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마음, 하나님과 만나는 곳
녹취자 : 장미연
(앞부분 녹음 안됨)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으깨어진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뭔가 부서지도록 두들겨 패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박살이 난 겁니다. 이것은 죄에 대해서 각성된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해 각성된 마음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아,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매우 잘못됐구나.’ 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아까 누가 화난다고 했는데 화나는 걸 넘어서서 ‘아, 나는 진짜 희망이 없구나. 난 어떻게 하지? 나는 이렇게 하면 안 될 거 같아. 내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면서 자기가 굳세게 살아가던 삶에 대해서 갑자기 확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약해지는 것입니다. 약해지는 것은 단순히 그냥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무슨 불순종 하며 살아가나’ 생각을 합니다. 우리들이 그냥 평범하게 걸어갈 때는 그다지 힘이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걸어가다가 유리문 같은 것에 쾅 부딪히면 이빨이 부서질 정도로 중상을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강력한 힘으로 걷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에게 막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강하다는 걸 몰랐던 것뿐입니다.
진정으로 복된 마음은 이렇게 어떤 과정을 단순히 거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통과하는 겁니다. 이해되시지요? 지난번에 사당동 튀김을 예로 들면서 얘기 했습니다. 튀김을 만들 때에 기계에 닭을 넣어 눌러서 납작하게 어묵을 만들었습니다. 형체도 없는 것입니다. 형체가 없이 부서진 겁니다. 그것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강한 성향과 고집을 가지고 반항을 하던 마음에서 그것이 쫙 빠져 나가면서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겠다.’라고 하는 그런 부드러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17세기의 영국의 청교도 리차드 십스 같은 사람은 부드러운 마음을 둘로 설명을 합니다. 세상적인 것에 대해서 부드러운 마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부드러운 마음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딱딱한 마음이 되면- 에스겔서에서는 ‘레브 하에벤’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는데 ‘그 돌의 마음’이라는 뜻임- , 다시 말해 돌멩이같이 딱딱한 마음이 되면 세상에 대해선 아주 부드러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 세상의 유혹, 세상의 욕망,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될수록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주 완강하고 딱딱한 마음이 되고, 때로는 아주 분명하게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데도 아무 이유 없이 자기가 싫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것을 거절 합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반항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은혜에 대해서 부드러운 마음이 되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딱딱한 마음이 됩니다. 꼭 갖고 싶은 것도 없고 특별히 세상에서 해야 되겠다는 욕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진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연애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집니다. 귀찮잖아요. 자꾸 기도하는데 옆에서 만나자고 하니까 말입니다. 세상을 향해 부드러운 마음이 될 때는 충분히 유혹이 되었던 것이 하나님을 향해 부드러운 마음이 되면 그것들이 전혀 유혹이 안 되는 겁니다. 땅을 생각해보면 두 종류의 땅이 있습니다. 하나는 콘크리트입니다. 콘크리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사람이 밟고 다니고 햇빛을 받아서 돌 같이 딱딱해진 땅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갈아엎어져 잘 다듬어진 밭과 같은 땅이 있습니다. 여기에 씨가 떨어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디서 싹이 나겠습니까? 이와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부드러운 마음이 세상에 의해서 딱딱한 마음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이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부드러운 마음이 되었던 것이 계속 똑바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느 한 순간에 확하고 굳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굳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발뒤꿈치에 각질이 생기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한참 살다가 발이 딱딱해서 만져보면 엄청나게 각질이 생긴 것을 알게 되고 샌드페퍼로 긁어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끊임없이 굳어지려고 합니다. 이러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자기의 마음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측정해 봐야 합니다. 몸무게를 관리하기 위해 매일 저울에 올라갑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몇 킬로쯤 됐나 올라가보고, 저녁에 되어서 또 재어봅니다. 그리고는 ‘내 느낌과 상관없이 몸무게가 많이 늘었네. 좀 덜 먹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너무 빠져서 어떡하지? 더 먹어야 되겠네.’라고 하며 조절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이렇게 끊임없이 흘러가는 겁니다. 그런 겁니다.
