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201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1 (2011.1.16 주일오전설교)
목 차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2 (2011.1.23 주일오전설교)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3 (2011.1.30 주일오전설교)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4 (2011.2.6 주일오전설교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5 (2011.2.13 주일오전설교)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6 (2011.2.20 주일오전설교)
1. 병든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마9:12-13) 2011.1.16 주일오전 1
2. 다시 살게 하시는 예수님(요8:10-11) 2011.1.23 주일오전 8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7 (2011.2.27 주일오전설교)
3. 다시 섬기게 하시는 예수님(요21:17-19) 2011.1.30 주일오전 16
4. 다시 용서하시는 예수님(눅18:13-14) 2011.2.6 주일오전 23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8 (2011.3.6 주일오전설교)
5. 영생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요4:13-14) 2011.2.13 주일오전 30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9 (2011.3.13 주일오전설교)
6. 인생을 고칠 힘이 없을 때(마9:1-2) 2011.2.20 주일오전 39
7. 죄인을 미리 아시는 예수님(눅19:1-7) 2011.2.27 주일오전 47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10 (2011.3.20 주일오전설교)
8. 잃어버린 자들의 하나님(눅19:8-10 2011.3.6 주일오전 55
9. 초대 받지 않은 여자(눅7:44-50) 2011.3.13 주일오전 63
10.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마15:21-28) 2011.3.20 주일오전 71
11. 절망을 이긴 믿음(마9:20-22) 2011.3.27 주일오전 79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38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1 (2011.1.16 주일오전설교)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2 (2011.1.23 주일오전설교)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3 (2011.1.30 주일오전설교)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4 (2011.2.6 주일오전설교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5 (2011.2.13 주일오전설교)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6 (2011.2.20 주일오전설교)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7 (2011.2.27 주일오전설교)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8 (2011.3.6 주일오전설교)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9 (2011.3.13 주일오전설교)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10 (2011.3.20 주일오전설교)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11 (2011.3.27 주일오전설교)
1.병든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I. 본문해설
II. 죄인들과 함께 잡수심
A. 병든 자를 찾아오심
B.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심
III.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IV. 결 론
2.다시 살게 하시는 예수님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0-11)
I. 본문해설
II. 간음 중에 잡혀온 여자
A. 율법에 호소함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 율법의 규정: 성읍 문밖에서 돌로 죽임(신 22:24)
- 예수의 판단을 시험함
B. 예수님의 판결
-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 자신들의 죄를 보게 하심
- 율법의 성취가 사랑임
III. 절망 중에 만난 예수님
A. 죄인을 만나주심
- 불결하게 보지 않으심
-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심(겔 33:11)
B. 죄인을 용서하심
- 사람의 관심사 : 정죄
- 주님의 관심사 : 미래
- 다시 살 기회를 주심
IV. 결 론
3.다시 섬기게 하시는 예수님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7-19)
I. 본문해설
II.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
III.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A.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세 번의 반복되는 질문들
- 과거를 묻지 않으심
- 소명으로 돌아가게 하심
B. 베드로의 응답과 부르심
- “주께서 아시나이다”
- 순교를 예고하심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III. 다시 섬기게 하시는 예수님
IV. 결 론
4.다시 용서하시는 하나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3-14)
I. 본문해설
II. 기도하러 올라간 두 사람
III. 죄인을 만나주신 하나님
A. 불쌍히 여기옵소서
-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함
- 소극적 의와 적극적 의
- 격식을 깨뜨린 기도
B. 하나님을 향한 갈망
- 어찌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미움
- 부끄러우나 회피하지 않음
- 하나님을 향해 살고자하는 갈망
III. 다시 용서 하시는 예수님
IV. 결 론: 낮아짐과 갈망
5.영생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I. 본문해설
II. 우물가에서 만난 여자
- 사마리아의 역사
- 물 길러 온 여자
- 물을 구하시는 예수님
III.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A. 샘물을 구하는 여인
- 육신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 육신의 수고를 해결하려고
- 영혼의 고통이 원임임을 모름
B. “네 남편을 불러오라”
- 핵심을 회피하려는 여자
- 죄에 직면하게 하고자 하심
IV.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V. 결 론: 낮아짐과 갈망
6.인생을 고칠 힘이 없을 때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1-2)
I. 본문해설
II. 침상에 떠메어 온 중풍병자
- 스스로 기동할 수 없음
- 타인으로 도움으로 살아감
- 지붕을 뚫고 달아내림(막2:3)
III.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
A. 질병의 근원을 보이심
- 죄 때문에 생긴 질병
- 죄에 대한 신적 복수가 아님
-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
- 병든 몸으로 병든 영혼을 알게 하심
B.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
1. “안심하라”
- ‘소자야’: 지극한 사랑의 표현
- 요동치는 마음: 정욕+낙담+분노
2,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 ‘저희의 믿음’: 사람들+중풍병자
- 죄 사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
-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심
IV. 인생을 고칠 힘이 없을 때
V. 결 론
7.죄인을 미리 아시는 예수님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눅 19:1-7)
I. 본문해설
II. 세리장인 삭개오
-세리라는 직업
-부자였으나 외로운 사람
-예수를 알고 싶어 함
III. 어려움을 딛고 만난 예수님
-만남에 놓인 난관들
1) 사람이 많음
2) 키가 작음
-난관들을 극복함
1) 앞으로 달려감
2) 뽕나무위로 올라감
IV.먼저 부르시는 예수님
A. 이름을 알고 계심: “삭개오야!”
-삭개오를 보심: "우러러보시고"
-마음을 보심: "속히 내려오라"
B. 친교에로 부르심: “네 집에 유하리라”
-뭇사람의 반응: "죄인의 집에 유함"
-당신의 가족으로 부르심
-생명적인 교제를 약속하심
V.결론
8.잃어버린 자들의 하나님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8-10)
I. 본문해설
II. 삶을 돌이킨 삭개오
A. 재물에 대한 변화
-소유의 절반을 포기함
-토색한 일에 최고로 배상함
B. 사람에 대한 변화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생각함
C. 예수에 대한 변화
-죄를 회개하게 하심
-새 삶을 바라게 하심
III. 잃어버린 자를 위해 오심
A. 삭개오의 구원을 선언하심
-구원의 은총을 베푸심
-아브라함의 자손임: 새로운 영적 백성
B.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은
-잃어버린 자를 위하여
-구원하여 한 가족 되게 하시려고
IV. 결론
9.초대 받지 않은 여자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 7:44-50)
I. 본문해설
II. 초대 받지 않은 여자
III. 사랑, 용서 받은 증거
A. 겸비한 참회
-마무 말이 없음
-뒤로 돌아들어 옴
-예수님의 발치에 섬
-울며 눈물을 흘림
B. 절실한 사랑
-눈물로 발을 적심
-자기 머리털로 씻김
-발에 입을 맞춤
C. 넘치는 헌신
-모든 섬김에 헌신임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음
-예배처럼 준비 된 만남
D. 확고한 믿음
-한 영혼의 아름다움: 믿음으로부터
-여기서 말하는 믿음: 확신과 의존
-진리의 이해와 순종: 사랑과 동행함
IV. 결론
10.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1-28)
I. 본문해설
II. 불쌍한 가나안 여자
-흉악히 귀신들인 딸
III. 가나안 여자의 믿음
A. 그리스도만 바라봄
-작정한 만남
-오직 그리스도의 시선을 끌고자 함
-부끄러운 사정을 큰소리로 고함
B. 그리스도께만 매달림
1. 장애에 굴복하지 않음
-예수님이 대답지 않으심
-제자들이 보내라고 간청함
-개들로 불리는 것을 견딤
2. 경배하며 간구함
-멸시 속에서 경배함
C. 그리스도의 긍휼만 의지함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부스러기...”라도 긍휼을 구함
-어찌하든지 주님과 관계를 허락 받고자 함
III. 죄인을 부르신 예수님
-믿음을 인정해 주심
-죄인을 긍휼히 여기심
-딸을 고쳐주심
IV. 결론: 긍휼을 구하라
11.절망을 이긴 믿음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마 9:20-22)
I. 본문해설
II. 혈루증을 앓는 여인
- 열두 해 동안 병을 앓음
- 많은 의원에게 가산을 허비함(막 5:26)
- 치료로 고통을 당하였으나 중해짐
III. 절망 중에 찾은 예수님
A.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옴
- 소문을 들음(막 5:27)
- 예수께 나아갈 뜻을 세움
B. 절대 의존의 믿음
- 다른 길을 포기함
- 두려움과 겸손: "뒤로 와서"
- 마음으로 믿음: 구원
- "겉옷만 만져도"장애에 굴복하지 않음
C. 고쳐주신 예수님
- 혈루의 근원이 마름(막 5:29)
- 구원해 주신 예수님
IV.결론
1.병든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는 광경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예수님의 생애에 초기에 있었던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자세한 이야기들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내용을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마태에게 ‘너는 나를 좇으라’ 명령하셨을 때 그가 순순히 따르는 것을 보면 이 이야기 속에 생략되어 있는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에게 찾아오셨고, 무엇인가 말씀으로 이 사람에게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감동을 주셨기 때문에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고, 또 자신의 집에까지 예수님을 모셔서 식사를 하게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II. 죄인들과 함께 잡수심
이 세리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원성을 많이 사던 그러한 직책이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시대의 세금 징수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로마가 식민지를 통치할 때 가장 어려웠던 일은 세금을 징수하는 일과 종교문제였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원칙 즉, 정해진 세금을 내고 황제를 숭배하는 로마의 정책에 반기를 들지 않는 한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일들을 규제할 때에 그들은 로마 사람들을 통해서 이 일을 하지 않고 할 수 있으면 그 나라 식민지 원주민 출신 사람 중에서 로마 편에 서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이 일들을 규율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을 위한 세금 징수는 유대인들 중에서 선발된 사람들이 징수하였습니다. 당시의 세금 제도는 다소 모호했습니다. 구역을 정해서 로마에서 이 구역에서 이만큼 돈을 걷어서 납부를 해 달라고 그렇게 지시를 하면 그러면 이제 그 사람들이 돈을 거두었고 거기에서 얼마를 남겨서 자신들이 갖든지 간에 로마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세금 제도의 불합리성 때문에 유대인들은 마땅히 내야할 세금 이상의 돈을 늑탈 당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 이 세리들은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하였지만 동족들로부터는 정치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이고, 종교적으로는 동족들을 수탈해 가는 그런 아주 더러운 죄인들이라고 낙인이 찍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인 경우에는 이방인에게 몸을 파는 창녀들과 똑같은 수준의 죄인들로 이 남성인 세리들이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자, 2000년의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어서 여러분이 한 번 이 세리의 처지가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동족의 피를 빨아먹던, 수탈을 하던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끼니가 간 곳 없던 때에는 먹고 사는 일 때문에 뭐든지 희생할 수 있지만 이제 먹고 살만해지면 그 다음에 사람이 물과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돈은 가지고 있고, 그리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지만 동족들의 가슴에 원한처럼 맺힌 이름이 되었고,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상대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자인 창녀 취급을 할 정도로 비천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A. 병든 자를 찾아오심
그래서 오늘 성경에도 보면 이 마태가 자기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거기에 와서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했으니 세리가 따로 있고 죄인이 따로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동격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보아서 세리 곧 죄인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해석일 것입니다. 기껏해야 만나는 사람들이 같은 처지로 민족에게 따돌림을 당한 세리들끼리만 만나서 함께 교제를 나눌 뿐 그들은 동족들로부터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고 마음이 허우로운 가운데 살아가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 그 사람에게 랍비같이 생긴 분이 다가오셨고, 그리고 그에게 신앙적인 감화를 끼쳐주셨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마태의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되었고 그래서 이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집에 초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이제 함께 식탁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너희 선생은 어째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고 하는 비난이었습니다. 이 비난을 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병든 자를 찾아오신 분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두드러진 사역가운데 하나는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신유의 사역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음을 먹으시면 우리가 질병에 있을 때에 의학을 초월하셔서 우리를 고치시고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능력이 사도 시대처럼 이렇게 사람들을 따라가면서 베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죄인들에게 다가오셔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시는 가운데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육신의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치시는 치유의 사역보다도 더 본질적인 사역의 국면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의 궤적은 그의 마음이 그린 발자취이고, 그의 마음은 그의 영혼의 건강한 바에 따라 달려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육신적 질병의 치료사역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영혼을 고치기 위해서 오신 영적인 의사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을 통해 영혼의 질병의 심각성을 깨닫고,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경험하면서 영혼도 고치실 수 있는 그 분이기에 우리의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그 분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병든 자를 고치시는 섬김을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병든 자를 찾아오셨습니다. 실제로 병든 자를 고치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 여기서는 영혼의 병든 자를 가리키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질병 상태는 인간으로 온전한 육신의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모든 기능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질병은 어느 정도 우리의 육체의 건강에 장애가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육신으로는 어떻게 움직이려고 마음을 먹어도 그 마음이 마음먹은 대로 육신에 전달되지 않는 것처럼 영혼이 이런 질병 상태에 있을 때에 마음은 선한 것을 마음에 명령해도 듣지 않고, 그리고 마음이 선한 것을 명령해도 몸은 악한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장애의 상태는 우리의 삶 그 자체를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악하고 잘못된 삶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예화) 대학에 있을 때 같이 교수로 있던 어느 선생님이 저한테 들려준 간증이었습니다. 이 분은 성악을 전공하셨는데 독일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깊은 밤이 되었을 때에 이제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모두들 잠든 시간에 채플실을 찾았답니다. 그랬더니 불이 모두 꺼져 있는 채플실 저 구석에 불 하나 켜져 있는데 어떤 사람이 기괴한 목소리로 아주 섬뜩하도록 그런 목소리를 내더래요. 그래서 가서 보니까 뇌성 소아마비 장애가 있는 학생이 거기에서 찬양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몸과 이 모든 머리의 동작들이 올바르지 않으니 정상적인 음성이 나왔을 리는 없죠. 온 피아노에 침을 튀기면서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 보기에는 괴성을 지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눈물을 흘리며 찬양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어느덧 그 찬양에 빨려 들어갔고, 그래서 그는 수많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의 찬양을 들었지만 그 사람이 부른 찬양이 자기가 일생동안에 들은 찬양 중 가장 아름다운 찬양이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건강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리 새로운 삶을 살고자 결심을 해도 달력 한 장 넘겼다고 해서 바뀌어진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궤적은 우리의 마음이 그린 발자취이고 우리 자신의 내면이 고쳐져 아름다운 영혼을 갖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은 종종 의사들이 크게 고쳐주기도 합니다만 영혼의 질병은 의사들이 고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고치실 수 있는 질병입니다. 육신은 길어야 8~90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하지만 길게 보면 일회용 소모품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니 육신과 영혼을 공정히 사랑해야 합니다. 물론 마지막 날에 우리는 새로운 육신을 입겠지만 그것은 주님에 의해서 완전히 새롭게 되어진 우리의 새 몸입니다. 그러므로 그 몸을 입을만하게 여러분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그리고 건강하게 고쳐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신앙은 이런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병든 자를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세리는 동족들에게 낙인을 찍혀 그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도, 함께 마실 수도, 그들과 함께 어울릴 수도 없는 소외된 이웃이었습니다. 모두들 그들을 생각하였습니다. 함께 사랑으로 소통하여야 할 사람들이기보다는 소탕하여야 할 인간들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조차도 가까이 가지 않는 이 더럽게 낙인찍힌 죄인들, 그들의 삶의 한복판으로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허허로운 날들 한복판에 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을 그들에게 전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사람들이 모두 버린 죄인들을 찾아 나서십니다. 사람들에게는 이 세리들이 몹쓸 죄인이요, 낙인찍힌 인간쓰레기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더럽고 낙인찍힌 죄인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이 받는다면 그들은 주님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낼 훌륭한 도구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흐드러지게 꽃핀 들판에 피어난 한 송이의 꽃은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합니다. 새하얀 눈밭에 피어난 꽃 한 송이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고,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한 줄기의 빛은 대낮에 충천하는 화염보다도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 세상 사람들이 소탕하기 바랬던 이 더러운 인간들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의 사랑으로 교통하셨고, 그들에게 참 사는 길이 무엇인지 가르쳐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인생의 벼랑 끝에 서고 친구도 없고 돌아보는 이 없이 버려진 사람들, 기껏해야 자기 동아리들 끼리나 모여서 밥이나 먹는 인간쓰레기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 완전한 하나님이시오, 사람이신 그 분이 오셔서 그들의 친구인 것처럼 앉아주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인정해서도 아니고, 그들의 실패한 삶에 동의해서도 아닙니다. 그들의 죄는 미웠고, 그들의 실패한 삶은 부끄러운 것이었지만 실패한 그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었기에 아버지의 사랑으로 그들은 세리들 그 모임 한 가운데 임재 하셨던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신앙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죄인일수록, 굽은 삶을 살수밖에 없는 사람일수록 다시 놓아주어도 벼랑 끝에서 춤출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더욱 필요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사람들이 내 곁에 없다할 그때에 사실은 주님 홀로 여러분을 대면하기 위해서 그 벼랑 끝에서 기다리고 부르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 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감격적으로 체험하고 일평생 그 사랑에 빚진 자로 자처하였던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병든 사람들이었고, 이 세상에서 떠받듦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버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 마음을 다해서 여러분에게 권하노니 주님과 함께 한해를 시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어제 밤늦게 이 설교를 다시 한 번 묵상하면서 준비했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우리에게 희망이 무엇일까? ‘우리가 좋을 때에 사람들도 좋지만 우리가 나쁠 때에도 변함없이 좋으신 분은 우리 주님 한 분 밖에 없구나’. 영혼이 병든 여러분의 많은 얼굴이 가슴에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이 그런 병든 자를 위해서 오셨다는 이 말씀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질 않네.
B.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심
주님으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고 새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예수님이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이 말씀은 사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구약 호세아서 6장 6절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은 구약의 여호와라고 명령되어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사실은 성육신하기 전에 제 2위이신 그리스도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이미 오래전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되풀이 하였습니다. 긍휼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 ‘엘로스’라고 하는 단어는 정확하게 히브리어 ‘헷세드’의 번역입니다. 사람의 좋은 이점 때문에 자기에게 이익이 돼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헷세드’는 그 사랑을 베푸는 하나님이나 사람 속에 있는 성향 때문에 자연스럽게 솟아 나와서 가치 없고, 비천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언약적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헷세드’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셨기에 예수님은 이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 바리새인들은 제사가 이 사랑보다 훨씬 더 큰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사를 하나님 앞에 향기롭게 올라가게 만드는 그것이 이렇게 ‘헷세드’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헷세드’로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입고 그 사랑에 감격함으로써 사람들을 그 ‘헷세드’로 사랑해서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 모두가 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교통하게 하는 이것이 제사를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를 이 ‘헷세드’보다도 더 높게 생각하는 것은 목적과 수단을 전도하는 것이요, 본말을 바꾸는 것이라고 믿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예배와 종교 생활 속에 깃들여야할 가장 근본적인 사랑의 정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 놀라운 엘로스의 사랑,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그 사랑이 넘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마음으로 이웃을 향해 사랑을 베풀고 그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이 헷세드의 사랑으로 우리 모든 인류가 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인 줄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친히 그 모본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뒤집어 놓은 신앙의 도리를 예수님이 바로 잡으시면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모두 버린 이 세리들 한복판에 다가가셔서 불결하기 짝이 없는 그들과 함께 가족처럼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를 보내신 가슴 저민 사랑을 증거해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III.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주님 앞에 나아와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갑니다만 마음이 없는 일만 번의 예배보다는 마음에 있는 단 한 번의 예배가 여러분의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왜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종교적인 의식을 매주 마다 거행하고, 심지어는 주중까지 우리들이 이 의식을 행하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만약에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자라지 않는다면 이런 일을 행할 때마다 우리를 위해서 사랑하는 자기의 독생자까지 기꺼이 주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아버지에 대한 은혜에 녹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의 이 종교 의식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이것을 예배당으로 가득 채워 우리가 주님 앞에 올리는 이 제사를 통해 주님이 받으실 것이 무엇이 있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모든 안타까운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눈물로 호소합니다. 형식적인 신앙은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단 한마디의 기도라도 영혼의 울림이 있어야 합니다. 단 한 번의 예배라도 마음의 통곡이 있어야 합니다. 단 한 번의 찬양이라고 심중 뼈 사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 묻어있는 가락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식과 위선 속에 일주일을 살다가 다시 그 위선과 거짓 속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는 바리새인과 같은 인간들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어차피 우리의 인생의 길은 우리가 영원히 행복하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아닙니다. 죄 많은 세상에 주님이 소망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순간순간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질병과 궁핍, 환란과 핍박, 고난과 위기, 굶주림과 병든, 그리고 늙음과 아픔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언제나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수록 죄인들을 부르기 위해서 죄인들이 당신을 찾지도 않았을 그때에 핍박에 서슬 퍼런 칼날이 기다리고 있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합니다. 아들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이 고난을 당하게 하시면서라도 우리같이 소망 없는 병든 죄인들을 당신께 다시 부르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으니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의 이 불붙는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에 눈물처럼 흐르는 이 긍휼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긍휼을 입어서 아무 가치 없는 죄인이 이 분에 넘치는 긍휼을 입었은즉, 예전에 하나님 앞에 섰던 우리처럼 불쌍한 영혼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고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주님이 주신 모든 자원의 최종적인 소비처가 아니라 그것들을 유통시키는 자들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기독교는 점점 전망이 어둡다고 말합니다. 그럴 것입니다. 아마 교회는 점점 줄어들 것이고, 주님을 믿겠다고 희망하는 사람들의 수요도 점점 감소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필요성은 점점 느끼지 못하게 될지 모릅니다. 매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그 수많은 추문과 그리고 도덕적으로 열악한 수준들은 더더욱 현대인들의 마음을 돌리게 만들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정교한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님 사랑 안에서 결합되어 있을 때 교회는 한 시대를 향해 위대한 힘을 갖게 되는 것인데 교회는 무지가 무지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로 가득차고 흑암에 무지의 어두움이 가려있습니다. 그리고 윤리의 힘은 이미 많이 쇠약해져 버렸습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다녀야 할 필요를 점점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방황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주님을 믿어야 할 필요는 증가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점점 다닐 필요가 없는 집단이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는 그리스도인을 점점 더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목마른 시대가 될 터인데 어떻게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신 그 큰 사랑 때문에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려 주님의 사랑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우리를 버려 그 사랑을 보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IV. 결론
오늘도 주님께서는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낙인찍히고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들도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버렸지만 자신들은 버림받는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버림받은 자들 중에 몇이라도 구하시려고 그들을 위해 자기의 옥채를 깨뜨리시고 자기의 거룩한 성혈을 흘려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집 나간 자들, 당신을 멀리 떠나 아무 희망이 없이 버려져 그리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오늘도 부르시는 것입니다.
