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이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0년전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그 성당의 95개 조항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개혁을 외쳤습니다. 단기적으로는 면죄부, 정확히 말하면 면벌부의 판매 때문에 촉발된 사건이었지만 그 내용은 전체적으로 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마르틴 루터는 어거스틴을 통해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당위성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사제들에 의해 집전되는 미사에 매번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공적이 쌓여간다는 사상을 거부하고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통해 그의 속죄의 죽음 안에서 그것을 믿음으로 이신칭의가 된다는 교리를 확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힘입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만인 제사장의 교리를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직업에 영적인 직업과 육적인 직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오도록 부름 받은 소명이 직업이라는 사상을 확립했습니다. 이것은 루터가 새로 시작한 사상이 아니라 오랫동안 중소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에 사실은 성경의 내용을 저버렸기 때문에 다시 성경으로 돌아갔을 때 이런 교리들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종교 개혁은 이후에 예배의 개혁으로 나타났습니다. 희생의 미사로 드리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라틴어로 설교를 하면 예배에 참석하기만 해도 영혼에 신비한 은혜가 주입되고 예배에 참석한 것이 구원에 이르는 공로로 정립이 된다는 사상을 단칼에 거부하고 예배의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였고, 예배를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신자의 본분을 확인하고,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솔로몬 이후에 하나였던 이스라엘은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분열됩니다. 남왕국은 예루살렘의 수도였고 북왕국은 사마리아가 수도였습니다. 서로 왕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아닌 이곳에서 예배를 하는 것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신학을 수립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오경과는 좀 다른 나름대로 자신의 종교를 합리화한 사마리아 오경이라는 것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주전 722년에 북왕국이 먼저 망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앗시리아에 의해서 점령이 됩니다. 남북 왕국으로 나뉜지 약 200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북왕국을 지배한 앗시리아는 처음부터 철저한 삼인 정책을 실행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앗수르 사람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켜서 온 민족을 혈통을 섞어버리는 소위 국제화 정책이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는 수도였고 삼인 정책은 훌륭하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혈이 되고 이제 그들이 종교적인 독특성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왕국 유다의 사람들은 더더욱 사마리아 땅을 버림받고 추한 땅이라고 보았고, 거기를 지나가는 것 자체도 불결하다고 여겨 단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복음을 들고 그 사마리아 땅을 지나 그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대화가 오가면서 이 여자는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죄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예배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이것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정복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적인 설교를 마지막으로 남깁니다. 신명기서입니다. 11장 27절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너희들이 이제 가나안을 쳐들어갈 텐데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하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거기에 두 개의 산이 있는데 하나가 에발 산이고, 하나는 그리심 산이다. 에발 산에서는 이 율법을 외쳐 어기는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하라, 그리심 산에서는 이 율법을 낭독하고 이것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르침을 추적해 들어가면서 이제 북왕국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우고 예루살렘과 다른 북방 왕국의 토착화 신학을 수립하게 됩니다.
