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예배의 회복
(200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참된 예배의 태도(요4:23下) 2007.8.12 주일오전 1
2. 설교자는 누구인가(눅20:14-15) 2007.8.26 주일오전 12
3. 자신을 드리는 헌금 (고후8:2) 2007.9.9 주일오전 25
4. 더 값진 예물(시51:17) 2007.9.16 주일오전 34
참된 예배의 회복 1
1.참된 예배의 태도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하)
I. 본문 해설
II. 우리의 예배 태도는 어떻습니까?
A. 공적인 예배의 중요성
B.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C. 약속 있는 은혜의 수단
III. 참된 예배의 태도
A. 마음을 다하는 예배입니까?
B.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IV. 결론과 적용
2.설교자는 누구인가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눅20:14-15)
I. 유대인이 복음을 거절한 방법-설교자의 권위를 의심함
II.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본 설교자
A.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
B. 설교자의 고난과 하나님의 사랑
1. 설교자의 고난
2. 하나님의 사랑
C. 설교자는 죽어도 설교는 남는다.
III. 결론과 적용
3.자신을 드리는 헌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2)
I. 본문 해설
II. 마게도냐 교회에 주신 은혜
A. 넘치는 기쁨
B. 사랑의 고백
III. 자신을 드리는 헌금
A. 힘에 지나도록
B. 자원하여
C. 자신을 주께 드리고
IV. 결론과 적용
4.더 값진 예물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I. 본문 해설
II.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III.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IV.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
Ⅴ. 더 값진 예물이 지금 있습니까?
Ⅵ. 결론과 적용
참된 예배의 회복 1
1.참된 예배의 태도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하)
I. 본문 해설
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 특별히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사람들이 모여서 주님을 경배하는 공적 예배의 제도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께 대한 찬란한 계시를 보여주었고 그것을 통하여 사람들은 자기를 창조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든지 그 찬란한 자연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함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였고 그 예배의 정신으로 땅을 정복하며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도록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그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은 상당부분 하나님께로 되돌아갔고 더 심각한 것은 인간의 영혼 안에 자신이 타락한 죄로 말미암는 벌이 내렸으니 이는 죄에 대한 욕망과 영혼의 어두움으로 마음이 찢어진 것이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은 나를 경배하지 말고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외치건만 무지한 인간들은 바로 그 달과 별과 해와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을 경배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자연적인 우상숭배입니다.
II. 우리의 예배 태도는 어떻습니까?
A. 공적인 예배의 중요성
하나님은 타락하자마자 인간에게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예배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아담의 자녀인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기억하게 됩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 그 제사가 열납 되지 못하였으나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열납 하셨습니다. 그 제사를 통해 아벨은 하나님과 교제하였지만 가인의 마음은 그 후에 하나님을 향해 더 닫히고 강퍅한 마음이 되어서 결국은 영적인 시기심으로 자기 아우를 돌로 쳐 죽이는 끔직한 살인자가 되었으니 예배의 실패가 한 인간을 어떻게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해괴한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이 더 이상 창조의 목적을 이룰 수 없게끔 이 땅을 더럽히는 것을 발견하고 이 땅과 함께 고통 하는 모든 이 세상의 생물들을 홍수로 쓸어버렸습니다. 다시 건설될 이 지상의 나라를 향해 다시는 이런 재앙을 베풀지 않고 복 주시리라는 그 과묵스런 약속이 주어진 것도 노아와 가족들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때 주어진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하면서 그 고난과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또한 주어진 제사의 제도를 통해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예배의 경험을 통해서 그 고단한 광야의 삶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 예배에 끝까지 성공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퍅한 마음을 품고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하늘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 날마다 기적을 보며 양식을 먹었지만 그들이 예배드리기를 슬퍼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약속의 땅을 바라볼 뿐 광야에서 죽어갔던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후 하나님께서는 성막과 성전을 이어 하나님을 만날 장소를 예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하느냐 하는 공적인 예배의 상태는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과 국가의 상태를 말해주는 동시에 이후에 국가와 나라, 민족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점치게 해주는 예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피를 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그들을 참된 예배로 돌아가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들이 복의 근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에 의해 중대한 심판을 받고 멸망 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하면서도 외쳤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그때에 예배의 타락상은 극도에 달했습니다. 제사보다는 제물에 눈이 먼 제사장들과 하나님의 율법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백성들의 두령들, 그들의 본을 따르면서 하나님 없이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는 막 되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릇된 예배행위가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시대에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돌아온 그들이 가장 감격하며 하나님 앞에 바쳤던 선물은 예배였습니다. 그 속에서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며 영광과 함께 즐거워하였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백성들은 그 땅의 이방 풍속에 젖어 타락하게 되었고 이때 그 예배는 다시 땅에 떨어졌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한 행실을 보며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 앞에 엎드려 통곡하던 그 광경은 바로 당시에 망해버린 이스라엘의 예배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한 행동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면서 서기관들의 냉랭한 예배, 마음이 드려지지 않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참 예배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일어난 변화는 예배의 변화였습니다. 모일 때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정직한 복음의 선포 속에서 경험하고 자기들이 나무에 못 박여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완전히 세워지고 교회의 시대가 계속된 뒤에도 영광스런 복음으로 말미암아 확장되는 교회를 짓밟아 버리려고 하는 사탄의 궤계는 성도들의 마음에 침투하여 그 예배를 더럽히는 것으로서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바로 이 두 사람의 탐욕으로 예루살렘의 교회 전체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지 않는 본보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시대가 전개되면서 사람들은 이제 이 세상의 풍속에 빠져서 모이기를 싫어하고 예배드리기 위해 한 공간, 한 장소, 한 시간에 모이는 그것들에 대해서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더군다나 로마 제국 시대 핍박이 시작된 이후에 이렇게 공적인 예배를 지키며 모이는 일은 때로는 생명을 건 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향해 피어린 절규를 외칩니다. 함께 모여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무리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그렇게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위대한 전망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한 곳에서 전심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를 경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며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 그분의 사랑과 생명을 경험하는 것은 종말 이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경험할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복이 이 말세의 시대를 뚫고 우리들에게 스며들어오는 것입니다. 오지 않은 시대를 우리의 마음 안에서 영 안에서 예배를 통해 미리 맛보므로 가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B.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그러나 오늘은 이 예배가 거의 변질되어서 참된 복음적인 예배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마치 공연을 보는 것처럼 예배에 참여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태도까지도 이미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라고 하는 정신이 현저히 사라져간 가운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백화점에서 바겐세일을 해도 15분 전에 가서 줄을 서는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올 때는 예배시간이 15분 지나도 꾸역꾸역 예배당으로 몰려오고 30분이 지나서도 어슬렁어슬렁 교회에 오는 이미 마음에 하나님을 떠난 이런 예배자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에 참석하고서도 예배에 대한 깊은 자신의 태도에 대한 자각과 참회의 눈물은커녕 그 예배시간에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는 형식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한 사람들은 이런 예배의 형식조차도 멋대로 짓밟아 버리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이 발달되어 교통도 불편하고 거리도 멀고 날도 더워 자신이 불편하면 집에서 소파에 앉아 예배를 드립니다.
C. 약속 있는 은혜의 수단
그 예배가 그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말은 두 손을 들고 찬양함으로써 여러분들의 왼손과 오른손에서 주님이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환자가 아닙니다.
예배는 삼중의 구조를 가집니다. 제일 넓은 의미의 예배가 있습니다. 삶으로서의 예배입니다. 이 모든 삶 자체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드리는 넓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2) 삶 전체가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면서 그 분을 사랑하고 섬기며 그 분의 생명과 사랑을 이 모든 인간과 피조세계 속에 전달하면서 사는 것이 이게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한 예배가 참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예배, 사적인 예배가 하나님 앞에 잘 형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적인 예배는 특별히 많은 형식이 필요 없습니다. 오늘 아침 열린공간 마당에 나와서 하나님을 마음으로 찬양하고 성경 한 구절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해도 훌륭한 개인적인 예배입니다.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는 사적인 예배의 아주 대표적인 전형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이 개인의 경건생활 자체가 넓게 보면 모두 사적인 개인적인 예배입니다. 이 개인적인 예배가 잘 이루어질 때 넓은 의미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구석구석 뛰어 들어간들 자기 안에 넘치는 하나님의 넘치는 생명과 사랑이 없는데 이 세상의 죽음과 이 세상의 많은 정욕에 자신이 잠식당하는 것입니다.
이 개인적인 예배가 아주 풍성하기 위해서는 제일 가운데 공적인 예배가 계속 솟아나는 샘물처럼 강력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이 넘쳐나야 합니다. 거기서 솟아난 것이 개인 예배의 뜰을 적시고 개인 예배에서 풍성해진 것들이 넓은 의미의 예배인 삶 구석구석에 뻗어나가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전달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처럼 예배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가고 넓게는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도 하나님을 예배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 개의 예배의 지평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세 개를 모두 포괄하는 전 삶을 포섭하는 거기에서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이것은 두 번째, 세 번째 예배의 영역에서 나타나게 될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높아지심의 핵심이 됩니다.
III. 참된 예배의 태도
A. 마음을 다하는 예배입니까?
예배 중에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엇을 돌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미친 듯이 찬양을 하고 예배 속에 공연을 도입하고 만족스럽다는 것이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을 돌린다는 말을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아,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하고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살아온 사람들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구나, 의로우시구나, 나 같은 인간은 어떻게 살까? 하고 엎드리면서 참회하는 것이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충성스럽게 살았던 사람들은 “아, 하나님이 여기 계시는구나.” 주님을 위해 살려고 분투할 때 많은 상처와 눈물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위로해 주시는구나 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던 사람들은 이 모든 삶이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덕분에 살았다고 하는 것 때문에 다시 자신의 삶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앞에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핵심은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입니다.
예배가 재미가 없어요. 너무 지루해요. 설교가 너무 길어요. 못 알아듣겠어요. 조금 더 흥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시대에 뒤 떨어져요. 모두 채워주면 마지막에 오는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까요? 예배 시간이 짧아지면 설교가 쉬워지면 보아서 즐겁고 들어서 기쁜 다양한 순서들이 포섭되면 편안하고 좋은 인테리어 이런 것들이 마련되면 죄인은 엎드려지고 고난 받으며 산 사람은 위로의 눈물을 흘리고 주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거기에서 목매어 노래 부르게 됩니까? 목사님, 우리 교회는 예배당이 너무 길어서 예배에 집중이 안돼요. 천장이 높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면 그렇게 됩니까?
B.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영광을 돌린다는 뜻은 목적입니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행복은 인생의 목적입니다. 돈이 없으면 행복해질 것 같지 않아요. 계획을 세워서 절약하며 열심히 돈을 벌어요. 돈 버는 것은 목표이고 행복해지는 것은 목적입니다.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면 목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지 못한 어느 멍청한 인간이 자신의 죄에 대해 참회의 눈물을 흘리겠어요? 하나님 못 만난 인간이 고난 속에서 위로를 받으면서 감격을 하면 정신병입니다. 오늘 예배당에 올 때 목표가 하나님 만나는 것입니까?
예배 시간이 늦었는데 젊은 부부 가운데 6살 난 아이 손을 잡고 예배당을 향하고 있었어요. 예배당 가까이 왔을 때 이 아이가 엄마, 아빠 번갈아 보며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 오늘 예배 시작되면 졸지 마. 나 창피해 죽겠어.” 그리고 예배 시간 5분이 늦어서 엄마, 아빠는 허리를 굽히고 은혜를 사모한다고 앞자리를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일어났다 앉았다 찬송 부를 때까지는 견뎠는데 설교가 시작되면서부터 엄마는 좌우운동, 아빠는 전후운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참다못한 이 아이가 벌떡 일어나서 엄마, 아빠를 깨웠습니다. “엄마, 아빠 빨리 요금 내고 집에 가자.”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하이로다.]
