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죽임의 교리
(199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서론: 죄로부터의 구원(롬8:13) 1998.6.14 주일오전 1
2. 죄를 죽이지 않으면 그대가 죽으리라(롬8:13) 1998.6.14 주일오전 7
3. 죄 죽임의 필요성(골3:5-6) 1998.6.14 주일오전 14
4. 죄 죽임과 거룩한 삶(1)(고후7:1) 1998.6.21 주일오전 26
5. 죄 죽임과 거룩한 삶(2)(고후7:1) 1998.6.21 주일오전 38
6. 죄 죽임이 없는 신앙의 위험(1)(딛2:11-14) 1998.6.28 주일오전 48
7. 죄 죽임이 없는 신앙의 위험(2)(딛2:14) 1998.7.5 주일오전 61
8. 죄 죽임의 실천과 성령(갈5:24-25) 1998.7.12 주일오전 79
9. 죄 죽임이 없는 영적생활의 두 위험(시40:12) 1998.7.26 주일오전 90
10. 죄 죽임과 은혜 자람(계3:2) 1998.8.2 주일오전 98
11. 영적 회복의 길(1):말씀의 빛을 받아라(히4:16) 1998.8.9 주일오전 105
12. 영적 회복의 길(2):영적 생명의 원리를 알라(애5:21) 1998.8.16 주일오전 121
13. 영적 회복의 길(3):참된 죄 죽임이 아닌 것들①(행8:22-23) 1998.8.23 주일오전 134
14. 영적 회복의 길(3):참된 죄 죽임이 아닌 것들②(시78:34-37) 1998.8.30 주일오전 143
15. 영적 회복의 길(3):참된 죄 죽임이 아닌 것들③(마23:25-26) 1998.9.6 주일오전 155
16. 영적 회복의 길(4):죄를 죽임의 길①(갈2:20,5:24) 1998.9.13 주일오전 173
17. 영적 회복의 길(4):죄를 죽임의 길②(벧전2:11) 1998.9.20 주일오전 181
18. 영적 회복의 길(5):죄와의 싸움에서 빈번히 승리함(롬14:8) 1998.9.27 주일오전 198
19. 영적 회복의 길(6):철저한 회심이 필요하다(행2:37-38) 1998.10.4 주일오전 214
20. 죄 죽임의 실천적 지침(1)-총론1:총체적인 순종이 필요하다(고후7:1) 1998.10.11 주일오전 225
21. 죄 죽임의 실천적 지침(2)-총론2:죄죽임과 성실한 경건생활(고전15:31) 1998.10.18 주일오전 239
22. 죄 죽임의 실천적 지침(3)-총론3:거룩한 말씀의 감화①(딤전4:5上) 1998.10.25 주일오전 252
23. 죄 죽임의 실천적 지침(3)-총론3:거룩한 말씀의 감화②(딤전4:5上) 1998.10.25 주일오전 267
24. 죄 죽임의 실천적 지침(4)-총론4:열렬한 기도생활(딤전4:5下) 1998.10.25 주일오전 275
25. 죄 죽임의 실천적 지침(5)-각론1:죄의 뿌리 깊음과 그 원인(시38:5-6) 1998.11.1 주일오후 285
26. 죄 죽임의 실천적 지침(5)-각론2:죄에 지고 있는 징후들(사57:17) 1998.11.15 주일오후 295
1. 서론: 죄로부터의 구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해마다 8월이 다가오면 50여 년 전에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한다고 들려 오던 일본 천황의 음성을 기억합니다. 그 한마디는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동남아 민족 전체에게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 준 결정적인 항복의 선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그리고 죽으셔서 다시 사신 것은 이처럼 오랫동안 세상을 지배하던 죄의 종지부를 찍는 광복의 사건이었습니다(죄와 시험 또는 죄와 유혹의 문제).
우리는 왜 무기력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고, 왜 마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해 왔는지 새로운 지식을 주고, 반복되는 실패를 벗어나서 승리로 접어드는 길이 어떤 길인지 보여 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죄라는 문제에 대해서 자주 지적을 받고 그러한 죄에 대해서 올바른 견해를 갖지 아니하면 우리의 신앙이 견고해 질 수 없다는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해 놓으시고 우리에게 주신 그 모든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죄와 타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십자가도 그리스도도 헛것이며 복음이 복음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초가 없는 신앙, 봉사하고 섬기지만 어느 계기가 있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의 밑바닥을 드러내시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무너지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기초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초가 그렇게 부족한 것을 지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나쁜 것이고, 회개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죄가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죄 때문에 인간이 철저히 불행해지면 그곳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이고,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죄를 이기며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되는지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을지... 겉멋과 허세를 벗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정직히 하나님 앞에 내가 왜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고 내가 왜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심지어는 주일날 많은 곳을 갈 수 있지만 이곳에 앉아 있는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답변을 통해 감동 받을 수 있는 답변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온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을 맨 마지막에 창조하시면서 창조를 통한 고통을 겪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만드신 것은 인간이 두 부분으로 구성됐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흙으로 빚으신 것은 육체가 되었지만 생기로 불어 넣어 주신 것은 누구도 넣어 주시지 않으신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영혼이고 바로 하나님과 인간이 유일하게 교제할 수 있는 피조물 중에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잇는 유일한 피조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동산을 다스리시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권한을 부여받아 관리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동산은 아름다운 낙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특별한 은혜와 일반적인 은혜의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오직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것은 평범한 나무요, 평범한 과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 나무였습니다. 선악과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은 왜 그것을 만들어 놓으셨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가 없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같은 존재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비록 죄가 없고 깨끗한 상태였지만 언제고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것은 완전하지 않는 인간을 그 인간에게 선악과는 하나님과 인간이 어떤 관계인지 알려 주는 좋은 은혜의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동산을 두루 다니며 다스리고 했지만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 그 분이 하나님 아버지였고, 그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위대한 능력 앞에서는 왕처럼 다스리고 있지만 창조라는 관점에서 자신들은 풀 포기, 나무, 돌과 같다는 것을 생각나게 해 주는 그 은혜의 수단이 선악과였던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선악과가 없었더라면 또 다른 수단으로 타락했을 수 있었다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을 주신 하나님께 문제가 잇는 것이 아니라, 법을 어긴 인간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죄가 이 세상에 밀려 들어왔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피조의 세계는 죄로부터 피할 수 없고, 그것에 깊이 잠겨 버린 침수의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전망하면서 그때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오직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리라고 말했던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에 대한 전망과 죄로 인한 이 세상이 죄의 권세 아래로 들어가게 된 전망은 일치합니다. 이제는 죄의 어마어마한 권세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것은 벗이었습니다. 법은 이 땅의 사람을 통제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예화) 싱가폴(철권 아래의 평화) 곳에 성범죄 가는 공장을 맞는 처벌을 받는다.
주차위반.
죄의 법에 항거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하나님만을 찬양해야 하는데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그렇게 죄에 대해 강요당하며 사는 것입니다. 또한 이 몸이 죄를 지배하고 즐거워하는 본성이 되었습니다. 죄의 본질은 범죄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한번씩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사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진노를 쌓아 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 인간을 버려 두시지 아니하고 구원의 여명을 사람의 마음속에 주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여자의 후손이 오심으로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창조의 원래 상태로 돌아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라는 희망이 이미 아담과 하와에게 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업으로 삼고 살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인생에 있어서 기억에 남을만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그는 숙명적인 삶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삶을 가리켜서 구원을 받는 사건, 거듭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대적하고 반기를 쳐들면서도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보람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좀 더 도덕적이거나 방탕하거나 예술에 미치거나 또는 이 세상 문화에 미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흉악한 강도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혐오스럽다는 것입니다.
(예화) 똑 같은 배나무를 기를 때, 나주나 해주, 먹골에서 나는 배를 제일로 치는 이유 는 땅이 좋기 때문에 똑 같은 씨를 심어도 아주 훌륭한 과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척박한 땅에 심고 기후 조건이 좋지 않으면 배나무는 아름다운 열매가 아 닌 작고 맛없는 작은 열매가 열립니다.
죄의 입장에서 보면 싱가폴과 같은 곳이 척박한 땅인 것입니다. 여건이 좋아지고 토질이 좋아지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보실 때 하나님은 혐오감을 느끼신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그 아이를 보며 행복해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이가 위에서부터 커다란 구렁이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인간이 죄를 범한 후에 인간을 바라소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처럼 혐오스러웠던 것입니다. 그 혐오스러운 것을 쓸어버리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죄로부터 돌이키시기 위해 인내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절망적인 죄의 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탄이 벌벌 떨고 있는 항복한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본 천황이 항복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영적인 무기력은 죄에 대한 무지에서부터입니다. 사람이 죄를 이기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그가 거듭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거듭나지 않으면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은 우리 먼저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에 대해서 이기는 삶을 살 것인가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는 죄에 거듭났는가에 대해 되물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피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죄에 대해 싸울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 자체가 죄에 대해서 이미 지배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좋은 나무가 아니라 나쁜 나무가 되어서 밭을 살리기 위해서는 작은 피는 남겨두고 나쁜 피는 뽑는 것이 아니라 모두 뽑아야 밭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인생의 본질, 인간성의 본질 자체가 하나님을 거슬리고 있고 대항하고 있기 때문에 그 본성이 변화되고 새로워지지 않으면 어떠한 희망도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문제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느냐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듭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거듭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고 그 죄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부를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장식한 쥐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거듭난 사람인가?” 한번의 X-ray가 그 사람의 폐결핵 환자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성경은 우리를 참 신자인지 아닌지 구별해 줄 수 있습니다. 천사가 와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려 주었을 때 롯은 자기의 식구들을 데리고 그 성을 나가길 원했지만 그의 사위들은 비웃었으나 조금 뒤에 그들의 죽음은 사실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음이 들려지는 것을 애써 외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언제까지 고개를 돌리고 살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십니다. 여기에도 아직 거듭나지 않았다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제 마음에 끊임없이 제 고통이 됩니다. 6개월이 지나면... 물론 소수입니다. 여러분 중에 대다수의 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오래도록 교회에 나오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진실한 복음이 들려질 때마다 그들은 애서서 외면합니다. 속히 그 질문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길밖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이렇게 하나님 앞에 교회에 많이 나오고 오래도록 교회 생활을 해서 어느 날 여러분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 사람들이 그 얘기를 하면 여러분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정말 거듭남의 증표가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까? 회개한 사람의 놀라운 증표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셔야 여러분들을 그 죄 가운데서 사셨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여러분들의 인생에 어마 어마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하나님의 영광이외에 진정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가끔 실패하는 때는 있지만 그러나 그 실패를 조금도 정당화하지 않으며 정직하게 질문을 버리고 떠났던 죄를 회개하며 제 정신으로 돌아와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의 죄가 당신을 못 박았으며 그리고 당신의 십자가가 그 죽음의 죄 가운데 나를 구했기 때문에 내가 비록 잠시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어둠 속에 들어가는 때는 있지만 나는 당신의 그 결정적인 십자가의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 고백이 우리 안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지 아니하면 그는 단지 생명을 못 얻는 것이 아니라 그는 치열한 지옥의 심판 가운데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물론 거듭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이 세상에서 형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사실이나 혹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인생 그 속에서는 우리 모순이 종식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칸트가 한 유명한 말이 그것입니다. 지옥이 있느냐, 없느냐 말하기 전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 세계 속에 이 엄청난 모순을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바르게 사는 데도 끔찍하게 죽기도 합니다.
(예화) 제가 아는 한 권사님은 정말 주님만 열심히 섬기는 권사님 이었습니다. 교통사고 가 났는데 앉은 좌석에서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튀어 나갔습니다. 어떻게 설명하 겠습니까? 그 버스 안에서 흉악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타고 있었을 텐데 말입 니다. 그 착한 할머니가 그렇게 유리창 밖으로 튀어 나가서 다른 차가 깔고 지나 갔습니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때 내세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예수 믿 을 맛이 뚝 떨어질 것입니다.
(예화) 어느 한 집사님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야기.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교회에 보내라고 합니다. 그 아이 때문에 예수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온 가족이 기분 좋게 케이블카를 타러 갔는데 강을 건너가는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고 합니다. 꼬마가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저 케이블카가 떨어 졌다고 해서 편도 끊어서 네 식구가 배를 타고 오려는데 독일 기술자들이 만든 케이블카가 떨어져서 그 자리에서 5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케이블카가 어떻게 떨어졌느냐하면 커다란 석유 시추선이 그 위로 지나가다 그것에 부딪힌 것입니다. 밀물 때 부딪힌 것입니다. 그 다음 주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올바르게 산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다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악을 행한다고 해서 못 죽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만으로 따져서는 안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어느 부모가 그 아이를 낳아 놓고 “이 아이를 향해서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대답하는데 “15살 되기 전까지 80Kg을 만드는 것이 내 꿈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돼지 사육자는 그렇게 말합니다.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돼지 고상해 지기를 바라겠습니까? 살만 찌면 되는 것입니다. 목표 자체가 잡아먹는 것입니다. 교수로 많이 나가면 돈이 됩니다. 형벌 받기 위해서 예비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내버려두십니다. 하나님이 징벌하시는 가운데 제일 무서운 것은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내버려두시고 막판에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직하게 거듭났는가 우리는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소수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교회 나오면서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 어떤 설교를 들어도 접촉점이 없습니다. 왜 입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을 향해서 설교를 하는데 자기는 구원을 받지 않았는데 무슨 접촉이 있겠습니까? 거룩한 삶을 살 의향도 없고 결심을 해 본적도 없고 그런 생각도 아예 없는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성도들의 옆에서 부르짖는 기도 소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 사랑할 의사도 없고 앞으로도 사랑할 계획이 없는 사람이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해 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와 설교자의 설교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은 오늘 진실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는가? 거듭나지 않았다면 다음주부터 계속되는 설교는 여러분들과 엄청난 괴리감을 느끼게 만들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들에게 적용 점을 찾기 어려운 설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그러한 힘을 주시는 것이고, 죄와 더불어 싸우면서 우리는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면서 살아왔던 옛날의 그 어두운 삶을 청산하고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하듯 여러분들에게 다시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을 주위에 있는 지체라고 이름은 부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교회에 죄인이 아닌 사람들 거듭난 것 같지 않게 여겨지는 사람들을 볼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빚 진 것 같은 마음이 있습니까? 복음의 부채 의식이 느껴지느냐 말입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모르는 여러분들의 가족이나 교회에 나와도 여전히 죄사함을 받지 못하는 여러분들의 가족을 보고, 스치면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으면서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님을 훼방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그 무지한 사람들을 볼 때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께 가지셨던 잃어버린 영혼들, 거듭나지 못한 영혼들을 향한 눈물과 아픔이 있습니까?
교회가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느냐 하는 것은 주님이 교회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아픔과 세상을 향해 가지고 계신 주님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교회가 그것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무언인가 프로그램을 만들고 자주 일을 꾸며서 사람들이 정신없이 교회에 드나드는 것만이 교회가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살아 있는 교회는 주님의 마음을 받은 교회이고 그 마음을 전수 받아서 그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서 주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행하고 싶으셨던 일들을 마음 시원하게 대행해 주는 교회가 바로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죄는 이처럼 불신자들의 세계 속에 강력하게 역사해서 그들로 하여금 도저히 죄의 압박과 협박, 그 죄의 영향력에서 아니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크고 놀라운 힘은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가 우리 죄를 회개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에 대한 죄의 지배권은 모두 박살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깨달을 수 있는 바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입니다. 오늘이라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듣고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이제는 성령이 다스리는 나라 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는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이제 이러한 숙제가 하나 마지막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끝장이 났다면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죄에 쉽게 지고 패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이것입니다.
결론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죄의 권세는 종식되었고 죄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을 지배해서 하나님을 등지게 살 수 있게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 있는 당연한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극히 이변에 가까운 일이 그의 영혼 속에 일어난 것입니다. 문제는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이변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죄를 죽이지 않으면 그대가 죽으리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앙에 대해서 전해들을 때는 예수님을 믿으면 기쁨이 넘치고 행복하고 그래서 승리하는 생활을 하고 미워하던 사람도 용서할 수 있게 되고 오랫동안 한 맺힌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자유를 얻게 되는 축복이 온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신앙 생활을 해 나가 보면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예수를 믿으면 이러저러한 복이 주어진다고 했던 것들에 있어서는 별로 잘 나타나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기게 해 주신다는 약속은 있지만 우리들 여전히 패배하고, 풍성한 삶을 살게 해 주신다는 약속은 있지만 여전히 가난하게 살고 주님을 믿으면 놀라운 기쁨을 얻게 된다는 약속이 있지만 그러나 기쁨 대신 슬픔과 우울한 삶을 계속 살게 되는 이러한 약속과 현실이 완전히 동떨어진 현실 속에서 많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번에 몇 주 동안 설교되어지는 주제는 저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깨달음이었습니다. 저는 똑 같이 여러분이 궁금하게 여시기는 것과 같이 그러한 의문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어떤 때는 은혜로 충만한 때가 있었고 어떤 때는 은혜가 메마른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속에 일어나는 그 약속과 현실이 너무나 심하게 분리된 삶,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녀라는 사실은 분명한데 살아가는 삶이 전혀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고 또 하나님의 자녀인데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도 행복해 하지 않는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지금도 만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들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때 “아! 말이야 바로 저거야 저 사람의 모습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야. 내가 저 모습을 닮았으면 좋겠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여러분들은 아마 거의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 문제가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이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속은 있는데 현실은 약속과 너무 다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너무나 오랫동안 반복해 오다 보니까 그것이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살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 있지만 그렇게 못 하는 것은 당연하고 성경에서는 승리를 약속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패배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이번 설교는 특별히 답을 줄 것입니다. 사도가 1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우선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여기에 나오는 “너희”라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너희”는 1절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이러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했는데 그렇게 생명과 성령의 법에 의해서 사망과 죄의 법에서 해방된 사람도 또 죽을 수 있는가? 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들은 먼저 “죽는다”는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죽는다”고 하는 의미는 육신 적으로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영적인 죽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의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죽음과 같은 무기력과 생명이 있는 어두운 그림자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깊이 드리워져서 그가 의에 대하서 반응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죽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죄와 사망의 법 아래에 있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단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 단절된 가운데서 생명과는 거리가 먼 사망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은 겉 사람이지 속 사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비교를 하자면 이런 말씀입니다.
(예화) 컴퓨터에 모든 주변 기기가 있는데 작동되지 않을 때...(Down 상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못났다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몸은 살아서 모든 곳을 돌아다니지만 속은 완전히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면 속 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컴퓨터가 프로그램을 깔면 작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비로소 겉 사람과 속 사람이 함께 살아 있는 것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사망의 법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할 때에는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예화) 범죄를 저지르고 수배령이 떨어진 후 사면 조치에 의해 해방됨.
이것이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또 다른 의문은 생명과 성령의 법안에 이것은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죽었던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롭게 거듭난 사람들이 되면 그 다음에는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죄와 사망의 법이 아니라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죄가 우리를 지배했기 때문에 그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애를 써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우리를 거기서 해방시켜 주어서 생명과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우리가 죄의 억압을 받거나 어려움이 생기거나 할 때에도 하나님 앞에 다시금 은혜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해지게 되면 죽었던 것과 같은 우리의 옛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가다 커다란 어려움을 만나서 우리의 모든 것이 혼돈에 휩싸이며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그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찬송을 부르고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환경은 변한 것이 없는데 근원도 알 수 없는 기쁨과 은혜가 우리의 맘속에 밀려와서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변화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마음에 죄와 고통과 갈등이 있다가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깊이 의지하면 우리 속에 놀라운 평안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과 성령의 법 아래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생명과 성령의 법안에서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시 죽을 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그것도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숙명적으로 그렇게 되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리적인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안에 성령이 계시고 충만한 생명이 있고 그래서 악한 것들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는 구원해 낸 우리가 어떻게 다시 죽을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죽는다”는 의미가 완전히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아서 그 영혼이 지옥에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쉽게 말하면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영적인 생명과 충만한 생명력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너희를 살게 해 주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영적으로 죽은 자와 같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첫 번째 교리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식으로 교리를 듣는 일에는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생명만 있고 성령의 놀라운 은혜만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다시 이런 의문을 제기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든지 예수님을 분명히 영접한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하고 그 구원의 감격에 빠졌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첫사랑의 경험 말입니다. 그런 경험들은 무엇이냐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의 그런 깊은 회개와 삶을 돌이키는 아들이 성령의 은혜로써 바로 그때 우리의 길은 회개를 통해서 우리 속에 있는 많은 죄들을 죽인 것입니다. 조기 죽어 있는 상태가 되니까 그 다음에는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신앙의 양심도 예민해 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쁨도 충만해지고 은혜와 사랑도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일어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 주셔서 죄와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건져 주신 것은 저절로 “너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 믿기만 하면 일평생 충만한 성령의 은혜 속에서 영적인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다”라고 약속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아멘”하며 믿을 그때에 우리에게는 놀라운 생명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길을 주님이 우리에게 열어 주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든 그러한 길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처음 아버지 앞에 깊이 회개한 순간에 성령으로써 이렇게 몸의 행실을 죽였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해서 충만한 생명 속에서 주님 앞에 뜨거운 신앙생활을 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찾으려 하든지 어떻게 해야할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말입니다. 물론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실 기도할 때조차도 어느 때에는 기도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경우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 때에는 말씀을 들어도 해결이 안되고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자기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해 보려다가 결국은 자포자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는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으려니와” 이 “육신”은 “옛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들이 즉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정결해지고 더 다듬어 지어서 그래서 더 풍성한 진리와 은혜가운데 살아서 우리 자신이 온전한 예수의 사람이 되어져야 됩니다. 예수 믿고 나면 우리 안에 두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전에는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죽어 있고 죄를 향해서는 열심히 살아있는 육신적인 자신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옛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이제는 새 사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 생활을 잘 하게 되면 이 새 사람이 옛사람을 거의 죽이거나 누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분의 존재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옛사람을 처치하지 않으면 옛 성품이 우리 속에서 살아납니다. 그래서 옛 성품이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새사람을 끊임없이 죽이고 멸하여서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그렇게 만들어서 결국 목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사는 것만큼은 옛날 주님을 믿지 않고 살았던 그 방종하고 죄짓는 생활로 데려 가려고 하는 것이 사탄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전투입니다. 그런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풍성한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육신대로”라는 말은 우리 속에 있는 죄악 된 성품,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옛 생활의 성품이 시키는 데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기 담겨 있습니다. “너희가 그런 식으로 살면 나는 너희를 영적으로 죽은 자와 같이 만들겠다”라고 하는 의지입니다. 그런 법이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존재합니다.
새사람과 옛사람이 시키는 바는 서로 다릅니다. 새사람이 시키는 바는 은혜를 구하라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말씀에 순종하라고, 기도하라고, 죄를 이기고 세상을 사랑치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계속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그러나 옛사람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야! 적당히 믿어, 옛날 생각해 봐” 이렇게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들이 옛사람을 따라서 살면 결국 영적으로는 우리가 완전히 죽은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어 살게 하시고 싶으셨던 삶은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게 하시는 것이다. 소요리 문답에는 “사람의 제일 가는 본분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입니다.
“죽은 상태”이란 의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선 살게 됩니다. 이제는 예전의 죄가 자신에게 즐거움이 안되고 정말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사람인데 이것이 모두 사려져 버리고 반드시 죽을 것이다. 도저히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없고 주님을 즐거워하며 살수 없는 사람으로 다시 전락되는 것입니다.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사상과 삶은 옛날 마귀의 자녀로 다시 돌아간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맹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생겨나는 이유인 것입니다. 육신대로 사니까 자기는 그리스도이라고 말하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로 부인할 수 없는데 문제는 마음속에 그 예수님을 기뻐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고 찬양할 수 없고 그분을 위해 살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냥 부인하고만 살지 않는 것입니다. 날마다 교회에 나오지만 하나님을 만나고픈 감정은 없습니다. 만나면 혼나는 일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 혼나지 않고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둘 중에 하나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보실 때 정말 갸륵하고 풍성한 삶을 살든지, 그렇게 못 살고 죄 가운데 있으면 회개하고 깨끗하게 되든지 말입니다. 둘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이런 죽어 있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기 때문에 심령 깊은 곳에서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사름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찾으라는 말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이 이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주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바로 이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상 거의 죽어 있는 자와 비슷한 것입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육신대로 산다는 의미를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잘 나오고 십일조 잘 내도 육신대로 살 수 있습니다. 마음에 없는 신앙생활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제가 여러분을 사랑하지만 정직하게 진실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무엇인가 변화도지 않는다면 그 죽어 있는 상태가 죽을 때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제가 만난 많은 그리스도인들 구원받은 것을 너무 크게 생각하는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영적인 삶에 있어서 시작일 뿐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할 때에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죄 사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죄를 이기며 살아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너무나 쉽게 잃어버리고 나면 구원받은 것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죄를 죽이고 내 안에 주님의 성령과 생명의 은혜가 충만하게 되도록 살아가는 삶을 저절로 보장 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가능성을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하지 않고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적당히 믿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까? 너무나 쉽게 사람들은 육신대로 살아갑니다. 비록 다시 은혜로운 신앙 생활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이 사실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육신대로 살아서 또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활을 자기 스스로 속는 것이고 머리와 마음속에는 돌멩이로 가득 차는 것이고 계속 절망적인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도 바울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의 태도를 바꾸지 않고 이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인생 속에 생명이라고는 없을 것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계속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진노만 계속 쌓아가게 될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든지 아니면 스스로 깨닫지 못할 때 징벌을 가하시고 고난을 주어 깨닫게 하든지 입니다. 둘 다 불행한 일입니다. 이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육신대로 살고 있구나. 나의 영혼이 죽어 있구나. 난 이럴 수 없다. 생명을 얻고 주님이 나를 위해 어떻게 죽으시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 겨우 이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살이 찢으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신 채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던가! 난 이럴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이것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 할 때 영혼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 답을 성경이 주는 것입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산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산 사람만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대화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돌아갈 길을 보여 주고 위기에 처했을 때 축복 할 수 있는 힘과 슬기와 인내를 주시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삶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함께 드릴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위해서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되는 것입니다. 고행과 금식하는 자신의 육신적으로 할 때에는 결코 의미가 없습니다. 마음의 죄 짓고자 하는 동기 자체를 종식시키는 분은 성령님께서 만 이 하실 수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은혜를 받아서 마음 안에 악한 품성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몸의 행실로서 이 의미는 구체적인 행동이 아니라 보다 깊은 뜻은 모든 사악하고 죄악 된 행동들을 밖으로 저지르는 그 뿌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뿌리를 자르지 아니하면 계속해서 자란다는 것입니다. 죄는 죽이지 아니하면 계속 우리 속에서 자라게 되고 신앙의 숲을 뒤엎어 죄가 완전히 우리를 이긴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을 때 실제 영적으로 삶에서는 죄가 우리를 완전히 이겨서 기도도 거의 할 수 없고 말씀 앞에서도 거의 깨달음이 없고 육체를 사모하는 마음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가 된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죄의 뿌리를 철저히 죽이게 되면 나는 없고 예수님만 내 안에서 살아 계신 것 같은 커다란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생명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리고 될 대로 되라 하는 식의 신앙생활은 우리가 계속해서 형식적인 신자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예수 믿는 것이 우리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죽인다”는 의미는 절대절명의 각오로 적개심에 불타서 죽이는 것을 의심합니다.
결국 끊임없이 죄를 죽이는 삶은 자신의 대치할 수 없는 의무이고 그 의무를 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앞에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섣불리 죽이면 다시 일어날 때 적개심을 가지고 죄를 죽이려 했던 사람에게 더 덤벼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일 죄에 대해서 진지한 견해를 갚지 않으면 그들은 살아 있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어떠한 지름길도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원칙을 비켜 가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길은 오직 죽은 자와 같이 사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죄를 미워하고 죽이지 아니하면 우리는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한 진지한 견해와 혐오감과 적개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아 정죄함이 없는 우리들이 하더라도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우리의 영적인 삶을 죽게 됩니다. 살기를 원한다면 성령의 은혜로써 우리의 죄에 대한 행실을 철저히 미워하면서 마지막엔 죄를 토하고 완전히 죽기까지 죄를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죄 죽임의 필요성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邪慾)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3:5-6)
(예화) 길가에 심긴 못 먹는 복숭아와 개똥참외.
똑같은 나무라도 그저 심어만 놓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잘 거름을 주고 잘라 다듬어주고 두루 치고 등등의 정성을 다하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신앙 생활하게 하시는 원리도 똑 같습니다. 그냥 놔두면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려고 가지를 다듬어 주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정결하게 해 가실 때에 우리들이 제대로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포도나무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하나님이 그 가지를 정결케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수원의 손에 늘 들려있는 것이 바로 정장가위입니다. 가지를 치고 잘라내고 하는데 쓰는 도구인데 이를 통해서 가지는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도 똑같이 하나님이 그들을 날마다 죄 가운데서 정결하게 해주시고 또 그 죄를 죽이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심으셨지만 열매맺는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없다 이 말씀입니다. 오늘 너희는 그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도록 사도가 명령합니다. 또 그것이 사욕, 음란, 탐심이라고 말합니다. 너희의 지체를 죽이라 골로새서 3장 앞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얻었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그러나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명령을 할 때 그 명령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지난 시간에 로마서를 보면서 바로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여야만 살고 반드시 너희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으면 죄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죽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게된 사람들과 똑같은 논리다 이런 말씀인 것입니다. 결국은 사도 바울이 그래서 어떤 고백을 했는가 하면 자기가 받은 구원이 취소된다든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자기를 구원해주신 영원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는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그들을 구원받게 하고 나는 오히려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한다고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구원의 확신이 흔들려서가 아니라 버림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지옥에 가는 것만이 버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문이 막히고 말씀에서 아무런 은혜도 없고 죄 가운데 살면서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죄에게 코 꿰이고 악한 일을 하면서 계속 번민하고 그러면 교회에 나와도 버림받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래서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킨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복종시킨다는 희랍어는 노예를 복종시킬 때 쓰는 말입니다. 인격적으로 그렇게 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채찍질을 하는 겁니다. 우리들이 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죄를 향해서 죄와 대화하면서 해결하는 것이 해결이 아니라 오직 몽둥이질을 하면서 쳐서 복종시키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예수를 믿지 만은 영적으로는 죽은 자같이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교회를 나왔습니다. 참 계획에 없었는데 그날 말씀과 기도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콧물을 흘리고 침도 흘렸습니다. 큰 은혜를 받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참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졌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았는데 마음이 다 식어지고 하나님을 거슬리고 교회도 나오지 않고 또 교회에 나와도 다시 또 기도하지 않고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옛날의 그 모습이 다 참된 모습이 아니었다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진짜라면 사람이 이 정도밖에 안되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도 가능하고 이것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때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했는데 자기 속에 며칠 사이에 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자라고 그를 삼켜버립니다. 그러면서 망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진실이고 이것도 진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는 너무 약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약한 것과 악한 것은 틀린 것입니다. 점하나 더하면 약이고 점하나 빼면 악인데 그 점 하나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온누리교회에서 설교를 하시고 나서 피를 토하고 쓰러지셨어요 그런 것이 약한 것입니다. 악한 것은 마음으로 솔솔 나쁜 일을 계획하는 것입니다. 그건 약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입니다. 그 둘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라고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사랑이 아니십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가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한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는 것이 그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자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나를 사랑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랑을 주관적으로 깊이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지만 행복한 신앙생활이 되고 그 주님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가능케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지체를 죽이지 않고 내 속에서 솟아나는 많은 죄 가운데 있게되면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게됩니다. 그 진노는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떨 때는 그 생명을 단숨에 거둬가 버릴 수 있습니다.
(예화) 목사님과 벤츠.
하나님이 악이 어느 한계에 달하면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둬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악이 덜 찬 것 같은데도 데려가시고 악이 차도 안 데려가시고 기다렸다가 변화시키십니다. 무슨 근거가 있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아는 것을 하나님이 그냥 쓰레기처럼 처리해 버리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보면 집안에 있는 살림도구 벌릴 것 같은데 그냥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쓸만한데 쓰레기통에 막 버리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입니다. 범죄 하면 하나님이 단숨에 일격을 가해서 비참하게 데리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놔두실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노라는 것은 일격이라는 것은 교통사고가 나서 박살이 난다든지 비행기를 타고 가도 폭발이 된다든지 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진노와 심판은 다릅니다. 진노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저놈 못됐구나 하고 생각하시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맞아라 하고 때리시면 심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런 진노가 이런 죄가 마음속에 살아있고 그 죄가 마음속에 살아서 삶으로 나타나는 모든 사람들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으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닫혔으니 위로부터 매일매일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감동,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의 지식 이런 것을 받아야지 만 죄도 이기고 시험도 이기고 믿음으로 살텐데 이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졌기 때문에 안 오는 것입니다. 그게 진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를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지금 거의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하면은 어두움 속을 헤매는 것 같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이 연약해서 그럴 수 있지만 그것은 매우 드문 일이고 대부분은 여러분 속에 있는 죄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과 시련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제를 끊을 수 있는 단 하나는 죄가 들어와 가로막는 것입니다. 늘 들으면서 감동 받던 말씀인데 요즘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한 표현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이 살고 죽는 문제의 교리를 여러분께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결국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 이것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죄의 지체를 죽이는 실행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겉으로 보기에는 승리를 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의 맘은 언제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왜 자기가 그렇게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패배하고 그 죄와 더불어서 철저하게 씨름하면서 고통 해 보지 않았으면 죄의 이 놀라운 능력 그래서 죽은 사람을 살려 낼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 사랑은 한번도 죄를 과소평가 하거나 하찮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죄를 무섭게 생각했습니다. 두렵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그렇게 살아 있는 짐승을 비참하게 혐오하는 감정을 가지고 증오에 차서 찔러 죽이는 태도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의식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왜 우리들이 그 죄를 죽여야 되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릴 수 있는데 첫째는 죄가 늘 존재하기 때문에 죽여야 하고 두 번째는 죄가 역사하기 때문에 죽여야 하고 세 번째는 죄가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가 늘 존재한다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교리를 대하면서 결국은 우리들이 왜 그리 오래도록 지루할 정도로 실패하는 삶을 반복하여 살아왔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화) 목사님의 심방 시 질문 예화. 짐승 같은 삶.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하면서 개도 예뻐해 주고 사랑해주면 꼬리를 흔드는데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개조차 그렇게 하는데 그것과 다름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잘못된 가르침을 하나 받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고 하니 꼭 명시적으로 가르쳐 준 것은 아닌데 대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정말 놀라운 사건이고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엄밀히 말하면 죽었던 죄인인데 내가 그 주님을 그 십자가의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면 그 주님이 내 마음에 오셔서 내 안에 사시기 때문에 난 염려 없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막아주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에 난 걱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 자유하네 라는 찬송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말을 살아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그렇게 배우기는 하고 성경의 어떤 구절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는데 사실 구원받을 때 그때는 구원받는다는 엄청난 건 줄 알았는데 세월이 흘러가서 신앙생활 하다 보니까 구원받았는데도 말할 때는 구원이 시시하다고 말할 수 없어요 교회 안에서도 예의가 있는데 그렇게 얘기하면 되겠습니까?
자기 몸도 자기는 그렇게 체험하지도 못한 사실을 뻥 튀겨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자가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전혀 기쁘지도 행복하지도 않는데 예수를 믿기 때문에 환희에 찬 삶을 사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에게 말할 때에는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일이 잘된다고 말하면서 자기는 걱정 투성입니다. 비 진위적 위치의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 자체가 완전히 맞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고 참 크고 위대하신 일입니다. 인간이 살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영생을 얻게 되었고 이제는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참 감사하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내 안에 천국이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요소입니다. 결국 신자는 가장 훌륭한 신자라고 할지라도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화) 잡지에 난 암세포 기사 이야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신지라해도 죄가 항상 있습니다. 우리 안에 늘 있고 우리밖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걸 느낀 것입니다. 내 안에서 죄와 야합하고 그 죄를 받아드리려 하는 본성을 날마다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걸 행할 능력이 없고 그리고 나를 다시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본다는 그렇게 무서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죄의 유혹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밖에서 유혹을 합니다. 그 유혹이 우리 속에 있는 탐심과 결탁을 하게되면 반드시 죄를 불러일으킵니다. 밖에서 오는 유혹을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보고 만지고 듣는 모든 것들이 유혹의 소재들입니다. 그 유혹을 받기 싫으면 진공관이죠. 하나 그곳에서도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나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자신 속에 일어나는 사악하고 더러운 욕망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가계에 들어갔는데 주인이 밑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하고 있어요 이때 돈을 집어들고 가버리면 좋겠다 라는 유혹이 들었습니다. 이 속에 남에 돈을 훔쳐서라도 부하게 살고 싶다고 하는 탐심이 있으면 실행에 옮겨집니다. 환경이 허락한다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가치관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돈이 많은데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옷을 입고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남의 것을 탈취하는 범죄를 해서라도 돈을 손에 넣어서 느끼는 즐거움보다 하나님께 사랑 받는 즐거움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믿음이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면 돈을 얼마만큼 쌓아두어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화) 알렉산더 대왕과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황금이야기.
금덩이가 있어도 마음이 완전하게 변화하니까 그 유혹이 사람을 죄로 이끌어 가지 못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유혹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 유혹을 대해서 반응 할 수 있는 사악한 죄와 욕망을 철저히 죽이면 그 유혹이 아무리 많이 몰려와도 유혹 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거기에 죄악으로 반응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런 삶을 우리들에게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 죄가 우리 속에 끊임없이 역사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풀과 같습니다. 은혜라는 제초제를 뿌리면 기를 못 펴 계속 죽지만 그 은혜라는 제초제를 뿌리지 않으면 이게 길같이 자랍니다.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풀숲이 되어 삼켜버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도저히 상상도 못할 큰 죄를 짓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죄의 최종목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해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 하면 이 죄는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해도 완전히 승리하고 완전히 이길 수 없고 믿음이 좋고 은혜생활을 잘하면 죄가 거의 억눌려 있는 것입니다. 거의 죄가 밑에 깊이 잠복해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서 신앙생활하고 선을 행하는 데에 방해가 안될 정도로 깊이 눌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잡힌바된 그것을 잡으러 쫓아가노라 이게 죄에 대한 올바른 생각입니다.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에서는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왜? 매일매일 궁극적이며 최악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죄를 죽이면서 매일의 새로운 기쁨과 은혜를 맛보기 때문입니다.
(예화) 열린교회 개척 후 성도들이 찾아오는 간증이야기.
그리스도인의 충만하고 능력 있는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 혼자 하시는 거라는 착각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에게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에 하나님이 주권 적으로 은혜를 주실 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감격과 은혜를 주실 때에 거의 죄짓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죄를 짓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으십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흐느껴 울면서 죄를 짓고자 마음을 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죄가 깊이 상처를 받고 쓰러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솟아난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놓고 자신은 계속 그러한 삶을 살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만 나오면 저절로 되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런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는 정말 다시는 죄가 살아나지 못하도록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고성의 산불 예화.
완전히 사그리 불타버린 산에도 불과 몇 달이 지나면 파란 새순이 자라납니다. 큰 능력의 말씀에 폭탄을 맞듯이 자기가 산산이 부서진 사람이라도 부서진 채로 내버려두면 다시 합체되어 옛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경이 인간에 대해서 그렇게 절망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속속들이 다 부패했기 때문에 인간 그 자체가 진짜 절망적입니다. 자기를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자기로부터 큰 배신을 당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이 싸움을 매일매일 반복되는 싸움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감격적인 은혜를 받았으면 즉시 눈물을 딱은 다음에는 강철과 같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투철한 말씀의 지식을 소유하고 거룩한 사랑으로 매일매일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다시 번성하려고 하는 옛 죄악들에 싹 트는 것들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매일매일 말려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도 하지 않고 예배도 제대로 드리지 않고 예배에 나와서도 구석진 곳에 멀거니 앉아서 멍하니 하늘 쳐다보고 시계만 보고 졸다 예배가 끝이 나면 설교 말씀이 어느 말씀이었는지도 모른 채 나가며 사는 동안에 죄악이 칡넝쿨처럼 자라나서 영혼의 온 몸을 휘감아 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서 서서히 진실해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왕년에 은혜를 받은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말처럼 날마다 새롭기 때문에 옛날을 반추할 새가 없습니다. 오늘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같습니다. 매일 새로운 성경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그 새로운 말씀이 좋기 때문에 옛날 설교를 재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죄는 늘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가 역사하기 때문에 죽여야 합니다. 죄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사악한 인간의 탐심이 가만히 깔려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안달을 하면서 우리를 설득해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의 욕구를 채워 달라고 계속 요구를 하는 것. 계속적으로 역사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유혹해서 죄를 짓게 하려는 죄의 성격이요 죄의 성질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 속에서 계속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죄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의 타락에 깊이 개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다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범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밖으로 나오기 전에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악한 마음이 우리 안에 있게 되면은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참으로 순수하고 순결한 상태일 때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팔복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결국은 죄를 지적하지 않고 신령한 생활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말하더라도 어차피 죄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마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늘날 그런 식으로 그릇된 영성 운동이라든지 성령운동이라든지 하는 것 계속 불길같이 번져 가는 것이 교회를 변화시키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냐 하면 죄에 대한 진실한 지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가 모든 것을 드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결국 죄는 우리의 마음의 탐심이 역사해서 결국은 하나님과의 사이를 갈라놓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라는 것은 기도생활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대화는 청산유수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벙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대화는 지식으로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과는 영으로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영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가 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고 죄가 영향을 주어서 하나님과 우리사이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온전히 해서 주님의 마음에 다다르면 하나님은 가만히 있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십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무언가를 주십니다.
(예화) 기도와 일기예보.
진심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이 오든지 아니면 평강이 오든지 무언가가 주어집니다. 안 온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이고 이런 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믿을 수 없는 완전히 속속들이 부패한 여름날의 쓰레기 하치장의 버려진 썩은 생선 같은 존재들입니다. 도저히 쓸 수 없고 고쳐서 사용할 수 없는 속속들이 섞은 존재들인데 우리가 그나마 예수의 사랑에 힘입어서 이 세상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깨달음을 주셔서 짐승 같은 우리들의 눈을 뜨게 해주시고 그리고 그 시커먼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 더러운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해주는 일들을 주님이 수시로 해주시니까 일주일동안 죄 가운데 살다가도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으면 지난날 살아온 일들을 회개하며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에 대한 확신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니까 이만큼이라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게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제야 평탄한 게 진짜 평탄한 것이 아니였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교회에 와서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죄를 죽이지 아니하고 탐욕을 죽이지 아니하면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끊어집니다. 즉시 인간이 죄에 대한 저항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AIDS란 병은 병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무슨 병에 걸리든지 아무런 면역이 안 된다는데 있습니다. 면역력이 극도로 떨어지는 이와 유사한 병에 걸린 한 형제가 있었는데 감기만 걸려도 멸균실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 방은 하루에 30만원에 그 방에 들어가려면 반도체 공장에서 입는 복장을 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조그만 병균이라도 들어오면 그를 완전히 삼켜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막혀질 때우리 스스로 죄를 이길 저항력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흐느적거리면서 그 고삐에 끌려서 이리저리 비참하게 끌려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삼손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로부터 큰 능력을 받아서 블레셋 사람들을 수없이 때려 죽었던 그 용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자 두 눈을 빼고 쇠사슬에 엮어서 짐승이 매었던 연자 맷돌을 돌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사사가 곡식을 갈아주려고 그것을 돌리었습니다. 그게 바로 죄가 자신을 이겨버린 성도의 말로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반드시 죄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그 죄가 살아서 우리를 죽이게 됩니다. 둘 중 하나가 죽기까지 만족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그렇게 은혜 생활을 하면 되겠습니까?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담대하고 자신 있습니까? 여러분 안을 살펴보면 가슴팍에는 시궁창 같은 타락한 마음과 머리에는 돌밖에 든 것이 없는 게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여러분 목회자가 기도하라고 구걸하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십니까? 누가 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기본적인 신앙이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기본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만큼 붙들어 주시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죽게 된 것을 붙잡으라고 하십니다. 다 죽게 되어 시들어가면서도 그래도 주님이 남겨 두신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이나마 신앙생활을 유지해 가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일날 달랑 나와서 한번 얼굴 비추고 오전 예배에 나오셔서 그때 소원은 끝나면 집에 가야지 하는 식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죄를 이긴다면 성경은 다시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그에 앞에 있는 성도의 운명은 구원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마귀에게 결국은 굴레에 씌워져 거기에 붙잡혀 끌려 다니면서 결국은 죄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삼손같이 성도로 태어났지만 남의 곡식이나 갈아주기 위해 연자 맷돌을 돌려야하는 그런 삶을 평생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자기는 교만이 흐르고 신앙의 대가처럼 생각하지만 그 사람들의 운명은 그런 것 외에 기다리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껏 실패가 말해주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장난처럼 생각하고 농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가는 곳은 불붙는 지옥밖에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당할 때 롯이 간절히 피하기를 권했던 사위들은 그 사실을 농담처럼 느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은 불 속에서 죽었습니다. 매일 매일 은혜생활을 하기를 내 생명이 달린 문제인 것처럼 해야 합니다. 목회자나 구역 장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사정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살면은 사는 거고 죽으려면 죽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사람은 산사람입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이해를 해주고 납득을 해주고 하는 것 자기 영혼의 상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주님의 참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그래서 얼마나 하나님의 참사랑을 쫓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 주님을 향한 그 사랑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대도 왜 여러분 속에 죄는 자라고 은혜는 메말라가고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여러분들은 부족한 것이 없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이 슬픔이 진노로 바뀌어서 여러분들의 영혼을 핍절하게 되었고 여러분들은 부족한 것이 없는 것처럼 웃으며 교회에 나와도 여러분들의 영혼은 예배당 앞에 들어올 때 눈물로 소리치는 것입니다. 나 좀 살려달라고....
주일 날 게슴츠레 내게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눈을 떴다가는 월요일 날 더 깊은 잠에 빠져버리는 신앙생활 이것을 신앙생활이라 말할 수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에 기대를 걸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을 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죄를 죽여야 하는 더 큰 이유는 죄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능력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작은 죄가 항상 궁극적으로 최악의 죄를 꿈꾸면서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리로 데려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의 재물을 보고 탐내는 마음은 여건이 안되니까 그렇게 못하는 것뿐이지 가만 내버려두면 여건이 허락만 하면 결국은 그것을 훔쳐서라도 잘 살겠다는 것을 지양하는 것입니다.
형제가 자매를 대할 때 정결하지 않는 부정한 눈길과 마음으로 대하고 음욕을 품게되면 그는 여건이 허락되지 않고 상대방이 응해주지 않고 주위에서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지 결국 마음속에 일어나는 그 유혹의 죄가 마지막에 꿈꾸는 것은 간음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보면서 미워하는 마음이 스쳐가고 그 미워하는 마음을 우리의 속 사람이 움켜쥘 때 그것은 용기가 없어서 못하고 그 결과가 가져다 줄 두려움 때문에 억제 당하고 있지만 마지막에 꿈꾸는 것은 그를 무참하게 살해하는 것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실까 하는 순간적으로 스치는 의심은 약함이 아니라 악함입니다. 그 순간적으로 스치는 의심은 순간적으로 사라지니까 그렇지 그것을 잘 보호해서 그 마음을 계속 번성할 수 있도록 주위에서 여건을 조성해주면 마지막에 그 마음이 가고 싶은 것은 무신론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실까 아마 안도와 주실 꺼야 이런 의심이 마지막에 그 사람을 데리고 가고 싶은 곳은 하나님을 전혀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불신자의 길을 가게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목적이 성취될 대까지 죄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자기의 목표를 이룰 때까지 끊임없이 목말라서 몸부림치면서 그를 파멸로 데려가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수시로 떠올라도 괜찮습니다. 떠오를 때 부인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셔서 여기까지 데려오셨는데 내가 하나님 없이 살수 있겠는가 저 형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구원하셨는데 내가 그 형제를 사랑할 수 있을지언정 어떻게 그 형제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 이건 불가능해. 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하게 되면은 우리의 죄가 드러나고 하나님이 우리의 죄 된 생각으로 인해서 얼마나 가슴아파하시는지를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내가 순간적으로 음란한 생각을 품었다가도 내가 하나님 앞에 주님이 나의 이런 불결한 마음으로 인해 슬퍼하실 지 생각하는 순간에 유혹이 스쳤지만 탐심이 생겼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의 눈물이 흐르며 주님이 정결하신 것처럼 나도 주님의 정결한 모습을 닮아서 하나님의 눈빛 앞에 살고 싶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한쪽에는 죄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한쪽에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는 아무리 극도로 타락한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여러분 속에는 진정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깊이 자신의 죄악을 보면서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자신의 마음이 이쪽의 자신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손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살아나던 것이 죽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확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가득 채우면 죄가 죽으면서 왜 내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을까? 주님의 눈빛 앞에서 사랑 앞에서 사는 것이 이렇게 좋은데 마지막에 그 어두운 길에 발을 들여나 봐야 끔찍한 파멸밖에 없는데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하며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입술을 열어서 주님을 찬송하고 떨쳐버리고
이제 어둠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그렇게 완전히 변화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계속 반복하면서 죄가 거의 바닥에 눌려 있어서 거의 끔쩍도 못하게 됩니다. 나타났다 하면 끔쩍도 못하게 죽이니까요
(예화) 서울에 잠복해 있는 천 여명으로 추정되는 간첩들의 활동.
중앙 정보부 사람이 나와서 특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추측하는데 서울 시내에 천명 정도의 간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간첩이 총 들고 설치는 것 본적이 있으세요. 여기선 못합니다. 잘못하다가는 죽기 때문입니다. 6.25때는 공산당이 지나고 나면 막 일어납니다. 전혀 기를 쓸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면 결국 최악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으로는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예화) 상상 할 수 없는 일(교회에 봉사하던 부부의 바람난 이야기).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회에 참석하고 우리가 눈에 보이는 신앙 생활하는 것은 죄가 목에까지 차도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 안되고 상상해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욕심이나 탐심들은 그때그때 처리하면 그렇게 안 되는데 그것을 계속 자라도록 방치하고 보탬 해 두게 되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차츰 차츰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반복되는 생각은 반드시 행동을 낳고 반복되는 행동은 반드시 습관을 낳고 반복되는 습관은 그 사람 자체 인격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데 억제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에는 꿈꾸고 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른 범죄도 또 같은 과정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가 완전한 승리를 부리면 개가를 부르고 그때 어떻게 되냐 하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자신의 마음으로 어쩔 수 없는 죄가 조그맣게 올라왔을 때에는 풀밭이 이렇게 올라왔을 때는 뽑으면 뽑히고 자르면 잘리어지는데 이제 점점 굵어져 아름드리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도끼를 가지고 두들겨도 나무가 꿈적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끼를 두들기는 감히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도 나오겠느냐 이 말씀입니다. 그럼 톱으로 자르면 된다면 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두드리며 자르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을 큰 부흥이 있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스라서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토로 돌아와 성전을 지으려고 하다가 지연이 되고 시간이 흘러 이방인들과 결혼을 하고 잊고 있다가 어느 날 부흥회를 하다가 깨달을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이걸 싫어하는 구나 순전한 결혼을 해야지 이방여인들과 결혼해서도 안되는구나 정리를 해야겠다 생각 하지만 문제는 쉽지 않습니다. 슬하에 아이들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가족이 파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 죄가 자라서 죄가 자기를 삼키면 그것에 굴복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왜 결단을 못 내리는 것입니까? 결단을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일 매일 자신 속에서 솟아나는 죄를 죽이지 않는 짐승 같은 성도들의 말로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런 죄 죽임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여러분들이 이렇게 죄를 스스로 죽이고 은혜가 여러분 안에서 살아서 그렇게 이 의무를 실천하지 않고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자기 부인이 없는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지막은 결국은 짐승과 같이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에서 시인이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 같으오니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삶을 살다가 계속 해서 머리는 희어지고 육신은 쇠약해 가고 그래서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그는 천군 천사가 기다리고 영광스러운 죽음을 죽기보다는 죽음 그 자체를 떨며 끌려 갈 것입니다. 성도로써 그런 삶을 살게 하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열심히 신앙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해 가지고 한국교회가 되겠습니까? 천명 모이고 수요일 날 50명 모이고 주일 저녁 예배 150명 모이는 이 사람들은 다 쓰레기입니다. 이렇게 자기 죄와의 싸움을 게을리 하고 있는 동안에 죄가 무성하게 자라서 그 사람 자체를 다 뒤엎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아름다운 건물이나 넓은 대지나 혹은 많은 사람이 교회에 운집하는 것에 교회의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박은 끊어 자유케 만들어 주는 교회 함께 할 때 그것이 살아 있는 교회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들이 죄를 증오하는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죄는 죽이고 은혜는 불일 듯 살아나게 하려는 노력 없이는 안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과 같은 빛 가운데 주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체험하였습니까? 삼층 천에 올라가 보셨습니까?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만을 위해 사십니까? 세상의 즐거움을 다 버리고 가진 굽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작정한 사람입니다. 그런 대도 날마다 죄에 의해서 자신이 죽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삼켜서 자기가 거의 죽은 자와 같이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지체를 날마다 죽이고 그리고 자기 속에서 솟아나고 있는 죄의 소원과 날마다 생사를 건 투쟁을 하는 것만이 자기가 사는 비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기도로 그 일을 했고 말씀으로 그 일을 했고 경건으로 그 일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사도 보다 위대하고 사도 보다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의 기도하지 않고 성경은 어디까지 읽었는지 기억도 없고 설교를 들어도 마음의 약간의 찔림을 받아도 일주일 동안 눈물과 그 길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 여러분들이 지금 살았어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며 지금 죽은 사람도 계속 죽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여러분들로 인해서 이방인 가운데 모욕을 받을 것이고 교회는 여러분들이 있기 때문에 수치스러운 교회가 되어갈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농담을 하고 장난을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그것을 본받으며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그 사람만이 하나님의 편이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다수의 것입니다.
언제든지 넓은 길, 쉬운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멸망의 길이였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약속된 길은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기 위해 땀 흘리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날마다 죽노라하는 고백을 사도 바울은 함께 했습니다. 자신 속에 있는 부패하고 더러운 것들이 가끔 떠올라도 자리를 잡지 못 하도록 증오하는 마음으로 그것들을 죽이고 하나님이 하는 삶을 살아서 그래서 한 청교도가 얘기했듯이 “진리와 함께 악마의 손톱 자국이 가득하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마귀가 무엇입니까? 어두움의 세력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장본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품고 마음속에 키우고 있는 죄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스스로 솟아나는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하기에 아무 것도 없고 빈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주님은 우리가 언제든지 나와서 “하나님 우리 속에 이렇게 더러운 죄들이 싹트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 힘으로 이것을 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내 안에서 죽여주십시오. 주님이 돌아보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런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그저 돌려보내시지 않습니다. 죄의 결박을 풀어 주시고 죄의 소원을 말려 버리시며 다시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신령한 소원을 우리에게 깊이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지 않고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 주신다고 그 은혜의 수단들을 따라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죄의 소원이 결국은 우리의 의로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언젠가 그 죄에게 삼킨 바 될 것이라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운 마음을 죄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는 힘이 없고 연약해지지만 내 안에 사는 이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고백했던 바울과 같이 부지런히 은혜 생활을 해서 열심히 우리 속에 있는 죄들을 향해 말씀의 참된 것을 밝히고 철저히 죽여서 우리도 사도 바울과 함께 그 어두운 밤을 지나고 내가 그리스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승리하는 자들이 맛보는 거룩한 환희가 벅차서 주님을 향해 찬송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생명 주시는 동안 오직 좋으신 주님을 위해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죄 죽임과 거룩한 삶(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어떻게 죄와 더불어 싸워서 이길 수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의무를 다 하여야하고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지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거듭나고 나면은 아무리 연약한 신자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거듭난 즉시 우리에게 옛날에는 없던 새로운 본성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 본성을 창출하는 주체는 성령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 제일 먼저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성령 하나님과 새로운 본성이 우리 안에 주어지므로 우리는 죄를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와의 싸움을 생각할 때 우리들이 너무나 절망적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생활을 경험을 보면은 죄에 대해서 이기고 승리하는 놀라운 감격을 맛보는 것은 마치 매우 고차원적인 성자들이 그런 경험을 하는 것 같은 오해가 우리 안에 늘 있습니다. 이런 삶이 결국은 우리를 영적으로 거의 죽은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에 할렐루야 교회에 말씀을 전하러 갔다가 그 교회의 부 교역자들과 식사를 하는데 그 중에 한 부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사실 교회에서는 우리 교역자들이 구원만 받으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렇게 가르치지만 실제 성도들의 삶을 보면 정말 십 원도 되지 않는 구원을 주고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초라한 구원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만큼 구원받은 사람이나 구원을 안 받은 사람이나 구원받은 사람이 별로 행복해 보이지도 않고 돈 많이 벌어서 잘 사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지 못했을 때는 누리지 못하는 놀라운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잠시 그런 것들을 맛보다가는 사라져 버려서 결국은 그것은 마음에 몰려왔던 놀라운 마음의 평강이나 인생을 살면서 느꼈던 기쁨, 이런 것은 결국은 처음에 무슨 물건을 보면 호기심에 한참 좋다가 실증이 나서 거기에 대한 신비감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도 처음이니까 그런 느낌이 들지만 시간이 흘러가면 그런 것들에 대한 신비감이 사라져서 그렇게 되는 것이구나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을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에 대부분의 생활들은 죄와 더불어서 싸워야할 강력한 내면적인 욕구나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이고, 또 그럴 필요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지로 싸우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싸우다가도 번번이 실패하기 때문에 이렇게 실패한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현실과 타협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투쟁을 위한 갈등도 버리고 편안하게 죄 가운데 묻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댓가로 우리들이 지불해야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영혼의 생명을 고스란히 그에게 양도하고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아니고, 안 믿었을 때에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데 차이점은 주일날 교회에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그 차이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직도 여러분들 가운데 교회에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것이 목회자에게 크게 보탬을 주는 것같이 생각하고 있다면 꿈을 깨시기 바랍니다. 착각도 유만부득입니다.
여러분 성경 속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런 경고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모욕을 받는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 하는 표지를 단지 교회에 출석하고 안하고 그런 정도, 성경책 가지고 다니고 안 다니고 그런 정도, 무슨 제사 지낼 때 절하고 안하고 그런 정도로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의 표지를 잰다고 하면은 여러분들의 사고 방식은 예수님 시대 때 바리새인들의 사고 방식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출석하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그런 것 하나만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표지로 삼으려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죄를 죽여서 우리 안에 죄를 죽여서 우리 안에 영원한 영혼이 진정한 생명을 누리는 행복하고 은혜에 넘치는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 사실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외식된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도 기쁘지 않은데 복음을 전할 때만 기쁜 척 해야되고 자기는 전혀 거룩한 삶을 살지 않은데 설교할 때만 거룩한 삶을 사는 것처럼 흉내를 내는 가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깨지고 상한 마음이 없는데 기도할 때만 우는 그런 외식과 위선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영향력은 교회의 모방에 의해서 세상을 향하여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모방하는 겉모습을 향하여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들 속에 존재하고 있는 그 내면의 힘이 세상을 향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창출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 땅을 고치는 놀라운 치료의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죽이는 삶이 없다면 우리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도 가끔은 그런 사람을 보지만 다른 교회에서는 더 많이 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고 하니 성경이 우리에게 신앙에 도리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성령이 오늘 나의 신앙 생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든지 그런 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고 내 할 일 내가 알아서 교회 생활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예배 시간에 벌거벗고 나오는 것과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교회 안에 법적인 제재가 없기 때문에 그런 성도들조차 모두 용납하고 받아주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하지마는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 사람은 백주대낮에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다니는 사람과 똑같이 부끄러운 사람이며 그 사람은 겉모습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축이나 짐승과 같은 삶을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런 식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여러분들도 말씀 안에 많이 변화되어 왔지만 아직까지도 이전에 하던 신앙 생활의 뿌리 깊은 패역들이 뽑히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과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중심의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그런 패역함, 그렇게 하나님을 거슬려 살고 성령의 소욕을 거슬려 살아 거듭 실패하면서도 그것이 단지 하나님의 사랑이나 아니면 연약하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살아가는 삶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영적인 삶에 진보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깨달은 것은 같지마는 삶을 들여다보면 깨달은 것이나 깨닫지 못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고 무엇인가 깨달았다고 해도 머리 속에만 뱅글뱅글 돌면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는 사랑이 없는 교만한 모습을 영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는 난센스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가르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가르침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한다거나 신앙에 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추리소설을 보고 대하소설을 볼 때에는 그렇게 잘 굴러가는 머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진리의 교훈을 듣고자 할 때는 즉시 어둠 속으로 떨어져서 모든 대뇌의 기능이 멈추어 버리는 사람들은 비록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고 하니 동물적인 본성에 의해서 야수와 같이 움직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발견된다면 성경을 다시 써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나라에 이르게 될 때에 확실히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든 죄인을 구원받도록 초청하셨지만 그러나 정말 천국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은문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거기는 성도들이 들어가는 곳이지 짐승과 같은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아무리 강조를 받아도 결코 모자랍니다. 그 가르침이 무엇이고 하니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신령한 신앙 생활의 도리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도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성경을 읽거나 우리보다 뛰어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고 진실로 교회다웠던 시대에 살던 선배 목사님들의 글을 읽으면서 죄가 그 앞에 짐승과 같이 벌거벗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수시로 느낀다면 여러분들은 배나 더 느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있고 여러분들은 제 품에서 젖을 먹으며 신앙이 여기까지 자라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먹이시고 기르시고 입히시고 해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습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고 아장거리며 걸어가는 가운데, 죄 가운데 넘어지고 부서지는 그러한 과정들을 하나님과 함께 저는 지켜보았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즉시 넘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구원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임을 알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자기 몸을 깨트려 이와 같은 놀라운 구원을 주셨으니 여러분들은 이제 구원받은 여러분들의 삶에 대해서 정성을 기울이고 어떻게 내가 신앙의 도리를 따라 올바른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지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밤이나 낮이나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삶에 대한 진지한 생각과 사고 없이 오로지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내일은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고 사람들 앞에 내 모습을 화려하게 드러내 보일까, 먹고 마시고 입고하는 이 일을 위해 내가 어떻게 제물을 모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신 구원의 거룩한 옷을 입고 돼지우리를 누비는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끄러움으로 면류관을 삼는 자요 인간의 정욕과 더러운 타락으로 자신의 허리띠를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저들의 배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무리 들어다 보아도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부패하고 아무런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죄와 더불어 싸울 수도 없고 그 죄를 이길 수는 더 더욱 없는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신앙이 깊어질수록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만약에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자신의 전적인 타락,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패하고 비참한 죄인인지를 깨닫지 못하면 여러분들의 신앙의 기반은 결코 그리스도 예수가 될 수 없습니다. 반석 위에 짓지 않은 집은 어느 순간에 결국은 무너지게 되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언제나 기억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의 삶을 진실로 성찰하여야지만 불현듯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자로 발견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타락하고 부패한 우리, 그리고 전적으로 무능한 우리를 향해서 감히 죄를 죽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의 본성은 죄 가운데 익숙해져 있고 타락 가운데 젖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살아가기를 즐겨하고 좋아하는 그런 본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를 죽이고 이기는 삶을 살 수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이 오늘 생각해 보고자하는 첫 번째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거듭나는 순간 거룩한 본성을 주시고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의지하고 거듭난 성품을 의지하지 않는 죄를 죽이는 모든 삶은 실패할 뿐 아니라 더 악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 악한 결과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 의를 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 위해서 금식을 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이러한 죄 죽임에 대한 정확한 교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마음에 솟아나는 정욕을 없애기 위해서 무조건 금식하는 그런 것들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의 의를 쌓아갈 뿐이고 죄를 궁극적으로 이기지 못합니다. 저는 이러한 실패를 이 교리를 바로 깨달아 알기 전에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요한 마음이나 혹은 죄악된 생각이나 정욕을 이기기 위해서 금식하지만 그러나 금식하고 나면서 육신이 기력을 회복하는 것과 함께 다시 강렬하게 살아오는 죄의 정욕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죄 죽임의 방법으로 들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로 하여금 그렇게 회심하고 복음을 깨닫게 만든 것도 이러한 실패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틴 루터의 신학에 있어서도 죄 죽임의 교리는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수도사로서 열심히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그 고달픈 수도 생활 가운데 끊임없이 괴롭게 하는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그 당시 중세의 신학은 이러한 답변밖에는 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내가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갈 때에 그때 비로소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나타나서는 되지 않는 그런 더러운 죄에 대한 부패한 본성이 고개를 들면서 속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그가 했던 것은 지독한 고행이요 지독한 금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간증 속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씁니다. 담요 하나 뒤집어쓰고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서 삼일, 사일씩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그렇게 매달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때도 많았다고 그랬습니다. 심지어는 무릎 팍을 벗고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올라서 온 무릎이 전부다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고행을 하면서 자기 속에 있는 죄를 죽이는 실행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는 자기가 분명히 구원을 받은 것 같습니다. 죄가 그렇게 죽은 것 같고 그렇게 지독하게 금식하고 건강을 헤칠 정도로 쇠약해지고 그리고 온 몸에 피가 흐를 정도로 고행을 하고 나니까 죄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 다음에는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확실히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다시 금식을 풀고 육체가 기력을 회복하게 되면은 다시 반복적인 죄에 대한 욕망이 고개를 들고 온 마음을 에워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그는 어떤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냐하면 이것은 고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더 혹독하게 자기를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의 그림을 보면은 굉장히 건장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까지 금식과 고행의 몸을 바치고 오죽했으면 그 수도원장이 마틴 루터는 더 이상 금식하면 안 된다고 금지령을 내릴 정도로 자기를 쳤지만 결국은 죄에 대한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고 그 수도원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금식할 때 이기지 못했던 그 죄에 승리하는 비결을 피텐베르그 대학에서 성경을 연구해 가면서 시편,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로마서를 공부해 가면서 그가 찬란한 복음의 빛을 발견하면서 그 죄로부터 벗어나는 비결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깨닫는 것 없이 금식을 하는 것보다 유익한 것은 한 마디의 하나님 말씀을 진실하게 깨닫는 것이 깨닫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백 날을 금식하는 것보다 훨씬 하나님 앞에 놀라운 능력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깨닫지 못하면서 남들은 못하는 금식을 열흘씩, 이 십일씩 이를 악 물고 성취한 다음에 남는 것은 금식기도 한 것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포스터에다가 부흥회 강사를 소개하면서 무슨 학교 졸업, 무슨 책을 쓴, 그리고 사십일 금식기도 세 번했음, 무슨 그런 이력이 있습니까. 포스터보고 오면서 “아이고 잘 났다” 그랬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이기지 못합니다.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 하면은 우리 안에 주신 성령, 그리고 성령이 주신 새로운 본성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없는 본성입니다. 도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이 전혀 안 믿는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더 못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사람에게는 없는 그런 마음이, 그런 본성이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고 싶고 죄 가운데 살면은 견딜 수 없이 괴롭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도 그 순간에는 느끼는 즐거움도 안 믿는 사람의 즐거움과 같을 지 모르지만 그렇게 범죄하고 난 다음에 느끼는 그 고통은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깊은 고통과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살고 하나님 품안에서 살고 싶어하는 그러한 본성이 정말 있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부모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많이 받았던 아이가 가출을 하고 그런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다가 고아원에서 매일 매 맞고 학대만 당하다가 도망친 아이가 있을 때 후자의 아이들은 아무리 고생스러운 일이 있어도 고아원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그런 사랑과 동기간들의 따뜻한 사랑이 있었는데 자기가 무엇인가 생각을 잘못하는 바람에 세상으로 나아가서 즐거운 시간들이 지나고 춥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면은 따뜻한 부모의 사랑이 있는 그 품이 그리워지듯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러한 본성, 이러한 착한 마음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쉽게 말하면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런 마음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성령의 소욕이고 또 한쪽의 반대의 죄를 이루면서 살려고 하는 것은 육신의 소욕입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 안에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어떤 식으로도 평화를 이룰 수가 없는데 우리는 이것도 버리고 싶지 않고 이것도 버리고 싶지 않고 두 가지를 묶어 보고 화해를 시키고 이 두 가지를 조화를 이루면서 한 인격 속에 이 두 가지 마음을 같이 품으면서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간단합니다. 그 싸움은 그치지 않는데 은혜가 죄를 이기든지 죄가 은혜를 이기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아예 이 만큼의 신앙 생활도 않고 밖으로 나가버리면 빨리 죄가 이길 것이고 교회에 나오면 늦게 죄가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죄가 반드시 승리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우리 안에 공존시키려고 시도하면 반드시 죄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어느 동물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금방 태어난 쥐와 고양이를 우리 안에서 사이좋게 놀게 만들었습니다. 고양이는 엄마에게 쥐는 나쁘다고 배운 것도 아니고 쥐는 고양이가 나쁘니까 도망가야한다는 것을 배운 것도 아니니까 태어나서 눈을 뜨고 보니까 서로 둘밖에 없으니까 잘 지냈습니다. 결론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잡아먹었습니다. 고양이가 이빨이 커지고 철이 드니까 잡아먹었습니다. 사람과 호랑이 사이에는 그런 식으로 스토리가 안 끝날 수도 있지요?
옛날에 나오는 ‘야생의 엘자’ 그런 영화를 보면은 사자와 인간 사이의 눈물 나오는 사랑, 그런 이야기도 나오잖아요. 얼마든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쥐와 고양이 사이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쥐를 예쁘게 만들어 놓고 고양이를 점잖게 입혀도 둘이 결혼할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왜?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하면은 천적이라고 말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적대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와 은혜가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둘 다 품고 살아가는 것이 처음에는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어느 한 순간에 죄가 확 자라서 은혜를 삼켜 버리든지 은혜가 확 살아서 죄를 삼켜 버리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온전히 죽인 삶,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승리를 확보하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죄를 모두 죽인 영적인 삶은 고상한 성자의 삶이나 평범한 그리스도인은 도달할 수 없는 매우 큰 능력을 소유한 위대한 종들이나 한 두 번씩 살 수 있도록 부름을 받은 죄를 이긴 삶,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라고 한 이러한 삶은 그리스도인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기초인 것입니다. 죄를 죽였다고 해서 모두 죄 죽인 사람 위에 놀라운 성령의 권능이 부어지는 것도 아니고 죄를 죽인 사람이라고 해서 죄를 죽인 대가로 어마어마한 권능을 가지고 이적을 행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수준이 너무나 부패하고 오늘날 교회의 수준이 한심할 정도로 쇠퇴해 버렸기 때문에 죄를 죽인 그리스도인의 삶 그 자체가 엄청나게 고상하고 높아 보이는 것이지 성경은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죄가 온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마음을 하나님 앞에 다스린다라는 신앙생활이 안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배당에 나오는 것은 죄를 완전히 죽인 영혼의 상태가 아니더라도 가능합니다. “교회 안가면 뭘 하겠어”하며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도 죄를 온전히 죽이지 않은 기도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의 경험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형식적으로 (중언 부언 )…? 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어떤 때에는 드물기는 하지만 마음이 모두 녹아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기도될 때도 있지요? 그런데 그런 기도가 자주 있나요? 가끔 있나요? 죄를 온전히 죽인 사람들은 언제나 기도할 때 간절하고 열렬합니까? 그렇습니다. 18세기 전설적인 설교자 “죠지 윈필드”가 매일 매일 자신의 삶을 점검하는 16가지 항목을 만들어 놓은 가운데 첫째항목이“나는 오늘도 열렬히 기도하였는가?” 이것은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통성기도를 했느냐가 아니고 마음을 온전히 쏟아 붓는 심령의 불붙는 기도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 하나로서 모든 자신의 영적 상태를 가름하는 것은 정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온전히 죽이고 마음이 하나님께만 다 부어진 내면의 세계를 소원하지 않으면 기도할 때마다 매일 매일 열렬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서 기도생활 자체가 기질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할 때 습관이 잘못되어서 남이야 하거나 말거나 기도할 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의자까지 흔들고 뒤집어지는 사람들은 성령이 넘친 사람들이 아니라 교양이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통제할 수 없도록 발광을 하는 것이 성령의 감동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은혜가 진짜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는 인격 속에 담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원래 인격적으로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은혜를 그런 식으로 받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것을 유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어야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나 소리 안내고 기도하는 것이나 이런 것들은 그야말로 신앙에 있어서 자기의 성품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뜨겁게 솟아나는 하나님을 향한 북받치는 내면의 세계조차도 그런 것과 안 그런 것의 기질의 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견해입니다.
죄를 죽인 영혼의 상태가 되기만 하면 모두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거의 죽고 성령의 소욕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의 내면의 본성이 거룩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살아날 때 그 영혼이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 기뻐 뛰고 감동하고 감격을 누리고 은혜를 누리고 그 얼굴에 비치는 놀라운 사랑과 은혜 이런 것들을 못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죠지 윈필드가“오늘도 나는 열렬히 기도했는가?” 이 한마디에 그의 영적인 모든 삶이 거의 체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그 성도들이 빈번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감격할 수 있다면 그의 다른 모든 허물들은 용납 해야된다” 고한 “로이드 죤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하나님 앞에 언제나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온전히 하나님 앞에 바쳐지면서 비록 그가 다소간에 흠이 있는 삶을 산다 할지라도 그의 삶을 그의 내면의 세계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인간의 안목으로 볼 때는 도무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고 그 보다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주셔서 그로 하여금 주님의 뜻을 분별하게 해주시는 놀라운 영적인 교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도 이러한 죄 죽임의 상태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몇 주 동안 죄 죽임의 교리를 설교하기 위해서 묵상하면서 정말 새삼스럽게 인간이 얼마나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깊이 깨달았습니다. 정말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에 적대적인 마음과 각오를 가지고 우리 안에 불순종과 우리 속에 솟아나는 정욕들을 죽이려고 하는 강한 의지를 우리들이 갖고 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반드시 죄에게 삼키고 그래서 로마서 8장 13절에 나온 말씀처럼“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반드시 우리가 영혼의 죽은 상태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속에 있는 주님이 주신 성품이 적절하게 은혜를 공급받기만 하면 능히 이 죄를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받고 은혜를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본성이 강한 힘을 얻어서 새롭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번번한 실패를 경험하는 것이지 죄의 능력이 위태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실패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가 많아서 죄를 못이기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모자라서 우리가 죄를 못이기고 실패하고 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하나 깨달아야할 것은 유혹을 받을 때 어떤 계기가 있어서 유혹을 받지 않습니까? 계기가 없이는 유혹 받지 않습니다. 계기로 만나서 그것 때문에 유혹을 받게 될 때 우리 속에 묻혀있던 죄의 정욕과 손잡으면서 우리 안에 죄가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기는 방법은 첫 순간에 격파해야 됩니다. 그것이 가장 고생을 덜하는 비결입니다. 심겨놓아 두면 놀라운 속도로 자신도 모르게 어마어마하게 빨리 자란다는 것입니다. 씨앗은 떨어지면 빗자루로 쓸어버리면 끝납니다. 그렇지만 자고 일어나면 싹이 납니다. 이제는 빗자루로 쓸어도 위에 잎만 짤라지지 속에 뿌리는 남습니다.
하물며 약 보름쯤 내버려두면 풀이 길게 자라서 이제는 빗자루가지고도 안되고 낫으로도 안되고 큰 쟁기를 가지고 와서 뿌리를 다 뽑아 버려야 됩니다.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죄에 들어서고 타락에 들어서기는 쉬워도 그 지속적인 불순종과 죄악된 삶에서 돌이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마음속에서 죄를 품기 시작했다는 것은 소문이 안 납니다. 왜 너무나 일반적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어느 시간에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회개했다는 내용은 소문이 납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러니까 죄 가운데 떨어지고 성령의 소욕이 육체를 소욕에 의해서 짓밟힌바 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 회개를 경험하고 거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화) 우연히 만난 친구인데 학교도 안 다니는 친구인데 세상적으로 보면 질이 나쁜 친구였습니다. 폭력배 생활을 오래도록 하고 소년원에도 몇 번 들어갔다 나오고 그러면서도 인간적으로 참 친해졌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조직 폭력배에 가담했다 가 풀려난 사실을 말하는데 책을 써도 팔리겠더라구요. 들어갈 때도 쉽지는 않았 답니다. 이 사람이 쓸모가 있나 하고 검토한 다음에는 아주 넉넉하게 돈을 준대 요. 그래서 안정적으로 살수 있도록 만들어준대요. 그런 즐거움을 맛보고 얼마 있 다 떠나야 되겠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는 그냥 도망가면 반드시 죽는데요. 찾아 내서 죽인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정정당당하게 보스를 만나서 저 이 바닥에서 손 을 씻고 싶습니다 형님!. 그리고 고백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퇴 소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그곳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자유로 들어갔지만 후에는 그것이 너무나 무서워서 거기서 벗 어나지를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가마니에 꽁꽁 묶어놓고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 서서 발로 차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것이래요. 그래서 맞다가 졸도하고 깨어났는데 앉히더니 손톱 깍기로 손의 살을 다 베어내는 것 그러니까 뼈만 보이 더랍니다.
죄도 우리를 가입하고 죄 가운데로 들어올 때는 미끄러지듯 가볍게 들어오지만 거기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칠 때는 죄는 우리를 순순히 놓아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도록 우리를 우겨 싸면서 모든 마음의 평안함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공포와 두려움을 우리에게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히브리서 12장에서 “너희가 죄와 더불어 싸우는데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하지 아니하였으며” 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면은 생명을 건 싸움이외에는 결코 그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자면 널리 잘 알려진 교회에 가서 “이 교회에서는 어떤 식으로 목회를 하시며 널리 알려진 교회로서 하나님께서 어떤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부교육자가 대답이 걸작입니다. “목사님 ! 비유로 말하자면 우리교회는 이런 교회입니다.”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권투를 하는데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오긴 하는데 목사님의 설교가 쨉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방 맞고 뻗어야 새사람이 되는데 계속 쨉만 날린단 말이죠.“ ”그것도 여러 번 맞으면 쓰러지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목사님!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이골이 납니다.“ 라고 대답하더라구요.
여러분! 말씀 들었을 때 간단히 톡톡 건드리는 것, 아!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주실거야 라고 간단히 와 닿는 것 없이는 교회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아니 비디오를 보다가 보기 싫으면 팽겨쳐 버리는데 하물며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데 마음에 와 닿는 것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장기간에 세월동안 참여할 수 있겠어요. 불가능하잖아요? 조금씩은 맛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 가지고는 전체사람이 안되잖아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날 잡아 가지고 아구를 한방 날려서 완전히 뻗었어요. 뒤로 벌렁 나자빠지자 바닥에 머리를 꽝하고 부딪쳤어요. 그때 회개하고 새사람 되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죄를 죽이는 삶도 그렇게 매일 매일 이러면 안돼지 그러고는 주님 또 범죄 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 저를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제가 지면은 주님 책임입니다. 이기면 내 탓이고 지면 주님 탓입니다. 이러면서 얼르는 신앙생활을 해 가지고는 365일 몇 년을 신앙생활하여도 도무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돌아보세요.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 가운데 놀랍게 변화 된 사람이 누가 있느냐구요? 5년 전에 만난 사람 5년 후에 만나도 그 턱이 그 턱입니다. 그런 식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죄가 거의 온전히 육체의 소욕이 성령의 소욕을 삼키고 이긴 것입니다.
그래서 “라엘” 이라고 하는 사람은 “다락방” 이라고 하는 자신의 저서 속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하기를 “죄는 기도로 죽이고 기도는 죄를 죽인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두 가지 소욕을 함께 묶어 두려고 생각하는 자체가 잘못된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여러분 속에서 일어나는 죄에 대해서 적대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적대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은혜는 죽고 자기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 죄가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느냐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아예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갈등을 느낄 때 교회도 안나오고 나쁜 대만 돌아다니면 급속하게 이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끔 나와서 “이러면 안 돼지” 하고 돌아가면 시간이 조금 연장될 뿐입니다. 지기는 반드시 져요. 오래 걸려서 지는가 빨리 지는가 비슷하지 않습니까?
천천히 타락하느냐 확 타락하느냐 둘 중의 하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국은 패배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놀라운 본성을 주셨는데 이것은 성령의 본성이고 이것은 육체의 본성과 양립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화해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순종이 아니면 불순종이고 의의 길이 아니면 불의의 길이고 진리의 빛 가운데 사는 삶이 아니면 무지와 어둠 속에서 사는 삶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삶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두 번째로 죄를 죽이는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영적인 게으름이 문제인 것입니다. 저는 늘 말씀드렸습니다만 군대에 갔다가 도로 돌아왔습니다. 눈이 너무 나빠서 돌아왔습니다. 저는 현역하고는 인연이 별로 없어서 방위생활을 했는데 방위병들의 생활가운데 50% 이상 차지하는 생활이 바로 풀 뽑는 생활입니다.
저는 도서관에서 근무했어도 오후가 되면 모두 연병장에 나가서 잡초를 뽑습니다. 잔디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들인다면 한 달에 수천 만원 들어가야 할 정도로 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전문가에 의하면 잔디가 종자가 좋으면 거의 2~3일 에 한번씩 뽑는데 3일전에 방위병들이 쪼그리고 앉아서 잡초를 다 뽑는데 지나온 길을 보면 인간성이 다 들어납니다. 성실한 사람은 깨끗하게 잡초를 뽑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의 뒤를 돌아보면 잡초가 그대로 있어요. 그런데 운동장만한 운동장에서 뽑은 잡초가 몇 트럭이 나와요. 신기하게도 이틀 있다가 나와 보아도 또 똑같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만약에 일주일 내지 보름만 내버려두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무덤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풀 무덤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골프장이 왜 안 비싸겠어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영적인 생활도 똑 같아요. 매일매일 죄를 죽이는 신앙생활이 아니면 안됩니다. 여러분 가끔 보면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한꺼번에 소나기 은혜를 한꺼번에 받기 좋아하는 사람들 그까짓 것 찔끔찔끔 받아봐야 뭐하냐 한번 죄악된 길에서 살다가 왕창 뒤집어져서 한번 새사람이 돼야지 소용없습니다.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 몰라요. 사도 바울이 그렇게 위대하게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기적 때문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반 밖에는 옳지 않아요. 어떤 의미에서 바울 이상의 놀라운 체험을 하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뒤로 미끄러져서 불신자처럼 살다가 간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를 죽이는 성도의 삶은 구원받은 즉시부터 성도에게 주어지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떼어놓을 수 없는 의무로서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이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금방 태여 났는데도 우유병을 주면 빨아요. 신기하지 않아요. 엄마 뱃속에서 젖 먹으면서 살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고 빨까요?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본능이라고 합니다. 대 주면 50cc 씩 먹어요. 금방 태어난 아이가 아무도 안 가르쳐 주었는데도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고 나면 즉시 본성에 가까운 반응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대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생활을 계속해서 제대로 할 때에는 본성이 유지되면서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별로다 라고 생각하다가 이 은혜의 본성이 계속 강화되면서 죄에 대해서 처음에는 싫다하는 생각만 가졌는데 이제는 지겹다, 밉다, 보기 싫다, 죽여 버려야된다 그러한 강한 적대감이 점점 증대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거듭나고 난 다음에는 그런 참다운 지식이 없이 그냥 시간이 흘러가 버리면서 자신이 죄에 물들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삶을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는 삶보다 더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는 우리 속에서 계속자라고 죄에 대한 혐오심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생쥐처럼 자기를 잡아먹을 고양이 앞에서 재롱을 떨고 화해를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게으름은 반드시 우리 속에 있는 은혜를 메말려 버린단 말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겠지요? 영적으로 부지런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에 열심히 참여하고 그것들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배입니다. 예배를 자기가 시간 나고 마음이 내킬 때뿐만 아니라 마음이 내키건 안 내키건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의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주님을 경배하는 신앙생활을 계속해서 해 나가는 것입니다. 기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방편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우리는 죄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찼던 마음이 변하고 주님의 뜻을 쫓아 살겠다는 착한 마음이 다시 말하면 성령의 소욕이 우리 속에서 다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말씀을 깨닫는 것도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고 성경에서 은혜를 받고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하고 그러면서 날마다 죄를 이기면서 살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결심을 가지고 교회당을 나서는 이러한 깨여있는 신앙생활이 매일 매일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가 꿈꾸는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좋은 경건 서적을 읽는 것도 엄청나게 도움이 됩니다. 마음이 메마른 것을 느낄 때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고 하지만 그 때마다 저는 제가 쓴 책을 읽습니다.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를 네 다섯 번 읽었습니다. 펼쳐놓고 천천히 읽어갑니다. 20 페이지쯤 읽다보면 내용은 다 내가 쓴 것이니까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읽어가면서 내 마음속에 그 글을 쓸 때에 내 마음을 감동시켰던 하나님의 감동이 살아나고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 라는 따뜻한 마음이 솟아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를 살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방법 혹은 우리가 은혜 받는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방편일 뿐이지 그 자체가 은혜의 원천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배에 계속 참여하면서도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죄를 죽이는 삶에 저절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전혀 죄를 죽이는 삶에 도움을 못 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심지어는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율법을 지키고 정기적으로 금식을 하고 하나님 앞에 헌물을 드리고 율법을 준수하면서 그러한 제도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겉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경건하게 가꾸어져 가는 동안에 그 속 사람은 더 깊이 썩어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5. 죄 죽임과 거룩한 삶(2)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온갖 죄와 탐욕들이 승리를 하고 완전히 죄가 지배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렇게 죄가 완벽하게 지배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겉모습은 이레의 두 번씩 금식하고 경건 생활의 모습을 할 수 잇습니까? 거기에 대한 답은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껏 까지 잘 하다가 교회에 안 나가면 목사님이 나를 귀찮게 할지도 몰라”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 나오는 사람이 많이 보았습니다. “오늘도 교회에 안 나가면 심방 오고 전도사님이 전화하고 난리 칠꺼야.”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교회 나와 주는 교인들을 저는 교회 생활하면서 많이 발견하였습니다.
