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 13-1과
녹취자 : 장주은
자, 13-1과 <신학과 존재의 울림 1>입니다. 13과가 워낙 길어서 이렇게 1, 2로 나누어 만들었습니다. (신나가 총) 15과인데 0과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17주에 걸쳐서 이 공과가 진행될 것입니다. 1번 문제입니다. 같이 읽으니까 힘들지요? 1분단만 읽어봅시다. 1번 문제 시작.
문제 1)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데, 그와 관련하여 구분되는 세 부류의 인간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들은 어떤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나누어 봅시다.
책을 읽으면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이 얘기를 하기 전에) 제가 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순이나 구역 모임에서) 구역장님들이 말하는 것은 전체 공부 시간의 30%를 넘으면 안됩니다. 구역원들 속에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꺼내도록, 힘든 이야기도 꺼내놓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도 꺼내 놓도록 하는 것입니다. 공과공부 시간이 아니라 마치 학원 강의 시간 같다고 하는 불평들이 가끔 들어옵니다. 그래서 구역모임에 안 나간답니다. 왜 그러냐면 (모임에) 가면 꼭 학원 가는 것 같답니다. (구역장이) 아는 것은 많아서 자기들을 보고 그냥 과외공부 시키듯이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꾸 도망가고 싶답니다. 구역장들은 그 사람이 신앙이 없어서 도망간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리더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습도 못해옵니다. 그러면 자꾸 바깥으로 밀려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다가 평소에 별로 공부 안하고 삽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안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어디가든지 늘 자랑하는 분들입니다.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왔다’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전 어디 가서든 그렇게 자랑합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이 책이 구역공과라고 하니까 신학교에서 다들 뒤로 뒤집어졌습니다. (나아가) 이 책 목차만 가지고 가르칠 수 있는 인력이 우리교회에 한 400명 쯤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증인들입니다. 진짜입니다. 크게 웃으시는 분들은 아닌 것 같고 다른 분들은 대부분 그렇습니다.
한 10여 년 전인데 영국에서 막 공부하고 온 청교도를 전공한 친구가 우연히 ‘사랑의 교회’ 기도원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교회가 수련회를 왔더랍니다. 그래서 그냥 목사가 아닌 척 하고 순에 들어갔답니다. 거기 사람들이 그냥 순원인줄 알고 이름도 나누고 이야기를 했는데 장년과 청년이 섞인 순에 30대 초반의 청년이 리더였답니다. 그 때의 주제가 마음지킴의 교리였습니다. 그것을 쫙 가르치는데 자기가 청교도를 전공하고 왔는데도 너무 은혜를 받고 놀란 것입니다. 어떻게 평신도가 저렇게 잘 가르칠 수 있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책을 주의 깊게 읽고 마치 신천지처럼 그렇게 활동하는 것입니다. 신천지 교인들을 이렇게 모아놓고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왔다’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천지 다니는 교인들을 불러내서 밥도 사주고 거기 가지 말고 얘기해주고, 안 믿는 사람 집단 속에도 살며시 들어가서 하나씩 둘씩 불러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보다 더 무지한 사람들인데도 그렇게 잘하는데 (여러분은) 왜 못하겠습니까?
(요약하자면 구역원들에게) 이야기 할 시간을 많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규모가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잘 끊는 것들은 자꾸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부드럽게 말입니다. 끝날 때 ‘우리 형제님에게 마지막으로 말하실 수 있는 시간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고 마지막에 1분정도 주고, 기도하고 (맺으면 됩니다). 모르는 것을 질문하면 ‘나중에 끝 시간에 질문을 받겠습니다.’라고 하고, 마지막에 질문하면 ‘어, 시간이 다됐네요, 다음 주에 가르쳐드리겠습니다.’라고 한 뒤, (주중에 교역자에게 물어보고 다음 시간에 답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지혜롭게 하십시오.