설교가 시작되면 그 말씀을 깨달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예배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데 민방위 교육 온 것 같습니다. 민방위 교육은 가자마자 구석진 자리로 갑니다. 가운데 자리는 비워 놓습니다. 우리 예배 같지 않습니까? 일간 스포츠 뒤집어쓰고 강사야 뭐라고 지껄이든지 잠을 청하기 시작합니다. 도장 찍으러 온 것이지 처음부터 그 교육에 참여할 의사가 없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어 설교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견뎠는데 설교가 시작되면 주보에 낙서하는 사람, 주보에서 오자 찾는 사람, 뒤에 헌금 액수 들여다보는 사람, 감사헌금 한 사람, 십일조 한 사람 명단 들여다보고 가로로 세어보고 세로로 곱해보고 헌금 총액 가지고 나누어보고 곱해보고 빼보고... 주보를 왜 안 만드는지 알겠죠? 제가 은퇴할 때까지 안 만듭니다.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주보 구석구석 읽어보고 낙서 써서 옆 사람과 대화 나누고 다리는 꼬고 그러면서도 시간을 다 채울 수 없어 좌우로 옆으로 졸기 시작합니다. 졸다 고래를 끄덕이는 사람, 성경을 떨어뜨리는 사람, 천국보다 높은 어디서 전화가 왔는지 설교 시간에 핸드폰을 입에 물고 뛰는 사람, 거기 하나님 안 계십니다. 만약에 하나님 거기 오시겠다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오시지 말라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거기 가셔서 모욕을 받으시냐구... 경건하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이 거기 오시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전달해야 할 중차대한 사명을 받은 설교자는 성도들을 웃게 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많이 웃고 재미있었지만 가슴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이 올 때보다 더 무거운 걸음으로 교회당을 빠져 나가는 그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예배가 끝났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급합니까?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면 감사해서 자리를 못 뜰 것이요, 못 만났으면 통탄스러워서 회개를 할 것이고 하나님 앞에 주님의 얼굴을 대면하지 않을 수 없는데 축도가 끝나기 무섭게 뛰는 사람은 누구이고, 예배가 끝나서 정문에서 교인과 인사하기 위해서 설교자가 나가지도 못하게 통로를 가로막고 먼저 나가겠다고 등을 밀고 사람을 밀치면서 세로로 몸을 세우고 옆걸음을 하는 그 모습이 영화관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지 예배당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건물 먼 곳에서 교회당 건물을 보면 시커먼 교회당 문이 열리면서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토해 놓듯이 구슬처럼 그 돌계단을 따라 마당 아래로 쏟아져 내려옵니다.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 인간들 중 95%는 통계에 의하면 방금 전의 예배 시간에 본문 어디를 설교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 중의 절반은 신약이었는지 구약이었는지도 생각이 안 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주일 동안의 패배는 맡아놓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주먹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계단을 걸어 나와도 이 세상이 바뀔까 말까인데...삼일절 기념식도 그렇게는 안합니다. 육이오 기념식도 그렇게는 안합니다. 죽은 가족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 사람이 삶 어디서엔가 하나님을 만난다면 기적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이 일주일 동안 핵심이 되는 공 예배에서 은혜의 물이 없는데 그런 사람 일주일 살면서 사적인 예배에서 풀이 돋고 꽃이 필 리가 있겠습니까? 사적인 예배에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경배가 없는데 이 더럽고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일주일 동안의 삶 속에서 그 자리가 예배의 자리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을 알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나누어 주기는 커녕 세상에 나가서 실컷 짓밟히고 참회해야 할 죄를 실컷 짊어지고 다음 주일 교회 오는데 그러면 더 많이 참회할 것 같은데 마음은 굳어지고 심령은 더 교만해지게 됩니다.
하나님 만납니까? 여러분 중 대부분은 모두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일 것입니다.
제가 가슴 아픈 이야기 오늘 할까요? 아프더라도 들으십시오. 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막 부어지는데 설교를 할 수 없는 심정을 아세요? 이런 이야기하면 충격 받지 마십시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말씀을 막 부어주시는데 그것을 창고에 넣어두고 혼자 즐거워하고 다른 것을 꺼낼 때도 있습니다. 설교자가 그러면 되겠느냐고 그럴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그렇게 만듭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시간이 길다고 합니다. 어렵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어느 교인이 교인에게 전화를 해서 이제 교회 나와 어려운 설교 끝났어. 웃음이 나오세요. 그렇게 쉽고 즐거운 것을 원하면 영화관을 가세요. 아니면 주일 낮 11시에 코미디 프로를 틀어놓고 여유롭게 보십시오. 마음을 드리지 않는 예배가 무슨 예배입니까? 그러니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습니다. 매주는 못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몇 주에 한번쯤은 이 예배의 현장이 눈물바다가 되어하지 않아요? 우리가 일주일 동안 짓는 죄의 분량을 보면 가끔은 예배의 시간에 홍수와 같이 눈물이 쏟아져야 하지 않아요? 여러분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서 목덜미까지 흘러내린 적이 언제 입니까? 예배가 끝났는데도 나를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분의 마음에 상처와 모욕을 드린 것이 너무 아파서 자리를 뜨지 못한 적이 언제입니까? 옆에 사람은 주님 만나서 기도하는데 도대체 어디를 가는지 그 기도하는 사람 다리와 허리를 밀치면서 굳이 바깥으로 뛰어나갑니다. 그래서 가는 곳이 화장실 아니면 식당의 줄서는 것입니다. 이러고도 여러분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대에 돈을 가득 채워주시도록 사업마다 형통함을 주시도록 자식들은 승승장구하도록 집은 더 큰 집으로 옮아가고 투자한 부동산을 오르기를 기도하시겠죠? 하나님 관심 없으십니다. 짐승과 같이 살아가는 자기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든지 영혼이 그런 상태가 되었는데 하나님께 무슨 기쁨을 드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런 거의 배교에 가까운 우상에 바쳐도 우상도 거절할 그 쓰레기 같은 예배를 드리면서 또 필요할 때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복을 구합니다. 하나님 없는 삶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설교하는 설교자, 그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가치는 목회에서의 성공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서 연말이 되었는데 장로라는 사람이 목사를 찾아왔대요. 작년 12월 마지막 주 주보와 금년 12월 마지막 주 주보를 펼쳐놓고 “목사님, 보십시오. 작년에 281명이 모였는데 올해 마지막 주에 282명입니다. 많은 부교역자들과 그 많은 사례비 성도들의 봉사 그거 사용해서 겨우 한명을 늘려 놓았습니까? 언제 사임하시겠습니까?”
기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안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주워 모아서 어떻게 하는데요? 꾸역꾸역 모인 그 사람들이 주님 만나고 깊이 변화되면 할렐루야입니다. 변화 안 되면 그 변화 안 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뭉쳐서 교회를 허물어 버리는 것 아세요?
오늘날 우리는 이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그칠 줄 모르는 분열의 영, 갈갈이 찢어지는 분리의 정신에 대해서 특단의 참회를 해야 합니다. 교회가 찢어지고 교단이 찢어지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교회를 찢어버리는 것쯤은 아주 우습게 압니다. 마지막 날에 모두 지옥에서 만날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회개해야 될 것은 더러운 세속주의입니다. 성도라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네 교회 큰 것이나 자랑하고 이름 붙인 교회에 다니는 것이 자신의 영혼의 우등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허세를 떨고 목회자들이 모여 교회의 크기나 재고 앉았고 장로들이라는 사람은 모여 재산이나 서로 자랑하고 모두 쓰레기 같은 세상의 헛된 욕심입니다. 그런 삶을 청산하고 버리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 속에서 목회자인 저는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모릅니다. 설교자에게 목회의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넓고 커다란 사택이겠습니까? 기쁨 아닙니다. 커다란 자가용, 고액의 사례비도 기쁨이 아닙니다. 무엇이 기쁨이겠습니까?
목회자는 성도를 만나기 전에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속에 그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 없는 무지하고 곤궁한 인생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고 거기에서 그 진리의 빛과 맛을 본 사람입니다.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을 가슴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마음껏 외칠 때 전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삶을 보이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용기를 얻고 죄 때문에 쓰러진 자는 말씀의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보람입니다. 큰 교회, 우리교회는 크지도 못하지만 목회자 좋아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 모르지만 저는 하나도 안 좋습니다. 골목에서 성도를 만나서 “목사님, 저 누구인지 아세요?”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안는 목회, 무엇이 좋습니까?
평생의 소원이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진리대로 살고 거기서 승리해서 하얀 가운이 아닌 피 묻은 전투복을 입고 온 마음을 다해 진리를 토해놓고 성도들은 그 진리를 온 마음으로 들으며 범죄 한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 하나님께 영광을 둘리고 고난을 받는 사람은 위로의 눈물을 흘리고 나태했던 사람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마음으로 고사리 같은 손을 움켜쥐는 것, 그래서 우리 모두 예배의 시간마다 생긴 것은 틀리고 생각도 다르고 부름 받은 자리도 각각 틀리지만 거기에서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그 예배가 되는 곳, 거기서 목회하는 것입니다. 제게 그런 기쁨이 없습니다. 부분적으론 저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여러분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그런 기쁨이 마음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교회는 관용을 베풀고 그 속에서 은혜가 식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짓밟으며 교회당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예배가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좋은 만나를 기적으로 먹여도 음식 투정을 하면서 고기를 안 준다고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고기를 입에 물고 이빨사이에 고기가 아직 끼었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배가 길다. 짧다. 설교가 어렵다. 교리 설교 집어치우고 재미있는 설교하면 안 되냐? 우리 교회는 왜 성가대도 없느냐? 예배 시간에 광고는 왜 그렇게 기냐?
예배 중에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세리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대부분의 것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 목사님의 설교는 옛날 설교가 좋다. 그러니 제발 발전하지 말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하나 다 설교자의 가슴에 남습니다.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니까 극성스럽게 사람들을 물고 오는데 그 사람들이 변화가 안 됩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산 넘고 물 건너고 아파트 층계를 오르내리고 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헌신입니까? 화요일에 여리고 대원들을 보면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 많은 노력도 해야 되지만 예배 시간에 하나님과 만남이 있어서 영혼들이 회심하고 돌아서는 예배의 감격이 없으면 안 붙어있습니다. 붙어있으면 그것도 교회의 재앙입니다. 회심 안 한 사람이 교회에서 계속 붙어서 권찰, 집사, 권사가 될 때 마지막에 껍질 벗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발톱이 있는데...양의 탈을 쓴 이리들인데, 언젠가는 그 껍질을 벗습니다.
셋째는 회중들이 마음을 다하여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왜 그렇게 늦게 옵니까? 사람이니까 늦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의 문을 잠그지 않습니다. 매주 늦게 온다면 그것은 몸은 교회에 보냈지만 마음은 집의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겠습니까? 예배에 늦게 오면 예배드리기 전에 회개부터 하고 예배를 드립니까?
5공 시대의 일입니다. 대통령이 재계의 거물들을 초청했습니다. 그 중의 한 회장이 30분 늦게 왔습니다. 그 기업을 공중으로 분해시켜 버렸습니다. 대그룹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대통령하고 만날 약속을 했는데 15분이 늦었으면 올 때 그 심정이 어떻겠어요? 와서 고개를 들고 그 대통령 얼굴을 쳐다볼 수 있겠어요?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이 동장쯤 됩니까?
왜 매주 늦게 옵니까? 교회 주차 시설이 어렵다고 하면 대중교통으로 오시고 주차장을 이용하시려면 10분 일찍 오시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보고 늦게 오시라고 할까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한마디로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예배입니다. 그날 주님을 만나면 기적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배 들어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 의지합니까?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일주일 동안 산 생활을 보면 전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께 나아갑니다. 하나님 절 도와주십시오. 오늘 주님을 만나고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왜 이번 주는 안 됩니까? 왜 다음에 주님을 만나야 합니까? 설교 시간에 목사님을 붙들어 주십시오. 저 말씀이 내 가슴에 다가오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은혜가 저희들에게 임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들 가운데 40% 정도가 아직도 예배 시간에 호주머니에 손 넣고 헌금 뒤지는 것 아십니까?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으십니까? 그것이 예배의 정신입니까? 헌금 바구니 돌아오니까 그때에야 지갑을 저 밑에 넣고 꺼내고 주머니 속에서 만 원짜리 밀치고 다른 지폐 꺼내느냐고 부스럭 거리고 헌금을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자녀들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개척하던 초기에 이렇게 교인들이 말 안 듣지 않았습니다. 주일 예배를 2시간40분 드린 적도 있었습니다. 한 사람도 미동하지 않았습니다. 오후 예배에 3시에 드리고 5시까지 설교한 다음에 ‘함께 기도하다가 돌아가세요.’ 했는데 어떤 때는 다른 교회에 가서 저녁 예배 인도하고 돌아와 보면 아직도 몇몇 교인들이 저녁도 먹지 않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시대는 그때보다 훨씬 악해졌고 우리에겐 교회가 커지면서 더 많은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더 많은 눈물과 땀, 더 많은 사람, 위로부터 내리는 더 많은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매일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책망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목회하는 교회를 보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 문제는 계속됩니다. 헌금도 인색합니다. 없는 사람은 없어서 못하지만 생활을 뻔히 아는데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예배 시간마다 자녀들을 축복해 주시고 우리에게 물질의 복을 주시고 썩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붓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부을 때는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 나와 경배 드립니다. 주 계신 곳에 기쁨 가득 누구와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배드림이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제껴 놓고 돈 좀 벌어 보려고 애 써도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일이 성공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더 중요한 것은 안 줍니다. ‘저희의 구하는 것은 주셨으나 저희의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나이다.’(시106:15) 파리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은혜에 목마른 성도들에게 가고 싶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고 목회자의 마음입니다. 사례 넉넉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승용차 없어 승합차 타고 다니면 무슨 상관이 있어요? 목사는 처음에 호강하려고 이 길을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이발사는 가위하고 면도칼만 가지면 일하고 목사는 성경 찬송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자신의 책에서 ‘교회는 목사로 하여금 두 가지 일, 자신이 참된 신자가 되도록 애쓰고 하나님 말씀을 풍부히 연구하여 자기의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도록 최선을 다해 도우라’고 했습니다. 어제 읽은 책에서는 목사의 마음을 힘들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연구도 하고 탐구도 하고 성경도 연구하고 해서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파헤치기 위해 막장까지 내려갔는데 탄을 가져와도 불을 때지 않습니다. 그러니 캐서 무엇 합니까? 누구를 위해 캡니까? 여러분들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자녀들 건강 생각하면서 밥을 차려놨는데 아이가 투정하며 밥을 먹지 않으면 주부인 엄마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파하나 다듬으면서 마늘 하나하나 까면서 완성된 반찬이 상에 올라오기까지 수 십 번 주부의 손이 가잖아요. 반찬이 열 가지 되면 손이 얼마나 갔겠어요? 그런데 수저 던지고 나가면 마음이 어떻습니까?
