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시리즈 1
예배란 무엇인가 (요4:23-24)
오늘은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앞에는 우리들이 잘 아는 바와같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꿨지만 지금도 자기의 남편이 아닌 소위 물길으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이 여인은 물을 길으러 나왔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대화가 시작되었던 여인입니다. 그렇게 쭉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주 비범하신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다음에 네 남편을 불러오라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여인이 이제껏 살아오면서 자기의 인생을 그토록 힘겹게 만들었고 그리고 인생의 알 수 없는 문제속에 둘러 쌓여서 이 여인도 역시 오전의 여인과 마찬가지로 소외당한 인생을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낮에 물을 길러오지 않는 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한낮의 시간을 이용해서 사람들과 마주침을 피해서 그래서 물을 길러 왔다가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와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받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죄인이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네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넘쳐나는 하나님의 성령을 주셔서 목마른 영혼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바뀌어서 풍성한 샘물과 같은 영생을 누리며 살도록 그렇게 해주시겠다고 그럴때 여인은 그것을 날 주십시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막혔던 문제가 무엇이고 그리고 이 여인이 이러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참된 평화와 그리고 참된 영생수를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영생수를 소유하기 위해서 하나님앞에서 해결해야할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직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죄문제였습니다. 그런후에 예수님께서 여인과 함께 대화가 더 깊어지셨습니다. 그러다가 여인이 가만히 예수를 보니까 보통사람이 아니예요.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 같습니다. 선지자라면 내게 말을 좀 해 주십시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 유대인들의 말은 예루살렘에서만 예배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어느것이 맞습니까? 이 얘기 였습니다.
사마리아는 여러분 알다시피 헬라나라가 쳐들어왔고 헬라나라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죠. 그래서 그 지방에는 말하자면 튀기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일사각오로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고 하는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국제화 정책에 밀려서 이방인들과 결혼을 하고 그래서 신앙이 다 혼탁해 졌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상종도 안했죠. 변절한 유대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릴수 없으니까 자기네들 끼리 형식을 만들고 성경도 자기네들끼리 만들어서 그래서 자기들이 정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그러면서 예루살렘에서는 그들이 드리는 예배가 쓸데없다라고 말하고 이들은 우리가 이 산에서 드리는 예배가 옳다라고 말하면서 각각 자기들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거죠. 그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예배의 두 요소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오늘은 이 두 요소를 중심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우리들이 신령과 진정이라는 것이 무슨뜻이냐 번역이 정확하지 않은데 성령과 진리예요. 원문에는 그러니까 쉽게 번역한다면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할때가 오나니 곧 이때가 그때라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러면서 영과 진리, 그리심산이냐 예루살렘이냐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된다는 얘기예요. 구약에는 문제가 됐는데 그리스도인 자신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런 장소가 문제가 안된다는 거예요. 문제가 되는 것은 빈들이나 산이나 초막이나 어느곳에서든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모여서 세워진 그곳에서 하나님앞에 더 중요한 요소는 이제는 예루살렘이냐 그리심산이냐가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진리와 성령이라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드리는 것만이 참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우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할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즉 다시 말씀드려서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할때가 온다. 예전에는 영과 진리안에서 참된 예배를 드릴수가 없었다는거죠. 왜그래요? 이렇게 사람들속에 참된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한 오해가 생겼던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자기네들은 하나님앞에서 예배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자기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 참된 구원의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오늘 말씀하신 것은 뭐냐하면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러니까 무슨애기예요? 이렇게가 아니면 안된다 이거예요. 이렇게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찾으시지 않는다는 거예여.매우중요한 이야기입니다.그러면 이렇게 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의 첫 번째 순서에 뭐가오고 마지막에 뭐가오고 그런 이렇게가 아닙니다. 어떻게 진리와 영안에서 드려지는 예배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앞에 드려지는 참된 예배 그런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시면 사람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겠죠? 