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영혼과 영원 (1)
녹취자: 백지영
퀴즈를 낼게 알아 맞춰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행동이 자기의 인생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누구한테 더 화를 낼까요? 자기 인생관과 어긋나는 행동을 자기에게 한 사람에 대해 화를 더 많이 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사람에 대해 더 많이 화를 낼까요? 그게 일반적인 경험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은 도둑질 한 사람은 용서해 줘도 자기하고 시간 약속을 안 지킨 사람은 인간 취급도 안 합니다. 이러면서 하나님이 세우신 어떤 죄와 규정들을 무너뜨려버리고 자기중심적으로 다시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매우 잘못된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됐는데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돈을 빌려가고 안 갚는 것에 대해서 너무 너무 싫어하는 사람, 누구든지 자기 돈을 빌려가고 떼먹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인간이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건 인간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딱 한번 빌려가서 안 갖다 주면 그다음서부터는 아예 자기 인생 수첩에서 칼로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상대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람이 더 큰 죄를 지었는데도 그렇게까지는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을 자신이 밟고 올라가는 신앙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여러분들에게 주고 싶은 팁은 무엇이냐 하면, 대부분이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신학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학이 무용하다는 게 아니라, 신학이 우리를 하나님께 가게 해 주는 게 아니라 신앙이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것은 여러분들이 아주 난삽한 신학 책을 읽는 것 못지않게 그 사람의 설교를 읽는 것이 신앙에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대원 다닐 때 칼빈의 설교를 많이 읽었고 또 모으는 일에 마음을 기울였던 적이 있는데, 그러니까 설교를 읽으십시오. 그리고 설교를 잘 듣고 그러면서 신앙을 터득해 가고 신학을 배워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오늘 발표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수업을 나가야 돼서. 그러면 텍스트로 돌아가겠습니다. 10쪽 제3번부터입니다. 영원과 영혼에 대해서 우리들이 지금 공부하고 있습니다. 영원과 영혼의 관계입니다.
3. 영원과 영혼의 관계이다. 인간의 영혼은 영원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런 점에서 영혼의 고향은 영원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이 곧 영원은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영원은 끝이 없을 뿐 아니라 또한 시작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기에 시간적으로 끝은 없으나 그것도 하나님이 그리 지정하신 덕 때문이고 또한 시작을 갖는다. 그러므로 영혼은 영원에서 취하여졌으나 영원 자체는 아니다. 영원 자체는 곧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영혼을 창조하실 때 그 영원 안에는 자신이 취한 바 된 영원에 대한 선험적인 기억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 자신과 사물에 대한 기억이며 또 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궁극적인 원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다.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그 행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논리적으로 진술하지는 못한다. 또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두 스스로 진술하지는 못한다. 이는 곧 인간이 행복과 진리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영원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런 점에서 영혼의 고향은 영원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이 곧 영원은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영원은 끝이 없을 뿐 아니라 또한 시작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기에 끝이 없으나 그것도 하나님이 지정하신 때문이고 그래서 시작을 갖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존재이시고 인간의 영혼은 유시무종(有始無終)한 존재입니다.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영원 안에서 취하져 졌으나 영혼 자체는 아니다. 영혼도 하나님의 피조물일 따름입니다. 영혼자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영혼을 창조하실 때 그 영혼 안에는 자신이 취한 바 된 영원에 대한 선험적인 기억을 갖는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레테의 강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 자신과 사물에 대한 기억이며 또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궁극적 원인인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다.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를 논리적으로 진술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행복한 상태가 되었을 때 “아! 좋다. 너무 행복하다.” 