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즈와 사랑의 목회
(질의응답, 마침 기도 포함)
녹취자 : 오희열
조나단 에드워즈와 사랑의 목회가 무엇인가? 저는 여기에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야기했던 어느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체적인 사상을 아우르면서 여러분에게 조나단 에드워즈의 궁극적인 비전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들어가는 말: 천지창조의 목적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주 중요한 저서 “천지창조의 목적”에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은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의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 자체가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게 이 세계가 필요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하나님은 뭔가 부족한 분이 되십니다. 하나님께 필요가 없는데도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은 쓸데없는 일을 하신 것이 됩니다. 어떤 것으로 대답을 해도 하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에드워즈는 그 설명을 비껴가며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에드워즈를 읽으며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에드워즈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들을 가로지르면서 이해해야 합니다. 에드워즈의 사고에 압도적인 영향을 주었던 기독교 저자는, 물론 성경이 있지만, 저자로는 어거스틴이었고 비기독교 저자는 플라톤, 혹은 플로티누스라는 사람입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그 창조가 양쪽 다가 아닌, 필요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필요 없는데도 만든 것이 아닌, 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라서 하나님이 예술작품처럼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혼신을 힘을 들여서 예술작품을 만듭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그 사람에게 그 예술작품이 필요합니까? 물론 팔아서 돈을 받는다면 필요하겠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없어도 그 사람은 그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에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쓸모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어떤 정신이 그것을 예술로 표현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모든 창조의 근원은 삼위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두 개는 서로 짝을 이룹니다.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충만하게 드러나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그것이 누구에게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자신이 거울처럼 당신이 세계를 봅니다. 물론 그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이 새로운 지식을 얻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그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맨 처음 창조하셨을 때부터,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사회를 의도하시면서 사람을 만드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연히 한 사람만 창조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많은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창조하실 때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회를 향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의도는 무엇인가? 그 의도를 조나단 에드워즈는 “사랑의 사회”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정확하게 성경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사회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회인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사랑하시며 존재하시는 것 같은, 말하자면 이 둘이 원형과 모형을 이룸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회입니다.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은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었으니 그 영광을 하나님도 보고 모든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 안에서 혜택을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입니다. 이 영광은 사람 없이는 하나님께 직접 돌려지고, 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인류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 사회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이런 사회적인 의도를 가진 아주 존귀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목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가면, 여기에서 사랑의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이 “사랑”(love)이 무엇입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을 간단하게 “좋아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에드워즈에게는 사랑과 미움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사랑의 반대의 감정이 미움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좋아하지 않는 것 혹은 싫어하는 것 혹은 혐오하는 것은 미움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원하신 것은 이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하는 이야기는 에드워즈가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가 발견한 것인데,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아담은 흙으로 만드셨는데 두 번째 사람은 신체의 일부를 취해서 만드십니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를 의존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흙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렇게 만드신 이유는, “너희는 영원히 한 몸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몸에는 없어도 되는 살 혹은 뼈가 있는가 하면 없으면 안 되는 살이나 뼈가 있습니다. 손톱깎이로 한번만 깎여 나가도 절명하는 살과 뼈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의 의미는 바로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너 없는 나는 생각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의 배타적인 관계를 봅니다. 사랑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을 읽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가졌던 의문이 있습니다. 만약 죄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어린 아이가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누군가는 태어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속해서 흙으로 만드시지는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그 밑으로 동생들도 태어났다면 이 아이들이 자라서 자기 색시에게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인류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는 사상을 같이 공유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회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죄에 의해서 그 사회는 깨졌고, 깨졌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내어 다시 그 사랑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으며, 그 첫 번째 모판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미래에 성취될 완전한 인류애적인 사랑을 선취적으로 맛보는 곳이며, 서로를 용서하며 이 사랑을 온전히 구현해 나가는 공동체입니다. 이 사랑은 마지막 날에 온 우주적으로 성취되어 질 것이며, 이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존재가 되어서 서로를 사랑할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드워즈의 비전이었고 그것은 개혁신학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에드워즈가 엄청나게 많은 철학적 저술들을 남겼고, 모든 것을 끝까지 파고들었던 논리적인 사람이었지만 어떤 개념들에 대해 정확하게 정의를 내렸던 신학자는 아닌 듯합니다. 에드워즈는 철학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여러 사상들을 두루 섭렵하고 넓게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철학과 사상의 전개를 두 가지 차원에서 기획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갈 것인가?’ 두 번째 차원은 ‘자기가 목회하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 사회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목적대로) 변화시켜 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에드워즈가 어느 한 분야를 전공하지 않은 목회자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주 놀라운 동질감을 느낍니다. 