남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비밀을 여러분들에게 말하겠습니다. 그러는 것이 꼭 잘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마음으로 준비해서 전할 때 그것을 전심으로 받으면 일주일 후에나 다시 설교해야 하는데 어떻게 견디나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전심으로 준비했는데 성도들이 전심으로 받지 않으면 모욕을 느끼며 강단에서 내려오고 일주일 후면 저기를 또 올라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아세요?
사택에 먹을 것 안 가져 오셔도 됩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모처럼 방문하시니까 예수님 섬기기 위해 부지런히 장만하던 마르다와 마리아를 향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되었다. 한 두 가지면 된다. 마르다는 좋은 편을 택했었다.’ 그것이 예수님의 판단입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못 만났으니 집에 가서 자녀들에게 흘려보낼 사랑과 생명이 있어요? 그러면서 저수지가 마르면서 저 아래 모든 밭들이 황폐해지는 것입니다. 씨는 열심히 심었는데 수로에 물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너무 부유해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야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숨길 수 없는 목회자의 판단입니다. 옛날에 절실한 목마름, 한 번의 예배에 목숨을 거는 그 어린아이 같은 마음, 이런 것들이 잊어져 가고 있습니다.
마지막 그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은혜는 갈망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 오십니다. 확 부어주십니다.
지금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9년 7월 마지막 주로 기억됩니다. 전도사 때 중고등부 학생들과 수련회를 갔습니다.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떤 예배를 드려도 그때의 그 예배의 감격이 인상이 남아서 만족이 안 됩니다. 오늘은 정말 좋으신 하나님을 충분히 예배했다는 느낌이 목회를 하고도 한주도 그런 날은 없었습니다. 캄캄한 밤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 자가 발전을 해서 작은 불이 들어온 곳에 천둥과 번개가 내려치는 폭풍우 치는 밤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다 허물어져 가는 학교 건물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만나기를 갈망하는 흐느낌들이 여기저기 있더니 설교가 끝나고 나서 강력한 성령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7시에 시작된 예배가 새벽 2시에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벽을 붙들고 2시간을 회개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들 마음에는 늦게 끝나면 3부 예배 어떻게 하시려고 저러나?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만남이 없이 지리멸렬한 신앙생활을 이어가면서 교회가 무슨 사업이나 되는 것처럼...그렇게 양적으로 성장하기를 그리워하면서 이것이 정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교회의 모습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그 예배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하나님을 못 만나는 모든 탓을 자신에게로 향하고 거기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태도를 바꾸세요. 마음을 고쳐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2.설교자는 누구인가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눅20:14-15)
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좋든 싫든 마주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목회자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목회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수 만 가지의 직업들은 모두 인간의 육체를 위한 것들입니다. 직업들의 가지 수를 생각해보고 그 수많은 직업들이 어떻게 우리의 생활에 이바지하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모든 일들이 우리의 육체를 위한 것입니다. 혹은 정신을 위한 것들이 있어서 예술이나 미술 공연 그리고 학문 같은 것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역시 하나님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우리의 육신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조화롭고 편안하게 지식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며 우리에게 이바지하는 직업 활동이기 때문에 그 역시 넓은 의미에서 모든 직업은 인간의 육신과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영혼과 관련된 직업이 단 하나있으니 그것은 바로 목회자입니다. 이것은 영혼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이 세상의 유일한 직업이고 이 세상에 있는 직업과 구별해서 하나님의 소명을 필요로 하는 그런 종류의 성역입니다. 이 일들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을 가리켜서 목회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바로 이 일을 위해서 부름 받은 가장 고유한 직무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목사가 되는 일들을 그저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작년까지 집사인 사람이 올해 목사가 되어 나타나는가 하면 작년까지는 권사였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나타나서 목사가 되었노라고 명함을 내미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없는 것은 교회는 점점 교인들이 줄고 영적인 면에 있어서는 점점 퇴락의 길을 걷고 있는데 신학교에는 입학하려는 학생들이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정말 단순히 우리들이 좋아할 일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신학교에 가보면 목회는커녕 회심도 하지 않은 학생들이 우글우글한 그런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들의 목회의 소명이 환경에 의해 인도를 받았다고 하는데 목회의 소명은 환경에 의해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을 여러 번 떨어진 것이 신학교 가는 하나님 인도를 보여준다는 것은 이미 다 케케묵은 옛날이야기입니다.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대학을 다 떨어진 사람이 마지막에 갈 길이 없을 때 신학교로 인도하실까요? 교회가 쓰레기장입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사업을 하다가 여러 번 망하고 몰리면 그러면 그것이 목회의 소명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또 연예인들은 인기가 떨어지면 모두 목사가 되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말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신학대학원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일이었습니다. 학생들을 뽑는데 나이가 꽤 든 학생들도 왔습니다. 면담을 했습니다. 왜 신학교에 오시려고 합니까? 지원자 하는 이야기가 교수님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뭘 압니까? 우리 집사람이 다 압니다. 우리 집사람이 하나님께 응답을 받아서 저보고 신학교에 가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집에 가시고 집사람 보내십시오. 그 분이 아무래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왜 신학교에 오게 되었습니까? 목사님 저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효도하려고 신학교에 왔습니다. 그건 또 태어나서 들어보지 못한 효도의 소명이 무엇인가 했더니 저희 집에 80되신 노모가 계십니다. 이 어머님이 평생하시는 말씀이 난 네가 신학교 들어가는 것을 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해서 마지막으로 그 어머님께 효도하기 위해 여기 왔습니다. 당신은 집에 가고 어머님을 보내십시오. 내 손으로 빨간 줄 그어서 다 떨어뜨렸습니다. 그것은 목회의 소명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버스기사를 고용했는데 꾀를 피우고 일을 잘 하지 않아 어느 날 교회 마당에서 야단을 쳤더니 버스기사가 대들더랍니다. 목사님 사람 그렇게 무시하지 마쇼! 주머니를 뒤적뒤적하더니 증명서를 꺼내더니 나도 목사요 기사 목사라고 하면서 목사 증명서를 내놓더랍니다.
사람들은 이 목회자로 부름을 받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모릅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적인 평판이나 대접, 그것도 몇 사람들이나 대접을 받고 평판이 있지 모든 목회자들이 그렇습니까? 1960년대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배우자감을 고르라고 했더니 목사가 이발사 다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30-40년 지나고 나서 조사를 했더니 이번에는 아주 높은 level로 올라갔더랍니다. 그만큼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사의 사명은 그렇게 환경에 의해 인도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도 우리 교회 어떤 여자 집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목사가 되어 전화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의 소명이 그렇게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업을 하다가 몰리니까 목사가 된다. 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목사가 되고 난 다음에 여전히 세상적인 직업 활동에 종사하며 삽니다. 연예인으로 살아간다든지 목사인데도 사업을 해서 사장이 된다든지 목사가 되었는데도 이 세상에 있는 학교의 선생이 되어 살아간다든지...그러면 목사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평신도로서 그 일을 위해 봉사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목사의 소명이란 어떻게 오는 것인가?
목사의 소명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함으로써 소명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평신도가 하나님을 믿고 진실한 신자가 되는 소명과 목사의 소명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틈나는 대로 교회 봉사하고 가정에 봉사하고 그러면서 직업 활동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며 살 수 있으면 은혜 받은 평신도의 소명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목사의 소명은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너무 커서 직장에 가서 일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을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 좋은 직장이고 장래가 보장되어 있는 훌륭한 직업인데도 그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내 시간을 이렇게 가치가 적은 일에 쓸 수가 없습니다. 더 소중한 일이 나를 부릅니다. 이 시간에 그들에게 가서 예수의 사랑을 전하면 얼마나 좋을까? 진리를 몰라서 어둠 속에 헤매는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줄 수만 있다면 나는 밥을 굶어도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을 내가 볼 수만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 받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내가 이런 직업이 없은 들 무슨 상관이 있으며 밥을 굶은 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런 마음이 목회의 소명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느끼십니까? 도망치십시오. 도망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그렇게 목회의 소명을 받은 사람은 성도들 때문에 목사가 된 것이 아니라 일이 좋아서 목사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를 개인적으로 만났는데 그 예수의 사랑이 깊이 뼈 속 깊이 사무쳐서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영혼을 위해서 자기를 바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삶은 도저히 살 수 없는 내적인 고통 때문에 목사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만 느끼면 모두 목사가 됩니까? 마음에 뜨거운 열정만 있으면 다 목사가 되면 되느냐? 아닙니다.
목사는 기본적으로 지성적인 면에 있어서 그 진리의 세계를 스스로 탐구하고 성령의 도움을 힘입어 그 진리의 세계를 사람들에게 펼쳐 보일 수 있는 지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목사님 정말 영혼을 향한 가슴 저미는 뜨거운 사랑이 있는데 그 지적인 능력이 모자라는데 어떻게 합니까? 전도자로 사시면 됩니다. 누가 그런 불붙는 사랑이 있어 전도자가 된다면 나는 그런 분들을 교회에서 일하게 해 줄 용의가 있습니다. 시골로 보내도 되고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을 억누르면서 예수의 사랑을 전할 것입니다. 이 동리 저 동리 이 마을 저 마을 어디서든지 그것을 전할 것입니다. 그것이 목사의 소명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목회라고 하는 이 말은 너무 애매합니다. 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적당한 단어가 없어 그냥 쓰지만 별로 희미한 단어입니다. 목회가 뭡니까? 모인 무리를 양치 듯 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뭡니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목사처럼 다양한 일들과 연류되어 있는 직업은 없습니다. 건축, 부동산, 금융, 경제, 조직, 인사, 사람관리, 인간관계, 디자인, 회화, 연설, 경영, 투자, 인테리어, 소방법, 전기, 배관공사, 식음료 제작 방법, 새로운 빙수의 도입, 위생관리, 주방관리, 차량, 보험 등 다 알아야 됩니다. 목사님 다 압니까? 다 압니다. 지겹게 싫은데 사역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교회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옛날이야기이지 안 좋아합니다. 우리 집사람이 요즘 증인입니다. 싫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또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어갑니다. 병자의 심방으로부터 시작해서 이혼하려는 부부 말리는 일, 회심하지 않은 아이들 회심시켜주는 것을 돕는 일, 수없는 일들이 기다립니다. 이것이 모두 합쳐져서 목회라는 그림을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다 부차적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해도 괜찮은 일입니다.
목사의 목회에 있어서 중요한 양보할 수 없는 정체성이 있습니다. 진리의 전달자로서의 목사입니다. 요즘의 풍조는 어떻습니까? 단에서 내려와 다 같은 죄인끼리 어울리면서 놀지 뭘, 그렇게 높은 데 올라가서 혼자 떠들어. 이것이 오늘날의 풍조입니다. 함께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진리를 전달해 주는 사람입니다. 이 진리는 육체를 위한 양식이 아닙니다. 영혼은 육체의 주인이며 진리는 그 영혼의 주인입니다. 영혼이 건강할 때 육체는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고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영혼은 영혼으로서의 올바르게 기능할 수 있는 선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을 보이는 인간 속에서 발견하고 그들을 사랑하며 그 영혼을 위해서 그들이 가보지 못한 진리의 세계를 보여주는 일이 목회자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목회자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이고 목회자가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목회자가 그 일을 위해서 종사하고 섬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환경입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 몇 가지만 들자면 목회자가 진리를 깊이 탐구하고 그 세계 속에서 헤엄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수많은 세상일들이 교회에는 가득 있습니다. 세속적인 일입니다. 화장실을 수리하는 일, 교회 재정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괴로워하는 것,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장소가 너무 좁아서 땅을 사고 교회를 짓는 것, 영혼 자체를 움직이는 일이 아닙니다. 이런 수많은 일들로 끊임없이 목회자는 소진합니다. 교회가 작을 때에는 덜합니다. 교회가 커지고 나면 조직끼리 갈등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의 말이 들어오고 하면서 목회자의 심령은 더 많이 시간 속에서 찢깁니다. 분산이 되어 도무지 집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진리의 세계를 깨닫고 그 속에서 깊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발견하고 와서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시간의 여유가 나지 않습니다.
