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아름다움과 신학
녹취자 : 김세나
질문1) 주관적인 충동에 대한 조나단 에드워즈와 조지 휫필드의 이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었기에 이에 대한 두 목회자의 이해가 달랐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답변1) 웨이터를 하다가 아주 손님들 흉내 내는 연기를 하는 천부적인 재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인데, 주님을 만나고 깊이 회심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설교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조지 휫필드의 신학은 매우 건전합니다. 그분이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저분이 설교의 전범으로 삼았던 사람이 메튜 헨리입니다. 메튜 헨리를 평생에 전집을 7번을 읽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에는 무릎을 꿇고 전집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설교가 대게 메튜 헨리 주석에 기초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아주 창의성 있는 설교자였고, 묘사에 있어서 아주 달인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 하면 재미있지만, 시간이 많이 가니까 생략합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조지 휫필드, 1739년도부터 부분적으로 시작되었지만 1740년도 8월에 있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엔필드의 설교, 이것은 원고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죄인들」이라는 설교를 하면서 본격적인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거기에 불을 붙인 인물이 바로 조지 휫필드였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영국 목회자였지만 대서양을 건너서 뉴잉글랜드, 당시 잉글랜드 땅이었습니다. 그 식민지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아주 불굴의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에 자주 와서 설교하였습니다. 자기가 운영하는 고아원 사업에 필요한 후원자들을 미국에서 찾기도 하였고, 피뢰침을 발견한 벤자민 프랭클린이 그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회심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여튼 굉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굉장한 부자이고 그 당시 출판업자로, 발명가로 이름을 날렸고, 뉴욕에 있는 유펜(Upenn), University of Pennsylvania 아주 좋은 대학입니다. 그 대학의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조지 휫필드가 올 때마다 돈을 많아 거두어서 헌금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벤자민 프랭클린이 ‘그래, 이번에는 내가 절대 헌금을 안 하리라.’ 결심하였는데, 설교를 듣다가 그렇게 말합니다. “설교가 시작되었다. 나는 결코 이번에는 헌금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두 번째, 설교가 은혜로웠다. 슬그머니 나는 전대를 풀었다. 은화만 헌금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은혜가 쏟아졌다. 나도 모르게 돈주머니째 헌금하고 말았다.” 이러한 이야기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지역교회 목회자로서 아주 깊은 신학을 하면서 목회하는 사람이었고, 조지 휫필드는 순회 설교자로서 목회자가 없었습니다. 둘이 달랐지만, 부흥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순간순간 자신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민감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약간 오순절 적인 그러한 요소도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두 사람은 너무 크게 달랐습니다. 조지 마스턴에 의하면, 두 사람의 사역에 대한 이해와 방식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갈 수 없지만, 그러나 서로를 형제로 여겼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순간순간 사람의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이러한 것에 대해서 조지 휫필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조지 휫필드가 그러한 직관을 신뢰하는 데서 오는 실수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두 사람, 한 사람은 목회자였고 한 사람은 순회 설교자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이해는 너무 많이 달랐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충동’의 문제였는데, 이것은 설교하거나 할 때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인위적으로 충동을 주는 것을 조나단 에드워즈는 매우 매우 엄격하였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의 완벽한 풀 스크립트(full script) 설교자였고 조지 휫필드는 즉석 설교자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당시 확성기가 안 나왔는데 벤자민 프랭클린이 과학자였습니다. 얼마나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지 측정하였다고 합니다. 1마일 바깥에서 육성이 들렸답니다. 저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거짓말할 리는 없는데 우리 교회 대로에서 인덕원까지가 900m입니다. 거기보다 훨씬 더 멀리 들렸다는 이야기입니다. 1마일, 1.6km입니다. 그 당시에는 웅장한 거성이 나는 것이 설교자로서 가장 중요한 하나의 조건이었습니다. 마이크가 나오면서부터 상황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질문2) 에드워즈는 아름다움을 일차적인 아름다움(혹은 영적인 아름다움)과 이차적인 아름다움(혹은 본성적인 아름다움)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한 구분을 정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답변2) 그렇게 궁금할 것 없습니다. 일차적인 아름다움, 이차적인 아름다움이라 하였는데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아름다움의 원형은 하나님입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하나님을 닮음으로써 아름다워집니다. 하나님은 ‘쓸 크룸’(07:42-정확하지 않아 표시합니다) 뷰티(beaty) 그 자체이고 나머지 것들은 그 뷰티를 흉내 낸 것입니다. 그 뷰티를 사람들이 직접 볼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일차적인 아름다움이라 본다면 이차적인 아름다움은 그 일차적인 아름다움을 본뜬 모든 아름다움입니다.
