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201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4년 10월 27일-12월 14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4년 11월 일
목 차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0 (2014.12.14 주일오전설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1 (2014.10.27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2 (2014.10.28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3 (2014.10.2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0. 그의 피로 화목케 하심은(골 1:21-23) 2014.12.14 주일오전설교 1
1.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골 1:24) 2014.10.27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0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4 (2014.10.3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2.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고난(골 1:24) 2014.10.28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26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5 (2014.11.02 주일오전)
3. 그리스도와 남은 고난(골 1:24) 2014.10.2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39
4. 육체에 채우는 고난(골 1:24) 2014.10.3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54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6 (2014.11.09 주일오전)
5. 교회의 소명과 일치(골 1:25) 2014.11.02 주일오전 70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7 (2014.11.23 주일오전)
6. 성도에게 나타난 비밀(골 1:26) 2014.11.09 주일오전 80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8 (2014.11.30 주일오전)
7. 영광의 비밀, 그리스도(골 1:27) 2014.11.23 주일오전 91
8. 남은 고난에 참여함은(골 1:28) 2014.11.30 주일오전 99
9. 그의 역사를 따라 수고함(골 1:29) 2014.12.07 주일오전 109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1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17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0 (2014.12.14 주일오전설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1 (2014.10.27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2 (2014.10.28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3 (2014.10.2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4 (2014.10.3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5 (2014.11.02 주일오전)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6 (2014.11.09 주일오전)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7 (2014.11.23 주일오전)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8 (2014.11.30 주일오전)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9 (2014.12.07 주일오전)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0) 2014.12.14 주일오전
< 그의 피로 화목케 하심은 >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골 1:21~23)
I. 본문해설
- 노년 옥중에서 깨달은 복음의 전망
- Recapitulation의 교리를 깨달음
- 교회로 그리스도의 몸 이루게 하심
- 위대한 경륜의 시작은 개인의 구원
II. 우리의 정체
A. 구원 받기 이전
- "전에‥" 성도지만 옛 정체 생각함
- "악한행실" 구체적으로 주님 대적
- "멀리 떠나" 스스로 하나님을 떠남
- "원수됨" 마음속까지 주를 미워함
B. 구원 받은 이후
- 하나님과 불화한데서 화목하게 됨
-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 주님을 죄인께 죄인을 주께 돌이킴
- 은혜는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이루심
III. 성도와 구원 계획
A. 거룩하게 하심
- "너희" 이미 성도된 골로새 교인들
- 이미 된 거룩함과 이루어갈 거룩함
- 구별과 완전: 이미 구별, 완전해짐
B. 흠이 없게 하심
- amomos "결점 (흠)없는" a+momos
- 자연적 의미 뿐 아니라 도덕적 의미
- 흠 없게 하심은 흠 없는 교회 세우려
- 흠 없는 거울의 비유, 사과의 비유
C. 책망할 것 없게 하심
- 하나님 앞 뿐 아니라 이웃 앞에서도
- 불완전한 신자와 불완전한 교회임
- 책망할 것이 없는 온전함을 추구함
- 우리를 그리스도 앞에 세우려 하심
- 심판주 뿐 아니라 구속주 그 분 앞에
IV. 구원 계획에 부합하는 길
A. 믿음 안에 거함
- "그 믿음 안에 머물기를 계속하면"
- 믿음은 일회 아닌 매순간의 작용임
- 믿음 안에서 삶: 지식+사랑 안에서
- "같은 차 번호 – 왜 그러세요"
- 지식을 즐기는 것과 믿음화 하는 것
- 믿음이 강화되는 길은 사랑의 감화
B. 터 위에 굳게 섬
- "터 잡혀 굳게 서 있어 오고 있다면"
- 굳게 섬: 지식+사랑의 강함 의미함
- 현대와 과거의 사랑: 부모+부부로
- 유익+의무+헌신에의 뚜렷한 인식
- "터" themelios 고전 3:12, 엡 2:20
- 복음의 진리와 교리의 터를 가리킴
C. 흔들리지 않음
- "복음의 소망" 복음이 주는 소망임
- 하나님을 향한 삶의 의미를 발견함
- 흠 있어도 교회 통해 신적경륜 성취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취에 참여
- 매일의 삶을 하늘 생명으로 살아감
- 십자가에 대한 은혜와 사랑의 경험
- 분명한 삶의 이유는 예수를 소망함
V. 적용과 결론
- 죄인이던 우리의 정체를 잊지 말자
- 구속의 사랑이 무엇 위함인지 알라
- 배우고 확신한 바에 거하며 충성함
- 은혜 받아 진동치 못할 나라를 누림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1) 2014.10.27 가을말씀사경회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골 1:24)
I. 본문해설
- 우주적 기독론을 담은 옥중서신임
- 바울의 로마 투옥중인 62년경 기록
- 바울이 세우지 않은 교회를 사랑함
II. 그리스도인의 정체
- "너희를 위해 받는 괴로움을‥"
- tora xairo eis ta pathdmata mou dia sas "이제 내가 너희로
말미암는 나의 겪음들 속으로 기뻐하고"
A. 속량, 곧 죄사함을 얻은 자 (14)
B.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김 (15)
C.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부 (18)
-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세계의 창조
- 천상과 지상의 세계, 세계의 질서
- 교회의 머리되심⇒만물의 으뜸
- 모든 만물의 충만: 참된 존재가 됨
- 세계 완성을 위한 선취적 생명주심
- 그리스도 통한 화목을 이루어 가심
III. 몸을 위한 고난에 참여함
- "너희 때문에 받는 겪음들‥" (24)
- 자신의 투옥: 교인들 함께한 고난
A. ‘겪음’(pa,qhmata): 피동적 고난
- 신적인 선을 거부하는 세상 때문에
- 결핍과 오류 속들에서 선을 추구함
- 인생 자체가 끝임 없는 겪음의 연속
- 신자됨이 거룩한 목표의 겪음 소명
-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겪음 생각
- 세상의 악함+사랑하는 자들 위함
B. 몸의 고난에 참여함
- 세상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몸
- 구원은 고난 받는 몸의 일부 되는 것
- 하늘생명, 사랑↔세상 고난, 핍박
- 안팎의 고난을 몸의 일부로서 받음
- 고난 이유 세상 교회 안에 세상 있음
- 고난을 그 몸의 성화위해 사용하심
- 그리스도를 본받는 믿음이 요구됨
IV. 적용과 결론
-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를 생각하라
- 그의 몸의 일부임은 신자의 운명임
- 무지 속에 행해 교회와 자신 불행함
- 그리스도 몸의 일부임의 신비 알라
- 우리 기독교 신앙을 다시 시작하라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2) 2014.10.28 가을말씀사경회
그리스도인의 몸을 위한 고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골 1:24)
I. 본문해설
- '겪음'(pathemata): 사도의 투옥
- 방문한적 없는 골로새인 위한 고난
- '너희로 인한 괴로움들' 복수로 씀
- '대신해서', '때문에', '위하여’
II. 주의 몸을 위한 고난 있음
- 그리스도 몸인 교회의 현실적 고난
A. 교회 밖으로부터
- 세상과 다른 존재이기에 받는 고난
1. 세상과 다른 사상 때문에
- 세상과 다른 믿음 때문에 싫은바 됨
- 하나님의 존재와 상 주심 (히 11:6)
- 사람이 중심된 사상의 강력한 반감
- 순결한 신앙 공동체가 미운 물건됨
2. 세상과 다른 윤리 때문에
- 세상과 다른 사랑의 질서가 윤리됨
- 이익 안 겹치는 부분은 문제가 안 됨
- 이익 겹치는 부분이 갈등의 원인 됨
- 어둠의 세상과 빛의 자녀들의 존재
B. 교회 안으로부터
- 성도들의 불완전함의 총화 때문에
1. 불완전한 몸 때문에
a. 지식의 불완전함
- 불완전함의 원인이 무지와 오류임
- 무지와 오류에 대한 고집의 강한 힘
- 신령한 것에 무지한 죄인들의 감각
- 사랑 없는 마음에 지식 수납은 고통
- 무지와 오류로 참 신앙에서 멀어짐
- 참 신앙의 몸을 바랄 때 고통을 받음
b. 사랑의 불완전함
- 바른 지식 많은 사랑과 늘 부합 않음
- 사랑은 서로 다른 사람들 하나 되게
- 사랑의 부족과 빗나감이 고통을 줌
- 교회의 온전함 추구할 때 고통 받음
- 자신의 온전함 추구 없이 추구 못함
2. 교회의 분쟁 때문에
a. 자기만 위한 이기심
- 이기심이란 단순히 이익의 문제임
- 본질상 진리로 깨어지길 거부함임
-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기 늘 고집함
- 이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이 아파함
- 그리스도 더 사랑하는 자가 짊어짐
b. 영원에 대한 무관심
- '이기심' 추구하는 이익 잠세적임
- '이기'의 주체도 사라져갈 존재임
- 영원한 복락의 현재적 누림 생각함
- 신앙의 행복은 영원한 복의 현실화
- 영원의 빛으로 시간 세계를 봐야 함
- 영원하신 한 분에게 기쁨이 되는 삶
III. 영적인 몸으로서의 삶
- 교회의 신비에 대한 무지의 심각성
- 그리스도인의 삶을 모래 위에 세움
- 신자로서의 운명이 교회와 함께함
- 지식, 은혜, 세상 자원 공유케 하심
- 세상과 교회 자신 위해 고난 받는 몸
- 주께 대한 사랑 보편교회 사랑으로
- 개교회에서 그 사랑을 구현하며 삶
IV. 적용과 결론
- 머리 항한 사랑은 몸 사랑과 일치함
- 주와 함께 죽고 다시 태어나게 하심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3) 2014.10.29 가을말씀사경회
그리스도인와 남은 고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골 1:24)
I. 본문해설
- 자기만의 행복 위해 예수를 믿는 시대임
- 신자의 행복은 교회와 함께 지어져감
- 행복 소명을 공동 생활 안에서 발견
- 참 교회가 되는 것 이상의 소명은 없음
- 교회의 존재적 울림에 함께 참여함
II.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 구속을 위한 미완성의 고난은 없음
- "그리스도의 고난들 뒤에 있는 것"
- hysterema ta ton thripseon tu Xristou
A. 도성인신하신 그리스도의 고난
1. 홀로 당하신 고난
- 고난을 받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
- 인간의 죄와 세상 불완전함을 인함
- 궁극적으로 그의 고난만이 유효함
- 우리 동참 기대치 않으심(마 26:31)
2. 구속을 위한 고난
-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줌
- 참 인간의 모본을 보여줌
- 대속의 십자가로 죽으심
B. 교회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고난
1. 함께 겪으시는 고난
a. 그리스도의 부활과 머리되심
- 죽음에서 부활승천 후 만유 주 되심
-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여호와이심
- 머리되심으로 그의 통치 시작하심
- 교회를 의, 거룩함, 진리로 갱신함
- 교회와 신자들의 순종을 사용하심
- 이 일을 이루기 위한 신자들의 고난
b. 머리되심과 그 몸인 교회의 고난
- 고난 없는↔고난 당하는 그리스도
- 몸의 일부로서 당하는 머리의 고난
- 당신의 부족 아닌 신자로 인한 고난
- 신성 인성의 겪음 아닌 교화적 적용
2. 신자 참여하는 고난
- 영적인 몸의 일치로 고난에 참여
- 신적 요구 아닌 교회 온전함 위함임
- 교회를 고난에 참여하게 하신 지혜
- 온전한 세상에 대한 갈망 유지케 함
-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의존을 촉진
III. 적용과 결론
- 예수의 남은 고난에 참여치 않을 때
- 육체의 생명과 죽음의 신비한 관계
- 성화는 궁극적으로 교회의 봉헌임
- 구원의 우주적 계획 따라 살아야 함
- 모든 은혜와 진리를 그 몸통 해주심
-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라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4) 2014.10.30 가을말씀사경회
육체에 채우는 고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골 1:24)
I. 본문해설
- '그리스도의 고난들 뒤에 있는 것'
- 구속의 고난으로 그리스도 몸 이룸
- 몸의 구속: already~but not yet
- 완전한 머리와 불완전한 몸의 고통
- 흠 없는 완전한 몸 이룸에 고통 따름
II. 육체에 채우는 고난
A. “육체에 채운”는 뜻
- antanaplero ~ en sarki mou
- "나의 그 육체 안에(in) 채운다"
1. '육체'(sarkos)의 용례
a. 죄와 무관한 육체 (마 26:41, 요 1:14)
b. 죄에 오염된 육체 (롬 7:5,18)
2. '채운다'의 뜻
- 밖에서 안으로 들어붓는 동작 아님
- 3격 전치사 'en': 정지 상태 나타냄
- '차오르게 하다'라는 의미 보여줌
- 죄에 오염된 육신의 경향에 대적함
B. 교회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고난
- 영혼과 육체 대비는 단순 실체 아님
- 신령적 특성과 육신적(죄성) 특성
- 고난을 육신적 성향의 마음에 채움
- ‘고난 채움'은 '죽음 채움'을 뜻함
- 그리스도 고난의 고유한 뜻 죽음임
III.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실재화
- 그리스도의 죽음은 객관적 사실임
- 고난 죽음이 믿음 통해 죽음 채움 됨
A.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
- 이미 발생한 일을 섭리 속에 이해함
- 섭리는 주권적 선을 이뤄가는 과정
- 신적 선과 발생한 일의 선함을 믿음
- 사람과 환경 너머에 있는 주님 의지
- 그리스도 몸은 이로써 충분치 않음
B. 십자가 고난을 묵상함
-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를 구속함
- 그 은혜에 고난 겪음으로써 반응함
- 고난 겪음은 일방적 고통당함 아님
- 겪음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보게 함
- 진리의 객관화로써 자기 죄 인식함
C. 성령으로 육심을 죽임
- 예수 죽음의 이유가 자신 안에 있음
- 믿음으로 예수 죽음 의미를 적용함
- 열렬한 기도로 자기정죄 죽음 도달
- 죄된 육신 요구에 순종치 않을 힘 줌
D.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
- 자기 깨어짐 속 그리스도 부활 경험
- 죄 된 육체 아닌 천적 새 성품 다시 삶
- 영적 죽음 경험과 그리스도와 연합
- 그리스도 사랑함⇒교회 사랑으로
- 심미적 사랑: 교회 아름다움 때문
- 성향적 사랑: 사랑의 경향성 때문
- 추하고 악한 교회의 머리도 예수님
- 추함과 악함은 인간의 잘못에 기인
- 그 안에서 그리스도 머리되심을 봄
IV.적용과 결론
- 구원의 은혜를 교회를 섬김에 적용
- 보이지 않는 주님 사랑 교회에서 봄
- 사도도 자신 안에 죄 된 육체 발견함
- 사랑스러울 때 뿐 아닌 부족할 때도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5) 2014.11.02 주일오전
교회의 소명과 일치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 (골 1:25)
I. 본문해설
- 갑자기 자신에 관한 얘기로 돌아감
- 하나님이 그를 diakonos로 세우심
-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목회자 됨
- 다메섹의 체험과 하나님의 부르심
- 그의 소명이 우주적 경륜 안에 있음
II.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하심
- 번역: "그것에 대해(hes), 나는 하나님의 그 경륜을 따라
한 일꾼이 되었는데, 그 경륜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성취
하려고 너희 속으로 나에게 주신 것이다"
A. 일꾼으로 부르심
- "일꾼" diakonia 식탁 차리는 종 됨
- 사도의 권위와 봉사자로 교회 세움
- 교회에 접붙여짐과 은혜 속의 소명
- 모든 지체가 그리스도 몸에 봉사함
- 무위도식의 삶은 자각없기 때문임
- 스스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물음
B. 신적경륜을 따름
- kata ten oikonomian tu theou
- "오이코스"+"노모스": 가정통솔
- a.청지기직 Lk 16:2, b.경륜 Ep 3:9
- 그 경륜
a. 구원계획과 하나님 영광
b. 바울을 일꾼 삼음⇒둘을 연결함
III. 교회를 세우신 경륜
A. 하나님의 말씀을 이룸
- "하나님의 말씀" 그 경륜 관련된 말
- 타락한 인류의 구원 위한 신적방법
- 교회 통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심
- 구원받은 인류가 사랑의 나라에 삶
-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회복하심
- 세계 경륜-교회 경륜-성도의 경륜
B. 목회자와 성도의 연합
- "dodeisan moi eis hymas"into
- 성도들과의 연합 속에서 이루어감
- 신비적 연합과 영적 연합 속에 성취
- 그리스도 사랑과 천국 소명 일치임
- 주 안에서: 서로 사랑+소명의 일치
- 다양한 사람이 서로 다른 재능으로
- 교회는 획일화 아닌 조화의 일치임
IV.적용과 결론
- 교회는 소명 받은 성도들의 연합임
- 한 몸에 주어진 소명을 따라 주어짐
- 개별 사명 발견과 인생 의미 자각함
- 한 소명 안에서 사랑의 일치 이루라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6) 2014.11.09 주일오전
성도들에게 나타난 비밀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 (골 1:26)
I. 본문해설
- 하나님의 경륜은 세상에게 비밀임
- 창조의 목적과 구원의 계획을 모름
- 비밀이 구원의 복음 속에 담겨 있음
- 구약 선지자들 통해 말씀하심(히1:1)
II. 오래 전부터 감춰짐
A. 오랜 동안 감춰짐
- “만세와 만대로부터” apo ton aionon kai apo ton geneon
- aion과 geneon “시대들과 세대들”
- “감춰진“ (having been hidden)
-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인류사의 물음
- 주전 5∼3c 철학자들의 천재성과 죽음
- 내 인생의 의미는 세계 됨, 이웃과 연결 됨
- 끝없는 불안과 세상의 안락을 구함
- 알지 않기로 다짐한 자기중심적 삶
B. 비밀스러운 경륜
- “그 비밀” to mysterion 신적 경륜
- 창조했으나 타락한 세상과 인간들
- 구원 계획은 세계 창조 목적의 연장
- 그리스도 죽음과 부활 그리고 천국
- 그 비밀은 철저한 비밀이 아니었음
- 메시아를 통한 구원 계획이 전승됨
- 복음이 하나님 지혜, 곧 철학인 이유
- 지혜와 선행이 아닌, 하나님 은혜로 앎
III. 성도들에게 나타남
A. 그의 성도들에게
- “tois hagiois tou” 그의 거룩한 자들에게
- 성도의 정체성은 거룩하게 된 자임
- 신적 은혜로 구별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됨
- 거룩하게 되었고, 미래에 완성될 자의 현재성
- 거룩함의 두 의미: 초월성 + 완전성
-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 사람과 구별됨
- 미래 하나님 나라 보여주는 공동체
- 그 안에서 진리와 사랑의 일치를 이룸
-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함
B. 밝히 나타남
- epanerothe "밝히 드러났다“ 의미
- 이미 일어났고 하나님에 의해 성취 됨
- 세계의 경륜에 관한 비밀이 드러났음
- “눈으로 본 바요 만진 바” (요일1:1)
- 자연 이성으로 알 수 있다는 말이 아님
- 구약과 비교 할 때 명백해진 의미와 눈 멂
- C. Hitchens => 철학자 회심과 개안
- 이 비밀 아는 것, 이 얼마나 복된가?
IV.적용과 결론
- 그 경륜 모르던 불신자 시절 생각함
- 지성의 혼란 느끼거나 자기 틀 세움
- 가치의 혼돈 이길 수 없어 맘대로 삶
- 하나님의 경륜의 펼침인 그리스도
- 성도와 거룩함의 펼침과 행복한 삶
- 욕망 따라 살게 내버려 두지 않으심
-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음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7) 2014.11.23 주일오전
영광의 비밀, 그리스도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 (골 1:27)
I. 본문해설
- 비밀, 접근하여 아는 것이 금지된 것
- 인류의 고민: 세계의 기원과 종말의 의미
- 하나님과 세계: 창조, 타락, 구속, 완성
- 기독교 신앙, 새로운 사상의 체계임
- 비밀이 오래 감취어져 옴 - 점진적 계시
II. 영광의 비밀을 안 사람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방인들 가운데 이 비밀의 영광의
풍성함을 무었인지 알리기 원하셨다” (27절)
A. 비밀스런 영광
- te doxes tou mysteriou tou you
- “이 비밀의 그 영광” 비밀스런 영광
- 영광-눈부셔서 다른 것들을 가치 없게 함
- “은혜 받았니? 엄마, 은혜가 문제 아니야”
- 구원 계획 안에 인생의 답들이 있음
- 가장 우주적 사실이 가장 현실적과 연관됨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
- 세계의 비밀 안에서 인생의 답을 찾음
B. 이방인 가운데 풍성함
- ti to ploutos tes doxes
- “그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 “이방인들의 구원”: 유대 선민 사상과 배치됨
-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인 하나님 나라
- 십자가와 성소 휘장이 찢어짐(마27:51)
- 완고한 이스라엘이 버린 축복을 이방인에 주심
III. 그 비밀, 그리스도
A. 그 비밀이신 그리스도
-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 인생의 의미는 필연적으로 세계의 의미와 관련됨
- 세계 경륜이라는 비밀 창고와 그리스도라는 열쇠
- 그리스도를 만남 + 회개와 믿음 + 사랑함
- 그 지식으로써 세계와 인생의 의미를 찾음
B. 그 소망이신 그리스도
- “그 영광의 그 소망이신” 그리스도
- “너희를 위해 하늘에 쌓아둔 소망”(5절)
- 성도의 소망은 이 세상 나라가 아님
- 하늘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게 하고 누림
- 하나님 사랑, 통치, 그 뜻 성취 때문임
- 이 일을 위해 교회를 세우심, 지체들이 됨
- 다른 일로 아프지 말고 이 일 위해 살아가게 함
-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짐지는 것임
IV.적용과 결론
- 많은 무지의 구름들로 덮힌 현재 교회들
- 무지를 미워하고 복음의 장엄함을 알라
- 그리스도인 됨을 자랑스러워 하라
- 연단된 꿋꿋함과 성숙한 경건, 존재의 울림을 지님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8) 2014.11.30 주일오전
남은 고난에 참여함은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 (골 1:27)
I. 본문해설
- 그리스도가 세계 경륜의 비밀이심
- 이스라엘 너머 이방인에게 나타남
- 신적경륜이 곧 지혜이신 그리스도
- 성도는 이 지혜를 발견한 구도자임
- 지혜 전파 위해 남은 고난에 참여함
II. 성도를 완전한 자로 세움
-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자로 내세우기 위해"
- telos "다 자란, 어른이 된" 상태임
- 최종적 영화 상태에서야 완전해짐
- '성숙한 사람' 참 사람에 근접해 감
- 주를 경외함에 성숙 (지식과 사랑)
- 신자로서의 개인적 행복과 일치함
- 예수 믿어도 행복치 않음은 미성숙
- 개인의 온전함이 교회의 온전함임
III. 온전함을 위한 섬김
- "권하면서∼가르치면서∼선포함"
A. 그리스도를 선포함
- 지혜 그리스도에 대한 공중적 선포
- 세상의 비참은 그리스도에 무지함
- 신적경륜에 무지해 인생 의미 모름
- 구주와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전파
- 전도는 멈출 수 없는 교회의 사명임
B. 모든 사람을 권면함
- "nouthetuntes": nous + tithemi
- "훈계, 경고하다, 마음에 새기다"
- 교회 밖에 선포, 안에 권면, 가르침
- 마음을 올바른 곳에 두게하는 목양
- 교회의 목양과 신자의 경건한 생활
- 인생의 꼬임과 혼란한 마음의 이탈
- 교회와 예배 통해 마음의 위치를 앎
- "기도하라. 기도하라. 마음지킴"
C. 모든 사람을 가르침
- "didaskontes" dao 배우다의 중복
- "가르침. 교육하다" 무지 깨우침
- ‘권함’ ‘오류경고’ ‘가르침’ 알게 함
- 오류 제거와 꺾어지려는 마음 필요
- 진리 배우려는 마음 간직하며 살라
- 유형 따라 어찌하든지 가르쳐야 함
IV.적용과 결론
- 그리스도가 남겨둔 고난에 참여함
- 아픈 고통 참는 것은 단지 견딤 아님
- 분명한 목표 있으니 성도의 온전함
- 성숙한 성도와 온전한 교회를 세움
- 우리 신앙 위해 수고한 많은 지체들
- 마음 다해 온전한 성도되기 힘쓰라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9) 2014.12.07 주일오전
그의 역사를 따라 수고함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9)
I. 본문해설
- 자기 고백에서 시작한 공동체 소명
- 자기 고백으로 주의 고난에 참여함
- 좋은 교리도 자기 적용 없을 시 무용
- 남에게 말함과 자기에 적용하는 것
II.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
- “이를 위해" eis ho 내세우기 위해
- "성도를 온전케 함의 목표를 위해"
- 교회는 자기 만족과 평안 구치 않음
- 114세 할머니 "남의 일 참견마라"
- 교회 최고 섬김 온전한 자로 내세움
- 하나님 홀로 하지 않기로 하신 지혜
- 성도를 온전케 하며 주의 마음 배움
III. 그의 역사를 따라 수고함
A. 분투하여야 할 목표
1. 개인의 온전함
- 구원 이후 고민은 소유 아닌 존재임
- 자기 의를 구치않고 주 형상 본받음
- 지식, 사랑, 실천적 순종으로 이룸
- 그리스도께 사랑받고 사랑하는 삶
2. 교회의 온전함
- 개인의 성화 성례전적으로 봉헌됨
- 교회의 최고 섬김 하나님을 보여줌
- 제자들은 그리스도 통해 교회를 봄
- 우리들은 교회 통해 그리스도를 봄
- 좌우파를 선택하는 것이 교회 아님
- 죄와 자기 사랑 버리고 예수 닮는 것
B. 역사하는 은혜의 작용
-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
- "능력으로 작용하는 그 분의 역사"
-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은혜의 작용
- 은혜의 본질 "하나님 사랑의 감화"
- 은혜의 작용은 구원의 소명을 이룸
- 은혜는 주 하신 일 뒤잇게 함+지식
- 사도 안에서 "힘 있게" 작용하였음
- 선을 행하되 자랑할 것이 없는 이유
- 교회와 자신 위해 은혜 구할 수밖에
IV.적용과 결론
- "나도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 "그의 모든 힘과 함께 분투하면서"
- agonizomenos "다투다, 애쓰다"
- 구원의 계획안에 신앙 목표 달렸음
- 어리석음으로 인생을 낭비치 말라
- 하나로 모아진 빛줄기로 쇠를 녹임
-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을 생각함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1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17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0 (2014.12.14 주일오전설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1 (2014.10.27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2 (2014.10.28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3 (2014.10.2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4 (2014.10.3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5 (2014.11.02 주일오전)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6 (2014.11.09 주일오전)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7 (2014.11.23 주일오전)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8 (2014.11.30 주일오전)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9 (2014.12.07 주일오전)
그의 피로 화목케 하심은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 1:21-2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도 바울이 옥 속에서 이 편지를 쓴 것은 인생 말년이었습니다. 정확한 연대를 잡기 쉽지 않지만 아마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5~6년 안에 순교했을 것이라고 판단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노년에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까지 전하던 복음 진리의 깊은 지평들을 보게 하셨고 그래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같은 유장한 서신들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이 골로새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시는 우주적인 의미, 그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 그리고 종말의 이 세계의 완성이 어떻게 절묘하게 연결 되는지를 보여주었던 위대한 계시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 골로새서가 로마서보다 더 훨씬 더 수준 높은 위대한 기독교의 신학을 보여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더욱이 인생 말년에 사도 바울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에서 깊어져 갔습니다. 그 교회에 관한 지식과 그리스도, 우주에 관한 지식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골로새서의 유장한 기독론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이 교회, 이것이 너무나 소중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앞으로 이루어질 영원한 하늘나라의 종자 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구원의 경륜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서 각자 각자가 예수를 믿음으로써 디 위대한 경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II. 우리의 정체
A. 구원 받기 이전
사도는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약 9번에 걸쳐서 살펴보았던 교회와 그리스도의 고난의 동참함의 교리를 말하기 전 그 배경을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우리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구원 받기 이전에는 우리가 어떤 정체를 가진 사람들이었는가? 이미 성도가 되었지만 그러나 성도가 되기 이전에 우리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게 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그는 오늘 이 서신서에서 고백하기를 그때 우리는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사람들이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저 일반적인 의미의 악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실로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님을 훼방하고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과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골로새 교인들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먼 거리감과 간격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죄와 욕심에 미혹이 되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욕망을 따라서 멀어져 갔던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하나님을 마음속까지 뼛속 깊이 미워하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모든 삶의 활동들이 하나님을 향한 이런 치열한 반감에서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B. 구원 받은 이후
자, 인간적으로 볼 때에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원수 맺고 대적하는 이 인간이 완전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사랑의 관계로 돌아갈 가능성은 전혀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희망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정체를 변화시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 받은 이후 우리의 정체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예전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였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불화하는데서 화목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주님은 죄인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죄인을 향해 멀리 떠나갔던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로 움직이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구원의 은혜가 그야말로 은혜이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이 은혜가 은혜 되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죄 없는 자신의 몸을 못 박아 당신 자신을 희생 재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화목 재물로 주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로써 우리는 구원받기 이전에 그렇게 절망적인 인간들이 변하여 하나님 앞에 그렇게 소망을 가진 천국 백성들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III. 성도와 구원 계획
A. 거룩하게 하심
그러면 하나님이 왜 그런 막돼먹은 인간들을 구원하여 성도를 삼으셨을까요? 여기에는 이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구원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자 없는 자로 그리스도 앞에 세우려고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해 놓으신 이유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을 하나님이 구원해 놓으신 계획이었고 성도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를 구원해 놓으신 이 계획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들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거룩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너희”라고 하는 이 사람들은 이미 성도가 된 골로새교회 교인들이었습니다. 이미 이 세상에 불신자들로부터 구별되어, 거룩하여,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사람들을 또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피로 이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불신자이던 시절에는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섞여 있었고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방의 족속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이 세상에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 구별해 불러내셨을 때 이미 그들은 하나님께 봉헌된 구별된 존재들이 되었고, 그것이 바로 구원 받은 신자의 거룩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들은 이미 거룩해진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신자라고 해서 그들이 뼛속 깊이, 마음 깊이 그의 모든 심령과 정신이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 지난 한 주일동안도 죄짓고, 불순종했고, 눈물 흘리며 뉘우쳤고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미 거룩하게 된 사람으로서 아직은 완전하게 거룩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거룩하게 되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가는 중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성도들을 구원해 놓으신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레위기로부터 시작을 해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내가 거룩하니 내 백성인 너희들도 거룩하라는 명령을 수없이 듣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도 사실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하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을 받냐 하면 학대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거룩하라고 그러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워낙 거룩하시니까 당신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씻고 닦고 심지어는 막 닦으려고 하는데 안 닦아지면 칼로 도려내서라도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있어서 완전하고 충족하신 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거룩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에게 무슨 보탬이 되느냐 이것을 묻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막 괴로우십니까? 또 여러분이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뭔가 이렇게 재앙이라도 받으시는 것처럼 큰일이 나십니까? 그렇게 모자라는 게 많으신 분이면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질문이 바로 우리를 보고 당신을 사랑하라 그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무언가 큰 손해가 납니까? 그런데도 우리들을 협박하고 위협하시면서 사랑하라 그러시고 심지어는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무슨 하나님이 우리의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막 괴로워하시고 잠을 못 주무시고 고통을 받으시는 것처럼 묘사하는데 왜 그렇게까지 묘사하시면서 우리보고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안에서 우리가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면 그 사랑이 결국은 마지막에 칼이 되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하라는 것도 여러분 자신이 거룩함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거룩하라고 주님이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하면 하나님께 사랑받고,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받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온유함과 질서로 다스리고 그렇게 해서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표본을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소원은 예수를 닮는 것입니다.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B. 흠이 없게 하심
두 번째는 흠이 없게 하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를 구원하신 계획입니다. 여기 흠이 없다는 말은 ‘안모모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안’은 ‘없다’, ‘모모스’는 ‘결점’, 이런 것입니다. 이 결점은 자연적인 의미이기도 하고 도덕적인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연적인 의미로는 사과 같은 것을 샀는데 아주 탐스럽고 맛있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귀퉁이에 한 숟가락 크기 정도 벌레가 먹었습니다. 그게 모모스입니다. 그러면 사과 전체의 값이 뚝 떨어질 것입니다. 또, 사람이 아주 좋습니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잘 벌고, 남성들은 여성의 외모에만 관심이 많은데 여성들은 능력에 그렇게 관심이 많답니다. 그래서 능력이 없는 남자는 얼굴이 못 생긴 여자를 볼 때의 남자들의 마음과 비슷한 마음으로 여자들이 본답니다. 참 새로운 사실입니다. 그런데 능력도 있습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도벽도 있습니다. 그래서 뭘 그렇게 잘 훔칩니다. 허우대도 멀쩡하고 집안도 부자고 그런데 훔칩니다. 도덕적인 결함입니다. 그런데 너무 잘해줘, 얼굴도 예뻐, 집안도 부자이고, 신체도 건강하고, 그리고 능력 있어서 돈도 많이 법니다. 석 달에 한 번씩 마누라를 팹니다. 이런 것도 모모스, 흠입니다.