이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 알지도 못하는 것을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리가 없으니까 무엇인가 행복한 상태에 대한 선험적인 기억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원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모두 스스로 진술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공부를 하고 탐구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많이 터득한 사람이 진리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공부한 사람이 모두 그 진리를 진술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그 지식이 제대로 되어 있을 때 그 지식을 자신의 인생에 유용하도록 사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설명하면 긴데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오늘 설교시간에 조금 다룰 것입니다. 그것을. 그게 오늘 설교입니다. 오늘 새벽 다섯 시부터 정신이 없습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처럼 강한 욕망을 가지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또한 어떤 상태에 도달했을 때 거기가 행복이라고 알아보기도 한다. 진리를 깨달을 때 방금 전까지 스스로 진리가 무엇인지를 진술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리임을 깨닫고 붙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기억이라는 기능 때문이다. 행복은 지극히 선한 상태를 가리키고 진리 또한 모든 참된 것의 근원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모든 참된 것을 참되게 만드는 근원으로서의 참이다. 그것들은 모두 영원 세계에 속한 것이며 아름다움과 함께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영원에 대한 기억은 곧 하나님께 대한 기억이니 지상에서의 이러한 판단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 영원 자체이시며 선이시고 진리이시며 아름다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4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인간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처럼 강한 욕망을 가지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또한 어떤 상태에 도달했을 때 거기가 행복이라고 알아보기도 한다. 행복이 무엇인지를 진술할 수는 없지만 "아! 정말 행복하구나."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 어떤 진리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아멘, 이것이 정말 나를 살리는 진리구나” 그렇게 알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기억이라는 기능 때문이다. 행복은 지극히 선하고 만족스러운 상태를 가리키고 진리 또한 모든 참된 것의 근원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참된 것을 참되게 만드는 근원이 진리이다. 이것들은 모두 영원세계에 속한 것이며 아름다움과 함께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영원에 대한 기억은 하나님께 대한 기억이니 지상에서의 이러한 판단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 영원 자체이고 선이며 진리이고 아름다우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자신의 다양하고 충동적인 욕망과는 상관없이 그 자신 안에 영원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께서 하신 어리석은 부자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자가 엄청난 곡식을 거두어들이게 됐는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더 이상 추수한 곡식을 넣어둘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 큰 창고를 짓고 거기다 모아둔 다음 사람들을 불러서 매일매일 잔치를 하고 즐거워하자 이렇게 말하는데, 예수님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취하시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렇게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두 개의 사고가 동시에 등장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는, 시간 안에서 육적인 만족만 찾는 인생의 시각은 그런 식으로 사고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원래 곡식이라는 것은 배고픈 사람이 먹고 힘을 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곡식이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돈으로 바꾸고 그래서 쾌락을 즐기고 그 다음에 아주 성대한 잔치를 하고 이렇게 해서 쾌락을 즐기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난번에 설명했듯이 표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물이 있고 당연히 이 사물은 이 사물로서의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물을 이렇게 안 보고 이렇게 보면서 이 사물이 이만큼 이렇게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물이 A가 있는데 이것은 실제의 가치가 요정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용도로 사용되는데 이것을 위로 끌어올려서 이만큼 가치를, 이게 착각가치입니다. 이게 표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환타지아(Fantasia) 혹은 환타스마(fantasma). 그런데 인간의 대부분의 불행이 바로 이런 판타지아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표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겉(表)이고 그 다음에 상(象)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겉으로 드러난 것뿐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표상이라는 말이. 철학에서도 많이 사용됩니다. 표상으로서의 세계, 본질이 아니라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마음에 대해서 공부하는 중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실제가치가 이것밖에 안 되는데 왜 이렇게 착각가치는 높을까? 이렇게 높게 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지 보십시오. 가장 인간의 이상적인 삶은 중요한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고 덜 중요한 것은 덜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다음에 가치가 없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사는 게 맞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아니 왜 확신을 못하십니까? 