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은사체험과 하나님의 인격의 체험(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
녹취자: 문미경
오늘부터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얘기하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수요일마다 계속해서 신앙과 참된 은혜체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제가 중요한 문제제기를 하나 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9장 35절부터 시작해서 10장은 몇 달 전에 설교한 적이 있는데 오늘은 그 설교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각도에서 우리가 오늘 다루려고 하는 신앙과 참된 은혜체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많다는 것입니다.
10장 1절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누누이 설명해드렸기 때문에 거듭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9장까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이 10장에서 제자들을 드디어 예수님이 하고 계시는 똑같은 일들을 계속해서 하도록 세상 속으로 파송시키는 것이 최초로 이 10장입니다. 그렇게 세상으로 파송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권능은 헬라어로 ‘엑소시아’ 인데 이 엑소시아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하여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고 할 때 쓰여 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권세는 상징적인 권세가 아니라 실제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그러한 커다란 권능이란 것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할 것은 예수님이 이러한 권능을 주셨다고 말하기 전에 열두제자를 불렀다는 겁니다. 부른 열두제자에게 모든 병과 모든 귀신을 내어 쫓고 고치고, 약한 것들을 고치는 그러한 권세를 주었던 겁니다. 그 권세는 엄청난 영적인 권세였습니다.
오늘날 문둥병을 안수기도를 해서 낫게 했다는 것을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가까워졌다고 외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병든 자를 고치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완전히 극단적인 명령입니다. 주님이 그 권능을 주지 않고 행하라 그러셨다면 주님이 이상한 주님이십니다. 못할 걸 뻔히 아시면서 해보라고 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권능을 주님이 주셨고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근데 문제는 거기에 누구도 들어갔었습니까? 성경은 가룟 유다가 이 권능을 받은 사람 속에 들어갔다는 증거를 두 번에 걸쳐서 보여줍니다. 처음엔 열두제자를 불렀다는 것, 두 번째는 주셨다고 얘기를 하고 받았다는 사람이 누구라고 얘기를 할 때에 가룟 유다(예수를 판자)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구원받지 못했다고 우리는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마지막을 보면 그의 구원 받지 못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은 삼십에 예수를 판 것에 번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번민과 자신의 실패로 이어지는 괴로움이 곧 회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은 삼십을 성전에 던지고 목매어 죽었습니다. 복음서에선 목매어 죽었다고 나오고 사도행전엔 배가 터져서 죽었다고 나오니까 목매었다가 떨어지면서 언덕 아래로 굴러서 배가 터져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죽은 자를 살릴 정도로 그러한 놀라운 권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구원을 못 받았을 수 있다는 겁니다.
구약에서 그런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가 사울입니다. 사울은 한때 하나님의 힘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만 나중에 그 신이 떠나고 여호와를 부리는 악신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영원히 하나님이 세운 왕은 이렇게 되면 마지막엔 저렇게 망한다..라는 구원받지 못한 왕의 영원한 표징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령이 우리에게 역사하실 때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적인 역사와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그런 일하시기 위한 역사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채 그 성령의 도구가 되어서 그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일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께서 잡히셨을 때에 사람들이 제사장 집에 모여 예수를 어찌할꼬 의논하는 가운데 대제사장이 예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고...그렇게 되는 것이 유익하지 않겠느냐..’라고 할 때에 성경에서는 저가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라고 나옵니다. 분명히 그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제사장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 한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라고 하는 그 구속의 도리를 가르쳐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인도 그 말이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성령의 능력을 받고 그 성령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이 곧 그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바로 의미하지 않는다는 두려운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단의 교주로 등장한 사람들 가운데 초창기에 그렇게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많이 행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꼭 강령의 역사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셨을 때 이렇게 성령 받은 것은 복음을 전파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아주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그것은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능력을 나타남으로 전했고 병든 자를 살리고 죽은 자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귀신 들린 자를 명하자 귀신이 나가고 쫓기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와 구원에 필요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역사를 보면서 자고해지는 사람들은 정말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통해서 구원 받은 사람이 할 수 없는 더 크고 위대한 엄청난 일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신학적으로 어렵게 표현하면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은 구속적인 사역과 사역적인 사역으로 나뉜다는 겁니다. 