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예배
녹취자: 김은정
작년인가 제 작년에 킵인트레이 목사님 오셨을 때 예배에 대해 120분정도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의 이야기하고 중복되는 면도 있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예배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들에 대해 한번 도전을 하고 오늘은 단지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우리 목사님들이 '아하 이게 문제였구나' 하는 것만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그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제가 최근에 쓴 책 가운데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라는 책이 있습니다. 많이 보급이 되었는데 그 책을 더 참고하시면 보다 진전된 토론들을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들 이런 질문을 하면 목사님들은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우리 목회하는 회중들 중에 주일 예배를 드리고 나가는 회중들 중에 몇 사람이나 설교를 기억하고 있을까요? 실제로 조사를 해본 결과 그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전국의 교단을 망라해서 예배드리고 나오는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했습니다. 예배 마치고 교회당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출입구에서 만났으니까 예배 마친지 불과 5분 내지 길어봐야 10분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물었는데 100명에게 물어봤더니 어떤 질문을 던졌냐면 오늘 예배 드렸습니까? 오늘 목사님이 설교하신 성경본문이 어디입니까? 100명에게 질문을 했는데 놀랍게도 단 5명만 본문이 어딘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5명을 24시간이 지난 월요일 확인을 했더니 5명 가운데 2명은 하루 사이에 잊어버리고 3명만 예배 시간에 어느 본문을 설교했는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강연을 나갔을 때 평신도들이 많이 모였기에 여기서부터 실제로 한번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12명을 물어봤더니 그 중에서 단 1명이 정확하게 3일전에 드린 예배의 주일설교 본문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제가 몸담고 있던 신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의 강의를 하러 들어가서 다시 확인을 해봤는데 거기에 있는 분들은 대개 일선 교회에서 부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입니다. 그래서 월요일날 저녁때 수업을 하면서 주일날 설교 본문을 기억하느냐고 확인을 했더니 10명 중에서 2명만 본문이 어딘지를 기억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역자들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오늘날의 예배가 무엇인지를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성경본문을 기억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모두 은혜를 받은 사람이냐 하면 사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의 갱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굉장히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열린예배, 구도예배 이런 이름으로 많은 예배들이 행해집니다. 근데 인제 문제는 무엇이냐면 예배도 그렇고 성령도 그렇고 제자훈련도 그렇고 모든 목회의 성령님까지 안들어가지만 소위 이시대의 목회의 패러다임, 그러니까 어떤 목회라고 하는 총체적인 흐름이 꼭 어떤 요소들을 새롭게 새롭게 집어넣을 수 있는 요소의 집합체를 가르쳐서 패러다임이라 합니다. 그 패러다임 속에 예배도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즘의 문제는 성령도 심지어는 어떤 성공과 성장을 위한 목회 패러다임 중의 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벌어지고 있는 성령운동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함정이 무엇이냐면 훈련도 해보고, 공부도 해보고, 전도 프로그램도 해보고, 예배 프로그램도 해보았는데 이번에는 성령으로도 한번 해보자 그런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비신학적인 접근입니다. 예배의 문제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배를 바꾸자는 논의들이 활발히 일어나고 예배에 대한 회복이 있어야 되겠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활발히 일어납니다. 제가 지방에 어느 큰 도시에 내려갔을 때 목회자들하고 모여서 담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방에 상당히 유력한 교회의 목사님이신데 “예배가 바뀌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기뻤습니다. 저는 어떤의미에서 예배 바로 드리기 위해 교회를 세웠다고 할 정도로 예배에 대해서 그런 집착을 하고 있는데 ‘저와 뜻을 같이하는 분이 계시구나’ 했는데 그 다음에 이야기들은 저를 매우 실망시켰습니다. “예배가 새로워져야 됩니다.” 그래서 “어떻해요?” “우선, 프로그램을 대폭 수정해야 합니다.” 고식적인 프로그램이 현대인의 요구에 안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서부터 나오는 얘기가 전입가경이었습니다. “권위주의적인 강단의 모양 이런 것도 고쳐야 됩니다. 인테리어도 획기적으로 다시 해야됩니다. 그리고 고전적으로 우리가 써오던 피아노 중심의 예배를 탈피해서 현대적인 악기들을 동원해야됩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에 일어나고 있는 소위 말하는 예배의 갱신 운동들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기서 우리들이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동기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악한 것입니다. “예배가 바뀌어야 된다”는 절대적인 외침이 모든 사람이 예배가 바뀌어야 된다고 말해도 말하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같은 동기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정직하게 오늘 우리의 예배갱신을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하소연의 동기들 들어봅시다. 무엇입니까? 예배를 바꿔야 된다는 이면에는 그 동기가 어떤 것 입니까? 제자훈련을 해도, 성경공부를 가르쳐도, 한때는 강해설교의 바람이 불어서 강해설교를 해봐도 도무지 변하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뭔가 목회현장에 변화와 교회의 성장을 위한 드라이브를 예배 중심의 워십 드라이브로 한번 몰아가보자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은 예배갱신의 참된 동기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갱신의 진정한 동기는 이런 것이어야 되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이렇게 밖에 예배드릴 수 없을까?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영광가운데 계신 지존하신 하나님이시고, 그 앞에 예배를 드리는 우리 인생들은 선한 피조물에 불과한데 왜 이 피조물들이 예배드리는 이 모습이 이렇게 오만하고 불손하고 예배드리는 모든 광경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대접이 되지 못하는가를 깊이 고민하면서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경배하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이어야지 예배를 어떤 하나의 패러다임이나 드라이브의 한 수단으로 생각을 해서 그것을 통해서 교회를 성장시켜보겠다든지 다른 교회가 제자훈련으로 성공을 하고 또 다른 교회가 찬양이나 강해설교를 성공하는 것처럼 우리는 예배라는 독특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한번 승부를 해서 목회의 사활을 걸어야겠다는 동기는 매우 성공주의지향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에 대한 강력한 동기는 자기사랑입니다.
