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200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1 (2008/09/07, 주일오전예배)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네 자녀를 돌이키게 하라(삼상3:12-36) 2008.9.7 주일오전 1
2. 어머니의 눈물(눅7:11-15) 2008.9.14 주일오전 10
3. 아이를 위해 기도해야 할 일(잠23:26) 2008.9.14 주일오후 18
4. 자녀를 위해 기도한 아버지(막5:22-23) 2008.9.21 주일오후 22
5.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애2:19) 2008.9.24 수요예배 29
6. 자녀들을 은혜의 말씀으로 세우라(행20:32) 2008.9.28 주일오후 35
1.네 자녀를 돌이키게 하라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삼상2:12-36)
I. 본문 배경
이때는 이스라엘에게 왕이 없던 사사시대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종교적인 지도자의 지위와 정치적인 영도자의 지위를 함께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는 바로 그런 사사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Ⅱ. 믿음의 가문의 불량자들
오늘 성경을 보면 엘리는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은 중요한 사사였는데 그 아들들이 전혀 신앙이 없이 타락하고 죽어가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가문에서 불량한 자식들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믿도록 교육을 받고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1세대로서 하나님을 믿고 집안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아본 사람들은 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엘리의 집안에서 자란 자식들은 3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A. 하나님을 알지 아니함
첫째는 하나님을 알지 아니하는 자식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좋은 많은 것들이 그들의 환경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 경건한 아버지와 하나님께 늘 경배하며 살아가는 은혜의 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아니하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는 자식들이었습니다. 인공위성이 지구 주위를 수없이 돌지만 한 번도 지구와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은혜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가 신앙을 버린 불량자들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B. 제사를 멸시함
둘째로 이들은 제사를 더럽힌 자들이었습니다. 원래 제사장은 제사를 드린 후에 율법에 따라서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오는 음식을 먹고 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제물로 드리는 물질에 더 관심이 많았으므로 헌제자들이 가지고 오는 제물을 심지어 제사 드리기 전에도 빼앗는 악행을 행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제사를 철저히 무시하는 불신앙이 얼마나 컸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교회 다닙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여러분 손에 이끌려서 교회 나오는 것만으로 부모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문제는 그 아이들이 아무리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물려받은 것은 부모의 신앙이 아니라 부패성입니다. 믿음의 가정에 태어난 아이들이라도 진실하게 회개하고 주님을 믿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려서는 여러분들의 손에 이끌려 자녀들이 교회에 나오고 또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 아이들은 여러분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참된 신앙을 받아들일 확률은 점점 작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 성인이 된 다음에 교회에 나와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제가 이제까지 주님을 안 믿던 사람이었지만 우리 부모님의 삶이 워낙 진실하시고 부모님이 열심히 복음을 전해주셔서 그 복음을 듣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러고 교회에 나오는 장년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장년은커녕 머리가 커서 대학만 다녀도 그런 간증은 하지 않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믿음의 가정에서 자녀를 생산하여 유아세례까지 받았지만 결국은 회심하지 않고 여러분들의 품을 떠나 가정을 이룬 자식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이제는 학창시절을 지나 대학을 지나 사회에 나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손에 이끌려서 1년이면 52주를 교회에 나왔고 10년이면 520주 20년이면 1,040주를 교회를 다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설교하였고 많은 가르침, 기도의 시간과 성례가 있고 성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기회들을 여러분들의 자녀는 빗겨갔고 한 번도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이 비회심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는지 묻고 싶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배의 감격과 하나님을 만난 기쁨이 있었다면 어떻게 그 긴 세월동안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데도 내버려두셨습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렇게 긴 세월동안 예배를 참석하며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하나님도 만나지 못하는 예배에 자녀들은 왜 데리고 나오셨습니까? 자녀가 회심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저는 여러분들에게 엄중하게 밝혀두는 바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두 가지만 하면 모두 다 한 것입니다. 신앙을 물려주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키면 모든 것을 다 한 것입니다. 나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몇 해 전 중국에 가서 반갑게 인사하는 몇 자매들을 알지도 못하는 교회에서 만났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는 사람의 자매들이었습니다. 어쩐 일로 여기에 와 있느냐고 했더니 여섯 살 난 아이를 중국어 교육시키기 위하여 남편과 일 년 혹은 이 년째 별거생활을 하면서 외국어 학습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제가 비성경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서 빨리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신앙에 대해서, 아이의 영혼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회심을 못하고 대학에 진학하고 가정을 이루는 일들은 없지 않겠습니까? 자녀들이 어렸을 때에는 여러분들의 손에 이끌려서 고분고분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나 나이 들면 부모의 통제를 벗어납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회심하지 않은 여러분들의 자녀를 가지고 교회에서 고민하며 교역자들이 기도하고 선생님들이 금식하고 자녀들을 어떻게 하든지 회심에 이르게 해야 되겠다고 하는 절실한 마음을 가지고 괴로워하는데도 기도회에도 나오지 않고 자녀를 위해 기도하지 않은 여러분들을 보면 저는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인지 의심이 갑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행한 부모로서의 태만함에 대해서 어떻게 여러분들이 책임을 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2 (2008/09/14, 주일오전예배)
자녀를 낳는 것은 짐승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은 그것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희생해서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자기 새끼들을 보호합니다. 그것도 짐승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자녀에게 하나님을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아직도 회심하지 않았는데 여러분들은 어쩜 그렇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엘리는 한때 신앙의 사람이었고 훌륭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자식들은 제사를 더럽히고 하나님을 욕보였습니다. 어렸을 때 여러분 손에 이끌려 교회에 꼬박꼬박 나오는 것을 대견하게 생각하는 여러분에게 저는 말합니다. 그것도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회심을 안 하고도 어린 아이들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좋아서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용돈으로 협박하는 부모의 권력이 무서워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이 아이들은 나이가 들자 악행으로 타락하여 끔찍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자식이 있다고 할 때, 나이가 어렸을 때는 회심한 아이들과 회심하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 도덕적 차이가 심하지 않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여섯 살짜리가 죄를 지면 무슨 죄를 짓겠습니까? 살인을 하겠습니까? 은행 강도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간통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회심하지 않은 마음은 죄악 된 세상과 접촉하면서 점점 힘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항하며 살아가게 하는 그 무엇이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C. 악행으로 타락함
셋째로 엘리의 아이들은 장성하여 성인이 되자 그들 안에 있는 회심하지 않은 악을 끔찍한 범죄로 드러냈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이렇게 되지 말라는 보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실제로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나 부모의 손을 붙잡고 교회 잘 다니던 믿음의 집안의 아이들이 불행하게 되는 일들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 권사님의 실화입니다. 아들을 장가보냈습니다. 믿음의 집안인 권사님 가정에서 잘 기른 조신한 자매가 있어 결혼을 시켰습니다. 집안에서 크게 싸우는 것은 없었지만 부부사이가 살갑지 않다는 것을 느꼈는데 얌전하던 며느리가 시어머님께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 친구가 생겨 이혼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식은 시어머님이 맡든지 고아원에 주라고 하며 이혼을 했다고 합니다. 어렵지도 않고 간단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들이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나 주일학교 꼬박꼬박 다니고 교회에서 목사님의 주례를 받고 결혼하고 교회에 나올 때 누가 그들을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깨뜨려졌습니다.
결국은 부모가 자식에게 어떤 권한을 행사해서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짧은 기간만 가능합니다. 어렸을 때 교육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나무도 보면 어렸을 때 나무를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커다랗게 아름드리나무가 된 후에 무슨 수로 고칩니까? 어렸을 때 아직 악에 물들지 않았을 때에 선과 악에 대해서 뚜렷하게 가르치고 잘하고 잘못했을 때 부모가 희로애락의 표정을 분명하게 보여야 합니다. 그때 이 아이들이 개념이 생겨나게 됩니다. 크고 나면 부모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고등부 사역할 때 일입니다. 신앙도 없는데 교회에 열심히 나옵니다. 하나님도 못 만났는데 열심히 나오느냐고 물으니 엄마의 잔소리 듣는 것이 귀찮아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엄마는 대견한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착각입니다. 여러분들의 임무는 자녀들을 교회에 달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수단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그 아이가 하나님을 만나서 보이는 부모의 간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붙들어주시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첫째는 여러분들이 신앙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녀들이 참다운 회심에 이르는 것입니다. 회심은 자기의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자기를 구원하시는 이는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갖는 것인데 이 결과로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회심을 단 한번 밖에 없지만 이 회심은 은혜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끊임없이 새롭게 경험이 됨으로서 우리들이 경건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Ⅲ. 무력해진 부모의 신앙
그러면 여러분들은 엘리를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모자랐으면 사사이면서도 자식들을 이렇게 관리했을까?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A. 신령했던 사람
그러나 이 사람도 한때는 신령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엘리의 집에 맡겨져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엘리가 자고 있는데 사무엘이 와서 ‘저를 부르셨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부른 적이 없다고 엘리가 대답하는데 똑같은 일이 3번 반복됩니다. 그때 엘리가 알아차린 후 사무엘에게 충고했습니다. ‘또 너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오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아뢰고 여호와 앞에 서라고 했습니다.
B. 부모의 무력한 신앙과 자녀들
1. 영적 분별력이 없음
엘리가 충고해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도 한때는 그렇게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며 무기력한 신앙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2. 신령한 영향력을 상실함
결국 본인의 신앙이 무기력해지니까 자녀들을 향한 영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자녀들이 다 자랐는데도 부모가 자식을 향해 ‘너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라고 할 때 자식으로 하여금 그 부모의 충고 앞에 머리를 숙이게 만드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부모가 워낙 훌륭하게 살았을 때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부모는 훌륭하게 살아도 자식이 회심하지 않으면 절대 부모에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들 가운데는 목사님은 개인적으로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계시고 아주 끔찍이 교회를 위해 헌신했는데 교회에서 당하게 된 아버지의 끔찍한 고난, 교인들과의 관계, 극도의 가난한 삶 때문에 지긋지긋하게 여기며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녀들을 여러 명 보았습니다. 자기의 신앙이 무기력해지게 되면 자녀를 향한 신앙의 영향력이 사라지는데 이것은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자녀들이 회심하지 않으면 부모가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아도 자식들의 가슴에는 와 닿는 것이 없습니다.