저는 신앙과 행복에 대해서 계산하는 것이 있는데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진짜 행복하고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에 의해서 자기 인생이 지배되는 삶을 살아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누구든지 간에 말입니다. 사랑을 하고 연애하는 것은 좋은데 거기에서 자기 자신이 매몰될 정도로 자신을 잃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사랑은 좋은 사랑이 아닙니다. 거기에 생명까지 오갈 정도의 그런 사랑은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실존을 상실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겠어요? 영원하다고 생각하지만 영원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이외에는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너무나 소중한 것이 자기 자신의 주체성이 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 주체성은 예수님 안에서 자기가 가득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할 때 자기가 가장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나답지 않은 나와 나다워야 할 나 사이의 싸움입니다.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인생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무엇이 나다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삶 속에서 나의 인격 속에서 나답지 않은 것을 덜어내고 건져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아무것도 나를 흔들 수 없다.’ 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서 나는 정말 자유하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것들은 잃어버려도 얻는 것이고 얻는 것도 잃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화) 15년 전에 이집트 쪽의 박물관에 갔는데 깜짝 놀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쪼그리고 앉아있는데 북어처럼 말랐습니다. 2,500 년경에 사막에서 죽은 어떤 사람의 시체입니다. 미라를 한 게 아니라 모래에 버려졌습니다. 사인을 분석해 보니 뒤에서 뭔가 둔기에 맞아서 타살당한 사람입니다. 키는 한 145Cm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인데 어린아이는 아니고 성인입니다. 죽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말라서 아주 딱딱한 오징어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 얼굴 그대로 있었습니다. 안 썩고 말입니다. 사막엔 습기가 없으니까 부패하지 않고 미라처럼 되버린 것입니다. 파피루스가 수천 년 것이 그대로 발견되는 것처럼 그렇게 발견된 것입니다. 완전히 오그라들어 요만한 함지박 하나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게 인간이구나.’
인간은 그렇게 잠시 살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보람을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쓰고 그러는 것에 인생의 희망을 두면 희망 자체가 견고한 곳에 뿌리 내려진 게 아니기 때문에 인생도 함께 떠내려가는 겁니다. 그것을 모두 지나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읽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한 번 읽어 보십시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보면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거대한 우주의 흐름 속에 있는 물방울과 같은 존재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무엇을 올바르게 사랑하고 무엇을 어떤 마음을 지키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여러분은 고민해야 합니다.
마지막 시간이지만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 자신이 주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 없이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종교의 노예가 되는 것일 뿐이지 자기의 주체성을 찾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이 신앙의 열심은 있지만 주체적이지 못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온 우주 공간에 내가 홀로 서 있고 내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여기에 서 있다. 육신은 흘러가고 사라져 가지만 나의 영혼과 정신은 영원하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자유로운 삶일까?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미친 듯이 빠지는 그런 취미 아니면 오락, 심지어 요새 줄이라고 하는 전자담배 그런 것들에 빠져서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내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매이는 것도 힘든데 왜 우리가 자원해서 그런 것에 매이면서 살아야 됩니까?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사는 겁니다.
6장. 하나님, 마음의 치료자
5장까지 우리는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배웠고 시간, 영혼,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망가지는 등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알다시피 우리의 마음이 정말 내가 원하는 바람직한 상태에 있을 때 보다는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불만자는 우리 자신입니다. 어떤 때는 ‘왜 이렇게 내 마음이 변할까?’ 아니면 ‘내 마음이 자꾸 약할까?’ ‘내 마음이 자꾸 이렇게 변하지를 않을까?’ 이런 걸로 항상 고민을 합니다. 한참 고민하다 보면 너무 힘드니까 내려놓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배에 탔으나 조정하는 사람 없이 세월을 따라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게 하면서 뱃노래를 하면서 바다까지 흘러가게 하나님이 놔두시지 않습니다. 어딘가 한 번 꽝 하고 부딪히면서 한 쪽이 깨어지면서 물이 들어오고, 거의 죽을 것 같은 경우를 경험하게 하셔서 마지막에는 마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항상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지금은 죽을 것 같고 심지어는 자기 인생을 이 정도에서 끝낼까하고 자살까지 생각합니다. 옛날에 은혜 충만했을 때는 그런 상황과 마음을 이겼었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환경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이상한 사람 만나면 만난 사람의 인생이 한 없이 꼬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아무도 책임질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치료하신다는 것입니다. 고쳐서 온전하게 하십니다.
신자의 마음은 중생과 함께 이러한 질서를 갖게 되고 그러한 질서 안에서 영혼은 진리의 영향을 받게 되며 그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서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이러한 인간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은 신자의 마음을 끊임없이 고치심으로 본래 그가 구원받은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도록 이끄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치료는 성령의 은혜로써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역이시다.
