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은혜 받을 준비Ⅱ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내게 나아와 들으라(사55:3)2001.1.3 수요예배 1
2. 위로하고 살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시119:50)2001.1.7 주일오전 12
3. 지도자를 따르는 성숙한 회중들(수1:17)2001.1.7 주일오후 20
4. 깨닫지 않으면 기도도 가증하다(잠28:9)2001.1.14 주일오전 32
5. 말씀에 은혜를 받으려면(행10:33下)2001.1.14 주일오후 44
1. 내게 나아와 들으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사55:3)
요즘은 그럴 기회가 별로 없는데 전에는 교인 중 초상이 나서 빠른 시간에 달려가면 염을 하지 않은 상태로 죽어있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그 시체에 가까이 가서 한번 시체를 안아보면 삶과 죽음이 얼마나 가깝게 교차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얼마나 다른 지, 산 사람은 냄새도 안 나고 특히 10대 20대의 젊은 사람 옆을 지나가면 향기가 납니다. 그러나 죽으면 얼마나 비참한지 잠깐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냄새가 나고 시신에서 물이 흐릅니다. 그 악취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악의 냄새입니다.
우리 육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있을 때에는 생기가 있습니다. 시련이 오면 눈물을 흘리고 아프게 반응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면서 향기가 납니다. 시련을 인해서 더 경건해지고 고난 때문에 더 거룩해집니다. 수많은 모함을 받고 악이 창궐하고 거짓과 사위가 가득한 세상의 한복판을 지나면서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진실에 목마른 사람들이 됩니다.
그런데 영혼이 죽으면 우선 반응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주셔도 그 마음이 전달이 안되고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그 아름다움에 감격할 줄 모르고 슬프고 가슴아픈 일을 만나도 그것 때문에 흐느낄 줄 모릅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마음을 가졌는가 하면 즉시 그 영혼이 썩는 냄새가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 대신에 그 사람의 부패한 인격 깊은 바닥 속에 잔존해 있던 더러운 것들이 솟아나면서 그 사람 자신의 본래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때의 그 본성들이 흘러나와 심한 악취를 진동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관건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알지 아니한 모든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은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래 전에 죽은 채로 태어나서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이 계속 그 영혼이 죽어있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믿고 알기 전에 우리는 모두 냄새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예수님의 향기를 풍기면서 다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속속들이 썩고 여름날에 물이 흐르는 시체와 같이 더러운 존재들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악취 나는 그런 존재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서 옛날의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봐도 지겹도록 싫은데 하물며 완전히 거룩하신 그분이 보실 때 우리가 얼마나 냄새나는 존재들이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 믿기 전에 물론 그랬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간절히 외치고 있는 이 음성은 오늘로 말하자면 그렇게 거듭나 본 적도 없는 본래 죽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때는 주님을 믿어서 그 언약의 은총 아래서 생명을 누렸던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그 은혜를 잃어버리고 영혼이 죽은 자와 같은 상태에 있게 된 사람들을 향해서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 해를 시작할 때 올해처럼 우울하게 시작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감사하고 기대되는 것도 많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경제나 교인들의 형편을 볼 때, 마음 한 구석에 무거움과 어두움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러 때일수록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돈 몇 푼 들어있는 통장이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습니다. 남들은 다 구조조정에 희생되어서 떨어져 나가도 근근히 붙들고 있는 직장의 자리 하나가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살아있는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있기만 하고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깨어있기만 하면 고난은 승리를 위한 기회이고 위기는 번영을 위한 디딤돌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영혼, 깨어있는 영혼, 그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반드시 이기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어려울 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게 한해를 시작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기대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기독교 신앙이 필요할 것이다. 전망이 이렇게 어둡고 먹구름이 낀 한해를 맞이하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금년에는 자신의 영혼이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성찰하게 될 것이다’는 기대입니다. ‘경제가 좋을 때에 돈이나 몇 푼 번다고 뻐기면서 자신의 인생의 근본적인 바탕에 속한 문제들에 대해서 냉담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성찰하고, 전망이 어두운 이 금년 한해를 누군가를 의지하면서 헤쳐나가고 싶다고 하는 절대자이신 주님에 대한 의존의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그럴수록 교회의 역할은 더 중요해 질 것이고 영혼을 섬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은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 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는 전망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어두움 속에서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 소식보다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잠자던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서 그 사랑에 감격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어두움 속에서 무지 가운데 살던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의 사랑에 붙잡혀서 지난날 짐승처럼 살아온 삶을 회개하고 주님의 참다운 사랑 속으로 들어갔다는 소식보다 더 기쁘게 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화: 부산 집회 때 그 목사님께서 열린 교회에 전화 거셔서 여직원에게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 지 물었다는 이야기-“우리 김목사님은 그런 먹는 것보다 영혼이 참되게 변화되는 것을 제 일 좋아하십니다”고 대답했다)
우리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영혼들이 생명을 잃고 살아가다가 주님을 만났다더라’ ‘그 영혼이 소생을 경험했다더라’ ‘세종로 앞에 서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의 차가운 뺨에서 눈물이 흘리기를 기다리는 것이 그 인간 뺨에 눈물 흘리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 인간이 회개를 경험하고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펑펑 울며 새 생명이 무엇인지를 맛보았다더라’ 이런 소식보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 교회이면 더 좋고, 너이면 어떻고 남의 나라-러시아, 카자흐스탄, 몽골, 필리핀, 남미- 어디서든지 그 소식이 들려오면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소식입니까? 가볼 수도 없는 미국 땅에서 들려오는 소식도 기쁨이 된다면 늘 그 영혼의 상태를 마주보며 살아가는 우리들 가운데서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이것보다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았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오면 오랫동안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던 우리의 눈에도 눈물이 흐를 것이요 우리는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이며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인 동시에 또한 자기의 자녀들의 영혼을 바라보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제 한해를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대체로 죽어있습니까, 아니면 대체로 살아있습니까? 아니면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가사 상태에 있습니까? 아니면 오랫동안 죽음과 방불했던 잠자는 생활을 떨쳐버리고 이제 막 생명의 심호흡을 하는 회복의 단계에 있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우리는 이 한해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전망이 어두운 한해를 위한 가장 훌륭한 대안은 소생된 영혼으로, 살아있는 영혼으로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한해를 맞는다면 우리는 어떠한 어두운 전망이 우리 앞에 드리우고 있어도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초에 사경회를 하는 것은 연말에 사경회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치에 합당합니다. 이 때에 우리들이 죽어있는 영혼으로 한해를 맞이한다면 우리는 참 곤고하기 짝이 없는 한해를 실패를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오랫동안 패배하면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한해가 시작되는 벽두에 살아있는 영혼으로 새롭게 회복이 되어서 한해를 맞이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년에도 졌고 재작년에도 패배했지만 올해는 그것을 뛰어넘어서 반드시 승리하고 이기게끔 만들어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우리들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이번 사경회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여러분들의 모든 심령이 확 살아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가운데 한해를 시작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만 우리의 영혼이 그렇게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세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듣는 것입니다. 세 가지 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명령형으로 쓰였습니다. 같은 이야기의 반복 같지만 이것은 선지자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려고 하실 때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그 살리시려고 하는 손길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영혼의 변화에 관한 진리의 진수들을 여기에 담고 있습니다.
그 중의 첫째는 ‘귀를 기울이고’입니다. 신기하게도 히브리어 성경에는 ‘너희들의 한 귀를’이라고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많이 있는데 귀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복수인데 그들이 소유한 귀는 하나입니다. 이것은 얼굴에 달린 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의 세계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예비 된, 영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청취의 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귀를 기울이고’라는 말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보면, ‘너희들의 한 귀를 펼치고’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나타’라는 동사가 사용되는데 그것은 텐트를 칠 때에 쫙 펼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참된 영혼의 변화에 이르는 한가지 요소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집중하는 것입니다. 소곤소곤하는 소리를 들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귀에 손을 펴서 대면 소리가 모아져 들어오면서 더 잘 들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는 참다운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귀를 펼치는 집중적인 자세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집중된 마음을 갖지 않고 풀어진 동공으로 취한 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은 영혼의 상태도 어김없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만 이렇게 하지 시장바닥을 지나다니면서 귀를 모으고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슨 말에 대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기울입니까? 자신의 이해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이야기들을 놓칠 수 없는 상황에서 귀를 펼치고 오고가는 이야기를 하나도 놓침 없이 들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주님이 만져주셔서 영혼의 참된 변화에 이르고 싶은 사람들은 집중된 마음을 가지고 이해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자세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들리는 것과 듣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스쳐지나간 수많은 소리가 아니라 자신을 향하여 명백하게 날아오는 날선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자세 없이 그의 영혼이 죽었던 상태에서 살아나게 되는 경우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그런 방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영혼의 살아있음을 경험했다면 그것은 단지 느낌일 뿐이지 사실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예화: 어린아이가 만화에 나오는 슈퍼맨을 흉내내어 높은 데서 떨어져 죽은 이야기)
파란 보자기를 펼치고 뛰면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어디까지나 느낌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실 때에는 반드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법칙이 있습니다. 자연의 이치가 있듯이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시는 방법에도 이치가 있습니다. 또 반대로 살아있던 영혼이 죽은 자와 같은 상태에 들어가는 데에도 반드시 법칙이 있습니다. 그 법칙을 생각하면서 죽은 자와 같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법칙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영혼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때에도 그 법칙을 따르시는 것입니다.
그런 살아있는 영혼으로의 참된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이해하고자 하는 집중된 마음을 가지고 사경회 기간 동안에 선포되는 말씀 중에 단 한마디도 내 1년 동안, 아니 나아가서 일생동안의 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이해관계가 없는 말씀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혼의 변화에 이르는 첫 번째 길입니다.
그래서 이번 사경회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에 다른 것보다 가장 먼저 여러분 자신이 이처럼 금년 한해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그 말씀을 들을 때에 한 말씀도 놓치지 않고 그 말씀이 모두 여러분의 마음에 이해되면서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담길 수 있게 되도록, 집중력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일을 방해하는 일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에 모여서 하나님 앞에 집회를 하는 그 시간에도 방해할 수 있겠지만 일주일 이주일 동안 사경회를 향해서 여러분들이 마음을 비우고 준비해야 하는 이 시간에 쓸데없는 욕심이나 쓸데없는 근심이나 염려들이 여러분의 마음 전체를 지배하고 나면 여러분들은 영혼의 참된 변화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음의 귀를 펼치고 여러분들의 죽어있는 영혼을 살게 하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청취할 수 있도록 자신을 갖출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오다가다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들어온 사람들을 변화시키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시 영혼의 참된 변화에 이르는 사람들의 비율을 본다면 오다가다 아무렇게나 온 사람 수십 명 중 한 명이 변화된다면, 마음을 미리 준비하고 비우고 그 말씀 집회를 통해서 자신의 영혼을 살리실 것을 기대하고 목말라 하면서 타는 듯한 열망으로 그 집회 하나에 자신의 삶을 걸고 매달린 사람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번 사경회를 위해서 준비할 때에 제일 먼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귀를 열어야 합니다. 그 귓바퀴를 펼쳐서 세미 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고 그것을 깊이 받아들여서 여러분들이 영혼의 참다운 변화에 이르게 되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내게 나아와 들으라”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도 ‘나를 향하여(혹은 나에게로) 걸어와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앞의 말이 집중을 이야기한다면 이 말은 집회에 참석하는 영혼의 참다운 변화의 때에 하나님을 향한 자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온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의 영혼의 참된 변화를 위해서는 주관적인 느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자기 인식입니다. 그 객관적인 자기 인식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할 때 우리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이 집회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정확히 보고 싶습니다’하는 희망입니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잘 알지만 모두 알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소위가 자기의 보기에는 옳은 것 같아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자기는 자기에게 문제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보실 때는 그렇지 않을 때도 많고 자기는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전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영적인 현실과 자신의 인식의 격차는 잠들어 있거나 죽어있는 영혼의 상태에 있는 사람일수록 이 격차가 큽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사람보다는 영혼이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 착각이 아주 심합니다.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서 주님이 내리신 평가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내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실상을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그들은 부유한 자가 아니라 벌거벗은 사람들이고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감으로서 우리는 객관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자기 인식이 첫 번째 걸음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영혼이나 심령에 아픔을 느끼면, 스스로 자신의 상처와 고통들을 이겨내기 위해서 삶에 대한 처방을 합니다. 신앙이 없고 사오십대가 지나서 인생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 사람들이 춤바람 나고 나쁜 짓 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이 너무 아프고 공허하기 때문에 뭔가를 처방하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한 돌팔이 의사쯤 되는 사람들입니다. 각자 자신의 영혼에 처방을 내리는데 그것이 정확할 리는 거의 없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자기 인식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든지 주께서 나를 판단하실 때에 주는 옳고 나는 틀렸습니다’라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할 것이라고 하는 신앙의 인격적인 자세가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들이 기대해야 될 것입니다.
어떤 의사가 훌륭한 의사입니까? 얼굴이 잘생긴 사람입니까? 가운을 외제로 입은 사람입니까? 칼이 소련 제인 사람입니까? 일단 찌르고 보는 결단력 있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좋은 의사는 약을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사의 유능과 무능의 여부는 정확하게 진단을 해내는 것입니다.
