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학업과 사역
녹취자 : 김세나
질문1) 신학의 근육을 기르기 위한 훈련에는 기도, 연구, 사색, 시련 등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목회의 근육을 기르기 위한 훈련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1) 인내. 첫째는 ‘인내’입니다. 목회하면서 교회 들어온 지 1년도 안 되었는데 힘들다고 다른 데서 돈 많이 주는 데 있다고, 친구가 부른다고, 마음에 안 든다고 휙 떠나는 사람은 그 다음 교회도 그렇게 하고, 그 다음 교회도 그렇게 하고, 담임 목사가 되어서도 그러고 다닙니다. 그러니까 많은 어려움이 와도 크게 견디는 것을 해야 합니다.
징계라는 말을 영어로 ‘disciplinary’라고 하고, 라틴어로는 ‘디스키플리나(disciplina)’라고 합니다. 의외로 ‘디스키플리나(disciplina)’라고 하는 징계라는 단어가 ‘디스케레(discere)’라는 단어에서 옵니다. ‘디스케레’(discere)는 ‘배우다’입니다. 징계의 목적은 한 짓에 대해서 목수를 하는 데 징계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징계를 안 받았더라면 배우지 못하였을 것을 배우게 하는 것이 징계, ‘디스키플리나(disciplina)’입니다. 그러면 결국 목회는 징계 일족도 있지만, 그러나 많은 괴로움을 겪으면서 그 안에서 연단을 받으면서 못 배웠던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한 배움을 가지려면 그냥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다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많이 겪으면서도 하나도 못 배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징계를 받았을 때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 “머리가 하얗게 되었는데도 철이 안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배우게 하는 것은 신앙입니다. 인내를 배우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사도바울의 소위 이야기하는 ‘apostleship’, ‘사도성’을 가지고 논쟁을 삼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힘들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진짜 사도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을 직접 보았지만.” 사도바울 보고 그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것을 믿을 수 있는가. 사도가 그것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사도된 표가 있다.” 그것을 뭐라고 하였는가 하면 인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참는 것을 보아라.” 그렇다면 인내 다음이 기적입니다. “내가 베푼 기적도 사도라는 증거가 될지 모르지만,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인내이다.”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참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서서히 서서히 자라면서 그러한 고통을 자라면서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깨어짐’입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안 하는 사람들의 약점이 뭐냐 하면, 목회 사역을 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많이 깨닫지만, 신학을 공부하면서 그것을 깨닫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깨달음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영혼들을 다루면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 책에서 했는지,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에서 했는지, 지금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개정판을 쓰고 있는데 완전히 내용을 다 바꾸는 것은 아니고 샅샅이 다 뒤져서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요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우쭐해집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서는 변하지 않는 영혼들을 보면서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겸손과 자기 깨어짐을 배우게 됩니다.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신학 공부를 할 때는 책을 읽으면서 자기가 비판하는 신학자들을 사랑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조금 뭐가 다르다고 해서 계속해서 비판하고 사람들을 잘라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들을 통합하고 조화를 시키는 것이 목회의 관심입니다. 사실은 두 가지를 같이 한다는 것이 머리 구조상으로는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정신과 목회에서는 이해하고 사랑하고 통합을 시키는 이러한 일들을 해야 하니까 참 어렵습니다. 칼빈도 목회를 하면서부터는 논문다운 논문을 별로 못 씁니다. 그 전에 많이 썼습니다. 결국, 관심사 자체가 이동하게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비상하리만치 그 양자를 겸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찬송할 뿐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일에 대한 훈련’입니다. 하나의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부임해서 교회에 탁 갑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정도 일을 맡겨 봅니다. 그런데 영 품질이 아니면 대부분 교회에서 일을 안 맡깁니다. 오래도록 두고 보면서 그렇게 기다려주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일,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은 그것을 처리할 능력이 안 된다고 파악이 된 다음서부터는 일이 그 사람을 빗겨갑니다.
