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보다 나은 것
(201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1년
제사보다 나은 것 1 (2011.1.10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제사보다 나은 것 2 (2011.1.11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제사보다 나은 것 3 (2011.1.12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 순종(삼상15:22-23) 2011.1.10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
2. 회개(시51:17) 2011.1.11 새해말씀사경회(새벽) 7
제사보다 나은 것 4 (2011.1.13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3. 지식(호6:6) 2011.1.12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4
4. 화목(마5:24, 잠16:7) 2011.1.13 새해말씀사경회(새벽) 21
5. 정의(암5:21) 2011.1.14 새해말씀사경회(새벽) 27
제사보다 나은 것 32
제사보다 나은 것 1 (2011.1.10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제사보다 나은 것 2 (2011.1.11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제사보다 나은 것 3 (2011.1.12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제사보다 나은 것 4 (2011.1.13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제사보다 나은 것 5 (2011.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순종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
I. 본문해설
II. 사람의 도와 하나님의 뜻
III. 제사 보다 순종
IV. 결론
2.회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I. 본문해설
II. 시인의 경험
A. 두 가지 죄악
B. 내면의 변화
III. 제사 보다 회개를
A. 자비를 믿음
B. 사죄를 믿음
C. 정결을 믿음
D. 섭리를 믿음
IV. 결론
3.지식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I. 본문의 배경
II. 축복을 부패의 기회로
A. 세속적 번영을 추구함
B. 신앙적 관심을 내버림
III. 제사보다 소중한 지식
A. 지식의 본질
B. 알고 사랑함
-기독교신앙의 힘: 사상+윤리
-둘의 원천: 헤세드
IV. 결론
4.화목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4)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16:7)
I. 본문해설
II. 삶을 돌아보는 예배
A. 하나님을 위한 예물
B. 예배자를 향한 원망
III. 제사보다 나은 것: 화목
A. 불화: 적대와 거리감
B. 화목: 용서와 친밀함
IV. 결론: 맺힌 것을 풀라
5.정의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암 5:21)
I. 본문해설
II. 성회와 제사를 거절하심
A. 종교의식을 미워하심
B. 가증한 이중성: 삶과 예배
III. 참된 제사가 되려면
A. 공법과 정의를 따라 삶
1. 공법을 물같이
2. 정의를 하수같이
B. 예배와 삶의 일치
IV. 결론
1.순종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낳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전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다는 것, 그것은 당시 구약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죄를 용서받고 또 죄를 이길 수 있는 힘도 공급을 받고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메시야의 오실 것을 예표로 끊임없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제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한 여망을 갖게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신앙이 뒤로 물러가고 타락한 풍조가 두드러지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제사를 하나의 제도로 접근하려는 그러한 움직임들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은 사실은 광야 그 자체가 아주 끔찍한 곳이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짐승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작은 새나 곤충이 아니라 커다란 짐승이 그렇게 죽임을 당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피를 흘리고 그것을 태워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요즘 구제역 때문에 100만 마리가 넘는 가축들이 그렇게 도살을 당한다는 것이 참 너무 슬프죠. 단순히 돈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래서 소도 자기가 매몰되는 것을 알아서 눈물을 흘리는 사진을 신문에다가 실었더라고요. 이게 그 그것을 매립하는 것을 담당하는 공무원들도 참 죽을 맛이지. 그래서 그 환청에 시달리고 자다가 꿈에 나타나고 그런 게 얼마나 끔찍하겠습니다.
그게 하물며 이 짐승을 죽여서 그것을 각을 뜨고 이게 그 짐승을 해체해서 제사를 드리고 그게 얼마나 그 무섭기도 하고 끔찍한 것이겠습니다. 그 속에서 사실은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그리고 참으로 회개를 요구하시는 것과 그 요구하시는 것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것 등등 모두 경험하게 되는 것이 이게 제사거든요. 그래서 사실은 진지해 질 수 밖에 없는 거거든요.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게 되니까 이 제사 자체를 하나의 제도로 보고 그리고 거기에 그저 참여함으로써 그 제사의 모든 효과를 자신들이 누릴 수 있다고 하는 타락한 생각들이 고개를 들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이 제사를 탄핵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이렇게 제사 드리는 것이 나에게 참 지겹다. 그래서 제발 누군가가 저 성전 문을 닫아 버리고 저 인간들로 하여금 제사 드리지 못하게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까지 말씀하실 정도로 염증을 내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한번 염두 해 두면서 오늘 이 제사가 참 올바른 제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때야 하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탄핵과 비판은 사실은 제사 자체를 똑바로 드리라고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제사가 대표의 원리를 가지고 있거든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제사는 이제껏 제사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이 이제껏 살았던 그 삶이 삶과 일치를 할 때, 그 제사가 진정한 의미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II. 사람의 도와 하나님의 뜻
여기에 보면 이제 사람의 의도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이 보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사울 임금의 이야기는 이 사람이 겸손하고 그리고 아주 외모가 출중했습니다. 그리고 지도력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왕의 권세와 그리고 교만에 취하여 처음 하나님 앞에 자기를 지극히 낮추며 주님을 위해 봉사하던 때의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멜렉과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아는 바와 같이 이 아말렉은 가나안 원주민이었습니다. 원래 이 사람들을 모두 진멸하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셨죠.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가나안 원주민들이 완벽히 진멸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이제 높은 산지로 도망을 했기 때문에 정복 자체의 어려움이 있었고, 두 번째는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그들이 이제 시간이 흐르고 나서 산지에 있던 원주민들이 내려와서 이스라엘과 접촉을 하면서 유대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결국은 가나안의 족속들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온전히 시행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자손들이 자꾸 씨가 퍼지고 자라면서 세력을 형성하고 두고두고 그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을 때에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그런 것들이 마음에 남아있을 때에 이것들이 이제 은혜의 생활에서 멀어지면서 불순종의 씨들이 됩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전쟁이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들을 이제 모두 이겨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도 주님의 명령은 일관성이 있어서 똑같습니다. 그들을 모두 진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이 사울이 전쟁에서 이겼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가축들 중에 좋은 것을 남기고 또 왕 아갑도 진멸하지 않고 남겼습니다. 또 가축들을 남긴 것은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것이었고 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 놓은 것은 백성들에게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해서 이 남의 나라의 왕까지 사로 잡혀 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왕이라고 하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이 제사는 사무엘이 드리게 되어 있는데 사무엘이 드리게 되어 있는데 이 사람이 이제 제사권을 침범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선지자가 도착을 해서 책망하는 장면입니다. 사실 사람, 그렇다면서 이제 책망하면서 왜 이렇게 하였느냐고 강하게 질책할 때, 그 때에 이 그 사울이 자기가 그렇게 한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기 시작해요. 그 사람의 의도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당신이 진멸하라는 것들 중에서 다 진멸했고 정말 좋은 가축들만 남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양과 소를 취하여 왔습니다. 뭐, 아갑 왕에 대한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그것도 뭐 핑계를 대지 않았겠어요? 사실 누가 비난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데 가장 좋은 것, 이스라엘 무리들 가운데서 쉽게 만날 수 없는 그런 양과 소를 잘 취해서 그래서 남겨 두었다고 할 때에 사람의 이해로는 번지르르 하고 그리고 누구도 합리적으로 그것을 비난할 수 없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죄인으로 불리우는 여자가 예수께서 식사하는 때에 와서 예수께 기름을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그 기름 부음 사건이 있을 때에 비난을 하죠. 그 기름이 300 데나리온은 되겠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천만 원이 되는데 자꾸 그 가치가 변하는데요. 데나리온이 장정 한 사람이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일하고 받은 품삯이었습니다. 즉 아마 기술 업자들은 우리나라에서 10만원을 줘야 할 것입니다. 그만큼 부었는데, 그것을 왜 붓느냐. 그것을 차라리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지. 누구도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죠. 합리적이니까. 당연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처음부터 식사 한 끼에 향유를 3천만 원씩 부을 정도로 그런 삶을 사신 분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 오히려 책망과 가르침을 듣습니다. 이 여자가 나의 장사를 위하여 한 것이고, 이 여자의 행한 일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기념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뜻은, 사람의 의도는 겉보기에 번지르르 하고 합리적인 것 같아서 누구든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뜻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전쟁을 통해서 이 아말렉의 흔적이 묻어 있는 모든 것을 진멸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시대에나 후에나 그들과 접촉해서 그들에게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을 따르는 그러한 불신앙이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의지할 때에는 이렇게 불순종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서 살아지고 신앙이 떠나게 되면 그렇다면 인간의 이상적인 이치만 남고 인간의 육욕적인 마음의 욕심만 남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이외에는 남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따르기 보다는 인간의 정욕을 따르든지 아니면 정욕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이성을 따르게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무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서 사무엘이 당시로서는 아주 충격적으로 분개합니다. 아마 이러한 노골적인 선포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처음이었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충격적인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게 됩니다. 특별히 사울을 통해서 들려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적에 순종하는 것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마치 제사나 번제의 이 제도를 무시하는 것 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사실 여러분이 출애굽기나 이렇게 모세 오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제사에 관한 규례가 얼마나 정교하고 분량이 많은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직접 제사를 드리는 제도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신 이유는 그 제사 자체가 하나님께 그렇게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신 것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치 번제와 제사를 좋아하시겠습니까. 사실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그 목적위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제도를 교정하는 것 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고 토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서 하는 이야기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보다 낫습니다.
