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과 눈물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행 20:19)
그리스도인의 리더십은 이 세상 사람들의 리더십과는 다릅니다. 두 가지로 나뉘어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인이면서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경우와 교회의 지도자는 아니지만 세상에 있는 단체나 기관의 지도자가 될 경우로 나눠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선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있는 단체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우리가 신앙과 생활을 완전히 이분법으로 나누어 단절시키지 않는 한, 우리의 정체성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마음대로 지워버릴 수도 없고 떼어 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나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지도자가 된다든지, 공직자가 된다든지, 어떤 식으로든 세상의 지도자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은 떼어놓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많은 제약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부정하고 불법한 관행들이 광범위하게 유포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신앙의 원리를 따라 회사를 경영하고 공직자로서 생활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나올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내용은 이 시간에 다룰 수 없겠지만 어쨌든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바이고 자신의 양심이 증거 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지도자, 혹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교인으로 이뤄진 단체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에는 아마 극단적인 갈등은 적을지 수 있습니다. 최소한 술을 먹으러 가고 놀음을 하러 가는 일은 안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영혼은 훨씬 더 위험합니다. 신자들만 모여 있으면 선교적인 긴장이 사라지게 됩니다. 항상 거기에는 그 나름대로의 위험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어떤 성격의 단체의 지도자가 되든지 하나님 앞에서 지도자 된 것을 생각해보면, 리더십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따라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소명을 받아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예언하는 사람을 통해서 말씀을 하시기를,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면 결박과 커다란 환란이 사도 바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명이기 때문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밀레도라는 곳은 물이 많은 곳이고 철학자 탈레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밀레도에 이르렀을 때 사도 바울은 두고 온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을 시켜서 교회의 장로들에게 오라고 했습니다. 장로들을 모아 놓고 어쩌면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그 내용을 우리가 살펴보기 전에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는 아시아에 들어와서 약 3년 동안 사역을 했는데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고 했습니다. 지도자의 삶은 그것이 잘한 삶이든, 잘못한 삶이든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라고 해서 완벽한 삶을 살았을 리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사도로서 유언적인 설교를 남기는 가운데 장로들에게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시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는 삶에 부끄러움이 없이 최선을 다해 헌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 지배하는 자요 대접을 받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왕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막 10:45)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섬김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자기가 아시아에 와서 지도자로 살면서 겪었던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을 몇 가지 나열하고 있는데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것이 겸손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학문에 있어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을 했던 사람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로마주의,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종교적으로는 유대주의까지 모두 이해했던 당대 최고의 지성인의 반열에 들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열두 사도와 같이 예수님 살아생전에 사도가 되지는 못했지만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사도로 직접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신약 성경 27권 중 약 절반에 해당하는 13권을 사도 바울이 썼습니다. 능력에 있어서는 죽은 자를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능력을 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지식에 있어서나 능력에 있어서나 무엇에 있어서 자기보다 탁월하지 않은 사람들을 섬기면서 아시아에 있었던 3년 동안 제일 먼저 배운 것이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겸손이라는 말은 비천하게 낮아진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제일 먼저 절실하게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확신과 신념에 넘치는 지도자도 훌륭하지만 연약해보이는 지도자도 위대한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여러 나라의 대사를 지내시던 외교관 한분이 계셨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부시 대통령과 엘 고어가 맞붙어서 누가 승리할지를 예측하기 힘든 때였습니다. 