(예화: 결혼 후 얼마 안 되어서 소변에 이상한 것이 섞여 나왔었는데 겁이 나서 병원에 갔더니 소금을 많이 먹어서 그렇다는 진단이 나왔다)
의사는 고치는 것은 나중 문제이고 정확하게 보고 진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기대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경회를 통해서 기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무조건 나를 위로해 줄 것이다’하는 기대도 하지 마십시오. ‘무조건 반쯤 죽일 것이다’는 기대도 하지 마십시오. 사경회는 그야말로 거울과 같이 나도 몰랐던 내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료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기대해야 할 첫 번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들이 기대할 수 있는 두 번째 것을 말씀드리자면, 의사들이 환자를 돌보는 것이 의무이지만 자신이 도저히 고칠 수 없을 때에는 “집에 모시고 가서 잡숫고 싶은 것이나 구해다 드리십시오”하는데, 그 말은 그 환자를 정말 사랑해서가 아니라 ‘의사로서 당신을 살릴 수 없다. 죽음을 기다려라’는 말을 그렇게 부드럽게 하는 것입니다. 의사들도 못 고치는 병이 있고 의사들도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해서 보내야 하는 환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영혼의 상태가 얼마나 많이 죽어있든지, 그리고 그 영혼이 얼마나 많이 아프든지, 주님께서는 그들을 결코 포기하고 돌려보내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주님이 우리를 받아주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 그것이 참된 영혼의 변화에 이르게 하는 한 조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오랫동안 죽었던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는 때가 될라치면 이상하게 우리의 마음속에는 오랫동안 믿었던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하나님 한 분을 깊이 의뢰할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내가 이런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도 주님이 나를 고쳐주시고 받아주실 것이다’는 기대가 단순한 기대를 뛰어넘어서 강력한 믿음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많이 망가졌다면 우리가 더더욱 주님께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습니까?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20대 30대 40대, 인생이 원숙을 향해 갈수록 아주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불안전한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에 대해서 상당히 열린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다’하게 됩니다. 저는 ‘그것이 타협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했었는데, 타협이 아니라 비로소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한없는 연약함과 부족함을 보면 볼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격하게 됩니다. 이렇게 모자라는 인간들, 상처투성이 이고 죄악투성이인 인간들이 당신이 그 영혼을 변화시켜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당신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을 모두 팔 벌려 맞아주시는 그 믿음을 배반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은혜, 자기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향한 그 한없는 불붙는 사랑,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망가졌으면 더 주님밖에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가는 길은 아버지께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갑니다. 어떤 사람은 북쪽으로, 남쪽으로, 동쪽으로, 서쪽으로 다 흩어져 갑니다. 그러나 흩어져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마지막 돌아가는 길은 오직 한 길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향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품을 향해서, 그분께로 걸어가는 그 한 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사경회 때에 이런 마음으로 주 앞에 나오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듣는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동사 가운데 의미심장한 단어중 하나입니다. 히브리어로 ‘샤마’라는 동사입니다. 이것은 들리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내포한 상태에서 성취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귀를 기울이고”가 집중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지향하는 바가 이해라고 할 것 같으면 여기에 나오는 마지막 세 번째의 “들으라”고 하는 것은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욕구를 가지고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뭔지 한번 청취해 보지요’하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그 음성을 듣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내적인 순복의 의지를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에 확 와 닿으면서 여러분들의 심령과 골수에 깊이 파고들어서 여러분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것들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험하는 강도가 항상 같습니까, 수시로 변합니까? 수시로 변합니다. 처음에 그런 것들이 강력했다가 다시 감퇴되었다가 또 다시 강력하게 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오해를 합니다. 자신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려서 그 말씀이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스며들어서 삶을 움직이게 만드는 말씀에 대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들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자기를 파고 들어와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움직여서 말씀이 역사 하는 그런 종류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는가 하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온갖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내가 요새 하나님의 말씀이 안 들리는 것 보니까 우리 목사님 설교 통이 이제 고갈되었나봐. 하기는 그 정도 들었으니 이제는 고갈이 날만도 하지’ 그러면 그 사람은 영원히 변화 받지 말아야 하는데 어느 때에 가서 곤고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코에서 단내가 나오면 마음이 겸비해져서 다시 하나님 말씀 앞으로 나아가면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많이 깨달은 것이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연약한 지체들이 뭔가를 물어본다든지 하면 ‘이것도 몰라’하며 적선하듯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구역질 나는 일입니다. 정말 주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그런 식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자기 속에 주님을 아는 지식이 스며들어서 그 말씀이 들려서 자기를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그런 방식으로 자기 속에 축적된 말씀에 관한 지식은 자신의 인격, 삶, 땀과 피, 이런 것들이 용해되어있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놀라운 은혜 때문에 자신이 주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어보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하니 예수님이 감탄하시면서 “네 고백이 정말 좋다. 그러나 그것을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누구냐라고 할 때 엉뚱한 소리나 하고 돌아다녔는데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고백이고 네가 진정한 고백을 했는데 자랑하지 말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참된 지식을 네가 전쟁을 해서 탈취 물로 빼앗은 것같이 그렇게 자랑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주님에 대한 참된 깨달음을 통해서 지식을 갖게 된 사람들은 결코 그 지식을 자기의 공로인 것처럼 그렇게 자랑하고 자기보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아직 삶이 성화 되지 못한 사람을 향해서 무시하는 것 같은 거만한 태도를 하지 않습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이 누구인지 아직 잘 모릅니다. 양파껍질처럼 벗겨내고 벗겨내도 갈피갈피 스며든 이 부패와 죄악성 때문에 우리가 아직 누구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들려서 우리의 영혼 그 자체에 깊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염려하고 진실 되게 걱정하는지 오늘 묻고 싶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영혼의 참다운 변화, 죽었던 영혼들이 진정으로 살아나는 이 복된 영적인 참된 변화는 들음에서 옵니다. 그것이 단순한 들음이 아니라 내적인 순복의 의지가 있는 들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경회 때에 말씀하신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여러분들이 “먼저 말씀해보십시오. 내가 한번 해볼는지 말는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한번 해보시오”하는 식으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주시는 것이 무슨 재주피우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나서 좋으면 행하고 싫으면 집어치우겠다는 마음보를 가지고 있다면 사경회에 참석하는 것과 재미로 천 원 내고 한번 점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심지어는 컴퓨터에 손바닥 집어넣고 찍혀 나오는 프린트 물을 보면서 기분 나빠하거나 낄낄거리는 것과 사경회에 나와서 말씀을 듣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 컴퓨터에 손을 넣고 ‘무엇이라고 나오든지 내게는 내적으로 순복 할 의지가 준비가 되었나이다’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거기에서 ‘목요일은 멀리가지 말아라’한다고 해서 직장에 안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금요일에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아라’한다고 해서 집에 안 들어가는 남자들이 있습니까? 모두 재미로 한번 봐보는 것입니다. ‘뭐라고 하든지 간에 한번 해보자’하며 했는데 운수 대통한다고 나오면 ‘웃기네’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적인 진정한 순복의 의지가 없이 사경회에 참석하는 것이 컴퓨터에 손바닥 집어넣고 손금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처음부터 나오지도 말고 각기 흩어져서 저 좋은 대로 사십시오. 차라리 “하나님, 금년 한해는 나를 떠나소서. 내가 소신껏 살겠나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제가 알아서 하겠나이다”하고 사십시오. 그러면 오히려 확실하게 깨달을 것입니다. 금년 연말에 가서 ‘손들고 옵니다’할 것입니다.
그런데 듣는 것이야 억지로라도 끌어다 놓으면 듣겠지만 내적인 순복이 어떻게 순간적으로 오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예화: 집회를 다닐 때 정면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은혜 받지 못하면 마지막날 그 한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 습관이 있다-집회 날마다 한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하 다)
그런 사람 어깨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해 주면 뜨거움의 진동이 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져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나 혼자의 힘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내가 살아야겠습니다’하는 내적인 순복이 가득 차있는데 마지막에 간절히 기도하면 예외 없이 기도해준 보람을 안겨줍니다. 강력하게 회개를 하든지 아니면 새사람 되든지 합니다.
그러니까 내적인 순복의 자세를 갖춘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참된 것이지 동시상영 두 편 하는 영화관에서 예고편 보듯이 앉아서 듣는 수많은 설교와 수많은 집회가 그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주 여호와 능력의 주 내 영혼의 치료자
말씀으로 고치시네 그는 나의 치료자
그러한 내적인 강력한 순복의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사경회 당일 날은 안되고 그 전부터 자기를 계속 낮추면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화: 토요일부터 눈이 쏟아져서 도로가 꽁꽁 얼어붙었는데 그냥 두면 성도들이 문 앞에 들어오다 가 넘어지고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아침 일찍 얼음을 깨고 염화칼슘을 뿌리고 계단을 깨 끗이 닦고 주일을 맞이한다
사람이 집에 와도 오는 길이 불편할까봐 준비를 하는데 하물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 그런 마음의 준비, 내적인 순복의 자세 하나 점검하지 않고 덜렁덜렁 와서 어떻게 한번 해볼까 한다면 여러분이 은혜 받을 확률은 적습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 관한 하나님의 한 견해를 들려주시지요. 그러면 제 인생에 뭔가 결정을 내리는데 참고하겠습니다’ 하는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아예 ‘금년은 내가 주님 없이 살겠습니다. 제가 교만하게 인생을 살 테니까 말씀을 통해서 저를 깨닫게 마시고 온몸으로 깨닫게 도와주시옵소서. 저는 과외 공부하러 갑니다. 고액의 과외 비를 지불할지라도 나는 한번 해봐야겠습니다’하고 가십시오. 태도를 분명히 하십시오. 그러면 교회는 아마 들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실컷 자기의 뜻대로 살고 만신창이가 되어서 깨어지고 난 다음에 깨달았다고 하는데 ‘하나님 뜻대로 안 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합니다. 사업 다 털어먹고 알거지가 되고 나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습니다’하는데 이렇게 말로 할 때, 이렇게 인격적으로 이야기할 때 “아멘”하고 들으십시오.
내적인 순복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내가 부인할 수 없게 가슴속에 들려오는 그 순간 나는 순종하리라. 주님의 뜻대로 내가 살리라’ 하는 고백을 가지고 사경회에 참석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위로하고 살리시는 하나님의 말씀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119:50)
새벽에 눈을 뜨니 온 천지가 하얗게 뒤덮였습니다. 아침에 교회 마당을 거닐면서 ‘하나님의 능력은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것을 흉내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몇 십분 동안 눈을 펑펑 내리셔서 온 천지를 하얗게 뒤덮어버리셨습니다. 이런 겨울이 오면 기분 좋은 생각도 나지만 힘들고 고단했던 겨울이 떠오르곤 합니다.
(예화: 교회에 사찰로 살 때 이렇게 눈이 온 날 목사님께서 심방을 오셔서 ‘하나님이 귀히 쓰실 사람은 연단 하시는데 그것을 잘 감당해 나가야지 만 하나님이 쓰실만한 사람이 된다’는 설교를 들으며 펑펑 울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뜨겁게 사랑하시지도 않는 그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서라도 고통가운데 있는 저에게 큰 위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목사님을 더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 말씀을 통해서 한해를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결심이 명료해졌습니다. (찬송: 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 저도 그 뒤를 따라 심방을 떠났는데 눈 내린 길을 털신을 신고 걸어갈 때 하나님의 위로가 눈이 내리듯이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고난을 많이 당해서 망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을 많이 당해서 인간의 성품이 부서지고 깨트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해도 고난보다 더 큰 위로가 있으면 절대 성품이 망가지거나 황폐하고 거칠어지지 않습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다윗이라고 믿어지는데 두 가지 경험이 함께 교차하는 가운데 다윗이 이 119편을 써 내려갑니다. 고난의 큰 아픔과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 이 두 가지가 교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19편 전편을 읽어보면 두 가지가 함께 물결처럼 교차합니다. 견디기 힘든 시련과 고통이 한쪽에서 밀려오고 또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큰 위로의 은혜가 밀려옵니다. 거기서 시인이 궁극적으로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간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19편 처음 시작이 “행위 완전한 자들은 복이 있나이다”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시련과 위로, 고난과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점점 더 자신이 다듬어져가서 온전해져 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복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체험적인 결론을 말하고 그것을 입증하듯이 119편을 풀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인은 큰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곤란 중에 위로’라고 할 때 이 ‘곤란 중’이라는 말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보면 ‘나의 고통 속에서’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곤란하다’ ‘무엇을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 정도가 아니라 ‘고통’입니다. 참기 힘들 정도로 아프게 찔러오는 그 고통 속에서 시인이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고통이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어디서 왔든지 간에 결국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을 때에는 역시 그 고통은 똑같이 아픕니다. 또 하나님이 같이 하셔도 고통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아픕니다.
예를 들자면 고통이 시인에게서 생길 가능성을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선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과정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회개하게 하시니 까요. 또 하나의 가능성은 비록 자신에게는 죄가 없지만 하나님의 큰 섭리 가운데에서 이 사람에게 고통을 당하게 하심으로 하나님 앞에 더 정결한 사람으로 서도록 만들어 주시는, 섭리 가운데 있는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온 것이든지 간에 역시 아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고통 속에 시인이 만일 내팽개쳐 버려졌다면 고백할 것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신앙의 고백은 단지 고통의 경험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비로소 그 고통이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낳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그렇게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사람에게로부터 받는 상처와 비슷합니다. 상처와 위로가 정반대이면서도 아주 비슷합니다. 사람은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일생을 살아가는데 어느 한 순간에 누군가에 의해서 상처를 받게 되면, 자신의 의식부터 시작해서 모든 정서와 인격 그 전체가 일순간에 상처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생각에 빠져버립니다. 상처밖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살인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불행한 사람, 절대적으로 행복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는 어차피 그런 것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예화: 죽어 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병원에서 호스피스처럼 일하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님의 간 증-병원에 누워 있는 사람도 천차만별인데 퇴원 날짜가 정해진 사람은 신선이다. 그 다음 은 언제 퇴원할 지 모르는 사람이고 그 보다 심각한 사람은 식물 인간 상태에 있는 사람 의 가족이다. 진통제를 써도 잘 듣지 않는 암 말기의 사람은 더욱 비참하다-이렇게 상대 적인 것이다)
이런 고통도 문제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고통 속에서 위로를 경험하지 못하면 사람이 황폐하게 됩니다. 상처도 일순간에 오고 나면 상처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상처에 대한 한 하나가 우리의 마음 전체를 지배하듯이 위로가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으로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데 하나님의 위로가 밀려오면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은 몇 년, 혹은 수십 년에 걸쳐서 자기의 가슴에 쌓여졌는데 그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고통에 능가하는 하나님의 풍부한 위로만 있는 것 같은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입니다. 시인이 이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지난 한해에 우리는 너무 힘겹게 살아왔는데 불행하게도 저는 이 자리에서 세상 돌아가는 정세를 보고 인간적으로 판단을 하자면 여러분들에게 “금년에는 좋은 일이 저절로 일어날 것입니다. 설렁설렁 살아도 신나는 한해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낙관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이 매우 유감입니다. 연초부터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딸린 가장이 거리로 내몰리고 공장과 회사가 부도를 맞아서 문을 닫고 사업하던 사람들이 사업을 정리한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구조조정의 칼부림을 맞고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무슨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상황은 금년에도 계속 될 전망입니다.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저 같은 사람이 동족을 이렇게 보면서도 가슴 아려오는데 그런 시련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 본인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때일수록 교회의 역할, 신앙의 필요성은 증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있어서 교회가 세상을 섬길 수 있는 귀한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한 해라고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상황적인 어려움이 오히려 선교적으로는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어느 해보다도 더 순전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이미 주님을 믿고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은 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득 지닌 자들이 되어서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흘러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 이 건조하고 황폐한 도시 속으로 그 생명의 물을 흘려 보낼 수 있는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야될 필요성이 증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와 우리의 지체들,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위로입니다. 비록 우리들이 지난 한해동안 죄와 불순종의 세월을 지내면서 곤고해지고 또 시련과 어려움을 만났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당신과의 관계 속으로 이끄시는 위로의 은혜입니다.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의 죄와 허물은 밉지만 그 속에 살아가면서 찢기고 상처받고 피 흘리는 그의 영혼들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불쌍한 하나님의 자녀의 상한 영혼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의 포도주를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가 없이는 금년도 내년과 똑같이 실패하는 한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위로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우선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는 위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하기 좋은 말을 하고 싶어합니다.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할 때는 항상 부담을 느끼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다소는 힘이 될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데서 오는 우리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회복시켜줄 수는 없습니다.