이런 것이 결국에는 내면에서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자 아니하고 변화가 일어나지 아니하는 자체를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겉모습을 자꾸 쌓아 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연조가 깊어 가니까 주위의 여건은 점점 자신에게 더 고도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흉내를 내면서 살아가도록 요구합니다. 평신도 시절에는 교회에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말고 싶으면 말겠지만 집사가 되면 최소한 주일 예배는 빠질 수 없는 처지가 되지 않습니까? 직분이 높아 가면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교회적인 제도를 의식하면서 점점 눈에 보이는 경건 생활의 수준을 높여 갑니다. 그러면서 내면의 세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은 은혜의 수단 자체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야 말로 수단 자체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예배 자체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자리에 우리를 갖다 놓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저를 만나 주시고 내 안에 있는 많은 죄악들은 예배 중에 나를 용서하시고 저의 사악한 본성을 거룩하고 불순하고 나의 마음을 정말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꿔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주님이 예배 중에 하늘에서 내게 내려 주는 은혜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나오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석 장 씩 읽어야 되기 때문에 줄치기 위해 읽는 것이 정말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느냐 이것입니다. 오늘 어디까지 읽었는지 생각 안나는 성경 읽기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도, 육체의 소욕은 우리를 이겨서 온전히 삼켜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펴면서 성경을 읽는 것은 나지만 내 영혼에 빛을 비춰서 내 눈을 뜨게 하고 진리의 법의 기이함을 깨달아서 이전에 내가 사랑하던 것을 버리고 진리의 빛 속에서 주님을 찬송하게 만드는 변화의 놀라운 힘은 내가 의무를 이행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이행하는 나를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것 가지고는 자랑할 수 없고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것이 그러한 논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 우리는 은혜의 수단에 자신을 부지런히 내어놓아야 합니다. 주일과 주일 오후에까지 나와서 은혜를 받으면서 겨우 죄를 이기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주일 예배를 빠져 버리고 주일 오후 예배는 재껴 버리고 주일 낮 예배는 느지막하게 나와 반 토막 짜리 예배나 드리고 이렇게 신앙생활해서 이기기를 바란다면 그 사람은 전쟁터에 나갈 때 새 총 들고 나가서 핵무기가 날아오는 전쟁터에 살아 남기를 바라는 사람과 꼭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한 헛된 허용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이러한 신앙생활에 헛된 허용심을 버리지 아니하면 진정한 영적인 생활에서의 승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려서 오로지 죄에 종노릇하면서 살아가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지런히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서 영적으로 게으르지 않도록 열심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어는 순간에 말씀을 주셔서 여러분들에게 크게 감동을 주시고 여러분들을 펑펑 울게 하고 그래서 결국 여러분들이 옛날의 삶을 미워하고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 것이라고 결심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단지 그런 체험만 하고 뒤에 이어지는 실천하는 삶이 없는 성도들은 그런 경험이 매일 매일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심 삼일이라면 삼일마다 한번 씩 그런 일이 일어나면 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죄 죽임의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두 단어가 있습니다. 실천과 성공입니다.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을 깨달았으면 그 다음에는 때때로 살려고 자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이 사라지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예배에 참여하고 마음이 내킨 때나 내키지 않은 때나 하나님 앞에 나와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리는 자기 헌신의 삶을 부지런히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공의로우신 분이시다라고 할 것 같으면 사도 바울 같이 이렇게 “나는 매일 죽노라” 그 모든 지체를 날마다 죽이는, 부지런히 살고 그것을 생명을 건 것처럼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조차도 끊임없이 죄에 실패했다고 하는데 아예 그런 영적인 부지런함이 없고 말씀도 부주의하게 듣고 예배를 드려도 그저 자는 듯 조는 듯 예배를 드리다가 뭘 들었는지도 모르고 예배를 마치고 기도에 게으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아니하고 경건 서적을 읽으면서 자신의 영혼을 고양하지 않는 사람이 빈번한 승리를 거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탐구하려고 하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려고 하겠습니까? 이것입니다. 모든 영적인 삶에 있어서 지름길을 쫓아가라고 하는 것은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지름길은 없습니다. 정확한 길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잘 살펴보십시오. 정확하고 깨끗한 신앙의 도리는 마지막 결국은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게으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조국 교회 성장에 대해서 눈을 돌리고 많은 감동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고 우리도 자랑하려고 하지만 도대체 무슨 자랑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외국에 갈 때마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놀라운 성장에 대해서 Wonderful 할 때 그건 당신이 몰라서 하는 말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나는 정직히 말합니다. 나는 도대체 보따리 싸 가지고 와서 한국 교회에 뭘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무슨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나는 정직히 대답합니다. 그들이 와서 배워 가지고 가는 것은 어떻게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교회가 마치 살아있는 교회처럼 운영 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배워 가지고 간다면 차라리 와서 주기철 목사님이나 길선주 목사님의 자서전이나 한 권 읽고 간다면 오히려 대 환영을 하겠습니다.
천명이 교회에 나와도 수요 예배는 겨우 백 명 정도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섬겼던 모든 교회들이 그랬습니다. 한 교회는 600-800명 정도 모이는데 수요 예배는 150명이 나왔습니다. 한 교회는 550-600명이 모였는데 수요 예배는 50명이 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00교회는 한국에서 알려진 교회입니다. 자기들이 뭐라고 그래도 난 개의하지 않습니다. 그런 교회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죽음이라는 우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가 미래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면 목회자인 저는 교회 대들보에 목 메달아 죽어 버리는 것이 훨씬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교회가 살아 남아서 뭘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문 닫음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다 함이 없는 은혜와 사랑이 그 교회들을 향한 심판을 연장시키고 그래도 그 속에서 살기를 원하는 성들의 애절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 교회를 붙들고 계시는 것이지 그런 교회가 되어서 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백 명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단 세 명만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이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매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 잇는 성도들의 모습입니까? 죄가 훌륭하게 이긴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교회 속에서는 세상에서 발견 할 수 있는 온갖 도덕적인 타락과 부패들이 만연해 있습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말하지만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빛으로 살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 가운데 사는 것이 너무나 즐거울 만큼 그렇게 타락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타락은 단번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서서히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게으른 삶을 살아 왔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되어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교회를 매우 특별하게 만져 주시지 않는 한 십 년 안에 새벽기도는 없어지고 이십 년 안에 수요 예배도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주일 오후 예배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주일 오후 예배 드리기를 포기한 교회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조국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만들어진 것을 길선주 목사님 시대에 만들어 졌다고 전해집니다. 새벽기도 없던 시대에 이 교회들의 부흥과 변화를 위해서 장로 둘이서 기도하기로 결심하고 소문내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나와서 기도했는데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오고 싶은 사람은 그 시간에 나오라고 했더니 400-600명의 사람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새벽 기도를 드리면서 결론이 수요예배 모여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요 예배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자신들이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변화되어서 이 세상을 바꾸어 놓는데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자기들이 그 신상의 신조들 보다 더 신앙생활 잘 하고 있습니까? 더 은혜에 넘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결국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성도가 은혜에 잠기면 잠길수록 은혜를 받고 은혜를 따라 살기를 소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고 반대로 죄와 타협하고 살면 살수록 죄를 짓기 원하는 소원이 하나님 앞에서 일어나서 게으른 삶을 살고자 하는 소원은 점점 더 커집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믿는 삶 자체를 부인하고 불신자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우리 안에 있는 육체가 요구합니다. 타협을 해서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 교회조차도 성도의 의무는 금요일 날 교회에 나오는 것까지는 포함하지 않다고 믿는 성도들이 많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안 나올 리가 없습니다. 왜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이러 이러한 은혜의 수단들이 필요하고 그러한 은혜의 수단들에 간절히 장려해야 한다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데 왜 우리는 그런 의무에 게을리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주신 은혜의 수단들이 적절하게 우리에게 죄를 이기는 능력을 공급해 주지 못할 때 우리는 모두 깊이 우리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으며 교회에 어떤 결함이 있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서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구하고 아버지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예배에 은혜가 떨어지면 하나님이 왜 우리의 예배에 은혜가 떨어지게 하실까를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자신의 교회의 모습은 뒤돌아보고 참회하고 뉘우치며 더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매달려야지 “은혜가 없는 예배 나오면 뭘 해”이렇게 생각하면 파멸로 발을 들여놓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데 기도하면 뭐해?” 이것은 결국 마지막 싸우려고 하는 의지조차 포기하고 투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게으른 삶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게으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우리 영혼 속에는 죄가 이기고 은혜가 사라지면서 마음이 돌멩이와 같이 단단해지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깨달으면서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그 사람에게 적합한 말씀이고 심지어 심령이 그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대로 듣기를 거부하고 깨달음 없이 잘못된 길에서 변화되지 않는 그러한 사람은 이유가 그 마음이 그 만큼 강퍅하고 완악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악하고 강퍅한 마음이 영적인 게으름 속에서 계속 형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돌멩이와 같아서 진리를 향해 돌멩이와 같이 굳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평범한 은혜주심을 가지고는 해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내다 메쳐 가지고 반쯤 죽이시든지 아니면 진짜 제대로 된 영적인 사건을 만나 가지고 완전히 폭파되어서 깨어진다든지 무슨 결단이 나야지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돌멩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거슬리면서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바로 우리의 마음이 돌같이 굳어지는 강퍅한 마음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향해서 얼마나 많이 경고하고 있는지 보세요.
“너희는 오늘날 여호와 앞에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 성경에서 끊임없이 그 경고가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강퍅해 지는 것은 순간적으로 죄악에 빠지는 것보다도 더 끔찍하게 죄앙스러운 일입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아궁이가 따뜻할 때에는 장작을 놓고 불을 붙이면 금방 불이 붙습니다. 엄동설한에 아궁이가 완전히 식고 구들장도 얼음장 같이 차가와 졌을 때는 계속 종이로 갖다 불을 붙여도 연기가 나고 불이 붙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은혜 가운데 살다가 잠깐 범죄한다 할지라도 잠깐 범죄하고 깨달아서 “하나님 이걸 잘못 되었습니다” 라고 뉘우치면 아직 우리의 마음이 식지 않는 상태에서 즉시 하나님과의 회복이 가능해 집니다.
지속적으로 영적인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같이 흩어져 버리는 만큼 은혜를 받아도 사랑이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영혼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더 부드러워져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은 감화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은혜를 받지 않고 죄를 죽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면 이 마음은 돌멩이와 같이 딱딱해져서 웬만한 하나님의 은혜에 녹아지지 않는 돌 같은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누구를 가르치겠다고 마음먹으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돌멩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깨트려져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새사람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언젠가는 똑 같은 마음을 깨트려지시기 위해서 그에게 진노를 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마음을 완전히 녹여 버리고 깨트려 버리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진노를 이루기 위해서는 죄를 죽이는 영적인 삶을 부지런히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수많이 열심히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생명이 걸리는 것 외에는 여러분들이 왜 수요 예배에 안 나오는 것입니까? 안 나오는 사람들의 심리는 이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싫습니까? 죄를 이기는 신앙 생활이 소망이 되지 않습니까? 계속 죄 가운데 머물고 죽어 있는 것 같이 복종하는 신앙생활에 대해서 항거하고 거기에 덤벼드는 영적인 삶을 포기했습니까?
결론을 말씀드리면 수요 예배에 안 나오면 은혜가 충만하고 죄를 이기는 삶을 살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수요 예배 안 나오고 들여다보는 TV가 여러분들에게 죄를 이기는 비결을 가르쳐 줍니까? 친구와 잡담하여 즐거운 교제를 갖는 시간 속에 여러분들이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공급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하는 시간들은 하나님께 멀어지는 시간입니다. 끊임없이 죄를 이기기 위해서 부지런한 삶을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경건한 삶의 심장부에 바로 이런 죄 죽임의 삶이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그것을 죽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거룩한 생활을 촉구하고 그 거룩한 생활을 위해서 두려움 가운데 거룩을 이루며 말하면서 우리에게 거룩한 생활을 촉구하고 그 거룩한 생활을 위해서 두려움 가운데 거룩을 이루며 그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 온갖 영혼과 육체의 불결과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를 하고 있는데 그 바로 문맥 앞에는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되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나옵니다. 성경 속에 나온 모든 약속 가운데 최대의 약속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약속들은 이 큰 약속을 성취해 가기 위한 작은 실천사항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결국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라는 약속을 실현해 나가기 위한 한 과정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너희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하나님이 너희를 부를 때에는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놀라운 은혜는 단지 죽는 날을 기다리면서 손에 꽉 쥐고 있는 천국 가는 기차도 같은 것이 아니라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은 단지 우리가 그런 식으로 구원을 기다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백성 외에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거룩한 삶을 살아 갈 때 이것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룩한 삶이라는 것이 검은 가운 뒤집어쓰고 강단에 올라오는 것이나 하얀 성가대 가운 입고 나란히 서 있는 것이 거룩한 삶이 아닙니다. 진짜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삶을 가리키는 것인데 하나는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한없이 낮아진 삶입니다. 그러니까 교만한 신자는 결코 거룩에 이룰 수가 없고 교만한 성도들의 삶 속에는 결코 죄를 죽이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사람들은 겸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는 죄에 있고 죄를 이기는 삶이 있다면 자기로 말미암아 그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 거기 안에 역사 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맛보는 증거하는 인식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있다면 성령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속에 살아가고 자기의 훌륭한 신앙, 수많은 헌신, 수준 높은 영적인 신앙 생활, 마치 일평생 주만 바라보며 살아온 것 같이 그렇게 자기에 대해서 스스로 대단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주님을 뵈옵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생각을 고치기 이전에는 주를 뵈올 가능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서 있는 신앙의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이 땅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죄인들이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농담 속에서 늘 먹이시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리 영혼을 주관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생명이 그분 손끝 하나에 살려 있는 미천한 버러지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생활입니다. 우리 안에 교만한 삶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도대체 그분 앞에 엎드리려고 하지 않는 마음 1면 364일 신앙생활을 해도 하나님 앞에 깨어진 마음이 무엇이지 모르는 신앙생활, 자기 의에 가득 차서 교만과 아집으로 뭉쳐져서 도무지 하나님 앞에 자기를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그런 사악한 깨트려지지 않는 신앙적인 열심은 그를 실리지 못합니다. 이러한 교만이 우리 사이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좋은 것들은 가로막히고 우리의 부지런한 영적인 생활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영적인 생활의 근원은 메말라 가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 대신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대신에 외식과 거짓된 신앙생활 속에서 만족을 느끼며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무딘 생활뿐만 아니라 그런 무지가 가져다주는 담대함 때문에 교회의 권위에 쉽게 도전하고 성도들의 거룩한 교제를 사악한 교제로 바꾸어 놓고 지체들 간에 하나님이 주신 형상을 마구 짓밟으며 파괴하고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악명 높은 죄악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교회는 법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조차도 받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감싸고 용서하고 이해하면서 신앙 생활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가장 완악하고 가장 불쌍하고 무식하기 이를 때 없는 고집스러운 죄인들조차도 교회에 와서 손들고 한마디 할 기회를 교회는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이 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 멸망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재직회를 하거나 당회나 공동의회를 하면서 소리 지르고 고함치는 정신병자들을 가끔 만납니다. 하나님 안에서 회의하는 거룩한 회의인데 거기에는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생각도 없이 그런 불신앙적이고 혈기 가득 찬 말을 막하는 것은 우리가 어느 안전에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 있을 때 여러분들이 모든 말과 행동을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슬퍼하시고 기뻐하신다는 의식이 없이 나는 나대로 막 산다는 사고 방식으로 교회를 섬기고 교회 안에서 막 살고 교회 밖에서는 더 담대하게 살아가는 이러한 삶은 죽기 위해 태어난 이성 없는 짐승과 같습니다. 이것은 이미 속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성령의 은혜가 아니라 죄의 세력들이고 어둠의 세력들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거듭 거듭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의 내면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지 않는 불순종과 패역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알고 하나님의 참 거룩하신 분이심을 깨닫는 사람들은 그런 식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이런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고난 당하게 하셨지만 우리는 오랫동안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익숙해져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바보와 같은 생각을 갖지 않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는 주님한데 그런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언감생심의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생각 속에 살아가고 교만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속에는 구원의 감각이 메말라 가고 있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목 박혀 구원의 사건을 보면서도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라고 하는 애통함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치는 죄에 대한 참회가 멈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무성하고 십자가의 감격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복음과 구원의 은혜 앞에 감격하는 것은 초신자의 시절 속에 한 두 번하고 마는 신앙적인 센치 메탈리즘이나 생각하고 무식하고 동물적인 본능에 의해 이해되고 왜곡된 복음들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것을 생각할 적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닐 존재들이었고 수많이 사라졌다가는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잡초와 같은 인생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거룩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은혜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죄를 기억하시는 대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기억하며 우리를 그 죄 가운데 구원해 주시고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하심에 감동을 받으면서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내 안에 온전하지 못하는 사랑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내 속에 불의한 삶, 그리고 내 삶을 통해 나타난 불의하기 그지없는 내 삶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황공해 하고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한 번 정직하고 솔직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는 오늘날 우리 나라에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치가 무엇이냐고 물어볼 때에 “거룩입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이 백 명중에 몇 명이나 만날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이 열심히 식어진 사람이고 열심히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예수 믿고 운수대통하는 것이 목표인 것이 열심히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예수 믿고 운수 대통하는 것이 가득 찬 세상에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바보와 같은 생각인지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에 대해서 비관 할 필요가 없지만 지나치게 낙관함으로 멸망했던 교회의 시대를 거울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사고자 하는 욕망이 없는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참 사랑으로 구원을 얻었는지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님을 뵈옵고 주님을 만나면 만날수록 주님의 그 거룩하심을 본받아서 어떻게 하든지 내가 이 어둡고 죄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부득하기는 하지만 주님의 분신으로써 이 세상에 살아가고 싶다고 하는 그러한 간절하고 거룩한 소망을 품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본인의 제자가 자기와 신앙이 같지 발등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색깔이 같다고 떠 벌리고 다닙니다. 난 그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누구냐 물을 때 성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니까 하나님의 명예와 우리의 고 백은 결탁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볼 때에는 아닌데 제발 그러지 말고 다 녔으며 좋겠는데 담대하게 죄 가운데 살고 거룩하지 못하고 속죄 생활을 하면서 담대하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 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넌 그렇게 사니?”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은 성도로 이 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도라고 불러 줄 때 집사님이라고 불러 줄 때보다 자존심이 상한다면 여러분의 신앙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 땅에서 불리워질 수 있는 최고의 호칭이 성도입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은 “차라리 집사”라고 불러 주십시오. 감히 성도의 이름을 감당할 수 없습니까? 그래야 되는 되 교회 7년 나갔는데도 아직 성도라고 불리우는 것에 자존심 상해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성도로 부름 받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가지 아니하면 이 성도라는 이름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거룩하게 살지 않는 여러분들을 보실 때 느끼는 마음이 마치 절대 그게 아니면서도 돌아다니면서 내 이름을 팔고 내가 그 사람을 수재자라고 돌아다니면서 엉뚱한 것을 다해서 내 마음 괴롭게 하는 사람들하고 또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더욱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더 큰 불명예를 느끼시고 더 큰 고통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오늘 깊이 기억하고 오늘 이렇게 거룩해지는 사람을 살기 위해서는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영혼과 육체의 모든 죄에 대해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에 합당하지 않는 삶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술 취하는 삶, 흡연하는 삶, 화투치고 놀음하는 삶, 쓸데없이 거짓말하는 삶, 내물 받는 삶 이런 모든 삶을 미워하고 모든 것을 청산하고 모양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여러분들이 거룩함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요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불러 주시는 성도의 거룩한 이름에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는 전심으로 노력하고 전심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찾아내어서 하나님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베푸시지 않는 매우 특별하고 놀라운 교제를 주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교제의 시간을 주심으로 그 속에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한없이 부으셔서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에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죄 죽임의 교리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예배 시간을 오래도록 고통스럽게 참고 견디었는데 죄 죽임에 도달한 사람이 예배 시간을 통해서 자신이 완전히 충전되는 감화를 맛보는 것입니다. 죄 죽임에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기도를 하면서 시계 보기에 바쁘고 끝나는 시간을 기다리기에는 바쁜 데 죄 죽임에 도달한 사람들은 기도의 문이 열리면서 하늘의 신령한 응답이 쏟아지는 것들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는 앞에 사람은 예배를 마쳐도 죄를 이길 힘을 공급받지 못했는데 뒤에 사람은 예배를 다 마친 후에는 정말 더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소원을 갖게 되고 실제로 죄를 이길 수 있는 담대한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 자는 더욱 부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면서도 점점 가난하게 되어지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은혜 속에서 죄 죽임에 도달한 사람들은 더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이 어려지고 죄 죽임에 도달하지 못하고 사악한 본성 속에서 끊임없이 지는 사람들이 마음은 점점 돌같이 굳어져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제가 하나님의 모든 사랑으로 여러분들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이 지상에서 우리 성도들의 삶은 휴식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죄와의 화해도 있을 수 없고 휴전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받았으면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불철주야 죄와 더불어 싸우고 그 힘을 공급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매달리고 우리 안에 죄된 본성을 소멸하고 거룩한 은혜의 본성을 주님이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살려 주시도록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롭고 우리 자신을 뒤돌아 볼 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산 것이요 오직 내 안에 주께서 사신 것이다라는 고백이 언제든지 쏟아져 나오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분투하고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고난을 받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처절하게 고난을 받으며 우리의 승리하는 영적인 삶을 위해서 우리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지고 지름길을 찾는 대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보며 고난의 감화를 받으며 이 길을 담대하게 걸어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을 온전히 승리하면서 살고 죄를 이기고 결국은 그 사람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는 빛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빛이 되었으며 그는 소금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는 이미 소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삶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싶어하고 심지어는 참다운 구원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고 그의 인생 길에서 수많은 어둠의 길에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가 무엇이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제일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드러내 보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삶이 필요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와 더불어 싸워서 이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6. 죄 죽임이 없는 신앙의 위험(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謹愼)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榮光)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1-14)
(예화) 10년 전 심한 두통에 시달리다 한약 120첩을 먹고 나은 내용.
처음 한약을 먹을 때는 구토할 것같이 힘들었는데 계속 먹으니까 녹차 먹는 기분이었습니다. 쌉쌀하면서도 먹을만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늘 왜 한약 먹는 이야기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죄를 죽이는 신앙생활을 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마음의 고통 없이 죄를 계속 삼키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죄 죽임이 없는 신앙생활은 마음의 고통 없이 그 죄를 계속해서 삼키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을 좀더 설명하자면 우리들이 조금 싫어하는 음식이라 하더라도 아주 기분 좋게 먹으면 웬만하면 속에서 소화가 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젓가락을 들었는데 냄새가 아주 역해서 싫다 하면서 먹었습니다. 영락없이 속에서 부작용을 일으키고 심하면 구역질을 해 밖으로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죄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부족하지만 하나님 앞에 매일 죄를 회개하고 은혜생활을 계속하고 말씀에 큰 깨달음을 받고 열심히 기도하고 그렇게 하면서 은혜생활을 유지해서 죄를 죽이는 삶을 살게되면 어느 순간에 우리들이 죄를 짓게 된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면 즉시 이 죄가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점점 그 고통이 심해져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그 고통에 못 이겨 죄를 토설해야만 해결됩니다. “하나님 아무도 모르는데 사실은 제가 이런 저런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 쥐옵소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죄를 토설하고 깊은 마음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신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우리를 용서해주시면 다시 우리의 내면의 세계가 죄와 친화적인 성격을 가진 내면이 아니라 죄를 거부하는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죽이지 않고, 하나님 앞에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계속하게되면, 그 다음에는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죄에 대한 친근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죄를 지어도 그것이 가책으로 느껴지거나 마음속에 고통스러운 통증이 안 옵니다. 그런 것들이 오지 않으니까 하나님 앞에 회개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회개하면 우리들에게 떠오르는 것은 주님의 용서, 주님의 큰 기쁨, 그리고 회개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 위로, 이런 것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것들이 회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기 전에 먼저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이것이 죄다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철저히 느끼면서 그것 때문에 가슴 아픈 시간들이 먼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사랑을 베풀어주셨는데 내가 왜 이렇게 나쁜 일을 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을까’하는 깊은 자책과 아픔이 있고 난 후에, 그 죄를 토설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용서와 평안과 위로를 주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으면 죄에 점차 점차 익숙해집니다. 그러니까 죄를 죽이고 은혜를 받아서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셔서 우리에게 그 죄 때문에 고통을 겪게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았고 그래서 예배에 참석하면서 하나님께서 예배 중에 임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크게 체험을 합니다. 그래서 ‘아 예배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은혜를 주시는구나’하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가 예배 중에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지 못했을 때,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을 때, 즉각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번까지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은혜로운 예배를 드렸는데 지금은 왜 이런 일이 잃어 났을까? 왜 하나님이 나의 예배를 받아주시지 않을까?’하며 고통을 느끼는 겁니다.
기도가 잘되어서 살아있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해봤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일주일정도만 기도문을 막으시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기도의 문이 막히게되면 이전에 하나님 앞에 죄를 죽인 삶을 살았을 때에 기도의 문이 열렸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기도의 문이 막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를 깨닫게 됩니다.
죄를 죽이는 삶을 살면 하나님이 말씀을 펴거나 설교를 들을 때 끊임없이 깨닫는 마음을 주십니다. 계속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늘 말씀을 듣고 나면 가슴이 충만하게 가득 차서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되겠다는 거룩한 결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왜냐하면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들어도 그것은 들은 것이 아니라 들린 것입니다. 예배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예배에 와서 견딘 것입니다.
지난 주일은 꽤 오래 견뎌야 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죄를 죽이지 못한 사람은 오늘의 소망도 빨리 끝나서 집에 가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자기를 즐겁게 할 수 있는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기도의 문이 막혔는데 기도가 자기를 즐겁게 하겠습니까?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말라붙었는데 찬양이 자기를 즐겁게 하겠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정신으로 살지를 않았는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영혼 속에 기쁨이 생겨나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이 그에게 무슨 즐거움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신령한 성도들의 모임 속엔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을 부어주신 것들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까 말씀이 자기에게 깨달아지지 않아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무슨 죄 때문에 이런 일들을 경험할까? 왜 나에게 이런 깨달음이 없을까?’ 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거나 아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삶이 없이는 신앙에 있어서 어떠한 거룩한 진보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냉정한 증거입니다.
(예화) 예배시간에 계속 조는 것을 지적하니까 콩나물에 물을 주면 물이 빠지더라도 콩 나물이 자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그 사람이 세월이 흘러가면 저절로 새사람이 되는 예는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죄를 죽이는 삶을 -우리처럼 죄 죽임의 교리가 무엇인지를 철저히 몰라도- 어느 정도 실천할 때에 그의 영혼은 사는 것 같은 경험을 하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 삶들이 반복될 뿐이지 진정으로 우리 주위를 바라보면 이십 년 전에 그렇게 믿던 사람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한심하게 삽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죽어라고 교회에 나오는 것, 그것 하나밖에는 변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도 자기의 자랑으로 삼아서 “이 교회를 이십 년을 다녔는데” 그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해주신 것은 교회 다니게 하시려고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품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만드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 다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체가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사람이 교회 몇 년 다닌 것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죄를 죽이는 삶을 매일매일 실천하지 않으면 마음의 고통 없이 죄를 삼키게 됩니다. 그래서 이 죄를 향한 자신의 양심과 신앙이 완전히 마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서 계속 죄를 향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시고 용서해주시는 분이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죄를 지으면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정욕으로 바꾸는 것과 똑같이 사악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새로운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훌륭한 탈출구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양심의 정죄와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예화) 미국에 갔을 때 한 형제가 목사가 되기 위한 면접 시험에서 너 같은 인간이 어 떻게 목사가 될 수 있느냐고 비난한다면 뭐라고 답변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엉 엉 울었다는 이야기.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나같이 부족하고 나같이 허물이 많고 인격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질문이 너무나 자기의 가슴을 찔러서 대성 통곡하고 어린아이처럼 울었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가 되었던 것은 그 순간에 ‘나의 나 된 것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라.’하는 말씀이 생각나서 “맞다 너희들이 내가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될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목사가 되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고백이나 신약 성경을 써 내려간 사람들의 고백을 보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사도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것을 강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내가 지금 깊이 짓고 있는 죄, 지금 내가 생활하고 있는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생활에 대해서 깊이 회개할 때에는 양심이 총동원되어서 우리를 찌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그런 식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살도록 우리를 내버려두지는 않으십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은 사람이 폐인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양심의 모든 가책을 받고 충분히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에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들의 깊은 신뢰와 믿음이 좌절과 정죄에 빠졌던 우리를 단숨에 건져내어서 하나님 앞에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서 그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기대를 갖는 것은 심리적으로 더욱 더 그 죄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범죄 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은혜에 감격해서 그 죄를 떠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의 교리를 빙자해서 그 죄 가운데서 계속 벗어나지 않는 겁니다. 범죄 하는 순간에 신자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대는 성령이 그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의식으로 불러일으키거나 마귀가 주는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청교도 ‘죤 오웬’은 죄에 대해서 말하기를 “신자가 죄를 짖는 그 순간에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그 표현이 마음에 안 듭니다.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신자가 죄를 짓는 것은 그 순간에 하나님의 면상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 한 번이 아니라 계속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나로부터 침 뱉음을 당하는 그분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저는 이 평범한 교리를 모르기 때문에 거의 마귀에게 짓밟히다시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수없이 만났고 요즘도 만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의 양심과 그들 안에 있는 성령이 증거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고 더 하나님을 닮고 그 은혜를 받았으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싶어하는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죄사함과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있으면서 그 죄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자신의 그런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봅시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용서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성경 요한일서에 의하면 우리를 깨끗케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죄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그 십자가의 보혈을 생각합니다. 주님의 권능과 능력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 가운데서 다시 부활로 살리셔서 하늘에 오르게 하신 것은 수많은 사람들로 회개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면서 자신은 죄에 깊이 더 빠져들어 가면서 하나님이 자기는 아무 노력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에 죄 가운데 살고 있는 나를 상하지 않게 품으로 안아서 죄에서 자기만 번쩍 들어서 순식간에 빛의 나라로 옮기실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느니까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경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회개하라”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번쩍 들어다가 옮기면 되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들이 비가 오는 날 진창에서 진흙을 기지고 장난을 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잘못 만지면 옷에 다 묻습니다. 그러면 오라고 부르지 않고 노는 아이를 뒤에 가서 엄마가 번쩍 안아서 목욕탕에 가서 씻길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죄 죽임을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했는데 우리가 읽은 그 성경 구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양육하신 것은 불경건함과 모든 더러운 것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해내서 결국은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은혜는 불경건과 더러움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려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데, 자기는 죄 가운데 계속 머물러 살기 위한 방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는 것이니까 즉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지금 저는 적어도 한국 교회에서 평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광범위하게 경험하는 실패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우려 듣지 아니하면 다른 많은 말씀에 감화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말씀이 여러분들을 세우는데 얼마나 부족한지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죄를 범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과도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거라는 겁니다. 더군다나 죄 지은 사람들을 위로한답시고 지금 말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위로하는 것은 그 영혼을 죽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삶을 그치지 않고는 어떠한 하나님의 축복도 그의 영적인 삶 속에서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담대해져가고 면역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자신이 변해 가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죄의 경중은 내가 그것을 심각하다고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죄의 크기와 죄의 종류가 정해져 있고 이 기준이 그 죄에 대한 심판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열심히 죄를 죽인 사람들은 작은 죄에도 아주 심각하게 부들부들 떠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번에 번역되어 나온 책 가운데 ‘죠나단 에드워즈’가 쓴 ‘놀라운 회심 이야기’ 뒤편에 보면 ‘피비 바틀릿’이라고 하는 4년 11개월 정도 된 어린아이가 죠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목회 하시던 노스햄프턴 교회에서 부흥을 경험하고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이가 늘 없어지는데 왜 없어지나 했더니 헛간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다가 그 아이가 거기서 성령을 깊이 체험하고 부흥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아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4년 11개월이니까 우리나이로 다섯 살이나 여섯 살밖에 되지 않는 예배드릴 때 천방지축 밖에서 뛰어 노는 나이입니다. 그 아이가 그렇게 깊이 회개하더니 매일 주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너 교회에 가면 멋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그렇게 주일을 기다리니?”하고 물으니까 이 아이의 말이 간단합니다. “아니에요. 어머니, 그날은 바로 죠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날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의 설교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최근에 나온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든지 ‘신앙과 정서’와 같은 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4년 11개월 된 어린아이가 그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 겁니다.
동네 언니들이 그 아이를 데리고 자두 따먹으러 가자고 꼬셔서 요즘 말로 서리를 했습니다. 쫓아가서 자두를 따서 실컷 먹고 가지고 왔습니다. 어머니가 보고 깜짝 놀라 야단을 쳤습니다. “왜 이것을 가져왔느냐? 이렇게 남의 물건에 손을 대고 주인도 모르게 그것을 따먹고 가져오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이다” 그것을 얘기하는 순간 이 아이가 너무 서럽게 우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언니보고 왜 나에게 이것이 잘못이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느냐 하며 하루종일 엎드려 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그 집을 찾아가서 우리 아이가 이것을 따먹었고 그랬으니까 내가 이것을 변상해주겠다고 해서 모두 해결이 되고 돌아와서 주인도 이제 너를 용서해 주었으니까 하나님도 너를 용서했을 것이라고 했는데도 한동안 그 과일 자체에 대한 지독한 혐오감을 갖는 겁니다. 그 과일 보기만 해도 치를 떠는 겁니다. 자기를 죄 가운데 빠지게 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한 자의 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죄를 죽이지 않는 삶을 계속하면서 은혜를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자기 기만으로 가득한 모습이냐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도 믿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그 사람의 신앙의 상태를 변화시키는데 어떤 도움도 줄 수 없고, 죄로 말미암아서 곤고해지고 비참해진 그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는다면 그것은 명백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가 아니기 때문에, 범죄 하면서 죄를 죽이지 않는 삶을 살며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고 죄에 대해서 집착하게 만들고 안심하고 죄 가운데 머물러서 살도록 그에게 계속 힘을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잘못 가르치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겁니다. 바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렇게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왜냐하면 자기는 이렇게 비참한 실패를 당하고, 결국은 많은 사람을 형식적인 신자로 만드는 원인제공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젊은 시절에 나름대로 은혜를 받고 뉴잉글랜드, 지금으로 말하면 미국 선교에 꿈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선교를 하러 갔는데 결과는 아주 비참한 실패였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대서양에서 큰 풍랑을 만납니다. 삼킬 듯한 풍랑을 만나서 배가 기울기 시작하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몰려다니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거의 미친 사람처럼 뒹구는데, 배가 기우는데도 갑판 한구석에 모여 앉아서 열심히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는 모라비안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와 자신도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 하면 여기서 살아 남을까를 생각하며 허둥대며 뛰어다니는데 그 사람들은 요동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요한 웨슬레는 자기가 뭔가 잘못된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신을 갖게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위협 앞에 놓였을 때 저 사람들처럼 저렇게 하는 것이 성경에 훨씬 부합하는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오늘날 왜 이렇게 형식적이고 죽어있는 신자들이 많은 신앙생활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는지 압니까? 여러분이 다 기여한 것입니다. 여러분을 보고 다 배운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다 배운 것입니다. 서로서로 배워서 합력 하여 악을 이루어 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실로 복음서가 원하고 신약성경이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면 오늘 같은 시대에는 여러분의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충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등불 하나라도 켜 있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왜 등불이 안 들어오나 생각하면서 ‘아 난 불 꺼진 등불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뭔가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등은 화려한데 너나할 것 없이 다 불이 꺼져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극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촉진시키는 것이 누구냐 하면 죄를 죽이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형식적인 신앙이 만연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만하면 낫습니다. 어쩌다가 어떤 영혼이 어떤 계기가 있어서 그렇게 거의 형식적인 신자들만 있는 교회에서 밖에서라도 은혜를 받고 새사람이 되어 돌아와서 참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알게되면 주위에서 박해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향평준화를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공하면 아주 더러운 위선자가 되고 그것마저 실패하면 완전히 물러가 침윤에 빠져서 패역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삶 없이 신앙생활에 성공하면 신앙의 형식을 고스란히 잘 간직하는 겁니다. 그리고 점점 더 신앙적인 모습을 교회 안에서 요구받게 됩니다.
(예화) 한 장로님이 35년 전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여인에게 전화를 받은 이야기-장로 가 아니었다면 90% 범죄 했을 것이라는 고백.
이 말에서 허실을 찾아보십시오. 고도의 죄를 죽이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다보면 직분이 높아지고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지는 가운데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제법 도덕적으로 갖추어 가도록 강요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죄를 이기게 한 그것이-물론 그 사람의 경우에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부도덕한 삶에서 떠나는 것은 꼭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 때문에 죄에서 떠나고 부도덕한 삶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경우에는 혹시 내가 옛 생활로 돌아가면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좋은 평판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도 우리로 하여금 죄의 외면적인 모습을 버리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죽이지 않는 신앙생활이 잘 성공하면 껍데기는 아주 경건한 그리스도인 같고 속은 완전히 썩어있는 회칠한 무덤 같은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최고의 도달할 수 있는 기대치입니다. 그리고 최악의 기대치는 결국 그 형식까지도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죄 가운데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가는 순간까지는 우리의 신앙을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는 정말 마음으로 존경하던 그리스도인이 막판에 불신자같이 휴지처럼 구겨진 인생을 사는 사람을 여럿 보았습니다.
(예화) 부흥사가 와서 승리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라고 할 때 유일하게 손을 들었던 한 형제를 10년 뒤에 만났는데 불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예화) 한 신실한 기독교인이 아이가 없다고 씨받이를 했다는 이야기.
(예화) 잘 아는 목사님이 아이를 데리고 설악산에 오르다 한 승려를 만났는데 그 승려 도 신학교를 졸업했었다고 하더라는 이야기.
그렇게 은혜 받고 신학교를 갔어도 막판에 중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형식까지 모두 무너져버린 마지막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심한 이야기지만 신앙생활이 실패하게 되면 아주 경건하던 사람들이 창녀촌의 포주가 되어서 발견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에 썼듯이 훌륭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목사가 가슴에 칼을 품고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알코올중독자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결국 죄에 져서 마지막에 모든 것이 다 허물어진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지 않는 신앙생활이 성공하면 아주 아름답게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삶을 살아서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 있을진저”라고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하는 것이고, 그것마저도 실패하게 되면 모두 허물어져서 패역의 길을 가게되는 것입니다. 불신자와 같은 패역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예화) 아주 성실한 회계집사가 단란주점하는 이야기.
매일매일 죄를 죽이지 않는 삶을 사니까 결국은 죄가 자기를 죽여버리게 된 비참한 결과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신 속에 있는 죄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그것과 더불어서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승리하는 삶을 조금이라도 살지 못하면서 계속 교회 다니면, 훌륭하게 성공하면 고도의 위선자가 되는 겁니다. 겉으로는 거룩하고 속으로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고도의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성공했을 경우에 겨우 그 정도입니다.
죄를 죽이는 삶이 없는 사람이 다 세상으로 도망쳐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완전히 무너져버린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아까 얘기한 것처럼 비교적 성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나옵니다. 종교적인 열정은 있지만 그런 열정의 동기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데서 오는 열정이 아니기 때문에 인내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냄비처럼 끓다가 식어버리고 뭘 해보겠다고 하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팽개쳐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열정은 있고 소란을 떨고 박수도 치고 고래고래 소리는 지르는데, 문제는 의로움이 없는 겁니다. 심령이 의롭지 않습니다. 종교적으로 열정은 있고 열심은 있는데 여전히 삶이 불의한 것입니다. 탈세하고 술 먹고 담배 피우고 화투치고 하는 삶을 청산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다 버려야하는 옛날 삶인 것입니다. 성도가 되었는데 그런 것을 해야겠습니까? 그들은 방탕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예배시간에 은혜를 받고 나서 오후예배 끝나고 난 다음에 단란주점에 가서 술 퍼먹고 밤새도록 춤추고 여자들하고 나쁜 짓하고 그럴 수 있습니까? 대부분이 그럴 수 없습니다. 방탕을 택해서 방탕함에 빠진 삶은 안 사는데 문제는 모든 사고방식이 여전히 세속적이라는 것입니다. 세속적이라고 하니까 탈세하고 바람 피우고 사람 죽이고 사기 치고 하는 것만 세속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화) 귀순 용사가 하는 냉면 집에 가서 표를 받고 한 시간을 기다린 이야기.
그런 것이 세속적인 겁니다. 그런 세상 사랑의 삶을 계속 살아가는 겁니다. 예배당에는 10분도 일찍 못나오면서 백화점에서 바겐세일 한다면 30분전에 가서 기다리는 것, 이것이 세속적인 겁니다. 교회 봉사하는데는 10분도 시간을 못 내면서 계꾼들이 모여서 온천이라도 간다하면 새벽부터 일어나 설치는 것, 이런 것이 세속적인 겁니다. 사랑이 아디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방탕은 거부하지만 사고는 여전히 세속적입니다. 물론 사람을 찔러 죽이고 강도처럼 돈 뺏고 겁탈을 해서 자기 야욕을 채우고 이런 것은 싫어하지만, 마음속에서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자기 분량에 너무 넘치는 죄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뭔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이지 하나님 때문에 절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결국 죄는 언젠가는 우리를 거기까지 몰고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말하는 것은 ‘영’자가 많이 들어갑니다. ‘영적으로 생각할 때’ ‘영적인 은혜’ ‘영성’ ... 말은 그렇게 좋은데 그의 삶은 영적이 아니고 아주 육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헛된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사실은 그렇게 자랑하지만 사람을 용서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어느 정도 교회 잘 다니고 있으면 술 담배 안 합니다. 아직도 하는 분 있으면 오늘을 계기로 끊으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면 가야할 데 안 가야할 데 어느 정도 가려서 갑니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구분하기는 하는데 세상의 불쌍하고 연약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게 바로 외식하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자기가 경건하고 고상한 척 하면서 진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해서 아무런 동정도 없는 무자비한 삶, 정죄하는 삶, 이것이 바로 고도의 위선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가득 차 있어서 세상이 변하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추호도 변화되지 않는 겁니다.
이렇게 죄를 죽이지 않으면 겉모습은 그럴듯하게 기독교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 속은 철저하게 죄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할 때 그 제사를 무효로 돌아가게 만들었던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죄를 죽이는 삶이 없으니까 내면의 세계가 정결하고 거룩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치중하는 것은 내면의 요구 없이도 행할 수 있는 외적인 것, 그런 것들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교회가 왜 교회를 그렇게 엄청나게 크게 지었는지 압니까? (120년째 짓고 있는 성당이 있음) 그것은 예배당에 들어가는 사람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 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가 지배해서 영혼들을 압도해서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세워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얼마나 부패한지를 보여주던 시대에는 그런 것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습니다. 청교도 예배당들은 아주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식 같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소박한 강단, 높이 세운 중앙의 강단, 강단 뒤에서 들어오는 계시의 빛을 상징하는 창문, 의자, 그것이 다입니다. 천장에 이상한 무늬를 넣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영적인 내면의 세계를 바꿔 놓을 수 있는 진정한 변화의 힘이 없으니까, 그러한 내면의 변화를 바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일, 제도적인 것, 돈 들여서 짓는 건축 같은 것에 신경을 쓰면서 권위를 가장하는 것입니다. 거기 들어오는 사람들의 기를 죽이면서 굴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화) 강대가 4개까지 올라가 있는 교회.
모든 것들이 그런 식으로 권위주의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내면의 생생한 생명력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사람 속, 말씀의 참된 의미, 이런 것들이 아니라 겉모습, 외형, 이런 것들에 신경을 쓰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계속 자기를 속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더 강퍅해져 가는 겁니다. 그런 삶을 너무나 많이 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은혜로부터 굉장히 멀어진 삶을 살면서도 자기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자기가 망가진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자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지만 그 진리의 말씀과 함께 그 진리의 말씀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요한 웨슬레가 그랬던 것처럼 ‘아 내 신앙은 뭔가 문제가 있구나’하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여러분들의 존재 자체가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모두 충격이 됩니다. 이것이 제가 이야기하는 ‘불꽃같은 삶’입니다. 예외적인 삶이 아니라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일반적인 삶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갖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신기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소금들이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등대에 불빛이 들어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등대의 불빛들이 사위었기 때문에 그 불빛이 아직까지 간직되어서 어두운 하늘에 빛나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상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삶이 없이는 성공하면 고도의 위선자가 되고 실패하면 그 신앙의 형식마저 완전히 파괴되어서 뒤로 물러가 침윤에 빠져서 결국은 타락의 길로 접어든 사람들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하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에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커다란 죄의식을 같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생각은 ‘이제는 내가 죄에 대해서 자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뉘우쳐 본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함께 경험하면서도 또 다시 즉각적으로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또 이런 죄에 안 빠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그런 죄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그래서 긴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신앙의 비밀에 대해서 충분히 터득하기도 전에 유행하고 있는 은혜의 교리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오해한 은혜의 교리입니다. ‘하나님은 다 용서해 주신다. 우리가 어떻게 살던 지간에 주님이 뒷감당은 다 해주신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다 씻어주실 것이다’ 이런 식의 거짓된 복음이 유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향해서 긴장하는 삶을 살던 자신의 긴장 어린 삶을 즉시 포기하고 해체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파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설교하면서도 소수의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 벽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파멸한 그리스도인이냐 하면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죄를 죽이는 삶을 너무나 오랫동안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그냥 흐름에 자신을 맡겨버린 겁니다. 형식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훌륭하게 가지고 있지만 내면의 세계 속에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사실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성경이 여러 곳에서 신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신부와 신랑에 비유했는데, 부부에게 “왜 사느냐”고 물으면 “죽지 못해서 살지요”라고 한다면 부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헤어지지 말라고 해서 삽니다”하면 불행한 겁니다. 그런 식의 삶이 바로 그런 사람들의 신앙생활 모습입니다.
주님의 참사랑을 알고 사랑하는 감격이 있고-사랑하는데는 감동이 있습니다- 죄를 죽이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감화와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의 참사랑이 우리에게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십자가를 경험하게 되고 주님의 그 참사랑을 깨달아 알아서 이전에는 단지 듣기만 했는데 이제는 그 사랑의 품에 안겨서 그 참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맛보는 놀라운 특권을 하나님이 죄를 죽이며 사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생각해야 합니다. 죄를 죽이는 삶 없이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위선자의 삶이고 실패하면 죄가 의도했던 바와 같이 결국은 최악의 상태에서 우리들이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생을 사는 날 동안에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가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당연히 지불해야하는 몫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이 죄를 죽이면서 살아가는 삶을 조금도 흐트러트리지 않는 신앙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날 낮 예배에 달랑 와서 시계 보며 끝나는 시간 기다리다가 뛰쳐나가는 신앙생활을 해서 죄를 이기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왜 삽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그리스도의 구원이 아니면 이 세상에 아무 의미가 없고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세례를 받을 때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은혜가 아니면 우리의 인생은 어떤 소망도 없고 우리 앞에는 파멸과 어두움밖에는 남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밖에 어떤 인생의 행복도 없다는 사실을 믿고 시인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직까지도 이 신앙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들이 외식을 쌓아가고 많은 사람들 앞에 겉모습만 갖춰 가는 그런 외식으로 화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주님이 우리가 그렇게 예배드리는 모습 그 자체를 가증스럽게 생각하시고, 우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실 적마다 마음에 없는 짓 그만 두라는 주님의 가책 어린 음성을 듣는 처지 속에 있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분들의 귀에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싶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짐승이 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와서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동시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계속해서 그 예배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되도록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고민을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주위의 성도들을 보면서 날마다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고 자기를 부인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나는 이미 죽었고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만들어서 그런 신앙생활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정죄 받고 있는지를 깨닫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신앙 생활할 때 마지막에는 파멸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가슴에 다가오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삶 없이 어떠한 거룩의 진보도 없으며 하나님과의 친밀함도 없을 것입니다. 성공하면 고도의 위선자요, 패배하면 패역과 배도의 길을 걸어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가능성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적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죄를 죽이는 삶 속에 게을리 해왔던 우리의 삶을 참회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가슴 깊이 ‘하나님이 이 예배는 나를 위해서 만드셨으며 오늘 내 마음속에 찾아왔고 나는 그분을 만났으며 이제는 내가 그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달았고 그리고 오늘 이 예배가 나에게 있어서는 영적인 회복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예배가 여러분 생애에 몇 번이나 되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최근에 하나님 앞에 가슴이 물같이 녹으면서 하나님 앞에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혼자 매달려 기도하는 것 같은 그런 상태로 들어간 일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여러분 지금도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흘린 눈물이 남아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원을 믿고 그렇게 사육 받는 짐승처럼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주일날이면 수천 명씩 모이는 교회들이 주일 밤이면 사람을 찾아 볼 수 없고 수요일 날 나와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교인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 이러면서 그들은 도처에서 죄에게 패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게으르게 신앙생활 하는 동안에 도처에서 그들은 패배하고 은혜는 마르고 죄는 살아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지난주에 받은 은혜를 불씨를 간직하는 것처럼 여러분들 속에서 간직하며 살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는 깊이 반성하고 피 흘리기까지 죄와 더불어 싸워서 자신을 정결케 하고자하는 노력이 없이는 누구도 신앙적인 진보를 이룰 수 없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우리를 형벌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멸망이나 사망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간절한 소원은 우리 모두가 산 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고 당신을 인해서 한없이 기뻐하는 성도들의 무리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런 참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후에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깨달으면서 주님과의 더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에게 기쁨이 되고 이렇게 경배하며 예배할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 계시다고 하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행복이 되는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택하셔서 주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말 성도가 되려는 노력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이런 성도가 되려는 노력의 중심부에는 매일 죄를 죽이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은혜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매일이 아니라, 매시간 마다 그리고 매분 마다 매초 마다 하나님이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부어주시는 그 은혜의 감격 없이는 지금은 잠시 살아있는 것 같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죽은 자와 같다 할지라도 오늘도 말씀을 들으면서 진실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죽이기를 게을리 하며 살았던 형식적인 신앙들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을 되찾으며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는 지금은 죽은 자와 같은 사람들도 놀랍게 살리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을 죽음 가운데서 건져내신 위대한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외식하는 신자들로 남지 않도록 우리의 죄를 끊임없이 죽이며, 주님을 위해서 매일매일 은혜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우리의 육신을 복종시키고, 안락을 좋아하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평탄하고 안일하게 살려고 하는 우리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죄 지을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죽이면서,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 속에서 성도의 교제를 그리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길 이외에는 참으로 살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7. 죄 죽임이 없는 신앙의 위험(2)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4)
(예화) 직장에서 처음 발령 받은 여직원의 부정행위의 정당화되어 가는 과정.
(예화) 우리는 몇 해 전에 부천 세무서의 엄청난 부정행위- 천문학적인 숫자의 부정.
이유는 간단합니다. 처음부터 그러한 범죄를 모르는 사람에게 큰돈을 가져다주면서 이렇게 범죄하면 이만큼 보상하겠다고 유혹하면 거기에 넘어갈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에 대한 유혹은 항상 어느 날 기적과 같이 자기 앞에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작은 죄에서부터 서서히 파고 들어와서 면역을 길러 주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지 않는 신앙생활의 위험에 대한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우리가 끊임없이 범죄하고 우리의 내면에, 그리고 우리의 외면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의 말로 끊임없이 범죄하는 그 죄 짓고자하는 우리의 내면의 욕구를 죽이지 아니하면 성경은 우리에게 반드시 죽으리라고 성경은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죽어 있는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시간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 몇 번에 걸쳐 말씀드린 죄 죽임에 대한 테이프를 문서 선교부에서 구입하셔서 몇 번이고 이해가 될 때까지 다시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사는 길입니다.
자, 앞으로 나아가 보겠습니다. 죄를 죽이지 않는 신앙생활은 두 가지 방면으로 위험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향해 위험하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그 다음에는 둘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를 죽이는 삶이 없이는 자기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고 그리고 자기의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그는 매일같이 교회에 나오면서도 하나님의 얼굴에 침 뱉는 생활을 계속할 것이며 이웃을 불행과 고통으로 불어넣는 삶을 계속 살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였는데 우리의 이웃을 불행의 고통에 불어 놓은 적이 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제 잠시 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죄를 죽이지 않는 신앙생활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고통 없이 독약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한 번 두 번, 계속 이렇게 해서 고통 없이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화) 담배를 처음 배울 때.
담배를 깊이 들려 마시는 것이 흡연의 진수이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담배의 연기는 푸른 색인데 깊이 들려 마셨다가 토해 놓은 연기는 색깔은 회색입니다. 그런 방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배우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즉시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한번도 패 안에 담배가 들어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니코친 성분의 담배가 으-흡하고 빨려 들어가는 순간 패 자체가 그것을 거부하고 토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침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난리가 납니다. 그러면서 쉬지 않고 꾸준히 성실하게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한번, 두 번, 세 번 노력을 많이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깊어집니다. 그 다음에는 담배를 피는 참 맛이 그것을 깊이 빨아 드리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맑은 공기를 보면서 심호흡을 하던 사람이, 이제는 담배를 물고 심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야릇한 환각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기분 좋은 피로감을 니코친을 가져다줍니다. 해 보지 않고야 어떻게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겠습니다. 이래 저래 체험은 중요합니다. 한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3개월 정도 지나야 합니다. 적응을 못하는 사람은 결국은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담배를 배우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 좋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2,3년 담배를 배우고 난 다음에 결국은 패를 갈라 수술하려고 하면 완전히 니코친으로 떡이 되어 있습니다. 패를 끈적 끈적한 짜장 같은 데다가 푹 집어넣고 거기에 절인 것과 같습니다. 해부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보통사람들은 패는 선홍빛입니다. 깨끗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완전히 쩔어 가지고 시컴한 장아찌 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좋다고 지금도 물고 다니냐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물고 다니지는 않겠지만 안 물고 다니고 숨어서 피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무엇이 좋다고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라 천천히 숙달됩니다.
죄 죽임이 없는 신앙생활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죄 죽임이 없이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고 매주일 마다 교회에 나와서 도장찍고 가는 사람들을 보면 장아찌와 같습니다. 시꺼멓게 죄에 쩔어 가지고 억지로 나와서 앉아 있는 모습이 바로 니코친을 머금어 가지고 푹 찌른 패하고 비슷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계속해서 반복해서 죄를 짓는 동안에 결국은 용감하게 독을 마시는 것과 같은 그런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먹는 것이 아닙니다.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먹는 것이 아니고 삼킬 수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몸에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죄를 죽이는 영적이 삶이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렇게 우리들이 죄 죽임이 전혀 없는 신앙생활을 계속해 가면서도 자기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반성이 없는 이유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우리의 약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하나님의 은혜 자체는 우리에게 언제나 약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귀한 은총이지만은 은혜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자, 좀더 쉽게 말씀드리면 이것입니다.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죄를 짓고 또 죄가 반복됩니다. 더 나쁜 경우에는 동일한 죄를 계속적으로 짓는 것입니다. 반복하면서, 그런 죄는 적극적인 죄일 수도 있고 소극적인 죄 일수도 있습니다. 적극적인 죄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계속해서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죄는 기도하라고 하는데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도 죄이란 말씀입니다. 정결하게 살라고 하는데 계속해서 불결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는데 찾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지 간에 죄를 계속 지으면서 범죄상태에서 계속해서 있는 것 이것은 그 사람에게 더 악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죄로부터 떠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은 죄를 지으면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신데, 하나님은 나를 지켜 주시는 분이신데, 우리 부모님도 나를 위해 기도하시고, 내 아내도, 혹은 내 남편도 그것도 안되면은 우리 목사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데 아마 지켜 주실 거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자기가 죄를 죽이고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 은혜 생활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고 죄 가운데 있으면서 은혜를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그 은혜를 붙들고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에서 떠나지 않기 위해서 그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반복하면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은 그 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은혜를 붙들고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짓고 있는 이 죄를 계속 이렇게 지어도 괜찮을 거야 라는 마음을 자기에게 스스로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은혜롭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주는 생각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단언하건데, 하나님이 주신 생각은 어떻게 파괴적인 결과가 오겠느냐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결과가 너무나 비참하게 파괴적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주신 생각이 아닙니다.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무지가 낳은 잘 못된 결론입니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 죄를 행하면서 나는 안전할 거야 하나님이 지켜 주실 거야 나도 어쩔 수없이 이 상황에 있는 것이 하나님은 아실 가야 이러면서 계속 죄에서 떠나지 않을 때 마지막 결과는 탐욕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냐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거의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를 건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되어 가느냐? 그것은 은혜라고 하는 것으로 위로를 받으면서 자신의 신앙생활을 계속해서 더 많은 죄를 불러 들려서 그 죄에서 짓눌리는 삶을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사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는 길입니다
자,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논리적으로도 맞습니다. 내가 죄를 짓는데 이 죄를 짓는 것은 죄에 대한 사랑이 있어서 짓는 것입니다.
(예화) 마약에 중독된 여인에 대한 모습.
미국에서 마약에 대해서 경고하는 광고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신문에서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갔을 때 TV에서 광고 나온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문구가 나오는데 마약의 해독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 넘습니다. 섬뜩한 광고를 내 놓은 적이 있습니다.
자, 보십시오. 자기의 육신을 그렇게 비참하게 망치면서도 그렇게 병적으로 코카인을 흡입하고 헤로인을 복용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이 주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즐거운, 순간의 즐거움을 끊어 버릴 수 없기 때문에 파멸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붙들고 놓지 않는 것입니다. 죄가 그런 것입니다. 죄가 전혀 즐거움은 주지 않는다. 이젠 그가 이젠 싫다 라고 하는 사람은 죄를 죽인 사람입니다. 죄가 이제는 그를 더 이상 유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죄에서 떠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도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그 죄를 꽉 붙들고 그 죄를 계속 지으면서 은혜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죄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놓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계속 짓고 그 죄에 대한 사랑이 있는데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야, 나를 지켜 주실 거야, 나를 불쌍히 여기실 거야 이런 생각을 하고 난 다음에 마지막 가져온 결과는 더 죄로 깊이 깊이 나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점점 담대해 지고 이전에는 은밀히 숨어서 행하던 것을 이제는 공개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묻어만 두었던 것을 이번에는 행동으로 표현을 하고 이제는 행동으로 표현하던 것을 이제는 공개적으로 하고, 그래서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인격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은혜를 생각하는 그것이 은혜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범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은 은혜를 자기 정욕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런 것은 말은 하지만 그것은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지 자신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경배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선물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인지를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큰 선물입니다.
13년 전의 일입니다. 나라가 굉장히 복잡했을 때의 일입니다. KAL기 폭파사건, 홍수사건 굉장히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울 때입니다. 단순신전을 짓는다는 일까지 있었던 때입니다. 성경을 보고 글을 쓰면서 제가 커다란 감화를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민족을 얼마나 슬퍼하시고 얼마나 애통해 하시는지를 느낀 것입니다. 두 달 동안을 기도하려고 교회에 들어가면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감동을 받은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에 그런 감정들이 똑 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아직 무엇인지 몰랐지만 깊이 깨닫고 난 후에는 어느 순간에 두려움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그 두려움이 나에게 이제껏 까지 정신없이 살아가던 많은 삶을 청산하고 버리고 바르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두려움을 우리에게 때로는 불러일으키는 것이 우리에게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두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은 엄청난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에 때의 기록들을 보면 어느 한 순간에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대충 살아가다가 그러다 어느 한순간에 자기가 지옥의 낭떠러지에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자기가 그런 두려움을 느끼면서 즉시 무엇을 보게 되느냐 하면 자기가 얼마나 죄로 가득 찬 삶을 살아 왔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전에는 “죄”그러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 탈세를 했냐? 바람을 피웠냐? 내가 사기를 쳤나?” 자기처럼 깨끗하게 산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잘못했느냐 이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은혜를 생각한다 하는 것은 점점 더 담대한 범죄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죄는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찬송하는 많은 찬송가들이 나옵니다. 찬송을 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느냐? 두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죄를 이기고 승리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맛보는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한 사람들이고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죄 가운데 있었지만 깊이 회개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건져 주실 것이라고 믿는 그리고 자기가 거리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를 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죄에서 건져내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 갈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말끝까지 듣지 않으면 발길로 차서라도 더 이상 멸망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하여서 신앙생활을 정당화하고 더 깊은 죄악 속으로 들어가면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은 주님이 사람들을 심판하는 가장 두려운 심판은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두면 자기 뜻대로 잘되는 것같이 사기 치면 딱딱 들어맞고 나쁜 짓 하려고 하면은 그냥 미리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가 막히게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앞서 행하는 것입니다. 다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형통하고 말합니다. 형통은 형통이지, 그런데 형통의 마지막이 파멸로 다가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려고 할 때에만 형통한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 뛰어 가려고 하는 그 때에도 형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버려 두시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로 가라고 했는데 다시스로 가지 않았습니까? 물론 나중에 폭풍을 만났지만 처음에는 배표도 샀고 배타고 순풍에 돛달고 잘 갔습니다. 그것만 딱 잘라 생각해 보면 악한 일을 도모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며 죄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순탄함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걸어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직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간단한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개기고 한번만 봐 줘, 그리고 가서 매달리고 하는 것이 저절로 통하는 그런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목회자 장례 집에 가지 않습니까? 목회자인 마음속에 선명하게 “아 하나님이 데려 가셨구나!” 그렇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여럿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안 데려 가시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니, 순리로 대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인생이 여기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이상 보시지 못할 때에 쳐서 데려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균형 되게 알아야 합니다. 신구약의 모든 사람들이 신앙의 가장 중심적인 요소를 경외함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경외함은 주님을 사랑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한없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살면서 그 죄를 죽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커다란 은혜는 죄인을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두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살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 앞에 범죄하면서도 계속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 은혜 타령만 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는 결국은 그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비참하게 파멸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이 우리들을 깊이 벌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에 정죄하지 않는 분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8장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제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났으면 이제는 이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가든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구원을 취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랬다가 내일은 주를 위해 산다고 그랬다가 그 다음날은 하나님 제발 내 버려 둬요. 그러면서 세상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러다가 다시 자기 발로 돌아와서 주님 나를 받아 주시옵소서 이렇게 변덕 충만한 삶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일관성 있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셔서 자기의 자녀로 삼으신 다음에는 결코 취소하지 않습니다. 천국 간다 이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의 문제가 죽음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제일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 무슨 매장 해달라, 화장 해달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렇게나 하면 어떻습니다. 죽은 다음에 무슨 상관입니까? 또 살아 생전에 자기 묘지 보러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예 다 파 놓습니다. 관까지 묻어 두고 뚜껑까지 덮어놓고 이제는 할 일 다 했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한심합니까? 살다가 죽으면은 묻으면 묻고, 불태우면 불태우고, 장기를 기증하면 기증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지 쓸데없는 사치입니다. 대개 인생을 신통치 않게 살았던 사람들이 묘자리 보러 다니고 땅파러 다닙니다. 열심히 산 사람들은 그런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그렇게 범죄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의 영혼을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정죄함이 없지만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셨지 징벌이 없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죄”라고 하는 것은 구원과 관련된 정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살면 이 세상에서 계속 고달픈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고 자기 마음대로 방탕하고 나쁜 짓하고 온 갓 죄악 된 짓을 다 하면서도 교회에 나오는데도 아무런 일이 없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멸망하기로 준비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내버려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여러분들을 선택하셔서 여러분을 끝까지 구원하려고 작정하셨으면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부모인데 자식이 자꾸 가방 팽개치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가서는 불량배들과 어울리고 칼 가지고 동네 꼬마애들 돈 빼앗고 이런 삶을 사는데 친부모라면 가서 매일 불러옵니다. 한 동안은 두들겨 패요. 부모에게 매일 폭행을 하니까 부모가 견딜 수가 없으니까 경찰서에 고발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앞에서 자기 아들을 수갑을 차게 해서 데려가게 합니다. 그 아버지 하는 얘기가 이것입니다. “이것이 다 너 사람이 되라”고 한다. 잠시 교도소 가서 생각이 바뀌어서 새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만약에 집나가고 나쁜 짓하고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것이 뻔한데 내 버려 두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의 친자식이 아닙니다. 다리 밑에서 주어 왔든지, 고아원에서 대려 온 자식인 것입니다. 자기의 살과 피가 썩였으면 그런 식으로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여러분들을 자신의 친자식으로 생각하고 계셨기 때문에 내 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의 삶에 현장 곳곳에 나타나십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죄를 버리지 않고 죄 가운데 있어서 은혜를 계속 생각하고 그래서 더욱 담대한 진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여러분들을 징벌하십니다. 그리고 징벌이, 징벌이 도저히 통하지 아니하면 제명에 못 죽게 만듭니다. 생명을 걷어 가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거룩한 구원의 계획을 성취시켜 드리고 그 구원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이 땅에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 입혀 드릴 불명예가 더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 어느 순간에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깊이 기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인지를 눈뜨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두렵게 나타났던 사람들의 심판이 우리에게는 나도 굉장히 많이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 같은데 왜 안 나타났느냐? 이것은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참으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래 참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삼풍사건.
어제도 신문을 보니까, 삼풍사건이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회사 재산을 다 압류를 해서 매각을 한다 하더라도 천 이 백 억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 주인이 보수적인 교회에 안수집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5분만에 망한 분입니다. 잘 해나던 회사가 5층부터 와르르 무너져서 490명 죽으면서 5분만에 알거지가 된 분입니다. ......
나이 든 교우들 어느 날 제가 불러 놓고 똑 바로 하세요. 그렇게 하다가는 재미가 없습니다 라고 말을 한다면 “할렐루야 감사합니다”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한 달 후에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풍지박산이 된 것입니다. 몇 천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부채 천 이 백 억을 가진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돈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떠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무섭게 다루시는 지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서 부흥이 일어나던 때에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리에 있다고 하는 깊은 두려움이 먼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런 깊은 두려움이 내리니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이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 정결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 고 결론을 내려놓았으면 주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기에 이제는 죄 가운데 사는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 정결하게 살아야지 이렇게 결론이 나야 합니다. 죄 가운데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죄를 위해서 다 빗을 지불하셨으니 이제 우리가 먹고 마시고 마음껏 죄를 짓자 이렇게 되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주님이 능력이 많으신 분인데 그렇게 말하면 그 능력이 많으신 그분이 우리가 똑바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우리를 심판 하실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두려움으로 회개하면서 살아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이제는 하나님 제가 이제는 은혜의 빗을 많이 졌는데 어떻게 하면 주님을 위해 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정상이 아닙니까? 은혜를 많이 받았으니까 이 정도는 용서해 주시겠지요. 그렇게 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하냐 이것입니다.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잘못된 신앙이 이렇게 교회 안에 가득하게 되었느냐 하면은 이것은 처음부터 잘 못 배워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서 비늘이 벗어지는 것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왜 그러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논리적인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순간에 즉각적으로 거듭나는 순간에 우리에게 죄에 대한 예민한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죄를 하나님이 매우 싫어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것을 싫어하도록 싫어하는 성품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넣어 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시간에 죠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설교하시던 18세기 노셈턴 교회에서 부흥을 경험한 피비 바틀렛이라고 하는 4년 11개월 된 어린아이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그 어린아이가 매일 하나님 앞에 헛간에 들어가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뛰어나와서 어느 날 엄마 품아 안겨서 막 울었습니다. “엄마! 이제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 하나님이 나를 지옥에서 건져 주셨어.” 그렇게 감격하고 난 다음에 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배였습니다. 그는 주일이 얼마 남았냐고 물어보니까 엄마가 “너 주일날 가서 좋은 사람 만나려고 하느냐?”하니까 그가 하는 말이 “아니 그날은 에드워즈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시간이야”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4년 11개월 된 아이가 말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하고 있는 이 설교보다는 서 너 배 더 길고 어려운 설교를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설교를 못 들어보았지만 원고를 보면 세시간은 족히 됩니다. 아무리 빨리 해도 3시간은 해야 할 불량입니다. 그 설교를 그 꼬마가 앉아서 들은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변화된 영혼이 되니까 놀라운 이해력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귀에 그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용어 몇 가지를 못 알아들어도 아이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흘러 들어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영어를 못해도 공항에서 뭐하고 떠들고 있으면 “여권 보여 달라, 표 달라, 저기 가서 줄 서라” 그것 밖에 더 이상 무엇이 있겠습니까? 공항에서 영어 못하고 독일어 못해도 공항 카운터에 있는 직원이 “뭘 드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보겠느냐 말입니다.
변화를 받고 나면은 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나면 저것이 죄에 대해 이야기하는구나 자기가 경험하고 있으니까 깊이 빨려 들어가면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은 대게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가운데 변화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몹시 어려워 보이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한 설교를 요즘의 젊은이들이 못 읽습니다.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절을 가지고 한없이 설교를 합니다. 로마서 8장을 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9권이나 나올 정도이기 때문에 도저히 읽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들었던 아이 중에 9살 먹은 아이가 있잖아요. 병원에 목사님이 입원을 했더니 편지가 왔습니다. “할아버지 빨리 돌아오세요. 부목사님들이 하는 설교는 무슨 설교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말입니다. “당신만이 내가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목사님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지금 그 글을 옮겨 놓은 설교를 대학생들이 읽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꼬박 앉아서 메모를 하면서 그 설교를 들은 것입니다. 영혼의 변화가 그것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렇게 변화를 받고 나면은 즉각적으로 죄에 대한 혐오감이 생겨 납니다. 구원의 놀라운 경험을 하기 전에 죄에 대하여 사로잡히는 일이 먼저 있습니다. 구원 받고 나서도 그 죄에 대한 경계심이 늘 남아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그 죄를 죽이고 어떻게 하면 죄 가운데서 벗어나는 삶을 살 것인가를 교회는 가르쳐 주고 성도들은 그것을 실천을 해야 되는 데 그것을 실천하기 전에 즉시 밑도 끝도 없이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신다. 하나님은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막 살아도 어쩔 수 없는 분이시다. 이런 식의 사상이 들어오는데 자기가 계속해서 죄가 싸우고자 하는 욕망과 영적인 상태를 유지하면 그러한 교리가 들어올 때 아니냐 라고 항거할 수 있는데 죄와 싸울 힘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괜찮아 여기에 편하게 믿는 길이 있어 라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누가 항거하겠습니까? 그런 일들이 이단이 아니라 아주 복음적이고 정통적인 교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누가 거기를 가지 않겠느냐 이것입니다.
누가 가시밭 같은 길을 가겠습니까? 넓은 길, 고속도로로 갈려고 하지 누가 달구지 타고 비포장도로로 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500K 가고 싶지 누가 달구지 타고 50K가고 싶겠느냐 이거십니다. 그 고생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선뜻 그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죄는 거의 죽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계속해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도 별거 아니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멀고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별거 아니구나 하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자포자기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하겠습니까? 배워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지금 유명한 하나님이 있다. 그런데 와서 가르쳐 줄 때에는 배워라 그러면 귀가 솔깃할 것입니다. 과목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요리”라고 하면 나는 가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좋아했지만 지금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패역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죄가 그를 완전히 이겨 버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배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예화) 국민일보의 기사.
설교90분이다. 길으면 120분입니다. 이해가 안 간다는 것입니다. 40분도 긴데 어떻게 그것을 듣느냐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없습니까? 죄를 죽이지 못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제는 죄를 더 이상 죽이지 못하니까 이제는 더 이상 살아볼 삶이 없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살면서 부딪치는 무엇인가 안 될 때에 몸부림치게 되고 그래서 뭔가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왜 안될까 하지 않습니까? 싸울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때 주님이 주시는 모든 좋은 그리스도인들의 군사로써 갑옷은 벗어버리고 파자마 바람으로 슬리퍼 신고 싸우려 돌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총은 녹이 쓸고 칼은 가져다가 팔아먹었습니다. 폭탄 팔아서 술 먹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전쟁이란 이런 것이고 군인이란... 집어치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삶을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과 기대감이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와서는 모두 나를 한번 웃겨 봐라 완전히 재미있게 나를 웃겨 봐라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설교자를 이야기꾼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설교하기보다는 타임지나 뉴스 위크지나 크리스찬 라이프지에 나타나는 이야기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으로 사람들의 권위를 사려고 하는 그런 시대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단과 강단 밑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손잡고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이 모양이 되는 것입니다.
죄와 더불어 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투자하면서 고치며 승리하는 영적인 생활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사회가 나머지 남겨 둘 것은 바보 같은 후손들과 돼지우리 같은 교회밖에는 남겨 둘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죠시아 프랜트라고 하는 청교도는 아주 무뚝뚝하지만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상당한 진리가 들리고 그 진리에 감동을 받고 변화 받는 그리스도인이 없다면 교회는 무신론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상의 무신론자들 아닙니까?
주일날이 되어서 11시에, 그것도 시간도 못 맞추어서 성경 찬송 들고 오는 것도 부끄러워서 봉투 속에 집어넣어서 예배 시간 늦게 덜렁 덜렁 내려와서는 끝나자마자 축도 받기가 두렵게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그리스도인들, 끄덕 끄덕 졸면서 예배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이 오면은 견디긴 무엇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달려가서는 나를 받아 달라, 영접해 달라고 할 것입니다. 배교의 세력들입니다. 그런 정신이 죄를 죽이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현실 속에서 잘 적응해 나가야 한다는 미명하에 얼마나 많은 타협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의과대학 교수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의대 교수인데 어느 날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저의 열렬한 독자입니다. 항상 형제 같습니다. 같이 만나서 차도 마시면서 말을 나누는데 자기가 박사 학위 받고 나서 대성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계속해서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을 했는데 하나님께 예배한 이 손으로 교수들을 대리고 단란주점에 대리고 가서 여자 붙여 주고 그 돈을 자기 카드로 긁었다는 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박사학위를 안 받겠다고 포기하기 전에는 자기가 놓여 있는 구조 속에서는 그 강요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건한 사람들도 그렇게 굴복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도 그렇게 삽니다. 그런데 죄를 죽이지도 않고 은혜의 세계는 모두 말라버린 형식적인 신자가 세상에서 올 때 믿음으로 살 것이냐? 아니면 타협할 것이냐? 위기의 선택이 올 때 망설이겠습니까? 뭐가 있어야 망설이지 그냥 선뜩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튀지 않고 현실 속에 잘 적응을 해서 빛을 들어내야 된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미명하에 그 손이 다 더렵혀지는 것입니다. 술 마셔야 할 때가서 술 마시고 온갖 나쁜지 다하고, 탈세할 때가서 다 탈세하고 말입니다. 탈세하는 사람들 다 도와주고 손잡고 여기 저기 가서 나쁜 짓 다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주일날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만 다른 것입니다.
썩은 자주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세상과 타협을 하고 세상 속에 자기의 신앙을 굴복시켜서 무엇인가 좋은 일이 생기서나 승진을 한다든지 위기를 벗어나게 되면 “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죄와의 타협이 가져다 준 열매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서 입에 넣었을 때 맛이 있었을까요? 맛이 있었겠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그런 식의 삶을 사니까 죄는 죄를 낳고, 죄는 자기를 삼키면서 계속해서 수령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는 모든 내면의 세계가 황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하루나 이틀 계속되었으면 즉시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 말씀이 심기어 지면 그 마음의 땅이 그 말씀을 받아서 뉘우치고, 회개하고, 새롭게 돋아납니다. 그런데 이것이 1년, 2년, 3년, 4년, 5년 지나갑니다. 그것은 단단한 땅이 됩니다. 여름에 장마철 아닌 때에 바짝 건조한 때에 하수도 공사하기 위해서 땅을 파면 분명히 흙을 내려치는데 불이 번쩍 번쩍 납니다. 겨울에 딱딱하게 얼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물기를 먹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이 땅 자체가 오랜 시간동안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50Cm 파내려 가면 그 다음부터는 고갱이가 필요 없고 이제는 삽으로 팝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땅을 쑥 파면 쑥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땅이 파집니다.
그러니까 뭘 뿌리면 뭐합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뿌려도 어떤 의미에서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단단하게 굳어진 땅에 물을 뿌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변화를 받았습니까? 사도 바울이 와서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드릴처럼 뚫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뿌려 지는 것입니다. 후-- 하고 말입니다. 불어서 날아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매주 와서 뿌리는데 매주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30년 반복한 것을 자랑을 합니다. “아! 내가 삼 십 년 동안 교회 다녔다” 고 말입니다. 삼 십 년 동안 강퍅해 지는 역사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깨어지지 않지만 오늘 어제 밤에 술 먹고 땡강 부리던 그 사람이 오늘 교회에 온 사람들은 주저앉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신앙생활이 계속되다 보면 결국은 자신에게만 그런 커다란 해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커다란 피해를 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가족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한 가족을 변화시키는 원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한 가정을 변화시킬 때 여러분들의 생각은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 주여 그 가정에 그저 성령을 폭탄으로 부어 주시옵소서” 폭탄을 맞으면 무엇이 남아나겠습니까? 거덜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우리가 그렇게 기도를 해도 어느 날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렇게 뺀질 뺀질하던 가정이 한꺼번에 폭탄 맞고 교회에 나오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기도해서 사실 하나님의 응답은 그런 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대게 어떻게 옵니까? 그렇게 형식적으로 살아가던 한 사람을 하나님이 딱 찍어서 변화시켜 주십니다. 변화시켜 놓으시니까 그 다음에 가족으로 들어가니까 옛날에는 그 가족이 자기하고 똑 같았는데, 수준이 맞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변화되고 들어가 보니까 우리 식구들이 이렇게 살다가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 우리 식구들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이전에는 “너희식구들 신앙생활 해야 되지 않니?”라고 물으면 “우리 식구들이 뭘 어때서 우리 식구들처럼 단란한 가정이 어디에 있어 매 주일 손잡고 교회에 가는데 가서 졸지만” 또 사람들은 이것을 부러워합니다. 거기조차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부러워합니다. 우리는 저렇게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발 그렇지 마십시오. 꿈을 크게 가지십시오. 왜 그런 꿈을 가지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제는 가족들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가족들의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시킨다고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그들의 영혼이 너무 불쌍해 보이기 시작합니다. 기도하던 것이 지나 쳐 가지고 이제는 마음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된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하기 전에 가족들이 변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가 달라졌다. 우리 아들이 변해 가는구나. 딴 사람이 되어 가는구나. 도대체 저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저 안에 준 것은 누가 준 것일까? 어느 교회에서 받은 것일까? 교회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교회에 하나님이 무엇을 주셨기에 저럴까?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는 없는 것을 그가 가졌기 때문에 나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삶을 산다라는 생각이 느껴질 때 그에게 도움을 받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말로는 그리스도인지만 다른 것이 무엇이냐 말입니다. 죄를 죽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다르다라고 말합니다. 죄를 죽이지 못하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즐겨 하는 말이 “내가 무슨 죄인이냐” 기도할 때는 잘 합니다. “하나님 우리 같은 죄인..” 만약에 사람이 “당신 아무래도 죄가 많은 것 같다”라고 말하면 길기리 뛸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참을 수 있는데 사람들이나 하나님이 자기를 죄인이라고 불러주는 것은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뭐가 죄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죄가 없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처럼 그렇게 담대하게 죄를 지어서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추격을 받는 그런 사람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대 놓고 가정을 누고 나가서 나쁜 짓하고 그러지는 못할지 모릅니다. 술을 퍼먹지 않을 지는 모릅니다. 먹는 사람도 많지만 안 먹는 그리스도인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흡연도 안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죄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방탕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뿐입니다. 방탕하지 않다고 하는 것과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죄라고 하는 문제는 방탕하게 산 죄만 죄가 아니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죄는 그러한 삶을 살게 하는 욕구나 경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옛 사람의 율법에는 간음하지 말라 말하였으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진짜 간음하는 것이나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이나 다 똑 같다. 그러므로 하나 안하나 말씀하시고 싶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내가 간음을 하지 않았으면 죄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이 없고 깨끗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싶어 하셨던 것은 “그래 너는 간음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네가 여자를 보고 얼마나 많이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마음은 간음한 것이다. 그러니까 네 마음도 하나님 앞에 죄지은 것이고 용서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용서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가 너희 안에 깃들이지 못하고 너희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런 축복 받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축복 받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싶어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실제로 몸으로 간음하는 것과 간음에 대해서 마음으로 죄를 범하는 것은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둘 다 질적으로는 마찬가지입니다. 크기가 다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탕한 삶은 살지 않지만 그러나 방탕한 삶만 살지 않으면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꾸 이렇게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명예를 생각하면서 지금 교회에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방탕한 삶을 살지 않고 반듯한 삶을 살아도 이상하게 그가 하나님과의 참된 영적인 교제가 없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은 기도생활입니다. 기도 생활이 있다고 하더라도 매우 형식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살아가면서 자기 의에 빠져 버리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적인 하나님과의 교제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시간이 없어서 기도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주어도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에 와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남들이 오래도록 기도를 할 때 그 시간을 참으면서 기다리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막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거기에 직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삶이 외식하는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죄를 죽이지 않으면 방탕한 삶은 살지 않을 지 모르지만 이런 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제일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교회 잘 나오면서 그리고 세상에 방탕하지 않으면서 반듯하게 생활을 하면서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그 사람보다는 창기와 세리들이 훨씬 소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와서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무릎을 꿇고 자기가 무너질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은 --- 사람들이고 생각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못 지키는 주일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고 십일조를 띠어 먹어 본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사람들 앞에서 잘 못한 것이 있느냐 합니다. 나는 선한 행실을 하는 사람이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석 위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모두 무너져 버립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깨져 본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은 하지만 그들을 살아가게 만드는 사람들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들은 거의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지만 자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느끼지 못합니다. 영적인 생활에 대해서 말하지만 말은 영적인 생활을 말하지만 삶은 세속적입니다. 그리고 허영에 들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고 주일도 잘 지키고 그리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교회 생활을 잘하고 그리고 죄는 죽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런 꿈은 가질 수 없지 않습니까? 돈 많이 벌어서 호화스러운 집을 짓고 첩들을 많이 거느리고 몸종과 같은 사람들을 많이 취직시켜서 진시황 왕처럼 그렇게 질펑하게 놀아 보리라 그렇게 생각하지는 못합니다. 어차피 그것은 실현에 옮길 수 없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꿉니다. 이제는 세속적인 일을 안하고 거룩한 일을 하면서도 목표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거룩한 일을 하면서도 관심이 거룩한 일을 섬기는 그 관심이 하나님이 존귀히 여기시는데 자기의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높이여 지기를 원하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전에는 정치판에 가서 서로 잘 되겠다고 싸우던 사람이 이제는 교회에 와서 서로 높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전에는 장사하고 사기 쳐서 밥 먹고사는 사람들이 이제는 복음을 가지고 밥 먹는 것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똑 같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경과 신앙의 모든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어나가게 만들어 주는 가장 커다란 힘이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죽이지 않으면 이 두 가지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소리로 들리고 성경은 참다운 맛을 잃어버리고 성경을 읽어도 마치 다 말라빠진 옥수수 껍질을 씹는 것과 같이 아무런 맛이 없습니다. 매일 매일 분량을 정해서 읽기는 하지만 어디를 읽었는지 모르고 읽은 것이나 안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해도 기도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는 막히고 그는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모든 저항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가 그렇게 된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들이 주일을 꼬박꼬박 지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그렇게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열심히 교회에 나가는 것은 자기에게 대단한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열심히 교회에 다녀서 직분이 올라가고 그러면 그렇게 직분이 올라간 사람들이 가서 죄를 죽이지 못하는 그런 불신자 같은 삶을 살 때에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평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생활하고 십일조 내는 것도 섭섭해하지 않습니다. 자기 한데 안 한다고 해서 화내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뭐든지 해라, 그러나 하나는 바치지 마라. 마음만 하나님께 드리지 말고 죄만 죽이지 마라 그러면 내가 모든 것을 용납해 주겠다. 그런 식으로 타협조건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공작에 훌륭하게 놀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적인 삶을 서서히 고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나는 영적이 삶이 다 죽어도 살수 있어” 이런 사람들이 가끔 나옵니다.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계속해서 영적으로만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육적으로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애지중지하던 직장에서 쫓겨나고, 여러분들이 자식보다 사랑하는 사업의 파탄이 오게 하고, 긍지를 느끼던 건강에 위협이 오게 하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불러 가시거나 고통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의지하고 있었던 이 세상의 의지하고 있었던 수많은 벽이 얼마나 나를 지켜 줄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죄 죽임의 교리를 듣고 있습니다. 죄를 죽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강과 화목을 주십니다. 그러나 죄를 죽이지 않고 살아가는 신자의 삶이 성공하면 가장 외식으로 충만한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그 형식 마져 잊어버리고 완전히 죄 가운데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열심히 전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전철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하다가 불량배들에게 매 맞아 본적이 있습니까? 그런 삶을 살고 경찰서도 수수로 끌려 다니는 사람들이 결국은 마지막에 배교에 가까운 삶을 살고 신앙을 모두 버리고 자기 자신이 파산해 버리는 경우를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예화) 어느 날 기숙사에서 어느 신학생의 소리 지름.