장로님들 세우기 전 입니다. 다 지난 이야기입니다만 너무 힘이 들어요. 몸의 이상이 와서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왔습니다. 장로님 한 분이 목사님 쉬셔야 합니다. 장로님이 염려를 많이 해 주는 구나하고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그래도 주일엔 설교를 하셔야 합니다. 설교 준비를 하는 것은 쉬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의 설교가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목사 자신에게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일주일 동안 자신이 진리에 합치한 삶을 살기 위해서 고뇌하며 분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도의 삶입니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 자신의 온 마음을 매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이 조국교회는 목회자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이곳으로 와서 교회를 지을 때 일이었습니다. 한 동안 기도의 제목이 “하나님, 내게 순발력을 주시옵소서. 순발력을 안 주면 나는 쓰러집니다.” 그 순발력이라는 것이 여기 엎드려서 그냥 은혜를 주셔서 기도하면서 눈물이 막 쏟아지는데 누가 와서 어깨를 툭툭 치면서 빨리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도면보고 공사 지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분위기 파악을 해야지 목사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면 기다리면 되잖아요. 그런데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씻고 도면 놓고 1m, 2m 가지고 싸우면서 공사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교리반에서 들어오라고 합니다. 안전모자 벗고 지휘봉 놓고 등산화 벗고 빨리 들어가서 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마음이 진리를 찾아서 깊이 침잠해서 들어가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다같이 더러운 죄인의 마음과 입에서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있는 진리가 나온다는 것이 그것이 일주일 내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이 세상의 속된 일에 소진한 사람 속에서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뛰어난 영성이야말로 이렇게 세파 속에 묻혀 있으면서도 언제든지 뚜껑만 열면 샘물과 같은 진리가 솟아나는 것이 진정한 영성이라고 하지만 도대체 이 세상에 어느 사람이 그런 세계를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미안하지만 난 그런 세계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일주일 내내 쉴 새 없는 프로그램 속에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 속에서 목사가 진리의 전달자라는 인식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교회 오는 재미가 진리를 깨닫고 변화되는 재미로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어울려 살아가는 재미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 여럿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진리는 아무 관심이 없고 사역하는 재미로 교회 나오는 사람입니다. 진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오랜 교회 생활에 함께 엮어진 지체들과의 우정이 좋아서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장 악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커질수록 이런 현상은 아주 심해집니다. 그래서 익명성이 보장이 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채 교회생활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커질수록 많은 목회 서비스들이 제공되면서 편안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작은 교회 안 가려고 합니다. 큰 교회 나옵니다. 그렇게 하면서 묻힌 채 신앙생활 합니다. 진리가 중심이 아닙니다. 수없이 예배 드려도 진리의 말씀이 그를 찔러서 하나님 만나게 해주는 이런 은혜의 감격은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I. 유대인이 복음을 거절한 방법-설교자의 권위를 의심함
오늘 예수님께서 이 비유는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을 놓고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종교 지도자들이 묻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누가 그런 권세를 주었는지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특유의 화법으로 그들을 누르셨습니다. ‘내가 먼저 한 가지 질문을 할 테니 대답을 해라. 그러면 나도 대답을 하겠다. 너희들에게 세례 요한이 있는데 그가 세례를 주었는데 그 세례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냐 사람에게로부터 온 것이냐’를 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왜 세례 요한이 그렇게 외치며 회개하라고 했는데 왜 회개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의 질문이 될 것이고 사람에게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면 온 백성이 그 세례 요한을 존경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주의 종으로 알게 되면 백성들이 이 사기꾼들 하고 돌을 던질 판입니다.
말하지 않겠다고 하니 예수님이 나도 안 가르쳐주마하고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주인이 포도원을 잘 만들어 놓고 다른 복음서에 보면 포도즙을 짜는 틀도 만들어주고 망대도 세우고 집도 짓고 포도까지 심어서 아주 아름다운 포도원을 만들어서 몸만 들어오면 살 수 있게 해 놓고 사람들을 불러서 여기에 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약조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너희들이 누리고 여기에서 땅을 붙이면서 살아라. 그대신 세는 내야 된다고 했습니다. 가서 금방 온 것이 아니라 한참 있다가 이제 드디어 이들이 먹고 살만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당신의 종을 보내어서 소작료를 받으러 왔습니다. 당연히 소작료를 줄 줄 알았더니 실컷 두들겨 패서 보냈습니다. 내가 주인 같았으면 당장 병사들 이끌고 와서 당장 요절을 냈을 텐데 이 주인이 마음이 너무 좋아 네가 아마 잘 못해서 그랬나보다 하고 두 번째 종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실컷 두들겨 패고 욕에 욕을 해서 보냈습니다. 세 번째 보냈더니 피투성이가 실려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주인이 내가 아들을 보내면 그 아들 이야기는 듣지 않겠는가? 하고 자기 아들을 보냈더니 농부들이 이게 우리 포도원인데 누가 와서 이 포도원을 세를 달라고 하느냐? 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이 오는구나. 저 포도원 주인이 죽으면 이 포도원이 저 아들에게로 돌아갈 텐데 저 놈을 죽여 버리면 상속받을 사람이 없을 테니까 진짜로 우리 것이 되는 구나하고 그 아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이사야 5장 7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은 포도원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포도원에서 공평과 정직, 인자의 열매를 원하셨지만 강포와 포학의 열매만 맺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나오는 포도원의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 포도원의 세든 소작인들은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포도원은 이스라엘 나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맨 처음에 주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너무 힘들어서 주님 앞에 나오게 되었을 때에 그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혼자서는 도저히 허물어지는 가슴을 억누를 수 없어서 하나님께 나아왔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아름다운 희생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하나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깊이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들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데 하나님이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이 모든 사랑과 행복을 주셨구나 하면서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그때 여러분들이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소작료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 쓸모없는 인간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해 주셨으니 이제는 나의 모든 인생의 열매가 주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과실을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너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또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헌금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면 안 됩니다. 이 열매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물론이고 우리의 삶 전체 구석구석에서 맺는 열매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느 교인이 너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해서 감동을 받았는데 집안에서 폭력을 휘두른다는 소리를 듣고 자기는 너무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썩은 열매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좋아서 하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열매는 그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변화되어지고 제일 먼저 맺히는 열매는 그의 심령에 맺히는 열매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온 삶에 가정과 교회, 직장, 모든 것에 열매를 맺히는 삶입니다. 그것을 보고 그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그 삶이라는 것입니다.
II.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본 설교자
오늘 이 예수님께서 왜 주옥같은 비유의 말씀을 하셨어요? 예수님이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전해주는 복음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지 목사인 당신의 이야기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느냐? 여기에 관한 분명한 교리는 이런 것입니다.
A.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
원천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외에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다 들은 응답도 하나님의 말씀일 수가 없고 설교하는 것도 원천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원천적인 말씀은 오직 성경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설교가 그 성경을 설교하는 것이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다. 그것은 안 들어야 합니다. 안 들어야 할 의무가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증거를 대 볼까요? 요한 계시록에서 에베소 교회를 평가하실 때 예수님이 칭찬을 하신 내용 중에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너희가 시험하여 드러낸 것과’ 설교가 진리인 성경을 설교하고 있는 한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을 듣지 않고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거스르고 거역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사람들은 목회자가 증거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뀌어야 한다고 믿거나 그 진리의 말씀이 자신의 영혼을 살릴 것이라고 하는 기대 없이 교회로 발길을 옮깁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없이 교회당에 발길을 옮깁니다. 그러니 예배 속에 마음이 담기지 않은 모든 증거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예배의 시간에 끊임없이 늦게 옵니다. 오늘 우리 목회자들에게 10분까지만 안내서고 한 사람만 남고 다 들어와라.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교회 마당에 아무도 안 서있을 것입니다. 들어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영화관도 그렇게 다니지 않습니다. 왜 지각하십니까?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면 지각할 수도 있고 길거리에서 갇혀서 교회 못 올 수도 있습니다. 어쩌다 한 번 일어나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연이지만 반복해서 일어나면 여러분 마음 안에 하나님을 만나러 오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드리러 하나님을 만나러 오면 마음속에서부터 주님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으로 가슴이 채워진 다음에 예배당에 와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가장 기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들어올 때부터 시작해서 교회에 오게 되면 주차장에서부터 겸손해져야 됩니다. 그 하나님의 일군들이 거기에 서서 자기의 좋은 시간을 바쳐서 지휘를 하고 인솔을 하면 그것을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는 것이 기독교인의 교양이지 심지어는 주차위원하고 말다툼까지 한다고 하니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교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1부 예배 때도 항상 제가 마음이 상하곤 하는데 이 앞자리는 휑하니 뚫어놓고 저쪽 뒤에 가서 사람들이 포진하고 앉아 있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그렇게 예배를 구경하고 싶으면 집에서 TV를 보라는 것입니다. CTS 틀면 나옵니다. 그것이 진리를 통해서 자신이 변화되겠다는 간절한 사모함을 가지고 있는 모습입니까? 어제 어린이 집회를 하면서 난 여러분들이 아이들만큼만 매주 그렇게 회개하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매주일 예배가 어린이 집회만큼만 드리면 춤추고 다니겠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두 녀석이 엉금엉금 기어 나와서 무조건 머리를 디미는 것입니다. ‘목사님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제가 한참 기도하고 있는데...여자 아이 하나와 남자 아이 하나였습니다. 너무 기특해서 내가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성경을 설교하고 있는 한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권위를 의심하면서 빗겨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가 그런 교회 아니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하니까 그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자신에게 너무 고통스럽고 찔리니까 사도 바울이 언제 예수님 만나기나 했나? 정말 사도일까? 이것이 전형적인 수법이었습니다.
B. 설교자의 고난과 하나님의 사랑
오늘 이 비유는 설교자의 고난과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1. 설교자의 고난
18년 정도 되었을까요? 제가 이 본문을 읽는데 깊은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해 안 가는 것이 무엇이냐면 진멸당하는 포도원 농부들도 당연합니다. 왜?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는데 어느 주인이 가만 내 버려두겠습니까? 주인이 소작료를 받겠다고 종들을 보내고 마지막 아들까지 보내는 것도 당연합니다. 어떻게 말하면 아들이 죽은 것도 당연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지 않으면 죄인들의 죄를 대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죽어가는 수많은 종들이었습니다. 가서 소작료를 받아오라고 그러면 호위병이라도 딸려서 보내야지 혼자 가서 소작료 내라고 하니 반쯤 죽였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인간들이 어떤 종자인 것이 주인에게 탄로가 났잖아요. 그럼 다음에 갈 때는 갑옷을 입혀서 무사를 딸려서 보내야 하잖아요. 비무장으로 또 보냅니다. 이번에는 흠씬 죽어서 피투성이 되어 모욕까지 당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도 또 보내요.
그때 제 마음에 걸림이 되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 말씀을 들고 이 세상에 오는 말씀의 종들인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애꿎은 말씀의 종들, 그 종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평생 주인 옆에서 주인 사랑하고 주인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라 그래서 순종하고 왔어요. 그런데 어떻게 주인이 책임도 안 져주시고 거기에서 피투성이가 돼서 맞아 죽게 하고 다른 복음서에 보면 더 많은 종들이 능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 조상들이 누구냐? 그 수많은 선지자들을 죽여서 마지막에 제단사이에 피 흘리고 죽은 그 선지자까지 너희들이 죽인 종자가 바로 너희 이스라엘이 아니냐하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사랑하고 진리의 말씀만을 붙들고 살던 종들은 결국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세상에 보내어서 그렇게 봉변을 당하고 고난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런 희생에 대하여 여기 성경을 보면 아무데서도 보상 받았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2.하나님의 사랑
그런데 깊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선지자를 중심으로 놓고 본 것입니다. 사실은 선지자가 아니라 여기에서 중심은 자기 아들도 아닙니다. 중심은 누구냐 하면 그 포도원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죽으시게 된 그 동기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로 그것을 위해서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이 당신의 종들을 마지막에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을 사랑해주시는 인생 가운데 어디에서 만날 수 있겠어요. 부모의 사랑도 완전하지 않아서 우리를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남편의 사랑도 완전하지 않아서 아내를 버리는 수가 있고 아내의 사랑도 완전하지 않아서 남편을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자식의 사랑도 완전하지 않아서 살만하면 부모를 몰라보는 자식들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의 자식을 향한 사랑, 한번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식’ 그 단어를 생각해보세요. 가슴이 미어지지 않아요? ‘자식, 내 아이, 내 새끼’ 가슴에 밀려오지 않아요? 난 금요일에도 내가 집회하는 곳에 450명 3,4,5,6학년 아이들이 모였는데 가슴이 미어질 수가 없었어요. 얼마나 사랑스런 아이들이에요. 그 부모들이 모두 예수 믿는 우리 교인들입니다. 지방에서도 올라오고 그랬습니다만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 자식, 내 피붙이, 내 새끼 정말 이 세상에서 이 내 자식들이 행복해야 될 텐데 그러고 정신을 차리면 그 행복이 영혼의 어떠함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쯤은 교리적으로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너무 사랑스러운 아이들입니다. 이 세상은 흉악함의 입을 벌리면서 그들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붙어있는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영혼의 변화와 회심이 필요하지만 이 세상에서 막 되먹은 인간들로 살기 위해선 그냥 내버려 두면 됩니다. 세상이 그런 세상입니다. 그것을 그 곱디고운 마음, 엄마가 무릎에 놓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눈물 흘리며 가리키기만 하면 그 가슴속에 눈물이 떨어져서 그 가슴에 새겨질 그 복음을 그 좋은 때를 다 내버려 두고 이제는 그 아이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졸업을 하고 세상에 나갈 때까지 무기력하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회개하세요. 여러분들이 사랑이 있으면 어떻게 자식들에 대해서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인간의 사악함은 사랑이 식어지면 짐승만도 못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사악함입니다. 더 아프게 이야기할까요? 자식들이 회심하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입니다. 엊그제도 내가 간증하나 들었습니다. 아이가 너무 막 된 것입니다. 그 어머니가 교회에 와서 새벽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결국은 회심하고 말더랍니다. 하나님도 못 이기시는 기도가 있습니다. 눈물 흘리는 에미, 에비의 기도입니다. 왜 안합니까? 어떻게 그 아이들의 인생을 여러분들이 책임지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예수 믿는 여러분들의 몸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게 하신 것은 그 아이들의 회심을 위해서 여러분들의 영혼인 것처럼 맡기시기 위해서 맡겨주셨습니다. 그 아이들 최초의 목자는 내가 아니고 그대들입니다. 그 아이의 영혼의 최초의 목자는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말씀을 들려 보낸 주의 종들은 자기가 아주 사랑하는 종들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자신의 살을 깎고 뼈라도 꺾고 싶었던 그런 충성스런 종들을 말씀을 들려서 이 세상에 보냅니다. 치고 때려 피 흘리고 시체가 되어서 수레에 실려 오는 데도 또 당신의 종들을 보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을 향한 목 매이는 사랑입니다. 끊임없이 보냅니다.