II.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
그러면서 이제 그 여인은 ‘어느 곳에서도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정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에게 진짜 예배하는 때가 이른다. 그런데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장소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방식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 방식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결정짓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방식일까?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 ‘이렇게’가 뭐냐 하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예배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두 가지의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 두 번째는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A. 진리 안에서
첫째로,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는 어떤 것일까요?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영광이 있는데 조금씩 모두 보태어서 한 바구니 모아가지고 하나님 머리위에 부어드리면 하나님이 더 영광스러워지시는 분일까요?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 분은 하나님이실 수 없고 우리는 인간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예전과는 달리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함으로 예배자가 변화됨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보다 나은 사람, 변화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그런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예배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는 바로 하나님을 그 예배 속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앎으로써 자기가 누구인지를 본분을 확인하게 되고, 그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자기의 인생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영적인 생명을 분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예배의 목표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그것은 목표에 도달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는데 그 목표는 하나님을 예배 속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될까요? 성경이 오늘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 그 진리를 계시하셨습니다. 설교자는 설교를 탐구하여 그 진리를 발견해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정리해서 힘 있는 웅변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설득하고, 선포해서 그들로 하여금 수납하고 또 그것을 믿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준비된 설교자가 있고 그 말씀을 깨달으려는 진리를 갈망하는 예배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양자의 만남을 축복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그것은 진정으로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가톨릭은 미신적인 미사를 추종하고 있었습니다. 모일 때마다 성찬을 하지만 사람들은 결코 성찬에 손을 댈 수 없고, 와서 입을 벌리고 줄을 서 있으면 사제가 떡을 입속에 넣어주고 포도주는 주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평신도의 손은 거룩한 손이 아니요, 너무 세속적인 사람의 손이기 때문에 구별된 사제들만이 그 성찬에 손을 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손을 댈 수 없다면 혀를 대는 것은 괜찮을까?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진리로부터 떠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반복적인 예수의 희생, 그것을 기념하는 미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종교개혁이 가져온 예배의 개혁이었습니다. 이제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라틴어가 아니라 모국어로 모든 평민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수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설교하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네 언어로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이고, 예수가 무슨 일을 하시고,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계획하시고 구원하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가져다주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사람들은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깔보거나 우습게 보는 태도로 예배에 나아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외심은 하나님의 엄위와 사랑에 대해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엄위로우심에 대해 두려워 떨고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자기를 사랑하신 그 사랑하심에 마음이 이끌린 상태, 그래서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아야 할 필요를 느끼는 그런 효과를 진리가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참석할 때 성도가 그 예배를 통해서 주실 말씀을 기대하고 깨닫고자 하는 태도는 경외심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증거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중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데 어느 날 황제가 여러분들을 불렀습니다. 복잡한 절차를 걸쳐서 황국에 들어갔고, 탁자를 놓고 일곱 여덟 명의 사람들이 여러분과 함께 황제를 알현한 후 탁자에 앉았습니다. 당연히 황제는 탁자에 같이 앉은 것이 아니라 위에 높은 용상에서 탁자에 앉아있는 여러분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대들은 고개를 들라” 황제가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훈시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리를 꼬고, 졸고, 그리고 턱을 괴고, 아예 자고, 다리를 달달달달 떨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살아서 황궁 밖을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황제를 향한 아주 심각한 모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안전인데 감히” 하고 말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예배에 나와도 기본적인 경외심조차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가지 않지만 젊은 시절에 민방위 교육가면 예배하고 똑같았습니다. 새벽에 나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극장이나 시민회관에 갑니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거기 강사로 오는 사람들입니다. 가면 다리 꼬고 일간 스포츠 보는 사람, 그 다음에 뒤로 재끼고 얼굴에다가 신문지 덮고 코를 골면서 자는 사람, 그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거기 모인 사람들의 20%도 안 됩니다. 그리고 45분을 채우고 내려갑니다. 나를 거기 오라고 불러준 구청도 없지만 나는 불러줘도 절대 안갑니다.