III. 제사 보다 순종
수양이 기름 그 다음에 제사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행위와 거기에 핵심이 되는 그 재물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강력하게 탄핵합니다. 그렇다면 뭘 의미합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이것이 하나님께 가지고 와서 드리는 제사, 번제라면, 하나님 앞에 불을 태워서 자기 자신을 헌신하며 드리게 되는 그런 헌신의 의미와 속제라면 자신의 죄를 위해 대신 죽는 짐승을 보면서 진실로 자기가 하나님을 대적한 죄를 뉘우치며 회개하는 그 모든 것이 제사의 정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제사는 제사 자체가 하나의 그 우리의 삶 전체가 그 제사에 어울리고 일치를 이루는 그것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제사, 이것은 하나님에게는 매우 불쾌한 제사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예배의 감격에 빠진다고 말하지만 사실 감격에 빠질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의 삶을 통해서 이미 결정이 나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예배당에 왔다가 주님 만나는 분들도 있지만 이것은 드믄 예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주신 사람들은 한 주간 동안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며 살았는가. 그 넓은 의미의 예배의 지지를 받을 때에 이렇게 10시, 12시, 2시에 드리는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열납 될 수 있도록 그 속에서 간절하게 예배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기 위해 분투하고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기 위해서 분투하면서 죄와 더불어 싸우고 참여의 정신으로 매일 매일 자기 깨어짐 속에서 살았다면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나아와서 매달리고 기도할 때 그 때 아주 간절하고 열렬해지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승리하기 위해서 열렬해지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더 잘 섬기지 못한 것에 대해서 가슴 아프고 또 티끌만큼이라도 자신의 지은 죄에 대해서 스스로를 분노하게 됩니다. 이럴 때에 예배는 아주 역동적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 그리고 용서, 사죄의 은혜 이런 것들이 아주 놀랍게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예배 자체가 아주 놀라운 역동성을 띄게 되죠.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한 주간 동안의 삶이 거의 하나님 없는 실천적인 무신론자의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이 예배에 나아와서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예배할 때 그 일주일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문맥입니다. 그러므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졸고, 자고, 그리고 지루하고 그렇다면서 예배를 견디게 되고, 그것은 결국은 삶의 개혁이 없으면 어떠한 예배의 변혁도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고 가르칩니다. 이유는 제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와 삶이 일치를 이룰 때에 그 제사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제사와 삶이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일치를 이루는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불순종합니까. 불순종하는 것은 노력을 안 해도 되고 순종하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포기하고 복종시키는 자기 죽음의 노력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불순종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도와주심이 없지만, 인간 그 자체가 무슨 그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예화) 그 어떤 차 같은 것을 비탈에다가 큰 트럭을 비탈에다가 세워놓을 때에는 요즘이야 차들이 아주 잘나왔는데 옛날 차는 수시로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풀립니다. 그래서 지금도 트럭 운전수들은 항상 차 뒤에다가 차를 이렇게 받쳐 놓는 나무토막을 가지고 다녀요. 그것을 대어 놓아야지만 차가 미끄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와서 툭 하고 빼버리면 누가 밀어서 트럭이 언덕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무게 때문에 그것을 못 가게 세워두었던 장애물을 탁 하고 치운다면 바로 굴러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무게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가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것이 그런 원리에 의해서 악을 행하게 됩니다. 저절로 굴러 떨어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사람이 뒤로 굴러 떨어져서 그렇게 악한 길로 가게 됩니다. 자신으로서는 그것을 이길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이 바뀝니다. 그러니 순종하는 삶을 위해서는 절실하게 예배가 필요하고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이르기 위해서는 일주일동안 분투하며 살았던 그 눈물과 땀이 있는 삶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 주님을 향해 찬양과 경배, 말씀을 드릴 때에 엄숙함과 진시함,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의 내적인 복종, 이 모든 것들이 거기에 나타날 때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인 것은 잠시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이지만, 흩어져 살아오는 동안에 하나님 한분을 사랑하고 추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고 또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고 난 뒤에는 흩어져서 그렇게 살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지. 그런 삶이 동반되지 않는 가운데 주일날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게 아니라 뇌물을 바치는 것이란 말입니다. 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뭔가 하나님이 손볼 것 같은 불안감에 양심의 부자유함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나오는 그러한 의미의 세속적인 종교행위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 손을 펴서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금년 한해 복을 주시기를 기도하고 내 인생의 계획을 밀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도 그것은 한 편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한 편으로는 축복을 구하는 것이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표현에 의하면 가슴에 칼을 품고 화해를 청하러 가는 적국의 사신과 같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부를 하면서 나에게 복을 달라고, 그리고 속에는 반역의 칼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만남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겠는가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런 이유 때문에 내가 곤고하고 저런 이유 때문에 내가 고통을 받는다고,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이 세상사는 것에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곤고하고 그리고 사슬에 매이게 되는 것, 사람이 사망의 그늘에 앉고 그 쇠사슬에 매이게 된 것 같이 그렇게 부자유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멸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을 불순종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IV. 결론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올 한해의 우리의 신앙의 가치를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순종하는 것에 두자. 순종하는 것에 두자.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를 선택하며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순종하는 사람에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해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순종하고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주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해지게 되고 우리의 기도가 열렬해 지게 됩니다. 삶을 올바르게 놓아 보세요. 그렇다면 기도에 하나님이 힘을 주셔요. 그리고 정말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제사보다 나은 것, 첫 번째가 있는데 그게 바로 순종입니다. 순종은 제자보다 훨씬 더 낫고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여러분이 지금도 마음속에 불순종하고 있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오늘 이 자리를 뜨기 전에 우선 생각나는 그것이라도 순종하겠노라고 다짐을 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마음속에 갑자기 기쁨이 오고 그리고 영혼이 가벼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주님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축복이 있는데 그 중에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순종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공급해 주시기로 작정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뒤덮는 모든 죄는 불순종을 통해서 들어왔으니 아담의 죄요, 그 죄의 세력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들어왔으니 이것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 분에게서 순종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오늘 하나님 앞에 한 해를 시작하면서 주님의 축복과 은혜가 넘치는 생애적인 한 해가 되기를 사모하면서 제일 먼저 결단해야 될 것은 여러분이 불순종을 버리는 것입니다. 운명처럼 따라왔던 그 불순종을 지속하는 한 금년에도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깊이 회개하고 마음 깊이 결심해서 이 일에서 있어서는 내가 순종하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2.회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 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위대한 시인 다윗이 하나님 앞에 쓴 대표적인 참회시 입니다.
Ⅱ. 시인의 경험
이 시인의 경험을 따르면 그가 하나님 앞에 일생동안 정결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산 사람이었었지만, 두 가지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A. 두 가지 죄
하나는 하나님이 금한 인구 조사를 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인구 조사는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물자와 군인의 수요를 헤아리는 인구 조사였기 때문에 행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싫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라가 크든지 적든지 간에 그것과 상관없이 다윗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말과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군인의 숫자를 가지고 스스로 만족하며 나라를 지킬 힘을 자신들이 가졌다고 긍지를 느끼는 것은 세상 나라의 임금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나라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구 조사를 하기 보다는 오히려 다윗이 자신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조사하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점검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절대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의존하면서 믿음 생활되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두 번째 그가 저지른 죄악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죄는 앞에 말씀드린 죄보다 더 커다란 결과를 시인에게 가져왔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은 율법이 금한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놓고 생각해 보자면 이 다윗은 정말 외롭고 가엾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고 아버지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고, 동기간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다윗은 형들을 존중하고 사랑했지만, 형들은 다윗을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결혼했지만 그는 다윗이 가진 신앙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신적인 연대를 이루기에 힘든 여성이었습니다. 결국 그를 떠나가죠. 후에 자식들을 낳았지만 그 자식들은 아버지의 경건한 신앙을 티끌만큼도 닮지 않은 무법한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어느 한 순간 눈에 꽂히듯이 사랑한 여성이 있었는데 그는 불행하게도 이미 남편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가 언약 백성의 나라였기 때문에 자신의 나라 전체를 왕의 재산처럼 생각하며 굴러가는 세상 나라의 임금과는 다른 임금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윗도 깨어있는 신앙을 가졌을 때에는 항상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낮추며 한 나라의 제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가난하고 비참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의 신앙의 특징은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물같이 녹아져 내리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러한 마음의 제사를 드리는 헌제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사람을 자기의 신학함과 철학함의 전범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우주와 하늘의 가득한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예배당에 와서 겨우 하나님을 느낀 인물이 아니라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한 주님의 인자하심과 주의 진리의 무궁함을 노래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죄를 저지르게 되자 그에게는 커다란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B. 내면의 변화
이 시인이 내면의 변화에서 경험한 두 가장 커다란 변화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라고 말입니다. 범죄 하자 제일 먼저 그는 하나님과의 무한한 거리감을 겪어야 했습니다. 오웬 목사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구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고 다윗만큼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자 그의 내면의 세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고 그 변화는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거리감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떠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만약에 우리를 떠난다면 주님이 가고 난 빈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지겠으며, 주님이 가시고 난 그 빈자리는 하나님이 없는 어떤 장소가 되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게 거기에 계시지만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고 가까이 계시던 주님을 멀리 느껴지도록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던 사람이었는데, 주님의 면전에서 쫓겨난 것 같은 격리감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한다함은 주님 앞에서 산다함은 주님이 사물이 아니시니 어찌 그분에게 앞과 뒤가 있겠으며, 또 양 옆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표현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말의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이 시인 다윗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께 매달리며 사는 동안에는 항상 주님의 면전에서 사는 것 같았습니다. 언제나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의 기도는 향연처럼 우리 주님께 올라갔습니다. 갈바를 알지 못할 때에는 그 분께 물었고,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주님의 귀에다 자신의 심사를 쏟아 놓을 때 주님께서는 그의 귀에다 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일평생 주님과 동행하며 폭풍과 흑암이 몰아치는 인생의 날에도 주님의 손을 붙들고 이 외로운 고난의 길을 지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을 때에 내면의 변화가 일어났고, 그것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난 것 같은 격리감이었습니다. 이 때 그가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달았습니다. 환란이나 시련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아무것도 끊어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죄는 그 사랑이 끊어진 것처럼 만들 수 있는 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가져온 첫 번째 내면의 변화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의 세계에서 정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무시합니다. 마음이 산란하고 기도를 드릴 수 없을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런 저런 환경 때문이라고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환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끊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인 다윗이 그렇게 사울이 자기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풀고 인간의 언어로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핍박의 길을 정처 없이 해매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그 속에서 날마다 자신의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원수들이 시인을 에워쌌습니다. 전혀 쉼이 없는 괴로움이 계속 되는 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괴로움 속에서 시인에게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은혜와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희를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부설의 다툼을 면하게 하시리이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이 시인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끊어진 것은 환경이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 흔들리고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불순종할 때 일어나는 거리감과 낯섦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죄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령을 자신에게서 거두어 가실 것 같은 커다란 두려움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성령이 오셔서 신자 안에 내주하시지 않고 하나님이 일을 맡기신 동안에 그와 함께 하시고 그래서 뛰어난 능력을 주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특권을 줍니다. 하나님의 쓰심이 끝나면 주님이 다시 불러 가시는 그러한 성령의 경륜 시대였습니다. 다윗은 한 때 성령의 충만한 부음을 입었던 전임자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성신을 거두셨을 때에 그가 미치광이가 되어 버리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고 그 광기가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자객을 풀고 끊임없이 추격하였던 그 고통스러운 날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니 이 다윗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 점에서도 우리는 정직하지 못합니다. 왜 성령 충만하지 못하느냐고 물었을 때에 우리는 여러 가지 많은 근심과 걱정이 있기 때문이고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서 그렇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과거를 돌아보면 고난을 많이 받으면서도 성령 충만했던 적 많고 시련과 환란을 당했으면서도 은혜 충만했던 때가 많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시련과 고난을 이기고 우리의 믿음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은 지치고 기도할 수 없었을 그 때에도 성령 충만할 때에는 우리의 마음에서 기도의 언어가 솟아올랐고 핍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주님을 섬기는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과 소망이 있었습니다. 환경이나 시련 때문에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짓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우리 안에 성령을 소멸합니다.