다시 말씀드리면 영과 진리안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배는 결코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죽으신 그것을 기념하는 장래의 애도나 아니면 기일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또 예배는 하나님앞에 주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단순히 표현하는 형식이 아닌것입니다. 예배는 무엇입니까? 예배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이해할수 있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구약의 제사를 이해하면 되요. 구약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집에서 길른 짐승을 매고 예루살렘성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짐승이 자기의 죄를 지고 손을 얹고 기도할때에 자기의 죄가 짐승에게로 옮아가고 그리고 그 성전에서 그 양이 혹은 소가 죽임을 당해요. 처참하게 피흘리고 죽어갑니다. 그런데 그러한 제사를 통해서 사람들이 원하는게 뭐예요? 우리도 주님을 꽤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의미가 아니예요. 이렇게 자기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가는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와 만나주실 것이다. 오셔서 내 죄를 사하시고 내 영혼에 하나님이 사유함을 주시고 그리고 나의 심령에 주님이 죄로 말미암아 막혔던 담을 허무시고 참된 회개와 진실한 참회와 하나님과 만났을때 우리 영혼에 새로운 은혜와 빛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깊이 깨닫고 그것을 간직하고 이방의 잘못된 문화에 둘러 쌓여 있는 그 시대를 오직 진리의 힘으로 살아갈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제사드리게 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생명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예배하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지금 제 말씀은 예배를 정성껏 드려야 된다 물론 그것도 포함됨니다마는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예배는 한교회의 예배는 한교회의 영적수준을 넘어설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 못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것을 뛰어 넘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우리들이 하나님앞에 간구한다고 할찌라도 우리들이 주님이 만나주실수 있는 방식대로 예배드리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기도가 진실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과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수많은 일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진리를 듣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진실하게 영이신 하나님과 생생한 만남이 이루어질때 죄인이 어떻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릇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의 길을 뉘우치고 돌아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 없었던 사람들이 사랑을 소유하게 됩니다. 어둠 속에 있었던 사람들이 진리의 참빛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었던 사람들이 참된 사랑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었던 그러한 강철 같은 가슴이 하나님의 사랑에 녹아질 때 그는 눈물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예배를 통해 바뀌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수준과 믿음의 성적은 무엇을 얼마큼 했느냐 거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때로는 말씀을 전하러 다니면서 교회에서 아주 귀한 중직을 맡고 장로님석이 쫙 놓여 있는데 거기서 기라성 같은 교회의 중직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조는 예배를 보게 됩니다.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이렇게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 속에 흐르고 있는 성령의 분위기가 그 사람의 마음에 와 닿지 않고 증거 되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을 찌르지 않는데 어떻게 고개를 숙이고 졸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졸음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려지지 않는 예배를 탓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살아서 예배를 장악하시고 진리가 살아 역사하므로 사람들이 움직이고 부딪칠 때 그들은 고뇌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뜨겁고 흔들렸던 마음이 냉정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 속에서 이런 역사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말했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감각과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감격을 소유하고 있을 때에는 정성껏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짐승을 데리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 그 짐승이 자기네 집에서 기르던 짐승이 잖아요. 제사를 드릴때 자기의 죄를 거기에 얹으면서 간절히 기도하니까 제사장이 너의 죄가 이 양에게로 옮아갔다 그러는 순간에 양이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하얀 양털이 씨뻘건 피로 물듭니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갑니다. 드디어 목이 잘라지고 팔다리가 잘라집니다. 그리고 각이 떠집니다. 내장이 발기발기 찢어지면서 기름이 분해되고 내장이 분해됩니다. 콩팥과 쓸개가 갈라집니다. 온통 피 천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있는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앞에서 처참하게 죽어져 가는 짐승의 제물. 왜 죽어갑니까? 무엇 때문에 죽어갑니까? 짐승이 뭐 했습니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다 그렇게 죽어가는 모습은 바로 자기여야 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신앙의 양심과 영적인 예민함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그 앞에서 이미 손을 얹으면서 양에게 기도할때에 전신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가 소리를 지르며 죽어가기 시작할때에 정말 피어린 통곡과 참회의 눈물로 가슴을 치는거예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런데 어떻해요? 신앙이 떨어지고 그리고 신앙의 감격이 사라지고 믿음이 감각을 다 잃어버리고 말하자면 무감각해지니까 어떻게 되요? 막 범죄하다 너 그렇게 범죄하고 하나님앞에 어떻게 살려고 그래? 아 그거 뭐 양한마리 갖다가 죽이면 되지 뭐.