(찬양) 어둡고 캄캄한 그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세상의 모든 사람이 우리를 버려도 변함없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시는 한 분이 있으니 그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주님의 이 사랑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시니 허우롭게 살았던 날들에 못을 박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함께 이 세상의 파도를 이기며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다시 살게 하시는 예수님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0-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을 대면하시고, 그를 다루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간음 중에 잡혀온 여자가 등장합니다. 시간은 아침이었고, 장소는 성전이었습니다. 물론 이른 아침에 이 여자가 어디에선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 목격되어 사람들에게 끌려 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받는 느낌은 꼭 그날 아침이 아니어도 언젠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런 여자를 준비했다 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II. 간음 중에 잡혀온 여자
A. 율법에 호소함
어쨌든 성경은 침묵하고 있으니 우리가 판단할 바는 아닙니다만 어쨌든 죄를 범한 여자가 끌려왔습니다. 서기관과 율법사들이 주동이 되었고, 그리고 무지몽매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과 함께 동조하며 이 여자를 에워 쌓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거기에 계셨습니다. 그들은 제일 먼저 이 여자의 죄에 대해서 율법에 호소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어느 쪽으로 예수님이 답변을 하시든지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 여자를 살려줘라’ 라고 말한다면 모세의 권위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되었죠. 모세는 그 당시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궁극적인 최고의 권위였습니다. 그는 아는 바와 같이 율법의 수혜자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만약에 예수님이 ‘이 여자를 용서해 줘라’라고 말씀하시면 이것은 모세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든 종교적인 교훈이 모세와 맞서는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훌륭한 기회였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종교적인 곤경에 빠뜨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을 존중하여 율법대로 이 여자를 처리하라 하면 두 가지 난제에 부딪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돌로 쳐서 이 여자를 죽이는 그것이 평소에 예수께서 가르치던 사랑과 용서의 복음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모순을 행하는 자로 사람들에게 낙인찍힐 수 있었습니다. 이보다도 더 커다란 문제는 로마의 실정법을 위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권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는 종교와 정치가 일치했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서 판결을 하고 그대로 집행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국권이 없었습니다. 작은 종교적인 문제들이야 공의회에 맡기고 로마가 간섭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이렇게 형벌을 하고 마지막에 목숨을 박탈하는 이런 행위는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로마의 실정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입니다. 이미 로마는 누구든지 법에 의지하지 않고는 구금당하거나 혹은 목숨을 빼앗기지 않을 그런 시문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만약에 예수님이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면 유대인들에게야 환심을 살지 모르지만 로마의 권위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고, 반정부적인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이 어느 쪽을 택하든지 자신들은 전혀 밑질 것이 없는 그러한 말하자면 하나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들이 이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께 율법에 이 여자를 돌로 치게 되어 있다고 율법에 호소한 것이 충심이었는지를 의심하게 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남아있습니다. 이런 것들입니다. 율법의 규정에 의하면 이런 여자를 신명기 22장 24절에서 돌로 쳐서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여자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남자도 반드시 같이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남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율법에 대한 충성이 있었다면 당연히 남녀를 모두 데리고 와서 예수님 앞에 세웠어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율법에 의하면 이러한 여자들은 죽이되 성 안에서는 죽일 수 없고 더욱이 성전 안에서는 그런 일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반드시 성문 밖으로 끌어내어 거기에서 처결하도록 율법이 규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으로 미루어볼 때 오늘 요한이 내리는 이 해석적인 판단, ‘이는 예수를 시험하려 함이라’고 하는 이 해설은 정확한 것이었다고 우리가 동의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B. 예수님의 판결
이런 난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요청을 받고 자리에 앉으셔서 땅 바닥에 글을 쓰셨습니다. 무슨 글을 썼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다 ‘너 자신을 알라’ 이렇게 쓰셨다고 하고 그리고 두 번째 앉아서 쓰실 때 ‘아무도 못 칠걸’ 이렇게 쓰셨다고 하는데 우리는 모두 그 사실을 동의할 수도 없고 부동의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글은 기록으로 남지 않고 흙과 모래 위에 썼기 때문에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는 글씨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대답 대신 앉아서 글씨를 쓰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기세등등해졌고, 그래서 예수님을 추궁하듯이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에는 ‘묻기를 마지않는지라’ 라고 하였습니다.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추궁하도록 물었을 때에 이들은 아마 이 시험에 예수님이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제 3의 요청을 그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새로운 판결이었습니다. ‘너희 중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고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보신 율법의 최종적인 완성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주옥과 같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향한 당신 자신의 태도를 이미 오래전에 말씀하신 대로 지키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율법을 폐하려 함이 아니요. 온전케 하기 위해서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점일획이라도 변경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바꾸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그 뜻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가 지은 죄는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은 복음의 때니 그 율법은 다 쓸데없다, 무조건 놔줘라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고 이 여자를 감싸고돌지도 않았습니다. 율법은 그대로 시퍼렇게 살아있고 이 여자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도, 그 죄의 형벌이 죽음이라는 사실도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이 이렇게 성난 군중들이 에워 쌓여서 사람을 돌멩이로 타살하기 위한, 타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율법을 주시지 않은 것임을 예수님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새까맣게 잊고 있던 자신의 죄로 돌아가도록 예수님이 찌르셨던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 부분을 해석을 하면서 이들은 불신자들이요, 유대인들이었지만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훌륭한 분들이다 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안 믿어도 양심이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믿으면서도 양심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좀 비판적인 말이긴 하지만 오늘과 같이 불법한 시대에는 우리들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명심하여야 될 것은 이들의 마음이 정말 그렇게 양심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에 찔리고 그리고 각자 이 여자 앞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회개를 둘로 나누었습니다. 율법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회개가 그것입니다. 율법적인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 앞에서 자기에게 임할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의식하면서 그 두려움 때문에 회개하게 되는 것이니 회개의 동기조차도 자기 사랑이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의미에서 회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공포와 두려움입니다. 온전한 회개는 복음적 회개입니다. 이 복음적 회개는 율법적 회개의 과정을 거칠지라도 궁극적으로 회개하는 동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사랑하시고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희생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즉, 바실레야 슈링크가 고백했던 바와 같이 진정한 회개는 회개하면 형벌을 안 받을 것이라는 요행심 때문에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는 이 죄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다 치르는 형벌을 받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 되기를 원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의 정신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 바실레야 슈링크의 지적과 마찬가지로 복음적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깊은 후회, 자신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주님이 불명예를 당하셨다는 후회, 여기에서 오는 자기 사랑의 포기에 뒤따르는 회개입니다. 율법적 회개는 우리를 하나님 사랑으로 데려가지 못합니다. 복음적 회개는 항상 우리를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고 죄를 짓게 만들었던 본래의 근원이 자기 사랑을 버리도록 깨뜨리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적 회개야 말로 진정한 회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적 회개는 불신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고 신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만은 복음적 회개는 오직 신자가 되는 사람 혹은 신자인 사람에게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둘 모두 다 성령의 역사이니 율법적 회개는 성령의 일반적 역사이고 복음적 회개는 성령의 특별한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완악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들이었지만 예수님이 이 말씀을 이들에게 들려주셨을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고 그리고 그 성령의 역사는 잠자고 있던 이들의 양심을 깊이, 깊이 찔렀습니다. 누구도 복음적인 회개에까지 들어오게 된 사람이 있다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은 성령의 일반적 사역 속에 깊은 찔림을 받고 그 양심적인 가책으로 돌아갔으니 그 양심의 가책으로 돌아간 것도 이들의 선함에서 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때려주신 성령의 역사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진정한 성취가 바로 사랑의 원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III. 절망 중에 만난 예수님
여러분은 이전에도 이 본문을 여러 차례 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되었을 리도 없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이 성경을 읽은 적은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그 여자를 죽이려고 에워싸던 유대인 중 한 사람의 관점에서 이 본문을 읽은 적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마치 영화를 촬영하는 기사가 그 피사 되는 장면들을 놓고 찍는 것처럼 그렇게 여러분은 객관적인 위치에서 여러분은 이 본문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여자가 서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에워 쌓고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충돌 질하는 그리고 거기 예수님이 앉아서 글씨를 쓰고 계신 그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이 본문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한번 제안을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그런 관점에서 이 성경을 읽지 말고 이 여자를 빼 내고 그 여자의 자리에 여러분이 한 번 서 보는 관점을 가지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에 이 여자였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기 때문에 부인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끌려왔습니다. 그 여자도 아마 율법을 알고 있는 여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죄가 어떠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말로 고소했는데 그것은 정확하게 사실들로 이루어진 고소였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변명할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군중들은 성나 있었고, 그들을 충돌 질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떠한 자비심도 기대할 수 없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무서운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랍비 같은 분이 한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의 모습이나 모든 걸로 볼 때에 이 커다란 난관에서 여러분을 단번에 구해줄 것이라고 하는 확신 같은 것은 주실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이 이 여자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까? 말할 수 없는 수치와 부끄러움에 눈을 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희망은 끊어지고 이제 잠시 후 이 사람들의 손에 들린 돌로 자기를 내칠 때에 피를 흘리고 죽는 장면밖에는 생각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을 꽉 감고 기왕에 올 것이라면 죽도록 수치스러운 이 환경에서 도망치도록 ‘속히 죽음이여 오너라’고 속삭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A. 죄인을 만나주심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물질이 없거나 건강을 해쳐서 죽음의 벼랑 끝에 가 있는 것만이 절망이 아닙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아무 희망이 없는 포기 상태에 있는 이 여자의 처지야 말로 절망의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어떠한 희망의 실낱같은 빛도 발견할 수 없는 캄캄한 인생의 벼랑 끝에서 그는 절망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에서는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 말씀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이 상황을 이렇게 기적적으로 단숨에 바꿔놓을 것이라고는 이 여자는 상상한 적도 없었습니다. 칼 한 자루, 몽둥이 한 개 없이 자기를 에워싸던 수많은 성난 군중들과 그리고 성경에 달통한 것처럼 행사하던 종교 지도자들까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이 여자 곁을 떠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죄인을 이 절망 속에서 만나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순결하고 거룩한 분이셨고, 이 여자는 정말로 불결하고 더러운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정결하신 분은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여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다가가셨던 것은 예수님에게는 죄는 더럽고 불결한 것이지만 그것 때문에 죄인이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신성을 가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만 경험되는 체험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이것을 경험해 본 분들이 분명히 계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성령 충만하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아주 열망이 있는 경건의 삶을 살게 되면 죄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더 사랑스럽고 불쌍해지는 경험을 여러분이 마음속에서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옴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심정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그렇게 불쌍하고 그리고 가엾어 보이는 이유는 죄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그 사람의 영혼이 분리되어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식고 사랑이 사라지면 그가 죄를 짓거나 자신에게 손해를 입히면 그거 하나 때문에 그 사람 전체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악의 덩어리가 되고, 사랑으로 소통하여야 할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으로 소탕 받아야 할 존재로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은 이러한 우리의 은혜 체험을 극대화 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예수님에게는 죄는 죄였고, 율법은 시퍼렇게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어느 곳에서도 이 여자의 죄가 작다든지, 문제가 안 된다든지, 혹은 이 여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죄를 무시한다든지 하는 것을 읽을 수 없습니다. 율법에 대한 모세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권위에 도전하지도 물론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 율법이 시퍼렇게 살아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가 지은 죄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에 대한 사랑은 오히려 그 죄 때문에 더 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이런 절망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에 눈을 감고 비존재를 택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죽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3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악인이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오히려 악인이 돌이켜 회개하고 살기를 바라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도 절망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범죄하고 나서, 불순종 하고 나서 이런 양심의 가책을 강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양심의 채찍질을 당하고 율법의 정죄를 받으며 온 영혼과 마음은 파리해지고 하나님을 위해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서 주님을 위해 무엇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도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남녀가 서로 사랑 했는데 한 사람이 배반을 했을 때, 그 사람에게 정을 주었던 인간이 어떠한 질투심도 느끼지 않는다면 과거의 사랑이 참된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 사랑이 참된 사랑이었다면 상대방이 자기의 사랑을 배반했을 때 질투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질투의 감정, 불같은 투기의 감정은 하나님에게도 신인동형론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언약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버리운 자들이라면 여러분이 매일매일 양심의 치열한 가책을 느끼며, 그리고 율법의 끊임없는 정죄를 받으며 하나님 앞에 버림 받은 느낌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버림 받는다는 것 자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만약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어 이렇게 모진 양심의 채찍질과 율법의 정죄 속에서 아파하고 있다면 이것은 그 아픈 깊이만큼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끔찍한 죄를 짓고도 아예 기억도 하지 못하며 평안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람일리가 없고 구원 받았다면, 만약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원리에서 이 여자를 지극히 불쌍히 여기셨고, 오히려 이렇게 죄를 지은 사람, 율법에 의해서 돌로 쳐 죽임을 받아야 되는 정죄에 처해질 죄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는 이 여자가 한없이 불쌍한 존재였고, 복음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이 여자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떠나 범죄를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고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히브리 성경으로 이 글을 읽어보면 엄중하고 책망하는 음성이 아니라 오히려 친근하게 엄마나 아빠가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가족 간에 불리는 사랑스러운 호칭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그렇게 물으신 것처럼 예수님은 ‘그들이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하고 예수님께서는 두 번이나 이 여자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물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흩어져 돌아갔고 그 뜰에는 예수님과 이 죄 많은 여자만이 마주서 있었습니다. 거기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만이 이 여자를 돌로 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일체의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율법으로 보든지 율법을 집행할 양심의 가책으로 보든지 예수님은 이 여자를 정죄할 충분한 권위와 자격을 갖추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B. 죄인을 용서하심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입니다.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목적은 ‘너를 정죄하는 것이지만 내가 온 것은 너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왔노라’ 고 하는 말씀입니다. 잠시 후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터인데 너는 분명히 죄를 지었고 정죄 받아야 하고, 그리고 너는 형벌 받아야 하지만 그 죄의 형벌을 내가 대신 담당할 것이니 너는 이제 나의 용서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죄가 너무나 크고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가 없기 때문에 죄와 죄인을 분리시켜서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 보면 그 천국 문 앞에는 ‘아무나 오게’ 라고 쓰여진 간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짜 천국에 들어가고 난 뒤에는 그 간판의 뒷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회개한 자들만이 들어온 곳’ 이라고 쓰여진 간판일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죄인을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관심사는 사람의 과거의 행위에 있고 그것을 정죄하는데 목적이 있지만 복음의 관심사는 그들을 용서하고 새 삶을 살게 해 주는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의 역사를 펼쳐 보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았던 모든 사람들은 한 때 이렇게 자신의 죄 때문에 양심의 송사를 받고 율법의 모진 정죄의 채찍을 맞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묘사했고 그랬기 때문에 죄인들을 구하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임하셨다는 복음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감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평생 자기를 사도로 불러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처럼 또한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바울이 감옥 속에서 낳은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나 모든 사람들에게 쓸모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 안에서 다시 태어났을 때 그는 교회와 사도 바울에게 매우 유익한 사람이 되었고, 그리고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주님을 위한 심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죄인을 불러 당신의 은총의 증거를 나타내 보여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되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여주심으로 공교롭게도 올바르게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 주님의 사랑은 증거되지 않고 한때 죄인이었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용서와 사랑은 증거 되는 것입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조용히 눈을 감고 피 묻은 돌멩이에 치여 조용히 인생을 마름하고자 했던 가엾은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에워싼 모든 사람들은 이 여자에게 일어난 과거의 과오가 관심사였지만 예수님에게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여자의 남아있는 인생의 날들이 예수님의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새벽에 교회당에 나와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정말 잘 살았던 사람들은 이제 그냥 그렇게 살라고 버려두고, 주님 앞에 너무나 많은 날들을 방황하고 주님의 가슴에 못을 박으며 살았던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이 다시 살게 해 주신 은총을 주신 지금에 더 주님을 위해 아주 진한 빛깔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 후에 이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도 등장하지 않고, 나의 독서의 범위에서는 읽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 여자가 이 용서의 감격을 잊을 수 있었을까요? 죽음에서 자기를 살려주시고, 피 묻은 돌멩이에 쌓여 죽어갔을 그 비천한 자기를 살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의 은혜를 잊을 수 있을까요? 순교자들은 그렇게 돌에 맞아 피 흘리며 죽어갈 때 순교의 영광이 있지만 이 여자는 아끼는 자 없이 율법의 정죄대로 죽어가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죽음 대신에 삶을 주셨고 자기는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미래를 현실로 주셨습니다.
IV. 결 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순간 우리는 우리에게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의 본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의인도 아니요 그리고 정결한 자도 아니요, 다만 용서받은 죄인들일 뿐입니다. 주님의 그 큰 사랑이 뒤덮여 용서해 주신 사람들, 죄 가운데 눈을 지그시 감고 죽음을 기다리는 절망의 사람들이었지만, 생각지도 않게 주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신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 피 같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그냥 자기중심적으로 살게 내버려 두고, 이 십자가 사랑을 안 여러분은 매일매일 정성스럽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아침마다 맞이하는 하루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눈부셔야 합니다. 바로 그 날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지만 여러분에게는 허락되었기에 생명이 있는 그날까지 이렇게 용서하시고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기억하며 주 앞에 사는 그런 사랑스러운 성도들이 된다면 오늘 불순종과 죄에 잠시 미끄러진 것도 주님의 찬란한 은혜를 깨닫는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여러분을 이렇게 살게 하셨으니 이 복음을 붙들고 여러분도 이 여자처럼 다시는 가서 범죄 하지 않고 새 희망을 갖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3.다시 섬기게 하시는 예수님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7-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고기 잡던 제자들과 만나는 광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성으로 보자면 요한복음은 20장에서 끝나면 꼭 좋을 성경입니다. 21장은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이 요한복음의 부록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요한복음의 부록이라기보다는 네 복음서의 마지막 부록이라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 부록이 중요한 것은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다시금 지도자로 회복 시켜주시는 사건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21장 부록이 달려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매우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서 전체에서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배반하고 미끄러진 사람이었는데, 복음서 마지막 그 다음에 나오는 사도행전에서는 그가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 21장은 네 복음서 속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미끄러지고 실패한 이 베드로가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유일한 고리가 되고 있습니다.