A. 영혼과 마음, 그리고 삶의 질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자의 마음은 영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그의 실제적인 육체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혼이 진리의 영향을 받으며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가장 올바른 경향성을 갖는 순수한 상태가 되는 것처럼 또한 인간의 마음은 그러한 영혼의 상태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자아의 일치를 가져온다. 이것은 마음의 하나 됨이며 그 하나 된 마음 안에서 지성과 욕망과 의지는 각기 자신의 질서를 따라 작용하게 된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마음의 찢어짐”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겁니다. 마음이 여러 개로 나뉘어서 서로 돌아다니면서 통제가 안 되는 겁니다. 도대체 찢어진 마음 중 내가 어디에 속했는지 알 수가 없고, 내 마음이 내 마음 안에서 갈라져 수없이 싸움을 하면서 나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으니 도대체 이 싸움질 속에서 나는 어느 마음의 편을 들어야할지 모르는 상태가 인간의 고통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게임 같은 것에 몰두합니다. VR 같은 것들이 나오고, 심지어 외국에 가보면 사람을 눕혀 놓고 3D가 돌아가면서 영화관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현혹시키는데 그 기술력이 옛날과는 비교가 안 되게 훨씬 극적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속에 자꾸 빠져 들어갑니다. 제가 볼 때 앞으로 이런 오락이 기독교에 주는 위험이 훨씬 클 겁니다. 그래서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나왔던 ‘토탈리콜Ⅰ’ 그 뒤에 나온 ‘토탈리콜Ⅱ’와 같은 것들에 대한 것들이 예언자적인 암시를 주는 영화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그런 것에 자기 인생을 내어줍니다. 이번에 WHO에서 게임을 중독으로 분리했습니다. 진작 분류 되어야 되는 것이었는데 이것 말고도 질병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현상은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너무나 힘드니까 피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게임할 때 어마어마하게 집중하는 것 같지만 사실 심리학자들 이야기로는 그것을 ‘초 분산’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초 분산 시키는 정신의 작용이 게임 같은데 몰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겪는 마음의 이런 현상들을 이미 다른 사람들도 모두 겪었기 때문에 차라리 그런 현상들을 전달해주는 문학이나 예술, 사회 안에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등을 통해서 우리들이 공부함으로써 마음의 다양한 작용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누가 얘기를 하기를 심리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40%가 약간의 심리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마음이 너무 궁금한 겁니다. 그냥 궁금한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우주에 뭐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지만 나하고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궁금할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 심리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도무지 설명이 안되니까 공부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인간의 심리를 들여다본다고 해서 인간의 마음이 파악되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이 얘기한 것처럼 “모든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자신의 마음도 알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기를 그냥 포기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권력을 많이 가지고 돈을 많이 모아서 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 빛나는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죄악입니다. 왜 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옳지 못한 방식으로 강요하며 살아야 합니까? 모두가 자유롭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는데 말입니다. 마음공부 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에게 주는 나의 간절한 충고입니다.
사실 이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지성과 욕망과 의지의 기능은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능이라기보다는 서로 잇대어져 있는 하나의 통합적 존재이다. 지성과 욕망과 의지가 구분되지만 분리되어 나누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욕망은 지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생하며 또한 의지는 욕망과 밀접한 의지를 가지고 발생하게 되는 것이니 아는 것 없이 욕망할 수 없고 욕망이 없이 의지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하나 된 상태로부터 인간의 지성은 가장 잘 발휘되어 한편으로는 오성을 통해 영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며 또 한편으로는 이성으로써 육체의 감관을 통해 들어오는 수많은 사물들에 대한 인상과 마음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관념들을 질서롭게 짝 지우며 어떤 생각의 결과를 마음 안에서 미리 예측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지성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주도적인 지도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욕망은 바로 그러한 지성의 지도를 받으며 그 도덕적 판단에 따라 욕망할 바와 혐오할 바에 대해 바르게 반응하고 의지는 그 좋고 싫음에 의해 무엇인가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지런한 질서의 선택은 일관된 행동과 삶의 질서를 형성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나된 마음 안에서 규명하는 지성은 진리에 의해 빛을 받으며 그 빛 아래서 또한 스스로 올바른 도덕적 상태의 구현을 위해 바르게 추론된 가운데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성 안에서 모든 사물들에 대한 질서로운 생각이 생겨난 그 계획이 욕망을 거쳐 의지로까지 투영될 때 그 사람의 삶은 아름답게 빛난다. 