사람들은 놀라운 것이 좋은 점과 결점이 있으면 좋은 점은 안 보입니다. 그리고 결점이 확 부각이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정치 지도자를 뽑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뭐냐 하면 도덕적으로 사람이 검증을 합니다. 그런데 막 치열한 검증을 거쳤습니다. 훌륭합니다. 딱지 한 장 뗀 적이 없습니다. 세금 꼬박꼬박 내고 그리고 나쁜 짓을 한 번도 안했습니다. 무단 횡단도 안했습니다. 그래서 장관을 시켰는데 무능합니다. 이게 죽을 맛입니다. 그렇게 도덕적으로 하나도 흠이 없고 그러면서도 아주 유능한 사람이어야지 되는데 그런 사람은 그런 일을 별로 하고 싶어 하지를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거기에서 현실적인 깊은 고민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나라가 커서 그래서 사람이 수없이 많으면 그래도 좀 확률이 높지만 나라도 작으면 정말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직자의 도덕적인 기준을 하향 조절하자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현실적인 그런 어려움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것은 구원 받은 후에 룰루랄라 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흠이 없는 결점이 없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고 나면 처음엔 너무 기쁘고 좋습니다. 진짜 하늘나라를 날라가는 것 같은 기쁨이 듭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씩 둘씩 깨달아 가면 그러면 그 다음에는 뭐냐 하면 어쩜 그렇게 정확하게 하나님이 짚어내시는 것입니다. 네 성질머리 죽여라, 그 다음에 부모하고 상처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대적하는 것 하나씩 하나씩 지적하면서 어떤 때는 잔인할 정도로 고쳐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불평해서는 안되는 게 뭐냐 하면 그것도 다른 사람 행복하게 하시려고 하시는 게 아니라 그렇게 집요하게 고쳐 가셔서 그래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만큼 하나님이 행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생이 남도 도와주지 못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불행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고 그것이 실제로 작용하는 것은 자신의 본성 안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사람들은 나만 싫어해요.” 하는데 본인만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왜 싫은지 다 압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좋아할 수 있는 성품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래서 아프지만 그것이 고쳐질 때 최대의 유익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C. 책망할 것 없게 하심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책망할 것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이웃 앞에서 비록 우리가 불완전한 신자이기 때문에 티끌만큼도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온전함을 추구해서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앞에서 세우려고 하고 마지막 날 주님의 심판 때에는 주님의 의로 우리를 완전히 의롭게 하사 그 심판을 감당하게 하시지만 그 날이 이를 때까지 살아가면서도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로 이웃과 하나님 앞에서 힘쓰는 그것이 바로 성도의 의무이고 이렇게 살 때 그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놀라운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IV. 구원 계획에 부합하는 길
A. 믿음 안에 거함
그러면 이런 구원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면 그 계획에 부합하며 사는 길이 무엇일까?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들은 바 복음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렇게 되리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믿음 안에 거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아주 정교하게 나옵니다. “너희가 만약 그 믿음 안에 머물기를 지속한다면”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순간에 불끈 불끈 감정으로 솟아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이 항구적이고 견고해서 끊임없이 그 믿음의 작용 안에 머물러 사는 일이 계속 된다면 그러면 너희를 구원해 놓으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일회적인 구원 얻을 때에 필요한 단회적인 작용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 신자의 본성 안에서 작용되어야 할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렇게 어느 한 순간 울컥하는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이 계속 타올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 중에서 계속 그렇게 충만한 믿음으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마음이 그렇게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믿음을 지속적으로 작용하게 하시는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믿음의 작용은 마치 사랑의 작용과 아주 흡사합니다. 우리 안에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도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랑이 작동을 안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욕망이 워낙 크면 나타나지 않아도 상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식욕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은 보통인 사람은 평소에 아무 생각 안합니다. 그런데 이제 맛있는 음식이 배고플 때 나타나면 푸드 코트에 가서 아우 저것도 먹고 싶다, 이것도 먹고 싶다, 이것도 맛있겠는데 그러면서 한 바퀴를 다 돌고도 결정을 못해서 한 바퀴를 더 돕니다. 그렇지만 이 욕망이 워낙 강한 사람은 그런데 안 가고 컴컴한 화장실에서도 여러 가지 음식을 생각하면서 침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똑같이 믿음도 믿어야 할 대상들이 제시가 될 때에 그 믿음의 작용들이 활발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에 대한 대상이 제시된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이 규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지식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믿어야 할 규칙과 살아야 할 교훈입니다. 믿어야 할 규칙들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예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확 하는 믿음의 작용이 생겨나고 그것을 믿음을 따라서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믿음은 믿음 홀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할 대상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지만 그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믿어야 할 대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이 이 속에서 믿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든지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다든지 하게 될 경우에 어떻게 될까요? 그것이 결국은 사실이 아니고 허위이기 때문에 결국은 불끈 솟아났다가는 의미 없는 감정으로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참된 믿음과 정사만이 흔들리고 지나간 감정의 체험을 그렇게 구분하려고 애썼던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지난 수요일이었나요? 비가 왔나요? 추웠나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교회 밖을 탁 나갔는데 제 차 번호하고 똑같은 차 번호 차가 지나가더랍니다. 날 태워가려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구나 하고 막 손을 흔들고 차를 세우니까 차가 탁 섰는데 번호가 똑같았답니다. 그런데 창문을 죽 열더니 대머리 벗어진 아저씨가 “왜 그러세요? 저 아세요?” 이 마음속에 ‘아, 이렇게 나를 기다려 주다니 나를 태워갈려고’ 이렇게 충분한 믿음은 생겼습니다. 그런데 지식이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줌마 누구세요?” 그래서 믿음이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하기 위해서는 그 믿음 안에서 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믿어야 될 대상에 대한 지식이 계속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들이 우리에게 제시되어도 우리가 그것을 모두 믿는 것은 아닙니다. 제시되지도 않고 믿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 충만할 때에도 성경은 읽어야 하고 신학은 공부해야 하고 은혜가 떨어졌을 때도 해야 되고 충분할 때는 더 많이 해야 되고 왜냐하면 언제 믿음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렇게 매일매일 믿음 안에 사는 것이 구원 계획에 부합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B. 터 위에 굳게 섬
두 번째는 “터 위에 굳게 서면” 이랬습니다.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의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랬습니다. 이 터라고 하는 것은 신약 성경에서 ‘패밀리오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는 그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닌데 그 의미를 가진 동사로 사용이 되는데 고린도 전서 3장 12절, 에베소서 2장 20절 같은 데를 보면 이 터는 복음 진리의 터, 교리의 기초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 신앙의 도리, 복음 진리, 교리, 이 신앙 고백의 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멀리 마태복음으로 가면 예수님이 이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할 때에 바로 그 앞에 유명한 베드로의 고백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러한 터 위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믿는가 하는 이 지식의 견고함, 확고한 체계와 그 진리의 관점들이 있고, 그 위에 신앙이 서 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의도를 따라 살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늘 경고하는 게 바람에 밀려 늘 요동하는 삶이 바로 이게 신앙적인 유아기의 상태이고, 믿음이 견고하지 못한 상태이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터 위에 굳게 서서 그랬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너희가 만약 터 잡혀 굳게 서 있어 이제까지 오고 있다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방금 터를 잡은 것이 아니라 예전에 터를 잡았고 그것이 장기간 동안 계속 되어서 현재까지 오고 있다면 그러면 그리스도 앞에 그렇게 흠 없는 사람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굳게 서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지식과 사랑의 강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신의 의무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고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명에 대한 인식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요즘은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둘 다 약합니다. 여러분은 보면 법정에서 양육권을 서로 가지고 가겠다고 싸우는 부부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요새 신라 호텔 사장님도 양육권 문제 가지고 싸우시고 하는데 그런 사람도 있지만 서로 안 갖겠다고 싸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가정 법원이 지금도 서소문 쪽에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덕수궁 돌담장 길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법원에서 이제 나오는 부부들이 아이를 하나 사이에다 두고 ‘야, 너는 니 엄마 따라가’ 얘가 엄마한테 가려고 하니까 ‘야 너는 여태까지 아빠하고 살았으니까 아빠한테 가.’ 아빠한테 보내면 ‘엄마한테 가래니까’ 그 아이가 울면서 양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성이 망가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그 당시에 늘 보던 풍경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옛날에는 부모가 된다, 그 다음에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 혹은 남편이 된다고 할 때에는 그 남편과 아내, 혹은 자식도 마찬가지이지만 부모도 지금 아주 쉽게 버립니다.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정신의 크기가 훨씬 컸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적인 복음의 힘이 아니라 유교의 사상이든지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그러니까 내가 애들 부모이기 때문에 이 애들을 내가 길러내야 된다고 하는 정신이 거의 종교심처럼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자녀들을 많이 거느리고 남편을 먼저 여의고 그랬을 때에 이 아이들을 데리고 험한 세상을 살아간다고 할 때 그 어머니의 마음속에 있는 이 정신의 크기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그의 아내가 된다고 할 때도 정신의 크기가 아주 컸습니다. 그런데 한 3년 시험적으로 살아보고 안 되면 때려치우고 이것은 정신의 크기가 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 아니면 이제 내 인생은 끝이다 그러면 무지하게 정신이 큰 것입니다. 심지어 죽어도 이 집에서 죽어야 된다 할 때에는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커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컸으니까 뭔가 일이 일어나도 그 크기 안에 다 들어옵니다. 자식을 낳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장이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가정을 지켜야 한다.’ 그게 무지하게 큰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들이 한두 명이 속 썩이고 마누라가 가끔 바가지를 긁고 그래도 그것은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그런 거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정도야 감당해야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지금은 조그만 해서 조금만 팅하고 나면 ‘네 놈이 그럴 줄 몰랐다. 우리 의절하자.’ 이러는 것입니다. 아빠가 개념이 조금 없이 굴어도 ‘아빠, 어떻게 부모 자식 간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제 우리 서로 보지 말고 삽시다.’ 그러고 줄긋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정신으로 살아가니까 이게 결국은 견고하고 굳센 삶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하실 것입니다. 자식들이 조금 속 썩이면 그러면 막 괴로우면 어떤 생각이 드냐 하면 ‘저 자식이 얼마나 못된 놈일까’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아이고, 내 사랑의 크기가 이렇게 꼭 종지짝만 하구나’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니 애 낳았을 때 그 정도 예상 안했습니까? 자기도 별로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돌연변이가 생겼나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애가 하도 엄마가 공부 못한다고 쥐 잡듯이 잡으니까 할머니한테 “할머니, 우리 엄마는 공부 잘했지요.?” 그러니까 “공부는 야. 네 에미는 중학교, 고등학교 때 껌만 씹었다.” 이 분들은 껍 씹는다는 게 무슨 얘기인지 모릅니다. 껌 씹는다는 좀 놀았지 그런 뜻입니다. ‘걔 조심해. 걔 껌 씹는 애야.’ 자식을 기르면 자기가 어떤 자식이었는지를 새카맣게 잊어버립니다. 그것을 자꾸 반성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크기가 커집니다. 그 정도면 괜찮지 항상 이렇게 생각해야지 내가 우리 하나님의 자식으로서 한 짓보다는 우리 아들이 내 자식으로서 나에게 한 짓이 덜 잔인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참 감사하다 그렇게 하고 살면 됩니다. 그렇게 안 갖는 것입니다. 딱 종지만 하게 요즘에 노래 같은 것 들어보면 예전에는 자연에 대한 노래도 있고 역사에 대한 노래, 만날 죽고 사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엄청나게 커졌냐면 아닙니다. 그냥 종지짝만 합니다. 딱 맞으면 불탈 것처럼 그럽니다. 조금만 빗나가면 참기는 왜 참아, 또 다른 사랑을 찾아가면 됩니다. 그게 오늘날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막 가수들이 빠르게 부르는 이야기를 받아 적어보면서 무슨 내용인지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그 내용이 바로 그런 내용들입니다. 결국 굳건하지 않은 것입니다. 유익, 의무, 헌신, 희생, 이런 것들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뚜렷한 인식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결 같이 그렇게 견고한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이런 성숙한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구원 계획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C. 흔들리지 않음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복음의 소망은 복음이 주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또 교회의 흠이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의 경륜이 성취될 것이라고 하는 믿음, 그리고 우리는 부족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그 우주적인 구원의 성취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매일매일의 삶을 하늘나라의 생명에 덧입어 살아가는 그런 생활을 할 때에 우리들이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매일 경험하면서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그런 세계관의 터 위에 굳게 서서 삶의 분명한 이유가 오직 예수라는 이유에 붙들려서 살 때에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사도는 옥에 갇혔고 순교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지금 비록 하나님의 자녀요, 사랑받는 그리스도 교회의 소중한 지체이지만 원래는 죄인이었던 여러분의 정체를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구속의 사랑이 무엇을 위한 사랑인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이제껏 어떤 은혜를 받고 무슨 말씀을 배우고 어떤 교리의 터 위에서 여러분이 시련과 역경을 이기며 여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미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은 사람들이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도 예비하셨고 그 모든 것을 헤치고 나갈 사랑과 자비도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믿음에 굳게 서서 또 다른 믿음의 길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주님 의지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옥중에 있었던 약 62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 골로새서를 기록한 목적은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편지로써 골로새교회를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함이었지만 그러나 그러한 일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이제 말년에 아주 풍성해진 이 복음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심오한 필체로 골로새서에서 기록해나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가 그것을 교회론적 관점에서 기록했다고 하면 골로새서는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우주적인 기독론을 담고 있는 옥중서신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매우 사랑하고 이 두 서신서의 주석을 남기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그런데 이 골로새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직접 세운 교회 못지않은 깊은 애정을 가지고 이 골로새 교회를 대하여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이 4일 동안에 사경회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4일 동안 계속해서 이 24절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가 있으면 좀 더 길게 할지도 모르겠는데 아직은 지금으로서는 일단 4편만 마음속에 준비를 했습니다.
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저는 오늘 첫 시간에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말할 때 왜 그 첫 번째 설교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하는 제목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새삼스럽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아야합니까?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라고 질문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네,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머릿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는 생각들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파편처럼 흩어져있는 생각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회론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이 분명해지지 않는 한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규명하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의 언급들을 종합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골로새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바로 이 유명한 고백 “나는 이제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운다.”라는 고백을 했을 때 바로 그 문맥 안에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밝힌 후에 그 몸을 위한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당하는 그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이 되는지? 그리고 그 고난이 우리에게 어떠한 효과를 가져다주는지를 차례대로 4일 동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Ⅱ. 그리스도인의 정체
A.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은 자 (14)
우선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위해서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랬습니다. 그때 이 너희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요 또 구체적으로는 골로새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그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정체를 1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라고 말함으로써 오늘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와 편지를 받고 있는 골로새교회 교인들이 한 사람은 옥 속에 갇혀있고 한 사람은 멀리 떨어져있는 골로새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모두 하나로 묶어져서 ‘우리로’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다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죄 사함을 받는 방식이 자신의 공로나 힘과 노력으로 얻어낸 구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속량을 통해서 얻어낸 구원인 것입니다. 속량이 무엇입니까? 이 속량이라는 이 말은 속전이라는 말과 함께 로마시대에 노예제도의 문맥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자, 어느 부자가 화려한 마차를 타고 길을 지나갑니다. 마침 노예시장이 열렸고 거기서 노예를 사고 팔리는 광경이 부자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제 엄마노예, 아빠노예, 애들 노예 이렇게 있는데 팔려온 상품처럼 진열이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어느 집에서 종살이를 같이 하다가 그 주인이 돈이 급해서 이 노예들을 팔게 되었을 때 만약에 여러분이 그렇게 노예의 몸으로서 시장에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면 여러분의 절박한 소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노예라는 운명은 벗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가족이 흩어지지 않는 것이 아마 가장 간절한 바람일 것이고 하나 더하라고 하면 마음씨 좋은 주인을 만나는 것일 것입니다. 자, 그런데 지금 이 가족들이 팔리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와서 이 가족들을 한꺼번에 사가려고 하지 않고 따로따로 사가려고 합니다. 아이들은 울고 아내도 눈물을 흘리고 주인에게 우리들을 한꺼번에 팔아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 광경을 보던 이 부자가 자기의 종을 보내어서 그 노예의 몸값이 얼마냐고 불어봅니다. 얼마라는 통지가 오면 그 부자가 자기의 전대에서 돈을 주어서 저 노예를 사오라고 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돈은 지불되었고 그 값을 치룬 부자는 그 노예를 사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노예들은 이제 이 집에 팔려왔으니까 이 집에서 종살이를 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려니 하고 생각했는데 집에 데려가더니 깨끗이 목욕을 시키고 따뜻한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인 다음에 다음날 아침에 가족을 모아놓고 증서를 하나 주는 것입니다. ‘사실 너희들을 사기는 샀지만 나는 노예들이 필요 없다. 이미 많다. 내가 너희들이 너무 불쌍해서 샀으니까 내가 오늘 해방증서를 써주마’ 그러면서 노예를 해방시킨다는 증서를 쓰고 자기의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제 이 사람들은 이것만 가지고 있으면 어디를 가든지 이 집의 노예였다가 이 주인의 자비심으로 인해서 해방된 사람인 것을 입증하면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 사람들은 너무 상상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집주인이 마음씨가 좋아서 그들에게 적절한 일자리도 주었고 상황에 또 경우에 따라서는 너희들을 이렇게 해방시켜주었는데 ‘갈 데가 없다면 우리 집에서 일을 해라. 그리고 너희는 나가서 살고 급료를 너희에게 주마.’ 완전히 자유인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신들의 아무런 공로 없이 그 부자의 자비심 하나로 노예의 신분에서 완전히 그 부자가 값을 치르고 완전히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것을 가리켜서 속량이라고 말하고 그 속량을 위해서 지불한 돈을 속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 유비를 그리스도인에게로 가져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 때문에 죄의 노예로 팔린 사람들인데 하나님이 그리스도라는 속전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셔서 해방시켜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하나님 앞에 일평생 교회를 잘 다니겠다는 조건으로 구원을 해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해주셨을 때 일평생 교회를 잘 다니는 것을 조건으로 구원해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시킨 사람이 있어서 지금 여기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유의 의지로 여기에 나온 것입니다. 상태가 좀 안 좋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상태가 좋은 사람은 아니 어물전에 가 봐도 상태가 좋은 생선이 있고 눈의 빛이 벌겋고 약간 아가미를 열어보면 꺼멓고 파리가 굉장히 좋아하는 상태가 된 그런 생선들이 있습니다. 파리는 싱싱한 생선을 싫어합니다. 상태가 안 좋은 사람들과는 이 이야기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 아니 누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라고 했습니까? 누가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실 때 가서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어서 죽도록 충성한다면 구원을 주겠다고 한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하라고 했습니까? 또 하라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나는 개척하고 여태까지 누구를 만나서 ‘권사님 한번 해주십시오. 집사님한번 해주십시오.’ 그런 이야기를 단연코 한 번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자기네들이 한 것입니다. 설렁 누가 시켰다고 해도 그 말을 들어야할 의무가 어디 있습니까? 싫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교회 지하실에는 감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공로로 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속량입니다. 그러니 상태가 좋은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고 괴로운 일을 만나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속량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께 구원받지 못했을 때 어떤 인생을 살았고 그리고 나의 인생의 날들이 얼마나 희망이 없는 날들이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속량 받은 은혜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그 좋으신 사람이신 예수님이 자기 생명을 속전을 주시고 살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라고 생각할 때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태가 좋은 교인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태가 안 좋은 교인들은 전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생각은 오고가는데 감동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속량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누구냐 하면 속량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구원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축복, 미래에 나에게 주어질 하늘의 영원한 생명의 약속,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생명과 사랑의 교통, 교회에서 누리는 이 모든 복락들,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이 우리를 위해 속량해주셨기 때문에 내가 누린다고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어떠한 사연을 안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든지 정말 생애적인 주님을 만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는 과거의 신앙의 깊이에 달린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신앙의 깊이에 달린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십니까? 지금 나를 속량해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있으면 옛날에 받은 구원의 은혜가 옛날이라고 다가오지 않고 아침마다 새롭고 눈을 뜨면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자기 몸을 속전으로 주셨을까? 아, 이 속량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그런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붙들고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살아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멘! 더 하고 싶지만 갈 길이 멉니다.
B.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김(13)
그러면 두 번째 이 골로새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가 무엇이냐? 13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먼저 권세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희랍어로 ‘엑소시아’라는 단어입니다. 이 권세는 형식적이고 상징적인 권세가 아니라 실제로 힘을 행사하는 권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태복음 10장에서 12제자들에게 모든 병든 것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쫒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을 때 바로 그 단어이고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라고 할 때 쓰신 단어입니다. 그러면 ‘엑소시아’즉 권세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떤 것을 명령하고 그것을 굴복시킬 수 있는 힘입니다. 그것이 ‘엑소시아’입니다. 권세입니다.
요즘은 제가 운전을 해서 고속도로를 달리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지금은 운전하기가 싫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운전하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보면 운전을 하는데 고속도로에 들어서면 우리나라 차들은 정말 무섭게 달립니다. 고속도로에서 사고도 많이 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제일 무서운 차가 무엇이냐 하면 수시 톤의 짐을 실은 트레일러입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립니다. 제일 무서운 차는 뭐냐 하면 돌멩이를 실은 차입니다. 봉고만한 돌멩이들을 무엇에 쓰려는지 모르지만 그런 것을 잔뜩 싣고 달리고 그렇지 않으면 포스코에서 나오는 철강들을 싣고 달립니다. 그것도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32톤을 싣게 되어있는 차에다가 32톤만 실으면 돈이 남는 게 없답니다. 또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것도 아니고 돈을 다 준다는데도 더 싣는 것입니다. 45톤씩 싣는 것입니다. 여러분 32톤을 실어야하는 차에다가 45톤을 실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리를 공부한 사람들은 그런 차가 120㎞씩 달릴 때에 그 가속도와 힘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 차들이 막 달립니다. 조그만 차를 타고 가던 사람이 그런 차가 달리면 깜빡깜빡해봐야 신경을 써줍니까? 안 써줍니까? 신경 안 씁니다. 창문을 열고 소리소리 질러봐야 그 차는 하도 높아서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질주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이 그럴 것입니다. 빨리 가려고 막 질주를 합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가슴이 서늘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언덕에서 내려갈 때는 시동을 끄고 내려간답니다. 그렇게 하면 만 오천 원쯤 기름이 절약이 된답니다. 그러면 브레이크가 밟히지 않는답니다. 자기는 괜찮지만 앞에 가는 차도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그랬는데 어쨌든 막 달릴 때 주위에 있는 차가 뭐라고 그래도 꿈쩍도 하지 않고 빵빵거리면서 막 달리는데 무시무시합니다. 그때 저기 멀리서 차도 타지 않고 걸어가던 사람이 손가락으로 이리오라고하니까 이 차가 갑자기 온순한 양이 되어서 천천히 비상등을 키면서 가서 섭니다. 손가락질을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경찰입니다. 여러분이 가서 손가락질을 하면 ‘저게 돌았나?’ 그럽니다. 파란 경찰복을 입고 사이드카를 옆에 세우고 추격할 자동차 하나를 뒤에 세워놓고 빨간 등을 들면서 손짓을 하면 꼼짝도 못합니다. 크기를 보면 교통경찰 170㎝되고 몸무게 70㎏이 될까 말까한 사람이 이런 수십 톤짜리 차가 100㎞이상으로 달리다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무법자처럼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가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멈출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엑소시아’입니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전에는 어떤 사람들이었느냐 하면 흑암의 ‘엑소시아’ 아래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 흑암은 또 무엇입니까? 문자 그대로 그냥 깜깜한 것입니다. 성경이 흑암을 무엇이라고 그러는지를 알려면 성경이 빛을 무엇이라고 그러는지 알면 됩니다. 그런데 이 흑암이라는 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그 흑암이 상징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는 사상적인 어두움이고 또 하나는 윤리적인 어두움입니다. 사상적인 어두움은 무지입니다. 모릅니다. 그러니까 무지하니까 무지한 사람들은 무엇을 하기가 좋습니까? 속이기가 좋고 겁주기가 아주 좋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무지한 사람들은 속이기가 좋고 겁주기가 아주 좋은 것입니다.
이번에 프랑스집회를 갔는데 후배 목사님하고 같이 밥을 먹는데 아침에 빵을 주는데 제일 싫어하는 것이 아침에 빵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무엇을 발라서 요기를 했습니다. 목사님이 많이 먹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잔뜩 먹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뷔페라기보다도 조그맣게 차렸는데 가서 이만한 국그릇 같은 대접에다가 무엇을 잔뜩 담아왔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깡통에 들은 복숭아, 깡통에 들어있는 파인애플, 후루츠 칵테일을 이만한 사발에 담아온 것입니다.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으려다가 또 최근에 그 양반이 암 같은 것도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네!’ ‘그것을 왜 먹어?’ ‘단 것이 맛있는데요.’ ‘잘 봐라. 그것이 당신이 한 사발을 가지고 왔는데 그것이 정확하게 반사발이 설탕이다.’ 깜짝 놀랍니다. 보이지도 않는데 설탕이 그렇게 많이 들어갔느냐고 해요. 그런데 일본말로 ‘간스메’라는 그것은 그렇게 설탕을 집어넣지 않으면 상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설탕을 넣는 그것을 왜 먹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나이가 들어서 당뇨도 오고 다 오는데 당신에게 하얀 백설탕 반 사발을 주면서 먹으라면 먹겠느냐는 것입니다. 안 먹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먹느냐고 하니까 몰랐답니다. ‘그것 봐라.’ 무지는 그렇게 무지를 사용하면 우리 욕망이 우리를 막 데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날 모든 예배시간에 다 설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 들은 사람도 있고 듣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이야기 할 테니 들어보십시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진시황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똑똑했겠습니까? 그 넓은 땅덩어리를 최초로 통일하고 오죽했으면 자기는 평생 죽지 않으려고 불로초를 구하려고 우리나라까지 사람을 보냈습니다. 500명이 넘는 동자들이 전 지역에 흩어져서 그것을 있지도 않은 말도 안 돼는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찍 죽습니다. 왜 죽었는지 아십니까? 수은을 계속 마셨습니다. 바보 같은 의원이라는 친구가 새로 발견된 수은을 보면서 너무 신기하게 여겨졌던 것이 물도 아니고 은도 아닌데 굴러다니고 굴러다니면서 묻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환하게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마총 아래에 중국 지도를 그려놓고 강이 흐르고 물이 고여 있는 연못은 수은을 집어넣었습니다. 그 수은 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싼데 이 친구들이 그것을 외국에 있는 서역의 의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것을 먹으면 무병 불로장수한다고 하여 매일매일 진상을 했습니다. 물로 마신 것은 아니고 환으로 만들어서 계속 먹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은 중독이 되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미치광이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무지한 속에서 인간의 욕망이 엑소시아를 행사하니까 인간이 그렇게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옛날의 모습입니다. 무지했습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인간이 왜 사는지도 모르고 그냥 불나방처럼 말입니다. 열린 공간 앞에 지지직 타 죽이는 것이 있습니다. 나방이 막 날라서 부딪히면 지지직하면 날아갑니다. 워낙 큰 것은 죽지 않고 도망갑니다. 그리고 10초 있다가 다시 와서 또 부딪힙니다. 왜냐하면 날아가는 동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금붕어가 기억하는 것이 3초랍니다. 금붕어가 그랬답니다. ‘내 기억이 3초라는데 너희들이 실험해봤어!’ 그 말을 하는데 딱 3초가 걸린답니다. 그 다음에 또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왜? 한 것을 잊어버리고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흑암에 있었던 어두움입니다.
또 하나는 윤리적인 어두움입니다. 윤리적인 어두움은 무엇입니까? 그런 무지의 어두움 속에서 그 어두움에 적합한 어두움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은 어두움의 일을 사랑하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빛으로 오셔서 빛을 비추사 빛 된 생활을 하게 하셨으니까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란하게 비치는 아침햇살, 풀잎에 맺히는 아침이슬의 반짝이는 영롱함은 아름답습니까? 보기 싫습니까? 그런데 그 아침에 벌판에 나가있는 여러분이 안질이 걸렸다면 괴롭습니까? 안 괴롭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빛은 너무 좋은데 사람이 안질에 걸려서 눈이 망가지면 그 빛 때문에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 보기에는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들보다도 더 나쁜 짓을 한 것입니다. 왜? 진리의 빛으로 눈을 후벼 팠으니까 말입니다.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 강렬하게 거기에 대응하고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실제적으로 엑소시아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권세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권세를 행사하던 그런 권세 아래 있던 비참한 사람들이 우리였는데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이제는 그런 흑암이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 어두움 속으로 들어갈 때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지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와서 그분의 은혜의 힘 아래에 살 때 이것들의 권세는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까지는 순전한 인간이었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물론 안 지을 수도 있는데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는 인간입니다. 죄를 짓고 타락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오고 죄가 유입된 다음부터는 그 다음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가 있고 진리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죄를 지을 수가 있지만 자신이 은혜 안에서 살고 진리를 붙들고 살면 안 지을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완벽하게 안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죄를 지을 의욕도 없지만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완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렇게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의 긴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졌는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죄가 있는 세상이고 구원받은 우리 안에도 잔존하는 죄입니다. 구원파가 저렇게 한때는 잘나갔던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이 죄가 별것 아니라고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특히 구원받은 다음에 죄는 별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편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제대로 된 예수를 믿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이단에 빠지는 것입니다. 늘 울어도 회개해도 죄가 남아있어서 내일도 또 기도하고 은혜를 받아야하고 말씀의 빛으로 자신을 비춰서 뉘우쳐야 한다는 것을 매일 듣는 것이 유쾌한 일입니까? 아니면 구원받을 때 한번 용서를 받으면 되니까 끝났다. 그리고 현재 네가 죄를 짓고 있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이미 용서하신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신납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이슬람권에 있는 선교사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슬람을 연구해보니까 예수님을 믿기 싫은 사람들이 이슬람이 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거기에 덧붙이면 회개의 교리를 믿기 싫은 사람들이 구원파가 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되면 결국 그리스도인의 정체는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C.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부(18)
세 번째가 더 중요한데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하심이요.’ 맨 앞에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자, 여기에서 사도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세 번째 정체성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부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하여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구속에서 있어서만 중보자가 아니라 창조에 있어서도 중보자이시고 마지막 이 세상이 완성되는 것도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되기 때문에 하여튼 하나님과 이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창조, 구속, 완성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러나 타락에 있어서는 예수님이 중보자가 아닙니다. 그분의 은혜를 입어서 타락했다고 하면 안 됩니다. 이 세계가 창조된 것도 그리스도의 중보 때문이고, 이 세계가 구원받는 것도 그리스도 때문이고, 그 구원이 완성되는 것도 그리스도 때문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창조와 구속과 완성의 중보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게 창조하셔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된 모든 사물을 그리스도께서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학문이라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창조되었습니다. 창조된 것들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탱이 됩니다. 지탱이 되고 있는 것들은 각각 서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고 서로 작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통할하는 원리가 그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요한복음 1장에서 로고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고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지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세상 모든 만물이 그분에 의해 지어졌고, 그분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통치를 받으며 그래서 그 안에서는 일정한 규칙과 질서와 원리가 있고 그것들은 사물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객관적인 사실과 그리고 객관적인 사물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일반 학문으로 추론이 가능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 세상의 지혜가 아무 쓸모가 없다는 표현들이 여러 번 나오는데 확실히 이 세상에 있는 지혜를 깔보는 것 같은 구절이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은 조심해서 해석해야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학문과 모든 지식은 다 쓸데없고 다 쓰레기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했다면 여러분은 옷도 입지 말고 벌거벗고 다녀야합니다. 왜냐하면 학문이 없으면 여러분이 입고 있는 이런 옷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내가 어제 설교할 때 내가 10㎏가 줄어서 옷을 30벌을 줄였다고 했더니 우리 집사람이 그러면 양복이 30벌인 줄 알 것 아니냐고 그랬는데 티셔츠 포함해서 30벌입니다. 티셔츠뿐만 아니라 남방, 콤비, 잠바까지 다 포함새서 30벌입니다. 양복은 4벌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그러면 옛날에는 안경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발이고 뭐고 이 모든 것들이 다 학문의 도움을 받아서 여러분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느 것도 학문의 도움 없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지식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로고스가 이런 만물 속에 깃들여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런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인간의 이성으로 자연이성을 가지고 학문을 통해서 찾아내는 결과들은 언제나 Fact입니다. 사실과 자연적인 사물의 인과관계입니다. 정신작용 같은 것들도 우리들이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찾아냅니다. 현대 심리학을 전부 쓰레기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중에는 상당히 유효한 지식들이 그 안에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런 것들을 학문이라는 것들을 객관적으로 찾아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찾아낸 지식들을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그 속에서 사고방식을 배우고 그것을 가지고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쓰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그런 것입니다. 뉴턴은 하나님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자기가 쓴 책 『프린키피아』라는 책속에서 하나님이 없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들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계몽주의가 폭발하듯이 일어나면서 그러면 이 모든 우주 안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천둥만 쳐도 ‘아, 하나님이 화 나셨나봐. 그러니 우리는 똑바로 살아야해!’ 그랬는데 이제는 ‘음전기와 양전기가 만나는 현상이고 수학으로 다 계산이 가능한 것이야. 하나님이 없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발견된 객관적인 사실에 해석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해석을 집어넣을 때에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올바른 해석을 집어넣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해석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이 세상속의 지혜에는 없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 학문의 결과들을 우리에게 적용하고 그것으로 세계관을 형성할 때에는 중대한 오류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문을 잘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기독교신앙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학문을 이해하려고 하고 기독교학자들은 학문을 더 열심히 공부해서 그 안에 올바른 해석을 퍼뜨려서 대학이라는 사회나 이 세상의 학문의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유지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세계가 창조되었는데 인간이 타락하면서 이 창조의 세계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합니다. 인간 자신도 저주를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아름다운 상호 연관관계들이 다 깨집니다. 그런데 완전히 깨졌다면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고 난리가 날것입니다. 아니면 이것을 집어던졌는데 오늘은 떨어지고 내일을 위로 올라가고 난리가 날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법칙들은 하나님이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왜? 그래야지만 인간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비가 하루는 위에서 떨어지다가 하루는 밑에서 올라오면 사람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일정한 규칙과 질서들을 하나님이 유지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자연의 세계는 그렇게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들은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자연을 그냥 자연 그대로 내버려두면 잘 굴러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메뚜기 떼들이 지나가면서 한창 소동을 벌인 일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이 생태계가 어느 정도는 균형을 유지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내버려두었을 때 이 생태계가 말하자면 그대로 균형을 잘 유지할 것이라는 것은 낙관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왜냐하면 이런 균형들이 이미 이 속에서 깨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물질에 대한 소비와 욕망들이 이런 불균형을 촉진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자력발전소를 짓고 그러면 안 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갖 불균형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세계를 완성하는 날에는 그런 부조화와 모순들이 다 해결될 텐데 그 해결되기 전에 더 커다란 문제는 뭐냐 하면 인간들 속에 있는 찢어짐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창조된 인류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사랑의 고백을 했는데 죄가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살인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끔찍한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우리의 인생사라는 것이 너무 고달픕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연적인 자원이 모자라서도 고달프기도 하지만 더 커다란 것은 여러분이 지금 괴로워하는 대부분의 고통들이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 아니라 떼어내고 싶은 이는 내 암중의 암이요, 종양중의 종양이로다. 떼어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지금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얼마나 길게 더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120세까지 살수 있다고 하는데 문제는 삶의 질입니다. 70세 까지 성성하게 살고 50년 동안 휠체어에서 산다면 그게 120세를 사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소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무역을 해서 돈을 많이 번다면 그것이 인간의 행복에 얼마나 기여합니까? 동네에 50억씩 60억씩 들여서 사우나를 만들어놓고 동네의 목욕탕들을 다 싹 쓸어서 없애버립니다. 뭐가 그렇게 문제입니까? 그 조그만 동네목욕탕 찰랑찰랑하는 곳에서 바가지로 물을 끼얹으면서 목욕을 하면 얼마나 낭만적이고 운치가 있습니까? 그런데 왜 그런 목욕탕 다 없어지고 그 엄청난 기업형 사우나가 서고 나머지 사람들은 갈 데가 없고 그게 대체 무엇입니까? 이런 무질서 속에는 인간의 더러운 탐욕들이 깃들여 있습니다.
어제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를 잠깐 들으면서 한 10년 동안에 피자배달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은 사람이 통계에 잡힌 사람만 200명이랍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런 일에 사람이 종사하게 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그거 배달시켜먹은 적은 없습니까?’ 그러는데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별로 없습니다. 그저 3, 4년에 한번 될까 말까 하는데 내손으로 시킨 적은 거의 없습니다. 누가 시켰든지 배달음식을 먹은 적은 있지만 걔네들이 한건을 배달하는데 300원씩을 더 준답니다. 그것을 가지고 헬멧도 쓰지 않고 미친 듯이 달리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는 것입니다. 피자를 가서 사먹으면 10,000원이라고 칩시다. 그러면 시켜먹을 때는 20,000원을 내야합니다. 그리고 걔네들은 안전한 차를 타고 천천히 배달하고 식어도 괜찮다고 받아먹고 자기가 프라이팬에 구워먹든지 말든지 그래야지 그것을 싣고 15분 안에 배달하겠다고 미친 듯이 질주하다가 버스에 치여서 즉사를 하게 됩니다. 이런 비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을 우리가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라면 우리 딸이라면 그것을 시키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속에서 분노가 일어납니다. 통신회사들이 2조씩 수익을 냈다고 하는데 꼭대기에 올라가서 전파를 매다는 사람들은 한 달에 백십만 원을 받는답니다. 조금 더 달라고 하면 너 말고도 올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비인간적으로 대하느냐고 했더니 우리 회사가 아니고 하청업체라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런 모든 일들이 어떻게 생겨나게 됩니까? 죄가 들어오면서 만물의 교통들이 다 차단되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그런 사회를 하나님이 보시면 기술의 발전과 어마어마한 물질문명의 성장이 가져온 것이 결국 그런 것들입니다. 무슨 정신을 그렇게 성숙시켰느냐는 것입니다. 핸드폰을 만들어주었더니 책을 읽지 않습니다. 초등학생들이 그것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너무 불쌍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렇게 살아서 무엇 합니까?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지도 모르는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속에서 하나님이 그런 불행한 인류를 고칠 작정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 구원받을 인류가 한 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지는 몸이 되고 몸이 되어서 돌아보니까 자기는 혼자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는지 알았는데 보니까 자기처럼 구원을 받고 한 몸이 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모여서 이렇게 교회를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살면서 서로를 용납하고 머리로서 그리스도께서 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깨달으면서 나와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허물이 있는 사람을 용서하고 물질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내게 있는 것이 저 사람들에게 없다면 뽐내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을 섬기라고 내게 이것을 주셨구나!’ 하는 자세로 그렇게 살아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다시 하게 하시는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는 남아있는 모든 인류가 서로 하나가 되어서 일체의 미움의 감정이 없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면서 살게 되는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질 미래의 아름다운 인류사회를 미리 맛보게 하신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시지만 마지막에 구속이 완성될 때에는 온 인류 이퀄 교회입니다. 지금은 교회밖에 인류가 많습니다. 그중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있고 구원을 받을 사람도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구원받을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나면 인류가 곧 교회가 되니까 교회는 거기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인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가 한 머리이신 몸이 되고 온 인류가 한 몸이 되고 그리고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사랑과 생명을 나누어주심에 있어서는 온 인류의 머리가 되시고 통치와 지배하시는 일에 있어서는 인간들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들의 머리가 되셔서 그 모든 것들을 통치하셔서 자연에 맺힌 모든 저주와 진노가 풀리고 아주 아름다운 연관관계를 형성하면서 그러면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 아름다운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그리스도인이 된 여러분은 그렇게 아직은 자연의 저주가 풀리지 않았고 우리도 안에 또 교회 안에도 여러 가지 죄가 있고 인류도 죄가 있어서 그런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살지만 그러나 교회에는 십자가 사랑을 주시고 오늘도 기도하고 주의 성령의 은혜와 말씀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은혜를 주셔서 내가 정말 나에게 원한을 남긴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이미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연과의 화해도 연습해야합니다.
