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를 가르치라(2)
녹취자: 백지영
그러면 어떻게 교리교육을 교회 안에서 구체화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교리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신학입니다. 모든 철학 사상들이 각기 자기의 독특한 관점으로 세계와 인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기독교의 고유한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 세계, 인간, 이런 것들에 대한 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설명을 하게 하는 관점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교리입니다. 그래서 교리의 목적 자체는 지식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서 지식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그런 지식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만한 마음을 갖게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교리 자체는 살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살려면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해서 그 지식이 필요한 것이고, 그 삶을 위한 지식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교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제가 교리교육을 강조하니까 사람들이 가끔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교회에서 교리를 가르치다 보면 혹시 사람들이 머리만 커지는 것 아닙니까?” 제가 늘 묻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도대체 우리나라의 어느 교회가 너무 많이 가르쳐서 그 지식이 너무 많이 전달되어서 머리만 커진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교회 있으면 내가 찾아가서 배우고 싶습니다. 왜 있지도 않은 교회를 이야기하느냐는 것입니다. 지식을 너무 가르쳐서 교인들이 머리만 커진 게 현실이 아니냐고 하는데, 현실의 어디에 너무 많이 가르쳐서 머리만 커진 교회가 어느 교회입니까?
여러분, 삼위일체에 대해서 설교하신 적 있으십니까? 교인들 모아놓고 10명을 붙들고 삼위일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양태론입니다. 양태론 아니면 삼신론입니다. 왜 그렇게 무지해졌을까요? 옛날 같으면 전부 다 화형당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너무 어려운거니까 그냥 믿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는데, 뭘 믿음으로 받아들입니까? 뭘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되느냐고 물으면 말을 안 합니다.
오늘날의 설교의 심각한 문제는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합시다. 착하게 삽시다. 노숙자들을 도와줍시다. 하나님이 행복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수없이 설교를 들어도 성경을 더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설교자 자신이 성경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그 속에서 신학을 녹여내고, 그것이 설교가 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총신 어느 교수님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자기 누나가 우리 설교를 인터넷으로 듣는데 감동을 받은 게 있다고, 그게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면서 항상 설교를 시작하는데, 그 이야기를 자기는 20년 만에 처음 듣는 얘기라고 하더랍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설교를 하는 그 자체는 성경을 해석해 가는 작업이어야 하는데 설교 한편을 다 들어도 성경이 해석됐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예전에 우리 선배들은 설교를 준비하면 기본적으로 원어성경, 원어사전, 그리고 주석 이런 것들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했는데 지금을 그게 아닙니다. 심지어 누구 설교를 들으면 설교시간에 '탈칵'하니까 영상이 ‘촥’ 나오고, 어느 교회는 설교를 안 하고 아예 연극을 해버립니다. 오페라처럼. 그리고 축도하고 마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를 점점 더 병들게 만듭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들입니다. 그러면 부지런히 탐구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셔야 됩니다. 모든 교회의 이 혼란은 어디서 오느냐, 목회자들이 공부를 안 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면 가르칠 내용이 자기 안에 충분히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르칠 내용이 형성되는 것 자체가 무엇이냐 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모두스비벤디 꼬삐아도켄디” 라틴어입니다. “삶의 방식, 가르침의 풍부함”, 삶의 방식이 가르침의 풍부함을 결정한다. 더 이해하기 쉬운 말로 하면, “어떻게 사느냐가 가르칠 내용을 풍부하게 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이 “모두스비벤디”, 삶의 방식은 어디서 배우느냐 하면 성경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는 목사님은 기도에 대해서 설교할 내용이 풍부합니다. 학문이 많으면 그것을 아주 예리하고 체계적으로 정확하게 더 설득력 있게 설교할 수 있지만, 학문이 좀 모자라더라도 기도를 많이 하는 목사님은 기도하지 않는 교인을 보면 답답하고 기도란 이런 것이라고 하는 할 말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성경 읽는 것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목사님은 왜 공부를 해야 되는지 이야기할 때 풍부합니다. 