II.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
그는 다른 모든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때가 가까워 옴을 보시고 당신의 고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목자를 치리니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지리라 고 한 예언의 말씀을 주시면서 당신이 고난당할 것과 제자들이 모두 당신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침묵하고 있었지만 베드로는 다른 모든 제자들을 팔면서 ‘이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려도 나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다’ 라고 호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당신을 버리고 배반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네가 돌이킨 후에는 네 형제를 굳게 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그의 사명까지도 확인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신앙과 충성심은 올곧고 바르며 사람의 충동에서 난 열정은 항상 불안하고 모순됩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이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실 때에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잘라버렸습니다. 이런 열정에 충돌질을 받는가 하면 잠시 후에는 예수님이 체포되어 끌려갈 때에 두려움 속에서 멀찌감치 예수 그리스도의 체포당해 가는 광경을 관망하며 따라갔고,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이 종교 재판을 받으실 때에는 예수님과 한패냐고 묻는 무리들에게 자신은 예수를 모른다고 대답했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저주하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맹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후 닭이 울자 그는 담장 밖에 나아가서 통곡하며 울었는데 우리는 이것을 정당한 회개라고 받아들일 근거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갔지만 차라리 그 제자들이 더 나았습니다. 왜냐하면 최소한 그들은 예수님이 바라보는 면전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III.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때가 첫 번째가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였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개인적인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에도 이 제자들은 고기를 잡으러 나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의 이 행동을 세상으로 돌아간 행동이라고 해석하지만 요한 칼빈 선생은 자신의 주석에서 이들이 고기 잡으러 나간 것은 예수의 부활은 목격했지만 자신들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때에 그저 일상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해석을 하였습니다. 이 제자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고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마치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와 그 일행이 예수께 부름을 받던 그때 고기를 잡다가 실패한 광경과 꼭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그때처럼 예수님께서는 실패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또 예수님의 명령대로 그물을 던졌을 때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들은 이 광경이 언젠가 자신들이 경험한 상황임을 깨달았고 그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부활하신 예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급한 마음에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고 걸어서 해변으로 나아왔을 때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배신했던 사실을 잠시 잊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디에서 마련하셨는지 숯불을 피우고 고기와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물 묻은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오셨을 때 예수님은 마치 그 옛날 자신들과 함께 다니시던 그때처럼 종의 모습으로 자신들의 아침 식탁을 차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수줍음과 두려움 속에서 거리감이 있어 하는 제자들에게 그 거리감을 좁히시려는 듯 ‘너희 중에 물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시면서 그들에게 고기를 청하셨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풀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아침 식탁을 차려주셨습니다. 감히 누구도 예수시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A.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식탁은 한 가족 되었음을 의미하고 한 형제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주님이 가장 쓰라리게 고난을 당하는 순간에 예수님을 홀로 버려두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한 번도 이들을 버린 적이 없이 당신의 가족으로 여기셨다는 사실을 아침 식탁을 차리는 종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식사가 끝난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으니 이는 희랍어 본문에 의하면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도 번역이 될 수 있는 지시대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사물로 해석하면 ‘너희가 잡아온 이 물고기보다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물음이 될 것이고, 사람으로 친다면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어느 해석이 꼭 적합할지 마음에 확신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보다 그리고 피붙이처럼 여길 동료, 사도들인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가장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질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두 해석 모두를 취해도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하셨지만 이것은 베드로 개인을 향한 질문이기도 했고, 또 이 모든 제자들 예수님을 버리고 배반했던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 대해 주신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세 번 반복되는 질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느냐’라고 쓰여진 이 질문에 사용된 동사가 희랍어에서는 각각 다른 동사인데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예수님이 사랑의 차원을 점점 낮추어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사실 그 해석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희랍의 문학에서 적용될 수 있는 원리이고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을 세 가지로 반복하신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것처럼 한 번의 질문에 한 과오를 지워주시려는 듯이 예수님은 세 번 동일한 질문을 반복하셨고, 예수님은 이 베드로에게 대답을 받아내셨습니다. 우리라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네가 그렇게 큰 소리를 치더니 정말 죽는 데까지 나를 따라갔느냐?’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했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앞으로 사랑할 거냐고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네가 지금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이 질문에 대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렇게 진심으로 예수를 사랑한다는 인간이 왜 며칠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신하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느냐고 묻는다면 베드로는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는 것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배반한 것도 사실이었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잠시 그 분께로부터 미끄러졌지만 마음속에서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오늘 베드로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모순된 두 사실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그를 위선자로 몰았을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그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 고백을 진실하게 받으시고 그의 과거를 용서하셨으니 이는 용서를 통해 그로 하여금 다시 섬기도록 소명으로 돌아가도록 부르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일생에 단 한 번도 주님을 배반하는 적이 없이 십자가에 그 붉은 피 사랑을 가슴에 간직하고 주님 앞에 올곧게 충성스럽게 사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에 오늘도 주님께서는 찾아오셔서 다시 한 번 소명으로 부르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해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위대한 인물들, 자신의 목숨을 버려 주님을 위해 철저하게 섬겼던 거의 대부분의 모든 인물들은 이렇게 한때는 미끄러졌던 사람들이었고, 죄인이었던 사람들이었고, 주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죄의 깊이와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가 함께 만나면서 그들의 깊은 죄와 배반은 오히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고, 값없이 용서해 주시는 주님의 그 큰 용서의 사랑은 그들을 잃어버렸던 소명으로 데려가 그 자리에서 다시 주님을 섬기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B. 베드로의 응답과 부르심
그러므로 오늘 은혜에서 미끄러진 사람들, 잠시 주님을 배반하고 거짓된 길을 따랐던 성도들은 오늘 깊이 돌이키고 이렇게 다시 불러 섬기게 하시는 그 소명으로 돌아가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주님의 질문에 대해서 베드로는 응답하였고, 주님은 불러 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이 부르셨을 때 이 부르심은 이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지도자로서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고, 영혼을 구원하며,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고,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길 소명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소명과 구별되는 소명이기는 하지만 분리되는 소명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받은 이례로 주님을 섬기도록 다양한 모양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섬김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지도 않고 섬길 수 있는 봉사가 있다는 말입니까? 만약에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에 충동되고 자신의 인생의 비전에 의해서 휘몰아지는 꿈이라면 그것은 자기 보람을 우상으로 삼은 사람의 꿈이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모든 사도들을 대표한 사람이 아니라 한 때 실패하고 미끄러졌던 모든 죄인의 대표자로서 주님께 이 질문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세 번이나 주님이 거듭 물으시자 그는 주님이 자신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 같아서 괴로워하면서 고민하며 근심어린 표정으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도 아십니다.’라고 힘들게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그렇게 사랑하니 그 사랑의 고백이 참으로 진심이니 네가 이 세상에서 너에게 감당할 수 없는 복을 부어 주리라. 그래서 너를 부자 만들고, 성공하게 하고, 그리고 뛰어난 인물이 되게 하고, 네 자식들도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은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것은 누가 보든지 간에 순교를 예고하는 분명한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진심으로 네가 사랑하느냐? 네가 정말 나만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후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렇다면 너는 나를 위해 죽거라’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늘날 유행하는 거짓되고, 쓰레기 같은 번영의 복음과 성공의 복음이 설자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눈물로 고백하는 이 베드로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다면 ‘너는 이제 나를 위해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는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당신에게 인격적인 사랑을 진정성 있게 고백한 사람에게 순교를 명령하실 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요한의 해설을 읽어보면 우리의 관점을 이동할 근거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고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관심은 우리의 행복에 있고, 그리고 우리의 자랑에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의 영광에 있고, 당신의 영광은 하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 이루어질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순교를 예고하셨지만, 이것은 사랑했기 때문에 베드로를 죽이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들풀 같은 베드로의 생명이 하나님의 그 위대한 구원의 계획이 이루어지는데 이바지할 인생을 살게 될 베드로의 영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III. 다시 섬기게 하시는 예수님
베드로는 일평생 이날 이 이른 아침 갈릴리 바닷가에서 자기를 용서하고 다시 불러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사무친 일생을 살았습니다. 오히려 맨 처음 죄인인 자기를 불러주시던 그때는 잊혀졌어도 이 갈릴리 바닷가 모질게 주님을 배반하고 그렇게 사랑해 주신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한 실패한 자기를 찾아오셔서 떡과 물고기를 구워 주린 배를 채워 주시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가족처럼 물어주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큰 사랑, 모든 실패한 제자들 가운데 가장 많이 실패한 자신을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우두머리로 삼아주시고, 이후 성령 강림하신 후 교회의 역사를 이끌어갈 위대한 지도자로 삼아주신 그 용서의 순간을 일생 마음에 빚진 자처럼 간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증거를 베드로전서와 후서에서 발견합니다. 커다란 로마의 핍박을 앞두고 두려움 속에 떨고 있는 흩어진 성도들에게 그는 편지를 써 내려 갔습니다. 그리고 환란과 시련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담대하라고 외쳤습니다. 소망을 굳게 붙들고 주님을 배반하지 말라고 외쳤으니 그는 주님을 배반한 자신이 어떠한 실수를 했는지를 알고 있었고, 거기서 주님이 자기를 건져 주셨을 때에 그는 주님께만 헌신된 삶을 살도록 맹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베드로전후서는 한 때 그 핍박이 두려워 배신했던 베드로의 쓰라린 눈물로 기록된 편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두렵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사람을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찬양) 새벽 닭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 텐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 위해 당신이 바친 고귀한 사랑.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고파 사랑의 십자가를 나도 지네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베드로를 불러주셨고, 그는 잠시 주님을 버렸고, 모질고 악하게 자기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못을 박았지만, 주님의 무한한 사랑은 이 사람 베드로를 용서해 주셨고, 그리고 다시 그 자리로 불러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의 이 놀라운 은혜에 보답하며 충성으로 주님의 이 용서에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예화) 저는 지난 주간에 신문에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고 한 주간동안 은혜를 가슴에 새기며 지냈습니다. 소말리아에 우리 화물선이 나포되었을 때 UDT/SEAL 특공대가 과감하게 작전을 감행해서 21명 선원을 모두 구조하고 해적들을 사살하고, 남은 사람들은 생포하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대부분 외국에서는 인질과 인질범들이 섞여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특수 부대들도 작전을 하지 않는 것이 통상적이랍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인명피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특공대를 지휘하러 갔던 소령이 해적들이 쏜 총에 맞고 중상을 입었습니다. 의사의 증언에 의하면 1cm만 빗나갔더라면 즉사했을 텐데 정말 아주 놀랍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것입니다. 아직 완쾌되지 않은 이 사람에게 찾아가서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특공대를 지휘하는 순간 두렵지 않았습니까? 총에 맞는 순간 고통스럽지 않았습니까?’ 여러 질문을 던질 때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군인이 된 그날부터 지금까지 나의 목숨은 조국과 민족의 것이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 말이 일주일동안 내내 귓전에 맴돌았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열린 교회 성도들 중 이 고백을 할 사람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로,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나의 목숨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교회의 것이었습니다 라고 말할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라고 말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IV. 결 론
우리 주님은 다시 섬기게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미끄러지지 않았더라면 정말 더 좋았을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것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고, 미끄러졌고, 넘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미끄러질 때에 사람들을 잡아당기고, 넘어질 때에 밟아버리고, 쓰러졌을 때에 눕혀 버리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쓰러진 자들을 하나씩 피 묻은 손으로 일으켜 세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당신을 섬기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을 위해 자신을 다 버려 섬겼던 그 누구도 자신이 그렇게 미끄러졌던 사람들이요, 주님을 배반했던 사람들이라는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자기의 자기된 것이 우리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밖에 고백할 수 없게 만드심으로 주님은 완전한 사람들을 통해서보다 불완전한 인간들을 통해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때는 베드로와 같이 실패했고, 미끄러진 사람들이었지만 변함없으신 주님은 우리를 다시 불러 용서하시고 다시 섬길 기회를 주님이 주셨습니다. 우리는 미끄러졌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의 인생의 계획을 수없이 바꿔보려고 몸부림쳤지만, 주님은 우리가 미끄러졌어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서 그 자리에 세워 놓으실 때 미끄러지지 않았더라면 살게 하셨을 그 삶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시면서 다시 한 번 주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살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우리의 목숨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교회의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잊혀졌던 이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우리의 남은 인생의 날들에 모든 보람이 주님을 섬김에 있음을 깨닫고 시종일관 주님을 충성되이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다시 용서하시는 예수님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3-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 이 본문은 좁게 보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 것이고, 더 넓게 보면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인생을 살아야할지, 신앙을 이어가야 할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보면 기도하러 올라간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한 사람은 거룩한 종교의 도리를 가르치는 종교지도자였고, 한 사람은 동족들의 고열을 빨아 로마에 바치고 자기의 사욕을 불리는 세리장이었습니다. 세리는 아마도 바리새인과 함께 거의 같은 시간에 성전에 올라간 것 같습니다. 당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였고, 성전에서 기도하고 성전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였습니다.
II. 기도하러 올라간 두 사람
이때에 바리새인은 자기 가까이에 세리가 있는 것을 보고는 오늘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세리를 의식해서 그는 세리로부터 좀 멀리 떨어지려고 하였고 그리고 혼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기도의 문을 연 것은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하는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모두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옆에서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도를 하고 있는 세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너무나 죄가 많아서 성전에서 얼굴도 들지 못하던 이 죄인이 오히려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얻고 성전에서 내려갔느니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III. 죄인을 만나주신 하나님
여기서 우리는 죄인을 만나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믿음과 갈망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 죄인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죄인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청산유수와 같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을 때에 세리는 아마도 그 기도소리를 모두 들으면서 더 깊은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토색, 불의 어쩌면 간음까지 행하는 사람이었고, 또 이레에 두 번씩 기도한 적도 없고,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드리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믿음과 거기에서 비롯된 회개에 있었던 것입니다.
진실한 종교의 대의는 꾸밈없는 마음이고, 순수한 심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표리부동한 삶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참된 신앙의 도에 근접할 수 없고, 꾸밈이 없는 마음으로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 이외에는 참된 복음적인 경건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꾸밈이 있고 가식된 이중 삼중의 마음을 가진 의로운 사람보다는 오히려 죄로 말미암아 파산한 그러나 꾸밈이 없고 순수한 하나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을 주님은 만나 주십니다.
A. 불쌍히 여기옵소서
이 죄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었던 기도의 내용이 단 한 마디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이 사람의 기도에는 바리새인의 기도에 있었던 것 같은 순서와 정연한 논리 같은 것들 없었습니다. 사실 희랍어로 보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이 탄원은 거지들이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호소하며 동정을 구할 때에 쓰는 표현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가 무엇인가 얻을까 하여 사람들에게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하는 그런 종류의 구걸 행위에 나오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이 죄인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절한 탄원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죄인이 세리가 성전에 올라올 때에 적어가지고 온 기도제목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기도한 바리새인의 기도 소리를 들었겠죠.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즉 다른 사람을 등쳐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의,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간음, 이런 일들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특별히 세리들과 같이, 이 세리와 여기에 있는 이 세리와도 똑같지 않은 사람인 것을 나는 감사합니다.’ 한마디, 한마디의 기도가 죄인의 마음을 때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도가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토색하였고, 불의를 행하였고, 어쩌면 간음을 행했을지도 모릅니다. 도저히 자신의 의는 바리새인이 의에 비길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바리새인이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다는 기도를 올릴 때에 이 세리는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레에 두 번씩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례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금식한 적도 없고 먹고 배불렀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소득의 십일조도 하나님 앞에 드린 적이 없었기에 자신은 도저히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했는데 이것은 자기의 죄 한 가지, 한 가지, 한 가지 지은 것들이 생각이 났기 때문에 회개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 하나의 죄가 기억이 났던 것은 사실이고, 이 죄의식을 바리새인의 기도가 일깨웠던 것은 진실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오늘 이 세리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차마 얼굴도 들지 못하고 격식을 깨뜨리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아마도 눈물로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탄원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통해서 더듬어, 더듬어 깊이 들어갔을 때에 뼛속 깊이 사무쳐져 있는 예전에 보지 못했던 자신의 죄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교리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말씀의 지식을 얻고 나면 그 지식 때문에 교만해지는 적이 있습니다. 자신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 만한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릎을 꿇을 때 그는 정직하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사람됨은 무릎을 꿇었을 때 그 사람됨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고, 또 하나님을 알고 그 분과 하나 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 없이도 지적인 호기심 때문에 그것을 더 많이 알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끔찍한 것이라도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마음속에 있는 호기심 때문입니다. 끔찍한 것과 사랑하고 끔찍한 것과 하나 되기 위해서 그것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의 호기심 하나 때문에 그것을 보고 싶은 것처럼 성경과 교리에 관한 지식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죄인은 자신의 죄 하나, 하나를 생각하면서 그 모든 것의 뿌리인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 때에 일반적인 기도의 방식은 서서 두 손을 높이 하늘을 향해 들고 고개를 들어 주님을 우러르며 기도하는 것이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의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 모든 격식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손을 모을 수밖에 없었고, 얼굴을 떨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손으로 가슴을 쳤으니 이는 회개에서 북받쳐 오르는 깊은 탄식이 자신의 호흡을 힘들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가슴을 치면서 그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나는 죄인이옵나이다’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인이 자신이 죄인임을 정직하게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된 종교의 도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시작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종결됩니다. 정말 신앙의 참된 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런 마음으로 갈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마음 깊은 곳에 돌팔매를 던지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돌팔매처럼 던져져 우리의 심령에 떨어질 때에 커다란 파문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환란과 시련을 통해서 당할 때에 우리들이 겪는 분노와 고통, 좌절로 우리의 마음이 분탕질 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의 정동입니다. 고요히 우리의 마음속에 울려 퍼지고 그리고 그것은 마치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처럼 우리에게 부자연스러운 강요가 느껴지지 않는 가운데에 울려 퍼지는 파문과 같습니다. 전혀 커다란 힘을 가지지 않은 것인데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그 파문은 우리의 몸 밖에서 밀려오는 파도보다 힘찹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꿀 수 없었던 마음을 바꾸어 놓으시고, 약했던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 그릇되었던 마음을 바르게 하십니다. 분노와 미움으로 어우러졌던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감화시키십니다. 이렇게 마음 깊은 곳에 파문이 일어나는 경험을 여러분은 얼마나 하고 살아가십니까?
이 죄인은 바리새인의 마음속에 없는 커다란 파문을, 마음속에 은혜의 정동을 경험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큰 정동을 느꼈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기 싫은 자신의 마음 때문에 정동을 느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기도해 본 사람, 경건의 끝자락이라도 붙들어 본 사람들은 체험적으로 이 말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에 방해가 되는 것은 우리의 용모나 학벌, 외모나 우리의 처지, 심지어는 우리의 죄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여전히 죄를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여전히 주님의 면전에서 살기 싫어하는 고집이 유일한 방해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마저도 넘어서서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고자 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수많은 악과 그리고 오류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듬어, 더듬어 내려가 보니 그것은 뼛속같이 사무친 우리 죄악의 본질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뼛속 깊이 우리의 마음까지 그리고 우리의 온 영혼과 보고 듣고 입고 마시는 우리의 모든 감각에 이르기까지 이 죄의 영향력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말 죄송한 마음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송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불순종하여 죄를 지었고,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주님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모순 사이에서 우리는 불쌍히 여겨달라는 탄원 밖에는 또 다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을 향한 갈망
이 죄인인 세리가 이렇게 거지가 동냥을 구하듯이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이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여 토색하고 불의하고, 율법에 기록된 언약 백성의 의무를 외면하였지만 그러나 지금 자신은 이제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 버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면전에 섰을 때에 자신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절실하게 더욱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은 것도 사실이고, 지금 마음으로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불쌍한 인간이 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뼛속깊이 사무친 죄에 물든 더러운 죄인으로 이 성전에 서 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무한히 죄스러운 것이었으나 그러나 그는 그 자리를 회피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토색과 불의를 통해서 얻는 재물로는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육체는 부했고, 불법 속에서 여유를 누렸을지 모르지만 영혼은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비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 기도도 드릴 수 없었고, 또 의미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이 세리를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지만 이 죄인이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며 그 임재 앞에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매달릴 때에는 바리새인을 의식하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의 의로움이 자신의 죄를 생각나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그가 정말 주님 앞에 용서를 간절히 탄원하였을 때에 바리세인 때문에 자신이 죄인인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뼛속 깊이 사무친 죄에 물든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그는 간절히 탄원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절망했으나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갈망이었습니다.
