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 제1과
녹취자: 백지영
지난주에 0과를 배웠고 이번에 1과, 역사와 사람 1부 첫 과를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문제 1) 열다섯 살의 소년이 주일에 교회로 가던 길에 논둑에 엎드려 울었던 일화를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나누어 봅시다. 청소년 시절 인생에 대해 최초로 자각을 하였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굉장히 좋은 질문인데 잘못하면 1번하다 공과 끝날 수 있습니다. 일대기를 이야기하다 보면.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적절히 조절하셔서, 말을 아주 재미있게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 아니면 자기 구역장이나 순장 이야기를 잘 받아줄만한 사람, 구역공부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게 미리 메모를 보내서, 다음 시간에 제일 먼저 이 질문이 나오니까 당신이 청소년기 때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겠냐고 그래서 그 사람이 미리 좀 생각을 하도록 그렇게 해서 적극성이 있고 공과공부에 도움이 되는 구역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을 하십시오. 절대로 매 맞을래 말 할래 그러면 매 맞겠다는 사람을 시켜서 그래서 뜸을 들이고 공과공부가 진행되지 못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니까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표가 짧으면 세 사람정도 길면 두 사람 정도 간략하게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이런 자각이 생기는 것이 결국은 자신의 삶에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살다가 이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면서 자각이 생겨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저는 책 속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습니다만 그때는 그렇게 통곡하고 울고 그랬지만 도대체 왜 울었는지에 대해서 잘 이해가 안 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결국은 주체가 되는 것에 두려움입니다.
그럼 한번 보겠습니다.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모릅니다.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모르니까 도대체 내가 어떤 의도로 이 세상에 창조되었는지 또 어디로 가야될지 자기 인생의 목표에 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근원에 대한 질문과 가야할 목표에 대한 대답이 없으니까 모든 것을 모르겠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다른 어떤 사물들과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이 모든 것들이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이런 것에 대한 생각 없이 살수가 없도록 자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은 자기가 철저하게 외롭고 누구도 내 인생의 문제에 대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러면서 자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자신이 바로 이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이 세상에 창조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에 그때에 모든 문제들이 한 번에 기본적인 공식들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내가 왜 사람으로 태어났고, 그리고 왜 하필이면 이렇게 남북이 갈라져서 전쟁한다고 으르렁거리는 이 불행한 나라에, 가난하기 짝이 없는 나라에 내가 태어났을까 이런데서 태어난 것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각나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물을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무엇인가 뜻이 있어서 나를 다른 시대가 아니라 이 시대에 태어나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게 하셨다는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자연에 대한 생각은 나중에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습니다. 나중에 공부를 더 하고 사람이 성숙해지고 하다보니까 그리고 또 제가 회심하던 그때에는 개발논리에 밀려서 환경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80년대 중반 접어들고 90년대에 환경문제가 심각하게 대두가 됐고, 1975년도 나이로비 CCC 대회에서 주제가 소위 이야기하는 생태론이 되면서부터 생태신학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생태계의 보존을 위해서 힘써야 할 것인가가 문제가 됐습니다. 60년대에 이미 벌써 릴 하이트의 논문이 나오면서 세계의 환경이 파괴된 것이 창세기에 대한 인간의 오해, 그리고 기독교에서 잘못 가르친 창조세계에 대한 주인의식, 그러니까 관리하는 게 아니라 착취하는 주인의식 이런데서 나왔다는 논문들이 발표되면서 환경문제가 나중에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후에 이런 환경문제에 대해서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실 이런 창조된 세계들도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 창조되었다는 면에 있어서는 동질의식 같은 것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의 육체적인 삶이 이러한 환경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배경에 깔아서 결국은 주체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결국은 ‘아는 것’ 그리고 ‘힘’ 그것입니다. 알고 그 다음에 그렇게 아는 대로 살 수 있는 어떤 힘이 우리 안에서 주어져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로운 이야기로 1번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문제 2) 회심 이후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진정으로 자유로웠던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삶의 진정한 주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의 말로 표현해 봅시다.