그럼 (1번 문제의 답은) 무엇일까요? 세 부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행복한 삶’(De beata vita)이라는 책에 나오는 것인데, 회심하고 나서 금방 쓴 초창기 작품이었습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아마 도서관 어디를 뒤지면 번역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영어 번역본도 있습니다. 라틴어는 읽기가 불편하니까.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행복에 이르는 길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즘은 이것 말고 하나 더 추가해야 합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좀 낫습니다. 완전히 그 길이 아닌데 그것이 맞다고 확신에 불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굉장히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천지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줘야 합니다. 우리교회에도 분명히 와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설교만 잘 듣고, 여러분들처럼 성경공부 잘 들으면 변화 될 텐데 말입니다. 그렇지요? 비진리도 그렇게 힘이 있는데 진리는 얼마나 더 힘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천지에서) 막 온 사람마다 계속 변화되어서 장로교인이 된다고 하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어쨌든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았지만 미끄러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 다음 세 번째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았고 굳세게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이 누구인지를 구역 식구들에게 보여주려고 구역장이 된 것입니다. 안 웃으시는 것 보니까 굉장히 심각해 지셨습니다. 찔리죠.
그러면 이 사람에게 가르쳐야 할 세 가지가 무엇이겠습니까. 누구든지 간에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제일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그 진리에 합당한 생활로 돌아가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한번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갔는데 그 길을 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깥에도 있고 내 안에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과 어떻게 해서 싸워가면서 그 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확고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것을 한번 보십시오. 인생을 어떻게 걸어가야 될지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진리는 여러분들이 열심히 하는데도 열매가 없을 때 자기를 돌아보면서 왜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돌보는 사역에 열매를 안주실까와 같은 것들을 고민하게 만듭니다. 고민하지 않으면 그것은 목양자로서의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어차피 진리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진리가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진리로 붙잡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소유한 자는 확신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둠 속에 있다면 진리는 어둠 속에 뻗치는 팔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붙잡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을 오래도록 기다리던 사람, 하나님이 그렇게 진리를 만나게 해주고자 하는 사람은 그 손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둠에서 헤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에 가르쳐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런 식으로 설교했습니다. ‘아주 지혜롭게 진리를 가르쳐도 그것이 모든 사람 속에서 믿음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진리 없이는 믿음은 생겨나지 않는다’라고 말입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듣는다는 것은 들려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읽는 데서는 안 나옵니까? 아닙니다. 듣는다는 것은 아코에(ἀκοή)라는 헬라어 단어인데, 히브리어로는 쉐마()입니다. 듣는 태도 자체에서 쉐마가 나오는 것입니다. ‘너희는 들으라’ 이것이 쉐마입니다. 거기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쭉 기울이면서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거기에서 믿음이 생겨난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평소에 잘 하셔야 합니다. 따뜻한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리더는 따뜻해야 합니다. 이미 교회를 떠나간 구역원들이 구역장의 사랑을 못 잊어 연락을 하고 보고싶어 합니다. 떠나간 교회에서 그 사랑을 못받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지요? 아멘.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 문제 2. 2분단만 읽어봅시다. 시작.
문제 2) 세상을 향한 기독교의 힘은 ( )의 힘과 ( )의 힘인데, 이 둘은 신자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세상에 나타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 )이다.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서로 나누어 봅시다.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맞추어 토론해 봅시다.