(예) 직장에 있을 때 어떤 카톨릭 신자가 맨날 술 먹고 못된 짓 하고 다녔어요. 아니 천주님 을 믿는 다는 사람이 그러면 어떻게 그러면 괜찮아 이렇게 대충 살다가 망년에나 가서 고해성사 한번 하면 딱 끝나.
이게 카톨릭에만 있습니까? 구약에 선지자들이 탄핵했던 그 부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 시대 속에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이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질렸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성전의 문턱을 밟고 다니는 수많은 사람의 발걸음이 아니다. 제사 앞에 진심으로 참회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 앞에 진심으로 자기의 죄를 참회하며 주님이 나를 용납해 주시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으며 보좌 앞으로 나아갈 때 주께서 예배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얼싸 안으시면서 죄악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우리의 손을 우리의 발을 임마누엘의 피의 샘에서 씻기시고 그리고 우리를 다시 마치 밖에 나가서 뒹굴고 장난을 치며 개판을 치다 온 자식을 목욕을 시키고 새로운 옷을 입혀 보내듯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배가 형식에 이르고 있다는 얘기는 신앙이 죽어있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형식에 흐르고 있다는 애기는 하나님을 향한 감각이 그만큼 무감각해져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배가 형식에 흐른 시대의 사람들은 오히려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진노하게 했던 것입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월삭으로 모이는 것과 절기로 모이는 것과 대회로 모이는 것과 그리고 그 모든 대회와 함께 너희가 악을 행하는 것 입술로는 나를 경외하나 그러나 너희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이런 백성들의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가 아닙니다. 어떻게? 영과 진리 안에서. 먼저 영입니다. 영안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다른 피조물들과 유일하게 구별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혼을 소유한 것입니다. 사람이 아이큐가 돌고래만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돼지만도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몇 년전에 해외 토픽에 보니까 돼지가 피아노를 치는데 기가 막히게 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뛰어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무리 지능이 뛰어나도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교통할수 있는 영혼이 없습니다. 오직 인간에게는 그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질수 있는 영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은 육체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영혼과 육체사이에 있는 그 기능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육체와 영혼이 모두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끝임없이 네 영혼아 돌아오라 말하지 않고 네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라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배의 한 요소는 반드시 영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을 느끼며 살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그렇게 즐겁게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나님을 이 육체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느끼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성령이 오시는 것이예요. 성령이. 왜 그래요? 이천년 전에 죽은 예수가 지금 나를 살린다?