시인에게 마지막 세 번째 내면의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구원의 즐거움이 마음속에서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은혜 안에서 살 때에 우리에게 가장 기쁜 것이 무엇이냐 물어 볼 때 우리는 집주고 먹을 것을 주시고 입을 것을 주신 것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에 대해서 매일 특별한 감사를 느끼게 됩니다. 자고 깨어나도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하늘을 두루 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쓸 수 없는 주님의 큰 사랑, 하나님과 주님의 교회에 티끌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 쓸모없는 인간을 구원해 주셔서 주의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에 감격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원천은 바로 이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감격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 이 구원의 감격 때문에 주님의 교회에 한 모퉁이를 섬깁니다. 이 구원의 감격 때문에 죄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 구원의 감격 때문에 이 세상을 주님의 나라로 바꾸기 위해서 다양한 직업에 종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범죄 하였을 때, 우리의 마음 안에 이러한 구원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구원받는 것 정도는 일상적인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함으로 경험하는 내면의 변화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죄를 지었을 때 해결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 구약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속죄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한 나라의 임금이었고, 휘하에 많은 제사장들과 그리고 수많은 제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먹으면 어떤 재물인들 하나님 앞에 올릴 수가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 고백을 합니다. 제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였습니다.
Ⅲ. 제사 보다 회개를
제사보다도 회개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구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그랬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하나님의 제사들은 깨어진 심령이라 혹은 깨어진 영혼이라 하나님이 깨어지고 으깨어진 마음을 멸시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제사이든지 간에 그 모든 제사의 조건을 상한 심령으로 보신 것입니다. 히브리말로 ‘로아흐 미슈바르’ 라고 하는 이 단어는 샤바르가 깨어지다입니다. 사기 그릇 같은 것들을 이렇게 땅에 널치면 딱 하고 깨어지듯이 그렇게 깨어지는 동작을 가리키는 것이 미슈바르라는 단어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깨어지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것이 수동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깨어지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입니다. 이게 깨어진다 라고 하는 것은 뒤에 나오는 통회하는 것과는 달라요. 깨어지는 이 마음은 통회하는 것 보다는 다른 마음입니다. 통회하는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더 강렬한 표현으로 나와요. 그것이 뭐냐 하면 로아흐 다끄에, 혹은 레브 다끄에 라는 단어인데 다까라는 단어가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떻게 표현하면 될까요. 고기 같은 것을 짓이겨서 형체가 없이 형체가 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짓이겨진 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주님이 그 기도하고 혹은 예배를 드리고 할 때 기쁘게 받으시는 그 마음은 상하고 통회한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상한 마음은 이 세상과 자신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마음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소망을 갔던 것을 져버리는 마음입니다. 즉, 이전에는 이런 저런 성공을 꿈꾸고 행복이 있을 것이라 믿고, 혹은 또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는가. 나는 옳다. 이렇게 생각하던 마음, 내가 이런 저런 모양으로 주님을 많이 섬겼고 나는 주님을 위해서 많이 헌신한 사람이다 라고 하는 이런 것. 이것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마음이 하나님 앞에 굳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주님의 은혜가 작용했을 때, 아 그게 아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생각했던 대로 돈을 많이 벌고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세상에서 명예를 얻으면 내가 행복할까. 그 까짓것들이 내가 무슨 인생의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 내가 하나님 앞에 뭘 잘못했던가 하는 마음이 나는 정말 비참한 인간이구나. 아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없구나. 이것을 깨닫는 마음. 하나님을 섬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를 일평생 봉사해 왔지만 오히려 나의 살아온 날들은 주님을 섬긴 날들이 주님에게 누를 끼친 날이었구나 생각하면서 자기를 부정할 마음이 드는 것이 깨어진 마음입니다. 그러니 이 깨어진 마음은 자기를 의존하던 마음이 깨어진 것이고 하나님을 깊이 의지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통회하는 마음, 레브 다끄에 이 마음은 짓이겨져서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마음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마른 진흙 한 덩어리를 가지고 만약에 토기를 만든다면 제일 먼저 그 흙을 잘게 부순 후 물을 집어넣어서 먼저 반죽을 하지 않겠습니까. 잘 반죽을 한 후에 그것을 농로에 올려놓고 굴리면서 여러분이 원하는 도자기의 형태를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자기의 고집을 버리고 이제는 부드러운 흙이 되어서 토기장이이신 주님의 손에서 손끝이 움직이는 대로 빚어질 수 있도록 부드러운 그 상태가 바로 통회하는 심령의 상태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마음이 생겨나고 자기가 주장하고 고집하던 것을 하나님 앞에 포기할 생각이 들게 됩니다.
(찬양)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 주소서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외적인 환경에 관심이 많습니다. 올해는 얼마나 돈을 벌까. 올해는 우리의 가족들의 건강이 어떨까.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심지어 나의 외모, 그리고 나의 여러 가지 사회생활에 대해서 목표를 세우고 기대를 갖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사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당신을 향해서 살 마음,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제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이런 제사보다도 나은 참회의 제물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는 믿음이 없이는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 행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즉, 굳센 신앙,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사보다도 나은 참회로 나아갈 때에 수없는 방해물들이 있기 때문에 굳센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네 가지의 믿음을 오늘 소개하는 것으로 새벽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A. 자비를 믿음
첫째는 하나님의 자비를 믿는 것입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주의 자비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자비를 좇아 내 죄가를 도말하소서 라고 말입니다. 자비는 하나님이 비참한 죄인을 향해 베푸시는 값없는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언약 백성들에게 이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자비롭게 대해주시는지를 증거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뉘우치며 끝없이 여러분에게 의심이 밀려옵니다. 나의 지은 죄가 너무나 커. 그리고 너무나 오랫동안 불순종했어. 주님께 입힌 손해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도 나를 버리셨을 것이야. 그리고 더 이상 하나님의 자비는 나에게 없을 것이야. 성경과 역사를 봐. 하나님의 커다란 진노가 수없이 나오잖아. 사단과 양심은 여러분의 마음에 속삭입니다. 너는 이제 끝났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두 끝났고 너는 주님의 자비를 수없이 거절하였기 때문에 이제 기회는 끝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주님은 우리를 버려도, 우리는 주님을 버려도 주님은 우리를 붙든 손을 놓지 않으시니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동안에 끝없는 자비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꼭 믿습니다. 의심이 마음속에 파고들 때마다 사단아 물러가라. 주님은 한번 구원한 날 버리시지 않는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신앙을 갖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사죄를 믿음
두 번째는 사죄를 믿는 것입니다.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죄가를 도말하시고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고 하나님 앞에 주님이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시인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했을 뿐 아니라 이 죄를 은패하기 위해서 아무 죄 없고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살인하는 끔찍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 사람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그리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남은 날 동안에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높으심을 찬양하며 사는 신앙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죄를 믿는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해 주셨을 때에 베푸신 은혜 언약 안에는 두 가지의 보증이 있습니다. 첫째는 죄에 대한 무제한의 용서와 두 번째는 순종하고자 할 때에 순종할 수 있는 한없는 능력의 공급입니다. 은혜의 베푸심입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언약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에 무한한 용서를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요. 진실하게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용서하셨어도 자신에게 용서받은 자유함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내가 나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얼마나 용서해 줘야 됩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숫자적으로 490번이 아니라 무한한 용서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기도할라치면 나의 마음속에서 생각이 나고 양심과 사단은 끊임없이 그것을 붙들고 너의 죄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네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느냐고 우리를 송사합니다. 그 때에 사죄를 믿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신 십자가에 호소하고 나의 공로가 아니라 날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을 믿노라고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C. 정결을 믿음
세 번째는 정결해 지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시인이 말합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날 씻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라고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노래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과 같이 희게 되리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 정결한 사람이라는 것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두 죄 가운데 태어났고 어떤 사람들은 많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적게 때 묻었을 뿐인데 하나님 앞에 모든 때 묻은 죄악은 작은 것이든지 큰 것이든지 간에 그 본질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불결한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깨끗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정결하게 행하심으로 과거의 우리의 죄를 잊어버리시고 씻기시고, 그래서 마치 과거의 죄를 짓지 않았던 사람처럼 우리를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백화점에 가보면 5만원 하던 물건을 4만원에 판다고 줄을 쭉 그어놓습니다. 그렇다면 옛날에 5만원 팔았던 흔적을 일부러 보여줘서 많이 깎아 주는 것처럼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은 죄인인 우리에게 줄을 긋고 그런 죄인을 내가 용서해 줬다고 표를 내시는 것이 아니라, 깨끗이 지워 버리고 새로운 가격표를 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 은혜를 회복했을 때 과거의 지은 죄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해 주시는데 방해가 되었습니까. 오히려 다윗의 경험을 보십시오. 자기가 한 때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것이 주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D. 섭리를 믿음
마지막 한 가지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서 돌아오리이다 라고 말입니다. 죄를 지은 것은 물론 잘못되었지만 그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게 될 때 오히려 그 죄를 몰랐더라면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큰 은혜의 세계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는 없고 사도바울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강력히 탄핵하였습니다. 그렇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색욕꺼리로 바꿀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은 어차피 돌이킬 수 없이 일어난 일이고 과거에 일어난 그 일은 우리의 힘으로 바꿔 놓을 수가 없으니 이미 일어난 일을 끊임없이 후회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시인의 고백처럼 만약에 내가 돌이킨다면 나와 같이 죄에 빠져서 고통을 받는 많은 사람에게 돌아오는 길을 가르칠 것이고 그 길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 그 길을 가지 말라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사랑을 용서를 통해서 알게 하시니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안 사람은 위대한 회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제사보다도 더 나은 한 가지, 참회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섭리 속에서 여러분을 보다 더 깊은 은혜의 세계로 인도해서 오히려 나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다고 고백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IV. 결론
그러므로 보다 나은 제사를 참회 속에서 올리는 사람이 될 때까지 자비를 믿으며 사죄를 믿으며 정결함을 믿으며 섭리를 믿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3.지식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의 배경
첫날은 제사보다 더 나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순종이라고 배웠고, 둘째 날은 회개라고 배웠습니다. 오늘 셋째 날은 번제보다도 하나님이 더 원하시는 것이 지식이다 이것을 배우려고 합니다.