맞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것을 만약 옆으로 그림을 옮겨보면 이게 만약 실제 가치라면 그리고 이것이 착각된 가치라면 그러면 요 위에 요런 가치가 있을 것 아닙니까? B, C, D 이렇게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결국은 A´의 가치는 B나 C나 D보다 큽니다. B나 C나 D가 A보다 큰데 표상 때문에 이게 이것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이것은 무가치하게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팩트가 아닙니다. 팩트는 당장은 숨겨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팩트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드러나게 될 때는 나중에 어떤 모습이 되느냐 하면, 이것을 이 가치로 여기며 살아야 되는데 이 같은 가치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것만큼 이것보다도 더 우등한 가치는 멸시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신앙적으로 하늘에 속한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중대한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번에 우리들이 본 스카이캐슬, 나는 그 스카이캐슬을 첫 편부터 마지막 편까지 다 봤습니다. 세상에 돈 주고 드라마를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1750원씩 내고 드라마를 밀린 것을 댓 편을 보고 밀린 것을 따라잡아서 보았는데 저는 모르겠습니다. 진짜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런데 신문에 그것을 본 강남에 있는 교육 관계자들은 실제는 그것보다 약간 더하다 그렇게 진단을 했습니다. 우리는 지어낸 것이겠지 생각하는데 그런데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그래서 나는 이 나라의 이런 교육제도를 너무 혐오합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이렇게 이상하게 제도를 복잡하게 해 놓고 나서 돈 있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는 길들을 더 많이 열어준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 같은 것들이 들고, 이것을 위해서 교육관계자들이 이 나라에서 충분한 대우를 받고 자기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말하자면 교육을 할 수 있게끔 그렇게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미국에도 스카이캐슬 같은 똑같은 사건이 터져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는데 그것도 결국은 마찬가지인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미국사람들은 사실은 과외라는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가서 하버드반, 예일반, 이런 것을 한국식으로 만들어가지고 놀라운 성과를 내면서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지금 그 사람들도 전부다 다 과외 하느라 난리고, 과외 하는 기법을 한국에서 배워가지고 한국 사람들 하고 손잡고 과외학원을 만들어서 그렇게 성업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이 자기네만 망치는 게 아니라 남의 나라도 망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실감나게 얘기해보자 이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연애를 한다, 그러면 실제 가치는 요만큼입니다. 그런데 가치를 이만큼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나머지 더 중요한 것은 다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한 3년 사귀었는데 뻥 차고 가버렸습니다. 돌리도 그러는데 3년을 어디서 돌려받을 것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연애가 할 가치가 없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경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착각된 질서를 실제의 질서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가능할까요?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이 사람이 이렇게 가치를, 실제의 가치보다 착각된 가치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요게 한건만 그렇겠습니까? 하나만 그럴 리는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게 이리로 뛰어올라서 이렇게 표상을 갖게 되면 그러면 당연히 이것은 다 자기 자리를 한결같이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러니까 하나가 중요한 게 위치를 잘못 잡게 되면 나머지는 전부다 다 위치를 제대로 못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일어나는 게 무엇입니까? 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혼란이 일어나고 혼란이 일어나면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전심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게 결국은 A에서 A´로 이동하게 해준 게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렇게 무질서한 것들을 잡아주는 게 뭐냐 하면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갖는 가장 중요한 효능은, 이렇게 주관에 빠져서 가치의 질서가 혼란스럽게 된 곳에 진리의 깨달음이 오면 이것들이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진리의 빛에 의해서 착각가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 헛된 거구나."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헛된 가치를 버리고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가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묘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면 잘못된 사랑이 사라지면서 이 착각가치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착각가치를 최소화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지혜를 구하는 삶입니다. 