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2009년 설교모음)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2)
설교기간|200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3)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4)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5)
1. 복음적 교회의 기원과 영원성(마16:18) 2009.1.12 새해말씀 사경회(저녁) 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6)
2. 교회의 질서와 성도들(1)(엡4:11-12) 2009.1.13 새해말씀 사경회(저녁) 19
3. 교회의 질서와 성도들 (2)(엡4:11-12) 2009.1.14 새해말씀 사경회(저녁) 41
4. 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1 : 유기체적 생명(롬6:4) 2009.1.15 새해말씀 사경회(저녁) 62
5. 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2 : 유기체적 섬김①(엡4:16) 2009.1.16 새해말씀 사경회(저녁) 85
6. 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2 : 유기체적 섬김②(엡4:16) 2009.1.18 주일오전 11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6 (주일오전예배 2009/01/18)
7. 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 유기체적 통치①(엡5:22-23) 2009.2.1 주일오전 123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7 (주일오전예배 2009/02/01)
8. 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 유기체적 통치②(고전14:33) 2009.2.8 주일오전 136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2)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3)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4)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5)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6)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6 (주일오전예배 2009/01/18)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7 (주일오전예배 2009/02/0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8 (주일오전예배 2009/02/08)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복음적 교회의 기원과 영원성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I. 교회의 기원: 그리스도
A. 교회에 관한 계시
1.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 교회
2.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주어짐
B. 교회를 위한 구속
C. 교회를 위한 권위
1. 제도와 질서 안에서 권위를 행사하심
2.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행사하심
II. 통치의 권위: 그리스도
A.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권위
1. 그리스도의 존재적 권위
2. 그리스도의 행사적 권위
a. 교회를 몸소 세우심
b. 교회 통치를 위한 질서를 세우심
-직무를 정하심
-직분자들을 지정하심
c. 교회 통치를 위한 은사를 주심
B.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통치함
1. 성경과 동등한 입법적 권세는 없음
2.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마음과 의지를 따름
III. 교회의 영원성
A.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영원한 왕국을 주셨음
B. 성자께서 교회를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심
C. 교회는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함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2
교회의 질서와 성도들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I. 교회와 그리스도의 통치: 질서를 통해
A. 교회정치는 신적 질서를 반영함
B. 질서를 통한 4중의 유익
1. 순수한 신앙의 보존
2. 참된 말씀의 전파
3. 범법의 징벌과 억제
4. 교회와 세상을 효과적으로 섬김
C. 질서의 방식: 성경에서 계시됨
II. 교회와 입교자들
A. 입교자들의 의무
1. 중생한 신자로서의 참되고 공적인 고백
a. 신앙과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권위 인정
b. 그리스도에 대한 기꺼운 순종
2. 그리스도의 위격과 직무에 대한 지식
3. 죄에 대한 확신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고백
4. 교회를 통해 행사되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복종
5. 자기부인과 십자가 지는 삶: 성화의 분투
6. 신자로서의 의무를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수행함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3
교회의 질서와 성도들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B. 교회의 의무
1. 일반적 의무
a. 참된 신앙의 도리를 가르침
1) 믿어야 할 규칙: 진리의 체계로서의 교리
2) 행해야 할 교훈: 경건의 체계로서의 생활
b. 그를 위하여 기도해 줌
c. 어린아이처럼 돌보아줌
1) 장성해야 할 신자의 의무
2) 양육해야 할 교회의 의무
a) 교훈 b)책망 c)바르게 함 d)의로 교육함
3) 사랑해야 할 상호의 의무: 성도와 교회
2. 특별한 의무
a.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함
b. 회심과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게 함
c. 추문이 될 죄를 금하게 함
d.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게 함
1) 은혜에 의한 개별적 통치에 있어서
2) 질서를 통한 교회적 통치에 있어서
III. 교회의 질서와 성도의 복종
A. 교회의 질서와 외적 복종
1.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복종: 내적 + 외적
2. 외적 복종: 본성의 빛과 은혜의 작용임
a. 실제에서 순종할 때: 두 작용 구분 어려움
b. 은혜에서 부패할 때: 외적 복종 소홀
c. 복종마저 거부할 때: 그리스도 통치에 대한 노골적인 대적
B. 교회의 질서와 내적 복종
1. 진정한 복종: 은혜 작용 +외적 행동
2. 신자로 하여금 복종하게 하는 3 가지 영적 요소
a.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의 감각: 회심과 함께 생김
b. 성령의 인도를 받음: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연합 안에서 경험함
c. 복음의 의무를 깨달음: 공동체적 삶으로 이끌림
1) 십자가의 경험과 사랑의 감화
2) 감화된 사랑의 확장성
3)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에게로 외연을 확대됨
C. 진정한 복종:
1. 내적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음
2. 외적으로: 교회 질서에 복종함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4
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1:
유기체적 생명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I.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되심의 3 측면
A. 유기체적 생명의 머리
B. 유기체적 통치의 머리
C. 유기체적 봉사의 머리
II.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 유기체적 생명
A. 중생과 접붙임
1.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생명의 근원임
2. 그리스도께 접붙여짐: 생명에 참여함
3. 신자의 영적 생명의 본질: 영적 교통
a. 은혜의 시여
b. 은혜가 다양한 덕행으로 나타남
B.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령
1.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 세 차원들
a. 우주론적 차원
b. 인간론적 차원
c. 구원론적 차원
2.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a. 신비적 연합
b. 언약적 연합
c. 영적인 연합
3. 성령을 통한 구속의 적용
a. 거룩함 안에서 연합
1) 그리스도와의 관계
2) 거룩함의 원천으로서의 그리스도
3) 성령의 인도함
4)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재화의 기쁨
b.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C.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
1. 죄의 죽임
2. 은혜 살림
III. 은혜와 복종: 그리스도와의 연합적 사랑
A. 복음적 순종의 본질: 사랑
B. 복음적 의무와 사랑의 감각
C. 순종과 진리에 대한 인식
D. 실천과 진리에 대한 갈망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5
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2: 유기체적 섬김의 머리되심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I.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도의 교통
A.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공통체적 현실화: 교통
1. 내적으로: 그의 생명에 참여함
-그의 부요함(요 1:3-4, 롬 8:32)
2. 외적으로: 그의 은사를 사용함
-타인의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고전12:13, 13:5, 빌2:4-6)
B. 접붙임과 사역의 계승
1. 계승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
2. 계승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
II. 머리되심과 유기체적 섬김
A. 그리스도가 계셨더라면 계속하셨을 일들
B. 유기체적 섬김의 세 차원
1. 그리스도 안에의 구속
2. 그리스도 안에의 사랑
3. 그리스도 안에의 반영
a. 그리스도의 마음을 반영함
b. 그리스도의 모범을 반영함
c. 그리스도의 통치를 반영함
1) 유기체적 섬김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
2) 충성과 지혜를 주시는 그리스도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6
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2: 유기체적 섬김의 머리되심2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C. 섬길 수 있도록 공급하시는 하나님
1. 개별적 영혼 안에서: 하늘 자원과 은혜
2. 일반적 섭리 안에서: 지상 자원과 환경
III. 교회의 질서와 유기체적 섬김
A. 교회에 주신 두 권세
1. 질서를 유지하는 권세
2. 순결을 유지하는 권세
B. 유기체적인 섬김을 위한 질서
1. 교회의 영적 질서와 유기체적 섬김
a. 교회의 신령적 질서
b. 교회의 봉사적 질서
c. 두 질서의 관계와 통합
1) 진리에 대한 복종
2) 사랑에 의한 일치
2. 유기체적 생명과 나뉘지 않는 섬김
3. 존중되어야 할 목양의 질서와 정신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7
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3
교회의 유기체적 통치①
I.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 교회의 유기체적 통치
A. 권위의 원천: 그리스도
1. 신약 교회를 제정하심
2. 은혜의 방편, 말씀과 성례를 정하심
3. 교회의 헌법, 직원을 주시고 신적 권위로 입히심
4. 교회 안에 임재하시며 질서를 따라 일하심
B. 통치의 원천: 그리스도
1. 주관적으로: 성령 안에서
2. 객관적으로: 말씀 안에서
C. 통치의 실행: 개 교회
1. 일차적으로: 개 교회 자체 안에
2. 이차적으로: 통치의 실행을 위해 부르심 받은 자들
II. 교리권
A. 말씀을 순수하게 보존함
B. 말씀의 선포와 성례를 집행함
C. 신조와 신앙고백을 작성함
D. 성경과 신학 연구를 진작함
III. 결론: 교회의 번영과 말씀의 부흥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8
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3-2
교회의 유기체적 통치②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
I. 들어가는 말
II. 질서 유지권(고전 14:33)
A. 그리스도의 법을 시행하는 권세
B. 교회의 규칙을 정할 수 있는 권세
III. 순결 유지권(마 18:15-17)
A. 권징의 목적
B. 권징의 시행
IV. 봉사권(행 4:34-35)
A. 섬김의 대상
B. 연약한 자들을 돌봄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2)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3)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4)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5)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6)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6 (주일오전예배 2009/01/18)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7 (주일오전예배 2009/02/0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8 (주일오전예배 2009/02/08)
1.복음적 교회의 기원과 영원성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 18).
오늘 저녁부터 시작해서 다섯 번에 걸쳐서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복음적인 교회의 기원과 영원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림으로 내일부터 이어질 교회의 구체적인 질서 안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교회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고 또 그 교회가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당신을 이 제자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지 한번 떠보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예레미아 선지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시는 모습을 통해서는 세례요한을,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는 권능의 행사를 통해서는 엘리야의 모습을, 백성들을 사랑하고 눈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외치시는 음성 속에서는 예레미아의 모습을 읽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사람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때에 시몬 베드로가 모든 사도들을 대신해서 주님께 고백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이렇게 칭찬하신 적이 별로 없었는데 “바요나 시몬아!” 이 말은 요나의 아들 시몬아! 그런 뜻입니다.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칭찬하신 후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다”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라고 지어주시면서 그러면서 바로 그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 구절을 근거로 베드로 1대 교황설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한 이 반석이 베드로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은 이렇게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을 하는 베드로라는 사람위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으니 베드로라는 사람 이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 결국 하나님을 대리한 첫 번째 교황인데 그 사람이 바로 베드로고 이후로 이러한 교황의 권한은 사람을 통해서 계속 이어져서 지금까지 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사상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거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성경에 보면 “너는 베드로라” 이 말은 반석이라는 뜻인데 베드로를 왜 예수님께서 반석이라고 부르셨나하면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했으니까 이 것은 베드로의 인격이라기보다는 베드로가 남긴 신앙의 고백, 베드로가 모든 사도들을 대신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하는 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고백, 이 위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 반석은 베드로 개인의 자격이라기보다는 베드로와 꼭 같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으니 피부색깔이나 나이, 나라, 민족, 문화, 시대와 상관없이 그렇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들, 그 신앙의 터 위에 교회는 세워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양이 어떠한 모양이 되었든지 이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것은 참된 교회요. 교회의 모양이 아무리 교회답다 할지라도 이 고백에서 이탈하거나 이 고백이 근거로 되어있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일 수가 없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도대체 기독교에 있어서는 예수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한사람이 누구인가에 매인 종교는 없습니다. 불교도 마호메트교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시냐 예수그리스도를 어떤 분이시라고 믿고 신앙을 고백하느냐 이것이 이 모든 기독교 신앙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께 우리를 구원하도록 선택받은 중보자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우리의 구세주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 이것은 한사람 예수가 어떤 분이냐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와도 마음속에 ‘예수는 그리스도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이 고백이 없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점에서 약간 견해의 차이가 나도 이 고백이 아주 분명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받을 수 가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교회의 기원은 그리스도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Ⅰ. 교회의 기원 : 그리스도
그러면 여기에서 교회의 기원이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구약에서는 교회가 없었느냐 라는 질문이 제시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관한 계시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A. 교회에 관한 계시
교회에 관한 계시는 이미 구약시대에부터 우리에게 주어지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후에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타락하기 전에 인간에게 허락하신 제도인 결혼의 제도가 계속 유지되게 하십니다. 비록 영원불멸할 인간에서 한시적으로 살다 죽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고 늙음과 그리고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지 않고 완전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인간들에게 그런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고 완전성에서 멀어져서 소멸할 육체를 가진 인간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결혼의 제도를 이어지게 하십니다. 이것이 맨 처음에 가정과 교회가 나누어지지 않고 하나로 이렇게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조해서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의미하는데 이스라엘백성들은 야곱의 집안에 족속으로서 애굽에 가서 거기에서 민족이 아주 창대하게 번성하여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한 가문에서 민족을 이루게 되었고 그 민족이 나라를 형성하게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 세상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라로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 등장하기 전에 가정과 이 민족을 이어주는 고리가 있었는데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스라엘은 야곱이 하나님께 개명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개인의 이름이 민족의 이름이 되어서 구약성경에서 오늘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시대를 좀 거슬러 올라가면 야곱에게 아들들이 있고 야곱은 위로 올라가면 이삭이 있고 이삭에서 더 위로 올라가면 거기에는 아브라함이 있죠.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부터 아브라함까지는 굉장히 많은 시대가 흐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민족이 번성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의 계보를 남겨두십니다. 그래서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타락한 이후 가인은 불택자로 물러나고 아벨은 죽임을 당하고 셋의 후손이 아벨의 후손을 대신하면서 이후로 셋의 자손들이 한쪽으로는 같은 조상에서 태어나서 계속 불신앙으로 빠져나가고 그리고 한쪽으로는 선택된 백성들이 신앙으로 계속해서 전해 내려오며 가문으로 형성하게 됩니다. 그 가문은 단순한 가문이 아니라 교회와 가정이 일치가 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아는 특별한 지식을 갈라져나간 많은 사람들에게는 희미하게 주시고 갈라져나가지 않은 원줄기가 되는 계보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계시를 보여주시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그들에게 보여주심으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을 계시를 통해 끊임없이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아는 지식을 한 가정에 허락하셔서 그 한 가정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서 누군가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면 그 가정의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며 그들의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하나님에 관한 증거를 들으면서 구원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의 가문에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그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자신들의 후손 속에서 우리를 영원한 죄에서 건져낼 메시아가 탄생하실 것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기대를 가지고 제사 속에서 하나님 앞에 일시적으로나마 죄를 용서받으며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나누며 은혜와 진리의 생활을 해 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들이 점점 불어나게 되고 이 땅에 민족이 많아지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한가정이 아니라 더 큰 단위의 민족으로 그들을 만드셔서 그 민족 안에 공통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도를 두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요, 그리고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왕 같은 사람들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그들에게 주심으로 그 율법을 토대로 이제는 들려오는 전승의 이야기가 아니라 기록에 의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떻게 우리가 죄인이고 어떻게 우리가 구원의 약속을 받고 있는 지를 하나님이 알게끔 구원의 계시를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보존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가정이 믿음생활을 잘 해봐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는데 이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통해서 열방에 있는 많은 족속들이 이 이스라엘민족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들 가운데 전해 내려오는 율법을 배움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가 하는 것을 깨쳐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민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통해 현상적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고 그들 가운데 말씀으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담지 하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가 나라 되기 위해서는 백성과 주권과 영토가 있어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이미 애굽 땅에서 3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되었으니까 해결이 되었고 땅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허락을 해주셔서 그들을 거기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들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했는데 이 세상에서는 임금들이 그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이 나라는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셔서 직접통치하심으로서 주권을 담지 한 국가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백성은 이스라엘이고 땅은 가나안을 삼으심으로 완전히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는 가정과 교회가 하나가 되었는데 이번에는 국가와 교회가 하나 되게 하셔서 그래서 국가인 동시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그러한 교회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진리를 보존한 거룩한 백성들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을 알리기 위해서 이 백성들은 이 땅에 있는 백성들과 구별되지 않으면 모두 함께 섞여서 차별성이 없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것을 알리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백성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특별히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거룩한 하나님이니 너희도 나를 닮아 거룩해지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해지는 방법과 거룩한 사람들이 살아야 할 삶의 기준이 어떤 것인지를 율법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될지를 의식 법으로 가르쳐주시고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신앙과 일반생활 속에서 통일을 이루어야 할지를 그 핵심이 무엇인지를 십계명이라는 도덕법을 통해서 가르쳐주시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들이 같은 시민들로서 살아갈 때는 어떻게 살아야지만 그 국가가 곧 하나님의 교회임을 드러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시민법을 가르쳐 주심으로 백성들과의 사이에서 하나님에 법을 기준으로 함께 살아가도록 공동체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열방을 향해 기대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땅덩어리가 큰 나라가 되고 이 세상에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너희 이스라엘백성은 땅의 크기나 혹은 왕이나 황제의 지위의 높음에 의해 구별되는 나라, 군사의 수나 마필들의 수에 구별되는 나라가 아니라 나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너희와 함께하고 너희들은 나를 경외함으로 내 앞에 거룩한 삶을 삶으로써 이 땅에 있는 수많은 나라와 민족들과는 구별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어라. 그러면 내가 스스로 나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너희를 통해 이 모든 백성들에게 가르쳐 그들도 구원을 얻게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선택받았다는 점에서 다른 백성들일 뿐이지 실제 내용적으로 보면 그들도 똑같이 세상 좋아하고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필연적인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내버려 두시면 그 인간들이 하나님이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는 다른 민족이 될 수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 보내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고 진리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때에도 하나님께서 진리를 외치고 전달하는 당신의 종들을 보내셔서 하나님께로 받은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이미 받은 율법의 뜻을 드러내어 설교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백성들은 똑같이 잘못 살았을 경우에 하나님께 책망을 받으며 회개하고 올바로 살 때에는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자기의 마음속으로 느끼며 하나님 앞에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우상을 만드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그 모든 선진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수단이었지만 그렇게 우상을 만들게 되면 영적인 하나님이 우상 안에 갇혀져서 하나님이 자기 마음속에 없는데도 우상을 옆에 놓고 하나님이 여기계시다고 말할까봐 하나님께서는 당신자신을 믿는 여호와의 종교의 영적인 특성을 보존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일체의 우상을 만들지 못하게 그리고 그것에 경배할 수 없도록 못 박으시고 오직 이 세상에 어떤 민족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령하고 거룩한 방법으로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끔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고등한 종교의 표시이고 앞으로 인간의 부패성에 의해서 종교를 변질 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하고 은혜생활하면 하나님이 어디 계셔요? 내안에 계시죠. 내안에 주님이 계시기만하면 어디든지 안계신데 가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에 가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고 직장에 가서도 부정을 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 사이에 신의를 지키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은혜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이 내안에서 떠나가시면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아무데도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 안에서도 막하고 교회에 와도 하나님이 없습니다. 자기 안에 없으면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없는 것처럼 막되게 행동한다 이것입니다. 사람들과의 신의도 지키지 않고 직장에 가서는 부정행위하고 이렇게 하나님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 하나님이 없구나! 내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면 결국은 나는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살게 되는 구나!’ 그러니까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 그분께 붙어있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러나 이런 우상이라도 하나 가지고 있으면 뭐야, 위로가 될 거 아닙니다. 거기다 집어넣고 ‘하나님 어디 있냐? 여기 벽장에 계시다. 여기 계시는데 그래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이 이렇게 함께 하시는데 금으로 만들어 드렸는데 지켜주실 꺼야’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의 그런 우상을 없애고 마음과 영혼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그 하나님을 읽을 수 있는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들이 하나님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많은 것들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을 진리의 말씀을 통해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언제나 보게 되니까 이런 믿음을 가지면 우상이 없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게 되는 신앙을 갖게 된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구약의 이스라엘이 이처럼 교회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완전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진정으로 앞으로 태어나게 될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기대하고 바라게 하는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직접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격하게 말하면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 교회는 이미 아담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독특하고 고유한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이 계시던 때도 아직은 교회가 형성이 안됐습니다. 교회라는 표현이 나오긴 하지만 그건 좀 넓은 의미의 표현이고 진정한 복음적 교회의 시발은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복음적인 신약의 교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교회와 놀라운 신학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교회의 특성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교회는 제도였다면 신약의 교회는 훨씬 더 신령합니다. 구약의 교회가 율법을 통해 다스려졌다면 신약의 교회는 복음을 통해 다스려지게 됩니다. 물론 구약의 교회에도 율법 안에 복음이 나타났고 신약의 교회도 복음 속에 율법이 담겨있지만 그러나 주된 역사에 있어서 신약교회와 구약교회는 이렇게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독특한 차이점은 구약교회는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희미한 전망 속에서 지탱되어온 교회이고 신약교회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구속의 보증과 인치심속에서 이루어진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특성이 있는데 신약의 복음적인 교회는 구약의 교회에 비해 훨씬 신령하고 영적인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직접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시자 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마지막에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 의미가 구약의 교회와 신약의 교회를 어떻게 연결하는 지에 대해서 아주 환한 빛이 들어오는 것처럼 찬란한 계시의 빛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약의 교회는 구체적으로 이제 실현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에서 구약의 교회가 구체적으로 실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적인 교회의 그림자는 이미 아담의 가정으로부터 시작이 되지만 구체적인 기원은 그리스도예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보내신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진정한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B. 교회를 위한 구속
예수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기원이라고 할 때 이것은 교회를 위한 구속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즉, 신약의 복음적인 교회는 그리스도예수의 구속사건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그 은혜언약 관계 속에 들어와 거듭난 사람들로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있는 많은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음을 가졌지만 실제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을 위해 구속하시기 전까지는 그들의 구속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실 때에 그래서 그들의 모든 죄 값을 담당하셨을 때에 그 모든 구약의 성도들은 온전히 그리스도예수로 말미암아 온전한 구원을 입은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은 역사 속에서 실현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전가되어 그리스도 예수의 의를 구약의 성도들이든 신약의 성도들이든 덧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에게는 예상하지 못했던 아주 구체적이고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그들의 구속이 완전히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구속과 함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당신이 구속하신 사람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모두 하나로 모으시게 됩니다.
이 모으시는 방법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 데 하나는 신령한 방법으로 모으시는 것과 또 하나는 제도적인 방법으로 모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먼저 신령한 방법으로 모으십니다. 모든 교회는 오직 하나이고 하나인 이 모든 보편적인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예수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그가 구속한 모든 사람들은 그의 몸이 되어서 그와 함께 영적으로 접붙여져 신령한 몸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하늘에 있는 구약의 성도들로부터 시작해서 그리고 현재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동참했던 사람들과 이후로는 태어나게 될 모든 구원받을 사람들까지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구체적으로 이루어가며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삼아 그 모든 통치의 질서에 복종하는 하나의 교회의 모습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통해서 한 사람 한 사람 죄를 용서받고 죽었던 영혼은 하나님 앞에 중생하게 되었습니다. 중생한 그 영혼은 그리스도와 함께 접붙여져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내려오는 생명과 통치를 함께 받으며 함께 지체된 모든 사람들과 영적인 연합을 이루며 온 우주 안에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이 교회는 이미 이루어졌고 지금도 시간 안에서 실현되어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도로서 이들을 모으시는 방법은 그렇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영적인 연합은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의 영적인 실체이고 그리고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런 영적인 실체로서의 하나의 교회를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지역의 교회 안에 구현하게 하셨어요. 그래서 거기에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사람들을 모으시고 그 구속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하여서 그 고백의 토대위에 이제 시간과 공간 안에 이렇게 보이는 사람들끼리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모임을 만들어서 이 교회를 하나님께서 지역에 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교회의 기원으로 삼으셔서 이 교회를 위한 구속을 담당하게하심으로서 교회를 설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이렇게 세워 놓으시면 이 교회는 그냥 내버려두는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예수께서 친히 그 교회를 다스리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여야만 진정으로 이 교회가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데로 일하고 자기의 역할을 감당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을 이 모든 세계에 삶으로 언어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교회를 위해 권위를 주신 것입니다.
C. 교회를 위한 권위
이 권위는 맨 처음에 그리스도에게 모두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예수가 홀로 이 모든 교회의 권위를 가지신 머리가 되시고 이 머리의 권위를 가지고 제도와 질서 안에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권위를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예수는 신령한 몸인 교회의 머리입니다. 머리로서 머리가 모든 것을 명령하고 생각하므로 이 몸은 머리에 복종하며 그 머리가 계획하고 의도하는 바를 가슴으로 이루어가는 것이 우리의 신체의 활동양상이듯이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삼위의 계획을 모두 알고 이행하시는 가운데 그것으로서 모든 몸에 명령하여 이 몸을 그리스도의 몸답게 움직이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어쨌든 그리스도예수의 뜻대로 움직이는 그러한 권위의 행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예수에게 주신 권한을 하나님이 보이는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하셨는데 그 행사는 하나님이 친히 말씀으로 교회 속에 제도와 질서를 세우셔서 그 제도와 질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행사해 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만 세우시고 ‘나머지는 니들이 알아서 해라’ 그러지 않으시고 교회를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그 교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조직과 질서를 가져야 되는 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와 선지자들이 있고, 목사와 교사들이 있고 그리고 복음 전도하는 사람들이 있고, 장로가 있고, 감독이 있고, 집사가 있고 그리고 그 목사와 장로와 감독과 집사의 자격은 어떠한 것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일러주시고 그 제도에 대해서 상세하게 언급하신 이유는 바로 그렇게 세워진 교회의 제도와 질서가 예수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왕권을 행사하는 통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나머지는 니들이 알아서 해라’ 하고 맡겨두셔서 어느 한사람이 그 왕권을 가지고 휘둘러 교회가 좌지우지되고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도와 질서 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권위를 행사하십니다.
여기에 복음적 교회의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 이러한 개혁신학적인 교회론에 대한 생각이 없이 자기의 편의를 따라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저 나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혼자 신앙생활하면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동지도 필요하고 도와주는 서비스도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신앙생활을 좀더 잘하기 위한 수단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렇게 생각한 그 인간도 영적으로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에 붙어있는 작은 살점 하나 혹은 땀구멍 하나 지체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았으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떠하신 분이신지가 교회를 통해서는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올바로 이해하는 지식이 없으면 그는 결코 하나님 앞에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같은 시대에는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어떠하고 하나님의 교회의 제도와 질서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특별히 미국을 기준으로 1960년대 이후에 시작된 반권위주의, 한국에서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기점으로 시작된 권위에 대한 반발심, 기존의 질서에 대한 부정, 이러한 사조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교회의 복음적인 제도와 질서의 중요성은 대단히 위협을 받고 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인간이든지 막돼먹은 인간이 교회 안에서 똥 싸듯이 휘두르면 그것에 의해서 교회는 고스란히 피해를 보고 어찌하지도 못하고 그저 그 몇몇 인간에 의해서 짓밟히고 상처 나는 그러한 교회의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호하게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런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 사람은 마치 약의 용도가 무엇인지 모르고 아무약이나 복용하고 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 없이 이리저리 민간요법을 하며 암을 키워가다가 마지막에 비참한 말로를 맞고야마는 그런 사람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80년대 이후로 한국에는 반권위주의가 밀려들면서 제도에 대해서 반발하고 부정하고 권위에 대해서 고분고분 순종하지 않고 반골의 기질을 지니는 것은 의식이 있는 표요 그렇게 하지 않고 고분고분 복종하는 것은 의식이 없는 사람의 대표적인 표본이라는 생각들이 편만하게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래서 지성인들은 누구도 고분고분한 사람이 없고 어쨌든 반발심으로 가득 차서 기존의 권위와 질서를 부정하고 덤벼드는 그것이 의식이 있는 표라는 사상이 번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잘못된 사상 때문에 사회가 많이 고쳐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기질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밀려들어와서 사람들이 잘못 세운 것들에 대해 도전하던 기질이 하나님이 세우신 것도 하찮게 생각하며 덤벼드는 이러한 반권위주의적인 태도들이 밀려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은 티끌 같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무릎을 꿇는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자신은 쓰레기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아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 떨면서 자기를 용서해주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거기에서 신앙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와서 제일먼저 배워야 할 것은 복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와 질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이유 없이 거기에 무릎을 꿇고 복종하는 것 그것부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분방한 기독교인,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생활의 표준이기를 거부하는 신자들은 이런 고전적인 신앙을 가지고 생활 하지 않습니다.
교역자로 들어오면 교역자들에게 제일 먼저 제가 충고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대들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고 그리스도께서 명백히 성경을 통해 세우신 교회의 질서에 복종하고 그리고 먼저 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섬기며 이 교회를 사랑하는 섬기는 이들 앞에 복종하는 것부터 먼저 배워라. 나머지는 나중에 배워도 된다.”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전혀 이런 복음적인 교회에 대해서 바로 알지 않는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되심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데로 이 몸이 움직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손을 올리고 싶은데 손이 부들부들 떨면서 이 손을 옮길 수 없다면 우리가 장애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가고 싶은데 갈수가 없다면 머리는 가라고 명령하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몸에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겠죠.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예수께 복종하고 그분과 똑같은 마음을 가슴에 품고 신속하고 정확하게 충분히 기꺼운 마음으로 진심으로 이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의도하고 명령하는 데로 신속하게 힘차게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복종하며 움직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그 모든 것들을 통제하는 이 기관이 필요합니다. 몸에 흐르고 있는 피는 끊임없이 우리의 몸에 나쁜 것을 받아 날라 밖으로 배출하고 새롭고 신선한 양분과 산소를 공급합니다. 힘줄은 머리가 의도하는 데로 이 모든 사지백체를 움직일 수 있도록 머리에 그 근육을 복종시켜 완전히 순종하고 복종하게 함으로 정상적인 사람의 삶이 가능해집니다.
똑같이 그리스도예수께서는 이렇게 생명적인 은혜를 교회에 공급하심으로 불복종하려는 모든 악한 것들을 그러한 은혜의 피의 흐름 속에서 걷어 밖으로 배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산소와 같은 것을 끊임없이 공급하셔서 성도들로 하여금 내적으로 복종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일 때 핏줄만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근육이 움직입니다. 이 근육은 힘입니다. 이러한 힘들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제도와 질서에요. 이 제도는 구체적으로 교회에서 세우신 직분 자들로 나타나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위임하셔서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교회에 이런 직분이 있고 제도들이 있어서 이 교회의 질서들을 통해서 이렇게 움직여라 저렇게 움직이지 말라 명령하는데 움직이지 않는다면 또 움직인다면 그래서 머리에 반대되는 의사를 행하게 된다면 이 힘줄을 모두 잘라놓아서 피는 흘러가서 생명은 보존하지만 사지백체를 움직이지 못한 체 사지가 널브러져 들어 누워있는 기동할 수 없는 사람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이러한 사람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집사가 뭔데” “당회 웃기네!” 더 심하게 이야기 해볼까요. “아이고, 병신 같은 것들이 장로라고 앉아가지고” 어떤 사람은 아예 공공연하게 이야기해요 “나는 당회를 인정할 수없어” “목회자면 단가?” “지가 하나님인가?” 이런 이야기들은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면서 거침없이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에요. 이런 행동이 어떤 행동이냐 하면 자신의 몸에 피는 (이런 사람들이 또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흐르고 있어도 칼로 마디마다 칼질을 해서 힘줄을 다 끊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힘줄로 이루어져서 사지백체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끊어놓으면 마치 끈 떨어진 뼈마디처럼 되는 것입니다.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칼 가지고 다니면서 끊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의외로. 그러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요? 시간이 없어서 그건 다음에 하겠지만, 어떻게 하실까요? 가만히 안두시죠. 어떻게 하실까요? 그렇게 마음을 먹고 행동하는 순간 하늘의 문은 닫힙니다. 그런 사람들이 기도를 한 다구요? 개가 웃습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혹시 기도가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기도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끊어집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보면 교회의 이런 질서와 제도를 거부하고 무시하고 그런 힘줄들을 끊어놓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주위에서 많이 볼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되는 일도 없죠. 마음에 교회에 칼 꽂고 그리고 교회의 그런 힘줄들을 다 분질러버리고 그런 칼의 역할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에 되는 일이 있는지 한번 보세요. 사업을 하면 반드시 망할 겁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집니다. 영혼은 어두움이 드리웁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끊임없이 가시노릇을 하면서 주님의 교회에 고통을 줘요. 그가 진정 거듭난 사람인지는 가 봐야 알아요. 누구도 보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 권위를 주셔서 하나님이 이 제도와 질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행사하게 하시고 또 진리의 말씀과 성령을 계속 내려주심으로서 이 제도와 질서 속에서 사람들끼리 일체를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보면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 함께 은혜를 받으면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에서 있었던 일인데 시누이하고 올케하고 그렇게 사이가 안 좋다면서요?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자기도 시집가면 올케인데 왜 그렇게 살아. 어쨌든 시누이하고 올케가 하여튼 고양이하고 개처럼 싸웠데요. 하여튼 시누이 때문에 이혼할 생각까지 했다니까 지겹게 개 싸우듯이 싸웠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올케가 회심을 한것입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전도를 받아 가서 은혜를 흠뻑 받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제일먼저 나오는 회개가 뭐냐 하면 시누이하고 싸웠던 것이 회개가 나와요. 그러니까 가서 태도가 변한 것이 느껴질 거 아닙니다. 처음에는 경계합니다. 저게 또 무슨 병이 났기에 이렇게 태도가 바뀌나 (우리 저, 사이가 안 좋던 사람이 갑자기 활짝 웃고 다가오면 불안해지잖아요.) 이게 한번 두 번 세 번 해보니까 이게 진심이거든요. 그러면서 예수 믿으라고 마지막에 권고를 하는데 놀랍게 이 시누이가 올케 따라와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회심을 한것입니다. 둘이서 아주 최고의 신앙의 동지가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은혜는 그것을 함께 경험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거 아니에요? “아니 그런데 왜 교회에서 보면 두인간이 개 싸우듯이 싸우는데 그 인간 둘 다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고 서로 간증을 하는 데 그 인간은 왜 그렇습니까?” “나도 몰라” 가서 직접 물어봐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깊이 만났다는데 그게 지 느낌일 수 있고 사실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는 한때는 그렇게 깊이 만났지만 지금은 멀리 미끄러져서 그래서 상태가 아주 나빠서 그렇게 개 싸우듯이 서로 싸우는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쨌든 그런 이유에서 말씀과 성령을 끊임없이 보내심으로 일치를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달라도 하모니를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 되게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만들어나가시는 것입니다. 일치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와서 교역자로 있었던 사람이 잠깐 교역자생활하고 가면서 소감을 나한테 이야기하는데 자기는 다른 것은 모르는데 하나는 확실하데요. 열린교회는 목사님으로부터 저기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이르기까지 다 똑같은 신앙의 물이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같은 종류의 신앙의 물이 흘러내려간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래야지 이사람 와서 이 이야기하고 가고, 목사님들이 부목사에게 설교를 맡겨놓고 가면 불안해서 못 견디잖아요. 이거 따발총을 어디다가 쏠까? 나는 그런 걱정 안 합니다. 물론 걱정되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지만 기도해주죠.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내가 설교하는 것과 다르겠지만 그러나 들어도 그 부목사님 설교를 잘 듣고 은혜를 받으면 다음주에 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데 도움이 될 거다. 그건 심지어 구역장에게도 그런 신뢰를 가져요. 물론, 걱정되는 구역장도 있지요. 늘 기도를 많이 해줘야 하는 구역장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역장이 제대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는 걸 내가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구역원이 저 구역장에게 구역공부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은혜를 받으면 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교회가 진리와 성령을 보내주시는 하나님 은혜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어제 오후에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 마음이 쓰릿했죠. 해당되는 분들은 더 그랬을 것이고요. 그렇지만 믿어줘요. 내가 진짜 여러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처음에는 화도 좀 났는데 그때 그 설교를 했더라면 칼날이 좀 섰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내가 그 칼날을 넉 달 동안 묻어 놨다고요. 그리고 다 사라지고 난 다음에 꾼 사람도 불쌍하고 꿔준 사람도 가엾어요. 그런 눈물로 가득 찬 마음으로 공정하게 푼 것입니다. 그래서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도 몇 사람하고 이야기하면서 그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진리를 아는 사람이니까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랬지 이제는 알았으니까 아마 여러분은 동일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얼마나 놀라워요. 자,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다 놓고 “너 그럴래? 안 그럴래?” 각서 쓰라고 그러면 교회 뛰쳐나가지 치사해서 거기다 지장 찍고 있겠어요. 그런데 진리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힘이 몽둥이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힘보다 훨씬 더 크다 이 이야기에요. 성령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힘은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힘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그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생각해보세요.
“집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진작 드렸어야 하는 데” “저 그거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집사님, 전혀 부담 갖지 마시고 제가 섬기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받아 주십시오.” “제가 집사님을 위해서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마음속에 깨끗이 털고 얼마나 가볍고 감사해. 아니, 여러분 인생 살면서 몇 백 만원 몇 천 만원 구제 해본 적 있어요?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시지 않는 한 여러분 자력으로는 할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자의반 타의반으로 한번 하는 거 아닙니다. 진짜에요. 나도 태어나서 몇 천 만원씩 구제해본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 근처에까지 갔지만 그 이상은 해본적은 없습니다. 능력도 없고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감사합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여러분 중에 누가 밉겠어요.
그렇게 다스려지는 힘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그 권위를 이렇게 말씀사역을 통해서 목양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권위를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징벌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거 어떻게 한 인간 한 인간을 그렇게 징계해서 고치겠어요. 징계한다고 고쳐져요? 얘들도 잘 사랑으로 타이르는 것과 “이 놈!”하고 혼내는 것을 병행해야지 계속해서 몽둥이 대수를 늘린다고 해서 아이가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이 놈의 자식” 이러고 때리려고 하면 아빠 손을 탁 잡으면서 “허허 왜이러십니까, 고정하십시오. 건강에 해롭습니다. 기침도 많이 하시면서” 잡는단 말입니다. 대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잘 이렇게 하면서 가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권위를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렇게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서 ‘아, 그렇구나!’ ‘내가 어리석었구나!’ ‘아, 내가 하나만 생각했구나!’ ‘아, 그랬구나!’ ‘이것 하나만 볼 때는 그렇게 잘못된 것이 아니었는데 다른 것들을 다 이렇게 연결하고 보니까 아, 그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구나!’ 그렇게 깨달으면서 무릎을 꿇는 것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예수의 통치에 복종하고 그 권위가 행사되는 방법이라 이것입니다. 아무리 “예수가 좋다오.” 노래를 부르고 발광을 해도 그 찬송 많이 부른다고 예수님께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성령에 의해서 목양을 받고 변화 받은 사람들이 굴복하는 것입니다. 아멘
Ⅱ. 통치의 권위 : 그리스도
그런데 이 예수그리스도는 교회를 통치하시는 권위의 근원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치하시는 그 권위의 근원은 예수그리스도에요.
A.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권위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권위가 있습니다.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존재적 권위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모든 만물위에 지극히 높여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으니” 빌립보서 2장에 나오잖아요.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온 땅에 있는 모든 만민과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그 놀라운 영광스러운 일은 그리스도예수의 죽으심 이후에 부활과 함께 나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예수가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주님이 되시는 그것이 부활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앞에 예수님의 지상생활가운데서 “주여! 주여!” 라고 고백하는 말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물론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높이면서 “주여” 라고 부르는 것도 있었지만 “주여” 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주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며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주여-“퀴리에” 라고 하는 희랍어가 그 당시에 하인이 주인을 부를 때, 낮은 사람이 자기를 고용한 높은 사람을 부를 때, 심지어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 상대방에 대한 높임말로 사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지상생애에서 예수님을 “주여” 라고 불렀다고 해서 거기에 모두다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신앙의 고백이 담겨있는 걸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이 이제 “주여”라고 불리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자신에게 고유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예수그리스도에게 허락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의미로서 주님이라고 불렀던 그 호칭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존재가 이제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셔서 그들 위에 계신 존재의 권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자,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갖고 오시지 않으셨을 때에는 피조물이 아니시니까 피조물 속에서 발견될 수 없었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에는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몸은 피조물로서 모든 사람들 속에 함께 사셨죠. 그래서 예수님의 신성은 이 몸 안에 갇히지 않고 온 우주에 가득 있으셨지만 인성은 예수님의 이 몸 안에 제한적으로 계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 때에는 유대엔 없으셨어요.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는 갈릴리에 안 계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가실 때에는 데가볼리에 없으셨단 말입니다. 그런 분이셔서 피조물과 똑같이 보이셔서 존재에 있어서 예수님이 별다른 분이라고 하는 것을 믿음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변화산에서 변화되실 때에 그것을 본 제자들 이외에는 그런 걸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후에는 그 예수그리스도를 여전히 인성을 가지시면서 충만한 신성을 가지신 편제하신 신성의 주인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존재를 온 땅과 만물 모든 것 위에 지극히 높여서 모든 피조물이 심지어는 그를 찌른 자들도 예수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에는 볼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주셔서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온 땅과 모든 만물위에 아주 뛰어난 탁월함을 가지신 존재인 것을 하나님께서 드러내 보여 주시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존재적인 권위에요.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친히 당신 자신이 모든 만물과 온 땅위에 뛰어난 그런 존재로 계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탁월성을 바라보는 모든 인간과 피조물들로 하여금 자기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를 고백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때를 생각해보세요. 예전에는 4대성인 사회교과서에 나오는 한분 정도로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예수그리스도를 복음을 통해 만나게 됐어요. 단순히 복음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계시고 인성으로는 정해진 공간에 계시지만 신성으로는 삼위하나님과 온 땅과 우주 만물에 편제해 계신 그리스도예수를 뵙게 될 때에 그분의 탁월하심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에 자기는 아주 티끌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절대자 하나님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할 때에는 자기가 티끌 같은 존재이고 아주 더러운 죄인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예수의 탁월하심을 발견하고 나서 자신은 이 모든 만물 중에 찌끼에 불과하고 죄인 중에 괴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리스도예수와 자신사이에 있는 이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고 인생의 참된 행복은 탁월하신 그리스도예수 앞에 복종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그리스도의 권위는 이렇게 존재적으로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권위를 직접 행사하십니다. 그래서 하늘 보좌우편에 앉아계셔서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알아서 복종해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당신이 왕으로서 직접적으로 당신의 나라인 이 온 우주를 당신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들의 질서로운 움직임도 그리스도예수의 통치를 반영합니다. 보좌우편에 계신 그분이 그 모든 만물들을 붙들고 계시고 운행하고 움직이고 계심으로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모든 질서로운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교리적인 지식이 있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목사님, 예수님 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 전에는 그러면 그걸 누가 붙들고 있다가 예수님께 넘겨줬데요?” 그때도 예수님이 붙들고 계셨죠. 그때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으신 삼위 중 한분으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창조된 이 세상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이 지탱하고 질서롭게 움직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 그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시면서 동시에 당신 자신은 편만하신 신성 때문에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몸으로는 우리 가운데 계셨으나 그의 하나님의 본성으로는 삼위 하나님 가운데 계셔서 이 모든 만물을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인성을 가지신 하나님으로서 그 인성 안에서 그 모든 충만한 신성을 가지고 만물을 또한 동일하게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성의 찬란한 영광은 우리의 가시적인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성의 영광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는 성부와 성령은 볼 수 없고 성자 그리스도예수만 뵈옵게 되는 것입니다.
그 탁월한 영광으로 이 모든 만물들을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 우주가 아무리 넓고 크다고 하더라도 존재의 의미는 크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가지고 의미가 그 크기보다도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다스리실 때에 인간을 다스림으로서 당신 자신의 왕권을 펼치시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끊어졌어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어지던 이 만물의 아름다운 영적교통의 연결들은 단절되게 되었고 희미한 연결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예수의 속죄의 피로 구속시키신 후에 그 죄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연결을 다시 이으시는 것입니다. 이 연결은 궁극적으로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모두 이루어지고 모든 만물들도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다시 드러내게 되어서 타락하기 전에 이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결 속에서 당신 자신의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던 이 아름다운 사물의 교통들을 회복하게 될 것인데 그때는 완성의 때이고 그 완성이 될 때까지 하나님이 제일먼저 원래 있었던 그 아름다운 교통을 우선 회복하시고 싶어 하신 것이 있었는데 그게 사람사이의 회복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히 그리스도예수께 구속함을 받고 그의 접붙여져 몸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생명이신 그리스도예수와 연결시켜 그분에 생명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그 성품에 함께 참여하게 함으로써 예수의 생명을 그들 속에 나누어주시고 예수의 통치를 그들에게 실현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서로 한 몸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들어오고 타락한 이후에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 깨어지게 되었는데 이렇게 영적인 연결이 이루어지고 나서는 저 사람이 죄에 빠지면 살과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인데도 예수 안에서 맺어진 이 영적인 연결로 인해서 내가 아파하고 회개하고 그리고 저 사람이 충만한 성령의 은혜가 있으면 그것에 도움을 내가 받으면서 이렇게 하나의 몸처럼 연결을 이루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것인데 이게 바로 몸소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 교회를 그리스도예수께서 몸소 세우시고 이 한사람 한사람을 당신의 피로 구속하셔서 한사람 한사람을 당신의 몸에 접붙이셔서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삼위의 생명으로 그들에게 흘러들게 하시고 그리고 그 생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세포와 세포가 연결을 이루는 것처럼 똑같이 그리스도예수의 생명을 나누어 갖게 하심으로 영적인 공동체 함께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을 섬겨가는 운명 공동체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통치를 위한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자,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산중턱에 어마어마한 저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산 아래 수많은 논과 밭들이 있는데 만약에 그것을 그냥 내버려두면 산중턱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저수지의 물이 출렁출렁 넘치고 아래에 있는 논밭은 비가오지 않아서 가뭄에 타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농부라면 당연히 그 위에부터 시작해서 물길을 내어서 큰길을 가운데 두고 큰길에서 작은가지를 쳐서 그래서 뉘 집 논밭에도 그 물이 스며들지 못하는 곳이 없도록 높이와 길이를 조종하면서 물길을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나 물길을 막지 못하도록 단속을 하면서 저수지의 댐에 문을 열고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모든 논과 밭에 충분히 스며들어서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도록 지혜롭게 물길을 관리하지 않겠어요.
그리스도예수께 하나님이 이 모든 교회를 다스릴 수 있는 왕권을 주셨다고 하더라도 예수그리스도께서 직접 다스리실 수 없죠. 만약에 예전처럼 우리 가운데 계신다면 예수님이 담임목사가 되어서 “이렇게 해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렇게 하겠죠. 그래도 여러분 말 안들을 것입니다. 안 듣는 사람들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담대한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면 예수님이 몇 교회나 담임하실 수 있겠어요. 열린교회에 있는 동안은 닫힌 교회를 떠나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통치하시는 권한을 당신자신이 당신자신과 꼭 같은 성령님을 보내셔서 사람들 속에서 다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성령님의 은혜는 마치 저수지의 물과 같아요. 그 성령의 은혜가 스며드는 사람들의 마음 밭에서만 곡식이 자라. 그래서 이렇게 스며들어갔는데 이 사람은 성령의 은혜를 많이 받아 열매가 많이 나죠. 옆에 있는 인간은 삐뚜름해 그래서 빗겨가 그러면 여기서 가시덤불이 막 자라는 거요. 이렇게 되는 거요. 성령의 은혜는 그렇게 흘러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교회를 다스리실 때 둘 다 필요하지 않겠어요. 우리를 마음으로 잘 설복하셔서 “아멘”하게 하셔서 하시는 때가 있고 그릇 행할 때는 “그렇게 하지 마라” 이렇게 할 때가 있을 거 아닙니까.
우리들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어떤 때는 분명히 죽사발이 될 정도로 두드려 팰 정도로 잘못했는데도 팬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야 그래서 불러다 놓고 계속 타이르고 이렇게 해서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려서 “내가 우리 아빠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구나! 그러지 말아야지” 이렇게 하게 만드는 때도 있지만 아니, 공부하는 학생이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학교 가는 게 도리잖아요. 매일 퍼질러 잔다 이것입니다. 그럼 그걸 매일 아침마다 눈물 흘리게 할 수 있는 재간이 있는 부모 있으면 한번 손들어 봐요. 그게 아니라 문을 발길로 뻥 차고 “일어나 인마! 네가 지금 몇 학년인데 아직 이러고 있어” 이불을 확 걷으면서 “일어나” 그래서 이제 간신히 일어나면 밥상머리에 앉혀놓고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너! 좋은 말할 때 들어 너, 지금 네 나이가 이렇게 아빠가 매일 와서 너같이 큰 아들놈을 이렇게 깨워야 될 때냐. 너, 네 자신의 일을 그렇게 못해! 너, 내일부터 제때 일어나서 학교 안가면 가만히 안 둬! 용돈이고 뭐고 없어! 정신 똑바로 차려!” 이렇게 해야 될 때도 있다 이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러면 교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이 그렇게 하셔서 사람들을 설복하시면 그 까불고 돌아다녔던 사람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돌아와서 산다 이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게 행할 때 “하지 마! 하면 안돼! 그렇게 하지 마!” 이렇게 엄중하게 경고하고 타일러야 할 때가 있어요? 없어요? 그 둘 다 같이 가야 돼. 그런데 뭐라고 하냐하면 인격적인 신앙 좋아하는 사람들 있죠. “어, 뭐 인격적으로 하셔야지” 진짜 인격적인 사람은 인격적으로 해 달라고 요구 안 합니다.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들한테는 무슨 인격이, 무슨 인격적인 것을 그렇게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죠.
