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함과 신앙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 1:80)
녹취자: 박지성, 김미영
여러분들이 이 학교에 와서 신학을 공부한다고 할 때 적어도 이십년 후에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되어 있기를 원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중요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서 여러분들이 오늘날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태도나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들은 점검받아야 될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20년 후에 그리는 그림이 목회도 안하고 한국에 있는 어느 작은 신학교에 가서 선생으로 가르치면서 일생을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또 그림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것이 아니라 20년 후에 교회를 개척하고 한 교회를 충실하게 담당하면서 살아가는 한 지역교회의 목회자의 삶을 선택한다면 그 그림은 아까의 그림과 달라집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이 20년 후에 양쪽 일을 다 한다면 얘기는 또 달라질 것 입니다. 그러므로 오늘과 내일의 강의를 통해서 제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것을 명확하게 하고 신학교 사역이냐 목회냐 라는 식으로 찢어지고 나누어지는 것은 원래 목회와 신학과의 관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제대로 된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알다시피 구약은 이 사람에 대한 예언으로 끝나고 신약은 이 사람의 출생으로 시작합니다. 이 사람이 먼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예수께서 등장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시면서 이 사람 세례요한은 역사 속에서 사라져갑니다.
우리들이 ‘나 하나가 소명을 받고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이일 저일 하다가 죽는다.’ 이렇게 보지 말고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의 역사를 움직이시는 거대한 구원의 역사 속에서 모래알 같은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고 우리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를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역사가 곧 사람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사람의 이름을 줄을 그으면 곧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역사를 창조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실 때 인간을 사용하셔서 이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역사를 바꾸기 위해서는 사람을 준비하시고, 사람을 준비하신다는 의미는 그를 신앙과 지식과 은혜로 준비해서 당신이 쓰시고자하는 쓰심에 합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먼저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그들이 타락해서 죄가 밀물처럼 들어오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이전에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세워 구속의 계시들을 받고 보존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구원의 역사의 시작은 아브라함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 사람을 시작으로 해서 하나님은 인류 구속의 계시를 한 집안에 담으시고 이것들이 민족을 이루게 되었을 때 구약의 아주 큰 산과 같은 존재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모세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에 하나이고 그 이후에는 그보다 카리스마는 떨어지지만 믿음을 강조했던 여호수아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에 의하여 전설적인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정착을 하고나서는 다시 사람의 산맥이 낮아지기 시작하다가 아주 높은 산이 하나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무엘이라는 사람입니다. 지금적선지자의 시조로서의 이 사무엘은 사사시대와 왕정을 가르는 분기점에 나타나 이스라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이라는 구약 최대의 인물이 나타나는데 이 사람은 신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이고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언약백성이었습니다. 왕이었고 동시에 선지자였던 이 사람은 구약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영적인 보물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가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제 10세기가 지나면서 9세기 8세기로 넘어오게 됩니다. 그 때에 자잘한 선지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선지자들 중에서 이사야 선지자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외쳤던 사람,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과 같은 걸출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자잘한 사람들이 나타나고 구약의 역사는 드디어 산의 높이가 낮아지면서 말라기 선지자로 끝나고 중간사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 이제 예수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산맥 중 한 봉우리가 아니라 산맥위에 높이 떠있는 빛나는 태양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는 사도들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높은 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 높은 산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구약의 모세나 혹은 다윗과 비견될 수 있을 위대한 봉우리가 하나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후에 사도들의 시대가 끝나고 나서 속사도시대가 이어지면서 결국은 이 봉우리는 낮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교회역사로 접어들면서 이제 속사도교우들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 고대교부들의 시대가 등장하게 되는데 오리게네스, 예레니우스,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위대한 교부들이 나타나고 특히 테르툴리아누스는 정말 위대한 사상가였습니다. 철저히 계시중심의 신학을 추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이 불합리하다는 로마의 사상가들의 비평에 맞섰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의 각오가 되어있는 신학자요 사상가였습니다. 비록 옳은 것과 그른 것, 오류와 진리를 한 번에 토해내기는 했지만 놀라운 능력을 가진 위대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게 교부들의 시대가 지나가게 되고 그러다가 동방교우 중에서는 요한 크리소스텀이라고 하는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후에 교회사에 가장 높은 봉우리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 사람은 이후 기독교역사뿐만 아니라 서구라파의 모든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도록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서구 문명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되고 거기에서 모든 것들이 통합되어서 수문과 같은 역할을 하였고 이후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인류의 철학도 이 사람의 사상에 많은 빚을 지게 될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두 세기가 지난 후 소위 황금의 청산그리우스라고 불리는 동방교회의 마지막 신학자 다마스케누스 요한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세로 접어들면서 또 다른 그렇게 높지 않은 봉우리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끌레르보의 베르나르 그리고 프란시스 베르나르도네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페트로스 롬 바르두스,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13세기에 와서는 높이에 있어서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범위와 영향력에 있어서는 결코 아우구스티누스에 뒤지지 않는 위대한 산이 하나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보편교회의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인물입니다. 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요한 타울러라는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독일의 성직자가 태어나고 이후에 존 위클리프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종교개혁 이전에 새벽을 밝힙니다.
야알프스와 같은 사람들이 예언한 바와 같이 그가 순교한 후에 100년이 흐른 후인 15세기에 와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높은 산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마르틴 루터입니다. 그러나 이 마르틴 루터는 홀로 서있는 외로운 봉우리가 아니라 다른 산들과 함께 거대한 산맥을 형성하며 개신교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쯔빙글리, 멜란히톤, 블링거, 무스쿠무스 그리고 안드레아스 휘펠리우스, 피터마르터, 베르미글리, 바렌, 비에, 낙스 같은 종교자들이 함께 이 산맥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한 세대가 지난 후 루터가 시작해 놓은 종교개혁을 실질적으로 마무리 하였던 존 칼빈이 등장하게 되고 이 사람은 후에 칼빈주의라고 불리우는 위대한 사상의 체계를 완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이후 16세기의 후반으로 개신교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는 개혁파정통주의 시대가 열리고 17세기는 개혁파신앙의 황금기였습니다. 천재와 같은 사람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선배신학자들의 신학적인 유산들을 활용하면서 세계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을 그려내어 이 기독교의 황금기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데오르드베사, 브로시우스 그리고 프란시스쿠스 유니우스, 윌리암퍼틴스, 페커만, 폴라누스, 에임스, 고마루스, 알스테드, 휘치우스, 피터판 마스트리스, 튜레틴, 존 오웬, 벡스터, 하이데거, 빌할루스, 아프라케어, 토마스 이드기 같은 많은 신학자들이 활동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바로 경건과 학문에 탁월한 모범을 보여주었던 존 오웬이라는 신학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로마카톨릭과 소피누스 주의 그리고 아르메니우스 주의와 치열하게 싸워 복음을 파수했던 당대 복음주의의 신탁으로 불리워진 사람이었습니다.