잠시 있다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 유한한 것을 영원한 것과 연결시키면서 살아가느냐, 그 불변하는 어떤 의미를 찾아내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젊은 나이에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못 느끼는 것은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는 채 계속 살면 생각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생각이 들어올 때 자기가 살아온 많은 날들을 후회하게 됩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의미를 발견해서 그래서 그것을 연결시키면서 그것이 사라져 가더라도 허무한 것을 위해서 살지는 않았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의 행복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는 외로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는 정말 외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그런 외로운 존재에 대해서 자각하게 되면 그 다음에 깨닫게 됩니다. 아무도 이 외로움은 공유할 수 없는 외로움입니다. 내가 한 인간으로 태어났디는 사실, 이것이 주는 고독감은 누구하도고 공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절대 공유가 안 됩니다. 무슨 공유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공유하지 못한다고 원망하고 또 사랑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그것도 미친 짓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다르게 독자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사람으로서의 한 인간 실존으로서 갖는 고뇌는 누구 사람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잠시 연애하고 사랑에 빠져서 까불 때는 잊어버릴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를 들어서 너무 신나는 미팅을 했다든지, 캠핑을 갔다든지, 그럴 때는 중간고사 까먹을 수 있습니다. 생각 안 하고 놀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면 현실입니다. 23일 날 중간고사 보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그 현실을 피할 수가 있습니까?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지난 주에 얘기했습니다. 이 강의에 대해서 자매들은 엄청난 은혜를 받았는데, 누구하고 결혼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너밖에 없다는 사람하고 결혼하지 말라고. 그 사람은 몇 년 전에도 누구한테 또 그랬습니다. 그리고 여러분하고 떠나면 또 누구한테 그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한테 존재 전체를 기대고 삶과 죽음이 밑바닥 까지 흔들리는 사람은 나에게 필요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같이 살 수 없습니다. 그냥 한 사람으로서 자기가 두 발을 딛고 주체적으로 인간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대등한 관계에서 인격적인 교류를 나누면서 살아가는 게 사랑입니다.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존재를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사랑은 없습니다. 다 허구입니다. 그러면 교수님은 사모님하고 별로 사이가 안 좋으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39년을 살았는데 마지막으로 약간 언성을 높이고 말다툼한 게 24년 전입니다. 끊임없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사랑얘기에 또 열을 내셨나?
착각가치, 실제가치. 그래서 말씀에 늘 은혜를 받고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은 이게 전혀 없다고는 말은 못하는데 요렇게 가려고 하다가 다시 돌아오고 다시 돌아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진리의 빛 때문에. 그런데 아예 아무 것도 안합니다. 그러면 갈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강남스타일에서도 나오지 않습니까? 갈 때까지 가보자고. 어디까지 갈 것입니까? 마지막에 간만큼 후회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인터넷이나 SNS, youtube 이런 데서 볼 때 "이 사람들이 미쳤나?" 이러는 삶이 여러분한테는 미친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 사람들한테는 너무 당연한 삶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항상 비판적으로 보면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삶의 의미입니다.
5. 인간의 영혼은 인간 자신의 다양하고 충동적인 욕망과는 상관없이 그 자신안에 영원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이 땅에서 영혼은 육체 안에 갇혀 있으나 또한 영혼과 교제함으로써 한시적인 육체가 한시적인 사물들 가운데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만물의 의미를 영원의 빛 아래서 해석하고 적용함으로서 그 영혼에 힘입어 인간 존재는 하늘을 향해 오르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그렇게 오른 고양된 영혼은 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탈혼의 상태에서 물질세계를 감옥처럼 생각하며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혼이 영원을 향하여 고양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던 이 세상의 참된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고양된 영혼은 인간의 마음 안에 불변하는 진리의 빛과 참다운 선, 그리고 완전한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들 안에서 사물들을 보게 하는 것이니 이 사물들 안에서 그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이 어떻게 스며들어 조화로운 세계를 만들고 있는지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 5번으로 넘어갑니다. 인간의 영혼은 다양하고 충동적인 욕망과 상관없이 영원을 향한 갈망을 갖고 있다. 영혼은 육체에 갇혀 있으나 또한 영혼과 교제함으로써 한시적인 육체가 한시적인 사물들 가운데 둘러 쌓여있지만 만물의 의미를 영원의 빛 아래서 해석하고 적용한다. 그 영혼에 힘입어 인간의 존재는 땅에 있으면서도 하늘을 향해 오르게 되는 것이다.