모든 면에서 부시가 밀렸습니다. 모두들 엘 고어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이분이 미국에 계셨습니다. 한국에 들어오셨기에 잠깐 만났는데 선거가 임박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십니까?” 했더니 판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TV 토론을 하는데 엘 고어는 숫자 통계까지 딱 맞아 떨어지게 준비하고 나와서 청산유수로 대답을 하고 무엇을 질문해도 막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시는 시골 아저씨처럼 나와서 버벅대고 대만 총통이 누구냐고 했더니 이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계속 토론을 하는데 부시는 TV 토론에서 할 말을 못하고 계속 밀리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그것이 오히려 유권자들에게 정반대로 어필이 되어서 ‘저렇게 청산유수로 말이 딱딱 떨어지는 게 진짜 맞는 걸까?’ 하고 생각하면서 질문을 하면 대답도 못하고 버벅 대는 시골 아저씨 같은 부시에 대한 동정심이 생긴 것입니다. “저 사람은 무언가 대답을 잘 하지 못하는걸로 봐서 진실성이 있는 것 같아.” 엘 고어는 잘 가공된 것이고 부시는 천연의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는 인식으로 전세가 확 뒤집혔다는 것입니다. 결국 근소한 차이로 부시가 이겼습니다. 세상도 그렇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신념과 확신이 넘치는 사람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불편합니다. 오히려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하는 사람들에게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오기 전에 남포교회에 박영선 목사님이 인터뷰하는 기사를 읽어 봤는데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자기가 젊었을 때는 휘둘러 치던 설교를 하다가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자기가 너무 어렸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외부적인 조건으로 봤을 때 겸손해져야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아시아에서 3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제일 먼저 겸손을 배웠습니다. 그것도 앞에 형용사가 붙어서 ‘모든 겸손’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이 겸손은 어디에서 유례된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쓴 디모데서는 거의 인생 말년에 쓴 책입니다. 1장 15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면서 핍박자요 폭행자였던 자기 같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것에 대해 한 없이 감사하며 순교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겸손은 사람 앞에서 비굴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섬기면서도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가 할 때 “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한 죄인이다.”라는 인식이 사도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라는 선교사이자 작가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19세기에 교회에 주신 최고의 선물 중 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사람이 자신의 책 『겸손』에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죄인들 밖에는 없습니다. 한 종류의 죄인은 이미 용서 받은 죄인이고 또 한 종류의 죄인은 아직 죄를 용서 받지 못한 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인식은 이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해주시고 “너희는 이제 의로운 사람이다. 거룩한 백성이다. 왕 같은 제사장이다.” 그렇게 불러주셔도 우리 자신은 스스로 인식하기를, “아닙니다. 하나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인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원래의 정체성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 와서 목회를 하면서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난관을 만나고 어려움을 만날 때 마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자기 인식입니다.
여러분은 별이 어떻게 생기는지 아십니까? 하늘에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이 6천개 정도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늘에 얼마나 많은 별들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태양이 속해 있는 은하계를 ‘우리 은하’라고 부릅니다. 우리 은하계는 넓적한 쟁반처럼 생겼는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의 길이가 20만 광년입니다. 빛이 20만년을 달려가야 합니다. 옆에서 보면 납작하게 생겼습니다. 그 두께가 약 900광년 정도 되는 은하에 약 2천 억 개의 별들이 모여 있습니다. 여기서 ‘별’이라고 할 때 지구 같은 것은 별로 세지 않고 태양 같이 항상 타 오르는 항성만 개산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태양을 중심으로 8개의 위성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위성 주위에 또 다른 위성들이 돕니다. 마치 달이 지구를 도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500원짜리 동전 하나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또 다른 항성은 대구쯤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먼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별들 2천 억 개가 모여 있습니다. 중심이 있고 태양은 여기에서 2만 6천 광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습니다. 