늘 눈물 흘리며 전도하는 목사님은 전도 안 하는 교인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많아서 전도를 왜 해야 되는지를 이야기할 때 가르치는 내용이 풍부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는 지금 이야기한 것 수십 개 중 하나를 하도록 부른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으니, 성경을 주신 목적이 목회자를 주신 목적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주신 목적을 디모데서에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첫째는 불신자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두 번째는 이미 예수 믿은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격적으로 온전해 지고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목적으로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것이고 이 목적을 구체적으로 구현해 나가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성공이니 실패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굉장히 쑥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사업에서나 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불신자를 신자로 만드는 것도 성경, 온전하지 못한 인격을 가진 사람을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고, 모든 행하는 일에 있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도 성경, 성경을 통해서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어떤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모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는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삶의 방식이, 가르침의 풍부함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서는 기도에 대해 가르침이 풍부해야 됩니다. 전도면 전도,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면 연구, 정직이면 정직, 사랑이면 사랑, 희생이면 희생, 충성이면 충성에 대해서, 그러니까 목회자가 먼저 앞서 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결정하는 것이, 곧 삶의 방식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삶이 될 때 가르치는 내용은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신앙입니다. 그가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하면 온전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어떻게 하면 자신이 한 사람의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자기를 위해서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을 향해 온전한 삶을 살아서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이것은 전도나 기도 하나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만나는 삶의 모든 것, 인내, 자비로움, 충성, 절제, 헌신, 정결, 신앙의 정조, 모든 방면에서 그래야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여기에서 삶의 방식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칠 내용이 풍부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그냥 이런 마음이 들 것입니다. “아, 정말 이상하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 저렇게 살까? 저 사람들은 참 나쁜 사람들이구나. 저 사람들은 뭘 잘 모르는 사람들이구나. 답답하다. 차라리 내가 말을 말지.” 이것이 결론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게 지식입니다. 목사가 공부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화) 우리 교회 다니던 교인 어머님 한분이 우리나라에서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한 병원에서 수술을 했습니다. 어느 병원이라고 말은 안 하겠습니다. 그 병원의 명예가 달려있으니까. 그것도 몇 달씩 기다려서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왼쪽다리가 아파서 입원을 했는데 멀쩡한 오른쪽 다리를 수술을 한 것입니다. 지금 같았으면 아마 소송을 걸고 해서 돈 몇 천만 원을 받아낼 수 있는 건데 할머니는 허허하고 웃고 넘기셨습니다. 그러니까 성한 다리를 수술했으니 할머니가 수술을 하고 나왔는데도 계속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아픈 다리를 다시 수술하게 됐습니다. 할머니도 참 마음이 좋으시지 껄껄 웃으면서 지난번에는 엄한 다리를 수술해서 나를 고생시켰으니까 한 다리밖에 안 남았으니까 수술한 다리 또 수술하지 말고 잘 좀 하라고. 그러니까 의사들이 와 가지고 꾹꾹 누르면서 "할머니, 어디가 아파요?", "여기에요?" 그리고는 수술실로 끌고 가서 볼펜으로 그려놓고 잘라냈답니다. 소위 한국의 최고가는 대학병원이라는 데서 그런 짓을 했으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목사가 공부 안 해서 영혼에 대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미친 짓 아닙니까? 어느 교인이, 우리교회 교인은 아닙니다, 질문을 하는데 자기는 너무 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야 하는지 말아야 되는지. 