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에 은혜를 주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시 67:1)
녹취자 : 김세나
이 시편은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이스라엘의 비전을 보여줍니다. 신약의 경우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영적인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의 교회에 주시는 비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1절에서 이 비전이 어떻게 전파되어 나가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은 한 사람이 은혜를 받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은 어느 한 지도자가 사람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비전이 아닙니다. 먼저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는 것으로 비전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나의 보람은 바로 내가 영혼들을 섬기는 이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은혜의 도구로 사용해 주시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목회자로서의 소명이 확실하다고 인 쳐지는 것은 바로 나를 사용하셔서 정말 놀랍게도 나의 말을 듣고, 나의 가르침을 받고, 나와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거나 무엇인가 주님의 마음에 충분히 갖추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인가 요구하며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은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 자체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사건입니다. 그 증거는 우선 이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때, 당신의 몸 전체를 채우기 위해서 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받으면 즉시 나 자신을 잊게 되고 타인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게 되면 은혜를 받지 못하였을 때는 지독한 자기 사랑에 매여 살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웃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됩니다. 내 지체들의 영적인 형편, 내 이웃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는 비참한 상황, 그리고 그들의 불쌍한 처지, 이러한 것들이 모두 떠오르면서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이 비전의 시작은 한 사람이 은혜를 받음으로써 비전이 시작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한 자녀로서 먼저 은혜를 받아야지만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단순한 원리입니다. 절대 복잡한 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함께 사역해 보면 마지막까지 남아서 끝까지 돕고 눈물 흘리며 함께 섬기는 사람들은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은혜를 준 모든 사람들이 끝까지 남아 있느냐?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엄청나게 은혜 받은 사람들도 언제든지 변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를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만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에게 부어지는 도구로 여러분들을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충분한 은혜의 역사를 지체들에게 베풀고 계신가?’ 누가 감히 “나는 충분히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반감을 품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조는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정말로 하나님이 나를 쓰시는 그러한 증거를 보여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것 없이 비전을 말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야심입니다. 자신이 해보고 싶은 일, 자기가 만들고 싶은 교회에 대한 꿈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서 은혜를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하십니다. 큰 돌멩이를 저 아래 호수에 확 던지면 풍덩하고 빠지면서 파문이 일 것입니다. ‘풍덩’ 하고 빠지는 것이 바로 사람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비전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무슨 비전이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못 받았는데…” 물론 그럴 수 있겠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열심히 믿으면 복 받는다고 목사가 큰 소리 치니까 ‘자신이 부자가 되어 보겠다.’ ‘사업에 성공해 보겠다.’ 등등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비전일까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넘치는 말씀의 은혜를 주시는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설교자가 조금 어눌하고 목회자가 무엇인가 똑 부러지게 일을 잘 못하여도 목회자 자신이 주님의 은혜를 받고 말씀 사역을 하고 목양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렇게 목회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목회자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비상하게 신자들이 한 마음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고, 은혜의 결과가 사랑으로 하나로 묶어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배를 드리면서 성령 충만한 반주자들이 환상적으로 리듬이 맞습니다. 찬양인도자와 일체가 되면 찬양이 강물처럼 흐릅니다. 그것이 어떻게 피아노와 악기연주, 성가대, 그러한 것과만 관련이 있겠습니까? 다 말은 못하지만, 한 성령 안에서 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나면 목회자가 다 표현을 못하고 다 그것을 옮겨도 사람들이 눈빛으로 통합니다. 그리고 그 진심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비전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한 번의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회심시켰다고 할지라도 지금도 여전히 나의 말씀사역을 통해서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는가! 그래서 나는 원래 청년부에는 재능이 있지만 장년부를 맡았으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각 사람들에게 맞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똑같은 영혼입니다. 그래서 한 영혼에게 은혜를 부어달라고 안타까울 만큼 매달리면 영혼을 변화시키는 원리는 유치부서부터 소망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똑같습니다.