~주 앞에 나와 경배 드립니다. 주 계신 곳에 기쁨 가득 누구와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네 예배드림이 기쁨됩니다.~ (찬양)
우리들이 우선 생각하고 있는 예배의 정의부터 손을 좀 봐야됩니다. 예배는 무엇입니까? 예배는 우선 이런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만 이해해서는 그것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특징지어주는 종교적인 중요한 한 습관도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예배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모여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신 위대한 구속의 사건을 기념하는 사건도 아닙니다. 예배는 무엇입니까? 저는 아직 예배를 간략히 정의하고 싶습니다.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다수의 백성들이 함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궁극적인 목표는 제사 개념과는 틀립니다. 즉 기념 개념과는 틀립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단지 기념 그런 것일 수는 없습니다. 믿음으로 경배하고 경배하는 사람들 속에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서 찾아오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자리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누구든지 예배하였어도 하나님과 참된 만남을 예배 속에서 갖지 못했다면 그 예배는 단연코 실패한 예배입니다.
이제는 우리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자”하면 짜증냅니다. 우리 교역자들도 “우리 같이 예배드립시다”하면 예배라는 그 자체에 대해서 매우 짜증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표현을 “오늘날은 예배를 견디는 시대이다.” 교인들은 예배를 견디는 겁니다. 예배는 뭔가 인내를 요하는 종교적인 행위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오늘날 조국교회의 예배의 현장을 보면 확인할 필요도 없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백화점에서 추운겨울에 물건값을 10% 20% 깎아준다고, 사은품을 준다고 광고를 하면 백화점이 개점하기 30분 전에 선착순 순서를 헤아리면서 추운겨울에 줄을 서는 열심으로 박 터지는 인생들이 예배시간에는 15분이되어도 조용히 나와서 기도하며 예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극장구경에는 중간에 영화를 보면 재미없다고 미리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숍에서 다음 영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자기가 들어가고자 하는 횟수에 들어가는 인생들이 예배 시간은 15분전이 되도 사람들은 오지 않습니다. 10분전에 몰려오기 시작하고, 5분전에는 러시아워입니다. 종이 울리고 예배가 시작됐는데도 못 들어오는 사람들이 복도에 즐비합니다. 기도할 때는 안 드려 보내고 찬송할 때는 드려 보내는데 왜 그러는지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이리저리 자리를 찾아서 헤매는 궁상들이 바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피조물들입니다.
우리가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입고 사니까 다행이지 구약시대의 제사를 그런 식으로 드렸으면 벌써 돌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에 대해 추호의 반성의 눈빛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들도 그런 현실들을 분노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예배당을 한번 보실까요? 물론 모든 교회가 지금 말씀드린 것 같은 형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가 그렇습니다. 특히 교인이나 한번 800명이나 1000명 모이고 안정적인 목회선상에 들어선 교회일수록 이런 그림을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이제 5분정도 지나고 10분 다 되야지만 교인들이 들어올 사람들은 다 들어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예배드립니다. 앉았다 일어섰다 찬송도 부르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 시간이 자꾸 짧아져 가는 것입니다. 저의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선명히 기억합니다. 가끔 어른들 쫒아서 교회가면 목사님이 호통을 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당신들이 일주일에 2시간 예배드린다고 해서 그것이 신앙생활인 줄 압니까? 중학교때 쯤 가니까 여러분들이 교회 나와서 1시간 40분 예배드리고 간다고 해서 그것이 신앙생활의 다가 아니요? 그랬습니다. 인제는 1시간 40분씩 예배드리는 교회는 현대적 감각을 잃어버린 교회들입니다. 이제는 12시 10분에 예배가 끝납니다. 장로교도 같고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교 뭐 간판은 뭐라고 붙었든지 간에 각 교단에 교단장들이 모여서 12시 10분이면 모두 끝내자고 카르테를 맺은 것도 아닌데 12시 10분에 정확히 끝내고 앞서가는 교회는 할 수 있는 한 1시간이 넘으면 안된다는 룰을 정해놓고 그 안에 예배를 마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게 뭐하는 겁니까? 저희 어렸을 때만해도 예배실은 단순했습니다. 근데 지금은 복잡합니다. 그리고 제가 부교역자로 있던 교회에서는 한 700명 모이는 교회였는데 깜짝 놀랬습니다. 주일예배 순서가 23가지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65분만에 정확하게 끝납니다. 그런게 어디있습니까? 어떻게 천국에 있는 교회가 12시 10분에 예배를 마치를 수 있습니까? 말도 안되지 안습니까? 찬송을 부르다가 더 부를 수 있는 것이고 설교를 하러 올라갔다가 더할 수도 있고 덜할 수 도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길게 예배를 드리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가 길어질 수도 있는 것이지 목표가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끝나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이런 우스운 질문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주일날 왜 교회에 나오는지 아십니까? 전 압니다. 예배를 빨리 끝내고 집에 갈려고 나오는 겁니다.” 자 그럼 봅시다. 복잡한 순서를 자꾸 드립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예배를 견디는 겁니다. 예배 견디기의 극치는 설교 견디기입니다. 설교가 시작되면 회중들 중 상당수는 설교를 들을 의지를 보이지 않습니다. 설교가 시작되면 아예 고개를 땅에 떨구고 주보를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보를 뭐 하러 읽습니까? 전 그래서 개척하고 나서 주보를 안 만들었습니다. 아니 “찬송 부르자” 그러면 부르고, “일어나라” 그러면 일어나고, 기도하면 그냥 듣고 있고, 설교하면 귀 기울이고, 다 끝났으면 “가라” 그러면 가면 되는 것이지 무슨 일주일 후에 부를 찬송을 일주일 전에 정해서 주보사에 보내서 그래야될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예배시간에 예배드리러 나왔지 주보 읽으러 나왔습니까?