물론 천재성에 있어서는 비교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같은 목회자의 입장에서 공감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의 권리는 저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이유로 에드워즈는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좋아함”입니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어떤 대상을 고정하여 거기에 계속 머물며 그것을 즐기려고 하는 경향’입니다. 영어로는 enjoy라고 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1장에서 나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됩니다. 그래서 영어의 enjoy라는 말은 굉장히 고차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로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데 라틴어로는 “프루이”(frui)라고 합니다.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의 목적이 없는 단계에서 그를 즐거워하는 것, 혹은 향유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이 의미를 녹여내어 “인간의 가장 큰 의무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라고 이야기 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에드워즈는 “좋아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올바른 좋아함인지 올바르지 않은 좋아함인지를 다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좋은 좋아함이든지 안 좋은 좋아함이든지 그것은 정확하게 하나님을 본뜬 것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면 욕망하는 그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에드워즈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좋아할 가치가 없는 것들을 좋아하지 못하도록 폭로하고, 좋아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진짜 좋아할 수 있도록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에드워즈의 목회 평생의 추구점이었습니다. 그 마지막 열매는 하나님 앞의 거룩한 삶입니다.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만 있는 참된 사랑을 인간이 흉내 냄으로써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점은, 하나님이 사랑을 보내주시면 인간은 그 사랑을 파이프처럼 흘려보내기만 하는 것인가 입니다. 에드워즈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에드워즈는 인간을 철저하게 죄인이라고 본다는 점에서는 개혁신학과 일치합니다. 그런 일치성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와 개혁주의자들의 전통을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 주체적으로 사랑하는, 다시 말해 사랑에 있어서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단순히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회의 목적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에드워즈가 강조한 것은 사람이 사랑하는 것 자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 목적하셨던 바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사회를 이루는 것이었으며 이 사랑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오고 유지되고 그분께로 돌아가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인데 타락하기 전에도, 그리고 타락한 후에도 사랑하는 능력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며, 타락하였다고 해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이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에드워즈의 사랑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붙잡힌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신 질서를 따라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도록 존재하는 한 통로이지만 파이프처럼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받은 내가 나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 안에서 사랑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선행적인 사랑이 없이는 인간은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에드워즈는 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보았을까요? 이런 질문을 집요하게 추구하게 들어간 것이 <참된 미덕의 본질>(The nature of true virtue)이라는 작품인데,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작품과 짝을 이룹니다. 상당히 어렵습니다. 다행히 번역이 되어 있으니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철학적인 내용입니다. 그 책을 보면 근본적으로 이야기하는 에드워즈의 논지는 아주 간략하게 말하면 이것입니다. 하나님 아닌 인간 자신 안에 있는 사랑으로 사람들이 사랑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랑에는 각자의 자의성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어차피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가장 거룩한 신자라 할지라도 올바르지 않은 사랑을 할 가능성과 현실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에드워즈는 그 해결책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찾습니다. 이것은 지금 논외의 문제입니다.
아시다시피 조나단 에드워즈 때 이미 개혁신학의 전통들은 무너졌고, 좀 전에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사님이 정확하게 지적했던 것처럼 미국 뉴잉글랜드 사회가 깊은 부도덕에 빠져서 굉장히 힘겨운 상태에 돌아가게 된 것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로 건너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어났습니다. 1620년에 건너갔는데 한 세대가 지나기 전인 1650년대에 이미 수많은 목회자들이 통탄하는 글들이 올라왔습니다. 그 중에 <부흥에 관한 역사적인 모음집>(Historical collections of accounts of revival, 존 길리스 편집)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호라티우스 보너(H. Bonar)라는 사람이 선조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놀라운 경험들에 대한 회상을 또렷하게 합니다. “나는 그 시대도 보고 이 시대도 보았다. 그 시대의 나의 사회는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이웃 중에 누구 하나라도 헐뜯는 사람이 없었고 무례하게 행동하고 뻔뻔스럽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신앙적으로 너무 후퇴해 있다.”라고 한탄을 합니다. 이것이 1650년 혹은 1660년대였다면 에드워즈가 태어난 시대를 고려하면 50년을 더 지나야 하는데, 이때의 상황은 지금처럼 발달한 문화는 아니었어도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느끼는 폐해, 이기주의, 성적인 탐닉을 비롯해서 물질주의 풍조, 도둑질, 이런 것들이 사회에 만연해 있어서 청교도의 정신을 물려받은 후손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입니다.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대륙에서 시작된 소위 이성주의라는 물결이 넘치게 들어오고 있을 때였습니다. 존 뉴턴이 쓴 “프린키피아”가 외치는 사상들, 곧 모든 자연현상들은 수학적 공식에 의해서 해석될 수 있다고 하는 사상들이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초월하신 하나님, 모든 세계와 사물 안에 계신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초월적 신론을 주장했고, 이 세상은 태엽을 감아놓은 시계처럼 자동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퇴각하셨다는 자연신론적인 사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사상은 미국을 건국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지도자들도 빠져있던 사상이었습니다.
(다시 논지로 돌아와서), 각자의 자기 사랑으로 사랑의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에드워즈의 사상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을 이룰 수 없고, 사랑의 사회를 이루는 일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기에 에드워즈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사랑하는 모든 것이 덕스러운 것이 아니며, 이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덕은 인간의 모든 사랑이 하나님께 매달려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표현대로 만물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만물에게로 다시 내려오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할 때에, 여기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은 어디로 올라가겠습니까? 모두 하나님께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사랑을 가지고 사람과 사물들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니까 올바르지 않은 자기 사랑을 포기하고 꺾을 용의가 있는 것입니다. 왜요? 유일한 사랑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랑한다면 사람들 속에는 일치가 이루어지는데 이 사상도 정확하게 어거스틴의 “Concordia”(일치의 사상)”에서 온 것입니다. 사랑의 일치를 이룬다는 개념입니다. 그것이 물론 우연히 일치했을 수도 있지만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어거스틴이 다 쏟아 놓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18세기의 상황에 맞게 정리를 해서 모든 설교와 자신의 삶 속에 녹여낸 것입니다. 그것이 에드워즈의 신학자로서의 위대성입니다.