구속적인 사역은 성령이 오셔서 그 사람의 마음을 감화하고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중생 있게 하고 그를 성화시키고 어떻게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경외하고 인격적으로 연합되고 영적으로 하나 되어서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생생한 인격적인 사랑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고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이런 성령의 역사를 구속적 사역입니다. 사역적 사역은 일의 자체를 위해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도 성령이 오셔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리고 또 그들로 하여금 큰일을 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마태복음 10장은 굉장히 많은 의문을 던져줍니다. 엄청나게 많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전도에 있어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귀신 들린 자가 내어 쫓기고 병든 자들이 일어나서 확실히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능력 있게 전해졌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과 동질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그 모든 일들을 예수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하시니..예수그리스도께서 그곳에 계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하고자 하는 일들을 그대로 다 행해 나가시는 똑같은 사역들..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을 가르치고, 병든 자를 고치는..이 예수그리스도의 삼중사역이 제자들을 통해서 그대로 능력 있고 권세 있게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권능을 주심으로 인해서 말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큰 성령의 능력을 받았는데 (사도행전 1장이 어느 지점이냐 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함께 모여 앉아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분부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주시기까지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려라...얼마 되지 않아서 너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일으킬 정도로 성령을 그렇게 주셨는데 거기다 성령을 더 주시면 천국에 있는 사람을 불러내셔서 산사람으로 만드는 그런 정도의 능력이겠습니까? 더 이상의 능력이 필요 없이 그 능력이면 족한데도 그거까지 정도는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증인이 되리라..아직은 증인이 못된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주여, 주님이 나라를 회복시킬 때가 이때입니까? 헬라어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나라를 그 나라로 회복시키는 것이 이 때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중심 속에 이스라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있는 겁니다. 그 나라는 다윗의 왕국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최고이상은 다윗왕국이었습니다. 다윗왕국 시대 때는 나라가 강성해서 주위에 수많은 나라가 무릎을 꿇고 조공을 가져와서 이스라엘에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보내실 때 하나님께서 이루시려고 했던 가장 완전한 뜻이 다윗왕국에서 펼쳐졌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사고가 아니라 육적인 사고였습니다.
그러니까 늘 이스라엘의 꿈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벌로 말미암아 그 왕국이 못되지만 언젠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면 우리는 그 화려한 왕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 나라 시대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잘못된 메시아 관이었고 잘못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견해였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왔는데 그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라고 하는 게 그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메시아는 적어도 여호수아나 모세나 다윗의 후예정도 되는 사람이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나타나가지고 메시아니까 구원하다이니 이스라엘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라고 하는 커다란 개념은 이 끔찍하고 지겨운 로마의 박해와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그렇게 도전 받고 고전하는 이 끔찍한 나라를 잃어버린 설움 속에서 구출해낼 그러한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중간사 시대 때 마카비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로마의 치하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기 위해 칼을 들고 일어났던 군사 지도자였습니다. 결국은 그 꿈도 무너집니다. 한참 반란의 위력을 떨칠 때 저 사람이야말로 메시아의 징후로다..라고 그런 생각을 사람들이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그리스도가 오셨을 때에 그 예수그리스도를 보면서 사람들이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나느뇨..