인간의 절망은 생명에 이르는 절망이 있고, 죽음에 이르는 절망이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절망은 좌절하고 낙심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에 이르는 절망은 자신이 이제껏 믿었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절망입니다.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구원 얻는 믿음이라고 할 때에 그 믿음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예전에 자신이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길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이런 갈망이 있습니까? 껍질뿐인 예배생활, 침묵 속에서 예배를 드리고 마음에 아무런 파문도 없이 돌아가는 여러분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눈물이 납니다. 주님은 통곡하고 계실 것이고, 성령은 여러분 안에서 탄식하실 것입니다. 도대체 그 따위 종교 생활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기도를 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마음에 일어나는 너무나 커다란 파문 때문에 할 말을 잊어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기 때문에 뼛속 깊이 사무친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 때문에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기에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올려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눈물의 기도로 탄원하고 있는 이 죄인의 기도 속에서 버릴 수 없지만 결코 의지할 수 없는 자신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런 믿음의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록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도 내가 싫어진 지금에 와서는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당신을 기쁘게 하고, 기뻐하시는 당신 안에서 나도 즐거워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 찾아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어찌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절절한 미움이 불쌍히 여겨달라는 이 기도 속에 배어 있습니다. 타고난 죄의 본성위에 율법 없이 살아가는 불법한 삶과 그리고 자신의 부에 대한 욕망이 세리질을 하게 만들었고, 이렇게 불순종과 악을 더하면서 그는 더더욱 죄인이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성전에 올라와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 지금에 와서는 그는 도저히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기에는 너무나 먼 하나님이었고, 자신이 이제껏 지은 불의와 많은 죄들이 자신의 마음에 무거운 사슬이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오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제 외부로부터 오는 도움이 아니면 이 사슬을 끊을 자가 없었고, 그는 자기 스스로 이 욕망과 죄악에 포로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날아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절히 종이 상전을,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람과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간절한 탄원은 그의 마음을 쥐어뜯듯이 울려 퍼졌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살아온 모든 죄악된 날들에 대한 회상은 이를 더욱더 자신의 과거에 대한 회한에 몸부림치게 만들었습니다. 조여 오는 자신의 폐에 압착을 느끼면서 그는 가슴을 때리며 자신의 폐를 진정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우리가 가슴을 때려야 될 정도로 우리의 폐가 응축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적이 있습니까? 단 한번이라도 주님께 합당하도록 간절한 갈망을 주님께 올리는 일이 있습니까? 매일매일 이런 삶은 살지를 못할지라도 자신의 죄와 불순종, 태만과 게으름이 산처럼 쌓였는데도 하나님 앞에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고 앙심을 품을 뿐 하나님 앞에 자기를 미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참된 복음적 경건의 대의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고 누구도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때려지지 않고 성령에 의해 불 질러지지 않으면 누구도 정결하게 될 사람이 없고, 따라서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세상보다 더 사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갈망이 있습니까? 정말 이런 사모함이 있습니까? 할 말을 모두 잊고 모든 소원을 다 버리고 내 존재 자체가 지금의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 앞에 너무나 죄스럽고 너무나 미안해서 마음을 뜯으며 어떻게 나를 고쳐달라고, 지금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로 당신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그런 몸부림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 절망했으나 이 세리의 간절한 소원은 죄 가운데 죽는 것이 아니었고,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여호와가 원하는 것은 죄인이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는 것이라’ 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생명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당신 앞에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오늘도 여러분을 예배에 불러 모아 어둠에 가득 찬 여러분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나누어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얼음처럼 차가운 여러분의 마음에 은혜의 불을 지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돌멩이처럼 굳어지고 냉담한 여러분의 마음을 녹이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는 여러분이 전혀 여러분의 지금의 여러분이 아닌 다른 여러분이 될 수 없는 줄을 주님이 아시기에 여러분도 고칠 수 없는 여러분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오늘도 여러분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도록 돌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III. 다시 용서 하시는 예수님
우리에게 이런 갈망이 한번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자기가 자신인 것을 하나님 앞에 너무나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나와 지금 나 사이의 격차를 인정하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내가 되지 못한 것 때문에 나를 그렇게 되게 해 달라고 주님을 찾는 이 죄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주님은 오늘도 찾고 계시고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주님이 그런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그래서 하나님 없이 떳떳한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는 보물과 같은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시간은 끝났고, 세리도 내려갔고, 많은 사람과 함께 바리새인도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입고 내려왔느니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수많은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을 다시 용서하시는 예수님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은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당신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가 많았다는 이유 때문에 죄인들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 속에서 이렇게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간절한 갈망과 탄원을 보실 수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바리새인들보다는 주님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찬 자기를 낮춘 세리들을 찾아다니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돌을 던지시고 바리새인의 마음에 일어나지 않았던 그 놀라운 은혜의 파문을 일으키셔서 그들로 새 사람이 되도록 만드셨고 그래서 그들은 새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IV. 결 론: 낮아짐과 갈망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이지만, 그러나 죄인이 죄를 지었다는 이유 때문에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죄는 잘못된 것이지만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은혜를 받고, 그리고 자신이 그 죄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 통곡과 간절함으로 주님을 갈망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어디서나 만나주시고 그들이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리고 당신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를 때 그렇게 일컬음을 받기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심으로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 깊은 사랑을 가지고 주님의 양떼들인 사랑하는 여러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종교의 대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가식이 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한 마디의 기도는 거짓과 허위 속에서 일 만 마디의 미사여구로 기도하는 것보다 더 크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기도하는 여러분 자신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만약에 오늘 우리 위에 주님이 이런 갈망을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늘이 열리고 빗줄기 같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갈망이 내려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 앞에 여러분 자신인 것을 죄스러워하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구원해 주셨을 때 되고 싶어 하셨던 그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나를 용서해 달라고 여러분이 눈물로 부르짖는다면 여러분의 인생에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그리고 여러분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겠습니까? 그때는 교회가 큰 것이 이 세상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성도들의 빛나는 그 빛은 마치 밤하늘의 반딧불 같아서 그것이 모여 있을수록 찬란한 불빛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 합시다. 그리고 단순한 마음을 가집시다. 꾸밈이 없는 심정으로 주님을 대하십시다. 이 죄인처럼 깊이 용서하시고, 다시 부르시는 주님께로 돌아가 여러분이 여기에 있어서 아름다운 사람들로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5.영생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시는 예수님에 관한 기록입니다. 우물가의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신약 성경에서도 매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시는 영생을 누리며 살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II. 우물가에서 만난 여자
여기에 보면 우물가에서 만난 여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으로 가고자 하셨고, 그래서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셔야 됐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당시 남북으로 세 토막으로 지역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제일 위의 지역이 갈릴리였고 중간이 사마리아였고, 아래지방이 유대지방이었고 예루살렘이 바로 이 유다지방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갈릴리로 통행을 하거나 혹은 갈릴리에서 유다로 내려오려면 사마리아를 거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지 않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서 우회하여 이 양쪽 지방을 왕래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주전 722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곳은 한때 북왕국 이스라엘의 땅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역사시간에 배운 아시리아라는 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리고 이제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여러 식민지를 통치해 본 경험이 있는 아시리아는 이제 이 사마리아를 국제화 정책을 사용한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사마리아 거민들을 외부로 이주시키고, 또 외국에 있는 사람들을 사마리아에서 살게 함으로써 결국은 피를 서로 섞어 민족의 정체성을 흐리고자 하는 시도였는데 이러한 시도들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오래전에 이 북 왕국 땅이었던 사마리아는 민족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이제 언약 백성들의 그 둥치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유대인들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북 왕국이 멸망하기 이전부터 계속돼 왔던 영적인 피폐화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무튼 그 이후로부터 이 땅은 율법을 저버린 자들이 사는 대표적인 땅이 되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예루살렘에 내려가 예배할 수도 없고 차단되어 그리심 산이라고 하는 곳,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던 그 산 중에서 특별히 축복을 선포한 그리심 산을 예배의 처소로 삼고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하는 자신들 나름대로 해석이 덧붙여진 율법서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 길러 온 이 여자에게 예수님께서 물을 한 그릇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물론 목이 말라서 이 여자에게 한 그릇의 물을 청하셨겠지만 이 여자의 곤고한 영혼을 보시고는 당신의 육체의 목마름을 잊고 이 여자의 메마른 영혼의 상태를 해갈해 주시기 위해서 집중하시는 주님의 사역을 보게 됩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당시에 이 여자가 대낮에 물을 길러온 이유는 동네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해석을 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대낮의 이 팔레스타인은 엄청난 햇빛이 내려쬐이고 굉장히 덥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아낙네들은 이제 이른 아침에 일찍이 아직 해가 퍼지기 전에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서 그렇게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이나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우물가가 모든 그 정보통신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아낙네들이 거기에서 물을 긷고, 또 물도 마시고 빨래도 하고 하면서 재잘 거리면서 각 동네에서 일어난 수많은 정보들을 교환하고 거기를 중심으로 온 동네의 소문들이 퍼져나가는 인터넷의 웹사이트 같은 곳이 당시의 우물가였습니다. 이 여자는 그런 사람들과 마주쳐서 자신이 화자의 대상에 오를만한 여자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런 동네 사람들의 얼굴을 피해 한낮에 물을 기르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III.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A. 샘물을 구하는 여인
예수님께서 물을 한잔 달라고 말씀을 하신 후에 이 여자의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왜 유대사람인 당신이 나같이 천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구합니까? 당신들 유대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다니지도 않고 또 나 같은 사람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이도 없는데 당신은 왜 나를 상종하십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 말은 ‘나 예수가 너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내가 아쉬워서가 아니라 너에게 없는 그 무엇을 네게 주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주는 물은 한 번 먹으면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다. 만약에 네가 내가 주고자 하는 샘물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이렇게 묻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너는 오히려 나에게 그 샘물을 달라고 그랬을 것이다’. 예수님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그 샘물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 샘물을 자신에게 달라고 그 물을 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비유였습니다. 얼핏 보면 예수님이 자의적으로 즉석에서 만들어 내어서 이 샘물의 비유를 이 여자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구약 성경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는 성경의 전승을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달리 해석할 이유가 없는 가장 명백한 비유로 이 여자에게 샘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 샘물, 혹은 생수는 여러 가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께로부터 채워지는 영혼의 만족을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성경이 시편 42편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라는 시인의 고백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하나님을 뵈올 수 없게 된 시인이 예배의 처소를 그리워하면서 성소를 그리워하면서 지은 시죠. 팔레스타인에는 사슴들이 많습니다. 가을이 이 사슴들의 교미기입니다. 그러면 하나의 암컷을 놓고 여러 수컷들이 쟁탈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교미기가 되면 수컷들은 짝을 짓기 위해서 암 사슴을 찾아 나섭니다. 발정기가 될 때에 사슴의 몸에 심각한 변화가 오는데 그것은 타는 듯 한 목마름입니다. 짝짓기를 위해 나섰다가 목마름이 엄습하자 관심사가 이제는 물로 바뀝니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의 광야에 아무데나 물이 있는 것이 아니죠. 급기야 체력이 다하면서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신기루가 나타납니다. 거기가 우물인줄 알고 들판을 가로지르며 달려가 보면 우물은 없어지고 메마른 땅만 펼쳐집니다. 반복되는 착각과 신기루 속에서 결국은 사슴이 거품을 물고 뜨거운 태양 볕 아래 죽어갑니다. 숨을 거둘 적에는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간절한 목마른 사슴에게 한 모금의 물은 물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시인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거절된 체 완전히 하나님의 성소로부터 멀어졌을 때에 한번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님을 만나는 것은 죽어가는 이 시인의 영혼을 위한 그것을 물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런 음식은 없으면 저런 음식과 바꿀 수 있습니다. 이런 의복은 없으면 저런 의복과 교환해서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은 대치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물로써만 문제가 해결되지 물 이외의 다른 것으로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전통을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전혀 말길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샘물을 구했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샘물을 주시겠다고 하는 의도와 같은 뜻에서 샘물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육신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 샘물을 구했고, 또 매일 이렇게 남의 낯을 피하여 물 길러 오는 수고와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서 그는 샘물을 예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시고 싶어 하고 원리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서 우리에게 항구적인 평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언제나 그런 방법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변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인생의 고통이 되는 원인을 우리 주변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물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 인생이 곤고하다, 주님이 물질을 주시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 나는 행복할 것이다’라고 믿는 것입니다. 어디 물질 뿐이겠습니까? 명예와 인간관계, 질병 등등 지식 이 모든 것들을 이런 식으로 우리들은 이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시인이 시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저희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으나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나이다’ 함과 같이 모든 것을 받아 누리면서도 사실 자신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제 책을 읽고 회심에 방불한 경험을 한 어느 지체의 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은 기도도 하면 하나님이 참 응답을 많이 주시고 누구에게 간증하라고 하면 헤아릴 수 없이 간증거리가 많았는데 언제부턴가 기도는 들어주시지만 자신의 영혼은 매우 피곤하고 고단하다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사실은 그러한 경험을 시편에서도 이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고 한 시인의 회고죠. ‘저희의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셨지만 영혼은 파리하였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들을 우리는 날마다 직면하게 됩니다. 오늘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에게 나는 묻고 싶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서 여러분에게 안내 위원 대신 예수님이 나타나서 ‘네가 무엇을 기대하며 이 예배당에 들어오는냐?’고 물을 때 자신 있게 ‘나는 주님을 만나러 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교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그러한 목표가 예배를 드리고 마지막 끝나는 순간까지 시종일관 유지되고 있습니까?
B.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 여자는 자신의 인생의 고통이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여자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이 여자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대의는 우리 인생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우리의 고통의 원인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바로 주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물이 있다면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고, 물을 길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가슴을 졸이며 매일 이 우물가에 나타나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의 자세가 있었기에 이 여자는 거듭거듭 주님께 그 물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요구를 하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아침에 물 길러오지 않고 아무도 없는 대낮에 물 길러온 이유이기도 한 그 사생활을 예수님께서는 들추어내어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이 여자가 빗겨가고 싶었던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절반은 사실이었고, 절반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더 깜짝 놀랄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네 말이 맞다. 네가 예전에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남편이 없다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미리 정보원을 풀어서 이 여자의 사생활을 캔후 의도적으로 이 여자에게 접근해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전지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이 순간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살아온 모든 과거와 현재까지 예수님께서는 모두 알고 계셨고, 또 미래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이 곤고한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고쳐 주시려고 오랫동안 이 여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였으면서도 늘 피하며 살아왔던 그 앞에 깨달으라는 듯이 이 여자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 여자는 그 순간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웠을까요? 어쩌면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한 자신의 요청을 즉시 철회할 용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남에게 부끄러워 보이고 하찮아 보인 한 줄의 이력서는 이력서의 주인인 당사자에게는 수많은 땀과 피와 눈물이 맺혀있는 기록일 수 있습니다. 다섯 명의 남자를 갈아치웠습니다. 어쩌면 다섯 모두 자기를 남기고 차례대로 죽어버렸을 수도 있고, 혹은 일부는 죽고, 일부 남자에게서는 버림받았을 수도 있고 그 중 일부는 자신이 직접 버린 남자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이러한 여인의 삶은 자랑스러운 과거일 수는 없었습니다. 사랑은 희망과 함께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인생을 보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여자의 과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거느렸던 여자, 그 중에 몇은 잡아먹고, 그 중의 몇에게는 버림당한 여자, 이렇게 이 여자의 과거를 향하여 사람들은 돌팔매를 던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자의 살아온 과거가 당신의 마음에 기쁘신 것은 아니었지만 실패하며 살아온 삶보다는 앞으로 사람답게 살아갈 그 날들이 더욱 예수님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여자를 향한 사랑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제일 좋은 친구는 소망입니다. 아무리 불행하고 고통스러워도 사랑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그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 한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이유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사랑하는 대상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절망이 없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하시는 주님은 변하지도 않고 망하지도 않고 죽지도 아니하시는 언제나 살아계시는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IV.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지나치지 아니하시고 이 여자를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과거를 지적해서 ‘너 자신을 알라’ 그렇게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과거를 지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관심은 지금이었습니다. ‘지금 너의 핏기 잃은 삶, 생명의 기운이 하나도 없는 죽어버린 자와 똑같은 삶, 그 원인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생명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남편을 다섯 갈아치운 너의 과거도 아니고, 그리고 네가 사마리아인이라는 이유 때문도 아니다. 그런 영생하도록 솟아나오는 샘물과 같은 은혜를 가로막는 것은 오직 죄 때문이라는 것’ 을 이 여자에게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여자를 세우고 싶어 했던 자리였습니다. 핑계 댈 것이 있는 한 인간은 절대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논리가 신앙을 창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논리가 신앙의 도움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논리가 인간을 설득해서 하나님 앞에 댈 수 있는 모든 핑계를 제거해 버려줄 때, 하나님 앞에 변명하고자 하는 이성의 퇴로를 차단해 버릴 때 모든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회개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진실하게 회개하던 경험을 생각해 보면 예전에 핑계한 모든 것들이 없어져 버리고 오직 나의 잘못된 내 상태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나 때문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진실한 회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아마 이 여자를 대하였을 때에 신적 지식으로 이 여자의 살아온 모든 과거를 한 번에 아시면서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울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 여자를 자기의 죄에 직면하게 하는 일 없이는 이렇게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이 예수님께도 없었기 때문이 주님께서는 이 여자를 이 여자의 부끄러운 모습 앞에 마주 세우셨던 것입니다. 할 말을 잊고 그리고 모든 핑계거리를 제거해 버려 이 여자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오래전에 이 본문을 읽으면서 좀 아쉬웠습니다. 물동이를 내려놓고 우물가에서 완전히 엎드려져서 통곡하는 장면이 한 줄만 나오면 진짜 완벽한 작품인데 그게 빠졌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런 것이 빠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회심의 다양성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런 걸 잘 몰랐습니다. 목회를 해 보고 나니까 이젠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회개를 하게 되면 그 회개가 정말 진실한 회개라는 표징이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회개의 진실성을 모두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울면서 회개하다가 까무러치는 사람도 전 여럿 봤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무릎을 꿇고 눈물 몇 방울 흘리는 것 이상은 무슨 격렬한 반응을 안 보여. 근데 회개하고 울다가 졸도한 사람은 금방 세상으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렇게 격렬한 반응이 없었던 사람은 견고하게 주님을 사랑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요. 어떤 별다른 신비한 체험도 없었는데 거기가 자신의 인생을 돌이키는 놀라운 기회가 되는 경우를 여러 번 봤습니다. 그 다음서부터는 어떤 사람의 회개하는 외모를 보면서 그 사람의 회심의 깊이를 판단하는 습관이 사라졌습니다.
이 여자 보십시오. 성경 기록이 생략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 여자는 예수님과 이 대화를 나누고 난 뒤에 기쁨으로 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우고 지금 있는 남자도 자기의 남편이 아닌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던 이 여자가 이제는 자신의 과거의 부끄러움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교재로 사용되어도 기쁘고 즐거운 여자로 바뀌었습니다. 이게 바로 영생하도록 솟아난 샘물이 이 여인의 마음속에서 터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샘물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디선가 흘러 들어와서 흘러 나가는 것을 우리들이 시냇물이라고 하지 샘물이라고 안합니다. 샘물은 자연히 속에서 스스로 수맥이 터져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우리 영혼의 이 영혼 샘물, 이 은혜는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얼마큼 흘러나오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흘러나와서 그것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두루 사면을 적셔 물된 동산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 안에서 솟아난 영적인 생명은 우리의 영혼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인격을 고치고, 우리의 삶 속에서 거룩함의 열매들이 맺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 이런 영생하는 샘물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도록 처음 하나님이 말씀의 지팡이로 샘을 터트리시는 사건이 첫 번째 중생과 회심의 사건입니다. 이후에 우리의 모든 삶은 이 샘을 가로막으려는 죄와 사단의 공격과 이것을 보호하여 계속 솟아나게 하려는 우리의 선한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의 싸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부끄러운 과거에 직면하게 하시고 싶었던 것은 이 여자를 창피하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에게 너무 마음 아픈 것은 여러분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에 커다란 고통은 여러분이 지위가 낮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에 너무나 쓰라린 아픔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에 쓰라린 고통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생명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한편으로는 우리를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고 또 한편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이중적인 목적을 실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단지 구원을 받았다라고 하는 실낱같은 영적 목숨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은 주님의 구원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갈망이 있습니까?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마음속에 충만하게 차기를 바라는 사모함과 그리움이 있습니까? 실패보다 무서운 것은 실패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고통보다 무서운 것은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삶은 정말 실패가 우리를 실패하게 하기 위하여 주고 싶었던 그 실패입니다.
시골에서 닭들이 병아리를 까잖아요. 그러면 이게 사방팔방 돌아다니니까 싸릿대로 이렇게 만든 병아리 울타리가 있습니다. 시장에 가면, 장날 가면 그걸 사서 거기에다가 병아리들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모이도 주죠. 주인이 자비로우면 그것도 살아있는 생명이니까 가끔 열어주어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모이도 먹고 벌레도 잡아먹게 할 텐데 그러다 보면 강아지한테 물려 죽기도 하고, 또 고양이한테 물리기도 하고, 솔개가 채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내버려 둡니다. 그리고 주인도 바빠서 밭일, 논일하면서 정신없이 살아요. 그러다 보면 이 병아리가 점점 거기서 중탕이 될 때까지 그 바구니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한참 지난 후에 ‘아이구, 얘네들 좀 답답하겠다. 좀 열어줘 보자’ 그러고 뚜껑을 열어놓으면 한동안 닭들이 움직이지 않고 무리를 지어서 동그랗게 모여 있습니다. 왜? 여러 번 밖에 나가려고 어렸을 때부터 시도했지만 언제나 그 길은 차단되었기 때문에 이 바구니를 치워버려도 이 병아리들의 의식 속에는 거기는 더 이상 못나가는 곳이라고 규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마음속에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것 이상의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중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미 이전에 그런 것들을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이제껏 자기의 인생의 부끄러움과 수치이었던 것이 전도를 위한 교재가 되어도 좋은 그런 우리의 마음의 변화가 있습니까? 나가서 소리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까? 영적인 생명이 우리 안에 솟아납니까?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팔자 고치는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여기서 주님 만나고 큰 은혜를 받고 집에 돌아가도 예수 안 믿는 남편 여전히 파자마 바람으로 텔레비전 보면서 소파에 누워있고, 공부안하는 애들 여전히 게임하고 마음을 상하게 만듭니다. 오늘 여러분 은혜 받았다고 해서 집에서 남편과 아이들이 무릎 꿇고 여러분 안수 기도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면 우리는 이런 환경을 극복하고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위기와 어려움과 그리고 역경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게 되고 주님께 더 매달리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더 붙들게 되지 않습니까? 이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평탄하면 평탄하기 때문에 역경이 오면 역경 때문에 이기며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놀라운 힘이 바로 영적인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목숨이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늘의 생명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정말 우리에게 낮아진 마음이 있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같이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은혜에 하나님의 생명에 마음이 불타는 적이 있습니까? 형식과 위선과 거짓에 갇혀서 그래서 매일매일 습관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삶 속에 무슨 생명이 있겠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지극히 불쌍히 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다섯 번이나 남편을 갈아치운 이 불쌍한 여자를 부르시는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문제가 아니라 돌이켜 회개하지 않는 것이 문제임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은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 조금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지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속에 샘솟듯 솟아나는 영적인 생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런 믿음이 없고, 신앙이 없었더라면 이길 수 없는 길을 이기면서, 견딜 수 없는 고난을 견디면서 그래서 그 두려움이 변하여 우리의 노래가 되고, 전날의 한숨이 변하여 우리의 기도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직하고 진실해져야 합니다. 저는 가끔 어떤 사람들 기도가 자꾸 안 된다고 그러면 하지 말라고 합니다. 되지도 않는 기도를 해봐야 웬 쓸데없이 허공을 향해서 되지도 않는 이야기나 주섬주섬, 가치도 없는 그 사람의 마음이 말씀으로 비췸 받지 않으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기도는 대부분 가치가 없는 기도입니다.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데펴라’ 기도는 수증기와 같습니다. 물이 끓으면 김은 저절로 나와요. 그런데 물이 끓지 않고 김이 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읽고 책을 읽고 혹은 설교를 듣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잘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회개는 가슴으로 들이밀고 회개해야 한다고 그러는데 아닙니다. 회개는 머리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깨달으면서 하나씩 하나씩 깨달으면서 마지막에 도저히 하나님 앞에 변명할 수 없고 핑계할 수 없을 때 가슴에 깊은 찔림이 오면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이제는 어찌할꼬’ 하면서 가슴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여러분 정직하게 반성을 해 보세요. 하나님 앞에 진실해지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도 한번 무릎을 꿇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사랑해 주십시오. 저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고백을 해야 되잖아요.
휴가 기간 중에 아이들을 데리고 초밥을 먹고 싶다고 해서 초밥을 사줬습니다. 그랬더니 다 먹고 났는데 만족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우리 딸이 그래요. ‘아빠 정말 감사합니다. 근데요 이 감사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발바닥서부터 올라오는 감사입니다.’ 얼마나 맛있었으면 발바닥부터 올라오는 감사입니다. 그렇게 영혼 깊은 곳에서 울림입니다. 1970년대에 제가 아주 좋아하던 가수 가운데 탐 존스라는 미국의 팝송가수가 있었습니다. 뭐 딜라일라(Delilah) 그런 걸 불러서 아주 유명했던 가수입니다. 어렸을 때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는데 그 사람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충격을 받은 게 이후에 목사가 되고 난 다음에도 그 광경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유행가를 부르는데 그 사람 곱슬머리거든요. 눈에서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지는 것입니다. 근데 두 개가 신기한 게 어떻게 유행가를 부르면서 그렇게 울 수가 있는가? 그거고 두 번째는 그렇게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데 어떻게 목소리가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 눈물이 세상의 유행가도 진심으로 부르면 가수가 그거를 부르다가 울컥해가지고 눈물이 비 오듯 흘러서 그냥 눈물이 비치는 게 아니라 흘러서 옷깃까지 흘러 내려요. 나는 그것을 비록 유행가지만 예수 혼입니다. 예수혼. 그런데 유행가를 불러도 그 중심에서 솟아 나와서 부르면 그렇게 눈물을 쏟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는데 우리에게 그런 갈망이 있어요? 단 한번이라도 무릎을 꿇고 깊은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 힙겹게 물을 길어 올리는 것처럼 주님 앞에 언어를 길어 올리면서 하나님!
(찬양)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V. 결 론: 낮아짐과 갈망
매달려야 됩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직 다섯 명의 남편을 갈아치운 여자는 없습니다. 이 여자도 주님이 찾아오셔서 어루만지셔서 그래서 다시 영생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너무나 많은 과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었기 때문에 진실해질 시간이 없이 우리는 이 외적인 사물들에 의해서 휘둘리면서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마음을 모으고 한 주간만이라도 주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굳이 안하던 일을 하란 것이 아닙니다. 금식을 하고 너무 좋겠지 그것이 아니더라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내 영혼이 주님을 갈망합니다’, 곤고하면 곤고하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주님이 필요하면 원한다고, 죄가 있으면 용서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라는데 그게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파문이 일어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앞에 진실해 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형식과 허위, 이중적인 마음을 벗어버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6.인생을 고칠 힘이 없을 때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막 9: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성경 본문에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에 관한 기록이 등장합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인생을 고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스스로 환경을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결심과 우리의 의지, 우리의 노력으로 고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처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한계 선상에서 우리를 불러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쳐주시려고 하는 분이십니다.