기독교의 힘, 두 가지가 무슨 힘이라고 하였습니까?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각자 추구하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것인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가시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는 말하고 글 쓰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완전히 모르지만 대략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시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은혜는 어떻습니까? 은혜의 결과는 사람들에게 보이지만 은혜의 열매는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은혜를 많이 받으면 무엇이 많이 생긴다고 하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은혜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강해에서 수없이 이야기했습니다. 은혜의 결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은혜는 거룩한 사랑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은혜는 경건한 정동을 불러오고 경건한 정동의 반복은 사랑이 깊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남녀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봤을 때에는 ‘에이, 생긴 것도 못생기고 능력도 없으면서 나 같은 사람한테 대시를 하나’하고 자매가 짜증이 났습니다. 집에 가서 거울을 보는데 자기가 그 사람에게 시집가면 밑지는 장사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늘 찾아옵니다. 그리고 자매에게 감동을 줍니다. 처음에는 그 감동도 별로 성에 차지 않았는데 계속해서 감동을 주니, 조금씩 마음이 출렁거립니다. 그 다음에는 계속 마음이 출렁거립니다. (남녀 간의 연애에서) 시간을 오래 끌면 남자한테 유리합니다. 왜냐하면 자매들이 나이를 먹기 때문입니다. 점점 찾아오는 사람, 쳐다보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아마도 한 10년만 기다리면 그 자매를 독점할 확률이 높습니다. 여하튼 출렁출렁 거리는 마음의 정동이 반복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은혜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라고 하는 것은 보이는 영역이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신비입니다. 이 사실이 이 책의 절반 이상의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을 상세하게 풀어서 쓴 것이 이 책입니다. 지난 번에 공부한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이라는 책은 2주 만에 집필을 끝냈지만 사실은 피를 토하듯이 쓴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이 많이 안 읽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공과공부를 했지만 성도님들이 얼마나 이해했을까 싶습니다. 오늘 이 정도의 설명을 들으셨으니까『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다시 한번 펼쳐서 차분히 읽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가슴에 다가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힘은 무엇이냐 하면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사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집니까? 성경과 신학과 다른 모든 학문적인 지식을 통해서 이뤄지는데, 이것들이 동등하게 결합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고 다른 학문들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다른 학문들을 이해하고 있으면 신학이 더 풍부하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면서 확고한 사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읽고 신학을 이해하고, 학문을 이성으로 잘 받아들이고, 그것 모두를 성경 아래에 두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성 아래에 두면 안 됩니다. 성경의 내용을 진리라고 아멘 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떤지 아십니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안 믿습니다.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가 아주 다릅니다. 예를 들자면 칼 바르트 같은 신정통파에서는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경을 보는 견해가 달라졌는데, 성경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고 봅니다. 성령이 역사하셔서 무엇인가 나의 실존에 대해서 말을 걸어오면 거기에는 소위 조우(encounter)가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굉장히 주관적입니다. 그 전에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을 부인한 것과 비교해보면 그래도 높이 살만 합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가 쓴 <로마서 주석>을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고 비유를 했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칼 바르트는 예수 연구, 자유주의적 비평적 연구에 관심을 쏟던 당시 서구 신학을 성경으로 돌아오게 한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거기서 이야기하는 성경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 오늘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고백하는 그런 믿음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흔히 접하는 알리스터 맥그래스(A. McGrath), 데이비드 베빙턴(D. Bebbington), 브루스 윌키(B. Waltke), 마크 놀(M. Noll) 등의 사람들이 상당한 업적을 이루고 있고, 기독교를 위해서 상당히 많이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영감된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아닙니다. 그 점에서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무시하지는 않지만 성경에 대한 생각이 도전을 받고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그런 교리를 배우지 않아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깊이 믿습니다.
어렸을 적 교회 다닐 때에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대단했습니다. 찬송가를 성경 위에 두지를 않았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십니까? 찬송가를 성경 위에 올려놓는 법이 없었습니다. 요새는 저는 그냥 찬송가를 성경 위에 올려놓습니다. 성경책은 두껍고 찬송가는 얇으니까 그냥 성경 위에 올려둡니다. 하지만 그 옛날에는 성경 위에 어떤 책이나 물건을 올려놓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생각들이 굉장히 약화되었습니다. 여하튼 성경을 꾸준히 읽으면서 거기서 주님을 늘 만나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엄청난 하늘의 자원들을 공급받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다음에 신학과 일반 학문들을 공부해 가면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삶의 전 방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향하는 것입니다. 내년 상반기에 제가 안식의 시간을 조금 갖고 재충전을 한 다음에 돌아오면 여러분들을 더 말씀에 단련된 사람들로 인도해 주고 싶습니다.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방법으로 여러분을 격려를 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더 느끼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고 싶습니다. 아멘.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지.