외국에 가서 어느 총장을 만났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응접실부터 시작해서 박제가 꽉 찬 것입니다. 그것도 새 같은 박제가 아니라 120㎏짜리 사슴, 곰, 사자, 호랑이들입니다. 이만한 사자가 박제가 되어 있기에 어떻게 된 것이냐고 하니까 물어보니까 자기가 사냥한 것이랍니다. 얼마큼 떨어진 거리에서 쐈느냐고 하니까 자기 발 앞에서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확 덤벼드는 놈을 쏜 모양입니다. 욕이 여기까지 나왔습니다. 살려고 태어났는데 왜 죽입니까? 그래도 목사인데 싸우자고 미국까지 간 것은 아니니까 모르는척하고 나왔는데 자연과 화해하는 것을 지금부터 배워야합니다. 에너지를 마구마구 쓰기위해서 원전을 돌리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그게 목숨을 걸고 원전을 돌릴 정도로 그렇게 에너지를 낭비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자연과의 화해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뭔가 나중에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가족처럼 살 수 있는 자연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것들을 보호하고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계와의 관계에서 가져야할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이 세계의 완성을 위한 선취적인 생명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까지가 서론이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나 혼자 이러고 살다가 예수님을 내가 믿어서 내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이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에 예수님이 우리를 당신의 몸에 접붙이십니다. 접붙이는 것은 이 나무를 접붙이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을 잘라서 가른 다음에 기다란 나무를 갖다 끼우고 칭칭 감아놓으면 모든 나무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이게 두 개가 붙어서 여기에 말하자면 새로운 줄기가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접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생명적으로 머리이신 당신에게 접붙이셨는데 몸에 접붙이심으로 머리에 접붙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고백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구원을 받았을 그때에 나의 형제들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따라하십시오. 내가 구원받았을 때에 나의 형제들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영원의 시각에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쨌든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계획하시는 구원받을 사람들이 규모가 있을 것입니다.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고 칩시다. 여기에 실선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진짜로 구원을 받아서 현재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점선을 실선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선교입니다. 나도 언젠가는 실선 밖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점선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합니다. 사람들이 교리를 오해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는 찰떡궁합처럼 살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의 몸이 아니니까 그러는데 당신도 한때는 그 몸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느냐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나면 사람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교회 안에 있는 형제나 교회밖에 있는 사람이거나를 구별하지 않고 흘러들어갑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 중 상태가 좋지 않은 성도들은 해당이 없는 것입니다. 상태가 좋은 상태에서 가정시리즈 설교를 들으니까 구원을 받지 못한 엄마가 너무 불쌍합니다. 엄마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를 하니까 엄마가 자기에게 잘못했던 일은 싹 잊어버리고 용서가 되고 그 영혼이 너무 불쌍하고 눈물이 나도록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불신자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실선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점선 밖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적으로는 실선 밖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이 우리 속에서 진하게 묻어나게 되면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게 되면 교회 안에 현재 있는 형제들 못지않게 구원받지 못한 부모를 보고 뜨거운 사랑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구령의 열정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이런 그리스 도 안에서 하나의 몸이 된 사람은 사실 가깝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지만 왜? 나는 몸의 일부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몸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랑이 적용될 때에는 그리스도와 나 사이의 연합은 신비적인데 예수를 믿는 나와 또 다른 예수 믿는 사람들 사이의 결합은 영적인 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결합의 사랑은 불신자에게까지 퍼져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구령의 열정입니다. 사랑이 없는 구령의 열정은 무엇입니까? 목표 채우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구원을 봐야하는 것입니다.
Ⅲ. 몸을 위한 고난에 참여함
그래서 사도 바울이 24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운 눈물을 기뻐하고’ 그랬는데 사도 바울이 투옥된 것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투옥되었는데 그런데 이것이 왜 너희를 위해 받는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골로새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감옥을 가는데 보태준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왜 너희를 위해서 받는 괴로움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이런 이야기입니다. 골로새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고발하거나 실수를 해서 사도 바울이 로마에 투옥된 것이 아닙니다. 골로새교회와는 상관없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아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오늘 너희 때문에 내가 받는 괴로움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너희들이 당하고 나는 당하지 말아야할 고통인데 내가 지금 대신 당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 괴로움은 사도 바울이라는 개인을 향한 괴로움이 아니라 예수의 몸에 대한 괴로움입니다. 그런데 나도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몸이고 너희들도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몸이니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의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 같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고난에 참여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에 형제들이 그 곁에 있었습니다. 라는 고백과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이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 형제들도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가 현실적으로 사랑이 없으면 ‘그깟 늙은이 감옥에 갇혀서 죽든지 말든지 죽을 때도 되었는데 죽어버리지’ 사랑이 있으면 ‘차라리 그를 석방시켜주고 나를 대신 감옥에 가두시지!’ 그런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것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A. 겪음: 피동적 고난
여기에 보면 괴로움이라고 그랬는데 희랍어성경에 보면 ‘파데마타’라고 나옵니다. 원래 ‘파데마’가 원형인데 ‘파데마’가 무엇이냐 하면 ‘겪음’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파도스’라는 명사가 있는데 격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좋은 뜻은 아닙니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욕망의 열정이 솟아오르는 것을 ‘파데스’라고 합니다. 왜 그런 열정이 솟아납니까? 뭔가에 자극을 받았으니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겪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파데마타’라고 ‘겪음들’이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너희들 때문에 당하는 나의 괴로움, 겪음들’이라고 할 때 이것은 피동적인 고난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다가 잘못해서 다친 것이 아니라 자신은 이 세상을 해칠 의지가 없는데 이 세상과 자신이 존재론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름수련회의 용어를 빌리자면 존재적인 울림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존재적인 울림을 들으면서 ‘쿵’ 하고 감동을 받으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진리로 전향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쿵 하고 존재를 울렸을 때 극도의 미움이 생겨서 이것을 죽이고 싶은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도 바울이 지금 겪음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선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 많은 결핍과 오류 속에서 이 세상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그들은 어둠에 속했기 때문에 빛을 싫어하고 오히려 악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선을 싫어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다른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는 겪음의 연속이고 겪음의 정체는 괴로움입니다. 신자들이 고난이 없는 이유는 상당부분 타협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유시민씨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썼습니다. 흥미 있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유시민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감옥에도 가고 대공 분실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그랬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어려움을 겪었느냐고 말하고 어쩌면 그렇게 용감할 수 있느냐고 그러는데 그때 자기는 이렇게 이야기한답니다. ‘정말 용감한 사람들은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수시로 요령을 피웠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했던 것입니다.’ 정말 그 책속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은 자기를 포장하려고 할 텐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진짜 용감한 사람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대공 분실에서 고문을 받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살아남은 것은 순간순간 요령을 피우고 변질한 것처럼 했기 때문에 자기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그 사람들에게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이 없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끊임없는 타협과 변질 속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까? 결국은 신자 됨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목표를 따라서 죄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살고 어두움이 있는 이 세상에서 빛으로 살고 주기도문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주기도문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는 사람은 이 세상을 괴롭힐 의지가 없어도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는 괴로움이 되기 때문에 수많은 겪음 들을 당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그것을 우리들은 매일매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살아가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힘들어서 교회에 왔는데 교회를 다니는데도 힘 드는 것입니다. 착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싶으셨으면 지금 믿지 마시고 꼴깍하기 직전에 예수를 믿으셔야했습니다. 그러면 바로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믿을지 안 믿을지는 가봐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은 정말 그렇게 완전한 존재라서 교회를 다니는 것 자체가 목회자를 비롯해서 모든 성도들에게 기쁨의 이유가 되는 사람입니까? 머리를 좌우로 힘차게 흔들어야합니다. 목에서 삐걱하는 소리가 나도록 힘차게 흔들어야합니다. 사람을 가지고 원망하고 비판을 합니다. 자기는 누구에게 그렇게 만족을 주는 사람인지 묻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네 부모를 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네가 살아있는 것이 태어날 때부터 여태까지 부모에게는 슬픔과 고통의 연속이었지 기쁨의 이유가 되어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도 해보지 못한 것을 왜 부모에게 해보라는 것입니까? 자기가 조금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을 해보면 결코 그런 존재가 내가 교회에 이만큼 붙어서 살아가는 것이 수많은 지체들이 나를 용서해주고 사랑해주고 허물을 덮어주었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뭘? 나만큼만 해보라고 그래!’ 진짜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인지는 잠시 후에 거기에 가서 확인을 해보면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하고 또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회가 올바른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 이 세상에서 항상 좋은 이야기만 들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올바르게 하기만 하면 세상이 너무 좋아하는 것이 세상이라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정말 실수하신 것입니다. 왜? 스스로 고쳐질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예수님이 괜히 목숨을 던지셨으니까 말입니다. 어리석은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여기에 ‘파데마타’라고 나오는데 복수로 나옵니다. 무수한 겪음을 이 사도 바울이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겪는 그런 고통들 그리고 순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면서 당하여야하는 불이익과 고통들 이 모든 것들을 당연하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왜? 그러니까 우리들이 불완전한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나라를 앙망합니다. 그런데 그 겪음이 감사한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예수와 함께하는 겪음입니다. 왜? 우리도 예수님의 분신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이고 예수님 혼자 친히 복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12명의 제자들을 택하셨습니다. 너무너무 개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가 하나님 옆에 앉을까를 놓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어떻게 하면 돈을 훔쳐서 가져갈까하는 궁리를 했습니다. 어떤 사모님이 글을 썼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매일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매주일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부서는 헌금위원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넓은 치마는 교회에서 훔친 헌금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습니다. 보십시오. 결국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고통과 아픔이 없는 현실은 없고 교회로 불완전한 곳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겪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죄 때문에만 겪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죄와 부족함이 내 것과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론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같이 겪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이것이 괴롭다. 내가 왜 이것을 당해야 되는가 하면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자기를 찢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찢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이니까 찢어낸다고 찢어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형제를 자르고 찢어내는 모든 고통의 과정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몸에 해를 가하는 과정이고 그 해 속에서 가장 충만한 사랑을 가지신 분이 가장 많은 고통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고통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방법은 그런 고통을 당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참고 견디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자신 속에 스며들어 자기의 죄를 죽이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교회의 일부가 된 모든 성도들은 죽는 날까지 고통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고통이 있으면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고통과 기쁨이 교차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기도를 하면 말할 수 없이 괴로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이 밀려옵니다. 어떤 때는 아파서 울고 어떤 때는 구원하신 은혜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데 한참 흘리고 나면 눈물의 어떤 분량이 기쁨의 눈물인지 어느 분량이 고통의 눈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습니다. 기뻐하는 깊이만큼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B. 몸의 고난에 참여함
그래서 결국은 그런 모든 겪음이 마지막으로 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이 세상의 영광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아파하며 일생을 사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 받는 그의 몸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고 끊임없는 하늘의 생명을 주시고 사랑을 주셔서 세상과 맞서 싸우게 하시고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핍박 속에서도 핍박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생명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고난이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도 계속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사도 중 한 사람 때문에 고난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아픔을 예수님이 다 아십니다. 12명을 몰고 다니실 때에 저 녀석이 나를 팔아먹을 그놈인줄 아셨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택하여 사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다 끌어안고 그리고 안에서는 예수님을 언제 돈 받고 팔아서 죽일까 끊임없이 괴로움을 끼치는 인간이 거기에 있고 나머지는 개념이 없어서 아무 판단력이 없는 아무 생각이 없는 그런 사람들처럼 모여 있는 무리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면서 까지 기도를 하시는데 잠을 퍼질러 자는 예수님의 심정과는 아무 상관없는 그런 떨거지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실 때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그런데 밖으로 나가면 끊임없이 종교지도자들과 핍박하는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생명을 노립니다. 속의 근심 밖의 걱정 그칠 날이 없는 그 속에서 예수님은 그 부족한 제자들을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당신이 죽으실 때가 되었을 때에는 더 많은 사랑으로 자기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요한복음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팎의 모든 고난을 당신이 당하셨고 그런 고난이 지금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보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교회를 진짜 아프게 하는 일들이 밖에서 폭탄이 떨어져서 교회를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결국은 고난을 받는 이유가 세상 안에도 있고 교회 안에도 있고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세상이 교회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안에도 교회가 있지만 교회 안에도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고난을 그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는 일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저절로 그렇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라디오에 나와서 사람들이 토론을 했습니다. 독감주사가 맞아야하는가 맞지 말아야하는가 하는 것이 토론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왜 저것이 토론이 이유가 되는지 궁금해서 들었는데 나는 매년 독감주사를 맞는데 의사끼리 싸우는데 의사가 절대로 맞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왜 그러는가 했더니 자기가 한번 맞고 진짜 독감에 걸린 것입니다. 죽도록 고생을 했는데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그냥 살다보면 겨울에 독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증세로 감기가 오는데 감기가 오면 그냥 쉬고 그 다음에 물을 많이 먹으면서 그냥 감기에 걸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가벼운 감기를 살짝 앓고 회복해서 살면 되는데 자기는 독감주사를 맞았는데 진짜 지독한 독감에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고생을 하고 거의 일주일동안을 물 설사를 하다가 깨어났는데 그렇게까지 하면서 한해 겨울을 그런다고 해서 독감에 안 걸린다는 보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면 예방주사를 맞으러가는 사람이 줄어버리면 의사들 수입이 줄 텐데 어쨌든 그런 논리를 펴는 것입니다. 생소했습니다. 그런데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뭐냐 하면 이것이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예방주사를 맞을 때에는 너무 피곤하고 기력이 없고 몸살기운이 있을 때 맞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병원체에게 응원군을 보내주는 것이 됩니다. 건강하고 맑고 기분이 좋고 초롱초롱할 때 맞아서 그것을 능히 이겨야합니다.
Ⅳ. 적용과 결론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이 있고 교회에 어려움이 있고 밖에서 핍박을 받고 이럴 때 그것을 자기가 극복할 수 있는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내가 점점 더 강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면 그것 한방에 깊이 가라앉으면서 깊은 질병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의 세포를 형성하고 있으니까 예수를 본받는 투철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왕년의 믿음, 작년의 믿음, 처음 회심할 때의 그 믿음이 아니라 지금 현재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라보고 그 고난에 참여하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교회의 운명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냥 구원을 받고 천국 가는 티켓을 쥐거나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서 말씀의 젖을 먹는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험한 이 세상 한복판을 지나면서 온갖 겪음과 그리스도의 몸의 고난에 참여하고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들을 인내하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세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전쟁을 나갈 때는 적군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가? 집을 지을 때는 건축할만한 돈이 되는가를 생각해보고 하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정말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까?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교회론적인 입장에서 자기가 신자가 되었다는 그리스도인이 된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묻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지 속에서 헤매며 교회에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고 그리고 자신도 불행해지고 결국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부름을 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의 몸을 찢고 상처를 내는 사람들입니다. 왜? 자기가 상처를 받기 싫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런 고통을 교회에 가할 때 결국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영혼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신앙이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 내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었구나! 신비한 그리스도의 몸에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내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졌구나! 그의 신비한 몸의 일부가 되었구나! 이제 나는 좋으나 싫으나 교회와 운명을 함께하고 그리스도와 운명을 함께하고 그 속에서 다른 모든 형제들과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상태에서 일생을 사는 것이다.’ 이것을 굳게 붙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고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녹취자: 백지영
I. 본문해설
이 골로새 교회는 사도바울이 세운 교회도 아니었는데 이 교회를 사도 바울은 아주 사랑했고 또 골로새 교인도 그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교제요 한없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깊은 사랑을 무엇이 만들어주었을까요? 사도 바울과 목회자 사이에 있는 이 뜨거운 사랑은 둘이 서로 사랑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골로새교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자신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하나의 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소위 ‘파데마타’라고 하는 끊임없이 많은 괴로움들을 겪었는데 그것이 마지막에는 사도 바울의 투옥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오늘 너희로 인한 괴로움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했습니다. ‘너희를’, 희랍어 성경에는 ‘너희를 대신해서’, ‘너희 때문에’, ‘너희로 말미암아’ 그런 의미입니다.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는데 골로새 교인들이 무엇을 도와주었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의 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내가 고난을 받는 그곳에 너희도 있고 너희들이 사랑을 받는 그곳에 나도 있다 이런 의미로 너희를 위한 고난,. 정확하게 말하면 나 혼자 나 바울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일부로서 내가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에 내가 고난당하는 이곳에 너희도 있다는 의미에서 ‘너희를 대신해서’, ‘너희 때문에’, ‘너희로 말미암아’ 겪는 겪음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주의 몸을 위한 고난 있음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정체가 무엇이냐를 이야기할 때 지난 시간에 세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그 첫째는 속량, 곧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긴 사람들이었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부가 된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채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혼자 믿는 종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운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은 바로 그 구원을 얻을 그때에 예수가 계신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함께 있고 그 교회의 일부로서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자신이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올바로 알고 기독교신앙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올바로 깨달으면 자신은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몸으로 구원을 받았고 또 그 구원의 은혜가 몸 안에서 보존되고 자신의 삶이 몸 안에서 구현되고 자신이 그리스도인다운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하는 하늘의 신령의 은혜와 생명도 바로 그 몸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두 몸과 함께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의술이 많이 발달해서 접합수술을 잘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손가락이 끊어졌어도 그것을 얼음에다가 잘 채워서 여덟 시간 안에만 가면 접합해서 성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에 우리의 사지백체 중 어느 부분이 끊어져 버리면 그러면 그것은 몇 시간 안에서 생명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열 두 시간쯤 지나면 의학적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몸이 되어서 떨어져나가는데, 그 이유는 생명에서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건 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항상 잊지 말아야 되는 것은 내 자신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는데 그 교회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몸의 일부인 하나님의 자녀라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가 끊어질 수 없는 것처럼 우리보다 먼저 있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날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모르면서 살아갈까요? 무지 때문입니다. 누가 올바로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무지하게 사는 것입니다. 악이라고 하는 것은 무지 속에서 번성합니다. 밝은 지식의 빛이 비치면 그렇게 대놓고 악을 저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젊었을 때 회심하기 전에 왜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목사가 되려고? 그런 것 왜 합니까? 내가 행복하려고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것입니다. 그래서 믿었더니 안 믿는 것보다 훨씬 행복해 졌습니까?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돈도 많이 생기고 병도 낫고 모든 환경이 좋아지고 개념 없는 인간들은 다 죽고 나와 맘 맞는 인간만 살아남고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그런 것 다 그대로 있습니다. 대부분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있는 그것을 이겨나갈 수 있는 자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나면 그것을 극복하며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이 하나님께 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끊임없이 그 생명을 누리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믿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기는 일부인데 그 생명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몸으로서 제대로 된 작동을 못하는 것입니다. 음식점에 가면 아직까지 털 부덕 앉아서 먹는 식당이 있습니다. 또 한식은 그렇게 먹어야 맛있습니다. 그런데 한참 쭈그리고 앉아서 밥을 먹고 나면 쥐가 납니다. 불과 몇 십분 동안 피가 안 통했는데도 오금을 못 필정도인데, 진짜 몸에 피와 생명이 공급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 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있지만 조건이 있는데 우리가 끊임없이 믿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따르는 삶을 살 때 아주 활발한 세포가 되면서 생명력이 넘치는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부로서 살아가는데 성령 충만하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고 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몸과 함께 분여 받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에 참여하기 때문에 은혜와 기쁨과 소망을 얻고 그래서 이전에는 없던 하늘의 자원 때문에 우리들이 넉넉히 우리 인생을 이기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당하는 그 고난에 우리도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A. 교회 밖으로부터
1. 세상과 다른 사상 때문에
그러면 왜 주의 몸을 위한 고난이 우리에게 있는가? 우선 첫째는 교회 밖으로부터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교회의 몸에는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으로부터 고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핍박입니다. 그래서 교회 밖에는 세상이 있는데 이 세상과는 구별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난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입니까? 세상과 다른 사상 때문에 교회는 끊임없이 박해를 당합니다. 세상과 다른 믿음 때문에 세상이 싫어합니다. 결국 이 세상은 순수한 교회를 만나면 만날수록 자신들이 세상과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는 견해가 현저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주인은 사람이고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로 살 것인가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로 살 것인가 하는 것들이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강력한 핍박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20세기에만 기독교 이름으로 순교한 사람들이 3천만 명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특히 이슬람 지역 같은 데서 기독교도들이 많이 학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자기들과 가진 사상이 현저히 다르기 때문에 그들을 향해서 강력한 반감과 미움을 가지고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순결한 신앙을 가진 공동체이면 공동체일수록 그 사상과 생각을 분명히 했을 때 이 세상과는 반드시 충돌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때 거기에서 커다란 핍박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가 받는 박해는 사실은 뚜렷한 사상 때문에 받는 박해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허물 때문에 교회가 박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과 교회와의 전선이 희미해지는 것, 이것이 사실은 사단의 훌륭한 전략입니다. 교회는 진리가 있고 세상은 어둡고 그래서 진리를 가지고 싸우니까 사상적으로 충돌해서 어느 사상이 더 올바른 것이냐를 가지고 싸우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니고 뭔가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특별한 사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시대에 물들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분명하게 그 시대를 움직이고 있는, 프란시스 쉐퍼의 표현에 의하면 사상계를 움직이고 있는 마귀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밑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게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거기에 묻어서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그런 세상과의 어떤 뚜렷한 사상적인 구분이 없고 희미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전선이 형성이 안 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전쟁이 일어났는데 적군과 아군이 뚜렷하게 갈라져 있어야 되는데 이 안에 적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옛날에 월남 전쟁 때 그랬습니다. 아오자 입은 아가씨가 밀짚모자 쓰고 지나가다가 밀짚모자 열어가지고 수류탄 던지고 도망가고, 미군들이 싸우라고 무기를 주니까 군인들이 술집에 가서 그것 맡기고 실컷 술 먹고 그 다음날 아침에 베트콩들이 그 무기를 가지고 가서 그 다음날은 그 총에 맞아서 자신들이 죽는 것입니다. 결국 그 전쟁은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7백대의 미군 전투기가 떨어지고 5만 명이 죽었습니다. 우리나라 군인도 오천 명 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전쟁에서 졌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교회가 세상과 명료하게 다른, 이 세상과 더불어 싸워서 파수해야 될 사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느냐 이것입니다.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이렇게 교회가 순수하게 다른 사상을 가지고 교회 바깥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2. 세상과 다른 윤리 때문에
두 번째는 세상과 다른 윤리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사랑의 질서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질서이고 힘 있는 자를 중심으로 하는 질서이지만, 교회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사랑의 질서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정말 제대로 된 질서입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가지고 각기 충돌을 일으키다가도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하면 멈추어지는 그리스도의 권위가 교회를 통솔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지만 그게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윤리문제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욕을 많이 먹으니까 어떻게 좀 잘 해서 세상의 칭찬을 받을까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리키는 교회의 사명이나 교회의 윤리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윤리라고 하는 것은 거룩함의 열매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윤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는 진정함 거룩함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그 명령에 준수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왕국의 주인으로 삼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천국백성들의 윤리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윤리와 종종 충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 세상의 윤리가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윤리를 따르기로 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이익이 겹치지 않는 부분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이익이 겹쳐서 그 이익이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윤리와 이 세상에서 가르치는 윤리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될 때 그때에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깥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면서 교회가 박해를 받고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잘 믿는 사업가가 착실하게 세금을 내고 정직하게 사업을 하면 칭찬받을 것 같습니까? 칭찬받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몇 사람이 해 보았습니다. 법에 따라 정직하게 세금을 내니까 자기하고 똑같이 사업하는 사람보다 거의 50% 이상 세금을 더 내야 합니다. 그러면 ‘잘 하셨습니다.’하고 칭찬해야 되지 않습니까? 세무서에서 감사 나옵니다.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잘난 척 하는 거야?,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그 뜻입니다. 요즘은 모르겠습니다. 몇 년 전까지 독서실 하던 제가 아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동대문구 독서실 그러면 이게 몇 개인가 해서 세무서에 있는 사람이 와서, “동대문구 어디에 몇 개의 독서실이 있으니까 전부 다 합쳐서 얼마씩 세금을 내는 것으로 하시오” 통지를 하고 간답니다. 그러면 모든 자료를 거기에 맞게 꾸미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아니요, 우리 이것보다 훨씬 더 학생들이 들어와서 수입이 훨씬 더 많습니다. 좀 더 내겠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한 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괘씸죄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 자식 봐라. 말을 안 들어?” 그리고 그 집만 와서 서류를 다 뒤지고 감사를 하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의 정의는 세금문제를 명쾌하게 하지 않고는 백성들에게 정의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한 달에 150만원 봉급 받는 데도 칼같이 세금을 뗍니다. 그런데 무슨 법률사무소하고 의시하고 성형외과 하는 사람들, 또 성형수술 하는 사람들은 “현금으로 내면 15% 깎아주겠습니다.” 아예 그런 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최근에 하나 읽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백화점에 가서 상품권을 사러갔는데 15%를 캐시백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영수증을 달라고 하지 말라고. 영수증 없이 그걸 팔아가지고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런 돈이 모여서 건전하게 사용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일 하면 안 됩니다. 명백한 탈세입니다. 국세청에다 고발해야 됩니다. 어느 교인도 이야기하는데 자기 앞에서 50억 원어치 사 가는 것 보았다고. 현금을 주고 그것을 사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는 돈도 문제가 있는 돈이고 상품권을 그렇게 수십억 원어치 사 가지고 가서 어디에 쓸려고 하는 그 용처도 구린 냄새가 나는 것이고 받는 그 사람도 상당히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회의 불의가 계속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명료합니다. 나라가 투명해 질 때까지 화폐를 없애자 그리고 모두 카드를 들고 다니면서 가다가 옷핀 하나만 사도 다 통계가 나오도록 그래서 명백하게 세금을 매기자. 그런 것을 볼 때 누가 정의를 이야기하겠습니까? 누가 그런 사회에 살면서 그렇게 성형외과 하면서 돈을 한 달에 수입이 몇 억 원씩 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세금을 엉터리로 내고 거의 다 떼먹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자신이 그런 사회의 정의에 대해서 온전히 승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민주국가에서 잘 사는 사람 있고 못 사는 사람이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있어야지만 사회에 발전적인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창의적으로 해서 사회를 기여를 많이 하든지 적게 하든지 똑같이 100만원씩 주고 살라고 한다면 누가 열심히 하겠습니까? 물론 그래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하는 맛에.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유럽 사람은 살기 위해서 일하고, 미국 사람을 일하기 위해서 일하고, 한국 사람은 일하기 위해서 산다고. 심각한 사회학적인 통찰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럽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가치입니다. 미국사람들은 일 속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일이 자기 삶보다 먼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생각이 바뀌어 집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지 않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제 피자배달이야기도 했습니다만 그런 제도 없어져야 합니다. 먹고 싶으면 자기 발로 걸어가서 사먹지 남의 집 귀한 아들딸들 오토바이 타고 달려오게 하느냐 말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튼튼한 봉고 타게 하고. 그러니까 만 원짜리 피자 한 2만원 받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죽는 사람이 없어져야 합니다. 피자 좀 식은 것 먹든지 아니면 그냥 불편해도 집에서 안 먹고 나와서 먹으면서 그런 사람들이 안 죽는 사회가 그게 진짜 공정하고 아름다운 사회 아닙니까? 피자만이 아닙니다. 중국집의 배달부도 자장면은 불으니까 늦으면 아예 사람들이 다시는 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방법을 쓰는데, 냉소다를 많이 넣어서 면이 안 풀어지게 찔깃찔깃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총알로 배달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 통에 들고 헬멧도 안 쓰고 달리는 사람들이 한 달에 받으면 얼마나 받겠습니까? 그 4500원짜리 자장면 배달하느라고 총알같이 달리다가 버스에 치어서 사람들이 죽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것을 한번 물어보는 것입니다. 나의 이 행동이 돈 주면 오케이, 내가 돈을 주면 팔려는 사람이 있고 그러면 오케이. 그것은 정말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제가 요새 원래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우유를 잘 못 먹습니다. 심리적으로 굉장히 힘듭니다. 소가 평균 15년 삽니다. 젖소의 수명은 3년입니다. 왜냐하면 젖을 짜기 위해서 계속 임신을 시키는 것입니다. 임신 안 하면 소가 젖을 안 짜니까 그리고 송아지 나면 송아지는 젖 안 줍니다. 그 녀석 먹일 젖이 어디 있겠습니까? 송아지는 저질 우유, 세균 감염된 것 그런 거나 먹으라고 하고 그것을 짜서 우유를 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먹는 우유 한 잔에도 아주 창조질서를 어지럽힌 비열한 동물학대적인 행위가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물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렇게 따지면 여기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문제라는 것입니다. 외국 갔다 누가 사온 카페트 하나에도 티베트 아이들이, 일곱 살 여섯 살 된 아이들이 쪼그리고 앉아서 짠 그 비인간적인 그런 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것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탐욕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물건을 만들어서 팔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들이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나한테 피자 배달을 하다 한 사람이 죽었다고? 내가 뭘 잘못 했어? 피자 시킨 게 뭐가 잘못이야?” 잘못 아닙니다. 책임질 일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걸 상품으로 만들어서 파는 동안에 누군가는 그 저임금 속에 그렇게 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런데 우리가 그런 피자배달에 얽힌 비인간적인 업계의 처사를 안다면 집에서 그거 앉아서 시켜먹을 맘이 나겠느냐는 것입니다. 걸어 나가서 한판 먹든지 아니면 꾹 참고 말든지. 그러니까 말입니다. 나는 정말 그 텔레비전 보면서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지금도 이야기하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왜요? 그런데 종사할 사람들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답니다. 고등학교 1, 2등급 하는 애들은 피자를 시켜먹고, 3, 4등급 하는 애들은 튀기고, 5, 6등급 애들은 배달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윤리를 이 세상에만 맡겨두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비유를 맞추면서 착하게 살아야 되겠다는 그 뜻이 아니라, 어떻게 이 세상에서 물질문명을 구가하면서도 비열한 자본주의의 정신이 인간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아무리 국가가 좋은 법을 만들고 그래도 이게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런 사회의 아픔들을 자신의 아픔인 것처럼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런 마음으로 이 세상에 사셨기 때문입니다. 또 어느 피자집에서는 그런 것도 했습니다. “30분 안에 배달해 주면 돈을 안 받겠습니다. 깎아주겠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사고가 너무 많이 나는 것입니다. 나중에 없애버렸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집에서 시키시면 다시 데워 드셔야 합니다. 그리고 만 원짜리 피자는 이만 원입니다.” 안 팔리겠지요. 그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중심의 윤리를 따라 살려고 애를 쓸 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만약에 피자집에 가서 오토바이 붙들고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겠습니까? 별난 인간이 꼴값한다고 할 것입니다. 피자집 주인은 재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것들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덤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그 순간 자신이 죽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덤으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B. 교회 안으로부터
1. 불완전한 몸 때문에
뿐만 아닙니다. 주의 몸을 위한 고난이 성도들에게 있는 것은 교회 바깥으로부터만 올 뿐만 아니라 교회 안으로부터 옵니다. 성도는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하나님의 생명체가 되었다는 점이서는 이미 완전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죄가 남아 있고 그리고 목회자를 포함한 교회에 모인 성도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그 몸을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 아직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현실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불완전함 때문에 교회는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몸, 다시 말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몸이 되었는데 불완전합니다.
첫째는 지식이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무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오류가 남아 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합니다. 그 대신 겁도 많습니다. 모르니까. 무식하면 용감하지만 그러나 누군가가 진실을 밝혀주면 굉장히 불안해하고 겁내합니다. 그게 바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것들에 대해 무지하고 사상에 대해 무지하고 그런 속에서 참 신앙에서 멀어집니다. 그런 무지 속에서 생활을 하게 될 때 사람들은 악에 대해 대담하게 되고 ,선을 행해야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되고, 오류에 익숙해진 악을 행하는 것을 깨달은 바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쉽게 생각을 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은 끊임없이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의 불완전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참 감사한 게 무엇이냐 하면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일치단결해서 은혜가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상태가 안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가 하면 저쪽에 상태가 안 좋던 사람들이 가을말씀사경회에서 은혜 받고 좀 견딜만해지게 됩니다. 상태가 안 좋은 사람들이 자꾸 딴 짓을 하면서 괴롭힙니다. 괴롭힌다는 것은 가서 때리고 그런다는 것보다도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자면 구역장이 상태가 매우 안 좋아서 매일 아침에 눈 뜰 때마다 못한다고 때려치워야 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합니다. 그런데 구역원들이 은혜를 많이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서 구역예배를 인도하고 오면 구역장이 은혜를 받고 옵니다. 그러고 보니까 너무 수치스럽고 창피합니다. 그래서 정말 저 사람 내가 전도한 사람인데 저렇게 믿음이 좋고 열렬히 기도를 할까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말 창피해서 구역장 못하겠다고. 은혜를 주시던지 내 사표를 받아주시던지 둘 중에 하나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십니다. 그냥 간신히 구역예배 때 폭탄 맞은 머리를 하고 왔었는데 성경도 읽고 구역공부도 열심히 하고 이제는 섬기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제 구역식구들이 하나씩 둘씩 시름시름 병이 들면서 구역예배도 자꾸 안 나온다고 하고 교회를 옮기겠다고 하고 지난주에 구역예배 인도할 때 구역장 이야기에 상처받았다고 하고 이러면서 사람들이 시름시름 상태가 안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았으니까 그 사람들을 끌어안고 하나님 도와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만약 두 사람 다 일치하게 은혜를 못 받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역원들은 떠나고 구역장은 사표내고 그 구역은 공중분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시고 여기 좀 병들만 하면 저기를 살려주시고, 여기 좀 살려둘만하면 저기 또 병들고, 그래서 오늘 책망 받던 사람이 내일은 위로하는 사람이 되고 계속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이 늘 은혜만 받고 은혜를 잘 간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원한 ‘을’입니다. 교회에서는 은혜 떨어진 사람이 ‘갑’질을 하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을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미안합니다. 상처가 됐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나는 요만큼 상처 주었는데 자기는 꼬챙이로 찔렀잖아. 그래서 배로 찔러서 등으로 나왔잖아.” 그런데 그 꼬챙이 찔린 사람이 사과를 해야 합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듣고 또 적용을 이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 은혜 계속 받으면 늘 손해를 보는 을이 된다니까 나도 이번에 한번 남아 있는 은혜 털고 갑이 한번 되 보자.” 털어버릴 은혜나 남아 있습니까? 갑 해보십시오. 그런데 그게 참 이상한 게 행복한 갑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이 많으면 괜찮은데 사랑이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지식적으로 잘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졌습니다. 사랑이 부족합니다. 여러분, 집에서 만날 해 본 것이지요. 남편 예수 안 믿으니까 설교 듣고 은혜 받아 또 누가 주위에서 충고를 해줍니다. 남편한테 마음을 사야지 전도를 하지 않느냐고. 그래서 밥도 잘 해주고 비유도 맞추고 잘 합니다. 그러다가 은혜가 떨어집니다. 그러면 한데거리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모릅니다. 교회 다니는 이유 때문에 만날 ‘을’만 됐다가 어느 날 성령 충만 떨어지고 성질폭발하면 자기도 한번 ‘갑’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내가 뭘? 그러려면 이혼해.” 남편이야 힘이 없으니까 쭈삣쭈삣 하지만 교회 와서 기도를 해 보니 기도가 되나 죽을 맛이지요. 그게 무엇 때문입니까? 다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충만한 사람들은 아프면서도 기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을로 남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갑하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교회는 불완전한 자기의 몸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교회의 분쟁 때문에
이것보다도 더 큰 것은 분쟁 때문에 교회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 고통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분쟁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그 분쟁은 표면적인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쭉 거슬러서 끝까지 뿌리를 캐고 들어가고 나면 결국은 두 가지로 집약이 됩니다.