II. 침상에 떠메어 온 중풍병자
오늘 성경에 보면 침상에 떠 메여 온 중풍병자가 등장합니다. 중풍병이라고 하는 것은 다 알다시피 혈관이나 혹은 신경계통에 손상을 입어서 사지백체를 자기 맘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된 그러한 질병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사람이 나이가 얼마인지, 왜 중풍병에 들게 되었는지 얼마나 오랜 세월 중풍병으로 눕게 되었는지 그것은 우리들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이 사람의 중풍병은 가벼운 증상이 아니라 매우 심한 증상의 중풍 이고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기동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타인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이동할 수도 없고, 어쩌면 누워서 대소변을 받아 내야 되는 아주 고통스런 인생의 삶을 지속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오늘 읽은 본문과 꼭 같은 병행 기사가 나타나는데 거기에 보면 이제 사람들이 이 중풍병자를 떠 메여 병 고치는 예수님께 데려간 걸로 나옵니다. 주님께 가까이 접근하고자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 집에 들어가기는커녕, 그 예수님께 접근하기는커녕 그 집에 들어갈 수도 없고 용신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사람을 네 줄에 메여 예수님이 계신 그 자리에 지붕을 뚫고 달아 내렸다고 나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도움을 입지 않으면 도저히 스스로를 고칠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이 사람은 떠 메여져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기록을 읽으면서 2000년 전에 중풍 병 걸렸던 어떤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의 기사를 평면적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육신의 중병이 들렸기 때문에 마음의 생각과 뜻은 있었지만 사지백체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육신의 중풍 병보다도 더 비참한 것은 영혼의 중풍병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으로는 이런 저런 선한 일들을 계획하고 뜻을 갖지만 그 뜻대로 우리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육체는 우리 명령대로 쉽게 움직입니다. 발더러 가라 하면 가고 손더러 들라하면 들립니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에 중풍병이 들게 되면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해도 마음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여러분은 예배를 드리며 말씀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마 여러분 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처지를 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주간동안 살면서 여러분은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이런 저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고자 마음을 품고 마음에 원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신을 스스로 꾸짖으면서 기도해야 된다고 다그치기도 하였을 것이고, 여러분에게 맡겨진 그 하나님의 일을 소홀이하고 게을리 한 자신을 발견하면서 이래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꾸짖으며 주님의 일에 충성하자고 다짐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중풍 병 상태에 있게 되면 이렇게 수시로 선한 결심을 품고 마음을 먹어도 좀처럼 그것이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질병상태이고 중풍병의 상태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의식이 없이 여러분의 껍질밖에 없는 삶을 돌아본다면 여러분은 그래도 세상에서 단정한 사람들이고 오늘 예배당을 가득 메우고 예배드리고 있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그것은 여러분의 껍질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경배가 아니면 여러분의 껍질뿐인 행실은 하나님 앞에 심히 역겨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제사는 마음으로부터 솟아나는 진정한 경배이고, 마음과 그의 삶이 일치가 되는 온전한 재물이 하나님이 받으심 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자신의 중풍 병 상태에서 예수님께 떠메어져 나온 이 사람처럼 어쩌면 여러분의 인생에 가장 커다란 문제는 육신의 문제이고 감각적으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문제 때문에 여러분은 불행해지기도 하고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나온 어떤 분들은 신앙의 힘을 빌어서 이런 어려운 상태를 개선해 보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의 실제적인 문제들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거보다도 더 뿌리 깊은 문제를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게 마련이고 육신의 모든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몸은 몸대로 여러분이 마음먹은 대로 훌륭하게 움직입니다. 더욱이 마음이 어떤 일에 대해서 욕망을 느낄 때 사지백체는 어쩌면 그렇게 민첩하게 그 일을 위해서 움직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도 이렇게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습니까? 장애 상태에 있어서 마음은 원하되 육신은 움직일 수 없는 중풍 병의 상태에 있지는 않습니까? 마음의 중풍 병은 육체의 중풍 병보다 훨씬 더 근원적으로 여러분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의 영혼을 직접 들여다보고 그리고 여러분 마음 앞에 여러분을 세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무엇도 고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정할 수 없지만 어쩌면 이 사람은 돈이 많은 부자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아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여력을 다 모아서 의원들에게도 호소하고 민간요법도 활용하면서 자신의 이 질병 들린 저주스런 중풍병의 상태에서 자기의 육신의 자유를 찾아보고자 몸부림치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의 힘으로 될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인정하지 아니하고는 우리는 진정한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한계를 발견하고 우연적인 문제에서 영혼 깊이 더듬어 내려가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필연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힘으로서가 아니면 고쳐질 수 없고 우리의 한계를 초월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III.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
A. 질병의 근원을 보이심
이 사람이 드디어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순서를 무시하고 이렇게 위법하느냐’고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예수님께서 이제 이 중풍병자의 중차대한 문제를 치료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질병의 근원을 보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명백히 이 사람의 중풍 병 상태는 죄 때문에 생긴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의 기록만을 가지고는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이 질병을 내리셔서 중풍병에 걸리게 되었는지, 혹은 그 죄가 개인의 죄인지 아니면 조상들의 죄인지 아니면 그것도 아니고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어기고 타락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밀물처럼 밀려들어온 죄로 말미암아 생겨나게 된 고통스러운 결과라는 의미에서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지는 우리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 사람 개인의 죄이든 아니든지 간에 이 사람의 중풍병의 상태는 확실히 죄 때문에 일어난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완전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인간도 하나님께서는 완전하고 선하게 창조하였습니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으로 밝았고, 지성은 하나님을 알고 이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충분하리만치 빛나고 있었습니다. 의지는 올바른 것을 아는 지성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의 마음과 모든 뜻은 하나님을 향하여 올곧고 아름다운 영혼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의지로서 죄를 짓고, 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괴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밀물과 같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파괴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졌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부서졌습니다. 자기와의 관계도 파괴되었고 자연과의 관계는 더더욱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연과의 무너진 관계가 우리의 몸속에서 일어나게 된 것이 바로 질병의 상태입니다. 이런 질병의 상태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충분히 이 질병이 죄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B.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
그러나 우리들이 유의해야 될 것은 예수님께서 이 사람이 중풍병의 문제를 치료하기에 앞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죄 때문에 생겨난 질병이라는 것은 말씀하시지만 이 질병이 죄에 대한 신적인 복수심을 드러나는 것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잘 나갔더라면 하나님을 생각도 안했을 사람, 인생에서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이 모든 우주의 주인이요, 중심이라고 생각했었을 사람들을 주님은 실패하게 하심으로 자기의 약함을 보게 하시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하심으로 하나님만이 존귀하신 분임을 깨닫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태는 우리들이 뒤집어 볼 때에 보다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중풍병에 걸려 자신도 기동할 수 없는 처지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에 그의 심령이 동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아마 건강한 육신을 가지고 병든 영혼을 움켜진 채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육신이 병들었고, 그가 가련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에게 죄를 지적하시고 그리고 죄를 사하여 주실 때 비로소 자신의 이 병든 육신의 상태의 근원의 뿌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고 복음에 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병든 몸으로 병든 영혼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 질병의 근원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질병의 겉모습이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행복에 가장 관심이 많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신앙이라도 이용하여 여러분의 행복을 도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 바깥에서 독립적으로 추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과 관계를 맺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복이므로 이 모든 만물들의 복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누리게 되는 반사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복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분 안에 있는 것이 참다운 복이요, 안정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육신의 질병 상태에서 육신이 고통을 받고 있었으나 그것은 영혼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받는 고통에 비하면 표피적인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일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병든 몸으로 그의 병든 영혼을 알라고 일깨워 주셔서 질병의 근원이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이 세상에 들어온 죄 때문이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는 이 죄로부터 우리들의 인생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라는 이 복음을 알려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1. “안심하라”
아무런 반응도, 이 사람의 아무런 반응도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주님께서 그를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 사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제일 먼서 이 사람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자야” 라고 하는 이 호칭은 정말 어린 아이들에게 사용하는 호칭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이 사람이 어린 아이로서 중풍 병에 걸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네 사람이 침 대 모퉁이에 줄을 달아서 내릴 정도면 그것은 어린 아이가 아니라 무게가 나가는 성인이었음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으로서 이 중풍 병이 걸려서 지붕을 뜯고 달아 내려온 이 사람에게 어디를 볼 때 이 사람이 소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소자야” 라고 말씀하신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하나는 예수님 안에 있는 이 중풍병자를 향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고, 또 한 가지는 아마도 이 사람의 믿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사랑스럽게 보시고 이 사람을 소자라고 불러주셨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자기의 이성을 의지하지 않고 보이는 것을 믿는 어린 아이의 단순한 마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셨고, 기적을 보여주셨을 때에 그때에 그는 아주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음에 있어서 어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이성의 위험에 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이 사람에게 “소자야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른이 된 나이에 이제 자신의 힘으로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고 똥, 오줌을 받아내야 되는 신세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는 몸은 움직일 수 없었으나 마음은 요동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낙담과 분노, 절망과 좌절, 한탄과 그리고 고통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서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몸은 움직일 수 없었으나 몸이 움직일 때보다도 그의 마음은 더 크게 요동치며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안심하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쉼을 주는 예수님의 말씀임을 우리들은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쉼이 없는 곳에서 쉼을 찾고 안정이 없는 곳에서 안정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숨을 불어 넣어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영원히 거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자리는 하나님의 품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록 속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자신의 영혼은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나아온 이 사람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안정을 원하십니까? 요동치는 마음으로는 천국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소자를 안심시키신 후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저희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선언하셨다고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을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이 사람을 데리고 온 동무들의 믿음을 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중풍병자와 그리고 그들에 의해 달아내려진 중풍병자와 그를 달아 내린 이 모든 사람들의 믿음을 함께 보시고 사죄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중풍병자가 비록 자기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데는 육신을 사용해서는 아무것도 이바지할 수 없었지만 마음으로 주님을 간절히 갈망하던 병자였고, 그래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올 때에 신앙으로 나아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히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아무리 선지자들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러주어도 알 수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인격적인 사랑을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림처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실 때에 할 수 없는 수많은 병자를 고치신 사건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육신의 질병든 사람처럼 아무데서도 고칠 수 없는 영혼의 질병 상태를 복음을 통해서 치료해 주시는 일들이 영광스럽게 전개될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예표적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하나님 없이 우리의 불행한 처지, 질병이 걸려 중풍병자와 같이 되어 움직일 수 없는 우리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이 낙담하고 분노하며 좌절하고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한 계기입니다. 그래서 사소한 육신의 고통을 통해서 보다 더 고통 받고 있는 우리의 영혼을 고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주님과 함께 동행하시기 위한 주님의 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없이 홀로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서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울고 있는 것 같을 때 사실은 가장 가까이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다만 신앙이 없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닫혔던 우리 의 눈을 뜨게 해 주고 우리의 모든 영혼의 감각들이 깨어나게 합니다.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만들어주고, 만질 수 없는 것들을 만질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냄새 맡을 수 없던 것들 속에서 우리 하나님의 체취를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의 하늘을 찌르는 고함치는 기도소리만 하나님께 들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예수님은 이 사람의 중 병의 문제를 표피적인 부분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믿음으로 자기 앞에 나아오는 이 비참한 중풍병자를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죄사할 권세로 그의 죄를 용서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웠던 중풍병을 통해서 오히려 그것이 징검다리가 되어서 자기의 인생에 찾아오시는 예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한 의존의 대상이 예수뿐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신앙의 미끄러짐과 인생의 비극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십니까? 그릇된 독립심입니다. 그 놈의 그릇된 독립심 때문에 교만하여 기도하지 않고 교만하여 말씀대신 자신의 상식을 붙듭니다. 주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람의 영광을 선택하여 결국은 스스로 자신을 충돌질하여 죄를 짓고 은혜에서 미끄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매일매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붙들지 않고는 누구도 이 믿음의 길을 걸어갈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 유명한 화가가 그린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그림을 보았습니다. 하도 오래전에 본 그림인데 양쪽에 절벽이 있고, 그리고 이쪽은 아주 고통 받는 세상이고 저쪽엔 파란 풀밭이 있고 그리고 찬란한 햇빛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천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십자가가 다리처럼 놓여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길을 이제 막 걸어가기 위해서 이쪽에 있는 땅에서 절벽을 바라보며 이쪽으로 건너고, 어떤 사람은 다리를 다 건너가서 만세를 부르고, 어떤 사람은 똑바로 걸어가고, 어떤 사람은 가다가 십자가에서 쓰러져 있고, 어떤 사람은 십자가 다리를 걸어가다가 떨어질 듯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걸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이심전심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구원은 한 번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받는 것이지만 그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우리의 인생은 천로역정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한 번 미끄러진 사람들을 짓밟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잘못으로 미끄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찾아오셔서 다시 불러 그래서 병든 자를 고치고 절망 중에 처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의존할 분이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IV. 인생을 고칠 힘이 없을 때
우리는 종종 우리의 힘으로 인생을 고칠 아무런 능력이 없을 때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가장 곤고해집니다. 사랑하던 사람들조차도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는 낯선 사람들로 느껴집니다.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외톨박이가 됩니다. 이게 자기 사랑의 결말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우리를 끊임없이 하나로 묶어 사랑으로 유통하게 만들어 나를 지체들 안에서 발견하고 그리고 지체들을 내 안에서 발견하고 우리와 지체들 속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발견하고 누리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은 끊임없이 안으로 오그라들어 하나님도 없고, 이웃도 없고, 사랑하는 가족도 없이 오직 자신 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어느 한 순간 처음은 좋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가 외톨박이가 된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영혼의 질병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자신의 인생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이 있겠고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님과 함께 동행하지 않는 삶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는 혼자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과 동행하며 살게 되어 있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때로는 우리들이 미끄러져 주님을 멀리 떠났을 때 한동안 고통가운데 버려두심으로 우리의 육신의 괴로움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의 질병상태를 발견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V. 결 론
주님이 여러분의 불순종과 죄악에 대해서 복수하신다기 보다는 이 중풍병자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침상에 떠 메여서라도 예수님께 나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여러분을 잠시 홀로 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난주에 이어서 여러분에게 촉구합니다. 마음을 낮추십시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거짓과 위선으로 주님을 찾지 말고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탄식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국 청교도의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도 오래전에 읽어서 유명한 사람이긴 한데 그 청교도의 이름이 누구인지는 잊어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목사님 청교도 목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회자는 우리 모두 모였으니 이제 우리 모두를 위해서 목사님이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왠지 기도를 시켰는데도 이 목사님이 기도를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엎드려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이 시간이 흐른 후에 그는 한 마디의 기도를 통했습니다. “오. 주님” 바로 그때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질병 상태에 있는 영혼을 발견하게 되었고, 기도하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는 그 목사님의 영혼이 사실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병든 영혼들 때문이라는 것을 성령이 깨닫게 해주시면서 설교한 편 없이 자신의 죄에 대한 심오한 회개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마디의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인생을 고칩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라고 제가 여러분에게 당부를 몇 주째 드렸습니다. 그것이 잘되지 않는다면 더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영혼이 질병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짖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단번에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찾을 수 있다면 더욱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계속 그렇게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지금은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도 잠시 후 이 중풍병자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영혼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찾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됩니까?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 사람들을 그 올무에서 풀어주십니다. 뺨에 흐르는 눈물들을 씻어주시고, 힘이 없는 자에게 힘을, 지혜가 모자라는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살도록 당신을 의존하며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주님을 믿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7.죄인을 미리 아시는 예수님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눅 19:1-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세리장이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그를 찾아주셨고, 불러주셨기 때문에 만나게 된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보면 세리장인 삭개오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몇 주 동안 세리에 관한 설교를 들으시면서 알게 되셨겠지만 당시 세리는 정상적인 공무원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세리들은 결국 동족들의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유대인들이 보면 정말 반민족적인 행위를 하는 앞잡이들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세금 징수 행위에는 늑탈과 그리고 여기에 나오듯이 토색이 뒤따랐고 그래서 많은 동족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리장은 지역의 세리들을 지휘하며 이 일을 하는 사람이니 세리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삭개오였습니다.
II. 세리장인 삭개오
오늘 성경에는 다른 세리들과는 달리 그는 부자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사유재산권이 보장되고 있었으니 그는 아마 큰 집에서 그리고 좋은 옷을 입고 편안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지체는 높지 않았지만 돈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도 종처럼 부리며 그렇게 생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인 것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갈증이 이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갈증이었고, 또 종교적인 갈증이었습니다. 부자였으나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으니 동족들이 자신을 개같이 여기고 자기를 그들의 교제 속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종교와 사회생활이 일치를 이루고 있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는 경건한 종교 생활에 있어서도 낙인찍힌 죄인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혹시라도 그런 종교적인 모임에 참여하려고 하면 노골적인 멸시를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오늘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이 길거리에 나왔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가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였다 그랬습니다. 이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사람들로부터 어떤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런 막연한 기대가 이 삭개오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 속에서 이것이 단지 삭개오의 막연한 호기심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은 있었고 그리고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가슴은 허허로운 인생의 날들 동안에 찾아온 수많은 허무감으로 곤고해 있었습니다. 동족들에게 사람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물질로서만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어떤 막연한 빈 잔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는 고백이 이 삭개오에게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인생에 도움을 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는 무엇인가 맨 처음 기대에 이끌려 예수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가까이 그분께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III. 어려움을 딛고 만난 예수님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본문에 보면 어려움을 딛고 만난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이 마을에 들어오셨고, 지나가신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삭개오가 살아온 인생의 허허로운 날들을 기억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그 분을 뵈옵고자 나왔습니다. 그러나 뜻밖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자기보다 훨씬 더 뜨거운 열심으로 예수를 만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도저히 예수 오시는 그 길의 앞자리에 나가서 설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오늘 성경은 이 사람이 키가 작았다고 했습니다. 키 작은 사람들만이 경험해본 일이었겠지만 키 큰 군중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것이 마음에 많은 부담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헤쳐 나가고자 해도 나갈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자 이제 이정도면 예수님 만나길 포기하고 돌아갈 이유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나는 예수를 보고 싶어 했노라, 그래서 생각했노라, 그래서 내가 나갔노라.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어서 운신할 수도 없고 예수를 만나고자 하되 그 분을 보기는커녕 길거리조차 볼 수 없도록 사람들이 에워싸여 있었고 나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삭개오가 예수님 만나기를 포기하고 돌아갈 만한 설득력 있는 근거였습니다. 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오늘 일곱 번째 주일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에 관한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 아직도 많은 사람은 아직까지도 자기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충분하게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삶에도 변화가 없고, 마음에도 여전히 어두운 그림자가 가득하여 진리가 주는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를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명하게 만나고 감격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변화되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인생을 개선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배당에 오는 것만으로는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만나는 분명한 목적 없이도 얼마든지 예배당에 출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중 누구도 주님을 만나지 않기로 뜻을 세운 사람들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을 기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대가 얼마나 자주 장애에 꺾이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 가지 핑계와 많은 여건에 대한 변명들이 우리에게 있지만 그것은 사실 우리의 마음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의 부족을 입증할 뿐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죄인들을 부르시지만 자기를 찾는 죄인들에게만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날 동안 여러분이 이런 저런 핑계 속에서 영적으로 결단하고 주님께로 돌아가기를 망설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생활에 있어서 세월은 약이 아닙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세상과 하나님의 교회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여러분이 만약에 특별한 결단을 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면 머리가 하얀 20년 30년 세월이 흐른 뒤에도 같은 마음으로 또 다른 예배당에 출석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세리장인 삭개오는 달랐습니다. 그는 키도 작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도저히 예수님을 만나기에 적합한 전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열망은 모든 창조적 행동의 원천입니다. 그는 이 모든 사람들 뒤로 돌아가 정면으로 나아갔고 그는 마침 길거리에 있는 예수님 지나가는 것을 보기에 적합한 뽕나무 한 그루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른인데도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게 기어올라서 그래서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 뽕나무가 그 뽕나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거기에 가면 아직도 삭개오가 올라갔다는 뽕나무가 있습니다. 그게 뽕나무인지 뻥나무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삭개오가 올라갔던 나무라도 그렇게 믿고 있답니다. 우리는 진위를 확인할 수 없고 그 길도 그때 그 길과 같은 길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어쨌든 현재 상황으로 보면 삼거리 한복판에 있어서 정말 그 나무 위로 올라가면 어느 길에서 누가 오든지 간에 정확히 볼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전망을 가진 나무였습니다. 그 나무가 그 나무였다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그 나무가 크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 위에 삭개오는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오든지 예수님을 뵐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전망을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서 자기를 기다렸습니다.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면서 노래방에서 논다면 그것은 정말 주님을 만날 자리가 아닙니다. 물론 주님은 그보다 더 엄청난 곳에서도 여러분 만나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두 명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통계를 내보면 교회에서 주님을 만났다는 사람이 많지, 노래방에서 주님 만났다는 사람 없습니다. 그렇게 하실 순 있지만 일상적으로 잘 안하십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주님을 만날만한 좋은 전망을 가진 뽕나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세리장 삭개오는 거기서 예수님과 자신의 눈이 마주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뽕나무는 아마도 예수님의 평상적인 눈높이와는 비교도 안 되게 훨씬 높은 위치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증명하듯이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삭개오를 우러러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삭개오는 키가 작고 사람이 많은 어려움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앞으로 달려가고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가장 좋은 전망을 선택하였습니다.