주보는 왜 그렇게 읽을게 많습니까? 뭐 칼럼도 나오고, 교인 글도 나오고 재미있죠? 잘 귀에도 들리지 않는 설교 듣기보다는 보는 겁니다. 다 읽고 났는데도 설교는 3분의 1도 안끝났습니다. 그다음에 인제 주보가지고 뭘 장난을 하는 겁니다. 공상을 하는 것입니다. ‘감사헌금이 100만원이나 나왔네 몇 명이 낸거야? 가로로 5명, 세로로 5명, 어구 25명이네 가만있지 100 나누기 25 한사람이 4만원씩 했구먼, 어후 누구네 돌이래 이집은 애도 잘낳네 아무개가 결혼하는 구먼’ 그래도 설교는 안 끝납니다. 이번에는 교정을 보기 시작합니다. 볼펜을 꺼내서 ‘이게 뭐야 교회지 고회’동그라미 치는 겁니다. ‘박 목사님을 최 목사님이라고 했네’ 하고 동그라미를 칩니다. 교정까지 다 봐도 설교는 안 끝납니다. 그 다음에 인제 총 천연색입니다. 제일 흔한 사람이 별에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옆에 사람들과 속닥거리는 사람, 주보에서 편지를 써서 주고받는 사람 또 뭐 그 시간에 뭐 그렇게 급한 일이 있는지 고개를 숙이고 늦게 온 사람이 어디로 예배시간에 빠져 나가는 사람, 또 설교가 한참 절정으로 치닫는데 핸드폰이 오는 사람, 삐삐가 오는 사람, 허리춤에서 삐삐 번호 확인하는 사람, 끄덕거리고 조는 사람, 졸다가 성경 떨어뜨리는 사람, 저는 거기에 하나님 안계시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왜 할 일이 없으셔서 그런 곳에 와 계시겠습니까? 영광스럽게 지어놓은 예루살렘 성전에도 그 속에서 경배하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지 아니하시면 그 영광스럽고 정성스러운 제사 가운데도 오시지 않은 하나님이 뭐 할 일이 없어서 오늘날의 교회에 ... 민방위 교육처럼 예배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민방위 교육 가보셨죠? 들어가자 마자 다리꼬고 민방위 모자 깊이 눌러쓰고 기다립니다. 집에 가라고 출석표 가져오라고 광고하는 그 시간을 기다립니다. 그런 곳에 어디 하나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나주시겠냐 말입니다. 거기서 하나님 만났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 저녁 헌신예배에 저도 갈 사정이 안됐는데 어떻게 사정을 하는지 갔습니다. 교인들이 열심히 설교을 듣더라구요 한참 설교를 하는데 신사한분이 맨 뒷자리에서 하얀 양복에 하얀 구두까지 신고 하얀 넥타이를 매고 열심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게 담임목사님입니다. 교회가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다 허위입니다. 한 교회의 영적인 깊이는 노래 부르고 교제하는 것을 통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예배드리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발견하는 특징 하나가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려고 노력하는 교회의 교역자들은 매우 겸손합니다. 그러나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지 못하면서 뭔가 다른 것으로 교인들에게 보상을 주려고 열심있는 교역자들은 대개 자신의 목회 방식에 대해서 아주 건전하지 못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식으로 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고 헌금시간에 헌금을 냅니다. 그리고 축도가 끝나고 나면은 교인들이 흩어집니다. 예배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만났으면 더러는 하나님을 만난 감격 때문에 흐느껴 울면서 예배는 끝났어도 예배당을 떠나지 못하고 정리되지 못한 자신의 삶을 돌이키는 일들이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예배가 끝나고 나면 5분도 되기 전에 소방 훈련하는 것처럼 빠져 나가 버립니다. 육중한 교회당 문이 열리고 나면 하얀 돌계단이 나오고 알록달록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마치 구슬을 토해놓는 것처럼 예배당에서 걸어나올 때 하늘에는 주일이 아닌 공휴일 오후에 따가운 햇살이 내려쬐고 있습니다. 걸어나오는데 예배드릴 때 그렇게 우울해 보이는 사람들이 예배가 끝나고 걸어나올 때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걸어나오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나님 그렇습니다. 저의 삶은 하나님의 계명을 떠난 삶이었으니 저의 생활은 흩트러진 삶이었고, 십자가를 드러내 보여주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배 중에 주신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제 산 인생은 어리석었고 이제는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도록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면서 예배당을 나와도 세상이 바뀔까 말까인데 말은 안해도 웃고 떠들고 내려오는 사람들 속에 있는 공통된 고백은 이것입니다. ‘휴~ 끝났다. 주일날 해야할 가장 커다른 의무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길게하기 시작하면 목회자를 미워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게 어느날 조국교회의 현실입니다. 교역자조차 설교본문을 기억하지 못하는 교회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어느 목사님이 솔직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목사님 그건 맞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도 제가 지난주에 무엇을 설교했는지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예배하고 교회가 교회다워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목회철학과 성경해석을 비롯한 모든 분야를 지배하여야할 원리가 하나있습니다. 그 원리는 바로 경외의 원리입니다. 성경을 해석해도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가 드러나고 우리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해석이 나와야된다는 것입니다. 목회의 철학을 가질 때에도 그 철학이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철학, 그 철학대로 목회하면 주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많은 그리스도 예수의 씨앗들이 생겨나는 목회가 될 수 있는 그러한 철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러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예배의 절대적인 요구가 충족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선,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인가 목회를 할 때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우리는 건전한 목회의 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두려운 것은 그런 정직한 사고를 갖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성경을 위한 방법 밖에는 성경 속에서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탐구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연구하는 사람이 누구냐가 더 중요한 겁니다.
