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침체에 대한 지혜적 사유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내가 나의 행위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시 119:25-26).
하나님을 늘 경외하며 살던 이 시인도 오늘과 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고 말합니다. ‘진토’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아파르’인데 먼지입니다. 이 먼지는 기본적으로 흙에서 나오는 먼지인데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그 ‘아파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흩어지면 모두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흙이라고 하는 의미는 ‘땅’의 의미와는 틀립니다. 땅은 하나님의 기업, 축복 등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반해서 흙은 아무 것도 아닌, 아주 천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신 데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보석을 깎아서 사람을 지으셨을 수도 있는데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은 인간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그 흙으로 지은 인간이 살아있고 감각하고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존재의 위대함은 모두 흙 자체에 돌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초청하신 것입니다.
이 시편에는 이런 사상이 그대로 배어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거의 상실하고 아주 비천하게 되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시인이 어떤 역경과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에 아주 깊은 무가치함을 느끼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혹은 이것이 다른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신 안에 있는 죄를 깊이 인식했기 때문에 느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둘 다 거룩함에 대한 인식입니다.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신 초월하심과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자기가 티끌에 불과하다고 깨닫는데 이 티끌은 도덕적 의미를 제하고 나면 존재 중에서 가장 하잘 것 없다고 하는 뜻입니다. 벌레가 티끌보다는 낫습니다. 티끌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랑하는 존재도 아니고 인식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감각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그냥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 중에서도 가장 부피와 크기가 없는, 그러면서도 인간의 눈에 띄는 존재가 티끌입니다. 진토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피조물과 구분된 하나님의 초월성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죄가 있어서 그렇게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묵상해보면 누구나 다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충만한 신자들, 다윗이 고백했듯이 ‘주께서 밤새도록 내 안에 죄들을 찾으려하셨으나 발견하지 못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신자들이라도 밤하늘에 빛나는 별 아래 서면 자기가 티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거룩에 대한 인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진토에 붙었다’는 의미는 합일되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진토와 똑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완전하심을 보니까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불결한 인간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 티끌과 같이 자기를 취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은 전혀 틀립니다. 성경에서 보면 한 사람의 많은 재산 혹은 권세, 아름다움, 때로는 힘 그 자체를 영광이라고 합니다. 히브리말로 ‘카베드’라는 동사에서 온 ‘카보드’인데, 무겁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 자체를 영광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일반적인 의미는 그 영광을 소유한 존재에 대해서 밖에 있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그것이 그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효과를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달의 영광이라고 하면 그 달을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 달을 달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독특한 효과, 그것이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무엇일까요? 하나님이외의 모든 인간과 만물로 하여금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하나님 자신에게서 비치는 효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의 영광은 여러분 각자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여러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어주는 그 효과입니다. 그런데 그 있어야할 자리가 어디입니까? 여기에서 영광의 신학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과 모든 만물이 돌아가야 할 영광은 창조 때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다른 영광을 가지고, 다른 영광을 찾고, 다른 영광을 바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악입니다.
그 처음 영광은 하나님이 각 사람을 이 세상에 창조하셨는데 그것 하나하나가 다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달은 달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 영광을, 별은 별이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는 그 영광을, 들풀은 들풀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영광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람은 사람이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아주 강한 굴복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광입니다.
그런데 또 그것이 사람마다 다 틀립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과 저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 두신 자리가 틀리고 움직이는 기능이 틀립니다. 하늘에 떠있는 별들이 많이 있지만 그 별들의 위치가 틀리고 밝기가 틀리고 다른 항성에 미치는 영향이 다 다르듯이 똑같이 흙으로 만든 사람이지만 다 두신 자리가 틀립니다. 그래서 한사람 한사람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이미 창조의 디자인 속에 다 배치하신 것입니다. 창세전에 한사람 한사람을 다 기억하시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거기에서 각자 개별적인 존재의 영광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존재가 그 존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영적인 끈으로 연결되어서 하나하나가 영광을 발하지만, 그 영광은 궁극적인 한 영광을 찬란하게 드러내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것은 그 영광을 다시 온 땅에 가득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창조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그 영적인 연결 속에서 빛을 발하던 그 찬란한 존재의 영광을 발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뜻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이 연결들이 모두 파괴되고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의 찬란한 영광이 현저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을 보면서,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면서도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창조 주로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세계도 망가졌고 우리 지성도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한사람 한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주어서 그 자리를 찾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있는 영광을 버려야할 때도 있습니다.
