고라의 자손이었습니다. 그 집안의 사람들은 대대로 모세에게 반역하여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지진 속에 삼켜진 가문의 후손들이라고 낙인이 찍혔고, 레위인으로서 섬기는 모든 섬김에서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그 치욕을 안고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집안의 자손인 자기를 하나님이 사용해 주셔서 거룩한 직분을 회복시켜주시고, 성소로 백성들을 인도하여 나아가게끔 만들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교회에서 섬길 수 있는 지체들이 있어서 기뻤던 때는 언제입니까? 지금도 그런 섬김의 기쁨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런 갈망이 여러분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까? 자신의 영적인 무기력한 현실에 마음 아파하며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시시때때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은혜 주시는 하나님 만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까? 예전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런 갈망이 없이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죽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찬양)
험악한 세상을 방황하다가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 죽을 험한 세상이 왜 이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물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그때 여러분이 최고의 전도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물가의 여인처럼 방금 주님을 만나고 왔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분을 만났노라.' '그분이 나의 인생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노라.' '그분이 나의 살아온 모든 일을 알고 계셨노라.' '너희도 목마른 사슴처럼 헤매지 말고 영혼의 샘물이신 그분께 나아오라.'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위도식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눈물 나게 하는데 어떻게 놀고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무엇이든지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지하실에 일곱 명이 모였던 작은 예배당이 변하여 이렇게 많은 성도가 모이는 아름다운 예배당이 되었습니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성도의 눈물겨운 헌신과 섬김이 있었기에 여러분이 그 모든 것을 누리며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누군가 미래에 있을 교인들에게 똑같은 감동을 주는 일을 여러분이 여기서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 중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와주셨기에 기뻐했던 순간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지금의 마음과 비교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어떠한 사랑으로 당신 인생의 길을 인도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눈물 흘리며 참회하고 피 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올 때뿐만 아니라 그 이전 저처럼 무신론자로 살던 시절, 더 멀리 불신자였던 시절, 그리고 심지어 엄마 뱃속에 있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때도 주님은 우리를 아셨고,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처럼 불신자로 방황할 때조차도 스스로 택한 길이니 방황을 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마지막 돼지우리에서 쥐엄열매라도 찾아보려고 애쓰는 동안에 결국 마지막에 그것조차 발견하지 못하여 풍족했던 아버지의 집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은혜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왔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런 은혜를 기억하고 또 이렇게 메마르게 살아가는 영적인 현실을 대조해보고 나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비참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을 다시 간절히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결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다시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이 되어서 주님과의 만남을 기억하고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하나는 섬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의 날에, 시인은 은혜로웠던 지난날에 섬김을 회상했습니다. 그는 성일이 되면 하나님을 예배하러 오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했습니다. 감사의 찬송을 드렸습니다. 이런 섬김의 기억 때문에 시인은 더욱 하나님을 만나고자 가슴이 불탔습니다. 그때처럼 다시 성소로 돌아가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들을 섬기는 행복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시인의 소원은 단순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찾는 기쁨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기쁨입니까? 그것은 세상에 속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까? 잠시만 여러분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까? 영원히 하나님과 자신을 기쁘게 할 소원입니까? 여러분의 마지막 소원은 무엇입니까?
