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 제 6과
녹취자 : 장주은
이제 구역장 공부 제 6과를 시작하겠습니다. 이것은 신학생들을 배경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학업과 사역의 틈바구니에서 고통을 받고 그러지는 않을 테니까 거리감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똑같이 우리에게도 같은 씨름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가려고 애쓰고 힘쓰지만 끊임없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때로는 교회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는 기쁘고 감사할 때도 있지만 또 고통 받고 아플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속에서 어떻게 그런 것들을 견디며 믿음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 1번입니다.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우리 기억에 남는 충성스러웠던 목회자나 신학생, 혹은 지체들과 그들로부터 감화를 받았던 일화들을 두 사람의 지체에게서 들어봅시다.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늘 언제나 이런 것들은 그날 가서 닥쳐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한번 구역장으로서 순장으로서 오랫동안 같이 사귀었을 테니까 이런 것들에 대한 간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누가 가능한 답변자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서 그런 사람들에게 귀띔을 하고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쓰고 그럴 정도는 아니지만 마음속으로 준비해서 공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간증을 하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주위에서 너무 신실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산 사람들은 화젯거리가 잘 안됩니다. 항상 문제를 일으키고 나쁜 사람, 이런 사람들이 화젯거리가 되어서 이 땅의 신실하고 경건한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구역장이나 목회자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순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타락하고 더러운 것도 아닙니다. 아주 지저분하고 더러운 연못에서도 그 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이 피어나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이것입니다. 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말씀이 최고지만 그 성경말씀을 체화해서 살아가는 어떤 모본이 있다고 하는 것들을 우리가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찾아보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경험을 나눕니다.
그 다음 2번입니다. 내가 경험한 부흥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나누어 봅시다. 또 자신이 경험한 특별한 영적 부흥에 대해 이야기 해 봅시다. 이것은 하나의 스토리니까 못 읽을 것이 없습니다. 읽은 다음에 자기 느낌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아마 모여 있는 모든 구역원 전부는 아니지만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런 개인적으로 그런 부흥을 경험했을 수도 있고 혹은 공동체적으로 그런 큰 부흥의 은혜를 경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구역에서도 그런 것들을 경험할 수 있고 얼마든지 그런 경험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제가 1988년도에 교수가 되고 그 다음 해 89년도였습니다. 그 때 제가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되고 여기에 내가 경험한 부흥에 나오는 이야기는 1989년도 7월 20이 속한 그 주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기 전에 어떤 경험이 있었냐 하면 봄부터 제가 그때도 너무 바빴습니다. 화장실에 앉으면 피를 한 컵씩 쏟을 정도로 무리를 하며 살았습니다. 오후시간에 제가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청교도와 그 역사에 관한 책들이었습니다. 읽으면서 저에게 그런 것들이 의미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분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었습니다. 책을 읽었는데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지만 한 가지 또렷했던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너무 신앙의 기준이 없이 살았구나, 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믿으면 되지, 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성경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런 모본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명료한 그런 것들이 없이 인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오늘 저는 코긴 목사님의 처음 들었습니다. 최근 제가 그분이 쓴 책을 몇 권을 그분이 주고 나머지는 제가 다 구입해서 가지고 있고 부분적으로 읽었는데 설교를 들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국의 목회자로서 저렇게 설교하는 사람은 정말 희귀합니다. 이 분이 아까 말씀하셨듯이 성도들뿐만 아니라 목회자들 자신도 그 영혼구원에 대한 긴박성이랄까 그런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관심사가 사회정의, 복지,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굉장히 특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살아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순수한 복음은 생명의 역사를 불러일으킵니다.