II. 축복을 부패의 기회로
A. 세속적 번영을 추구함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호세아서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남 왕국 유다의 선지자가 아니라 북 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이 때 북 왕국은 여로보암 2세가 나와서 아주 세속적인 번영을 부가하는 나라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영토도 넓었을 뿐 아니라 산업 정책을 잘 해서 경제가 발전하게 되었고, 그 뿐만 아니라 이제 북 왕국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아마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속적으로 오랫동안 번영한 나라가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 축복을 부패의 기회로 삼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이제 왕의 지도력 아래서 번영을 부가하고 있었는데 계속해서 이 세속적인 번영을 추구했습니다. 나라가 영토가 넓어지고 그리고 세금을 거두어서 왕실이 부유해지고 또 군대들을 잘 훈련시키고 무기를 갖추어서 강력한 국방력을 가지고 있고,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무역을 통해서도 많은 돈을 버는 이러한 번영이 국가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속적인 번영을 추구한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B. 신앙적 관심을 내버림
그런데 문제는 신앙적인 관심을 내 버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가 이 북 왕국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비판을 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당시에 이제 빵을 구워서 먹는데 빵을 석쇠든지 팬이든지 위에 올려놓고 이제 가루를 반죽을 해서 빵을 굽잖아요. 아래는 아주 뜨거워서 그래서 철판에서 빵이 새카맣게 타고 위에는 아직 열이 올라가지 않아서 빵이 익지 않아서 날 것이 되어 버렸는데도 뒤집지를 않는 것입니다. 뭐 빈대떡이든지 뭐 빵이든지 간에 앞뒤를 이렇게 오가면서 뒤집으면서 골고루 익혀 가지만 맛있는 음식이 되잖아요. 뒤집지를 않으니까 한 쪽은 새카맣게 타고 위에는 날 것이 되어 버려서 아래는 타서 못 먹고 위에는 안 익어서 못 먹는 그런 음식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속적인 번영을 추구함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열심을 품어서 열정이 있어서 거의 타버릴 정도인데 종교적인 신앙적인 부문에 있어서는 무관심해서 아주 냉담하고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복주신 것은 그냥 그것을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함만이 아니고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들은 하나의 기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올바른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해야지 될 텐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속적인 번영은 추구했지만 신앙적인 관심사는 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인생에 있어서 때로는 위기를 만나고 환란을 만나고 때로는 이제 더 이상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낭떠러지 앞에 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모두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그러한 환란이 오는 것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이 우리의 실제적인 삶이 신앙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이 항상 중심에 있어서 그 신앙 때문에 그 신앙의 연장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받았으면 그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의 고백이 우리의 섬김이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 앞에 은혜를 받고 영적으로 변화되고 주님의 그 큰 그 크고 넓은 사랑을 깨달으면서 살아가는 영적인 변화가 핵심이라면 그것이 밖으로 퍼져서 주님을 섬기고 그것이 밖으로 퍼져서 장사도 하고, 직장도 다니고 그것이 바깥으로 퍼져서 우리들이 이웃과의 관계도 갖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게 하나의 통일된 신앙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앙적인 관심사를 내팽개쳐 버렸다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지금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위기는 대게 그런 데서 발견이 됩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이제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는 그렇게 하나님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중심이 되었지만 주님이 그것이 너무 예뻐서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면 그 다음에는 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들을 잘 받아들여서 그래서 맨 처음 받았던 은혜의 소명대로 물질을 사용하고 또 물질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믿음 생활을 하고 그것으로서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봉사하고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는 이런 데서 사용을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예전에 자원이 없을 때에는 신앙이 있어도 주님을 조금 밖에 못 섬겼는데 주님이 영적인 자원이든, 육적인 자원이든 자원을 주셨으면 그것 때문에 주님을 더 잘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을 주신 이유고, 여러분에게 번영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사업을 하든지 학문을 하든지 아니면 무슨 활동을 하든지 간에 좋은 것을 얻게 되었을 때 이것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여러분이 그 축복을 탐닉하게 되면 그렇다면 신앙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대게 그런 데서 인생의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III. 제사보다 소중한 지식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문제를 극복을 하고 하나님 앞에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있겠느냐. 그래서 오늘 선지자는 제사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말 합니다. 나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그 앞 4장에서도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데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너희가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 여호와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뽑아서 당신과 관계를 맺게 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시고 정복해서 얻을 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에게 하나님이 영적인 축복을 주셔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율법을 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각양 좋은 종교의 제도를 내려 주신 것은 뿐만 아니라 강한 나라를 만들고 무역에서 큰 돈을 벌고 그리고 산업을 발전시켜서 많은 부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은 제사장의 나라로 살게 하심입니다. 제사장이 무엇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갈 수 없는 죄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중보를 중보의 역할을 해서 그래서 죄인으로 하여금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이 선지자의 이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 만약에 이 세상에 잇는 나라들을 하나의 사람으로 나라 하나 하나를 사람으로 본 다면 이스라엘은 제사장이 되고 그 많은 나라는 죄인이 되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백성들이 되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 이스라엘의 소명이었고 그것이 선교적인 사명이었습니다.
A. 지식의 본질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남에게 없는 매우 특별한 것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부강한 나라만이 아니죠. 만약에 부강한 나라가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애굽이 그런 역할을 했어야 했겠죠. 바벨론이 그런 역할을 했어야 했겠죠. 그런데 못 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 제사장 나라를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제사장 나라를 삼았느냐. 그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지식.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서 지식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트 엘로힘이라고 합니다. 다트는 지식이고 엘로힘은 하나님입니다. 이 지식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식을 어떤 형태로 주셨을까.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지죠. 그 지식의 대표적인 전수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심으로써 그럼으로써 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계시해주셔서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전달 방법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데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또 이미 얻은 지식 안에 머물 수 있는 그러한 은혜를 입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진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시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목회 사역과 교회 안에서의 모든 교제는 이 진리의 성경 말씀이 흘러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그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경외심을 가지고 그 분을 예배할 때 그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홀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잘 깨닫지 못했던 진리들을 우리에게 예배라는 통로를 통해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고. 구역의 교제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나와 똑같은 위치에서 각기 다른 환경 속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나누고 배움으로써 진리의 새로운 국면을 보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말씀의 지식 안에서 하나님이 마음에 품고 계신 소원들을 분별하여 그것이 나의 기도의 제목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소화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그것이 바로 기도의 생활입니다. 이 세상에 나아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 속에서 여러 가지 이 세상의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고 때로는 경쟁함으로써 물질을 획득하고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이 모든 과정은 이미 성경을 통해 내가 습득하고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직업활동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선택백성들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삶으로 보여주는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에서 활동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그 모든 지식의 중심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가 이 성경말씀이고 이 정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들이 펼쳐져 나가는데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이 삼위일체입니다. 거기에서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퍼져 나가면서 그렇다면서 그러한 아름다운 하나님의 질서들이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의 세계 속에 배열이 되어 있는데 그렇게 아름답게 배열된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찾아내는 것을 가리켜서 학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체계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아름다운 질서들을 논리가 아니라 감각을 통하여 찾아내고 기뻐하는 것을 우리들이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질서의 아름다운 것들을 이제 이야기로 풀어서 사람들에게 습득하게 만들어 주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문학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운 지식이 온 세계와 이 모든 것 속에 아주 아름다운 파문을 일으키면서 번져 가는 것입니다. 이 지식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 언약 백성의 의무이고 모든 인류가 지향하여야 할 삶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식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언약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선교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엔진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 핵심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것이 없다면 그렇다면 사실상 그의 마음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희는 지식을 버렸고 너희들이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나도 너희를 버리노라고 까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전체를 살펴보더라도 하나님이 이정도로 극단적인 말씀을 하신 데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식을 버린 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이 믿음 생활을 해 왔는데 정말 이런 지식을 간직하고 한편으로는 간직하고 또 한편으로는 계속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그래서 일 년 전의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나는 그렇게 무지했을까. 어쩌면 나는 그렇게 하나님이 이미 주신 지식들을 하찮게 여기면서 살았을까 등등의 이야기를 여러분 자신에게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대게 인생의 위기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벼랑 끝에 서는 환란 이런 것들은 대게 이러한 지식의 균형을 깨드린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시련과 어려움이 와도 그 시련과 어려움이 우리를 인생의 벼랑 끝에 세우는 게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왜, 예전에는 지금보다 더 큰 시련과 환란을 만났는데도 십자가 꽉 붙들고 믿음으로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위기 아닙니다. 벼랑 끝 아니란 말입니다. 일단 이 지식을 굳게 붙드는 것을 놓아 버리면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려운 일 때문에 흔들리면서 벼랑 끝으로 걸어가게 되고 하나님이 번영을 주시면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 번영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인생의 벼랑 끝으로 가는 것입니다. 당연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땅에 콱 박혀서 우리들을 어디로 이탈하지 못하도록 붙들어 주는 줄과 같습니다. 그렇죠. 높은 절벽을 오르거나 빙벽을 오르는 등반가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올라갈 단단한 줄을 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두에 서는 사람들이 제일 말하자면 베테랑들이 선두에 서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좋은 장비를 가지고 하나씩 하나씩 그 픽을 꽂으면서 그렇다면서 맨 얼음 위를 올라가요.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서서 거기에다가 웬만해서는 절대로 뽑히지 않게끔 아주 단단하게 그렇게 자기를 묶고, 아래 사람들은 그 줄에 매달려서 그래서 뒤따라 올라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굳게 박힌 그 고정하는 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여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아는 지식을 버리면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셔도 나쁘게 되고, 나쁜 것을 주셔도 나쁘게 되고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굳게 흔들리지 않고 있으면 좋은 것을 주시면 좋은 것 때문에 좋아지고 나빠 보이는 것이 주어져도 그것 때문에 오히려 변하여 더 좋게 됩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B. 알고 사랑함
그런데 이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데,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간단하게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동반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이 지식의 본질은 앎과 사랑이 하나가 된 지식입니다. 그래서 이 지식을 갖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사랑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는 힘이 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하나님을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게 되면 항상 거기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과 동시에 그 하나님이 아름다운 분이시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사랑이 함께 그 속에서 경험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알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또 그 하나님을 사랑해요. 그것이 인간의 가장 커다란 의무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두 가지인데 사상과 윤리입니다. 그래서 철저히 교리를 배우고 그 교리를 펼쳐서 이 세상을 하나님이 어떤 세상으로 창조하셨고 이 세계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잘 터득하고 아는 총체적인 세계관을 갖는 것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죠.
