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2
녹취자: 김미영
읽어서 이해가 안 된다 그러면 철학적인 훈련이 ‘내가 굉장히 빈약 하구나’ 생각하시면서, 그러면서 논문을 누군가가 설명을 해 주면 아주 좋고 천천히 읽으시면. 핵심이 뭐냐 하면, 이 세상에는 미덕이 있는데 미덕이 하나님 믿는 사람들에게만 미덕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미덕이 있습니다.
미덕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다른 사람, 타인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영혼의 힘입니다. 이게 미덕입니다. 다시 말해 보겠습니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 영혼의 힘입니다. 이게 바로 덕입니다. 그래서 ‘저 분은 참 덕이 많아’ 그런 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다 관계를 좋게 하고 뭔가를 베풀 때, ‘덕이 많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그 덕이 1차적인 덕과 2차적인 덕으로 나누어서 일반은총의 차원에서도 얼마든지 훌륭한 덕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그것을 논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교도들은 탁월한 도덕, 그리고 비종교인들의 탁월한 덕성, 이런 것들이 얼핏 보면 훌륭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모든 것을 확장해 가보면 결국은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신념과 관련돼 있어서 하나님이 천지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는 데는 결함이 있다 이런 논증을 합니다. 아주 논쟁이 정교하고 풍부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책을 읽으면서 저는 아주 커다란 도움을 받았고 무엇을 설교하든지 우리가 왜 선을 추구하고 악을 버려야 하는 가 이런 것에 대해서 아주 자신 있게 설교하고 설득할 수 있는 그런 도구들을 저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번역이 되어 있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원서를 보면 더 어려운데.
이 책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책이라고 그러는데 아주 유명한『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니코마코스는 철학자들이 생각하기를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일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 이름입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무엇이 참 좋은 것인가’ ‘인간으로서 탁월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사실은 플라톤이『국가론』에서 논증을 했던 것을 여기서는 이제『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범위를 훨씬 좁혀서 논증을 합니다. 다 읽으면서 읽었을 때에 많은 의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무엇인가를 ‘절대적으로 선하다’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그게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매우 약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에드워즈는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그것을 밝힘으로써 당시에 도움이 필요 없고 우리들이 평화롭게 세상을 살면 그것이 훌륭한 것이 아니냐 이렇게 주장하던 소위 계몽주의와 도덕주의 사조에 대해서 그것으로써는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통쾌합니다. 아주 굉장히 훌륭한 책이고 정말 다른 책을 팔아서라도 이 책을 꼭 사시면 좋겠습니다. 제 책을 팔지 마세요. 제 책은 팔면 제가 섭섭하니까 다른 책.
그 다음에 이제 삼위일체론입니다. 제21권의 제목이『삼위일체, 은혜, 그리고 믿음』이라는 제목이 붙어서 21권에 실려 있습니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삼위일체, 은혜, 칭의 이런 것들을 다루고 있는데 에드워즈의 논지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은혜라고 하는 것이 곧 성령 자신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와 신론에 대한 해석은 17세기 개혁파 전통주의자들의 신론에 의하면 그렇게 탁월해 보이지는 않는데 용어 진술의 정교함, 깊이 이런 면에 있어서 선배들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술을 보면 화면에 나오기 시작합니다만 아우구스티누스, 피터롬바르드, 최초에 조직 신학사를 써서 그래서『명제집』이라고 하는 책을 펴낸 10세기의 아주 유명한 중세 신학자입니다. 또 토마스 아퀴나스, 그 다음에 기롤라모, 잔키우스, 이 사람은 아주 개신교의 신학을 스콜라주의적으로 구체화한 아주 탁월한 학자입니다. 그 다음에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 이 사람은 17세기를 살았던 화란의 아주 탁월한 신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쓴 TPT라는『Theoretico-practica Theologia』라고 하는『이론-실천 신학』이라고 하는 두 권의 아주 유명한 조직신학 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그 책을 썼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 책을 성경 다음으로 탁월하다고 칭찬했던 책입니다. 그리고 이제 코케이우스, 이 사람은 삼위, 계약신학을, 언약신학을 개혁신학 안으로 끌어 들어온 그런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삼위일체론으로부터 다양한 내용들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를 보면서,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의 접근방식을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삼위일체라고 할 때 삼위는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 혹은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이면 한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 이시면서도 세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인격은 분리된 독립적인 인격이지만, 삼위 하나님의 인격은 분리 독립한 인격이 아니라 서로와 서로를 구별하면서도 교통하게 하는 인격입니다. 이걸 위격이라고 부릅니다.