옛날, 새까맣게 옛날이야기에요. 교인들이 늘어나가지고 교회를 옮겨야 될 수밖에 없잖아요.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저리로 옮겨라’ 그래서 거기 갔어요. 그랬더니 몇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어요. “왜 떠났냐?” 그랬더니, “아니, 교회를 옮기는데 건축헌금 하라고 그랬으니까 너무 비인격적입니다.” 내가 저보고 돈을 달라고 그랬어?,그래서 “교회가 이만저만하니까 기도해 주십시오.” 그다음에 와서 “이렇게 이렇게 해서 교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다음에 와서 “이렇게 이렇게 되어서 이만큼 돈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유 있는 사람은 내고 없는 사람은 조금만내고 기도 많이 하시고 이렇게 해서 우리 갑시다.” 그랬는데 “뭐가 비인격적이냐?” “그래도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을 감동을 하셔야지” 지가 해보라 그러지, 교인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하나하나 붙들고 감동을 시키나 이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못하겠어요. 아니, 그리고 교회 옮기는데 하나님이 교회의 일꾼이나 목회자를 통해서 인도하게 하시는 거지, 아니,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백성을 가나안으로 가라고 그러실 때 모세 한사람에게 가르쳐 주셨지 이스라엘 집집마다 하나님이 찾아다니면서 심방하시면서 “야, 이해해라. 야, 니들 이제 출애굽 해야 되겠다. 야, 좀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래도 내가 하나님인데 체면 좀 봐줘라. 대들지 말고” 그 다음 집에 찾아가서 “저 집도 내말 듣는다고 했거든, 너도 좀 해” 그렇게 해서 250만 명을 심방해서 보내셨느냐 이거야. 인격적이란 말 아무데나 쓰면 안 되지. 그러니까 자식을 기를 때 그런 사람들 다 시집 장가가서 애들 낳았을 거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어떻게 교육시키는지 그 집에 한번 가 봤으면 좋겠어. 애들이 밥 안 먹고 땡깡부릴 때 매번마다 그렇게 눈물 흘리게 하는지 보고 싶어요. 그래서 성경의 가치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하지 마” 그럴 때 있습니다. 들어야지, 집안에서 엄마가 “하지 마 딸, 하지 마”,그랬는데 “치 웃기네!”, “너, 아빠한테 이른다.” 아빠가 와서 “하지 마라” 그러니까 “아이고, 뚜엣으로 노네!” 그러면 어떻게 되죠. 콩가루 집안입니다. 통제가 안 되죠. 그러면 가정에서 통제 안돼 봐야 손해 보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그렇게 되면 아주 심하게 하면 그런 사람들은 잘라내야 됩니다. 이제 삼일 째 가면 나와요. 잘라내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나머지 모든 지체들이 건강하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다가도 명백하게 잘못되면 “하지 마, 하지마라” 이렇게 교회의 제도와 질서를 통해서 명령하면 하고 싶어도 “네” 하고 하지 말아야지 그게 교회이지 “아이고, 웃기네! 담임목사면 다야”, “아이고 웃기네! 당회, 학력도 안 되는 것들이!” 이러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냐 이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마지막으로 그 모든 누가 어디로 돌아가나 하면 그리스도예수께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통치를 위한 질서를 구체적으로 세우셔요. 그리고 직무를 정하셔요.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어떤 거라는 걸 정하시죠. 한사람에게 맞기지 않으시고 직무를 정하시죠. 교회를 가르칠 목양하는 사람, 그러면서 교회를 치리할 지도자, 그 사람을 도와서 교회의 성도들에 신령한 사무를 총괄하고 그들을 돌아보고 교회를 순결하게 지키고 교리의 정당한 것들을 수호할 책임을 맡은 사람, 이런 사람들을 지정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를 질서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그 질서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경외심을 그 질서와 제도에 대한 복종으로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류가 없지만 사람은 오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도는 실수가 없지만 제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자체를 밟아버리고 무시해버려도 좋다는 것은 해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모든 죄를 용서해도 지 아버지에게 폭행을 하거나 엄마에게 폭행을 한 자식은 어느 시대에든 용서를 한 적이 없습니다. 모든 사회가 축출입니다. 칼빈의 시대에 그런 자식을 대려다가 묶어놓고 개 패듯이 팼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근본적인 인륜의 제도를 뒤흔드는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다. 부모가 잘못할 수 있잖아요. 아버지가 돈도 많고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고 권력도 있고 말발도 있고 ‘돈도 많고’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돈도 많고 그리고 존경할만하면 자식들은 너무 행복합니다. 그런데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아버지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 아버지를 깔보고 사람취급 안하고 그렇게 대들어도 되는 거죠? 안되죠. 하나님 앞에서도 용납될 수없고 사회적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제도를 부정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사이를 분간을 못해. 그래서 사람이 올바르지 않거나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이 세우신 그 제도를 아무렇게나 밟아버려도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이것입니다. “아 나 그 인간 담임목사로 생각 안한지 오래됐어!” 나도 들은 이야기에요. 오래됐어요. 신학교가면 전도사들이 점심시간이면 잔디밭에 앉아서 궁시렁거리고 지 담임목사 “아이고, 그것도 설교라고 밥을 먹는 것을 보면 기적이지!” 그러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를 그렇게 이야기할 정도니까 무슨 장로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번 씹히면, 그렇게 짓밟은 속에서 그게 결국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아까 이야기 했듯이 하늘은 닫히고 말씀의 은혜는 사라지고 영혼은 고사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의 이런 질서를 훼방하고 근육을 끊어놓고 끊임없이 고통을 주면서 영혼의 번영을 누리는 교인을 본적이 있어요?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에 영혼의 그러한 곤고함이 자신의 그러한 잘못된 신앙의 태도 있다고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직분 자들을 지정하셔서 그래서 교회의 질서를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통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의 자원과 땅의 자원을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B.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권위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하나님은 통치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법을 세울 권세는 없습니다. 그거는 성경의 완전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 건 없습니다. 법을 만들었는데 성경에 정신에 배치되면 잘못된 것이며 명백하게 성경의 가르침을 배반하는 것이면 그것을 준수할 의무는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마음과 의지를 따라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킬 수 있도록 규칙들을 만들고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물길처럼 흘러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가기 위해서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는 당신이 교회의 머리이신 권세를 모든 백성을 향해 행사하심으로 교회를 진정으로 교회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가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없습니다. 그리스도예수의 이 왕권에 도전하면서 다른 것으로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려는 것은 왕의 목에 반역의 칼날을 겨누면서 한쪽으로는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와서 왕에게 드밀며 왕에게 인심을 얻어 보려고 어리석은 사람과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여러분은 교회와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2)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3)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4)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5)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6)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6 (주일오전예배 2009/01/18)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7 (주일오전예배 2009/02/0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8 (주일오전예배 2009/02/08)
2.교회의 질서와 성도들(1)
“그가 혹은 사도로,혹은 선지자로,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2).
어제 집회를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설교를 다 못하고 끝냈어요. 그래서 먼저 어저께 못한 것 하고 그리고 성경봉독하고 그리고 오늘 것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오늘도 저희와 함께 해 주셔서 어제에 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저희들이 경청하려고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해 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래서 쫌 이상합니다. 이런 사경회가 없지. 그래도 괜찮아요. 자, 그래서 결국 교회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데 하나님이 교회의 제도를 통해서 통치하시지만 그 통치의 궁극적인 권위는 그리스도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개혁파 정통주의 신앙과 카톨릭의 차이는 카톨릭은 성경과 교회를 대등하게 혹은 교회를 성경보다 훨씬 높이 봐요. 그래서 교회에서 성경을 능가하는 규칙을 제정할 수 있고, 그것에 의해서 교회를 통솔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 정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교회가 성경에 의해서 생겨났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의 권위의 근원으로 교회를 통치하실 때에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성경이 정해준 질서에 의해서 그래서 이 하나님의 교회를 통치해 나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과 동등한 법을 세워서 그래서 성경의 가르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이런 권세를 하나님이 교회에 부여하셨다고 믿지를 않아요. 그것이 바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대한 복종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근데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의 주 되심을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어떻게 복종해야 할지를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무릎을 꿇고 복종하게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의 진리예요. 그래서 교회는 성경에서 교회의 질서에 대한 것을 찾아내고, 그리고 그것들을 잘 연결해서 어떻게 교회를 다스리고 성도들을 양육하고 가르치고 돌보고 생활하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이 그리스도의 통치의 질서에 부합하겠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이렇게 교회는 주님의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래요. 굉장히 신앙이 좋으신 분이었는데도 자기 아이는 절대로 중고등부에 보내지 않는데요. 그래서 왜 중고등부에 보내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성경에 그런게 어디에 나왔냐고, 마침 그러다가 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중등부애들이 수련회에 갔다가 하나가 물에 빠져서 죽었습니다. 거 봐라 성경에 없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하니까 그러니까 물에 빠져서 죽지 않냐, 그러므로 그런 것 모두 다 잘못된 인본적인 것이다 그래요. 그 이야기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틀린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중고등학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고등부를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누가 그래요. ‘열린교회는 남전도회도 없고 여전도회도 없다면서요’. ‘예 그렇습니다.’ ‘아유 굉장히 성경적이시네요’. ‘난 그런 걸 의도하고 하는 건 아닌데 왜요?’ ‘성경에 남전도회가 어디에 나옵니까?’ 그래서 졸지에 아주 성경적인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틀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하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과 대등하거나 그것을 능가하는 법을 세울 수는 없지만 성경이 교회에 가르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의 질서를 보다 잘 구현하기 위해서 그 권위 아래에 복종하는 더 좋은 규칙들은 교회가 만들어서 그 질서를 더 효율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같은 그런 권위를 부여하려고 하면 안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통치하시는데 성도들에게 말씀과 은혜를 주심으로 예수의 마음과 의지를 깨닫고 그것을 구현해 나아가는 질서로운 통치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를 구현해 나가시는 거고 그리스도 예수의 권위를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일치하게 복종하면서 그러면서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명백하게 성경을 통해서 세워진 질서들이 있을 때 여기에 대해서 각자가 아무렇게나 판단하고 ‘나는 그게 싫어’, ‘나는 동의할 수 없어’, ‘나는 그런 방식이 맘에 안들어’ 하고 각각 반기를 들고 대들게 되면 그것은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 질서 전체에 대한 말하자면 도전이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제일 먼저 그가 알고 행한다면 더 심각하게, 모르고 행한다면 그것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심각하게 즉각적으로 자신이 의식하든 못하던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닫히고 그리고 영혼의 어두움이 드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교회에 붙어살고 무슨 특별한 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저 봉사해도 교회에서, 그저 밥을 먹어도 교회에서, 놀아도 심지어는 교회에서 그렇게 노는데도 영혼의 깊은 곤고함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결국은 이런 문제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좀 더 많이 있는데 넘어가겠습니다.
III. 교회의 영원성
A.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영원한 왕국을 주셨음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원이시고 그리고 그리스도가 교회를 통치하시는데 성경은 이 복음적인 교회가 영원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를 영원한 왕국으로 주신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이 땅에 세워졌는데,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교회 하나만을 세우시기 위해서 이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시는 방법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비유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자 우리가 나무를 심잖아요. 그러면 우리들이 흔히 나무를 심을 때에는 식목업자에게 묘목을 사서 그 묘목을 지고 산에 올라가서 땅을 파고 나무를 심잖아요. 그럼 원래대로 말하자면 만약 산에 나무가 떨어져서, 나무의 씨가 바람에 날려서 떨어져서 땅속에 묻히게 되겠죠. 그러면 그 씨앗이 떨어져서 뿌리를 내리고 뻗어나가면서 작은 묘목이 되고, 더 큰 나무가 되고, 나무가 되고, 나무가 되고, 나무가 되어서 나중에는 많은 새들이 깃드는 아름드리 큰 나무가 되지 않아요. 그러면 교회를 그 씨에다 비유한다면 그 교회를 통해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그 큰 거목에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지역에서 십자가를 세우고 교회를 세워서 불신앙적인 사람들과 더불어 싸우고 핍박과 고난 속에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세속주의와 더불어 다투면서 이렇게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이런 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고 나면 이 지상의 교회들은 모두 들려 올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각기 선한 일을 행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불신앙의 악을 행한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아오게 하시고 이 모든 세상을 궁극적으로 완성시키시죠.
그래서 결국은 완성되고 난 다음에 지금은 악인과 선인이 섞여있지만 하나님을 끝까지 대적하는 악한 사람들을 분리시키고 난 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온전한 나라를 만드셔서 거기서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를 온전히 구현해 나아가는 사랑과 그리고 통치의 질서가 있는 공동체를 구현해 나가시는데, 이게 이제는 어떻게 동네에 세워진 한 교회, 두 교회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통치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나라예요. 그런데 이 나라는 결국은 교회라고 하는 씨앗이 터져 나오면서 맺혀지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은 씨는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서 죽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죽었지만 죽은 그 씨가 나무로 되어서 그 나무가 자랐다는 점에서는 씨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씨가 계속해서 발전을 해서 연속성을 가지고 나무를 만들어 간거 아니에요? 똑같이 언젠가는 이 지상에 있는 열린교회, 무슨동 교회, 아무교회, 아무개 교회 이런 것들은 결국 껍질처럼 까서 없어져 버려요. 그렇지만 이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이 껍질을 탈피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그런 도구가 되어서 사실은 이 땅에 있는 작은 개별적인 교회들이 없어졌으나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서 뿌리가 나오고 줄기, 가지가 뻗어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우주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탈바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된 나라를 다스리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에게 그 나라를 다스릴 수 있도록 권한과 통치를 주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셔요. 그럼 그 나라가 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지상에 있는 교회들은 바로 그렇게 그 나라를 향하여 전망을 하고 가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절대로 망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지상에 있는 교회가 망해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 마음대로 통치하실 수 없다면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통치를 가로막는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하고자 하는 의지가 가로막는 것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가로막힐 것 같으면 그 하나님이 하나님이실 수 있겠느냐 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주신 왕국이 영원한 왕국이기 때문에 그 교회는 왕국을 이루는 수단이기 때문에 그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원하다라는 것입니다.
B. 성자께서 교회를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심
또 하나는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이거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거는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라고 하는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화자의 의지가 거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교회는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18C의 계몽주의 시대에 프랑스의 볼테르라는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이건 뭐 놀랍게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이성주의가 막 부흥을 하니까 이제 이런 하나님을 믿는다든지 하는 이런 신앙 같은 것들은 아주 하찮게 여겨졌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예언을 했어요. 100년 뒤에 정확히 100년 뒤에 이 지구상에서 성경이란 문서는 모두 폐기 될 것이다. 100년 후에 그 사람이 살던 집이 프랑스 성서 공회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핍박과 환란이 일어나고 또 한편으로는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던 나라들이 잘 살게 되면서 그 신앙을 끊임없이 버려요. 그러면 ‘아 이제는 기독교는 종말이 오는 구나’ 하고 낙심이 되던 역사의 순간들이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 위기가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의 박해였잖아요. 세례를 받으면 즉시 죽여버릴 정도로 그렇게 무서운,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재산이 모두 박탈당하고 가문에서 끊어져 버리는 그런 무서운 핍박과 형벌이 주어졌는데, 그러면 기독교가 결국은 망하겠구나 생각 되었지만 절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 핍박 속에서 교회는 순교의 피를 먹고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에 시간이 없어서 예를 들 수 없지만 그 모든 역사를 통해서 기독교는 곧 망할 것 같았지만 결코 죽지 않고 계속 뻗어나갔던 것입니다. 구라파 교회가 문을 닫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고, 신학교에 무신론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리고 미국 교회가 점점 더 자유주의로 기울어서 이제는 교회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있던 때에 아시아에서 한국에서는 복음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면서 이 복음이 역사가 일어나고 수많은 교회들이 서게 된 것입니다.
지금 신학교를 졸업하는 사람들은 너무 불쌍합니다. 70년대쯤 졸업했던 사람들은 뭐 할 게 없습니다. 그냥 세우면 사람들이 몰려와요. 세우면 사람들이 몰려와요. 그 사람들이 그때 그렇게 실력이 있었겠어요? 뭘 실력이 있습니다. 지금 젊은 사람들이 실력이 더 좋죠. 몰려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설교가 뭐 엄청났느냐 그게 아닙니다. 그때 설교 틀어놓으면 요즘 사람들은 식상해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쨌든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요. 하루종일 공장에 가서 일하고 그리고 저녁때는 이쪽에는 연탄 하나 들고 쌀 한봉지를 사들고 들어와서 집에 갖다놓고 저녁때 교회에 가는 것입니다. 기도하러 그래서 펑펑 울면서 ‘예수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확 불길처럼 일어나고, 이게 슬슬슬슬 꺼지기 시작하니까 이 불이 중국으로 번져요. 확 타오르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계속 불길들이 일어나잖아요.
영국에 가보면 영국인들은 신앙을 다 버렸어요. 그래서 교회가 무슬렘으로 팔리고, 댄스장으로 팔리고, 심지어는 술집으로 바뀌어요. 그런데 그런 무너져 가는 교회를 세 얻어서 열심히 모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입니다. 모이면서 그 사람들은 뭐 설교 같은 것도 별로 잘 안하고 계속 모여서 춤추면서 노래하고 계속 정말 대단합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계속해서 탬버린 흔들면서, 수련회 장소 얻어가지고 그냥 아침서부터 저녁까지 꺼먼 옷 입고 계속 꺼먼 사람들이 계속 그래서 어쨋든 간증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이런 등치 있는 흑인들이 손을 들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코 어느 한 부분을 보면 기독교가 쇠퇴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끊임없이 이 복음은 전파되면서 그러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요. 지금도 서부 아프리카 쪽으로 가면 기독교 역사의 큰 영향을 끼쳤던 19C 인물이 있습니다. 이름이 뭐냐면 김방구예요. 그래서 그 김방구를 따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방구리안이라고 하는데 아주 유명한 엄청난 부흥사였고 영적 지도자였어요. 죽었습니다. 그런데 막 지금도 그 사람을 따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 핍박과 고난을 이기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전 세계 속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전체의 선교 역사를 보면 우리는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이렇게 복음이 사라지는 것 같은데 캄보디아에 가봐요. 예수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아멘 하고 새카맣게 몰려와. 뜨겁게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계 전체를 놓고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결국은 이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를 망하지 않게 하시구나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보존하시겠다고 하는 그 약속을 실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C. 교회는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함
그래서 결국은 이 교회가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께 머리이신 예수께 접붙여져있는 교회의 몸이 지금은 시간 속에서 환란과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세속주의의 물결에 삼키는 거 같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본질을 떠나서 세속화되고 신앙을 버리는 것 같지만, 여기 평촌, 서울, 대한민국 이것만 보면 안 됩니다. 북한 요것만 보면 안 됩니다. 넓게 펼쳐서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한국에 있는 교회만이 교회가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모든 교회들이 하나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몸입니다. 그것을 전체적인 것을 보면 결코 교회가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때마다 하나님께서 큰 부흥을 내리시고, 그래서 1910년대에는 한국에 큰 부흥을, 1900년대에는 영국에, 웨일즈에, 그 다음에 1900년도 후반에는 인도에, 1910년에는 한국에, 1930년대에는 아프리카에, 1960년대에는 인도네시아에 하나님이 각각 각각 부흥을 주셔서 거짓말 같은 역사가 일어나서 하나님의 교회가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역사가 지구 저쪽에서 계속 들쭉날쭉 하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한 번에 지구에 있는 교회 전체를 이렇게 바라보면 이게 실망할 것이 아니라 ‘야 드디어 이 역사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향해서 가고 있구나’ 가슴이 막 뛰게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은 선교사를 파송을 하고,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열렬하게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가고, 또 한편은 이쪽에서 식으면서 예수를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과 또 싸우면서 그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키고, 온 곳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힘입으면서 우리들이 이 선교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 됩니다. 그때 교회는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지금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접붙여진 사람들의 머리이시지만, 결국에는 이 모든 세상을 정리하신 후에는 이 모든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머리를 그리스도로 하는 모든 지체들로 이루어져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서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당신의 마음에 꼭 맞게끔 훌륭하게 통치하시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자연의 모든 세계도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그리고 상실한 광채, 창조주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이 결함이 있는 자연의 세계까지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따라서 예수에게 주신 왕권으로 통치하심으로 이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도덕적인 이 모든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모든 유익을 충만하게 누려서 아주 아름다운 자연의 질서가 회복되고, 그리고 아주 아름다운 도덕의 질서가 회복이 되어서 이 두개의 질서의 조직 속에서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 아름답게 드러날 영광을 먼저 소수의 사람들에게 맛보게 하시고 보여주고 싶으셨는데 그게 바로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가 이런 왕위에서 폐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위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육적인 왕국 이스라엘은 망해도 영적인 다윗의 왕국인 교회의 통치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보좌의 그 위는 영원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의 통치가 점점 더 확장될지언정 결코 사라지거나 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고 교회는 바로 그렇게 영광을 받으실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에 종말론적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운명과 교회의 운명은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교회는 영원하게 되는 거고, 교회가 영원하니 성도들도 영원한 교회와 함께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왕권을 실현하면서 수종들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기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래에 그렇게 예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갈 놀라운 기쁨을 미리 맛보고 가불해서 여기에서 맛보면서 그 유익을 먼저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게 어제까지 하고 싶었던 내용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을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12절입니다.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랬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앞에서는 어제 못한 내용들을 보충으로 들었습니다. 오늘 이어지는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저희들이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I. 교회와 그리스도의 통치: 질서를 통해
우선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혹은 그가 혹은 사도로 여기에서 그는 그리스도이시죠. “그리스도께서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히랍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조금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한번 보세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틀리는 거는 없는데 12절이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목사와 교사로 주셨는데 이렇게 주신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해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해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차이가 있죠? 그래서 어떻게?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 이것이 결국은 마지막에 예수의 몸을 세우는데 이바지 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그리고 목사와 교사와 이런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셨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들은 이제 교회의 질서와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과 내일 이틀에 걸쳐서 다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의 질서와 성도들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자 이제 우리 어제 배운 내용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결국은 교회를 통치하시는데 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통치는 결국은 질서를 통해 이루어지는 통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이렇게 몸을 입고 다시 계교에 와서 당신이 담임목사처럼 다스릴 것이 아니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가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이 세우신 질서들을 통해서 그 질서 속에 세워진 직분자들을 통해서 그래서 성경의 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치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그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스도 예수께 통치를 받는 그러한 공동체로 삼으심으로써 당신은 하늘에 계시지만 여전히 당신이 여기에 계신 것처럼 통치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자면 중국이라는 나라를 보면 이끝에서 저끝까지 지금도 비행기를 타고 날라가려면 5내지 6시간 정도 날라가야 되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에까지 내려가려면 6시간 넘을 것입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먼 거리니까 옛날에 황제들이 그걸 다 다닐 수가 있겠어요? 불가능했겠죠. 지금은 비행기라도 타니까 다니지만 예전에 황제가 한번 출두를 하려면 수천명이 마차를 끌고 도로를 수리하면서 다녀야 되는데, 황제가 그렇게 마음대로 자기의 수도를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많은 황제들은 사실은 태어나서 그 근처에서 이렇게 살다가 결국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넓은 땅덩어리들을 일사분란하게 다스렸죠. 로마같은 나라가 대표적인 것 아니예요? 그럼 어떻게 했죠? 그런 나라들의 공통점은 황제는 그 궁 밖을 벗어날 수도 없는 사람, 왜? 어디에 가면 누구한테 죽임을 당할까봐 수많은 군대들에게 에워싸여서 돌로 만든 집에 갇혀서 살던 사람인데 그렇게 갇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땅덩어리를 놀랍게 통치할 수 있을까? 그건 뭐죠? 법을 만들고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법을 절대적으로 따르도록 감시하고 따르지 않는 사람은 반역이라는 죄로 그를 심하게 징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뭐 반역을 하면 3족을 멸했다고 하잖아요. 중국을 보면 9족을 멸했다고 합니다. 누구 한 사람이 사돈의 팔촌의 누가 반역을 했다더라, 그러면 그와 티끌만큼도 피가 섞여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아예 수백 명, 수천 명을 싸그리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씨를 말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뭐 사돈의 팔촌이 죄를 지었는데 내가 그 사람 얼굴도 못 봤는데 그냥 억울하게 한 꿰임에 꿰어서 다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만큼 황제는 다른 건 몰라도 왕권에 도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극도로 용서하지 않고 극형에 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황제 자신은 돌로 만든 그 왕궁을 떠나지 못하는데도 가보지 못한 수많은 땅들을 질서 정연하게 다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나라가 대표적인 나라가 로마잖아요. 그러니까 로마가 가는 곳마다 길을 만들었잖아요. 이유는 두 가지예요.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면 바람처럼 달려가서 반 죽여 버리는, 아니 완전히 죽여 버리는, 그 다음에 세금을 거두는 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놀랍게 도로를 건설했던 것입니다.
A. 교회정치는 신적 질서를 반영함
그러면 똑같이 만약에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물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지만 그래서 우리를 교회를 통치하신다고 할 때, 결국은 그 통치는 교회를 향해 가지고 계신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시는 이 질서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정치는 즉, 여기서 정치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시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신적인 질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이렇게 볼 때 사람을 보고 아우 참 예쁘다, 이렇게 하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자 그러면 그 예쁘다는 기준이 뭐겠어요. ‘아 참 예쁘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면 이목구비가 제자리에 가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 다음에 우리의 몸의 원래의 들어갈 부분은 들어가고 나올 부분은 나오고, 살이 적당히 붙을 부분은 붙고 빠질 부분은 빠져서 적절한 것을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그 사람이 예쁜 사람이다 이렇게 불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미인들의 자격을 자로 재서 다 해보면 놀랍게 비율이 나오게 되는데 황금비율입니다. 그걸 볼때 우리는 머리 속으로 계산기로 계산하지 않아도 그 비율이 딱 맞을 때 아주 예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건물도 마찬가지죠. 꽃꽂이도 마찬가지고 이 꽃꽂이 하나도 각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꽃꽂이 모양이 훨씬 달라지죠. 꽃꽂이 그래서 배울 때 제일 먼저 기초가 각도의 아름다움부터 배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하나, 색깔, 이런 모든 것들도 다 조화를 이루면서 배워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 아름다움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질서예요. 그 질서가 아주 잘 이루어져 있으면 놀라운 아름다움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질서가 더 아름다우려면 어떻게 하냐면 여러 개의 요소들이 아주 복잡한 비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비율이 놀라운 일치와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그것은 더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무토막 하나도 예쁜 게 있고 미운 게 있지만 나무토막 하나보다는 그 나무로 집을 지었을 때가 더 예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질서예요.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질서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면 똑같이 우리의 영적 세계도 질서가 아름답게 이루어져 있을 때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이고 교회가 아름답다라고 할 때는 바로 건물이 크고 예뻐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시고, 통치하시는 이 질서가 교회 안에 아주 아름다운 조화와 일치를 이루면서 그것대로 움직여지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아주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는 질서를 통해 이루어지고 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는 아주 아름다운 질서예요. 그리고 이 아주 아름다운 질서에 인간이 순응해서 그 질서를 통해 행사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에 온전히 복종하게 될 때 그 교회는 아주 아름다운 모습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그러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워 놓으신 교회의 질서가 아름다운 것이라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아름답게 느낄 것이고 그렇게 느꼈다면 아름다운 것에 끌려서 아름다운 대로 행동할 것이니까 그리스도께서 아름답게 세워 주셨으면 당연히 그 안에 사는 성도들도 아름답게 믿고 살 것이 아니냐 이런 결론에 도달하잖아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두 가지로 설명이 됩니다.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우신 질서는 아주 아름답지만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그 질서는 아주 아름답지만 그러나 그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고 섬기는 사람들은 주님의 질서만큼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사람들을 끼어놓았을 때 그렇게 예쁘다는 느낌이 안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텔레비전을 보면 모델들이 옷을 입고 나와서 광고를 합니다. 이 옷 하나 사보시라고. 너무 옷이 예뻐요. 그래서 자기도 그거를 한번 사보는 것입니다. 평소에 입던 옷이 훨씬 낫죠. 왜냐하면 몸이 받쳐줘야지 그거를 입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백화점에 갔는데 어떤 자매는 그 옷을 계속 사겠다고 고집을 쓰고, 남편은 빨리 벗으라고 계속 그래요. 왜냐하면 옷은 참 예뻐요. 그런데 그 옷을 입으니까 자매의 온 몸의 굴곡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나오면서 배를 툭툭 찌르면서 이거는 당신이 입을 옷이 아니야, 빨리 벗어, 옷 늘어나, 빨리 벗어, 그런 것입니다. 옷은 예쁜데 그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의 몸매가 안 받쳐주니까 그러니까 옷은 옷 자체로 아주 예쁜데 옷과 옷을 입은 사람 사이의 조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예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질서는 완전합니다. 근데 그 질서 속에 있는 사람들은 완전하지 않아요. 자 교회의 목회자의 직분, 얼마나 아름다워요. 거기에 아주 이상적인 목회자가 있으면서 교회를 다스리고 목양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그 직분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교회의 장로, 이 직분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거기에 가장 이상적인 장로가 있어서 목사를 도우며 교회를 돌보고 그리고 양떼들을 가르치면서 치리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는 아름답지만 목사도 미숙한 인간이고 장로도 미숙한 인간이고 뭐 교사도 미숙한 인간이고 하니까 그 질서는 아름다운데 사람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불완전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때로는 훌륭한 질서도 아름답고, 거기에 아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좋은 사람을 세워서 그래서 객관적으로 정말 아름다운데도 그걸 보는 사람이 그 아름다운 걸 세우신 주님의 마음과 같은 안목이 아니야, 이럴 경우에는 그게 주님이 아름답게 보셔도 그것을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 교회사에서 자기 아들 둘을 죽인 원수를 데려다가 자기 양아들로 삼아서 그렇게 길러진 사랑의 원자폭탄이라는 손양원 목사님, 그 분의 일생은 일본어로도 번역이 되고 외국에도 번역이 되서 외국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목사다운 목사요 성자죠. 그런데 놀랍게 그분 따님이 우리 교회에 와서 수련회 때 와서 간증을 했는데 교회에 그렇게 아버지를 씹는 사람들이 있었대요. 그렇게 미워하고 독하게 마음을 먹고 그렇게 못되게 굴면서 목회에 도전하고 지금 우리들이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면 미쳤다고 그러지 않겠어요? 그렇죠? 아니 복에 겨워서 지금 복에 겨운거지, 이후에 결국은 한국의 목사중의 가장 목사다운 목사요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사랑의 원자탄이라고까지 불리워지는 그런 존경스런 목사님을 목사자격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뒤에서 씹는 교인들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건 어떻게 되요? 그분은 하나님이 세우신 목회자의 자리도 아름답고 그 사람의 영혼도 아름다워서 거기 세웠지만 성도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생각이 예수님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고 자기의 마음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거를 보면서 야 저게 뭐가 좋으냐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런 이유에 의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이러한 질서 자체가 아름다운데도 아름답지 않게 보는 사람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결국은 뭐예요. 결국은 그러한 성화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그렇게 하나님과 같은 안목에서 하나님이 아름답다고 하는 질서를 같이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질서를 예수님처럼 사랑하게 되는 그것이 성화의 효과예요. 그래서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고 변화되면 변화될수록 주님이 아름다운 것은 내게도 아름다운 것이 되고, 주님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내게도 싫은 것이 되고,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그 일이 이 사람에게 그 일을 행하는 것이 기쁨이 되고, 성향이 될 때 그것이 바로 성화의 결과예요.
여러분, 여러분이 자기 이야기하면 잘 못 알아들어도 자식 이야기를 하면 금방 알아듣잖아요. 여러분에게 애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 딸이 있는데 학생의 의무는 뭐죠? 물론 공부 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있잖아요. 부모 말을 잘 순종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리고 내일을 위해서 땀 흘리면서 준비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좋은 자식이 누구겠어요. 그거를 부모가 몽둥이가 무서워서 겨우 하는 애들은 좋은 애 아닙니다. 그런 애 거의 없겠지만 부모님을 공경하는 게 마음에 기쁨인 아이들, 여러분의 애들처럼, 그리고 또 뭐냐하면 신앙 생활하는 것, 그 자체가 마치 자기 직업인 것처럼 생각하고 열렬히 회심하고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면서 살아가고,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것을 제일 좋아해. 그리고 공부하는 것을 그렇게 기뻐합니다. 그래서 정말 형설의 지공을 이룰 듯이 그렇게 밤늦도록 그렇게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집 애들은 야, 텔레비 그만 보고 공부해라, 어느집 애는 애가 하두 텔레비를 보니까 엄마 아빠가 텔레비를 없앨 수는 없잖아. 자기네들이 또 봐야 하니까. 그래서 텔레비 뚜껑을 열고 거기서 부속을 하나 뺐대. 그러니까 못보겠지 그랬던 것입니다. 어느 날 아들놈 책가방을 뒤져보니까 가방 속에서 똑같은 부속이 나오더래. 그러니까 그 부속을 끼어 놓고 보고는 빼서 가방에 넣어서 휴대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는 애들이 있는데 얘는 그런거 싫은것입니다. 그냥 공부하는 그렇게 좋고 기쁜 것입니다. 그리고 기말고사만 보면 집에 돌아와서 엄마한테 막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 마음아파 하지 마세요. 2등밖에 못했어요. 눈물을 흘리면서. 그러니까 그런 자식이 아주 좋은 자식이잖아요. 그러면 하나님도 그렇게 섬기는 것이 그게 좋은 성도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릴께요. 해야 할 그 일이 마음의 기쁨이 되고 그 보람으로 사는 성향을 갖는 것, 이게 성화의 결과예요. 그것이 뭐냐하면 질서예요. 그 질서를 잘 따르는 거라는 것입니다.
B. 질서를 통한 4중의 유익
그런데 이러한 질서를 교회가 따르게 될 때 4중의 유익을 얻게 됩니다.
1. 순수한 신앙의 보존
첫 번째가 뭐냐하면 순수한 신앙을 보존하게 됩니다. 순수한 신앙을 보존하게 됩니다. 최근에 제가 어느 이단의 교파에 속한 성도 한 사람을 상담을 했어요. 자기가 편지를 보내와서 상담을 하게 됐는데 쭉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네 교회에서도 예전까지는 그분이 가르쳐 주는 것을 온 교인이 전심으로 따랐는데 이제는 안 그러고 어떤 사람은 남포교회에 가서 은혜 받고, 어떤 사람은 또 무슨 로이드존스 목사님 설교 들으면서 어떤 사람은 내 책 읽으면서 은혜를 받는데, 그러니까 결국은 무슨 이야기냐면 이러한 교회의 질서 속에서 질서를 잘 따르면서 이 질서에 의하여 통치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권에 잘 순종하지 않게 되면 모이는 것만 이렇게 한 교회에 모여서 헌금 꽂이함에 같이 헌금 봉투만 집어넣을 뿐이지 이 사람은 저기 가서 은혜 받고 이 사람은 저기 가서 찬양배우고 이 사람은 저기 가서 성경공부 배우고 그 다음에 주일날은 여기에 나오지만 그 다음에 평일에는 다른 교회 가서 봉사하고 또 어떤 사람은 교회는 여기 나오지만 십일조는 어떤 교회에 갖다 하고 이렇게 하면서 다 뿔뿔이 흩어져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거는 그리스도 예수의 질서를 따르는 신앙생활이 아니고 순수한 신앙을 보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질서를 따름으로서 질서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어떤 잘못된 교훈이나 교리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릇되게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가려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 질서를 통해서 제일 얻는 유익은 순수한 신앙을 잘 보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참된 말씀의 전파
두 번째는 뭐냐하면 참된 말씀을 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말씀의 전파는 교회의 강단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성도들이 그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만나서 진리를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의 말씀을 전할 때 일관성이 있게 그 교회에서 먹은 말씀대로 사람들에게 전파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한 교회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를 구현하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설정된 교회의 질서를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참된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그런 점에서 여러분 우리 열린교회는 그동안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왔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교회는 큰 교회는 아닙니다. 우리교회보다 큰 교회들이 이 세상에 많지만 그러나 어쨋든 여기에 모이는 몇천명의 교인들이 일치하게 담임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말씀을 붙들고 거기에 은혜를 받고 신학적으로 전체적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전체적으로 하나의 사상을 형성하면서 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한국 교회에서 특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말씀 드렸지만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부목사님들이 설교를 해도 하나도 불안하거나 걱정되거나 그러지 않아요. 물론 설교가 성도들에게 충분히 만족을 못 줄 수 없지만 내가 A요 하고 갔는데 누가 올라와서 그거는 아니고 B요 이럴 사람이 있다고는 믿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고 순수하게 전파되는 통로가 교회에 갖춰지기 위해서는 질서를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이 질서가 두 가지인데 교리의 질서와 생활의 질서예요. 이 두개는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이 여기에서 가르쳐주는 교리를 안 배우고 아이고 여기서는 예배는 감격이 있지만, 교리는 딴데 가서 배워야지, 그러면 교회는 여러분을 회원으로 받지 않죠. 그래서 이것은 여러분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지켜야 할 참된 질서예요.
최근에도 교회 바깥에서 보면 선교 단체, 그리고 혹은 어떤 곳에서는 하나님의 복음을 잘 가르쳐 준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잘 모아서 가르쳐요. 그런데 그 중에 어떤 곳에서는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단체도 있지만 의외로 어떤 단체는 교리적으로 문제가 별로 없는 그런 단체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교리적으로 그런 문제만없으면 모든 것이 괜찮으냐 그것은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준다고 하지만 영혼을 돌봐주지는 않아요. 그리고 거기에서 그렇게 말씀을 먹고 좋은 것을 얻어서, 그래서 그것을 잘 섭취해서 교회에 와서 봉사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게 논리를 펴지만 결국은 우리의 목회의 경험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 말씀을 먹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기반 자체를 교회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사람들은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그 영혼이 교회에서 병들어서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여러분 그것이 자연스럽지 않아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먹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그곳으로 결국은 자기가 떠나가게 되는 것이지 그런 일들은 다른 교회 가서 하고 여기에 와서는 이름을 걸어놓고 섬긴다고 할 때 성도로서의 정신적이고 마음적인 연합을 어디에서 이룰 수 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도 모두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질서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를 구현하는 방식을 따르는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3. 범법의 징벌과 억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이 질서를 따라서 이제 생활하게 될 때 세 번째 받는 유익은 범법과 징벌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이냐하면 이제는 교인들이 이제 어느 교회에서 이 교회로 오게 되었을 때 도대체 무슨 사연을 안고 여기에 왔는지 본인의 간증이외에는 아무 정보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전에 있던 교회에서 돈을 떼어먹고 온 사람도 있고, 목회자와 쌈질하다가 온 사람도 있고, 교회에 말할 수 없는 큰 불명예를 끼치고 징계를 받을 것 같으니까 도망친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교회 돈을 횡령하고 온 사람도 있단 말입니다. 검증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그게 결국은 무엇 때문이죠? 교회에 세우신 그 질서를 따라서 올바르게 생활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지만 그가 잘못했을 경우에는 징벌을 하고, 그래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리고 거기서 억제를 하고 하지 뭘 잘못해서 징계를 해보려고 하니까 벌써 없어져 버렸어요. 사람이 없는 거야. 그런걸 아주 하찮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교회 장로가 되고 이런 사람들도 아주 그런 걸 하찮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잘못된 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순수한 신앙생활이 힘들어지게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4. 교회와 세상을 효과적으로 섬김
또 하나는 이런 질서를 따르게 되면 교회와 세상을 효과적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쇼. 전쟁을 할 때에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잘 훈련되고 명령에 복종하고 개개인의 군인들이 잘 전투적으로 준비가 된 사람들이 군대를 이루고 가서 싸우는 것과 오합지졸같은 사람들이 지휘관도 없고 대열도 없이 모두 죽창 하나씩 들고 소리를 지르면서 꾕과리를 지르면서 떼거지처럼 몰려올 때 그 두 편이 전쟁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물어봅시다. 사슴 한마리가 이끌고 가는 천 마리의 사자들이 있고, 사자 한마리가 이끌고 가는 천 마리의 사슴이 있습니다. 어느 집단이 더 무서울까요? 전자요, 후자요? 사자 천 마리가 더 무섭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 통치자가 이끄는 인물이 사슴이야, 그러면 그것은 오합지졸이 되는 것입니다. 사슴 밖에는 안되지만 인도하는 사람이 사자와 같은 사람이면 그럼 질서 정연하게 싸워서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전쟁은 군인들의 숫자만으로 이기는 게 아닙니다. 전쟁의 역사를 보면 1/4, 1/5, 1/6밖에 안 되는 되도 소수의 군대를 가지고 어마어마한 대군을 무찔렀던 역사는 많이 일어나요. 마케도니야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는 4만의 대군을 가지고 26만명의 군인을 무찔렀어요. 승리했어요. 그게 뭐죠? 그게 질서와 놀라운 군인의 정신,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진 통치의 체계, 이런 것들을 가지고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럼 생각해 보세요. 자 우리가 일을 합니다. 일을 할 때 아주 운동을 잘하고 해서 온몸의 상태가 아주 좋고 근육이 발달한 젊은이가 하루를 일하는 양과 그 다음에 한번 땅을 파고는 허리를 펴서 세 번씩 아고아고 그러고 내 무릎이야 하고 한숨을 쉬어야 하는 노인네가 하는 일의 양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질서를 따르게 될 때 교회와 세상은 효과적으로 섬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몇 천명의 교인이 함께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한다고 할 때 이것은 이미 이제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전문가적인 그런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조직을 하고 계통이 서고 질서가 갖추어진 가운데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과 경계도 없이 이 일, 저 일을 넘나들면서 마음을 상하고 부딪치고 돈을 낭비하고 서로 정보가 교류되지 않아서 혼란을 일으키는 이런 교회의 모습하고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어요.
C. 질서의 방식 : 성경에서 계시됨
그래서 이런 질서를 따르게 될 때 이런 4가지의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질서는 이 질서의 방식은 성경에서 계시가 됩니다. 이 질서는 둘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뭐냐면 교리의 질서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부지런히 성경을 배우고 교리를 배워요. 그래서 설교를 들으면서도 그냥 스쳐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설교를 들어보면 그 안에 내가 몰랐던 신앙의 이치, 내가 알았던 한 가지 신앙적인 사실과 영적인 이치가 연결을 이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항상 하고 싶은 이야기가 설교를 주의 깊게 들어라, 그러면 그 설교를 계속해서 주의 깊게 들으면 그것들이 연결을 이루면서 교리적인 지식을 형성해 갈 거라는 것입니다. 원래의 교리는 자 이제는 강해 설교 많이 들었으니까 교리 배워야지, 네 그러고 앞으로 50일간 교리공부 시작, 이렇게 배우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축척을 해서 이 속에다가 쑤셔 넣는 게 교리 배우는 게 아닙니다.
하나하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많은 진리들의 질서가 어떠한 것인지를 교리는 보여줘요. 그래서 교리를 잘 배우면서 흩어져 있는 것처럼 여겨지던 많은 우연적인 진리들이 어떻게 질서 정연하게 하나님의 생각 속에 조직되어 있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 교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배우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 하나하나를 배우고 나면 하나하나 배우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라고 하는 것을 하나 배우게 될 때 ‘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모습으로도 나타나고 저런 모습으로도 나타나실 때가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그것이 올바로 우리의 마음에 깨달아지기만 하면 내가 그 사랑의 질서에 부합하지 않게 살아왔던 것에 대한 많은 후회와 회개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너 그렇게 예수 믿으면 하나님 앞에 벌 받는다’ 하고 협박할 때에는 나오지 않던 회개가 하나님이 이렇게 ‘너를 사랑하셨고 너를 용서해 주시고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 주신 것은 바로 너로 하여금 이렇게 이런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고 니 인생을 이렇게 인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저렇게 빛나게 하시기 위함이라’ 이렇게 논리적으로 들려주었을 때 하나님 앞에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불순종하면서 살아왔던 사랑의 질서를 거스르면서 살아왔던 많은 날들이 생각이 되면서 그렇게 살았던 것이 주님을 모질게 반역한 것이라는 뉘우침 때문에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 사랑의 질서를 무시했던 그것을 버려서 나의 사랑의 질서를 버리고 예수 사랑의 질서를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이고 은혜를 받는 사람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교리적인 앎은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아는 또 다른 질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데 위의 것이 교리의 질서라면 밑에 것은 생활의 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딱 알아보고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근데 이 질서를 질서대로 알아보지 않고 생활하는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그리고 본인은 느끼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 아주 더럽고 지저분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결국 두 가지예요. 지성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계시해 주신 성경 안에서의 진리의 질서를 잘 깨닫는 것과 그것을 잘 배워서 살아가는 생활의 질서가 아름답게 되어서 아는 것과 생활하는 것이 이렇게 실타래, 이렇게 그물 짜지듯이 탁 짜져서 아무리 빼고 흔들려고 해도 생활은 아는 것에서 떨어질 수 없고, 아는 지식은 생활에서 이탈될 수 없게끔 단단하게 직조된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경건의, 삶의 체계로서의 경건이고 생활의 체계로서의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탄탄한 그물을 가지고 세상의 거짓을 이기고, 인간의 욕망과 방탕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의 욕구를 이기면서, 그러면서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게 생각이 났네요. 자 옷감을 짜잖아요. 그럼 우리들이 바늘로 요즘은 그런 거 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옛날에는 여성들이 뜨개질을 많이 했잖아요. 그죠? 요즘은 석기시대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뜨개질을 하는데 잘 보면 결국은 실이 이렇게 가고 이렇게 가잖아요. 그런데 자 보십쇼. 좀 과장을 할게요. 자 실이 이렇게 가면서 직조되는데 그게 없고, 지실만 있다. 이쪽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이렇게 나란히 계속 됐다. 그래서 이만한 천을 짰다고 치자고 합니다. 그거 뭐하겠어요. 집어넣으면 벌어지면서 툭 떨어져 버리는데 그러니까 그게 안 되죠.
반대로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자 우리 이제 교리 배우는 시간이다’ 아무개 집사만큼 내가 교리를 모르다니 정말 자존심 상해. 학교도 내가 더 좋은 데 나왔는데 자 배워서 이길 거야, 공부시작’. 그렇게 해서 배우는 게 그런 거와 똑같은 거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한사람은 교리는 안 배우고 아이고 누구는 헌금을 그렇게 많이 했대. 내가 꼭 이기고야 말거야. 제발 그러시길 바랍니다. ‘이기고야 말거야’. ‘아이고 누구는 교회에서 저렇게 많이 봉사를 하는데, 아이고 세상에 말이지 교회 온지 2년 밖에 안 된 사람이 그래도 내가 명색이 나는 4년 나오고 난 교회의 집사인데, 나는 있지 그것보다 더 많이 할거 야’. 그래가지고 이것 저것하면서 다 한다고 쳐요. 이쪽으로 짜지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지식은 없는 것입니다. 아이구 크게도 짜셨네 뭘 담아보면 찍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힘이 없는거야. 아이고, 성경공부 교재 100권 끼고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집에서 줄친 교재가 이렇게 쌓여도 헛 거다, 헛 거다. 다 왕년에 그거 안 해 본 사람 누가 있습니다. 헛것입니다. 이 두개의 질서가 같이 짜여져야 탁 짜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빠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그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거를 가지고 이교적인 사상을 이기고, 그리고 아무리 세상의 유혹이 와도 그런 것들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삶의 체계로서의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의무는 딱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우기 위해서 태어났고 배운 데로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 ‘배운대로 산다’ 라고 하는 그것이 뭐냐면 결국 주님이 교회를 통치하시는 그 질서를 배우고 통치하고자 하는 그 질서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예요. 거기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성도가 아름다운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교회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데 그것은 질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질서가 아주 아름답게 구현될 때 아주 예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교회다운 교회가 예쁜 교회죠. 교회가 사회 단체다운 건 예쁜 게 아닙니다. 교회가 군대같은 건 예쁜 거 아닙니다.
옛날에 제가 아는 목사님이 한분이 있었는데 벌써 25년 전 이야기예요. 지방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그렇게 목회정신을 강조하고 교회를 제대로 해야 된다고 막 강조를 하셔서 그 강의에 저는 전혀 도전이 안됐는데 몇몇 학우들은 엄청 도전을 받고 그리고 그 분이 목회하시는 곳에 가 본다고 그러고 갔어요. 그런데 충격을 받고 온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러니까 아우 놀랍더라는 것입니다. 뭐가 그렇게 놀랍냐고 하니까 교회가 그 당시에도 다 의자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마루였대요. 마루고, 교인들이 오는데 여성도들이 똑같은 차림으로 오더래요. 그게 뭐냐면 까만 치마에 하얀 저고리, 그리고 여기 머리 묶고 그리고 앞자리에서부터 착착착착 줄 맞춰서 앉고, 그 분은 아마 그게 보수적인 신앙의 표상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 하나님 면접하는 거냐, 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기대서 예배를 드리느냐 그러는 것입니다. 말이 되는 것 같지만 본질이 아닙니다. 빗나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난 여러분이 이렇게 알록달록한 옷 입고 와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 까만 치마, 무슨 하얀 저고리, 쪽지고 오지 않아도 좋으니까 비듬 떨어져도 상관없습니다. 이 참다운 질서는 두 가지, 진리를 아는 지식의 질서, 그 진리대로 사는 생활의 질서, 이 두 가지가 탁 짜여져서 그래서 교리를 배우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 사는 이유는 내가 그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위에 모든 지식을 삶으로 이어지게 이렇게 하면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질서롭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질서롭게 이루어진 것을 교회에 투영해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II. 교회와 입교자들
자 이렇게 결국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교회에 세우신 질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결국은 교회는 성도들이 모인 곳이잖아요. 사람들이 모인 곳이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각기 그 질서를 알고 질서에 익숙해 질 때에 교회는 이런 질서를 따라서 사중의 유익을 얻고, 결국은 이 지식의 질서와 생활의 질서가 혼연 일체가 되어서 삶 전체의 체계로서의 경건을 이루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될 거 아니겠어요? 그러면 그 질서는 어떻게 될 것이냐? 이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제 해당되는 것이 뭐냐 하면 교회와 입교자들의 관계예요. 그럼 왜 성도라고 안하고 입교자들이라고 하냐면 이 입교자는 누구냐면 하나님 앞에서 처음 예수를 믿으면서 나는 이렇게 이렇게 예수를 믿고 살겠습니다, 이제 내가 교회의 회원이 되나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입교자의 의무는 당연히 모든 성도들의 의무가 되겠죠. 그러니까 처음 예수를 믿고 교인이 될 때 교회가 무엇이고, 니가 누구이고, 교회의 질서가 어떤 거고, 그래서 너는 무슨 의무가 있고, 교회는 어떤 권리가 있고, 교회는 어떤 것을 너한테 해준다고 하는 것을 똑바로 분명히 가르쳐 주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A. 입교자들의 의무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목회 목표 가운데, 계획 가운데 하나가 금년서부터는 이제 세례를 받는 자격을 더 엄격하게 규정하고 더 많은 공부를 해서, 그래서 교회의 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확고하게 그 사람속에 넣어준 후에 세례를 주는 것이 옳겠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렇게 예수를 믿고 교회의 회원이 되는 사람들의 의무는 무엇인가? 우선 첫째는 중생한 신자로서 참된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생한 신자가 아니면 무슨 문제가 일어나죠? 영적으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접붙여진 사람들의 속에 들어와서 자꾸 개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 영혼이 진정으로 거듭났는가를 100% 정확하게 찾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발견하려고 애를 써야 하며 그래도 모든 양심과 성경의 지식의 빛 아래서 판단할 때 이 사람은 중생한 신자가 틀림이 없다고 믿어지는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도록 해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중생한 신자라고 확신을 주어도 스스로 자신이 그런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세례를 주지 말고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1. 중생한 신자로서의 참되고 공적인 고백
그러면 그가 무엇을 고백해야 하는가 이것입니다. 중생한 신자로서 교회의 회원이 될 때에 가장 중요하게 고백해야 될 것이 뭐냐하면 신앙과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내가 그분 때문에 살아났고, 그분은 나를 사랑하신 분이고, 더욱이 하나님 아버지가 그분께 이 교회의 머리로 주셨고, 나는 그분에게 접붙여진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이 나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이시며 나는 그 권위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여기에는 뭐가 포함되냐 하면 교회를 통해서 이 그리스도가 교회의 질서를 통해 당신의 권위를 행사할 때 그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교회를 통해 정당하게 시행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에 복종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통치라고 하는 것이 성경 말씀과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통치되는 것이지 매순간 나와서 너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이렇게 신앙과 삶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의 권위이고, 그 권위가 교회를 통해 행사될 때 나는 거기에 복종하겠습니다라는 것과 함께 이 복종이 마지못해 하는 복종이 아니라 아주 기꺼이 드리는 복종이겠습니다라고 하는 이 고백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의 회원이 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의 조건입니다.
2. 그리스도의 위격과 직무에 대한 지식
두 번째는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삼위일체 중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위격과 그의 직무가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생각하면서 구원 받았을 리는 없지만 자기는 입으로는 구원받았다고 하고 중생한 게 틀림이 없다고 펄펄 뛰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4대 성인의 하나죠. 그래도 부처보다는 낫죠. 마호메트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예수 믿는 게 안전하죠 이렇게 되서는 참된 회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집회 갔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교인이 자기 집에 점심 초대를 했어요. ‘보신탕을 끓였으니까 드시고 가십시요’ 그래요. 그래서 ‘아이고 여기도 개가 있습니까?’ 그랬더니 ‘미국은 개를 못 잡게 해서 염소고기를 가지고 보신탕 흉내를 냈대요’. 어쨋든지 간에 ‘나는 염소고기 싫어하지만 차렸다니까 갑시다’ 그러고 갔어요. 그러고 이제 별로 맛이 없게 점심을 먹었는데, 따라갔던 어떤 분이 있는데 거기에 그 교회 목사님이 그 집사님을 소개하면서 안수집사라고 그러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뭐, ‘참 신앙심이 깊고 진실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사실은 옆에서 듣는 내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저는 그렇게 잘 못하거든요. 근데 하여튼 참 목회를 잘 하시더라구요. 빈말인지 뭐인지 어쨋든 하셔요. ‘야 이거, 대단한 사람이구나’ 그러는데, 근데 이 양반이 밥 먹을 때부터 계속 내 옆에 앉는거야, 내가 좋았던 모양이야, 그러더니 뭐라구 그러냐면 ‘목사님 사실 좀 여쭤볼게 있는데요’. 모든 사람이 있는데 물어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슬슬 차 마시려고 비킨 상황에서 옆에 와서 슬며시 물어요. ‘목사님 제가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그게 뭔데’, ‘꼭 여쭤보고 싶었는데 목사님에게 여쭤보는데요’, ‘얘길 해보라구요’, ‘만약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기독교가 이게 진리라고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딱 죽은 다음에 갔을 때 이게 기독교는 꽝이고, 이슬람교가 진짜더라 그러면 그때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딱 잘라서 이야기했어요. 나는 목사로서 확신하는데 그 사람은 구원 없습니다. 도대체 그 목사님은 내가 판단하기에 구원도 못 받은 그 사람을 왜 그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는지 이해가 안가요. 그게 뭐냐하면 그리스도의 위격과 직무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중생의 고백이 가짜야, 있을 수 없고 중생 고백이 있다면 그건 가짜예요. 그러니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안수집사가 되서 그렇게 목회자의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예수가 누구시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고, 무슨 일을 하러 오셨고, 무슨 일을 하셨고, 지금은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에 이것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배우는 학교에 입학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깊이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깊입니다.