그는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아무런 선한 것이 없는 그런 모습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도저히 메시아라는 생각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걸고넘어지려고 했던 이유는 자기네들이 고정 관념 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가 출현한 메시아가 너무나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 상황이 되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나라에 대해서도 예수그리스도께서 가르쳤을 때에 그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갔습니다. 세례요한부터 선포 했을 때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면 우리나라가 천국인데 그럼 우리가 천국 밖에 있는 것인가 하며 이해를 못했습니다. 천국 가까오니까 회개하라고 하니까 천국 오면 좋은 거지..왜 회개를 하라고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세상적인 왕국이고 세속적인 왕국이고 이 세상의 정치적인 왕국이고 메시아도 그렇게 우린 내면적인 영혼의 죄에 대한 문제를 짊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이 세상에 먼저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주고 참된 자유를 주는 그런 것을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문제였던 것입니다. 성령이 얼마나 임했는지 문둥병이 손을 갖다 대면 낫고 죽은 자에게 일어서라하면 죽은 자를 걸어 나오게 하는 건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권능을 받은 제자들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성령의 능력을 받았는데도 이 머리는 안 변한다는 겁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렇게 큰 성령의 능력을 받았는데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는데도 부활하셨는데도, 아직도 왜 죽었는지 모릅니다. 부활하셨을 때 어째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며 놀랐을 겁니다. 충격도 받았을 겁니다. 그러나 깨달음이 없는 충격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놀라는 정도입니다. 충격을 받으면 눈이 확 열려서 신앙의 도리가 눈에 확 들어와야지 그게 아니라, 충격을 받았는데 40일 동안 계시며 여기저기 나타나시자, 거기서 끝나는 겁니다. 왜 부활 하셨는지 모른 채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걸 안 가르쳐주셨다면 모르겠지만, 하지만 가르쳐주셨어도 지루할 정도로 많이 가르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할 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라.. 고백을 하고나니까 주님이 그때부터 ‘인자는 고난을 받으러 간다.. 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버림을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온 것이 아니고 섬기려 하고 자기 몸을 대속제물로 주려함이라..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니라.. 내가 죽어야 너희가 사느니라..’ 수없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러주시고 ‘살아나리라...너희보다 내가 먼저 갈릴리로 가느니라’라고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하셨는데도 이해가 안 갔습니다.
왜 이해를 못한 겁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말에 무슨 오해가 있겠습니까? 해석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오해할 여지를 하나도 안주고 명백한 직설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성령을 한없이 받아가지고 쉿! 하면 귀신이 나가고 손을 만지면 문둥병환자가 깨끗하게 되고 죽어서 냄새가 나는 시체에게 손을 얹고 일어나 하면 살아나는 그렇게 권능을 받았는데 진리가 있고 성령이 있는데 왜 깨닫지 못했습니까? 말씀도 명백하게 해줬는데 왜 깨닫지 못했습니까?
결론을 얘기하자면 성령을 체험하고 방언을 받고 귀신을 내쫓는 은사를 받고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자기가 무슨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그것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관계가 있을지언정 동일한 사건은 아니라는 겁니다.(중간 끊김-30초 정도)
제자들이 왜 그렇게 명백한 가르침을 받고 죽은 자를 일으킬 정도로 성령을 받았는데도 도무지 이 예수님이 왜 죽었는지 왜 살아나셨는지 그 분이 왜 승천하시는지 모르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는 것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어떻게 틀리기에 그렇습니까? 주님이 명백한 말씀으로 진리를 가르치셨고 죽고 살아나야 될 것을 그 의미까지도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왜 이해를 못했습니까? 제자들이 비록 귀신을 내어 쫓고 죽은 자를 살리는 그 권능을 받았지만 제자들 속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고방식들이 세워진 그 사상의 체계가 버리지 못하고 서 있는 겁니다. 귀신 내어 쫓도록 성령이 임하시는데 그건 안 부서졌습니다. 그 증거를 대보겠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가지고 무려 5년 넘게 고민을 하였는데 성경을 보면서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민했던 것은 이겁니다. 우리는 부흥을 사모하면서 그 부흥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던 때기 때문에 은혜 때문에 그것을 사모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비록 그의 삶이나 목회사역이나 사역을 하는 방법이나 설교에는 후한점수를 줄 순 없어도 분명히 커다란 성령의 권능이 함께 하고 있다라고 하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 사례가 주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그 사람의 생각이나 사상이나 기독교의 교리가 우리랑 다르다고 해서 그게 성령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정말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폐결핵으로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 성령이 임하는 이야기를 할 때 부흥의 역사에서 나오는 그 사람들이 성령이 체험하는 이야기와 너무 흡수합니다.