자기가 바울처럼 하나님을 만났다고 해서 바울처럼 산다라고 하는 것은 마치 자기가 람보 열화를 보면서 파자마 바람으로 빗자루 들고 총 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상상한다는 것과 실제로 능력이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바로 같은 생각입니다. 바울과 같은 하나님을 만났을지는 모르지만 바울과 같이 죄 죽이는 삶을 안 사니까 옛날 왕년에 하던 생각이 나오는 것입니다. 술을 먹어도 옛날 그 맛이 그 맛이고 그리고 두꺼비를 만나도 반갑다고 악수를 하는 것입니다. 먹으니까 옛날 기질이 나오는 것입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
보십시오. 죄를 죽이지 않으면 마지막에는 결국에는 이렇게 완전히 배교에 가까운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매주 교회에 나오는 것을 여러분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교회가 대단히 고맙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나마 안 나오면 누가 자리를 메워 주겠습니까? 고맙죠. 그러나 그런데서 마음의 위안을 얻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되었느냐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엊그제 청교도 설교를 읽으면서 매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모 공경을 설교하면서 약속 있는 첫 계명이잖아요. “너희들이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이 땅에서 장수하리라” 그런데 “장수하리라”라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설교를 몇 번하면서도 말입니다. 그런데 청교도들은 “당신들이 진정으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제명에 못 죽을 줄 알아라”라는 것입니다.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성경을 보니까 “장수하리라” 부모를 잘 공경하고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장수할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리고 부모님을 하찮게 생각하고 박대하면 제명에 못 죽을 줄 알아라 그러면서 실제적인 경우들을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벌하실 지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게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해 가고 있다면 여러분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신앙 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도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삶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건져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은 어두운 가운데 이방인의 빛들로 드러나고 하나님의 놀라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전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들로 불러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로만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로 전도합니다. 우리의 존재, 우리의 현존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메시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보고, 여러분들의 생각을 보고, 여러분들의 처신을 보면서 많은 형식적인 신자들이 나는 무엇인가 깊은 문제가 있구나 생각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삶을 보고 이렇게 믿는 것은 참다운 신자라고 말 할 수 없어. 이전에는 내가 참다운 신자라고 생각했지만 너를 만나고 난 다음부터 나는 무엇인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불러일으켜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하나가 저희 교회에 왔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 교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만났는데 “저는 목사님의 교회에 가서 정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도를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내 머리 속에 있는 사고 구조와 저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사고 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 해답을 자기가 지금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잠깐동안 하는 기도를 통해서도 형식적인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고뇌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은 참된 신앙이 아닌데 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매 순간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리다가 반쯤 조는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면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왜 이것이 아닌데 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라는 것도 성립이 됩니다. 매일 그런 식으로 살던 사람들이 안 그런 사람들 속에 들어오면은 “아 그것이 아니었구나” 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닌데 저 사람이 깨닫습니다. 무엇인가 다른 것들이 마음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제가 12여 년 전에 변화를 받은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가을에 학교에서 학생들 다 빠져 나가고 야간 학생들 다 빠져나가고 신약 성경을 쭉 읽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읽으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전에도 읽었지만 말입니다. 읽는데 계속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다가오는데 제가 생각하고 이제까지 배워왔던 신앙이 자꾸 성경하고 틀린 것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순례의 시작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을 다 읽고 마지막 결론을 내린 것은 내가 배운 것도 참된 기독교가 아니었고 이제까지 입에 침을 바르면서 가르친 기독교도 주님이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참된 신앙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답을 주었지만 만족스럽지 않는 것도 많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이전에 하나님 앞에 축복을 누렸던 시대의 교회의 글들을 읽으면서 내가 지금 고통하고 괴로워하던 것들의 대한 답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반쯤 졸고 예배드리고 나가는 사람들이 본문이 무엇이지도 모르는 그런 식의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예배에 오셔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형식적인 교인들이 각성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20년씩 30년씩 아집에 사로잡혀서 교만하기 짝이 없던 사람들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큰일 나겠다는 각성이 일어나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놀랍게 몸부림치고 변화되는 사람들이 일어나는 것을 본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은 것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된 신앙을 버려도 참된 신앙이 이것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 속에서 발견하면서 끝까지 붙들고 살아갔던 사람들이 어느 시대이든지 없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때는 다수였고, 어떤 때는 소수였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 소수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변혁되어 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일 주시는 은혜를 따라서 목회에까지 들어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매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죽이는 삶을 살아서 속 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지 아니하면 여러분 자신도 행복을 느낄 수 없을 것이고 많이 여러분들을 만나는 사람들에도 여러분들 때문에 참된 신앙을 버리고 죄악 된 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구원의 받지 못했으면서도 구원받은 채 살아가는 여러분을 보면서 똑 같이 지옥에서 만날 사람들이면서도 같이 천국을 들어가는 사람들인 것처럼 착각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에 대한 진지한 근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믿다가는 내가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이 죄를 죽이지 않는 교회에서는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죄를 죽이는 삶을 살고 생명의 놀라운 맛을 보면 이단으로 몰아 버리는 것입니다. “제는 좀 이상하다. 약간의 사이코다. 약간은 돌았다. 이단의 물을 좀 먹은 것 같다. ” 매장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강한 의지를 교회가 완전하게 죽을 수 있도록 철저하게 서로 동요하면서 죽은 자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죄를 죽이지 못하는 삶을 살 때 결국은 우리에게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거듭나지 못하고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을 회심하게 만드는 방법은 우리에게는 이런 힘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말할 수 없는 신앙의 감격 속에서 살아가면 그들은 자신의 건조한 삶을 보며 후회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써 여러분들이 말할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면 능력이 없고 근심과 걱정이 가득히 쌓여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정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겠다고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죄 죽임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공하면 외식하는 그리스도인들이고 실패하면 배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고 죄를 이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이 아멘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주일 오후 예배 왜 안 드립니까? 수요 예배 무엇합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은혜를 받고 변화 받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면서 사는 것만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죽이고 신앙으로 이기는 길입니다.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 죄 죽임의 실천과 성령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情)과 욕심(慾心)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5:24-25)
지난 시간에 우리는 죄를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철저하게 형식주의자가 되어 가는가를 그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죄를 죽이는 삶이 그렇게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서 심장부에 올만큼 중요한 문제라고 한다면 무엇으로 죄를 죽이는가! 누가 죄를 죽이는가의 문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죄를 죽이는 그 주체는 성령님 이십니다. 성령이 아니면 결코 우리의 죄를 죽일 수 없고 혹시 죄를 죽였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것은 느낌일 뿐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성령이 아니면 죄는 죽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지만 죄를 죽이는데 있어서는 성령이 죄를 죽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실 때는 주님 홀로 그 일들을 하시지만 그러나 우리의 죄를 죽이는데 있어서는 성령이 죄를 죽이시는데 성령은 우리가 죄를 죽이는 일에 있어서 함께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를 죽이는 삶에는 어떠한 진보도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제 지금은 죄를 죽이기 위해서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전의 수도사들은 정말 죄를 죽이기 위해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그런 훈련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쳐서 복종시킨다고 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전적으로 오해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자연적인 자아와 부패한 자아가 있습니다. 자연적인 육체와 인간의 부패성이 있는데 죄를 죽이는 삶에 있어서 겨냥 해야할 것은 자연적인 육체가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인 부패성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체를 이롭게 합니다.
여러분 지금도 필리핀 같은데 가보면 고난 주간이 되면은 진짜 나무에 이렇게 누워 가지고 사람이 팔을 벌리고 여기다가 진짜 못을 박았습니다. 진짜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집니다. 그리고 가시면류관 쓰고 피가 낭자해지고 나무에 매달려 있으면 그걸 높은 차 같은데 태워 가지고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거예요. 그 나라의 기독교 수준이 어떠냐 하면은 제가 보기에는 정상적인 기독교가 아니고 카톨릭도 아닙니다. 금식도 자기를 죽이기 위해 금식합니다. 금식으로 자기가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즉시 이렇게 마음속으로 질문할 것입니다. “아! 우리 목사님이 금식에 대해서 반대하는구나!”아닙니다.
금식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우리에게 가져다준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는 아니지만 1년에 한 두 차례 저도 하나님 앞에 금식 할 때가 있습니다. 근데 왜 금식이 도움이 안된다고 말하느냐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이 이것입니다. 금식은 그 목표 자체가 우리의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데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금식은 금식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밥만 굶기만 하면은 육체는 쇠해지지만 마음속에 있는 부패한 죄의 본성은 죽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금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일 뿐이지 그 자체가 은혜의 원천은 아닙니다. 죄를 죽이는 은혜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이고 성령님 뿐입니다. 그러니까 금식을 해서 은혜를 받고 죄를 죽였다고 할 것 같으면 금식 자체가 죄를 죽여준 것이 아니라 금식 가운데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에게 베푼 그 영혼의 은혜 때문에 죄를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혼의 은혜를 부어주신 분은 두말할 필요 없이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겁니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부패성을 이기고 승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면서 하는데 우리들이 육체를 괴롭게 하고 육체를 학대하는 것으로는 결코 우리의 죄를 이기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반드시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실 때 전능하신 에너지를 우리 가운데 부어주실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죄를 이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성령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는 삶을 살게 하느냐, 이 문제를 살펴보아야겠죠?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는 은혜 가운데 거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이기게 되고 두 번째로는 불태우시는 성령의 역사로 죄를 죽이게 되고 마지막 세 번째는 십자가로 우리를 데려가심으로 죄를 완전히 이기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하나씩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죽이시니까 우리는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성령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죄를 죽이시는 방법이 첫 번째로 무엇이냐 하면 우리를 은혜 가운데 살게 하심으로 죄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저는 제간에는 제법 나무를 보면 저 나무가 몇 년쯤 됐을 것이라고 알아 맞추는데 상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만을 보고 그 나무가 몇 년쯤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문제는 어떤 나무는 똑같이 50年이 되었는데 어느 산의 나무는 굉장히 크고 종류가 똑같은데 어느 나무는 너무나 똑같이 50年이 됐는데 그 산에서 20年밖에 안된 나무같이 작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나무가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에 따라서 크기가 다른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는데 충무에 집회를 갔을 때 거기서 배를 태워 가지고 앞 바다를 이렇게 도는데 돌처럼 되어 있는 섬이 있는데 사람도 안 사는 섬인데 거기 1m한50㎝정도 되어 보이는 나무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사공이 이야기하는데 소나무 하나가 천년 된 나무래요. 믿지는 않지만은 어저께 갔다 심어놓고 천년 됐다고 할리는 없잖아요. 그 나무를 만약에 뽑아다가 우리 기름진 산에다가 심어놓고 이게 몇 년 됐냐고 물어볼 때 천년 됐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라는 것입니다. 분명 그 나무는 불과 심은 지 1年이나 2年이나 채3年 정도밖에 안되 보이는 나무에 불과한데 그 사람들은 그 꼭대기에서 천년이 됐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그 사람 얘기가 더 재미있죠? 어렸을 때 자기가 보았던 그 나무가 조금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 살아서 그만한 키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 나무를 심느냐에 따라서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저희 집에 어머니께서 이만한 화분에다 고추묘목을 사다가 심으셨습니다. 하나는 화분이 이만하고 그 다음엔 요만하고 그 다음엔 요만합니다. 같은 날 똑같은 고추묘목을 심었는데 정확하게 작은 화분에 담긴 것은 큰 화분에 담긴 것의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똑같은 밭에 만약에 그렇게 심겨져 있었다면 우리가 똑같이 생각했겠냐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죄는 우리들의 신앙이든지 간에 자라는 환경이 어떠느냐에 따라서 무럭무럭 자라기도 하고 그 다음에 아주 지지부진하게 잘 안 자라기도 하고 그런 단 말입니다.
그런데 은혜생활을 계속 하고 있으면 거기서는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잘 자라지를 못합니다. 죄의 목표는 결국은 단지 우리에게 유혹을 심어주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죄를 사단이 심을 때는 목표자체가 엄청나게 자라서 우리를 모두 파멸로 몰고 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대와 똑같은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단지 우리 예수 잘 믿다 가 그저 죽겠다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이 점점 자라서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를 알고 그리고 우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꿈꾸는 것 같이 죄도 역시 그러합니다. 은혜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냥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야기 할 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아무개 은혜 받았어?」은혜라고 하는 말을 객관적으로 말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가 없이 베풀어주시는 분에 넘치는 호의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주관적으로 해석 할 때에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은혜로운 생활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깊은 감동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은혜생활을 잘하고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렇게 예배할 때 어저께까지 마음이 좀 건조한 것 같았는데 그래도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릴 때에는 순발력이 있습니다. 순발력이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마음이 좀 건조한 것 같다가도 나와서 찬양하고 내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나면 다시 마음속에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습니다. “아! 그래 맞아, 내가 지난주에도 갈등하고 또 범죄한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나 같은 죄인을 주님이 살리셨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어떻게 살수 있겠는가 아! 나는 그럴 수 없어! 내가 아무리 신앙이 떨러진다고 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옛날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아니야! 그럴 수 없어!”이런 마음이 이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뭐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시는 삶이 죄를 서서히 말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다 시들게 하는 것 고사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한라산 같은데 차를 타고 가다보면은 곳곳에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들이 고사되어 말라 죽어버린 경우를 봅니다. 한때는 막 그 산에서 높이 치솟아 모든 나무들의 부러움을 샀던 거목 이였는데 뭐가 잘못 되었는지 소사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속에 죄가 많이 있어도 우리들이 지속적으로 이렇게 하나님 은혜 안에 살면은 서서히 말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우리 속에서 서서히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사는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은혜 안에서 사는 성도들도 허물은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싶어 하고 은혜 받고싶어 합니다. 언젠가 제가 섬기던 교회에 세배를 온다고 왔습니다. 2년 온 다음에 내년부터는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이렇게 교회를 떠나 보내서도 몰려다니면서 옛날 교역자 찾아서 세배 다니면 지금 있는 교역자가 어떻게 너희들을 목양할 수 있겠느냐고 개인적으로는 와도 단체로는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개인적으로도 오지 않았습니다.
세배 온 학생들과 윷놀이를 하고 한 두 시간 놀았는데 참 이상하게 그렇게 즐겁게 놀았는데 마음 한구석이 너무 허전해서 이불 보따리를 싸 가지고 실컷 먹고 일어나려고 하는 아이들을 “야! 너희들 좀 앉아봐라.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 예배 드리고 가자!” 그러니까 다 앉았죠. 다 찬송을 불렀습니다. 옛날에 우리 함께 은혜 받으면서 불렀던 찬양을 부르니까 말이죠 다들 눈이 빨갛게 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태복음 26장을 펼쳐서 설교를 시작했는데 제가 또 길게 하는데는 장기가 있지 않습니까. 50분을 설교했습니다. 그 마루바닥에 앉아 가지고 그 추운 겨울에 십자가를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모두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막 남의 집에서 통성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한 30분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와서 세배하고 세뱃돈 대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니까 건조하고 메말랐던 마음이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고 ‘아! 그래 내가 이전에 사역할 때 이 영혼들을 나를 통해 변화시키고 새사람 만드셨지.’ 모두 흩어져서 어디에 살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자 그러고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에 막 밀려왔습니다. 이게 은혜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여러분 은혜 안에 살고 있습니까?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도의 불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습니다.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은 사랑의 불을 간직하고 있고 열심의 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늘 울어야할 곳에서 울고 기뻐할 곳에서 기뻐하고 찬송할 시간에 찬송하고 그리고 사랑할 시간에 사랑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죄가 숨막히도록 싫어하는 환경입니다. 견디지 못해하는 환경이란 말입니다.
시골에 넓은 평야 기름진 옥토에 이제 모내기를 쭉 해놔서 이제 그 여름에 뜨거운 햇빛을 받으면서 쭉쭉 자라고 있잖아요. 벼가 자라고 있는데 내버려두면 어떻게 됩니까? 고개를 번쩍 쳐든 피가, 피라는 것은 뚝뚝 흐르는 피가 아니라 잡초인데 그 잡초가 말이죠. 가라지가 세게 자라니까 그걸 막기 위해 비행기를 띄워 가지고 넒은 날개에다가 제초제를 잔뜩 담아 가지고 수시로 나라 다닙니다. 땅이 기름지면 벼만 잘 자라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잘 자랍니다. 그런데 쭉 제초제를 뿌리면 신기하게 그 가라지만 죽습니다. 죽고 나서 약 기운이 가시면 또 다시 일어납니다. 그러면 비행기로 다시 뿌립니다. 언제까지 하느냐 하면 추수할 때까지 그렇게 합니다. 추수한 다음에는 추워서 자라지도 못하지만 자라든지 말든지 그때까지는 쭉 뿌립니다. 제초제를 뿌려서 튼튼하고 실한 곡식들을 거두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죄를 이기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이냐 하면 어느 날 대박이 터지는 것 같이 활딱 뒤집혀지는 그런 은혜가 아니라도 매일 와서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아! 내가 이렇게 살아야지. 용서 해주옵소서. 주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지나가시는 그런 은혜가 우리 영혼의 도끼질하시는 그런 은혜가 아니라 매일 매일 우리 영혼을 어루만지시고 지나가시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 이것이 계속 유지 될 때에 죄는 기승을 부리는 것 같지만 한풀 꺾기 우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 받으면 우리 속에서 믿음은 아름답게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그 은혜를 그렇게 받는 은혜 생활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런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은혜를 받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길로 자꾸 들어서야 됩니다. 은혜를 받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길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은혜의 방편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 기도하는 것, 성경을 읽는 것, 묵상을 하는 것, 성도와 함께 교재 하는 것, 설교를 듣는 것, 경건 서적을 읽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은혜 그 자체가 은혜는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 은혜의 수단에 참여해도 은혜를 못 받을 수도 있지만 그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지 않고는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보다가 성령세례 받았다는 사람 봤습니까? 술 먹다 뒤집어지고 술집 앞에서 회개했다는 사람 봤습니까? 그런 일은 이전에도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은혜의 자리에 더 가까이 다가 가야지만 해결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은혜 수단에 참여한다고 해서 모두 은혜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지 않고는 은혜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여러 해전에 「18C의 위대한 영적 부흥」이라는 한 1,300페이지 되는 책을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이 나오고 나서 어떤 일이 있었냐 하면 대학생 하나가 생명의 말씀사에서 쭉 돌아다니다가 이 책을 봤습니다. "위대한 부흥"? 야 이거 좋은 거 있나보다 그러고 쑥 뺐는데 너무 두꺼워서 되게 비싸겠네 하고 보니까 만 몇 천 원 이었습니다. 그 학생이 딱 펼쳐 보았는데 가운데 딱 펼쳐봐야 역사 자료니까 난잡하고 서명을 펼치니까 서명은 제가 쓰지 않습니까? 서가에서 가방을 메고 기대고 서서 시작되는 서문을 쭉 읽었는데 그 친구가 서가 사이에서 서문을 읽다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자기 마음이 떨리면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참 이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저 모습을 연상하면 참 좋을텐데” 그러고 사실은 교회를 들어오지 말고 곧장 저 우리로 들어가야 할 성도들이 쓸데없이 교회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그 사람들은 스스로 우리 앞에 지나갈 때 마다 사실은 내가 저쪽으로 가야되는데 이것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삶이 없이는 우리는 짐승과 같은 신앙 생활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짐승이라는 말을 죄 죽임의 교리를 하면서 많이 쓰는 것은 나름대로 그 말의 큰 도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 이 머리로 성도의 죄를 죽이지 않으면 마지막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더 좋은 표현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쓴 책에서도 그렇게 죄를 죽이지 않고 목양도 받지 않으려고 하는 교인들에게서 선한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죄 죽임과 그러한 성도적인 신앙이 아닌 그러한 잘못된 기초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서 태어나는 후손은 짐승과 같이 될 것이며 그들이 만든 교회는 돼지우리간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은혜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은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로써 살아가면서 죄를 지을 때 그럴 때 빨리 오셔야 합니다. 빨리 와서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내버려두면 말라붙어서 딱지가 앉고 피부가 염증을 일으키기 시작하며 문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씻으십시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은혜가 식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일어 나는 것 같으면 또 말씀을 읽으면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또 세상을 사랑하는 대신 우리를 사랑 하셔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배우면서 감화를 받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 살지만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되는 사람이구나! 하고 깨닫고 버리는 겁니다.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은혜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부지런히 예배에 참석해야 하고 부지런지 기도해야 하고 부지런히 성경 읽고 부지런히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됩니다. 이런 은사가 날마다 우리의 마음속에 촉촉한 하나님의 은혜에 젖어있을 때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감격이 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다른 길로 가고싶지 않는 겁니다. 그러한 은혜가 우리의 인생이라는 배의 방향키가 될 때에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지 술집으로 데려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은혜가 우리 안에서 늘 유지되어야 됩니다. 형식적인 신자들과 죄를 죽이는 대신 죄에 삼킨바된 신자들의 특징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은혜가 거의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냉냉한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재도 없고 죄를 향한 저항력이 매우 약화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은혜 받읍시다! 매일 은혜 받으십시다! 우리를 향해서 은혜의 불을 끄게 하려고 하는 것이 사탄의 시도 아닙니까? 문제는 우리 마음 밭을 자기가 자라기 좋게 만들어야만 자기가 뿌리는 씨가 열매가 맺지 거기다 아무리 뿌려봐야 소용이 없는 겁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돌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수없이 말씀을 뿌려봐야 안된단 말입니다. 우선 포크레인을 들고 와서 그냥 그놈의 바위부터 박살을 내버려야 됩니다. 안되면은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어 가지고 날려 버려야 됩니다. 흙이 나와야지 뭘 뿌리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사탄이 우리의 마음을 정복하려고 할 때 우리는 거기에 쌓여서 하나님 앞에 은혜로운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근데 그러한 저항이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
주일날 낮 예배에 나와서 달랑 예배 드리고 그것도 꼭 늦게 와 가지고 도장 찍듯이 예배 드리고 끝나자마자 나가는 사람, 담임목사한테 죄 지었습니까? 먼저 나간 다음에 천천히 나가면 되는데도 그냥 뒤에서 총알같이 뛰어나가 가지고 등뒤에 다 대고 인사를 하게끔 만듭니까? 도대체 왜 그럽니까? 그러고는 일주일 동안 성경도 잊어먹고 하나님도 잊어먹고 교회도 잊어먹고 그러다가 토요일 날 명화극장 끝날 때야 교회 생각하는 사람들이 죄를 이기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몇 주 빠지고 대성통곡하면서 "아버지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러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주일을 빠져봐도 그런 통곡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이르는 길은 넓고 아주 쉽다” 이렇게 말입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사는 것만이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지만 성령께서는 간혹 죄의 뿌리를 불태워 버리는 강력한 역사를 통해서 죄를 죽여 버리십니다. 그걸 가르쳐서 우리는 무너진다고 말합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얘기를 드렸습니다.
저희 학교에 제가 가리키는 제자 한사람이 있었는데 그때 저는 아직도 목사안수를 안 받았었는데 제자는 벌써 목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얼굴에 칼자국이 난 사람인데 그 제자 점심 제의에 칼자국 때문에 음식이 소화가 안될 것 같아서 두 번을 거절하고 세 번째 식사를 같이 하게 됐는데 자신이 저의 책을 읽고 은혜 받고 회개한 얘기를 하는데 폭력배 김태천이 옛날에 자기 밑에 데리고 있던 사람이라면서 이야기를 해주는데 그것은 진짜 불가사의한 일이었습니다. 회개라는 것이 대개 오랜 시간에 걸쳐서 우리의 마음이 녹아지고 그러면 하나님 앞에 용서해 달라고 매달리면서 서서히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돌리시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렇게 돌아갈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이셨는지 어느 날 망년회에서 술을 실컷 마시고 그 술기운에 교회에 대한 향수가 생기더랍니다. 아! 교회 가야지. 그러면서 아무 똘마니도 없이 혼자서 허부적거리면서 교회를 찾아갔는데 문이 열려 있더랍니다. 교회 문을 팍 여는 순간에 불덩어리 같은 게 바람처럼 "휙" 날라 오더랍니다. 그러더니 그대로 "꽝"하고 꼬꾸라졌는데 신기하게도 어디에 부딪친 것도 아니고 그냥 고꾸라졌는데 눈, 코, 귀, 입 구멍 있는 데서는 전부 피가 나오더랍니다. 자기가 아무리 폭력배 생활을 했지만 그게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남 죽일 때나 겁 안나지 자기 죽을 때는 다 겁난다고 서진 룸싸롱 살인사건 때 유도하는 사람들처럼 덩치 좋은 폭력배들이 뒷 힘들을 믿고 재판 받을 때도 콧방귀도 안 뀌더니 판사가 "사형!" 쾅"쾅쾅" 하니까 어린애처럼 덜덜 떨면서 막 흐느껴 우는걸 봤습니다. 자기 앞에서 그 회칼로 난자해 가지고 사람들이 죽어갈 때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기가 죽게 되니까 그렇게 무서워하는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이 친구도 온몸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하니까 무서운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곧바로 회개하고 그 시간 부로 술, 담배 다 끊고 하나님 앞에 돌아섰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 죽게 하심으로 서서히 죄를 말리신 것이 아니라 죄있는 그 지점에 미사일을 발사해서 박살을 내버리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그냥 피만 흘리다가 멈췄지만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발하나 날려 버릴 수도 있고 손 하나 날려 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사업 완전히 거덜나게 해버릴 수도 있고 가족중 한사람 데려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근원을 완전히 말려 정신 바짝 차리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완전히 뒤집어지게 말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걸 부러워하면서 그때가 올 때까지 자신은 어쩔 수 없다고 자기 합리화를 시키며 자신들이 죄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죄가 좋아서 자기가 은혜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지 은혜 주시지 않아서 죄를 못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인 성령의 역사 속에 거하셔서 죄를 서서히 죽이기도 하시지만 위급하거나 그 뿌리가 워낙 깊다고 생각될 때는 미사일을 날려서 한방에 박살을 내버리시는데 문제는 바울과 아까 얘기한 그 목사님처럼 미사일이 날라 와서 죄만 죽었지 잘못하면 하나님 앞에 죄만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신까지도 그 미사일에 날라 가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징벌하시며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살아있는 동안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드십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아시는 분이 책 한 권을 부쳐 줬는데 바빠서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제목이 「회개하라 아니면 망하라」였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둘 중에 하나 택하라 이겁니다. 회개하든지 멸망 해버리든지 둘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생각입니다.
성령은 이처럼 때로는 강력하게 우리의 죄의 뿌리 그 자체를 공격해 우리를 완전히 새사람 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됩니까? 늘 은혜 가운데 살도록 기도하고 은혜 가운데 늘 죄를 죽이는 삶을 살면서도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죄! 버리려고 끊임없이 애쓰지만 아직까지도 도말되지 않고 있는 이런 죄에 대해서 성령의 매우 특별한 큰 역사를 베푸셔서 죄를 날려 주시도록 그러나 우리에게는 날리지 마시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죄만을 날려 버리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쉽게 말씀 드리자면 인질범이 우리를 꽉 잡고 있는데 저격자들이 총을 쏘니까 인질범이 "다 물러가지 않으면 이 인질을 쏘겠다" 그러는데 에따 "너도 죽고 너도 죽어라"그러고는 그냥 갈겨버리면 인질도 죽고 죄 없는 사람도 죽는데 유능한 저격자는 숨어서 범인이 이리저리 움직일 때 "탕"하고 쏘면 인질은 하나도 상하지 않고 인질을 사로잡고 있는 범인의 머리를 관통하는 총 한방으로 상황을 끝내는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에게서 분리되지 않는 죄를 우리가 은혜가운데 살더라도 마지막 근본적인 죄의 뿌리조차 놀라운 방법으로 말려 버리시고 불태우시는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저는 지난날에 담배를 끊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가 세 번 끊었다가 4번째야 성공했는데 세 번째 왜 실패했을까 했는데 저의 결심은 있는데 성령의 도우심이 없었습니다. 대개 끊는 것이 1月1日부터 끊는다 아니면 6月31日부터 끊는다 아니면 어느 날 가래에 피가 묻어나는걸 보면 끊는다 하는데 4번째는 세례를 받고 나서 무슨 동기에 의해서 깊이 자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이렇게 살아서는 매가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을 살수 없겠구나"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강력하게 역사 하시는데 그렇게 담배를 좋아하던 사람이 이상하게 담배만 물고 나면 소 배설물 냄새가 나더랍니다. 사실 그 담배에서 무슨 냄새가 나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죠, 그러니까 아예 냄새 때문에 자기 스스로 그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평소에 은혜 안에 살면서도 그러나 어떤 특정한 부분에 있어서는 한번의 미사일을 날리는 것 같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죄의 근원에 폭발하듯이 떨어져야 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우리를 십자가로 데려가심으로 죄를 죽이십니다. 우리를 십자가로 데려 간다는 것은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다가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는데 그때에 성령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생각나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려는 유혹을 받다가 도 십자가가 떠오르면서 죄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경험케 하시는 그 십자가를 볼 때 우리는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피 흘리시는 예수님의 형상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가시 면류관 쓰신 그 모습을 볼 때 그리스도인은 아파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편의주의자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흉악한 형벌을 받고 죽으신 이유는 자기의 허물과 죄 때문에 그렇게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지식이 있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십자가를 보는 것과는 다른 감동을 가지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그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바로 나의 죄 때문이 아닌가! 내가 지금 범죄 하도록 유혹 받고있는 이것 때문에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밝히 보이는데 내가 어떻게 이 죄를 지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죄를 짖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 바로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죽이도록 만들어 주시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여러분들께 제가 개척한 이래로 이제껏 까지 십자가를 경험하는 문제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십자가에 대해 굉장히 많은 설교를 했고 무슨 설교를 해도 십자가와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공통적으로 들었던 메시지는 십자가를 경험하지 않고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일회적인 경험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건장한 영성의 심장부에 와야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드린 이유는 바로 죄를 죽이는 성령의 가장 마지막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경험하는 이문제도 단지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느 한 분야가 아니라 신앙생활의 한복판에는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고 그 관계에서 비롯되는 영적인 생활이 있는데 그 영적인 생활의 심장부가 바로 죄를 죽이는 삶이고 그 죄를 죽이는 삶은 십자가에 대한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정립이 안되신다면 “십자가를 경험하라"를 구입하시든지 집에 꽂아 놓으셨으면 처음부터 다시 정독하시기 바랍니다. 한번이 아니라 일년에 한번씩은 정독을 하십시오. 죄를 죽이는 삶과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이 왜 그렇게 관계가 깊은지 그 비결을 여러분들이 터득하시기 전에는 여러분들이 정말 죄를 이기는 삶을 살수가 없을 겁니다. 십자가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질그릇같이 연약한 사람들이었는데 사자처럼 혹은 불꽃처럼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유능한 목사님만 그렇게 산것이 아니라 무능한 평신도도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들이 그런 삶을 살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인간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위대한 삶을 살고 그리고 짧은 인생이지만 불꽃처럼 살아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함께 해주시는 삶.
나의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 때
나 위해 고통 당하신 주 얼굴 보인다.
그 형상 볼 때 내 마음이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겁을 주는 것만으로는 죄를 버리게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 깊이 깨달아야만 경계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문제는 죄에 대한 깨달음이 오는 것만으로는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과 복음 사이에서 몸부림 친 것이 비로 그것입니다. 율법을 몰랐을 때는 잘살았는데 알고 보니까 이것도 죄 저것도 죄라는 정죄가 날라옵니다.
그러니까 아! 이거는 정말 괴로운 일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데 문제는 죄를 깨닫게 됐는데 그 율법 자체 안에는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그 사람을 십자가로 데려가셔서 “네가 지금 범죄 하도록 유혹 받고 있지?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네가 지금 지으려고 하는 그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단다. 그 분이 저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데 그래도 네가 계속해서 범죄를 하려느냐?”그때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사실을 깊이 다시 경험하게 될 때에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오는 것입니다.
지금 한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른다면 여러분은 정말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빨리 십자가를 다시 경험하고 기초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십자가의 참된 고통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그런 고통을 경험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했던 사랑도 우리에게 경험시켜 주십니다. 그 사랑도 우리에게 경험 시켜 주시니까 한 편으로 고통 또 한편으론 사랑 때문에 우리가 지으려고 했던 그 죄를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참 자유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러니까 이 십자가가 구원받을 때 한번 통과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매일 매일 우리의 영적인 생활의 한복판에 서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에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나는 원래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살아갔던 흉악한 죄인이요 영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이미 죽었던 자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래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으신 그 분이 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내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 버려 두시고 내게 오셔서 나를 그의 사랑으로 건져 주시고 구원해 주셨구나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하나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살려 주셨사오니 이 감사한 마음을 내가 어떻게 표하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십자가에 대한 감격을 깊이 간직할 때 결국은 우리는 죄 짖고자 하는 마음을 그 앞에서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들이 성령을 통해서 그 십자가를 오늘도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육체와 함께 못박았느니라" 어떻게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느냐 하면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고 성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성령이 우리를 살게 하시면 하시지만 한번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 가운데로 옮기시지만 그러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이 죄를 끊임없이 죽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고 나는 하나님 앞에 정말 죄인일 뿐이고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는 이 겸손한 자기 인식이 날마다 새롭게 십자가 앞에서 체험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매일매일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있고 십자가에서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그 분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려고 하는 매일의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속에서 새롭게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죄를 이기는 삶을 살수 없고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성령이 아니면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죄를 이기는 삶을 살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함으로 서서히 우리의 죄를 죽여가고 그러면서도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우리의 죄의 근원을 불태워 주시는 기적적인 역사를 고대하고 또 한편으로는 날마다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새롭게 경험하며 그 앞에서 의를 위해 부름을 받고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이제는 죄를 미워하며 살도록 우리의 처지들을 확인하면서 살아갈 때 죄를 죽이는 삶은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에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모든 죄를 모두 죽이게 되었을 때 여러분들은 사도 바울과 함께 그런 고백에 동참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9. 죄 죽임이 없는 영적 생활의 두 위험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시40:12)
지난 시간에 우리는 죄를 이기는 (죄를 죽이게 하는)그 주된 주체가 성령이심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또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즉각 그 죄를 싫어하고 또 그 죄와 더불어 싸우고자하는 마음을 율법이 갖게 하고 율법이 그러한 두려움을 주지만 그 율법은 우리고 하여금 그 죄를 이기며 살 수 있게 하는 힘은 공급해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은혜가 필요하고 그 성령을 통해서만 죄를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죄 죽임이 없이 살 때 우리의 영혼에 어떤 영향이 오는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이 시편 40편의 시는 다윗의 시이며 아마 51편하고 그 문맥이 통하지 않나 봅니다. 51편은 다윗의 시이며 밧세바와 범죄하고 난 후에 자신 속에 일어나는 많은 가책과 그리고 왕성하게 솟아난 죄에 대한 욕망과 하나님의 은혜의 회복에의 영혼의 소원 사이에서 깊이 갈등하고 고통하였던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40편의 문맥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성도가 자신의 속의 죄를 죽이지 못했을 때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얼굴을 들어 주를 우러러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던 마음이 자신 속에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다음의 것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에 대해 깊이 깨닫고 그 죄를 죽이기 위해 고통하고 그 죄와 더불어 부단히 하지만 이상하게 승리를 누리고 완전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와 더불어 싸우고 나면 즉각적인 승리가 찾아와 완전한 평화를 누리고 죄를 이긴 자에게 베풀어주시는 놀라운 승리를 맛 볼 수 있다면 좋겠는데 어떤 이는 그러하지만 어떤 이는 상당히 많은 시간동안 분명히 죄와 분투하고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사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계속되지만 완전한 평화가 찾아오지 않는 그러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봅니다.
왜 그럽니까? 우리는 이 시간에 획일적인 공식을 만들어서 판단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한 경우 한 경우 보면서 어떤 점에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찾아 볼 수는 잇지만 그러나 획일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 가져야 할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죄와 의 싸움을 포기하고 사는 평화(?)로운 그리스도인보다는 죄와 더불어 끊임없이 갈등을 느끼는 그러한 사람의 삶이 훨씬 올바른 삶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노고를 갚아주실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어서 그들은 죄에게 진 사람들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평화 없을 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마땅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많은 열매를 붙여 주셔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해도 열매가 실망스러울 정도로 적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어 기쁘고 어떤 사람은 열매가 적어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 자보다 하나님께 훨씬 순종하는 삶이고 하나님께서 훨씬 축복해 주신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
죄와 더불어 싸우고 분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를 이기는 그래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만들어 주는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지만 그 수단들을 사용하여 진정한 평화를 우리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투하고 싸우고 노력함으로 죄와 더불어 할 때 결국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잠시는 고난을 받는 것 같지만 우리를 더 위해 주고 축복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우리는 끊임없이 죄와 더불어 싸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안에서 놀라운 은혜의 축복을 누리고 세상을 이실 수 있는 힘을 공급받고 영혼의 생명과 그리고 고난과 어려움을 이기며 살게 하는 깊은 천국의 신령한 은혜 이런 것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사실 우리가 죄를 죽이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축복과 주권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하고 은혜 받았을 때 우리가 죄 죽이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까? 하나님의 앞에 구원받고 회개하고 새 사람의 되니까 단번에 이러한 영혼의 기쁨, 사랑, 긍휼, 자비 은혜 이런 것들이 막 주어지게 되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누릴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악인의 삶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고 난 이후에는 즉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일단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는 마귀의 공격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마귀는 우리를 지배했습니다. . 그러나 이제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는 우리는 더 마귀에게 집요한 표적이 됩니다. 거듭나고 하늘의 천사들이 여러분들의 이름이 하늘 책에 기록되는 것을 기뻐할 때 마귀는 그 순간 이를 갈고 으르렁거리면서 여러분을 넘어뜨리고 여러분들 안에 있는 참된 구원의 기쁨과 활력을 빼앗아 가버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즉시 하나님의 그러한 은혜를 주셨는대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저절로 충만하고 은혜와 사랑과 영적인 활기가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는 즉각적으로 죄를 어떻게 죽이느냐 얼마나 죽이느냐에 따라서 그러한 영적인 생명과 활기가 좌우되는 신앙 생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죽이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찾아오는지에 대해 오는 2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두 가지로 우리의 영혼의 영향을 미치는데 하나는 우리의 영혼을 연약하게 만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영혼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먼저 죄는 우리의 영혼을 약화시킵니다. 어떻게 약화시키는가 봅시다. 우리가 범죄하고 우리 안에 죄가 자라며 제일 먼저 즉시 우리 마음에 변화가 옵니다. 죄는 지극히 작은데 그 죄가 쌓일 때 서서히 우리의 마음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예방접종을 하는데 100만 명당 1인은 사고가 난다고 합니다. 그 적은 약이 그 작은 주사 바는 안에서 우리 몸으로 들어가는데 그게 잘못되면 우리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이지 못한 죄는 제일 먼저 우리의 마음을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올바르게 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교제를 누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구조가 올바로 되어야 하는데 이 마음의 구조가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의 죄를 죽이지 못했을 때 찾아오는 첫 번째 현상입니다. 죄를 죽이지 못하고 죄가 계속 번성하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무너지고 변질되는 것입니다. 제가 성악 전공자에게 몇 달간 발성 연습하면서 그 사람이 제일 강조하는 것이 자세입니다. 똑바로 앉으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피리가 똑바로 곧게 만들어졌으니 소리가 마치 엿가락처럼 되었으면 소리가 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해 나가기 위한 마음의 구조와 죄 가운데 막살아가기 위한 마음의 구조가 똑같으면 그것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잘 믿고 은혜 생활하는 사람들이 그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면 세상 생활 잘할 수 없습니다. 또 세상에서 신나게 놀던 그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죽이지 못했을 때 그 죄는 제일 먼저 우리 안에 마음의 구조를 허물어트리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죄는 무식하게 힘을 다해 돌격 앞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부터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란 이런 것입니다. 부부사이에 숨기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부정을 행하면 마음의 구조가 일그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격적인 구조가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애정이 빠져나가는 것은 나중의 문제이고 정상적인 인격구조가 안 되는 것입니다. 서로 대화가 단절되고 이해하고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안 되는 이유가 마음의 구조가 일그러졌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 안에서 죽지 않을 때 죄는 우리 마음에 이러한 것들을 갖다 줍니다. 마음을 일그러뜨리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사라지니까 예배를 들여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느낄 수 없고 찬양을 불러도 하나님의 참된 은혜가 자신에게 밀려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봉사를 해도 이것이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하나님의 나의 이러한 섬김을 기뻐하신다고 하는 확신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살아가는 모습은 예전과 같아지고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고 나의 영원하신 기업은 당신밖에 없나이다 라고 고백도 할 수 없고 오직 내가 가는 길을 주 홀로 아시나이다 라고 고백도 할 수 없고 주님만 내게 계시면 난 아무래도 좋습니다 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기쁨일 수도 없고 주님만 나와 함께 하시면 난 괜찮다는 고백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이 하나님 앞에 주를 믿으며 살아가야 할 마음의 구조가 일그러지면서 인격적인 교제가 함께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 투명하게 사는 삶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뭔가를 감추고 부정직해서 인격적 교제가 일그러지면서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어떤 일이 찾아 오냐 하면 정서의 놀라운 변화가 찾아옵니다. 정서의 놀라운 변화가 찾아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원래 신자에게는 타락한 사람들이 가슴에 깊이 와 닿게 느끼는 사람들의 정서가 사라지고 신령하고 거룩한 정서가 살아있기 마련인데 이제는 후자가 물러나가고 전자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시절 팝송을 좋아했습니다. 공부를 할 때도 듣고 하루에 몇 시간 씩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구원받고 나니까 그 가락 자체가 싫어졌습니다. 옛날에 술 좋아하다가도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게 되면 그것들이 싫어집니다. 아직도 좋다면 그 사람은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정서가 다른 정서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싫어진 것이 유행가입니다.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자체가 곤욕입니다. 근데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하더라도 자신 안의 죄가 죽지 않고 자신을 무너뜨릴 때 정서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 거룩한 것들에 대한 기쁨은 사라지고 뭔가 이상한 쪽으로 갑니다. 내 인생은 왜 이럴까 그러면 성경을 보면서 알아야 하는데 유행가 가사에서 답을 찾습니다. 어느 사람은 그럽니다. 유행가 가사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라고 합니다. 타락한 사람의 정서는 뭔가 허무를 느끼면 그런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서가 하나님의 자녀 속에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타락한 정서들이 솟아나면서 마음이 죄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죄에 의해 지배받고 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하고 그리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마음 깊이 아파하고 타인의 죄악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이 이러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며 얼마나 슬퍼하실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마음은 죄를 죽이는 신앙인들 속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산상 수훈 말씀가운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애통함이 없으니까 하나님께로 오는 진정한 위로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렇게 마음의 구조가 무너지고 거룩한 정서가 사라지고 난 후에 우리들이 이전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던 일이 더 이상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내가 굶어도 교화만 부흥되면 좋았고 나는 아무 것도 없어도 교회의 영혼들이 잘되고 하나님 나라만 이루어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이런 것들이 자신의 인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이 변질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죄는 우리의 이 사고를 혼란 속으로 몰고 갑니다. 이제는 사고가 바뀝니다. 예전에 하나님 은혜가 충만할 때는 영적이고 신령한 것들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는데 죄에 의해 지배되고 난 후에는 찾고 생각하고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육적입니다. 옷, 재물, 외모 육체 집 이런 것들뿐입니다. 계속해서 생각하고 꿈꾸는 모든 것이 육체를 위한 것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 몸은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마음 은 자신의 육체를 만족시키는 그런 일을 하도록 마음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기 영광을 위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신앙적인 일을 하면서 자신이 영광을 받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고 의 구조가 신령하고 거룩한 것에서 모두 사고가 떠나고 그리고 자기 중심적, 자의 의에 중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가 우리를 이길 때 마음의 구조가 무너지고 사고가 세상적인 것에 사로잡혀 거기에 완전히 미치는 것입니다.
루이스 베일리가 쓴 책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2의 발견을 했는데 ' 진정으로 경건한 삶을 살려면 당신이 꼭 필요한 이상으로 세상에 대해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죄를 죽이는 생활에 있어서 핵심을 찌르는 말입니다. 세상에 대해 많은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놀라운 지식 추구 삶 자체가 세상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신령한 것들이 사라져 간다는 것들을 보여줍니다. 죄 죽이지 못함으로 인해 우리 사고가 모두 세속적인 것들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각을 부르고 반복되는 생각은 행동을 부르고 반복되는 행동은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은 인격이 되고 이제는 그 사람과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죄가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그것을 패역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단단하게 고착되어 그 사람에게 붙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죄의 예민함입니까?
세 번째로 죄는 의지에 영향을 줍니다. 한번 죄에 지고 은혜가 떨어졌다고 해서 그 사람의 즉각적으로 '오늘부터 교회에 안 나가야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에도 잘 나오고 십일조도 하고 겉으로는 신앙생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죄는 점점 자라므로 그 죄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신앙적인 삶은 못하게 만듭니다. 전에 은혜가 충만할 때는 한번도 새벽기도 나오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된 적이 없었는데 죄가 그를 이긴 후에는 그런 삶 자체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또 그렇게 살고 싶은 소원도 없습니다 .그리고는 수요예배 나오는 것도 힘들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삶 자체도 내게서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의무를 하나씩 둘 씩 다 포기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을 마음으로뿐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내시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삶이 어떤 삶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절대로 살지 말라는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모든 이에게 보여주고 기대하는 삶이 아니라 순종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만들고 그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의지적으로 그것들을 깨뜨리고 범죄하고 살아가고 자신의 의무를 모두 버리도록 만듭니다. 결국 하나님을 막보는 삶을 살라고 죄는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 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음도 빼앗기고 사고도 버리고 그 마지막 껍데기도 버린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하고 은혜 속에서 살아가도록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그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는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이 되고 진노를 불러오는 그러한 삶을 적극적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짐승과 같은 삶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몰라서 그런 삶을 사는데 이 사람은 모두 압니다. 주님이 자기를 위해 못 박힌 것도 알고 자기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알고 자기는 아무 공로 없음도 압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에 의해 완전히 삼킨바된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는 가끔 부정직한 그리스도인의 소문을 들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럴 수 있냐고 반문하지만 그럴 수도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가 정말 충성되고 헌신된 삶을 살았을 때는 자신도 그럴 줄 몰랐습니다. 마음이 무너지고 사고가 지배되고 의지까지 무너지게 되니까 자장 기본적인 삶, 예전에는 기쁨이 된 그런 삶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붙잡을 때만 성도이지 하나님의 우리 향하던 손을 놓으시면 우리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더 끔찍한 타락으로도 갈 수 있으며 그 사람이 갈 수 있으면 우리도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목표는 의지까지 완전히 마비시켜서 그렇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은 이러한 질문을 마음에 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계속 이런 식으로 진전이 죄지 않는 사람을 왜 그렇습니까? 너무나 오랫동안 죄를 지었어도 계속 교회에 나오는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죽어도 은혜를 못 받고 뭔가 죄를 이길 의욕도 없어도 교회에 계속 나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도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꾸역꾸역 나오다 그대로 죽을지 변화를 받을지는 여러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교회에 나온다는 그것만으로 여러분들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는 영혼을 약화시키다가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서도 쓸모 있지도 않습니다 죄는 이런 식으로 우릴 지배합니다.
여러분들은 죄의 이러한 구도로 볼 때 어느 단계에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허물어지려고 합니까? 사고가 이미 지배되었습니까? 여러분,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듭니까? 그렇게 되면 주님이 주신 생명을 모두 잃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하시고 어떻게 못 박혀 죽으셨는데 그런 삶을 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구원받고 주님이 우리 같은 죄인 살리시기 위해 어떻게 당신의 아들에게 고난받게 하셨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죄를 이기지 않으면 우리 모든 구원의 은혜도 헛되고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도 헛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크고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 하나님을 저항하고 항거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르쳐주고 신앙의 빛을 증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지 보여주는 삶이 되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부끄러운 삶이며 마지막 주 앞에 서서 어떻게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죄는 우리 영혼을 어둡게 만듭니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그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주 두텁고 짙은 먹구름이 끼게 됩니다. 빛이 아무리 강력해도 그 빛이 자신의 영혼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말씀이 우리 영혼 안에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2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자체의 성령의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먹구름이 없어야 합니다. 죄를 죽이지 못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 오는 모든 은혜가 차단되는 것을 봅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어떤 이는 졸고 어떤 이는 흐느끼며 어떤 이는 지겨워하는데 어떤 이는 환희에 빠집니다.
지식에 두터운 구름이 생기면 이해가 안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령이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쳐 주는 것은 한번 반으로는 만족되지 않고 우리의 삶 속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라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 느끼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전의 그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사랑은 또 새롭습니다. 사랑은 현재적으로 경험해야 되는 것이지 추억을 먹고는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전에 받은 것이 지금 살아가는 것에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에 있어서 경험적인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높은 지식과 학식을 가졌더라도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으면 아무리 설명해도 그는 그것을 모릅니다. 반대로 그가 학력이 짧더라도 그가 온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이면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할 때 그에게는 놀라운 감각이 다시 살아납니다. 이렇게 신앙 생활에서 경험적 요소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의 영혼을 약화시키면서 신앙의 경험이 사라지니까 우리의 사고가 이해를 못하고 그리고 먹구름이 끼어서 하나님께로 오는 은총을 못 받으니까 서서히 우리의 영혼을 어둡게 만들어 이전에는 깨닫던 것을 이제는 못 깨닫게 만듭니다.
어떤 이는 예배를 드릴 때 흥분되고 기대감으로 차소 설교를 듣는 반면 어떤 이는 도무지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없기 때문에 도무지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습니다. 영혼의 두터운 먹구름이 끼면 어두움 속에서는 낮에는 할 수 없는 일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러면서 어두움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를 못 죽일 때 결국은 거듭나고 구원받는 이들은 잠시는 행복할 수 있지만 계속해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수영을 좋아하는 사람의 물 속을 헤엄치는 것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그러나 그 속에서 계속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끔 혼란과 무질서 속에 갇히면서 그 곳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진실한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환난 날에 날 부르라, 내가 너를 구원하겠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그렇게 진실하게 기도해도 이상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대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하나님께로 원망과 배반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더 하나님을 찾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막가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들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르짖을진대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가지고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은 그대로이면서 가끔 그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힘들게 느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그때 은혜 주시길 바란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한번 기도하면 확 상황이 바뀌고 환경이 열리고 기도의 응답이 주어지고 어떤 놀라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간증은 그가 죄를 죽인 삶을 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에 있을 때 이런 놀라운 기도의 응답이 일어나지 자신이 지금 하나님을 떠나 죄가 들어와 마음도 사고도 의지고 모두 허물어 버리고 영혼에도 두터운 먹구름이 끼었는데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도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고 매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면 더 큰 비극이 일어납니다. 영혼이 두터운 먹구름이 끼어 말씀의 은혜도 없고 주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주어도 그 은혜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우리의 영혼은 서서히 고사됩니다.
결국 결론은 우리 속에 있는 이 죄의 번성함을 어떻게든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들에 참여함으로 돌이키는 그런 근본적인 삶 없이는 우리는 모두 결국은 이런 식의 삶을 위해 악한 것들이 데려가는 것입니다. 너무나 명백한 길이고 모두 드러났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살펴봅시다. 우리가 우리 안에 죄를 죽이지 않고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랄 수도 없고 하나님의 부를 수도 없는 처지로 내려갑니다. 우리의 사고가 지배되고 의지를 지배해서 결국은 주님을 섬기던 일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형식도 모두 버려 하나님을 배역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런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가게 되고 이 육체의 정욕은 아무리 넣어도 됐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떠난 삶을 더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를 크게 징계하셔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 깨닫게 하시던가 아니면 이를 이 세상에 놔 둘 때 나의 교회와 나의 영광에 심히 해롭다고 생각될 때 그이 생명을 거두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단이 우리에게 향한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셔서 화해 시키셨음에도 불구하고 죄로 말미암아 다시 그 분과 원수 맺는 관계가 되기 원하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우리가 이 곳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가 되고 심지어는 그 나라에 거치는 자가 되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죽이고 거룩하게 사는 것만이 성도가 진정으로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마음을 지키고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고 우리의 사고가 변화되도록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회개하는 것 두 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를 반복하는 삶을 살면서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어그러진 길로 갔을 때 속히 돌이키고 우리가 잘못했지만 패역이 되지 않도록 하여 결국은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0. 죄 죽임과 은혜 자람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계3:2)
지난 시간에는 죄 죽임이 없는 신앙 생활이 영혼에 어떤 영향이 미치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죄 죽임이 없을 때 첫 번째는 우리의 영혼이 매우 약화되어 그로 인하여 우리는 죄 가운데 잘 들어간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는 죄는 우리의 영혼을 매우 어둡게 만들어서 우리의 분별함이 없어진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악화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고 그리고 그 뜻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죄를 죽이는 신앙 생활은 우리 마음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자라게 한다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죄 죽임과 은혜의 성장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10년 전 저는 우체국장을 지냈는데 시골이었습니다. 그 곳의 전임 국장이 1 년에 만원 주고 작은 땅을 세를 빌렸는데 아주 작은 땅이었습니다. 그래 거기다 채소를 심어서 점심 시간에 따서 먹는 것이 커다란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상추밭인데 옆집의 것은 잎이 손바닥만한데 우리가 빌린 땅의 상추는 도무지 숟가락 만해서 더 이상 자라지를 않았습니다. 왜 그러한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저는 원래 김 매고 그럴 줄도 모르고 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옆집의 것은 주인이 항상 풀 뽑고 김 매고 가꾸는데 우리 땅은 누가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밭을 가꾸지 않았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있는데 확실히 모든 것이 씨만 심는다고 잘 자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태껏 나무를 보면 대게 몇 년쯤 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 맞추는 눈을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실험을 해 보고 난 이후 저는 그것이 얼마나 착각인가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무를 보고 나이를 맞추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50년 된 두 그루의 소나무를 보았는데 한 쪽 나무가 다른 한쪽 소나무의 반 밖에는 안됩니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로 인하여 달라지는데 산이 어떤 산이냐에 따라 주위에 얼마나 많은 나무가 있느냐에 따라 흙이 어떠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그러면 그 은혜가 심겨져 성장을 합니다. 물론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한번도 마음에 와서 부딪힌 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여태껏 한번도 감동도 없고 찔린 적도 없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한 적도 없었습니다.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말씀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마음 밭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를 콘크리트 바닥에 뿌린 들 무엇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고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조금이나마 감동이 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멘 하면서 그 은혜를 받고 우리는 참 좋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불순종한 삶이 후회가 됩니다. 그리고 뉘우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심겨졌는데 심겨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다음에는 자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라는 것은 심겨졌다고 해서 저절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한 번 생각을 해 봅시다. 예전에는 화전민이 많았었습니다. 화전민들이 어떻게 밭을 일구는지 생각을 해 봅시다. 우선 산에 불을 지르고 풀섶, 작은 나무를 태우고 큰 나무를 도끼로 쓰러뜨리고 그리고는 정리를 한 뒤에 곡괭이나 호미를 사용하여 모든 뿌리를 다 파냅니다. 그 다음에는 쟁기로 흙을 파내어 큰돌들과 작은 돌들 모두를 골라냅니다. 그러면 밭이 됩니다. 근데 어떤 사람은 그냥 바위 풀, 덤불, 나무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씨를 뿌렸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싹은 나긴 납니다. 그러나 난다해도 결실을 맺을 수가 없고 혹 결실을 맺는다고 하더라도 거의 쓸모 없는 것입니다. 쉽기는 후자가 더 쉽지만 결실이 안 되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도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은혜 받은 사람들은 그 은혜가 자라야 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은혜의 씨앗을 받아서 잘 가꾸어 나무로 자라게 하여야 합니다. 어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을 그런 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겨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은 그것이 안 심겨졌을 때의 문제이고 그 후에는 그것이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그 주위의 잡초를 뽑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죄를 죽이는 신앙 생활 입니다. 죄는 죄대로 짖고 은혜는 은혜대로 받으려고 하고 그러니까 그것이 은혜를 받아도 은혜가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은혜는 많이 받는 것 같은데 견고함이 없습니다. 지난주에는 은혜를 받고 이번 주에는 안 나옵니다. 그런 사람의 그런 일이 한번이 아니라 자꾸 반복될 때 주위의 사람들은 그가 받은 은혜가 가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 은혜가 가짜가 아니라 적절하게 죄를 죽이는 신앙 생활을 못하고 사니까 은혜가 심겨질 뿐이지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의 앞에 은혜 받는 그 동안에는 그 사람도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고는 그렇게 되지 않으니까 자기 자신도 혼란에 빠집니다. 왜 나는 견고함이 없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는 결론을 나는 연약하다고 내립니다. 그런데 그것은 연약한 것이 아니라 연악한 것입니다. 연악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의 의문이 풀렸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는데 견고함이 없는 것은 그 은혜는 받는데 그 은혜가 자라지를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99%이상이 죄 죽이는 신앙 생활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받는데 죄 죽이는 생활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은혜가 장성하게 자라지를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나무라고 가정을 해 봅시다. 나는 흔들리지 않을거야 나는 흔들릴 수 없어라고 아무리 결심하고 다짐해도 그것이 나무 마음대로 됩니까? 나무가 삐짝 말라서 금방 쓰러질 것 같은데 세차게 바람이 불면 자기가 안 흔들리고 배기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심 4가지고 안 되는 것입니다. 결심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차근차근 은혜 안에 살면서 자기 죄를 죽이고 그리고 자기 죄를 죽이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죄를 죽일 때 어떻게 죽인다고 그랬습니까? 순종한 만큼 죽인다고 그랬습니다. 이런 생활은 거의 없이 부흥회나 집회를 쫓아 다녀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무엇합니까? 은혜를 받은 다음에 물을 줍니까? 김을 맵니까? 비료를 줍니까? 내버려두니까 그 후에 사고는 혼란이 옵니다. 내가 예전에 받은 은혜가 약했나 보다라는 생각이 옵니다. 나무를 깊이 깊이만 심으면 다 됩니까? 문제는 심고 잘 가꾸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가슴을 가르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죄를 죽이는 신앙 생활을 하지 않으면 그 체험이 그를 영원히 붙들어 주지는 않는다는 갓입니다. 그러니까 체험을 많이 하면서도 견고함이 없는 이유를 여러분들은 발견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도 견고함이 없는 삶은 항상 같은 생활의 반복일 뿐이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뭔가 쭉 뻗어 나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질적인 변화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동물적 반복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원리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이제는 하나님 앞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은혜 받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서 깨달으려는 마음으로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일단 하나님의 은혜가 심겨지면 이것이 잘 자라도록 죄를 죽여야 합니다.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은혜 안에 거하면서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을 없애주어야 하고 주위의 밭을 다 고르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은혜가 처음에는 작은 은혜 같았는데 점점 자라서 큰 은혜로 자랍니다. 큰 나무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체험을 많이 하였으나 사는 것은 짐승과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자기처럼 강력한 은혜가 없어도, 간증할 만한 그런 이야기가 없어도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견고하면서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심겨진 후에 죄를 계속 죽이는 생활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그 분이 우리를 붙잡을 때에만 신앙이며 바로 신앙다워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운 첫 번째 진리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오늘 성경을 보니까 이 사대교회는 살았다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로다 라는 말씀을 들은 교회였습니다. 살았다 죽었다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 사대교회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적인 상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영적인 실태를 분석하자면 살았다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로다 하는 말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죽었다 라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보다는, 생명보다는 죽음에 근접한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사대교회가 죽었다 라고 말을 들었는데 죽었다 라고 해서 주일 예배를 안 들였겠어요 선교사 파송을 안 했겠어요? 요즘으로 말해 재직회를 안 했겠습니까 구역예배를 안 들였겠습니까? 성가대가 없었겠습니까? 교회가 하는 모든 것은 다 하였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교회나 죽어있는 교회나 그 겉모습은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겉보기에는 비슷해도 실제 내적 생명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교회나 죽어있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나 겉모양은 같아도 속은 다릅니다.
병원에서 구르마가 오는데 보자기에 무언가 싸여있는데 아기가 있었습니다. 아마 조산아인 모양인데 잘 보니까 움직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사람이 자는 것과 죽어있는 모습이나 겉으로는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다릅니다. 잠깐 보면 비슷해도 계속 들여다보면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은 같을래야 같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마찬가지로 이 사대교회가 영적으로는 죽은 교회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영적으로 거의 죽어있는 것과 같은 이 교회에서도 생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어떤 가르침을 배우느냐하면 이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 인이 열심히 죄를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소수입니다. 보통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도 받고 싶어하면서도 세상의 정욕도 맛보고 싶어합니다. 하늘의 은혜도 받고 싶어하고 세상의 것도 즐기고 싶어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그리스도 인은 이런 2중 적인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전혀 성령의 은혜를 받지 않는 사람이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결론은 이 사대교회가 영적으로는 것의 죽은 것처럼 보여도 그들에게조차도 성령의 은혜가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남은 바'는 성령의 은혜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죄 죽임의 삶이 거의 없는 게으른 사람들조차도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찔림을 받고 눈물이 나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사랑하심의 느껴질 때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 남은 바가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을 대단한 것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게 죈 것을 이라고 말합니다. 죄 죽임이 없이 이따금 교회에 나와 감동을 받아 눈물을 조금 흘린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감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옳고 나는 연약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가 이렇게 살아도 내가 언젠가는 죄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승리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이런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삶 자체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간헐적인 은혜로 인해서 자신의 삶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므로 인해 가끔 가책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냥 가나 가끔 가책을 받고 가나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2번 속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죄를 죽이지 않아서 은혜를 자라지 못하게 하는 즉 하나님의 은혜를 소멸시킨 것이고 두 번째는 가끔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을 보고 스스로 잘났다고 여기는 자기 의와 자기 교만에 빠지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두 번 잘못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가끔 하나님의 은혜가 있지만 죄를 죽이지 않으면 그것마저 사라져 버립니다.
결국 죄가 우리를 몰고 가려는 지점은 선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죄 가운데 살면서 영혼에 먹구름이 끼어서 자기가 그것을 세밀하게 분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불순종 위에 무지까지 겹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삶은 허해지는 것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부지런한 생활 없이도 가끔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바른 신앙 생활에 도움이 안되고 우리의 신앙의 영적인 원동력이 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생활의 방향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집회 길에 차를 타고 오는데 내리막길이었습니다. 차가 갑자기 시동이 꺼져서 난리가 났습니다 차는 자기 혼자서 내려가고 브레이크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내려오는데 내려오고 4거리 한복판에서 또 차가 시동이 꺼져서 그 한가운데 서 멎었습니다. 그러다가는 다시 시동이 걸려서 조금 가다가 또 차에 시동이 꺼지고 그렇게 가는데 정말 고생했습니다. 경찰도 주위에 없고 길에서 혼자 차를 몰고 갔습니다. 차 시동이 걸리긴 걸리는데 그렇게 가끔씩 조금 걸리는 것 가지고는 주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다 가끔 눈물 흘리는 것, 은혜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신앙 생활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적으로 역사하기 위해서는 죄 죽이는 신앙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촛불이 하나 방에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어 두었습니다. 바람이 들어오면서 흔들리며 간들간들 합니다 그리고는 흔들리며 빛은 내지 못합니다. 죄를 죽이지 않는 신앙 생활도 바람에 막 꺼지려는 촛불과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이런 사람들은 죄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택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택하면 꺼져 가는 촛불 위에 바람을 막는 것과 같고 꺼져 가는 작은 불씨 위에 불 쑤시개를 곱게 올려놓고 후하고 부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꺼져 가는 불씨 같아도 그 불은 곧 큰불을 발하는 불꽃이 되어 일어나 커다란 장작을 올려놓아도 거침없이 타는 불꽃이 되어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죄를 죽이는 신앙 생활은 곧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왜 가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왜 죄를 죽이는 신앙 생활이 없는가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것 없고 딱 하나,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적으로 삭막하게 말할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가까이 있고 싶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럴수록 멀어지고 싶어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 중 부인은 서울에 있고 남편은 일본에 사는데 5개월에 한 번씩 일주일 정도 만납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만나면 너무 너무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뭔가를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을 모르고 하난 말입니다. 부인은 남편을 외국에 보내 놓고는 혹시 유혹이 있지 않을까 좋은 여자가 새기지 않을까라는 이런 것에는 아무런 걱정도 없고 아무런 관심이 없다라고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사랑은 소식이 없을 때는 편지라도 주고받고 싶고 그 다음에는 시진이라도 보고 싶고 그 사진을 보고 나면 목소리라도 듣고 싶고 그래서 전화라도 통화합니다. 그리고 또 그 다음에는 얼굴을 보고 싶고 그 다음에는 먼발치라도 보고 싶고 그러면 가까이에서 보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는 악수라도 하고 싶고 그 뒤에는 포옹을 하고 싶은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정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우리가 정말 그렇게 사랑한다면 간절히 주님을 만나고 대면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말하길 팔복 중에서 최고의 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주는 복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주님의 음성듣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간절히 뵈옵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영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죄입니다.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 장래의 일이나 천사라도 그 어떤 피조물들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환난 날에 어떤 이는 건강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부유할 때 어떤 이는 가난할 때 하나님을 만납니다. 외적 환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가로막지는 못합니다 오직 가로막는 것은 죄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매우 사랑하는 자녀가 있다라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귀여운 아이를 오랜 세월 후 낳으면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잃어버렸습니다. 찾고 다니다가 보니까 우는 소리가 어느 방에서 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이가 안에서 문을 잠기었다는 것입니다 그 문은 보석이 박히고 금으로 도금을 한 최고급 문입니다. 아이는 기겁을 해서 울고 열쇠 쟁이는 아무리 전화해도 연락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애야 기다려라 내일 아침에 열어줄게 이 문은 너무나 비싼 것이라 손상시킬 수가 없단다, 라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람도 아닙니다. 당장 도끼 들고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그 문짝이 문제이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는 그 문이 바로 죄의 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너무 사랑하면 그것 부셔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깝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거 내가 너무 사랑하는 죄인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죄를 버리는 아픔 없이도 주님을 만나는 기쁨도 없습니다 . 만약 그 아이가 보기 싫어하던 이웃집 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애야 조금만 기다려라 너네 엄마 데려올게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는 결국 정욕이고 자기 사랑이란 것입니다. 세상 사랑입니다. 그 세상사랑 속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않습니다. 그 문을 부신다는 것은 주님을 진실한 사랑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죽이는 생활은 결국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입증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자기 죄를 죽이지 않는 생활은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죄를 죽일 때 평안이 밀려옵니다. 찬송가 성경에 큰 인생 풍파가 밀려올 때 끄떡도 하지 않는 고백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것은 먼저 죄 죽임이 있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말려올 때 담대함으로 하나님 내게 환난이 오나 나는 열려 없습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뒤로 다 밀려나 자기 할 일 다하고 범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 말리는 그런 사람은 큰 환난이 다가 올 때 나는 그런 담대함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주 여호와는 구원의 빛이요 나의 방패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그런 고백이 가능한 사람은 죄를 죽이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그런 결과가 온다고 말했듯이 이런 결과가 없다라는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승리가 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환난에 무서워하고 시련에 고민하고 사람 미워하고 팔자타령하고 그러면 그것이 무슨 그리스도인이냐는 것입니까? 예수를 닮아 가는 신앙도 그를 본받으려고 애쓰는 것에서 오는 것보다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거슬리고 자기의 본성을 죽이고 죽이는 생활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럴 때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죄를 죽이는 것은 은혜 자람과 관계가 있고 또 죄를 죽이는 신앙 없이도 성령의 은혜가 가끔 올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고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죽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죄 죽이는 것 없이는 다른 활로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은혜가운데 살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죄를 죽이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 영적 회복의 길(1):말씀의 빛을 받아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矜恤)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지난 시간에 우리는 죄 죽임과 은혜 자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즉 죄를 죽이는 신앙생활이 없이는 우리 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은혜가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라지를 않으면 은혜를 받은 체험은 있지만 열매가 없고 간격이 가끔 있지만 그 신앙생활이 견고하지를 않아서 도무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어제 설교를 했습니다만 이 평범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일생을 허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러나 허비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자! 언젠가는 우리도 받습니다.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깊이 무엇인가를 체험하고 그리고 감동도 받습니다. 눈물 흘리는 회개도 가끔 있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언제나 잠시 그렇게 되고 잠시 후면 그런 은혜는 사라져 버리고 다시 죄가 자신을 모두 얽어매고 마음의 기쁨과 신령한 은혜가 모두 사라진 뒤로 물러 간 신앙생활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결심이 약할까?
나는 왜 이렇게 힘이 없을까? 나는 너무나 실망하기를 잘하는 성격인가 봐 그렇게 자신을 학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기질이나 혹은 그의 성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끔 하나님 앞에 소나기와 같은 은혜를 받아도 곧 잃어버리는 것은 보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죄 죽이는 생활이 일상적으로 실천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 죄를 죽이는 신앙 생활 없이 어쩌다 한번씩 맛보는 소나기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영혼이 살아있다는 표징은 되지를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사데교회를 보면서 실상은 죽은 자와 같은 교회인데도 남은 것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죽이는 신앙생활에 게으른 사람들도 이따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무엇인가를 깨닫고 눈물을 쏟고 감격을 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꼭 무엇과 같으냐하면 자갈밭 위에 쏟아지는 빗줄기와 같습니다. 다른 곳에 비가 쏟아지면은 빗물이 고이지만 자갈밭에 비가 쏟아지면 마구 빗방울이 튀기는 것 같은데 끝나고 나면 물이 모두 빠져버리고 자갈만 남는 것과 똑 같은 이치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 하나님의 이런 은혜를 경험한다고 해서 자기가 대단한 그리스도인 인 것처럼 생각하면 바보 중에서 상 바보입니다.
가끔 하나님의 그런 은혜가 자기에게 있고 가끔 무엇인가 가슴에 찔리는 것이 있어서 눈물도 흐르고 기쁨도 솟는다고 해서 자기가 대단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 중에서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것이 곧 그가 하나님 앞에 죄를 죽인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많이 받고 삶의 열매가 없는 것은 결국은 그 은혜가 지속적으로 심겨지는 은혜가 아니라 간헐적으로 소나기와 같이 쏟아져서 자갈밭에 물 뿌린 것처럼 빠져버리고 사라져버리는 그런 종류의 은혜를 가리키기 때문에 체험은 있어도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의 체험이 있고 그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견고하게 심겨져 있는데 열매가 없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보면은 자기가 가끔 회개를 하고 감동을 받는다는 이유 때문에 마치 굉장한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착각하는 그런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곳입니다. 그 사람은 두 번 잘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니까 비참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데 그것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는 대신 교만해지니까 또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여러분들 가운데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분명한 말씀의 체험이 있고 은혜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죽이는 매일 매일의 신앙생활이 없기 때문에 형식은 남아 있고 뜨거운 감동은 가끔 오지만 생활 자체가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 이런 생각을 해 봅시다. 딱딱하게 굳어진 산아래 밭이 하나 있다고 칩시다. 그것을 곡식을 잘 뿌릴 수 있는 그런 밭으로 바꾼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당연히 소에다가 쟁기를 달아서 소를 몰면서 꾸준히 밭을 하루종일 갈아야 합니다. 그런 다름에는 흙덩어리를 다 캐고 바위를 골라내고 흙을 가느다랗게 만든 다음에 물을 뿌리고 보드랍게 만든 다음 씨를 뿌려야 됩니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계속해야지 곡식이 자랄 수 있는 밭이 되는 것입니다. 포크레인이 저 쟁기보다 훨씬 더 크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 포크레인 들고 와서 한참 후 점심때 한번 해볼까 하고 포크레인으로 밭 중간에 실컷 깊이 파놓고 내 팽개치고 며칠 있다가 와 가지고 저쪽 한번 막 파 가지고 헤집어놓고 내버려두고 웅덩이처럼 만들어 났다고 해서 그 밭이 곡물을 심을 수 있는 밭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막 기가 막힌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어수룩하고 바보 같습니다. 그러니까 가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자기가 마치 뭔가 굉장한 사람이 된 것같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기억해야 되는 것은 죄 죽이는 일 없이는 죄를 죽이는 생활에 매우 게으르면서도 이따금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감동을 받고 눈물을 쏟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간적인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체험을 해도 열매가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어떤 은혜나 자극을 받은 다음에 그렇게 울고 그 다음에 감동을 받고 하는데 신앙생활의 열매가 없고 와르르 끊었다가는 다시 사라져가고 하는 것은 기질이나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약간은 있지만은 기질 전체가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감동을 받으면서도 즉시 뒤로 미끄러져 가지고 다시 차가운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삶의 뚜껑을 열어 보면은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은혜 받는 생활이 없다 이것입니다. 성경은 매일 매일 제대로 읽으면서 감동을 받지를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매일 기도 생활을 안 하는 것입니다. 한다고 그래도 매우 형식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죽지를 않습니다.
은혜가 조금자라도 죄가 와서 즉시 뽑아 던져 버리고 더 깊이 죄를 심어놓는 것입니다. 계산이 되지 않습니까. 이런 생활을 계속 반복하다가 나중에는 믿음이 없는 자처럼 죽어버리는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지금 여러분들이 듣고 있는 이 설교 한편만 들었으면 인생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자기도 모르면서 그냥 반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래 이런 것이려니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패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인생입니까.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죽는 것입니다. 한번도 풍성한 삶은 살아보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마치 하와이는 한번도 못 가보고 하와이 가는 티켓 가지고 가끔 좋아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인생입니까. 이것을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또 하나는 죄를 죽이는 신앙 생활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징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평안이 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오늘부터 한 삼 주에 걸쳐서 아주 실제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려합니다. 지난 주 설교 말고 지지난 주 설교를 여러분들이 기역을 하실 것입니다. 지지난 주에는 무슨 말씀을 드렸느냐 하면 한 사람이 어떻게 죄에게 져서 허물어지는가를 순서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정신을 차려서 들으셨다면 그저께들은 설교가 그림으로 여러분들에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제일 먼저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제인 먼저 무엇의 혼돈이 일어난다고 그랬습니까? 지식의 혼돈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그렇게 현명하게 잘 판단하던 사람이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길이 아닌데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선택을 하면 안되는데 그런 선택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에는 그렇게 행동하면 안되는데 뭐 어때! 이런 식으로 판단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사모하던 그런 신앙의 감정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그 마음. 그래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다시 사랑을 받는 그 행복 이런 것들은 모두 빼앗겨 버리고 하나님 대신 이 속에 타오르는 세상에 대한 욕망, 정욕, 꾀에 대한 탐심. 세상에 대한 간절한 사랑, 이런 것들이 뜨겁게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드디어는 그가 행하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의무를 이전에는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는 행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으로 정복당하는 것은 의지가 모두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은혜 받았을 때는 십일조 생활하고 교회 출석하는 것이 힘겹다든지 죽을 것 같은 고난이라든지 그런 생각은 안 드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하나님 앞에 기본적으로 살아가던 그 삶 자체를 이어 가는 자체가 엄청난 부담감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일주일에 한번씩이나 교회를 나갈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소득에 10%를 받칠 수 있겠느냐 이러면서 전에는 당연히 행할 수 있었던 신앙의 여러 의무들조차 자기가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는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그 다음에는 완전히 교회를 떠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락 가운데 가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훼방하고 도전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목표입니다. 죽이지 않는 피는 우리에게 가장 극단적인 파멸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예를 드렸습니다. 무엇인가 권력에 대한 탐심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마음입니다. 형제가 자매를 쳐다보면서 음란한 마음을 갖는 것은 결국 마지막으로 간음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향해서 치 닫는 것입니다. 여건이 그걸 막아주고 도덕심이 그걸 누르게 하고 하나님께서 임한 은총으로 환경을 조성해 주지 않고 자꾸 잘라버리시니까 그 범죄가 못 이루어지는 것이지 모든 환경이 협력해서 그 길로 쭉 열어주면은 그는 갑니다. 그는 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몇 칠 전에 깜짝 놀랄 NEWS가 나왔습니다. 차 타고 가는데 어느 회사라고 말하지 않겠는데 차 살 때 잘 골라서 사야 되겠습니다. 어느 사람이 차를 하나 샀는데 오토입니다. 오토이므로 싸이드 브레이크는 잠가 놓았고 시동을 걸었습니다. 순서가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사이드를 내리고 그 다음에 브레이크를 내리고 필(?)을 뒤로 옮기는 순간 시속 몇 십 km로 용수철처럼 달려갔습니다. 차 세대가 앞에 있는데 다 박살이 나 버렸습니다. 얼마나 세게 달렸는지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고 사람이 있었으면 죽었습니다. 용수철처럼 튀어나왔습니다. 말하자면 죄를 죽이지 못하고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성격이 있는 것입니다.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려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는 튀어 나가려고 하는데 무엇이 잡아주었으면 피 브레이크가 잡아준 것입니다. 못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위 수준의 것이 아니라 최악의 목표를 향해서 우리를 몰아가려고 하는 그런 속셈이 있습니다. 그래서 의무를 모두 저버리게 만들어서 결국은 하나님 없는 자처럼 살아가도록 만들어 버리려고 합니다. 죄를 거의 죽이지 않고 죄에 거의 진 것 같으면서도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사람의 도덕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붙들고 계시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매일 교회에 나오게 하시고 하나님 말씀을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깨달을 날을 하나님께서 손꼽아 기다리시면서 시간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두 허물어트려 버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 깨트려져 버리고 기도도 거의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는 모두 사라져버리고 지적으로도 혼란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고 감정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빼앗겨 버리고 쉽게 이야기해서 자신의 신앙적인 세계 자체가 허물어져 버려서 죄와 더불어 대항하려고 해도 대항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그런 사람들에게 죄와 더불어 싸우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마치 빈사 상태에 주워있는 사람에게 람보가 사용하는 장비를 주면서 너는 이것을 입고 싸우라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충성심 하나 가지고 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자기가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써 무장 해제 된 것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부터 한 3주에 걸쳐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잘 들으시면 보다 실제적인 교훈을 여러분들은 받게 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를 잃어버리게 된 순서대로 회복을 해야 됩니다. 제일 먼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지식부터 희미해지면서 마지막에는 의지까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이 지식을 하나님 앞에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계속해서 말씀 드리고자 하는 주제는 죄에게 패배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인가 입니다. 그것은 지식의 빛을 회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몇 일 동안 지하실에 맑은 물이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그 물을 몇 바가지 퍼내면서 교회에 이렇게 은혜의 물이 쏟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이 부모가 되어서 어린아이들과 함께 큰방에 누워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불행이 그 집이 지하실입니다. 그래서 물이 넘치거나 제방 뚝이 터지거나 하수구에서 역류가 된다는 근심을 하면서 골아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코를 골면서 자는데 잠결에 들으니까 "엄마, 아파 아파"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로 물이 여기 저기서 솟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하다가는 아이들이 자다가 물에 빠져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여러분들은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불부터 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급한 것은 불이 아니라 물이지만 불부터 먼저 켜야 판단이 서게 됩니다. 119에 전화를 해야하는지, 전화는 어디에 있는지, 아이들은 무사한지, 물은 어디서 나오는지, 얼마나 심각한지,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인지, 이러한 판단이 설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두 무너져 버려 죄에 거의 진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회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몸부림의 수준과 정도는 각각 다르지만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몸부림도 안치고 계속해서 빠져 들어가면 그 사람은 이제 죽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몸부림을 치는데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너무 곤고하고 캄캄하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도 모르고 옛날에는 내가 이렇지 않았는데,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매일 그러한 소리만 반복하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왕년 타령하는 사람 치고 금년에 신통치 않은 사람들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뜨거운 집회에 가서 한 번 열렬하게 기도를 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원에 올라가면 특히 잘하지 않습니까? 마구 북을 칩니다. 북을 세게 치면 더 세게 기도하고 빨리 치면 빨리 기도하고 천천히 치면 "주-여"하고 나중에 쾅 치면 "아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막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정욕입니다. 정욕의 측면이 많다고 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정직한 이해를 가지고 마땅히 자기가 지불해야 할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냥 빨리 하나님의 사랑만을 회복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욕입니다.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를 하면 뉘우침은 없고 제사만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욕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회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렬히 기도를 하고 열광적인 찬양을 한번 불러 보는 것입니다. 그냥 목이 아프고 땀이 나도록 불러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 뭔가 조금은 해결의 길이 있을까 하며 모든 것을 팽개치고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과의 무너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실험을 많이 해 보셨을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고개를 한번 끄덕거려 보십시오. 아주 많습니다.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름에는 이제 어떤 마음을 갖게 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원에 올라가서 그렇게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찬양 집회를 할 때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손바닥을 치면서 목이 터져라 불렀는데 하나님이 나를 돌아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돌아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은 이 속에 있는데 속은 고치지 않고 겉에 있는 몸을 해결해 보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뇌물을 드리는 심정으로 죄를 해결해 보려는 것입니다. "주님! 저의 죄가 이 내면의 세계에는 졌지만 이것은 고칠 수 없으니 주님 제가 드리는 헌금으로 대신 받아 주십시오"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통성 기도로 해결을 봅시다, 찬양을 할테니까 한번 이것으로 흥정을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과 똑 같다는 것입니다.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더 큰 좌절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것도 되지 않는구나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줄 압니까? "될 대로 되라" 그러면 사탄이 그날 기뻐하고 박수를 치면서 파티를 하는 것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될 대로 되라고 그러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보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온전히 죽고 하나님 앞에 다 받쳐 졌을 때 "오, 주님. 될 대로 되는 것이 옵나이다. 저를 주 뜻대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기도도 하지 않고 죄에 패배하고 모든 것이 무너진다면 될 대로 되라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막가파가 되는 것입니다. 되는대로 살자, 죽기 밖에 더하겠느냐,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두 글자로 뭐라고 합니까? 동물입니다. 동물, 사람의 탈을 썼지만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금수와 같은 노릇입니다. 될 대로 되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누구 뜻대로 됩니까? 주님 뜻대로 되어야 됩니다. 주님 뜻대로 되는 것은 그냥 주님 뜻대로 되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주 고도의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가끔 은혜를 받고 대부분의 삶을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주여, 주 뜻대로 될 것입니다. 뜻대로 하시옵소서" 절대 안 됩니다. 매일 근심하고 주님 뜻대로 안되면 어떡하나,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면 어떡하나,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면 어떡하나, 자기를 돌아보면서 불순종의 씨앗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쳐도 주님의 뜻대로 될까 말까 그렇게 저절로 되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었겠습니까? 그것은 그냥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단이 마지막에 목표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다가 될 대로 되라 팽개친 다음에 이제 하나님을 거슬리면서 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축복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렇게 믿은 사람하고 동업하면 동업하는 사람이 쫄닥 망하고, 결혼하면 죽어라고 고생하고, 부모가 되면 늙어도 대접을 못 받고, 그렇게 엄마 아빠가 예수를 믿으면 그 밑에서 태어난 아이는 매일 그러한 부모를 쫓아다니다가 볼일 다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의 근원이 되리라 말씀하신 것의 정 반대가 아닙니까. 슬픔의 근원이 되고 재앙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요나가 배를 타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갔습니다. 물론 죄인들이지만 요나만 그 배에 타지 않았다면 잘 갔습니다. 괜히 그 사람을 태워주는 바람에 그 배는 완전히 박살 안 것입니다. 짐도 다 버리고 사람도 다 죽을 뻔하고 난리를 치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만 탔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대로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바울도 배를 타고 요나도 배를 탔습니다. 유리굴라라는 폭풍을 만난 것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거기는 바울과 탔던 사람들은 바울 때문에 축복을 받고 모두 살았습니다. 요나와 같이 탔던 사람들은 요나한테 떡 하나 얻어 먹은 것 밖에 없는데 하나님 앞에 난리를 당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같이 인생이라는 배를 탔을 때 요나와 같은 사람이 되야 되겠습니까?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야 되겠습니까? 당연히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려는 것은 바로 그런 곳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하고 동업을 했는데 쥐뿔도 되는 것이 없고 망했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어쨌든 망하면 좋은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도 아니라고 합니다. 결국은 그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까지 이 세상에서 모욕 받고 있는 것입니다.