(사랑과 관련하여 덕이라는 개념에 대해 살펴봅시다). 최고의 덕이란 무엇일까요? “덕”이라면 생소한 말일 텐데 흔히 누구에게 실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덕스럽지 않다”고 하는데 기독교적 의미에서 볼 때에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희랍어로는 “아라떼”(arete)라고 하고, 라틴어에서는 “비루투스”(virtus)라고 합니다. “아레떼”나 “비루투스”의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덕론을 펼칩니다. “덕”이란 무엇인가? 아주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단어는 몰라도 이 단어는 아실 겁니다. “도덕”(道德). 우리가 많이 사용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도”(道), 중국말로 “타오”라고 하는 것과 “덕”(德), 중국말로 “더” 라는 말이 합쳐져 있는데, “도”는 인간을 초월해서 있는 진리입니다. 객관적인 법칙, 혹은 진리, 혹은 객관적인 원리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초월해 있습니다.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따라서 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그 도를 따라 살 수 있는 영혼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덕”입니다. 그 “도”에 합치하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의 힘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와 그것에 합치하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의 힘을 한데 묶어서 “도덕”이라고 합니다. 에드워즈가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에드워즈의 사상 전체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이런 객관과 주관의 개념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 덕입니다. 에드워즈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만 하면 덕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랑만 하면 덕이다.” 오히려 에드워즈는 그런 식으로 진리와 상관없이 사랑을 펼친다고 할 때 그것은 자기 사랑의 확장일 뿐 그 이상이 아니라고 보고 이것이 아무리 기가 막힌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펼치고 전개되면 될수록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도하신 그 사랑과는 반드시 심각한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고 봅니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윤리학적인 난점에 빠지게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덕이라고 하고, 영혼의 올바른 힘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인도주의적인 측면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하는 것인가 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고안해낸 것이 있는데 –독창적인 것은 아니고 17세기에 이미 개혁파 정통주의 후반에 다 나오는 이야기로서 카메론 같은 사람이 이미 이야기한 것임- 소위 말하는 “이차적 덕”(second virtue)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original, first, prime virtue이고, 하나님과 관계없이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인간의 도덕적인 원칙에 상당부분 부합하는 것, 이런 것을 second virtue 라고 본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한 평가는 여기서 논의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사상은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 서론에서 열어놓으면서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설명하기 전에 오현제들이 로마제국을 올바르게 통치했을 때 하나님이 주신 복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사상들이 다 연결됩니다.
목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목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 때에 인간을 사랑하게 되는가? 여기에서 ‘아름다움’(beauty)의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에드워즈의 작품은 객관적으로는 beauty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그 다음으로 주관적으로 많이 나오는 단어는 sweetness입니다. 이 단어는 다른 신학자들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의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철저하게 청교도의 경험 신학적인 유산을 물려받고 자신의 극적인 체험 속에서 그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에서 칼빈주의자로 전향하게 됩니다. 물론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칼빈주의자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칼빈은 수많은 훌륭한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물에게서 아름다움을 보아야 그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당연히 아름다운 것을 사랑합니다. 예쁜 용모를 가진 자매에게는 기회가 많이 옵니다. 왜? 예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반대는 기회가 적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얼굴만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기회가 됩니다. 돈을 쓰는 것이 일생의 목표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누구든지 돈만 많으면 상관없게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플라톤이 제시했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선한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고 추한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에드워즈도 똑같이 했던 고민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 아름다움의 정체를 가장 먼저 ‘일치’에서 찾습니다. agreement 혹은 consent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이 뜻에 대해서 에드워즈는 철학을 전개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설명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물 A가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평가를 할 때 에드워즈는, B, C, D와의 관계가 어떤가에 의해서 A의 아름다움이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하나님의 세계에 인간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사람들은 어떤 존재로서 어떤 행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 어떤 존재는 이웃, 다른 사람, B, C 의 존재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이 관계를 맺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되었을 때, 그가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하신대로 되었을 때,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여하는 바가 사회 전체를 이루면서 그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가 되었을 때, 그것이 아름다운 상태라고 본 것입니다.