제가 지금으로부터 한 11년 전에 목회자들 모임에서 같이 성경원어를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 이단으로 알려진 어느 교파의 젊은 여교역자가 와서 함께 원어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원어를 잘 공부하면 보다 성경적인 비밀을 잘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값비싼 투자를 해서 원어를 공부합니다. 그리고 공부하셔야 합니다. 근데 참 거기서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단에 속한 교파의 교역자인줄 알았나요? 얼굴도 예쁘게 잘 생기고 예의바르고 하니까 그런 가보다 했습니다. 저녁을 사겠데요 몇몇 모인 교역자들이 쫒아갔습니다. 잘 시켜줘서 저녁을 맛있게 먹었는데 자기는 원어를 공부하면서 너무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참 감사한 일이네요 했습니다. 자기는 원어를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그 사람이 속한 이단에 교리의 말이 진리라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인가하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느냐가 이 철학이 성경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으면 성경을 읽어나갈 때 성경 그 자체를 왜곡시키거나 틀어놓지 않는데, 이 아이큐 몇 자리밖에 안되는 알량한 머리를 가지고 자기 좋은 방식대로 세워놓은 목회자의 틀이 비성경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 성경을 볼 때 그 성경을 비성경적으로 해석을 해서 왜곡을 시켜야하지만 자기의 목회 철학하고 맞아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배의 갱신을 이야기를 합니다만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은 소위 이야기하는 목회철학 저는 그 말 자체를 아주 불경스러운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철학이 무슨 목회철학입니까? 성경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나 구지 오늘날 쓰는대로 목회철학이라고 한다면 대폭 수정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가 해야 할 가장 커다란 의미는 예배를 수정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공하면 그는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패하면 다른 모든 분야에서 성공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진정으로 성공한 목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수정해야하는 것입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들을 그저 전도나 교육이나 심방 이런 것들 하나로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곤란한 것입니다. 바꿔야 됩니다. 교인들의 생각도 엄청나게 잘못됐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버릇들이 없습니다. 특히 나이 먹은 교회 오래 다닌 고리타분한 신자들이 더 껍데기 예배를 드립니다. 한번 여러분 올라가서 설교할 때 보십시오. 눈 지긋이 감고 설교는 사절합니다. 얼굴에 씌여있는 사람들이 교회 중직자들입니다. 한쪽에서 처음 예수 믿고 감격을 하면 비웃듯이 나도 한때는 그랬다 이런 사람들도 다 늙은 양들입니다. 다 두드려 엎어버려야 합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하는 두 요소가 있습니다. 그 두 요소 없이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관한 가장 선명한 교훈을 주고 있는 성경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우물가의 여인과의 대화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예배에 관하여 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는데 당신들에 의하면 예루살렘이라는 그러는데 어떻습니까?” 이 여자는 예배를 생각하면서 어디에 매어있었냐면 장소에 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가 예루살렘이어야 한다는 그 배경은 구약의 율법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여성은 다른 것들은 믿지 않았어도 오경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 나름대로 약간의 주석을 가미한 사마리아 오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는 권한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축복의 산이라 여겨지는 그리심산에서 경배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배의 장소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즉 이 그리심산에서 조상의 규례를 따라 드리는 예배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와 맞먹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예배 방식에 대한 그러한 사고는 율법의 지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아주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관점이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다시 말해서 이전에 하나님를 경배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새 방식으로 예배하는 자들만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어떻게 나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은 저렇게 예배하는 자들은 안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도 말고, 하나님은 오직 이렇게 라고 지시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복음적인 진술에 의해서 볼 때 모든 예배가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 바쳐진다라고 하는 것은 미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진 제사가 있고 거절된 제사가 있듯이 하나님 앞에 드려진 예배가 있고, 하나님 앞에 거절당한 예배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많은 교회가 거절당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수없이 방법을 찾아서 헤메고 교인들이 목말라서 이리저리 헤메는 광경은 하나님이 예배를 거절하셨기 때문에 내린 어떤 의미에서는 영혼의 재앙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라는 방식으로 예배를 해야지만 아버지께서 찾으시고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자만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라는 방식이 무엇일까요? 주님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주 간략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저는 이것을 아직도 목회자들 가운데는 ‘신령’은 신령으로 해석하고 신령은 뭔가 ‘거룩하게’ 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진정’이라는 말은 ‘진심으로’ 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희랍어 원문에 의하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즉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진리와 성령,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이 두 가지가 예배를 예배답게 만드는 거대한 기둥입니다. 이것 없이는 예배는 설 수 없습니다. 이것 두 가지만 굳건히 서면 다른 것들은 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가 서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학자들 속에는 이미 종교개혁시대 때부터 예배의 규범을 만드는 가운데 심각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 논쟁이 무엇이냐면 예배는 성경에서 예배의 요소라고 말하는 것만 들어가야 된다. 이것이 칼빈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예배 중에 그런 건 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 이외는 다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벌써 있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칼빈이 제시한 견해를 따르지 않고 예배의 규범을 마련하는 것에 있어서 그 시대의 경험을 다양하게 섞어서 문을 아예 활짝 개방해 버린 때에는 본질은 유지하고 형식만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시간이 흘러가다 보면 본질이 형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이 본질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이 교회에 공통적인 경험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얘기하는 열린 예배, 구도자 예배 하는데 좋습니다. 필요 하겠지요 가능하다고 봅니다. 집회는 집회고 예배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주님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지식 안에서 드린 예배가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배가 먼저 입니까? 지식이 먼저 입니까? 지식이 없는 예배는 미신행위에 불과합니다. 사도행전 14장인가에서 바울이 아데네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너희들 주위를 돌아보니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해놓고 신상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도 있더라. 