그게 혼란이 일어날 게 뭐 있느냐고 했더니, 자기는 너무 혼란스럽다고, 성경은 이렇게 잘 살라고 이야기하는데 자기는 매일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한테 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아주 명쾌하게 답을 가르쳐주더랍니다. “야, 괜찮아. 세상에서 어떻게 죄를 안 짓고 사냐? 네가 그렇게 잘났냐?” 그러면서 예를 들어주더랍니다. “너 해수욕장 가지?”, “예.” “해수욕장가면 사람들이 해수욕 해, 안 해?”, “하지요.”, “그런데 해수욕장 보면 저 멀리 풍선이 있고 깃발이 꽂혀있지? 그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거 아니냐. 조그만 죄만 져. 큰 거 짓지 말고.” 그래서 자기가 너무 명쾌해 졌는데, 그러다가 제가 쓴 책을 읽었답니다. 그런데 자기 목사님 이야기하고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왼쪽다리 진찰하고 오른쪽 다리 수술한 것보다 더 나쁜 일을 그 영혼에 대해서 한 것입니다. 큰 게 뭐고 작은 게 뭡니까? 작은 것도 자꾸 하다보면 큰 게 작은 것처럼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무식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공부하셔야 합니다. 월요일 날 휴식을 취하는 것은 좋은데 몰려다니면서 먹고 마시고 골프나 치고 볼링이나 하고 그러면 절대 안 됩니다. 공부를 해서 자기 자신이 계속 발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도저히 우리 목사님을 따라갈 수 없다는 인상을 갖게끔,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해야지만 거기에서 깊이 있는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식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스비벤디”, “삶의 방식”이 있어야지만 가르침이 풍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공부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너무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이것을 교육을 할 것인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우리 교회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교리 교육이 제대로 되려면 우선 학습과 세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학습을 받게 되는데, 6개월입니다. 학습을 받을 때에도 아무나 학습이 되는 게 아닙니다. 정말 그 학습을 받고자 하는 의도가 진실한지, 그리고 학습교인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아도 되고 세례교인서부터 주님을 영접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엄밀한 의미에서 학습교육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는지를 학습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우선 그 사람의 간증을 들어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진실하고 주님을 만난 표가 있는지. 그 다음에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는 것입니다. 가족들은 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역사를 찾아보니까 18세기에 미국에서는 어떤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야 되겠다고 하면 교회에서 그 사람의 회심의 진위를 파견하는 조사단을 구성했습니다. 그래서 사당동에 있는 아무개 씨가 신자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학습을 거쳐 세례를 받게 되었다면, 교회의 조사단이 그 사람 사는 동네에 찾아가서 그 김 아무개 씨가 평소에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봅니다. “그 사람 교회 다니고 정말 달라졌습니다. 사람이 굉장히 친절해지고 정직해 졌습니다.” 그런데 조사를 하러 갔는데, “그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고요? 그 인간이?” 그러면 탈락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교회를 순수한 신자들의 모인 모임으로 만들려고 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두 가지만 안 하면 커다란 실수는 안 합니다. 불신자를 세례 주는 일, 그리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신앙 없는 사람들을 교회의 중직자로 세우는 일, 그 두 가지만 안 해도 교회가 말도 안 되게 망가지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해도 교회가 어려워지는데, 그 두 가지입니다.
그러면 그 회심의 진위를 확인한 다음에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경우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네 번을, 그러니까 두 시간 정도씩 여덟 시간에 거쳐서 교리문답집을 해설을 합니다. 가르쳐주면서 거기에 관련된 강의, 설교, 책 읽는 것 등등 숙제가 나갑니다. 그래서 그것을 모두 이해하면 이제 학습문답과 세례 문답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출석 안 하면 안 됩니다. 한번 결석하는 것은 봐 주는데, 그 과제를 집에서 수행한다는 조건입니다. 어쨌든 교육의 총량이 들어가고 그 다음에 문답을 하는 것입니다.