레이더가 있는데 레이더에는 항상 눈금이 있어서 위도와 경도를 알려 주는 표시가 있죠. 그것이 없고 만약에 넓은 화면에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났다면 이게 도대체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비행기인지 얼마나 크기의 비행이기인지 나에게 까지 이 비행기가 날아와서 폭격을 하는 데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아무것도 모르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눈금이 펼쳐지게 되면 비로소 나와 그 비행 물체 사이의 거리도 알고 속도도 파악을 하고 몇 분이면 나에게 날아올 수 있고, 내가 이것과 맞서거나 피하기 위해서 남은 시간이 얼만큼인지도 파악할 수 있을 것 아닙니다. 똑같이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교리를 잘 배우고 기독교 사상을 이해하고 그 눈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역사를 바라 볼 때에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고, 그리고 이 세상에 우리를 데려 가려고 하는 것과 성경이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 어떻게 차이가 되는지를 배우게 되잖아요. 그게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성경을 읽고 교리를 배우는 것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좋은 기독교 사상을 습득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세상과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고 그렇게 하면서 우리들이 책임 있는 기독 지성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상을 철저하게 갖추고 있을 때 이것이 기독교의 힘이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윤리적인 삶입니다. 아무리 자기 사상이 훌륭하고 기독교의 교리를 꿰고 있다고 할지라도 삶 자체가 이웃 사람들에게 비윤리적인 사람이라고 비난을 받고 욕을 먹고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어느 교회에서 진짜 있었던 일인데 차를 몰고 운전을 하고 오는데 한 차가 계속 진로를 방해하고 끼어들기를 하는데 빵빵 빵빵 하고 그렇다면서 가는데 이 차가 계속 또 그래요. 하도 화가 나니까 창문을 열고 야 이 자식아 운전 좀 똑바로 해 임마. 그러니까 눈을 이렇게 여니까 저 쪽의 운전수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 더래요. 여자가 갑자기 빨간 루즈를 칠하고 화장을 곱게 한 여자가 입을 열더니 욕을 욕을 하면서 야단을 치더래요. 내가 뭘 잘못했냐고 아침부터 별 개 재수 없게 군다고. 이상한 게 그 차가 자기 앞서서 가더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교회 주차장에서 같이 내리더래요. 같은 교회 다니는 교인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망신입니다. 주일날 아침에 교회 가는데 그냥 끼어들기를 하는데 좀 참지, 남자 집사님이 문을 열고 이 자식아 운전 똑바로 해. 재수 없어. 여자가 문을 열고 아침부터 왠 거지같은 녀석이 하면서 차를 세우고 둘이서 차에서 내려서 교회를 향해 걸어가요. 그렇다면 안 되겠죠.
세상 사람들을 보이라고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우리의 삶과 나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모든 사상과 윤리,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힘인데 이러한 사상과 윤리의 힘이 되는 그 기반 원천이 뭐냐 하면 헤세드입니다. 여기 보면 인애라고 나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헤세드. 아가페의 사랑이라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랑이 기반이 될 때에 그 때에 이렇게 됩니다. 누구도 사실은 장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감격하고 기뻐하면 그가 정말 신앙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지만 그것을 잃어버리면 누구나 다 마찬가지의 사람이 됩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니까 성도지, 만약에 그것을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나면 본성상으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과 똑같은 부패성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디로 가겠습니다.
IV. 결론
그래서 나는 결론적으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뭐냐 하면 여러분은 인생의 벼랑 끝에 섰을 때 돈 때문에 벼랑에 서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돈 주시면 벼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기적적으로 병을 고쳐주시면 인생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마음이 망가지고 하나님 아는 지식을 버린 사람들에게 번영을 주시면 번영 때문에 더 빨리 낭떠러지로 굴러 가요. 그래서 여러분이 만약에 돈 때문에 고통을 받으면 왜 그런 결과가 이르게 되었는지 환경적으로 여러분이 시련과 환란을 만나게 되었으면 시련과 환란을 당하면서도 벼랑 끝에 안 갔을 때도 많았는데 왜 벼랑 끝에 있게 되었는지를 생각을 해야 돼요.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축복을 주셔도 여러분이 마음을 하나님 아는 지식으로 굳게 붙들지 않으면 누구든 그 물질 때문에 타락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시련과 환란이 와도 그냥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은혜를 받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 만나서 감격하고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 때에는 지금보다 더 큰 어려움이 와도 벼랑에 서지 않았습니다. 얼마 만큼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에서 그런 은혜는 떠나가고 말씀의 미각은 잃어버렸고 그래서 불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지식을 버린 것을 깊이 회개하고 날마다 주님을 알기를 힘쓰지 않았던 생활들을 뉘우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 꼭 붙들고 옛날처럼 그 말씀을 읽고 듣고 외우고 실천하고 하는 그 일이 여러분을 삶의 중심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하나님 앞에 그 말씀 안에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 사랑하고 이런 삶이 중심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많이 주셔도 거기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별로 그렇게 특별한 게 없습니다. 왜, 아무리 물질을 많이 주셔도 그것 하면서 나쁜 짓하면서 즐거워 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말씀을 꼭 붙들고 은혜를 받고 말씀을 깨닫고 하는 이 기쁨이 중심이 되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예화) 9월 달에 제가 한동 대학교에 집회를 가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교수님들 20여 명을 만났는데, 열린 교회 설교를 열심히 듣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 한 교수님은 제가 내려갔더니 자기가 김 목사님과 꼭 밥을 먹어야 된다고 그래서 이제 그 분하고 만나서 밥을 먹었습니다. 처음 보는 분이셨습니다. 교수님이셨는데 아예 MP3에 몇 기가를 다운 받아서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그렇다면서 자신도 듣고 학생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고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중심 속에 계속 은혜를 주고 그 말씀에 붙들려 사는 그 중심이 있으면 벼랑 끝까지 안 걸어가요. 왜,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그러잖아요. 아이들이 잘 들어보세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할게요. 아이들이 있는데 아이들이 항상 똑바로 사는 것 아니잖아요. 그 때 부모와의 관계가 바람직해서 부모한테 잘 하면 머리를 쓰다듬고 칭찬도 받고 그리고 부모와 대화하면서 보다 나은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친구처럼 충고도 받고 때로는 잘못했기 때문에 혼도 나고 또 자기가 어떤 때는 잘못한 줄 몰랐는데 혼이 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잘못하고 있는 줄 알면서 무슨 면목으로 우리 부모님을 뵈올꼬 하며 자기 스스로 고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잘못될 수 있겠지만 많이 잘못되지 않죠. 요즘들은 뭐 시집가고 장가가면 그냥 부모들이 그 교육시키는데 2억 6천만 원이 든다면서요. 하나를 대학 졸업시키는데 그것을 해놓고도 그것이 모자라서 또 바리바리 싸 주고 더 가져가겠다고 싸우고 하는데, 옛날에는 옛날에 그 나름대로 명망이 있는 가문에서는 이제 며느리를 진짜 딸내미를 시집보낼 때에는 아버지가 책을 한권 만들어서 그 말하자면 시집가는 길에 보자기 속에 집어넣어 줬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어떻게 네가 남의 집에 가서 며느리로 살아야 되는가 교훈을 적어 준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갈 도리와 교훈을 준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중심에 계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중심에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굳게 붙들고 말씀을 깨닫는 기쁨 속에서 살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아가는 행복속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들이 벼랑 끝까지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꽉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제 새해에 뜻을 좀 세우세요. 결심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깨닫고 성경을 사랑하면서 금년 한해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제사보다 나은 것입니다.
4.화목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4)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성경에 보면 제사가 죄를 용서 받고 또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정말 놀라운 은혜의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제사보다도 나은 것을 여러 가지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충격적이고 또 한편으로 보면 우리의 신앙이 결국은 삶과 함께 어우러져서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이제 우리들이 제사보다 나은 것을 네 번째 우리들이 말씀을 듣고 있는데, 제일 첫 번째는 뭐였죠.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두 번째는 뭐였죠. 그렇죠.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시지 아니하고 상한 마음, 통회하는 마음을 기뻐하신다. 세 번째가 뭐였죠. 참 잘 외우셨네요. 그래서 제사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는데 나는 제사보다 나를 아는 것을 원한다. 그래서 지식입니다. 오늘은 화목입니다.