진짜 올라간다는 뜻이 아니라 하늘의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게 요셉의 경우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얼마나 예뻤는지 난 모르겠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였으니까 예쁜 여자였겠지요. 그런데 어쨌든 그래도 나이는 좀 더 있지 않았을까요? 요셉은 한창 어렸을 때였으니까. 그 주인여자가 얼마나 잘 해주었겠습니까? 그러고 나서는 보디발의 아내가 하여튼 연정을 느꼈습니다. 그래가지고 나와 동침하자 그렇게 요구를 할 때 이제 이 요셉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여자는 “여기 우리 둘 밖에 없지 않냐?” 그런데 요셉에게는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리오” 하면서 그 단둘이 있는 방에서 하나님을 의식한 것입니다. 그게 진리를 믿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것을 만약에 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인간의 도리를 믿는 유교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고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어떻게 내가 내 앞에서 죄를 짓겠느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31.13) 죄라는 개념이 별로 없지만 그러나 나의 확신과 양심에 반하는 바는 나는 행할 수 없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덕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결국은 자신이 둘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되어야 할 나와 그 다음에 실제 하는 나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누가 나쁜 짓을 하면 바가지로 욕을 하고 그 다음에 피를 튀면서 칼을 드는데 자기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굉장히 관용하고 자기도 그렇게 합니다. 여러분도 똑같지 않습니까? “이 바쁘고 공부해야 될 이 중요한 시간에 어떻게 연애를 하고 있느냐?” 이렇게 욕하지만 자기도 누군가 사랑에 빠지면 또 그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장담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권장사항이지 절대적 기준이 아닙니다. 연애 같은 것 하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는 사람이 공부도 안 하는 사람 많고, 그것 하면서도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너그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마땅히 되어야 할 나와 실제 하는 나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비양심적인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쳐야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자신의 힘으로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아주 절실하게 자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도움을 간절히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무엇을 명하시든지 무한히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이 절대의존의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종종 드는 비유지만, 여러분들이 만약에 아무도 알 지 못하는 낯선 땅에 가고 그리고 깊은 동굴에 들어가게 되어서 빛도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됐다, 그런데 여러분들을 인도하던 가이드가 거기 하나 있었는데 그 가이드는 여기 와 본 적이 있고 지형을 잘 안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이 하자는 대로 여러분 하겠습니까? 하지 않겠습니까? 죽으려고 맘을 먹지 않는 한 당연히 할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기의 논문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존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 실제로 그 논문, 어쩌면 설교문이라고 읽히는 그 책이 번역이 되어서 그러니까 1700년대인데 그 책이 그 도시 안에서 20쇄를 거듭할 정도로 팔렸습니다. 굉장한 책입니다. 옛날 클래스에서는 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래도 좋은 시절에 와서 그런 숙제를 내가 마음이 온유해져서 접은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읽어보십시오. 조금 여러분 영어 실력으로 어려울 수 있겠지만 한번 읽어보는 것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비슷하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의 의존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 유명한 글입니다. 저도 굉장히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설명에 의하면 죄가 들어오기 전보다 죄가 들어온 후에 하나님은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는 저렇게 인간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정론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도움이 되는 글입니다.