문답을 할 때에는 학습이나 세례문답이나 거의 같은 데 세례 문답의 경우에는 완벽하게 총회에서 나온 요리문답집을 외워야 합니다. 문답 받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면접실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각 면접실 마다 장로님과 목사님 한 분씩 그 사람이 정말 회심했는지 간증을 들어보고, 과제를 다 했는지 확인하고, 그 다음에 요리문답집으로 물어봅니다. 그러면 즉각적으로 정확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구절까지 외우게 하지는 않지만 그 내용은 정확하게 답을 해야 합니다. 대답을 못하면 떨어뜨립니다. 세례 주는 날이 예를 들어서 4월 셋째 주라 하면 첫째 주쯤 시험을 봐서 떨어뜨리고, 재시험을 볼 수 있는 기간을 일주일 후에 줍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도 떨어지면 그 사람은 떨어진 것입니다. 시험에 통과한 사람은 세례를 받게 되는데 그렇게 세례 교육을 받은 것이 한 3년 정도 유효합니다. 예를 들자면, 그렇게 문답을 한 다음에 교인이 되고 3년쯤 있다가 애기를 낳고 그러면 유아세례를 주어야 하는데, 3년 되기 전에 그 교육을 받았으면 시험만 보면 되고 3년이 지났으면 다시 교육을 받아야 됩니다. 엄마 아빠가 모두 나와서 정확하게 묻는 말에 완벽하게 암기해서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엄마 아빠가 다시 나와서 문답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거기서도 떨어지면 아이는 그 해에는 세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인이 되고 한 2년 정도 세월이 흘러가면 교리반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교리반에서는 제가 직접 가르칩니다. 짧으면 10주 길면 14주, 보통 12주에서 14주 정도 기간으로 가장 기본적인 교리를 배우게 되는데, 총회에서 만든 공과서가 아니라 조직신학의 기초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거기에 언급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견해를 가질 수 있도록, 그때 사용되는 교제가 루이스 벌콥의 조직신학요약이라는 책입니다. 루이스 벌콥의 책이 세 종류입니다. 7권으로 된 오리지널 조직신학, 나중에 2권으로 통합이 되어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 기독교신학개론이라는 책과 그것보다 더 얇은 기독교교리요약, Summary of Christian Doctrine이라는 책을 번역한 책입니다. 이 책 두 권을 사게 합니다. 가능하면 세 개 다 사고 그렇지 않으면 두 개만 사게 합니다. 그래서 가르칠 때는 요약으로 가르치고 집에 가서는 개론까지 읽어보도록 지도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보통 200명 많으면 300명이 저하고 교리를 공부하는데, 그 12주 동안에 매주 숙제가 있습니다. 그와 관련된 다른 책들을 읽고 매일 강의나 설교를 듣는 것, 그 다음에 전도하는 것 등등의 과제가 있어서, 12주가량을 마치고 나면 루이스 벌콥의 조직신학과 나머지 책들을 한창 많이 읽을 때는 한 3000페이지까지 읽혔습니다. 요즘은 너무 힘들어하고 해서 지금 제 생각으로는 12주 동안에 책을 한 1000페이지정도 읽고, 설교와 강의를 90분짜리 기준으로해서 12개 정도 듣고, 그렇게 해서 숙제를 내는 것으로 하고, 그 다음에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보아서 마지막에 85점 이상 나와야지만 패스가 됩니다. 그러면 루이스 벌콥의 조직신학을 거의 암기하다시피 외웁니다. 그리고 시험을 보고 패스가 되면 주일학교 교사를 할 수 있고 구역장이 될 수 있습니다. 교리반을 수료하지 않으면 교사, 구역장 할 수 없습니다. 안 시킵니다. 신학적으로 정리가 안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가르칠 권한을 주면 안 됩니다. 예전에는 집사도 안 시켰는데 너무 힘들어해서 집사까지는 시켜주는데, 그 대신 빠른 시간 내에 교리반을 이수하겠다는 서약을 받고 집사를 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가르치는 권한을 주지 않습니다. 교리반 수료하지 않고는 가르치는 권한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첫째 낳고 일 년 만에 아기를 낳아서 2년 만에 세례를 받게 될 경우에는, 엄마 아빠가 3년 되기 전에 이미 교리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문답만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3년이 넘었으면 다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집사가 될 때도 다시 합니다. 또 남녀가 둘이 결혼을 하겠다고 할 때에도 문답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 교리교육에 참여해서 교리교육을, 그 다음에 문답을 치러서 문답에 합격을 해야지만 교회도 빌려주고 주례도 서줍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정하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정해서 꾸준히 그렇게 하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제법 교리에 대한 견해가 딱 섭니다. 그래서 신천지에서도 우리 교회를 꽤 두드렸습니다만 별로 성공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잘 아니까. “당신 처음 왔다고 하면서 이야기하는데 어디서 왔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고 몇 년 더 흘러가면 고급 교리반이 열립니다. 매년 열리지는 않고 한 3년에 한번 열리는데 교리반을 이수하고 교회에 몇 년 이상 다닌 사람만이 신청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여기서도 제가 직접 가르치는데, 기독교 강요를 라틴어에서 직접 번역한 책 약 22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으로 역시 12주 내지 14주 동안 모두 공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외에 책들을 읽고, 매주 시험을 보고, 중간고사 기말고사에서 90점을 받아야 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투표에 나올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고급 교리반을 수료하지 않으면 임직도 받을 수 없습니다. 안수집사, 권사, 장로에 투표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명예권사나 협동장로는 시켜주지만, 그러나 교회에서 투표해서 되는 권사나 안수집사, 장로는 할 수 없습니다. 고급 교리반에서는 상당히 많은 양들을 공부하게 되는데, 한참 열렬할 때에는 과제가 교제 포함해서 5000페이지였습니다. 그러니까 5000페이지를 16주 동안에 읽고 레포트를 내야 합니다. 그때에는 거의 매일 운전면허시험 보는 것처럼 그렇게 공부를 시킵니다. 