3. 빗나간 자식사랑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3 (2008/09/14, 주일오후예배)
엘리가 끔찍한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너희가 그럴 수 있니? 너희들에 관해서 들리는 소문이 너무 나쁜 소식이 들린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이렇게 범죄 하였느냐?’고 충고하였지만 그들은 아비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제사장인 동시에 모세와 같이 이스라엘을 이끄는 정치적인 지도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자기의 자식을 율법대로 다스려 이스라엘에게 악을 행하지 말도록 경고하는 도구로 삼아야 했지만 그러기에는 아버지가 자식들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굽은 자식 사랑, 빗나간 사랑 때문에 율법대로 이 백성들을 다스려야 할 엄중한 자신의 직무를 저버렸고 결국 하나님께서 엘리와 엘리의 자식들을 한날에 죽게 합니다. 전쟁에서 자식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래서 쓰러질 때에 목이 부러져 같은 날 예언대로 한 가족이 모두 죽게 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훌륭한 것이지만 빗나간 방식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자식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줍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부모들이 자기의 자식이 회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별로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리차드 백스터 목사님은 자신의 책에서 말하기를 ‘회심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사람은 그 사람 자신이 누군가가 울어 주어야 할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이제껏도 회심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점 자기 아집이 굳어지고 세상의 유혹에 물들게 될 때에 신앙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집니다. 그때에 여러분 자식들의 회심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입니다. 왜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고민하지 않습니까? 부담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여러분들의 자식을 남의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이 아이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아이인지 판결해 보십시오. 만약에 그 아이가 구원받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은 그 아이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는 삯군 목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삯군 부모도 많이 있습니다. 낳아놓기만 했을 뿐 그의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무도 행하지 않는 막된 부모들이 이 세상에는 많기 때문에 믿음의 가정에 태어난 수많은 아이들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해보면 정말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교회에 다닌 사람들이었다는 사실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전혀 종교가 없었던 사람들, 혹은 아예 다른 종교를 믿었던 사람들이 복음의 참된 이치를 발견할 때 아주 분명하게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오래 다니며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도 없이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듣고 교회에서 이꼴저꼴을 본 아이들은 자기가 기독교에 대해서 거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신앙에는 새 것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설프게 전하는 그 복음, 신통치 않게 받아들이고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4 (2008/09/21, 주일오전예배)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부모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아이들을 무릎에 앉혀놓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면 머릿속에서 수많은 상상을 하면서 사실처럼 믿고 받아들이고 저녁에 잠자리에 누우면 엄마가 들려주었던 동화의 나라 꿈을 꾸던 순수하던 맑은 시절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고 먹고 살기 위해서 바쁘고 자기의 쓰레기 같은 고민에 빠져서 인생을 허비하다가 나이가 들어 부랴부랴 아이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무엇인가를 가르쳐 보이려고 하지만 그때에는 이미 아이들의 가슴에 부모에 대한 불신과 신앙에 대해 하찮게 여기는 마음, 굳어진 심령이 자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정말로 심각한 것인데 무기력해진 신앙이 되다보니까 자기 몸을 추스릴 여유도 없어서 자식에게 신경 쓰지 못하는데 그 아이는 그 집안에서 태어나지 아니하는 것이 훨씬 행복할 뻔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자녀를 낳은 후 유아세례를 받게 하면서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 서약하였습니다. 우리의 믿는 종교의 도리를 이 아이에게 가르치며 이 아이의 구원을 나의 구원처럼 염려하며 나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것처럼 이 아이의 구원을 위해 힘쓸 것이며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고 이 아이를 위해 기도할 것에 대해 서약했습니다. 차라리 안 믿는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인생을 살다가 좋은 사람이 복음을 전해주면 이제껏 보지 못한 은혜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고 예수를 믿었을지도 모르는 그 아이를 여러분들은 영혼을 돌보는 일이 없이 형식적으로 그 아이를 기르는 동안에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복음에 대한 반감과 편견이 가득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오늘날 우리 자녀들을 위한 눈물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저는 이번에 영국에 가서 제가 존경하는 존 오웬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두 교회를 돌아보았습니다. 가까이에 있어서 갈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목회하실 때 2,000명의 회중에게 설교하셨던 교회당은 우리 교회당보다도 훨씬 작은 교회당이었습니다. 어떻게 여기에 2,000명이 앉아 있을 수 있는가를 질문하였습니다. 그 교회 목사가 말하기를 당시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서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강대 앞까지 빽빽하게 서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목사님 설교가 2-3시간 되는 꽤 긴 설교였을 텐데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서서 예배를 드렸느냐고 질문하니 현재 담임하고 있는 목사님께서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당신과 교인들 가운데 존 오웬 목사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냐고 질문하니 알지도 못하는데 사랑을 할 수 있냐고 반문합니다. 다 잊어졌고 이제는 백 여 명의 교인들이 나오고 교회 마당은 부서진 흉가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또 한 교회는 서른 댓 명 교인이 나오고 교회 유지도 힘든 교회들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그 유서 깊고 화려하던 예배당 건물들은 도저히 유지할 수 없어서 거의 폐허처럼 변해가고 그것도 힘든 교회들은 사람들에게 교회 건물을 매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즐겁게 사 들이는 사람들이 무슬렘 들이었습니다. 교회를 사 들여서 자기네 예배당으로 개조해서 사용합니다. 교회는 오래된 건물이므로 허물지 못하도록 법으로 제정되어 있습니다. 건축업자들이 예배당을 구입하여 여관방처럼 칸막이를 해서 팔거나 수퍼마켓, 양복점, 디스코텍, 술집으로 바꾸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훌륭하고 깊이 있는 목사들에게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이고 자녀들을 위해서 신앙으로 가르치려고 무던히 애쓰던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교회당은 텅텅 비고 그렇게 눈물을 뿌리던 목회하던 사람들은 자손들에게서 새까맣게 잊어지고 이제는 교회에 거의 출석도 하지 않고 축구경기 보러 다니고 크리켓 게임에 미쳐서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겁게 살까 하는 생각에 혈안이 된 채로 유리방황하고 있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똑같은 상황을 맞이할 때 그것보다 더 빨리 변해가게 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가 죽고 나서 100년 후에 한국 교회가 어떻게 될까에 대해서 저는 굉장히 비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 하나 희망은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의 자녀들이 비록 인구의 숫자로는 적을지라도 정말 신앙에 뜨거운 체험이 있고 진리에 대한 풍만한 지식을 가진 자들로 세워 놓고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희망이라면 유일한 희망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고등학생들 보다는 중학생들이 더 무섭습니다. 고등학생은 그래도 중학생에 비해서 세상 물정을 알아서 대학 갈 고민도 하고 내 인생을 이렇게 살면 어떻게 하나 고민하는 학생이 더러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해보니 중학생들이 가장 힘듭니다. 어른도 아니고 애도 아니고 애매합니다. 그런데 이미 아이들은 성장해서 발육은 좋아지고 세속적인 환경에 노출되니 굉장합니다. 그 애들은 어떻게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교회에서 보면 주님을 만나고 신앙이 들어간 아이는 틀립니다. 토요일이면 항상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런 아이들을 몇 명 만나는데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습니다. 토요일인데 왜 왔냐고 물으면 기도하러 왔다고 합니다. 누구도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틀립니다. 기도할 때에 만나주시는 하나님, 성령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틀립니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서 신앙생활을 해 나갑니다.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5 (2008/09/24, 수요예배)
Ⅳ. 네 자녀를 돌이키게 하라
자녀들을 돌이키게 해야겠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A. 모본을 보이라
첫째로 모본을 보이세요. 자녀를 향해서 기대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기대하는 바가 없다면 하나님도 여러분들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 자녀가 회심해야 되겠구나.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겠구나. 그러면 여러분들이 자녀에게 기대하는 삶 이상을 살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모범이 한순간에 잘 보이는 것이라면 한번 연극이라도 해 보이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교인의 가정이야기입니다. 고등학생 아들이 가끔 술을 먹고 들어옵니다. 몇 번 모르는 채하다가 불러서 야단을 쳤습니다. 하나님 믿는 학생이 술을 먹고 다니는 것이 말이 되냐고 하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빠를 쳐다보며 집사인 아빠는 왜 술을 먹느냐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수년 전에 어려운 상황이었을 때 끊었던 술, 담배를 몇 달 동안 입에 대었을 때의 아빠 모습이 아이의 눈에 찍혔던 것입니다. 원래 자신에게는 관대하므로 용서를 잘 하잖아요. 아빠 자신은 잊어버렸던 기억이었습니다. 신앙에는 역동성이 있습니다. 승승장구 하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간증 속에서나 가능합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믿음의 길을 갑니다. 회심하지 않은 아이에게는 그러한 믿음의 역동성 같은 것들이 안 느껴집니다. 한 장면만 들어옵니다. 그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예배드릴 때도 있었고 가정예배 드리면서 은혜 충만했던 때도 있었을 텐데 그런 수 천 개의 장면은 이 자식의 마음에 안 꽂히고 딱 한번 술 먹고 들어오다가 자식의 눈에 띄었는데 그것 하나가 꽂힌 것입니다. 그러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변명을 거기서 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했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 되는 것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모본을 보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B. 오래 참아라
두 번째는 오래 참아야 합니다. 자녀의 회심을 위해서 많이 애쓰지만 그러나 쉽게 회심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나를 위해서 참으셨던 것을 생각하면서 오래 인내하며 아이를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회심하지 못한 상태는 안타까워 하지만 자녀는 깊이 사랑하면서 그 자녀가 회심하게 되기를 위하여 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에 자녀를 위한 회심 기도에 부모의 참석을 보니 90명 정도 나왔다고 합니다. 회심하지 않은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절반이상 교회를 떠납니다. 그 부모가 그보다 얼마나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어서 자식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그 시간에 기도하지 않는 것일까?
어느 날 여러분들은 천국에 가시겠죠? 그때 주님이 “네 자식은 어디 있니?” 라고 물을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주님이 내게 선물로 주신 이 자식을 위해서 열심히 섬겼더니 주님이 베푸신 은혜로 내 자식이 예수를 믿고 내가 다 살지 못한 주님을 섬기는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이렇게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주님이 내게 주신 자녀를 위해서 주님의 분부를 따라 어떻게 하든지 신앙의 모범을 보이려고 온 힘을 다하고 오래 동안 참으면서 이 아이에게 복음을 듣게 하고 눈물로 이 아이를 위해서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기도했건만 이 아이가 아직도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저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며 눈물이 솟아난다면 괜찮겠지만 만약에 그 아이를 위해 그렇게 기도한 적도 없고 그 아이의 영혼을 인하여 애닮아 한 적도 없다면 여러분들이 그 주님께 아이의 회심하지 못한 상태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사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이 질문보다도 더 심각하고 급박한 질문이 없습니다.
C. 복음을 듣게 하라
제가 이 교회를 처음 목회하기 시작할 때 태어난 아이들이 이제는 15-16살이 되어갑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이들의 마음은 굳어지고 복음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이 자녀를 위해서 회심하기에 가장 빠른 날입니다.
전심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 염려하는 것처럼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 염려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듣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안 되면 차라리 교역자, 선생님을 찾아가서 울면서 바지를 붙들고 매달리면서라도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내 자식의 회심을 위해서 도와달라고 빌기라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얼마 안 돼서 모두 세상을 떠나고 이 교회는 우리의 자손들에게 물려줄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자녀의 진실한 회심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는다면 교회와 자녀들의 미래는 없습니다.
Ⅴ.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전심으로 기도하십시오. 자녀의 구원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사는 낙이 없다고 고백하십시오.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의 자녀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아직은 여러분들에게 기도할 힘이 남았고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 회심할 기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지 말고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 여러분들의 자녀로 구원에 이르게 하여할 부모의 책임을 다하기 바랍니다.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1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1 (2008/09/07, 주일오전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2 (2008/09/14, 주일오전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3 (2008/09/14, 주일오후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4 (2008/09/21, 주일오전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5 (2008/09/24, 수요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6 (2008/09/28, 주일오후예배)
2.어머니의 눈물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눅 7:11~16上).
I. 본문 해설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의 죽음은 산에 묻고 세월이 지나가면 그 시신도 흙과 함께 썩지만 가슴에 묻은 자식에 대한 기억은 일생동안 지워지지 않는다는 부모 마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바로 이런 불행한 일을 당했던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나인이라고 하는 곳은 나사렛에서 멀지 않고 갈릴리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은 아주 작은 동네였습니다. 그 동네에서 한 과부에게 독자가 있었는데 그 독자가 죽은 이야기를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부는 어떤 연유에서 남편을 여의고 홀로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소망이 있다면 남은 피붙이인 하나의 자식, 독자밖에는 없었습니다. 무슨 연고인지 젊은 아들이 자기를 앞서 죽음의 강을 건너게 된 것입니다. 이 과부에게 있어서 독자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 청년으로 다 자란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아마 이 과부의 마음에 밀려오는 슬픔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고 이것을 보는 많은 동리 사람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자아내게 하였을 것입니다.
제 친구 중에 3대 독자가 있었는데 중고등학생들을 데리고 수련회에 갔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실에 대한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열린 교회는 대대로 물가로 가는 것에 대해서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학생들은 배를 타고 양수리를 건너고 제 친구는 수영을 아주 잘하니까 천천히 헤엄치면서 따라갔는데 배가 건너가서 보니 사람이 안 왔습니다. 심장마비로 물속에 가라앉은 것입니다. 3일 동안 잠수부를 동원하여 시신을 찾았습니다. 부모님이 한분은 장로님이고 한분은 권사님이었는데도 3대 독자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독자의 죽음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더욱이 이 사람은 남편도 없이 과부가 된 처지였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죽은 자식을 장지로 보내는 어미의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과부의 독자가 죽은 장례식에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이 과부가 얼마나 실력이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동정심 때문에 많은 동네 사람들이 그의 슬픔을 위로하며 따라 왔을 것입니다. 이런 많은 사람들이 동행하는 위로도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Ⅱ. 어머니의 눈물
이 기사 속에는 자식을 잃은 어미의 이야기가 아무것도 대사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머니의 눈물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 짧은 기록을 통해서 볼 때에 어머니의 마음은 둘로 요약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비참함과 소망 없음이었을 것입니다.