웃기는 거죠. 그런데 그 말도 안되는 얘기가 어느 한 순간에 믿어지는 거예요. 세뇌를 당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오늘 교회 올 때 까지 안 믿어졌었는데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깊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을 느끼게 되는 것이예요. 그러면서 깊은 참회를 하게 되는 것이예요. 전철에서 전도를 하는데 저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신거 봤어? 그러고 어떤 사람이 물어요. 뭐라고 대답해야 겠어요? 못봤다고 얘기하면 말발이 안서요. 나는 보았다. 어떻게 보았냐? 육신의 두 눈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예요. 마찬가지죠. 양심이 어디있어요? 양심이 있는 곳에다 손을 얹어보셔요. 어디로 가야되요? 여기로 가죠? 근데 참 이상해요. 병원에 가면 심장을 다루는 곳도 있고 내장을 다루는 곳도 있고 흉부를 다루는 곳도 있는데 양심을 다루는 곳은 없어요. 양심이 없어요? 있죠. 물리학적으로는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와 같은 분이세요. 만져지지 않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그러나 보이도록 만져지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성령이 우리마음속에 오실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확실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황당무게한 이야기 지옥이 있다는 것 하나도 안 믿어지잖아요. 과학시대에 그런 것 웃긴다 .그러면서 놀다가 제가 그랬어요. 말씀을 듣는 순간 확 다가와요. 그 믿음이 얼마나 뜨거운지 내가 뭐라고 애기했냐하면, 그말이 어패가 있는 이야기 인지는 모르지만 목사님한테 찾아가서 “목사님 저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가 전부 거짓말이라고 해도 나는 이것을 믿지 않고는 살아갈수 없습니다. 이제 내가 이 인생에 있어서 더 이상 붙들 것이 업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예배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이 오시는 것이예요.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어때요? 주일날 몸과 마음이 너무 곤고해요. 찢어지는 것 같아요. 대충 예배드리고 끝내야겠다. 그리고 예배당에 갈 때 있죠. 뒤에 앉아요. 천지에 있는 이름중 귀하고 높은 것은 나시기 전에 지으신 이름 예수. 늘 읽던 찬송가 가사인데, 반주가 나오면서 막 찬송을 부를때 마음에 막 흐느낌이 오는 거예요.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 언제나 가장 귀한 그 이름. 그것이 찬송가의 가사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확 다가오는 거예요. 그 놀라운 사랑. 나시기 전에 지으신 그이름 예수. 나시기 전에 그분의 이름이 예수라고 지어짐으로 말마암아 그분이 얼마나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걸으셨는가 짐작하는 거죠.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죄를 뜻하지 않게 회개하면서 주님앞에 용서를 구하게 되는 것이죠. 무엇이 하는 것입니까?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까? 우리 마음 스스로가 그렇게 해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셔서 우리의 마음속에 느껴지지 못하는 하나님과 그 참된 진리를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예요. 여러분 여기있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한테 전도 받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한테 전도를 받았고 어떤 사람은 자기는 대학원 나왔는데 국민학교밖에 못나온 사람한테 전도 받아서 온 사람들도 여기 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설득시키고 논리로 우리를 항복시킬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예요. 논리로 항복되면은 그러면은 전부다 예수를 믿어줍니까? 어림없어요. 유신론과 무신론으로 싸워가지고 말이예요, 입심이 좋은 사람은 무신론자를 꼼짝못하고 굴복시켜요. 그러면 할말없다, 졌다, 그래도 그 사람이 교회 나오냐 그애기 예요. 아니예요. 주님의 성령이 예배가운데 오실 때 평범한 찬송이 우리의 가슴 속에 뜨겁게 밀려오면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감격과 참된 회개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이거죠. 그러므로 찬송을 부를때는 늘 가사에 집중해야해요. 설교를 들을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그 설교 가운데 함께 해 주시면 평범한 설교인데 수 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찌르는 것이예요.