섬기고 싶은데 그 신이 누구인줄 알지 못하니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했는데 그분이 누구인줄 알려주겠다. 그분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지식이 없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경건이 있고 예배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오해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집회입니다. 그 두 개를 섞어 본다든지 예배를 집회로 바꾸면 뭔가 교회가 불신자들에게 더 호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론이지 기본적인 예배의 정신과는 이탈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자 그럼 보십시다. 진리와 성령 그러한 예배의 모본을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될 수 있으면 무슨 순서를 만들어서 집어넣으면 예배가 폼이 나겠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꾸 순서를 만들어 넣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예배 시작할 때는 복음성가를 시작해야 되겠다든지, 율동을 하면서 시작을 해야겠다든지 어느 교회에 가니까 끝날 때 율동으로 끝나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자꾸 예배의 변형을 가하려 하지 말고, 예배의 기본적인 틀, 물론 약간은 자유가 있습니다. 예배의 기본적인 틀, 즉 예배에 나오면 거룩한 예배의 부르심이 있고, 목회자가 좋아하는 성경구절 하나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예배로 초청하는 성경구절은 성경에 몇 구절 안됩니다. 그런 초청이 있고, 그리고 하나된 신앙의 고백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찬양이 있고, 그리고 또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있고, 그리고 기도가 있는 후에는 그 기도도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예배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줍니다. 어떤 때는 5분이상 10분까지 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합니다. 그다음에 설교가 있습니다. 설교가 끝나고는 헌금이 있고, 헌금이 끝나고는 축도가 있습니다. 그것도 또 문제입니다. 주기도문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이고, 축도는 성경에 나오지만 사도가 가르쳐주신 기도이고 또 우리가 하는 축도인데 목사없이 드리는 예배 약간 2등급, 3등급 예배는 주님의 기도로 끝내고, 가장 중요한 1등급 예배는 축도로 끝나는 것, 이런 것들은 성경적인 논리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도 신학적인 검토를 요합니다. 저는 그래서 축도가 필요한 예배는 반드시 주기도문 먼저하고 축도로 끝마칩니다. 두 개를 한꺼번에 하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리고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좀 자유로워야 되지 않습니까? 예배가 성령 안에 있을 때 자유로워지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예배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앉아서 찬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두곡정도 부르고 기도로 들어가려 했는데 찬양가운데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찬양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이 당신을 경배하도록 부르시는 초청을 느끼고 있는 것이 확연했습니다. 그러면 주보에 2개 나왔으니까 끝내고 다음 순서로 넘어가야 된다는 겁니까? 아니면 더 부를 수도 있어야 합니까? 확신이 없으십니까? 더 부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실제적으로 주보에 교회의 소식을 알릴 필요는 있지만 예배 순서를 광고하기 위해 주보를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오늘은 찬양을 부르는데 십자가의 찬양을 부르는데 놀라운 감화를 주셨으니 하나님 앞에 찬송을 부릅니다. 어떤 날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서 찬송을 부는데 사람들에게 놀라운 감격을 주셨으니 ~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랑만 그 사랑 알도다. ~(찬양) 교인들이 찬양 속에서 한없이 은혜를 받습니다. 교인들은 부를려하는데 시계를 보내까 2절 끝내고 마쳐야 겠습니다. 땡 땡 그만합시다. 다음 순서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겁니까? 순서를 위한 예배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예배입니까?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예배 순서가 간단합니다. 사도신경 한 다음에 바로 찬송 부르기 시작합니다. 찬송이 다 끝나고 나면은 11시 20분쯤 됩니다. 그러니까 뭐 악기도 저는 예배에 많은 악기를 동원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비판적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을 순수한 진리와 성령이 아니라 뭔가 임의적인 음향 같은 것으로 사람의 정서를 조작하려고 하는 것은 아주 타락한 습관입니다. 가장 성경적인 예배를 드렸다고 믿어지는 시대가 두 시대가 있는데 하나는 말할 필요도 없이 성경의 시대이고, 그 다음시대가 종교개혁을 비롯한 청교도 시대였습니다. 특히 청교도들이 예배의 자유를 찾아서 뉴 잉글랜드로 건너간 다음에 그들이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시간에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 아십니까? 그래서 결국은 교단이 무악기파, 유악기파로 나중에 갈라졌습니다. 악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4부, 5부 이런식으로 합창을 못하게 했습니다. 모두 똑같이 단음으로 했습니다. 분명히 그들의 견해는 무엇인가 지나친 것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시대적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거짓된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만남은 사라져 가고, 노래가 흥왕하는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거기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전파되고, 정직한 깨달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살아있는 예배를 위해서 집에서는 그렇게 악기를 즐겨했으면서도 예배당에서 예배할 때는 악기를 모두 포기하고 생음악으로 목소리로 하나님 앞에 예배했던 것입니다. 그런 정신입니다.
그러면 말입니다. 설교가 시작됐습니다.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 모든 교인들의 마음이 깊이 녹고 그리고 여러분 예배에 1000명이 나와 있으면 미안하지만 500명은 단 10분도 연속해서 하나님 앞에 입을 벌려 기도하지 않은 사람이 허다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굴리는 예배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여해야 됩니다.
입을 열고 " 살아계신 하나님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 이놈이 예배당에 나왔습니다. 하나님 목사님이 기도하라 그러시는데 할말이 없습니다. 주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할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기도안하는 사람은 괴로울 것입니다. 괴로운 시간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교회의 직분을 맡은 사람이 나와서 대표로 기도를 합니다. 성경본문을 읽으면 저희는 정확히 11시 30분입니다. 그리고 설교가 시작됩니다. 설교는 몇 분을 해야되겠습니까? 그런게 어디있습니까? 어느 잡지에 보니까 25분이 가장 심리학적인 이상적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심리학적인 이상적인 표준을 가장 무시하신 원조입니다.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고자하는 거룩한 소원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25분이 아니라 10분도 지나기 전에 잠들기 시작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그랬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설교하다가 "집사님 옆에 사람 좀 깨워요 도대체 뭐하는 겁니까? 예배시간인데" 그러자 그 집사님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재워놓고 왜 나보고 깨우래요?" "당신 계속 졸거요? 일주일에 30분도 깨어있을 수 없단 말입니까?" 그 사람이 대들면서 말하기를 "목사님도 한번 내려와서 들어보세요 안졸리는가? 목사님은 나보고 30분도 못 깨어있다고 말하지만 목사님은 한번이라도 나를 30분동안 깨어있게 해본적 있습니까?" "자는 게 내 책임만은 아닙니다."
그리고 설교하러 올라 갑니다. 몇 분을 설교해야 되겠습니까? 시간이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원칙이 있습니다. 몇 분 안에 끝내야겠다는 원칙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원칙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충분히 말씀하셨다 할 때까지 설교하거나 설교 도저히 못 하겠다 할 때까지 한다.'
어떤 때는 40분을 설교했는데 충분히 말씀하셨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희 교회도 12시 10분에 예배가 끝납니다. 1시가 됐는데도 하나님은 아직 말씀을 다하지 못하셨다 설교할 때가 있습니다. 1시 30분에 예배가 끝나는 날입니다. 저희 교인들은 아예 익숙해져 있습니다. 시작하는 시간은 알지만 끝나는 시간은 나도 모르고 우리 목사님도 모른다. 그러나 대개 1시 전에는 마치는 경향이 있다.