(예화: 잘 나가는 안과 의사였던 몽골 선교사 이야기-거기가 자신을 창조하신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세상의 영광을 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는 진토와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시지만 당신 자신의 영광보다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야고보를 단칼에 죽인 헤롯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으려고 하니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탁월한 열심은 인간으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그 위대함이 그 영광의 열심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열심을 내실수록 행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생의 모든 목적이 그분의 계획안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고자 하는 삶의 방향과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완벽하게 합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때로는 심판하시는데 그 안에서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원래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충족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하나님만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런 점에서 -죄송스러운 표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자충족적 사랑이고 우리들이 흔히 쓰는 말로 말하자면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자기 충족적 사랑은 하나님의,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 자신을 위한,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인데, 그 사랑이 결국은 우리에게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우주가 창조된 것이 146억 년 전이라고 보고 창조될 때 이 우주의 크기는 원자 정도의 크기였다고 봅니다. 폭발하면서 우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960억 광년이나 되는 우주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금도 팽창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 뭐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의한, 하나님 자신을 위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할 때 그 하나님 안에 모든 우주와 세계와 인간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면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고 마음속에 가져야 될 사랑이 영원 전에 성삼위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 가지셨던 그 자충족적 사랑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지순의 사랑,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충만해지게 되면 -문학적 표현이니 잘 이해하십시오-하나님이 더더욱 이기적이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시옵소서. 하나님 자신만을 위해 역사 하시옵소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이 그 안에 있습니다.
오늘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진토와 같아졌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은혜 가운데 있었던 영혼이 그 아름다운 위치를 상실하고 그 가지고 있었던 탁월함을 상실하고 그 존재를 통해서 드러나던 자신의 영광, 곧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추던 그 영광이 마음속에서, 그 존재 속에서 사라져서 한없이 비참하게 된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채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인간에 합당하도록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에게 합당한 생각은 맨 처음 하나님이 자기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을 기억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찬양)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그 소망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 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 방향으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 주님이 우리를 참으로 거기 있게 하시고 싶어 하시는 그 자리에 그 존재로 남기 위해서 피 흘리기까지 분투하는 사람,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산들이 뛰놀며 바다가 뒤집혀 온 땅이 그 파도에 엄몰할지라도 그 속에서 지존하신 여호와의 영광을 봅니다. 온 땅 가득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항상 기쁨만이 있습니다. 그 시련과 환란을 통해서도 아프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자기의 자리에 놓으신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는 악이 이기는 것 같고, 잠깐 동안은 사특한 자들이 승리하는 것 같고, 잠시는 하나님의 법이 이 세상의 법에 패하는 것 같지만, 결국 만사는 그 지존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심의 물결 속에 삼켜지고 다시 바다는 잔잔해집니다. 그리고 대양처럼 주님의 그 모든 만드신 세계는 그분의 뜻을 고요히 드러냅니다.
오늘 이 시인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불결과 죄악으로 인해서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같이 그 본래적인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깊이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비추이는 효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비추는 이 빛의 효과는 영광의 빛의 효과이니 이 영광의 빛은 그 빛을 받은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보도록 만들어줍니다.
고린도서에서 사도는 이것을 ‘영광의 복음의 광채’라고 말했는데 이렇게 이르는 것은 그 영광의 빛이 인간 영혼의 지성에 비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빛이라는 표현을 썼고, 그것을 또 영광의 빛이라고 표현한 것은 지성에 비추는 빛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본성의 빛, 자연의 빛과는 달리 그 지성을 압도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압도되는 빛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천한 영혼의 상태에 있는지를 깊이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내 영혼은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깊은 통회가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영광의 하나님이 이렇게 죄와 허물로 인해서 쓰레기같이 진토가 되어버린 이 비천한 인간을 향해서 여전히 사랑하시고 여전히 긍휼히 여기시고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들을 그 가장 아름다운 창조의 영광을 발하는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참된 행복은 얼마나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상태에서 사느냐, 심지어는 내 인생에 어떤 꿈이 있고 그것을 찾아서 매진하며 사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아름다움을 묵상하고 자신이 그 창조세계의 전부는 아니지만 진토와 같이 아무 가치가 없어 보이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자기의 존재가 하나님이 꼭 필요해서 만드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거기가 어디인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존재가 끊임없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모든 계획에 자기 인생의 목표를 합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완전히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으로 보면 그는 하찮은 사람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앞에 큰 사람이 큰 사람이지 세상의 눈앞에 큰 사람이 큰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자리로 돌아가고 이런 자리에서 창조의 영광을 묵상하면서 살아가면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 그 자체로 충분히 만족하게 됩니다.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꽃처럼 향기 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주님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나머지는 모두 지나갑니다. 태어나고 부패하고 소멸되고 잊혀지고 또 다시 태어나고 부패하고 소멸되고 잊혀집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들이 영원을 향해서 깊이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시인에게 이런 마음이 꽉 찼을 때 시인은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높고 위대하심, 온 세계와 온 땅 아래 가득한 창조주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과 자비, 긍휼을 어디에서든지 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할 때에는 이 시인도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불평을 털어놓기도 하고 감히 절망을 말하기도 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박멸해주시도록 가시 돋친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참된 행복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이 참된 행복이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말아야 할텐데 환경과 여건의 변화, 심지어는 내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라도 흔들리지 않는 행복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 그런 행복일 수 있을까요?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진토에 떨어진 것과 같은 영혼의 상태에서 주님의 은혜를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사경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을 위한 은혜일까요? 혹시 우리의 은혜가 땅에 있는 것들만을 위한 은혜가 아닐까요? 그래서 항상 요동치고 흔들리는 마음을 상황에 묶어두려고 해보지만 상황이 마음을 묶고 함께 말처럼 달려갈 때 그때 우리는 이상하게 마음의 모든 평화를 잃어버립니다.
