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부패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첫 회심의 축복과 회심경험(롬7:17) 2004.4.4 십자가사경회(저녁) 1
2. 죄가 은혜의 샘을 막는 법(롬7:17) 2004.4.5 십자가사경회(저녁) 19
3. 은혜의 상태로부터의 부패 (1)(롬7:17) 2004.4.6 십자가사경회(저녁) 37
4. 은혜의 상태로부터의 부패 (2)(롬7:17) 2004.4.7 십자가사경회(저녁) 60
5. 은혜의 상태로부터의 부패 (3)(롬7:17) 2004.4.8 십자가사경회(저녁) 81
6. 은혜의 상태로부터 부패 (4)(롬7:17) 2004.4.9 십자가사경회(저녁) 97
1. 첫 회심의 축복과 회심경험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7:17)
이번 십자가 사경회의 전체의 주제는 로마서 7장 17절을 토대로 “은혜와 부패” 라는 제목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이 부패는 먹는 부패가 아니라. 썩는 부패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어떻게 신자가 은혜의 상태에 있다가 부패해져서 뒤로 물러나게 되는가를 여러분들이 들으시겠는데 이번 사경회부터는 다른 때와는 다리게 설교가 진행되는 것이 한편의 커다란 논문처럼 진행되니까 여러분들의 이해를 위해서 진행되고 있는 순서를 따라서 소제목이 위에 차곡차곡 뜨겠습니다. 그러니까 메모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면 사경회가 끝나면 그 다음날 또 지난번은 두꺼웠는데 얇게 만들어서 여러분 모두 받아보실 수 있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진행되는 이 교리는 사실은 제가 이 교리를 터득하고 깨닫기 위해서 거의 10넌 가까이 고통을 받았던 그런 교리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역시 똑같이 저처럼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 분투하는 사람들에게는 똑같이 나타나는 암초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 사실들을 여러분들이 깊이 깨달으면 아마 그동안에 은혜의 상태에서 뒤로 물러갈 때마다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던 그 공허한 몸부림으로부터 여러분들이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7장 17절에 보면 마치 신자가 죄와 분리된 것처럼 “이제는 이렇게 행하는 것이 이렇게 역사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죄를 행하는 그것이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다.” 그렇게 신자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러면 신자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잘못 행하면서도 “그것 뭐 내가 그랬나? 내 안에 있는 죄가 그랬지. 나는 그냥 시키는 것 밖에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이 날 가지고 혼내려면 내 죄를 혼내든지, 그래야지 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 로마서 7장은 신학적으로 엄청난 논쟁이 되어왔던 굉장히 어려운 신약의 블랙홀중의 하나입니다. 특별히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뒤에 이어지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리요.” 하는 것이라든지 또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본다.” 라고 하는 이 구절에 화자가 누구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신자냐? 불신자냐? 아니면 바울 자신이냐? 아니면 바울 자신이 신자의 경험을 대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냐를 두고 엄청난 신학적인 논쟁들이 있고, 그리고 멀리는 이방인들에 대한 이야기라고부터 시작해서 뭐 구약의 백성들이라는 것부터, 또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거듭나기 직전의 상태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신자의 상태까지 아주 많은 폭넓은 견해들이 펼쳐지고 그리고 여기에서 아주 치열한 신학적인 논쟁들이 일어나는 대목들입니다. 여기에서 그 문제를 다 다루어봐야 여러분들이 머리만 아프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이 부분은 요한 칼빈을 비롯해서 존 오웬이나 걸출한 뛰어난 개혁주의적 신학자들이 한결같이 이것은 신자의 경험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라고 하는 사실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바는 내게 있으나” 그럴 때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불우이웃 돕기를 한다든지 아니면 도덕적 행실을 고치고 싶다든지 하는 그런 종류의 일반적이고 도덕적인 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창조의 목적 시리즈를 모두 들으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선이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에 대해서 모두 이해 하셨으리라 믿고, 또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1장을 오늘 공부하셨으니까 이 선이 무엇인지 여러분들이 명백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선은 일반적 도덕적 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말이 안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 안 믿는 사람도 선을 행하기 원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선은 그런 일반적 도덕적 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머물고 또 그렇게 살고 싶어 하고, 자기 이외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주도적이고 지속적인 소원입니다. 물론 그 사람 속에는 죄도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는 그러한 것을 따라서 살지 않으려고 하는 갈망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있지만 그러나 주도적으로 흐르는 것은 순간순간 죄를 짓지만 그러나 주도적으로 가슴 속에 흐르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고 싶다. 거기로 돌아가고 싶다. 여러분의 가슴에 와 닫게 더 쉽게 이야기 하면 예수님이 나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나는 이렇게 살면 되나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 그 얘기입니다. 그것이 신자가 아니면 주도적으로 그 사람 마음속에 있을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신자의 경험이란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신자의 경험에서 여기에서 이렇게 죄 때문에 절망하고 있는 이 부분은 우리들이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되겠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똑같이 이것을 신자의 경험으로 보면서도 생각들이 조금씩 나뉩니다. 그런데 나뉘는 것은 대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이 부분을 바울 자신의 경험이라고 보면서 바울 자신이 어떤 특별히 어떤 죄에 졌다. 그런 것 보다는 더 성결해지고 더 성결해지고 높은 성결의 수준으로 가게 되니까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죄를 더 많이 발견하면서 절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그런 뜻입니다. 상당한 타당성이 있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진짜로 점점 더 거룩해지고 거룩해져 갈수록 자기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절망적인 인간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해석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저는 그런 해석의 가능성들을 충분히 인정하고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경험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성경에 의해서도 입증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충분히 인정하는데 저는 좀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그런 견해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보태야 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이것은 당연히 점점 더 거룩해지고자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의 해석을 바울이 아주 영적으로 높은 성화의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에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그러면 굉장히 많은 낮은 수준의 사람들은 이런 것을 발견 못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아주 낮은 수준에 있는 우리들도 이것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발견할 때 없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감히 바울하고 맞먹은 수준까지 올라갔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어떻게 보느냐면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이 부분은 오히려 사도바울이 신앙의 경험 가운데 내면적으로 그 죄에 깊이, 죄의 강력한 세력을 느낀. 쉽게 얘기하면 은혜가 좀 떨어진 상태에서 죄의 강한 힘을 느끼는 상태의 고백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다 좀더 상세한 설명을 붙이고 싶습니다. 이것은 우선 존 오웬의 견해에 동의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보태야 될 것이 뭐냐면 이것은 그 사도바울의 높은 수준이냐? 아니면 땅바닥에 떨어진 수준이냐? 그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 사도바울 안에 있는 죄가 객관화 되어가고 있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죄와 은혜의 지배를 꼼꼼히 듣고 잘 정리한 사람은 이러한 생각이 날 것입니다. 기도와 관련해서 이 죄와 은혜의 지배를 다루면서 이 교리가 서로 연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 많이 해야 합니다. 엊그제 아침에도 어느 자매를 만났는데 자기가 요즘 교리 공부한다. 그러면서 고백하는 이야기가 공부를 굉장히 많이 해야 되겠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만 해도 굉장한 진전이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 죄와 은혜의 지배에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리 가운데 어떻게 죄가 기도를 고갈시키는가도 배웠고, 그 다음에 두 번째 기도가 어떻게 죄를 죽이는가 하는 것도 여러분들이 배운 기억이 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그 두레박의 비유가 생각날 것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마음이 기도의 은혜를 거의 고갈했는데 진심으로 저 깊은 우물에 두레박을 던지듯이 겉으로 하지 말고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를 길어내면서 끌어 올리면서 기도를 하다 보면 그러면 이 마음에 쇄신이, 서서히 마음의 틀이 바뀌고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이 죄와 내 마음 속에서 죄가 나와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죄 가운데 사는 사람보고 “똑바로 살아 너 죄 투 성이야.” 그러면 항상 하는 말이 “내가 뭘” 그러죠. “은혜 생활 잘 해 그 죄 가운데 있지 말고.” 그러면 “내가 뭘” 그래놓고 하는 말이 “내가 주일을 안 지켰어. 헌금을 떼어 먹었어 십일조를 강탈했어. 교육관 헌금도 냈는데 그리고 내가 교회를 몇 년을 섬겼는데 내가 개척 공신인데, 건축할 때 집도 팔았는데” 온갖 것 다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매일 보는 사건 아닙니까. 그러니까 죄가 하나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는 들어오면 이미 벌써 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마음 속에 죄가 들어오기 때문에 일단 딱 들어와서 퍼지면 마치 이 자궁에 아니가 딱 착상될 때 엄마와 아이가 분리가 안 되잖아요. 엄마가 아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이는 아이고 엄마는 엄마잖아요. 다른 것이 외부에서 들어와서 붙은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엄마가 아이와 하나는 아니죠. 그런데 애기가 죽어도 엄마는 살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로 생명이 있어서 붙어 있는 동안에는 하나입니다. 그것도 똑같이 죄는 들어오면 신자의 몸과 영혼 속에 깃들게 되는데 일단 들어오게 되면 동일체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스며들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성품과 기질, 성향, 그런 속에 다 벱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 수록 깊이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찾아낼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찾아 낼 수가 없습니다. 찾아낼 수가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매일 깨달아도 찾아내기가 어려운데 예배시간에 와서 매일 졸고 기도도 하나도 안 하고, 교회에 오면 맨 친구들 하고 어울려서 밥이나 사 먹으러 돌아다니고 말이죠. 탁구나 치러 돌아다니고 말이죠. 돈 많으면 골프나 치러 다니고 말이죠. 그렇게 하니까 그것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죄가 깊이 스며들어가는 것입니다. 죄는 자기 자신을 직접 공격하지 않으면 다 참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뭐 아무리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고 그래도 그것은 죄 자체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 아닙니다. 죄 자체에 대한 공격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로 마음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죄는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분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간이 철저하게 이 죄가 성품과 기질 깊이 스며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랜 세월이 흐르면 그것이 뼈 속까지 스며들어서 도저히 이 사람이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패역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그 사람이 죄에 바로잡힌 사람이 되고, 나중에는 정말 그가 행하고 살아가는 모든 삶이 겉으로 보기에는 교회에 나와서 반듯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 같고 뭐 헌금도 하고 왔다. 갔다. 하고 봉사도 하고 몰려다니면서 밥도 먹고 말이죠. 탁구도 치고 그러는 것 같아도 그러나 결국 마지막으로 보면 그 사람이 나중에는 악의 화신처럼 되는 것입니다. 죄가 깊이 베어서 도저히 영적으로 어떤 선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지배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착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쭉 베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를 쭉 끌어올려서 진심으로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 안에는 그가 거듭난 사람일 경우 그 사람 안에 그렇게 살면서도 그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주도적인 소원이 그 밑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와도 누구 말마따나 일사불란하게 승진을 해서 점점 빨리 승진해서 장로까지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칩시다. 그래서 그리고 교회의 목사가 인정해서 “야 내가 너 아니면 누구를 보고 목회를 하겠느냐. 너 아니면 내가 쓰러진다.” 그래서 물고 못 놓고 그리고 진짜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존경하고 사랑해줘도 그것이 뭐냐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 사람에게 만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족이 안 됩니다. 속에 주도적으로 흐르고 있는 그 소원이 뭐냐면 하나님이 나를 구속하시고 창조하신 그 선한 계획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야지 영혼이 즐거워하고 만족합니다. 물론 내 안에 있는 죄는 반란을 일으키겠지 그러니까 그 속에서 경험되는 곤고함을 사도바울이 여기에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뭐냐면 높은 거룩함의 경지에 도달했다. 안 도달했다.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뭐냐면 이것이 사도바울같이 고도의 영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웬만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경험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면 누구든지 죄가 객관화 되는 것을 경험하면 이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왜? 내가 이 죄가 운데 살았습니다. “내가 뭘” 그러면서 씩씩하게 살았거든요.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합니다. 마음 깊이 기도가 되기 시작합니다. 점점 점 기도가 됩니다. 쭉 기도가 되니까 계속 기도가 되면서 그 기도가 내 영혼을 계속 쓸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한 참 쓸고 지나가니까 먼지가 털어지고 나니까 그다음에 나오는 것이 시커먼 죄의 뭉치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 각성입니다. “아니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이번 신문에도 보니까 한참 딴 길로 갔다는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그런데 그것은 자기가 어두워서 못 본 것입니다. 그 때 기도를 통해서 그것이 객관화 되는 것입니다. 그 때 확 나타납니다. 그 때에 무엇을 발견하게 되느냐면 이것을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죄라는 사실을 깨달아요. 그리고 이것이 정말 가슴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여전히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내 육신이 다시 그 죄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영혼으로 이것을 통제하기에는 너무 이미 내 자신의 힘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신자가 자기의 죄가 객관화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이 7장 뒤편에 나와 있는 이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그렇게 본문 해설을 살펴보고 그러면 이제 이것을 우리들이 크게 두 번째로 첫 회심의 축복과 관련해서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먼저 회심이 무엇이냐? 이것부터 설명해야 되겠죠. 이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구원과 관련시켜서 회심을 말할 수도 있고, 성화와 관련시켜서 회심을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과 관련시켜서 말할 때에는 이 회심이 딱 한번 일어나는 것이고 성화와 관련시켜서 말하자면 이 회심은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회심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회심은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우선 소극적인 측면은 자기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에배소에서 온 교회의 장로들에게 순교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면서 유언 적으로 남긴 말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여기에 들어와서 너희에게 거리낌이 없이 어디서나 전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었다. 이 두 가지가 바울이 전한 복음이 회심의 복음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회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깊이 그 죄를 깨닫고 그리고 그 죄가 자신을 정죄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그리고 그것을 깊이 후회하고 의지적으로 그것으로부터 돌이키는 그 회개와 그리고 그러므로 내가 이 모든 죄 가운데서 오로지 용서받을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고, 그리고 용서받은 이후에도 내가 의지하며 나 스스로 살아간다. 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를 그렇게 붙들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그 선한 목적을 따라서 살게 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 그러면서 그분을 전적으로 믿는 그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이 다른 곳에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으며 그리고 내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라고 하는 그 절대적인 의존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의 적극적인 요소입니다. 회개와 믿음 이 두 가지가 회심의 요소입니다.
거듭나지 않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이 회심은 일생에 딱 한번만 일어나는 회심입니다. 그리고 이 회심은 반드시 중생의 결과로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시는 그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회심입니다. 그러나 성화에 있어서 이 회심은 많이 반복되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은혜를 받고 자기가 깨뜨려진다. 그러는데 그래서 자기가 깨뜨려짐의 정체를 결국 죄에 대한 사랑이 깨뜨려지는 것이고 자기 의에 대해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에 대한 사랑에서 깨뜨려진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죄를 이제 혐오하고 미워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자기 의에 대해서 깨뜨려지게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기를 믿었습니다. 그것이 자기 의입니다. 자기를 믿고 자기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 자기를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자기 의입니다. 이런 의가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의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기도하러 올라갔던 새리와 바리세인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새리는 자기 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고개를 들고 기도해야 되는데 고개를 들고 손을 들기는커녕 면목이 없어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그리고 말을 잊지 못하고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자기를 의지하는 모습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의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세인은 어떻습니까? “아, 나는 이 새리와 같지 않으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쫙 이야기 하는데 결국은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어떤 의존의 마음도 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자기 의가 아직까지 깨뜨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의 의가 깨뜨려지는 만큼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되고, 예수님을 계속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 의지하는 마음속에서 살게 될 때 자기 의가 쌓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의가 영적생활의 파괴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이 우리를 아주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집안에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불러주셨어도 그것은 우리들이 이 악에게 유혹을 받거나 혹은 양심의 송사를 받을 때 사용하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는 항상 하나님이 “네가 누구냐?” “나,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할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잘났다.” 이러실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하나님 저는 그냥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용서해주신 전직 죄인이옵나이다.” 그 속에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회심은 반복되지 않으면 성화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거듭나고 성화의 길에 들어가는 순간에 죄가 모두 사라져버린 다면 그런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가 남아있기 때문에 결국은 그 죄가 바로 그 죄를 사랑하게 만들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자만하게 만드는 요소이지 않습니까. 그것들을 끊임없이 죽이는 것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회심이 계속해서 반복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핵심적인 과제가 뭐냐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회심하는 것과 두 번째는 회심한 신자들에게는 그 회심을 어떻게 보존하며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오전에 예배를 드리니까 인터넷에서 어느 성도가 가슴 아파 했던 것처럼 그렇게 다리 꼬고 앉아서 음료수나 마시면서 예배드리고 군것질이나 하는 교인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 예배드리나 마나입니다. 거, 왜 와서 여기 앉아서 시간 보내요. 그 시간에 차라리 극장가서 영화나 보지 패션오르 크라이스트나 보지 그것이 뭡니까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옛날에 사도바울의 버금가는 회심을 했어도 지금은 그 회심을 잊어버렸습니다. 회심의 은혜가 보존이 안 됩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면 그러나 오늘도 보면 상당히 많은 지체들이 그렇게 가슴 아파하면서 자기가 깨뜨려집니다. 그러면 일회적 회심은 옛날에 거듭날 때 이루어졌지만 그 회심이 갱신되는 것입니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계속, 그렇게 계속해서 회심이 회심되는 가운데 신자의 영적 생명이 활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심 중에서도 이 첫 번 회심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첫 번 회심이 중요하느냐면 처음 회심하는 그 때는 말하자면 창세기에 비유를 하자면 “빛이 있으라.” 그러니까 캄캄하던 땅에 확 하고 빛이 비추게 된 것처럼 그것이 바로 첫 번 회심의 사건입니다. 그러면 이후의 회심은 뭐냐 “밤이 되고 아침이 되니 그 다음 날이더라.” 가슴에 뭐가 이렇게 와 닫지 않습니까? 절묘한 비유 아닙니까. 그러니까 첫 번 회심이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 회심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이 거듭난 결과 이제 인간의 의식이 그것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게 되는데 그 순간에 인간의 영혼 안에, 내면세계 안에서는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되느냐면 이전에 나라는 인생을 지탱해 왔던 개뼈다귀 같은 가치관들이 그 순간에 와르르 무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면서 이 회심을 통해서 무너진 것들이 정리되고 그리고 새로운 것들이 쌓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심을 하는데도 아주 깊고 오묘하고 매우 방대한 양의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간단하게 바로 예수님이 너의 죄를 인해서 죽었고, 그럼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버린 멀리 떠난 탕자다. 이런 간단한 사실 하나만 깨닫고도 와르르 무너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세워져야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 다는 것과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과 나는 끔찍이 더러운 죄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주셨다. 까지는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 제대로 된 성경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깨닫게 되었는데 그다음에 들려오는 매시지는 돈 많이 벌어서 건축헌금 해라. 그리고 죄는 짓되 호르라기 불면 빨리 돌아올 수 있을 정도까지만 지어라. 그러면서 새마을 성공사례 같은 인생 성공담 들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의 모본이 되는 것처럼 그런 비 영적인 틀 속에 메여서 신앙생활 하게 되고 이 복음이 깃들이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다 때려 부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니다. 그리고 기둥 몇 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붕을 막 얹는데 더 이상 건축 자재가 안 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따뜻한 여름에는 그래도 거기에다 가마니 데기라도 덮고 잡니다. 그런데 무섭게 바람이 부는 밤물결이 높이 설렐 때 그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북풍한설이 몰아칠 때 그러면 차라리 옛날에 집 안 부스고 학 고 방 같은 데 있는 사람이 더 행복해 보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후에 정말 회심한 이후에 그 회심을 보존하면서 신자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꾸준히 건축자재가 날아져 나와합니다. 계속해서.
저는 한번도 설교하기 위해서 공부해 본적은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설교하기 위해서 공부해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궁금한 것이 뭐냐면 이 상태에서 지성이 멎으면 나는 아주 나쁜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생을 마칠 것이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니까 이 지성의 탐구와 자신의 마음과 온 몸과 그리고 온 삶이 함께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지 지성은 집에서 놀아라. 하고 가서 발가지고 교회에 가서 손으로만 열심히 일하고 아니면 손도 놀고 발도 놀고 수표만 보내고, 그러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들 중에 수표만 보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구도의 삶에 남김없이 투입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첫 회심과 이후의 회심의 차이를 제가 설명했죠. 여러분 첫 회심이 어떤 점에서 그런 놀라운 축복을 가져다주느냐? 이 첫 회심을 가리켜서 존 오웬은 “하늘이 열리고 샘이 터지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 보통 때였을 것 아닙니까. 산에는 산이 있고, 바다에는 물이 있고, 강에는 시냇물이 흐르던 그런 시절 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온 지면을 내가 물로 다 덮겠다. 그러니까 비만 내리셔도 모자랍니다. 그러니까 샘을 터칩니다. 그러니까 밑에서 솟아나고 위에서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산이 모두 완벽하게 다 물속으로 잠겨버립니다. 그렇죠. 첫 번째 회심이 바로 그런 놀라운 것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격이 조용해서 그렇게 확 뒤집어진 적이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 회심의 경험은 개개인에 따라서 양태가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때는 말씀을 전해보면 이 첫 번째 회심을 하는데 거의 절제를 못하는 정신이 나사 풀린 사람처럼 길길이 뛰고 심지어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한 30센티씩 뜁니다. 맑은 정신에 한번 해 보라. 그러면 못합니다. 기도하고 나면 정말 무릎이 시퍼렇게 멍이 드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뛰는 것도 없고, 뒤집어 지는 것도 없고, 그냥 그 자리에 그냥 가만히 퍼 앉아서 휴지만 계속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의 사람이 이 사람보다 더 샘이 많이 터지고 하늘이 많이 열린 사람이냐? 그것 아닙니다. 회심의 양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첫 번째 회심에서 하늘이 열리고 샘이 터지면서 확 하늘의 자원이 쏟아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때에 강력한 세 가지 축복이 주어지게 되는데 우선 첫 째는 뭐냐면 사죄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정죄의 경험까지는 있습니다. 이것을 놓고 이제 많은 청교도들과 개혁 신학자들이 중생 이전에, 인간이 거듭나기 이전에. 거듭나기 전에 어떤 변화가 먼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정석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중생이전 준비설이라고 누가 명한 사람은 없는데 내가 그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중생이전 준비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 이전 준비 설에 대해서 이제 많은 신학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 하지만 그래도 공통적인 것을 보면 우선 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이 은혜의 수단아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꼭 설교일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지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은혜의 수단아래 있고, 거기에서 자신의 양심이 그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이 마음과 이 내면의 세계에 뭔가 이렇게 커다랗고 강력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뭐냐면 두려움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고 그리고 그 죄로부터 구출 받고 싶다는 갈망을 갖게 된다든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 자체가 중생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같다가 뒤로 물러서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거듭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날 우리들이 교회에서 잘 생각하십시오. 혼란을 경험하는 것이 뭐냐면 자기가 거듭난 적이 없이 거기까지 갔다가 뒤로 미끄러져서 좀 세상에 빠지고 죄에 빠진 것이거든요. 그런데 바보같이 교회도 본인도 자기는 거듭났는데 은혜가 약간 떨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그를 치료하는 접근방법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왜? 거듭나지 않았으니까 그 사람은. 만약에 거듭나서 뒤로 물러갔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죄를 죽여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야지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가 거듭나지 못하고 뒤로 물러간 것일 경우라고 할 때는 그가 아무리 죄를 죽이려고 해도 죄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불신자는 죄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엄청난 혼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첫 회심에서는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셨다. 라고 하는 사죄에 대한 놀라운 감각이 확 물 붓듯 부어지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용서하셨다. 라고 하는 이 사죄에 대한 탁월한 감각이 확 주어지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첫 회심의 경험 뒤에는 반드시 뭐가 있습니까? 그 죄를 벗고 홀가분해지는 해방된 기쁨, 그리고 내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나니. 하는 이 죄로부터 벗어난 해방감 이것이 이 첫 회심 속에서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커다란 문제라고 하는 인식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인생의 근본적인 불안이나 불행 그 자체가 이 땅의 유한한 자원을 내가 조금 소유한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심을 하면서 하늘 문이 열리면 사죄의 놀라운 감각이 주어지기 시작할 때 그 때에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가 하나님의 용서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의 은총아래서 살아가는 이 행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된 행복이라고 하는 강력한 감각이 그 사람 속에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로 그 감각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신자가 고통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주어지는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뭐냐면 그 앞에 나오는 사죄의 경험과 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용서 받았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느껴야지 알 수 있죠.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을 통해서 사죄를 확인하게 된ㄴ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죄 많은 여인이 와서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무슨 뜻입니까? 그러니까 사죄의 경험이 있는 곳에는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는 사죄의 경험이 공존한다. 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심을 많이 했어도 사실 석 달 전에 한 회심은 잘 생각이 안 납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것은 맨 날 처음 회심, 그래서 매일 첫 사랑 타령하지 않습니까. 첫 사랑 타령의 비밀도 내가 다 얘기 해주겠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생전 처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본 것입니다. 그 크기도 크려니와 크기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뭐냐면 처음 그 순간, 그 한번도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속에 그 사랑이 확 하고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확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최초의 감각, 그것을 잊어버릴 수가 있습니까. 잊어버릴 수가 없죠. 그렇죠. 어느 화장품 잡지를 보니까 거기에 여자가 태어나서 일평생 립스틱 한개 반을 먹는데요. 그래서 철저하게 양리적인 성분을 조사해서 먹어도 문제가 없도록 그렇게 만듭니다. 남자는 두개 반을 먹는답니다.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일평생 두개 반을 먹는답니다. 여자는 한개 반을 먹고, 사람이 태어나서 수천 번의 키스를 하고 죽어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은 뭐냐면 첫 번째 그 사랑하는 사람과의 입맞춤, 잊을 수가 없죠. 그것이 선명하게 남아서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요? 아무런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처음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 하늘이 열리고 양과 이런 것도 크지만 그러나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거듭나지 못했던 죄인들의 마음속에는 아주 이질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한번에 확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회심을 또렷하게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만 사랑해 본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시간이 1년을 갔느냐. 3년을 갔느냐 6개월 밖에 안 갔느냐 심지어는 한 달밖에 안 갔느냐.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어쨌든지 그 회심이 딱 주어지는 그 순간에 정말 그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정말 이 세상에 고아와 같이 살아온 버림 받은 자와 같이 살아온 이 서러운 인간을 찾아오셔서 사랑해 주신 분이 하나님 밖에 없으시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감격과 함께 이 감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이것이 식어지게 되면 그 신자가 계속 고통하고 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참 잃어버렸는데 안 아프데요.” 그러면 잠깐은 그럴 수 있습니다. 왜? 더 강력한 죄의 즐거움이 개입되면 그리고 너무 병적으로 인간의 심령이 굳어져 버리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 그것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표입니다. 거듭나면 그럴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주어지는 것이 뭐냐면 첫 회심에서 영광에 대한 감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광에 대한 감각은 뭐냐면 아주 쉽게 생각하면 그 하나님이 지극히 영광스러운 분이시며 자기는 깊이 죄인인데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많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제 자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고 싶다. 라고 하는 소원입니다. 인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 인식이 생겨나고 그 눈을 가지고 이렇게 보니까 가슴 아픈 일이 많이 보이는 것입니다. “왜 저 사람은 나보다 먼저 예수 믿었는데 왜 저렇게 신앙생활을 할까?”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입니다. 이 영광에 대한 감각은 그 하나님의 본체적인 영광을, 하나님 자신이 굉장히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그 하나님이 정말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라고 하는 그것은 어떻게 파악이 되느냐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함으로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라고 하는 것을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예전에는 내가 우주와 이 세상에 있어서 내가 최고인줄 알았는데 최고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인간 밖에 없는 줄 생각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신 지극히 높고 지존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존재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티끌과 같은 인간들이다. 라고 하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자기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고 하는 옛 생각을 모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지 않습니까?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모든 인생의 목적, 이 우주의 목적이 자기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도 내 행복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가 지존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실은 그런데 자신이 지존한 것이 아니라. 지저분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면 도덕적으로 자기가 얼마나 불결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결하시고 그러니까 자기 의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순전하게 살아도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자기를 비춰보면 정말 불결한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전한 삶을 살면 살수록 자기 안에 있는 그 죄 성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탄식하고 더 많이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이야기 하는 회심의 경험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에 역사하시는 것을 보면서 그 거룩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 지성과 의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밖으로 이렇게 흘려보내시는 한 방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 있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고자 하는 의지가 나타나있는가?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우리 마음대로 안 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 때 무엇을 깨닫게 되느냐면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거나 혹은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그 속에서 하나님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하고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역사하시고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다른 의지를 가지고 역사하시는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 지성과 의지의 흐름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본체적인 영광을 경험하고 나면 그 다음에 인간은 자신이 그 본체적인 영광의 빛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 안에 주님이 충분히 살아계셔서 자기를 통해서 그 주님의 영광의 빛이 사람들에게 비취는 그런 발산하는 영광을 보여주는 그런 사람으로서 효과적인 영광을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그런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만족스럽고 내게 좋아도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주님이 아파하신다고 생각하면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첫 회심에서 이렇게 사죄에 대한 그리고 사랑에 대한 그리고 영광에 대한 탁월한 감각들이 주어지게 되는데 특별히 이 영광에 대한 감각은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과 함께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에서 여태까지는 전혀 존재하지도 않았던 영적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 이 영광에 대한 감각이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과 함께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배부르고 등 뜨뜻하고 근심이 없고 좋아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진짜 아무것도 염려가 없었는데 그런데 이제 이렇게 하나님의 이 회심을 통해서 이런 놀라운 것들이 들어오게 되니까 신령한 감각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한 쪽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살다가 가면 마지막에 내 인생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리고 오늘 내가 이렇게 돈 벌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 이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내가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일까? 온갖 신령한 방향으로 자신의 인생이 생각되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첫 회심을 통해서 쏟아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다음으로 궁금한 것이 뭐냐면 크게 첫 회심과 이후의 회심이 그러면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르냐? 우선 첫 째는 이 모두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결과로서 오는 첫 번 회심이나 또 성화의 과정에서 반복되는 회심이나 모두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회심은 원래 성령의 역사이기는 하지만 성령 혼자 하시는 역사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성령의 역사는 선도적으로 일하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주도되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앞장서서 죄인들에게 자신의 죄를 보게 하고 죄에 대해서 슬퍼하게 하고 그리고 그 죄를 인식하게 하고 죄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게 하고 그 죄에 대해서 돌이킬 수 있는 그런 놀라운 결단까지도 성령께서 불러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회심 때에도 마찬가지고 나중 회심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제 이 회심의 역사에 있어서는 성령이 주도적으로 일하시지만 그러나 이 회심은 성령이 주도적으로 일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인간이 반드시 그렇게 우리를 회심시키시는 성령님께 순응할 때 성령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회심시키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별명이 뭐냐면 인간 영혼의 박사입니다. 왜냐면 비록 처음 들어가시는 불신자의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성령님이 인간 안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의 구조와 정신, 영혼의 상태와 구성에 대해서 탁월하게 잘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오셔서 불신자였다고 할지라도 성령님이 그 속에 들어가셔서 “야, 이것 생전 처음 들어오는 곳이다. 이게 도대체 스위치가 어디 있고 뭐가 어디 있나?” 그렇게 하면서 학습을 하셔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옛날에 인간 안에 거하셨던 성령님이기 때문에 오셔서 그 인간의 기질과 이 인간의 내면의 구성의 요소와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하시고 그것들을 사용하셔서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하나의 이 인간의 구원의 역사와 회심의 역사에서의 놀라운 신비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한번 한 적이 있는데 귀신들리면 사람이 좀 이상해지지 않습니까. 그렇죠? 갑자기 밥 먹다가 막 웃고,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그렇습니까? 밥 먹다가 괜히 막 웃고 막 미친 짓 하고 그렇습니까? 안 그렇죠. 물론 사람들이 보고 사도행전에 나온 것처럼 “저 사람이 새 술에 취했다. 어쩜 저럴 수 있냐?” 그럴 수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정신 구조와 맞게 사용하십니다. 귀신들린 사람과 성령 충만한 사람하고 똑같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귀신은 우리의 몸과 영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들어오면 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어거스틴이 그런 비유를 했는데 말이 있는데 마귀가 우리 마음의 말을 타면 우리가 미친 말이 되는 것입니다. 미치광이처럼 말을 모는 것입니다. 미친 말이 어떻게 뛰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에 오시면 숙련된 기수여서 우리를 기가 막히게 통솔하시면서 우리 마음을 타고 달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거스틴의 비유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오셔서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개하실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심의 역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합작투자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비유를 제가 한번 든 기억이 날 것입니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왔는데 그것을 도끼로 쪼갭니다. 그런데 동양이든지 서양이든지 간에 나무를 이렇게 세워놓고 위에서 내리쳐서 쪼개지 이것을 옆으로 놓고 떡국 썰 듯이 이렇게 자르는 사람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 속에 회개하려고 하면 자신이 회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회개하려는 사람들을 회개시키시고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종류의 회심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 첫 회심과 이후의 회심의 차이가 있습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첫 회심은 중생의 결과입니다. 영혼이 완전히 죽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는 영혼이 죽어있다. 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있다. 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두 번째로 영혼이 죽어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한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상태에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죽어있다.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신령한 어떤 것을 감지할 수 없는 무반응 상태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사람에게 가서 “야, 이 자식아 에이 길름뱅이” 하고 얘기해도 시체가 벌떡 일어나서 따귀를 때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약간 잠든 사람에게 가서 “야, 이 바보 일어나” 그러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당장 일어나서 “바보라고” 그러면서 따귀를 때리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렇게 죽어있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무의식 세계 속에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이 사람을 살리신 것입니다.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그렇죠? 살아나니까 밖에서 들리는 음성을 들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중생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 속에서 함께 소원이 일어나면서 함께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첫 회심 이후에 반복되는 회심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그 회심에 대한 경험이 새롭게 인식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미 나의 형벌 받을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죄가 싫어요. 미워요. 그리고 예수님만 절대적으로 의지하기로 다짐했어요. 이제는 세상 자랑 버리고 싶고,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죄 가운데서 생활해요. 그 인식이 흐려져요. 그러니까 다시 죄를 사랑해요. 다시 세상의 길과 가치를 따라가요.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내가 회심하고 나니까 없었던 것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옛날 같이 똑같이 다시 그 죄가 사랑스럽더니 요즘 와서 다시 미워지기 시작해요. 그리고 예수님 의지하지 않았는데 이제 다시 예수님을 의지하고 싶어요. 그런 마음으로 다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회심이 새로 일어 난다기 보다는 이미 첫 번째 회심을 통해서 획득되었던 이 상태가 구원 이후에 회심을 통해서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내버려두면 이것들이 계속해서 무디어져서 머리 속으로는 남아 있습니다. 회심했기 때문에 머리 속으로는 신자는 죄를 미워해야지 그리고 예수님만 의지해야 돼 그런데 자기의 육체는 뭐라고 말하느냐면 “나는 하나님 보다 죄가 더 좋아.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이 싫지 않지만 세상을 잃어버리면서까지 그렇게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없어” 이 반응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자기와 일체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성령과 말씀의 도움으로 이것이 은혜를 받으면서 이런 것들이 쇄신이 일어나게 되면 자기 안에 이런 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 이상하다. 진짜 내 마음 깊은 곳에는 그런 것 처음 회심에서 경험한 세상사랑, 죄의 사랑을 버리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살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에 이놈이 내 안에 들어와서 이렇게 살고 있나. 아, 나는 정말 괴롭다. 내 힘으로 당장 쫓아낼 수도 없고, 어떻게 하지. 오, 하나님 나를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면서 이것들이 객관화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17절의 경험입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 또 중요한 것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첫 번째 회심은 은혜라고는 하나도 없는 곳에 오직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죄만 지을 수밖에 없게 된 상태였는데 어느 한 순간에 어둠을 찢고 밝은 복음의 빛이 비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확 밀려들어오면서 죄의 용서, 그리고 나에 대한 사랑,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그 마땅한 소원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확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심 하고난 즉시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두고두고 중요합니다. 다시 한번 설명할 테니까 들어보세요. 거듭나기 전에 자기가 철저하게 죄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영혼에는 어두움이 가득하고 총명은 거의 흐려져서 보이지 않습니다. 감정은 죄악된 것들을 따라가고 의지는 자신의 생각에 잘 복종하게끔 되어있고 생각은 허탄한데 굴복하고 마음은 어두움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와 회심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샘이 터지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확 쏟아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죄에 대한 감각, 하나님의 사랑의 뜨거운 감각,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감각, 신령한 은혜에 대한 감각이 확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그러시니까 그 빛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빛은 있었는데 땅은 어두웠습니까?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빛이 있어라.” 그러면 어두웠던 이 땅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환하게 빛이 비춘 것입니다. 그 사이에는 어떤 경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빛이 있어라. 그랬는데 반은 빛이고 반은 어두움인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죠. 그러니까 첫 회심은 바로 그를 곧바로 은혜의 지배 상태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놀라운 감격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리고 우리 안에 은혜도 있고 죄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은혜도 있고 죄도 있는데 어느 한 순간에 많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은혜생활 해서 죄가 물러가고 은혜가 꽉 차게 되었을 때도 감격하는데 그런 은혜가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고 사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신령한 것,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상태에서 단번에 회심을 통해서 은혜의 지배로 들어가는데 그 때에 이루어질 광경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지창조에 비유를 하자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이 있는 그 때인데 빛이 있으라. 그러면서 그대로 하나님이 하루하루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주일 뒤에 온 땅이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 광경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처음 자기 속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죽어도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잊혀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크기도 크거니와 없는 곳에서 처음 생겨난 강력한 경험이고 회심을 통해서 단번에 은혜로운 지배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첫 사랑을 경험할 때 죄와 싸워서 이기는 것이 힘들었습니까? 안 힘들었습니까? 쉽죠. 첫 회심을 경험하고 일주일 만에 외식하는 신자가 되는 것 본 적 있습니까? 그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이 외식이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들은 모두 이 안에 있는 부패성들이 계속 남는데서 생겨나는 현상인데 회심하고 단번에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마음을 지키면서 성화의 원리를 지키면서 살아가느냐에 의해서 그 첫 회심은 생각보다 하늘의 샘이 아주 빨리 막혀버릴 수도 있고, 그리고 상당히 오랫동안 그것을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은 여기에서 다룰 수 없습니다. 어쨌든지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서 첫 회심은 그를 곧바로 은혜의 상태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심하자마자 죄를 이기는 강력한 은혜가 그를 온통 가득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한 놀라운 감격 모든 것들이 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파라다이스입니다.