그리고 영혼의 힘은 바로 이러한 마음의 상태에서 가장 잘 발휘되며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 자아는 온전한 평화를 누리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자신의 삶 밖에서 실현되는 것을 통하여 인간은 자기를 구현하며 또한 자기 안에서 구현하시는 하나님 자신과 교통하며 자기를 확장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자아를 성취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세계를 구속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전우주적인 구속사역에 인간의 마음이 참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의 완성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비지성적인 만물보다 지성적인 인간의 마음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은 마지막에는 자기도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는 그런 상태가 됩니다. 그런 속에서 자기가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순간, 순간 욕망에 반응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은 어마 어마하게 죄를 짓냐 안 짓냐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죄를 져봐야 무슨 어마 어마한 죄를 짓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마음의 찢어짐 속에서 그렇게 찢어지는 가운데서 인간은 분열하게 되고 그 안에서 인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B. 질서의 파괴
마음은 육체의 감각이 실어오는 사물들의 대한 인상을 해석하고 판단하여 주는 지상의 도움 없이 그것과 짝하여 발생하는 욕망의 충동에 따라 작용하게 되므로 심한 무질서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말하자면, 상상에 의한 마음의 번민입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막 상상하고 짝 짓고 마음속에서 결합하면서 어떤 욕망을 충동하거나 비관적인 일들이 계속 전개되거나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도 혹시 친구나 누구 만나서 비관하는 사람들 있잖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절대 동조해주지 말고 그렇지 않다고 부인해줘야 합니다. 그들이 심리적으로 원하는 게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난 정말 못난 인간이야.” 그렇게 얘기하면 다 들어주고 마지막에 “절대 넌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정색을 하고 얘기해줘야 합니다. “그래 네가 좀 그런 못난 점이 있지.” 거기서 이제 푹 꺼지는 겁니다. 강하게 “아니야 난 정말 못 났어.” 그렇게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그 정도 반응으로 부정하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 그 뜻입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 넌 절대로 못난 사람이 아니야. 내가 혈서를 쓰랴.” 이 정도까지 얘기해줘야 합니다. 그럼 증거를 보여 줘야 합니다. 격려입니다.
이런 모든 상황을 이끌어야 할 지성은 홀로 존재하는 한 그 지도력을 회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성이 올바르게 판단하는 작용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진리의 빛 아래 있어야 하고 그 지성으로써 욕망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성에 의한 욕망의 제압은 단지 인간의 순수한 지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지성과 함께 역사하는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서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이렇게 질서가 파괴될 때 인간의 내면의 세계는 더욱 하나님을 몰라보는 거만한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렇게 충동되는 욕망을 따라 의지는 노예상태가 된다. 이렇게 질서가 파괴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근본적인 원인: 원죄
첫째로, 원죄 때문이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원죄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죄책과 오염으로 이루어진다. 이 오염은 인간에게 본성에 있어서는 전적인 타락을, 의지에 있어서는 전적인 무능을 물려받게 되었다.
인간 본성 안에 깃드는 이 불가항력적인 오염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나면서부터 영혼, 마음, 그리고 육체의 삶 사이에 무질서를 겪으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가 추구하는 그 모든 물질세계의 번영과 자신을 기쁘게 하는 모든 도구들의 생산과 소비의 활동들은 이러한 질서를 바로잡아주는 데 조금도 기여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은 스스로 자기의 욕망을 현혹시키는 수많은 물질 속에서 더욱 더 자아를 상실하게 된다.
여기에서 나온 게 소비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느끼는 찢어짐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정하지 못하는 불안을 소비를 통해서 해소하는 겁니다. 소비는 당연히 돈이 있어야 많이 쓰겠지요. 그러나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성향 자체가 소비를 지향하게 됩니다. 오늘날 가짜로 자기를 포장해서 어마 어마한 유튜버가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밥 한 끼에 50만원, 100만원 하는 먹는 광경부터 찍어내고 해외를 돌아다니고 어마 어마하게 비싼 옷을 입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SNS에 올리는 일들은 결국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런 소비에 매몰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한 30년 보다 훨씬 더 위험한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신병 수준입니다. 게임하는 것만 병이 아닙니다. 쇼핑 같은 것에 중독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너무 많습니다. 홈쇼핑에 혹하여 카드를 긁는 것도 다 질병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에 항거할 수 있어야 되고 그럴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건강한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게 인간이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마음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만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결혼을 한다든지 그러지는 말고 도와주십시오. 가엾으니까 도와주십시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되니까요.