별들은 40억년 내지 70억년을 정도를 살다가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때 쾅하는 폭발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별들이 어마어마한 크기가 됩니다. 태양이 수명이 다 되어 폭발을 하게 되면 수, 금, 지, 화, 목성 정도까지가 전부다 태양 속으로 다 들어가 버린다고 합니다. 멸망 하는 것입니다. 별이 폭발을 하면서 거기에서 수많은 별 먼지가 발생을 합니다. 별 먼지가 떠돌아다니다가 또 다른 별이 폭발할 때 그 에너지에 의해서 흩어진 별 먼지들, 가스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휘돌면서 거대한 핵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폭발과 함께 새로운 별이 탄생합니다. 어떤 별이 죽음으로써 새로운 별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약 60조개 정도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포는 뇌세포를 제외하고는 계속 재생이 됩니다. 어린 아이들의 골을 쪼개면 순두부 같은 골이 꽉 찹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별로 없습니다. 호두를 깼는데 쭉정이 호두가 나오듯이 뇌가 찌그러듭니다. 몸의 세포는 3개월 이면 사라지고 새로운 세포가 생겨납니다. 우리의 몸을 보면 60조 개의 꼬마전구들이 모여서 깜박깜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세포가 죽습니다. 세포의 죽음도 2가지가 있는데 네크로시스(necrosis)라는 죽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포가 괴멸이 되는 것입니다. 다친다든지 어떤 손상에 의해 세포가 죽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죽음은 아포프토시스(apoptosis)라는 죽음인데 학자들은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세포가 이유 없이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죽으면서 APP라는 화학 에너지를 만들어서 옆에 있는 세포에 보냅니다. 그 세포가 그것을 받아 세포라는 공장을 돌려서 세포가 분열을 합니다. 결국 이 드넓은 우주에서 별들이 죽음으로 새로운 별들이 탄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그렇게 되는데 어떤 세포는 서로 안 죽겠다고 뭉칩니다. 살기 위해 수많은 영양분을 잡아당기면서 세포가 증식을 하는 것이 암입니다. 결국은 안 죽은 세포들 때문에 결국은 온 몸이 죽어버리는 병이 암입니다.
빌립보서로 넘어가면 기가 막힌 말이 나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죽음으로서 결국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처럼, 교회에서든 어디서든지 죽는 사람이 없을 때 그 모임은 암과 같이 되어 버립니다. 그곳에서 무엇인가 폭발하면서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만큼만 하라고 그래!” 이렇게 살면 자신의 영혼은 계속 죽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집에 돌아가서 반성을 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회개를 하고 자기를 죽입니다. 그 안에서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시는 경험을 합니다. 이것인 신비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사역을 하면서 겸손과 자기 죽음을 깊이 터득했습니다. 그 일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예수의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자신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이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능력을 많이 주십니다. 여러분은 오늘도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능력을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능력을 많이 주시면 어려운 일도 쉽게 하고 남들이 고통스럽게 겨우 해내는 일들을 쉽게 빨리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능력은 우리의 고난을 줄이는데 쓰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디모데후서 1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여기에서 ‘따라서’는 ‘비례해서’라는 뜻입니다. 능력을 많이 주신 사람들은 아주 험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특별히 사랑을 받고 큰 능력을 받은 사람들 중에 황금 마차를 타고 카펫 위를 걸으며 꽃다발을 흔들어주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일생을 산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를 많이 주신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을 위해서 살게 하시고 많은 고난을 겪게 하십니다. 죽은 자를 살릴 정도의 능력이 있는데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무 때나 사용하라고 그런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수만 명을 먹이셨지만 기적으로 당신의 식탁을 차리신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묘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능력을 많이 주시면 고난도 많이 받게 하십니다.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쓰라린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가난한 자가 되어 매달리게 하십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교회는 경영학 하나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영적인 집단입니다. 이익만 내면 되는 집단이 아닙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200명이 출석하는 교회를 하는 게 어려울까요? 직원이 2000명인 회사를 운영하는 게 어려울까요? 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우스운 이야기지만 나는 교회가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일하다 보면 “사표 써!” 이렇게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회사가 얼마나 좋습니까? 전권을 갖고 있어서 “정말 그렇게 할래? 다음 주까지 사표 받아.” “진짜 일 잘하는구나. 여기 연봉 1억 올려줘.” 이렇게 하는데 얼마나 쉽겠습니까? 교회는 사표 내라고 해서 겁먹을 사람도 없고 낼 사람도 없습니다. 장로에게 어떻게 사표를 내라고 합니까? 1년짜리 안수 집사에게 어떻게 사표를 쓰라고 합니까? 평생을 함께한 교역자들에게 어떻게 그만두라고 합니까? 돌아가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거기서 겸손을 배웁니다.