이것도 잘못 구역을 인도하면 한 문제 가지고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공과공부가 끝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우리들이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없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 그런데 그것은 언제나 일시적입니다. 항구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유로운 만큼 나중에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를 느꼈는데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것이 정말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속박이었다는 고백을 여기에서 받아내는 것입니다. 스스로 그것을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냥 자기의 육체적인 감각대로 원하는 대로 막 살아가서 아무것도 속박을 받지 않는 그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현대인들은 그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결과는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자연의 질서 창조의 질서를 어긋나게 살면 반드시 질병에 걸리든지 아니면 지금은 굉장히 좋은데 나중에는 그것들이 문제가 돼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기천 같은 데 걷거나 아니면 산을 오르다 보면 연세 드신 분들이 운동을 굉장히 열심히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연세 드신 분들은 그렇게 열심히 운동을 하면 안 됩니다. 저희 어머님도 새벽기도 끝나고 걸으시고, 아침 드시고 걸으시고, 점심 드시고 걸으시고, 저녁 드시고 텔레비전보시다 주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걸으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몸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인간의 신체 자체가 이미 기계가 낡았기 때문에 그것을 감당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조급하게 뛰지 않고 천천히 걷고 천천히 동작을 하고 그래서 나이 들면 기품도 갖추게 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합니다. 스콰시나 이런 격렬한 운동이 멋있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알아야 합니다. 40대 후반 50대가 다 되가지고 그런 것을 하면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결과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음식 같은 것도 대부분 그렇습니다. 몸에 좋지 않은데 너무 맛있다고 거기에 빠져서 극복을 못하고 먹게 되면 계속해서 자기 몸을 쳐다보면서 후회를 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외형의 문제뿐만 아니라 건강상의 실제적인 문제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육체적인 것도 좋은 환경 속에서 인간의 육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질서를 찾아가는 것이 사실은 육체적인 건강을 찾는 길이라면 영적인 건강도 그것을 가는 것입니다. 그 질서를 깨뜨리면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폭식하고, 화난다고 불같이 화를 내고 그러면 결국은 그 결과가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음식도 그렇게 돌아오고, 자기는 사라졌는데 한번 그렇게 된통 당하고 난 사람은 다시는 자신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자유라고 하는 개념을 속박이라고 보면 안 되고 그런 질서를 이탈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참된 자기 주체인가 하는 고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지만 신약성경에서 인간이 참된 주체로 돌아간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게 진짜 자기가 진정한 거짓 주체를 버리고 참된 주체로 돌아간 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자유로웠던 때가 언제인가 그것을 질문하고, 그 다음에 그 자유로웠던 때를 이야기하고, 그것이 참 자유였는지 아니었는지 이렇게 이야기하게 하고, 그래서 주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보면 반성해야 할 점이 많습니다. 광고가 홍수처럼 쏟아 부어집니다. 리모콘에 의해서 작동이 되면서 쏟아 부은 것만큼 움직이면서 두통나면 무슨 약, 먹고 체하면 무슨 드링크, 맥주하면 뭐, 비스킷하면 뭐 이렇게 하면서 자동적으로 떠오르는데 그것을 항상 자기에 대해서 비판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전부다 거짓말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그래서 제가 신문 보는 것에 대해서 설교시간에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냥 신문 펼쳐놓고 코 박고 읽으면 안 됩니다. 보면서 항상 “하는 이야기일 수 있지. 누가 기획해서 이 따위 기사를 썼을까? 그리고 분명히 이 기사 뒤에는 뭔가 흑막이 있을 것이다.” 그런 비판적인 눈을 길러야 합니다. 물론 “뉴욕의 오늘 날씨는 맑습니다.” 이런 것도 “여기에 흑막이 있을 것이다. 누가 이렇게 했을까 ?” 그렇게 의심할 필요는 없고, "고속도로가 지금 막히고 있습니다,"라는 보도에도 분명히 나를 못 가게 하려고 그런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정신병이고, 그냥 일반적인 것은 그냥 믿어주십시오. 그렇다고 치고, 또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도 나에게 어마어마한 손해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광고를 보면서 절대 저 광고에 내가 현혹되지는 않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주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 독하게 먹지 않으면 그 물결에 어마어마하게 휩쓸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체적인 삶이 아닙니다. 그러면 TV 홈쇼핑 보면서 무슨 프라이팬 하나 사고 화장품 하나 사는데도 그게 문제가 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런 것에 익숙하다 보면 작은 것서부터 비판능력이 사라지면서 나중에는 도덕적인 것까지 받아들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 동성연애? 해도 되는 것이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이구나.” 이렇게 나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다운 도덕적인 판단과 줏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을 봐도 항상 한쪽으로 치우친 것을 보지 말고 아주 비판적인 한겨레신문 같은 것 그 다음에 조중동 이렇게 섞어보는 것입니다. 방송을 예로 들자면 TV는 우측으로 치우친 것을 본다면 라디오방송은 야측에 치우친 것을 듣고, 그리고 저는 많이 이용하지 않지만 인터넷에서도 그런 사이트를 보면 우리와는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보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진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입맛대로 가지 말고 골고루 보면서 마지막에 신문은 내가 만든다는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자기일보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문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에티오피아에서 박태통령이 사인해 가지고 거부권 행사한 것을 두고 한쪽 신문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한쪽 신문에서는 엄청나게 나쁜 일을 한 것처럼 나오지 않습니까? 