예배 시간에 와서 일어났다 앉았다 찬송을 할 때까지는 그래도 활동이 사람을 깨어있게 합니다. 그러나 설교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이제 예배 견디기가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주보를 안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거기에 신학적인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배 시간에 성도들이 그것을 읽기 때문에 안 만드는 것입니다. 주보를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이 설교 시간에 펼칩니다. 빨간 펜을 꺼내서 교정을 보기 시작합니다. 이미 인쇄가 됐는데 교정봐서 뭐하겠습니까? 그리고 시간이 남습니다. 뒤에다가 헌금 액수까지 싣습니다. 헌금 액수를 보면서 십일조 한 사람을 가로로 몇 명인지, 세로로 몇 명인지 헤아리고 곱하기를 해보고, 그 숫자를 금액에서 나누어 봅니다. 한 사람 앞에 얼마인가, 죽은 사람이 몇 명인지 헤아려 보고 이렇게 죽는다면 1년에 몇 명 죽을까 곱하기 52를 해 봅니다. 그래도 설교는 아직 안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핸드폰을 펴서 그래서 검색을 하기 시작하고, 마침 문자가 오면 답장도 하고, 그러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도 설교는 아직 본론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졸기 시작합니다. 까딱거리고 졸다가 옆에 사람들과 부닥치고 성경을 떨어뜨립니다. 흐르는 침을 닦습니다. 그렇게 예배드리는 사람들 대부분은 신천지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예배드리는데 여러분도 그렇게 하세요. 옆에 있는 사람이 계속 핸드폰을 보고 설교를 안 듣고 가끔 고개를 들고 피식 웃으면서 다시 핸드폰을 봅니다. 성도가 귓속말로 얘기했습니다. ‘신천지에서 오셨어요?’ ‘어, 아닌데요.’ ‘예배드리는 태도가 신천지 신도하고 똑같으시네요. 똑바로 앉으세요. 당신 때문에 우리 예배가 안 드려져요.’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로서의 경외심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은 그 분이 하는 말씀에 정신 차리고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자의 기본입니다. 최근에 드디어 로봇 목사가 독일에 등장했습니다. 루터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로봇 목사가 수만 편의 설교가 이미 들어있고 AI 통해서 계속 업데이트가 되고 있습니다. 예배드리기 전에 무슨 설교를 들을지 입력을 합니다. ‘위로에 관해서’ 길이는 30분 탁 하면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사람 목사가 하는 것보다 훨씬 은혜롭답니다. 그래서 자기는 그런 거에 혼란을 느낀다고 그래서 혼란 느낄 것도 쎘다 내가 그랬습니다. 그게 로봇이 한 거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모든 사람이 설교를 깊이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설교를 모든 사람이 그렇게 논리 정연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또 논리가 있어도 감동적인 수사를 동원해서 사람들에게 설교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AI는 합니다. 그 어려운 걸 로봇이 해내지 말입니다. 감동을 받습니다. 놀라울 게 없습니다. 그것은 로봇이 준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설교를 잘 못하는 모든 목사들을 추방하고 로봇으로 대체할 것인가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 기술이 발달되어서 그래서 사람이 로봇을 앞에 놓고 나, ‘하나님의 속성의 교리 중 신실성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할 때에 로봇이 가르쳐 주는 기능이 있다면 나는 교회에도 설치할 용의가 있습니다.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 로봇이 설교를 해도 모든 사람이 은혜를 받겠느냐? 정신 차리고 있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해될 때 혹은 그것을 수납하려고 노력할 때에 믿음도 생기고 은혜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열린 마음으로 그것을 깨달으려고 하는 사모하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영 안에서
두 번째는 ‘영 안에서’입니다. 이것은 순수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도 되지만 기본적으로 이것은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적인 요소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단지 의식이나 정보의 교환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일이고, 영적인 역사입니다. 마귀와 성령 사이에 가장 선명한 전선이 형성된 것도 바로 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는 영혼 안에서 그 분을 만납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고 칩시다. 예배당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기에 가장 잘 설계되었고, 우리 예배당은 매우 단순합니다. 예배당 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렇게 설계되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음향 기기가 정확하게 언어를 전달하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말씀을 잘 준비했습니다. 이렇게 되어도 그 자체가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열왕기상 18장에는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갈멜산에 장작을 쌓고 물길을 파고 그 위에 물을 부었지만 불을 내리시는 분은 하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예배시간에 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성령님은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위격이십니다. 