II. 삶을 돌아보는 예배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팔복의 말씀으로 시작을 하시고 그 다음에 이제 소금과 빛의 비유, 착한 행실,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그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 쭉 이야기 하고 그렇다면서 이제 그 또 다시 제사와 예물의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사실 여기에서 예물의 이야기가 나오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사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낼 때, 사람들의 의식 속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물, 혹은 재물이었습니다. 재물이 없는 제사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헌제자가 있고 그 제사장이 있고, 제사의 제도까지 있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희생과 헌신, 죄 사함을 표징 할 수 있는 제물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제사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는 제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제물, 혹은 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사가 있고 거기에 합당한 제물이 갖추어지면, 그 제사는 하나님께 드려진다 이렇게 믿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복음의 교훈을 주시면서 사실 그 제물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이 제사가 저절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제물보다도 더 중요한 그 무엇이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한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고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정말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을 우리에게 새롭게 해석해주시는 것이라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이미 3일 동안 살펴본 바와 같이 이 하나님의 제사를 둘러싼 이러한 제사의 정신은 이미 구약 속에 풍부하게 제시되어 있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무시하며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이 충격적으로 들렸던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이 이렇게 제사를 탄핵하고 제사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고 제시했을 때, 그 사람들에게 그 역시 충격적이었던 것과 같이 똑같은 이치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화목이라고 하는 것을 무엇을 이야기하다가 나온 화목일까. 문맥을 잘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흔히 하고 있는 욕설이 등장을 합니다. 그래서 뭐라 그러냐 하면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모든 진노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지 않은 얼마든지 그 분노해야 될 때가 있잖아요. 이것은 혈기적이고 육욕적인 그런 분노를 이야기 합니다. 또한 라가라고 하는데 히브리 사람들의 욕설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말로 말하면, 골빈 놈, 머리가 텅 비어서 어리석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로 이야기 하면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 요즘은 그런 욕 잘 안하는데 골빈 놈 그러잖아요. 그렇게 머리가 텅 빈 멍청이 그런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아주 흔히 있는 욕설이었습니다. 그렇게 되고 그 다음에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렇다면 세상에 이게 엊그제 통계를 보니까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70% 이상이 욕을 입에다가 달고 산다고 나왔더라고요. 어른들도 그래요. 어른들도. 그렇게 따지면 누가 천국을 가겠어요? 그죠. 그런데 사실은 여기에서 말하는 이것은 욕을 하고 그 다음에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이것을 그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제 이것은 그 앞에 나오는 팔복의 사람과 연결 지어서 해석을 해야 해요.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마음이 청결하고 등등 복음의 말씀에 의해서 마음이 그렇게 변화된 사람들이 되면 이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욕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욕설이 쏟아져 나오게 하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없음. 이것이 하나의 성향처럼 일관되게 사람들 속에 흐를 때, 이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라 이것입니다.
우리는 나무가 서 있을 때 사실 즉각적으로 이 나무가 죽은 나무인지 살아있는 나무인지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는 아마 나무를 캐서 뿌리를 보아도 이런 겨울 같은 날에 이 나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굳이 생명의 근원이 되는 나무의 뿌리를 보지 않아도 철이 바뀌면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줄기 가지가 뻗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그 나무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나름대로 그것이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살았을까. 죽었을까. 생각했는데 봄에 싹이 나고 잎이 자라게 되면 누구도 그것이 살았다는 사실을 뿌리를 보지 않고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지속적인 인격으로 이렇게 형제에게 진노하고 라가라고 욕을 하고 그리고 미련한 놈이라고 욕설을 달고 살고 그 사람들을 멸시하는 일들이 계속될 때, 그것은 절대로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A. 하나님을 위한 예물
그래서 이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삶을 돌아보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한 예물, 혹은 하나님을 위한 제사에 쓸 제물이 갖춰졌을 때 그 제물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 뒤에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자기가 그 예물, 혹은 제물을 바치는 대상인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마음이 필요하고, 두 번째는 경외의 마음이 필요하고, 두 번째는 그 예물이 혹은 제물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헌제 행위가 이제껏 살아온 자신의 삶과 어울리고 일치할 때 이 제사가 하나님 앞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형제와의 화목은 그것 하나만 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죠. 만약에 그렇다면 3일 동안의 설교가 다른 것으로 이어질 수가 없지 않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제사드리는 헌제자의 삶이 하나님에게 어울리고 예배하는데 어울리고 그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이 있다면 그렇다면 그는 반드시 마음속에 헤세드 아가페를 가진 사람들일 것이고, 그렇다면 형제를 절대로 그렇게 대우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해되실 것입니다.
B. 예배자를 향한 원망
그래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예배관은 포괄적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공식적인 이 예배도 예배고 삶 전체로 드리는 예배도 예배입니다. 둘은 구별되지만, 그러나 막힌 담처럼 나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함께 흘러서 좁은 의미의 예배를 잘 드리면 넓은 의미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힘과 지혜가 생기고 넓은 의미의 예배를 잘 드리다가 좁은 의미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오면 하나님 앞에 새로운 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부워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그 예물에 어울리는 일치한 삶이 필요한데 이 때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며 이제 예배자인 자신을 향해서 원망이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제단에 들이다가 거기에서 내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들과 특별히 형제들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들과 더 넓게는 그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올바르지 못했던 것들을 회개하고 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뭔가 맺히고 원통한 일이 있다면 그것을 먼저 풀고 와야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그리고 그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화) 아주 굉장히 오래된 일인데, 얼마나 되었을까. 45년 전의 일인데 저희 할머니가 살아계셔서 같이 생활을 하는데, 집이 굉장히 집이 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집에 마당이 있고 한 집, 두 집, 세 집, 네 집, 네 집인가 다섯 집이 하여튼 한 기와집 안에 세를 들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쪽 맨 문칸 방에 전도사님이 한분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전도사님이 여동생과 함께 살면서 이제 신학교를 다녔는데, 지금은 다 은퇴하셨죠. 나중에 그 목사님이 꽤 유명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교회도 아주 크고, 설교를 참 잘하셨습니다. 어렸을 때에도 내용을 잘 모르면서도 그냥 항상 그랬습니다. 어쩜 저렇게 설교를 잘 하시나. 까만 성직자 가운이 아니라 성결교이었으니까 신부 같은 그런 옷을 입고 하얀 칼라를 내놓고 그리고 올라가서 인물도 아주 훤칠하시고, 목소리도 참 좋으셨습니다. 굉장히 열렬하고 진지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어린 마음에도 아주 특이한 분이시다 그런 느낌을 받았고, 거기에서 제가 중학교 2학년 때까지인가,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그 교회를 다녔습니다. 회심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이제 전도사였을 때인데 신학교를 다니시는데 그 당시에는 신학교라고 하면 가난의 대명사였습니다. 너무너무 가난하셨고, 강원도 분이었는데 그 여동생이 와서 오빠 밥을 해주고 그렇다면서 이제 신학교를 다녔는데 총각 때였죠. 그랬으면 항상 그 때 보면 그 분쟁이 세 사는 사람들끼리 분쟁이 일어나는 가장 좋은 기회가 언제냐 하면 전기세 낼 때거든요. 전기세를 계량기가 워낙 비싸고 그런 제도도 없으니까 한 집으로 무조건 전기가 들어가고 그것을 이제 분배해서 내는데, 참 그게 분쟁이 많더라고. 왜냐하면 몰래 전기장판 쓰는 사람도 있고 뭐 이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식구들이 세든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전기세를 내는데 누군가가 분배를 했겠죠. 그리고 이제 각자 내기로 했는데 그랬으면 생활이 어려워도 명세기 주의 종인데, 그렇다면 그렇습니까 나한테 분리하다 그래도 그렇습니까 제가 내지요. 그렇다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 전도사님이 은혜가 떨어지셨는지 대판거리 싸웠습니다. 그것을 전기세 분배를 하다가 그러니까 저희 할머님이 아주 성품이 좋으셔서 일생을 살면서 그분이 누구를 비난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성품이 좋으신 분이셨는데 굉장히 그 전도사가 부당하게 한다고 느끼셨는가 모양입니다. 나는 현장은 못 봤는데 할머니가 뭐라고 그랬대요. 이 양반이 말입니다. 지금은 할머니이지만, 그 당시에 뭐 할머니 그 때 저 뭐 젊으셨을 때겠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한 얼마나 되셨을까요. 한 50세 정도 되셨을까 말았을까 그 때쯤 되었겠죠. 할머니하고 언쟁을 심하게 하고 다툰 것입니다. 굉장히 기분 나쁘게 끝났겠죠. 그러고 나서 할머니가 기분이 안 좋으셨겠죠. 할머니는 교회 안 다니시지만, 온 집안 식구들이 교회를 다니는데 어떻게 신학교 다니고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저렇게 전기세 가지고 저렇게 동네 사람들과 싸우고 다투나.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흘렀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모습은 제가 기억이 나요. 양복을 입고 키도 크시고 인물도 아주 좋으셔요. 가방을 들고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심방 대원인지 자기 부인한테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그런데 하여튼 누구한테 여자분 한두 분 하고 같이 마당을 들어오면서 남준이 할머니 계세요? 그러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나왔는데, 들어보세요. 할머니 제가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할머니도 성품이 좋으시니까 내가 좀 지나쳤습니다 그러셨겠죠, 기억은 안 나는데.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주 또렷이 기억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제가 직접 들은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할머니 얼굴이 떠오르고, 예배를 드려도 할머니 얼굴이 떠오르고, 성경을 읽어도 할머니 얼굴이 떠오르고 할머니 얼굴이 계속 떠올라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래요. 그래서 버티다 버티다 와서 그래서 용서를 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III. 제사보다 나은 것: 화목
A. 불화: 적대와 거리감
우리가 영적으로 예민하지 못하니까 못 느끼는 거지, 만약에 예민하면 그게 사람과 불화한 것이 얼마나 우리의 영혼에 걸림돌이 되고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는 커다란 방해물이 되는지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는데 그 때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세월이 빨리 흐르는지 벌써 뭐 45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 때 거기 마당에 서서 그 때 까만 양복에 까만 오바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서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면서 아, 남준이 할머니 정말 제가 잘못했습니다. 기도를 해도 할머니 얼굴이 나타나고, 주님이 나타나셔야지, 할머니 얼굴이 나타나고 설교를 해도 할머니 얼굴이 나타나고, 사람과 맺힌 그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를 어렸을 때 생생하게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서 주님께서는 제사보다 더 나은 것을 제시하시는데, 그게 바로 화목입니다. 화목. 그렇다면 이 화목의 반대는 불화거든요. 불화하게 되면 적대감과 거리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적대는 뭐냐 하면 그를 미워하고 그가 궁극적으로 파멸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살인을 말씀하시다가 이것을 같은 문맥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해석하신 바에 의하면 이 살인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미움의 감정과 동질의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인을 왜 할까요. 그 사람이 살아서 존재하는 것이 자신에게 큰 고통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처리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나서는 것이 살인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죠.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하기에는 살인하지 말라. 대부분의 사람이 나는 그 죄와는 상관이 없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만약에 너희가 너희에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고, 원망을 들을 만큼 다른 사람에게 욕하고 그의 명예를 훼방하고 하는 일들을 했다면 그것은 살인의 감정과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네가 마음속으로 살인한 그 사람과 결국은 적대감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무한한 거리감이 있을 텐데 사람과 그런 적대감을 갖고 무한한 거리감을 갖은 그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오는 그것은 하나님이 그 제사를 아무리 규정된 예물을 드리고 훌륭한 내용을 갖추었어도 하나님은 그런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예화) 나는 말만 듣다가 어제 처음으로 신문에서 봤는데, 참 끔찍하더군요. 그 미국의 의원 한 사람이 총격을 당해서 본인은 어떻게 총알이 뇌를 뚫고 들어갔는데도 죽지 않고 살았는데 주위의 사람이 여섯 명인가 죽었습니다. 그 일이 얼마 있기 전에 자기의 반대편인 정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그렇게 비난을 하고 심지어 그 작년 대선에, 전에 대선에 부통령으로 나왔던 헤일리라는 여자는 그런 사람들, 그 사람들을 겨냥을 해서 기관총을 갖고 있는 그런 사진을 보는데 섬짓하더라고요.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극단적일까. 무슨, 정치를 하다가 의견이 다르면 말로 하지, 그것을 포스터에다가 기관총을 겨누고 사살하는 장면을 찍어서 나왔는데 진짜 그런 총에 맞아서 죽었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욕을 퍼 붓는 것입니다.