그러면 이후의 회심은 어떻게 되느냐? 그렇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지금 우리가 회심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첫 회심은 그 사람을 곧바로 은혜의 지배 상태로 데리고 가지만 그 이후에 이어지는 회심의 경험은 결코 우리를 한번에 은혜의 상태로 데려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아주 단순한 진리 사이에서 지성적으로 굉장히 많은 혼란을 겪으면서 영적인 손해를 많이 보았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이제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인위적이거나 조작적인 방식이 아니라. 분명히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에 그 은혜를 주시면 가장 빨리 반응이 오는 것이 마음이고,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게 되지 않습니까. 은혜를 받게 되면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이 죄를 뉘우쳤습니다. 그러니까 그 순간에 자기가 그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고 서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하게 펑펑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이렇게 죄가 운데서 나동그라진 자기 인생을 보면서 이제 정말 예수님 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이 막 가슴이 저미도록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볼 때에 전혀 어떤 인간의 조작이 깃든 회개가 아닙니다. 인간의 조작이 깃든 회개 많잖아요. 사람의 감정을 구슬프게 해서 그런 것 없고, 정말 정직하게 깨달은 말씀이고, 그리고 자기가 정확하게 죄를 인식했고,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진실하게 참회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이 회개가 정말 간절하게 되면 이 가슴의 섬유질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 있게 됩니다. 그 때에 뭐가 오느냐면 확신이 옵니다. 무슨 확신이 오느냐면 “내가 마음에 이 섬유질이 찢어지도록 이렇게 애달프게 일체의 가식이나 이런 것이 느껴지지 않고, 진실 되게 가슴이 찢어지도록 기도하는 그 순간에 이 기도가 하나님께 확 빨려 올라가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그리고 눈 뜨고 돌아왔는데 하루 이틀 지나보니까 분명히 그 회심은 진실한 것이었는데 옛날의 그 첫사랑으로 안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것이 몇 년 동안 그렇게 궁금했습니다. 사실 첫사랑 매일 꿈만 꾸지 첫 사랑이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두 번째 사랑에 빠진 신자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하세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첫 회심에서는 회심과 함께 동시에 은혜의 지배 상태로 들어갑니다. 은혜의 지배 상태가 무엇인지 모르면 “죄와 은혜의 지배” 교리를 들으세요. 은혜의 지배 상태로 단번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거듭난 이후에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슴에 섬유질이 찢어질 정도로 그렇게 진실하게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울부짖고 그리고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만은 순간적으로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들고 그 순간에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께 들려 올라가는 것 같고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와도 회심은 틀림없는 경건하고 진실한 회심인데 그 회심만으로는 그가 단번에 은혜의 지배 상태로 갈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지는 여러분들이 죄와 은혜의 지배를 듣거나 죄 죽임의 교리를 들었으면 이제 여러분들이 두개가 맞아떨어지면서 “아 그렇구나.”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안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설명을 좀 덧붙이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거듭나지 않는 상태에서 회심하게 되면 아까 말씀드린 이유로 인해서 단번에 은혜의 지배 상태로 가는데 은혜가 모두 다 다스려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난 사람들은 그 동안에 살아온 영적인 생활이 있습니다. 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처음에 회심했을 때에는 전적인 은혜의 지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죄를 쉽게 죽이고 피 떨어지는 십자가의 감격을 누리면서 그렇게 생생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태만해 지고, 게을러지고, 부주의해지고, 그 다음에 부주의한 복음적인 잘못된 견해에 빠지고 이렇게 하면서 어쨌든지 내제하는 죄가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은혜아래 살지 않으면 정욕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은혜의 지배아래의 상태에 있을 때에도 정욕이 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즉시 죽입니다. “내가 어떻게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내가 그럴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 그러면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런 저항력이 약해집니다. 그러니까 이 속에서 계속해서 허용합니다. 그러면 밖에 가서 내가 지금 어떤 성적인 정욕이 생겼는데 그것을 밖에 가서 즉시 범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가슴에 품고 있으면 이것이 내 안에 내제하는 죄에게 훌륭한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계속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점점 더 이 속에서 이 죄가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힘을 얻는 것만큼 이제 은혜는 한 때 우리 마음 전체를 지배했었는데 그것들이 점점 뒤로 물러나고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이 뭐냐면 이런 설명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야, 그러면 이런 거듭남이라고 하는 중생이것 말짱 헛것이구나. 그러면 중생하게 되면 말이지 하나님께서 생명과 성령의 법을 심으신다, 그랬는데 그러면 그런 것도 필요 없고 죄가 융성하면 이제 다 삼켜버리는 거야.”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고 중생과 함께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 하시는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뭐냐면 은혜를 우리에게 확 주입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지배 상태에 들어가게 하고 두 번째는 이 속에 영적 생명의 원리를 심으신 것입니다. 은혜를 주입하심과 동시에 원리를 심으십니다. 그래서 이 원리를 따라서 살아가면 이 주입된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계속 활발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속에는 죄와 사망의 법이 무너지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그 새 생명의 원리가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만연한 것 같아도 예전에 거듭나지 못했을 때는 그 죄를 티끌만큼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듭난 상태에서는 죄가 많이 들어온 것 같아도 비교적 짧은 기간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진실한 은혜의 생활을 하게 되면 놀랍게 죄가 죽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어느 지체 한명이 지금은 저희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아닙니다. 만은 정말 영혼이 너무 위험한 죄의 지배 상태에 있었습니다. 벼랑 끝에서 저를 만나서 상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치료 처방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편지가 왔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자기는 그 머리끝까지 넘어서 그 죄의 어마어마한 세력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불과 두 달이 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 어두움 속에서 건져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죄의 지배는 불법한 지배입니다. 그래서 이 영적 생명의 원리를 따라서 순종과 믿음의 생활을 하게 되면 그렇게 쉽게 죄를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원리대로 살지를 않고 잘못 살면서 그 죄를 이기려고 하면.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 그 죄를 도저히 이길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그 죄를 돕고 그릇된 방법을 택하면서 그러면서 죄를 죽이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마음이, 내면의 세계가 은혜가 많이 죽고 죄에 의해서 그 불법하기는 하지만 지배가 된 그래서 적절하게 이 죄를 죽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하나님 앞에 가슴의 섬유질이 찢어지도록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싶어 하고, 그리고 자신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은 진실한 참회와 자기 깨어짐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이 사람이 단번에 은혜의 상태로 들어간다. 라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니까 누가 그렇게 가르쳐주면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입증되지 않은 가설입니다. 엉터리입니다. 그러면 거룩하게 살 필요도 없고, 가끔 한 번씩 회해서 정기 청소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이 속에서 죄도 자라고 은혜도 자랍니다. 둘이 서로 계획을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묻고 싶겠죠. “아니 그러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첫 회심은 회심하는 즉시 우리를 놀라운 은혜 지배 상태로 데려가니까 할 필요가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두 번째는 그렇게 가슴의 섬유질이 찢어질 정도로 그렇게 애절하게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그리고 그렇게 죄를 한순간 철저하게 미워하고 예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도 하면 마음이 그 기도 속에 녹아서 들어가도 눈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 뭐 하려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회심 이후에 또 회심을 하기 위해서 자기 깨어짐의 삶을 살아야합니까? 왜 그러면 그렇게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왜 그렇게 회개하라고 하고 자기 깨어짐 속에서 살아라. 하고 왜 다시 그 회심의 은혜를 회복하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반발어린 반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신자 안에 있는 죄의 지배는 그런 식으로 가슴이 녹는 것 같은 한번의 기도로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서 온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원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죄를 죽여가시는 신자의 순종을 사용하셔서 영혼의 상태를 바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자, 들어보세요. 이렇게 신자가 이미 영적인 생활을 해 오면서 자기가 잘못 살아서 아주 심각한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 앞에 열열이 기도해요. 그리고 자신의 죄를 너무 슬퍼해요. 그리고 예수님만 의지하기로 결심하는데 이 가슴이 진짜 섬유질이 찢어질 정도로 그렇게 가슴 아프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요. 그렇게 기도해도 나를 용서해주셨다. 라고 하는 사죄의 확신은 잘 안 옵니다. 온다면 그것은 사죄의 확신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지금 듣고 계시다. 라고 하는 확신을 변형된 방식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이 문제를 지난 가을 기도학교 사경회에서 시편 130편 4절을 가지고 상세하게 다룬 것입니다. 왜 그런지를 말이죠. 왜 공부를 안 합니까. 그렇게 해서 죄의 지배에 있는 사람들은 회심을 해도 그것이 그를 단번에 은혜의 지배의 상태로 데려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오늘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이미 거듭난 신자의 첫 회심 이후에 반복되는 회심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것입니다. 죄의 지배 상태에 들어가지 않고 은혜의 지배아래 있으면서 죄가 수시로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그렇게 한번 자기의 마음을 깊이 쏟아놓는 기도를 통해서 그가 은혜의 지배의 상태를 다시 건강하게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한번의 기도를 통해서도, 어떻게? 이미 그 마음이 이런 세계가 영혼의 세계가 죄보다는 은혜가 훨씬 우세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틀들도 건강해요. 그런데 약간 때가 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깊이 한순간 마음을 쏟아놓으면 싫증도 털어버리고 권태감도 털어버리고 그리고 죄를 사랑하는 사소한 마음도 다 털려요. 그래서 그것이 씻겨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때 있지 않습니까. 예배에 오기 전까지 뭔가 욕망에 시달리고 그랬었는데 한번 예배를 드리고 깊이 회개하면서 “야, 쓸데없는 것이구나.” 그리고 집에 돌아갈 때는 자유하게 돌아갈 때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는 가능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미 은혜가 져서 죄가 비정상적으로 나를 많이 지배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회심이 아무리 진실하고 애절해도 울부짖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유는 뭐냐? 이제 자신 안에 융성한 죄를 죽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어디 높은 곳에 올라갈 때 아무리 높고 힘이 들어도 발판만 탄탄하면 그래서 밑을 돌아보기 위해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안심할 위치가 되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힘을 이 발에 힘껏 주고 올라가면 되니까. 그러나 이 디딜만한 곳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리 등반의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올라가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빙벽을 오르는데 깊이 폐여서 돌 맹이 하나라도 밟아서 아무리 밟아도 안 미끄러지는 발을 착취할 수 있는 한 지점만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산을 공략하기가 굉장히 쉬울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한번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회심하게 되면 그러면 그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어떻게 그 죄를 이기고 어떻게 해야 될지를 발견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그 죄와 싸울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을 딱 딛고 안전한 자세에 서서 그 죄와 싸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마음의 섬유질이 찢어질 정도로 애절한 기도가 나왔으니까 그 은혜가 남아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은혜가 마르기 전에 다시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추가적인 은혜를 주시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애절하게 기도하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때에 그렇게 마음을 쏟아 부으면서 애절하게 간절히 기도할 때 그 때에 사실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 같아도 기도하는 것은 우리지만 그런 기도를 사용하셔서 이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우리 안에 있는 죄와 맞붙어서 싸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하다가 너무 애절해지고 힘들어지면 신음 소리가 나지 않습니까. 그 때에 그렇게 마음을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신음소리를 내며 기도할 때 사실은 우리는 신음 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 미치광이 같은 죄를 사로잡아서 지금 죽이고 계신 죽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막 시작되는데 금방 기도를 끝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항상 펄펄 뛰는 야수를 창으로 한번 달려가서 가슴을 딱 찍었습니다. 이것이 흔히 있는 기회가 아닌데 그러면 그것을 찔렀으면 이번 아니면 너를 못 죽이지 하고 그것을 모든 일을 전패하고 이제는 딱 꽂혔습니다. 꽂혔으니까 큰 짐승의 가슴에 꽂혔으니까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쑥 들어갔어요. 그다음에는 이것만 깊이 밀어 넣으면 심장에 가깝습니다. 그러면 금방 죽지는 않는다고 해도 하여튼 치명상을 입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딱 꽂혔어요. 그런데 창 꽂아놓고 집에 가는 것입니다. 다음날 와서 다시 싸우는데 아물었어요. 아니 웃을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반복되는 경험입니다. 그럴 경우 이 사람의 경험이 어떻게 되느냐면 매일 진실한 기도를 드리는데 죽어도 죄가 안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 가느냐 결국은 그런 식으로 실천해서는 그렇게 가슴의 섬유질을 찢는 것 같은 애절한 기도가 오래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애절함과 간절함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그런 것을 부어주실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이 지속적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에 어울리고 방불한 삶이 함께 동반될 때 그 기도가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피눈물 나게 몸부림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지 나태하게 게으름 속에 빠져 살아가는 사는 사람이 어쩌다가 한두 번은 말씀을 소홀히 여긴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고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몇 달만 게으르게 살아보세요.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런 기도가 나오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회심 이후에 신자가 경험하는 회심은 처음 회심의 갱신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회심할 때 그가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진실한 회심의 반복을 통해서 한번의 회심으로 그렇게 깊이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기도는 진실했지만 그러나 오랫동안 죄가 쌓여서 죄가 이미 세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것도 죽여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한번 그런 강력한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면 영혼이 원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죄를 발견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발견되었잖아요. 뭐라고 어떻게 고백해요.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다. 나는 발견했다. 나는 밉다. 나는 싫다.” 그 발견함을 터득한 것입니다. 적군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 앞에 말씀과 기도로 나아가면서 성령의 역사를 구하면서 찌르는 것입니다. 깊이 집어넣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수 십 년 동안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고 숙명처럼 생각했던 그 죄의 지배아래서 얼마나 놀랍게 벗어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생명과 성령의 법의 해방하게 하시는 위대한 역사를 맛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 언제까지 신앙생활이 사경회 시작하면 뭐 불 좀 붙였다가 그다음에 다음 사경회 때는 다 털어먹고 그리고 다시 와서 뭐나 좀 있나 하고 기웃거리고 이런 식의 핍절한 신앙생활을 언제까지 하면서 그런 신앙생활을 인간의 연약함이 어쩌고 그런 식으로 호도하면서 살아가겠느냐는 것입니다. 진짜 여러분들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면 우선 여러분들의 두 눈이 구도의 지식을 얻기 위한 갈망으로 빛나야합니다.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한 때에 복음의 교리를 깨닫고 각성하고 은혜의 세계를 보고 복음의 맛을 보고, 그리고 은혜의 비밀들을 터득했고, 그래서 많은 것들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가 끝이라고 생각합니까?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신자가 성화되면 성화 될수록 그 안에 남아있는 죄는 그 모든 그의 경건한 삶과 하나님을 향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추구하는 그 처절한 삶의 몸부림 속에서도 그 수많은 죄 죽임의 칼날을 피하고 살아남은 죄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얼마만 쉬면 그 속에 산전수전 겪고 살아남은 죄가 역사해서 여러분들을 죄의 지배의 상태로 데려가고 그리고 첫 회심을 통해서 열렸던 그 놀라운 은혜의 샘들을 모두 막아버립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진리를 탐구하지 않는 삶을 보면 너무 한심합니다. 나는 왜 사는지 궁금합니다. 무엇 때문에 사십니까? 살아봐야 뻔한 것인데 아니 솔직히 얘기해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건너자마자 죽은 사람이나 한참 가다가 가데스바네아에서 죽은 사람이나 또 요단강을 앞에 두고 죽은 사람이나 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 더 걸으면 더 걸을수록 고난 받는 길만 한참 많이 걷는 것이지 무슨 별다른 삶이 기다릴 것 같습니까. 한번 말해보세요. 나는 특별한 이러한 신학적인 견해가 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고 진리의 참된 도를 알려하지 아니하며 나는 생긴 대로 살아갑니다. 말해보세요. 그러면 뭐하려고 이렇게 어려운 교회에 다닙니까. 쉬운 교회에 다니지, 타협할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이 다 나를 버리고 떠나도 죽을 때까지 나는 여러분들의 마음에 좋은 소리 안할 것입니다. 나는 요즘에 죄와 은혜의 지배의 교리가 선포된 이후로 한동안 꺾였던 여러분들의 영적 교만들이 고개를 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열린 교회 목회 가운데 죄와 은혜의 지배를 비롯해서 몇 번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깊이 찌르시고 거꾸러뜨리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나는 것을 봅니다. 나는 너무 슬픕니다. 도대체 우리가 실험해보지 않았습니까. 몰라서 그렇다면 나는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죄를 죽이고 거룩한 신자의 삶을 살기를 게을리 하고 포기할 때 마지막 돌아오는 것이 맛있는 열매였고 향기로운 꽃밭이었습니까? 가시와 엉겅퀴와 피눈물 나는 방황과 고통 이외에 여러분들에게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나는 여러분들의 모습 속에서 정말 구도자의 눈빛을 읽을 수가 없는 것이 너무 서럽습니다.
왜 탐구하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죄의 지배아래 있으면 그렇게 가슴의 섬유질이 찢어지는 것 같은 그 반복되는 회심을 통해서도 은혜의 지배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냐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우리가 어떻게 이 교회에 발걸음을 옮겼었는지 핍절하던 날들의 여러분들의 영혼을 회상해 보십시오.
오, 예수님 내가옵니다.
고백하면서 오지 않았습니까? 그 때에 교회에 발걸음을 들여놓을 때 나는 여러분들에게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특별히 여기 5년 이상 다닌 사람들 회개하셔야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떤 발걸음으로 그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지하실의 교회로, 방배동의 계단으로 내려오고 올라갔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때 여러분은 상처 입은 영혼들이었고, 그리고 주님 만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집 팔고 가난한 월세방 얻어서 교회 옆으로 이사 왔죠. 그 고단한 직장생활 속에서도 핏기 잃은 얼굴로 그 추운 새벽에 문도 열리지 않는 교회당 앞에 서서 기다렸죠. 그리고 어린 아이처럼 말씀을 사모하고 그리고 주님 사랑했죠. 그리고 이런 회심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되냐고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 흘리셨죠. 그 때에 저는 행복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슬피 울부짖고 곤고한 영혼으로 몸부림쳐도 여러분들이 받는 그 고통 하나만을 가지고 주님의 시선을 끌기에는 하나님의 또 다른 성품들이 너무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깊이 여러분들의 행위를 조사하고 그리고 어디서 미끄러졌는지 생각하고,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죄가 은혜의 샘을 막는 법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행하는 죄니라.(로마서 7:17 )
지난 시간에는 이 본문에 대한 해설과 그리고 또 이 본문이 주고 있는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고 이어서 구원 받을 때에 경험하는 회심과 이후의 회심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았고, 그 속에서 우리는 구원 받을 때에 경험하는 첫 번째 회심은 우리를 단번에 은혜의 지배 상태로 데려가지만 그 이후에 경험되는 회심의 경험은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거론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다루겠는데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런 회심의 경험에서 겪는 우리의 지성의 혼란들을 먼저 다루고, 그리고 이어서 죄가 어떻게 첫 회심에서 터트려진 그 놀라운 은혜의 샘을 막는지에 대해서 시간 나는 대로 살펴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선 제일 먼저 회심에서 우리들이 경험하는 지성적 혼란입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로 다룰 수 있는데 근본적인 혼란과 개별적인 혼란입니다. 근본적으로는 한가지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자신이 거듭난 줄 아는데서 문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사실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혹은 어떤 은사의 경험을 조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도덕적인 감화를 받았다든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에 자신이 어떤 신비하고 열광적인 경험을 했다든지, 그런 것들이 그가 거듭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고 그 거듭나는 것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생명의 원리를 심으시고 동시에 성령의 은혜를 주입하십니다. 그 성령의 은혜는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거듭남과 함께 오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에게 증거 해 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그렇게 만드시는 성령님이 거듭남과 함께 내 안에 오시죠. 그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 영을 양자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은혜는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줄 분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명령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공급합니다. 그리고 그 주입된 은혜가 우리 안에서 계속 해서 역사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들을 우리들이 경험하고 또 하나님 자신과 교통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경험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할 때 깨닫는 마음을 주셔서 그것들을 놀랍게 이해하고 경험하도록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생명의 원리는 우리 안에 본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고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어서 이제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고 그런 의미에서 선한 계획대로 살아야지만 행복할 수 있도록 그렇게 느끼게 만들어주고 그 은혜의 원리는 계속 우리 안에서 역사해서 우리에게 영적인 힘을 공급해주고 활기를 공급해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생명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이 아예 없습니다. 그의 생각은 어두워져서 허탄한데 굴복하고, 사물을 판단하고 이치를 파악하는 총명은 어두워져서 분별력을 상실했습니다. 마음은 굳어지고 흑암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과 대적하는 그런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신이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고 죄를 죽이려고 애를 써도 그것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서 사람들이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내가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내가 이렇게 죄를 이길 수 없을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내가 왜 이렇게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까? 하나님이 혹시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사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구해야 할 것은 자기를 구원해주시고 거듭나도록 하나님 앞에 탐구하고 진지하게 매달리고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회개하지 못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멸망 받을 자신의 영혼의 처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근심하며 거듭남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열열이 구해야 하는데 자신은 이미 거듭났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죄를 죽이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고 거기에서 주어지는 많은 가르침에 순종하고 따르려고 하니까 자신에게 그럴 수 있는 자원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성화의 삶에 실패하고 있다면 혹시 모르니까 진짜 구원 받은 자녀인지 여러분들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늘나라에 가면 두 번 놀랄 것인데 이에 대해서 존 뉴턴 목사님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는 여러분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천국에 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여러분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하나 더 추가하자면 여러분 자신이 천국에 왔다는 사실 때문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래서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생명의 증거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그런 삶을 계속 살아가고 있고, 자신의 영혼에 대한 어떤 진지한 성찰이나 근심, 그리고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 하는 간절함이 도저히 경험되지 않는 그런 심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오늘 이 시간에 깊이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집사이건 무엇이든지 간에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여러분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고, 정말 거듭났는지 한번 여러분 자신들을 돌아보고 시험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혼란으로 들어가 보면 대게 여기에서 느끼는 혼란들은 이런 혼란입니다. 이제 신자가 이미 구원에 이르는 회심은 했고, 그리고 이제 믿음으로 살아가다가 죄를 짓고 죄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에 영혼이 너무 곤고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매달리니까 그 기도가 반복되는 가운데 자신 속에서 죄가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주관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죄가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랬더니 성령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회개는 진실했고, 정말 가슴에 있는 섬유질까지 찢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가슴이 아프도록 기도했고, 그 기도는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진실한 회심을 경험했는데 그러고도 왜 내가 옛날처럼 하나님의 쏟아 부어지는 사랑, 나를 향해서 하나님이 한없이 기뻐하시는 그 친밀한 교제, 그리고 하나님이 나와 지금 동행하고 계시다는 말할 수 없는 행복, 이런 것들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이렇게 회심을 했는데도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에 느끼는 혼란이 뭐냐면 왜 이 회개는 내가 이렇게 진심으로 했는데도 첫 사람을 경험하게 만들었던 그 처음 회심보다 강력하지 못할까? 혹시 내가 이렇게 진실 되게 회개를 해도 그렇게 첫사랑을 경험했던 때와 같은 그런 은혜가 쏟아지는 것 같은 상태에 못 들어가는 것은 이 회심이 그 때 회심보다도 강력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런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어떤 혼란을 경험하느냐면 예전에 처음 구원에 이르는 회심을 할 때는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그 거듭남의 결과로서 자신이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자기가 걸어가던 이 죄 악 된 길에서 딱 돌이키는 것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즐거움과 사랑 같은 것들을 다 끊고,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대표적인 경우죠. 예전에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고 열심 으로는 교회를 핍박한 자였는데 이 모든 것을 자랑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것이 모두 배설물과 같이 더러운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그동안에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거기로부터 돌이켜 섰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려서 드디어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는 자부심을 포기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 때문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고 이방인들은 개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한참 구원 받은 다음에 수십 년 흘러간 다음에 차차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모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구원 받는 것과 함께 회심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가는 그 진지한 전 존재를 건 탐구는 일생동안 계속 되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라. 라고 하는 이 신학적 판단은 회심 즉시 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 것입니다. 우리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여튼 그렇게 분명하게 “아, 이게 다 소용 없구나. 그리고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예수님 밖에 없구나.” 그것을 확 확연하게 우리 가슴속에 느꼈기 때문에 사실 그 동안에 예수님 아닌 것들을 추구하고 사랑하고 그런 것들을 다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나서 한참 살다가 죄의 지배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어느 한 순간에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다시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고, 진실 되게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앞에 회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옛날처럼 그렇게 진실 되게 했는데 삶을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처럼 그렇게 딱 부러지게 단칼에 딱 내리고 돌아서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제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느냐면 왜 그럴까? 그러면 내가 이 죄에 대해서 돌이키는 이것이 처음 회심 때에는 아주 분명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그런데 지금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후에 경험하게 되는 이 회심을 통해서는 죄로부터 돌이키기가 상대적으로 너무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결국은 자신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회심의 경험은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했지만 그러나 능력에 있어서 훨씬 떨어 지나보다. 그러니까 예수 믿은 다음에 하는 그 회개는 우리를 이렇게 돌이키기 힘들구나. 그리고 죄의 강력한 힘을 처음 회심 때에는 별로 못 느꼈는데 지금에 와서는 이 죄의 강력한 힘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두 번째 혼란입니다. 세 번째는 뭐냐면 처음에는 그렇게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이제 예수님 의지하며 살겠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니까 곧바로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시고 그리고 나를 그 모든 지난 죄에서 나를 씻어 깨끗하게 해 주셨다는 사실, 그것이 내 마음 속에 놀랍게 믿어졌습니다. 그래서 진짜 예전에는 주홍같이 붉고 진홍같이 새빨간 죄인이었는데 정말 하나님이 자신의 이 거듭남과 회심을 통해서 눈같이 희어지게 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너무 깊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한참 살다가 죄의 지배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죄의 지배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나서 어느 한 순간에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진실하고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진실하게 회심을 했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주셨다. 라고 하는 확신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지성적인 혼란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은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답을 쉽게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혼란이 결국 무엇이냐면 이러한 혼란을 간직하고는 우리들이 그러한 죄의 지배를 벗어나서 첫 회심에서 경험했던 하늘이 열리고 샘이 터지면서 은혜가 밀려들어와서 그 신령한 기쁨을 경험하던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경건하고 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가 은혜의 지배아래 살아가고 있을 때에는 한 두 번의 이런 회개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털어내고 그런 사죄의 확신과 그런 은혜를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죄 가운데로 들어가서 죄의 지배 아래서 살게 되면 한 순간의 격렬한 회개의 몸부림으로 이런 것들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막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는데 첫째가 뭐냐면 교리를 정확히 이해해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회심, 일회적인 회심과 구원 받은 이후에 반복되는 회심의 차이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정확히 알고, 그리고 먼저 생각의 혼란부터 털어 내어야합니다. 진리의 밝은 빛이 있는 곳에서는 항상 성령님이 즐겨 역사하시고 무지의 어두움이 있는 곳에는 죄가 항상 기뻐하는 환경입니다. 여러분들이 곰팡이나 혹은 우리의 몸에 유익한 버섯 같은 것을 재배할 때에 햇볕이 밝게 비취는 양달에 버섯을 쭉 심어놓고 버섯을 기르는 사람 보았습니까? 그것은 식물 자체가 어두움 속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곰팡이나 이끼 같은 것들은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습한 곳에서 잘 자라는 식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도 바로 그런 곰팡이와 같아서 그렇게 진리의 빛이 깃들지 않는 그런 무지의 어두움 속에서 잘 자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그 어두움의 친구들은 죄, 부패, 미끄러짐, 혼란, 정욕, 사망, 심판, 두려움, 이런 것들이 그 어두움의 친구입니다. 그러나 빛의 친구들도 있습니다. 진리의 밝은 빛이 비칠 때 빛은 사랑, 희망, 거룩함, 영광, 기쁨, 착한 열매, 은총, 이런 것들이 그 밝은 빛의 친구들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라고 할 것 같으면 끊임없이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도구들을 끊임없이 소유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조금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면 이 질문에 대해서 명백하게 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거룩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걸어가는 성화의 길이 완성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걸어가는 발걸음도 끝이 없겠죠. 그러면 그렇게 거룩한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에 여러분들을 이 세상이나 여러분 자신 안에 있는 부패성이 가만히 내버려둡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그 길은 완성되지 않는 끊임없는 길입니다. 명제는 끊임없이 가야하는데 가야하는 길속에 수많은 원수들을 만나고 내 안에 있는 부패성들이 그 원수와 손잡고 내통해요. 그래서 나를 곤고하게 하고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바는 행치 못하게 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악이 나와함께 있도록 만들어요.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그러면 이 우리의 코에 호흡이 끊어지고 우리의 혈관에 피가 굳어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이제는 더 이상 성화를 위해서 힘쓸 수 없게 될 그 때까지 우리의 손에는 끊임없이 이 나타나는 수많은 대적과 싸워야 하는 무기가 들고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성황 되면 성화 될수록 오늘 이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화 되면 성화 될수록 그 성화의 과정에서 자신이 신앙이 어렸을 때는 깨닫지 못했던 많은 죄들이 성화의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한다고 해서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분투하면 분투할수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깊이 절망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죄를 끊임없이 발견하게 될 때에 그 죄는 점점 더 교묘한 죄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 와서 이렇게 말씀 듣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 받으면서 이 좋은 휴일에 놀로도 못하고 그리고 벚꽃도 다 제쳐놓고 꽃보다 못생긴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면서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여러분들은 그래도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방금 교회에 오기 전에 살인하고 손에 묻히고 온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외간 남자나 외간 여자와 함께 침대에서 뒹굴다가 지금 이 자리에 목욕도 안하고 온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 물론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굉장히 가슴 아프고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정도 까지는 안 됩니다. 그러나 뭐냐면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죄는 점점 더 교묘해집니다. 옛날에는 싸우면 밖에 나가서 주먹질 하면서 피 흘리면서 세상 사람하고 싸웠고, 이제는 그래도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았으니까 싸움도 교회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 세상에서는 술 먹고 싸우는데 이 교회에서는 성찬 받들고 싸우는 것입니다. 옛날에 회심하기 전에는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보려고 뇌물도 쓰고 하면서 막 길길이 뛰고 난리를 쳤는데 이제 은혜 받고 나면 이제 교회에서 높아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자신 안에 이러한 죄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이 죄가 자기 안에서 이 신앙이 오래될수록 이러한 죄들이 교묘한 죄들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 여러분들이 한번 신앙생활을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여기에서 은혜 많이 받은 사람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어제 5년 이상 열린 교회에 나온 사람들을 회개하라 그랬는데 그 배경을 내가 오늘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5년이라고 자른 것은 사실 좀 무리가 있습니다. 3년으로 좀 내려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말씀은 드리느냐면 말씀을 전혀 못 깨닫고 교회에 와서 놀다가 매일 밥이나 먹고 가고, 말도 되지 않은 소리나 하고 그랬으면 말을 안 합니다.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정말 신자다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지금은 좀 낫지만 옛날에는 그 년 초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교회 근처로 이사 와라. 그런데 교회가 서초구 방배동입니다. 거기가 얼마나 비쌌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그러니까 서울 변두리에서 아파트를 팔고와도 거기에 오면 전세밖에 못 얻습니다. 내가 얻어 보니까 인천에 아파트가 있었는데 그것을 두 채 팔면 똑같은 것 거기 와서 전세 얻겠더라고요. 그러니까 전세라도 좀 밖에서 방 네 개까지 쓰던 사람은 세 개도 아니고 두개 줄여서 반 지하로 와야 될 정도로 그렇게 비쌉니다. 그래도 그것을 다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번 신년 심방 쫙 하면 열 가정 어떤 때는 이십 가정씩 그렇게 이사를 왔습니다. 쭉 와요. 그런데 그 올 때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변두리에서 큰소리 치고 살다가 지하실 비슷한 그런 방으로 내려올 때 뭐 바라고 왔습니까. 물가는 비싸지, 뭐가 좋은 것이 있습니까? 공기는 나쁘지. 그러니까 어때요. 진짜 이제는 새벽기도 나오고 믿음생활 열심히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 그리고 오는 것입니다. 감동적이죠. 그래 진자 그렇게 합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새벽기도는 무슨 새벽기도야. 안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죠. “방 빼라. 다른 사람 줘라. 다시 변두리로 가라. 어차피 신앙생활 잘 안한 테니까” 그러면서 여러분은 지금은 좀 낫습니다. 지금부터 3년 5년 거슬러 올라가면 각 성도가정에 심방을 가면 라면박스로 한 박스 내지 두 박스씩 테이프가 쌓여있습니다. 그거 거저 준 것 아닙니다. 한 개에 천 오 백 원씩 칼같이 돈 주고 산 것입니다. 그것을 마치 책꽂이에 책을 쌓아놓고 그렇게 미친 듯이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한 것입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요즘은 어떠냐는 것입니다. 모든 그런 가르침들이 틀렸다. 그러면 여기에 있으면 안 되죠. 나는 왜 사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몰랐을 때는 몰라서 안 살았습니다. 살 힘이 없어 못살았어요. 그런데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오는데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면 벌써 압니다. 주님을n 향한 추구와 갈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개념만 잔뜩 쌓여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곤에 지치고 그리고 싫증으로 가득 찬 영혼을 안고 교회에 나와서 즐겁지도 않고 매시간 한없이 긴 그 설교를 인내하면서 고통 가운데 들어요. 나는 그런 지체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왜 사냐?” 그러면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벗어나고 하나님의 그 말씀 앞에 자기를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유혹에 빠지거나 무지 속에서 한번 가본다고 쳐요. 옛날에 다 가본 길이잖아요. 은혜에서 미끄러지면 가는 길이 항상 똑같은 길입니다. 똑같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하나님 앞에 버림 받은 차가운 느낌, 기도할 때 그 차가운 거절, 무엇을 해도 하나님이 동행하시지 않는 영혼의 피곤함,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외로움, 이글거리는 정욕,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모든 기쁨과 사랑이 사라지는 형식적인 신앙생활, 외식하는 그 신앙생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태초 이래로 변한 적이 없습니다. 똑같은 길입니다. 다 가본 길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뒤로 물러가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지 않고 집에 돌아가서 쌓여있는 그 테이프와 목회하고 나서 쓴 책만 25권입니다. 다 샀습니다. 안 살수가 없지 구역 공부하니까 매일 다 사야지. 그래서 그것이 무엇을 갖다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선택하세요.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그 말을 하고 싶습니다. 예전에 변화받기 전에 섬겼던 그 세상이라고 하는 그 신을 섬기고 열조들이 섬기는 그 신을 섬기든지, 아니면 회개하고 돌아와서 예수님만 섬기고 사랑하든지, 여호수아가 기울어져 가는 이스라엘 역사의 배교의 비탈길에서 외쳤던 그 얘기,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나와 우리 집은 여호와만 섬기리라.” 묻고 싶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당에서 붙들고 “집사님 왜사십니까?” 손을 잡고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많이 깨달았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리되었는데 왜 그런지 아십니까? 죄가 그 모든 것들을 피해서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 살아남은 죄가 새끼를 친 것입니다. 그러면 맨 처음에 모르고 죄가 가득하나 많이 알아서 죄가 가득하나 결국은 죄가 이긴 것입니다. 그렇게 눈물로 기도해도 살아남은 죄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때 이 죄는 무자비하게 그 은혜에 공격을 당하는 것입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참 있다 보니까 이제 말씀의 칼도 안 날아오고 기도의 화살도 안 날아와 그리고 상당히 우호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같이 한번 놀아볼까? 원래 원했던 관계잖아요. 다시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기로하려고 해요. 옛날에 다 경험해 본 것 아닙니까. 어디로 화살이 날아오는지 알아요. 그러면 죄는 피합니다. 칼도 피하고 죄가 약아집니다. 그래 결국은 그 죄가 다시 살아나서 그를 지배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날이 갈수록 더 선명한 하나님의 칼, 그 은혜의 도구들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일평생 잊혀지지 않을 경구를 여러분의 가슴에 새겨 두겠습니다. 들어보세요. “두 눈에 총기를 잃은 거룩한 그리스도인은 없다.” 두 눈이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말한 것처럼 이 시인이 총명한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를 깨닫고 거룩해지기를 원하는데 총명하게 쳐다보는데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나의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원하는 이 살아있는 총기어린 눈빛이 없이는 성화의 삶은 멈추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복음의 교리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없는 그 탐구의 정신으로 가득 찼던 그 총기어린 눈망울이 빛을 잃어버릴 때 그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는 정욕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은 모두 뒤엉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젖은 장작을 태우는 것과 같은 피곤하기 이를 대 없는 눈물나는 신앙생활을 계속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 사람이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만큼 우리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주님의 마음은 고통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그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계속 이해해야합니다.
여러분 남의 종교 이야기 하는 것은 안 되겠지만 이 진리를 찾아가는 것은 다르지만 인간적으로 상당히 그 사람을 인정해주고 싶은 중들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탐구하면서 존경이라고까지는 이야기를 안했습니다. 인정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부지런히 공부하고 탐구해요. 그래서 내가 신학교 선생님 할 때 그 학생들에게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아니 중들도 그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 8년 동안을 한번도 드러누워 본적이 없다. 그러고 심지어는 머리 깍은 그 중들이 말이죠. 3개 국어 4개 국어를 공부해서 심지어는 그것도 모자라서 인도까지 유학을 가서 경전을 원전으로 보겠다고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하는데 그렇게 너희들처럼 탱탱 거리고 놀아서 너희들에게 우리 후손들을 맡길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말이지, 그런데 공부 그런 것 하나도 안하고 눈망울이 흐리멍덩한 중들이 있습니다. 땡 중입니다. 그렇죠? 정욕으로 이글거리고 온갖 난잡하고 더러운 그런 일들을 하는 그런 파렴치한 사람들이 신문에 오르내리지 않습니까. 땡 중입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땡 신자가 있습니다. 눈빛이 흐리멍덩한 아무것도 더 알려고 하지 않는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 흐리멍덩한 눈은 세상의 지식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초롱초롱 빛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정욕에 이글거리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의 영혼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땡 신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참 기가 막힌 용어들을 많이 만들어요. 그렇죠. ‘삯군 부모, 그 얘기 했잖아요. 기도원에 가서 삯군 목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는 부모는 삯군 부모입니다. 생물학 적으로 낳아놓기만 했지 그 부모에서 파면시켜야합니다. 그렇듯이 땡 신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머리에 든 것이 없고, 거룩해지려고 노력하지 않는 그런 눈빛을 잊어버린 그런 교인.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도의 손에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 있어야 하고 가슴 속에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해야합니다. 그래서 머리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내려오고 삶으로 움직이는 그 추구의 과정들을 밟아야합니다.