[돌아와 돌아와 마음이 곤한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자여 돌아와 돌아와]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공부도 못하고 말썽만 부리고 그래도 가출을 해서 어디선가에서 밥을 굶는다는 소식이 들리면 찾아가지 않겠어요? 여러분들이 계모라도 찾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머니의 사랑보다 여러분들이 자식을 향해 가진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찾아가십니다. 오늘도 이 예배의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저를 보내셔서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것은 예배의 시간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 여기에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기 세우신 것은 여러분들이 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기에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인 여러분들이 정말 살아있기 위해서는 교회의 한복판에 진리의 샘물이 계속 솟아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너무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내가 장로님 한 분을 불러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 마음을 너무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내 마음이 그대들의 마음에는 샘물입니다. 내 마음에 물이 없는데 내 마음에서 솟아나는 진리를 통해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샘물을 마십니다. 목회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C. 설교자는 죽어도 설교는 남는다.
이 설교자의 소명은 하나님께로 부터만 오는 것이고 설교자는 참된 진리의 말씀을 전하면 전할수록 사람들에 의해서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 참된 진리의 말씀을 전하면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좋아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북한에 갔을 때 거기 있는 분들이 저를 그 유명한 평양 옥류관에 데리고 갔습니다. 한번에 3,000명이 냉면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라고 하는데 거기서 냉면을 먹었습니다. 솔직히 맛이 없습니다. 그래도 전 눈치가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전에 남한에서 온 사람들이 냉면을 시켰습니다. 평양이 자랑하는 옥류관 냉면이라서 기자분이 젓가락을 들고 먹다가 복무원에게 그랬다고 합니다. ‘아가씨 최고라고 하더니 별로이네. 우리 동네에 가면 맛있는 냉면 많은데’ 복무원이 ‘기자 양반 당신 혓바닥이 미국놈 혓바닥이 되었는데 이 고고한 평양냉면의 변함이 없는 맛을 알겠수까?’ 그 사람 옆에 있는 사람들이 창피해서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
예화] 가짜 참기름이야기
이것이 오늘날의 시대입니다. 여러분들의 입맛이 너무 변했습니다.
참다운 진리는 그 진리를 끊임없이 맛보고 진리에 익숙해지고 그 진리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이 진리의 말씀이 정말 진리의 말씀이 되고 그렇게 진리의 말씀을 섭취하고 나면 즉시 알아봅니다. 아무리 능란하게 설교를 해도 진리하고 거리가 멀다고 하는 것을 압니다. 여기에는 그릇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본주의의 국물에 사람 중심의 양념에 참된 계시가 들어가지 않은 국수에 그런 식으로 비벼놓은 설교라고 하는 것을 금방 압니다. 설교자의 존재의 가치는 설교해서 성도들을 많이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오늘 이 설교를 여러분들의 가슴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설교자의 영광은 교회에 모이는 회중들의 수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큰 교회 목사님이면 일단 한번 꺾고 들어갑니다. 작은 교회 목사님은 한번쯤 약간 무시하면서 들어가지요. 진리의 맛을 이미 본 여러분들은 최소한 그런 세속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한 목회자의 가치는 얼마나 큰 교회, 교세에 얼마나 교인들을 거느리고 있느냐에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교회를 했는데 남전도 회원만 60만 명이었습니다. 마지막에 두 명 천당 보냈습니다. 가나안에 두 명 들어갔습니다. 뭡니까? 완고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하고 광야에서 씨름하다가 죽어가지 않았습니까? 헛되고 헛되니 바람을 잡는 것 같습니다.
저는 최근 들어서 어떤 변화를 주시면서 깊이 결심하게 됩니다. 내가 다시 이 진리의 말씀에 목숨을 걸고 그렇게 말씀을 전하다가 죽어야 되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목회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 진리의 말씀을 절실하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외쳐서 본인들이 성경을 보아서 만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세계를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목회자를 이 세상에서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보기에는 인격이 하잘 것 없고 학식도 많은 것 같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때문에 깊이 사로잡힌 그 진리의 말씀, 뼈 속 깊이 아로새겨져서 그 진리의 말씀을 외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으로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부름을 받은 사람이 목회자인 줄 알면 목회자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목회자에게 무엇을 보상해 줄 수 있겠어요?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그 하나님이 세우신 설교자를 통해 증거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과 떨림과 기쁨 속에서 듣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그 설교 앞에서 진실하게 참회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욕망과 이 세상 더러운 정욕으로 가려졌던 눈의 비늘이 그 설교를 통해 벗겨지고 십자가의 사랑을 예전엔 알았지만 이제는 차갑게 식어졌던 그 마음이 그 설교자의 외침을 통해서 내가 돌아갈 곳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깊이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주일 동안 진리를 깊이 탐구하고 사모하고 이러던 설교자 그 속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진 그 놀라운 말씀 그것을 증거 할 때 말씀의 의미와 함께 그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마음도 함께 전해지고 그 진리의 깨달음과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함께 받아가지고 가정과 이 세상에 돌아가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하나님께 드릴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라고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가 커져서 목회자에게 좋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작은 교회일 때 건강한 영혼이던 목회자가 교회가 커졌기 때문에 병들게 되는 일들은 쉽지만 반대는 어렵습니다. 그렇게 어렵고 위험합니다. 더 많이 진리를 탐구하고 목회자가 진리를 탐구하고 거기에 자기의 마음을 바치고 남들이 가보지 않은 은혜의 세계를 들어가고 자신의 모든 마음과 온 지력을 다 들여서 그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탐구하고 그 속에서 마음을 다 쏟아 부어서 하나님 나라의 번영과 교회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렇게 할 수 있게끔 마음을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치가 적은 일에 마음이 매여서 허덕이는 바람에 진리를 전달해야 하는 이 본래적인 사명을 껍질만 수행하는 일이 없도록 자기를 다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아직 은혜를 못 받고 어렸을 때에는 목회자에게 사랑도 받고 싶고 같이 다독거려 주는 것도 좋지만 진리를 알고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는 목회자의 곁에서 비켜나야 합니다. 방해하지 않고 진리의 말씀에 깊이 탐구하고 더 많은 사람을 위해서 그 진리의 말씀을 탐구하고 남이 가보지 못한 그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주님과 영교를 누릴 수 있도록 그 일을 위해서 방해가 되는 것들을 성도들이 온 힘을 다해서 치워주고 그 일에 온전하게 헌신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언젠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어느 교인이 계속 자기 일 좀 도와달라고 시간을 끊임없이 빼앗았습니다. 그 때에 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주 엄중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나에게는 진리의 말씀으로 섬길 때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당신 한 사람과 이토록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하나님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 목회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대의 봉사는 그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배를 드리고 이렇게 교회의 의식 속에 참여하는 것으로 안 됩니다. 매주일 이 예배에 왔을 때 진리의 말씀의 칼이 여러분들의 가슴에 찔려서 심장에서 피가 펄펄 쏟아져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참회하고 그 진리를 통해서 예전엔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그리고 남이 보지 못한 찬란한 진리의 세계를 경험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 개혁의 횃불이 밝히 들리기 전에 죄악에 잠들어 있었던 이탈리아 플로렌스에 하나님이 세우신 설교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보나롤라였습니다. 제가 그 예배당에 가서 섰고 결국은 그 사람이 순교를 당하게 된 그 자리에 가서 서서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예배당은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서 주님의 말씀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부패한 로마 카톨릭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게 되었을 때 교황은 사람을 보내어서 추기경을 줄 테니까 조용히 하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때에 사보나롤라는 교황청에서 온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일 설교시간에 대답을 할 테니까 듣고 교황에게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설교시간에 외쳤습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추기경의 붉은 모자가 아니라 순교로 물든 붉은 모자입니다.” 온 도시가 놀랍게 변했습니다. 사람이 그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이른 새벽부터 몰려오지 시작해서 입추의 여지없이 그 큰 예배당에 사람이 꽉 차서 문이 잠겼는데 그 설교를 듣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쇠창살에 매달려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쇠창살에 매달려서 회심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것을 오늘 아침에도 생각하면서 그렇게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다가 결국은 모함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목이 잘리고 그 시신은 재가 되어서 아로논 강물에 뿌려졌는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영광스럽게 목회를 했는데 나는 교인들보고 예배 시간에 늦지 말라고 그렇게 사정을 하는 목회를 하니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그 가슴 아픈 기억들이 내 가슴속에 밀려왔습니다.
III. 결론과 적용
침묵으로 일관하는 예배, 계획에 의해서 시작하고 끝나는 예배가 아니라 가슴 깊이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에 사로잡혀서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이 역사, 이것이 뭡니까? 설교할 것은 남았는데 이제 끝나야 됩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온 마음을 다해서 오늘 주님을 만나지 않으면 내가 여기에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절박한 사모함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잔무로부터 벗어나게 하십시오. 온전히 매달려서 진리와 함께 씨름하고 그 진리를 기뻐하고 진리와 함께 탐구할 수 있도록...
제 마음 속에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은퇴를 할 것 아닙니까? 마지막 주일에도 열린 교회에서 30년을 설교를 들었는데도 성경을 펴니까 무슨 말씀을 하나님이 주실 지 알 수 없다는 세계 속에서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소명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 은혜의 세계, 남이 보지 못한 그 은혜의 세계, 이것을 사람들에게 다 전하고 죽어야 하는데, 매일 예배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진리 가운데로 돌아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자신을 드리는 헌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2)
I. 본문 해설
어느 교회하면 이름에 떠 올리는 그 교회에 대한 인상이 있게 마련입니다. 선교를 열심히 하는 교회, 성도들이 뜨겁게 사랑하는 교회, 늘 분쟁이 있고 싸우는 교회 이렇게 교회마다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교회가 있게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마게도냐 교회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이 편지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사도 바울의 두 번째 서신입니다. 교회의 여러 가지 바르지 못한 것을 올바르게 잡아주는 가운데 헌금 생활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마게도냐 교회의 예를 들었습니다. 고린도는 바닷가에 인근한 커다란 항해 도시였고 지금도 그 남아있는 터에 가보면 어마어마한 크기의 아고라 곧 무역시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는 예로부터 아주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당연히 부자인 도시였습니다. 그 교회가 헌금이 매우 인색해서 사도 바울이 그들을 책망하는 가운데 마게도냐 교회를 봐라하면서 예로 들게 된 것입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어서 기근이 심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알다시피 복음이 맨 처음 전파된 곳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뛰쳐나온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고 마게도냐 고린도 헬라의 도시들까지 모두 복음의 혜택을 입게 되었으니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이 흩어진 이방 교회들이 연보를 해서 궁핍에 처한 그 교회를 돕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때에 이 고린도 교회는 매우 인색하게 참여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마게도냐 교회는 사도 바울이 환난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 때에 연보를 할 수 있는 교회로 계산속에 넣지를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인상이 헌금을 할 수없는 어려운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의 형편에 대해서 오늘 사도는 말하기를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시련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환경에 큰 어려움을 동반해야만 시험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돈도 있고 건강도 잃어버리지 않고 가정도 평안한데 시험이 올 수 있습니다. 모든 환경은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은데 마음이 스스로 부패하고 정욕에 떨어져서 하나님을 향해 등을 돌리면서 영혼에 어둠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시험은 환난의 시련은 아닙니다. 스스로 시험에 든 것입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회가 당한 시험은 스스로 부패해서 좋은 환경 속에 있지만 미끄러진 그런 종류의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삼중으로 그 고통을 묘사하는데 환난의 많은 시련들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가 당한 고난은 외형적인 큰 환난 속에서 경험한 시험이었습니다. 그 환난이 무엇이었는지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큰 핍박일 수도 있고 끊임없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 성도들의 삶의 현실일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이 교회가 환난을 당했다고 했으니까 이 환난은 공동체적인 환난이었습니다. 커다란 핍박과 고난 멸시와 천대 교회적인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이 교회는 환난을 당했고 그 환난 중에 시련을 만나게 되었으니 한 두 번의 시련이 아니었기에 많은 시련들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다가 한번 오는 시련이 아니라 파도처럼 연달아 계속 밀려오는 시련 가운데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마음 둘 곳이 없고 저녁때 눈을 감으면 아침에 다시 뜨고 싶지 않은 인생의 환난의 시련을 당해본 사람들은 이 말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II. 마게도냐 교회에 주신 은혜
마게도냐 교회는 불같은 시련 속에서 고통을 받던 교회였습니다. 어떻게 넘치는 헌금을 드렸겠습니까? 또 하나의 요인이 있습니다. 이 교회는 가난한 교회였는데 사도 바울은 일생 부유한 삶을 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 마게도냐 교회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극도로 가난한 교회, 그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마게도냐 교회에 대한 그림이었습니다. 극도의 가난과 끊임없이 밀려오는 환난의 시련 이것이 마게도냐 교회가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헌금은 돈이 있어야지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은 틀렸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헌금을 액수의 크기를 가지고 말하면서 얼마만큼의 액수 이상의 돈이어야지만 헌금이라고 정의를 할 때에는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헌금의 정의를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내게 있는 소중한 것을 마음을 다해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를 한다면 돈 많은 사람이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과 시련을 많이 당하고 극도의 가난 속에 있는 사람들도 오히려 헌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오늘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A. 넘치는 기쁨
이제 이 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 다른 교회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극도의 가난 속에 찌든 교회였습니다. 그런데도 넘치는 헌금을 드릴 수 있었던 요인은 오직 한 가지가 성경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넘치는 기쁨이 그 연보를 감당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물론 환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환난보다 더 큰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많은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련 속에서 그들을 건지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시련보다 더 컸습니다. 극한 가난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가난을 능가하는 은혜의 풍요함이 이 마게도냐 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헐벗으면서도 기쁨이 충만했고 환난 속에서도 기쁨이 가득했으며 시련 속에서도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희락이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기쁨’ 우리에게 있는 단어입니까? 기쁨, 희락, 환희 이런 단어들이 아직도 우리들에게 남아있는 단어들입니까? 부족한 것이 없이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물질들은 우리를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루나 이틀 그것이지 우리를 계속 기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 이외에는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 안에서 계속 솟아납니다. 그것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그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고는 결코 우리를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명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우리들이 기쁨을 잃어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마게도냐 교회에는 육신을 즐겁게 할 만한 편안한 환경도 없었고 마음껏 입고 먹고 쓸 수 있는 물질도 없는 극도의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기쁨이 있었습니다. 어디서 오는 기쁨이었을까요?