(찬양)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하나님의 이 불변하시는 성품은 당신의 진리를 통해 가장 잘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열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온 뜻으로 성령의 은혜, 충만한 성령의 사랑, 성령의 부어주시는 특별한 은총을 갈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가장 잘 깨닫도록 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충만한 성령의 은혜가 내 마음 가득 임할 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주님이 내 안에 성령으로 살아계실 때 그때 진리를 가장 잘 인식하게 됩니다. 그 진리와 함께라면 외로운 길이 없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그 진리가 삶 이편에서 발견될 때에는 그 진리와 함께 살아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 진리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죽음의 땅에 존재할 때에는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붙들면서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 시인은 이러한 이치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진토에 붙은 것처럼 되었으니까 소성하게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히브리말로는 이렇게 복잡한 단어가 아니라 ‘하야’라는 단어입니다. ‘하야’는 ‘to be(존재하다)’ ‘to live(살다)’ ‘to become(되다)’의 뜻입니다. 그냥 ‘나로 하여금 살게 해 주십시오’의 뜻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빛줄기 같은 아주 뚜렷한 성경의 인식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그 은혜의 빛, 그 영광의 빛의 비춤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영광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는 죽은 자입니다. 시인은 어느 시편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살아있는 자의 땅에 있습니다’ 한 것입니다.
요즘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거의 하루도 예외 없이 가슴에 밀려오는 뼈저린 아픔이 있습니다. 그렇게 오래 인생을 살았는데 죽어있는 채로 산 날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육신은 고달프고, 마음은 분주하고, 심장은 무엇을 향한 열정으로 박동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죽은 자로서 산 날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떻게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시인이 오늘 고백합니다.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과 같을 때에는 자신의 영혼이 죽었다고 여깁니다. 직역하자면 ‘내 영혼이 티끌과 하나가 되었으니 내가 살아있게 해주십시오’입니다.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인식하고, 인식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고, 그래서 살아있어야지만 창조의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데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조금씩이라도 날마다 주께로 가까이, 지금은 부족하나 그분의 뜻 가운데로 가까이 가까이, 그렇게 가기 위해서는 살아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이 주안에 있는 행복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크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가 크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계는 하나님이 만드신 아주 작은 작품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계 안에 있기 위해서 하나님 안에 있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에게는 세계가 있는 것도 세계가 없는 것도, 삶 가운데 있는 것도 그것을 넘어서 죽음 가운데 있는 것도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은혜를 통해서 이 땅에 있는 것들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지정된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출렁거리고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평정의 정체는 질서의 평정입니다. 사랑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지 말 것을 사랑하지 말고 미워할 것을 미워하고 위하여 울어야할 것을 위해서 울고 인해서 기뻐해야할 것을 인해서 기뻐하고 하면서 주님의 분신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빛 아래서 나머지 모든 것들이 보입니다.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돌보며 살아야 할지 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이 살아야 합니다.
그 영혼을 살리는 힘이 무엇일까요? 지금 시인이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내 영혼을 소성시켜주시라고 기도할 때 그가 무엇을 통해서 영혼이 소생하기를 간구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시인은 아주 생애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에도 유혹을 받을 때에도 어떤 상황이든지간에 자신의 영혼을 살리는 힘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눈을 들어서 주위를 살펴보면 사람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헛된 것을 찾습니다. 그의 영혼의 곤고함과 마음의 깊은 고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고, 해결되는 방식은 그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뼛속까지 가득한 상태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살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대를 못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운명적으로 곤고함과 친구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하나님이 하늘을 활짝 여시고 은혜와 그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의 마음을 폭포수처럼 부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사람 한 사람의 눈을 제가 뜨게 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의 눈을 뜨게 하겠지만 그렇게 죄인들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활짝 여시고 아무리 눈이 어두운 죄인도 부인할 수 없는 영광의 찬란한 빛이 그들에게 가득 비쳐서 온 세상에 안 계신 곳이 없이 당신 자신의 있으므로 충만한 세상에서 그의 영광을 가득 채우신 것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바깥에서는 아무 행복이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실험을 해봐도 결론은 이 한마디로 모두 모아집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행복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바깥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모든 길을 하나님이 봉쇄하셨습니다. “이에 사람들을 내어쫒고 동산 주위에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시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이 행복에 들어올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욕망, 놓지 못하는 사악한 탐심, 이런 것들로 뒤엉킨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받아서 이런 것들을 성취해보려고 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모자라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속에서 다 덜어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은혜의 자극이 있어도 뜨물통에 생수를 붇는 것처럼 대부분의 말씀의 은혜들이 표피적인 정서의 체험으로 끝납니다. 그러니 다 토해내야 합니다.