두 번째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합니다. 자기가 지금 처한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가? 정말 자기가 지금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이 느낌이 정말 공정한 것인가? 사실을 정확히 본 올바른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숙고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이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고 영혼이 그 죄에 대한 욕망에 뒤엉키게 되면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끔 이런 것은 합니다. “아, 힘들다. 은혜가 떨어지니까 되게 뻑뻑하네. 컬컬하다.” 그러죠. 무슨 막걸리 마시는 사람처럼 무슨 표현을 해도 거룩하게 표현을 해야지 컬컬 하다는 것이 뭡니까. 그런 것들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왜 그럴까? 내 영혼의 상태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것일까? 이런 것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나? 그런 영혼의 상태를 잘 진단할 수 있는 사람에게 가야합니다. 그래서 진단을 받아야합니다. 청교도들도 항상 그렇게 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보고 자기를 깨닫는 것은 좋은데 환자가 환자 자신을 진단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영적인 경험이 많고 정확하게 말씀을 분별해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파악하고 헤아려줄 그런 신앙이 선배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믿을만한 말씀 사역자를 찾아가서 그래서 정확하게 진단해야합니다. 그리고 과연 그러한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분별하고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뭐냐면 회심의 은혜를 계속 보존해야합니다. 은혜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혼란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 이것이 모두 다 오랫동안 회개하지 않고 죄 죽임의 실천이 없이 진실하게 마음을 바치는 신앙생활이 없이 형식적으로 떠돌다가 미끄러진 시간들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마음은 굳어지고 영혼은 죄로 가득하게 되어지고 생각은 혼란스러워지고 총명은 흐려지고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어렵게 된 것입니다. 계속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면서 은혜아래 있게 되면 그러면 이러한 개별적인 혼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첫 회심해서 은혜를 쭉 받고 보면 이 혼란스러웠던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정돈이 잘 됩니다. 그것이 결국은 우리의 영혼의 질서와 우리의 지성의 질서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이와 같이 해서 그래서 회심의 경험에서 겪는 이 지성적인 혼란에서 벗어나야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뭐냐면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하고 깨달아 신무기들을 끊임없이 개발하여 그래서 자기 속에 그 많은 은혜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죄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죽일 수 있는 그런 탐구의 정신들을 계속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크게 두 번째로 죄가 은혜의 샘을 방법이 무엇인가? 저는 지난 시간에 처음 회심에 대해서 말씀드리기를 첫 회심의 그 축복성은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마치 하늘의 문에 열리고 그리고 땅의 샘이 터지면서 노아 홍수 시대에 물이 불어났던 것처럼 첫 회심의 축복은 바로 그렇게 하늘이 열리는 것이고, 밑에서 땅의 샘이 솟아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구원과 관련된 회심은, 일 회적 회심은 우리를 즉각적으로 은혜의 상태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신비한 교통, 오죽했으면 그 찬송가 작시 자가 그랬겠습니까.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런 강함 체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한 비유를 했죠. 회심도 빛이고, 그 회심의 반복도 빛이라면 첫 회심은 “빛이 있으라.” 할 때 처음 빛이 들어온 것이요. 그 이후의 회심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면서 비친 그 빛이라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 빛이 그 빛이니까. 그러나 이제 처음 들어오는 각렬함에 있어서는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이러한 은혜의 샘, 그리고 하늘로부터 열려진 은혜의 문, 이것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죄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데 연약해서 그러는데 연약은 이 문을 막지 않습니다. 물론 이 죄가 그런 연약함을 사용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순수하게 연약함이 그 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죄가 그 문을 막는 것입니다. 신자 안에 내제하는 그 죄가 그렇게 첫 회심과 함께 터진 그 은혜의 샘, 열려진 하늘의 문을 막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이후에 성화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그 회심은 그 첫 번째 회심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 회심은 열려진 하늘의 문이고 그다음에 터진 은혜의 샘이라고 할 것 같으면 죄는 이것을 막는 것이고, 구원받은 이후 성화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회심의 경험은 이 닫힌 문과 막혀진 은혜의 샘들을 다시 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기도해서 안 열리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것은 나중에 하고 무엇이 이러한 은혜의 샘, 은혜가 쏟아져 내리는 하늘 문을 회심한 이후에 가로막아서 그래서 신자를 그 은혜로부터 부패하게 만드는가? 크게 네 가지를 거론할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영혼의 권태감과 육체의 게으름입니다. 영혼의 권태감이라고 하는 것은 싫증입니다. 우리가 회심하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의 문이 열리고 샘이 터져서 우리가 그 은혜의 강물에 떠밀려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선천적으로 우리가 이 죄에 의해서 오염된, 것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 부패성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렇게 물려받은 오염 속에서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무능함과 부패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럴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니 목사님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회심하고 은혜를 받으니까 그래서 진짜 하늘의 문이 열리고 은혜가 들어오니까 우리가 무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기쁨으로 봉사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었는데” 그렇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 안에 사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물론 나와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얘기 했을 때 바로 그런 경험입니다. 그렇게 막 샘이 터지듯이 물론 그것 자체가 사도바울의 첫 회심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와 같은 상태, 상태적인 면에서 그런 상태라는 것입니다. 들어와서 강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니까 죄는 실존하고 있는데 죄는 그 안에 있는데 그 죄가 거의 없는 것처럼 그 은혜의 물에 떠밀려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것은 나는 이렇게 살수가 없어요. 이렇게 환란이 왔는데 이렇게 기뻐할 수가 없고 이렇게 고난이 겹치는데도 이렇게 소망으로 충만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지금 내가 애통하고 울어야 되는데 왜 이렇게 실실거리고 웃음이 나오는지 너무 기쁘고 감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느냐면 이 17절에서 이야기 한 것의 정 반대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 속에서 기뻐함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있는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백은 죄가 객관화 되어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비례로 똑같이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서 객관화 되어지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죠. 그러니까 죄가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내 몸과 하나 되었을 때에는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다. 라는 느낌이 안 드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아래서는 그런 느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쁨으로 가득한데 속에 부패가 남아있습니다. 부패함과 무능함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과 사랑, 거기에서 비취는 기쁨 이런 것들로 계속 들뜹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무너무 행복하고 기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청년들이 결혼하기 전에 사랑에 빠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랑하면 싫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둘이 만나서 벤치에 안아서 3시간 4시간 지나가는데 거 만약에 혼자 거기에 앉아 있으라. 그러면 돈 준다. 그래도 싫을 것입니다. 추운데. 그리고 비가 오면 분명히 우산을 두개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접고 비를 맞으면서도 하나만 쓰고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좋으니까 싫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결혼하고 애도 몇 낳고 한참 살아요. 요즘 핸드폰 보면 여러 가지 목소리 나오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전화를 걸었는데 따르릉 하고 벨이 울리는 줄 알았는데 여우 우는 소리가 나더래요. 그래서 딱 보니까 ‘마누라’ 이렇게 써 있더래요. 빚쟁이는 귀신 소리 나게 만들어 놓고, 그러니까 뭐냐면 저녁 때 퇴근해서 집에 돌아가요. 그런데 화장을 예쁘게 하고 나와서 ‘여보’ 그래요. 그러면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고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 무슨 사고를 쳤기에 저러나 하고 말이죠. 그런데 여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공정하잖아요. 오는데 매일 오밤중에 문 열어 하고 들어오더니 꽃을 한 다발 사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인의 마음이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 무슨 사고를 쳤기에 저 꽃을 사와서 아부를 하려고 하나. 왜 그렇습니까? 이제 싫증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이 없습니다. 영혼은 그렇게 쉽게 권태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권태감이라고 하는 것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먹을 것이 지천인데 왜 하필이면 선악과를 따먹어요. 그렇잖아요. 먹지 말라고 한 그것 보지 말고 마음대로 먹어도 되는 그 수많은 과일은 안 보이고 왜 그것이 보이는 것입니까? 싫증이 난 것입니다. 무엇에 싫증이 났습니까?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너의 위치는 여기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 모든 피조물들을 지위하면서 나를 향해 울려 퍼지는 영광의 그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어라.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자기도 한번 거기에 올라가서 “너 한번 해 봐라.” 이렇게 누굴 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자기의 위치에 싫증이 난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를 보면 이 인자가 일인자를 죽이고 왕이 된 역사가 많습니다. 부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 한 사람 바로 밑인데 그 한사람 밑에 있는데 그것 해볼만하지 않습니까. 한 사람만 가서 인사하면 되는데 그런데 자기가 끝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도 바로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일에 권태감을 느꼈다면 죄가 들어온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더 쉽게 권태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보면 은혜 받고 나서 5년을 간직하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인들 중에 얘기합시다. ‘1998년도에 은혜를 받고 지금도 그 은혜를 간직하고 삽니다.’ 한번 손들어보세요. 없잖아요. 그렇게 영혼이 싫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권태감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싫은 것입니다. 그 권태감을 몰아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만 이야기 하면 기니까 어쨌든 그런 권태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영혼의 권태감을 무엇을 즐겨 사용하느냐면 육체의 게으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게으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두개가 영혼이 싫증이 없고 열열하고 육체가 게으르면 영혼이 육체를 막 다룹니다. 새벽기도 시간인데 딱 눈을 떠보니까 이제5시에요. 그래서 새벽기도 가야지. 영혼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육체보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야, 새벽기도 가자.’ 그런데 육체가 뭐라고 하느냐면 게을러 그래서 ‘아이 힘들어 죽을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더 잘래.’ 그러면 영혼의 싫증이 없으면 뭐라고 하느냐면 ‘빨리 못 일어나 이 망할 놈.’ 그러면서 ‘당장 일어나지 못해’ 그리고 영혼이 육체를 발길로 뻥 찹니다. 그래도 안 일어나면 ‘예수님이 너 때문에 어떻게 하셨는지 한번 생각해봐. 지금이 무슨 주간이야.’ 그러면 육체가 영혼의 코에 끼어서 딸려오는 것입니다. 나중에 한참 가다보면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기를 잘했다.’ 그리고 이제 앉아서 예배드리고 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따라와서 둘이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이제 반대로 영혼이 싫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육체가 부지런해요. ‘새벽기도 가자.’ 그러니까 은혜가 있어서 깬 것이 아니라 늘 우유 배달부 깨듯이 깬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육체가 주섬주섬 옷도 입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영혼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영혼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아, 그 긴 설교 새벽에 가서 듣고 그리고 컴컴한 방에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음악 소리 들으면서 옆의 지체들이 막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기도하는 것이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왜? 영혼에 죄가 베기 시작하면 그런 신령한 환경을 싫어하거든요. 왜? 죄를 향한 공격적인 분위기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가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부지런히 걸어가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새벽기도 갈려다가 조깅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혼도 싫증을 느끼고 육체도 게을러요. 그러면 이것은 뭐 찰떡궁합입니다. 영혼이 ‘야, 가자.’ 그러지도 않고, ‘새벽기도 가야 할 텐대’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체가 뭐라고 하느냐면 ‘아이, 힘들어’ 영혼이 뭐라고 하느냐면 ‘아, 그러면 안 되겠네.’ 그리고 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번일 경우에는 그래도 좀 낫습니다. 그런데 이게 한번 두 번 세 번, 반복이 되는 가운데 어떻게 되느냐면 이제 영혼이 단순한 권태감이 아닙니다. 처음의 권태감은 그냥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사랑하고 이런 것에 좀 싫증이 난 것인데 나중에는 그것으로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영혼이 의무에 게을리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을 허락해 주면 그 다음에는 영혼은 또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얻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벌써 신령한 은혜, 이런 말씀의 사랑의 하나님과의 관계, 이런 것들을 통해서 얻고 싶지 않은 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신앙생활 한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여러분들을 즐거움이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게서 즐거움을 느끼고 죄는 아니지만 전혀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이 될 일이 별로 없는 그런 것에 여러분들이 기쁨을 느끼고 있고,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만족을 느끼고 있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죄에서 그런 만족과 기쁨을 느끼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영혼은 심각하게 망가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인생을 살다보면 조금씩 기분전환 같은 필요할 것입니다. 뭐 탁구도 칠 수 있고, 뭐 배드민턴도 칠 수 있고,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라도 하면서 기분을 새롭게 할 것도 있고, 뭐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도 한번 그렇게 기분을 풀 취미는 아직은 없지만 갖고 싶은 것이 있는데 스카이 다이빙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 하다가 죽으면 비문에 쓸지를 몰라서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용도입니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탐닉하는 것입니다. 깊이 거기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다 부패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육체가 게을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가면 영혼싫증이 도가 지나치게 되면 그다음에는 그 죄로부터 즐거움을 취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점점 강해집니다. 그 때에는 이미 많은 갈등이 일어난 가운데 결국 이 죄에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가 그 죄에 의해서 종노릇 해 가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처음에 그렇게 솟아오르던 하나님의 은혜, 하늘을 열고 쏟아 부어지던 하나님의 은혜의 그 샘과 그 문들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의 지배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이 영혼의 싫증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겨울 사경회 때 그 영혼의 싫증에 대해서 했지 않습니까. 왜 싫증이 오고, 그리고 그 싫증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고, 그 싫증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배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것들이 자신의 삶 속에 들은 것 가지고는 소용이 없습니다. 듣고는 그것을 계속 숙고하고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영혼을 권태감에서 건져서 하나님 앞에 진실한 성도의 삶을 회심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의 문, 은혜의 샘들을 막지 않고 그 거룩한 성도로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열렬한 영혼과 부지런한 육체입니다. 게으르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열렬한 영혼과 부지런한 육체를 통해서 그렇게 해서 성화의 삶의 진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불순종의 과정을 통해서 이제 은혜의 샘들이 점점 막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문이 닫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가면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거의 공급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죄는 장날을 만난 것입니다. 이 속에서 놀랍게 번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끔 보면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그런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경건한 것처럼 살던 사람이 그렇게 끔찍한 죄를 지을 수 있을까? 그러는데 결국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원래 가식되었던 사람이, 옛날에 진실했던 신앙생활들이 모두 다 가짜가 아니라. 그것도 진실이고 이것도 진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았던 날도 진실이고, 지금 끔찍한 죄를 지은 것도 진실입니다. 두 진실의 가능성이 한 신자 안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마음의 부패와 은혜의 틀이 파괴됨으로서 그 은혜의 샘이 막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부패한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얘기냐면 그렇게 첫 회심에서 하나님이 은혜가 쏟아지고 회심을 통해서 막 바로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부패한 본성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부패는 이 부패한 본성이 은혜에 엄청나게 눌려있는 상태가 아니라. 이 부패가 융성해서 은혜를 쫓아내버리는 그런 상태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부패를 누가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그 중심을 보시느니라.” 그러니까 결국은 자신의 눈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아이고, 교회를 5년이나 다녔지, 교회에서 집사지, 주일 학교도 하지, 새 가족도 하지, 하여튼 나처럼 명함 많이 걸어놓은 사람 있으면 나오라. 그래.” 걸린 것도 많지, 뭐 진짜 자기 말로 “나 없으면 교회가 쓰러지지” 할 정도로 봉사도 많이 한다고 쳐요. 그렇게 판단하면서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판단입니다. 또 다른 사람의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그러는데 정말 대단하다. 그러더라. 이런 이야기, 누구도 그러고 누구도 그러고 계속 꼽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뭐냐면 다른 사람하고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 목사님이 나보고 그것도 신앙생활이라고 묻는다면 그러면 내 주위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은 다 나만큼도 못한데 그러면 그 사람들도 다 아무것도 아니냐?” 그렇게 진지하게 물으면 나는 진짜 진지하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렇다.” 수가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닌 것은 백 명이 따라가도 아닙니다. 오히려 많으니까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사망으로 이르는 길은 길이 넓고 친구들도 많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길이 협착하고 찾는 이가 적다.”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다 결국은 그렇게 마음이 자기 자신으로서는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느냐? 그렇죠.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비춰볼 때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자기의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본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신령하고 거룩한 감화를 발휘하면서 작용하고 있을 때에 비춰보는 일이 가능한 것이지, 자기 안에 역사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기를 거기에 비춰보고 그 말씀을 보면서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가책을 받고, 찔림을 받고, 뉘우치고,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거울을 이렇게 들여다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본 것입니다. 뭐가 많이 묻었네, 그리고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본 유익이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감화가 되지 않을 때에는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와서 내 안에 감화를 일으키고 내 안에 역사하면 그러면 “아이고 뭐가 많이 묻으셨네. 거울을 내려놓고 그냥 삽시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자기를 찌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패하면 이런 작용들이 다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면 마음의 틀들이 파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틀이 파괴된다. 라고 하는 뜻이 무슨 뜻이냐면 이 틀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뭐 빵 같은 것을 찍어내는 틀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쌀을 빻아서 그래서 가루를 만들어서 채에 쳐서 찜통에 넣고 불을 펴서 물을 끓입니다. 그러면 떡이 익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다 갖다가 가래떡 뽑을 때 거기에 갖다 쏟아놓습니다. 그리고 이제 커다란 방망이를 가지고 남자들이 힘차게 집어넣기 시작하면 두르르 하면서 방아가 돌아가면 이 밑에서 가래떡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무엇을 꽂느냐에 따라서 모양이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 품질이야 똑같죠. 쌀 빻아서 소금 좀 집어넣은 것이니까. 맛도 다 똑같고, 그런데 거기에 넙적한 것을 넣으면 절편이 나옵니다. 어슷하게 썰어서 기름 묻혀서 꺼내놓으면 그러면 절편입니다. 좀 굵은 곳에 넣어서 떡국 먹는 가래떡이 나옵니다. 가느다란 것 4개 집어넣어서 쭉 빼면 학교 앞에 떡 볶기가 나옵니다. 이 마음의 틀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가래떡 뽑는데 들어가는 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의 틀이 어떤 틀이 박혔느냐에 따라서 계속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이 틀이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확 내려서 우리의 심령이 온전히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혔을 때 그 때에 그 마음의 틀은 경험과 지식과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경향성들을 그 속에 집어넣어서 쭉 빼낼 때 그런 경건한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은 것입니다. 정직하고 올곧은 삶을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계속 생각하고 그리고 무엇을 봐도 다 하나님과 은혜와 관련되어서 생각나는 것입니다. 뭐 이런 것을 봐도 ‘예수님이 바로 이런 가시에 찔려서 돌아가셨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 꽃을 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 많은 영광을 누렸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꽃 하나만도 못하다.’ 그러셨지 들에 지나가면서 발에 치이는 풀포기 하나를 보면서도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는데 우리를 돌보아 주시지 않겠는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면서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주님이 뜻이 아니면 안 떨어진다. 그랬지.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잘 지키실까.’ 이런 쪽으로만 계속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반대로 이 마음의 틀이 그런 은혜에서 떠나요. 그러면 ‘아휴 흉해, 저것 빨간 칠 하느라고 고생 좀 했겠다. 저것 사느라고 교회 돈 얼마나 썼을까?’ 들에 핀 풀포기를 보면서 ‘아무 생각도 없는 것입니다.’ 공중에 날아가는 새를 보면서 ‘참새구이나 해 먹을까’ 모든 것들을 봐도 은혜에 깊이 잠기게 되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쭉 보면서도 신령한쪽의 생각이 계속 떠올라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계기가 계속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틀이 죄로 기울어지게 되면 신령한 것을 봐도 계속 세속적인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생각과 삶, 이런 것들이 모두 악한 것들이 흘러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의 틀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틀은 한번에 확 변한다기 보다는 시간을 두고 서서히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 떠먹은 자리에 표 안 나고 배 지나간 자리에 표 안 난다. 그러지 않습니까. 어쩌면 뭐 하루. 기도 안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한 주간 사로잡히기 않았다고 해서 뭐 갑자기 여러분들이 배교한 것 아니죠. 그렇지만 그런 태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쌓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기도하기 싫어서 안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기도할 수가 없어서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있는 은혜들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가 들어오고 은혜가 고갈되는 과정을 통해서 이 마음의 경향성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사악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안에 들어온 죄는 일단 들어오면 그냥 한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서서히 들어오되 환경 개선을 하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신이 그 속에 들어가서 적합하게 살 수 있도록 그 신자의 마음의 틀을 죄의 경향성으로 바꾸어 놓는 작업을 하면서 그것이 성숙되어 가는 정도만큼 죄가 융성하면서 발전해서 마음 전체를 그 죄로 사로잡아서 죄의 지배 아래로 데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우리의 육체와 마음과 영혼이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버려서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이 마음의 부패와 은혜의 틀이 파괴됨으로서 이 죄가 은혜의 샘을 막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거짓된 평화입니다. 크게 네 가지로 나뉘어 지는데 우선 첫 째는 환경에 의해서 거짓된 평화 안에서 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2장 19절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놓았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되” 그러니까 이 환경에 의해서 우리에게 두 가지 것들, 첫 째는 괴롭게 분투하여야 할 어려움들을 환경이 사라짐으로서 또 두 번째는 어려움이 없는 번영이 찾아옴으로서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 거짓된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돌아보면 정말 가난하고 핍박받던 때에는 훌륭하게 신앙을 지켰던 사람이 그런 어려움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 평안해졌고 핍박도 없는데 아주 작은 육신의 유혹을 못 이겨서 믿음의 길에서 미끄러지는 사람들을 보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그 피비린내 가는 고난의 길에서도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그리고 사선을 넘나들면서 순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 시간이 지나서 모든 것이 연안해지고 어려움이 사라지고 나니까 그렇게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다가 무릎을 잠깐 꿇었다면 인간들은 동정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이 정욕에 이끌려서 범죄하고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쉽게 어떻게 판단하느냐면 옛날에 그렇게 열심 있는 신앙은 전부 다 사기다. 꾸려낸 것이다. 그러는데 꾸며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진실이고 그 때 그 성공도 진실이고, 지금 이 실패도 진실이고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떤 변화가 일어났냐? 환경이 예전에는 어려움이 있었고, 그 환경 속에서 주님을 붙들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했는데 그 어려움들이 사라지고 번영이 찾아오게 되니까 자신의 영혼을 말하자면 단속하지 못하고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게으른 상태에 방치해버림으로서 그렇게 거짓 평화를 스스로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가치의 기준을 이 세상의 성공에 두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의 성공에 두면 성공한 다음에 반드시 방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사업을 하거나 돈을 벌거나 무엇을 하더라도 그 성취에 우리의 궁극적인 가치를 두면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반드시 방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인생을 살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길에서 기왕이면 잘 살아야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될 때 이 모든 세상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업으로 물려주신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합법적으로 그것을 빼앗아야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공부 잘해서 그 지식의 영역들을 탈환해서 그것에 예수 십자가의 깃발을 꽂고, 가끔 사업하는 사람들을 보고 어떻게 하냐? 그러니까 “아이고 밥은 먹고삽니다.” 그 밥 먹고 살려고 그 힘든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소리 들을 때 참 답답합니다. 그러지 말고 좀 탈환해야합니다. 불신자들이 저렇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데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기업 활동을 하고 창의적으로 해서 재산을 많이 모아요. 안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다 모아서 현금으로 바꿔서 지하에 가서 정치인들에게 넘겨주고 그러지만 믿는 사람들은 안 그럴 것 아닙니까. 그렇게 쓸 돈 가지고 선한 일에 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면 그것도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밥만 먹으려고 그것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 말고, 그렇게 하면서 분투하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 그 자체가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지면 어느 한 순간에 번영하게 되면 반드시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것대로 살아야지만 인생의 참 가치와 만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얻어도 내가 주님을 내가 얻을 수 없다면 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매일 매일 순종하며 그런 심령을 가지고 발걸음을 옮겨놓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그릇된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우선적으로 목회자에게 해당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직접적으로 가르치지 않아도 자기보다 신앙이 어린 사람들에게 눈에 띄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1절에 뭐라고 했느냐면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그러면 왜 그런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서 거짓된 평화를 자신이 지지하게 되느냐? 그 이유가 뭐냐? 첫 번째는 먼저 믿은 사람, 더 좁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가르쳐준 사람들에 의해서 그릇된 신앙의 모본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준 목회자가 더 이상 성화를 위해서 분투하는 모습을 보이지를 않아. 자기를 전도하고 자기에게 말씀을 가르쳐준 구역장이 더 이상 자신이 죄인이며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수많은 죄들이 있어서 그것과 함께 끊임없이 싸우고 분투하기 전에는 진실한 신자가 될 수 없다. 라고 하는 그런 신앙의 결의와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보여주는 그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것들을 읽을 수가 없어요. 교회에서 커다란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진지하게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아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자기가 깨어지는 현장을 지도자들 속에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자기 자신에게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이것 혹시 신비주의 아닌가? 내가 너무 신앙적 신경과민에 지금 속해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는 이것 내가 잘못된 신앙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본을 보면서 그릇된 길로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샘이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받을 형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심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많이 선생 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구역장 시켜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모양인데 그런데 그것 좋은 것 아닙니다. 나중에 그 하나님 앞에 판단 받을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매어서 깊은 바다에 빠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 와서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냐면 참된 신자의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자신의 삶과 존재를 통해서 보여 주어야합니다. 물론 그 사람이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완전한 사람이 자기같이 불완전한 사람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완전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도 자기가 완전하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을 보면서 배우는 것이 뭐냐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부족을 느끼고 온전한 신자가 되어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깨뜨려지고 그리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 죽인 것을 날마다 내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서 힘써요. 그리고 자기 깨어짐의 끊임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먼저 믿은 사람이 그런 것을 보여주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목회자들이 먼저 그것을 보여 주어야합니다. 완전하지 않죠. 어쩌다가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의 종이 되었지만 영적으로 보면 모두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한 마리의 어린 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먼저 만난 사람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주의 포도원에 포도원지기가 되었습니다. 주의 목장에 양의 무리를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목자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이기 전에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한 사람의 신자로서 일평생소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하고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그 진실한 신자, 참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인간이 되는 것을 일평생 가장 중요한 숙제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큰 교회에 맞는 빌딩을 사고 땅을 넓히고 그러는 것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어려워요. 설교를 한 시간 준비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쉬워요. 그렇지만 자기 자신이 온 존재로서 어떻게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길인가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성도들만 의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 안에 주님이 새겨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자신도 똑같이 저도 역시 똑같은 고민입니다. 처음 회심의 그 은혜를 반복되는 회심을 통해서 갱신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열어주신 그 은혜의 샘들과 열려진 하늘의 문들을 열려진 채도 터진 채로 간직하며 사는 것, 뭐가 차이가 있습니까. 한 사람은 여기에서 신앙생활 하고 한 사람은 거기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 차이지. 무슨 신앙생활에 차이가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형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릇되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 커다란 죄악입니다. 그래서 신자로서 참된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지 못하는 지도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영혼들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정말 참된 신앙이 무엇이고 진실한 신자의 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의지가 없고, 그런 실제적인 피 묻은 삶이 없는 난무하는 가르침 지식의 자랑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심령이 어린 영혼들이 “아, 신앙생활은 이렇게 고민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냥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럼치기 엉켜진들 어떠하리. 그냥 살면 되는 것이구나.” 매일 몰려다니면서 보신탕이나 먹고, 매일 몰려다니면서 야유회나 다니고, 탁구나 치러 다니고, 매일 이집 저집 모여 앉아서 수다나 떨고,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결국 동물원 같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매일 그렇게 인간적인 교제로 뒤엉켜서 다니면서 형님 누나. 동생 하면서 그렇게 어울려서 그렇게 해서 사교클럽처럼 되어서 마지막에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성도의 모임은 모였다고 끝나고 흩어져서 갈 때에는 저 사람처럼 거룩하게 살고 싶다. 라고 하는 그 무엇을 가슴에 심어줄 수 있는 그런 모임이어야합니다. 그리고 요즘은 또 얼마나 그렇습니까. 아예 주일 예배 간단하게 드리고 나서 축구 클럽, 골프 클럽, 승마클럽, 탁구 클럽, 무슨 수영클럽, 종이접기 클럽, 자수 놓는 클럽, 게이트볼 하는 클럽, 그렇게 되는 교회에서는 부흥이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끈끈한 인간관계로 뒤엉킨 교회에서는 절대로 부흥이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만족 속에 또 다른 사교단체화 되어가는 교회입니다. 그런 속에서 성도들이 무엇을 배우겠습니다. 몰려다니면서 그렇게 놀면서 먹고 마시고 놀면서 그러면서 그것이 거의 전부 다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무엇을 배우겠냐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교회에 처음 왔을 때 완전한 사람들이 있거나 그것이 아니라. 똑같이 세상에 우리와 같이 이렇게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은 무엇인가 다른 본향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구나. 그래서 자기 부족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아파하고 자기의 죄와 악함을 발견하고, 그리고 기도하고, 연약한 지체들을 돌아보면서 눈물로 호소하고, 이러는 모습들을 보면서 뭔가 이 세상에 있는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이 이 안에 존재하는 그것을 보여주게끔 한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것이 한 교회에 신앙의 성숙도입니다. 무슨 행사를 잘 치루고 무슨 건축헌금만 하면 돈이 억수로 쏟아져 나오고 이런 것에 의해서 교회의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가장 커다란 문제가 뭐냐면 이 신앙적으로 자신이 본받고자 하는 진실한 맨토, 즉 스승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스승은 많으나 아비는 없으니 그랬는데 나는 오늘 스승도 없다. 그런 시대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물어보세요. “너는 예수 믿는 사람 중에 누구를 본받고 싶으냐?”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세요. 누구를 본받고 싶습니까? 그런 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제 소견에 옳은 대로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목회자에게 해당되는 것인데 다수의 인기에 영합해서 쉬운 쪽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쉬운 신앙생활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소위 얘기하는 현실화 한다는 미명하에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많은 영혼들이 그 그릇된 가르침에 넘어지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려고 애쓰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것은 하나님 앞에 참다운 평화가 아니다. 나는 정말 이렇게 내 안에 있는 많은 죄를 발견하고 깨뜨려져서, 그래서 변화되어서 새 사람이 되어서 그 처음 회심 때의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과 누렸던 그 평화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배우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 뭐라고 배우냐면 처음 믿을 때는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그런 사랑이 강한 것처럼 느껴지고 감정을 조절을 못하지만 이제 오래 성숙하게 되면 이렇게 딱딱한 것이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그런 식으로 암시를 주어서 오히려 회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미성숙 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역할까지 하는 것입니다. 배나 더 지옥 자식 만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개인적으로 친해요. 저는 교회생활을 하고 목회를 쭉 해오면서 혹은 부교역자 때 교회를 도우면서 목회자와 인간적으로 깊은 친분을 누리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과 친분을 누리는 사람이 별로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목회자와 인간적으로 아주 가까운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친교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러니까 물론 같이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일로 인해서 목회자와 더 가까울 수 있지 않습니까. 장로님이 된다거나 하면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고 교회 일을 의논하다 시피 하니까 가까워질 것 아닙니까. 또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특히 교회에서 일을 한다거나 하면 매일 거의 마주 보다시피 하니까 친교가 많아질 것 아닙니까. 그러면 목회자도 사람이니까 개인적인 친분관계들이 생길 것 아닙니까. 이런 관계가 깊어지면서 선명하게 저분으로부터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리고 나는 그 말씀 앞에 굴복해야 될 사람이다. 라고 하는 생각이 희석되지 말아야 되는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그것이 희석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믿음생활 똑바로 하십시오.” 이것도 이렇게 잘 모르던 상태에서 선포될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들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 해줘도 이게 나하고 친한 목사님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느냐면 목회자 입장에서 이렇게 친한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을 친분관계로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그릇된 가르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또 더더군다나 정말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생생한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설교자에게 인간적으로 가까이 다가오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차라리 멀리 있어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그 기쁨으로 가득해집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계속 과도한 친분관계를 요구하면서 다가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 교제가 어느 선에서 딱 끝나면 혹은 끝나지 않고 이어지더라도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이런 원리를 파악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 속에 계속 들리는 통로로서 목회자를 대하고 그래서 함께 가까이에서 일하고 돕기는 하지만 그러나 언제든지 그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들으면서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 라고 하는 이런 결심들이 유지되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여러분 집회에 가보거나 말씀 전하러 가 보면 설교 안 듣는 사람들이 몇 부류가 있는데 가장 안 듣는 사람이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입니다. 대부분 두 번째는 부목사님, 세 번째는 장로님들이고, 네 번째는 그들의 부인들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분들만 변화되면 나머지 사람들은 천천히 변화되어도 교회는 반드시 변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뭡니까.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이 잘못된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고 목회자와의 개인적인 친분, 이런 것들로 인해서 뒤엉킨 가운데 또 그것들을 부러워하고 시샘하고 서로 그것들을 차지하려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은 전부다 쓰레기통에 집어 넣어야할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들입니다. 목회자로 단에 서게 된 것도 주님 때문에 서게 된 것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이게 아니다. 그러면 지금도 아니지.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도 주님 때문에 그리스도의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목양관계가 성립된 것 아닙니까.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가족적인 교회 되게 좋아하시는데 그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가족적인 교회보다 더 좋은 것이 뭐냐면 하늘나라 같은 교회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생하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끊임없는 성화의 길을 가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관계입니다.
세 번째는 속이는 영의 역사입니다. 예레미야 6장 14절에 보면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가짜입니다. 속이는 영의 역사입니다. 악한 영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와서 그릇된 가르침을 사용해서 혹은 직접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분명하고 명백한 말씀이 너무나 쓰고 아프게 느껴질 때 쉬운 가르침을 택하게 만들어주어서 괜찮다. 괜찮다. 너만큼 잘 믿는 사람이 없다. 여러 가지 감언이설로 꼬이면서 자신의 영혼의 실체를 보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그릇된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 9절에 보면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은 잘못된 것이 없는데 그것들을 자신에게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너희는 내 백성이다.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좋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디에 사용해야합니까?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처럼 사랑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했던 것처럼 순종해야지 이렇게 생각해야 되는데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니까 대충 살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안 주실 수 있겠어. 당신이 어떻게 감히 그러실 수 있겠어. 이런 태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그랬으니까 이제는 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되겠다. 생각해야 되지 않습니까. 한번 구원은 일수불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을 주셨으니까 이제는 더더욱 잠시 있는 이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영원한 구원을 주시고 흔들리지 않는 구원을 진동하지 않는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으니까 더 많은 은혜를 받고 우리들이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자. 이래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구원이 일수불퇴라며 아, 그래 죄 좀 짓고 세상 맛 좀 보면서 이렇게 살살거리고 살아도 결국은 마지막 때 주님이 구원해주신 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결국 뭐냐면 하나님의 약속은 진실한데 그 약속을 자신에게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겸손해지고 하나님 앞에 낮아지도록 주님이 주신 말씀을 사용해서 교만해지고 방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죠. 그러니까 더더욱 여러분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죄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주님을 거시리게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바르게 살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짓된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아주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주 진실하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데 내가 무슨 문제가 있느냐. 교회에 잘 다니고, 기독교 적인 집안이고, 그런 식으로 거짓된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결국 남았던 하늘의 문이 모두 닫히고, 솟아나왔던 그 은혜의 샘들이 모두 닫히기 시작하면서 그러면서 그는 죄의 지배아래서 속절없이 껍데기는 예수 믿는 사람이고 속은 철저한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거시리면서 교회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에게 어떤 생명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감화를 상실했고, 마음이 그 하나님의 음성을 기뻐하지 않고,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에는 힘이 없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해도 차가운 거절감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어서 이제는 인생의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과 의논하기 보다는 자신의 지혜와 인생의 방법을 의지하기에 바쁘고 죄와 타협하기 위해서 이미 마음의 문을 열어놓은 상태입니다. 그런 사람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깃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은혜의 상태로부터의 부패 (1)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7:17)
우선 어제 시간이 너무 늦어서 하나를 다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오늘 마저 하고 그리고 오늘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죄가 은혜의 샘을 막는 법에 대해서 네 가지를 말씀드리겠다. 하고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영혼의 권태와 육체의 게으름, 마음의 부패와 은혜의 틀의 파괴, 그다음에는 거짓된 평화 그리고 끝났는데 마지막 네 번째가 뭐냐면 복음을 떠난 가르침에 빠짐으로서 죄가 은혜의 샘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위험에 빠지게 되면 신앙이 아주 쉽게 형식화 되고 타락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복음을 떠난 가르침에 쉽게 빠지게 되는 이유가 뭐냐면 신앙에 관해서, 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성경이 토대가 되어서 그래서 쌓아올려진 이 기독교의 교훈, 그것을 올바르게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제 차이가 나는 것도 사소한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매우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소한 차이냐, 큰 차이냐에 따라서 이제 이 기독교 신앙의 기반 전체가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 역사를 보면 예배당에서 악기를 사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가지고 논쟁이 벌인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사소한 차이입니다. 또 예배당의 구조가 나무 의자를 놓을 것이냐 이렇게 개인적인 의자를 놓을 것이냐? 이런 것들은 사소한 차이이고 그렇게 중요한 차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정도가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 아주 근본적인 것들을 흔들어 놓는 것들은 신앙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서 우리의 영적 생활을 혼미함 속으로 빠뜨릴 수가 있습니다. 이런 모든 원인들은 결국 첫 째로 지각없는 견해에 의해서 그것들을 신앙화 하는 것입니다. 무슨 깊은 생각을 하면서 성경을 연구하고 그렇게 해서 이것이 신앙이다. 이것이 신앙의 답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도자로서의 인격적인 특성이나. 그리고 우리 교회가 잘 한다든지, 혹은 또 여러 가지 다른 이유에서 우리들이 아주 쉽게 너무 가볍게 신앙에 대한 견해를 취하고 신앙의 일부분인 것들을 전부인 것처럼 호도해서 그렇게 신앙을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게 될 때에 그 때에 이제 우리의 첫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샘들은 막히게 된다.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1970년대쯤 일입니다. 박 정희 대통령이 살아있고, 그 때 뭐 혼자 독제를 한다고 해서 그 때도 대모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랬습니다. 국내에서는 이제 여러 가지 많은 제악 때문에 자기의 정치적인 견해들을 올바로 피력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외국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그 때 독일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었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뭐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사실 조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어느 날 목사님이 새로 오셨는데 올라가더니 이제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교 하면서 박 정희 일당이 독제를 하고 있고 수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데 우리가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여기 외국에서 이렇게 편안히 산다고 해서 조국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2년 동안 똑같은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번 두 번 설교를 하면 잊혔던 조국이 생각나면서 “아, 진짜 우리가 조국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시간이 흐르면서 이 시간이 마치 성경을 읽고는 마치 정치 강좌 하는 시간처럼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그렇게 함으로서 이 성도들이 역사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자녀, 이 신자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 세상을 바꿔놓기 위해서만 부름을 받은 도덕적 개혁의 매개체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영혼을 가진 신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예수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속사람도 살았고, 또 속사람을 힘입어서 겉 사람도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한 부분에 치우치면 안 되고 우리의 구원이 통 전적 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혼의 원리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그 은혜를 받고 그래서 죄를 이기고 속사람이 강해지고 그러면서도 그렇게 받은 은혜의 체험들이 자기만족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죄가 가득한 이 세상에 나아가서 정말 천국의 맛보기로서의, 하늘나라의 맛보기로서의 삶을 살고, 그리고 그 어두운 세상에서 적당히 야합하고 타협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고, 고난을 받아도 참된 가치가 자신의 행복이나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합당하게 사는 것으로서 가치를 삼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올곧은 믿음을 지킬 수 있고 또 손해를 많이 보면서도 신앙 하나로 이 어두운 세상에 천국의 맛보기와 같은 삶을 살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라고 하는 도덕적 명제 하나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하늘의 신령한 자원들이 그의 영혼 속에 공급되고, 그리고 그것들이 그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그래서 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자기에게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하늘나라의 올바른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외톨이가 되어도 좋다.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균형이 맞춰 져야지 조국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기도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나쁜 놈들 몰아내자고 말이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헌금해서 반정부 단체에 보내자. 그리고 말이지 그렇게 하는 것만을 가지고 되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고 통전적인 성격의 구원이 되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어느 하나를 받아들이고 어느 하나에 예민해진 나머지 다른 것들은 전부다 무시해버린 그런 현상입니다. 그런 것에 빠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이 신앙과 어떤 영적인 것들이 모두 마음속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말이죠. 모든 우리의 신앙생활의 답이 우리 스스로 찾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러면 이 지각없는 견해가 우리의 신앙화 되느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뉘우치고, 끊임없이 죄를 죽이고 자기를 이기면서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는 것은 이미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자기 안에 있는 부패성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무능함과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끊임없는 은혜들을 공급받기 위해서는 자기가 정말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한 삶을 살면서 참된 신자가 되어가고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오늘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어제 이겼으니까 오늘도 이길 것이라는 그런 생각은 안 됩니다. 매일 매일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이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해서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는 기뻐하지만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그런 삶이 너무 부담스럽고 무거운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는 그렇게 힘들게 하나님을 추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그런 삶 말고, 편안하게 갈 수 있는 길들을 택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자기 깨어짐이 없는 그런 신앙생활이 없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신앙생활 말고 이런 신앙생활도 있다. 라고 가르쳐줄 때 그런 영혼의 고통과 내면이 깨어지는 아픔이 있는 길을 택하기 보다는 손쉬운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가 못되게 사는 놈들을 혼이나 내 주고 욕이나 해 주고, 그리고 열심히 그들을 위해서 모금해서 보내고. 이러면 뭔가 세상이 되나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뭐냐면 영혼의 싫증과 그 싫증난 상태에서 지성이 자기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합리화를 자꾸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그런 영혼의 싫증을 느끼면서 그런 싫증을 느낀 것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으로 그런 것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자기가 그런 식으로 그릇된 신앙의 견해를 아주 쉽게 받아들이고 그 길을 택한 것입니다. 어려운데도 그것이 옳다고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훨씬 쉽겠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길들을 택하는 것입니다. 또 쉽겠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이 육신적인 판단을 가지고 그런 것들을 쉽게 택하고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이냐면 두 번째로 성경에 순종치 않은 불신앙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참된 복음 신앙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한다면 누가 우리에게 신앙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쳐준다면 그것이 정말 성경적인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판단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명백하게 성경이 그것을 참된 신앙이라고 증거하고 있으면 이제까지 내가 믿음 생활 하면서 지내왔던 참된 신앙이라고 검증된 것들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지, 이것들을 보면서 그것들을 검증하고 철저히 검증된 것만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최소한 자기 자신이 두 가지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말씀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지식과 그다음에 어제 말씀드린 거짓 영들을 분별해 낼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대표적인 교회였지 않습니까. “자칭 사도라 칭하는 자들이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막 혼잡 되게 가르쳤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자칭 사도라 했으니까 아마 그 교인들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받아 들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막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들으려고 했는데 가만히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까 이 가르침이 참된 가르침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영적으로 분별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입니까. 자기가 신앙부터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가면서 그것들이 가슴속에 하나씩, 하나씩 쌓여서 그 지식들이 축적되어서 뭔가 새로운 지식이 들어오면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그 신앙의 지식, 성경에 입각한 신앙의 지식을 가지고 과연 그러한 가르침이 성경에 부합하는 진리인가 하는 것을 검토하고 그리고 확실히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 라고 확신될 때 그것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신앙생활이 되어야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건축을 하는 것과 아주 유사합니다. 건축을 하는데 뭐가 들어가겠습니까. 벽돌, 시멘트, 나무, 철근, 목제, 등, 합판, 이런 것들이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건축이라고 하는 것은 땅 파고 돌 놓고 그것도 줄 맞춰서 쭉 놓고, 시멘트 바르고 굳은 다음에 거기에다 창문을 세우고 그 위에 유리를 끼우고 이렇게 해야지 집이 되는 것이지 트럭이 다섯 대가 와서 벽돌 안 트럭 쏟고 가고, 그 위에 목제 한 트럭 쏟아놓고 가고 시멘트 수십 포대 쏟아놓고 가고 그 위에 유리 수 백장 쏟아놓고 가면 그것이 건물입니까. 쓰레기 더미지 나는 여러분들에게 아주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그리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항상 죽을 때까지 학생의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을 공부하는 자세를 갖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은 결단코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마음에 드는 견해를 아무거나 세상에 돌아다니는 기독교에 대한 견해 가운데 아무거나 하나 가지고 편리하게 맞는 것 하나 쥐고 신앙생활 하면 된다. 라고 생각하는 이 모두 다 올바르지 않는 복음을 떠난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이고 거기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어떻게 되느냐면 은혜의 샘이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은혜의 샘이 막히게 되느냐면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나는데 우선 첫 째는 그 신자의 마음이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성도의 고백이 그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설교를 들었을 때 너무 조국에 대해서 마음이 아프고 분노도 생기고 그래서 기도도 하게 되었는데 자신들은 계속해서 영혼이 곤고한데 계속해서 설교가 그런 혁명적인 설교만 주어지니까 영혼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마음이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오지 않고 기도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순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굳어지고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퍅해지고 굳어진 가운데 칼날같이 서서 이것은 옳고, 이것은 그르다. 라고 하는 판단이 그들에게 주입되게 되면 혁명가가 되든지 아니면 세상이 아무렇게 돌아가든지 나는 나대로 산다. 둘 중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서 세상을 이기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그리고 자신이 복음적인 신앙에서 떠나지 않을 때에는 기도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느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 안에 회복되어지는 은혜의 작용들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복음이 아닌 그릇된 신앙적으로 빠져버리게 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 속에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리로부터 멀리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은 굳어진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생명과는 거리가 먼 그런 핍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단 안에는 열심이 있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생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이렇게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 하나 성경을 기초로 신앙이 차곡차곡 쌓아 올려져간 사람들은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이미 쌓아올려진 성경의 지식들에 기초한 기독교 신앙의 얼개가 있기 때문에 그 얼개를 통해서 어떤 누군가가 나에게 가르치고 주장하는 그런 참되지 않는 신앙적인 가르침을 볼 때에 그것이 즉시 아니다. 라고 하는 것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허망할 정도로 아무것도 머리에 든 것도 없고, 그다음에 진지하게 성경을 공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교회를 5년씩 10년씩 그렇게 다니고도 성경 어디에 있는지 그것 하나 못 찾아가지고 쩔쩔매고, 읽지도 않고 체계적으로 배우지도 않고, 설교는 무엇을 들었는지 예배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는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그러면서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교회생활을 통해서 나아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 마당에 나무가 서 있는데 열린 공간에 있는 첫 번째 나무는 위를 잘라냈습니다. 왜냐면 나무 가지가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정원사가 와서 잘라내야지 다시 난다고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그리고 그것을 자신 속에 차곡차곡 쌓아올리면서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해야지만 그 위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쌓아 올려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 사각으로 된 나무토막들을 잔뜩 갖다놓고 그리고 많이 높이 쌓으라고 한다면 하나씩 놓고 쌓는 사람 없을 것입니다. 높이 쌓고 싶으면 우선 널따랗게 놓고 그리고 하나, 하나 천천히 쌓아 올려 가면 몇 트럭도 쌓아 올려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 하나 올려놓으면 몇 미터나 쌓을 수 있겠습니까. 한 바가지 쌓아놓으면 와를 무너져버리지 그것이 균형을 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매일 매일 예배를 드리면 그것들이 가슴속에 남아야합니다. 머리로 모두 기억할 수는 없죠. 그렇지만 그것을 하나, 하나 터득하면서 내가 알고 있는 이 기독교 신앙의 책꽂이에 하나, 하나씩 정리하면서 그것들이 체계화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외우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암기하려고 노력하고 그것을 마음에 담으려고 노력하고, 그리고 누군가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것을 진술하려고 노력하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 복음을 떠난 교훈에 빠지지 않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빠지게 되면 은혜의 샘이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지난시간에 할 내용에 들어가는 것이고,
이제 오늘부터 본론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죄가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이러한 은혜의 샘을 막게 되는데 은혜의 샘을 막는 일은 구체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역사하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우리 안에 있는 죄가 구체적으로 은혜의 샘을 막는지. 죄가 은혜의 샘을 막는 방법을 차례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죄가 은혜의 샘을 막는 방법 중에 두 가지만은 먼저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째는 영혼이 죄를 경계치 못하게 함으로서 이 은혜의 상태로부터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샘이 계속해서 솟아 올라오게 되면 부패할 리가 없죠. 그런데 그 샘을 어제 말씀드린 방법으로 막아버립니다. 막아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 그 은혜로부터 부패해지는데 죄가 어떻게 은혜 상태에 있는 신자를 부패하게 하는지에 대해서 삼일 동안 말씀드리겠는데 첫 번째 것이 뭐냐면 영혼이 죄를 경계치 못하게 함으로서 은혜 상태에 있는 신자를 부패하게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우리들이 생각을 통해서 이제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이 생각의 태만이 죄의 역사인데 이 생각의 태만을 통해서 굉장히 은혜 상태에 있었던 신자가 서서히, 서서히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생각의 태만을 죄가 가져온다. 라고 하는 이것이 무슨 뜻이냐?