그랬다고 하잖아요. 사도 요한이 노년에 올라가서 너무나 힘이 없어서 제자들이 부축해서 올라가서 “ 애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야 하느니라 ” 온 교회가 흐느껴 울었어요. 평범한 말속에 비범한 성령이 함께 할때 비범한 역사가 나타나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죄로 말미암아 흐느끼게 되고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으로 말미암아 한없는 즐거움과 기쁨속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는거예요. 무엇을 통해서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영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서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영이 없는 예배, 영안에서 드려지지 않는 예배는 어떤 것일까요? 또 하나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어떻게 영안에서 드려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두가지 질문에 먼저 답을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나중 질문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그럴수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이 결코 내용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배의 내용은 형식을 좌우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형식은 내용을 가져 올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형식이 내용을 좌우할수 있다면 수십억짜리 파이프 오르간으로 반주를 하고 수천만원짜리 피아노로 반주를 하고 고성능 앰프에다 소리를 내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요?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니까 문제는 더 일어나는 거예요. 집회 때 마다 몇 대의 트럭으로 앰프를 싣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예요.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아요. 주님은 영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이 성령을 심하게 근심시켜 드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그사람들이 모여 있는 예배가 어떻게 영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영안에서 드려지지 못하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타락한 시대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때 율법은 집어던지고 자기들 마음대로 제사를 드렸습니까? 아닙니다. 율법의 규례를 따라서 엄격하게 그대로 드리기 위해서 애썼습니다. 순서는 까다로왔고 절차는 복잡했고 그리고 예배드리는 형식은 공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과 참된 교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참된 성령안에서 드려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그런 일들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 순서는 까다롭고 공교로와도 그 속에서 참된 감격을 받는 사람들이 적어져 간다면 그러면 그 예배는 살아있는 예배일수 없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데서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예배는 성령 안에서 예배드리지 못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느냐 ? 절차와 형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자유스러운 역사보다는 절차와 순서를 고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격하게 그 규격을 지키도록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십시오. 예배를 정해진 절차와 순서를 따라서 엄격하게 드려진다 할 찌라도 모든 성도들이 침묵할 수는 있습니다. 침묵 가운데 고요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반드시 침묵 이상이어여 하는 것입니다. 침묵하는 것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생하게 인격이신 하나님과 인격인 인간 사이에 영혼으로 만남이 이루어 질 때 그 속에서 어떻게 아무런 느낌도 없고 고요하기만 하고 아무런 인상도 받을 수 없고 그리고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고 의지의 변화도 없는 그러한 만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참다운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오래간만에 십여 년 가까이 못 만났던 친구를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납니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길거리에서 손을 흔들고 얼싸 안고 난리입니다. 흥분 가운데 몇 칠을 지냅니다. 너무 반갑다. 그게 인격과 인격의 만남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영안에서 예배가 드려지지 못할 때 그런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영안에서 예배가 드려지지 못할 때 사람들은 점차점차 예배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배의 자리에 앉아서 온통 오늘의 해야 할 일과 예배가 끝난 다음에 벌어질 자기의 스케쥴에 대한 계획들이 머리를 계속 흔들며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미 내용은 사라진 형식으로 드려지는 예배인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이렇게 예배하는 자 주님이 찾으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 그들의 모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성령 안에서 드려지지 못하는 예배는 일년 오십이주 예배를 드려도 예배시간에 흐느낌도 없고 환호성도 없고 부르짖음도 없고 회개함도 없고 진실한 참회도 없고 돌이켜서는 회개의 결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영안에서 예배가 드려질 때, 성령 안에서 예배가 드려질 때 예배는 놀라운 생명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이 예배당에 들여놓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자기의 영혼을 장악하며 예배 전체를 붙들고 계신 성령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배 속에는 참된 감화력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리고 이제껏 자기가 제일이라고 붙들며 살아왔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분과의 참다운 만남을 소유하고 싶은 이러한 마음의 열정이 가슴속에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찬양을 부르는데 역사하셔서 한곡 부르려던 찬송이 성령이 역사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순서 지를 따라서 다음 순서로 넘어가야겠습니까? 아니면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더 불러야겠습니까? 어리석은 질문인 것입니다. 당연히 성령이 역사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열두시 반이 재직회로 모이고 한시가 식사시간 이니까 그 안에 마쳐야겠습니까? 아닙니다. 늦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길을 내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사회자가 내려와야 할 적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정말 풍성한 축복을 누릴 때의 모습인 것입니다. 