그래서 스님들 중에 이판 스님과 사판 스님이 있습니다. 이판사판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중들이 다 동났다는 뜻입니다. 이판승은 이치 할 때 이입니다. 철학자 같은 사람들입니다. 물은 물이로다. 산은 산이로다 하면서 저 위에 있는 이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로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사람들이 이판승이라면 사판승은 종점님께서 이것을 지시하셨다, 기가 막히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바로 사판승입니다. 목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판사판 해야 합니다. 사판만 하면 그것은 비즈니스맨이 됩니다. 그리고 이판만 하면 혼자 ‘나는 자연인이다’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판사판을 다 해야 합니다.
그래서 네 가지, 인내, 자기 깨어짐, 사랑, 일에 대한 훈련입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다음 이것을 한번 보십시오. 아침에 따끈따끈하게 묵상한 것입니다.
「… nam sapientia dei filius eius unigenitus dicitur, sed loguemur de hominis sapientia, vera tamen quae secundum deum est et verus ac praecipuus cultus eius est. De trinitato 14. 1. 1.」
(“하나님의 지혜는 곧 그분의 독생자라고 불린다. 우리가 이야기 할 것은 ‘인간의 지혜’이며 참다운 지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지혜인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참되고 으뜸가는 예배다.”)
“nam sapientia dei filius eius unigenitus dicitur”
이것은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가 곧 그 분의 독생자라고 불린다.” ‘unigenitus’는 ‘독생한’, ‘filius’는 ‘아들’입니다. ‘dicitur’는 ‘불리운다.’입니다.
“sed loguemur de hominis sapientia”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인간의 지혜’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sapientia’는 어떤 것인가 하면,
“vera tamen quae secundum deum est”
그래서 뭐냐 하면, 참되고 ‘qvai secumdum deum’, 하나님으로부터 ‘est’, 말미암아 오는 것이며
“et verus” 참되고
“ac” 그리고
“praecipuus culus” 가장 탁월한. 으뜸가는 예배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신학을 하든 목회를 하든, 우리들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은 뭐냐 하면 ‘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음 시간에 시간이 있을 때 이야기 하겠지만 지혜와 지식이 지난 시간에 제가 지혜는 뭐라고 했습니까? “영원한 사물들에 대한 오성적 인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지식은 “시간적 사물들에 대한 이성적 인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개가 두부 자르듯 딱 잘라지는 것이 아니라 두 개가 하나로 쭉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혜를 발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일을 아주 비효율적으로 하다가 누가 가르쳐 줘서 자연적인 지혜가 생겨서 ‘이렇게 하면 할 수 있구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하는 방법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기술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소중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똑같은 것입니다. 저것은 그 지혜보다 더 뛰어난 인생 전체에 대해서, 그 자체에 대해서 해명을 해 주는 근거가 되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이 세계가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이고 내가 무엇인가에 대해 ‘아하’ 깨닫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경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하면 거기에서 지혜가 계속 쏟아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하는 것을 ‘에이 신학은 내 그릇이 아니야 집어치우고 목회를 하겠어.’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신학이 없는 목회를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야. 나는 그냥 공부나 해야 하겠어.’ 이것은 목회가 없는 신학을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2번 하겠습니다.
질문2)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삶의 선한 질서’를 갖는 것이며, 이러한 삶은 '온전함'(rondeur)과 '순전함'(integrite)을 요구한다고 했습니다. 칼빈이 말한 ‘온전함’과 ‘순전함’의 정의와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을 알고 싶습니다.