또 다른 형태의 위로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자기 연민의 행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사실 이렇게 우리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은 항상 우리에게 미래를 향한 진취적인 기상들을 고취한다기 보다는 과거를 회고하고 현재를 스스로 위로하면서 자기 비하의 연민에 빠지게 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며 감상적인 연민에 빠져서 나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긍휼을 열방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하늘로부터 한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이런 위로가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위로와 긍휼을 내리시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바로 오늘 시인의 고백처럼 “이 말씀이 나의 곤란 중에 위로가 되었나이다”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고통 가운데 상심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시련 가운데 아파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어루만진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어떠한 어려움에 처하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움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두 가지 사실만 확신할 수 있으면 그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잘못 살고 하나님을 거스르고 때로는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함으로 인해서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할 신앙의 길에서 많이 이탈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오면 신기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내가 비록 이렇게 죄와 불순종으로 더러워지고 부패하고 소망 없는 인간이지만 내가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는 고백이 우러나옵니다. 그 마음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끔 회개할 때에 ‘내가 주님 없이 어찌 살 수 있습니까’하는 마음이 들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항상 동일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여러분들을 주님께서 쉼 없이 찾으시는 하나님,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가지시는 기대는 여러분들이 주님을 잘 경외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신 가장 간절한 기대입니다.
두 번째 잃지 말아야 할 확신은 그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으로 건져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견디기 힘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경건한 자들이 늘 경험하는 핍박과 박해로 인해서 아픔을 참아야 하는 고통 속에 있었고 혹은 시편 119편에서 고백하는 바와 같이 이전에 그릇 행했던 잘못으로 인해서 죄 가운데서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으면서 고통 중에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 속에서 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위로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 자신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오시는 징검다리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당신 자신의 성품을 보이시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와 같은 세미한 사랑을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인은 오늘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시인은 바로 그 앞 절에서 하나님께 “당신이 나를 위하여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그 시인이 일반적인 성경 말씀이 자기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예전에 무엇인가 자기에게 소망을 주는 특별한 말씀이 자기의 가슴속에 있었고 그 말씀이 견디기 힘든 고통 중에서 자기가 신앙을 잃지 않고 위로를 받으며 살아오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과 시련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꿈에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십자가를 골라지게 된 이야기-그러 나 결국 자기 십자가가 자기에게 가장 잘 맞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 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누구나 다 지고 갑니다. 그대들에게도 있고 내게도 있습니다. 십자가가 너무 커서 멸망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고 쓰러진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길이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도 그 십자가 지신 길이 그러했거늘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를 아무리 지고 가도 우리에게 시시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십자가를 지고 살면 반드시 그 후에 영광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무언의 은혜, 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고 가면 언젠가는 우리에게 대낮과 같이 밝은 승리가 올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신령한 위로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미래의 그 희망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이 고통스러운 난관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하나님이 무엇으로 하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큰 은혜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이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밝은 전망을 할 수 없는 2001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먼저 여러분들의 마음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기를 품고 금년에 무엇인가를 해보고 말리라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인간적인 각오와 독기를 품은 결심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구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 인격적인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금년을 시작하는 우리의 마음이 고통과 응어리지고 한 맺힌 마음으로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에 대한 원망과 독기를 품은 마음으로 시작을 해서는 결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실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우리에게는 변화된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의 삶이 흘러나와야 할 필요가 있는데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셔서 새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년 한해를 시작하는 이 정초에 주님의 말씀을 일년을 살아야 할 이정표로 붙들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진리의 말씀으로 여러분들에게 넘쳐서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한 맺힌 마음들을 모두 풀고, 용납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의 모습조차도 사랑으로 용납하면서 그렇게 위로에 넘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해를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시인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그 말씀으로 자신의 영혼을 살리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이 ‘살리셨다’는 말씀이 강의형(?)으로 나옵니다. 확 살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존재를 확 살아나게 하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위로한다고 한다면, 말씀이 가진 또 하나의 효능은 우리의 영혼을 살아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인생의 커다란 적들이 환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주위의 경제적인 환경 같은 것들이 우리의 최고의 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대적은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진정한 원수는 우리 안에, 진정한 방해꾼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계속 황폐하게 만들고 우리 안에 있는 죄 된 부패성들은 우리 영혼을 계속 죽음에 가까운 상태로 데려갑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용기를 내야 할 때 우리들이 낙심하고,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쏟아 부어서 섬기고 희생해야 할 때에 이기적인 자기 사랑에 빠지게끔 만들어버려서, 우리로 하여금 더더욱 하나님과의 관계를 골 깊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우리의 잠자던 영혼이 확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었던 상태와 같은 영혼들이 새로운 생명과 소생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몰랐던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이 불같이 뜨거움을 알고, 냉랭했던 사람들은 그 은혜의 체험 속에서 주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 생활이 죽은 자와 방불했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이 습관적으로 생활했던 사람들은 2000년과 함께 옛 생활을 종식해야 합니다. 그 지긋지긋한 생명이 없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병든 교회 생활을 끌고 2001년의 문턱을 또 한번 넘으려고 합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얀 눈밭과 같은 가능성으로 가득 찬 이 아름다운 한해를 그 오물로 다시 또 더럽히려고 합니까? 그래서 마지막에 한해를 넘기면서 또 다시 절망에 빠져있는 자신을 만나시려고 합니까? 지난해까지는 우리가 그렇게 살았어도 이제 이 새해에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던 인생의 숙명적인 실패들과 이제는 결별할 때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무엇인가 이 한해를 새롭게 맞아야겠다는 비장한 각오와 서슬 퍼런 결단의 칼날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영혼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의 가장 커다란 아픔은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은혜의 진리의 빛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로 물러가서 죽은 자와 같은 영혼의 상태, 잠든 자와 같은 침체된 심령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께는 가장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뒤로 물러가 침체에 빠지기에는 너무 훌륭하고 안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를 이처럼 은혜의 자리에서 뒤로 물러가 침윤에 빠지게 하는 자기 안에 있는 부패한 요소들을 성찰하는 냉정한 눈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뒤로 물러가는 부패로부터 자신의 영혼의 신선함을 지키려고 하는 피어린 결단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인생을 산 사람의 마지막 결국은 부서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죄악의 덩어리가 되어서 신음하는 것 이외에는 그의 인생에 기대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자기를 죽이고 매일매일 회복된 영혼으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사람의 삶은 긴장의 연속입니다 마는 그러나 그들은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인자하심을 볼 것이며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성실하심을 경험할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겉 사람은 후패해져 가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큰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리반 공부 중 ‘목자와 양’ 시리즈를 나누는 가운데 이런 진리들을 우리 함께 공유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마음의 가장 커다란 기쁨은 양떼들이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나누어 가진 사람들은 바로 목회자를 비롯한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가지고 있는 금년의 가장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들이 모두 살아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죽음에 가까운 무기력한 신앙 생활과 결별하고 지겹도록 익숙해져왔던 실패한 삶과 결별을 선언하는 한해가 되어서 마음 가득히 고인 사랑의 눈물을 가지고, 가슴에 벅찬 신앙의 감격을 가지고 -컨스탄티노플의 설교자 ‘요한 크리소스톰’이 말했던 것처럼- “세상아 네가 나를 버리려느냐. 나도 너를 버리노라”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담대함을 가지고 자기 안에 있는 충만한 생명 속에서 사는 것이 가장 간절한 소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시인이 그런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시인은 시편 119편에서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엎드러진 것 같은 때가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다 죽게 되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심령이 살아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입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의 가사 상태에서 살리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광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기상학자에 의하면 한 방울의 비는 공중에서 사방 1㎥박스에 꽉 찬 구름이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눈이 쉼 없이 이렇게 내리는데 얼마나 많은 구름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 눈을 만드셨겠습니까? 이것을 보면서 제 가슴이 녹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능력이 많으신 주님이신 데, 어디서 가져왔는지도 모르는 그 엄청난 눈으로 온 세상을 뒤덮고도 남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신 데 그 능력의 몇 분의 일만 우리의 영혼에 행사해 주셔도 아마 죽었던 자는 살고 생기를 잃었던 자들은 기쁨을 찾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와 우리의 교회에 이런 능력을 부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여러분들의 영혼을 가사 상태에서 살리십니까? 실패하고 곤고해진 심령을 가지고 올 한해도 별 기대 없이 시작하는 여러분들의 가는 길을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막아서고 있습니다. 여러분, 승리할 수 있습니까? 올 한해에 이길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이정표는 무엇입니까?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지금처럼 이런 마음, 이런 태도, 이런 심령으로 계속 12월까지를 살면 여러분들은 그 12월에 위대한 일을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이 행복했던 한해였다고 고백할 수 있느냐는 이야깁니다. 지금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의 마음에는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인생의 막판까지 몰려서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과 시련과 고통으로 가득 찬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가장 시급한 일은 상황과 환경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먼저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러분들이 회복된 영혼으로 새로운 한해를 맞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을 말씀 앞에 세우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이제 이 한해를 시작하면서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이 사경회는 어디로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이정표입니다. 그 이정표를 따라가면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빨리 도달할 것이고 연약한 사람들은 늦게 도달할 것이지만 가고 있는 한 반드시 그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몸부림은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이 공허한 몸부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주님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주시는 말씀의 푯대를 소유하고-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셔도 그 뜻대로 살수가 없으면 아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시인이 경험한 것처럼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확 살아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 한해를 능히 이기며 살 수 있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오늘 말씀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금년 한해를 우울하게 맞지 말고 소망 가운데 맞읍시다.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 많은 영혼들이 달렸습니다. 밖에 나아가서 사람들을 만나보면 곧 쓰러질 것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된 곡식과 같은 상태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곤고하고 어려운 때에 우리들이 그 영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야지 만 주님이 우리를 그 십자가의 피로 건지셔서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살게 하신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 이런 말씀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서 한 해를 맞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지도자를 따르는 성숙한 회중들
“우리는 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같이 당신을 청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수1:17)
어떻게 보면 오늘 전하려고 하는 이 말씀은 사경회와 직접 상관이 있는 것 같지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1년 동안 어떻게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되겠는가에 대한 원리들을 발견하고, 이 원리는 여러분들이 저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지 않으면 지킬 수 없는 원리들이기 때문에 또한 이번 사경회에 이런 원리를 따라서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실 은혜를 기대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상관이 있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원래 훌륭한 형 다음에 훌륭한 동생이 없고 사회에서 존경받는 아버지 뒤를 이은 아들이 빛을 보는 법이 별로 없으며 신령하게 목회 하던 목사님 후임자로 온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법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앞사람이 누구냐가 참 중요한데, 그런 점에서 여호수아는 매우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앞에 광야 교회를 목회 하던 모세가 워낙 커다란 산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모세는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매우 특별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마 그리스도 예수를 제외하고는 구약에서 큰 인물 하나를 고르라면 모세일 것이고 신약에서 큰 인물 하나를 고르라면 바울일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특별한 사람인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그 사람이 매우 신령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신령을 가장한 사기 카리스마가 있는데 그것은 진짜 카리스마였습니다. 워낙 하나님 앞에 신령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카리스마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도 받는 사람들은 지도자보다 항상 강한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모세 같은 사람이 나타났으면 오금도 못 피면서 교회생활 하다가 교회 묘지로 갔을 텐데, 그런 태산 같은 사람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구 대들었습니다. “네가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서 우리를 다 죽게 한다”하며 대드는 것을 보면 카리스마도 필요 없는 것 같습니다. 리더십을 받는 지도자가 지도 받는 사람보다 강해야 한다는 구호는 항상 있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리더가 자기가 리더 하는 사람보다 강해진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또 강하다고 해도 마음의 눈이 완전히 감겨진 상태에서는 신령하다고 하는 것도 인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영적인 비췸이 있어야지 만 신령한 권위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 대단한 사람들이었고 모세는 아마 요즘 목회를 한다고 해도 능히 성공할 것입니다. 그 강적들을 이겼으니 요즘 같이 부드러운 사람들이야 이길 수 있었겠지요.
아무튼 모세는 정말 신령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면전에 서서 그분과 대면한 사람에서 나타나는 영적인 특징으로 늘 얼굴에 광채가 있었다고 하니 굉장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죽은 다음 결론은 “모세 이후로는 모세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였습니다. ‘이후에 아무리 쟁쟁한 선지자가 나타나도 너희들이 모세와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정도로 신령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큰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가지는 그 사람에게는 강력한 영적인 파워가 있었습니다. 강력한 영적인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는 하지만 누구나 팔을 벌린다고 해서 홍해가 갈라집니까?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네가 기도하면 내가 재앙을 물러가게 해주마”하실 정도로 하나님께서 도장까지 다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파워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큰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모세’를 말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겨진 특징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십일 금식 기도를 세 번 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는 나와 대면하여 말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육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시니까 그렇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 자체가 의미하는 것은, 너희들이 나와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모세와는 나와 친견한 상태에서 말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하나님과의 교제의 친밀성,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한 하나님과의 깊은 기도의 세계 속에서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모세의 권위를 넘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차적이기는 하지만 또 하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모세가 한없이 커다란 산처럼 보였던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인격적인 특성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누군가를 무시하고 깔보는데 그 사람이 저항을 안 하면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을 깔보는 자기자신이 초라하고 비참해 보이는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입니다. 그 사람 앞에 서면 왠지 내가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것 같은 경우를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인격적으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초창기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지독하게 목회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목회라는 방망이로 모세를 엄청나게 두드려서 깎고 다듬으셔서 성자와 같은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가 태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이 모세는 공부한 수준에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중근동 세계에 있어서 모든 문명이 모인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애굽의 왕궁에서 수학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40년 동안 잊어버렸다고 하더라도 그 토대가 어디를 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학문적으로 연마하고 법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지어 예술, 행정에 이르기까지 그 당시 최고의 발달된 애굽의 문명 아래서 그 모두를 섭렵한 것입니다.
