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설교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애 1:12-13)
녹취자 : 정은숙, 박은희
이렇게 두 번째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목회의 영광과 관련해서 예배의 영광이 회복되는 것이 목회의 영광을 회복하는 가장 중요한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목회자의 영적인 수준은 그가 인도하는 예배와 성찬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는 결코 자기 이상의 예배를 인도할 수 없고 자기 이상의 성찬을 인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목회자가 되기 이전 목회자는 진실한 예배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땅이 진정한 예배로 가득 차는 그 날의 전망이 우리의 목회사역을 위한 모든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두 번째로 목회의 영광과 설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듯이 유대나라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된 직후 기록된 성경책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예언하는 내용이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자신이 예언한 내용이 역사 속에 성취되는 것을 본 사람들이 흔치 않았습니다마는 이 사람은 자신의 예언이 거의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을 생전에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선지자에게는 기쁜 일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예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썩은 지팡이만도 못한 애굽을 의지하여 바벨론과 대항해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유다 민족의 역사를 확정하셨고 그리고 이제 바벨론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가므로 육적인 이스라엘은 허무시고 그 안에서 새로운 종자 씨인 영적인 이스라엘을 태동함으로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었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이 실현되었을 그 때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야말로 끔찍한 약탈이 이루어졌고 성전의 아름다운 기품은 모두 이민족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치 그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은 겁탈당한 처녀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선지자는 가슴이 메어질 것 같은 슬픔으로 예루살렘 거리를 바라보며 울었고 그래서 예레미야 애가의 첫 번째 시작하는 단어가 ‘애카’라는 단어인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혹은 오호 애재라 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거리의 풍경 하나를 발견하고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망해버린 예루살렘 도성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감추어놓았던 돈을 꺼내가지고 와서 곡식을 사기 위해서 이리저리 부지런히 다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현실을 보면서 예레미야는 통곡하며 말한 것이 지나가는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이 예루살렘 멸망이 관계가 없느냐 나의 마음에 있는 이 고통이 너희 마음에는 왜 없느냐 하나님이 높은 곳에서 나에게 불을 보내셔서 도저히 내가 그것을 이길 수 없게 만드셨고 그래서 결국은 나를 피곤하게 하셔서 황폐하게 만드셨다 그러면서 이 선지자는 통곡하듯이 자기 속에 있는 자신도 이길 수 없는 어떤 골수에 사무친 불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해 전 우리 교회의 부목사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목사님 제가 교회를 개척하겠습니다.” 그래서 “하지마라.” 저희 교회에서는 교회 개척하면 교인도 좀 떼어주고 교회도 얻어주고 하는데 이 친구는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해서 “하지마라.” “왜요?” “안 된다.” “정말 제가 교회를 개척하면 안 되겠습니까?” “내 모든 명에를 걸고 교회를 하면 안 된다. 절대 안 되는 걸 내가 보장할 테니까 아무 생각하지 말고 더 엎드려 있어라.” 많은 사람들이 후배들이 교회를 개척하고 이제 교회를 세우면 사람들이 종교적인 욕구 때문에 모이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동기는 교회가 서는 것이 교회를 세우는 동기일 수는 없습니다.
목회의 시작은 한 신자인 한 사람 속에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진리의 불이 있어서 이것이 자기로 하여금 이것을 외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그 무엇이 교회를 세우는 원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현실적인 교회 성장의 비전 보다는 내가 내 마음에 있는 이 불을 토해놓지 않고는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죽을 것 같다는 이 진리가 자기를 이미 이겨버린 고통이 교회를 시작하는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청산유수 같아서 세기에 남는 설교일 수도 있고 소수의 사람들만 알아듣는 설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오늘의 주제로 직행을 해봅시다. 우리 얘기를 하지 말고 성경으로 돌아가서 무엇이 한 사람을 외치지 않을 수 없는 불을 갖게 만들고 도대체 그 가슴 속에 타오르는 불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 속에서 아주 명백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입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에 보면 ‘다트 엘로힘’ 소위 얘기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호세아 4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나도 너희를 버려서 다시는 너희를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 할 때에 이 다트라고 하는 히브리어 지식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유하게 독특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그런 의미의 지식이었고 이 지식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지식을 버린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지식의 개념은 헬레니즘에서 생각하는 사유를 따르는 지식의 관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이 지식의 개념은 통합적인 개념으로서의 지식입니다. 혹시 여러 목사님들 가운데 이 다트라고 하는 단어의 동사가 ‘야다’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야다’가 첫 번째로 사용된 구약 성경이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매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어의 know라고 하는 단어에는 ‘성교하다’라는 의미가 있고 ‘knowledge’라고 하는 것은 성적인 지식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지식을 철저하게 경험이나 인격과 분리된 또 다른 종류의 지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지식이 바로 하나님에 관해 적용될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특별히 강조된 것은 인류역사가 타락하고 구원의 계시가 보존되어 오면서 하나님을 하는 지식은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 가운데 뛰어난 민족으로 만들었고 그 지식을 담지하고 있는 공동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이들이 바로 모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파하는 구원의 계시를 간직한 중요한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에 세계 역사에 두 줄 밖에 안 나오는, 고등하교 세계사에 두 줄밖에 안 나오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구약에 나타났던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은 이 지식을 특별히 받은 사람들이었고 그것을 붙들고 그것을 발전시키면서 살아간 사람들이었고 선지자들은 바로 그 지식을 함양하라고 외친 사람들이었고 그것을 버렸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을 책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제 신약에 와서 여러분이 동일한 단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표현은 거의 사라지고 새로운 표현이 등장하는데 그리스도를 하는 지식이라고 하는 ‘그노시스 크리스투’라는 단어가 