존 오웬이 영국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을 때 대륙에서 똑같은 일에 헌신하던 사람이 있었으니 이 사람이 프랜시스 튜레틴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때에 비록 이들과 같은 탁월한 학자는 아니지만 영국 청교도의 역사에서 괄목할 만한 두 사람이 나타나는데 조지 윗필드와 요한 웨슬레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같은 시대에 미국의 뉴잉글랜드에서는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즈워즈가 등장하게 됩니다. 1703년에 태어나서 58년에 생을 마감한 이 사람은 철학자이며 역사가이며 신학자인 동시에 설교자이고 목회자였고 교육자였습니다. 그는 온몸으로 이 대륙으로부터 밀려오는 거대한 계몽주의와 싸우기 위해서 그는 단 신학 한 자루의 칼이 이 아니라 신학, 철학, 미학, 심리학, 역사학,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칼을 구비하고 온몸을 던져 이 밀려오는 계몽주의의 사조와 몸부림치며 싸웠던 전사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나는 논쟁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하고 진리의 가치를 아는 사람으로서 그는 일평생을 논쟁에 자신의 지혜와 지력을 헌신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18세기 19세기가 지나가고 19세기와 20세기에 와서 아브라함 카이퍼, 벤자민 워필드, 헤르만 바빙크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고 이후 현대 신학자들이 다닥다닥 나타나면서 비교적 큰 산 없이 20세기가 지나가고 21세기에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시려고 합니까? 이렇게 거대하게 뒤움치며 흘러가고 있는 역사의 물줄기 속에 어떤 역할을 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전개하는데 이바지할 인물이 되려고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신학대학원에 교수로 있을 때에 입학시험에서 신입생 면접을 하게 되었습니다. 연세가 좀 있어 보이는 분이 대학원과정에 입학을 하겠다고 원서를 내고 시험을 쳤습니다. 그래서 면접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연세가 많으신데 왜 신학교에 오십니까?”, “교수님, 효도하려고 왔습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제게는 80넘으신 노모가 계신데 평생소원이 제가 목사 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려고 왔습니다.”, “당신은 집에 가고 할머니를 차라리 신학을 시키십시오.” 소명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이 설명을 들으면서 정말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목회자로서 혹은 선교사로서 소명을 받은 사람인지를 물어보고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둘 중에 하나를 하시면 됩니다. 신학을 그만 두든지 아니면 그런 소명을 내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소명의 체험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체험입니다.
사도 바울의 영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하게 되었고 이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생각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회개하다”는 희랍어로 “메타노에오”라고 하는데 사실 “메타노에오”에는 “회개 한다”는 뜻이 없습니다. 원래 희랍어의 의미로 보면 “생각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회개의 가장 훌륭한 증거는 울며 회개하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생각이 얼마나 바뀌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은 도덕적으로 얼마나 증진된 생각을 갖게 되었느냐 그런 것이 아니라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Spirits good” 소위 예기하는 영적 서원에 대한 개념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인류의 보편적 복지에 도움이 되면 그것이 Good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Spirits good” 영적인 서원에 대한 개념이 혁명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것은 완전히 다른 예전과는 다른 세계관과 인생관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에 그들이 하나님의 예언자가 될 큰 소명을 받으면서 “완전히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중에 있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도다” 하는 이런 지성의 벼락이 내린 것 같은 놀라운 경험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목회의 소명의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소명과 관련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 분명히 설교자는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처럼 한 사람의 신자입니다. 그 점이 기본적이고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사람입니다. 또한 거기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없는 또 다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소명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가 여기에서 부각됩니다. 한 설교자는 단지 설교하기로 결심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목회하기로 뜻을 세운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소명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 그들의 타락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 주어야하며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말하고 구원의 길을 알려주어야겠다는 소원을 포함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지 않고는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 같은 emergency를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의 진수부분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의 목회의 소명은 신학을 하고 싶은 흥미나 뜨거운 관심이 아니라 그것은 이차적인 것이고 일차적인 것은 저 멸망해서 죽어있는 비참한 영혼들을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주님의 말씀으로 돕지 않을 수 없고 내가 만약에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의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의 진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은 십자가 사랑이 핵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명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아마레 데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마레 데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이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모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과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와 모든 거룩한 것들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소명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하는 강한 소원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전집 제 8권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씁니다. 그 목적에서 그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을 Ultimate goal과 Ultimate end와 Chief end로 나뉩니다. ultimate는 내가 하고 있는 어떤 일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우리가 여기 모여서 이렇게 집회를 하는 것은 깨닫고 은혜를 받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최고의 목적은 아닙니다. 최고의 목적보다 훨씬 하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모두 다 함께 엮어져서 어떤 사람은 목회를 어떤 사람은 선교를 어떤 사람은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을 어떤 사람은 그 일을 돕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면서 각자 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리에서 일을 감당해 나갈 때 마지막에 그 모든 궁극적인 목적들이 다 연합하여 마지막에 성취되는 것을 가리켜서 “Chief end”, “최고의 목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의 원인론적인 동기인 동시에 목적론적인 동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세계가 창조되었고 창조된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을 겨냥하여 흘러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든 잡은 소명이 궁극적으로 이바지하여야 할 바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목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굳이 피코 밀란돌라의 말을 인용하지 않는다고 할지라고 이미 그 후의 종교개혁자들은 우리 인간 존재의 가치와 의를 중세의 억압으로부터 풀려나오면서 성경 속에 계시된 아름다운 인간의 지위와 의미를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죄로 물든 존재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divinely 되어야할 존재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경건과 그리고 신앙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몸과 마음을 깨끗케 하고 이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종교적인 실천과 신실한 우리의 경견생활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모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과 함께 그는 동시에 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소명을 하나님 자신을 향해서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향해서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 자신의 창조적 행위를 보태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지어 놓으셨던 선한 상태를 증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와야르 엘로힘 키 토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더라.” 아름다웠다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였다는 것인데 “토브”로 그 선한 상태는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선한 상태이기도 하지만 그 선함은 이미 성취된 선함만이 아니라 미성취된 가능태적인 선함도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이를 탁 낳아서 서너 살이 되면 예쁘지 않습니까? 너무 예쁩니다. 그런데 애를 기르면 이 아이가 충분히 예쁘지만 잘 길러서 이 아이가 스무 살 정도 되면 남자인 경우에는 멋있는 청년이 되고 여성의 경우에는 예쁜 자매가 됩니다. 그것이 뭐냐면 선한데도 그 선 안에 그 선이 모두 성취된 것이 아니라 가능태적으로 선들이 남아있는 그것을 이룰 때에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적인 행위를 섬김으로써 그 세상에 보태어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대로 아름답게 마련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사는 그 통치의 질서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신학이라는 것은 내 꿈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신학의 소명은 나의 꿈을 십자가에 못 박고 포기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보람을 느끼게 하시려고 이 소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런 천지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을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자격은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신 그 목적에 부합하며 살겠다는 그 마음을 갖는 것, 그리고 그것을 더욱 더 불같이 뜨겁게 간직하며 사는 것이 신학을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자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보고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이 세 기도 제목이 나뉠 수 없는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분명히 소명이 없는 신학공부는 하나님 없이도 할 수 있습니다.