첫째는 이기심입니다. 이기심이라고 하는 것은 이익의 문제입니다. 이기(利己)라는 것이 자기를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 'selfishness'입니다. 자기가 제일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의 문제에 집착하면서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이익에 집착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자기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기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랑 앞에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서 자기 깨어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신뢰하는 마음으로부터 깨지고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깨어져서 그래서 그렇게 될 때에만 결국은 자기 사랑이 깨지고 그렇게 될 때에만 이기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기심에 강력하게 사로잡히게 되면 몸 전체의 사랑이 없습니다. 몸 전체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가 하는 행위가 몸 전체에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먹는 이야기 오늘 또 한 번 하겠습니다. 어거스틴도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많이 했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이 입맛을 주신 것은 정말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에서도 배웠습니다만 아시시의 프란시스가 음식만 나오면 재를 확 뿌렸다고 했습니다. 음식 맛을 없애기 위해서. 그런데 사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정말 입맛 없어본 적 있을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병에 걸리거나 하면 입맛이 없어집니다. 저도 이번에 입맛이 없어 봤는데 좋은 점은 있습니다. 음식에 대한 욕망이 없으니까 거기에 매달리는 마음은 없어졌습니다. 두 수저만 뜨면 구역질이 나고 뭐든지 싫습니다. 그런데 건강이 유지가 안 됩니다. 몸의 체력이 뚝뚝 떨어지고 특히 나이든 사람일 경우에는 심각하게 체력이 손상이 오는 것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게 오래되면 생명을 위협하는 사태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당한 입맛이 살아 있는 것은 정말 감사해야 할 조건입니다.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그 입맛을 따라서 뭘 좀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조금만 방심하면 살살거리고 요사를 부리면서 더 자극적이고 맛있는 것을 달라고 혀가 난리를 칩니다. 그래가지고 급기야 몸에 해로운 것도 너무 먹고 싶어 합니다. 사실 팔만 원짜리 점심이나 5천 원짜리나 다 위에 들어가고 나면 맛을 못 느낍니다. 그런데 여기 입안에 있는 것입니다. 의사들이 30번을 씹어라 40번을 씹어라 그러는데 보통 15번 씹으면 넘기고 성질 급한 사람은 다섯 번 씹으면 넘깁니다. 그러면 다섯 번 씹으면 그저 한 5, 6초 동안 맛의 차이가 몇 만 원짜리하고 몇 천 원짜리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양에만 차이가 없다고 하면 잠시 이 안에서 침 안에서 도는 그것을 위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먹을 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매여서 사는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혀를 통솔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제도 설탕을 예로 들었지만 그렇게 먹으면 되겠습니까? 얼마나 몸에 나쁘겠습니까? 그것도 하얀 설탕을. 그렇게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혀가 계속 그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 좋아하는 것을 계속 퍼먹습니다. 그리고는 당뇨에 걸립니다. 그러면 다음에 눈이 어두워집니다. 상처가 나도 아물지를 않습니다. 배를 째고 수술을 해야 하는 데 수술을 못한답니다. 합병증이 생기고 그리고 몸의 기능들이 다 마비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 하나 즐겁게 하려다가 온 몸이 괴로움을 다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신 그 비유를 생각해 보면 참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이 끊임없이 교회에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한번 음식점에 갔는데 네 식구인가 밥을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남의 얘기 엿들으려 한 것이 아니라 하도 가까이 있으니까 들렸을 뿐입니다. 시아버지가 시집 온지 얼마 안 되는 며느리를 데리고 식사를 하는 분위기인데 시아버지가 아주 의미 깊은 충고를 했습니다. “얘야, 인생을 살면서 가정이 화목하려면 일평생 배워야 할 것이 있단다. 지는 법을 배워라.” 제가 옆에서 듣기에 이분이 자서전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야기야 명쾌합니다. “부부싸움은 둘이 서로 잘났다고 자만심을 가지고 싸워봐야 마지막에 상처받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본인도 상처를 받는다. 그러니까 지는 게 이기는 거란다.” 참 의미 있는 교훈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만심이,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이 생겨나고 이것 때문에 교회에 분쟁이 생겨나게 될 때 가장 커다란 충돌의 원인은 깨어지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있는 그대로가 될 테니까 네가 변해라 그리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기를 강력하게 고집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아픔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을 짊어지고 그리고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진리의 문제라면 그렇게 양보하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교회가 분쟁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영원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교회에서 분쟁하는 대부분의 일들이 본질적인 관점, 영원한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파수하기 위해서는 한 번도 그렇게 싸워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전투적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긴들 거기에 무엇이 남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기심이 추구하는 이익은 잠시 있는 세상에 속한 것들이고 그 이기심의 주체인 자기 자신도 사라져가야 할 필멸의 존재입니다. 영원히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항상 그 안에 영원에 대한 빛을 불러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는 항상 육신의 것을 어느 정도 벗어나는 영원에 대한 관점, 언제나 이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는 영원에 대한 관점이 도입이 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로 막 서로 다투고 마음 상해하다가도 은혜를 받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찬양)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 되도다
그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항상 영원에 대한 감각을 불러 일으켜 줍니다. 그래서 잠시 머무는 세상에 집착했던 그런 진흙과 같은 이익을 내려놓고 그리고 하나님 의지하며 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 없이는 나는 살 수 없다. 이것은 이렇게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한다.”고 하던 강력한 집착이나 몸부림 같은 것들이 결국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행복은 영원한 복락을 현실적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기 위해서는 매일 우리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데 이렇게 매일 매일 살아갈지라도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시간적인 삶 속에서 영원의 빛을 보면서 영원의 빛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비추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런 인생을 우리들이 매일 매일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하나님 한 분에게 기쁨이 되는 삶을 산다면 그러면 교회에서의 분쟁은 많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III. 영적인 몸으로서의 삶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인 몸으로서의 삶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내가 몸으로서 교회를 떠나 이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살아가는 모든 삶은 교회와 한 몸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가 개인이 한 것인 동시에 우리의 몸 전체가 한 일이고 그 전체가 한 일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께 봉헌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어떤 불순종을 하고 죄를 짓고 잘못 살면 그것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몸에 아픔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아픔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삶으로 행동으로 교회에서 끊임없이 자신이 하는 올바르지 않은 불순종과 악으로 교회에 고통을 주고 분쟁을 일으키고 한다면 살아있는 영혼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영적으로 주님을 생생히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매일 받고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러한 살아 있는 영적 생활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불순종하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아픔을 주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렇게 살아서 그리스도의 몸에 끊임없이 해를 가하는 행동을 하는데 그 사람이 주님을 처음 사랑처럼 뜨겁게 사랑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고 어린아이처럼 물같이 녹는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런 삶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최고의 표지는 일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물론 우리가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의 시대는 사회가 지금보다는 훨씬 단순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교통도 발달하지 않았고 통신도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위 오늘날 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 로컬리티(locality), 지역성들이 철저히 보호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지금처럼 오늘 아침 여기서 먹고 점심은 미국에 가서 먹는 그런 식으로 교통이 발달되고 모든 나라들과 사람들이 서로 무역을 하고 교통을 하는 이런 열린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회의 구조도 간단하고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느끼는 필요도 아주 단순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심각합니다. 중동의 문제라든지 그 다음에 사회부적응의 문제라든지 굉장히 많은 것들이 산업화 사회의 후기에 그리고 물질주의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시대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런 요구에 대해서 교회가 무엇인가 해 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그때와 같은 단순함을 계속 유지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충분히 인정을 하면서도 교회에 원래 주어진 사명은 백화점처럼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서비스들을 교회 와서 다 얻는 그런 양식으로 교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에서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은혜를 공급받는 것, 그리고 그가 올바른 지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도록 교육되어 지는 것, 이런 단순한 기능을 교회가 맡아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본질적인 기능들이 충분히 행해지는 가운데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면 좋은데 본질적인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사람들은 무지 속에서 그냥 무엇인가 자신이 일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데서 오류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의 신비를 이해하고 그래서 바로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접붙여진 몸으로서 무엇을 하면서 살든지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운명은 교회와 함께하고 교회의 운명은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몸이면서도 우리 몸 자신에 대한 의식이 별로 없기 때문에 알고 보면 그 몸을 더럽히고 몸을 해롭게 하는 행동들을 너무나 많이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깨뜨려지고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에 관한 교리들을 잘 배워야 합니다. 오늘도 하루 종일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어려운 교회에 관한 교리들을 조국교회에 정말 쉽게 전해서 그래서 도전을 받게 만들어서 이렇게 짐승과 같은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일깨워서 그리스도의 몸을 몸으로 볼 수 있게 해줄 수 있을까? 언젠가도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했지만 이 중의 상당부분은 여기 와서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으신 분도 있겠지만 교회를 옮긴 분도 있습니다. 옮긴 분들 중에 어떤 분은 정말 은혜롭게 옮긴 분들도 있겠지만 관계를 많이 깨뜨리고 교회에 상처를 주고 오신 분들도 여러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회개해야 됩니다. 그리고 가서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비록 여러분은 아직까지도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어떠어떠한 문제 때문이었고 어떠어떠한 사람들 때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고 그 사람들 잘못한 것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 잘못한 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가서 사람들한테 용서를 빌 일이 있으면 빌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 일이 있으면 빌고 그렇게 하면서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맺힌 것들을 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이 사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당신이 만드신 공동체의 불완전함과 이 세상의 불완전함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기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능력이 있으면서도 당신의 고난의 의미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사랑하는 교회가 이 세상에서 적절히 고난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교회 안의 불완전함 때문에 혹은 이 세상의 불완전함 때문에 그렇게 박해를 받으면서 고난을 겪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정말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시고 믿음으로 하나님 의지하면서 그 아픔과 고난을 견디며 하나님 사랑하려고 하는 진실한 신자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가려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돌이켜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뜻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개교회에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구현하면서 그렇게 살게 하시려고 오늘도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것은 을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다 감수하고 그리고 나 때문에 교회가 상처를 받거나 흠집이 나는 일은 없도록, 차라리 그 아픔을 내가 당하도록, 그렇게 교회를 위해 자기를 버리고 희생하는 삶을 살 때 사람 앞에서는 짓밟히는 자 같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들의 믿음을 그렇게 보시지를 않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결국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몸을 향한 사랑과 일치를 이룹니다.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나의 연합은 신비적인 연합이지만 그 신비적인 연합을 나만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체들이 신비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만 존귀하고 소중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눈앞에 무엇인가 만족스럽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그리스도께 연합된 신비한 연합을 이룬 지체들이라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런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연합을 가진 지체들은 자신들끼리 한 영이신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연합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을 영적인 연합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비한 연합이고 동시에 성도들이 함께 누리는 이 연합은 영적인 연합입니다. 물론 신비적인 연합 속에 영적인 연합이 있고 영적인 연합 속에 신비가 있지만 어쨌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지체들과의 연합을 촉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교회와 함께 고통을 함께 하고 아픔을 함께 하는 고난을 겪으면서 그 속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셨던 예수의 모습을 배우고 그 심정을 전수받고, 그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 속에 스며들어오고 그래서 자신이 죄와 불의에 대해 죽고 하나님의 의와 진리에 대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러면서 고난을 이길 힘과 슬픔을 능가하는 기쁨과 고통을 능가하는 희락이 우리 마음속에 주어져서 어두운 세상에 한줄기 빛으로 살 수 있는 힘들을 공급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그리스도 교회를 깊이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와 남은 고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녹취자: 조원정
Ⅰ. 본문해설
오늘날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도 자기만의 행복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물론이고 신앙이 있고 신앙의 실천의 열심을 내는 사람도 기본적으로 이런 틀을 바꾸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올리는 기도, 마음에 품고 있는 소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많은 소원들 가운데 실제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아뢰는 것은 얼마나 적습니까? 그렇게 아뢰는 기도들을 살펴보면 기도의 모든 초점들이 나의 행복과 평안,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구출에 관련되어 있지 않나 한번 반성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의하면 신자의 진정한 행복은 교회와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소명이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라는 선포를 여러 번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은 다음에 그 사람이 죄악 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졌고 죄인에서 용서받은 죄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고 하는 점에서는 완전한 성도들입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 세상의 습성이 남아 있고 죄가 잔존하고 있고 끊임없이 불안전한 세상 속에서 죄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아직 완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모순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빛의 도움이 아니면 참된 신자의 소명을 따라 살 수 없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온전해질수록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면 되어 갈수록 가장 커다란 유익을 누리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순전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변해갈 때 그때 최고의 혜택을 누리는 곳이 어딘가 하면 교회가 그것을 최고로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때에 느끼는 평안과 행복, 사랑과 은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께 부어준 사랑을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 부어주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몸에 한 지체가 되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이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온전한 신자가 되어 간다고 하는 것은 성례전적으로 연합된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는 것이고 그 온전함을 나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유익하게 누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구역장이 은혜를 받으면 최고의 혜택을 누가 받습니까? 구역원들이 받습니다. 아내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최고의 수혜자는 남편이 수혜자입니다. 목회자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최고의 유익을 누리는 사람들이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온전해지는 것은 교회의 온전함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고 거룩해지고 순전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러므로 누리는 행복은 하나님이 나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에게 주신 것을 우리가 그 몸에도 온전하게 참여함으로 그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유럽을 출장 갔을 때입니다. 박사 과정에서 칼빈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어느 젊은 목사가 나한테 물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창조했다고 해도 맞는 이야기입니까? 새가족 수준의 질문이긴 하지만, 제가 그랬습니다. 그 행복을 무엇이냐고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을 할 수도 있고 그 정의가 어떤가에 따라서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그 행복이 이 세상에서 먹고, 쓰고, 입고, 쾌락을 즐기고 자기를 확장해서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고, 환경을 파괴하면서도 인간의 극대화된 욕망을 충족시키며 살아가는 종류의 미친 행복이라면 하나님이 행복을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 삼위일체 안에서 누리는 교제의 평화와 진정한 행복이라면 하나님이 그것을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행복을 많이 생각하는데 사실 행복은 소명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행복은 신자의 소명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 안에서 그 소명이 성취되면서 신자가 기쁨을 누리고 행복을 누릴 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지 그것이 아닌 곳에서 느끼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소명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선교입니다. 아니면 열심히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뭘 열심히 해서 어떻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양한 답변이 나올 수 있습니다. 노래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 노래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만 하고, 글 쓰는 재능이 있는 사람은 글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서 그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온다든지 각자 다양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현상적인 것입니다. 모두다 뿌리로 들어가서 참다운 소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들어가 보면 우리가 현상적으로 무엇을 하느냐 하는 문제는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문제입니다. 내가 직업을 갖는데 나는 가르치는 재능이 있어서 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재능도 있고 기회도 주어졌으니 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재능도 있고 기회도 주어졌지만 나는 다른 것을 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예화) 어떤 젊은이가 아주 어린 나이에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고 판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판사라고 하면 그래도 월급이 얼마 안 된다고 하지만 우리보다는 많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사회에서 검사들보다 조금 더 존경을 할까 말까 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서른쯤 되었는지? 이십대에 판사가 되었습니다. 재판을 하는데 정말 궁금한 것이 있더랍니다. 왜 그렇게 법을 판단할 때 인간을 깊이 고려하여 판단해야 되는가에 대해 선배들에게 물었습니다. 선배가 인간이 존엄하기 때문에 법이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면 법이 중요한 것은 알겠는데 인간이 왜 존엄하냐고 물어보니까 아무도 대답을 안 합니다. 그때부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법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이 일에 종사하려면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법학은 인간이 왜 존엄한지를 안 가르쳐 주더랍니다. 결국은 그 잘나가던 판사 집어치우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속에서 왜 인간이 존엄한가를 공부를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글을 보니까 그리스도인인 것 같습니다. 서울대학교에 철학 교수로 오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5년 동안 거기에서 자기가 궁금해 하는 질문을 가지고 씨름을 하며 공부를 할 때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했답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각기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다를 것입니다. 판사를 하던 사람이 집어치우고 철학을 해서 교수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는데 제빵사가 되었습니다. 의사하면 돈을 많이 벌 텐데 빵을 구울 때 자신의 영혼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반죽을 만지면서 너무 가슴이 벅차다는 것입니다. 빵들이 오븐에서 구워져 나올 때는 자기 새끼처럼 느껴진답니다. 새끼를 막 먹습니다.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자유이고 모든 것은 양상입니다. 우리 시대니까 빵 굽는 사람이 의사보다 더 못해 보이지 조선시대로 가면 의사 하는 일은 양반들도 안 하고 중인계급들이 하는 것 아닙니까? 별거 아니라는 얘깁니다. 눈뜨면 해질 때까지 사람들 헌데만 만지다가 날 새는 직업 아닙니까? 조선시대 사람들이 그 직업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양반도 거기에 종사를 안했습니다. 양반들이 의사로 쓰기도 하지만 그것도 다 귀향하고 낙향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었지 잘나가던 정계에 진출한 사람들이 그런 것 할 기회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소위 얘기하는 거룩한 직업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지만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판사나 이런 것 하면서도 부정을 해서 욕을 먹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은 직업에 종사하는데도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이 존경해 주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 이유는 그 속에 깃들어 있는 도덕성 때문입니다. 무슨 동기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그 일을 하는가? 입니다. 선교를 한다, 무엇을 한다, 막 벌리고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회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가 교회를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 됨됨이가 되면 교회 일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가? 사람 됨됨이가 괜찮은데 아무렇게나 할 리가 있겠습니까? 능력이 모자라서 좀 더 덜할 수야 있겠지만 그러면 좀 더 같이 은혜를 받았어도 좀 더 유능한 사람이 선두에 서고 덜 유능한 사람이 뒤에 서고 돈 많이 버는 사람이 회계를 맡고 그렇게 맞추어서 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참 교회가 되는 것과 참 교회가 되는 이상의 소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이상의 소명이 없고 우리의 행복은 그 소명 안에서 발견되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있는데 비록 돈이 많지 않고 지위가 높지 않다고 하더라도 무시하고 깔볼 수 없는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높은 지위에 있고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더 잘 눈에 뜁니다. 그런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 안에서 어느 한 가지 때문에 존재의 울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그 영혼과 함께 그의 기질, 성향, 감정, 지식, 의지의 행사, 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덕스럽기 때문에 존재의 울림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한 시대에서 존재의 울림이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 몸을 형성하고 있는 많은 신자들이 온전한 사람이 될 때 교회가 장중한 존재의 울림이 있는 그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행복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보다 더 큰 소명은 없습니다. 교회의 소명은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서 존재의 울림이 있는 것보다 더 큰 섬김이 없고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에 아름다운 지체가 되는 것 이상의 소명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교회의 소명과 신자의 행복은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Ⅱ.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오늘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을 잘못 오해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시기 직전에 뭐라고 말씀하시고 죽으셨습니까? 다 이루었다. 무슨 뜻입니까? 그 의미는 굉장히 심각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에는 이루어져야 할 일들에 대한 예고가 있었습니다. 이루어져야 할 일들의 예고가 이미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면서 계속 주어지는 것입니다.
처음에 원 복음이 창세기 3장 15절에 주어집니다. 여자의 후손이 나오고 뱀은 발꿈치를 물고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쳐서 그 죄의 권세를 멸하는 그 구원의 복음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약속을 위대한 약속을 계속 주시고 그것들을 제사의 형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리얼 플레이 방식으로 실현식 방식으로 우리에게 제시해주시고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구속의 계시들을 보냄으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또 구원의 계시를 담아 그것을 점진적으로 발전시킴으로서 점점 더 풍성한 계시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인류의 구속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와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들과 선지자들의 예언이 한 점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도 말했고 또 히브리에서도 바로 아들에 관한 예언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명백히 말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많은 역사가 한 점으로 수렴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모든 바라보는 구원에 대한 전망과 예언을 따라서 모든 인류의 죄 값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율법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모든 요구를 이루고 율법의 저주를 이루고 약속을 성취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우리의 모든 속량을 위한 속전의 지불을 다 지불하셨다는 뜻입니다.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보태야 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여기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이야기를 하는가에 대한 것이 우리의 궁금증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무엇을 남겨놓은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희랍어 성경에는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직접 번역한 것만 읽어 드립니다. 의미심장합니다. 그리스도 고난들 뒤에 있는 것, 그것을 그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나의 육체 속에 채우노라고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 보다는 훨씬 더 명료합니다.
우리말 성경을 들어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다하지 못한 어떤 고난이 있고 사도 바울이 그것을 자기의 육체 속에 채운다고 이야기하는데 희랍어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들이 있었다. 그 고난이 지나가고 난 뒤에 그 뒤에 있는 것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들 뒤에 있는 것들이 있다. 뒤에 있는 것이 고난이라고 여기에서는 명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고난에 뒤따라서 남아 있는 어떤 괴로움은 똑같은 종류의 괴로움과 고통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충분한 고난을 지불하지 않으셨다는 뜻이 되고 우리도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서 우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어떤 고난을 채워 간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신성모독적인 발언이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사역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A. 도성인신하신 그리스도의 고난
1. 홀로 당하신 고난
여기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면 도성인신하신 다시 말하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누어서 생각해야 됩니다. 제일 먼저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은 어떤 고난이었느냐면 이것은 홀로 당하신 고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고난을 받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표현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하는 용어, 메시아의 희랍어적 표현, 그리스어적인 표현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대제사장입니다. 제사장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이 분이 매우 특별한 제사장인 이유가 무언가 하면 제사장은 제사를 지낼 때에 자신은 제사장이고 제사를 위해서 제물을 선택해서 하나님께 드렸는데 예수님은 제사장으로 오셨지만 제물을 취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제사를 드리면 앞서간 구약의 제사장들이 드린 제사처럼 일시적인 효력밖에는 없습니다.
일시적인 효력을 주는 것은 이미 구약시대에도 수많은 제사 속에서 실천이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실 속죄는 일시적인 것, 일시적인 평화, 일시적인 하나님과의 교통이 아니라 영원한, 단번에, 영원히 효력이 있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취소될 수 없는 평화를 가져오는 그런 종류의 제사였기 때문에 그런 영원한 제사를 위해서는 짐승으로 드리는 것이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아담이 순전한 인간의 몸으로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순전한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서 헌제자도 당신 자신이고 제물도 당신 자신인 아주 독특한 형태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고난은 홀로 당하여야 할 고난이었습니다.
비록 인간들의 불순종과 죄를 사용하고 또 이세상의 불완전함과 세상 사람들의 악함, 이것들을 조정하는 마귀의 악함을 하나님이 사용하셨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는 그 순간부터 당신 자신을 그렇게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된 가운데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성경을 면밀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이 십자가를 지는 고난에 같이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시거나 혹은 기대하시는 장면이 하나도 안 나옵니다. 오히려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마태복음 26장 31절에 보면 예수님이 당신을 이렇게 열렬하게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막상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따라서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고난을 당할 때에는 아무도 곁에 없을 거라는 것을 아시고 그것 때문에 외로워하거나 슬퍼하거나 가슴 아파하지 않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처럼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 예언이 뭡니까? 목자를 치리니 양들은 흩어지리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까짓것 문제가 안 된다는 듯이 이후에 일을 말씀하십니다. 돌이킨 후에는, 무슨 뜻입니까? 네가 나를 버리고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건데 나중에 네가 할 건데 돌이킬 때가 올 텐데 돌이킨 후에는 네가 형제들을 굳세게 해서 믿음으로 살도록 붙잡아 줄 것이다. 예수님이 예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배신하고 도망할 것을 못내 괘씸했다면 그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계속 우리의 의식 속에 살아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 홀로 지게 하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도 나누어 줄 수 없고 나를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도 나눠 줄 수 없습니다. 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거들어 줄 것이라는 것은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교훈을 우리는 배우는 것입니다.
(찬양)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우리가 보기에 아 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십자가하고 저 사람하고 뭔 상관이 있을까? 그것은 옆에서 보기에 그렇지 들어가 보십시오. 그 사람도 괴롭습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정말 재밌는 것은 모여 앉아서 모든 인간이 꼭 군대 갔다 온 청년들 같습니다.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자기 군대 가서 정말 고생했다고 이야기 하면 옆에 사람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나는 더 고생했다고 합니다. 옆에 사람이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그러다 한 사람이 정 반대로 나는 정말 군대 생활 편하게 했다고 얘기하면 그 다음 사람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난 더 편하게 보냈다고 합니다. 내가 비록 졸병이었지만 장군처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는 우리가 성육신 하셔서 당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는 우리가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그분이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기 때문에 그의 고난만이 우리의 속죄를 위해서 유효한 고난이었고 우리의 동참 같은 것들은 기대하지도 않으셨고 또 바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2. 구속을 위한 고난
예수님이 도성인신하신 채 당하신 이 고난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기 예수로 태어나시자마자 십자가로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기 예수로 태어나셔서 30년 동안을 인간들과 함께 사십니다. 30세에 공적인 생애에 들어오시게 됩니다. 성경에 스포트라이트를 바로 30세부터 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고 하는데 그것은 다 뻥이고 원래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세례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공적인 메시야로서 취임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스포트라이트가 30세에 확 비치기 시작해서 3년 동안 비치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갓난아이로 십자가에 직행하시든지 아니면 30세가 되자마자 성경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자마자 바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3년이라는 시간이 있어서 그동안 이 세상에서 사십니다. 우리와 똑같이 먹고 입고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고 이야기하고 예배하고 가르치고 상담을 듣고 이렇게 하시면서 일생을 사십니다. 그리고 온갖 상황을 만납니다. 좋은 상황, 나쁜 상황, 이런 죄인, 저런 죄인, 수많은 상황을 만납니다. 그 시간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완전한 사랑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성취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간음하다가 잡혀 온 여자, 율법은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모든 사람을 향해서 그래 율법에는 모든 사람은 돌로 치게 되어 있지, 모든 사람이 돌을 들었습니다. 자 쳐라, 그 대신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 사람들이 모두 돌멩이를 놓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피가 묻었어야 할 돌멩이들이 그냥 다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은 흩어져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유일하게 너를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도 너를 용서한다. 다시는 가서 범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오늘 밤새도록 얘기해도 복음서에 나와 있는 얘기를 다 못합니다. 무슨 얘긴지 이해되십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비난을 받으셨던 이유 중의 하나가 왜 예수님은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의 규례는 그런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으면 형제 되는 것을 의미하고 불결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무시하는 것처럼 오십니다. 하시는 말씀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는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왔노라.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그들을 형제로 받아주는 것이 궁극적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해, 그러면 내가 너를 사랑해 준다가 아니라 먼저 사랑하시고 그 사랑 속에서 그들을 녹여서 회개시킨 것이 예수님의 모습이고 이것이 바로 그 율법에 나타난 규정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었는데 율법을 통해서는 그것을 모두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십자가에 매달리지 아니하시고 공생애 스포트라이트를 받자마자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상당기간 동안 살아계셔서 당신의 성품을 온 세상이 비춰주시고 그것이 성경에 기록으로 남아서 오늘도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알고 싶은 사람들은 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을 통해 만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떤 분인지 알게 되도록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람의 몸을 입혀가지고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그렇게 보여주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은 사람이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생생한 모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시는 그 장면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의 모습은 아닙니다. 연약한 한 인간의 모습이고 마치 가족을 잃은 형제나 부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그렇게 비천한 인간을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사람이 자신의 이웃에 대해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는지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에게 참 인간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모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신 이유가 우리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해서는 죽어야 되었기 때문에 대속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고 만약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으셨다면 죽을 수가 없고 죽지 않는다면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고 했으니 피 흘려 생명을 버려 죽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던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살아계셨을 때 그 정신의 완전한 성취가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이 중에 우리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셨습니다.
이번에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사형을 구형을 했는데 유족들은 어떻게 그 한사람만 구형시킬 수 있느냐 모든 사람들 항해사부터 시작해서 다 사형을 구형해야 되지 않느냐 합니다. 벌을 받아야 됩니다. 너무 너무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저는 세월호 사건을 어느 정도로 보는가하면 전쟁을 해서 나라가 졌을 때에 패배감에 버금가는 엄청난 좌절을, 아마 돈으로 계산하면 계산이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수치심과 좌절,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을 온 사람의 가슴에 심어줬습니다. 며칠 있다가 전동차가 멎었습니다. 방송이 나옵니다. 위험하니까 객차 안에 가만히 계십시오. 여기는 지하터널입니다. 사람들이 신경도 안 쓰고 다 내렸습니다. 학습이 된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 있던 수많은 사람들, 수천 명을 죽인들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까? 무슨 얘긴가 하면 속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죄를 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죄 때문에 발생한 그 일을 되돌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대속의 효과를 우리에게 가져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매우 특별한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선포하신 것을 사도 바울이 계승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계속 이야기하는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온다고 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가르쳐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해서 당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 특히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고난에는 우리가 참여할 수 없고 우리의 대속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덜 당하고 남겨두신 고난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다음에 장사한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십니다.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장소적으로 하나님이 가운데 앉으시고 예수님이 옆에 앉고, 그럼 좌측에는 누가 앉습니까? 성경은 이야기 안 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통치주로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상태로 여기 계셨는가를 따라서 그리스도를 나눕니다.
첫째가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그리스도입니다. ‘크리스토스 아사르코스’, 살을 입지 않은 예수그리스도, 다음에 ‘크리스토스 사르코스’, 살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그리스도, 다음에 ‘아스켄수스 크리스토스’, 부활하신 다음에 올라가서 승천하신 예수그리스도, 승천하시고 올라가신 예수그리스도께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고난을 아들에게 맡겨 모든 세계를 통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주라고 불리워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주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대부분 사람들 속에 주라고 오고가는 명칭은 당시 사람들 속에 높임말로 부르던 것이었습니다. 원래 고유한 주라는 명칭, ‘아도나이’라고 하는 이 명칭은 희랍어로 퀴리어스라고 하는 이 명칭은 여호와를 가리키는 칭호였습니다. 여호와를 가리키는 그 칭호가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그 보좌 우편에서 모든 세계와 우주를 통치하시는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는 교회의 영적인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머리가 되신 예수그리스도가 진실한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에 접붙여진 사람들이 모두 한 연합을 이루어 하나의 교회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교회 안에는 감리교나 성결교, 장로교, 화란개혁교회, 루터파 교회, 그런 구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에 따라 진실하게 믿고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럼 그 하나의 몸속에 카톨릭도 들어갑니까? 카톨릭이 들어가고 안 들어 가고가 아니라 진실하게 구원받고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카톨릭이 들어가고 장로교가 들어가고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도 않고 장로교회에 다니면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보다 천주교에서 거듭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 문제로 삼는 것은 한 사람이 진실로 믿음을 가지고 회개하고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진실한 몸이 되려면 올바른 복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마치 다리가 잘못된 것같이 다리를 계속 걸어가면 다른 곳이 나오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내가 이단에 속했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가르쳐 주는 대로 믿고 싶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복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복음의 빛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성경 속에 명백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도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확률적으로 그런 교회를 다니면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매우 적은 것입니다. 결국은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머리이고 그 몸을 형성합니다.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들을 통치하시지만 종말의 때에 가서 그 통치는 완전히 실현이 됩니다. 완전히 실현될 통치를 하나님이 먼저 구현해 보고자 만드신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함께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칠 때에는 서로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교제의 모습은 하나님의 구속이 완성되었을 때에 종말에 모든 인류가 그런 고백을 하며 살아갈 것을 선취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하는 것보다 더 완전한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아직은 그 종말이 다 오고 그 구원의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데 은혜가 떨어지면 너는 내 암 중의 암이요, 관절염 중의 관절염이로다. 그런 고백이 나와서 도려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지불해야 할 고난은 다 지불하셨지만 그리스도 머리에 접붙여진 교회라는 몸이 부분적으로는 이 세상에 죄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자연히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고통이 아니라 은밀히 말하면 예수님의 부족함이나 모자람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 아니라 이 세상이 아직 하나님의 통치 속에 온전히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창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완전한 성도들 때문에 생겨나는 고통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당신의 고난인 것처럼 생각을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머리로 접붙여지셨기 때문입니다.
(예화) 여러분이 자녀들을 길렀습니다. 다 길러서 교육을 시키고 시집, 장가를 보냈습니다. 노후준비도 못하고 허리가 부러지도록 돈을 모아서 전세라도 얻어주든지 아니면 돈이 더 많으면 집이라도 사주고 합니다. 부모로서 의무는 끝났습니다. 오늘도 신문에 보니까 한국의 혼인방식에 대해 세계 사람들이 기이하게 생각합니다. 전 세계에서 이런 나라는 없습니다. 독일 사람이 “혼수요? 그게 뭡니까?” “시집 갈 때 해가는 것이다.” “왜 해옵니까?” 외국에는 미국에 한번 가보니까 얼마나 재밌게 되어있는지 가전제품 파는데 가보면 인터넷이 하나 떠있습니다. 이름을 칩니다. ‘김돌순’ 하고 치면, “김돌순 하고 김돌쇠가 몇 년 몇 월에 결혼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아, 우리는 이런 것이 필요해.” 하고 다 올려놓습니다. 목록이 있는데 이것은 벌써 누가 사줬다고 표시가 다 되어있고 가격까지 다 나와 있습니다. “나한테 돈은 100불밖에 없는데.” 하며 쭉 보면 “아 여기 있구나. 매트가 하나 필요하다는데 50불 밖에 안하는구나. 그럼 내가 사 줄게.” 거기에서 카드 결제하면 친구가 누가 보냈는지 다 압니다. 마지막에 물건 하나 패킹해서 이 신발은 누가 사줬고 매트는 누가 사줬고 냄비는 누가 사줬고 해서 오는 것입니다. 절대로 사람들이 100불 이상 안합니다. 그렇게 하고 모자라면 같이 사면되지. 뭐든지 여자가 해 가지고 오는데 여자 혼자 쓸 것 아니고, 부모로부터 돈을 받아서 집을 마련한다는데 일본 여자들은 그런 남자하고 결혼 안하려고 합니다. 마마보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에게 이렇게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는지 모르실 겁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면 시간이 가니까 진짜 연구대상입니다. 나도 아들 장가보낼 때 했습니다. 다 해주고 2년 흘러갑니다. 우리 아들 전세 값을 올려달라고 할 텐데 ‘에이, 살든지 말든지 한번 했으면 끝났지.’ 도움 받지 말라고 주례할 때도 얘기합니다. 그러면 자기네들이 알아서 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면 신경이 계속 쓰이는 것입니다. 아기 낳으면 자기 새끼지, 우리 새끼 아닙니다. 키우든지 말든지 셋을 낳든지 열을 낳든지 미음을 먹이든지 우유를 먹이든지 알아서 할 일이고 그렇습니다. 독일 엄마들 대단합니다. 아이 딱 낳으면 일주일은 데리고 있습니다. 일주일 딱 지나고 나면 아기 혼자 재웁니다. 비디오 카메라를 답니다. 엄마는 여기 와서 잡니다. 애기 낳자마자 샤워하고 와서 잡니다. 우는 소리가 들리면 비디오로 보고 갑니다. 일주일 되었는데 너 인생은 너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잔정이 많은 한국 사람은 그렇게 못 합니다.
교회가 겪는 고통은 대부분 죄 때문에 겪는 고통입니다. 교회 자체의 죄와 불순종이 아니라면 세상의 죄 때문에 겪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쁘니까 핍박을 합니다. 잘못 한 것도 없는데 욕을 하고 핍박을 하고 미워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뭔가 사람들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싸우고 깨고 볶고 그러면서 미워하고 상처를 주고 하면서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시켰습니까?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이 보태준 것 있습니까? 교회에서 일어나는 것에 예수님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악해서 자기 의지를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고 교회가 사람들이 완전하지 않고 성화되지 않아서 자기들 끼리 성질부리면서 싸우고 갑 질하고 을 질 당하면서 사는 건데 예수님이 거기에 뭘 보태줬습니까? 어떤 식으로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교회에서 겪는 그 아픔을 당신의 아픔처럼 느끼도록 만들고 칼빈에 의하면 우리 신자 한 사람 한사람이 예수와 연합되었다는 의미는 그냥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질서에 의해서만 연합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와의 인성과의 연합이라고 까지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 신비적인 연합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의 잘못 때문에 생긴 고통이 아닌데도 그 모든 것을 당신 자신의 몸의 아픔인 것처럼 짊어지셨기 때문에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는가하면 그리스도의 고난들 뒤에 있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B. 교회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고난
1. 함께 겪으시는 고난
a. 그리스도의 부활과 머리되심
그 고난은 예수님 홀로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함께 겪으시는 고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핍박을 받고 고통을 받거나 할 때에는 예수님이 아픔을 느끼십니다. 사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예수님 만난 적도 없는데 예수님은 거기에 안 계시는데 하늘에 승천하셔서 부활하셔서 영광의 보좌에 계신 분이신인데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니까 그 아픔이 예수님의 아픔으로 받아들여지고 당신 자신이 고통을 겪는 것처럼 느껴져서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예수님이 사울을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과의 신비한 연합을 이룬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소극적으로 말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과 연합을 이루며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이교도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그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도 예수님에게는 넓은 의미에서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은 교회의 몸 안에서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의 몸 밖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 속에서도 그렇게 아파하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거기에 참여하며 자신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을 그 고통에서 건져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십자가 정신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선교의 동기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교회에서 겪는 모든 고통을 당신 자신의 고통이라고 생각하시면서 이 고통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럼 여러분 고통당하는 모든 교회는 정결해집니까? 보십시오. 교회가 고통을 당하고 내가 고통을 당하니까 저 사람 원망하고 미워하고 싸움이 일어납니다. 거룩해집니까? 성결해집니까? 콩가루가 되는데 뭐가 거룩해지겠습니까? 그러한 교회가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그 고통이 진정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그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예수의 정신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무슨 일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고 말했던 바로 그 마음입니다.