B. 화목: 용서와 친밀함
불화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원수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든 거거든요. 성경에도 나와요. 그런데 잠언에서 하나님이 뭐라 그러시냐 하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의 최고의 축복이 뭐냐 하면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그와 화목하도록 만들어 주시는데 원수처럼 맺혔던 사이도 풀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그 은혜, 화목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불화가, 불화가 적대와 거리감이라면 화목은 용서와 친밀함입니다. 즉, 그러한 용서와 친밀함을 회복하고 주님 앞에 나왔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최고의 표현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겠다고 하는 가장 높은 이상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니 그것은 마음 안에서 자기가 자기야 육신으로 미워하고 원망하고 적대감을 갖고 이렇게 사는 것을 원하지만 하나님 앞에 자기, 하나님 앞에 자기가 예배드리면서 나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자각을 하고 자기를 낮추고 화목하게 지내는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나에게 악을 행하거나 잘못할 때 거기에 맞서서 그 핏대를 올리고 싸우는 일은 내가 별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마음속에 확 솟구치는 쓴물을 토해내면 쌈질이 됩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내 마음속으로 저 사람이 나에게 악을 행했는데도 혹은 저 사람이 마음에 너무 싫은데도 자기를 꺾고 주님이 그러지 말라고 그러셨기 때문에 마음을 꺾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것은, 그것은 자기 안에서 자기를 죽이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움은 상대방을 죽여야 되겠다는 살의에 가득할 때 미움과 원망이 나오지만, 화목 하는 것은 반대로 그 칼을 자신에게 겨누지 않으면 화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IV. 결론: 맺힌 것을 풀라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 전체를 좌우한다고 우리에게 선언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화목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맺힌 것이 있으면 푸는 것이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누가 이러한 잘못에서 자유스러울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도 오늘 기도하면서 마음에 이렇게 맺힌 것이 있다면 오늘 예배드리러 나오기 전에 정 안되면 만나서 용서를 빌고 그게 안 되면 전화로라도 통신수단으로도 잘못했다고 고백을 하고 화해를 하면 예배의 감격이 밀려 올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제사보다도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미워하는 사람에게만 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그 미움이 돌아와 자신의 영혼을 찌르고 용서하고 화목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수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게 돌고 돌아와서 자신의 영혼의 친밀함과 화해를 가져 오는 것이니 결국 남에게 하는 그것이 자신의 영혼에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오늘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이렇게 제사보다 더 나은 화목으로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정의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암 5:21)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이 아모스 선지자 때에도 나라가 아주 부강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서 사회가 점점 정의를 잃어버리고 그리고 혼란스러워 가고 있는 때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이 정의를 외치던 아모스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모스서에 보면 이 사람에 대해 기록하기를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직업이 목자였다가 선시자로서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제나 저제나 이 목자는 그렇게 최상류층에 속하는 귀족 계급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나라가 온통 이 세속주의에 빠져서 그래서 그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랑, 공평, 이러한 것들이 사라져 버린 현실을 아주 뼈저리게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서 이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독특하게 꾸려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언약 공동체적 성격이 와해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그 율법을 지키는 생활이 사라져 가기 때문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인 이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이 무너져 버린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경외심과 신앙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이라고 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사는 비결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유지되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조건으로서 제시받은 이 율법을 따라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계속되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모두 와해되고 깨뜨려버리게 되자 극도의 이기심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고 저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갈등하는 사회가 되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로서의 독특한 특징, 위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는 그 언약 백성들이 함께 사랑하면서 사는 이 독특성들이 무너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II. 성회와 제사를 거절하심
A. 종교의식을 미워하심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워 놓으셨을 때, 두 가지를 가지고 선교하시려고 세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사상,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그 하나님을 자신의 통치하시는 임금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독특성, 더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사상과 윤리의 힘으로 사상과 도덕의 힘으로 선교를 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목적이었고, 이 두 가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모두 무너져 버리고 났는데도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로 성회로 제사로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성회와 제사를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명백한 거부의사 표시가 나타납니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종교의식을 미워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절기, 성회, 이러한 그 다음에 번제, 소제, 등등, 그 다음에 희생의 화목제 등등이 나옵니다. 절기는 여러분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혹은 수전절과 같은 명절을 하나님 앞에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명절은 명백하게 그 중심에 단지 이방적인 축제의 성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하나님의 그 큰 능력으로 자신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 주신 것,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절기의 중심이었고 그리고 이제 뭐 여러 가지 절기들, 맥추절이라든지 수전절이라든지 하는 많은 절기들도 그 중심이 하나님의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 하나님의 베풀어 주신 축복의 은혜, 이것을 노래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의 정신이 사라지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절기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절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지내는 그러한 종류의 축제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실런지 모르는데 원래 석가탄신일날이 공휴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불교계에 있는 어떤 사람들이 그 때 대법원에 위헌소송을 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기독교가 국교도 아닌 나라에서 성탄절 날 쉬는 것은 쉬고 쉬는 것은 이것은 종교적인 편향이다 그렇다면서 소송을 냈습니다. 그 제판이 한동안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 결말을 보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좋아할 수도 없고, 싫어할 수도 없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기억하세요? 그 판결이 뭐냐 하면 이미 성탄절은 시작은 기독교에서 시작했지만, 이미 세월이 많이 흐르는 가운데 모든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세속명절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지금 와서 이것을 종교적인 편향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다고 판정이 났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는 요즘 애들 말로 헐 했죠. 뭐 좋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빠할 수도 없고.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에도 가보면 성탄절이 굉장합니다. 백화점이고 뭐고. 자신들이 뭐 대부분 사람들이 사실 성탄절과 관계없는 사람들이고, 일본은 사실 더 하거든요. 중국은 그래도 선교가 되고 있지만, 일본 사람들. 그러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대단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커다란 행사로 모이고 사람들이 그렇게 커다란 잔치를 벌이고 해도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 세 사람이 모였어도 당신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사랑하고, 의지하고 하는 그런 사람들을 모임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되느냐 하면 큰 것만 좋아하는 것은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크고 많이 그리고 큰 권력이 있는 것처럼 그것이 좋은 것처럼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은 그 바벨론의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그 조지 스윈녹이라는 청교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소수가 예배드리는 것보다 다수가 예배드리는 것을 통해 더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니까 그 두 가지 사실을 어떻게 조화를 시킬 수 있겠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없는 다수와 주님을 경외하는 소수의 비교라면 두말 할 필요도 없이 후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지만 동일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B. 가증한 이중성: 삶과 예배
그러니까 결국은 어떤 결론이 나오냐 하면 사람의 수와 크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질을 추구하면서 참된 신앙을 갖게 되는 속에서 확장되어 가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니까. 그런 것을 떠난 종교 의식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기로 모이든지 성회로 모이든지 헌신을 상징하는 번제든지, 속죄제든지, 소제든지 그리고 희생의 화목제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돌아보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해요. 그리고 공교하게 부르는 그 노래 소리와 그 많은 그 비파 소리 성가대의 찬양 소리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는 미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같이 사람들 속에 살면서도 칭찬을 받아서 싫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명백하게 그것이 빈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칭찬받고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경외심이 없는 종교 의식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미워하시는 이유는 뭐냐 하면 예배와 성회, 하나님을 찬양한 찬양, 이 모든 것들의 조건을 결핍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뭐냐 하면 가증한 이중성입니다. 이중성.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을 닮은 가운데 당신 앞에 나아와 예배하고 제사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 이 삶과 예배가 정말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항상 진심으로 말씀하시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어떤 일들을 행해주실 때에는 항상 의심할 여지없이 투명하게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솟아나오는 모든 행동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표리부동하거나 그 다음에 자신이 약속하고 스스로 그 약속을 위반하거나 하는 분이 아니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일정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는 그 제사가 우리의 마음과 맺은 마음, 삶, 이런 것들과 맺은 모든 관계들이 일정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 이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솟아난 사랑, 그 다음에 제사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 지식에서 자신의 자유로운 신앙의 선택, 그렇다면서 그것이 최고의 정성스러운 제물과 그 다음에 법도를 따라 드리는 제사로 나타나고 그리고 그렇게 제사를 드린 마음을 품고 제사가 끝난 후에 삶의 제사로 이어지는 그래서 마음부터 시작을 해서 삶으로 나오고 삶에서 다시 마음을 휘돌아 다시 삶으로 나오는 이 모든 것들이 마치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이 모든 피조물 위에 부으시고 그리고 다시 당신 자신에게로 그 모든 만물을 회귀하여 다시 당신 자신이 이 피조세계를 향하여 친절하고 자비롭게 대하시는 그 일관성처럼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으니까 이게 이제 가증한 이중성들이 나오게 됩니다.