‘일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몸이 하나다’라는 뜻인데 거기서 ‘몸 체’자가 우리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의 몸에 머리가 세 개 난 것 같은 그런 식의 표현이 아니라 여기서 일체라고 할 때 체는 ‘우시아’ 신적 본질을 의미합니다. ‘하나의 신적 본질에 세 위격이 있으신 분이시다. 이게 하나님이시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교리입니다. 그래서 서방교회의 라틴 교우들은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먼저 ‘일체’를 먼저 설명하고 ‘하나님은 동일하고 단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신 한 본질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일체를 먼저 설명하고 그런데 하나인 하나님이 어떻게 삼위가 되실 수 있느냐를 설명합니다.
이에 대해서 동방교회는 먼저 셋에서 출발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 계시다. 각각 세 위격이시다. 그런데 그 세 위격이 어떻게 하나의 동일한 본질인 일체이실 수 있느냐 이런 방식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어떻게 보면 서방교회의 접근은 플라톤의 접근 방식을 많이 닮았고, 동방 교회의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 방법을 많이 닮은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그들이 삼위일체에 대해 논쟁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 이제 각각 서로 다른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인데 어떻게 일체가 될 수 있느냐 라고 할 때 페리코레시스라는 교리를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희랍어로 ‘페레코레시스’라고 하는 것은 ‘상호교통, 연결’, 이런 뜻인데 비유를 하자면 삼위 하나님이 각각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신데, 이 셋이 세 위격이면서도 하나의 본질로 교통할 수 있도록 페리코레시스가 이루어 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격이 셋이지만 하나의 본질을 가지신 분이시다. 이게 바로 삼위일체의 접근 방식입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압도적으로 개혁신학에서 많이 사용하던 서방교회의 접근 방식을 접고 동방교회의 접근 방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겨우 하나님이 사랑이 계시다고 한다면 ‘God is love’라는 말이 성립을 안 하잖습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한다면 사랑할 대상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은 사랑이셔야 되잖아요? 당연하죠? 이해되시죠? ‘무엇은 무엇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외부의 환경과 상관이 없이 그것이어야지만 a is b라는 명제가 성립이 되잖아요? 맞죠? 그러면 하나님은 이 세계에 당신이 관계하면서 사랑할 인간을 갖기 전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셔야 되잖아요? 그런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혼자서는 못합니다.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모든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도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고 삼위가 서로를 사랑하시므로 ‘하나님 자신은 사랑이시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에드워즈는 이렇게 관계 중심적인 삼위일체론을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서 세 위격의 관계로 설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피조세계와 맺으신 관계, 나아가서는 피조물이 서로에 대해서 관계를 맺는 모든 설명의 기초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세상에서 모든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게 우리들이 신앙이 없어도 나이가 들면 남자와 여자가 뜨겁게 사랑하고 또 뜨겁게 사랑하고 싶어 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서로 상호교통하고 사랑하시는 그것을 무의식중에 본 뜬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도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본뜨게 하시기 위해서 내가 아무 상관이 없는 여자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면 다른 사람과는 비교되지 않는 각별한 사랑을 함께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교회가 정말 사역이 성공했느냐 라고 하는 것은 빌딩을 얼마나 짓고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줬느냐가 아니라 그렇게 사역한 열매로써 그 사람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해서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공동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교통을 근접하게 본 따고 본 딴 공동체가 되느냐 그 성숙한 정도가 사역의 성공을 재는,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척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에드워즈의 신학이 각광을 받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일단 서로가 다르고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못 견뎌 하잖아요? 