3. 죄에 대한 확신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고백
세 번째는 죄에 대한 확신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고백입니다. 자 여기서 지금 계속 예수 이야기가 나오는 것 무슨 뜻인지 여러분은 이제 눈치를 채셨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머리이신 당신에게 접붙여진 모든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거를 통해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결국은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실 수밖에 없는 분이라는 것을 깊이 인정하고 거기에 무릎을 꿇은 사람들만이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분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 분이 세우신 질서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역으로 이야기하면 지식의 현저한 결핍이 없는데도 끊임없이 교회의 세운 성경적인 질서를 부정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행사하시는 통치의 권한에 불복하며, 그리고 거기에 맞서는 사람들은 지식이 현저히 부족하든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그 사람의 한 가지 신앙에 있어서 기반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장로까지 됐지만, 이 사람이 집사, 아까 그 사람처럼 안수집사까지 됐지만 이 사람이 진짜 중생한 신자인가, 그래서 신앙과 삶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의 권위라고 하는 것에 기꺼이 무릎을 꿇은 사람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왜 오셨고,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고, 지금은 하고 계신지를 알고 있는 사람인가, 과연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예수를 통해서 자기가 아무 희망이 없는 자기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자기들이 진정한 고백을 가진 사람인가 이걸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4. 교회를 통해 행사되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복종
네 번째는 교회를 통해서 행사되는 그리스도 권위에 대해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그렇게 됨으로써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의 질서와 자기가 사랑하는 질서가 어긋난다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성경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참된 교인이라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성질 머리가 못되고 옛 성품이 고약해서 가끔 교회를 발로 차고 찔러도 진리에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들은 괜찮아요. 오래 참고 사랑해 주면 결국은 변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자기가 사랑하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질서를 따라서 살진 않고 불순종합니다. 그런데 진리가 울려 퍼지는 거야, 진리는 바로 진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 질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 그렇구나, 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맨 처음에 회심할 때 몰랐잖아요. 내가 어디 있는지 우리 인생이 뭔지 모르잖아요. 복음을 다 들으면서 아, 하나님이 계셨구나, 그리고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구나, 그리고 나는 그 하나님에게 지은바 되었구나, 나의 지금 이 고민과 많은 번뇌와 괴로움은 죄 때문이구나, 결국은 내가 하나님을 거스리며 살았구나,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죽으셨구나, 이걸 깨달으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아주 놀라운 질서를 따라서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나는 이 질서를 끊임없이 거스리며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자기 자신이 아주 추하고 더러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에 진리를 붙들고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자기부인과 십자가 지는 삶: 성화의 분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당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 만드실 때까지 나 혼자 내버려 둬서는 안 되기 때문에 때로는 고난을, 시련을, 혹은 위기를 주셔서 하나님이 그 모든 상황들과 환경들을 사용해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며 성숙해 가도록 나를 도우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건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결국 이 십자가를 질 때 그리스도 예수를 더 사랑하고 닮아갈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기꺼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화를 위한 분투예요. 이게 교인의 의무예요.
그러니까 잘 들으세요. 자기가 불완전한 인간이니까 자기가 누구이든지 간에 불완전한 인간이니까 하나님의 질서보다는 자기의 질서를 좋아할 때가 있고, 또 하나님의 질서보다는 자기의 생각이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울려 퍼져서 참으로 올바른 질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면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안한다, 그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욱이 의지를 가지고 고의적으로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항하고 덤벼드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대표적인 표징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영혼에는 견딜 수 없는 곤고함과 고통이 끊임없이 파도처럼 밀려들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까? 행복합니까? 주님 만납니까? 성령 충만합니까? 사랑 안에서 삽니까? 주님 사랑하고 주님 사랑 받습니까?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거 아닙니다. 그거 왜 그래요. 그렇게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주시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예수 믿게 만드셔서 그래서 주님의 자녀 삼아 주셨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그런 참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그런 질서를 따르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인의 의무예요. ‘어이씨 의무는 뭐 내가 싫다는데’ 그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막 보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막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거 있잖아요.
6. 신자로서의 의무를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수행함
여섯 번째는 무엇이냐면 신자로서의 의무를 부지런함과 일체의 성실함으로 수행해 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잘 들으세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즉시 우리의 의무를 일깨워줘요. 은혜를 받으면 우리의 의무가 쓰디쓴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게 될 때, 그때에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본분에 대한 감각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본분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나를 비춰보니까 형편없는 인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거기서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올바르게 가르쳐주면 의무에 대한 놀라운 감각들이 생겨나요. 물론 의무도 가르쳐 줘야 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나면 의무를 기뻐하고 좋아하는 취향이 마음속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자기의 마땅한 의무를 행하는 일을 기쁨으로 여겨요. 그래서 그 일을 위해 봉사하고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고 하면서 살아가요. 그래서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그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렇게 신자로서의 의무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누리는 많은 복음의 유익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여 믿음으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십시오. 우리의 구원도 그렇고, 회심도 그렇고, 하나님의 사랑, 은혜도 그래요. 그런데 그것들이 유지되는 것은 끊임없이 그렇게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의 회심하게 하신 은혜를 간직하고 신자의 본분에 충실하게 살아갈 때 그것이 껍질이 되어서 이미 받은 은혜는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게 해 주시고,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그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 보십시다. 이것만 하고 마칠께요. 자 예를 들어 보십시다. 자 처음에 은혜 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했을 때는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되는지도 몰랐어요. 회심하고 은혜를 받았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크구나, 이런 큰 사랑을 하나님이 내게 주시더니 너는 이렇게, 이렇게 나를 섬기면서 살거라, 영혼을 위해 살거라, 복음을 전하거라, 교회를 위해 기도하거라, 목회자를 섬기거라, 영혼을 위해서 희생하거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의무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면서 너무 기쁜 것입니다. 이 벌레같은 인간에게 영혼을 위해 살라고 하시고, 교회를 섬기면서 봉사하라고 말씀하시고, 목회자를 도우라고 하시고,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구나, 아 너무 감사하다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지로 그 후에 살아가 보니까 그게 그렇게 감사한 것만은 아닙니다. 왜? 은혜가 떨어지고 식고 나니까 나 하나를 추스르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니, 나 하나를 봉양하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라니, 나 스스로 돕는 것도 지쳐죽겠는데 목회자를 돕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라니 하며 힘든 의무가 생겨나요. 그때 비로소 뭘 깨닫게 되냐면 ‘아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 앞에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매달리게 됩니다. 내가 참 한심한 사람들이 뭐냐 하면 육적 백수는 직업을 잠정적으로 못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영적 백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 싶은 일도 없고, 하고 있는 일도 없고, 할 예정인 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영적 백수예요. 다시 한 번 할께요. 육적 백수는 잠시 취업의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입니다. 영적 백수는 뭐냐 하면 본성적 백수야, 그래서 주님을 위해 하고 싶은 일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고, 앞으로 할 계획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열렬히 구하는 것 본적 있어요? 만약에 그런 일이 있다면 코메디고 그런 코메디를 하면 나는 묻고 싶어요. 아니, 은혜를 주면 어디다 쓸려고, 주님을 위해 산적도 없고 살 계획도 없고 앞으로도 안 살 건데, 근데 그 은혜를 뭐할려고, 어디 은혜를 쓸려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의무를 행하게 하시는 사랑의 감화이지, ‘아 달콤해’ 하면서 마리화나나 마약을 먹듯이 ‘휴~ 하’ 들이키고 하는 좋아하는 그런 은혜의 용도는 그런 게 아니라 자기 도취를 위한 그런 게 은혜의 용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은 후에는 피 흘리며 살아야 됩니다. 은혜를 조금 받은 사람은 백수 비슷하게 살아도 괜찮아요.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백수처럼 살면 혼나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영적 백수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자체가 비참한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백수로 살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자기를 위해 생명을 버렸고 그 예수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고 고백하는 그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서 일할 계획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가슴을 치면서 안타까워 하는게 그거잖아요. 왜 놀아요? 왜 놀아, 여러분에게 묻고 싶어요. 하는 일이 뭐예요? 여러분이 뭘 하는 일이예요? 영적 백수들 아니예요? 여러분 하는 일이 뭐냐 이것입니다. 아주 분명하게 벌떡 일어나서 저는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저를 구속해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나는 이렇게 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고백하는 사람들 전 교인 가운데 얼마나 되겠어요. 그렇게 일하는 사람보다 놀고먹는 백수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열렬히 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이 교회를 정교한 질서로 만드시고 그 질서를 통해서 당신 자신이 은혜와 통치의 질서를 공급하세요. 그 질서 속으로 돌아올 때 여러분도 핍절한 영혼이 다시 부흥하고 은혜를 입을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2)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3)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4)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5)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6)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6 (주일오전예배 2009/01/18)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7 (주일오전예배 2009/02/0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8 (주일오전예배 2009/02/08)
3.교회의 질서와 성도들 (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 에베소서 제 4장 11절과 12절입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혼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아멘. 뒤에 좀 더 읽겠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통치는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행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질서를 세우셨지만 이 질서를 인간들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어제 이제 성도들, 곧 입교한 성도들의 의무를 말씀드렸습니다. 성도들은 중생한 신자들로서 참된 고백이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시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 지식이 있어야 하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감사의 고백이 있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는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질서 속에서 당신의 왕권을 행사하심으로 당신의 교회를 통치하시니 이 교회를 통해 행사되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복종이 없이는 신자의 삶도 있을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끊임없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 지는 삶을 통해서 성화를 위해 분투함으로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이런 성도들의 연합을 통해 교회는 점점 더 교회다워 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신자로서 의무로 여기고 일체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수행을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지식의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B. 교회의 의무
그러나 오늘 저는 이제 이렇게 교회 앞에 성도의 해야 할 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교회가 성도들에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일깨워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질서를 통해 행사되는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성도에게 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데 이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일반적인 의무와 특별한 의무가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1. 일반적인 의무
일반적인 의무란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하여야 하는 의무이고, 특별한 의무란 이 일반적인 의무를 하면서도 개인에게 특별히 목회사역을 통하여 세심하게 돌봄으로 이 일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앞에 시간이 성도들이 교회를 향해 하여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면, 오늘의 이 내용은 교회가 성도들과 함께하는 목회의 사역과 모든 돌보는 일을 통해 무슨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목회자 혼자 이 모든 교회를 이끌어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세우시고 그리하여 전도하게 하시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지만 모인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되신 주 앞에 접붙임을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동안에 그들은 이제 교회의 한 지체로서 섬기게 되고 실로 교회 안에서는 헤아릴 수없이, 수없이 다양한 섬김들이 직물이 짜지듯이 상하좌우로 연결이 되면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리고 우리에게 부탁하신 그 일들을 섬기면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실로 교회 안에서는 헤아릴 수없이 많은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목사의 하는 일들을 보면 교회의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됩니다. 저는 시간이 없지만 비교적 신문을 오래보지는 않아도 짧은 시간이라도 중요한 기사를 꼭 보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고 최소한 세 개 내지, 네 개의 신문을 구독하고 있습니다. 요즘에 신경에 바짝 쓰이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자가 오르고 내리는 것, 왜 이렇게 신경을 쓰고 있는지 알고들 있죠? 그래서 엇 그저께도 ‘이제 CD금리가 많이 내렸다고 우리가 빌린 돈도 이자를 제대로 깎아주는지 속히 알아 보거라.’ 그리고 지시를 했습니다. 금융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건축, 디자인, 미술, 음악, 악기, 공간, 심지어는 색깔, 심지어는 경영, 조직, 열린 공간 메뉴, 식당 위생, 화장실, 불이 났을 때 불을 제대로 끌 수 있는 물은 제대로 비치해 놨는지까지 어제 확인을 했습니다. 실로 헤아릴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 일을 목사가 모두 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을 챙기고 꼼꼼하게 잘 알고 있어서 교회를 이끌어 가는 것은 하기 싫은 일이지만 그러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목회를 하면서 당시에는 대주교가 교회에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재판을 했습니다. 그 일을 하는 걸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속스러운 잡무에서 벗어나 하나님 당신만을 생각하고 말씀을 탐구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고민을 했던 것과 똑같이 저도 이 속스러운 잡무에서 벗어나 정말 하나님을 알고 탐구하는 이 일에만 모든 것을 기울이고 싶은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고 아마 죽는 날까지 이것을 벗어버리기가 쉽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울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이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니 기쁨으로 하자고 마음을 잘 다스리려고 애를 쓰지만 쉽지 않다고 하는 것이 저의 고백입니다. 그 모든 일들을 성도들과 함께 수행해 나갑니다. 그래서 그 모든 일들은 직접 나아가 동네에 다니며 때로는 핍박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부터 시작을 해서 예배를 은혜롭게 인도하는 이러한 영적인 일, 기도모임을 인도하는 일부터 시작을 해서 저 밑에는 기도한 사람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모으는 일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없는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 일을 대충대충만 묶어놨는데 50개의 위원회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해나가는데 그것들을 아무렇게나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이러한 교회의 의무를 성도들을 향해 이행하기 위하여 봉사하도록 그 일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 의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의무가 첫째입니다.
교회가 성도에게 해야 할 그래서 교회의 질서를 세우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실현해야 할 첫 번째 의무는 신앙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교회를 떠나서 다른 교회를 가더라도 그 교회가 참 좋은 교회냐 그렇지 않은 교회냐는 하는 첫 번째 기준은 자기에게 좋게 해주느냐 나쁘게 해주느냐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교회에 가서 참된 신앙의 도리를 배울 수 있는 가, 그리고 그 교회는 성도인 나에게 참된 신앙의 도리를 가르치는 그것을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이것이 참된 교회를 판단하는 중요한 이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신앙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그 안에서 아무리 만족을 누리고 성도들을 행복하게 해주어도 그 교회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 신앙의 도리를 가르쳐서 신자다운 사람을 만들지 않으면 그 교회는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서 넉넉한 살림살이에서 잘 양육을 받으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잘 정돈 된 공부방이 있고 그리고 깨끗이 자신의 몸을 씻을 수 있는 욕실이 있고 집안 살림이 넉넉해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다 부모가 후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일들보다도 가정이 가정되는 가장 중요한 자격이 있는데 그것은 태어나는 핏덩어리에게 사람이 누구인지 가르쳐주는 인생사는 도리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그 부모는 돈으로 도배해서 아이를 길러도 그것은 사람을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육한 것입니다. 그 부모는 삯꾼 부모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낳으면 그 자녀가 좋은 환경 속에서 살 수 있도록 돌봐야지요. 그러나 단칸방에 살던지 열 칸짜리 커다란 저택에 살던지 간에 그것은 비본질적인 것이고, 본질적인 것은 그 태어난 자기 자식에게 인간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도리를 가르쳐주어서 이 세상에서 나아가서 살아갈 때에 사람노릇을 하고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야지만 그 가정이 참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신앙의 도리를 교회에서 가르친다고 할 때에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참된 신앙의 도리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 참된 신앙의 도리는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그것은 믿어야 할 규칙과 행해야 할 교훈입니다. 믿어야 할 규칙은 진리의 체계로서의 교리이고 행하여야 할 교훈은 경건의 체계로서의 생활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하나씩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교회에 와서 성도들이 교회로부터 받는 가장 큰 유익은 무엇을 믿으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진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이런 진리들이 쪼가리, 쪼가리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이러한 모든 진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조직화되고 교리를 통해서 체계를 갖춤으로서 성도들에게 성경과 신학의 체계를 통해서 기독교의 참된 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교리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믿으며 똑같이 생각해오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은 하나이지만 사람마다 성경을 통해서 해석하는 것이 제각각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명백한 진리를 갖추고 있지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편견에 따라서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해석이 되고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해석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고 있는 이 진리의 체계는 우리가 신봉하고 있는 교리는 과연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가 됩니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양보할 수없는 근본적인 조항들이 있고 각각 견해가 달라도 용인될 수 있는 부수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세례를 줄때에 사람을 물속에 풍덩 집어넣을 것이냐, 물을 뿌려도 괜찮으냐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로 뿌리는 세례를 인정하는 교회에 지체들도 다른 것에 있어서 참다운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우리의 형제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주제들, 그리스도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 그가 참 사람이고 하나님이시라는 것, 오직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된 것, 성경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통치를 교회 안에서 질서를 통해 실현하신다는 것, 종말이 온다는 것, 그 날에 우리가 부활할 것이라는 것, 영원한 심판과 영광이 있다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은 양보할 수 없는 근본 조항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동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단지 신학적인 견해가 차이나는 것이 아니라 중대하게 그들은 다른 것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형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그런 잘못된 신앙에서 돌아오라고 몇 번 권한 후에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는 남처럼 여기고 그들과 절대로 교통하지 않으므로 교리의 순수성을 지켜나가는 것이지요. 이렇게 이런 구분점을 가지고 우리는 믿으면서 참된 신앙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신앙을 가르쳐주시고 그 사도들의 신앙은 속사도들에게 전승되고 그리고 교부의 시대를 거쳐서 오류와 참된 것이 섞여있었지만 그러나 훌륭한 교부들의 신앙을 토대로 신학을 기반으로 그 모든 것들이 중세를 통해서 오류에 빠진 것들을 바로 잡고 참된 성경으로 돌아갔던 종교개혁자들의 신앙 사상을 통해서 그 중에서도 특별히 많은 종교개혁자들에게 더 올바른 신학의 입장과 덜 올바른 신학의 입장이 존재하고 그런 다양성이 있지만 특별히 그 모든 것들이 칼빈과 베자와 그 이후에 이어지는 개혁파 정통주의 신앙의 체계와 교리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물려주시고자 했던 신앙이 비교적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리와 이 모든 진리의 체계들이 다른 교파들과 차이가 날 때에 우리는 그 차이가 근본적이라면 그들을 잘못됐다고 정죄하지만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그렇게 믿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것이 훨씬 성경적이고 역사적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하는 선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그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들도 인정하며 우리는 보다 더 좋은 길을 걸어가고 있노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그 교리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의 체계를 세우고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를 교육하는 것이 우리의 신학적인 입장이고 이 모든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은 무엇을 믿어야 되는지를 명확하게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도리인 것입니다.
또 하나의 신앙의 도리는 행하여야 할 교훈인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모든 삶의 행동들, 이것은 철저하게 사상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는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그 원리에 입각하여 행동할 때에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자유민주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모든 삶에 방면에서 거기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행동하는 것과 마음에 확신하는 것이 일치를 이룰 때에 모순됨이 없는 일관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나라와 민족들은 자라나는 자기의 후손들에게 이렇게 일관된 사상과 일관된 삶을 가르치려고 애를 써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이 기독교 신앙은 단지 아무렇게나 믿고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그런 종류의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에서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 선한 일을 해서 감동을 주고 싶어 하고 세상에 칭찬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교회는 이 세상에 감동을 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연합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가 신문지상, 매스컴을 통해 오르내리고 칭찬을 받고 박수갈채를 받는 미담을 만들어내기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선한 행실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행실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으셨던 말씀은 우리가 그것을 목표로 살아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우리의 거룩한 삶을 보고 선한 행실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자기들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겨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사람들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앞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속의 은혜와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를 충실히 따르고 그렇게 순종하다보니까 그 거룩함의 결과로서 경건한 삶이 흘러나오게 되었고 그 경건한 삶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착한 행동이 되어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관관계는 상대적입니다. 사회가 바르지 못한 도덕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가장 충실하게 하나님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 사람들이 당시에 사회와 민족과 국가를 향한 가장 패역한 사람들로 낙인이 찍혀서 그래서 그들이 심하게 핍박을 받고 오히려 선한 행실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났던 것입니다. 천주교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들에게 맨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에 그들은 신주단지를 태우고 죽은 조상에게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참된 복음신앙을 가지고 그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모든 사람들은 배역 무도한 예수교의 무리라고 비난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행하여야 할 교훈이 세상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그런 이치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세상은 무엇이며 교회는 어떤 것이며 인간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배워나는 그 진리의 체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믿어야 할 규칙 속에서 행하여야 할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행하는 이 모든 교훈은 기독교 사상의 믿어야 할 규칙의 체계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를 배움으로 진리의 체계를 깨닫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 진리의 체계를 따라서 교리에 입각한 삶을 삶으로서 우리의 거룩한 삶은 일체의 체계를 이루어 삶과 행동에 모순이 없는 그러한 하나의 체계로서의 생활을 꾸려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규칙과 살아야 할 행동의 교훈들을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 가르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끼치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이 두 가지를 가르치는 것이 교회의 의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의무 또 하나는 그를 위하여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교회가 성도를 위하여 기도해준다고 할 때에 이것은 일차적으로 목회자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만의 의무가 아니라 이 목회자에게 가르침을 받은 모든 성도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를 위하여 교회의 지체들을 위하여 기도해줄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될 때에 그는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영혼들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처럼 여기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교회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뿐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을 기도로 독려하여 다른 지체들을 위하여 전심으로 기도하게 함으로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보이지 않는 기도의 끈으로 직조된 천과 같이 단단하게 이런 사랑의 질서 속에서 기도의 연결을 이루며 삼겹줄과 같이 끊어지지 않는 영적인 교통 속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인 것입니다.
교회의 일반적인 의무의 세 번째는 어린아이처럼 신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린아이처럼 돌보는 것은 양육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어린아이를 장성하게 자라도록 양육해야 할 교회의 의무는 장성해야 할 신자의 의무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거듭나고 구원을 받은 것은 갓 태어난 아기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영적으로 태어난 신자는 이제 중요한 의무를 지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태어난 어린아이에서 훌륭한 신자로 장성해 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태어난 아이는 밥을 먹이고 적당한 운동, 그리고 편의로운 삶의 환경을 제공함으로서 그들은 건강하게 되고 그리고 또한 그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진리의 가르침을 받고 그리고 양식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가르침의 교훈을 받음으로서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하게 되죠. 똑같이 성도들이 태어나게 되면 이제 육체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갓난아이가 태어나자 엄마의 젖을 먹고, 음식을 먹으며 자라나는 것처럼 태어나자마자 즉시 그는 엄마의 가슴을 파고들어 젖을 물고 빨아먹는 것처럼 성도는 태어나자마자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양의 품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음으로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제는 장성해야 할 신자의 의무가 있기 때문에 이 신자들이 계속 성장을 하면 성장을 하는 데에 따라 각각 상이한 음식을 공급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또 그들을 돌보는 것도 조금씩, 조금씩 변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꾸 쉬운 설교를 듣고 싶어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설교는 쉬워야 된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반만 맞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듣기에 쉬운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맞지만 그러나 내용도 쉬운 내용만을 계속 전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 아이가 아무것도 먹지 않습니다. 물과 양식이 구분되지 않고 물과 양분이 함께 섞여있는 엄마의 젖을 먹으면서 자랍니다. 갓 태어난 아이의 입을 벌리고 밥을 한 숟가락만 밀어 넣는다면 그 아이는 당장 병원 신세를 져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갓 태어나면 묽은 우유를 먹고 자라다가 좀 더 자라게 되면 이제 젖을 떼고 이유식을 먹게 됩니다. 이유식을 먹고 좀 시간이 지나면 죽을 먹게 되고 죽을 먹고 좀 지나면 밥을 먹게 되고 이때부터 똥도 본격적으로 싸게 되고 그리고 냄새도 지독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좀 더 자라게 되면 야채와 고기반찬과 곡물들을 골고루 먹으면서 이제 다섯 살, 여섯 살쯤 되면 어른의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게 되고 그리고 매운 반찬들도 잘 먹으면서 이제 초등학교 갈 때 쯤 되면 어른 반찬과 아이 반찬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좀 더 나이가 들게 되면 보신탕도 먹는 것을 배우게 되죠. 그러면서 이렇게 어른들의 음식에 접근하고 갈비도 뜯고 하면서 점점점점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갓난아이가 눈을 감고 입을 오물거리면서 엄마의 젖을 파고들어서 그걸 무는 것은 예쁘지만 나이 한 40쯤 되어서 얼굴이 쭈굴쭈굴 해진 늙은이가 무릎을 기어 올라오면서 엄마 젖을 문다고 할 때에 그건 재앙이야. 끔찍한 광경이야. 더군다나 이제 치매가 찾아올 나이가 됐는데도 엄마의 품을 파고들면서 젖을 달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심각한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쉽게, 쉽게 늘 위로만, 사랑만 설교를 듣고 나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듣고 나서 뭔가 회개하고 뉘우치고 그런 것 말고 그냥 이렇게 두들겨 주어서 갈 때에 따뜻해. 역시 사랑은 교회밖에 없어.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50싹, 60씩 먹어서 무릎 위로 기어오르면서 허연 수염이 나서 엄마 젖을 물겠다고 파고드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엄마가 누구인지 묻고 싶어요. 징그러워요. 그리고 조금만 설교가 어렵거나 책이 힘들면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꼭 누구냐면 이제 막 직업 활동을 하면서 가족을 위하여 돈을 벌고 열심히 활동해야 될 나이에 아기밀만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뭐냐 하면 심각하게 허약합니다. 영적으로 매우 허약해서 하나님을 느끼고 은혜를 받을지는 모르지만 매우 허약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오래 다니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고 그래서 교회에선 어떻게 해서 집사도 되고 안수집사도 되고 뭐 권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그랬는데 후딱 하면 삐져. 요번 사경회에 굳 바이 합니다. “나의 어린 날들이여! 굳 바이” 그래서 어떤 때는 할 수 없이 그 늙은 교인을 불러다가 가슴을 풀고 젖을 물려요. 그런데 먹는 자신을 행복할지 모르지만 주는 나는 괴로워. 오늘 저녁에 가서 엄마들은 한번 해봐요. 가슴을 풀고 중학생 아들 불러다가 한번 먹어보라고 합니다. 기분이 어떤가. 징그럽지 않아요? 어떻게 또 목회를 잘못해서 그것 밖에 안됐으니 데려다가 또 가슴을 풀고 먹여야죠.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생각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 기질적으로 보면 목회자 옆에서 목회자가 계속 토닥거려야지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죠? 창피한 줄을 알아야 됩니다. 맨 처음 회심하고 믿은 다음에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점잖게 물러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두 살 반밖에 안 된 애가 동생이 젖을 먹는다고 투기를 하는 것은 이해를 하지만 중학생 간 아들이 이제 갓 태어난 동생이 젖을 먹는다고 동생을 발로 차고 엄마젖을 독차지하겠다고 하면 정신과 치료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해서 신자는 장성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장성은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진리를 먹고 그리고 진리의 말씀 안에서 점점 더 단단한 것을 먹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린 교회에서 한 3년, 4년 은혜를 받았으면 기독교 강요 2400페이지 6권 정도는 놓고 너무나 쉽고 편하게 읽어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다 읽은 다음에 좀 더 깊은 것이 없을까 그럴 수 있을 정도는 돼야죠. 창피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제 이렇게 장성해야 할 신자의 의무가 있기 때문에 교회는 이 교인들을 잘 자라도록 돌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 돌보는 방법이 뭐냐 하면 성경이 쓰여 진 목적과 연속성을 갖는 것입니다. 성경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죠.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게 하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은 네 가지 기능으로 돌보는 것입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입니다. 그러니까 교훈을 해야죠. ‘이건 이런 것이란다. 이런 것이란다. 이런 것이란다. 이렇게 이렇게 해야 되는 거란다.’ 하고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거를 잘 가르치지 않으면 그러면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사실은 우리 딸을 참 예뻐하는데 마음이 이번에 굉장히 상해서 한 일주일 동안 말을 안했어요. 그러다가 어저께 그저께 아침에 학교 가려던 놈을 불러다가 놓고 아빠하고 2분만 이야기하자. 그리고 앉혀놓고 이야기를 했어요. 이제는 다 지나갔기 때문에 감정이 없어져서 그래서 내가 너한테 이야기 하는 거다. 감정이 있을 때에 이야기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야기를 안했는데 이제는 감정이 다 없어져서 아빠가 너에게 교훈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이야기를 했어요. 성탄절이 됐는데 저도 너무 바쁘거든요. 그런데 딸내미 선물을 하나사려고 나갔어요. 그런데 뭘 사야 될지를 모르겠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풍덩한 옷을 참 좋아합니다. 이렇게 후두를. 그래서 여기에 있는 가게에 갔어요. 그랬더니 거기에 운동복 파는 가게가 있는데 우리 딸한테 입히면 너무 좋을 옷이 있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예뻐요. 그런데 맞는 치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거를 개한테 맞는 것을 사줘야지 하고 ‘이 메이커 파는 데가 어디에 있습니까?’ 물어보니까 안양에 가면 백화점에 있대요. 그래서 그 바쁜 24일 날 차를 몰고 거기를 갔는데 3층인가 4층을 올라가서 찾는데 그 집이 있는데 또 그 집은 그 옷이 없습니다. 그래서 돌아다니다가 돌아다니다 그래도 가장 근접한 것을 사다가 줬어요. 그러고는 밤에 늦게 들어 오길래 포장을 해서 편지는 시간이 없어서 못 썼어요. 포장을 해서 자기 테이블 위에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올려놨어요.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고맙다는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 일주일동안을 말을 안했어요. 여러분은 웃지. 그래도 나는 저렇게 안 살았는데. 우리는 그렇게는 안했거든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주 분명하게 표시하고 살았어요.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왜 이럴까? 한 몇 칠이 지났어요. 그런데 이제 에이 그래. 그리고 여러분 생각을 많이 했어요. 교인들을 향해서는 그렇게 잘 참는 사람이 왜 자기 새끼를 향해서는 이렇게 못 참나. 그래 그러면 안 돼지. 그리고 아침에 이야기 했어요. 사실은 그 때에 내가 태어나서 열여덟 살이 되었는데 열일곱 살이 되었는데 이 17년 동안에서 제일 섭섭했다. 아주 30초 딱 이야기 했어요. 그리고 그러지 말거라. 옳지 않다. 아빠니까 이렇게 풀어지지만 시집을 가서 시아버지가 그렇게 소중한 선물을 줬는데 고맙다는 포시도 안하고 오히려 투덜댄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그러면 시아버지는 너를 그렇게 곱게 생각 안 할 거다. 고쳐라. ‘네’ 이게 교훈입니다. 교훈.
그러니까 여러분이 뭘 들어야 좋을지는 여러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 저는 위로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놀고 있네. 그거는 마치 음식점에 가서는 제가 뭐가 먹고 싶거든요 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근데 병원에 가서는 배를 가르지 마시고 창자를 뽑으세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거는 의사가 알아서 하는 것입니다. 가끔 병원에 가거나 약국에 가면 환자한테 물어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러면 나는 항상 그래요. ‘소신껏 하십시오.’ 아니 내 몸에 대해서는 당신이 전공이지 약을 어떻게 지어드릴까요 해서 ‘아니 약사 선생님이 왜 나에게 물어보십니까? 소신껏 지으십시오. 약값은 내가 달라는 대로 줄 테니까 소신껏 지으십시오.’ 항상 이야기합니다. 무엇을 자기가 들어야할지 그 교훈은 하나님이 결정하세요. 그리고 제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뭘 가르쳐 주세요’ .아니 그렇게 잘 알면 스스로 가서 배우지 뭘 그래요. 가서 계속 위로하면 되잖아요. 본인을. 두 번째는 책망입니다. 교훈했는데 혹은 교훈을 몰라서, 혹은 알면서도 잘못 행할 때가 있죠? 그때 책망을 하지 않으면 교훈을 어긴 것의 심각성을 몰라요. 그렇죠? 그러니까 어떻게 하죠? 교훈을 잘못했을 때에는 책망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책망도 똑같이 하면 안 되죠. 이 사람이 우리로 말하자면 중학생쯤 됐어요. 중학생쯤 됐는데 엄마 돈을 가지고 갔다면 이건 도둑질입니다. 이것은 혼나야 됩니다. 몽둥이로 다스려야 됩니다. 그 뿌리를 완전히 뽑아버려야 됩니다. 어떤 집 부모는 애가 하도 안 고쳐지니까 경찰에 고발을 해버렸어요. 그래가지고 한번 집어넣었대요. 겁주느라고. 경찰하고 짜고. 그 엄마도 참 대단합니다. 그 책망. 그러나 기어 다니던 애가 엄마 지갑에서 돈을 꺼냈으면 그건 훔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걸 갔다가 중학생놈이 ‘아니 제가 돈을 빼갔는데 왜 제는 그러지 마라 그러고 왜 나는 때려?’ 그런다 이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아니 오늘 처음 와서 등록하고 예수를 믿으려고 그러는데 교회에서 개념 없이 행동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목사가 ‘이놈, 당신 어떻게 뭐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겠어요? 안 돼죠. 그러나 교회 오래 다녀서 직분을 맞고 심지어는 교회에 영적인 나이가 있어서 성장하고 교리도 알고 단단한 음식을 먹어서 배운 사람이 개념 없게 행동을 할 때에는 혼나야죠. 그렇게 해서 교훈과 책망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능이 오늘날 교회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설교 속에서도 책망을 안 하려고 합니다. 칼빈 선생님이 설교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 책망을 이야기하면서 왜 설교자들이 교인들을 책망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질타하면서 만약에 여러분의 자식이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그러지 마시지요. 그러시는 것은 참 안 좋은데요. 어떻게 좀 고쳐보시지 않겠어요?’ 이렇게 이야기 하겠느냐 아니면 이렇게 표현도 똑같아요. ‘네 이놈. 이 후래 자식 같으니. 네가 그렇게 하고도 사람이냐?’ 이렇게 야단을 치겠느냐? 둘 중에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면 교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진리를 그렇게 가르쳐야 된다 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혼나는 것 그게 책망입니다.
세 번째는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책망을 받았는데도 자신의 힘으로는 고치기가 어려운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교정을 해줘야죠. 계속해서 교정을 해서 올바르게 해야죠. 그리고 의로 교육하는 것, 이 네 가지를 통해서 성도들이 장성한 분량에 까지 계속해서 자라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의 행동에 대해서 모든 성도들을 똑같이 처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이 어리고 아직 어린 사람들은 적게 혼나고 믿음이 많고 알만한 사람들은 많이 혼나고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올바르게 양육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에 가르침을 받으며 스스로 믿음 안에서 자라가야 할 신자도 교인들을 그렇게 잘 가르쳐서 믿음 안에서 성장하게 해야 할 교회도 모두 의무가 있는데 이것이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애들은 요, 말로 곱게 해도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면 그 교훈이 아이들을 빗나게 하고 작대기로 후려쳐서 피가 나와도 부모가 어떤 마음으로 자기를 때리는 줄을 알면 그러면 그것은 사랑의 매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생님들이 애들을 매로 때리지 않으니까 개판이 되잖아요. 그래서 부모들 중에 35%는 다시 교회에서 애들을 때렸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통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도 때리게 허락을 할 거냐, 말 거냐 그러는데 그것은 그렇게 물어 볼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때려도 그 옛날의 스승들처럼 그런 정신을 가지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 때에 애들을 반 죽였거든요. 아 설교를 세게 하셨네요. 그게 아니라 작대기로 개 패듯 팼어요. 어떤 일이 있었냐 하면 아 이놈들이 수련회를 가서 전도사하고 선생은 그냥 한 놈이라도 변화 받게 하려고 눈물을 흘리고 집회를 하는데 이 놈들이 쉬는 시간에 도망을 가가지고 저 뒤편에 가서 담배를 피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때는 발각이 후에 돌아서, 돌아서 내 귀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렀어요. 담배 피운 놈들, 그 다음에 담배 피우는 놈들을 잘 돌봐야하는 책임이 있었으나 책임을 감당하지 않은 회장 뭐 이런 애들을 다 불렀어요. 부르고 나서 이제 히브리서 12장인가를 읽어줬어요. 사생자에게는 징계가 없다. 그러나 참 아들은 부모가 징계한다. 그걸 읽으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내가 너희들을 잘못 가르쳤으니까 날 패라. 그러면서 내가 엎드렸어요. 그런데 몽둥이를 가져 왔는데 요만한 것을 가지고 왔어요. 여선생이 그걸 발로 차면서 세상에 말이지 남자선생한테 야단을 치면서 이게 무슨 몽둥이냐고 하면서 자기가 가가지고 대걸레를 쑥 뽑아 가지고 왔어요. 그래가지고 줬어요. ‘야, 내가 너희를 잘못 가르쳤으니까 날 패라.’ 그랬더니 그 중에 담대한 녀석 하나가 와가지고 나를 팼어요. 진짜. 열대를 때렸어요. 그래서 내가 중등부실 바닥에 엎드려서 열대를 맞았어요. 근데 그래도 지들이 잘못했는데 아무리 내가 때리라고 해도 그렇게 세게 때릴 수가 있겠어요? 그래 이젠 됐어요. 그리고 엎드려라. 그냥 하튼 젖 먹던 힘을 다해서 갈겨 버렸어요. 결국 몽둥이가 부려져버렸어요. 몇 명 팼더니. 그 중에서 죽도록 얻어맞은 녀석이 있었는데 목사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죽도록 팬 다음에 그 다음에 올라갔어요. ‘목사님, 제가 좀 팼습니다.’ 그 다음에 사정 이야기를 다 했어요. 그 막내 아들이었거든요. 목사님이 눈이 넣어도 안 아픈 아들입니다. 얼마나 쓰리셨겠어요.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알았습니다. 그 다음 날, 날 불러요. ‘전도사님, 제가 어제 밤에 곰곰이 생각했는데 소신껏 하십시오.’ 그래서 반 죽였어요. 그 다음서부터 애들이 뭐 폭력배 전도사가 왔느니, 부모들이 궁시렁 거려요. 개내들이 집에 가서 나한테 맞았다고 그랬냐? 맞대요. 지들이 나 때린 것은 애기 하더냐 했더니 그건 안 하더래요. 됐으니까 가보라고 그랬더니 ‘전도사님이 맞으셨어요.’ 나중에 후한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먼저 맞았지요. 지 아들이 나를 때렸는데 그래서 막 작대기로 후려쳐서 피가 시퍼렇게 맺히도록 팼대요. 근데 우리 교역자들보고는 따라하지 말고 당부를 했으니까 안심하세요. 끝나고 나서 다시 히브리서12장을 읽고 그리고 이제 회개의 기도를 하고 마쳤어요. 참 징하게 때렸어요. 그리고 나서 펑펑 울면서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애들이 그게 사랑의 매라고 하는 것을 알아요. 그 다음서부터 그렇게 주어 패놓고 나서 아이들이 놀랍게 내 품으로 돌아왔어요.
그래가지고 그렇게 했는데 그 모든 것들이 결국 무엇 속에서 이루어지냐면 사랑 속에서 이루어져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이 사랑은 내적인 것입니다. 그 사랑이 토대가 되어서 그래서 한편으로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이 이렇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설교나 가르침 속에서 모든 것들이 시원시원하고 딱딱 각져야 됩니다. 옳은 것은 옳다. 틀린 것은 틀렸다. 그리고 그것은 잘 한 거다. 못 한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래도 괜찮은 거다. 뭐 입장이 분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도 좋은 것 같고 안 좋은 것도 좋은 것 같고 술에 술 탄 것처럼 그렇게 하면 안 되죠.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제가 가르쳤죠? 교육의 첫 번째 시작은 아이를 낳아놓고 엄마의 표정을 알 때에 희노애락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했을 때에 자기가 한 의미를 엄마의 표정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흑’ 그러면 애가 의미는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 안 좋은 거라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활짝 웃으면 아 이거 엄마가 좋아하시는 거구나 이러면서 애들이 선악에 대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들이 교회에 와서도 설교를 들을 때에 분명하게 들어요. 교훈 할 때에는 감정 없이 잘 가르치고 책망할 때는 혼을 내고 그래서 정신을 못 차리게 그러지 마세요. 에? 이 나이에 이 목회하는 것 불쌍하지도 않아요? 에?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혼을 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책망을 받을 때에 대드는 것은 자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일 새벽에 할 텐데 사도들은 그런 사람들은 그냥 내보내라고 그랬어요. 상대도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너희에게 가르쳐준 이 교훈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상대도 하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서 교회의 질서를 세운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사랑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의 끈이 단단하게 되어졌을 때에 그때 이렇게 마음 놓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 속에서 교훈을 통해서 교회는 더 교인들을 사랑하고 교인들은 교회를 더 사랑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이러면서 점점점점 더 교회는 사랑의 진실한 공동체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2. 특별한 의무
그 다음에 교회가 교인들에게 해주어야 할 특별한 의무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는데도 끊임없이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때에는 달콤했는데 이것을 자신의 삶속에서 실천해보려고 하니까 피가 나도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지는 상황으로 복음을 덮어버려요. 그러면서 세상을 향해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교회에서 참된 진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이 세상으로 돌아가면 그 세상은 옛날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입니다. 한번 여러분에게 질문을 할테니까 대답을 해보세요. 은혜를 원래 못 받던 사람이 미끄러진 것과 은혜를 많이 받았던 사람이 미끄러졌을 때에 누가 더 곤고하겠어요? 전자에요, 후자에요? 후자에요. 그래서 한 사람이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곤고해하고 죽도록 괴로워하고 이게 너무 심하면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 됩니다. 호흡이 어려울 정도가 되면 이게 너무 심하면 사람이 까무러치기도 한다고요. 이런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세상으로 끊임없이 돌아가려고 할 때에 이런 영혼의 깊은 고통이 육체에 까지 나타나요. 이렇게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진리와 은혜의 말씀으로 굳게 붙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교회가 아무리 이 일을 위해 노력해도 교회는 강압적으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과 인격에 호소하고 영혼의 원리와 마음에 호소하여 그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여야 하니 교회가 성도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힘을 쓰고 고생을 해야 할지 여러분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회의 성도들은 크게 세 대상을 대하여 봉사하게 되는데 첫째는 하나님이고 또 하나는 세상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교회 자신을 통해서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신자의 섬김의 이유다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회심과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 있는 모든 성도들이 성도가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우선 첫 번째는 교회에 출석한다고 할지라도 진정으로 회심해서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성도들만이 참다운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혹시 교회가 실수해서 그에게 집사의 직분을 주고 무슨 여러 가지 일들을 맡겨도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교회에 와서 잘 길들여져서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가 회심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절대로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사되는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행사되는 통치의 주권에 내심적으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거기에 복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복종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남의 나라에 끌려온 전쟁 포로가 무서워서 복종하는 것 같은 혹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복종하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복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렇게 참되게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져서 구원을 얻어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의 일부가 된 사람들 말고 결코 회심에 이르지 못해 그리스도께 접붙여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교회는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그들이 이 교회에 있는 동안에 교회의 섬김을 통해서 결국은 그들이 회심하고 중생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참된 몸에 접붙여져야 한다고 된다고 하는 다급한 마음을 가지고 어른인 성도들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성도의 가정의 어린아이들까지도 깊이 돌보고 이들을 섬겨야 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에요. 그리고 이것은 성도들이 목회자와 함께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아야 할 가장 일 가운데 하나에요. 그래서 많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다가 교회에서 일정한 시점에서 이 교인들 전부가 전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접붙여지지 않은 전도 대상자들인 것처럼 설교를 하여야 할 필요가 교회에는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한때 열린 예배라고 하는 것들이 유행했죠? 이제는 전부 다 물 건너갔죠. 다 세상의 유행이 그런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냐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너무 낯설고 틀리기 때문에 사도신경도 하지 말고 기도도 하지 말고 공연하는 것처럼 마치 쇼하는 것처럼 그렇게 예배를 드려서 자연스럽게 그 사람들이 예배에 동화되도록 해야 된다고 하는 그러한 논리를 가지고 열린 예배니, 구도자의 예배니 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구도자는 예배할 수 없습니다. 예는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하는 행위에요.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예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 할 수 있겠어요? 좁은 의미의 예배는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미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앎의 토대 위에서 주님께 예배하고 경배하는 것이 이게 진정한 의미의 예배에요. 그런데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사람들에게 전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인 것처럼 하고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로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하는 그 예배를 계속해서 드리면 무슨 문제가 생겨나냐 하면 계속해서 자식들이 갓난 애기도 있고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 다니는 애들이 있는데 맨 날 멀건 죽을 쑤어서 동생을 위해서 너도 다 똑같은 것을 먹어라 하는 것과 똑같다는 이야기죠. 교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이미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참된 신앙 안에서 자라가도록 이렇게 다양한 음식들을 차려서 어떤 때는 생선 요리도, 어떤 때는 야채 요리도, 어떤 때는 숯불을 피워서 바비큐를 구워서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는 가운데 교회가 든든한 신앙으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몸살이 나거나 감기가 들어서 몸이 휘저어서 일어날 수도 없을 때에 한 끼 식사를 아주 맛있게 먹으면 힘이 나는 것 아세요? 힘이 나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그런 것이거든요. 그러나 종종은 이렇게 늘 복음을 전하지만 교인 전체가 전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인 것처럼 설교를 해야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겨냥하는 사람이 바로 교회 안에 있는 비회심자들입니다. 그들이 아주 정직하고 아주 원초적인 생생한 복음을 듣게 함으로서 주님을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 결단을 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중요한 의무이고 또 하나의 의무는 그렇게 회심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같은 사람을 용서해주신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는 비천한 인간이고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영광스러운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회심한 뒤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용서, 영광에 대한 감각들이 생생하게 살아있어서 그래서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발견하고 찬송과 기도와 예배와 이 모든 은혜의 수단들이 아주 찬란한 기쁨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항상 잘 보존이 되지를 않고 은혜에서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회심한 사람들이 받은 회심의 은혜를 잘 보존할 수 있도록 거기에 방부제를 뿌리고 소금을 뿌리고 그리고 다시 그것을 은혜를 불 일듯 일어나게 하는 이런 사역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며 다시 하나님 말씀에 은혜를 받게 하고 미끄러진 마음을 붙들어주고 그리고 심지어는 상담이나 심방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개별적인 죄에서 미끄러지지 못하도록 붙들어주는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가끔가다가 교역자들이 물을 때가 있습니다. 뭐 중고등부나 청년부나 하다가 보면 애를 쓰고 하는데도 왠지 헛바퀴에 빠진 것 같고 뭐 반응도 없고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기도 많이 하고 해야 되겠지만 어떤 때는 가끔 일 년에 한번 정도씩은 내가 항상 이야기합니다. “풀어줘라. 풀어줘라.” 저도 청년부 할 때에 기도하고 막 이러는데 이게 이상하게 헛도는 것 같고 너무 힘들어요. 그럴 때는 올라가가지고 그 따위로 신앙생활 해가지고 되겠냐고 막 설교를 해서 따발총을 쏘고 대포를 쏴도 그냥 별로 반응이 없고 그냥 그 대포에 맞아서 널부러져 있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죠. 살아나는 게 아니라. 그럴 때마다 제가 하는 게 뭐냐 하면 가끔 야유회 같은 것을 가요. 아니면 그냥 온 청년들을 교회로 불러서 맛있게 음식을 먹고 아주 재미있게 교제하면서 노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확 풀어주고 그리고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인 것을 깨닫게 해주고 그 다음에 또 이제 다시 조이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도 부르고 그 다음에 성경공부도 시키고 혼도 내고 심방도 가고 이렇게 하면서 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구에서도 가끔 구역장들 모임을 갑니다. 교구에서 무슨 체육대회를 합니다. 그러면 내가 그러죠. ‘일 년에 한 번만 해라. 아무 때나 가지 말고 그렇게 바퀴가 헛도는 것 같을 때에 딱 한 번만 해라.’ 너무 자주 그런 일들을 하면 결국은 뭐냐 하면 그 일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하면 영적인 것에 더더욱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되니까 한 번만 해라. 내가 항상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특별한 의무에요.
세 번째는 추문이 될 죄를 금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열린 교회를 목회하고 나서 딱 한 번을 치리를 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치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그 죄에 대해서 치리를 했는데 같은 죄에 빠진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지금은 후회가 많이 됩니다. ‘왜 그랬을까? 나도 현실과 너무 많이 타협을 했구나.’ 아에 교회가 세워졌을 때에 그 자세를 그대로 가지고 그리고 성경에 이탈되게 행동한 사람들은 강력하게 징계를 해서 종교개혁자들이 했던 것처럼 징계를 하고 심하면 교회에서 출교를 하고 해서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해야 했다. 아마 그렇다면 교회가 교인이 이렇게 많아지지 않았겠지만 그러나 훨씬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에 더 다가가지 않았을까? 물론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하는 교회들이 없으니까 익숙하지 않은 교인들이 반발을 하며 교회에 대해서 안 좋은 소문을 내며 그랬을 가능성도 있고 뭐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게 되지만 어쨌든지 간에 교회가 교인들이 자기 좋은 대로 살아도 단지 은혜에 호소하고 양심에 호소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그들을 억제하는 방법이 없으니 그게 문제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렇게 강력하게 징계를 해서 출교를 시키고 온 교회 앞에 공개를 해서 수치를 당하게 하지 않아도 은혜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잘못 행할 때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풀어주면 회개하고 돌아오기 때문에 그래도 교회가 이만큼 되지 않았나 하면서 위로를 삼지만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아쉬운 대목으로 남고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것들을 강력하게 시행하면서 교회다운 교회가 서가는 것을 저 자신도 직접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과연 이 시대의 교회가 이렇게 추문이 될 죄를 금지하는 강력한 권징이나 이런 것들을 행사할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다시 한 번 나에게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한 번 강력하게 목숨을 걸고 이렇게 성도들에게 참된 사랑으로 양육하지만 명백하게 하나님의 법에서 이탈한 죄에 대해서 종교개혁자들이 했던 것처럼 강력한 권징을 행사해서 교회를 올바르게 세워보고 싶다는 소원은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교회가 해야 될 중요한 것은 추문이 될 죄를 금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집단적으로도 마찬가지고 개인적으로 마찬가지에요. 교회의 마지막 특별한 의무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해서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가 해야 할 의무에요. 그러니까 성도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 교회는 이렇게 수준 높은 교회다 자랑하기 위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잘 알아야지만 잘 믿어야지만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 통치를 받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을 올바른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열심히 가르치는 이유는 또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렇게 해야지만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께 복종하는 생활이 될 테니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때에 회심했을 때에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이고 그리고 나는 그분의 주되심 앞에 복종하면 살 수 밖에 없는 용서 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했던 그 은혜를 유지하고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에 온전히 복종하게 하는 그것이 교회가 성도를 위하여 하여야 할 중요한 의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처럼 교회가 성도가 서로에 대해서 의무를 지고 있고 그 의무를 올바로 인도함으로서 하나님이 세우신 이 질서에 우리들이 부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III. 교회의 질서와 성도의 복종
그래서 우리들이 여기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 교회의 질서와 성도의 복종입니다. 자 이제 교회의 질서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권위를 행사하시는데 이러한 교회의 질서는 따라서 그리스도의 통치의 수단입니다. 이러한 통치의 수단인 교회의 질서에 대한 성도들이 하여야 할 복종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외적인 복종과 내적인 복종입니다.
A. 교회의 질서와 외적 복종
먼저 교회의 질서에 대한 성도의 외적인 복종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회의 질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교회에 머리이시기 때문에 이 교회를 다스리시는 통치주이세요. 그 당신의 통치의 권한을 행사하시는 통로가 바로 교회의 질서입니다.