(예화) 어떤 목사님의 일기에는 지금 부흥강사로 열심히 활약하는 분 중의 하나인데 예전엔 폐결핵 3∼4기에 걸려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주님, 한번만 살려주시면 제가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기도를 드리는데 불이 떨어졌고 한없이 각혈을 해댔습니다. 그 각혈로 죽을 줄 알았는데 그다음부터 고침을 받아서 건강하게 목회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부흥사들은 사이비를 빼놓고는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금식하다가 기도원에서 했든지, 무슨 이유에서 했든지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체험하는 장면들에 대한 수기를 읽어보면 큰 부흥의 시대에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는 것과 거의 유사한 간증을 보여줍니다. 그게 뭔지 알고 싶으면 18세기 위대한 영적부흥을 읽어보십시오. 그런데 결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성령을 그렇게 체험했는데 왜 부흥 시대에 설교가와 같은 그런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안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제가 5년 이상 동안 고민하던 문제였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그렇게 크고 엄청난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죽음에 이른 사람이 기도를 받고 하나님이 하시면 그 사람을 기도를 통해서 건강하게 하신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예화) 한 부흥사가 간증을 하는데 묵호에 사는 사람이 전화를 해서 안수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해옵니다. 부흥사는 거리가 멀고 자신의 스케줄도 있으니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지만 그 묵호에 사는 사람은 너무 아파서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부흥사가 스케줄을 보면 도저히 그 묵호까지 가지 못한다고 하자, 그 사람이 그럼,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 아시니까 내가 전화통에 손을 얹고 기도 할 테니까 목사님도 기도해달라고 하자 부흥사는 그대로 전화에다가 기도했습니다. 그다음에 그 묵호 사람은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는 위필드나 웨슬리나 에드워드나 이렇게 각성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증거 함으로 그들을 거꾸러트리고 그들로 하여금 죄에 대해 심각하게 회개하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지푸라기와 같이 비천한 인생임을 보게 하고 그리하여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인이고 얼마나 보잘것없는 인생인가 하는 것에서 각성하고 회개하고 거룩한 하나님으로 돌아오고 그래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에 매여서 그 이름을 위해서 살지 않고 베길 수 없는 부흥을 만난 사람들과 같이...그렇게 변화시켜주는 그런 사람, 만나기 힘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성령을 임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래서 그 성령을 받아서 성령을 받은 표징도 나타나는데 문제는 설교가 바뀌어 지지 않는 것입니다. 5년 동안 고민하던 문제였습니다. 이렇게 한국과 같이 성령의 극적인 체험을 한 설교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난다면 여기에 수십 명의 위필드나 웨슬리나 에드워드와 같은 사람들이 그런 정신을 계승한 설교자가 나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혀서 외치는데 그 메시지는 성령 받기 전에 외치던 설교와 대동소이합니다. 다만 체험이 가미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것을 5년 동안 고민했습니다. 아무데도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그 마지막 답은 그럴 수가 있다는 겁니다. 마지막 대답은 성경이 증거 합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놀랍게 체험했습니다. 능력들이 자기에게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언제든지 능력을 행하고자 할 때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머리는 아직도 성령이 주신 예수그리스도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왜 다시 살아나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죽고 다시 사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그 일이 성경의 커다란 물줄기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성경이 안 보이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아름다운 교훈들을 들었으면서도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이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은 나오는데 길게 설교하는 기사가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했습니다. 제가 확신하기는 제자들이 선포했지만 그 선포는 단순하고 간단한 구원의 도리를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예수를 믿었다. 돌아오라, 회개하라,’ 등 직접적으로 개인을 전도하기 위한 간단한 메시지였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증거들 중의 하나가 사도들이 설교한 것이 복음서속에 한편도 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성경을 통해서 해답을 얻게 되었을 때 길길이 뛸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문제로 말미암아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이 자고해지고 쓸데없이 기죽고 또, 심지어는 자기의 영혼조차도 올바르게 관리하지 못하는 그 오해와 무지 속에서 너무나 고통 받는 교회를 보았고, 제자신이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을 알았을 때 엄청난 충격과 감격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좀 더 들어 가보면, 사도들이 그 커다란 성령의 권능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시대 속에서 태어나서 그 시대가 가르쳐주는 여러 가지 교훈들.. 