저 사람하고 나하고 생각이 딱 맞으면 딱 화해를 선포하고 같이 가는데, 전혀 달르고 자꾸 딴 얘기를 하면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고 짜증이 납니다. 그럼 급기야 안 좋은 사건이 생기면 아주 교만해서 다음에는 아주 상종을 안 합니다. 그런데도 계속 상종을 하자고 그러고, 주먹이 날아간다든지 아니면 욕이 나가든지 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하면 안 되고, 한 사람의 예쁜 여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여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무슨 여자의 도움이 필요 하냐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그 여자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십시오. 모두 똑같은 밝기와 똑같은 크기라면 얼마나 못생기겠어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캄보디아 공항에 내려서, 수많은 캄보디아 여자들이 지나가는데 전부 다 김태희라면 얼마나 무섭겠어요? 그 중에 누구도 선택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똑같습니다. 한 사람이 한 번에 탁월하기 위해서는 공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의 배경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각각 그렇게 이바지 하면서 살아갑니다. 농담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아름다움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쁜 얼굴과 외모에 둔다면 사실 우리 중 대부분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제목이지 않습니까? 일평생 기여하는 게 잘 생긴 사람 돋보이도록 그렇게 이바지 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외모만을 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엄청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아니하고 중심을 보시느니라.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복합적인 것입니다. 혼자 있어서는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파란 바다는 하얀 백사장 옆에 있어야지, 하얀 백사장 위에는 노송이 숲을 이루고 있어야지 예쁩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구름이 떠가고 거기에 갈매기가 날면 예쁘지만 갈매기가 여기에 날아다니면 안 되지 않습니까? 정말 더럽고 우리 모두 다 문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더럽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적합한 장소를 이탈하는 것입니다. 그게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이런 삼위일체를 다음 그림처럼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사랑을 받는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신랑인 아들에게 사랑을 부어주시면 아들에게 부어진 사랑은 신부인, 신랑과 연합된 신부인 교회에 부어지고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교회에 부어주신 그 사랑에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개신교는 너무 약합니다. 잘못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아주 심각할 정도로 거칠기 짝이 없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 은혜를 받았다’ 그러면 항상 생각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원래 우리교회 전체에 부어 주신 것인데 내가 그 교회의 한 지체이기 때문에 받았구나 그리고 교회에 부어 주신 이것은 원래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주신 것이구나 아들에게 부어 주신 이것은 원래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구나 그래서 결국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기뻐하는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야 되는 구나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선교, 전도가 무엇이라 그랬습니까? 선교가 뭐라 그랬습니까?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따라해 보세요. “선교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설득하는 것.” 그래서 복음이 필요합니다. 항상 잊으면 안 됩니다. 일평생. 선교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설득 하는 것이다.
그다음 『신앙정동론』, 신앙감정론이라고도 번역이 되는데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Religious Affections』이라고 하는 책인데 아주 탁월한 책입니다. 번역되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여기서 affection이라는 말은 우리들이 흔히 영어에서 사랑 혹은 정서라고 번역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어떤 뜻이냐 하면 잔잔한 호수가 있는데 무지하게 커다란 호수입니다. 그런데 헬리콥터가 높이 떴습니다. 지프차만한 바위 덩어리 하나를 던졌습니다. 물에 슝 내려와서 풍덩하고 빠지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 잔잔하던 호수에 돌이 떨어지면서 파도가 치겠죠? 처음에는 이렇게 큰 파도가 치고 그 다음에는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지고 하면서 잔잔한 물결이 정확하게 원을 그리면서 호수 저 끝에까지 퍼지게 되겠죠?