B. 사랑의 고백
마태복음 26장과 누가복음에 보면 죄 많은 한 여인이 식사하시는 예수께 와서 향유를 붓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창녀요 기생이었을 그 여자는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뒤로 다가와서 그분에게 기름을 붓고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의 발을 적셨지만 감히 나 같은 인간의 눈물이 어떻게 예수님의 발에 떨어질세라 황급히 풋 미역 같은 검은 머리로 예수님 발에 묻은 눈물자국을 씻어내던 여자였습니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불쌍히 여겨주던 이도 없는 이 여인의 손에 들린 향유는 요즘 시가로 약 삼천만원 어치 정도 되는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그것을 한번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발에 한 번에 부어버렸습니다. 주님 만나기 전까지는 이 향유가 재산을 모으는 수단이었고 이것을 모두 모은 후에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볼 생각도 했던 이 여자의 인생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예수 그리스도가 그 여자의 마음에 가득한 기쁨이 되었고 향유는 이제 궁극적인 기쁨을 위해 낭비되어도 좋은 하찮은 것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이 여자가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의 기쁨의 원천은 두 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통해서 오는 기쁨이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을 통해서 오는 기쁨입니다. 물질이나 사업, 건강이나 명예, 부와 영광 같은 것을 이 세상에서 누리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기쁨의 원천으로 삼습니다. 누가 기쁘지 않겠습니까? 사업하는 사람이 돈을 잘 벌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어찌 기쁘지 않겠으며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 때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부하는 사람이 자신의 업적을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는 영예가 주어질 때 기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들은 오래 가는 것들이 아닙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그러면 이렇게 환난과 많은 시련 극한 가난까지고 극복하며 하나님 앞에 최선의 것을 드리게 만든 이 아름다운 헌신의 원천인 기쁨은 어떤 종류의 기쁨이었을까요? 이렇게 향유를 주님 앞에 모두 부은 이 여자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의 모든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이 여자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기쁨이 이 여자로 하여금 예전에 자기를 기쁘게 하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소비해버릴 수 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18C에 위대한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고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 선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그 말씀의 은혜 앞에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때 그가 어김없이 그들에게 던지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눈물을 흘리며 참회할지라도 그대들의 지갑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난 그대들의 참회를 믿지 않겠다.”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회개란 사랑의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예전에는 향유를 사랑했습니다. 물질을 사랑했습니다. 왜 그 물질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줄 수 있으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사창가에서 몸을 팔던 여자가 적금 통장을 부으면서 이 돈이 꽉 차면 개인택시라도 하나 얻어서 인생을 바꾸어볼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만났습니다.
[멸시와 유혹 가시관 쓰셨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이 여자는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 최초로 사랑을 받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거운 죄의 짐을 벗기고 더러운 자신을 깨끗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자기를 다시 찾게 해 주신 그분을 생각하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단번에 부어버렸던 것입니다.
1904년에서 1906년 사이에 인도 가시 지방에 큰 부흥이 있었을 때 선교사가 그 동네를 갔습니다. 어른들은 없고 6-8살 된 아이들이 이 골목 저 골목에 모여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선교사가 “왜 우니? 엄마 아빠가 없어서 우니?” 그랬더니 이 아이들이 뜻밖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저씨 아니에요. 우리는 엄마 아빠가 없어서 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다 찢으시기까지 우리를 많이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와서 우리들이 울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교회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착한 일을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지지난주 Time지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게 하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mother 데레사 수녀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빈민가의 어머니로 불리며 그렇게 선한 일을 많이 했던 데레사 수녀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은 1979년 11월의 일이었습니다. 같은 해 8월 노벨 평화상을 받기 3달 전에 자기가 마음으로 깊이 존경하는 신부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었습니다. 그 편지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는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는 하나님의 존재가 나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당신 안에 계신 그 하나님이 내가 그분께 기도할 때는 계신 것 같이 느껴지지 않고 입을 열어 그분께 기도하려고 하면 한마디의 말도 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영혼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Time지는 mother 데레사는 그 많은 헌신과 봉사 세계 모든 사람의 사모와 추앙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결국 일평생 극복하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라고 결론을 조심스럽게 내렸습니다. 전 그것을 읽으면서 마음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못하면서 우리들이 많은 일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머슴입니다. 머슴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이도 쇠경 때문에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참다운 섬김이 무엇이겠는지 생각해보세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최고의 어려운 일은 믿는 것도 아니고 배우는 것도 아니고 의무를 준수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은 핵심을 붙드는 것입니다.
[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그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 사랑, 그것이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고 천사의 말을 하고 내 몸을 다른 사람을 위해 불사르도록 내어주는 희생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게도냐 교회에는 환난의 많은 시련 속에도 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고 극한 가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들 안에 가득했기 때문에 마음속에 희락이 가득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주님이 이 마게도냐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기까지 희생하셔서 이들에게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희생과 권한의 십자가가 크게 보일수록 이 세상은 작은 것이 되고 세상이 아주 크게 보일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아주 사소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III. 자신을 드리는 헌금
신앙의 관건은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 십자가를 통해 농축된 하나님의 큰 사랑, 인간의 모든 사상과 모든 사유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신적인 놀라운 지혜를 십자가 앞에서 발견합니다. 형상을 보면서 내 마음에 큰 찔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빛 아닌 곳에 살 때에는 나의 장점도 보이고 내가 제법 난 사람처럼 느껴졌는데 그 십자가의 찬란한 빛 앞에서 내 마음에 찔림을 받고 나는 다만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그 십자가 앞에서 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보여줄 수 있는 모습 가운데 최고의 아름다운 모습은 십자가 앞에서 그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그 상태를 하나님이 왜 가장 좋아하시는지 아세요? 그 마음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받아드릴 수 있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오류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인간,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내가 만약 오류에 빠진다면 나는 존재한다.” 내가 오류에 빠진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에게 있어서 오류에 빠지는 것은 피할 수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오류에 빠지는 것이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인데 거기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마음이 그 십자가 앞에 녹아내리면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수시로 되지 않으면 우리는 죽어도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약 12년 전에 깊은 기도를 경험하라는 책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한 번의 설교로 수많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위대한 설교자가 되겠느냐 아니면 기도 속에서 녹아내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겠느냐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단 10초도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하겠노라 말입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움직인다는 보장은 없지만 하나님을 움직이는 사람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흰머리가 가득해도 육체는 굳어졌지만 마음은 굳어지지 않아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어린아이처럼 그 사랑을 생각하며 마음이 녹아내릴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마지막까지 참된 신자의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 백발이 성성한 사도가 눈물을 흘리며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고백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예수께서 우리를 구하려 이 세상에 오셨다함이로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다.”(딤전1:15)라고 말입니다. 그 예수로 말미암는 놀라운 사랑의 기쁨 그것이 이 마게도냐 교회로 하여금 환난의 많은 시련들, 극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를 부끄럽게 하는 섬김으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봉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A. 힘에 지나도록
여러분들의 헌금 생활은 여러분들의 본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는 히브리서에서 말하기를 우리의 본향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가르칩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그렇게 이 땅에 살 때는 나그네라고 여기며 살았고 본향을 찾는 자라고 증거하며 살았고 이것이 바로 믿음이었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인색한 헌금 생활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랑의 정동이 끊어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많은 액수의 헌금을 드린다하더라도 그것은 돈이 많은 그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아닐 수 있고 거액의 헌금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헌금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데려갈 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 우리에게는 아까운 것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피뢰침을 발명한 과학자 벤자민 플랭클린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뉴잉글랜드 시절에 미국에서 돈을 많이 번 사업가였습니다. 과학자요 발명가일 뿐 아니라 인쇄업자요 교육가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미국 펜실베니아에 가면 펜실베니아 대학이 있는데 바로 벤자민 플랭클린이 세운 대학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고 18세기에 산업혁명을 경험하면서 도시와 빈부의 격차 모두 산업화에 고통들을 경험했고 그 속에서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조지 휫필드라고 하는 전설적인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말씀 집회를 인도하면서 순회 설교자로 활동을 했고 거기서 얻은 헌금으로 고아원을 세워서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돈이 떨어질 만하면 당시 영국보다는 상황이 나은 미국으로 집회를 가곤했습니다. 벤자민 플랭클린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은혜로운 설교자 휫필드가 오신다며 요번에는 내가 헌금을 하나 봐라. 그리고 참석을 했다고 합니다. 마음속으로 이번에는 안 해. 내가 절대 안 해. 오기만 하면 다 털어 가는데 이번에는 내가 절대 안 해.’ 설교가 시작됩니다. 그가 그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마음에 굳게 결심을 하고 설교를 듣기 시작했다. 나는 설교가 진행되고 은혜가 열리는 동안에 나의 손은 슬그머니 돈주머니로 갔다. 설교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나는 생각을 바꿨다. 조금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설교가 점점 더 깊어지자 나는 또 한 번 생각을 바꿨다. 은전만 모두 내고 가야지. 설교가 모두 끝나자 나는 울면서 주머니째 들고 갔다.’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그럼 걱정을 안할테니까.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을 움직이면 하나님 앞에 안 드릴 수가 없습니다.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조금 사랑할 때에는 바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많이 사랑하게 되면 그것 밖에는 못 바친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이 아파오게 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옛날에 생전에 계시던 저희 할머니가 저를 참 사랑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할머니가 예수를 안 믿으십니다. 어느 날 할머니께 두 손을 붙들고 말씀드렸습니다. “할머니가 내가 정말 소원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무엇인데 말해 보아라.” “난 할머니가 예수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영적인 일인데 그렇게 해서 되겠어요. 전 안 될 줄 알았습니다. 할머니께서 정색을 하시면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이 너인데 돈이 없어서 너에게 좋은 옷, 좋은 집은 못 사주지만 내 사랑하는 손자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는데 내가 소원을 들어 주마” 하시고는 그 다음 주부터 주일을 안 빠지고 다니시다가 거듭나고 주안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가 내가 찬밥을 먹으면 목이 메어 하시는 겁니다. 이런 밥을 먹고 어떻게 하냐고 하시면서 더운밥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사랑이 많으면 해준 것은 기억이 안 나고 못하는 것에 마음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 본 적 있습니까? 하나님 제가 이렇게 밖에 못 섬깁니다. 제가 다 드렸는데도 이것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끊임없이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은 헌신하는 겁니다.