III. 적용과 결론
저의 어렸을 적 기억의 맨 끝이 한 네 살이나 다섯 살 정도의 끝자락입니다. 마치 사진처럼 몇 장이 남아 있는데 그중에 한 장면이 동생에 대한 회상입니다. 동생이 저하고 세 살 차이인데 지금도 또렷하게 사진처럼 찍혔습니다. 안방에 문이 있고 삼면은 벽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걷지는 못하고 기어 다닐 때였던 것 같습니다. 확실하게 떠오르는 것은 포동포동하고 동글한 얼굴에 눈이 큰 동생이 기저귀를 찼습니다. 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방 안을 기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때 엄마가 큰 수박 하나를 안방에다 갖다 놨습니다. 그게 재미있어서 동생이 그걸 굴리면서 노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혓바닥을 내밀면서 열심히 수박을 핥고 있는 모습이 사진처럼 찍혀있습니다. 제가 네 살이나 다섯 살, 아마 네 살 때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기억이 떠올랐던 이유는 뭐냐 하면 사람들이 아무리 비싼 수박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좋은 수박이라고 할지라도, 그 수박의 겉을 혓바닥으로 아무리 열심히 핥아도 수박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엄마가 도마 위에 수박을 올려놓고 큰 칼로 반을 딱 갈라서 쫙 하는 소리와 함께 찢어지듯이 갈라집니다. 그리고 몇 번 더 칼질을 해서 씨도 거의 없는 빨간 잘 익은 수박의 과육을 큰 덩어리 하나를 입에 넣어줄 때, 얼마나 잘 익었는지 하얀 색깔의 과육까지 함께 입에 들어올 때 씹을 틈도 없이 입을 다물기만 하면 그것이 물처럼 눌리면서 향긋하고 달콤하고 시원한 액체를 우리의 입안 가득히 뿜어냅니다. 그리고 몇 번 씹으면서 그 달콤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 우리의 온몸에는 전율이 일어나는 것 같은 기쁨을 느낍니다. 그게 수박을 먹는 것입니다. 핥아서는 결코 그 맛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수박을 먹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만남도 똑같은 것입니다. 예배에 나오고, 성경을 읽고, 심지어 여러분이 봉사를 해도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없으면 수박을 껍질로 핥는 것과 같습니다. 수박 겉핥기와 같다는 것이 바로 거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신앙의 정수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로, 하나님의 거룩함의 진수로 들어가서 그분을 경험하고 그분의 성품을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이것이 그 마음속에서 생겨나게 될 때, 그때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은혜를 주셨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공위성을 쏘면 거의 두 시간마다 지구를 한 바퀴씩 돕니다. 그러나 지구를 떠난 인공위성은 한 번도 지구와 만나지 못한 채 마지막 망가져서 사라질 때까지 끊임없이 지구를 돌 뿐입니다. 그렇게 우리도 인공위성처럼 주님을 만나지 못한 채 도는 사람이 되어서는 결코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값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배의 때, 섬김의 때를 기억하십시오. 가슴 깊이 벅차오르는 희열, 그 거룩한 환기(喚起)를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다시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며 가슴 벅찼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이를 위한 길은 조용히 기도의 골방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무릎을 꿇고 하나님만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고 간절히 다시 한번 주님을 만나기를 기도한다면 반드시 주님이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5.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지난주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성소에 올라가던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그 은혜로운 때에 대한 기억에 시인의 마음은 심히 상했습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의미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처럼 여전히 하나님 만나기를 갈망하고 있었지만 아직 그분의 얼굴을 뵙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픔과 시련 속에서 시인은 한 가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고난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혼과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II.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시인은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도움도 주시지 않을 것 같은 하나님의 침묵은 오래도록 계속되었습니다. 아마도 시인에게 그 시간은 가혹하리만치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는 그토록 외롭고 아프던 인생의 어두운 밤을 어떻게 지냈겠습니까?