둘 다 믿지 말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공정하게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판단할 정도로 자료가 없으면 유보하고, 필요한 때 내가 자료를 찾으면서 판단을 한다는 그런 주체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 TV에서 광고 때려 붓는다고 그런데 현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그 정도로 넘어가겠습니다.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문제 3) “사람이 곧 역사입니다." 로마의 역사를 연구한 작가 시오노 나나미도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에서 "인간이 역사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살피면서, 이에 대해 느끼게 된 점을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여러분이 시오노 나나미의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을 금주에 읽고 간다면 더 좋겠지만 그러나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시오노 나나미가 누구냐고 물어볼 때 몇 마디 해 준다면 구역장으로서 권위가 설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지 한번 찾아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1937년 7월7일생입니다. 이 사람은 일본사람이고 대학생 시절에 로마 여행을 갔다가 로마문화에 반해서 거기에 정착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거기서 혼자 독학으로 이태리어와 라틴어 이런 언어들을 띠고 공부를 하면서 로마의 역사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관점을 구축하면서 해석해 내는 일로 인기를 끌었고 이 사람의 주요 저서가 로마인 이야기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에도 보면 르네상스에 대해서 우리가 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정말 새로운 각도에서 르네상스를 해석하고 있는 저자의 면모를 보게 만듭니다. 위안부 사태 같은 것들을 가지고 우리와는 관점이 안 맞는 이야기를 해서 한국 사람들에게 미운털이 박히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로마인 이야기는 수십 개국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서 한국에서도 엄청나게 많이 팔린 책입니다.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이라는 책은 저도 아주 감명 깊게 읽었고 정말 어려운 이야기를 아주 기가 막히게 쉽게 풀어내는 재주가 있는 작가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첫 페이지에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도 몰랐었는데 어느 날 중학교 다닐 때에 노트에 끼적거렸던 것을 보니까 -그러니까 역사책을 읽으면서 뭔가 말하자면 결기가 생긴 것이지요. 인간으로서.- 그때 노트 앞에 아주 힘찬 필체로 “역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열여섯 살의 시오노 나나미가 여학생으로서 우리로 말하면 중학교 3학년쯤 된 학생이 그렇게 확신에 찬 필체로 써놓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이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것입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이야기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을 우리가 살펴보더라도 역시 역사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셔서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앞에 나오는 질문에 대해서, 성경의 역사를 보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중요한 인물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들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고 열방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이야기를 그런 쪽으로 생각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해 보고, 결국은 이렇게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속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있는데 이 구원사는 기본적으로 불가시적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신앙의 눈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세상의 역사를 껍질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세상의 역사만 보입니다. 무슨 나라가 일어나고 일어나고 하면서 현대는 미국이 강대국이고 하는 이야기밖에 안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안목이 깊은 사람은 그 껍질을 깨고 들어가서 그렇게 나라의 패권이 바뀌고 문명과 문명이 만나면서 그것이 인간의 정신 속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탐구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야기가 훨씬 복잡해지고 재미있어지면서도 또 해석에 대해서 다양성들이 나오니까 굉장히 복잡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역사비평가들이 하는 일입니다. 꿰뚫으면서.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역사를 보는 지혜의 눈 이런 것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물들이나 현상들을 보면서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딱 관통해 내는 것은 선(先)이해를 자기가 무엇을 얼마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 드라마나 영화나 이런 속에는 문화코드가 다 담겨 있지만 자기가 지식이 없으면 그냥 맛있다 재미있다 달콤하다 그리고 빠져들어 갈 뿐이지, 그 속에서 굉장히 많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고 그것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도 그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된다는 것을 못 느낍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런 훈련을 계속 하면서 비판능력이 길러져 가는 것입니다. 주체적인 삶을 위해서는 비판능력이 절대적입니다. 모든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비판하라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회에서나 이런 데서 일어나는 대중들을 확 휩쓸어가는 어떤 선동들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존재합니다. 요새도 정치 돌아가는 것을 보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런 선동에 다수는 흔들리면서 그 선동을 따라가서 선동이 먹혀도 주체적으로 그런 선동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주체성입니다. 그 주체성은 정말 올바른 것인지를 성경에 의해서 끊임없이 비판되고 점검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데 이바지하는 주체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까칠하게 군다는 것과 주체성이 있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매사 부정적이 된다는 것과 주체적이 된다는 것도 똑같은 말이 아닙니다. 은혜로운 주체성을 가진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런 구원사가 있는데 그러면 이 역사라는 것이 무엇이냐? 결국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에 의해서 사건이 일어납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사건에 대한 기술입니다. 사건은 사람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태평양 한 가운데서 지름 500킬로짜리 태풍이 일어서 바닷물이 공중으로 2킬로쯤 올라갔다. 