1.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복종 : 내적+외적
이 교회의 질서가 바로 그리스도의 권위를 행사하는 수단인데 그래서 성도들은 이렇게 교회의 질서에 잘 복종함으로서 교회를 통하여 행사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 분께 순종하는 생활을 해 나가는 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 하나하나를 따르게 될 때에 우리는 올바른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자 초등학교에 간 학생이 맨 처음에 책가방을 매고 학교에 가보니까 좋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몇 칠 다녀보니까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들 입학했을 때에 갔더니 어떤 아이가 그러더래요. ‘그래, 너 학교 다니기가 어떠니?’ 그리고 물어보니 ‘아줌마, 나 두 달만 다니고 끊어야 되겠어요.’ 학원인줄 아는 것입니다. 이제 그 가방 매고 나면 자기 마음대로 못 나와요. 그런데 초등학교 일학년 다니는 아이들에게 ‘자, 어린이 여러분, 아침에는 어떻게 해야 돼지요?’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야 됩니다.’ ‘세수는 혼자 해야 돼요, 엄마가 씻겨주어야 해요?’ ‘혼자 해야 됩니다.’ ‘밥을 먹고 학교는 제 시간에 와야겠죠?.’ ‘네.’ 그렇게 행할 것만 가르쳐주지 학생이란 누구인가, 학교는 누가 세웠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학교의 사명은 무엇인가, 그리고 초등학교 졸업생들은 이 대한민국 역사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참다운 사람이 된다는 것, 훌륭한 인물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이런 것들은 가르쳐 주지를 않아요. 애들이 이해를 못합니다. 코 흘리지마, 숙제해, 말 안 들으면 때려요. 숙제 왜 안 해왔어? 숙제 안 해오면 왜 나쁜 가를 선생님한테 설명들은 사람 있으면 한 번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무조건 숙제 안 해오면 맞는다. 이것만 여기에 딱 들어 있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이 공부하면서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선생님으로부터 책임 있는 설명을 들어서 아 그렇구나, 역시 공부해야 되겠구나, 이런 것을 받아본 사람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 초등학교 아이들이 이해 못합니다. 그래도 잘 몰라도 부모님은 나를 참 사랑하시고 학교 선생님은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셔. 그러니까 숙제는 해가고 시키는 대로 하고 이렇게 꼬박꼬박 부모와 선생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다보면 그러면 훌륭한 어린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나면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이 복종인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2. 외적 복종 : 본성의 빛과 은혜의 작용임
(예화) 옛날에 내가 직장 다닐 때에 자매가 하나 있었는데 딸이 아주 비상합니다. 지금은 뭐하는지 궁금한데 진짜 영재 같아요. 다섯 살 때에 애가 한 동안 우울해 하더래요. 그러더니 엄마한테 ‘엄마, 나 물어볼 것이 있어.’ 그러더래요. ‘뭔데?’ 그러니까 ‘죽음이 뭐야?’ 그러니까 엄마가 너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어요? ‘엄마 산다는 게 뭐야?’ 그러고 네 살짜리가 물어본다고 해봐요. 그냥 웃지. 그러면 개가 알아듣겠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 잘 몰라요. 그리고 잘 몰라도 됩니다. 그냥 따라 하면 됩니다. 자라면서 언니, 형이 어떻게 할 때에 혼나는 지를 보면서 눈치 보면서 아유 저러지 말아야지, 혼나겠구나. 이렇게 하면 된다 이야기에요.
그러면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다음에 아직 지적으로 어리기 때문에 왜 이렇게 해야 되는 지를 잘 모르는 부분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질서를 통해 당신의 권위를 행사하실 때에 거기에 복종하는 것부터 먼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잘 믿는 신앙의 선배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개념 없는 선배들로 가득 차 있을 때에는 교회 환경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교회는 무어냐 하면 목사님이 훌륭한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성도가 성도다운 교회가 훌륭한 교회에요. 물론 그런 사람들이 많은 교회에는 목사님도 훌륭하겠지만 그러니까 갈 때에 목사님을 먼저 보고 가지 말고 성도들을 보고 가요. 가서 개념 없는 인간들이 많이 있으면 환경이 나빠. 그리고 거기 가면 물들게 된다 이것입니다. 놀라운 게 말이죠, 애들이 공부 안 하려고 하는 애를 공부 잘하는 애들끼리 아무리 교제를 하게 해도 그거는 물이 잘 안 들어요. 근데 공부 잘 하는 놈 빼내가지고 날라리처럼 노는 애들한테 슬쩍 집어넣으면 그거는 너무나 쉽게 물이 드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그러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올바르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신앙생활을 해야지만 그래도 영향을 받고 더디더라도 그렇게 닮아가죠. 그러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아이들이 자라갈 때에 엄마, 아빠가 교육을 많이 시킨다고 하지만 사실은 교육학자들 이야기는 또래를 통해 더 많이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에 인생에 대해서 참 골똘히 생각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인생에 대해서 부모나 어른들한테 배운 것은 별로 없습니다. 대개 책을 읽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인생에 대해서 배우고 중학교 3학년 때에 내 옆에 ,옆에 앉았던 학생이 자살하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이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지고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 성도들을 보면서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와가지고 그렇게 배울 것이 없는 성도들과 함께 어울려 살게 되면 이거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교회의 질서를 통해 행사되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은 둘로 나눠지는데 내적인 복종과 외적인 복종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복종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것은 이제 행동으로 거기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러 이러한 일은 하지마라. 그러면 거기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러한 외적인 복종이 항상 은혜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영국에서 목회하던 형제 목사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는 참 목회하기 힘들면서도 편하다는 것입니다. 힘들면서 편하다는 것은 뭐냐 그러니까 변화는 잘 안 되는데 말은 대개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교인들을 별로 만나본 적이 없어서 은혜를 못 받으면 나는 처음에 열린 교회를 세우고 나서 하나님이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내줄 것이라고 해서 그게 굉장히 좋은 것인 줄 알았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말씀을 주셔서 그래 그냥 가엽고 늘 의지할 곳이 없어서 그래서 마음도 아주 약한.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라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했기 때문에 아주 험악한 그런 사람들을 보내줄 거라고 그래서 우리 교회가 30%, 35% 정도는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수평이동을 해서 어떤 교회에서 뭐 다른 교회에서 양떼들이 오기도 하는데 나는 항상 그러죠. 다른 교회에서 양떼들이 한 번도 온 적이 없습니다. 다 염소가 와서 여기서 양으로 변했지 양은 거기에 다 남아있고 염소만 골라서 온 것입니다. 우리 교회 최근에 찾으신 분들 자존심이 좀 상하실지 모르겠지만 조금 있으면 양이 됩니다. 계속 돌아다니면 계속 염소입니다. 그런데 그 염소들이 여기에 와서 말씀을 듣고 뿔도 다시 이렇게 되었던 뿔이 이렇게 다시 말리고 그리고 이제 발로 차는 버릇도 많이 없어지고 이렇게 하다가 된통 변화된 사람은 완전히 양이 되었는데 이제 삶아지다가만 사람은 한쪽은 양이지만 한쪽은 염소가 되어서 가끔 발로 차고 그러죠. 그러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는 잘 안 되는데 말은 잘 듣는다고 해서 나는 그런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되냐 그랬더니 뭐라 그러냐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공부를 아주 잘 해서 유학을 온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실력이 있어서 주재원으로 온 사람들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에 놀던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유학하고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야. 얘네들은 뭐냐 하면 범생이들이야. 선생님이 하지마라 그러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고대로 하던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뭐냐 하면 교회에서 뭐 이런 것, 이런 것 하지 마라 그러면 선생님 말 잘 듣는 애들처럼 딱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한계가 있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은 마음의 경향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변했기 때문에 스스로 복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그 일을 수행하는데 이게 그게 아니라 원래 착했던 사람들은 본성의 빛에 의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실제에서 외적은 복종은 어떤 성도가 외적인 행동으로 교회의 질서에 복종할 때에 이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가 그렇게 시킨 것인지, 본성의 빛이나 양심이 그렇게 시킨 것인지 실제에 있어서는 본인도 구별하기가 힘들고 목회자나 주위의 지체들도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우리 주님은 정확하게 구분을 하시겠지만 그것이 쉽지 않아요. 근데 이제 성도가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외적인 복종이 참 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 생활 제대로 하십시오. 그러면 은혜가 넘칠 때에는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그리고 교회에서 책임을 맡았으면 열심히 수행하셔야죠. 그러면 아멘 그리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했을 때에 ‘교사가 되어가지고 구역장이 되어서 도대체 뭐하는 겁니까?’ 야단을 쳐도 ‘죄송합니다.’ 그래요. 여러분 기드온협회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사업가들의 모임인데 이 사람들이 하는 일들은 자기들이 돈을 내어서 성경을 사서 그래서 찍어서 기드온이라고 되어 있는 성경 한권씩 안 받아본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전 세계에 여러 언어로 배포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직장 다닐 때에 그 기드온협회에 우리 신우회에서 부탁을 했더니 봉사를 해주겠다고 그러면서 아침 8시쯤 되어서 일찍이 나왔는데 아니 이 사람들이 전부다 부티가 나는 사장님들입니다. 자가용을 대고 기사들은 기다리고 거기 나와서 그 골목에서 출근하는 직원들에게 예수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파란 성경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돈 주고 사가지고 이제 한 차 싣고 와서 나눠주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아마 대장인가 봐요. 띠 같은 것은 안 두르고 기드온이라고 붙이고 나눠줘요. 이렇게 보면 야 참 대단하다. 이렇게 이 이른 아침에 자기 돈 주고 성경을 사서 그리고 회사에 가면 수많은 직원들이 사장님, 회장님 할 텐데 여기에 와서 겸손하게 추운데 저걸 나눠주나. 그런데 어떤 몇 사람이 늦게 왔어요. 아 그랬더니 나이도 들고 얼굴도 부티가 나서 허옇고 우리하고는 종자가 아예 벌써 틀리더라구요. 댓돌 위에 서가지고 그 회장이 막 야단을 치는 거야. 지금 뭐하는 거야고 말이야, 맡은 바 책임이 있으면 제 시간에 나와서 똑바로 해야지 말이지 당신들이 지금 몇 시인데 이제 나오냐고 마치 사장이 부하직원 야단치듯이 그렇게 심하게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얼굴이 붉어지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웃으면서 성경을 나눠줘요. 뭐가 있으니까 그게 가능해요? 은혜가 있으니까 그게 가능한 것입니다. 은혜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제가 이야기하잖아요. 성도가 은혜가 떨어지면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고 섬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섬길 수도 없습니다. 아주 애매모호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한 번만 더 할게요. 그래서 성도가 결국 은혜가 떨어지면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고 섬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만 집어치울 수도 없고 집어치운다면 그 사람이 그렇게 은혜에서 들락날락 하는데 했다 말았다 했다 말았다 계속 그럴 것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잖아요? ‘저 그만 둬야겠습니다.’ ‘아니 왜요? 왜 그러시죠?’ ‘아니 제가 지난주부터 은혜가 떨어져서요.’ ‘그래요. 그럼 그만 두시죠.’ 이틀 후에 와가지고 ‘아휴, 목사님 회복되었습니다. 다시 주십시오.’ 아니 애들 장난도 아니고 어떻게 하냐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에서 부패하게 될 때에 외적은 복종은 소홀해 지는 것입니다. 이때에 성품이라도 견고하고 사회적인 훈련이라도 제대로 되어있고 양심이라도 올바르게 되면 은혜가 떨어져도 딱 붙들어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성실한 사람은 은혜가 떨어져도 그래도 꾹 참아요. 엉덩이가 스티로폼 같아서 팔짝팔짝 하는 사람들은 은혜가 있으면 온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것 같아도 은혜가 떨어지고 바닥이 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눈에 보이는 것인 없는 것입니다. 그래 나 은혜 떨어졌다. 어쩔래? 막나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그 사람이 예수 믿기 전에 어떤 인간이었는가 하는 것을 바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은혜가 쫙 빠져나가고 나니까 옛날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러면 이런 질문이 떠오르죠? 그래 나 은혜 떨어졌다. 못해. 그리고 외적인 복종마저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본성의 빛이든지 은혜의 작용이든지 간에 어쨌든지 안 하고 집어치운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이거는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입니다. 그래 이거는 은혜가 떨어져서 힘이 약해서 연약해서 하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것하고는 다른 차원입니다. 자 여러분, 예배시간에 은혜가 안 되고 힘이 들고 그리고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람이 식어도 예배는 드려야 되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간신히 예배를 드리면 영혼의 유익이 있어요, 없어요? 별로 없잖아요. 해봤으면서 왜 그래요. 은혜도 없고 마음이 식어서 감동도 없고 교회 나가지도 싫어요. 그래가지고 55분까지 쭈구리고 앉았다가 할 수 없이 가서 심방 오는 것도 귀찮고 그래서 기어 나와서 골난 사람처럼 기둥 뒤에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갔어요. 그러니까 예배를 드린 것이나 안 드린 것이나 사실 영혼에 유익이 없기는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나 그렇게라도 예배를 드리다가 간 사람은 영혼에 유익은 없지만 하나님을 막 본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 나 못 가겠어. 왜? 은혜가 떨어졌거든. 배 째. 이러면 이거는 하나님을 막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와서 예배를 드리고 혼자서 마음을 움크리고 은혜를 안 받고 가면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고 가면 올바르지 않은 것이지만, 대놓고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집어치워버리면 이거는 하나님 앞에 노골적으로 반항하는 거라 이것입니다. 여러분, 애들을 야단칠 때에 ‘너 왜 이랬어?’ 그러면 무릎을 끓고 ‘엄마, 죄송합니다. 정말 잘못했어요. 저 때문에 너무 마음 아프셨죠?’ 그러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 100점입니다. 110점은 누구에요? 그냥 야단을 치고 싶어도 야단을 칠게 없으면 어떻게 나도 야단이라는 것을 쳐봐야겠는데 부모로서 칠 것이 없으면 110점입니다. 그런데 야단을 쳤을 때에 엄마 정말 잘못했어요 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저 때문에 마음 너무 아프셨죠? 죄송해요 제가 앞으로 잘 할게요. 그러면 100점입니다. 그런데 너 왜 이랬어? 정말 이럴거야? 너 진짜 도대체 왜 그런지 이유나 말해봐. 이 자식이 딱 때렸는데 이거는 60점입니다. 근데 너 왜 그랬어?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 거야? 니가 해야 할 본분이 뭐야? 딱 때렸는데 왜 때려요 이거는 20점짜리라는 것입니다. 이거는 맞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때리냐고 물을 수 없을 정도로 맞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게 아닙니다. 반항심을 이 속에 가지고 가만히 있는 것과 ‘왜 때려요?’ 누가 그러는데 외국에 이민 간 사람이 때리려고 하니까 ‘엄마는 나를 18살까지 양육할 의무만 있고 나를 때릴 권리는 없거든.’ 그러고 문을 박차고 나가더래요. 작대기로 맞아야죠. 이 한국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아무리 패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잖아요. 그렇게 복종마저 거부할 때에 이것은 그리스도 통치에 대한 노골적인 반항이라 이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B. 교회의 질서와 내적 복종
진정한 복종은 교회의 질서와 외적 복종은 이런 것인데 내적 복종이 진정한 복종입니다.
1. 진정한 복종 : 은혜 작용 + 외적 행동
진정한 복종은 은혜의 작용이 이 안에 있어서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그래서 그 분은 잘 섬기고 싶어서 순종하고 그 다음에 그래서 외적으로 잘 해야지 하고 하나님의 기준에 복종하는 이것이 훌륭한 것입니다. 맨 날 하는 이야기 그렇죠. 마음으로는 그게 아니었는데 행동으로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두 개가 일치가 되도록 복종을 해야 되는 것이 이게 진정한 복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복종 하게 하는데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적인 진정한 복종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데 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복종하게 하는 세 가지 영적요소가 있습니다.
2. 신자로 하여금 복종하게 하는 세 가지 영적 요소
그 첫째가 뭐냐 하면 회심과 함께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의 감각이 생겨나는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신 사랑이 너무 크다는 걸 알게 될 때에 누가 아무도 안 가르쳐줘도 주님께 복종해야 된다는 기본적인 감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생전 성경도 안 읽고 어느 날 친구 따라 교회에 왔는데 예수님이 여러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럴 때에 눈물을 펑펑 흘리며 회심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그게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야 하는데 가끔 간증하잖아요. 복사기 고치러 왔던 사람이 와서 회심하고 뭐 이런 거요. 그렇게 회심하게 됐을 때에 그는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뭐가 생겼냐면 그리스도 예수는 살아계시고 나는 그분께 복종해야 된다는 비상한 감각이 이 안에서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안 가르쳐줘도. 그리고 그분이 지금 내 마음에 그리고 어디든지 계시고 그분은 나를 향하여 어떤 것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미국에 얼마 전에 갔었는데요, 죄와 은혜의 지배 그 어려운 책을 읽다가 회심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생자, 초신자에요. 구원을 받았어요. 너무 기쁨으로 은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책을 한권을 선물을 받았어요. 그게 조웰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었대요. 그거를 읽었대요. 그래서 교인들이 물어봤대요. 그 책을 읽으니까 어떠냐고 ‘나는 방금 예수를 믿어서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지만 이 책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책은 하나님을 산타클로스처럼 만드는 거지 나는 방금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모르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는 그 하나님은 아닌 것 같다.’ 이게 이런 것들이 뭐냐 하면 진리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니까 복종에 대한 감각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 니가 복종에 대한 감각이 생겨났지?’ ‘네’ ‘그러면 그 복종에 대한 감각을 그게 뭔지 한번 30분 동안 이야기해봐.’ 이야기할 수 없죠. 그런데 설명할 수는 없는데 예수는 의식되고 그분께 복종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 감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처음 회심뿐만 아니라 신앙에서 미끄러졌다가 은혜를 받고 다시 신앙에 불이 붙어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집사님, 그렇게 살지 마세요.’ ‘권사님,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안수집사가 그게 뭐야. 큰 일 나. 그렇게 하면 안 돼.’ 아무리 해도 내가 뭘,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딱 받고 나면 자기가 예수님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그 길에서 멀리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복종해야 되겠다는 것이 즉각적으로 생각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 개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그렇게 회심하게 되면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이 이루어진다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래서 첫 번째 회심을 한 사람은 즉각적으로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미끄러졌던 사람은 천천히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게 되잖아요. 그때에 그리스도 예수와의 실제적인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잖아요. 그게 사랑의 연합이잖아요. 그리스도께 은혜를 많이 받고 변화되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많이 사랑하신다는 것이 느껴지게 되고 내가 그리스도를 많이 사랑하는 게 느껴지잖아요. 이러한 실제적인 연합 안에서 뭘 경험하게 돼냐 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직 성경도 잘 몰라요. 그런데 안 좋은 행동을 하면 성령께서 내 안에서 굉장히 아파하시는 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거는 성경을 많이 모르는 사람도 탁탁 느껴지는 지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알고 그것을 받으면 더 훌륭합니다.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이렇게 하는 것은 싫어하시고 저렇게 하는 것은 싫어하시고 이렇게 하는 것은 슬퍼하시고 느껴져요. 근데 올바르게 할 때는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데려가시려고 하는 곳이 어디에요? 예수께 복종하는 그 통치로 우리를 데려가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복음에서 말하는 그 의무인지를 성경을 배움으로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그 의무가 놀랍게 우리를 외딴 섬에 있는 사람처럼 개인적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성경을 통해서 복음의 의미와 그 복음에 은혜를 받은 사람이 행하여야할 의무로서의 삶을 발견하고 깨닫게 될 때에 놀랍게 그것은 교회 생활 잘 하라는 교훈으로 함께 모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설명 안 해도 이해하겠지요? 여러 가지 일들을 가르쳐주시는데 그것들이 결국은 하나하나 쪼가리 쪼가리 다니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공동체 속으로 모두 들어와서 엮어지면서 최종적으로는 그렇게 네가 살아야지만 교회의 온전한 회원이 되고 너희의 교회가 성화되고 그래서 사람들의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이것이 엮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의무를 발견하게 될 때에 그럼 내가 성도들에게 어떻게 해야 되나, 내가 교회에서 어떻게 해야 되나, 목회자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되나, 진리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되나,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내가 무얼 해 줘야 되나,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울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 줘야 되나, 이렇게 모든 것들이 깨달은 것들은 각각 틀린데 마지막으로 이것들이 전부 연결되면서 교회라는 공동체 속으로 의무가 스며들어 오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런 놀라운 것들이 회심하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질서가 착착착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놀랍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성도는 진정한 복종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C. 진정한 복종
이때에 십자가를 경험하며 사랑의 감화를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랑의 감화를 받고 나면 이 사랑은 더 많이 확장이 됩니다. 더 많은 사람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에게로 이 외연이 확장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이 파문처럼 마치 큰 호수 위에 돌멩이가 떨어지면 그것이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것처럼 퍼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 나라에 가보지도 못한 나라의 있는 영혼들을 향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거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하나의 통치 그리스도의 통치의 질서를 통해서 개 교회에서 뻗어나가면서 세계를 향해서 쭉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1. 내적으로 :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음
그래서 결국은 성도는 진정한 복종을 해야 됩니다. 누구에게? 교회의 질서를 통하여 당신 자신의 통치의 권한을 행사하시는 그리스도 앞에 진정으로 복종해야 되는데 내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은혜 속에서, 외적으로는 교회의 질서 속에서 행동으로 옮김으로서 거기에 온전히 복종함으로서 이 두 가지가 함께 어우러질 때에 그가 그 교회에 있음으로서 그가 그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사람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이 세상은 희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당신의 큰 권능을 그들을 통해 마음껏 행사하시고 그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혜는 그 질서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그 일을 뒤이으면서 하나님을, 세상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데 이바지 하게 되는 거라 이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놀라운 일치를 이루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요.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의 삶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왜 은혜를 받으려 합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 축복이 우리 위에 와서 그냥 썩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축복을 받아서 흘려보내는 교회 속에서 흘려보냄으로 지체를 살게 하고 주님의 교회를 더 온전하게 하고 이것을 세상에 흘려보냄으로 세상을 살리고 변화 시키고 이것을 가정에 흘려보냄으로 주님을 알지 못하는 가족들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그런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주 앞에 사는 것 아닙니다.
2. 외적으로 : 교회 질서에 복종함
그 통로를 위해서 우리는 교회와 바른 관계를 가져야하고 목회자와 바른 관계를 가져야하고 성도와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하고 부부간에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하고 이 세상에 있는 영혼들을 향해서도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질서를 교회 안에서 배워나가면서 그러면서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에 온전히 복종하기를 의무감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넘쳐나는 은혜 때문에 그리고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 때문에 마음으로 행동으로 예수의 마음을 품고 일체의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에 그 한사람이 있음으로 교회는 아름다워지고 그 교회 때문에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세상이 있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세상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셔요. 마지막에 교회가 이 껍질을 깨고 마지막에는 그런 아름다운 질서를 이 온 땅과 세상에 충만하게 구연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왕 되신 통치에 온전히 복종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가득 덮게 되는 그 세상을 전망하면서 교회는 여기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2)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3)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4)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5)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6)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6 (주일오전예배 2009/01/18)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7 (주일오전예배 2009/02/0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8 (주일오전예배 2009/02/08)
4.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1
: 유기체적 생명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I.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되심의 세 측면
그래서 이제 지난 이틀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당신의 왕권을 행사하시고 성도와 교회는 그 질서 안에서 만나서 서로 의무를 다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다스리시는 교회의 모습을 이루어갈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부터 세 번에 걸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선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 고 말합니다. 자 이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뜻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신앙을 고백하면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사람을 물속에다가 풍덩 집어넣는 그런 종류의 세례였죠. 그 의미가 무엇이냐면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뜻하고 그 물 속에서 다시 일어나 나오는 것은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단절되고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은혜로 구원을 받을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우리들이 적용이 되어서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치르신 죄 값이 우리를 위한 죄 값이 되어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이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우리를 그 죽음에 적용해서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게 하신 것은 우리를 예수님이 그 죽음을 감당하시니까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신 것처럼 또한 우리도 다시 살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바로 부활하셨지만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죽은 사람들로써 죄를 용서받았지만 그러나 우리의 부활은 우리의 육체적인 죽음 이후에 마지막 날에 이루어지겠죠? 그러면 그 마지막 날 영광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다실 오실 때 우리가 부활하기 전부터 그리고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이 시기까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로서 부활시에 다시 살아날 사람으로 다시 살도록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인 부활은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의 영혼을 살아있게 하심으로써 육체로는 죽을 몸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된 가운데 이 부활을 우리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경험한 가운데 하나님과 생명적인 교통을 누리면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 공로로 우리들을 구원 얻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즉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 구원과 함께 육체는 여기에 살아서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죽음의 기운에 삼켜져 사망으로 가지만 영혼으로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인 새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는 머리 되시고 우리는 그 그리스도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그의 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신다는 이 비유가 성경에 아주 자주 나오고 교회론을 말할 때에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기독교에서 교회와 성도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본질적인 설명을 우리에게 여러 각도에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하는 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A. 유기체적 생명의 머리
첫째는 유기체적인 생명의 머리이세요. 다시 말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되면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게 되는데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게 되는데 이 후로부터 이제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와 우리는 끊어질 수 없도록 영적으로 연결이 되어서 그 예수로부터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영혼의 생명이 우리에게 공급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럴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진다고 하면 생명도 함께 끊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한 번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에 접붙여진 중생한 신자는 그 생명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누리면서 살아가게 돼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땐 그 생명이 풍성하게 주어질 때도 있고 어떤 땐 그 생명이 빈약하게 주어질 때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 생명은 사라지지 않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우리의 영혼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져 그 연결을 통해서 신적인 새 생명이 우리에게 공급되는 것이니 그리스도는 그 생명의 원천이요 원천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해 그로부터 우리가 영적 생명을 받아서 영적 생명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머리가 되신다는 첫 번째 의미에요. 그래서 의미에요.
B. 유기체적 통치의 머리
두 번째는 뭐냐하면 유기체적 통치의 머리에요. 그래서 무슨 뜻이냐면 이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생명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공급해 주실 뿐 아니라 또한 머리는 하나님과 그리고 당신의 몸인 교회 사이에 계셔서 그래서 그리스도 홀로 하나님의 이 교회에 대한 영원한 계획을 알고 계시며 그 알고 계시는 그리스도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계시해 주셨고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 성경에 기록된 대로 교회, 교회를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기 위해서 의지를 가지고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통치는 마치 왕이 온 나라를 다스리는 것 같은 그러한 통치에요. 지금도 보면 필리핀 같은 나라 보면 민가나오라고 하는 섬을 분명히 법적으로는 필리핀 땅인데 반란군들이 일어나서 그래서 거기에서 저항을 하면서 거기에 있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고 자기끼리 살림을 합니다. 정부군의 능력이 그것을 통제할 수 있도록 미치지를 못 합니다. 그러면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 아니겠죠. 하나님의 자녀들의 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온전히 통치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대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기 위해서 갈망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를 받으며 거기에 복종하면서 사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만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질서대로 통치를 받는 것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 일을 위해 이바지 할 수 있고 또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달은 사람들만이 이 통치 아래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고통하고 시련을 당하는 이 세상의 비참한 인간들을 향하여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날이 속히 오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라고 할 때 그것은 유기체적인 통치의 머리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왕처럼 당신의 의지를 가지고 말씀을 통해서 교회를 다스릴 때 그 통치에 복종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은혜와 생명이 끊임없이 공급받고 그리고 유기체적인 통치의 머리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교회를 통치하실 때에 당신의 교회를 통치하시기 위해 당신이 성경적으로 세우신 목회자와 그리고 교회의 질서를 가지고 당신의 교회를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모두 불완전한 인간들이지만은 목회자와 교회에 세워진 일꾼과 모든 성도들이 끊임없이 우리들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올바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말씀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되려고 끊임없이 애쓰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통치는 질서를 통해서 아름답게 구현이 되고 이렇게 통치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유기체적인 통치에 복종하기를 우리의 사지가 우리의 머리에 복종하는 것 같이 하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C. 유기체적 봉사의 머리
마지막 세 번째는 유기체적인 봉사 혹은 섬김의 머리이셔요. 자 무슨 뜻이냐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치하시죠.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질서를 잘 깨달아서 교리를 많이 배우고 성경을 깨달아요. 생활의 질서를 잘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믿어야 할 규칙 뿐 아니라 살아야 할 생활에 있어서 온전함을 이루게 되죠.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충만한 생명을 공급 받으며 또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스리는 통치에 온전히 복종하며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게 되죠. 그런데 모든 성도들이 다 그렇게 완전하게 생명을 누리고 완전하게 그 통치에 복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아요? 그래서 뭐가 필요하죠? 그들이 그런 통치를 온전히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은혜를 받게 하고 돌보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다양한 봉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노래를 잘 해서 성가대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성가 대원들이 연습을 하고 나면 밥을 먹게끔 식당에서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리고 식당에서 밥을 먹은 사람들이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가면 식당에서 나오는 이 모든 쓰레기와 설거지들을 정리하는 봉사하는 일꾼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수행하기 위해서 교회의 돈을 지출하는 사람들이 있죠. 지출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헌금하는 사람들이 있겠죠.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로 열심히 봉사를 하면 사람들이 수시로 화장실을 드나들면서 일을 봐요. 그러니까 그 일을 보는 사람들이 또 다른 일을 일 보고 난 다음에 일 보게 하기 위해서 화장실을 청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망가지면 그걸 고치는 사람들이 있죠. 또 하나님의 교회는 자신들뿐 아니라 자녀들도 교육해야 되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오면 온 부모들이 아이들을 교회에 맡기면 교회의 일꾼들이 그 아이들을 자신의 자식인 것처럼 진리의 말씀으로 잘 가르쳐 그들이 받을 구원을 자신의 구원인 것처럼 그렇게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합니다. 말하자면 오늘 저녁내에 못할 정도의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일들이 있어서 그 일들이 일들을 교회에서 감당해 나가는데 이것은 결국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모든 사람들이 누리게 하고 또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통치를 온전히 받도록 그들을 진리의 지식으로 가르치고 생활의 교훈으로 훈련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유기체적인 봉사에 있어서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겠어요.
(예화) 자. 만약에 집을 짓는다고 할 것 같으면 땅을 고르는 사람부터 벽돌을 쌓는 사람부터 전기를 만지는 사람부터 목공과 조적공과 그리고 구조를 점검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작을 해서 실내 인테리어와 디자인, 색칠, 방송 기자재를 비롯해서 수많은 일거리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할 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누군가가 그 모든 것들을 장악해서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 교회를 지어야 할 건물을 지어야 할 계획을 가지고 통솔하면서 나가야 될 것 아니에요?
만약에 이것을 안 하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봉사의 섬김이 뒤죽박죽 되겠죠.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섬김에 있어서도 그리스도 예수는 이 모든 봉사의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이번에는 복종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소극적으로 복종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마음과 뜻을 알아서 그 분의 통치에 복종하며 섬기며 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섬김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수행해 나가실 때에 당신이 각자 각자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그래서 목회자와 교회에 세운 일꾼들을 통해서 그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이 교회 속에서 아주 아름답게 조직화 되어서 그렇게 해서 일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2월 14일이 되면 이 교회에 와서 교회를 수리하고 공사하기 시작한 딱 7년이 되는 해입니다. 저는 태어나서 그 때처럼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해 본 때가 없었습니다. 저는 맨 처음에 건축을 전혀 모르지만은 갑자기 저쪽에서 빨리 나가라고 하니까 성도들 데리고 여기 올 때 그냥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교회가 그까짓거 화려하면 뭐 하나 다 집어치우고 그냥 난로나 하나씩 놓고 허옇게 칠이나 하고 의자나 하나씩 갖다 놓고 마이크 하나 걸어놓고 그리고 설교하면 되지.그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정말 순진한 생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난 와서 그냥 쭉 허연 칠하고 문 뚫고 의자나 좀 사다 놓고 예배를 드리면 그까짓 게 무슨 한 보름만 공사하면 들어가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랬더니 뭐냐 하면 나라에서 그렇게 지어서는 사람들이 위험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들어가서 쓸 수 있도록 허락을 안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거를 부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냐면 와 가지고 설계도는 무슨 놈의 설계도야 페인트 갖다가 야 여기 뚫어 여기 문 여기 이렇게 .그러고 돌아다녔어요. 그랬더니 일꾼들이 와 가지고 망치로 다 때려 부셔가지고 유리창을 다 만들어 놨어요. 그러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전기, 소방, 배관, 정화조 이 모든 것들을 다 갖춰서 이웃에게 아무 피해도 주지 않고 안전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걸 갖춰야 되는데 그거를 계산해 보니까 10 몇 억이 들어가더라구. 똥통 하나 파는 것만 4000만원 들어갔거든요. 그리고 여기에 이 저 엘엔지 가스 들어오는데 이게 5억이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만약에 그렇게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고 교회를 대충 허연 칠이나 하고 바르면 이거는 버릴 수도 없고 쓸 수도 없는 건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내가 고생 많이 했어요. 어느 교인이 이메일을 보내서 내 마음을 후벼 파는 거야. 목사님이 대충 검소하게 하고 들어간다더니 왜 이렇게 돈을 쳐바릅니까 그래. 그래서 내가 답장을 또 다 썼어. 미안하다고. 나도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까는 이게 이렇게 복잡하더라. 그렇게 해 가지고 그렇게 해서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했는데 그래서 난 그냥 간단하게 생각을 했죠. 그저 대충하고 들어가. 어림없습니다. 이거를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만 하는데 설계비만 1억 가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고 나서 인제 교회에 일꾼들에게 조직을 해서 맡겨서 건축위원회 있으니까 하라 그랬어요. 그런데 한 두 주 쯤 지나고 나니까 막 공포가 밀려오는데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 그 다음에 이건 안 되겠다 제가 눈치는 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내가 기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건 안 되겠다 그러고 그 다음에 이제 완전히 일꾼 복장 갈아입고 군화 신고 그리고 하이바를 쓰고 지휘봉을 들고 아침마다 여기에서 선거야. 모두 모아놓고 이야기했어요. 나는 건축을 잘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내 하는 이야기를 들어라. 모든 지휘자는 나다. 나한테 통제를 받고 일 하지 않고는 일하지 마라. 그러니깐 내가 한다. 그러고 나서 밤이나 낮이나 건축 공부하기를 시작을 했어요. 제가 건축 잡지를 3년 반 동안 내가 프랑스와 미국에서 부쳐서 내가 공부를 했어요. 그러면서 인제 배우면서 일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르면 사람들에게 묻고 책을 보고 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해 나가는 것입니다. 벽돌 쌓는 사람은 벽돌만 휙 쌓고 가지 다른 거 관심 없습니다. 색칠하는 사람은 색칠하고 돈 받아 가며 그만이고 전기 다는 사람은 50개. 그러면 50개 등 달고 돈 받아 가면 끝입니다. 상관 안 합니다. 이 건물이 뭐가 되는지 그런 거 상관 안 한다구. 그거는 오직 한 사람 속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휘봉을 잡고 설계도도 없이 그렇게 해 가지고 이거를 갖다가 완수하면서 일꾼들한테는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해야지 모른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아직도 여기 교회 지은 일꾼들은 내가 현대건설에 있다가 나온 사람인 줄 아는 것입니다. 여기 일화가 굉장히 많아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면 그렇게 해서 해 놨는데 이거를 거들어 주던 건축하는 어느 형제가 이야기합니다. 자기가 18년 동안 건축 현장에서 일했는데 설계 도면도 없이 이렇게 엉터리로 시작을 해서 그래서 지금도 벽을 뜯어보면 벽에 내가 그려놓은 그림이 수 없이 많아요. 그걸 즉석해서 그리면서 일꾼 70명을 데리고 이거를 결국은 2월 14일에 시작해서 4월 30일 날 끝을 낸 것입니다. 그랬는데 뭐라고 그랬냐면 18년 동안 일했는데 이렇게 개판으로 시작을 해서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 되는 건 여기가 처음입니다..그래서 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통치를 교회를 통해서 온 땅에 확장하기를 원하시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일을 시켜야 됩니다. 그 때에 그 유기체적인 섬김의 머리로써 이 모든 것들을 행하시는 분이 그리스도 예수시라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이제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교회의 일들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좋은 대로 꽂혀서 그냥 일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마치 축구 할 때 아니 공 움직이는 거를 보고 움직여야지 막 반대편으로 막 달려가요. 왜 그러냐니까 아 난 원래 왼쪽을 좋아해. 그러고 달려가는 거야. 그럼 안 된다 이것입니다. 박지성 선수를 그렇게 뛰어나다고 하는 게 뭐냐면 하튼 공 받을 자리에 항상 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난 아직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렇게 평가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교회 질서가 돼 가는지를 보면서 그러면서 교회를 통해 행사되는 이 질서 속에서 조화롭게 섬기면서 그러고 가야 된다 이것입니다. 일 하나 맡겨 놓으면 마치 이거는 자기한테 뚝 띄어서 맡겨 준 무슨 그 나라 하나인 것처럼 그렇게 하는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목회자와 교회에 세운 당회와 이런 이 기관들을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섬김의 일들을 이루어 가실 때 그 때에 이런 것들을 잘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잘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격하게 보면 당회는 통치를 주로 하고 실제로 봉사하고 일하는 것은 교역자들이 주축이 되고 평신도들이 함께 연결이 되어서 자기의 사역을 교회에서 감당해 나가는 게 이것이 성경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렇게 그리스도는 유기체적인 생명의 머리이시고 통치의 머리이시고 섬김의 머리이셔요. 그래서 이제 세 번에 걸쳐서 오늘 이 시간에는 유기체적인 그리스도께서 유기체적인 생명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을 공부하고 내일은 유기체적인 봉사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이 무엇인가 공부를 하고 그리고 주일날은 유기체적인 통치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렇게 꾸려 보려고 생각을 하는데 주일날 시간이 모자라서 좀 걱정은 됩니다. 어쨌든 그렇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 유기체적인 생명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I.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 유기체적 생명
우선 인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다고 할 때 거기에 붙어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중생과 접붙임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A. 중생과 접붙임
1.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 생명의 근원임
즉 한 사람의 신자가 예수를 믿게 되면 그는 영혼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우리들이 육체와 영혼이 있는데 영혼.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영혼은 죽은 상태였는데 그런데 그 영혼을 하나님이 살려서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 깨닫도록 만들고 그래서 그 영혼을 영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적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포도나무를 꺾어서 포도나무와 가지가 있으면 포도나무와 가지가 있잖아요? 또 감람나무의 경우 감람나무를 꺾어서 접을 붙이잖아요. 나무를 꺾어서 이 쪽 나뭇가지를 꺾고 붙여서 거기다가 단단하게 실로 묶어 놓으면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거기서 진액이 나와서 그 나무가 붙어 버려요. 붙어 버리면 그것이 처음에는 두 개가 상관이 없는 거였는데 하나가 이렇게 돼서 꽂혀서 그래서 그것이 이제 연결을 이루게 될 때 이 원둥치에 있던 생명에 참여하면서 그러면서 하나의 가지가 되게 될 때에 그것이 이 원나무가 맺는 열매와 똑같은 것들을 맺으면서 일체가 되잖아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즉시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접붙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근원이세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삼위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2. 그리스도께 접붙여짐 : 생명에 참여함
그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신자가 접붙여지게 될 때 그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나무는 잘라져 있지만 만약에 그 나무를 내버려두면 죽지만 그러나 그것을 원가지에 원둥치에 접붙일 때 그 때에 생명이 원둥치 안에 있는 여기에 가지가 접붙여졌기 때문에 그 생명을 힘입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잘라 놓으면 하루만 지나면 모두 말라서 부러지는 나뭇가지가 되지만 부러지는 마른 나무가 되지만 접붙여지면 그 속에서 끊임없이 생명의 진액을 먹어서 이 나무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영적 생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이렇게 연결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졌기 때문에 누리게 되는 영적인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생명은 우리 안에 있는 원래 생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에게 접붙이심으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우리의 영혼이 받아먹으면서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3. 신자의 영적 생명의 본질 : 영적 교통
이러한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으로 나타나요.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졌던 것입니다. 이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육체가 살기 위해서는 이 땅의 자원이 필요하고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하늘의 자원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여러분이 배웠죠? 그런데 육체는 끊임없이 살아도 이 육체는 이 자원을 이 땅에서 공급을 받아요. 그러나 영혼의 생명을 위해서 이 영혼이 필요하는 하늘의 자원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맺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흘러 들어오는 그 영적인 생명은 곧 은혜의 시어야.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을 예수께 접붙이실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끊임없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이 비밀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는 비밀입니다. 없는 비밀입니다. 그래서 처음 제가 회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뭐 지식도 없고 잘 아는 게 없으니까 가끔 이렇게 의심이 들 때가 있죠. 그런데도 교회에 가서 금요일 날 빠짐없이 철야기도를 했어요. 성도들이 모여서 한 열 댓 명에서 이십 명 모여서 철야기도를 했는데 11시에 시작하면 정확하게 4시에 마쳤어요. 근데 모여서 그렇게 기도를 하면 기도하면 의심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 선명하게 마음속에 믿어지고 근심이 있을 때에 그 기도에 나아가서 기도하면 근심이 사라지고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미워서 너무 괴로울 때 가서 기도하면 놀랍게 그 사람이 불쌍하게 여겨지고 그를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도 별로 없이 사는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바라보면서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생명, 우리의 영혼 안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께 중생을 통해서 우리가 접붙여졌기 때문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게 부어지면 그러면 이 은혜는 여러 가지가 아니라 하나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햇볕과 같아서 그 햇볕이 찬란히 비치게 되면 균들은 죽고 또 생명 있는 나무는 살아나게 하고 그리고 나무가 자라서 열매가 맺은 것은 열매가 더 충실하게 있도록 만들고 이렇게 하면서 햇빛이 햇빛은 하나이지만 이 햇빛의 작용은 수없이 많듯이 이 은혜는 하나이지만 은혜는 항상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을 불러 일으켜요.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이 불러 일으켜지면 아주 햇빛이 다양한 작용을 하는 것처럼 이 은혜가 아주 놀랍게 많은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이 은혜는 자기 안에 있는 이 본성을 놀랍게 변화시켜요. 사람은 누구든지 본성이 있죠? 좋은 본성, 하나님 앞에 올바른 본성은 이것을 통해서 아름답게 강화되고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본성은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비칠 때에 그것들이 죽어가요. 그러면서 새롭게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미운 사람을 만나면 사랑하게 되고 은혜를 받으면 자기에게 죄 지은 사람을 만나면 용서하게 되고 은혜를 받아서 궁핍한 사람을 만나면 돕고 싶고 은혜를 많이 받아서 무지한 자를 만나면 도와주고 싶은 것입니다. 근데 이 은혜가 사라지고 사랑이 없어지게 되면 미운 사람을 만나면 죽이고 싶고 자기에게 죄 지은 사람을 만나면 복수하고 싶고 자기보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멸시하고 싶고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질 때 아주 다양하게 이런 것들이 나타나서 그래서 놀랍게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이런 많은 덕행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생을 통해서 우리가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질 때 그 생명의 본질이 은혜와 사랑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인제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 우리가 접붙여질 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붙잡아다가 당신에게 털썩 접붙이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니까 돌격 앞으로 해서 그리스도께 머리를 쥐어박고 그리고 그 분께 푹 꽂히는 것도 아니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구속을 이루시고 교회의 머리이시지만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이시게 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접붙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령의 역사가 이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 그리고 하나님,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과 창조하신 하나님 사이를 연결해 주는 중요한 매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 세 개의 차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잘 들으세요.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 세 개의 차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령
1.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 세 차원들
우선 첫 번째 차원이 뭐냐 하면 우주론적인 차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창조하셨거든요? 그런데 성부 하나님이 이 세상을 혼자 창조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는 성자가 담당하시고 그리고 구원 받은 우리들을 믿게 하시는 것은 성령 혼자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적인 오해에요. 그래서 이 창조의 역사는 이 모든 세계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처럼 생각하고 말할 수 없는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이 모든 우주적 창조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함께 참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우리를 구속하실 때 그리스도 예수를 중보자로 삼으시죠. 그리스도 예수를 중보자로 삼으시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되어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그 뜻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는 도구가 되시죠.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창조에 있어서도 중보자가 되셔요. 그런데 창조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가 되시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 것과는 달라요.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예수는 예수 그리스도는 다만 창조를 위한 수동적인 중보자의 역할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창조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함께 창조하신 분이 되시고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지칭하며 그가 없이는 만물이 지어진 것이 없다고 성경이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 뿐 아니라 성령도 거기에 참여하셔서 그래서 하나님과 아들은 성령을 통해서 이 모든 창조의 사역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 안에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계획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창조로 실행이 됩니다. 그래서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연결을 이루는 것입니다. 물론 그 피조물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들이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 자신이신 이 삼위 사이의 영적인 교통과는 다른 종류의 교통이지만 그러나 분명히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성령 안에서 하나의 연결을 이루며 삼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아주 아름다운 질서를 갖추고 있는데 이 창조 세계의 아름다운 질서가 바로 성령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이 함께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세계들을 통치하시죠. 자연 세계를 하나님이 통치하셔서 낮과 밤과 계절이 있게 하실 뿐만 아니라 피조물들이 자연의 법칙을 따라서 생겨나고 사라지고 흘러가고 소멸하는 절차를 밟게 하시고 온 우주는 그래서 생성과 소멸 속에서 날마다 날마다 새로운 세계를 구가하며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물가 물가의 물속을 떠다니는 작은 벌레부터 시작해서 우주의 큰 천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비율을 이루면서 아름다운 질서를 만들어 내요. 이러한 질서 자체가 하나님이 이것을 다스리고 통치하신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이 개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연의 세계를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러한 자연의 세계를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통치하시고 보존하심으로써 마지막에 이 모든 자연의 세계를 가장 아름다운 영원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완성하시는데 이 모든 것들을 바로 질서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고 이 모든 자연의 아름다운 질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 자연의 세계 속에서 유지되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의 세계 속에 있는 것들을 우주론적인 차원이라고 말한다면 두 번째는 인간론적인 차원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론적인 차원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이제 인간과 특별히 관련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은 매우 특별하게 창조하신거야.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어요. 이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 안에 있는 것인데 하나님을 닮은 도덕적인 성품이고 또 자연적인 성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하고 통치함으로써 하나님이 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죠? 인간에 의해 만약에 인간에 의해서 인간이 창조 세계를 돌보고 가꿈으로 더 아름다워질 여지가 있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심히 좋았더라 매우 좋았더라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인제 이것들을 설명하게 되면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인제 오늘 여러분에게 그 세계로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은 없고 그래도 간단하게 맛을 보이자면 이런 이야기에요.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밖에는 못 봐요. 그래서 여기에 이것이 이렇게 있지만 어제보다 꽃이 활짝 피었다 그럴 때 아직 피지 않은 상태를 생각할 수 있을 뿐이지만 이것을 처음 보는 사람인 경우에는 내일 이것이 어떻게 변할지 우리들은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매일 매일 거울을 보다가 어느 날 “ 세상에 내가 이렇게 늙었어” 그렇게 말을 하잖아요. 사진, 사진을 나이가 들수록 안 찍으려고 그러죠? 왜냐하면 그것을 계속 확인하는 게 괴로워. 그리고 교회에서 사진 내라고 하면 오십 먹은 사람이 스물 다섯 살 청년 때 찍은 사진을 갖다 내는데 심정적으론 이해가 가지만 행정적으론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하란 말이야. 그런 거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매이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한꺼번에 아시는 것입니다. 시간 속에서 보실 수도 있고 시간을 초월해서 보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웠더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미 창조를 통해서 드러난 아름다움 뿐 아니라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잘 가꾸어지게 되면 아름답게 될 것, 당신 자신이 구원을 완성하고 이 모든 세계를 가장 아름다운 극치로 데려가실 것 까지 모두 포함해서 시간을 초월해서 한꺼번에 보시면서 매우 아름다웠더라 심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제 이해하겠죠. 그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창조 세계 속의 아름다움을 드러난 아름다움과 가능성이 있어서 앞으로 드러나게 될 아름다움의 씨를 사물 속에 함께 심어 놓으시면서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계를 보시면서 아주 아름다웠더라 그렇게 말씀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바로 그렇게 이 모든 창조 세계를 지으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 모든 사물들을 질서를 잡고 조직함으로 가능성으로 피조물 속에 주신 그 아름다움이 인간의 섬김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활짝 꽃이 피어서 아름다운 세계를 더 하나님 앞에 만들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으니 인간을 한우나 아니면 토종 돼지 같이 만들어서는 그런 어마어마한 일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영혼을 주시고 영혼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주셔서 하나님과 피조물과 자기 자신을 반성적으로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물과 사물 사이에 있는 모든 인과 관계의 법칙과 사실들을 깨달아서 이것들을 논리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탁월한 지성을 인간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무엇이고 선과 악이 어떤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까지도 인간에게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형상 안에 하나님이 주신 많은 은사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도덕전인 판단의 능력 그리고 사물의 원인과 결과를 추적해 낼 수 있는 이성의 힘, 같은 것끼리 모을 수 있는 종합의 능력과 함께 섞여 있는 것들을 각각 다른 점을 찾아내서 구별할 수 있는 분석의 능력 같은 것들을 주셨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자마자 수학, 건축, 물리, 예술, 음악, 과학 이 모든 것들이 눈부시게 발달을 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발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바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넒은 의미에서는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만 성령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 받지 못한 사람도 넒은 의미에서는 이 모든 창조 세계와 인간의 영혼을 통치하시는 성령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강한 양심, 전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믿지 않으면서도 비교적 그래도 쓸 만하게 선과 악을 판단하고 양심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사회의 질서를 따르는 것, 학문을 하는 것, 예술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 이 모든 것들 역시 넓은 의미에서 그 사람 안에 성령이 작용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해 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론적인 차원의 성령의 역사에요. 그러나 이제 우리 이 주제와 관련해서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은 구원론적인 차원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에요. 이 구원론적인 상태에서의 성령의 역사가 성경적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결이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 창조되었을 때 육신으로는 양식을 얻고 그리고 영혼으로는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생명을 공급 받음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죄는 이것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자원은 인간이 취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 영적인 세계에서 주어지는 하늘의 자원은 끊어진 상태에서 인간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인간의 정신과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가 버리면 그러면 이 세계는 암흑천지가 되고 동물들이 사는 세계가 될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인간과 세계를 포괄하는 성령의 작용을 완전히 거두시지를 않으셨어요. 그걸 남겨두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은 안 믿어도 그래도 도덕을 세우고 윤리를 세우고 그리고 여러 가지 많은 사회적인 활동을 하면서 이렇게 질서 있는 나라를 건설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자연의 질서, 사회의 질서 이면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권한을 부여 받으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모든 우주 만물을 위임 받아 통치하고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죄악 되게 살아가고 있으며 영혼의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알지 못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들의 죄를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저희들을 새롭게 살리시는 그러한 구원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 그런 계시를 이스라엘과 교회를 통해 보존하게 하시고 전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인간은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는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서 살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러나 좁고 고유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고 세계를 지으신 목적을 알아서 그래서 그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자기의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는 가운데 섬겨서 질서를 이 모든 세상에 확장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모든 질서로 말미암아 온 세계 속에 퍼짐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봉사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 이런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잘못된 우리를 그렇게 그리스도와 이루어진 생명적인 연합 속에서 은혜와 사랑과 진리의 힘으로 우리를 꺾고 그리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새로운 하늘의 능력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놀랍게 변화시킴으로써 이렇게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께 통치를 받는 사람을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작용이 바로 우리에게 조명하시는 것과 새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우리가 성령을 받지 않을 때에는 알 수 없고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게 만들어 주어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빛이 우리를 통해 우리의 마음에 비치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이 어둠 속에 있을 때에는 볼 수 없었던 우리 자신의 죄와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한 것들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시죠.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옛 마음이 아닌 새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옛 마음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거슬러 육적 삶을 살려는 마음이고 새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마음을 알고 그 은혜의 능력에 의해서 변화된 마음인데 이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옛 삶을 버리고 끊임없이 하나님과 맺은 구원의 언약에 충실하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새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 세 차원입니다. 그래서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인간론적인 차원에서, 구원론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적인 연합을 통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생명의 원천으로 해서 우리는 거기에 쭉 붙어 있는 연합된 신자들로서 끊임없이 거기에서 생명의 진액을 먹으면서 교회의 통일체로서의 생명을 함께 지닌 몸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2.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
그리스도 예수와 신자의 이 연합은 이제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신비적인 연합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와 우리 신자들이 맺는 연합은 이 세상에서 비슷한 것을 찾아보기 힘든 아주 독특한 신비한 연합입니다. 왜냐하면 이 연합은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이시고 영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그 분과 연합되는 것이기 때문에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감각을 가지고 판단하는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고 우리의 지성을 넘어서는 불가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그 연합이 무엇인지 모두 다 밝힌 순 없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토대로 미루어 보아서 그러한 연합이 어떤 종류의 신비한 연합인가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되고 실제로 우리가 예수와 어떻게 연합 됐는지는 그 본질은 잘 모르지만 그러나 연합된 효과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나타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우리 사이에 놀라운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있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좋은 영혼의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온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잖아요. 성경은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와 신자의 연합의 비밀에 대해서 우리에게 크게 네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영적인 그 신비적인 연합이 어떤 성질의 것이지를 우리에게 넌지시 보여줍니다. 그것이 첫째가 뭐냐하면 남편과 아내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예화) 남편과 아내라는 것이 참 신기한 게 말입니다. 둘이 만나면 하나님은 대개 똑같은 사람 안 만나게 하시더라구요. 똑같은 사람 만나면 연애할 땐 참 좋아요. 근데 사는 것은 불편합니다. 보세요. 자 연애를 하는데 이 남자가 기분파야. 야 그러고 오늘 연애하러 만났는데 쓰자. 그러면 그 만난 자매가 똑같애. 좋아. 그런 거야. 그래 가지고 돈 쓰고 돈 모자르면 카드 긁고 해가지고 막 쓰는 거야. 연애할 때 얼마나 신나겠어요. 아마 우리 마음 딱딱 맞아.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근데 결혼을 하면 이게 좋은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게 되면 살림 거덜나. 그래서 여보 오늘 결혼기념일인데 우리 호텔에 가서 우리 둘이 한 번 은은한 불빛 아래서 우리 한 번 식사라도 할까 그럴 때 아내가 아우 여보 고마워 정말 나도 가고 싶어. 그러면 남자가 얼마나 기분이 좋아요. 그렇잖아요. 설마 가자고 그럴 때 자기가 뭐 돈 꿔서라도 마련을 했겠지. 그렇죠? 그러니깐 갈 거 아닙니다. 근데 그 아내들은 대부분 정신 차리슈. 이래서 김을 푹 빼놓거든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될 때 그렇게 바람을 푹푹 빼놓으니까 이게 살림이 균형을 이루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어떤 사람이 이야기했는데 똑같은 여잔데 애인에 먹는 음식과 마누라가 먹는 음식이 틀리대요. 애인이 좋아하는 음식: 피자, 돈까스, 스테이크. 마누라가 좋아하는 음식: 보리밥, 비빈 것, 그 다음에 큰 양푼에 먹는. 뭐 이런 거. 애인이 좋아하는 거: 짧은 치마, 마누라가 좋아하는 것: 고무줄 바지 이래요. 근데 사실은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그게 처녀 때 처럼 그런 것만 사 먹으려고 그러면 살림이 거덜나지 않겠어요? 그리고 멋이나 부리려고 하면 그 가정 경제가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남자가 씀씀이가 헤프면 하나님이 구두쇠 같은 여자를 만나게 하시고 남자가 그저 큰소리나 뻥뻥 치면 여자는 내실 있는 여자를 만나게 하시고 남자가 큰 이상에 들뜬 사람이면 여자는 현실적인 여자를 만나게 하시고 남자가 꼼꼼하고 꽁생원 같으면 여자는 통 큰 여자를 만나게 하시고 뭐 이렇게 해 가지고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근데 놀라운 게 함께 살다가 보면 이게 닮아가요. 놀랍게 닮아가요. 그래서 한 사람의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온 거울이고 한 사람의 남편은 그 아내가 살아온 거울입니다. 그래서 유행가에도 있잖아요? 거울처럼 마주 보며 살아온 인생. 둘이 보면 아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이 아내를 볼 때 성질이 못돼 먹고 개떡 같다 그러면 자기 얼굴을 보고 있는 거야. 지가 얼마나 남편으로서 개떡 같이 했으면 그 곱던 아내가 그렇게 개떡 같아졌냐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보면서 조용히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게 체질도 같아져요. 그래서 부부 생활을 하면서 이제 이렇게 호르몬들이 교환이 일어나면서 그러면서 여러 면에서 균형이 쭉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이 신비한 것을 다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포도나무와 가지에 비유를 이야기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시죠? 가지가 꺾여져 있으면 말라서 불에 던져지지만 그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렇게 해서 생명이 나와요. 포도나무가 뻗어 나올 때는 막 8미터씩 7미터씩 8미터씩 뻗어 나가잖아요. 이게 여기서 포도 열매를 맺었는데 도대체 원둥치가 어딨는지 모르는데 저 쪽에 가면 담 너머에 있는 거야. 그러면서 생명으로 연결됐기 때문에 포도 열매가 이렇게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예수 안에서 그런 연합에 연합이 너무 신비하기 때문에 그 정체를 다 알 순 없지만은 놀랍게 예수께 은혜를 받고 생명에 접붙여 살면 우리의 인격이 점점점점점점 예수를 닮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점점점점 하나님의 그 마음에 합당한 행동들을 해나가게 예수님처럼 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또 우리가 여기서 나오는 머리와 몸의 비유를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가 명령을 내리고 온 몸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병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머리가 그걸 명하는데 이 손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쭈그리고 앉아서 기도하면 다리에 쥐가 나죠? 그래서 일어나면 막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릴 정도가 되잖아요. 일시적인 장애 상태가 되잖아요. 머리로서는 이거를 똑바로 걸어야지 하는데 자꾸 헛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죠? 그러면서 이런 이게 그 통치가 제대로 미치지 않는 현상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럴 때 발목을 삐던지 몸을 상하게 되던지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 또 하나의 예를 드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모퉁이돌과 건물의 관계에요. 그래서 건물을 당시에는 돌멩이를 쌓았거든요? 돌멩이나 벽돌을 쌓았어요. 중요한건 뭐냐하면 모퉁입니다. 왜냐하면 모퉁이는 이쪽에서 벽돌이 오고 이쪽에서 벽돌이 오는 걸 연결시켜서 흔들리지 않고 이것이 이렇게 세 개가 만나잖아요. 이쪽으로 이렇게 오고 이쪽으로 이렇게 오고 이렇게 오고 위로 올라가고 .그래서 위를 받쳐주고 양쪽을 받쳐주어서 이것을 갖다가 코너 스톤, 모퉁이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쪽으로 오는 것과 이쪽으로 오는 걸 연결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모퉁이돌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고 이쪽은 유대인들이고 이쪽은 이방인들인데 그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로 묶어서 그래서 하나가 지어지는 것입니다. 기둥과 벽은 서로 틀리고 바닥과 벽도 틀려요. 근데 그 모퉁이돌에 의해서 이것들이 하나로 집약이 되면서 힘을 받으면서 건물이 지어져 가는 것처럼 그래서 이쪽 벽과 이쪽 벽은 본 적도 없는데 모퉁이돌을 통해서 서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건물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의 신비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는 아주 신비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도대체 그것이 뭐냐고 말할 때 우리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찬양)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이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또 다른 것은 언약적인 연합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하면 인제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머리에요. 인간이 창조되고 나서부터 마지막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인간을 대표하는 언약의 머리가 두 사람이 태어나요. 하나는 아담이고 한 분은 그리스도셔요. 그래서 아담은 아담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머리에요. 그 때의 언약이 뭐냐하면 행위 언약입니다. 즉 내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고 너에게 이 모든 것들을 다스려서 창조의 목적을 구현할 수 있는 그러한 재능과 은혜를 너희에게 주는데 그런데 너에게 있어서 중요한 명령이 있다. 그게 뭐냐면 나와 너 인간 사이의 뚜렷한 구별을 지켜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거를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죠. 그래서 그렇게 해서 만약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과의 교통을 인간에게 약속하시는데 이것은 아담이 홀로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머리로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이렇게 타락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끊어진 것이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아니 그 선악과를 우리가 맛도 못 봤는데 그 할아버지가 따 먹었는데 벌을 우리가 왜 받아야 됩니까 그러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이것이 바로 언약의 사상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봅시다. 이 생명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이거는 사실은 영원히 계속되는 언약은 아니었거든요. 모든 학자들이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렇게 봐요. 일시적으로 그 하나님이 아담이 당신 자신에게 순종하는지를 보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바쳐라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시기 위한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는다 그러고 따 먹지 않고 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그것을 따 먹고 싶지만 끊임없이 인내하면서 참으면서 하나님 명령에 순종했어요. 그럼 그 사람은 뭐 순종하려고 고생을 많이 했을 거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에 따 먹지 않았더라면 우리도 그 아담과 함께 생명을 누렸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 할아버지는 그걸 안 따먹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우리는 그런 노력을 한 적이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익을 그 할아버지 때문에 받게 되면 받을 수 있었다면 또한 그 할아버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우리는 아담을 머리로 하고 그 모든 인간들이 머리인 아담과 언약의 관계 속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아담이 타락하고 죄를 지었을 때 우리 모두도 그 언약에 참여자가 되어서 함께 죄가 들어와서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은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거를 내버려두면 결국은 모든 것들이 하나로 연결이 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생명이 사라졌잖아요. 이것은 무엇과 꼭같으냐면 자연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인간이 타락하자 관계가 끊어지고 성령과의 관계가 이런 것들이 단절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상실한 거나 마찬가지라 이것입니다. 이것들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두 번째 언약의 머리를 주시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 분이 오셔서 그래서 우리와 다시 그 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시는데 이게 바로 은혜 언약입니다. 이 은혜 언약은 이미 인간이 행위 언약을 위반하면서부터 생겨났지만 이 언약을 최종적으로 실행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이 언약은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죄 값을 네가 지불하고 죽어라 그러면 내가 너를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주로 높이고 네가 대신 구속한 모든 백성들에게는 생명을 주마 라고 하나님과 약속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 받을 모든 사람들의 또한 머리가 되셔서 그래서 대신 죽으심으로 그 분이 죽을 때 우리의 죄도 함께 죽은바 되고 그 분이 다시 부활하실 때 우리도 그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다시 살아나서 의롭다 일컬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아담의 아담의 인간의 처음 머리인 아담을 통해서는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들어왔고 두 번째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우리에게 생명과 성령이 흘러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예수의 그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우리의 머리가 되신다는 거.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이렇게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언약적인 연합에 있어서 으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근본적으로 언약입니다. 이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계약입니다. 이런 계약이 이루어졌는데 당사자 사이에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근데 이런 계약은 무슨 이렇게 대등한 사람들끼리 상업적으로 주고받는 그런 계약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대등하지 않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계약입니다.