사상은 지성과 관련이 되고 윤리는 행실과 관련이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다른 사람한테 착한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보여주기 위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주장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서 자기는 잊히고 주님의 가르침이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이번에 터키 에르도안 사태가 일어났는데, 쿠데타를 일으켰던 사람으로 페툴라 귤렌(Fethullah Gulen)이라는 사람이 지목되었습니다. 중동 지역에서 온 분들에게 물어보니까 그럴 가능성이 없고 의도적인 정치적인 박해일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페툴라 귤렌을 찾아 보십시오. 굉장한 사람입니다. 어느 교수님이 제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김 목사님이 이 시대의 페툴라 귤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전까지는 제가 페툴라 귤렌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그분은 칭찬으로 제게 한 말이었지만 그 인물을 알고보니 제가 너무 창피했습니다. 여러 해 전의 일이었습니다. 여하튼 참 어마어마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존재의 울림이 있는 이슬람 교도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놀랍습니다. 그 사람은 IS와 같은 그런 사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고가 대단히 유연합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는 폭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모든 학문과 모든 지식을 알라를 찬송하는 일에 사용하자. 그리고 우리는 욕심도 없이 이름 없이 우리가 여기 서있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하자. 돈 벌어서 남 주고, 재산을 획득해서 알라를 위해서 사용하자. 그리고 자기는 검소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지금 터키의 장관을 비롯해서 군의 수뇌부들이 페툴라 귤렌의 제자들입니다. 지금 73세 쯤 되었는데 우리로 말하자면 누구와 비견될 수 있을까요? 이 시대의 기독교의 칼빈 같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굉장합니다. 그는 어린 아이 적부터 교육에 눈을 떴습니다. 우리 교회 제직회에서도 핵심 사역 다섯 가지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다섯 번째 이야기 한 것이 자라나는 세대에 대한 교육이었습니다. 교육을 잘해야 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교육을 잘하고-그 안에 회심도 포함됨-, 그들을 지도할 수 있는 좋은 목회자를 길러내는 것, 이 두 가지만 잘하면 사실 다음 세대가 어떤 개판치는 시대가 되어도 사람들은 믿음을 버리지 않고 살아남습니다. 교육이 잘 된 자라난 세대, 그들을 능히 거룩한 학문과 신앙으로 목양할 수 있는 실력 있고 신령한 목회자, 이 두 기둥만 있으면 나라가 어찌되었든 상관없습니다. 이처럼 귤렌도 그런 생각을 한 사람입니다. 자본가들은 이슬람 국가들이 돈을 긁어모은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냥 돈을 찍어내다시피 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돈을 쓰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 부귀영화에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알라를 위해 존재의 울림이 있는 이슬람 교도가 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에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 삽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번에도 천안에 갔더니 학교에서 특강을 했다고 선물을 하나 주셨습니다. 사례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호두과자였습니다. 호두과자의 원조는 -방송에 나오면 안되니까- ㅇㅇ당이 원조입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주신 호두과자는 000 할머니 호두과자였습니다. 왜 이것을 주냐고 물었더니 그 할머니가 호두과자를 팔아서 40여개의 교회를 세웠답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그런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귤렌과 그의 제자들이 그렇게 사니까 사람들이 그 이슬람들이 너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IS나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이교도들도 그러한 생각과 삶을 사는데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윤리의 행실입니다. (거기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힘입니다. 그 누구도 꺾을 수가 없습니다.
자 문제 3, 3분단이 제일 많네요. 우렁찬 목소리를 기대합니다.
문제 3) 특히 본 과에서 저자가 오늘날의 개신교회의 현실과 관련하여 크게 개탄하고 있는 점은 무엇입니까?