(예화) 최근에 하버드에서 한국인 교수 최초로 성서신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근이 아니고 벌써 5, 6년 전에 신학교에 종사하고 있는 형제를 만났습니다. 옛날에 내 설교도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하버드의 신학교 교수들 가운데 30%만 교회에 출석한다고 합니다. 나머지 70%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학생들은 50%가 신앙을 고백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 50%중에 절반은 아닌 것 같고 절반 정도는 그래도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슨 신학입니까?
(예화) 여러분 혹시 프란시스 쉐퍼가 쓴 “The Great Evangelical Disaster”라는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말로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라는 책입니다. 하나님을 알기위해 신학교를 갔던 그 제임스 파크주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알기위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신학교를 갔는데 그 신학교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깊이 물들고 결국은 영매수대에 빠지게 된 그리고 나중에 비참하게 되어서 마지막에 고백하기를 “내가 불가지론에서 벗어나 떡을 찾고 기대하면서 유니온신학교에 갔지만 졸업 후에 내게 남은 것은 죄악됨 하나뿐이었습니다.”라고 예기했습니다.
(예화) 박윤석목사님이 파리에 유학을 가있는 자기의 제자에게 주고받은 편지의 사건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당신 주석을 쓰는데 책들을 구하거나 복사해서 보내달라는 요청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편지 때마다 제자들에게 부탁하시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무엇보다 기도에 시간을 많이 쓰십시오. 학문만 위주하고 기도하지 않는 신학자들은 자유주의로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런 자들은 교회에 해를 끼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학을 하면서 계속 신앙의 불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유지되게 하여야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신학을 다른 어떤 학문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게 하셨는데 이것은 뭐냐면 신학의 진수라는 내용이 신앙의 고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자기 몸을 파는 직업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내가 진술해내는 이 신학적인 진술이 신앙고백이 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칼빈이 주석을 써 내려가다가 멈추고 탄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내용들을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나는 칼빈을 읽을 때마다 때로는 그가 우리에게 부드럽게 말할 때도 있고 욕을 하면서 야단을 칠 때도 있지만 이런 때나 저런 때를 막론하고 칼빈의 책을 읽는 동안에 나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인상은 ‘이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다.’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신학교 1학년 때 그가 기도에 관해서 쓴 글을 읽고, 아마 여러분이 지금도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칼빈의 기도론입니다. 저는 한참 놀랐습니다. 이런 기도론은 사실은 기도를 열렬히 하는 목회자들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정말 뜨거운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실재로 그 시련의 폭풍 속에서 평생 개혁자로 살았던 이 칼빈에게 있어서 기도는 정말 유일한 피난처였고 안식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볼쉑의 논쟁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칼빈의 가르침에 반대한 볼쉑이라는 인물이 칼빈을 비난하는 전기를 써서 출간을 했습니다. 칼빈을 아주 바람둥이 색광으로 묘사하며 심지어는 동성연애자로 묘사했습니다. 그런 비열하고 아주 고통스러운 시련에 직면하면서 칼빈은 기도로 그 모든 것들을 이기면서 위로로 살았던 것입니다.
탈 비닝스의 지적과 같이 오늘날의 기독교는 하나님을 인간편의에 맞게끔 거리를 조정하여 묘사합니다. 이것은 소위 오늘날에 문화적 이신론 “Cultural deism”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를 양자 삼으시는 성경의 구원과는 배치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관에 따르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물들의 질서를 세우고 인간을 살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인간의 삶속에 개입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뜻은 인간들이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공평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디트리히 본 훼퍼가 이야기했던 성숙한 세계관과 유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하나님을 왕으로는 모시는데 왕이 왕정시대의 왕이 아니라 입헌 군주국의 왕, 가끔 나와서 밥 한 그릇 먹고 뒷방에 들어가서 놀고 있는 그런 왕으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것은 우리로 하여금 분명한 신앙의 체험, 이것이 결국 소명의 체험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소명은 신학의 세계, 학문의 세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세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학은 여러분의 소명을 확인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이 소명을 확인하는 영역입니다. 우리에게 만약 분명한 소명의 체험이 없다면 신학을 공부한다고 할지라도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에 대한 목표는 불분명해지게 됩니다.