건강한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나이가 어려도 건강한 사람이 있고 나이가 많아도 병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 갖지 말고 ‘나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여기십시오. 주님도 나를 대신하진 않으십니다. 그분이 내 안에 살고 싶어 하시고 우리를 당신 안에 살게끔 하고 싶으시지만 나를 없애 버리고 당신이 나를 점령하여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내 안에 주님 사신 것은 내가 주님 안에서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성을 주신 것은 이러한 물질의 문명을 목적 있게 수립하게 사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지라도 인간의 문명은 수립되었을 것이고 수립된 그 문명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궁극적 목적을 향해 연관을 이루며 질서로운 목적 연관을 수립할 것이었다. 우리 인간은 자연을 통해서만 창조주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게 된다.
인간의 물질문명이란 자연의 또 다른 구가일 수밖에 없으니 이는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하여 이룬 또 하나의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모두 자연에서 본 딴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풍부할 때 디자인을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디자인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있는데 자연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가질 때 디자인에 대한 이해가 나오는 겁니다. 가우디 성당 건축도 어린 시절을 산지에서 보내면서 자연에 매혹된 그 형태를 본 딴 것입니다. 인간에게 짓밟히는 자연을 보면서 느낀 분노, 연민 같은 것들을 파밀리아 성당에 녹인 것입니다. 그 건축물을 보면 한참동안 충격에 빠졌습니다. 137년 동안 짓고 있는 것을 아시지요? 아직도 짓고 있습니다. 세계를 다녀보면서 그런 성당은 처음 봤습니다. 성당은 대개 마리아부터 시작해서 온갖 성인들이 등장하는데 포도 넝쿨, 나뭇잎과 같은 것들이 등장 합니다. 가우디가 보기에 모든 세계와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파밀리아 곧 가족처럼 보인 겁니다. 충격이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인터넷에 들어가서 꼼꼼히 보십시오. 바르셀로나를 가시면 더 좋겠지요. 갈 때도 그런 것을 공부를 하고 가서 한 번 보십시오. 그리고 가슴이 꽉 차서 돌아오십시오. 저는 그냥 여행을 가본 적은 많지 않지만 일 하러 갔다가 잠깐, 잠깐 들르는데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스페인의 알람브라 궁전에 갔을 때에도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만난 흔적들이 드러납니다. 개신교도들이 쳐들어오면서 이슬람들이 항복을 하면서 두 문화가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두 문명이 만나면서 만들어낸 왕궁의 모습은 자금성 같은 것들은 발로 차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정말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들이 자극을 받는 것은 그 속에서 500년, 600년, 700년, 1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건축물을 통해서 읽어내기 때문입니다. 살아서 그 사람들이 걸어오는 것 같은 충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똑같은 괴로움을 느끼고 살았을 텐데 그들이 그러한 마음을 자신의 건축과 예술 속에서 표현한 겁니다. 마음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볼 때 범상치 않게 보이는 겁니다. 그 속에서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교감하는 일은 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영리한 강아지라도 못합니다. 인간이니까 그걸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속에서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배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영혼과 마음 육체 사이에 무질서로 떨어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사물들을 그렇게 질서롭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하였다. 이것이 바로 인간 안에 깃든 원죄와 부패성으로 말미암는 질서의 상실이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의 최고 숙제는 이렇게 영혼과 마음 육체의 작용간의 본래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을 죄에서 구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행동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도 바로 이 일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간 존재의 구원은 단지 영혼주의적인 구원이 아니라 이러한 구원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본래의 창조의 질서로 돌려놓고 거기서 당신 자신의 창조주의 영광의 증진을 시작하시려는 우주적인 계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의 아름다운 질서와 행복은 또한 개인적인 지평에서는 행복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고치심으로 실현되는 우주의 궁극적 선한 상태와 인간 영혼의 행복한 상태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 안에서 하나님 자신은 가장 영광을 받으시며 인간 자신도 영광스럽게 되고 하나님의 선에 참예함으로 자신도 행복을 누리게 된다.
2. 실제적인 원인: 실행죄
둘째로, 실행죄 때문이다. 신자의 영혼과 마음, 그리고 육체의 작용간의 질서가 깨어지는 것은 실제적으로 범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범죄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 중생과 함께 조화롭게 질서 잡힌 이 모든 관계는 깨뜨려지고 무질서가 도입된다.