성령님은 자유로운 인격체로써 당신 자신이 정서와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사해 보면, 성령님은 일반적으로 사모하는 마음과 은혜를 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오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도대체 무엇을 이렇게 구하고, 그 다음에 찾고, 그렇게 두드리는 마지막 목적이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해서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즉, 간절히 구하고, 간절히 찾고, 간절히 문을 두드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에게 지극히 좋은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데 그것이 최고의 선물인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예배를 위해서 일주일에 얼마나 기도를 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정신을 집중하고 제시간에 나와서 예배에 참석한다 할지라도 예배에서 주님이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고 나온다면 설교자의 재능을 의지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는 다만 말씀을 준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고, 그 말씀을 깨달으려고 노력하지만 충천한 화염과 같이 그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꽂히고 우리의 냉담한 가슴에 불을 일으키고, 동토와 같이 얼어붙은 땅에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깃들게 하시는 것은 오직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에 기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라는 사람의 전기에 관한 짧은 책을 썼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읽으며 깊은 감화를 받았는데 그 사람은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가였고, 마르틴 루터가 가장 존경하던 성직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활동하던 무대는 피렌체(Firenze), 그 당시에는 플로렌스(Florence)였습니다. ‘플로렌스’는 ‘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곳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르네상스가 꽃 피우던 본거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역사에서는 그 사람(기롤라모 사보나롤라)이 신비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잘못된 신학을 추구하는 인물로 기록됩니다. 그 사람이 오류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의 생애에는 괄목할 만한 말씀 사역이 있었습니다. 캄캄한 중세의 어둠의 시대에 한 수도자가 그리스도를 깊이 만납니다. 그리고 성경을 깨알 같은 글씨를 쓰며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탐독합니다. 그리고 플로렌스에서 제일 큰 두오모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로 전사와 같이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배 시간 한 시간, 두 시간 전에 이미 예배당은 사람들로 꽉 채워졌습니다. 예배당 문이 잠기고 예배가 시작되면 미처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쇠창살을 붙들고 매달려 그 설교를 들으며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로마 교황청은 연일 계속되는 사보나롤라의 교회 비판적인 설교에 매우 불편했습니다. 그리고 주교에게 도대체 저 망나니 같은 수도사가 왜 저러는지를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교황청에서 사자가 왔습니다. 그리고는 사보나롤라에게 말했습니다. “교황서항께서는 그대를 가상히 보시며 교회 비판하는 설교를 그친다면 추기경의 붉은 모자를 약속하셨습니다.” 사보나롤라는 그 제안에 대한 대답을 내일 설교 시간에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는 설교 시간에 답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추기경의 붉은 모자가 아니라 순교의 피로 물든 붉은 모자입니다.” 결국 그는 로마 카톨릭에 의해 체포되어 온 몸이 불살라지는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의 뼈는 모두 갈아져버려서 피렌체 한복판을 흐르고 있는 아르노강에 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뼛가루는 강물을 타고 유럽의 종교개혁의 새 불꽃을 쏘아 올리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그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에 존경하던 목사님 한 분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분이 목회하시던 교회가 서울역에 있습니다. 남대문 교회입니다. 한 곳에서 42년을 목회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늘나라 가셨습니다. 그 분이 평양에서 숭실학교를 다니셨답니다. 그때는 교역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여서 그냥 중학교 다니는 중에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조사, 지금으로 말하자면 전도사로 쓰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평양 숭실학교에 1학년인가, 2학년 다니는 학생 중에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내서 그 전도사를 조사로 일하기 전에 설교를 시험적으로 해보도록 불렀습니다. 그리고 대동강을 건너서 그 교회를 수요예배에 설교하러 찾아왔답니다. 장로님이 바깥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조사 비슷한 사람도 안 나타나는데 예배 시간은 다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웬 중학생이 우리로 말하자면 초등학교 4학년쯤 되 보이는 쬐끄만 키에 빼짝 마른 애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들떠도 안 보고 지나가는데 얘가 가다가 오더니 “제가 오늘 조사 설교하러 온 사람인데요.” 