사도바울을 비롯해서 복음을 위해서 살았던 충성스러운 사역자들은 한결같이 아주 분명한 소명의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복음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서 살려고 몸부림 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소명을 받으셨습니까? 이 소명은 한 번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과거적 소명이 아니라 현재완료적 소명이 되어야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 라고 말했던 것처럼 소위 “신 에스트로 마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 온 것입니다. “have been crucified”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 과거의 사건이 지금 현재적으로도 나에게 인과관계가 있고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도행전과 서신서 속에 흩어져 있는 사도바울의 고백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다메섹으로 가는 한 번이 아니라 이후에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의 소명에 대한 생생한 현재적 경험은 우리의 성화의 생활에 비례합니다. 우리들이 정결하게 열렬히 신앙생활을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이 단 한 순간도 의미 없게 느껴지거나 혹은 덤덤하게 느껴지거나 일상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적인 소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소명의 문제를 분명히 확인하지 않았다면 바로 지금 해야 합니다. 학교를 그만두지는 말고 학교 다니면서 열렬히 기도해서 해결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명과 상관없이 여러분들은 젊고 소중한 날을 이 신학에 보내고 나서 이미 나이는 들고 땅은 팔 수 없고 다른 일은 아는 것이 없으니 배운 게 이것이라서 이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 얼마나 한 사람이 비참하게 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과거적 소명이 분명할 때 우리는 이렇게 모든 유혹을 물리치며 그날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던 사건을 기억하면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회심과 같습니다.
(예화)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휫필드가 신앙이 흐트러지는 것 같은 날이면 자기가 회심했던 그 교회에 회심했던 날 앉았던 의자에 찾아가 거기에 입 맞추면서 하나님 앞에 처음 회심의 순간을 되새기며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다짐했다는 이야기는 교회사에서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 중 한 토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앞에 있는 푯대를 바라보자고 말하지만은 뒤에 있는 푯대가 분명하면 앞에 있는 푯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뒤에 있는 푯대가 앞에 있는 푯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과거적 소명은 한계가 있습니다. 과거적 소명이 우리로 하여금 거기로 돌아 갈 수 있는 분명한 목적지를 지시해주는 것은 틀림없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지속적인 헌신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명 받은 모든 사람들이 자동으로 열렬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소명을 받았는데도 딴 짓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는 범죄하는 사람도 있고, 쓰레기처럼 인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가장 복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신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신학교에서 흘린 눈물은 30년을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목회에서 마음이 흐트러질 때 그 신학교에서 눈물어린 기도를 드리던 날을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다시 순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은 지금쯤 별로 존경스럽지 않게 생각하는 선배 목회자들을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신학생 시절에는 여러분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치열한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기도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화) 실재로 총신신학대학교에서 잠시 가르치시다가 암으로 돌아가신 교수님 한 분이 계셨는데 지금 살아계시면 아마 은퇴하실 그때쯤 되셨을 것입니다. 기도에 참 열심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겨울이면 신학생 시절에 한강으로 가서 얼음위에서 무릎을 꿇고 밤새워 기도했다고합니다. 신학대학교 4년, 신대원 3년 다니는 동안에 저도 기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바로 이 소명은 지속적인 성화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번 생애적인 체험이 모든 것을 보장해 준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까? “형제들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가진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은 제가 남에게 전파한 후 제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 왜 이러는 것입니까? 무슨 신학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목회의 소명은커녕 구원의 확신조차도 없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의 이 고백은 소명을 따라 사는 목회자들의 불붙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진바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것을 목회의 소명을 따라 가는 날 중 날마다 체험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학의 세계에서 강의실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에서 홀로 어두운 밤, 교회당에서 혹은 숲 속에서, 골방에서 하나님과 몸부림치며 씨름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소명이 우리 안에서 전적으로 뜨겁게 역사하지 않는 것의 결국 가장 커다란 원인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신학교에 입학을 해서 해가 거듭 할수록 여러분들이 과거의 설교나 신앙의 행동들을 돌아볼 때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럽게 느껴야지 ‘옛날에는 참 내가 순수했어. 그땐 참 성령 충만했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했는데’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는 방식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fisica라는 방법이 있고 persuasive한 방법이 있습니다. fisica라는 방법은 중생과 회심과 더불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끊임없이 설복하시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설복이 가슴을 뒤흔드는 설복이 아니라 우리의 지성을 감화시키는 설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명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지성이 끝없이 설복되어야합니다. 한편으로는 아멘하고 믿음으로 설복이 되고 믿은 내용들은 이성의 추론 안에서 끊임없이 설복되어서 도저히 회피할 수 없이 그 진리가 fact이고 사실이고 그리고 나아가서 ‘그 진리는 참 아름답다’ 이것이 가슴 속에 확 밀려오는데 이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정동, 소위 얘기하는 affection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에드워즈는 이것을 “Religious affections”, “신앙감정론”에서 아주 아름답게 설명을 합니다. 이 속에서 확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흔히 쓰는 말로 은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은혜가 무엇이냐 그게 결국 아우구스티누스을 따르면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를 행할 수 있도록 선한 의지를 불러 일으키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항상 두 가지가 일어나는데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또 하나는 그 분을 위해서 선하게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 그 근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왜? 우리의 무한한 죄를 위해서 그 분이 무한한 의와 무한한 공로를 성취하시므로 우리를 대속해 주셨는데 그것이 그분의 무한한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이냐를 한마디로 정의해 보라고 말하면 난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한 사람의 신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기의 주인됨을 알고 감격하는 눈물을 흘리며 무한대의 순종의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무한대의 순종의 삶, 예를 들어볼까요? 이건 여러분들이 학문이 아니라, 신학안에서만 오가는 얘기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이미 경험한 것입니다. 언젠가 여러분들이 회심을 했겠죠? 아니 회심이 새로워지는 경험을 했겠죠? 자 어느 순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확 밀려옵니다. 그 찬란한 진리 앞에서 자기의 지성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무너집니다. 그리고는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여기에 내려오셔서 죽으셨구나’ 그 때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지금 내안에 액츄얼화 해야지 됩니다. 그 찢어지는 고통속에서 놀라운 생명의 희열이 솟아납니다. 이게 그리스도의 2천년전의 부활이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서 액츄얼화 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이 둘을 묶는 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게 하시는 작업입니다. 칼빈은 그 때, 그 때 생각해봐요.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전 스물 한 살 때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스물 다섯이 되던 해에 소명을 받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위해서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다가 금요일 직장에 갔다와서 조용히 교회 강대 앞에 앉아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앞에서 나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죄보다도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깊이 엎드려서, 그리고 이미 이전에 회개하긴 했지만 ‘왜 나는 이 좋으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실 수 없게끔 이렇게 더러운 죄를 지으면서 일평생 마치 자신이 기쁨인 것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을까’ 하고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 때 그렇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지은 자신을 정죄하며 뉘우칠 때 그 때에 하나님이 바로 그 순간에 우리에게 무엇을 염려하신다고 칩시다. ‘너 이걸 해라’ 그러실 때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예수님이 나 위해 못 박혀 죽은 건 고맙지만 그건 아니죠 어떻게 그것까지 언감생심 나에게 그까짓 십자가 가지고 그것까지 나에게 요구하실 수 있습니까? 그럼 뭐 다 가져가시면 내 인생은 어딨습니까?’ 그러시겠습니까? 아니면 ‘너 그것 가지고 있는 것 내놔라 하던 거 하지 말아라’ 그러실 때 ‘아 내가 주님을 위해 그냥 일반적으로 살긴 살겠지만 그것까지 달라 그러시면 안 되죠 그건 프라이버시인데’ 그럴 수 없잖아요. 그 때는 어린아이이든 어른이든 누구든지 간에 바로 그 진실한 회심, 회심의 반복이 그 사건에 든 지체 안에서는 이 가슴속에 느껴지는 건 뭐냐면 막상 그 때가 되면 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로서는 무한대의 순종입니다.