A. 영혼과 대화함
첫째로 자기 영혼과의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여기서 영혼은 '마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나님을 신뢰하고자 하는 자아가 있었습니다. 그 자아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또 다른 불신의 마음을 설득하고자 했습니다. 이 대화는 하나님께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고 있는 자신의 또 다른 마음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마치 자신 안에 두 개의 자아가 있는 것처럼 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인 안에 두 가지 인격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사람은 오직 단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인격이 있을 뿐입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4년 뒤에 태어난 보에티우스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사실상 로마의 마지막 위대한 사상가였고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특이하게 좀 깁니다. 아니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세베리누스 보이티우스(A. M. T. S. Boethius)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의 위격과 두 본성』이라는 책 중 <제3장 본성의 차이점과 위격들에 관하여서>라는 부분에서 인격에 대한 이런 정의를 내립니다. “인격이란 이성적 본성을 가진 개별적 실체다(Persona est naturae rationalis individua subustantia).” 종교회의에 갔는데 주교들이 하나님의 위격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데 저마다 그 위격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달랐습니다. 그래서 논쟁이 초점을 잃어가고 있을 때 이 사람이 깨끗하게 정리를 해줍니다. "인격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입니다." 이 인격이 사람에 적용될 때는 인격(人格)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는 위격(位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만이 독특하게 한 인격 안에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 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그리스도의 한 인격, 두 본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무튼 모든 인간은 한 사람이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시인 바깥에 있는 영혼과의 대화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인 자신의 두 마음 사이에 오고 간 대화였습니다. 한 마음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희망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마음은 눈앞에 닥친 현실에 낙심하고 그냥 포기함으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는 아무런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인의 마음은 더욱더 파리해져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인 한 사람만의 경험이 아닙니다. 믿음이 매우 좋다고 인정받은 성도들까지도 때로는 겪는 일입니다.
시인의 낙심하는 마음은 극복해야 할 자신의 불신앙적인 자아였습니다. 그것을 여기서 '영혼'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또 다른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마땅히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었으니, 이는 낙심하는 마음과는 정반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은 어떠한 불행 가운데서도 반드시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또 다른 자아였습니다. 이는 눈앞에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더 믿는 믿음이며, 그 말씀을 따라서 살려는 마음이었습니다. 시인은 믿음의 마음으로서 낙심하는 영혼을 설득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아무리 침체에 빠진 신자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에는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또 이와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의 성향도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를 중생시키실 때 주시는 것인데, 그것 또한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즉각적으로 부여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중생시에 그 영혼 안에 직접 심으신 것인데, 최초로 회심할 때 그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의 마음에 심겨진 영적 생명이 어떤 경우에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처럼, 신자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자 하려는 성향은 어떤 경우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은혜 안에 충만한 생활을 할 때는 그것이 강해지고 죄 가운데 미끄러질 때는 약해질 수는 있지만, 결코 신자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려는 마음이 아주 없어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식물인간에게도 생명이 남아 있는 것처럼, 아무리 침체된 신자일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자주 딴 곳에 가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그분이 우리에게 찾기를 원하시는 신령한 것보다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더 사랑하고 거기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감각으로 보이는 것들에 집중하고, 그것을 육신적으로 해석하면서 희망을 가져야 할 지점에서 오히려 낙심하고, 겸손해져야 할 지점에서 오히려 교만한 것이 우리의 오늘날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속적인 마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 앞에서 수시로 불안한 마음이 되게 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두려움을 내쫓는 원동력인데, 그 사랑이 없으니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낙심하고 좌절하는 사람은 모든 일들이 그의 뜻대로 이루어질 때 교만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눈동자처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때로는 평탄한 길만 주시지 아니하시고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십니다.