(예화: 고고학적으로 애굽지방에서 이집트 상형문자가 아닌 중근동 지방에서 사용되었던 쐐기문 자 토판의 외교서신들이 발견된다-이미 외국어를 가르치는 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모세는 언어적인 문제도 거의 완벽하게 해결하였을 것입니다.
그 뒤를 이어서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는데 모세와 비교가 되었겠습니까? 우리같이 신통치 않은 사람이 있다가 사라져도 빈자리가 남는데 그 태산 같은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부터 시작해서 40년이라는 세월들을 데리고 산전수전을 다 겪는 과정에서 대든 적도 있기는 했지만 결국은 그 모세의 권위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복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사람이 가고 나서 여호수아라는 사람이 지도자로 오른다고 할 때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마치 동장이 대통령 뒤를 잇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안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하십니다. 모세가 죽을 때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안수하면서 지도자로 세웁니다. 그 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데 하나님의 지혜의 신을 충만하게 부어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이왕 부어주시려면 영적인 탁월한 권능을 주셨다면 모세를 보충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이 아니라 ‘지혜의 신’이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제 모세의 시대는 끝났고 여호수아의 시대로 넘어왔는데 모세와 여호수아의 사이에 분명한 분기점이 하나 주어지는 것입니다. 모세의 시대는 모세의 시대로 끝나고 여호수아의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생각할 때마다 사도들의 시대가 끝나는 지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들이 충만한 권위와 비할 데 없는 영적인 특성을 가진 사역자들로서 한 시대의 토대를 세우고 역사적으로 속사도 교부들에게로 넘어갑니다.
여기에서도 똑같이 여호수아가 등장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모세를 통해 그 백성들을 인도하지 않으시고 믿음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보다는 공동체의 믿음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새로운 시대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사적으로 볼 때 아주 의미심장한 사건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수여 받은 사람이었는데 능력에 있어서는 여호수아를 능가하는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 바로 앞까지 인도하고 죽습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훨씬 능력이 없어 보이는 여호수아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모세가 율법을 상징한 사람이었다면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여호수아가 예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여호수아’라는 이름 자체가 ‘예수’라는 이름과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의미도 똑같이 ‘구원하다’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은 가나안 직전까지 데려가는 것이었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예수의 예표인 여호수아에 의해서 요단강을 건너고 믿음을 중심으로 역사가 일어나는 것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보다는 모세가 행하는 강권적인 중보 기도와 거기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이적의 역사들이 펼쳐져 나가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아말렉과의 전쟁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고 있으면 이기는 것입니다. 그 한사람에게 다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에 들어와서는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도 물을 한번 건너고 가나안에 들어갈 때도 물을 한번 건넙니다. 하나는 홍해였고 하나는 요단강이었습니다. 홍해는 기적을 본 후에 사람들이 건너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한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에 의해서 인도 받으면서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는 먼저 발을 들여놓으니까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믿음으로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으니까 물이 마르면서 행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시대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목회자인 제 입장에서는 모세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도 많지만 어떤 면들은 적용하기가 비현실적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훨씬 더 친근하게 리더십에 대해서 배울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커다란 신앙적이고 영적인 원리에 대해서 모세로부터 대의적으로 많이 배운다면 여호수아를 통해서는 함께 교회를 이루어 가는, 그래서 그런 목양 관계를 가지고 헤쳐나가는, 함께 하는 리더십에 대한 통찰을 많이 얻게 됩니다.
그런데 1장에서 여호수아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하는 여호수아, 순종하는 이스라엘, 이 세 가지가 나오면서 여호수아의 시대를 여는 것입니다. 이것도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리더십을 행사함에 있어서 첫 번째 원리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카리스마에 있어서는 모세와 비할 데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 카리스마 못지 않게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었던 강력한 인격적인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말씀의 신앙입니다. 그것이 여호수아에 있어서 아주 뚜렷한 신앙 인격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호수아의 역사를 열면서도 제일 먼저 기록한 것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여호수아인 자기 자신에게 주신 메시지 자체도 핵심이 “너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말씀을 붙든 사람이 되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불안했다고 하더라도 그 인간들이 얼마나 못된 사람인지를 모세를 보필하면서 모두 보았던 부목사격인 여호수아에게 그들을 책임 맡은 최종적인 지도자가 되라고 했을 때 -그들을 너무나 잘 아니까- 그 사람처럼 떨린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그랬을 때에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하신 말씀이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면서 순종하면 내가 너와 함께 한다”였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생애 끝까지 그가 놓치지 않고 붙들었던 신앙 인격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24장 마지막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울어져 갈 때 유일신 여호와의 신앙을 피를 토하듯이 외치게 만든 신앙이 말씀 신앙입니다. “그렇게 우상을 섬길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말년이 되었는데도 그 사람의 신앙의 인격 속에 배어있는 것입니다.
그 후 1장에서 두 번째 나오는 내용이 말하는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야기하는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가나안을 건너가게 되어있었는데 그 때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로 므낫세 반지파가 요단강 이편의 땅을 상당히 좋게 여기면서 자기네는 여기를 유업으로 주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것을 허락을 합니다. “너희들이 땅을 받았지만 형제들이 아직 못 받았으니까 처자들을 남겨두고 너희들은 같이 가서 싸워서 이 땅을 모두 취해야 한다. 그리고 모두 땅을 정복한 후에 너희는 너희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을 하는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오늘 성경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가 당신을 청종 하겠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이 모세 때에 그랬던 것처럼 당신과 더욱 함께 하시기를 우리는 원합니다”하는 고백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몇 가지 중요한 신앙적이 교훈들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금년 한 해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노정기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놓여있는 상황이 우리가 놓여있는 상황과 아주 흡사합니다. 우리도 방배4동에서 출애굽을 해야 할 것이고 명함은 인덕원에 들여놨는데 주님이 주시기 전이어서 아직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가서 보이지 않는 교회를 세우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되도록 우리들이 그 모든 일들을 완수하는 데 있어서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우리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고 나아가서 교회라고 하는 조직이 효율성 있게 움직여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이 있는 때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첫 번째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숙한 반응입니다. 첫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우리가 모세에게 순종했던 것과 같이 범사에 당신을 청종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먼저 나옵니다. 사실 이러한 고백이 어떻게 보면 참 쉬운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결단을 요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은 그러한 이해 때문에-워낙 커다란 지도자 아래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를 보면서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모세에게 순종한 것처럼 범사에 우리가 당신을 청종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결단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가나안 정복의 전 과정에서 보여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에 대한 청종하는 태도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가장 뛰어납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카리스마 면에서는 여호수아 7명을 합쳐놔도 모세와는 비교가 안됩니다. 그러나 신기하게 그 카리스마가 강력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회 하는 동안에는 항상 반기, 반란, 반역을 하던 사람들이 그보다 훨씬 못한 여호수아가 등장했을 때에는 교회가 평안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못 다하고 죽은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성취해 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모세가 목회 하는 교회나 여호수아가 목회 하는 광야의 교회나 역시 그 궁극적인 주인은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등장했을 때 한동안은 지도력에 공백이 생기고 혼란이 오리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도자에 의한 최대의 순종, 그리고 가장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던 때가 가나안 정복의 때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와 같은 선지자가 이 때를 그렇게 추억했습니다. 그 때가 주님을 청종하던 그런 때였습니다.
그렇게 청종하고 잘 따랐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할 때 우리는 간단하게 ‘아마 여호수아가 완벽했을거야’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완벽에 있어서는 오히려 모세에 비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불같은 자기의 기질에 대한 통제가 힘들었지 다른 면에 있어서 모세는 정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전쟁하는 기술이라든지 세속적인 리더로서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런 정도로 완벽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7장에서도 나타나고 9장에서도 나타납니다. 7장에서는 여리고 성을 공격하고 승승장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 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게 3-4천명이나 죽고 도망 내려오는 광경을 보고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았더라고 했습니다. 그 표현은 가나안 원주민에게 많이 쓰이는 표현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바산와 시온과 옥을 멸하고 들어올 때 그 소문이 들리면서 라합을 비롯한 가나안 원주민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자기들이 물같이 녹아 내린 것입니다. 결국은 절망 속에서 녹아 내린 마음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린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이것이 실패 속에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도 될 수 있겠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은 여호수아가 자신의 리더십에 한계를 느끼면서 주저앉아 있는 절망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증이나 하듯이 그렇게 엎드려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네가 왜 엎드려 있느냐”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깊은 신앙적인 깨달음보다 여리고 성은 엄청난 성이었지만 아이성은 조그만 성이었는데, 신앙적이 아니라 세속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런 정도의 실패를 하고 주저앉아 엎드려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어떻게 보면 신앙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바꿔보면 그런 연약함을 드러내고 있는 광경이라는 것입니다.
더 그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9장에서 나타납니다. 말하자면 적들의 커다란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기브아 사람들이 화친을 청하러 오는 장면인데, 그들이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와서 헤아릴 수 없이 먼 곳에서 왔다고 하는데 가방 속을 보니 곰팡이가 슨 빵이 나오는 것을 보고 하루 이틀 걸어온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멀리서 당신들의 소문을 들으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민족이고 여기에 있는 많은 민족을 진멸했다고 하는데 우리와 화친해 주십시오” 하니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들이 필요할 수도 있어서 성급하게 화친조약을 맺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바로 옆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과 자신들의 언약 사이에 충돌이 생긴 것입니다.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는데,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중적인 요구가 하나님께로부터 있었는데, 하나는 모두 진멸하라는 원래의 약속이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은 이웃과 맺은 언약에 있어서 신실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또한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등을 느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실수한 장본인이 바로 여호수아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는 ‘무슨 하나님의 신이 그런가, 여호와의 신이 어떻게 기브아 사람도 못 알아보는가’하며 당장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깊이 느끼는 것은 교회가 강력한 변화의 능력을 가진 공동체가 되어서 어떤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향해서 움직이는 데 있어서는 탁월한 리더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숙한 회중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 하에 있는 백성들이었는데 모세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모세는 여호수아보다 훨씬 카리스마적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아마 그 카리스마보다 더 카리스마적이 되어서 대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단을 건너 가나안을 정벌해 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뢰의 마음입니다. 오죽했으면 자기 조상들이 정탐을 했을 때 포도 한 송이를 꿸채에 꿰서 옮긴다고 했는데 과장이 아닙니다. 지금도 에스골 골짜기에 가면 포도송이 하나에 6키로까지 나온답니다. 그것을 다 보고도 거짓보고를 한 것입니다. 그들과의 싸움에서 질 것을 하나님의 약속보다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0년의 세월을 유랑하고 광야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그 세대들이 모두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없는 평지가 아니라 보지도 못했던 엄청나게 발달한 -애굽의 발달한 문명을 못 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요새들을 보면서 그들이 믿음은 있지만 얼마나 마음이 가난해졌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놀랍게 성숙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같이 완벽에 가까운 강력한 카리스마의 지도자가 죽었을 때에는 오히려 대들고 분란을 일으키던 족속들이 여기에서 그보다 훨씬 못한 여호수아를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들이 이 사람과 함께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펼쳐간 것입니다. 사실 이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펼쳐가기에 적합한 사람은 여호수아 같이 유약한 사람이 아니라 모세와 같은 난곡을 헤친 히어로가 훨씬 더 가나안 정복의 역사에 어울립니다. 그런데 이제는 광야가 아니라 요단을 건넌 이후의 이 땅을 헤쳐나가는 이것이 믿음으로 정복되는 역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고 난 다음에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변하지 않았던 여러분의 성품을 정복해서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변화되어 가는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 이것이 필요한 것은 기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보다 위대한 일들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수아가 중대한 실수를 하고 확실히 미숙한 사람이었지만 신앙적으로 성숙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끌고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목회자로서 비겁하게 여호수아의 어깨 뒤에 숨어서 “나도 좀 봐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정도로 비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이끌어 오면서 작년 한해에도 수없이 많은 중대한 결정을 내릴 상황을 맞이했는데 올해에는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항상 느끼게 되는 것은, 정말 간절한 소원은 정말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소원이 이루어질 리는 없지만 온전히 지혜로운 사람이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래서 기계를 가지고 머리에 집어넣어 조작할 수 있다면 아이큐를 470정도 만들어서 여러분과는 도저히 비교될 수 없는 사람으로,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그렇게 거듭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이큐 120정도 되는 사람이 470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그것도 현실적으로 안될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이 이스라엘 족속들을 다 알고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 그들을 놀랍게 변화시키셔서 믿음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아는 상황에서 이 여호수아에게 필요한 것은 백성들의 다양한 기질들을 통합해서 끌고 가는 놀라운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혜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임하게 하셔서 모세가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빈자리를 매꿔 나가는 지도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상대적인 것이어서 A라는 영역에서는 뛰어난데 B영역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A, B영역에서 모두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어느 케이스 하나에 그 지혜를 적용시키는 면에 있어서는 뒤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아니라 맥 놓고 가만히 있다고 어느 한 사건을 보면서 ‘그렇게 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은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훨씬 더 지혜 있을 수도 있는데, 사실 교회를 이끌어 가는 리더십은 단순히 그런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하나의 기발한 재치들을 모은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를 전체적으로 이끌어 가는 리더십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총체적이고 훨씬 더 유기적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고도의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정치라고 하는 것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사람들을 통해서 행사되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고도의 정치적인 성격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간단한 단편적인 재치들을 모은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교회를 훌륭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리더십에 연결된다고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자동차부품이 많이 있는데 A회사는 나사가 훌륭하고 B회사는 볼트가 훌륭하고 C회사는 엔진 중에서 돌아가는 축이 훌륭하고 D회사는 깜박이가 훌륭하다고 합시다. 그래서 수십 개 회사에서 가장 좋다는 것들만 모아다가 조립을 하면 최상의 자동차가 나올 것 같은데,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결함을 성숙한 신앙으로 극복한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업그레이드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세에게 순종한 것처럼 범사에 당신을 청종하리니”라고 말했을 때 이 사람들의 신앙의 고백은 “우리는 당신만 믿습니다”는 신앙의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당신을 붙들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입니다.