(찬양)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시뿐인 세상에서 밀알로 썩게 하소서
저는 제가 가르치던 제자들과 함께 안수를 받았습니다. 예정보다 무려 7년인가 8년인가 늦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전 지금도 기억합니다. 여러 가지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교회는 개척했는데 나 같은 사람이 감히 목사 안수를 받는다는게 엄두가 나지 않아요. 그래서 안수를 받을 날을 앞두고 새벽마다 지하실교회 개척한 교회 나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제 안수를 받는 것은 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받아야겠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를 않아요. 그런데 그 새벽에 하나님이 깊이 내게 심으셨어요. 그리고는 우리 같은 인간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를 버려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그 고난의 광경이 가슴에 깊이 닿았어요.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 앞에 기도 했습니다. 내 몸에 흐르고 있는 피 중 단 한 방울 이라도 주님을 위하여 흘리기를 거절하는 피가 있다면 주님이 쏟아버리시고 찢어지기를 싫어하는 삶이 있다면 하나님 떼어버려 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비난받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아무도 살리지 못 하는데 여러분들이 이 세상 사회에 얽매여 방황하고 있는 영혼들을 500명만 모아놓고 10번만 설교해보면 신앙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의 설교는 들을 만 할 겁니다. 그러나 목회는 누가 그런 사람 준비해 놓고 우리를 오라고 기다리고 있는것은 아닙니다. 그 밭을 여러분 스스로 피를 뿌리고 눈물을 뿌리며 만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회자가 자기 죽음을 통해서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학의 세계가 아니라 신앙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제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많이 알고 있으나 그 중 하나도 꽉 붙들고 살지 않는 목회자와, 신학의 진리를 조금 알고 있지만 그 조금을 확 붙들고 신앙으로 살려는 목회자 중 누가 성도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불신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어느 젊은이가 신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강의시간에 지혜로운 교수님으로부터 이런 충고를 들었습니다. ‘성경 외에 위대한 신학자 한 사람을 택해 평생 동안 그 사상을 존경하고 이해하고 숙달하도록 애쓰십시오. 여러것들의 얕은 물에서 첨벙거리지 말고 실제까지 깊이 들어가는, 적어도 하나의 물줄기에 잠기도록 말입니다’ 이 충고를 듣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일평생 스스로 모셔야 되겠다고 결심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존 파이퍼 목사님입니다.
재작년에도 제가 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신학 공부는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거니까 하세요. 하는데 그거 말고 평생 스승을 한 분 모셔야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에도 많지만 죽은 사람들이 더 훌륭한 사람이 많아요. 죽은 선생님 중에 한 사람을 탁- 택해서 그래서 제일 초창기 작품부터 시작해가지고 유고집까지 싹- 읽으며 묵상하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하면서 읽어 나가요. 그런 사람이 누구냐고 전도사님한테 물어봐도 알거고. 온 마음을 다해서. 내 이 충고를 한 10여년 전 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했습니다. 따라하는 사람 한 사람도 못 봤습니다.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20년쯤 읽고 있어요. 존오웬도 20년 쯤 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제 한 10년 되어갑니다. 칼빈은 신학교, 신학대학원 다니던 시절부터 좋아했고, 그렇게 깊이 심취하면서 자기 자신이 신앙과 신학이 어떻게 일치되는지를 이 신학교 선생님으로서만 유명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이 영적인 삶에 있어서 거목과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서 그것들을 배워가야 합니다. 그래서 엊그제도 내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한다고 어떤 사람에게 충고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든지 칼빈이든지 이런 위대한 신학자를 연구할 때 제일 제쳐 놓는 게 뭐냐하면 설교집입니다. 이건 평신도용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그게 가장 신학적으로 중요한 자료입니다. 거기에서 이 유장한 신학과 신학의 논리와 교화적인 애드립이 만나면서 이것들이 바로 그 진리와 하나님의 은혜가 한 설교자 속에 역사하던 그 생생한 마음의 움직임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 공부를 이 학교 공부와는 별도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제가 필라델피아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 가서 한국 학생들에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끝나고 났는데 그 중에 어느 학생이 와서 나를 붙들고 복도에서 애기처럼 펑펑 우는 겁니다. 왜 그러냐 왜 그러냐니까 ‘목사님 우리는 너무 곤고해요 너무 너무 곤고합니다’ 그러니까 영어는 잘 안되지 공부는 어마어마하지 거기도 엄청 시키거든요. 제가 개강 예배 설교차 집회하러 갑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시키거든요. 기도할 시간이 없는 겁니다. 뭐 성경 읽을 시간도 없는데요. 그런 속에서 기도 안하고 열렬하게 하나님을 묵상하지 못하고 살아가니까 뭘 하든지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덜 자야죠 덜 자면 되잖아요. 희생 없이 뭐가 되겠어요? 물어보십시오. 아무한테라도 물어보십시오. 희생 없이 먹고 싶은 것 먹고 자고 싶은 것만큼 자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만나고 싶은 사람 다 만나고 그렇게 하면서도 위대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나는, 이런 얘기하면 여러분 마음에 너무 아파하지 마세요. 아니 아파하세요. 아파하는데 너무 꾸부러지게 듣지 말아요. 나 들어올 때 마다 느끼는데 현저한 기도의 부족, 이게 온 몸으로 느껴져요. 그것은 당시 새벽기도 나왔을 때 사람이 얼마 안 나와서 내가 지레짐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에게는 감각이 있어요.