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을 섬길 때뿐 아니라, 외롭고 비참한 형편에 처해 있을 때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번영과 피폐에 상관없이, 때로는 우리의 신앙에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항상 압도하는 그분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불과 6개월 내지 1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 저는 친구의 간청으로 그의 교회에 가서 수요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이삼백 명 교인들이 모였는데, 이상하게 반주자가 안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자매가 나와서 반주도 없이 특송을 시작했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 단정한 자매가 낭랑하게 부르던 그 찬송 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저에게 그 가사는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그때까지 제가 들었던 어떤 설교에서 받았던 깨달음보다도 큰 깨달음이 제 마음에 한 획을 긋고 지나갔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음이 훌륭하고 헌금 많이 할 때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쓰라린 마음으로 혼자 버림받은 채 탄식할 때도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고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믿음으로 살려는 마음과 불신함으로 살아버리려는 마음 사이에 언제나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시인처럼 일평생 경건하게 살았던 사람조차 이 시를 쓸 당시 두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가운데 기록하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시인의 영혼은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믿음 없이 현실을 바라보며 느끼는 마음 한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커다란 낙심 때문이었습니다. 정상적으로 붙어있던 마음이 툭 떨어지고 희망의 끈이 잘려 나가는 것 같은 그러한 불안을 느꼈기 때문에 이 시인의 영혼은 고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그 안에 있던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영혼이라고 불리는 걱정하는 또 다른 마음을 달래며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낙심한 그의 마음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단지 시인의 경험입니까? 우리에게도 이런 때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예수를 믿고 있는데도 현실에 낙심하는 마음이 내 안에 스며들어옵니다. 그 감정이 너무나 크게 기울어지고 나면, 저녁에 눈을 감으면 다음 날 아침 천국에서 나 눈을 뜨고 싶은 때가 왜 없겠습니까? 시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때로는 본받아야 할 모본을 보여주지만, 때로는 우리와 똑같이 연약하고 유혹받으며 신음하고 있는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일체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더욱이 다른 시편들에서 그들은 종종 자기들이 당시 겪고 있는 시련과 불행이 혹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영 버리셨다는 의미는 아닐까 하고 근심하였습니다. 또 다른 시편에서는 자기가 범죄하여 징계를 받을 때, 시인은 주의 언약 안에서 자기가 끊어져 영원히 죄인으로서 버림받는 것은 아닐까 하고 시편 6편에서 낙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경건한 시인들은 믿는 마음으로 불신하는 마음을 설득했습니다. 버림받은 것 같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마음으로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마다 시인들이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전에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그 옛날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 이는 나의 잘못이라 ··· 곧 여호와의 일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기억하리이다”(시 77:5-11) 그랬습니다. 이것이 시련을 믿음으로 이기는 시인들의 경건한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그 옛날을 소환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기적처럼 건져주셨던 은혜의 기억을 소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의 소환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에 힘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얻은 사랑의 힘으로 또 한 구석에서 낙담하며 울고 있는 자신의 또 다른 마음을 어루만지며, 하나님이 시인에게 하듯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불안해 하는고 하나님께 희망을 두자꾸나"하고 타일렀던 것입니다.
때로는 가혹하리만치 힘겨운 현실 속에서 칠흑 같은 인생의 밤을 지납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하고 계십니까? 그런 어두운 인생의 한복판을 지나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현실을 이겨내는 믿음의 마음이 가득합니까? 아니면 현실에 쉽게 굴복하는 불신의 마음이 여러분을 흔들고 있습니까? 마음을 굳세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니 마음 한구석에서 들려오는 비난의 목소리, '너는 이제 희망이 없다.' '하나님도 너를 돌아보지 않으실 것이다.' '너 같은 죄인이 어찌 하나님을 찾겠느냐?' 이런 속삭임에 귀를 내어주지 마십시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나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도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마음을 굳세게 하고, 이럴수록 더욱더 열렬한 기도 생활로 충만한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헤쳐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희망으로 설득함
다행스럽게도 그때 시인은 이런 불신앙으로 그의 마음 전부가 아주 흔들리기까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의 마음이 시인 안에서 우세하였기 때문입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下) 아멘. 이런 갈등 속에서 시인은 불신앙으로 낙심하는 마음을 믿음의 마음으로 간곡히 사랑으로 때로는 꾸짖으며 설득하였습니다. "···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 불안해 하는가"(시 42:5上) 지금 시인의 눈앞에 전개될 정치적 상황에는 어떠한 낙관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장 절망적일 때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사물을 봐야 하는지를 결정해줍니다. 절망적일 때 모든 눈에 보이는 현실이 우리를 낙심시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절망적인 사태 너머에 있는 희망을 육신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생텍쥐베리는 어린 왕자에서 아주 유명한 명언을 남깁니다. “사람은 오직 자기 마음으로써만 분명하게 볼 수 있다(On ne voit bien qu’avec le coeur).” 