우리의 잔잔하고 움직임이 없던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지식이 돌멩이처럼 풍 떨어지게 되면 우리의 마음속에 감정이 일어나겠죠? 그게 affection입니다. 그게 아름다운 것을 인식하면 사랑의 감정이 일어나고 더러운 것을, 추한 것을 인식하면 혐오한 감정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신앙의 감정이 인간에게 생기게 되는가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사실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철학적으로 그 때가 조나단 에드워즈가 살던 시대가 대륙에서는 존 로크를 중심으로 하는 경험주의가 활짝 꽃 피우고 있었던 사조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또 예술사적으로는 낭만주의가 유행하던 시대였습니다. 원래 낭만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로망입니다. 로망. 낭만주의는 왜 생기가 되었냐면 맨 처음에 데카르트에 와서 이성의 절대성, 그 다음에 자아의 확실성, 그 다음에 과학의 신뢰성 이런 것들을 주장하는데 그렇게 하다보니까 모든 사물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수학, 과학, 법칙, 그 다음에 인간의 이성 이런 것들만 중요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사상에 한참 젖고 난 다음에 회의를 품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면 그러면 도대체 인간의 마음에 와 닿는 이 커다란 느낌, 감정, 이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무슨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사람이 선하게 사는 게 머리를 기른다고 해서 선하게 사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이 뭔지 무엇이 도덕인지를 뚜렷이 압니다. 그런데 실제 삶은 전혀 아닙니다. 왜 그러나 했더니 마음에 와 닿는 느낌이 불결하고 죄악 되고 나쁜 것을, 추한 것을 좋아하니까 이성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건 상관없이 감정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우 있잖아요. 막 싸워요 언제 그래. 그러다가 이성이 시킨 거야 막 욕을 해 주고 싶은데 야, 그건 이야기하지 마라 너 그것까지 이야기하면 나중에 후회한다. 그리고 이성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너무 꼴 보기 싫은 겁니다. 그러면 결국 얘기를 하고 후회해요? 아니면 절제를 해요? 해버리죠? 나중에 미안하다고 하더라도. “옛날에 이러이러한 거 했잖아?” 확 쏟아냅니다. “말 다했어?” 그런데 집에 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아 교인들이 있는데. 왜 그런 말까지 했나? 안 했어야 되는데.’ 후회가 됩니다. 그런데 그걸 못 이깁니다.
그러면서 이제 ‘아니다 인간이 참으로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그러면서 18세기에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소위 도덕 심미주의라고 하는 사조가 일어납니다. 그것을 기독교 바깥에서는 신플라톤주의의 부흥이고 그것을 받아들여서 기독교 안에서는 ‘스콜라 아우구스티니아 모데르나’라는 운동이 일어납니다. 번역을 하면 오늘날의 아우구스토 학문, 오늘날의 어거스틴학, 그런 운동이 일어나면서 기독교적으로 신플라톤주의를 어거스틴으로 재해석해서 어떻게 인간의 감정이 움직임으로써 인간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생각을 하면서 도덕적인 행동을 하는가 하는 규칙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양의 운동이 그 당시에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여러분이 철학 시간에 다 들어본 이야기겠지만 조셉 버틀러, 샤프츠베리, 루디안 컬스 워드, 이런 쟁쟁한 사람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자신의 신앙감정론을 말합니다. 그 신앙감정론의 핵심을 이야기해 보죠. 뭐냐 하면 인간이 지성과 감정이 항상 배치된 것이라고 봤는데 그렇지 않고 지성과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아주 놀라운 속도로 협력하는 기제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지성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말씀을 통해서 인식하면 지식이 들어오는데 지식이 들어올 때에 이 지식을 받고 마음에서는 그 지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역사하시어서 그 성경의 계시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감정이 되어 나타나고 이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은혜를 불러일으킬 때 우리는 추루한 자기 사랑과 이기심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고 이웃사랑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감정론이라는 책은 매우 어렵습니다. 어려운데, 그리고 신앙정동론은 친절한 책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설교로 씌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이 책은 상당히 영향력 있는 책이고 에드워즈의 사상을 공부하는 사람이 이 신앙정동론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에드워즈의 삼분의 이를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에드워즈의 이 신앙정동론 혹은 감정론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느냐 이 표를 보면 가장 커다란 자원은 성경에서 왔고 그 다음에 신플라톤주의, 그 다음에 새로운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운동, 아까 얘기했던 ‘스콜라 아우구스티니아 모데르나’라고 하는 운동, 그 다음에 도덕신비주의 18세기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 있는 학자들에 의해서 일어났던 도덕신비주의, 이것도 넓은 범위 내에서는 경험주의의 아류들입니다. 그 다음에 부흥에 대한 개인적인 영적인 경험입니다.(음성파일이 여기에서 끝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