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제된 희생보다 소중한 것
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렘7:22-23)
녹취자 : 윤은정
이스라엘 백성들의 번제와 희생은 제사 속에서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과 만나는 그것이야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독특성의 진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에 ‘번제나 희생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명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고 모세에게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을 때에는 아주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이 번제와 희생에 관한 규례를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엄격하게 따라야 할 것이기 때문에 만약에 그 규례를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수 있을 정도의 엄중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마치 제사의 규례, 번제의 율례 같은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예레미야가 이 계시를 받게 될 때에 역사적인 문맥을 고려하면서 이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역사 속에서 가장 고통을 받았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다가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예언이 성취되는 것까지를 보아야했던 비운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당하고, 그리고, 나라가 이민족에게 짓밟히고 성소가 그들의 말발굽아래 유린되는 광경을 보면서 이 예레미야가 받았던 그 신학적인 충격은 가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번제와 희생의 제사를 올리면서 성소에 대한 사상을 견지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면, 이 경배의 행위 자체가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상은 여호와 종교의 고요한 사상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사상은 이교도들이 이방신을 섬기면서 가지고 있는 사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의 중심이 바쳐지지 않아도 제사를 뇌물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신들께 이것을 올리면 자신들의 신이 이 예배행위를 통해서 자동적으로 주술적인 힘을 가지고 자신들이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종교는 당시에도 고도의 도덕적인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이 드리는 예배 행위의 주술적인 힘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고 있는 언약 안에서의 인격적인 관계, 도덕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분의 보호를 받을 수도 있고, 버림을 받을 수도 있는, 버림받는 다기 보다는, 그 언약관계에 충실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징벌을 받을 수도 있는, 그런 고도의 도덕적 성격을 가진 종교였습니다. 이 사실을 바로 당대의 사람들에게 깨우쳐주기 위해서 강한 어조로 말하다가 보니까, 마치, 이 제사와 희생의 율례 같은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탄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이러한 제사와 희생, 번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이러한 종교행위를 통하여 자신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거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 하나님의 인격을 제외한 기계적이고 미신적인 신앙의 빌미를 이 번제와 희생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강력하게 탄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 시대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선포를 듣고 두려움을 느꼈던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요단강변으로 나아왔을 때에 세례요한이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꾸짖으며 책망했던 것과 똑같은 동기를 가지고 이 희생과 번제를 탄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번제와 희생, 소위 멜디스 클라인이 이야기하는 제의적인 소명이 하찮은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는 비성경적인 이원론과, 정리되지 않은 일원론, 양자를 통해서 모두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원론은 알다시피 세상과 신앙이, 혹은 교회가 완전히 선과 악으로 구별된 것이라고 보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교회생활 하는 것을 행복해하고, 사회 속에서의 소명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잘 알려진 어느 교회에 다니는 어느 형제가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네 교회에서는 하여튼 청년들이든지 좀 젊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면 모두 교회에 취직하려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여러 가지 많은 일거리들이 있으니까 취직하려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기에는 그것은 하나의 도피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게 이원론이라면, 일원론은 뭐냐하면은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나 제의 우리의 삶이 그냥 평면적으로 하나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널리 알려진 어느 교회에서는, 교회에서도 문제가 됐었습니다. 청년들이 예배에 참석을 안합니다. 어떻게 하냐 면은 쪽방처럼 봉사 나가는 것입니다. 언제? 주일날 11시에... 그게 교회에서 문제가 되니까 뭐라 그러냐 면은, 삶이 예배고 예배가 삶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것을 허용을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설명 드리는 것은, 이것을 세상과 교회가 담장을 쌓았다고 보지 못하지만, 그러나 침체가 없다고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원뿔모양으로 이해를 해서 원뿔 위의 부분에 예배와 교리, 하나님께 대한 봉사라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나머지 아래의 부분들은 이 세상에서 노동하며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부분들입니다. 어디 특별한 경계가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평면을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등차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예배와 제사, 그리고 희생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래 주셨던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어진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면, 그것입니다.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 사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전편에 흐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목적과 이유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그것이 최고의 축복으로서 우리에게 제시가 되는 것입니다. 조건이 뭐냐하면은 제사나 희생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한 방법이고, 그 밑에 잠재되어 있는 것은 뭐냐하면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을 때에 모든 예배와 정신, 모든 것들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 있는 핏줄을 하나씩 이으면은 한 사람당 약 12만 킬로미터입니다. 어마어마하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우리의 핏줄입니다. 세포가 궤사합니다. 핏줄이 들어가지 않으면, 핏줄에서 피가 제대로 흐르지 않으면 궤사하고, 손이나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핏줄이 우리의 온 몸에 살 끝까지 파고들면서 우리의 몸의 생명을 공급받는 원인이 되듯이, 우리의 모든 제의와 제사,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그 안에 베어야 할 정신이 없으면 궤사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도 마찬가지이고, 우리의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바로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샤마’라고 하는 동사가 좋아하는 전치사가 있는데 ‘베’에요. ‘베’ 인투라는 뜻입니다. 