신자들이 예수의 정신을 품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리스도 앞에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자기를 꺾고 순종하며 믿음으로 그 모든 교회의 고통을 받아들일 때에 그때에 그 교회에서 많이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일들은 마치 우리 개인에게 일어난 고통스러운 일들이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그것을 극복할 때 우리를 진실한 신자가 되게 하는 것처럼 교회 몸 전체를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거룩한 몸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b. 머리되심과 그 몸인 교회의 고난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몸인 교회의 고난을 생각해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 천상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천국에 계시는데 거기에서 교회 때문에 계속 괴로워하신다면 거기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천국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지옥입니다. 상식적으로 그런 생각 안 해봤습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천국을 갔습니다. 그럼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해야하는데 천국에 갔는데 아침부터 아래 내려다보면서 교회에서 너무 괴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아침에 펑펑 울고 점심때 너무 괴로워서 입술을 깨물었더니 구멍이 났습니다. 피가 날 정도로 괴롭습니다. 하루 종일 그렇게, 또 전 세계에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려다보면 오늘은 장로교 때문에 입술을 깨물고 내일은 감리교 때문에 괴로워하고 글피는 성결교 때문에 눈물 흘리고 카톨릭 때문에 통탄을 하고 거기가 천국이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고통 받는다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런 생각 안 해봤을 겁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야지만 이것이 정말 깊구나,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가 깊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예수님 천국에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려다보면서 장로교 때문에 눈물이 나시고 감리교 때문에 입술을 깨물어야 하고 성결교 때문에 통탄하고 천주교 때문에 땅을 치신다면 예수님에게 거기가 천국일 수 있느냐 말입니다. 차라리 지상에 계시는 것이 낫지,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괴로움을 느끼면서 고통을 당하신다고 하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 교회가 불완전하고 세상에 악함 때문에 박해를 받거나 고통이 있을 때에 그렇게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속에서 느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하시면 교화가 불가능합니다. 우리를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잘 인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속에 묶여있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의 마음을 보이시고 지도하셔서 그들을 교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설교를 많이들은 사람들은 이해를 하겠다고 하는데 나중에 온 사람들은 뭔 소린지 잘 모르는데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이 모르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일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정말 말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낳은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바쳐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말에 순종을 하여 이삭을 죽이려고 했더니 하나님이 천사를 시켜서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 그야말로 헐입니다. 그게 뭡니까? 아니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모르셨다는 것입니까? 이제야 알았노라, 그런 분이 어떻게 하나님 일수가 있습니까? 그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해야지만 그때서야 그것을 겨우 아십니까? 이미 그럴 줄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시간을 초월해서는 하나님이 무엇도 새로운 것이 없이 모두 아십니다. 그렇게 아신다고 하면 여러분이 예를 들자면 큰 시험을 만났습니다. 자기는 너무 괴로워 어떻게 할 줄을 모릅니다. 자살하려고 수면제를 사놓고 한번 먹어보려다가 어느 날 쾅하고 은혜를 받으면서 아니야 내가 이러면 안 돼, 믿음으로 살아야 돼, 쓰레기통에 버리고 교회 달려와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매달리면서 기도하고 자기 마음을 지키고 말씀을 붙들고 막 씨름하면서 나에게 핍박하고 미워하는 자들을 다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극복을 했습니다. 시험을 다 이기고 나니까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가 다 이겼습니다. 하나님이 내게는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이미 영원 전부터 알았노라. 그럼 우리 입장에서 헐 그럽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나옵니다. 아 네가 드디어 그 모든 시련을 극복했구나, 정말 잘했다. 마치 하나님이 기대하지 못하셨던 일을 우리가 해낸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잘했다. 아무도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없었을 텐데 너는 정말 잘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네게 승리의 면류관을 주리라. 의의 면류관을 주리라. 하나님이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안 것처럼 감격하실 때 거기에서
(찬양)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일생동안 잊혀 질 수 없는 강력한 교훈을 받으면서 ‘하나님은 시험을 받을 때 쓰러지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구나. 아멘.’ 그리고 이기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놀라운 평안과 기쁨과 승리의 증거를 보여주시는구나. 아멘.’ 그러면서 믿음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고난들 뒤에 있는 것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2. 신자 참여하는 고난
신자는 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은밀하게 말하면 예수님 때문에 생긴 고난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생긴 고난입니다. 이 세상 때문에 생긴 고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머리이시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어 있는 이 언약관계 안에서 그 신비적 연합 안에서 우리 성도들은 믿음을 가지고 깨어 있기만 하면 교회에서 생기는 많은 아픔들을 우리가 아파하는데 예수님은 우리보다 훨씬 아파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사람을 향해서는 참을 수 없는데 그 사람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예수님 때문에 내가 참을 수 있는 마음이 생기고 인내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고 내가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데 그리스도의 아픔이 전해지지 않으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고난을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속에서 느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놀라운 영적인 몸의 일치를 누리면서 고난에 참여하게 하시는데 이렇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아픔과 고통, 혹은 밖에서 오는 고통과 핍박 이런 것들을 자신의 아픔인 것처럼 생생하게 느끼는 정도는 그 성도 안에 있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좀 찢어지면 어때? 깨지면 어때? 몇 사람 출교시키면 무슨 상관이 있어? 교회 하나가 쪼개져서 둘로 된들 뭔 상관이 있겠어? 재산 공정히 나눠서 둘로 쪼개서 공정히 나누면 되지, 부부도 살기 싫으면 이혼하고 부모도 마음에 안 들면 의절하는 세상인데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재판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한 아이는 엄마가 꽤 많이 먹었나 봅니다. 깔아 죽었습니다. 하나만 남았는데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합니다. 누군지 알 수가 없습니다. 명령합니다. “반씩 갈라서 줘라.” “예, 좋습니다.” 그 사람은 진짜 엄마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 여자에게 주십시오.” 진짜 엄마입니다. 무엇이 시킨 것입니까?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교회를 이런 고난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커다란 신적인 지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고난에 참여하면서 교회에 속해 있지만 이 교회보다도 더 온전한 교회가 되기를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 일이 이루어집니까? 내일, 모레, 글피, 물론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할 때 그것을 그리워하게 만들고 세상으로부터의 박해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계속 될 것입니다. 언제 그런 갈등이 끝나게 됩니까? 세상과 교회가 하나가 될 때 다시 말해서 완전한 세상이 되기 위해 교회라는 한 알의 밀알이 완전히 썩어서 형체가 사라지는 그날, 교회는 없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날에 바로 우리의 이런 꿈들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온전한 세상에 대한 갈망을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를 세워놓고 “저사람 정말 훌륭해. 우리는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 있어. 정말 좋아.” 그러면 주님을 의지하겠습니까? 결국 목회자를 의지합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기도도 하지 않은 채 은혜 받을 갈망을 가지고 주일날 나오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설교자의 재능을 믿는 사람이다. 명심하십시오. 물론 그것도 안가지고 오는 것보다 낫겠지만 기도도 안하고 주일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소망을 품고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설교자의 재능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은 몸이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성도들을 전심으로 주님 의지하게 살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일병장수, 순수한 우리말로 골골 팔십이라는 말이지 팔십 가지고는 감동을 안 하고 골골 백 그렇게 해야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정말 튼튼하던 사람들이 급사를 많이 합니다. 자기 체력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가끔 아픈 것이 정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번에 수술하기 위해 입원할 때도 마음속으로 처음에는 굉장히 괴로웠는데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다.’ 왜냐하면 자신을 믿지 않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제 주위에 신학을 가르쳐준 선생님 한분이 있는데 그분은 맨날 수업시간에 들어오면 십분, 십오 분씩 일찍 끝납니다. 학생들이 처음에는 좋아하다가 나중에는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그러십니다. “여러분 제가 건강이 안 좋습니다. 주님이 주신 몸인데 제가 이렇게 관리해서 늘 죄송합니다. 십분만 일찍 끝나겠습니다.” 그분은 마치 주님께 충성하듯이 수업을 일찍 끝내고 가시는데 우린 굉장히 썰렁했습니다. 그분은 아직도 살아계십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정말 전 세계를 휘젓고 열혈하게 다니시던 분들은 진즉에 가셨습니다. 언제까지 사실지 아직도 모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Ⅲ.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교회의 한 지체로 부르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 당신 자신이 머리가 되어서 교회를 다스리시고 교회와 생명적인 관계를 가지시는데 그리스도의 몸의 한 일부로서 교회의 한 지체로서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고난 중 주님이 안 겪으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그의 몸 된 성도의 아픔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믿음을 굳게 가지고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서 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소명과 여러분 자신의 행복이 동시에 성취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육체에 채우는 고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녹취자 : 이경순
Ⅰ.본문해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고,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 뒤에 있는 것, 엄밀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있는 고난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이 고난에 우리들이 참여할 때 당신의 충만한 생명을 누릴 뿐 아니라 또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고 교화시키시기 위해서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그리스도의 교회의 아픔 때문에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전달되도록 해주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고 거기에는 언제나 우리만의 삶의 상황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우리가 예수 믿은 것이 이러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간증을 가지고 내 신앙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래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인적으로 성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서구의 개인주의적인 영향을 받은 성경해석입니다. 처음부터 성경은 혼자 믿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저께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그때에 형제들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기 전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고,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는 우리가 이미 영원 전에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간과 공간속에서 성취되기 위해서 우리가 태어났고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이 생겼고 거기서 성령의 은혜로 우리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믿음이 있었고 이런 모든 하나님의 접힘이라고 할 수 있는 작정이 시간과 공간속에 펼쳐지면서 우리의 환경 우리의 믿음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 등등이 등장을 해서 우리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라고 물을 때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이 교회 론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예수께 접붙여진 그의 몸에 일부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예수그리스도는 완전하시지만 그리고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세상에 속한 자녀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녀로 흑암에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빛의 나라로 그리고 죄인으로부터 속량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점에서는 이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지만 그러나 우리 속에는 아직까지도 잔존하는 죄가 남아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완전한 세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의 완전한 몸이지만 아직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완전한 순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교회와 세상 사이에 차이가 있어야 된다고 말하는데 그게 잘 생각해 보면 이런 뜻이 됩니다. 교회와 세상은 구분은 되지만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몇 시간 전까지 여러분은 세상에서 살다고 온 사람들입니다. 예배가 끝나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사람들이고 그 세상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속에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것이 씻겨져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순수하고 순전한 신앙을 가질 때 그 때 이 교회는 천국과 최대한 일치가 되어서 존재의 울림이 있는 공동체가 되지만 그것이 각자의 신앙생활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그 세상의 크기가 클 때에는 여기가 이 세상보다 더 악하고 더러워 질수도 있는 것 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악하고 굽어있는 사람이 하얀 양복을 입는다고 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또 자기와는 가 되지 않는 사람들과 섞여있다고 해서 자신도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울타리 하나가 무슨 그런 어마어마한 힘이 있기에 들어오는 즉시 놀라운 사람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자가 불결한 자신의 옛 성품으로부터 끊임없이 순결하게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개인적인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그 개인적인 성화의 총화를 이루면서 교회의 현실적인 거룩함, 구별됨, 이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나는 것, 소금으로 나타나는 것이 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래서 우리들이 고난과 시련이 겹치고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뜨고 싶지 않은 지독한 괴로움이 있더라도 이 세상에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데도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고 간절히 기도하고 은혜를 빌면 하나님이 내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커다란 은혜를 주셔서 고난을 이기고 역경을 헤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용서하며 살 수 있는 새 힘을 주시는데 이것은 어떤 식으로 말해도 이 세상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자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이미 천국에 있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것이 이미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한 해전에 이 앞에 나와서 그렇게 예배시간마다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사랑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성도들을 섬기던 사람이 일 년이 지난 지금에는 미끄러진 채로 죄악 속에서 뒹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머리이시지만 불완전한 교회의 몸은 그 불완전한 것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고 이때에 당신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사랑의 연합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 고통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예수님이 고통을 받으신다고 하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II. 육체에 채우는 고난
A. “육체에 채운”는 뜻
그런데 오늘 성경은 아주 중요한 선언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즉 그리스도의 고난들 괴로움들 뒤에 있는 그것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러면서 육체에 채우는 고난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자 이것을 두고도 여러 가지 해석들이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이렇게 해석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하는 것은 감옥살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옥살이를 하면서 고문도 당하고 가고 싶은데도 못가고 그리고 착고에 채여서 그래서 지하실 같은 곳에 던져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이 고백은 물론 그런 의미도 없지는 않겠지만 사도 바울이 쓴 이 골로새서의 문맥뿐 만 아니라 사도바울의 이 육체와 영혼에 대한 생각을 사도바울서신 전체에서 고려하면 그렇게 가볍게 간단하게 해석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육체에 채운다는 뜻이 도대체 무엇이냐면 원래 신약성경에 쓰인 그리스어 성경, 희랍어 성경, 혹은 헬라어 성경이라고 하는 곳에는 ‘안타나 플레로 엔싸르키 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안타나 플레로’라고 하는 말은 ‘채운다. 바깥에서 집어넣어서 꾸겨 넣어서 들이 붇는다.’는 의미보다는 스스로 이 안에서 꽉 차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엔 싸르키 무’ 그랬습니다. ‘나의 살 안에서’ 여기서 ‘싸르크스’라고 하는 것은 ‘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과 대조되는 육신의 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 '육체'(sarkos)의 용례
그런데 성경에서 이 육체 ‘싸르코스’라고 하는 이 말의 용해를 보면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그것은 죄와 무관한 육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또 죄와 관련된 육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육체 그 자체가 죄와 관련되어서 나타나기도 한다는 이 뜻 입니다. 마태복음 26장 41절에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를 쏟으며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계속 잤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깨어 기도하라고 간곡히 말씀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때에 예수님이 육신 혹은 육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단어가 바로 이겁니다. 그러면 거기서는 사실은 너희들이 죄가 많구나, 악한 놈들이구나, 그런 뜻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육체의 연약한 한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사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하나님 품에 있는 독생하신 아들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그랬습니다. 그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사 라고” 했을 때 그 육신이 바로 ‘사르크스’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입고 오신 그 육체 안에는 죄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사람 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관련된 것을 말한 것은 육체의 죄와 관련이 없는 중립적인 상태를 말한 것이라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고하는 이 육체는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이 입었던 것과 같은 그런 의미의 순전한 육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더 많은 경우에는 죄에 오염된 육체를 가리키는 말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 5절에 보면 ‘우리가 육체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지체라는 것은 교회지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사지백체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역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사망을 위해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그것은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일어났다 즉 율법이 이것도 하지 말아라 이것도 하지 말아라 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 금지된 것을 보면서 그것을 오히려 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보면서 그 금지조항을 보면서 호기심을 느끼고 그것에 대한 욕망을 갖는 우리의 문제이기는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써있으면 그냥 길로 걸어가는데 이상하게 예쁜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 그러면 한번 밟아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리 선악과를 따먹은 이야기를 설명을 해도 나이 드신 장로님들이 이해를 못하시더랍니다. 그러면서 장로님들이 하는 말이 “아니, 먹을 것이 천지인데 그것을 하필이면 왜 먹나?” 목사님이 열심히 설명을 하고 호기심이 발동하고 뭐 등등 이야기해도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것을 왜 먹나?”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장로님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답니다. 사모님이 밥을 잘 차려서 가져왔는데 장로님들이 좀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상을 잘 차린 게 틀림없는데 모든 반찬에 뚜껑이 덮여 있는 것입니다. 뚜껑을 다 덮은 국과 반찬 그리고 찌개 밥 이게 한상이 올라온 것입니다. 시골에서 있던 이야기라는데 사실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장로님들 어서 뚜껑을 열고 드십시오. 제가 잠깐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런데 여기 가운데 고동색 그릇이 있는데 딴 것은 다 열어서 드시고 이것은 절대 여지 마세요.” 그리고 나가셨답니다. 장로님들이 뚜껑을 다 열었습니다. “와 반찬이 많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이 “그런데 저 가운데 있는 불그스레한 저 그릇에 뭐가 들어 있을까?” 그러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아 먹을 게 많은데 이거 먹지 뭘 궁금해 하나.” 하니까 “아니 그래도 궁금하잖아.” 하면서 결국은 열었답니다. 그랬더니 참새 한 마리가 휙 날아가더랍니다. 돌아오셔서 목사님이 “그 마음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마음입니다.” 그러셨답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이냐면 율법이 “이런 것을 하지마라.” 그랬더니 죄가 없을 때는 문제가 안 되었는데 죄가 생기고 나서 율법이 뚜렷하게 줄을 그으니까 “들어가지 마시오.” 하니까 자꾸 잔디밭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랬더니 죄의 정욕이 우리의 온 지체 속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으로 훔쳐서는 안 될 것을 훔치고 싶고, 발로서는 가서는 안 될 곳에 가고 싶고 그리고 이 입술로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고 싶고 뭐 등등의 이야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어제 밤늦게까지 워킹을 하고 한 한 시간 이십분 걸었습니다. 그리고 오는데 골목에서 어떤 사람이 툭 튀어나오더니 “김남준 목사님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인줄 알았습니다.” “아 예.” 그랬더니, 나를 딱 붙드는 겁니다. 그래서 “열린 교회 교인이십니까?” 하니까 “아닙니다.” 하면서 자기는 어느 교회 다니는데 자기네 가게 와서 기도 좀 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목사님 설교는 매주 들으면서 은혜 많이 받는데 교회는 다른 교회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정말 주님 사랑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소주한 잔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럴 수도 있죠.” 했더니 기도를 해달랍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를 해주고 왔습니다. 그런 것을 맛보지 말아야 되는데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언제 그러냐고요?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그러니까 육신이라는 말은 우리가 죄 가운에 있을 때 그런 말 하고 같은 이야기 입니다. 뭘 입증하기 위해서 이런 긴 설명을 드렸냐 하면 육체라고 하는 말, 육신이라고 하는 이 말이 죄에 오염된 육체, 그래서 예수 믿기 전에 우리가 가졌던 옛 성품은 육체에 속한 것이고 또 예수 믿고 새롭게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새 본성, 그것은 하나님 사랑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남을 자신보다 더 위하고 이러는 이타적인 예수님 사랑에 복종된 상태 이것을 우리들이 신령한 사람, 육신의 사람, 신령한 사람, 옛 성품, 새 성품 이렇게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말로 이 육체란 말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의 기업을 우리의 영혼만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까지도 하나님의 기업을 받는데 참여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육신을 여기다 두고 하늘나라 가지만 거기는 아직 천국이 아닙니다. 낙원입니다. 신학적으로 중간상태라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에는 지상에 남겨두고 갔던 육체가 부활해서 다시 낙원에 있던 영혼과 만나서 하늘나라에 들어가 육체와 영혼이 함께 결합된 완전한 인간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그 대신 거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이렇게 육신이 죄에 물들었기 때문에 이 육신이 끊임없이 우리의 신령한 삶을 방해하고 힘들게 하는 이런 갈등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육체를 잘 보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육체를 굴리면서 사는 것은 그래서 성경이 우리의 육체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죄로부터도 순결하게 보존해야 하지만 건강이라는 측면에서도 우리의 육체를 잘 보존하는 것은 우리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오늘도 공부를 하다가 많은 학자들을 인명을 살필 기회가 있었는데 어쩜 그렇게 오래 사는지 백세, 구십 팔세, 백일세. 향년 구십세 물론 일찍 죽은 사람이 하나님을 못 믿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잘 믿고 마음의 욕심을 버리면 육신을 잘 보양하니까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먹고 싶은 대로 퍼먹고 자고 싶은 대로 자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막 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원래 오래 사는 사람들은 뜨거운 열정 속에서 피를 토하면서 살던 사람들은 금방 죽습니다. 여유를 가지고 그러면서도 주님을 사랑하면서 용서하고 오래 사는 사람들은 마음에 맺힌 것이 있는 사람들은 오래 못삽니다. 금방 죽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쓸 수 있는 육체의 힘과 정신의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막 물 쏟듯이 쏟으면서 살면 일찍 죽는 겁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고 싶은 것은 여기서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는 육체에 채우노라 할 때에 이 육체는 죄에 오염된 육체, 그리고 옛 사람의 성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채운다’의 뜻
자 그런데 바로 그 육체에 채운다고 나옵니다. 조금 어려운 설명이긴 하지만 우리말에서 내가 그러면 일격이라고 합니다. 주격입니다. 나의 이격입니다. 소유격입니다. 나에게 3격 역격입니다. 그리고 나를 그러면 목적격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네 개인데 라틴어나 히브리어에서는 5격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희랍어를 보면 4격이 있는데 4격은 이동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믿으라고 할 때 그 복음이라는 말 앞에 4격 전치사를 씁니다. 그리고 사격이 옵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복음 속으로 믿는 것입니다. 제가 세례를 줄 때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자 아무개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속으로 세례를 주노라.” 목사가 자기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례를 준다는 뜻이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세례를 내가 이렇게 베풀므로 너는 성부성자성령의 이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연합이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바로 마태복음 28장에 나와 있는 그 세례에 대한 선언입니다. 자 그러면 3격 전치사는 이 4격은 이동을 나타내는데 복음을 믿으라고 할 때는 3격을 쓰고 세례를 주노라 할 때는 4격을 씁니다. 그러니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것이 있고 그 안에서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줄 때는 그 세례를 통해서 이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쓰여진 것은 3격입니다. 육체가 있는데 육체 속으로 고난을 들이붓는 게 아니라 육체 속에서 고난이 꽉 차오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자 그러면 이게 결국은 정지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육체 속에 이런 고난을 꽉 차오르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B. 교회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고난
자 그러면 이것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면 교회의 머리되신 고난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에 계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어떠한 고난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제 제가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하기위해서 눈높이로 설명 드렸듯이 만약에 예수님이 천국에 계신데 거기서 예수님이 이교회 보면서 눈물을 흘리시고 저 교회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고 또 다른 교회 보면서 마음에 분통이 터지신다면 거기가 어떻게 예수님에게 천국일수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이 땅에 사시는 게 낫지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하늘나라에 간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을 다 보게 될 텐데 보면서 만약에 그런 정동을 그 하늘나라에서 느낀다면 어떻게 거기가 하늘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존재론적으로 그런 고통과 괴로움들을 그 속에서 당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적인 해석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예수님이 이미 이 세상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아픔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분이라고 말한다면 뭐 그런 머리가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질병이 생기고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하는 말이 “아무래도 이 팔을 절단해야겠습니다.” 그럴 때 머리가 고민을 안 합니까? ‘나만 안 잘리면 되지. 그까짓 팔이야 잘리든지 말든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래야 될 것 아닙니까? 최근에 실험결과가 나왔습니다. 양쪽 팔이 없어도 뇌는 그것이 없다고 생각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 머릿속에는 영원히 잘려 나갔어도 그 팔이 영원히 자기 팔인 것인 것처럼 생각을 하고 감각의 명령을 하는 겁니다. 거기서도 번쩍 하는 것들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주 충격적인 것들이 느껴졌습니다. ‘그게 우리 몸이구나. 정말 신비롭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를 시킬 수 있겠습니까 머리이시면 몸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그 머리도 함께 느껴야지 그것이 머리와 몸의 관계고 그것이 곧 생명적인 관계이지 못 느끼신다고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론 적으로는 예수님이 천국에서 이 교회의 상태 때문에 다시 고난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몸을 이루고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성화를 촉진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더 온전해져서 이 세상에서 존재의 울림이 있는 교회가 되고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다면 되었을 그런 존재 그리고 하셨을 그 일들의 뒤를 잇고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며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하시던 예수님의 그 마음을 그대로 품고 이 세상을 위해서 섬기고 사랑하는 교회가 되게 하기위해서는 어떤 식 으로든지 당신이 겪는 아픔이 성도들에게 전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단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여 회심을 한 신자들은 절대로 지워질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은혜생활 잘하고 회개를 많이 하고 말씀을 꼭 붙들고 살면 이 사랑이 풍성해집니다. 그래서 어느 상태까지 가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렇게 고백을 할 정도 까지 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같은 사람이나 고백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초등학생이라도 온전히 죄 죽임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그 고백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 마음이 가장 약해집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당하실 때 그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일상적으로 생활을 하는데 누가 죽었답니다. 지겹게 내가 미워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또한 관계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사랑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그러면 내 존재의 기반자체가 흔들리는 겁니다. 그래서 따라서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없는 세상에 나 홀로 존재 하는 이 무게감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죽는데 그 죽는 심리는 죽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고 하는 고백이 바로 죽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교회가 아무리 후져보여도 그 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들과 미워하는 성도들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성향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되었습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당신의 아픔을 전달해야지만 그래야지만 그 아픔을 느끼면서 이 성도들이 그 아픔을 십자가로 지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고치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고치는 것이 성례전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에 봉헌되고 그래서 교회전체가 새롭게 되고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 몸이 된다고 하는 것이 그 의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당신은 실제론 적으로는 고통을 당하시는 분이 아니지만 고통을 당하는 것을 성도들에게 느끼게 해야지만 성도들이 자신의 죄 성을 버리고 옛 성품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성품을 덧입고자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이 세상을 본받으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회의 몸에 고통이 있을 때에 그것을 느낄 수 있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나쁜 신자도 회개하지 않는 아주 좋은 신자보다 그러니까 아무리 나쁜 신자라도 회개하는 신자는 아무리 좋은 신자라도 회개는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공사 중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져주시고 고쳐주셔서 새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의 대립,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대적하라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결국 영혼과 육체가 하나의 제유법적인 표현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III.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실재화
그래서 신자 안에 신령한 특성과 육신적인 특성이 있는데 그 육신적인 특성이 죄성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당하는 고통을 그것을 자신의 육신적인 성향의 마음에 가득 채우게 될 때 그 고난의 채움은 곧 죽음의 채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채우면서 자신의 안에 있는 육신적인 성품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 뭡니까? 죽음이라는 것이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과 질서를 거스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체험은 곧 죽음체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고유한 뜻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살이 찢어지고 에이는 고난을 다 당하셨다고 하더라도 탈출하셔서 죽지는 않고 살아나셨다면 우리의 속죄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죽으심으로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대업을 이루 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것이 육체의 고난을 채운다는 라는 의미인데 그러면 그렇게 육체의 고난을 채우는 것 다시 말해서 죽음을 채우는 것이 진짜 그것이 무슨 의미 입니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실제화입니다. 실제화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 속에서 작용하여 현실화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지금부터 이 천 년 전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육신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것은 이 천 년 전에 일어난 단한번의 사건이고 그것은 반복될 수 없습니다. 또 반복될 필요도 없는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한번으로 우리를 영원히 구속하실 수 있는 충분한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반복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죽음과 부활이 이 천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실제화 된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육신적인 의미에서 예수가 다시 살아나셔 서 못 박힌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고 있는 부활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가 우리 안에서 실제적으로 우리의 정신과 영혼 속에서 작용하여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거기에 우리들이 참여하는 것 같은 부활에 참여하는 것 같은 어떤 영적이고 정신적인 효과를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실제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안에는 예수님을 제외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 들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죄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법적으로 용서를 받았지만 그 죄에서 완전히 순결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지상에 남아있는 성도들은, 그래서 여러분이 얼마나 은혜생활을 많이 하고 하나님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그 옛 성품이 여러분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아주 작아서 거의 없는 것과 같아질 수도 있고 이때의 고백이 내 안에 사는 이 그리스도시니 나의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라고 하는 그런 고백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이 은혜생활 안하고 내버려 두어서 옛사람의 성품이 한없이 강해졌을 때는 어떤 고백이 나오느냐 하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에서 구하리오.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은 나에게 있으나 실제로 내안에 있는 것은 악이로다.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 나오는 그 고백은 학자들 가운데 논란이 많고 많은 학자들이 그것을 중생한 사람이 아니라 회심하려고 막 방황하고 있는 사도 바울 자신이 자연인의 상태의 고백이라고 하는데 그건 해석이 틀린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을 비롯해서 많은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그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주 분명한 사도바울자신이 그런 위대한 사도였지만 자신 속에 죄가 성하고 그 죄가 번성해서 어떻게 저항할 수 없는 그런 강한 힘으로 자신에게 밀려오는 것을 경험한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어떤 죄에 대한 현실적인 싸움이 그런 위대한 사도들에게도 있었으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구원파 들이 아주 놀랍게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구원파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여기 구원받은 사람들 거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교회를 안다니면 안다녀도 반드시 구원파로 돌아옵니다. 충청도 쪽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모여서 열린 교회 설교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듣고 내린 중요한 결론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설교하는 목사는 구원받은 것 같다.” 그 커트라인을 통과 했으니 얼마나 고마워요? 그리고 죄와 은혜의 지배 설교를 들으면서 빛이 들어오는 충격을 받기 시작했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것을 많이 알아도 문제가 되지만 알아야 될 것을 모르는 것도 커다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시왕이 가만히 있으면 오래 살 텐데 수은을 퍼먹고 일찍 죽어버렸습니다. 정신병자로.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육체라고 하는 것이 가리키는 것이 죄성인데 그러한 속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뒤따르는 것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들 그리스도의 괴로움들에 뒤따르는 것 그게 뭡니까?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지금 우리교회에서 우리가 당하게 되는 교회의 몸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리저리 갈등이 생기고 고통을 당하는 것 우리의 사상과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이 박해를 하고 핍박을 해서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셔야했던 그 이유와는 다른 이유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불안전함과 이 세상의 죄악 됨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고난이고 예수님은 그 고난을 당하고 죽으심으로서 구원받을 인류를 속죄하셨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효과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의 고난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남겨놓은 고난이 아니라 예수님이 당하신 괴로움들에 뒤따르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유사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자기를 잡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합기도로 태권도로 때려눕히거나 아니면 천사를 불러서 얘들 좀 정리해라 아니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실 수 있는 분이 그 정도 못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당신 자신을 위해서 그런 기적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이 어차피 홀로 당해야 하는 고난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도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 뒤를 따라가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이 나를 열 받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씩 정리해 버립니다. 하나씩 정리했다고 칩시다. 자기는 누군가를 열 받게 안합니까? 그럼 너도 정리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도 안 남습니다. 금년에는 이 사람이 나를 열 받게 했지만 작년에는 내가 저 사람을 열 받게 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부대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처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괴로움과 아주 흡사한 괴로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두 사랑으로 극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그리스도 고난 뒤에 있는 것 이라고 하는 이 표현은 아주 절묘한 표현입니다. 자 그런데 그런 것들을 당하면서 그 남은 것들에 채운다는 것은 고난을 채운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고난이 가득차면서 옛 성품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 목사님. 그러면 정말 간단하네요.” 어느 교회가 계속 문제를 많이 일어나면 직사하게 핍박을 하든지 아니면 달달볶아서 괴롭게 하면 교회가 거룩해지겠네요.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괴로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게 아니라 그 괴로움을 맞닥뜨리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 그 괴로움에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한을 남기고 원수 맺게 할 수도 있고 오히려 그것을 극복해서 자신이 성화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그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 속에서 실제화 되는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고 내일 새벽까지 해도 다 못할 얘기이지만 그러나 오늘 이 사경회를 마치면서 네 가지 핵심적인 것을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어떤 고통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속에서 자신에게 올 때, 이것을 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존 칼빈이 자신의 『기독교 강요』에서 우리에게 죄를 죽이면서 살아가는 은혜 충만한 삶을 위한 세 가지를 제시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거기에서 십자가란 하나님이 우리를 성숙시키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괴로움과 시련과 환란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다시 나누어서 절대적인 십자가와 상대적인 십자가로 구분했습니다. 절대적인 십자가는 자신의 허물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직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만 순전하게 박해를 당하는 것이 절대적인 십자가입니다. 그런가 하면 상대적인 십자가는 이것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서 그 열매를 거두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이 그를 거룩하게 성화시키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예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말년에 왕자들의 난이 일어나고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그것을 예고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즉시 심판도 하셨지만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도 하나님이 그 열매들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나서도 다윗은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다윗은 아주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가슴 저미는 시련과 고난을 다 당하면서 그는 그런 고난을 안 당했다면 결코 들어갈 수 없었을 심오한 영적인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자비,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 그리고 우주와 궁창에 까지도 가득 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상대적인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십자가를 통해서 그런 십자가를 짊어지면서 자기 안에 있는 죄 된 육체, 그 핵심은 자기를 주인삼은 삶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보다는 나를,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나의 명예를 그리고 교회의 유익과 평화보다는 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그런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총체적으로 육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뒤따르는 것들이 꽉 차게 됩니다. 괴로움이 차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차게 될 때 그것이 곧 죽음이 가득 참이 되어서 그것들이 자기중심으로 살려는 자아를 허무는 것입니다.
A.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
어떤 방식으로 허무느냐면 첫 번째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신자들이 믿을 때에 자기 안에 가득 찬 마음의 괴로움들이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육신의 본성을 허물어뜨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사 전체를 통틀고 우리가 여기를 떠나서 어디에 가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영적인 그리스도의 예수이신 머리에 붙어있는 한 몸이라고 하는 사실은 공간의 이동이나 위치의 이동으로 변화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시편기자가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기 거할지라도 거기서 주의 의로운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 밖에서 일어나는 일 이게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우리는 그리스도예수의 몸의 일부로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자신이 깨어집니다. 자기가 깨어짐으로서 육체의 성품들이 죽고 신령한 성품들이 북돋아집니다. 그게 우리가 죄 죽임의 교리 은혜 살리기 교리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교회 안에서만 국한된 문제라 그러면 교회를 섬기고 교회에 봉사하다가 만난 괴로운 일들만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깨어진 사람들이어만 그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아닙니다.
정말 가난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인이 전세를 올려달라고 해서 오갈 데가 없습니다. 사업을 하다 파산하게 됩니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잘리게 된 겁니다. 어느 날 병원에 갔더니 덜컥 의사가 암 3기라고 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그런 괴로움을 안고 교회에 나와서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주님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간절히 부르짖으니까 자기가 하나님 떠나서 자기 맘대로 살았던 옛날 일들이 다 생각나서 눈물로 회개하면서 내가 비록 암 3기지만 내 1년을 살아도 하나님 사랑받으며 살고 싶습니다. 하고 눈물 뿌립니다. 자기가 암 걸린 것이 교회하고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교회 일하다가 암 걸린 것도 아닙니다. 바깥에 나가서 놀다가 암에 걸렸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무슨 이유에서든 그것을 붙들고 기도하고 씨름하다가 이 사람이 새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전에 붙어서 아주 굉장히 안 좋은 상태였던 사람이 아주 좋은 상태가 되어서 주위에 있는 세포에 생명을 공급해주는 도구가 됩니다. 상담이다 뭐다 그래서 만나면 기를 한없이 빨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두 시간 상담하다 보면 진이 말라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태가 안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힘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 사람 만나서 잠시 차를 마시고 이야기 하는데 확 하고 은혜가 밀려오면서 ‘아 내가 정말 주님 뜻대로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전자 이었던 사람이 그런 은혜를 받고 후자의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고난이 어디서 무슨 일로 생긴 것인가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어떤 믿음으로 그것을 반응해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면서 수없는 다양한 일들을 만납니다. 그중에는 우리가 정말 기뻐하고 좋아하는 일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도 좋아하는 것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가 조상들이 얘기 하는 말이 귀인이 나타나서 우리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뭔가 전달하는 축복의 통로 도구가 있다 그럽니다.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을 전달해주는 사람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잊혀 집니다. 그리고 항상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운이 좋아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복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말이 은혜는 흐르는 물에 새긴답니다. ‘아이고 누구 고마워.’ 하며 물위에 글씨를 썼습니다. 그런데 끝나기 전에 물이 흘러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안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자기 잘나서 그렇다고 했다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아 내가 못나서 그렇지. 내가 나빠서 그렇지.’ 그래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는 하나도 생각 안 나고 전달해준 누군가가 있는 겁니다. 자신에게 불행과 괴로운 일들이 일어나게 해준 누군가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 좋을 때 예수님에게 꽂혔던 시선처럼 그 사람에 꽂히는 겁니다. 그리고 저 인간 그리고 화살처럼 꽉 꽂히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내가 행복하려면 저 인간을 제거하든지 그 능력이 모자라면 내가 스스로를 제거 해야지 거기에서 자살과 살인이 나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게 뭡니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안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자세가 필요하냐면 이미 발생한 일은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해하는 성숙한 지성을 가져야 됩니다.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평한 누구나 보도록 공적으로 공표한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섭리는 모릅니다. 다 펼쳐져봐야 아는데 이 펼쳐지는 것은 접힌 것은 하나님의 작정이고 이 작정이 펼쳐지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 합니다. 그 시간과 공간이 펼쳐지면서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때로는 굉장히 많은 시간이 흘러야지만 겨우 알게 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죽은 후에가 되어야지만 겨우 그 뜻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이 이해하게 되는 경우도 나타납니다. 그것이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행사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 그럽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감춰 있는 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나를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정도까지 나를 진실하게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내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가장 좋게 인도하시리라는 것, 혹은 그 결과가 지금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내가 원하는 것이 옳지 않았기 때문에 더 옳은 것으로 하나님이 나를 데려 가실 거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과 발생한 일들이 선해 보이지는 않지만, 왜요? 괴로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남이 괴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비극적인 영화를 봅니다. 어떻게 보면 해피엔딩은 가볍고 뭔가 눈물이 흐르고 뭔가 아쉬움이 남아야 깊이가 있어 보입니다. 남의 것을 볼 때는 그게 아름답지만 그것을 비장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다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이 나쁜 일도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더 좋은 곳으로 이러한 일을 당하지 않았다면 내가 나쁘게 되었을 나를 더 좋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시는구나. 그러나 이 말을 들으면서 또 잘못 적용하면 안 됩니다. 누군가를 많이 괴롭히면서 “봐 저 사람이 나 때문에 얼마나 기도를 많이해. 저 사람이 나 때문에 얼마나 겸손해졌어.”