보십시오. 사람들이 끊임없이 시련과 고통을 만납니다. 지난주에 설교하였듯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일입니다. 물론 기도를 해서 병이 낫기도 하고, 무너졌던 사업이 재기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는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목회는 그 현실을 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을 만나도 그것을 기꺼이 생명의 힘으로 극복하며 살도록 만드는 것이 목회입니다. 목회가 유일하게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목회 자체가 목회라는 방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시인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복을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라고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베라카’입니다. ‘베라카’는 영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세속적인 것까지 포괄하는 복입니다. 그 복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받는 복입니다. 창세기에서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다고 할 때 그 복 또한 베라카를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내리시고, 그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에서 신령한 것부터 물질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복을 누리는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셀라’는 음악적인 부호입니다. 읽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의 얼굴빛’이라고 나옵니다. 이러한 어법은 구약에서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3인칭 남성 단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흔한 히브리어의 표현방식입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따로 있고 그 다음에 얼굴빛을 비추시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셔서 하나님과 새로워진 사람의 관계 속에서 모든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무엇일까?’에 대한 답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뒤이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그러니까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그 얼굴빛이 우리를 비추사” 라고 나옵니다. 원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얼굴빛으로 하여금 우리위에 비취게 하시며” 이것이 원래의 뜻입니다. 얼굴빛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얼굴빛’은 시편에 수없이 나오고, 민수기에는 제사장의 기도 속에 나옵니다. “여호와는 너를 향해 얼굴빛을 비추시고” 하면서 전쟁하러 나가면서 제사장의 축도가 나옵니다.
이때 ‘얼굴빛’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얼굴빛은 하나님의 영광의 진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추신다.’라고 할 때, 당신의 얼굴을 누구에게 향하셔야만 비춰질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얼굴을 향하신다고 할 때 악인에게 적용하면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는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뜻합니다. 그것의 진수가 바로 얼굴빛입니다. 우리 신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위가 어디인가 할 때 당연히 심장입니다. 심장뿐일까요? 간도 1cm라도 찔리면 죽습니다. 그리고 한번 칼에 찔리면 절명하는 부위가 우리의 몸에 여러 군데 있습니다. 그러나 심장이나 간은 우리의 인격을 반영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김기훈’할 때 그의 심장의 생김새와 모양을 가지고 김기훈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얼굴을 생각하면서 그를 항상 생각합니다. 이해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얼굴을 뜻하는 ‘파닌’은 너무 신비한 물건이었습니다. 복수로 사용하는데, 복수가 히브리어 연구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신비의 복수일 것이라 보았습니다. 거룩하고 신비한 것들을 복수로 사용하였습니다. ‘파닌’이라고 할 때, 얼굴이 짝을 이루기 때문에 복수로 볼 수 있겠지만 반으로 나누면 그 사람의 얼굴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보면 대부분 사람의 얼굴은 데칼코마니처럼 되어 있으며 양쪽이 얼굴이 똑같습니다. 물론 삐뚤어진 사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데칼코마니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로 쓰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인간이 얼굴 자체가 히브리 사람 사이에서는 너무 신비한 것입니다. 눈이나 코, 입은 우리의 인격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신기하게 얼굴 전체가 우리의 인격을 반영합니다. 아무개 이름을 떠오르면 제일 먼저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이름과 얼굴이 매치되면서 여기는 기억이 안 나도 얼굴을 보면서 인격을 생각하게 되고 심지어 그 사람이 없는데도 그 사람과 인격적인 대화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가능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얼굴입니다.
이 구절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은 얼굴로 하여금’라고 나옵니다. ‘오타노’인데, ‘~을’이라는 뜻이지만, ‘~에게’ ‘함께’ 모두 적용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로 하여금 우리에게 비치게 하시면’ 인데, ‘얼굴빛’이라고 안 나오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빛’이 동사로 나옵니다. 그러면 ‘비춘다.’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얼굴이 비췬다.’라고 할 때, 그 ‘빛’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용매로 사용되지만, 여기에서 사용되는 것은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성품의 진수인 인격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빛은 영광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두 개를 같이 연결하면 어떠한 결론이 나올까요? ‘하나님의 나라의 우주적인 비전은 하나님이 교회에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한 영혼 한 영혼이 은혜를 받고 그 비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라고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이 시작됩니다. 파문처럼 말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바로 이러한 핵심적인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구체적으로 그 은혜는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당신의 영광의 빛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구석방에서 에드워즈의 전집을 읽으면서 에드워즈가 만난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 에드워즈의 천재성 앞에서가 아니라 그가 만난 하나님의 거룩하고 위대하심 앞에 자신이 티끌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경험입니다. 지금까지 쭉 설명하였던 것의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주님을 비상하리만치 깊이 만나고 그의 영광을 경험한 깊이만큼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설교자는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앞에서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인물들 모세, 여호수아에서 그 뒤로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쓰셨던 위대한 사람들, 하나님의 계시를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였던 위대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쓰셨던 위대한 인물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의 진수를 경험하고 거룩함의 빛을 경험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영광의 빛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만방에 도가 알려지기를 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의 빛을 경험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질서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우주적인 질서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물론 사람들을 모아놓고 신학과 철학을 잘 설명하면서 감동적으로 강의하면 ‘아, 우리 위에 놀라운 우주적인 질서의 세계가 있구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 또한 어떠한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내가 뵈옵나이다.’ 