제가 그 청교도들의 작품들을 읽고 특히 그들의 전기들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냐하면 내가 아는 기독교가 너무 피상적이었구나, 그리고 훨씬 아주 역동적인 어떤 내면의 세계가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구나, 라는 것을 전기 혹은 자서전을 통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전기, 자서전, 일기 이런 것들은 자기의 깊은 내면에 있는 것들을 많이 쏟아 놓습니다. 청교도는 아니었지만 우리와는 신학적 입장도 약간 다르지만 오스왈드 스미스의 구령의 열정을 읽으면서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신학적인 입장은 다르지만 어떻게 한 사역자가 이렇게 수많은 나라를 다니면서 매일매일 그렇게 주님을 향한 사랑과 영혼에 대한 눈물 속에서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하나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영적인 부흥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그래서 열린 교회에서 오래 생활하셨던 분들은 이해하시겠지만 초창기에는 굉장히 메시지가 그런 부흥과 영적인 각성, 이런 쪽으로 굉장히 많이 가있었습니다. 그것만 계속 하는 것도 그렇게 균형이 필요했고 그랬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지만 그런 긴박감, 오늘날 한국교회가 어느 정도 교회가 커지면 더 이상 교인이 더 자기네 교회에 오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이 마치 아주 청렴한 목회와 사심이 없는 신앙생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관점을 교회에 교인들이 오는 것을 헌금 내는 액수 같은 자본주의 정신으로 보면 그게 청렴의 표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어떤 영혼의 구령,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겐 그러한 개인과 공동체의 큰 각성과 부흥 이런 것들이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함께 나누면 마음속에서 그런 것들에 대한 사모함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에 대해서 사람들과 나누면 자기도 거룩하게 살고 싶고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부흥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다 같이 읽읍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학공부에 있어서 열렬한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나누어 봅시다. 자 그럼 항상 말씀드립니다. 신학공부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이미 신학공부가 무엇인지는 예전에 여러분들에게 다 정의를 내려드렸습니다. 그럼 이렇게 사람들에게 생각을 나눌 때 이렇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하는 여정에는 예수님을 많이 알아가는 매일매일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들의 지식이 많이 풍부하게 주어져서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정보가 넘치도록 주어져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 벅차고 그런 적이 있었던가 하면, 또 어떤 경우에는 그런 것이 거의 없어서 오랫동안 아주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그래프를 자신이 그려보면서 내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것이 설교를 통해서든 예배를 통해서든 혹은 책을 통해서든 아니면 기도를 통해서든 아니면 내 삶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통해서든지 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매일매일 알아가는 기쁨이 있었던 그 때에는 반드시 열렬한 기도가 있었던 때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기도는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우리를 자극하고 하나님을 알아 가면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도록 우리 자신을 채찍질하고 하면서 이렇게 상승작용이 일어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계속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지금 3번 문제에서는 결국 세 번째 문제에서 우리의 모든 관심사들을 기도로 모으는 것입니다. 이번 주일에 계속 선포되고 있는 메시지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입니다. 그 구역모임에 와서 같이 공부를 하고 가면 왠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그런 것이 목표입니다. 구역장이나 순장들이 다 경험하시는 바이지만 기도를 많이 하고 가면 구역 모임이 다릅니다. 왠지 애들도 조용하고 다 자거나 혹은 안 오거나 그렇게 되고 기도를 많이 하고 가면 생전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나와서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고 합니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공부하고 나누는 과정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고자 하는 하나의 포인트로 모아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3번 문제에서는 기도입니다.
그 다음 이것을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신학이라는 것을 탐구합니다. 그것이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데 이것은 단순한 지성으로만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동시에 의지에 사랑의 감화가 주어져서 사랑과 지식이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러한 열렬한 기도는 결국은 이런 지성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 다음에 성령에 의해서 의지가 감화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갈망을 주셔야지 우리 죄인이 뭘 갈망 하냐 하는데, 하나님은 갈망하고자 하는 사람 마음에 갈망을 주시지, 하나님을 향해 갈망하고자 하는 마음, 그렇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으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떤 것들을 간절히 사랑하고 사모하려 하면 어떤 일이 생기죠? 계속 생각이 납니다. 우연히 지나다가 원피스 하나를 봤습니다. 지나가면 될 텐데 저녁 내내 생각이 납니다. 입으면 예쁘겠다. 살이 내가 약간 찌긴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입으면 예쁠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생각이 계속 납니다. 그 다음엔 돈을 맞춰봅니다. 저게 얼만데 내가 될까? 이번 달 용돈과 생활비를 밀어 넣고, 하며 생각이 왔다갔다 합니다. 아니 그래도 하나 사면 한 5년은 입을 텐데. 나누기 5로 해봅니다. 아 갖고 싶어. 하고 에라, 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갈망이 있게 마련입니다.