그 다음에, 하늘을 향해 이렇게 오른 고양된 영혼은 플라톤 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탈원의 상태에서 물질의 세계를 감옥같이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혼이 영원을 향해 고양되기까지 알 수 없었던 이 세상의 참된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고양된 영혼은 인간의 마음 안에 불변하는 진리의 빛과 참다운 선 그리고 완전한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들 안에서 사물들을 보게 하는 것이니, 이 사물들 안에서 그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이 어떻게 스며들어 조화로운 세계를 만드는지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6. 인간은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이 시간 세계 안에 자기를 확장하신 그 위엄과 아름다움, 신적 권능을 보게 되고 그러한 정동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 이외에 자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궁극적인 존재가 없는 것을 알게 된다. 영혼의 고향은 영원이기 때문에 그가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고 그 영원에 잇대어 영향을 받을 때 가장 영혼다울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영혼으로서 가장 완전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참다운 나, 참 자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마음에 이끌리는 삶이며 그리고 이 마음을 통하여 영혼은 인간의 육체를 이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인간의 육체의 생명은 영혼이고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영원자체인 하나님이 시간 안에서 보여주신 위엄과 아름다움 신적 권능을 보게 되고 이러한 정동 속에서 하나님 외에 자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궁극적인 존재가 없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을 받으실만한 유일한 분이시다 그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아름다움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른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사랑스러우면 그 사람이 하는 행동, 그 다음에 가지고 있는 물건, 태도 혹은 버릇까지도 예뻐 보입니다. 심지어는 냄새까지도 좋아 보입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그 한 사람의 아름다움이 사람을 감동시키면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에도 감동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잠깐 설명했지만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이렇게 온 세상에 자연 안에 가득하고 인간의 지성 안에 가득하고 또 사물들의 질서 안에서 우주의 질서 안에서 충만하다는 것을 깊이 경험하면서 온 세계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그림책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깨닫고 나면 공부가 얼마나 재미있겠습니까? 그 공부가 그려내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은 재미있어지는 지름길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항상 이만한 모니터가 나옵니다. 게임이라고 나옵니다. 나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행기타고 미국까지 가는 동안에 눈이 새빨개서도 게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습니까? 나는 그 아름다움을 잘 모르기 때문이고 그 사람은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아니까 그 게임에 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별로 부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게임은 말하자면 팩트가 아니니까 거기서 내가 전 세계 일등 한들 나에게 삶의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을 보든지 영화나 보든지 잠을 자는 게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 가운데 하나는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영혼이 어떠한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가엽게도 하지만 그것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친구도 마찬가지고 애인도 마찬가지고. 그렇지요?
7. 진리로 말미암아 정화되고 성령 안에서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순일성을 간직함으로써 물상의 작용으로 혼란스러운 마음에 좌우되지 않고 오히려 그 마음을 이끌 수 있으며 이 안에서 인간의 마음은 단일성을 갖는다. 그러한 단일성 안에서 흘러나오는 인간의 모든 삶은 영혼이 바라보고 있는 진리를 향하여 지배받는 삶이 되고 궁극적으로 그 영혼이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선과 아름다움으로 통합된다.
그 다음 보겠습니다. 7번, 진리로 말미암아 정화되고 성령 안에서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순일성(純一性) 혹은 전일성(全一性)을 간직함으로써 물상의 작용으로 혼란스러운 마음에 좌우되지 않고 오히려 그 마음을 이끌 수 있으며, 이 안에서 인간의 마음은 단일성(單一性)을 갖는다.