(예화) 자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황제가 있고 그리고 나라를 통치할 수 없어서 땅을 일곱 개 쯤으로 나누어서 그래서 자기의 뜻을 따라서 나라를 다스릴 한 사람을 택합니다. 내가 이제 이렇게 인구 천만 명이 사는 땅을 너한테 떼 주겠다. 그러니까 너는 여기에서 왕 노릇을 하면서 이 천만 명을 다스리거라 모든 권한을 너에게 주마 그러나 최종적인 주인은 나다. 그러니까 나한테 충성을 다 해야 하고 전쟁이 나서 군대를 보내라고 하면 너는 즉시 보내야 하고 물자가 필요해서 돈을 바쳐라 그러면 언제나 바쳐야 하고 심지어 너 죽어라 그러면 나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어야 된다. 그리고 그를 불러요. 근데 그 사람이 원래는 그냥 돼지나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뭐 실현성은 현실성은 없지만 돼지나 칠 때에는 무슨 의무가 따로 없었는데 이 사람이 졸지에 한 나라의 황제에게 임명을 받아서 왕이 될 때에는 많은 의무가 따르겠죠. 그러나 그 의무는 황제에게 임명을 받아서 인구 천만 명의 땅덩어리를 다스리는 왕이 될 때에 가질 수 있는 그 모든 권리와 유익과는 비교될 수가 없죠. 그래서 황제가 불러서 너는 이제 이 나라의 왕이다 하고 자 여기다 싸인하거라 하고 계약서를 줄 때 아 이거 아무리 왕이지만 이게 언제든지 부르면 와라 하는 거는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그래도 내가 힘들면 안 가도 된다 여기다 하나 더 써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면 간이 배 밖에 나온 사람이겠죠 그죠? 여러분 저는 잘 모르는데 이야기를 들으니까 대령하고 별자리하고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난다고 그래요. 하나 차이인데. 그래서 뭐가 틀리냐 그랬더니 대령에서 별을 딱 다는 순간 아흔 아홉 가지가 달라진대요. 차가 달라지고 요리사가 따라오고 뭐 비서가 따라오고 등등등 따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이 대령이었는데 별을 한 네 개쯤 달게 되었을 때 얼마나 무거운 책임감과 의무가 있겠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래도 사람들은 그 책임감이 무서워서 승진 안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책임 아주 기쁘게 감당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걸 인생에 있어서 보람으로 알고 기쁨으로 아는 것입니다. 요새 이명박 대통령 보세요. 푹 삭았어요. 불과 몇 달 한 일 년 사이에. 푹 삭았고 노무현 씨는 그 하고 나니까 완전히 할아버지가 됐어요. 그래도 옛날에 시청 앞에서 저기 화염병 던지는 그 속에서 주먹 쥐고 노래 부를 때만 해도 청년 같았었는데 이제 그렇게 해서 대통령 한 번 하고 나니까 완전히 삭았고 김대중 씨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이 한 번 거기 들어갔다 나오면 완전히 진짜 사람이 완전히 몰골이 쇠해지게 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고생하고, 더군다나 이명박 씨는 월급도 못 받잖아. 자기가 다 바치겠다고 그래가지고 그리고 뭐 그거 5년 하면 자기 재산까지 다 내놓겠다고 그랬는데 어떨 땐 좀 안 됐단 생각이 들어. 월급도 못 받고 저렇게 욕을 먹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도 그걸 모두 해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왜? 그 의무는 너무 많지만 그러나 그 권한도 또 대단한 거거든요. 그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이네 제 이렇게 우리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언약이 맺어지게 되었으니까 우리가 동의하건 말건 그 분이 우리를 불러서 너는 이제 나와 언약을 맺은 사람이니까 내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는데 그 유익을 너에게 전달해 주어서 그래서 네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게 해 주겠다 이렇게 해서 다 되게 된 것입니다. 이게 일방적이죠 사실은 뭐 저 저기 그 황제가 왕을 임명할 때 무슨 뭐뭐 다수결로 합니까? 쟤를 왕으로 임명해라 그런데 못 하겠습니다 그러면 잘못하면 죽는 수가 있죠.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약속을 자꾸 배반할 때가 있어도 그 분은 워낙 신실하시기 때문에 한 번 붙든 우리의 손을 결코 놓지를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언약은 일방성이 있죠. 그렇지만 이게 또 언약이기 때문에 쌍방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께 연합이 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신통치 않게 살아도 그리스도와 맺은 이 연합이 끊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따라서 언약 생활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라고 하는 성경의 생활의 교훈을 따라서 올바르게 살아가면 이 연합은 점점 더 풍성한 생명으로 나타나요. 그런데 마음이 꼬여 가지고 교회 와서 슬슬 배타적인 이야기나 하고 그리고 교회의 질서를 훼방하기나 하고 그리고 성도들끼리 서로 다투고 목회자한테 대들고 이러면서 결국은 신앙 생활의 질서들이 무너지고 깨뜨려지게 되면 그러면 언약 생활에 있어서 이 사람이 파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 아무리 일방적이어서 한 번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언약 생활을 망가진 언약 생활을 해서 언약 관계에서 인간이 자신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지 않게 될 때 하늘은 닫히고 영혼에는 어두움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으로부터 아주 끊어지진 않지만 아주 핍절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빨대로 빨대가 아니라 링거로 맞으면서 의식도 없고 호흡기로 꽂고 있는 것도 산 거고 펄펄 뛰어 다니면서 테니스를 하고 조기 축구회 뛰어 다니는 것도 산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개의 삶은 그 질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가 있는 거나 마찬가지죠? 바로 그런 거란 말이죠 이게 바로 그리스도와 신자가 맺은 언약적인 연합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연합입니다. 이 연합은 바로 이스라엘 나라는 육적인 나라였지만 교회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통해서 마지막에 이 세상에 수립될 왕국도 영적인 왕국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영적인 연결을 이루고 그래서 그 연결들이 확장되는 거죠 우리들이 그렇게 끊임없이 이웃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여 교회에 데리고 오려고 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복음을 들을 때 깨뜨려지고 변화되어서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접붙여진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닙니다. 아까 말씀 드렸지만 그렇게 접붙여진 사람은 주님이 절대로 잘라 버리시지 않지만 자기가 언약 관계에서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고 교회를 통해 행사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왕권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하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의 자신의 언약적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 풍성하지 못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자꾸 고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늘의 자원이 교회 와서 신앙 생활 할 때 끊임없이 공급되는 기쁨을 누려야 되는데 이런 것들이 끊어진 가운데 핍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바로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영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적인 연합을 공고하게 해 나가는 비결이 뭐냐면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온전히 사랑하게 되는데 이것이 성령을 성령에 의해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사랑을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을 공고하게 해 나가게 되는데 이러한 공고한 연합은 성령에 의해서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영혼에 대한 영혼의 변화에요. 그래서 잘 믿는 영혼은 예외 없이 하나님을 잘 사랑해. 그래서 믿음이 충만할 때 성령이 가장 충만하였고 사랑이 충만하지 않은 믿음의 충만은 진정한 믿음의 충만이 아닙니다. 자기 아집에 충실한 것입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영적인 연합 속에서 신자와 그리스도는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면서 그러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 있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자원을 끊임없이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이러한 영적인 질서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그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영혼의 결합이지만 우리가 이것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역사하는 곳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많이 사랑할 때 그리스도께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되고 때에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생명, 더 많은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져서 은혜가 없을 땐 이길 수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기쁨으로 이기면서 감당하면서 살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게 되지 않겠어요?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마음이라는 것이 잘 들으셔야 돼요 이 마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모든 삶과 동떨어진 공간에서 예수와 사랑만 주고받는 데 사용되는 게 아니잖아요. 이 마음을 가지고 가서 돈도 벌고 이 마음을 가지고 가서 전도도 하고 이 마음 가지고 죄도 지어. 이 마음 가지고 기도도 하고 이 마음 가지고 국어책도 읽으면서 공부도 한다 이 이야기에요. 이 마음 가지고 혼도 내고 이 마음 가지고 사기도 친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은 이렇게 해서 우리의 외적인 삶과 그 다음에 영혼 이 모든 것들을 묶어주는 하나의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세요. 그런데 마음으로는 끊임없이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께 사랑을 받으면서 이러한 실제적인 연합을 공고하게 하고 싶은데 그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통해서 행사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 그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통치하고 그 질서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를 아주 아름답게 엮어서 봉사하게 하시잖아요. 근데 이런 질서를 무시해.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려고 하는 이 봉사에 끊임없이 방해하고 끊임없이 교회에 어려움을 가져다 주어요.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여러분 위원장도 맡았고 교회에서 부장 부감도 맡았고 그 다음에 차량 무슨 뭐 주차도 하고 또 열린 공간에서 봉사도 하고 또 뭐 그 다음에 주일 학교 선생도 하고 구역장도 하고 하잖아. 잘 해야 됩니다. 잘 해야 돼. 여러분이 만약 의식 속에서 이까짓 것 봉급도 안 주는데 명함 맡아가지고 있는 것만도 교회가 나한테 감사해야지 라고 생각하면 매우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하지 않으면 반드시 자신의 영혼이 망가져요. 여러분 주위에서 한 번 보세요. 아마 이러면 여러분이 정확하게 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혹은 사회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건 자기가 직감적으로 알잖아요. 아 이건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직분이다. 이런 걸 알잖아요. 그런데 그거 하찮게 여기고 개판으로 일해. 되면 되고 말면 말고. 그리고 무관심합니다. 이건 그래도 좀 낫죠. 그 다음에는 이걸 자꾸 잘못해. 그래서 의도 없이 잘못할 수도 있고 의도를 가지고 자꾸 애를 먹이면서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죠? 그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아주 멀어져요.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통치하심으로 교회를 봉사하고자 하는 질서를 자꾸 훼손하고 그래서 교회에 고통을 주고 그리고 충성되지 않아서 게을러서 결국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가 봉사할 때에 절뚝절뚝하게 만들게 하는 사람이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사는 사람 본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물론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명이 첫 번째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과 자신의 영혼에 무슨 관계가 있으랴 자기가 영혼이 곤고한 것은 사업이 안 되고 자식 새끼들이 속을 썩여서 그런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은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엮어져 있는 것입니다. 잘 들으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은 잘 감당해야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과 충만한 은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떼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가 하나님이 맡기신 그 일을 개판으로 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 전체를 통해서 엮어 가시려고 하는 봉사의 질서에 끊임없이 거치고 그래서 문제를 일으켜서 교회의 봉사를 비효율적으로 만들고 절뚝거리게 하고 교회의 돈들을 낭비하고 그리고 교회의 지체들끼리 끊임없이 분쟁과 다툼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래서 교회의 일체된 유기적인 생명체에 계속해서 흠집을 내게 되면 영혼은 곤고해지는 것입니다.
3. 성령을 통한 구속의 적용
그리고 하나님이 몇 번 기회를 주시다가 그것마저도 거둬 가셔요. 그렇기 때문에 이유 없습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것은 잘 해야 됩니다. 잘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충성스럽게 잘 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되는 것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제 이렇게 신자가 성령에 의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게 되는데 이렇게 연합을 이루게 되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그의 영혼 속에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이루신 그 구속을 적용함으로 그 모든 예수 안에 있는 풍부한 구원의 자원들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생각하면 되죠.
(예화) 고아로 천생 떠돌다가 엄마 아빠도 없이 살다가 그 아이가 돈 많은 집에 입양이 돼서 갔어요. 그래서 부모가 이 아이를 잘 교육시키면서 자기 아들로 입적시켜 줬어요. 가끔 보면 왜 이렇게 돈 많은 회장이나 이런 사람들이 바람을 피잖아요. 그래서 연예인들하고 무슨 스캔들을 일으키고 그러잖아요. 그럼 여자 연예인 뭐 연예인만 그런 게 아니라 하튼 문제가 일어날 수 있잖아요 그죠? 그러면 이 여자는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 회장의 애를 낳으려고 그러더라구요. 그죠? 왜냐면 애를 낳지 않으면 그냥 바람피운 걸로 끝나는 것입니다. 무조건 애를 낳아. 하튼 어떻게 애를 써서라도 애를 낳아. 애를 딱 낳고 그 다음에 뭐냐면 그 다음 목표가 뭐냐면 이 아이를 그 집에 등록시키는 거야.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몇 있죠 그죠? 등록시키면 이거는 뭐 굉장한 것입니다. 회장이 예를 들면 3조원의 돈을 가지고 있다 그 집의 애들이 뭐 셋이다. 그 중에 한 다리 꼈다. 그러면 죽을 때만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천억의 유산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집안에 입적이 되면 자녀로서 그 가정에서 누릴 수 있는 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주인처럼 함께 행사하며 거기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게 되면 예수 안에 있는 이 풍부한 기업들을 함께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기업 중에 놀라운 게 뭐에요? 아니 왜 어떻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수님 모르고 복음으로부터 멀어진 채 살았을 때에는 죄가 있으면 우리 자신이 스스로 이길 수 없었잖아요. 근데 지금 와서 진심으로 용서를 빌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십시오. 그리고 불순종해서 주님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했는데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항상 살리라
C.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
하면 다시 은혜를 하나님이 막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속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한 번 찍으면 영원히 씹지. 누가 그렇게 애지중지하고 그런 사람 없습니다. 부모도 심지어는 부부도 그렇게 안 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무한히 사랑해 주십시오. 그게 예수 안에 있는 기업입니다. 그걸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곤고하면 하나님이 곤고할 때 은혜를 주십시오. 순종하려고 하는데 나에게 지혜가 부족합니다. 지혜를 주십시오. 순종하려고 하는데 능력이 모자랍니다. 능력을 주셔요. 순종하고자 하는데 환경이 너무 어렵습니다. 환경을 극복할 수 있도록 막 끊임없이 그 기업들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누리게 해 주십시오. 그게 뭐냐면 거룩함 안에서 연합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함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이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하는 그런 구별된 본질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로 끊어지면 우리는 그냥 계속 더러워지는 존재들입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음식물을 사다가 냉장고에 안 넣으면 부패하잖아요. 부패하라고 애를 쓰지 않아도 음식을 사다가 두부든지 고기든지 무엇이든지간에 어쨌든 밖에 내놓고 온도가 맞으면 그냥 썩게 돼 있는 것입니다.
1. 죄의 죽임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께 떨어져 있으면 그냥 부패하고 더러워지는 존재에요. 왜냐면 우리의 안에는 거룩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결과 더러움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그렇게 끊어지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라는 게 노력을 해야 죄를 짓는게 아니라 은혜에서 멀어지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구속하셔서 연결된 연합 가운데서 우리를 당신 자신이 거룩함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그 그렇게 당신과 관계를 맺고 살아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 거룩해지는 비결이 무얼까 그리고 아이고 오늘보다 내일 더 거룩해져야 되는데 이렇게 애쓰지 않아도 그냥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2. 은혜 살림
위대한 은혜 세계 몰라도 매일 매일 하나님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교회의 질서를 통해 행사되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 생명을 누리고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통치에 복종하고 어떻게 하든지 주님과 함께하는 이 유기체적인 봉사에 자신의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과 물질을 드려서 섬기려고 할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큰 바위 얼굴을 매일 바라보기만 하던 그 사람이 결국은 그렇게 유명한 사람 아니어도 큰 바위 얼굴을 닮아 갔듯이 그렇게 거룩함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서 그 분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을 때 우리도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III. 은혜와 복종: 그리스도와의 연합적 사랑
놀라운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이 충만해서 생명적인 연결을 이루면 이룰수록 우리 안에서 성령이 충만해서 성령이 우리를 인도해 주셔요. 참 놀라워요. 그래서 내가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마음먹으면 내 안에서 성령이 슬퍼하시는 게 느껴져요. 그러니까 상태가 좋아야 됩니다. 상태가 좋아야 되고 그리고 안 하고 싶다가도 성령께서 내 마음을 움직여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라고 하고 그 인도하시는 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인도를 통해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인도가 우리로 말하자면 더듬입니다. 귀뚜라미 같은 거 잡아다가 장난치기 위해서 더듬이 두 개 딱 띄어놓잖아요. 그리고 뒤돌아보면 이게 그 때부터 막 헤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더듬어서 어디를 가야 될 텐데 막 움직였는데 이게 없어진 것입니다. 어디를 갈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 더듬이를 잃은 귀뚜라미처럼 우리가 성령의 인도가 없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교회에 꾸역꾸역 나와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신앙생활 하면 성령의 인도 그런 거 없습니다.
그게 끊임없이 자신의 자신과 그리스도의 연합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러한 연합 속에서 우리들이 그런 충만함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부활한 그것이 우리의 마음 속에 놀라운 기쁨으로 다가와요.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은 그것을 주님이 이 구속의 적용을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우리에게 이입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의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일컬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었지만 이것도 성령께서 하신 것이고 그리고 믿었지만 사실은 엄밀하게 말하면 믿음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훌륭한 사람이 된 게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가시켜주신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하나님이 아무 공로 없는 우리들을 이렇게 구원하셔서 십자가의 피로 살게 하시잖아요. 이렇게 할 때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가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충만한 그리스도와 연합 속에서 살 때 죄를 끊임없이 미워하고 죄를 죽이고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죄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지고 은혜는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융성하고 그리고 활기 있게 살아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잘못할 때도 있고 실수할 때도 있고 악을 행할 때도 있죠. 그러나 이런 연합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즉시 그것을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고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다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으면서 그렇게 주 앞에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생명으로 하고 유기체적으로 그 분께 연결된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와의 생명적인 이 연합이 우리에게 잘 보존되기 위해서는 의무의 껍질에 잘 싸여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의무가 뭐냐면 교회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이 지체들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와의 관계를 바르게 한 몸, 몸의 다른 기관과의 관계를 바르게 한 몸, 그리고 그 다음에 자신 안에서 이 생명의 작용이 올바르게 되어 있을 때 그것이 되는 거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거 아닙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 모든 것들이 연합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끊임없이 우리 안에 영적으로 흘러 들어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가 그렇게 영적인 한 몸을 이루면서 그러면서 유기체적인 생명의 연합을 구가해 가는데 이러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이 교회가 보이는 교회의 의무의 껍질 속에 있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행사하시는 통치의 질서, 그리스도께서 행사하시는 봉사의 질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는 이 생명의 교통을 위한 질서들이 우리들이 통해서 행사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 통치를 대항하고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것들을 방해하고 그것을 통해서 이 하나님 앞에 대적하고 이렇게 살아가게 될 때에 그 때에 마치 우리가 몸에 안 좋은 음식을 끊임없이 먹으면서 우리의 몸을 망가뜨리는 것 같이 그렇게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생명 자체를 끊임없이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 자기의 영혼이 곤고해지는 이유가 뭐 사업이 안 되고 그렇다고 그러는데 그런 사람 돈 많이 벌면 그러면 영혼이 저절로 부흥을 맞이할 거 같애요? 그런 게 어딨어요. 돈 다발 갖다 쏟아 놨더니 부흥이 일어났더라 그런 게 어딨냐 이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성령은 은행에 가야 있을 거 아니에요? 그게 안 되는 거라 이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외적인 삶과 이 영적인 내적 생명이 떼어 놓을 수 없게 아주 놀라운 연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예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혹시 실행하지 않았어도 마음으로라도 그리스도의 이런 통치 질서에 대항하거나 아니꼽게 생각하거나 이런 통치의 질서들을 무시하는 마음을 스쳐가듯 품기만 해도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주어지는 이 아름다운 공급들이 금방 영향을 받아서 영혼이 곤고해지고 이 영적인 위기가 오게 되는 거라 이것입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여러분이 살았던 삶이 어떤 삶이었는지 한 번 보라 이 이야기에요. 이런 이러한 아주 세미한 구조로 되어 있는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영적인 연합의 이런 아름다운 실체와 그리고 교회라고 하는 이 질서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야 되는 이 삶의 아주 이 아름다운 상관관계에 대해서 여러분이 심사숙고 하면서 생각했어요? 그저 얼마 되지 않는 여러분의 상식이나 가지고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통치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불순종하고 그래서 결국은 자신은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끊임없이 교회에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고 그래서 결국은 급기야는 자기 자신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이 생명적인 통치까지도 연결까지도 방해를 받는 그런 무지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잖아요. 이것은 매우 복음으로부터 멀어진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 설교를 행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교회 안에 심지어는 이 교회 아닌 다른 곳에 이러한 영적인 명백한 원리를 전혀 모르는 채 끊임없이 자기의 영혼에 해가 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본질을 떠난 빗나간 열심 그리고 본질로부터 멀어진 섬김에 취하는 자기의적인 행동 그리고 마치 교회에 와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마치 자기를 실현하고 스스로 보람을 얻는 것이 그 섬김의 목표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서 자기를 자랑하던 사람이 운동장만 바뀌어서 이번에는 교회 안에서 자기를 실현하고 자랑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무릎을 꿇고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께 연합되어 있는 영혼이 아닌 그런 망가진 영혼으로 이 속에서 주님을 섬긴다고 살아가는 그러한 섬김을 통해서 통치의 질서를 끊임없이 그가 방해하고 주님의 생명의 질서를 훼손하는데 어떤 아름다운 일들이 그의 영혼 속에 일어날 수 있을지 생각해 봐요. 기독교 신앙은 진지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2)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3)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4)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5)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6)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6 (주일오전예배 2009/01/18)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7 (주일오전예배 2009/02/0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8 (주일오전예배 2009/02/08)
5.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2
: 유기체적 섬김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6).
Ⅰ.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할 때에 이것은 크게 세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교회가 머리되시는 게 여러 가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은 하나이지만 그 머리되심을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세 측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되심을 우리 교회가 유기체적인 생명이라는 견지에서 볼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고 그래서 어제 긴 시간동안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신자가 접붙여질 때에 그것이 생명적인 교통을 이루게 되고 그래서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가 또 떨어질 수가 없는 관계가 됨으로써 성령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유기체적인 생명체가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중에서 또 다른 측면인 유기체적인 섬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주일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중에서 유기체적인 통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림으로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의 대미를 마무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이나 이후의 신학자들의 그 교회론의 진술에 보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은 대개 딱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합니다. 유기체적인 생명과 유기체적인 통치입니다. 이 두 가지를 명백하게 나누어서 설명한 학자들도 있고 두 가지를 함께 엮어서 그냥 두루뭉술하게 설명한 사람도 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 같은 분은 이 두 가지를 또렷하게 나누어서 그래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아래서 유기체적인 생명의 연합을 이루는 것과 또 다른 면인 유기체적인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을 구분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다가 유기체적인 섬김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새롭게 만들기 보다는 그동안 이렇게 무시되어 왔던 이런 부분들을 다시 교리를 수립함으로써 우리들이 이 교회에 관한 교리들을 보다 더 분명히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시대는 모두 유럽천지 전체가 예수를 믿는 그러한 기독교사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또 그렇게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적인 연합을 이루며 그렇게 생명적인 연합을 갖고 그것이 교회의 건축이나 사회제도 속에서 표시가 되고 국가와 교회가 구분하기 힘들게 이렇게 함께 엮여있는 그러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사회 전체가 기독교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사실은 사회에서 행하는 입법, 사법, 통치를 비롯해서 행하는 모든 일들이 사실은 기독교적인 정신 속에서 행해지던 사회였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관심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무엇을 할 것이냐?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이냐? 세상을 바꾸고 고치고 변화시킬 것이냐? 이런 것보다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시키는 대로 잘 통치를 받는 것이 무엇인가에 그렇게 관심들이 집중되어 있었죠. 그래서 교리적으로 잘못 나가는 사람들은 진리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이탈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통치를 벗어나는 사람들이고 그리고 말로는 똑바로 고백을 해도 행실이 삐뚤어져서 그래서 생활로써 그 진리를 잘못 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삶으로 그 진리를 이탈하는 사람들이었으니 여기에 대해서 교회가 적절하게 징계를 하고 그러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돌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오늘날의 시대는 종교개혁시대와 같지는 않고 오히려 사도들의 시대와 유사합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시대는 사회 환경 자체가 기독교적이었으나 사도들의 시대는 오히려 예수를 믿는 것은 새로운 종교를 따르는 것이고 오히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이방문화와 이방종교, 이방사상과 철학에 그리고 이방문화에 에워싸여 있는 속에서 기독교는 조그만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문맥이 바로 그렇게 이 초대교회의 문맥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약성경에 보면 교회가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생명을 누리고 또 교회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교인들이 올바른 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징계하는 장면도 나오지만 잘 조직하고 교회가 협력하면서 세상을 향해 복음으로 도전하고, 그들 속에서 복음의 빛 된 삶으로 영광을 드러내고, 아주 조직적으로 선교를 하고, 그리고 구제를 하고, 사회에서 선한 행실로 칭찬을 받고, 교회를 조직해나가는 아주 구체적인 봉사의 모습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저는 오늘날 신학적으로 재조명해서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세운 교리의 그 테두리 안에서 우리들이 약간씩 간과하고 지나갔던 그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되심의 측면들을 신약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이 다시 복원을 해내서 그래서 건전한 봉사의 기관으로서의 교회에 관한 교리들을 새롭게 구축하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매우 시급하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오게 되었고 그리고 오늘날 여러분에게 드리는 이 교리는 이러한 저의 신학적인 고민과 신앙적인 고민의 그리고 사역적인 고민의 결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데 유기체적인 생명으로서 우리의 머리가 되셔서 생명의 근원이 되실 뿐만 아니라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과 성령을 통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예수 안에 있는 그 생명을 전수받음으로써 머리에 부착되어 있는, 머리에 접붙여져 있는 모든 교회의 각 지체들이 이 생명의 놀라운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기운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퍼져있어야 합니다. 어느 한 쪽만 생명이 넘친다고 해서 그것이 건강한 몸이라고 말할 수가 없지요. 오늘도 제가 헌금시간에 우리 어린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그랬는데 이 추운겨울에 엄마 아빠의 손을 이끌고 아이들이 한 오백 명이 나와서 은혜를 받겠다고 일주일동안 집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집회에 참석을 하고 있습니다. 어린애들에게 이번 사경회에 목숨을 걸라고 했다니까……. 부모도 목숨을 안 거는데 애들이 어떻게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러면서 저 유아부, 유치부로부터 시작을 해서 저기 소년부까지 모두 모여서 ‘마음지킴’(이번에 여러분이 공부하는 그것)을 놓고 부흥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몸의 각 지체 어른들인 목회자로부터 시작을 해서 저 끝의 주일학교 학생, 유아부의 어린아이들까지 그렇게 예수의 생명으로 충만해질 때에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나이가 들어서 죽음의 기운이 서서히 밀려오게 되면 이제 머리부터 허옇게 되고 빠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쭈글쭈글하고, 그리고 무르팍이 아프기 시작하고, 비가 오면 무르팍이 쑤시기 시작하고, 그리고 팔꿈치가 아프고, 팔마디에 감각이 점점 사라지고 하면서 온 몸의 생명은 남아있어도 생명의 기운이 끝에까지 모두 퍼지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일을 위해서 가장 많이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 각 사람, 각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생명적인 교통을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 아래서 사랑으로 누리면서 그러면서 예수의 생명으로 목회자로부터 시작해서 저기 주일학생에 이르기까지 충만하게 나타날 때 그 사람들을 통해서 그 충만한 생명의 기운이 역사할 때 주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훌륭한 일군이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교회의 이러한 유기체적인 생명은 반드시 유기체적인 섬김과 꼭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이 유기체적인 생명과 유기체적인 봉사 혹은 섬김, 유기체적인 생명과 유기체적인 봉사 유기체적인 통치, 이것은 유기체적인 생명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은혜 안 받은 사람이 예수의 통치에 복종할 리가 있겠습니까? 예수의 생명이 충만하게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충만하게 봉사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그런 것은 없거든요. 그래서 이제 이러한 교리들을 우리들이 깊이 이해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급히 이루어지는 아니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사경회를 통해서는 모두 못하겠지만 어쨌든 잘 정리를 해서 여러분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Ⅱ.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도의 교통
A.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공동체적 현실화: 교통
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지난 시간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머리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서 공부를 했는데 이제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또 하나의 결과가 성도의 교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도의 교통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를 믿고 영혼이 거듭나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졌을 때에 그는 이제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한 분만을 바라보고 믿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지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그것은 예수의 몸에 접붙여짐으로써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의 처음시작 자체가 몸으로써 몸의 일부로써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은 공동체적인 현실화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은 공동체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몸에 우리가 접붙여지는 것이잖아요? 이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죠? 그런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가 보이도록 실현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이렇게 눈에 보이는 교회에 들어와서 함께 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 본질이 무엇이냐 하면 교통입니다.
1. 내적으로 : 그의 생명에 참여함
이 교통은 두 국면으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내적인 국면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그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내적으로 그의 생명에 참여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에 우리의 영혼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져서 그래서 예전에 떨어져있을 때에는 내게 없던 하나님의 생명을 그리스도 예수에 접붙여져서 모든 몸과 함께 동일한 생명을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의 공동체적인 현실화에요. 자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면 아주 놀라운 부요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그저 이 땅의 자원이나 있으면 행복할 줄 알고 미친 듯이 돈을 벌고 그리고 인색하게 생활을 하면서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살았지만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 졌을 때에 그의 마음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바 된 그 은혜의 세계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공급되는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놀라운 사랑을 힘입으면서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생명이 얼마나 크고 무한하고 놀라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구원받기 전까지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예수 안에 무한한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용서와 그 무한한 자원 같은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그런 것을 실제적으로 누리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놀라운 부요함 거기에 대해서 눈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놀라우냐하면 이러한 신앙은 하나님 앞에 일차적으로는 개인적인 것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를 보면 굉장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곤고하고 힘들게 살 때에도 은혜 많은 호황을 누릴 때가 있었고 교회는 시험에 많이 들었어도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께 넘치는 위로와 사랑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신앙이 개인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이 하나님 앞에 받는 이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에 풍성한 이 은혜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구원받을 때에 우리들이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서 하나의 몸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 하나의 몸으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유기체적인 생명의 일부를 부여받은 자가 된 것을 이렇게 지역에 정해진 교회 속에서 함께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가정과 같은 곳입니다. 슈퍼마켓이나 백화점이나 뷔페집이 아니라 가정입니다. 가정! 그래서 이 속에서 이 모든 교인들이 함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이 모든 우주적인 교회가 하나로 접붙여져 있는 것 같은 정신을 이 보이는 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을 실현해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가게나 슈퍼, 백화점, 음식점 같은 곳이 아니라 가정입니다. 가정!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는 가정과 같은 곳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이라고하는 곳이 무엇입니까? 우리 가정이 다른 집 가정보다 못살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다른 아버지보다 공부 많이 못한 사람일수도 있고 우리 엄마가 다른 엄마보다 얼굴도 못생기고 나이도 늙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몸에 또 장애가 있어서 절뚝거리거나 곰보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집 엄마는 그렇게 음식을 맛있게 하는데 이 엄마는 그저 하는 거라고는 밥하고 김치밖에는 할 줄 모르는 그러한 뚝배기 같은 엄마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정은 그런 것 이상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정에서 함께 생활을 하면서 비록 우리 집이 그렇게 큰 집은 아니라도 거기에서 부모와 어머니와 아버지와 그리고 형제들과 동생들과 함께 살면서 그러면서 거기에서 인간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그리고 어떻게 함께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야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집이 아버지는 지위가 높고, 돈도 많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엄청나게 많은 유산을 남겨놓고, 그리고 어머니도 얼굴도 아주 예쁘고, 세월이 그렇게 흘러가도 늙지를 않고, 그저 같이 나가면 엄마보고 ‘너네 누나냐?’ 할 정도로 그렇게 미모이시고, 교양은 철철 넘치고, 그리고 나이가 그렇게 들었어도 외국어도 그렇게 잘하고, 요리도 그렇게 뛰어나게 잘하고, 그리고 뭐가 먹고 싶다하면 요리사를 불러다가 요리를 시킬 수 있을 정도로 재력이 있고, 방도 한20개쯤 되서 친구들 데리고 와도 여기저기서 잘 수 있고, 그러면서도 신앙이 뜨겁고 훌륭하고, 그러면 좋겠지요. 그러면 여러분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자식에 대해서 그럼 부모가 못되었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의 부모도 여러분에게 그런 부모가 못된 것에 대해서 그런 불평을 할 필요가 없지요. 모두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렇다 고해서 우리 집이 그렇지 않다고 해서 자기 아버지가 뻔히 있는데 이 아버지는 형식적인 아버지일 뿐이고 나는 오늘부터 친구아버지를 내 아버지로 삼기로 했어요. 왜? 돈이 많고 인품이 좋으니까……. 가끔 폭력이나 행사하고 상스러운 말이나 하는 우리 엄마보다는 차라리 내 친구엄마가 훨씬 교양도 있고 인품도 있고 요리도 잘하고 그렇게 해서 밥은 흑석동의 친구네 집에서 먹고 그 다음에 세배는 사당동에 있는 친구아버지 집으로 가고 집의 엄마는 식모처럼 생각하고 진짜 마음속의 엄마는 친구 엄마를 품는다면 그게 정상적인 생활일 수 있어요?
물론 교회가 진리가 올바로 선포되고 학식이 뛰어나고 인품이 고매한 목회자가 목회하는 것은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지요. 그리고 한 교회에서 진리가 선포되는 설교가 영혼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너무 소중한 것이지요. 또 교회의 교육시스템이 잘 되어있는 것과 엉망으로 되어있는 것 사이에는 그 차이가 얼마나 큽니까? 애들을 데리고 교회에 5년, 6년씩 다니면서 유치부 때부터 애들을 맡겨서 대학 졸업할 때가 되었는데도 결국은 교회에서 회심을 시켜주지 못했어요.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그런 교육의 시스템이 잘되어 있고, 그리고 헌신적인 목회자들이 있고, 그리고 이런 것들은 얼마나 중요하고 또 내가 이러 저러한 필요에 의해서 이런저런 교육을 받고 싶은데 교회가 그런 것들을 충분히 제공해 줄 수 있는 환경이 될 때에 그 때 얼마나 감사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활기와 원기를 얻게 되요?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런 것이 교회의 가정됨을 파괴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옮길 때가 되면(옮길 때가 있지요. 목사도 교회를 옮길 때가 있는데 왜 그럴 때가 없겠어요? 멀리 이사를 왔다든지 이사를 오지 않아도 또 오래도록 생활하면서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선하게 주실 때가 있지요. 그러니까 그 때는 자기를 비우고 기도를 많이 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가야합니다. 일 년에 한번 이년에 한번 교회를 옮겨 다니다가 마지막에 머리가 허옇게 되어서 죽었는데도 누구한테 장례예배를 부탁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인생을 실패한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는 돈을 벌고 그리고 사업을 잘해서 세상에 촉망을 받는다고 하더라고 신앙적으로는 그 사람은 파탄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인도하시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이제 항존직이 될 때에 안수집사나 권사나 장로가 될 때에는 신중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이변적인 인도가 없는 한은 나는 교회를 떠날 수 없을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 직분을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분들 가운데는 비록 장로이지만 혹은 집사고 권사이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가 있어서 많은 기도 속에 우리 교회에 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을 조금이라도 마음을 아프게 하려는 그런 의도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런 사람들은 가볍게 교회를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 있어서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절대로 그런 항존직을 받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보면 권사다, 안수집사 이렇게 세워 놨는데 불과 1,2년 만에 담임목사에게 말도 안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래서 내가 가끔 물어봐요. ‘내가 뭘 크게 잘못한 것이 있느냐?’ 그것도 아니고 아주 사소한 이유에요. 안수집사를 세우고 권사를 세워놨는데 교회를 옮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는데 ‘좀 멀어서…….’ 그러면 세워질 때는 가까웠느냐고요. 그것은 하나의 핑계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직분들을 하찮게 생각하고 기도도 별로 없이 이리저리 떠돌면서 좋으면 그 교회에서 삼키고 신통치 않으면 뱉어 버리면서 이 교회, 저 교회를 방황하는 사람들은 죄짓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기왕엔 옮긴 분들은 이제 진지하게 생각하고 다시 그런 우를 범해서 교회와 자신의 영혼에 상처를 주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그리고 교회를 옮기려고 마음을 먹고 계신 분들은 진지하게 기도를 많이 한 후에 교회를 정하면 이것을 가정과 같이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이혼하면 두 번 이혼하는 것은 쉽고, 두 번 이혼하는 것은 세 번 네 번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버스 갈아타듯이 쉽게 이혼을 한다고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우리 몸에 배이면 우리의 영혼과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에 많은 상처를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내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면서 공동체적으로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는 영혼의 큰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예수 믿는 집안에서 안 태어났기 때문에 굉장히 힘들게 예수를 믿었잖아요? 너무 부러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잘 믿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애들은 우리는 교회 간다고 집에서 작대기로 두들겨 맞는데 그 애는 교회를 안 간다고 작대기로 두들겨 맞아요. 이것은 천지차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좋은 가정에 입양을 간 것 같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에 가입하는 것은 좋은 가정에 입양이 되었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좋은 가정에 입양이 되기만 하면 저절로 무슨 신앙이 자라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도 자기를 꺾으면서 그 가정이라는 교회에서 가르침을 잘 받고, 순종하고, 열심히 배우고, 그 가풍을 따라오고 할 때에 교회에 공동체적으로 주시는 그 은혜에 함께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교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이 교회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그렇게 뜨겁게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안 그런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아주 촉망받는 목회자하고 교인이 몇 만 명씩 모이는데 나는 목회를 해도 교인이 이것밖에 안 모이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많이 모이느냐고 했더니 ‘아휴 목사님 선배님 교회는 공수부대고 우리교회는 민방위대원들이 모인 교회에요.’ 그래 사실은 밖에서는 그렇게 생각을 해서 나는 웃지요. 아니 무슨 공수부대원들이 그렇게 빌빌합니다. 새벽기도 한번 나오고 이틀째부터는 해롱해롱 헤매는 그런 공수부대가 어디 있어요? 공수부대는 지금도 한라산에 올라가서 웃통 벗고 1950미터를 뛰어요. 공수부대 아닙니다. 공수부대는 무슨 공수부대…….공수부대가 다 죽었나?
그러니까 그런 유익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회심을 해도 하여튼 그 회심의 은혜를 비껴가고 그렇게 마음을 닫고 그렇게 신앙생활에 성장이 없어서 목회자들의 마음을 졸이게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여럿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렇게 내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예하는데 공동체에 부어주시는 그 은혜를 통해서 그것이 풍성하면 우리는 그 은혜에 가까이 다가갈 가능성이 아주 많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2. 외적으로 : 그의 은사를 사용함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공동체적으로 실현되는데 이것은 외적으로는 어떻게 실현되느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를 믿고 교회의 일원이 되는 우리에게 많은 자원들을 주시잖아요? 이런 내적인 생명이 차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면 하늘 자원이 되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다른 재능도 주셔요. 영적인 은사도 주시고, 또 우리에게 일반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물질을 주시고, 또 남이 없는 특별한 재능과 기술도 주셔요. 그게 공동체 누구나 빌려 쓸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 할 테니 잘 들어보세요.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보이는 이 공동체 속에서 현실화할 때 그 때에 이 교회의 질서 속에서 우리들이 한 몸을 이루면서 가정처럼 신앙생활을 하게 되잖아요. 이때에 외적으로는 우리들이 모든 각자에게 주신 모든 은사를 공동체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겨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특별한 재능을, 영적인 은사를, 학식을, 그 다음에 지식을, 기술을, 재주를, 심지어는 물질을, 시간을, 건강을, 힘을, 이런 것들을 많이 주시잖아요? 그러면 그런 것들은 이 공동체 전체가 함께 누구든지 그것을 사용해서 그래서 교회 전체가 한 몸을 이루면서 타인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에 있는 지체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라고 주신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것들은 어떤 방식이냐 하면 강압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 너 오늘 설교 들었지? 네가 가지고 있는 것 다 하나님이 우리가 함께 쓰라고 그랬다는데……. 돈 오백만원만 빌려줘.’ 그러면 안 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중 누가 가서 뺏어다 쓰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만나고, 그분이 나의 모든 삶에 있어서 주가 되심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은 가운데 그래서 그분 앞에 드리는 것을 가지고 모든 교회가 일치하게 교회공동체 전체를 통해 계승해 주신 예수의 사역을 뒤잇기 위해서 이것을 이 자원들을 사용하면서 하나님과 세상과 교회자신을 섬겨가는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아무리 외적으로 이 사람에게는 어학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이 사람에게는 연극과 그림에 대한 특별한 재능을, 이 사람은 또 무슨 학문에 대한 특별한 재능을, 기술에 대한 재능을 많은 것을 주셨어도 내적으로 그 사람들이 예수의 생명에 참예해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 앞에 인격적으로 무릎을 꿇어서 자기에게 주신 모든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이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리고 나는 이것을 맡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라고 하는 현실적인 은혜의 고백이 없으면 어느 놈이 그것을 내놓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내놓아요? 절대 안 합니다.
(예화) 부산에 갔을 때 이야기인데…….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갔더니 목사님이 점심을 먹과 나랑 바닷가를 거닐면서 자기가 얼마나 가슴 저리게 목회를 하는지를 털어놓는데……. 이렇게 우리처럼 헌금을 걷었대요. 그게 아니라 저 뒤에 헌금 통에다가 헌금을 넣었대요. 헌금이 하도 안 걷혀서 그러지 말고 우리 그냥 주머니로 헌금을 하자고 그랬더니 장로 몇 사람이 절대적으로 반대를 하더래요. 그래서 보니까 ‘목사님 어떻게 장로가 추사감사헌금을 이천 원을 할 수 있습니까?’ ‘아니 뭐 돈이 없으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목사님 그 장로님이 빌딩을 부산에 두 채나 가지고 있습니다.’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이천만원이라고 그러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다시 물어보았어요. ‘이천만원?’ ‘아니 이천 원, 이천 원’ 추수감사헌금을 이천 원을 했대요. 빌딩 두 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러니까 은혜가 그에게 들어가지 않으면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은사와 자원은 분명히 주님이 주신 것이거든요. 그것을 공동체와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다가 죽어야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죽여도 그렇게 안합니다. 절대 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유기체적인 봉사와 유기체적인 생명이 나눠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B. 접붙임과 사역의 계승
이제 이렇게 우리가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한 몸을 이루게 되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을 우리들이 계승하게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여기에는 계승할 수 없는 사역이 있고 계승할 수 있는 사역이 있습니다.