등장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이전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말했고 그리스도와 부활의 능력과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 지식이 너무 고상했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을 기꺼이 배설물처럼 여기고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가치 있는 최고의 비전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한 신학적인 고찰을 필요로 하는 대목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기독론적인 전환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복잡한 문제이지만 간략하게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신현으로, 이적으로, 꿈으로, 기적으로, 혹은 다양한 재료들을 사용해서 당신이 어떤 분이시고 당신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전달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은 두 가지로 구성이 되는데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에 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그 성품이 사람들 속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신현과 꿈, 선지자들의 에언, 이적, 이런 것들을 통해 나타났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들이 찬란하게 계시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위해서 다른 방식을 찾을 필요가 없고 그리스도 예수 위격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아주 쉽고 단순한 믿음으로 온 땅과 하늘 위에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과 그리고 위대하신 거룩함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는 지식의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핵심적으로 요약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설교자에게 열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저희 교회학교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회심을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회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목회자와 교회는 이 자라나는 아이들의 회심의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아이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엄마, 목사님이 십자가에 대해 설교할 때도 나는 믿어지지 않았어. 전도사님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설교할 때도 나는 믿어지지 않았어. 그런데 우리 선생님이 공과공부 시간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말씀을 하시며 눈물을 흘릴 때 나는 모든 것이 믿어졌어, 엄마. 설교자의 마음을 뜨겁게 하지 않은 진리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불로 전달할 수 있겠으며 자신이 애통하지 않는 복음 진리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애통하며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리스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 일생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둘로스 크리스토’, 여기서 노예라고 하는, 종이라고 하는 의미는 숙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숙명적으로 예수께 매인 사람이 되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활 사건입니다.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이것입니다. 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음모였습니다. 왜? 틀림없이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릴 것 같으니까 나무에 매달려 죽임으로써 신명기 말씀이 응하게 하여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나사렛 젊은이라고 하는 것을 백성들의 마음속에 각인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전통을 따라서 사울도 굳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허망한 풍설을 퍼뜨리는 인간들이 다메섹에서 출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제사상의 공문을 청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것도 대낮에 만났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었다면 부인하면 되는데 자신이 직접 만났고 그분과 대화까지 했고 그 찬란하고 눈부신 영광 앞에 엎드러져 버렸습니다. 이 똑똑한 젊은이 사울의 마음속에 영혼이 찢어지는 것 같은 모순이 밀어닥쳤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부활했다라고 하는 팩트였습니다. 부활에 대한 사실은 구약 성경에는 우리들이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부활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도 그 전통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부활했다고 믿은 모세,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에녹, 병거타고 하늘로 들려진 엘리야, 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죽음을 극복했거나 보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 매우 크게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죽었는데 살아났다면 하나님 이외에는 살리실 분이 없고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살리셨다고 하면 하나님께 크게 인정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면 저주하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주하셨다면 다시 살리시면 안 되고요. 해결될 수 없는 두 모순이 이 젊은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밀려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의 역사로 지성이 찢어지는 찬란한, 어두운 지성이 찢어지고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 신학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분의 저주받고 죽으신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었다면 하나님이 살리시면 안 되지만 그것이 대속의 죽음이라면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그 아들을 더 살리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대속의 위대한 교리가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한순간에 찬란한 빛이 들어오면서 저 구약의 역사를 꿰뚫으면서 제사제도 속에 내려오던 희미한 대속의 사상들과 이 사람이 익숙해져있던 헬레니즘, 정치적인 백그라운드가 되었던 로마니즘, 종교적인 백그라운드가 되었던 주다이즘까지 이 모든 역사와 지식의 세계에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찬란한 빛이 들어오면서 그는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메시지를 갖게 되었고 이것이 이 사람에게 있어서 ‘아남케’, 숙명이 된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모든 소명의 ‘코아’,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나 대 사도에게만 일어나야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목회자들에게 깊이의 정도와 차이는 있지만 핵심에는 반드시 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담금질을 통해서 그 사람이 기독교 설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을 선교사적으로 해석을 하면 선교의 새 장을 연 사건이겠지만 설교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한 번에 다량의 설교자들을 생산해내신 설교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왜? 그 사람들이 모두 집단적으로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체득하면서 그러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하는, 천하에 하나님이 구원 받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는 장엄한 확신에 사로잡힌 설교자들을 한꺼번에 양산해낸 사건이 바로 이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입니다.