여호수아가 기브아 사람과 화친을 맺는 바람에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러나 거기에서 그 사람들을 진멸하지 않고 약속을 지킨 것은 실패를 마무리하는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랬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여호수아의 실수를 성숙한 신앙으로 극복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였던 사람들을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해서 장작을 패고 물을 긷는 섬기는 자들로 삼아서 하나님을 수종들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을 이스라엘 백성화하는 계기로 삼은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놀라운 성숙입니다.
올 한 해도 우리들 앞에는 결단을 내려야 될 수많은 상황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일들은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통계자료들을 가져다 놓고 수없이 연구하고 검토한 후에 내려야 될 결단이 있지만, 상당수의 중대한 결단은 목회자인 제가 하나님이 주신 감각을 가지고 굵직굵직한 결단을 내려야 될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싫건 좋건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 모세로부터 그렇게 훈련을 받아서 그렇게 훌륭한 신앙을 갖고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지혜의 신을 부음 받았던 이 여호수아와 같은 사람도 완벽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갈 수 없었는데 하물며 저 같은 사람에게 그런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잘못 찾아온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수준에 맞는 사람입니다.
(예화:목사님이 이러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전도사에게 “그런 훌륭한 목사님이 왜 너 같은 사람 을 전도사로 쓰겠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저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교인들이 왜 나 같은 사람에게 목양을 받겠나. 오히려 나 같은 교인을 목양 하겠지’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완벽하지도 않고 완벽할 자신도 없습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첫째, 목회자 자신이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허위를 가장하고 마치 자신이 완벽한 사람인 것처럼 나가는 것보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정직하게 잘못했다고 이해를 구하고 용서를 구하여야 합니다. 그래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비난을 하면 정당한 비난이니 할 수 없이 받아야 합니다.
그런 원리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 심지어는 여러분의 구역, 여러분들이 다니는 직장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정직해지는 것이 최선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습니까? 가정에서나 혹은 직장에서 여러분들이 상사라고 할지라도 잘못했으면 아랫사람 다 불러놓고 정식으로 사과하십시오. 큰 잘못이면 엎드려서 큰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조직이 갈등을 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도자의 인격과 관련된 문제이고, 또 하나는 그 리더를 따르는 사람들의 성숙한 반응입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늘 생각나는 것은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집사들을 세우는 장면입니다. 사도들이 공궤하는 일들을 하면서 큰 혼란을 느낀 것입니다. 누구와 의논 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스스로 생각할 때 ‘이것은 아니다’고 생각하고 다시 찾은 사도의 본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선지자의 본분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리니 너희들 중에서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택하여 그들을 집사로 세우고 맡기자”고 하자 모든 교인들이 그 말을 좋게 여겼습니다. 말하자면 성숙한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멈췄던 하나님의 교회가 다시 강력한 힘을 회복하면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진행하는데 있어서 지혜는 성도들의 피와 눈물을 줄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원리를 따라서 신앙생활 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지도자가 얼마나 못났으면 자기의 지도를 받아서 따라오는 사람의 눈치를 헤아리며 행동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의 목회자가 여러분들과 함께 살아갈 때 목회자가 며느리처럼 되고 여러분들이 시어머니가 되는 식의 교회조직을 원하십니까? 항상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길,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데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늘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이 여호수아가 불세출의 탁월한 리더였습니다. 여호수아 24장에서 여호수아가 유언적인 설교를 하는데 -오죽했으면 우리가 “유일신 신앙이 대안입니다”라는 시리즈를 20주 가까이나 설교했겠습니까?- 원로인 이 여호수아가 그 설교를 말년에 피를 토하듯이 강력하게 외쳤을 때 그 설교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았으니까 그 설교가 위대하다고 인정을 받은 것이지 만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여호수아는 말년에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더 격렬하게 왕따를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내가 입에서 외칠 때에 이 백성들이 좋아할 것인가 말 것인가’하는 회중들의 반응이 이 지도자에게 있어서 최상의 가치였더라면 아마 그 설교를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이 여호수아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해주신 것 “너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살라”고 하는 참된 신앙의 척도를 가지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생활을 쟀을 때 유일신 신앙으로부터의 이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판단과 분석과 외침을 그들이 좋아할 것이냐 싫어할 것이냐 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최종적인 가치인 유일신 신앙을 따라서 외치고 피를 토하듯이 설교한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의 소관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신은 그것을 쏟아놓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모든 것이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될 수 있으면 모여서 의논하고 생각하면서 결정해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의 상황, 이 시커먼 밤바다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의 배처럼 떠있는 이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의 영적인 상황과 목회적인 상황, 선교적인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때로는 수학적인 계산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번뜻번뜻 하는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와 그 지혜를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갈 길을 모색하는 예지의 판단, 결단과 같은 것들이 요구될 때가 너무 많은 가변적인 상황을 우리들이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리더는 그 모든 것을 해명할 기회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여러분들은 일주일에 수십 시간씩 회의를 해야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러분들에게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금년 한해 저는 하나님 앞에 열심히 구했습니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할 뿐 아니라 뱀같이 지혜로운 사람,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제가 머리 좋은 사람이 되어서 여러분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성숙한 신앙적인 반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들이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마지막 교훈은 그들이 여호수아를 향해 하나님 앞에 비는 기도의 소원이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하기를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하셨던 것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무릎을 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인도하는 강력한 리더십을 필요로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리더십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을 간파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무엘 시대 때에 왕을 달라고 떠들다가 결국 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분노하심으로 왕을 주셨고 진노하심으로 왕을 패하셨노라”고 호세아서에 나옵니다. 결국 왕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 사람들은 지도자로서의 권위의 기초에 대해서 아주 불신앙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생각을 그들이 조금만 견지하고 있었더라면 그런 멍텅구리 같은 선택은 안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리더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기초가 제왕으로서의 엄격한 권위와 왕궁의 큰 권세에서 백성들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결국 열왕기서부터 역대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에 수많은 왕들이 모두 나라를 망가트린 왕이 아니었고 모든 왕이 나라를 세운 왕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제도와 왕실, 그가 거느린 군대, 모든 것을 가지고도 백성을 외적에게 짓밟히게 만들어 준 왕이 있는가 하면 소수의 군대, 소수의 사람들을 가지고도 백성을 훌륭하게 보호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던 믿음의 왕이었습니다. 리더십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건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정도 수준의 이야기를 새로 자신들의 지도자로 들어온 여호수아에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들의 영적인 수준이 상당히 성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신은 모세에 비하면 비할 데 없이 초라한 분이시지만 그러나 모세와 함께 하던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면 모세가 할 수 없었던 그 일도 당신이 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이다음에 주님 심판대 앞에 서면 여러분들이 억수로 욕먹을 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목회자를 위해서 거의 기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때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잘못이었는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그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경우는 그의 영혼의 커다란 각성이 일어나기 전에는 별로 없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자신들도 목사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 안 하는 것은 죄라고 대부분 생각하겠지만 자신들이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여러분들이 연초를 시작하면서 기도의 제목이 많이 있어도 그것을 밀쳐놔야 합니다. 그리고 제일 앞자리에 들어가는 기도제목의 하나에 바로 여러분들의 목회자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예화: 집회 갔을 때 집회 일정은 새벽부터로 잡아놓고 저녁 대표 기도하는 사람이 “우리 강사님 고단하지 않게 해주시고”라고 한다. 어떻게 피곤치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집회 동안만 그 기도를 하고 그 다음부터는 잊어버린다)
대표 기도할 때 강사가 죽을병에 든 것처럼 중보기도 하는데 물론 그런 기도도 필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좀더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기도를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도의 처음과 끝은 목회자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늘 하나님이 대면하여 말씀하시던 그 긴밀한 친교를 오늘 우리의 목회자에게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살아온 모든 삶에 대해서 일일이 변명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할 수 없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 준 이 교회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은 목회자로서 지도자로서, 또 많은 사람들은 목회자를 돕는 일꾼들로서, 또 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따라가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그렇게 일생을 주님 앞에 몸부림치면서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신앙, 지혜, 인격, 용기, 지식, 모든 것을 사용해서 최선의 섬김을 다하며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사후에 그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은 세상에서는 사람들의 문제이고 하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금년에도 우리 앞에 많은 결단을 요구하는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꼭 승리할 것을 믿고 하나님이 우리를 기가 막히게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위대한 미래의 장들을 쟁취할 것을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한마음 한 뜻이 되어서 이런 원리 속에서 서로의 부족을 메우며,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사용하실 수 있는 교회로 인도해주시는 그런 한해가 되기를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살수 있는 은혜를, 그리고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이번 사경회를 통해서 서로가 공급받았으면 좋겠습니다.
4. 깨닫지 않으면 기도도 가증하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28:9)
무엇인가 마음에 강력한 소원이 있는 동안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속에서 모든 원하는 소원이 사라져버린 상태입니다. 특별히 이렇게 한해가 새로 시작할 때가 되면 우리는 아직 살지 않은 일년 열두 달을 향해서 예전에 이루지 못했던 강한 소망들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으로 그러한 소원들이 금년에는 이루어 질 것이라는 자기 암시 속에서 희망을 가져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단지 마음에 소원을 품고 있다고 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한다는 것은 완전히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소원을 품고 있는 동안에는 마치 아이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유산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는 마음속에 품은 소원을 밖으로 산출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소원을 품고 있는 것으로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을 기도라고 하는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아뢰고, 주님이 그 기도에 대해서 인격적으로 응답하실 때에 우리는 그 기도가 힘있게 우리의 삶의 현장의 역사에서 과거의 실패를 오늘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 은혜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지난주에 강원도에 다녀왔는데 강원도에는 눈이 하나도 안 녹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2001년이라고 하는 한해가 눈밭처럼 하얗게 펼쳐져 있는데 작년까지 우리를 따라다니고 괴롭혔던 무기력, 부패, 불순종, 죄악, 실패를 운명처럼 생각하는 자포자기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새해에는 우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흰 눈밭과 같이 아름답게 펼쳐진 무한한 가능성의 새해는 눈 위에 주님과 우리가 걸어간 발자국 두개만이 찍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심리적으로 새해가 되면 신앙생활의 여러 부분 가운데 가장 마음에 강하게 도전 받는 부분은 기도입니다. 기도를 잘하고 싶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기도하지 않던 사람들이 기도하려고 애를 쓰고 기도해보려고 힘을 냅니다.
그런데 기도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내가 기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금방 그렇게 열렬하게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건강한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기도하기 싫을 때는 거의 기도할 수 없을 때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수 있을 때에는 기도하고 싶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그렇게 순발력 있게 결심 하나로 기도가 샘솟듯 솟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귀를 돌이켜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한 율법을 듣는 것으로부터 한 귀를 돌이키는 사람은 또한 그의 한 기도도 혐오스러우니라” ‘가증하다’는 ‘토에바’라는 단어인데 구약성경에서 ‘밉다’는 뜻도 있고 ‘혐오스럽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가증하게 여기신다’고 할 때 많이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가 하나님께 가상하게 여겨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주 싫다는 것입니다. “나는 제가 기도하는 것이 너무 싫다”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기도할 때에 싫어하시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싫어하시는 기도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뭔가 우리의 기도를 구걸하시는 분처럼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쉬운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무슨 기도든지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하기만 하면 그 기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이 감격하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오랫동안 기도를 잊고 살아온 우리 자신을 스스로 격려하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지, 때로는 기도 자체가 하나님에게 매우 혐오스러운 기도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런 의문이 떠오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혐오스러워하시는 기도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도대체 어떤 기도일까요? 물론 혐오스러운 사람, 즉 죄인의 기도는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것이고 의롭고 진실하고 경건한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나처럼 이렇게 죄 가운데 살고 불순종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는 기도가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나는 지금 죄인이고 죄 가운데 살고 있고 또 오랫동안 불순종 가운데 살아왔는데 나는 내 자신의 힘으로 돌이킬 수도 없고 이미 살아온 길을 취소할 수도 없고 나는 나일 뿐인데, 내 기도는 하나님 앞에 영원히 가증한 기도일 수밖에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 없이 살아가는 것밖에 무슨 대안이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기도에 있어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기도의 무기는 진실입니다. 현수막을 수없이 붙이고 수십만 명의 사람이 움집한 대형집회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고함소리와 같은 통성기도도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나 혼자, 혹은 두 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진실하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흐느끼는 기도가 오히려 그런 대형 집회에서의 지축을 뒤흔드는 통성기도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 성품을 깊이 생각하면서 기도의 길을 찾아가야지 단지 부르짖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감지덕지하실 것이라는 아전인수격인 생각은 기도에 대한 인격적인 접근이 아닙니다.