답변2) 칼빈이 저것을 불어판에서 쓴 말입니다. ‘헝 되’라는 말입니다. 저것은 영어로 말하면, 명사로 쓰입니다. ‘roundness’, ‘fullness’입니다. ‘wholeness’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온전함은 범위의 문제입니다. 잘 보십시오. 삶의 방면이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찌그러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모든 방면이. 예를 들어서 빵을 하나 만들었는데 동그랗게 만들어서 찌그러지거나 문제가 없습니다. 과일이 주어졌는데 아주 크고 실한 과일인데 어디에도 흠이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온전함이라면 순전함은 ‘앙떼 흐 히떼’라는 단어인데 저 단어는 불어사전을 찾아보면 ‘integrity’ 아실 것입니다. ‘integrity’는 속의 모든 것이 다 하나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honest’-정직. 그리고 또 ‘uprightness’-올곧음입니다. 그러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저것은 내적 질입니다. 온전함이 범위의 문제라면 순전함은 내적 질의 문제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이루어진 삶이 되어야 하고, 그러한 삶의 동기가 하나님을 향해서 거짓되고 불순한 동기가 섞이지 않은 순전한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 주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옛날에 아브라함 링컨 시대 때의 일인데 아브라함 링컨이 의회에서 비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야당 의원이 소리를 지르면서 “당신은 앞뒤가 다른 사람이다. 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비난을 퍼부으니까 링컨이 올라가서 “의원님, 뚜껑의 얼굴을 가졌다고요? 그러면 제가 왜 이 얼굴로 나왔겠습니까?” 조크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악인은 뚜껑의 얼굴을 갖지만, 의인은 단 한 개의 얼굴을 갖습니다. 그것이 바로 순전함입니다.
질문3) 신학의 결국은 신앙이고, 신앙의 결국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교회에 기독교에 관련된 것은 전혀 해 본 적 없고, 그러므로 신앙도 없는 새신자가 온다면, 그에게 신학에 대한 가르침과 성도로서의 생활에 대한 연습 중 무엇이 우선이 되어야 할까요?
답변3) 내가 묻고 싶은 것이 “교인으로서 의무를 다 하고 예수를 믿을래?” 아니면, “예수를 믿기 전까지는 아무 의무도 행하지 않을래?” 대답해 보십시오. 그대가 처음 교회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우선 교인의 모든 의무를 다 행한 다음에 예수를 믿을 것인지, 아니면 예수를 참으로 믿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안 할 것인지에 대하여 답해 보십시오. 둘 다 아닌 것 같지 않습니까? 저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가르쳐서 지혜를 갖는 것만큼 삶이 함께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저것에 대하여 관련된 자료가 있지 않습니까? 저것이 예로 생각이 나서 들어 봅니다. 본문이 너무 길어서 우리말로 해 보겠습니다. 지연 전도사가 크게 읽어 보십시오.
“이제 우리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요’ 이 믿음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라는 훈계를 남기면서 이 권을 끝맺기로 하자. 그러면 제반 덕목들, 사람이 현명하게, 용기 있게, 절도 있게, 정의롭게 살아가는 덕목들이 모두 신앙과 결부될 것이니. 그렇게 되지 않는 한 참다운 덕목일 수 없기 때문이다.” (De Trinitate 13. 20. 26)
느낌이 어떻습니까? 질문을 한 사람으로서 들으면서 느낌이 어떻습니까?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13권의 마지막 장입니다.
“이제 우리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요’ 이 믿음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고 난 다음에 사랑하고 그 다음에 행동하고, 그것이 아니라 그 세 개가 모두 다 함께 인간의 정신과 상황 안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모든 덕목들, 덕목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만한 훌륭한 ‘덕-virtus’을 이야기합니다. 덕은 영혼의 올바른 힘입니다. virtus, 그것이 덕이고 영어 ‘virtue’가 거기에서 나옵니다. ‘vir’는 남자라는 뜻입니다. 남자는 힘의 상징입니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지만, 여자가 더 힘이 센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서 “현명하게” 플라톤의 4추덕을 본받은 것입니다. 현덕. 용기 있게, 용덕. 절도 있게, 절덕. 정의롭게, 의덕. 그래서 4추덕입니다. ‘추’는 ‘기둥’을 이야기합니다. 네 개의 덕이 가장 중요해서 그것이 인간의 삶을 떠받치고 있고 국가의 존망을 떠받치고 있는 그 4추덕입니다. 인간은 저것 중의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한 모든 덕들이 결국 믿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결국 사랑으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참된 덕일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답이 됩니까?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4) 신학생 시절 3시간 이상 기도하라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바쁘신 사역과 학업 사이에서 어떻게 시간을 확보하셔서 기도하셨는지 목사님의 신학생 시절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답변4) 바쁘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교역자 회의를 하는데, 지금은 다 떠나간 교역자이지만 자기가 얼마나 바빠서 화장실 갈 시간도 없는지를 설명을 합니다. 그날 밤에 심야극장에서 두 부부가 만났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합니다. 중요한 것은 3시간이 의무가 아니라. 저는 지금이야 솔직히 이야기해서 3시간 기도하지 못합니다. 