지금은 돌아가신 목사님 한분이 계신데 정말 신앙이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32살의 나이에 300명 모이는 교회에 가서 열심히 목회하셔서 40도 되기 전에 변두리인데도 한 천명이상 교인이 모였습니다. 정말 성도들이 너무 좋아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여튼 회심안한 동생이 있었는데 6개월에 한 번씩 나타나서 돈 달라고 발칵 뒤집어놓는 겁니다. 지역교회 이니까 교회가 옛날 주택가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는데 이집 저집 창문을 부시고 술 먹고 행패를 부리고 다니는 겁니다. 동네사람들이 나와서 말리면 목사님이 너무 괴로워서 숨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식들아 나를 무시하지 마 내가 우리 형을 겸손하게 하는 가시야’ 그러나 선이라고 하는 것은 의도 되어야지만 선입니다. 그 사람은 정말 형을 겸손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오랫동안 눈물과 금식으로 기도한 끝에 행패를 부리기로 작정한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상 받을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제공한 나쁜 것들을 사용해서 선하게 바꿔주시는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사람과 환경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를 바라보면서 오늘 내게 왜 이러한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완전한 사람이 아니고 교회도 완전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고통을 통해서 나를 온전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교회를 순전하게 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환경들을 해석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그 속에서 하나님께 반항하고 원망하고 사람들과 투쟁하고 악을 악으로 갚고 이런 것은 못하게 하지만 이러한 믿음이 곧 우리에게 사랑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B. 십자가 고난을 묵상함
두 번째는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고난당할 때에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것, 그리고 히브리서 12장에 예수를 바라보자 것, 그리고 죄인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참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생각하라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나의 죄 때문이든지 내가 순전하게 당하는 절대적인 십자가든지 교회 안에서든지 만났던지 바깥에서 만났던지 어째든 괴로움을 당할 때 그 괴로움을 당하면서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육신 안에 가득 차오르고 있는 이 채워진 고난들이 죽음의 채움이 되어서 자신을 주인 삼으면서 살고자 하는 자신의 정욕적인 성향을 죽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 얘기는 자기가 잘못하고 당하는 이 고난을 예수님처럼 순전하게 어린양으로 고통 받는다는 생각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이 고난을 당하고 그래서 이 채워진 고난이 나를 주인삼은 정욕의 정신을 계속 파괴할 때 내가 고통을 당하는데 내가 고통을 느낄 정도로 내 안에서 엄연하게 살아있는 이 죄와 이 불순종 때문에 좋으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묵상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머리에 있는 생각이 깔때기를 타고 마음속에 부어지는 것이 묵상입니다. 머리에 에이라는 생각이 있고 마음에 비라는 생각이 있으면 에이를 따라갑니까? 비를 따라갑니까? 비를 따라갑니다. 왜냐하면 행동의 공장은 마음입니다. 마음에 무슨 생각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머리에 아무리 선한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마음속에 악한 마음이 가득차 있으면 선을 따라가지 않고 악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그것이 내려와야 합니다. 묵상을 통해서 그러면서 생각하는 겁니다. 바로 내 안에서 죽기 싫어하는 이 모든 하나님을 대항하는 성품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이유였구나. 라는 사실을 깨다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불순종과 악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얼마나 불안전하게 했는지 고통스럽게 했는지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겪는 이 고통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투사시킴으로서 믿음으로 예수죽음의 의미를 자신의 삶속에 적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대부분의 사람들 속에서 열렬한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C. 성령으로 육심을 죽임
그런 열렬한 기도로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아프게 했던 자신을 정죄하게 되고 급기야는 성령으로서 그러한 죄의 성향에 대한 직접적인 죽음의 공격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좀 끔직한 이야기지만 예를 들어봅시다. 사람을 죽이는 광경을 묘사하면 너무 끔찍하니까 어느 날 여러분이 캠핑을 갔습니다. 큰 텐트를 치고 잠을 자는데 뭔가 물컹물컹한 것이 느껴집니다. 길이가 3미터쯤 되고 굵기가 30센티쯤 되는 큰 뱀이 옆에 함께 누워서 있는 겁니다. 그리고 옆에는 아이들이 자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쫒아낼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뱀의 긴 3~4미터쯤 되는 그 뱀의 어디를 찔러도 죽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딱 보니까 삼각형으로 머리가 있는 겁니다. 그 머리위에 딱 한가운데 오백 원짜리 동전만한 크기가 겨냥이 되는데 골수입니다. 거기를 한번 무엇인가로 꽉 찌르면 짹 소리도 못하고 죽을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잠자는 척하면서 손을 움직이는데 마침 손에 뭐가 잡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뾰족하고 날카로운 독일제 칼입니다. 국산 칼은 휘잖아요. 쌍둥이 칼입니다. 꽤 큽니다. 과도가 아니라 부엌칼입니다. 그런데 푸줏간에서 쓰는 칼이 아니고 뾰족한 칼입니다. 두 번의 기회도 없을 거 같습니다. 한번만 그 골수에 박으면 그래서 텐트아래 땅에다 꽂아버리면 끝날 것 같았습니다. 딱 집었습니다. 그리고 힘껏 쳤습니다. 그런데 정수리에서 살짝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찍혔습니다. 머리가 이쪽 귀퉁이가 찢겨나갔습니다. 이 뱀이 미친 듯이 날뛰는 것입니다. 그 때에 머리는 꽉 잡았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눈을 감고 정신없이 피를 튀기면서 그 머리를 짓이기지 않겠습니까?
기도 속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게 바로 성령으로 육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너희가 영으로 육신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하고 나옵니다. 행실을 죽인다는 의미가 행동 하나하나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뿌리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거기서 열렬한 기도가 나오게 되고 믿음으로 예수죽음의 의미를 적용하면서 열렬한 기도 속에서 자기를 정죄하고 죽음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것을 바로 성령으로 육신을 죽이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 마음속에서는 제가 성화의 기도 속에서 이야기 했듯이 피의 펌프질이 되는 것입니다. 피를 펌프질 하듯이 자신의 기도 속에서 막 퍼 올리는 간절한 기도가 나오면서 그것을 대적하며 싸울 수 있는 용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병든 지체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하는 육신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힘이 그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뱀이 완전히 죽습니다. 저녁때 벗겨서 바비큐를 해먹든지 말든지 나중 문제고 난 안 먹어 봤는데 그렇게 맛있답니다. 중국에 가면 아예 뷔페에 올라온답니다. 어쨌든 그렇게 죽이는 겁니다.
D.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
그렇게 완전히 가득 차오른 고난으로 말미암아서 육신의 정이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 그 때 마지막 단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영적인 체험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은 그 속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죄 된 육체가 아닌 하늘의 새 성품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영적인 죽음을 경험하면서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이 때 예수그리스도와의 깊은 사랑의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착한 마음이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확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그리스도에게로 먼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원리적인 연합이 있고 실제적인 연합이 있는데 원리적인 연합은 예수 믿으므로 서 연합이 되는 것인데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그 연합은 실제적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혼했다고 해서 모두 불같이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랑하면 아주 더 연합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고 나서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교회를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때에 그리스도 마음으로 교회를 바라보면 거기에는 자신의 이기심이 대부분 파쇠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고백을 하게 되냐면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하느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만이 아니라 교회 바깥에까지 갑니다. 그래서 내 골육지친 중 몇이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예수그리스도께서 끊어져 저주를 받을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그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교회를 향하는 사랑으로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도들의 교회에 대한 사랑은 심미적인 사랑이 있고 성향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딱 나눠지는 것이 아니지만 어느 정도 구분이 됩니다. 심미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교회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사랑입니다. 교회에 와서 영적인 아름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야, 성도들이 정말 좋은 신앙을 갖고 있구나.’ 그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성도들의 영혼이 아름답구나.’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행실이 참 곱구나.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 사랑의 정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 보다 더 훌륭한 사랑은 성향적인 사랑입니다. 교회마다 그런 영적인 아름다움을 모두 탁월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교만에 빠질 수 있냐면 ‘아 우리교회는 영적인 아름다움이 정말 많아, 그렇게 생각하고 우월감을 느끼는 겁니다. 가끔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분이 열린 교회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이야기가 들리는데 괜찮기도 하지만 걱정도 많이 됩니다. 뭔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교회를 사랑하고 하는 것은 훌륭한데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교만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커다란 누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지식이 없다고 얕잡아 보고 교회가 작다고 얕잡아 보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심미적인 사랑보다 더 탁월한 것은 성향적 사랑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어떤 아름다운 것을 보았기 때문에 생기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이 안에 교회를 향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매우 적은데도 그 안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하도록 만듭니다. 자식가진 모든 부모들이 학교 와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선생님 우리 애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합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면 그게 좋게 해석을 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보면 진짜 훌륭한 사랑은 예배가 그렇게 훌륭하지 않은데도 성도들이아름다운 영혼이 아닌데도 교회에서 끊임없이 분쟁과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들을 몸으로 여전히 붙들고 계시는 머리이시 그리스도 그분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생명에 그 교회도 참여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가슴이 설레고 뛰고 감사해서 그래서 그 안에서 그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그리스도교회를 향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리론적으로 보면 성령 충만하고 성도들이 서로 덕스러운 생활을 하는 교회의 머리가 누구십니까? 그리스도입니다. 개념이 없고 싸우고 막 찢어지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일어나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그 교회 머리는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가 이 상태에 있든지 저 상태에 있든지 상관없이 모두 그리스도가 머리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늘 하신 던 습관 있었는데 동역 자들하고 길을 지나가도 저 멀리 교회가 보이면 우리 저 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교회가 나오면 마차를 멈추고 우리 저 교회를 위해기도 합시다. 그러셨답니다. 그게 진정한 예수님 사랑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은혜롭기 때문에 그 은혜로운 교회로 옮긴다. 이해가 되는 측면은 있지만 더 좋은 것은 은혜가 좀 없어도 그것을 견디면서 그 교회를 잘 섬겨서 그래서 은혜로운 교회로 만드는 것이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더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그리스도를 붙들고 생명적인 연합을 이룰 수 있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IV.적용과 결론
자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여기에서 육체의 고난을 채운다. 라고 하는 이것은 밖에서 고난을 들이 붓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자신을 주인삼은 삶을 살려는 죄성 안에 그리스도 고난에 뒤에 남은 것들을 가득 채워서 자기를 주인삼은 주권적인 삶을 폐기하고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 연합 되는 것 그리스도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신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아파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면서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이 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죽음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면서 죄에 대해 죽고 그 부활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면서 의에 대해서 살고 그 사랑으로 연합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신자가 하나님 앞에 살아야할 삶인 것입니다.
교회의 소명과 일치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5)
I. 본문해설
하나님의 형상이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치던 사도는 갑자기 24절에서 자신에 관한 개인적인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그 고백은 하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일꾼으로 세우셨다는 것이고, 자신이 일꾼이 된 것은 우연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직 신앙이 깊어지지 않았을 때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월이 더 흐른 후에 신앙이 깊어지면서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도가 된 것이 자신의 어머니가 자기를 잉태한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신앙이 깊어지자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만세전에 하나님이 자기를 택하여 당신의 일꾼을 삼으신 계획을 따른 것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신의 소명은 하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고 그들을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하시려는 그분의 우주적인 경륜 안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는 자신이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II.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하심
그러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성경 구절을 오랫동안 눈여겨보았고 공부를 했는데 이 번역은 바람직한 번역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희랍어 성경에서 이 부분을 직접 번역해보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는 사뭇 다른 번역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성경 본문을 보시면서 제가 읽어드리는 번역과 우리말 성경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시고 표시를 해두신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정확한 번역은 이것입니다. 25절입니다. “그것에 대해 나는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한 일꾼이 되었는데 그 경륜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너희 속으로 나에게 주신 것이다.” 이것이 제가 판단하기에는 25절의 정확한 번역입니다.
A. 일꾼으로 부르심
이것이 어떻게 다른지는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사도 바울의 고백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자기를 일꾼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꾼’이라는 단어는 ‘디아코니아’(διακονια)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원래 ‘디아코네이 트라페자이스’라고 해서 ‘식탁을 차리다’라는 말과도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디아코니아’는 봉사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저 누군가를 위한 섬김을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대게 종들이 주인을 위해 하는 일이 디아코니아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사도로서의 권위나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로 부름 받은 목회자의 존귀한 직책을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문맥은 바울과 골로새 교인 모두를 포함하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하나의 몸속에서 자신의 부름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나오는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교회론과 연관 지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로 목사로 선지자로 교사로 여러 직분으로 부름을 받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권위와 모든 것에 있어서 높낮이가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 있는 하나의 몸으로서 교회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이바지하는 봉사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진 사도와 모든 신자들이 함께 접붙여진 은혜 안에서 소명을 발견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모든 골로새 교회 교인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졌다는 면에서 동등하게 지체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신이 교회의 몸을 이루며 어떤 소명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를 자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신자가 된 것은 개인적인 일이고, 나는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충분하고, 내가 원하고 교회가 필요로 하면 어떤 특별한 일을 부여받을 수 있고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동의하든지 동의하지 않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운명적으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하나의 몸이 되었고,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을 때 모든 우주적인 교회도 여러분과 함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성화의 요구도 여러분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화되지 못해서 조잡한 성격을 가질 때 결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손해를 보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세상에서 욕을 먹게 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여러 가지 고민이 있어서 한동안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래서 어느 도시 한 구석에서 행하는 방탕한 행동이나 무신론적인 행위조차도 결국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교회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무위도식하는 삶을 살아가면 최대의 피해자는 교회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영혼이 됩니다. 신자가 무위도식하는 삶을 사는 것은 자신의 구원이 어떤지를 모르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의 교회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고 그 안에서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 대부분은 사경회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사경회 마지막 날 이 문제에 관한 결정적인 선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말씀을 못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예전의 삶을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를 듣고 안 듣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이지만 하나님은 이미 가르쳐 주셨다고 하시며 여러분을 다루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개념 없는 행동을 하고 성화되지 않은 조잡한 인격으로 교회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할 때 교회는 피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지 속에서 행했던, 알고 그렇게 행했던 결과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잘못한 것입니다. 무지라는 것은 여러분이 그것 때문에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지 아니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는 악입니다. 무지를 자랑하는 것은 악 위에다가 교만을 더하는 것이고 그것을 확장하면 결국은 배 째라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항상 무지를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 죄송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불러 살게 하셨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몸 안에서 하나님이 남에게 주셔서 내가 거기 참여하도록 하신 소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나에게 주셔서 교회가 거기에 참여하게 하신 나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주신 소명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며, 그것에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고, 주님 앞에 중심을 드리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일꾼으로 부르셨다는데 무슨 일꾼인지를 스스로 자문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교회의 몸을 온전하게 하고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일꾼이 되었습니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고유한 부르심이라고 하는 그 무엇이 있느냐고 여러분에게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일꾼으로 자처하며 교회 안에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이 속한 그리스도의 몸을 티끌만큼이라도 온전하게 하고, 교회의 근심과 걱정을 면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작정되었지만 아직은 구원이 실현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사랑으로 이바지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데 보탬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구원해주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일꾼에 대한 자각이 생기기까지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절반만 얻은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행복할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모두는 목회자와 함께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B. 신적경륜을 따름
사도는 일꾼으로 부름 받은 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따른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라고 그랬는데 이것은 오역입니다. 희랍어 성경에 보면 ‘카타 텐 오이코노미안 투 데우’(κατὰ τὴν οἰκονομίαν τοῦ θεοῦ)라고 나오는데 “하나님의 그 경륜을 따라” 혹은 “하나님의 그 경륜에 맞추어서”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라고 하는 단어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이코노미(economy), ‘경제’라는 단어가 나온 어원이 됩니다. 원래 이 말은 ‘오이코스’(oikos), ‘노모스’(nomos)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오이코스’는 ‘집’이라는 뜻이고, ‘노모스’는 ‘법’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네모’라는 ‘규율하다, 다스리다’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입니다.
오이코노미아라는 개념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던 일상적인 단어였습니다. 성경에 쓰여진 로마 시대에는 가정의 경제권을 남성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가정에서 남성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기 가정에서 오이코노미아를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의 질서를 세우고, 그 질서 안에서 가정이 로마라는 국가의 번영과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기능을 하는 가정을 꾸리는 것이 가장의 가장 중요한 직무였습니다. 가장이 바깥에서 일을 보는 동안에 아내는 남편의 뜻을 따라서 가정이 본래의 세워진 의도를 따라서 적합한 가정이 되도록 인내와 헌신으로 자녀를 가르치고 양육하고 살림살이를 꾸려가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의 문맥에서 보면 여자의 활동 무대는 언제나 가정에 국한 되었고, 울타리 밖을 뛰어나가서 무엇인가 사회적인 의견을 표출하거나 가정에 있는 일들을 발설하거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의견을 내놓는 것은 남편의 커다란 수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저는 이러한 여성관을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이코노미야’라는 말이 생기게 된 유래를 설명하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오이코노미야’라는 말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을 때는 하나님이 이 온 세계 전체를 당신의 집이라고 생각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집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다스림, 계획, 돌봄, 이것을 모두 함께 아우를 때 그것을 ‘오이코노미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이코노미야’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의 용례가 나옵니다. 첫째는 ‘청지기직’이라는 번역이 가능합니다. 누가복음 16장 2절에 보면 이 ‘오이코노미야’라는 단어가 청지기직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많은 경우 에베소서 3장 9절 같은 성경을 보면 이것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을 때는 이것이 가정의 경제, 혹은 청지기직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경륜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희랍어와 히브리어 성경을 각기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번역된 모든 성경 가운데 가장 탁월한 번역은 1611년에 출간된 킹 제임스 버전 초판 영어 성경입니다. 제가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제가 한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공부할 때 옆에 28개의 번역판을 놓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약 2년 정도의 꽤 긴 시간 동안 28개의 번역들을 원어 성경과 낱낱이 비교하면서 텍스트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66권을 시간상 모두 읽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 골고루 읽어내려 갔습니다. 원어 성경을 읽은 사람으로서 정확한 평가는 번역의 정확함에서 1611년에 출간된 킹 제임스 초판을 이길 번역이 없다는 것입니다. 킹 제임스 버전 초판은 번역이 꽤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스운 이야기로 영문학 교수가 이사야서 번역을 잘 못 읽는다고 말할 정도로 어려운 번역입니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원문의 뜻을 반영을 한 최고의 번역입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킹 제임스 버전 초판에서는 ‘오이코노미야’를 'stewardship', 청지기직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dispensation'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것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경륜을 가리킵니다.
III. 교회를 세우신 경륜
A. 하나님의 말씀을 이룸
하나님과 관련해서 ‘오이코노미야’라고 하는 이 ‘경륜’은 거의 전부 단수로 사용이 되는데 ‘경륜’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한마디로 요약하면 경륜은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당신의 영광을 이 세계에 충만하게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더 짧은 말로 경륜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그것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그것을 위해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의 개별적이고 특별한 경륜을 주셔서 그를 사도로 세우셨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기 위함이었다는 뜻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차고 다니는 시계 가운데 속이 훤하게 들여다보여서 부속품이 다 보이는 시계가 있습니다. 그 시계 속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부속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직도 시계는 정밀과학에 속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김정일 씨가 차고 다니던 시계가 24억짜리였다고 합니다. 아주 정밀하게 만들어져서 명품의 반열에 들게 됩니다. 시계를 보면 눈에 띄는 것이 수많은 톱니바퀴입니다. 어떤 톱니바퀴는 좌측으로 어떤 톱니바퀴는 우측으로 돕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자 운동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좌에서 우로, 좌에서 우로 계속 움직입니다. 어떤 톱니바퀴는 좌측으로 어떤 톱니바퀴는 우측으로 또 어떤 것들은 진자 운동을 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각기 개별적으로 작동하지만 최종적으로 시계를 만든 목적인 시간을 가리키는 일에 이바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사람에게 어떤 ‘디아코노이아’를 주십니다. 봉사자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부름은 저 사람의 부름과 종류가 다를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 있습니다. 요새 저의 기억력이 자꾸 희미해집니다.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몇 달 전에 읽었는데 다시 펼쳐놓고 보면 ‘누가 이렇게 줄을 쳤지?’ 그래서 날로 더욱 새롭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하룻밤에 영어 단어를 50개씩 외웠습니다. 한참 기억력이 생생하고 그럴 수밖에 없도록 강요받았을 때는 하룻밤에 라틴어 단어 200개를 외웠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날 150개까지는 거의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은 날로 더욱 새롭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노인네가 되고 나면 갑갑한 게 만나면 한 이야기 또 하고 한 이야기 또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사람은 날마다 그게 새롭습니다. 그래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요새 마음이 급한 것은 사람이라는 게 치매가 올 수도 있잖아요. 실제로 의사가 조심하라고 경고를 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린치라고 하는 학자는 “기억의 저편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신세가 될 텐데 그때는 내가 글들을 쓸 수 없을 것이고 이 안에 들어있는 것도 꺼낼 수가 없을 텐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라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혼자서 막 눈물이 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늙는 것이 안타깝거나 서러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사라지고 우주는 또 다른 것이 생성됨으로써 아름다워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글로 써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도록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는데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뿐만 아니라 기억력이 자꾸 사라져갈 때 오늘 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오늘만 내 것이고 내일은 내 것이 아니라는 다급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 기억을 의존하지 않고 기록해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앞으로 무슨 책을 쓸 계획이냐고 물어서 내가 눈을 감기 전에 꼭 쓰고 싶은 책이 3만 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300페이지짜리 책 100권입니다. 그것을 쓰다보면 또 다른 것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이 자꾸 희미해집니다. 그런 쪽으로 계속 생각한 이유는 내가 그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글 쓰는 일이 즐겁지 않냐고 하는데 소명은 즐거움에 의해서 입증이 됩니다. 헤르만 바빙크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소명은 재능에 의해서 입증된다.” 설교를 계속 해봐도 재능이 없으면 목회의 소명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소명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어떻게 이것을 이루면서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지만 어떤 사람은 선교를 가지고 고민합니다. 노숙자를 위해서 고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시계 속에 들어가 있는 톱니바퀴 같습니다. 상관없이 각기 다르게 움직이는 것 같아도 모든 것들이 연합을 이루어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의 구실을 하는 것처럼 그러한 하나의 목적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신앙을 갖게 되면 나를 성도로 택하신 하나님의 작은 경륜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자각이 반드시 생깁니다. 이 자각이 생기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무위도식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위도식하면 교회가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피해자가 됩니다. 마치 헤어지고 싶은데 자식 때문에 못 헤어지고 용기가 없어서 황혼 이혼조차 못하고 사는 부부같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다메섹에서 나를 만나주신 예수님이 나를 사도로 부르시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나는 지금 이 복음을 전하다가 옥 속에 외롭게 갇혔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 나에게 주신 경륜을 따라서 된 일이다.”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경륜을 무엇일까요?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로고스’라는 희랍어 단어에는 ‘말씀’이라는 뜻도 있지만 ‘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하나님의 신적인 경륜과 관련된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일들은 하나님에 의해 말씀으로 선포되었고, 하나님의 경륜을 한 몸에 담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륜의 핵심은 바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과 구체적인 계획을 가리킵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질서 안에서 자연의 모든 세계들과도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과 일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영장다운 위엄과 영광을 인간에게 주셨고,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세상을 세우신 보다 더 큰 경륜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자연의 세계를 다스리고 함께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완전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지만 모든 아름다움과 영광이 한꺼번에 드러나서 더 이상 나타날 아름다움과 영광이 없는 세상으로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인간이 그렇게 섬기면 만물 속에 감추어졌던 아름다움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도 그 안에서 풍성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피조물들은 그 안에서 행복한 상태를 누리고 인간은 그 영광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앎으로써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깊이 발견하여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한 몸을 이루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를 지었고 이로 말미암아 제일 먼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창조세계를 창조세계답게 아름답게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끊어지자 영혼에 참다운 생명이 그쳤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인간에게 덤벼들고 반역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만물을 다스릴 인간의 지위는 만물을 두려워하며 싸우는 투쟁적인 삶을 살도록 낮아졌고, 인간의 탐욕은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되어서 사람들 사이에도 평화가 존재하기 힘든 사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회를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성취해 가기로 작정하시고 구원 계획을 인간에게 계시하셨습니다. 타락하자마자 아담에게 계시된 구원의 계시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풍성해졌고, 결국 이것은 교회의 출현으로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을 택하시고 한 가정을 만드신 후에 한 민족을 이루어 한 나라를 세우시고 이 나라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보존하고 전파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인류가 되도록 힘쓰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오심으로써 이스라엘이 영적인 이스라엘로 전환되면서 육신적인 이스라엘이 나타내고자 했던 참다운 의미를 신약의 교회를 통해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고 그분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세계에 대한 경륜을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만드셔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삼으시고 미래에 그리스도의 교회에 이루어질 것들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고쳐지게 하셨고, 생명과 사랑과 은혜를 공급해 주셔서 그분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영적인 자원들을 내려 주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교회가 하나의 밀알처럼 이 땅에 떨어져서 마지막에는 다 썩고 사라져 교회의 껍질이 깨어지고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세상과 일치를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세상과 앞으로 오게 될 세상, 즉 창조하신 세상과 앞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질 세상 사이에 잠정적으로 있는 기관입니다. 교회가 한 알의 밀알처럼 모두 썩어져 사라지게 될 때 교회는 곧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온 인류가 함께 나누며 저주가 풀린 자연의 세계와 더불어 사랑하면서 사는 세상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경륜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신 경륜과 관련이 있고, 교회를 세우고 온전케 하시려는 경륜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완성하려는 위대한 경륜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륜의 빛 아래서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지하게 사색하고 하나님 앞에 물으며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영적인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에 행복을 규정할 때 따뜻하고 좋은 음식,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좋은 주거 환경, 좋은 의복,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생활의 여건, 건강한 신체 속에서 그 조건을 찾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로 지성에 있어서 판단 능력이 심각하게 궤멸이 되었고 모든 사고방식이 육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쪽 판단력이 부서져 버렸기 때문에 잘못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인류를 올바른 판단으로 돌려놓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수받았기 때문에 교회는 사상적인 면에서도 헌신해야 합니다.
제가 눈을 감고 죽어도 여러분은 제가 하는 이야기를 다 이해 못하겠지만 한 시대의 교회가 태어나서 미래의 세대를 향해, 자기의 세대를 향해 가진 가장 중요한 의무는 빛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무지하고 어리석은 삶의 조건을 후손들에게 남겨주면 안됩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성 중독에 빠진 40대 남성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이리저리 방황하고 다니다가 얼굴이 수심이 가득해서 우리 교회에 왔습니다. 아내도 그 사실을 다 압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미 병적인 수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통제가 안 됩니다. 우연히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서점에 가서 마음지킴이라는 책을 샀습니다. 한 번에 후루룩 읽고 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자기가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스쳐지나간 목회자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명료한 이야기를 나의 어린 시절부터 단 한 번도 가르쳐 준 적이 없습니까? 한번만 가르쳐 주었다면 내가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고는 바로 며칠 전에도 창녀와 잠자리를 하고 왔다는 이야기를 고백했습니다. 직장에 다니면서 점심시간에라도 성매매를 해야 하루를 사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한 끼의 양식은 먹으면 그 다음날 또 다른 양식을 필요로 하지만 진리의 빛으로 사람을 깨우는 것은 인생을 바뀌게 합니다. 교회가 이 일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그 빛을 즐거워하며 그 빛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륜을 이루어가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된 지체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목적에 이끌리는 삶입니다.
어느 경제학자 이야기가 유럽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일하고, 미국 사람들은 일하기 위해서 일하고, 한국 사람들은 일하기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유럽 사람들은 삶의 중심점이 자기 삶에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일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어마어마하게 돈을 벌어서 사회에 환원합니다. 나는 돈을 벌려고 했던 게 아니라 재미로 해본 거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워렌 버핏입니다. 그 사람이 내놓은 기부금이 32조원이니까 인류 역사에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일하기 위해서 삽니다. 그러다가 한 순간 과로사합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가련한 죽음입니다. 여러분은 한 번 진지하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찬양)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그렇게 발견한 새로운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경륜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답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도의 삶이고 그렇게 사는 성도 외에는 아무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목회자와 성도의 연합
그 다음으로는 목회자와 성도의 연합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고 했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도데이싼 모이 에이스 휘마스”(δοθεῖσάν μοι εἰς ὑμᾶς)라고 나옵니다. “그 경륜은 나에게 주셨다. 어떻게? 너희 속으로 주셨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 해석에 의해서 자칫하면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는데 너희를 위해 봉사하라고 하나님이 그 경륜을 주신 것이다.” 이익의 주체가 교회가 되어버립니다. 그게 아니라 희랍어 성경에는 'for you'가 아니라 정확하게 번역하면 'into you'라고 나옵니다.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목회하는 것을 통해 이익을 받는 사람이 근시안적으로 보면 성도들이지만,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성도들이 이익의 종착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경륜을 따라 목회자인 사도가 성도들 속으로 연합되어서 그들이 모두 한 몸이 되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사도와 교회에게 주신 소명을 성취해가는 연합을 의미합니다. 이런 가르침들은 우리에게 선명한 지혜를 줍니다. 목회자가 한 사람이 서 있고 “내가 이 교회의 우두머리니까 너희들은 아무 생각 없이 나만 따라와라.” 이것은 성경이 전혀 동의하지 않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어떤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으로 목회자에게 주신 경륜들을 뭉개버리는 것도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을 퍼 먹이는 것에 대해 강력한 소원을 품고 있으면 여러분은 밥퍼 교회에 등록하셨어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런 소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교회에 공통적으로 주신 소명과 목회자에게 주신 소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유익을 주고 나아가서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는 일에 이바지하도록 목회자와 성도들이 연합해서 하나의 일체를 이루면서 그 소명을 완수해 가는 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놓으신 경륜입니다.
교회마다 자기 시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헌신해야 합니다. 독재 시대에 우리 교회가 태어났다면 민주화를 위해서 상당히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투쟁하고 화염병을 던지고 무기를 만드는 것은 교회의 일은 아니지만 선지자적으로 그것을 꾸짖고 올바르게 해야 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정부가 반역의 길을 걸으면 혁명이라도 일으켜야 합니다. 그 시대마다 각기 다른 소명의 빛깔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하는 것을 인식하면서 우리 시대에 주신 소명들을 완수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경륜입니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신비적인 연합을 이루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모든 성도들끼리 연합을 이루면서 영적인 연합을 형성합니다. 목회자와 모든 성도들이 그 연합 속에서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하고 현재적으로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소명의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서로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들을 사랑 안에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서로 사랑하면서 교회 전체에게 주신 소명의 일치를 이루어가게 됩니다. 이 일치는 획일화가 아닙니다. 어떤 한 사람이 주권을 잡았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나로 만드는 획일화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히려 오케스트라와 같이 다양한 악기들이 각기 자기의 소리를 내면서도 지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휘에 맞추어 하늘과 온 땅에 울려 퍼지는 교향곡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서로 달라도 다양한 재능으로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개별적인 소명을 완수해가면서 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바지하는 경륜을 이루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 놓으신 이유이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IV.적용과 결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의 일부가 되었고, 우리 몸에 주어진 소명을 좇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이 소명을 이루어가는 헌신의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인생의 의미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회 전체를 향한 소명과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바로 그 일을 위한 소명을 발견하고,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일치를 이룸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온전하게 하고 앞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될 이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 속으로 불러주신 이유입니다. 성경은 이 일을 위해 목회자와 성도가 일치한 연합을 이루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한 몸의 연합인 동시에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완전한 마음의 일치입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일체의 분열과 분쟁 없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고상한 목적을 따라서 함께 즐거워하며 이 세상을 위해 함께 봉사해 나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에게는 찬란한 진리의 빛이 필요하고, 그 진리의 빛 앞에서 진리가 아닌 것들을 걷어내는 용기와 자기 부인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과 함께 성령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데 이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만 모든 신자들이 추루한 자기 사랑을 벗어나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며 여러분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이 위대한 경륜을 이루는데 티끌만큼이라도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성도들에게 나타난 비밀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골 1:26)
I. 본문해설
하나님은 이 세계를 향한 경륜을 가지고 계시고, 사도는 그 큰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비밀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분의 계획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바로 알지 못합니다.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비밀스런 경륜은 복음 안에 담겨져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들은 이 비밀의 경륜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갖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철두철미하게 감추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절에서는 이 경륜에 관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해 오신 바”라고 말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II. 오래 전부터 감춰짐
A. 오랜 동안 감춰짐
하나님의 경륜은 오래전부터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만세와 만대’라는 것은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것인데 희랍어 성경에 보면 ‘아이온 카이 아포 톤 게네온’(αἰώνων καὶ ἀπὸ τῶν γενεῶ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아이온’(αἰών)이라는 말은 시작부터 끝까지의 길이를 가진 장시간의 길이를 의미했습니다. 이 ‘아이온’이라는 말은 ‘영원’을 의미하기도 했으니 상당히 긴 시간의 장구한 세월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게네론’(γενεῶν)이라는 것은 영어로 'generation'인데 부모가 자식을 낳고 자식이 다시 그 자식을 낳는 세대들의 계승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시대들과 세대들로부터’라고 번역을 하면 좋을 것입니다. 장구한 시대들은 수많은 세대를 품고 있고 하나님의 세계를 향한 경륜은 영원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비로소 그 경륜을 시작하신 것이 아닙니다. 경륜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모습을 갖추고 드러난 것은 창조 이후이지만 이 세계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은 그 경륜을 이미 당신의 지성 안에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경륜이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희랍어 성경에 보면 현재 완료 분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언제부터 감추어져 있었는데 그것이 후에도 계속 비밀로 간직되어 왔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은 비록 타락했지만 모든 인류가 짐승과 같은 인생을 살아갔던 것은 아닙니다. 소수의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많은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인류 역사에서 계속해 왔습니다. 중국의 제자백가들의 시대처럼 서양 철학사에서 탁월한 철학자들이 이러한 사변에 몰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주전 5세기에서 3세기에 살던 그리스 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짧은 기간 동안 인류가 고민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주제들을 떠올리며 첨작했고, 인류 역사에 지혜의 빛을 남겨주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을 흔히 천재 burst 현상이라고 하는데 어느 시대에나 천재가 균등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한 시대에 예술적인 천재나 철학적인 천재들이 분출하듯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가리킵니다. 천재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놀랍게도 그들 중에는 자살한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런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와 인류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묻고, 인생을 어디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지만 엄청난 사변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정답에 접근했다는 의미와는 달랐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의 의미는 결코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가운데 발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곧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 세계의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고 누군가 이것을 만든 창조주가 있다면 그의 의도와 관련된 질문입니다. 그렇게 영원한 존재 앞에서 의미를 물으며 살아가는 ‘내’가 나 한 사람이 아니라 무수히 많다는 사실, 그리고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목적이 우주적으로 모든 사물들의 목적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모든 관계들이 ‘테이피스트리’, 직조물처럼 함께 씨줄과 날줄처럼 짜여서 엮어지지만 ‘모든 사물들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보다 높은 통치는 무엇일까? 그 통치는 어떤 권위에서 오는 것이며 통치자는 누구이실까?’ 하는 문제는 사변적인 문제가 아니라 오늘 눈을 뜨면 하루를 살아가야 할 우리 인간의 절박한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연구하고 고민하다가 미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한 힌트를 발견했지만 그것을 총체적으로 엮어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오히려 그것을 엿보지 않은 사람보다 더 불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인간은 끊임없는 지식을 찾아 인류사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했지만 찾으면 찾을수록 인간은 끊임없는 불안과 좌절 속에서 생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기위해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지 단지 진리 때문에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안락을 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끊임없이 평안과 안락을 구하고 육체의 쾌락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쳐도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면 그들 앞에 놓인 커다란 구렁을 발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끝없이 펼쳐진 우주 공간 안에서 나라는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인가? 시간 안에서 태어났다 시간 속으로 사라져 가는 인간들은 끊임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사물들을 만납니다.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것들을 보여주지만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 갑니다. 잠세적인 것들과 끊임없이 헤어지는 아픔을 느끼면서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에 인생의 모든 의미를 걸 수 없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은 미처 생겨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플라톤은 레테의 강 이론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는 영혼의 선재설을 믿었습니다. 육체는 이 땅에 있지만 영원으로부터 영혼이 각자 지상의 세계로 내려와서 물질과 합하여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에 속한 영혼이 지상의 물질세계에 내려오기 위해서 건너는 강이 있는데 그것이 레테의 강입니다. 그 강을 헤엄쳐 건너면서 모든 영혼들은 물을 마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물이 망각의 물입니다. 그것을 벌컥벌컥 마시고 강을 건너온 사람들은 영원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바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쾌락에 몰두하고 영원에 대한 생각도 없이 감각적인 물질세계 속에서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을 아주 조금 마셨습니다. 강을 건너 육체와 결합한 다음에 육체가 보여주는 감각적인 것들을 누리며 살지만 레테의 강물을 충분히 먹고 충분한 망각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수시로 두고 온 고향이 생겨납니다. 또렷하지는 않지만 희미하게나마 생각이 나고 거기서 누렸던 진정한 영혼의 평안은 이 세상의 물질과 세상에 있는 자원들이 주는 만족과 행복과는 비교되지 않는 안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리워합니다. 그 그리움이 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B. 비밀스러운 경륜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강물을 벌컥벌컥 마셨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육신의 안목과 이생의 정욕과 자랑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위대한 경륜을 하나님이 감추시기도 했지만 사람들 스스로 욕망에 눈이 멀어서 그것을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비밀스러운 경륜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이 경륜의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져있던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토 뮈스테리온’(τὸ μυστήριον), ‘그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세계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의 비밀, 예수를 대적하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복음을 위한 일꾼이 되게 했던 바로 그 경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외롭게 하나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두 개가 짝을 이루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입니다. 두 개의 세계가 실물과 거울처럼 마주보게 하셨습니다. 천상 세계의 완전함이 지상 세계에 투영되게 하셔서 천상 세계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가 되게 하셨고, 지상 세계는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세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물들 중 인간을 유일하게 천상 세계와 교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세우셔서 천상의 아름다운 모본을 지상 세계 속에서 구현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그의 선하심을 드러내 보이는 관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창조에 있어서 인간의 지위는 탁월하였고 천사들도 차마 누리지 못하던 뛰어난 지위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 세계를 창조하셨느냐고 말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에게 세계가 필요했다면 하나님은 무언가 모자라는 분이시니까 완전하다고 말할 수가 없고, 하나님은 세계 없어도 되는 완전하신 분이라면 하나님은 쓸데없는 일을 하셨으니 그것도 하나님이 모자라시는 분이 된다고 말입니다. 쓸데없는 일을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 합니까? 좀 모자라는 사람들이 합니까? 이런 질문은 기독교 역사 이래로 수많은 이방 사상가들이 기독교를 공격할 때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10여 년 전에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발견하면서 이제까지 이 문제에 대해 든든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제 설명을 듣는 것이 훨씬 더 탁월할 것입니다.