듣는데, 그냥 들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그 말씀이 마음 깊은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들음입니다. 들음. 그래서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하고 사무엘 선지자가 말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순종과 많은 불신앙이 이제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모든 분열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우리의 속에 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배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모이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마음을 쏟고 기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예배 나오기까지 그의 삶이 하나님을 향하는 삶이어야하고, 혹시 그랬지 못했다면 그것을 참회하는 마음이어야지만 그 기도 속에서 심령을 물같이 쏟는 것을 가능하겠죠. 찬양을 부를 때에 어떤 얽매임도 없이 하나님을 향해 올리는 향연의 노래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살고자 하는 고백이 자신의 삶 속에 베어 있어야지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깨닫기에 적합한 사람은 누구냐하면은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체스터 턴이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술을 하다가 미치는 사람은 거의 없답니다. 대부분 미치는 사람은 철학자들이 미친답니다. 이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미치지, 이성이 아니라 감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광기는 감각에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깊이 공감했습니다. 3세기, 5세기에 살았던 히랍의 철학자들 중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정신병으로 돌거나 자살했습니다. 키케로같은 사람도 자살했습니다. 그 훌륭한 작품을 하고도 자살했습니다. 그게 이성 속에 역사하는 광기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진리의 말씀을 깨닫기에 적합한 사람은 고도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구사역이나, 아니면은 구역을 인도하듯이,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이 말씀을 잘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들이 잘 깨닫는 것은 기껏해야 논리입니다. 논리. 공부한 사람이, 가방끈 긴 사람이 조금 낫지 않겠어요? 그래도? 그저 가방끈이 길어도 그저 아무것도 없고 끈만 긴 사람도 있지만은 그래도 조금 나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에 적합한 마음은 주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 의지가 최고도에 달한 그 마음이 뭐냐하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인격, 그 마음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분부하시든지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때에 아주 놀랍게 마음속에서 그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수없이 들려도 정말로 그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그것은 그 사람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수건위에 물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속에는 아무런 영향이 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싸움은 자신의 마음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단 한번만이라도 마음을 기울여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가 자기 마음에 깊이 파고 들어와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맨처음에 전자렌지가 나왔을 때에 사람들은 무지하게 신기해 했습니다. 굉장히 부자집만 사용을 했죠. 왜냐하면 스위치를 탁 놓고 드려다 보면은 아무 불빛도 없어요. 나중에는 거기에 뭐 전기불도 들어오고 그랬지만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열어보면은 뜨겁지도 않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마이크로 웨이브가 마이크로파가 들어가서 주변을 뜨겁게 하는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물건을 통과하면 속에서부터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로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수없이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하고, 교제를 갖다놓고, 무슨 낙서를 하면서 수없이 문제를 풀고, 그래도, 그 쌓아놓은 모두 공부한 교제의 양이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몇마디의 하나님의 말씀이나 내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나로 하여금 주님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했느냐가 내 인생을 변화시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듣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음성을 듣는데서 꾸밈이 없는 삶이 나오고 단순한 신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투명한 믿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칼빈이 얘기했던 순수한 경건이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한번 되물어 보십시오. 굉장히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죠. 연초니까... 대심방을 한다. 그 다음에 사역, 연초에 토대를 놓고, 교인들이 교회로 모이니까 돌봐야하고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오는데, 그럴수록 한번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하면서 마치 전자렌지에 마이크로 웨이브처럼 나를 깊이 파고들어가서 나를 터뜨리는 것이 뭐가 있나? 팝콘봉지를 넣고 마이크로 웨이브를 돌리면 말이죠. 파파파파파팍 터지고 나중에 조금 시간이 지나면 새까맣게 탑니다. 그런데 전자렌지를 열어서 손을 넣어보면은 별로 뜨겁지 않습니다. 뜨거운 것은 팝콘 봉지만 뜨거웁니다. 그렇게 깊이 파고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저 깊은 속이 변화되는 그런 말씀에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를 갈망하고 사모해야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전에 선교지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뭐냐하면은 선교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을 전체적으로 다시 해야 됩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목회를 해보지 않은 선교사들은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마지막에 가서 부딪히는 것은 뭐냐하면은 선교지에서 벌어지는 많은 갈등과 문제들이 목회자적인 소양이 없어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오죽하면은 평신도선교 그 자체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고, 그리고 평신도 선교를 간다고 하더라도 목회를 배우고 가야지만 선교가 되지 안됩니다. 그냥 머릿속에 들어있는 사고와 정신자체가 목회적이고 목양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됩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서 부터는 평신도들이라도 선교 나갈 때에는 목회의 훈련을 충분히 받고 가라. 그렇지 않은면은 비즈니스처럼 되기가 아주 쉬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들어와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그런 갈망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한번 정직하게 비춰보세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만지잖아요. 가르치고, 책 만들고, 그 다음에 CD굽고, 그 다음에 설교영상 편집하고, 그 다음에 말씀자료 찾고, 그게 곧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까지 실어 날라졌다라고 하는 의미는 아니에요. 그러기 때문에 깊이 고민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한줄기 말씀이라도 나의 교만의 껍질을 깨고, 그리고, 거만한 나의 마음을 통과하고, 혼란스러운 나의 지성을 통과해서, 마음 깊은 곳에 가서 맞딱 뜨리고 부딪혀서 그래서 정말 나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 변화되도록, 그렇게 되기까지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