저의 주장을 덧붙이자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어떤 사물 A가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만을 가지고 논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A라는 개별적인 사물 또한 완전해야 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완전에 가까워야 합니다. 완전하다는 것이 하나님처럼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규정하신 기준에 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까지 못 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의 상태에 미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이런 의도가 있다면 당연히 모든 사물들에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있을 것입니다. 꽃은 꽃으로서 완전한 꽃이 있었을 것입니다. 기후가 변하고 땅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변형되었겠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플라톤이 말했던 것처럼- 이데아가 있을 것입니다. 종류적인 이데아도 있고 개별적인 이데아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이데아에 완전히 부합하게 된 상태가 아름다움의 조건입니다. 즉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과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완전성, 다시 말해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의 일치를 어떻게 이루셨습니까? “너와 나, 사랑하는 사람이 만났으니까 우리 둘이 죽도록 사랑하고 다른 것은 아무 관계도 없다.” 이런 식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관계는 이웃과 가정, 교회, 심지어 피부 색깔이 다른 사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 또 지금 살고 있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 남자, 여자, 계층을 막론하고 모든 것들이 그물망처럼 얽히면서 서로의 존재를 빛내주고, 그 관계 때문에 서로가 아름답게 인식되는 그런 상태를 의도하셨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에드워즈가 생각했던 “일치”입니다. 엄밀하게 보면 이것은 ‘존재에 대한 존재의 일치’입니다. 에드워즈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사랑의 원인이 아름다움이고 일치가 아름다움의 요건이 된다고 하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일치를 이룬다고 할 때 두 개만 일치를 이루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어쨌든 다른 사람과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과의 모든 일치, 다른 사물과의 모든 일치를 이루는 전체적인 큰 틀에서의 최종적인 질서는 누가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가지고 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이라고 표현을 하지 않고 철학의 독특한 용어인 ‘존재일반’(being in general)이라는 말을 차용합니다. 이것은 규정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런 뜻도 있지만 반대로 “대상일반”(being in object)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대상 일반을 설명하면 존재의 일반이 어떤 것인지 금방 아실 수 있습니다. 대상일반은 크기, 길이, 넓이, 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물이든지 갖다 놓으면 대상일반을 가지고 그것을 보면서 이것은 긴 물건이고 짧은 물건이고 두꺼운 물건이고 등등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 존재가 하나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즉 모든 존재의 질서를 규율하고 있고 모든 존재를 존재되게 하는 궁극적 원인자로서의 존재를 존재일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것을 에드워즈는 정확하게 하나님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런 관계들이 있을 때 그것을 전체적으로 통괄하는 것이 하나님이시라고 보았습니다. 모든 관계들은 궁극적으로 계속 연관을 맺는데 최종적으로 이 모든 것들은 하나하나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다른 것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고, 다른 것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또 다른 것과 또 관계를 맺으면서 우주적인 커다란 존재의 일치의 그물망을 이뤄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 세계 속에서도 아직 남아있기에 우주 만물은 자연 법칙을 따라 아름답게 움직이는 것이고, 도덕세계 안에서도 남아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도 서로 죽이고 피를 빨아먹는 사회가 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은 어디에 나올까요? 에드워즈는 이것을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원형적 아름다움과 모형적 아름다움입니다. 원형적 아름다움은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아름다움 자체이시나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인간이 이성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모든 모형적 아름다움이 나옵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모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 뜬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탁월한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철학자인 동시에 미학자였습니다. 미학은 경험주의가 일어나고 낭만주의가 발생하면서 생겨났습니다. 17세기 중반 이후에 생겨난 사조입니다. 18세기에 대륙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런 사조들을 이해하면서 에드워즈가 이런 미학적 설명을 했다는 것은 정말 탁월한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다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원형적 아름다움도 사실은 그 이전부터 논하였던 개념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어거스틴이 최초의 미학자라고 봅니다. 후대는 어거스틴의 미학의 전통을 대부분 수용합니다.
자, 그렇다면 아름다운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감동을 일으킵니까? 에드워즈의 설명은 어거스틴보다 훨씬 발전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모형적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흉내낸 아름다움 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연(nature)의 아름다움이고, 또 하나는 도덕(morality)적 아름다움입니다. 전자는 자연계 속에 나타난 아름다움입니다. 좀 전에 맥그라스 목사님께서 자연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를 높이 평가하셨는데, (문제는 누구나 그 아름다움에 감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데려가서 자연 세계를 보여주면 막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을 하며 좋아할까요?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진짜 아름다운 숲 속에 들어갔는데도 그 아름다움에는 관심이 없고 삼겹살 구워먹는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그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는다면 거기가 부흥회 장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칼빈은 객관적인 시간 상으로 보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따른다고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올라가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야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찬양)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그 사랑 알아요
어거스틴이 작사한 것입니다. 물론 그 설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찬양하는 자연에 대한 beauty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맞습니다.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 지식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온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자연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인류가 이런 모형적 아름다움에 대한 올바른 평가 위에 서 있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자연을 학대하고 폭압적으로 지배하는 구조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빨리 종식되어야 합니다. 재작년 한 해 동안에 우리나라에서만 250억 개의 종이컵과 플라스틱컵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중에 절반 이상은 그대로 남아서 이 지구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도덕적 아름다움입니다. 에드워즈는 이 아름다움이 없이는 자연적 아름다움의 의미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도덕적 아름다움은 도덕적 피조물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입니다. 당연히 도덕적 피조물은 천사, 마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천상에서 본다면 그런 도덕적 피조물, 지성적 피조물들이 관계를 규정하는 도덕성, 아름다움, 하나님의 도와 그것을 따르는 인간의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에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도덕적 광경, 그것이 아름다움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화