1. 계승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
자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속죄의 사역 같은 것은 우리가 계승할 수 없는 사역이지요. 우리가 대신할 수 없는 사역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역들은 우리가 대신 계승할 수 없는 사역이고요 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는다고 할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은 자기의 기독교 강요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를 본받는다고 할 때 그것은 원숭이처럼 예수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40일 기도했으니까 우리도 40일을 따라하자! 또 예수님이 무엇을 했으니까 우리도 따라하자! 그렇게 예수님이 하신 것을 그대로 흉내 내는 그것이 아니라 계승할 수 없는 사역과 계승할 수 있는 사역을 구분해서 그 정신을 우리에게 적용해서 그래서 예수께서 그렇게 사역하신 섬김의 그 정신을 계승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뒤를 잇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죄사역 같은 것은 우리들이 계승할 수 없는 사역이지만 그 정신은 우리가 계승할 수 있지요. 그래서 사도는 여러 곳에서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주신 것 같이 자신의 몸을 생축으로 드리셨으니 너희도 서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여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속죄는 우리가 계승할 수 없는 사역이지만 그 정신은 우리의 모든 섬김 속에 배여야 할 정신입니다.
2. 계승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
속죄사역은 예수님의 뒤를 계승할 수 없는 사역이지만 병든 자를 돌보시고, 가난한자를 구제하시고,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그리고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돌보시고,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섬김은 우리들이 충분히 계승할 수 있는 사역이고 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 자신이 하신 일을 계승하게 하기 위해서 교회를 만드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당신을 대신해서 우리를 지도하게 하시고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를 주셔서 당신이 이 땅에 계실 때처럼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셔서 그 질서 안에서 이 세상을 섬기시던 그리스도 예수의 정신을 계승하여 그분이 이 땅에 살아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들을 해나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들이 잘 들으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지체가 되었으면 예수의 생명에 참예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생명에 참예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부가 된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렇게 몸의 일부가 되어서 예수님이 하셨던 그 일을 영적으로 이제는 예수님 혼자 하시는 일 아니라 이제는 교회 공동체가 공동체적인 지평 속에서 하나의 연결을 이루어 영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질서 속에서 통치를 받으며 예수의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회 자신과 그리고 이 땅에 있는 이웃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 구원을 받고 그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이 하여야할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신앙이 왜 잘못되느냐하면 이렇게 정통적으로 교리를 잘 가르쳐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졌고,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의 생명에 참예했고, 누구에게도 정죄 받을 수 없도록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해 주셨다는 것만 가르쳐주고, 그래서 우리들이 죄와 더불어 싸우고, 기도생활 많이 하고, 말씀을 잘 듣고,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면 우리가 계속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유기체적인 생명에 접붙여진바 된 이것은 분명히 공동체적인 지평인데 이 내적 은혜의 공동체적 성격이 외적인 공동체 속에서 표출되고 현실화되는 이것들은 강조가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신교의 신앙자체가 모두 개인주의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옮겼습니다.’ ‘왜 옮겨?’ ‘은혜 받으려고 옮겼습니다.’ 틀렸거든요. 그것 하나만이 아니거든요. ‘왜 요새 그곳에 안 나가세요?’ ‘마음이 불편해서요.’ ‘왜 이교회 나오세요?’ ‘이 교회에 오면 마음이 편합니다.’ 그것은 아니지요. 그러면 우리가 자식일 때 남의 집이 마음이 편할 때가 있거든요. 집에서는 텔레비전을 못 보게 하는데 그곳에는 텔레비전을 맘대로 보게 하고 친구엄마가 먹을 것도 해주고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너 여기서 자고가라. 방 넓은데 친구들 우리 아들하고 같이 자고 가거라.’ 내가 또 공부나 잘하고 모범생이면 또 그 집 엄마가 자기 집에서 오랫동안 있으라고 막 애원을 하지요. 그러잖아요? 그래서 ‘야 너 왜 집에 며칠 동안 안 들어오느냐?’ ‘엄마 여기가 훨씬 편해.’ 그러면 되겠어요? 그럼 그 엄마 아빠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지요.
물론, 물론 기도 많이 하고 하나님이 ‘그래 그러면 네가 교회를 한번 옮겨봐라.’ 그러셨는데 ‘그래! 마음 편한 교회는 가면 안 된다며…….’ 가서 쌈질이나 하고 그러는 교회에 가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니까 그런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게 모든 것을 결정하는 요소일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있어서의 유기체적인 봉사의 머리가 되신다는 이것을 깊이 강조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적인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서 살아가는 이 자체가 나를 유기체적인 섬김의 한 지체로 나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비로써 마음에 들어오지요? 왜 내가 교회에서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질타하는지……. 왜냐하면 교회가 여러분의 섬김이 필요해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교회에서 섬기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무슨 재능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것을 가지고 와서 교회에서 봉사하고, 교회에서 일하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 공동체적인 지평 속에서 자기에게 주신 그 자원을 공동체적으로 사용을 하면서 몸 전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교회에 와서 예수께 접붙여져서 유기체적인 생명을 누리며 살고 있는데도 아무 일도 안하고 살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생명에 있어서 심각한 지장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과학자가 실험을 했대요. 두 살인가 먹은 애들은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팔짝팔짝 뛸 때 있잖아요? 네 살 정도 때일 것입니다. 똑같이 따라했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옆에서 그 아이 하는 대로……. 그런데 반나절을 못 넘기고 완전히 KO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럴 것입니다. 집에 가서 한번 해보세요. 아마 힘들 것입니다. 애들은 또 드러누워서 발가락도 번쩍 들어서 빨아먹잖아요. 한번 해봐요. 어디 부러질걸요. 고개가 부러지든지 팔꿈치가 부러지든지 어디가 부러지든지……. 안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 속에서 자기가 생명이 있는 아이가 움직이지 않고 활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의 생명과 은혜가 깊이 그 사람 속에 스며들 때에 어떻게 무위도식을 할 수 있겠어요? 그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이에요? 자 나이도 먹고 이제는 교회도 정착했는데 ‘집사님 교회의 직분이 무엇이에요?’ ‘집사입니다.’ ‘그러세요?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세요?’ ‘ 아 한다기보다도 그저 11시 예배에 가서 예배에 참석을 하지요.’ ‘다른 일 하는 것을 없으시고요?’ ‘아 뭐 특별히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 11시 예배(우리는 11시 예배도 없지만)에 은혜가 있겠어요? 하나님 은혜를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틀림없이 예배시간에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왜 은혜를 주어야 되냐?’ 무위도식하는 것은 은혜가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방탕하고 타락한 게으름이 무위도식하기에 딱 맞지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가슴이 찔리는 은혜의 말씀을 들으면 그게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이렇게 무위도식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또 받아도 무위도식하는 사람의 은혜는 소쿠리에 받은 것과 같아요. 그래서 받을 때는 막 쏟아지는 것 같은데 보관이 안됩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섬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재능이 청소하는 것이면(평소에 하던 것이니까 잘할 것 아니에요?)와서 하고, 자기가 평소에 하는 일이 가르치는 일이면 교회에서 소정의 훈련을 받고 열심히 가르치고 뭐라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능 중에서 쓸모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나는 그거 진짜 싫은데 애들 머리를 거꾸로 쳐 박고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뱅글뱅글 도는 춤 있잖아요. 그 비보이들 춤……. 알아요? 알지요! 그런데 아무튼 어느 장로님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렇게 교회도 안 나오고 뺀질대고 매일 길거리에서 헬멧을 쓰고 그거나 하고 다닌대요. 그래 목사님이 하도 답답하니까 그 애를 불러서 ‘애 너 이리 와 바라. 너 이번에 우리 교회가 발표회를 하는데 너한테 한 20분 시간을 줄 테니까 네가 올라가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그 대신 시편2편을 가지고 해라.’ 그랬대요. 그 애가 가가지고 시편2편을 읽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랩을 만들고 비보이의 무슨 춤이야 아무튼 비보이의 춤하고 연결을 해가지고 그것을 한 것입니다. 교인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그러네요. 특히 그 아버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은혜를 받았대요.
아니 어쨌든지 간에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뭔가 배운 것이 도둑질이나 나쁜 짓이 아니라면 교회에 와서 필요하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뭐든지……. 그렇게 해서 그 일들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렇게 살아갈 때 내적인 생명이 공동체 속에서 외적으로 실현되어서 그렇게 섬기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평생 나는 무위도식하는 사람은 될 수 없다. 내가 정말 재능이 없으면 교회에 가서 쓰레질이라도 할 것이다……. 쓰레질도 그거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안 되면 추운 겨울날 물걸레질이라도 내가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일평생 절대로 놀고먹으면서 살지는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40, 50, 60 인생을 살았지만 주님 앞에 오늘 딱 갈 때에 주님을 위해서 살았던 날은 몇 시간이나 될까요? 그리고 살았던 날 중에서도 동기가 잘못 되었던 것 빼버리고, 또 동기도 괜찮고 모습도 괜찮았는데 실제로 성실하지 않았던 것도 빼버리고 어려워서 잘못했던 것 빼버리고 또 실컷 하고나서 말 잘못해서 까먹은 것까지 빼버리면 도대체 주님을 섬기며 산 날이 얼마나 되겠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에 있어서 주님을 섬기며 산 것이 아니라 지 먹고 산 날들입니다. 그러니 주님 앞에 갔을 때 얼마나 부끄럽겠어요. 그런데도 교회에는 항상 일군이 모자라서 쩔쩔매요.
제가 금란교회가 팔 만 명이던 시절에 설교를 하러 갔어요. 그랬더니 거기에 나를 차를 태워준 부목사가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네 교회는 큰일 났다는 것입니다. 왜냐고 했더니 교사가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아니 교인이 팔만명인데 교사가 왜 모자라느냐고 하니까 교인이 팔만명이니까 애들은 억수로 데려오는데 물론 교사가 다른 교회보다 많지만 그만큼 더 많이 봉사하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정말 부패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와서 말씀을 듣고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아도 봉사 안하고 6개월 가면 내 손톱에 장을 지져요. 그것은 반드시 부패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똑같은 음식을 한 식당에 가서 석 달만 먹어봐요. 그 식당 근처는 가기도 싫고 코에서 냄새가 나지. 여러분 영혼 속에는 하나님의 진리를 싫어하는 부패한 성품들이 있어서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이 그렇게 진리의 말씀을 달게 받아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라든지 섬겨라. 꽃꽂이의 재능을 가지고 이렇게 하는데 이게 마지막에 자기가 꽃 팔아서 밥 먹고 산 것은 하나님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을 섬기면서 산 이것이 기록에 남는 것 아니겠어요? 어디 꽃꽂이뿐이겠어요? 여러분이 앉아서 이렇게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는 이 모든 것들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섬김의 희생 속에서 오늘도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II. 머리되심과 유기체적 섬김
A. 그리스도가 계셨더라면 계속하셨을 일들
자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되심과 유기체적인 섬김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런 유기체적인 섬김 속에서 그리스도가 계셨더라면 계속 하셨을 그 일들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놀라워요. 자! 그리스도 예수, 머리이신 그분께 붙어있는 몸에 접붙여져서 생명을 누리게 되고, 이 생명을 통해서 예수의 마음과 이런 사랑과 모든 것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계속 하셨을……. 우리가 계승할 수 없는 사역 말고 계승할 수 있는 사역을 그렇게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동네사람들에게 구박을 받으면서, 아파트 경비실에서 혼날 때 지금 예수님을 대신해서 야단맞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쓰러진 어린아이를 하나 붙들어 일으켜 세우면서 눈물을 닦아주며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할 때 지금 예수님이 그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 아이를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연약한 구역식구를 심방하기 위해서 비닐봉지에 사과 몇 개를 사들고 그리고 그렇게 가난하고 그렇게 누추한 집을 두드리면서 낙심에 처한 지체들을 눈물로 위로할 때 예수님 대신해서 심방을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모두들 아직까지 잠들어 있는 새벽에 교회당에 나와서 모든 성도들이 은혜로운 주일을 맞이하도록 마당에 쓰레기들을 치우고 청소를 할 때에 예수를 대신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우리에게 스며들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뒤 이으면서 함께 섬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유기체적인 생명은 유기체적인 섬김을 이처럼 가져와요. 그래서 은혜 없이는 섬길 수 없고 섬기는 사람들은 또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이러한 섬김을 필요로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섬김이 놀라운 것은 유기체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기체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를 믿고 어느 교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자! 내가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무엇을 할까? 그리고 지 맘에 꽂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하는 게 그게 섬김이 아닙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주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이 은혜가 이렇게 큰데 하나님이 이 공동체와 함께 한 몸으로 하나님이 하게 하시는 일들 중에 아직까지 우리 지체들이 힘이 모자라서 못하고 있던 일들이 어떤 것일까? 내가 한 방울의 피가 되어 그리고 한 점의 살이 되어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러한 섬김을 다하지 못했던 그곳에 흘러가서 그래서 내가 그러한 유기체적인 섬김을 보태리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데 이런 것들을 사실 교회에서 신학적인 토대를 잘 가지고 지혜롭게 해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하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교회에서 좋은 경우에 은혜는 받았는데 교회가 이런 시각을 가지고 유기체적으로 성도들에게 섬길 수 있는 풍부한 기회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하면 성도들이 그냥 교회에 주저앉아서 받은바 은혜를 까먹다가 부패하고 식어버리든지, 아니면 그게 성에 안차니까 교회를 뛰쳐나가서 여기저기 가서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섬김이라는 것이 말이죠! 결국은 ‘언제 언제까지 모여라’해가지고 하는 민방위 훈련하듯이 소집을 해서 섬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마음도 하나가 되어야 하고 모든 가치관이나 비전 같은 것들도 공유해야하니까 모든 섬기는 곳에는 항상 훈련이 있고, 교육이 있고,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을 하나로 단단히 묶는 유기적인 연결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교회 밖에서 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 그런 일들을 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것이 교회의 유기적인 연결이 잘 된 가운데 그런 가운데 서로 협력의 체제를 이루면서 교회 안에서의 섬김이 질서 속에서 유기체적으로 연장되는 가운데서 공동체가 함께 그 사역에 참여하고, 함께 기도하고, 그 다음에 함께 그 속에서 이루어가면서 가치들을 공유하고 성취를 함께 나누고 그래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여기 저기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당장은 나름대로 보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결국은 그 영혼이 교회에 이런 유기체적인 섬김의 질서 속에서 자신을 자꾸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죠.
그래서 결국은 이제 교회가 올바르지 않은 모습이 됩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가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어도 그것들을 절제하면서 지혜롭게 해나 가야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위에 보면 이제 복음적인 단체들 중에서 그의 정신이나 이런 것들은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을 쭉 데려다가 자신들의 단체 속에 소속시키면서 거기서 불을 때고 해가지고 교인들을 많이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렇게 은혜 받게 한 영향력을 집중해서 그 단체의 일들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또 단체에서 일을 해나가려면 그런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겠어요? 이제 그러다가 보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교회는 그냥 명목상으로 본 교회에 출석하고 은혜는 저쪽에 있는 단체에 가서 은혜를 받고 거기에서 성도들을 함께 규합해서 이런 저런 봉사를 해나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그러지 말고 그런 단체들에게 제가 당부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를 만들어라 그러면 내가 교인들을 보내주마.’ 왜냐하면 거기서는 그렇게 할 뿐이지 영혼을 돌보아주지는 않거든요. 일을 시키고 불을 땔 뿐이지 영혼 하나하나를 돌보아주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이미 그곳에 가서 은혜를 받고 그곳에서 사역의 중점이 형성된 사람들은 이곳에서 목회적인 질서 속에서 그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려고 해도(우리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다니던 교회에서 은혜를 못 받아서 그렇게 거기에 가서 은혜를 받고, 거기서 변화를 받고, 거기서 소명을 느끼는데 여기에서 목양의 손길이 미칠 수가 있겠어요?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그런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그러면 교회 안에서는 전체적인 목양의 질서가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그러지 말고 차라리 단체마다 교회를 만들어라 그래서 그게 무슨 단체이든지간에 성경을 가르쳐주는 단체이든지, 무슨 선교를 가르쳐주는 단체이든지, 아니면 찬양을 가르쳐주는 단체이든지, 차라리 교회를 만들어라 그러면 내가 얼마든지 교인들을 보내주마. 가도 괜찮아요. 다 가요. 그런데 뭐냐 하면 그 영혼들을 거기에 보내주어도 영혼은 돌봐주지 않아요. 그냥 열심히 가르치고 그 다음에 열심히 동력화해서 헌금해서 자기 일들을 할 뿐이지 영혼은 돌보아주지 않아요. 교회가 아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이런 종류의 기독교단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낯선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가 있든지, 이 세상을 구원할 일이 있으면 교회가 함께 연합전선을 형성해서 교회의 성도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그 일들을 해나가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서울시를 복음화하고 싶으면 서울시 복음화 선교단체가 따로 생길 필요가 없고 교회들이 연합해서 그 일을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이었습니다. 후기의 정신입니다. 지금은 그런 게 아니야. 그렇게 안하고 그렇게 하면서 교회 속에서 이런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내요.
그래서 제가 15년을 목회하면서 보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보잖아요? 그런데 결국은 뭐냐 하면 다 단기적으로는 반짝합니다. 엊그제도 목회자들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다 똑같아요. 그러니까 단기적으로는 유익을 얻는데 장기적으로는 결국은 그 교회에서 떠나……. 반드시 떠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교회의 기존의 질서를 계속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정도가 심한 그런 교회 밖의 단체에서는 아주 교회에 대해서 아주 굉장히 안 좋은 인상을 심으면서 속히 그 교회에서 뛰쳐나오라고 그러면서 이제 자신들의 동아리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뭐 기존에 있는 이름을 다 대지는 않겠습니다만 우리나라에 이름이 알려진 여러 선교단체들이 그렇게 하고 특별히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선교단체들 속에서는 아주 반교회적인 사상들을 집어넣어서 교회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게 만들어 주어서 그 젊은이들이 아주 반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그래서 그런 선교계통에 있던 청년들이 혹은 어른들이 교회에 들어오는데 정착하는데 이러한 인식들을 벗어버리고 신학적으로 교정되는데 상당히 많은 시간들이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B. 유기체적 섬김의 세 차원
그러니까 이러한 것들이 결국은 잘못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그렇게 유기체적인 생명의 연합과 유기체적인 섬김의 연합의 일치를 이루면서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예수가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들을 계속 뒤 이어 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이런 유기체적인 섬김에는 세 차원이 있는데 그것이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유기체적으로 함께 섬기게 된 이유가 자신들이 뜻이 합치해서 만난 사람들이 아니라 일 때문에 만난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 구속을 받았기 때문에 그 구속의 결과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생명적으로 접붙여졌기 때문에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우리 서로 만나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서 왔는데 와 보니까 먼저 온 사람들이 있고 먼저 그 몸에 붙어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렇게 되게 된 것입니다. 나의 목회의 계획 속에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에는 여러분 중에 누구하고도 만날 계획이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에서 누구를 만나야 되겠다는 그런 계획이 없습니다.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증거하고 전했더니 그 말씀을 듣고 은혜 받은 사람이 교회에 가입하고 붙으면서 그러면서 생각지도 않던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유기체적인 섬김의 공동체이긴 하지만 섬김의 공동체이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힘입은 그러한 구속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유기체적인 섬김의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구속을 받아서 교회의 지체가 된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곤충학자가 개미를 놓고 실험을 했답니다. 이개미들이 다 열심히 일하는 줄 알았더니 80%는 열심히 일하고 20%가 농땡이를 부리더래요. 그래서 핀셋을 집어넣어서 농땡이 부리는 놈만 다 꺼냈대요. 80마리만 남겨두었더니 다시 그 중에서 16마리가 농땡이 부리는 개미가 나오더래요. 그래서 그것을 다시 꺼내고…….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은혜 받은 차이도 있겠지만 같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그렇게 불같이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을 싹 스쳐가서 눈물이 흐르고…….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따뜻하게 적셔지면 하나님 앞에 헌금할 생각부터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펑펑 울며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도 지갑을 굳게 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웨슬레가 ‘나는 네 지갑이 회개하지 않으면 네 회심을 믿지 않겠다.’고 그렇게 이야기한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지요.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사랑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 해서 은혜를 유기체적인 생명으로 연결되었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열심히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이제 이 유기체적인 섬김을 감당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뜨거운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유기체적인 섬김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제 아무 일도 안하고 불평만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 안에서 유기체적인 공동체로서 섬기면서 거기에서 애달픈 사연을 많이 맛보면서 예수께 자기가 접붙여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제가 회심을 하고 나서 그 이듬해부터 교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제가 목사가 되어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기 전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일학교 선생을 하는데 하여튼 오후에 아이들을 가르치고 나서 저녁예배 드릴 때까지 한 4시쯤 되어서 집에 갔다가 그리고 7시쯤 되어서 다시 저녁예배를 드리러 오는데 갈려면 교회에서 나와서 개울 다리를 건너서 그래서 들판을 지나서 철길 아래로 거쳐서 우리 집으로 갔어요. 한 20분 이상 걸어서 가는 길인데 암튼 주일날이면 한 번도 안 울고 집에 간적이 없습니다. 그 때 나이도 어린 평신도였지만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나면 마음이 막 저려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 아이들의 영혼은 얼마나 불쌍한가! 그런데 왜 이 아이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은혜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눈물이 막 쏟아져요. 거의 매주 한동안 울면서 집에 갔어요.
그 때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 예수님이 이 세상에 방황할 때도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아파 하셨겠구나!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여기에 세우셔서 예수님 대신해서 이 영혼들을 사랑하고 이 영혼들을 위해서 봉사하게 그렇게 만드셨구나! 그러니까 아이들이 말을 안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나도 눈물이 다 흐르고 나면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주 가깝게 느껴지고 그리고 이렇게 나 같은 인간을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반역의 길을 갈 때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이 지켜보셨는지가 마음속에 그대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사랑을 통해서 유기체적인 섬김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반영
세 번째 차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반영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이제 우리가 유기체적으로……. 그러니까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교회의 한 지체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셨더라면 계속하셨을 그 일들을 뒤이어 가는데 여기에는 반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반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말하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런데 이 마음은 일하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아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서 관계를 맺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려오는 그 은혜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의 변화를 받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하신 그 일을 뒤 이으면서 하는 것은 일이지만 이 일 자체는 우리에게 예수의 마음을 반영하게 만들어주지 않아요. 그래서 교회에서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은혜 떨어지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기 일에 대해서 욕심이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축도가 끝나기 전에 도망가는 사람들은 교회에 문제를 안 일으켜요. 왜냐하면 문제를 일으킬 기력이 없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려고 해도 뭐 좀 살아서 꿈틀거려야 문제를 일으키지 아이고 문제를 일으킬 기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예배 시간에 은혜를 못 받고, 기도생활도 거의 안하고, 진짜 기도생활 거의 안하고, 그런데 일은 큰일을 맡았어요. 언젠가는 대형 사고를 반드시 내요. 반드시 냅니다. 이게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일은 하는데 그 일이 그리스도의 일인데 그리스도의 마음은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사랑하고 섬기고 일치를 이루어야할 사람들이 유기체적으로 그 섬김을 감당해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잘 들으세요! 은혜를 많이 받고 예수의 생명이 가득 차게 되면 자기는 없어지고 이 유기체적인 많은 연결들이 생각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기도의 폭이 아주 넓어져요. 그래서 막 거의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 할 정도의 사람들까지 연결해서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은혜가 떨어지고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마음속에 식어지게 되면 유기체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그라들고 오그라들어서 자기와 상관있는 사람은 자기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기도도 별로 못하지만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맨 지 먹고 살 것과 자기 곤고한 것, 힘든 것, 그러다가 기분 내키면 그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땡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목회자를 위해서는 기도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오늘날하고 있는 기도의 이 폭이 얼마큼 되는지를 보면 여러분이 이 폭이 좁을 때는 예수의 은혜와 생명이 적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생각이나 삶 자체가 유기체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 사랑으로 똘똘 뭉쳐져서 폭이 요만큼밖에 없는 사람들이 큰일을 맡았는데 큰일이라는 것은 연결들이 많은 것이잖아요. 내 하나가 사역을 잘 하면 많은 사람이 유익을 얻게 되고 또 일이 큰일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못하고 많은 사람과 함께 연합을 이루면서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져서 이게 안으로 오그라들고 오그라들어서 저 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에게 큰일을 맡겨주고 지체들과 함께 어울리고 협력하면서 유기체적으로 섬겨야 되니 이것은 지금 코드가 안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이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아는 목사님 한분이 자동차를 사서 (그 분도 굉장히 순수한 분이신데 - 너무 순수해서 그랬지요) 한참 자동차를 타는데 어느 날 엄청 뜨거워지더니 차가 서더래요. 그래서 이제 자동차 회사에서 끌고 갔는데 오일이 하나도 없다고 그러더래요. 자동차를 사서 한 번도 오일을 안 갈고 그냥 끌고 다닌 것입니다. 그래서 엔진이 속에서 열을 받아서 다 녹아서 다 붙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일을 안 바꾸셨어요?’ 그러니까 목사님이 ‘자동차에 그런 것이 있어요?’ 그래서 이제 큰 것을 맡아서 막 돌리다가 보니까 교회의 지체들이 지체로 안보이고 자기회사의 직원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의 지체들이 함께 생명을 공유하고 나아갈 사람들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일군들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힘차게 돌아가면 갈수록 언젠가는 결국에 불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이 교회에도 본인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모범을 또한 반영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히 넘치게 되었을 때에는 이런 질문을 안 합니다. ‘남들 다하는데 뭐,,.’ 은혜가 떨어졌을 때에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제일 갑갑한 질문이 그런 것입니다. ‘목사님, 술 마시는 것이 죄에요?’ 은혜 받은 사람들은 거꾸로 물어보죠! ‘술 마시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려요?’ 은혜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고, 은혜가 떨어진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라고 칼을 들이대지 않는 경계까지 가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벌써 잘못된 것이지요. 그게 똑같은 것이잖아요. 십일조도 물어보잖아요? ‘십일조도 그것을 꼭 해야 되요?’ ‘봉급을 받으면 위에 것으로 해야 되요? 아랫것으로 해야 되요?’ 그러고 물어봐요. 그러면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십일조는 해야 되는데 그렇게 따지지 말고 그냥 넉넉히 해라.’ 그러면 되지요. 아랫것으로 해야 되요? 위엣 것으로 해야 되요? 아니면 십일조를 좀 나누어서 이 교회 저 교회 나누어주면 안돼요? 십일조를 놔두었다가 거기서 여전도회 회비 내는 것은 어떻게 생가하세요? 다 쓸데없는 질문들입니다. 왜 그렇게 쓸데없는 질문들이 많아져요? 그러니까 신앙이 떨어지면 질문이 많아져요. 쓸데없는 질문들……. 신앙이 깊어지면 질문이 많아지는데 쓸모 있는 질문이 많아져요. 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데 예수님을 더디 닮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될까?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항상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섬기면서 예수의 모범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들의 뒤를 이어 가면서 그러면서 두 가지를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충성스러운 마음과 그 다음에 지혜로운 마음 그 두 개를 함께 구하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마음과 지혜로운 마음을 하나님 앞에 함께 구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대개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지혜가 모자라고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충성심이 모자라고……. 이렇게 되는 경우도 많지요.
(예화) 전에 내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이 항상 지혜 없는 것을 이야기 할 때에 드는 대표적인 예화인데 교회를 처음 개척하셨으니까 청년들을 데리고 열심히 골목골목 전도를 다니셨대요. 그러니까 전도를 한참 하고나서 그 뙤약볕에 여름에 다 지친 것입니다. 그래서 하드를(그 때는 하드라고 그랬잖아요?) 사다가 골목에서 이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펼쳐놓고 그리고 이제 그것을 먹고 계속 전도를 하려고 아무개 집사님이 기도해주시겠습니다. 말 안 해도 이제 알지요? 이분이 불을 받은 거야! 그냥 그 뜨거운 뙤약볕에 전도하다가 보니까 불을 받은 거야 그러니까 기도의 입을 열었는데 입이 열리면서 기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 것이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고 보니까 다 물이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쓰레기통에 넣고…….
충성은 있었지! 그게 누가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겠어요. 그렇지요? 충성은 있었지……. 충성은 있었는데 지혜가 모자란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장로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겠습니다. 그랬는데 이 분이 새벽기도도 안 나오는 분인데 아무튼 대표기도만 하면 그렇게 오래 한데요. 그래서 뒤에서 목사님이 그만 기도하라고 바지를 당겼어요. 5분이 되서 바지를 잡아당겼더니 손을 딱 치더니 다시 10분을 더하더래요.
이게 다 충성스러운데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 때문에 교회가 갈라지는 교회도 보았어요. 장로님 한 분이 올라갔는데 25분을 기도하고 내려왔답니다. 목사님이 올라가시더니 성경을 한절 읽더니 모두 기도하시겠습니다. 그러더니 손을 높이 들고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리고 나가 버렸어요. 그 일로 해서 교회가 갈라졌어요. 그러니까 전부 다 충성심은 있는데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스러우면서도 지혜로운 섬김으로 우리의 모범이 되셨던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통치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잘 들으세요. 유기체적으로 섬기면서 유기체적으로 섬기는데 하나님이 자신에게 일을 맡겨주셨지만 그러나 주님이 자기에게 일을 맡겨주셨지만 일을 맡겨주신 것이지 자기를 주님 삼으신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나는 항상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담임목사로 부름을 받았지만 정상적으로 목회를 하려면 자기가 영원히 부목사인 것 같은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담임목사님이신 예수님이 내가 설교할 때 내 뒤에서 설교를 듣고 계시다고 생각을 하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불뚝 있어도 목사님 한번 보고 여기서는 하면 안 되겠구나! 그러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눈치를 보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왜냐하면 우리가 유기체적으로 섬기는 그것은 역시 머리되신 예수님이 하셔야 될 일인데 공동체적으로 한 몸을 만드셔서 그래서 함께 당신 자신의 일을 해나가게 하시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행하게 하시면 그러면 일 하는 사람이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원래 마음에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 예수 그분 앞에 그분이 주인이시고 이 모든 일의 원래의 계획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요? 이것은 일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에요. 이것은 봉사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봉사의 문제고 은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깊이 무릎을 꿇고 그렇게 해서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이 충분히 통치를 받는 가운데 그 질서 속에서 함께 교회를 섬겨가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리스도 예수께 섬기는 사람이 먼저 깊이 통치를 받아야 됩니다. 그 통치는 어떤 방식으로 오죠.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조명하고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스리기도 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렇게 불러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교회가 하도록 (잘 들으세요! 두 번할게 잘 들으세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교회 즉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이 우주적인 교회가 행하도록 명령하신 그것은 원래 예수님에게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라고 주신 그것을 성례전적으로 연합된 교회의 몸을 통해서 예수님이 해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예수님이 인성 안에서 오셔서 이 몸을 가지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행하셨는데 지금은 영적으로 우리 보이지 않는 모든 교회의 통치의 주가 되셔서 그래서 그분이 살아계셨으면 계속하셨을 그 일들을 뒤잇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예수의 머리되심 앞에 복종을 안 합니다. 예수의 머리되심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않아요. 그것은 가짜지요. 일 하고 있어도 예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똑같이 그러한 보이지 않는 교회의 지평을 보이는 교회 속에서 이렇게 이루셨잖아요.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지만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 앞에 섬기며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교회들이 지구상의 모두 흩어져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이런 식으로 묶을 수는 없잖아요. 담임목사는 러시아에 있고, 집사는 미국에 있고, 장로는 중국에 있고, 그리고 주일학교 학생은 아프리카에 있고 이런 식으로는 묶을 수가 없잖아요. 현실적으로……. 그러니까 그것을 지역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Local church라고 그러지요. 이렇게 묶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면 여러분은 교회에서 집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교사도 되고, 주차도 하고, 땅바닥도 쓸고, 걸레질도 하고, 유리창도 갈아 끼고 별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을 해야 되냐 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나 한사람을 불러내서 나에게 내 개인적으로 주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쌈질이 일어났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사실 빌미 자체를 목사님의 잘못된 목회철학이 빌미를 제공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기존의 교회는 잘못된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니까 우리들이 팀 목회를 해야 된다. 그러면서 뭐냐 하면 우리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게 사역을 해나간다. 나는 설교를 위해 부름을 받았고, 너는 찬양을 위해 부름을 받았고, 너는 기도를 위해 부름을 받았고, 너는 선교를 위해 부름을 받았고, 이렇게 평등하게 놓고 판을 짠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설교가 길어진 것입니다. 그랬더니 모여서 사역자 회의를 하는데 찬양인도자가 성질을 부리는 것입니다. 아니 당신만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느냐 우리도 부름을 받았는데 당신이 설교를 20분 길게 하니까 우리 찬양 시간이 5분 줄어든다. 그러면 우리가 모두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인데 당신 혼자 기름부음 받은 것처럼 그렇게 폼 잡지 말라고 대판거리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굉장히 위험한 것이고 그런데 이런 것을 굉장히 낙관적이고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자!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지금은 뭐 교회가 100명만 되어도 부목사를 많이 쓰는데 맨 처음에 우리도 교인이 한20명이 모이고 30명이 모일 때는 교역자가 없었습니다. 저 혼자에요. 그러면 주일학교 학생들에게도 제가 설교를 하고 이것을 해야 됩니다. 더욱 교인이 적으면 청소도 자기가 해야 될 것 아니에요? 아니에요? 누가 해줄 것이냐 이 이야기에요. 그런데 교인이 세워지면서 하나씩 하나씩 서로 맡아서 합께 협력해서 봉사하잖아요?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교회라고 하는 것을 이끌어가는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은 하나님이 목회자에게 일임하신 일입니다. 그것을 목회자가 위임받은 이 일을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을 주님이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 교회의 질서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무엇을 알 수 있어요?
원래의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는 것이 누구의 일이었어요? 사도들이 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보니까 처음에는 문제가 안 일어났어요. 과부가 몇 명 안 되니까 그런데 과부의 수가 하도 많아지니까 이게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교와 기도에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떼어서 집사들에게 주어서 이 일을 해나가게 하신 것 아니에요? 그러면 목사가 받은 그 일은 사실은 목사의 것이 아니라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들인데 그것을 목사에게 위임하시고, 그래서 목사도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속에서 그것을 받게 하시고, 그리고 그 질서를 다 감당할 수 없으니까 또 성경적으로 또 질서를 세워서 교회에 장로를 두고, 감독을 두고, 선생을 두고, 집사를 두고 해서 그 일들을 나누어서 함께 사역하게 하신 것이거든요.
그러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렇게 유기체적인 섬김을 해나갈 때에 유기체적인 생명, 내가 은혜 받고 변화 받고 성화되는데 있어서만 예수가 머리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섬기며 나아가는데 있어서도 이 모두 것들의 머리가 그리스도시고 그리스도께 통치를 받아야 된다고 하는 것들을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회사와 조직들이 항상 최종적으로는 마지막에 책임을 지고 그것을 결정하고 끌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구성원들이 그분의 뜻은 무언인가를 끊임없이 생각을 할 때에 이 모든 조직체들은 일치를 이루게 되는데 그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시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렇게 교회의 질서 속에서 당신의 계획을 따라서 그러한 질서들, 해나갈 일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양떼들에게 질서 있게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질서도 역시 보이는 교회의 질서 안에서 구체화 되어져요. 그래서 함께 아름다운 연결을 이루면서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의 필요를 느끼고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를 맛볼 때에 함께 섬기는 그 일들의 기쁨을 알게 되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각 마디 하나하나가 자라면서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는 있는 것처럼 서로 연결하고 상합하고 하여서 함께 역사해서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이것이 바로 머리되신 그리스도 앞에서 성도들이 섬기는 유기체적인 섬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 충성스러운 마음과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마음은 무엇이냐 하면 교회를 깊이 사랑하고,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사랑하고, 자기가 그분께 받은 모든 은혜와 사랑과 이 모든 것들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그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써 충성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철저하게 교회를 섬길 때 이 충성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철저한 희생, 헌신을 통해서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 하면서 함께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사람이 좀 교회에 봉사할만한데 끝까지 빼고 봉사 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파고 들어가 보면 옛날에 있던 교회에서 발 벗고 나서서 봉사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무슨 이유이든지 깊이 상처를 받았어요. 그래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이제 내가 교회에 끼어들어서 오지랖 넓게 이런저런 일 열심히 하다보니까 결국 내가 상처를 받았으니까 이 교회에서는 내가 잠자코 있겠다고 그러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지 자기 개인의 뜻일지 한번 깊이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전에 있는 교회에서 그렇게 상처를 받았다는 것은 가엾은 것이고 애석한 일이지만 그러나 상처를 준 사람도 문제고, 교회도 문제가 있겠지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만약에 그 교회에서 섬긴 섬김의 동기가 온전히 예수였다면 상처를 받았다면 그것 때문에 예수를 더 사랑하고 십자가의 정신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 아니에요? 사실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상처가 그렇게 오래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가 잘못이냐 하면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이 그런 상처를 받았다라고 하는 것 때문에 교회에 와서 이번에는 아무것도 안하겠다고 그러고 그 다음에 전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과연 이 교회에 와서 그리스도 예수와 생명적인 연합을 누리면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러한 신앙의 태도가 도움이 되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내가 여러분에게 공적으로 분명히 이야기 할 테니까 가슴에 깊이 새기세요. 그 대신 누구도 오해하거나 상처 받지 말고……. 충성스러워야 됩니다. 충성스러워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충성스럽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원칙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위해서 사심을 버리고 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일을 하다가 보면 어쩔 수 없이 교인들의 사업체와 연결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 때 내가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내가 은퇴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원칙을 제시 할게요. 그러니까 이것을 새기고 이것을 새기고 이대로 할 수 있으면 교회와 거래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교회에서 거래를 요구할 때 ‘거래할 수 없습니다.’라고 딱 끊어요.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사업과 교회가 연결이 되면 추호의 이득도 교회를 통해서 취해서는 안 됩니다.
(예화) 지방에 있는 교회인데 교인이 3000명이 모여요. 그 교회에 서점을 하는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명색이 장로에요. 2500명이 성경공부 교재를 주문했어요. 90%에 들어왔대요. 그래서 목사님이 사석에서 말하기를 나쁜 놈이라 이것입니다. 자기 장로를 가지고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자기가 전화 한통만 하면 70%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2500명이 10,000원씩이면 2500만원이고 5000원씩이면 1250만원이잖아요. 그러면 2000만원만 잡고 그게 그러면 30%이면 600만원이라는 것이 벌써 그 분도 책을 쓰시는 분이니까 금방 알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70%에 들어와서 송료가 있고 직원들 월급이 있으니까 75%에 갖다 주면 자기가 이해가 되는데 자기가 전화를 해도 70%에 올 수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꼬박꼬박 석 달에 한 번씩 그 돈을 교회에서 다 받아간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치사해서 말은 안하는데 저게 신앙이 있는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목사님은 너무 고상하셔서 그래요. 나 같으면 당장 불러서 이야기해요 그것 뭐 이야기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져 올래……. 그리고 전화해버리면 되지요. 70%에 들어오는데…….
그러니까 그것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선을 딱 그어요. 그러니까 어느 교회에서는 또 교인들에게 물건을 가져오면 무조건 돈을 안줘. 그리고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아 우리도 옛날에 그랬잖아요! 우리교회가 지하실에서 나오는데 나중에 교회가 들어왔는데 돈이 부족하다고 그러면서 먼저 이사 가면 나중에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한 천오백만원인가 되는데……. 끝까지 안줘요. 그래서 나는 뭐 거기에 갈 생각은 안하고 우리 집사님을 보냈더니 마지막에 뭐라고 하냐하면 ‘남은돈은 헌금하시죠!’ 그러는 것입니다. 헌금이야 줘야지 헌금을 하지 주지도 않고 어떻게 헌금을 하라는 이야기에요? 주면 마음이 동해서 하는 것이 헌금이지……. 그것은 빼앗아 가는 것이지…….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이 교회에 어떤 물건을 납품하고 ‘돈은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라고 명백하게 의사표시를 하면 그러면 오케입니다. 그것은 또 줄 필요가 없습니다. 왜? 바치겠다는데 왜 돈을 자꾸 주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실제로 그런 예도 있거든요. 교인은 바치겠다고 그러는데 돈을 준적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도 그러면 안 되지……. 한번 바치겠다고 그랬으면 시종일관 똑같아야지 돈을 안 줄때는 바치겠다고 그러고 돈을 갖고 오니까 덜컥 받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 예가 지하실 교회에서부터 몇 번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입 밖에 내놓고 하나님이 들으셨는데 그런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여러분하고 거래를 하려고 하지요. 왜냐하면 하다못해 유리 하나를 갈아 끼워도 교회의 지체들이 갈아 끼니까 훨씬 정성껏 해줄 것 아닙니다. 속이지 않고……. 교회에 계속 나오는데 속였다가는 또 말이 되겠어요? 그러니까 안 될 것 아니에요……. 그것은 좋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값이면……. 그러나 이익을 남기면 안됩니다. 그것은 옳지 않아요. 여기서 이익이라고 하는 말은 무조건 원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와서 일하는 직원들의 품삯과 이런 것……. 그리고 마지막에 오너인 자신에게 돌아올 혜택이 아무것도 없게끔 제로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혹시 정산해서 남았으면 헌금하세요! 제가 이렇게 정리를 할게요.
그리고 교회에서 재정을 출납하는 장로와 집사님들은 지금 내 이야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교인들과 거래를 하고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면 훨씬 더 많은 돈을 주더라고 교회밖에 있는 외인과 거래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신앙을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호도 교회에 물건을 팔거나 경제적으로 거래를 해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은 충성스러운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쪽에서 돈을 많이 남기고 다른 곳에 가서 헌금을 하든지 이쪽에서 남기지 마시고 저쪽에서 하시지 마세요. 필요 없으니까. 그것이 충성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이 이야기죠. 그렇게 해서 아휴! 내가 시간이 가서 설교는 다 못해도 이 이야기는 다하고 끝을 맺을게요. 어느 교회를 집회를 갔는데 목사님이 분노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교회를 리모델링을 하는데 그 돈이 10억쯤 들어가는 것이래요. 큰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업체를 선정해서 올리면 퇴짜, 올리면 퇴짜, 올리면 퇴짜, 계속해서 퇴짜를 놓는데 건축위원 한 사람이 그렇게 퇴짜를 놓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젊은 목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너무 힘들어서 울겠더래요. 그래서 불러서 그랬데요. ‘그러면 당신이 계속 반대하니까 당신이 해봐라.’고 했대요. 하도 화가 나서…….그랬더니 이 사람이 자기가 어디서 업자를 데려다가 해가지고 그것을 해왔는데 ‘목사님 이것이 훨씬 더 그럴듯하고 돈도 덜 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통과시켰대요. 통과시켰는데 세월이 몇 달 흐른 후에 목사님이 우연히 다른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건축업자도 아는 사람이고 네가 해라한 그 사람도 아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중직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 그 교회 공사 아무개회사에서 하기로 했다면서요?’ ‘예 그렇게 되었지요.’ ‘아이고 그 회사가 목사님 교회 그 분한테 정말 고맙다고 오천만원을 드렸대요.’ 나 같으면 치리하겠어요. 나는 그렇게 안 놔둬요. 그것은 횡령입니다. 사회에서도 그런 식으로 하면 배임횡령죄가 성립하거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교회의 중직이 되어서……. 그러니까 결국은 그렇게 1년이 끌도록 그10억짜리 공사를 못하게 그렇게 훼방을 놓은 이유가 무엇이었느냐 하면 자기가 업자를 물고 들어와서 돈을 받으려고 그 짓을 한 것입니다. 그 짓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와이로를 받아먹은 것입니다. 회개해야 됩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옳게 안봅니다.
옳게 안 보는 게 아니라 그것은 거의 교회 돈을 도적질한 수준입니다. 그런 것이 어디에 있어요? 우리 행정직원들도 업자들이 돈을 놓고 가면 그것을 그대로 교회에다가 집어넣는데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필요 없으니까 이 돈에서 깎으라고 그러는데 우리 행정직원들은 칼 같아요. 연말이 되어도 상품권하나 안 받아요. 그런데 어떻게 교회의 중직이 말이지 (물론 이것은 우리 교회 들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 교회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렇죠? 어떻게 거기서 커미션을 먹느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아간 오천만원의 커미션이 교인들의 피눈물 나는 헌금입니다. 어디서 그것을 하느냐는 이야기에요. 미친 인간들이지 그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추호라도 있는 사람들이냐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사기꾼들의 집단이지 그것이 어떻게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교회와 그런 식으로 거래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거래 못하겠다고 하면 죽을 때까지 거래를 하지 말아요. 돈을 다른데서 벌어서 헌금하고 그냥 신사적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에다가 무슨 물건을 팔고 할 그런 생각을 하지 말고……. 이게 기준이 되어야 됩니다. 추호도 남기면 안됩니다. 밑지지는 말아요. 바치고 싶으면 바치고 누구도 그것을 강요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이게 충성된 마음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었더라면 그 건축헌금 할 때에 눈물이 안 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길거리 앞에서 풀빵을 구워서 팔아서 그 할머니가 오 만원, 만원, 이만 원, 삼 만원 그렇게 헌금을 하고 과부들이 모아서 천만 원씩, 오백만원씩 적금 들어서 내어놓는데 어떻게 그 교회 중직이라는 인간이 그 커미션 오천만원을 받아서 꿀꺽 삼키느냐는 것이에요? 십일조도 안했겠지요. 해도 안 받으셨을 거예요 아마……. 돈이 더러우니까……. 어떻게 그런 인간들이 교회에서 중직이라고 말이지……. 투표를 받아가지고 앉아가지고 그러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마음속에 마귀가 시커먼 것이지 어떻게 인간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어요? 교회가 그런 곳이에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악한 것입니다.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향해 충성스러운 사람들, 마음을 다 비워서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다 버려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의 비밀을 알고 그래서 그 사랑을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이 작은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시고 그리고 이 교회의 한 지체로 생명을 얻은 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셨는데 그러면 그처럼 그렇게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이천한 몸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써주신 것 너무 감사합니다. 주님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쓰임을 받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착한 마음으로 섬겨야지 그것이 주님과의 은혜를 가로막지 않고 교회 전체적으로 유기체적인 섬김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러한 섬김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대장이 되셔서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그 일들을 깊이 알아서 그러한 섬김의 사역들을 목회자와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구현해 나아가실 때 절대 거기에 거치는 돌들이 되지 말고 복종하고 순종하면서 교회의 모두가 함께 섬김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그 모범과 통치를 반영해서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섬겨간다면 이 교회에 있었던 모든 날들을 여러분은 몰라도 주님은 당신을 섬긴 날들로 기억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도 거룩해져 가고, 교회도 거룩해져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2)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3)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4)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5)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6)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6 (주일오전예배 2009/01/18)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7 (주일오전예배 2009/02/0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8 (주일오전예배 2009/02/08)
6.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2 :
유기체적 섬김의 머리되심2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C. 섬길 수 있도록 공급하시는 하나님
이처럼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 교회는 나뉘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한편으로는 유기적인 생명과 또 한편으로는 유기적인 섬김과 또 한편으로는 유기체적인 통치와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당신의 몸에 접붙여져있는 모든 지체들에게 당신의 은혜를 부어주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가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계속 하셨을 그 섬김의 일들을 뒤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섬김에 있어서도 그리스도 예수는 친히 머리가 되시는데, 이렇게 모든 섬김 속에서 그리스도의 마음과 모범과 통치를 반영함으로써 교회는 질서 있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일들을 구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유기체적으로 당신이 계셨으면 하셨을 일들을 감당해 나가는 교회가 이 일들을 잘 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자원들을 교회에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1. 개별적 영혼 안에서: 하늘 자원과 은혜
이 공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질 수 있는데, 하나는 개별적인 영혼 안에서 공급해주시는 하늘의 자원과 은혜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있는 모든 지체들에게 끊임없이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영적 생명을 진리와 성령을 통해서 그 교회에 끊임없이 부어주시고, 그 교회의 부요함에 모든 성도들은 지체로서 함께 질서 있게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 영혼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가 어떻게 질서 있게 부어지는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누군가가 교회 건물을 하나 지어놓았더니 이사람 저사람 아무나 와서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고 자신들이 마치 상가의 번영회를 조직하듯이 그렇게 조직을 만들어서 세워진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에게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하셔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들을 뒤잇게 하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교회를 설립하기 전까지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소명을 받고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어떤 이 세상 사람들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자기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그 주님의 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셨던 일들을 뒤잇게 됩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혼을 돌보셨던 것처럼 그렇게 모이는 영혼들을 하나하나 보듬고 자녀처럼 주님의 진리로 양육하게 됩니다. 이때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목회자가 만났던 동일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사람은 서로 다르지만 그렇게 동일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동행 하면서 믿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 안에서 믿음 생활을 해나가면서 그러면서 교회는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자기 혼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도 목회자에게 유익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변화된 가운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익한 자가 되어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도 눈물 흘릴지 몰랐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러한 유기체적인 생명의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섬겨야할 수많은 일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다시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 섬기던 그 일들을 한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며 그렇게 교회를 섬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생명의 역사는 개별적인 영혼 안에 이루어지지만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목양의 질서를 통해서 그 진리의 말씀이, 성령의 역사가 목양의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달됨으로 유기체적인 생명을 담지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질서 있게 목양의 질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상에 하나님의 말씀의 저장고를 세 개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성경책이고 또 하나는 성도들의 마음입니다. 이 성경에서 진리를 퍼 성도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므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하고 또 섬기는 유기체적인 공동체의 한 지체로서 성례전적인 연합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속에 하나님을 섬기게 만드시는데 이 하나님의 계시의 책과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원천인 성도의 마음, 이 두 말씀의 저장고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 목회의 사역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 사역은 끊임없이 계시의 책인 하나님의 말씀의 저장고에서 그 진리를 길어내어 성도들에게 믿어야 할 규칙과 살아야 할 생활의 교훈을 실어 날러 성령 안에서 그것들이 충만하게 비축됨으로 그리스도께서 공급하시는 하늘의 자원과 은혜 속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별적인 영혼 안에서 하나님이 끊임없이 영적인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것도 목양의 질서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지체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열린 교회 15년의 역사를 보니까 아주 질서 롭게 하나님의 말씀이 공동체에 전달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초창기에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은혜와 부흥이 전달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회심의 이야기와 회심한 영혼들이 그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며 살기 위해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이 어떠함을 말씀을 통해 보여줌으로 인간을 가르쳐주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안에 있는 이 부패한 본성을 드러내고 어떻게 생명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될지를 끊임없이 해부해주고, 이후에는 이 온 땅과 하늘위에 충만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아름다운 질서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한 피조물인 것을 드러내 주는가 하면, 세월이 흐르면서 또한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산 이 교회가 어떻게 사랑 가운데 연합하고 공동체적인 질서를 이루어야 함을 보여주셨는데, 이 모든 것들이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목사님의 마음속에 있었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웃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제 마음에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매일매일 내리시는 은혜의 말씀을 따라서 그렇게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것처럼 목회할 뿐입니다. 끝없이 탐구하고 진리를 생각하고 설교를 위해 애쓰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매 순간 지푸라기와 같이 연약한 인간을 붙잡으시는 주님의 그 신비로운 손길에 인도되어서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합니다.
매일 그렇게 주님의 손에 이끌려서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미끄러진 성도의 삶을 보면서, 때로는 고통하고 아파하는 지체들의 생활을 보면서, 때로는 무지와 오류로 말미암아 혼란스러운 교회를 보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쓰레기 같은 이 인간에게 갈 길을 보여주시기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진리의 저장고속에서 하나 두 개를 내게 펼쳐 보이십니다. 그것을 있는 마음을 다해서 전달하고 때로는 성도들이 아니라 나의 영혼 하나가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깊은 고통 속에서 붙잡은 진리의 말씀들이 사실은 나 한 사람한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지체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음식을 먹고 젖을 풀어헤쳐 자식을 젖 물리는 애미의 심정으로 그렇게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매일매일 왔을 뿐이고 그리고 이 시리즈가 끝나면 다음에 무엇을 할 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이처럼 개별적인 영혼 안에 베풀어주시는 하늘의 자원과 은혜도 무질서하게 아무렇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목양의 질서에서 목회사역을 통해 계시의 책에 있는 진리를 길어 성도들의 마음에 담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공급해 주심으로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서 그 생명을 충분하게 누리게 되고 성도들은 그 충만한 생명과 은혜를 누리면서 하나님 앞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일반적 섭리 안에서: 지상 자원과 환경
또한 하나님께서는 일반 섭리 안에서 지상의 자원과 환경을 열어 주심으로 하나님 세우신 이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뒤를 이어 사역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신 그 일을 계승하며 주님의 몸으로서 섬기기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은혜의 자원과 또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섭리 속에 공급해주시는 이 지상의 자원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내려주십니다. 피할 수 없이 하나님이 하기를 원하시는 그 일을 계획해놓고 눈에는 아무 증거도 없고 손에 잡히는 자원도 없지만, 이 일을 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분부를 받들고 온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 예수의 분신처럼 섬기게 해 달라고,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의 자원과 이 지상의 자원을 공급해 달라고 빌 때 하나님께서는 생각할 수 없는 방법들로 우리에게 이 자원들을 공급해 주셔서 예수 하시는 그 사역의 뒤를 이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급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유기체적인 섬김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그 일의 뒤를 잇게 되는 것입니다.