설명을 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회심을 통해서 진짜 하늘의 문이 열리고 샘이 터지면서 그러면서 죄를 이기게 하는 신령한 은혜들이 샘솟듯 솟아나고 소낙비처럼 쏟아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그 은혜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행복한 교제를 누리며 하루, 하루 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흔히 첫사랑의 대라도 부른다고 첫째 날 말씀드렸잖아요. 그런 삶을 아주 행복하게 살아가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무한정 솟아나오고 위로부터 쏟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에 이제 하나님의 그 은혜의 쏟아진 솟아남이 정지 상태에 있는 것 같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그리고 그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주님이 주신 은혜로 주님을 성실하게 섬기고 그 속에서 우리들이 죄와 싸우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며 살게 하는 많은 어려움과 더불어서 싸우고 분투할 때 다시 그 은혜가 우리에게 제삼, 제사 계속 부어지는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사랑의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첫 회심을 통해서 그 첫사랑을 경험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확 부어졌다고 해서 우리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더 큰 은혜를 주시고 주님께 순종하려고 하면 더 큰 은혜를 주시죠. 그러나 어느 순간에 영혼이 이렇게 처음 회심의 문이 열리면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삶의 구석구석에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바치며 온 마음을 드리면서 사는 그런 신앙생활을 무한정 계속 해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어느 순간에 그 신자가 미끄러지기 시작하는데 그 미끄러지는 첫 번째 미끄러짐이 뭐냐면 생각이 이탈하는 것입니다. 죄는 생각을 이탈시킨다는 것입니다. 이탈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생각이 마치 기차가 설로 위를 걸어가듯이 거룩하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계속 그 선로 위를 가는 것처럼 똑바로 그 생각이 올곧게 가야하는데 우리 안에 있는 죄와 밖에 있는 유혹 이런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서 이 생각이 이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죄로 타락하기 전에 마음이 변하는 일이 있고 마음이 변하기전에 먼저 생각이 이탈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시골에 잠깐 있어 봤지만 그런 광경까지는 못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희 할머니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때만 해도 애들이 새 잡으러 간다. 그러면 대게 새총에다 돌 맹이를 잔뜩 넣어가지고 가서 새를 맞추거나 아니면 나무 사이에 새 많이 날아다니는데다 가느다란 실로 만든 그물을 걸어놓고 거기에 새가 부딪히면 이 날개가 실에 끼어서 파닥파닥 거리면 그것을 꺼내서 아이들이 구워먹기도 하고 그러는 것은 보았어도 저희 할머니는 당신이 어렸을 때 새 잡은 이야기를 한번 해 주셨는데 그 때 새는 제가 어렸을 때보다 훨씬 더 순박하고 어리석었던 것입니다. 그래 사실 여러분도 저의 얘기를 들으면 새가 그렇게 해서 잡힐까?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우리 할머니는 새를 많이 잡아서 어린 시절에 같이 드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느냐 그러니까 여러분 빈대떡 붙여서 올려놓는 바구니 있지 않습니까. 채반이 있는데 큰 채반을 놓고 거기에다 긴 나무를 놓는답니다. 그러면 채반이 이렇게 됩니다. 그것을 실로 묶어 놓고 저쪽에서 잡아당기면 채반이 쏟아질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다가 쌀이나 보리쌀 같은 것을 논다는 것입니다. 사실 새가 눈도 그렇게 안 좋을 터인데 그 바구니 속에 있는 보리쌀이 보이겠습니까. 안 보이니까 어떻게 하느냐면 친절하게 저기 대분에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뿌려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쪽으로 오게, 그러니까 너무 많이 뿌려놓으면 배가 불러서 그냥 가버리니까 몇 개만 놓아서 미끼를 놓고 안 쪽으로 올수록 점점 많아져서 거기에 많게 그러면 새가 사람을 경계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돌다가 내려와서 이 보리쌀이 있다. 이거죠. 그래서 막 소리를 질러서 친구들까지 전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씩 먹어요. 먹는 동안에 처음에 그 집안에 날아올 동안에 있었던 경계하는 생각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새 까먹은 정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 하나 먹고 가다보니까 바구니에 들어가 보니까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여서 머리를 들이대고 그것을 쪼아 먹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잡아당기면 채반이 엎어지고 거기에서 채반이 조금 움직이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파닥파닥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서 이렇게 열어서 꺼내면 날아갈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면 몇 번 밟으면 그러면 이제 거기에서 거의 졸도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갖다 털을 벗겨서 구워먹기도 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뭐 요즘에 실행하면 절대 새가 잡힐 리가 없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청교도들의 책에 보니까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면 제가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얘기하지 못하겠는데 새를 잡을 때 잠언 1장 17절에 보면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겠거늘” 그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새가 그물을 치는 것을 이렇게 보면 “응 저기에가 그물을 놨구나. 그리고 안 가지” 새는 바보입니까. 그것도 살라고 태어났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면 새가 있으면 그물을 칠 때 사람이 누군가가 몰이꾼이 있어서 이 새의 시선을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쪽 방향에다 그물을 친 다음에 그쪽 방향으로 모는 것입니다. 그물 치는 것을 보았으면 그쪽으로 안 날아갔을 탠데 못 보았기 때문에 정신 팔려서 딴 짓 하다가 그물 쳤을 때 못 보았기 때문에 그쪽이 유리한 통로니까 도망을 가다가 걸리는 것입니다. 뭐 그런 이야기를 청교도가 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어느 한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은혜를 모두 잊어버리고 마음을 돌 맹이 같이 딱딱하게 굳어있어요. 눈물도 안 나오고 마음의 뜨거운 열정도,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감동 있는 사랑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 하지만 그러나 그 첫 시발점을 깊이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것이 우리의 생각이 이탈되는 일이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면 사람이 살면서 무슨 생각은 안 하겠습니까. 심리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하루에 인간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이 십만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론 그 중에는 의식하는 것도 있고 못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생각들이 그렇게 스쳐 가는데 뭔 생각은 안 나겠습니까. 그런데 죄는 신자 안에서 기회를 보아서 신자가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을 상실할 때 어느 한 순간에 생각을 이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헛된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이 이탈하게 만듭니다. 생각을 이탈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영혼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죄에 대한 제대로 된 경계심을 가질 수가 없게 될 것 아닙니까. 생각이 이탈되니까 한눈을 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에 대한 공격은 이 생각을 통해서 이것들을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어떤 사람은 그렇게 잘난 척 하더라고요. 뭐 자기는 영적으로 분별이 된다고 그러는데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생각이라고 하는 기능 자체가 영혼이 사용하는 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상태에 따라서 생각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틀리죠. 영혼이 충만하고 은혜 가운데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신령한 생각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부패해 있으면 맨 더러운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노아 홍수 때에도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인간이 어려서부터 마음에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악함이니라.” 영혼이 죄로 더러워지게 되면 막 생각이 악하고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을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아무것도 없고, 나는 그냥 영적으로 분별한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아, 저 사람은 굉장히 안 좋은 사람이다. 왜? 내가 영적으로 느껴진다. 근거가 뭔데? 그런 것은 모르지만 내 영이 느낀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조심해야 할 사람입니다. 또 그런 사람 앞에 꼼짝 못하잖아요. 나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저 사람은 느낀다니까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그런 것. 저희 교회는 그런 점에 있어서 현저하게 있어서 성숙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 하고 돌아다니면 많은 지체들이 동물 보듯 합니다. 그것은 절대 영적인 자만심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데” “성령님이 말씀하셨는데 그냥” 그냥 기도하다가 생각이 났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뭐 기도도 별로 안 하면서 뭐 그렇게 하나님이 자주 말씀하셔요.
생각을 이탈시킵니다. 생각을 이탈시키고 나면 그다음에 어떻게 되느냐면 개별적인 상황에서 의무를 져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이런 뜻입니다. 일반적인 것에 만족하고 개개의 상황에 집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황에 만족하고 개개의 상황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런 뜻입니다. 죄가 아주 깊이 들어와서 그 사람을 파괴하기 전까지는 은혜가 좀 떨어졌다고 해서 교회에 안 나오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것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나, 교회에 나가고 있지. 나, 주일을 잘 지키고 있지. 나, 십일조도 한다고나 할까. 나, 변함없이 교회에 잘 다니고 신앙생활 잘 하고 있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일반적인 것입니다. “앞으로도 나는 신앙생활을 잘 했으면 좋겠어. 교회도 잘 섬기고, 성도들을 위해서 잘 봉사하고 나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 전체 지금처럼 교회 잘 다니고 그리고 우리 애들도 시집 장가가면 당연히 이 교회에 나와서 우리 모두 함께 신앙생활 해야지.” 이것은 모두 일반적인 것입니다. 일방적인 것에 만족하고 개개의 상황에 대해서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신자들에게는 모두 하나님을 사랑한다. 라고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렇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일반적인 고백, 포괄적인 고백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나는 도저히 그런 교리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런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또 두 번째 “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이면서 살겠느냐 오늘 나온 것도 사실 나도 영광을 받으려고 나온 것이지 내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겠느냐 나는 신학적으로 동의가 안 된다.”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분 있으면 한번 손 들어보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죠. 정말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러나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연약함이 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우리 하나님 이외에 누구를 사랑하겠습니까. 지금은 조금 주님을 안 사랑 한다. 라기 보다는 조금 덜 사랑해서 그 사랑 가운데 조금을 첫 회심 때보다는 다른데 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잠깐 있는 일이고 결국은 내가 주님을 사랑할 것이고 그리고 결국은 내가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세상에 욕심이 많다고 하지만 저는 사실 욕심 없습니다. 요즘 사업이 바빠서 주일 날 늦게 나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힘들어서 기도도 못하지만 결국은 나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습니다. 그런 포괄적인 고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포괄적인 고백만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리고는 구체적으로 이 개별적인 의무 이행에 있어서 이러한 고백들이 그 한 행동, 행동마다 베어있어야 합니다. 개별적인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그런 고백, 내가 하나님만 사랑한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싶다. 라는 고백이 개별적인 하나, 하나의 의무이행, 하나, 하나의 삶마다, 생활, 행동마다 독특하게 그 속에 내제되어 있어야지만 그가 생각에서 이탈되어 미끄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그 올바른 성화의 길을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포괄적인 것은 뭐냐면 “제가 열린 교회를 참 사랑합니다.” 그래서요. “진심입니다.” 그래서요. “결국은 이 교회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요. “그렇게 살다가 저는 이 교회에서 목사님 품에 안겨서 죽고 묻히고 싶습니다.” 하나도 감동적이지 않습니다. 내가 장례사입니까. 나는 있죠. 성도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짐승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누구 품에서 죽으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까짓 것이 어차피 죽는 것인데 아니 뭐 목사 품에 안겨서 죽으면 천국 갈 때 일등열차 타고 갑니까. 각자 자기가 사는 대로 하나님 앞에 가서 판단 받는 것인데 믿음대로 판단 받는 것인데 그런 이야기를 맨 처음 들을 때는 가슴이 찡했습니다. “야, 이 사람이 얼마나 참 대단하면 그렇게 얘기할까? 제가 먼저 죽으면 목사님이 저를 묻어주시고 목사님 먼저 죽으시면 제가 묻어드리겠습니다.” 지금 교회에 남은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죽을 때 올까봐 겁납니다. 전부다 다 쓸데없는 얘기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저는 사실 여러분들에게는 간단하게 들리지만 사실 저는 이 지점도 한 7-8년 동안 속아 넘어갔던 지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내가 은혜에서 굉장히 많이 미끄러졌어요. 그런데 기도를 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확 옵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 속에 뭐냐면 “이 세상에 너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나 세상사랑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마음이 다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그 때에 내가 내 자신 속에 인식되는 것입니다. “그래 맞아 나는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의 정말 궁극적인 그 내 가슴에서 이렇게 애절하게 사모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하느냐면 “다른 사람도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고 싶어서 이렇게 마음에 섬유질이 찢어지는 것처럼 이렇게 아픈 기도가 나올까? 사람들은 몰라줘도 주님은 아시겠지” 그런 경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개의 삶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이 이 죄에 의해서 은혜로부터 부패하고 있을 때에는 이렇게 간헐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이렇게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개개의 생활, 개개의 행동 하나에 이러한 생각들이 독특하게 내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몇 달에 한번씩 일어나는 것입니다. 빠르면 몇 주에 한번씩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내 주위에 보면 나의 신앙의 동료들 가운데는 그런 기도가 거의 뭔지도 모르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또 우월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하나님이 이렇게 애절한 기도에 응답해주셔서 나로 하여금 주님만 사랑하게 하시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릴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게 하실 거라고 믿음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헛된 믿음입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기도 응답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한 대로 순종하고 일체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날마다 죽이고 은혜 안에서 살려고 매순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그 믿음에 의해서 매일, 매일 쟁취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 투쟁하고 쟁취하려는 그 사람을 홀로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누가 도와주셔요? 성령님이 항상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죄 죽임을 실천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오셔서 그들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새 언약 아래서는 우리들이 온전히 순종하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진실한 결단이 있고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면 능력이 모자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새 언약이 무한한 성령의 은혜의 공급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종과 믿음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서 생각이 태만해 지도록 죄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가 있는데 영혼이 죄를 경계치 않음에 있어서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뭐냐면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의 영혼으로 하여금 태만에 빠지게 만들어서 생각을 이탈하게 하고 그다음에는 죄를 가볍게 여기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죄가 신자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는 두 가지 방식을 만나게 되는데 하나는 힘으로서 역사하고 또 하나는 속임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죄의 속이는 역사 중에 가장 위대한일 하나는 죄를 축소해서 생각하도록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크게 확대해서 생각하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서 그 죄를 정직하고 정확하게 성경이 그 죄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그 죄의 질은 모두 같지만 지금 내가 행하려고 하는 이 죄의 크기가 어떠하고 그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어떠한 심판이 뒤따를 것이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정직하고 분명한 판단을 갖는다면 신자가 쉽게 죄를 범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려고 했을 때, 아직 범하기 전에 하나님이 죄가 들어온 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십분 동안만 직접 경험하게 해주셨다면 그 사람들이 죄를 지었을까요? 안 지었을까요? 지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이런 죄는 특별히 부지불식간에 짓는 죄가 아니라. 내 양심이 그것을 죄라고 인식했는데도 죄를 짓게 되는 그러한 말하자면 고의적인 범죄가 있습니다. 그 때는 우리들이 어떤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치고 올라와서 그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죄를 짓지만 짓고 나서 그것이 정말 잘못된 것이었다고 후회하는데 단 5분도 걸리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 같은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는 돈이 탐이 났습니다. 그런데 돈을 받자마자 즉시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양심에 의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예수님을 팔 때에 기대했던 결과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돈이 조금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렇게 견디기 힘든 영혼의 고통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을 안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몰라서도 안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신자들의 경우에는 성령을 통해서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 내가 지으려고 하는 죄의 크기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는 어떤 비참한 결과가 따르는지 성경이 모두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이 크게 되면 그 속에 있는 내재하는 죄가 그 죄는 축소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 것이 아니야. 어떻게 인간이 완벽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큰 것이 아니고 봐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이것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죄도 그것을 죄가 아니다. 라고 까지는 말하지 않지만 이것이 죄라고 하더라도 그 하나님의 용서하는 지우개가 있지 않느냐?” 그것을 또 굉장히 크게 부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서 즐거움을 취해도 즉시 하나님의 용서라는 지우개로 지워주셔서 결국은 자기가 죄를 짓게 되면 뭔가 여러 가지 어려움도 오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당하는 어려움보다는 죄를 통해서 획득하는 즐거움이 훨씬 크다고 신자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를 가볍게 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때에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로서 부부사이의 맺은 부부간의 정의를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순결서약을 저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신자가 어떤 죄를 지으려고 할 때에 그 순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어서 세례 받는 그 순간 일평생 혼인 서약을 하고 순결하게 신랑 되신 예수님만을 사랑하겠습니다. 그런 서약을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설령 그런 것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이 지금 지으려고 하는 죄가 바로 예수님이 내가 지금 지으려고 하는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서 처참하게 죽으셨다. 하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것을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누군가가 그 사실을 깊이 생각나게 만들어주어도 그는 죄지을 욕심이 그 순간 잠깐 동안을 달아날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신랑이 보는 앞에서 자기 남편도 아닌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할 수 있는 담대한 여자가 어디 이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이렇게 그리스도와 맺은 부부의 정의를 버리면서까지 그 죄를 선택하게 되었다면 그러면 그것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계속 죄가 진전되어 왔고, 그래서 예수님과 맺은 이 부부간의 관계에 대해서 싫증이 날대로 난 상태에서 죄를 가볍게 여기는 그런 상황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 결과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무엇이라고 했느냐면 “그런 유혹이 있지만 그러나 그 유혹이 좋아 보이지만 마지막 결국은 가시덤불이 퍼졌고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다.” 그런 상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나태함 가운데 우리의 생각이 이탈되도록 내버려두면 이런 결과에 도달된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면 항상 생각을 제대로 제자리에 이렇게 돌려놓아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쓸데없는 생각, 죄는 아니더라도 신자가 마땅히 생각해야할 것이 아닌 그 쓸데없는 생각, 목표가 없는 이 생각의 방황, 방황하다가 생각이 신령한 은혜의 보좌에 정착하는 법은 없습니다. 이 떠돌면서 방황하는 생각하는 항상 더러운 곳을 찾습니다. 그러니까 그 생각을 이탈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지키고 결국은 죄를 가벼이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나는 두 가지를 여러분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첫 째는 뭐냐면 창조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도 설교했지만 하나님이 처음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하늘에는 하늘나라가 있었지만 땅에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을 말할 수 없이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작은 미생물로부터 풀과 돌, 그리고 흐르는 시냇물, 하늘에 떠 있는 별, 해와 달에 이르기까지 모두서로 영적으로 연결되게 하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창조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흘려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이 드러나고 인간은 그 안에서 연주하면서 그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그 아름다운 선율로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왜 사라져버리게 되었느냐? 죄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마음에 품고 지으려고 하는 죄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아름다운 세계를 산산이 부셔버렸고, 그래서 그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간, 그리고 오늘 죄와 하나님의 은혜 사이에서 고통하고 있는 나의 이 고통의 문제까지도 결국은 정답이 그 죄에 기원이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이 이 죄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이 죄의 속이는 역사에 대해서 우리들이 굴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죽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바로 내가 주님을 모를 때에 지었던 이러한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예전에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 죄를 좋아했고, 그 죄와 함께 먹고 마셨지만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면서 그분의 죽음이 나의 허물과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지으려고 하는 이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이고 원인이고, 그래서 예수님이 이 죄 때문에 못 박혀 죽으셔서 나를 구원해 주셨는데도 여전히 이 죄를 내가 다시 지으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다. 내가 어떻게 그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으로 그리스도 신부가 된 처녀로서 내가 어떻게 그런 불결한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두 가지를 묵상하는 것이 이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아주 중요한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거기에서 죄를 가볍게 여기게 되면 한 걸음 더 진전하게 되는데 그것이 뭐냐면 그 죄 속에서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생각이 이탈되게 만들고 두 번째는 그 죄를 가볍게 여기게 만들고, 세 번째는 마음으로 그 죄에서 기쁨을 맛보게까지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죄가 자신 속에서 객관적으로 관측될 수가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관측 된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내편이 아닐 때 객관적으로 관측 되는 것입니다. 망대에 높이 서서 경계를 서는 경비병들이 성 안을 뚫어지게 쳐다보겠습니까? 아니면 성밖에 멀리 펼쳐진 들판을 뚫어지게 보겠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왜? 여기에 있는 것은 자기네 편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만약에 적이 안 보이고 자기네 성만 이렇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미친 병사지 여기에서 무엇을 하든지 자기가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자기는 눈 똑바로 뜨고 이 사람들은 자기편입니다. 그리고 눈을 똑바로 떠서 나와 다른 객관적인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그 외부의 침입들을 자기가 들여다보는 것 아닙니까? 왜? 그들이 나타났다. 그러면 공격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기 나타났다. 그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사는 것이지. 그러니까 처음에는 그렇게 죄를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이탈해요. 그리고 죄를 가볍게 생각해요. 생각이 이탈하고, 그 다음에 지성이 죄를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오히려 그 속에서 죄에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객관적으로 관측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죄를 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그 죄가 바로 주관화 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가지면서 회심을 경험함으로서 이것들이 계속 씻겨 내려가면서 마음의 창들이 닦여지면서 이제 죄가 죄로 인식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 성경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이제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서 이제 자기 안에 주관화 되어 있던 죄가 죄라고 하는 것이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에도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25절은 뭐라고 말하느냐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고” 모세의 믿음에 대해서 말하기를 애굽의 바로의 공주라 칭함을 받으면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렸더라면 그것은 죄의 낙을 누리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죄에도 즐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도 무엇인가 영혼에 도움을 주는 것을 해야지만 영혼이 그것을 계속하지 기쁨이 되지 않는 일을 영혼이 하려고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동안은 하지만 그러나 오랫동안은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에 술을 배울 때 그 어른들이 술을 왜 먹는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독하고 한번 먹고 나면 토할 것 같이 그렇게 쓰고 코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그렇게 괴로운 술, 먹고 나면 아침이면 속이 다 뒤집히고 토할 것 같고, 이렇게 자신의 삶을 망가트리는 그 술을 왜 먹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갑니다. 커피 마실 때도 이해가 안 갔는데 그러나 몇 년 지나고 나면 이제는 식사 하고나면 커피가 없으면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인배긴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처음에 지을 때만 이상한 것을 선택하는 것 같고, 힘들게 느껴지지 시간이 지나면 그 죄에 인 박이게 되는 것입니다. 약물에 중독 되듯이 그렇게 인 박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다음에는 처음에는 자신이 죄를 선택했지만 그다음에는 죄가 자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죄가 즐거움 때문에 죄를 선택했지만 그다음에는 죄를 계속해서 짓지 않으면 느끼게 될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신자 안에서 죄가 점점 힘을 얻고 발전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부패한 정욕이 이미 이탈된 생각, 죄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 그리고 이미 죄에서 즐거움을 찾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부패한 정욕이 인간 안에서 계속해서 먹구름처럼 피어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이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계속 먹이를 주면 그 속에서 이 정욕이 새끼를 까요. 그리고 번식을 합니다. 그다음에는 더 크게 입을 벌리고 새끼들까지 태어나서 입을 벌리는 것입니다. 계속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새끼를 깝니다. 그러면 입이 더 많아진 것입니다. 계속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합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이것이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죄의 종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는 정면 으로 배치되는 인생을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신자가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벤자민 플랭크린이라고 하는 사람이 윗필드 시대의 사람이었는데 자기의 책 속에서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솟아오르는 자신의 욕망을 거절하는 것이 이후에 몰고 올 모든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결과적으로 영혼은 신속하게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인간의 영혼은 신속하게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안에 이 죄에 대한 욕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이 하늘의 문이 막히고, 은혜의 샘들이 막힌 후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은혜들이 서서히 잠식되어 부패하게 되면서 그러면서 영혼 전체가 죄에 사로잡힌 상태로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영혼은 견딜 수 없이 피곤하고 그리고 양심을 달래기 위해서 주일이면 무거운 발걸음을 교회에 옮기고, 신자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그러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어떤 생명의 증거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 죄의 지배아래 살아가는 신자로 전락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들이 이런 식의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어떻게 우리 안에 있는 죄가 교묘하고 능력 있게 아주 능수능란하게 우리의 영혼을 공격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각을 이탈시키고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다른 곳에 몰두하게 만들고, 한눈팔게 만들고, 그래서 경계가 느슨한 틈에 죄가 들어오고,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서 죄에 대한 정당한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판단력을 흐려놓고, 그래서 결국은 이 죄를 가볍게 여기도록 만들고,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결국 우리 안에 그 영혼의 신속한 부패를 가져와서 그래서 죄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된 그러한 상태에 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는 우리의 마음이 정말 죄에 의해서 정말 충분히 지배받는 그런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자, 은혜가 솟아나던 샘도 막혔죠. 하늘문도 막혔죠. 그리고 이제는 이탈된 생각과 죄를 가볍게 여기고 그리고 죄의 즐거움을 찾아서 개처럼 껄떡거리는 그런 영혼의 상태가 되게끔 만들어버렸습니다. 결국은 남아있는 모든 은혜도 거의 잠식되어서 고갈된 상태에 갔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삶은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깊이 회심하고 발판을 마련해서 다시 하나님 앞에 피나게 성화의 길을 걷고 주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그렇게 융성하게까지 내버려두었던 죄를 계속 죽이면서 다시 그 처음의 축복을 회복할 것인가? 아니면 죄의 종노릇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것인가? 딱 두 길만 남는 것이지 중간의 없습니다. 결국은 시간싸움이지 언젠가는 이쪽으로 가지 않으면 어젠가는 이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영혼의 상태에서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죄의 상태에서도 전혀 은혜가 내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그래도 희미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려고 하면 한쪽은 죄가 가득한데도 은혜가 부어집니다. 그런데 여전히 어떤 죄를 안 버리고 계속 불순종하면서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조금씩 부어지는데 전세를 뒤집지는 못하고 은혜가 부어지는데 이 죄가 이 속에서 역사해요. 그것을 딱 끊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절대 순종의 자세로 가야 되는데 이것은 싫어. 왜? 생각도 이탈되었고 죄를 가볍게 여기고 죄의 즐거움도 있으니까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은혜를 구해요. 그러면 은혜가 주어지면 이 은혜가 조금씩 주어져도 죄와 싸우는데 다 소비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이 싸움이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은 나중에 힘이 달려서 밀려가지고 죄에 의해서 다 뒤덮여 버리는 무서운 죄의 지배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교회에 나오고 안나오고 그러는 것을 가지고 얘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뭐 교회를 사랑하고 안 하고 그런 것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 사랑해야죠. 그러나 죽어있는 영혼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를 왜 사랑합니까? 우리 이사 가고 여기에 빌딩 지으면 공장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왜 사랑해요. 이것이 주님과 관계가 있는 동안에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팔고 이사 가면 극장도 만들고 그랬는데 그 때도 와서 이 극장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하겠습니까.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기가 되고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새롭게 하시는 것이 동기가 되어서 그래서 교회를 사랑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한 교회에 몇 십 년 다녔습니다.” 그것이 뭐 그렇게 자랑입니까. 중요한 것은 뭐냐면 소 잡아 먹은 귀신처럼 한 교회에 몇 십 년 엎드려 있는 것만 능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거기에서 그렇게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신앙생활 하면서 그 교회에서 계속 목양을 받고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이 십년동안 영적성장을 거듭해 왔을 때 그러한 교회의 경력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벌써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십년도 되기 전에 다 결판이 났는데 그 교회를 삼십년 다녔다. 마지막에 남은 것이 뭐가 남아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변화되고 그리고 그들을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속해주신 그 구원의 계획을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지, 대물려 가면서 그 교회에 충실하게 나오는 그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를 물려가는 교회생활이 무슨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전부다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은혜의 상태가 부패되는 두 번째 원인이 있습니다. 첫 번째 원인이 영혼이 죄를 경계치 않는 것이었고,
두 번째 원인이 있는데 세상사랑으로 인해서 영혼이 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세상으로 인하여 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로 영혼의 총명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우선 이 영혼의 총명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우리의 모든 생각이나 이런 것들을 지도하고 판단하고 식별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총명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총명이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이 총명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판단하고 그다음에 그것을 분별하고 그리고 그것을 지도하는 그런 능력을 가리켜서 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얼마나 많으냐.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영적생활에 있어서 총명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정확하게 사물을 판단하고 영혼의 상태를 식별하고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나 이런 것들을 주도해 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은 이 영혼의 총명은 발전하기도합니다. 그런데 발전할 때에는 역시 지식을 통하고 그 지식을 활용하는 것들을 통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조금 있다 말씀드리고 어쨌든 영혼의 총명은 판단하고 식별하고 그리고 우리를 지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 총명이 가장 잘 지도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생각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생각으로 하여금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지를 잘 판별해서 이 총명을 생각을 지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총명이 뛰어난 사람은 생각을 해도 계속해서 이 총명이 버려야할 생각과 취해야할 생각을 분별해 주기 때문에 생각이 계속 지혜로운 것만을 선택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의 총명이 상실되거나 아니면 영혼의 총명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되면 그다음에 생각을 제대로 지도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이것, 이것, 이것, 아무거나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명료한 생각을 가지고 살지 않고 잘 이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총명은 영혼의 상태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영혼이 충만하고 죄의 영향이 최소화 되었을 때는 총명이 뛰어나게 발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총명으로 이 생각을 지도합니다. 그래서 그 생각으로 하여금 판단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옳고 그름을 식별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영적 총명이 이런 것들을 판단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총명이 전체적인 사령탑이 되어서 “아니, 아니 그것 안돼 못써. 아니 그것은 지금은 좋아 보이지만 결과가 굉장히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와 그것은 눈에 좋아보여도 그것을 선택하면 안돼” 영혼의 전 기능을 이 총명이 지도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총명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 에배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 총명을 더해주시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가끔 여러분 중에 우리 교회는 공부 잘하는 사람만 신앙생활 하기 좋은 교회다. 그렇게 투덜거리는 사람 가끔 있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은 뭔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뭐냐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가르쳐서 여러분들에게 일깨워 주고 싶은 것이 뭐냐면 영적 총명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총명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공부 하나도 안 한 사람이 총명합니까? 그것은 더더욱 안 그렇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도 미련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공부를 그렇게 많이는 못했는데도 총명한 사람이 있죠. 이 세상 지식으로 봐도. 영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관념적으로 많이 알고 있고, 영혼이 죄에 물든 사람보다는 아는 내용이 적어도 영혼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총명합니다. 영혼에 총기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에 의하면 영혼에 세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에베소서 4장 17-18절에서 말하는데 세 가지로 말하는데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생명에서 떠나있도다.” 그래서 여기에 영혼의 세 가지 능력이 나오는데 첫 째는 생각, 두 번째는 총명, 그리고 세 번째는 마음입니다. 첫 째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지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진리의 말씀의 빛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이 처음 회심의 그 놀라운 은혜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면 제일먼저 우리들이 손봐야 될 것이 뭐냐면 이 머리부터 손을 봐야합니다. 생각을 똑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시간에 와서 생각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리고 멍하니 앉아서 텔레비전이나 쳐다보다가 가면 여러분들은 교회에 오나 마나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예배를 아나 무인 격으로 드린 죄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쌓인 것입니다. 몇 주 전에도 제가 신랄하게 통렬하게 여러분에 대해서 비판했습니다. 나는 오늘 다시 반복하고 싶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무엇도 깨달으려고 하는 의지가 없이 교회에 나와서 멍하니 텔레비전 쳐다보고 자막이나 보다가 그러다가 일어나 돌아가면 여러분의 영ㅇ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여러분의 마음은 오히려 그 예배를 통해 더 굳어졌고, 그리고 아나 무인 격으로 배교에 가까운 예배를 드린 여러분들의 죄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쌓여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예배를 아무렇게나 드리는 죄가 얼마나 큰지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 속에 와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아무 생각도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결국은 일주일 동안 생각이 없이 살았다. 라고 하는 증거입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이 냉랭하고 어떠한 감동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일주일동안 돌 같은 마음을 가지고 얼음처럼 차갑게 살아갔다. 라고 하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정말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 교제를 갈망하고 하나님 앞에 참회의 눈물과 그리고 진리와 더불어 살고, 진리와 더불어 죽고자 하는 진실한 신앙의 삶을 위해서 피 흘리는 분투기 있었다면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배시간에 와서 두 손 팔짱 끼고 자다 가고 말이죠. 다리 꼬고 앉아서 음료수나 마시고 말이죠. 군것질이나 하고 말이죠. 구약시대 같았으면 불이 내려서 모두 다 태워버렸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그런 태도로 예배를 드리면서 어떻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일 수 있냐는 것입니다. 거듭났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나 주님 자녀 맞습니까?” 한번 물어보세요. 어떻게 그렇게 땀 흘리는 설교를 그렇게 그리스도의 보혈을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3년, 4년, 5년, 6년씩 그렇게 듣고도 어떻게 그렇게 머릿속에 아무것도 드는 것이 없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진짜 묻고 싶습니다. 그냥 허탈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또 교회를 사랑한데요.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고 진실한 성도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사랑받기를 원하지 막무가내로 살아가는 그런 탕자와 같은 사람에 의해서 사랑받기를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이 무슨 사회단체입니까? 회사입니까? 사교단체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그의 몸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향해 사랑한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랑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없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는 급속하게 부패해져 가는 것입니다. 지체와 지체사이에 그 영적인 은사가 교통하고, 거룩한 영광의 빛이 교통해야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의 교통이 아주 유치하고 졸렬한 그런 세상의 사교적인 관례로 전락하고 말이죠. 그렇게 하고 모여서 서로 신령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존재가 되도록 자신들의 진실한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대신 먹고 마시고 함께 몰려 돌아다니고 말이죠. 그렇게 하면서 세상 사귐과 똑같이 다름이 없는 심지어 그런 관계를 통해서 물질까지 거래가 되면서 말이죠. 이해관계가 얽힌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두 주 오시는 날에 심판의 대상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많은 예배가 도대체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그 많은 책들, 그 많은 하나님의 말씀들, 그 많은 가르침들, 그 많은 깨달음들,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식의 삶을 쌓아올리기 위한 기초였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슨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런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이 교회는 그런 진실로 성도되기를 포기한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구걸해야 할 만큼 그렇게 가련한 존재가 아니고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생각이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생각이 기다리고, 그리고 내 어두운 생각을 깨우쳐서 내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고, 내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내가 어떻게 해야지 참 자녀가 될 수 있는지, 내가 어떻게 해야 이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그 회심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다시 닫힌 이 은혜의 샘들이 다시 열리고 하늘 문이 다시 열리고 그리고 신령한 은혜의 빗줄기들이 내 영혼 속에 쏟아져 내려서 나를 은혜의 상태로 데려갈 수 있는지. 생각이 그것을 집중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생각이 없이 다닙니다. 그까짓 새 가족 반 수료증 하나, 빨간 껍데기 씌운 것 그것 하나 장롱 밑에 집어넣어놓고 그리고 마치 자신이 엄청난 수준에 도달한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생활 하세요. 교회에 착실하게 나오면 권찰도 되고 집사도 됩니다.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있는 데로 다 하죠. 교리 시험도 보고, 상담도 해보고, 그리고 교육도 시키고 그리고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은 떨어뜨리죠. 그래도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도 그것 되겠다고 꾸준히 나와서 출석하는데 어떻게 안 시켜주느냐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권찰도 되고 집사도 되고, 다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안 시켜줄려고 하는 것이 구역장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결국은 떠밀려서 시켜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뭐합니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것입니까.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있는데 나는 오늘 여러분 여기 가르치는 분들에게 준엄하게 경고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정말 영혼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그 영혼을 그 생각을 일깨워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그 참된 생각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서 그 죄를 이기고 은혜를 회복하기 위한 그런 갈망을 가지고 가르칩니까. 일주일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청징한 삶을 살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퉁퉁 불은 그런 젖가슴을 가지고 와서 사랑하는 영혼들에게 앞가슴을 풀어 헤쳐서 그 갈한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매일 앉아서 다과회나 하고 말이죠. 두 시반 되어도 공과 공부 시작도 안하는 구역도 있고 말이죠. 세 시도 안 되었는데 벌써 끝나고 덮는 구역도 있고 말이죠. 그렇게 구역장 하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심판 받습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구원하신 영혼들에게 그런식으로 가르칩니까. 그리고 그 영혼들 하나, 하나 속에 깃들여져 있는 예수님의 형상이 보이지 않습니까. 주께 하듯 하여야 한다. 라고 하는 그 명제가 여러분들에게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젖이 흘러야할 구역이나 그리고 교회학교의 각급 학급들이 말이죠. 구역장을 중심으로 해서 신앙의 태만을 배우고, 어제 말씀드린 것과 같은 아주 거짓된 신앙의 본을 배우면서 나태하고 생각이 없는 신자들로 만들어가는 그런 가르치는 사람들이 교회에 있는 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해서 가슴을 찢는 눈물이 있습니까? 아니면 한 말씀이라도 이 영혼 속에 넣어주어야 되겠다. 라고 하는 그런 치열한 갈망이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들에게 깨닫게 하여야겠다. 라고 하는 그런 애끓은 마음이 있습니까. 영적인 유모의 마음이 없는 가르치는 사람은 모두 삯군 목자입니다. 그리고 구역장이니 아니면 교사니 하는 그 명함하나를 가지고 그 명예스럽게 생각하면서 누가 그것 맡아달라고 사정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억지로 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마음은 어떠시겠습니까. 우리들이 어떻게 영혼들을 맡겼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영혼들 때문에 영혼을 맡았습니까. 십자가의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사랑하시는 그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셔서 영혼들을 맡았잖아요. 그러면 유모가 되어야지, 참 부모가 되어야지, 그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항상 풍만한 젖가슴을 보호하고, 그래서 그 영혼들에게 가슴을 풀어 먹여주면서 그러면서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그들이 참 신자가 되는 것을 보기를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르쳐야할 영혼들을 다독거리면서 그러면서 세속적인 욕구나 만족시켜주고, 몰고 다니면서 많은 정욕을 별로 유익도 없는 교제에 다 탕진하고, 그렇게 하면서 영혼 하나, 하나를 주님 만난 기쁨 때문에 교회에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아주 비열한 인간관계로 그 사람들을 비겁하게 묶어 두어서 그리고 마치 공산당 점조직처럼 만들어가는 교회의 모습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냐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은 영혼들을 잘 가르칠 때 말로 할 수 없는 상급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올바로 그들을 가르치지 못할 때 그들이 받아야할 심판은 하나님 앞에 준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서 주신 그 피어린 경고의 말씀 가운데 거짓된 교사들을 향해 주던 말씀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생각이 그런 진리의 빛을 붙잡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올곧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고, 그리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위에 정직하고 깨끗한 진리의 말씀들이 선포되어야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영혼들이 받아들이고, 그럴 때에 거기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배 끝나고 나서 마당을 지나가서 점심 먹고 나면 오전에 들은 설교의 본문이 어디였는지 생각나지 않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신자가 되시려고 합니까. 죄의 지배를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두 번째 총명은 생각이 받아들인 그 빛이 우리의 마음속에 적용된 결과입니다. 이 총명은 생각이 받아들인 그 빛이 그 속에서 적용된 것이 총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각이 참된 진리의 말씀을 많이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어떻게 되요. 영적으로 총기가 영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옳고 그른 것을 참된 것과 거짓된 것, 그 죄, 그 죄의 진행과 결과,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는 판단력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5년씩 10년씩 그리고 다녔는데 판단하는 것을 보면 유치원 수준도 안돼요. 유치원 애들은 순수하기나 하지.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호세아서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머리가 하얗게 되어도 철이 안 들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모든 교회의 세속적인 면들입니다. 이런 식의 신앙생활이 결국 무엇을 가져다줍니까. 그런 사람을 세상에 내어 놓았을 때 그렇게 생각도 없고 그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영적인 총기가 없는 사람이 얼마나 간교한 죄들이 가득 찬 이 세상인데 그 세상에서 밥입니다. 그것은 신경 쓰지도 않는 간식거리입니다. 참된 신자가 되려고 그래도 생각도 많고 총명이 있으면 죄가 신경을 많이 쓰죠. 어떻게 해야지 이것을 잡아먹을까?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뇌 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건드리지도 않습니다. 이미 자기 발아래 있으니까 둬, 정 먹을 것이 없으면 그것이라도 먹지. 이런 정도의 수준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뭐가 다릅니까. 교회에서 실컷 가르치면 세상에 나아가서 목사님이 세상에 대해서 뭘 아시겠어. 현실을 너무 모르셔, 얼마나 현실을 잘 아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면서 피 흘리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희생은 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세상에서 소금이 되기는커녕 설탕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등불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찍히고 사람들이 주목받기 보다는 오히려 어두움 중에 하나가 되어서 어두운 세상에서 한 덩어리가 되고 싶어 하는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마음은 이제 마음에 들어옵니다. 결국은 마음은 그 빛 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은 그 빛을 받아들이고 이 빛이 우리의 생각 속에 적용되면 총명이 생겨나고 그리고 마음은 그 빛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빛이 마음을 장악합니다.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 그 마음을 장악합니다. 세속적인 마음, 세속적인 지혜를 사용하지 못하고, 그 신령한 판단력을 사용해서 죄를 분별하고 거룩한 삶의 비밀들을 터득하면서 구도의 길을 걸어가게 만듭니다. 그 때에 그 마음에 의해서 장악된 팔과 다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는 것입니다. 이미 벌써 생각부터 꺼져있는 것입니다. 왜 신앙생활을 합니까. 정말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구원 받았다고 믿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구원이 없습니다. 아니 생명이 없는데, 아니 생명이 있는 증거가 안 나타나는데 그렇게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양심에 가책이 없는데 영혼은 곤고함으로 인해서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데 정말 그 사람이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라면 돼지우리에 드러누우면 아버지 집이 생각나야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1-2년이나 몇 개월이 아니라. 몇 년이 흘러도 똑같은 영혼의 상태를 유지하고 이 교회에서 그렇게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 없다고 개인적으로 확신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서는 여러분들을 뭐라고 불러주는지 모르지만 하늘나라에는 그런 사람들의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그 빛을 품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을 주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입니까? 그 말씀에 의해서 여러분들의 그 마음이 주장되어 있고 마음은 바로 그 빛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의 그 마음에 들어온 그 진리가 마음이 그것을 사용해서 그래서 형성되는 삶이 마음속에 있는 이 말씀과 같은 질이 점차, 점차 되어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랑이 흘러나와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가 구원 받은 것처럼 우리 안에 마음에 하나님의 지식의 밝은 빛이 있어서 그 빛이 흘러나오는 삶의 결과가 거룩함입니다.
