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인간의 마음(3)
녹취자 : 오희열
6. 인간은 바로 이러한 원대한 하나님의 자신을 확대하시는 창조의 계획을 기억하고, 알고, 사랑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들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자기 밖의 두 세계, 곧 하나님과 자기 이외에 다른 세계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게 되었으니 실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 세상에 구현함에 있어 자신을 아는 지식은 원을 그리기 위한 중심점과 같은 것이다.
여러분이 컴퍼스를 이용해서 원을 그린다면 제일 먼저 중심을 잡고 크기를 임의로 정하여 여러가지 크기로 동그라미를 그리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기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 것 자체가 그냥 단순히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생각을 해야 하고 결정을 해야 하고 느껴야 하고, 마지막에 자신이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순간의 연속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는 지정의의 작용을 매 순간순간 요구합니다. 이런 순간이 있고 이런 순간이 있는데 내가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만약 전체적으로 일관되지 않다면 사람은 굉장히 큰 혼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아무 생각없이 살면 행복할 것 같아도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데는 항상 그 뒤에 힘겨운 결과가 뒤 따릅니다. 여러분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공부하는 것보다 노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노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이 행복했던 사람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나는 학교 다닐 때 하루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공부하는 것은 재밌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중고등학교 때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고 게임이나 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면 재밌었겠지만 대학교에도 들어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항상 그렇게 결과가 뒤따릅니다. 그래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우주를 짊어진 것 같은 아주 무거운 것입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절대 자살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도저히 살지 못하겠다는 것을 느끼고 자살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도 생각이 없는 사람인데 있는 것처럼 행세하며 살아가는 것인지 물어봐야 합니다. 가전제품을 하나만 구입해도 설명서가 두껍고 자동차 사용설명서는 두꺼운 책으로 두 권이나 됩니다. 특히 새로 나온 차들은 새로운 기능들이 많이 추가 되어서 5년을 타고 다녀도 그 기능들을 다 사용하지 않고 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게임의 경우에는 더 두꺼운 디렉토리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는 얼마나 많은 “인생 사용설명서”가 필요하겠습니까? 문제는 전자제품 하나에도 그렇게 두꺼운 메뉴얼이 있는데 인생 사용설명서는 어디서 읽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으로 부딪치며 사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모든 괴로움이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 마음이 무엇인지, 이 마음이 어디서 왔는지, 내 인생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진짜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기는 한 것인지, 이런 혼란 속에서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 몸으로 부딪치며 상처받고 고통을 받지만 거기서 얻는 교훈이 거의 없거나 너무 미미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면서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 주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산다, 생활한다고 하는 것은 “alive”가 아닙니다. “살아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생활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생존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live”라는 것은 “그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생활한다는 것은 “자기적 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을 사는 것입니다. 삶을 산다, 자기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자기 차가 시동을 걸어서 앞으로 가면 그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각하면 어디로 출발해서 어디로 가는 사람이고 갈 때는 강과 개울, 돌이 쏟아질 수 있는 절벽을 만나면서 지나간다고 생각을 하고 바로 그 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요소들과 싸우면서 결국은 자기가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운전자입니다. 그래서 운전자는 자기가 가고자하는 길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차에 대해서, 차를 타고 갈 때 만나는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지식이 있습니다. “스켄띠아”라고 하는데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믿어야 할 규칙”. 두 번째는 “살아야 할 교훈”. 레귤라이 쁘레벤디, 쁘라이 빼따 비벤디.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의 전부입니다. “믿어야 할 규칙”. 예를 들어서 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진화론에서 아무리 우리가 아메바에서 시작되었고 아주 단순한 세포는 무기물질에서 나왔다고 설명을 해도 우리가 어디서부터 왔다는 것에 대한 최종적인 답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과학이 발달해서 인조인간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것은 아닙니다. 어떤 과학자가 이런 말을 했답니다. “신이여, 이제 우리도 인간을 만들었나이다.”, 그랬더니 신이 대답하길, “내 재료를 쓰지 말고 만들어봐라.”했답니다 .이미 있는 것들을 결합해서 우리는 다양한 것들을 만듭니다. 과학기술로 인조인간을 만들 수 있다면 무엇이 달라질 것인지 질문하기도 하는데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지금도 인간에게는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세계 모든 나라까지는 아니어도 열 개의 나라 정도는 빠른 시일내에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깨닫게 만들어주지는 못합니다. 복제인간이 만들어져도 똑같은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해야할 것입니다. 자신이 기계에서 복제되었다는 사실, 나는 엄마 뱃속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인생의 고민의 차이를 줄여주지는 못합니다. 똑같이 우리처럼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책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인간의 존재, 사회에 대한 수많은 담론들은 지금 묻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데우스”, 최근에 나온 “초예측”이라는 책들, 이런 책들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는 못합니다.