물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최근에 하나님 앞에 ‘아- 오늘은 내가 충분히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쏟았다’ 그런 시간이 언젠가? 그렇게 여러분 5-6년 보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한 번 벌 받으면 되겠지. 그 분이 옳은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되는 게 아니죠. 그랬더라면 세례요한이 왜 그 긴 세월을 광야에 있었겠어요? 5, 6세부터의 어린아이지만 누가복음에는 베이비라고 나옵니다. 갓난애기때 보내진거죠. 그 속에서 서서히 서서히 스피리츄얼리티가 형성되어 가는 겁니다. 왜? 매일 매일의 삶과 실천을 통해. 그렇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돈 이사장트가 쓴 더 쎄크릿 어노인팅이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설교자는 비상하리만치 신령함으로 특징지어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더 프리쳘 마스디어맨 후 이즈 캡터 라이즈 바이 스피리츄얼리티 인 언 언뉴절 디그리 비상하리만치 신령함에 의해서 특징지어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했습니다. 이들이 오늘날의 현대의 개혁주의의 목회 개혁주의라고 할 때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저기 올드 프리스턴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화란 신학으로 올라가는 그 라인이 오늘날 복음주의의 뿌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개혁주의가 복음주의의 유일한 뿌리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미국을 기준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새로운 뿌리가 중간에 하나 들어오게 됩니다. 물론 중간에 들어온 게 뿌리냐 라고 말 하면 할 말 없죠. 그러나 뿌리라고 말할 정도로 견고하게 심겨져야 합니다.
그게 뭐냐하면 18세기 이후에 일어났던 리바이벌 리치, 부흥 운동입니다. 그게 리필드와 그다음 조나단 에드워즈때부터 시작되기 시작하고, 이후에는 훨씬 더 건전하지 않은 방법으로 처음 18세기 말에 켄터키부흥운동 이후에 차시니의 개이치 대각성운동, 그리고 그 후에 오순절 운동 등등을 통해서 이게 들어오게 되는거죠 그런데 잘 보세요. 이쪽에 한 뿌리가 되어 있는 개혁주의 전통은 칼빈주의이고, 바빙크나 이런 사람들의 신앙을 따라서 통전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이 기독교 전체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의 세계로 보면서 구속사를 바라보는 폭 넓은 학문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마틴루터가 자신의 책속에서 이런 얘기를 하죠 이제껏 기독교가 저지른 최대의 범죄는 이 장중한 사상을 버리고 간단한 신앙으로 바꾼 것이다. 그 전통은 이 쪽에서 온 게 아니라 이 쪽에서 온 것이다. 사람들은 근대주의가 들어오고 그 다음에 인간이 중심에 서게되고, 나중에 이 근대주의가 무너지고 하면서 사람들은 이런 장중한 진리 자체를 거듬고 이것들을 하는 그런것 자체를 싫어하는 시대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이 사람들은 이런게 싫고 즉각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감각적이고 현실적인것, 오늘날 조엔 오스틴 설교가가 그렇게 인기를 얻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여러분 한 번 보세요. 이게 리모콘을 딱 켜고는 놓을 수가 없어요. 빨려 들어가거든요 마력이 있거든요. 그런 것들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니까 이것들은 이런 사상을 얘기하는 전통들은 다 죽어버리거든요. 그렇게 오늘날 복음주의는 이상하게 그라운드도 없고 파운드도 없는 이론적인 근거가 없는 그런 아주 가벼운 종교가 되는 겁니다. 원래 개혁주의 목회에서도 그래요. 그래서 이렇게 철저하게 사상적으로 공부를 해서 뿌리깊은 사상의 체계속에서 거기에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뼈아픈 충고가 될 텐데 잘 들으면 약이 될 겁니다. 유학을 하고 와서 한국에 와서 목회에서도 재미를 보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유학을 했기 때문에 목회를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분은 유학을 안 했어도 못하였겠지만 유학을 하고 온 게 잘못된 게 아니라 유학을 한 게 목회에 도움이 안 된 거죠. 그럼 잘 한다. 그럼 그거는요 그냥 어떤 자기가 유학중에 배운 신학을 거기에 접목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이 교회를 신학적으로 이렇게 이끌어 가야 되겠다 그게 아니라 그 신학을 내려놓고 그 다음에 겸손하게 교회가 그래도 바람직하게 자라가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자기가 배운 신학하고는 상관없이 제켜놓고 다시 디자인을 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무슨 번영주의도 나오고 신사도운동도 나오고 그 다음에 신번영주의적인 교회, 조엘 오스틴 교회도 나오고, 또 은사주의 운동도 나오고 많습니다. 이걸 디자인해가지고 지혜롭게 잘 가지고 돌리는 겁니다. 너무 거기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낮추고 다 싸잡아서 비난할 필요는 없겠죠. 그러나 사실 그것은 뭐 신학이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탈신학적이라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개혁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목회는 뭐냐 하면 한 사람을 데려다 놓고 우선 첫째는 희망이 없는 인간이 진실하게 중생을 하고 회심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장중한 이 모든 하나님의 세계에서 나오는 이 진리의 체계적인 지식들을 전달하여 사상과 그 관점을 가지고 이 세계와 역사와 모든 것들을 바라봐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게 목회입니다. 그게 열 명이 모이든 다섯 명이 모이든 그게 목회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외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리가 자기 안에 없는 겁니다.