I. 교회의 질서와 유기체적 섬김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질서와 유기체적인 섬김이 결코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A. 교회에 주신 두 권세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두 가지 권세가 있는데 하나는 질서를 유지하는 권세고 또 하나는 순결을 유지하는 권세인 것입니다.
1. 질서를 유지하는 권세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비록 이 세사의 나라가 가지고 있는 세속적인 권세는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영적인 권세를 주셨습니다.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화형 시키는 권세는 하나님이 복음적인 교회에 주신 권세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세상 나라의 권세이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영적인 하나님의 왕국이기 때문에 교회에 영적인 권세를 주심으로 이 영적인 권세들을 이끌어가고 유지해 갈 수 있도록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주신 이 권세는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권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목양의 질서를 수립하시고 그 질서를 통해서 어른들로부터 유년 주일학교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을 공급받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목양의 질서 안에서 끊임없는 하나님의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고 그 은혜에 참여함으로써 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유기체적인 몸으로써 그 생명을 충분하게 공급받습니다. 이러한 충만한 공급 때문에 그는 주님의 몸으로써 그리스도의 분신처럼 섬기는 이 섬김의 과정에서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극복합니다.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있어도 그것을 매일매일 공급해주시는 유기체적인 생령 안에서 녹여가면서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뜻을 정하고 살지 않을 때에는 살아가는 삶 자체가 시련이요 괴로움이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 받은 이 생명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우리같이 불충한 인간들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의 섬김의 뒤를 잇게 하신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우리가 소명을 느끼며 주님의 일을 수종들고 그 목표를 향하여 섬기며 나아가려 할 때 세상은 우리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의 온갖 시험과 근심들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우리 안팎에 있는 수많은 원수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공격합니다. 끊임없는 고난과 시련이 우리의 삶속에 넘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양의 질서를 통해서 공급해주시는 그 은혜의 힘이 있기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고, 시련을 당할 때마다 그분이 나를 위해 버리셨던 그 생명의 가치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이렇게 섬기는 자리에는 서 있지만 이렇게 생명의 은혜가 공급되는 것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메마른 영혼으로 섬겨야 될 때가 있는데, 끊임없는 문제를 교회에서 만들어 냅니다. 영혼은 끊임없이 곤고하면서도 곤고한 영혼을 섬기는데 그 섬기는 동기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그는 목양의 질서 속에서 끊임없이 공급되는 생명의 은혜 없이 섬김의 질서 속에 아름답게 자기의 자리를 위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때문에 자기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박수갈채를 받기 위한 동기가 아니라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생명을 버리신 그 큰 은혜 때문에 주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그리스도 교회의 공동체 속에서 한 자리를 섬기면서 살아가는 순수한 사람이었는데, 이러한 생명의 은혜가 그치고 단절되게 되자 아주 사악한 사람이 됩니다. 순수했던 섬김의 동기는 탐욕으로 바뀌게 되고 거기에서 각양 많은 물질적인 이익들을 섭취하게 되고 또 많은 지체들과 섬기면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섬기는 그 지체들을 그리스도의 몸처럼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의 부하처럼 생각하거나 부속처럼 생각해서 미워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가운데 섬기게 되는 것이니 그 사람이 거기 있어 섬기면 섬길수록 교회는 끊임없는 생채기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몸으로는 섬기는데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이 아름다운 은혜가, 생명의 충만한 분여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당신의 사역의 뒤를 잇기 위해서는 당신의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님 자신이 경험적으로 너무나 잘 아시는데, 섬길 자리는 주셨으면서 그 섬길 은혜를 주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여기에서 바로 주님이 세우신 이 목양의 질서들을 흩뜨리며 교만과 무지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불순종과 거역들이 있기 때문에 그에게 이 질서를 따라 주어지는 생명의 놀라운 은혜들이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깔보는 사람들, 그리고 주님의 목양의 은혜를 똥같이 여기는 사람들, 그리스도께서 부르셔서 교회의 씨앗으로 삼으셔서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그 교회에서 주님의 사랑 때문에 부름을 받아 영혼을 섬기되 그 영혼들을 자신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처럼 섬기는 그 목회자들을 아주 하찮게 여기며 그 권위에 도전하고 질서를 똥같이 여기면서 그렇게 탐욕과 오만과 교만 속에서 자행자지하며 사는 그 사람들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몸을 찌르는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끊임없이 부어주실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주님도 하실 수 없는 그 일을 성도는 강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자리에 있으나 그 사람이 유기체적인 생명 속에서 끊임없이 그 은혜를 분여 받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권세를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끊임없이 말씀을 탐구함으로 이미 성경 속에 주어진 이 질서를 따라서 목양과 섬김과 통치의 질서들을 구현하고, 그 성경적으로 세운 질서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하부적인 질서들을 세우면서 하나님의 교회는 아름다운 질서 속에서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이 목양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권세를 교회 자신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런 질서를 끊임없이 흩뜨리는 사람들을 다스리고 억제하고 교화하고 감화시킴으로서 하나님은 이 질서를 유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2. 순결을 유지하는 권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교회에 순결을 유지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유기체적인 교회의 영적인 몸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에게도 육신의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이 연합, 지역 교회 안에서의 이 결속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그러한 교회의 몸입니다. 이 교회의 몸을 하나님 앞에서 유지하면서 순결하게 살도록 하나님이 교회에 권세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의 불순종과 악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자신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지만, 이름에는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의 지체들이 부도덕한 삶을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삶을 살게 될 때에 어느 정도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욕이 돌아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악과 불순종과 죄악을 발견하며 교회는 더러운 곳이고 그리스도 예수는 믿을만한 분이 못된다고 배우게 되며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은 이러한 죄와 악쯤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담대함을 얻게 되는 것이니 주님의 교회를 파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교회에 이 순결을 유지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교회의 교훈을 따라서, 이 질서를 따라서 순결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을 경고하고 견책하고 그들을 징계하고 심하면 눈물을 머금고 교회의 지체에서 잘라냄과 같이 더 이상 누룩과 같이 이러한 악과 담대함이 교회 안에서 퍼지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권세를 교회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교회에서 풀 때 하늘에서도 풀릴 있도록 이렇게 순결을 유지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교회가 영혼을 향해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권세를 수행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B. 유기체적인 섬김을 위한 질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교회에 충만히 전달하기 위해서 목양의 질서를 세우심으로 유기체적인 섬김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유기체적인 생명은 또한 유기체적인 섬김을 위한 질서를 교회 안에 세우심으로서 교회가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기 자기 일을 행해도 이것들은 전체적인 하나의 계획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경륜을 드러내도록 그렇게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1. 교회의 영적 질서와 유기체적 섬김.
그래서 교회에는 영적인 질서와 유기체적인 섬김의 질서가 떼놓을 수 없이 놀라운 연결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교회의 신령적인 질서라고 부르고 또 하나는 이것을 가리켜 교회의 봉사적인 질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이런 신령적인 질서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교회의 봉사적인 질서가 하나님 앞에 구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 충만한 생명을 목양의 질서를 통해서 누리는 것과 봉사적인 질서 속에서 유기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섬김을 통해서 교회의 유익을 끼치는 이 두 가지는 나눌래야 나누어질 수 없는 함께 짜여 진 직물처럼 직조된 씨줄과 날줄의 질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참으로 아름다운 질서를 드러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으면 하셨을 그 일을 뒤잇게 하기 위해서는 건물과 공간과 시설과 장비와 모든 것들을 주실 때 그것들은 각각 교회가 하고자 하는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처럼 여러분이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똑같은 설교자가 동일한 은혜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여러분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쌀 포대를 깔고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아마 현저하게 다른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하신 일을 뒤잇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물질적인 것들이 질서 있게 구비될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게 하시고 싶으셨던 일들은 효과적으로 수행되는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 하드웨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소프트웨어입니다. 기능적인 구조입니다. 교회가 이런 모든 물질들을 사용해서 주님을 섬기려고 할 때 아주 지혜로운 생각, 사역에 있어서 아름다운 질서, 그리고 보다 효율적인 방법과 아이디어, 이런 것들이 교회 안에 잘 갖추어져 있을 때 하나님을 위한 섬김의 효과는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교회당도 공간도 넉넉하고 돈도 있고 성도들도 있는데, 교회가 이 모든 것들을 잘못 운영하기 때문에 좀 주님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그 길에 들어섰다가 머리가 터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다가 결국은 뛰쳐나오는 경험들이 한 두 번은 모두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일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의 지혜를 주셔서 끊임없이 주님의 지혜를 힘입어 교회를 조직하고 교회를 경영하고 각 기관들이 온 몸이 아주 훌륭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드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기능적인 구조 소프트웨어입니다. 그래서 아주 지혜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의 훌륭한 아이디어는 많은 물질을 바치는 헌신 못지않게 중요해서 교회를 아름다운 하모니 속에서 섬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아무리 갖추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 말씀드리려는 이 한 가지가 없다면 그것들은 마치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전구와 같고 운전하지 못하는 발전기와 같아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것이 바로 스피리쳘 웨어 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신령한 은혜를 교회에 공급해주시는 바로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도 아니고 기능적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왔을 때 다른 곳에서는 느껴지지 않던 거룩한 권세가 이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느껴지는 이 놀라운 통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다른데서는 느껴지지 않는 놀라운 은혜가 느껴지는 것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회피할 수 없이 느껴지는 교회를 뒤덮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와 영적인 권능 같은 것들은 모두 기능이나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홀로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신령한 은혜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강력하게 사로잡힌 목회자들이 있을 때, 이런 것들에 강력하게 사로잡혀서 그 목회의 정신을 가지고 영혼을 돌보는 교회의 장로들과 일꾼들이 있을 때, 이때에 교회는 나머지 이 모든 지혜와 물질의 영역까지 이 모든 것들이 스며들어서 주님을 위해 훌륭하게 봉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많은 군인이 있고 훌륭한 무기가 있다 할지라도, 적을 이길 수 있는 훌륭한 전술이 마련되었다고 할지라도 전쟁을 해서 이기겠다고 하는 애국심에 넘치는 정신이 군인들에게 없다면 그 전쟁은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신령한 것들을 하나님이 끊임없이 공급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아무 쓸모없는 인간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다시 태어나는 전사로 만들고, 자기를 위해 살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셨던 그 일들의 뒤를 잇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공급되는 것이 바로 신령한 질서입니다. 이런 질서를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워 놓으셨습니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하나님은 목회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부으시고,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을 부으시고, 그리고 함께 기도로 단단히 끈으로 엮어지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날마다 그 은혜와 신령한 말씀과 그 은혜로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그저 주님의 능하신 손에 붙들려 영혼을 섬기는 마른 막대기와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모세가 들었던 지팡이에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를 붙잡은 모세의 손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던 것처럼 목회자는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지만 그 하늘의 문을 열어 그것을 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끊임없이 그것을 선포하지만 성도의 마음의 문을 열어 그 진리를 스며들어 주 앞에 깨뜨려져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분은 목회자도 아니고 성도 자신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자신일 뿐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 속에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손에 이끌려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번 사경회에도 도대체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할지 현수막을 붙이게 본문을 달라고 하는데 정말 괴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선명하게 제 마음속에 “이것이다.” 하고 주셨어요. 어떤 사람들은 이 설교를 할 계획이 오래전부터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때로는 설교자가 설교할 수 있을 때에는 설교하도록 힘을 주시고 그가 설교할 수 없을 때에도 설교할 수 있게끔 그를 붙드셔서 그 말씀을 먹은 사랑하는 많은 영혼을 돌보는 지체들에게 자기는 연약한데도 영혼은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자신은 약하지만 주님의 마음을 부어주셔서 약하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을 구하며, 주님을 어린아이처럼 의존하며 목양을 하는 목회자의 마음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신령한 질서 속에서 끊임없는 은혜를 공급하심으로 주님이 세우신 이 교회가 무위도식하지 아니하고 그래도 주님의 마음을 품고 미력이나마 예수 하셨던 그 사역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봉사적인 질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이제 내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고 주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이 때문에 우리가 목양의 질서 속에서 끊임없이 예수의 마음을 본받는 일 없이는 주님의 그 뜻을 이루기에 적합하지 않은 우리의 마음을 포기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진리의 빛이 끊임없이 이 신령한 질서 속에서 우리에게 비추게 될 때 우리는 일에 매몰되면서 원래의 목표를 잃어버리기 쉬운 어리석은 인간의 이 무지와 오류의 껍질들을 깨고 진리에 자기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마음이 생기게 되어 이 신령한 질서 속에서 봉사의 질서들도 끊임없이 교정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많이 일하면서도 끊임없이 이 신령한 질서를 통해 공급되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무너진 질서를 발견하게 되면서 매일매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빛 때문에 이 미력이나마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매 순간 불러 아버지 앞에서 이 사명을 감당해 나가게 하시는데, 이것으로써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두 질서는 그러므로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2. 유기체적 생명과 나뉘지 않는 섬김.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목양의 질서를 통해 공급받는 일이 없는 사람들이 봉사의 유기체적인 질서 속에서 자기를 끊임없이 꺾고 굴복시키며 공동체적인 질서 속에서 예수의 마음으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는 일을 본 일이 있습니까? 뿌리 잘린 섬김으로 이 일 저 일을 거들지만 기억하십시오. 하늘나라에서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섬긴 일로 기억되지를 않을 것입니다. 배짱이 맞으면 교회를 섬기고 배짱이 맞지 않으면 집어치고, 심지어는 교회의 질서를 모욕하고 목회자에 대해서도 안 좋은 감정과 언사를 거침없이 쏟아놓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둠 가운데를 걷고 있는 빛의 자녀일 것입니다. 신령한 질서가 마음속에서 무너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공급되는 이러한 신령한 목양적인 질서들을 짓밟는 그 사람의 영혼 안에 어떻게 진리의 빛이 있을 수 있겠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때는 그런 진리와 빛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지금은 어둠일 것이며, 한때는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굴복해 뜨거운 피 끓는 사랑 속에서 그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거기 섰다고 할지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그래서 탐욕에 넘쳐서 교회 일을 하며 이득을 취하고, 탐욕에 넘쳐서 교회에 물건이나 팔아먹고 거기에서 이득을 취하고, 교회에서 모든 섬김의 직분 그것을 자기의 명예를 드러내는 기회로 삼고, 말로만 충성하고 자기 자신 아무것도 교회에 바치지 않는, 영광은 주님과 함께 받고 수치와 모욕은 지체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하는 이기적이고 쓰레기 같은 섬김으로 주님의 교회를 고통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안의 생명을 온전히 누리면서 살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반쪽도 나눠가지지 못한 더러운 마음을 가진 목회자의 마음이 이렇게 녹는 것처럼 아픈데, 완전하시고 자기의 교회를 위해 생명을 다 주시고 흠 없으신 그리스도 예수님, 당신이 친히 보이신 모범이기 때문에 교회가 어떻게 섬기며 하나 되어야 할지를 너무나 잘 아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은 얼마나 많이 고통스러우시겠습니까? 이런 교회 안에서 고통 받는 주님의 마음과 목회자의 고뇌는 아랑곳없고 잠시 섬김 속에서 상처 난 자기의 자존심, 그리고 봉사 속에서 조금 입은 자신의 손실을 인해서는 자지러질 듯이 아파하고 보복하려고 하는 그런 생각이 없는 교회의 지체들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한번 기억해 보십시오. 결국 그렇게 쓰레기 같은 섬김 속에서 목양의 질서를 짓밟고 교회의 유기체적인 섬김의 질서도 훼방하고 마지막에는 마음에 남았던 목자도 없고 목회자도 없어졌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목회자도 사라지고, 자기를 이 교회로 부르셨던 주님도 자신의 마음속에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마음이 녹아서 주님이 불러주실 때 내 모든 것 주의 소유를 삼으소서. 주님이 나를 위해 살을 찢으시고 구원하셨으니 주님이 저를 쓰시겠다니 저를 드립니다. 하고 시작했던 이 눈물이 없는 섬김에서는 자기를 맨 처음에 부르셨던 섬김의 주인이 사라져버린 그런 형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이 두 질서의 아름다운 관계와 통합을 이루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이 마지막 가는 결국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질서를 아주 아름답게 연결하고 통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복종과 사랑에 의한 일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완전하시지만,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영적인 교회는 완전하지만, 지상에 세워진 이 교회는 완전하지가 않고 주님이 이러한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를 전달하도록 세우신 질서는 완전하지만 그 질서를 수행하도록 각각 자리매김하고 있는 사람들은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맨 처음 주님이 소명을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의 분신처럼 교회를 세운 목회자는 주님이 그렇게 특별히 불러주신 목양의 질서를 지키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그 사람의 본질도 여러분과 똑같은 형제중의 한 사람으로서 주님을 먼저 더 많이, 더 깊이 만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이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도 아주 평범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기쁠 때가 있는가 하면 슬플 때가 있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는가 하면 행복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이 교회를 위하여 목회자로 불러주신 그 은혜에 대해 한없는 행복을 느끼는 때가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에 눈을 감으면 내일 아침에는 하늘나라에서 눈을 뜨고 싶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기는 그렇게 완전하신 주님도 이 사역을 감당하실 때에 웃으신 기록은 나오지 않는데 눈물 흘리신 기록은 세 번이나 나오지 않습니까?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어제도 밤 열두시가 되도록 호숫가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살아온 목회의 날들이 너무 부끄러워서 주님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고 15년 동안에 단 한 번도 주님을 섬긴 적이 없는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그렇게 부족하고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인간이지만, 끊임없이 비춰주신 진리의 빛 앞에서 잘못 행한 것은 회개하고 자신을 잘못 평가했던 것들은 바로 잡고 그렇게 하면서 나아가는데 이것은 단지 목회자가 홀로 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모든 지상의 교회의 성도들이 빠질 수 있는 오류이기 때문에 그렇게 매번 진리의 빛 아래서 교정되고 새로워지는 일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 예수를 섬기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어쩜 그렇게 자기의 깨어짐은 인색합니까? 성자가 아닌 다음에야, 아니 성자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깨뜨려지지 않으면 지극히 악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기에 테로틀리아누스 같은 교부는 말하기를 “난 회개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깨뜨려지는 일에는 인색합니까? 예전에 알았던 진리가 얼마나 안 진리입니까? 그때 한 때 알았던 진리의 빛, 그 수 십 년 전에 간증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오늘 하나님을 섬기기에 충분한 삶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생명이 오늘 우리 안에 있습니까? 이 진리의 빛이 매일매일 비춰 나도 싫은 나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내가 좋은 줄 알고 사랑했던 나를 소스라치도록 버리기 위해서 내가 더러움을 발견해주는 이 진리의 빛과 그 진리에 대한 복종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앞에 오류가 많은 인간들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그 그리스도 예수의 섬김의 뒤를 이을 수가 있겠습니까?
3. 존중되어야 할 목양의 질서와 정신.
교회는 이런 진리 속에서 복종함으로 자신들은 각각 하나님 앞에 다른 사람들이지만 이 진리에 복종함으로 끊임없이 오류에서 벗어나서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유기체적인 섬김의 사명들을 감당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사랑 속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열심히 하지만 지체들을 향한 미움과 원망이 가슴에 맺혀 있는 사람, 지체들을 향해서 용서할 줄 모르는 끝없이 원수 맺힌 마음, 그리고 최근에 일어난 것처럼 몇 푼의 돈 때문에 여러분이 서로 지체들을 빚쟁이 취급하고 채무자의 권리를 행사하고 그렇게 하면서 교회를 찢어놓는 이러한 일들은 정말 견딜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는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든 것들이 사랑의 부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초대 교회 교인들은 자기의 집도 팔아서 가난한 지체들에게 나누어 달라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교회에서 주는 음식을 먹으며 기도하고 전도하며 사는 것으로도 만족했는데, 어떻게 거룩한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그런 일들을 행함으로 목회자의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합니까? 이 모든 것들이 사랑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생각은 다르고 견해는 달라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마음, 그 목양의 질서를 존경하는 그 복종의 마음, 그래서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기의 목회 사역을 통해서 태어난 양 떼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하고 그 목양의 질서를 자기의 가정처럼 생각하며 목회자를 부모처럼 사랑하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 많은 오류와 부족이 있어도 사랑으로 끊임없이 일치를 이루고 진리의 빛으로 서로를 교정해가며 하나님 앞에 부족하지만, 유한하지만, 그리고 어리석지만, 모자라지만 모자라지 않고 지혜롭고 어리석지 않고 현명한 교회의 모습을 이루어가서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사역의 뒤를 이어 가게끔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기체적인 생명은 그 유기체적인 생명과 나뉘지 않는 유기체적인 섬김의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나뉘어 갖지 못한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애국심 없이 나라를 지키는 군인 노릇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무기를 적군에게 팔아먹고 투항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오늘 주님의 교회를 섬기면서도 은혜에 고갈된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설교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진리를 이제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이 지성적으로 배부른 것입니까?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성이라고 하는 그 나부랭이는 아주 미천한 것에 불과하다고 난 확신하고, 여러분이 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커다란 산, 그중의 나무 한 그루, 그리고 돌멩이 한 줌을 붙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아주 사소한 것들입니다. 매일 그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끝이 없이 이어지는 진리의 벌판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리의 세계에 그 유유함을 생각하며 홀로 외로워져 눈물이 흐르는 그것이 목회자의 마음이라면 여러분은 그보다 훨씬 못한 지성을 가지 고 주님 앞에 교만해질 수가 있겠는지 나는 여러분에게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유기체적인 생명을 교회 안에 끊임없이 부어주시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 유기체적인 생명을 나의 지체들이 충만하게 누리고 있는데, 그런데 이런 유기체적인 생명을 충만히 누리고 있지 못한 그러한 가운데서 이런 유기체적인 생명을 충만히 누리고 있지 못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이 아름다운 생명의 유기체적인 질서 속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한번 깊이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질서 속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진정한 섬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결국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은 일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을 섬기는 것이고, 이 땅에 있는 주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영혼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하는 일인데 그래서 맡기신 일인데 그 일을 하면서 교회의 아름다운 질서를 깨뜨리고 유기체적인 몸을 끊임없이 상처 나게 한다면 도대체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누구의 부름을 받고 지금 이 교회에서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인지 나는 묻고 싶습니다. 1부 예배 때부터 설교 시간에 하도 눈물이 나서 쓰러질 것처럼 기운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나는 오늘 내 마음속에 여러분을 대면해서 갖는 이 마음이 내가 평소 여러분에게 가지고 있는 유감의 마음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유기체적인 생명의 질서를 통해서 나에게 부어주시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대들 중에 교회를 아프게 하고 이 질서를 흩뜨렸던, 그래서 교회에 적잖은 아픔을 주었던 사람들 중 나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도 그 사람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그 질서 속에 살고 싶었지만 가르쳐주지 않아서 무지했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싶고 또 그런 질서를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의 힘이 모자랐기 때문에 잠시 여러분은 이 질서 속에 이탈해서 교회에 아픔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이 아름다운 질서 속에서 우리들이 그 위치에서 이 아름다운 질서에 복종하며 우리가 거기 서 있으므로 이 질서가 더욱 아름다운 질서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에 세우셨고, 바로 그 질서 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으면 하셨을 그 일을 교회로 하여금 뒤잇게 되고 그 질서로운 섬김을 보면서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며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지체들이여,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 그 질서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결코 이 땅에 있는 동안에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교회의 이 아름다운 목양의 질서 속에서 생명의 은혜를 끊임없이 공급받고 이 아름다운 질서 속에서 주님의 통치에 복종하며 주님을 섬겨서 교회를 섬기며 살아온 모든 날들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이 세상을 섬겼던 날들로 기록될 수 있도록, 그래서 마지막 때에 여러분이 한 교회에서 평범하게 신앙생활 하다가 주님 앞에 갔는데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환난과 많은 시련을 이기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나를 섬겼으니 이제 나와 함께 쉬어라.” 라는 주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2)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3)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4)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5)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6)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6 (주일오전예배 2009/01/18)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7 (주일오전예배 2009/02/0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8 (주일오전예배 2009/02/08)
7.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
교회의 유기체적 통치 ①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 5:22-23).
Ⅰ.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 교회의 유기체적 통치
오늘은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신데, 그 주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교회를 직접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오늘과 다음 주에 걸쳐서 말씀을 드림으로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가정에 있어서 질서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마치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와 접붙여진 몸으로써 그분의 통치에 복종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여러 주에 걸쳐서, 여러 번에 걸쳐서 저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크게 세 가지의 의미를 갖는데, 하나는 유기체적인 생명의 머리로서 모든 하나님의 생명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전해져 내려옴으로 우리는 예수의 생명에 참여한바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은 이 생명의 은혜 속에서 아주 넘치는 가운데 생활하는 비결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두 번째로는 유기체적 봉사로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는 그분이 주는 은혜 안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으면 하셨을 사역을 뒤잇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봉사하는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으면 하셨을 그 일을 효과적으로 뒤잇게 하심 위함인데, 이러한 봉사의 질서를 하나님이 교회 안에 세워놓으셨으니 이 봉사의 질서를 따라서 우리들이 섬겨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과 다음 시간에 걸쳐서 살펴볼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 교회의 유기체적 통치를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통치라고 하는 것은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은 통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당신 자신이 교회와 떨어질 수 없는 머리와 몸의 관계이지만 그리스도는 또한 왕처럼 교회를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치하시는 이것은 권위를 필요로 하는데, 그 권위의 원천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나라를 통하여 신약의 영적인 교회를 보여주셨고, 신약에서는 영적인 교회를 통하여 영적인 나라를 보여주셨으니 교회가 바라보는 나라는 영적인 이스라엘이고 교회를 바라보는 나라는 육적인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짐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는 이 교회의 권위의 원천이 되시는 것입니다.
A. 권위의 원천 : 그리스도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지불하셨던 희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치르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교회를 사셨으니, 하나님이 바로 이 그리스도 예수에게 교회를 다스릴 수 있는 권위의 원천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교회가 어떻게 당신의 뜻을 알고 복종함으로 하나님께 통치 받을 수 있을지를 그 모든 수단까지도 예비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성례인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기록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그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는 가운데 끊임없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남으로써 성도들은 보이는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께 복종하며 그분께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을 박탈할 수도 있는 이 세상의 임금들보다 보이지 않게 진리의 말씀으로 성령으로 우리를 움직이시는 그리스도 예수께 더 많이 복종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인데, 이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가 어떤 교회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실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자기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것이 세례 속에 표상되어 예수와 함께 죽고 살아나는 세례의 형상화된 과정을 통해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의 원천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떡과 그리스도의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성도는 그 거룩한 성찬 속에서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주님이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기의 모든 교만을 꺾고 자기의 자기된 것이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런 은혜의 방편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시고 권위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B. 통치의 실행 : 개 교회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을 구원해 놓으신 다음 하늘로 올라가시고 알아서 하도록 교회를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교회의 법도를 세우시고 당신의 보이지 않는 통치를 실행에 옮길 교회의 직원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이전으로 보자면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도자들과 오늘날에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들 등등을 세우시고 이러한 질서를 교회에 도입하심으로 그리고 그러한 일군들에게 신적인 권위를 입히심으로서 보이지 않는 당신의 통치를 보이는 조직의 교회를 통해 실행해 나가게 하신 것이니 성도는 이렇게 보이지 않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교회 속에서 느끼며 그 교회에 세우신 질서를 따라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펼치신 다는 것을 깊이 인정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이렇게 당신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증명하실 뿐 아니라 실제로 교회 안에 임재 하셔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을 열어 진리를 보게 하시고 진리를 깨달아도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복종하게 하시면서 주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일하심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든든히 서 갈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의 원천이 되셨으니 성도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보이는 교회의 이러한 질서 속에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예수의 권위를 느끼고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을 세우신 질서가 주님이 창시하신 질서이니 그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그 사랑과 지혜안에서 교회의 질서에 복종함으로 주님이 세우신 일꾼들을 통해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온전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협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시되 당신이 직접 통치하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제도는 당신이 수립하셨으나 그 제도 속에서 부름을 받아 보이는 교회를 통치해 가는 사람들은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이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나, 그리고 세우신 제도는 온전하지만, 일꾼들은 온전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섬기고 그들과 함께 교회의 질서를 이루어가면서도 그들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천사도 아니고 당신 자신도 아닌 사람을 세워 당신의 교회를 이끌어 인도해 나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C. 통치의 원천 : 그리스도
이러한 그리스도의 권위는 통치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리스도는 교회 속에서 직접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직접 통치하셔서 각 사람들을 움직이고 변화시키심으로 그 사람들이 또한 자기의 교회를 다스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고 교회의 일꾼들도 세우시고 또 그 일꾼들을 따라 함께 복종하며 주님의 교회를 섬겨 나갈 성도들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각각 생각도 다르고 생활해 온 신앙의 배경도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교회를 이끌고 통치하는 도구로 쓰여 지는 사람과, 함께 복종하며 교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 사이에 일치를 이루시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통해서인 것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충만하게 받을 때 목사다운 목사가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로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성령의 은혜 안에서 그의 부패한 마음이 녹아질 때에 가장 장로다운 장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전에 알지 못했던 진리의 세계를 발견하고 또 예전에 알았어도 그렇게 살 수 없었던 마음이 성령의 은혜에 의해 녹아지고 그 성령의 사랑에 붙들리게 될 때에 가장 성도다운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다운 성도가 부름을 받아서 교회의 장로가 될 때에 가장 훌륭한 장로가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성도다운 성도로써 아름답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목사로 부름을 받았을 때 가장 훌륭한 목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니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를 통치하시는 이 은혜와 진리는 모든 교회의 직분을 막론하고 그리스도께서 공통적으로 그들을 통치하시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관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을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를 거스르고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교통의 질서를 거슬러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었을 때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교만과 아집을 버리고 교회 앞에 복종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목양의 질서 속에서 순종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러한 모든 은혜의 역사는 각 사람들에게 질서를 알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아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가정에서 훌륭한 아내가 되고, 남편에게 가장 좋은 아내가 되고, 자녀들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부모가 됩니다. 부모에게는 가장 착한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충만하게 임할 때 그 은혜는 이 사람 속에 역사해서 자기의 본분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목회자의 본분으로 돌아가게 하고 장로는 장로의 본분으로 돌아가 질서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도들도 이런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될 때에 목회자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러면서도 목회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많은 교회 안에 지체들은 이런 성령의 은혜가 자신 안에 충만하게 임할 때에, 장로와 교회에 세워진 일꾼들의 많은 결점들을 발견할 때 바로 그런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 곁에서 주님을 섬기도록 자기를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신이 그들을 잘 섬김으로써 그들의 부족한 섬김이 우리 모두 함께 어우러진 섬김 속에서 주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이 충만한 은혜는 사랑의 영이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가 목사이든지, 장로이든지, 성도이든지, 누구이든지 간에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이 은혜가 없었더라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게 만들고 은혜가 없었더라면 화합할 수 없는 것들을 화합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 이 은혜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통치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는 모든 성도가 사모하여야 할 바이며 누구든지 이 은혜가 없으면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에 복종할 수가 없고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의 성도가 이런 은혜가 없는 것은 하나님 앞에 대단히 잘못된 일이며 은혜로부터 멀어진 그 자체가 그에게 있어서는 심각한 신앙의 위기이며 불순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교회의 일꾼을 세울 때는 돈 많은 사람, 세상 이치에 밝은 사람, 한 교회 오래 다녀 출석을 오래 한 사람들을 교회의 장로나 안수 집사나 권사로 세우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세워진 사람들이 부실하여 현저히 주님의 교회를 고통주고 질서를 더럽히는 사람들이 된다면 그 사람들을 세운 여러분도 언젠가는 그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면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에 일꾼으로 세워지는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안에 있고, 이 은혜를 사모하고 이 은혜의 비밀을 터득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받음으로 자기를 꺾을 줄 알고 굴복할 줄 알고 잘못한 후에는 참회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들이 교회의 일꾼이 될 때, 교회는 부족한 인간에 의해 통치되면서도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를 정확하게 구현함으로 교회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세워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교회의 일꾼 된 여러분으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성령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에 복종하는 사람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객관적으로는 하나님이 말씀 안에서 이 교회를 그리스도를 통해 통치해 가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끊임없이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생각을 끊임없이 알고자 하는 것이 교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일이 모든 신앙생활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오래전에 저희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형제가 교회 홈피에 글을 올리며 “우리 이렇게 신앙생활하지 말고 교회 안에다 동호회를 만듭시다. 나는 테니스를 좋아하는데, 테니스를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 모여서 우리 모임 하나 만듭시다.” 그럴 때에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간 많은 지체들이 저는 가만히 보고 있었습니다마는 통렬하게 논박을 하면서 “교회는 그런 것을 하는 데가 아닙니다.” 라고 하니까 또 상대방에서 나도 그 정도는 안다. 그러나 내 뜻은 그게 아니다. 하고 한참 논쟁이 벌어지다가 결국은 접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들을 이렇게 지나가면서 교회에 매달려 있는 현수막을 보면 어떤 교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뷔페 집처럼 수많은 교실들을 만들어 놓고 성도들이 모입니다. 꽃꽂이 강습회부터 기타 연주 가르쳐 주는 교실부터 심지어는 종이접기 교실까지, 심지어는 양식을 어떻게 먹는지 테이블 매너를 가르치는 스쿨까지 교회에 생깁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그렇게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은 그런 것을 교회에서 행해서도 안 되고 그런 것을 교회에 곤란하게 요구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품으신 사랑을 배워감으로써 진리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교회의 이상입니다. 물론 저는 그런 모든 취미생활이나 이런 것들을 막을 마음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집에 가서 꽃꽂이를 배우고 그래서 그것을 집에 깨끗이 해놓고 또 교회에 이렇게 예쁘게 해 놓고, 또 기술이 없으면 이렇게 예쁘게 해놓겠습니까? 이게 다 각도가 맞아야 되고 그러는 거 아무나 못합니다. 이렇게 해놓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다 또 사업이 원만하지 않으면 이런 것 꽃꽂이 가게를 차려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직업으로 활동하는 것도 다른 장사하는 것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훨씬 아름답게 하는 좋은 사업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실제적인 삶속에서 행하여야 할 일들이고 교회는 초점이 오직 그리스도와 진리, 하나님의 은혜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보십시오. 이런 꽃꽂이를 가르쳐 주는 것은 집에서 학원이나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일이고, 교회에서는 이런 꽃꽂이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며 또 이런 꽃꽂이를 해서 돈을 많이 번 다음에는 그것을 어떻게 교회에 바쳐야 되는지 그런 것을 가르쳐 주고 그런 정신을 담게 해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심지어는 어느 교회 안에는 골프 동호회가 있어서 회사의 사장들끼리 모여서 주일 오전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필드에 나가서 함께 골프도 치고 한다는 이야기가 들리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교회의 근본적인 원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골프를 치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의 모임은 오직 진리를 탐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왕 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높이기 위한 다른 목적에서 모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돈 거래 하거나, 내가 아직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계를 하거나 하는 이런 것들이 장난으로라도 절대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것들을 하는 곳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도들의 교통은 진리가 중심이 되어서 그래서 그 진리를 끊임없이 깨닫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복음의 교리들을 하나씩 배워 감으로써 그리스도 예수께 더 잘 복종하고 그분의 통치에 굴복하는 그러한 사랑스러운 자녀들이 되게 하는 데에 바로 교회 존재의 의의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세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살던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예배를 드릴 때, 사랑하는 성도들과 대화를 나눌 때, 함께 주님의 교회를 섬길 때 바로 인간의 인생의 본질, 신앙의 본질로 돌아올 마음을 갖게 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꽃꽂이도 배우고 기타도 배우고 종이접기도 배우고 그리고 테이블 매너도 익히고 수영도 배우고 놀다가 교회에 와서 성도들과 함께 교통하니까 주님 안에 참된 인생이 무엇일까? 진리는 무엇일까?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주님의 진리에 합당한 삶일까? 이런 것들을 고민하게 하는 것이 교회이어야 하지, 세상에 있는 것들이 교회에도 있다고 가르쳐주는 것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깨달음으로써 성도들이 그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게 될 때에 받은 그만큼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에 잘 복종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목회자로부터 모든 주일학교 학생에 이르기까지 한마음으로 그 말씀에 깊이 은혜 받고 그 말씀의 깨달음 안에서 살려고 애를 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사경회 때 교역자들이 “여태까지는 사경회를 각 부서에서 알아서 했는데 그러지 말고 교회가 사경회를 주일학교 학생들을 전체를 통일해서 하십시다.” 그래서 “그러자. 뭘 했으면 좋겠냐?” 그랬더니 “장년들이 마음 지킴이의 교리를 하니까 아이들도 마음 지킴이의 교리로 통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거를 아이들에게 잘 가르쳤더니 아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들었는지 몰라요. 매일 5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와서 열심히 그 진리를 깨달았어요. 그 꼬마 녀석 하나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 넌 이번 사경회 때 뭘 배웠니?” “마음 지킴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조그만 앤데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인가 그래요. 그런데 “그래서 뭘 배웠니?” 그러니까 “엄마 마음이 부드러워지면 우리를 사랑하고 딱딱해지면 때려요.” 그러니까 지들 마음도 부드러워지면 부모님께 잘 순종하고 하나님께도 순종하고 기도도 하는데, 딱딱해지면 주님께도 반항하고 부모님께도 대드는 것입니다. 애들이 곧잘 알아요.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마음을 잘 지키면 부드러움이 유지되고 게임을 하고, 친구들하고 딱지치기 하고, 텔레비전이나 보고, 동생하고 싸우고 이러면 마음이 딱딱해진다는 것입니다. 아주 놀랍게 마음 지킴의 교리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를 깨달을 때에 아주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조심해야 되겠어요. 아이들한테 막하면 엄마 마음 딱딱해졌구나. 그럴 거 아니에요? 부패한 마음이 됐구나. 어머니, 마음 좀 지키쇼. 그러면 어떡할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깊이 성령의 은혜를 받는 가운데에 예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그럼 그런 말씀의 깨달음과 은혜를 안 받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예수의 통치에 복종을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항구적인 것이 있고 일시적인 것이 있습니다. 항구적인 것은 뭐냐면 교회의 지체가 아닙니다. 지체이었던 적도 없고. 이런 사람들은 불신자예요. 교회 와 있지만 교회의 일원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잠시 마음이 딱딱해지고, 하나님의 말씀도 깨닫고 싶은 마음이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도 아주 멀어져 있어서 거의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완강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를 거절합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뭘 어떻게 됩니까? 한 대 쥐어 맞지. 기다려보면 쥐어 맞을 때가 와요. 한 대 뒤통수를 얻어맞고 정신이 번쩍 날 때가 오죠.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치하시는데 이것도 추상적이잖아요. 구체적으로 누가 무엇을 잘못하고 잘못 믿고 있고 이렇게 할 때는 하나님의 성령이 저들을 감동시켜서 그 일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잖아요. 자!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불을 지른다고 할 때에 기도하면서 저 사람의 마음이 변하여 물동이를 들고 오게 해 주옵소서.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불을 더 이상 갖고 장난하지 못하도록 불을 빼앗고 제재를 해야 되겠죠.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통치의 실행이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느냐 할 때 개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아닌 개 교회를 통해서 하나하나의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통치를 실행할 수 있는 권세를 일차적으로는 교회 전체에 주셨어요. 그래서 이 전체에게 주신 것을 교인들이 하나님 안에서 자기가 배운 진리를 아는 지식과 성령의 인도 안에서 권한을 행사함으로 교회 일꾼들을 대신 세우고 세워진 일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를 실행하도록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대의정치에요. 특히 장로교회의 정치는 모든 권한을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시지만, 그리스도의 권한은 교인들을 통해 행사되고 교인들은 자신의 의사를 대의적인 제도를 통해서 교회의 장로와 목회자들을 선택함으로 그들에 의해서 교회는 통치되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모이는 조직과 질서를 따라서 실행해 나가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치하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사랑과 그분께 대한 신실한 성도의 복종은 교회의 보이는 질서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임을 깊이 인정하고, 그리고 그 교회는 목회자와 장로와 교회에서 세워진 일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양의 질서를 구축하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 성도들을 돌보고 성도들을 가르치고 성도들로 봉사하게 하고 성도들을 치리하는 질서를 세워 나가신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며 그 질서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고 거기에 복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 나라가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권세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배시간에 늦게 오고 목회자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아도 교회 지하실에는 감옥도 없고 교회 옆방에는 여러분을 고문할 수 있는 도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교회의 질서를 아주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고 각자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주님이 세운 질서를 얼마든지 파괴할 수 있고, 어떤 때는 이렇게 파괴할 때에 교회는 아무 힘이 없이 악한 성도들에게 피해를 입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나라의 권세는 단지 몸을 멸할 뿐이지만,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권세는 우리의 영혼까지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죽은 자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는 칠, 팔십 년 살다가 사라지지만, 다시 부활 때에 영혼과 만나 다시 몸을 입게 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 언제나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신앙이 없어서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교회의 질서를 훼방하면서도 그것도 유의 부족하여 목회자와 장로들을 비난하고 성도들의 아름다운 공동체적인 교회를 아주 육욕적인 것으로 바꿔놓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누구도 그들을 제재하는 것 같지 않아 그들 스스로 득의양양 하다 할지라도 이미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 심각한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에는 철문이 내려졌고 그들은 끊임없이 예배를 드려도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도 그들의 영혼에 와 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감화와 역사는 그들을 피해가게 될 것이고 그들의 마음은 점점 굳은 마음이 되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재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하여 사랑스럽던 교회는 여러분에게 아주 귀찮은 교회가 되고, 존경하고 신뢰하던 목회자와의 관계는 깨어져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관계가 되고, 한 교회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교회를 비방하고,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교제를 나누고 존경하고 사랑하던 장로나 교회 일꾼들과의 관계는 다 망가지고 부숴 져서 돌아서서 욕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관계가 된다면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로 임한 형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생활하는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는 산산조각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어떤 형통함이 있는지 한번 여러분 스스로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에는 평안이 없을 것이고, 여러분이 하던 사업과 생업에는 우울한 불행이 깃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행복하고 다복하던 가정에는 균열들이 생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을 행복하고 아름답게 만들던 그 원천인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사람의 관계가, 진리와 은혜의 관계가 깨뜨려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러한 일들을 막기 위해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잘 가르치고 그리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에 복종하도록 만들어주어야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교리에 대한 권세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Ⅱ.교리권
A. 말씀을 순수하게 보존함
그리스께 대한 올바른 복종은 그리스도께 대한 올바른 지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보존하여야 할 중차대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한편으로는 성도들에게 올바른 것을 가르쳐주고 또 한편으로는 잘못된 것을 성도들이 믿거나 배우거나 그것을 따라 살려고 할 때에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랑이 있는 부모라면 어떡하든지 여러분의 연약한 자녀들에게 영양분이 있고 몸에 좋은 음식을 섭취시킴으로 건강하게 기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아주 영양분이 있고 좋은 음식을 많이 준다고 할지라도 나머지는 무엇을 먹든지 자녀들을 내버려둔다면 영양분 있는 음식을 먹이는 여러분의 수고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으로부터 아침에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받아먹고 점심에는 학교에 가서 불량식품을 사먹고 저녁때는 중금속이 섞인 화장품이나 중금속이 섞인 장난감 같은 것들을 입에 물고 산다면 여러분이 아침에 먹인 영양분 있는 그 음식은 자녀의 행복을 위하여 이바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녀들에게 몸에 해로운 것은 절대 먹지 못하도록 자녀를 교육하고 야단치고 심지어는 울지라도 그것을 뺏고 못 먹게 할 것이 여러분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참된 진리를 가르쳐주는 것과 함께 장로들은 목회자와 함께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두루 살피며 참되지 않은 것들을 믿고 참되지 않은 것들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그릇된 이 말씀에 관한 섭취를 막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이긴 하지만 오래전에 이단으로 분류된 교회에 가서 교육을 받고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난 여러분이 그 죄를 얼마나 진지하게 참회하는지 묻고 싶어요. 우리는 여러분에게 개전의 정이 있고 회개의 기미가 있다하고 여러분을 받아들였고 지금도 여러분의 명단을 가지고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목회자들이 면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상당한 기간 동안 여러분은 신뢰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죄에 대해서 여러분이 얼마나 심각하게 회개했는지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한 아무런 인식과 가책이 없고 목회자가 그 사실을 발견할 때까지, 다른 통로를 통해서 그것을 확인할 때까지 스스로 부복하여 자신이 잘못했노라고 고백을 하는 사람도 소수에 불과했어요. 난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어요. 결혼으로 말하면 여러분은 바람을 피운 것입니다. 외간 남자와 자고 온 것입니다. 그 죄가 가벼운 영적인 간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참되게 회개하고 여러분이 다시는 그런 어두움 속에 빠지지 않도록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쳐 줄 때 그 진리에는 냉담하던 사람이 거짓선지자가 돼서 말도 되지 않는 교리를 가르칠 때 혹하고 사랑을 느꼈다면 둘 중에 하나겠죠. 여러분이 중대한 죄에 빠졌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양 떼가 아니라 그 이단의 양 떼든지 둘 중의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여러분이 만약에 후자에 속한 사람이라면 진실한 참회와 근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의 부족하여 교회 지체들을 설득하여 그 모임 속에 데려간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회심한 사람, 진리의 맛을 본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독특한 진리의 말씀에 대한 감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여기는 성경을 가르쳐주는 학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이고 영적인 가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들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보이는 교회의 목회자와 장로들과 일꾼들의 질서 속에서 여러분을 진리의 말씀으로 먹이고 사랑으로 돌보며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 모든 일에 있어서 단지 한 두 가지 일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성도를 섬기고 이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을 위해 예배할 수 있는 그런 통일된 교회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에 깊이 새기고 교회는 이렇게 순수하게 말씀을 보존하며 하나님 앞에 교회를 유지해야 될 중대한 사명을 세우고 거기에 복종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신 이 땅과 하늘의 자원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고 하는 그 일이 신앙생활에서 중심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영적인 가정처럼 교회 안에서 여러분은 한마음이 되어 주님의 교회와 더불어 예수께서 살아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들을 뒤잇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여기서 드리고 성경공부는 저기 가서 하고 찬양은 또 딴 교회 가서 하고 그리고 훈련은 또 무슨 교회 가서 받고 이렇게 하면서 여러분이 모든 교회를 마치 음식점처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 복음적인 교회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욕망을 워낙 강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교회를 그럴 수 있는 교회로 떠나라고 말하고 싶어요.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이 이 설교에 상처를 받아도 나는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 보다는 교회 전체를 보호해야할 중차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교회를 껍질처럼 생각하고 그저 맴버쉽 이나 달아놓고 장례나면 목회자들이 와서 장례나 치러주는 그런 정도의 교회라고 생각하고 마음은 전혀 없는 그런 교회생활 속에서 성도들과 성도들이 규합하여 여러분이 그런 식으로 교회 바깥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참을 수 없는 교회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회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교회 교인들이 이곳에 와서 은혜를 받는 것도 나는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도 50명, 혹은 100명 이상 이 교회에 등록하지 않은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빨리 결정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이 교회에 등록해서 신앙생활을 하든지 아니면 본 교회에 돌아가서 목회자에게 복종하고 그 질서를 따라 살든지 둘 중에 하나 결정하십시오. 이런 식으로 해서 여러분이 이 교회, 저 교회 설교 잘하는 목회자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메뚜기처럼 몰려다니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그런 속에서 받는 그 은혜가 마치 소쿠리에 부어진 샘물과 같아서 여러분은 보존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양도 싫다, 심방도 싫다, 내가 어느 교회에서 왔는지 묻지 마라, 우리 집이 어딘지 자꾸 캐묻지 마라, 나는 예배드리러 와서 은혜 받고 십일조는 하마, 저희 교회는 그런 교인 사절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환영하는 교회를 가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 백 여 명이 이 교회를 등록할까 하다가 휙 떠나는 일이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아깝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정도의 사람이 이 교회에 붙어 있을 때 이 교회에 이바지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가 교회를 옳기고 떠돌아다닐 때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때는 기도 많이 하고 하나님의 인도가 있어서 아주 아름답게 지난 교회와의 관계를 끝내고 이제 기도 가운데 이 교회도 출석해 보고 저 교회도 출석해 보면서 내 영혼을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교회가 어느 교회인지 하나님 앞에 눈물로 물으면서 이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분들은 예외입니다.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쉽게 결정하지 마십시오. 기도 많이 하십시오. 필요하면 금식하십시오. 그리고 신뢰 가는 교회에서 뿌리를 내리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상처를 주고 떠나왔습니다. 심지어는 목회자와 관계가 깨뜨려진 가운데 교회를 떠나왔습니다. 장소는 옮겨서 그 교회 만나진 않지만,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한 일은 이 교회에서 한 일입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정말 오늘 우리 시대에는 통탄하리만치 진리와는 상관이 없는 그런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 수많은 목회자들이 설교를 합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저 설교는 진리와 어긋났다는 시비가 생겨야 되지 않습니까?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제는 설교하고 선포하는 것 자체가 이것이 아니면 진리일 수 없다 고 하는 입에다가 칼을 문 심정으로 그렇게 피 저리게 외치지 않고 성도들도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말씀을 순수하게 보존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진리와 관련된 모든 생활, 여러분이 화장품을 뭘 쓰는지, 건강의 비결이 뭔지 그런 거 나는 참견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진리에 관한 한은 교회가 관여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진리와 관계된 것은 교회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읽지 말아라 하는 책은 읽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읽으라는 책은 읽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해서 순수한 신앙을 교회는 보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찾아내어 바른 신앙을 가르쳐주고 진리를 따라서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권세를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B. 말씀의 선포와 성례를 집행함
성도들은 교회의 이러한 교리적인 권세에 깊이 복종해야 하고 이 사람은 이렇게 믿고 저 사람은 저렇게 믿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바르지 않은 교리를 믿고 끊임없이 그 교리를 진리로 생각할 때에 교회는 사랑으로 가르치고 고쳐주어야 하고 끝까지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교회는 끊어내어 다른 성도들에게 이런 교리에 대한 오염이 증폭되지 않도록 교회를 순수하게 보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올바르게 번역되어 보존되게 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진리의 말씀을 교회에서 선포하여 많은 성도들이 참된 진리가 무엇이고 세속적인 사상이 어떻게 진리와는 다른지를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세례주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장로들은 목회자와 함께 중차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 진심으로 회심하고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지 세례를 받는 일이 없도록, 교회의 회원이 되는 일이 없도록 방지하여야 하고 자격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리는 일에 참예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의 공동체는 거룩 성을 유지하여야 하고 성도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성찬의 떡을 나누며 우리가 믿는 신앙의 도리를 하나로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C. 신조와 신앙고백을 작성함
이렇게 해서 성도와 교회는 끊임없이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를 교회와 양 떼들에게 고백하고 오고 오는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우리의 신앙은 이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무릎팍에 놓고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할 때부터 이 교리를 가르치고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변천하는 이 사조를 향하여 고백하고 그 일을 위하여 신조와 신앙의 고백을 작성하고 우리의 신앙의 입장을 표명하는 일들을 교회는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Ⅲ. 결론 : 교회의 번영과 말씀의 부흥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이 교회처럼 목회자들이 여러분의 자녀를 그렇게 진리 안에서 가르치고 그 영혼들을 사랑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 영혼들을 참된 복음 교리 안에서 심어주려고 하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망가지면 여러분의 책임은 훨씬 크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몰라서 그렇게 못 가르쳐 주었지만, 다 가르쳐 주었고 온 마음을 다해서 부지런히 복음의 교리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진리를 따라 부족하지만 진리를 따라 살고 싶고, 모자라지만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반갑고 도움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잃은 사람, 진리가 아닌 세속적인 것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만나를 퉤퉤거리며 뱉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변한 사람의 입맛을 맞춰 주기 위해서 교회가 바뀌어야 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교회의 수치입니다. 한 사람이 성도로 태어나서 한 교회에서 전도를 받고, 회심하고, 중생하고, 그 교회 목회자를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하고, 그 교회 장로님들을 목사님 다음으로 존경하고, 거기에 있는 성도들을 가장 복된 신앙의 동지들로 여기고, 거기에서 사명을 발견하고, 그렇게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주님이 주신 많은 이 땅과 하늘의 축복들을 교회 섬기는데 사용하고, 그래서 한 교회에 출석하며 목사님 가르침을 따라, 구역장들의 도움을 받으며, 장로님들의 기도를 받으면서 신앙생활 했을 뿐인데 알고 보니까 자신의 일생이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섬겨온 생애였다. 그래서 결국은 목회자의 품안에서 숨을 거두고 죽고 모든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교회의 장례로 성도들의 합창소리를 들으며 떠나가는 것입니다. 최고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됩니다.