평일이었기 때문에, 저기에 가서 제가 많은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스텝들을 만났습니다. 우리 교회는 너무 럭셔리합니다. 그냥 허름한 창고 같습니다. 근데 마당을 유리로 씌워버렸습니다. 그 지체들이 가지고 있는 선교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교가 먼 나라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나라 안에 있는 도시에서 유리하고 방황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참 재밌는 게 무엇이냐 하면 영국은 지금 기본적으로 아주 극단적인 이지주의에 빠졌습니다. 또 웃기는 게 뭐냐 하면 극단적인 지식주의에 빠지면서 또 한쪽으로는 신비주의가 유행입니다. 이것들이 사실은 어떻게 해결 되냐 하면 참된 성경적인 신앙을 우리들이 되찾게 되면 그 안에는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지식을 채워주는 요소와 하나님의 우리의 마음을 터치하시는 사랑을 경험하기 때문에 신비를 향한 우리의 욕구까지 함께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경건을 맛본 사람은 신비주의에 미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왜 그렇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이 마약, 미다졸람 같은 정신성 의약품을 먹고 잠드는 것 같은 것 같이, 내시경 같은 거 할 때 맞는 주사가 옛날에 가수들이 맞고 입건되고 했던 미다졸람이었습니다. 진짜 신기합니다. 너무 힘든데 내시경 검사하느라 한 대 탁 맞으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달콤하게 잠들어 본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고 나서는 말입니다. 어렸을 때는 모르겠습니다. 어쩜 그렇게 미끄러지듯이 열을 세는 그 안에 어떤 사람은 하나 둘 그러고 바로 들어간다고도 합니다. 나는 이를 악물고 했더니 44까지 세었습니다. 의사가 굉장히 예외적인 거라고 했습니다. 보통 열을 세기 전에 그냥 들어갑니다. 눈을 부릅뜨면서 내가 몇까지 견디나 세어봤습니다. 그런데 달콤하게 샥 들어갑니다.
왜 사람들이 그런 약물에 그렇게 미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앞으로 우리나라 절대 마약의 청정지대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광범위하게 퍼져갑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제가 호주에 갔을 때 놀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공원에 가니까 쓰레기통에 써붙여 놨습니다. 마약을 한 후 주사기는 이쪽 통에다 버리시오. 마약을 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화장실에서 수없이 주사기를 꽂으니까 처리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이쪽 통에다 넣어라, 아예 써놨습니다. 왜 그렇게 미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실에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만족이 안 되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끊임없이 신비적인 그런 것들에 빠지고 무엇인가 자기를 몰입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을 만나면 그것이 부도덕하든지 이단이든지 상관 안합니다. 거기에 몰입하면서 자기가 행복하면 오케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완전히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도 빠지긴 하지만 어떤 사람은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알았는데 알기만 하고 가슴 속에 터치되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1차 타겟입니다. 종교성은 있는데 그 종교성이 채워지지 않는 사람이 1차적인 타겟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이런 영국과 같이 극단적으로 반 기독교화 된, 기독교는 이미 벌써 영국에서 차별받고 있다고 봅니다. 제가 실제로 직접 들은 이야기 인데 자매 하나가 기독교인으로서 여기에 십자가를 하고 다녔습니다. 너 그건 종교 차별이니까 개인적인 것이니까 회사에 달고 오지 마라, 했는데 난 괜찮다고 하고 달고 다녔는데 해고당했습니다. 재판 했는데 졌습니다. 이 정도로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사람들이 그러면 그렇게 극단적으로 반기독교 적이고 탈 기독교적인 문화 속에서 살면서 사람들이 행복하냐, 아닙니다. 이를 아각거리면서 기독교를 비판하고 막 악을 쓰지만 가슴은 너무 허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면 그 사람이 진짜 주님께로 돌아오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변화들이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러한 열렬한 기도,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가는 것과 함께 그것이 촉진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기도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식을 탐구하고 열렬한 기도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하는 것을 우리가 구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 보면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신앙을 갖는데 제일 방해되는 것이 우리의 이성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해? 어떻게 창조해? 또,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어? 그게 말이 돼? 그게 진짜 물리 법칙으로 가능해? 물로 포도주를 만드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해? 한번 재연해봐. 아니면 우리가 죄인이야?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를 대속해?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어?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이성입니다. 이성이 결국은 원인, 결과, 원인, 결과, 이렇게 끈으로 이어갑니다. 끈으로 이어가면서 이것은 이것의 원인이 되고 이것은 이것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요것은 요것의 원인이 되도록 지배하는 것은 과학입니다. 그런데 과학이 우리에게 모두 알려졌으면 문제가 안 됩니다. 과학이 모두 알려졌을까? 아닙니다.