인간의 이 범죄는 단지 외부적 행동으로 지은 죄들뿐 아니라 마음 안에 있는 죄까지 포함하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인간의 영혼과 마음, 육체의 작용간의 아름다운 질서는 실제로 파괴된다. 신자의 일생은 이러한 자신의 내면세계의 무질서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자가 자신의 성화를 하나님의 도움으로써 완성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이런 싸움을 계속하여야 할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신자라 할지라도 그 안에 죄를 잔존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나라고 하는 인간의 욕구는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끊임없이 찢어놓고 하나님이 은혜는 이것들을 묶어서 하나가 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으로 돌아가기 까지는 찢어진 마음의 갈등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잔존하는 죄는 끊임없이 그의 영혼 안에 경향성을 형성하고 지배적인 힘을 얻으려 하고 또한 우리의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는 그 질서로 돌이키지만 죄는 끊임없이 이 은혜의 작용에 항거하여 그 질서를 깨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영혼과 마음, 육체의 행동들 간에 조화롭고 질서 잡혀진 성령 안에 있는 신자의 자아의 상태는 죄의 맹렬함과 광기, 그리고 충동적인 욕망의 분출에는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기에 죄는 신자 안에서 살아남고 마음 안에서 그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이 질서를 허물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진리의 빛 가운데로 나오는 것을 싫어하는 겁니다. 그리고 진리가 주는 고상한 아름다움 보다는 유혹이 가져다주는 그런 아름다움에 더 강하게 끌리게 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끝은 없습니다. 죄의 목적은 여러분들에게 뭘 주는 것이 죄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실현되고 나면 죄가 보기에도 여러분들은 무가치한 사람들입니다. 은혜 안에 살려는 사람에게 죄는 여러분에게 공격할 가치가 있지 죄 가운데 풍덩 빠진 사람은 공격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신 당신의 자녀들의 내면의 세계를 이렇게 결함 있는 상태로 남겨두신 것은 마음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구속받은 신자의 내면의 불완전성으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존하시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자의 마음 안에서 그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며 하나님을 향해 전존재가 의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인식을 자기 밖의 피조 세계를 향한 전망 속에도 적용함으로써 자신과 만물 위에 뛰어난 하나님 한 분 만을 높이게 하시기 위함이다. 또한 이러한 죄의 잔존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다.
이 사랑은 용서를 통한 사랑이며 또한 은혜의 시여를 통해 경험되는 사랑이다. 이러한 잔존하는 죄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질서를 위협받고 거기에서 질서가 깨어질 때 자신이 그것을 깨뜨렸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것을 복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때 인간은 끊임없이 거룩하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며 이렇게 깨어진 질서를 복구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도움은 거저 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그 도움이 거저 주어지지만 그 모든 깨어진 질서의 회복을 위한 은혜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그 중보는 그의 희생에 기초한다.
그리하여 신자는 이 모든 죄와의 싸움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해야 하고 신자는 그 용서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강력하게 경험하게 된다. 바로 그러한 돌이킴의 경험 안에서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사죄, 그리고 사랑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게 되며 이로써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갈등이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감당할 수 있는 질병을 통해서 우리가 면역력을 갖게 되듯이 똑같이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갈등들은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갈망하게 만들고 또 이러한 갈등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경험을 통해 인간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사랑이 가져다주는 파괴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회복을 발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잔존하는 죄로 말미암아 신자는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 갈망하며 나아가고자 하는 자신의 영혼의 탄식을 경험한다. 이러한 완성인으로써의 영혼의 갈망에 대한 경험은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영혼과 마음, 그리고 삶이 지향하여야 할 바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완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본래에 그러해야 할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원인이 자기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완성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혼은 하나님의 맨 처음에 영혼을 창조하셨을 때에 그 영혼에 대해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자리로 돌아갈 때에만 인간의 영혼은 가장 행복한 겁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날 때 마음이 괴로운 것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버리셨다면 괴로움을 못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선하지 않게 살 때 고통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미 붙잡았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는 고백 속에서 자신의 영혼과 마음, 육체의 작용사이의 그 질서로 돌아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구하며 의지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대두되는 것이다.