그 시대 속에서 통용되는 여러 가지 사상들, 혹은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스스로 자기가 뭔가를 세우고 살아온 사람들, 나름대로 철학을 가지고 신앙해온 사람들..그런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방언을 체험해도 그것들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역사를 해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틀 안에서밖에 역사하실 수 없도록 그렇게 성령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예수님이 무슨 가르침을 가르쳐 주었을 때 이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 관 이러한 왕국 관에 맞는 설교가 들어오면 입력이 잘 되었을 겁니다. ‘얘들아, 나와 함께 로마로 올라가자’ 했으면 입력이 착착 들어왔을 겁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하고 싸이클이 맞으니까 착착 들어맞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신앙관의 체계 속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된다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진짜 없었습니까? 구약이 수시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죽어야 할 것을 수시로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사상의 껍데기를 가지고 성경을 들여다보니까 그 체에 다 걸려가지고 필요한건 다 빠져나가고 자기의 사상에 동조하는 구절들만 떠오르는 겁니다.
(예화) 여호와의 증인들이 가방 들고 맨날 동네 돌아다니면서 전도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불러놓고는 그들에게 어떤 구절을 얘기해주며 이런 구절들을 아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전혀 못 듣는 구절 들이 많고, 그런 구절들을 구석구석에서 찾아내서 실타래처럼 엮습니다. 그러면서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요한복음 3장 16절은 모른다고 합니다. 자기네 사상의 체계를 꽤기 위해서 정작 중요한 그 성경구절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치워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십니까? 지난번에 예레미야 1장을 설교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건설되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고 우리에게 뭔가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가르쳐주고 하는 그것이 먼저 역사하기 전에 먼저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무너뜨리는 일들이 일어나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10장에서 엄청난 성령을 받았는데 하나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사상의 체계가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니까 그 큰 성령의 권능을 받은 사람들이 할 일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고기나 잡으러 갔습니다. 그건 할 일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에 와서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엉뚱한 얘기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했을 때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라고 분명히 말했다가 조금 있다 예수님께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것 같다고 했을 때 그들은 아니되옵니다. 주께서 죽으시다니요. 절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사옵나이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말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죽으러가야겠다 했을 때 아니 되옵니다. 빨리 가서 죽어야 마땅합니다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윤리적인 사실이 아니라 그 무지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드러내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성령의 권능은 받았고 은혜는 못 받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했을 때 주님은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니고선 아버지로선 말미암지 않고서는 너희가 나를 그렇게 고백할 수가없다. 그걸 알게 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그들에게 어느 정도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세상 사람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부분적인 은혜는 주어진 겁니다. 주어졌지만 그 예수그리스도가 장엄한 인격, 그 구원사역의 물줄기에서 차지하고 있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위치, 신약과 구약이 그분 안에서 어떻게 통일되고 있는지 어떻게 구원의 역사가 전개 될 것이며 구약과 신약의 물줄기가 만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죽고 다시 사시는 일이 구원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몰랐던 겁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방언과 통역과 병고치고 모든 은사를 다 체험했다고 그래서 오늘날 교만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나도 저거 다 체험해봤다고 생각하는 것,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부흥의 시대에 설교를 들었을 때에 성도들은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도들의 뜨거운 기도는 오늘날 성령운동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뜨거운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죄에 대한 애통, 하나님의 대한 자각,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한 깨달음,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에 대한 깨달음, 그런 것들을 새로 깨닫게 되고, 그래서 기독교의 물줄기가 보이는, 성령의 물줄기가 보이는, 그래서 그 하나님과의 만남의 체험이 성경의 해석을 좌우하고 신앙의 도리를 깨닫는 일을..일의 영향을 미치는..이러한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겁니다.