B. 자원하여
재미있는 간증하나 할까요? 교회에서 음향이 계속 설교를 하는데 안 들린다는 겁니다. 저는 설교가 심각해질수록 소리가 작아지잖아요. 음향업자를 불렀습니다. 130만 원 정도 들면 손을 볼 수 있겠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이 액수는 교회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예산이었습니다. 수요 예배 시간이 되어 음향업자가 못 가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배가 끝났는데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나가다가 “목사님 잠간 뵐 수 있을까요? 목사님 내일 제가 와서 그냥 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좋은 것입니다. 헌금에 있어서 인색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논리적인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싶죠? “그래요, 목사님 말씀이 맞아요. 그럼 하나님이 헌금 가져가겠으면 내 마음 좀 움직여보라고 해 보세요. 안 움직이시는 주님 책임이지 안 낸 내 책임입니까?” 그렇게 배짱을 부리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이성의 퇴로를 찾아내 드리겠습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선한 행동은 마음 자체를 바꾸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소수이겠지만 교회를 위해서 재산을 처분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때에 갈등을 안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너무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대부분은 내 살던 집, 내가 가진 큰 재산, 노후에 대한 보장을 포기하는 큰 헌신을 할 때에는 이 안에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섬길 때는 영혼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저는 21살에 회심했습니다. 그때 저는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에 붙고도 진학을 못하는 아주 연약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때 제 체구가 키 174cm, 몸무게 56kg,허리 27인치의 연약한 청년이었습니다. 회심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교회 가면 매일 예배 시간이 눈물이 흐르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내게 모든 것을 주셔서 나를 구원해 주셨는데 나는 모든 것이 없습니다. 너무너무 가난해서 옷도 제대로 입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교회가면 늘 나 자신이 물질 없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많은 것을 드리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돈이 생기면 예배당에 달려가서 아무도 없는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강대위에 그 헌금봉투를 무명으로 올려놓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에 내 마음에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감격으로 꽉 찼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행동은 마음 자체를 변화시키는 아주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목돈 아니어도 운영이 되고 가난한 사람도 섬김을 받지만 그렇게 인색하게 살던 그 사람의 영혼은 어디서 도움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매일매일 지워야합니다. 우리 마음은 칠판과 같아요. 애들이 와서 늘 낙서해놓고 가듯이 이 세상에 있는 생각과 욕망들이 낙서를 하고 지나가요. 그것을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다만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십일조 생활 꼭 하세요. 그거 인색하게 살아서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도 결단을 못하고 계신 분들 있지요?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물질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어떤 고백이 있냐면 ‘나는 이 물질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면서 매일 살아갑니다. 넘치도록 헌신하면서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마게도냐 교회가 바로 그런 본을 보였습니다.
C. 자신을 주께 드리고
괴로운 일이 많으시죠? 환난의 많은 시련들입니까? 마게도냐 교회만큼 환난의 많은 시련들입니까? 가난하시죠? 마네도냐 교회처럼 입에 풀칠 할 것 없는 극한 가난입니까?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는 큰 기쁨 때문에 자신을 다 드린 교회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가슴에 애잔하게 떠올랐습니다. 이 교회가 그렇게 물질을 하나님 앞에 드린 방식에 대해서 사도는 중요한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자신을 먼저 드렸느니라.” 여기서 자신을 먼저 드렸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잠언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잠23:26) 자식들이 부모에게 효도를 하잖아요. 명절이면 고기를 사 오고 봉투를 들고 오고 어버이날이면 카네이션도 들고 오고 생선이라도 한 토막 사 가지고 오는데 이 지혜자도 아들에게 그런 것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때 이 아들에게 하는 충고가 그런 것 말고 네 마음을 나에게 다오. 그러면 전 존재를 나에게 주는 것이니 더 이상 내가 받을 것이 없고 나는 네 안에 너는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냐?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돈 봉투나 고기 피륙 몇 필이 아니라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는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 어떤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자신을 먼저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사람들은 우리의 예배 속에서 많은 쓸데없는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서 우리들이 기대해야 하는 것은 오직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과 우리가 얼마나 비천하기 때문에 그분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쪽 끝에 있는 자신의 비참을 인하여 눈물을 흘리고 또 한편으로는 저쪽 끝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인하여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우리 자신을 향한 사랑에서 우리의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고대의 교부들은 영혼 자체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상승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우리의 영혼은 그리로 달려갑니다. 그 회개하는 회심의 기도 앞에서 우리는 세상 사랑의 줄을 끊고 하늘을 향해 상승합니다. 높은 보좌 위에 계신 하나님께 대한 인식에까지 이릅니다. 그렇게 상승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사랑의 세계를 맛본 신비한 영혼은 이번에는 다시 무거워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하강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이 땅에 있는 비참한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내려옵니다. 사실은 상승한 영혼만 하강할 수 있습니다. 하강해서 몸으로는 끊임없이 이 세상을 섬기면서 영혼은 하나님이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그것들을 사랑하면서 섬기며 희생하며 살 때 몸은 계속 내려오지만 영혼은 하늘을 향해 다시 상승하는 것입니다. 이 상승하는 영혼을 상승하지 못하도록 붙들어 매는 재갈이 있습니다. 추가 있습니다. 이것이 영혼의 무게입니다. 이 영혼의 무게가 바로 이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목마름, 갈망 이런 것들이 무게가 되어서 날지 못하는 것입니다. 새가 하늘을 향해 날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발에는 커다란 돌멩이가 달려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슴을 치며 기도하고 바쁘게 움직이며 섬기고 애를 많이 쓰는 것 같아도 그것만으로는 여러분의 영혼이 상승의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랑하는 것들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모든 하나님을 향한 인색함은 집착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것들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때 영혼은 자유를 얻게 됩니다. 훨훨 날아오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이 놀라운 구속의 은혜는 마게도냐 교회를 위한 은혜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오늘 우리에게까지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마게도냐 교회뿐 아니라 여러분도 받았습니다. 그것을 깊이 붙들며 주님을 사랑하고 물질보다는 그 물질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더 많이 의지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더 값진 예물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I. 본문 해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마음을 드리는 헌금이 없는 예배의 생활이 얼마나 헛된 예배의 생활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 보물 있는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을 원하셔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서 우리의 헌금을 통해서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으며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이 땅의 자원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고백하는 예배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지난주의 말씀을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 최선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 생활로서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 앞에 실하게 하여야 합니다. 인색함으로 드리거나 마음중심이 바침이 없는 물질적인 아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중심을 살피며 예배자로 나아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손으로 들고 오는 예물과 함께 바치는 보다 더 중요한 예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은 이런 진리를 온 몸으로 마음으로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난 대단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가문도 위세 있고 당당한 가문이 아니었고 그 집안에서도 다윗은 아버지에게도 잊혀질 만큼 한미한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내노라는 훌륭하고 인품 좋은 자식들을 버리시고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셨습니다. 그는 상처가 많은 고통의 세월을 보낸 인물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의 사랑을 별로 못 받았고 큰 다음에는 형제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불쌍한 동생이었습니다. 결혼 후에는 아내에게 신앙의 세계를 인정받지 못하고 또 버림을 받은 사람이었으며 왕이 된 후에도 자식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한 아버지였습니다. 성경에서 이 사람만큼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없고 또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건만 이 사람의 생애는 끊임없는 상처와 가시밭길로 점철된 생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삼으시고 당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시는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모세와 함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최고봉인 사람 하나를 더 찾으라고 하면 그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 다윗이 오늘 시편 속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보다 더 중요한 진정한 예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일평생 동안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꼭 한번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다른 죄도 있지만 이 죄 때문에 오늘 이 51편의 시를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인데 우레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한 나라는 임금의 소유이니 엄밀한 의미에서 그 백성들도 자기의 소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 나라의 법이었고 다윗은 하나님이 택하신 나라의 임금이었으며 왕이기 전에 하나님의 종이었으며 사람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였기 때문에 그의 이 범죄는 일찍이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영혼의 깊은 나락으로 다윗을 떨어뜨려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전의 다윗의 시대에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우리의 예배와는 달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한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으니 이것이 제사이고 이 제사 중에서도 특별히 속죄의 제사는 하나님 앞에 직접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고 그 관계를 회복하는 하나님이 주신 방법이었습니다. 신자의 영혼은 죄를 지은 즉시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마음은 혼란과 어지러움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영혼은 안정을 잃어버리게 되고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고 이런 마음과 영혼의 현상들은 그의 육체에까지 미처 육체가 병들게 되거나 피곤하게 되거나 지치게 되는 일까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이 바로 그런 상황에 떨어지게 될 때에 그가 찾은 해결의 방법이 제사였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한 나라의 제왕이었으니 제사장이 그에게 없겠습니까? 아니면 제물이 모자랐겠습니까? 그야말로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황소와 송아지들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성대한 제사를 드렸겠습니까? 그러나 결과는 다윗이 경험해보지 못한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제사장의 도움을 받으며 드리는 성대한 속죄의 제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철저히 이 다윗을 외면하셨으며 제사를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께로부터 차가운 거절만이 양심의 가책을 증폭시키고 말았습니다.
II.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다윗은 오늘 시편의 고백 속에서 내 입술을 열어달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범죄한 이후로 입술이 굳게 봉해져버렸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인이었습니다. 세계의 모든 삼라만상을 보면서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호흡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영성은 성막에서 제사할 때나 겨우 하나님을 느끼는 협소한 영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들에 핀 꽃에서도 하늘을 나는 새들 높은 하늘의 구름과 푸르른 궁창 속에서도 가득한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을 경험할 수 있었고 하나님을 전해주는 모든 것들 우양과 채소와 풀꽃과 하늘의 달과 별과 바다와 바람과 구름과 노래와 소리와 모든 것들은 다윗에게 찬송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춤추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법궤가 들어올 때 그는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범죄하자 몸도 얼어붙고 그 입술도 굳게 닫혔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아름다운 몸은 정욕을 따라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이로 바뀌었고 주님을 찬양하던 아름다운 입에는 거미줄이 끼었습니다. 입술조차 놀릴 수 없을 그런 사람이 되어 그는 침상에서 끊임없이 눈물만 흘리는 고통의 밤들을 보낼 뿐이었습니다. 그는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노래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소원이었습니다.
여러분 안에 찬양이 있습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하늘 가락이 있습니까? 주님 앞에 기도할 때 언제나 여러분들의 입술은 달라붙지 않고 그 입술은 움직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께 호소하기에 입술은 즐거워합니까? 주님을 찬송하기 위한 여러분들의 입은 정말 열려있습니까? 그래서 언제나 그분의 사랑,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있을 때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그런 영혼의 자유가 여러분들에게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깊은 영혼의 속박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대한 제사였을 것입니다. 범죄가 컸으니 그는 제사도 매우 특별하게 드렸을 것입니다. 특별한 범죄를 했으니 특별히 용서받고 싶었을 것이고 그러니 어찌 특별한 제사를 드리지 않았겠습니까? 날자가 정해지고 그 많은 제물들을 죽여 하나님 앞에 타는 불길과 연기 속에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짐승을 태우는 그 번제의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으나 다윗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땅 아래로 번지고 있었습니다.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해 보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방편이거늘 오늘 하나님이 주신 방편으로 하나님을 제사하고 있는데도 다윗은 그 제사도 거절되고 자신도 거절되는 차가운 하나님의 감정을 이 헌신적인 제사 속에서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주일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이 예배의 의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일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잘되게 하는 일에 이바지 합니까?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행위가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비옥하게 하고 변화시키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예배를 통해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이 매시간 자신의 마음 속에 오셔서 때리시고 어루만지시며 치료하시고 위로하시고 죄 가운데 고개를 들지 못하던 그의 머리를 들게 하시고 원수의 화살에 공격을 받으며 아무 희망이 없는 자를 방패가 되어 막아주시며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영광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한번의 예배는 생의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어제도 어느 형제가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은 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는 여전히 준수해야 할 의무이고 견뎌야 할 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배에 나올 때에 굳어졌던 그 마음이 예배를 드리면서 도무지 변화되지 않고 마지막에 예배당을 떠날 때에는 한자리에 앉아 있었던 육체의 피곤함과 주일 오후에 해야 할 일들과 휴식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찬 채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 예배당을 빠져나갈 때가 더 많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오고 가는 생각은 많지만 정리된 지식을 하나도 없는 채 양심의 무거운 가책만을 느끼며 하나님이 자기를 거절하셨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예배당을 떠나는 여러분들은 누구입니까?