그렇게 공부를 끝내고 나면 집에서도 기독교강요를 계속 읽습니다. 기독교강요도 요약된 것 말고 고영민 씨가 번역한 6권짜리 책을 가지고 합니다. 교제도 꽤 많이 사야합니다. 그렇게 해서 보고나면 신학적인 눈이 열리면서 다른 책들을 읽을 때 이 책이 잘못 됐는지 올바로 됐는지 판단할 수 있는 신학적인 판단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가지고 충분하냐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1년에 많이 할 때는 두세 번, 적게 할 때는 한두 번 정도, 주일 날 오후에 교인들을 데리고 광림수도원 같은 데 올라갑니다. 천오백 명, 지난번에 갈 때 한 2000명 정도 올라갔는데, 날이 좋은 때 야외에 모두 앉아서 우선 밥을 먹고 저녁에 약간 어두워지면 특강을 시작합니다. 그때는 설교시간에 다루기 어려운 신학, 역사, 철학, 현대사상 이런 주제들에 대해서 강의를 하게 됩니다. 잘 준비를 해서 책을 먼저 만들어서 교인들에게 나누어주고 화면을 만들고 해서 강의를 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인간은 누구인가?’, ‘현대사회에서 현대사상은 어떻게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는가?’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지적인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강의를 하는데, 대부분 이해를 합니다. 그렇게 두 시간 내지 두 시간 반 정도 강의를 하고 내려오고, 모자라면 그 시리즈를 교회에서 두 번, 세 번 하면서 전체적으로 연결시켜서 그래서 배운 신학의 내용들에 그것들을 보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강의가 끝나고 나면 그것이 책으로 나오고, 책으로 나온 것이 공과교제로 사용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제가 쓴 교리적인 책들을 가지고 구역공부를 하는데, 10년 정도 교회 다니면 구역예배만 착실하게 나와도 신학서적을 한 40권정도 읽고 공부한 셈이 됩니다. 그렇게 꾸준히 계속해서 교리를 공부해 나가면 좋은 점이, 우선 첫째가 가정에서 교리교육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아서 유아세례를 받고 막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고 네 살 다섯 살 될 때 엄마하고 같이 교리공부를 하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이 세상을 누가 창조하셨지?”, “하나님이요.” 그런 문답이 책으로도 있지만 아무리 책이 있어도 엄마가 설명을 정확하고 풍부하게 해 줄 수 있을 때에, 그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한 10년 전에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책을 썼는데 왜냐하면 구원론에 관해서 너무 혼란스러우니까 교회에서 구원론을 두고 너무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회심을 하게 되면 이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욕구들이 굉장히 증대하게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 놀랍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교리교육을 하는데 어른들에 대해서만 하는 게 아니라, 저 아래 유아부 부터 시작을 해서 교리를 아주 어릴 때부터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 소년부, 중등부, 고등부에서 각각 거기에 맞는 교리 커리큘럼을 만들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일수록 이 교리들을 아주 잘 받아들입니다.
실제로 우리 동네에 있는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거기 원장 선생님이 그리스도인인데 나중에 우리 교회 교인이 됐습니다. 원래 유치원교육에서는 종교교육을 못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상관 안 하고 노골적으로 “우리는 기독교교육으로 어린아이들을 시킵니다.” 그러면서 아이의 종교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우리는 성경을 믿어야 된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안 되는 이유는, 너무 교육을 잘 시키니까 부모들이 다 양해를 해 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유치원에 들어가고 싶어서 부모들이 줄을 섰습니다.
그 유치원 6세반에서 그날 어린이 교육 내용이 “천국은 있다.”였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천국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 천국이 그렇게 좋구나. 집에 가서 우리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해야지?” 얘는 불신자입니다. 돈 많은 엄마 아빠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이제까지 자란 애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옆에 있는 아이가 이야기합니다. “아, 천국이 정말 그렇게 좋은 곳이구나. 나는 꼭 갈 거야. 착한 일 많이 해서 천당 가야지.” 얘는 행위구원론자입니다. 세 번째 아이가 또 이야기합니다. “천국은 참 좋겠다. 그런데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나는 너무 어려서 천국에 못간데.” 얘는 구원파입니다. 그러니까 한 아이가 나타나서 다 교통정리를 해 주었습니다. “너,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그런다는데 천국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가는 게 아니야. 믿음으로 가는 거지. 그리고 너, 착한 일 한다고 천국 가는 것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보혈의 피로 천국을 가는 거야. 너, 어린아이라고 천당 못 간다고 하는데 틀렸어. 예수님은 우리 어린아이들도 예수님 믿으면 천당 가게 해주셔.” 얘는 칼빈주의, 우리 교회 유치부학생이었습니다. 실화입니다. 그 얘기 너무 재미있어서 미국의 모던 리포메이션(Modern Reformation) 잡지에서 기고해 달라고 했을 때 이 얘기를 써서 보냈는데 너무 좋아했습니다.