이 교회에서 뼈를 묻겠다. 하지 말고 묻어둘 자리도 없습니다. 아무데서 죽으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미 죽었는데, 묻어버리든지 태워버리든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면 분명하게 그 하나님의 빛을 가지고 마음이 그것을 사용함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인데, 생각이 빛을 싫어해요. 빛이 쌓이지 않으니까 총기가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그것을 싫어해요. 그러니까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포괄적으로 “아, 나는 교회를 사랑한다. 아, 나는 김 목사를 존경한다.” 원하지도 않습니다. 굉장히 부담스럽습니다. 내가 왜 그런 사람의 존경을 받겠습니까. 심지어는 뭐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고 싶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만한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영혼이 부패한 상태로 들어가게 되면 이 생각과 총명과 마음에 변화가 옵니다. 어떻게 변화가 오느냐면 영혼이 부패한 상태로 들어가게 되면 첫 째로, 생각은 혼란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허탄한 것, 아무 유익도 없는 헛된 것들에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정신 팔려서 살아가는데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 의미가 없는 헛된 것들에 몰두해서 정신이 팔려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총명은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결국 고린도후서 4장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결국은 “이 세상에 있는 신들이 이런 죄를 사용해서 그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신자들에게도 유사한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부패하게 되면 영적인 총명이 현저하게 떨어지거나 사라집니다. 그래서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정말 신실한 삶을 살았는데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의 생애적인 은혜보다도 중요한 것은 매일, 매일 그 은혜 속에 잠겨서 그 하나님 앞에서 부단한 자기 깨어짐 속에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그런 것이 되어야합니다. 마음은 어떻게 되느냐면 굳어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됩니다. 영혼이 죄로 물들게 되면 그다음에는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두르려도 쉽게 녹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심겨지지를 않고 튕겨져 나옵니다. 그 대신 그 마음속에서는 세상에 있는 것들은 기가 막히게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 굳은 마음에서 욕망은 은혜의 샘이 열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지던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마음의 문이 열리고 죄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한없이 욕망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면서 마음은 점점 굳어지고 그리고 그 마음은 부패하여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입니다. 처음에 죄 가운데 들어갔을 때에는 기도가 좀 안 되는가 싶더니 시간이 점점 지나면 기도할 수 없게 되고 시간이 점점 지나면 철벽을 내린 것과 같이 도저히 기도 할 수 없는 그런 절대적인 어려움과 같은 그런 굳어짐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정말 패역무도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양의 모습을 하고 교회에 나와서 왔다. 갔다. 하는데 사실은 그 사람이 궁극적으로 염소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네 번째로 이 총명은 자꾸 수시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 째로 이 총명은 올바로 부지런히 사용하면 이 총명이 발전합니다. 그래서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잖아요. 깨달은 생각들이 그래도 계속 있나? 흘러가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잘 정리해서 하나, 하나 잘 터득해서 이치를 깨달으면 그러면 영적인 총명이 생깁니다. 그 총명을 자신의 삶 속에 대입시켜보는 것입니다. 나는 굉장히 하고 싶은데 내 영적 총명은 가르치기를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누르고 이 영적인 총명을 따라 살아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영적 총명이 지시하는바 대로 살아요. 그래서 그렇게 해서 죄를 이기고 나면 그 죄를 이긴 가정에서 얻은 생각의 깨달음들이 총명의 빛을 더해줍니다. 그래서 그 총명이 발달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요? 생각 없이 욕심이 이끌면 이끄는 대로 그냥 떠밀리면서 신앙생활 해 오던 사람들은 고생만 많이 했어요. 왜? 똑바로 못 사니까 하나님이 한번 후려치시는 것입니다. 한번 쾅 후려치시면 사업이 망하고, 그래서 정신 바짝 차셔서 “아이고, 이러면 안 되지. 목사님 말씀도 듣고 교회 잘 다녀야지.” 그리고 다녀요. 그런데 근본적으로 생각이 깨뜨려져서 영혼이 변화되고 총명이 생긴 것이 아니라. 그냥 무서워서 그냥 손들고 옵니다. 그리고 오는 것입니다. “때리지만 마세요.” 그리고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 합니다. 그런데 생각은 이미 꺼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가겠어요. “아이고 무서워” 그러다가 며 일 지나고 나면 또다시 옛 기질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샘은 막히고 이 속에서 욕망들이 솟아오르는데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싶은데 또 가는 것입니다. 한데 얻어맞는 것입니다. 또 나뒹굴어져요. 그래서 질병이 생겨요. 병원에 가서 회개하고 고치고 이렇게 해서 다시 정신 차리고 살아요. 또 비뚤어져요. 한방 얻어맞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사건이 생겨요. 한번 할 때마다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어요. 걸어온 인생길이 정말 고달픈 인생길입니다. 그런데 남은 게 뭐가 있습니까? 상처밖에 없습니다. 왜? 근본적으로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열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는 이 진실한 생각의 노력이 없으니까 총기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10년 20년 30년을 생활해 왔는데 머리는 희긋히긋 한데 이 판단력은 유아부 수준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약에 교회의 큰 직분이나 가지고 있어서 무슨 장로나 되고 그러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약물 중독자에게 자동차 운전을 맡기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 걸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합니다. 그것은 투표한 교인들이 모두 책임지는 것입니다. 교회를 생각할 때 정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생각해야합니다. 이것이 무슨 나와서 내가 이렇게 교회에 다니다가 내가 신앙생활 하니까 내가 교회 어디든지 하나 정하고 다녀야되는데다. 이렇게 생각하면 혼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생각이 살아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어요. 아직은 어둡지만 그러나 깨달았어요. 깨달으니까 그것을 적용시키니까 총명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서 살아봤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요. 그러다가 또 어려운 일을 만나요. 또 말씀을 터득해가면서 또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이렇게 그러면서 또 실패할 때도 있죠. 또 깊이 회개해요. 그리고 또 다른 생각을 열어주셔요. 말씀을 받아요. 그리고 또 총기가 생겨요. 이러면서 죄와 싸우면서 총기 있는 신자가 되기 위해서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귀한 것을 보여 주시옵소서. 나는 돈도 싫고 명예도 싫고, 나에게 영혼의 이 총명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그렇게 해서 10년 20년 살아갔을 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것을 계속 사용했으니까 어때요. 두 사람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현저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둘이 마주 앉아서 대화할 수 없을 정도의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또 이 총명이 변화 한다. 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상태와 관련됩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이 죄를 물들게 되어서 영혼이 부패하게 되면 은혜의 상태에서 부패해지면 이 총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총명의 능력이 약화되는 것입니다. 분별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총기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뭐 성경에는 그런 이야기가 안 나오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흔히 쓰는 표현으로 ‘영안이 열린다.’ 그러잖아요. 뭐 그것도 사실은 과용하는 경향이 많이 있지만 ‘영안이 열린다.’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무엇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잖아요. 물욕 같은 것들이 여기에 차 있어서 물질에 대한 욕망에 과도하게 사로잡혀 있으면 그 영안이 열리겠습니까? 안 열립니다. 그래서 주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 물욕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의 등불이 꺼지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어떤 사람이 그 만약에 죄 악 된 성적인 욕망을 가졌다든지. 부당하게 명예에 대한 욕망을 가졌다든지. 그러면 안 되는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졌다든지. 그 사랑해야 될 지체를 아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든지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왔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영적 총명을 흐려놓는 것입니다. 왜? 이미 그것이 죄이기 때문에 그의 영혼을 더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죄와 영적인 총명은 함께 공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사랑하는 사람이 신령한 지식을 갈망하는 것, 죄를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이 신령한 지식을 갈망하고 죄를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가 영적인 총명에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탐욕을 이글거립니다. 그래가지고 아주 포악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로 인해서 이 영혼이 은혜에서 부패하게 될 때 영적 총명이 흐려지게 되는데 그러나 그것들을 하나님이 쇠신 시킵니다. 진리와 성령으로 그것들을 새롭게 하십니다. 오랫동안 죄 가운데 있을 때는 그 죄로 말미암아서 영혼의 참된 총명이 사라졌었는데 다시 회심하고 은혜의 상태로 돌아오게 되면 눈이 열려서 다시 자신이 죄 가운데 행했던 삶이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었다는 판단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언제나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진리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그렇게 우리의 어두워진 영혼의 총명을 하나님께서 쇠신 시키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통해서 지성적으로 깨닫고 생각이 그것을 붙잡아요. 그래서 그것들을 계속 생각하고 깨달으면, 묵상하면 그것이 적용되어서 여러분들의 사라졌던 영혼의 총명이 다시 되살아나요. 그리고 그것을 마음에 담고 마음에 그것을 사용하면 여러분들이 거룩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혼의 어두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죠? 영혼의 어두움과 총명의 관계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 째로는 영혼의 어두움인데 성경이 이 영혼의 어두움을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첫 째는 뭐냐면 주관적인 혹은 절대적인 어두움입니다. 이 절대적이라는 말은 뭐냐면 완전히 어둡다는 뜻이고 주관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자기 자신이 이 어둠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있다. 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절대적인 어두움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불신자의 영혼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어두우니까 빛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움이니까 생각이 잡을 래야 붙잡을 빛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적용되어야지 영적 총명이 생기는데 이미 생각이 붙잡을 빛이 없으니까 영적으로 총명할 수가 없죠. 마음이 그것을 사용해야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한 진실한 삶이 나올 수 있는데 붙잡을 빛이 없고 적용된 빛이 없고, 그리고 마음이 그것을 사용하고자 해도 사용할 빛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절망적으로 영혼이 어둡기 때문에 생각이 빛을 못 붙잡고, 그래서 영적인 총명이 없고, 그래서 마음이 그 빛을 사용하지 못하니까 마음은 상실한 자가 되어서 버려진 바처럼 그렇게 방탕한 마음이 되고 그래서 제멋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죠. “아니 그러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전부다 정신병자 내지는 부랑당만 있겠네요?” 그렇지 않죠.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영적인 진리의 빛 말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불신자나 신자나 공통적으로 본성이 빛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성을 빛을 주어서 어느 정도는 도덕적으로 선이다. 악이다. 깨닫게 하시고 선을 행한 날은 편안히 잠들게 하시고 악을 행한 날은 고민하고 가위에 눌리도록 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은 해도 악을 행하는 것은 스스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자기가 그 악을 행했기 때문에 보응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렴풋이나마 하나님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엄위, 악에 대해서 형벌하시는 하나님의 공평에 대해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성의 빛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도덕적으로 살아도 자기 좋아서 사는 삶이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그런 선한 의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선한 삶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객관적인, 혹은 상대저인 어두움입니다. 이 어두움은 앞에 있는 어두움처럼 완벽히 한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이고 또 하나는 그 사람이 영혼의 어느 부분은 이 영혼의 어두움과 하나가 되어있지만 그러나 실제 그 영혼의 중요한 부분은 이 어두움과 하나 된 주관적인 상태가 아니라. 객관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이것을 객관적 어두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이것을 설명 들으면 아주 분명하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들어보세요. 여러분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깊이 마음이 뒤로 물러가면서 미끄러져서 타락해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속에 많은 죄들이 융성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죄가 있는지 몰라. 그리고 뭐 자기의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만족해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말씀의 밝은 빛이 들어와요. 그리고 딱 깨어나요. 그리고 자기 속에 죄가 있다는 사실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이런 죄가 있는데 몰랐구나. 이렇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 죄를 버리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어요. 아직까지도 이 죄가 주관화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해요. “하나님 정말 이 죄를 버리기 싫지만 그래서 내가 아직도 죄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선명하게 이 죄가 느껴지지 않는데 하나님 제가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정말 잘못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정말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정말 내 마음은 굳어졌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졌고, 처음 느꼈던 그 신앙의 아름다운 감격과 사랑의 참된 교제에서 오는 즐거움들이 제게 없습니다. 저는 정말 마른 뼈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렇게 기도를 해요. 성령께서 도우시니까 기도가 잘 되는 것입니다. 막 눈물이 나오고 기도가 되요. 한번 두 번, 세 번, 세 번, 기도가 되니까 명료하게 죄가 무엇인지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객관화 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본분에서 사도바울이 “이제 내가 악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다." 그것이 전에는 자기와 완전히 주관적으로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닫고 은혜를 받고 어느 순간에 깨닫고 나니까 그 죄가 자신 안에 있는데, 자신도 그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마음 한편에서는 그 죄가 싫어. 그래서 싸우고 싶어 승복하기가 싫어. 그런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그러면서 죄가 죄로 드러나는 것이 객관화의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취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그 기도와 말씀의 은혜를 주셔야만 자기의 이 뼈 속 깊이 배어있는 이 죄의 성분들이 함께 모여서 그래서 이것들이 객관화 되는 것입니다. 객관화 되지 않을 때까지는 이것이 자기인줄 알고 끌어안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공격하면 막 성질을 내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공격은 곧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겠다. 자기가 무슨 연합군이나 되는 것처럼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이것이 객관화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객관화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런 객관적인 혹은 상대적인 어두움은 뭐냐면 불신자의 마음과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뭐냐면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생각하고, 깨달음으로서 이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그러면 불신자에게도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차이는 뭐냐면 불신자의 마음에 빛이 비추기 위해서는 성령님께서 먼저 그들을 중생 시키셔야합니다. 그러니까 그 불신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불신자도 가만히 넋 놓고 앉아서 불신자로 있는 사람은 이런 빛을 받을 가능성이 별로 없지만 그러나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를 궁금하게 묻고, 구스 네시처럼 이게 이사야에 나오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물었던 그 구스 네시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가르쳐주니까 깨닫게 되는 것처럼 그런 마음이 있으면 빨리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마음에 진리의 빛이 들어올 때 그것은 성령님께서 어느 순간에 잠자는 동안에 일어주신 그런 빛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하실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희귀한일입니다. 그런 희귀한 일이 여러분들에게 일어나리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오히려 “주님, 제 영혼 속에 어두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어두움은 주관적이고 절대적인 어두움이아니라. 객관적이고 상대적인 어두움입니다. 주님, 저는 이 어두움에서 벗어나고 싶고, 이 어두움을 물리치고 싶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오니 나의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귀한 것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자신의 영혼에 적합한 상태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말씀을 깨닫고, 하는 그 과정에서 성령께서 도우심으로 물러갈 수 있는 어둠입니다. 가끔 가다가 상담을 오는데 사실, 말씀을 잘 깨달으면 상담을 할 필요가 점점 줄어듭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옵니다. 아주 답답하니까 옵니다. 오는데 대화가 안 됩니다. 왜냐면 이것은 그것을 다 설명해 주려면 몇 시간을 설명해야합니다. 나도 사역이 바쁘니까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쭉 얘기를 하는데 고통스러운 것도 사실이고 심각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면 이 영적인 총명이 너무 없어요. 그리고 영혼의 어두움이 상당히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설명해 줘도 그것을 너무 격차가 크니까 제대로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입에 넣어준 것처럼 한번에 이렇게 안 됩니다. 그러면 이제 자기 얘기를 한 30분쯤 하면 마음이 좀 후련해질 것 아닙니까. 그것도 좀 재촉해야합니다. 빨리 용건만 얘기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두 시간합니다. 그렇게 한 30분쯤 털어놓으면 다 됐죠. 그러면 항상 제가 제안을 합니다. 뭐냐면 “내가 다시 한번 꼭 만나줄 테니까 테이프 두 세트 꺼내면서 이것 듣고 그러면 내가 아무리 바빠도 내가 이것 두개 다 들었다. 그러면 꼭 만나주겠다.” 대부분 안 옵니다. 왜? 자존심이 상해서 안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들으면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자기가 너무 괴로우니까 그렇게 해서 주는 설교 테이프는 정신 바짝 차리고 듣습니다. 약 먹듯이 듣는 것입니다. 그것도 또 담임 목사가 직접 빌려줬으니까. 그러니까 가서 듣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예전에는 들어와서 진짜 그야말로 다리 꼬고 음료수 마시면서 예배드리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것을 딱 틀어놓고 정 자세로 앉아서 대학 노트 펴놓고 필기까지 하면서 듣는 것입니다. 고3 때도 그렇게 공부하던 때가 없었데요. 당연하죠. 공부했으면 더 좋은 대학 갔지.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생각이 그것을 붙들어요. 자기가 더군다나 너무 총명이 없어서 고통 받다가 생각이 그것을 딱 붙드니까 총명의 빛이 막 쏟아져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 듣고 나면 이미 다 끝난 것입니다. “아, 내가 이래서 이렇게 고통을 받고 끝나는구나.” 그리고 찾아와요. 그래서 “더 할 얘기가 있느냐?” 그러면 “아, 목사님 됐습니다.” 그리고 놓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을 만났습니다.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혼의 어두움과 총명과의 관계는 영혼이 어두운 상태 속에 있게 되면 결국 이 총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영혼의 어두움이 깃들게 되면 이 총명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영혼의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물리적인 빛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깨달았다고 말하는 그 개똥철학에서 나오는 그 엉터리 같은 빛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로지 영혼의 어둠을 물러가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취는 찬란한 복음의 빛만이 우리를 이 영혼의 어두움에서 물러가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간절히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그 빛을 붙들고, 그 빛을 끊임없이 적용하면 이 어두운 시대를 분별하고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총명이 생깁니다. 마음은 그것을 사용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거룩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내면의 틀입니다. 이 내면의 도구들입니다. 이런 역사가 우리 안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어야지만 겨우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고 참 신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아무런 이런 변화도 없이 힘겹게 신앙생활을 이어가면서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교회 생활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종교생활이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깊이 회개하고 기도할 때마다 제일 먼저 “하나님 나는 무지합니다. 시인의 고백과 같이 나는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과 같사오니 주님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시고 내 영혼에 총명을 주시옵소서. 생각은 그 진리의 빛을 붙들고 그래서 그 빛이 적용되어 내 영혼이 총명을 더하고 그래서 지극히 선하고 거짓된 것을 그리스도 오시는 날까지 분별하여 순결한 사람이 되고 내 마음은 그 빛을 사용하여 그렇게 꿈에도 그리워하는 진실한 신자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먹고 사는 일보다 더 급한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은혜의 상태로부터의 부패 (2)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17)
지난 시간에는 은혜의 상태로부터 부패한 죄의 역사가 어떤 것이냐? 에서 크게 두 가지를 배웠는데 하나는 영혼이 죄를 경계치 않음으로서 은혜의 상태에서 부패하게 되고 또 하나는 세상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총명을 잃어버림으로서 판단력을 상실하고 어두움 속에 들어감으로 은혜의 상태에서 부패하게 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의 기억력을 위해서 두 가지만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은혜의 상태로부터 부패한 세 번째는 개별적인 정욕에 이끌림으로서 신자는 은혜의 상태로부터 부패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개별적인 정욕에 이끌림으로서 부패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많은 인간의 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이 신자가 모든 것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죄를 짓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죄가 하나나 혹은 둘, 몇 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용해서 신자에게 역사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제 처음 말씀드렸던 영혼이 죄를 경계하지 못하게 됨으로서 모든 생각들이 뒤엉키게 되는 이런 것들이 만약에 일반적인 죄에 대한 경계심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것은 특정한 죄에 대해서 특별히 쉽게 죄를 짓도록 욕망이 생겨나고 거기에 순순히 복종하게 되는 그런 경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이 신자가 은혜의 상태로부터 물러가 부패하게 된다.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선 말이죠. 죄는 역사할 때 은밀하고 개별적인 정욕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신자인 우리가 무엇인가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자체가 성결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런 욕망이 적으면 적을수록 훨씬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들이 금식하지 않습니까. 금식의 효용성은 하나님을 향한 집중입니다. 그런데 부수적으로 어떤 효과도 가져오느냐면 이 금식을 하면서 며칠이 지나면 온 몸에 힘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죄가 죽은 것은 아니지만 강력하게 자기를 지배하던 그 육체적인 강한 욕망들이 잠시 휴식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일주일씩 금식해서 기운이 쭉 빠지고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누구를 미워하려고 해도 힘이 없습니다. 미워하는 것도 힘이 있어야합니다. 우선 이 속에서 막 인간에 집중하면서 이를 뽀드득 하고 갈려면 이것이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됩니다. 자기 몸을 일으키기도 힘든데 말이죠. 그렇다고 미움이 이 속에서 죽은 것이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뭐에 의해서 입증되느냐면 죽이라도 몇 그릇 먹고 기운이 생기면 다시 뽀드득 한다는 것입니다. 성적인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적인 욕망에 순간적으로 막 이글거리고 타오르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금식해요. 한 일주일쯤 하면 성적인 욕망이 싹 사라집니다. 왜냐면 뭐 그것을 상상하려고 해도 무슨 힘이 나야지 상상을 하지.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죄를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 죄가 휴식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다시 밥을 먹고 기운이 나면 다시 성적인 욕망들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금식을 많이 하면 술 먹고 싶은 생각도 없어집니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도 없어지고,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음식에 의해서 육체가 자기 컨디션을 찾았을 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중세의 수도사들이 이런 맛에 자꾸 자기 육신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죄가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죽는 것이 아니라. 휴식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육체가 원기를 회복하면서 다시 육체가 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암이나 이런 것과 비슷합니다. 암은 그 병을 가지고 있는 인자의 몸이 약하면 그 병도 약해지고 강하면 그 병도 강해집니다. 그래서 연세가 많은 분이 건강하신 분이 암에 걸리면 금방 안 돌아가십니다. 그런데 펄펄 나는 젊은이가 걸리면 금방입니다. 그러니까 건강을 잃고 몸이 약해지고 쇠약해지면 이 질병도 함께 약해집니다. 그런데 반대로 또 결핵 같은 것은 반대입니다. 몸이 튼튼하면 병이 약해지고 몸이 약하면 병이 강해집니다. 병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욕망은 반대입니다. 그래서 같이 가는 것입니다. 몸이 약해지면 함께 약해지고 몸이 튼튼해지면 함께 육체적인 기운과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죄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할 때에 먹이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정욕입니다. 정욕을 가지고 계속해서 먹이를 삼으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죄가 은밀하고 개별적인 정욕으로 역사한다. 라고 하는 말은 어떻게 우리들이 설명할 수 있느냐면 죄는 우리의 본성에 아주 익숙합니다. 그래서 성령님도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합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성령님이 원래 우리 안에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집어넣으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를 닮은 성품을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성령님이 굉장히 익숙해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 무한히 익숙해진 방식으로 잘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오셨을 때 무엇인가 우리가 달라졌다. 기쁘다. 감사하다. 참 은혜롭다 이런 느낌은 들어도 성령이 오시니까 왠지 불편하다. 이것이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괜히 오셨다보다. 다시 가시라고 하는 것이 편하겠다. 그런 생각이 안 듣다. 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 다음으로 우리 인간의 구조에 대해서 아주 익숙해져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령님보다 더 오랫동안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왜? 타락한 이후부터 그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고, 거듭난 사람들 이외에는 지금도 죄가 그 안에서 충분히 지배권을 행사하면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태어날 때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죄가 우리 안에 있는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죄에 의해서 우리들이 종노릇 하면서 일생을 살아오다가 예수님 만나고 변화되어서 다시 성령님이 당신 자신의 집에 찾아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서에서 사도바울이 ‘너희 몸은 거룩한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이다.’ 그렇게 말한 것도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신자 안에 죄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그 성전 안에 성령님과 죄가 함께 공존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죄가 이미 거듭남과 함께 파괴되어서 이 인간 속에 심겨져있던 죄의 강력한 능력과 죄를 끊임없이 생각해내는 이러한 사망의 법이 파괴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죄가 남아있어서 죄가 계속 성장하는데 성장할 때에 그 죄는 우리의 몸의 특성과 우리의 영혼의 모든 구조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죄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죄는 까막눈 하고 싸우니까 너무 재미있는 것입니다. 마치 바둑위에 까만 돌과 하얀 돌을 올려놓고 쳐서 떨어뜨리는 것 밖에 모르는 사람하고 바둑을 둔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재미있겠습니까. 막 두면 다 따먹고, 막 두면 다 죽고 그럴 것 아닙니까. 죄가 그렇게 인간의 마음과 영혼의 구조에 대해서 잘 알고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러한 지식 안에서 우리의 강점도 잘 알고 약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우리 안에 있는 죄는 예수 믿고 거듭남과 함께 새로 들어온 죄가 아니라. 옛날부터 우리 안에 있었던 죄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가 망하고 다 파괴되었고 이제는 그 빨치산 같은 것들이 좀 남아있는데 그래도 원래 우리 속에 있었던 패잔병들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것입니다. 어떤 것에 마음이 약해지고 어떤 것에 강하고, 어떤 분위기에 가면 죄를 짓고, 어떤 것들을 가지고 유혹하면 어느 지점에서 넘어진다. 라고 하는 것을 죄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 깨어있다. 라고 말할 때에는 이러한 자기 자신의 약점에 대해서 이 본성적이고 자신만의 독특한 성격, 그리고 이 본성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그것을 죄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한다. 라고 하는 의미도 깨어있다. 는 말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이 그냥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래서 우리의 강점과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죄는 우리가 강할 때는 자신이 약한 것처럼 보이고, 우리가 약할 때에는 자신이 강한 것을 보이고 하면서 우리를 이리저리 이끌고 다니면서 우리를 향해 역사하는데 어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이 죄는 크게 두 가지를 사용해서 신자들을 공격하는데 그것이 속임과 그리고 강압하는 힘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죄의 계획은 신자 안에서 계속해서 자기의 영향력을 확대해서 그래서 비록 그 옛날처럼 다시 죄와 사망의 법을 세워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상태로 우리를 데려갈 수는 없지만 그렇지만 우리 안에 죄의 영향력을 계속 확대해서 마지막에는 우리를 구원은 받았지만 사실상 실제의 삶은 죄에 철저히 복종하고 그 죄에 순종하는 죄의 노예 된 상태로 데려가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우리를 구속해주신 목적하고는 정 반대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는 모욕이 되고 신자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 그것이 우리 안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내제하는 죄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 죄는 항상 우리를 억압하고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속이고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의 편이 되기도 하고 우리를 지지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사정없이 협박하기도 하고, 이렇게 속임과 강압을 통해서 온갖 지혜를 통해서 역사함으로서 우리를 그런 죄 가운데로 데려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죄의 모든 역사가 당연히 두말할 여지도 없이 사단의 지혜와 모략에 의해서 움직이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우리 안에 있는 총체적인 지배력을 얻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정욕을 사용하는 것이 이 죄가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선택된 어떤 개별적인 죄를 계속 집착하고 그것에 대한 정욕이 계속 솟아나게 하고, 거기에 계속 이끌려서 거기에 쉽게 계속 반복해서 빠지게 함으로서 그 개별적인 정욕, 개별적인 실패의 그 통로를 통해서 죄의 원군들을 계속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 전체가 죄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게 만들어서 다른 죄도 쉽게 짓도록 사단이 죄를 통해서 계속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두고 보시지만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백성들이 다시 그 죄를 뉘우치고 회심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죄를 이길 은혜의 원군들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 지나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만은 옛날에는 이북에서 땅굴을 팠다. 그래서 발칵 뒤집히고 그랬습니다. 참 그 때 우리는 불안했던 기억이 납니다. 땅굴을 파서 그 굴이 남쪽으로 이렇게 넘어왔는데 한 시간이면 만 명쯤 그렇게 굴에서 쏟아져 나온다니 자다가 일어나서 날 새고 나면 몇 만 명이 남쪽으로 넘어와 있는 그런 상황이 될 것 아닙니까. 그렇게 이 죄는 신자가 아주 잘 넘어지는 그리고 잘 이끌리는 그러한 개별적인 정욕, 개별적인 죄, 이런 것들을 선택해서 죄를 계속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어떤 특정한 욕망을 느끼면서 죄에 빠지게 될 때 그 때에 양심이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항거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남아있는 은혜가 이것에 대해서 항거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마음에 어떤 특정한 죄에 이끌리게 되면 그러면 거기에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는데 그 욕망보다 이 양심이 크면 도덕적으로 그것을 안 지을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도덕적인 결심을 할 때에 이제 떠오르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만은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아, 나는 이 죄를 꼭 짓고 싶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것이 만약에 알려지면” 사람들 얼굴이 쭉 떠오르는 것입니다. “나를 인간이라고도 안 하겠지. 참아야지.” 죄가 죽었을까요? 안 죽었을까요? 안 죽었죠. 이런 식으로 죄를 억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존 오웬의 표현에 의하면 물이 막 쏟아지는데 댐을 막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댐을 막는 힘보다도 밀려오는 수량이 훨씬 더 많으면 결국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댐을 막는 것은 어리석고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죄의 넘실거리는 물을 말려버리는 작용이 없이 이런 도덕적 결심으로 댐을 아무리 높이 쌓아봐야 결국은 이 댐을 쌓는 것 보다는 이 속에서 솟아나오는 이 죄된 욕망들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것들이 가득 모였다. 쾅 하고 무너지면서 와르르 하고 쏟아지면서 자신의 온 삶 속에 이 죄의 흙탕물이 가득 범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 가지고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신자가 이 죄를 자기가 사랑하는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해서 욕망에 대해서 굴복함으로서 이 죄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지성적으로 자기가 자주 빠지는 죄에 대해서 너그러운 판단을 지성이 먼저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면 특정한 욕망에 대해서 너그러운 태도를 갖게 함으로서 이 자주 자주 빠지는 어떤 개별적인 정욕에 쉽게 이끌리도록 자기 자신을 죄를 향해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특정한 욕망에 대해서 속이는 죄의 역사를 통해서 이 죄를 가볍고 너그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나는데 우선 첫 째는 뭐냐면 지의 크기와 그것이 몰고 올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이 죄가 신자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그리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그 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나? 그리고 그런 죄를 지었을 때 그 결과에 대해서 성경이 무어라고 말하고 그리고 그 비참한 결과가 자신의 영혼에 어떤 파괴력을 행사하는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공정하게 인식해야 하는데 자기가 어떤 특정한 정욕에 이끌리게 되고 죄를 짓고자 하는 의지와 경향을 갖게 되면 이미 들어온 그 지가 신자의 총명을 흐리게 만들어서 그 지의 크기와 죄의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공정성을 잃어버린 판단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 죄에 대해서 아무리 심각하게 이야기 하더라도 그렇게 죄에 의해서 속이는 역사에 미혹된 신자는 성경이 그 죄를 어떻게 크게 생각하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요즘 뭐 다 그러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요즘 뭐 다 그러는데 그래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지옥이 없다. 그리고 한 줄로 서서 지옥으로 가도 하나님께서 그 지옥으로 가는 길은 천국으로 바꾸고 그다음에 천국으로 가는 길을 지옥으로 바꾸시는 그런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날 우리 사회를 보면서 좀 걱정스러운 것이 뭐냐면 아무도 이 법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가 많고 목소리가 커서 소리, 소리 지르면 법도 무너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예의 바른 경찰이 영국 경찰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에 조금이라도 시민이 이 나라가 가지고 있는 공권력을 침해하고 있다. 라고 생각되면 이 여기에 차고 있던 몽둥이를 꺼내서 개 패듯 팹니다. 여러분 미국이 얼마나 민주적인 국가입니까. 1970년대 대모 하는 학생들을 향해서 총탄을 발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뭐냐면 국가의 공권력입니다. 법이 올바르게 서서 그 법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여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분별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주는 힘이 국가를 받쳐주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나라에는 잘못된 법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법들은 법을 순순히 순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법이 잘못되었다고 항거하고 그 법에 대해서 잘못을 지적하고 그리고 저항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법이 바뀌어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의 문제는 뭐냐면 그렇게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다든지, 그런 대의적 가치를 가지고 법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라가 뿌리째 흔들리는 위험스러운 광경들을 우리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도 역시 이러한 속임수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다 그 죄를 택해서 그 죄가 이 사회에 일반적인 죄가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율법을 현실화 시키시는 법은 없습니다. 요즘 세상이 다 그러니까. “삼 년 전에는 내가 이 법을 준수했지만 삼 년 후에는 이 법을 바꾼다. 그래서 60년대에는 이러 이러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이만큼 벌을 받았지만 90년대에는 이런, 이런 죄를 지은 사람보다는 저런 죄를 지은 사람이 더 형벌을 많이 받아야 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처럼 율법도 언제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판단도 그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엄위하심도, 항상 하나님은 같은 자리에 서서 우리 인간들을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죄는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쳐주는 그 죄의 정확한 크기를 축소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면 자기가 짓고 싶은 죄는 크기를 아주 줄이고, 자기가 안 짓고도 넉넉히 살수 있는데 다른 사람이 많이 짓는 것은 크기를 매우 크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죄를 짓는 것이 옳다고 까지는 말하지 않지만 하나님과의 평화를 파괴시킬 정도로 그렇게 큰 죄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죄의 속이는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세하는 사람들은 폭력 하는 사람들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탈세는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 폭력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폭력은 아주 사소한 문제지만 그렇지만 뇌물을 받고 정치적으로 부패한 것은 커다란 죄라고 생각한다든지. 이렇게 그리고 대대로 뭔가 이렇게 유고적인 집안에서 자라서 그래서 부모님에게 끔찍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라를 속이고 이웃을 속이고 그러는 것은 별로 큰 죄가 아니어도 부모님을 잘 공경하지 않는 것은 끔찍한 불효막심한 죄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느 음식점을 갔더니 못 쓰는 붓글씨로 크게 써서 밥 먹는 바로 눈앞에 액자를 하나 걸었습니다. 뭐라고 썼느냐면 “밥을 남기면 천벌을 받습니다.” 무서워서 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뭘 좀 더 달라고 해야 되는데 아니 차라리 “밥 남기면 1500원 벌금” 그러면 애교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주 흉측한 붓글씨로 “밥을 남기면 천 벌을 받습니다.” 다시는 그 집에 안 갔습니다. 천벌 안 받으려고 그날 혼났습니다. 우리도 그런 교육을 받았잖아요. 우리도 지금은 밥을 먹으면 밥알 하나도 안 남기고 먹는 것이 우리 몸에 배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음식이 하도 많이 나오니까 그렇지 않지만 그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도 아이들하고 밥상에서 늘 야단치는 것이 그것을 왜 남기냐? 농부 아저씨가 그 쌀 안 알을 하려면 80번을 손을 거쳐야 되는데 그것을 왜 남기냐? 이것도 결국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것도 다 선입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난한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진짜 그 밥을 남기고 그러면 안 됩니다. 심지어는 이웃집에서 음식을 갖다 주었는데 약간 상한 것을 갖다 주었습니다. 버릴 때는 밤에 보이지 않게 종이 싸서 버렸습니다. 왜냐면 쓰레기통에 흰 밥이 있는 것을 보면 온 동네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다 욕을 했습니다. 천벌을 받는다고 그러는데 그런 사람이 그런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밥 남기는 죄가 크겠어요. 아니면 부가가치세 안 내는 죄가 크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죄는 사람들을 막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집회를 갔는데 어느 교인이 저에게 점심을 사겠다고 데리고 갔습니다. 좋은 차를 타고 가는데 이 분이 인권 변호사였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고통 받는 민주화 투사들을 위해서 변론하는 이야기를 쭉 하기에 참 훌륭하신 분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세금은 잘 내십니까?” 그러니까 한숨을 푹 쉬면서 “목사님 그것은 진짜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한번 물어봅시다. 세금을 잘 내고 민권 운동변호사 안 하는 것과 민권운동하면서 그 사람들에게서 받은 세금 잘 안내는 것과 둘이 같이 누가 더 정당한가 하나님의 저울에 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각자 판단이 다른 것입니다. 세금 떼먹은 사람은 민주화 한 사람들을 변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세금 내는 사람은 내가 세금 안 내었으면 다른 사람은 누가 내느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죄는 이런 식으로 우리의 판단을 뒤엉키기 위해서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짓고 싶은 죄에 대해서는 이렇게 합니다.
아니 재미있어서 한번만 더하겠습니다. 제가 전도사 때였습니다. 교수가 되었습니다. 집이 인천입니다. 학교는 안양이고 교회는 종로였습니다. 이 삼각형이 장난이 아닙니다. 그래서 돈을 300만원을 주고 중고차를 하나 샀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르치는 학부모중이 한 사람인데 뭐라고 하느냐면 그 때 기름값이 조금 비쌌고 그랬습니다. 차도 막히고 그랬는데 이 사람이 분노하면서 인간들이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지 왜 그렇게 자가용을 사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어제 샀는데 막 분개하면서 말이죠. 도대체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뭐가 불편하다고 말이지 그것도 혼자 타고 세종로를 누비면서 말이지. 이 나라를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고 말이지. 정신 못자리는 인간들이라고 그랬습니다. 내가 얼마나 썰렁하겠습니까. 그것도 옆에서 담임 목사님이 심방 오셔서 차를 하나 사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그 조언을 받아서 그 중고 차, 똥차를 하나 샀는데 색깔이 똥색이었습니다. 내가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그 집사님이 “전도사님 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분 집에 심방도 여러 번 갔고, 그리고 그분의 신앙상태도 알고, 교회에서 잘 아는데 그분하고 거의 6년 이상 가까이 교제를 하면서 그 많은 자신 안에 그리고 자신 주변에 가정에 있는 어떤 죄에 대해서도 그렇게 분노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웃기는 것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이런 것들을 굉장히 조심해야합니다. 커다란 죄입니다. 그런데 하여튼 죄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속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의 크기에 대해서 속입니다. “죄라고 안 할 수는 없지만 아주 경미한 죄기 때문에 너를 그렇게 뜨겁게 열렬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뜨거운 사랑의 불길에 이정도의 죄는 다 타서 없어 질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가 몰고 올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부담이 적어지기 시작하면서 그 죄를 가볍게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그 죄를 짓고 싶은데 그렇게 설득해도 자기 자신에게 뭔가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한 구석에서 어떤 것이 나오느냐면 다른 장점으로 그 죄를 보상하려는 심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그런 경우보시지 않았습니까. 저 사람이 그럴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죄에 빠진 사람인데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매우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렇게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보상하려는 심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상당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물론 그 중에는 그런 심리가 아니라. 자기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러나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자리에서 어떻게 하든지 그 일을 감당하면서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 앞에 사죄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고통 가운데 매달리는 사람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일이라는 미명하에 그렇게 일에 매달림으로서 자기 자신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죄, 그리고 자주 빠지는 이 죄에 대한 그 손해를 이러한 자신의 장점을 통해서 보상하려고 하는 심리가 그 죄인 안에는 내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죄의 속이는 역사가 진행되게 되는데 결국은 그러면서 죄는 이 신자 안에 있는 특정한 욕망, 그것은 사람마다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적인 욕망에 쉽게 빠지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게 큰 죄가 아니더라도 사람을 아주 쉽게 미워하는 사람이 있고, 아주 잘 원수 맺고 다니는 사람, 그다음에 어떻습니까? 입을 열면 오물을 토해내듯이 그 이야기를 듣고 함께 생활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양심을 더럽히는 더러운 말을 토해놓는 이 언어생활에 절제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물질적인 이익에 대해서 아주 치열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래서 어떤 물질적인 것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아주 과도하고 병적으로 집착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에 쉽게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감투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도 존재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의 인생의 길을 이렇게 돌아보면 여우는 두 번 다시 같은 덫에 걸리지 않는다는 영국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렇지가 않고 항상 걸렸던 그 덫에 계속 걸립니다. 그래서 보면 어떤 사람이 제가 아는 분 가운데 그런 분이 있습니다. 교회를 여러분 옮겼는데 항상 돈 때문에 문제가 되어서 교회를 옮기는 것입니다. 이 성도들 간에 돈을 거래해서 이것을 갚지 못해서 떼먹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겠죠. 그렇게 해서 문제가 되어서 온 교인들에게 욕을 먹으면서 다닙니다. 그런데 그 다음교회에 가서 다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해도 또 그 지점에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를 옮길 때마다 전혀 지어보지 않은 새로운 죄의 영역들을 개척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죄를 짓고 옮겨 다니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넘어진 그 자리에서 계속 같이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온 길을 쭉 한번 보세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본성이 변화되는 성화의 진실한 변화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바뀌지 않는 살아온 인생의 괴 적은 바뀌지 않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가난하게 살 때가 있고, 부하게 살 때도 있죠. 그렇죠. 신자와 어울려서 지내야 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과 어울려 지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학교에서 생활하고 나이가 들면 직장에서 생활하고 그리고 더 나이가 들어서 성공하면 부하직원들을 거느리고 자기 기업에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무대에 지나지 않고 어떤 죄에 계속 빠졌던 사람이 무대는 바뀌지만 항상 빠지는 죄의 위험과 문제들이 그런 문제들로 계속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가 짓고자 하는 특정한 욕망에 대해서 자꾸 죄의 속이는 역사를 통해서 잘못된 가르침을 받고 자기 자신을 계속 속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죄의 크기는 작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특정한 욕망에, 개별적인 정욕에 이끌림으로서 순종함으로서 받는 기쁨이 굉장히 커요. 그럴 경우에는 신자가 아주 점 점더 쉽게 죄를 짓게 되고 죄를 계속 짓게 되면 중독같은 증상이 찾아와서 처음에는 자신이 죄를 선택했는데 그다음에는 죄가 자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거기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부림 치고 애를 써도 거의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날 우리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 가운데 가장 가슴 아픈 일 가운데 하나가 자연을 파괴하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야생동물들을 잡아서 그것을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이해가 안 갑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깊은 산 속에다 동물들이 지나가는 통로에다 덫을 많이 놓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보지 않는 산길 깊은 곳에 들어갈 때는 매우 조심해야합니다. 여러 번 이미 텔레비전에도 보도가 되고 그랬습니다. 멧돼지 한 마리가 지나가다가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밑에서 틀리 차고 올라오는데 그 틀을 저도 보았는데 실물을 본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겼느냐면 동그랗게 되고 가운데를 밟거나 건드리게 되면 이렇게 접혀져 있던 틀리 튀어 오르는데 이 뛰어오른 틀리 이빨처럼 생겼습니다. 뾰족한 이빨처럼 생긴 것이 튀어 오르면서 스프링으로 그 발을 찍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줄은 큰 나무에 묶어놓는 것입니다. 그 한번 걸리면 그 죄 줄을 끊기 전에는 못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스프링이 점점 살을 파고 들어와서 뼈까지 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짐승이 거기에 걸린 것입니다. 대게 밤중에 걸렸겠죠. 걸리니까 거기에서 헤어 나오고 싶어서 얼마나 몸부림을 쳤겠습니까. 그래서 제일먼저 빠져나오려고 발을 움직일 것 아닙니까. 발을 움직이면 공간에 여유가 생기니까 톱니가 더 살을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막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기자가 가서 보니까 나무에 묶어 놓은 고리가 얼마나 피를 흘리면서 돌았는지 하얗게 벗겨졌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거기에서 죽는 것입니다.