통계를 보니까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70%가 아버지를 미워합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미워하는데 아버지가 더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가치 없이 보는 것입니다. 가증하다. 웃긴다. 우리 아버지 그래도 교회가면 장로라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 집안에서도 자기가 죄를 죽이지 못한 삶을 살고 뒤로 물러가서 완전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나면 장로님의 신앙 때문에 하나님이 조롱을 당하는 상태까지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경고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깨어나야 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이면 빛입니다. 빛, 열렬하게 기도하는 것, 심지어는 은혜 받을 생각을 너무 많이 해도 안됩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상황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가, 그리고 내가 지금 어디 위치에 서 있는가,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상상력을 많이 동원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지리산에 들어갔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비는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계곡 아래로 사람들이 막 떠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망가려고 보니까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캄캄한 밤이 되어서 더욱 모르겠고 해가 떴는데도 어디인지 모르겠고 사면을 돌아보아도 산 밖에는 없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한 모금의 물이나 한 조각의 빵도 필요하지만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이면 누군가가 지리산 전체의 지도를 가져와서 여러분들이 서 있는 그 지점에 빨간표를 찍어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지도의 길도 나오고 그 다음에 봉우리도 나오고 절벽도 나오고 계곡이 나오고, 이쪽은 물이 있고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지를 모두 보여주는 지도가 있고 여러분들이 놓여 있는 지점을 알 수 있도록 딱 찍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산을 벗어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어둠 속에 들어가서 비참하게 파멸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무지와 두려움 때문입니다. 여러분 배가 조난을 당했습니다. 통신도 끊어지고 물도 하나도 없고 먹을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조각배가 되어 버렸습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것입니다. 물도 없고 음식도 없는데 살아 남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몇 일은 살겠지만 오래 살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 얼마 전에 탐험가 한 사람이 무전 통신도 하나도 없이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이 자기를 일부러 조그만 배에 조난 당한 상태로 버려 두고 바다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를 실험해 보니까 59일만에 육지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람이 거기에서 생각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물론 폭풍도 만나고 죽을 뻔도 했습니다. 그런데 무지와 두려움 때문에 죽는 것이지, 오래 살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왜 조그만 배를 하나 타고 나갔는데 목이 너무 갈하면 바닷물을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닷물은 많이 마시면 죽습니다. 조금씩 자주 마시면 염분과 수분이 함께 섭취되면서 이 몸의 밸런스를 잡아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다가 일어나 보면 갈치도 떨어져 있고 꽁치도 떨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다듬어서 양쪽에 붙은 살은 회를 쳐 먹고 나머지는 잘 말렸다가 꾸들꾸들 해지면 씹어 먹으면서 59일을 살아남은 것입니다.
결론은 무엇이면 두려움과 혼란 때문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절망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 가운데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허우적거리면 그의 모든 극복해 보려는 시도들이 그에게 혼란만 있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일 필요한 것은 빛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어느 순간에 혼란으로 가득 찬 캄캄한 가운데 있는 자신에게 빛이 확 들어오면서 자기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깨닫게 되고 자기가 어디로 걸어가야 될지를 깨닫게 됩니다. 혼란에 막 사로 잡혀 있을 때 우리들은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고 좌충우돌의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런데 빛이 비치면 겸허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렇게 되었구나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 받고 변화되기 전에는 모두 "너는 왜 이렇게 불행하냐" 매일 하는 말이, 우리 엄마가 날 낳기 때문에, 우리 아빠가 신통치 않아서, 남편 때문에, 몹쓸 아내 때문에, 무자식이 상팔자야, 얘들만 낳지 않았어도 나는 행복할텐데, 돈 때문이야, 동업자 때문이야, 회사가 망해서 그래, 두루두루 핑계를 대고 이를 갈다가 빛이 들어오고 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거기에 세워 두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죄 가운데 고통하는 사람에게 너그럽게 불행한 것은 너 자신 때문이야, 너가 정신 못 차리고 살아서 그래, 이렇게 말하면 싸움이 납니다. 머리를 끌어당기고 지금 누구를 놀리느냐 하며 불 난데 부채질하는 것이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들어와서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면 무릎을 끓고 자기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나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서 있습니다." 그런 자백이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굉장히 빠른 회복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빠른 회복, 놀랍습니다. 오래 걸려서 든 질병이 낫는데도 오래 걸리는 것도 일반적이지만 그러나 처치하는 방법은 매우 특수할 경우에는 순식간에 낳을 수도 있습니다.
혹 같은 것이 생겨났습니다. 하루 아침이 아니라 십 년, 이 십 년 걸쳐서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살살 음식 같은 것으로 조절해서 없애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런데 칼을 들고 짤라 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강력하게 약을 발라 가지고 그냥 완전히 새 살이 돋아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루 아침에 해결이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료해 주시는 능력의 역사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불부터 켜야지 물은 지금 콸콸 나오고 아이들은 허우적거리는데 불 키고 아이는 도대체 어디간 것이냐고 소리를 지르면서 허둥대다가 갓난아기라도 밟으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러면 허우적대면서 자신이 스스로를 구해 보려고 몸부림치는데 더 많은 사람이 불행해지고 더 큰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불부터 켜야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죄 때문이든지 무엇 때문인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어 가지고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 때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최초의 일은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 머리에 빛이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 빛이 들어오지 아니하고는 그는 죄가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더욱 죄와 더불어서 싸워서 승리하고 이긴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삶이 오죽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모닥불 피우면 연기 나듯이 그냥 연기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나가다가 어느 파출소에서 구경을 하였습니다. 슬쩍 보게 되었는데 웬 여자 하나가 파출소에 왔는데 삼각 팬티에 브레지어 차림입니다. 마약을 했는지 술을 먹었는지 인사불성입니다. 거기서 인사불성이 되어 가지고 이 자식들이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경찰관들 구경났다고 쳐다보고 있는데 술 깨고 나면 얼마나 창피할까, 자기가 술을 깨고도 밝은 대낮에 그렇게 사당동을 걸어다닐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다 새까맣게 모여서 구경을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보고만 지나갔는데 사람들은 들여다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두워서 그렇습니까? 그리고 무슨 짓이든 못하겠습니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앞에 지은 것은 나쁘고 뒤에 지은 것은 좋은 것이니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고 나면은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눈이 뜨여지는 것입니다. '잃었던 생명을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것 작사한 사람이 지독하고 악랄한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그가 왜 그렇게 살았어요? 어두우니까? 모르니까?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식으로 산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은혜가 자기와 같이 망해 버린 사람에게 비친 것입니다. 그 달콤한 주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예전에는 내가 눈이 멀었었네 그러나 이젠 내가 보네' 얼마나 놀랍습니까? 못보고 어두우니까 막 사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보 같은 질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막 살면은 어떻게 되느냐, 그래서 빛을 못보고 계속해서 살면 그렇게 되느냐, 이 일과 관련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그 교회 와 가지고 설교를 제대로 안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아주 성경 말씀을 의지해서 아주 단언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주님을 거치는 것이고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입니다. 왜 그는 스스로 영혼의 하나님의 햇빛이 비치기를 스스로 거절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죄 가운데 살면서 언젠가 하나님이 나를 바울과 같이 만나주셔서 새사람 되게 하시겠지, 그런 소망 품고 살다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왜, 수백 명이 한 명 같은 그 예를 꿈꾸고 기다리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행하시지 않습니다. 저도 바울과 같은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오지 않고 계속 종소리 듣고 내 마음이 열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겠다 하며 인격적으로 결단하고 인도하는 사람 없이 제가 걸어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바울처럼 그렇게 주님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살지 않습니까.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은 주님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자신의 삶을 청산하지 않으려고 하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회개하든지 교회를 떠나서 망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어야 됩니다. 청교도들이 쓴 작품 가운데 무엇이 있냐 하면 '회개하든지 망하든지 둘 중에 하나 하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다른 것은 없다 이겁니다. 우리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흔히 무슨 이야기를 하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 그런 이야기는 반은 맞는데 반은 거짓말입니다. 죄에 대한 마음과 죄인에 대한 마음은 나누어지질 않습니다.
요즘에는 그런 일이 그쳤습니다만 얼마 전에는 이상한 연쇄 살인 사건이 우리 나라에서 많이 벌어졌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아직도 이름이 생생한 사람이 있는데 김대두라는 청년입니다. 그 사람은 열 일곱 명을 연쇄적으로 살인을 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인데 마지막에는 고추 만 원어치 뺏으려고 사람을 절구통으로 쳐서 죽인 사람입니다. 결국에는 예수를 믿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그 끔찍한 사람이 취재를 받는 과정이 나왔는데 껌 씹으면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결국은 재판 받는 그런 과정까지도 나왔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수많은 가족들에게 고통을 준 사람에 대해서 죄에 대한 감정과 김대두라는 사람의 감정이 나뉘어질 수 있었느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괜히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이지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처음에 하나님에게 은혜를 많이 받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수많은 증거에 대해서 한 때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이 후일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많은 성경의 신비에 대해서 여러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런 설명은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말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거든요. 하나님 앞에 벌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벌이 항상 자기 죄보다 가벼웠습니다. 죄하고 똑같았으면 벌써 죽었을 텐데 하나님이 살려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주님 앞에 제가 잘못을 했습니다, 그 고백을 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제 주님이 괜찮다 그리고 주홍같이 붉은 우리의 죄를 맑게 씻어주시고 머리털보다 더 많던 우리의 죄를 눈보다 더 희어지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입니까? 알고 보니까 하나님이 내 죄는 그렇게 미워하셨는데 나는 너무 사랑하셔서 그래서 내가 그 죄 가운데 있을 때 단숨에 쓸어버리고 단 칼에 베어버리는 대신에 그렇게 심판을 받고 사라지는 성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나를 향해서 일체 오래 참으심으로 나를 결국은 이렇게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렇게 고백을 할 수는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인 나는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하셨고 내가 지은 죄가 주홍같이 붉고 머리털보다 더 많은데 나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를 사랑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키지 않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 가운데서 돌이키는 사람을 찾으시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이 돌이키기를 기도하고 또 그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힘쓰시지만 하나님은 혼자 돌이키시지 않으십니다.
죄를 죽이는 삶, 그것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성령이 죄를 죽여주시지만 우리가 순종하는 것만큼만 역사합니다. 하나님이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자꾸 주시는 것입니다. 그 자기 수준에 맞게끔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못 깨닫는 사람들은 가다가 한번 차를 굴려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정신들 바짝 차려야 됩니다. 지금은 우리 교회에 계시지 않으시는데 그분은 몇 달에 한번씩 차가 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다고 합니다. 놀라운 은혜인데 왜 새차 뽑은 것이 굴러 가지고 완전히 폐차가 되가지고, 왜? 미워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않으시니까 하나님이 적당히 굴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참으시는 것입니다. 왜 아주 쓸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이 참으시는 것입니다. 돈 갖고 덜덜 떠는 사람들은 돈 한번 날려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얼굴, 미모가 아름다워 가지고 교만을 떨면 한번 상처 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잠시입니다.
은행 빚은 떼먹고 살수는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 지은 것은 띠어먹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갚아야합니다. 갚는 방법이 두 개가 있는데 회개의 눈물로 갚던가, 징벌을 받아서 갚던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다른 해결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띠어먹는 일이 없습니다. 반드시 갚아야 됩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는 그것은 불신자들 이야기이겠지만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갚아야 됩니다. 불신자들은 영원한 세상에서 갚고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갚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곤고하고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를 쌓이게 되면 죄를 죽이는 생활은 커녕 죄가 자기를 죽여 가지고 혼란과 무지 속에서 살다보면 계속 쌓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꽉 찹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다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 쓸어버리시는 것입니다.
중국 물난리를 보니까 하박국 말씀이 생각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모래로 제방을 쌓다 쌓다 안되니까 쌀자루를 갖다가 쌓던 것입니다. 얼마나 급하면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불과 두 시간만에 수십 만 명이 사는 도시를 싹 쓸어버린 것입니다. 수천 명이 실종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권능입니다. 1989년도 어느 날에는 불과 몇 년 전입니다. 10년도 안되었습니다. 지구가 6시간 전에 있던 그 자리로 직경 1km에 수백 억 톤 짜리 혹성이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계산을 해서 부딪칠지도 모른다고 통계를 낸 것입니다. 부딪치면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그냥 끝입니다. 부딪치는 순간에 어마어마한 먼지가 일어나서 세계를 다 뒤덮고 기상 이변이 일어나서 엄청난 한파가 몰려와서 수 많은 생명들이 다 죽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경 오염을 시켰더니 엘리뇨 현상이 나가지고 수백 억 톤의 바다들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구름이 치솟으면서 기상 이변으로 하늘이 뚫린 것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더니 이번에는 라니뇨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서 지구를 구멍 뚫듯이 부딪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섯 시간 전에 지구가 있던 자리를 그 혹성이 빗겨지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위대한 능력은 우리들이 가히 우리의 입술로는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여러분 죄만 미워한다는 그런 생각은 처음서부터 다 치워버리라고 그것은 여러분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다음에 그 죄를 청산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구원을 취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고 죄를 죽이지 않고 그 죄가 계속 자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이 듣고 그러면서도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이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혼을 위해서 여러분들 먼저 보내 버리실지 모릅니다. 몇 명의 사람들은 이러한 경고를 농담처럼 들었습니다.
롯의 사위들이 그랬습니다. 롯이 위기를 외치니까 농담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땅에 묻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신앙 생활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무서운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두렵고 떨리는 분이시며 그분이 얼마나 위대하고 두려운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 앞에서 막해서는 안됩니다. 그분 앞에서 설 때는 몸가짐과 옷차림이 달라야 하고 우리의 마음의 옷깃을 여미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뜨거운 것처럼 하나님의 질투도 불같아서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다라는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아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심각하고 위험한 영혼의 상황을 깊이 터득하고 거기에서 자기의 서 있는 지점이 어디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스스로 사고해서는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도움이 아니면 불가능하고 성령이 우리를 거저 돕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고 여러분들 가운데도 많이 있습니다.
한편의 설교를 들으면서 인생이 바뀐 사람들이 여기도 많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설교 속에 나타났던 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해서 빛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온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순종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고 자기의 처지와 형편을 보여주셨으니까 차단을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 길을 걸어가니까 순종하는 삶이 되고 순종하니까 더 은혜를 주셔서 결국은 우리들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이기며 폭풍의 흑암 속 어두운 그 속을 뚫고 지나오게 만들어 주셨단 말입니다.
제가 인생이 곤고하고 어두울 때 특별히 사역을 하면서 어두운 일을 만나고 너무나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답답함과 어려움을 느낄 때 교회 안에서 매일 그 시내에 앉아서 창문 열어놓고 눈물 흘리며 부르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지치고 고단한 이 몸을
폭풍 후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손 잡고 날 인도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 잡고 날 인도하소서
그러면서 그냥 가을에 바람이 막 부는 길에 찬송을 부르면서 한참 울고 나면 내릴 때가 다가옵니다. 그러고 나면은 교회당으로 걸어가는 그 골목길은 이상하게 기쁨이 솟아납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찬송을 부르거나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난 다음에 놀라운 평강이 밀려들어오는 것은 단지 눈물을 흘리면서 찬송을 부르거나 그렇게 기도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죽이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만이 그런 평강을 맛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는 빛이 들어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빛이 있어야 됩니다.
물론 우리는 완벽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존 오웬도, 성경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우리들이 완전히 죄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죄를 식물 인간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식물 인간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해칠 수는 없습니다. 가끔 올라오긴 하지만 그래봤자 그러고는 말잖아요. 또 기를 쓰고 일어나면 한발 차면은 몇 달 기브스하고 드러 누울테니까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완전한 승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만 있다고 그러니까 우리 신앙 생활에서 항상 말씀의 정도를 놓고 두 가지가 되풀이되어야 됩니다. 믿는 신앙 생활과 회개하는 신앙 생활, 회개와 믿음 이 두 가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죄를 온전히 죽이면서 사는 그리스도인들 그렇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이 빗나가질 않습니다. 조금 빗나갑니다. 조금 마음으로 범죄하거나 조금 잘못합니다. 그러면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용서해 달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보면은 유명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언뜻 들어보니까 그 교회가 한 5,000명 이상 모이는 교회가 됐습니다. 성결교회 교인들에게 물어보면 다 압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신학교 시절에 우리하고 같은 집에 세 들어 살았습니다. 그 전도사님이 우리 할머니하고 대판 싸웠습니다. 그런데 전도사와 왜 싸웠냐하면은 전기세 때문에 싸웠습니다. 그때는 예수 믿지 않을 때니까 젊은 사람이 꼬장 꼬장 따지니까 몹쓸 사람이라고 야단을 치니까 왜 내가 몹쓸 사람이냐고 또 대들고 내가 다 봤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 교회를 내가 다니는데 대개 힘들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그 전도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남준이 할머니 제가 용서를 빌러 왔습니다.' 제가 그렇게 다투고 돌아갔는데 밤새도록 하나님이 자기를 잠을 안 재우시고 괴롭게 하시더라고 그래서 아침에 날이 새면 내가 남준이네 집으로 가서 할머니한테 용서를 빌겠습니다. 그래서 정답게 화해하고 악수하고 헤어졌습니다. 우리 가족 중 여러 명이 그 교회에 다녔습니다.
보십시오. 성령 충만한 사람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은 완전해질 수 있다고 그러는데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인간이 누구인지 너무 몰라서 그럽니다.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죽이지 않는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막가파의 범죄이고 죄를 죽이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짓는 죄는 교통 법규를 위반하는 정도의 죄입니다. 그러니까 잘못하면 즉시 회복하고 믿음으로 돌아옵니다. 고칩니다. 삽니다. 또 잘못하게 되면은 즉시 가슴 아파하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반복하면서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고 말씀의 귀를 기울이고 거기로부터 얻어지는 빛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갈 길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슬리는 이방인과 짐승들이 하는 것과 같은 패역무도한 행위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을 것이며 징벌을 당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불 받을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 영혼의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리차드 백스터라는 청교도는 말하기를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일은 진리로 성도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이고 성도들이 제일 힘든 일은 건축헌금을 하거나 십일조를 하거나 뼈빠지게 봉사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성도들에게 가장 힘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건 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아멘'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교회 나오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데 자기는 설교 같이 않고 소리처럼 들렸답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이 자신 속의 양육되고 변화를 일으키는 씨앗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마음과 삶 전체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만한 사람으로 바뀌어가고 변화되어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삶이 전혀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고 바라고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귀를 기울이는 신앙 생활을 해나가기를 하나님이 너무나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 우리에게 들어오니까 혼란스러운 상황은 계속되고 그리고 자기는 점점 더 담대하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은 어느 날 갑자기 어두움을 '확' 찢어버리면서 환하게 드러나서 생애의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대굴 대굴 구르는 각성과 함께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경우에는 그렇게 올 수도 있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캄캄한 동굴 속에 갇혔는데 일시에 빛이 들어와서 눈이 부셔서 고개를 숙일 정도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작은 바늘구멍만 한데서 한줄기 빛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 빛은 자기가 걸어가야 할 길을 다 밝혀주기에는 너무나 작은 빛이고 그리고 그 빛은 어떤 의미에서 지금이 어두운 이 상황을 파악하는데는 조금 밖에는 도움이 안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가 동굴에서 머물러 있으려고 마음을 먹지 않고 만약에 그가 거기서 벗어날려고만 하는 의욕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는 걸어갈 수 있는 수많은 길이 동굴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어디로만 걸어가면 돼요. 그 빛을 보고 가는 것입니다. 왜? 바깥 세상과 연결되지 않고는 그런 빛이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더듬으면서도 걸어가고 마지막에 그 빛 조그맣게 들어오는 것을 허물어 버리고 나면 그러면은 결국은 자신의 모든 상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위치와 자기가 걸어온 길, 그리고 자기가 걸어가야 할 길이 한눈에 모두 드러납니다.
벌거벗은 것들은 보게 하시고 굽은 것들은 고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거슬리면서 전혀 깨닫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려고 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굉장히 중요한 마지막 경고일 수 있습니다. 기억을 해야 됩니다. 언제든지 회개를 하면 된다라는 이런 사고 방식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속히 죄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성경은 회개도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무 때나 회개하면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에서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으나 기회를 받지 못하였다 라고 합니다. 회개했지만 그에게는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금은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에게는 찬란한 빛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무엇보다도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깨닫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깊이 투자하고 자신들을 위해서 쓰여지는 사람이 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생각으로 졸음으로 태만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놓치는 것은 더 깊은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 때에 고난이 오잖아요. 그 고난의 익숙해지고 고난을 견디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멀어졌는데도 거기에 적응을 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마귀가 준 담대함입니다. 하나님과 화목이 사라져서 우리 영혼의 어두움이 깃들면 우리는 그 어두움에 적응해서는 안됩니다. 그 어둠 속에서 살 수 없어해야 합니다. 몸부림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 아래서 살던 날들은 그리워하고 충만한 은혜가 있던 날들을 목말라하고 그 날이 너무나 그립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이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야 됩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거부하고 적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참된 은혜의 빛이 없으면서 은혜의 빛 없이 살아가는 일이 익숙해져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무한한 적응능력을 가지고 간입니다. 많은 해류학자들이 1,000m만 내려가면 거기에는 고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일만 미터를 파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생명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컴컴한 흑암 속에서 1cm당 수십 톤의 압력이 짓누르는 인류가 기구를 가지고 들어가도 얼마 안 되는 거기에 생명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잡아 가지고 올라오니까 지구에 내놓자마자 이상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몸이 뒤틀리고 눈이 튀어나오고 죽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이런 놀라운 적응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햇빛 없이 물고기가 못 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적응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능력이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으로부터 멀어져서 캄캄한 어두움 속에 있으면서도 이런 적응 능력이 생긴다면 그것은 매우 재앙스러운 것입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삼켜 버린 다음에 (?)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습니다. 딱 내려가니까 우리에게 뭐 협상할 것이 있습니까. 소리를 지르면서 말했습니다. "즉시 쿠웨이트로부터 철수하지 않으면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것 밖에는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해줄 말이 없다" 그렇게 하고는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그리고 전대무문의 치열한 공습이 계속된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돌이키면 살고 돌이키지 않고 계속 하나님 앞에 죄를 쌓으면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이 폭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입니다. 그리고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은 돌이키지 않는 사람은 언젠가는 그런 결과를 하나님 앞에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 빛에 대한 사모함을 가져야 되겠느냐 말입니다. 더 많이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책임을 물으시고 더 많은 자신의 실상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어떤 이유로든지 허우적거리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 쓸데없이 예배나 빠지고 은혜 받으려고 말하지 말고 여러분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어느 지점에 있고 그 말씀이 맑은 빛으로써 여러분들을 인도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 빛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폭풍 속에서 건지고 흑암 속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교회에 깃들고 여러분들의 영혼에 깃들어서 여러분 자신의 영혼의 위험한 상태를 깊이 깨닫고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12. 영적 회복의 길(2):영적 생명의 원리를 알라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5:21)
죄 죽임의 교리를 설교하면서 지난 시간부터 특별히 죄에게 져서 정말 패배해 버린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어떤 과정을 밟아서 결국은 죄를 이긴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겠는가를 다루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그렇게 지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의지적으로 혼란에 빠진 사람은 제일 먼저 하나님 말씀의 지식의 빛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빛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자기가 하나님을 떠나서 살고있는 그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모르고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속에서 살아가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고 진노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경박하기 짝이 없고 교회는 나오지만 주님의 진노를 쌓아 가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의 빛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두 번째로 ‘영적인 삶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영적 삶의 원리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도 결국은 하나님 말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지난주에 말씀드린 지식의 빛이 필요하다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지난주에 말씀드린 그 지식의 빛도 말씀을 통해 오는 것이지만,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온갖 더러운 칠을 다 하고 있다가 빛 가운데로 나아오게 되니까 더럽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빛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영적인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심하게 빛을 받아가면서 파악을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탐구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에 진정한 변화가 없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탐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몸을 뒤틀면서 한 시간을 앉았다가 가니까 한없이 교회에 나와도 한없이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다음에 천국가면 제 이야기를 가슴에 새겨 보십시오. 아마 여러분들은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만났던 너무 많은 사람들이 거기 없기 때문입니다. 탐구가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탐구해야 합니다.
성경이 얼마나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지 소리를 지르고 이방의 무당이나 이방의 신을 부르는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면서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탐구하라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탐구하고 마음으로 갈구하고 삶으로서 그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추구하는 이런 것들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이 가난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것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그 이전에는 영적 삶이라고 말할 것이 없습니다. 물론 그것도 영적인 삶이긴 하지만 마귀의 지배를 받는 삶이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삶이니까 살기는 살았지만 그것은 죄를 향해서 산 삶이고 하나님의 생명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들이 주님의 복음을 듣고 주님이 우리의 영혼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말씀을 깨달음으로 우리들이 성령의 놀라운 은혜로 거듭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 순간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예수님에게 접붙여지는 놀라운 변화가 우리의 영혼 속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얼굴이 갑자기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영혼 속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5장에서 이 신비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이제 이 포도나무에 접붙여지는 겁니다. 낫이나 칼로 나무의 몸체를 벗겨낸 다음에 거기에 가지를 잘라 꽂고 단단하게 묶어 놓습니다. 그러면 신기하게 접붙임이 되어서 그 가지가 나무에 딱 붙으면서 나무에서 올라오는 수액을 먹고 가지가 뻗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고 잎이 푸른, 몸체에 붙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에 주님의 몸에 접붙여지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한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것들을 우리들이 공급받을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주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어떤 사람들은 확대 해석한 나머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접붙인 바 되었기 때문에 그 접붙인 바 된 상태에서 그 포도나무 가지는 결국은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포도나무에서 솟아 나오는 그 수액을 먹고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즉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있기만 하면 우리는 저절로 열매를 맺는다.”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비유를 해석할 때 조심하여야 할 것은 주님이 그 비유를 말씀하시려고 할 때는 그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시고 싶으셨던 중요한 요점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맞춰야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마구 확장시켜서 해석해버리면 주님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실제로 들었던 설교 중의 하나인데, 주님이 우리를 소금이라고 하실 때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고 싶으셨던 의도는 소금의 기능 중 가장 단순한 것만 말씀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만을 설명해야 하는데 “주님이 우리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어떻습니까? 소금은 바다에서 건집니다. 물에 풀어지면 보이지 않습니다. 소금도 질이 있습니다. 굵은 소금 가는 소금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 가지고 마구 풀어대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려고 했던 의도에서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가지 비유를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은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접붙인 바 되었을 때에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포도나무 가지와 포도나무가 생명적으로 결합되어 있어서 나뉠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어버린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 밖에는 참된 생명도 참된 성장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열매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으셔서 포도나무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금 더 들어가서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열매를 맺으라는 요구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포도나무 비유로 들어가 버리면 말이 잘 안됩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쓰거나 잎을 무성하게 하려고 애를 쓰거나 포도나무를 향해서 포도나무 가지가 애원하거나 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냥 붙어있고 붙어있기만 하면 밑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수액을 먹어서 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혹시 어느 포도나무 가지가 약간 부실하게 열매를 맺었다면 그늘이 졌다든지 무슨 다른 이유 때문이지 그 포도나무 가지가 게을러서 열매를 못 맺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공식을 가지고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안 맞는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가만히 붙어있기만 하면 되지만 우리는 가만히 붙어 있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들이 열매를 맺으라는 요구를 주님께로부터 받고 있고 구원받고 예수님과 연합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받은 그 구원의 은혜가 죄를 죽이는 삶 속에서 새로워져서 열매 맺는데로 나아가기를 애쓰고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우리들이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거듭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단지 형벌 받을 죄 가운데서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순간에 우리들이 지난 죄를 용서받았지만 단지 용서만 해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당신의 생명에 접붙인 바 되게 하셔서 우리들 속에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샘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게 만들어주시는 은혜의 샘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전혀 발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요구하시는 삶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이 있으면 우리가 부족해도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지만 만일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는 영적인 은혜가 없으면 우리가 단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예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러한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크게 타락한 이야기나 큰 죄에 연루된 소식을 들으면서 깜짝 놀랍니다. 그러나 깜짝 놀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그 인간이 그 인간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주님을 믿는 동안 마음놓고 짓지 못했던 죄를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 줄 모른다고, 더 많이 더 악하게 변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천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그것을 봐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 자신의 영혼, 여러분들 마음에 깃들여져 있는 여러분들 영혼의 원천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 속에는 충분히 이 어두운 세상에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기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충만한 생명과 은혜가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화) 가스 넣는 차를 타니까 가스 넣는 곳이 잘 없어서 가스가 떨어질까 봐 늘 신경 이 쓰인다.
먼길을 가려면 많이 기름을 넣어야 합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를 간직하면서 훌륭한 믿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적인 힘을 확확 쏟아내야 합니다. 수원 갈 기름밖에 없는데 부산 갈 마음을 먹는다든지 살살 달려갈 정도밖에 기름이 없는데 몇십 분 동안 고바위를 올라가야 한다든지 하면 그 사람은 아예 도전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도전해 봐야 실패밖에는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 그 자체는 영적이기 때문에 영혼 속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이 없이는 그는 결코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이기는 삶을 살게 하시는 충만한 은혜를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커다란 세 가지 방편이 있습니다. 비유를 하지면 우리 마음속에 커다란 웅덩이가 있고 여기에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솟아나게 하는 은혜의 물을 공급해 주시는 세 개의 파이프가 하늘로부터 우리의 영혼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눈을 확 뜨게 만들어서 우리 자신의 벌거벗고 비참한 모습을 보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 말씀 자체가 성령이 역사 하셔서 우리에게 부어지는 통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그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주님의 성령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에서 우리들이 능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감화를 받고 그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강력한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우리 삶 속에서 매일매일 유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예화) 한 때는 탐스럽고 좋은 먹골 배가 달리던 밭이 버려진 후 길가의 돌배로 변하더 라는 이야기.
우리의 영혼이 버려진 것처럼 관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런 식의 삶의 열매밖에는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영혼이 관리되지 않고 버려진다면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식의 열매를 맺으면서 주님을 마음 아프게 해드리는 삶밖에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도 성령의 열매 대신 육체의 열매를 맺고 거룩한 열매대신 죄악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되는 대신 주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 안에 부어져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가장 커다란 첫 번째 은혜의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은혜가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유지되어야지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이지만 우리들이 범죄할 때도 있습니다. 바로 깨닫지 못해서 우리들이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가 우리에게 살아있으면 멀리 타락하거나 많이 불순종하지 못합니다. 조금 불순종 했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우치면 우리는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견고함이 없던 사람들은 자신이 견고함을 잃어버린 것을 얼마나 하나님이 슬퍼하시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는 자신의 견고하지 못한 삶을 뉘우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는지를 깨달으면서 이제는 마음을 정하고 하나님 앞에 살려고 하는 결심을 하게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무엇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깨닫고 자신의 마음이 낮아지고 깨트려지고 감화를 받는 이러한 말씀의 은혜 없이는 그는 결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의 주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왔지만 예배드리고 나가면서 어디를 설교했는지 조차도 기억 못하는 사람이 95%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달음이 없고 깨달았어도 하나님 앞에 그 깨달음에 부응하여 기도하지 않고 기도했어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붙들고 살기를 싫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가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회복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결코 죄를 이기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녀들의 문제나 가정의 사업을 위해서는 수시로 금식하면서도 말씀의 깨달음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자신의 그런 영혼의 상태를 위험하게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단지 말씀을 못 깨닫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포기하는 신앙생활의 자세인 것입니다. 깨닫는 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주어질 수 없고 혹시 무슨 체험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열심은 빗나갈 것이며 잠시 떠올랐던 체험은 사라질 것이고 여러분들이 아무리 진지해져도 여러분들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오늘 이 시간에 만약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실패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말씀에 의한 이러한 감화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도 가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목놓아 울거나 하나님 앞에 원통한 마음으로 매달려 기도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죄는 잠시 움추러 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죄를 죽이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기도가 그치면 죄는 다시 살아납니다.
저는 실제로 예배를 인도하면서 한 예배시간에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고 동일한 예배시간에 깊이 코를 골며 잠드는 것도 보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배시간이 아니라 같은 설교시간에 전반부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던 사람이 후반부에서 코고는 소리까지 내면서 잤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이 인간의 영혼입니다. 죄를 죽이지 못한 사람의 영혼의 상태는 깨닫는 것이 있어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일관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전혀 없으면서도 아무 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깨닫기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통해서 드러날지도 모르는 자신의 죄악과 불결한 삶, 청산해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생명이 있는 삶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깨닫게 하시고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더욱 그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고 살게 하시고 은혜가 있으나 약한 사람들에게는 그 은혜를 강하게 하시고 죄가 무성한 사람들에게는 그 죄를 누르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방편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화와 감동과 은혜를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메마른 마음속의 원천은 채워지고 그 원천이 말씀의 은혜로 채워질 때에 우리는 세상을 이기고 죄된 우리의 육체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월급을 받아서 생활하던 집안이 석 달 넉 달 월급을 안 가져오면 데모를 하고 피 흘리며 가서 싸움을 하고 나중에는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투신자살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육신의 생명을 연장하게 하는 물질에 대해서 이렇게 집착하고 사모하고 몸부림치는 것만큼 자신의 영혼의 비참한 형편으로 인해서 애통하고 아파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운 변화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주님은 인격적입니다. 주님은 공갈과 협박으로 다가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서 다가오십니다. 칼을 가지고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느끼게 하시는 것도 말씀을 통해서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심령이 너무나 무디어져서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화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받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이런 비유를 들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옷을 다 벗고 맨살로 있다고 칩시다. 그때 뾰족한 송곳을 가지고 쿡 찌르면 금방 살이 푹 들어갈 것이고 피가 죽 흐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마 그 사람이 졸던 사람이면 벌떡 깨어 일어날 것이고 가만히 있던 사람이면 푹 찌를 때 피가 솟아나면 자기를 찌른 사람을 향해서 어떤 식으로든지 반응할 것입니다. 그런데 겨울에 추워서 내복입고 보온메리 입고 털 쉐터 입고 그 위에 오바 입고 무스탕까지 입었다고 합시다. 그렇게 옷을 입은 사람에게 송곳으로 벗은 사람과 같은 세기로 푹 찔렀다고 칩시다. 무스탕에 구멍만 뚫어지지 옷으로부터 살갗까지의 거리가 너무나 멀어서 찔러도 아프지 않을 겁니다. 그가 깊이 잠들어 있다면 쿡하는 느낌만 있지 그 잠을 깨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간헐적이 아니라 매순간 그 말씀을 통해서 깊이 깨달음을 얻고 자극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도전을 받고 두려움을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영혼이 하나님 앞에 깨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관심과 태만으로 말미암아서 오바 위에 무스탕까지 걸친 상태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찔러도 아주 작은 자극밖에는 받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창으로 찔리고 돌아오리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경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흔하지 않습니다.
작은 자극이 주어져도 이것은 지금 내 영혼의 상태가 너무나 많이 무디어져서 그렇지 사실은 이것이 작은 것이 아니라 굉장히 큰 자극이고 내가 만일 이런 죄악의 옷을 입니 않았더라면 금방 찔려서 피가 났을 것이라는 두려운 마음으로 뭔가 자극이 오면 그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려고 하고 이전의 신앙지식을 총동원해서 그런 자극을 주실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나 하는 것을 느끼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붙들고 작은 자극이지만 간절히 기도하려고 애쓰고 그것을 계속 의식 속에 떠올리면서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를 더 크게 깨닫게 하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그렇습니까? 여러분들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들 보면 옆에 사람이 툭툭 칩니다. 그러면 흘낏 쳐다보고 더 푹 잡니다. 하나님의 자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무엇인가 그들을 심판하실 때 졸지에 심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잘나가다가 하나님이 졸지에 모든 것을 거둬 가셨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수없이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찌르기도 하고 칼로 찌르기도 하시면서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두꺼운 죄악의 옷을 입으니까 양심이 마비가 되어서 그것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도 보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웃기는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지를 압니다. 그래서 자기는 안타까워하지 않는데 옆 사람이 안타까워 막 웁니다.
(예화) 오래 전 한 자매가 다른 지체의 교만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안 주신다는 응답을 받고 괴로워 울며 기도하다가 결국은 그 지체에게 그 말을 전하자 그 지 체가 그 자리에서 무너지더라는 이야기.
그러니까 자기가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감화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쌓이는 것은 죄악밖에 없고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버려 두시지 않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없이 사실 수 없는데, 하나님 없이 사는 우리를 주님이 버려 두시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 놀라운 은혜를 주시고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못박아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는데 그것을 저버리고 하나님이 수없이 말씀하셔도 도무지 감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고 쌓이느니 죄악이고 불순종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계속해서 살아가며 짐승과 같은 삶을 되풀이하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버려 두시겠느냐는 말입니다. 참고 계시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인내가 끝나면 그는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시고 벌주시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버리시지 않는 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그 말씀의 은혜를 회복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교회를 나와도 계속 곤고할 것이며 봉사를 해도 계속 곤고할 것이고 결국 그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들을 제명에 살지 못하도록 정리해 버리셔서 이 세상을 청소하시고 말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를 포도나무 가지 삼으셔서 예수님의 생명에 붙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그 은혜를 회복하기만 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고 그분의 모든 생명을 우리들이 받아서 우리들이 기억하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이 모든 기초를 마련해 주셨는데 그것 버리고 세상과 함께 먹고 마시고 거기서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다가 결국은 주님 앞에 징벌을 받는 그 비참한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 안에 주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커다란 원천에 은혜를 공급하여주시는 세 개의 파이프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와 깨달음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깊이 사모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기도의 은혜입니다. 죄는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서 다양한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옵니다. 그런데 그것과 더불어서 싸우는 무기는 항상 동일합니다. 옛날에 사도 바울이 싸우던 그 무기가 오늘날도 가장 강력한 무기이고 우리의 후손에게도 그것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방법을 가지고 이기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기도라고 하는 파이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늘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우리의 영혼에 커다란 샘을 가득 차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은혜를.
그러니까 그 사람이 죄에 철저하게 져 있을 때에는 기도가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속에 죄가 어느 정도 살아있느냐는 기도가 어느 정도 죽어있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 은혜가 얼마나 살아있을까 생각될 때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의 기도가 얼마나 살아있느냐를 보면 여러분들의 죄가 얼마나 많이 죽어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기도라는 은혜를 통해서 우리가 우리로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계명과 명령이 얼마나 수준이 높은 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약의 율법도 지키지 못한 사람이 신약시대의 그 놀라운 계명- 무슨 얘기냐 하면 아내를 데리고 살다가 헤어질 때 이혼증서만 써주면 끝이었는데 지금은 간음한 연고 이외에는 자기 아내를 버리면 안됩니다. 젊은 사람들보고 늘 하는 얘기가 “결혼은 한 번 하는 것이다”입니다. 그러면 웃습니다. 그러나 살아보면 얼마나 그 사실이 심각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 사람 말고 딴 사람하고 했더라면’하는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보라고 제가 늘 권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사람을 해코지하고 죽이지 않으면 됐는데 이제는 마음으로 미워하면 살인한 것입니다. 피묻은 칼과 피묻은 입술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그러한 율법의 요구를 우리들이 모두 성취하고 살았더라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구원을 얻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것이 안됐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못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주님이 판정을 내리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을 살인하지 말라는 것도 지킬 수 없었던 사람에게 미워하면 살인하는 것이나 똑같다고 말합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도 지킬 수 없었던 사람에게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정도로 구약에서 이미 모두 지키려고 해도 실패했던 계명인데 그것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계명을 주시면서 그것을 준수하라고 말씀하시니까 이것은 사실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예수님의 계명을 지금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 계명보다 훨씬 수준이 낮은 옛날 율법의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보다 경우에 따라서는 훨씬 쉽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우리들이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죄를 죽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충만한 그 은혜의 원천을 소유하고 있을 때에는 그 말도 되지 않는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금방 미웠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죽으셨는지를 말씀을 듣고 깨닫고 하나님 앞에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면 내가 미워하던 사람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다가도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를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잠시 마음을 빼앗겼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청결한 삶을 살도록 간구하면 주님이 그런 마음을 우리에게서 물러나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의 참된 비결이 어디에 달렸느냐 하면 우리의 영혼 속에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가득하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벽한 삶을 살수는 없지만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많이 부어지면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많이 복종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그러한 일들을 우리에게 역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예수 믿을 때 새벽기도 나가는 사람들은 도대체 인간처럼 여겨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추운 겨울 새벽 네 시 반에 눈보라 치는 그 먼 거리를. 잠도 안 자나 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니까 그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를 회복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무엇 때문에 자꾸 막히느냐 하면 죄 때문에 막히는 것입니다.
왜 전에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꿀처럼 달게 빨려 들어와서 그 말씀을 듣는 그 시간 자체가 황홀하고 성경을 읽는 시간 자체가 너무나 기뻤는데 그런 말씀의 은혜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은혜가 사라지는 것도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지 매일 핑계대면 됩니까? 뭐가 어떻고 하는 것은 다 쓸데없는 겁니다. 한마디로 간단하게 줄여서 말하면 죄가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말려버린 것입니다. 일단 우리의 영적인 내면의 세계가 고갈되어 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 드러나는 것은 부패한 인간의 성품, 죄악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는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바닥이 그렇게 드러나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원래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다 악하고 죄악된 삶을 꿈꾸던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가 들어와서 그 사람을 감동시키니까 말씀의 은혜가 그에게 감화를 주니까, 걸어가려고 했던 더러운 길을 버리고 기도 속에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부어주시니까 사랑하던 것들을 내팽개치고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의 은혜 없이 하나님의 신령한 삶을 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는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을 그런 영적인 원리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주시는 그 기도의 통로를 매일매일 와서 청소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이 기도가 아니면 내가 살수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늘 매달리는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면 뭐합니까? 행하지를 않는데. 마귀의 궤계를 내가 다 파악했다. 파악하면 뭐합니까? 고무신 거꾸로 신고 도망가려고 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전쟁할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그 아름다운 무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적군의 현황에 대한 모든 첩보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싸우려고 하는 의지가 없고 죄와 더불어 이기려고 하는 그 용기와 그런 간절함이 없는데 그 모든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 앞에 불순종이요 하나님 앞에 징벌 받을 죄인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기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죄악 가운데 잠들어 있는 영혼이라도 어느 한 순간에 그가 말씀에 집중하면 자극을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 아파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기도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그때에 열심히 매달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벌어진 그 틈새로 들어가서 자기를 에워싸고 있던 모든 영적인 침체와 죄악의 벽을 부숴 버리고 하나님 만나려고 노력해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쇠심줄 같이 끈질기게 뜻을 정하고 기도하지 않는 겁니다. ‘기도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한 사람들을 어떠하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소를 개울가까지 끌고 가는 것은 농부가 할 수 있지만 물먹게 하는 것은 억지로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러한 기도의 관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일날 와서 중얼중얼 하면서 예배시간에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것 가지고 기도생활이 되겠는지 죄를 이기고 마귀의 세력을 이기기에 충분한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점점 할 기도가 많아집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자기의 뜨거운 마음을 쏟아 놓으면 쏟아놓을수록 뜨거운 불이 더 많이 생깁니다. 안 하면 안 할수록 할말이 없고 쏟아놓지 않으면 쏟아놓지 않을수록 우리의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져서 이제는 기도할 일이 생겨도 기도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노리는 여러분들의 영혼을 향한 목표가 바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말, 많은 핑계, ‘나는 어떻게 해서 마음을 잃어버렸고 무슨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다’ 사람들끼리 얘기를 나누어서 그 사람이 ‘그래 나라도 기도 못했을 거야, 어차피 이렇게도 저렇게도 기도 못하는 거지만 네가 그래서 기도 못했으니 너는 다른 기도 못하는 사람보다 훨씬 잘랐다’고 아무리 얘기 해줘봐야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 것은 한 것이고 안한 것은 안한 것입니다. 죽은 것은 죽은 것이고 산 것은 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영적인 원리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부어주셔서 우리의 영혼에 성숙이 있게 하시고 우리의 삶에 열매가 있게 만들고 우리를 점점 예수를 닮게 만드시고 포악한 사람들을 착하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례입니다. 즉 성찬과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성찬처럼 지루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놀라운 은혜가 살아있을 경우에는 이 성찬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새롭게 되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성찬은 우리에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요 하나님 앞에 진노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그 죄에서 건져내고 저주와 많은 진노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여 자기의 백성 삼으신 것을 이 성찬을 통해서 깨닫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세상에 붙었던 헛된 욕심을 버리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크게 보이니까 세상이 작아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니까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아야 되겠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교회의 영혼의 상태는 성찬을 행할 때에 성도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례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거룩한 하늘의 은혜를 공급해주시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늘로부터 부어주는 그 은혜가 이러한 세 가지 은혜의 방편을 통해서 우리에게 공급되어서 이것이 우리에게 가득 차고 충만하게 가득 있으면 우리는 활기찬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와도 기도로 이기고 그리고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어도 믿음으로 걸어가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거나 고난을 받아서 자기 혼자 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그 때에도 오히려 담대하게 ‘주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까’하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워쌀 때에도 하나님만이 나의 어려움을 알아주시고 주님이 내 곁에 계시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안전하다고 고백할 수 있고 시련과 고난이 가득 차고 결핍과 어려움이 에워싸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잔과 죄의 잔은 같은 잔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거기에 죄가 가득 차게 됩니다. 죄의 자리도 인간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도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사람 속에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죄 죽임의 교리와 이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죄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를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를 모두 사라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서서히 사라지게 만들고 또 그렇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시작되면 우리 속에 있었던 강한 죄들은 쫓겨나기 시작하고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그런 영적인 은혜 부어 주심을 사모하는 사람일수록 은혜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할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많이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굉장히 아이러니 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즉시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반론을 제기할 것입니다. “죄 때문에 말씀의 은혜가 사라지고 기도가 막히고 성찬의 감격이 사라져서 완전히 바닥이 드러난 사람이, 죄 때문에 모든 것이 막혔는데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의 통로가 열려서 쏟아져야 하고 기도가 퍼부어져야 되고 성찬의 감격이 솟아나야 한다는데 죄 때문에 이미 막혀버린 상태에서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순환논리가 아닙니까? 말장난이 아닙니까?” 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들이 하나만 더 배우기로 하겠습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가 모두 막히고 말씀의 은혜가 모두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자기가 이전에 받았던 사랑을 생각하면서, 또 성경을 읽으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가를 성경이 가르쳐줄 때 자기가 거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회복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으면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막혀버렸다 할지라도 그렇게 회복되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하면 하나님이 순간 순간 우리에게 완전히 막혔던 말씀을 어느 한순간에 빛으로 주시고 또 기도가 거의 되지 않는데 어느 순간에 기도할 수 있게끔 틈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은혜가 사라졌는데 순간 순간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말씀의 은혜가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말씀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일수록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를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순간 순간 자극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 말씀이 분명히 내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찌르는 말인데 그것을 깊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받아들이고 나면- 일단 칼을 든 의사가 옷을 벗기는 것을 내버려두면 틀림없이 자기 가슴을 찌르고 도려내서 해부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부하니까 하나님을 너무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러면서 죄는 점점 쌓아져가고 하나님의 진노는 어느 순간 폭발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게 들어오는 그것을 강하게 붙들려고 하는 의지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의지도 없이 살면서 어느 한순간에 크고 놀라운 은혜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들의 영혼이 만약에 잠자고 있으면 지금 50분 정도 지난 이 설교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여러분들을 찌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붙드십시오. 그것을 의지하고 작게 내 마음을 찔렀지만 분명하지는 않지만 내가 이 말씀을 깨닫는 것을 통해서 내 영혼이 살고 죽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면서 그 말씀을 더 깨닫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죄 가운데 산다고 할지라도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무너뜨려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분들에게 다시금 기도의 불을 땔 수 있는 불씨를 주시는 것과 똑같습니다. 불을 피울 때 크고 물에 젖은 나무토막을 놓고 성냥을 아무리 그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석유를 아무리 붓고 불질러 봐야 불붙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금이라도 마른 나뭇가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른 가지를 가늘고 작게 잘라서 젖지 않은 땅에 놓고 작은 불씨 하나를 받아서 후후 불면 비가 장대같이 쏟아진다 하더라도 처마 밑에서는 불이 피는 겁니다. 점점 큰불이 되어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그때 물에 젖은 나무 등걸도 가져다 놓으면 마르면서 타버립니다.
그런 기회들을 주님이 안 주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회를 주십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살아야 되겠나이다”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이런 기회를 수없이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하나님께서 징벌의 채찍을 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면서 “아 주님은 의로우십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나서 깨닫고 보니까 하나님이 어느 순간 갑자기 때리는 아버지와 같지 않고 “하지 마라, 하지 마라, 그것보다는 이것이 더 좋다. 힘이 없니? 이렇게 하면 된다.”하며 수없이 가르쳐주신 후에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크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이런 영혼의 원리를 져버리고는 영혼의 회복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을 등진 관계가 청산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등지고 여러분들이 훌륭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마음먹을 것 같으면 저는 교회를 떠나야한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은 무신론자입니다. 여기는 무신론자들이 오는 곳이 아닙니다. 여기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유일한 신이시며 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인생의 참된 본분이라고 생각하거나 또 그렇게 믿는 도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오는 곳입니다. 사실상의 무신론자가 왜 여기 남아 있습니까? 가라 이겁니다. 세상으로 가서 한 번 얼마나 훌륭하게 잘 사는지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가 복잡하지 않고 매우 단순합니다. 요약을 하면 이런 이야깁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영혼의 원리가 있다는 겁니다. 주님께 구원을 받으면 접붙인바 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주님이 우리를 정결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 막히고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다시 제거되면 하나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죄를 죽이는 삶을 통해서 영혼의 회복을 도모 해야지만 비로소 희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영적인 어려움에 처한 이유는 다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 때문에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어떤 사람은 건강 때문에 어떤 사람은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어떤 사람은 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모두 다른 이유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떠난 길은 여러 가지지만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같은 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수단들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삶을 통해서 이런 은혜는 우리에게 더 풍성하게 역사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할지 여러분들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3. 영적 회복의 길(3)
:참된 죄 죽임이 아닌 것들①
;삶의 방향만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惡毒)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행8:22-23)
몇 주전부터 죄 죽임의 교리를 설교하는 가운데 죄에게 져서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실상 죽은 신자와 같이된 사람들이 어떻게 생명 있는 신자로 다시 태어나는 소생을 맛볼 수 있겠느냐는 이 문제를 말씀 드리면서 3주 째를 맞이하였습니다.
첫째는 말씀의 빛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의 생명 없이 살아가는 그런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보습이고 죄를 죽이는 생활 없이 죄에게 져서 실패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위기 가운데 있는 신앙생활인가 하는 것을 보기 위하여 말씀의 빛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생명의 원리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것은 마치 포도나무에 접붙이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수액을 빨아들임으로서 포도나무 가지에 열매를 맺어서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것인데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도 그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 연합되어 예수님의 진정한 생명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질 때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열매를 맺는 삶을 살수 있지만 이런 것들이 가로막히면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 수 없는데 죄가 바로 그것을 가로막는 중요한 장애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떤 결론이 나오느냐 하면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셔서 주님과 접붙여진 관계가 되었지만 계속해서 생명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 앞에 점점 더 주님과 하나 된 생활을 해 나가고 또 삶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더 정결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마치 농부가 포도나무의 가지를 쳐주듯이 우리 속에 있는 죄들을 자꾸 죽여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적인 깊은 교류가 오갈 수 있는 그러한 정결한 사람들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지난주까지 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죄를 죽여야 하는데 먼저 몇 주에 걸쳐서 우리들이 흔히 알고있는 "아 그것이 바로 죄를 죽이는 것이구나" 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몇 주일에 걸쳐서 말씀드린 후에 진정한 죄 죽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이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예루살렘에 왜 핍박이 일어나게 되었느냐 하면 스데반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순교의 사건이 7장에서 일어납니다. 이 스데반의 순교 사건은 즉각적으로 선교의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 성령을 받았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이 무서워서 예루살렘을 벼려두고 사도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예수님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는 명령을 예수님 스스로 성취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았고 그리고 강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이제 복음을 위해 헌신해서 사람들을 구원해 낼 귀한 사명을 예수님께로부터 받았지만 요지부동으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다시 부활하셨다는 어렴풋한 소문이 사방에 떠돌고 있었지만 누가 와서 정확하게 증거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흩어지지 않으니까 커다란 핍박이 있게 하시고 그 핍박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나와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거기서 그들은 마치 커다란 불씨가 산 전체에 옮겨 퍼져서 큰불을 내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 저기서 복음으로 말미암는 놀라운 변화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일곱 집사들 가운데 변화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일곱 집사들 가운데 하나인 빌립이라는 사람이 ( ? )과 함께 사마리아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마리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커다란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 눈으로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복음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 성에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마술을 해서 밥을 빌어먹고 사는 사람이었는데 그 동네에서는 꽤 강력한 힘이 있는 무당이라고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큰 능력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렇게 그 방면에서 괄목한 만한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방에도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듣고 나니까 이 마술사 시몬도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12절에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라고 했습니다. 시몬도 그랬습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 받고 전심을 따라 다니고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술사 시몬에게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마술사 시몬에게 초등학교 다니는 학생이 있었다면 가정환경 조사서의 직업란에 2학년 때에는 잡귀 축출업 3학년 때에는 복음 전도자라고 기재하였을 것이다. 이 마술사 시몬은 빌립이 와서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을 믿었고 마음에 믿어지니까 세례를 받게 되었고 세례를 받고 나니까 마술사 직업에는 흥미가 없어지게 되어 다 팽개쳐 버리게 되었고 가족이 있었다면 사도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가족들도 버려 두고 전도대원 중에 한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시몬도 틀림없이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옛날에는 무당이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무당을 그만두고 하나님을 따르게 되었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복음을 전했을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 아닙니까? 그리고 또 그 눈으로 놀라운 기적과 역사를 보았을 때 "아 저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능력이구나"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아서는 분명히 변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이 변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은 자명합니다.
요즘 같으면 신학교 가라고 하였을 정도로 놀랍게 변하였던 것입니다. 한번 상상력을 발휘해서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굿하고 점치고 사기 치던 그 무당이 갑자기 변해서 요즘 같은 예로 말하자면 머리와 옷을 단정하게 차리고 전도지를 들고 복음 전하며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된 과정을 간증하고 돌아다니는 그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결론을 먼저 내리면 성경은 이 사람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제는 이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 한국의 교인은 너무나 많이 속아넘어가고 있습니다. 좀더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마리아 땅에 울려 퍼진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부대인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까지 내려 크게 되었고 그들이 사람들에게 안수하면서 하나님의 성령 주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술사 시몬도 복음을 듣고 모종의 변화를 경험하긴 했지만 그리고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도 경험했지만 이 성령이 주시는 은혜를 보고서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역사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습니다, 아멘" 하고 기도해 주니까 완전히 성령 받은 사람으로 변할 뿐더러 병든 사람은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눈먼 자는 눈을 뜨고 우울하고 고통받던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으로 변하고 열심이 없던 사람들은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시몬이 보기에는 베드로와 요한의 그 손은 마치 아이다스의 손과 같았으며 대기만 면 황금으로 변하는 신화적인 손과 같았습니다.
그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을 목격하면서 시몬의 마음에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변했느냐 하면 "아 저것이다, 저것이 내게 있다면 얼마나 돈을 많이 벌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고 병든 사람에게 가서 성령이 임하시게 하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가서 성령이 임하시게 하면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까? 이것 정말 귀한 것이구나!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는데 "저것 하면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벌 것이고 따라서 거금을 들여서라도 저것을 사면 완전히 경쟁 상대도 없는 독점 사업이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돈을 드려" 라고 했으니까 이것은 괜히 말로 한 것이 아니고 어디서 돈을 구해 가지고 온 모양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금일봉을 내민 것이 아니라 땅과 토지를 다 팔았을지도 모릅니다. 전 재산 다 팔아서 돈 보따리를 묶어 가지고 사도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이미 2장에서 보았던 것 같이 사람들이 은혜를 많이 받아서 사도 앞에 돈 보따리를 많이 가지고 왔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마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은과 함께 망해 버려라" 그러면서 "너는 우리가 전하는 이 복음의 도에 관계가 없는 사람이고 우리가 받을 그 축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너는 악독한 사람이요 나쁜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또 "탐심으로 악독이 가득한 사람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고 사도들이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저 그랬구나 생각할지 모르지만 일어 날수가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당장 이런 질문이 제기 될 수가 있습니다. 180°삶이 바뀐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답은 뭐냐하면 "그럴 수 있다"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더라도 여러분의 겉 삶을 예수 믿는 사람처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교인 중에는 아직까지도 술, 담배 못 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교회 수련회를 갔는데 자매들이 자동차를 쭉 세워 놓고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어서 뭘 하나 보니까 재떨이 터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 앞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 봤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 앞 벤치에서 담배 한대 꼬나 물고 다리를 꼬고 있어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러는 사람이 없습니까? 슈퍼에 가서 소주 한 병 사서 술을 따라놓고 쥐포를 뜯으면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 왜 없을까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변화 받았기 때문에 그런 일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해서 안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교회 성도이고 청년이요 이 교회 집사인데 내가 만약 담배 꼬나 물고 저기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나를 인간으로 생각 안하겠지, 그러면 내 삶이 얼마나 고단할까? 그 수치심은 어떨까? 이런 것들이 그런 행동을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속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겉모양만 바뀐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특히 여름철에 노출이 심하면 성적인 범죄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싱가폴에서는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여자들이 가슴과 등을 내놓고 돌아 다녀도 한 사람도 밤거리를 무서워하는 여자들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발각되었다 하면 거의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호텔의 텔레비전에서도 남녀가 가볍게 입맞춤하는 정도의 장면 이상이 안나옵니다. 왜냐하면 법이 그런 방송을 못하게 되어있고 만약에 모르고 여자를 희롱하다가 걸리면 곤장을 맞는데 바지 벗겨서 엎어놓고 물을 부운다음 곤장을 치는 물 곤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경찰과 의사를 불러놓고 곤장 한대 때리고 의사가 진찰해 보고 안 죽겠다 싶으면 또 때리는 것입니다. 곤장 맞다가 살이 터져서 피가 나면 꼬매고 치료해서 내보는데 치료비는 본인 부담이라고 합니다. 치료 다 받은 후에 의사가 다시 곤장 맞아도 된다 하면 다시 또 와서 곤장을 맞는데 일주일에 한대씩 맞아도 곤장 갯수를 다 채워야 한답니다.
그러니까 그 회사에 있는 남자들이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벌이 너무나 엄격하고 무섭기 때문에 감히 그런 일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속이 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미국이나 우리 한국 같은 개방적인 나라로 보내면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인텔리 계층 사람들이 미국으로 계속 나가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남들이 담배꽁초 안 버리고 자기부인 다른 남자들이 희롱 안 하는 것은 좋은데 자기는 가끔 히야까시(?)도 하고 담배도 버리고 싶고 가래침도 마음대로 뱉고싶고 쓰레기도 함부로 버리고 싶고 급하면 횡단보도도 건너고 교통 위반도 하고 과속도 좀 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겉모습이 너무 하나님의 은혜로만 바뀐다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여러분들은 죄 죽임의 교리에 있어서 첫 번째 시작서부터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빌립 만큼 변한 사람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직업을 바꾼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까? 이 직업이 부도덕했기 때문에 나는 도저히 신앙 양심상 이것을 할 수 없다 하여 버린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정부 공작 기관에 근무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신앙생활을 하고 변화를 받고 나니까 자신의 직무 성격과 항거하기에는 구조가 너무 커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사표 내고 나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그런 변화를 경험한 적 있습니까? 이 사람은 그런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생명을 포기하고 전도했습니까? 이 사람은 그렇게 했습니다. 놀라운 기적과 역사를 보았습니까? 이 사람은 보았습니다. 세례도 받았습니다. 남들이 볼 때 목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런 삶을 산 사람 이었지만 그러나 정말 그 내면의 세계는 반드시 어느 순간에 자신의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도 평소에 어느 사람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쭉 가지고 있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을 드러냅니다. 이 시몬이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성령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났을 때 그도 그것을 보면 당연히 "내게도 성령을 주옵소서, 그래서 병든 자를 치료하고 고통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건져서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되겠습니다. 주님이나를 어떻게 구원해 주셔서 내게 생명을 주셨는데 내가 하는 일없이 이렇게 살수가 있겠습니까? 은혜가 없고 사람들을 바꾸어 놓을 수 없는 이 무력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늘의 이런 성령의 은혜를 내게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내면의 세계가 변화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대만 바뀌었지 똑같습니다. 세상에 있을 때에는 세상 귀신에게 잡혀서 돈 좋아하면서 마술하고 사기 치고 장난쳐서 먹고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돈의 노예였고 귀신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무대가 교회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탐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도 자기의 돈벌이에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무대만 바뀌었을 뿐이지 똑같이 노예가 된 상태가 아닙니까? 세상밖에 있을 때에는 마귀의 노예가 되고 교회 와서는 탐심의 노예가 된 것 아닙니까? 겉모양은 바뀌었습니다. 무당이 입던 옷도 치워 버렸는데 그러나 여전히 무당이었을 때 노예가 되었던 것처럼 신앙인 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노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거룩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예수"라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예수 닮은 사람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7장에서 경고한 것이 그것 아닙니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병 고치고 등등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보면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라라 예수님께 항의를 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행악 하는 자들아,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희랍어 성경에 보면 그때에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몰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삶의 근원 자체가 예수님께 뿌리를 내린 삶이 아니었습니다. 상식을 파괴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가 없으면서도 그런 일을 하면서 돌아다닐 수가 있느냐 입니다. 그러나 능히 그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들을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태만한 신앙 속에서 수많은 가짜 신자들이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보면 여러분 충격을 받을 겁니다. 못 만날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마술사 시몬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사도가 바로 단정했습니다. "너는 우리와 유업을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복음을 받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신자들이 받을 수 있는 하늘의 참된 유업이 너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너의 겉모습은 그렇게 많이 변했고 그리고 사람들이 보면 신학교 가라고 말할 정도로 많이 변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너의 속에 있는 것은 옛날에 무당 짓 해 먹으면서 할 때 그것이 그대로 있다. 탐욕과 죄악으로 가득 차 있고 하나로 안 변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일들을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이제 교회 오신지 얼마 안되고 시작하신지 얼마 안되니까 여러분들은 순수합니다. 비난하기 위해서 말하는 건 아니지만 굉장히 많은 교회에서 구청장 뽑는 지방 자치제 하는 거나 교회에서 장로 뽑는 것과 뭐가 차이가 나는지 한번 보십시오. 전부다 그럴듯한 간판 가진 사람들이 교회 투표하기 전에 얼굴 디밀고 여기 저기 식사 사고 선심 쓰고 칼라 사진으로 밑에 경력까지 쭉 붙어 있고 마지막에는 교회 다닌 연수까지 되어 있고 무슨 기업체 무엇이라고 쓴 그것들을 보고 사람들이 투표하지 않습니까? 나는 머리에 털 나고 여태까지 장로 투표할 때 딱 한사람만 도장 찍어 주고 그 외 한번도 도장 찍어 준 적이 없습니다. 신앙적으로 도저히 동의 해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은 많이 변했어요. 심지어 교회 중직에 등장하고 교회에 훌륭한 일들을 한다는 둥 겉모습은 굉장히 많이 변했어요. 그러나 속 사람이 변했다는 데에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전에 몸담았던 교회에서도 투표를 했어요. 안 찍었습니다. 세워 놓고 3년도 안되어 가지고 그 중에 한 분은 교회 안나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업이 자꾸 힘들다는 이유입니다.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냉정한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겉 사람이 변하는 것이 모두가 하나님이 변화시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속 사람이 변화시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속 사람이 하나도 변하지 않고서도 겉 사람은 기가 막히게 놀랍게 변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됩니다.
어느 날 천국에서 방송이 들리는데 천국에 있는 신구약 성도들은 모두 출입구에 모이라고 천사가 방송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박수를 치십시오 하더랍니다. 그래서 보니까 실로 오랜만에 목사가 한사람 올라오더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게 뭘 말하는지 아십니까? 그가 무엇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인가 하는 것과 그의 내면의 세계가 진정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전에는 세상에서 살면서 세속적으로 살았으니까 앞뒤가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강도가 강도답게 사는 것은 하나의 예술 아닙니까? 그런데 강도의 마음을 가지고 성자처럼 살려고 하는 겁니다. 전에는 세상에서 세상을 위해서 세속처럼 살아가던 사람이 이번에는 종교에 와서 종교적으로 살면서 세속적인 탐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뭘 하겠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부패들은 바로 이렇게 제도의 문제라기 보다는 사람 그 자체가 내면의 세계가 진정으로 죄 죽임을 통해서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겉모습은 바빴겠지만 그대로 세상의 탐심과 더러운 것들을 가지고 와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목사님 한 분이 (?)지방에서 3천명 정도 목회하고 계시는데 집회에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 청빙을 받아서 갔습니다. 장로님이 16명인데 제일나이 어린 장로님이 당신보다 두 살이 많았답니다. 세워진지 50년이 넘는 교회에 갔으니까 교회가 작기나 해야 어떻게 잡거나 해 볼 수 있겠는데 어디 하소연 할 때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막 분노하면서 저한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다 도둑놈들이라는 겁니다.
집사님 한 분이 서점을 하는데 교회 성경공부 교재를 교회에 납품하면서 한푼도 할인하지 않고 100% 다 받더라는 것입니다(통상10-30% 정도는 충분히 할인할 수 있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교회 헌금 계정이 불안하여 그것을 잘해야 한다고 계속 강조를 했는데 몇몇 교회 중직들이 교회 온지 몇 달되지 않은 목사님이 너무 교인들을 의심한다고 반발하더랍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얼굴 붉히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던 사람이 재정부 장로님이었답니다. 그런데 예감이 역시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금전 사고가 난 것입니다. 그 중에 한사람이 무수하게 성도들의 헌금을 가져간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그 사람이 재정위원이 되고 난 후에 차도 바뀌고 집 내부도 다 바뀌고 장롱도 바뀌고 하여 동네 사람들의 입에 저 사람이 무엇을 하길래 저렇게 돈을 많이 벌었나 하는 의문을 가질 정도까지 바뀐 것입니다.
요즘의 부천 세무서 사건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교회가 크니까 헌금이 많이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 해에 그 사람이 가져갔다고 추산되는 것만도 대충 1억 원 정도 되는데 3년 정도 그렇게 했으니까 그 동안 얼마나 탈취했는지 짐작해보십시오. 그러니까 그 장로님으로서는 할말이 없게 되었고 그 재정 위원장직에서 사퇴를 했다고 한 것 같았습니다. 자기가 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 아래 사람이 한 것이니까 책임을 져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목사님께서 눈물을 글썽이며 저에게 자기는 매일 기도한다고 하길래 무슨 기도를 하느냐고 물으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 교회를 이끌어 갈 수가 없다"고 하나님 앞에 매일 항의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세무서에 근무하면서 연구비 빼어 횡령하고 나쁜 짓 하던 사람이 이제는 놀랍게 바뀌었습니다. 그런 건전하지 못한 사업도 그만두고 교회 안에 들어왔고 교회직분도 올라가 중요한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국민의 세금을 빼먹던 사람이 이번에는 교회에 와서 성도의 헌금을 빼먹는 겁니다. 뭐가 달라졌습니까? 이게 남의 일입니까? 우리가 교회 다니면 다 신자입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교회에 머물러 있습니다. 옛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옛사람을 청산하지 못하고 ,옛것에 대한 사랑에 불붙어 있는 사람들, 마치 음란하여 헐떡거리는 사슴과 같이 옛날의 탐욕과 더러운 욕심, 그것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만족시킬 만한 것이 이 신앙의 세계 안에 뭐가 없을까 하고 헐떡거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진노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죄 죽임이 사라진 신앙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어디를 손보시는지 아십니까? 먼저 교회를 손보십니다. 먼저 교회를 털고 거기서 진정한 신자와 거짓된 신자를 갈라내십니다. 그렇게 하여 진정한 신자들과 함께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우리 나라 교회에서 발견될 수 없는 아주 희귀한 연구대상의 신자 한 두 사람을 가리키며 지금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대부분이 이 범주에서 못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명예욕 그대로 가지고 들어와서 교회에서 뭐하나 해보려고 굉장히 충성하던 몇 사람이 나갔는데 그 이유인즉 "교회를 개척한지 이렇게 오래 되었는데 투표를 왜 안 하느냐, 투표하는 교회 찾아간다" 하고 나갔다는 겁니다.
무엇을 위해 충성한 것입니까? 교회에서 직분 맡는 것이 무슨 명예가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세상의 자랑이 됩니까? 이 모두 우리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죄를 죽이지 못하고 죄를 죽이는 대신 겉 사람만 살짝 바뀌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러한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말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에서 보면 주님도 이 시몬이 얼마나 대견하겠습니까? 마술 하던 것 집어치우고 이제 복음전도자가 되었는데, 울긋불긋한 옷 입고 사람들 점보고 할 때 반 이상은 사기치는 것 아닙니까? 사기 쳐서 사람들 그렇게 겁주고 먹고 살던 사람이 다 팽개치고 가족도 버리고 직업도 버리고 그리고 전도대 좇아 다니는데 무엇을 실컷 얻어 먹겠고 거기에서 무슨 월급을 받겠어요? 그리고 세상 영광 다 버렸다고 생각하고 성경책 들고 전도지 돌리면서 그러고 돌아다닌 것 아닙니까?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 사건을 통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된 것을 계기가 주어져서 사도들이 밝히 드러낸 것 아닙니까? 그렇게 180°변했는데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가 있어요? 그러나 대답은 그럴 수가 있다 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씀은 이겁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어서 영생을 찾아가는 길은 놀면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쉽고 편하고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죄악과 쾌락과 탐욕을 다 만족시키면서도 이 길을 걸어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마음놓고 저질렀던 죄악을 예수 믿기 시작하니까 가슴을 조리면서 저지르는 겁니다. 저지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내놓고 나쁜 일 하다가 이제는 숨어서 나쁜 짓 하는 겁니다. 전에는 그저 한 번 보기만 하면 행하다가 이제는 몇 번 생각하다가 행하는 겁니다. 차이가 있느냐 입니다.
그렇게 마음 졸이면서 자기 육신의 정욕과 죄악을 위해서 살아갈 바에야 차라리 예수 믿는 것 포기하고 세상으로 돌아가서 신나게 살다가 마지막에 죽는 것이 인생 편한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바로 거짓된 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오래 다닐 필요도 없고 한 두 시간 안에 자기는 껍데기구나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즉, 이렇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그 무엇을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넘겨 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속에 항상 끓어오르는 분노는 이방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냐 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죽이고 정결하게 되는 그 내면의 속 사람의 변화가 없이 그저 겉 사람이 훌륭하게 예수 믿는 사람답게 변신하기만 하면 마지막 결과가 고작 해 보아야 시몬 정도까지 될 뿐입니다. 기껏 예수 믿는 사람인 척하고 열심히 죄도 마음대로 내놓고 안 짓고 살았더니 "네 마음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하나님의 진노가 네 위에 머물러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운명은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는 무당 노릇하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굿거리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었는데 장소만 바뀐 겁니다. 전에는 굿판 점치는 영업소 위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었는데 이제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그러니 뭐가 바뀐 것입니까? 그 사람이 그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까 죄를 죽이는 신앙 생활이 고작 해 보아야 여기까지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택해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부지런히 내면의 세계를 살피고 내 안에 어떤 탐심이 있는지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사도는 "은과 함께 너도 망해버려라"하였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나면 거기에서 쓰던 모든 지폐는 휴지 조각이 되는 것을 여러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물의 속성이 그러합니다. 이 세상이 존재할 때에만 그 재물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사라지고 주님이 이 세상을 모두 끝내시는데 금․은을 해서 뭐하겠습니까? 그때에 은과 금이 모두 쓸모 없이 망해지는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성의 그 수많은 은과 금이 하나님의 심판아래 묻혔던 것처럼 너도 그렇게 망해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면의 세계를 부지런히 죽이면서 살아가는 삶이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종교적인 운명은 파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 사람이 변한 것을 보면서 얼마나 대견해하고 그것으로서 마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들어온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마술사 시몬이 우리에게 이런 경고를 주고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깊이 우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말 우리는 죄를 죽인 진실한 신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 단지 삶의 방향이 바뀐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삶의 방향만 바뀐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전에 회사 다니던 사람이 교회 다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전에 술집에 다니고 단란주점에서 나쁜 짓 하던 사람들이 오늘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만나 교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입술에서 “니나노”가 사라지고 찬송의 가락이 울려 퍼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영혼에 진실한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뵈올 수 있고 그런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이 어둡고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몸을 화목 제물로 주셨을 때에, 그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셨던 것을 자기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모든 죄를 뿌리치고 정결한 사람이 되어서 영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연합한 사람이 되고 거기로부터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신령한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는 신자들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되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내면의 세계는 정말 변화되고 있습니까? 갈수록 여러분들은 예수 믿는 사람 모습을 많이 닮고 있습니까? 갈수록 여러분들은 섬기는 사람다운 모습을 닮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내면의 세계도 그렇게 변해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술사 시몬처럼 내면의 세계는 탐욕과 물질에 대한 욕심과 온갖 세상에 대한 욕망에 쩔어서 그대로 부패한 채로 번성하고 겉모습만 놀랍게 변신해 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삶을 살아서는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열매로 나타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시는 하나님 앞에 깊이 성찰해서 우리의 내면의 세계가 죄를 죽인 가운데 온전한 주님과의 화목을 이루어서 주님의 진노가 아니라 주님의 축복이 우리 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14. 영적 회복의 길(3)
:참된 죄 죽임이 아닌 것들②
;죄가 움츠러드는 것이 죄 죽임은 아니다
“하나님이 저희를 죽이실 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懇切)히 찾았고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오 지존(至尊)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그러나 저희가 입으로 그에게 아첨(阿諂)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시78:34-37)
지난 시간에 무엇이 죄를 죽이는 것인지 마술사 시몬을 본문으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본문을 통해서 삶의 방향만 바꾸는 것은 결코 죄 죽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시몬이 전에는 마술을 하던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가 이적을 보고 진심으로 믿고 사도들을 따르면서 그는 정말 복음을 위해 헌신된 시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을 돈을 주고 사려고 하는 그 행동을 통해서 그의 내면의 죄는 사라지지 않았고 그가 섬기는 대상만이 바뀌었지 결국 죄의 노예의 상태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신앙생활의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속 사람과 내면의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하여 주심으로 그 속에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을 심어 주심으로써 도덕적인 완전성의 기초가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주 설교는 오늘날 겉만 그럴듯하게 변하고 또한 심지어 겉만 변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일에 열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죄를 이긴 그리스도인들과 상관이 없을 수 있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가끔 죄를 이기는 그것이 곧 자기가 내면의 죄를 죽이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생활하던 것을 회상하면서 시편 78편의 기자의 아삽은 이제 그들이 얼마나 불순종하였고 불순종하던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 베푸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셨는지를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는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 하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셨습니다. 살찐 자와 젊은 자를 죽이셨다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아무리 강한 자라도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살아남지 못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렇게 죽이실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께 간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찾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돌이켰다고 오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돌이켰다고 하는 말은 그런 하나님의 강한 심판을 보는 순간 사람들이 자기가 하던 죄를 그만 두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그렇게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하나님이 반석이시며 전능하신 여호와가 자기들의 유일한 구속주라는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은 그것은 하나님께 아첨하는 것이고 거짓말이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에 정함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제가 오늘 지난주에 이어 말씀 드리려고 하는 교리입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게 되어서 그 죄 가운데로 깊이 들어가서 이 하나님의 은혜가 거의 사라지게 되는 상태가 되면은 인간에게는 마음속에 커다란 고통이 일어나게 됩니다. 죄인에게는 항상 고통이 따라 다닙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죄 가운데 살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잃어버렸으면서도 아직까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오직 둘 중 하나인데 하나는 그가 전혀 거듭나지 않은 신자이거나 죄를 지으면서도 아직 죄가 가져다준 고통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그 배의 즐거움에 잠시 고통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 생각해 보면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길은 항상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자기와 싸우지 않고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죄를 온전히 죽여서 자기가 죄를 통제하고 있으면 순종하는 삶은 참 쉽지만 그러나 죄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 상태가 계속될 때는 죄를 온전히 죽인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갈등의 상태에 있거나 대부분 더 많은 사람들은 죄에게 완전히 져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와 더불어서 갈등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는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뜻을 꺾어야 됩니다. 그리고 순종하려는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쳐서 복종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생각해도 기도를 않기 위해서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지만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할 때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새벽에 졸려도 눈을 비비고 일어나야 되고 저녁에 피곤해도 떨치면서 매달리고 무릎을 끓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삶은 이처럼 자기의 본성을 부인하는 신앙의 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이것이 없이는 결코 순종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 부인이 처절하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 속에서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유혹을 떨쳐 버리는 각오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그 일은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매달렸던 것을 풀면 죄 가운데로 자연스럽게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를 온전히 죽인 그리스도인들은 죄 자체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내면의 세계 속에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승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등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일단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는 희생과 노력과 분투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죄에게 지게 됩니다. 죄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안일과 게으름, 세상에 대한 분주함, 이런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죄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성결함 깨끗함 경건과 열렬한 기도 생활 이런 자리는 죄가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죄에게 온전히 져서 영적인 침체에 빠져서 도저히 몸부림쳐도 헤어나려고 해도 헤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인데 여러분들이 왜 그런 상태에까지 가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직 그런 상태에까지 가지 않았어도 기도하지 않고 은혜 생활하지 않으면 곧 가고 말 것입니다. 깊은 침체에 빠지는 것이 커다란 죄를 덜컹 지어서 함정에 빠지듯이 "쾅" 하고 빠지는 그런 경우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가 우리를 이기기 전에 죄는 먼저 우리를 공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로 하여금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서 하나씩 모두 걷어 가고 그래도 기도하기만 하면 은혜를 받고 눈물이 있으며 감동이 있고 충만함이 있던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기도를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감동과 감화가 있던 사람 속에서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속에 파고들지 못하도록 그렇게 마음을 변화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 하나 해체시키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죄악된 욕망과 부패한 마음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런 속에서 은혜는 모두 해체되고 그 죄의 지배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그런 깊은 영적인 침체 속에서는 죄악된 상황을 깊이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깊은 침체와 죄에게 져서 깊이 패배한 상황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세월이 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 년 정도 영적인 깊은 침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평생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저절로 될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아주 단호하게 떨쳐 버리고 살려고 몸부림치지 않으면 나는 살수 없을 것이라는 사고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이제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성도가 죄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 해체되고 죄 가운데로 들어가서 범죄하게 되는 정도가 되었을 때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로운 세계는 거의 날아가거나 아주 희미하게만 남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로 계속 들어가게 될 때 처음에는 죄악이 주는 달콤함이 있고 불순종이 주는 평안함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범죄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할까 말까 하는 동안에 갈등이 그치지 않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하고 살 것이라고 결심하는 그 순간에 순간적으로 포만감과 행복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된 평화인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떠한 물건을 훔치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고 안달을 하는데 마음에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야! 저거 훔쳐 범죄는 순간이고 이익은 영원해" 다른 한 쪽에서는 "안돼! 그럴 수 없어 하나님이 보고 계신데?" 이렇게 마음의 갈등이 계속되는 동안에 해결을 보기 위해서는 훔쳐! 훔쳐! 하는 것을 안돼! 하고 완전히 죽여 버리든지 아니면 훔치든지 해야 합니다. 그것을 훔치는 동안에 갑자기 하늘이 갈라지면서 무슨 신비한 고통이 인간의 영혼 속에 파고든다고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불순종하고 사는 동안에 갈등이 끝나는 것입니다.
또 예를 든다면 어떤 죄인이 간음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때 어떤 목표를 정해 놓고 그 사람을 간음해야 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을 동안에는 계속 갈등이 그치질 않을 것입니다. 해결점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런 욕망이 모두 사라져서 평안을 얻던가 그것을 못하게 된다면 실제로 범죄하여 순간적인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된 평화입니다. 잠시는 평화가 밀려오지만 즉시 잠시 맛보았던 평화보다도 더 깊은 고통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의식 속에서 균열 현상이 일어나고 양심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매우 특별한 도덕적인 문제로 말미암아서 죄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상담하는 일이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 중에서 약60%이상이 정신과 치료를 받은 다음에 찾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잠시 그 죄를 범했을 때에는 만족감과 평화가 밀려오지만 그러나 그것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는 말할 수 없는 균열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이렇게 예배드릴 때에는 어떤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 머리에 스쳐 가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즉시 돌아가고 나면 내가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렇게 찬송을 부르면서도 저렇게 살아가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봐주는데 나는 저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의식 속에서는 균열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될 때 아주 커다란 지적인 혼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몇 주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지적인 큰 혼돈 가운데로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범할 때는 잘 판단하던 사람들이 사리 판단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죄의 영향입니다.