더욱이 오늘날 같이 여러분들이 이렇게 m.div 과정까지 섞어서 공부를 하다가 딱 끝나고 나서는 산지사방으로 세분화되어가면서 그러면서 박사과정까지 올라가게 되면 그 다음에는 남들이 다 하지 않는 실낱 같은거 하나를 가지고 7년 8년 연구를 해 가지고 학위를 받으면 세계 최고가 되겠죠. 아마 될 거에요. 뭐든지 남들이 안 하는거 가지고 7년 8년 하면 세계 최고가 안 되겠습니까? 되겠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걸 다른 신학의 세계와 통합을 할 수 있는 노력을 별도로 하지 않으면 별로 쓸모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박사과정 공부하다가 열심히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그 다음에는 공부할 의욕을 잃어버리고 침체에 빠진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걸 해서 뭘 하겠습니까? 아니 지금 공부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공부가 되겠어요? 그건 뭐냐하면 아까 얘기했듯이 연관성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공부는 학교에서 해 준 대로만 따라가면 안되고 이건 별도로 다시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치열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개혁주의의 전통, 개혁주의의 사상, 그리고 그 다음에 열렬한 신앙생활, 이 두 가지를 함께 묶으면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학문의 세계는 우리에게 신학의 논리만을 가르쳐 주지만 신앙의 세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만들어줍니다. 신학을 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뭐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심미안은 중생과 그리고 회심과 더불어서 우리 안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가 하는 것을 이 학문의 세계에서 보는 것입니다.
오늘 비행기타고 오면서 존 볼트 교수의 논문을 한 편 읽으면서 왔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솔라스크립투라’ 들어봤어요 그 얘기? ‘솔라스크립투라’ 아니 그 얘기가 아니라 그 분이 하는 얘기. 솔라스크립투라의 의미를 오늘날 우리들은 전적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솔라스크립투라는 ‘오직 성경으로써’ 이지 ‘성경만 가지고’ 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학의 기준을 정하고 모든 것을 할 때에 그 때에 ‘오직 성경으로써’ 라는 뜻이지 ‘성경만 가지고’ 라는 뜻은 아닙니다.
프란시스 튜레티는 오히려 자기의 변증신학 강요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느 인간이든지 형이상학과 철학을 통해서 신에 대한 참 지식을 갖고 있지 않으면 성경을 펼쳐서 하나님을 보여줘도 믿을 수 없는게 당연하죠. 신학에 대한 관념이 없는데. 그러면 결국은 이 학문은 성경 하나만이 아니라 이 모든 자연세계와 모든 인간의 학문의 세계, 역사, 그리고 발아래 부는 모든 것들 속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선함이 묻어있다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선함과 아름다움이 사물의 존재자체 원리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보고 감격하고 그것을 즐거워할 수 있는 심미안을 갖는 것이 신학을 하는 비결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화가 앞에서 그림을 아름답게 그리려면 숲 속을 이렇게 보면서 ‘삼겹살 구워먹으면 참 좋을 시간이다’ 이런 생각하면서 그 사람이 남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겠어요? 그런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농축돼서 묻어있는 곳이 성경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움은 구속사역속에서 현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구속사역이 담겨져 있는 성경의 계시를 핵심으로 해서 그 아주 진수이므로 이것들이 외연을 그리면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우주와 세계속에.
시저는 최근에 양자역학에 대해서 좀 보고 있는데 그 미시세계에까지 들어가게 되면 이 거시인 우주의 세계에서 풀리지 않는 많은 의문들이 미시세계에서 풀리게 됩니다. 그 보는 순간마다 감탄하게 됩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하나님은 정말 그 위대한 영광 입니다. 온 땅과 만물위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체험합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행복해하지 못하는 불쌍한 많은 사람들의 그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들의 무지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무엇인가 전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일을 그저 이세상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파트타임으로 하는 것 가지고는 도저히 내 마음에 일어나는 이 연민의 불을 끌 수 없다’ 이 마음이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올 4월달에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제가 석·박사 학생들의 초청을 받아서 조나단 에드워즈 특강을 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한 한 시간 15분 정도 특강하고 질문도 받고 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다 설명을 하고 마지막에 언급한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은 참 예쁘다. 나는 정말 아우구스티누스나 조나단 에드워즈를 만나기 전 까지는 신학이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예쁘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것을 이 속에 있는 너무나 아름다운 그것을 내가 이것을 누리고 그것 때문에 행복해 하는 나를 나의 프레즌스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최고의 선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너희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그렇게 핍박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너희들이 어떻게 그렇게 소망으로 가득차고 그 소망은 기쁨을 주는 그게 무엇 때문이냐 이렇게 묻고 싶을 정도로 소위 얘기하는 산 소망, 그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한다.
어느 스승의 날 새벽기도가 끝나고 집에 가는데 성경책 속에 편지가 하나 들어있었습니다. 구두 티켓이 하나 들어있고 누가 썼는지 지금도 모릅니다. 이렇게 써 놨습니다. ‘목사님이 거기 계셔서 전 참 좋습니다’ 내가 받아 본 최고의 스승의 날 편지였습니다. 우리도 그런 고백이 있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셔도 하나님이 거기 그렇게 계신 것 때문에 나는 행복합니다. 찬송 한 번 해 볼까요?