결국 기도라고 하는 자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라고 하는 이 자녀와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기초가 되었을 때에 그 위에 기도라고 하는 나무가 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쇠약한 사람도 있고 점점 더 뿌리 깊고 줄기 가지가 튼튼한 나무로 자라서 웬만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관계가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힘들여 아이를 낳아 양육을 해서 시집 장가 갈 만큼 길러놨는데, 친구에게 부모님을 뒷돈 대주는 물주라고 소개한다면 되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접근하는 태도의 기도를 가장 혐오스럽게 생각하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절대자 앞에 기도하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화: 병원 심방을 갔다가 나오는데 환자 두 사람이 불러서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한 이야 기)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처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해서 누군 지는 모르지만 절대자 앞에 간구하고 호소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우상을 세워놓고 소원을 비는 것도 그들이 지식이 없어서 잘못 알아서 그렇지 넓은 의미에서 말하자면 하나님께 호소하고자 하는 기도의 본성이 시킨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초로 이루어지는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변화에 따라서 자신의 기도도 변화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면 아까 말씀드린, 의롭게 살지도 못하고 거룩하게 살지도 못해서 죄와 불순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들이 진실해져봐야 마음의 밑바닥에 드러나는 것은 죄와 악함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에, 똑같은 기도라고 하더라도 평소에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기도를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내용도 기쁘시지만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기쁘시기 때문에 그 기도 자체가 향기로운 제물이 되지만, 그 기도 자체가 아무리 아름다움 기도의 제목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그 기도를 흉내내어 기도하는 것은 그 기도 자체가 하나님께 매우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게 죄 가운데 살아가고 불순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서 도저히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까요?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진실해 지는 것입니다. “진실해봐야 죄밖에는 바닥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라고 질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진실해지고 나니까 마지막에 밑바닥에 남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불순종과 죄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주님을 거스르면서 살아온 것밖에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고백하는 것,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죄 가운데 살아온 사람이 진실해져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자기 속에 있는 죄와 악함밖에는 고백할 것이 없습니다. 그 고백이 곧 회개의 고백이고,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오히려 의로운 행동을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마음에 감추어진 죄를 숨기고 진실해 질 줄 모르는 사람의 그럴싸한 수많은 기도보다 죄밖에 없는 비참하게 진실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오히려 들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진실해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약점과 부끄러움에 대해서 결코 쉽게 내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결점과 자신의 부패한 죄악들을 그대로 고백하며 진실해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진실해질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사람이 귀를 돌이켜서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기도와 기도하는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이 진실한 이야기를 하면 사람을 깊이 감동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된 사람이 진실된 이야기를 하면 그 진실은 진실인데 그 거짓된 사람과 좋은 이야기 사이를 메워 줄 수 있는 것은 가식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쾌감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역시 동일합니다. 그런 일들을 구체적으로 역사 하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한 깨달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경을 통해서는 물론이고 우리의 신앙생활의 경험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기도의 영을 가졌을 때는 마음속에서 우리의 기도가 언어화 -속에 있는 불분명한 소원은 기도가 아닙니다-되기가 무섭게 하늘로 빨려 올라가는 것 같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빨아올리듯이 흠향하신다고 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그 때에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우리를 감화시키던 바로 그 때입니다. 이 두 가지가 결코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참다운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기도의 세계에도 변화가 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신비한 것입니다.
저는 이번 주에도 설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했습니다. 갈수록 쉽다는 느낌도 들고 어렵다는 느낌도 듭니다. 전달하는 방법이나 기술들은 하나의 말이니까 늘어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설교를 통해서 보여주기 위해서는 전달의 기술이나 지식의 축적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피 흘리는 분투하는 추구와 몸부림을 통해서 예전에 들어가 보지 못했던 은혜의 세계를 자신이 넘나드는 영혼의 변화의 경험이 있을 때 새로운 설교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설교를 통해서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설교의 준비는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을 때, 혹은 아무도 없이 혼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님 자신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분투하는 삶, 그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설교준비가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혼자 조용히 있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기도의 헌신 속에서 다다르게 되었던 지식들을 모아서 정리를 하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와 기도하는 사람의 관계는 설교와 설교자의 관계와 아주 유사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 그리고 진리에 의한 강한 자극이 그의 영혼 속에 계속되지 않으면 그의 기도의 세계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차츰차츰 고사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대가라고 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설교의 대가는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의 대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끊임없이 그를 자극하시고 그를 강하게 강화시켜주시는 생생한 말씀의 세계가 살아있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되지만 설교자는 때때로 지금 만난 하나님이 아니라 옛날에 만난 하나님을 증거 함으로서도 청중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사람 들으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향해 올리는 기도이기 때문에 과거에 이루어진 경험을 통해서 오늘 내 앞에 계신 하나님을 감동시켜드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몇 일전까지 열렬한 기도의 세계를 가졌던 사람이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루아침에 도저히 기도할 수 없는 사람으로 바뀌는 경우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아름다운 교제 속에서 살았지만 불순종하고 인구 조사하고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을 향해 올리던 그의 기도의 세계는 파괴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생활의 재건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참다운 변화가 선행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에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데 첫째는 무엇을 기도해야 될 지를 알게 되고 또 그것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에너지를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경회는 응답 받는 기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꼼꼼히 살펴서, 과연 그러한가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서 그 말씀 앞에서 우리가 변화됨으로 하나님 앞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는 유익들을 회복하는 기회가 사경회입니다. 그래서 실현이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늘 이야기하는 것이, 제가 꿈꾸는 교회는 수련회도 필요 없고 사경회도 필요 없는 교회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그것이 실현되기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비췸이 있고 침체된 기도의 영이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 일들이 예배 시간마다 계속된다고 할 것 같으면 따로 이런 사경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환경적인 어려움과 그것과 만난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부패한 본성, 어떤 특별한 계기를 주지 않으면 일반적인 은혜의 수단들에 익숙해져 버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들 때문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이러한 사경회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왜 우리의 기도를 바꾸어 놓는 것일까요. 오늘 “사람이 귀를 돌이켜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가 가증하니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반대로 완전히 뒤집으면 어떤 말씀이 될까요? “사람이 다시 귀를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전심으로 귀를 기울이면 그리고 율법을 들으면 그의 기도도 사랑스러우니라”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사랑스러운 존재가 될 때에 우리의 기도도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때에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든 그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보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냐에 따라서 우리의 기도생활은 물론이거니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소원의 체계 그 자체가 다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어서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살고 있을 때에는 신령한 소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 생의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은혜 안에 있을 때 소원이 뭐냐고 물으면 “지난 해에는 나의 모난 성품 때문에 주님의 마음에 많이 고통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도 나의 모난 성격 때문에 많이 그르쳤습니다. 올해는 주님의 성품을 많이 닮은 진실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십자가의 그 놀라운 은혜를 받았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 왜 이런 사람밖에 되지 못할까?’ 그것이 고민의 이유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안타까워하며 아파하느냐고 할 때 ‘하나님이 맡겨주신 이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하는데 내가 너무 부족하고 아는 것이 없고 경험이 미천하기 때문에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고 싶은데 사실은 자신이 없다’는 것이 그가 하나님 앞에 슬퍼하며 간구하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소원의 체계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이전에 진실하고 하나님 앞에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던 자녀라고 할지라도 그 은혜 가운데에서 멀어져서 죄와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원 그 자체가 다릅니다. 신령한 것이 아니라 육적인 것이 됩니다. 그리고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과 결별하지 못한 소원들입니다.
자신 속에 있는 지배적인 소원이 결국은 기도제목이 될텐데 그 두 사람이 얼마나 기도의 방향이 다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보시는 것과 그 기도를 보시는 것이 거의 같다는 이유입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비록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그 작은 행동, 말들을 통해서 그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런 사람이 변화되는 지름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비추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를 정확하게 보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축복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는 것이 자신이 변화되는 지름길이요, 그렇게 자신이 변화될 때 그의 기도에도 큰 변화가 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아서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 없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깊이 듣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깨닫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게 됩니다.
(예화: 고모님이 새벽기도에 옷을 뒤집어 입고 나가신 이야기)
그렇게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는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1년 혹은 2년, 심지어는 일생을 살면서 단 한번도 하나님의 거울 앞에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비춰본 적이 없는 사람은 결국 자기 생긴 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가 예전에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지금도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이고, 앞으로도 기도하기 힘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변화되어야지만 참된 기도의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혹한 교리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가혹한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셔서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를 당신을 본받은 당신의 자녀 삼고 싶어하는 소원이 있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은 힘듭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비춰보고 자기의 잘못된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 앞에서 서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변화에 이르기를 포기하는 것은 곧 기도를 포기하는 것이고, 기도를 포기하는 것은 곧 무신론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거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귀를 기울여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에만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비취는 거울이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날 동안 수많은 설교, 스쳐간 수많은 성경 구절들, 그리고 여러분 손에 수없이 들려있었던 수많은 책들, 그리고 경건한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받았던 수많은 신앙의 충고들 속에 깃들여진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정직하게 여러분들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된 적이 얼마나 드물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한해를 새롭게 시작해도 지난해의 실패가 그대로 밀려와서 개처럼 뛰어다니면서 그 눈밭을 다 더럽히는 것입니다. 지난해의 실패가 올해도 넘나듭니다. 지난해의 죄와 불순종이 올해도 뒤덮습니다. 그리고 살아보기도 전에 우리의 전망을 모두 실패와 절망으로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우리를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심령이 굳어 있다가 큰 변화를 경험하고 자기가 무너져 내릴 때, 그리고 오랫동안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계신 것같이 느껴졌던 그 하나님과의 친교의 세계가 열리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쏟아 부어지는 긍휼이 내 마음에 밀려들 때, 거기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정직하게 거울 앞에 세워서 내가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나 자신의 모습을 알게 해 줄 수 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의 기도 생활은 진정한 변화가 힘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를 세워야겠다는 말씀에 대한 정직하고 진실한 태도가 없이, 기도만 열렬히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항상 이상한 신앙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저도 다 해봤습니다. 손바닥을 너무 쳐서 피도 났습니다. 기도원도 쫓아다녀 봤고 다 해봤습니다. 그러나 결국 열광하는 그 순간에만 열광하는 것이지 그것이 끝나고 나면 다시 옛날의 상태로 즉시 환원됩니다. 그러니까 신비주의에 빠지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체험은 있는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마약의 단위가 높아지듯이 더 강한 자극을 계속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열광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이 정말 마음속에 계신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수많은 사경회가 준비되어 있고, 수많은 설교가 있고, 여러분들이 아무리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내게는 이런 메시지가 필요합니다’는 식으로 스스로 미리 단정하는 것은 아주 바보 같은 행동입니다. 그것은 거울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화상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하게 우리의 참모습을 보게 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수없이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었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비춰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오늘 여기에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귀를 돌이켜 하나님의 율법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성경을 본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또 예배에 참석하고 집회에 참여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듣는다는 의미, 귀를 기울인다고 하는 의미는 아주 집중된 마음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불현듯 자신이 깨어나서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되는 변화가 있는 것이지 단지 참여하는 것, 그리고 눈앞에 수없이 스쳐 가는 것만으로는 그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정확히 보도록 만들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은 인간 자신의 집중을 통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강한 은혜가 역사 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느끼도록 만들어 주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성령은 그 일을 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들의 마음에 심겨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시는 그 성령의 일은 우리가 대신할 수 없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도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전에 오랫동안 살았던 삶의 방식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고 세상적인 이야기들과 나의 육체의 소원에 훨씬 더 귀를 기울이고 살았던 그 삶의 방식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새해를 시작하고 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이 지점에서 나는 이전에 익숙해져왔던 내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택할 것이라고 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무엇이라고 하는지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의 거울 앞에서 내가 이제껏 옳다고 생각해 왔던 나의 삶, 그리고 내가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의 모습, 이것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서는 잘못된 것일 수 있다고 하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참다운 빛이 되고 그 빛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어떠한 모습인지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비행기가 밤에 가로등도 표지판도 없는데 목표점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너무 신기했었다. 충무에서 부산으로 집회하러 가게되었을 때 헬리콥터를 타고 가면서 조종하는 것을 보았 다-계기 판에 가야하는 항로가 파란 줄로 그어져 있고 비행기가 가고 있는 곳이 빨간 줄 로 표시되어있어서 항로에서 빗나가면 바로 알 수 있게 되어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너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너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다. 나는 너에게 이 상황에서 이렇게 살기를 기대한다”고 파란 줄로 그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보니까 빨간 줄로 그어진 것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확인하게 될 때 우리들이 비로소 이제껏 까지 인정할 수 없었던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꼭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결코 새로운 기도생활을 이룰 수 없고 새로운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누구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한번 받은 은혜로 완벽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한번 받은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자신의 정직한 성찰이 없이는 여러분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어떠한 신령한 목표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발견해야지 회개도 되고 용기도 가질 수 있고 길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여러분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권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사경회를 통해서, 또 금년의 예배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비춰볼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참모습을 보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정직하게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 후에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예전에 하나님에게 사랑스럽지 않던 사람들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바꿔놓는 힘이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어그러진 길을 걸어가던 사람을 변화시켜서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돌아서서 걸어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런 논리를 핑계로 하면서 하나님 앞에 아무렇게나 살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실제적인 신앙의 경험은 이런 사실들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만들어줍니다. 