이 죄에 빠진 인간을 누구도 도울 길이 없는 상태가 바로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올무에 걸려서 그 인간이 어떻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몸부림치면 칠수록 한번 문 그 죄가 그것을 절대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참하게 몸부림치면서 도는데 죄는 점점 더 자기를 억제해 오고. 그 크고 두꺼운 나무가 껍질이 벗겨지고 그 속에 것이 벗겨져서 하얀 줄이 패일정도로 그렇게 돌았으니까.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을 한번 거기에 매달아 놔야합니다. 하얗게 파면서 돌아라. 고 말이죠. 아니 돈 조금 주면 가서 돼지고기 사 먹는데 그것을 먹겠다고 거기에서 그렇게 왜 사람들이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같이 어울려서 살았지. 그것을 먹겠다고 그러는데 그 짐승은 그 속에서 죽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그 덫을 놓고 찾아가지를 않아서 이게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져서 겨울에 박제처럼 되어버린 것도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합니까. 그런데 그렇게 죄에 물리게 되면 그런 식으로 특정한 죄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계속해서 그렇게 자기 자신이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 결국 신자는 그 속에서 죄가 즐겁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신자일 경우에는 그 죄가 그 신자에게 영원히 달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견디기 힘든 죄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울부짖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가슴에 섬유질이 찢어지는 것처럼 애절한 기도가 나와서 하나님께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 같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로 단 한번의 기도로 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이런 상태에 가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서 그런 비참한 고통을 맛볼 때까지 개의치 않고 거기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결국 그렇게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통해 역사하느냐면 개별적인 특정한 정욕, 그가 잘 빠지는 어떤 죄에 대해서, 그가 특별히 사랑하는 어떤 죄에 대해서 계속 욕망을 불러일으킴으로서 거기에 빠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은혜의 상태로부터 멀어져서 부패하지 않는 것이 결국 성화의 노력에 달린 것이라고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성화는 결국 총체적인 순종으로서만 죄를 이길 수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성화에 필요한 필수적인 자세가 있습니다. 우선 첫 째는 그 목표가 삶의 모든 방면에서의 온전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총체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성화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성화의 목표는 어떤 한 면, 내가 요즘에 교회에 잘 안 나오는데 열심히 나와야 되겠다. 이런 것만이 성화가 아닙니다. 기도는 내가 매일 열심히 해야 되겠다. 이런 것이 성화의 목표가 아닙니다. 성화의 목표는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신자가 온전해 지는 것이 성화의 목표입니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순종이 따라서 자기가 목표로 삶는 어떤 특별한 부분에 대해서만 순종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삶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의도, 마음에 있는 의도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스쳐가는 모든 생각과 이지의 작용까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기를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죄를 죽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랍 되기를 원하네.
그것이 시인의 기도입니다. 결국 이러한 성화의 이치를 잘 캐 들어가 보면 우리의 이 불순종하는 삶, 은혜의 상태로부터 미끄러져서 죄를 짓는 이 밖으로 드러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 뿌리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뿌리를 캐 들어가 보면 마음이고, 마음에서 깊이 캐들어 가면 영혼이 나오고, 생각이 나오고 총명이 나오고 이렇게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이 죄악 된 세상에 대해서도 많이 배워야 되겠지만 우리 자신,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 대해서 잘 배워야합니다. 오늘 날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배우면서도 적절하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가르치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그 영혼 하나, 하나를 잘 세밀하게 다루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뭐냐면 사랑이 없어서 라기 보다는 그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 대한 성경적인 연구와 탐색, 그리고 거기에 대한 교리들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 솔직하게 얘기해서 의사들이 사람을 수술하는 것 보세요. 얼마나 쉬워 보여요. 거기에 소독약 쭉 바르고, 그리고 마치 바지 수선하듯이 배를 쭉 가르고 꺼내서, 창자도 꺼내고 뭐 이렇게 해서 자르고, 그리고 재봉질 하는 것처럼 꿰매고 다시 집어넣고 다시 꿰매서 다 굳으면 실밥 쭉 빼면 낫습니다. 그런데 뭐 그렇게 병원비가 비싸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치과에 가서 이를 하나 뽑는데 얼마입니까? 그러니까 뭐 삼 만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더니 아니 뭐 한번 이를 뽑는다고 해서 그 펀지가 닳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이렇게 집어넣고 보는 그 거울이 닳는 것도 아니고 내가 보니까 이 전기 불빛밖에 없는 것 같은데 뭐 그렇게 비싸요. 값을 조금만 받으세요. 그러니까 치과 의사가 그러더래요. 가격은 각아 줄 수 없고 시간은 좀 연장해 드리겠다. 고 하더래요. 이빨 보는데 얼마나 걸리느냐고 하니까 5분 걸리고 삼 만원이다. 하니까 너무 비싸다 하니까 가격은 각아 줄 수 없고 시간은 30분으로 연장해 드리겠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수술하는 것이 쉬운데 그렇게 특별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자르는 것만 연습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자르는 것, 하면 사실 일식집에서 회 뜨는 사람들이 더 잘 자르죠. 조직 폭력배들이 더 사슴이 칼 가지고 더 잘 자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 안 됩니다. 왜냐면 이 인간의 모든 인체의 이치 혈관과 힘줄 신경, 그리고 혈액, 이모든 인간의 작용에 대해서 철저히 연구한 사람들만이 인간의 몸에 칼을 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수술을 해야 될 상황이 된다면 여러분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러나 인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여러분의 아버지에게 칼을 들려주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과 피도 살도 섞이지 않고 전혀 여러분을 사랑하지도 수술하고 받는 수술비에만 관심이 있는 전문적인 의사에게 맡기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맡기겠습니까. 그래도 아버지에게 맡겨야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 하나 탐색해서 그런 것들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 결국 우리들이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온전해지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방금 설교하다가 좋은 비유가 하나 생각났습니다. 이제 이렇게 옛날에 시골에 가다보면 조그만 개울이 있습니다. 도랑 같은 것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들이 좀 무식한 행동이기는 했지만 판자를 가지고 물을 막아놓고 물이 못 내려가게 하면 고기들이 막 뛸 것 아닙니까. 그러면 막 줍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하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면 여기 이렇게 기다랗게 직사각형으로 파진 그런 도랑과 같은 커다란 홈이 있고, 거기에 물이 가득 있습니다. 마치 목욕탕에서 보는 길쭉한 목욕탕 같이 그 물을 퍼내야 되겠는데 호수도 없고, 양수기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다란 목욕탕 하고 딱 맞는 판자가 있어요. 그래서 판자를 놓고, 여러 명이 쫙 밀었습니다. 논리적으로 가능하죠. 그렇죠. 가상 자리가 딱 맞으니까 그리고 열심히 밀면 결국 물이 넘칠 것이고 넘치면 그 물이 탕 밖으로 쏟아져 나갈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것이 말하자면 성화의 원리입니다. 그 물을 죄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딱 맞는 판자를 미는 것을 총체적 순종이라고 한다면 정성껏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밀어야합니다. 세워놓기만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열심히 쭉 여러 사람이 밀면 결국 물이 밖으로 쏟아져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 판자가 열개 정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가 뜯어졌습니다. 그래서 얼개만 남아있고 가운데 뚫렸습니다. 7분의 1정도가. 그리고 무도 미는 것입니다. 열심히 밀었어요. 물이 앞으로 갑니다. 그러데 다시 돌아보니까 물이 다시 뒤로 돌아왔습니다. 똑 같은 것입니다. 어떤 자기가 잘 빠지는 잘 이끌려서 범 죄 하는 몸에 읽은 특정한 정욕과 죄에 대해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거기에 즐겨 빠지게 되면 다른 방면에서 순종하려고 많이 노력해도 자기가 순종하지 않은 그 하나의 통로를 통해서 그 죄의 물이 쫙 스며들어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다시 물을 가득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표는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내면과 외면의 모든 세계에서 온전해 지기를 사모해야 하고 모든 방면에서 온전해지기를 사모해야 하니까 어느 방면도 예외 없이 모두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적어도 목표를 그렇게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달하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 앞 에 용서를 빌고 다시 새 힘을 얻어서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고 이렇게 싸워나가야지만 성화의 진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러분 부부싸움을 잘 하는 사람들 있죠. 그러면 부부가 나와서 그렇게 은혜를 받고 한 석 달 은혜를 잔득 모았다가 날 잡아서 대판거리 싸워서 머리채 까지 잡고 격투기를 벌이면서 다 쏟아버리죠. 그리고 다시 또 회개하죠. 그리고 다시 은혜가 쌓이면 다시 또 그런 일에 빠지고 그런데 사실 그것을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해야 되는데 그것은 자신이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은 그래도 머리채를 휘어잡고 싸우기는 했어도 바람은 피운 적은 없다. 그리고 자신이 자주 빠지는 이 죄에 대해서 굉장히 가볍게 여기고 너그러운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계심은 그만큼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쉽게 이끌리는 자신의 실패를 타고 그리고 죄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욕적인 사랑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런 현상들이 심각하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목표를 세웠으면 그다음에는 뭐냐면 자세가 일체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그렇게 거룩해지기를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군데고 안 같다온 사람이 군인들이 등장하는 용맹스러운 영화를 보고 감격하듯이 무슨 위인들의 전기나 읽고 그러면서 “야, 이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그리고 그냥 덮어버리고 자신은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아무리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고 말을 해도 자신이 그것을 위해서 실제적으로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에서만 참된 신자가 되고 싶다. 나는 참 그랬으면 좋겠다. 다른 교인들이 볼 때 여러분 얼마나 은혜 받겠습니까. 얼마나 충격을 받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은혜 받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만약에 참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인생이 목표다.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자기 자신이 삶의 모든 방면에서 그런 총 포괄적인 아름다운 고백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실제의 삶에 있어서 참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저항하는 요소와 끊임없이 싸우고, 투쟁하고, 그리고 그 모든 방면에 있어서 총체적으로 순종하기 위해서 일체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노력해야합니다. 성실함은 어떤 한 목표를 향해서 흔들리지 않고 정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부지런함은 개개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분발하는 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실함은 한번 정해진 그 좋은 목표를 향해서 꾸준히 그 경향을 그 목표와 같이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고, 부지런함은 그 일을 위해서 현실 속에 나타나는 개개의 상황에서 열심을 다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부지런하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가 성화에 도달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욕망 그 자체는 개별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개별적인 욕망이 온 영혼을 더럽히게 되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욕망이 마음과 온 영혼을 더럽히게 되고 그것이 결국 자신이 그 죄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싸우면서도 또한 그 개별적인 욕망에 이끌림으로서 자기가 한편으로 싸우고 있는 그 죄를 불러들이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성화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인 실천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성화는 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단정한 사람이 되어가는 윤리적 개선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요. 그런데 목표가 그 하나님 앞에 모든 삶의 방면에 있어서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표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그런 하나님의 자녀로 나타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부르셨고,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구속을 통해서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간 삶을 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 보다는 우리의 존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창조되어서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을 때에 천하와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마땅히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통해서 의도하셨던 바대로 그런 존재가 될 때 하나님이 그 인간의 상태를 통해서 가장 많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향해서 섬길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가 되어가는 것 만큼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는 그러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한 삶을 살면서 진정으로 인간이 누리도록 허락된 행복을 맛보며 살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인간 안에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그 죄의 불결로부터 성령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주시는 순결 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깨끗하게 만드시는 성령의 역사는 우리 영혼 안에서 일어나고 영혼 안에서 그렇게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순결한 작용을 통해서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다시 죄의 영향을 벗어나서 올곧아지고 우리의 총명과 판단이 그 하나님의 말씀인 그 지식의 빛을 생각이 받아들이는 것을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서 총명을 발전시키고 마음이 그 빛을 사용함으로서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주신 거룩한 계획과 목적을 따라서 범사에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고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선한 일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삶이고, 이러한 삶은 인간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살수 없는 삶이고 그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 라고 하는 의미는 도덕적으로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안에 있는 이 불결한 영혼이 그 진리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가는 그런 작용을 통해서 획득되는 순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은혜의 상태에 있었던 신자가 이런 개별적인 정욕에 이끌리고 자꾸 실패하게 되면 그것이 비록 하나, 특정한 것, 하나, 그 이외의 다른 삶은 온전히 의무를 감당하는 것 같아도 그 하나 때문에 넘치도록 죄가 들어와서 우리를 은혜의 상태에서 미끄러지게 하고 부패하게 한다. 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네 번째는 진리에 대해서 실천이 없는 개념적인 지식이 증가함으로서 이 은혜의 상태에 있는 신자가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쉽게 이야기 하면 성경을 배우고 이렇게 말씀을 들으면서 교리를 배워도 실천이 통해서 그것이 자기에게 채득되지 않고 생각 속에서 그것들이 계속 이성적인 지식으로만 그치고, 그런 현상들이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되어 갈 때 그의 영혼은 증가하는 지식과 함께 은혜의 상태에서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외관적으로 볼 때에 그런 사람을 은혜의 상태에서 부패로 가고 있다고 판단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교회에 나오면 설교시간마다 노트를 펴 놓고 열심히 적고, 그리고 교회에 올 때는 책가방 싸들고 와서 교리반도 배우고 구역 예배에 들어가서 새카맣게 열심히 배우고, 물어보기도 하고 정리도 하고 이렇게 하면서 공부하는 학원생처럼 그렇게 교회 다니는 사람을 보고 은혜의 상태에서 멀어져 부패하고 있다. 라고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라고 하는 것은 죄 자체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면 죄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죄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운 것은 죄가 자신의 정체가 폭로되는 것, 그것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그 신자가 이제까지 노예처럼 자기에게 순종했는데 그 죄를 향해서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자 하고 그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그 죄를 직접적으로 공격할 때에 죄가 두려운 것이지 자기를 충분히 알고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향해서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친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신자에 대해서는 그 죄가 그 지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지 윗필드 라고 하는 설교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말씀을 체험하지 못하고 단지 지식으로만 성경을 안다면 그런 지식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어느 날 칼빈 주의자가 되고 알미니안 주의자가 되고 이런 신학적인 입장으로 오고, 저런 신학적으로 위치를 바꾼다고 할지라도 사단은 아무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자신에게 도전할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서 죄가 우리 안에 하는 역사는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지적으로 그것들을 섭취하게는 하되 그것을 가슴으로 끌어내려서 그것을 실천함으로서 실제 죄와 맞부딪히면서 살아가는 투쟁적인 성화의 삶을 못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죄가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이 들것입니다. 언젠가 목사님 설교를 들었더니 신자가 은혜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싶은 욕망을 갖지만 그러나 그가 은혜의 상태에 있지 않고 죄 아래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기 때문에 말씀을 더 많이 깨닫고자 하는 영적인 갈망들이 사라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관심해지게 되어진다. 꼭 이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논리로 설교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여러 번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 것들이 떠오르면서 의문이 떠올라야합니다. 그래서 답을 해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 갈망이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말씀을 깨닫기를 원하는 마음이 실린 경험적 갈망이 있고, 또 하나는 뭐냐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적인 지적 호기심이 원인이 되어서 어떤 새로운 지식들을 섭취하고 싶어 하는 그런 동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아마 그럴 것입니다. 구라파에서 신학 속에 이미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학이 성립하느냐? 그것도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니까. 신학이다. 그래서 소위 얘기하는 사실 신학이라고 얘기하죠. 그런데 그런 것들을 가지고 공부하는 사람들 속에는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넌 크리스챤 이면서 신학자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교회 출석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거의 아닌 신학자들이 우리나라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은 우리들이 이해하는 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그것을 공부하게 만들었을까요? 지적인 호기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많이 아는 사람들을 무조건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위해서 그것을 잘 사용하고 거룩한 삶을 잘 살아가는데 있어서 사용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해야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거룩한 믿음의 사람들이 깊이 경험했던 탐욕스러운 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지식의 욕구였습니다. 지적인 호기심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계속해서 게걸스럽게 이 지식을 섭취해가는 것들이 우리의 영적 삶을 파괴하는 위험한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런 각도에서 보게 되면 아까 말씀드린 것들이 해결됩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싶어 해도 전자의 경우에는 순종하고 믿음으로 온전한 삶을 살고 싶어서 더 많은 지식의 빛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것은 온 마음이 영혼의 욕구를 담아서 필요로 하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지적인 호기심이 그것들을 자꾸 찾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지적인 호기심으로 시작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생각이 그 말씀을 붙들고 그것이 적용되어서 믿음이 들어오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고 자신의 거룩한 삶과는 상관이 없이 그냥 지적으로만 그것들을 습득하고 그리고 더 많이 더 많이 공부하고 그래서 그 지식들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들어내기 위한 동기 때문에 그 지식들을 섭취하는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을 섭취하게 되면 그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전혀 그 말씀 속에 깃들여있는 독특한 거룩한 효과들을 경험할 수 없고, 그 속에서 차가운 심령으로 부패한 마음이 되어서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아는 두 방식이 있는데 첫 째는 개념적인 이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경험적인 이해입니다. 첫 째는 진리를 아는 방식에 있어서 개념적인 이해라고 하는 것은 동기자체도 지적인 호기심에서 출발되었고 그래서 결국 지적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아는 것으로서 내가 그것을 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것이 결국 개념적인 이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하는 방식입니다. 혹은 그렇지가 않았는데 처음에는 내 영혼이 살고, 내가 하나님 앞에 돌이키고 내가 하나님 앞에 진실해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이 개념적으로만 정리될 뿐 그것이 자신을 향해서 직접적으로 역사하지 않을 때 그 때에 그 개념적인 이해로는 우리 안의 죄를 죽일 수도 없고, 우리의 영혼이 거룩해질 수도 없고 따라서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는 방식이 있으니 그것은 경험적인 이해입니다. 이 경험적인 이해는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우선 자신이 믿고 이해해야할 내용을 터득하고 그것이 자신의 마음과 그리고 자신의 생각 속에 적용되어서 자신의 삶으로 그것을 순종하고, 그래서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알게 된 것이 바로 경험적인 이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경험적인 이해를 통하지 않고는 그 성경의 말씀을 진정으로 잘 알았다고 말할 수 없고 이런 경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한 성화의 작용이 일어나고 죄들이 죽고, 그리고 우리들은 그 경험적인 이해의 과정을 통해서 성경에 기록된 문자만으로는 우리에게 전달될 수 없는 거기에 담긴, 놀라운 비밀들을 터득하게 되고 그렇게 경험을 통해서 터득한 그 비밀에 관한 지식들이 우리를 지혜롭게 만들고 우리를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서 죄와 싸우며 진실한 신자의 길을 걸어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를 이해하는 두 방식에는 현저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여기에 대한 예는 밤새도록 들어도 모두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합니다. 참고로 지난 가을 사경회 때에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길”이라는 시리즈에서 언급되었던 복음에 대한 개념적 이해와 경험적 이해의 차이를 다시 한번 설명드림으로서 이 문제를 여러분들에게 이해시키고자합니다. 성경에 보면 수없이 죄 지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용서해주신다는 약속에 지루할 정도로 많이 반복되어서 나옵니다. 개념적 용서는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주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그리고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죄가 아니라. 실제로 죄를 범했습니다. 그 죄를 자신의 정욕으로 인해서 어떤 악을 행했고, 그래서 범죄는 실행되었고, 실행된 범죄를 통해서 내 안에 있는 범죄는 마치 먹물 주머니가 터지듯이 온 영혼에 확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죄는 이제 드디어 속박을 벗고 예전보다 더 활발하게 좋은 환경에서 활발하게 역사하면서 번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상이나 생각 속에서 일어난 관념이 아니라. 실제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제적 현상입니다. 죄라는 실체가 자신 안에서 우세한 지배력을 얻고 이미 자신 안에 마련된 은혜의 틀들을 마구 파괴하고 그 사람을 온갖 더러운 정욕으로 가득 찬 쓸모없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 실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개념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죄 지은 사람들을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아멘.” 그리고 자신에게 바로 적용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죄 지은 사람들은 용서해주신다고 되었으니 내가 바로 그 죄지은 사람이고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이 용서해주실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기를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너무 사랑하신 분이고, 나를 구원해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내가 이런 죄를 지었지만 나를 용서해주실 것이다.” 그 때 성경에 보니까 회개를 해야지만 용서해주신다는 것이 다시 나오는 것입니다. 틀린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다음에 회개를 하는데 역시 회개도 똑같이 계산적인 회개가 있고 그다음에 경험적인 회개가 있는 것입니다. 개념적인 회개는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옳지 않다고 판단해야 한다. “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다음에 뭐냐면 그 죄를 미워해야한다. 그러기로 하자. 나도 이제부터 그 죄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통을 받으니까 나도 미워하기로 하자. 동의할 수 있다. 의지적으로 그 죄에서 떠나야 한다. 그래서 특정한 죄이기는 하지만 하여튼 그 죄는 다시 안 지으려고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경험적인 회개가 아니라. 개념적인 회개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그 회개를 회개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라고 하는 실체는 아무리 머리 속으로. 개념적으로 자기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자기를 스스로 암시해도 죄는 그런 생각에 의해서 공격당하지 않습니다. 죄는 계속해서 번성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바로 진리에 대한 책임 있는 실천,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자신의 마음에 적용해서 그래서 그것을 마음이 사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분투하면서 성화의 삶을 매일, 매일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계속 도전하고 우리에게 자극하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촉구하는 이런 내면의 역사를 움직이는 말씀의 경험이 없이 성경을 알고 말씀을 배운 지식들이 하나씩 쌓여져 가는 것들을 통해서 이 신자는 오히려 은혜의 상태에서 그렇게 하는 동안에 부패한 상태로 계속 변질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경험적인 이해는 어떤 것일까요? 어느 날 자신이 죄 가운에 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다는 약속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 나는 정말 그 용서를 받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에 온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안 사람들의 공통점은 나같이 죄에 의해서 실패한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그렇게 위대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었구나. 아, 그것을 어떻게 얻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정말 그 용서를 받고 싶다. 그래서 결국 마음속에서 그런 용서를 받고 싶다는 그 뜨거운 갈망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용서함을 받아서 이 모든 집요한 죄의 추격을 떨쳐버리고 다시 예전처럼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간절히 기도하고, 그런 도전에 직면하기 전에는 땅 사고, 집사고, 그리고 좋은 차사고, 그리고 좋은 옷 입고, 그리고 뭐 애들 인류 대학 보내고, 텔레비전 새로 바꾸고 이런 것에 정신이 팔려서 살았지만 어느 한 순간에 내가 하나님 앞에 내가 지은 이 끔찍한 죄, 이로 말미암아 찾아온 끔찍한 영혼의 어두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생을 산다면 나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생각을 다 버리고 그리고 오직 내가 생사를 걸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그 구원의 은혜를 힘입어서 나를 다시 용서해 주셔서 다시 그런 하나님과의 처음 회심, 그래서 그 첫 회심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은혜의 샘이 터지던 그때로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그렇게 안 하시려면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주십시오.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 주 없이 사는 것 보다 훨씬 쉽습니다. 그런 갈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펴 보니까 “회개 한 것이 모든 죄 지은 사람들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으로 바뀐 중요한 비결이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깨닫고 보니까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니까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말씀이 어느 날 찬란한 빛으로 다가와서 자기 한 사람을 향하여 제시되는 진리인 것처럼 말씀의 밝은 빛이 비춰오고 그 진리의 말씀의 빛이 자신의 어두운 영혼을 밝혀, 생각이 그것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 지식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적용되니까 총명의 어두움이 사라지고 나서 다시 총기가 생겨나더니 자신의 영혼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그리고 하나님과 화해한 은혜의 세계는 자기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복된 세계라고 하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하니까 그 마음이 하나님의 그 말씀을 강력하게 붙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놓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말씀을 붙들고 살겠습니다. 원수가 나에게서 이 말씀을 빼앗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이 막대기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내 손에 껍질이 벗겨지기까지 이 원수들과의 싸움에서 내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서 그 말씀대로 하나님 앞에 다시 순종하고자 몸부림쳤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느 한 순간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죄지은 나를 다시 용서하시고 용납하신다는 뜨거운 은혜의 감격이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토대로 해서 매일 매일 죄를 이기며 하나님 앞에 분투하며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죄가 들어왔고, 그리고 그 죄에 매여서 마치 올무에 걸린 짐승처럼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나올 수 없었고, 율법의 도움으로는 거기에서 풀려나올 수 없었지만 그러나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나님의 그 말씀을 깨달으면서 주님의 성령이 자신을 역사하셔서 그래서 죄의 그 끔찍한 올무에서 자기를 건져주시는 영혼의 회방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와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런 것이구나. 이것이 경험적인 이해입니다.
그런데 이제 신자가 매일 순종하고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올바르게 죽이는 삶을 실천하지 않으면 이 죄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뼈저리게 경험되고, 그 경험적인 앎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만들던 그 말씀 속에 깃들여있는 성령의 작용들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념적인 이해, 경험적인 이해의 차이는 뭐냐면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이 붙잡았는데 그 이후에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셨느냐? 아니면 우리의 타락한 지적 호기심으로 그것을 터득하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셨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성령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주십니까? 사도행전 5장 32절에 보면 “성령님은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 하게 만들어 주시는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그들에게 그런 성령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성령님은 우리의 본성과 우리의 모든 영혼의 구조에 익숙하시지만 그러나 성령님은 또한 우리가 그렇게 성령님이 우리 안에 충분히 역사하실 수 있도록 그런 영혼의 상태를 유지할 때 즐겨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시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당신의 능력을 활발하게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할 때에는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초자연적이고도 강력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충만하고 풍부한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양자의 영’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많이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모두 위대한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방언하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영분별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그들이 병 고치는 은사가 있는 사람들이고,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탁월한 말씀의 해석자,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말씀의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각각 사람들에게 제각각 그들에게 맞는 은사들을 주십니다. 그것들을 다양하게 주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고,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종류는 다르지만 그러나 그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짓이 뭐냐면 자신의 삶과 존재는 전혀 돌아보지 아니하고 그리고 열렬하게 매달리면 불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무지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의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서 순결하고 깨끗해지게 되면 깨끗하고 순결해지는 만큼 성령님은 우리가 매달려 기도하지 않아도 순결해지는 것만큼 우리 안에 풍성하게 계시는 것입니다. 충만하게 살아계셔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자들의 영혼의 상태의 비밀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개념적인 지식의 특징이 뭐냐면 진리에 대해서 경험적으로 알지 아니하고 개념적으로만 아는 지식의 특징은 첫 째는 생각에만 머물고 그 지식이 마음까지 내려가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터득하고 있는 것을 경험했다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제가 언젠가 한번 애기 낳는 광경을 설교 속에서 묘사했던 것 같습니다. 그 설교를 들은 어느 성도가 어떻게 그렇게 기가 막히게 묘사 하냐고. 그러나 그것도 모두 개념적일 뿐이지 들은 이야기 이고 본 광경일 뿐이지 내가 애를 낳아 보았습니까. 그런데 지식이 정확하면 거기에 근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죠. 그러나 자기가 그것을 모두 나처럼 정확하게 표현은 못해도 아기를 낳아본 사람들은 제가 하는 설명으로 충분하지 않다. 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죠. 그것이 결국은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한없는 서술을 가능하게 하는 그러한 체험의 세계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는 “눈” 그래봐야 무슨 눈이 있을까요? 그냥 눈, 함박눈, 싸락눈, 진눈깨비, 그 정도밖에 없지 않습니까. 북극에 가면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80개입니다. 우리 눈에는 눈이 그저 다 그 눈 같아 보이는데 그 사람들 눈에는 그 같은 눈이 80개로 달리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의 차이입니까? 경험의 차이입니다. 아마 거기에 내린 눈하고 또 다르겠죠. 당연하지 않습니까. 지금 눈 내리는 모습을 보아도 우리 어렸을 때 내린 눈 모습하고 다릅니다. 우선 눈 오는 양도 틀리고, 그리고 눈이 내려도 한 겨울 내내 녹지 않고 쌓여있는 광경은 이 도시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경험의 세계는 많은 서술들을 가능하게 하는 폭넓은 자원을 소유한 것이 경험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에 대한 개념적인 지식의 특징은 뭐냐면 생각에만 머물고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습니다. 마음까지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의 거룩한 삶을 움직이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옛날에 말이죠. 심방을 갔습니다. 저 쪽에서는 “교회는 빨리 나가라.” 그런데 안 비워주면 소송도 들어오고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교인을 데리고 어디로 갑니까. 그런데 우리 집사님들이 바로 여기에 “땅이 있다.” 이 땅을 보러 와야 되는데 바로 심방을 가게 되었습니다. 심방을 갔는데 말씀을 전하고 그리고 주기도문을 하는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러면서 사실 안 되는데 이 평촌에 있는 땅 생각만 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의 땅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그리고 이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했거든요. 그런데 제 마음 속에는 주기도문을 한번 하고 끝난 아멘인데 그것이 아니라. 설교하고 끝난 아멘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온 심방대원들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래도 옆에 있던 우리 장 목사님이 열심히 같이 따라 해서 동참해서 나 자신에게 아무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안 했습니다. 끝났는데 사람들이 배 살을 붙잡고 웃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뭐냐면 우리의 삶을 실제적으로 주관하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여러분 불행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생각으로는 저 사람을 사랑하면 안돼요. 부모도 반대하고, 그런데 마음이 사랑해요. 그럴 경우 생각의 말을 들어요. 마음의 말을 들어요. 마음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개념적인 지식은 생각에만 머물고 마음으로까지 절대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또 하나 두 번째 특징이 뭐냐면 생각에만 머물고 더 이상 진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 빛이 총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이 총명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으로 받아들여진 그 빛을 자신의 삶과 마음에 적용하는 과정을 통해서 생겨나는 판단력입니다. 영적 총기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생각을 창고에만 있을 뿐, 그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것들을 끌어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성경의 지식이 많이 들어나도 사람이 뭔가 사물을 판단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말 하고, 행동하고, 처신하는 것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바리세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 참된 목자는 여기에서 꺼내서 가르쳐요. 그런데 가짜는 여기에서 꺼내서 가르치는 것이고 더 가짜는 열어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개념적 지식은 뭐냐면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된 지식이 아닙니다. 제가 십자가를 경험하라. 라는 책에서 썼습니다. 만은 1740년에 영국 캄버슬렝 이라는 곳에서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무명의 설교자가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사건을 설교했습니다. 커다란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는데 그 때 저기에서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한분이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쏟으면서 회개했습니다. 그 지방에 있는 신학교의 교리학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하시는 이야기가 “이제껏 나는 일평생 동안 교리학을 가르치면서 속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었지만 나는 오늘 바로 그 속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앞에 이야기는 개념적인 지식이었고, 뒤에 나오는 것은 바로 경험적인 지식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고백한 모든 고백은 따라서 이런 개념적인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인 지식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이것이 경험적인 고백입니다. 개념적인 고백입니까? 경험적인 고백입니까? 경험적인 고백이니까 정과 욕심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못 박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서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이 “너희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너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를 믿으면 너희들이 죄 용서를 받고 성령을 선물을 얻으리라고 외쳤을 때 그들은 개념적으로 알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체험하게 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대해서 말했던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경험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 경험을 통해서 개념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이해한 사람들이 그 복음에 생명을 걸고 그 복음이 자신의 마음 안에 피 끌도록 역사해서 그로 하여금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재산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처자식을 잃어버리는 그 고난의 길도 택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떠나서 누릴 수 있는 수많은 명예와 그리고 부귀를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고난을 받는 그 길을 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로 경험적인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살았던 적은 이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소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지식의 특징은 결국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 1절에서도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나 사랑을 덕을 세우나니” 지식은 사람을 매우 교만하게 더군다나 이 지식이 개념적으로만 계속 쌓일 경우에는 그렇게 자기처럼 지식이 벗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 때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아, 깡통 왜. 인간이 저렇게 안 들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죠. 그러나 아무것도 안 들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못 사는 사람이나. 가득 들었지만 이것이 내려오지 않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사는 사람이나 뭐가 다릅니까. 여러분, 지금은 그런 차들이 많지 않지만 옛날에는 주유소가 많지 않으니까 차 마다 뒤에 스페어 휘발유 통을 매달고 다녔습니다. 기억나죠. 그런데 두 차가 가다가 기름이 없어서 섰습니다. 지금 방금 생각난 비유입니다. 두 지프차가 가다가 기름이 없어서 섰습니다. 결국 밀고 갈 처지가 되었습니다. 한 차는 기름이 모두 떨어진 차고 그래서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고, 한 차는 기름이 다 떨어졌고, 뒤에 스페어 통이 매달려 있는데 그것을 붓지 않고 같이 밀고 가는 것입니다. 차가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름 한 통 매달고 20 키로 그램 짜리 밀고 가는 차가 더 힘들지. 그리고 차자 언덕을 밀고 올라 간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니까 결국은 그 지식 자체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그러면 진리를 아는 참된 지식은 어떻게 되느냐? 진리는 아는 참된 지식은 어떤 것이냐? 그것은 바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랬습니다. 진리를 아는 참된 지식은 첫 째로 능력이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참된 지식, 다시 말해서 이 진리가 경험적으로 올바르게 터득된 그 지식 속에는 바로 능력이 있어서 그 지식의 빛이 생각에 의해 붙들려 져서 적용되어서 총명으로 나타나고 마음에 심겨질 때 마음에 그 성령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그리고 움직이니까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거룩하게 하고 정도의 자이는 있지만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 거룩에 영향을 끼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지 그것이 삶으로 흘러나와서 자기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강력한 소원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러나 그 경험적인 지식이 그렇게 하는 것이지 개념적인 지식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이 진리를 참된 경험적인 지식은 결코 강의실 같은데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요람에서 태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와 함께 깨닫게 되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그렇게 개념적인 지식으로 그치지 않는 경험적인 지식이 획득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닫고 들을 때 예배라고 하는 형식 속에서 그런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요즘은 세미나가 많이 유행하는 시기 입니다 만은 사실은 제대로 이야기 하자면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거기에서 발견하게 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하나님을 경배하는 현장에서 채득하고 그 경배의 정신 아래서 채득하고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이 보시는 경배의 현장에서 자신에게 적용하고, 하나님이 의식되는 임재의 그 현장에서 그것이 자신의 마음속에 심겨져서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그 경배의 현장에서 이렇게 살겠습니다. 라고 자신의 지난 죄에 대해서 뉘우치고, 새롭게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배의 현장이 되어야합니다. 그래 예배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갖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경험적인 지식을 그 섭취하려고 하는 의도조차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리 꼬고 앉아서 딴생각이나 하고 말이죠. 들어오면 듣고 말면 말고,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예배를 드리면 드리고 말면 말고,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대단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미운 물건들입니다. 감히 하찮은 피조물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영광스러운 예배에 참여해서 그 죄 가운데 살던 더러운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우리 주님의 이름을 높일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어떻게 감히 그렇게 방종에 가까운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태도로 그렇게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경험적인 지식을 줄 것 같습니까?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러한 진리를 아는 참된 지식은 결국은 은혜의 요람에서 태어나고, 치열하게 분투하는 삶의 현장에서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여러분들이 순종이라는 말을 어떻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순종’ 이 속에서 이해가됩니까? 그런데 그 말씀을 내 생각이 붙들어요. 적용해요. 그리고 총명이 생겨요. 마음에 심겨져요. 그런데 불순종했던 지난날이 생각이 나요. 그리고 회개해요. 그리고 불순종의 결과가 얼마나 뼈저리게 아프고 영혼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뼈저리게 터득했어요.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요. 그래서 순종하려고 해요. 그런데 너무나 많은 희생이 초래되는 것입니다. 견디기가 힘들어요. 주님의 힘과 도움을 구해요. 나는 순종하고 싶은데 이렇게 너무나 고통이 크고 내가 오히려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니까 나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나를 향해 발뒤꿈치를 들고 평화로운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으면서 불이익을 받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요. 그리고 바로 그 죽음이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기위한 과정에서 실제로 경험된 것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난 받는 현장에서 예수님이 나도 너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받았다는 음성을 듣게 돼요. 그래서 그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 되는 비결을 터득해요.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 앞에 순종하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순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하나, 하나,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매순간 분투하는 가운데 삶의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 앞에 온전하기 위해서 분투하는 사람들은 그런 성화의 몸부림과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성경이 굉장히 이해가 잘 되는 것입니다. 왜 성경이 이렇게 말했는지. 왜 경건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죄 때문에 고통 했는지. 왜 진실한 신자들이 자기 안에 있는 내면의 죄와 악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하고 주의 도움을 구했는지. 그리고 진실로 거룩한 나라를 꿈꾸던 사람들이 왜 그렇게 죽음 이후의 영광스러운 세계를 갈망했는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펼쳐놓고 가르치고 그렇게 똑같이 가르치는데 개념적인 이해밖에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장황하게 가르쳐도 이상하게 성경이 가슴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펼쳐놓고 천천히 절, 절, 절 가르치는데 가슴속에 깊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왜? 이해된 진리고 경험된 진리니까. 그것이 전달될 때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지. 바로 이 세상에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현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삶의 빛을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줘야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 받습니다. 순종해 보셨어요? 아, 순종 했다기 보다는 성경에 그렇게 씌어있으니까.” 이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오랫동안 이 곳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저는 하여튼 힘을 다해서 내게 능력 주시지 않는 것은 못하지만 능력 주시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주었고, 매일 여러분들이 먹어보지 못한 신선할 꼴을 주고 싶어서 한번 여러분들에게 펼쳐 놓아도 먹지 않았다고 해서 낙심하지 않고, 두 번째 다시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고, 그래도 먹지 않으면 그것을 갈고 비벼서 그래서 한번 입에 넣어주고 싶었고, 그래도 안 되면 입을 벌리게 해서 넣어주기까지 하려고 매순간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서 선포된 말씀을 열심히 정리해서 여름 수련회에 가서 배우고, 배우면 다시 정리하고 연구해서 책으로 내고 책으로 낸 것은 다시 교제로 만들어서 공부를 해서 이해시키고 이렇게 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들에게 넣어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너무 슬픈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물론 하나님 앞에 크게 혼날 사람들은 무엇을 가르치든지 신경 쓰지 않고 지성의 스위치를 끄고 하나님의 말씀과는 관계가 없는 그런 방종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께서 절대로 그런 불랑 당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진리를 통해서 깨닫기를 거절하고 사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면적인 배역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결코 가만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가 만약에 돈을 사랑하면 물질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것입니다. 그가 만약에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사랑하면 그 지위와 명예를 잃어버리게 하심으로서 그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정열을 낭비하고 그렇게 생각 없이 살아왔던 자신의 삶이 얼마나 하찮은 삶인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것입니다. 승승장구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자만하지 마십시오. 모래 위에 쌓아올린 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 무너짐도 창수가 넘치는 그 날에 심각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패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는 거의 우이독경의 삶을 사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에 여러분들은 변명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네가 왜 나를 믿지 못했느냐? 주님이 물으실 때에 명백한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고 가르쳐졌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변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오늘 이 시간에 그런 분들에게 정말 권고하고 싶습니다. 먼저 여러분 자신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자문해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만약에 구원받지 않았다면 주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가당한가? 생각해보십시오. 왜 남의 집에 와서 우리 아버지 보고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거듭나지도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교회는 여러분들의 이름을 교인의 카드에 등록해 주어도 하늘나라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해야합니다. 그리고 거듭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매달리고 더더욱 이런 진실하고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참된 회심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거의 거듭났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경고가 아니라. 절대로 과장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깊이 회개하고 정말 여러분들이 거듭났는지를 묻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말 진실하게 자신을 향해서 예비 된 나라가 하늘나라인지 불붙는 지옥인지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생명 있는 날 동안 오늘이 유일한 날인줄 알고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회개하고 그리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요구가 무엇이고, 그리고 주 앞에 진실한 회개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자를 위해서 어떠한 자리와 은혜의 자리를 예비하셨는지 기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판단하십시오.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고 믿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들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 한없는 영혼의 피곤을 안고 여러분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서 그 지루한 교회생활을 해 나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은 개념적으로만 하나님을 알아갈 뿐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념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들이 증가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 자신을 거룩하게 하지 못합니다. 영혼이 싫증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 영위하는 일에 급급해하고 있습니다. 책꽂이에 쌓인 많은 책과 그리고 새카맣게 쓴 많은 연습장들, 그리고 이런 저런 과정을 통해 밟은 수많은 시험지와 이런 것들이 여분들이 걸어온 정말 주님을 추구하고 걸어온 길에 여러분들이 남길 그런 발자취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마음이 각성하고 깨어났던 과거를 가져서 그러나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것과 원래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마음이 그 하나님의 마음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면서 피 흘리기까지 분투하고 온전해지기 위해서 땀 흘리려고 하지 않는데 그 많은 지식들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설교자가 그런 지석인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앞에 서 있는 광대처럼 보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지적인 노리게 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사람들의 정신적인 유희에 놀아나는 그런 가증한 인간들의 오락거리처럼 보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깊이 회개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삶으로부터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가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이 수많은 개념적인 지식의 증가들이 결국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러내어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가지고 있는 최대의 기대는 무엇입니까? 머리 좋은 신자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닙니다. 당신 닮은 신자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때로는 회초리 들고 가르치고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타이르며 가르치고 눈물을 보이시면서 다독거리시면서 가르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마음이 심겨져있고, 그 하나님의 말음까지도 함께 읽을 수 없는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의 부패의 상태에서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은혜 상태로부터의 부패(3)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17)