여러분 학교 다닐 때 이런 것을 배우셨을 겁니다. 이렇게 여기에 원자가 있고 핵이 있고 중성자가 있고 양자가 있고 이런 거 배웠죠? 배웠어요? 안 배웠어요? 왜 그래요. 배웠잖아요. 사실 이건 모두 허구입니다. 그냥 사람이 상상을 한 것이지 이것이 일렬로 섰는지 동그라미로 섰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얘기하면 굉장히 길지만. 그래서 보니까 우리가 보이는 물질세계에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과학의 법칙들, 이것이 뉴턴에 의해서 수립이 되고 발전했습니다. 나중에 과학이 발달하면서 아주 미세한, 말하자면 원자 이하로 내려가니까 원자 이하의 세계에서는 우리 현재 물질세계의 과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인정합니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역학이 지배한다고. 그것이 양자역학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더라도 결국 이러한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철저한 편견 속에서 그 카테고리 안에 들어온 것만을 가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추적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 자체가 이미 초월적인 사실들에 기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앙에 있어서 설 땅이 없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이 계시의 형태로 우리에게 먼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어렸을 때 수학 공식을 외웠습니다. 그 공식이 중학교 2학년 때 배운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가면 다 증명이 됩니다. 증명이 안 되면 그것이 공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려면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수학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이 그 수학을 모르니까 그냥 공식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 공식을 암기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멘까지는 안하지만 받아들여서 공식이 이렇게 됐기 때문에 한다. 왜 공식이 이렇게 나오지? 그것은 설명 못합니다. 그것은 더 높은 수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수준이 그것을 이해할 수준이 안 되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초월적인 사실들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거듭나기 전에는 이성에 길들여진 정신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이런 이성에 길들여진 정신만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확 하냐, 그것은 별개입니다. 사람은 다 제 이성의 판단이 있기 때문에 비판도 하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열렬한 기도를 통해서 유순한 지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깔대기를 통해서 유순한 지성이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비례합니다. 사람이 좋으면 말도 듣고 싶고 좋습니다.
그 유순한 지성은 결국 진리에 굴복하는 지성입니다. 그 속에서 유순한 지성 그 위에서 이 경건이 싹트게 됩니다.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냉철한 지성으로 그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생각하고 은혜를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이상적인데 거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열렬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200권이 넘는 책 가운데서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아주 중요한 책 중의 하나가 기독교 교양론, 혹은 기독교 교육론이라고도 번역이 되어있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무 기니까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그 사람들 말고 지식으로 인해 교만해지지 않고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이들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요 표상이었던 유월절을 당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기렸는지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써 문설주에 표를 하되 우슬초로 표를 하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우슬초는 온유하고 겸손한 풀이지만 그 뿌리보다 강력하고 침투력이 센 것은 없습니다. 자, 잘 보십시오. 우리는 그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 위에 세워져서 온 성도와 함께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이신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멘.
탁월한 지성을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어린아이처럼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유순한 지성, 겸손한 지성,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지성입니다.