그래도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이 안 죽었으면 역사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풍랑을 만나서 죽은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었다고 한다면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어하고 고등어 몇 마리가 하늘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에 졸도를 했다더라고 하면 이것은 역사가 아닙니다. 항상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의미 있는 사건에 대한 의미의 해석입니다. 그런 의미 있는 사건들은 항상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을 때 그 사건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커다란 지진이 일어나서 유황불이 떨어지고 했는데 그때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부패하고 타락했었다는 그런 해석을 줄 때에, 그 자연적인 재해는 말하자면 역사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도 역시 그런 것들의 의미를 해석해 주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제시하고 하는 것은 역시 역사적인 사건이고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롯과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이으면서 역사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모든 것이 선하고 그리고 인간도 서로 교통하며 사랑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식물들은 시들고 자연세계는 재앙이 오고 그리고 인간은 땀을 흘리고 수고해야지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비참한 지경에 처하고 남녀 간의 사랑도 그 사랑을 이용해서 남성들이 여성을 지배하는 그런 폭력적인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이 그런 인간의 비참을 보실 수 없어서 세운 것이 구원계획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이미 그 전서부터 구원역사가 있었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역사 속에서 그 구원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아브라함 시대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항상 아브라함부터 기술하지 아담이나 노아부터 기술하지 않습니다. 그 아브라함이 모세에 의해서, 모세가 여호수아에 의해서, 그래서 출애굽 시킨 사람들이 여호수아에 의해서 가나안 정복으로 이어지고, 사무엘이 등장해서 신정국가의 틀을 세우고, 사울을 거쳐서 다윗이 왕이 되고 그러면서 왕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그 다음의 역사는 타락하는 이스라엘과 그 타락을 꾸짖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보여주는 선지자들의 역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나오고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말라기 같은 선지자들이 사이사이에 빠진 사람들이 많지만 이런 사람들을 죽 이으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를 통해서 내려오고 왕들이 세속의 역사를 움직이지만 그 움직인 세속의 역사들이 선지자에 의해서 해석되면서, 그러면서 어떤 역사의 의미들이 드러나면서 구원역사가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이십니다. 계획을 위해서 오셨는데 단지 계획 때문에만 오신 것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을 교정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하나님이 얼마나 많이 인간을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보여주고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참사람에 대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시대가 열립니다. 사도들에 의해서 길러 내어진 제자들이 교회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속사도교부들과 교부들로 이어지면서 중세신학자 그리고 13세기말 그 다음에 르네상스, 종교개혁을 거쳐서 계몽주의를 거쳐서 근대를 거쳐서 현대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그라프들이 결국은 역사의 전개인데 그 모든 역사의 전개가 결국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사용하시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보겠습니다. 예수님시대 때의 광경은 예수님을 통해서 아직 나타나지 않은 교회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하는 구원의 행동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공동체, 그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불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제 교회의 시대로 들어오게 되면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안 보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생각나게 하는 매개체가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을 여전히 통치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그들의 삶과 인격, 언어 이 모든 것 속에서 발견하면서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분이실 것이라는 것을 기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교회에 위탁하신 그 말씀을 온전히 믿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문제 3에 대해서, 성경의 역사를 보면 결국은 위대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나타날 때 역사가 바뀌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기르고 있는 자녀들이 어떤 사람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선교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조지 휫필드는 열다섯 살 때 될 때까지 술집 보이였습니다. 그리고 온갖 주정뱅이 흉내를 다 내는 희극배우처럼 그렇게 술집에서 시중들던 웨이터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 사람이 전설적인 설교자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모르는 것입니다. 어떠한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 역사를 움직이게 될지 누구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항상 내가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이를 낳아서 기른다는 것, 그리고 아이를 낳지는 않았더라도 누군가를 교육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사명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소리 잘 듣지 못하겠지만 교인들을 만나보면 목회자 이상으로 자기를 섬겨주었던 옛날 구역장들을 존경하는 교인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어도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런 기억들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여러분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어떻게 결정해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4번의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문제 4) 초대교회시대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구원 역사 전개에 있어서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 서로 나누어 봅시다. 이 점에 관해 교회 역사와 자신과 자녀들을 생각하며 토의해 봅시다.