마지막으로 이런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어떤 인간이 이렇게 환호성을 칩니다. “와! 아름답다!” 환호성을 칩니다. 무엇 때문에 인간은 인식하지도 못했던 아름다움을 인식하게 되고 소리치게 될까요? 그 점에 있어서는 에드워즈가 굉장히 독창적인 설명을 내놓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설명들이 나옵니다. 그 이후에 학문들이 많이 발달했습니다. 그것을 에드워즈는 (지식과 미감 능력으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로 지식이라고 보았습니다. 지식은 실천적인 지식과 영적 지식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아름다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세상에 안 먹는 고기가 민물고기입니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는데 붕어찜에 대해서 라디오에서 설명을 하는데 저는 생각만 해도 흙냄새가 나서 싫었습니다. 그러나 10분 동안 설명을 듣다보니 마지막에 먹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지식을 그렇게 본 것입니다. “객관적 지식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아는 것이 없으면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제도 맥그래스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인상 깊었던 것이, 맥그래스 교수님이 당신의 책에서 TS 엘리엇의 이야기를 인용하는데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감동적인 문장입니다. “경험했으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의미를 파고들었더니 다시 경험되었다.” 여기서 “의미”를 “지식”이라고 보면 됩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경험했으나 의미를 놓쳤다. 의미를 파고들자 다시 경험되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의미를 파고드는 것이 신자의 의무요 특권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지식입니다. 지식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에드워즈는 보는데, 하나는 바깥에서 입력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상상 속에서 떠올라서 기존에 있는 지식과 결합하며 생성된 새로운 지식들입니다. 어쨌든 이런 지식을 잘 들었을 때, 그것이 그냥 흘러가버릴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의 마음에는 딱 꽂힐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저처럼 말입니다. 생전 돈 주고 사먹지 않는 붕어찜을 먹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은 먹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설명을 듣고 의미를 파고들면 다시 그 붕어찜을 먹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미감능력이라고 보는데 아름다운 것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여기에 본성적인 것이 있고 초월적인 것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본성적인 능력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렇게 입어도 “뭐 괜찮네.” 하는 사람이 있고, 저처럼 너무 까다로워서 신발과 윗옷의 색깔이 맞지 않으면 폭력을 당하는 것 같은 심각한 정신현상을 느끼는 것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본성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치된 사랑으로 데려가지 못합니다. 만약 그것이 있다고 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연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된다고 본 것입니다.
여기 사람이, 그리고 세상에 많은 사물들이 있습니다. 어느 누가 가르쳐주지도 혹은 도와주지도 않았는데 이 사람은 이것을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사랑의 출발점은 ‘자기 사랑’에서 온 것입니다. 이 설명도 어거스틴이 이야기했던 “아모르 수이” 곧 자기 사랑의 이론과 동일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불행, 죄짓는 원인을 의지적으로는 ‘자기 사랑’에서 보았고 지성적으로는 ‘교만’(수페르비아)에서 보았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내버려 두어도 세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고 보았습니다. 사도 요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할 때에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할 때 좋아하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맛보는 것, 손에 느껴지는 것, 냄새 맡는 것을 통해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세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이 끌립니다). 어거스틴도 에드워즈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각작용 가운데 인간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끄는 것을 청각이나 후각이나 미각이 아니라 시각으로 본 것입니다. 일치하게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릅니다. 영어로 시각중심주의(Ocular-centrism)라고 합니다. 시각중심주의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그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쁘면 범죄자인데도 팬클럽이 생깁니다. 영상이 감동적이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든지 눈물을 흘리면서 빠져듭니다. 오콜라센트리시즘으로 가도록 강력하게 우리를 밀고 있는 시대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교훈을 더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이런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해야 합니까? 누군가가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보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훨씬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에드워즈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는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신령한 것을 볼 수 있는 새로운 감각(new sense)을 주권적으로 부여하셔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에드워즈는 인간의 중생을 미학적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신령하고 본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감각을 부여받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마음속에, 의식 속에 새로워지는 것을 회심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에게 회심과 중생이 없는 한 어떠한 기독교적인 도덕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 중생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대적자이기 때문입니다. 에드워즈가 많이 설교했던 것이, “Angry against God,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었습니다. <모든 자연인은 하나님과 원수된다>는 유명한 설교가 있듯이 죄인은 아무리 도덕적이어도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 대적하는 감정, 의지는 바꿀 수가 없고 바꾸려면 하나님이 오셔서 그것을 퍼내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부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감각입니다. 그것을 주시되 영혼 속에 항구적인 성향으로 심으시는지 아니면 안 심으시는지에 대한 논쟁, 소위 말하는 성향 이론(disposition theory)에 대해서는 이상현 박사 외에도 수많은 에드워즈 전문가들의 치열한 격투장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나의 견해는 다음으로 유보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이런 신령한 것들을 보여주실 때 사람의 마음속에 확 끌리게 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본 것입니다.