A. 비참함
계속해서 그녀는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심한 눈물과 통곡으로 이 장례를 뒤따르고 있었고 아무런 소망도 없이 장지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식에게도 더 이상 아무 소망이 없고 자신에게도 아무런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들이 죽었고 남편을 여의고 의지하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왔던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버렸으니 이제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겠습니까? 가슴에 있는 수많은 원한과 슬픔을 오직 눈물로 털어 놓을 뿐이었고 많은 사람들의 위로도 이 여자에게는 진정한 위안이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독자를 여윈 이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남편을 여의고 외롭게 살아가면서도 이 자식은 여자에게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위로였습니다. 더욱이 이 여자는 홀로 사는 외로움 속에서도 이 아이가 점점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어른스런 청년으로 자라가고 있는 이것이 그녀의 사는 소망이요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때같은 아들이 어느 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지금은 아무 희망도 없이 장례를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기적이나 놀라운 변화의 가망성 같은 것들은 생각할 수 없었고 지극히 사랑하던 아들이 죽었으니 이제 자신에게 있는 모든 희망도 함께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아들을 편안하게 장례를 지내야겠다는 생각이외에는 이 장례가 끝난 다음에 자신은 어떻게 살 것이며 무엇을 의지하고 지낼 것이며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외로움 속에서 자신이 스스로 인생을 지탱할 수 있을지 모든 것에 대해서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통곡하는 일이었고 그 통곡과 눈물이 무엇을 가져다 줄 수는 없었지만 자식을 여읜 어머니의 비참한 마음이 자식의 사랑에 대한 기억과 함께 눈물이 되어서 이 어머니의 뺨에 하염없이 흘러 내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식을 여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식을 주신 것은 단지 번성하고 생육하기 위해서만 우리에게 자식을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다보니까 계획 없이 자식을 낳았을지 모르지만 자식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은 실로 원대하고 아주 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우리의 아이들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주님께 순종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 아이들 하나하나를 지으신 당신의 목적을 이루심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행복하게 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의 목적을 온전히 실현하는 한편 그 아이들 하나하나를 참된 신자로 만들어 그리스도 예수의 거룩한 몸에 한 지체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는지,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는지 본문의 문맥만을 보아서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어머니의 마음속에 있는 자식을 향한 절절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이 죽었을 때 사실은 그 어머니도 살았으나 함께 죽었고 이 어머니의 통곡하는 눈물은 자기의 자식이 죽은 것에 대한 큰 슬픔이었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음 건너편으로 가 버린 자기의 아들, 이제 그 아들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깊은 통곡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식을 옛날처럼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제도 가족들과 앉아서 TV를 보는데 이혼하면 자녀들을 서로 회피해서 고아원에 보내지는 아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결국은 마지막 시대가 되면 인간이 자기밖에는 모릅니다. 예전에는 나라도 알고 가족도 알고 교회도 알았습니다.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가 훨씬 넓었습니다. 넓게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그 사람이 덕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니까 자기 아내, 자기 남편, 자기 새끼밖에 모릅니다. 더 세월이 흘러가니까 이제는 새끼, 남편, 아내도 다 필요 없고 자신의 몸만 아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어머니는 자식이 죽은 것을 놓고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 앞서 자식이 갔다고 하더라도 더 있어 봐야 4-50년이나 5-60년 있을 육신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육신은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이렇게 장사 지낸 바 된 죽어 있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혹은 아직 슬하의 어린 아이들로 남아서 아직 회심하지 못하고 거듭나지 못해 죽어있는 영혼들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미 다 장성해서 시집, 장가보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돌볼 여지도 없이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장소적으로 여러분들의 자식을 멀리 떠나보냈다고 해서 그들의 죽어있는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무정한 부모라고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의 마음에는 늘 자식을 향한 사랑에 깊이 잠겨있습니다. 이 어머니가 먼저 떠나보낸 자식을 두고 통곡하며 울 때에 아마 이 어미의 마음에는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하였을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자식을 위해 눈물 흘린 어머니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위대한 설교자 크리소스톰의 어머니는 1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홀로 되어 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절세의 미인이었지만 자식을 위해 헌신했던 어머니 안투사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회심하지 못한 자식을 위해서 일생동안 눈물로 기도하던 믿음의 어머니 모니카, 그를 인해서 회심하고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실로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고 눈물을 흘림으로서 그 아들들, 자식들을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했던 것입니다. 어찌 이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이기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을 때에 자기를 죽이려고 반란을 일으켰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통곡하며 너를 대신하여 내가 죽었더라면 하고 울었던 그 마음도 역시 부모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죽음, 독자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이 자식을 위해 애달프게 눈물 흘리게 만들었듯이 만약에 우리의 자식들이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못하고 죽어 있는 영혼의 상태라면 나는 여러분들의 그 자식이 단 한번이라도 여러분들의 눈물의 기도를 들어 보았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을 자식들에게 보이고 어떻게 하든지 자기의 자식을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그것이 바로 부모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목회자를 통해서 그것을 배우고 집에 가서는 부모를 통해서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죽은 아들의 육신을 위해 통곡하며 울었지만 우리는 육신으로 살아있어도 영으로 죽어있는 우리의 자식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충분히 눈물을 흘리는 부모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의 회심은 어떻게 보면 매우 쉽게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부모를 고통과 괴로움 속으로 몰아넣으면서도 회심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런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내가 영국에 가서 설교했던 교회는 조지 뮐러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예배당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목사님이 자기 친구를 위해서 53년 동안이나 기도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은 생전에 회심을 보았지만 그 중의 어떤 친구는 목사님이 돌아가신 여러 해 후에야 회심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 인 것입니다.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죽어도 우리가 한 기도는 이 세상에 남아서 역사한다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위해서 진실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면 여러분들은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도 기도는 이 세상에 남아서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때로는 가혹할 정도로 멀어 보이는 자녀의 회심의 길, 특별히 자녀가 믿음 안에서 장성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우리들이 올바르지 못하고 본이 안 되는 생활 속에서 가슴에 많은 상처와 불신앙의 부패한 기운들이 배이게 되었을 때 어쩌면 우리들이 오래도록 기도해도 자녀의 회심이 가혹하리만치 더딜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식의 강퍅한 마음, 돌아서지 않은 상처받은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어머니인 여러분들에게, 아버지인 여러분들에게 자신의 자녀를 향한 이러한 살 깊은 통곡과 눈물이 있는지를 오늘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입니다.
B. 절망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라면서 자기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주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알고 자신에게 그 사랑을 몸소 가르쳐주는 어머니,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자신에게 보여준 어머니,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1세대인 우리들은 이런 큰 은혜와 축복을 못 누렸습니다. 우리의 부모들이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부모로부터는 기도를 받지 못했어도 우리 스스로 우리의 영혼을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는 그렇게 못했어도 우리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목회자들과 우리를 위해 눈물로 빌어주던 지체들의 도움으로 말미암아서 어둔 죄악의 길에서 벗어나 이처럼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힘과 공로로 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사랑과 말할 수 없는 자비, 우리를 위해 빌어주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눈물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복되게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게 하셨고 우리를 그 믿음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큰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아무 희망도 없는 구원의 경험을 우리에게 주셨는데도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죽어있는 상태가 되었는데도 그 자식을 위해서 눈물 흘리지 않을 만큼 우리의 마음이 굳어 있다는데 있습니다.
영혼을 향한 사랑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만큼만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고 자신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있으니 이는 영혼에 대한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수렴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만 자신의 영혼을 위해 염려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만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 빌 수 있으니 만약에 우리의 마음속에서 자녀를 향한 눈물의 기도가 없다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혹자는 우리의 자식을 회심에 이르게 하였으니 나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의 끝에서 보면 우리 자녀들의 회심이 끝일지 모르지만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자의 여정이라는 안목에서 바라보면 우리 자녀들의 회심은 겨우 요단강을 건넌 출발일 뿐입니다. 홍해를 건넌 광야의 길에서 출발일 뿐입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 누가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회심에 이르도록 애쓰지만 회심한 후에는 이제는 내 할 일을 다 했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살아라하고 팽개친다면 그를 진정한 목자로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회심한 자녀들을 둔 부모는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생각하고 이 아이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지 진리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있는지 마음을 기울이며 태어난 새끼를 옷섶을 풀어헤쳐 젖을 물리는 것처럼 진리의 신령한 말씀으로 이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먹지 않고는 젖이 날 수 없으니 자기 자신이 진리의 말씀을 잘 섭취하고 소화하고 마음 안에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과 교리들이 쌓여야 할 것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녀들을 끌어안고 젖을 먹이는 유모처럼 자기의 자식의 마음에 자신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식의 말씀을 떠 넣어주는 애정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성인이 되는 20년 후에는 지금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참된 복음의 신앙에서 멀어질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참되고 진실한 복음 신앙에서 멀어질 때 인간이 흘러갈 곳은 세속주의 아니면 차가운 이성에 호소하는 형식적인 신앙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식들을 영원히 붙들어 줄 수 없고 우리의 자식들이 있어도 우리가 붙들어 줄 수 없습니다. 그들을 붙들어 주는 것은 오로지 살아있는 하나님의 복음이고 성령의 은혜가 그들을 붙들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회심을 위해 기도하고 회심을 이루기 위한 많은 집회들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이 프로그램들이 우리의 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 만나게 해 주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자식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 큰 사랑만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만이 우리 자식들의 어둔 영혼에 진리의 빛을 비추고 잠들어 있는 우리 자식들의 영혼을 깨우고 식어져 있는 우리 자식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 사랑의 뜨거운 불길들을 지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일평생 여러분들에게서 태어나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그 아이들이 여러분 죽은 후에 회심도 없이 방황하다가 이 세상에서 구원받지 못한 채로 허무한 인생을 마친다고 할 것 같으면 천국에서 그 아들을 바라본 우리의 마음이 어찌 낙원일 수가 있겠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부모의 신앙은 이제 부모 개인의 신앙이 아니라 자기 자식과 하나 된 신앙입니다. 부모의 마음에 꼭 필요한 것은 목회자의 마음입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집안에서 자녀와 아이들을 잘 다스리고 사랑으로 가장의 역할을 잘 하는 사람들은 절대 교회 와서 목회자에게 대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존경 받지 못하고 자식들 통제 못하고 자식들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남편들이 교회 와서 대들고 형편없는 행동들을 합니다. 자기가 집안에서 목회를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영혼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어서 지체들을 판단하고 막된 행동들을 해서 교회의 몸을 현저히 더럽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명예를 누리고 많은 재화를 얻는 것이 인생의 본질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 앞에 좋은 신자가 되고 자기 자식들을 사랑하고 진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면 인간으로서 할 모든 일을 다 한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제가 죽고 나거든 오늘 설교를 기억하십시오. 넉넉잡고 50년 후쯤 되면 제가 충분히 이 세상에 없겠죠? 아마 그때 되면 우리들이 드리던 이런 예배와 우리의 참회와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자식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던 회심 집회 이야기들은 전설처럼 우리 자손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를 바라볼 때 먹고 살만해진 후에 하나님을 버리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그랬습니다. 결국은 종말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떠나고 진실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에게 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큰 능력으로 인간의 불신앙도 사용하여 당신의 영광스런 나라의 회복을 향하여 진행하게 할 것이고 당신의 나라의 종말의 영광을 이 땅에 보이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이 일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아직 기력이 남아 있고 복음에 대한 체험과 확신이 살아있는 이때에 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 아직까지도 복음의 능력과 은혜의 비밀이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의 많은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난 그 하나님을 그들도 만나고 이 세상의 풍조가 아무리 바뀌고 변한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의 풍조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말씀의 경험에 붙들려서 십자가에 붙잡혀서 살아가는 자식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자기의 자식들을 위해서 많이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면서 하셨던 말씀,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너희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및 너희의 자식들을 위하여 울라”고 하셨던 말씀처럼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마다 자기의 자식들의 회심하지 않은 처지를 아파하며 부모들이 진실하게 눈물을 흘린다면 교회는 놀랍도록 정결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의 신앙이 정결해지지 아니하고는 자식을 위해 흐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자식들이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될 것이고 신앙의 정수는 우리 자녀들의 가슴에 물려질 것입니다.
Ⅲ. 죽은 자를 살리심
이 여자가 심히 통곡하고 슬피 울면서 장례 행렬을 힘없이 뒤따라오고 있을 때 그를 살려주셨던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A. 자비로써
이렇게 살려주시는 주님의 큰 역사는 자비로써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자기 자식을 살려달라고 우리 주님께 간구하는 일도 나오지 않고 자기 죽은 자식을 살릴 만한 큰 믿음을 어미가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직 눈물로 찢어지는 마음으로 통곡하며 절망의 길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장례 행렬을 가로막으시고 자기의 아들을 향하여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명령하실 때 아마 예수님을 향한 전심의 의존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도 못하고 어떤 믿음을 가지고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는 이 불쌍한 과부의 비참한 처지를 보시며 마음으로만 통곡하고 눈물 흘리고 있는 이 여자의 불쌍한 처지를 보시고 자비로써 이 여자의 아들을 살려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 친히 구하지도 않으며 눈물을 흘리며 자기 자식의 육체의 죽음을 인해 비통해 하는 여자가 주님의 자비심을 움직였다고 한다면 주님이 누구신지를 명백히 알고 자신에게 임한 구원이 자기 자식에게도 미치기를 소원하며 구원의 유일한 주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눈물 흘리는 부모의 기도를 하나님이 어찌 거절하시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자식이 너무나 강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교회에서 잘못 가르치기 때문에 이 아이가 회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자식을 향한 참된 사랑이 있습니까?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그 부모의 처절한 몸부림을 바라보면서, 저는 종종 열심과 뜨거운 사랑의 절반만이라도 아이의 영혼을 위해서 쏟아 부어진다면 저 아이는 훨씬 빨리 주님을 만날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예수님의 한 성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은 어찌하든지 영혼들이 참된 회개에 이르러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게 되기를 원하는 자비로우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가장 비참한 여자의 독자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자비로써 이 청년을 살려주심으로 당신의 큰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B. 능력으로써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재능이나 흔히 있을 수 있는 과학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된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죽은 자를 장례 지내기 위하여 관을 앞세우고 많은 무리들이 따르고 있었으니 죽음의 행렬이요, 한편에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지나가고 있었으니 이는 생명의 행렬이었습니다. 두 행렬 앞부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장례의 행렬이 진행되지 못하도록 멈추시고 관을 가로막으시며 죽은 자에게 명령하여 다시 살아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어미의 통곡하는 눈물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이 청년은 죽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죽어 있는 자기의 자식들에게 자신들의 구원과 회심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할 것이라고 믿지 마시고 스스로 기도할 수 없는 자기의 자식을 위해 부름 받은 기도의 의무를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들의 자식,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영혼이 죽어 있는 상태가 되어서 믿음의 참된 본질로부터 소외된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온전한 신앙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도록 여러분들이 이 과부처럼 눈물로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일지라도 영혼을 살리는 큰 능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C. 이제는 복음으로써
이때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음성으로서 이 아들을 살렸지만 이제 주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당신의 복음으로써 이 일들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어찌하든지 우리 자식을 참된 진리가 있는 그 자리에 있게 하고 우리는 전심으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이미 자식들이다 커서 시집 장가를 보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아이의 회심 여부에 대해서 비교적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은 영원히 여러분들의 자식이고 여러분들이 그 아이를 회심하지 못한 채로 시집 장가보낸 그것도 하나님 앞에 씻을 수 없는 잘못을 한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여러분들의 자녀는 믿음이 없는 가운데 자녀의 자녀를 낳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고 여러분의 그 자녀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여러분들이 그 아이들이 여러분 품에 있을 때 그 아이들에게 참으로 주님을 만나게 해 주지 못했던 것을 깊이 뉘우치며 지금이라도 여러분의 자녀들이 회심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자녀들의 가정과 교회에 나타나는 문제들을 보면서 근심하며 그 자식의 영혼들을 위해서 주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식을 낳고 부모로 살아가는 이 일은 일평생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들을 당신 대신해서 맡겨주신 것입니다.