“나하고 역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지하실에서 개척교회를 할 때 일인데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이라는 시리즈로 설교를 했습니다. 책으로도 나중에 나왔는데 지금도 서점에 가면 찾을 수 있습니다. 부흥과 개혁사에서 나왔는데 그 시리즈가 원래 ‘다니엘의 부흥’인가였습니다. 그래서 교회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일어난 영적인 부흥이 어떻게 역사를 바꾸는 데에 이바지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시리즈로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한 노인분이 인천에 사시는데 주일 예배를 제외하고는 항상 열린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으셨습니다. 그분이 그때 연세가 79세였는데 굉장히 인자하시고 선교를 위한 헌금도 꽤 하셨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나오는 교회 앞에서 제 손을 꼭 잡고 눈물이 가득 고인 빨간 눈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렇게 나이가 많지만 주님이 제게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큰데 역사에 기여하다 죽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물론 그분에게 어떤 역사의 무대가 주어질 가능성은 그 연세의 할머니에게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분은 죽는 날까지 역사의 변혁을 위해서 기도하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진정한 신앙은 바로 그런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경험을 그 다음에 눈에 보이는 역사 속에서 구현에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신의 소명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육화된 신앙입니다.
그래서 보면 세 개의 원이 나오는데, 먼저 하나님의 사람들의 역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어떤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구원역사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을 움직이고 관계를 맺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 그럴 때 우리는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찬양)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대하셨던 초대교회 공동체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어디에 담겼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당신이 죽으신 후에 이루어질 공동체에 대한 최상의 기대가 주기도문에 담겨 있습니다. 당신이 몸소 기도하셨으니까 그것이 당신의 비전이었습니다. 이상이었습니다. 그런 각도에서 주기도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마음을 주기도문의 그 내용이 마음을 뛰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치현실에 대해서 견해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이고 같은 교회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북한을 멸망시켜야 새 시대가 온다는 사람들도 있고, 지금 당장이라도 도와주고 교류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 정치의 견해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어떤 모습일 것이냐에 대한 생각들은 같아야 합니다. 그러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역사적인 미래의 비전에 대해서 가슴이 뛰고, 우리가 받는 은혜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나 그런데 이바지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또 세상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세상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결국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 같아도 아주 정교하게 톱니바퀴처럼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런 구원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을 이루면서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임금들은 자기가 잘나서 왕이 되고 통치자가 되고 자신들이 결단해서 전쟁이 일어나고 평화가 온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면서 당신의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전개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이런 역사 속에서 어찌하든지 자신의 역할을 하고 그리고 쓰임을 받아야 되겠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사는 보람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사람들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우선 하나님의 주권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전에는 부부에 대한 설교를 들었고 그리고 2시 예배에서는 독신과 결혼에 대한 설교를 들었지만, 어떤 경우든지 간에 결국은 하나님이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우리의 먹고 입고 자고 살고 하는 이 모든 과정들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그런 과정이 되도록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그 뜻을 발견하고 거기에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뜻이 이 세상에 실현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거지로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이 배척받는 세상에서 황제로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진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한순간의 갈망이 아닌 현실적인 승리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는데, 자기를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헌신의 마음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는데 모두 이바지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각자 소명이 주어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소명을, 어떤 사람에게는 신학생들을 교육할 소명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잃어버린 영혼을 전도하는 것에 온전히 헌신할 소명을, 어떤 사람은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그런 각자 하나님 앞에 받아서 그 소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역을 나와 다르기 때문에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깊이 존중해 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나 같은 사람 하나, 둘 혹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다보지 못하는 영역들에 소명을 느끼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로부터 배우고 이해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있는 마음을 자신도 가지려고 애쓰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멘탈리티(mentality)입니다.