에드워즈에게서 배운다
마지막으로 이것만 설명하겠습니다. 에드워즈 신학의 위대함, 혹은 탁월성은 무엇일까? 에드워즈는 그 당시에 밀려드는 계몽주의 사조, 대륙에서는 경험주의가 주도권을 쥐고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존 로크 같은 사람과 그 이후에 나오는 운동들이 펼쳐가고 있었습니다. 도덕 철학에 있어서 이런 관심사는 18세기에 에드워즈가 처음 가진 관심사는 아니었습니다. 경험주의 후기에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른바 “신-아우구스티누스 학파”(Scholar Augustiniana Moderna) 운동입니다. 그때 어마어마한 저작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철학자들과 신학자,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도덕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사람이 도덕을 행하도록 명령이 주어지고, 그 사람이 그것을 하도록 선택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어떤 작용이 이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서 선한 것을 아름답다고 보고 도덕적인 결정을 하게 하느냐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때부터 자유주의가 이미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그 사람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성경이 아니라 인간 사회를 창조만 해놓고 간섭하지 않는 하나님이신데 인간이 어떻게 도덕적인 사회를 이루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믿으면서도 우리끼리 그런 도덕을 이루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때는 신학사적으로 볼 때, 유럽에서 정통인 원죄의 교리나 칭의, 성화, 죄 죽임, 이런 유장한 유산들에 대한 고려는 상당 부분이 이미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물론 그런 교회들이 남아있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 엄청난 저작들이 나왔습니다. 샤프츠베리, 커드워스를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저작들을 쏟아냅니다. 그런데 놀랍게 스코틀랜드에 있는 에드워즈를 존경하는 목회자들이 에드워즈를 스코틀랜드로 청빙까지 하였지만 그는 사양합니다. 아메리카 사람으로서 영국의 지적인 상황들을 잘 알지 못해서 목회를 잘 할 자신이 없다고 하고 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에드워즈를 존경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가 편집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같은 것들도 이런 일에 기여하게 됩니다. 어쨌든 이들은 에드워즈에게 부지런히 이 책들을 보내준 고마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을 흠뻑 마시면서 최신으로 업데이트 된 도덕이론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인간에 대해서 연구해야 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최종적으로 이런 설명에 이르게 됩니다. 마음에 그려보십시오. 지식과 사랑이라는 전통은 교부시대부터 있던 전통이었고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인간의 마음속에서 만나는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에드워즈는 이것을 완벽하게 설명해냅니다. 에드워즈가 직접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에드워즈의 모든 사상을 종합해서 정리해준 깔끔한 비유입니다. 마음속으로 큰 원형의 조용하고 잔잔한 호수를 그려보십시오. 엄청나게 넓고 바람이 없어서 물결이 하나도 일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엄청난 높이로 헬리콥터가 떠 있고 거기에서 커다란 바위 하나를 떨어뜨립니다. 에드워즈는 이것을 비유하기를, 이것을 사물에 대한 지식이라고 보았고 이것을 인간의 마음이라고 보았고, 이 돌이 떨어집니다. 그럼 어떤 형태가 됩니까? 물결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끝에 가서는 없었던 것처럼 될 것입니다. 이렇게 첨벙 하고 사물이 떨어져서 부딪치는 이 사건을 “인식”이라고 본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데 사물에 대한 지식이 떨어지면 묘하게 이 사람이 가지고 있던 욕망이나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이것과 함께 상호작용을 일으킵니다. 돌이 물에 닿으면, 물체의 낙하가 수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전제가 됩니다. 떨어지면서 인간의 마음에 파도가 칩니다. 이것을 에드워즈가 <신앙감정론>에서 이야기했던 “정동”(affection) -우리 말에는 감정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정확히 대체할 만한 단어가 없어 보입니다-입니다. “정”(情)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한글사전에서는 그냥 감정이라고 표현하는데 감정이 아니라 동작적인 측면과 사실적인 측면을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이 출렁하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것을 인식하면 사랑의 감정이 일어나고 추하다고 인식하게 되면 미움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해보겠습니다. 설교자가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서 정통신학을 공부하고 완벽하게 설명을 해 놓는다고 해도 그것은 돌멩이를 준비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사람의 마음에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사람의 마음을 겨냥해야 합니다. 논에다 던지면 안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겨냥해서 내립니다. 에드워즈는 여기서 인간의 집중이나 그 설교를 이해하려고 하는 열심있는 노력을 절대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청교도들의 경청함(attentiveness)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에 대한 정확한 설명, 인간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출렁거리게 하는 것은 기대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진리와 관련시켜본다면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사랑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창조하였다. 그리고 각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그 사랑은 존재일반에 일치해야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인가? 먼저 객관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 안에 들어가게 되면 객관적인 아름다움만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이성적으로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 속에 어떤 충격이 일어나야 하는데,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맺는 말