단일성을 갖는다는 게 성경에서는 순전함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싱글래스(singleness)라고 합니다. 사람은 많은데 그 마음이 다 한 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싱글래스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개체 수만 이야기할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무엇에 오로지하는 경우가 매우 드뭅니다. 다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 자신도 많이 찢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한곳에 오로지 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아까 누가 발표했지요? 신자의 마음은 굳어진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이 함께 있다고 했는데 그것을 청교도 존 오웬 같은 사람은 어떻게 설명을 하느냐 하면, 신자의 마음에는 죄가 있어도 절대적인 방식으로 신자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절대적인 지배는 불신자에게 있는 것이고,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게 되면 그 거듭난 것 자체가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도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 속했습니다. 세상 자체가 불완전하고 우리의 감각 자체가 우리를 속이는 측면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눈, 우리의 시각은 우리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결국은 그것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을 오쿨라 센트리시즘(centrism)이라고 합니다. 오쿨라는 눈입니다. 보는 것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이니'라고 할 때, 인간이 보면서 가장 많이 감정이 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디오도 엄청나게 발전을 했지만 그러나 비디오가 발전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전 세계가 미친 듯이 5G에 매달리는 이유도 결국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듣는 것만으로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데이터가 될 수가 없습니다. 제가 6천5백 편의 설교를 했다고 하는데 요만한 디스크 하나에 다 들어갑니다. 아니 인류 역사 이래 여태까지 신문을 모두 모은다고 해도 USB 하나면 다 들어갑니다. 그런데 거기에 영상이 들어가면 문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런 오쿨라 센트리시즘이 오늘날의 대세이기 때문에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용량의 데이터를 엄청나게 빠르게 처리할 수 있어야 됩니다. 지금 5GB가 완전히 전국에 퍼지게 되면 그러면 정상적인 속도가 2기가의 영화 한편의 하드드라이브를 2초에 다운받는다고 하니까.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150킬로를 고속도로를 달려가면서 거의 1초 안에 2기가지만, 이제 앞으로는 4기가, 6기가 이렇게 올라가지 않을까, 그래서 영화를 보다가 영화를 이렇게 보면서 손으로 이렇게 돌리면 영화화면 자체가 360도로 회전되는 것입니다. 지금 5G가 그것입니다. 야구구경하다가 텔레비전을 향해서 이렇게 손을 돌리면 포수석에서 찍던 것들이 갑자기 1루수 쪽에서 카메라가 쫙 비취는 것입니다. 이렇게 움직이면 빙~ 드론을 타고 돌면서 보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어마어마한 데이터가 들어가겠습니까? VR을 한번 착용을 해 봤는데, 시험관에 가서 한번 봤는데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용량이 들어가야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한 것이 앞으로 계속 발달합니다. 왜냐하면 오쿨라 센트리시즘 때문입니다. 저희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아니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마찬가지인데 가수에게 있어서 외모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매체자체가 전부다 녹음테이프, CD 이런 것이었지 얼굴을 보여주는 매체 자체가 거의 없었고 그럴 필요도 못 느꼈습니다. 목소리 하나가지고 승부했는데 이제는 어림없습니다. 그림 같지 않으면 정말 힘들다고 해야 될 정도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별로인 사람을 갖다놓고 수없이 편집을 해가지고 그림처럼 만들어가지고 사람들이 띄우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 때문입니까? 오쿨라 센트리시즘 때문입니다. 욕하면서도 계속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 문화 속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데 그래서 다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이런 오쿨라 센트리시즘에 살고 있으면 사는 만큼 표상의 위험성은 계속 가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표상의 위험을 나만 느끼면 그래도 나 자신에 비판적일 수 있는데 모든 사람이 표상에 대해서 공감해 줄 때는 그것이 하나의 도덕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반성해야 될 필요를 더더욱 못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방학 동안에 신나게 놀았습니다. 캠핑 다니고 놀러 다니고 별짓 다했습니다. 기도하고 공부만 안 하고 나머지 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 방학 때 잠깐 와 보니까 도서관에서 내가 아는 모든 학생들이 머리를 싸매고 미친 듯이 공부하고 공부 끝나고 난 다음에 채플실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광경을 두세 번 보았을 경우에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아,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나 지금 잘못 살고 있는 것 아니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두 그렇습니다. 모두 자기처럼 그렇게 농땡이를 친다는 말입니다. 그때 그렇게 하는 사람 누구를 보면 "제는 좀 약간 너무 신비주의로 간 것 아니야?"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안을 얻습니다.
그래서 같은 표상이라도 이것을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표상이 많은 사람에 의해서 일치를 이루고 사회적인 합의에 이르게 될 때 하나님은 이것을 더 큰 악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다 이렇게 표상에 속고 다 시대를 따라간다고 해도 "나는 아니야." 그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런 용기를 가능하게 할까요? "나, 어떻게 하든지 나는 나로서 살아가고 싶다." 주님 안에서 그런 주체적인 생각만이 "아니요"라고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 "아니요"라고 한 대가로 이런 좋은 표상들을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까짓 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자신감, 그것은 자기 인생에 대한 주체적인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