인간으로서 인간이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지식이고 하나는 사랑입니다. 이 지식을 성경이 가르쳐줍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지식이 모든 지식의 전부는 아닙니다. 성경은 복제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양자역학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성경이 쓰여진 목적은 그런 과학의 궁금증을 풀어내고 신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과학적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보다 아주 근본적인 지식,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믿어야 할 규칙입니다. 인간의 기원이 무엇인가? 150억 광년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우주의 천체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가? 150억 광년이라는 것도 측정 가능한 것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곳이 우리가 있는 곳과 같은 공간이 아니라면 어떤 상태로 그 공간이 존재하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껏 경험하는 것은 사차원이고 하나님은 무한차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어야 할 규칙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나 하나님은 존재한다. 너희는 나에 의해 창조되었고 너희는 죄를 지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믿어야 할 규칙. 인생을 사는 지식을 잘 습득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잘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살아있을 때 아주 놀라운 속도로 지식들이 증대됩니다.
두 번째는 살아야 할 교훈입니다. precept 가 여기서 온 단어입니다. “교훈”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가르쳐주는 하나의 보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사랑입니다. 이 지식과 사랑으로 인간은 참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 가져야 할 지식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해서 제일 먼저 가져야 할 지식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지식을 갖고 그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이 세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갖게 되는 지식이 “인간”입니다. 인간에 관한 지식은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인간 일반”, 일반적인 모든 인간에 대한 모든 이해, 공통점이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개별인간으로서 “자기”입니다. 모든 사람에 대해서 모두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공부하고 살면서 부딪치는 사람들과 교제와 사귐을 통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갑니다. 그 알아가는 과정이 정상적이라면 사랑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관계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하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 자기를 아는 지식, 이 세 가지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자연 만물에 대한 지식입니다. 왜 자연만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인간은 태어난 후로부터 죽을 때까지 이 자연만물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이 세상에 있는 만물로부터 공여받은 것들입니다. 핸드폰, 공책, 우유통, 심지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가방, 신발, 모든 것들이 자연 만물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육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육체와 정신이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가 어떤 형편에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우리는 “인생 사용설명서”를 배우게 됩니다.
제가 항상 쓰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Studeo ergo sum.”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이라고 했습니다. Cogito 는 “생각하다”의 1인칭입니다. Studeo 는 “공부하다”의 1인칭입니다. “공부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입니다. 존재의 의미가 배우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따라에 보십시오. “Studeo ergo sum.” “공부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자기의 존재의 의미를 공부하는 데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학교 공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스카이캐슬에서 정준호의 나이가 50이 다 되었는데 어머니에게 울부짖으며 토해내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나를 잘못 교육시키셨습니다. 어떻게 교육을 시키셨길래 50이 다 되도록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셨단 말입니까?” 하며 울부짖습니다. 학력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하고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했는데 그것이 “인생 사용설명서”에 대한 지식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박식한 자들의 무식”이 된 것입니다. “박식한 자들의 무지”, “이그노란띠아 독타”, “많이 배운 사람들의 무지”.
결국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부지런히 배우고 인간에 대해서 배우고 자연 만물에 대해서 배우면서 순간순간 자신의 인생을 걸어가기 위해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선택할 것인지에는 지식의 빛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살아가려고 하는 삶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하나하나 하는 선택들이 모두 연결되어서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환경과 싸우면서 자기가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것을 한참 쌓을 수 있는 시기가 지금입니다. 지금 생각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할 기회가 별로 없어집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연달아 둘 정도 낳거나 셋 정도 낳으면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미친듯이 살아야 하고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정신없이 사는데 자신이 무슨 선택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 사건 같은 것이 잘 보여줍니다. (25:22) 어마어마한 돈이 있으면서도 인생사용설명서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죄책감도 없이 살아갑니다.