똑같이, 일차적인 선과 이차적인 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일차적인 선은 하나님 안에 있는 선입니다. 이차적인 선은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선을 흉내 낸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슨 문제가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도 아름다운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을 전혀 경외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데 도덕적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기여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한 것에 대해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일차적인 선과 이차적인 선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원천적인 선’이 하나님이라면, 일차적인 선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선에 합치된 상태이고, 이차적인 선은 그러한 하나님 사랑 없이 아름다운 것, 도덕적인 아름다운 선한 것을 이차적인 선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저러한 아름다움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어거스틴과 공유하고 있는데, 어거스틴과 공유한다기보다 어거스틴에게로부터 물려받고 있는데 어거스틴은 아름다움의 원천을 하나님이라 보고 그 아름다움이 인간의 영혼에 투영되고 물질에 투영되고, 그것이 이제 한편으로는 자연계에 투영되고 도덕 세계에 투영되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자연 세계에 투영되었을 때 그것이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물질의 아름다움이 되고 그것이 도덕에 투영되었을 때, 그것들이 도덕 세계의 아름다움이 되는데 도덕 세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라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인 견해들을 윤리와 연결시켜서, 도덕과 연결시켜서 설명하는데 에드워즈는 거룩함, 경건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질문3) 본 책에서는 부흥주의의 어두운 면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반대로 부흥주의의 긍정적인 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저희가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내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3) 부흥이라는 것은 ‘revival’이고, 부흥주의는 ‘revivalism’입니다. ‘revivalism’은 어떤 식으로도 긍정적인 요소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안 머레이가 저 문제에 대해서 썼는데, 지난번에 여러분 맥 그레그 교수가 왔을 때도 맥 그레그 교수가 내놓은 전망이 여러분들을 당황하게 했을 텐데, 앞으로 20년 후를 놓고 보았을 때 가장 그래도 세계적으로 지속 가능한 교파가 순복음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쪽에서는 순복음이 거의 휩쓸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사람들이 지적으로 별로 생각하기 싫어하고 춤, 노래, 율동, 이러한 것들을 좋아하는 습성과 맞물려서 사실은 순복음의 가르침들이 폭넓게 퍼지고 있고, 특히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신관에서는 그 사람들이 모든 것들을 영적인 산물로 이해하고 생각하려는 성향들이 있는데 그러한 것들을 굉장히 많이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들이 순복음적인 교리입니다. 그래서 이단의 영향도 크지만 순복음의 영향이 아프리카에서는 특히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70년도 그쯤 되면 세계 인구의 절반이 흑인이 된다고 합니다. 지금 비율로 가면, 아이들을 낳는 출산 비율로 따질 때 2070년, 50년 정도 후면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흑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더더욱 그렇게 될 것이라 봅니다. 그런데 이제 순복음의 그러한 것들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보면 이미 순복음의 불길이 많이 꺼졌고 사람들이 잘살고 개화되고 하면서 결국 전체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떠나기도 하지만, 가장 빨리 버림받는 것이 순복음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도 미국에서 아직도 가장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이 바로 순복음입니다. 그래서 이제 굉장히 그러한 것들을 우리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저기에서 이안 머레이가 하는 것은 ‘부흥주의’는 결국 인위적으로 부흥을 흉내 내는 것으로서 결국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참된 신앙에 대한 왜곡을 가져오고 윤리적으로도 결코 사람들을 세워주지 못한다는 것이 열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은 순수한 부흥이었지만, 그 후 2차 대각성 운동 때에 일어났던 1800년대 일어났던 찰스 피니에 의해서 일어났던 운동은 신학적으로 굉장히 결함이 많은 운동이었습니다. 심지어 찰스 피니는 인간의 원죄를 부인하였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간의 내면의 성령의 역사를 모두 부인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미 보다 더 펠라기우스 쪽으로 간 사람이 찰스 피니였고 그래서 결국 그 당시 무슨 찰스 피니의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이후에는 매우 혼란스러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결국 열매도 바람직하지 않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 운동 때에는 순수한 부흥이었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어거할 수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향력이 떨어지면서 그 운동 역시 이상하게 이신론, 데이즘(deism)으로 빠지거나 그다음에 단이신론으로 빠지거나 신학적인 오류에 빠지고, 어쨌든 그렇게 하면서 끝이 납니다. 물론 ‘부흥’이라는 것이 그렇게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겠지만, 그러한 면에서 ‘부흥주의’는 상당히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긍정적인 면도 있을 것 같다.”라고 하였는데, 무엇이 긍정적인 면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신학적인 것들을 별로 나타내지 않고, 그냥 막 사람들을 모으고, 이러는 데에는 ‘부흥주의’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부흥주의’가 건전한 개혁신학적인 입장과 양립하고 화합할 수 있는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뭐, 한번 긍정적인 면이 무엇이 있을지 찾아보십시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남은 시간 지켜주시고, 저희와 함께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