그러니까 “아이구,” 같잖아서 “저기 가서 기다리세요.” 그리고 드디어 예배가 시작됐는데 모자까지 벗어 놓으니까 이제는 진짜 빡빡 깍은 초등학생 같은 애가 올라가더랍니다. 교인들이 못 마땅해 했는데 드디어 설교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설교가 계속되고 끝났을 때에는 교인들이 전부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하기 시작했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문 앞에서 어린 아이라고 깔보던 그 장로님도 그 안에 있었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기도 시간에 온 교회가 뒤집어지면서 사람들이 가슴을 찢는 비명으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설교의 부흥이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 아이가 신학도 공부하지 않은 중학생이, 우리로 말하자면 열댓살된 아이가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유창하게 설교했을까요?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시니까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분이 자서전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설교가 끝났을 때 온 교인의 태도가 완전히 공손해졌고 그리고 장로님은 깊이 머리를 숙여서 ‘조사님’ 하고 인사를 했고, 결국은 몇 년 후에 그 장로님이 자기 딸을 주어서 그 조사를 사위로 삼았답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갈망하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회개해야 할 예배 태도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에게는 회개하여야 할 예배 태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이 세상이 전부인 것 같은 세속주의와 복음을 거절하는 사상, 인간을 죄인으로 보는 본질적인 개념들의 실종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신앙생활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되고 통신 수단이 진보했습니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일해야지만 생존해 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기가 발명되니까 밤에도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사람들은 일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양계장 생각이 납니다. 양계장에 불을 환하게 켜놓고 닭을 재우지를 않습니다. 그래야지만 하루에 두 개씩 알을 낳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엇 때문에 이렇게 미친 듯이 살아야 되는지를 모르는 채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일주일을 몸과 마음을 이 세상에서 다 소진하다가 주일이 되어서 교회에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일은 쉬는 날로 기억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배시간도 간신히, 간신히 맞추거나 못 맞추거나 그리고 예배에 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를 드립니다.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모하는 마음이나 진리를 깨달아 내 마음에 어두움을 물리치고자 하는 의욕 같은 것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패배가 확정된 전쟁터에 나아가는 군인들처럼 눈에 눈빛도 없고 핏기도 없이 그냥 체념한 듯이 교회에 찾아와서 오직 소원은 예배가 좀 일찍 끝나는 것, 그런 마음으로 예배에 앉아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시간을 고대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였습니까?
옛날 교인들 이야기를 가끔 한다고 해서 비교된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때 교인들 모두 좋은 교인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사람들도 절대 아니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이후의 목회에서 그런 분들을 다시 만나고 싶냐고 그러면 저는 별로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보통 주일날 설교를 세 번쯤 했는데 1부, 2부 예배 시간에 한번 설교가 100분 정도 내지 110분 정도 됐습니다. 오후 예배에는 여유가 있으니까 한 100분 정도 혹은 90분 정도 설교를 합니다.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막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면 이제 “기도합시다. 우리 말씀을 들었으니 우리가 신앙생활 이렇게 하면 안 되겠죠. 우리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밖에서는 나를 오후 예배, 저녁 예배 설교자로 데려갈 교회가 시동을 걸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기도문도 안하고 그냥 “열심히 기도하다가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불을 확 꺼버리고 갑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가서 저녁 대접받고 차 마시고, 예배드리고, 설교하고, 끝내서 인사하고 궁금해서 교회 와 보면 상당수의 사람이 그 아홉시 반까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야유회같이 변해버렸습니다. 전투하는 것 같이 신앙생활을 안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간절히 매달려야 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예배가 끝났는데 주님을 너무 깊이 만났기 때문에 누가 설교했는지도 생각이 안 나는 때가 얼마나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은 정말 먼 훗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질 때에 그때 교회에 와서 휫필드처럼 무릎을 꿇고 키스할 의사가 있습니까? ‘내가 여기에서 주님을 만났지. 