(찬양) 온 세상 만물은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그 사랑 알아요
예를 들어 공부를 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한 사람씩 해부하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갖기 위해서 학문이 필요합니다. 신학에 도달하기 위해서 학문이 필요한데 학문만 가지고는 되지 않기 때문에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 신앙과 학문의 빛으로 하나님을 알고 학문의 도움으로 인간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해한 인간을 신앙으로 이해합니다. 자연 세계는 당연히 학문으로 이해합니다. 이 모든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중요한 두 축이 있는데 그것은 신앙과 학문입니다. 신앙의 중심은 성경이고 학문의 중심도 성경인데 성경을 통해서 발전된 지식들이 학문입니다. 그 학문을 하나씩 습득해가면서 하나님은 누구인지, 인간은 누구인지, 자연만물이 무엇인지를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미생물학을 전공한 어떤 학생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미생물의 세계는 너무너무 신비하고 아름답다고 합니다. 우리는 잘 모릅니다. 현미경 같은 것으로 보면 너무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것만 그렇겠습니까? 모든 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마 다 그럴 것입니다. 미국에 유학을 가서 과학을 공부하다가 스스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마음이 열리고 예수를 믿기 시작한 과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학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르쳐준다는 뜻이 아니라 그 과학 자체가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지는 못해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근원입니다. 이 근원에서 인간도 오고 자연의 모든 만물도 나오게 된 것입니다. 신비하지 않습니까? 그런 신비한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인간의 살고 죽는 것, 태어나고 병드는 것, 커다란 재앙이 일어나거나 큰 복을 받는 것, 생명체가 사라지고 소생하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그림책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배당에 와야만 하나님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피었다가 지는 들풀 속에서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free, 자유입니다.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늦게 들어온다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부모님이 잔소리하실 수도 있지만 자꾸 하다보면 포기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며칠 밤을 새워 공부한들 누가 말릴 사람이 없습니다. 그 속에서 한없는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고 인간에 대해서 배우고 자연의 만물 세계에 대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에 세 가지 책이 골고루 들려 있어야 합니다. 그 모든 책의 중심은 당연히 성경입니다. 그러면서 지성을 일깨워 가야 합니다. 드넓은 인간 지성의 바다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부분적으로 몸부림친 인간의 과정이고 그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수용됩니다. 제 말을 꼭 들으십시오. 모두 다 허무합니다. 다 헛되고 헛됩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부지런히 공부하십시오. 나는 정말 여러분이 열심히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알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앎에 눈을 뜨고 나면 무지하게 살았던 자신의 삶이 너무 비참한 짐승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지식이 가져다 주는 아름다움의 세계는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입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여러분은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컴퍼스로 원을 그린다면 어디에 컴퍼스의 중심을 잡아야 할지를 이런 것들이 결정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신앙이 결정해줍니다. 하나님 중심에 서서 말입니다. 지식을 많이 가져도 삶이 비틀거리며 요동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똑바른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입니다.
7. 이처럼 인간의 자신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통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아에 대한 지식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만 자아에 대한 지식이 객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자신에 대한 의식의 작용이 마음 안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자기를 떠날 수 없다 함은 곧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 함이니 이는 하나님과 대면하는 모든 인식의 작용들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위에서 “넌 잘못되었어!”라고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우리로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는데 성경이 나를 책망합니다. “너 어제 네 친구에게 정말 잘못한거야.”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객관화 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한편입니다. 영원한 내 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딱 하나 있습니다. 나 자신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늘 그렇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을 내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잘못을 해도 그 잘못 때문에 “네 인생을 끝내야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치며 살아야지.”하며 내편을 들어줍니다.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나 자신에게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결국 사랑의 결핍입니다. 진리의 빛은 자신을 객관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자신에 대한 의식의 작용이 마음 안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자기를 떠날 수 없다. 어거스틴도 그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나를 떠나서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입니까? 나 아닌 내가 또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인간은 자기를 떠날 수 없습니다.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모든 인식의 작용들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떤 도덕적 행동을 함에 있어서, 어거스틴은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내가 나를 떠나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내가 어디에서 나 아닌 나를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면서 이렇게 똑같이 이 약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말은 내가 나 자신을 인식하는 증거 자체가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면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뵈옵고, 죄짓고 악을 행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뿐이니 인간이 당신을 떠나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자신을 멀리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의 앞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랑하면 당연히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과 작별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자기 사용설명서의 시작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출발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8. 어떤 도덕적 행동을 함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은 경향성들이 서로 충돌하며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는 곳이다. 이로써 인간의 행동은 선한 행실의 올곧음을 사일하고 스스로 수많은 모순율들을 지니게 된다. 타락 후,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그리하여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며 자신을 창조주의 위치에 격상시키고 하나님처럼 살아가고자 하는 경향성을 가진다.