C. 마음을 고치심
하나님께서 신자의 마음을 고치시는 것은 마음을 삼자간의 질서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마음의 명령에 놀랍도록 순종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의 명령에 쉽게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고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개입이 요구되며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개입은 반드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인간을 향한 삼위 하나님의 내재적인 계획은 성령을 통해 외출적으로 실현되며 신자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는 바로 그 발로이다. 인간 자신의 의지로서는 자기를 고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고치신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을 허무하게 살다가 사라지도록 만들지 아니하시고 끊임없이 그 마음을 고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당신안에서 함께 교통하며 그 선의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찢어졌기 때문에 이 마음과 저 마음이 싸움질 하면서 말을 안 듣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나라가 전체적으로 하나의 정부로 통일되어 있으면 누가 말을 안 듣겠습니까? 말 안 들으면 당장 처벌을 받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막 찢어집니다. 누가 왕인지 모르고 너도 나도 왕이라고 합니다. 그럼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도 역시 그러한 원리에 의해서 인간의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보면 ‘어떠한 선한 일을 해야지.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데 마음이 말을 안 듣잖습니까? 마음이 말을 안 듣습니다. 마음이 망가진 상태를 보여주는 겁니다.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치료는 결국은 사랑이라는 질병이 문제입니다. 잘못된 사랑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한 편으로는 왠지 그것만 가지고 안 될 것 같고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면서 마음이 찢어지면서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1. 의사이신 하나님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치료하시는 분이심을 소개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존재를 고치신다고 할 때 도대체 그 치료는 무슨 치료인가?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였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고치시는 것도 바로 이렇게 안으로는 영혼과, 밖으로는 육체의 삶과 관련된 질서를 바로잡으심으로써 전 자아의 갱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치료이다. 그런데 이것은 마치 의사가 병든 육체를 고치는 것과 유사하다. 인간이 자신의 병든 육체를 고치기 위해 의사의 치료에 자기를 맡길 때 반드시 육체의 고통이 따른다.
여담이지만 모든 의료적 치료 행위는 비인격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아프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수술할 때 의사들은 우리의 몸을 존중히 여겨야할 인격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인과관계가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살덩어리, 하나의 뼈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놓고 만지는 겁니다. 못 느꼈습니까? 그래서 의사들은 가족을 수술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런 겁니다. 우리들이 은혜에서 멀어졌을 때 하나님이 우리들을 고치십니다. 그럴 때에는 그게 많은 사람에게 유쾌한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유쾌한 일이 됐다면 고쳐야할 정도로 망가졌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꺾고 깨뜨려지고 새사람이 되는 그 일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는 애잔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여전히 자기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고 자기의 집착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서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들들 중 안 그런 분들도 있겠지만 세상에서 여러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일 것입니다. 전 세계에 70개국의 젊은이들한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어 중 가장 아름다운 단어를 선택하라고 하니 1위가 ‘엄마’로 나왔습니다. 아빠는 76위라고 합니다. 애인은 사랑할 때 엄마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해주는 것 같지만 마음에 안 들면 얄짤 없습니다. 버립니다. 그런데 엄마는 자기 딸이, 아들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해서 불행해져도 엄마는 버리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엄마들은 말입니다. 그 이유는 진정한 사랑은 자기의 만족과 행복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만족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에게 대입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한다면 어떤 마음이 되겠습니까? 나를 아무리 깎고 다듬으시고 고치셔서라도 나는 아프지만 당신이 행복하실 수 있다면 나는 정말 행복하겠습니다.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게 사랑입니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해줬는데’ 이거 사랑 아닙니다. 사랑은 그걸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해서 덕을 본 그 사람보다는 사랑함으로써 내가 받은 유익이 더 크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진짜 행복한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 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 번 얘기 한 것 같은데 ‘가장 좋은 삶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면서 아무의 사랑을 안 받아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다시. 가장 아름다운 삶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면서 동시에 아무에게도 사랑 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나에게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사랑이 있으니까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두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질서를 바르게 돌려놓을 때 마음이 고통 받는 것은 그릇된 사랑의 단절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고통이니, 이 고통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고통이 매우 크면 매우 클수록 아버지께로부터 너무나 멀리 떠나가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탕자처럼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겁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가 미끄러지고 타락했는데 그것을 통해서 그렇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더 깊은 사랑의 매를 깨달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이 나쁜 일이 아닙니다. 