한 시간 남짓, 조금 더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생 때뿐만 아니라 교수 생활할 때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의무였고, 저것을 제일 먼저 앞세우고 그 다음 시간을 회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제가 유리했던 것은 탁월하게 건강하였습니다. 저는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하면 힘이 솟았습니다. 그리고 3시간이라고 했을 때 어떻게 3시간이 나오는가 하면, 목회하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새벽기도 가서 그냥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시 또 시간을 잡고 기도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새벽에 한두 시간 정도 기도했으면 저녁때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내서 가서 기도하고, 그리고 나머지 것들은 잠을 줄이면서, 쓸데없는 시간을 줄이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흔들어놨던 두 개의 기도에 관한 책은 칼빈의 기도론도 좋기는 하지만, 마음 자체를 막 뒤흔들어 놓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E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 그리고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그 책이 엄청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여러분들, 지금 기도 안 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안 합니다. 그것은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신학생 시절에 기도 많이 하던 사람은 교역자가 되어서도 기도 많이 하고, 교역자가 되어서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담임목사가 되어서도 기도 많이 합니다.
다른 이야기도 있지만, 그 정도로 넘어가겠습니다.
질문5) 신학 공부만 하는 것과 사역을 병행하며 신학 공부할 때 얻어지는 효과는 무엇이 있을까요?
답변5) 이것은 아까 설명을 한 것 같습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6) 의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학습해야 공부의 범위가 있듯이 신대원 시절과 교과 수업만 열심히 임하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목사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학습해야 할 절대적 공부의 범위가 있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6)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못 하면 안 됩니다. 어느 대학이든지 학력고사 상위 1%가 안 되면 지원 자격이 없습니다. 미달이 되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신학교는 들어가니까, 요즘에는 거의 걸어 들어가다시피 하니까 말입니다. 학생들의 수준이 우리 시절에는 M.div.를 60명을 뽑았는데 20대 1이었습니다. 1,200명이 공개강좌에 와서 점수를 받아 가고 그 중 나머지 두 개의 어학 과목 점수와 세 개의 시험 과목을 합쳐서 다섯 과목으로 합격자가 결정되는데, 1,200명이 공개강좌에 와서 60명이 합격되었습니다.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진짜로 너무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총신대학교 졸업한 애들이 우리 시절 한 해만 우열반까지 만들었는데, 1반이었는데 1반에 총신대학 출신자들이 3명밖에 없었습니다. 학생들이 70명이었는데 모두 다 M.div학생들은 아니었습니다. 60명이 M.div이고, 나머지 15명은 영어점수가 좋아서 들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출발부터 신대원 다니는 학생들은 모든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공부도 안 해, 그럴 경우 리처드 십스에 의하면 영혼을 다루는 의사입니다. 영혼이 뭔지 개념이 없습니다. 당연히 의사가 된다고 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였습니다. “신대원 시절 교과수업만 열심히 임하면 되는 것인지”, 그랬는데 저의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은 안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모든 교과목을 열심히 했습니다. 어느 교수 과목은 정말 듣기 싫었습니다. 처음에는 뒤에 앉아 원서도 읽고 히브리어 공부도 해 보고 다른 것을 해 보았는데 정신의 분열이 생깁니다. 귀로는 목회신학이 들려오고, 눈으로는 신약 신학이 보이니까 그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 다음 서부터는 맨 앞에 앉아서,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학생들 안 듣습니다. 그런데 저는 노트를 펴 놓고 모든 강의하는 내용을 수양하는 마음으로 다 필기를 하였습니다. 돌아와서 필기를 보면 ‘아, 비싼 돈을 내고 이것을 들어야 하나.’ 생각하였습니다. 정신 수양에는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도 되지 않는 강의를 참을 수 있는 인내심도 생겨났습니다. 그 대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특히 시험공부 하는 게 교과목을 정리하는 계기가 됩니다. 신론 같은 것들을 한 학기 정리하고 시험 예상 문제를 가르쳐 주건 안 가르쳐 주건 다 정리를 해서 노트와 책을 다 읽고 정리해서 메모지를 만들고 그 다음에 아침 일찍 산에 올라가서 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게 한 학기 강의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신론을 한 학기 동안 배우겠습니다. 여러분 신론 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릅니까? ‘theologos’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이론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논쟁에서부터 시작해서 쭉… 그러면 두 시간 반도 걸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잘 모르면 다시 보고, 두 번 정도 하면 무슨 시험이 나오든지 간에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식으로 해서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것을 교수가 그렇다 그러지 말고 열심히 배우고 성실하게 배우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 교수님들은 배운 모든 것들을 구슬을 제공할 뿐이지 구슬을 실로 엮어서 목에 매다는 것은 자신이 신앙 안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합하는 학문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여러분들이 책을 읽으면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학습해야 할 절대적인 범위가 있는 것인지.” 