또 한 번은, 만 네 살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다섯 살 먹은 여자아이하고 네 살 먹은 남자아이하고 서로 싸우고 있었는데 막 싸우다가 남자 애가 물어보았습니다. “야, 너 우리가 왜 이렇게 싸우고 있는지 알아?”, “ 네가 잘못했잖아? 네가 먼저 우리 괴롭혔잖아?”, “아니야.”, “그럼 왜 싸우는데?”, “네 마음과 내 마음 속에 시커먼 게 많아서 싸우는 거야.” 이 아이는 전적 타락을 믿는 아이입니다.
교리 가르치면 정말 재미있는 일이 많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처음으로 학교에 가서 옆에 있는 짝한테 전도를 했습니다. “야, 너 우리 열린교회 가자.”, “야, 나는 일평생 교회 안 나가고 팔 년 동안 살았는데 내가 왜 널 따라서 교회 가야 되냐?”, “너는 우리 교회 반드시 와야 돼.”, “내가 여태까지 하나님 안 믿었는데 내가 왜 너희 교회 가야되는데?”, “너와 나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살아야 돼.” 엄마가 너무 황당해서 하나님이 너를 창조하신 목적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설교를 여덟 번이나 했으니까 엄마는 물론 알고 있었는데, 너무 놀랍게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더랍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제 8권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아이들일수록 잘 믿기 때문에 교리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빨리 심깁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르치다 보면 재미있는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어떤 엄마가 아이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두셨어. 너무 예쁘고 아름다운 세상이었어. 그런데 하나님이 나무 하나를 지정하시면서 이 선악과는 따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너는 큰 벌을 받는다고 명령을 하셨어.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그것을 따먹고 하나님이 너무 화가 나셔서 그 사람들을 벌주셔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어.” 그랬더니 아이가 갑자기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아담과 하와가 잘못한 거지.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하나님하고 나눠 먹어야지. 혼자서 먹으니까 하나님이 화났잖아.” 기발한 상상력들이 아이들에게 있습니다.
방배동교회에 있을 때 수요일 예배 때마다 초등학고 5학년인가 아이가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전도사님들이 너는 다 큰 애가 뭘 집에서 있지 엄마를 따라다니느냐고 그랬더니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얘기하더랍니다. “아니에요. 전도사님, 나 엄마 따라 온 것 아니에요. 제가 말씀 들으러 오는데요. 요즘 충성시리즈가 얼마나 은혜로운데요.” 그러면서 그림처럼 앉아서 90분짜리 설교를 듣습니다. 내가 예화를 들면 막 깔깔대면서 웃고 은혜로운 이야기를 하면 손수건을 꺼내서 계속 울면서.
영혼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면서 깊이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그렇게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정말 놀랍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재미있는 예화들이 수없이 생겨납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조금만 복잡하면 힘들고 어려워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이야기들은 복잡할수록 예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컴퓨터게임 같은 것을 별로 안하는 사람입니다. 옛날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옛날에 교수생활 할 때도 바둑 같은 게임은 가끔 머리 아프면 조금 했는데 지금은 그것도 안합니다. 그런데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보고 깜짝 놀란 게 그것을 초등학생들이 그렇게 잘하는 것입니다. 중학생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거기에 미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게임 매뉴얼이 550페이지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배우기를 힘들어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부산, 마산 쪽에 있는 초등학교 아이들 중에 엄마가 학원 한번 안 보냈는데도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일본만화가 그렇게 재미있는데 그 만화를 원전으로 읽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방송이 그쪽으로 잘 잡히니까 일본만화영화 보다가 그 아이들이 거기에 빠져서 스스로 일본어를 배우면서 만화를 보는 것입니다. 중학교 아이들 가운데 영어를 정말로 잘하는 아이들은 미국드라마, 미드에 빠진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옛말에도, 열심히 노력하는 놈을 머리 좋은 놈이 따라갈 수 없고, 열심히 노력하는 놈이 좋아서 하는 사람을 능가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좋아서 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면서 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게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아, 깨달았구나!”