에드워즈가 볼 때 목회자의 중요한 사명은, 모든 사람을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함으로써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그 사랑의 질서 속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목회자여야 하는데 그 아름다움의 정수가 자연과 인간의 도덕이 아니라 그 중심에는 성경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름다움의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라고 봅니다. 그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은 세계 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제가 원래 쓰던 비유인데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님이 사용해서 좀 놀랐습니다. 빛이 들어오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프리즘을 통과하면 일곱 가지 빛으로 나갑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들이 다양한 빛깔들로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찬란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신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목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 합치된 사랑을 하도록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것을 버리고 참으로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도록 구하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두서없이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과 답변>
질문 1)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현실의 고통의 문제와 많이 맞물리게 되면서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의미 없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현실적으로 많이 퍼져 있는데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변증적으로 대답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1) 질문의 요지가, 인간이 아름답다고 느껴도 너무 고통스러우면 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문제가 오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당연합니다. 오늘 제가 너무 신나서 생선회를 먹으러 인천 앞바다를 향해 고속으로 달렸습니다. 그런데 앞차가 사고가 나서 세 사람이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생선회집으로 계속 가겠습니까? 돌아오겠습니까? 무슨 뜻으로 이 질문을 했느냐 하면, 인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것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주관적인 것은, 그것이 주는 인상을 능가하는, 자신의 육체적인 존재에 더 큰 영향을 주는 강력한 무언가가 나타나면 인간은 금방 그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을 버리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질문자의 질문은 정확합니다. 고통이 생기면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자연적인 것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령한 아름다움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은 계속 사라집니다. 어거스틴이 이야기했듯이 ‘공간은 우리가 사랑할 대상을 제시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갑니다.’ 그것은 시간의 붙임과 함께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원히 계십니다. 따라서 사물에 붙은 아름다움은 사물이 사라지면 아름다움도 함께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원히 아름다우십니다.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항상 빛이 납니다. 그 아름다움을 우리가 인식하면서 성령의 감화를 받을 때, 그때 변천하는 많은 것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다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는 영원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기는 것이 바로 신앙의 힘입니다. 청교도들에게 항상 습관화되어 있던 것이, 항상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나오지만 그것보다는 ‘그리스도의 탁월성’(excellence of Christ), 하나님의 위대함 등을 끊임없이 묵상하면서 고난에 넘치는 인생살이가 잠시 지나가는 것이고 우리는 그 영원에 이르는 존재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되는데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게 할 때, 인간은 생각보다 하나님 안에서 강한 존재입니다. 그 현실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목회의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질문 2) 회심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죄를 보는 율법의 기능과 그리스도의 처절한 십자가는 그 아름다움을 보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답변 2)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봅니다. 그런데 죄도 똑같이 하나님처럼 안 보입니다. 어디에 죄가 있습니까? 한 번 만져보시겠습니까? 없습니다. 인간이 죄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길은 하나님의 거룩함의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어두움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빛의 개념이 있기 때문에 어두움의 개념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질문의 답이 될 수 있겠습니다.
또 하나의 질문,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하나님의 형벌을 받는 광경은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아름다운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 죽는 것은 어느 정도 ‘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개인이라는 관점에서 놓고 보면 그것은 아름다운 사건이 될 수 없겠지만 (구속사 전체에 볼 때에는 아름다운 사건이 됩니다.) 청교도들을 비롯해서, 서구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고난일을 Good friday 라고 칭합니다. 그 날은 예수님께 ‘좋은’(Good)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부활하셔서 모든 것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사건과 부활해서 승천하신 이 사건 두 개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에 두 개를 분리시키면 안 됩니다. 오늘날 그것을 분리시키려는 사조들이 일어나는데,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로 볼 때 결국 그 사건은 아름다운 사건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올 효과와 혜택, 은덕, 은혜, 이런 것들의 결과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혜택을 받는다는 점에서만 십자가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는 것 같이 보였던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속을 통해 당신의 찬란한 사랑의 성품을 온 인류에 구원의 은총으로 비추게 되었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질문 3) 방영민 목사입니다. 김남준 목사님께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에드워즈 신학에 있어서 천지창조의 목적이 사랑의 사회를 구현하고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 땅에 만들어가는 것이며, 인류 보편적인 가치가 이 땅에서 활성화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목사님께서 강의해주실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구속사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이 난다고 말씀하셨는데 구속사에서 드러난 그 아름다움과 그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이 땅에서 실현되는 것과에 있어서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같이 가야 한다고 보여지는 그 관계성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면 앞으로 목회하고 설교할 때 유익이 될 것 같습니다.