결국 교회는 사람들이 딱 갇혀서 철통같이 무장하여 교회를 자기네 교회로 만드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고난이 와도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사랑하고 그 진리의 샘에서 기뻐하는 가운데 교회가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가면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은 와서 그 물을 마시며 하나님 사랑하고 성도가 되어가고, 또 한 켠 에서는 돌이킬 수 없이 마음이 굳어지고 은혜에서 미끄러지고 진리에 진력난 사람들이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그 마음의 미끄러짐을 이기지 못하고 그 교회를 떠나갑니다. 목회자는, 장로들은 그것을 보면서 가슴앓이를 하고 구역장들은 그것을 보면서 자신의 탓인 것처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사랑으로 돌이키려고 애를 쓰지만 그러나 떠나갑니다. 그렇게 들어오고 나가면서 교회는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처럼 교회에 오래 엎드려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견고한 신자이고 그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생명이 있어야죠. 우리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주님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죄 된 본성이 있고 너는 오늘 드러났고, 나는 내일 드러나고, 쟤는 내일 드러날 뿐이고, 나는 강하게, 너는 약하게, 차이가 있을 뿐이지 누구나 다 마찬가지거든요.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우리들이 참된 신앙의 본질, 내가 비록 잠시 은혜에서 미끄러졌으나 주님 사랑을 더 좋아하고, 잠시 내가 말씀의 미각을 잃었으나 나도 그 진리를 흠뻑 마시며 행복하던 때가 가장 좋았고 그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에 권세를 주셨는데, 그게 바로 말씀을 지키고 영향을 미치는 교리의 권세에요. 이 일을 위해 교회가 해야 할 것은 뭐냐면 끊임없이 이 성경을 탐구하고 이 진리를 길어내는 일을 위해 교회는 헌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교개혁을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혁하였던 마틴 루터나 존 칼빈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전에 있었던 위클리프나 롤라드 형제나 맬랑히톤이나 베쟈, 쯔빙글리, 그리고 블링거를 비롯해서 기라성 같은 수많은 개혁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은 다 교회가 이런 거라고 생각할 때에 그들이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일 수 없다고 참된 교회를 외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어느 날 꿈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개혁하라고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을 읽다 꽂혀서 개혁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서 종교개혁으로 돌아갔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성경을 혼자 보다가 돌아간 게 아니라 성경을 올바르게 탐구했던 고대의 교부들, 중세의 신학자들, 자기 시대의 신학자들 연구하면서 이 교회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교회는 예수님이 사도들을 통해서 세우시려고 했던 그 전통적인 교회가 아니다 라고 판단을 해서 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칼빈이 성경으로 돌아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어거스틴을 통해서 성경으로 돌아갔다고 말해야 한다고 까지 가르쳐요. 그러니까 교회가 하여야 할 사명은 성경을 잘 탐구하고 이 탐구한 역사들을 앞에 사람들을 탐구하고 공부하여 오늘에 되살리고 거기에다가 우리 자신의 헌신을 통해서 성경말씀을 더 많이 풍부하게 해석함으로 그 위에 올바른 진리들을 보태어 다음 세대에 넘겨줄 때는 우리들이 받은 거보다 풍성하게 넘겨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교회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하나님의 학문을 탐구하는 이 일에 전심전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가 이 일에 충성스럽게 봉사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이 아주 커졌고, 이 일을 위해 봉사하지 않을 때에는 교회는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교회에 온 성도들의 생각은 세속적인 사람들과 다름이 없는 그런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영국에 가면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설교하던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가 스펄전 목사님이 설교할 때 평균 육천 명 정도 모였다고 기록에 나와요. 그 당시에 육천 명이면 상상이 안가는 숫자 였고요, 영국은 교구제로 되어 있기 때문에 국교도예요. 영국 왕이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고 거기에 성직자들은 공무원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안양에 교회 하나를 세워놓고 이쪽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이 교회에 나가라는 시대였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이 찰스 스펄전 목사는 국가 교회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비국교도인 침례교회였어요. 그래서 설교를 하는데 각기 자기 동네에 나가는 것을 법으로 알고 있던 사람이 말씀이 좋아서 모였는데, 육천 명이 모였다고 하니까 그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숫자이고요.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가지고 결국은 이층이 무너져 사람이 깔려 죽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안전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전관리 위원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스펄전 목사의 목회의 성공을 시기하는 사람이 불도 안 났는데, “불이야”하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내가 늘 이야기하잖아요. 덕의 기본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막에 차 빼라고 나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 중계방송 되는데······. 불이 났어도 천천히 내려왔으면 안 죽었을 텐데 서로 지가 먼저 살겠다고 내려오다가 이층이 무너져서 몇 명이 깔려 죽어요. 그러니까 그 목사님이 우울증까지 생기죠.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불우하게 인생을 사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러던 교회가 75년도에 저 아는 목사님이 그 교회를 방문하셨는데 50명 모이더래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츄리닝 입고 모였더래요. 빨리 예배드리고 테니스 치고 골프 치려고요. 지금은 천 명 가까이 모이더래요. 천 명 모인다는 게 한참 전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1800년대 마지막 사람인데, 그럼 그렇게 교회가 다 주저앉아서 마지막에 50명 밖에 안 모이던 교회가 (영국에서 천 명은 여기에서 만 명 정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상상할 수 없이 큰 숫자에요. 그런 교회가 영국에 손으로 꼽을 정도의 숫자밖에 안 됩니다.) 그렇게 까다로운 영국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서 신앙생활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겠어요? 교회를 새로 지었을까요? 연예인들을 데려 왔을까요? 예배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신세계 백화점 상품권 하나씩 준다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목회자가 바뀌었습니다. 아주 학문이 출중하고 설교를 기가 막히게 하는 피터 마이어라는 목사가 왔어요. 그리고 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가 왕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회의 참된 번영은 영적인 번영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교회의 부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강하게 붙들린 사람, 왜 주님을 믿고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명료한 생각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많은 무리를 이룰 때 그들이 사랑 안에서, 은혜 안에서 연합을 이루고 일치된 진리를 신앙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을 받고 그 통치에 복종하며 나아가서 그분이 이 세상에서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들을 뒤이으며 섬기며 살아갈 때 그때에 그 교회가 정말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런 통치의 질서 안에서 예전에는 잘 몰랐기 때문에 우리가 바르게 못했어도 이제는 이런 진리를 깊이 깨닫고 여러분이 말씀 안에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 되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2)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3)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4)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5)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1/16)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6 (주일오전예배 2009/01/18)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7 (주일오전예배 2009/02/01)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8 (주일오전예배 2009/02/08)
8.교회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2
: 교회의 유기체적 통치 ②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3).
Ⅰ.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기체적인 공동체의 머리이십니다. 머리로서 온 몸인 교회를 통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본문은 목회자인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섬기면서 겪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였고, 이 교회는 영적인 은사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속에서 많은 분쟁들이 또한 존재하였습니다. 특별히 교회에 주어진 영적인 은사 때문에 사람들이 저마다 계시를 받았다고 무질서하게 자기를 주장하게 되었고, 방언하는 사람과 예언하는 사람들이 엉키면서 교회는 예전에 사도바울이 목회할 때의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많이 상실했습니다. 이런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사도바울이 근심하는 가운데 이 교회에 책망하는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성품과 교회의 운영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혼란스러운 교회의 질서의 문제를 바로 잡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의 성품을 이들에게 상기시키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사실 이 두 가지 낱말, 어지러움의 하나님과 화평의 하나님이 짝을 이루고 있으니, 오히려 사도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오, 질서의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화평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어지러움의 하나님이라는 표현과 대치시킴으로 곧 어지러움이 모든 불화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질서의 상실이야말로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에 굴복하지 않는 대표적인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복종은 보이는 공동체의 지평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사도는 이렇게 권면을 함으로 이 문제를 권위 있게 다루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이 통치는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그 통치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왕으로서 그리스도의 통치는 바로 당신의 몸인 교회 구석구석을 당신의 뜻대로, 당신의 지혜를 따라서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찬양을 하거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르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는 그 왕이 어떤 종류의 왕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만약에 그 왕이 입헌군주국의 왕이라면 그것은 이름만 왕이지 실제로는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왕입니다. 왕궁에 살면서 외국에서 손님이나 오면 가끔씩 밥이나 함께 먹어주고 기자들에게 사진이나 찍히는 그런 종류의 왕은 실권을 가진 왕이 아닌, 의례적인 왕입니다. 많은 정치가와 권력자들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만, 이것은 의례적인 조아림이고 모든 권세는 자신들이 실제로 가지고 행사함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고 왕이시라고 할 때에 그 통치는 이런 입헌군주국의 왕과 같은 명목상의 통치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엄한 명령을 바라고 자기의 뜻에 따라서 이 모든 대신과 신료들을 거느리고 저 땅 끝에 있는 작은 백성까지 마음대로 다스리고 자기의 뜻대로 통치할 수 있는 그러한 실제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는 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입교할 때에 세례를 받으며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때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왕권에 총체적으로 복종하겠다고 하는 결단이 이미 고백된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왕권을 정의하게 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아주 권위 있게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왕권을 통치하실 때에 이 왕권을 행사하면 하고 말면 마는 그런 방식으로 행사하신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법이 있고 그 법을 법대로 시행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의지는 명확하며 그의 통치의 권한은 무한하여 모든 자기의 백성을 통치의 권한에 복종하고 굴복시키시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왕권인 것입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예수의 왕권은 보이는 교회의 이 질서를 통해서 행사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교리에서 ‘치리의 권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법이 있고, 그 법이 공포되고, 공포된 그 법을 따라서 믿고 살아가며, 그대로 살고 믿지 않았을 때는 제재를 가하여야 합니다. 만약에 이런 제재가 없어서 믿고 싶은 사람은 믿고 살고 싶은 사람은 살라면 그 법은 휴지조각과 같은 법이 될 것입니다. 법이 있고 법의 표명이 있고 그 법을 모든 사람의 신앙과 삶의 기준으로 삼아 거기에 어긋나는 사람을 제재할 수 있는 권세를 교회에게 주셨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치리의 권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치리의 권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게 되는데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권세와 순결을 유지할 수 있는 권세인 것입니다.
Ⅱ. 질서 유지권(고전 14:33)
A. 그리스도의 법을 시행하는 권세
먼저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권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처럼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의 하나님 곧 질서의 하나님이라는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그리스도의 법을 시행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법은 성경의 계시의 형태로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중차대한 사명은 성경을 연구하여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인지를 탐구해내고 탐구한 그것을 드러내고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모든 성도들에게 그들이 볼 수 없었던 성경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조직적인 법들을 가르쳐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어떻게 무엇을 믿어야 되는지를 배우고,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익히게 됩니다. 소위 믿음의 규칙과 생활의 교훈이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법은 성경에 명백히 실려 있기 때문에 교회는 이 성경을 부지런히 탐구하고 성도들이 무지하여 어둠속에서 이 진리의 법들을 깨닫지 못해 부지불식간에 거짓된 것을 믿고 올바르지 않는 삶을 살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구석구석 성도들을 돌보는 이 일이 교회가 하여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셨더라면 하셨을 이 일을 교회에 위탁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권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이 진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법들을 찾아내고 이 진리 속에서 성도들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중차대한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제도와 구조는 이 한 가지 궁극적인 목표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조직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은 공연하기에 적합한 예배당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을 깨닫고 이해하고 가르침을 받고 그 법을 통하여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힘입어, 그리스도 예수의 법을 몰랐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믿고 멋대로 살았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그리스도인들답게 예수를 믿고 예수를 위해 사는 그런 지혜로운 성도들로 자라가게 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조직과 모든 제도, 모든 시설들 까지도 이 한 가지 목적에 다양한 방면에서 이바지할 수 있도록 구성이 되고 이러한 철학 속에서 이 모든 성경의 가르침들을 따라 조직화되고 이바지할 수 있는 기능으로 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감히 이러한 구도 속에서 교회가 지어지고 모든 조직들이 이루어지려고 애를 썼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밝혀두는 바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곧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명령이시니,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회에게 성경, 혹은 성경과 상응하거나 성경을 능가하는 법을 교회가 결정하여 만들고 성도들로 하여금 그것을 지키게 할 수 있고 심지어는 신앙의 양심의 자유 까지도 교회가 속박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 개혁파 정통주의 교회에서는 이러한 가르침이 성경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새로운 가르침을 만들 필요가 없고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그들이 믿어야 할 믿음의 규칙을 교리로 제시하고 살아야 할 교훈을 또한 가르침과 교리의 형태로 제시하여 삶과 지식을 아우르는 통일적인 신앙이 될 수 있도록 성도들을 지도하고 돌보는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이것이 교회에 주님이 부여하신 권세라고 믿는 것입니다.
B. 교회의 규칙을 정할 수 있는 권세
이러한 그리스도의 법을 구체적으로 보다 잘 효과적으로 시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교회는 규칙을 제정할 수 있는 권세를 물려받았던 것입니다. 많은 예가 나오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경에서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여기 등장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위한 규칙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사도는 은사의 문제를 가지고 교회가 단정함을 잃어버리고 교회가 혼란에 빠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원인은 사랑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사랑을 가지라고 교훈을 하는 한편 엄격한 규칙을 세워서 예언이 있을 때에는 어떠한 차서를 따라 예언하고, 방언이 있을 때에는 어떤 용도로 그 방언을 사용하라고 사도는 명백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통역하는 사람이 없이 교회에서 방언을 말하는 것을 금한 이유도 이러한 질서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도 미친 사람들이 모인 것 같고 종교적인 황홀경에 빠진 정신병자들의 집단과 같이 보이지 않고 진리에 의해 단정한 집단처럼 보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꾸게 그렇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이러한 충고는 교회의 규칙이 되었고 성경에 영감 받은 성경의 자리를 하게 되었고 당시의 모든 교회들이 준수 하여야 할 교회의 교훈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가 이제 중대한 선교적인 문제에 봉착했던 광경을 보게 됩니다. 즉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에 어떤 사람들은 너희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예수는 유대인 중에서 태어나셨으니 너희도 모세의 율법을 모두 지켜야 되고 알아야 된다고 가르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모든 율법에서 해방했으니 예수를 믿기만 잘하면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서 선교적인 커다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헬라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지혜롭게도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모두 모여 역사적인 제 1차 예루살렘 공의회를 실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모든 회의 끝에 원칙을 정하고, 그 몇 가지 원칙을 따라서 유대인들은 양해하고 이방인들은 그것을 설득함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구속을 이루신 것이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포함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율법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살아서는 안 되고 이러저러한 도덕적인 법들을 우리들이 지켜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함으로써 이제 그리스도의 법을 교회 속에 실현하는 그런 훌륭한 일들을 하였고 그 일들이 교회의 모범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과 상반되지 않는 한 이러한 교회의 규칙, 교회와 노회와 총회에 의해서 제정된 이 규칙을 주님이 주신 권세로 이루어진 규칙으로 알고 거기에 복종하는 것이 교회의 질서를 따르는 행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교회의 규칙은 성령에 의해 영감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질 수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이 잘못 결정함으로써 중대한 오류를 남기게 되는 그러한 슬픈 역사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대한 예수교 장로회 33차 총회에서 결의하였던 신사참배에 관한 건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교회는 이제 많은 교회가 신사참배에 반대하고 신앙운동을 펼치며 순교를 각오하고 이 모든 일제의 만행에 항거하였습니다마는 그러나 회유와 협박, 이 모든 것에 굴복한 총회의 주권자들은 거기에 굴복해서 모든 교회에 시달하기를 “이제 신사참배는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이 일을 행하여 내선일체를 기하자.”라고 하는 그런 결정을 가결하였습니다. 많은 뜻있는 사람들은 성경에 계시되어있는 그리스도의 법과 상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강력하게 철회하기를 요구하였지만, 이미 회유와 협박에 의해서 넘어간 지도부들에 의해서 이것은 채택이 되었고 심지어 이것에 대해 항의하는 교회에 이 사람들이 못을 박고 교회를 폐문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결정이 역사적으로 내려지게 되었지만 후에 이것은 곧 잘못된 결정임이 밝혀지게 되었고 그 결정은 철회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교회에 내려졌던 모든 징벌들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법에 어긋난 것이었기 때문에 교회가 복종할 필요가 없는 잘못된 법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명백한 오류가 있을 경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교회와 노회와 총회들은 어떤 규칙들을 제정함에 있어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야 하고 자신들에게 주신 권한을 사용하되 남용하지 말고 명백한 그리스도 예수의 법에 부합하는지를 자신들이 세운 규칙을 잘 상고하여 후회 없이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경우가 아니라면 교회는 이 법에 온전히 굴복하고 복종하는 자세를 보여야 하는 것이 교회의 질서입니다.
저는 중보기도라고 하는 말을 그렇게 많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누구를 위해 중보기도 한다고 할 때에 그 중보의 의미와 성경에 나타난 중보라고 하는 의미 자체가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고, 또 옛날에는 그 뜻이 같은 뜻이었다고 할지라도 언어라고 하는 것은 시대를 흘러가면서 용법을 따르는 것이니 우리가 같은 중보의 말이라도 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사회의 규약으로 통용되게끔 시대가 변했다면, 그것은 형태는 그대로 있지만 의미는 이미 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굳이 우리가 중보기도라고 하는 말을 철회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중보기도 하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를 힘입어서 그가 못하는 기도를 내가 해준다는 의미에서 중보기도라고 말하는 것이지, 예수님을 자기가 대신한다는 의미에서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 해 전 총회는 위원회에서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을 내리기를 “중보기도라고 하는 이 표현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그 기도에 의해 한정하여 부를 것을 정한다.” 라고 하였고 사람이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는 중보기도라고 부르지 말도록 그렇게 규칙을 제정하고 의결을 하였습니다. 그 후로부터 나는 교회에 중보기도라는 말들을 사용하지 말도록 교역자와 여러분에게 적극 권했고 어느 정도 이러한 가르침의 이치들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이 말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말로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나는 “섬김 기도”라고 고치자고 제안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비록 우리가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워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시행하는데 있어서 이바지한다고 믿는 한 그렇게 상회인 총회에서 여러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심사숙고를 거쳐 결정된 그 일에 그 이하에 있는 모든 노회와 교회들이 복종하는 것이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는 질서라고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서 총회의 결정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총회는 총회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총회 의무 금을 교회마다 부과 하였습니다. 교인 한 사람당 서울 사는 사람은 만원, 지방 도시에 사는 사람은 칠천 원, 읍 단위 리 단위 이하에 사는 교인은 오천 원씩 이라고 정해놓고 거기에 세례교인을 곱하여 정확하게 총회에 납부하도록 지시를 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이 결정을 두고 많은 목회자들 사이에 의논이 분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돈이 과연 잘 쓰여 질지에 대하여 많은 의구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신문에 총회의 은급기금을 두고 몇 십억 되는 그 돈이 문제가 되어서 재판을 하고 신문에 오르내리는 광경들을 보면 마음이 상하고, 우리가 내는 의무 금들 그 어마어마한 돈들이 총회에 의해서 올바로 사용될 지에 대해서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들의 몫이고 우리는 총회가 그렇게 결정하였으니 우리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최대한 그 일에 복종하는 것이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가 총체적으로 예수의 통치를 받는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이 기금을 내게 되었을 때에 교인들이 갑자기 불어났습니다. 그래서 교직원 중 한 사람이 이것을 내면서 절반 정도만 내자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였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해도 그대들이 우리 교회까지 그렇게 속임수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교회를 보필해야지,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 다른 교회가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교회는 총회에서 결정 되었으니 정확하게 세례 교인들을 헤아리고 에누리 없이 거기에 곱하기 정식 금액을 해서 돈을 내라.”고 지시를 했고 여러 차례 매 년 그 일을 해오고 있고 상당 금액의 돈을 교회 의무 금으로 교회에서 총회에 납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 그 돈을 사용한 것은 그분들의 책임이고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질서를 이루는 이 일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이 아니시고 세례요한에게 죄 씻음을 받을 필요도 없는 분이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질서라고 믿으셨기 때문에 예수는 부끄럽게도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이제 메시야로서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노회는 이러한 총회의 권위에 굴복하고 개 교회도 여기에 굴복하고 그리고 교회는 노회에, 그리고 개 교회의 성도들은 개 교회의 당회에 복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이 시행되도록, 만들어 가도록 이렇게 교회는 새로운 규칙을 제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목사와 교사와 장로와 집사들을 세우라고 말했지만, 구체적으로 이 일들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서 장로의 자격이 무엇이고, 임기가 얼마이며, 그는 어떠어떠한 사람이어야 하고, 목회자는 어떠어떠한 사람이어야만 목회자가 될 수 있고, 어떠 어떻게 신학을 공부했어야 된다 라고 하는 조항들, 그리고 집사는 어떤 사람을 세워야 하고 세운 집사들은 어떻게 어떻게 관리되고 유지되어야 한다는 조항들, 어떤 사람을 선교사로 뽑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선교사로 파송해서는 안 되는지, 파송된 선교사가 어떤 일을 행할 때는 그 선교사 직을 파하고 다시 본국으로 소환해야 하는지를 규칙들을 제정하는 것은 교회에 주신 권세이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법을 온전하게 시행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이러한 규칙을 제정하는 일은 쉼 없이 계속 될 것입니다. 생활과 교회에 운영에 관한 규칙은 물론이거니와 한걸음 더 나아가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그러한 규칙들이 작성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교리인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성경에 들어있고 이것이 성경의 진리라고 생각하며 많은 교회들이 전체의 회의를 통해 채택되는 것은 “교의”라고 부르고 교회와 목회자가 성경의 연구와 탐구를 통해서 그것들을 조직적인 형태로 진술해 내는 것을 “교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교회는 끊임없이 작성하여 보다 더 그리스도의 법을 성도들이 잘 실행할 수 있도록 이런 규칙을 만들 수 있는 권세를 교회에 주셨고 이런 규칙들에 항거하는 것은 교회의 질서에 항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법한 절차에 따라서 교회의 규칙이 제정될 때에 옳지 않거나 성경의 원리에 위반된다고 할 것 같으면, 자신의 의견을 적절하게 질서를 따라 표명하여 반영되도록 할 것이며, 채택된 규칙에 대해서는 거기에 준수하고 복종함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법을 이루는 것이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우리 교회에서 노회를 하였을 때, 어떤 재판의 사건을 두고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교회 마당에 와서 피켓을 들고 데모를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중에 어떤 사람들은 악에 치받혀서 어느 목사의 이름을 부르면서 너도 목사냐고 고함을 치면서 욕지거리를 하는 광경이 거룩한 교회 마당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을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 질서를 현저히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결정이 아주 현저하게 성경의 원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이해 당사자들에게 누군가에게는 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실이 되는 그러한 결정의 손익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결정에 순복하고 교회가 세우신 그리스도 예수의 모든 통치를 기꺼이 질서 속에서 받아들이는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공경하고 섬기는 성도의 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세를 교회에 주셨으니 교회는 이 권세에 굴복하여야 하고 모든 성도들은 이 질서를 유지하도록 주신 교회의 치리의 권세에 복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상식을 의지해서 이러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치리의 권한이 대체 무엇이고 사람이 세운 규칙, 교회가 세운 규칙이 무엇이기에 나 같은 사람을 속박하느냐고 항거할 때에 그는 그리스도를 막 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그를 막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정의 제재를 가하여 그를 교회에서 끊어내고 적절한 징벌을 함으로써 이렇게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고 교회의 질서에 항거하는 이 무분별한 일들이 누룩처럼 온 성도들에게 퍼지지 못하도록 기강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기로 이름난 경찰이 영국의 경찰입니다. 그리고 월급을 많이 받기로도 유명한 사람들이 영국 경찰입니다. 말을 타고 순찰하는 런던의 경시청 순경들은 관광객들이 나하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그러면 아주 친절하게 내려와서 옆에 같이 서서 사진을 찍고 안아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단 공권력에 항의한다고 생각될 때에 그들은 칠십 센티의 박달나무로 된 곤봉으로 마구 내리쳐 시민의 머리통이 깨지고 피가 철철 흐르는 일들은 예사로 있는 일입니다. 나는 우리나라 경찰이 잘못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잘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경찰에게 폭언과 폭행을 퍼붓고 단속하려는 경찰을 차에 매달고 몇 백 미터씩 달리고 심지어는 차에 치게 해도 이렇게 가벼운 형벌을 받거나 벌을 주지 않는 나라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미국만 하더라도 도로상에서 교통경찰에게 제지를 당하면 차를 세우고 운전대위에 두 손을 얹고 머리를 숙인 채 그림처럼 앉아 있어야 합니다. 문을 벌컥 열고 나오면 총알이 날아옵니다. 아마 다리나 손 같은데 쯤 사격을 해서 총에 맞는다고 할지라도 그 경관은 면책될 것입니다. 만약에 차에 앉아 있어도 손을 운전대 위에 올리지 않고 밑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는 것처럼 손을 더듬으면 유리창을 깨고 총알이 날아옵니다. 그렇게 나라마다 공권력을 세우는 그 일을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바로 그 나라의 기강을 유지해 나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경찰을 하려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합니다. 월급을 많이 주어서라도 모든 부조리의 유혹으로부터 이 경찰들을 벗어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대우를 해주고 최고로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해야 합니다. 일본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한 번 일본에서 전해 나온 소식을 TV뉴스를 통해 보면서 한없이 일본이 부러웠습니다. 일본같이 질서가 잘 잡힌 나라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서 경찰청 앞에서 화염병을 던지면서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난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난 줄 알았더니 그 경찰서의 과장이 뇌물을 조금 먹었습니다. 그런데 온 시민이 화염병을 경시청에 던지면서 시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마 오늘은 경찰 중 아무도 뇌물을 안 먹었대. 그러면 그때야 비로소 깜짝 놀랄 겁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냐고 말입니다. 한동안 그 그림이 마음속에서 떠나지를 않았어요. 야! 과장이면 죄송합니다마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위에 얼마나 많은 상관들이 있는데요. 졸개입니다. 그 사람이 봉투 하나를 받았다고 온 시민이 경시청에 화염병을 던지면서 데모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소에 일본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이 경찰에 대한 마음이 어떠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직자의 수준이 아니었는지 내가 묻고 싶어요. 그러니 이 모든 경찰의 권력을 움직이는 정치인들은 얼마나 도덕적이어야 합니까? 그래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기강이 올바르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 자신의 왕권을 통치하고 다스리는데 사용할 수 있게 하셨는데, 주님은 보이지 않지만 교회의 보이는 질서, 목회자와 교회에 세우신 합법적인 일꾼들에 의해서, 교인 총의에 위탁을 받아서 이러한 통치의 권한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순결을 유지할 수 있는 권세인 것입니다.
Ⅲ. 순결 유지권 (마 18:15-17)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형제가 악에 빠지게 되면 그에게 개인적으로 충고하고 그를 바로 잡을 것이요, 또 두 세 사람의 증인으로 이 일들을 하게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로부터 정식의 치리를 받게 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명백하게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법이 있고 법을 따라 사는 사람을 상주지도 않고 법을 어기는 사람을 벌주지도 않는다면 그 법은 있으나 마나한 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권징을 주셨습니다. 권징 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은 교회가 성도들에게 베푸는 징벌인 것입니다. 이 징벌을 베풀어 교회의 기강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순결을 유지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교리를 믿는데, 그때에 교회는 그것은 바르게 믿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이렇게 믿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타일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이것들을 타이르되 끝까지 잘못된 교리를 믿겠노라고 고집을 하면 그 사람은 징벌을 하여야 합니다. 또 그가 어떤 잘못된 삶을 살 때 그런 삶은 성도의 삶에 어울리지 않으니 그렇게 살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사랑으로 권고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 줍니다. 그러나 끝까지 잘못된 그 길에서 돌이키려고 하지 않고 개전의 정이 없을 때 마음 아프지만 교회는 징벌함으로써 그를 교회에서 끊어냄으로 이러한 죄들이 누룩과 같이 교회에 번지지 않게끔 보호하여야 할 그러한 권징의 권세를 교회에게 주신 것입니다.
A. 권징의 목적
이 권징 할 수 있는 통치의 권세는 원래 목회자에게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교회 전체에 준 것이고 교회 전체에 준 것을 그리스도께서 대의적으로 목회자와 교회의 장로들에게 위임하여 당신의 일꾼들로 하여금 그 교회를 치리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이 일들이 바로 교회가 하여야 할 순결을 유지할 수 있는 권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한 편으로는 이런 죄에 연루되지 않는 자들에게 이런 죄에 연루된 자들을 징벌함으로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여 자기를 성찰할 기회를 갖게 만들어 주고, 또 이러한 죄를 지은 당사자에게는 참회하고 돌이킬 기회를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행사하시는 통치의 권한에 온전히 복종하는 질서 있는 교회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B. 권징의 시행
이러한 권징은 실제적으로 다음과 같은 절차를 따라서 시행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악에 빠지게 되면 이에 대한 구체적인 고발이 있고 또 고발이 없다고 할지라도 교회가 자체적으로 이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에 장로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이렇게 교회의 이런 저런 일을 맡아서 경영에 참여하고 이런 저런 일을 맡아서 직접적으로 몸으로 봉사하는 일이 장로들의 본분이라기보다는 이렇게 교회 속에서 성도들을 심방하고 성도들을 돌보며 목회자와 함께 성도들의 생활을 잘 총찰함으로써 그들이 잘못된 것을 믿고 있다면 바로 잡아주고 교리적으로 그들을 양육하고 만약에 그들이 잘못된 생활을 하고 있다면 높은 도덕성으로 경고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주며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경고하고 그리고 그의 영혼이 어떻게 상처받고 있는지를 헤아려 목회자와 함께 치료하고 고쳐주는 일들에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들이 사실은 장로들이 해야 할 고유하고 중요한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목회자와 마찬가지로 장로가 될 사람들의 이 모든 영적인 수준도 현저하게 낮아져서 이제는 이런 것들이 상당한 변형을 이루게 되었고 그리하여 교회는 부패한 구조 속에서 돈이 많은 사람, 큰 돈을 헌금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사회에 내다 놓으면 지위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의 권력을 빌려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 심지어는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 등등으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준에 의해서 장로들을 세우는 것은 교회가 먼 훗날 스스로 자신의 발목을 잡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에 있어서 교인들은 심사숙고하여 사람들을 선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한 후에는 그들이 부족해도 그들의 치리에 복종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런 장로들을 뽑을 때에는 기도를 많이 하고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차대하고 독특한 일인지를 생각하고 그 사람의 사람됨과 신앙, 인격과 모든 생활의 태도들이 이러한 일을 행하기에 적합한 사람인지를 물어야지, 이 사람이 나와 친척인가? 이 사람이 얼마나 오래 교회에 다녔는가? 헌금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얼마나 우리 편을 들어주는가? 이렇게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부패한 교회가 이런 일들을 위하여 막대한 권한을 행사하고 어떤 사람들을 위하여 편을 만드는데 이바지하도록 해서 교회의 장로들을 목회자의 심복으로 채우거나 심지어는 교인들이 자기의 편을 들어서 노조 운동하는 사람처럼 목회자에게 대들거나 당회에 대들 수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대변인으로 세우기 위하여 장로로 뽑는 이것은 마지막 날에 모두 주님 앞에서 심판 받아야 할 막된 행동인 것입니다. 장로 선거가 있을 때에 어느 교인이 전화를 걸어서 “목사님은 도대체 의중이 무엇입니까? 담임 목사님의 의중을 따라 투표하고 싶습니다.” 이런 전화가 나한테는 직접 못하고 우리 집사람을 통해 들어왔어요. 그래서 내가 일러 주었습니다. “니 마음대로 하세요.” 목회자가 무슨 할 일이 없어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결국은 자기가 가르친 것만큼의 안목을 성도들이 갖게 마련이고 그 안목을 따라서 투표를 하는데 결국은 자기가 뿌린 목회의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도 되지 않는 사람을 장로로 세웠다하면 여러분의 영적인 수준이 그 수준이고 그 수준은 결국 제가 목회한 수준입니다. 그러니 수준에 맞는 사람들끼리 살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어요? 이제는 당회가 구성이 되었고 앞으로는 어떤 사람을 일꾼으로 세워야 될지를 당회가 깊이 심사숙고하고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정리에 치우치지 않고 규칙과 규정을 따라서 모든 장로들이 고민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일꾼들을 세우자고 할 것이고, 그것에 대해서 여러분은 한 번 더 투표를 해서 아닌 사람들을 가려내고 올바른 사람들을 장로와 일꾼으로 세우게 될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에 있어서 질서를 따르게 되어있고 바로 장로는 이러한 권징을 실행하기 위한 일꾼으로 세워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교회에 명백한 죄가 있다 할지라도 이 권징은 오직 교회의 당회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것이니 개개인이 누구의 죄를 정죄하고 그를 성도의 교제에서 떼어내고 상대도 해주지 않는 이런 것은 영적인 린치인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영적인 린치를 가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당회에 의해서 그 사람이 적절하게 징계를 받기 전 까지는 성도들은 모든 성도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한 지체로 생각하고 명백한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납하고 성도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유업과 분깃을 여러분과의 교제 속에서 누릴 수 있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권징은 크게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작은 출교이고 또 하나는 커다란 출교입니다. 작은 출교라고 할 때에 이 출교는 익스커뮤니언(excommuion)인데, 익스는 떼어 낸다는 뜻이고 커뮤니언은 여러분이 신앙고백 속에서 날마다 고백하는 성도의 교통 바로 그것입니다. 작은 출교는 몸은 교회에 내버려두고 성도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유익, 예배의 참여, 회의, 성도의 모든 교통 등은 허락하되 성찬에서 그를 떼어내는 것입니다.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그를 떼어내는 것입니다. 의미는 네가 이렇게 이렇게 옳지 않은 교리를 믿거나 바르지 않은 생활을 하였고 교회가 누차에 걸쳐서 경고하고 바로 잡으려 했음에도 네가 많이 항거하였으니, 이제 네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되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내려진 결정이 바로 '성찬정지'의 결정입니다. 그는 모든 성도들이 성찬의 떡을 떼고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게 될 때에 그는 징벌 받은 자로 거기에 참여할 수 없으며 만약에 징벌을 받은 상태에 그 성찬에 참여하게 되면 두 번 죄를 짓고 교회와 자신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가 이런 정도의 징벌을 내리는 것에 대해서 아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분 나빠서 다른 교회로 옮겨가면 모두 환영해 주고 대접해 주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교회에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까짓 것 떡, 그까짓 것 포도주, 물론 집의 냉장고에 가면 포도주 한 모금보다 더 많은 음료가 있고 한조각의 떡보다도 많은 먹을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그 떡은 이 떡이 아니고 그 음료수는 이 포도주가 아닙니다. 그가 만약에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를 알고, 그가 못 박혀 우리를 위해 죽으신 대속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는 성찬에서 제외된 그 순간에 얼마나 통절하게 이런 성찬의 교통에서 끊어내어짐을 당하여야 했던 자신의 무질서한 믿음과 행위에 대해서 회개하겠습니까? 자! 보십시오. 자식이 있습니다. 부모가 보기에 아주 못됐어요. 그래서 벌이 필요합니다. “어딜 앉아서 숟갈을 들어? 일어나. 들어가서 있어. 넌 임마, 가족들하고 밥 먹을 자격도 없어. 손들고 서 있어.” 그럴 때에 그 아이가 먹지 못하는 밥은 그냥 밥이 아닙니다. 그렇게 징벌을 받고 있는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빠, 잘못했어요.” 라고 말을 해야지, “에이 씨, 이 집에서 안 주면 뒷집에 가서 얻어먹지.” 하고 뒷집으로 가버린다면 새끼도 아니지. 그것입니다. 열린 교회를 세우고 15년을 목회해 오는 동안에 가장 후회되는 대목이 있다면 저는 이것입니다. 사실 교회를 세우던 39세 나이에 나는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던 부분이 많이 있었던 걸 고백합니다. 열린 교회가 치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치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치리하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뼈저린 후회가 됩니다. 특히 근래 몇 년 동안 일어났던 작은 무질서의 풍조들을 보면서 저는 15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했던 목회의 씨앗을 저는 거두는가보다 라고 하는 쓰라림에 여러 날들을 고뇌하여야 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교회에 대한 이치를 분명히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알았어도 나 자신의 우유부단함, 때로는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영혼들을 어떻게 때려서 기를까? 사랑으로 보듬고 눈물로 목회하면 이들이 더 훌륭하게 변할 수 있을 거야 라고 하는 그러한 생각, 어떤 악들은 너무나 이 사회에 일반화되어 있어서 치리하면 온 교인이 거의 치리를 받아야 될 정도의 죄악들, 이런 것들 속에서 항거하기에는 너무 역부족인 나 자신의 부족함, 이러한 등등 많은 것들이 요인이 되어서 주님의 교회를 이런 면에 있어서 엄격하게 이끌어오지 못했던 것은 제가 죽은 후에도 주님께 가서 사죄드리고 용서를 받아야 할 대목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또한 주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자들을 내가 너희에게 보여주리니 너는 그들의 목자가 되 거라.” 는 말씀 속에서 여러분 속에 있는 많은 죄들을 사실은 상처와 그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연약함으로 보면서 덮을 때가 많았던 것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나 많이 후회되는 대목이고 최근에 몇 년 동안 일어났던, 작기는 하지만 무질서의 조짐을 보면서 저는 이 교회의 권징의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다시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권징을 엄격하게 시행했기 때문에 교회 규모가 지금의 절반 쯤 밖에 안 된다고 하였다고 할지라도 과연 그것이 나쁜 것이었을까? 생각하게 되고, 이런 권징을 엄격하게 했기 때문에 지금은 내 옆에서 나를 사랑하고 존경해 주는 사람이 다른 교회 가서 섬기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나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반성이 많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얼마간의 시간을 지나면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가 다시 태어나서 한 번 더 교회를 세운다면 이번에는 이 권징을 철저히 시행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교인들을 만들고 싶다고 하는 절실한 소망이 내 마음속에 생겼습니다. 이후로 이렇게 커진 교회를 이끌어갈 때에 이제 이전에 시행하지 않았던 권징을 시행하게 될 때에 과연 여러분이 교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며, 그리고 나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어떤 마음을 갖게 될지 두려움과 기대가 교차합니다. 한번 최악의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까? 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내가 고집스럽게 이 일을 엄격하게 시행하려고 하면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노쌤턴 교회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어쩌면 목회자인 내가 사랑하는 여러분에 의해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교회에서 이렇게 이제까지 해오던 것처럼 우유부단하게, 그래서 이런저런 죄를 짓고 이렇게 저렇게 제멋대로 믿는 교인들이 있어도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덮어놓아 군데군데 곪은 교회를 끌어안고 일생을 하직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잘 산 삶일까? 그리고 내가 세운 열린 교회에서 축출을 당하고 천막을 치고라도 정말 엄격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손바닥만 한 작은 교회를 목회하다 죽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잘 사는 것일까를 생각을 하며 마음에 많은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참 으로 좋아 보이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일 수 있고, 참 으로 나빠 보이는 것인데 사실은 하나님 보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가 되고 욕지거리를 당하고 교회와 자신의 집이 불태움을 당하였던 초대 교회의 사람들의 고난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그것은 향기로운 제사였고 아름다운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15년의 목회생활은 너무 비겁했던 날 들 이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권징을 행할 수 있는 권세를 교회에게 주셨으니 교회는 고도의 도덕성을 유지하며 사랑과 은혜 안에서, 엄격한 절제 속에서 이 권징들을 시행함으로 교회의 통치가,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가 교회 속에 시행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권징이 있으니 커다란 출교가 그것인데, 이것은 어떤 사람이 잘못된 교리를 믿거나 교회의 질서를 현저하게 항거하고 잘못된 생활을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려 하지 아니할 때 교회는 여러번 충고하고 정해진 절차에 의해서 권고하되 끝까지 복종하지 않을 때에는 그 사람을 교회의 모든 모임에서 물리적으로 끊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죄를 지은 당사자를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남아있는 성도들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어느 대학교에서 사 오백 명의 사람을 한 곳에 모아놓고 재미있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아주 불쾌하고 나쁜, 악한 소문을 말해주면서 사람에게 사람으로 얼마나 전해지는 지를 조사하고 그리고 좋은 소문을 내고 어디까지 전해지는 지를 알아봤더니 좋은 소문은 가다가 그냥 멈춰버려서 뒷사람은 못 들었고 나쁜 소문은 거기 모인 사람 86%의 사람에게 전달되었고 알아들은 사람은 모두 그것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한 음식점이 음식을 아주 잘했을 때 6개월 동안에 여섯 명의 사람에게 전파된답니다. 여섯 명의 사람에게 그 음식점 너무 잘하니 한 번 가보라고 권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만약에 음식이 맛이 없을 때 6개월 동안에 26명의 사람에게 그 집 음식은 형편없다고 소문이 난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맛있게 먹었기 때문에 선전하는 사람은 소극적이고 맛없게 먹었기 때문에 화가 나는 사람은 적극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가 봐, 괜찮아.” 정도라고만 말하는데 반면에 음식 맛이 없어서 손해를 본 사람은 전화해서 그 집은 절대 가지 말라고 그렇게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도시락 싸가지고 말리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한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이 은혜가 전파의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전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이 악하게 돌변해서 부패함에 빠지고 잘못된 교리를 믿고 이단을 추종하거나 아주 부도덕한 삶에 빠지게 되면 그 사람과 마음을 터놓고 교제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 사람을 두둔하게 됩니다. 거의 예외 없이 두둔하게 됩니다. 아주 친했는데 이 사람이 악을 행했을 때에 준엄하게 “당신이 틀렸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기 때문에 남아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마음이 아프지만 끊어내는 것입니다. 끊어내게 되면 그는 교회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제지당해야 하고 제재해야 마땅하고 성도들이 만약에 교회에서 출교된 사람과 교회 바깥에서 만나거나 혹은 교제를 하거나 혹은 서신 같은 연락을 통해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게 될 때는 그도 역시 동일하게 징계를 받게 되어 있는 것이 교회의 법입니다. 왜냐하면 출교는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한 병적인 존재를 끊어내는 것인데, 그와 은밀하게 교통하는 것은 이러한 의도를 가진 그리스도 예수의 순결을 유지하는 권세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순결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모이는 그 모임은 연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성도들이 모이는 이 모임은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고 진리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이 일 이외에 다른 목적으로 성도들을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여러분 가운데 이런 종류의 모임이 있다면 물어볼 필요도 없고 이제까지 잘못 됐던 것들을 정중하게 회개하고 회원들에게 선포하고 해산하여야 합니다. 다시 누군가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명백하게 지시가 되었는데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순결을 유지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완전한 사람이고 잘난 사람이기 때문에 죄를 지은 성도를 출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만약에 아주 큰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통절하게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한다면 그는 출교할 수 없습니다. 간음한 여자도 주님께서는 용서해 주시고 다시는 가서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통절하게 회개하고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그것은 물리적인 출교보다도 훨씬 더 그를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회개의 정이 없어서 출교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후에 진정으로 참회하고 뉘우치면 교회는 해벌하여 그를 다시 입교의 절차를 거쳐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야 하고 이때에 모든 성도들은 그가 이전에 행했던 잘못은 잊어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공평하게 맞아 주어 교회에서 모든 교인의 권리를 행사하는데 있어서 지장을 받지 않게 하는 그것이 성경의 이치인 것입니다.
Ⅳ. 봉사권 (행 4:34-35)
주님이 교회를 이처럼 순결하고 깨끗하게 만들기를 원하셨던 것은 바로 봉사의 권세를 교회로 하여금 바르게 이행하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 봉사의 권세는 성경에 기록된 바, 그 중에 핍절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느니라 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셨던 봉사의 일들을 할 수 있는 권세를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A. 섬김의 대상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아니 영원히 섬겨야 할 세 대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린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며 높여 드립니다. 또 하나의 대상은 교회 자신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 봉사합니다.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봉사하고 사랑하는 자녀들을 끌어안고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육하고 주의 교훈으로 훈계하여서 예수다운 사람으로 만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혼자 어느 순간에 신앙의 결단을 하고 예수 믿은 것처럼 여기지만 여러분도 한때는 핏덩이였습니다. 똥오줌을 못 가리는 교인이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핏덩이 같은 여러분을 끌어안고 돌보고 씻겨주고 가르쳤습니다. 방금 태어난 핏덩이 같은 여러분을 목회자들이 가슴을 풀어 젖을 물리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며 부모의 마음으로 여러분을 길렀습니다. 어렸을 때 좀 자라니까 삼지 사방 돌아다니면서 일을 이렇게 시작할 때에도 많은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무릎을 꿇고 기어 다니면서 여러분을 붙들면서 여러분이 벌려 놓은 많은 물건들을 치우고 정돈하기를 마치 서 너 살짜리 아이를 엄마가 따라다니면서 무릎박이 아프도록 화장대며 TV대며 정돈하는 것과 같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많은 무명의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 속에서 목회자의 가르침과 성도들의 교통 속에서 그 희생을 딛고 오늘날의 여러분이 된 것입니다. 잘 된 것은 그분들의 희생을 통해서 주님이 베푸신 은혜요, 못된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맘대로 멋대로 살아서 이런 교회의 섬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기인하게 된 결과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묻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이 그렇게 교회 자신에서 섬김의 대상이 되었고 또 교회가 세 번째로는 세상을 섬기게 되어있는데 그러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섬김의 대상이 되어서 섬김을 받았고 하나님께로 부터도 은혜를 받아서 그렇게 혜택을 입은 은택의 대상이 되었다면 이제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여러분을 그렇게 길러냈으면 이제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합니까? 정말 가슴이 답답한 것은 이러한 교회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많은 교인들이 생각하기를 교회는 출석해 주는 곳이다. 전도사 때부터 담임 목사 옆에 있으면서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담임 목사님이 정문 앞에서 오고가는 교인들에게 교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때부터 나는 목회하면 절대 그런 인사 안하리라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여러분 아무도 나에게 출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를 못 받아 보셨을 것입니다. 혹시 받았다면 오발 나온 겁니다. 제 정신에서 나온 소리가 아닙니다. 뭐가 감사합니까? 지 영혼 위해서 교회 나온 것인데 뭐가 감사합니까? 나는 여러분의 교회 출석을 인해서 감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면 나를 위한 출석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살기 위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 출석도 남을 위해 나와 주는 건데, 하물며 봉사하는 것은 더더욱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봉사를 명할 권리가 있습니다. 교회는 엄마에요. 엄마가 자식에게 물 떠오너라. 방을 쓸어라. 할 때에 물그릇을 집어치고 방비를 발로 찬다면 후레자식입니다. 에미를 다시 안 보기로 작심한 새끼에요. 그래서 우리 장로나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찾아가서 이것 좀 해달라고 애원하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뒤에서 참 마음이 아프죠. 저렇게 가서 부탁을 할 때에 부탁을 하면 왕이 신하에게 떡 하나 던지듯이 목사님이 그렇게 사정을 하니 한 번 해 보죠. 하사품 내리듯이 그렇게 직분을 하나 맡는 그것이 성경의 정신인지를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상당수가 교회 안에서 무위도식하고 있습니다. 뭘 하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출석하지 않습니까?” 글쎄 그것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하는 거라니까요. “헌금하고 십일조 하지 않습니까?” 그건 기본 의무입니다. 여러분, 장사하는 사람이 세금 안내는 것 봤습니까? 기본적인 의무에요. 그것은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구역 예배 빠짐없이 참석합니다.” 구역 위해서 참석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영혼 위해서 참석하는 것이거든요. 이게 무엇입니까? 도대체 어디서 하나님을 섬기시는지 내가 묻고 싶습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여러분은 카톨릭 교인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카톨릭에서는 사제가 성도에게 명령하면 “아니요.”가 없습니다. “자, 주일 학교를 가서 좀 섬기십시오.” “아, 사람 잘못 보셨어요.” 개신교에서는 의례적으로 있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목회할 때에 뜻을 세운 것 중의 하나가 하도 담임 목사님이 전화통을 붙들고 “아무개 성도님, 집사 좀 꼭 해 주십시오.” 삼십 분씩 통화를 하면서 안하겠다는 놈을 시키는 것을 보면서 난 안하겠다는 사람은 안 시킨다. 그게 오늘까지 15년 동안 내려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 교회 6년을 출석했는데 아직까지 집사가 안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위로 성도에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머리인 내가 손을 명하여 이 꽃잎을 뜯게 명령할 수 없겠으며 이 물을 따르게 명령할 수 없겠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한 몸일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B. 연약한 자들을 돌봄
주님이 33년을 이 땅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머리 둘 곳이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항상 곤궁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 가난하고 병든 자들, 어둠 가운데 있어 무지한 사람들의 이웃이며 친절한 아버지셨습니다. 그래서 늘 그들 가운데에 주님이 계셨습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는 의로운 사람들을 떠나 스스로 자신이 죄인이요 병들었다고 생각하는 연약한 사람들에게 내려가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머리 둘 곳이 없는 고단한 생애였지만, 생애 전체는 자기를 아낌없이 주시는 생애였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섬기며 살아가시던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이 많은 위로와 넘치는 재물과 세상의 부귀함으로 채워주시는 생애가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황금 옷을 입고 황금 마차를 타고 가난한 자들 가운데 가셔서 그 화려한 가마 위에서 먹을 것들을 던져 주신 부모로서가 아니라 그분과 꼭 같이 그들 중의 한사람처럼 그렇게 내려오셔서 고난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러면서 연약하고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랑하는 여러분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을 돌보시고 자기에게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은 찾아가셔서 돌보고 위로하시며 자기를 다 버리신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려는 사람들은 이 봉사의 권세가 무엇을 누리고 주관하고 호령하는 권세가 아니라 예수와 꼭 같이 이 고난의 길을 가며 핍박을 받으며 수고하며 많이 헌신하고 오해를 받으며 멸시를 받고 주님을 경외할 줄 몰라서 이 질서를 어긋나게 행동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짓밟히고 핍박을 받는 그 길을 뒤따라가는 것을 기억하고 그 모든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교회를 위해 동참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이 부활의 경험 속에서 우리의 속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날 부분적으로는 알아도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살지 못했던 많은 날들, 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무지와 어둠 속에 갇혔기 때문에 길이 무엇인지 몰라서 마음대로 살았던 날들, 우리에게 많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깊이 내려놓고 주님 앞에 진실하게 뉘우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충만한 왕이 되시도록 그래서 목회자로부터 주일 학교 학생에 이르기까지 이 신앙 안에서 이 그리스도의 유기체적인 통치에 복종하며 살아있는 날 동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고단한 교회에서의 섬김을 마치고 주님 우리를 부르실 때에 주님이 보시기에 정말 예쁜 교회, 아주 아름다운 교회가 남아서 우리의 후손들과 이 땅에 방황하는 영혼을 담고 우리들이 변화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변화되게끔 섬길 수 있는 그런 그리스도의 교회를 남겨놓고 죽는다면 우리가 바람처럼 살다간 모든 날들이 주님 앞에 헛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를 여덟 번의 설교로 마무리 하면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교회의 질서를 기뻐하십시오. 온전히 그분의 통치에 복종하며 그 안에서 행복한 성도들이 되십시오.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