그러면 저는 설교와 관련지어서 왜 이 말씀을 드리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설교자가 여기서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에 관한 것을 떠들면 그것이 모두 설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17세기에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가 이어지면서 종교개혁 신학의 정교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18세기 1725년경서부터 이미 17세기에 시작되었던 데카르트주의를 비롯해서 계몽주의가 밀려오기 시작하고 결국은 이 종교개혁의 장엄한 신학적인 물결들은 멈추게 되고 신학은 이성주의로 떨어지게 됩니다. 여기에 대한 반발이 독일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유명한 경건주의 운동입니다. 교리보다는 삶이라는 단순한 구호를 외치며 성경공부를 강조하고 사회에 복지와 구제에 대해서 눈을 뜨며 진젠도르프 백작이나 슈케나 프라헤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대대적인 신앙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200년 후 경건주의 운동의 모태가 되었던 할레대학은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는 관문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 신학이 좌경화 되어버리게 되고 이렇게 신학이 좌경화 되면서 이제 세대는 엄청나게 변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계몽주의라고 하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성경에 있는 기적과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의 교리와 진리의 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를 품게 되었습니다. 이때 교회가 한 일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도 너희들이 생각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계몽주의에 물든 많은 설교자들이 복음에 대한 체험이 없이 목회를 하기 시작하고 강단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찰스 에드윈 다간이라고 하는 전설적인 20세기의 설교역사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 책을 쓴지 벌써 10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까지도 주 교재로 사용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학자입니다, 그는 그 책 속에서 18세기말 19세기 이때에 독일교회의 형편을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서 주일날 선포되는 설교제목이 이런 내용입니다. 한 찬의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 천연두 예방주사 맞아야하나 말아야 하나, 짐승은 우리에 가두어두는 것보다 방목하여 기르는 것이 좋다, 주일날에는 생매장당하는 예수의 염(?),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문화의 말할 수 없는 즐거움, 실제로 주일날 설교되었던 제목들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설교자들이 목숨을 걸고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케리그마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밀려들어오는 계몽주의 사조가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강력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두 해전에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선교사이자 선교학자이던 한 분에게 동양인으로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김 목사님은 이 네덜란드의 유서 깊은 신학의 깊이를 알기 때문에 1년에 한 두 번씩 오셔서 돌아보고, 제가 1년에 한번‘씩 화란의 다량의 구입한 책들을 제 서재에 둡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광스러운 개혁주의신학 캘빈주의가 찬란하게 꽃피던 우리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단번에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무기력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는지 당신의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똑같은 질문을 당신의 나라 학자에게 설명했더니 간단하게 엔라이트먼트 계몽주의라고 하더라.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한국교회가 계속 부흥하는 것은 계몽주의를 안 겪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좋게 들으면 자랑스러운 애기지만 나쁘게 들리면 아직까지도 미몽에서 헤어나지 못한 무지한 백성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상 어느 시대건 계몽주의가 없었던 시대가 없었고 역사상 어느 시대건 복음이 이 세상의 지혜보다 더 훌륭하다고 세상이 생각해주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와 같이 발달된 현대인들이 믿기에는 너무나 미개하고 원시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 시대의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니 어느 시대인들 그런 생각을 안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그런 것들은 언제든지 있지만 그것들을 이기게 하는 두 가지, 한 가지는 뭐냐 하면 이 기독교의 진리를 개인의 체험의 수준이 아니라 사상화해서 그러한 계몽주의를 비롯한 이 세속적인 인생관과 세계관들이 가지는 한계를 드러내고 그리고 이 기독교의 진리의 총체적인 체계가 얼마나 신뢰할만한 진리의 체계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도록 지금 이 현실 예배당 속에서 매주 모일 때마다 복음의 감격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그것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한 번에 무너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패혈증이라는 질병을 알고 계십니까? 어떤 건장한 젊은이가 몇 달 동안 좀 무리를 했고 가족들에게 미안해서 가족들을 데리고 서해안에 놀러갔습니다. 바닷가에서 애들하고 조개를 잡고 놀았는데 저녁때 이상하게 시름시름 열이 나기 시작해서 부인이 감기약을 사다 먹여주었는데 그 다음날 죽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냥 맨발로 백사장을 걸었을 뿐입니다. 조개에 발이 베었습니다. 여기에 비브리오 패혈균이 들어왔습니다. 웬만한 사람은 그런 균이 들어와도 저항력이 있을 때는 이깁니다. 그런데 과로로 이 저항력을 다 상실했습니다. 그러니 이틀 만에 그냥 잠깐 사이에 죽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일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관점을 놓고 본다면 구약 성경에서 진리의 말씀을 외치다가 피 뿌리며 죽어간 구약 선지자들은 실패한 설교자들로 정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를 더 진전시키기 전에 여러분에게 촉구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매인 사람들인가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의미에 매인 사람들인가 그래서 정말 이 모든 인류와 인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및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어떤 구원의 길도 없다는 확신이 우리 속에 불타고 있는 것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남의 얘기 하지 말고 우리로 돌아가 봅시다. 여러 목사님들은 어린아이 적부터 부모의 서원을 받고 목사가 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다가 목사가 된 분들도 종종 있겠지만 우리 중 대부분은 다 세상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던 다른 일에 종사하던 사람들입니다. 저 역시 그랬고 추호도 젊었을 때, 어렸을 때 목사가 되어 교인들의 코 묻은 돈이나 받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가장 경멸하던 직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서 이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는지 한 번 생각해봅시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도록 만들었을까요? 큰 교회를 하면 받게 될 지도 모르는 좋은 대접이나 내 안에 있는 어떤 종교적인 꿈들이 성취될 것 같은 전망들이 우리를 여기로 내몰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빌어본 적 없습니다. 그냥 우리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의 지성을 찢고 들어온 그리스도 십자가의 장엄한 의미에 붙잡혔을 뿐입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그리고 보니까 내가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나의 간절한 소원은 이제 이 실망과 괴로움이 많은 허무한 세상을 모두 떠나서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괴로운 세상에 할 일 많으니 너는 나를 위해 너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길을 전하여 나 예수께 돌아오게 하라는 소명을 느꼈기 때문에 이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이 공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면 소명 아닙니다. 