여러분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그래 내 인생 이렇게 살면 안 돼. 주님이 날 부르고 계시는데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라고 마음에 잠시 찔림을 받고 여러분이 일주일동안 예전과 다름없는 삶을 산다면 여러분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 속에 묻혀 있는 것이지, 뽕나무로 올라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죄인들을 부르시지만 주님을 찾는 죄인들에게만 주님의 애끓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돌아가고 난 뒤에는 주님이 우리가 돌아온 그 순간에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 관심 한번 두지 않을 때조차도 그렇게 안타깝게 부르셨다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IV. 먼저 부르시는 예수님
A. 이름을 알고 계심: “삭개오야!”
우리는 여기서 먼저 부르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삭개오의 이름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삭개오야’ 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시야에 벗어난 줄 알고 뽕나무 꼭대기에 있었던 삭개오는 얼마나 커다란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가슴이 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수많은 인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만나기 위해 온 길거리를 가득 메웠을 때에 삭개오는 아마 ‘나 같은 인간이야 어디 예수님의 안중에나 있으랴’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전에 삭개오에 대한 정보를 가지셨다는 성경의 암시는 어느 곳에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신적 지식으로 한 번에 이 삭개오를 알아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친히 이름을 불러주시는 대부분의 사례는 말할 수 없는 애정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따먹고 언약을 파기하려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를 불러 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었느냐?’ 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아주 정겨운 아버지가 자식을 염려하여 부르는 것 같은 부르심의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당신의 선지자들,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죽기까지 하나님을 섬겼던 당신의 선지자들을 이런 식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예레미야야’ 이렇게 불러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알고 계셨다는 것은 곧 그를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이름은 곧 그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그 이름을 높인다는 것은 그 분을 높인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의 이름을 알고 계셨고 알고 계신다는 것은 사랑하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 번 이 시점에서 칼로 이 장면을 끊고 한번 단면을 가지고 생각해 봅시다. 이 시점에서 삭개오를 주님이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아셨고 사랑하셨습니다. 도대체 이 삭개오의 이제껏 살아온 날들 중에서 하나님이신 이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을만한 어떤 아름다움이나 좋음이 있었습니까? 일평생 그는 세리로 살았고, 세리들 가운데 가장 세금을 잘 거두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세리장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로마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동족들에게 더 못할 일을 많이 했다는 뜻이 아닐까요? 토색하고 늑탈하는 일들에 앞장을 섰기 때문에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그에게 어떤 장점과 좋은 점이 있어서 마치 예수님이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는 이 장면 자체가 삭개오 한 사람을 심방하기 위해 오신 것처럼 그를 특별 대우해 주실 만한 그 무엇이 삭개오에게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이것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의 발현이었습니다. 다만 삭개오에게 있는 그 다른 무엇인가를 우리들이 굳이 발견하려고 애쓴다면 어쩌면 맨 처음 예수님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에서 주님을 보러 왔을지 모르는 이 삭개오의 마음속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외로운 삶을 살았고 이 세상의 물질로 채워지지 않는 허허로운 인생의 날들을 보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이 에워싸여 있어서 예수를 만날 수 없을 때에 그는 자신의 마음에 있는 갈망의 크기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자신도 깜짝 놀라도록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파를 헤치고 그는 뽕나무 위로 올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전망을 차지하였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하는 진실하고 간절한 갈망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던 그 많은 죄의 능력보다도 훨씬 큽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에 가득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이 희망이 없는 세리장 삭개오를 만나주시기로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장면을 보십시오. 수많은 인파에 에워싸여 계시지만 이 마음을 방문한 예수님은 마치 삭개오 한 사람을 심방을 하시기 위해 오신 것처럼 삭개오를 대우해 주셨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 좋은 강점이나 인간적인 선함 때문에 예수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를 만나기를 원했던 간절한 갈망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도덕적인 사람이 갈망 없이 당신에게 다가온 예배는 불쾌한 예배지만 죄인들이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눈물로 드리는 예배는 그분께 영광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재물,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곱 주 동안에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한 설교를 들었고, 희망이 없는 다양한 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증언들을 들었습니다. 형편과 처지는 각각 달랐지만 그들에게는 모두 부인할 수 없는 일치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진실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만날 기대도 없이 예배당에 나아오고 주님을 찾는 마음도 없이 드리는 기도의 형식, 그리고 마음에 복종할 뜻도 없는 성경읽기와 많은 종교적인 행동들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허허롭고 그리고 마음속에 허무한 모든 생각들이 떠나지 않지 않습니까? 이것이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저의 인생의 기억의 끝자락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몇 살쯤 됐을까요? 아마 다섯 살이나 많아야 여섯 살 정도 됐을 것입니다. 아주 어린 시절의 한 토막입니다. 일하러 나갔다 돌아오시는 아버님이 수박을 한통사다가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수박을 가지고 저하고 제 바로 밑의 동생하고 셋째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인데 둘이 하루 종일 그 수박을 핥으면서 방안에서 놀더랍니다. 그 수박은 기억이 나는데 핥았던 기억은 안 나는데 하여튼 그때에 보았던 가족들로부터 증언을 들었습니다. 여러 번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하루 종일 그 수박을 좋아하고 굴리면서 동생하고 핥으면서 놀더랍니다. 수박의 맛이나 봤겠습니까? 그것을 쪼개어서 붉은 속살을 한입 콱 깨물 때 그때에 입안 가득히 번지는 수박향이 가득한 붉은 수분을 머금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차가운 감격을 느껴본 사람이 아니면, 뭘 또 침을 삼켜요? 이런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수박을 맛 봤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의 진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죄가 많기 때문도 아니고 무지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정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고백이 있습니까?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니
그런 기도가 있습니까? ‘내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라는 영혼의 외침이 있습니까?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통성기도만이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영혼의 깊은 통증을 동반한 신음소리, 그 분을 만나기를 그리워하는 간절한 갈망, 그것이 없기 때문에 오늘 수박이나 핥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생활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이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고자 간절히 원했을 때 언감생심 그는 먼발치에서 주님을 볼 수만 있다면 감지덕지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듣도록 삭개오의 이름 석 자를 불러주었을 때 그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예수님께 다가와 한 송이 꽃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지만 우리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 더없는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치 이 마을에 삭개오 한 사람 심방을 오신 것처럼 지탄받는 쓰레기 같은 이 인간을 이름을 이미 알고 계시고 사랑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이 어떻게 나는 죄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 분을 만날 수 없다고 스스로 영혼의 갈망이 없음을 핑계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예수님이 그 이름을 불러주신 것처럼 오늘도 여러분이 마음으로 주님을 간절히 찾는다면 주님이 여러분의 이름도 불러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신앙으로 따진다면 예수님이 ‘삭개오야’ 하고 부른 다음에 아마 엄청 혼내셨어야 될 겁니다. ‘너 이렇게 털어먹었지? 저렇게 토색했지? 이렇게 늑탈했지? 니 얻은 수많은 재산이 가난한 사람 피 빨아먹은 거지?’ 그러면 아마 삭개오는 펑펑 울면서 ‘주님 제가 그때는 몰랐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는 내가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폼 나게 ‘그래 한번은 용서해 주마’ 하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신앙의 상식하고 아주 아름다운 일치를 이루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안됩니다. 그러나 다음 주에 우리들이 이 본문을 더 살펴보겠습니만은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죄를 무시하셨다거나 이 세리 안에서 세리장 삭개오 안에서 일어난 진실한 회개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삭개오의 주님 없이 살아온 지난날들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그리워하던 은혜의 시대입니다. 그가 누구든지 주님을 간절히 찾으면 주님을 만나게 되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막 생각이 납니다. 여러 해전에 제가 아주 오래전 입니다. 어느 교도소에 설교하러 간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많은 죄수들을 만났는데 저를 안내한 교도소 관계자 한 분이 저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여러분 아마 기억하십니까? 김현양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막가파 조직을 만들어서 돈 있는 사람들을 납치해서 죽이고 시골에 끌고 가서 돈을 뺏은 다음에 사람을 죽인 다음에 살점을 다 칼로 벗겨서 석쇠에 구워서 태워버리는 인물이었습니다. 다섯 명인가 여섯 명을 죽이고 거기서 탈출한 어떤 여자에 의해서 고발을 받은 경찰들이 본격적으로 수사에 나오면서 결국은 잡혔습니다. 취조하는 순간 내내 태도는 불량했고 추호의 개전의 정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어느 그리스도인이 그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간수들은 둘이 함께 있는 것도 매우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두 달 가까이 복음을 전해주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자기의 장기를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기증하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죽었답니다. 형장에서 마지막 남길 말이 없느냐고 했더니 그가 노래를 하나 부르겠다고 유언했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러면서 지난날들을 너무 후회한다고 고백하고 피해 입은 가족들에게 온 맘으로 사죄하면서 자신은 좋으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다고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B. 친교에로 부르심: “네 집에 유하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어느 집에 유한다고 하는 이 말은 유대인의 문화에서 보면 그들과 가족 관계와 방불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뭇 사람들은‘ 정말 이상하다, 혹은 실망한다 왜? 아니 그 예수가 어떻게 저 쓰레기 같은 이 동네에서 악독하기로 유명한 죄인의 집에서 묵으실 수 있다는 말이냐’ 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자신이 의롭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마치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심방을 오신 것처럼 그에게 독점적으로 관심을 표명하시고 그와 가족처럼 하루를 지내길 원하셨다는 이 소식은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고 실망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삭개오와 같이 비천한 세리들, 창기들 이 세상에서 따돌림을 받고 버림을 받아 자신이 아무리 자신의 편에 서도 주님을 만날 만한 장점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얼마나 커다란 복음이었겠습니까? 우리가 이 복음을 읽으면서도 예수님같이 훌륭하신 분이 왜 이 더러운 삭개오의 집에? 라는 반발이 들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마음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은 더 찬란한 것처럼 죄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눈부시게 빛납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유하게 된 사건은 거기 모였던 많은 사람들 중에 정말 주님을 마음으로 찾는 사람과 자신을 의지하고 주님의 은총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을 갈라놓았을 것입니다.
V.결론
오늘 이 기사를 읽으며 여러분의 마음이 뛰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부자였지만 허허로운 인생의 날들을 사는 이 사람 삭개오를 불러주셨습니다. 당신의 가족처럼 부르셨고, 당신이 그들의 가족이 되기를 원하셨고 생명적인 교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 일생을 살아온 삭개오였지만, 주님을 뵈옵고자 하는 간절한 믿음의 갈망이 주님의 사랑을 붙들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님을 찾기 전까지는 주님의 부르심이 여러분의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그 사랑을 찾기 전까지는 주님이 사랑으로 여러분을 애타게 찾으시는 목자의 음성으로 들려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곱 번을 설교했습니다. 몇 번을 주님이 여러분을 더 부르셔야지만 이제 어두움을 뿌리치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언제나 거기서 스스로 당신을 떠난 죄인들을 마치 그들이 떠난 것이 당신의 잘못인 것처럼 주님을 부르지 않는 여러분을 찾아 나서십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가서 주님을 만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날지 투신할 지 누가 우리의 미래를 보증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이야말로 주님을 만나기에 가장 적합한 날이고, 우리 주님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기에 가장 아름다운 날임을 우리가 어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영혼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나의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부끄럼 없이 기도할 수 있도록 주님을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여러분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8.잃어버린 자들의 하나님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8-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보며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사람 삭개오의 마음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더욱이 예수님이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이 그 동네에 방문한 것은 마치 삭개오의 집을 심방하기 위한 것같이 보여 졌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이 부르심을 받고 뽕나무에서 급히 내려왔고,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짧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속에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된 사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여러 단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이 사건은 단순한 종교의 경험을 넘어서 삶을 돌이킨 사람의 모습을 오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II. 삶을 돌이킨 삭개오
A. 재물에 대한 변화
본문에는 삭개오가 눈물을 흘리고 회개했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분명히 그의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된 사람임을 깨달아 알 수 있게 해 주는 단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 앞에 선 삭개오 속에서 우리는 제일먼저 재물에 대해서 변화된 그의 태도를 만나게 됩니다. 삭개오는 내려오자마자 우리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으며 혹시 내가 뉘게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라고 그는 예수님께 약속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구원해 주시는 조건으로 이런 것들을 요구하신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리고 그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믿어졌을 때 그는 이렇게 재물에 대한 태도가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고 회심한 다음에 삶이 바뀌는 것은 엄청나게 장고한 세월이 흘러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성경에서 적절한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물론 한 사람의 다듬어지지 않는 인격과 그리고 그의 아직까지도 미력한 모든 판단과 이런 것들 때문에 그는 지속적인 성장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성장이 필요하고 그를 아는 은혜에서의 성장이 필요합니다. 지식과 은혜로서 다시 말하면 말씀과 성령 안에서 지속적으로 성숙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방향은 그렇게 서서히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바뀝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바뀐 삶의 방향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데는 장고한 성화의 기간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그 남자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사랑에 빠진 여자들에게 묻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사랑에 빠진 남자들에게 그 여자가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고 묻습니다. 그런 건 물어보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어느 한 순간 시선에서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건 논리를 초월하는 사랑과 감정의 이끌림입니다. 그러면 보이는 사람을 향한 사랑도 그러하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이런 일들이 얼마나 더 정확하겠습니까? 한 사람이 죄인으로서 자기를 부르시는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을 때 주님을 향해 변화된 그의 태도는 제일 먼저 물질에 대한 태도의 변화에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에 끊임없이 집착하던 것들로부터 벗어나 주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삭개오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모르고 허허로운 인생의 날들을 사는 동안 이 물질은 그에게 유일한 위로였을 것이고, 세리로서 기본적인 인간의 체면을 유지하며 살게 해 주는 마지막 보류였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자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가복음 10장에 나타난 부자인 젊은 청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눴던 대화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부자였고 젊은이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속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종교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고 영적인 것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하면 영원히 살 수 있을까? 영생에 대해서 고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어찌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삽나이까?’ 이미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이 세상의 부는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면에 희색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마지막 요구를 하셨습니다.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부자를 혐오하신 것일까요? 정말 물질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 후에 사도들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는 부자가 없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님께 은혜를 입고 따른다고 해도 따르지 말라고 하시더니 이 사람보고는 예수님을 따라와야지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우리 안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의지와 함께 주님의 은혜로 우리 안에 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안에 이룰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가 우리의 마음에 임하지 못하도록 우리가 끊임없이 저항할 수는 있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지혜로 예수님께서는 한 번의 이 젊은 청년의 마음을 들여다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방해가 물질에 대한 집착이었던 것을 예수님께서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네가 버려야 할 가장 하나님만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라 이런 뜻으로 너는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청년에게는 그것이 재산이 될 수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의 꿈이 될 수도 있고, 권력이 될 수도 있고 이 세상에서의 영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사랑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방해물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 요한 웨슬레는 말하기를 자기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나는 그들의 지갑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들의 회심을 믿을 수 없노라’고 말입니다. 돈 제일 많이 쓰는 그것, 그것이 여러분이 제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많이 쓰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자기를 위해 많이 쓰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이 삭개오는 그 뽕나무 꼭대기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단 한번 자기에게 와서 꽂힌 예수 그리스도의 그 눈빛이 자기를 그 사랑에 불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주님의 사랑의 눈빛 아래서 영원히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허허로운 인생의 날들을 붙들어 주던 실낱같은 희망, 물질에 대한 사랑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재물에 대해서 변화된 태도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B. 사람에 대한 변화
두 번째는 사람에 대한 변화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있습니다. 그가 만약에 용서의 은혜를 입었다면 예수님께 입었고 자기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불러주시는 사랑을 경험했다면 그 사랑은 예수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인데 그는 나무에서 내려오자마자 ‘가난한 자를 위해 자기의 소유의 절반을 주겠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자기에게 토색질을 당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위해서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했는데 이것은 율법에 의하면 남에게 손해를 입혔을 때 배상할 수 있는 최고의 한도를 자신의 배상 금액에 적용한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내 돈을 주님을 위해 다 드리겠습니다.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사람을 향해서도 삶의 태도가 바뀌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자 흐르는 하나의 정신과 영혼의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해보면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던 성도들이 기도를 열심히 하다가 은혜가 떨어져요. 그러면 이상하게 기도할 게 별로 없어져요. 그리고 쪼그라들고 쪼그라들어서 마지막에 자기에게 모이게 됩니다. ‘하나님 나 이번에 뭐하는데 뭐가 필요한데, 돈이 필요한데, 시집가는데, 장가가는데’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데 오래 못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서 자기에게 집중하며 기도의 제목이 쪼그라드는 것 자체가 자기 사랑의 이행이거든요. 그런데 자기 사랑은 본질 그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독립하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동안은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도를 해야 될 필요자체를 못 느끼게 되는데 왜냐하면 기도의 정신은 주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이고 자기 낮춤인데 비해서 자기 사랑은 자기 독립을 따라가는 성향이기 때문에 기도할 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은혜를 받고 회개하고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솟아나게 되면 그러면 기도할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오지랖이 넓어져요. 그래서 오만 군데 다 나서 근데 훼방을 놓거나 아니면 지 잘난 척하면서 나서는 게 아니라 오지랖이 넓어지되 끊임없이 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고 그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한 이타적인 사랑의 오지랖입니다. 그러면서 쭉 펼쳐져 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기와 아무 상관도 없는 가보지도 못한 대륙에서 죽어가는 영혼들 때문에 흐느껴 울 마음까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한 신자 안에 있는 사랑의 깊이와 넓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서 아름다운 연결을 이루면서 이렇게 서로서로 희생하고 사람들 속에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됨으로써 만족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 속에서 떠올리는 사람들은 얼마나 됩니까? 정말 여러분의 마음속에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알았다고 자부하는 성도로서 이웃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그리고 그들의 진정한 기쁨에 대해서 여러분 마음속에 정말 그리움이 있습니까?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오늘 이 사람 삭개오는 주님 없이 허허로운 인생의 날들을 보내다가 회개하고 단 한 번 주님의 눈빛 앞에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물 붓듯 부어졌고 그는 지금까지 아무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삭개오의 관심의 대상이었을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세금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의 마음을 가득 채웠고 그는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소유를 내놓을 마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여러분의 사람에 대한 태도는 어떻습니까? 정말로 여러분은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여러분은 무엇인가 그들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맨 처음 주님을 만나고 그 은혜가 여러분을 덮었을 때 여러분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그 신앙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예수에 대한 변화
세 번째는 예수님께 대해 변화된 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뽕나무 꼭대기에 있다가 주님의 분부를 받고 급히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올라갈 때 삭개오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 새 사람이 되었고, 물질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 변화된 태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를 변화시킨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새 삶을 선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렇게 놀랍게 일어난 자신의 변화를 누구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까? 왜 가난한 사람들 앞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내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 주노라 말한 대신 예수님 앞에 와서 이 고백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자기가 토색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사배로 갚겠다고 제시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서 이 고백을 제일 먼저 실행에 옮기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이 사람의 삶에 있어서 기준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많은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 삭개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의 마음을 찌른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초청의 음성은 이 사람의 심령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삶에 새로운 가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재산을 나누어 주겠다고 하는 것도 토색한 사람들에게 사배나 갚겠다는 고백도 실행에 옮기기 전 예수님께 제일 먼저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복음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변화된 삭개오에게는 이렇게 예수님이 자신의 삶의 중심의 근거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어떤 삶을 살 때 그 삶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시고 여러분 그 사랑으로 불러주셨을 때에 여러분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었을 때 그 분은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 분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위한 것이 되었고 모든 좋은 것이 그분께로부터 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여러분의 비전이고 그 분이 여러분의 사랑이 되었습니다. 모든 행복은 그 분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은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변화된 태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전에 주님이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여러분이 중심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전엔 주님을 따랐지만 요즘은 주님보고 여러분을 따라오라고 말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주님 중심으로 살게 만들고 우리의 죄악은 언제나 우리 중심으로 살도록 만들어줍니다.
오늘 이 삭개오를 보십시오. 눈물을 펑펑 흘리고 고꾸라졌다는 이야기가 없어도 그는 마음 깊이 회개하고 예수 중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자의 모든 불행의 근원은 예수 바깥에서 행복을 찾아보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관계없는 곳에서 어떤 복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낙을 찾아보려고 할 때 신자의 영혼은 오염이 되기 시작하고, 그의 정념은 옮음을 잃어버리고 무분별하게 되어서 온갖 욕정들이 그의 마음속에 뒤움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시간에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정직하게 우리가 정말 그 분 안에 있는 행복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지 진지하게 물어야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짧은 시선에서 보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좀 더 긴 안목에서 보면 여러분이 주님 바깥에서 행복하려고 하는 그 자체가 여러분의 영혼을 허물고 주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뜻대로 사는 것이 힘들 때마다 바울의 고백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함께 못 박았느니라’ 고 말입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III. 잃어버린 자를 위해 오심
A. 삭개오의 구원을 선언하심
이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바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서 오신 것’이었습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고 말입니다. 삭개오는 정말 잃어버린바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애 무목적한 가운데 물질을 추구하며 세리 질을 하며 살아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허허로운 인생의 날들을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는 그때에 그리스도에 관한 소문이 그의 마음을 때렸고, 그는 뽕나무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은총이 오늘 그의 집에 이른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함께 모였던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썰렁했을까요? 동네에서도 토색질하기로 이름났을지도 모르는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는 그 세리 한 사람을 심방하기 위해서 오신 것처럼 모든 사람들 보는 앞에서 한 사람을 추켜세우시며 오늘 이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는 세리 질로 이름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주님이 보기에는 잃어버린 영혼이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난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아마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이 세리장인 삭개오의 가슴은 터질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의 계시가 아직 충만하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지체, 그리스도의 신자라고 불러주어도 사람들이 그 뜻을 잘 알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에 대한 사상은 이미 구약에서 전해 내려져 오는 사상이었습니다. 삭개오 자신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절대로 생각했을 리가 없습니다. 동족들에게 버림받고 따돌림을 당한 가운데 그는 벌어들이는 얼마의 수입으로 위로를 얻으며 살아가는 속물과 같은 사람 중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과 함께 기도하러 올라갔던 세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가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기도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는 남들은 청산유수로 기도할 때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눈물만 흘리면서 용서해 달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가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바리새인은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를 멸시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 율법을 지키면서 살게 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아브라함의 자손의 관점도 사실은 그렇지 않았지만 외형적으로 그렇다 할지라도 주님이 오늘 이 삭개오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이 선언은 사실은 ‘그는 나의 지체라’고 하는 신약의 선언을 구약의 용어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아마 이 삭개오의 마음은 터질 듯 한 희열을 느꼈을 것입니다. 동족들이 개처럼 여기고 따돌림을 받으며 서럽게 살아오고 하나님의 모든 은총으로부터 소외된 내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니, 그것도 예수께서 나에게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선언과 함께 인쳐주시다니 그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에게 다가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일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이 죄를 하찮게 여기시는 장면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마음으로 당신에게 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 때문에 우리에게 오시지 못하는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어두운 영혼에 주님은 빛처럼 오시고 동토에 땅과 같이 얼어붙은 마음에 주님은 봄바람처럼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 더 큰 은혜의 역사를 보이시며 죄인을 부르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우리의 귀에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B.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은
이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은 바로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모든 사람들은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주신 꿈이 아닌 자기 성취의 비전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잃은 양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이렇게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없이 살아가던 이 삭개오가 단 한번 주님의 부르심 앞에 자기를 전폭적으로 드리고 예수께 매여 사는 회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 주님의 사랑을 몰랐던 사람도 단 한 번 주님의 죄인을 부르시는 눈빛에 이렇게 응답했다면 이미 주님을 만났고 주님을 알고 있는 여러분은 얼마나 더 주님의 그 사랑에 응답하여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삭개오를 부르셨을 때에 주님이 삭개오에게 무슨 대가를 요구하셨나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재산 반을 팔아주면 내가 너희 집에 묵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냥 삭개오를 용납하셨고, 그리고 그의 집에 유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삭개오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신 사건이었습니다.