18세기의 위대한 인물 조나단 에드워즈가 하나님 앞에 늘 드리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 백성들의 두 가지 죄악을 용서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을 용서해주시옵소서’ 모두 버리십시오. 그리고 정말 ‘저는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며 살고 싶습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외양간에 송아지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무화과나무가 결실치 못하고, 아무 것도 없어도 나는 오직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겠습니다. 주님, 충분합니다’ 고백하게 될 때 우리는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 눈의 어두운 비늘을 벗기시고 보게 하시는 주님의 영광이 얼마나 많은 방해를 통해서 우리의 지성 속에 들어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온 땅과 하늘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아직까지도 탐욕이 우리 안에 남아있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세상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우리 눈의 비늘을 벗기시면 그 타락한 세상, 저주받은 땅과 하늘, 그리고 망가진 지성을 찢고서라도 희미한 빛이나마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아름다워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도베드로는 자신의 글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모든 지성의 눈멂을 벗고 영혼의 어두움에서 헤어 나와 온 땅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마주대하게 될 그 그리스도의 영광은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지금은 비록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때는 찬란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잠세계적인 것들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변전하는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며 그것을 묵상하게 하는 도구인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늘 생명으로 충만하게 유지하며 그 거룩한 묵상 속에 살았던 성도들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었는지 그때 깨닫게 될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은혜 받으십시오. 그리고 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눈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 마음, 그래서 시인이 오늘도 자신의 영혼을 살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왕국도 이 세상의 꿈과 소망도 미래의 비전도 소유도 장래도 모든 것을 가져가셔도 오늘 한 가지 소원을 들어달라고 어린 아이처럼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살려 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에 나와 있는 ‘아파르’를 재위에 앉아서 회개할 때 흩날리는 티끌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지금 이 시인이 재위에 엎드려서 옷을 찢으면서 참회하고 있는 그 참회 속에서 경험된 시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영혼이 살아있기를 싫어하는 사람 손들어보십시오. 한 손으로 피 흘리는 악인들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영혼은 살아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원과 고백의 기도는 자기가 그 기도에 어울리는 자리에 있어야지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불완전한 세상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참회입니다. 오늘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제 질문에 대답해보십시오. 은혜 많이 받으셨지요? 진리의 빛도 많이 받았지요? 한상에 한 식구처럼 먹으면서 긴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회하시나요?
(찬양)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예레미야 애가에 나오는 노래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되었기 때문에 선지자는 미친 사람처럼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에카’하고 시작합니다. ‘아 슬프도다’입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파괴되어서 파멸되어버린 나라, 이제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도록 다 부서져버린 나라인데 이 절망의 선지자가 거기에서 희망을 노래합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인자하신 주님’ 어떻게 그것을 볼 수 있었습니까? 끊임없이 아침마다 흐르는 눈물이 그 비참한 절망의 상황이 자신의 마음속에 가져다주는 표상을 지워버리고 하나님의 계획의 실재를 보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비참하게 파괴된 재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괴된 잿더미 위에서 일어나서 주의 성실하심이 아침마다 새롭다고 노래합니다. 두 눈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참회합니까? 주님이 교회에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참회의 은혜입니다. 너무나 크고 중요하고 죽을 것처럼 괴롭게 만들던 문제들도 이상하게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나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문제로 전락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참회의 눈물이 없으니까 우리의 인식에 그릇된 표상들이 맺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 어마어마한 중요한 일인 것처럼 떠오릅니다. 사소한 일인데 큰일처럼 떠올라서 그것 때문에 죽을 듯이 살듯이 마음이 요동치는 것입니다. 참회하십시오. 참회하지 않는 신자는 나쁜 신자입니다. 마음이 굳어져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주님이 우리의 심장을 그분의 손으로 끄집어내서 그분의 눈물에 씻어서 우리의 가슴에 다시 넣어주셔야 합니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할 수 있으면 하루 세 번씩 참회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은혜를 받으십시오.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 편이라면 이 세상에 나쁜 일은 없습니다. 원수나 나를 미워하는 자나 환난이나 핍박도 결국은 좋은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문제는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요한 마음을 다 털고 영혼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여러분들을 만나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