여기서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 사랑하고 사명을 발견했어. 아, 사랑스러운 그때 예배의 기억이여.’ 하며 입 맞출 의사가 있느냐고 저는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당연히 교회에 대한 가슴 깊은 애정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배에 오는 모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예배 끝나고 사람들은 다 흩어졌어도 너무 가슴에 밀려오는 하나님의 감동이 커서 한참을 기도해 보니까 오후가 되었더라, 왜 그런 일이 우리에게만 안 일어나는 걸까요?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며 돌계단을 내려가도 우리 앞에 펼쳐진 일주일의 인생은 절대로 만만한 싸움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미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단지 금주도 예배는 ‘떼웠다.’라고 하는 양심을 달래는 그것 하나 가지고 예배당 걸어 나가는 그 사람에게 무슨 승리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형식이 무엇입니까? 실제가 중요합니다 라고 외치고 싶지만 이제는 형식도 유지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 10분, 20분, 30분 늦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을 하고, 예배 시간에 벌떡벌떡 일어나서 문 열고 나가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깔보는 행동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전화를 해서 초특급 호텔에 뷔페에 초대했다고 칩시다. 여러분 가시겠습니까? 요즘은 뱃가죽이 등에 붙는 시대가 아닙니다. 왜 오라고 그럴까? 거기에 내가 낄 자리인가? 내가 거기가면 존중히 여김을 받을 수 있나? 아니라고 생각하면 전화 끊고 안갑니다. 그게 평균적인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깔보고 그런 태도로, 막된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거기 오시겠습니까? 안 오십니다. 하나님이 가신다고 하면 제가 말립니다. 하나님이 거기 왜 가시겠습니까? 아니 이 세상에는 그렇게 주님을 갈망하며 매달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나님을 멸시하고 깔보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곳에 하나님이 거기에 가셔서 하실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멸시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자 어떤 사람이, 잘 아는 사람이 여러분들을 아주 매우 매우 정중하게 초대했습니다. 그래서 양복을 입고 그 집에 갔더니 어마어마한 대궐 같은 한옥집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앞에 마당이 길게 펼쳐 있는데 아침 일찍 하인들이 깨끗이 빗자루로 쓸었습니다. 티끌하나 없는 그 길을 사뿐사뿐 걸어가니까 하나의 문이 더 나오고 다시 마당이 나옵니다. 그러자 주인을 비롯해서 주인의 부인, 아이들까지 모두 반가운 마음으로 마루에서 뛰어나와서 마당에서 여러분을 향해 인사를 합니다. 예쁜 한복을 차려입고 모두 머리를 단정히 한 사람들이 깍듯이 인사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모셔졌습니다. 댓돌위에 신발을 벗고 그리고 사람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대청마루로 위에 올라갔고 대청마루를 지나서 아주 크고 품격 있는 안방으로 초대되었습니다. 드디어 주인의 분부에 의해서 여섯 사람이 들고 오는 교자상이 방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앉기 미안할 정도로 화려한 방석이 제공되었고, 그 위에 앉아서 밥상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그 그릇은 어디에서 수입해 온 것인지 본 적이 없는 아주 아름다우며 품격이 있는 도자기들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그릇들로 차려진 밥상이었습니다. 모든 반찬에 뚜껑이 닫혀져 있었습니다. 모든 주인 식구들이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말합니다. “손님 이제 드시지요.” 밥그릇을 덜컥 열어보니 똥이었습니다. 국그릇을 열어보니 설사였습니다. 세 번째 반찬을 열어보니 또 똥이었습니다. 모든 반찬을 열어보니 모두 색깔과 종류가 다른 똥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이 들까요? 예전에 자기를 향한 태도가 공손하면 공손할수록 격식이 갖추어졌으면 격식이 갖추어진 것만큼 멸시당하고 있다는 마음을 받지 않을까요?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주일날마다 마음이 아픈 것은 우리는 왜 이렇게 밖에 예배할 수 없을까? 그 높고 좋으시고 아름다우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왜 우리는 이렇게 밖에 예배할 수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매일 예배에 나올 때마다 성령 충만해서 일주일은 오직 예수만 위해서 살았노라고 자부심 충만해서 예배당에 못 나옵니다. 그런데 괜찮습니다. 스테반 차녹이라고 하는 17세기의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완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가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라면 그것은 모두 헛된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이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우리가 성공하고 주님을 깊이 만나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 일주일동안의 넓은 의미의 예배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동안을 전투적인 삶을 살면서 승리하고 온 사람들은 예배당에 딱 앉자마자 눈물이 확 쏟아집니다. ‘아, 하나님이 지난 일주일동안 나를 홀로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지켜주셨구나. 그리고 나를 도와주셨구나.’ 깨닫습니다. 그리고 감격이 밀려옵니다.