그렇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에 동반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깊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죄를 잠깐동안 맛보는 것이 한없이 달콤하고 갈등하는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신과 의식 속에 균열이 생기고 마음이 찢어지면서 혼돈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이 생겨날 때 자기가 그렇게 좋아했던 그 죄가 싫어지고 다 필요 없고 나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때 일시적으로 자기가 여태까지 지어왔던 그 죄를 혐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신 겁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돌이켰다고 그랬습니다. 돌이켰다는 이야기는 죄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방탕한 삶에서 돌이켰다는 겁니다. 일단 방탕한 삶을 버린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죄를 버린 것 말고는 돌이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진짜 그런 죄를 버리고 돌아와서 하나님이 우리의 반석이시고 전능하신 여호와만이 우리의 전능한 구속자이시다 라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첨하는 말이 되고 거짓말이 되어버린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죄를 죽인 깊은 내면 속에서 우러나온 반응이 아니라 죄가 가져다준 깊은 고통 때문에 순간적으로 그 죄를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그 죄로 말미암아 받는 고통이 너무 커서 그 죄를 싫어하고 던져버릴 때에 그때 순간적으로 죄는 확 움츠려 들면서 죄가 우리 속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뭔가 하나님 앞에 범죄를 해서 그 범죄 때문에 너무나 마음이 고통스럽고 마음이 괴로울 때 몸부림치면서 울면서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에게 "야! 한 건 더 해볼래?"하면 순간에는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면의 죄를 죽였기 때문에나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지은 자가 느낄 수 있는 갈등을 너무 깊이 느끼기 때문에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그 범죄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버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유사한 케이스가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가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예수님을 팔고 대제사장들에게 은30을 받았을 때 가룟 유다의 기분은 최고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유다는 쓰지 못했습니다. 누가 쓰지 말라고 그렇지도 않았고 예수님이 자신을 팔고 받은 돈이라고 그 돈 쓰면 혼난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배반자라고 힘을 합해서 죽이자고 현상금을 걸어 쫓아오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방해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고 스스로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대제사장들 앞에 다시 가져가서 "내가 무죄한자의 피를 흘렸도다" 하면서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성령이 시킨 것입니까? 그것은 성령이 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인 스스로 죄를 지은 이후에 경험되는 인간 본성에서의 몸부림치는 뼈아픈 고통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회개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그는 결국은 양심의 가책에 너무너무 못 이겨서 결국은 목매어 자살하고 떨어져서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죄로 말미암고 고통을 당하는지 보여주고 그런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느낄 때에 마치 달팽이가 비오는 날 나뭇잎에 붙어서 연꽃 짜 놓은 것처럼 쭉 내밀잖아요. 그러다가 "훅"불거나"툭"치면 머리가 재빨리 들어갑니다. 그리고 껍질 속에 쏙 들어가서 절대 나오질 않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이젠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싸우긴 싸우는데 싸우려면 눈에 보이고 적하고 눈을 마주 대고 권투를 하듯이 싸워도 이길까 말까 하는데 자신이 나름대로 몸부림치고 기도하는 동안에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속에서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약속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죄가 준 고통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데굴데굴 구르다시피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울 때 그것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거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진심과 성경이 생각하는 진심이 얼마나 다른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워서 흘리는 눈물이 거짓말이겠습니까? 살려달라고 부르짖고 나면 적이 사라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적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적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이전에는 "오는구나" 하고 보면서 싸우든지 항복하든지 포옹을 하든지 입을 맞추든지 했는데 자신은 이제 회개했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 용서해 주시니까 용서해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범죄로 말미암아서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는 것이 24시간 내내 일평생 계속되는 것이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는 "딱" 멈추는 때가 있고 멈추고 나면 적군이 "싹" 나타나는 때가 있습니다. 적이 눈에 보이는데 이제는 내가 엎드려진 것처럼 죽었다가 깊이 통회하고 몸부림친 다음에 화살이 날아와서 가슴에 맞은 것입니다. 끌어안고 몇 달을 몸부림치며 간신히 빼내고 아물만해서 고개를 내밀면 돌멩이가 날아 왔는데 아무리 돌아봐도 적군이 없는 것입니다. 상황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이렇게 죄가 가져다 준 번민 때문에 고통스러워 몸부림칠 때 사람들은 간절히 부르짖으며 몸부림을 치는데 겉모습은 마음이 가난해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모습과 꼭 같은데 차이는 죄가 가져다준 고통 때문에 몸부림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할 때는 진심의 기도가 간절하게 쏟아져 나오기는 하는데 내면의 세계의 몸부림뿐이고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고통하면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기도를 해도 그 격렬한 기도가 모두 끝나고 나면 주님 자신으로 우리의 심령이 가득하게 채워지는 충만함이 있어야 되는데 죄로 말미암는 고통 때문에 몸부림치는 기도 속에서는 그러한 충만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몸부림쳐도 공허할 뿐입니다.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속는 것입니다. 그들은 알량한 성경 지식을 끼워 맞추고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진실하게 기도하고 몸부림쳤으면 모든 것이 끝나야 하는데 잠시 시간이 흐르고 마음속에 그런 간절한 몸부림이 사라지면은 인간의 내면 밑바닥에서 정욕이 다시 솟아오르고 죄에 대한 유혹이 생겨날 때 다시 거기에 굴복하게 되어 범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어떤 혼란에 빠지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진심으로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그 다음에는 자포자기의 마음이 옵니다. "그래 더 뭐가 더 나빠지랴"하고서 말입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의식세계 속에서 균열이 생기고 갈등을 일으키면서 바짝 긴장하고 몸부림칠 때 하나님께로 피하지 않으면 더 큰 죄로 탐닉하게 되면서 마음에 일어났던 깊은 번민들이 순간적으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갈수록 그 죄는 점점 더 악랄해지고 더 자극적인 쾌락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원래도 별로 없었지만 더 철저하게 파괴되면서 완전히 초토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딛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기관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은혜는 완전히 사라지고 죄가 완전히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전에는 마음속에 "저것 훔치고 싶어! 안돼! 그래도 안되잖아!" 이러면서 약화되는 과정이라도 있었는데 그런 상태에 접어들게 되면은 마음속에 생각하는 것이 즉각적인 행동이 됩니다. "나 저것 하고싶어! 가자! "하는 통제기능이 모두 상실 되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은 죄의 세력들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차렷! 앉아! 일어서! 시키는데 하는 사람은 힘이 드는데 말하는 사람들은 애들 힘든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이 아프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마귀도 마찬가지로 그런 식으로 움직입니다. 마귀가 원하는 방향으로 구르면서 노예의 상태로 살아갈 것이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우리에게 주고 싶으셨던 풍성한 삶의 정 반대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것으로서 우리의 인생을 향한 마귀의 목적은 아주 훌륭하게 성취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은 물론 이거니와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교회를 부패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데 죄지으니까 번민과 고통이 그치지 않고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니까 더 큰 범죄로 피하고 하면서 계속 쌓여 가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벗어나기 힘든 깊은 수렁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께서 도저히 보실 수 없으며 그 생명을 하나님이 건져 가셔서 원래의 생명대로 못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단이 얼마나 정교한 계획을 가지고 신자들의 삶을 파멸시키는지 모릅니다. 그런 속에 있을 때 죄에 대해서 혐오하는 마음으로 막 몸부림치는 것은 인간에게 일어날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영적인 것들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또 하나는 어떤 깊은 공포가 일어날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똑바로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형편없이 살아가면 하나님이 어느 순간 그에게 아주 강력한 두려움을 심어주셔서 끔찍한 느낌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진노가 자기에게 임박한 것을 의식하게끔 만들어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런 두려움이 생겨날 때 혹은 큰 재앙이 일어나게 될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생기면서 자기의 죄에 대한 사랑이 순간적으로 식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커다란 공포심이나 자연적인 재앙 혹은 옆에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숨을 거두거나 하는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눈뜨면서 큰 두려움에 서로 잡히게 되고 그때 자기가 좋아했던 것들을 버리게 됩니다. 그럴 때는 사람이 갑자기 도덕적으로 완전히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그러나 그것이 죄를 죽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삶으로 변화되었다고 해서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강같이 흐르고 죄를 이기며 풍성한 삶을 이어가게 만들어주는 생명의 놀라운 은혜가 그 마음속에 역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이런 정도의 위치에 대해서 거의 무지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일단 죄로 말미암아 어둠 속으로 사람을 몰아 놓으면 어디서 주먹이 날아오는지 모르고 실컷 두들겨 맞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흔히 어떤 비극적인 주인공 의식을 갖기도 합니다. 자기가 이렇게 많이 얻어맞고 죄로 말미암아 곤고하고 곤비하게 되어져서 자기는 굉장히 슬픈 사람이고 무엇인가 많이 피해를 입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한다고 하는 그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뿐이지 자기 상태가 어떠하고 어떻게 그런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고 어떻게 벗어나야 되는지 길을 알지 못하여 죄를 회개한다 하더라도 항상 감상적인 차원에서 그칩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너무 괴롭습니다. 어떻게 좀 해주세요."라는 차원 이상을 못 벗어납니다. 길이 보이지 않으니까 노력할 수 없고 노력하려고 해도 할 힘이 없어 계속해서 죄 가운데 사로잡혀 가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한번 사로잡으면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눈물 흘리며 애원해도 사단이 그 눈물에 감동 받아서 이번만 살려줄게 하고 풀어 놔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제가 3주전에 말씀 드렸듯이 이런 영적인 깊은 어려움 속에 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의 빛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향해 반감을 갖는 마음입니다. "뭐가 더 나빠지랴" 하고 더 담대하게 악을 행하고 그런 속에서 계속되는 고통으로 또 몸부림치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계속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것도 잘했을 때입니다. 잘못하면 교회와 신앙과도 결별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쯤 은혜생활 안해도"하는 마음이 쌓여서 결국은 파멸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교회는 좀 낫다고 하는데 기도를 너무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 하나님을 크게 만났다고 하는데 크게 알만한 사람은 죄에게 져서 이렇게 비참하게 빠져 들어가는 이런 상황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여러분이 몇 년 전에 받은 은혜 그것만을 밑천으로 살아갈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제는 새로워져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죄 죽임의 교리를 들으면서 여러분은 무얼 생각했습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다급함이 생기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지옥에서 온 사람을 예로 들은 것이 아니며 도저히 도달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여러분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파멸한 그리스도인들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갈 수 있는 자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곳으로 지금 달려가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매일매일 하나님 은혜 없이도 잘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몇 년 전에 만난 하나님 자랑하면서 살아가기를 언제까지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신자 중에 말로 할 것 같으면 사도 바울은 삼층천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복음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 자체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온전히 잡았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나는 매일 죽노라 다른 사람들을 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내가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노라"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바울보다 뛰어난 그리스도인입니까? 여러분들이 매일매일 기도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과는 거리가 먼 얘기가 아닙니다. 죄 죽임을 성공하지 못하면 잘하면 외식하는 그리스도인이요 실패하면 배교에 가까운 삶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지 않고 여러분 속에 오늘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죄를 죽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존 웨어는 말하기를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여러분 자신 속에 솟아 나오는 이 끊임없이 독버섯처럼 솟아나는 이 죄악들을 죽일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여러분들에게는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혹시 마술사 시몬 같은 사람 아닙니까? 옛날에 술 먹고 나쁜 짓 하던 것 팽개치고 이제 그럴듯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위에서 착실한 청년! 정말 변화된 사람이라고 말해주니까 그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만족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 하나님 앞에 거짓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매일매일 죄를 이기지 아니하고는 여러분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들이 죄 가운데 빠지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제가 예로 들고 있는 이 사람처럼 실패 가운데서 뼈저리게 몸부림칠 때 비로소 여러분들을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몸부림치면서 죄를 떠났지만 결국은 죄를 죽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본 사람들이었고 놀라운 이적의 떡을 먹은 사람들이었고 고기를 먹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험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 그렇게 살기에는 너무나 바쁜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가기에는 너무 바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 살다가 세상과 함께 마술사 시몬에게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좋은 세상과 함께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다가가고 은혜 안에 살기에는 너무 바쁜 사람들은 망할 세상과 함께 살다가 망하는 것이 아주 훌륭히 갈 길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살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빠져서 허덕이고 있는 바로 그곳! 거기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를 다시 살릴 때에는 무엇인가 참 놀라운 삶을 기대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풍성한 삶, 풍성한 은혜 가운데서 받은 이 세상에 딛고 살지만 마음은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이 세상에서 살지만 그러나 사실은 세상을 섬기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은혜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하나님과 사귀기에는 너무 바쁩니다. 은혜 안에 살기에는 제가 얼마나 땀나게 바쁘게 살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기업은 바로 망해 가는 이 세상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을 구조 조정할 생각은 없는 것입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삶이 살아가는 방식과 환경자체가 일평생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강요하면 그 삶의 틀 자체를 거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서 뭘 남기고 죽으실 것입니까? 이름을 남기시렵니까? 물질? 명예? 후손을 남기려고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리고 우리의 삶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를 위해 사는 것 외에는 삶의 소망이 없다고 고백을 하던 그리스도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정말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고 매일 솟아나는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뿌리뽑고 생명의 은혜 속에 살기에는 너무나 바쁘다는 것, 그러기에는 내 인생 구조가 허락을 하지 않는다는 것, 언제까지 그런 식의 삶을 사시렵니까? 그렇게 산 사람의 마지막은 무엇을 위한 생이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우리의 삶 그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런 삶을 우리가 살지 못할 것 같으면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죄가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갈등을 더 많이 느끼면서 산 인생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고 맛본 후에 세상으로 달음박질 친 사람이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왔다 갔다 방황하다가 세상에서 죽다!」이것이 그들의 비문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회색지대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성도의 인생이 무엇이겠느냐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주님을 섬기다 죽은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너무 바쁜 나머지 예배조차 참여 할 수 없는 귀하신 몸이 되어 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인생을 너무나 잘못 살고있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을 아낄 정도로 기도시간을 아낄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의 은혜를 받는 시간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분주하게 몸부림치면서 살아서 여러분들이 얼마나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남기고 죽는지 제가 살아서 똑바로 지켜보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소중한 좋은 것들을 주를 위해 버리고 자기의 귀한 것들을 주를 위해 허비하고 세상의 영광을 세상의 아름다움보다는 주님의 사랑을 찾고 하나님 자신의 목말라하면서 그렇게 주님을 경배하면서 살던 사람의 인생 마지막이 어떠한지 나는 여러분 모두가 대조해서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겉멋과 폼밖에는 배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로 온 신자 어떻게 하면 기죽이는지 어떻게 하면 뻥치면서 간증해서 사람들이 자기의 무용담을 들으며 무릎꿇고 "헤"하고 쳐다보게 할 것인지 배우고 그리고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추구도 없고 기껏 해봐야 죄 가운데서 몸부림치면서 가끔 신음하듯이 울부짖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훌륭한 신앙의 과거를 가진 여러분들과 같은 사람 속에서도 얼마든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겨우 그렇게 사는 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고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육신을 섬기고 우리의 죄를 따라가는 종노릇하는 삶을 청산해서 이제는 우리의 본성을 거슬리는 그런 죄를 이기는 삶을 살아서 우리의 삶 자체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향한 경배와 향기가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일은 두 가지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그가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지적 받을 때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엎드려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가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참회의 삶을 살아가고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쪽에서 무너져 가는 자신의 내면의 세계의 생명이 참회와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 날마다 새롭게 재건되고 복구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은 여러분들은 계속해서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될 뿐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더 큰 자금난을 찾는 그런 삶의 자리는 모두 사라져 버리고 가상 현실로 뛰쳐나가고 싶어하는 그런 사람들로 다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처음 죄 죽임의 교리를 듣던 때의 긴장을 가지고 듣고 있습니까? 처음에는 지난 시간 테이프를 다시 듣겠노라고 정신없이 나갔는데 한참 지나고 나니까 흐려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고 주님이 구원받은 우리를 향해서 얼마나 강렬한 열망을 품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옛날에는 아이를 낳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시집에서 쫓겨나는 것을 소박맞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짐승처럼 막자라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고통은 아이를 못 낳아서 시집에서 쫓겨나고 소박맞는 것보다 더 커다란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낳아서 낳을 때 괴로움 다 잊고 진자리 마름자리 다 갈아 눕히면서 그렇게 기른 그 자식이 짐승처럼 막 살아간다고 생각할 때에 그 부모의 고통이 얼마나 크겠는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획도 없고 뜻 없이 여러분들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셨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을 주셔서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삼으셨을 때 여러분들을 향한 계획이 없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 속에 끊임없이 독버섯처럼 자라서 결국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초토화시키려는 그 모든 죄를 이길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기를 하나님 앞에 힘써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듯이 한 달에 한번 부흥회 할 때에 가끔 수련회 할 때에만 죽이면 안됩니다. 날마다 죽노라 하는 것은 매일 매일의 싸움과 매일 매일의 투쟁이 필요한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아마존강을 잡지에서 본적이 있었는데 위에서 사진을 찍은 것이었는데 뭐냐 하면 큰 강이 흘러가는데 정확하게 강의 세로로 반 조각은 아주 투명한 물이 흘러가고 나머지 한쪽은 아주 더러운 흙탕물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까 하고 기사를 읽어보았는데 기가 막히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흙탕물과 맑은 물 두개가 합쳐지지 않고 수십 킬로를 흘러가는데 무슨 수요와 관계가 있답니다. 아주 정확하게 칼 같이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는 우리교회를 생각 해보았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많이 합니다. 아주 열심히 합니다. 아주 멀리 사는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약속하고 퇴근하고 와서 하고 새벽에도 와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지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완전히 안합니다. 은혜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맙니다. 왜 하나님 앞에서 그토록 기도하지 않고 은혜생활에 열심을 내지 않는지 그 비결을 한번 배워보고 싶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지 않으면 시기의 빠르고 늦음은 있지만 반드시 그는 후회할만한 파멸로 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고 하면서 매순간마다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 아침까지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 살기를 구해야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도록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주를 위해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며 자신의 패역함과 악함을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고 하나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최근에 읽은 청교도 루이스 벨리의 책 가운데 깨달은 것이 있는데 저는 도저히 흉내내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인이 맞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루이스 벨리의 요구에 위하면 하루에 3장씩 성경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3장씩 읽으라는 건 읽겠는데 그는 아침에 한 장 읽고 점심에 한 장 읽고 저녁때 한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 장을 그냥 후루룩 읽는 것이 아니라 한 장 전체를 큐티를 하는데 눈을 딱 뜨는 그 순간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눈을 딱 떴을 때 무엇을 먼저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가 많은데 그는 눈을 뜨는 순간에 무엇을 묵상해야 되는지 기록을 해놓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놀랬습니다. 저자는 그 순간에 부활을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아! 새로운 세상이다. 결국은 주를 위해 살다가 주를 위해 죽고 나면 언젠가 우리는 이렇게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하루도 종말론적인 헌신 속에서 살아야 되겠다는 묵상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옷을 입으시면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저는 빨리 새벽기도 갈 생각으로 옷이나 거꾸로 입지 않았나 하는 생각하는데 그는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왜 당신은 벌거벗은 그 채로 하루를 시작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수치를 가리기 위해 옷을 입는 것처럼 당신이 만약에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거룩한 행실로 옷 입지 않으면 당신은 결국은 내복바람으로 팬티바람으로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뛰어 나가는 것과 똑같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기도하고 좀 있다가 밥 먹고 나면 또 성경 읽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요구조건이 너무 과하다고 말할지 모르면 그렇게 살 시간이 없다고 투덜거릴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당신을 위해 예비 된 하늘나라의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대충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기업이 예비 된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죽음이 찾아와도 기다렸다는 듯이 그 최후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런 사랑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들이 불철주야 노력하고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씨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게으른 자신의 육신의 본성과 더불어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살아도 도저히 어쩔 수 없다면 여러분 삶의 구조자체를 새롭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받게 해주셔서 이 땅에 살게 하신 것은 우리 자신의 목표에 미쳐서 사는 것을 위해 우리를 여기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아버지의 참사랑을 알았던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의 인생은 우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이처럼 죄 죽임에 대해서 진지한 견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깨닫고자 하는 것도 결국은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끔 죄에 대해서 몸부림치듯이 이기는 것과 같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은혜 생활을 이어 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경건한 삶을 살고 주님을 찾는 우리의 기도생활과 말씀생활을 그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15. 영적 회복의 길(3)
:참된 죄 죽임이 아닌 것들③
;외식과 도덕적 변화가 곧 죄 죽임은 아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23:25-26)
저는 지난 시간에 종종 죄를 이기는 것이 그것이 곧 죄를 죽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들이 고통가운데 울부짖고 혹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두려워 떨 때에 죄는 잠시 움츠려 들지만 그것이 우리 안에서 죄가 죽은 상태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왜 이렇게 죄 죽임에 대해서 집요하게 석 달이 넘도록 넉 달째 우리들이 계속 듣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넉 달째 접어 들어가고 있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해야되나 생각했더니 지금 진도 나간 것이 사 분의 일쯤 나갔습니다. 왜 우리들이 이렇게 집요하게 죄 죽임에 대해서 듣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그 죄 죽임을 통해서 얻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 죽임을 통해서 얻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죄 죽임이 있는 곳에 은혜의 살아남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나는 일이 있고, 우리 안에 죄가 온전히 죽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보다 풍성한 교제를 누릴 수 있으며, 세상을 이기는 놀라운 능력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겉모습이 그럴듯하게 변화된 것이 곧 죄를 죽인 증거가 아니다 이거를 죄 죽임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주부터는 그렇다면 참된 죄 죽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몇 주에 걸쳐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라고 시작하신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화 있을진저'라고 하는 말의 정반대는 ‘복이 있도다’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이것은 이렇게 ‘화 있을진저'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저절로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라고 하는 그런 뜻이 아니라, ‘화 있을진저'라고 할 때에 이 ‘화 있을진저'는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진노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야 말 것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겠다 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복이 있게끔 하겠다, ‘축복하겠다'라는 말씀이고, ‘화 있을진저'는 너희들이 지금은 형통한 것 같고 잘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러나 나 여호와가 너희를 반드시 벌주어 너희로 반드시 화를 당하게 할 것이고, 반드시 너희가 내 진노아래 있어서 너희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 하는 심판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 이 말씀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하고 얼마나 다릅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그들을 축복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적어도 주님께서 처음 오실 때에 주님이 원하셨던 것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내가 반드시 너희들을 벌주고 벌줄 것이며, 반드시 너희 모든 삶을 내가 내 진노아래 만들어서 너희들을 반드시 심판하고야 말리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심하게 아주 격렬한 진노의 말씀을 주셨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께서 진노하며 우리에게 말씀하셨던 이것은 오늘도 똑같이 살아서 예수님께로부터 이런 책망을 들었던 삶을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그들을 하나님께서 벌주고 벌줄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그릇된 삶과,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나님의 진노아래 두시겠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무엇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외식하는 사람들을 향한 말씀인 것입니다. 외식, 이 외식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밖으로 들어내 보여주는 내 내면의 세계와는 다른 행동 때문에 사람들에게 영광이나, 칭찬,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 행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내면의 세계와는 상관이 없이 속마음과는 다른 행동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사람의 칭찬과 영광을 구하려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외식하는 것을 인해서 예수님께 깊이 탄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러나 우리들이 한번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은 바리새인이나 종교지도자나 이런 사람들이 외식한 것이 예수님께로부터 그렇게 심판을 받아될 정도로 심각하고 나쁜 것이었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의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서기관이 원래 하는 일은 율법을 베끼는 일이었습니다. 정성껏 베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복사기도 없고 인쇄술이 없으니까 사람의 손으로 보고 그대로 베껴야 지만 결국은 모든 것들이 만들어지는 그런 상황이단 말이죠. 그래서 그거를 그대로 베끼는 것입니다. 베끼는 가운데 이 일이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이제는 성경을 베끼기 위해서는 제대로 성경을 알아야 된단 말이죠. 그래서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회에 성경을 가르치는 중요한 종교적인 그룹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이 성경을 베끼는 그 행위는 굉장히 엄숙하기까지 했습니다. 많은 게 필요할 때에는 한꺼번에 사람들이 모여서 불러지면은 베끼는 경우도 있었고, 보고 베끼는 것보다 일반적이었는데, 한 양피지가 가장 값진 것인데 거기다가 성경을 베끼다가 다섯 글자인가 몇 글자이상 커다란 종이에서 틀리면 그 자체를 영구히 파기해 버렸습니다. 야훼라는 이름이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붓을 빨아서 다시 쓰는 그러한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보여주던 그런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보다 큰 관심은 율법을 현실의 생활 속에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한 많은 규칙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이요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 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외식을 했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로부터 깊이 탄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사람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많은 일들을 행했습니다. 여러분 터놓고 노골적으로 악하게 사는 거 보다는 위선이라도 선을 행하면서 사람들에게 사는 것이 세상으로서는 훨씬 더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 거짓으로 선을 행하는 위선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자기를 괴롭히지 않고 자기에게 좋은 일을 해 주면 세상은 혜택을 받지 않습니까? 세상은 솔직히 말해서 정직한 악보다는 거짓된 선을 더 좋아해요. 그렇잖아요. 지금 가난한 사람들이 위선이라고 할지라도 있는 사람들이 한번 많은 돈을 내 놓으면 하여튼 잘 살 것 아닙니까? 세상은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좀 다르다 이겁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 외식에 대해서 깊이 혐오하시면서 심판하시느냐 이거를 우리들이 더듬어 보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신앙생활을 해 나갑니다. 교회 와서 신앙생활 해 나가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좀더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모습을 갖춰나갑니다. 예전에 방종하고 방탕했던 삶을 버리고 그리고 좀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반듯하고 균형이 잡힌 좋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꾸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시는 것은 속 사람을 바꾸어놓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기독교의 참된 본질은 사람의 내면의 세계를 고치는 거예요. 그거를 고치면 밖으로 흘러나오는 삶도 고쳐진다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새사람을 만드는 것이 기독교의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는 많은 관심을 외부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물론 갖지만 보다 더 많은 관심은 그런 잘못된 삶, 망가지고 고통하는 삶을 살게 됐을 때 어떻게 하면 그 삶이 ‘행복해 질 수 있다’에 대해서 성경이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렇게 우리의 망가지고 고장나고, 죄로 깊이 물들어 있는 고통스러운 삶이 무엇 때문인지를 보여주는 일에 성경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실패하고 망가진 채로 살아온 그런 삶을 살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 사람의 내면 속에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내면의 세계를 고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고치실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고쳐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영혼이 치료되는 것과 함께 그의 밖의 삶도 함께 고쳐질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전망을 성경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교 같은 경우는 좀 달라요. 물론 유교가 내면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충성을 다하고, 효도를 하고 이럴 때에 굉장히 많은 가치를 유교에서도 진심에다가 둔단 말입니다. 충이라는 그 자체가 가운데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강조점은 어디에 두느냐 하면 바깥에 입니다. 그 사람의 삶이, 그 사람의 행동이 예를 갖췄는가,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가, 이런 것에 대해서 훨씬 많은 강조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의 달라요. 인간의 그 모든 고통과 일그러진 삶, 그리고 살면 살수록 많이 산출되는 수많은 죄, 이러한 자기도 원하지 않는 잘못되어 가는 삶의 한 복판에는 망가진 사람의 내면의 세계가 있다는 거예요. 영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거를 고치는 그것이 성경이 주된 관심이고, 복음은 이런 것들을 고치러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를 이 저주받을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들을 건져주시는가 하는 것을 복음은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겉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 바뀌어져 가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강하게 변화시켜 주실 때에만 밖에 있는 생활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밖에 있는 삶을 변화 시켜주는 것은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고쳐준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인으로도 우리의 삶은 많이 고쳐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 아닙니까? 교회에 다니는데 말씀에도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뜨거운 기도생활에도 관심이 없어요. 자기 말로는 ‘소질이 없다'그렇게 말하거든요. 그리고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도 없어요. 그런데도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 이야기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른데 어떤 사람들은 아주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목사님이 그런 야기를 자기 글에서 썼어요. 자기 교회에 여성도가 있었는데 남편이 병이 들었어요. 그런데 암입니다. 군인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그래서 그렇게 부인이 눈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이야기를 해 가지고 결국은 목사님 심방을 받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 목사님이 너무 너무 바쁜 분입니다. 그래가지고 정말 어렵게 그 병원에 심방을 갔는데 다 심방을 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권면했더니 마지막에 하는 말이 뭐냐하면 “목사님, 제가 군인입니다. 내가 여태까지 예수를 안 믿다가 어떻게 지금, 죽을 때가 되가지고 내가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고 비겁하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군인정신으로 죽게 내버려두십시오" 그래서 죽었어요. 군인정신으로 용감하게 지옥을 간 것입니다.
봐요. 사람은 그렇게 남다르게 자기명예에 대해서 집착하거나 다른 사람의 평판에 대해서 많이 신경 쓰는 사람들은 자기 속에 어떤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났을 때 그 죄를 지음으로서 얻게 될 즐거움 보다 이 죄가 사람들에게 발각 났을 때에 자기가 당하게 될 부끄러움에 대한 공포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죄를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는 회개 안하고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 예민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계속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갈 때, 또 반대도 생각될 수 있잖아요.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맛볼 수 있는 쾌락보다는 내가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서 사람들에 과시할 때 그들이 나를 이렇게 높여주는 정신적인 쾌감이 훨씬 크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럴 경우에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을 고치고 변화시키는 과정 없이도 얼마든지 죄를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은 남아있는데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돈도 있었고, 시간도 있었고, 건강도 있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욕망은 남아있는데 건강도 없고, 돈도 없고, 그리고 죄를 짓자니 이제는 너무 늙어서 기력이 없어졌어요. 그리고 사람이 너무나 몰골이 흉악해져서 이제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 주었던 사람들이 자기를 상대하지 않으려고 그래요. 그런 경우에는 어때요? 사람이 도덕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는 옛날 같이 그런 나쁜 짓 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그 사람이 죄를 버린 것이 죄가 그 사람을 버린 것입니다. 죄조차 버린 것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우리는 몇 가지 논증을 통해서 뭘 배우게 되느냐 하면은 사람이 반듯한 사람, 보다 도덕적인 사람으로 되어 가는 것이 성령이 역사 하셔서 그의 영혼을 바꾸어 놓으심으로서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외식이 그런 종류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외식은 죄를 지음으로서 받을 수 있는 쾌락보다는 사람들 앞에 죄를 안 짓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자기가 받을 영광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면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세계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속에 흐르고 있는 정서는 주님을 사랑하고 순결해 지고 싶고, 뜻대로 살고 싶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싶은 정서가 아니라 내가 높아지고 싶고, 탐욕과 죄악과 욕망과 거짓이 흐르는데 겉으로는 거룩한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이러한 죄를 아주 심하게 질타하셨는가, 오히려 내면의 타락과 더러운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밖으로 그대로 흘러 나와서 일치한 삶을 사는 사람들보다 일치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보다 더 하나님의 진노아래 묘사하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이것입니다. 그거는 외식이 가지고 있는 매우 특별한 해독 때문입니다.
어느 소설가가 그런 얘기를 하대요. 일평생 소설을 쓰다가 보니까, 어느 것이 사실이고 소설인지 자기가 분간이 잘 안간 대요. 그럴 것 아닙니까? 사실 소설을 쓴다든지, 글을 쓴다든지 그럴 때에는 대게 자기가 체험한대서부터 출발을 한다구요. 여러분들은 어린 왕자라는 책을 읽어봤죠. 생떽쥐베리, 야간비행도 있잖아요. 그리고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 꿈 같은 소설도 한때 유행했잖아요. 두 사람 다 비행사였어요. 비행사였기 때문에 갈매기가 떨어지고 솟구치고 즉각 비행을 하다가 날개가 부러지는 이야기를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보고 그런 것을 쓰라고 그러면 물론 쓸 시간도 없지만 읽어 줄 사람도 없지요, 그러니까 피차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못써요. 왜 그쪽 세계에 대해서 체험이 없으니까. 우리 같은 사람보고 만약에 소설을 쓰라고 그러면은 대게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 성전 이전하다가 생긴 일, 부흥회 하다가 생겨난 일, 그런 것이나 쓰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보고 첩보작전의 스릴서 그런 것을 쓰라고 그러면 쓸 수는 있겠지만 아무도 안봅니다. 너무 재미없고 뻔합니다.
자기 체험한데서부터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체험한데서부터 출발해서 일어난 이야기나 혹은 일어날수 있는 이야기, 일어났으면 좋았을 뻔했던 이야기, 안 일어났으면 했던 상상, 이런 것들을 섞어서 소설을 쓰는 것입니다. 한참 쓰다보니까 그 다음에는 인제 어느 게 픽션이고, 어느 게 논픽션인지 헷갈리는 것입니다. 사실이 무엇이고, 내가 꾸며낸 게 뭔가 뒤범벅되는 것입니다.
외식이 우리에게 그런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말해봐요.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예수님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고, 삶이 아무리 개떡 같아도 말이 찰떡같으면 자기가 찰떡이라고 생각한다고. 그게 외식이 가지고 있는 효과입니다. 처음에는 외식을 행할 때에 그때에는 딱 지각이 되요. ‘아이고, 내 이거 마음에 없는 건데' 그러나 모든 죄악 된 습관이 그렇듯이 이제 하면 할수록 그것이 몸에 착 달라붙고 자연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세련된 방식으로 위선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도가 지나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자기의 참 모습이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가, 그런 외식하는 삶에 건강한 영적인 삶이 불가능하잖아요? 그러니까 내면에서 하나님과 거의 교통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진노를 받고 저주아래 있는 것 같은 하나님의 평화가 완전히 끊어진 내면의 세계가 자기의 참 모습이라는 것이 아니라, 위선을 행했을 때에 사람들이 “당신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감동 받았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실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나는 당신처럼만 됐으면 좋겠습니다." 막 이럴 때에 자기가 그런 사람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 착각에 빠지고 나니까 어떤 문제들이 대두 되냐 하면은 그런 착각에 일단 빠지고 나면은 주님이 내 인생에 있어서 신앙에 있어서 간절히 필요한 존재다라고 하는 인식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나 잘 나가는데 무슨 도움이 필요하냐'이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 없는데 왜 하나님, 도움이 필요하냐'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절박하게 필요하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골고다 언덕으로 기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야 되냐하면은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비참한 죄인이고 그리고 주님의 진노아래 있으며 우리의 내면의 세계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죄악 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의 힘으로는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절박하게 예수님 밖에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흘리신 그 피로 나를 정결케 해 주시옵소서. 나는 공로 없으나 내가 예수의 피를 의지해서 아버지께 갑니다 날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간절하고 진실 된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복음을 간절히 필요로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복된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되거든요. 진노아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지만 복음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 사람은 자기가 상당히 쓸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이미 놀라운 은혜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구원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이 얘기예요. 없다 이 얘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외식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파괴력, 그 외식 뒤에는 사단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더러운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파괴력을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토록 철저하게 인간들이 외식이라고 하는 피난처에 숨는 것에 대해서 극도의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진노를 보여주심으로 그들이 그렇게 외식 속에 안주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는 이제 희망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에 가장 훌륭한 격언 하나를 우리들이 가진 다면은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사람들은 아무리 죄 가운데서 있어도 희망이 있어요. 그러나 부정직한 사람들은 아무리 그가 의롭고 훌륭하게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부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3년 전에 '참된 신앙과 외식'이라는 시리즈를 이 교회에서 한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에서부터 18절까지입니다. 그게 시리즈가 문서 선교부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들으셔야 됩니다. 그 해에 연말에 가서 모든 성도들에게 앙케이트를 했을 때에 가장 충격을 받았던 시리즈가 외식시리즈였습니다. 그거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삶에 깊이 파고 들어있는 이 외식을 여러분들이 철저하게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거는 2천년 전에 바리새인들이나 했던 그것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들의 삶 속에 매우 가까이 와 있고 어쩌면 여러분이 거기에 깊이 파져 있는 것입니다.
일단 이 외식이라고 하는 잘못된 죄악에 빠지게 되면 그러면 커다란 문제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뭐냐하면 적군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면서도 그 화살이 어디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살인, 부 정직, 불의, 포악, 간음 이런 죄들은 뻔히 보인단 말입니다. 그러고 휙 날아와서 자기를 딱하고 화살이 맞힐 때 난 누구로부터 화살을 맞았는가 하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외식은 그게 불가능해요. 외식에 빠지게 되면 계속해서 드는 생각이 ‘나는 올바로 살았는데 왜 나는 이런 영적인 어려움을 겪게 될까' 하는 이러한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끔 모태신앙을 가지고 있거나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 하는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태신앙이 잘되면 모태신앙이지만 모태신앙이 잘못되면 모태신앙이 곧 못된 신앙이 되거든요. 그러면서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들은 수없이 들어 봤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타락했으면 좋겠다는 사람들, 무슨 뜻이냐 하면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도록 다녔어요. 모태신앙으로 딴 친구들은 주일날 배낭 메고 놀러가고, 나쁜 짓 하러 다닐 때에도 자기는 교회한번 빠진 적이 없고, 주일날 뭐 사먹은 적도 없고, 그리고 십일조 한번 걸러본 적이 없고 그저 꾸역꾸역 교회에 다녔어요. 성실 하나로 시종일관 교회를 다녔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며칠 전까지 나쁜 짓 다하고 자기가 인간이라고 생각도 안 했던 친구들은 교회 와서 부서지고 깨지면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렇게 많은 날 동안 재미도 못보고 신앙생활 했는데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고, 은혜도 없고 불이 뭔지도 모르고 성령이 뭔지도 모르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자기가 하나님을 못 만난 것은 ‘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친구처럼 그렇게 타락하면 나도 다메섹과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다. 다메섹에서 만난 하나님을 만난 바울과 같은 극적인 체험 속에서 뭔가 분명한 신앙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크게 두 가지의 답이 주어집니다.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그가 성령이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굉장히 많이 받고 있는 착한 신자인데도 인제는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것을 자기가 느끼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성령을 체험하게 되면은 그런 것들이 느껴지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이 시간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경우의 처해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외식입니다. 외식. 무슨 얘기냐 하면 이런 뜻이거든요. 사실 말이 되요? ‘저 친구가 하나님을 만난 것은 죄가 많기 때문이고, 내가 하나님을 못 만난 것은 너무 의롭게 살기 때문입니다. 고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을 버려야 될 필요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말이 되냐구요? 말이 안되잖아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표현은 약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지 모르지만 속뜻은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것과 꼭 같습니다. 제가 지금 그 속을 이렇게 까서 여러분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그런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어떤 점에서 중요하게 실수를 하고 있는 거냐 하면 이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이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반듯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극적인 하나님을 못 만났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겉으로 그렇게 다듬어진 착실한 교회생활, 그리고 그리스도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도덕적인 생활 이런 것들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내면의 변화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는 겉으로 이렇게 드러난 자신의 주일을 잘 지키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도리를 하며 살아가는 이 도덕적인 수준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비교가 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약간 상위에 랭크되겠죠. 그런 것과 꼭 같은 영혼의 상태를 자기가 가지고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다 이것입니다.
지금은 중국으로 가버렸는데 아주 복음에 대해 감격을 가진 여전도사님이 한 분 있었어요. 그분이 저를 어떻게 불러서 교회에 청년부를 집회를 오게 했어요. 벌써 6, 7년 전의 얘기입니다. 그래서 가서 설교를 하는데 그 교회에 있는 청년들이 모두 윤리운동에 빠져 있었어요. 그 교회에서 최고 대접받는 사람들은 아주 윤리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그 전도사님 개인적으로 그런 얘기를 해요. 자기네 교회의 목회자가 아주 존경하는 평신도가 한 사람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 교회의 마스코트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누구냐 하면 일평생을 세무소장을 지냈던 분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이렇게 다 쓸어져 가는 움막집에서 산 대는 것입니다. 지금은 퇴직했지요. 노모와 함께 그렇게 산다는 거지요. 정말 가난하게.
그런데 얼마나 청빈하게 살았는지 일평생을 그렇게 옛날에야 지금보다 훨씬 더 부정부패가 많았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잘 살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생활을 하면서 잘사는데 그때 자기는 월세방을 전전하면서 산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진짜 미스터 윤리죠.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비춰놓고 보면 대충 사기 치면서, 오늘날 나쁜 짓 하면서 살아가는 그러면서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뭔가 이렇게 내밀고 다니는 사람들 보면 역겨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 얘기가 재미있어요. “그런데 교수님 제가 그 집을 여러분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교역자의 양심으로 그 사람의 영혼이 죽었다고 확신합니다." 일평생 도덕적인 삶을 살아왔는데 복음을 안 그 여전도사님 눈에는 그가 병상에 누워있는 그 모습이 그 사람이 한번 휠체어 타고 교회 나오면 그렇게 교인들이 따듯하게 맏이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보기에는 그 사람의 영혼은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일평생을 윤리적으로 살아왔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깃들이고 있는 것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지점이 사실은 여러분들이 어마어마한 혼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복음을 깊이 체험하고 알기도 전에 윤리 운동으로 내 몰리고 ‘이런 것, 이런 것도 못하면서 무슨 그리스도인이냐고 말하느냐?' 이러면서 내 몰리는 거지요. 그러니까 예수 믿고 들어와서 그리스도의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고, 복음이 어떻게 우리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심어서 죽은 자와 같고 패인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새 삶을 살게 만드는지, 그러한 주님의 어떤 영적인 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순간적으로 사람에 의해서 윤리로 내몰리고, 운동으로 내 몰리고, 이러이러한 삶으로 살려고 내몰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죄 받고, 그러면서 교만한 외식하는 마음을 갖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날려 버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이 종합적이어야 하고,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이 균형 잡혀야 한다라고 하는 미명하에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윤리적인 삶을 향해서 내몰리는 것입니다. 이대목이 굉장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실은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해야 되요.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또 넘어지고 있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직 두 부류밖에 안 나눠진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무엇이냐 하면, 삶과는 상관없이 신앙이라는 자기 도취에 빠진 사람들, 은혜 받는다, 기도 응답 받는다, 금식한다, 기도원에 올라간다, 뜨겁게 찬양한다 이런 쪽. 또 한쪽은 그런 기반과는 상관없이 그냥 이를 악물고 한번 이 시대의 양심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 둘 다 성경이 그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니라 이 얘기지요. 그래서 이 지점에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깊이 이 지점을 이해하고 여기에 걸려 넘어지지 아니 해야지만 지속적인 영적인 성장이 있다 이 얘기예요.
외식하는 삶을 예수님께서 이토록 깊이 질타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고 하니, 외식하는 의로운 척하면서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는 사는 외식하는 삶이 자신의 내면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이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가상적인 사람, 자기가 죄가 너무 적기 때문에 하나님을 못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만난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잘 기억을 해야 되요. 그 창기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던 것은 죄가 많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죄가 예수님을 만나게 해준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있었냐하면 자신의 망가진 삶을 보면서 그들의 내면의 세계도 철저하게 망가졌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식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그것도 인생이냐?'하고 물을 때에 무릎을 꿇으면서 ‘그렇습니다. 제가 사는 것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동족들에게 버림받았고,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았고, 나는 세상에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오 주여 저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때 예수님의 복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내가 너희와 같이 그렇게 죄로 말미암아 병든 자를 고쳐주러 왔다. 너는 나를 따르라' 그럴 때 ‘오 주님, 그렇습니다. 너는 다 망가졌습니다. 이제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럼', ‘아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제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붙드는 가난하고 주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절박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의롭게 살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내면의 부셔진 자기의 속 사람을 보고 비참하게 절망해야 되는데 그거를 안하고 밖의 사람들에게 뭔가 영광을 얻기 위해서 과시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을 보면서 사람들에게 영광을 구하면서 나는 굉장한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 것입니다.
잘 기억을 해야 됩니다. 세리와 창기가 죄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닙니다. 그들은 겉과 속이 똑같은 죄악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지 않습니까? 아니, 그렇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은 주님을 잘 만나기 위해서는 마음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죄에 대한 욕망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면 주님을 만나겠네요? 그건 아닙니다. 죄인 중에 소수만 주를 만났고 다수는 죄 가운데 죽었어요.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그런데 문제는 정직하니까 자기가 비참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깨닫게 하실 때 아멘하고 받아드릴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많은 죄인들은 그렇게 말씀하시는데도 '내가 뭘'이렇게 반응할 수도 있죠. 그러나 그럴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시고 또 그런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복음이 복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그럴듯한 자신,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는 자기의 내면의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좋은 평판, 이런 것들이 자기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어리석음에서 자꾸 떠나서 자기 속에서 하나님을 거슬리려고 하는 죄악을 볼 수 있어야 되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죄악,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놀라와서 그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느냐 그것을 깊이 이해하고 또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그 놀라운 능력, 그리고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우리들이 바로 알지 못하고 깨닫게 될 때에 자기가 의도적으로 행했던 선한 행실이나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만들었던 평판 좋은 착한 행동들은 하나도 생각이 안 고, 지금 하나님 에서 그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비참한 죄악,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내게 부어지고 있는데도 도무지 바뀌지 않는 죄악 된 경향, 하나님을 등지고 살려는 사악한 본성, 주님의 십자가를 한 쪽으로 부르면서도 한쪽으로는 세상을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에 달려 갈려고 하는 것, 주님의 사랑을 간절히 받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세상으로부터도 사랑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이중적으로 배역하는 마음, 이런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 건져내리요. 오 주여 내가 깊은 가운데서 울부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을 건져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절박한 울부짖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역겨운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폼잡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뭐 왕년에...' 왕년에 잘하는 사람이 금년에 신통치 않다 그랬죠. 그리고 자기의 얼마 되지 않는 그런 봉사, 헌금, 자기가 몇 년 동안 주일을 한번도 안 빠지고, 그런걸 뭐 기억을 하고 있어요? 자기 숨쉬고 사는 것 자랑하는 사람도 있어요? 자기가 ‘몇 시간씩 기도하고' 전부다 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 지옥에서 동창회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거는 심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외식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외식은 교회를 처음 찾은 오늘 나온 신자들 속에서 발견되는 게 아닙니다. 이거는 오래 묵은 신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처음 나온 사람들은 외식할 줄 몰라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금 끓어오르는 분노로서 아주 극단적인 말씀으로서 더 이상 강할 수 없을 정도로 ‘화 있을진저 내가 너희를 반드시 벌줄 것이며, 너희의 그런 행동과 너희의 그런 마음이 반드시 나의 진노아래 있어서 그 죄 값을 받게 해 주겠다' 주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창녀와 세리에게도 하지 않으신 그런 말씀을 외식하는 거룩한 종교지도자들에게 퍼부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처해 있는 외식의 죄가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파괴하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송두리째 앗아가는 가 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무 희망이 없다, 사단의 울타리에서 갇혀 사는 사람들하고 똑같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폼잡는 신자 되고 싶습니까? 그래서 교회 나오면 성도들이 여러분을 그렇게 높여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정말 존경을 받고 싶으면 세상에서 존경을 받으라구요. 예수 믿는 다는 이유 때문에 불신자들에게서 존경받는 그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 입니다. 도대체 삶이 유통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교회는 교회라고 하는 박스에 갇혀 있어요. 그리고 자기 가정생활은 가정생활이라는 박스에 갇혀있고, 직장은 직장생활의 박스에 갇혀있어요. 박스를 이동할 때마다 각기 옷을 갈아입고 가면을 뒤집어쓰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그런 신앙생활이 있느냐 이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전 포괄적이고 전인적인 삶입니다. 사람자체가 바꿨으면 어디 갔다놔도 그 사람입니다. 사람자체가 안 바꿨으니까 이거는 수시로 뒤집어쓰는 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자체가 바꿨으면 그럴 수가 없다는 거지요. 여기 있다가 제주도로 간다고 해서 갑자기 키가 작아지거나 얼굴이 잘 생겨집니까? 여기서 새는 바가지가 강원도 가면 안 새냐 이것입니다.
사람자체가 바뀌면 어떤 상황에 들어가든지 같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전인 적인 모습으로 하나님 에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지 순간순간 가면을 뒤집어쓰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이겁니다.
이런 삶의 불일치를 느끼니까 외식하는 삶 속에서 그렇게 불일치를 느끼게 되니까 사람들은 점점 더 종교생활의 울타리만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가상현실이죠. 모여 가지고 한 풀이 하듯이 울부짖고 매달리고, 그러면서 거기에서 자기의 감정적인 배설 다하고, 그리고 떠나 갈 때는 그걸로 끝입니다. 그 다음에 다른 삶의 영역에 들어 갈 때는 또 다른 가면을 쓰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외식이지 뭐예요. 교회 안에서는 펄펄 나는 사람이 부정과 부패가 가득한 직장에 가면 맥도 못 추는 사람이 있어요. 교회 와서는 혼자 믿음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펄펄뛰는 사람들이 약간 인간관계로 얽히고 어려움이 있는 가정에 가서는 맥을 못쓰고 말이죠, 미워하는 감정을 품고, 그렇게 하면서 피묻은 칼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 깨뜨려진 관계에 대해서 아무런 희망도 없고 치료할 수 있는 어떤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도 되지 못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철저하게 이런 외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것입니다.
그래요 겉모습은 놀랍게 변했어요. 이제 술도 안 먹어요. 먹는 사람도 있지만, 담배도 안 피워요, 나쁜데 안가요. 상당히 종교적으로 변했어요. 그런 모습이 경우에 따라서는 옛날에 함께 놀려 돌아다니던 친구들에게 충격을 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는 안 믿는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거나 환심을 사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는
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원수들이 우리들이 비방하든, 우리의 신앙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비난과 그리고 저주의 화살을 퍼붓든,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내 주되신 주를 더 사랑하고 그리고 그 주님이 나를 향한 사랑에 더 깊이 감격해서 어찌하든지 짧은 인생사는 그 동안에 우리의 목숨이 여기에 붙어있는 동안에 그렇게 주님을 향한 사랑을 간직하고 인생이라고 하는 이 편지지에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연필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고백하면서 살아가서, 우리의 삶의 편지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향기를 맡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게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대치할 수 없는 목표라 이것입니다.
딴 사람이 열광하면 뭐하고 딴 사람이 우리 칭찬하면 뭐하냐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고 그러시는데, 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직분을 탐내는 것은 정말 원수도 구토할 노릇입니다. 모두 다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주인만 바꿨지, 노예의 상태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전에는 세상의 영광과 육체의 쾌락의 종이 되었는데 이제는 약간 미끈하게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종교적인 욕망과 탐심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이 얘기지요.
외식은 겉으로 이렇게 그럴싸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 같지만 그러나 그는 내면의 세계가 변화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는 속에서 그대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좀더 나은 경우를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요것보다 좀더 나는 경우는 무엇이냐 하면은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은 없어요. 성품자체가 사람들에게 막 드러내서 스타기질을 가지고 있는 자체가 아니고, 마이크만 잡으면 열 받는 사람들 있죠. 신나는 사람들, 도무지 안 내려가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체질이 아닙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는 게 부담스러워요. 그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서도 도덕적인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겉으로 보이는 도덕적이어 보이는 사람이 그 도덕적인 것만큼 죄를 죽인 내면의 세계를 가진 것은 아니다 이 얘기예요.
좀더 설명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신앙생활을 해 나가다가 이런 경우를 만나게 되잖아요. 악하고 부도덕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악하고 부도덕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대게 기본적인 흐름은 이런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요 그리고 하나님을 거역해, 하나님께 불순종해, 그리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말씀의 은혜, 기도의 은혜, 교제의 은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속에 있는 융성하도록 솟아나는 우리의 죄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죄가 우리의 정욕을 불붙게 하고 그 다음에 우리 속에 일어나는 더러운 탐심들을 통제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것이 마음에 많이 머물러 있다가 그 다음에 그것이 행동으로 들어 나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마음속에 있을 때에는 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면 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이죠.
이세상의 도덕은 사람의 내면의 세계에 대해서 비교적 관심이 적어요. 훨씬 더 많은 것은 그가 무슨 일을 했는데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클링턴이 지금 곤욕을 치르고 있죠?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힐러리예요. 너무 불쌍해요. 부흥회 때라도 한번 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두 번째 불쌍한 사람은 칠시에요.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이 르윈스키가 있었는데 마음속으로만 그 여자하고 이런저런 일을 했으면 하고 마음먹고 끝났다면 지금 저렇게 곤욕을 치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거보다 더 흉악한 생각을 했더라도 아마 저렇게 비난받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그런 곳입니다. 내면의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냐 보다도 고려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알 수 없기 때문에 보다 더 많은 문제가 되는 것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요. 무슨 말씀인고 하니 어떤 사람은 많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 욕망이 많이 마음에 담겨져 있고 조금 표출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요만큼만 욕망이 생기면은 그냥 거침없이 밖으로 쏟아져 나와서 커다란 행동과 범죄를 낳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지요. 무슨 말씀인지 아세요? 그리고 그런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에 의해서 영향을 안 받는 것은 아니고 분명히 영향을 받지만 그러나 본성이나 습관, 훈련, 이런 것과도 많이 관련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낯뜨거워지는 이야기지만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툭 터놓고 얘기해 봅시다. 나는 오늘날 말이죠 이렇게 쭉 흘러가고 있는 문화의 흐름을 보면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둘이 있어요. 그것이 다른 시각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연세 많이 든 사람들은 모두 노망에 드는 것으로 묘사하는 그런 문화, 그리고 쓸모 없고, 그리고 그들이 이전에 삶을 살았던 모든 경험은 우리시대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그런 것, 그런 식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에 대해서는 나는 반대예요.
또 하나는 뭐냐하면 이제 소설이나 혹은 영화나 많은 것들을 오늘날 이렇게 흐름들을 보면은 한 30년 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장면들이 나와요. 그게 뭐냐하면 장면까지 다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기본적인 인간의 인식이 놀랍게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여자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전에는 여성에 대한 인식자체가 그저 참고 절제하고 그저 도덕적인 틀 속에 갇혀 있는 존재로만 인식됐는데 이제는 달라요. 여자자체를 아주 강한 자기 표현력을 가진 실체로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자면 여자가 어떤 성적인 욕망에 허덕거리면서 그런 자기가 범죄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다니는 것 같은 이런 묘사, 이런 것은 30년 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경험을 못했는데 어느 잡지에서 보니까 청년사역을 하는 젊은 교역자들이 여자 청년들을 조심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는 참 재미있어요. 젊은 목사인데, 72년 생을 기점으로 다르데요. 그래서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리고 72년 생을 가만히 생각해 봤어요 그러므로 스물 일곱이 입니다. 그래서 어떤 차이가 있나 쭉 읽어보니까 72년 전까지는 자기가 선생님을 좋아하든지 교역자를 좋아하면은 ‘어머 참 좋다,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이런데요. 그런데 73년 생부터는 자기가 좋으면 그 사람누구든지 돌격 앞으로입니다. 그러면서 73년 생부터 조심하라고 그러드라구요. 나는 그 말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런 식의 여성에 대한 묘사는 30년 전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해 나가잖아요. 그런 실재를 가진 사람들로서 묘사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문화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거 내숭 떠는 것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이건 위선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인간적인 거는 뭔가 확 솟아 내릴 때 그냥 그대로 해 버리는 것이 인간적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애들이 한 백년쯤 타임머신을 타고 이조시대에 딱 태어날 것 같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그건 불가능하다 이거지요. 왜냐하면 사회적인 틀이 그걸 용납을 안 해요. 훈련되는 거지요. 어려서부터, 그죠? ‘너는 잘 기억해라. 만약에 그렇게 산다면 그건 인간도 아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 선현의 글에 이르기를 여자는 자고로' 이런 것입니다.
그들이 순결에 관한 교리를 배우거나 예수님이 자기 죄를 위해서 못 박혔다고 하는 복음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닌데 도덕적인 사람으로 바꿔 가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 부모들이 IMF 사태가 되어서 내다버리고 그러는 사람들, 많잖아요? 미국에 가면 더 눈물나는 얘기 많아요. 어머니, 아버지를 데리고 말도 안 통하는 곳에 데려다 놓고 자식들이 그냥 도망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한 이 백년쯤 뒤로 갔다면 그래서 그 사람들도 똑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부모 죽은 다음에 묘지에다가 초막집 지어놓고 3년 동안 살면서 호곡할 사람들입니다. ‘이 백년만 거슬렀으면 내가 이 짓 안 할텐데' 그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럴 사람들이라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에 의한 제도와 훈련, 분위기, 교육, 이런 것들이 얼마나 영향을 많이 미치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죽이고 새사람을 만들지 않으시고도 그러한 외부적인 영향 때문에 우리를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 속에서 이런 욕망은 솟아 나오는데 그것들이 흘러가지 못하도록 제동장치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래 계속되다가 보면은 그런 욕망이 상대적으로 많이 감퇴되는 것입니다. 왜, 엄두를 못 내니까, 사람들이 대게 꿈꾸는 거는 해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자꾸 자극과 유혹을 느끼는 것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들이 달나라에 가서 술 파티 해보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고 간절히 사모해서 몸부림치면서 잠 안 자본적이 있어요? 그건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어요.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욕망이 퇴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망은 퇴화됐는데 죄가 퇴화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노골적으로 터놓고 얘기하자면 지금 이 백년 전에 우리 선조들이 살아와서 여기를 보면은 ‘이것들이 인간인가' 그런다고 배 다 내놓고 돌아다니고 말이지 벌거벗다시피 돌아다니고, 남자들은 자기 가정 버려 두고 말입니다 나쁜 짓하고 그리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인간사는 세상인가 그럴 거라는 거지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있는 삶의 윤리적인 의식을 보면서도 이 백년 전의 선조들이 구역질할지도 몰라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구원의 가까운 사람들이었어요? 그건 아니잖아요. 그러므로 겉으로 굉장히 도덕적으로 보인 그 사람이 똑같이 그의 영혼이 깨어있는 그런 상태는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비례하지를 않는다 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해 오면서 종종 아주 헌신됐어요. 반듯해요. 쉽게 얘기하면 어느 형제가 어렵다 그러드라, 그러면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말입니다 좀 도와주자 그러면, 10만원도 안 내놔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이 백 만원씩, 삼 백 만원씩 내놔요, 그럼 부자냐? 아닙니다. 가난합니다. 그리고 진짜 검소하게 살아요. 그렇게 조국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눈물, 콧물 쏟는 사람들은 돈 얘기하면 ‘웬 돈' 그래요 진짜 영감대입니다. 가장 예민한 영감대, 안 내놔요. 그런데 열렬한 기도도 몰라, ‘하나님 만났어?’ 그러면 ‘글쎄' 이래요. 내가 보기에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 내놔요. 이런 거 보면서 여러분 갈등 안 느꼈어요? 이상하네 나는 굉장히 갈등을 많이 느꼈는데. 고민에 동참해야지 해답의 감격에 동참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고민할 필요도 하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막 열렬하게 기도하다가 돈 그러면 ‘웬 돈'그러고 안 내놓는 사람이 죄를 더 많이 죽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세요? 보다 도덕적인 사람이 죄를 거의 죽인지 못한 그리스도인일수 있고, 약간 덜 도덕적인 사람이 죄를 더 많이 죽인 그리스도인일수도 있다 이 얘기입니다. 아까 얘기한 열렬하게 기도하면서도 돈 얘기만 나오면 ‘웬 돈'이러는 사람은 어떠냐하면 원래 성품자체가 구두쇠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엄마가 와서 돈 달라고 할 때 돈 안주는 사람입니다. 돈 있고 그 다음에 관계가 성립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되 먹기를 그렇게 되 먹은 것입니다. 본성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희망이 없냐, 그렇지 않죠. 그런 사람도 하나님을 제대로 못 만나서 그래요. 진짜 제대로 만나면 자기가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런 식으로 움켜쥐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인지 한번 보여주시고, 그리고 그걸 깨뜨리고 그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제 지갑도 회심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아까 그 사람은 열렬한 기도도 모르고 하나님을 만났냐 그러면 머리 긁적긁적 긁고, 구원받았냐 그래도 글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많이 헌금을 하고 가난한 사람도 돕고, 훨씬 더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느냐, 그 사람은 살아가면서 말씀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인간적으로 그런 성품이 개발될 수 있고, 누군가로부터 그런 감화를 받았을 수도 있고, 예를 들자면 자기선생이나 혹은 자기를 가르쳤던 사람이 어렸을 때 미치는 영향은 굉장히 크잖아요? 그 속에서 누구 모범을 모거나, 부모로부터 배우거나 아니면 처음서부터 돈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그렇게 흥미가 없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 가 있다 이거지요. 방탕하지도 않고, 진짜 모든 사람이 죽어 라고 돈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예외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있어요 그런 사람이. 하나님 못 만났는데도, ‘까짓 것 모든 참된 행복이 돈이 아니지' 이런 사람이 진짜 있습니다.
저는 거기 가보지 않았습니다 마는 옛날에 광화문 쪽에 가면은 점을 유명하게 잘 보는 김 아무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 거기 많이 다녔어요. 내가 은혜 언제 받겠느냐고? 그런 거야 안 물어 봤겠지만은, 가 가지고 우리식구들 가운데서도 몇 사람 갔어요. 그런데 얼마나 돈이 많은지 찾아오는 친구들도 줄서야 되요. 이게 누구냐고 정말 오래간만이라고, 그런데 내가 너무 바쁘니까 ‘여보게 너무 바쁜데 자네혼자 술이라도 혼자 먹고 가게' 그리고 돈 집어주면 말입니다 이렇게 세어서 주는 게 아니라 막 집어서 주었답니다 ‘야, 가서 뭣 좀 사먹어라, 배고프지?' 그러고 줬대요. 꼭 일치하는 거는 아니지만 그 사람이 만약에 돈을 워낙 많이 벌면 너그러워 질 수도 있어요.
뭘 입증하기 위해서 제가 지금 이렇게 장황하고 길게 반복하는 이유는 뭐입니다. 하나님이 만지고 가셔 야지만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만지고 가시면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 갈 수 있는 기초가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 앞에 늘 깨어지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자기 속에 있는 죄를 죽이면 그는 반드시 거룩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가요. 그런데 그거는 도덕자체를 추구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을 닮아갈려고 하다 보니까 부산물이 생겨나는 데 그게 도덕입니다. 그거 차이라고, 전자는 도덕자체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다르잖아요.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어떡하면 주님의 뜻대로 살까,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고 싶고 ‘내가 요만큼만 변화되면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칭찬할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요정도만 변화되면 사람들이 나 찍어주겠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너무 감사해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밖에 못살아요. 그래서 잡아다 함도 아니요, 이미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닙니다. 앞에 있는 것을 향해서 막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이 이제 우리를 불러주시는 그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너 참 잘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부족한 게 너무 많습니다 이 세상에 저의 최고의 괴로움은 나의 부족한 모습을 이렇게 갖고 이 땅에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 괴롭습니다. 예수여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울고 자기를 죽이고 이렇게 하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람의 평판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어요. 그리고 살아가다가 보니까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기 때문에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세상의 평판이나 영광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그런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차이는 뭡니까? 이렇게 되든지 저렇게 가든지 서울만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게 아니다 이 얘기입니다. 어떻게 되냐 이런 얘기지요. 아까 말씀드린 거와 같이 그런 자신의 삶의 초점과 교정이 자기 본성이나 외부적인 훈련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아니면 외부적인 분위기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기가 도덕적인 사람이 되도록 강요를 받아서 그래서 내면의 세계가 새로워지는 것 없이 도덕적이 된 사람들은 사람에게는 칭찬 받지만 하나님에게는 칭찬을 받지 못해요. 그는 여전히 기도하지 못할 것이고, 그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놀라운 기쁨을 맛보지 못해요. 그러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더더욱 사람의 판단과 평가에 아주 민감한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야 벼룩도 낯이 있지' 그렇게 얘기잖아요. 그게 무슨 얘기냐 하면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거지요.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보다 어떻게 말해야 되요?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이렇게 얘기해야 합니다. ‘벼룩도 낯이 있지' 벼룩이 무슨 낯이 있어요.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도덕적인 삶을 살면서도 내면의 세계는 여전히 망가진 상태에 있고, 죄에 눌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어요. 마음을 깨뜨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든지 참된 하나님의 샬롬이 밀려온다든지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놀랍게 기뻐하심으로 복 주신다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 주신다든지,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위로를 알게 하신다든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자기와 함께 하시는 놀라운 확신 때문에 내면의 세계에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거룩한 기쁨과 승리의 함성이 솟아나는 것 같은 것, 그래서 폭풍우를 지나는 것 같이 캄캄한 바다를 지나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님이 친히 선장되어 주셔서 그의 오른 손으로 자기를 붙들고, 그 폭풍의 바다를 헤치며 나가는 것 같은 임마누엘의 감각, 이런 것은 없다 이 얘기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을 모본으로 제시하면서 이러한 정도는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잘 못된 방향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내모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대의 교회의 미래는 윤리운동에 있지가 않다 이 얘기입니다.
물론 세상적으로 볼 때는 그런 점도 필요한 점이 있죠. 그러나 그것으로서 신앙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내면의 세계를 죽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런 환경 속에서 교육을 못 받았을 수도 있어요. 또 부모의 방탕한 기질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작은 욕망만 있고 작은 유혹이 있으면 제동장치가 풀린 자동차처럼 즉각적으로 죄를 향해 치달아 갈 수 있어요. 워낙 가난함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제 가난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돈에 대해서 집착할 수도 있어요. 워낙 어려서부터 좋은 얼굴 때문에 미모 때문에 사람들에게 항상 공주처럼 떠 받음을 받았던 사람들은 교만이 싹틀 때 즉시 그 교만이 밖으로 표출되어서 악을 행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가 살아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의 부족을 알고 끊임없이 자기를 하나님 앞에 죽이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승리를 경험하고 지금은 다 이루지도 못했고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고 붙잡았다 함도 아니지만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간다면 지금은 도덕적으로 약간 미진하고 그리고 즉시 후회하는 삶을 어느 정도 살아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주님을 찾아 갈 것이고, 실패 속에서도 주님과 교통할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붙드시고 그렇게 온전해 지고 주님 닮기를 갈망한다면 그의 인격과 도덕적인 삶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무엇을 찾아야 될지 생각해 보라 이겁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 가운데 예수그리스도의 흠 없는 보혈의 능력을 버리고,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들을 신앙의 영광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이 아니요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끊임없이 내면의 세계 속에서 우리의 속 사람의 죄를 죽이고, 그리고 그 우리의 죄를 죽이기 위해서 더 간절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 속에서 살고, 우리의 영혼에 시시때때로 오셔서 만져 주시기를, 그러한 예배의 감격 속에서 살면서 주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 사람을 철저히 멸하기까지 죽이고 하나님의 참 사랑의 빛 아래 살아서 지금은 불완전 하지만 이후로는 온전하신 예수그리스도처럼 더 온전해 져 가는 그런 승리하는 삶을 쟁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16. 영적 회복의 길(4):죄를 죽임의 길①
;죄악된 습관을 약화시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내 안 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리라”(갈5:24)
오늘은 죄를 죽인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하나 죄를 죽인다는 의미는 죄악된 습관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반복하겠습니다. 죄를 죽인다는 것은 죄악된 습관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리는 마음이고 죄의 자리도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생각이 가득 차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법도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그 법도를 지키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가득하고 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또 그렇게 살고 싶은 의지가 있을 때에 그 사람의 삶은 신앙적인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속에 죄가 있고 그 죄가 힘을 얻게 될 때에 힘을 얻은 죄는 그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그의 마음을 죄에 대해 열리게 만들고 의지적으로 죄를 행하게 만들어서 인격자체를 지배당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속에 죄를 품은 자는 죄를 행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마음속에 죄가 있고 그 죄를 짓고 싶은 욕망이 삶으로 나타날 때 이것을 계속하다보면 습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생각은 행동을 낳고 그것은 습관이 되어서 결국은 인격화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람과 그것이 떠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몸에 베게끔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까 우리 속에 있는 이 죄악된 욕망을 성경에서는 정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욕이 꼭 성적인 것에만 결부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식으로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죄를 이루고자하는 모든 마음을 가리켜서 정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정욕 즉 죄악된 욕망이 우리 가운데 계속 살아있을 때 우리는 반드시 범죄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죄를 죽인다는 의미가 어떻게 해서 죄악된 습관을 약화시키는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죄악된 욕망은 결국 우리에게 범죄에 빠지도록 타락된 습관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 곳으로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천천히 습관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 죄를 죽이는 생활입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습관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적 습관이고 다른 하나는 죄악된 습관입니다. 즉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것도 있는가하면 마음이 죄로 물들었기 때문에 타락한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예술가 집안에서 그런 끼가 있는 아이들이 주로 태어나는 것은 자연적 습관에 속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기질은 같지 않습니다. 천성적으로 다른 면이 있습니다. 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감각적인 오락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야채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성적으로 다른 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죽여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자연적 경향이 아니라 타락한 죄악된 경향성입니다. 그러면 자연적 경향성은 죄악된 경향성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겠습니다.
자연적인 경향성은 그것이 살아가는데 어떤 때에는 좋고 어떤 때에는 나쁜 것입니다. 조용히 산책하길 좋아하는 사람은 무엇인가 앞에 나와서 앞장서서 이끄는 리더로선 부적절하지만 글을 쓰는데는 좋은 것이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연적 경향성은 순응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들어가면 자연적 경향성은 잘 변화됩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 이제는 담대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본성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연적 경향성은 은혜를 받으면 순응합니다.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죄악된 경향성은 순응하지 않습니다.
비유로 자연적 습관을 밀가루 반죽이라고 하면 죄악된 습관은 돌덩이 입니다.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자연적 습관은 비교적 부드럽고 은혜를 받으면 자연적 기질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그리고 그 기질 자체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거슬림이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매우 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많이 배운 것도 있었지만 그의 기질 자체가 뭔가 분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를 믿으니까 그의 기질이 성경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성경도 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베드로는 매우 다혈질 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심한 고난 아래에서도 뜨거운 사랑으로 신앙의 절개를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적 기질 때문에 심히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그런 자연적인 기질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변화 될 수 있고 그리고 그 기질이 모두 하나님께 귀히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악된 타락한 습관은 순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격렬하고 충동적이어서 매우 저항이 심하므로 이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 전서에서 베드로는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적인 욕망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죄로 물든 경향성입니다. 죄악된 습관은 우리를 강한 힘으로 어디론가 물고 가는데 그것을 거슬리고자 한다면 이제 우리는 피 튀기는 싸움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죄악된 습관은 충동적이고 격렬하고 자극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한 욕망이 우리를 주장할 때 우리는 그것을 제갈 물리지 않으면 우리는 도저히 죄에 대해 통제 할 수 없게 됩니다.
전에 시골에 책을 보려고 내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까 집주인이 아들과 함께 송아지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송아지가 더 자라기 전에 코뚜레를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는데 자꾸 소가 도망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송아지가 자라기 전에 코뚜레를 하면 이제는 어린아이가 잡아도 잘 따라오게 됩니다. 옛말에 코뚜레를 하지 않은 송아지 3 어른이 못 당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삶을 살고 싶고 우리가 그것을 제갈 물리지 않으면 아무리 그 죄를 이기고 싶어도 이미 형성된 그 죄악된 습관을 제어하지 못하면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영적이 생활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제비고 처마 끝에 봄이면 찾아와 집을 짓습니다. 그리고 알을 까고 새끼를 낳습니다. 근데 제비가 알을 까고 세끼를 낳으면 어미가 먹이를 가지고 밖에서 돌아올 때마다 대여섯 마리의 제비 새끼들이 일제히 나와서 입을 벌리고 자기 입에 먹을 것을 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어미는 그들이 아무리 그래도 순서적으로 새끼들에게 먹이를 넣어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새끼 중에서 아까 먹은 것도 또 입을 내밀고 자기에게 달라고 합니다.
인간이 때로는 신통치 않게 신앙 생활 하는 것 같은데 보편적인 죄에 대해서 결백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은혜에 젖었기 때문에 겸비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겸손해지는 것을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를 죽이지 않고도 원래 나서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그 사람 속에 자기를 만족시켜 달라고 입을 벌리는 죄가 너무 많아서 그것을 만족시키지 않고 다른 것들에만 만족시키느라 열을 내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가 그 와중에서 만족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은 게으름의 죄에 빠질 틈이 없습니다. 안일한 생활의 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럴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다른 수많은 죄를 만족시켜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 죄에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욕망에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경건하고 거룩한 일에 종사하며 질 낼 수 있습니다. 그런다고 그가 경건하고 거룩한 일에 의해서 통제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이 그를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로 한 사람이 사회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나 그가 재물에 다한 욕망이 있으면 그리고 그것이 강렬하다면 그는 언젠가는 그 사회 단체에 모인 돈을 빼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일이 욕망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일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신령하고 거룩한 사람에게 유혹이 심한 일자리가 생겨서 그가 그곳에서 계속 일한다고 해도 그는 결코 그러한 일을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분야에 도덕적이면 그 사람이 죄를 죽인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다른 분야의 죄에 종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죄에 너무 충실해서 특정 죄를 만족시켜 줄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제비처럼 자기를 만족시켜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많은 죄에게 그것들에게 먹이를 날라주느라고 모든 삶을 바치고 있는 사람이며 육체를 위해 욕망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결국 사단이 우리의 삶을 죄 가운데 데려가려는 목표는 분명해졌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그것이 작은 것이더라도 그것은 항상 최악의 상황을 목표로 하여 달려갑니다. 그래서 결국 여건만 형성되면 반드시 성취하도록 죄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하나가 뛰어나게 발전하면 그것이 지성을 혼돈 시키고 마음속을 죄악으로 가득 차게 되어 의지를 굴복시키고 그래서 영혼의 어두움이 가득하게 됩니다.
다윗이 바세바와 동침했을 때 그를 움직인 욕망은 단지 간음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욕망하나 때문에 그것이 확 하고 고개를 들어 죄를 범했는데 그것이 지성을 혼돈 시키니까 결국 우레아를 죽이고 거짓말하고 속여 수많은 다른 죄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마귀가 신자들을 타락으로 이끌어 가는 아주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이가 물질적 문제에 대해 범죄했다면 한가지 범죄가 유혹해서 그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모든 죄를 연달아 지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 살 때는 어떻게 하나님을 즐겁게 할까 항상 긴장된 마음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죄 가운데 빠지면 막 가는 마음이 우리 속에 일어납니다. 다른 죄에 대해 모두 마음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이 이상 나빠질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자포자기의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죄악된 습관을 약화시키지 못하면 이런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리라 하고 십자가의 못 박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마땅히 그런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를 얻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을 위해 죽으심을 영접하고 그로 인해 성령님의 내주 하심으로 진리에 의해 해방되고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죄를 이길 능력으로 죄를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은혜 생활을 못하면, 그 정과 욕심을 못박지 못하면 결국 죄가 그를 지배하는 상황이 온다는 것입니다.
가령 한 사람의 장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한 사람이 못 박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적어도 예닐곱 명은 되어야 합니다. 못 박히는 사람은 처음에는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을 칠 것입니다. 그리고는 애원하고 매달릴 것입니다. 자신은 못 박힐 수 없다고 말입니다. 처음에 특정한 죄가 우리를 지배하려고 할 때 우리는 처음에는 격렬하게 항의하고 더 들어가 그 죄에 빠졌다면 그는 아마 다윗처럼 애통해 하며 통탄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안타까워 할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해 그렇게 부르짖는 것은 그것이 진실하다고 하더라도 그 때 그 죄는 잠복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죄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잠시 죄가 힘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울음이 그치고 시간이 지나면 그 죄는 무섭게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동일한 죄가 반복될 때 믿음의 속 사람이 못 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처음에는 항거하고 몸부림치며 하다가도 그것을 포기하게 되고 시간이 점점 흐르면 그는 그 죄에 대해 깊은 애착을 가지고 됩니다. 그러면 이제는 그 죄에 의해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자신이 그것을 끌어안는 것이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은 버려도 그 죄는 버릴 수 없는 그러한 처지가 됩니다. 그 죄가 사람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죄에 대해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그가 그 죄를 떠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 죄가 가져온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때문에 애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가 가져온 고통 때문에 울부짖는 것입니다.
정반대로 생각해도 똑같은 논리가 성립합니다. 못 박힌 것이 이번에는 죄라고 생각해 봅시다. 타락한 습관 나에게 오랫동안 형성된 죄라고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두 가지인데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금하신 것을 하려는 습관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습관입니다. 그 죄가 못 박힐 때는 처음에는 몸부림치며 격렬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못 박히면 서서히 말라죽어 가는 것입니다. 있긴 하지만 이제는 전처럼 강력하게 자신을 이끌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력이 되지 않습니다.
담배를 처음 배울 때는 고통스럽고 아무 맛도 없고 쓰고 맵습니다. 그리고 연기를 들여 마시면 구토가 나고 어지럽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고통스러운데 자꾸 해보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죄는 그러한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두 번 해 보다 보니까 부자연스럽게 우리 몸에 찌르듯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아주 쉽게 서서히 들어옵니다. 성경 잠언에서 지혜자는 자기 아들에게 성적 타락을 경계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꿀이 입어 들어오는 것처럼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나중에는 입의 쑥처럼 쓰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드럽게 몸에 뱁니다. 언제부터 담배 없으면 못살게 되었는지는 시점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자연적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습관이 얼마나 강력하게 나중에는 자기 몸을 감싸는지 모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한 때는 골초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끊는 계기가 있었는데 하루는 담배를 찾는데 그 날 따라 담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담배를 안 피우니까 성경도 읽을 수 없고 기도도 할 수 없고 답배를 한 대 펴야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모든 활동이 멈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이든 아니든 간에 무엇인가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 안에 속한 것이 아닌 세상에 속한 것에 미친 듯이 매달리고 그것 아니면 다른 것이 불가능한 그런 강력한 욕구를 느끼는 그런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담배를 끊어 보신 분은 알겠지만 그것이 장난이 아닙니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 욕망과 계속 싸우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 짓을 다하는데 하루종일 사탕을 입에 달고 다니던가 껌을 씹던가 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한가로운 시간이 되면 미칠 듯이 그 욕망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노예의 상태입니다. 일주일 동안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입니다. 기도도 안되고 예배도 온전히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 죄는 서서히 약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속해서 세월이 계속 흐르면 그 욕망 자체가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그 습관에서 떠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중간에 한 3년쯤하고 다시 담배에 손을 댄다면 아마 지금도 끊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습관적으로 형성된 그 죄를 끊기 위해서는 처음에 그 죄를 떠나려고 할 때에는 그 죄가 강력하게 몸부림을 치는데 그것을 이겨야 합니다. 몇 번 이기고 나면 이제 그 죄는 점점 힘이 약해집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죄는 힘을 잃고 포기하게 되면 죄가 더 이상 자기에게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상태를 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의 그 주님을 향해 가진 아름다운 신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죽인 생활 속에서 이제는 자기 안에 그 죄는 있지만 더 이상 자기에게 영향을 주지 못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자기의 삶을 그 죄가 주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죄가 죽는 동안에 자기 안에 사신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이 살았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욕망이 이제는 사도 바울의 욕망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소원이 바울의 소원이 되었고 그분의 비전이 사도의 비전과 동일하여졌습니다. 바울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동일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숨에 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이것은 순간 순간의 유혹을 피하고 하나님 은혜 가운데 살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여러분들이 외설 잡지를 보는 것은 죄입니까 아닙니까? 엄밀히 말하면 보는 것 그것 자체로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것 자체를 가지고 죄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은 그런 것을 보는 것은 북으로는 가기 싫은데 북으로 간 열차를 탄 것과는 동일합니다. 이것은 유혹에 자기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못 박아야할 죄를 풀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죄를 죽이는 지혜가운데 가장 손쉬운 것이 그 죄가 처음 고개를 들었을 때가 가장 죽이기 쉽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죽이기 어려운 욕망으로 뻗어 갑니다. 다른 모든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욕망이 만족하는 때는 없습니다.
바로 그런 원리입니다. 하루아침에 단숨에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서서히 시간이 걸리며 죽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깊이 뿌리 박힌 죄악된 경향성은 한꺼번에 죽지 않습니다. 죄를 죽이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에서의 순간 순간의 선택에 깨닫고 강인한 각오를 가지고 돌이켜 서야 합니다. 살인하는 마음과 같은 중오로 결단을 가지고 자기 죄에 칼을 가지고 돌이켜 서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서서히 그 죄를 죽이고 그 유혹을 피하고 은혜 가운데 들어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부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배워야 합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며 불변하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라가 얼마나 우리에게 거룩한 소망을 주는 것인지 배워야 합니다.
교만하고 높아지려는 죄에 휩싸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낮아지심으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또한 그분이 얼마나 간절히 그렇게 낮아진 사람을 찾고 있는가에 대해 은혜의 감격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성적인 죄에 있는 사람들은 성결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값진 것이며 육체 욕망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이 이 자연적인 욕망과 타락한 습관이 결부되면 더 파괴적인 역사를 일으킵니다. 결국 마귀가 우리를 죄 가운데 데려갈 때 그 본성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성령도 우리의 본성을 사용하셔서 주님을 사랑하는데 유용한 것이 되지만 마귀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죄악된 습관, 마귀의 본성은 항상 우리의 연약한 습관을 강타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손잡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본성이 타락한 습관으로 변하기를 원하고 갚은 수렁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러면 정말 어려운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순간 즐거움을 포기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즐거움에 들어가려고 해야 합니다. 눈물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가는 삶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억눌리는 것과 마음의 고통을 알았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투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만이 거룩한 성도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짐승 같은 신앙 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매일 기도하길 힘쓰고 성경 읽길 애써야 합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길 사모하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느끼길 소망해야 합니다. 그 싸움이 너무 지루해 보인다면 여러분들에게 천국은 너무나 먼 것입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제는 내가 살아도 산 것 아니다라는 고백은 위대한 승리의 호칭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나에게 매인 삶이 아니라, 자신의 죄에게 매인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인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이고 그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이고 그를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런 마음속에서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 뜨거운 사랑이 솟아나고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을 볼 때 주님의 슬픔이 느껴져 어찌하든지 이 세상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고 등불이 되어서 주님의 은혜를 따라 살 결심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삶이고 이것은 엄청난 변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죄악된 습관을 끊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피를 요구하지만 타락한 습관에 순종하는 것은 끊임없는 즐거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 즐거움을 먹고 마시는 동안에 마지막에 그 영혼은 처절하게 피폐해져 가는 것입니다. 결국 희망이 없는 상태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영혼의 변화 없이 단지 죄악만 가지고 인간을 고쳐 보려는 것은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대안은 하나입니다. 이미 죄에 대해 완전히 빠진 자도 있습니다. 또 마귀가 어떻게 패역하게 만들까 고민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처지가 어떻든 해결은 이것입니다. 그러한 죄와 더불어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그것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죽기를 각오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무리 교회에 나와도 결코 평화를 누릴 수 없고 가끔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아침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에 영향을 줄 만한 사랑, 은혜 견고함, 진리, 평강,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단어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한번도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있는 이유가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가슴 벅찬 감동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거룩하고 놀라운 뜻들을 이루어가고 계시고 여러분들이 바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역사에 한복판에 서 있는 주인공 의식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거품과 같은 인생이 되고 다른 그리스도 인들의 결코 본받지 말아야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꿈꾸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들의 인생을 판단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사람들을 가르쳐서 거품이라고 부릅니다. 거품과 같은 인생입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예수를 믿으면서 그 안에서 어떻게 자신의 영화나 영광을 찾아보려고 신앙과 세상 속에서 밧줄 타기나 해보려는 사람들 예수를 믿고 예수를 위해 살기보다는 그 예수의 힘을 얻어 세상에서 번영을 이루려는 사람들! 마음에 들지 않는 복음은 언제나 토해 내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마지막 결말은 결국 형식적인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거기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려는 자아를 기도 시켜야 하며 은혜 받지 않으려는 자신을 은혜 속으로 들여보내야 합니다. 단지 과거의 은혜가 아니라 매일 매일 사도 바울처럼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 아니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언제나 여러분들에게 펑펑 우는 감격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 은혜 안에 살게 하는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찬송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이 그것만이 우리가 죄를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사는 유일한 길이며 그런 삶을 살 때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삶이 가능해집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계속 은혜 안에 살아서 이렇게 죄악된 습관을 약화시키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7. 영적 회복의 길(4):죄를 죽임의 길②
;끝없는 투쟁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지난 시간에 저는 죄를 어떻게 죽이겠는가, 죄 죽임의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는가를 말씀을 드리면서 죄를 죽이는 삶을 위해서는 습관적으로 우리의 악한, 습관적인 죄를 약화시켜야 된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들이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반복해서 하고 짓고 있는 습관적인 죄들을 약화시키고 그것들로부터 승리를 경험하는 것은 비유를 하자면 커다란 나무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땅속에는 아직 자디잔 뿌리들이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이 이제 하늘높이 치솟는 커다란 아람들이 나무로 자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죄를 죽이는 삶의 중심에는 이렇게 죄악 된 반복적인 습관을 약화시키고 멸하는 것, 이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죄를 죽이는 삶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투쟁해야 된다라는 사실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투쟁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죄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우리 앞에서 역사하게 될 때 그때에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40편 12절에서 말하기를 '죄가 나를 누르오니 내가 고개를 들 수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죄가 자기를 누르고 있기 때문에 감히 얼굴을 쳐들 수 없는 그러한 때를 다윗은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이때에는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그러한 난감한 처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이 이미 마음속에서 확 솟아나서 그의 마음 전체를 지배해 버렸을 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척결하고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죄를 짓게 만드는 정욕을 이기는 가장 중요한 길은 처음 유혹을 받았을 때 초기에 그것을 제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죄가 점점 자라서 우리가 그 죄를 이기기에는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투쟁해야 된다라고 하는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성경은 베드로를 통해서 이런 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들이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로부터 이 편지를 받고 있는 흩어진 여러 교회의 교인들을 향해서 베드로가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라고 불러주고 있는 장면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야말로 문자적으로 나그네가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버리고 바울처럼 깊이 사랑했던 동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아야 하는 그러한 동일한 처지를 불러 왔습니다. 베드로가 이제 이 사람들을 나그네와 행인 같다라고 말할 때에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전에는 이 세상의 주인이요. 이 세상에 거하는 자였으나,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나서부터는 그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되었고, 지나가는 길손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전에는 이 세상에 꿈이 없었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나서는 그들이 꿈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본향이 생겼습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고향이 생겼고, 그들은 그 고향을 생각하면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길과 같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인생은 지나가는 나그네길에 불과 한 것입니다. 본향을 찾아서 우리는 가는 사람들입니다.