한국 교회의 큰 지도자 가운데 한상동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고신 측 목사님이셨는데 70년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분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회의 거목입니다. 전도사 한 사람이 속을 썩입니다. 우리 같았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너 계속 속 썩이려면 이번 달에 나가라.”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이 목사님은 이런 신앙을 갖고 계셨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자르면 하나님의 주권은 어디에 있는가?” 교계의 거목이 신학교에 다니는 작은 전도사를 하나 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 인간을 변화 시켜주시든지 아니면 스스로 나가게 해주십시오.” 여러분도 똑같습니다. “회사 사장을 하기 쉬우냐? 교회에 와서 장로하기 쉬우냐?” 그러면 여러분도 똑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기에서 깊은 겸손을 경험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때 안 될 것 같은 일들도 되게 해주시고 꼭 될 것 같은 일들은 안 되게 하기도 하십니다. 안될 것 같은 일을 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당신이 직접 우리를 당신의 종으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고, 될 것 같은 일을 안 되게 하시는 일은 간절히 매달리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강의가 있어 이렇게 차를 타고 오니까 여기저기 조그만 교회의 십자가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마음이 아주 아립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2층, 혹은 지하에 교회가 서 있지만 저 목회자는 얼마나 힘이 들까?’
(찬양)
뉘에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계속 불평을 했답니다. “하나님 제 십자가는 너무 아픕니다. 저 사람도 살만하고 저 사람도 살만하고 저 사람도 가뿐한데 왜 나에게만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해주셨습니까?” 그랬더니 꿈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셨답니다. “네가 십자가가 무겁다고 하도 불평을 하니까 하나님이 네 십자가를 바꿔주라고 하셨다. 따라와라.” 가보니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마어마하게 큰 창고에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잔뜩 쌓여 있더랍니다. “자, 네 십자가를 여기에 벗어 놓고 가서 새로운 십자가를 찾아라.” 십자가가 크고 무겁고 힘이 들어서 ‘이번에는 가벼운 십자가를 찾아보리라.’ 하고 가보니까 가벼운 십자가가 있더랍니다. “이것 참 좋습니다.” “걸어봐라.” 한참을 걸어보니까 가볍긴 한데 너무 깁니다. 땅에 끌려서 매고 다닐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안되겠다. 더 작은 십자가를 찾아봐야겠다.” 작은 십자가를 딱 짊어졌는데 무슨 나무로 만들었는지 쇳덩어리 같습니다. 잠시 맸더니 어깨가 빠개질 것 같았습니다. 내려놓고 작고 가벼운 것을 찾게 되었습니다. 매니까 딱 맞았습니다. “이제는 이것으로 결정하겠다.”라고 하니까 천사가 “좀 더 매봐라.” 하기에 한참 매고 있으니까 옹이가 하나 튀어 나와서 등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못살겠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찾아다니다가 하나를 딱 맺는데 딱 맞는 것입니다. ‘아! 이게 안성맞춤이다.’ 이걸로 매고 가겠다고 했더니 자기가 일평생 매고 온 십자가였습니다. 이 세상에 고난이 없는 지도자의 삶은 없습니다. 고통 없는 십자가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큰 능력, 놀라운 지식, 모든 것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역에 관한 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주님 앞에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93년도 12월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올해로 딱 20년 되었습니다. 교만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하면 1년에 300명이 안 모일까?’ 그러고 믿음 하나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12월 12일에 6명이 예배를 드렸는데 1월 달에 30명이 모였습니다. 예배 시간마다 얼마나 은혜를 주시는지 교인들이 펑펑 울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를 안 합니다. 헌금과 교회 등록을 안 합니다. 남의 교인들이 와서 그렇게 펑펑 울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절대로 등록을 안 합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갔는데 겨우 50명이 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 했습니다. ‘아, 내가 교만 했구나. 쓰레기 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구나. 주님이 도와주셔야 되는구나.’ 그렇게 겸손하게 만드셨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배운 것입니다. 뭔가 자기가 하고 있는 일들이 잘 안될 때 지도자들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핑계를 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새로운 방법을 찾으라고 부하 직원들을 닦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겸손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진실하게 잘 하면 사람이 변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잘 못하면 사람이 나쁘게 변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3년을 섬기면서두 번째로 배운 것이 있습니다. 눈물을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실제로 자기의 서신서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 하노니”(빌 3:18)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랬고 갈라디아 교회가 그랬고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하나님을 섬기면서 배운 것이 눈물이었습니다. 저는 확신과 신념에 넘치는 지도자도 훌륭하지만 하나님 앞에 눈물이 가득 찬 지도자,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께 꽉 붙들려 있는 사람이 훌륭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한 번도 안 나옵니다. 우셨다는 이야기는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깊은 고통 속에서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많이 주셔서 당신의 뒤를 따라오게 하십니다. 