(찬송)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God is so good God is so good God is so good He is so good to me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신학 공부는 캬- 인상을 그리면서 ‘하- 이거를 내가 해야 된다’ 그러고 가는 길이 신학의 길이 아닙니다. 이것은 도열의 길입니다. 도, 록스 열, 기쁨. 그리스도 때문에 혹은 진리의 도 때문에 희열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학은 이것이 이 사람속에 육화되어서 그에게서 나오지만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 그의 진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소위 심원성을 가지고 있는 거죠. 성경에 보면은 마이 라스포이라는 묘사가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여러 번 이야기 합니다. 그건 갓스 포 크라이스트와 별개로 이 사람이 새로 하나 만들어 냈다는게 아니라 여기서 마이라고 하는 것은 인케마스, 친밀성을 나타냅니다. 혹은 칼빈의 설명에 따르면 패밀리아티, 친밀성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로부터 받은 것인데 그게 뭡니까? 주께로부터 받았지만 지금 나는 내가 너희에게 전해준 교훈은 예수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똑같이 왜 어떤 사람은 신학을 공부해서 그 신학이 이 사람 속에 좌-악 육화되어서 무엇을 말하면 그 신학이 묻어 나와서 강의실에서 듣던 진리와 설교단에서 울려 퍼지는 진리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그런 것들이 없을까? 이런 것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되냐면 두잉 씨알러지 신학을 함에 있어서 좋은 신학함의 조건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진리에 합치된 삶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하죠. ‘진리가 있고 진리보다 더 큰 것이 없다면 그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진리가 있다고 하면 있다는 그 존재 자체는 여러분들에게 책임을 지도록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하나님으로 바꿔놓고 보면 모든 사상이 하나님은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렇게나 살아가면 돼.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단지 진리를 탐구하는 영역에만 갇힐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분이 살아계시면 그 분이 의도를 가지고 계시고, 의도를 가지고 계시면 그 의도대로 안 산 나는 그 분 앞에 왜 뜻대로 안 살았는지를 변명을 해야 됩니다. 받아들여지면 다행이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렇게 살지 않았던 나의 삶에 대해서 내가 리스판서빌러티, 책임을 져야합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좋은 신학함은 뭐냐 하면 그 진리에 대해서 매일매일 책임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심사는 뭐냐 하면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뭐냐 하면 그 진리를 성경속에서 발견해 내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입니다. 신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학문일 수가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반드시 학문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의 독특성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리가 저 하는 짓을 인정해 줄 때는 좋아하나 그 진리가 자신을 책망할 때에는 아파하고 싫어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버린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신학에서 어려운 것은, 공부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거니까 합니다.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또 어렵다고 칩시다. 그만큼도 안하고 먹고 사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한 20년 전에 이런 책에 보니까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기숙사의 한 동에서 한 학기에 두 명 정도가 병원에 실려 간다고 합니다. 기말고사 공부하다가 너무 프레셔를 받아가지고 감기에 걸리고 몸살이 나서 병원에 실려가는 게 아니라 돌아서 정신병으로 돌아버려서.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면 안 돼요 마귀에 져가지고. 아니 세상 속으로 나와 봐야, 좋은데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교수나 하고 회사가고 그러잖아요. 그것도 그렇게 해야지 먹고 살아요 그런데 뭐가 힘들어요? 그만큼 고생 안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진짜 어려운 것은 그게 아니라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겁니다. 사람이 해 놓은 학문인데 그만큼 못 할지 모르지만 열심히 공부하면 여러분들이 그걸 발견하고 진리 앞에 자기를 세워서 거기에 자기를 합치시키고 그 진리에 대해서 책임지는 이것은 학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세계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거기에서 그 진리에 합치했을 때에 하나님의 인정함이 있고 그렇지 못했을 때 회개와 자기 깨트려짐이 있고 그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서서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달려가는 생활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신학을, 저도 여러분들처럼 유학은 안 했지만 여태껏 지금도 나는 신학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속에서도 깨달은 것은 뭐냐 하면 신학을 공부하기에 적합한 마음은 뭐냐 하면 굳은 살 박힌 무릎, 굳은 살 박힌 팔꿈치, 그 다음에 눈물에 젖은 눈물 빵, 사랑에 불타는 신앙. 왜 아무리 진리를 터득하고 내가 배워가지만 나는 그 진리에 이제는 도달했다 이제는 내가 진리에 합치되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합치될 것 같으면 멀죠 여기에 합치된 것 같으면 저기서 멀어지죠 그걸 발견하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러면서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렇게 눈물로 아버지 앞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제가 사역자들에게 말을 많이 합니다. 제가 신뢰하지 않는 사역자들이 있어요. 진지한 설교 청취자였던 적이 없는 열렬한 선교사, 뜨거운 기도자였던 적이 없는 기도 인도자, 목양을 잘 받아본 적이 없는 목회자, 교회 치리에 복종해 본 적이 없는 당회장, 이런 사람들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 직분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 일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목회자는 목회를 배워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훌륭한 목회자는 좋은 양떼에게서 나옵니다.
캄보디아를 갔었어요. 선교사들이 모여서 담화를 하는데 ‘목사님, 우린 너무 힘듭니다. 뭐가요? 깨닫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래서요? 가보면 되지도 않는 설교를 하고 목회자를 주물러서 교회를 아무렇게나 주물떡 거려 가지고 선교사들이 힘들고. 그래서요? 목사님이 한 번 여기다가 더 좋은 교회를 개척해 주십시오. 그러면요? 우리는 모두 거기 가서 제대로 된 목회를 한 번 배워 보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당신들이 그 맘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교회를 개척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좋은 교회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무슨 구멍가게 있는 곳에 만들어 놓은 것처럼 그렇게 되지 말고, 그 말도 안되는 그 교회 들어가서 그 교회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당신들이 희생을 하면 안되겠습니까?’ 한 참을 있더니 고개를 끄떡 끄떡 거리는데 그들이 그렇게 하겠다는 뜻은 아니고 ’참 힘든 일이다‘ 그겁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어요. 치열하게 신앙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주일이면 갈 데 없어서 방황하고 계시는 않겠지요? 아무데나 가세요. 가서요 공부하고 있으니까 거기서 큰 일 맡겨 달라고 그러지 말고 주일학교라도 맡아서 그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서 일주일동안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이게 얼마나 큰 일을 해 가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본질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해 봤느냐에 의해서 이 목회와 신학의 통합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을 신뢰 안해서 주일 학교도 안 맡겨준다 그러면 전도를 하세요. 미국사람 전도하기 힘들면 한인 하나 하나 찾아가 전도하고, 그것도 안 되면 처음 온 새신자 한 사람이라도 맡겨 달라고 해서 일주일에 한 번 씩 주일 날 예배드리러 만나서 도시락을 먹으면서 복음을 가르쳐주고 그 영혼을 위해서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주일날 가서 청소해주고 겸손히 봉사하세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한 사람의 신자가 되어 우리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보편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입증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를 향해서 그 속에서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는 신통치 않게 담임 목회를 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더 많은 역동적인 은혜를 경험 하면서 신학을 공부해 나가는 겁니다. 영혼을 위한 눈물이, 시도가 누군가에게 이 진리를 가르치는 이들이 여러분들의 삶속에서 사라지지 않게 해야 됩니다. 공부도 전념할 때는 조금 하고 해방 되었을 때는 그 일을 더 많이 하겠지만 이것이 사라지지 말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의 신학의 길이 얼마나 걱정이 많겠습니까? 경제적인 문제부터 시작을 해서 뭐 부부간의 갈등까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모든 것이 십자가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짊어지면서 하나님 앞에 매일 매일 살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결국은 승리할 때 그들이 이 한 점 한 점 살을 베어내는 거기에다가 소금을 뿌리는 것 같은 그 고통 속에서 한 꺼플 한 꺼플을 덧 붙이면서 소위 얘기하는 신학의 체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더 얘기하면 신학의 인카네이션입니다. 열심히 이렇게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