말씀을 증거 하는데 사람들이 가슴이 무너지면서 여기저기서 흐느껴 울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할 때 설교를 계속해야 겠습니까? 기도를 해야겠습니까? 어리석은 질문인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설교를 들으면 되는 것입니다. 순서에 없는 데요? 그래서 순서 지를 안 만듭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나아가야 할 텐데 성도들의 마음이 열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심령을 닫고 그리고 형식적인 예배로 때우고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때, 어찌하든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의 형식이 아니라 참된 마음의 참회를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릴때 주님은 예배 시간을 통하여 수 많은 사람들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 하시지 않는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관해 들려줄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 하실 때 진리 안에서 선포되는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런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진노 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할 때 진노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앞에 떨며 회개하고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하고 주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들을 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 하나님의 참된 사랑에 대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을 들을 때에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을 때는 “ 아하, 주께서 죽으셨다는 이야기구만 ” 그러나 성령이 역사 하실 때 우리는 골고다 아래서 매일 보는 십자가지만 오늘도 이 십자가를 인하여 눈물 흘리고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후회하며 주 앞에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실 때 모든 격식은 타파되어 집니다. 깨트려 집니다. 예배가 세시간 네시간 흘러갈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예배가 오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예배를 위해서라도 일주일 동안을 성령 안에서 살다가 와야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성령을 근심케 해드리고 속을 있는 대로 썩혀 드리다가 주일날 와서 면죄부를 받으려고 올 때 우리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지 못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또 예배의 현장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슬프시게 하고 죄 가운데 살다가 예배 시간에 와서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근심시키며 살아갈 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가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릴 때 마음을 열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사람을 치료하는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회개 속에서 이제는 정말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싶은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서 주일을 지내게 하고 일주일 동안 세상으로 내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답게 주님이 찾으실 만한 예배를 함께 드리는 사람이 되어주시기를 원한다면은 그러면 여러분은 이 주일의 예배를 위해서 수요예배를 위해서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은 여러분들에게 무수히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주에도 성령은 무수히 역사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여러분들이 그릇된 길로 행하고 육체대로 행하고 자기의 혈기를 못이기고 인간의 고집대로 나아가고 하나님을 없수이 여기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불순종 할때 주님은 슬펴하시며 마음 속에서 우시며 탄식하시는 거죠. 문제는 뭐예요? 듣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예민한 사람들이 되어야해요. 그러나 시시각각으로 육체를 제어하며 그리고 자기를 회개하고 자기를 쓰다듬고 뉘우치며 돌이키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바를 따라서 예민하게 한걸음 한걸음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살 때 그 사람이 드리는 주일예배는 살아있고 생명력이 있는 예배가 되어질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 속에는 진리의 요소가 있어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성령과 진리 두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이 자유롭게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기울여서 예배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고 가다듬고 일주일이 끝나면 다음 주일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 그리고 실수해서 죄를 지었을 때에는 주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기회를 구하면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령이 역사하시되 간절히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이 아닙니까?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죠? 전 인격적인 추구인 것입니다. 그 추구가 무엇으로 나타나는 것입니까? 마음을 기울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을 기울여서...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예배의 시간은 관념이 없고 예배에 나올 때는 우리의 육체를 충분히 휴식 시켜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준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믿음의 성도들이 토요일을 주일 다음으로 귀하게 생각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예비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날은 육체를 할 수 있으면 푹 쉬고 마음을 정리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주님과 만날 그 시간을 기대하면서 토요일과 주일을 지내면서 육체를 푹 쉬고 와서 예배 시간에 아무런 얽매임 없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문득 끊어졌던 별 빛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한적한 시골 길을 들어설 때에 다시 빛을 찬란하게 발하며 그들의 인생을 인도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도 바로 이런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래 바람이 부는 광야와 같은 곳, 고요한 섬, 그리고 가시나무 떨기에 붙는 불속에서 들려오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만한 고요하고 정리 된 곳에서 주님은 그들과 만나시는 것입니다. 