Ⅳ.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그 자녀들을 위해 흘릴 수 있는 눈물이 없다면 새끼를 위해조차도 흘릴 눈물이 없는 자신의 영혼의 병든 상태를 보며 더 많이 울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이 일은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더 이상 때를 지체하지 마시고 우리의 자녀들이 참된 회심에 이르러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비는 부모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부모의 기도는 죽었던 자식들을 살아나게 할 것이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1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1 (2008/09/07, 주일오전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2 (2008/09/14, 주일오전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3 (2008/09/14, 주일오후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4 (2008/09/21, 주일오전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5 (2008/09/24, 수요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6 (2008/09/28, 주일오후예배)
3.아이를 위해 기도해야 할 일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 23:26).
우리가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해야 할 일이 있는지를 여기서 보여 줍니다. 아다시피 이 글은 솔로몬이 자기의 자식에게 전해 준 내용입니다. 솔로몬이 이 잠언을 통해서 자식에게 신앙의 길을 가르치는 방법은 아주 분명하고도 간단 합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고 지혜로운자가 되어서 그 지혜로운 길을 자기의 자식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의 가르침이 자식의 마음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식의 마음이 부모에게 상통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을 통한 인격의 감화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인격적인 교통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인데 인격적으로 교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하든지 부모인 지혜자와 그 지혜자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자식 사이에 인격적인 연락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가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다오 그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훈계하든지 간에 건성으로 듣고 의무감에서 듣지 말고 마음으로 전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그리고 나와 함께 인격적으로 교통하는 가운데 내 가르침이 네게 전해질 수 있으니 네 마음을 내게 다오 하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 지혜자가 자식이 마음을 부모에게 주어야지만 부모의 가르침이 자식에게 흘러 들어간다 라고 하는 것을 어디서 배웠겠습니까? 결국은 두가지 측면에서 배우지 않았겠습니까? 아버지 다윗과의 관계를 통해서 배웠을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배운것이 아니겠습니까? 솔로몬은 다윗이 낳은 아들중에 왕위를 이은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후일에는 불신앙에 빠지고 후에 그 불신앙에서 그가 돌이켰다 돌이키지 못했다 하는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어떻든지간에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어떤 의미에서 보면 불행한 결혼이기는 했지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는 다윗이 일생을 살면서 진심으로 사랑한 한 사람의 여자였습니다. 그러니 그 슬하에서 태어난 사연이 많은 이 아들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솔로몬은 아버지와의 관계로부터 그것을 배웠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 가장 먼저 앞서야 될 것은 자식이 우리를 향해 마음을 아무리 우리에게 준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 자식에게 넣어 줄 수 있는 내용이 없다면 우리에게 준 자식의 그 마음은 우리안에 잘못된 것들을 자식에게 전달해 주는 훌륭한 통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한번 해 봅니다. 봄이 되면 제비들이 오는데 그러면 옛날부터 다른것은 몰라도 제비가 와서 처마 끝에 집을 지으면 지푸라기도 떨어지고 똥도 떨어지고 지저분해 집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것을 굉장히 길한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마치 가을이 되면 박씨라도 하나 물고 올 것처럼 그렇게 정성껏 처마에 집을 짖고 살도록 편의를 봐주지 않았습니까? 봄이 되어 제비가 돌아와서 집을 지은 다음에 세끼를 낳고 어미니까 날아가서 벌레를 하나 물어 오지 않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먹고 싶겠습니까? 그것을 물고 오면 제비 세끼들의 입이 얼굴만 합니다. 얼굴의 대부분이 입 입니다. 쫙 입을 벌리면 우리가 보면 그놈이 그 놈 같은데 엄마는 정확히 알아서 그것을 넣어주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 아이들의 마음이 그렇게 엄마를 향해, 아빠를 향해 벌린 제비 세끼 같습니다. 거기에다가 무엇을 넣어 주든지 아이들은 받아 들이려고 합니다. 물론 그 아이들도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이세상의 악에 단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집어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놀라운 유비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산전수전 겪고 (안좋은 의미에서) 달고 달은대로 되면 꼭 설교 듣는 태도가 맛 없는 밥 씹는것 같이 그렇게 질겅질겅 씹고 아이들이 밥 안 먹는 아이들 한번 퍼 넣어 주면 계속 물고 돌아 다니면서 삼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숟가락을 주면 입을 벌리면서 아직 밥이 있다고 밥을 거부하지 않습니까? 교인들이 꼭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드리는 태도를 보면 거의 눈에 들어 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이번에도 제가 영국을 가 보니까 청교도들이 앉았던 의자는 도대체 저런 살인적인 의자에 앉아서 어떻게 3시간씩 설교를 들었을까 할 정도로 직각입니다. 나무입니다. 90도 직각입니다. 그 의자에 앉아서 어떻게 그런 설교를... 설교단이 얼마나 높은지 고개가 뿌러질 정도로 쳐다 봐야지 보일 정도로 꼭데기입니다. 그런 설교를 세시간씩, 두시간 반 씩 그렇게 들었습니다. 이렇게 해도 아프고 또 이것을 가져다 놓았더니 누가 그러던데 요즘 신형이 나왔는데 목 때리는 의자가 나왔다고 하던데 제가 됐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가 무슨 PC방 입니까? 영화관 입니까? 그리고 의자가 사람을 안고 있는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바닥에 거적때기 깔고 예배도 드리는데... 와서 거기에 기대고 다리를 쭉 뻗고 신발은 또 왜 벋습니까? 예배시간에 신발을 벗어서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고 복잡 합니다.
회심을 하고 방금 태어나면 이 사람의 마음이 꼭 엄마한테 입 벌린 제비세끼 입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든지 주시기만 하면 받아 들일... 성경을 읽으면서도 은혜를 받고, 설교를 듣고 누가 간증을 해도 은혜를 받고 합니다. 그런데 변하고 나면 안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똑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 말씀에 미각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굉장히 복된 것인 것과 동시에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때 그때 가르침이 훌륭하게 흘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신앙교육이 중요하다고 제가 이렇게 누차 강조하는 것이 뭐냐면 어렸을 때 마음의 세계가 엄마 아빠 밖에 없습니다. 입을 쫙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 뭐든지... 그런데 쫙 벌렸을때에 성경에 의하면 입만 벌린것 뿐만이 아니라 오감 눈, 귀, 입 모두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도 열렸고 거기에서 눈으로는 참된 신자로 살아가는 모습이 그리고 귀로는 엄마, 아빠의 아름다운 진리의 이야기가 입으로는 찬송 이런것들이 막 들어 갈 때 아이들의 심령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을 쫙 벌렸더니 가끔가다 부부 싸움 하는 것이나 쑤셔 넣어 주고 아니면 저 놈의 자식 아니 였으면 내가 팔자가 피는데 이런 것이나 들려 주고 무자식이 상팔자 라고 하고 그런 이야기나 들어오는 것입니다. 쓰레기 같은 것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진리만 잘 습득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쓰레기들도 습득이 잘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받아 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조금 넣어 주어야지 할 때가 되면 마음이 닫힌 것입니다. 이것을 솔로몬은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이 신앙이라는 것이 말을 끌고 물가 까지 갈 수는 있지만 그 말에게 무슨 수로 물을 먹이겠습니까? 그것이 간난아기라도 맘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맘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훌륭한 목사였는데 자식은 도대체 저 뱃속에서 저 자식이 할 정도로 이상한 인간이 태어나서 그 부모의 말년에 그렇게 고생끼치는 자식들도 많은 것입니다. 가끔 목사님들께 그런 전화를 받고 하소연을 받습니다. 우리 아이 좀 어떻게 좀 해 달라고... 그래서 가끔 도와 줄 때도 있지만 쉬운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그렇게 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자식을 위해서 우리들이 빌어야할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아이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아이의 마음은 자물통 같지 않아서 부모가 열쇠로 쑤신다고 해서 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도 지성과 감정과 의지와 인격을 가지고 별도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맘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어렸을때는 야단치면서 교회에 끌고 올 수 있고 중학교때는 용돈으로 협박 할 수 있는데 대학 들어가면 안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만 들어가도 안 됩니다. 돈을 안주면 자기들이 방학때 가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아이들이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지만 하나님의 가르침과 교훈이 흘러 들어오는데 그 마음을 주님께 드린다는 것이 결국 회심이 아니면 그렇게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적인데 어렸을때는 적대적인 것이 노골화되어 드러나지 않는데 나이가 먹으면서 자기 전 삶의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니까 회심하지 않고 중생하지 않은 인간에게 참다운 길을 걸어가라고 가르치는 것은 죽은 여자 얼굴에 화장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발라도 계속 속에서 썩은 냄새가, 시체 흐르는 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위해서 우리가 그렇게 회심... 우리가 회심한다고 해서 그 회심의 감격을 평생 유지하고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들이 회심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회심만이 인간의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회복되고 주님의 진리를 붙들고 순종하는 삶을 살고 매일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으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그렇게 시련이나 유혹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면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 자녀들이 그 마음을 주님께 드리지 않습니다. 주님께 드리지 않는 그 마음 어디에 바칠까요? 자기 자신을 위해 바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얼마나 신뢰 해서는 안되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회심의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인생을 길 걷다가 이것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믿음으로 돌아 왔을 때 가장 심란한 것은 세상도 아니고 마귀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고 나에 대해서 너무 실망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런 존재밖에 안되는구나 하는 것에 실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자중 한 분이었던 박윤선 목사님이 83세인가 85세 약간 안되서 돌아 가셨습니다. 암으로 돌아 가셨는데... 83세가 되어 쓴 자기 자서전 속에서 그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죄인입니다.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 이상하게 나이가 이렇게 들었는데도 나는 내가 그렇게 싫고 미울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까 내가 나를 미워할수록 내가 나를 싫어할수록 내 영혼은 살더군요” 그 노인이, 그 학자가 그런 영적인 깊은 세계를 스스로 경험하면서 그 노년을 지냈다는 것이 참 신비롭지 않습니까? 그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우리가 음식물들을 안 상하게 하기 위해서는 냉장고에 넣고, 기름에 튀기고, 소금에 절이고, 고추장속에 박아 두어야지만 그냥 상온에 내버려 두면 상하라고 염불을 외지 않아도 상하게 하는 물건을, 재료를 집어 넣지 않아도 내버려두면 상하게 되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그런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아이들이 회심하면 재미있나 하면 아이들이 일단 회심하고 나면 얼마 안되어서 그 회심의 은혜를 잃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중에 좀 특별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옛날에 제가 통화했던 어떤 분은 자기가 목회자 사모인데 초등학교 4학년때 회심하고 지금까지 새벽예배에 안 빠졌다고 합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나이가 벌써 50 가까이 되신 분인데...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 특별한 사람을 제외해 놓고는 아이들이 회심을 해도 은혜에서 멀어 집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이 뭐냐면 아이들이 곤고한 것을 압니다. 곤고해 집니다. 회심하지 않은 아이들은 절대 곤고해지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 외에는... 그런데 회심하고 나서 은혜가 떨어지면 아이들이 곤고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굴과 표정에 나타납니다. 곤고해지는 것입니다. 곤고해진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처음에는 지식이 없을때에는 이런 것, 저런것도 해보고 말도 안들어 보고 하는데 이것이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았을때에는 이런 곤고함 같은 것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심하면서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면 곤고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재미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밖에 안된 아이들이 곤고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곤고한 것이 산전수전 겪어야 곤고함이 있는데 거듭난 영혼이 은혜에서 멀어지면 아이들이 어린 아이라도 곤고해지는 것입니다. 그때 제일 먼저 반성이 일어나는 것이 뭐냐면 그 조그만 아이들속에서 마음의 반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목회를 해 보니까 부모의 방해를 안 받는 속에서 모아 놓고 회개의 기도를 시켜 보면 굉장히 수준이 높습니다. 왜 수준이 높나하면 성경을 많이 알아서 수준이 높은 것이 아니라 회심하고 하나님의 복음의 빛이 비치고 사랑의 은혜도 느꼈는데 여기에서 곤고해지게 되니까 자기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 하는데 그 표현하는 기도의 내용이 영적인 진리의 정곡을 찌르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떠나가신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쓰라고 하면 더 잘 씁니다. 그러면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 보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감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회심은 세가지 감각을 인간속에 도입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용서와 사랑에 대한 감각입니다. 이것이 말로 표현하는 정도는 틀리지만 어린이든지, 어른이든지, 노인이든지 모든 사람에 똑 같은 감각입니다. 회심과 함께 세가지 감각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광과 사랑과 용서에 대한 감각입니다. 그것이 모두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기뻐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놀라울 수가 없습니다. 그 경험이나 이런 것들이 그렇게 놀라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을 결국은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 가는데로 가는 것입니다. 몸이 교회에 있고 마음이 세상에 있으면 세속적인 사람이 되겠습니까? 경건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세속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은 세상에 있는데 마음이 교회에 있으면 경건해 지겠습니까? 세속적이 되겠습니까? 경건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몸이 있는 쪽으로 마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 있는 쪽으로 몸이 갑니다. 그래서 신앙의 형식을 벗어 버리는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의 자녀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지도록 그래서 가장 안전한 것은 자기가 자신의 신앙을 위해 기도 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도는 힘이 되지만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을 때 남이 해 주는 그 섬김의 기도는 큰 위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이 참다운 회심에 이르러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스스로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렇게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자녀들이 되도록 우리들이 기도해야 하고 그리고 회심해서 우리들은 그러한 변화들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한주간 동안도 마음을 모아서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1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1 (2008/09/07, 주일오전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2 (2008/09/14, 주일오전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3 (2008/09/14, 주일오후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4 (2008/09/21, 주일오전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5 (2008/09/24, 수요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6 (2008/09/28, 주일오후예배)
4.자녀를 위해 기도한 아버지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막 5:22-23).