저는 9년 정도 교수생활을 했는데 교수할 때에는 공부를 별로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을 가르쳐야 할 공부를 해야 하고, 또 공부할 시간도 별로 없었습니다. 다 사표내고 나서 개척교회하면서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태까지 왔습니다. 너무 재미있습니다.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은혜를 많이 받고 교회 연구실을 걸어 내려옵니다. 직원들도 다 퇴근하고 깜깜한 밤길을 걸어 내려오면 거리에 바람이 확 붑니다. 밤하늘에는 별이 빛납니다. 그런데 어제보다 한 뼘 자란 내가 느껴집니다. “어제보다는 좀 더 나은 내가 됐구나. 1년 전에는 내가 정말 어렸구나. 3년 전에는 저 하수를 어떻게 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발전입니다.
그래서 저는 골프도 못치고 볼링도 별로 썩 좋아하지 않고 취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돈 쓸 일도 별로 없습니다. 꾸준히 책을 사서 5만권을 모았는데, 교회에서 많이 헌신해 주셨습니다. 목회가 전투라면 책은 무기입니다. 최신 무기를 당할 수가 없습니다. 북한이 핵에 미친 듯이 매달리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심각합니다. 재래적인 전쟁으로 붙으면 일주일만 지나면 한반도 상공에서 북한의 비행기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전략가들의 공통된 증언입니다. 김정은이 군부대 방문하는데 대부분이 공군부대인 것 아십니까? 그 이야기를 탈북자가 전해주는 데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북한 공군들 사이에서는 전쟁이 나서 공중에 뜨면 바로 죽는다고 이미 다 소문이 났답니다. 비행기가 상대가 안 되니까. 더군다나 미국의 에프22같은 것들이 만약에 오키나와에서 발진해서 한국전에 투입이 되면 어떤 비행기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캐나다 상공에서 여태까지 있었던 전 세계의 비행기 146대를 띄워놓고 공중전을 했습니다. 시뮬레이션을 했는데, 결과가 146대 0이었습니다. 146대 모든 비행기가 격추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무섭습니다. 제가 북한에 세 번을 갔었는데, 특히 이지스함이 건조되고 나서 이지스함 이야기가 나오니까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왜 남한의 이지스함 같은 배를 만들었느냐?, 여러분에게 그게 왜 필요하냐?” 동해바다에 한척만 띄워놓으면 180개의 미사일로 휴전선을 넘어오는 비행기들을 파리 잡듯이 격추시킬 수 있는 배입니다.
그 나라가 얼마나 대단한 국방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무기고를 보면 압니다. 목회자의 서재에 들어갔을 때 최신무기와 좋은 것들을 갖추고 있으면 상당한 국방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베트남 같은 경우 미국에서 좋은 전쟁물자 다 대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 그날 밤에 술집에 가서 다 맡기고 먹고 그 다음날은 그 총에 맞아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열렬한 애국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애국심, 이것은 책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 안에서 삶으로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기도하면서 학자와 같은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후에 그 남겨진 지식의 유산들이 백년 후에 혹은 150년 후에도 책으로 읽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그러한 설교가 되도록 우리들이 자신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책을 사서 모으고, 읽고, 쓰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서 "모두스비벤디"를 만들고 그래서 가르칠 내용들이 풍부해지는 그런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면 되느냐고 물어보는데, 한편 한편 설교하는 일에 마음을 많이 쏟고 정성껏 설교를 준비해야 합니다.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설교 준비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한지 22년째 되는 지금이 초창기보다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이 2배내지 3배 길어졌습니다. 예전에는 정말 뭘 몰랐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한편 한편 설교에 정성을 기울여도 그것이 설교의 수준을 결정해주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40대가 인생에 대해서 수필을 쓰는 것과 초등학고 2학년이 수필을 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40대 먹은 사람은 산전수전 다 겪고 나무 그늘 아래 의자에 앉아서 끄적끄적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썼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은 정말 신명을 바 다쳐서 이 한편을 쓰고 내가 죽으리라는 생각으로 약지 손가락을 깨물어서 혈서를 썼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썼다고 하더라도 초등학교 2학년은 2학년일 뿐입니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살아왔던 40대 후반의 통찰을 능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스펄전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스펄전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그 설교 준비하는데 얼마나 걸리셨습니까?” 스펄전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일평생 걸렸습니다.” 한 사람이 설교하는 그것은 일평생 살아온 것이 그 안에 농축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설교를 이야기할 때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나는 지식이고 또 하나는 삶입니다.