문제 5) 오늘날 조국교회의 시대는 이러한 교회 역사의 산맥의 줄기에서 어떤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우리 중 오래 교회 다닌 사람 순서를 따라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봅시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의견을 각자 나누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줄거리를 가지고 이것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되겠다는 것을 오늘 배운 대로 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가고, 마지막 너무 길게 연설하듯 해서 진 빼지 마시고 70퍼센트 정도는 사람들이 말하게 두시고 30퍼센트만 가르치십시오. 그렇게 해서 정리하면서 마무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요약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미래를 위해서 교회가 준비를 해야 되는데 어떤 식으로 준비할 것인가? 우선 참된 회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참신앙의 모습을 가지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마치 사업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운영해도 안 되고 그리고 그렇게 교회를 이끌어가도 안 됩니다. 이런 참된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은혜생활을 하게 하면서, 아까 이야기한 대로 역사와 자기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목회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사회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등 많은 분야에서 그러한 비전을 자기 영역에서 어떻게 성취하면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분투하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참된 교회가 미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역할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을 잘 길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사회의 지도자들이 교회에서 배출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목회자가 필요합니다. 그런 목회자의 생명 있는 진리의 말씀 사역을 통해서 참된 회심이 일어나고 그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깊이 있는 기독교 지성인으로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따라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분야에서 활동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예를 들어서 요새 셰프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미래의 꿈이 무엇이냐고 하면 열 명중의 여섯 명이 셰프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 셰프들 가운데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수만 명에 하나인데, 그런 것도 어떻게 보면 아이들이 방송에 세뇌가 돼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먹방이나 노래방 같은 것을 한없이 보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벌써 아이들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자기가 모든 문화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만큼만 경험을 하면서 그것들을 주체적으로 소화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화 속에 빠져들어 가서 그것만 즐기는 사람들은 비판 능력이 안 생깁니다. 자기가 스스로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독서를 하고, 사색을 하고, 자기 지성을 연마하는 가운데 비판적으로 충돌하면서 서로 부딪히고 해석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무제한으로 텔레비전을 보게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간에 요리를 했는데 크리스천 요리를 만들었다고 합시다. 뻥이지요. 크리스천요리가 뭐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이슬람이라면 알라의 식품을 요리를 한다고 하겠지만, 크리스천 요리? 이것을 먹으면 말씀을 잘 들립니까? 이것을 마시면 기도가 뻥 뚫립니까? 뻥입니다. 기독교경제학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다 과장된 것입니다.
그냥 법조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문제가 됐습니다만 엄청나게 유명한 법률사무소에서 모든 사람이 볼 때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건을 변호하겠다고 덤벼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하나 이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법조계에 있으면서 그렇게 돈에 양심을 팔거나 도덕적인 판단을 흐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수수하게 살면서 그 경쟁 속에서 무엇인가 법의 정신을 실현해 간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법학을 따로 공부를 안 해도 그 자체가 존재의 울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가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서 무엇인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바지하기를 원하는데 그러려면 모두 전도자가 되든지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건축을 하는데 교회만 짓겠다,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명을 느낀다면. 그래도 받을 돈은 다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절을 지어주고 머스크를 지어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집을 짓고 건물을 짓는 것은 자기 비전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직업 활동 그 자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직업 활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다른 인생관과 다른 가치관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기 안에 있는 주님을 보여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좋은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것이 미래의 한국교회를 위한 대안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모든 것은 다 생깁니다. 진짜 능력 있고 잘 갖추어진 목회자들이 있어서 설교를 하고 사람들이 회심을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선교를 위한 헌금도 모일 것이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 자기의 재능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려고 할 것이고 모두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위해서 신학교가 미래의 목회자들을 교회와 협력해서 잘 길러내는 것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런 사회의 지도자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사회의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가 하는 것은 글로서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선배로서 본보기가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으면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껏 기독교의 역사의 산맥을 어떤 때는 낮게 어떤 때는 높게 하시지만 한 번도 끊어지게 하신 적은 없습니다. 줄기차게 뻗어 나오게 하셨고 당신의 사람들을 불러 다음 산맥을 이어갈 봉우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산과 산이 이어지면서 봉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떤 시점에 서 있고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교육하고 있는 우리의 자녀들, 학생들, 지체들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 시대가 지나가고 난 다음 시대에 이 기독교 역사의 산맥을 계속해서 줄기차게 뻗어나가게 할 것인가? 이런 것들을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섬기는 일에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