세계 역사를 볼 때, 재미 있는게 뭐냐 하면 교회 건축이 발달된 역사의 그래프와 그 다음에 영적으로 교회가 침체되었던 그래프가 정반대쪽으로 일치를 해요. 그것이 무엇 때문이냐 하면 결국은 삶의 이중성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앙을 떠나면, 삶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고 삶이 그 삶이 하나님 앞에 그 종교심을 버리게 되면, 종교의 모양도 버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삶이 종교를 떠날수록 형식은 종교를 더 강력하게 고집을 하는 보상심리가 있단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죠.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사랑으로 못할 때, 돈을 많이 준다든지, 그 다음에 뭐 그런 것 있잖아요. 보상심리 이해 아시죠. 부모하고 맺힌 가운데 살아서 부모를 잘 공경을 못했는데 돈으로 계속 해결하려고 한다든지 그런 것들 있잖아요. 그런 것이 바로 보상심리입니다. 그런 식의 보상심리가 우리의 종교생활 속에서도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가증한 이중성들이 나오게 됩니다.
III. 참된 제사가 되려면
A. 공법과 정의를 따라 삶
1. 공법을 물같이
그렇다면 하나님이 받으시려는 참된 제사가 되려면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그리고 정말 제사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흘릴지로다. 그렇게 나와요. 흘린다는 동사의 주어는 누구냐 하면, 이제 히브리성경에는 하나의 허락형으로 나오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냐하면, 이스라엘을 단수로 표현해요. 그로 하여금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게 할지어다 그랬거든요. 물이라는 게 뭐냐 하면 히브리어의 마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물을 통칭하고 심지어 수증기도 마임이라고 그래요. 가끔 이 물이라는 게 바다보다도 훨씬 더 큰 의미로 쓰일 때, 이 때 마임이라는 말을 써요.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바다는 일정한 해역이 있잖아요. 그게 어제 말씀 드린 하박국서처럼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온 땅을 가득 덮을 때 넘실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물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바다 그 위를 두루 덮고 있는 그 무한한 물의 양을 가리켜서 마임, 혹은 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어느 하나도 덮이지 않는 데가 없이 그냥 땅이었던 거기를 바닷물이 밀고 들어와서 다 덮어 버리는. 우리말로 좋은 비유가 있네요. 상전벽해라고 하잖아요. 뽕나무 밭이었는데 바닷물이 들어와서 파란 말하자면 바다 해변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넘치는 그 물로 모든 것을 뒤덮은 상태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물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뭘 가지고 온통 뒤덮으라고 이야기 하냐 하면 공법입니다. 이게 히브리말로 미쉬파트입니다. 정의입니다. 정의. 샤파트라는 말은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명사형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람들이 각자 삶을 살고 내가 옳다, 네가 옳다 싸우잖아요. 그렇다면 어디를 가요, 법원을 가요. 법원에 가서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판결을 내려요. 네가 옳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법으로 판단하면 너는 죄를 지은 것이고, 이 사람이 손해를 본 거다. 배상을 하든지, 너는 감옥에 들어가라고 판결을 탁 내리는 것입니다. 그 판결을 가리켜서 미쉬파트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미쉬파트가 온 나라를 온통 뒤덮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각자 각자가, 각자 각자가 자신의 행위와 삶을 판단해서 하나님의 법에 맞는 것을 선택하는 이러한 정신과 실제적인 행위가 온 나라를 두루 덮고 있다 라고 하는 그 뜻입니다. 그렇다면 공의의 판단은 무엇입니다? 내가 힘들고 어렵다,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것들은 공의가 아니라 인정입니다. 공의는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겠죠. 그 기준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는 그렇게 공법이 물같이 흐르는 사회가 되기를 물같이 흐르는, 그렇게 뒤덮힌 사회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합니다. 그 나라의 영광은 어쨌든 부유하고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잖아요. 보면 외국을 이렇게 다녀봐도 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은 대접을 못 받습니다. 나라가 강력하고 가진 것이 있고 힘이 있는 나라의 국민은 어디 가도 무시를 당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자면 힘이 있고 그 다음에 세상에서 번영한 국가가 될수록 사람들이 사람 속에서 그런 사람이 대접 받는 것처럼 나라도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나라마다 부강하고 강성한 대국을 이루기를 원해요. 그런데 그것은 이 세상 나라의 가치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 백성이 이렇게 공법을 물같이 흘림으로써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가장 훌륭한 선교는 비록 우리가 지위가 높지 않고 거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가 아닐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고 있는 중요한 사명은 공법을 따라 사는 정의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회에서도 비난을 받을 만한 도덕적인 흠결을 가지고 있고 탈선하고 그리고 속이기나 하고 불법이나 행하고 이렇게 정치 공작이나 하고 이렇게 하면서 부당하고 불법한 방법으로 속여서 그렇게 하고 그러는 것은 그것은 정말 옳지 않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독특한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만들고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번 무슨 물건 같은 것들이 날개 돋은 듯이 팔려서 회사가 엄청난 돈을 벌었는데 무슨 거기에서 이물질이 나왔느니 바람물질이 나왔느니 한번만 돌면 그냥 회사가 주저앉아 버리잖아요. 똑같죠. 많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개개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체로 봐요. 만약에 우리가 어느 집에서 물건을 샀는데, 식료품을 샀는데 서너 번을 샀는데, 계속 썩은 것이 섞여 들어왔다고 한다면 우리는 고의라고 생각을 하고 더 이상 그 가게와는 거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과의 모든 부분이 좋고 그리고 잘 익었어도 한 부분이 썩었을 때, 그 사과 전체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2. 정의를 하수같이
여기에서 나오는 정의를 하수같이 흘린다고 할 때, 나할이라는 단어인데 원래 이게 강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제 이 강이 그 끝없이 끝없는 깊은 깊이를 가지고 있어서 결코 마르지 않고 계속 흐르는 그런 종류의 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말하자면 남한강과 북한강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거대한 수량을 흘려보냅니다. 그런 종류의 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웬만한 것들에 의해서 저항 받거나 장애받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그런 강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정의를 흘려보내는데, 제데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의로움, 정의라고 하는데 정의 중에도 특별히 행동으로 드러난 정의입니다. 행동으로 드러난 정의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그리스도의 표로 살기 위해서는 불편과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여성들이 추운 겨울날에도 제일 좋은 거야. 중공군 옷 같은 것 고구마 바지에다가 두꺼운 누비옷 걸치고 벙거지 하나 쓰고 털신 신고 다니면 얼마나 따뜻하고 훈훈하고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여성의 특징이 안 나타나. 그러니까 예쁘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그냥 불편하고 춥고 고달파요. 그래도 그렇게 하면 예쁘니까 그렇게 다니는 게 여성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말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죠. 우리가 그냥 생긴 대로 편하게 살려면 정의고 공법이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워 버리고 지 좋은 대로 살면 됩니다. 그렇다면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매달릴 필요도 없습니다. 죄 지을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시지도 않거니와 하나님께로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숨만 붙어 있고 하나님 믿는 신앙 있으면 그냥 살면 되요. 그래서 늘 말씀 드리는 것이 아무렇게나 살기 위해서는 노력할 것이 없습니다. 그냥 하면 되요. 학생이 공부 안하고 불량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히 학원 다녀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게으르게 퍼질러 자고 공부하기 싫으면 책 집어 던지고 게임이나 몰두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허튼 짓이나 하고 그렇게 살면 저절로 불량 청소년이 돼요. 불량 성도가 말이 안 되지. 불량 성도라는 게, 성도 같지 않은 불량한 의인이 되는 것은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마음에 있는 부패성이 시키는 대로 흘러가면 되요. 그런데 정말 미모의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추워도 스타킹 신어야 되고 종아리를 드러내야 되고 그리고 중공군 같은 옷은 입지 말고 예쁜 옷을 입고 다녀야 해. 그래서 춥고 고달픈 것입니다.
B. 예배와 삶의 일치
그것이 성도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품격입니다. 품격. 품격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해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저 사람들은 우리와 똑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우리와는 다른 가치관이 저들을 지배하고 있구나. 참 그래서 저들의 삶은 우리의 삶과 다르구나 라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선교적인 삶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배와 삶의 일치, 예배와 삶의 일치.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예배와 이 삶은 하나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원뿔처럼 되어 있어서 그래서 예배는 위에 있고 삶은 아래에 있는 떨어진 게 아니라 산봉우리로부터 산자락을 이렇게 내려오면서 삼각형의 하나의 산이 되는 것처럼 그래서 위에 눈이 많이 오든지 비가 많이 온다고 칩시다. 산이 높으면 위에는 비가 오고 아래는 안 올 수 있잖아요. 위에 비가 많이 내리면 그 빗물은 땅을 타고 개울을 타고 산 아래로 흘러서 산을 두루 적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은 삶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을 올바르게 살지 못했던 사람들도 회개하면 그 예배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으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말씀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삶을 두루 적시면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받을만한 넓은 의미의 예배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가 넓은 의미의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심직 하게 되었을 때, 그 때 좁은 의미의 예배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일주일동안 믿음대로 살기 위해서 분투하고 고난과 핍박을 받았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드리는 이 예배는 얼마나 감격적이겠습니다. 아버지, 제가 이제 주님 앞에 왔습니다.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이기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서 기도할 때 속에서 기쁨과 감사가 막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IV. 결론
그렇다면서 오늘 선지자가 말합니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와 같이 흘릴지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그런 공평한 삶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좁은 의미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심직 하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도 허공을 치는 같을 때, 삶을 돌아보면서 삶을 아주 단호한 마음을 가지고 개혁을 해야 해요. 그래서 강한 의지를 가지고 그래서 불순종하는 삶을 종식시키고 그리고 하나님이 동의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자신에게서 살점을 때내는 그러한 각오로 고치려고 해요. 그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강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그것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그러한 결심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매달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제사보다 나은 것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