지식에 관해서 말하자면, 설교 한편 한편을 주석과 모든 것들을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준비하는 것 너무 중요하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것과 함께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지식의 탱크자체를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수지로 비유하자면 저수지에다가 평소에 물을 많이 저장해 놓는 것입니다. 언제 쓸지 모를지라도 꾸준히 성경, 역사, 철학, 신학 이런 것들을 공부하면서 계속 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힘이 되어서 어떤 설교이든 잘 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설교를 위한 기초체력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말해도 깊이 있게 정확하게 해설해 낼 수 있는 지적인 능력들을 길러가는 것입니다. 꾸준히 공부하라고 하니까 학교로 뛰어가는데 그렇게 공부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습니다만,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가이드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가 차분히 앉아서 공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지적인 탱크들을 가득 채우면 그 자체가 자신의 성장입니다. 그리고 성장하는 수준을 가지고 한편 한편을 정확하게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40대 후반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 중에 산전수전 안 겪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회심하기 전에 사람들 손금을 많이 봐 줬는데 나이든 사람 손금 봐주기 너무 쉽습니다. 손바닥 펴자마자 “정말 고생 많이 하면서 사셨군요.” 그러면 다 맞습니다. 고개를 끄떡끄떡 거립니다. 일제시대, 6.25, 군사혁명, 그 가난한 시절 다 겪었습니다. 고생안 한 사람 어디 있습니까? 인생은 산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는 고생 아닙니까? 그런데 한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적으로 아주 브릴리언트(brilliant)하고 또 한 사람은 그냥 시골에서 지게나 지고 호박밭이나 가꾸며 살던 사람이라면, 그 그릇의 차이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아마 후자의 사람은 글을 옮기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지식을 통해서 자신의 수준을 높이고 지식의 총량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런 것들이 현대사회를 보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벌써 여러 해 지났지만 아바타 같은 영화가 왜 그렇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지, 그리고 명량 같은 영화가 오늘날 왜 저렇게 인기를 끄는지, 인터스텔라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왜 사람들은 그렇게 열광을 하는지, 그런 이야기들 속에 엄청나게 많은 철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이야기들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목회자들은 정확하게 간파하면서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대중문화도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밀회 같은 드라마가 왜 건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는가 라고 하는 것들은, 그 뒤에 깔려있는 어떤 모럴리즘(moralism)의 배경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없었더라면 보이지 않을 그런 사회 현상들이나 이런 것들을 설교 속에서 정확히 짚어주고, 또 그것들을 분석해 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지적으로 상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고 수준 높은 강의를 자주 접해서 자기의 지적인 수준 자체를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러나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교와 목회는 "진리에 대해서", "about the truth"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진리를 따라서 살면서 사람들에게 전달될 때, 객관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으로 자기 이야기처럼 꽂히고 들어갈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의하고 다른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사상을 체화(體化)해서, 자신이 그렇게 살아가면서 삶이 동반된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선포할 수 있는 그러한 기력을 가져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회의 영향력은 훨씬 더 감퇴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과 사랑의 통합을 이루는 것이고, 이것을 신학에서는 경건과 학문의 통합이라는 이야기로 우리들에게 전해내려 오는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조직신학을 공부를 하십시오. 목사님들이 다 기본적인 신학은 공부하셨으니까, 요즘 좋은 책들 많습니다.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같은 책도 좋고, 찰스 핫지의 ‘개혁신학의 개요’도 좋습니다. 영어로 읽을 수 있다면 더 많은 자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책들을 같이 모여서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신학적인 이해를 깊이하고, 그리고 나서 교리문답집을 보면 문답집에 대한 새로운 감동이 밀려올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풍부하게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야기 했던 것처럼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 위에, 모든 지식을 삶으로 나타나게”, 즉 왜 그렇게 사느냐고 할 때 “이런 지식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그 지식이 필요하냐고 할 때 “이렇게 삶으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제 책 중에서 아까 드린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과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깊이 있는 주기도문, 존 오웬의 신학 등등 들어가 보면 많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찾아서 여러분이 더 읽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