IV. 결론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실수는 그리스도 바깥에서 행복해져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잘못은 예수 밖에도 예수 안에 있는 것보다 더 훌륭한 행복과 기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이 단 한 번 비치기만 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형상이 우리의 마음에 단 한 번 아로 새겨지기만 해도 모두 사라져 버릴 헛깨비 같은 것들이 사실인 것처럼 우리에게 강력한 유혹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번 주님께로 돌아간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죄인을 불러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한번 들은 것으로 충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 없이는 죄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 용서 받았으나 다시 죄로 돌아갈 수가 없는 사람이기에 주님의 은혜의 사슬에 묶이는 것 이외에 길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됩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성도들이 주님 앞에 겸손해져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삭개오를 보면서 우리들이 삭개오를 비웃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예전에 몰랐던 삭개오가 오늘 누리는 이 구원의 기쁨이 이전에 주님을 알았던 우리들에게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이렇게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 이 벌레 같은 인간들을 끝까지 찾으시는 그 주님 앞에 부복하고 그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는 것 이외에 우리에게 새로운 삶이 없다는 것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고 이것이 바로 복음에 대한 반응인 것입니다.
9.초대 받지 않은 여자
“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 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눅 7:44-5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기록된 이 성경의 본문은 예수께 향유를 부은 죄 많은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이 여자가 나아와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다고 하였습니다. 병행 기사인 마태복음 26장에는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종합을 해 본다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문둥병에 걸렸고, 그래서 문둥병에 걸렸다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둥병에 계속 걸려 있었다면 이스라엘의 회중 가운데 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만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님을 초청하여 식탁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동료들에게 알려진다면 심각하게 비난을 받을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문둥병을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닐까 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II. 초대 받지 않은 여자
아무튼 오늘 본문에 보면 초대받지 않은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을 처음 만나러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예수님이 여기에 식사하기 위해 앉은 것을 알고 있다고 했고, 향유까지 준비해 가지고 예수님께 온 것으로 보아 예수님과의 첫 번째 대면이 아니라 이전에 이미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듣고 그리고 회개를 했던 그런 여인으로서 예수님을 찾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이 여자가 행한 일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도 기념이 되리라고까지 말씀을 하셨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던 뱃세다 광야에 오병이어의 이적 때에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들이 귀신을 무찌르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에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고, 괄목할 만한 위대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해 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도 전하여져 기념이 되리라고 예고하셨던 것입니다.
III. 사랑, 용서 받은 증거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증거로서 우리 주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 하나님의 은총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신앙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여자는 예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복음의 진수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우리 주님께 이미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삶으로 입증해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A. 겸비한 참회
제일 먼저 우리들이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겸비한 참회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신분으로 보면 이 사람 바리새인의 집에 감히 찾아갈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자기를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 시몬의 집을 찾았습니다. 정면으로 대면하지도 못하고 예수님의 등 뒤로 돌아왔고,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그는 예수님의 발치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클라이 오오’라고 하는 동사로 되어 있는 이 ‘눈물 흘리다’는 원래 고유한 의미는 소리를 내어서 우는 것입니다. 식사 자리였으니까 마음 놓고 속을 풀며 통곡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억제된 흐느낌 속에서 조금씩 소리를 내며 흐르는 눈물은 비처럼 쏟아져 뺨을 타고 흘러 예수 그리스도의 발에 떨어졌습니다. 원래 이 당시에는 손님들이 뉘 집을 방문하면 주인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손님이 발 씻을 물을 준비해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발을 씻고 이제 정결하게 되어서 대접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당시에 예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시몬은 예수님께 이런 예절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이 사람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식사에 초대한 것으로 보아서 그는 예수님께 대한 상당한 호감과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여자처럼 절실하게 예수님께 참회하고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을 암시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적게 용서받은 자들은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마도 이 사람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되어집니다. 아무튼 이 여자는 그렇게 예수님께 와서 마음속에는 수많은 말이 있었으나 한 마디 언어도 없이 발치에 서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고 눈물을 쏟아내려 예수님의 발을 두루 적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발치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려 주님의 발을 적시고 있을 때에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울고 있는 이 여자의 마음속에 오가고 있는 정동들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두 가지가 아니었을까요? 자기와 같이 더러운 죄인이 주님 앞에 서 있다고 하는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한 정직한 인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셔서 자기를 불쌍히 여긴다고 하는 친교, 이 두 가지가 주는 깊은 참회와 용서의 감격 때문에 섞여 흘러내리는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물질을 주시지만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깨어진 심령을 주십니다. 주님이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번영을 주시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참회의 마음을 주셔서 예배시간마다 주님 앞에 깨뜨려지고 변화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손에 쥐어지는 물질은 나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이지만 우리의 영혼을 그렇게 변화시켜 주님 앞에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이 놀라운 내적인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영혼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마음 깊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므로 이전에 사랑하던 것들은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초대도 받지 못한 손님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참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그 분의 발치에 섰을 때에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 주님이 자기를 이렇게 사랑해 주셨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회와 감사의 눈물이 아울러 흘러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들이 주는 세상적인 사물의 표상들에 시달립니다. 헛된 것들이 가치 있게 보이고 무의미한 것들이 커다란 의미를 가진 것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다가오는 동안 정말 가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 의해서 업신여김을 당하고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사소한 것처럼 취급됩니다. 그러나 참회의 눈물, 구원의 감격으로 흐르는 눈물은 우리의 마음의 창을 닦아주어 이 모든 어리석은 판단들을 제자리에 돌아오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물질을 주시지만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눈물을 주십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기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자기가 비록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지만 자신의 정체는 다만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요한 칼빈 선생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죄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됨으로써 알게된다’ 라고 말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고 싶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의 이 구원이 얼마나 감격적인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구원받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살아갔던 허허로운 우리의 인생의 날들이 얼마나 덧없고 목적 없는 어두움 속의 인생이었는지를 깨닫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여자 어쩌면 수많은 남성들에게 웃음을 팔고 술을 팔며 그렇게 허허로운 인생의 날을 보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자기 같은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도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정결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 자신의 지난날의 죄를 뉘우치고 또 구원받은 그 감격 때문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 여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이 구원의 감격, 죄에 대한 진실한 참회의 눈물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이 이 여자를 통해 보여주시고 싶어 했던 복음 신앙의 본질인 것입니다. 이 세상적인 정서는 기쁨이 있는 곳에는 슬픔이 있을 수 없고, 그리고 슬픔이 밀려오면 기쁨이 모두 사라지지만 신령한 신앙의 인격 속에는 경건한 슬픔이 있는 그곳에 신령한 기쁨도 함께 깃드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하나님 앞에 많이 눈물 흘리던 그때가 가장 행복한 때였던 것입니다. 겸비하게 참회하는 것이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대한 응답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B. 절실한 사랑
두 번째는 절실한 사랑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의 발치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억제된 흐느낌 속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은 볼을 타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을 충분히 적실 수 있을 정도로 흘렀습니다. 어쩌면 이 집의 최고의 손님으로 초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발을 씻겨주는 대접조차 받지 못하시는 주님의 형편에 대한 아픔의 눈물도 포함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여자에게 있어서 가장 존귀한 신체의 부위중 하나는 머리이고 그 머리에서 삼단처럼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강제로 머리를 잘리는 것은 수치와 부끄러움의 일입니다. 이 여자는 때 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에 흠뻑 적시도록 흘러내린 자신의 눈물을 황망히 이 검은 머리털로 닦아 내었습니다. 주님의 먼지 묻은 그 발이 자신의 존귀한 머리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 것은 주님께 대한 절실한 인격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에 입을 맞추었으니 이는 최고의 존경과 그리고 애정의 정확하게 말하면 숭모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용서 받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주님을 절실하게 사랑하는 착한 인격입니다. 이 사랑의 성장 없이는 누구도 신앙의 성장을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배를 드리며 이렇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있습니까? 그런 진한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선명히 역사하고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신앙생활하고 교리적인 지식도 증가하였기 때문에 예배 시간에 어느 한 구석에서 흐느끼고 있는 성도들을 보면서 어쩌면 여러분은 나도 한때는 저랬지, 저것은 영적인 미성숙의 증거야 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에 복음 신앙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교리와 많은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신앙의 진수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아주 적은 지식밖에 없는데도 신앙의 진수를 맛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적게 사랑하고 많은 지식을 가진 것보다는 작은 지식을 정확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많이 사랑하는 그것이 복음 신앙의 진수에 더 가까이 있는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배를 드리며 주님의 발치에 서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마음 깊이 내가 이 시간에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이렇게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는 이 자리에 있는 사실 때문에 감격해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은 주님이 여러분에게 자신이 바쳐진 것처럼 우리 주님께만 바쳐져 있습니까?
(찬양)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아래 입 맞추고 깨뜨립니다.
나를 위해 험한 산길 오르신 그 발. 걸음마다 크신 사랑 새겨 놓았네
절실한 사랑, 그것입니다.
C. 넘치는 헌신
세 번째는 넘치는 헌신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주님을 만나러 올 때에 면밀히 준비해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그의 손에는 순전한 향유 한 옥합이 들려있었습니다. 이 향유는 당시에 오늘날의 금붙이처럼 재산을 축적하던 수단으로 쓰이던 재화였습니다. 언제든지 시장에 가지고 나가면 현금과 바꿀 수 있는 유동성이 있는 재산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제자들은 예수께 이 향유를 붓는 이 여자를 질책하면서 그것을 삼백 데나리온이나 넘는 돈으로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줄 수 있었다라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그 정도 가격이라면 오늘날 인플레이션으로 약 삼천만원 정도 되는 금액의 향유입니다. 그것을 식사하시는 예수님께 한 번에 부어버렸던 것입니다.
이 여자는 이 향유를 모으면서 그의 꿈도 함께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뭇 남성들에게 웃음을 팔고 술을 따라준 대가로 모은 이 향유가 점점 불어나는 것이 이 여자의 꿈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향유가 얼 만큼 모이고 나면 처분을 하여 틀림없이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향유는 단순한 향유가 아니라 이 여자가 하나님 없이 허허롭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 그 자체였습니다. 수치와 부끄러움과 기쁨과 슬픔이 모두 뒤섞인 인생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희망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이 여자는 이것을 단번에 깨뜨려 예수께 부을 마음이 생겼습니다. 순간의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의 인생의 소망은 자신의 삶의 환경을 바꾸는 것이었다면 예수를 만나고 난 뒤의 그의 인생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쳤을 때 사실 그것은 모든 것을 예수님께 바친 것이었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부족의 최고 우두머리인 추장이 복음을 듣고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추장은 자기의 온 부족들을 예수를 믿도록 하였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우상을 모두 청산하고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매일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받은 이 구원의 은혜는 말로 할 수 없는 감사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이렇게 구원하신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선교사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선교사에게 자기의 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셨는데 나는 주님께 별로 드린 것이 없으니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재산인 이 흰 말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주 좋은 백마 한 필을 선교사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써달라고 말입니다. 선교사는 기도를 해 보고 결정을 하겠노라고 하고 한참 기도하고 난 후에 돌아와서 하나님이 그 말을 받지 않으신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며칠 있다 이 추장은 고민과 고민을 거듭한 끝에 중대한 결심을 하고 조상 대대로 추장에게 전수되어 오던 그 나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추장의 관을 가지고 선교사에게 와서 바쳤습니다. 각양 깃털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그 추장의 모자를 바치면서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입니다. 내 자신의 왕국을 우리 주님께 바칩니다’ 라고 했습니다. 선교사가 다시 기도하고 나오더니 이번에는 ‘하나님이 그것도 안 받으시겠답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이 추장은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인데 왜 하나님은 안 받으십니까? 이제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내 목숨밖에는 없습니다’. 그때 선교사는 ‘하나님은 백말도 왕관도 필요 없고 당신의 생명을 받으시겠답니다.' 라고 전해주었습니다.
최고의 것을 드린 사람은 나머지 모든 것을 이미 주님께 받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최고의 것을 바쳤을 때에 자신의 마음도 드린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며 주님 앞에 드릴 최고의 예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누구에게도 나누어 준 적이 없었던 깨어지지 않은 향유 옥합이 여러분에게는 무엇입니까? 이 여자는 예수님께 일평생 모아 두었던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 단 번에 부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온 방은 이 향유의 냄새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여러분이 예수를 믿기 이미 3000년 전에 이러한 신앙의 진수에 대해서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중의 재물이 무엇인지를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상한 심령과 깨어진 마음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참 하나님의 향기가 풍기고 예배는 그렇게 자기를 깨뜨려 주님께 드림으로 예수의 향기를 가득 머금은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이고 그 예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이제껏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던 최고의 가치 있는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 바쳐져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정말 하나밖에 없는 그 마음이 주님께 깨뜨려졌고, 그 분께 바쳐져 있고, 그래서 여러분은 자기 의와 자기 사랑에 대해서 부서진 사람들이 되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반응은 신앙이고, 용서에 대한 반응은 사랑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진정으로 주님께 용서받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임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이 사건은 한 여인의 이야기로 기록이 시작되었고 끝났지만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동일한 사건들이 교회 역사에 언제나 있었고 지금 우리에게도 언제나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르고 시계는 바뀌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은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 사람들은 주님이 자기를 사랑한 것처럼 자신도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리고 그 사랑은 언제나 자신에게 가장 최고의 것을 우리 주님께 드리도록 시켰고, 사랑은 반드시 최고의 것을 드린 후에야 만족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보십시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예배에 나와서 혹시나 하고 예배를 드리다가 역시나 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배를 올바르게 드리면 드릴수록 선한 사람이 되어 가지만 올바르게 드리지 않으면 드리지 않을수록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이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단 한번이라도 여러분이 복음의 진수와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여러분은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고 고백할 수 있어야 됩니다.
(찬양) 이 생명도 달라시며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에서 밀알로 썩게 하소서
D. 확고한 믿음
마지막으로 넘치는 헌신 그 위에 이 여자는 연약한 여인이었으나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주님의 상반된 두 언급이 등장합니다.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용서 받았도다 왜냐하면 이 여자의 사랑함이 많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하고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이 여자는 사랑 때문에 용서를 받은 것입니까? 아니면 믿음 때문에 용서를 받은 것입니까? 예수님이 이 여자가 나를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죄를 용서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원인이고 죄 사함이 결과라는 뜻이 아니라 이 여자의 죄가 용서받은 증거가 사랑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큰 사랑을 안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반응은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정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시면서 세 번을 질문하셨지만 모두 한 가지를 물어보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가 고백한 대로 믿음은 항상 사랑을 동반합니다. 사랑이 언제나 믿음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은 언제나 사랑을 동반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물을 때에 우리는 최소한 사중적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기적인 원인에 있어서는 우리 같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공로적인 원인이 또 하나 부과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우리의 죗값을 치르는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도구적 원인이 필요한 데 우리의 믿음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작용적인 원인을 하나 더 추가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불러 일으켜 주시는 그 분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공로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로서 우리의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확고하게 구원을 받은 사람의 영혼은 아름답습니다. 한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이라면 그 영혼은 하나님을 굳게 믿을 때 가장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전적인 의존의 마음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동반하고 순종을 이미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의 믿음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이제까지도 그는 아무에게도 의지할 곳이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홍수에 떠밀린 사람처럼 떠내려가다가 붙잡은 마지막 희망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향유였습니다. 물질을 모아서 자신의 인생을 한 번 바꾸어보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사람이 술을 팔고 남자들에게 웃음을 팔다가 밭을 갈고 식물을 가꾼다고 해서 이 사람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이 이 여자를 만났을 때 예수님은 이 여자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릇된 모든 사랑으로부터 참된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고 잘못된 질서로부터 돌이켜 올바른 질서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죄악 되고 허허로운 인생의 모든 날들을 접어도 좋은 그런 인생의 목표를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보다 의롭게 산 사람들이 사랑할 수 없었던 그런 사랑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했고, 중심으로 주님을 붙들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굳게 붙들고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이 여자의 복음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IV. 결론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을 비록 만났지만 오늘 우리들이 누리는 복음의 충족한 계시와는 비교될 수 없는 적은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이 복음의 혜택과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사랑의 계시는 이 여자가 받은 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 여자가 이렇게 주님께 온전한 사랑을 가지고 주님의 발을 씻겨 드렸다면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부어드렸다면 여러분은 그보다 더 넘치는 헌신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여러분을 복음 안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일이고 또 주님이 여러분에게 걸고 계신 기대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향유 옥합을 주님께 깨뜨려 그 향기를 이 세상 널리 퍼뜨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 없이 허탄한 날들을 보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줍시다. 그리고 우리의 인격을 통해서 주님의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행복한지를 깊이 경험하며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성도의 삶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됩시다.
10.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1-2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예수님을 만난 가나안 여자의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이 여자의 짧은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신앙과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그림처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II. 불쌍한 가나안 여자
여기에는 불쌍한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기에는 가나안 여자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복음서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발음하면 싸이로 페니키아의 여자입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이 여자는 해양 민족이었고, 구약에서는 이 페니키아를 통해서 여러분이 잘 아는 바알신이 유입돼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가나안에 살고 있는 이방여자였던 것입니다.
이 불쌍한 여자가 오늘 예수님께 나아온 이유는 두 가지도 아니고, 한 가지 인생의 커다란 무게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귀신이 들린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그 순간에 귀신이 들렸을 리는 없고 이미 오래 전에 귀신이 들렸고 백방으로 이 여자는 자신의 딸을 어떻게든 돌봐 주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 앞에 나아오게 된 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귀신이 들려서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어미의 마음은 언제나 찢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는 아주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응답할 수 있었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여자를 구원해 주셨던 것입니다.