예배하러 올라갑니다. 외부에서 온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 이 교회는 예배가 몇 시쯤 끝납니까?" "주님한테 직접 여쭤보십시오." 뭐가 그렇게 급합니까? 저는 그래서 그렇게 말합니다. "예배드릴 수 없을 정도로 급한 사람들은 예배에 나오지 마십시오." 그렇게 급합니까? 그 예배 시간을 찬송 4절되어 있는 것 2절 짤라 먹고 2절 불러서 1분 30초 아껴서 2분정도 아껴서 어디다 쓸려고 합니까? 그리고 급히 예배 끝나고 급히 뭐하는 거 있나 보면 밥 먹거나 노닥거리거나 볼일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에는 너무나 바쁜 사람들입니다. 자유롭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면 미워하는 사람들이 가면 그만이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그 점에 있어서는 자유로워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 일부 어떤 사람들처럼 길게 하는 것이 자기의 권위인 것 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의 습관을 쫒아가선 안됩니다. 하나님이 본문을 통해 할 말씀 거의 하셨다 하면 서둘러서 빨리 끝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계속 끌고 나가면 인간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끝나는 것입니다. 설교가 마르면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설교를 합니다. 긴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문제는 길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변화를 못 받으니까 문제가 됩니다. 오늘날 예배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가 무엇입니까? 참회입니다. 예배 밖에 있을 때에는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알고 그리스도는 콩알만 해보이고 세상은 온통 자기의 모든 사고를 가득 채우는 엄청난 것으로 보이던 사람들이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아버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찬양)
척박했던 마음에 은혜의 단비가 내리고 굳었던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아지고 메말랐던 두 눈에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 회개로 말미암은 눈물의 흐르는 감격이 있게 될 때 그들이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언제 예배가 끝날까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코메디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 그때 그 예배가 기쁨이 됩니다. 큰 경배와 기쁨이 됩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인도했던 예배에 하나님이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제가 개척하기 전에 근데 하나님이 예배 중에 마구 부어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 줄 압니까? 9시에 예배 시작인데 7시 30분부터 사람들이 오기 시작합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압니까? 앞자리에 앉으려고 그리고 하나님이 마구 부어주실 때 설교를 180분 하였습니다. 요즘도 집회에 있을 때에는 대게 20분 내지 180분 합니다. 매우 특별한 날이었는데 설교를 하러 올라갔는데 하나님이 끊임없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시계를 풀어놓고 원고없이 설교를 한없이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하실 말씀을 충분히 하셨다고 생각되어서 기도하고 내려왔습니다. 설교하러 올라갈 때 7시 20분이었는데 구두끈을 매면서 시계를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11시 40분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끌고 가셨습니다. 설교자든지, 기도자든지, 찬양하는 사람이든지 심지어 반주하는 사람이든지, 성령의 손에 붙잡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틀을 존중하지만 틀에는 매이지 않는 예배, 틀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틀을 존중하지만 성령에 사로잡혀서 드리는 예배 그것이 예배를 예배답게 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30분정도 마치고 내려와서 1시에 제직회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주님이 본문을 펼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점점 전입가경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모든 성도들의 마음 속에 있는 불신앙의 요소들이 서서히 움츠리면서 항복의 깃발을 준비하는 때였습니다. 시계를 보면서 예배를 마쳐야 되겠습니까? 마지막 항복의 깃발을 들고 걸어 나와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 경배할 때 까지 더 설교의 폭탄을 퍼부어야 되겠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자유로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함께하시면 반드시 거룩한 참회와 기쁨이 옵니다. 그리고 정서의 회복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면 뭔가 그 예배 속에 깊이 몰입이 되어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기쁨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신선노름에도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그러는데 예배의 감격에 취하는데 언제 시간을 보고 앉았습니까? 그러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그렇게 예배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예배 중에 만지실 사람은 만지시고 혼내실 사람들은 혼내주시고 그리고 깨우칠 사람들은 깨우쳐 주시는 예배가 되도록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찬송도 너무 인색합니다. 설교 전 2개, 설교 끝나고 1개, 축도 전 1개 공식입니다. 어디서 약속을 했습니까?
지금은 보기 힘들어졌습니다만 목사님들. 시골의 대장간에 가면은 풀무를 붙혀서 쇳덩어리를 시퍼렇게 달구지 않습니까? 무쇠같은 것을 가지고 칼이나 납, 도끼 같은 것을 만듭니다. 칼이나 납,도끼 같은 것을 만들때 어떻게 만드는지 눈여겨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선 쇳덩어리를 불에 시퍼렇게 달구어서 쇳덩어리를 가지고 칼 모양을 만듭니다. 이만한 망치를 가지고 두들기는게 아닙니다. 한 손에 쥘 수 있는 망치를 가지고 다다닥, 다다닥 장단 맞춰 두들기면서 뜨거울 때 두들겨서 쫙 펴는 겁니다. 3번 정도 하면 낫이 되어서 나오고 1번 갈아주면 훌륭한 풀 베는 낫이 됩니다. 칼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 무쇠 쇳덩어리를 가지고 큰 오하나를 가지고 두들겨 가지고 만들려고 한다면 황우 장사가 와도 만들기는 커녕 쇳덩어리를 다 부러뜨리고 말겁니다. 인간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넌 하나님이 가만 안두신다. 너 같이 강팍한 죄인들을 하나님이 가만 놔두시나 보자" 공갈을 쳐봐야 " 쳇 저것도 설교라구" 오기밖에는 생기지 않습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하늘을 쪼개는 것 같은 천둥과 벼락과 같은 설교로 부흥을 주시기도 하지만은 때로는 속삭이는 봄바람 같은 소리로도 감동을 불러일으키신다는 말입니다. 어떤 대 그게 가능해지냐면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깊이 달구어질 때 그 때는 속삭이는 말 한마디가 커다란 행로보다도 커다란 위력을 발휘해서 그게 성품을 고치고 하나님 앞에서 자세를 고치고 하나님 앞에서 구부러진 그들의 관계를 변혁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진리를 깨달을 뿐 아니라 그 진리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성경을 통해서 받은 사람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찬양)