답변 3) 조나단 에드워즈가 가지고 있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저서들을 통해서 폭넓게 개혁신학자들과 접촉합니다. 제가 다 찾아보니까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전체에서 칼빈 이야기를 한 것이 약 열두 번 정도 나옵니다. 결코 적은 빈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16세기와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에 대해 많이 나오고, 심지어 여기 중국에 있는 중요한 철학서들을 이미 그 시대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거의 다 읽었습니다. 중국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사상을 조목조목 비판까지 합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방면에 있어서 그 정도로 폭넓게, 깊게 연구할 수는 없겠으나 그가 폭넓게 독서를 한 사람인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정체가 사랑의 나라라고 본 것입니다. 그 개념은 어거스틴의 두 왕국 이론을 정확하게 계승합니다. 어거스틴은 두 왕국이 사랑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 나라라고 보았습니다. 하나의 눈처럼 되어있는 이 속에 두 개의 원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하나님 사랑에 감화된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질서를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또 하나는 자기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세상 나라’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나 세상 나라나 모두 평화를 원하는데 세상 나라에서는 평화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에 외연을 확대하다 보면 그 사랑은 서로 이해관계에 충돌을 일으키고 이것이 국가와 국가의 충돌을 일으킬 때 그것은 분쟁이 되고 나아가서 전쟁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세상 나라는 망하고 결국 모두 하나님의 나라로 이루어질 때, 하박국서에 나오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가득하리라” 할 때에 그 지식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정확하게 “사랑”이었습니다. 실제로 베르나르두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아모르 이스 에스뜨 노스 노띠띠아” 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 그 자체는 지식이다.” 두 개가 분리되지 않는 신학의 전통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오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사랑의 나라로 이루어지는데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은 태어나기를 자기만 사랑하도록 태어나고 아예 유전인자 속에, DNA속에, 골수 속에 이 사랑이 박혀서 태어나는 존재인데 어떻게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여기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훨씬 강력한 부흥주의적인 견해를 갖게 됩니다. 나쁜 의미에서의 부흥주의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사람들이 변화되는 부흥주의를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국가 속에서 저절로 신앙이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개인 속에서 어떤 영적인 체험을 하고 그 사람이 진실로 변화된 마음과 거듭난 영혼이라는 것을 삶으로 입증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존의 교회들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충돌이 되어서 노샘프턴을 떠날 때에도 사실 압도적인 표차로 버림을 받습니다. 수백 대 몇 십 밖에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표차로 버림을 받습니다. 그 얘기는, 이미 자기가 그렇게 피를 토하며 목회를 했지만 그런 사상에 설득된 사람이 교회 안에 많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것에 대한 에드워즈의 답이 <구속사>(History of redemption)입니다. 두 가지를 크게 중요하게 이야기하는데, 하나는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뜨고 가라앉기를 반복해도 결국은 하나님이 구속을 통해서 이 세계를 완성하시려는 계획은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은 반역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것이 각 사람 속에 적용되어서 그들이 실제적으로 자기의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근본적인 변화가 그의 영혼 속에 일어난 사람은, 가끔 그 사랑이 영향을 받을 수는 있으나 결코 그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 사랑으로 되돌릴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구속사건이 전파되고 그것이 교회에서 설교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설교하는 것이고, 구속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이 참되게 회심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는데 사막 같은 땅에서 점점 더 기름지게 되어서 온갖 곡식과 초목이 무성한 낙원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면, 그 가운데로 흘러가는 강은 구속사라고 보는 것입니다. 구속사에 대한 풍부한 가르침과 교훈이 선포를 통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마침기도>
에드워즈와 다른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에게도 같은 비전이 필요한 것을 아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비록 여러 가지 부족한 것과 오류가 있었다 할지라도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개혁신앙의 전통을 따르려고 애쓰며 자기에게 주어진 세대에 하나님의 나라의 전파를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해 헌신했던 에드워즈를 봅니다. 저희들은 에드워즈를 흉내 내는 사람이 되길 원하지 않나이다. 그를 붙들고 계셨던 하나님의 손에 우리가 붙잡히길 원하나이다.
그가 했던 동시대의 부흥에 대한 치열한 열망이 우리의 마음속에도 타오르게 해 주옵소서. 회심한 자를 바라보고 가슴아파하던 눈물과 이 세상의 타락에 대해 분노하던 그 마음이 여전히 우리에게도 재현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 먼저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야 하겠사오니 에드워즈가 만난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하나님 앞에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영원과 시간에 대한 공정한 생각을 가지고 영원한 것들을 위해 시간 안에 있는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며, 시간 안에 있는 것들을 영원의 빛으로 올바르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에서 인생의 보람을 찾을 수 있도록 역사해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어느 지점에서 우리가 물러서지 않고 진리를 지켜야 하는지, 어느 지점에서 자기 자신의 개인의 생각을 양보하고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본을 보여준 조나단 에드워즈의 본을 저희도 따를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고, 그가 받은 본은 그리스도 예수께 배운 본이오니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를 수 있는 마음도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에드워즈가 말했던 것처럼 귀신도 믿고 떠든다고 하였나이다. 하나님, 우리들이 단지 역사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롱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그 말씀이 선지자들의 후예답게 우리의 골수에 사무치게 하시고 우리 속에 불이 되어 우리를 먼저 새 사람으로 만들고 우리 안에 죄를 죽이며 자기 사랑을 꺾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으로 돌아가는 자기 갱신이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붙들어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전심으로 그가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학문을 탐구하고 그 모든 학문의 탐구의 중심에 성경적으로 올바로 믿고 살고자 하는 경건한 갈망이 있게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교회에 대한 많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지는 것처럼 그렇게 신비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어서 그 몸 전체를 사랑하며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복종하며 하나님 삼위일체 주님을 높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우리 때문에 에드워즈 안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우리의 지역의 교회 안에, 나의 심령 속에, 그리고 조국 교회 속에, 그리고 온 선교지와 열방 속에 일어나도록 은혜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나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애가 마치는 그날, 하나님이 우리의 적은 섬김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위대한 일들을 이루셨던 발자취들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며 우리 주님만을 높이고 주님의 이름은 기억되고 우리는 잊히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