했던 것처럼 그것을 설득을 통해서 막연하게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은 그 영광을 깊이 경험하였습니다. 자신 안에 먼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경험함으로써 우주적인 질서가 이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원래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시고 이 세계를 향해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사랑은 그 질서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렇게 경험하게 되면 마음의 틀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내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나라인데 사람들은 그 질서에서 멀어지고 이탈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도 그 질서에서 이탈한 채 하나님을 찾는데 그 하나님은 원래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마음속으로 그려낸 하나님으로서 진짜 하나님과 겹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질서의 나라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그렇지 않은 것을 바라보면서 아파하게 되고 자신의 전 존재를 드려서라도 자기 안에 이루어진 아름다운 나라가 이 세계 속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결국 한 설교자의 설교의 깊이와 영적인 깊이는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영광과 그 거룩함의 깊이입니다. 그것을 깊이 경험하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광의 빛이 신약에 오면서 신학적인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주에 설교하였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러한 영광을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독생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찬란한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은 곧 그분의 인격을 뵈옵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인격은 독생하신 성자의 인격 안에서 나타내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탁월성입니다. 왜 그리스도가 탁월하신가? 그리스도가 인간과 비교해서 무엇이 낫기 때문에 탁월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사용하는 용례입니다. ‘A는 B에 비해서’ ‘C, D, F에 비해서 탁월하다.’ 라고 할 때 함께 키를 재보니까 같은 도토리가 아니라 다 도토리인데 이 사람은 밤톨만큼 큰 것입니다. 비교가 가능한 측정할 때 크기와 부피가 다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은 그러한 비교적 우위가 아니라 온 땅과 만물 중 아무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영광으로서의 탁월함입니다. 절대적인 탁월함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여러분을 만날 때마다 누누이 전하였습니다. “진짜 목회자가 되려면 예수를 깊이 만나라.” 그 깊이 만나는 것, 신앙의 정수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눈짓으로 알지만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상세하게 설명하여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사람들만이 아이스크림을 본 적도 없는 토인들에게 말로 그 느낌을 설명할 수 없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설교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향하여 설교하지만 인간의 이성에 의해 자기만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목표로 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이 말하는 것을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직접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구약의 인물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경험한 사람들이 구약에서 쓰임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신약으로 넘어가게 되면 특별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거룩함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위대한 사도들, 그들의 뒤를 이었던 그들의 제자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놓고 철저히 헌신하면서 핍박으로 순교의 길을 걸어갔던 모든 사람들이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왜 그랬겠습니까? 열 받아서 그랬겠습니까? 아닙니다. 온 땅에 높으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에 대한 비전을 자신 안에서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이렇게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 그의 거룩함의 영광을 경험함으로써 증언하지 않을 수 없는 내적인 설교의 필연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던 예레미야의 고민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구약의 바울이라고 말하고 바울을 구약의 예레미야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유사한 체험에서 온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신약에 와서 소위 이야기 하면 ‘Christological conversion’(기독론적인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설교하였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그 지식의 진수가 바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의 얼굴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진수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주님을 그렇게 깊이 만남으로써 이제 2절의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 내용은 이것입니다. “주의 도를 땅위에” ‘도’는 ‘떼레크’입니다. 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실제로 길을 가리키기도 하고, ‘보라크’라는 히브리 단어도 길인데, 그것 보다는 큰 길입니다. ‘길’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하나님의 도’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떼레크’인데 인생길을 나타내는 의미로 많이 사용됩니다. 그것이 율법과 관련될 때는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도리로서의 도를 이야기합니다. “주의 도를 땅 위에”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땅 안에”로 되어있습니다. ‘땅’은 ‘에레츠’입니다. 이것은 땅도 되고 사람도 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길을 있는 사람들 속에서 에레츠는 한명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집단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땅 안에 있는 모든 만민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들 속에서 ‘주’는 ‘여호와’, ‘아도나이’입니다. ‘주님의 도를 많은 사람, 혹은 인류, 혹은 거민들 가운데 그 안에 알리소서.’가 됩니다. 결국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질 때 그 은혜가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영광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성품이 시행되는 방식의 영광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나타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두 가지에 대한 눈부신 지식이 들어오게 됩니다. 눈부신 영광으로 자신을 압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얼굴빛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모든 의미를 설명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얼굴빛을 비췸 받았을 때 효과는 무엇일까요? 정말 많이 나오지만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두려움’과 ‘사랑’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나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스랍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영광이 주님의 전에 가득한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그 영광을 경험하면서 보인 반응이 무엇일까요? “내가 이러이러한 일을 하겠습니다.”가 아닙니다. 제일 먼저 경험한 것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위대한 영광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티끌 같은 존재이고 더러운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깊이 자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그 재단의 숯불로 입술을 지져 주시면서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하십니다. 