세월이 악하여 자식을 돌아 보지 않는 못된 부모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인간의 본성 안에는 자기의 자식을 남달리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식을 낳아서 길러보기 전에는 사실은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완전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면서 부모의 사랑을 받고 동기간에 고임을 받으면서 친구와의 우정속에서 하나님을 알아 가면서 그러면서 사람이 되어 갑니다. 몸이 훌쩍 커서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더욱 다 된 사람은 아닙니다. 성인이 된 후에는 위로는 부모님을 사랑하고 가깝게는 아내와 남편을 서로 사랑하고 또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고 하면서 끊임없이 깍이며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그렇게 자기 자식을 절실하게 사랑했던 아버지 한 사람이 나옵니다. 야이로 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회당장이었으니까 그래도 유대인중에서는 꽤 종교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회당장 이었는데 이 사람이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박해를 받던 어떻게 보면 종교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는 예수님께 달려와서 무엇인가 간구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어쩌면 이 사람이 예전에 이미 예수님을 만나서 말씀을 듣고 변화된 사람일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소문만 들었었는데 워낙 사정이 급하니까 믿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달려 왔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경우든지 저런 경우든지 간에 유대인의 회당장으로서 예수님께 엎드려서 무엇인가를 빌었다는 이야기는 이것이 동료들에게 알려지면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누가 될 지언정 좋은 이야기는 들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큰 핍박을 받거나 아니면 자기의 사회적인 지위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께 다가 갔습니다. 그때에는 바닷가에 예수님이 계셨을 때이고 해변에 예수님 홀로 계신것이 아니라 많은 무리들,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성경은 큰 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예수님이 계신데 그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렸으니 이는 이 야이로의 행동이 모든 사람앞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도 상관없다 라고 생각하고 이 야이로는 예수께 엎드려 무엇인가 간절히 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어린 딸을 위한 기도 였습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질병에 걸려서 이 딸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이로는 말하기를 내 어린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딸이 아주 어린 딸이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무엇인가 질병이 걸려서 급박하게 죽어가고 있다는 것 이 두가지 사실은 확실했습니다. 야이로에게 이 딸은 몇 명이나 되는 자녀들 중 한 명인지는 모르지만 어린 딸은 그에게 얼마나 귀엽고 소중한 존재이었겠습니까? 딸을 길러 본 모든 부모들은 알지만 그져 저의 경험에 의하면 딸 기를때 제일 예뻤던 때는 3살, 4살, 5살 때 였던것 같습니다. 6살, 7살 되어 꾀가 나기 시작하면 슬슬 말썽을 부리니까 그져 예쁜 옷 입고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 3살 그져 4살, 5살 그때는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그렇게 귀여운 것이 딸입니다. 그것이 딸을 길러본 부모들의 경험입니다. 야이로에게도 이 딸이 그렇게 귀여운 딸 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원하지 않는 질병의 상태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하니까 이 사람이 의원의 도움을 안 받아 보았겠습니까? 아니면 여러 가지 민간요법으로도 어떻게 이 딸을 살려보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결국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간절히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께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이 문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이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이 아닙니까? 자기가 예수님 따라 다니는 제자들 중 하나라면 모르거니와 유대인이요 또 회당장이요 그리고 나름대로 종교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는 이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는 예수께 와서 그렇게 간구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의 행동이 어떻습니까? 제일 먼저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발 아래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비참하리만치 완전히 낮아진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모든 것을 굴복했을 때 발 아래 두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거기에 전적으로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내적인 복종의 표현이고 자기는 은총이 필요한 발 아래 흙과 같은 존재입니다 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이 회당장은 자기 딸이 죽게 되었을때에 예수께 와서 자기를 띠끌처럼 여기며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혼의 구원이라든지 인간이 죽게되면 그 후에 맞이하게 될 그 절실한 심판의 운명이라든지 이런것을 오늘 우리가 아는 것처럼 명료하게 알 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이 야이로가 가지고 있는 딸에 대한 절실한 사랑은 이 아이가 질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으니 이 아이를 살려 달라는 소원이었습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렸다면 자기의 아이가 회심하지 않고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 있는 상태에 있다면 어찌 예수께 은혜를 구하며 아이를 살려 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인 여러분들은 은근히 자녀의 회심을 아내에게 미루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것은 아닙니다. 청교도 가족들은 아버지를 목사로 생각했고 어머니를 전도사처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교인이 변화되지 않으면 목사 책임이지 전도사 책임이겠습니까? 그래서 아버지로서 이것에 대해서 자유롭기는 커녕 더 많은 구속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로서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말해 보십시요. 여러분 회심하지 않은 자녀를 위해서 언제 울었습니까? 낮아졌습니까? 겸비해졌습니까? 아이들은 점점 자라서 이제는 현저하고 뚜렷하게 회심이 없는 표징들을 드러내고 있는데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며 보는 것이 이렇게 긴 세월이 지났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들의 품을 떠날때가 되었습니다. 평생 여러분들은 자식의 영혼을 돌보지 않은 아비라고 하는 이름표를 하나님앞에 달고 다녀야 합니다. 보십시요. 어린 딸 하나가 육신의 질병이 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회당장의 명예 사회적인 지위를 다 뿌리치고 예수의 발 앞에 그것도 만인이 보는 바닷가에서 엎드려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내 아이를 살려 주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교육시키고 밥 먹이고 옷 입힌다고해서 그 아이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예수 믿지 않고 살아 온 일생을 보면 너무 잘 알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안 믿고 사는 이 세상에 있는 아버지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버지는 어차피 모든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녀들이 하나님께 돌아 와야 될 것이라고 하는 것 자체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구원도 알고 회심도 알고 영혼의 지옥 형벌도 알고 은혜도 아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지금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자녀를 위해서 절실해 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저께도 교역자 회의를 하는데 이번주에는 많은 교인들이 나왔다고 보고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러 200명쯤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200명이 뭐냐고 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1,100명 1,200명 되는 주일학교 학생 중고등부 학생 모두 포함해서 청년들은 빼놓더라도 60%는 회심하지 않았는데 나머지 부모들은 무엇하는 사람들이냐? 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지금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난것은 거의 기적이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의 자녀에게도 그 일은 그렇게 쉬운일이 아닙니다. 아마 시대가 흘러 갈 수록 그 일은 점점 기이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하나님께로 스스로 돌아 올 수 없다면 부모들은 그 아이를 위해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이 회당장 야이로에게 내가 이렇게 예수께 엎드려 이렇게 간구하고 기도하면 유대인들에게 욕을 먹지 하는 생각이 어린 딸의 생명보다 귀했습니까? 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 바닷가에서 어떻게 개처럼 엎드릴 수 있었겠느냐? 그러면 회당장인 나의 체면은 뭐가 되겠느냐? 정통 유대인들이 회당에 들어오면서 저 인간의 예수의 발 앞에 개처럼 엎드렸다며 하는 이런 추문 아닌 추문이 돈다면 내 사회적인 지위가 위협받지 않을까 하는 이런 생각 했겠습니까? 딸만 살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이런것이 자기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모르고 살때에 하나님께서 우리같이 우둔하고 구원받지 못한 다른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은 우리들을 사람의 행실로 하지 아니하고 중생의 씼음과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신 그 놀라운 은혜가 이런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미친것이 아니겠습니까? 특별한 아버지가 되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마음이 한순간이라도 되어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장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해변에서 예수께 엎드렸고 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 이 비천한 아버지 야이로에게 쏠렸습니다. 회당장이로 하는 사회적인 직분도 명예도 유대인들에게 좋은 평도 그에게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내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특이한 것은 오늘 성경이 이 사람이 예수님께 기도했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많이 간구하여 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아주 시끄럽게 자식이 회심했는지 자꾸 묻고 기도 안하면 지옥간다고 협박을 하니까 마지못해서 잠자리에 들기전에 배게에 얼굴을 묻고 우리 자식 하나님이 도와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기도입니까? 좀 보십시요? 죽어가는 자기 딸을 위한 유일한 희망이 예수님께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많이 간구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보고 있는 그 동안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서 많은 말로 여러번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에 보면 가끔은 성경속에 예수님이 기도하는 사람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 전혀 그렇게 나오지 않고 예수님이 그와 함께 가셨다 라고 나옵니다. 분명히 그 해변에 수많은 인파에 에워싸였을때에 예수님의 스케줄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 접고 발아래 엎드려 기도하던 이 사람을 일으켜 너희 집으로 가자 그리고 심방을 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애처로운 야이로의 자기 자식을 위한 절실한 기도를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그래서 많이 간구하였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무에서 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자식을 향한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절실함의 반영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앞에 엎드리며 많이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렇게 빌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에 휙 던져넣고 사람 만들어 주시오 그렇게 무책임한 아버지가 되지 말고 이 자식은 내 자식이다 그리고 나는 내 집안에서 목사다 내가 이 아이를 낳아서 5년, 10년, 15년 혹은 20년, 30년을 목회 했는데 아이가 회개하지 않았다면 나의 목회에 문제가 있다 생각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매달려야 합니다. 이렇게 어린 딸이 죽어가는데 이 애비가 다른곳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면 아비일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회당장에게는 인생을 살아 오면서 경험하게 되는 모든 시간표가 멎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오직하나 지금 내 어린 딸이 죽어가고 있다 라고 하는 것 하나 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많이 매달렸습니다. 이러한 간구가 아버지인 여러분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 야이로의 기도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즉 의원이나 민간처방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시면 이 아이가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에이 다 길러놓았는데 이제 자기 신앙 자기가 찿아 가야죠!" 그러면 목회자로서 너무 무책임한 것입니다. 가정의 목회자인데... 기를려면 다 골고루 길렀어야죠... 그래서 부모가 죽을때까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식들을 시집 장가 보내도 내가 독립의 원리를 늘 결혼식때마다 이야기 하지만 예외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 집에 가서 사립학교 보내라, 공립학교 보내라, 용돈을 아껴써라, 냉장고를 새로 사라 마라 하는 것은 모두 훈수를 너무 둔 것입니다. 다 알아서 합니다. 그리고 조금 부족해도 자기들이 깨달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노년에 속 끓일 필요가 없습니다. 놔 두십시요. 그러나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지 않을때에는 밤중에라도 찿아가서 혼을 내야 합니다. 혼을 내든지 아니면 뜨거운 사랑으로 녹이든지... 독립의 원리라고 했으니까 자기들이 어떻게 하든지... 그것이 되겠습니까? 실제로 어느 가정에서는 집사 권사 가정에서 아들을 장가를 보냈더니 절로 가버렸습니다. 교회에서 결혼식하고 절로 갔습니다. 며느리가 옛날에 묻어있던 불심이 다시 살아 난 것입니다. 그러고도 독립의 원리에 충실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을 똑바로 안하면 혼내야 합니다. 사랑으로 녹이든지... 내가 너에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가르쳤느냐?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대게 부모로서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살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있게 자녀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안하려고 합니다. 자꾸 피합니다. 그런 속에서 자녀들은 가서는 안될 길도 가고 가야할 길은 포기하고 그렇게 하면서 신앙이 없고 생기지도 않은 것입니다. 죽어가는 내 어린딸이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지만 주님이 오셔서 내 불쌍한 어린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리고 역사하여 주시면 내 아이가 살아나겠습니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이성적으로 설명이 안되지만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전적으로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 변화는 정말 순간에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이렇게 죽어가는 야이로의 딸을 살릴 수 있었던 능력이고 그것은 죽어있는 영혼에 대해서는 더욱더 확실한 사실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것과 사육하는 것의 차이는 돈 벌어서 그냥 퍼 먹이면 사람이 되는 것은 그냥 사육이고 진짜 양육이 되기 위해서는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참사람이 알차게 되어 가야 하는데 특히 영혼이 그렇게 변화되어서 알차게 되어가기 위해서는 그를 목회하는 부모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해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목회하면서 날마다 예수 죽인것을 짊어 지는데 이는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망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가운데 역사 하느니라 즉 영혼을 돌보는 자기가 죽는 경험 속에서 고린도 교인 너희들은 살았고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이 살기 위해서는 영혼을 돌보는 사람들이 죽어야 했다 라는 것입니다. 제가 물어 보겠습니다. 아버지인 여러분들은 자녀의 영혼의 곤고한 상태 때문에 깊은 고통을 느껴 보셨습니까? 내 세끼가 얼마나 주님 없이 외로울까? 내 아이가 회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갈등을 느낄까? 하나님의 이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내 아이의 영혼이 얼마나 아플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불신집안의 아이들은 이 세속주의와 이방신들에 대한 생각이 부모가 꽉 차 있어서 도무지 복음의 빛이 비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이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고 언젠가는 그 십자가 아래서 이 야이로처럼 여러분 자식의 죽은 영혼을 구해달라고 하나님앞에 매달리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허황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그것이 없어서는 안될일이었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도 피할 수 없이 그 일은 꼭 있어야 되는 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식의 곤고한 영혼을 생각하면서 마음아파해 보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깊이 자식이 가진 고통을 느끼는 것이 부모의 양심 아닙니까? 부정의 양심 아닙니까? 그러면 그런것을 못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자신의 영혼이 죄로 더러워져 있기 때문에 못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로 우리의 마음이 순전해지면 항상 기쁨도 선명하고 슬픔도 선명하고 고통도 선명하고 끊임없는 정동의 작용이 우리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붙들렸다고 할 때 그것은 두가지에서 붙들린것입니다. 말씀에 붙들리고 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주님과 같은 의지를 가지고 그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 붙들린 삶입니다. 주님은 아파하고 우시는데 춤추고 노래한다면 미친 자식 아닙니까? 자기 부모가 죽어서 모든 사람이 애곡하고 우는데 자기에게 눈물이 없다면 우끼는 것 아닙니까?