이것은 믿음에 있어서도 정확하게 사실입니다. 정말 사소한 것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영원히 우리를 붙들어주는 것, 영원히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들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은 종종 착시일 수 있어도 마음의 눈으로 정확하게 본 것은 때로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과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나누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두 마음 사이를 오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어린아이처럼 그분의 품에 기대어 의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또 한편으로는 현실로부터 도망쳐 내 마음대로 하나님 없이 살아버리고 싶은 불신앙의 마음입니다. 이 두 마음은 사이를 수시로 오가기에 우리의 마음은 변덕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심지어 두 마음 사이의 갈등에서 오는 피로감이 극도에 달할라치면 문득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까지 드는 것이 우리의 심정입니다. 이때가 바로 우리 믿음의 마음이 적을 향해 백기를 든 때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아무리 어려운 현실을 만날수록 거룩한 희망으로 마음을 설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은 결코 자기 암시가 아닙니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근거로 한 믿음의 자아가 불신의 마음을 향하여 베푸는 설득입니다. 믿음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라고 로마서 10장 10절이 말합니다. 이런 역할을 잘하게 하는 것이 바로 소망이니, 소망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만 말미암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매우 어려운 현실을 맞닥뜨리며 하나님 앞에 도저히 기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마음이 됩니다. 그때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힘없이 엎드립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맡기면서 결국 갈등 끝에 마지막으로 "나의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는 어느 한순간 모든 우리의 감각을 초월하는 아주 놀라운 평강이 우리의 마음에 찾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이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이냐고 물을 때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평강은 인간의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내 마음에 있어서 이제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요동하지 않는 상태로 우리를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마음이 놀랍게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큰 평화가 밀려오면서 마음에서 기쁨이 솟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들은 모두 좋은 것들이며, 하나님이 안 주신 것은 모두 나쁜 것들이라는 확신과 함께 내가 믿음으로 살면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통해 형성되는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그분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때 마음에 놀라운 평화가 찾아옵니다. 마치 큰 풍랑으로 수많은 배들을 삼키던 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결조차 없이 잔잔한 호수처럼 변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평강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평강 없이는 행복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복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먼저 화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 편이시고, 내가 그분의 편이고, 우리 둘 사이에 끊어놓을 수 없는 사랑의 연합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지만 그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살아있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신앙이 모두 쫓겨난 뒤에야 신앙이 우리 마음에 깃들거나 혹은 믿음이 우리 마음 안에 있으면 어떠한 불신앙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 두 마음이 공존합니다. 믿음과 믿지 않으려는 마음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믿음으로 살려는 마음, 그리고 현실에 비관하여 인생을 포기하려는 마음이 신자 안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마음이 저 마음보다, 때로는 저 마음이 이 마음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데, 이는 은혜 생활의 열렬함의 여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 안에서 성령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두 개의 축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천과 관련된 것인데, 하나는 끊임없이 죄를 죽이는 실천, 또 하나는 끊임없이 은혜를 살리는 실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죄에 대해 찔림을 받았으면 그것을 붙들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파고 들어가며 열렬히 기도하며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성령으로서 죽일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죄를 죽이는 생활, 곧 죄 죽임의 실천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에게 성령의 은혜를 계속 부어주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간직하며 그것을 계속 살려내는 생활을 기뻐하십니다. 자, 날은 춥습니다. 그런데 추적추적 진눈깨비가 내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벌판에 텐트를 치고 있습니다. 불을 피워야겠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있는데 땔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장작은 있는데 눈에 흠뻑 젖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낙엽이 있는 곳으로 가서 쌓인 눈들을 걷어내고 젖지 않은 낙엽들을 한 움큼 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쌓아놓은 나무들 중에 저 아래 있어서 아직 눈으로 젖지 않은 작은 나뭇가지들을 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냥으로 불을 붙인 후 정성을 들여서 불기 시작할 것입니다. "후우~ 후우~" 그 사이에 나뭇잎에 붙은 불은 작은 나뭇가지에 옮겨붙고, 그 작은 나뭇가지가 불길을 자그맣게 일으키면 또다시 마른 약간 큰 나뭇가지를 얹으면서 타오르는 거센 불길이 되고 나면 젖은 나무토막이라도 올려놓으면 마르면서 불길을 일으키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예배를 통해 받은 은혜의 말씀을 간직하고 끊임없이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그 말씀을 두 번, 세 번 곱씹으며, 그 말씀이 나의 마음에 살이 되고 피가 되기까지 소화시키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불길이 일어나듯이 계속 살아나게 됩니다. 