나그네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나그네길에서 집을 짓거나 나그네길을 너무나 사랑하거나 이 나그네길에 너무나 정을 많이 두어서는 안됩니다. 사도베드로가 보기에 자기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다 버리고,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백성들에게도 역시 정욕은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시 세상의 즐거움을 버리고 세상에서는 너희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이 땅을 단지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푯대로 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욕은 그의 마음속에서 역사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마음속에 있는 죄의 경향은 천국을 찾아가는 순례자들에게 역사해서 그들을 쓰러뜨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단지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었다는 이유,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여러분들이 모두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나그네요 그리고 지나가는 길손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죄와 그리고 정욕의 심한 몸부림이 있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본향의 길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이 죄의 대적들을 이기는 승리 없이는 우리는 진짜 이 세상을 지나가는 거룩한 순례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죄와 더불어서 끊임없이 싸울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 죄와 더불어 끊임없이 싸우기 위해서는 죄에 대해서 적개심을 갖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 이렇게 적개심을 갖는 것은 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죄가 어떻게 우리를 이끌어 가며 마지막에는 그 죄가 어떻게 우리를 철저히 파멸시키는지를 깊이 이해하고, 그 죄에 대한 혐오심을 갖지 않고는 우리는 죄와 더불어서 싸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항상 우리에게 즐거움도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싸워야 하는 이 신앙생활의 실체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싸워야 합니까?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이 싸워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우리의 대적이 무엇인지를 알고, 어떤 것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방해를 받고, 그리스도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자기를 못박아 주셔서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사랑했는데도 왜 우리들이 그런 사랑을 늘 간직하지 못하는지를 깊이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껏 까지 저를 포함해서 제가 만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선 제일 먼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됩니다. 한 교회에서 언제나 선명하게 피묻은 복음이 울려 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교회들보다는 그렇지 못한 교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모든 교회들은 비록 선명하고 피묻은 복음은 아니지만 그러나 물 묻은 인간의 사상을 전파하는데도 거기에 가끔 피가 섞여 있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순수한 말씀이 아니더라도 가끔은 거기에 죄인으로 하여금 복음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조금씩 보여주는 진리들이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를 간절히 열망하십니다. 그래서 그러한 조금씩, 깃들여 있는 이 복음들을 어느 순간에 성령께서 죄인들의 마음속에 가져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마음에 복음의 어떤 요소들을 깊이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남의 깊이와 정도는 다르지만 그러나 성령께서 그런 것들을 사용하실 때 이 사람들은 그 주님의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다소나마 깨닫게 되고, 마음이 자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어렴풋이 느끼게 되고, 또 자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에 대해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깨닫게 됩니다. 죄인의 마음속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영혼의 어떤 이상한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데서 오는 잠시 영혼의 평화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으면서, 그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알아 가는 잠시 기쁜 시간들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놀라운 구원의 감격을 몇 년은 고사하고 일년이라도 지속적으로 간직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커다란 원인이 무엇인고 하니, 그들이 잠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맛보아 알았지만 그 다음에는 무엇과 더불어서 싸워 야지만 이런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자기 안에서 계속 유지될 수 있는지를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들은 애씁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과 그런 아름다운 은혜를 잃어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 잠시 있다가 그들이 공허함을 느끼게 되고, 공허함을 느끼기 때문에 옛날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데 옛날의 은혜로 돌아가는 길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때로는 자기가 교회에서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서 섬기는 일에 자기를 내던져 보기도 하고, 때로는 분에 넘치는 물질을 하나님 앞에 바쳐서 그것으로서 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충실하게 살지 못했던 것을 보상해 보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이 모든 일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잠시 느꼈던 하나님의 참된 은혜와 생명이 자신에게서 떠난 것을 느낍니다.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느끼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는 매우 우울하고, 뭔가 습관에 이끌려서 교회 생활하는 것 말고는 더 이상 지탱할 힘이 없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모습니다. 안다고 하더라도 매우 막연한 진단에 불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어떻게 자기 길을 찾아가야 할지 모른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더욱이 그 중에 대 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신앙 생활하는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무릎을 꿇고 감탄하고, 승복하고, 회개하는 이런 것은 물론 안돼 있거니와 설교를 들으면서라도 그것을 집중하고 깨달으면서 자신의 신앙 생활의 지침을 발견하는 일 조차도 훈련이 안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온통 혼란에 쌓여있습니다.
죄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하는 가장 첫 번째 일이 무엇인지를 저는 몇 주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죄가 제일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하는 일은 우리의 지성을 혼돈 시키는 일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혼돈 시키고 우리의 정서를 정욕에 가득 차게 만들고 그래서 신앙적인 의무를 행하는 우리의 의지를 약화시킨 후에, 우리를 정복해서 우리의 인격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범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라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적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 자체가 영적인 싸움인데, 그 싸움의 한 복판에 들어서서 자기는 눈을 가리고, 죄는 눈을 똑바로 뜨고, 함께 권투시합 하는 것과 꼭 같습니다. 뭔가 허공을 향해서 주먹을 휘둘러보지만 그 주먹을 맞고 쓰러질 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러다가 결국은 잠시 몸부림을 치지만 그러나 몸부림을 치다, 치다, 지치고 나면 그 몸부림을 포기하듯이 죄와 더불어서 뭔가 싸워보려고 허공을 치는 것처럼 움직이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가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 죄에 의해서 완전히 지게되면서 그 싸움조차도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될 대로 되라' 그리고 자기를 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를 그렇게 내버려두는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 위에 또 다른 죄를 짓고, 그 죄는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그를 점점 어두움 가운데로 몰아 넙니다. 그런 가운데 돌이키지 않고 죄는 계속 쌓여가고 그런 사이에 하나님의 진노는 함께 쌓여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진리의 빛을 잃어버린 죄인의 궁극적인 운명임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신앙 생활을 해 나가기 위해서는 싸움의 실체를 먼저 인식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과 더불어 싸워야하고, 내 신앙생활의 생명을 앗아가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자신의 놀라운 생명을 소멸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이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죄 이기 때문에 그 죄를 멸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서 경박한 견해를 갖고 있거나 자기가 죄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태평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의 죄를 이길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마지막 남는 길은 두 가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공하면 외식으로 가득 찬 거짓된 그리스도인이고, 실패하면 그 외식된 모습조차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죄에 대해서 경박하고 태평한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명 있는 신앙 생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우리의 심령 속에서 뜨거운 열정으로 존재하던가 차가운 습관으로 남던가,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아무 것도 느끼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게 뭔가', 하나님의 그 뜨거운 위로, '그게 뭔가', 죄 가운데 허덕이고 있는 나를 용서해 주시는 사랑, 이런 것 하나도 몰라도 교회에 꾸역꾸역 나옵니다. 타고난 성실성과 그리고 성실하나로 버티면서 꾸역꾸역 나옵니다. 그 사람은 교회 생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직장 생활도 그래요. 직장에서 무능하다고 그런 다든지 사람이 욕을 하든지, 그저 꾸역꾸역 목표는 가서 출근부 도장을 찍는 거예요, 꾸준히. 그런 사람들은 반상회도 잘 나갑니다. 뭐든지 시키면 그저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헬스클럽에도 가도 죽으나 사나 꾸준히, 꾸준히 가는 겁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히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잖아요. 세상에 그러고 왜 교회를 다닐까,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고 몇 년을 다녀도 하나님을 못 만나고,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는 것이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교회 나와서 말씀을 듣고 죄는 죄대로 짓고, 어차피 거역하면서 사는데 뭐 하러 교회에 다니느냐, 시간 버리고, 돈 버리고, 돈은 많이 안내니까 많이 안 버리지만 하여튼 어째든 시간 버리고, 돈 버리고 왜 그렇게 낭비하면서 살고, 교회 갈 때 벌써 염려 되는 것이 '오늘 설교 길게 하면 어떻게 하나, 이거 몇 시에 끝날까' 그럴 염려를 할 바에야 안 나오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안나오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대부분 하나님의 참 사랑이 뭔지 깨달은 사람들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지, 그냥 꾸준히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못 만나도 그냥 그만둘 생각을 안 합니다. 타고난 성실성으로 그저 꾸준히 교회 나오는 것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은 직장에 가서 도장찍고, 주일날은 교회 와서 도장찍는다 이렇게 생각하고, 꾸준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죄를 죽이지 않고도 살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도 성공해야지 그 정도지 실패하면 그 껍질도 다 집어 던져버리고, 결국은 속에 있는 본색을 드러내면서 죄악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대해서 태평하고, 죄에 대해서 그저 두리 뭉실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죄를 이기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적군이 적인 줄을 알고 그 적이 얼마나 우리에게 심각한 피해를 안겨 주었는지를 깨닫고, 그 적을 향해서 '죽여 버려야 되겠다'라고 하는 적대심이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하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느냐는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죄에 대해서 아주 가볍고, 아주 태평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신령한 신앙생활을 할 가능성이 거의 없고, 그들에게는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실성이 지탱해주고 있는 한 꾸준히 교회에 나올 것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고,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저희 친구 아버님이었던 걸로 기억이 되는데, 벌써 오래 전입니다. 20년 가까이 됐으니까, 그때는 의학이 오늘날처럼 발달되지는 못했겠지요. 눈부시게 발달되니까, 그런데 어느 병원에를 갔는데 암이래요. 그러니까 기가 막힐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거보다 좀 큰 병원으로 갔는데 암이 아니래요. 그래서 이제 헷갈리잖아요. 그래서 또 다른 병원으로 또 갔어요. 그런데 암이 아니래요. 또 다른 병원에 갔더니 누가 암이라고 그러냐고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그럽니다. 삼대일 아닙니까. 누굴 믿겠어요? 암이 아닌 걸로 믿지 않겠어요? 결국은 여러 해 후에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여러분 뛰어난 의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한가지 증상을 보고, 실력이 없는 의사들은 그저 한가지만 생각을 해요. 그리나 실력이 있는 의사들은 한가지 징조를 보고,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 말고, 그 배후에 무엇이 없을가를 자꾸 탐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태어나서 한번도 입원해 보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기록이 삼 년 전에 깨졌잖아요. 새벽기도에 갔다 왔나 했는데, 들어 누워 있는데 엄청나게 열이 나는 거 같애요. "여보, 한번 체온계로 좀, 재봐" 입 속에다가 집어넣었더니 우리 집사람이 꺼내보더니, "여보, 41도야" 그러는 것입니다. 그거 죽는 거거든요, 41도면. 입 속에다 넣은 거니까 1도정도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40도가 되잖아요. 그래 갖고 응급실로 뛰어갔어요. 응급실로 가서 입원을 했는데 해열제를 놓으니까 열이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얼음주머니를 하고 그래서 열이 떨어져요. 그런데 의사가 들어와 가지고 자꾸 근심 어린 표정을 하는 것입니다. 열이 떨어지는데 나는 해열제 계속 놓으면 되는지 알았지, 간호원 하는 얘기가 뭐냐하면 지금 심각하데요. 왜냐 선생님들이 열이 계속 나고 고열이 오르는데 무엇 때문에 열이 나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거를 알면은 열이 나는 게 아무 것도 문제가 안 되는데,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를 모르고 열이 계속 치솟으면 이거는 보통 심각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열을 내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속에서 궤양이 생겼어요. 10곳이 생기면서 그게 곪으면서 쏟아져 나오는 열이었다고 진단이 내렸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서부터는 간단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의학적인 지식이 없으니까 열이 막 나도, 가서 주사한대 맞고, 쭉 내려가서 38도쯤으로 내려가니까 '이제 나았구나' 생각합니다. 지식이 있는 의사는 보면서 계속 염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계속 염려하는 것입니다. 왜, '열은 내렸지만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다시 치솟고 있다. 원인이 뭔지도 모른다. 이건 심각하다. 무슨 이상이 있지 않을까'. 나는 기껏 해봐야 이마밖에 관심이 없는데, 이 사람들은 이마가 아니라 내장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어디서 무슨 변화가 일어났기에 이렇게 고열이 치솟는 것일까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령한 사람들이다. 영성이 뛰어난 사람이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라고 말할 때에 그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눈만 감으면 환상을 보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까?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러면 신령한 사람은 뭔가 남이 꿈꾸지 못하는 꿈이나 꾸고, 신령한 사람은 뭔가 이렇게 방언이나 하고, 뭔가 은사를 들어내는 그런 사람들이 신령한 사람입니까? 아니 예요. 한 사람이 신령하다, 그가 영성이 뛰어나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한가지 사실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그는 죄에 대한 뛰어난 경험과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반복합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신령하다 그리고 영성이 뛰어나다 영적으로 매우 무르익어 있다라고 말할 때에 그는 한 가지 사실과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죄에 대한 탁월한 분석력과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리 뭉실하게 생각을 하고 '아 뭐 이렇게 하면 되지' 하면서 넘어가는 것이 신령한 사람 앞에서 딱 서면 자기가 이렇게 자꾸 벗겨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신령한 사람, 영성이 깊은 사람들 앞에서는 자기가 벗겨지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두리 뭉실하게 끌어안고 있는 그것이 그 사람들 앞에는 정확하게 분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이것은 옳은 것이며 이것은 옳고 이것은 좋은 것이다 다 가려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 그것이 뛰어난 영성, 영적으로 무르익은 사람, 신령한 사람의 결정적인 특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누군가가 신령한 사람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매우 영성이 뛰어난 사람이다라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과연 그러한지를 알고 싶으면 그와 대화하면서 그가 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죄에 대해서 얼마나 탁월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측정해 보세요. 거기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으면 그의 신령한 것은 다 거짓입니다. 그것은 그저 영적인 폼일 뿐입니다.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말이죠 영적인 은혜의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이상하게 견고하지를 않고 아주 쉽게 흔들리는 것들을 발견하게 되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 신비한 영적인 은혜에 대한 저항감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문제가 뭐냐하면은 신비한 체험이나, 신비한 감동 같은 것들이 아무리 그에게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가 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진짜 깊이 있고 영성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민수기를 보면서 제가 이번 주에 깊이 느낀 것은 하나님께서 빽빽한 구름가운데 임하셔서 형상은 보이지 않고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서들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애원하는 겁니다. '모세여,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소서 그래서 주님께 간청하기를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지 마옵시고, 당신을 통해서 말씀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그러면서 모세를 밀어 내보내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네는 가까이 가면 죽을 것 같으면서 모세는 왜 보내요? 그 죽을 자리에 자기네들은 가까이 가면 죽고, 모세는 가까이 가면 안 죽는다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죠.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무엇이 모세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었을까요? 모세는 신령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도대체 그게 뭐냐 이 얘기입니다. 신령하다는 게? 하나님께서 화를 내거나, 의로운 진노를 발하실 때 무슨 갑옷을 모세가 입고 있었어요? 모세를 특수인간으로 본 겁니까? 그게 아닙니다. 뭐라고 본 것입니까? 자신들보다는 하나님과 훨씬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본 것입니다. 뭐가 모세를 그런 사람들과 구별되게 끔 만들어 주었습니까? 물론, 모세는 특별히 부른 사람이니까 그렇죠. 그러나 실제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신령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사람이라는 것은 뭐예요? 거룩한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쉬운 말로 하면 죄로부터 멀리 떠난 사람이다 이것입니다.
단지 죄로부터 멀리 떠났는데 그것이 자연적인 깨끗함이 아니라, 거룩해진 깨끗함이란 말이죠. 거룩해진 깨끗함이라는 게 무슨 얘기냐. 어느 청교도가 말하기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평생을 진리를 따라 산 성도의 얼굴에는 악마의 손톱 자국이 가득합니다." 다시 말해서 연단된 거룩함은 죄와 더불어서 처절하게 싸우는 속에서 획득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오해를 하면 안돼요. 그것은 뭐냐하면 '그러면 죄에 빠져야 되는 구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청교도 목사인 오웬의 책을 읽으면서 죄에 대해서 이 사람이 아주 해박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제가 깊이 감탄하고 있어요. 그는 여러 방면의 죄, 예를 들자면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위선의 죄, 또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교만해 지려는 마음을 타고 하나님 앞에 교만해 질 때에 떨어지는 죄, 그렇게 타락하는 과정, 그 다음에 간음하고 성적인 범죄를 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처절하게 멀어지는 죄 이런 것들을 그림같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아주 쉽게 생각해서 '아, 이 사람은 교만해서 한번 주님 앞에 되게 얻어맞아서 그래서 징계를 받아보고, 이 사람은 실제로 이런 성적인 죄에 빠져서 아주 추하고 더러운 어거스틴 같은 삶을 살았구나!' 그렇게 쉽게 얘기 할 수는 없다는 거죠. 왜, 우리들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그 모든 삶을 다 경험을 통해서만 지식을 축적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능하잖아요. 그렇다면 아마, 일평생을 살아도 대여섯 가지 진리밖에 깨닫지를 못 할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람은 간음죄를 짓지 않고서도 간음죄를 짓고서 고통하는 사람들의 그 마음을 모두 헤아려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직접 몸소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조차 간파할 수 없는 죄의 방향과 방법과 그 술책들에 대해서 놀라운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그는 '총회장을 하겠다' 아니면은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지위를 놓고 다툰 적은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렇게 다투는 사람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교만의 죄의 마지막 결과에 대해서 그 사람들보다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죄 가운데 빠진 모든 사람들이 그 실패로부터 지식을 갖는 것도 아니고, 빠지지 못한 사람이 그 죄에 대한 지식을 못 갖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들이 아무리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여러분 속에는 성경에 기록되고 있는 모든 흉악한 죄들을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통찰력이 뛰어나고 영성이 있고, 영적이 분별력이 뛰어나면은 이 죄가 기승을 부려서 자기를 다 지배하고 밖으로 튀어나와 가지고 자신의 삶을 다 난장판으로 만든 후에야 '아, 이게 죄였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아직 역사하지 않고 작은 씨앗으로 자기 안에 존재할 때에도 이미 이것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파괴력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성입니다.
그러니까 두리 뭉실하게 살아가는 사람, '좋은 게 좋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없다 이 예기예요. 불가능하다 이것입니다. 이 신앙의 영역에서는 생각을 안 하면은 망하는 것입니다. 짐승과 같이 사는 길 밖에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서 태평하고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밑도 끝도 없는 영적인 무기력에서 계속 시달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타고난 성실성을 가지고 5년, 10년 교회를 다녀보십시오. 변화되나, 죽어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변화 받지 못한 채 인생을 불안 속에서 마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구원 못 받았을 수도 있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아주 깊은 인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는 영성이라는 것은 모두 거짓된 것입니다. 왜, 신령한 삶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깨끗한 데서 나오는데 결국은 그게 죄를 떠난 삶입니다.
소위 얘기하는 영적인 지혜, 영적인 놀라운 이해, 이런 것도 결국은 알고 보면 죄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그것이 결국은 자신의 삶 속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주는가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면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로마제국이 왜 망했는지가 역사가들에게 있어서 매우 궁금한 탐구거리입니다. 평면적으로 말하기는 부패가 망했다 그러는데, 어떤 사람은 로마가 망한 것은 물 때문에 망했다는 것입니다. 왜, 물 때문에 망했냐 그러는데 그 얘기를 쭉 읽으면서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 논리 정연합니다.
그 당시에 로마가 2천년이 넘는 시대인데 그때 벌써 로마에는 상수도 시설이 되었답니다. 빵 굽는 제빵 공장까지 나올 정도니까, 그런데 그 상수도를 연결하는 관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석관이고, 하나는 연관입니다. 납으로 만든 관입니다. 납은 삼 백 도만 불을 가하면 금방 액체로 녹잖아요. 그러니까 원하는 모습을 얼마든지 만들어 내잖아요. 그러니 석관은 그 당시로서 아주 촌스러운 관이었고, 연관은 최신 제품이었습니다. 연관을 만들어 놓고 수많은 도시사람들, 그것도 고위층 사람들이 늘 마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면 죽으라고 작정을 한 것입니다. 납이 얼마나 해로운 건데, 그러니까 멀쩡하게 산에서 흐르는 좋은 생수를 중금속이 섞인 물로 바꾸어 가지고 그걸 꾸역꾸역 먹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렸다는 그런 학설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무지는 결국은 이렇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영적인 지혜, 이런 것들은 자 신속에 어떤 것들이 죄인가를 보게 되고, 그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죄가 어떻게 역사해서 그래서 어떻게 우리들을 유혹하고, 우리들을 파괴하고 우리들을 사망가운데로 이끌어 가는지를 깊이 체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령한 사람, 영성이 뛰어난 사람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삶 속에서 자기의 죄를 보고, 두려워 떨고, 때로는 도저히 죄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에 몸부림치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힘입고, 그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기쁨을 맛보고, 더 고등한 죄와 싸우고, 그러면서 자신을 정결케 되어 가는 처절한 자기 복종의 과정을 거치면서 신령한 사람이 되 가는 것입니다. 마치 하늘에서 방망이가 내려와서 '뿅'하면 갑자기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에 대해서 적절한 견해를 갖지 못하고, 경박한 견해를 갖거나 태평한 마음,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생각은 간단해요. 죄 보다도 하나님의 용서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 지어봤자 주님이 계속 용서해 주시면 된다는 거지요. 그러나 주님이 정말 그렇게 끊임없이 용서해 주시는 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혼돈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이미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마는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과 죄가 실제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혼돈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제일 처음 접하게 되는 복음이 무엇이냐 하면은 여러분들이 이제껏 살아온 죄를 회개하고, 주님 앞에 진노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고백하면 주님이 우리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는 거지요. 그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주님 앞에 진심으로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할 때 주님께서는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미래에 지을 우리의 죄까지도 모두 용서해 주셔서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지금 우리의 커다란 관심사는 그렇게 구속되어서 죄 용서를 받고 천국을 가느냐 못 가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을 실제로 살아가는 삶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생의 목표라기 보다는 주님을 위해서 애써 살다가 마지막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결과예요.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에서 천국을 보장받았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는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거든요. 지금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마음속에 임하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역사할 때 우리가 비로소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늘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 야지만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부둥켜안고, 그리고 버려진 사람들을 치료하고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서 인생을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영원한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한번 죄 사함을 받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심겨준 영적인 생명이 이 소멸되도록 만드는 죄의 세력을 알아야 된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서 싸워서 이기는 방법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신앙생활의 특징을 가지고 있냐 하면 도무지 누군가에 의해서 책망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는 끊임없는 자기 합리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참된 신앙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가',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옳다고 사실까',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얻은 것이 무엇일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말씀을 통해서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알아서 믿는 주의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는 정당화, 합리화 그 다음에 누군가의 올바른 말씀의 권고를 견디지 못해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 입니다마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사람들이 많은 변화를 받는데 어떻게 공부도 많이 안한 사람이 그렇게 버릇이 없어요. 나를 좀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도 제 설교를 듣는 회중입니다.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은 쭉 얘기하다가 자기 본심을 다 들어내 놓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자 다 아는 것처럼 폼잡는 것을 견딜 수가 없대요, 자기는 설교시간이 너무 괴롭답니다. 그런 사람들이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그 사람 기분 나쁜 것은 설교를 하는 중에 많은 성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기를 화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뭘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그러는지. 나는 그 사람이 지금도 거의 죽어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런 사고 방식을 가지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나가며, 감히 영혼들을 인도하는 목자가 되겠습니까?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깡통 같은 사람이 교회의 중직이 되고, 돌 같은 사람이 교역자가 되는 일이 오늘날의 구조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것을 분별해 내는 것이 교회의 임무라 이 이야기입니다.
이런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도저히 무엇인가 누군가로부터 지적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참된 것과 아닌 것들을 드러나는 것들을 도저히 못 견뎌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많이 선생이 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신은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가리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뭐가 있어서 가리키느냐 이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선생 노릇을 하는 것은 교회의 재앙입니다. 왜, 성공하면 자기 같은 사람들 만들어 낼 것 아닙니까. 죄에 대해서 선명하게 선포를 하고, 무엇이 죄 인지를 말해주고 나면 저렇게 죄에 대해서 따지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고 돌아다닌단 말이죠. 그러면서 처참하게 파괴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를 못해요.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메여집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도무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너지기를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기를 마다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깨지기에는 자신은 너무 완벽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으면 되지, 무엇인가 자기가 부서지도록 강요하는 것은 참된 복음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누구 복음입니까? '내가 복음'이지 누구 복음입니까.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까, 교회에서 참되고, 깨끗한 복음이 유지가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참된 복음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어떤 역사가 일어나야 하면은 아주 깨끗한 복음이, 순수한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성도들이 그 순수한 복음을 들으면서 복음적이지 못한 삶이 참된 복음에 의해서 밝혀질 때 그 드러난 잘못된 삶을 아파하고, 뉘우치는 반응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은 속에 죄의 요소와 부패한 성품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 말씀을 잡고, 때를 묻히고 더럽게 만들어서 순수하지 않은 말씀, 진리로 만들로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어요. 왜, 그렇게 하면 자신들을 살아가는 삶을 상당히 합리화 시켜 주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복음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말할 수 없는 감격입니다. 그러나 복음적으로 살아가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복음이 한없이 무거운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매일, 매일 삶 속에서 죄와 더불어 싸우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주께서 우리를 거룩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라고 하는 이 메시지가 가슴 뛰는 감격적인 메시지예요. 그러나 매일, 매일 하루 만족한 삶을 살아가고, 오늘도 교회에 도장 찍으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믿어서는 소망이 없다라고 도전하는 이 소리는 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되요. 둘 중에 하나 길밖에 없어요. Repent or Perish, 회개하든지 망하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는 길이 없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이렇게 경박한 견해를 갖고, 끊임없이 자기를 합리화시키면서 살아가는 이러한 사람들은 죄를 죽일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 사랑을 맛보지 못할 것이며,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말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맛보지 못할 것이며,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많은 것을 공부하지만 그러나 은혜에 관해서 알뿐이지 은혜 자체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그들 속에 관념으로 머물 것이며, 삶을 움직이는 실체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고작해야 그는 도덕적인 삶으로 만족하는 외식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며, 마음속에 있는 깊은 죄악들의 뿌리를 하나님 앞에서 불사르고 태워 버려서 그렇게 죄를 이긴 사람들 속에 넘치는 사람을 움직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의 놀라운 영적인 생명에 대해서 영원히 무지한 채로 살아 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을 그들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일뿐이고, 그의 삶을 신앙이 움직이지도 않을 것이며, 그리고 그 알량한 교회 생활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지도 못할 것입니다. 심지어 그의 영혼이 지옥을 가는 그 길에서도 그는 돌이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신자인척하고 일평생을 살았지만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자로 발견될 것이 분명하고, 한번도 죄를 이겨 보지 못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는 결국은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그의 인생은 주님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인생밖에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죄와 끊임없이 싸우기 위해서는 죄를 잘 인식하고 적개심을 가져야 할뿐만 아니라 두 번째는 어떻게 하면 죄를 이기는지에 대해서 그 방법과 친숙해wu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명장은 승리를 통해서 보다는 패배를 통해 더 많이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싸움터에서 유능한 장군은 승리를 통해서는 적은 교훈을 얻지만 패배를 통해서는 아주 큰 교훈을 얻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가게 하는데 매우 요긴한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실제적인 이야기를 오늘 한 토막 해 볼까요? 여러분 신앙 생활을 하다가 보면 어떤 때는 미끄러지는 때가 있습니다. 안 미끄러지는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십시오. 한번 씩 미끄러집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두 팔을 벌리고, 청룡 열차를 타는 것처럼 그저 미끄럼 자체를 즐기면서 내려가는 사람이 있고, 아직도 여러 해가 됐는데 계속 내려가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조금 내려가다가 '아이구 머니나'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길게 속히 내려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천천히 멀리 내려가는 사람이 있지만 한번씩은 다 미끄러져 본 사람들입니다. 한번쯤이 아니라 여러분 미끄러졌겠지요. 그리고 조금씩은 우리들이 날마다 미끄러지면서 삽니다. 바나나 껍질을 밟은 정도로 뒤뚱뒤뚱 하는 일은 이번 주에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실패인 것은 분명하거든요. 미끄러지면서도 처음에는 '야호'하고 청룡열차를 타도 내려가는 것처럼 두 팔을 벌리며 신나 하지요. 왜, 미끄러지는 것은 죄고, 죄는 항상 우리에게 즐거움과 편안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마는 한 때 여성들이 하이힐을 신은 적이 있죠? 아주 번쩍 들어야지만 되는 그런 아주 아슬아슬해 보인 모든 하이힐을 신잖아요? 그렇게 뒤뚱뒤뚱 거리면서 하루종일 걸어다니던 사람이 집에 들어와서 슬리퍼를 신을 때 얼마나 편할까요. 죄는 그것입니다. 죄를 이거며 싸우려고 날마다 긴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다가, 포기하고 죄의 길로 들어서면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로 넘치는 사람이 아닌 한, 즉시 편안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고향집에 돌아온 것 같고, 신고 다니던 슬리퍼를 다시 신은 것 같고, 오랫동안 익숙한 가방을 들고나서는 것처럼 그렇게 편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시간이 지나고 하면 즉시 고통을 느끼거든요. 계속해서 '야호'하고 내려가고 있는 사람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아직 때가 덜 됐든지 아니면 계속 굴러가다가 불 가운데로 들어가야지 정신을 차리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즐거움은 잠깐이고, 즉시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해요. 왜, 이렇게 편안하면 편안할수록 죄와 친근하면 친근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맛보는 그런 은밀한 즐거움, 예배 드림이 우리의 영혼에 참된 기쁨이 되는 즐거움, 꽃처럼 향기 나는 화려한 삶이 없어도 말씀을 통해 깨달으면서 늘 밤늦게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을 간직하고 돌아가던 이런 즐거움, 삶의 시련이나 폭풍이 와도 요동치지 않게 말들어 주었던 하나님과의 평화가 가져다 준 견고함, 이런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할 때 드디어 그것이 사라져버린 고통이 죄가 주는 즐거움을 능가하게 된다 이거지요. 그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몸부림치게 된다 이거지요.
그래서 계속해서 미끄럼 타고 내려갈 때 '아이고 저거 얼마나 내려가나, 저거 어떻게 하나' 그런데 몇 달 지나고 나서 보면 다시 죽을뚱 살뚱 올라와 가지고, 다시 미끄럼 타고 내려갈 때는 매일 구석에 앉아서 우거지상을 하고, 예배를 드리다가 또 다시 회복되면 앞자리에 나와 가지고 생긋생긋 웃으면서 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렇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수시로 변한단 말이죠. 그러니 밖에 있는 사람이야 그 속사정을 알겠어요. 아는 것은 한참동안 맛이 가더니 미끄럼을 탔구나 그건 알았지만, 언제 다시 돌아왔으니까 이제 은혜를 받는구나 하는 것만 알지 옆에 있는 사람이 그 속사정을 어떻게 알겠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모르는 건 이해가 갑니다. 왜, 남이니까. 그 심오한 속뜻을 어떻게 알겠어요. 문제는 뭐냐하면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자기도 왜 변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도 왜 그렇게 죽상을 하다가 요새 또 은혜가 살아나는지 자기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데 뼈저리게 실패했는데 아무 것도 얻은 게 없어요. '왜, 빠졌니?', '모르겠는데요', '왜, 미끄러졌니?', '은혜가 떨어졌나봐요', '왜, 떨어졌니?', '생각 안 해봤는데요', '지금 어떠니?', '다시 회복됐어요', '어떻게?', '모르겠는데요' 그러니 패배를 해도 아무 것도 배운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얼마나 신나겠어요. 왜냐하면, 다음에 똑같은 시험을 걸어도 역시 생소해. 그러니까 몸으로 부딪혀 보기 전에는 아무 것도 이해가 안가고, 부딪히고 나서도 그 다음에 배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걸린 덫에 또 걸리고, 걸린 덫에 또 걸리고 그러고 가는 것입니다.
지금 다 기억이 사라져서 언제 쩍 일인지도 기억이 안나요. 초등학교 때 일입니다. 시골에 있는 아저씨하고 같이 숲길을 이렇게 걸어가는데 말이죠 산을 올라가는데, 우리들은 그냥 졸졸졸졸 좇아가는데 이 아저씨는 갈 때 기다란 막대기를 하나 꺾어 갖고 가더라구요. '애야, 빨리 걸으면 안된다. 천천히 내 뒤를 좇아와라' 그러면서 나뭇잎이 잔뜩 쌓였는데 툭툭 치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툭하고 뭘 치는데 숲 속에서 뭔가 '털컥'하면서 뛰어오르는 것입니다. 뭔가 그랬더니 짐승 잡는 덫입니다. 그걸 가랑잎 사이에다 묻어놓은 것입니다. 멧돼지 같은 게 지나가다가 탁 건들면은 그냥 이렇게 된 쇳덩이가 탁 체면서 톱니바퀴 같이 생긴 게 확 찍어버리는 거거든요. 거기에 사람이 밟았으면 어떻게 할 뻔했습니다.
우리 어린 아이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숲이 길이 있으니까 걸어가는구나 그런데 사실은 그 길이 사람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짐승들이 다니는 길이라는 거지요. 그 산에 대해서 깊이 아는 그 사람은 절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아니까 긴 막대기를 가지고 툭툭 치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걸 체면 어떻게 할 뻔했습니다. 그 임자가 그 내 덫인데 그리고 나타나겠어요. 멧돼지 걸리면 나타나서 자기 덫이라고 그러죠. 사람이 걸렸으면 큰일 나는 거지요. 못하게 돼 있습니다.
그것을 보십시오. 지혜 있고 무엇인가 분명하게 죄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느냐에 대해서 예측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서 실패하고 뒤로 미끄러졌으면 그리고 회복을 해야 되겠지요, 그렇죠? 그때에 꼼꼼히 생각을 하고 분석을 해야 됩니다. 왜 미끄러졌는지, 그것도 자기분석이 잘 안되면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받아야 돼요. 그래서 배워야 되요. '아, 죄가 이렇게 나를 유혹했구나, 그래서 내가 이렇게 했더니 결국은 더 큰 죄를 짓게 되었고, 거기서 이렇게 했더니 결국은 안되고, 결국은 이렇게 되어버리고 그 죄가 결국은 여기로 나를 데리고 왔으니까, 처음 그 죄가 나를 유혹할 때 마지막으로 가고 싶어했던 곳이 바로 여기였구나,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내가 패배했구나, 그래서 여기서 상당히 여러 날 동안을 완전히 꼼짝 못하고 죄가 목을 누른 것처럼 그렇게 아무 꼼짝도 못하고 지나다가 극복을 하게된 대에는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아 그렇구나 거기서 내가 이렇게 마음을 바꾸니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었고, 이런 기도를 하니까, 이런 말씀을 주셨고, 이런 지혜를 줬고, 삶을 이렇게 바꾸고, 이렇게 순종하고, 이렇게, 이렇게, 했더니 결국은 그 죄를 이기고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그거를 깨끗하게 정리를 해서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을 살아가는데 엄청나게 커다란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그렇게 하면서 이제 비로소 신령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딴 사람이 똑같은 죄에 빠지려고 그래요 그러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고 히히덕 거리면서 계속해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가는 것입니다. '야, 거기 내려가다가 큰일 난다, 안돼, 안돼'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비가 오는 날입니다. 비가 창대처럼 쏟아 붓는 날은 그래도 안전합니다. 그런데 비가 살짝 내렸을 때 땅에 쫙 깔린 먼지들이 페이스트가 됩니다 진덕 진덕한 꼭 된장 같은 물질이 된단 말이죠. 그때 제일 위험한 게 뭐냐하면 오토바입니다. 그런데 비가 오는 날입니다. 어느 지체하고 걸어가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청년 둘이서 그냥 쌩하고 달리는 것입니다. '저거 위험하다 저거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조금 있더니 '끽익' 하더니 '쾅' 하는 것입니다. 쭉 가다가 휙 도는 더 그 페이스트처럼 된 거기에 바퀴가 미끄러지면서 뒤집어져 가지고 왕창 깨진 것입니다. 갑자기 피가 쭉 흐르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알아요? 그렇게 넘어져 봤어요. 그러니까 아는 것입니다. 타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죠, 탔을 때 오히려 비가 쏟아지는 날은 운전을 조심하게 되고 땅이 깨끗하기 때문에 오히려 덜 미끄러지는데 살짝 가랑비가 내렸을 때가 위험하다는 거를 여러 번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즉시 그 위험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맑은 날 밟는 속도로 휙 트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여러 번 핸들을 틀었을 것입니다. 안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다른 날이었고 그걸 알아야합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실패를 통해서 얻게 되는 지혜예요. 그런 것들을 계속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세요, 내면의 세계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과 더불어 끊임없이 싸우는 사람들은 그런 끊임없는 싸움 속에서 승리와 실패를 반복하면서 계속해서 그러한 이해가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가지고 있는 술수와 방법, 죄가 우리를 타락으로 이끌어 가는 과정들에 대한 이해가 모두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두리 뭉실하게 넘어가는 사람들을 들어다 불때는 한심하게 짝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는 정말 용감하게 살아가는데 알고 보니까 사실은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무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삶을 자꾸 회보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와 더불어 끊임없이 싸우고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뭔가를 이렇게 자세하게 얘기를 해 주면 항상 뭐냐하면 '뭐 그렇게 따지는 것이 많느냐?'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 복잡하냐?' 쉽게, 쉽게만 넘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은 짐승처럼 사는 것입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너무 어려운 일이 많아요. 그걸 우리들이 이해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의 술책을 알고 내재하고 있는 이 죄의 교만함을, 교묘함을 깊이 파악해서 그것을 경계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엄청난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닥이 다 들어 나서 죄 가운데 사로 잡혀 가다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파괴되고,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이기 전까지는 자기가 잘못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터져 봐야 그래서 자기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람도 다행이지, 그 이상을 가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들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총신 대학원에 다닐 때 저는 항상 점심시간에도 혼자서 산아래 산책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가을에는 공기가 맑고, 단풍이 들어있어서 좋아요. 그런데 후미져 가지고 사람들이 잘 안 내려갑니다. 봄에는 내려가서 같이 도시락도 까먹고 하는데 안 내려가요. 가을에 이제 제가 좋아하는 계절에 커피한잔 뽑아 가지고 쭉 내려갔어요. 쭉 내려가는데 저기서 말이죠 가랑잎이 흔들흔들 흔들려요 낙엽이 그러더니 얼마나 잘 먹었는지 팔뚝만해요. 구렁이가 말이죠 '쉭 쉭' 하는 것입니다. 다음서부터는 다시는 안 내려갔어요. 졸업 할 때까지. 구렁이는 나를 본 것은 아닙니다. 자기 혼자 이렇게 휘감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질문 하나 해보겠습니다. 야유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아주 풀 섶도 좋고 그늘도 적당했습니다. 돗자리를 깔고 아이가 말했어요. '엄마, 저기 뱀 있어', '어디' 보니까 뱀이 그냥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눈만 꿈뻑 꿈뻑하면서 혀만 날름날름 하고 있어요. 엄마가 뭐라 그랬겠어요? '애야, 뭐 우리에게 다가오지도 않는데 그냥 개는 거기서 놀게 내버려두고 우리끼리 놀자.' 그랬겠어요? 여러분 웃지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다구요. 어떻게 왜냐하면 죄가 지금 나와 관계가 없고, 역사하지 않으니까 경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교만, 그게 지금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 요즘 하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그냥 지금 심령이 무너지는 것 같고, 가난해 지고 겸비해 지고 있는데 교만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어'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지요. '도둑질,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면서 잠복돼 있는 죄에 대해서 경계를 늦추는 것은 마치 뱀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끼리 놀자 라고 말하는 사람과 꼭 같은 사람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죄는 우리가 휘말려 들 때에는 물론 경계를 해야되지만, 경계가 아니지요 그건 이미 휘말려 들었으니까 이제는 싸우고 있는 중이죠, 그러나 우리로부터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지금 현재 상당히 멀기 떨어져 있다고 생각될 때에조차도 우리가 지을 수 있는 죄에 대한 경계심조차도 늦추지를 말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경계해야 됩니다. 그래서 언제고 저것이 고개를 들고 몸을 움직이면서 우리에게 다가올지도 모른다고 하는 경계심을 가지고 있어야 되요. 이런 것의 유익이 무엇이냐 하면 죄에 대한 초동진압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뱀이 있는데 그냥 놔둬라 뭐, 가만있는데' 그러고 놀면 오는 것을 못 봅니다. 그러나 예의주시하고 '아, 저기 뱀이 있구나' 그리고 계속 주시하는 동안에는 고개를 들면 '아, 공격을 하려고 하는구나, 단칼에 베자' 이렇게 된다는 것이죠. '내가 그거와 무슨 상관이 있어, 무슨 상관이 있어' 하는 동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깊이 와서 우리들을 파괴하고 우리들을 무너뜨리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죄와 더불어서 싸워서 죄 죽이는 삶을 우리들이 쟁취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싸움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목사님, 너무 힘들어요, 나는 예수 믿으라고 그래서 그냥 믿으면 모든 게 잘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 죄 죽이는 것에 대해서만 배웠는데도 이렇게 끝이 없는데, 뭐 그렇게 신앙생활이 어려워요?' 예 바로 봤어요. 신앙생활은 어려워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다가 그만두고 넓은 길로 가고 많은 사람들이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를 않고, 넓은 길로 들어서서 멸망으로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친구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을 길로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고독하고, 외롭고, 중단 없는 싸움이 있고, 내 적인 긴장이 있고, 그리고 세상의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희생이 있어요. 넓은 길로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대로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존재합니다.
주일 날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그것으로서 모든 의무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형식적인 신자들이 예수를 위해서 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예수를 위해서 무엇을 버려보셨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인가 포기한 것이 있습니까? 신앙을 위해서 우리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저버린 적이 있습니까? 얼마든지 그럴 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너무나 귀중하고, 우리의 신앙의 길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포기하고 버리고, 죽어본 적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이 이야기입니다.
죄를 이기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버립니다.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버리고, 오히려 편한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과 투쟁으로 얼룩진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 없이 고독하지도 않고 갈등도 없이 넓은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마지막은 사망의 길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편안하게 살고, 신앙생활을 안락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세상과 타협하면 살아가는 그 대가를 마지막에 영원의 때에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을 걸어가며 끊임없이 죄와 더불어 싸우고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사랑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진 것만큼 그들에게는 하늘의 축복이 깃들 것입니다.
18. 영적 회복의 길(5)
:죄와의 싸움에서 빈번히 승리함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
지난 시간에는 참된 죄 죽임을 위해서 끊임없는 죄와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죄에 대해서 자주 승리를 하면 그것이 죄를 죽인 상태라는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한가지만 드리려고 합니다.
신자가 죄에 대해서 어쩌다 한 번 이기는 것, 그리고 기도를 하되 어쩌다 한 번 폭포수와 같이 쏟아져 나오는 것, 그것은 죄를 이긴 것이라고 볼 수 없고 온전한 기도의 영 속으로 들어갔다고 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축복된 영혼의 상태가 상당히 오래도록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어쩌다 한 번 폭포수처럼 나오는 것이 아니라 늘 기도하면 열렬한 기도가 쏟아져 나올 수 있게 되는 것, 그래서 18세기 전설적인 설교자 '위필드'가 자기의 삶을 점검하는 15가지의 체크리스트 가운데 첫 번째 항목이 '나는 오늘도 열렬하게 기도하였는가'입니다. 열렬하다라고 하는 영어단어가 여럿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fervent'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야말로 '나는 오늘도 불붙듯이 기도하였는가'인 것입니다. 그런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의 영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똑같은 원리에 의해서 어쩌다가 죄에 대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빈번히 승리하는 것, 어쩌다가 죄를 실천에 못 옮기는 것이 아니라 죄가 우리를 유혹하지만 번번이 우리를 범죄의 자리에 이끌어 가는데 실패하는 것, 그것이 죄를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표징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우리들이 매우 후퇴해 있거나 죄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성령의 강력한 감화를 보내셔서 마음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언뜻 보면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대신 기도하는 것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살아가다가 순간적으로 자신의 죄된 처지에 대해서 강력한 반발심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 죄를 죽이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죽인 그리스도인들 속에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이 죄를 향해서 빈번히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가 죄를 이기는 두 가지 방향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이고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무슨 뜻인지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날마다 신앙생활 속에서 죄를 죽이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하는 중요한 기준이 그의 생활 속에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내 마음속에서 어떤 욕망이 생겨나서 어떤 죄를 짓게끔 충동을 우리에게 넣어줄 때 깨어있는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금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다'는 의식이 금방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혹을 받거나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에 즉각적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치하는가',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식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서 어떤 죄를 짓고자 하는 충동적인 마음이 정욕이 되어서 확 솟아날 때 그때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르면서 하나님이 그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는 의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에서는 순종하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이긴 그리스도인들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되겠다는 욕망이 죄를 순종하며 살아야되겠다는 욕망보다 더 크고 강하니까 언제든지 범죄 하고자 하는 욕망이 솟아나면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죄를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는 가끔 기도를 많이 하는데도 승리하는 신앙생활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가장 커다란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의 법에 의한 깊은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아주 신령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늘 기도하는 사람이고 아주 비상하게 신령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많이 받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행 길에 나갔습니다. 또 그렇게 신령하지는 않은 보통사람이 차를 몰고 나갔습니다. 신령한 그 사람은 교통표지판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고 신령하지 않은 사람은 교통표지판에 대해서 잘 압니다. 차를 몰고 가다가 유턴 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려고 보니 반대편에서 차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겁니다. 잘못 돌다 부딪히면 박살이 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디서 유턴을 해야되는지 주님께 응답을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통성기도를 통해서 어디서 유턴을 해야 될지를 결정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불행하게도 보다 더 안전하게 유턴 하는 사람은 신령하고 통성기도를 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 교통표지판을 잘 아는 사람이 훨씬 정확한 지점에서 유턴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차를 몰고 가다가 도저히 유턴해서는 되지 않는 지점에 놓고 '주여 여기서 유턴 하는 것이 주의 뜻이옵나이까, 뜻이라면 돌다 부딪혀도 제가 돌겠나이다' 그렇게 돈 사람처럼 기도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도로에 들어섰으면 표지판을 따라 움직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고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규칙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쓸데없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런 것을 해야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주 분명한 원리와 법칙이 성경 속에 있는데 왜 그런 기도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 술 공장을 해야되겠나이까, 된장공장을 차려야 되겠나이까' 하면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한데 왜 기도합니까? '회사에 다니는데 이중장부를 쓰고 탈세의 앞잡이가 되어서라도 직장에 남아있어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나와야 되겠습니까?' 너무 분명한 것 아닙니까?
죄를 죽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죄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를 단죄하고 잘못됐다는 것을 정확히 포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를 이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에 성도들이 많아도 왜 이렇게 거룩한 성도들이 매우 작은가하는 분명한 이유는 그들에게 말씀이 너무나 없는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되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규칙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희박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은 삶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는 능력 있는 기도가 될 수 없고 지금은 능력 있더라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채 동물적인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 삶은 결국 죄를 쌓이게 할 것이고 그 기도의 은혜도 말려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하나님의 큰 은혜와 영혼을 깨어나게 하는 각성을 경험하고 열렬한 기도의 영에 사로잡히는 신자들을 가끔 봅니다. 그러나 공통점은 불과 몇 달이 지나기 전에 그렇게 뜨거웠던 은혜와 기도의 영을 고스란히 악마에게 반납하고 다시 껍질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추억만 남고 삶은 다시 죄 가운데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생을 사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감화와 지식이 쌓여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도루묵이 되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즉각적으로 그 죄가 죄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죄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성장하고 나면 어떤 파괴적인 결과를 자기의 인생 속에 가져올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감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시간에 사람들 입을 벌리게 만드는 무용담과 같은 간증을 남기는 사람들이 신령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신령하다라고 하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은 인지하지 못하는 죄에 대한 어떤 놀라운 감각을 가지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죄가 고개를 들고 자기의 인생을 향해 다가와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모르지만 신령한 사람들은 그 죄가 지금 보기에는 매우 미미하고 작지만 궁극적으로 죄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결과가 얼마나 파괴적이고 엄청날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알고 대비하고 경고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신령한 사람인 것입니다.
죄와의 관계를 떠나서 누구도 신령하다고 말할 수 없고 죄와 관계없이 신령한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령함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죄로부터 떠나고 죄 죽인 상태가 되어서 신령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과 매우 가까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몇 번을 인용해도 지루하지 않은 예화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주님이 강림하셨습니다. 빽빽한 구름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를 향하여 뭐라고 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여호와께로 나아가서...... " 자기네들은 나아가기가 그렇게 무서운데 모세에게는 왜 나아가라고 합니까? 그 사람은 더 무서울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은 가까이 가면 죽고 '저 사람은 하나님 매우 가까이 가도 안 죽을 것이다'고 생각했습니다. . 차이가 무엇입니까? 모세가 신령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신령함은 자기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죄로부터 떠난 영혼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즉각적으로 죄를 구별해 내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잠복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에 정욕이 솟아나면서 죄가 고개를 들게 되면, 이 사람은 말씀의 빛을 자기의 마음속에 비추는 은혜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저것이 죄다'라고 지적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저렇게 살며시 고개를 들고 있지만 저놈이 완전히 몸체를 드러내고 역사할 때 그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그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서 미리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빈번한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십자가의 사람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저것이 죄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에 거기에는 단지 죄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무슨 소원이 있으니까 죄가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우리에게 항상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고통을 가져다주지만 그러나 처음 시작될 때는 우리에게 달콤한 유혹과 그리고 그 죄를 따라서 순종함으로 내 마음을 즐겁게 하고 육신을 만족하게 해야겠다는 안달하는 소원이 우리 속에서 고개를 함께 드는 것입니다. 그때에 죄를 이긴 그리스도인의 상태는, 그렇게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서 죄가 고개를 들 때에 그 죄가 이룰 파괴적인 결과를 볼뿐만 아니라 그 끔찍한 죄의 결과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순결하고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의 이러한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못 박혀서 하나님 앞에 저주를 당하셨는데, 이제 나에게 새 생명을 주셨는데, 그래서 주님을 위해 살라고 나를 부르셨는데, 내가 어떻게 잠시 육신을 만족하기 위해서 이 죄를 저지름으로 다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릴 수 있겠는가' 하는 착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죄가 기승을 부리게 되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이지 하나님의 뜻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세상이 굉장히 많이 부축입니다.
오늘날의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이 무엇입니까? '네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너에게 좋은 것이 선이고, 네가 하기 싫은 것은 다 악이다'라는 것입니다. '너에게 좋은 사람들은 다 선한 사람들이고 네 행복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다 악한 사람들이다'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충동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법입니다. 개인의 최고의 행복이 곧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개념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인 율법, 하나님의 기준, 이런 것들이 죄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것은 모두 죄고 나쁜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더 고통스러운 세상이 되는 것이지요. 왜? 욕망과 욕망이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커다란 갈등과 고통을 빚어내는 것입니다.
자기를 극대화시키다 보니까 필요 없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나 많고 어떤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가 불행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처치 해버려야 될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은 죄와 불순종과 탐욕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지막 때가 되면 놀라운 표징이 하나 일어나는데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나온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죄를 짓고자 하는 소원이 일어나고 유혹을 받을 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갖게 됩니까? 죄를 이기는 삶을 위해서는 십자가의 감격이 필수적입니다. 그것 없이는 누구도 죄를 이기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자들을 징벌하신다고 하는 끔찍한 진노의 약속 하나만을 가지고는 우리들이 내적으로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죄로부터 떠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죄에 대한 공포 못지 않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의한 감동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이 없이는 우리는 죄의 유혹이 가져다주는 그 놀라운 행복, 그 즐거움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건강한 신앙생활의 비결 중 하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서슴없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 앞에서 펑펑 우는 감격이야말로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통해서 구원을 얻고 그 십자가의 참 사랑으로 말미암아 속죄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대해서 무감각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죄가 잘못된 것인 줄을 알면서도,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이 죄 가운데로 들어가고 심지어는 그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한편으로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께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다시 주님을 못박게 만들었던 그 불의와 옛 생활로 돌아가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고백과 삶이 다르고, 말로 하는 것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다른 그런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바로 죄 죽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 죽임의 교리를 여러분들에게 가르치면서 누누이 말씀드린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신앙생활이 없이 우리들이 믿음생활을 해나가면 성공하면 외식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고 실패하면 배교하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람이 벗길 수 없는 외투를 따뜻한 태양 빛이 벗겨버리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죄에 대한 그런 심각한 경고, 죄에 대한 심각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들으면서도 도무지 그 죄와 결별할 수 없었던 사람들, 항거하면서도 늘 실패를 경험하던 사람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고 나서 죄를 떠난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사도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말합니다. 오늘 사도가 이런 놀라운 감격적인 고백을 하는 그 영혼의 상태가 바로 죄로부터 온전히 떠난 상태요 죄를 죽인 상태인 것입니다. 사도가 오늘 왜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라고 말 할 수 있었습니까? 주를 위해서 자기를 다 바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끔찍한 진노의 심판에 눈을 떴기 때문에, 오직 그 이유 때문에만 사도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가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서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끔찍할지도 물론 알았지만, 더 크게 사도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그 일입니다. 주님이 핍박자요 포행자요 그리고 배반자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을 이루지 않고 살아가던 포악한 자기와 같은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로 건져주셔서 새사람 만들어주신 그 놀라운 은혜, 도무지 쓸모 없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생을, 자신에 대한 가치 때문이 아니라 억누를 수 없는 하나님 속에 있는 사랑과 자비 때문에 구원해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는 결국 자기를 하나님 앞에 다 드리고 싶은 그런 사랑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이렇게 죄가 떠오를 때 즉각적으로 그 죄를 주님의 사랑 앞에 데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를 짓기 원하는 우리에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과 구속의 은혜를 입고도 네가 범죄할 수 있느냐'고 우리의 정욕을 향하여 묻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러한 죄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고개를 들면 율법의 빛에 의해서 즉각적으로 인식되고 그리고 그 빛 앞에서 정체가 탄로 나고 이어서 즉각적으로 그를 십자가 앞으로 데려감으로 그 죄가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원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죄와 악수하고 껴안고 입맞추는 대신 그 죄를 향한 극도의 혐오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빈번한 승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로부터 우리를 이기게 만들어주는 커다란 기둥이 두 개가 있는데 십자가에 대한 놀라운 감격과 죄를 죄로 인식하는 놀라운 말씀에 대한 지식, 이 두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한 놀라운 구원의 감격은 끊임없는 묵상 속에서 우리 속에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런 놀라운 성령의 은사와 역사를 경험하고도 그렇게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가 되어서 사도에게 책망을 받게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사도 바울이 그 교회 교인들에게 상기시킨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하였습니다.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전도하기 전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전도에 완전히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례적인 실패를 경험하게 되었을 때 그가 자신 속에 잃어버렸던 것을 상기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증거 하는 것으로 아데네에서 성공을 거둬야 했었는데 그는 그런 충실한 복음의 원리에서 잠깐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나아갈 때는 심히 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가장 연약한 자가 되어서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아데네에서의 놀라운 실패가 이 사도 바울에게 이러한 어려운 마음을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그는 죄인들이 모여있는 도시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은 인간의 지혜나 철학이나 그리고 사상이나 인간의 능란한 말이나 언어가 아니라 십자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는 바로 그런 십자가의 선포를 들으며 죄 많은 항구 도시에서 우뚝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십자가에 대한 놀라운 감격을 잃어버리게 되자 다시 항구 도시의 정신, 세속의 정신에 하나님의 교회가 물들게 되는 불행한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영성의 심장부에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그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늘 재현되고 늘 반복되는 놀라운 축복들이 우리 안에서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 '찰스 스펄젼'이 서재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다가와서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울고 있었습니다. 이 좋은날 아침에 왜 울고있느냐고 물으니 그때 스펄젼이 남긴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보, 오늘은 이상한 날이야, 오늘 아침에도 어제와 다름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데 왠지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고 그 십자가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셨다 라고 하는 감사한 마음도 들지 않으니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그렇게 초라한 내 자신 메말라 버린 나 자신을 바라보니까 너무나 슬퍼서 지금 울고 있는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
죄를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삶, 자신 속에 죄가 떠올랐을 때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모두 그것과 다투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이렇게 살면 되지 않는데 하면서 사는 불순종의 삶이 모르기 때문에 사는 불순종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면 안되고 내가 이렇게 기도하지 않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떠난 삶을 살고 영혼에 대한 사랑이 식어 가는 마음을 무조건적으로 내가 방치해두고 나면 마지막에 나의 섬김과 신앙에 어떤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알면서도 그렇게 불순종하면 사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몰라서 못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무엇을 가리켜줄 때에도 항상 습관적으로 우리 속에 드는 생각은 그것입니다. '누군 몰라' 그러나 내 마음이 마음 아닙니다. 몰라서가 아닙니다. 번번이 실패하는 이런 실패는 우리 속에 살아있는 십자가의 영성이 없기 때문에 적군은 발견했는데 그것을 끌고 와서 십자가 앞에 대면해 놓고 그 십자가의 빛을 비춰보고 '아 너 나쁜 놈이구나'하며 죽여버려야 하는데 못하는 것입니다.
(예화) 싱가폴에 갔을 때 관광객들이 구렁이를 몸에 감고 사진을 찍더라는 이야기.
그 사람들이 뱀을 그렇게 끌어안고 사진을 찍는 것은 그 뱀에 대한 혐오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경계심도 있었는데 그 사진 찍는 사람이 영업을 위해서 상당히 해소시킨 겁니다. 자기가 뽀뽀도 해보고 볼을 비벼보기도 하고 목에 걸기도 하니까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거기서 신기한 체험을 몇 달러씩 내고 한 번씩 하는 것입니다. 혐오감이 없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아프리카 밀림에 텐트 치고 자다가 그런 구렁이가 목을 조여온다면, 그리고 옆에 칼이 있다면 아무 것도 안 할 수 있겠는가, 찌르다 물려죽는 한이 있어도 소리지 르며 치열하게 싸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피 흘리기까지 죄와 더불어 싸운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주는 죄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 그 죄를 단숨에 머리를 쪼개고 박살나게 만드는 그 힘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입니다.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구원하셨는데 그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내가 어떻게 옛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즉각적으로 그 죄에 대해서 항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를 이긴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죄를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라운 특징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의무감과 놀라운 평화입니다. 의무감이라고 하는 것은 죄를 그렇게 죽인 상태가 되고 나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고 행동해야 한다라고 하는 신령한 의무감이 그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규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의무라고 하는 것을 매우 나쁘게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마음의 경향이 하나님의 참 사랑을 완전히 등지고 의무감으로서만 무엇인가를 행하고 또 의무를 행하면서 거는 기대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좋은 평판이나 그러한 선하게 보이는 행동을 함으로써 얻어질지도 모르는 명예나 이익 같은 것을 기대하면 그것은 외식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이 그 길이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그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한 의무를 행하여야하는 것을 알고 열심히 사는 것은, 우리에게 그러한 의무를 이행하는 삶이 마음을 함께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끔 물질적인 고통 가운데 있는 이웃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성도의 의무는 곤궁함에 처한 사람들을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직접 물질로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이 비록 적을지 모르지만 저 사람을 도와야 할텐데 하는 것은 우리의 양심의 소리이고 의무감에서 우러나오는 그러한 요구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그러한 의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냥 자기만을 위해서 쓰고 먹고 마시면서 인생을 살게 된다면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서 잠깐 불쌍하게 보였던 그 지체의 얼굴은 영원히 의식 속에서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불같은 사랑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저런 어려움에 처한 지체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했는가를 생각하면서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물질로 그를 도와야되겠다는 의무감에서 그것을 순종하고 나면 전에는 가득하지 않았던 예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지체를 향한 사랑이 마음속에서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십시오. 의무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무가 아니면 무엇이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살라고 하시느냐, 내가 교인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까 내 의무가 무엇이냐,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상황, 그리고 내 마음, 내가 처한 이 위치에서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안하고 싶으면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무감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 사람은 제멋대로의 삶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출발할 때부터 우리 자신을 믿지 아니하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우리를 배반하고 우리의 신앙의 발목을 잡게되는 것입니다. 우리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신앙에 있어서 어떠한 승리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깊이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이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는 이러한 놀라운 신령한 의무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청교도들이 가장 좋아했던 단어 가운데 하나가 '의무'라는 단어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섬기면서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되려고 노력을 해야 될 것이고 그렇게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짐승과 같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죽이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과의 약속, 의무, 주님 앞에서 지고있는 신령한 책임, 이런 것들에 대한 큰 부담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죽어도 자기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의무가 성취되기를 원하고, 나의 뜻은 꺾어져도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소원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죄를 죽이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놀랍게 역사 하는 것은 평화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는 죄를 죽인 신자의 삶 속에 나타나는 뚜렷한 표증이고 이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되는 평화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죽인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놀라운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고 순종하는 삶을 살면 물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공식이 성립되지 않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라고 말한 사도 바울은 그렇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철저히 죽어졌기 때문에 이 세상적으로 평탄하고 행복하고 잘 나가는 삶을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고난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죽을 위험에 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며 우겨 쌈을 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날마다 마음이 녹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 몸에 체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사람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그런 고난으로 넘치는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위한 고난이었고 환경에 의해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내적인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나 성경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 다른 인간의 사상을 가지고 인생의 행복을 찾고자 하는 대부분의 많은 현인들과 철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은 눈에 보이는 환경과 상황, 물질의 있고 없음에 우리의 마음이 놀아나는 한 참된 행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파악되고 있는 삶의 법칙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보다 더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환경에 의해서 쉽게 요동치고 쓸데없이 조급해 하고 안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이긴 성도들에게는 심각함이 있지만 마치 커다란 군함이 바다를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죄를 죽이지 못한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는 마치 쪽배 하나를 타고 3-4미터 파도가 치는 바다 위에 던져진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파도가 한 번 치고 나면 배가 뒤집힐 것같이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죄를 이기고 나면 이제는 우리의 인생에 적당한 파도가 밀려와도 흔들리기는 하지만 쉽게 요동하지 않는 커다란 배와 같은 그러한 마음, 그러한 영혼의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자그마한 범선을 타고 큰배에서 육지로 이동하거나 할 때 옆에 큰배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나면 그 물결 때문에 배탄 모든 사람들이 좌우로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랑잎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큰배에 탄 사람들은 웬만한 파도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하늘의 신령한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그마한 환경의 변화에 안달하고 조금만 어려우면 슬퍼서 어쩔 줄 모르고 자기를 가누지 못하고 신앙생활조차도 지탱해나가지 못하는 감정의 기복을 보이는 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진정한 평화에서 오는 평강이 그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죽이지 않기 때문에 평안한 삶을 살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릴 것이고 죄를 지음으로서 누리는 잠시동안의 평화를 위해서 항구적인 평화를 상실한 불안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쁜 도시 생활을 하다보면 견딜 수 없는 두통이 올 때가 있습니다. 고질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더라도 종종 그런 것들을 경험합니다. 두통을 퇴치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빨리 약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머리가 아플 때 약을 먹었었습니다. 약을 먹으면 오 분도 지나지 않아서 신기하게 싹 가십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여건이 허락하면 숲 속으로 들어가서 드라이브를 한다든지 시원한 공기를 마시면서 숲 속의 평상 같은데 누워서 잠시 쉬는 겁니다. 그러고 나면 역시 통증이 가십니다. 그러나 전자의 방법으로 통증을 사라지게 하는데 익숙해지고 나면 중독이 되는 것입니다.
(예화) 직장 다닐 때 매일 와서 감기 약을 먹는 사람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중독된 것 이었습니다. 처음에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고통을 해결하지 않았더라면 약물에 중독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화) 수 십 년 동안 두통 약을 먹고 처참하게 육신이 파괴 되어간 사람 이야기.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평화를 얻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죄에게 항복하면 평화가 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항구적인 평화가 아니라 잠시 평화가 오는 겁니다. 또 하나는 그 죄를 완전히 이겼을 때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지금 후자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어떠한 죄를 지어야되겠다는 마음이 고개를 들 때 죄를 온전히 이긴 상태 혹은 죄에게 완전히 진 상태에서는 죄에 대한 반응이 즉각적입니다. 자기가 죄에게 완전히 져버렸으면 유혹이 떠오를 때 주저하거나 생각을 많이 하지 않는 겁니다. 즉시 그 죄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통제력을 잃어버린 겁니다. 반대로 자기가 죄를 다 죽인 상태가 되었을 때 죄에 대한 유혹이 딱 떠오르면 오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시 '저것은 죄다' 그리고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정서, 지식, 인격,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죄를 향해서 화살을 날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죄가 유혹을 할 때 마음속에서는 그 죄를 짓고 싶은데 자꾸 멈칫 멈칫 하면서 뭔가 망설이는 것은 그래도 은혜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또 죄가 딱 떠올랐을 때 확 죽여버려야겠다는 마음이 강한데 즉시 화살을 날려버리지 못하고 멈칫 멈칫 하고 있는 것은 대체로는 죄를 이겼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는 죄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즉각적이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자의 경우에는 죄에 대한 유혹을 가지고 있는데 은혜가 살아있으니까 짓고자하는 기본적인 마음의 성향은 결정되었는데 은혜가 죄 짓는 것을 자꾸 방해하는 것이고, 후자는 죄를 죽이려고 하는 은혜의 방향은 정해졌는데 또 다른 죄에 대한 욕망들이 그 죄를 즉각 죽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싸움이 특별한 하나님의 개입 없이 오래 지속되게 되면 결국은 죄에게 유리한 쪽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 죄에 대한 욕망이 지배적일 경우에는 결국은 은혜의 방해를 뚫고 범죄를 하고 두 번째 은혜의 성향이 커서 멈칫 멈칫하고 시간을 끌면 결국은 방해하는 죄의 세력이 은혜의 세력보다 커져서 죄와의 싸움을 포기하도록 우리를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범죄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렇게 망설이면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동안에는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완전히 승복하고 죄를 짓고 나면 평화가 몰려오는 겁니다. 잠깐동안 평화가 오는 겁니다. 그러나 마약에서 깨고 나면 더 극심한 고통이 시작되듯이 그런 종류의 평화는 점점 더 극단적인 죄로 나가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이긴 그리스도인들이 소망해야할 바는 죄를 온전히 이김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환경에 의해서 우리들이 요동하지 안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는 이 세상과 찰떡궁합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적당히 나그네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는 자기의 집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그네와 행인과 같고 이 세상은 내가 완전히 정들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으면서 옛 생활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더 이상 내가 옛 생활과 그렇게 즐겁게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을 때, 여러분들이 나그네 된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기 전에 신나게 어울렸던 그 친구들, 오랜만에 다시 만나니까 왠지 낯선 것 같고 그 친구들도 나를 옛날과 같이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모임이 지금은 옛날과는 달리 그렇게 기쁘지가 않게 생각되어서 왠지 소외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기뻐하십시오. 여러분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 없이 살았던 때에 맛보았던 그 즐거움과 쾌락, 그리고 그 분위기, 그 아름다웠던 기억들이 이제는 나의 삶 속에서 다시 재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그네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늘 변하고 변천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러한 환경이 쉽게 흔들 수 없는 진정한 평화가 우리 마음속에 깃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요동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답이 하나 나오지 않습니까?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한 때 그렇게 열렬한 은혜를 받았는데 견고함이 없는가 하는 답이 나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견고함이 없는 것입니까? 죄를 죽이는 삶이 지속적으로 계속되지 않기 때문에 견고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이렇게 견고하지 못한 것은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그 만남의 강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타락했다가 다시 만나면 변화가 올 것처럼 생각하는데 다 소용없는 생각입니다.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돌아와서 옛날보다 더 진한 감격을 맛본다 하더라도 그 감격 하나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죄를 죽이는 지속적인 삶의 실천 없이는 결코 그는 견고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천성이 묵직하고 양반기질을 가지고 있고 본래 듬직한 사람이라서 견고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죄를 죽이는 삶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그런 평화가 사라지고 나면 그 다음에 우리는 동물과 똑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돈 조금 벌면 해해거리고 잃어버리면 울상이 되고 누가 와서 조금 칭찬해주면 주인이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 꼬리를 흔들며 기어오르며 혀를 내미는 강아지처럼 좋아하고 한 대 맞으면 마루 밑에 들어가 끙끙대는 강아지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인생을 살면서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환경이나 재물 사랑, 이 세상의 행복, 늘 뜬구름처럼 떠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이러한 세상적인 것들에 대해서 한 번 웃고 한 번 슬퍼하고 이러면서 일희일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성도들을 향한 기대에 어울리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이긴 그리스도인은 왠지 웅장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들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담대하고 의연합니다. 왜냐하면 평온한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구체적인 감격과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감격이 그들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죄를 죽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삶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자처럼 용맹스러운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훌륭한 도구가 되었던 사람들, 단지 일로만이 도구가 아니라 섬기면 섬길수록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거룩의 흔적을 가졌던 뛰어난 성도들은 모두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단히 내면에 있는 죄를 지적하고 그것들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설교나 하나님의 말씀들을 가르쳐주는 교훈들을 헐떡이는 사슴이 물을 찾는 것처럼 목말라하며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교훈과 가르침, 방법과 친숙해지는 것이야말로 거룩으로 가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신자들은 많은데 성도들은 적다고 말합니다. 아멘 하고 열광하며 믿는 사람들은 꽤 있는데 삶까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어서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다라는 이야깁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지속적인 죄 죽임의 삶이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평화에서 비롯되는 신령한 평강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입술로는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고백하면서 늘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대하시다 라고 말하고 우리의 구원자요 보호자라고 고백하고 찬송하면서도 그는 작은 인생의 파도 앞에서도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삶을 반복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죄를 죽이지 못한 대가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온전히 죽인 삶을 사는 가운데 세상이 맛볼 수 없는 놀라운 평강, 그리고 주님과의 화해가 가져다주는 위대한 평화 속에서 살아가서 가난할 때에나 부할 때에나 높아질 때에나 낮아질 때에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심기지 않으면 그 은혜에 반대되는 죄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일주일동안 세상만을 위해서 살고 한푼이라도 더 벌어서 이다음에 잘먹고 잘 살아야겠다는 욕망에 혈안이 된 사람들을 모아놓고 주일날 하루 "세상을 사랑하지 마십시오"라고 이야기할 때 즉각적으로 순종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에 와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고, 또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에 대해서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그것을 실감나게 많이 듣는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그 사람 마음속에 세상을 향한 사랑이 있어서 그 사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데 어떻게 그를 세상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꿔놓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가능합니까? 반대를 생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만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랫동안 신앙의 연단을 받으면서 죄를 죽이고 신앙에 깊이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그런 것처럼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영광과 영화와 권세를 한 몸에 누리면서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에서 철저히 버림을 받으면서도 주님을 위해서 한 번 멋있게 죽는 것에 대해서 불붙는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을 향한 그 사랑을 단번에 멈추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지금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세상을 사랑하라 주님을 사랑하지 말라" 한 두 번 말하고 협박한다고 해서 주님 사랑하는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칼도 그 사랑을 끊을 수 없었지 않습니까? 사자 밥이 되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어도 그 사랑을 끊을 수 없어서 찬송하며 사람들이 죽어가지 않았습니까? 유리하고 정처 없이 방황하는 나그네요 귀향 가는 신세가 되었어도 그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 수 없었지 않습니까? 불가능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세상사랑이나 주님 사랑이나 종류가 다를 뿐이지 나타나는 모습이 틀릴 뿐이고 심겨진 것이 틀릴 뿐이지 사랑이라고 하는 성향은 똑같은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과 늘 짝하지 않고는 못 배기듯이 주님을 사랑하면 하늘에 계신 주님만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여기 오셔야 합니다. 날 안아 주시고 날 붙드시고 나와 함께 동행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도 사람이 안달하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에 가득 차도 사람이 안달하는 것입니다.
유별나지는 것입니다. 그냥 신앙생활 하면 될텐데도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내가 주님을 더 사랑하는가?' 아닌 것 같은 겁니다. 그래서 회개합니다. '주님 저 타락했습니다. 어제보다 제가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유별나지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지 않고 대충 살아가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무슨 과대망상증에 걸린 것 같습니다. '주님 타락했습니다'하고 울면서 회개하면 '범죄 했구나' 생각합니다. 그랬더니 '주님 타락이 별 것입니까? 어제보다 내가 주님을 덜 사랑하니 타락한 것이 아닙니까?' 옆에 있는 사람은 '쯧쯧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나'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돌았습니다. 미쳤어도 그리스도를 위해 미쳤고 정신이 온전해도 예수를 위해서 정신이 온전한 사람으로 변한 겁니다. 사나 죽으나 자기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미치는 것도 똑같습니다. 그런 사람을 불러다 놓고 "세상 사랑하지마"한다고 해서 엉엉 울면서 세상사랑하지 않고 주님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완전히 코미디입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제가 예화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똥입니다. 더러운 것입니다. 세상의 영화, 부귀와 권세 주님 없이 누리는 모든 행복한 삶, 모두 똥입니다." 그렇게 말할 때 세상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앉아서 '와 그 똥통에 한 번 빠져봤으면 원이 없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모아놓고 세상사랑하지 말라고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디 가든지 폼잡기 좋아하고 교만한 사람에게 "겸손해지십시오. 교만은 패망의 앞잡이입니다." 이야기 해봐야 교만이 얼마나 좋은데 순종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악함, 인간의 죄는 죄 자체를 지탱해봐야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심겨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그렇게 세상을 열렬히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만드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에 미치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상 사랑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도 안 듣다가 세상 사랑하지 않게 되는 비결은 하늘나라 사랑하는 사람들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대접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세상이 대접 안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안사랑 하는 사람은 대접 안 해줍니다. 그러니까 세상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대접 안 해주면 미치는 겁니다. '난 너만 사랑하는데 왜 날 몰라주느냐, 왜 날 자꾸 배신하려고 하느냐'합니다. '네가 뭘 요구하든지 내가 다 버릴 수 있다. 우리 주님도 쉽게 버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나만 사랑해 주면 내가 다 버릴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사람이 세상에서 버림받으면 못 견디는 겁니다.
그런데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 그리고 성도다운 거룩한 삶을 살다가 온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그 지고한 행복, 거기에서 누릴 하나님과의 영화, 거기서 맛보게 될 막힘이 없고 끊어짐이 없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그리워하고, 믿음을 따라 산 사람을 위해서 주어질 영광스러운 상급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세상이 자기를 미워하고 가끔 쥐어박아도 끄떡 안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 죽여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 상급이 기다린다'합니다.
로마시대 때 하도 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믿으니까 로마황제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못 믿게 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보고가 들어오기를" 도저히 안됩니다. 폐하, 계속 믿습니다" "믿지 말라고 법을 만들어라" "폐하, 그 놈들은 우리 나라 법보다 하나님 나라의 법을 더 신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 그러면 불러다가 옥에 가둬라" 그렇게 지시를 하니까 하는 말이 "폐하 제가 그들의 교리를 샅샅이 살펴봤는데 그들은 옥에 갇히거나 두들겨 맞아서 핍박을 받으면 그것이 저 세상에서 더 큰 복락을 얻고 상급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핍박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 그러면 예수 믿는 주동자들을 불러다가 죽여버려라"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폐하 그것은 더더욱 아니 될 말이옵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핍박해서 그들을 죽이는 그 순간 그들은 사형됐다고 말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순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목이 떨어지는 즉시 하나님 나라의 면류관에 별이 달린다고 생각하고 죽는 즉시 주님의 품에 안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폐하, 그들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옵나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하는 가장 커다란 비결은 하나님 나라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을 낮추는 방법은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고 폼잡고 다니는 네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벌레와 같은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깊이 불어넣어 줄 때, 그들은 겸비하게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안일하게 살기 좋아하는 사람들, 그것은 예수 믿어도 잘 안 변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야지만 변합니다. 그런 게으른 사람들이 변화되는 방법은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바꿔놓으면 부지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일하게 살던 사람이 은혜를 받고, 바쁜 직장생활, 분주하기 짝이 없는 가사노동을 하는 중에 주님을 위해서 하루나 이틀을 섬겨야 되는데, 은혜를 받고 그 일을 정말 섬기고 싶다면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으로 바꿔 놓아 버리면 옛날의 모든 나태한 사람은 모두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족하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쓰임 받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예화) 대우조선 노조 운동하던 양동생이라는 사람의 인터뷰 내용- 그가 은혜를 받은 후의 기도제목이 열심이 있는 신학생들은 주님이 쓰시고 열심히 없고 게으른 신 학생들을 굳이 주님께서 쓰려고 하시지 말고 실력은 없고 배운 것은 없지만 자신 을 사용해 주시라는 내용.
주님께서 그 기도를 덜 들어주시니까 다행이지 그 기도 다 들어주시면 정말 게으른 주의 종들은 갈 데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보다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 많습니다. 교회 오랫동안 섬기고 돈 있는 사람들도 많고, 해야할 일들을 아주 잘 처리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서있는 자리가 어떤 때는 우리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는 자리입니다. '주님이 무엇 하러 나 같은 사람을 이 자리에 세워 주셨을까? 주님이 왜 나를 이렇게 문제가 많은 삶의 자리에 서게 해 주셨을까? 주님이 왜 아무도 지지 않는 십자가를 내 가정에서 혹은 내 직장에서 혹은 교회에서 지게 만들어 주셨을까? 아무리 봐도 나는 여기에 적합하지 않은데 왜 하나님이 이런 사명 감당해 나가라고 내게 이 멍에를 매어주셨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말 충성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삶이 우리의 안일하고 나태한 삶을 모두 앗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 마지막 이 부분에서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진리를 하나 입증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어떤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죄와 싸우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그 죄를 대적하게 하는 성령의 은혜가 심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패한 사람들은 그들이 순결하게 살아가는 삶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 알기까지 부패한 삶을 청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태한 사람들은 충성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놀라운 기쁨과 감격을 알기 전까지는 나태한 삶의 즐거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죄와 싸우고 한편으로는 그 죄를 대적하게 하는 성령의 은혜가 우리에게 심겨지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이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는 바로 이런 것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죄를 완전히 죽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속에 살아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남아있어 봐야 문제가 안됩니다.
(예화) 서울에 많으면 오 천명 정도의 간첩이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이 나라는 대한 민국 주권이 지배하기 때문에 간첩이 있어도 고개를 못 든다는 이야기.
죄가 우리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어봤자 소용이 없고 고개를 들면 즉시 저격 당한다는 사실을 아는 동안에는 우리 속에 잠복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도 죽을 리가 없고 환영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는 여기저기서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우리의 삶은 정욕으로 치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심겨져야지만 죄를 죽이는 삶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늘 죄를 빈번히 이기는 삶이 되기 위해서 이렇게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뿌리뽑혀지는 삶이 되도록 우리는 쉬지 않고 주 앞에 구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늘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러한 설교를 듣기만 하고 여러분 삶에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불행한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 거울을 들여다보고 우리 얼굴에 뭔가 더러운 것들이 묻은 줄 알았으면 즉시 그것을 지워버리고 씻어버려서 새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지금 18번째 죄 죽임의 교리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이 말씀에 대해서 반응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고민하고 결국은 나 스스로는 죄와 더불어 싸워서 이길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몸부림치며 죄와 더불어 싸우지만 끊임없이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해야된다'는 사실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만큼 죄를 이기게 만들어주십니다. 그 이상도 아니 행하시고 그 이하도 아니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이길 놀라운 약속이 우리에게 있어도 우리들이 성령을 의지해서 지속적으로 죄를 죽이는 그런 거룩한 투쟁,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죄 죽임에 대해서 듣고 죄의 위험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달을 뿐, 그것들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킬 힘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약병에 붙은 해골의 표시를 보면서도 약을 먹는 것과 같고 약물을 남용하면 마지막에 어떠한 결과가 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잠시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 약을 지속적으로 복용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돌이키는 일이 필요하고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심겨져서 우리의 죄를 철저히 멸해서 끊임없이 우리의 삶 속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안팎의 죄들을 능히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19. 영적 회복의 길(6):철저한 회심이 필요하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使徒)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聖靈)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7-38)
오늘부터 몇 시간에 걸쳐서 죄 죽임이 신자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원리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첫 시간인 오늘은 죄를 죽이기 전에 먼저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설교를 듣게 되면 왜 교회 안에 그토록 거듭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왜 거듭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신자인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지에 대해서 해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과거에 해당되었던 분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분명히 지금 현재 이 말씀에 해당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만약에 직접적으로 해당된다면 여러분들은 즉시 오늘의 이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들 영혼의 위험한 상태를 보고 돌이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2장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일어나는 사도들의 설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장면은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후에 유대인 동족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때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사도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두 가지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첫째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과 특히 사도들은 매우 특별한 하늘의 영적인 권세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상징적인 사건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모여서 기도하던 그 사람들 위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는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이 신령한 천국의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되어서 병마를 제압하고 귀신을 꺾는 그런 놀라운 권세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 중의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하시고 그들에게 병을 고치는 권세와 약한 것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때에도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지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그 강도나 포괄적인 성격에 있어서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 살아 생전에 경험했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굉장히 커다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비로소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성령께서 역사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구원의 사건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교를 통해서 적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큰 권능이 임했고 그 영적인 권능을 가지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병든 자를 고치기도 했습니다. 또 한가지 성령강림 사건이 사도들에게 가져다 준 놀라운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다시 말하면 복음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참 답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도 기억하고 있었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는 것도 다 목격했고 그분이 죽으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도 알았습니다. 왜냐면 주님을 만났습니다. 보았습니다. 함께 식사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기들만 남겨두고 떠나가셨습니다. 그들은 하나하나는 다 진실 되고 맞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연결되고 남아있는 자신들은 뭘 해야되는지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그 말씀도 물론 이해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사도들이 뭘 하러 갔습니까?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고기 잡는 것밖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활도 진실이었고 십자가의 죽음도 진실이었고 예수님의 사랑도 놀라왔는데 자기들이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모른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이 사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 지를 분명히 깨닫게 만들어주는 복음의 놀라운 감격을 체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구약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죽 깨달았던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이 그 구약을 해석해 주셨던 것, 모든 것들을 배웠지만 모든 것들이 희미하고 서로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랬다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성령이 그들에게 충만하게 임하고 나니까 그들의 영적인 눈이 뜨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놀랍게도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구원 받아야할 백성이라는 것과 그리고 단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내는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계획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셨는데, 그것은 바로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이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이 세상의 인류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제일 먼저 찾아간 것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외친 메시지의 중심은 '너희들이 나무에 매달아 십자가에 못박은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메시아이시고 바로 구약 때부터 그렇게 오래도록 우리의 조상들이 목메게 그리워하던 그 하나님의 구원자,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바로 너희가 나무에 못박아 죽인 그 그리스도 예수시다'고 외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모두 듣던 이 강퍅한 유대인들의 마음이 녹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가슴을 치면서 '우리가 어찌해야할꼬'하며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아 죽인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 자기들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신들의 죄가 아직까지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데서 오는 통탄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때 사도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래 너희는 죄를 죽여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 죄를 죽이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했던 것처럼 사람들을 미워하는 그 죄를 죽여라"고 가르치지를 않았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우리들은 죄 죽임의 교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도 베드로는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될 것을 강조했습니다.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하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를 죽이기 전에 먼저 우리가 거듭났는지를 확인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거듭나지 아니하였다면 그는 죄와 더불어 싸울 수는 있으나 죄를 죽일 수도 없고, 거듭나지 않은 채 죄와의 싸움을 하면 할수록 그는 참된 신앙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왜 이렇게 교회 안에는 신자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을까?' 다시 말하면 교회에 나와서 오래도록 교회의 분위기에 젖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문제는 구원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백성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그런 구원이 있습니까? 구원받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고,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고 불순종하고 죄악된 길로 걸어가서 하나님께 커다란 징계를 받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자기가 잘못했다는 참회도 없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없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우리가 아이를 낳았다 칩시다. 태어나는 즉시 아이들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예화) 방금 태어난 둘째 아이에게 우유 꼭지를 물리니까 빨더라는 이야기.