우리는 지도자로 살아가면서 깊은 희생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터득해 갑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도 깊은 눈물도 가져오지만, 사역을 해나가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나는 자신을 보면서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키가 작고 배가 나오고 머리가 벗겨지고 고집이 센 성격이 아주 불같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회심하기 전에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는지는 두 가지 사건에서 나타나는데 스데반을 죽이는 것에 대해 가편 투표를 하고 그가 돌에 맞아 죽을 때 옷을 지키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려고 공문을 청해서 다메섹으로 달려가는 광경도 그가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거기서 눈물을 배운 것입니다. 강퍅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자연적으로는 완악하고 잔인하고 독단적이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면서 그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약한 자가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앞에서도 일하지만 뒤에서도 일하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잠들어있는 시간에 하나님 앞에 마음을 간절히 쏟으며 교회와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위해 주님께 간절히 빌면서 자기가 얼마나 못된 인간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거기서 자신의 진실한 깨어짐을 경험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이고 아집에 가득 찬 인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성향이나 본질은 환경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기 전까지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접촉을 하면서 자기도 몰랐던 자아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되고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배우게 됩니다. 이 눈물은 한편으로는 자기 깨어짐의 눈물이지만 또 한편으로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을 위한 눈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천사 이상의 사람이었지만 멸시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에게는 한낱 종만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핍박하고 욕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했던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복음의 승리를 주지는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한량없는 능력을 받으시고 진리만을 말하셨지만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지는 못하셨습니다. 진리를 선포하고 나면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뜨겁게 붙들지만 어떤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갈등이 일어나서 누가 진리 편에 서있는지가 드러났습니다. 우리에게 영혼의 변화를 위한 진실한 눈물이 있습니까? 지도자들은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가 헌금을 걷고 봉사를 많이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마당을 가득 채운다고 할지라도 교회는 그것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와서 그들이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는 일을 위해 교회가 있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은 그 일도 인간의 행정이나 경영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모독입니다. 교회에서 짐승 같았던 사람들이 변하여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기까지는 누군가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피를 뿌려야 합니다. 그것을 누가 해야 할까요? 지도자들이 하도록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하면 눈물을 요구하십니다. 눈물이 능력에 의해 대치가 되지 않습니다. 능력이 많으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흔히 만나지 않는 문제들을 만나서 결국은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게 하신 후에야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꾼으로 불러주셨을 때 그것은 세상의 리더십과 다릅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섬기셨던 그런 리더십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 머무는 동안뿐만 아니라 모든 사역의 과정을 통해 자기가 가야 일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감옥 속에서도 교회들을 위해 빌면 거기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게 지도자입니다. 교회의 최고의 복은 좋은 지도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매달리면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도자의 삶입니다. 세상은 각박해지고 어디에서도 자기를 희생하려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성경이 그려내는 지도자들을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의 역할은 더 중요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도구로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통치하심으로써 그들이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모범이셨지만 우리는 그렇게 완전하지 않습니다. 오류가 있고 잘못할 때도 있지만 그 때마다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위해 살아갑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그래서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을 때만 주님의 사람이지 주님이 손을 놓으시면 그는 더 이상 주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독교 지도자로서 어디에서든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붙들려 살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