정말 소명 아닙니다. 60년대에 여대생들에게 앙케이트를 했더니 신랑감 후보로서의 목사가 이발사 다음이었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과연 그런 것들이 목회의 소명의 동기일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저는 지금 여러분이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하면서 기독교 설교자의 소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저와 여러분이 맨 처음 소명을 느꼈을 때에 우리는 다른 모든 세속적인 직업을 포기하고 이 길로 가도록 만들었던 그 의식적인 소명에 대한 기억으로 여러분을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그런 것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데 그럼 왜 우리는 도처에 눈을 뜨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과는 정 반대되는 이 사회의 현실,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아파하지 않고 애통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할 텐데 여기저기서 짓밟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텐데 하나님의 뜻이 좌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가 구현되어야 할 텐데 수시로 하나님의 왕국이 거부됩니다. 그런 현실을 예수님도 사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셨습니까?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우셨다는 기록은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한번은 ‘에다크’, ‘눈물을 흘리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고 두 번째 단어는 ‘에클라우센’이라고 해서 소리 내어서 방송대곡하는 동사가 등장합니다. 왜 그럴까요?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래핑 크라이스트’라고 해서 예수님이 활짝 웃으시는 그림을 만들어 전 세계 교회에 배포했지만 왜 성경은 그렇게 활짝 웃으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보도하지 않고 있을까요? 어느 신학자가 아주 훌륭한 설명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보시기에 세상에 웃을만한 일이 없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가까이 오셨을 때 통곡하며 우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예레미야의 마음속에 있었던 꼭 같은 종루의 어떤 어펙션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목회자들 속에 정말 그 눈물,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의미를 체득하고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오늘 이 교회와 역사와 특별히 교회 속에서 실현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운 눈물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한 웨슬리의 신학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뢰하는 것 한 가지는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웨슬리가 목회하던 예배당이 잘 보존되어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목사님들이 그 교회를 투어를 갔습니다. 가이드 하는 그 직원에게 한 한국의 목회자가 물었습니다. 그 부패하던 18세기 영국 사회에서 웨슬리 목사님의 혁혁한 성공적인 사역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직원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정말 알고 싶으십니까? 네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리고 그 목사님을 데리고 강대에 올라가서 그대로 있습니다. 자, 강대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무릎을 꿇었습니다. 자, 무릎 사이에 고개를 숙이십시오. 배가 나오면 무릎 사이에 고개가 안 들어가는 것 잘 아시지요? 거기까지는 따라할 수 있었습니다. 그 직원이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자, 이제 됐습니다. 우십시오. 그것이 바로 웨슬리 선생님이 하시던 일이었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저는 한 때 찰스 스펄전 목사를 깊이 존경했고 그의 설교를 모으는 일에 공을 들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이 스펄전이 서재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보니 기도하는 것 같았는데 가만히 보니 기도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울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설교자지만 그는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이 평생 통풍과 우울증으로 시달린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여보, 왜 그렇게 우세요? 스펄전 목사는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은 슬픈 날이야. 왜요? 당신도 알다시피 아침마다 일어나서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데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 여기에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데 아무 감동도 없어. 어쩌다 내 심령이 이렇게 말라깽이가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니 나 자신이 너무 비참해서 눈물이 나오는구려, 라고 했습니다.
자, 우리 목사로서 우리끼리 모였으니까 한 번 생각해봅시다. 목회를 하다보면 눈물 나는 때 많습니다. 교회에 너무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당회가 속상하게 할 때, 교인들에게 때로는 모함을 받을 때, 능력이 모자란다는 교인들을 구박할 때, 등등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괴로움 속에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는 우리를 겸손케 합니다. 그것 말고 이 비참한 인간을 위해서 그 좋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그것이 감사해서 흘리는 눈물이 우리의 일생의 목회 중 얼마나 될까요? 여러분은 너무 성숙하신 목회자들이 모인 모임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 제일 재미없는 모임이 목사들 모임입니다. 맨날 모여봤자 교회 땅 산 이야기, 성지순례 갔다 온 이야기, 말 안 듣는 장로 혼내 준 이야기, 그런 이야기입니다. 제일 가기 싫은 곳이 목사들이 모인 성찬 모임입니다. 교인들과 함께 성찬을 드릴 때는 그렇게 뜨겁고 눈물이 있는데 왜 그렇게 건조할까요? 우리 모두의 책임이겠지요. 그래서 결국은 사도 바울은 뼛속 깊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 20여 년 전에 저는 희랍어성경으로 갈라디아서를 읽다가 너무 충격을 받고 성경을 가슴에 안고 서재를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못 박혔나니’라고 하는 동사의 시제였습니다. ‘에스타우로마이’, ‘have been crucyfied’ 현재완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그것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고 그 의미를 아는 것도 과거에 일어난 사건인데 그 의미는 지금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그 시간까지 사도바울의 인생의 의미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설교를 사람들은 잘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목회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설교에 대해서 그게 목회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조차도 설교를 잘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교회가 정말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데 있어서 이것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설교를 잘 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간단하게 정리를 합디다. 저 사람은 설교에 달란트를 타고 났다고요. 물론 그 말을 전혀 말도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설교에 탁월한 달란트를 타고난 사람이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머지는 설교에 달란트를 타고 낳자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죽 쑤면서 설교를 하는 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 어디에서도 지지를 받을 수 없는 복음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이 가장 커다란 문제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설교자의 영적인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입니다. 자, 그냥 성장이고 뭐고 없어도 항상 이 마음속에서 단순하게 ‘아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못된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군요. 오늘도 예수님 십자가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납니다. 예수 나 위해 죽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당신위해 죽을 차례입니다.’ 아침마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최소한 이건 설교할 수 있겠죠? 예수님이 당신들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자는 지옥. 듣는 모든 사람들이 야, 저 설교는 진짜 자기의 모든 인격을 걸고 하는 설교구나 그렇게 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구원받았어도 여전히 죄성은 남아있고 죄성은 항상 하나님을 기뻐하지 못하게 하고 두려워하지 못하게 하고 즐거워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는 이렇게 끊임없이 이런 모든 악한 요소들과 더불어 싸우면서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성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가 그렇게 영적으로 성장해야 된다고 하는 것,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자 목회자가 영적으로 성장한다고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한가?