9. 인간이 가지는 이러한 악을 향한 필연적인 경향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본성으로는 더 이상 창조 목적을 위하여 이바지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존재가 되게 하였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구속하시기 위한 위대한 계획을 인간의 영혼 안에 실행하신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구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영혼을 구속하심으로써 그들 안에 다시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의지하며 사랑하게 하신다.
10. 구원받은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자신 안에 있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죄의 경향성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을 위한 새 본성과 자아를 위한 옛 본성의 갈등이 그것이다. 영혼 속에 일어나는 이러한 갈등은 마음 속에서 실제로 구현되며 인간에게 의식된다. 그 속에서 인간은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외부 세계를 통해 전달되는 모든 사물들의 정보를 인지해야 하는 마음의 고유한 작용들을 혼란시켜서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세우신 존재와 가치의 질서들을 전복하고 하나님을 거스르게 하기도 하며, 또한 그 모든 감각 세계의 사물들에 대한 지식을 마음 안에서 올바르게 해석하여 창조 세계 안에 무한히 내재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심미하며 즐거워하게도 하신다. 창조된 세계는 유한하지만 그 세계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과 힘과 영광은 무한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지력을 다해도 이 세계의 무한함을 포섭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능력이 인간에게 독특한 영혼의 능력이며 이러한 능력의 행사가 마음 안에서 실현된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인간 마음의 주인이 마땅히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겸손을 배웁니다. 많은 것을 배워도 “나”라는 인간 자체는 연약할 뿐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인간의 겸손이 됩니다.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인간은 자기가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 부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능력이 인간의 영혼의 능력이며 이 능력이 마음 안에서 행사된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인간의 마음에 주인이 마땅히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11.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자신의 전 존재와 삶을 드리기 전 먼저 마음을 드려야 한다. 마음을 드리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을 방향과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신자는 이 땅의 피조물이면서도 하늘의 하나님과 교통한다. 또한 인간은 이 마음을 통하여 자신이 생각하고 욕망하고 의지하는 바를 행사하는 것이니 인간은 마음의 작용을 통하여 모든 것을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동물들에게 마음이 있느냐고 할 때 없다고 하기에는 참 곤란합니다. 유튜브에 강아지 동영상이 하나 있는데 주인에게 강아지가 열 마리쯤 있는데 어미를 옆에 두고 그 강아지들을 야단치니까 어미 개가 안타깝게 쳐다보는 모습이었습니다. 주인이 슬리퍼를 들고 강아지를 때리려고 하니까 어미 강아지가 뛰어와서 슬리퍼를 꽉 물고 놓지를 않았습니다. 주인에게 자기 새끼들을 혼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이 어미도 주인이 장난으로 한다는 것을 알고 꼬리를 치며 놀이에 참여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실제로 경험을 했습니다. 개를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개가 쥐약을 먹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병원에 데려가서 위세척을 해서 살릴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동물병원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 어미가 약을 먹고 창자가 끊어질 것처럼 아픈데 마루로 뛰어 들어오더니 자기 생애 마지막으로 강아지들에게 젖을 먹이다가 쥐약 때문에 내장이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워서 견디지 못하니까 바깥으로 뛰어나가더니 10m도 가지 못하고 마당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동물에게 마음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자기 종족보존의 본능이 발현된 것이라고 보고 인간이 가진 이 복잡한 마음의 기능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런 spirituality, 정신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마음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육체는 자연적 질서 안에 있고 영혼은 도덕적 질서 안에 있으며 두 질서는 인간의 마음에서 함께 엮어진다. 씨줄과 날줄로 엮어진 금수주단처럼 이해하게 된다.
12번. 인간의 마음을 인간존재 외부의 세계와 내부의 세계와 관련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인간의 삶이 외부의 세계로 나오는 문과 같으며 또한 내적 세계에 대해서는 그리로 들어가는 문과 같다. 인간의 마음은 단지 그 의식을 통과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 안팎으로 향하는 모든 의식의 근거지가 된다.