(예화)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저희 집안에 어른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갔습니다. 모여있는데 자식들이 울지를 않습니다. 뭐 그럴수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별로 잘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죽어도 별로 애닮프지 않았던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친구들하고 친구가 오면 앉아서 술 한잔 마시고 이런 이야지 저런 이야기하다가 문상객이 왔다고 하면 쭈루룩 서서 인사 한번하고 또 친구들 하고 웃고 이야기 하고... 그러다 된통 한번 걸렸습니다. 시골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올라 오셨습니다. 서서 맹숭맹숭한 얼굴들로 자식들이 문상객을 받으니까 이 할아버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야 이놈의 자식들아! 울어라! 네 아비가 죽었는데 울음이 안 나오면 소리로라도 울어라!" 주먹을 흔들면서 역정을 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노인네가 보기에는 정말 무도한 일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죽었는데... 그러면 슬퍼해야 하는데 최소한 안 슬프더라도 슬픈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어도 슬프지 않은것은 죽어도 슬프지 않은 감정이야 왜 그렇냐고 말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그 자리에서 울어야 합니다. 그 다음부터 "아이고 아이고..." 톨스토이가 그랬습니다. "죽음의 공포보다 더 한것은 사랑의 감정입니다. 물에 빠진 자식을 보고 헤엄칠 줄 모르는 아버지가 뛰어드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사랑의 감정이 시킨 것입니다."
청년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여러번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상담을 하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저는 이렇게 부름을 받았는데 연로하신 우리 부모님들이 지옥에 간다면 제가 어떻게 하나님께 고개를 들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아직 아버지에게서 그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가 이 큰 사랑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내 자식이 회심에 이르지 못한다면 제가 가는 천국이 어떻게 기쁨의 나라일 수 있겠습니까 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못 만났습니다.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감동을 받게 만들지만 영혼의 무감각은 우리를 무정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고 자기의 자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불신세계에 태어나서 버림받은 자식들보다 더 불쌍한 아이들은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회심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부모의 섬기는 기도를 그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절실한 믿음의 기도를 한번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기도하기전에 그 회심하지 못한 아이를 데려다 놓고 너는 네 신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하고 진지하게 물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목회자가 여러분들을 그렇게 목회한다면 여러분들은 교구의 목사나 담임목사나 이런 목회자들을 여러분들은 목회자로서 존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할 사물과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가족 그리고 우리 아이의 영혼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비는 많은 기도는 아버지의 태만과 나태함 때문에 공중에 흩어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자식의 회심이 아내만의 책임이겠습니까? 그럴수 없습니다. 오히려 언약백성들의 경건한 신앙은 아버지에게서 자녀에게로 물려져 갔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자식을 위해 기도해야 할 얼마나 큰 의무를 지고 있는지 진실하게 생각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아이들뿐 아니라 교회에 속한 자라나는 많은 세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가 경험했던 그 하나님 없는 삶의 밑도 끝도 없는 고통스러운 방황이 이 아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인생이 되지 않도록 그렇게 하나님앞에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식이 싫어해도 쓴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는 틀렸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자손들에게 이 믿음이 물려지지 않는 이유는 세상이 너무 악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 세상이 악하지 않은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믿음의 집안에서 아이들을 내 놓으면 이세상이 훌륭한 믿음의 자식으로 키워주던 때가 아담의 타락이후에 있었습니까?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 성에 불비가 내리고 심판이 임할 때 아득한 먼 옛날인데 어떤일이 일어 났는지 보십시요. 천사들이 찿아 오니까 온 동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요세집에 뛰어 들어서 부숴질듯 문을 두드리며 그 천사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상관하리라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동성연애입니다. 상관하리라 이것을 직역하면 성관계를 가지리라는 뜻입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그 세상을 유황과 불비로 쓸어 버리셨겠습니까? 그 옛날도 그러했습니다. 그 핍박의 칼날을 이기고 기독교가 최고의 부흥을 이루던 로마시대에도 세상이 그랬습니다. 믿음의 자녀들에게 신앙이 계승되지 않는 이유는 절대로 세상이 악하기때문이 아니라 부모가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렇고 세상 끝날까지 세상을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너희 믿음을 지켜라 그리고 신앙을 따라 살아라 은혜를 구하라 내게 간구하라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부모이지 않습니까? 할 수 있는 고난은 하나님 아버지가 주셨습니다. 마지막 여러분 자녀들이 회심하지 않았을 때 여러분 가서 주님 앞에 "아내에게 그렇게 아이들 챙기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내버려 두었습니다." 라고 변명을 하면 주님이 "합당하도다" 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이 아버지의 희망은 어린 딸이 사는 것 이었습니다. 부귀와 명예도 아니었고 물질도 아니었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데도 다 필요 없고 오직 딸이 사는것 하나만이 이 아버지의 소원이었습니다. 절실한 소원 하나는 하위에 있는 모든 소원을 없는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의 정체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한주간 동안에 아버지가 기도 하십시요. 애초로운 것은 엄마가 그렇게 가슴을 쥐어 뜯으며 절실하게 기도하는데 아이가 회심을 안합니다. 집회에 올때부터 회심 안하기로 뜻을 세운 아이 같습니다. 장난하고 산만하고 드러누워서 뒹굴고 아버지인 여러분들이 회개하기 전까지는 회심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번주부터 아내와 함께 한 마음이 되어서 자식을 위해 절실히 기도하십시요. 사랑은 영혼을 바꾸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예화) 그래서 제가 언젠가 그런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맨처음 전도사 생활할 때 섬겼던 교회에서 목사님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앞에 서원을 했다고 합니다. 아이가 죽을때까지 가난한 시골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해 주겠노라고... 그래서 10명, 15명 모이는 교회에 아주 자주는 아니었어도 일년에 두세번씩 가서 봉사하고 오셨습니다. 한번은 갔는데 귀신들인 아이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도 은사를 기도원에서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기도를 해주는데 안 나가더랍니다. 온 몸이 다 상처가 나고 동네 사람들이 귀신이 들였으면 조용히 내 쫒을 일이지 잡아 패가지고 팬다고 그 귀신이 나갑니까? 그래서 아이가 완전히 정신적으로 혼란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래도 그 부모가 매일 새벽마다 이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데 어느 순간에는 이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데 목사님이 너무 서럽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능력이 있으면 이 아이를 났게 해 줄텐데 내가 있는 힘을 다해도 안 고쳐진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자기는 서러운데 당신은 집회 끝나고 가면 이 아이가 이런식으로 살다가 결국은 버림 받을텐데 너무 불쌍하더랍니다. 별로 감정의 동요가 없으신 분이셨는데 하여튼 그 노인네가 이 아이를 붙들고 기도하는데 서럽게 눈물이 나더랍니다. 3일을 그렇게 울면서 기도하여 주었더니 대게 귀신이 나갈 때 소리를 지르고 기절을 하고 뒤집어 지고 하는데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는 사이 나가서 온전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그 집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사랑은 능력보다 뛰어나다. 사랑이 없는 능력보다는 능력이 없는 사랑이 더 위대하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능력보다는 능력이 없는 사랑이 위대하니 이는 내게 능력이 없을 때 능력이 많은 하나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주부터 아버지들은 절실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아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해도 내 자식이 회심에 이르지 않은 것은 내가 이 아이를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부부가 한 마음이 되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분들의 신앙이 회복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나 여러분 자식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나 여러분 자신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나 모두 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해서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 온것 같은 놀라운 회심이 여러분의 집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1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1 (2008/09/07, 주일오전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2 (2008/09/14, 주일오전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3 (2008/09/14, 주일오후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4 (2008/09/21, 주일오전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5 (2008/09/24, 수요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6 (2008/09/28, 주일오후예배)
5.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 찌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애 2:19).
I. 본문의 배경
아마 선지자들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사람중의 한 사람을 들라면 예레미야였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 이스라엘이 멸망하리라는 예언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애에서 그 예언이 이루어져 이스라엘이 망하고 민족이 포로로 끌려가는 비극적인 광경을 모두 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애가는 예레미야의 슬픈 노래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된 자식이 아버지를 향해서 죽음을 향해서 죽음을 향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애자라 이렇게 칭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슬픈 자식입니다 그런 뜻이죠? 아버지가 혹은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들이 슬픈 자식이 된거죠. 그러면 그런 말은 물론 없지만 만약에 자식이 죽으면 애부나 혹은 애모가 되는것 아니겠어요?
여기의 이 광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예언대로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난 직후에 초토화된 예루살렘을 돌아보며 예레미야가 통곡하며 부른 슬픈 노래예요. 그래서 공교롭게 예레미야 애가는 히브리 말로 에카라는 말로 시작을 해요. 근데 그 애카가 아 슬프도다 그런 뜻이예요. 그래서 이것을 애가라고 부르는데 지금 예레미아 선지자가 부르는 애가의 앞에는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면 예루살렘이 멸망함으로 말미암아 자녀들이 이제 뿔뿔히 흩어져서, 그래서 밥도 먹지 못하고 전쟁터에 유리 방황하고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고통을 받으며 너무나 길거리에서 이미 벌써 굶주려 죽어가던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이 어린 자녀들이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그렇게 굶주리고 환란가운데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 중에는 부모가 있어서 돌보는 자식들도 있었지만 그 중의 어떤 아이들은 부모가 버리고 도망간 자식도 있었을 것이고, 혹은 그 난리통에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곳이 없어 홀로 길거리에서 형제도 잃어버리고 가족도 상실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고 먹을 것을 먹지 못해서 핍절한 상태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어린 생명들을 선지자가 보면서, 그러면서 찢어지는 그 마음으로 이 시를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예요.
하나님은 이미 예레미야에게 왜 그런지 다 그 섭리는 모르지만 결국 이 나라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망하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가르쳐 주셨어요.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미 하나님의 뜻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확정되었으니까 순순히 바벨론에게 복종하고 거기에 무릎을 꿇으라고 증거하였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고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의 망령된 말로 여겨서 결국은 예레미야가 고난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는 환란을 당해서 전쟁이 일어나서 그 전쟁속에서 예루살렘의 말 발굽아래 짚밟혀 나라가 초토화되었고 그 속에서 양식이 없어서 사람들은 굶주리게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은 다 뜯기고 파괴가 되었는데도 예레미야 혼자 눈물을 쏟으며 슬퍼하고 있었지 다른 인간들은 장롱속에서 마지막 보물을 꺼내어 양식을 바꾸러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1장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너희에게는 어찌 나처럼 마음이 찢어지는 것같은 고통이 없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내 눈에 흐르는 것같은 그런 눈물이 없느냐고 탄식할 정도로 이미 이 백성은 하나님을 떠났던 것이예요. 결국은 전쟁중에 양식을 모두 잃어버리고, 식료품의 공급이 끊어지자 제일 고통받는 것은 어린 자녀들이었습니다. 어른은 그래도 면역력이 있고 저항력이 있어서 며칠 안 먹고 버틸 수 있었는데 어린 자녀부터 먼저 쓰러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II. 어린 자녀의 처지
나는 이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라고 생각을 해요. 육체적으로 보면 우리 아이들은 없는 것 없이 생활을 합니다. 저희 어렸을 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물질 생활을 누리면서 살아가요. 얼마전에도 제가 북한에 다녀왔지만 우리는 꼭 북한하고 비슷한 환경속에서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은 지금 너무나 넉넉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동네마다 소아 비만 치료 전문 병원이라고 간판을 써붙여놓고 돈들고 와서 애들 살 빼주라는 광고가 나오는 세상이니 그러니 집에서도 아이들을 이렇게 그만 먹어라, 살찐다, 뱃살나온다, 어떡할려고 그러니? 칼로리가 중하다, 이렇게 우리들이 어떻게 보면 사치스러울 정도로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애들 불쌍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직도 가난하고 굶주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추석때도 우리들이 벌말 초등학교 가서 도왔죠. 그런데 육신적으로는 그렇지만 영적인 안목으로 보면 이 아이들은 예전의 우리보다 훨씬 굶주린채 살아갑니다. 저희때는 사춘기라는게 빨리 조숙해야지 중학교 2학년이고, 그렇지 않으면 제 친구는 고 3때 사춘기가 시작된 애들도 있었어요. 전 2학년말 정도 왔던거 같애요. 2학년때쯤. 대충 빠른거였어요. 대게 중학교 3학년 되야 사춘기가 왔는데 지금은 놀랍게도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아주 더 빠른 아이들은 초등학교 3학년때도 벌써, 2~3학년때부터 오기 시작해요. 그리고 성적인 징후들도 나타나기 시작해요. 그러니까 이건 뭘 의미하냐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보면 그만큼 빨리 이 진리와 그리고 정신과 영혼을 위한 양식이 필요하게 변했다는 거예요, 세대가.