(예화) 어느 교인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맨 처음 장로교회 전도를 받고 장로교에 왔답니다. 왔더니 이건 맨 날 무슨 요즘은 그런 장로교회도 별로 없지만 어쨌든 교리만 설교하고 맨 날 뭘 가르친다고 그러는데 구름 잡는 것 같아서 자기하고 상관이 없더랍니다. 이 대체 구원을 받았는지 말았는지 그러다가 침례교회를 가게 되었답니다. 그랬더니 이건 가는 날부터 당신 구원받았냐고 구원 받은 게 몇 년 몇 월이냐고 집요하게 따지더랍니다. 결국 거기서 자기가 정말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답니다. 이게 시간이 흐르고 보니까 이건 한 두 번이지 맨 날 만날 때마다 며칟날 구원 받았냐 그것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순복음교회로 가니까 순복음교회에서는 막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비전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예수를 믿었으니까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위대한 길이 열렸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 너무 좋아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니까 한참 있다 보니까 왠지 영혼이 곤고하고 재미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기적도 체험하고 뭐도 해보았지만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장로교로 돌아오니까 이제 뭔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지 이해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예화는 장로 교인이 지어낸 예화입니다.
설교라고 하는 것은 잘하려고 한다고 해서 그 설교가 잘하는 설교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는 설교단에 한사람이 섰을 때에 일생동안 살아온 깨어지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선 모든 삶을 가지고 전 존재로 그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펄전이 설교하고만 내려오면 어떤 사람들이 “정말 은혜로운 설교였는데 준비하는데 얼마 걸렸습니까?” 그러고 물어보면 “항상 일평생”이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저보고도 그런 물어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설교가 몇 시간 준비하는데 걸렸냐고? 그건 알아서 뭘 하려고?
그래서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설교자의 영적인 성장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 어느 선배목사님이 그러시더군요. 3년마다 교회를 좀 교환했으면 좋겠답니다. 그러면 항상 신선한 설교를 할 수 있을 것 같답니다. 본인이 신선하다는 것이지 교인이 신선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영적인 성장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영적인 성장입니다. 이 영적인 성장은 이런 걸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말 안 듣는 장로들을 다루는 고도의 방법, 그 기술이 성장하는 것 이것 아닙니다. 교회를 지을 때 어떻게 금융을 일으켜서 돈을 빌려오는지에 대한 기술의 습득, 발전, 이런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경영에 노하우에 대한 숙달,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를 경영해 나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영적성장의 국면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성장의 국면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영적성장의 국면은 성숙입니다. 성숙. 그러니까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한 목회자의 정신과 영혼, 마음이 죄의 불결한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서 순결해져 가는 것, 더 고상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아름다운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 닮아가는 그 완성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이며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지닌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그래서 한 목회자의 아름다움도 그가 가지고 있는 지위나 지식의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이 되어가는 것, 영혼이 아름답고 예쁘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이 목회자에게 영혼을 주신 그 목적대로 작용하는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부단한 자기부인과 자기 와이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self-denial’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자기부인과 남의 부인으로는 안 됩니다. “너 그러면 안 돼. 너 때문에 목회가 안 돼” 이러면 그건 자기부인이 아니라 남의 부인입니다. 끊임없는 자기부인과 죄와의 싸움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는 가운데 아름다운 영혼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영혼을 보실 때에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을 보는 것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 라고 하는 그런 평가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영적 성장은 결국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소원은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소원과 구별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소원은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 영적성장의 핵심이 무엇이냐? 지식과 사랑입니다. 지식과 사랑. 지식과 사랑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한 지식을 함양함으로서 우리가 성숙해 질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속에서 두 가지로 제시를 합니다. ‘regulae credendi’, ‘praeccepta vivendi’ 직역을 하면 ‘믿어야할 규칙들’과 ‘살아야할 교훈들’ 이 두 가지의 지식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는 것과 믿는 것은 절대로 분리되지 않고 이 두 가지는 항상 기차 레일처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가 믿어야할 규칙들입니다. 그 믿어야할 규칙들은 우리가 결국에는 이성적으로 그것을 설득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초로 해서 우리들이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성령 충만하면 잘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잘 믿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면 잘 안 믿어집니다. 부패한 이성이 계속 믿음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가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은혜생활을 잘 해서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계속 살아나야 되고 우리 목회자는 목회자라는 이유 때문에 이미 믿음은 끝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성도만 못한 믿음을 가진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 앞에 언제나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 보아야할 주제입니다. 믿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잘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촉진하는 가장 중요한 길이 뭐냐 하면 성경입니다. 이 성경은 우리들이 믿어야 할 모든 규칙들을 모아놓은 집대성이고 엑기스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도 제가 목회자세미나 가면 가장 수강인원이 많이 모이는 강의제목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평생 설교준비 안하는 방법’ 정말 많이 모입니다. 평생 설교준비 안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은 공개를 안 하겠습니다.