이렇게 커다란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는데도 이렇게 세상 적으로 주어진 오해나 잘못된 생각이 바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좀 더 극단적으로, 성령의 권능과 은사를 한없이 받고도 참된 기독교신앙에 대해서 거의 무지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성령을 체험했다는 그 사실 때문에 교만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령을 체험하고 그 속에서 은사를 받고 귀신을 내어 쫓고 병을 고치는 참 귀한 일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을 올려놓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화) 몇 해 전, 제 동생 친구를 만났는데, 사기를 많이 쳐서 감옥도 몇 번 들어갔다 나와서 이젠 미국으로 들어간다기에 한 번 만나봤습니다. 온 얼굴이 완전 죽어있어서 저는 그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간곡하게 권했습니다. 그 사람이 중학교 다닐 때, 은혜를 체험 했는데 방언은 물론이거니와 성령의 갖가지 은사를 체험했습니다. 손을 얹고 누군가에게 기도를 해주었는데 기도를 하고나서 손을 딱 떼면 새까맣고 손자국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후의 삶을 보면 거의 구원 받지 않은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은사와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주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사람이 목격할 수 있는 그런 성령의 놀라운 표징들을 행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가져다주지 않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참된 지식을 가져다주시는데 그러면 그 10장의 체험의미는 무엇입니까? 쉽게 얘기하자면 복음 전도를 위한 체험이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해서 그 성령이 귀신을 내어 쫓고 병든 자를 고치는 놀라운 능력을 행하면서 사람들의 사도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 준겁니다. 그리고 천국의 복음을 듣게 하였습니다. 짤막짤막 하고 간단한 이야기지만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고 예수께로 향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을 그렇게 많이 받았음에도 설교가 변하고 청교도적인 사도적인 설교의 정신을 가진 그러한 설교내용으로 뒤바뀌지 않은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미가 전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전도가 되는 의미는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집니다. 기독교의 깊은 신앙의 도가 아니더라도 어떻게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를 통해 복음은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 복음이 전해지는 데엔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가 받은 그 이상의 복음의 깊이를 전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도 곧 곤고해집니다.
사도바울은 한번 예수그리스도와 다메섹에서 만났는데 영원히 그 체험이 그 인생을 주관합니다. ‘내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는데..베냐민의 지파요 율법의 의뢰로 흠이 없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로다.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기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게 된 것’이 언제였습니까? 처음에는 그저 그랬는데 한참 신앙 생활하다가 깨닫게 되었습니까? 죽을 때쯤 되어서야 모든 걸 버렸습니까? 아닙니다. 즉시, 그 즉시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버렸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얘기했냐면 ‘주님, 주 예수그리스도의 많은 지식이 가장 고상합니다..’ 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언제부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까?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다음에 몇 년 있다가 복음을 전했습니까? 아라비아에서 3년 연단을 받은 후가 아니라 그 즉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 전에는 서슬이 파래지며 믿으면 다 죽여 버린다고 하며 말 타고 달려가던 그 놈이 와서 이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니까 사람들은 사기일거라며 믿지 않았고 예루살렘 교회는 믿지를 않아서 바나바가 보증을 해주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얘기했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자기가 바울과 같이 성령을 체험하고 그 이상의 성령을 체험을 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견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런 함정을 가리킵니다. 복음전도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주신 성령을 통해서 귀신을 쫓았고 병든 자는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자들은 아직까지도 설교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오순절에 성령을 딱 받으니까, 성령이 오시자마자 입을 딱 여는데 구약과 신약이 질서정연하게 하나의 물줄기로 딱 맞아떨어지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신구약속에 딱 들어가면서 신구약에 불이 확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입을 열면 기독교에 대한 진리가 강물처럼 쏟아져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