태어난 아이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이를 낳는데 숨도 안 쉬고 울지도 않는다면 사산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죽어있지 않고 살아있어서 태어났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태어났으면 꼼지락거릴 것 아닙니까? 죄를 지었으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음 아파할 것이고 하나님 앞에 혼나면 잘못했다고 울면서 빌 것이고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감격할 것 아닙니까? 주님이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면 형언할 수 없는 감사함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 안에는 제가 말씀드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년 이년 삼 년이 지나도 한 번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 사랑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교회에 나와도 나오는 그 동기 자체가 주님께 순종하며 살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예전에도 다녔으니까, 아니면 부모님 잔소리하는 것 싫어서, 아이들 등살에 못 배겨서, 혹은 남편 때문에 혹은 아내 때문에 교회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나는 목회자의 양심으로 단언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천국에 가면 교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교회에서 보던 사람 가운데 반도 발견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닌데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스스로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해서 거듭난다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넓게 보면 회심인데 그 회심이 무엇이냐 하면 두 가지로 구성되는데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절망하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받도록 철저히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한 두 가지의 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소망이 없는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회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와 믿음,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을 향해서 회심하는 것입니다. 그런 회심 없이 구원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문제를 자꾸 덮어두려고만 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얘기 해봅시다. 여러분 교회에 이렇게 나오는데 이중에도 거듭나지 않은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제 마음의 고통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거듭나지 못하고 교회에 계속 나와서 신앙생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 다니다가 지옥 가는 겁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열심 있는 샐러리맨은 40대 중반의 나이에 과로로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 그 수첩을 보니까 일년 뒤 스케줄까지 빽빽하게 계획되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습관으로 사는 것입니다. 작년에 내년에는... 했더니 올해 살아있더라는 겁니다. 그저께 내일, 했더니 어제 살아있더라는 얘깁니다. 어저께 내일... 그러니까 오늘 살아있다는 얘깁니다. 이것이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그 기대가 끝날 수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 어쩌면 내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 인생을 막 내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로 태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증언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그가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나와도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깊이 회개하고 자기가 살아가던 삶의 길에서 돌이켜 서고 새로운 믿음을 가지고 살지 아니하면, 그리고 새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그는 아무리 교회에 나왔어도 슬피 울며 악마들에게 지옥으로 끌려가고 말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우습습니까?
일평생 교회를 떠난 적이 없는데 성경 찬송을 들고 꾸준히 나와서 매주 거르지 않고 연보도 하고 교회봉사도 했는데 마지막에 뒤집어 보니까'회심한 사람이 아니더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목 앞에 하나님의 칼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이 한숨에 내리쳐서 그 목을 떨어지게 할 수도 있지만 혹시라도 이 죄인이 회개할 날이 있을까 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처형을 연장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 호주에 갔다가 오늘 새벽에 도착했습니다. 정말 좋은 나라였습니다. 도시 전체가 공원이고 하늘도 맑고 바다도 파랗고 인공이라는 것 없이 다 자연산 이었습니다. 미국이건 캐나다이건 호주이건 거기 사는 한국사람들 만나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것이 자연경관입니다. 한국에서 미국 건너간지 6개월도 되지 않는 사람이 " 목사님, 그런 서울에서 어떻게 사십니까?" 저는 "괜찮아" 합니다. 자기 나라도 아니고 자기 땅 한 평도 없으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합니다. 처음에는 찬송할 자연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하여 감동적이었습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그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짙어졌습니다. 그런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아주 여유가 있게 살아가니까 우리처럼 이렇게 시끄럽고 강퍅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사실 무서운 나라거든요. 공중전화 걸다가 뒤에 젊은 아이들 있으면 얼른 내려놓고 "먼저 거시죠" 공중전화 오래 건다고 맞아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주차도 세우지 말라고 하면 빨리 딴 데로 가야합니다. 주차 때문에 싸우다가 때려죽인 이야기가 신문에 여러 번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음식점에 가서도 "빨리 가져와. 빨리 가져와" 그런데 거기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하면서 정말 잘 삽니다. 사람들이 부드럽습니다. 사람들 자체가 관광 자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부족한 것 없이 편안한 자연 환경 속에서 육체만 편한 것이 아니라 영혼도 편한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썩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역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이민 와서 목회 하는 것은 꼭 시골 들어가서 목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시골에 가면 경쟁도 없으니까 자연 속에서 많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많이 성경 읽고 책 많이 보고 신령해 질 수 있을 것이다 해서 시골에 들어갔는데 그런 결심을 하고 들어가서 5년이 지난 후 어느 날 하나님께서 자기 모습을 보여주시는데 족대 들고 고기나 잡으러 다니고 닭이나 치고 친구들이나 만나서 보신탕이나 먹고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자연환경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사람이 아니면 그런 좋은 조건도 타락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기가 들었습니다. '너희들은 공기 좋은데서 잘 산다 치자. 나는 공해 먹으면서 방배동에서 산다. 차이가 무엇이냐' 죽고 나면 그들은 나보다 송장의 때깔이 고울 것입니다. 어차피 땅에 묻히거나 화장되어 버릴텐데. 거듭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번영과 성공을 그리워하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생명과 관계없고 구원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좋은 환경에서 잘 먹고 편안하게 살면 때깔 고운 송장이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분바르고 화장하고 우유로 온 몸에 쳐 바르면 뽀얀 송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인생의 목표입니까? 물론 송장 때깔 더럽게 만드는 것이 인생의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 죽어있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입니다.
자매들에게 묻겠습니다. 가을이 오니까 이제 결혼의 계절입니다. 미남 형제가 있습니다. 돈도 많고 가문도 훌륭하고 공부도 많이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설마 "그래도 얼굴이 예쁘다면서요"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막 살다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나, 속으로는 시커먼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도 안 돌리고 하나님 믿지도 않으면서 겉으로 주일에만 덜렁 나와서 예배 한 번 드리고 헌금이나 몇 푼 집어넣고 그렇게 다니는 신앙 생활을 하다가 죽나, 후자가 전자보다 고상한 인생입니까? 다 희망이 없습니다.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렇게 감격적으로 사랑 장을 쓴 사람이 16장에 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사도가 저주 안 해도 원래 저주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겠으며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구원해 주신 구주임을 알고 그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뛰어난 사람이 된다면 그것 뭐합니까? 잠시 영혼이 거처하는 그 집을 아름답게 단장하고 그 집안에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고래등같은 기와집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이나 서너 평도 되지 않는 지하실 골방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이나 죽어서 12시간 지나면 썩은 냄새 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심각하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거듭나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지금 죽으면 정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성도들이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신 있습니까? 자신 있다고 해서 모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선 여러분들의 생각이라도 '아멘, 나는 하나님의 자녀야. 내가 하나님 떠나서 어떻게 살겠어. 주님이 죽었던 내 영혼을 살려주셨어' 하는 구원의 고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모두 인생 헛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나와서 여러분들의 귀를 아름답게 하는 수많은 설교를 들을지라도 여러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시체에 아무리 분바르고 화장을 예쁘게 하고 눈썹을 그린다고 해서 거기 와서 입맞출 정신 나간 여자는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화장을 해도 코로 흐르는 송장의 물을 보면서 입맞출 사람이 있겠습니까? 거듭나지 못하고 기독교인인 것처럼 행세를 하고 살아가는 그러면서도 자기의 영혼에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위험에 대해서 눈뜨고 있지 못한 가련한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재주를 피우고 여러분들이 아무리 좋고 선한 행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재롱을 부려도 주님은 여러분들에게 와서 입맞추지 않습니다. 거듭나기 전까지는.
생각을 해보십시오. 사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고 공부를 할 때에 매달리면서 곰곰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 번 이 인생이라는 사업이 어떻게 될 것이고 이 사업을 움직이고 있는 내 영혼이 이렇게 살면 마지막에 어떤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말하기를 천국에 가면 정문에는 '아무나 오라'고 쓰여있답니다. 들어가 보면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은 자들이 들어온 곳'이라고 쓰여있답니다. 지옥에는 어떻게 써있을까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오는 곳' 들어가 보면 뒤에 틀림없이 '생각하기 싫어한 사람들이 온 곳' 거기가 지옥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거듭나지 못했다면 지금 이 시간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골몰해하고 있는 일들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일들이 아닙니다. 돈 몇 푼을 벌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명예가 올라가고 내려가고 오늘 즐거운 일이 있고 내일 신나는 일이 있는 이런 인생의 계획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최고로 중요한 일은 '내가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나?'입니다. '나는 구원받았는가?' '이렇게 계속 살면 내 인생의 마지막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것이고 이것에 대한 대답이 없이는 나머지 모든 생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늘 제가 드리는 이 말씀이 하나님을 향하여 회심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은 이제 여러분들이 비록 멸망당한다고 할지라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정확한 여러분 영혼의 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인심을 얻기 위해서 좋은 말로 구슬리거나 아니면 여러분들을 하찮게 여기면서 가혹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가도 되는 것인가?' '여태껏 살아온 대로 계속 살면 내 인생은 마지막에 어떻게 될 것인가?' 돈 십 만원 투자를 할 때에도 이것을 투자하면 나중에 어떻게 돌아올 것인가를 생각하는데 그토록 오래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자기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반 이상은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갔을 때 자기의 이름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쓸데없는 것들에 대한 인생의 관심을 잠시 멈춰야 됩니다. 그리고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인 자신 영혼의 운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것도 두 가지 방법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형벌을 받기로 되어있는 사람의 머리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오겠습니까?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이상한 사상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 오 년 전에 캐나다에 갔는데 옆자리에 젊은 아가씨가 탔습니다. 좁은 자리에 앉아서 가는데 얼마나 오래 갑니까? 성경도 보고 기도도 하고 가다가 힐끗 쳐다보니 노트에 새까맣게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는 왜 이럴까?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이 밉다......' 저는 처음에 크리스천인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섹스교 수련회 가는 길이랍니다. 인생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고뇌한 결과 여름방학 이용해서 그런 수련회 가는 겁니다. 영혼 팔아먹는 것 아닙니까? 죄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하니까 입을 삐쭉 내밀었습니다. 죄인이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서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정답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정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와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 되려면 내가 이렇게 예수를 믿고 거듭나지 않은 채 살다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내가 누구이며 내 영혼의 상태는 어떠하며 이렇게 계속 살아갈 때 미래에는 어떤 일들이 나에게 일어날까 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의 답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이 귀를 기울이기에 너무 고리타분한 책이면 여러분들은 구원받기에 너무나 후진 영혼들입니다. 생각을 하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들려주는 사람의 목소리도 희미하고 들으려고 하는 마음도 희미하면 예수 믿는 분위기에 휩싸여 살다가 손잡고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우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참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나 같은 인간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가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이 어떻게 해야지만 하나님 앞에 살 길이 있는가? 내가 이대로 계속 거듭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왜 커다란 문제인가?'에 대해서 성경으로부터 들려오는 답을 들을 때에 '내가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인이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내가 한 두 가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내 인간 그 자체가 죄를 만들어내는 기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없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이고 그 진노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복음을 들으면서 이렇게 범죄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을 주님은 하나님의 진노로 심판하실 것이지만 도망갈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분이 바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분께로 피하는 것 말고는 인생에 희망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이 회심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그렇게 회심하고 거듭나는 사람들 속에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은혜가 우리 속에 있게 됩니다. 그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길 힘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놀라운 힘이 되어서 성령의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면 그 기도가 큰 능력이 되어서 이길 수 없었던 죄를 이길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회심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살아있는 아이에게는 우유와 밥과 고기를 주면 점점 걷게 되지만 죽어있는 아이의 입에다 먹을 것을 집어넣어 봐야 함께 썩고 마는 것처럼, 그의 영혼을 다시 살리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차드 백스터는 말하기를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할 일은 오직 하나 정직하고 진실한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가서 무릎꿇고 그것을 듣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시름이나 달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한대서 비롯되는 인생의 곤고함과 영혼의 고통을 한잔 술로 시름이나 달래고 바람이나 쐐서 달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그는 영원히 회심하지 못합니다. 그는 진노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님이 주시는 기회를 까먹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커다란 함정이 하나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은 참된 신자들의 죄를 죽이는 것을 흉내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영적입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짐으로서, 즉 회심을 통해서 구원을 받아서 거듭나고 죽었던 생명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살아나니까 그 다음에는 말씀을 먹고 기도를 하고 은혜를 받으면서 영혼이 계속 살아나면 그 살아있는 영혼이 우리의 인생을 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적하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모욕하던 사람들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돈밖에 모르고 미친 듯이 살던 사람들이 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섬기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밖에 모르며 살던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위해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로 변하며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안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고 주님만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구원받고 성령이 마음속에 오시는 영적인 새 생명의 역사가 안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가만히 들으니까 '죄 지으면 안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일 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 안 믿는 사람도 안 그러는데 하나님 믿는 사람이 이러면 되겠습니까?' 하는 설교가 들립니다. 그러니까 '아 그렇구나 이제는 이런 것 하지 말아야지' 그래서 안 하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모순입니다. 죄 죽임의 교리를 시작하는 초반부에는 오직 성령으로서만 죄를 죽일 수 있다고 했는데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죄와 싸울 수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죽이는 것은 못하는데 싸우는 것은 합니다. 만일 그것도 못한다면 이 세상은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어날 것입니다. 교통법규는 성령 충만한 사람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깡패도 지킵니다.
물론 어기는 사람도 있지만, 안식교에서 운영하는 금연학교가 있습니다. 담배 골초들을 데려다가 일주일만에 담배를 못 피우게 만드는 것입니다. 때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자마자 흡연이 가져오는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슬라이드를 보여줍니다. 건강한 사람의 폐는 발그레한 선홍빛입니다. 그런데 10년 20년 담배 피운 사람들은 폐는 간장에 장아찌 담은 것처럼 시커멓습니다. 그리고 끈적끈적한 니코틴이 폐에 잔뜩 묻어있습니다. 거기에서 발암물질이 혈관 속으로 들어가 암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어 가는 광경까지를 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담배를 보게 되면 그 생각이 나서 안 피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95%가 치유가 됩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기도해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겁을 주는 것입니다. 도둑질하며 살던 사람들, 예수 안 믿어도 그만두게 할 수 있습니다. 도둑질 한 사람들 하나씩 불러다가 광화문 네거리에서 모든 사람들 볼 수 있게 중계방송하고 몇 사람만 능지처참하면 성령 충만 안 해도 그 죄를 못 저지릅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죄와 싸우는 그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평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지가 멀쩡한데 돌아다니면서 구걸해서 먹는 것도 일종의 범죄입니다. 성경에 위배됩니다.
(예화) 교회에 찾아오는 구걸하는 사람들 이야기.
(예화) 책을 날라주고 만원을 받아가며 기뻐하던 아저씨 이야기.
거듭나지 못했어도 죄와 씨름할 수도 있고 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기는 것은 어렵고 죽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은혜로 죄를 죽여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자신의 영혼이 깨어지면서 영혼에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변화가 안 일어나면 신앙생활에서 마지막 남는 것은 윤리입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안 믿을 때 하던 일을 안 하게 됩니다. 술 먹던 것도 끊고 고스톱 치던 것도 끊고 하나씩 둘씩 나쁜 짓들을 끊습니다. 그리고 감격하여 눈물 흘리고 깨지는 지체들의 고쳐지지 않은 행실을 보면서 '여전히 담배 피우네. 난 안 피우는데. 네가 감격해봐야 네가 한 게 뭐 있냐. 나 봐라 나는 예수 믿고 나서 이것도 안하고 저것도 안 한다. 그리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한다' 하는 생각이 계속 쌓이면서 마음에 평화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평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해되었기 때문에 오는 평화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하루종일 낮에 드러누워 만화책이나 보고 TV나 보고 술 먹고 하다가 하루를 보내고 나면 저녁 때 허무한 것과 같습니다. 술 먹은 다음날 후회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가 가져오는 끔찍한 결과나 선한 의지를 통해서 어떤 것들을 안 행할 때 마음속에 평화가 어느 정도는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평화가 하나님과 화목 되었기 때문에 오는 평화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결론은 그 사람이 느끼고 있는 그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상관이 없이 찾아온 평화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과의 평화는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정말 존경스럽지만 그러한 평화에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이 정도만 되어도 나는 상당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의식을 계속 갖으며 성실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들쑥 날쑥한 것은 죄 때문에 그런 것인데 하나씩 죄와 싸우면서 나름대로 정리를 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한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성실과 인내로 신앙생활 하는 겁니다. 은혜 받아서 좋은 사람된 것이 아니라 원래 바탕이 호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헌금을 팍팍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기마이를 팍팍 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볼 때에는 그게 그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신앙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점점 강퍅하게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못 견디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분의 십자가를 보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설교를 못 견디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 산 것은 아무 공로 없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그 거룩한 보혈만이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할 때, 자기는 그 예수와 관계가 없고 오직 자기에게 자랑거리가 있다면 이것도 안하고 저것도 안하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도덕적인 생활밖에 없는데, 그것이 지푸라기와 같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니까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설 땅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허공 중에 매달려있는 사람의 발판을 흔드는데 가만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가장 신앙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거듭나지 못하고 가장 신앙인 같은 사람으로 바뀌어 가면서 마음이 강퍅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설교가 확 울려 퍼지면 인간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자기 의를 쌓고 살아온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대적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반듯하고 윤리적인 생활을 하면서 타고난 성실성과 인내로 교회에 나올지는 모르지만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에 영혼의 감격이 없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기쁨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큰사랑을 입은 사람인가에 대한 감격도 없고, 나의 죄로 말미암아 주님을 마음 아프게 해드렸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가슴 찢는 참회도 없습니다. 눈물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묻어서 꾸준히 교회 생활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잘못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파멸시키는 공식이 하나 성립하는데 처음에는 속이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을 강퍅하게 합니다. 그 다음에는 파괴해버립니다. 하나두개에서는 죄와 싸워서 어느 정도는 승리를 거두는데 근본적으로 죄를 죽이게 만드는 성령의 임재하심이 그 속에 없기 때문에 그는 죄를 결박하고 죽일 수 없습니다. 마귀의 입장에서는 그가 아무리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만 안 하면 참을 만 합니다. 거듭나서 구원받는 성도가 되어서 하늘의 신령한 영적인 능력을 공급받는 사람만 안되면 할만하니까 참아줍니다.
저는 목회를 하거나 많은 영혼들을 만나면서 이런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거듭나지 못했음에도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채 대접을 받으면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교회에 대한 우정을 가지고 있고 교회에 헌금도 하고 사람들과 함께 교회 속에서 어울리며 살아서 교회를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보이지 않는 교회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의 운명은 어떤지 오늘 이 시간에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의 가장 본질적이 문제를 향해서 관심을 갖고 마음을 기울여야지 변화가 일어날텐데, 생각하기 싫어하고 도무지 영혼의 운명과 처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인생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일과 더불어 골머리 씨름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징계하실 수도 있고 실패 가운데 두실 수도 있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잃어버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들이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시려고 합니까? 이제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영혼의 위기를 보고 있습니까? 거듭나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내가 이 위험한 영혼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직접 물어보십시오. '하나님 내 영혼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고 주님이 내 영혼을 향해서 지금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내가 듣고싶습니다. 알게 해 주십시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미 거듭났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오늘 이 사실을 통해서 하나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죄와의 싸움은 원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싸움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금 죄와의 싸움을 들으면서 그 죄를 죽이는 일들이 너무나 힘겹다고 느껴지는 것은, 여러분들이 거듭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길 수 있는 성령을 여러분 속에 주셨는데 불순종하며 죄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은혜는 약화되었고 죄가 기승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죄가 훨씬 우월한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은혜생활을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항상 죄에게 지고 죄를 이기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테이블 밑으로는 죄와 더불어 뒷거래를 합니다.
이러한 비참한 실패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여러분들이 죄를 죽일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주신 은혜의 성령이 풍성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안에서 살아 계실 수 있도록 죄를 회개하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신앙의 지름길이 있다고 가르쳐주면 여러분들은 그를 지목해서 만나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사귀지도 마십시오. 거기에는 지름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존경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철저하게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을 거듭나도록 외치고 부르짖었으며, 거듭난 성도들은 죄를 이길 수 있는 자신 속의 성령의 은혜가 약화될까봐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자신의 영혼을 간수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 죄 죽임의 실천적인 지침(1)
-총론1:총체적인 순종이 필요하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저는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뚜렷한 회심 없이는 그 누구도 죄를 죽이는 삶에 도달 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를 죽이는 삶이 없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의 평화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마음 가운데 계실 때에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와 십자가에 사랑에 대한 감동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마치 수원지 없는 물길과 같은 것입니다.
예배당에 이사와서 우리는 어제 여러 시간동안 물이 나오지 않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얼마나 잠시 동안이지만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옥상에 가면은 커다란 탱크가 물통이 3개인가 4개가 있는데 거기 가득 찬 물이 이 빌딩 곳곳에 수도꼭지를 통해서 공급이 되는데 흘러나오는 물보다 더 많은 양을 아래에서 청소하느냐고 막 써 버린 것입니다. 2틀 동안. 그랬더니 물이 물통으로 떨어지는 물이 있긴 있지만 가득 차지 않으니까 아래에서 단수가 되는 거죠. 여러분들이 다 가고 나서 다시 탱크에 물이 고이니까 다시 수도꼭지를 여니까 물이 다시 꽐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거기에서 비롯되는 참된 하나님과의 사랑 거기에 대한 놀라운 십자가의 감격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된다 이거지요. 공급되는 것 없이는 우리는 결코 흘려 보낼 수 없고 채워지는 힘 없이는 우리는 결코 능력 있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죄는 마치 심장을 통해서 흐르고 있는 피를 막고있는 노폐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들이 잔득 쌓이게 되면은 순식간에 혈액 순환에 문제를 일으켜서 쇼크사를 하거나 중풍이 걸리거나 반신불수가 되거나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될 것은 죄를 죽이는 진지한 신앙생활 없이는 여러분들은 전혀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 죽임이 없는 안일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가 예수 믿으나 마나한 삶을 살게 만들 것이며 열심히 신앙생활 할수록 그 열심은 빗나간 열심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죄를 죽이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총체적인 순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단어에 익숙해지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총체적인 순종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명령 중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 원하는 것 몇 가지를 선택해서 순종하려고 애를 쓰는 그러한 삶으로써는 죄 죽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총체적인 순종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모든 것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순종해야 되겠다고 하는 의지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그는 결코 죄 죽임에 도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형제 한 분은 공직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불행 이도 그는 공금에 손을 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단위가 작았지만 점차 커지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씀씀이가 헤퍼지면서 생활이 화려해 졌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분에게 금목걸이를 선물하고 시계를 사주고 그러는 어리석은 일들을 하게 됐습니다. 아직 아무도 그의 비리를 캐내기 못했고 경찰서로부터 소환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까이 있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자기에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벌받지도 않았고 누구도 그에게 아직 책임을 추궁하지도 않고 죄는 은폐되었는데도 그는 이미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돈이 많고 좋은 집 좋은 차 정상적인 삶을 살았더라면 누릴 수 없었던 영화를 누리면서도 그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그것이 기쁘기보다는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화를 잃어버렸고 그 마음에는 예전에 가난하게 도시락 싸들고 직장을 출근하면서 아무리 다리가 아프고 불편해도 택시 탈 엄두를 내지 못하던 가난하던 생활을 그리워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지난번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 혹시 이런 의문을 품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거듭나지 않고도 싸울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싸울 수 있다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 사람과 같은 경우를 우리는 우리 주의에서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죄는 그들의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가 버렸고 잠시의 쾌락과 영화를 위해서 유혹에 넘어져 범죄한 자신의 실패는 즉시 커다란 고통으로 가다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철저히 자기가 그런 나쁜 짖을 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그가 만약에 빠른 시일 내에 그 죄를 용서받고 다시 한번 공직을 담당하게 된다면 아마 그는 죄가 가져다주는 그 끔찍한 고통과 불안 때문에 아마도 그러한 범죄를 쉽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의 역사 없이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죄와 더불어 씨름 할 수 있고 그리고 그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반적인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일반적인 은총을 주셔서 이 도시로 하여금 어느 정도 양심을 유지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조절하시지 않으신다면 아마 이 세상은 생지옥과 같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싱가폴에 갔을 때 바로 거기서 배타고 30분 거리에 인도네시아가 있었고 그때도 아직 소요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갔다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은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제일먼저 털린 것이 은행이었다고 합니다. 길거리에 서있는 현금 인출기는 즉시 박살이 났고 모든 돈들은 강탈당했으며 은행의 벽에는 구멍이 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한 순간에 돌변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법과 양심과 사회적인 제도들이 그들로 하여금 마음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식의 삶을 살수 없도록 억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죄와 더불어서 싸울 수 있고 그리고 죄를 절제 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러나 죄를 이기는 것은 불가는 하다 이겁니다.
6.25때 우리는 종종 전방에 가면 죽기까지 자기에게 맡겨진 그 위치를 고수하던 승리한 병사들의 무용담이 새겨져있는 전적비들을 보게 됩니다. 강원도 지역에서 끝까지 쳐내려 오는 공산군을 향하고 자기가 맡은 지역을 사수했지만 주위에 있는 모든 부대들이 후퇴하면서 고립이 되어버린 부대들을 여럿 기억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어느 한쪽인 면에서는 죄에 대해서 어느 정도 투쟁하고 이긴 것 같았지만 총체적인 삶이 이긴 것이 아니면 그것은 이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아주 가슴에 와 닿는 실패를 이스라엘 백성들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나와있는 어떠한 명령에 대해서는 병적일 정도로 집착하면서 그 명령을 준수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특별히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 같은 것들은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그 수준을 뛰어 넘어서 그래서 그것을 향하여 인간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규례들 까지 다 지키는 철저함을 보였습니다. 어떤 규례에 대해서는 그들이 그렇게 철저함을 보여서 그 부분에 있어서는 범죄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성일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는 그 일에 있어서는 그들이 남다른 열심과 헌신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볼 때 그 계명들은 준수했습니다. 그러나 그 계명은 준수했지만 다른 계명들은 실패했기 때문에 결국은 그 계명을 지킨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이런 것입니다. 안식일과 절기 이런 것들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는 철저할 정도의 열심을 보였고 외관상 그것들을 범죄 하는 일은 그것들에 있어서 철저히 배척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인 의로움, 신실함, 진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런 것들은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모두 패배하고 그런 계명들은 준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결국은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절기를 지킨 것도 결국에 가서는 자기를 자랑하는 한 방편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그랬으니까 그것은 결국 한가지 죄는 이긴 것 같았지만 더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들을 향해서 역사하고 있는 죄에게 패배하고 나니까 계명을 지키고 한가지 죄를 이긴 것 같은 그 이긴 것이 진정한 승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으면서 주님의 가르침을 대할 때 자기가 좋아하는 어는 가르침에 대해서 그것만 철저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진정한 죄 죽임의 정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항상 근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게으른 사람들은 참아 눈뜨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잠언을 읽다가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배울 지어다”라는 성경을 읽을 때 얼마나 가슴이 뛸까요? 왜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비난하고 게으른 사람들을 향해서 자기의 의를 높일 수 있는 근거를 성경에서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은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에 준수하는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총체적인 순종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내가 지키면서 사는 것이 내 인생에 진정한 기쁨이고 그리고 그 주님의 진실한 사랑 앞에서 내가 이러이러한 죄가 잘못 됐다는 사실을 깊게 깨닫고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것이 죄 죽임의 출발이라 이겁니다.
가슴에 와 닿는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단지 양심의 가책만을 받고 있다면 그래서 회개를 한다면 여러분들이 회개 할 때 찾아와서 형제 왜 그렇게 안타깝게 회개를 하느냐? 물어보면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왜 죄인이냐 그렇게 말하면 ‘나 공금 횡령했어’ 아니면 ‘성적인 범죄를 했어’ 아니면 ‘누구를 죽였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다른 경우를 예를 들어봅시다. 어느 날 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참된 복음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고 그 창조주로서 얼마나 그분이 영광이 뛰어나신 분이시며 우리는 그분 앞에서 얼마나 초라하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죄인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자기에게 주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강물과 같이 영혼 속에 밀려들어오게 되었고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솟구치는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울며 회계하게 되었습니다. 주위의 사람 아랑곳하지 않고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한없이 통곡하며 회계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형제 왜 그렇게 울고 있어?” 라고 말할 때 “나는 죄인입니다. 뭘 잘못했는데”라고 물을 때 그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노라고 정확하게 집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가 무엇을 잘못했노라고 정확하게 집어서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제가 보기에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그는 깊이 회개하면서도 한가지 한가지의 죄가 생각이 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저 비참한 죄인에 불구 하다는 처절한 죄인의 인식만이 그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자신이 죄악덩어리일 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한가지 죄가 무엇인가를 데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한가지 죄를 지적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죄악의 덩어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바로 참되게 회심한 사람의 자기 인식입니다. 그것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깊이 회개하는 것 그것과 한 두 가지 죄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다르지 않느냐 이것입니다. 총체적인 순종 없이는 우리는 결코 죄를 이기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약점 말고 다른 사람에게는 비교적 없는 여러분의 고유한 약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속에 있는 교만해지기 쉬운 성품일 수도 있고, 게으름에 빠지기 쉬운 성품일 수도 있고, 물질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연약함 일수도 있고, 또 명예에 대해서 매우 약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적인 유혹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허약한 그런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결점을 즉시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은 타고난 결점일 수도 있고 후천적으로 패역한 생활 속에서 만들어진 약점일수도 있습니다.
어째든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약점들을 누구보다도 빨리 파악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았으면 여러분들은 그것을 위해서는 특별히 기도해야 됩니다. 돈에 대해서 사심이 비교적 없는 사람이 물질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해 달라고 한번 기도할 때 돈에 대한 탐심이 강한 사람들은 여섯 번 일곱 번은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많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해결하면 모든 것이 될 것이라는 그러한 생각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사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제 그 약속을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으니 너희들은 영혼과 육체의 모든 더러운 것들로부터 너희 자신을 깨끗케 하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어떻게 됩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도덕적인 삶은 도덕 자체를 추구함으로 얻어 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의 성취를 위해서는 철저한 순종이 필요하다 이거지요. 여러분들이 가는 길 그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여러분들 기뻐하시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데서 행하는 작은 순종들은 하나님 앞에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인 순종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서로 충돌을 일으킬 때 하나님이 뜻을 바꾸셔야 합니까 우리가 마음을 고쳐먹어야 합니까? 이사온 다음부터는 대답을 안 하시기로 하셨습니까?
캄캄한 밤바다에 폭풍이 몰아 치는데 군함 하나가 길을 잃었어요. 가는데 저 쪽에서 무전이 오는 것예요. 항해사가 급히 선장에게 가서 보고를 하는 것입니다. “선장님, 선장님 저 앞에 불빛이 하나가 있는데 아무래도 배 같습니다.” “그런데 저 쪽에서 통신이 오기를 좌 연으로 속히 돌려라 충돌하기 쉽다고 그럽니다.” 선장이 “우리는 못 돌리니까 자기보고 돌리라 그래!” 항해사가 무전을 쳤습니다. “우리는 돌릴 수 없다. 너가 우측으로 돌려라!” 그쪽에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는 못 돌리겠다. 너가 돌려라!” 그러니까는 선장이 화가 나서 다시 무적을 쳤어요. “야! 임마 돌려 난 선장이야” 저 쪽에서 “난 삼등 항해사다 내가 높으니까 너가 돌려 우리는 돌릴 수 없다” 선장이 “우리는 엄청나게 큰 군함이다.” “너가 돌려라” 다시 무전이 왔는데 “빨리 돌려라 난 등대다. ”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충돌 할 때 누구의 뜻을 돌려야 되겠습니까?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하는 것은 회개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라고 결심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부르는 찬송이지 어그러진 길로 걸어가면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아픔 때문에 울면서 돌이킬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가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부를 수 있는 찬송은 찬송가에 별로 없습니다. 하나 지어 놓는다면 ‘내가 이길 계속가면 망하리라’ 그런 찬송밖에는 없습니다. 연약하다는 말과 악하다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죄 죽임의 교리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려고 힘썼습니다. 처음 이 교리를 듣는 사람 치고 깊이 감격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평소에 죄를 죽일 생각도 없고 자기 맘대로 살던 사람들, 죄와 더불어 싸워보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도 안 기뻐요. 뭐 그렇게 우울하고 너무 복잡하다는 거지요. 사실은 하나님의 진리가 복잡한 게 아니라 자기가 멍한 거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머리 없는 그리스도 인들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뭔가 좀 분명하고 자세하게 얘기하려고 그러면 너무 복잡하데요. 자기가 멍청한 생각은 안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얘기할 필요도 없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깊이 감격합니다. 그리고 아 이제는 죄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겠구나하는 확신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해 보면 그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또 깨닫게 됩니다.
왜 그러는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죄 죽임의 교리에 대해서 감격하고 “이놈의 죄 이제는 내 손안에 있소이다” 라고 말해도 여러분들이 걸어가고 있는 인생 전체가 주님이 기뻐하시고 있는 순종의 길이 아니면 그러한 감동도 잠깐에 불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작은 은총이야 있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 다운 그러한 삶을 위한 특별한 은총은 없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난 여러분들에게 오늘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인생의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인생의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입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걸어가고 인생의 길 그것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면 여러분들은 죄를 죽일 수도 없거니와 하늘로부터 죄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이 내리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중간지대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정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뒤로 물러가지 않으면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화) (1) IMF로 인해 실직하신 아버지가 어머니와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집안에 잦은 불화가 있게되고 그로 인해 반에서 1, 2등 하던 아이, 부모의 말씀이라면 불순종 할 줄 모르는 매우 착한고 성실한 여 학생이 그릇된 길로 빠져 음란 비디오 물을 찍어 나중엔 퇴학까지 당한다는 빨간 마구라 이야기.
(2) 마약과 술과 여자 그리고 도적질하는 삶이 일반화된 한 아이가 어느 날 도적 질하고 돌아오다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기억나 불쌍한 사람에게 훔친 돈 중 일부 를 준다고 그것이 아버지에게 기쁨이 되지는 못한다는 이야기.
삶 차체 걸어가는 삶의 방향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순종하는 길을 걸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이 따끔 죄와 더불어 싸우려는 갸륵한 마음을 품고 또 성령의 도움 없이 일시적으로 그 죄에서 떠나는 것 같은 장한 생활이 하나님 앞에서는 장한 것이 아니라 이겁니다. 설령 그 아이가 옛날처럼 그렇게 똑같이 구제할 줄 모르고 가난한 사람 불쌍히 여길 줄 몰라도 다시 가정으로 돌아와서 부모와의 관계를 갖으며 평범한 학생이 되기를 원해요. 가르쳐 주면 되잖아요. 부모와의 관계가 살아있고 화목하고 부모에게 감화를 받는다고 할 것 같으면 가르쳐 주면 되잖아요. 애야 이 돈 아깝지 그러나 이 사람들은 우리가 편안히 먹고 마실 때 더 고통받는 사람이니까 도와주어야 된다. 아 그래요 아버지 처음은 안되겠지만은 한번 두 번 노력하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물려받으면서 그렇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으로 고쳐져 가면 되는 것 아니에요?
여러분 분명히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은총을 가로막고 있는 패역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 패역은 전체적으로 삶 자체가 주님께 순종하는 길로 돌아서지 않으면 그 패역은 쉽게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버리는 것 겉모양으로 죄를 버리는 것은 그저 순간적으로 어떤 다른 이유로 버릴 수 있지만 그 죄를 지울 수 있는 마음속의 경향 자체를 고치는 것은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지속적인 은혜가 아니면은 불가능하고 하나님이 순종하는 길을 안 걸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왜 지속적인 은혜를 부어 주시겠어요?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불순종하며 하나님께 어그러진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적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은 마치 사하라 사막에 이따금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이 간혹 있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적은 양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전폭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서 정말 주님 앞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의 계명에 완전히 순종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아요. 그랬더라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이유가 없고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이유도 없었지요. 그러나 이겁니다. 삶의 방향 전체가 나는 하나님께 순종해야돼 전적으로 주님께 순종하면 살아가지 않으면 내 인생은 행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어 주님 순종하며 살고 싶습니다 라고 하나님 오늘도 제가 불순종하면 어떠하지요? 이렇게 고민하고 하나님 앞에 계속 주님께 순종하며 살고 싶다라고 하는 마음 불순종할 때 내가 느끼는 고통 때문에 아니라 순종 할 때에 주님이 받으실 그 큰 주님의 기쁨과 영광 때문에 순종하며 살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충만한 결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연약한 육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순종하게 되는 것과 방향 자체를 안 고치고 계속 살아가는 것 그 사이에는 어마 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 말씀을 아무사람이나 마구 사용하는데 나는 그런 말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보실 때 예수님이 생애 적인 결단을 앞에 놓고 십자가 사건 앞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매달리면서 아버지 앞에 처절하게 매달리고 있을 때 제자들은 잤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함부로 말하지 말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주님에 그 기도에 동참하고 싶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깨어있고 싶었습니다. 이제껏 주님이 대적들에게 고난과 핍박을 받으시면 서도 그처럼 애절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그러나 그만 자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은 정말 간절했는데 육신이 바쳐 주질 않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설교로 제게 감화를 많이 끼쳐 주시던 목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자기 개척 시절을 이야기하시면서 목사도 예배 시간에 졸 때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나는 사회 보다가 졸았는지 알았어요. 사회 보다가 조는 사람은 가끔 봤거든요. 주보까지 떨어뜨리면서 열심히 자요. 기도시간이 됐는데도 안나와요. 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을 설교를 하시면서 조셨대요. 그것도 기발하지 어떻게 설교를 하면서 졸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 이야기를 다 듣는 순간에 웃을 수가 없고 가슴이 짜릿해 와요. 시골 교회로 갔는데 사례금을 못 주는 것예요. 교인 열 댓 명되는데 생활비가 나오겠습니까? 뭐 교회 재정의 70%를 목사님이 헌금 하셨다니까 뭐가 되겠어요. 할 수 없이 도와주는 기회도 없고 하니까 가족들은 먹어 살려야 하잖아요. 돌 짐을 진 것입니다. 채석장에 가서 하루종일 돌 짐을 지고 일당을 받아 가지고 와서 일부는 이제 수제비라도 끓여먹고, 일부는 교회에 헌금하는 삶을 여러 달 동안 계속 한 것입니다. 지금이야 뭐 9시에 출근시간 이지만 옛날에는 그런 것이 어디 있어요. 그저 해 뜨면 시작이었습니다.
새벽기도 끝나고 가서 등이 벗어지도록 가마니를 이고 돌 짐을 지다가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 수요 예배에 선 것입니다. 그런데 뭐 견딜 수 없는 피로감과 잠이 몰려 온 것입니다. 아 물론 성령이 더 충만하고 역사가 일어나면 그것도 해결 됐겠지요. 그런데 그것은 주님이 비난할 일이지 당신 왜 그렇게 충만하지 못하냐고 말할 수 없잖아요. 3분의 2쯤 설교를 했는데 졸면서 막 나가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같이 졸았더라면 문제가 안됐겠지만 깨어있는 사람들은 “저게 지금 무슨 설교가 저래” 눈을 지긋이 감으니까 야 설교 내용에 얼마나 심취했으면 저렇게 되랴 했겠지요. 나갈 땐 얘기가 막 잠꼬대 같이 나가고 그런 것이 연약입니다. 그런 것이 연약입니다. 제가 설교하면서 졸지 않는 것은 단연코 여러분들에게 고백하건대 내가 그분보다 은혜가 많고 성령의 사람이어 서가 아니라 돌 짐을 안 졌기 때문입니다. 그게 연약입니다.
문제는 삶의 방향을 하나님 앞에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이키지 않으면서 언포를 놓는다 이것입니다. “등대야 너가 비켜라” 하나님이 아직 누군지 몰라서 그래요. 등대에서 불빛 비추는 사람은 3등 항해사고 자기는 선장이라 이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것입니다. 등대에 받치면 그냥 박살이 나는 건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전폭적인 순종의 의지 총체적인 삶에 있어서 총체적으로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그러한 자세 없이는 죄를 죽이는 삶이 불가는 하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죄 죽임의 교리 가지고 환호성을 지르지만 결국은 그 교리 가지고 죄를 못 죽여요. 왜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향 자체가 유턴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계속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일정한 범위 안에서 진실하게 살려고 하면 작은 은혜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것은 사막에 있는 가랑비와 같은 것입니다. 그를 완전한 사랑과 생명으로 인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결코 어두운 세상에서 불꽃처럼 살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으심으로 우리에게 기대하셨던 그런 삶을 살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여호수아가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향해 외쳤던 그 음성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운데 가나안을 정복-
(뒷면으로 옮겨지면서 설교가 조금 잘려 나갔습니다.)
여호수아의 나이 많아져서 그 시대의 원로가 되었을 때에 참아 눈뜨고 볼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그 큰 역사를 간직한 사람들 나아가서는 요단강 물이 마르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고 곳곳에서 여호와가 함께 함으로 승리의 깃발을 꽂으면서 정복의 역사를 이루어 오던 그 주역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커다란 부패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방신 들을 섬기고 그리고 방탕한 길로 걸어가는 비참한 일들이 눈앞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 끔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결국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던 신앙의 자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래가 없을 정도로 단호하게 말씀하신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게 바로 그 단호한 명령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그 명령이었습니다. 그 명령에 불순종하게 되니까 총체적인 삶에 불순종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기는 지켰을 것이고 율법 중에 어떤 것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성실하게 수행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사도 지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껍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총체적인 순종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순종에 형태가 총체적인 순종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일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는 열심과 성공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뿌리가 썩은 그러한 나무와 같은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죽어 가는 인생에 그 말년에,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피를 토하는 외침으로 그들에게 외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만 섬기라고 말씀하신 그 계명에 순종하는 삶으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제가 전해 볼까요?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의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러나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에게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유부단한 삶에 대한 혐오감이 우리들에게는 필요합니다. 대충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한 물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안일한 삶을 뒤흔드는 그 어떤 고난이 두려워서 완전한 순종을 포기하고 대충대충 살아가는 삶에 만족하는 삶에 대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결단과 총체적인 순종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이 될 수 없다라는 그런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여러분들이 아는 모든 신앙의 지식이 여러분들의 삶을 살릴 수 없습니다. 이따금 여러분들이 맛본다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비치 못할 질병에 걸려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가끔 남의 간증 테이프나 들으면서 위안을 삼는 정도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한 두 가지가 아니라 삶 전체가 돌이켜 서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사고 방식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면 그 사고 방식과 싸워서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직업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직업이라면 사표부터 내고 봐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사업이 하나님께 도저히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업이고, 주님이 그 길을 원하시지 않는데 그 길에 섰다면 여러분들은 속히 문 닫고 다음에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며 떠돌아다니는 그 모습 자체를 하나님이 안 기뻐하신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신앙의 정착부터 하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좋은 설교나 듣는 것이 여러분들의 신앙에 양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삶 전체가 전체적으로 방향 전환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유턴하지 안으면 충돌이 있을 뿐입니다.
군함을 운전하는 항해사가 되었다고 칩시다. “에이 씨 부딪치면 부딪치는 거지” 여러분이야 불순종했으니까 등대하고 부딪쳐서 죽으면 그만이지요. 배 뒤칸에 타고 있는 천진난만하게 놀고있는 아이들은 무슨 책임이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 불순종해서 파멸하면 여러분 하나로 인생이 끝나느냐 말입니다. 여러분의 가족, 여러분의 교회, 여러분에게 딸린 어린 영혼들 여러분에게 딸린 가족들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여러분 저는 말이지요. 무엇인가 저의 설교나 강의 속에서 쓸만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사람들 혐오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인가 쓸만한 어떤 것들을 부속품가게 다니는 것처럼 찾아다니는 사람들만큼 혐오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매우 혐오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춘행위와 같은 신앙생활입니다. 부속품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삶 차체가 총체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술을 뿌리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 ? ) 삶 자체의 방향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로 돌이켜 보십시오. 죄는 신속한 속도로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요즘 제 책이 담임 목사실로 옮겼습니다. 방에 들어서면 책들이 저에게 박수를 치는 것 같습니다. 주인님 너무 고맙습니다. 왜? 너무 많은 동료들을 잃어 버렸어요. 왜요? 지하실에서 곰팡이 쓸어서 내용은 좋은데 여러 권 버렸어요. 수 백 권 버렸어요. 이제는 아무리 책을 뒤져보아도 곰팡이의 흔적은 있지만 곰팡이 쓸고 있는 진행중인 책들은 없습니다. 왜요? 이제 여기서는 곰팡이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안 됩니다. 보십시오. 삶이 총체적인 순종을 결단하고 삶의 방향을 틀고 나면 죄는 빠른 속도로 삶의 기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반대는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있어도 삶 자체를 불순종의 길로 전환해 보십시오. 은혜는 속히 마르기 시작하고 곰팡이와 같은 죄악의 이끼들이 여러분들의 영혼에 순식간에 끼게 될 것입니다. 순종입니다. 오직 두 길입니다. 거슬리며 살 것이냐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것이냐 이것입니다. 이렇게 순종하며 살 마음이 있으면 아멘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그렇게 순종하게 만들어 주는 총체적인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동기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동기가 바로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범죄 할 때 인간은 즉시 평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범죄를 하고 나면 인간은 잠시동안에 즐거움을 얻게 되는 데신 긴 시간동안에 평안을 잃어버린 고통스러운 마음에 상태가 된다 이거지요. 그러니까 그는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어냐 하면은 자기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무슨 자기 생각이냐 하면은 하나님 앞에 범죄 했을 때 범죄하고 나니까 그 댓가로 고통이 시작되고 영혼에 번민이 시작되잖아요. 그러니까 괴로워요. 괴로움이 점점 크고 나니까 죄를 지으면서 받았던 기쁨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괴로우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께 죄를 죽이려고 시도를 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은 한 가지를 잃어버리고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 안에 계신 성령이 자기가 범죄 하는 동안에 피해를 본 당사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한다라고 하는 것이 “My got I am sorry" 그런 정도 예요. 하나님 미안해 그런 정도죠. 참된 회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내가 죄지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손해를 생각하기 전에 나의 범죄함 때문에 주님에게 끼쳤던 고통을 생각해야 된다 이거지요. 그래야 지만 진정으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죄를 죽이게 되고 죄의 원동력을 말리게 된다구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죄를 지었기 때문에 경험하게된 그 불순종해서 오는 고통 때문에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 라고 마음을 먹으니까 죄와의 싸움은 있는데 승리가 없는 겁니다. 물론 그는 더 이상 그런 죄를 짖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세계적으로 망신살이 뻗친 미국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 스타 보고서 전문을 전부 읽었습니다. 2천 4백 페이지는 모두 읽지 못했지만은 리포트지 한 200장정도 되는 불량을 정성껏 다 읽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그가 거듭 났는지 안 났는지는 확신 할 수 없습니다 만은 대통령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있는 클린턴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아! 하나 님 얼굴이 희던, 검던, 붉던, 노랗던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지 어느 인간에게서나 동일한 이 영원의 원리를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똑 같았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만약에 이 죄 죽임의 교리를 영어로 들었더라면 그리고 진지하게 결단을 했더라면 범죄에 빠졌을 리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는 깊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범죄가 아직 알려 지지도 않았는데 그는 갈등하고 가책하고 있었습니다. 딸과 같은 여자아이와 그런 소문 날만한 범죄, 그 추문에 빠진 것이 미합중국에 대통령에 지위에 그 영광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가책이 그의 마음에 파고든 흔적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을 인해서 아파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그는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하거나 인간 승리였다고 말합니다. 죄에선 떠났지만 죄의 모양은 사라진 것 같지만 그와 비례한 하나님과의 평화가 충만하게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풍성함이 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죄로부터 잠시 떠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총체적인 순종의 동기는 그런 것 이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 구름과 같이 허다한 선지자와 그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는 길을 걸어갈 때에 우상을 섬기며 범죄할 때에 그들을 탄핵하면서 상기 시켰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무서운 진노의 성품을 상기시키기 전에 먼저 상기시킨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어떠한 사랑을 너희에게 배 푸셔서 그 흉악한 원주민이 살고있던 이 땅을 너희들이 맨 손으로 차지하게 하시고 심지 않은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고 짖지 않은 집에서 살게 해 주셨는가 생각해 보라“ 다시 말해서 그 믿음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 총체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촉구하기 전에 그분께로부터 받은 놀라운 사랑을 상기시킨다 이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교리 하나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총체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는 동기가 주님을 향한 사랑 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주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고는 한 두 가지 죄와 싸워서 이기는 것처럼 볼 일수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고서는 총체적인 순종 자체가 불가는 하다는 것입니다.
한달 전에 여러분들이 들었던 설교를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설교 중에 이런 말을 여러분들에게 남겼습니다. 죄를 많이 죽였는데도 죄를 거의 죽이지 못한 그리스도인 보다 도덕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수도 있다. 그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동기에 의해서 죄로부터 떠날 것을 강요받거나 마음속에서 혐오감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그 죄로부터 떠나게 해 달라고 애를 쓰는데도 잘 안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의 형제들 가운데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형제가 제가 유일합니다. 제가 7살 때 돌아 가셨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저의 어린 기억에 늘 그 식사 때마다 소주를 드시는 것이 제 기억에 납니다. 소주도 이런 잔에다가 마시는 것이 아니라 놋 사발에다가 그것도 막 소주 됫병 두 손으로 따라야지 따라지는 것, 콸콸콸 따르시어 식사하실 때 냉수처럼 쭉 드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병 때문에 일찍 돌아 가셨어요. 마흔 여덟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얼마나 술을 좋아 하셨는지 진짜 말수를 불사 하셨어요. 뭐 정말 인지는 제가 볼 수 없었으니까 우리 아버님은 전혀 술을 못 드십니다. 어느 정도로 술을 못 드시냐 하면은 어느 날 집에 택시에 실려서 인사불성 되셔서 오셨는데 왜 그러냐 하면은 술을 드셨는데 동네 어른 하시는 말씀이 도봉산 야유회 갔다가 맥주 반 컵을 마셨는데 졸도해서 택시에 실려 오셨어요. 체질적으로 못 드시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버님 말씀에 의하면 할아버지가 술 잡수시고 쓰러져 있는 것을 업어 나르시느냐고 하도 고생해서 내가 다시 자식들에게는 이 고생만은 안 시키리라 하고 안 드셨다는 것입니다. 체질이 안 받는지는 진짜 그런지는 하나님만이 아시겠지요. 하여튼 실제로 거의 술 때문에 자식들에게 고통을 주신 적이 없어요. 한번도 업어 나른 적이 없으니까요. 예수 믿으시기 전에도 그 결심을 유지 하셨고 믿은 후에는 더더욱 유지하고 계십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사랑에 감동되기 전에도 어떠한 죄에 대해서 혐오감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꿔서 얘기합시다. 정말 술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많이 봤습니다. 와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펑펑 흘리며 은혜를 받고 주님 뜻 데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 데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보지 않겠네 그랬습니다. 그런데 퇴근하면서 골목길을 도는데 고기 굽는 냄새와 술 냄새가 자기를 억지 할 수 없게 유혹하는 겁니다. 성경에도 바울이 디모데 더러 포도주를 가끔씩 먹어라 그랬는데 한잔만 걸치고 가자 쉽게 유혹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저 보십시오. 세례 받고 그렇게 은혜 받았는데 4년 동안 담배 못 끊었어요. 그렇게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 만큼 힘들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앞에 있는 사람보다 죄를 더 많이 죽였지만 그 죄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유혹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더 많이 죄를 죽이고 다른 방면에서 더 많이 승리하고 있지만 그 방면에서 덜 승리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과 더 가깝게 지네냐 하면은 전자의 사람이 아니라 후자의 사람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지요? 그는 많이 죄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죄를 죽이는 동기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고 있기 때문에 죽이는 것만큼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놀라운 은혜를 맛보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제일 희망이 없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은혜도 쥐뿔도 못 받았으면서 삶이 반듯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희망이 없어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반듯한 삶 때문에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삶이 반듯하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의 뜨거운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하는 것이죠. 목마르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설교를 마치면서 정리를 해 봅시다. 주님이 우리에게 총체적인 순종을 원하시는데 그 순종이 뭐가 되야 하면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된다 이겁니다. 아주 쉽게 예를 들면 이렇게 되지요. 하나님 앞에 아까 말씀드린 그 사람처럼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자신의 삶에 있어서 어느 한 두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가 총체적으로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 이제 것까지 주님의 마음 아프게 해 드리며 살았습니다. 주님 내가 범죄 하였습니다. 물을 때 야 널 뭘 범죄 하였는데 하나님께 죄를 지었느냐? 그는 아마 역설적으로 모른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몰라요. 지금 내가 살아온 것은 다 죄예요. 내 주님의 없는 삶은 어둠 속에 삶이었고 주님 없이 살아온 모든 생활은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 삶 이였기 때문에 나는 산다고 살면서 몸부림 쳤지만 그것은 마치 더러운 손을 가지고 깜깜한 방에서 방금 새 벽지를 발라 놓은 방을 더듬는 것과 같은 행동 이였어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더 깊이 절절히 회개하면서 이렇게 찬송 할 것입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내 주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그 사람에게 너 뭐 순종하고 살 건데 말할 때 그 사람이 바보같이 눈물 닦으면서 나 술 안 먹을 거야. 뭐도 안 할 꺼야! 그 회개는 가짜 회개예요. 그는 분명히 모른다고 말할 것입니다. 감격적으로 회계하면서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내주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할 때 너 뭘 순종 할 건대 그러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아 몰라 하여튼 나는 온전히 순종 할 꺼야. 무엇이든지 순종할 것이고. 그리고 나의 모든 삶을 다 드려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고싶어 하고 말 할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길이라면 불 가운데라도 지날 것이며, 물 가운데라도 지날 것이며, 주께 불순종하는 길이라면 황금 길도 마다하겠노라고 하겠노라고 말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죽이는 삶을 위해서라면 총체적인 순종이 필요하고 순종이 필요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에 죄를 죽이는 삶의 핵심부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떠한 사랑을 배 풀어 주셨고, 나 같은 죄인을 용서 하셔서 그 수많은 어두운 죄악의 길에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할 때 내 이름 석자를 불러 주셔서 남들에게는 가리운 복음의 빛으로 들어오게 하시고 십자가의 그 참 사랑을 알게 하셔서 짐승과 같은 삶을 버리고 성도의 길을 걸어가게 하셨는데 주님 이 사랑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나님 내가 이 사랑을 받아도 되는 겁니까? 나에게 이러한 평화와 이러한 놀라운 은혜의 소망을 주시고 우리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주님의 진노를 끄는데 물을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찢어 흘린 피와 진액으로 하나님이 진노의 불을 끄셨는데 주님 제가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는 겁니까?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러한 주님의 사랑 앞에서 내가 아무 것도 아니고 형벌 받아야할 죄악된 나와 나를 사랑하시는 그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의 형체 사이에 간격을 눈물이 아니고서는 매울 수 없다는 의식이 우리에게 밀려오는 감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비록 부족하지면 총체적인 순종이 필요하고 이 총체적인 순종을 위해서는 총체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이 그 십자가의 사랑 우리같이 일말의 집게와 같은 죄인 중에 괴수요 소망이 없는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목 매이는 사랑에 대한 펑펑 우는 감격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서 피 뭇은 손을 씻을 것이며 하나님과 대면 할 때마다 그는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 살 찢는 고난을 당하는 것이 짐승과 같은 삶을 사는 대가로 맛보는 부기와 영화보다 더 보람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놀라운 사랑, 그것을 매일 매일 새롭게 알아 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 사랑을 알면서 총체적인 순종을 배우고 그 순종을 통해서 죄를 죽이고 그런 죄 죽임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끊을 수 없는 사랑과 교제가 완성되는 그런 행복한 관계를 이루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를 죄 가운데서 건져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그 긴 방황의 날 동안에 여러분들은 우리 주님의 이름 석자를 잊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여러분들의 이름이 한번도 잊혀진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 이름은 보좌 우편에서 간구 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의 향로에 담겨서 아버지께로 올려 졌고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기도의 향기를 흠양 하셔서 여러분들을 이제 그 어두운 삶에 종지부를 찌고 복음의 빛 가운데로 담이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한 빛 가운데로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로 돌아오기를 오늘 원하고 계셨기에 오늘 여러분들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바로 여러분들이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릴 날입니다. 오늘이 바로 여러분들이 총체적으로 불순종하며 걸어가므로 패배하였던 여러분들의 삶에 종지부를 찍어야 되는 날입니다. 실패와 패배를 숙명처럼 알고 살아가던 무너진 여러분들의 영적인 삶에 서전 포고를 선언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여러분들의 순례의 길을 살아갈 것을 다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때 우리는 비로써 총체적인 순종을 뜻하며 어그러진 길로 걸어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돌아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서 이제껏 애 타는 마음으로 여러분들을 돌이킬 때를 기다리며 죄 죽임의 진리를 알려 주셨던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 감격을 안겨 드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1. 죄 죽임의 실천적 지침(2)
-총론2:죄 죽임과 성실한 경건 생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옛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지난 시간에는 죄를 죽이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총체적인 순종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죄를 죽이는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예수 믿기 전부터 평소에 잘하고 있던 그런 한 두 가지를 성경 속에서 발견해서 그것을 마치 인생의 신조인 것처럼 살아가는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총체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요구 받고있는 바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주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모든 뜻에 대해서 관심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한 두 가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고 또 그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근본적인 동의가 없다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이제껏 여러분들이 변화되지 않은 것처럼 앞으로 더 많은 세월이 흘러도 여러분들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대로 있을 것이며, 영혼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 축복으로부터 제외된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주 설교를 기억하면서 여러분들은 단안을 내려야합니다. '내가 이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내 마음대로 살 것인가'를 말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죄를 죽이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성실한 싸움이 필요하다는, 다시 말하면 죄를 죽이는 싸움을 위해서는 성실한 경건 생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사도 바울과 같은 훌륭한 그리스도인 속에도 무엇인가 살아나서는 안될 것들, 그런 것들이 매일매일 살아나고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도록 만들어주지 않습니까? 살아나서는 안될 것이 살아나니까 그것을 매일매일 죽이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최상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보다 뛰어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속에서 살아나서는 안될 것들이 매일매일 살아나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말입니다. 어떤 것들이 살아나고 있었습니까?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자랑과 육체의 욕망과 죄와 이런 것들이 속에서 매일매일 자라고 있었습니다.
사경회도 가깝고 해서 머리도 식히고 기도도 할까 해서 그저께 어제 일박이일로 다녀왔습니다. 차를 몰고 서울로 올라오다가 들판에 누렇게 곡식 익은 것이 너무 아름다워서 차를 멈추고 논길을 죽 걸었습니다. 가을의 정취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논을 보니까 무슨 종류의 벼를 심었는지 일찌감치 거두어 들였습니다. 아직까지 벼를 베지 못한 논이 많이 있었는데 그 논은 벌써 베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벼를 벤 논 위에 가을 날씨가 따뜻하니까 모가 다시 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 논 주인은 그것이 나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나라고 비료를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때가 되매 곡식을 다 거둬들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돌보지 않았는데도 날이 따뜻하니까 그 위에서 다시 싹이 나고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자라는 것은 우리가 매일매일 힘쓰고 애쓰면서 성실하게 믿음생활을 해야하지만, 우리 안에 죄와 탐욕과 더러운 것들이 자라는 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는 것입니다. 성도답게 살기 위해서는 분투하며 노력해야 되지만,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살면 마지막 가는 길이 그런 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죽이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매일 매일의 신앙생활이 성실해야 되겠구나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년에 한 번씩 죽노라' '봄, 가을 심령 대 부흥회 때 죽노라'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일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매일 죽노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세상의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매일매일 마음속에서 더러운 죄악들이 자라납니다. 교만한 마음들이 자라나고 부패한 탐심들이 자라납니다. 사도 바울이 쓴 편지를 보면 그는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고, 그는 죄와 더불어 싸워서 승리한, 영적인 세계를 평정한 그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입니다. 귀신들린 자들을 명하여 꾸짖으므로 귀신이 물러가게 만들고 병든 자를 명령함으로써 낫게 하는 놀라운 권세는 우리로 하여금 사도 바울이 아니라 예수님을 생각나도록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큰 권능과 권위 속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인 권세와 커다란 영적인 권능 속에서 살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이 된 것은 원래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게끔 그가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여러분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더러워지게 만드는 그 모든 죄들로부터 사도 바울은 하나도 자유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도 역시 젊은 여인을 보면서 음란한 마음을 품었을 때가 있었을 것이며,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바라보면서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런 일들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끊임없이 죄가 솟아났지만 그 죄가 자기를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매일 자라났지만 매일 죽었고 그래서 그는 매일 새롭게 영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령한 생활의 비결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실하게 매일매일 경건 생활에 힘쓰고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에, 하나님을 묵상하는 일에 자신을 바치지 않고서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망상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여러분도 각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을 가지고 계십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보다도 더 극적인 체험을 가지셨습니까? 그는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고 그 찬란한 빛에 눈이 멀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만나되 예수님께서는 단지 그를 만나주신 것이 아니라 만나서 그를 회개시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마자 자신의 인생의 모든 편견과 이제껏 살아온 인생의 가치관이 모두 무너져 내렸습니다.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그 사람이 이전에 자랑하던 모든 자랑거리들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처럼 가정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처자식을 부양하고 아이들에게 좀더 좋은 교육과 맛난 음식을 먹이기 위해서 가족이기주의에 빠진 적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물질을 만졌지만 그러나 그는 청렴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와 동행들의 쓸 것을 위해서 천막을 기워 팔며 자기의 먹을 것을 스스로 조달하면서 누구에게도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선교사역을 위해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분과 같은 신앙의 체험을 가졌습니까? 그분처럼 헌신됐습니까? 그분처럼 세상의 모든 것 버려 두고 예수만 좇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 속에서 매일매일 살아나서는 안될 것들이 살아났습니다.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매일매일 처리했습니다. 매일매일 살아서는 안될 것들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죽이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성실한 경건 생활 없이는 여러분들이 신앙에 있어서 어떤 승리를 경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기도하기 싫을 때 기도를 안하고 예배 참석하기 싫을 때 집어치우고 하나임의 말씀을 깨닫고 싶지 않을 때 그만 둬 버리면 그는 결국 죄는 살고 은혜는 모두 시들어버려서 죄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화) 잔디밭을 관리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이야기-잔디밭에 잡초를 매일 뽑 지 않으면 잡초 밭이 되어버린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여러분들이 아무리 많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매일매일 여러분들 속에서 죄와 정욕과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가로막는 사악한 욕망들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자리를 잡고 살아나면 무서운 속도로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힘 안들이고 처치하는 방법은 매일매일 뽑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잔디에서 잡초를 뽑지 않고 일주일 이상만 내버려두면 손으로 뽑을 수 없습니다. 손으로 뽑으려하면 뿌리는 남고 허리가 잘라져 버립니다. 할 수 없이 송곳이나 꼬챙이같이 생긴 것을 가지고 뿌리에 밀어 넣어 하나씩 뽑아 내야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려운 작업이 되겠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하면 차라리 갈아엎고 다시 잔디를 심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주 착각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은혜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크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돌이키면 주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 잠자던 신앙은 깨어 일어나고 게을렀던 그의 영혼 속에는 부지런히 주님을 찬송하고 섬기며 살고자 하는 착한 마음이 들게 됩니다. 건조하기 짝이 없던 기도생활에 윤기가 생기기 시작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골치만 아프던 설교가 가슴을 파헤치며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말씀에 감격이 있고 기도에 감격이 있고 봉사할 때에 마음속에서 큰 기쁨이 솟아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사랑을 만끽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무슨 원인인지 시간도 많이 안 흘렀는데 몇 달 지나고 나서 마음이 싸늘하게 식고 기도도 할 수 없고 성경을 읽어도 건조하기 짝이 없고 예배시간이 되도 전처럼 내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때 이런 사람들이 대개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하면 '옛날의 회개에 문제가 있다. 그때 좀 더 세게 회개를 했어야 하는데 그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회개했으니 그렇지,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작은 죄를 짓고도 더 강력하게 회개를 했다는데 그때 회개가 아무래도 사이비였던 것 같아'라고 생각을 합니다.
반대로 '그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데도 내가 이렇게 밖에 못사는 것을 보면 그때 하나님의 큰 은혜인줄 알았었는데 사실은 별로 큰 은혜가 아니었나봐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밖에 못살지' 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건조하고 메마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은혜를 적게 주신 하나님의 책임, 혹은 더 큰 회개를 하지 못한 옛날의 실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여태껏 살아오고 있는 불순종하고 날마다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죄를 죽이지 못하는 불성실한 경건 생활은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점으로 자꾸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결단코 그는 아무 정답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물론 뚜렷하고 분명한 회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들의 회개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우습습니까? 하나님께 회개한다는 것이 반성문 쓰듯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죄를 지었는데 남들이 꽤 큰 죄라고 합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다시는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겠으니 이번만 선처해주시기 바라나이다' 아이 출생신고 늦게 해서 관공서에 반성문 쓰는 것처럼 사유서 달듯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회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옳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자기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회개는 '내가 이렇게 죄를 지을 때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 하셨을까?' 그리고 '내가 이런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얼마나 많은 고통을 드렸고 또 나의 이 죄가 소문이 났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얼마나 많이 더럽혀졌는가?'를 생각하면서 나의 죄 때문에 아파하시는 주님 때문에 아파하는 마음이 회개의 정신의 토대가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를 범했던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되돌아간 것을 입증해주는 것입니다. 회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죄인이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로 인해서 못 박히신 주님을 볼 때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주님, 어찌하여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하면서 펑펑 우는 것밖에는 그 죄인은 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 왜 그러셨어요, 그러지 마시지요' 그러면 자기는 구원받을 수 없고 용서받을 수 없으니 그렇게 말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주님 나를 위해 못 박혀 죽으셨군요. 잘 죽으셨습니다. '고 말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결국 이렇게 할 수도 저렇게 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 십자가 앞에서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아는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를 향한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바로 그렇게 십자가로 돌아간 그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과 함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할 사실은 아무리 처절하게 우리들이 회개를 하고 내장을 다 뒤집을 정도로 회개하였다 하더라도 그 회개의 눈물이 채 마르기 전에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또다시 죄와 욕망과 사악한 탐심이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매일 열심히 기도하고 매일 성경을 읽고 예배시간마다 빠지지 않고 나와서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듣고 한편으로는 회개하고 한편으로는 믿음을 가짐으로서 자기 속에 살아나려고 하는 그 죄악된 욕망을 은혜로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아무리 격렬한 회개를 체험했다 하더라도 그 격렬한 체험 하나가 그런 성도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싸우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화) 교회 현관 앞 샹데리아-추물이었던 것을 잘 닦아 놓으니 찬란한 빛을 발한다는 이야기.
나의 죄를 정케하사 주의 일꾼 삼으신
구세주의 넓은 사랑 항상 찬송합니다
나를 일꾼 삼으신 주 크신 능력 주시어
언제든지 주 뜻대로 사용하여 주소서
‘우리도 저렇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옛날에 아무리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셨다고 하더라도 먼지와 같이 더러운 죄악이 많은 이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악한 욕망과 죄악된 탐심에 물들고 밖으로는 세상 풍파의 죄에 찌들기 쉬운 우리를 닦지 않고 내버려두면 저렇게 더러워질텐데, 그래서 소망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기 직전에 주님이 우리를 저렇게 새롭게 닦아주시면 얼마나 영롱하고 찬란한 빛을 발할까?
저는 확신합니다. 전에 있던 교회가 저것을 매일 닦아서 저렇게 영롱한 빛을 냈다면 갈 때 저것을 가지고 갔을 것입니다. 닦으니까 진가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결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입니까? 결심이 얼마나 약한 사람들입니까?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부족한 것이 많습니까? 그러나 깨끗이 닦으면 그래서 영롱하고 찬란한 빛을 발하는 등 기구처럼 된다면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실 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오늘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 끊임없는 죄가 솟아납니다. 그래서 옛날에 은혜 받은 정도 가지고는 안됩니다. 매일매일 자기 속에서 살아나서는 안될 것들이 살아날 때 그것을 죽이는 일들을 매일매일 성실함으로 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성실함과 열심 있는 경건 생활 없이는 그는 결코 죄를 죽이지 못할 것이며 그는 결국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불순종하는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추운 겨울에 모자라는 잠을 쫓으면서 털옷을 걸치고 눈보라를 맞으면서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이 좋습니까, 따뜻한 아랫목에서 내복바람으로 이불을 높이 뒤집어쓰고 푹 자는 것이 좋습니까?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예배당에 와서 편하지도 않은 의자에 몸을 고추세우고 두 시간씩 설교를 듣는 것이 좋습니까, 파자마 바람으로 소파에 벌렁 누워서 리모콘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TV를 보는 것이 편합니까?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쓸쓸한 기도원에서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이 쉽습니까, 차 타고 자기 좋아하는 곳에 여행 다니면서 먹고 싶은 음식 사먹는 것이 더 신납니까?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경건 생활을 힘쓰지 않으면 그는 계속해서 추락하는 신앙생활밖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따금씩 깨어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가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신앙생활 하는 것은 불가능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약속에 관해서는 많이 듣지만 그 약속을 실제로 누리며 살지는 못합니다. 천국의 참된 기쁨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말을 듣지만 자기 스스로 그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많은 말은 듣지만 그 사랑이 밀려와서 그 사랑으로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고 주님의 참된 평화가 사람들 속에 이루어지게 하는 그 일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고 싶은 것만 할 하기 싫은 것도 해야합니다. 내 자존심과 내 마음 내 심령이 허락 안 하는 것도 하나님이 그것을 하라고 명하시기 때문에 기쁨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하는 삶이고 이것이 바로 승리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매일매일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죄를 죽이는 방법이 경건 생활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은혜를 유지하겠으며 아무리 격렬하게 회개를 하고 신문에 낼 정도로 놀라운 믿음의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매일매일 공급되는 하나님 말씀의 은혜 없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성경 읽고 여건이 허락하지 않거나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도 달려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아무리 바쁘고 복잡한 일이 있어도 예배 시간을 아껴서 내 인생이 무슨 영광을 누리겠는가 하고 예배에 참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제 잡지에 보니 한국 교회에서 주일에 천명이 모여서 예배드린다면 수요일에는 이 백 명도 안 모이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삼 백 오십 명 모이는 교회가 수요일에는 오십 명 모인답니다. 결국 어떻게 죄를 이기는 신앙생활을 해나가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일 낮 예배나 달랑 나오는 사람들이 매일매일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서 눈물 흘리며 집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연구대상입니다. 또 그렇게 예배생활을 게을리 하는데도 성경을 꾸준히 읽으면서 매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서 삶을 날마다 고친다는 것은 이론으로나 가능하지 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다는 말도 되지만 구체적으로 불성실입니다. 게으름입니다. 영적인 삶의 게으름이고 신앙생활의 게으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그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피골이 상접한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전쟁터로 비유하자면 총기를 모두 빼앗기고 군화까지 벗겨버린 철모까지 벗어버린 맨발로 걸어가는 패잔병과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형편은 형편이고 사실은 사실입니다. 믿음을 따라서 사는 길은 날마다 자신 속에서 솟아나는 더러운 죄와 욕망을 경건 생활로 죽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되면 하고 안되면 집어치우고 성경도 생각나면 잡고 읽으면 읽고 말면 마는 것이고 일년 삼 백 육십 오일 흘러도 교회에서 공과 공부하는 것 이외에는 경건 서적하나 안 읽는 사람들이 무엇으로 죄를 이기겠습니까? 개장수를 하려해도 오랏줄이라도 가지고 다녀야지 개를 잡아서 팔 것 아닙니까? 뭐가 있습니까? 그리고는 교회에 와서 위선이나 부리고 가식이나 떨고 사람들 앞에 높이 여김이나 받는 것이나 해보려고 하는 그런 신앙생활로 무슨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배 드리러 올 때에는 세상살이 한 가면 벗어버리고 예배용 가면을 쓰고 진실한 신자인 것처럼 예배드리고 뭐든지 말씀만 하면 다 들을 것처럼 아멘 하고 돌아갈 때는 눈물 흘린 예배용 가면 벗고 세상살이용 가면 뒤집어쓰고 가서 세상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군상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세상사람들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정결하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신실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지기 좋아하고 사리사욕에 밝고 표리부동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죄를 죽이지 않고 살아가는 불성실한 경건 생활이 가져다준 욕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다른 사람 못지 않게 신앙의 깊은 체험을 가지고 정말 책으로 써도 쓸 만큼 감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뛰어난 마음을 가지고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신앙의 지식을 소유하게되고 신비한 체험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습니까? 마음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삶을 이어가는 일에 얼마나 성실했습니까? 환경이 여러분들로 기도하지 못하게 할 때에 얼마나 그 환경과 더불어 싸우려고 애를 썼습니까?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없을 때 얼마나 여러분의 마음을 채찍질해서 진리의 말씀이 아니면 내 영혼이 죽으리라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생활과 성경을 읽는 생활에 매진했습니까? 마음 내키는 대로 흘러가고 그저 생각 되는대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받은 그 큰 은혜는 오늘날 오히려 여러분들에게 부끄러움이 되었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값없이 주셨던 그 놀라운 하나님과의 만남의 체험은 오늘날 여러분과 그 체험을 본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가 별것이 아니구나하는 마음을 갖게끔 만들어주지 않았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된 여러분들의 사정을 하나님 때문이라고 한편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무슨 신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예전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그 은혜에 사무치는 마음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모두 은혜를 잃어버리고 건조하기 짝이 없는 마음으로 의무에 묶여서 신앙생활 해나가고 있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으려니와'라고 말한 사도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 가운데 도대체 하루에 단 30분이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일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오늘도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나 같은 부족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매일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하는 착한 교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교회 저 교회 떠돌아다니고 온갖 좋은 부흥회에 다 다닌다고 하더라도 그런 불성실한 경건 생활의 태도를 청산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죽어있는 것밖에는 여러분들에게 선택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핑계를 댈 수 있습니까? 주님의 그 큰사랑을 몰랐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불타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고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세상에 뜯기고 죄에게 뜯겨서 살아가는 비참한 삶을 슬퍼하셨는지를 하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을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런 죄를 이기고 대적하고 승리할 수 있는 영적인 권세까지도 아울러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간절히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죄를 이기는 성령의 은혜를 주시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두쇠처럼 그 모든 영적인 부요함을 한 품에 품고 계시면서 인색하기 짝이 없는 마음으로 아무에게나 호락호락 은혜를 주시지 않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강렬한 바램, 그런 목마름으로 죄를 이길 능력과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을 간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예수님이 팔복산에 올라 입을 여시고 첫 번째 하신 그 축복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그 사람에게 한 번에 천국 전체를 주어버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낌없이 말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우리들이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 때문에 속상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주님의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여전히 후줄근한 삶을 살아가는 죽은 자와 같은 삶이 누가 책임져야할 삶입니까? 하나님께 책임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은혜를 받은 후에 매일 매일 죄를 죽이는 삶에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실한 마음으로 이것이 내가 사는 길이라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죄를 죽이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나가지 아니한 편안한 경건 생활이 실패를 가져온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능력의 종을 기대할지 모릅니다. 물론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그런 능력의 종이 있어서 한 번 설교로 여러분들을 뱃속까지 뒤집어 회개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래도 여러분들이 눈물 닦은 후에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섬김으로 성실하게 살아가지 않으면 그가 어느 종에게 뒤집어지는 은혜를 받았던지 도로 뒤집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의 경건 생활은 어떻습니까? 기도하고 계십니까? 형식만 겨우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마저 집어 치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있습니까? 요즘도 여러분들이 처음 은혜를 받던 때처럼 주일날 설교를 듣고는 돌아가서 일주일동안 그 설교를 묵상하고 있습니까? 듣고 모자라서 테이프로 듣고 두 번 세 번 반복해 들으면서 정리하며 그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의 신앙의 태도는 마치 새로운 취미에 빠진 사람들이 잠시 열을 내다가 시들해져버리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호기심, 뭔가 내가 모르는 새로운 것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설교를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사람이 설교를 즐기는 것과 그 설교를 통해서 사람이 변화 받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다 동의하고 참 좋다고 하며 가면서도 여러분의 영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진정으로 참회한 다음에 성실하게 죄를 죽이는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실한 죄 죽임이 없이 여러분들은 결코 온전한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만 통용되는 법칙이 아니라 어디에 가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곤고하고 지친 영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국에도 있고 캐나다에도 있고 호주에도 있고 세계 각국에 널려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가든지 소수이기는 하지만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칙을 좇아서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매일매일 기도에 온전히 힘쓰고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해주시기를 사모하고 매 예배시간마다 하나님이 내 영혼을 만나고 지나가시기를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는 성실한 실천이 없이 영적인 변화를 꿈꾸는 것은 도박사의 사행심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거니와 변화가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 변화는 잠시 스쳐 가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 선교를 여는 첫 번째 교두보가 되었던 고넬료의 그 놀라운 성령 세례 받는 장면을 접합니다. 왜 그 수많은 이방인 가운데 성령의 시대를 알리고 이방 선교의 개막을 알리는 첫 번째 열매로서 고넬료를 택하셨을까요? 고넬료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말단 장교에 불과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단장 같은 사람을 교두보로 사용하시지,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황제를 뒤집으셨으면 이방선교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고넬료를 택하셨습니다. 그는 이방선교에 새 장을 여는 이방인에게 첫 번째 성령을 부어주시는 놀라운 도구로 사용되는 영광을 맛보기 전에, 그는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사람이었고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구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그 사람을 기도하던 사람 베드로가 만나서, 기도하던 두 사람을 만나고, 경건한 두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하나님이 이방선교의 새 장을 여신 것은 얼마나 심오한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죽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죽이는 행동 없이 불가능합니다. 문제는 내 안에서 솟아나는 것을 죽이는데, 이 죽이는 것이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들을 죽여버리는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안 죽고 밖에 있는 것만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속에서 살아나는 죄, 내 속에서 솟아나는 정욕, 내가 간절하게 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시는 일을 하고싶어하는 욕망, 이런 것을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을 안 해 본적이 있습니까? 무엇인가 행하고자하는 강한 욕망이 있는데 예수님 때문에 포기해보신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거룩한 신자라고 할지라도 속에서 죄가 솟아오르고 사악한 욕망이 솟아오를 때 이것은 자기의 일부분입니다.
(예화) 노인반점이나 쥐 젖을 보면 슬펐는데 요즘 생긴다는 이야기- 내가 원하지도 않 았는데 생겼고, 자르려해도 살의 일부가 되어버려 없어지지 않는다.
죄가 그렇습니다. 죄가 우리 몸에서 솟아날 때 자르려고 칼을 갖다대면 잘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온몸에 다 전해오는 것입니다. 편하기 위해서는 계속 자라게 내버려둬야 합니다. 그런데 처음 자랄 때는 매일 잘라내면 쉬운데 시간이 흐르면 뿌리를 내리고 커다랗게 장성하기 때문에 잘라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매일 죽이노라'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한 것은,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죄의 정욕을 하나님의 은혜로 퇴치하고 성실한 경건 생활로 이것을 끊어버릴 때에 매일매일 자기 속에 있는 또 다른 자기가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고통 이후에는 영생을 맛보는 놀라운 기쁨을 맛보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 열심히 기도생활 안 합니까?" 이렇게 물으면 "목사님 요즘 바빠서요" "나도 마음이 아닙니다" "급한 일이나 끝나야 되겠습니다" 다 틀린 답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서요"입니다. 왜냐면 옛사람을 죽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 옛 성품, 옛날 그리스도밖에 있을 때에 가지고 들어온 아직도 죽지 않은 자기의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왜 예배에 안 나옵니까?" "바빠서요"는 조금만 맞는 얘기지 예배에 나오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고 자기가 변화되는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깨트려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가 우리에게 밀려들어오기 전에 죄의 담이 무너지는 일들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목마른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지를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먹고 마실 때가 아니구나,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주님의 그 은혜를 사모해야할 때이구나'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죽는 일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무엇인가 마음속에서 견딜 수 없는 정욕이 솟구칠 때 그것을 억제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저 사람에게 이말 한 번 퍼부어야 하겠는데 그래도 이렇게 말하면 주님이 슬퍼하시겠지 하고 퍼붓고 싶은 그 말을 절제하는 것은 살을 에이는 것과 같은 고통입니다. 용서해주라고 성령이 끊임없이 말하는 그 사람을 허락하지 않는 마음을 이끌고 그를 용서해 주는 것은 너무나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죽는다고 표현한 그 말이 정말 적절한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스스로 죽기를 각오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나는 죽어야해'하며 죽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어려운 일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솟아나는 죄를 죽이는 길이 내가 사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면 이 죽는 길이 얼마나 쉬운 길인가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악한 욕망이나 죄를 죽이려고 할 때에 무엇인가 고통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내가 죽으면 내 안에 주님이 사시고 내가 살면 내 안에 주님이 죽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제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죽으심이 한 번에 죽으심으로 족하다고 할 것 같으면 이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나를 살게 하셨으니 이번에는 내가 죽음으로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했을 때 그 마음이 어떤 것이었을 것이었을까요? 우리가 느끼고 있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죄의 유혹들을 그는 빼놓지 않고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매일 죽였습니다. 그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매일매일 자신 속에서 솟아나는 죄의 욕망을 죽이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느껴질 적마다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 절인 고난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쓸모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고 당신의 거룩한 자녀 삼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한 번에 담당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이후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마다 이렇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그런 죽음의 정신을 가지고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다시 사는 사람들 만드시려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성실함으로 기도생활에 힘쓰고 말씀생활에 힘쓰고 예배생활에 진력하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에 사무칠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피로 가치 없는 이 죄인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에 대한 감동과 십자가에서 이 가치 없는 죄인을 위해 흘려주신 그 고귀한 피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한 번 죄를 위해서 죽고 우리가 한 번 우리의 정욕을 위해서 죽는 것이 얼마나 작은 희생에 불과한지를 깨닫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싫은 새벽기도 한 번 나오고 힘든 기도생활 한 번 더 힘쓰고 한 번 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기 위해서 굳은 무릎을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이 성실한 경건 생활이 얼마나 우리에게는 작은 부담이요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화) 군대 갔다 14일만에 돌아와 보니 할머니께서 추운 겨울날 이불을 덮지 않고 주 무시더라는 이야기-추위에 고생하는 손자 생각에 그랬습니다. 바로 사랑의 마음 입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머리와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그분은 죽음의 길을 택하시고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고자 그분은 가난해지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자기를 못 박았고 우리가 생명 누리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보게 하시기 위하여 그분은 하나님에게 싫어버린 바 되셨습니다. 우리의 강함을 인해 약해지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분은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이제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주님을 모르던 시대에 살았던 그 죄를 좇는 삶, 죄와 화목한 삶을 청산하고 이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심으로 단번에 이루신 그 화목을 누리면서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난 그 죄로 말미암아 깨트려진 관계를 자기의 찢으신 피로 양탄자처럼 뿌리셔서 값없는 죄인들이 그 길을 걸어와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들이 죽이기를 마다하고 우리 마음속에서 자라고 우리 삶 속에서 번성하고 있는, 애완 동물처럼 애지중지하는, 바로 그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 죄가 바로 고결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가시관을 씌워드린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신앙을 배반하지 않고야 어떻게 우리가 죄와 화목할 수 있겠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침 뱉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걸어갈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확정된 길로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누가 그렇게 죄를 애지중지하는 게으른 신앙생활, 불성실한 신앙생활 때문에 우리는 죽이고 죄는 살리는 그런 못된 그리스도인을 죄의 길에서 돌이키게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칼로 우리를 돌이키게 하십니까? 채찍을 가지고 우리를 돌이키십니까? 물론 그릇된 길을 계속 걸어갈 때 주님이 칼을 드실 수도 있고 매대신 총을 드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만으로는 우리를 돌이키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도 바울이 자기 속에서 번성하고 있는 이 죄와 싸우기 위해서 매일 죽노라 라는 이 고통을 지불하기 전에 먼저 바울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와 더불어 싸우고 우리의 영혼을 억압해오는 모든 사망의 세력과 더불어 싸우고 정욕과 더불어 싸우는 이 일들이 우리에게 힘들고 고통스럽고 아픔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며 피 흘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관을 쓰신 그 고난은 얼마나 더 처절하고 큰 고난이었겠냐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그 고난은 오늘날 우리들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분투하는 고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고난이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마음을 지키지 위해서 싸우고 흐트러진 경건의 생활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육신의 나태와 게으름과 더불어 싸웠지만 거기에는 땀이야 좀 있을지 모르지만 피 흘림도 없고 살 찢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말고 이제는 다시 육신에 져서 죄의 종노릇하지 말게 하시려고 자기의 거룩한 몸을 찢으셔서 우리를 위해 모두 양식으로 나누어주시고 그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보좌에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일평생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죽는 것, 내가 매일 죽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될 때마다 예수 죽으심을 기억해야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라고 말했습니다. 어제의 기도로 오늘 충분하지 않고 어제 신앙의 정절을 지킨 것으로 오늘 충분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신앙 생활, 나태한 신앙생활은 우리를 교만으로 인도하고 교만은 패망의 앞잡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아가기 원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길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매일매일 죽기 위한 유일한 길은 경건 생활입니다. 매일 기도하고 매일 말씀 읽고 매 번마다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이, 매일매일 새로운 은혜로 매일매일 우리 속에 떠오르는 죄를 죽이는 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내일부터 사경회를 합니다.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 시리즈 다섯 번째입니다. 하나님이 매번 많은 영혼들을 이 호세아 말씀으로 살리셨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고 여러분들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좀 달라야 합니다. 예년과 같은 그런 태도로 사경회에 나와서는 안됩니다. 한 번 '나는 사경회 때마다 죽노라'가지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허물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 이번 사경회에 나를 만나주시고 내 이 식어진 마음에 불붙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면 이전에는 그 은혜 받은 다음에 날마다 죽지 않았기 때문에 죄는 살고 은혜는 죽었습니다 만은 이제 주님이 이번에 나를 만나셔서 나를 새롭게 해주시면 내가 그 능력으로 매일 경건 생활에 힘쓰고 매일매일 죽어서 주님이 내 안에 매일 매일 사시고 주님이 나를 불붙는 사랑으로 사랑하셨던 것처럼 나도 그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겠습니다.'는 결심을 가지고 사경회에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22. 죄 죽임의 실천적 지3침(3)
-총론3:거룩한 말씀의 감화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4:5上)
지난 시간에는 그리스도인이 죄를 이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성실한 경건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러한 죄를 이기는 삶을 위해서 어떤 경건 생활이 필요하고, 또 그것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어떤 결과를 얻게 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거룩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어떤 사람들은 커다란 환난 속에서도 은혜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큰 환난 속에서 은혜생활을 해나가는 성도의 분투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와 격려가 되고, 또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본받아야할 귀감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큰 환난과 시련 속에서 거기에서만 하나님의 큰 은혜를 맛보고 거기에서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맛보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들이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커다란 환난과 시련 그 자체가 우리에게 은혜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은 환난과 시련 때문에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환난과 시련 때문에 그가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환난과 시련 속에서 경건을 회복했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평안할 때에는 정신 차리지 않고 살던 사람들이 시련이 오니까 비로소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살았는데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니까 하나님 앞에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평탄하고 잘 나가는 때에는 자기가 잘난 줄 아는 교만에 빠졌는데 환난과 큰 시련을 당하고 보니까 자기가 얼마나 불순종하고 죄의 길을 걸어왔는지를 알게 되어서 참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형통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제쳐놓고 자기의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환난을 만나고 보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더 순종하고 오히려 기도생활에 더 열심을 내면서 경건을 회복했기 때문에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것입니다.