그럼 뭐냐? 성경을 읽는 것이 믿음을 촉진하는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그래 성경을 한편으로는 작은 부분을 읽으면서 깊이 읽어서 그것을 신학적인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서 그것을 주석해내고 주석된 것들을 적용하고 그 속에서 진리를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위해서 하면 안 되고 어떤 식으로든지 설교를 위해서 그것을 해선 안 되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그 일을 해야 됩니다. 그러한 것이 성경을 통해 목회자의 믿음을 고양하는 한 쪽 날개라면 또 한쪽의 날개는 뭐냐 하면 성경을 많이 읽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매3 주5 하면 일 년에 성경을 한번 읽는답니다. 그렇게 3장씩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이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는 것과 하루아침에 딱 앉아서 한 30장을 한꺼번에 몰입해서 읽을 때에 다가오는 성경의 계시의 분량은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읽기에 열심을 내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잘해서 원어성경을 읽든지 아니면 원어성경을 옆에다 놓고 읽을 수 있을 정도면 excellent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안 되더라도 좋으니까 우리말 성경이라도 그렇게 작은 부분을 깊이 그리고 넓은 부분을 한꺼번에 빨아들이듯이 읽으면서 그 속에서 은혜를 받을 때에 우리의 믿음이 계속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요소가 뭐냐 하면 공부입니다. 공부. 공부. 학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이 뭐냐 하면 소수의 목회자들을 제외하고는 목사님들이 공부를 안 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어렵게 하는 아주 커다란 원인이고 더욱이 공부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목회자들이 매우 드물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목회자의 사명은 진리를 탐구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전하도록 소명된 이 복음은 이 세상에 모든 학문이나 철학적인 사조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하게 높은 가치를 지닌 위대한 진리의 체계이고 대치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은 우리가 그 위대한 진리를 복음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초월적인 지성으로 그것들을 단번에 발견하지만 그것들을 이 시대 속에서 복음이 아닌 혼잡한 사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을 해방하고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계몽주의의 언어를 빌어서 체계화 할 때에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고 믿는 사람들 안에서도 우리가 믿고 있는 아주 신실한 복음의 내용들이 순수성이 보존된 가운데에 지켜낼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역사적으로 중세와 르네상스의 연관성,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종교개혁과 개혁파 정통주의,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사실은 논구되어야 할 아주 중요한 역사인식에 있어서 주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뭐냐 하면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학문이 담겨져 있는 책들의 대한 독서를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포기합니다. 그리고 설교집, 매일 써먹을 수 있는 예화, 이런 책들을 읽는 일에 시간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이게 어떠한 확고하고 굵직한 사상을 가지고 묵직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감히 대항할 수 없게 하는 어떤 권위를 가진 그런 것들로 등장 하지 않는 거라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신학이 어떻게 학문이냐?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신학이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하고 이성의 논구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앙망하는 신실한 신앙에 의해서 초자연적인 지식들이 명제로서 우리의 마음속에 쌓여진다는 점에서는 이것은 학문이 아닙니다. 그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습득된 명제와 신학적인 진리의 주제들이 이것들이 변화무상한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모습을 갖추고 독자적으로 이 세상 사람들이 성경 없이 만들어낸 인생관과는 어떻게 다른가하는 것을 보여주고 그것과 대항하고 거기로부터 오는 공격에서 기독교복음의 순수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체계와 지식의 정리가 필요하고 분석과 종합이 필요한데 이것은 정확하게 이 세상에 있는 학문의 규칙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따르지 않으면 절대로 그런 순수성들을 이겨낼 수 없는 것입니다.
‘제임스오르’라고 하는 신학자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역사를 회고해볼 때 진지한 논리와 학문의 틀을 빌지 않은 모든 신앙운동들은 큰 열매가 없이 끝나거나 혹은 불건전한 것으로 변질되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제 말씀드린 ‘복음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자’ 라고 하는 그 구호는 아주 낭만적인 구호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개혁신학을 붙들고 있다면 그런 구호의 낭만성과 현실성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요? 죽도록 공부해야 합니다. 마치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그는 학문에 몰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목회도 바쁜데 공부를 합니까?
(예화) 저희 교회에 부목사 한사람이 있었는데 교역자회의 시간에 자기가 얼마나 바쁘게 사역하고 있는지를 장황하게 아폴로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 너무 바쁘겠구나. 어쨌든 쉬면서 잘해라” “목사님 얼마나 바쁜지요? 화장실 갈 시간이 없습니다.” 그날 저녁에 우리 두 부부가 극장에서 만났습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반드시 합니다. 결국은 하기 싫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미국에 가서 집회를 했는데 어느 젊은 후배들이 와서 그럽니다. “목사님 저 책을 읽다가도 말입니다. 이게 뭐 책을 읽으면 왠지 목회의 마음이 심는 것 같고 뭐 이래서 무슨 책을 읽어야 되는지를” 그래서 “내가 그대 같은 사람들에게 해주는 두 글자가 있다. 닥. 일.” 무슨 뜻인지 감이 안 오세요? “닥치고 읽어라. 그 후에 얘기하자. 닥치고 읽어라” 그래서 어떻게 하냐 하면 우리의 마음을 따끈따끈하게 해주는 좋은 설교자들의 설교집이나 훌륭한 위인들의 전기, 그 다음에 현실세계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들, 이것을 읽는 독서와 묵직한 신학서적을 읽어가는 이 독서를 항상 균형 잡히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몇 종류의 책이 있는데 잠 올 때 침대에 누워서 읽는 책이 있고 화장실에서 변 볼 때 읽는 책이 읽고 짬나는 시간에 소파에 기대서 읽는 책이 읽고 책상에 정자세를 하고 앉아서 노트까지 옆에 놓고 읽는 책이 있습니다. 자연과학이나 이런 책들은 화장실에서 읽으면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묵직한 신학 책들은 책상을 옆에 놓고 노트까지 펼쳐놓고 읽어야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참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한 20여 년 전에 그러니까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칼빈에 깊이 심취했었고 목회를 하면서는 존오웬이라는 위대한 신학자를 만났습니다. 제가 그전에는 청교도에 깊이 심취해서 지금도 영국 청교도 책들을 한3000권 이상 수집을 했습니다만 오웬을 만나고 나서는 모든 청교도 신학자들은 시시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거인입니다. 나머지 책들은 그 분의 책을 읽고 나니까 초등학교 학생들 책 같습니다. 깊이가 없습니다. 그분의 책을 20년 정도 탐독을 했습니다. 아마 그것 쉽지 않을 것입니다. 16세기 영어니까 영국 사람을 줬는데도 그 책을 못 읽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난분이 ‘아우구스티누스’ 제 일평생 잊을 수 없는 위대한 신학자였고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책을 읽었지만 단 한 번도 이 책의 저자가 천재일거라고 생각해 본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교만이 아니라 느낌이 그랬습니다. 그냥 뛰어나다는 정도였고 칼빈 선생도 뛰어난 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저는 온 몸이 떨리는 감동 속에서 무릎을 꿇고 ‘당신은 천재입니다.’라고 고백을 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15여년 이상 탐독을 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만난사람이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였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목회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아주 전형적인 사람이었고 오늘날 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이 전 세계에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 것도 21세기의 이 현대의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그 신학의 소위 이야기하는 ‘relevance’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몇 해 전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명한 연구가인 조지마스틴 교수를 만날 수 있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강가에 레스토랑에 식당에 앉아서 점심을 함께 나누며 우리는 몇 시간에 걸쳐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토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노학자는 현실교회에 대해서 깊은 개탄을 토하셨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무 피상적이고 가볍다는 것입니다. 