삼 일째 계속되는 말씀은 은혜의 상태로부터의 부패입니다. 그래서 첫 째 날 두 가지를 했고, 지난 어제 두 가지를 했는데 어제한 두 가지가 개별적인 정욕에 이끌림으로서 그리도 두 번째는 진실한 실천이 없는 개념적 지식의 증가를 통해서 총명이 흐려지고 그래서 결국 뒤로 물러나 부패하게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크게 두 가지, 첫째는 자기 부인이 없는 삶을 통해서 다섯 번째가 되겠습니다. 자기 부인이 없는 삶을 통해서 은혜의 상태로부터 부패하게 된다.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첫 시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구원에 이르는 첫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샘이 터지고 그리고 은혜의 빗줄기가 쏟아지는 하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곧바로 은혜의 지배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첫 사랑의 감격을 느끼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죄를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그런 강한 능력과 그리고 사랑의 경험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의 상태가 영구히 계속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은혜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빛이 들어오는 문이 열리는 정말 제 창조와 방불한 그 축복이 각 사람 속에 주어져서 이제 신앙을 출발하게 할 때에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제대로 깨달아서 생각이 그 복음의 진리들을 붙들고 총명은 그 빛에 의한 생각들이 적용되어서 총명으로 발전하고 마음은 그 빛을 붙들고 분투하는 삶을 인내와 순종으로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그러한 은혜의 상태는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첫 회심을 통해서 그렇게 은혜의 샘이 터지고 하나님의 신령한 빛이 들어오는 하늘 문이 열려서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그가 게으르고 나태하고 부주의하고 그리고 현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없어서 그 빛을 생각이 붙들지도 못하고 적용시켜서 총명한 삶을 살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그 빛을 붙들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할 때 그는 신속하게 아주 신속하게 그 은혜의 상태로부터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죄가 아주 융성하게 자기를 지배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두 경우에 결국 얼마나 정확한 복음진리의 말씀의 빛을 받고, 그리고 얼마나 자기가 그 빛을 사용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느냐. 그리고 실제적으로 진리와 성령으로 죄를 죽이는 삶을 살아가느냐. 이것에 의해서 얼마나 은혜의 상태에 있느냐는 달라집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잘 하게 되면 그러면 일평생 계속 은혜의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 은혜가 처음에 부어지던 것 같은 그런 은혜가 똑같은 상태로 계속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죄의 영향을 계속 받으니까. 그러니까 변해가겠죠. 그렇지만 그것을 잘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결국 그렇게 하나님의 첫 회심의 은혜를 통해서 놀라운 은혜가 주어져도 인간 자신이 여전히 이 안에 부패한 죄 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도 그런 신령한 마음과 육신대로 살려고 하는 육적인 마음도 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성화라고 하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두 사람, 즉 자기 안에 하나님이 회심을 통해서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새롭게 주신 새 사람은 계속 살고 남아있는 옛 사람은 계속 죽는 것, 이것이 성화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은 계속 더 죽고 새사람은 계속 사는 것. 그렇게 함으로서 이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 사람이 살아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았다고 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게 생각하시는 것만 생각하거나 느끼거나 행동하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이 나는 죄로부터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이 세상은 아직까지 죄가 지배하고 다스리는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이 세상은 신자를 이 죄 많은 세상에 원래 살고 있는 거듭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따라 살도록 신자들을 유혹하죠. 오늘 우리 집사님이 기도한 것처럼 말이죠. 세상은 우리들에게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끊임없이 옛 세상의 가치, 그리고 옛 세상의 길을 따라 살도록 우리를 핍박하기도 하고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부패한 속사람이 그런 유혹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이 없으면 결국 우리는 은혜의 상태에서 미끄러져서 부패할 수밖에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집에서 함께 사는 그 부인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나라고 하는 존재를 부인하고, 나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생각, 나라는 존재가 좋아하는 것, 나라는 존재가 하고자 하는 것을 “아니다.” 라고 이렇게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디 있느냐? 없지.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빚어진 그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새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고, 부인하여야 할 대상은 그것이 아니라. 부인하여야 할 대상은 새로 입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옷 입은 새 사람이 아니라. 벗어버려야 할 옛 사람, 그 옛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 하고 싶어 하는바 그가 사랑하는 것, 그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그것을 “아니다.”라고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셨죠.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피조물로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창조된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각자 하나, 하나도 하나님이 목적을 위해서 정해주신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그것입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라.” 그렇죠.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그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 들에 핀 백합화. 그것도 다 모두 목적이 있어서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그리고 그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은 작은 미생물부터 커다란 우주 천체와 바다의 물고기와 들에 핀 백합화에 이르기까지 한 가족으로서 영적인 연결을 모두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연결의 통로를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이 거기에 모두 가득 흘려보내졌고,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피조물에는 하나님 자신이 나누어진 어느 정도의 영광이 찬란한 빛을 발하여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 피조세계에 비취는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보면서 하나님의 그 본체적인 영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그렇게 아름답고 찬란한 세상이었습니다. 거기에 인간의 자리도 당연히 있었죠. 그 인간의 자리도 그냥 보통 있는 자리가 아니라. 그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크고 작은 악기라면 인간의 자리는 그 모든 삼라만상의 그 수많은 악기들 앞에서 지휘를 하면서 하늘나라로 울려 퍼지는 그 글로리아 영광의 찬양을 울려 퍼지게 하는 지휘자와 같은 존재였단 말입니다. 인간이 바로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잘 가꾸고 하나님의 그 영광의 빛이 더 찬란하게 드러나도록 그렇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섬기고 돌보고, 그러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인간입니다. 죄 때문에 그런 목적이 모두 다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런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스스로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살 수 없으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속해주셔서 우리를 다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해 주셨으니까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나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우리들이 구속받고 나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신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좋은 신자가 되면 원래 인간을 창조한 참다운 인간을, 인간다운 인간을 이 세상에 만드셔서 당신의 피조세계를 영광으로 가득 찬 세계로 바꾸는 그 일에 종사시키려고 했던 그 인간의 본래의 창조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시고 그리고 우리를 작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렇게 우리 앞에서 펼쳐져 있는 이 성경말씀이 바로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렇게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상세한 지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고 회심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와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시에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시간이 걸려서 또다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대한 믿음이 없이 창조주 하나님과 나를 구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이것을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의 내증” 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성경이 그 자체 안에 있는 성경의 증거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이 생길 때 우리 앞에 놓인 성경이 하나님의 정확 무 호한 말씀이라고 한 것들이 함께 믿어지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렇게 돌아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교과서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돌려놓으시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샅샅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인생의 이치가 무엇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명령받고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이 배우고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셔서 진정으로 우리로 하여금 돌아가게 하시려는 그 원래의 창조목적의 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것은 그렇게 많은 내용을 모르고 한두 가지만 복음의 핵심적인 사실만 터득해도 결단하고 그리고 주님을 영접해서 그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가 그다음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탐구하고 배워야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는가. 그리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계획과 뜻은 무엇인가?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터득하고 그것을 이해해서 하나님이 나를 예수 안에서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이고, 그것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진실한 신자가 될 수 있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평생을 배워도 다 못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났다. 그리고 처음에 하나님 감사하다. 그러고 펄펄뛰며 첫사랑의 감격을 경험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하지 않을 때에 그 기쁨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오히려 구원받지 못한 사람보다도 배는 더 불행한 사람처럼 그렇게 억지로 교회에 나와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힘겹게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천국 가는 날 까지 구도자의 자세를 가지고 진리를 깨닫고 참으로 사람답게 하루를 살 수 있다면 내일 죽어도 좋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진리를 사모하고 구도의 길을 걸어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곧 길이요.” 당신 자신이 “도”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구도자입니다. 그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알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계획된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와 구속의 이 위대한 계획들을 터득하고 배워가면서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떠돌아다니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서는 아주 쓸모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고 구원받았지만 그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께 별로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데 우리가 부인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뭐냐면 그렇게 지식의 밝은 빛을 받고, 우리가 각각 알고 있는 지식의 정도는 다르죠. 그렇지만 그 지식의 정도는 다르지만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지식의 범위 안에서 옳고 그른 것들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판단의 수준은 다르지만 각각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각각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옳고 그른 것들을 터득하게 되면 무엇이 나의 의무인가 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이 납니다. 거기에서 합당한 것은 아멘하고 받아들이고 하기 싫어하는 나를 부인하면서 하고 그리고 하고 싶은데 그것이 아니라고 그 지식이 이야기 할 경우에는 하고 싶은 나를 부인하면서 그것을 안 하는 것,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관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렇게 부인해야할 일도 더 많아지겠죠. 왜? 하나님의 뜻을 세밀하게 분별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부인해야 할 것들이 많이 생기고, 또 자신 속에 있는 욕망들도 끊임없이 생겨나니까 그것들을 보고 부인해야 할 것들이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의 지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를 구속의 목적으로 데려가고 창조의 목적으로 데려가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돌아감으로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우리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피조물의 위치를 지킬 때에만 우리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화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죄와 끊임없이 싸워서 그것을 죽이고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로 돌아가도록 내적으로 우리들이 변화를 받고 영혼의 상태가 순결해지는 것, 그래서 그것이 삶으로 흘러나오는 그것이 바로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정도 서론적인 설명을 드리고, 자기 부인의 필요성을 말하자면 우선 첫 째는 내적인 부패성 때문에 우리들이 자리를 부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내적 부패성은 전방위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이 부패함 자체가 우리의 손끝이나 발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 안에 이 부패가 있습니다. 부패한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총명과 마음, 그리고 우리의 모든 육체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영혼의 기능입니다. 그 영혼 안에 부패성이 있으니까 영혼과 관련된 모든 신체와 정신의 기능에 그 부패한 영향을 미쳐서 우리의 생각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정서, 우리의 의지, 그리고 우리이 보고 듣는 것,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 육체에까지 이 부패의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모든 부패한 영향이 우리 안에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생겨나는 기능, 즉 생각이나, 느낌, 사랑,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욕구 이런 것들이 이런 부패에 뿌리를 박고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가려내서 부인하지 않으면 마치 밭을 가꾸는데 곡식과 가라지를 함께 계속 키우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우리들이 자기를 부인해야할 두 번째 필요성은 외적인 유혹입니다. 그래서 이 유혹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늘 있는 유혹들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있는 우리 모두 다 유혹이 있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모두 우리가 유혹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유혹은 일반적인 상태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유혹이 특별한 시험으로 우리를 인도하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이제 이 죄가 신자의 마음속에서 일반적으로 늘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생각이나 마음에 미끼를 던지죠. 이런 것들은 죄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은혜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서 자기를 보호하고 또 자기의 힘을 더 펼치고 신자의 영혼 안에서 지배력을 얻기 위해서 부지런히 자기 나름대로 자기를 강화하는 활동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에게 끊임없이 인간 자신의 도움 없이는 죄가 그렇게 성장할 수 없으니까 그 인간을 자기편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 끊임없이 자기 안에 있는 새 사람을 죽이고 옛사람인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신자를 계속 유혹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활동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죄가 일반적으로 활동했는데 그 죄에 대해서 신자가 특별히 매력을 느끼고 끌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느냐면 시험의 때를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해서 시험에 빠질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마음에 끊임없이 죄를 주어서 두 번째 죄가 마음에 친근해지도록 친화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지가 마음과 친밀해지도록 계속해서 그 죄 된 생각을 보내고 그리고 그다음에 죄에 끌리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죄와 익숙해지도록 만들고, 죄가 신자의 생각을 속여서 죄를 작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용서는 크게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부당하게 생각하게 만들어서 이 죄와 친교관계가 이루어지도록 신자 안에서 역사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세 번째로 어떤 특정한 정욕에 대해서 강한 끌림을 느끼면 그 정욕을 부추겨서 결국 그로 하여금 범 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될 필요성입니다. 이렇게 죄가 쉼 없이 작용해서 속임과 강압을 가지고 신자의 은혜의 상태를 허물어뜨리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데 이것이 어느 한 방향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선행을 하고자 할 때만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 이런 모든 것들 속에 다 이렇게 지배하도록 역사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과 아주 밀착 되어 있는 것들,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가 될 때 주시는 네 가지 놀라운 특권이 있습니다. 첫 째는 자유입니다. 다시 이중의 자유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신분의 자유이고, 하나는 내적인 자유입니다. 신분이 예전에는 죄인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자유인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그 죄가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사로잡아서 그 죄에 종노릇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성령이 은혜를 부으시고 새 생명을 심으셔서 이제는 죄와 사망의 법이 그를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자유를 주셔요. 그렇게 자유를 주시는가 하면, 뿐만 아니라. 명분도 주십시오. 명분은 하나님의 집안에 상속자라는 명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담대함을 주십니다. 남의 집에 온 것처럼 구원받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이 무섭고 두려웠는데 성령이 그 안에 역사해도 그것은 종의 영이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공포심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성령님은 우리가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요. 아버지는 위대하신 분이지만 나를 사랑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양자의 영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징계라고 하는 특권을 주십니다. 그렇죠. 그러면 보세요. 이러한 많은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데 그런데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아, 나는 이제 죄와 사망의 법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아니라. 이제 생명과 성령의 법에 의해 해방된 사람이야." 그렇게 믿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의무이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죠. 죄가 거기에 가까이 오게 되면 이렇게 유혹합니다. “야, 넌 이제 해방이야.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설마 하나님이 너를 버리시겠니?”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도록 그 주신 자유가 육신의 소욕을 이루는데 사용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명분을 주셔서 그 나라를 상속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우리가 마지막 날 천국만 상속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도 상속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드리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 하늘나라뿐 아니라. 이 땅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업입니다. 불법하게 불신자들이 이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옆에 차도 못 대게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땅인데 말이죠. 아니 법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불법하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법이 세상법이 아니라. 하늘나라 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우리가 그렇게 불법하게 빼앗긴 것이니까 우리가 적법하게 그것을 빼앗아야합니다. 그래서 그 사업하고 있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사업해서 그 기업이 정직하고 진실한 기업이 되어서 소비자에게 사랑을 받고,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이 경영하던 회사를 하나씩 접수해서 그다음 하나님의 방법대로 경영하는 것입니다. 실컷 기업을 합병해놓고 탈세하고 근로자나 착취하고 비자금이나 빼돌려서 차에 가득실어서 정치인에게 갖다 주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혼나야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쫄딱 망한 회사를 살려서 이제 정직하고 진실한 기업, 노동자를 사랑하고,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기업이 계속해서 발전해가서 고용을 창출해서 직업을 얻지 못해 불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경영자의 경영방침에 따라서 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아름답게 만드는데 기여하면서 살아가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기업을 하는 것입니다. 왜 밥이나 먹기 위해서 기업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밥 먹으려고 그렇게 힘든 일을 합니까.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공부는 안 하고 매일 교회에 와서 기타나 치고 노래나 부르고 말이지 학교는 뚝뚝 떨어지고 말이죠.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학문의 영역도 정복해서 거기에 십자가의 깃발을 꽂고 학문이 조금만 발전하면 얼마나 교만해요. 거기에 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해서 그 학문의 영역에 십자가의 깃발을 꽂아서 하나님께 승복하도록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뛰어난 학자가 되면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뭐라고 막 까불면 “너희들이 몰라서 그렇게 더 많이 공부해봐 하나님 살아계셔” 그리고 깃발을 꽂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무엇을 하든지 하다못해 골목을 쓸면서 청소부로 먹고 살아도 다른 골목 더 많이 쓸어서 세계를 정화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 그런 창조적 정복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죄가 역사하면 어떻게 됩니까? “저것 먹어버려. 그리고 사기 쳐서라도 빼앗아버려.” 얼마나 비슷하게 가까이 있는지 보세요. 이처럼 죄의 역사가 전방위적이고 그리고 모든 면에 퍼져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분별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계획에 부합하지 않다. 라고 이렇게 부인하는 이것이 없이는 반드시 언젠가는 은혜의 상태로부터 미끄러져서 부패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 얘기 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의무에 대한 올곧은 인식이 필요하다. 무슨 뜻이냐면 내가 그것을 하고 싶다. 말고 싶다. 이것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왜? 은혜가 있을 때는 선한 것을 하고 싶고 은혜가 뚝 떨어지고 나면 선한 것은 죽여도 하기 싫고 나쁜 일만 골라서 하고 싶어지니까.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을 따라 살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집니다. 결국 내 마음을 따라 그대로 살면 결국 불신앙의 길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 되지만 지옥가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과외비를 내고 공부할 필요 없습니다. 순응에서 점수를 잘못 맡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특별 방송을 들어야합니까? 대학을 떨어지기 위해서 대학 떨어뜨리는 종합 반에 가서 여러분들이 공부를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국어시험을 망치는가? 이것을 조직적으로 연구해야 됩니까? 아닙니다. 그냥 먹고 놀고 까불다가 가서 백지 그리고 오면 충분히 떨어집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옥을 어떤 사람들이 갔느냐? 그냥 사는 사람들이 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냥 산 사람들이 간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상태가 그것을 못 따라 준다고 할지라도 올곧은 인식을 갖는 것입니다. 내 의무가 무엇인가? 이것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올곧은 인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올곧은 인식을 가지면 그것이 자기 부인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뭐라고 하느냐면 “내가 주의 법도와 증거를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의 앞에 있음입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의무에 대한 올곧은 인식을 해야 되는데 그래서 자기를 부인한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고 있는 의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무를 행하고 싶을 때도 있고 행하기 싫을 때도 있고, 열렬하게 행할 수도 있고, 행하기를 행하는데 아주 힘들 때도 있지 않습니까. 은혜 받으면 그냥 집에서 새벽에 어디를 가느냐고 야단을 쳐도 창문 넘어서 새벽기도 하러 오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온 집안 식구들이 새벽기도 가자. 그래도 안 아프면서 “아, 너무 아파서” 그리고 핑계를 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상태는 이렇게 자꾸 변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가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이런 것들은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판단이 어느 날은 기도생활 열심히 하는 것이 옳다. 그러다가 며칠 있다가 기도생활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진짜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전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비교적 적게 변하는 것이 생각이고 인식입니다. 그러니까 그 인식이 의무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내 본문이 무엇인가? 그것을 파악하면 싫을 때 그것을 붙들고 “해야지.” 그러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요즘 말이죠. 정말 큰일 났습니다. 경제가 다 곤두박질해서 어려운 상황에 살아가고 있는데 호황을 누리는 장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슬기로운 눈빛으로 볼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사업은 아닙니다. 그것이 뭐냐면 대형 술집입니다. 대형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냐? 200명, 300명이 아니라. 한꺼번에 1500명에서 2500이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술집입니다. 그것들이 지금 수원과 외곽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하게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래층에 술집을 만들어 놓고 위층에는 작은 노래방 같은 방을 100개씩 150개씩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소위 이야기 하는 부칭 룸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눈 맞은 남녀들이 거기로 올라가서 미팅하고 그리고 불륜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내가 이 얘기를 왜 하느냐면 지금 사회가 얼마나 부패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제는 말이죠. 기성세대들이 젊은이들을 걱정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젊은이들이 기성세대를 더 걱정해요. 염려스럽게 바라보면서 저 아줌마 아저씨들이 어떻게 하려고 저러나. 내가 말이죠. 그 모든 것들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민주주의 국가니까 허가를 안 내줄 수는 없잖아요. 허가를 내주게 하되 그 부킹 룸 방마다 커다란 가족사진을 붙여놓고. “당신은 아버지입니다. 혹은 엄마 거기에서 뭐해” 모두 끝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잘하려면 앉으면 규칙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엄마 거기에서 뭐해. 언제와” 이렇게 소리가 들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망하게 해야 합니다. 그 사업을 한 사람들이 자기 사업이 얼마나 번성하는지 자기 자신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이럴줄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왜? 한 열댓 명 앉아서 술을 마시면 얼굴이 다 탄로가 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 홀에서 2500명이 술을 먹을 수 있다니까 불까지 시커멓게 해 놨는데 누가 누군지 누가 알겠습니까. 서로 앞 뒤 집 사람 만나도 얼굴이 파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타락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 사람들이 누군가가 그 사람들이 범 죄 하는 그 순간에 의무를 생각나게 해 준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정말 그럴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지침이 있는데 첫 째로 모든 상황 속에서 자기의 의무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왕의 신상에 절하는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풀무 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당신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 아십시오.” 그랬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명백하게 자기의 의무가 무엇이다. 당황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상황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본분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자기를 부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피토하게 전해주고 나면 기껏 돌아가서 한다는 이야기가 뭐냐면 한숨 한번 쉬죠. 양념이니까. “휴, 아이고 목사님은 세상을 너무 모르셔서 그래 현실적으로”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라는 말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과는 빠이빠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라는 그 부사가 타협으로 건너가는 다리입니다. 그리고 건너가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심방을 가도 목사님을 가르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몰라서 그러는데 그렇게 정직하게 살수 없는 세상입니다.”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뭐 설교를 취소할까요. 의무에 대한 생각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자 하는 신앙의 결단과 비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자 하는 신앙의 결단이 거의 없는 사람들은 연체 동물처럼 흐느적거립니다. 그러니까 자기 신앙적인 줏대라고 하는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흐물흐물한 문어나 낙지가 동그란 그릇에도 들어가고, 네모난 그릇에도 들어가고 접시에도 퍼질러서 누워있고, 얼마든지 적응하지 않습니까. 낙지를 너무 모욕해서 미안한데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그릇을 갖다 줘도 통발에도 들어가고, 주발에도 들어가고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사랑 받은 적이 있으면 한번 나와 보세요. 하나님과 세상을 바꾸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에 "예수를 버려라." 그럴 때 “아니” 그러면서 낙지가 퍼질러서 누웠던 그 접시에서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서는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뼈가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접시에 퍼질렀던 문어가 “세금 똑바로 내야지.” 그러니까 대답도 안하던 문어가 퍼질러져 누워있고, “정직해야지” 그래도 누워있고, “뇌물주지 말아야지.” 그냥 퍼질러 누워있어요. “이웃간에 신의를 지켜야지” 그래도 퍼질러 누워있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냐면 “그런 것은 모두 몰라서 그러지 그렇게 빡빡하게 이 세상을 살수 없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러는 것입니다.” “차라리 예수를 모른다. 그래” 그러면 그 때는 아, 이것은 본질적인 문제구나. 그러면서 벌떡 일어나서 동그랗게 서서 그래서 눈을 뜨고 “아니 어찌 그런 일이. 그것만은 내가 양보할 수 없지. 죽을지언정” 그러는 낙지 있으면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낙지 신자가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 계속 씁시다. 타협을 잘하는 신자를 낙지 신자라고 부릅시다.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또 뼈대도 없습니다. 왜? 뼈대를 세우면 그렇게 아무데나 가서 적응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을 훨씬 더 잘 알죠. 그러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의 본분과 의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하고 싶다. 하기 싫다. 그것은 나중 문제고 우선 내 본분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마땅히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내가 하고 안 하고는 나중 문제고, 일단 정확한 정답이 뭔가? 그것을 파악하고 그다음에 그것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아니다.” 그리고 부인하려고 하는 그런 노력이 우리에게 너무 필요한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면 의무에 배치되는, 의무에 반하는 생각과 욕구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파악된 의무에 반대하는 생각과 욕구를 의지를 가지고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잘 들으세요. 생각과 이렇게 하고자 하는 욕구를 의지를 가지고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7편에서 시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 치 아니 하리이다.” 결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렇게 의지가 중요하느냐. 우리들은 이제 죄와 관련지어 볼 때 죄가 맨 처음에 들어올 때는 항상 우리의 가슴으로 창을 찌르듯이 바로 들어온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이미 ‘마음 지킴의 교리’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충분히 배웠죠. 죄가 들어올 때는 어디를 타고 들어와요? 그렇죠. 생각을 타고 들어옵니다. 생각을 타고 들어온 모든 죄가, 생각을 타고 들어온 악한 모든 생각들이 마음의 죄로 착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종종 우리가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신자들의 경우에는 저도 신앙의 초기에는 그런 것들을 경험했는데.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말도 되지 않는 굉장히 더러운 생각이 순간적으로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나갑니다. 같이 모여서 철야기도 하는데 무슨 평소에 내가 그런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그러지 않았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 아주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신성모독적인 생각이 확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참 기도하다 보면 사라집니다. 이런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냐면 그런 것을 보면서 이제 이것이 신성모독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성령을 회방 하는 죄가 아닐까? 혹은 내가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뭐냐면 어느 한순간 신자가 아직 이 영적인 상태가 건강하지 못하거나 신앙적으로 어릴 때 혹은 영적인 상태가 건강하더라도 어느 한순간에 사단이 확 하고 밀어 넣어버린 생각입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 신자는 심판받지 않습니다. 결국 그 짓을 한 사단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궁극적으로 처참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때가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아주 신성모독 적이고 더러운 생각 이런 것들이 어느 한순간 확 하고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확 하고 사라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단이 확 밀어 집어넣는 생각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신자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뭐냐면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데 많은 생각들이 떠돌아다니지만 그러나 문제는 뭐냐면 그 생각이 모두 머리 떠오르고 사라지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렇게 죄를 불러일으키는,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물건들, 환경들, 보고 듣고 느끼고 이런 것들로부터 우리를 피해놓는, 떨어지게 하는 것은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을 보고 그러는 그 자체, 그래서 생각이 딱 떠오르는 것은 죄가 아닐 수 있지만 그런 환경 속에 들어가면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냥 떠오르게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생각을 타고 들어와서 마음에 씨가 떨어져서 뿌리는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날 깊이 회개를 해서 털어버리면 뿌리를 내리다가 뽑혀버리는 것인데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게 안 하면 계속 쭉쭉 뿌리를 뻗는 것입니다. 뿌리를 뻗어서 나중에 눈물을 흘리고 회개했는데 잎은 잘라졌는데 뿌리는 저 깊이 박혀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한번 떨어져서 착상된 죄는 죽어도 안 나가려고 필사의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좋은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끔찍한 비유이기는 하지만 뭐 육체를 비유해서 죄의 씨앗이 떨어져서 그래서 우리의 뱃속에 여자의 자궁과 같은 곳에서 죄가 떨어져서 뿌리를 내렸다고 칩시다. 그러면 떨어져 있을 때는 씻어내면 되겠죠. 뿌리가 살짝 내렸을 때는 강하게 씻어내면 빠져나가겠죠. 그러나 뿌리가 나무뿌리 같은 것들이 태내에 깊이 박혀서 10센티 20센티 내려갔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살을 파고 빼 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만큼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생애적인 결단과 어떤 뼈저린 참회, 이런 죄 죽임의 몸부림의 시간이 있지 않으면 이것이 안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가 우리의 마음에 착상되고, 자라고, 이런 것들이 다 내면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실제로 범죄를 해서 아이를 낳는 것처럼 산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거기에서 이야기 하는 욕심이 정욕입니다. 그 정욕을 잉태한다. 라고 하는 것이 자기가 이렇게 품고 자기의 자궁 속에 착상시켜서 아이를 갖듯이 그렇게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여기에서 아홉 달 반이 되어서 자라는데 그것이 밖으로 안 나오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이와 함께 죽어버리기 전에 그 아이를 안 낳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안되잖아요. 그런데 그 단계마다 이 의지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생각을 통해서 마음에 착상될 때 그러니까 생각에서 떠도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라붙을 때 그 때에 누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느냐면 생각이 참여를 합니다. 생각에 떠오르지 않는 것은 마음에 바로 내려갈 수 없으니까 그렇잖아요. 당연하잖아요. 눈 감고 자는 사람 심장위에 책을 올려놓았다고 해서 그 국어책이 들어가느냐고요. 눈을 떠서 하얀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자요. 그러면서 들여다봐야지 생각이 나고 생각이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잘 때마다 성경을 베고 자면서 자기는 이렇게 해야지만 꿈도 맑고 좋다고 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베고 자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착상될 때는 생각이 주도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런데 생각이 떠오르는데 이 씨가 마음에 떨어지도록 내버려둘까? 말까는 의지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생각이 막 떠올라도 의지가 훅 하고 한번 불어버리는 다 날아가 버립니다. 아무것도 안 남습니다. 정신이 조금 산란해지기는 했지만 한번 기도하고 나면 마음이 깨끗해서 씻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막 떠돌아다녀요. 그런데 어느 생각이 생각을 하니까 굉장히 기분이 좋아요. 그러면 이제 이 생각은 어떻게 아부를 하느냐면 이것을 마음에 떨어뜨려서 계속 그 생각을 반복하면 안 될까? 그러면 그 때 의지가 그러지 그러면 딱 내리면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뿌리가 내려진 그 죄는 일단 떨어진 그것은 죄가 악한 생각을 집어넣었을 때는 생각이 죄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마음에 떨어져서 착상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성공했어요. 그러면 그다음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거기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씨가 자라는 것처럼 죄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어떻게 되느냐면 생각이 설득당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설득을 당하면서 의지가 동의를 함으로 이 속에서 죄가 자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런 것입니다. 인간에게 악한 생각이 떠올랐을 때 즉시 죄를 짓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속에서 충분히 자라난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골에 가면 가끔 이제 시골집에 내려가면 어머니나 혹은 할머니나 이웃집에서 서울에서 귀한 손님이 왔다고 하면서 닭을 잡아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쩌다가 암탉을 잡게 되는데 닭을 잡아놓은 다음에 털을 다 뽑고, 배를 갈라서 벌려보면 그 위에 알을 밴 닭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알을 뼈 뒤쪽에 알주머니들이 깨알 같은 것부터 시작해서 계속 매달려 있습니다. 셀 수도 없습니다. 맨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것입니다. 그냥 내려옵니다. 밑에는 어떤 때는 잘못 닭을 잡으면 하얀 껍질이 흐물흐물 하게 계란이 닭 엉덩이 바로 밑에 산출 될 때는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마음이 거의 그런 것입니다. 성화가 많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알 주머니에 알이 별로 안 매달려 있습니다.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아주 미미합니다. 그런데 죄 죽임이 없고 자기 멋대로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에 부지런히 참여하지도 않고 일채의 게으름과 불성실함으로 신앙생활 하게 되면 말이죠. 제멋대로 살게 되면 딱 열어서 보면 가득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월아 흘러라 입니다. 계속 쏟아내는 것입니다. 하루에 심지어는 두 개씩 쏟아내는 것입니다. 한없이, 한없이 낳는 것입니다. 닭 한 마리가 살아서 얼마나 알을 낳는지 조사는 못해봤는데 아마 엄청날 것입니다. 양계장 주인이 알을 많이 낳으라고 낮에도 모이를 주고 밤에도 불을 환하게 켜놓지 않습니까. 사단이 그렇게 역사해서 새로운 사명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그러나 옛정을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너는 나를 위해서 알을 낳아라. 그리고 비교적 교회가 깨끗한 교회니까 더 많은 죄를 부르고 있으니까 거기에 가서 더 많이 퍼트려라. 그래서 그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고 문제를 일으켜서 하여튼 네가 가서 똥칠하고 별짓을 다해서 하여튼 그 교회를 지저분하게 더럽혀라. 그 사명을 주어서 보내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그것이 죄의 계획입니다.
그러면서 아니 겉으로 보면 닭이 내가 교회에 오래 다니고 색깔도 그럴듯하고 말이죠. 다 괜찮아 보이지만 배를 갈라보면 쭉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은 모르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여러분 하나, 하나의 알주머니들을 다 보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모르지만 주님은 이것이 언제 저 죄가 산출될 것인지 훤히 다 아시는데 그러면서 죄는 그 속에서 계속 새끼를 치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게 자랄 때 이 생각이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왜? 일단 생각이 들어와서 죄를 범하기 전에는 어떻게 되느냐면 이 죄를 범하고자 하는 욕구는 있는데 그 죄를 범할 환경은 아직 되지 않았을 때에는 그것을 계속 생각하면서 즐거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 그 정욕적인 생각을 통해서 죄가 이 속에서 계속 알들이 맺히기 시작하면서 이 아래로는 이제 출산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죄가 아주 탄탄하게 영글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예화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처음에 생각으로 스쳐간 것입니다. 포도원이 괜찮아요. 그래서 “좋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딱 본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율법이 있어서 남이 받은 기업을 탐낼 수 없고 왕이라고 그것을 빼앗을 수 없다. 넌 하나님의 나라에 백성이야.” 그리고 의무를 일깨우면 “아이, 그것 좋기는 하지만 안 돼지.” 그리고 털어버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슴에 품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병이 날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니까 이세벨이 “죽이고 뺏으면 되지 뭘 그러느냐.” 그래서 때려 죽이고 빼앗아버리는 것입니다. 죄가 그런 식으로 성장하면서 산출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생각이 설득을 당하고, 거기에서도 역시 의지가 동의를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수록 의지의 역할을 약해집니다. 왜냐면 생각이 끈질기게 설득당하고 나면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이 죄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의지가 저항을 해도 그것을 뽑아내기가 힘든 것입니다.
세 번째 마지막 단계에 가서 죄가 산출되게 되는데 죄가 산출될 때에는 정서가 안달을 하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벌써 죄의 맛을 보았기 때문에 뱃속에 있는 것보다는 밖으로 산출될 때에 그 기쁨이 너무 크거든요. 아니 한번 생각해보세요. 생각속의 죄를 짓는 것도 기분이 좋지만 실제로 그것을 실행할 때에 느끼는 그 즐거움에 비하면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계속하고 마음에 정욕이 꽉 차게 되면 그 정욕을 따라서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범할 환경만 주어지면 바로 범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범죄를 할 때에는 정서가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지에게 통사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지가 계속 그것을 억제하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산출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뭐 연약하여. 죄를 짓고, 그러는데 전부다 거짓말 입니다. 그것은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선택해서 죄를 지은 것이지 연약하기 때문에 자신은 그 죄를 짓지 않으려고 저항했는데 워낙 죄가 세게 밀어서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어져서 범 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교리적으로 올바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책임질 것이 없게요. 그것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실행 죄는 자기 자신이 직접 그 죄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악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뭐냐면 그렇게 해서 죄가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번에는 이 죄는 이제 이 안에 있을 때에는 그래도 자기의 통제권 안에 있었는데 쏟아내면 무슨 일을 일으킬지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들이 아리를 갖게 되면 자매들은 “힘들어죽겠어요.” 힘들지. 허리도 아프고, 배는 남산만 하게 나오고 핏줄이 터지고 얼마나 힘들겠어요. 다리도 붓고 “아니고 낳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다 어른들이 뭐라고 해요. "아이고, 뱃속에 들었을 때가 좋다.” 뱃속에 들으면 내일 출산을 할지라도 오늘 내가 교회에 가고 싶으면 금방 뱃속에 넣고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자고 싶으면 자고, 그런데 일단 낳아놓으면 딱 하루 차이밖에 안 되는데 교회에 오고 싶어도 못 옵니다. 아이가 우니까. 젖 먹자고 우니까 자고 싶어도 이놈이 놀자. 그러면 할 수 없이 놀아줘야합니다. 사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은 했지만 우리아를 죽이려고까지 처음부터 마음을 먹지 않았잖아요. 그것이 산출된 애가 돌아다니면서 그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속에 있는 것들이 산출되었는데 그것이 각자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속 산출되고 돌아다니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가 뭐냐면 날 위해서 일하는 역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 인생을 그 하나님을 대적하고 살게 하기 위해서 총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내 몸에서 태어났지만 이 자식은 내가 신자의 길에 서 있는 동안에 내 친자식이 아니라. 원수처럼 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회개를 했는데도 이 죄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세요. 왕자들의 난이 일어나서 서로 죽이고 말이죠. 그 집안 전체가 초토화 되지 않습니까. 다 다윗이 그렇게 해서 지은 죄가 산출되어서 죽지도 않고 돌아다니면서 계속해서 역사해서 그 사람의 인생을 초토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이렇게 모든 과정에서 의지가 이렇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의무에 대한 올곧은 인식을 가지고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자기의 참된 본분이 무엇인가를 따라서 판단하고 옳지 않은 것들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그 때에 자기부인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굉장히 힘들지 않겠어요. 이미 벌써 자기 안에 은혜가 상당히 퍼져나간 상태인데 나의 의무와 본분이 무엇이다. 그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인식해서 너는 이러면 안 된다. 그러는데 벌써 그것을 저항할 수 있는 힘이 많이 빠져나간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하나의 복음의 비밀이 나오는데 그것이 순종과 의존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면 이 순종과 의존의 관계가 대두되는데 무슨 뜻이냐면 어느 한 시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너의 의무가 이것이다.” 그리고 인식시켜 주셨는데 그 의무는 떠올랐는데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는 그런 힘과 마음들이 모두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의무는 정확하게 인식했는데 도무지 이 의무를 그래도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있지 않습니까. 그 때에 우리 자신이 그것을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선택은 우리가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성령의 힘과 그리고 내가 인식한 그 참된 의무와 본분을 따라서 나를 부인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셔야만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힘을 누구에게 주시냐면 순종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순종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보면 신자가 죄 가운데서 이제 죄의 지배 상태에 들어가서 죄에게 많이 패배하면서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그 때에 이 결단을 남발하는 것입니다. “아, 나는 이제 그러지 말아야지. 나는 뭐 어째야지” 결단을 하는데 그것이 자꾸 무너집니다. 그렇죠. 그러면서 결국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면 “아, 내가 이렇게 결단하는데도 하나님은 나를 안 도와주시는구나.” 그것이 뭐냐면 자기 부인이 철저하지 않아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어느 하나의 행동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 뿐만 아니라. 이 죄의 유혹과 부패의 영향력이 총체적이고 전방위적이니까 자신의 삶 전체를 살피면서 이 죄가 어떻게 내 마음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서 이 모든 것들을 다 대적해야지 이것은 내버려둡니다. 왜? 이것은 내가 계속 하는 것이 기분 좋으니까. 놔두고 별로 맘에 안 드는 것만 난, 너 안 할 거야. 그러는데 이것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뭐냐면 믿음과 순종입니다.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내가 마땅한 의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올곧게 인식하고 내가 그대로 순종하려고 하는데 내가 너무 힘이 없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셔서 이렇게 순종할 수 있게끔 도와주실 것이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전망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로 그것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무는 인식했어요. 내 본분이 이것이다. 그리고 인식했어요. 그런데 자기를 돌아보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너무 없어요. “그것은 인식했지만 나는 너무 힘이 없어.” 그리고 포기하는 것은 뭐냐면 결국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거기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신비한 방법으로 자기에게 힘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것이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이미 일어난 일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미 도와주신 것에 대한 회고, 그 때에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도와주셔서 내가 이길 수 있었구나.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모든 상황에서 자기의 의무를 생각하면서 거기에 순종하려고 할 때 그 때에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 모든 거듭난 신자들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급되는 은혜의 힘이 모자라서 진짜 힘이 모자라서 불순종하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이 약속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신자가 스스로 죄를 택할 때에 죄를 이길 힘을 하나님께서 함께 그에게 주시지 않으십니다. 심하면 너무나 죄를 사랑하고 그 죄에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되면 어느 한 순간에 생명과 성령의 법이 활동을 딱 중지합니다. 멈춥니다. 그래서 거의 불신자의 상태와 똑같이 그렇게 영혼이 전적으로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타락한 길로 걸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 없으신 분이셨는데도 끊임없이 당신을 부인하는 길을 걸어 가셨잖아요. 그렇죠. 그렇게 예수님이 걸어가신 발자취,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그분이 인간처럼 이렇게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 그분에게 합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이 더러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는다고 하는 것은 그분의 본성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인간들에게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시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결국은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예수님의 뜻도 있었던 것입니다.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당신 자신을 부인하신 생애를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구도자적 신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오려면 제일 먼저 해야 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두 번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쫓아갈 때에 비로소 구도자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는 자기반성 하나님 앞에 이 순종한 말씀의 거울, 이 찬란한 복음 진리의 빛,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이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철저한 반성, 이것이 없이 그 사람이 거룩한 신자가 되어서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보면서 말씀의 빛이 없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통탄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 말씀의 빛을 소유해도 그가 그것 하나만 가지고 구도자의 삶을 살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 빛이 있으면 겨우 자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되요? 자기를 부인해야죠. 십자가를 져야죠. 삶의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길을 걸어가려고 애써야죠. 그런데 빛이 가장 기초인데 이것들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땅에서 여러분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창조하셨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철저한 죄인들이고, 어떻게 여러분들 안에 죄가 남아있어서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위대한 계획에 부합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지 여러분들이 왜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없는 성도들이 어떻게 황소 뒷발에 개구리 맞듯이 그렇게 진실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환상입니다. 그런 우연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라는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말이죠. 어떻게 보면 그것 하나밖에 소원이 없습니다. 목회자로서는 크게는 하나님 앞에 가장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숨 거두는 날 까지 성화의 길을 가서 주님이 “너의 인생의 고단을 길을 마치고 내 품으로 와라.” 그러실 때에 그 날이 이 지상에서 가장 성화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날이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이래로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 끊임없이 성장해서. 그리고 목회자로서 여러분들에게 원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뭐냐면 죽을 때까지 본문을 읽고나면 무슨 설교가 쏟아질지 예측도 되지 않은 설교자가 되고 싶은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여러분들은 나의 선생님입니다. 왜? 나는 여러분들의 그 부패하고 더러운 성품 속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저 자신의 부패함을 통해서 배운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여러분들을 목회하면서 배웠습니다. 그것이 목회자인 저를 절망시키기도 했지만 그러나 또한 그것이 저로 하여금 아주 어리숙한 설교자로 남지 않고 아주 예민한 설교자가 되도록 만들어주었고, 큰 칼 몇 개 가지고 싸우는 이 영적 전쟁의 싸움이 아니라. 새로운 여러분들의 그 부패한 본성들을 하나님이 충분히 수술하실 수 있는 예리한 말씀의 칼, 거룩한 삶을 위한 교리의 칼들을 준비하게 하는 훌륭한 촉진제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기회를 저에게 주었다는 이유 때문에 스스로를 칭찬해서는 안 됩니다. 왜?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은 설교자를 좋은 설교자 만들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좋은 신자들로 빚어져서 우리를 구속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구원의 계획, 창조의 계획에 부합하는 인간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여러분들을 지으신 것입니다. 저는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 받으면서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탐구 합니다 만은 요즘 교육관이니 뭐니 정말 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면서 한번도 설교하기 위해서 공부해 본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일생을 살아가는 구도자의 삶에는 반드시 이 지적인 탐구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얘기합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그래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생각나게 하고, 여러분들의 의무를 가슴에 새기게 만들어주고 어떻게 힘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그 의무를 따라 순종함으로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모든 교회의 기능들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 말씀의 빛을 사용해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자신의 본분을 깨닫고 의무가 무엇인지를 터득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이런 몸부림들이 너무 허약합니다. 이런 삶을 가지고는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면서 그것을 정직하게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앞에서 자기를 성찰하고 그래서 자기를 철저하게 부인해야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부인하려고 하면 아프죠.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우리는 손톱만한 욕망이 있어도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살을 떼어 내는 것만큼 그렇게 힘들어요. 그렇게 힘든 것이 자기 자신의 욕망과 육적인 생각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얼마나 고통스러워요. 견딜 수 없죠. 누군가가 미운데 우리의 본분은 그 지체를 그렇게 미워하면 안돼요. 그래서 그를 용서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경험해본 사람은 압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은 한번 맺히면 일평생 원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 힘들죠. 그뿐입니까? 자기 속에 있는 인간적인 이 더러운 욕망이 있는데 그것을 철저히 부인하면서 못 박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니까 자기부인을 실천하는 실제적인 실천의 삶 한복판에 무엇인가 그런 동기를 제공해주는, 자기부인의 동기를 제공해주는 끊임없는 어떤 원천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빈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나를 항상 버리고
십자가를 붙드네.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자기 부인이 너무 너무 어려웠어요.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자아가 살아있으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용서해줘” “자존심이 있지 내가 어떻게” “이 정욕을 포기해”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렇게 갖고 싶은데.” 이런 욕망들이 자아가 살아있으니까 자기 부인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가서 “네가 누구냐? 그 십자가 앞에 서면 우리는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 같은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해주셨고,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닌 벌레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더러운 죄인이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송한 일입니까.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고 믿음을 갖게 된 그 회심의 때 은혜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빛이 열린 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던 그 때에 우리가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한번 보십시오. 이 벌레 같은 나라고 고백했습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고백했고,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했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면서도 나는 단지 무익한 종일뿐입니다. 나는 단지 그리스도의 종이요. 예수의 노예일 뿐입니다.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회심의 은혜아래 있을 때에 우리에 대한 우리 자신의 판단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인하시고 그래서 우리 같이 너절한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지 아니하셨다면 지금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을까요. 아직도 영혼의 어두움에 갇혀서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리를 위해 생명주시기 위해서 오신 고난의 주님을 욕보이면서 그분을 현저히 십자가에 못 박으며 우리가 그렇게 살았지 않겠습니까.