그런데 상대적으로 물질 문명이 너무나 팽배하고 그리고 가족관계를 통해서도 다들 바쁘게 살아가면서 예전처럼 따뜻한 그런 관계같은 것들이 다 무너지고 나니까, 이제는 가족이 함께 살아도 그 아이들 하나하나가 부모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모두 외로운 거예요.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얘들이 집에 들어와서 잠을 자는건지 안자는지도 모를거예요. 과외니 뭐니 해서 새벽 1시에 나왔다가 6시좀 넘어서 눈을 부비고 나가고 하니까 식구들마다 이러고 돌아다니니까 그 속에서 아이들이 영혼이 말할 수 없이 곤고한 거예요.
제가 그래서 그런 말씀 드렸잖아요. 어느 교회에서 중고등학교 하나를 인수해서 그 아이들, 이제 젊은 여성들은 좀 바쁘고 권사님들은 좀 한가하잖아요. 그러니까 권사님들 나이든 여집사님들이 한반이 10명씩 맡아가지고 도우미를 했대요. 처음에 뭐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니까 완전히 동물원의 짐승보듯 하더래요. 이 노땅들이 여기에 왜 왔나, 그러고 쳐다보는데 정말 민망할 정도로. 그걸 실망하지 않고 매주 돌아가며 편지쓰고 전화해주고 문자해 주고 한달에 한번씩 도시락 싸가지고 가서 하니까 한 6개월 지나니까 하나씩 둘씩 마음을 열면서 가까이 보면 엄마같고 멀리보면 할머니 같은 권사님, 집사님들에게 엄마한테도 안하는 자기 속사정을 털어면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더래요. 그렇게 곤고하게 되고 있는 거예요, 지금의 사정이.
III. 자녀의 생명을 위해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러니까 부모들을 향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너희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뭘 하라, 뭘좀 하라. 그게 뭐냐하면 첫째는 네 마음을 쏟아라, 네 마음을 쏟아라. 여기서 쏟는다는 의미는 무슨 뜻이냐면 액체 같은 것을 어떤 장소에 확 부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마음을 물같이 녹을때 비로소 쏟는 것이 가능해지겠죠. 마음이 녹는다고 하는 것은 물로 비유하지 말고 촛농에 비유하면 참 좋을 거예요. 초가 열을 받지 않고 단단할 때에는 형체가 고정되어 있지만 그 양초를 따뜻한 불에 녹여서 물로 만든 다음에는 어느 틀에든지 부으면 이전의 모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새 모양이 되듯이 우리의 마음이 굳어져 있던 마음일 경우에는 이게 어느 한쪽으로 쏟아지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이렇게 물을 놓고 아무리 기울여도 이게 물이 아니라 얼음이면, 달라붙어 있다면 아무리 기울여도 흘러내려가지 않잖아요.
A. 마음을 쏟으며
이렇게 기울이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굳어진 마음으로는 아무리 무릎이 아프도록 무릎을 꿇고, 다리가 아프도록 무릎을 꿇고, 많은 언어로 중얼거리고 이야기를 해도 마음은 굳어 있어서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흘러가지를 않아요. 그래서 그 마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앎으로 녹아내릴 때 그 마음이 기도로 기울면 기도로 쏟아지고 섬김으로 기울면 섬김으로 쏟아져서 무엇을 하든지 그 마음의 쏟아짐이 가능해지게 되는 것이예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인간의 모든 선행과 공로에 의지하는 구원 사상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주장했어요. 레오 10세라고 하는 당시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동봉한 책 속에 왜 인간의 모든 공로와 외적인 행실이 우리를 진정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는지를 설명한 책자를 하나 집어넣었어요. 그 중에 나오는 인상깊은 내용이 그거예요. 뭐냐하면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은 이 땅에서의 공로나 인간의 행위,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 있으면 이 마음을 가지고 밥을 먹든 기도를 하든 예배를 드리던 무슨 짓을 하든 이런 기울기가 이 마음을 물처럼 녹아내리게 만들지 못한다는 거죠. 그러면 이렇게 굳어진 마음이 물처럼 변화되어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이냐, 그것을 믿음이라고 본 거예요. 믿음만이 진리와 함께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변화된 영혼이 구원받은 심령이라면 인간의 선한 행동과 공로는 이건 우리의 외면일 뿐이지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논리를 폈었요. 꼭 같은 것이예요. 기도회에 참석을 하고 이런 저런 일을 해도 우리의 마음을 물같이 녹이는 것은 그런 행위가 녹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물같이 녹이는 것이죠. 그런 마음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 녹은 마음은 정체가 무엇일까요? 자기의 생각에 의해 굳어진 마음, 그리고 자신의 정서에 의하여 채워진 마음, 자신의 의지로 가득찬 마음이 물같이 녹아질 때 지성은 하나님의 생각을 마음은 하나님의 정서를,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예요. 그런 마음이 되는 것이 자녀의 생명이 죽음 앞에 있을 때에 부모가 갖는 마음이예요. 내 자식이 내 앞에서 서서히 죽어갈 때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겠어요. 그렇게 마음을 쏟는 것이 영혼의 생명이 이 죽음 앞에 있을 때에 진정한 부모가 가져야 할 마음이라는 것이예요. 어쩌면 다양한 환경들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단련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고치시는 하나님이 어쩌면 부모인 여러분들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변화되길 기대하면서 안 변하는 여러분들을 고치기 위한 수단으로 여러분 자녀의 회심을 지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녀를 위해 마음을 쏟는 부모들이 되길 바랍니다.
B. 손을 들며
두 번째는 손을 들찌어다고 했는데 이것은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하나님께 손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했으니 이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열망의 표현이었던 것이예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제 하나님 앞에 심판받은 예루살렘에서 무너진 성전에도 관심이 없고, 자녀들의 생명에도 관심이 없고, 장롱 밑바닥에서 보물을 꺼내어 곡식을 바꾸러 이리저리 돌아치는 이 신앙이 없는 부모들에게 이렇게 지금 주려서 혼미한 가운데 죽어가는 이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헤아려 하나님께 손을 향하여 기도하라고 외쳤던 것이예요. 그렇게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들이 마음에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의 구원은 전혀 인간의 힘에 달린 것이 아니예요. 그 자녀의 영혼의 진정한 변화는 오직 하나님께 달린 거예요. 하나님이 어루만지시면 고쳐지지 않을 마음이 없고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면 스스로 변화될 영혼이 이 세상 아무곳에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난한 마음으로 자기 자녀에 대한 뜨거운 사랑속에서 하나님이 이 구원의 은혜를 우리 자식들에게 베풀어 주기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이 부모가 해야 될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이들 한 글자라도 더 공부를 시키려고 어떤 때는 비굴할 정도로 자녀들에게 그렇게 애달프게 잘해주지 않습니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게 뭐냐하면 어떻하든지 이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래서 인생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인 하나님 앞에 구원받는 이 중생과 회심의 문제로 마음을 모으고 스스로 자신의 영혼의 비참함을 깨닫고 주님께 구원얻는 것 이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는 것이예요. 그것을 위해서 부모는 하나님을 향해 든 손을 내려놓지 말도록 권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일들을 밤 초경에 일어나서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실컷 자다가 아침녘에 일어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잠들기 시작하는 초경에 너는 일어나서 부르짖으라 무슨 뜻입니까? 니 새끼가 죽어가는데 부모인 너희들이 잠이 오느냐 그 뜻이예요. 어떻게 잠이 오느냐.
요즘은 조금 사회가 개방되서 좀 나은데 제가 초기에 전도사 생활을 할 때만 해도 딸이 나이가 많아서 시집을 못가면 그 집에 심방을 가면 어머니가 늘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제가 죄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는 노인네들을 여럿봤어요. 딸을 여의지 못한 것이 자기의 큰 과오라고 말이죠.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회심하지 못한 자녀를 둔 것이 마음의 큰 고통과 짐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초경부터 마음을 하나님께 기울이며 기도하라고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예요. 결국 결론은 부모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이 얘기입니다. 부모가 참된 부모라면 그 부모 마음으로 부모의 참된 마음으로 돌아가야지요. 우리가 그 마음으로 안 돌아가니까 자식들이 회심을 하든 말든, 그저 잘 먹고, 건둥건둥 뛰는 것으로 만족을 하고 그냥 잘 길렀다 생각하는 것이예요.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자식들 기르라고 맡긴게 아니죠.
좋은 대학 나오고 똑똑하고 건강하고 심성 좋고 우리애는 나무랄 게 없습니다. 회심을 하게 되면 그러면 언제쯤 회심할까요? 부모는 부모의 마음에 일반적으로 그런 자식을 향한 애정이 어찌 없겠습니까만은 때로는 어떤 때 마음을 모아서 그 자식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가끔 초상집에 가면 부모님이 분명히 믿는 가정인데 부모님이 안 믿고 돌아가셨어요. 그때 마음이 참 아프죠. 자식들도 물론 마음이 아플거예요. 그런데 그 부모가 마음이 더 아프죠. 과연 아무리 자식들이 간절히 전도하고 부모님을 섬겨도 마음이 강팍해서 결국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인간들도 있지만 과연 이 돌아가신 부르신 부모는 어느 자식이 애달도록 그렇게 눈물로 그렇게 기도하며 이 부모의 영혼을 위해 울어주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 오히려 남아있는 사람보다는 그런 사랑을 못받고 간 고인들이 더 불쌍하지 않아요? 그러면 여러분들의 자녀를 향하여 여러분 자신이 부모의 참 마음으로 돌아가면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III. 부모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여러분 제가 지지난 주에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어느 순간에 여러분 자녀를 놓고 마음에 깊은 고통으로 “얘야 나는 니가 회심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서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한번 그렇게라도 말씀해 보셨습니까? “어머니 요번 생신때 뭐해드릴까요?” 그럴때 한번 두 손을 꼭 잡고 “이 에미의 간절한 소원은 니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인 신자가 되는 것이다” 한번 얘기해 보셨습니까? 오늘도 그렇게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어요. 이분이 저를 그렇게 좋아하시고 저를 보러 교회에 늘 오셨는데 주일날 후딱하면 빠지시는 거예요. 뭐 친척의 환갑이 있다 제사가 있다 누구 장가간대드라 그러고 빠져요. 그래서 어느날 할머니 손을 꼭잡고 얘기했어요. “할머니 내게 간절한 소원이 있는데 하나 들어주시겠어요?” “얘야 이 세상에서 내가 너를 제일 사랑하는데 내가 무슨 소원인들 못들어 주겠니 한번 얘기해 봐라” 그래서 “절 보러 그냥 교회에 가끔 들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르게 잘 믿고 구원을 얻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랬더니 아주 진지하게 “얘야, 내가 돈으로 해달라면 없어서 못해주겠지만 손자인 네가 그렇게도 네가 진실하게 하나님 믿기를 원하는데 내가 왜 그 부탁을 못들어주겠니” 그러고 그 다음 주서부터 거의 빠지지 않고 어느날 당신 자신의 마음안에 일어난 모종의 변화를 저에게 간증하셨어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비록 우리 자식의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할 때 성령이 불같이 내려서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이 자녀의 회심하지 않은 영혼의 상태에 대한 깊은 부모의 눈물, 그리고 부모의 마음에 남아있는 무엇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는 큰 고통, 너의 영혼의 죽음을 육체의 죽음처럼 생각한다는 영적인 부모로서의 이 마음을 진실하게 전하기만 해도 자식들은 달라지지 않겠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님 오시기에 앞서서 선지자 세례 요한을 보낼 때 그는 400년만에 온 선지자거든요. 큰 능력과 권능으로 오는 그 선지자가 큰 일을 할텐데 그 큰일이 뭐냐하면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아가게 하고,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아가게 하는 그러니까 시대가 하나님을 떠나면 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 있는 이 기본적인 사랑이 끊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다시 이어주겠노라고 그런 사람으로 내가 선지자 세례 요한을 보내노라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모의 마음에 역사하면 제일 먼저 자식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생겨나요. 그래서 참된 부모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새끼의 영혼을 위해서 깊이 애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여러분들이 하늘 나라에 갔을 때 거기서는 이 지상을 모두 볼 수 있어요. 그때에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허랑방탕하면서 영혼의 깊은 고통을 겪으며 사는 모습을 본다면 거기가 어떻게 천국이 될 수 있겠어요. 참된 부모의 마음으로 돌아가길 바랍니다.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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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5 (2008/09/24, 수요예배)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6 (2008/09/28, 주일오후예배)
6.자녀들을 은혜의 말씀으로 세우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 5:20-32)
아이들이든지 어른이든지 신앙생활이 유사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3년째 회심집회를 했는데 사실 작년에는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열매가 없었던 것은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들었나 분석해 보았더니 크게 두가지정도의 요인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1회때 회심집회 할때에는 교회적으로 정말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작년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있고 두 번째는 열린교회 회심집회가 세 번째이지만 따지면 다섯 번째입니다. 여름, 겨울 이렇게 했으니까... 수년이 가면서 많은 곳에서 같이 참여하겠다고 해서 좋게 받아 주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실 문제가 별로 안되었는데 세 번째 할때에는 굉장히 많은 수가 외부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데리고 온 사람들은 회심에 대한 갈망이 있지만 온 아이들은 회심이 무엇인지 오늘 여기에 왜 왔는지 아무 개념이 없는 아이들이 수 없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니다 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은 자기 교회가 있으니까 거기에서 해결할 문제이고 어쨎든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일체 외부 광고를 하지 않고 외부의 단체를 받지 않고 우리끼리 집회를 했는데 작년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깨어짐과 아이들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아직 저의 마음에는 충분히 차지 않지만 어쨎든 그랬습니다.