III. 가나안 여자의 믿음
A. 그리스도만 바라봄
그러면 이 불쌍한 가나안 여자의 믿음이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이전에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다는 암시는 없습니다. 삭개오처럼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작정을 하고 여기로 온 것입니다. 주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고, 집이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로 그는 나아왔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들이 믿든지 안 믿든지 전파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전파되기 전까지는 누가 그 복음을 듣고 믿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께 작정을 하고 만나러 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에워싸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고 자기 같은 사람이 예수님의 눈에 띈다고 하는 것은 언감생심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예수님의 시선을 끌기 위해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라고 외쳤습니다. 짧은 외침이지만 이 속에는 신앙의 고백과 마음의 간절함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치며 예수님이 메시아이시고 자신의 구원자이심을 신앙으로 고백을 하는 한편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함으로써 심령의 간절함을 표명하였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이 구절은 거지들이 동냥을 할 때에 상투적으로 쓰는 화법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여자의 마음이 얼마나 가난하고 간절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외쳐서 예수님의 시선을 끌었고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아서 그는 자신의 차마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사정을 주님의 귀에 들리도록 그는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 목소리는 예수님의 귀에만 들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그 분을 만나기 위해서 온 모든 동리 사람들 귀에도 들린 목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이야 잠시 스쳤다 지나가시는 분이고,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일평생 같이 사는 마을 사람들인데 아랑곳하지 않고 이 여자는 주님의 귀에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간절히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수치심도 없이 이 소식을 들은 많은 동네 사람들이 후일 자기와 자신의 딸을 손가락질하며 욕할지도 모르는데도 그는 간절히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우리 주 그리스도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집중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만 고정된 영혼의 집중된 시선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과 세상이 가져다주는 수많은 인상들, 그것에 반응하기 위해서 발 빠르게 움직이는 우리의 마음의 작용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갈라지고 나뉘고 찢어집니다. 그래서 희랍어로 ‘염려하다’라는 말이 ‘마음이 나뉘다’ 라는 뜻을 가진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근심과 염려만 우리의 마음을 나누어 놓는 것이 아닙니다. 들뜬 욕망과 정념들은 더더욱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분산시켜 초점을 잃은 신앙생활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힘이 없고, 우리의 찬송은 맥이 없고, 우리가 듣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가 봅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라는 목사님이 언젠가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대부분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쇄된 광고 우편물 취급을 받습니다.’ 주님의 전에 올라가기도 전에 천사들이 쓰레기통에 집어넣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화요일 아침에 와 보면 언제 갖다놨는지 우편함에 우편물이 가득합니다. 정성껏 한 자, 한 자 써서 마음으로 편지 받는 나를 생각하며 쓴 글은 한 달에 몇 통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제 이름 석자, 교회 주소 수없이 인쇄기에 박아서 이 물건 사시오, 저 물건 팔아주시오 하며 보낸 찌라시들입니다. 대부분 쓰레기통에 버려집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집중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오는 모든 기도와 섬김, 쓰레기 같은 것들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우리의 마음에 깃들고, 죄도 우리의 마음에 깃들고, 그리고 젊음의 욕망도 마음에 깃듭니다. 그래서 신자의 마음은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는 것, 우리 주님 한 분만을 앙망하는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의 활동입니까? 이 여인은 이방여자였고, 흉악하게 귀신들린 딸을 지닌 인생의 막다른 골목까지 간 정말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부러워해야 할 훌륭한 영혼의 특징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시선을 우리 주님께 고정시킨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간절히 자신의 고통스런 처지를 주님 앞에 고해 올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가능한 한 미디어를 절제하십시오. 가능하면 핸드폰도 꼭 필요할 때만 보고, 그리고 TV나 이런 많은 매체들로부터 자신이 소화할 수 있을 만큼만 마음을 열어야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마음 깊은 곳으로 주님을 응시하는 시간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그 분의 성품과 그 분의 속성에 마음을 모으고, 그리고 그 분을 깊이 앙망하는 가운데에 우리의 영혼의 시선을 고정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주님의 심정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욕망과 거친 우리의 마음의 작용들 때문에 묻혀버리기 쉬운 영혼의 진지하고 간절한 갈망이 이 깊은 속에서 우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모든 상처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치료하시는 광선으로 고쳐집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그 치료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우리의 지성을 통해 우리의 영혼 모두에 두루 비칩니다. 그 진리의 빛은 밖에서 비추는 빛이기도 하고 우리 마음 안에 내리는 빛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밖에 있는 계시의 말씀을 나 아닌 성령의 은혜로써 나의 일부인 나의 마음과 영혼에 아로 새겨주시는 시간이기 때문에 주님께 마음을 모으고 간절히 주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다지는 것이 주님을 우러르는 믿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 듣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하루에도 몇 번씩 거기가 어디든지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찬양을 부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웁니다. 간절히 영혼의 응시로 주님을 우러러 보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이 여자가 바로 이런 믿음으로 우리 주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그리스도께만 매달림
두 번째는 그리스도께만 매달린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러 갔지만 주님께 접근하는 길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발치에서라도 주님의 귀에 이르도록 외쳐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나이다’ 라고 외쳤습니다. 아무리 크게 외쳤어도 여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기도가 아니었다면 주님의 귀에는 들렸어도 마음에까지 다다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그리스도를 응시하는 가운데 터져 나오는 이 여자의 외침은 골수에 사무친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인 동시에 매달림이었습니다. 영혼의 응시가 지성의 집중이라면 예수께만 매달리는 이 신앙은 선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1. 장애에 굴복하지 않음
주님께 그렇게 매달렸을 때에 주님이 처음 보이신 반응은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반복해서 이 여자가 같은 목소리로 부르짖은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계속 저렇게 귀찮게 소리를 지르니 보내버리십시오’ 라고 주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까이 다가와서 그 소리를 이 여자가 들었을 수도 있고 먼발치에서나마 제자가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그 입술의 모습이나 분위기를 보면서 무언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말이 예수님께 건네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는 예수님께 계속 부르짖었고,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마음에 대못이라도 박는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이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은 적이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당신은 육적인 이스라엘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는 맞았고, 어떤 의미에서는 틀렸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이 이렇게 복음을 전해서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르러 수많은 사람들이 육적 이스라엘을 깨고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이 말씀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런 복스러운 일, 육적인 이스라엘이 깨뜨려지고 영적인 이스라엘이 형성될 것이라고 하는 이 놀라운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신 후 보내실 성령에 의해서 성취될 일이라는 점에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알듯, 모를 듯 이 여자에게 자신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 이외에 다른 데로 보냄을 받은 적이 없다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이 여자는 상처받고 낙심할 만한데도 오히려 예수님께 더 달려와서 엎드려 경배를 드리며 ‘나를 도와주소서’ 하고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우리 흔히 상처받았다는 이야기 많이 하는데 그것은 그리 썩 좋은 말이 아닙니다. 자꾸 써 버릇하면 그것도 버릇이 됩니다. 그것이 어떤 버릇을 만드냐면 모든 것을 자꾸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그런 버릇을 만듭니다. 그러니까 그런 말은 그렇게 자주 쓰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상처 받는 게 이상할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원래 그래요. 그리고 여러분도 여러분은 기억을 못하지만 숨 쉬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온 인생의 길이었습니다. 주위 사람들 보고 한 번 물어보세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에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이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고 스스로 느낀다면 아직은 살만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여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정말 인생의 벼랑 끝에 서서 신발까지 벗어본 적이 있어요? 무슨 뜻이에요? 이상하게 신발 신고 투신자살하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신발은 꼭 벗습니다. 그것이 무슨 심리일지 저도 궁금합니다. 그런데 아마도 뭔가 자신이 살았던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가 아닐까 그런 것도 있고, 이제 뛰어내려서 맞이하게 되는 이 죽음은 살았을 때와 다른 환경이기 때문에 신발까지 가져가고 싶지 않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본능적인 행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벼랑 끝에까지 있는 것은 아직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신발까지 벗어봐. 못해봤지? 그렇게 신발까지 벗어서 발끝이 천길, 만길 낭떠러지 위에 걸쳐서 그 앞의 흙이 부스러질 정도가 되면 상처 없습니다. 그것도 다 살만하고 그래도 희망이 있으니까 생겨나는 것입니다. 상처가 무슨 상처입니다.
2. 경배하며 간구함
주님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이외에는 보냄을 받은 데가 없다’ 고 말씀 하셨을 때 우리 같았으면 상처를 받았을 텐데 이 여자의 마음에는 상처가 아니라 갈망이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를 도와 달라고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엎드려진 사람 등 뒤에다가 대못을 박듯이 예수님께서 더 뼈아픈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 여기에서 자녀는 틀림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떡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그야말로 이 여자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섞여 살면서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했던 이방인 콤플렉스에 대못을 박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는 예수님도 생각 못하셨을 기발한 답변으로 주님의 이 뼈아픈 말씀에 응답했습니다.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옳습니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자녀의 떡은 결코 취하여 개들에게 던져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비로운 개의 주인은 주인의 자녀들이 충분히 먹고 남은 그 떡은 상아래 떨어지게 허락을 하고 떨어진 그 떡은 원래는 주인의 자식들의 떡이었지만 자식들이 배부르고 버렸기 때문에 개들도 먹게 합니다. 주님은 그 개 주인보다는 자비롭지 않으십니까?’ 그러며 주님께 간절히 호소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만 매달린 이 여자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마음에 간절한 부르짖음, 피를 토할 것 같은 울부짖음, 하나의 기도제목에 자신의 생명을 건 몸부림, 이런 것들이 우리의 기도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춥고 배고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앙도 참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울며 매달리고 마음을 찢으며 주님 앞에 목이 쉬도록 부르짖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신앙에 목숨을 거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마도 배가 부르고 그리고 등이 따뜻하고 모든 것이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등 따뜻하고 배부르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것은 아버지 집에 있는 짐승들이 하는 생각이지 아버지의 집에 있는 자녀들의 생각은 아닙니다. 예전에 많이 불렀지만 지금은 절대 안 부르는 찬송들이 여러 장 있습니다. 회심을 하고 나서 거의 금요기도를 안 빠지면서 다니던 시기들이 꽤 있었습니다. 뭐 대부분 다녔죠. 그때 기도회를 11시에 모입니다. 왜냐하면 요즘처럼 8시에 모이면 올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금요일 날 철야기도하기 때문에 낮에 푹 자고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실업자들이고,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그렇게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직장 끝나고 저녁도 못 먹고 허덕거리고 오는 사람, 그리고 공장에서 3교대로 일하다가 그 밤중에 교대 시간이 되어서 오는 사람, 10시 반쯤 되면 모이기 시작해서 찬송을 부르고 예배당을 가득 메웁니다. 그러면 한 4시까지 그렇게 기도회를 했습니다. 그때 잘 불렀던 찬송중의 하나가 이거였습니다.
(찬양)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찬송을 부르다가 한 사람이 울면 전염되듯이 옆에 사람도 울고 또 뒤의 사람도 울고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열심 있는 성도들은 그 찬송을 끝날 때까지 두 손을 들고 울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요즘은 이런 광경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만 매달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고치고 개선할 그러한 방법들이 여러 곳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 하나에 복음 하나에 말씀 하나에 목숨을 걸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이 불쌍한 가나안 여자를 보십시오. 딸은 흉악히 귀신 들렸고 정상적인 가족의 삶을 이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삶이 고통스러워서 주님을 만나고 싶었지만 주님을 만나고 보니 이제 이 예수께만 매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묵묵부답인 예수님도 그리고 자신을 무시하는 예수님의 말씀도 그에게 상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경배하면서 주님 한 분만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오로지 하며 아버지 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예수님을 붙들고 매달려 놓지 않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이 이것이 아닐까요? 이 여자에게 인생의 최고의 숙제는 귀신 들린 자신의 딸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가장 커다란 무게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예수께 집중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든 손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어린 아이 같은 간절한 몸부림에 이유가 되고 있는지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만 매달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그리스도의 긍휼만 의지함
마지막으로 이 여자의 믿음은 예수의 긍휼만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의 부스러기도 먹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자신이 준비한 최고의 것보다는 주님의 은혜의 부스러기가 자신의 인생을 고치는 데는 훨씬 더 나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가엾은 여자는 예수께 자신의 온몸을 던져 매달렸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며칠만이라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매달린다면 그 분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 믿음 속에서 변할 수 있을까요? 부스러기라도 먹나이다라는 이 여자의 비천한 간구는 당당하게 은혜를 달라고 주님께 삿대질하며 기도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이 여자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양식은 그리스도를 통해 내리는 하늘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뿐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이 주님의 그런 자비와 긍휼을 힘입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는 주님의 은혜와 자비는 주님의 주권으로 베풀어 주는 것이고 오로지 믿음으로 이렇게 주님께 매달리면 주님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한 길로 주님께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여자의 오롯한 믿음을 보시고 이 여자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노라’고 외칠 때에는 이 여자는 부끄러운 여자였지만 주님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자야 네 믿음이 참 크구나.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렇게 구원을 선언하셨을 때 이 주님의 음성은 모든 사람 앞에서 이 여자를 세워준 칭찬이었습니다.
III. 죄인을 부르신 예수님
오늘도 주님께서는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영혼의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시키고 당신의 긍휼을 찾으며 어린 아이처럼 울고 매달리는 사람들 가까이에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 무엇으로도 고쳐놓을 수 없는 그의 인생을 고치십니다. 무엇으로도 바꿔 놓을 수 없는 인생을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버림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마음에서 둥주리를 틀었고 그 분의 품에서 쉼을 얻었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인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까? 주님이 자기를 긍휼히 여겨주실 때까지는 자신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주실 때까지는 주님을 바라는 자신의 손을 거두지 아니하겠노라는 그런 진실한 고백이 있습니까? 우리를 향해 무심하고 그리고 관심이 없으신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기 전에 여러분이 이제껏 살아온 날들 중에 마음을 오로지 하고 그 분 한분께만 마음을 쏟아 부어드린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영혼의 시선을 그 분에게 고정하고 그 분의 은혜의 그 보좌 앞에서 간절히 매달리며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저버리지 않고 부스러기 같은 주님의 은혜라도 힘입고자 하는 이 가나안 여자의 그 애달픈 마음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는 입술에서 나왔기 때문에 주님의 귓전에 이르기 전 허공중에 흩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큰 소리로 여러분의 귀에 외쳐도 그의 말씀은 여러분의 귀를 지나 마음에 닿기 전에 허공중에 흩어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시인의 기도처럼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부르짖는 나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셔야 합니다.
IV. 결론: 긍휼을 구하라
이렇게 이 여자가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에 비로소 그는 오래전부터 죄인인 자신을 부르고 계셨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을 인정받고 죄인을 긍휼히 여겨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셔서 자신의 딸도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귀신들려 미친 짓만 하던 자신의 딸이 온전한 여자 아이가 되어서 자신을 사랑에 가득한 눈빛으로 맞이해 줄 때에 그를 끌어안고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시인은 말합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아가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주님은 부르짖는 자 가까이 계시고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가장 멀리 떠났다고 생각할 그때에 사실은 우리의 마음 가장 가까이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영혼의 시선을 당신께 고정하고 선한 의지로 당신께 매달리고 당신의 작은 긍휼에 목숨을 건 기도가 올려지기를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절해지십시오. 무엇을 하시든지 진실해 지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주님이 결코 그대들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1.절망을 이긴 믿음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0-2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는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 열한 번째 설교로 오늘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인생이 변화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여자도 예수님께 나아올 때에 믿음으로 나아왔기 때문에 주님이 그를 어여삐 여기시고 고쳐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인간 중에 행복을 위한 계획은 있어도 불행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행이 없을 리가 없다고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불행할 계획을 세우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우리는 그 속에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좋은 것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뿐 아니라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이 절망적인 질병에 걸린 여인에게도 찾아오셔서 오히려 이 절망이 주님께 소망을 듣는 계기가 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II. 혈루증을 앓는 여인
오늘 여기에 보면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열두 해 동안 이 혈루증을 앓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혈루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부인과에 속하는 질병이라고 보고 시도 때도 없이 하혈을 하는 질병일 것이라고 봅니다. 12년 동안이나 같은 질병을 앓았던 것으로 보아 암과 같이 치명적인 질병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흐르는 그런 하혈을 경험하면서 이 여자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결혼을 한 사람인지 결혼하기 전에 있는 사람인지 혹은 이런 질병을 앓을 때에 아이들이 있었는지 성경은 밝혀주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지 상관없습니다. 가정을 가졌더라 할지라도 이미 이러한 상태에서 가정을 온전하게 이루어가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도 같은 기록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여기보다도 상세한 설명이 여러 곳에 부가되어 있습니다. 이 여자가 혈루병에 걸려 열두 해 동안 고생을 하는 동안 많은 의원을 찾았고, 그 의원들에게 치료를 받기 위하여 가산을 허비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무런 효험이 없고 오히려 고통만 당하고 병세는 중하여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에 이 여자는 대단히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2년 동안 질병에 걸려서 많은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포기할만한데 이 여자는 끊임없이 이 의원에서 저 의원으로 찾아다녔으며 그러는 동안에 그는 가지고 있던 가산을 모두 허비하게 되었고, 병세는 더 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III. 절망 중에 찾은 예수님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불행과 시련가운데는 우리의 일반적인 힘으로도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 종종 있습니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만나게 하시기 위해서 닥치게 만들어 주시는 시련은 어떠한 노력에도 그것을 이길 수 없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여자는 이 질병과 괴로움 속에 고통을 당하며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치료를 받으려고 해도 더 이상 돈이 없었기 때문에 치료행위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만나게 하기 위하여 허락하신 절망이었습니다.
A.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옴
그래서 이 여자는 절망 중에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어떻게 이 여자가 이 절망 중에 예수를 찾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별 설명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5장 27절에 의하면 이 여자는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전해준 소문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겠습니까? 직접 본 사람도 있을 것이고, 두 다리 세 다리 건너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예수님의 행적과 인품에 대한 조각난 지식들 한 두 개씩 전달해 주는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문 그러한 종류의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이 절망 속에 있는 여자가 붙들만한 복음의 요소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에게 정말 이 여자의 구원을 사모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전해 주었는지 아니면 전해들은 풍문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한 조각 들려온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절망의 어두움 속에 고통 하던 이 여자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전파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거절당해 본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전해봐야 저 사람들이 나를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의기소침해서 자기의 의도를 접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복음은 전해지는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예수님이 제일 먼저 실패한 복음 전도자가 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당신이 복음을 전할 때 모든 사람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복음을 들을 때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복음이 전해짐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이 어둠에 속한 사람들인지 빛에 속한 사람들인지, 구원을 얻을 때가 이른 사람들인지 아직 익지 않은 곡식인지를 스스로 드러내 주는 시금석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임무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그러면 가장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전혀 사람들이 믿을 가능성이 없다 생각되는 그곳에 복음의 씨를 뿌릴 때 그때 놀랍게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절대 의존의 믿음
아무튼 이 여자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에 예수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뜻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에 이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에 구경이나 해볼 요량으로 예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절대 의존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처음에는 한 쪼가리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소문 속에는 복음이 묻어있었고 그것을 가슴에 품자 이것은 이 여자의 마음속에 믿음의 불꽃을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이 여자가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뜻을 세우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여자의 마음속에 있는 타오르는 이 믿음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다른 모든 길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전에 이 의원에게 치료받을 때에 신통치 않으면 자기도 돈이 있고 시간이 있으니 저 의원을 찾아가리라고 또 다른 희망을 가지고 의원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해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 보았고 그의 병은 깊어졌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때에 이 여자의 마음속에 들려온 한 조각의 복음의 소식은 이 여자의 심령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 내가 예수께 돌아가리라. 그 분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이 죄인들에게 베푸신다고 하니 내가 예수께 매달리리라’고 말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눈먼 자를 뜨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문둥병 걸린 자들조차도 어루만져 고쳐주신다는 주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예수님이 자신을 버리지 아니하시리라는 믿음, 그 분의 능력으로서 자기는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이 여자의 마음속에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뜻을 세우고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나아가서 당당히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대면하여 나의 혈루병을 고쳐달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너무 위대하신 분이고 자기는 아주 더럽고 불결한 여인이라고 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렇게 혈루가 나오는 여자는 불결한 여자로 정죄됩니다. 그래서 제사에 참여할 수 없고, 성물도 만질 수 없습니다. 결례를 드린 후에야 깨끗해질 수 있는데 피가 멎어야 결례를 드릴 거 아닙니까? 그러니 이 여자는 죄의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예수님같이 거룩한 분을 만나 대면할 자격이 없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죄인인 한 여자가 그러했듯이 예수님 뒤로 다가가서는 살며시 예수님의 겉옷 자락을 만졌습니다. 이게 뭡니까? 정말 만지려면 한번 하늘을 향해 기도하심으로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 명이나 먹고 남게 만들었던 예수님의 기적의 손을 붙들어야죠. 풍랑 있는 바다를 걸어가시던 예수님의 기적의 발을 붙잡아야지 옷자락이 뭡니까?
C. 고쳐주신 예수님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말할 수 없는 겸손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마음속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비록 예수께 나아가는 그의 태도는 두려움과 겸손에 가득 차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굳센 믿음이 고동치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만 만져도 내가 나음을 얻으리라’고 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겉옷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능력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 하나님이 자기 같은 인간을 불쌍히 여겨서 고쳐주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이 이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예수께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 여자가 구원에 이를만한 아름다운 행실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 어쩌면 이 여자의 혈루는 이 여자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아무 공로 없었지만 예수님 한 분을 온전히 의지하고 그분 한분이 자신의 모든 인생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희미하게 전해지는 소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을 붙들었을 때에 이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열두 해 동안이나 자기를 지겹게 따라다녔던 이 질병으로부터 놓임을 받는 기적적인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떨림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두려움이 있습니까? 이런 겸손이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내 인생의 문제가 아무리 깊고 멀어도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 만나면 고쳐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멈칫 멈칫 뒤로 물러서고 비겁한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의 목숨을 우리의 신앙에 걸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근원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발은 교회에, 한발은 세상에, 한 발은 성경에, 한발은 상식에, 한발은 우리의 믿음 생활에 한발은 세상살이에 걸고 유리한 쪽으로 우리의 몸무게를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열두 해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혈루병 같은 우리의 문제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여자의 신앙적인 행동을 보고 감동을 받고 박수를 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신앙의 원리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닥친 문제가 너무나 크고 어렵기 때문에 우리를 천천히 구해주시거나 구원해 주시지 못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돌멩이 하나와 돌멩이 세 개가 엄청난 차이의 무게이겠지만 어른에게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에게는 큰 문제와 작은 문제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 불행과 절망 속에 끊임없이 불러도 이 여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소문이라도 붙들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여자를 보십시오. 열 두 해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했습니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모든 기술은 다 동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께 걸어가는 그 순간에도 다리 사이에 흐르는 피를 닦으면서 예수님께 다가갔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들은 그날부터 이 여자에게 예수님은 한 희망이 아니라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찬양)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이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이 여자의 일평생 숙제는 열두 해 동안 계속된 절망적인 혈루병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희망을 가지고 살지 못하게 하는 영혼의 혈루병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혈루병의 발목 잡혀 있는 여러분은 어떻게 그 절망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시려고 합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입니다. 이 여자가 열두 해 동안 혈루에 걸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에 그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의지했지만 여전히 그의 몸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어떠한 변화의 조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지했습니다. 주님이 그 마음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고쳐주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 29절에서는 혈루의 근원이 즉시 말랐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을 부분적으로 피상적으로 치료하는 것은 이 세상의 자원으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의 인생의 문제의 근원은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치료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면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복음적인 변화가 아니면 고쳐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의학이 발달하고 이 세상의 자원들이 우리에게 넉넉히 있어도 우리의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쳐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 여자의 감격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을 지금도 부르셔서 고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절망 속에서 고통을 받던 이 여자,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시름과 한숨 속에서 눈물과 고통 속에서 세월을 보냈겠습니까? 사랑하던 사람들도 점차 자신의 곁에서 떠나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이 여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문 한 조각에 자신의 온 마음을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분을 만나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이 불쌍한 여자를 고쳐주셨습니다.
IV.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신앙의 이치가 있습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사모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젠가 여러분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길에서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어떻게 해결할 수 없어서 이름 모를 어느 기도원에 가서 지금처럼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거기가 교회당이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상식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그대로 따르겠노라고 결심하며 주님 앞에 살려달라고 매달리던 간절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여러분을 주님 앞에 세우시려고 하는 12년 동안이나 계속된 그 혈루병은 여러분에게 무엇입니까?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주님 앞에 간절히 매달립시다.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은 언제나 부르셨지만 주님의 그 목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쪼가리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붙들고 인생을 걸 수 있었던 여자가 있었다면 복음을 아는 지식을 듣고도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주님 앞에 걸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다음에 주님 앞에 가서 무엇이라고 우리의 불신앙을 변명하겠습니까? 낙심과 절망 가운데서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어쩌면 여러분이 오늘 주신 이 절망적인 상황은 나태했던 여러분의 믿음을 다시 한 번 확 뒤집어 주님을 향해 불타는 믿음으로 만들기 위해서 주님이 주신 은혜의 기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매달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