뭉크라는 사람이 일생동안 ‘절규’라는 작품을 세 점을 그립니다. 똑같은 그림인데 칼라가 약간씩 다릅니다. 그 중 한 점이 옥션에 올라왔고 경매에서 1160억에 낙찰이 되었습니다. 저도 그 유명한 그림을 전시회에서 두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내가 발로 그려도 그 정도는 그릴 거 같은데 왜 저 그림은 1160억에 팔리고 내 그림은 안 팔릴까?’ 제가 미술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림을 보는 순간에 가슴에 와서 꽂히는 코드는 있었습니다. 실존에 대한 처절한 외로움과 두려움입니다. 현실성에 대한 두려움과 거기에서 오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절규로 표현한 것입니다. 붉은 저녁노을이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선착장에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등 뒤로 두고 도망치듯 달리면서 한 사람이 입을 크게 벌리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자연 앞에서 마주해야 하는 자신의 존재의 현(現) 사실성,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의 무시무시한 고독, 그것 때문에 몸부림치는 인간의 절규를 그려낸 것입니다. 묻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뭉크에게 ‘절규’라는 위대한 작품이 필요했을까요? 필요하지 않았다면 뭉크는 쓸데없는 일을 한 것일까요? 그래서 아무 그림도 그리지 않은 우리가 뭉크보다 더 위대한 사람들인가요? 이런 질문들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교도들의 조잡한 질문에 대한 가장 훌륭한 변증이 예술 이론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이유가 뭐냐고 할 때 예술 이론이 변증이 되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절규’라는 작품이 뭉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뭉크는 그것을 그리지 않았을 때도 뭉크였고, 그린 후에도 뭉크였고, 그리고 있는 동안에도 그림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언가 모자라는 뭉크가 아니라 뭉크였습니다. 뭉크 안에 넘치는 예술의 혼, 무한한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느끼는 현 사실성의 처절한 고독, 감당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한계에 대한 인식, 즉 위대한 예술의 혼과 철학적 직관이 그 그림을 그리도록 만들었고 절규라는 작품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난 후에도 뭉크가 자기의 작품을 의존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작품이 뭉크를 낳은 것이 아니라 뭉크가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안 그린 우리보다 그것을 그린 뭉크가 위대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필요로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 넘치는 아름다움과 사랑이 그분으로 하여금 이 세계를 창조하게 하였습니다. 창조한 세계는 당신이 의지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세계가 당신을 의지하게 함으로 당신이 붙들지 않으시면 온전할 수 없는 세상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인간의 행복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거기서 말하는 행복이 어떤 의미의 행복이냐가 그 답을 좌우합니다. 그 행복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면서 얻는 행복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beatitude', 지복의 행복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계를 지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더 큰 재앙은 지성에서 현저하게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희미한 기억만 남아있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왜 만드셨는지를 모르니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도 불명확합니다. 자기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목적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자연과 모든 인간들이 어우러져서 마지막에 창출해내야 할 진정한 존재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어떻게 더듬어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위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세계, 하나님이 그토록 유지하고 싶으셨던 세계가 어떻게 인간의 타락 때문에 만신창이가 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 세계를 창조하실 때부터 그렇게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면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위대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도전했던 인간들이 상상도 못할 방법으로, 타락해서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방식으로 당신의 창조의 목적들을 구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 세상에 베푸시는 것이었습니다.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진리는 지금보다 더 넘쳐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죄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타락하고 망가진 불행한 세계의 어두운 휘장 뒤, 밤하늘 뒤에 찬란한 별빛처럼 나타났습니다. 죄인의 마음을 녹이는 하나님의 은혜, 무지한 죄인들의 마음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어두운 지성을 찢고 들어오는 진리의 찬란한 빛과 거기에 화합하는 인간의 영혼의 아름다움, 이런 것들은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아담과 하와도 결코 맛볼 수 없었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런 놀라운 구원의 펼침은 안건아 타락하면서부터 예고되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한시적인 것이었고 촛불처럼 희미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횃불처럼 커지고 모닥불처럼 밝게 타오르기는 하였지만 세계를 모두 비추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경륜이 무엇인지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었을 때 그 나라가 어떤 나라가 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그렇지 못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 그리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어떻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보다는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아직 죽거나 부활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다가올 당신의 죽음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은 이미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역사적인 부활의 의미를 사람들에게 깨우침으로써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 문은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셨던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복음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곧 인류 역사에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궁구하고 탐구하며 알기를 원했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의 비밀이 담긴 열쇠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소피아, 곧 하나님의 지혜였고 이 지혜를 추구하는 삶이 바로 필로소피아, 철학의 삶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가 여러분에게 감격하도록 촉구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아직도 수많은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비밀로 남아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세계에 대한 경륜이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지성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적인 경륜의 비밀을 받을만한 장점과 좋은 것들이 있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탁월하게 선을 행하고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경륜을 아는 복음을 주신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무엇 때문에 우리가 뽑혔는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의 공로, 우리의 의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비밀스러운 경륜이 우리에게 드러나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세계가 무엇인지, 우리의 이웃이 왜 존재하는지를 알게 되었고, 그 모든 관계의 직조, 그 안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찰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모를 때와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모든 세계가 다가왔습니다.
(찬양)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 죽을 험한 세상이 왜 이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위대한 지성인들에게 숨겨졌던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경륜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아멘.
III. 성도들에게 나타남
A. 그의 성도들에게
이 비밀스러운 경륜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오늘 사도는 성도들에게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토이스 하기오이스 아우투’(τοῖς ἁγίοις αὐτοῦ), ‘그의 거룩한 자들에게’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거룩하게 된 자’입니다. 원래 ‘카도쉬’(v/dq)라는 말은 ‘분리한다’라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이 세상과 한 덩어리였던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경륜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의 무지한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도려내셨고 하나님께 바쳐지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수 있는 정신의 힘과 마음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와 연합이 되었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붙여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몸을 이루는 교회의 일부가 됨으로써 속된 곳에서 잘라내어져서 거룩한 곳에 덧붙여졌습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이 세상에서 도려내어짐으로써 이미 거룩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미 거룩하게 되었지만 아직은 완전히 거룩하게 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흘려보내는 진리의 피와 성령의 피가 그를 지속적으로 거룩하게 하실 것이고, 마지막 날에는 예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몸인 교회도 온전하게 하시는 작정 속에 있습니다.
한 9년 전쯤 전에 배가 고파서 요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도마가 똑바로 놓여있지 않아서 뒤뚱뒤뚱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칼질을 했는데 ‘삭’ 하는 사이에 칼로 손을 베었습니다. 잘 드는 칼에 베이면서 보니까 칼등에 마늘 쪼가리 같은 것이 탁 붙었습니다. 손에는 뼈가 보였는데 너무 순식간에 베이니까 한참동안 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병원으로 뛰어야 되나?’ 하고 생각하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한번 시술을 하자.’ 그러고 고무줄로 지혈을 해서 피가 안 나오게 하고 마늘 쪼가리처럼 칼등에 붙어 있는 것을 떼어서 소독을 한 다음에 상처 위에 접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핀셋으로 놓고 대충 놓으면 나중에 보기 싫을 테니까 지문과 주름까지 정확하게 맞춰서 놓고 밴드를 감았습니다. 그리고 매일 치료를 했습니다. 치료를 하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손을 들여다보니까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접합한 부분이 시커멓게 변색되고 있었습니다. ‘정성껏 소독을 했지만 결국은 궤사하는구나. 결국 딱지처럼 떨어져 나가고 살이 생기고 여기 움푹하고 패인 흔적을 일평생 간직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계속 치료를 했습니다. 2주쯤 지났을 때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위에 부분은 감 껍질이 말라서 벗겨지듯이 벗겨지고 있었는데 저 속에서 새살에 생겨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동안에 머리는 한 손으로 감고, 세수도 한 손으로 하고, 샤워할 때는 왼쪽을 높게 하고 샤워를 합니다. 약국에서 파는 고무로 된 것을 손가락에 끼우기도 했는데 결국은 물이 들어갔습니다. 할 수 없이 왼손을 들고 샤워를 하고 너무 불편합니다. 한 달이 지나고 상처가 붙었습니다. 그런데도 놀랍게 감각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바늘로 찔러보면 주변은 아픈데 가운데는 아프지 않습니다. ‘이것이 살이 되기는 했지만 신경은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5주나 6주 정도 되어서 밴드를 완전히 풀어버렸고, 다시 4주쯤 지났더니 신경이 그대로 살아났습니다. 지금은 완전한 손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꼬집으면 아픕니다. 칼로 베인 흔적이 경계선이 또렷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게 떨어져 나갔으면 그냥 썩어서 휴지통에서 사라졌을 살점인데 갖다 붙이니까 몸이 된 것입니다. 한두 달 동안 이 경험을 하면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대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 몸이 이렇게 아플 때에 온 몸이 이것을 위해 신경을 쓰듯이, 교회에서 한 지체가 썩어가고 궤사되어 갈 때 그렇게 사랑하고 헌신해 본 적이 있는가?’ 예수님은 쓰레기 같은 인간들, 아직은 성도답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온 몸을 동원해서 돌보기 원하신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사랑, 이 세상에서 낙인찍히고 버림받은 더러운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이 밀려왔습니다.
우리는 이미 거룩하게 되었지만 아직은 완전히 거룩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거룩하게 되어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결국은 거룩하게 되어져 가는 것만큼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온전한 몸이 되어 다른 몸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지성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는 여전히 비밀로 남아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였기 때문이고, 영적으로는 이 세상과 짝한 사람이 아니라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하나님의 교회에 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렇게 거룩하게 된 한 사람이 아니라 ‘토이스 하기오이스’, 거룩하게 된 많은 사람들에게 이 경륜의 비밀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경륜을 알게 된 사랑하는 성도들이 보이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일치를 이루며 진리와 사랑으로 연합된 가운데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아가라고 죄인이었던 여러분을 성도로 만들어 주셨고, 불신자이던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성도란 얼마나 놀라운 지위입니까? 탁월한 철학자들도 터득하지 못했던 세계의 위대한 경륜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이고, 알게 된 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무한한 자원을 공급하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한 몸의 일부로 삼으셨습니다. 칼등에 붙어서 떨어져 나가버린 쓸모없는 살점과 같은 여러분을 다시 그리스도의 몸에 붙여서 생명과 피를 보내주시며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 안에 살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B. 밝히 나타남
성경은 바로 오늘 그 성도들에게 이것이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여기에서 ‘에파네로데’(ἐφανερώθη)라고 되어 있습니다. 과거형 수동태입니다. ‘이미 과거에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밝히 드러났다. 이미 일어났고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신적인 경륜, 그것에 기초해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왜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에 관한 답을 내리게 해주는 기초적인 비밀에 관한 지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신적인 경륜을 자연 이성으로 알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향해 펼치시는 위대한 경륜들을 다가올 미래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두루마기처럼 거꾸로 접으면 하나의 점으로 수렴이 되는데, 이게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이 펼쳐진 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구약을 읽으면서 이런 비밀의 경륜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희미하게 그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심으로써 누구든지 믿음을 가지고 당신 앞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아주 명쾌하고 분명한 지식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과 비교할 때 명백해졌다는 의미이지 인간의 이성으로 그것을 깨달아 알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성이 뛰어난 사람들은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한 지식과 그 지식에 대한 지나친 확신 때문에 눈이 멀게 마련입니다. 며칠 전부터 크리스토퍼 히친스(C. Hitchens)라는 사람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입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했고 미국에서 활동한 언론인이며 사상가였습니다. 어느 앙케이트에서는 이 사람이 미국 최고의 지성인 중에서 5위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이며 유물론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없다.”라는 사상을 전파하는 일에 일생을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이름 ‘크리스토퍼’라는 의미는 ‘예수를 품은’이라는 뜻인데 예수를 품은 사람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으니 참 미묘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식도암에 걸려서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의 죽는 모습은 수많은 무신론자와 불신자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의 평소의 신념을 그대로 유지하며 너무나 평안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카페에 한 글을 소개하면서 “이게 너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짓이다.”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이 카페에 글을 올렸습니다. “히친스, 네가 식도암이 걸렸다고 하는데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 목구멍으로 네가 얼마나 하나님이 없다고 대적하고 나쁜 말을 많이 했느냐. 그래서 하나님이 네 목구멍에 암이 생기게 하신 것이다.” 히친스가 그에게 답장을 썼습니다. “내 목구멍은 사실 죄가 없다. 원래 내 목구멍으로 나오는 많은 말들은 뇌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너희 하나님은 주범인 뇌는 놔두고 종범인 목에만 암을 내리시느냐?” 그러면서 기독교가 얼마나 허구에 빠진 종교인지를 죽는 순간까지 논증하다가 생명을 다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기도를 비웃는 것입니다. “만약에 기도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너희 하나님은 기도하는 너희보다 IQ가 훨씬 떨어지시는 분이다. 너희들도 알고 있는 것을 그분께 자꾸 깨닫게 해드려야 되니까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보다 기도하는 너희들이 더 낫지 않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듣고 ‘아, 너희에게 기도 제목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하나님이라면 그분이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히친스가 교리반만 들었어도 그렇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어두운 휘장이 이 사람을 덮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데 그 휘장이 똑똑함이었습니다. 똑똑함이 이 사람의 지성에 휘장을 내리고 있으니까 어떤 복음의 빛도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10여 년 전의 일입니다. 때는 성탄절이었습니다. 성탄절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한 철학자가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 사람은 박사과정에서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고 논문을 쓰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내가 열심히 교회를 다니니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매주일 교회에 따라오는 사람이었습니다. 충청도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가족들과 함께 형제 집에 왔다가 거기서 하룻밤을 자고 가까운 우리 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왔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와서 의자에 앉는 순간 폭신하고 설교를 시작하면 잠자기 좋은 여건이었기 때문에 아주 좋았답니다. 그 전날 후배들과 함께 예수님 오신 날을 기념하여 실컷 술을 마시고 숙취가 풀리지 않은 가운데 예배에 나왔습니다. 설교가 시작되면 자리라고 마음먹고 엉덩이를 앞으로 빼고 등판에 기대고 있을 때 어느 목회자가 올라오더니 성경 본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 그런데 갑자기 어떤 커다란 충격이 오면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답니다. 아내는 자기 뒤에 있었고 자기 혼자 예배를 드리는데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 이게 뭐야? 정말 신이 있는 거야?’ 계속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예배가 끝났습니다. 아내에게 일체 말하지 않고 충청도까지 가면서 ‘도대체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집에 가서 결론을 내리기를, 전날 너무 과음해서 예민해졌기 때문에 일어난 감정적인 남용이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눈물을 쏟게 만들었던 그 시간이 생각이 나면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한번만 더 가봅시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올라갔습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데 똑같이 자기도 어쩔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건 뭐지? 그래도 삼 세 번은 해봐야지.’ 그리고 그 다음 주에도 다시 한 번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자기와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사를 와서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3년 정도 잘하다가 멀리 이사를 갔습니다. 그때 그 양반이 생각한 게 무릎을 치면서 ‘아 이거다. 체관.’ 체관(諦觀)이 뭐냐 하면 플라톤 철학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추론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가 이성으로 추론할 수 있는 세계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세계는 이성의 힘으로 다다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뭔가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면서 체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논리를 초월해서 인간의 오성으로 번쩍하면서 볼 수 있는 진리에 대한 바라봄, 직관이라고도 이야기하는데 직관 혹은 체관이 주어집니다. 인류 역사에서 철학자들이 몸부림치면서 발견하기를 원했던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는가 하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 경륜의 위대한 비밀은 언제나 인간의 지성의 크기에 의해서 탐구됨으로 발각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에 대한 사유를 하면서 영원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영원에 대한 인식은 두 가지인데, 직선적인 영원관과 원적인 영원관입니다. 원적인 영원관은 대표적으로 불교에서 가져오는 윤회사상 같은 것입니다. 상당한 통찰입니다. 어떤 화학자가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던졌습니다. “당신 살의 일부는 임진왜란 때 돌아가신 이순신 장군의 일부일 수 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 인간의 육체라는 것은 마지막에 사라지고 나면 화학기호, 원소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 원소는 다시 이 세계 안에서 결합되어서 또 다른 사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소들이 끊임없이 형체를 바꾸면서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이 우주의 삼라만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의 일부가 우리 뺨에 붙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영원관은 직선의 영원관도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세계 안에서 시간이 지속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하나님 자신은 선도 아니고 원도 아닙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이론적으로는 영원에 대해서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이 영원에 대해 아는 비결이 하나가 있습니다. 사랑하면 영원을 알게 됩니다. 신비하게도 사랑하면 영원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자신이 영원이시기 때문에 영원을 몰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영원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그리고 시간 세계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영원을 향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영원 속에서 파악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철학자들도 못한 그 개안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V. 적용과 결론
우리는 이런 놀라운 지식, 수많은 인류의 지성인들에게 감추어졌던 경륜의 비밀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불신자이던 시절입니다. 얼마나 불행했는지는 지금의 행복과 대조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세계가 창조된 의미도 모르고 인생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영원한 복락에 대해서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라질 것들을 붙들며 그것에 울고 그것에 웃고 그것과 함께 좌절을 느끼면서 허무하게 살다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가치의 혼돈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차라리 타락을 택하고 쾌락을 택하고 잠깐의 육신의 평안과 즐거움 때문에 영혼의 번민을 잊는 길을 택했습니다. 영국의 사상가 체스터턴이 말했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는 하나님을 찾는 중이다.” 정말 하나님처럼 행복하고 싶은데 그 행복에 이르는 참다운 길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쓰레기 같은 데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쾌락주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쾌락주의에 빠진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 아니고 그것을 질병이라고 생각하고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의 펼침을 위한 씨앗이고, 펼쳐진 하나님의 나라의 위대한 경륜을 접고 또 접으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됩니다. 세계와 하나님과 우주와 인간과 모든 비밀들이 그리스도 예수 한분의 인격 안에 있습니다. 그분을 아는 것은 곧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비결이고 거룩한 성도가 되는 비결이며 그것이 펼쳐진 것이 바로 우리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문을 여시고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경륜의 비밀을 알고 그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수시로 우리의 마음이 변해 세상을 향해 달음질하고 주님을 멀리 떠나려고 하지만 결국은 그 경륜을 모르고 살던 불신자 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간섭과 가족들의 간섭이 없는 자유로운 곳이었지만 거기는 돼지 우리였습니다. 쥐엄 열매조차도 먹을 수 없는 결핍으로 가득 찬 메마른 땅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긋지긋한 자유였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의 비밀이 나타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에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렇게 드러난 경륜의 비밀을 굳게 붙들고, 그 경륜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기 위해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행복을 누리면서 살 때 들풀처럼 사라질 여러분의 인생은 영원을 잇대어서 사는 영원히 죽지 않는 성도의 삶이 될 것입니다.
영광의 비밀, 그리스도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I. 본문해설
비밀이라는 것은 함부로 접근해서 아는 것이 금지된 것을 뜻합니다. 오늘 성경은 세계를 창조하시고 세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비밀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로 지각이 있는 사람들의 고민은 이것이었습니다. 이 세계는 어디로부터 왔고, 인간 존재는 무엇이며, 우주의 종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관심사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생활에 골몰하느라 종종 잊혀지기는 하였지만 쉬지 않고 인류에게 던져진 질문이었습니다. 유구한 세월동안 계속 되어온 진리에 대한 인간의 탐구, 무수한 종교의 생겨남, 철학적인 사유의 발전들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해 대답을 찾아온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에 의해서 타락한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완성하시는 위대한 경륜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비밀이었습니다. 왜 이러한 질문들이 인류 역사에서 근본적인 질문이었고, 또 기독교인들에게도 중요한 질문인가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우주적인 하나님의 계획이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적인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세계의 기원과 인간 존재의 이유, 종말에 관한 지식의 토대위에서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의미를 규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러한 세계와 역사와 인간, 종말에 관한 새로운 사상의 체계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시간에도 두터운 무지의 어두운 구름이 현대 교회 전체를 뒤엎고 있습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무지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II. 영광의 비밀을 안 사람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27절 전반절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희랍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성도들에게 이방인들 가운데 이 비밀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라고 해서 이 비밀을 충분히 안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우선 이 비밀을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안 성도들이 더욱더 그것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영광의 비밀을 안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정체성은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경륜, 즉 창조와 타락과 구속과 완성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의 비밀을 안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비밀스러운 영광의 지식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A. 비밀스런 영광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비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뜻하는 것입니다. ‘비밀의 영광’이라고 했는데 이 ‘영광’이라는 것은 현상적으로 말하면 어떤 중요성과 가치 때문에 너무나 눈 부셔서 다른 것들은 거의 가치가 없고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그 무엇이 바로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영광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예전에 주님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자기 욕심대로 살던 사람들이 어느 한 순간 돈이나 많이 벌고 권력을 손에 넣어서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그들의 지배를 받기보다는 지배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었었습니다. 그러다가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는 순간, 눈부시도록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경륜이 우리의 지성에 쏟아졌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사건 외에 다른 것들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처럼 눈부시게 느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밀스러운 영광을 아는 것이고 이렇게 비밀스러운 영광을 안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저는 34살에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20시간씩 한 주에 강의를 하고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하면서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화장실에 앉으면 한 컵씩 피가 쏟아지고 그러던 어느 가을이었습니다. 주간의 학생들이 3~4시정도 되면 수업이 끝나고 돌아가고 야간 학생들은 6시가 조금 넘어야 옵니다. 한 시간 반 정도 학교가 조용합니다. 제 교수실은 산 바로 아래에 있어서 그늘이 우거지고 새들도 노래하는 곳이었습니다. 조용히 창가에 기대어 앉아서 복음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 생애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오는 순간이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복음서만 읽기 시작했고, 많이 읽을 때는 서너 장, 조금 읽을 때는 한절을 읽으나갔습니다. 그때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성경만 펴면 하나님이 금가루를 뿌리셨습니다.” 복음서를 모두 읽고 덮은 다음에 저는 많이 분노했습니다. 네가 이제껏 배운 기독교도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가 아니었고 그 동안 내가 가르친 기독교도 참된 기독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청교도에 눈을 뜨면서 청교도의 책들을 섭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 청년 대학생들을 위한 수련회에 갔습니다. 300~400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저의 설교를 듣고 있었고 저는 지성적으로 영적으로 한창 불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설교 시간도 엄청나게 길었고 말도 엄청나게 빨랐습니다. 처음부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청년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엄마 눈에는 대학생들도 아직 어려 보이니까 둘째 날, 셋째 날에는 권사님, 집사님들이 먹을 것을 싸들고 자기 아들, 딸이 있는 수련회 장소로 올라갔습니다. 그중의 한 자매에게 엄마가 물었습니다. “얘야, 수련회에 와서 은혜 많이 받았니?” 이 자매가 허공을 쳐다보면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지금은 은혜가 문제가 아니야.” 무슨 의미일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해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은혜를 더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제가 교수실 창가에 앉아서 복음서를 읽으며 느꼈던 똑같은 것을 이 자매가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의 영광에 대한 경험입니다.
우리 인생은 많은 질문들을 가지고 있고, 바라는 바 요구사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 우리의 인생은 우울하고 슬프고 기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비우고 나면 대부분의 것들이 이래도 상관없고 저래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저는 요즘 사색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데 젊어서 목숨처럼 생각하면서 가치를 부여했던 것들 중에 많은 것들이 사실 그럴 필요가 별로 없었던 것이었다고 반성을 합니다. 여러분, 가까이에 있는 가족이나 이웃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때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어납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인생관과 다른 태도를 보일 때 부르르 떨며 마음에 분노가 일어납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대부분 후자입니다. 우리가 정말 마음에 소원을 품고 때로는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 와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기도하는 제목들도 생각을 바꾸면 그것은 응답이 되도 안 되도 상관없는 것들입니다. 그게 인생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가 우울하고 불행해지는 많은 이유는 우리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우리가 원하는바 중 대부분은 우리의 욕심이 거기에 투사된 것입니다. ‘아무렴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 그런 생각을 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15년 넘게 동일한 생각을 계속 해왔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책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어떻게 하든지 많은 책을 쓰고 죽어야 될 텐데.’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여태까지 설교한 게 원고지 400만장 정도가 녹취가 되어 있으니까 저거라도 어떻게 풀어서 내가 죽기 전에, 나 죽은 다음에도 100년 동안은 책이 나올 수 있게 만들어 놓고 죽어야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에 아프면서 수술을 하고 많은 과정들을 겪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힘닿는 대로 그렇게 해야겠지만 여러분과 함께 있든지 이다음에 여러분과 헤어지든지 저는 그 길이 저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가야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꼭 해야 되는 일인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소중한 내용들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흙더미에 덮으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면 나는 아무 상관없다.’ 그러고 보니까 아무 욕심이 없습니다. 결국 지푸라기 같은 일생의 손은 하나님에게 달려있고, 있는 지식들을 인간이 모두 습득하는 것도 아니고, 습득한 지식을 모두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기억한 지식을 모두 삶에 적용하는 것도 아니고, 적용한 모든 지식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고 나니까 마음에 자유함이 생겼습니다. 자유함 속에서 어떤 일을 하는 것과 노예 상태에서 어떤 일을 하는 것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열심히 글을 쓰는 것을 그만 두시렵니까?” 아닙니다. 지금도 세 권의 책을 동시에 집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1200페이지짜리 책을 끝냈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우리에게 욕심이 되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설명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세계에서 그분을 거역하고 그분의 생명이 끊어진 상태에 살아가고 있는 목적을 잃은 비참한 인간들을 구원하셔서 다시 당신의 생명에 잇대어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계를 향해 가지고 계신 경륜이었다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 창조와 종말의 비밀 안에서 나의 인생의 의미를 물으며 끊임없이 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 비밀스러운 영광을 안 사람들이 바로 성도들이고 하나님은 먼저 성도들이 비밀스러운 영광을 충분히 알고 그 영광의 지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B. 이방인 가운데 풍성함
성경은 이 비밀스런 영광이 오늘 이방인들 가운데 풍성해졌다고 말합니다.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희랍어 성경은 “그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알리기를 원하셨다”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민이라고 하는 강력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그분의 백성이 된다는 사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릇된 선민사상으로 말미암아 자신들 이외에 모든 인류를 쓰레기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한 민족으로 선택하신 것은 틀림이 없지만 선택하셔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지식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가지고 모든 열방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의 백성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고 거룩한 분이신지를 알게 하시는 데 선택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제일 먼저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고 그의 가정을 택하시고 마지막에는 그의 민족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이름을 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율법과 은혜를 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이스라엘로 이루어지는 왕국은 한시적인 왕국이었고, 결국은 망하게끔 되어있었습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영적인 이스라엘이 태어날 때까지 한시적으로 필요했던 한 알의 밀알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밀알의 배아가 영적 이스라엘이었고 그 배아를 잉태하기 위하여 썩는 한 알의 밀알이 육적인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이것에 동의하지 않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영적인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완성되기 위해 종자 씨로 선택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던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기록들이 상세히 보도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마지막 남긴 말씀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탄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운명하는 그 순간에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고 마태복음 27장 51절은 전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약 12평되는 성막은 삼분의 이 크기의 성소와 삼분의 일 크기의 지성소로 나뉘어져 있었고 두 공간을 구별하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이 휘장은 고운 베실로 짠 것으로 양쪽에 황소를 매달고 반대편 방향으로 채찍질해서 잡아당겨도 찢어질 수 없는 아주 튼튼한 직조물이었습니다. 성소는 모든 제사장들이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지성소는 오직 한 사람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차례만 하나님의 임재를 뵈옵는 곳이었습니다.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 제사장과 대제사장 사이의 구별이 사라졌고 제사장이면 누구든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들로 불러주셨습니다. 이제는 피 흘려 죽임 당하는 어린양의 희생 없이, 제사장의 중보 없이, 인간의 중재 없이 오직 유일하신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과를 통해 누구든지 믿는 마음으로 찢어진 휘장을 지나 그리스도께서 피를 뿌리신 핏길을 걸어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분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이방인 가운데 풍성하게 나타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서 교만하고 완고한 이스라엘이 버린 하늘나라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서 복음의 비밀을 맡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였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에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차별 없이 이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누구든지 비밀스런 영광을 보게 하셔서 그 영광의 비밀을 알고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를 가슴에 새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이 사람들은 비밀스러운 영광을 안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이 비밀을 알았으니 이러한 인생관을 따라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그 비밀, 그리스도
A. 그 비밀이신 그리스도
성경은 오늘 그 비밀이 바로 그리스도였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 비밀인 그리스도입니다. 왜 사도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지를 않고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라고 말했을까요?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골고다 언덕에 수시로 올라가서 감상적인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는 골고다 언덕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살아계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복음을 거절하고 유대교 사상을 좇아가려고 하는 어리석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고 꾸짖다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라고 말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필연적으로 세 개의 의미와 연결이 됩니다. 세계와 인간이라는 날줄, 역사라고 하는 씨줄로 짜인 직조물 위에 우리 한 사람이 놓여있고, 그 직조물 위에서 우리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으면서 살아야 울고, 웃고, 요동치는 인생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일관된 의미를 찾으며 사는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세 개의 경륜이 커다란 창고에 들어있는 물건들이라면 굳게 닫힌 창고의 문을 여는 열쇠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까지도 그러했지만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신학을 배우고 배운바 지식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시련도 오고 고통도 있지만 꾹 참고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하고, 그것을 자신들이 누릴 뿐만 아니라 선교지와 무지한 많은 교회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소명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을 따라서 저도 목사가 되었고 끊임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많은 지식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이 편지를 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나사렛의 젊은이는 메시야일 수가 없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이방인들은 쓰레기 같은 존재들이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선민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이는 복음 때문에 옥에 갇힌바 되어서 골로새 교회를 통해서 들려오는 가슴 아픈 소식들을 듣고 그 고난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사울을 바울로 바꾸어 놓았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어서 하나님의 아들일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모습으로 사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커다란 신학적인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은 것이 마땅하다면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고, 살리실 정도로 사랑하신 분이었다면 저주하셨을 리가 없다는 상반된 두 가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 순간 성령님의 역사로 캄캄한 무지의 구름으로 뒤덮였던 어두운 지성을 찢고 찬란한 빛줄기가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마음속에 마치 지성의 벼락이 떨어진 것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가 죽은 것은 예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많은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아는 지식에 눈을 뜨는 그 순간, 감당할 수 없이 눈부신 영광의 빛이 사도의 지성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깨어난 사도는 예전의 유대주의와 헬레니즘, 로마 사상으로는 미처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과 세계에 대한 비밀스러운 경륜과 자신의 인생의 존재 가치와 이스라엘의 가치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고, 골육지친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았지만 가슴이 저리도록 서러운 그리움이 된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것은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회개하고, 아들을 주시기까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십자가의 의미를 자신의 인생에 묶으며 거기에 매여 살고자 하는 진실한 경건, 여기에서 세계와 인생의 의미를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루에 한번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것이 너무나 눈 부셔서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종교적인 체험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찬양)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B. 그 소망이신 그리스도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를 ‘소망이신 그리스도’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 사도는 골로새서 1장 5절에서 골로새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성도의 소망은 예수 때문에 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살고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결코 우리에게 그런 복음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도의 소망은 죄와 슬픔이 많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늘나라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드려서라도, 자신의 모든 물질과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신의 모든 섬김과 수고를 다해서라도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를 바라며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바깥에 당신과 상관이 없이 한 단체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영적인 머리가 되셔서 온 세계의 교회들을 하나의 몸으로 삼으시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눈 형제들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셨습니다.
여러분이 열린 교회에 대해서 지나친 자부감과 동일체 의식을 갖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관양동에 있는 눈에 보이는 열린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헌금해서 다른 교회에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다른 교회의 부흥에 이바지하여야 합니다. 왜 아멘을 안 하십니까? 나는 암시적으로도 여러분에게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생각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셔서 하나의 영적인 몸을 만드셨습니다. 교회는 영광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게 해야 합니다. 이방인들 가운데 구원의 풍성함이 나타나 온 인류가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경륜을 알고 지혜롭고 행복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입니다. 교회는 고유한 목적에 헌신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의 몸의 질병 가운데 무서운 질병 중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면역 체계에 이상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있는 면역체들이 건강하고 좋은 세포를 침투해 들어온 해로운 세포로 여기고 공격해서 좋은 세포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병입니다. 그러면 건강할수록 몸이 망가집니다. 온 성도가 한 마음이 되어서 예수의 혼을 품고 한 몸인 교회로서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해 헌신해도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합니다. 그런데 다른 일 때문에 아픕니다. 교회에서 서로 공격을 합니다. 망가진 면역 체계가 건강한 세포를 해로운 병원체인줄 알고 공격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도 그런 슬픈 일들이 일어납니다.
교회에서 예수님보다 높으신 분이 없지만 더 높은 사람이 교회에 있습니다. 피 끓는 혈기로 “내버려둬. 내 마음대로 살 거야.”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교회는 권력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화형시키거나 지하실의 감옥에 넣거나 귀향을 보낼 수 있는 권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적인 생각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 혈기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교회를 아프게 하면 교회는 고유한 사명을 위해 헌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에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남겨두십니다. 예수께서 골고다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실 때 예수님은 누구도 당신 옆에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다 당신을 버릴 것을 알면서도 상처받지 않으셨고, 오히려 먼저 그들을 용서해주셨습니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예수님 홀로 지셔야 할 독점적인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교회를 참으로 교회되게 하시고, 비밀스러운 경륜을 이방에 알리는 일에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도들을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당신의 고난을 남겨 두어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그 사랑 때문에 예수의 남은 고난을 짊어지고 교회에서 잘 죽음으로써 때로는 교회가 아파도 영혼이 죽지 않도록 당신의 교회를 보양하셨던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잘 살기 이전에 먼저 잘 죽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면 예수 바깥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은 함께 죽고 예수 안에서 잘 죽고자 하는 거룩한 소망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견디기 힘든 어려운 일, 자신의 본성에 반하는 사건들이 일어날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라고 말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나는 지금도 두터운 무지의 구름에 뒤덮인 현대 교회를 바라보면서 눈물이 흐릅니다. 더욱 마음 아픈 것은 여러분 가운데도 무지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는 영광의 비밀스러운 경륜을 알고 이 사상 체계를 받아들인 사람들인데,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사상보다 무지를 더 좋아하고, 가치 있는 사상을 따라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보다는 무지를 좇아 안락한 삶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복음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일평생 다하도록 마귀 다음으로 미워해야 할 존재는 무지입니다. 무지를 미워하고 복음의 장엄함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인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천사들도 알지 못하던 이 세계에 관한 비밀스런 경륜을 알게 해주신 사람이 나입니다.”라는 고백 속에서 연단된 꿋꿋함과 성숙한 경건으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남은 고난에 참여함은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 1:28)
I. 본문해설
옥 속에 갇힌 사도 바울이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인간인 사도 바울도 고난이 기쁘고 행복했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그런 안일하고 편안한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고난의 길을 갔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사도는 이미 그리스도가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고,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도 바로 이 경륜을 위해서 일하다가 갇힌 것이었습니다.