그 사람이 아이든지 아니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다른 지체든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불신자든지 간에 인간의 마음이 가장 순수할때에는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때입니다. 그 중에서도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 때 그 사랑은 완벽하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백번을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영혼이 같은 영혼이기 때문에 똑같다 라는 뜻이 아니라 같은 영혼의 유에 속하기 때문에 이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저것을 위해서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아침에 열린뉴스에 나온 자매님이 자기 자녀를 잘 기르지 못했던 것을 잘 희망적으로 양육하고 싶다고 울먹이면서 인터뷰를 했는데 얼마나 눈물이 나올려고 해서 혼났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뭐냐면 이것이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그 부모를 사랑하시면 그 사랑이 제일 먼저 그들 자손의 영혼에 보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는 복이라고 하는 것이 돈 많이 벌어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복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진정한 복은 아이들이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부모들도 마음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면 우리 어렸을 때 짜증이 나도록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이었습니다. 요즘 그런말 씁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요? 주위에서 그런말 들은 적이 있는지... 이상하죠? 그것이 불과 우리 어렸을때이니까 40, 50년전 세월 밖에 안 되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왜 사라졌을까요? 이야기 하면 굉장히 길어요. 이것이 이 세상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우리들이 들어 온 어른으로부터 받는 충격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때 생긴 유행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흘러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40, 50년 전부터 와해되어 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그래서 언젠가 설교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항상 구호속에서 일생을 살아 왔습니다. 제가 어렸을때에는 너무 어렸을때에는 기억이 안나고 초등학교때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이 나는데 무찌르자 공산당입니다. 6.25가 끝난지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책을 찍으면 연세 드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책을 찍으면 책 맨 뒤에 반드시 우리의 결심이라는 것을 찍어야 했습니다. 그것의 핵심 내용이 뭐냐면 우리는 오랑캐를 쳐 부수고 백두산까지 간다. 4개조항 5개조항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것이 무찌르자 공산당입니다. 그래서 저 북쪽은 아주 나쁜 사람들이 사니까 맨날 포스터 그리기 대회하고 불타는 전투기 날라 가는것 그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 다음에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것이 우리가 초등학교 2학년때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증산, 수출, 건설 여러분들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농부가 볏단을 끌어 안고 활짝 웃고 있는 그 우표 기억나죠? 증산, 수출, 건설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빨리 더 많이 생산을 해서 그것을 안 먹고 굶즈리고 팔아다가 돈이 들어오면 그것을 가지고 공장 같은 것을 지어서 물건을 팔아서 그래서 돈을 벌고 그렇게해서 나라가 발전하자 그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여러해 갔습니다. 그 다음에 이 양반이 계속해서 대통령을 하고 싶으니까 유신으로 뒤집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유신으로 번영하자 해서 학교 앞에 가면 증산, 수출, 건설 그 다음에 기억에 선명하게 납니다. 무찌르자 공산당 상기하자 6.25 그것이 대표적이었고 그 다음에 증산, 수출, 건설 그러다 70년대 들어 유신으로 번영하자 해서 결국은 무너집니다. 그래서 80년대 새봄이 오고 그리고 노태우씨가 당선 됩니다. 이 양반은 별로 내걸것이 없어서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 옛날 고려시대부터 쓰던 것을 내걸었습니다.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 그리고 80년대가 지나갔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구호는 공중에 뜬 것입니다. 확 하면서 후기근대주의 사조들이 밀려 들어와서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묶는 이런 보편적인 가치 이런것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학교에 그런 구호들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증산, 수출, 건설 유신으로 번영하자 그 다음에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 그러다 김영삼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삐삐는 진동으로... 아이들이 다 삐삐 가지고 다니니까 수업시간에 울려서 견딜 수 없으니까 삐삐는 진동으로... 지금 어떻게 될까요? 아무것도 내걸 말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런속에서 우리들은 아이들을 낳아 기른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그런 말을 하냐면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시집, 장가가서 애 낳을때가 되면 회심이라는 단어가 그때까지 남아 있을까 우려 될 정도로 불신앙의 시대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을 회심집회 하면서 느끼는 것이 뭐냐면 어제도 너무너무 괴로웠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문제는 뭐냐면 성령의 강력한 역사입니다. 폭풍같은 역사가 불어와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거룩하심이 우리 어린 아이들의 마음속에 확 심겨져야 하는데 그 중에 여러명은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 하도록 작정을 하고 온 아이들 같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회피하려고 하는 인간의 악이 얼마나 큰것인가 하는 것을 봅니다. 그 아이들이 처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몇 년 부모가 신앙에 관심을 안가지고 내버려 두는 사이에 아이들이 그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몹쓸 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아주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 회심집회에서 그랬습니다. 이제 이런식의 회심집회는 이번으로 끝이다. 다음에는 이번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부모와 교사, 교역자와 회심할 아이들이 한마음이 되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것을 묶고 거의 부흥에 가까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이것이 정말 소기의 열매를 거둘 수 없겠구나 라고 하는 긴장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점에 있어서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이 설마 이럴지 모르지만 제가 아는 연세드신 목사님들 가운데 자기 자식이 교회를 안다니기 때문에 고민하는 목사님들이 여럿 있습니다.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물며 목회자들도 신앙을 자기 자식들에 못물려주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어렸을 때 그 아이가 그럴 줄 알았겠습니까? 어렸을때는 부모 말씀 잘 듣고, 교회에 다니고, 공부 곧 잘하고, 중고등부 다니고, 대학부 다니고 하니까 신앙이 있는지 알았죠? 어느 순간에 직장 다니고 나니까 삯도 없는 것입니다. 이미 벌써 부모가 좌지우지 하기에는 늦은 것입니다. 목회자들도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물며 여러분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늦기전에 어렸을 때 이 아이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리고 이 아이의 회심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십시요. 자녀를 위해서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 못하면 무엇이 못하게 하겠습니까? 자기가 은혜에서 멀어지니까 자기의 영혼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데 어떻게 남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겠습니까? 자신의 영혼이 잘못 되었을 때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진심으로 아파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가장 먼저 유익을 얻는 사람은 부모입니다. 부모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것을 마음으로 깊이 깨닫고 자기 자식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중차대한 일에 부모들이 마음을 모으는 것 만큼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이고 마음을 모으지 않는 것 만큼 지금 정신을 안차리고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어제도 그 아래에서는 3,4,5,6학년 1,2학년 전부 다 해서 약 600명의 아이들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목사가 애원 하듯이 아이들을 같이 데리고 와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는데 160명의 부모가 왔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보면서 우리는 정말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구나 진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복 하지 않는 그런 시대에 우리들이 살고 있구나 이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예수 믿는 아이들의 가정에서 거의 버리다시피 나두지 않습니까? 옛날에 우리가 어른들이 "얘야! 그래!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그 이야기는 단지 돈 많이 벌어라 그 이야기가 포함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뭐냐면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나 재산을 가지고 그래서 머리가 되데 또 인격적으로나 모든 면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까지 포함을 하는 것입니다. 아들 참 훌륭합니다 그럴때는 학교에서 일등을 한다든지 아니면 축구를 기가막히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으로 됨됨이가 됐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것 조차도 이제는 아이들에게 충고하지 않는 시대인데 이제 여러분들도 자녀들보고 너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는 사람이 요즘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자녀들을 기를 때 사실은 훌륭한 사람이라는 개념을 가장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앞에 살아 가면...
지금 선교 사역하시다가 이제 일선에서 은퇴하신 목사님을 있었는데 동남아쪽에서 선교 하셨고 후배들이 참 그분을 존경합니다. 저도 그분을 아는데... 선교사의 삶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미국이나 영국으로 선교를 가면 여기 있는 것 보다 아이들 교육이 더 잘 되겠지만 동남아의 후진국으로 가면 아이들 교육은 너무 힘들고 또 부모가 이나라에서 저나라로 옮겨 다니면 그것도 후진국만 옮겨 다니면 아이들 교육은 최악입니다. 그런데 선교사들 사이에서 그 집의 자녀가 잘 자랐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너무 부러워하니까 후배 선교사들이 사모님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렇게 다니시고 이렇게 아이들 교육도 못시키셨는데 어떻게 자녀들을 저렇게 좋은 신앙으로 잘 기르셨어요?" 했더니 그분이 하는 말이 참 은사적입니다. "아이 나는 해준것이 없어 너무너무 자주 선교지를 옮겨다니고 해서 후진국만 다니고해서 아이들 공부를 제대로 시킬 수 가 있었나 편안한 공부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었나 나는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어"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아이들을 잘 키우셨어요?" "그냥 평범하게 아이들에게 한가지만 가르켰어" "무엇을 가르치셨는데요?" "하나님을 사랑하거라 너희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라는 그것 하나 가르쳤을뿐이지 나머지는 자기들이 했지"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자식들에게 가르쳐야 할 책임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쨎든 회심을 못한 아이들도 있고 은혜를 안 받은 아이들도 있지만 어쨎든 우리의 아이가 그렇게 회심을 하고 또 은혜를 받게 되었다고 하면 그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그 답을 오늘 여기서 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신앙은 어른들의 신앙도 마찬가지이지 내용이 흔들리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유아적인 신앙이 극성입니다. 흔들리는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큰 나무라고 할지라도 그 바닥에서 수십년간 자란 나무는 흔들리지 않지만 오늘 가져다 심은 나무는 흔들면 흔들리지 않습니까? 뿌리가 안내려 졌으니까? 그렇게 회심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이 처음 믿은 신자의 모습인데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유사합니다. 그래서 뜻은 뭐냐면 그렇게해서 그 아이들이 든든하게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뭐냐면 엄마 아빠가 죽고 없어지고 헤어져도 자기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붙들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사실 신앙 교육의 가장 현실적인 목표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몰라서 그렇지 굉장한 것입니다. 부모가 매를 들고 패고 선생이 모욕을 주고 이래도 아이들이 마음 깊은곳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자기의 태도를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아이들은 바꿉니다. 바뀝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앞에 변화를 받았기 때문에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그런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바뀌는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그들을 든든히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토대로 이루어지냐면 은혜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냥 말씀이 아니라 은혜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지도를 꼭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직 어리니까 부모가 지도를 합니다. 하루에 한 장씩 꼭 성경을 읽거라 아니면 절반씩이라도 읽거라 아니면 학교가기전에 기도하거라, 잠자기전에 기도하거라 그것을 가르쳐서 아이들이 회심을 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하나님앞에서 살아가는 경건한 세계가 있어야 은혜가 유지되지 없으면 어른보다 더 빨리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함께 참여하되 그 말씀이 은혜의 말씀이 되도록 성령께서 그 말씀을 접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게 되도록 예배생활과 성령의 은혜생활을 지도해 줍니다.
저는 재작년에 한번 감동을 받았습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였는데 회심을 한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아빠가 이 아이를 놓고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그 어려운 책을 놓고 일주일에 한과씩 하루에 한과씩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주 열심히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 있는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하든지 이 아이가 말씀에 접근하도록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말씀을 가까이 하게 하고 그렇게 다독거려서 그래서 이 아이가 그 은혜의 말씀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해 가도록 그렇게 아이를 위해 기도해주고 지금 하는 그 일들이 하나하나 희미해보이는 것 같지만 적어도 아이들의 이후의 인생에 여러분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노심초사 했던 것은 또렷이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러한 여러분의 섬김을 사용하셔서 그래서 여러분들의 자녀를 진정으로 구원을 얻어 그 늪이 등등 서가는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가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다음 세대가 얼마나 큰 바람이 불고 그리고 눈보라가 치는 세월이 될지 몰라도 수십년 뿌리를 내린 나무가 겨울에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없죠. 그러나 묘목은 얼마든지 그런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그렇게 섬겨서 회심의 집회를 마무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