하였는데 그렇습니다. 성경이 중심이 되고 우리가 최소한에 읽어야 할 책의 분야가 조직신학, 역사신학, 성경신학, 실천신학, 선교학입니다. 실천신학 안에 교육학이나 등등. 교회법도 이 안에 들어갑니다. 여러분들이 능력이 되는 만큼 계속 뻗어나가는데 그것들은 일반학문과 병행하며 읽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7) 존 오웬이 말한 마음의 열렬함이 수반하는 두 열매 ‘끈질김’과 ‘지속적임’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7) ‘끈질김’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것, 그리고 ‘지속적임’은 그것이 오래 유지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continuation’입니다. 열렬함을 수반하는 두 열매, 마음이 열렬할 때 그때 금방 막 하는데 금방 그만두는 사람을 우리들이 열렬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열혈팬이라 할 때, 아침에 좋아하고 오후에 싫어하는 것을 가리켜 광팬이라 말하지는 않습니다. 싫으나 좋으나 막 끝까지 좋아하는 것입니다. ‘끈질김’은 말하자면 붙들고 놓지 않는 것입니다. ‘지속적임’은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두 개가 수반될 때 비로소 마음의 열렬함이 있는 것입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8)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에서 경험한 영적 부흥이 개인적인 부흥이기보다는 설교를 통하여 많은 회중들이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의 부흥이 무엇인지 보았던 경험이라고 하셨는데, 이러한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 준비되어져야 할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8) 뭐가 준비되면 부흥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부흥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대게 부흥을 주십니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부흥을 주시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주 희귀한 일이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준비된 마음에 하나님이 부흥을 주십니다. 부흥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다가 다른 데로 가면 곤란하지만, 그러나 제가 한창 신대원 졸업하고 나서 교수 초창기에 즐겨 읽었던 책이 「설교사」(History of Preaching)였습니다. ‘20 centuris 풀 핏’이라고 하는 전집으로 한 20권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책을 굉장히 즐겨 읽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조지 휫필드’라고 하면 그에 대한 전기가 나오고 그 사람의 설교가 세 편 정도 실려 있는, 저쪽에 암브로시우스나 어거스틴서부터 시작해서 쭉 뒤에까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일기라든지 휫필드의 일기라든지 그러한 일기들을 읽으면서 그 사람들의 내적인 면들을 보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결국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부흥을 주십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일시에 임재하셔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게 하는 것, 그것을 부흥이라 보는데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교회가 성장하고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 그것을 가리켜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정결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저 부흥을 사모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그러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만 부흥을 사모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배운 공과 내용과 똑같습니다.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만큼만 자기밖에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길 갈망하지,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이미 자기 안에서는 그 의에 배부른 사람입니다. 이해됩니까?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9) 목회자는 그리스도와 열애에 빠진 지성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 학업에 있어서 중점을 두어야 할 부분에 대해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9) 거의 다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와 열애에 빠진 지성”인데, 그대들도 연애해 봤겠지만 연애하면 지성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나사가 빠져서 자매에 빠지면 분명히 지금 기도할 시간인데 만나러 뛰어갑니다. 사역해야 하는데 퇴근 시간만 기다리며 손목시계만 바라봅니다. 약간 비이성적으로 됩니다. 그런데 가장 이상적인 것은 뭐냐 하면, 그냥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열렬한 사랑에 빠진, 그래서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차가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경제학자 J.M.케인스가 있습니다. 이야기하면 길지만, 케인스가 경제학자로서 남긴 것이 그것입니다. 경제학을 하다가 보면 경제는 아주 정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속에서 정치적인 어떤 것을 하기 위해서 가슴이 불탑니다. 