II. 성도를 완전한 자로 세움
그러한 사도 바울이 다시 옥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고난에 참여하게 된 것은 바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성도를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완전한 자’로 번역된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라는 희랍어 단어는 원래 완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 자란, 어른이 된, 성숙한’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형용사입니다. 그래서 앞부분을 직역을 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자로 내세우기 위함이라”고 말입니다.
성도가 완전해지는 것은 영화의 상태에서의 일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모든 사람들을 부활시켜 심판의 부활과 생명의 부활에 이를 사람들을 나누시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온전한 인간이 됩니다. 다시는 죄의 영향력이나 방해가 없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의 탁월한 교통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는 불멸의 몸과 순전한 영혼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들이 완전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구되는 것이 성숙의 개념입니다.
우리는 영화의 상태의 완전해진 인간을 향해 나아가지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모두 심판하고 우리를 부활시키기 전까지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 중 하나는 우리에게 온전한 사람이 누구인지, 온전한 사람이 될 때 그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고 이웃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셨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해서 그분을 닮으려고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가 온전함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함이 성숙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성숙은 무엇에 대한 성숙일까요? 이것은 바로 지식의 성숙과 사랑의 성숙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각기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치를 이루는 하나로서 곧, 지식을 동반한 사랑, 사랑에 감화된 지식 안에서의 성숙을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너무나 많은 고난과 시련,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치기 때문에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도 아주 실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의 현실적인 생활에 필요한 구체적인 삶의 지혜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왜 창조하시고, 인간을 왜 만드시고,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와 교회, 그리스도와 우리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실제 생활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우주적인 지식들이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현실적인 지식이 된다는 것도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바입니다. 사도가 인간의 본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옥살이를 하면서도 기쁨으로 그 일에 참여한다고 현실적으로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처럼 원대한 지식, “하나님이 왜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이스라엘이 누구이고,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내 인생의 의미가 성취되는지 깨달았던 그 지식과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난을 기쁘게 당한다고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행복한 사람이 되는 요령이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행복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현실과 많이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만큼 인간의 행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책은 없습니다.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몸의 일부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행복할지를 우리가 이해한다면 그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행복하지 않은 것은 그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기와 하나님이 그를 사람으로 만드신 계획이 일치하지 않는데서 오는 불만족 때문입니다. 교회는 지식과 사랑에 있어서 온전하지 않은 미성숙한 사람들을 당신의 말씀과 사랑으로 잘 가르쳐서 개개인이 온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결국 교회 전체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성도 삼으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중요한 사명은 성도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도록 우리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지금도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치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기쁨으로 채울 수 있었던 이유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도들을 온전한 자로 세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III. 온전함을 위한 섬김
교회는 어떤 섬김을 통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무엇무엇 하게 함이니”라고 말입니다. 이 부분이 희랍어 성경에는 분사로 나와 있습니다. 희랍어에서 분사는 동시적인 행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하면서, 가르치면서, 선포하는데 이것은 “이렇게 이렇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A. 그리스도를 선포함
성도를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는데 교회가 해야 하는 첫 번째 일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전파’라고 되어 있지만 정확한 의미는 ‘공포, 선포, 공표, 선언’, 이런 뜻입니다. 즉, 누구를 설득하거나 동의를 구하고 협의하고 의논하면서 구차하게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듣고 알 수 있도록 권위 있게 선언하고 공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선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왜 창조하시고 어떻게 이끄시려고 하는지, 인간은 누구이고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로서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 세계를 향해 공중적으로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비참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모르는 무지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아야만 이 세계를 누가 창조하셨고 좋으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왜 이렇게 불행이 많은지, 이 불행은 어떻게 종식되는지, 그때까지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과 더불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의 사명이야말로 멈출 수 없는 교회의 사명이고 이 일을 위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불신 세계를 향한 공중적 선포라면, 이것이 어떻게 성도를 세우는 일에 도움이 될까요? 이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런 선포를 통하지 않고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의 회원인 성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배당에 더 이상 불신자들이 찾아오지 않고 추가적으로 교회에 회원이 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세월이 지나면서 교회는 계속 늙고 여러분이 죽고 나면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 없이는 성도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는 한때 모두 불신자였지 성도였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 보면 그리스도 예수는 이 세상에 불신자들과도 관계하시면서 교회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식구인 것처럼 끌어안고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아직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양 떼들이 있다.” 다시 말하면 아직 구원 받아서 교회의 몸의 일부가 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은 구원하실 자기의 백성들까지도 당신의 양떼로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 마음을 교회가 품어야 신자의 세계와 불신자의 세계가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대치하는 것처럼 획일적으로 세상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선교적으로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를 향한 선포는 그리스도의 교회 바깥에 불신 세계를 향해서만 외쳐질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외쳐져야 할 선포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소중하고 우리에게 귀하신 분인지를 잊고 살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불신자일 때뿐만 아니라 신자가 될 때도 누추한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던 때는 항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새로운 복음적 사실에 대해서 각성하는 일이 함께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때 은혜를 받으면서 이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잊고 살았구나 하고 회개할 때에 믿음도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 예수는 교회 밖에서 혹은 교회 안에서 쉬지 않고 선포되어야 하고, 이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도와 함께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왔고, 구한말을 겪으면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선교사들이 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기독교 사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납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을까요? 중국을 통해 들어온 실학 내지는 서학의 문물들, 천주실의(天主實義) 같은 책들이 들어오면서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선비들이 치열하게 토론을 하고 기독교 사상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상당히 많은 지성인들이 결정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잘 모르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사실 동양 사상과 유교에 쩔어있는 사람들에게 서양의 기독교 사상이라는 것은 사실은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마음을 여는 사상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주위에서 선교 초창기에 자신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예수를 믿게 된 간증을 하는 사람을 몇 사람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 중 어느 목회자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가 사대부 집안의 고고한 선비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실학사상을 접했는지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순순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선교사가 들어온 다음에도 서양 귀신이라고 욕하고 피했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베뢰아 사람처럼 아주 신사적인 분이었습니다. “그러면 한번 와서 예수쟁이들이 무슨 사상을 가졌는지 한번 이야기해보라고 그래라.” 그래서 선교사가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참 동안을 설명을 듣고 나더니 이 할아버지가 담뱃대를 내려놓고 무릎을 치면서 경탄을 하더랍니다. “내가 유학에서 다 못 배운 세상 인간이 사는 이치가 이 안에 다 있구나. 내가 믿으리이다.” 사실 그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순교자들을 냈습니다. 눈물을 펑펑 흘리고 부흥회에 가서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어두운 지성을 찢으면서 찬란한 빛이 들어올 때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지, 그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예수 복음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세상이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그리스도 예수를 전파해야할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교회는 힘을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B. 모든 사람을 권면함
두 번째는 모든 사람을 권하는 것입니다. 여기 ‘각 사람’이라고 그랬는데 이렇게 번역을 해도 됩니다. 영어로 'every man'입니다. 히브리어에 ‘판타’(πάντα)라고 나오는데 ‘모두 다’ 이런 뜻입니다. ‘누구도 빼놓지 않고 모든 사람, 사람 사람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사람 사람마다 권하고” 그런 뜻입니다. ‘권하고’라고 번역을 했는데 우리말로 마땅한 말이 없습니다. 이 희랍어 단어가 ‘누테툰테스’(νουθετοῦντες)라는 단어인데 분사입니다. ‘권하면서’ 이렇게 번역되어야 하는데 이 동사의 원형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누스’라는 명사, ‘인간의 정신 혹은 지성, 생각’ 이렇게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것에 ‘티데미’라는 동사가 더해졌습니다. ‘티데미’는 ‘어떤 물건을 제자리에 둔다, 놓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권하다’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의 원어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우리말 성경에서는 ‘훈계하다, 경고하다, 마음에 새기게 하다’ 정도로 번역되었습니다. 결국은 온전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섬김은 수시로 사람들의 정신을 제자리에 놓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교회에 나오기 전까지 일주일동안 지난주에 들은 말씀을 가슴에 품고, 성경을 묵상하고,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생활 속에 산 사람들은 정신이 조금밖에 틀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져다가 고이 두고 기도는 말씀을 들을 때 기도한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동안 수많은 세상의 사건들을 만나면서 살아갑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을 만나면 마음이 헤이해지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면 괴로워서 마음이 굳어집니다. 그 속에서 생각은 자꾸 이탈하게 됩니다. 이때 이렇게 예배에 나와서 선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그분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깨달으면서 이탈됐던 정신이 제자리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이것이 일주일에 한번이 아니라 교회 생활 속에서 목양을 통해 늘 일어날 때 우리는 점점 더 온전한 성도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15년 전에 사경회를 했는데 그때 주제가 ‘마음지킴’이었습니다. 책으로도 나왔고 인터넷에 떠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그 교리를 발견해서 설교를 했는데 참 많이 은혜를 받았고 열린 교회 시리즈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던 시리즈 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우리 신앙생활 중에서 정말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시련을 참고 고생을 하는 것도 물론 어려운 것이지만 더 어려운 것은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 참 이상한 게 있습니다. 마음이 발에게 명하여 이리 가라고 하면 가고 손보고 저것을 집으라고 하면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내 마음에게 명령하면 말을 안 듣습니다.” 마음에서 발까지의 거리가 멀겠습니까? 마음에서 마음까지의 거리가 멀겠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서 어거스틴은 답을 합니다. “내가 마음을 향해 명령하는데 마음이 듣지 않는 것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망가졌고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어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차면 왜 말을 안 듣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완전하지 않고 병들어 있기 때문에 선한 것을 마음에 명해도 마음은 그것을 실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사실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미 활동하고 있는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단 마음이 끌려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것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선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는 가게 내버려두면 좋으니까 지키고 말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안 좋은 방향으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그것을 지키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옛말에 “코 뚫지 않은 송아지를 삼부자가 감당 못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송아지가 난지 얼마 안 되면 바로 데려가서 코를 뚫어야 됩니다. 그리고 고삐를 끼워야 합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가 소를 끌고 가도 소는 잘 따라옵니다. 그 아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코가 아파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안가면 코가 아프니까 따라 가는 것입니다. 말이 고삐 한번 딱 잡아당길 때에 급브레이크를 하는 이유가 말에게 무슨 정신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입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니까 멈추는 것입니다. 한번 시골에 갔는데 이 분들이 농사짓느라고 바빠서 송아지의 코를 못 뚫었습니다. 송아지가 계속 커져서 꽤 큰 송아지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하고 아들 둘이서 송아지를 강아지처럼 목에다가 줄을 메고 가는데 이게 무엇을 먹겠다고 산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감당을 못하고 산까지 두 사람이 따라 올라갑니다.
이미 활동하고 있는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이 어떻게 작용을 하냐 하면 평평하게 고요하게 중립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도 학문적으로 보면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어쨌든 마음속에 어떤 경향이 있긴 있는데 아직 발동이 안 되었습니다. 수면처럼 고요합니다. 그때 마음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보십시오. 혼자서 어떤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통해서 생각이 떨어집니다. 생각이 떨어졌을 때 생각들이 ‘훅’ 하고 날아가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데 떨어져서 그게 계속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라고 번성하면서 속에 있는 경향성들과 만나서 힘을 갖고 어느 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게 음란물 같은 것들을 철저하게 차단해야 합니다. 청소년 사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자녀들에게 핸드폰을 사주는 것은 불결한 문화에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입니다. 특히 안드로이드 폰 같은 것은 한없는 세계로 아이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이유는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의 씨앗이 떨어져서 급속하게 자라면서 욕망을 따라 살고자 하는 아이의 경향성을 만나 일평생 자신의 힘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힘을 가지고 어느 한 방향으로 그의 인생을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마음을 지키려고 해도 그 마음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코를 뚫지 않은 상태에서 엄청난 크기의 황소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모터보트가 강변에 서있습니다. 시동을 걸기 전에 줄을 나무 하나에 단단히 묶어 놓으면 제 아무리 큰 엔진을 매달았어도 발동 걸어봐야 그 앞에서 뱅글뱅글 돌지 못 나갑니다. 그러나 일단 시동을 걸고 붕 출발하기 시작했을 때 뒤에 매달린 끈 잡으면 자신이 딸려가서 물속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결국은 우리의 인생에서 마음을 지키는 것은 너무 중요하지만 정신과 생각을 지키는 일 없이는 마음을 지키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목양이라는 것은 이탈하는 성도들의 정신을 수시로 선명한 진리의 말씀으로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이 일을 하지만 목회자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배당에 나와서 말씀의 은혜를 깊이 받고 각성하게 될 때 이탈하였던 정신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구역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배우고 성도들이 은혜로운 간증을 나누고 하면서 ‘아, 이것이 아니로구나.’ 하고 자기 생각이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런 일들을 지혜로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이 세계의 경륜과 어떻게 관계 되었는지, 그 지혜를 사람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정신을 항상 제자리에 돌아오게 하는 것, 이게 바로 목회이고 목양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 인생은 너무나 고달프고 꼬여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주와 세계, 하나님의 경륜, 이런 초월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당장 현실적으로 써 먹을 수 있는 설교나 지식들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흔히 인생이 꼬였다고 말하는데 꼬인 게 무엇입니까? 뜻대로 안 되는 것을 꼬였다고 말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실이 아닙니다. 인생은 늘 꼬이는 것입니다. 모든 게 내 뜻대로 잘되는 인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꼬였다는 것은 뜻대로 안 됐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제껏 예수를 믿으면서 살아왔을 때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셨구나. 이런 계획이 있으셔서 나를 이렇게 인도하셨구나. 정말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구나.’ 이런 것들은 대부분 꼬인 인생살이 속에서 깨달은 것이지 순풍에 돛단 듯이 가는 생활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꼬인 게 모두 꼬인 게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꼬였다는 게 무엇이냐 하면 일이 내 뜻대로 그냥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내 뜻대로 안되는데 그 의미가 무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생각이 꼬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혼란이 옵니다. 정신이 이미 제자리에서 이탈해 버렸기 때문에 진리의 빛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 할머니가 시키는 심부름 중에서 제일 싫은 일이 실 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도 시장에 가면 실패에 감아놓은 실이 있지만 그것은 비쌉니다. 그러니까 항상 타래로 된 것을 사오십니다. 타래로 된 것도 방금 공장에서 가져와서 가지런한 것은 비쌉니다. 그런데 몇 달 동안 끌고 다녀서 뒤엉클어져서 사가는 사람이 없는 것은 싸게 팝니다. 꼭 그것을 사가지고 오십니다. 몇 타래 사가지고 오셔서 봄, 가을에 이불잇을 세탁할 때 준비 작업으로 그 실을 사오십니다. 꼬여 있는 실을 나한테 감으라고 그럴 때가 있고 “너 이거 붙들어라.” 그러고는 할머니가 감을 때가 있습니다. “할머니 이거 다 끊어버리고 하면 안돼요?” 그러니까 “얘야, 그러면 못 쓴다. 이 실은 원래 공장에서 생산될 때 한 가닥으로 나왔기 때문에 찬찬히 찾아가면 다 한 가닥으로 풀리게 되어 있다.” 그러고는 실패를 실속에 집어넣고 춤추듯이 돌면서 몇 시간을 수고하고 나면 실패에 가지런히 감기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가 나쁘면 손과 발이 대신 고생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기억하라, 생각하라, 잊지 말라”라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가 와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대신 제자리에 갖다놔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설교하고 예배하고 목양을 하고 구역 예배를 하고 책을 읽는 것은 모두 도구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정신과 마음은 하나님의 것이지만 여러분에게 맡겨졌습니다. 여러분이 싫으면 끝까지 혼란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정신을 찾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일주일 동안 열심히 경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기도 생활에 착념해야 됩니다. 제자리에 갖다 놓은 마음과 생각이 다시 이탈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로 마음을 제자리에 묻고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면서 살려고 할 때 바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리에 마음이 머물게 됩니다. 기도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지켜야 하고, 제자리에 놓아둔 정신들이 제자리에 있게 하기 위해서도 마음을 쏟아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 한 줄이라도 읽고 설교를 듣고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담궈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곤고한 게 어떻게 변화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많은 것을 주셔도 미래에 대해서는 잘 보여주시지 않으십니다. 봤다는 것은 대부분 거짓말입니다. 안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미래에 일어날 일이 좋은 것이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나쁜 일이면 낙심하고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 보여주십니다. 모르는 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르니까 매일매일 주님을 의지하고 삽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는 상관없습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나무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서 주님께 가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새벽이든지 밤이든지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난 쉬는 시간이든지 오전에 일을 끝내놓은 한가한 시간이든지 산에 산책을 하러 나간 고요한 혼자만의 시간이든지, 아무데서든지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권함을 통해서 우리의 정신들이 제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교회는 바로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진리의 빛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일을 잘함으로써 교회는 온전한 성도들로 가득 찬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C. 모든 사람을 가르침
마지막 세 번째가 모든 사람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각 사람의 정신을 제자리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통해 성도들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갈 때 교회는 온전한 교회가 됩니다. 그 때 교회는 참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수종들면서 사는 예수의 분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르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몰랐던 옳은 것을 알게 하는 것도 있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올바로 잡아주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결국은 성도가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성도는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옛 조상들이 얼마나 통찰력이 뛰어납니까? “철들자 죽는다.” 머리가 허여니까 ‘이제 철이 들었구나.’ 그런데 죽습니다. 그게 우리 선조들이 수많은 인간을 보면서 깨닫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모든 인간이 철이 드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만큼 깨우쳐 인간의 도리를 아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도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진리를 배우려는 마음입니다. “목사님, 사는 게 너무 고달파서요. 그런 것을 배울 시간이 없습니다.” 안 배웠기 때문에 고달프게 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도 또 그렇습니다.
문제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싶어서 안타까워합니까? 여러분 가운데 지난 일주일 동안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진리를 알고 싶어서 헐떡거렸던 사람이 있으면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물론 있으실 것입니다. 많지 않습니다. 문제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가 성숙해지지만 안 깨달으려는 사람의 머리를 뚫어서 거기다 깔때기로 하나님이 말씀을 넣어 주시거나 말씀을 붙들고 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 빨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주시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싫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지 속에서 괴롭게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뭐 하러 공휴일에 여기 나와서 앉아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가 나서 대여섯 살 때부터 이가 새카맣게 썩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사탕을 좋아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밥을 잘 안 먹는 경우에 이가 상합니다. 밥을 물고 삼키지를 않습니다. 입에 물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분으로 변해서 이 사이사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엄마가 밥숟가락을 가지고 “한술 더 먹어라.” 그러면 입을 벌리면서 “엄마, 여기 있어.” 밥 한 숟가락을 먹이려면 한 시간 내내 무르팍으로 기어 다니면서 씨름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의사들은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밥을 주지 말고 굶겨라.” 이틀만 굶으면 “엄마, 밥.”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사니까 하는 이야기이지 엄마는 그렇게 못합니다. 엄마는 애가 바짝 마르는 게 가엾으니까 어떻게든지 사정을 해서라도 한 숟가락이라도 먹이고 싶은 것입니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침 받고 싶습니다.” 하면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산다면 이렇게 많은 교역자나 교회의 일꾼들이 필요하겠습니까? 저는 그런 교회에서 목회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막 빨아들이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축도가 끝난 다음에 숙제를 내주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무슨 책 몇 페이지부터 몇 페이지까지 나오고 설교가 이만큼 있으니까 듣고 외우고 기도하고 와라.” 그러면 모두들 그러고 옵니다. 그러면 목회를 혼자 해도 됩니다. 구역 예배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수요예배에 모두 모이면 됩니다. 새벽예배에 절반 이상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교역자들이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먼저 안 성숙한 성도들이 말씀의 밥숟가락을 들고 무르팍으로 기어 다니면서 새끼한테 한번 먹여보려고 치사할 정도로 사정을 합니다. 제가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교회에서 은혜 못 받은 사람이 왕이라고 말입니다. 막 나가는 사람이 VVIP입니다.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 “한번만 드셔보세요.” 먹으면 “아, 너무 감사해요.” 뭐가 감사합니까? 제가 교회 앞에 서서 늘 인사하는데 절대로 안하는 이야기가 “감사합니다.”입니다. 한 번도 안했습니다. 전도사 때부터 궁금했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항상 교인들과 인사하면서 “감사합니다.” 그러는데 뭐가 감사한가? 교인들이 오히려 가면서 목사님한테 “감사합니다.”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목사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뭐가 그렇게 감사하세요?” 그러니까 “나와 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말씀을 쭉쭉 빨아들이는 사람도, 거부하는 사람도, 미지근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일을 위해 헌신해야 하고 성도들이 진리의 말씀을 배우려는 마음을 간직하면서 살고 그것을 싫어하는 자신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아멘.
IV. 적용과 결론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도 골로새 교인을 위해 받는 고난을 기뻐했고 그리스도 예수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 고난이 좋고 기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한 성도들로 채울 수 있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사도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 우리가 잘나서 여기까지 왔는지 알지만 사실은 우리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예수 사랑으로 동참하면서 희생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그렇게 온전한 신자가 되기 위해 애쓰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그렇게 만들기 위해 예수의 남은 고난을 여러분 속에 채울 때 여러분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의 역사를 따라 수고함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 1:28)
I. 본문해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공동체적 소명에 대한 언급은 29절에서 “나도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라는 주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자기 고백으로 끝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에서 배우는 교훈입니다. 아무리 좋은 교리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의 삶에 실천적으로 적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남에게 진리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입술에 침만 바르면 되지만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가 신자들에게 실천적으로 적용되는 가운데 그 진리는 자신의 살과 피의 일부분이 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빛 된 삶입니다.
II.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
그러면 사도가 이렇게 그의 역사를 따라 자신도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한 그 고백은 무엇을 목표로 한 것이었을까요?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수고하노라” ‘이를’이라고 할 때 이것은 무엇일까요? 앞에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한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 자신도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를 온전케 하고, 성도를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도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당하게 되는 모든 시련과 괴로움들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자기의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자기만족이나 평안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목표가 예수를 힘입어 스스로 만족적인 삶을 살고 개인적인 평안을 누리는 것,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최근 캐나다에 114세쯤 된 할머니가 사셨습니다. 생일을 하루 앞두고 돌아가셨습니다. 아주 건강하게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이 할머니 생전에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그렇게 오랫동안 건강하게 장수하시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이 할머니의 첫 마디가 재미있습니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마라.”라는 것이 답이었습니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으면 평안을 잃어버릴 일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썰렁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맨날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입니다. 그럼 금방 죽겠네요.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최고령자가 중국에 있는데 127세입니다. 이분은 할아버지입니다. 지금도 밭일을 다닌답니다. 이분이 1888년생이니까 19세기, 20세기, 21세기, 3세기를 거쳐서 살았습니다. 장수의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아몬드와 호두를 매일 먹었답니다. 집이 부유해서 먹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대대로 그 농사를 지었습니다. 농장에서 수확한 것을 매일 먹으면서 살았더니 127세를 살았다더라. 그리고 이분은 할머니와 다르게 이야기 합니다. 남의 일에 참견하면서 살았답니다. 지금도 자기 일이 아니라 동네에 일이 있으면 항상 나서서 밭일도 해주고 뭐도 고쳐주고 봉사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루하루 삶이 너무 즐겁더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자기를 구원하여 예수의 몸에 일부, 지체가 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의도는 이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최고의 섬김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교회가 그리스도를 온전히 드러내고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말씀 한 마디면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혼자 세상을 창조하셨고, 혼자 중생하게 하심으로 시작하셨지만, 놀랍게도 이후에 사람을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역사에 협력함으로써 만들어 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엄마 아빠랑 같이 살 때는 한없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습니다. 개념 없이 굴었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어려서부터 마룻바닥에 벌렁 나자빠져서 두 발을 막 뒹굴면 엄마가 뭐든지 하자는 대로 다 해줬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형제한테 꽂혔습니다. 엄마가 아무리 봐도 저 친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벌써 꽂혔습니다. 반드시 시집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엄마, 아빠가 바리바리 싸서 시집을 보냈습니다. 가서 몇 달 살아보니 그 놈이 그 놈이 아닙니다. 정말 강적을 만난 것입니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보니까 이제 인간으로 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인간’하고 잘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인간을 낳은 또 다른 두 인간이 있습니다. 거기서 그 인간이 나왔는데 그 두 인간은 만만하겠습니까? 그리고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 인간의 피를 받아 태어났는데 만만하겠습니까? 시집을 와서 보니 위로도 만만한 인간이 없고, 옆으로도 만만한 인간이 없고, 아래로도 만만한 인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니까 눈물이 나고 슬픔과 괴로움이 엄습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엄마가 생각이 납니다. 한없이 자기를 용납해 주었던 이 세상의 단 한 사람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은혜를 조금 받으면 다른 일을 하지만 진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영혼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안 섬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임하면 그것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해 노력을 할뿐 아니라 남의 일에 참견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도와서 온전한 신앙을 갖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미끄러진 저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을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그 일을 시작해보면 너무너무 힘이 듭니다. 자존감이고 뭐고 다 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그 인간을 섬기면서 자기가 옛날에 예수님한테 어떻게 했는지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자매가 시집을 가서 위아래 옆으로 힘든 인간과 만나면서 자기가 엄마에게 얼마나 힘든 인간이었는지를 깨닫는 것처럼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조금 은혜를 주시면 다른 일을 해도 되지만 진짜 많은 은혜를 주시면 영혼을 섬기지 아니하고는 배길 수가 없고 더 큰 은혜를 주시면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직업이고 뭐고 다 버려두고 그 일 하나를 두고 자기를 불태우지 않으면 커다란 재앙이 임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목회의 소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영혼을 섬기지 않을 수 없게 하시고, 영혼을 섬기면서 말도 되지 않는 인간들에게 에워싸여서 한없는 고통을 당하면서 자신이 주님 앞에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새삼 깨달으며 회개하고 뉘우치고 자기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일찍이 예수를 믿었고, 너보다 아는 것도 많고, 너보다 돈도 많이 냈고, 너보다 교회에 높은 직책도 맡았으니 내가 너보다 더 잘난 사람이지. 뭘 좀 나눠줄까?’ 이런 마음으로 영혼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섬기면서 자신이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온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결정적으로 수고하고 애쓰는 사람일수록 주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주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인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 놀라운 지혜가 바로 그 속에 숨어있습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 희생하는 길을 걷고 자기를 헌신하는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본체이지만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로 낮아져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부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장 큰 소명은 하나님이 창조할 때 의도하셨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사람됨을 닮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셨으니 교회의 최고의 섬김은 교회 전체가 온전한 신자의 연합이 되어 그리스도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III. 그의 역사를 따라 수고함
A. 분투하여야 할 목표
사도는 바로 이 목표를 위해 그의 역사를 따라 자신이 수고한다고 말합니다.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그의 수고에는 분투하여야 할 목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개인의 온전함입니다. 일단 불신자에서 구원받은 신자가 되고 난 다음에 그의 고민은 무엇을 소유하느냐,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오르느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의 진정한 목표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설교하시는 도입을 팔복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로 이어지는 이 팔복은 “가난한 행동을 해라. 울어라. 온유하게 처신하라. 의에 주리고 목마르도록 무언가를 해라.”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행동이 아니라 인격의 특성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이 세상에서 사셨을 때의 자신의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자기의 의를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 받은 신자가 일생 동안 자신의 인생의 목표로 삼으며 살아야 할 바입니다. 지식과 사랑, 거기에 합치하는 실천적인 순종을 이룸으로써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그 안에서 진정으로 흔들림이 없는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고, 자신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할 때 가장 커다란 유익을 받는 사람은 이웃이나 하나님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있는 자기 자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의 근원을 불신자였던 데서 찾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세속적인 욕망을 이룸으로 행복해지려고 했지만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의 힘을 빌어서 세속적인 욕망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복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방향과 그를 구원하여 행복하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방향 사이에 불일치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길로 가겠다고 몸부림을 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하고 가는 길을 막아 당신이 정하신 행복의 길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도와주신다고 생각되지 않고 자꾸 훼방을 놓으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놀라운 증거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만약에 그 자식이 사생자라면 부모가 징계하지 않고 내버려 두겠지만 친자식이라면 내버려 두겠느냐는 것입니다. 때려서라도 올바른 길을 가도록 가르칠 것입니다. 개인의 온전함은 개인의 행복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 됩니다. 개개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얼마나 착한 사람이 되었는가에 따라서 교회의 모습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최고의 섬김은 공동체가 영적인 연합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은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와 더불어 생활했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아직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신약 교회의 시작은 가장 고유한 의미에서 볼 때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이루어질 신약 교회의 모습이 어떠할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이루어질 교회를 사람의 몸을 입고 자기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 통해서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와 더 이상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통해서 하늘에 올라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 교회를 보았고,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보게 됩니다. 현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비칠 것인가는 현실적인 교회의 온전함, 교회의 성숙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좌파나 우파의 정치적인 견해에 동조하거나 반감을 품는 것이 사명일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나라라는 정신에서 볼 때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볼 때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을 비판하고 동의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 신문지상을 도배하고 있는 정권에 있는 몇몇 사람들의 권력을 행사하는 모습은 백성들을 비감하게 만듭니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의 성숙도는 그 백성들로부터 위탁받아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인들이나 권력자들이 권력을 대하는 태도에서 결정이 됩니다. 후진국일수록 이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자기중심적으로 마음대로 휘두릅니다. 성숙할수록 이것은 백성들로부터 위탁된 것이기 때문에 권력 행사는 백성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최종적인 유익을 국민들이 누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고기 냄새를 맡고 침을 흘리며 달려들어서 물고 뜯는 개떼와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탐욕이 더럽게 비친다면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 세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기심과 영원에 대한 무관심, 자기 욕심을 앞세우고 살아가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이 얼마나 더럽게 비쳐지겠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닮아가며 그분과 같이 온전해지기를 힘쓰는 성도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존재의 울림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숨 쉬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를 욕 먹이는 것입니다.
B. 역사하는 은혜의 작용
사도는 이 일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가 불신자들에게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한 것도 그들을 단지 교회에 불러들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될 수 없고, 그렇게 된 후에는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세우는 희생을 통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조금이라도 온전한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묻고 싶습니다. 부모도 자식을 위해 희생하다가 어느 순간 그 줄을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이방인을 위해 사도가 그렇게 헌신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이의 역사를 따라서”라고 했습니다.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 원래 성경에는 능력으로 작용해서 파워풀하게 워킹하고 있는 그분의 역사, 성경에는 ‘에네르기아’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의 'energy'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그 힘을 좇아서, 그 힘을 따라서 수고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도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는 은혜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은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사랑하게 됩니다. 신자의 영혼이 정말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습니다. 한번은 죄에 대해서 통절하게 회개할 때입니다. 그 영혼이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남의 영혼을 위해서 진심으로 눈물을 흘릴 때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어떤 인생을 살든지 자신의 죄에 대해 눈물 흘리고 남의 영혼이 불쌍해서 울 수 있다면 그의 영혼은 안전합니다. 교회에서 영혼을 위해 수고하는 교사나 구역장이나 순장을 향해 교회 전체가 고마워해야 합니다. 대신 그 사람들은 잘해야 됩니다. 못하면 그것은 더 나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 있으나 실족하게 하면 화가 있을 것이다.” 실족하게 하는 사람은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소자를 물에 빠뜨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연자 맷돌은 짐승이 돌리는 것인데 그것을 목에다 맸으니 물속에서 다시 헤어 나올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정욕이라는 것은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려는 것입니다. 이게 들뜨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기회가 허락되지 않으면 저수지에 물을 가두듯이 가두고 있다가 꽉 차면 둑을 무너뜨리든지 둑을 넘어서 흐르게 됩니다. 은혜의 작용은 결국 사랑의 작용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주신 소명, 즉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고 무엇인가를 보태어 교회를 온전하게 하는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런데 왜 우리 주변에는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거나 온전한 신자가 되고 남의 영혼을 위해 힘쓰고 애쓰고 눈물을 흘리는 일에 헌신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것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은혜가 은혜가 아닌 자신의 착각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울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연적인 빛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우리가 눈물 흘리고 감동받을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저는 아직 못 봤습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제목의 다큐가 있다고 합니다. 90세가 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칠십 몇 년을 해로하면서 살아온 러브 스토리를 그린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다큐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인간성이 회복됩니다. 87세 된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물었답니다. “여보, 내가 이 물에 빠지면 어떻게 할 거야?” 그러니까 “나도 빠져야지.” “왜 나 건져주려고?” “예끼 이 사람아,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당신을 건져줘.” “그런데 왜 빠져?” “당신 죽었는데 내가 무슨 재미로 살아. 같이 죽어야지.” 요즘은 “널 죽이고 내가 살 거야.” 이런 세상인데 그런 것을 보면서 인간성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성경 계시가 없어도 그렇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은혜는 언제나 지식과 결혼합니다. 그래서 한 몸이 됩니다. 둘이 아무리 사귀어도 별거하면 애가 안 태어납니다. 같이 살아야지. 지식과 은혜가 따로따로 돌아다니면 인격의 열매, 삶의 열매가 없습니다. 둘이 결혼을 해서 동침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인간성이 변하고, 성품이 변하고, 삶의 행동이 변하고, 개념 없는 인간에서 개념 있는 인간으로, 싸가지 없는 인간에서 싹수가 있는 인간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냉혈인간에서 따뜻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지식이 은혜와 함께 있을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도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안에서 힘 있게 작용하였고, 그래서 자신이 힘을 다하여 수고할 수 있노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선을 행하되 자랑할 것이 없는 이유입니다. 자신이 악을 행하였으면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버리는 길을 택하여 악을 행한 것이기에 자신의 책임이지만, 선한 일을 하고 하나님 앞에 착한 일을 했을 때는 자신 안에서 힘 있게 작용하는 주님의 은혜 때문에 그 일을 할 수 있었으니까 선을 행하였어도 성도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나와서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교회와 여러분 자신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충만하게 부어주시도록 간구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시면 얼음장같이 차가웠던 신자의 마음속에 사랑의 불길이 일어납니다. 냉정하기 짝이 없던 동토의 마른 땅과 같은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질 때 교회는 구령의 열정으로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열정에 불타는 교회가 됩니다. 역사하는 은혜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성도들의 온전케 되도록 힘을 다하여 수고하면서도 불평할 줄 모르는 헌신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오늘 사도는 그런 의미에서 “나도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말합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그의 모든 힘과 함께 분투하면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힘을 다하여’라는 것은 ‘에거니 조매노스’라는 희랍어 단어인데 여기에서 ‘고뇌’라는 의미를 가진 영어의 'agony'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원래 ‘다투다, 애쓰다, 분투하다, 씨름하다’ 그런 뜻입니다. ‘수고하다’라는 단어는 ‘코피오’입니다. 코피가 나도록 많이 수고하니까 뭐가 흐릅니까? 코피요. 사도는 자신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교회의 온전케 됨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죽음을 무릅쓰며 살고 있는지를 그림 같은 언어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허영과 욕망으로 어리석은 삶을 살면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주님 안에 있기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행복해지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하나님을 대적해야 합니다. 그의 삶에 평화가 있을까요? 은혜가 있을까요? 진정한 안식이 그 안에 있을까요? 신자의 신앙의 목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안에 있습니다. 자기 같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거기에 자신의 인생의 모든 열정들을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질서 잡힌 삶이고 초점이 있는 삶입니다.
수십 년 전에 잡지에서 본 것인데 잊혀지지 않는 그림이 있습니다. 태양열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큰 빌딩 같은 구조물을 건축하고 그것을 렌즈 거울처럼 이용해서 태양광을 한 곳으로 모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커다란 쇳덩어리가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초점이 있는 삶, 집중된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모처럼 좋은 뜻을 품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의 지체들을 위해 헌신해서 그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고자 할 때 평탄한 길로 걸어가듯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시련이 오고 어려움이 옵니다. 수고하면 할수록 고통과 괴로움이 계속 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저울에 달리는 것입니다. “네가 날 사랑한다고? 한번 달아보자.” 그리고 저울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올 때마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힘들 때마다 달아보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잘 믿는다고? 그래. 어디 한번 달아보자. 이게 뭐야? 엄청나게 부피가 커서 무게가 나가는 줄 알았더니 아니잖아.” 그래서 그때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개념 없는 딸내미가 시집가서 고생하면서 엄마 생각하듯이 그런 상황을 맞이하면서 ‘예전에 내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고 살았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해주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참을 수 없는 상황을 참고, 이길 수 없는 일을 견디고,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납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자신은 죽고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도록, 사망은 자기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지체들 안에서 역사하도록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 받은 성도들이 주님 앞에서 살아야 할 삶이고, 그 안에서 정말 신자는 가장 완전하고 흔들림 없는 존재의 울림이 있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1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