바로 이 죄 죽임의 실천과 은혜 살림의 실천, 이 두 가지가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계실 때 가장 기뻐하시는 환경입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어려운 현실을 만나도 믿음의 마음으로 낙심하는 마음을 설득해낼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기쁘고 행복한 일만 만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젊고 아프지 않은 날들만 계속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으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행복하기만 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세상 자체가 슬픔의 바다이기에 그런 일들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분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하나님을 잘 믿으며 살아온 여러분일지라도 그대들의 지난날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인도 없이, 그분의 보호가 필요 없이 살아온 날들이 있었습니까? 가시밭길에서 떨고 있을 때 여러분을 꺼내주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몸부림칠수록 더욱더 깊이 빠져들어 가는 깊은 수렁에서 당신의 의로운 손으로 여러분을 건져주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부르짖어도 들을 사람이 없는 깊은 웅덩이에서 여러분을 건져주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사망의 벼랑 끝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여러분에게 그 죽음의 계곡을 날아다닐 수 있는 천사의 날개를 달아주신 분이 누구셨습니까? 하나님이 이제껏 어떠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인도하여 여기까지 오게 하셨는지 생각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죽음의 고비들을 넘겼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혼자 있다고 외로워했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어 살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힘겨운 현실에 낙심하는 마음을 믿음의 마음으로 설득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늘 약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연약했지만 주님이 주신 믿음은 강했기에 그 강한 마음으로 약한 마음을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약해진 것은 우리의 불신앙 때문이었지만 강해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을 이겼습니다. 이는 좋으신 하나님이 친히 도우심으로 이 현실을 반드시 이겨낼 것이라는 희망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고 힘겨운 인생을 주님의 손 붙들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쉼 없이 바람 불고 파도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은 늘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시험에 들고 나면 육신의 눈에 비치는 현실의 파도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사람인데도 인연을 끊고 싶고, 심지어 주님이 주신 사명인데도 내려놔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의 때는 마귀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시험의 때에 육신적으로 깊은 어려움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의 질서는 흐트러집니다. 비유를 하자면 적기가 공습을 하는지를 알려주는 레이더가 작동을 하지 않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에게 섭섭한 마음, 하나님에 대한 원망, 그리고 나를 왜 이런 상황에 하나님이 버려두시나 하는 불평, 그리고 나에게는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는가 하는 낙심, 이런 것들로 영적인 레이더가 고장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기 가장 좋은 때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저 멀리서 마귀가 움직이는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던 사람이 마음 가까이 들어와서 뱀처럼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데도 그것이 마귀인 줄을 모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때로는 마귀의 목소리에 설득을 당합니다. 그래서 일평생 자기가 믿고 살아온 가치를 등지기도 하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하찮게 여기고 데마처럼 세상으로 돌아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변함없이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신앙의 생존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가 중요하고 ‘나머지 것들은 모두 다 부차적인 것이다.’ 나머지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머지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등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자기중심성을 확고히 세우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약속을 믿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은 풍랑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을 주신 것은 의심하거나 낙담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믿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현실을 해석하고, 희망으로 낙심하는 영혼을 설득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 때문에 희망을 갖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특권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불신자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내가 믿음이 없어서 포기한 그 지점이 바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시작하는 지점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에게는 낙심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실 때 은혜 없이 우리 바깥에서 혼자 이루지 아니하시고 은혜와 함께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우리에게 그 은혜 주시는 주님을 믿어야 할 필요를 말해줍니다.