인간의 영혼이 있다면 영혼의 기능이 인간의 마음인데 마음을 통해서 인간은 바깥 외부의 세계와 만나고 이 마음을 통해서 인간 자신, 내면의 세계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마음을 통해서 자기 바깥의 세계와 만나고 자기 세계와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인간은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자기가 주체성을 가진 삶을 살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2장. 인간의 외적 세계와 내적 세계(1)
A. 외적 세계와 마음
1. 인간의 마음은 인간 내면에 있는 것을 매일의 삶속에서 수많은 행동들을 내보내는 문과 같다. 신자의 삶은 마음을 통해 흘러나오지만 또한 그것을 흘려보낸 마음이 어떠한지를 유추하게 하는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삶과 행동을 산출하게 하는 본성이 작용하는 곳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이어가는 신자의 삶의 근원을 추적해 간다면 그 인간 존재의 수많은 행동과 다양한 삶의 행동들은 일정한 스펙트럼을 갖게 될 것이고 그것들의 근원을 정신세계 속으로 유추해 갈 때 그것은 마음에서 최초로 모아지게 된다. 그리고 이 마음을 중심으로 다시 인간의 영혼과 정신세계 속을 향해 무수히 뻗어 있는 수많은 갈래의 또 다른 스펙트럼이 발견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마치 프리즘과 같아 삶과 행동으로 뻗어가는 것이다.
인생에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또라이 같은 사람입니다. 여태까지 배운 인간에 대한 지식으로 이야기하고 대우할 때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과적인 필요를 요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너무 불행해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내가 여태까지 겪어왔던 사람들로부터 익힌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대한다고 해도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만나면 안 됩니다. 그냥 조용히 피해야 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또라이들이 있습니다. 한번만 잘못만나면 인생을 완전히 망치게 됩니다. 마음공부를 많이 하면 그런 사람을 쉽게 분별해내는데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일을 당하고 나서야 그 인간이 또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너무 늦게 됩니다. 더구나 이런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돌이킬 수없는 인생의 비극에 들어가게 됩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병원장 한분이 계신데 이분의 취미는 운전기사에게 밤 열 시 반쯤에 산에 내려 놓으라고 하고 새벽 네 시 반쯤 그 산 반대편으로 데리러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섭지 않으세요?”하고 여쭈었더니, “목사님, 산이 뭐가 무섭습니까? 사람 사는 곳이 무섭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맞는 말이었습니다. 서울 근교 산에서 호랑이가 나타날 것도 아니고 여우가 나타난다고 해도 도망갈테니까 진짜 무서운 것은 사람일 것입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2. 인간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그의 행동과 삶은 어떤 점에서 필연성을 가지고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니 이는 본성의 일관된 작용과 힘이 거기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은 어떤 고형적 물체처럼 변하지 않는 항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마음은 끊임없이 인간 존재 안팎의 또 다른 정신 작용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겪음을 지난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 양태가 바뀌어 간다.
“겪는다”는 것입니다. “겪는다”는 것은 재밌는 것입니다. “바위가 수많은 비바람을 겪었다.”는 표현은 적합한 것이 아닙니다. 겪는다는 의미는 히브리말로 “파데고”, “겪음”, “파시오” 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떤 사물이 있고 거기에 많은 상황이 전개됩니다. 상황이 전개될 때 이 상화에 피해를 보거나 덕을 보는 것은 겪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황을 겪으면서 이 사물 자체가 그 속에서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계속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변양”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환경에 적합하도록 자기를 계속 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북극곰의 체중이 최근 50년 사이에 80kg이상이나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먹이를 찾기가 옛날처럼 쉽지 않으니까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서 체중을 감량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겪음입니다. 인간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정신의 구조를 가집니다. 오늘의 나라는 존재는 원래 태어난 나, 교육받은 나, 그리고 겪으며 살아온 내가 삼각형처럼 만나는 것이 “나”입니다. 겪음은 환경입니다. 이것은 본성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인간본성의 삼각형”이라고 합니다. 태어난 본성이 있고 받은 교육이 있습니다. 인간은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교육에 의해서 형성되지 않습니다. “저것은 진짜 같아.”, “저건 좀 거짓말 같아. 저건 받아들일 수 없어.”하며 주체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상황을 겪을 때도 상황의 소산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그 상황에 대해서 반응합니다. 무엇으로? 마음으로 반응합니다. 마음이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현재의 마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의 과거와 환경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3.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기쁨, 두려움과 슬픔의 수많은 작용들을 생각해 보라. 그 다양한 움직임과 작용이 얼마나 무수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인간의 마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마음은 어떤 점에서는 갈대와 같이 흔들리고 풀꽃처럼 나부끼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그 식물의 뿌리와 같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힘과 경향성, 그리고 성향이 얼마나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인가를 보여주며 이러한 것들이 본성이 되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작용할 때 그 작용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4. 인간의 마음은 신앙의 자리이기도 하고 죄된 욕망의 자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신앙도 죄된 욕망도영혼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혼의 움직이는 작용은 마음 안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인간은 마음을 통하여 자신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감지한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과 정서와 의지는 이 마음을 통하여 행사되는 것이니 인간의 마음은 인간의 모든 행동의 모판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어떤 움질일 수 없는 성향은 필연적으로 이에 따르는 행위를 가져오며 그런 점에서 인간의 영혼의 경향성은 마음에 대하여 필연성을 갖고 인간의 마음의 본성은 인간의 행위에 삶에 대하여 필연성을 갖는다.