제가 강해설교 같은 때 수없이 불려 다녔습니다. 그런데 매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설교를 어떻하면 좋겠냐고 물어보는 세미나에 안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사람들은 열심히 모이는데 설교만 바꾸려고 하지 자기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료를 좀 달라는 것입니다. 자료목회입니다. 자료목회. 신령한 설교는 신령한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사람이 성공주의에 들떠있으면 그의 설교는 번영을 위한 설교밖에는 못합니다. 사람이 비관적이면 설교도 비관적입니다. 사람이 경박하면 설교도 촐삭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진실하면 설교도 진실을 호소합니다. 그 사람이 기도의 사람이면 기도에 대한 강한 호소를 설교를 통해 보여줍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는 예배의 감격을 회복할 생각을 안하고 어떤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은 교인들을 예배의 감격에 익사시킬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사행심 어린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물을 때 그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목회 성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이 오실 때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 아닙니까? 성령이 오셔야 됩니다. 마지막 요소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예배에 있어서 무엇과 같으냐면 다리와 같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다리와 같습니다. 이렇게 인간과 하나님이 이렇게 있다면 인간과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다리가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에게 가르쳐야할 것과 목회자가 배워야할 것이 각각 예배를 예배답게 하기위해서 하나씩 있는데 설교자가 배워야할 것은 순수한 진리를 예배시간에 선포하는 것이고 교인들이 배워야할 일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진리를 따르려고 몸부림치는 자세로 초지일관 예배를 드려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깡통입니다. 한심할 정도로 세상에 나가면 머리좋은 사람들도 예배당에 나와서 30분설교하는 것을 그 논리를 쫓아오지 못합니다.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말씀대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려고 하면 그러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이 요소를 교제나 인간관계에 두는 것이 되어선 안됩니다. 목회의 스타일 가운데 최악의 스타일이 인간관계를 중심으로한 목회입니다. 이것에 대해선 요한복음 10장이 아주 명쾌하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냐면 나는 양의 문이라 양도 나를 통해 들어가고 목자도 나를 통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양떼들은 목회자를 보고 그 교회에서 목회자를 만난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주님을 믿게 되었고, 목자는 양떼나 교회를 생각해서 목회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가 이유가 되어서 그리스도에게 매었기 때문에 목회할 수 밖에 없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 그래서 서로가 그리스도 때문에 만난 사이가 될 때에 그것이 진정한 목양의 관계입니다. 인간관계에 얽어 매이고 심지어 치사하게 교인들 떠나려면 협박하고 "내가 손들고 기도해서 복 안 받은 사람이 없고 내가 저주해서 성한사람이 없다" 아직까지도 큰 소리치는 정신나간 목회자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타락한 목회방침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목회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목양을 받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목양의 관계어서 가장 주요한 요소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심각할 정도로 훈련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결코 신앙이 견고해지지 않고 신앙이 문제가 됩니다. 저는 이런 비유를 잘 듭니다. 나이가 되어서 늙어가는게 식물과 동물이 다릅니다. 동물은 백수와 왕이요 밀림의 사자라도 늙으면 추해집니다. 인간은 더 추해집니다. 결국은 이빨이 다 빠지고 흉악한 몰골이 되어서 추하게 죽어갑니다. 나무는 어떻습니까? 소나무는 200-300년 쯤 되어야 기품이 있어 보입니다. 저는 가보지 않았지만 미국에 다녀온 어떤 사람이 캘리포니아에 가면 레드우드 숲이 있는데 높이가 110미터 되는 나무들이 세 사람이 팔을 붙잡아야지만 두를수 있는 그런 나무들이 빽빽한 밀림을 이루고 있답니다. 수령 1200년입니다. 왜 우리는 좀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고 오래 믿음생활하면 할수록 이렇게 좀 장엄한 나무와 같이 거목처럼 되어서 수많은 짐승들이 깃드는 열매가 맺혀지고 그 그늘아래 살기만 해도 행복한 그런 그리스도인이 안나오고 비비 틀어지고 비비 꼬이고 뭔가 알도 못하는 패개 닭같이 이런 신자들이 양산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신앙생활의 중심이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대접받는 것, 교회에서 권세부리는 것, 연조 따져서 밥그릇 찾아먹는 것 어디서 다 배운 수법들입니까? 전부다 세속적인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 주님을 사랑하므로 그것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대접받아선 안됩니다. 그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장로님들 세워놓고는 죽을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장로 없는 세상에 가서 목회 좀 해봤으면 좋겠다" 오죽 했으면 그러겠습까? 누구들이 세웠습니까? 우리들이 세웠습니다. 스스로 올무에 스스로 눈치를 보면서 왜 그렇습니까? 말씀을 듣고 깨닫고 거기에서 변화를 받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기쁨이 없기 때문에 교회가서 수틀리면 한판 엎으려는 사람들로 가득차는 것입니다. 비극적입니다. 이런 현실은 매우 비극적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회중들의 입장에서는 정신을 차려야합니다. 예배시간에 너무 산만합니다. 텔레비전의 드라마 할 때는 아이들이 왔다 갔다하면 소리를 지르면서 조용히 하라고 그러는 사람들이 예배시간에는 한심할 정도입니다. 목회자들도 문제입니다. 좀 그런 거 고치면 어떻습니까? 바닥은 지저분하고, 밖에서는 차가는 소리가 들리고, 몇 백만원만 주면 이중창 설치해서 방음 장치할 수 있는데 다른 데는 펑펑 쓰면서 예배에는 고려를 안하는 겁니다. 막 차소리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환풍기는 떨어져서 덜덜덜하고, 유아들은 여기서 울고불고 뛰어다니고 그렇게 해서 예배가 꼴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겨울이면 온풍기를 틀어놔서 앞에 있는 사람도 설교가 안들릴 정도입니다. 그렇게 추우면 아랫목에 있지 뭐하러 교회에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뭐가 우선순위가 안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단은 조용해야 합니다. 처음에 좀 상처를 받겠지만 아이갖은 부모들은 "당신은 본당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들어오시려거든 아이를 두고 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유아실로 가십시오" 한번은 섭섭하겠지만 냉혹하게 그것을 통해서 모든 교인들이 유익을 얻어야 합니다. 우선 절대적인 요소는 조용해야 합니다. 오직 설교자의 숨소리는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날 수요일 날인데 외부 교인이 저희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왔습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저희 교회 교인들은 안그럽니다만은 히브리서 11장 3절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찾아보지 않습니다. 노트필기도 못하게 합니다. 조용히 앉아서 설교자를 주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하는데 히브리서 11장 3절에 이르기를 하니까 습관적으로 성경을 찾는데 순간적으로 천둥치는 소리인줄 알았답니다. '부스럭' 하는 소리가 납니다. 그만큼 조용해야 합니다. '경건하다'라는 것은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가 구별된 자리인줄 알고 이 자리가 비록 초라한 곳이지만 여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타지 않는 불꽃가운데 임재하시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며 또는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시다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있는 현존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방종하고 떠들고 웃고 왔다 갔다하고 삐삐가 울리고 핸드폰이 울리고 그럴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조용해야 됩니다. 여러분 그것은 목회자가 의지가 있으면 저희 같은 교회도 하는데 왜 못하겠습니까?