오늘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여러분들과 같이 일상적인 예배가 아니라 특별한 제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 거절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여러분도 아마 영혼의 침체에 빠져본 적이 있었을 터이니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기도를 거절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서 여러 가지 말을 늘어놓으며 주절주절 떠드는데 하나님은 등을 돌리고 앉아계시고 혹은 내가 안타까운 사정이 있어서 여러 말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데 나의 양심은 너의 기도는 하나님께 거절되고 있으며 너와 하나님 사이에는 무거운 철문이 내려졌다라고 나에게 증거 합니다. 그런 거절감을 여러분들은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상당수는 지금도 거절감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배당에 나와 있어도 졸음과 피곤함 속에서 정신은 침대에 뒹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은 세속의 시장바닥처럼 세상의 염려와 근심 걱정으로 가득차서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III.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다윗은 자신의 속죄의 제사가 번번이 거절되는 좌절을 맛보면서 그는 복음의 핵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범죄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제사는 번제의 제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주께서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넘어지거나 혹은 어떤 물체에 부딪혀서 우리 몸에 멍이 들때가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피도 나지 않고 찢어져 상처도 나지 않았지만 속에 있는 살의 세포들이 충격을 받아서 트게 됩니다. 잠시 후 부어오르기 시작하고 이윽고 시퍼렇게 멍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몸엔 손을 대어도 아프지 않은데 그렇게 타박상을 입은 거기에는 살갗에 손을 대기만 해도 자지러질 것처럼 통증이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살조직이 상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이 상한 마음이라고 한 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예민해진 마음입니다. 자기의 죄에 대해서,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에 대해,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의 기억에 대해서 예민해진 마음입니다. 육체의 필요에 대해서는 언제나 예민했지만 영혼의 필요에 대해서는 마음이 둔감해질 때에 예민하지 못했는데 이런 상한 마음은 영혼의 필요에 대해서 예민한 마음입니다. 이 상한 마음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상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헌금보다도 중요하고 예배의 의무를 준수하는 것보다도 중요하고 유명한 설교자로부터 아주 박식한 설교를 듣는 것보다도 그것이 바로 이 상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갈망하지 않은 사람들의 수 십 만 명이 모인 대회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늘 이런 월삭과 절기 안식일 제사 공동의 행사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열심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월삭과 절기를 지키는 것과 너희가 대회로 모이는 것을 나는 미워한다. 너희들이 그렇게 성대하고 행사를 하고 제사를 드리고 바쁘게 예배당을 들락거리지만 그것은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나는 너희를 본 적도 없고 너희는 나를 만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공위성이 지구 주위를 돕니다. 불과 몇 시간에 한번씩 지구를 돕니다. 수 십년을 돌아도 지구와 만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지구를 떠난 이래로 한번도 못 만났습니다. 예배에 나오고 봉사하고 이 일 저 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교회에서 이 직분 저 직분 맡으면서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될지라도 주님을 끊임없이 돌 뿐 주님과 만나는 법은 없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물질로 주님을 감동시키겠습니까? 세계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놀라운 재주로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겠습니까? 그 재주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영혼의 침체의 때가 있었을 것이고 그 침체로부터 회복되는 반복적인 회심의 때나 세상에서 살다가 덧없어서 주님 앞에 나와 회심하던 최초의 회심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기 직전 여러분들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였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상한 마음은 하나님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상한 마음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보고 싶어 하고 예전에 경험했던 그 뜨거운 하나님의 용서를 다시 한번 체험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거기에 목마르고 그것을 한없이 그리워하는 마음이 바로 상한 마음입니다.
IV.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슬픔으로 꽉 차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기쁜 마음에는 슬픔이 자리할 수 없고 슬픈 마음에는 기쁨이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의 세계에서는 기뻐야지만 슬픔이 있고 슬퍼야지만 행복이 그 마음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누리던 때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예배드릴 때 별로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 조금 하는데 그렇게 자지러질듯이 웃어요. 조금만 슬픈 이야기 하면 눈물이 확 쏟아집니다. 그런데 침체에 빠지면 웃기는 이야기를 해도 웃긴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안 움직입니다. 그리고 슬픈 이야기를 해도 마음이 딱딱해져서 슬프지가 않습니다. 더 핵심을 찔러볼까요? 옆에서 사람들이 나는 슬프지 않은데 슬프게 눈물 흘리는 것이 싫습니다. 왜냐하면 나만 무엇인가 소외된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한 마음의 반대의 상태입니다.
저는 가을을 참 좋아합니다. 가을이 되면 언제나 마음이 설렙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그냥 멎었으면 좋겠습니다. 영혼의 침체에 들었다가도 가을이 되면 기대감이 많이 생기고 실재로 하나님의 생애적인 회복을 저는 가을에 많이 경험했습니다. 아주 예민한 성격이라서 그런지 기후에 의해서 기분이 많이 영향을 받습니다. 가을은 참 좋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던 때가 있습니다. 생활이 어려워서 직장을 다니면서 신학대학을 야간에 다녔습니다. 그래도 새벽예배를 늘 놓칠 않았습니다. 그러니 직장에 가서 일하고 밤에 학교 가서 공부하고 밤에 돌아오니 너무 힘들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건강했기 때문에 새벽시간에 부지런히 일어나서 성경 찬송을 들고 예배당에 갑니다. 이런저런 생각하면서 길 걸어가다가 교회도 우리도 아닌데 문만 열고 들어가면 사정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면 준비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앉자마자 마음이 확 녹으면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이 벌레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무엇 때문에 마치 악을 행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아프기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이 비천한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까? 따로 기도의 제목을 준비하는 일 같은 것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사정없이 확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냥 내가 한잔의 물이 되어서 스펀지 같은 주님의 마음에 스며들어서 내가 사라져버리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주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주님이 있는 나와 주님이 나눠질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영혼이 되고 싶은 갈망밖에는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을 정도로 그냥 눈물이 납니다. 그 기도의 대부분이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기도였습니다. 주님은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나는 주님을 이렇게밖에 섬기지 못합니다. 주님은 나에게 이렇게 되라 하셨는데 나는 이것밖에 아직 못 됩니다. 나는 주님이 계셔서 기쁘지만 주님은 내가 있어서 얼마나 슬프시겠습니까? 라는 기도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천천의 수양과 기름을 주께 드릴까 내 몸에 열매로서 주께 바칠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민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가서 무엇을 드릴까? 내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을 드릴까? 아니면 내 몸으로 난 내 자식을 신학교 보낼까? 하나님 앞에 태워서 제물로 드릴까? 이방의 종교의 사람들이 보이는 열심처럼 그렇게 할까? 미가서 선지자는 “아니다.”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사람아 하나님이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네게 보이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서 살아라.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신앙은 그 마음을 마음에 느끼며 마음에 담고 사는 생활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믿음생활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었습니다. 그러니 만약에 다윗에게 하나님께 드릴 상한 심령, 애꿎은 황소만 태워서 바치는 제사, 송아지만 죽여 바치는 제사, 양들을 잡아 피 흘리는 그 제사 말고 자기를 죽여 드리는 그 자기 깨어짐의 제사가 있었다면 왜 하나님이 이 제사 속에서 다윗을 만나 주시지 않으셨겠습니까?
Ⅴ. 더 값진 예물이 지금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이런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릴 예물이 있습니까?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손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눈과 귀와 이 많은 것들에 지원을 받으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 의무를 행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다면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마음을 깨뜨려 하나님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만나러 예루살렘의 성지 순례 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높은 산 꼭대기 기도원으로 올라오라고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한 뼘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헌금이야 돈이 없어서 못하고 봉사야 시간이 없어서 못하고 주님을 위한 희생은 여러분들이 재능과 가진 다른 것이 없어서 못한다고 합시다. 마음은 드릴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그것을 원하십니다. 예배에 있어서 최고의 헌신은 자기의 마음을 예전에 제 것처럼 생각했던 그 마음을 깨뜨려 주님의 것이라고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살아온 생애를 돌아보면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던 시기에는 항상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먹을 것 많이 주셔도 여전히 마음에 눈물이 있었고 수입이 많아서 넉넉한 삶을 살아도 그것으로서는 씻겨 질 수 없는 마음의 슬픈 상처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한 마음이 될 때 기도는 얼마나 쉬운 것인지요? 말을 지어낼 필요도 없고 만들 필요도 없고 내 영혼이 마음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 대화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수많은 언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마음은 마음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다른 부분을 밝혀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의 상태를 직고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도 속에서 언어는 어떤 문학가의 필력도 능가하는 그 아름다운 묘사들이 둔하기 짝이 없는 나의 마음속에서 솟아나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깨어진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열린 마음이고 하나님 은혜에 목마른 마음이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과 바꾸고 싶어 하는 마음이 바로 상한 마음입니다. 주님에 관해서 알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자신을 보기를 원합니다.
Ⅵ. 결론과 적용
오늘 예배에 나와 앉은 여러분 무엇을 원하십니까? 정말 여러분들 마음속에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있습니까? 오늘도 지금 이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여러분들의 찬송을 거절하시고 여러분들의 기도를 향해 돌아앉으신 하나님을 느끼면서 초조하게 예배의 시간이 끝날 때를 기다리는 분들이 여러분들 가운데 없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에게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있습니까? 주님 때문에 해결하고자 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돈도 필요하고 지위도 필요하고 가정의 갈등과 여러 가지 원하는 일반 섭리의 기도제목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의 영혼의 곤궁함과 슬픔은 그 문제들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은 여러분들이 느끼지 못할 때도 탄식하며 눈물을 씻습니다. 자신의 양식인 진리를 달라고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의 고향인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절규합니다. 지금도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여러분의 마음에서 들려오는 일상의 번잡함과 여러분의 이 세속에 대한 집착과 사랑, 분주하게 움직이는 일상의 생활 때문에 묻혀버린 영혼의 그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영혼은 울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은 흐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은 여러분들의 육체와 정신을 향해 외칩니다. 양식이 아닌 것들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먹지 못할 것을 위해서 수고하지 말고 나에게 양식을 달라고 내 양식이신 내 님의 얼굴을 뵈옵도록 나를 하나님께 데려가 달라고 여러분들의 영혼은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탄식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 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깊은 고통 가운데 기도한 적이 인생에 여러 번 있었고 목회를 하는 가운데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너무 괴로워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목회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저녁때 눈을 감으면 아침에 뜨고 싶지 않은 때도 있었고 오늘은 이 땅에서 잠자리에 들지만 아침의 기상은 하늘나라에서 하고 싶었습니다. 하루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날이 없었던 그런 때였습니다. 마당에서 묵상을 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 여호와는 너의 방패, 너의 영광, 네 머리를 드는 여호와니라” 어린아이처럼 엎드려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의 말이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녹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그 짧은 한마디의 말로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녹아내릴 수 있을까요? 상한 마음은 언제나 그렇게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굳어진 마음은 주님이 외치고 고함쳐 부르짖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청취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전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춤추고 노래하는 기쁨의 때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뉘우치는 진실한 회개를 통해서 오는 것이니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이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부유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기름져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애의 벼랑 끝에서 아무 희망이 없고 나도 나를 버리고 싶던 때에 주님을 만난 기억이 있지요? 그때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주님의 얼굴을 뵈었습니까? 얼마나 간절히 주님의 음성을 원했습니까? 집과 좋은 차 훌륭한 음식 값비싼 의복이 우리의 마음을 끌기나 하였습니까? 우리 생애의 관심사는 오직 주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안 만나주시면 난 오늘 저녁에 죽어버릴 것입니다. 난 인생의 이 벼랑 끝에서 주님이 불러주시지 않으면 이 절벽으로 뛰어내려 버리고 말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절했습니다. 한 번의 예배에 목숨을 걸고 한 번의 기도에 생명을 담보했습니다. 이 예배가 마지막인 것처럼 이 기도가 내 생애에서 드리는 육신의 입술을 열어 바치는 마지막 기도인 것처럼 주님을 붙들고 어린아이처럼 매달렸습니다. 세월은 흘렀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거기서 건져주셨고 근심에서 면하게 하셨고 우리에게 많은 좋은 것을 주셔서 심지 않은 포도원과 짓지 않은 집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의 마음이 부요해졌습니다.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게 되고 주님을 중심에 모시기보다는 내가 그 중심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예배에는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을 만나고 거기에서 자기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깊이 참회하는 것입니다.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에 은혜 허락하시네]
교회가 커져서 하나님 앞에 죄송한 것 참 많습니다. 여러분들의 얼굴 모두 모릅니다. 목자는 양의 아픔을 헤아려야 하거늘 여러분들을 그렇게 다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늘 짐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훨훨 날아가 한 100여 명의 교회를 담임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도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은 제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고 이 교회를 찾았고 어떻게 처음 예배를 드렸고 저에게 심방을 받았으며 그 고통스러운 삶의 상황을 어떻게 나에게 처음 고백했는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했는지요, 그리고 목회자인 저를 얼마나 많이 의지하면서 언어는 없어도 그 마음속으로는 목사님 저의 영혼을 어떻게 해 주세요. 저를 그분께 데려다 주세요. 저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울고 있었습니다. 그 기억들이 마치 자식 하나하나에게 남아있듯이 여러분들에게 남아있습니다. 그러던 그가 마음이 변하여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감사하지 않고 염려와 근심 혹은 야망에 차서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볼 때 과거의 기억은 거기에 겹쳐져서 현재 그의 하나님 떠난 삶을 보는 쓰라림에 과거에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던 기억의 쓰라림이 겹쳐서 둘을 겹친 그 쓰라림의 비애를 느낍니다. 나같이 잊어버리기 잘하고 여러분들을 사랑할 줄 모르는 차가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그런 감정을 느끼니 여러분들을 위해 친히 목숨을 버리신 우리 예수님이 여러분들에게 대해 느끼는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얘야 네가 그 인생의 벼랑 끝에서 나를 어떻게 찾았는지 기억해 보라.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절망의 벼랑 끝에서 네게 날개를 달아 하늘로 날아오르게 해준 그이가 누구였는지 기억해 보거라.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주었으니 이제는 너는 그 모든 것을 갖고 단 하나를 내게 다오.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다오.”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은 인격으로 하는 것입니다. 강요나 협박, 강제, 억압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인격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끊임없이 주님이 당하신 그 고난을 기억하면서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하신 일을 생각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배에서 이렇게 깨뜨려진 마음을 하나님이 받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의 회복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