아무리 그것이 옳고 좋다는 것을 알아도 그대로 살 힘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옳은 줄 알고 또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을 알면서도 우리 자신 속에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도 그렇게 살 수 없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논리를 핑계로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 때에 우리들이 고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키셔서 우리가 옳다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춰서 깨닫게 된 대로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그 은혜가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지난 한해동안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심히 부족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고 불순종한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모든 것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할 수 있는 힘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사슬에 끌려가듯이 불순종의 삶을 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설교를 듣는 순간 지금도 그것이 잘못된 삶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서 돌이킬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원기를 회복시켜서 우리들이 도저히 살 수 없었던 그 삶을 향해서 도전하게 하고 새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독수리가 날개를 치고 오름과 같이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이례적으로 공급받는 특별한 은혜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은혜 안에 있을 때와 죄 가운데 있을 때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선명합니까?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신령한 신앙생활을 해나가기가 얼마나 힘드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신령한 생활, 거룩한 사람의 의무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얼마나 기쁜 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 사라진 사람들이 기도의 의무를 지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이 기도의 짐을 진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모릅니다. 기도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한시간을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차라리 한 시간을 노동하라고 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수 있는 사람, 기도의 은혜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한시간의 기도는 너무나 짧은 시간입니다. 그런 힘을 하나님께서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지난 한해동안 문제는 있으면서도 도전하기를 거의 포기하고 살아왔던 문제점들은 대부분 도전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도전했는데 힘이 없어서 계속 실패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그 실패가 익숙해져서 도전해도 안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도전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마치 가나안을 정탐했지만, 그 땅이 좋고 아름다운 것은 목격했지만, 그러나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생각들이 거짓된 보고를 하게 만들었던 열 사람의 정탐꾼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힘이 없는 것도 아시고, 우리에게 가야할 길을 분명히 가르쳐 주셔도 우리에게는 그 가르쳐주신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고 우리가 그 뜻대로 살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 힘주심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우리에게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주신 그분이 너무나 잘 알고 잃어버린 과정을 지켜보시는 분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 지를 가장 잘 아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간절히 찾고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던 자리에서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는 소원을 가진 사람들을 오늘도 찾아가셔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일까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스데반을 보면서 그런 것을 생각합니다. 돌팔매에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데 그 모습자체가 구약에서 하나님을 훼방한 사람들이 저주를 받아서 맞아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데반에게 있어서 단지 육체적인 고난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을 훼방한 사람으로 정죄를 받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재판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용서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들은 저희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첫 번째 기도와 완벽하게 일치하는데 그 때 스데반의 마음의 상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에 자기를 못 박는 죄인들, 그렇게 자기를 못 박기 때문에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 대한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스데반의 자신의 인격 속에서 솟아 나온 사랑이라기 보다는-그런 것도 부분적으로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결정적으로 그런 정도의 관용과 자비심으로 심판을 받아서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심판하는 사람들이 받을 지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심판 때문에 두려워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은 순교를 당하는 그 순간에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놀라운 사랑의 힘입니다. 그 증거가 스데반이 죽기 직전에 하늘을 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놀라운 신령한 교통을 그 결정적인 순간에 경험한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쏟아 부어진 사랑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평소에 스데반에게 이러한 죽음의 상황이 올 때에 너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용서의 기도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면 “Yes I can”이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말했던 사람들은 대개 실패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이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 그러면 은혜를 받을 것이다’가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할 수 없는 사랑을 하나님이 은혜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견디기 힘든 교통들이 있었고 견딜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없었는데, 하나님이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특별한 은혜는 그것을 견디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상황에 대해서 절망했었는데 하나님이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의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정복해 가는 놀라운 비결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부어지는 능력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코 나 자신 속에 참다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부어지는 일 없이는 우리들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갈된 우리 속에 있는 놀라운 영혼의 에너지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에너지가 나로 하여금 다른 삶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른 삶을 계속 살면서 나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고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면서 내 삶에 변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옛날의 하나님의 시선을 끌 수 없었던 그 무기력한 기도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변화된 기도자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기도가 다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변화의 시발점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부어지는 개인적인 은혜를 통해서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현대에서 앞으로 가장 촉망받는 직업중의 하나가 폭파 업이라고 합니다. 치솟은 건물들을 해체하려면 돈이 엄청나게 든답니다. 건설비의 십분의 일정도 든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높은 빌딩들을 지어놓고 나서 그것을 해체할 때가 되면 재래적인 방식으로 쇳덩어리로 두드려서 부수는 것이 점점 힘들어 집니다. 그래서 동원되는 공법이 폭파공법인데 외국에서는 굉장히 발달되어 있답니다. 구조를 전부 조사해서 폭약을 어느 지점에 장착하고 누르면 그대로 주저앉아서 흙더미가 되는 것입니다. 폭약만 잔뜩 갖다 넣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계산해서 어느 지점을 무너뜨리면 그 지점이 무너지면서 다른 것들이 어떤 작용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다 계산해서 가장 결정적인 장소에 배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이제껏 하나님 앞에서 살아왔는데, 우리의 패역,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의 부패한 본성, 그 위에 쌓아올려진 수많은 불신앙의 삶, 이런 것들이 우리가 쌓아올린 것이지만 그것이 또한 우리를 지배합니다. 그것을 우리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무너트릴 수 없고 우리 자신도 무너지지 않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꼭 필요한 부분을 강타하기만 하면 숙명처럼 여기면서 살아왔던 그 그릇된 구조물들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가운데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져야 겠다는 계획표 없이 살다가 그 계획표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만나서 부서진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과정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과정입니다. 우리 자신을 먼저 깨트리시고 깨트린 그 위에 하나님께서 주님의 뜻을 좇아서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한 은혜를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신년 축복 사경회’하는데 무슨 복이 그렇게 터지겠습니까? 사경회 끝나고 나서 복권이라도 당첨이 되겠습니까? 아무리 사경회에서 은혜를 받아도 그 은혜 받은 과정 자체를 통해서 저절로 환경이 변하는 일들은 거의 없습니다. 남편이 핍박했다면 사경회에서 은혜 받았다고 해서 부인이 여기에서 은혜 받는 동안 남편이 거기에서 통곡하면서 용서해달라고 부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부부싸움 할지도 모릅니다. 자식들도 환경도 사업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일 먼저 이 말씀의 집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실패로 가득 찼던 우리의 인생을 하나씩 하나씩 정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었던 불신앙들을 신앙으로 정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극복할 수 없었던 한계들을 신앙으로 극복해나가고, 예전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환난과 시련들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감당해나가도록 만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그런 믿음을 사용해서 결국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고칠 수 없었던 우리의 삶의 상황들을 고치고 변화시켜서 하나님을 증거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반드시 자기의 일을 이루시기 전에 조짐을 보이시는데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를 먼저 지나가게 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그 뒤를 따라오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기차가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철길이 놓여야 되듯이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전능한 힘이 모든 일을 할 수 있지만 먼저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가 그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여러분들에게 품는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들이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든지 열렬한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살 수 있으면 여러분들은 분명히 이 금년을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비춰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런 기도의 은혜를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5.말씀에 은혜를 받으려면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下)
사경회가 가까울 때마다 한번씩 생각해보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에서 10장은 2장과 함께
큰 봉우리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2장에서는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지만 10장에서는 그 성령의 놀라운 부어주심이 이방인들의 세계로 열리는 분기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선교적인 분기점에서 두 사람이 예외 없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사람들을 밟고 지나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베드로와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철저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 중에도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많이 도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품과 구제, 경건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10장에 나타나는 이방인들에게 성령 부어주시는 이 놀라운 사건은 사실 이미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자연스럽게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명백하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이 구약 성경에 명백히 계시되어있음에 불구하고, 2장부터 10장에 올 때까지는 성령 부어주심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그들이 유대민족 제일주의적인 편견에 사로잡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와 부활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지를 경험하게 하셨는데도 여전히 이러한 편견을 붙들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이었습니다.
그 편견을 깨트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베드로를 먼저 부르셔서 그 베드로에게 큰 보자기를 보이시고 거기에 율법에 금한 불결한 곤충들이 내려오는 장면과 그것을 먹으라는 하나님의 명령, 그리고 그것을 먹을 수 없다고 하는 율법에 의지한 베드로의 대답이 반복되고 나서 이 고넬료의 집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아니라 다른 사도, 예를 들자면 바울과 같은 사람이 이 일에 쓰임을 받았더라면 아마 교회는 커다란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머지 열한 명의 사도와 같은 방법으로 부름을 받지도 않았거니와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에 헌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방인을 위해서 선교하는 팀과 유대인을 위해서 선교하는 팀 사이에 중대한 균열이 생겼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정통적인 유대인이요 기존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중심적인 목회자였던 장본인의 편견을 깨트리심으로 그 교회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10장은 굉장히 많은 메시지들을 담고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고넬료가 기도 가운데 베드로를 모셔오고 집회를 하는 것으로서, 쉽게 이야기하면 사경회를 하는 것으로서 이방인 선교, 이방인에게 성령 부어주시는 놀라운 선교의 장이 열리는 광경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주님이 약속하신 사건이기도 했지만 기도를 통해서 성령이 임하셨다 할 것 같으면 이 10장에서는 이후에 성령이 역사 하실 훌륭한 모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은 반드시 이런 사경회를 통해서만 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건이었고 그 후에 부어주시는 성령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지만,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단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임한 것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10장에서의 사건은 말씀에 대한 강론과 함께 성령이 임하시는 광경을 보여줌으로서 역사 하시되 말씀과 함께, 깨달음과 함께 역사 하실 성령의 이후의 역사의 형태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이 교넬료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그것도 기도 가운데 두 사람을 사용하셔서 이방인 선교의 장을 여시는데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유대인이고 이방인이며, 사도이고 그들과는 상종하기 어려운 이방인의 군대에 종사하는 사람입니다. 도저히 만나고 화합할 수 없는 사이이지만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불러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한 일 가운데 본받을 만한 일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는 기도 가운데 이일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베드로를 모셔오면서 자기 주위에 있는 친척과 모든 사람들을 불러모았습니다. 분명히 그는 그저 형식적으로 그들을 초청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그 모임의 의미를 설명했을 것이고 누가 거기에 오는지를 미리 예고해주었을 것이고 자신들이 그에게로부터 무엇을 기대해야 되는지를 모두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람은 훌륭하게 준비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모아놓고 다음에 베드로가 왔을 때, 사경회가 시작되기 전에 이 사람이 고백한 말은 “이제 우리가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주 앞에 있나이다”였습니다. 여기에서 고넬료는 주님을 깊이 경외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또 경건한 사람이었으니까 또 자기의 재물을 흩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산 사람들이었으니까 또 인품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그 덕망을 인정받은 사람들이었으니까 그 나름대로 경건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었고 하나님과의 모종의 영적인 교통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10장부터 시작되지만 이미 하나님께서는 신약시대가 도래하면서 이 복음이 만 천하에 전해질 것을 아셨기 때문에 아직 성령이 그들에게 부어지시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무관심하셨을 리는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지만 자기를 경외하는 그 사람과 모종의 교통을 느꼈을 것이고 이 고넬료는 하나님을 전혀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많이 알아갔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넬료는 사경회를 시작하기 전에 어떤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느냐면 하나님이 베드로를 통해서 내게 무엇인가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이다 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베드로에 대한 존경심이나 혹은 사도의 직분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신앙생활의 한 원리라고 하는 것을 고넬료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누누이 말씀드립니다만 여러분들이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을 잘 하고 그것을 꾸준히 붙들고 살아가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공적인 예배에서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아도 그것만으로는 여러분들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원리입니다. 예전에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서 많이 받은 사람들이 파리한 영혼으로 살아가면서 이상하다고 하는데 이상할 것 하나 없습니다. 은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은혜를 간직하고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개인의 경건 생활에 대한 헌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개인적인 성경 읽기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 그리고 개인적인 기도의 헌신, 이런 것들이 없이는 공적인 예배에 하나님께서 많이 은혜를 쏟아부어주셔도 여러분들이 그 공적인 집회 하나만을 가지고 항상 건강한 영혼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이야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일날 말씀 듣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 다음 주에 와서 그 말씀이 자기에게 쌓여서 자신의 성화의 삶에 있어서 진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앙의 경험에 있어서 진전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다음 공적인 예배를 기다리는 일주일의 삶이 이미 받은 바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고 개인적인 경건의 지성소 속에 들어가고자 하는 분투하는 일주일이 있고 나서야 그 다음 주일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의 빛이 여러분들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고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읽고 신앙생활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던 사람이 주일날 나와서 용서해주시는 하나님 은혜를 중얼거려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실제로 일주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은혜가 경험되면서 그것을 딛고 하나님과 더 합일된 삶으로 나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일주일 동안의 삶이 그런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에 대한 추구는 없고 방만하게 흩어져서 성경도 안 읽고 기도도 안하고 그저 아무렇게나 살아가면서 예배나 빠지지 않고 나오는 정도로는 교회생활은 가능하지만 영적인 풍성함이 있는 신앙생활은 불가능합니다.
왜 매일매일 성경을 안 읽습니까? 왜 매일매일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옛날에 받은 은혜를 자랑해도 그것은 소용없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이 튼튼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주일날이나 수요일이나 집회 때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은혜 받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희생을 요구합니까? 물론 딱딱한 의자에 몇 시간씩 앉아있으려면 허리도 좀 희생하겠지만 영화관에 가도 그 정도는 희생합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경건의 생활을 살아가는 것은 자기의 부패한 육체와의 처절한 싸움입니다. 누구든지 새벽에 이불 덮고 퍼 자는 것이 새벽기도 나오는 것보다 훨씬 본성에 어울리는 것입니다. 그런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을 제대로 이어가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사경회 때 은혜 받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년 내내 목숨을 거는 것이 중요합니다. 새벽에 엎드려서 몇 시간씩 기도하는 것이 좋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좋은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헌신적으로 가슴이 저미도록 기도하는 것이 행복한 때가 도대체 여러분들의 생애 가운데서 몇 일이나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안 그럴 때도 많지만 그것을 극복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프로는 꼭꼭 챙겨도 일년 열두 달 맥체인 성경읽기표 대로 읽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오늘도 나에게 말씀의 깨달음을 주시옵소서’하며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에 대한 헌신을 금년에는 좀 하십시오.