그때 이사야가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답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역자들이 앞의 부분이 빠진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보내지 않으십니다. 왜 입니까? 그는 아직 비전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자신이 보냄을 받는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맞짝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사야 6장에 나오는 똑같은 사건을 경험하는데, 스랍 가운데 계신 분이 아니라 영광 가운데 계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주여 뉘십니까.” 묻습니다. 두 번째는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사도 바울이 살아왔던 모든 상황 속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왜 이해가 되지 않는가 하면, “주여 누구십니까.” 그렇게 구약을 많이 공부하였는데도 예수를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영향입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신에 넘치는 젊은이였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그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비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우주적인 파괴를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전체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너져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너질 수 있다는 목표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를 항상 개떡같이 드렸기 때문에 이 예배가 얼마나 영광스러워질 수 있는가 알지 못합니다. 똑같이 자신이 그렇게 자기의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못하였기 때문에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물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우리는 이것을 해야 한다.”라고 끌고 갑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발견하였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비전일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약에 나타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그것이 영광의 진수를 경험한 모든 사람들이 압도적인 두려움과 이후에 주님을 향한 자신을 다 드리는 헌신이었던 것처럼 똑같이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사도가 만난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를 만나지는 않습니다. 한 성령 안에서 우리는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동질의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똑같이 예수를 깊이 만난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주여 뉘시니이까.” 묻고 두 번째는, 자신이 이제껏 쌓아올린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묻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이방나라와 임금들을 위한 사환으로 너를 세웠나니, 내가 나타난 것과 장차 네게 나타날 것들의 사환과 증인이 되려 함이라.” 예수님이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아난케’ 그래서 그는 어떻게 보면 예수를 위해서 산 게 아니라 자신도 그렇게 살지 않는 또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산 것입니다. 이제 내가 예수를 깊이 만나라는 경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바로 비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깊이 만나지 못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허위입니다. 어느 후배가 “목사님, 개척이 안 된다고 하는데 어떤 식으로 개척해야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진짜 개척에 소명을 받은 사람은 그러한 질문을 절대 안 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 본적 없습니다. 막연하게 ‘1년에 3백 명 모이겠지.’ 라고 생각은 하였습니다. 물론 그 생각도 꽝이었지만 진짜 개척에 소명이 있는 사람은 그러한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묻는 것이 이것입니다. “내가 하나 물어보자. 개척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되는 내적인 필연성을 가지고 있느냐.” 이해를 못하였을 것 같아 쉽게 말해 보았습니다. “외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그 무엇이 당신 마음에 있는가?” 그리고 그것만 토해 놓으면 정말 살 것 같은 그것이 있는가, 그것이 있으면 개척이 소명이고 없으면 개척은 아니다. 교회 개척이 사업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전혀 아닙니다. 결국 설교자는 설교의 결과에 대한 설교자의 우선적인 기대는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빛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이 한편의 설교로 이들이 모두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한편을 하고 피를 토하고 죽어도 정말 행복하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의 소명입니다. 그는 설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설교를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의 설교를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설교하면 하나님이 일으키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그는 설교의 결과를 주님께 맡기고 자신 속에 있는 필연성을 따라서 외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주일학교에서 설교를 하여도 피 냄새가 나야 합니다. 이 영혼들을 위해서 죽을 것 같은 그 무엇이 가슴 속에서 넘쳐야 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설교가 수많은 사람을 회심시킨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진실한 회심자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 열매가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없으면 ‘이것이 나의 소명의 중대한 하자이구나.’ 그리고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안 죽습니다. 삽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데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생각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부르셨고, 목회자로 부르셨고, 전도사로 부르셨으니까, 저는 많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든지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으려면 살아서 뭐하겠습니까?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그러면 가족은 어떻게 합니까? 안 데려가시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진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 앞에 보내면서 놀라운 것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목회자는 그러한 기도 속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이 가득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지만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탁월하게 능가하는 하나님의 신령한 위로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빛을 비추시고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내가 경험하였을 때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자매가 있습니다. 쌀쌀 맞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열심히 기도도 하고 열심히 장미꽃도 보냈습니다. 결국 어떻게 어떻게 해서 프러포즈를 하였는데 그 프러포즈를 받아 주었습니다. 돌아오는 기쁨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경험하는 기쁨에 비하면 그것은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그렇게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 예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며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빛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모든 사람이 경험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인가. 그것을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각 사람 속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이 시작되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