그 때에 우리가 자기 부인 같은 것 필요했을까요?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다가 그 마지막 날에 도륙당하는 짐승처럼 심판받고 불길 아래 던져진 그런 형벌 받을 운명밖에는 우리에게 무엇이 남은 것이 있었겠습니까? 아무것도 존재하는 것이 없지 않았겠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예수를 새롭게 만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의미와 그리고 그분이 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그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셨는지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가 사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우리의 새 사람의 원수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고, 그리고 그 안에 깃들여 있는 모든 죄의 계획과 그리고 부패한 욕망들이 바로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고 일평생 존경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죄인으로 못 박아 죽게 한 그 궁극적인 모험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세상사랑 때문에 오늘도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파괴하고라도 우리는 ( ? )하고 싶어 하는 그 육체의 더러운 그 욕망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부인하지 않고 있는 이 교만과 더러운 욕망에 사로잡힌 우리의 옛 자아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처참하게 하나님 아버지 앞에 버림을 받고 죽으셨으니 그는 죄가 없으셨으나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그는 순결하셨으나 우리의 불결 때문에 하나님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죄에 갇혀서 영혼이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하나님 앞에 그의 전 삶을 ( ? )비참한 그 인간들을 구원해 내셔서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이 세상에서 영혼들에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나라가 다시 오게 하고 그래서 인간으로 말미암아 망가진 이 세상이 그 창조의 아름다운 목적을 다시 회복하도록 그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었고, 그가 상하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범죄는 우리가 했으나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하나님 앞에 형벌을 당하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덕에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런 죄를 위해서 죽으신 그 때에 우리도 함께 죽었고,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사실 때에 우리도 살아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보면서 그것이 우리의 죄와 악함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더러운 죄인들뿐이고 도무지 우리 스스로를 주장하고 우리의 권리를 내세울 수 없는 용서받은 죄인들이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아버지의 집에 입양된 그 자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기는커녕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함과 죄를 사랑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거룩한 십자가의 계획을 수포로 돌리면서 살려고 하는 우리의 이 악하고 대적하는 삶을 주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요. 복음의 빛을 주시고 우리에게 회개의 은혜를 주시고 십자가의 복음의 뜻을 깨닫도록 만들어주셔서 우리를 새롭게 일깨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그 아름다운 은혜의 상태에서 뒤로 물러가 부패한 사람들에게 오늘도 간곡히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도록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은혜의 상태로부터 부패(4)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17)
은혜의 상태로부터 부패하는 원인을 삼일에 걸쳐서 여섯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마지막 날 자기 부인에서 너무 말씀을 많이 주시는 바람에 마지막 한 가지를 도저히 계속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그 자기부인과 함께 마지막으로 은혜 상태에 있는 신자가 부패하게 되는 요인 중의 하나를 기도생활의 태만함으로 오늘 꼽고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사경회를 통해서 첫 회심과 함께 은혜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그래서 신자가 곧바로 은혜의 지배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첫 회심 속에서 터치는 그 은혜의 샘은 기도의 샘이 터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면 그 은혜의 샘의 정체는 결국 성령의 한량없는 은혜의 역사이고 기도의 영은 또한 그 성령의 영과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신자의 첫 회심은 기도의 은혜가 샘솟듯이 터지는 경험이고 하늘로부터 그 기도의 응답이 주어지는 그런 놀라운 축복의 경험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무엇이 이 기도의 첫 회심과 함께 터지는 기도의 샘을 막는가? 그것은 은혜의 샘을 막는 것과 동일한 죄의 작용이 역사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은혜의 샘이 막히는 것은 이미 삼일 동안 살펴본 바와 같이 포괄적인 원인을 간직한 것이고 기도의 샘이 막히는 것은 그 포괄적인 원인의 영향을 받으면서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이러한 지침으로부터 이탈될 때에 기도의 은혜의 급속히 감하여지게 되고 결국 첫 회심과 함께 터트려진 기도의 샘은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회심의 은혜를 경험할 때에는 특별히 기도하려고 애를 쓰고 분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기도의 욕구가 확 솟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 처음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회심을 통해서 그런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면 오랫동안 불신상태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누구에게 기도해본 적이 없고 또 기도해서 응답을 받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생경스럽기 짝이 없는 경험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자신들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기도의 욕구를 그 내면의 세계 속에서 불러일으키시고 밖에서는 하나님이 그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 라고 하는 증거를 보여주실 때 그 때 생전 처음 경험하는 이 기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를 발전시켜나갈 욕구를 갖게 될 것 아닙니까. 이해할 수 있죠. 그래서 예수 믿고 처음 회심한 다음에 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참 잘 들어주십니다. 물론 그 기도도 너무 엉뚱한 기도를 하면 안 들어 주시겠죠. 그래서 뭐 얼굴을 갑자기 정형수술 한 것처럼 만들어달라든지. 자고 일어나면 숲 속의 공주처럼 만들어 달라고 한다든지. 그런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는 기도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마세요. 그러나 이런 기도는 들어주실 수 있죠. 원판은 안 바꾸시더라도 사람들이 보기에 참 좋아보이게 해 달라고 그것은 사람들 눈에 콩 꺼풀만 씌워 놓으시면 될 것 아닙니까. 얼마든지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자신의 경험을 미루어 봐도 처음 회심과 함께 참 하나님이 기도를 잘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첫 회심 때를 그리워하면서 아, 다시 한번 그 첫 회심 때의 기도가 그리워지는 것이 뭐냐면 하여튼 뭐만 기도해도 하나님의 뜻에 근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기도의 수준이 그 때는 매우 낮잖아요. 그러니까 응답도 하나님이 매우 수준 낮은 방법으로 응답해주셔서 그 인간에게 어울리는 응답을 받게 해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속에서 기도해야할 욕구나 이런 것들이 증진되게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우리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가 막 되기 시작할 때 덜컥하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단번에 은혜의 샘이 막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첫 회심에서 미끄러지는 것이 사실 어떤 죄를 하나님이 사랑이 막 솟아날 때 그 때 죄를 덜컥하고 짓는 경우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매우 드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도 준비된 사람의 마음속에 오시고, 죄도 준비된 마음에 옵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경을 보면 사단이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어주었다. 그랬잖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저에게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도 피해자가 아닙니까? 그러는데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가룟 유다에게 그 사단이 가서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어주었을까요? 뭐냐면 그 사람이 그렇게 하고자 하도록 마음이 가장 잘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사단이 볼 때 마음 밭이 가장 좋았기 때문에 그 사단이 그 사람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우리들이 생각할 때에 이런 원리들을 이해해야합니다. 그런데 이제 마음속에 그런 하나님의 은혜, 이런 것들이 준비된 가운데 찾아오고 죄고 충분히 자기 자신을 준비한 다음에 들어오게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래서 회심의 은혜로 인해서 기도의 샘이 터진 다음에 처음에 찾아오는 것은 그런 덜컥 짓는 큰 범죄나 이런 것들이 아니라. 의무에 충실하지 않는 몸에 밴 게으름이나 쉽게 뒤로 물러가는 영혼의 끈기 없음, 이런 소극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은혜에서 물러가는 일들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처음 회심을 통해서 기도의 샘이 터지고 열렬하게 기도하던 신자는 결국 이 기도생활에 있어서 태만함 때문에 그 은혜의 상태에서 물러가게 되는데 그 첫 번째가 짧게 기도하려는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짧게 기도하려는 유혹이 어떻게 오느냐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게 짧은 기도를 통해서도 충분하다. 라고 하는 자만심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에 보면 짧은 기도로도 상황을 확 바꿔놓았던 위대한 기도의 인문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기도도 역시 그랬고, 또 바울의 기도 같은 것,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같은 것이라든지, “파도야 잔잔하라.” 말씀하신 것이라든지, 바울이 귀신을 꾸짖는 장면이라든지 이런 모든 것들은 변형된 기도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보면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이 원주민들을 추격하는데 해가 져요. 어두워지면 이 지형에 눈이 밝지 못하니까 그들을 놓칠 수밖에 없죠. 기도하니까 하늘에 해가 멎으면서 낮 시간의 길이가 길어집니다. 어떤 과학자가 이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예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런 모든 것들은 짧은 기도가 큰 능력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짧은 기도가 그렇게 큰 능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단지 믿음만 있으면 저절로 그런 기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대게 성경에서 볼 때에 짧은 기도로 커다란 능력과 기적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모두 평소에 깊은 기도 속에서 산 사람들만이 짧고 능력 있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릴 수 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이런 유혹을 떨쳐버리고 그리고 기도를 충분히 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짧은 기도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는 이유는 우선 기도가 희생을 요한다고 하는 아주 평범한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 회심에서 은혜의 샘이 터져서 기도가 터져 나올 때는 기도하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달콤한 기대를 주고 진행도 달콤한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고, 결과도 달콤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은혜의 경험은 일반적으로 신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드문 경험입니다. 오히려 회심한 이후 성화의 도상에서 서 있는 성도들의 경험은 한 사람의 신앙의 인격 안에 기도를 통해 기쁨을 못 보고자 하는 욕구와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하지 않고자 하는 그 영혼의 싫증과 게으름이 공존한다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이 훨씬 보편적인 경험입니다. 물론 죄를 많이 죽이고 더 온전한 은혜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다시 첫 회심 때 그러했던 것처럼 기도자체가 한없이 달콤하고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희생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즐거운 특권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18세기의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책 속에 나오는 그런 소위 이야기하는 기도의 스위트네스에 대한 경험,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스위트네스에 대한 경험들은 바로 이런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들이 죄를 죽이고 끊임없이 성화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단계에까지 도달해서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맛보면서 살고자 하는 그런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것을 추구해야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 있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 도달하는 것도 그런 상태에 도달하면 그렇게 기도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우리가 실제로 태만한 기도생활에 대해서 어떤 개혁을 꾀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영원히 그런 기도의 상태로 돌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기도가 희생이라고 하는 사실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무엇인가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하기 위해서 희생을 치루고 대가를 치러야만 기도를 할 수 있다. 라고 하는 보편적인 생각을 원칙으로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리고 그렇게 기도를 실천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이고 의무를 마지막에 팽개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영혼을 대적에게 노출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의무는 영혼을 싸고 있는 껍질입니다. 포장입니다. 그것을 벗고 나면 알로 된 영혼이 남는 것입니다. 말랑말랑한 공격하니 얼마나 쉽게 공격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새 가족 반을 하면서 예배에 대한 이런 것을 배운 것이 기억날 것입니다. 마음 없이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죠. 안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 얘기를 듣고 “그래, 난 그러면 어차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도 안 되는데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도 안 드려지는데 사람들이 말하기에 나는 정말 예배에 참석하나 마나한 그런 사람인데, 그렇게 하면 나는 안 드리겠다.” 그래서 의무로부터도 완전히 이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마음에도 없이 의무를 행하면 외식하면 신자인데 그 의무마저도 벗어버리면 그는 배교를 실천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배의 감격에서 표현하기를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막보는 것이다. 막보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막본다.” 라고 하는 의미는 “니 까짓 것이 뭔데”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원수 맺는 것의 바로 전단계입니다. 그래도 위선적인 신자가 낫죠. 왜? 위선적인 신자는 참된 신자만은 아주 못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예배에 나와야지만 어느 순간에 자기가 잘못되었다. 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돌이켜 설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유대인들 중에 외식하는 사람이 진실로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 비해서 악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지 아예 그런 의무도 벗어버리고 세금을 노략질 하고 사람을 죽이고, 그렇게 포악무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낫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두 종류의 사람 다 멸망한다는 면에서는 똑같습니다.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의무는 우리의 영혼을 싸고 있는 껍질입니다. 그래서 그 껍질이 단단하게 잘 유지되면 우리의 영혼은 강력한 공격을 받아도 안전하게 보호됩니다.
자주 외국으로 책을 주문합니다. 영국이나 미국으로 그 책 올 때보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는 책 한권 인터넷 같은데 주문하면 흐물흐물한 봉지에다 싸서 그냥 날아옵니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옛날에는 포장이 다 찢어지고 때가 묻고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은 안 그렇습니다. 한번은 제가 받아보았는데 책을 그렇게 많이 신청하지 않았는데 꽤 큰 박스에 왔습니다. 어떻게 했나 보았더니 하나, 하나를 렙으로 쌓습니다. 그리고 렙으로 싼 것을 다시 공기방울 포장지로 다시 포장하고, 그다음에는 자잘한 스티로폼 톱밥 같은 것을 잔뜩 넣고 그 속에다 마치 사과 궤짝 에다 겨 속에 사과 넣듯이 하나, 하나씩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이렇게 까지는 안 해도 안전하게 올 터인데. 그래서 그 쓰레기를 다 털어내면서 하나, 하나 벗겨내면서 귀찮기는 했지만 그러나 덕분에 전혀 상처 나지 않은 구겨지지 않은 책을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면 아마 제가 보기에는 비행기가 싣고 가다가 땅에 떨어뜨려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포장을 했습니다. 우리의 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무가 잘 지켜지고 그 의무 속에 우리의 마음이 잘 베어날 때 이것은 굉장히 강력한 껍질입니다. 웬만큼 공격해도 절대로 깨뜨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기도 왜 안 하니? 안 되니까. 주님이 해주셔야지 장사를 하든지 말든지 하고 그냥 다 걷어치워 버렸어요. 그리고 어떻게? 어디까지 한번 떠내려가나 보자. 그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알로 노출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그냥 말랑말랑한 채로 밖에 노출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와서 발길로 차면 다 터지지. 그리고 사소한 상처가 나도 치명적인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가슴 아픈 것은 그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조국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영적인 세계가 거의 없는 그리스도인, 기도 자체가 희생이라고 생각하고 되든지 안 되든지 그 기도에 헌신해야 한다. 라고 하는 의지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소수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찰스하튼 스펄 전은 그의 설교 속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기도가 잘 되십니까? 열심히 기도하셔야합니다. 왜냐면 기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기도가 잘 되는 때가 흔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기도가 안 되십니까? 그러면 많이 기도하셔야합니다. 왜냐면 기도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기도가 안 되니까. 기도를 많이 해야만 그 기도 자 영혼 안에 쇄신의 작용이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된다는 그런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희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합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영혼을 쇄신하는 매우 중요한 작용이라고 하는 사실은 어떻게 입증되느냐면 죄가 우리 영혼 안에 깃들어서 그래서 그 죄가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생각,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까지 모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감정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시인의 고백은 “내가 나의 죄를 인하여 고개를 들 수가 없게 되었나이다.”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그의 영혼을 파리하게 해서 감히 하나님을 쳐다보려고 해도 이것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남아야지만 주를 바라보고 살지. 그 은혜가 그 은혜가 고갈되면 주를 바라볼 기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영혼과 육체에까지 그렇게 영향을 끼칩니다. 죄의 공격이 그렇게 전면적이기 때문에 그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거기에 맞서는 공격 또한 전면적인 공격 이어야합니다. 여러분 감기에 걸리죠. 바이러스가 어떻게 됩니까? 몸속으로 들어가 온 몸에 퍼집니다. 그런데 손만 감기 균을 죽이는 소독약 속에 계속 집어넣는다고 해서 이것이 해결이 되겠습니까? 코로 감기기운이 들어갔으니까 코만 독한 과산화 수로를 코 구멍에다 집어넣으면 감기를 이길 수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죠. 그래서 주사를 맞아서 그 항생제가 온 몸에 피를 타고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다 흘러야합니다. 그래서 전방위적으로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기면 감기가 떨어지는 것이고 그들을 이기고 살아남은 바이러스 균들이 축제를 벌이면서 다시 힘을 내는 것입니다. 똑같은 원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의 영혼과 마음, 생각, 그리고 우리의 육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주어서 죄를 죽일 수 있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 뭐냐면 기도입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합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영혼이 있어도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와의 피어린 투쟁이 없이도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죄와의 피나는 싸움이 없어도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와의 피나는 싸움이 아니면 우리의 영혼과 마음이 간절히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시작되자마자 바로 싸움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를 통해서 이 죄의 전방위적인 영혼을 죽이는 그 역사를 대적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고 방법입니다. 기도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죄와의 싸움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무기를 모두 다 반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철저하게 굴복하는 것입니다. 모든 무기와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그 영혼과 마음을 공격하는 것은 죄에게 있어서 얼마나 쉬운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죄는 먼저 우리의 영혼에 찾아와서 우리 안에 찾아와서 우리의 생각을 혼돈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서 기도할 수 없도록 우리를 먼저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아직 기도의 은혜가 남아있는 사람을 데리고 “오늘 가다가 나쁜 짓 하자.” 이렇게 유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서히 알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감지할 수 없는 놀라운 지혜로 우리 안에 있는 기도의 은혜들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존 라일은 말하기를 “죄는 기도를 죽이고 기도는 죄를 죽인다.” 그래서 기도의 은혜와 죄의 역사함은 마치 리브가의 한 태에 있던 그 쌍둥이 야곱과 애서를 닮았습니다. 둘이 서로 싸웁니다. 그리고 결코 둘 사이에 화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어느 하나를 완전히 죽이지는 못합니다.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기도를 안 하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위험한 것이고, 기도를 안 하면 나쁜 그리스도인입니다. 단호히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아주 나쁜 신자입니다. 악한 신자입니다. 그냥 이렇게 자기 의무를 충실하지 못하는 약간의 결함이 있는 신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못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활용하고 사용한다는 면에서 보면 아주 가치 없는 쓸모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수 없는 성화의 교리를 이해하고 그리고 수 없이 그것을 들어도 실제로 그 죄가 죽는 것은 자기가 마음을 다해서 열렬히 기도할 때 성령이 그 죄를 죽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파악했습니다. 알았습니다. 수 없이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싸우지를 않습니다. 그 깨달은 정보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가 이제 기도하지 않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노라.” 아주 그는 명백하게 뛰어난 영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 자체가 연약함이나 어떤 모자람이 아니라. 적극적인 악이요. 하나님을 향한 대적인 죄라고 본 것입니다. 결국 이 짧게 기도하려는 유혹을 받으면서 우리는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느냐면 신자는 자기 안에 있는 남아 있는 은혜의 크기만큼만 기도의 의욕을 느끼는 것입니다. 남아있는 은혜의 크기만큼만 기도의 욕구를 느낍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아주 진실하고 정직한 평가를 내려야합니다. 적어도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정직한 평가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은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은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습니다. 암이라고 진단이 났습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날에도 오진 률이 35%입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큰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암이 아니래요. 1:1입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더 큰 병원에 한 번 더 갔습니다. 아니래요. 그래서 결국 3년 후에 암으로 죽었습니다. 그 큰 두 병원은 못 찾아냈는데 그보다 작은 병원에 있는 의사가 정확하게 진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몇 대 몇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으로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우리 자신이 우리를 정직하게 소위 이야기 하는 “정사” 정확하게 우리 자신을 살피는 것에 있어서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요즘 묵상하고 계시죠. 잘 돼요. 처음에는 상당히 잘 되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잘 안 되시죠.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것 자체를 죄 된 우리의 육체도 싫어하고 사단도 싫어합니다. 한순간이라도 정직하게 말씀 앞에서 내 자신을 비춰보면서 진단받는 이런 것, 우리의 육체도 싫어하고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죄도 거기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인하면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은혜의 상태는 어떤가? 스스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주 간단합니다. 기도의 욕구를 어느 정도 느끼느냐? 며칠 계속 기도하지 않고 지냈는데도 기도해야할 욕구를 느끼지 못한다. 영혼이 병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가책조차 들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신앙의 길에서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것입니다. 무서운 상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소위 이야기 하는 영혼의 갈급함이라는 것이 있죠. 뭔가 이렇게 마음이 건조해지면서 아주 견디기 힘들게 마음이 드라이 해지는 경우 있잖아요. 이런 것들이 죄의 지배아래서 자주 일어나는 경험이 아니라. 은혜의 지배아래 있을 때 자주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놀랍게 역사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이 드라이해지는 경험이 자주 일어납니다. 왜? 이 영적인 예민함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가 있는데 이 요구를 내가 안 채워줘. 그러면 즉시 반응이 와서 아주 갈급하고 그리고 견디기 힘든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쭉 쏟아놓고 나면 큰 위로와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바로 그런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에게 있는 기도의 욕구가 어느 정도입니까? 정말 있는 그 삶의 자리에서 수시로 무릎을 꿇고 그 속에서 좋으신 주님을 대면하는 기쁨, 그 은혜가 있습니까? 얼마나 필요합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쏟아놓지 않고 하루 이틀만 지나도 마음이 너무 드라이해지고 갈급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에 대한 욕구입니다. 이런 것들이 살아있느냐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은혜가 없습니다. 이런 은혜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러니까 정말 변화되기 힘들죠. 그러니까 그렇게 기도의 영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것은 경험적인 복음이 아니라. 개념적인 복음입니다.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해석해서 거기에서 돌출되는 많은 은혜의 이론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삶을 합리화하고 방종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 딱딱하고 굳어진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이미 기도의 욕구조차 사라진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봅니다. 요즘은 제가 통계를 못 보았는데 한 5. 6년 전인가. 한국에 있는 크리스찬 대학생 1000명을 대상으로 앙 케이트 조사를 했는데 그것을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55%가 10분도 기도하지 않는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야, 정말 이 조국 교회의 미래가 있겠는가? 한 2-30년 흘러가고 나면 좋든지 싫든지 이 사람들 솔에서 지도자가 나오는데 그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는 한 결국은 교인들이 될 것 아닙니까. 그 중에서 목사도 나오고 장로도 나오고 그럴 것인데, 세상에 복음의 근처도 안 가본 사람들이 어떻게 55%가 10분도 기도하지 않는다고 응답했습니다. 크리스챤 대학생들이 말이죠.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들이 개혁이 어쩌고, 하면서 주먹을 쥐고 그래도 역사가 그렇게 바뀌는 것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으셨죠. 우리는 좀 그런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정말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의 어느 삶의 자리에 있든지 간에 깊은 기도에 잠긴 사람,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인격적인 특징이 된 사람,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방금 주님의 면전에서 나온 사람인 것처럼 지존하신 왕을 알현하고 나온 사람처럼, 그 얼굴이 빛나고 그 인품이 거룩함을 머금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싶습니다. 결국 상습적으로 행해지는 짧은 기도, 이것은 은혜의 가사상태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 짧게 기도하고자 하는 유혹은 대게 세 단계를 거쳐서 실행되게 디는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는 피할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짧게 기도하도록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그렇게 악한 것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너무 육신이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기도하기 힘들 때, 혹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의무 때문에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기가 매우 어려울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죠. 여러분들이 의사라고 칩시다. 새벽기도 가려고 하는데 휴대폰이 울리면서 수술하러 오라고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러면 주님에 데려가실 사람이면 수술해도 데려가시고, 살릴 사람이면 내 기도 끝날 때까지 살아있겠지. 그리고 가는 것은 사실 살인방조죄입니다. 자기가 의사면 빨리 가서 하고 그것이 싫으면 차라리 분식집을 하지, 왜 병원을 해요. 가야죠. 그러나 계속 반복되면 어떻게 되요. 허셀포드 목사님은 자기의 설교 집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인 하나가 교회를 안 나와요. 왜 그랬느냐? 그랬더니 매주 안 나오는데 매주 그럴듯한 핑계가 있어요. 이번 주에는 왜 안 나왔느냐? 그랬더니 송아지가 웅덩이에 빠졌데요. 그래서 그놈 끌어내느라고 애를 쓰다 보니까 결국 주일날 예배에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웅덩이에 빠져서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이 까져서 피가 나는 송아지를 그대로 두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정말 옳겠습니까? 그래서 허셀포드 목사님이 슬기로운 분입니다. 아, 그럴 수야 없죠. 그 송아지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잘하셨어요. 그런데 집사님 자꾸 빠지면 팔아버리세요. 그러니까 한 두 번은 그렇게 병원에 달려갈 수 있지만 새벽기도 갈 때마다 전화 오면 차라리 병원을 옮기든지, 뭐 하여튼 변명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의 틀을 바꿔야 됩니다. 돈을 좀더 벌어서 당직 의사를 하나 사든지, 뭔가 그렇게 틀을 바꿔야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보면 진짜 주님을 위해서도 그렇게 충성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회사에 충성하는 사람들 있죠. 그런데 주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거시려. 그렇게 충성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그런 사람들이 직장에서 버림 받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십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죠.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에 쓰리요.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 맛을 잃은 소금이 사실은 흙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염분이 땅 속에 들어가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을 저는 표현하기를 삶에 있어서 비 영적인 틀입니다. 그런 속에 들어가게 되면 은혜의 지배로 돌아오기가 굉장히 힘이 듭니다. 첫 번째는 어쩔 수가 없어서 환경 때문에 기도를 못하게 되요. 그것은 좀 낫죠. 두 번째는 뭐냐면 기도가 필요한 상황인데 순발력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상황인데 그 필요에 부흥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막 해야 되는데 그러면 즉각적으로 매달려서 기도해야 되는데 머리 속에서 계속 재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황은 끝납니다. 그런데 안 좋은 상황으로 흘러가지. 마지막 세 번째 단계에 가서는 어떻게 되느냐면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 합니다. 처음에는 신자가 기도를 버리는데 시간이 점점 흘러갈수록 기도가 신자를 거절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됩니까? 은혜의 상태로부터의 부패는 가속화 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상습적인 짧은 기도는 결국 은혜의 가사상태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 가사상태로부터 돌이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자신 속에 남아있는 기도의 불씨를 사용해서 그것을 지펴야합니다. 아니 뭐 상습적인 계속 짧은 기도 하고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는데 어떻게 또 은혜가 남아있습니까? 남아 있습니다. 뭐에 의해서 입증되느냐면 성경에 보면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자. 라고 판단을 받던 강력한 탄핵을 예수님께로부터 받던 사대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대 교회를 향해서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남은바 네 안에 죽게 된 것을 굳게 지키라.” 거기에서 ‘죽게 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죽으려고 그 길을 향해 가고 있는 은혜, 숨이 깔딱 깔딱하면서 꺼져가는 그것이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죽은 자와 같았던 사대교회에서 남아있었습니다. 거듭난 신자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은혜가 완전히 죽어버린 그런 영혼의 상태에는 가지 않습니다. 항상 남아있습니다. 그 남은 것을 찾아서 그것을 순종과 믿음이라고 하는 후, 부는 작용으로 그것들을 일깨워야합니다. 그러면 그 불이 다시 확 살아납니다. 그래서 다시 열렬히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기도생활의 태만함은 결국 두 번째로 마음에 깨어짐이 없는 기도생활에 만족함으로서 가속화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이 영혼이 은혜의 상태에서 부패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서는 기도 그 자체 안에 영혼을 쇄신하는 작용이 있습니다. 그 쇄신하는 작용은 마음이 깨뜨려지는 그런 기도의 실천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마음이 실려 있지 않는 기도입니다. 우리들이 이 성화의 문제는 아주 냉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주님이 주시는 것은 주시는 것이고 안 주시는 것은 안 주시는 것입니다. 자, 요한 칼빈은 우리에게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우리가 함부로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죠. 40일 금식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면 주님이 사십일을 하셨는데 자기도 사십일을 하면 주님과 똑같단 말이냐? 그러니까 39일만 해라. 그런데 사실 요한 칼빈이 지적하는 바는 예수님을 우리가 당신을 닮기를 원하시지 당신을 흉내 내는 원숭이가 되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될 것은 무슨 사십일 금식기도, 성전에 가서 성전을 숙정하시는 장면이라든지, 예수님이 발 씻기셨으니까 자기도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긴다든지, 그런 것들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 뭐 무릎 꿇고 발 씻겨줄 수 있죠. 그런데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런 섬김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잖아요. 그 사람 발 씻겨놓고 그 사람을 자기의 발톱의 때만큼도 못하게 여긴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때는 벌써 새 숫 대야에서 떠내려갔는데 그런 것들을 모방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그분의 인격적인 특질, 성품적인 특성, 자기부인, 순종, 믿음, 고난에 대한 철저한 복종, 하나님께 대한 사랑, 온유함, 슬기로움, 이런 인격적인 자질과 영적 특성들을 본받기 위해서 애를 쓰라는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성화의 문제는 기도 응답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보니까 누가 그렇게 인격이 그렇게 고상해요. 정말 그 사람만 만나면 주님을 뵈옵는 것 같은 그런 온유함이 느껴지고 그 얼굴에서 정말 천상의 기쁨을 소유한 인격적인 특질들, 너무 갖고 싶어요. 그래서 사십일 금식기도를 세 번했어요. 주께서 나를 죽여 버리시든지, 그런 인격을 주시든지. 그리고 사십일 기도를 세 번이나 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뭐냐면 이렇게 애절하게 매달리면 주님이 응답해주시리.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보다 그 120일 동안 아침, 점심, 저녁 다 먹고,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리고 새벽마다 주의 기도의 은혜 속에서 깨뜨려지고 예배의 은혜 속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뜻대로 살기 위해서 매일 매일 분투하는 성도가 훨씬 그 사람보다 빨리 그 고매한 인격의 사람으로 성숙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화의 문제를 이렇게 간절한 기도로 단번에 해결을 봐서 응답으로서 완제품의 성화가 자기에게 와서 푹 뒤집어 씌워지리라고 하는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은 그 성화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성화는 밖으로부터의 개조가 아니라. 이 내면으로부터의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그가 변해서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한 순간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도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순간을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순교보다 어려운 것은 순 생입니다. 그러니까 순 생의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순 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순 생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순 사라, 즉 순교라고 하는 은사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순교는 은사입니다. 아무나 자기가 가고 싶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약에 주어져도, 그것을 활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제가 아는 목사님이 교역자 회의 끝나고 나면 항상 커다란 액자가 있는데 한국교회의 순교자. 그래서 사실 순교자들은 그런 것을 원하지도 않는데 그 후손들이 사진을 붙여서 이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위해서 순교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것을 몇 만원씩 받고 교회는 또 그것을 방에다 걸어놓고 그더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전부다 다 잘못하는 것입니다. 순교자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펼쳐놓고 한 사람씩. 이 목사님이 옛날 목사님이시니까. 그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서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씀하셔요. 하루에 한 사람씩 말씀하셔요. “이분은 참 인격이 고매한 분이었습니다. 오직 믿음 하나로 산 사람이었고, 결국은 일제 시대에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매 주일 하다가 어느 주일에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글쎄요. 이 사람이 여기에 왜 올라왔는지 모르겠네요. 순교는 하셨다고 했는데 진짜 순교를 했는지 그냥 죽임을 당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를 않습니다. 왜? 평소에 이 사람이 저런 신앙이 가진 사람이었는데 죽었다. 아마 순교가 아니라. 타살이었을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낙지 신자에게는 순교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경회에 안 온 사람들 좀 보세요. 웃지도 못하고 저러고 있잖아요. 낙지 신자들이죠. 그래도 삼십초면 설명하겠습니다. 너무 소외감을 느끼니까. 낙지신자란 제가 만들어낸 신자인데 모든 상황에 훌륭하게 적응하는 신자입니다. 통발 속에도 들어가고 그리고 네모난 상자 속에도 들어가고, 그리고 동그란 그릇 속에도 들어가고 그리고 판판한 접시에도 퍼질러 누워있고, 이것이 낙지 신자입니다. 그렇게 현실적응 하던 신자가 어느 날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의 뜻대로 살지 말고 주님을 버려’ 그럴 때에 그 퍼질러 있던 접시에서 벌떡 일어나서 ‘아니 어찌 그런 일이’ 이런 순사의 결단을 낙지가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낙지는 그냥 그렇게 어울려 놀다가 그러다가 결국 매운탕 속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그냥 잘라져서 산 낙지로 회감으로 나가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낙지 신자에 대해서 많이 묵상했습니다. 이 낙지 신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큰일입니다. 그런 응답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죄 죽임의 작용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가 영혼을 부패로부터 보존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요건을 갖추어야합니다. 모든 기도가 이런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능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두 가지인데 먼저 하나는 열렬함입니다. 이 열렬함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서 뜨겁게 간절히 고양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뜨겁고 열렬해질 때 우리 안에 있는 이 기도를 방해하는 죄의 세력들이 은혜의 상태에서 그를 미끄러지게 만드는 부패의 요소들이 불태워지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열이 아주 뜨겁지가 않으면 절대 죽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어느 병균인지 잘 모르겠는데 뭐 불과 한 6-70도만 가열해도 죽는 세균이 있고, 그리고 상당히 열을 뜨겁게 가해도 잘 안 죽는 균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균들의 경우에는 온도가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00도씩 끓는 물에 5분을 삶아야지 겨우 죽는 균을 한 50도쯤의 미지근한 물에다 5시간을 괴롭힌다고 하더라도 그 균은 좀 피곤하겠지만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이 은혜의 상태로부터 우리를 미끄러지게 하는 이 죄들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생각과 이 모든 안에 베어있는데 그것들을 전방위적으로 죽이기 위해서는 열렬한 기도가 필요하고 그 은혜의 열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육체의 열렬함이나 열기가 아닙니다. 왜? 그런 육체의 열렬함이 영혼의 열렬함과 일치할 수 있습니까? 마음에 아무것도 없고, 바알 선지자들처럼 열렬해서 그들은 자기의 몸에 상처까지 내고 피를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혼의 열렬함입니까? 그렇게 소리, 소리 지르고 기도해요. 덕의 비결은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 혼자 기도하나 다른 사람도 다 기도하는데 그렇게 하고 소리, 소리 지르고 기도해요. 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제 할 수 있어야합니다. 울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커다란 수건 같은 것을 가지고 와서 자기의 얼굴을 묻고 기도하면 얼마든지 마음껏 울면서 다른 사람에게 방해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소란을 피우고 이런 열렬함을 전부다 거짓입니다. 더욱이 자기도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는 방언으로 한 두 시간 내내 기도 하다가 털고 집에 가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열매를 맺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뭘 기도를 했는지 알아야지만 그 기도 제목대로 살터인데 “뭘 기도했냐?” 그러면 모릅니다. “어떻게 살 것인데?” 모르는 대로 살아야지.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방언은 그렇게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전부다 거짓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 자리가 교회이든지, 버스 안이든지, 심지어는 똥 두간 위에서든지 그 마음에 깊은 곳에서 길어나는 그 기도가 진정으로 열렬한 기도이고 그리고 그런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우는 시늉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무엇인가 기도하는 분위기로 몰고 가려고 하는 그러한 모든 행동들은 모두다 아주 저열한 행동들입니다. 물론 저는 통성기도의 필요성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예배드릴 때 우리들이 함께 기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나는 통성기도의 필요성도 인정하고, 그리고 모든 것이 다 가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분은 물론 그 시대에는 카톨릭 사람들이 그렇게 염주를 손에 들고 중얼중얼 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큰 소리로 하는 기도가 널리 유행하던 때였으니까 그런 것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은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라고 하는 그의 논문 속에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두 가지 경우 이외에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대표기도 할 때와 또 하나는 성령께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부르짖게 하실 때 그 이외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통성기도도 가능하고 소리 내서 기도하는 것도 가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초점은 영혼의 열렬함에 있는 것이지 육체의 열렬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열렬함에 이르기 이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기도를 길어 올리는 마음을 바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진실해져야 합니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 한분 앞에서 자신이 살을 베고 뼈를 깎아서라도 그분의 마음에 용납되고자 하는 그분에게 사랑받고, 그분께 자기 자신이 기도와 함께 제물로서 연납 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 있는 것으로 자기 가슴에 다가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 라고 하는 결의와 각오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그래서 자기를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해야합니다. 모든 거짓을 아주 미워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결코 그가 성화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는 지속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망치로 치고, 톱으로 잘라도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커다란 철근 같은 것들을 어떻게 일군들이 잘라내는지 한번 보십시오. 그들 손에는 산소 용접기가 들려있습니다. 그리고 잘라야할 철근에 분필로 줄을 그어놓고, 그리고 가서 제일 먼저 산소 용접기를 켜고, 자르고자 하는 지점에 놓습니다. 그 수천도가 넘는 뜨거운 불길이 거기에서 확 쏟아져 나올 때 그 철근 껍데기를 싸고 있던 때들이 일순간에 타버리면서 불꽃을 냅니다. 그래도 이 용접공은 조용히 앉은 자리에서 한 곳에 계속 불을 댑니다. 새카맣던 쇠가 붉은 빚을 띠기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면 새빨갛게 그 지점이 달아오릅니다. 그래도 눈을 떼지 않고 한 지점에 계속 용접의 뜨거운 불길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면 드디어 벌겋게 타오르던 그 지점이 거의 눈부신 빛을 내면서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고 한곳을 계속 댑니다. 드디어 쇠가 국물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하면서 이 용접기가 이동하는 방향을 따라서 서서히 녹으면서 도저히 끊어낼 수 없는 그 엄청난 철근이 잘라져나가는 것입니다. 한번에 수 천도의 열을 낸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정함이 없이 그렇게 쬐다 말다, 쬐다 말다 하면 하루 종일 있어도 그 철근을 잘라낼 수가 없습니다. 집중과 지속성입니다. 그 한곳을 계속해서 녹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이 죽고 은혜의 상태에서 부패하려고 하는 우리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보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육체를 호되게 다루는 자기 극기와 그런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복종시킨다.” 라고 할 때에 그 때에 그 쳐서 복종시킨다. 라고 하는 용어가 노예를 다루는 용어입니다. 당시 노예는 그렇게 인격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되는 그런 짐승과 같은 사람들로 취급되었습니다. 노예를 먼저 강력하게 복종시키듯이 그렇게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의 게으름을 영혼으로 담대히 책망하고, 그리고 가혹하게 다루어서 그래서 육체가 영혼을 위해서 훌륭하게 봉사하도록 만들어야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여러분들이 이따금 사경회에 나와서 휴지나 몇 장 쓰고 간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성화의 길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철저한 열렬함을 방해하는 것이 자기 사랑입니다. 동물들의 자기 사랑은 단순합니다. 자기를 보존하고 종족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 사랑은 보다 높은 고상한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고상한 의도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고 싶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위에 군림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은 제쳐놓고 하나님의 선하신 구원의 계획은 파기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계획이 그 자리에 대신 서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패로 미끄러진 자신의 망가진 영혼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쏟아 기도하게 되면 결코 이 짧은 기도에 만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열렬하게 지속적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전 삶으로 주님을 찾는 구도자가 되여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기도 자는 가장 훌륭한 구도자입니다. 열렬한 기도의 은혜는 간절한 추구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열렬히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열렬히 기도할 수가 있고, 간절히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하는 구도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만이 열렬한 기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주신 구원의 가치를 새기면서 주 뜻대로 살고자 하는 그런 신자가 될 때 그런 치열한 삶의 껍질 속에서 기도의 불꽃은 하늘 높이 충천하는 화염처럼 타오르는 것입니다. 깊이 각성해야합니다. 그렇게 정함이 없는 육체와 쉽게 야합하는 삶을 통해서는 우리들이 진실한 성도의 자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제껏 우리를 인도하신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들이 기도할 수 없을 때에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의 은혜를 회복시켜 주셨는지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주께 돌아오는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부패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