개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상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장중한 전통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그냥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실 조금만 공부를 하고 사고력이 있는 사람들은 요즘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굉장히 힘들다고 합니다. 주한 미국 대사 마크 리퍼트가 칼에 찔렸다고 위로한답시고 회복기원 집회를 열면서 춤을 추고 했는데, 기독교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 그들에게 사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사상이라는 것은 집과 같습니다. 그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공산주의식으로 모든 것을 해석합니다.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자유주의적으로 생각합니다. 신비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은 공부하다가 전기가 나가도 이게 신비한 힘이 작용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슨 신비가 거기에 있겠습니까? 전원이 떨어졌으니까 꺼졌겠지요.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사상의 힘으로서 무엇을 믿는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식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이것입니다. 14살 2개월이 되었을 때에 논둑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난 어떻게 살아야 되나, 이 세계는 무엇인가, 신은 진짜 살아있나’라고 질문하는 저 같은 사람들에게 답을 해 주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 안에서 집을 짓고 그 집 안에 들어가서 ‘아 이런 거였구나, 아멘’하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교육을 체계적으로 안 받으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전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교육을 받고 알고 있어도 그것이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 충만한 삶을 살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좀 전에 얘기했듯이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면, 그 길을 몰라서 헤매는 사람이나, 알긴 하지만 그대로 살고 싶지 않아서 미끄러지는 사람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어쩌면 두 번째 사람의 결과가 더 비참한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전혀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을 모르는 사람은 그냥 행복한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 대체 무엇입니까? 진리를 아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견고한 사상을 가지고 성경의 관점에서 관계를 맺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세계와 관계를 맺고 이웃과 관계를 맺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세계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연하고도 관계가 됩니다. 기독교인은 자연에 대해서도 적절한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원을 너무 낭비하고 삽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심각성을 느끼면서 하나님이 주신 이 세계를 어떻게 보호하며 살아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나’라는 한 인간이 태어나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 뿐 아니라 이웃들, 그리고 심지어는 풀포기 하나, 공중에 떠다니는 구름 하나도 나 때문에 유익을 얻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 목양을 한다고 하는 것은 신자들의 삶을 사상 위에 두도록 돕는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 위에, 모든 지식을 삶으로 나타나게.’ 쓰십시오. 연필 가지고 뭐하겠습니까? 쓰십시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왜 그런 삶을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근거를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지식은 삶과 연관되니 그것이 삶 속에 적용되어서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왜 그런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상은 체계화 된 신념과 지식입니다. 절대적인 지식의 양 뿐만 아니라 구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렇게 집을 지을 때 비로소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예전의 우리 교회의 모습 기억하시지요?) 아주 나지막한 건물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뼈대만을 두고 새로운 건물을 올리려고 하니까 지반이 약해서 땅을 파서 콘크리트를 집어넣고 철근을 보강하여 진도 6 정도에도 안 무너지는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 이상의 지진이 일어나면 안전을 보장 못하지만, 진도 6까지는 안 흔들리게 내진 설계해서 지었습니다. (이 낮은 건물도 그렇게 꼼꼼하게 지어야 하는데) 높이 지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튼튼하게 하기 위해 수학적으로 정확한 계산이 나와야 합니다. (사상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지성적인 사고가 매우 빈약합니다. 복음주의 전통을 개혁주의자들에게서 차근차근히 배우지를 않고 18세기 미국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 같은 것에 영향을 받으면서 배우다보니 아주 천박하고 가벼워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상과 삶은 굉장히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싫어할지도 모르겠지만, 자주 보지 않는 텔레비전을 가끔씩 켜 봅니다. 불교방송이 나오는데, 언제나 교리강의가 이뤄집니다. 깊이도 있습니다. 머리를 빡빡 깎은 할아버지가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유창하지도, 가슴에 확 와 닿지도 않습니다. 목사가 불교방송을 들으면서 그렇게 되어도 좀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좀 갑갑하긴 해도 뭔가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심오하게 풀어내는 감은 있습니다. 천주교 방송은 틀면 언제나 드는 생각이 참 착합니다. 이웃을 도와주고 모금하고 하는 선행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기독교방송은 좀 아쉬웠습니다). 한 편의 설교나 강의를 듣고 나면 유장한 사상들이 세워지면서 ‘아, 기독교도 참 깊고 심오하구나. 나도 한번 믿어봤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생기도록 해야 하는데 아쉽습니다. 구역원들에게 비치는 여러분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역예배 드릴 때에 수더분한 아줌마처럼 그냥 후줄근하게 하고 막 사는 사람처럼 해서 가시면 안 됩니다. 예쁘게 화장도 하고 자신을 가꿀 줄 아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유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구역장님을 만났더니 그냥 얘기하시는 것 같은데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지성적인 사고가 정말 깊구나, 무엇인가 저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그런 깊은 뿌리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들도록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깊은 사상의 체계를 갖추어야 합니다.
자 이제 1분단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4번. 시작.