4번 문제, 다 같이 읽읍시다. ‘나를 울린 선생님’에서 여러분이 느낀 느낌과 소감은 무엇입니까? 저자는 가장 이상적인 신앙생활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러분들이 이미 읽고 오셨겠지만 제가 아마 설교 속에 두어 번 간증을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96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찾아뵈었을 때 94세였는데 한 2년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미국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제가 찾아가 뵙지는 못했고 나중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참 잊혀지지 않습니다. 정말 훌륭한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진짜 언젠가 우리는 부부가 같이 살면서 내가 먼저 죽는다는 것을 항상 기정사실화 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얘기할 때 ‘당신이 죽고 나면..’ 뭐 그런 이야기도 합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 때 제가 94세 때 뵈었는데 92세 까지 손수 운전을 하고 미국 시내를 다니셨다고 합니다. 사모님은 이미 7년 전에 돌아가셨고. 그 분을 뵈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남편이 죽고 아내 혼자 남아있는 것은 그렇게 보는 게 힘들지 않은데 본인이야 물론 힘들겠지만, 그런데 남편이 훨씬 오래 살 때 되게 힘들어 보였습니다. 보는 사람이 너무 안됐습니다. 그래, 당신이 더 오래 살아라, 했습니다. 그 할아버지 목사님을 뵈는데 너무 눈물이 났습니다. 외롭지 않으세요.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21평 아파트에 혼자 사시는데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대수롭지 않게, ‘외롭긴 뭐가 외로워, 내가 혼자 있나? 우리 주님하고 같이 있지. 성경도 읽고 책도 보고 기도도 하고 그러면서 지내지.’ 참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 분의 처지가 되었을 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코긴 목사님이 설교하신 것처럼 심판대까지 안가더라도, 우리가 그렇게 홀로 남겨진 외로운 날에 그렇게 주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는 것을 깊이 자각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인생 전체를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각자 소감을 나누라고 한번 해 보는 것입니다. 자 읽읍시다. 가장 이상적인 신앙생활은 그리스도와 열애에 빠진 지성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데 사랑도 여러 가지입니다. 언제 헤어질까 자로 재는 그런 사랑도 있습니다. 그런데 열애. 뜨겁게 사랑에 빠지는, 그래서 너무 사랑하는 것.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그런데 그 사랑 때문에 머리가 뜨거워지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나 냉철하게 살아있어서 분명한 의식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은 지식을, 지식은 사랑을 끊임없이 불러오면서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 이것이 다음 도표로 요약이 됩니다.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 여기서부터 갈까요?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배워가게 됩니다. 성령님의 위로, 그리스도의 구속,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결국은 어디서부터 먼저 시작하든지 상관없이 계속 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중심에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자,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늘 마지막 순서는 우리 모임의 특별기도회입니다. 찬송가 315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오늘은 우리 개인의 열렬한 기도생활과 교회의 영적인 부흥을 위해 준비된 기도제목을 따라 기도하겠습니다. 자 이것도 그렇습니다. 항상 구역이나 순을 이끌 때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하면 혼자 도맡아서 모든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모든 지체들에게 헌금 혹은 기도제목, 찬양담당, 학습자료 복사 담당, 각각 맡기십시오.
그래서 오늘 이것도 미리 그 다음 주에 누군가에게 맡겨서 문자로 기도 같이 할 때 당신의 기도제목을 얘기해 달라, 하고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으면 A라고 표시해도 괜찮다. 그럼 얘기할거 아닙니까. 그럼 시아버지가 어떻고 어떻고 어때서 이걸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B라는 사람은 또 우리 남편이 이런 일을 당했는데 이렇게 이렇게 기도해 주십시오. 등등의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와서 기도합시다. 막 헷갈리는 것 보다 요만하게 적어 와서 한 장씩 나눠주면서 우리 기도합시다, 하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자고 하면서 한 7가지 기도제목을 얘기합니다. 자기도 못 외우면서. 어떻게 그걸 기도시간에 다 외우겠습니까. 기도시간은 1분인데 설명하는 시간은 5분입니다. 한번은 기도하고 기도에 불을 붙여서 기도하려고 하는데 다시 또 기도의 불을 끄고 한 3분 동안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한꺼번에 다 놓으십시오. 왜 그런 기도의 제목이 나왔느냐. A라는 사람이 사실은 시아버님이 그래서 우린 정신이 없고 이런 이런 기도제목이 필요하다. B는 아들이 이번에 유학을 가는데 무슨무슨 일들이 필요하다. C는 이번에 회사에서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데 어떤 상황이고 이것을 위해 기도해달라. 그것을 다 충분히 나누고 나눔 속에서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도 같이 느끼고 그럼 그중에 어떤 지체는 기도제목을 나누면서 울먹거리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모두 모여서 함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가끔 다시 불러줄 필요도 없습니다. 눈 뜨고 하나씩 보면서 다시 눈 감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기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6가지 기도제목이면 한 2번씩 끊어서 하고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아무개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겠습니다. 함께 간절히 기도하고 그 두 사람의 기도제목을 놓고 한 사람이 대신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다음, 다음, 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은혜로운 기도회를 마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기도제목을 오늘 여기서만 기도하지 말고 흩어져서 일주일동안 살면서 함께 기도하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것은 우리 순장, 구역장 성경공부의 기도제목입니다. 첫째, 구역원들이 기도생활을 열렬히 할 수 있도록. 두 번째, 교회에 말씀의 부흥을 주시도록. 세 번째, 지체들이 중생과 회심으로 변화받도록. 기도, 부흥, 회심. 세 가지를 위해서 우리 함께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