육일은 주일을 위해서 있고 또한 주일은 육일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육일을 경건하게 삶으로 칠일의 주일이 거룩하게 되어지고 칠일에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육일의 삶을 경건하게 살수 있는 재충전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주일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 집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 된 세상을 이겨갈 수 있는 참된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 죄인들을 찾아오시고 오늘 주일에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의 생활 가운데 곤고할 때나 위협을 받을 때나 위기에 처했을 때나 안타까울 때나 주께서 우리를 붙드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내 것으로 삼으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이 믿음의 재충전이 주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경건한 성도들이 주일날 춤추고 노래하는 것과 쓸데없는 책들을 보는 것을 멀리하고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고 말씀을 들은 것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기도하고 그리고 성경을 읽고 그리고 경건한 서적들을 읽으며 육신을 쉬는 것이 주일이라고 신앙을 고백했던 이유가 바로 이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희는 오늘부터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면 우리는 주님이 찾으시는 예배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순서가 공교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화려함과 아름다운 성가대의 음악소리와 그리고 우렁차고 직수입한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 교회를 찾는다고 할찌 라도 성령이 역사하셔서 하나님이 만나주시지 않으시면 그 모든 것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장하고 육십조원 어치의 금이 들어간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도 선지자들의 질타를 받았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제사를 지낼찌라도 하나님은 너희를 만나지 아니하시리라 너희가 아무리 천천의 수양 만만의 기름을 가지고 나온다고 할찌라도 하나님 앞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너희가 주 앞에 겸손히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주와 함께 동행하는 것, 이런 삶이 없는 모든 제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갈 뿐이라고 주님은 책망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없고 빈들에서 초막과 같은 곳에서 예배를 드린다 할찌라도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죄인을 흐느끼고 참회 하게 만듭니다. 거친 세파에 찢기서 실망하고 모두 마음이 상하고 그리고 가난한 심령이 되어서 이곳에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열고 위로의 손길을 주께서 내리는 것입니다. 평화의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부으시고 그리고 거기에 고약을 바르심으로 말미암에 상처받고 찢겨서 흐느끼며 교회당에 들어섰던 그 심령들이 하나님과 만남으로 말미암아 치유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시금 하나님을 위하여 살수 있는 이러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예배 속에서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들을 향하여 경배했으나 이제는 아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이제는 확실하게 깨달은 하나님 앞에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았으며 일주일 동안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압박과 압제를 당하고 나에게는 참된 친구도 없고 참된 사랑도 없고 그리고 참된 위로가 없다고 자기 혼자 밖에 없다고 인생을 그렇게 외롭게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자기의 인생에 가장 친절한 동반자가 하나님이요 그리스도 예수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재물과 명예와 이 세상의 지푸라기와 같은 것들을 위해 목매어 살던 인생으로 하여금 그것은 모두 지나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영원하도록 거하리라 요한일서 이장 십육절 십칠절 말씀을 그의 가슴속에 새겨넣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을 찾을 때는 그의 심령이 어떠했고 마음이 어떠했던지 떠날때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래 내 인생은 바람처럼 사라져 가는 인생이지만 그러나 나는 영원을 향해 사는 인생이야 나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지음 받은 인생이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할 수없사오나 주님이 위로부터 세상을 이길 신령한 힘을 내리시사 우리로 하여금 이 한주간 동안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세상에는 없는 참된 평화와 진실한 샬롬을 우리 영혼속에 소유하고 주만이 나의 가장 소중한 전부인 것처럼 살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기도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갑자기 힘들고 버겁던 세상에 요만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커보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상심한 자들이 와서 위로를 받고 하나님을 만남으로 참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용기를 잃어버린 자들이 이곳에 와서 험악한 세상을 이겨내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의 승리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특색인 것입니다. 어디서도 사로잡히지 않았던 사람이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통해서 사로잡히게 되어지는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 그 속에서 주님께 확실히 사로잡히게 될 때 그는 이전에 살았던 모든 인생의 가치와 생각들을 즐겁게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잃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발견되는 것이 가장 고상하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때로는 그 진리의 성령은 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진실로 생애적인 결단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드리고 또 드려도 그것밖에 드릴 것 없는 것에 대하여 가슴 아파하도록 완전히 변화된 사람들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모든 예배는 이렇게 영안에서 드려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에 대한 사모함이 있으면 아멘해 보십시오. 사모합니까? 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