두 번째 요소는 설교시간에 집중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설교뿐만 아니라 찬송을 부를 떄에는 찬송을 부르는 일에 집중을 해야됩니. 예배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성경암송도 도움이 되겠지만 찬송가 가사 암송대회를 한번 해보십시오. 그래서 온 교인이 아버지 앞에 ~큰 영광중에 계신 주 나 찬송합니다.~ (찬양) 하나님 앞에 조용히 모든 가사를 외우면서 눈을 감고 묵상하며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찬양을 불러도 남이 기도를 해도 집중, 축도를 받아도 집중, 헌금을 할 때에도 집중하는 예배가 되야지만 하나님께 마음이 받쳐지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집중하는 것을 제외해놓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바친다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마음에 없는 이야기를 하면 논리에 허점이 들어나고 딴 소리를 자꾸 합니다. 마음없이 드리는 예배의 대표적인 것이 집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시간에는 절대 교개숙이지 못하게 합니다. 모두 고개를 드십시오 필기도 하지말고 끝날 때 까지 설교자를 뚫어지게 집중하고 무엇을 하나님이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시는지에 대해서 어린아이같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기만 하면 성도의 예배의 의무는 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 보고는 나를 보라고 해놓고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런데 구원을 얻는 길은" 원고에 코를 박고하는 설교하는 예배에 자유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설교에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유롭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거나 추천하지 않습니다. 저는 무원고 설교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무원고 설교를 위해서는 원고설교보다 피를 깍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하고자 하는 내용을 거의 머리 속에 골자를 놓고 있어야 하고, 설교하고자 하는 전체에 대한 완전한 구도를 갖고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문장을 기록해서 읽는 것이 아니므로 그 본문에 대해 충분히 느껴야만 말할 수 있습니다. 느끼지 못하고는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올라가서는 회중을 모두 장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처다보는 것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자기를 처다보면 이쪽서부터 차례대로 성도들에게 주면서 성도들이 한사람 한사람 자기 앞에 나와있는 것 처럼 설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감동을 가지고 말입니다. 거기서 주님이 붙잡아 주시면 성도들에게 큰 감화를 끼치는 것이고 주님이 손 놓으시면 망신당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설교하는 중에도 예배를 드리는 시종일관 성도들과 예배 인도자는 하나님의 성령이 한순간도 붙잡지 아니하시면 우리가 하는 이 예배가 다 쓸데없는 짓이 될 수 있다 하는 절박한 의식을 가지고 예배 내내 하나님 앞에 긴장하면서 예배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울리시면 웁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웃게 하시면 웃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분노하게 하시면 우리 함께 분노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결단을 촉구하시면 결단합니다. 이게 예배를 다는 사람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그 일들을 위해서는 성도들이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꾸 예배시간이 헛 곳을 처다보고 딴생각 한다고 생각되면 저는 부릅니다. "무슨 일입니까? 지난 주에 들은 설교를 기억합니까? 지속적으로 노력을 해도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확신이 없다면 당신 취향에 맞는 교회를 찾아가십시오 당신 자신의 영혼과 교회를 위한 일입니다." 권고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은 교회를 하는 것도 목회의 목표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커지면 크고 안커지면 안커지는 겁니다. 그러나 바르게 하지 않는 댓가를 통해 성장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팔아넘기는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바르게 하다가 하다가 안되도 자기하고 자기부인은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진리가 선포되는 곳에는 모든 사람이 거절해도 그 진리를 붙들고 살고 싶어 하면서 감격해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회중에게는 이런 태도는 필요하고 말씀을 들을 때 호기심을 가지고 들어선 안됩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은 여기에 있고 듣습니다. 주님 말씀하옵소서. 내가 그 뜻대로 행하겠나이다." 이러한 신앙적인 자세를 가진 마음으로 설교를 듣도록 교인들을 혼내고, 가르치고 타이르고 위로해야합니다. 마지막으로 설교자의 입장에서는 순수한 진리를 설교해야 됩니다. 합리주의에 때묻고 성공주의에 루즈 바른 그런 설교를 해서는 안됩니다. 기록을 하시렵니까?
설교란 하나님을 만난 설교자의 뼈 속에서 우러나와 심장을 관통하여 피를 바르고 입에서 토해져 나오므로 진액을 묻힌 하나님의 음성이다. 설교란 진리를 따라 산 설교자가 자신의 피로 회중들을 적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주일동안 자기가 증거 하고자 하는 진리와 더불어 피를 말리는 진리와의 깊은 씨름 속에서 빛을 만난 사람들의 설교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복음을순수하게 설교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이 설교한 설교의 내용들을 읽어보니까 정말 은혜롭습니다. 성경적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가 요즘 먹혀들겠습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겁니까? 더 심한 경우를 말씀드려 볼까요? 설교에 관해서 연속강연을 다하고 나오니까 로비에 모여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제가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뒤를 빠져나오는데 어떤 나이 드신 목회자 분이 자기 친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야 야 다 맞는 이야기야 참 저래야돼 그런데 어쩌란 말이야 이제 내 나이 50이 넘었어" 내일 죽어도 그것이 옳으면 고쳐야 될 것이고 60년이 남았어도 그것이 그르다면 버려야 됩니다.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즘 먹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사역의 정신이었습니다. 참 선지자들의 삶의 진정한 비젼은 주님이 자신들의 심령에 주신 영혼의 하나님의 메시지를 모두 다 토해놓고 죽는 것이 선지자의 본분이라고 믿었습니다. 성과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었습니다. 학개 선지자를 제외해 놓고는 누구도 자기가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의미에서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입니다. 바라보고 환영하다가 죽었습니다. 예레미야 같은 사람은 멸망을 보았지만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성취였습니다. 가치를 어디에다 두느냐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다 볼 때 우리 목사님은 워낙 하나님께 붙잡혀 있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라면 가정은 물론이고 우리 같은 것들도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분이시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매인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빛이 아니고 빛에 대하여 증거하기 위해 온 자라 그리고 진리를 순수하게 설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성공이 아니라 그것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에 그러면 사람들이 모일까? 제가 강남에 있는 어느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는데 그때 아주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수 없었습니다. 신학교에 교수로 있을 땐데 설교가 끝마치고 났는데 앉아서 다과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제 앞에 어느 집사님이 앉으셨습니다. 모 대학에서 역사를 강의하고 계신 교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인제..(설교가 중단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