예배의 감격, 하나님 만나는 희열, 그 분을 경배하는 환희, 이런 단어 생각나세요? 최근에 영국의 한 학자가 초대 교회, 그러니까 교부시대까지의 기독교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문헌적으로 연구해서 책을 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그가 말하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매우 윤리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믿는 것과 사는 것이 일치가 되었던 사람들, 그래서 그렇게 살려고 항상 몸부림친 흔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그 당시에 모든 종교, 특히 헬라 세계에 이방 세계의 종교와 그리고 또 유대교하고 다른 점은 뭐냐 하면 평신도라는 말이 별로 적합하지 않지만 사제나 성직자만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다 책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 자체가, 신약성경 자체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이라는 것입니다. 왜 충격이냐 하면 이렇게 긴 편지를 쓰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특이한 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편지를 받았는데 편지가 단순히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선포하면서 한 장, 두 장, 세 장 넘겨도 끝이 없이 계속 나오는 편지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편지를 해설해서 설교하고,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모여서 그것을 다시 정리하고, 토론하고, 심화학습 하면서 모든 관심이 기록과 책으로 모여졌다는 것입니다.
요즘 읽고 계시는 경건 서적이 무엇입니까? 물론 없으실 것입니다. 성경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데 손에 들렸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을 지르는 말씀이 없으니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그게 표류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 교회 정도 되는 규모의 한국에 있는 교회 중 평신도들과 어린이를 위한 저런 훌륭한 도서관을 갖춘 교회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오천 권 가까운 책들이 꽂혀있고 그것은 기증 받은 것이 아니라 한 권, 한 권 내가 확인하고 추천해서 입고된 책입니다. 이 정도 되는 규모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풀타임 생활비를 받는 직원이 여러분들을 맞이하기 위해 도서관에 근무하는 사서가 있는 교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보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없애버릴까요? 책을 사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좋은 양서를 비치해 놓고 무료로 빌려가서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빌려 가면 상도 줍니다. 그런데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이용 안합니다. 그리고는 열린 공간에만 바글바글 모이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책의 종교를 선택했습니다. 성경이 책이고, 그리고 이 성경은 이 책을 풀어쓴 신학과 교리서, 그리고 경건 서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더 풍성하게 드러났습니다. 청교도들은 성경이 밥이라면 경건 서적을 반찬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사람들이 관심이 없는 것일까요? 기본적으로 마음의 갈망이 진리를 알고 그 진리대로 살고 그 진리를 믿고 싶다는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관심사에서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주일동안 진리에 대한 감각이 거의 없이 살다가 주일 예배에 나오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이 시간이 한없이 생경스러울 뿐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너무 거북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대한 환희나 감격 같은 것들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 있어서 종교 개혁자들이 보면 통탄할 예배의 현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종교개혁 주간을 맞아서 우리는 과감하게 돌이켜 서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있는 한 인간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예배는 바로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영혼에 생명력을 사랑을 공급해 주는 하나님의 통로입니다. 그 속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영적으로 변화되고 새로운 힘을 하늘로부터 얻어야 합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그 피로 속죄함을 얻었기 때문에 당신께 예배드리는 자들로 받아주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도 다시 한 번 종교 개혁의 주간을 맞아 예배의 개혁의 기치를 들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내가 살 것인가 죽은 자처럼 생존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기 있게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뿌리치고 이 주님이 주신 은혜를, 진리를 굳게 붙들어 하나님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배자가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