저는 주일예배에 이곳이 가득 차는 것도 기쁘지만 새벽예배가 꽉 차면 행복해서 졸도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가슴 아파하는 교회가 주일 오전 예배에 터질 듯 미어지는데 저녁예배 때는 텅 비는 교회입니다. 개인적인 경건의 삶이 견고하면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의 역사를 다시 한번 써보고 싶습니다. 주일 낮에는 850명, 주일 저녁에는 1200명, 이렇게 바꿔보고 싶습니다. 간절하게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개인 경건생활에서 입증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만 잘하면 더 이상은 필요없느냐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보십시오.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고 구제와 기도에 전혀 힘쓰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칭찬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저 사람이 나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가 베드로입니다.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 자기 자신의 독서,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경건생활을 이어가지만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가게 하시는 중요한 방법은 설교자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일생을 살면서 설교를 통해서 내가 섬김을 받고 있다고 하는 기억할만한 분을 만난 적이 없다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깊이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지식을 간직하고 계속 그 생활이 살아있으면 그 속에서 성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외부적으로 이러한 공적인 예배나 집회를 통해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강한 외부적인 말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그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강력한 경험이 없이는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 자체가 계속 성장하면서 튼튼하게 자라 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도시간이나 성경 읽기를 약속해놓고 하면서도 그것이 점점 형식화되어 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훌륭한 것들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이 항상 그렇게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쓸어 내버리는 강력한 공적인 예배에 대한 경험이 절박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정에서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다가 성령님께서 고넬료의 가정을 통해서 이방에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펼치는 교두보로 삼으실 때에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을 만드셨는지 잘 보십시오. 뜻밖에도 하나님이 베드로를 청해서 오게 하셨습니다. 이것도 사실 고넬료가 제정신으로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와서 상기시킨 일이 “유대인들이 이방인인 너희와 상종할 수 없다는 것은 너희도 아는 바라”였습니다.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베드로는 교계에서 커다란 거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방인의 백부장이라고 해봐야 요즘으로 따지면 동장도 안 될텐데, 황제나 황제 친척이라면 몰라도 그 정도로는 그 사람이 청한다고 해서 율법에도 상종하지 못하게 되어있는데 그것을 깨고 올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사람이 율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넬료 자신도 강권하시는 성령에 못 이겨서 순종한 것이고 동일한 성령이 베드로를 순종하게 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참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 인도의 과정을 통해서 고넬료가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이 사람을 통해서 자신에 대해서 뭔가 말씀해 주실 것이다 는 사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알기나 했겠습니까? 그리고 삶의 정황이 한 사람은 군인이고 한 사람은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이고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통해서 자기에게 말씀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사정을 모두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다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말씀을 전하는 데 방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교인에 대해서 몰라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목회에 있어서 또 다른 방향의 분야이지 설교를 하는데 있어서 나의 모든 사정들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설교할 수 있겠느냐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 자신의 문제는 너무나 특수한데 설교는 너무나 보편적이고 사경회라고 하는 것도 너무나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 보편적인 말씀을 가지고는 특수한 사정인 나를 다룰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넬료와 베드로는 상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삶의 정황도 모두 다른 사람입니다. 하나 같은 것이 있다면 동일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성령의 인도에 민감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만이 공통점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이 고넬료는 자신에게 대해서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것이 필요합니다. 사경회 기간 중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 중에서 내가 참고할 것이 있으면 내가 곁다리로 들어서 보태야겠다고 하는 생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경험적으로도 입증이 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을 때에는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고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심지어는 저 설교자가 내게 설교하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오직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만 자신의 마음의 시야를 가득 채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이 집회는, 이 설교는 나 한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용의주도하게 계획하신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위력입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기대가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실 것에 대한 기대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여기 모인 우리 교인들 가운데는 제가 아직 심방하지 못한 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것을 또한 기대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오랫동안 나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보기를 원했지만 볼 수 없었던 모습, 또 보여주시기는 했지만 내가 인정하기 싫었던 내 자신의 모습, 그리고 듣고 싶었지만 들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음성,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명백하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하는 강한 기대,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모든 신경을 끄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찾아오셔서 나에게만 하는 사경회라고 하는 믿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고넬료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이 베드로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성령 부어주심의 비밀 같은 것은 감히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해 주시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앙이 어떻게 고백되고 있느냐면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로 나타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기대하는 말씀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말씀이었느냐 가 아니라 그 말씀의 근원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모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라고 하는 말이 보여주는 것은 마음이 열려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슨 말씀이든지 내가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는 열린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예화: 이민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가면 예외 없이 주문이 있다-위로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주 문)
사실 진정한 위로는, 우리의 영혼 속에 있는 진정한 필요는, 결국 우리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바뀌어지고 변화될 때 우리 영혼의 모든 필요들이 진정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속이 시커먼 사람에게 ‘긁어내면 하얗게 될 꺼야’ 한다든지 회개하고 뉘우칠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용서받고자 하는 마음조차도 없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하나님의 용서의 가능성에 대해서 가르쳐줘바야 그들에게 위로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 도구가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들이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것이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높이는 삶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IMF가 터졌을 때 신문 잡지마다 이러한 때에는 교회가 성도들에게 힘을 북돋워 주는 위로의 설교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상황은 상대적입니다. IMF때 위로 받을 필요가 없는 부자들도 많았습니다. 은행에 돈을 넣으면 1년에 30%씩 이자를 줘서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위로 받을 일이 없습니다. 거리에 차가 없으니 좋고 골프장에 언제든지 부킹할 수 있고 은행에 넣어둔 돈은 이자가 늘어나니 얼마나 좋으냐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 상대적인 것입니다. IMF때 죄죽임의 교리에 대해서 6개월 가량 설교했었습니다. 그 때 교인이 30%늘었었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그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지간에 그 말씀에 대해서 반응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이것이 가장 훌륭한 준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나를 찾아와서 노골적으로 나를 묵사발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내가 다 쪼개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신앙의 원리는 항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맞추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게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 우리 마음의 의지, 통제될 줄 모르는 우리의 욕망대로 살면 거기에는 반드시 영육간의 죽음이 있을 뿐이고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살기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그 말씀을 좇아서 깨닫고 그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길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번 사경회는 무슨 말씀을 하실 것입니까?”고 물어보는데 저도 모릅니다. 또 알면 뭐하겠습니까? 자기가 생각하던 것과 어긋나면 실망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 것은 필요 없고 ‘무엇을 주께서 말씀하시든지 마음을 열고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에 대해서 내가 무엇이든지 반응할 수 있사옵나이다’하는 마음이 은혜 받을 수 있는 두 번째 마음입니다.
또 하나는 ‘듣고자 하여’했는데 신학성경이든 구약성경이든 듣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샤마’ 희랍어로는 ‘아쿠오’라는 단어는 굉장히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듣는다고 하는 것을 여러 가지로 사용합니다. 긍정적으로 사용할 때는 항상 내적인 순복의 의지를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성으로 듣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도 쓰이기는 하는데 그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뜻으로 쓰일 때는 전인격적인 소원, 혹은 전인격적인 집중을 가지고 지적인 작용에 있어서 귀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냐 세상의 사람이냐는 그가 무엇을 듣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의 풍조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에게 권면 하는 목회자의 성경적인 권고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사람은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귀를 기울입니다. 세상이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1편에서 이야기하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입니다. 여기서 ‘꾀’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예차’인데 ‘카운슬링’입니다. 살다가 어떤 분기점을 만났을 때 악인에게 달려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악인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다가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그 삶의 지혜를 얻는 근원이 성경이 아니라 악인인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눈에 성공할 가능성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가 복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지난 한해에도 여러분들은 무수한 인생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신앙의 고비를 넘기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어떻게 넘기셨습니까? 세상의 꾀를 좇아서 넘기셨습니까? 세상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하셨습니까? 그랬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에 있어서 순간 순간 내려야 될 판단의 지혜를 세상으로부터 듣는 사람들은 잠시 번성하는 것 같으나 반드시 패배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위기, 판단을 해야할 갈림길에서 하나님께 듣고자 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듣고자 하는 사람들은 당장은 너무 어려운 것 같지만 마지막에는(...?)
(예화: 논둑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면 농부들이 낫으로 베어서 풀 위에 눞혀둔다. 처음에는 살아 있는 풀인지 베어 놓은 풀인지 분간이 안가지만 한나절만 지나면 심겨져 있는 풀은 여전 히 번성하는데 벤 풀은 한나절만 지나면 검불이 되어서 다 없어진다)
악인의 번성은 그와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한해를 시작하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년 열두 달이 눈밭과 같이 하얗게 펼쳐져 있는데 실패라고 하는 개떼들이 뛰어 다니는 한해를 만드시겠습니까? 한해를 실패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옥에 간 사람들은 무엇을 특별히 했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그냥 산 사람들이 간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다면 우리 인생에 있어서 위기나 분기점, 판단이 필요할 때에 세상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살면 됩니다. 어두움 속에 있는 지혜들을 따라 살면 우리가 살아보지 않아도 개떼들이 뛰어다니면서 우리의 일년을 다 더럽혀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식의 삶은 지난해로 족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되돌아보지 않겠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그런 식으로 세상의 꾀를 좇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앙생활하기가 무척 힘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수많은 재주와 수많은 지혜가 있는데 언뜻 보기에 미련해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에 자신의 인생을 의지하며 살려니까 갑갑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똑똑한 사람들이 은혜 받기가 더 힘듭니다. 순결하게 똑똑한 것 말고 더럽게 똑똑한 사람들은 정말 은혜 받기가 힘듭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여기 있나이다’ 하는 고백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금년에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신년 말씀 사경회에 다른 사경회 보다 특별히 은혜를 많이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가짐이 조금 다르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실패하지 않아야 될텐데’하며 ‘금년 한해를 출발하면서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이정표를 세워주시든지 내가 일단 그 이정표를 한번 보고싶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내가 한번 귀를 기울이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고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저는 여러분들이 혹시 제게 찾아와서 ‘내가 목사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대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나를 통해서 당신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잘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교인은 설교시간에 딴 일하는 교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식사를 사준다고 하는 것이 제 마음에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집중해서 들으려고 하는데 그래도 못 깨닫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겠다고 하는 의지, 살다가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이 내게 무엇이든지 말씀하시면 내가 그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하는 마음의 소원이 엿보이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목회자를 섬기는 것도 동기 자체가 목회자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섬기는 것이니까 밥 한끼를 먹어도 주님의 이름으로 대접한다는 생각이 드는 데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때는 마음이 불편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전달하는 메신저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해줄 뿐인데도 그것을 느낍니다. 비유하자면 저는 우유를 배달해주는 사람입니다. 배달해주었을 때 맛있게 먹어도 보람을 느끼는데 그 우유의 제조공장주인이신 그분은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고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그 사람이 우리 하나님 안에 있는 합일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신앙생활의 놀라운 특징은 주님이 말씀하실 때에는 자신의 모든 의견을 끊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충분히 자기에게 말씀하셔서 자기가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에 맞추어서 살고자 하는 내적인 순복의 자세를 가진 사람의 그 청취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결정적인 특징입니다. 고넬료와 함께 한 사람들이 그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들의 마음을 대표해서 고넬료가 고백을 했을 뿐이지 여자나 어린아이나 친척이나 가족이나 할 것 없이 모두의 마음이 고넬료와 같았습니다.
지난 한해동안도 우리가 부주의함 속에 흘려보낸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부주의하게 흘려보냈기 때문에 우리를 향해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눈물 어린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도 우리들이 놓쳤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부어졌더라면 우리들이 그렇게 살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놓쳤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지지를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속된 마음들이 우리의 삶의 동기를 지배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실패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한 해를 맞고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있는 사람은 경험하지 않고도 주님이 말씀하실 때 깨닫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복된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라도 깨닫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가장 불행한 사람은 끝없이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실패를 반복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번 일주일 동안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지만 이번 일주일 뿐 아니라 일년 내내 이런 태도가 견지되어야 합니다. 상황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매일매일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적인 순복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 그 삶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고대하며 살아가는 자의 삶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끊임없이 주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말씀들을 떠내려보내고 있는 그 때에 이렇게 내적인 순복의 자세를 가지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주님을 아는 지식, 은혜의 빛, 지식의 열이 계속 쌓여서 그의 마음속에 축적되어서 그로 하여금 보다 더 거룩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섰나이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사실 베드로 앞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베드로가 하나님입니까?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을 향해서만 기대가 모아진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실패에 대해서 핑계를 대는 시간만큼 기도를 한다든지 말씀을 탐구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훨씬 더 범죄하지 않고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을 향해서 하나님이 간단히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어찌해서 그 선악과를 먹었느냐?” 이렇게 간단하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답변은 복잡하고 길었습니다.
(예화: 가끔 상담하러 오는 사람 중 자신에 대한 처방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을 통해서 목회자에게 자신을 과시하려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 대해서 아담에게 물어본 질문은 간단했는데 대답은 복잡했습니다. 결국은 수많은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하느라고 보내는 시간도 많지만,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도 우리 영혼이 많은 고통과 해악을 경험하지만 그러나 핑계 대다가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더 많이 허비합니다. 그런데 사실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 물으셨네
하니 베드로가 “예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대답이 아담처럼 복잡하지 않고 간단합니다. 죄인인 한 여자가 마태복음 26장에서 옥합을 가져와 깨트려서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그 장면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여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거기에 한마디의 대사도 나오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향유를 부으면서 그 거룩하신 품성 앞에 섰을 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느낀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은 이렇게 단순하고 명징 합니다. 연막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비춰보면 우리의 고백도 아주 간단합니다. 어두움 속에 살다가 주님이 어느 순간 말씀의 빛을 비춰주셔서 우리가 그 빛을 받으면서 말씀의 거울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게 되었을 때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이 너무 비참한 몰골이면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그 모습이 그래도 하나님 앞에 고귀한 모습이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밖에 밀려오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진실은 단순하게 밀려옵니다. 어떨 때 그렇게 진실해집니까? 그런 진실한 마음을 가진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 면전 앞에 서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술취한 목소리로 기도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열정적이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영성이 정말 순결하고 하늘로부터 말미암는 영적인 특성들을 가진 신령한 것인지를 입증하는 것은 혼자 있을 때나 많은 사람들 앞에 있을 때나 항상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물론 혼자 있을 때도 개판이고 많이 있을 때도 개판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차이가 거의 없는 상태가 수준 높은 영성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진실해질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때로는 그것이 자신에게 커다란 고통과 아픔을 준다고 할지라도 진실해질 수 있는 것은 아무도 보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서 끊임없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하나님 앞에 서는, 독대하는 장구한 삶 속에서 형성되는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요셉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찌 득죄하리요”할 때 그 밀폐된 방에서 하나님을 느끼게 된 것은 한 순간의 역사가 아니라 장구한 세월을 요셉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거기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 앞에서 산다는 말을 참 잘 사용합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서 산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이 나를 보고 계시며, 주님이 나를 판단하실 것이며, 그 판단에 나를 기꺼이 맡기며, 그 판단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내가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의로운 사람대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야지 만 의로운 삶 속에서 교만을 면할 수 있고, 악하고 더러운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야지 만 자신의 불결하고 더러운 모습을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직해지는 것, 그것도 역시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덕성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금년 한해를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주가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기상도 보면서 신문 앞에서 1년을 살고 싶습니까? 누구 앞에서 살고 싶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가 어느 삶의 자리에 놓여있든지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하나님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보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서려고 몸부림치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이 순간도 붙들어 주십니다. 그런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을 향한 간절한 두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금년에 하나님을 많이 만나고 그분의 더 큰사랑을 깨달아서 여러분들이 이제껏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뿌리깊은 패역의 근원들을 고치는 것과 그래서 새 사람이 되는 것과, 두 번째는 그렇게 변화된 새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진실하게 섬기면서 인생을 사는 것, 그런 한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귀한 신앙적인 가치관이 여러분들에 있어서도 소중한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때가 믿음대로 살 수 있는 기회입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이제는 주께서 일하실 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가지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가 하나님이 일하실 때입니다”라고 시인이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같은 시기에 정말 믿음으로 살기 힘듭니다. 지금 어떻게 꼬박꼬박 주일을 쉬고 수요예배에 잘 참석할 수 있는 직장을 고르겠습니까? 이런 때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기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신앙인이 경건에 대해서 많이 양보하며 사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핍박받지 않으려고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세상의 현실 사이에서 신앙을 양보하면서라도, 그리스도인의 독특성을 잃어버리면서라도 세상과의 신령한 갈등보다는 죄악된 평화를 원하는 그런 시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상황이 어둡고 곤고한 때이기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신앙을 지키면서 잘 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더 강력한 시선을 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노아는 당세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했습니다. 물론 노아의 경건과 신령한 신앙생활, 그의 순종하는 자세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노아가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그 배경이 완전히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였기 때문에 그런 파격적인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두운 시대에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샛별처럼 빛납니다. 여러분, 저는 미래론 자도 아니고 금년 한해를 어떻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참된 말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적을 것이고, 그러한 신앙의 필요성은 점점 증대될 것이다 는 것은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삽시다. 신앙으로 삽시다.
말씀에 은혜 받을 준비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