시인 안에서 두 마음이 거칠게 싸웠습니다. 눈앞에 있는 현실을 두고 벌어진 싸움이었습니다. 한쪽은 시인의 마음을 희망으로, 한쪽은 낙심한 쪽으로 끌고자 서로 잡아당기는 싸움이었습니다. 결국 시인은 이 싸움에서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은혜의 승리였습니다. 절망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찬송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고통 속에서 방황할 때조차도 하나님은 당신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모든 절망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껏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과거를 돌아봅시다. 지금보다 더 막막하던 때에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합시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아무리 힘겹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도우심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을 가집시다. 이제껏 그런 은혜로 살아오게 하셨으니 지금도 주님의 의로운 손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확신합시다. 마치 폭풍 속에서도 요동치는 배의 키를 놓지 않는 항해사처럼 믿음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붙드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인처럼 믿음의 마음으로 낙심하는 영혼을 설득하기를 계속하십시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시련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미워서가 아닙니다. 고난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싫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보다 온전케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보다 순전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당신의 품속에 가두어 두시기 위해서, 당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주시기 위해서 철들라고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풍랑 이는 바다에서 폭풍 가운데 멸망할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아무리 칠흑같이 어두운 인생의 밤중이라도 하나님의 항구에는 등대가 빛나지 않습니까? 거기가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시련의 파도가 격해도 주님이 우리의 발을 붙들고 계시니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여 그 은혜의 항구에 닻을 내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길입니다.
제가 군대에 갈 때 일이니까 수십 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사실은 군대를 안 가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쨌든 병무청 심사에 올라가서 최소한 일주일 전에는 회신을 해주게 되어 있는데, 마지막까지 저를 놓고 심사위원들의 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밤 11시에 연락이 왔습니다. 내일 아침 의정부로 입대하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머리는 이미 빡빡 깎고 있었습니다. 불과 한 6시간, 7시간 전에 통보를 받았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제가 군대를 가면 가족을 부양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정부에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성암교회라는 곳을 찾았습니다. 텅 비어 있는 작은 예배당이었고, 거기서 저는 생애에 몇 번째 되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제 머리에 떠오른 한 그림엽서가 있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파도치는 격랑이 이는 바다 위를 작은 배의 키를 붙들고 항해하고 있었고, 주님이 당신의 오른손으로 그의 오른쪽 어깨를 붙들고 왼손으로 갈 길을 지시해 보여주시는 그림엽서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나의 가는 길을 주께서 아시니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보호하며 인도해 달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때 저는 충만한 성령이 임하여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는 즉시 모든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그 병무위원들을 향한 미움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속에서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정확히 열흘 뒤에 저는 집에 돌아와서 할머니와 뜨거운 재회를 했고 수요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한 가지 배운 사실은 어떠한 형편 속에서든지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함께해 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여러분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대들이 그대들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 갓난아이처럼 주님의 가슴을 파고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있는 모습 그대로 안아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품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영원한 안식처이니 우리의 영혼이 거기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사랑으로 안아주시고 당신의 가슴을 펼쳐 말씀의 젖을 물려주시고,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잔뜩 먹은 후에 젖 땐 아이처럼 평화를 누리며 그 품에서 쉼을 얻게 됩니다. 자기의 젖먹이를 가슴에 품은 착한 엄마이신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니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다"라고 한 다윗의 고백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련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사는 우리가 오직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할 이유입니다. 이 이유를 따라 주님만 믿으며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위로를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