그렇지 않습니까?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그 마음을 쾌락 중심으로 드러냅니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국은 먹습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꼭 가고 싶은 곳을 갑니다. 얼굴이 예뻐지고 싶은 사람은 하다못해 알바를 해서라도 돈을 모아서 좋은 화장품을 삽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성향입니다. 그러면 이런 결론이 이르게 됩니다. 마음은 순간순간 중립지대가 아니라 순간순간 결정하는 것과 내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내 마음을 훈련했던 그것과 만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에서 이런 재밌는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내 머리가 발더러 저리 가라고 하면 가나이다. 그런데 내 마음이 내 마음에 명령하면 내 마음은 듣지를 않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잘 곱씹어보십시오. 발에게 “가라”고 하면 갑니다. “손을 들어라”하면 손을 듭니다. 그런데 마음에,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해도 잘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불구의 상태”로 본 것입니다. 그러한 “불구의 상태”의 약이 그리스도이시고 “메디키나”,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치유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마음에게 명해보십시오. 잘 되는지 안 되는지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불행한 상태를 깨닫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움직일 수 없는 성향은 이에 따르는 행위를 가져오며 그런 점에서 영혼의 경향성은 마음에 대해 필연성을 갖고 인간 마음의 본성은 행위와 삶에 대해 필연성을 갖는다. 이처럼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거슬러 살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영혼 안에 지니고 있다.
필연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연적 필연성과 도덕적 필연성입니다. 자연적 필연성은, 자연에 이미 법칙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그 일이 일어나면 그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을 말합니다. 높은 곳에서 물체를 떨어뜨리면 떨어진다는 것,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 물에 햇빛이 비치면 증발한다. 이런 것들이 필연성입니다.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도덕적 필연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악인이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악한 일을 하게 되는 것, 선한 일을 하면서도 악을 꿈꾸는 것, 혹은 악이 배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도덕적 필연성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데 마음 안에서 이런 잘못된 도덕의 필연성이 형성될 때 그 사람은 그만큼 불행해지게 됩니다. 좋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인데, 그것이 쉽겠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플루타크가 “영웅전”에서 인용하면서, 인간이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한 조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 나라다운 나라에 태어날 것, 우리나라는 나라다운 나라가 아닙니다. 나라는 법이 법대로 시행되는 도덕국가를 말합니다. 두 번째, 사람다운 아비와 어미 밑에서 태어날 것,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세 번째, 훌륭한 스승을 만날 것, 네 번째, 진리를 함께 사랑하는 친한 친구를 만날 것. 이렇게 네 가지 조건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그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에서 태어난 사람도 없고 살아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최고의 행복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는 빨리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태어났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습니다. 일수불퇴이니 어떻게든 살아가야 합니다. 생각없이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 없는 사람과는 결혼하더라도 생각없는 사람과는 절대 결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재앙입니다. 차라리 혼자 살고 말지 왜 그렇게 합니까?
5. 이처럼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거슬러 살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을 영혼 안에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영혼 안에 있는 경향의 필연성은 마음을 통하여 구현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 제일 먼저 성령으로써 그의 영혼 안에 중생으로 작용하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함으로써 인간은 거듭난 영혼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 마음 안에 형성된 새로운 하늘에 속한 본성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이 세상의 의미를 해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6.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수많은 행동을 생산해 내는 공장과 같으며 이는 신자라 할지라도 마음을 올바르게 간수하며 지키시려는 성령의 작용에 협력하여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그를 통해 구속의 목적과는 상관이 없는 허탄하고 죄악 된 삶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이 마음이 어떠한지를 유추하게 하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매일매일 이어가는 신자의 삶의 근원을 추적해 간다면 그 다양한 삶과 행동의 스펙트럼은 마음으로 모아지게 되고 이 마음은 마치 프리즘과 같이 삶과 행동으로 뻗어나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음의 어떠한 상태에 따라 그의 행동과 삶은 숨길 수 없게 흘러나오는 것이니 본성이 작용하는 것도 인간의 마음이다.
다음 시간에 7번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