예를 들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무제한으로 도와야 하겠다는 열망을 펼치든지 아니면 우리 국가가 이래서는 안 되겠고 미국을 이기기 위해서 과학을 발전시켜야겠다고 어느 한쪽으로 주어집니다. 그러한 목표가 없이 국가를 운영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거의 치우칠 정도로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경제는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가 권면하는 것이 뭐냐 하면 “Warm heart, cool head.” 따뜻한 마음과 함께 냉철한 지성을 가지고 경제를 운영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신학교 다니는 동안에 학업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 부분은 아까 이야기했듯이 성경을 중심으로 하고, 제 분야의 신학들의 기본서들을 읽는데 기본서들을 읽을 때 현대의 기본서만 읽지 말고 그것의 백그라운드가 되는 과거의 고전들로부터 시작해서 최근 현대에 이르기까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제 하나의 지적인 훈련이고, 또 하나는 학문이 아닌 신앙의 차원에서 끊임없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만나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갈 때 이 지식과 지혜가 일치를 이루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그 길로 인도해 갈 수 있을지에 대한 요령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10) 목회자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그리스도와 열애에 빠진 지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신앙인에게 있어서 적용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성경 골 1:3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요 14:6절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과 진리를 소유한다는 것이 어떤 관계이며, 우리의 지혜와 지성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목사님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10)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는 진리를 소유할 수 없고, 진리를 소유한 자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고 나서 진리를 소유하느냐, 진리를 소유하고서 며칠 있다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느냐, 그러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지혜와 지성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 탁월한 영향을 끼쳐서 결국 어두웠던. 도현화 전도사, 불을 다 꺼 보십시오. 자, 이렇게 꺼졌습니다. 다시 켜 보십시오. 불이 들어옵니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 안 갑니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신우 전도사가 연애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물어보고 싶습니다. 자매가 사랑스러워 보입니까?
(이신우 전도사님: 예, 사랑스럽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확인을 하고 그러한 감정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러한 감정을 가지니까 예쁘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까?
(이신우 전도사님: 먼저 감정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아주 사실 예쁘게 생기지 않았는데 그러한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까?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말입니다.
(이신우 전도사님: 예. 힘들 것 같습니다.)
스스로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Confessions(고백록)에 나오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Qui novit veritatem, novit eam, et qui novit eam, novit aeternitatem, Caritas novit eam.
O aeternitas veritas et vera caritas et cara aeternitas!”
(진리를 아는 자가 그 빛을 알고, 그 빛을 아는 자가 영원을 압니다. 사랑은 그 빛을 압니다. 영원한 진리여, 진리스러운 사랑이여, 사랑스러운 영원이여!)
Augustinus, Confessiones 」
“Qui novit veritatem” 진리를 novit, 아는 qui, 사람이. “novit eam” 여기에서 eam은 빛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빛을 압니다. 그리고 그 빛을 아는 사람이 영원을 압니다.
“Caritas novit eam.” 사랑이 그 빛을 압니다.
“O aeternitas veritas” 오 영원한 진리. 그리고 진실한 사랑, 그리고 사랑스러운 영원이여!
다시 해 보겠습니다.
진리를 아는 자가 그 빛을 알고, 그 빛을 아는 자가 영원을 압니다. 사랑은 그 빛을 압니다. 영원한 진리여, 진리스러운 사랑이여, 사랑스러운 영원이여!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Caritas novit eam.” 사랑은 그 빛을 압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이 결국 진리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최고의 선물이 바로 진리에 대한 인식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도 사랑을 받을 것이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도 그에게 나를 알게 하리라.”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대한 최고의 보상입니다. 제가 종종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조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시고, 하나님을 조금 사랑하는 자에게는 애인을 주시지만,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