깊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으로 돌아가서 무엇인가 이 요동치는 이 사상을 기독교의 확고한 진리로 붙들어 줄 수 있는 그런 사상적인 목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근데 제가 그분에게 말씀드린 것 가운데 하나가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해서 그분의 저작이 28권 정도가 나왔습니다. 그걸로 출판이 끝났습니다. 한 18000 페이지 정도 되는 책입니다. 20년 가까이 탐독을 해왔습니다. 거의 읽었습니다. 어디를 펼쳐도 정말 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런 위대한 신학자가 될 수 있었던 원천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탐구하면서 제가 18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에 눈을 뜨게 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아무튼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에 의하면 목회자의 임무는 뭐냐 하면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목회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우리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은 우리의 설교 속에 죽고 사는 신앙의 결단뿐만 아니라 무엇인가 한편의 설교를 들었을 때 내가 이제껏 살아왔던 인생관과는 다른 어떤 인생관이 저 설교자에 의해서 선포되고 있구나. 그리고 저 설교자는 나와는 다른 인생관을 따라 살기 때문에 너무나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사는구나. 그 설교를 이해하는 많은 성도들도 그렇게 보이는 구나라고 하는 것이 최고의 선교입니다. 그것이 바로 설교에 있어서 사상의 중요성입니다.
한 5년 전에 어느 잡지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인터뷰 좀 하세요. 무슨 잡시사인가 했더니 그냥 기독교 잡지사가 아니라 그냥 세상 잡지사입니다. 그런데 세상잡지사에서 목사인 나를 왜 인터뷰를 하려냐 했더니 사회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이렇게 하다가 이제 종교순서가 됐는데 불교는 지난번에 했고 이제 기독교순서가 됐는데 당신하고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설였습니다. 그랬더니 주위에서 선교적으로 도움이 되니까 한번 해보라고 그럽니다. 왔습니다. 당연히 그 기자들은 불신자입니다. 그래서 대화를 했습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되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목적 그리고 천지를 창조하시는 것과 인간을 지으신 것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이 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불행해지는가?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21세기에서 이 세계의 한 일원으로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슨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고 해서 한 시간을 인터뷰를 했습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서 이 기자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왜요?” “제가 개신교 목사님들 여러분 인터뷰를 했거든요.” “네” “그런데 목사님은 다르셔요.” “뭐가요?”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아요” “그럼 뭐 같아요?” “스님 같으셔요.”
그때 제 마음속에 너무 아프게 다가온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불신자의 눈에도 스님은 철학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개신교 목사는 사업가로 보이는 것입니다. 사업가. 근데 사실은 우리 기독교가 가장 아름다운 사상, 완전한 하나님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종교 아닙니까? 그러니까 치열하게 공부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한해에 한학기라고 까지는 말 못하겠는데 한해에 한 키는 읽어야 됩니다. 그것도 묵직한 신학 책들을. 그럼 언제 목회하느냐? 덜먹고 덜자고 덜 놀고 하시면 됩니다. 공부해야 됩니다. 특히 여기 젊은 목사님들은 절대로 공부안하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치열하게 공부하셔야 됩니다. 더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접겠습니다.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성장의 또 하나의 요소가 무엇이냐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 사랑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사랑을 성장시키실 때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성장시키시죠?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미셀러니(miscellany)에서 하나님이 우리인간에게 사랑을 주시는 방법을 두 가지로 제시 했습니다.
첫째는 ‘physical’ 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과 회심입니다. 한사람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죽은 영혼을 살리심으로서 그에게 예전에 없던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을 확하고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하고 나면 한순간에 사랑의 대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놀랍게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내안에 막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그 사랑이 나를 강권 하시는 도다.” 내가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그 사랑이 내안에서 역사해서 그런데 하나님이 항상 사랑을 이런 식으로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두 번째 주시는 방법이 설복적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설복적 방법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설복적 방법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믿음과 이성의 추론을 통해서 그 하나님 앞에 승복하게 만들고 이것이 단순한 논리의 승복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승복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그라티아(gratia)’ ‘카리스(Charis)’라고 할 때에 이 은혜는 성경에서 크게 세 가지 용례로 사용이 됩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구원의 길 자체가 은혜 ‘그라티아(gratia)’ 라고 묘사가 됩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객관적인 호의로서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런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호의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 사용되는 용례가 세 번째 용례인데 이게 주관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형이상학적으로 정의를 내리자면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를 행할 수 있게 만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감화.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 은혜의 결과는 마지막 남는 결과는 사랑입니다. 사랑. 이 사랑이 충만하게 남아서 그 사랑이 없었더라면 행할 수 없었을 어떤 도덕적인 의무들을 완수하고 끊임없는 자기극복과 자기 죽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예수를 품고 살아가는 그 생활에 만족하는 것, 오늘 아침 우리 박 목사님 설명에 의하면 칼을 품고 살아가던 나를 버리고 예수를 품고 살아가면 끊임없이 손해를 보고,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고, 끊임없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도 그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정신과 영혼의 힘, 그게 결국은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결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모든 은사보다 가장 뛰어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불렀던 이유는 그 은혜가 결국은 사랑을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영적성장의 또 하나의 중요한 국면을 발견하게 되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서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야 됩니다.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자신 안에 꽉 찼을 때에, 이 물이 이렇게 꽉 찼을 때 흘려서 넘치는 것처럼 이렇게 우리 안에서 진리가 그 무엇이 사랑과 함께 넘쳐서 흘러나오는 자기 존재의 발현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설교의 발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간단하지 않습니까? 비록 부족해도 전도를 열렬히 하는 목사님은 최소한 한 가지 설교는 자신 있게 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해야 합니다.”라고 설교할 때에 삶이 묻어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책에서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모두스 비벤디 꼬삐아 도켄디’ ‘모든 가르침의 풍부함은 삶의 방식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어떠한 삶을 사느냐에 의해서 가르친 내용은 풍부해지게 됩니다.’ 라고 하는 얘기입니다. 결국 우리의 목회사역은 무한정 계속되는 여정이 아니라 원하든 원하지 않던 우리는 조만간 목회사역을 끝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마지막에 남는 그 무엇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저는 교인이 1000명 정도 모였을 때에 새삼스럽게 위임식을 했습니다. 장로를 처음 뽑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정말 부족한 인간을 목회자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두 가지 소원을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설교자로서.