다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수없이 일어나도 그것은 좋은 일 일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치료하실 때 받는 고통의 경험을 통해 인간은 그러한 질서를 깨뜨리고 살아간 욕망이 가져다 준 최종적인 결과가 일시적 기쁨을 능가하는 고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이후에 이러한 질서를 위협받을 때 이 고통의 기억들은 그를 위한 실연식 교육방법으로 작용하여 자신의 마음을 지키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가 은혜 아래 있다면 반드시 그 고통의 기억들은 끊임없이 재생될 것이며 그 치료를 위한 고통을 기억하면서 영혼과 마음, 육체의 행동들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수고를 가벼운 멍에로 여기게 될 것이다. 어차피 인간으로 태어나서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괴로움과 시련을 겪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발견하고 그 사랑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게 행복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질서를 이탈하여 잘못된 신자의 마음을 고치실 때 신자의 마음에는 고통이 따르게 되는데 이것은 욕망하던 것을 끊어야 하는 아픔과 충동을 따라 사는 것을 고쳐야 하는 절제의 고통이며 익숙하지 않은 선보다는 익숙한 악을 행하고자 하는 경향성에서 꺾이는 고통이다. 이는 마치 굶주린 짐승이 먹을 것을 찾지 못하는 고통을 가져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고통을 통하여 그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행복을 생각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치료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주님의 치료에 순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의 마음을 고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치료 행동에 대해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의사인 아버지 앞에 자기의 몸을 맡긴 자녀가 아버지가 자기를 고쳐서 가장 좋은 상태로 만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듯이 또한 신자도 자기의 마음을 고통가운데 고쳐 그 질서로 돌아가게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치료 행동이 자기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의 소산이며 사랑의 발로임을 믿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의사가 진단을 했는데 “위암 2기입니다.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자기를 수술하기 위해 적합한 교수를 찾을 겁니다. 최종적으로 선택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마취를 하면서 가물가물 하면서 정신이 넘어 갑니다. 우리는 믿는 겁니다. ‘저 사람의 손에 나를 맡길 수 있으면 저 사람은 최선의 의술로써 나를 고칠 것이다.’는 마음 가지고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솔직히 마취를 하니까 수술받을 수 있는 것이지 (얼마나 고통이 크겠습니까?) 저는 마취할 때 기분이 참 좋더라고요. 10번-11번 가까이 수술을 받았지만 마취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못 깨어날 가능성이 몇 프로쯤 될까? 15%, 20% 그럼 내가 못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이것이 내가 보는 마지막 세상일 수 있겠다.’ 싶어서 한 번 쭉 둘러봐요. 그리고는 마취약에 취해 눈을 감습니다. 의식이 들어오면 링거줄을 줄줄이 달고 수술이 끝난 상태에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런데 만약 의식이 또렷하게 있는 상태에서 칼과 톱이 가는 소리가 들리고 뼈가 잘라져 나가고 살이 사각사각 긁히는 소리가 난다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고치실 때 마취의 방법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순간에도 선명하게 우리를 살아있게 하시고 살아있는 그 속에서 우리를 고치시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참 잔인한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쉽게 우리 마음을 세상에 또 내어주고 또 쉽게 마음을 고쳐서 다시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아픈 경험이 있기에 우리는 막 까불고 막 살다가도 말씀을 보니까 (주님이 우리를 고치시던 때가) 딱 생각이 나는 겁니다. 몇 년 전에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숨을 껄떡거리면서 살려달라고 빌었던 기억이 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루는 계획은 아주 신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강퍅해질 때에 얼마나 고통스러워지는지를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우리 마음을 경계하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인간의 몸을 의사가 수술하는 방법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말입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하나님. 제가 아무리 아프더라도 제 마음을 고쳐주세요. 망가진 채로 사는 것은 이 아픔을 겪는 것보다 더 잔인한 것입니다. 아멘. 아멘. 아멘”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믿음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런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의 치료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듣고 책을 읽고 말씀이 여러분 자신을 후벼 파도록 만들어줘야 합니다.
2. 은혜와 선한 의지의 조화
또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은혜와 인간의 의지와의 조화이다. 타락한 인간은 그 의지에 있어서 선한 것을 향하여는 전적으로 무능하고 악한 것을 향하여는 필연적인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중생하게 하셨다 할지라도 이러한 무능함과 부패성은 하나님이 인간의 의지 자체 안에서 극복하게끔 회복시키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역사하시는 은혜의 전용적인 작용으로 그 무능과 부패성을 극복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나기 전 악한 의지를 가진 인간의 영혼과 마음 안에 역사하셔서 그 악한 의지를 선한 의지로 바꾸신다. 성령의 능력으로써 이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 안에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라 살고자 하는 선한 뜻이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성령의 은혜 없이는 유효하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불신자뿐만 아니라 신자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자신의 의지를 새롭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앞서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라 살고자 하는 선한 결심을 갖게 되고 또한 그렇게 결심한 것을 계속 지속하는 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전적으로 필요하다.
끝날 시간이 됐기에 종합을 하자면, 결국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한때 망가졌어도 망가진 채로 살게끔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강한 손으로 고치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고치시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고 사랑이 많으신 분인지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은 이 인류 역사에 예전에도 없었고 다시도 없는 단 하나의 희귀종의 마지막 개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여기에 있던 자리는 어느 인간에 의해서도 대치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기에 살고 있는 의미를 여러분 자신의 마음으로 써 내려가는 겁니다. 그런 엄숙함과 신성함을 느끼면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대하기를 바랍니다. 저의 강의를 한 학기 동안 성심을 다해서 들어준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