문제 4) 마크 놀의 인용문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나누어 보고, 자신의 신앙에 대해 주는 반성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청교도들과 존 웨슬리(John Wesley),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같은 18세기 복음주의 대각성운동의 지도자들, 그리고 19세기 북미의 존경할 만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인 감리교도 프란시스 에즈버리(Francis Asbury), 장로교도 찰스 핫지(Charles Hodge), 회중교도 모세 스튜어트(Moses Stuart), 그리고 캐나다 장로교도 조지 몬로 그란트(George Monro Grant) 이들 모두는 부지런하고 엄격한 지성의 활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지성적인 활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 내지는 최선의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지성적인 삶을 믿었으며,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영적인 선조들과는 달리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 아래서 포괄적인 사고를 추구하거나, 지성의 가장 깊은 영역까지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형성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에서는 많은 내용을 다룹니다. 설명이 잘 된 책입니다. 읽어보시면 아마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도서관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빌려서 열심히 읽어 보십시오. 제 여력이 허락한다면 온 힘을 다해서 여러분들에게 기독교 역사를 좀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룹으로 모여서 토론도 하고, 이렇게 성경공부가 끝나면 가슴이 벅차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를 느끼게 해주는 그런 사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보십시오. 여기 성경이 있습니다. 이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신학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으로 사상적인 체계를 세웁니다. 이 사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먼저겠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먼저겠습니까? ‘내가 누구인가’가 더 궁금할 것입니다. 그래야지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오겠지요.
회심하기 전에 제가 한동안 빠졌던 것이 ‘자살’이라는 주제였습니다. 헤르만 헤세 같은 사람은 자살을 칭송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연애를 권장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았습니다. 사랑에 빠져서 행복을 누리다가 죽어버리는 것이 최선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염세적 연애지상주의 같은 - 그 옛날에 윤심덕 같은 사람이 빠졌던 사상이 그런 것임- 생각들입니다. 현실이 너무 암울하니까 그렇게 사랑에 푹 매몰해서 사랑타령 하다가 죽어버리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이 세계는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인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남이 어떻게 생각하겠어?’라는 생각도 필요하겠지만 고작해야 그것이 전부라면 그것이 자기 인생이 아닙니다. 자기가 깊이 동의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답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을 기초로 한 토대와 사상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을 이해하고 신학으로 사상의 체계를 세우고 구체적인 윤리적 행동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 모든 것이 그냥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밑바탕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입니다. 5번. 시작.
문제 5) 우리의 신학공부에 있어서 성경읽기와 묵상의 중요성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특히 설교에 은혜 받는 것과 성경 읽기에 관해 본인이 경험한 것을 이야기해 봅시다.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구역에 누가 있겠습니까?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에게 너무 강요하지는 마십시오. 나눌 사람이 있으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그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가면서 나누어 봅시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은 은혜롭게 맺으십시오. 예배시간에 정신 차리고 설교를 듣자. 매일 매일 성경을 한 장씩이라도 읽자. 읽을 때 내가 성경을 읽는다는 마음을 갖지 말고 성경이 나를 읽게 하자. 그래서 조금이라도 은혜를 받자. 이렇게 다짐을 하면서 은혜롭게 탁 끝내는 것입니다. 그 때에 지혜로운 구역장이라면 백금산 목사가 쓴 <성경 어떻게 일을 것인가>와 같은 소책자를 준비했다가 예쁘게 포장해서 한 권씩 나눠주면서 ‘선물이에요 꼭 읽어보세요.’하겠지요. 더 재밌게 하려면 선물 하나에만 어떤 표시를 해서 나눠주기 전에 ‘뒤에 표시된 선물에 걸리는 사람은 다음 주에 구역공부 요약해 와야 돼요.’라고 (게임처럼) 돌리든지, 선물 하나에만 몰래 문화상품권을 넣어서 나눠 준 후 모두 포장지를 뜯어보게 한 후 그 선물이 걸리는 사람을 확인하게 한다든지 하면 좋겠지요. 지도자는 위트가 있어야 합니다. 상품권이 천 원짜리면 어떻고, 오천 원짜리면 어떻습니까? 얼마나 재밌습니까? 구역 모임에 오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아기자기하고 재미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이끌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주 기도제목 봅시다. 첫째,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게 해 주십시오. 둘째, 순원들이 말씀을 잘 읽고, 묵상하고 믿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셋째, 가을사경회를 위한 기도해 주십시오. 이 세 가지 기도제목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