그 첫째는 뭐냐 하면 ‘언젠가 나이 70되면 타의에 의해서라도 마지막 우리 교회를 사임하는 날이 있을 턴데 그때가 살아온 날들 중에서는 우리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날이 되고 앞으로 살아갈 날 중에서는 제일 조금 예수님을 사랑하는 날이 됐으면 좋겠다.’ 이것이 한사람의 신자로서의 소원이었고 설교자로서의 소원은 ‘20년 동안 5216편의 설교를 했다니 앞으로 70세까지 설교를 하게 되면 8000편 쯤 설교를 할 턴데 어떤 교인은 내 설교를 30년 이상 들었을 턴데 그 교인조차도 마지막 설교를 하고 떠나는 그 날에 본문을 읽을 때 전혀 무슨 설교가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는 설교의 깊이를 가진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결국 설교자의 삶도 목회자의 생애도 모두 잠시 썼다 내려놓는 감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은 이 믿음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간 한사람의 설교자로서 단지 설교를 전달한 강단 꾼이 아니라 전하고자하는 진리를 온 마음을 다해 탐구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살려고 부족하지만 몸부림 쳤고 마지막에 그 진리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설교자의 퇴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마음을 크게 울렸던 우리 선생님 얘기 하나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큰 복이 있다면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대부분은 이미 여러 세기 전에 죽은 선생님들이지만 살아있는 선생님들도 몇 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그 중에 한분이 총신에서 학장을 지내셨던 이상근 목사님이셨습니다. 주석을 쓰신 그 분 아닙니다. 제가 몇 해 동안 그 분의 조교로 섬겼고 사랑을 참 많아 받았습니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의 집회를 갔을 때 주최 측에서 디즈니랜드를 구경시켜준다 그래서 난 필요 없고 우리 선생님 한분만 찾아 달라 그랬습니다.
드디어 수소문을 해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찾아가 뵈었습니다. 꽃바구니를 들고 과일 바구니를 들고 그리고 갔습니다. 목사님 그때까지 살아계셨습니다. 아파트에서 쓸쓸히 혼자 살고 계셨고 사모님은 7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 목사님의 연세 96세였습니다. 그리고 저를 한참 설명을 드리니까 알아보십니다. 그리고 책을 한권 드렸더니 읽으시면서 “오오, 우리 김 목사가 개혁주의 구원론 조직신학을 한권 썼구먼.” 그리고 제가 큰 절을 올렸습니다. 작은 아파트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다리가 아프셔서 이렇게 뭔가를 짚고 다니시면서 손수 뭐를 떠서 마시고 그러시면서 사셨습니다. 얼마나 마음 아픈지 제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얼마나 외로우세요?” 울컥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빙긋이 웃으시면서 “외롭긴 뭐가 외로워. 여기는 뭐 내가 나 혼자 있나? 우리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데. 누워서 책도 읽고 기도도 하고 우리 예수님도 생각하고 그러면서 지내면 안 외로워”
(찬양)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목사님 댁을 나와서 차를 타고 오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과연 내가 이렇게 인생을 살면, 이렇게 목회를 하면 언젠가 교인들도 다 내 곁을 떠나고 그럴 리는 없지만 우리 집사람도 나를 놔두고 먼저 하나님께로 가고 그리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외로운 방에 홀로 있을 때에도 내가 저렇게 해맑게 웃으며 ‘외롭긴 뭐가 외로워 우리 예수님이 나와 항상 함께하시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러면 나는 한사람의 목회자로서,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저 선생님처럼 될 수 있을까?
명성도 사라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 쳐주던 목회의 성공적이고 기록적인 사역도 잊혀 집니다.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고 그리고 풀잎의 맺힌 이슬과 같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우리가 처한 모든 삶의 정황 속에서 변함없이 우리 주님을 사랑했던 한 구도자의 인격이, 한 하나님의 자녀의 인격이 마지막에 우리 안에 남는 것 아니겠습니까?
끝으로 일제 강점기 때 목사였던 제가 좋아하던 ‘이산 김광섭’ 이라고 하는 시인이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때로는 웃기도 하려니와 때로는 울기도 하려니와 그러나 젊은 새의 꿈은 항상 나르는데 있나니’ 우리 목회자는 천상을 향해 기상하도록 부름 받은 젊은 새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날마다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되어서 우리가 사랑하시는 주님을 우리의 혈관의 피가 식을 때까지 우리의 입속의 혀가 굳어질 때까지 전파하다가 우리 모두 죽읍시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