그러나 환난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곧 건조한 옛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랜 동안 신앙생활 해왔지만 환난을 당할 때만 예수 믿는 사람처럼 경건 생활을 한 사람들, 그래서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은근히 환난과 시련을 만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던 때를 그리워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한 컵의 물을 얻기 위해서 전국에 폭우가 쏟아지기를 기다리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환난이나 시련이 성도들을 거룩하게 만들고 성숙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 환난 속에서 자기가 부서지고 참된 참회가 있고 참회에 뒤따르는 성실한 경건 생활이 있을 때에 비로소 환난이 그를 성도로 만듭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면서 오히려 마음이 더 강퍅해지고 하나님을 향해 모질게 대적하는 그런 끔찍한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특별히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우리가 그 동안에 신앙생활에서 너무나 자주 실패하고 짐승과 방불한 삶을 살면서 회복과 침체를 반복하면서 조금도 진전이 없는 앉은뱅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해온 것은 너무나 간단한 신앙의 공식을 가지고 이 신앙의 세계에 덤벼들었기 때문입니다.
(예화) 지방에 설교를 하러 가게 되었는데 팩스로 보내 준 약도가 너무 간단해서 찾아 갈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
그렇게 간단한 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믿으면 축복 받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운수 대통합니다.' ‘죄 지으면 하나님께 혼납니다.' ‘많이 벌면 많이 바쳐야 합니다.'이런 간단한 공식 몇 개를 가지고 이 신앙의 세계에서 승리를 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적진에 대해서 아무 연구도 없이 소문에 떠도는 풍문 몇 가지를 듣고 군대를 이끌고 돌격 앞으로 하는 것과 똑같이 무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간단하신 분이 아닙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정말 세밀하고 검증된 성경에 토대를 둔 지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쓰러진 사람들은 자기가 왜 쓰러졌는지도 모르고 쓰러졌다 일어나서는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죄에 패배하고 영적인 침체에 빠졌던 신앙의 쓰라린 경험들이 도무지 그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지 않는 겁니다. 여우는 같은 덫에 두 번 걸리지 않지만, 그 덫이 달아버릴 정도로 똑같은 덫에 수도 없이 걸리기 쉬운 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매순간 순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의 감화와 열렬하고 뜨거운 기도생활 없이 그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죄를 죽이는 그 과정이 곧 거룩해져 가는 과정이요 거룩해져 가는 과정 그것이 곧 죄를 죽이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매일 매일의 경건 생활에 얼마나 힘을 쓰고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약해지고 매일매일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중심적이 아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순종하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이 약해진다는 사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셔서 참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우리 주님과 함께 연합한 신비한 한 몸이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에서 우리를 가지로 비유하고 당신을 포도나무라고 비유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신비하게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것만으로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와 접붙여진 가운데서 완전히 달라붙고 포도나무를 통해 끌어올려지는 생명의 수액을 먹으면서 원래 포도나무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를 향해서 기대하던 그런 열매를 맺는데 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삶을 위해서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하는 삶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풍성히 살아서 당신 자신의 삶을 사실 수 있도록 우리가 그 분 안에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순종은 의무적인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갖고 계신 그 뜻에 복종하면서 살고 그렇게 살면서 맺는 열매 때문에 하나님도 기뻐하고 우리도 기뻐하는 그런 삶을 가리켜서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순종하면서 살 때에 우리의 영혼은 계속해서 강해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계속해서 소생하게 됩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는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는 제목으로 가을 기도학교 사경회를 가졌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러한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고 '한 주간 동안도 그런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셔서 이런 불붙는 마음으로 내 영혼에 이런 축복을 주셨으니까 내가 패역을 고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하면서 이전에 하나님을 거슬렸던 죄를 뉘우치고 불순종했던 삶을 버리고 순종하는 삶으로 돌아오면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여러분들의 가슴에 더 깊게 다가오면서 감화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속해서 그의 영혼을 강하게 만들어주시고 반대로 불순종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계속 약하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용기와 결단은 그것 없이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 가운데도 틀림없이 인생의 기로에 놓인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계실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서있는 그 자리가 '내가 서야할 자리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분들이 이중에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이 길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엇이 아닌지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와 결단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이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대해서 칼을 빼어드는 마음으로 결단을 하는 용기 없이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격적으로 딱 부러지는 사람들이 믿으면 믿고 안 믿으면 집어치웁니다. 불성실한 사람,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서 성실한 사람으로 바뀌어졌으면 모르는데 그런 변화가 거의 없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해도 계속 물에 물 탄 것처럼 흐리멍덩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은 살아서 좋은 날 보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제껏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몇 번이나 결단을 내렸습니까? 진정으로 여러분의 삶의 무게 전체를 실어서 '오늘날 너의 섬길 자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고 하는 거룩한 결단 속에서 '내가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든지 감내하겠다'라고 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머뭇거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은 오늘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인줄 알고 기억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는 유익은 말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이 자기의 친구들과 함께 바벨론에 끌려갔을 때에 그렇게 신앙의 정절을 지키면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시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다니엘 1장 10절에서 성경은 말하기를 '다니엘은 뜻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하지 아니하기로 뜻을 정하고 그 축을 중심으로 인생을 설계한 겁니다. 그런 결단이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고 수많은 정치적인 격동기 속에서도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고고한 자태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을 해야합니다. 때로는 진실하고 거룩하고 용기 있는 결단이라고 할지라도 열매를 맺지 못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더 많이 봅니다.
여러분 얼마나 결심을 많이 하셨습니까? 얼마나 주먹을 불끈 쥐는 새로운 각오를 자주 했습니까? 그런데도 그 결단과 각오가 다니엘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자기의 신앙의 자태를 잃지 않는 고결한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은 다니엘보다 결단이 약했기다보다는 동일한 힘으로 결단을 했다고 하더라도 뒤이어지는 매일매일의 성실한 경건 생활의 뒷받침이 없으면 그보다 더 뛰어난 결심을 한다고 하더라도 열매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에게서 이런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예고하실 그 때에 '모든 사람들이 다 주를 버려도 저는 죽는 데까지 주를 좇아가겠나이다'고 결심을 표명했을 때에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나 위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허풍을 떤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는 그러한 결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수하들을 향해서 칼을 빼어든 데에서도 나타납니다. 그의 결단을 보여주는 고백은 진실했고, 심각했고 용기 있는 결정이었지만 결국 그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결단이 진지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결단 뒤에 따르는 분투하는 성실한 경건 생활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입증해주는 것이 마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밤에 겟세마네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거기서 땀이 피가 되어 떨어지도록 기도하실 그 때에 주님은 그토록 베드로를 비롯한 사랑하는 사도들이 기도로 깨어있기를 원하셨지만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다름없이 잠들고 말았습니다. 용기와 결단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으나 뒤따르는 기도생활이 다른 사람들과 같았기 때문에 그는 결국 그런 용기와 결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버렸던 많은 사도들과 똑같은 길을 택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을 너무나 간단하게 생각하면 여러분들의 영혼에 축복이 없습니다. 수많은 신앙의 사람들,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평탄할 때에 모든 유혹을 마다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거룩한 성도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그들은 위대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었고 어떤 때에는 우리와는 비교되지 않는 큰 신앙의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만 보지 말고 그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매일매일 어떻게 성실하게 기도와 말씀 생활을 이어갔는지를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말미암아 거룩해짐이라'고 말입니다. 불순종하는 생활은 우리의 영혼을 약화시켜서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능력을 자꾸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죄를 빼앗기고( ? )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영혼의 건강함을 빼앗기고 건강을 빼앗겼기 때문에 힘을 잃어서 범죄하게 되고 범죄하니까 더욱 더 불순종할 수밖에 없게 되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단이 건강한 신자들을 무장해제 시켜서 자기 수하에 두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로는 매일매일 믿음으로 삶으로서만 우리의 삶의 초점이 주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 자기를 부인하는 믿음 속에서 살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국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가난하고 물질적으로 고통 하는 시대에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많은 재산을 하나님을 위해 바칩니까? 돈 몇 푼에 사람의 목숨을 죽이고 살리고, 자기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아내를 죽이는 그러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자기의 물질을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습니까? 헌금한다고 이름이 납니까, 나라에서 표창을 해줍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헌신된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자기 이기심을 버릴 때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일 매일의 삶을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사는 것이 참 인생이요 신앙이라고 하는 믿음의 권고를 받지 않고는 불가능한 삶입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경건 생활의 부지런한 실천이 없이 어찌 순종하며 살 수 있겠으며 어떻게 매일 비온 뒤에 대나무 밭에서 죽순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끊임없이 매일매일 솟아나는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하는 이기심을 분쇄시키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느 화장품 광고에 '여자는 아침마다 새로 태어난다' 새로 태어나기는 무슨 새로 태어납니까? 자다가 일어났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들은 매일매일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성도다운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지 않고는 승리하는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죄를 죽이기 위해서 우선 선행되어야 할 것은 죄와 친숙해지는 습관을 끊고 은혜와 친숙해지는 습관을 붙여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죄를 이기고 승리하게 만들어주시는 그 방편들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이 진정으로 승리하는 신앙생활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거룩하게 하시는가?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방편에 대해서 말씀과 기도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편이 무어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서 세 가지로 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죄와 더불어 신음하고 여러분들의 불순종을 눈물을 펑펑 흘리며 회개하고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말씀에 감화를 받는, 말씀을 붙잡은 삶을 계속해나가지 않으면 오늘 흘린 눈물은 내일이 지나기 전에 말라버리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생활을 어떻게 해나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지난주에 한 설교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번 주에도 여러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이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놓여진 여건과 더불어서 분투하면서 그 말씀을 섭취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까? 성경을 어디쯤 읽고 있는지 지금 기억하고 계신 분이 지금 몇 분이나 계십니까? 어제도 성경을 읽고 거기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개인적으로 하시는 말씀을 분명하게 들었습니까? 그래서 그 말씀에 거치는 삶이 어떤 삶이었으며, 어떤 부분에 있어서 내가 불순종했고 그러므로 참회하고 ' 제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는가'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깨달았습니까?
예배에 참석하고 갈 때에는 어떤 생각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예배시간이 단지 설교자의 설교를 즐기거나 성가대의 음악을 감상하는 시간으로 바뀌고 있지 않습니까? 마음에 뭔가 커다랗게 걸리는 일이 없고 모든 순서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만족스러울 만치 일찍 끝나면 그 예배는 은혜로웠다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도 변화되지 않은 것 같은 사람들, 영혼에 어떤 자극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뻔뻔스럽게도 설교자의 손을 잡고 은혜 많이 받았다고 말하는 그러한 입 발린 예의는 어느 교회에서든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겉치레가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말씀이 살아있는 예배, 하나님께서 언제나 말씀하시는 성경을 읽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을 어디 읽었는지도 모르고 주간지에 코 박고 일간스포츠를 보는 시간,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관계된 깨달음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죄를 이기고 살아간다면 성경은 다시 써야 될 것입니다. 통계가 나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 중에 95%가 오늘 설교한 성경 본문이 어딘지도 모르고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설교했는지도 모르는 사람, 뭘 들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리가 없고 살지 못한 삶을 참회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들리고 죄는 죄대로 쌓여가고 옛사람은 옛사람대로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조금 있었던 은혜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생활 속에서 조금 있었던 은혜마저 자꾸 시들어가고 죄는 점점 번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형식은 앙상하게 남아있지만 생명이 없는 그러한 말라빠진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실패에 익숙해지고 패배를 숙명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아주 쓸모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름다운 밤나무에서 다른 것들은 아주 탐스러운 알밤을 맺어서 모두 벌어졌는데 가을이 깊어가도 도무지 벌어지지 않아서 주인이 작대기로 두드려서 땅에 떨어트린 다음 지팡이를 가지고 발로 밟아서 까보고 나니까 밤이 맺히기도 전에 모두 벌레가 먹어서 껍데기만 뭉쳐있는 그런 밤과 같은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이 인생에 도움이 될까요?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의 인생에는 신앙도 도움이 되지 않고 그 사람도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데 거치는 돌이 될 뿐이고 진정으로 주님의 나라가 번영하기 위해서 그런 사람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이 빨리 데리고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그런 식으로 죄에 짓밟혀서 살아가는 삶이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사십 년 장구하게 이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 때문에 교회는 욕을 먹고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고 아주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기독교 자체가 생명이 없는 종교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풍성한 영혼의 생명을 누리며 건강한 도덕적인 삶을 이어가는 사람이 옆에 있었더라면 복음을 향해 마음을 열고 십자가 앞에 나왔을 수많은 사람들을 함께 연자 맷돌에 목을 매워서 깊은 바다 속에 빠트리는 것 같은 죄를 삶 자체로 저지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만홀이 여기고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감화 없이 신앙생활을 해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해도 아무 기쁨이 없습니다. 교회 와서 오락회 하는 것도 한두 번이고 친목회 하는 것도 일년에 몇 차례지 무슨 신명이 나겠습니까? 그러니까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교회생활 자체에 대해서 시들먹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그런 무감각한 신앙생활을 계속해나갑니다.
가장 커다란 원인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죽이고 거룩한 삶을 살게 만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와서 성도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집사 되고 장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복이 있는 성도,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 해야할 교회에서의 최고의 의무는 여러분처럼 거기 앉아서 잘 깨닫는 것입니다.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안 하는 사람과 다름없습니다. 설교자가 때묻지 않은 진실한 하나님의 깨끗한 말씀을 성경 그대로 성도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어려운 것만큼, 성도들은 일체의 교만과 위선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거기 그렇게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가장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교회가 형식적인 예배 순서를 거부해야 합니까? 왜 이렇게 성가대조차 세우지 말아야 합니까? 저희 교회에 음악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주자들도 여러 명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오케스트라같이 조직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청년들이 특송하는 것을 들어보시겠습니까? 천사들의 합창소리 같습니다. 여기 사 오십 명 성가대를 세워놓으면 한다하는 성가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안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예배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성경이 예배의 본질을 아주 단순하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가장 성경으로 돌아갔다고 믿어지던 청교도 시대에 그들의 예배가 지금 우리만큼이나 단순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왜 성가대 같은 것들을 원하지 않았고 왜 강단을 쓸데없이 장식하지 않았습니까? 단순하고 소박한 강대상, 그리고 단순하고 간단한 예배순서, 언제 끝나고 얼마나 길게 설교하고 얼마나 많이 찬송 부르는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그러한 자유로운 예배를 지향하였던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예배 속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예배 새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예배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통해서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데, 그 목적은 그 깨닫는 말씀을 통해서 각 성도들이 영혼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그렇게 깨닫고 만나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참회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 자유함이 없었던 사람들은 사유하심을 받고, 오해와 무지 속에서 열심을 내면서도 불순종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된 신앙의 길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가슴아파하며 돌이키는 겁니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깨달음 속에서 격려하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큰사랑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모두 끝난 후에는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교회에 올 때에는 세상에 이루지 못한 야망, 세상의 근심 걱정으로 살을 썩이고 뼈를 찌르던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크고 깨달으면서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 난 다음에 '아 그렇구나 세상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 이제껏 나는 이것도 없어 저것도 없어 하면서 마음에 쓴 물을 머금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았지만, 오늘 예배를 드리고 보니까 나 같은 죄인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외아들까지도 아낌없이 주셨으니, 내가 바르게 순종하고 주님의 뜻대로 산다면 그 아버지가 나에게 무엇을 아끼시겠는가'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잘 살아보려고 애쓰던 사람들이 예배가 끝난 후에는,
내 생의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내 생의 더욱 귀한 것 주 닮는 것
나의 주 닮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의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그래서 욕망과 죄악으로 가득 찼던 우리 영혼의 더러운 때가 그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로 말갛게 씻겨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주님께로부터 이런 커다란 구속의 은혜를 입었사오니 잠시 머무는 세상에서 조금 부족한 것이 있어도 저는 살 수 있습니다. 나와 동행해주시고 이 모나고 못된 사악한 나를 주님의 손으로 빚으셔서 주님의 형상 닮은 사람 만드셔서 나와 마음껏 사귀시고 나를 통해 주님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하는 새로워진 가치관, 새로워진 인생관, 그리고 새로워진 정결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예배를 드리는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 예배의 목적입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에서 사람들이 60분도 채 되지 않는 예배를 견디지 못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간단합니다. 예배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즐거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화) 새롭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교회를 찾던 한 자매가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 리게 되었는데 죄 죽임의 교리 설교만 두 시간 이십 분을 한 날이었다.-그렇게 긴 예배가 있다는 것과 그것을 자신이 견딜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이야기.
무엇 때문입니까? 깨달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 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하고 깨달으면서 나를 향해서 이전에는 내가 몰랐던 그 하나님의 간절하고 뜨거운 사랑과 나를 향한 그 마음을 내가 전수 받으니까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화) 젊은이들 집회에서, 그날 새벽까지 다른 집회를 인도하고 피곤했음에도 4시간 40 분을 설교한 이야기.
만일 사람들이 뒤틀고 벌떡 일어나서 가고 삐삐 오고 핸드폰이 울렸다면 할 수 없었을 텐데 설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기도원 마루바닥에서 흔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런 일들이 가능합니까? 두 가지입니다. 성령이 거기 오셨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 것도 못 깨달으면 성경을 읽는 것이 신앙생활에 거의 도움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몇 독했다는 자랑거리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이 없이 성경을 읽는 것은 신앙생활에 도움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는 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감화를 받는 그러한 삶이 없이는 우리는 거룩해질 수 없고 죄를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오래 예수를 믿었는데도 인격이 야비하고 추접스러운 사람들의 뒤를 캐보십시오. 그러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담쌓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진실하고 뭔가 깊이가 있고 그 사람 앞에 서면 왠지 하나님의 형상이 느껴지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성실하게 경건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됩니다. 하나는 설교를 잘 듣고 이해하고 일주일 동안 그것을 기도할 때마다 회상하며 살려고 실천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고, 성경을 매일 매일 읽으면서 은혜를 받는 삶, 이 두 가지로 집약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매일 매일 깨가 쏟아지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가슴속에 확확 다가오면서 영혼의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은 정말 살아있는 신자들입니다. 누구도 그 사람을 쉽게 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상태를 유지하며 살지 못할 경우가 많고 그런 상태를 유지한다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보다는 수시로 변합니다. 늘 밥을 먹으면서도 어떤 때는 맛있고 어떤 때는 먹기 싫듯이 성경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때에 뭐가 필요하냐 하면 좋은 반찬이 있으면 됩니다.
(예화) 할머니께서 좋은 반찬을 해드리면 할아버지께서 "오늘은 소란 놈이 밥이 빨리 들어가라고 채찍질을 하는구나"하셨다는 이야기.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다가 건조한 느낌이 들 때에는 좋은 경건 서적을 함께 읽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성경자체가 가슴에 다가오지 않고 딱딱하게 느껴질 때 경건 서적을 반찬해서 먹는 것입니다. 어떤 경건 서적을 읽어야 하냐고 하는데, 조심해서 읽어야합니다. 그릇된 책을 읽었기 때문에 신앙이 잘못 굳어진 사람들이 저희 교회 안에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좋은 책의 비결은 읽은 후 그 책을 쓴 사람과 같이 성공하고 싶다든지 어떤 열망에 들뜨기보다는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가슴이 깊이 젖어오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이 일반적으로 좋은 책입니다.
또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책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해서 자기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성경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책이 좋은 책입니다. 그러면서 부지런히 노력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감화를 받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죄를 이기는 삶이 가능해 집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 세 가지 일들을 위해서 얼마나 성실하게 노력하고 있는지 오늘 한 번 반성해보시기 바랍니다. 매일매일 성경을 읽고 또 그 성경을 읽는 속에서 깨달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통계에 의하면 매일매일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깨달으려고 규칙적으로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 한국교인 백 명 가운데 세 명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여러분 세 명 안에 들어갑니까?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와서 예배시간에 멍하게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끊임없는 상념에 잠겨있거나 혹은 눈을 지긋이 감고 졸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않는 것은 예배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예배에 들어왔기 때문에 마치 좋은 사과의 한쪽 구석이 썩어서 사과 전체의 값을 떨어트리는 것처럼 그 예배의 품질을 떨어트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가 교회를 돕는 일은 그런 예배태도를 속히 버리든지 예배의 현장에서 떠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설교자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삶 속에 적용하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말씀의 실천적인 적용과 삶을 통해서만 성실한 경건 생활이 유지될 수 있고 그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강화되고 우리 속에 있는 죄악된 욕망들은 서서히 시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경건한 책을 읽고 그 속에서 감회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모자라는 지식들을 보충하고자하는 노력들을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그런 일들에 열심을 내어서 여러분들의 후손으로 하여금 여러분들이 진리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얼마나 경건한 책들을 안 읽으려고 하는지는 제가 쓰는 것을 다 못 읽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한 권을 다 읽기 전에 저는 그 다음 책을 썼는데 나오고도 여러분들은 지난번에 나온 책을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전에는 이 사람 저 사람 나누어주는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준 책들이 껍데기 하나 넘기지 않고 가지런히 책장에 꽂혀있는 일들을 몇 사람에게서 발견하고 다음부터는 절대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피치 못하게 줄 수밖에 없을 때는 읽겠다는 서약을 받고 줍니다.
인생을 다 살고 난 후에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여러분들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물론 여러분들은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일수도 있고 사회적 직분에 있어서 성공한 높은 지위의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재물을 많이 모으거나 혹은 이웃에게 신망을 얻은 선한 사람으로 자녀들에게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높은 직분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던 사람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말씀의 사람이 아니라면 여러분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훗날 여러분들을 보면서 어떤 인상을 갖게 될까요? '우리 아버지는 교회 가면 매일 싸움질만 하셨다'그런 인상을 심어주시겠습니까? 아니면'우리 엄마는 돈만 있으면 교회에 다 바쳤다' 그런 인상도 나쁜 인상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엄마는 우리조차 팽개치고 교회에서 늘 살았다' 그것도 나쁜 인상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선한 삶에 대한 인상은 다음의 한가지보다는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 엄마는 말씀의 사람이었다', '우리 아빠는 성경의 사람이었다'입니다. -그때 일은 지나고 다만 눈에 환하오 어머님의 말씀 기억하면서 나도 시시때때로 성경말씀 읽으며 주의 뜻을 따라 살려합니다-분주한 가운데에서도 언제나 창가에 조용히 앉아 성경을 읽으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구속의 사실을 기억하고 흘리는 경건한 어머니의 눈물, 어찌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어찌하여야 나의 생애를 통해서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 무지한 세상에 복음의 빛이 깃들일까를 노심초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일에 열심을 내던 경건한 아버지의 그 땀방울, 이것들이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 할 아주 없어지지 않는 유산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과 간절한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까? 뒤집어지는 은혜를 일년에 한차례씩 경험하고도 죄를 이기지 못하고 언제나 다 털어먹고 손들고 나오는 그런 비참한 죄인의 모습이 반복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말씀에 의한 감화가 사라진 삶을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예화) 극동 방송에서 소개된 중공에서 온 편지- 성경을 구할 수 없는 신앙인들을 위해 서 받아쓰도록 천천히 성경을 읽어주는 성경을 받아 적은 성경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이야기.
여러분들은 얼마나 좋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합니까? 지금도 육 칠백 명 모이는 중국교회에서 설교자가 없으니 비디오 테이프를 보내달라고 연락 왔습니다. 예배에 오면 진리를 가르쳐주는 설교자가 있고 손을 뻗으면 읽을 수 있는 깨끗한 성경책이 있고, 살펴보면 어디든지 성경을 읽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 많고 테이프가 무진장으로 쌓여있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 중심의 생활을 하지 않고 인간의 감정에 쉽게 흔들리면서 신앙생활 했기 때문에 결국은 죄를 알면서도 죄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불순종인줄 알면서도 걸어가던 그 길을 포기하고 돌아설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점에 있어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켜서야 합니다. 사람들은 불순종한 죄는 가끔 회개하지만 그렇게 불순종하는 원인이 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 말씀의 감화 속에서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태만하고 게으른 날들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 보실 때에 바보 같은 행동일까요?
경건한 시인들, 그리고 거룩한 선지자들은 마음속에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의 감화 앞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을 전부 투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요한계시록 5장을 보시면 거기에는 사도 요한이 통곡하며 울고있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내가 마지막 때에 될 일을 너에게 계시하리니 너는 적어서 모든 교회들에게 보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 사명감을 가지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고 계시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늘로부터 두루말이 하나가 내려오는데 인봉한 두루말이였습니다. 빨리 뜯어서 봐야지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텐데 오히려 들려오는 천사의 소리는 "하늘과 땅 아래 이 인봉을 뗄 사람이 없다" 그때에 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던-주님을 사랑하던- 요한은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때에 "어린양 예수 그분이 이 인을 떼기 합당하도다"라고 말하면서 다시 하나님이 은혜로 그 봉인한 두루말이를 뜯어서 요한 앞에 보여주심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셨을 때에 요한은 그 눈물을 닦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모두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뵈옵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죄와 더불어 싸우고 불순종과 더불어 싸워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자하는 결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그 열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 속에서 감화를 받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단에서 출발해야합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거기에서 참회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며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진실하고 큰사랑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은혜와 사랑을 모르는 채 살았던 무감각한 옛 생활에 대한 깊은 참회가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기해서 그 말씀에 늘 감화를 받고 그 감화 속에서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깨달음들을 끊임없이 부어주셔서 장엄한 말씀의 숲 속에서 한없이 감탄하고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예화) 비행기를 타고 속초에서 서울로 오다보면 높은 태백산맥에도 사람들이 다녀 생 긴 길이 있다-어느 산이든 사람들이 다닌 길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는 것은 등산하는 것과 아주 흡사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남이 걸어간 길만 부지런히 걸어갑니다. 계속 사람들이 걸어다녔기 때문에 밟으면 먼지가 퍽퍽 나는 길입니다. 산 속을 걸어가는데도 계속 앞사람이 먼지를 피워 입을 막으며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너무나 불쌍히 여기셔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깨닫고 정말 '하나님 내 삶이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는 헤아릴 수가 없는데 그 높고 깊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도 한 번 큰 감동을 받고 그 말씀 속에서 크게 새로워질 수 있도록 한 번 도와주십시오'하고 그렇게 울며 기도하는 어린양들의 기도가 너무 가상해서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말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깨닫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자기가 여태 걸어갔던 그 메마르고 타박타박하던 길 말고 숲 속으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숲 속에 접어드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산을 다녔어도 본적이 없었던 아주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나는 것입니다. 숲 속을 들어가 보니까 이른 아침 숲 속에 잔디가 쭉 깔려있는데 아침 이슬이 내려서 영롱하게 풀잎 끝에 구슬처럼 매달려있습니다. 더 지나가 보니까 아침 안개가 살포시 깔리고 하늘에서는 아침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면서 신비한 모습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니까 아름다운 호수가 보이고 거기를 둘러싸고 있는 신기한 큰 나무들이 웅장하게 서 있습니다. 그리고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립니다.
거기에서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잠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큰 은혜를 받았는데 십 년 이십 년 동안 묶였던 죄악의 사슬들이 끊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질병들이 고쳐지고 죄악의 질병에 얽매였던 신앙의 세포들이 새롭게 소생하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큰 은혜와 감화를 체험했던 사람들은 한 주 두 주 석주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것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떠한 죄 가운데 살고 가망이 없는 사람이고 아무리 나쁜 사람이고 아무리 결심이 약하고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말씀이 여러분들의 귀에 들리고 그 거룩한 감동이 여러분 속에 있으면 여러분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힘이 없고 약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큰 말씀의 은혜와 감화를 깊이 경험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기 때문에 읽습니다. 고난받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양약이 되고 위기에 쳐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힘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리고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에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큰 용기를 주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감화를 받고 그 말씀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니까 더 순종하게 되고 더 순종하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강하게 해주십니다. 실천하고 순종하며 사니까 하나님이 깨달음을 점점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이 조금 있어도 순종하지 않고 살던 사람들에게는 그 은혜를 거둬버리시고 조금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이 순종하고 그 순종 때문에 더 큰 은혜를 받고 말씀에 감화를 받으니까 하나님이 계속 보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생각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지배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뭘 생각할 때 ‘저것을 하면 내게 이익이 될까' ‘저것을 하면 내가 세상에서 성공을 할까' 이런 것들이 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인가' ‘주님이 저것을 기뻐하실까'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로 볼 때 저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을까' 이것을 먼저 검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늘 순종하면서 사는 겁니다. 순종하면서 살려고 할 때에 고난도 많습니다. 그 대신 고난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은혜를 하나님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은혜를 가지고 죄를 이기고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정욕들을 이기면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크고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데도 말씀에 의한 은혜로 자기를 죽이지 못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핑계할 수 없습니다. 모두 자신의 영적인 게으름 때문입니다. 게으르고 인색한 신앙생활 때문에 그러한 말씀에 의해서 감화를 받는 거룩한 삶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는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며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죄를 이기게 하는 일들을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우리들이 매일매일 경건한 삶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가 매일매일 경건의 삶 속에서 반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요즘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할 때 여러분들은 서슴없이 '요즘은 하나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계속 주시고 있기 때문에 제가 변해가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분들은 마음속으로 한 번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지금 묻는 저의 질문에 대해서 답변할 수 없거나 답변을 해도 애매모호하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뒤로 물러가고 있는 중입니다. 동역자들을 만나면 즐겨 묻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부흥됐느냐 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목회자에게 지금도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지금은 초라해도 그런 목회자가 강단을 피 흘릴 각오로 붙들고 있는 교회는 결국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볼 것입니다.
만약에 교회의 자산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목회자가 피묻은 손으로 강단을 붙들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신자인 여러분들의 삶은 어떻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삶이라고 해서 다를 수 있습니까? 교회를 허물어뜨리기 위해서 달려드는 대적은 교회만 상대하고 여러분들의 삶은 안중에 없습니까? 교회를 향하여 유혹이 되고 있는 여러 가지 유혹들은 교회 안에서만 발견되고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까? 원수들은 목회자만을 노리고 평신도인 여러분들은 관심이 없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에 의한 감화 없이 여러분들이 죄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어떤 인생을 살다가 마칠지 제가 미리 모두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죄를 이기지 못할 것이며 가끔 은혜 받았다가 곤두박질치는 삶을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반복하다가 쓸모 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이 교회 저 교회 옮겨 다닐 것이며 결국은 자신이 하나님께 한 번도 만족을 드린 적이 없는 것처럼 교회도 여러분들에게 한 번도 만족을 주는 교회를 못 만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에 의한 감화가 없이 산다면 둘 중의 하나는 어느 목회자 밑에 들어가서 종처럼 살든지 아니면 목회자와 함께 겨루면서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보다 더 가능성이 많은 것은 교회 안에는 들어왔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일 겁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참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학교를 그만 두고 나서 육신적으로 훨씬 더 편해졌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학교를 그만둘 때는 굉장히 널널하고 여유 있는 인생이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제 생각이었지 하나님은 저를 그냥 놔두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역으로 저를 부르셨습니다. 지금도 하루면 수없이 강의, 집회, 원고 청탁이 들어옵니다. 요즘 부탁하는 사람들은 운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거의 다 못 간다고 통보합니다. 제가 이 교회와 씨름하기 위해서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러분과 씨름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도 한가한 때는 없었지만 학교 다닐 때는 자고만 일어나면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고 연탄가스 먹은 사람하고 똑같았습니다.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더 격렬하게 육체적인 힘을 쓰는데도 훨씬 나졌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아침에 일어나면 개운했습니다. 그때 어떤 의사가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혈압이나 만성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일생을 살면서 아침에 커튼을 열고 찬란하게 비쳐오는 태양을 맞으면서 기지개를 켜며 '상쾌하다'는 것을 평생 한 번도 경험하지 않고 죽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가 없이 신앙생활 한다면 정말 일생을 예수를 믿으면서 한 번도 '정말 이 맛이구나. 주님의 이 큰사랑 때문에 나는 정말 행복하구나. 나 같은 사람을 주님이 왜 이렇게 사랑하실까?'하는 가슴 저미는 그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것이 말씀의 감화 없이 신앙생활 하는 사람의 일생을 미리 볼 수 있는 그림입니다.
무슨 재미로 신앙생활을 해나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요새 가만히 보면 교회 와 가지고 매일 머리를 맞대고 하는 것이 '뭐 좀 재미있는 것이 없나'에 껄떡이는 사람입니다.
23. 죄 죽임의 실천적 지침(3)
-총론3:거룩한 말씀의 감화②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4:5上)
바자회도 한 번 해보고 노래자랑도 한 번 해보고 친교회도 한 번 해보고 박수도 쳐보고 연예인도 한 번 불러보고 성경 퀴즈대회도 한 번 해보고 온 가족 연극대회도 한 번 해보고 별일을 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 그렇게 재미있겠습니까? 하나님과 만나는 큰 놀라운 기쁨과 성경에 기록된 말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쁨보다 기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 없이 신앙생활 하는 마지막 그림은 결국은 그런 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일평생을 살면서 싸워야될 대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와 그 은혜를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인과 더불어서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깊은 은혜를 받고 그 속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영혼의 변화를 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한 번 반성해보십시오.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를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역사할 수 있다면 주님의 말씀 속에서 내 영혼이 변화를 받을 수만 있다면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기쁨이요 즐거움이겠다고 하는 거룩한 소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 속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인지를 입증하는 중요한 시금석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을 때에 그가 얼마나 안타까워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가끔 물건을 사고 얼마 안돼서 즉시 후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화) 노트북 컴퓨터의 배터리가 오래 간다해서 비싼 돈을 주고 샀는데 실제 얼마가지 않아 즉시 후회했다.
우리가 물건 하나 잘못사서 돈을 허비한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후회합니다. 후회해본들 바꿔줄 리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후회합니다. 왜냐하면 그 돈이 아깝고 그것을 사러간 노력이 아깝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사지 않았더라면 그 돈을 가지고 더 유용한데 쓸 수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수많은 기회가 있고 주님이 우리에게 죄를 이기며 살도록 끊임없이 소원하고 마음에 의지를 품으시면서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고싶어 하셨는데 너무나 많은 날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 없이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불순종으로 가득 찼고 우리의 삶은 무지 속에서 인생을 낭비하는 일로 많은 시간들을 허비했습니다. 그랬으면 우리는 후회해야하지 않습니까? '아 내 젊은 날에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찬란한 빛이 있었다면 주님의 그 말씀이 내 영혼에 거룩한 감화를 주어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더 깊이 일찍 만났더라면 세상을 위해서 허비했던 내 많은 젊은 날들을 통해서 주님을 얼마나 더 잘 섬길 수 있었을까? 주님이 내 젊은 날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을 텐데'하는 안타까움과 간절한 슬픔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우리의 온몸을 집어넣어서 정결케 되도록 하나님께서 교회 한 가운데로 말씀의 거룩한 강물을 흘려보내실 때 뭔가 두려워하고 주저하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이 세상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결별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온몸을 잠가서 새 사람되는 대신에 손만 씻고 말면서 흘려보낸 하나님의 말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에 대해서 깊이 참회하고 그렇게 흘려보내 수많은 날들이 하나님 앞에 안타깝고 서럽도록 회개되고 후회되고 있는가는 말입니다. 그것이 오늘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면서 살아왔던 많은 날들을 후회하고 지나온 날들이 너무나 서러워서 이제는 남은 날들을 순종하며 사는 것밖에는 살 시간이 없고 주님의 뜻을 준행하면서 사는 것밖에는 인생의 참 보람이 없다는 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온다면 우리 가운데 머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날 동안 주님의 명령을 하찮게 여기고 하나님이 명백하게 우리에게 분부하시는 계명을 어기는 것을 교통법규 어기는 것보다도 더 하찮게 여기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불순종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습관을 가져왔고 지속적으로 주님을 거스르며 사는 습관은 패역을 형성하여 우리의 영혼을 약화시키고 우리 안에 죄가 자라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정말 하나님 앞에 불순종과 범죄로 피 발자국을 찍으며 달려가는 모습이 되었고 종교적인 모습은 많이 갖고 있어도 하나님 앞에 말씀에 의한 감화가 희박하기 때문에 자기가 깨트려지는 거룩한 자기 깨어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있으나 성도는 없고 그리스도인은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참된 제자는 사라진 그러한 신앙의 삶을 살아오게 되지 않았습니까?
신앙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방법이 우리를 새 생명 얻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길,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던 그 길, 어리석을 정도로 우매할 정도로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주님이 주신 은혜의 수단들을 홀로 의지하며 살았던 거룩한 성도들의 발자취, 이것들을 보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 없이 신앙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짐승에게 넥타이를 매게 하고 양복을 입혔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리 성도다운 모습을 흉내내려해도 우리의 속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감화가 파헤치고 지나가서 우리를 새사람 만들지 아니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새사람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들을 뿐이고 은혜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들을 뿐이고 영생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들을 뿐이지 우리 자신이 새 생명을 누리고 새사람이 되고 영생을 얻게되는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을 놀랍게 만나고 격렬한 회개를 경험한 사람들조차 이 간단한 신앙의 원칙을 얼마나 쉽게 무시해버리고 있는지를 보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우신 분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회개한 후에 사람을 돌이킨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에 그 회개에 감동을 받으시는 것이지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그런 감동적인 회개 놀음에 하나님은 감동 받으실 이유도 없고 감동 받으실 리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신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오늘도 듣고 또 그냥 넘어가려고 합니까? 무엇인가 결심해야 합니다. 무언가 결단을 하고 여러분들의 말씀 생활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받아야합니다. 예배 시간마다 주어지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고 그것들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 여기 올라와서 여러분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사람이 얼마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웅변을 늘어놓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여기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기억되기 위해서 여기 서있는 것도 아닙니다. 설교테이프의 한 시리즈를 완성하기 위해서 여기 서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를 여기에 세우신 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주님의 거룩한 구원받은 성도가 되게 하시려고 세우셨습니다. 이 포도원에서 의와 사랑과 공평의 열매를 맺고 여러분들을 통해서 온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맺힌 열매를 보고 과연 주님의 백성인 것을 알게 하시려고 주님이 여기에 세워 놓으셨습니다.
성경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들이 여러분들에게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매춘부과 같은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지식을 자랑하게 하기 위하여 당신이 낳은 지식을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지몽매하기 짝이 없던 우리들의 어두운 눈을 열어서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같이 무지한 인간들, 주님이 내버려두시어서 우리의 의지대로 찾아오라고 말씀하셨더라면 우상에게나 가서 절하고 있었을 이 들풀과 같이 가치 없고 가축과 같이 무지몽매한 인생들에게 당신을 아는 지식을 주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불붙는 함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셔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 지를 보여주신 그 말씀의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게 하시려고, 거룩한 백성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식들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순종하는 삶을 살고 다른 사람보다 더 거룩한 삶을 살고 그리고 그 지식을 더 사용해서 모르는 사람들은 흉내낼 수 없는, 주님을 향해 자기가 다 산화하고 싶어하는 그런 헌신된 바쳐진 인생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그러한 지식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많이 알고 주님을 위해서 별로 하는 것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하나님께 커다란 책망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여러분들은 마치 한 달란트를 받고 땅에 묻어두었던 종과 같습니다. 아니 더 나쁜 사람입니다. 한 달란트 밖에 안 받고 그것을 땅에 묻어둔 사람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주인에게 책망을 받았다고 할 것 같으면 다섯 달란트를 받고 그것을 고스란히 땅에 묻어둔 사람들은 하나님께 얼마나 더 책망을 받아야할까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여러분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많은 말씀을 깨닫고 거룩한 감화를 받고 그 지식을 이전에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해서 별로 하는 것이 없는 삶을 산다면 이제 여러분들 속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부끄러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당신 자신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지만 거기에 순종하지 않고, 많은 것을 알 뿐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돌이킬 수 없는 불순종입니다. 성경의 교훈에 비춰볼 때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들을 똑같이 다루시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주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많이 맡은 자들에게는 많이 구할 것이요 적게 맡은 자들에게는 적게 구할 것이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사람들은 신앙에 관해서 말만하고 실천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청교도와 거룩한 순교자들에 대해서 말하면서 자기는 단지 그런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고 그런 사람들의 감동적인 생애를 들먹임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마치 그와 닮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청교도들에게 역겨운 사람들입니다. 뭘 닮은 것이 있습니까? 그들처럼 순결합니까? 그들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를 사모하고 있습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자기의 인생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몸과 마음과 그들의 온 영혼과 인생의 행복까지도 주님의 손에 저당되었습니다. 불붙는 소원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 속에 흐르는 한 방울의 피까지라도 모두 주님을 위해서, 주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서 쓰여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찰스 스펄전'은 그의 자서전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몸에 흐르고 있는 피 중 단 한 방울이라도 주를 위해 흘리기를 거절하는 피가 있다면 그 피를 쏟아 주시옵소서. 내 몸의 살 중 단 한 점이라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찢기기를 싫어하는 살이 있다면 하나님 오늘 그것을 도려내 주시옵소서'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사로잡혀있던 사람들의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감화와 그 진리를 위탁받았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버릴 때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이 세상에서 웃음거리로 만드시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함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백성의 뛰어남이 무엇이었습니까? 더 권세 있는 왕이 세상에는 많았고 더 많은 말과 칼과 병기를 가진 군사 대국들이 주위에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사람의 몸에서 배꼽과 같은 조그만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하찮은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그들을 주목해야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보다 더 도덕적인 사람들이 거기 살았기 때문도 아니고 영리한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질그릇이었으나 보배가 담겼으므로 보배로운 존재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특별히 뛰어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 믿고 나서 얼마나 많이 변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백성보다 구별된 지위를 주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이 질그릇과 같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여러분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교회에서 대접을 받고 높은 직분에 오른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 속에 이러한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있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별로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거룩한 감화를 입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지만 되겠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죄와 더불어 정말 싸우고 있습니까? 주님의 그 크고 놀라운 은혜로 받는 말씀의 감화에 책임지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반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깊이 참회해야합니다.
(예화) 미국에서 안식년을 받은 어느 목사님이 모든 나라의 교회를 순회한 후 가장 살 아 있는 예배를 드린 교회를 만났는데 열린 교회였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저는 그 고백을 듣는 순간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일리는 있을지 모르지만 한 교회가 드리는 예배가 정말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예배인가 하는 것은 단지 여러분들처럼 훌륭한 자세로 설교를 경청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입니다. 정말 성도들에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위탁하셨고 나같이 소망이 없는 소경과 같은 인생을 어두움 가운데서 빛으로 건져내셨다고 하는 신성한 소명의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삶이 남달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알지 못했을 때에는 그릇 행하였거니와 이제는 알게 되었은 즉 우리는 그 지식 안에 거하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거룩한 감화를 더더욱 필요로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즐거워하였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말씀을 받은 것이 정말로 영혼의 그릇으로 받은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동시에 정말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혐오해야합니다. 주께서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에게 이런 거룩한 진리를 위탁하셨은 즉 나는 이제 이 진리를 좇아 살겠노라고 하는 거룩한 결의와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이러한 일들에 열심을 품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 것만큼 거룩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감화가 지금도 계속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변화 받는 반복적인 생명의 역사가 우리 안에 그치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언제나 이 진리의 영을 유지하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여기 서있는 이 목회자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진실로 이 교회에서 악마에게 표적이 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이겠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과연 여기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마르지 않도록 생명을 걸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샘솟듯 솟아난 날이면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며 그렇지 못한 날이면 설교자와 함께 괴로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절치부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나 가진 재물 없고 이 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내가 진리의 사람이므로 주님과 동행하며 살고 진리가 내 안에 있으므로 주님이 우시는 삶의 현장에서 나도 울고 주님이 아파하시는 그 현장에서 나도 아파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현장에서 나도 환호성을 치며 세상의 것을 좇지 않는 그런 성도의 거룩한 삶을 살고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오랜 실패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는 입증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뒤로 물러간 성도들이 있고 한없이 앞으로 전진하고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주저앉은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새 힘을 얻고 뛸 듯이 기뻐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세상 끝날 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패배하고 어떤 사람은 승리하며 어떤 사람은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만 어떤 사람은 정복하고 전진하여 주님이 주신 그 땅을 취할 것입니다.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좌절과 실의에 빠져서 인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만큼 냉혹한 세계는 없습니다. 목회자가 여러분을 인정해주면 뭐합니까? "목사님이 그러는데 나 그럴 수밖에 없데" 하나님이 '땡' 하시면 끝납니다. 슬픈 역사입니다. 우리가 이미 여러 시간들을 거치면서 명백해졌습니다. 여러분 중 어떤 사람에게는 분명한 회개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휴지 사대기가 바쁠 정도로 눈물이 있는 예배도 드렸습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는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밖에는 내 인생에 희망이 없다는 거룩한 헌신의 다짐도 지루할 정도로 많이 했습니다. 그러고서도 실패한 원인이 이제 무엇이었는지 다 드러났습니다. 여러분들은 말씀 생활에 성실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격렬하게 회개했으나 옛 삶으로 돌아갔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으나 사실은 그 지식을 버리고 물러가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주님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의 영혼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진리를 떠나서는 살 수 없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데 하나님하고 만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는 말씀이 없이는 살 수 없는데 말씀으로만은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 없이 살 수 없는데 은혜만으로는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가끔 세상 재미도 봐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마음에 정함이 없는 사람들이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시험에 든 사람들은 계속 시험 속에서 썩어갈 것이며 오류에 빠진 사람들은 계속 깨닫지 못할 것이며 좌절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거기서 엎드려지고 말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는 그런 사람들이 설 땅이 거의 없습니다. 누가 그것을 대신해줄 수 있겠는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은 대신 해줄 수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거룩한 감화를 받고 그 말씀의 은혜를 붙들고 매일매일 성실하게 진리와 함께 사는 것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대신해주시지 않습니다.
죄 죽임의 교리에서 우리는 중요한 성화의 원리를 배웠습니다. 성령이 죄를 죽이는 주체이시고 역사 하시는 주체이신데 홀로 죽이지 않으시고 순종하는 만큼만 죄를 죽여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에 의해서 변화를 받으려는 의지도 별로 없고 받은 변화를 간직하며 살려고 하는 고민도 별로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뭐라 하실까요? "얘들아 내가 네게 어찌하랴"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쓸모 없는 인생을 살뿐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도저히 보실 수가 없어서 징계하시면 고통스러운 영혼을 안고 몸부림치며 용서를 빌 것입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다시 뒤로 물러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말입니다. 그런 삶을 반복하다가 죽는 것은 이 세상에서 짐승 하나가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만큼도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저는 며칠 전에 여러분들에게 스스로 평가하기를 명언을 하나 남겼습니다. 대충 살고 즐기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고 거룩하고 철저하게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나 길어서 누구도 이 정도면 됐다고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매일 죽노라' 했던 것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찬란한 불꽃처럼 타올라서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을 보여주는 그 거룩한 영광스러운 성도의 삶은 어쩔 줄 몰라하며 근신하는 삶 속에서 성취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고 정말 하나님 앞에 크게 깨달았다고 칩시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식으로 그의 말씀이 하나님의 마음속에 열매 맺게 만드시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갑니다. 봄에 꽃들이 만발하게 피면 꽃나무 하나에 꽃이 몇 송이인지도 셀 수 없으리 만치 과실나무에 꽃이 빨갛게 매달립니다. 대부분의 꽃들은 그냥 떨어지지만 어떤 꽃들은 열매를 맺습니다. 꽃처럼 피어나는 생각은 선하고 좋은 생각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악하고 더러운 생각도 한꺼번에 피어납니다. 최선의 삶은 무엇입니까? 꽃이 피는 것도 막아야겠지만 어쩔 수 없이 꽃이 마음속에 피었다고 할 것 같으면 무슨 방법을 해서라도 열매 맺지 못하고 며칠 지나고 나면 시들어지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의한 거룩한 감화만이, 신령한 생각만이 열매를 맺도록 만들어야합니다.
좀 더 크게 보십시오.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감화를 받으면서도 그 감화를 간직하며 살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한가지 고려해야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렇게 말씀에 감화를 받고 격렬하게 참회를 했는데도 불순종하는 삶을 서슴없이 사느냐는 것입니다. 눈에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토했던 죄를 다시 집어먹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어느 순간에 말씀을 듣고 깊은 감화를 받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늘 일어나는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차갑고 냉랭하던 마음에 간신히 하나님의 말씀의 불이 당겨졌습니다. 초가 오랫동안 타서 뜨듯해졌을 때는 멀리서 불을 붙여도 '확'하고 불이 붙습니다. 그러나 차갑게 식었을 때에는 성냥불을 심지에 문질러대도 불이 잘 붙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불이 당겨졌으면 좀 간직해야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주시겠다고 할 때는 그렇게 안 열던 마음을 세상을 향해서는 해벌레 합니다. 전혀 긴장이 없습니다. '주님이 주신 이 은혜의 마음을 빼앗기면 어떻하지. 어떻게 받은 은혜인데' 몇 년 동안을 건조하게 살다가 이제 겨우 내 마음이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하나님 내가 내 마음을 지키고 주님이 내게 주신 이 은혜의 불씨를 지킬 수 있도록 예수여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야 되는데 정반대입니다. 주님이 말씀 좀 하시려고 하면 마음을 닫고'누가 이기나 보자'하고 깨닫고 난 다음에 그렇게 닫아야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깨닫고 난 다음에 해벌레합니다. 그러니까 매일 죽 쒀서 개주는 식으로 은혜 받고 나서는 마귀 좋은 일만 다 시키는 겁니다.
교회에서 잘 믿던 사람이 계속 잘 믿고 있을 때도 기쁩니다. 그러나 더 기쁠 때는 집을 나간 탕자와 같이 쓸모 없던 사람이 다시 믿음으로 돌아올 때 얼마나 기쁩니까? 우리가 은혜를 받고 감화를 받으면 마귀 입장에서는 우리가 탕자일 것 아닙니까? 다 털어먹고 손들고 옵니다 하고 가면 마귀가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그런 식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패한 원인이 무엇이냐?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을 아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화) 개척 교회하는 후배 목회자가 장로님과 설교 속에서 교인들이 은혜 받는 이야기 를 하다가 두 달에 한 번이라도 교인들이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자 그 장 로님이 개척 교회 때는 매시간 뒤집어져야만 한다고 하더라는 이야기.
그런데 문제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 감화 없이 살아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한 감화가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 서서히 사라지다가 결국은 죄에 발목 잡히는데 그것을 수없이 경험했으면서도 또 그것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삶을 가로막고 있는지 반성해보십시오. 여러분 무너져 가는 사업 일으키게 해달라고 금식기도 하는 사람들은 많이 봤고, 술 먹고 방황하는 남편 변화시켜달라고 금식기도 하는 사람도 많이 봤고, 친정 집이 우상 버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해달라고 시집이 정신차리고 신앙생활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이 만났습니다. 건축을 위해서 금식 기도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게 하시지 아니하시면 내가 죽겠나이다'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까?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경험을 하면서도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이 깊이 각오하고 결단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깊이 깨트려지고 그 말씀이 여러분들의 영혼에 큰 힘을 주고 그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있는 죄들을 드러내고 여러분들을 정결케하는, 거룩한 감화가 마르게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여러분들이 깊이 쇄신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삶을 고치지 않고는 여러분들의 회개도 여러분들을 고칠 수 없습니다. 커다란 체험도 여러분들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다음에 주를 위해서 죽어버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큰 몫에 하나님을 위해서 한 번 죽도록 바쳐 보겠다 라고 하는 미래의 담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말씀의 감화가 있는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 지불해야할 매일 매일의 비용을 지불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매일 매일의 경건한 삶에 대한 부지런한 실천 없이 미래의 순교를 꿈꾸는 것은 허영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의 더러운 목숨을 갖다가 어디 쓰시겠습니까? 그것은 죽었다하더라도 순교가 아니라 그냥 죽은 것입니다. 순결하게 산 사람의 죽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정답이 나왔습니다. 이제 뭘 결심하시겠습니까? 한 번 여러분의 마음속에 다짐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무엇이 결핍됐고 이제 무엇을 고쳐야 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태한 생활이 계속 되야 되겠습니까? 말씀에 의한 감화가 없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살아가는 삶이 언제까지 지속되기를 원합니까? 결별해야합니다. 그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가까이에 성경을 들고 늘 읽어야 합니다. 규칙적으로 읽고 전체적으로 읽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예배시간에 설교를 마음을 다해 귀담아 듣고 깨달은 대로 실천하며 살겠다는 거룩한 결의가 필요합니다. 되씹고 또 되씹고 되새기고 또 되새기며 그렇게 진리를 따라 사는 즐거움을 배워가야 합니다.
우리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봅시다. “집사님, 어제 하나님이 집사님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형제여, 요즘 하나님이 형제에게 어떤 말씀을 주십니까?" “자매여, 요즘 하나님에게서 새롭게 깨달은 것 있습니까? 제게도 좀 나눠주십시오" “하나님이 요즘도 여전히 당신에게 말씀하십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렇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말씀을 통해 더 깊이 경험하고 그 뒤를 따라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4. 죄 죽임의 실천적 지침(4)
-총론4:열렬한 기도생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4:5下)
오늘 불현듯 오후에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하는 대신 오전 설교말씀을 뒤이어 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1부에서는 5절을 다했는데 2부에서는 반밖에 못했기 때문이고 그 다음에 두 번째는 5절을 살피는 김에 한꺼번에 살펴서 여러분만이라도 뭔가 하나님 앞에 성실한 경건의 삶을 향해 결단하는 날이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 때문이어서 계획을 바꿔서 이제 5절 하반 절을 우리는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도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여기에서 어떤 특별한 종류의 기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입니다. 기도 그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날마다 우리 속에 솟아나는 매일 솟아나는 더러운 욕망의 제초재가 되고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을 질식시켜버리는 그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신자의 마음속에서도 매일매일 죄악된 생각이 떠오르지만, 그것들을 도저히 발붙일 수 없이 불태워버리고 하는 무기가 무엇인고 하니 기도생활인 것입니다. 말씀과 똑같이 기도생활도 어떤 일이 닥치면 환난 속에서 소낙비처럼 기도하고는 곧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환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기도했던 날들을 그리워합니다. 이 사람도 똑같이 비유를 하자면. 담배에 불붙이기 위해서 산에다가 산불 나기를 기다리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그러면 매일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매일매일 기도하기 싫어하는 자신과 더불어 싸우고 있느냐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죄가 어떻게 기도에 의해서 죽을까요? 다시 말하면 어떻게 기도라고 하는 은혜가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죄를 죽이고 우리를 승리하는 사람들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우선 첫째로 이 기도는 우리의 지성에 영향을 미치므로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보면 가끔 기분 나쁜 사진들을 화장실 앞에다가 길게 늘어났습니다. 이렇게 보면 형체도 없이 차가 짓이겨진 것, 사람들의 피가 낭자하고, 차량 두 대가 완전히 불타있는 이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습니다. 19○○년 ○월○일 사고 사망6명, 부상3명 그리고 사고 경위가 죽 쓰여져 있습니다. 늘 기분이 나쁩니다. 근데 고마운 것은 그것을 한번 휙 둘러 볼 때마다 조금 아까 까지 생각나지 않았던 가능성이 생각납니다. 나처럼 한번도 부딪혀 본적이 없는 이 차도 이 고속도로에서 바로 이 고속도로에서 저렇게 어느 차량과 부딪히거나 언덕 아래서 굴러서 짓이겨져서 나와 내 사랑하는 가족들이 죽임을 당할 수 있고, 내가 가해자가 되어서 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데려갈 수 있다라고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인식시켜 줍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 인식시켜 줍니다. 자 어떻게 인식시켜 주는 지 예를 들어볼까요? 기도를 거의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기껏 해봐야 양심의 가책입니다. 근데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은 떠올랐다가는 사라지는 것이 양심의 가책이 아닙니까! 죄인의 가슴속에 있는 양심의 가책은 한 가지를 가지고 집요하게 오래도록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기 전에는 그러니까 죄라는 성질 자체가 처음에 범할 때는 두렵고 떨리지만 두 번 범할 때는 자연스럽고, 세 번 범할 때는 익숙하고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범하면 그 다음부터는 그 죄를 범하지 않고는 인생을 사는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의 지배를 받는 삶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다릅니다. 기도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던 사람들은 죄인지 아닌지 모르거나 혹은 알아도 그 죄를 가볍게 생각해서 지었는데 하나님 앞에 딱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는 기도가 막히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자기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줄 알고 했는데, 하나님이 슬퍼하셨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우리의 지성 속에 죄가 어떤 것인지 확 확 인식시켜 주는 것입니다.
집사님! 어제 하나님이 집사님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형제여! 요즘 하나님이 형제에게 어떤 말씀을 주십니까? 자매님! 요즘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까? 제게도 좀 나눠주십시오. 하나님 여전히 당신에게 말씀하십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말씀을 통해 더 깊이 경험하고 그 뒤를 따라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는 성도는 더 좋지만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식이 많이 있는데도 죄에 대해서는 불감증이 걸려 있을 때는 너무 많습니다.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 법을 어기면서 가책을 별로 못 느끼듯이 그런 일이 신자 안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죄가 탁탁 새겨지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 죄를 지적하는 것이 기도 속에서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근데 뚫린 기도를 해 본 적이 있어야 막히는 게 뭔지를 알지 원래 막혔는데 비교개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가 불순종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시는 데도 하나님이 자기에 대해서 상당히 호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현실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사랑 받는 사람이 신령하지는 않습니까? 그 하나님 앞에 사랑 받는 사람이 양심이 무딥니까? 그 하나님 앞에 눈물겨운 사랑을 받는 사람이 왜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삶이 왜 틀립니까? 주님을 위해 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일주일에 한번 와서 예배 참석하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합니까? 그 정도 살아가는 사람은 은혜 안 받아도 살아갑니다. 죄를 지으면서 죄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기도는 가르쳐 줍니다. 아! 이것이 죄구나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받으면서도 늘 따라다녀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감화를 받고 은혜를 깨달으면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그 기도를 자신 속에서 불붙이고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주일날 은혜 받고 기도 하나도 안하고 팽팽히 놀다가 하나님! 오늘도 녹여 주시옵소서 주님은 녹이는 분입니까? 깨닫게 했으면 이제 무엇을 기도하게 하시는지 분명합니다. 붙들고 살아야지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유혹과 더불어서 싸우면서 살아야지 그게 바로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지성을 일깨워서 죄가 무엇인지 보게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 죄를 혐오하는 그리스도인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죄가 죄인지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기도를 통해서 기도를 하면 상상력이 발동해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기도 자체가 성령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수단인데,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이 죄에 대해서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가운데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죄를 죄로 인식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 안하고 말씀 꽤나 좀 안다고 그러면서 버티는 사람들은 진짜 고칠 길이 없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무지한 상태에서 고집을 쓰기 때문에 그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은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말도 되지 않는 이상한 논리를 나름대로 세워 가지고 우기면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집을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가르쳐 보여봐야 저 견해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만 못하다 일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입니까? 바리새인들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죄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하고, 죄가 무엇인지 인식하게 하는 그 일을 기도 자체가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다음에는 기도를 하면서 계속 살아야지만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삽니다. 그걸 기도가 하게 해 줍니다. 그러니까 죄는 기도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정확하게 자기가 죄란 사실을 가르쳐 주고, 기도하는 사람의 눈앞에서는 죄가 속이는 탈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안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러니까 열정은 있는데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는 겁니다. 그 정열을 가지고 쓸데없이 일에 빠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못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가 우리의 정서에 영향을 주어서 죄를 이기게 만듭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 기도의 높은 수준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어렸을 때에는 그냥 뜻을 세워 놓고 하나님! 이렇게 안 해 주면 콱 죽어버린다고 공갈, 협박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수준이 그것 밖에 안되니까 하나님은 일단은 수준대로 놀아주시는 겁니다. 얘들이 뭘 사달라고 그럴 때 무조건 100% 거절하면은 나중에 부모자식간의 신뢰관계가 깨집니다. 잘못된 것을 말할 때 땡하고 말하지만, 가끔은 딩동뎅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좋은 것이 온다 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만들어 줘야만 합니다. 계속해서 좌절만 시킨다 그러면 나중에는 부모로부터 기대하는 게 없어지는 겁니다. 얘기해 봐야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처음 믿을 때 어떤 때는 참 기도의 규칙에도 맞지 않는 그런 억지를 쓰면서 하나님 앞에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달라고
우리 아들이 네 살 땐가 다섯 살 때, 엄마! 아빠! 나 하나님이 기도 응답해 주셨어.뭐냐?밤에 잘 때 엄마가 기도하라고 해서하나님! 닌자 거북이 좀 보게 해 주세요기도했는데, 꿈에 나타났어 다음에는 그런 거 보여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네가 직접 TV켜고 봐라
하나님 앞에 때로는 어린아이 같이 그렇게 뭔가 막 놓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될 것처럼 보이는데, 신앙이 어렸을 땐 그것 없으면 죽을 것 같은데, 그게 신앙이 아닙니다. 생명을 겁니다. 얘들이 뭐 형제들끼리 다투고 싸우고 꼬집고, 할퀴고, 울고, 불고 온 동네를 시끄럽게 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요만한 몽당연필 한 두개 가지고 그럽니다. 이런 종이 쪼가리 그런 거 하나 가지고 울고, 불고, 싸우고 난리입니다.
우리도 신앙이 어렸을 땐 그렇습니다. 그걸 응답해 주시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그 아이의 가슴 속에 심어 주실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이젠 하나님이 기도를 통해서 다루시는 것도 달라집니다. 똑같이 그런 식으로 은혜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한 번 해볼래요. 내가 이기나 한 번 해 봅시다. 계속 안 들어주시면 계속 굶어 버릴래요 그런 사람은 굶어 죽어도 쌉니다. 바뀝니다. 이제는 어떻게? 기도 속에서 주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으로 그 기도의 통로를 통해서 내 영혼이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와서 넘치게 자기를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여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를 통해서 기도가 다 충만하게 채워지고 나면, 이제 주님이 가지고 계셨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고픈 소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들이 이런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늘 결별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한참 살다가 은혜가 떨어지면 죄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지고 친숙해지는 경향이 생겨납니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는데, 옛날에 매일 이북 얘들이 쳐들어온다고 난리를 치다가 뭐 한국에서 누가 날라 가고, 이북에서 고, 김일성을 만났다고 그러구, 공산당 깃발이 신문에 나오고, 김일성 웃는 얼굴이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하니까 초등학교 얘들이 뻥 갔어요. 1-2-3-4학년 때까지는 무찌르자 공산당 열심히 외웠는데, 혼동이 되는 것입니다. 물어보는 것입니다. 아저씨! 김일성이 나쁜 나라 사람이예요혼란이 생깁니다.
죄에 대해서는 이런 일들이 생겨나는 겁니다. 은혜생활을 계속 유지하며 살아가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킬 때에는 그 죄가 아주 뚜렷하게 하나님과의 평화에 계속 영향을 주는 것이 지각되는 겁니다. 느껴지니까 영혼의 원수라는 생각이 확 드는 겁니다. 죄를 짓고도 자기가 너무 미운 겁니다.어! 하나님 어쩌면 좋습니까? 하나님! 저는 죄가 너무 밉습니다. 이런 생각을 갖는 겁니다. 그런데 기도를 안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평화가 사라지고, 영적인 감각들이 무뎌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방해하는지 안하는지 모릅니다. 왜? 평화가 없으니까요.
앞 못보는 사람들이 저녁마다 하는 일이 뭔지 아세요? 샌드빠 있죠. 빼빠 갖다 놓고 손을 간다구요. 이 손가락들은 다-. 요 바로 앞부분을 그래 갖고 눈 먼 사람들 여기 만져보면 어린아이 살갗같이 반질반질해요. 지문이 없어요. 왜? 그래야지만, 이 굳은 살이 없어야만 점자를 읽는다구요. 그런데, 내버려두고 거친 일을 합니다. 굳은 살 배겨요. 점자를 읽어도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기도를 안 하면 그렇게 됩니다. 죄가 와도 죄인지 몰라요. 죄가 변장만 하면은 혹하고 빠집니다. 죄를 대적하던 사람이 은혜가 떨어지고 기도생활이 그치니까 지와 악수하는 겁니다. 죄와 친화적이 됩니다. 그런데 기도는 우리의 영혼의 병든 상태를 변화시켜서 죄를 향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는지를 우리의 영혼 속에 생각나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마음에 흘러 들어오게 만들어 주는 겁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마틴 로이드 존슨에 의하면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분은 거의 예화를 들지 않기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냐? 그 분은 성경 속에 하나님의 정서가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바르게 설교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그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하면 그 하나님의 마음이 전수가 되어서 우리의 정서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늘 감화를 받으면서 한없이 기뻐하고 격렬하게 회개하는 사람들은 그게 어쩌다가 일어나는 거면 모르지만 늘 그런 영혼이 깨어지는 상태가 유지되는 것은 매일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것입니다. 그런 일 안 일어나는 겁니다. 왜? 아주 신속하게 영혼에 때가 쌓입니다.
깨끗하죠. 저? 아침에 면도하고 점심 때 올라가서 다시 면도하고 왔어요. 그냥 내려오라고 거울을 봤는데 벌써 자랐어요. 여러분들이 불쾌할까봐 얼굴 못 생겼는데 면도라도 잘 해야 되잖아요. 돈 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은 그 인식이 흐려지고, 오늘은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는데, 내일은 하나님의 마음과 담을 쌓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이건은 interval을 폭을 1년 2년 3개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매일 매일입니다.
우리는 정말 기도가 살아 있었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 나가면 그냥 돌아오는 때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제 하루의 생활에서 우리에게 슬퍼하셨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잘 못한 것이 무엇인지 경솔한 것이 무엇이었든지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은 뱉은 것이 무엇인지를 즉각 즉각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해도 성도가 될까 말까인데 내버려두는 겁니다. 꼭 무엇과 똑같으냐 하면 동네 구멍가게에 걸려 있는 갚기를 포기한 외상 장부와 같은 것입니다. 기름 때가 묻어서 새까맣게 되었는데, 갚은 날이 없으니까 작대기 그은 게 없어요. 계속 쌓여 가는 것입니다. 그 구멍가게 주인이 나중에 결정적인 순간에 참다 참다 화나겠죠. 그거야 대판 한번 싸우면 되겠지만, 하나님의 회개의 장부책에 그런 식으로 쌓여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런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존 오웬은 그의 죄 죽임의 관한 설교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한 그리스도인이 어떤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평화가 깨졌습니다. 그랬는데 그가 정말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 죄를 그만두고, 그쳤을 뿐만 아니라 예전에 지은 그 사실을 심히 슬퍼하고, 그만 두었을 뿐 아니라 그 죄 자체에 대한 혐오감이 그 사람 마음에 있을 때, 그게 바로 하나님과의 진정한 평화가 회복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이런 아주 심히 불쾌한 마음, 그 죄를 회복시켜 주는 일을 기뻐하십니다. 단지 머리 속으로 성경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100번 읽어보십시오? 예수께서 성을 보시며 우시면서 가라사대~그 대목에 주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을까?하고 눈물 흘리게 만드는 것을 무엇이냐 하면은 자기 속에 오시는 성령의 은혜, 그 성령이 기도를 통해서 죄를 실감나게 느끼도록 만드시고 그 죄의 두려움과 무서움. 그것을 향한 하나님의 아픔과 예수 그리스도의 고뇌를 그의 영혼 속에 깨닫게 만들어 주실 때, 그 때 죄에 대한 감각을 갖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 지식을 잘 아는 것이 곧 죄에 대한 민감하고 자연적으로 동반한다면 신학자들은 아마 최고의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잠깐 죄에 대해 친화적인 성격을 가지려고 하다가도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면 주님이 우리의 영혼에 묻은 죄악된 욕심을 씻어 버리시면서 다시 그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마음속에서 솟아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겁니다. 그게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가끔 신앙적으로 실족하거나 쓰러진 다음에 목사님! 제가 마음을 못 지켜서 그랬습니다.그 마음 왜 못 지켰습니까? 기도했으면 지켰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킨다는 게 뭡니까? 솔직히 말해서 내가 지킨다는 겁니까? 그게 아닙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속 영향을 주시도록 내가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의해 지배받는 생각, 그런 성령에 의한 사고. 이런 것들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하나님의 마음이 계속 우리에게 부어져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계속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가정을 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커다란 웅덩이를 파고 흙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콘크리트를 하고, 깨끗하게 치운 다음에 거기에 다가 진짜 몸 속에다가 주사를 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아주 맑은 물을 찰랑찰랑 담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진짜 티 하나 없다고 칩시다. 안 흘러가요. 그거 불과 몇 주일 안 가서 이끼가 끼고 썩기 시작할 겁니다. 약을 집어 넣지 않는 한, 그러나 그것보다 좀 더 순수합니다. 그저 2급수 밖에 안 되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계속 흐릅니다. 어느 물을 순수성을 더 유지할 수 있겠어요? 후자예요. 마찬가지랍니다.
여러분들이 죄에 대해서 아주 똑 부러지게 회개하고, 진짜 발칵 뒤집어진다고 하더라도 매일매일 하나님의 마음이 생수와 같이 죄에 대한 혐오한 마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한편으로는 죄에 대한 사랑이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이런 유통하는 우리의 신앙적인 정서의 흐름이 계속 일어나야지만, 비로소 우리 안에서 그 순결한 정서가 유지되는 겁니다. 그걸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는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마다 풍성한 신앙의 정서를 가지고 산사람, 그냥 감상적인 생각에 빠져서 변덕스러운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괜히 폼잡는 감상주의자 말고 말입니다. 낙엽이 떨어져도 '아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말고, 육신적인 정서 말고, 신령한 정서에 사로 잡혀서 풍성한 정서 속에 사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독자들을 만나면 매일 똑같은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언제 그렇게 책을 많이 씁니까? 두 번째 질문은 ‘언제 문학을 공부했습니까?저는 문학을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변화를 받고 나니까 평소 내가 쓰던 어휘 가지고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다 표현이 안됩니다. 상투적인 말로는 자꾸 생각을 해 보는 겁니다. 생각을 해 보고, 생각을 해 보고, 그러니까 자꾸 남들이 보면 글재주가 늘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 큰 은혜를 부어 주셔서 우리의 정서를 신령하게 만드실 때에는 사람들에게 얘기할 때는 평범하게 얘길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어록에 남겨두고 싶습니다. 평범한 얘긴데 왜 그래요? 느끼는 게 많으니까 사람의 마음에 와 닿은 그런 짤막 짤막한 깨달음들이 솟아나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그 기도가 정서에 영향을 주는 방법입니다.
여러분! 왜 그렇게 자주 세속적인 정서에는 쉽게 빠지면서 신령한 정서에 적게 젖어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돈이 몰리고 어려움이 닥치면 그렇게 잘 흐르는 눈물이 가난한 영혼의 상태를 보면서 왜 마른 시내와 같습니까? 굶주리고 배고픈 이웃들은 보면은 찡한 그 가슴이 왜 우리의 메마른 영혼을 보면서 슬픔으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우리의 정서가 영적인 정서가 아니라 육신적인 정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우리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우리고 하여금 죄를 이기도록 만들어 줍니다. 의지에 영향을 줍니다. 어떤 식으로 영향을 줄까요? 참 놀랍습니다. 이 죄를 하나님 앞에서 깊이 기도하면서 죄인지를 깊이 인정하게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그 죄를 슬퍼하신 마음이 깊이 파고 들어오게 되면, 십중팔구는 그렇게 기도하고 나면은 단호한 결의가 생깁니다. 전에는그 죄 버리고 어떻게 사나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이상하게 그 죄를 끊어버릴 수 있는 용기와 의지가 생겨나는 겁니다. 그래서 찬송가에 나오잖아요.
울어도 못하네 눈물만이 흐르되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그런데 믿으면 해요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가능해집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강하게 의지의 영향을 주시는 겁니다. 힘을 주시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힘을 주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뉘우칠 때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공통적으로 몇 가지를 경험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슬픔도 경험하지만 기쁨도 경험하고 무거운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과 동시에 힘이 너무 없었는데 힘이 생겨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의지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니까 용기 있는 결단의 삶을 살아가던 사람, 순간 순간 어느 상황에 부딪힐 때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거룩한 용단을 내릴 수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그런 용기를 부리는 것은 객기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객기가 안 먹혀 들어갑니다. 그건 교만입니다. 자기 아집입니다. 벌써 다릅니다. 거룩한 결단과 객기는 다릅니다. 객기는 항상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를 드러내고 싶고 자기의 의에 빠집니다. 그런데 거룩한 결단은 하나님 중심이고, 하나님을 높여 드리고자 하는 결단을 낳습니다. 지금 저는 기도가 어떻게 지성과 정서와 의지에 영향을 주어서 우리를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게 하는가를 배웠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죄의 지배받는 것과 꼭 같은 과정을 밟아서 하나님이 치료하시는 과정입니다. 자! 죄가 무엇입니까?
여기 시계가 있습니다. 어느 날 여러분들이 제 방에 들어와서 시계를 발견했습니다. 어! 그거 시계네! 금시계네.지성적으로 인식을 한 것입니다.어휴! 좋다. 내가 가졌으면 그건 마음이 움직인 겁니다. 세 번째,아무도 없잖아! 가져가야지,주머니에 넣어 가져가면 완벽한 범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 어떻게 고치십니까? 집에 가서 꺼내 보는 거예요어! 아까 그 시계잖아, 목사님건데지식이죠.그걸 내가 왜 가져 왔을까, 내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슬퍼하는 것입니다. 정서죠욕을 먹더라도 고백을 하고 제자리에 갖다 놔야지그리고 들고 온 것입니다. 의지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신자의 인격 속에 들어와서 파멸시키는 방법과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 들어와서 우리를 그 죄를 극복하는 과정이 아주 흡사합니다. 그러니까 신학적으로 죄의 자리도 인간의 마음이고 신앙의 자리도 인간의 마음입니다. 죄는 신앙을 몰아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우리의 마음에 깃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습니까? 매일매일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니까 지적으로 혼돈이 오고, 마음이 세속적이 되고, 의지는 힘을 잃어버리게 되어서 결국은 죄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루쯤, 이틀쯤, 한 달쯤, 안해도 무슨 천지개벽을 하겠는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영혼 속에서 균열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야 될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육신은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 가지 많은 핑계를 대게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수긍하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서 싸우고, 이겨서 이 기도라는 은혜의 수단을 활용하고, 성실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고 간구하는 삶 없이는 죄에 대한 승리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내 영혼의 진정한 자유도 없을 것이다라고 하는 거룩한 결단을 내리게 하는 것은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 안 했기 때문에 많은 은혜 받고도 미끄러지고 뒤로 물러간 자가 되었습니다. 겸손하던 사람이 교만해지고, 풍요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알던 사람들이 아주 비천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우리 속에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죄 가운데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과 사람에 열망에 불탔던 사람들이 이제는 이기적인 마음이 되어버렸단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느끼던 마음이 모두 식어지고 이제는 지극히 형식적인 신자가 된 것 아닙니까?
죄를 이기는 능력이 오로지 한 온천( ? )에서만 나옴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위로하고 달래는 일에 열심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핍절한 상태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기도하는 일을 매일매일 성실히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결정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한 순간에는 매우 특별하게 매달려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평소에 기도 없이는 살 수 없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매일매일 성실한 기도생활을 통해서 자기를 이기는 몸부림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깊은 기도를 경험하라』책 앞에서 이런 얘기를 썼습니다. 필자의 소원은 유능한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 유능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룩한 것이고, 그렇게 거룩한 성도가 되는 비결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영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깊이 참회하고 기도하지 않고 게으르게 살았던 그런 삶들을 깊이 뉘우쳐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오늘 이 말씀을 깊이 들어야 할 이유는 이 교회에 왔기 때문에 더 더욱 그렇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배시간에 시간이 되어서 벌떡벌떡 나가는 사람들, 우리 지하실에선 없었습니다. 생겨납니다. 어떠하겠습니까? 못 나간다고 멱살을 붙잡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때요. 우린 여기서 더 마음을 지키면서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겨야 됩니다. 우리는 이전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필요로 합니다. 이전의 지하실 교회에서보다 더 강한 성령의 역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가지 않아서 아래층, 위층 전부다 도깨비 같은 신자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난 그날이 두렵습니다. 떨립니다. 하나님 밖에 의지할 분이 없습니다.
우리가 피 땀흘려 헌금해서 여기 와서 자리를 잡게 된 것이 그런 사람들 아래, 위층 가득 채워서 우리도 많이 모인다고 한 번 자랑하려고 우리가 이 교회 세운 것입니까? 그 헌금 걷어서 목회자 넉넉하게 먹여 살리고 전차 태워 줄려고 우리가 그렇게 피눈물 나게 헌금해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까? 자랑이 아니라 영광이 아니라 부끄러움입니다. 나는 두렵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시 한번 그 두려움을 실감했습니다.
아!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그냥 일반적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심령을 다 바쳐서 하나님께 매달리고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 진실한 신앙이 하나님 앞에 입증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이 정말 세상의 영광이 아니었고 우리의 기대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번영하는 교회가 아니었고, 정말 거룩한 백성의 함성으로 가득 찬 교회였다 라고 하는 그것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입증해 보일 때입니다.
여러분! 이 싸움을 저만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해도 이길지 말지 한 싸움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효율적인 기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마음에도 없이 형식적인 기도의 패턴을 이어가는 것들 다 때려부수고, 마음을 쏟는 기도, 지성과 감정의 모든 의지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향에 미쳐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멸하고, 순결한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 매달리는 그런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들어 온 사람마다 부서지고 변화되는 일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아무리 일시에 수많은 불신자들이 몰려와도 결국은 신자 안에 있는 거룩한 영향력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빨리 변화시켜서 새 사람 만드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하나님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이 교회당을 가득 메워서 주님을 찬송하고, 이 어두운 세상을 밝은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서 죄와 분투하며 사우고 교회의 거룩한 영광을 회복하기에 달음박질 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우리는 세상의 번영이 아니라 그러한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결단을 촉구하고 싶습니다. 우린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 자신을 합리화 할 수 있었어도 이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이전에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실패로 반복하겠다는 것이요. 그리고 이 교회가 세상의 번영을 추구하는 교회로 흘러가도 좋다는 찬성표시인 것입니다. 우린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4년여 전에 하나님이 이 교회를 어떻게 세우셔서 어떻게 은혜를 주셨는지를 추억해야 합니다. 물 나오는 지하실에서 어떤 영혼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으며, 주님이 그 작은 교회 속에 조국의 미래를 향한 어떤 비전을 품게 하셨는지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그렇게 이 땅에 하나님을 전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주님의 거룩한 부흥이 내려오는 통로가 되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순결해져야 하고 더욱 하나님의 영적인 성품을 깊이 인식하고, 우리 자신 속에 만연해 있는 더러운 악과 부패와 더불어 혐오하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의 수단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미끄러지기는커녕, 오히려 이 교회를 밀고, 역사를 밀어서 주님의 나라에 깃발을 세울 수 있는 그런 용사와 같은 성도들로 다시 태어날 때, 주님이 이 땅에 이 교회를 세우신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제가 이 교회에 첫 목회자가 되었다는 커다란 기쁨도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25. 죄 죽임의 실천적 지침(5)
-각론1:죄의 뿌리 깊음과 그 원인
“내 상처(傷處)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시38:5-6)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총론 적으로 볼 때 우선 이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부분적으로 순종하려고 해서는 죄가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총체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절대 죄가 죽지 않습니다. 총체적으로 순종해야 되겠다 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면서 그런 총체적인 순종에 실패했던 사람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죄가 그들을 삼킨바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 말씀드린 것이 뭐였냐 하면 성실함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크게 못 만났기 때문에 죄에 진 경우도 물론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 신자들이 죄에 지는 것은 주님을 크게 못 만났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진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고 부흥회 때 한 번씩 죄를 죽이려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안됐다는 말입니다. 부흥회 때까지 놔두고 계속 키웠기 때문에 이게 완전히 힘을 얻어서 지난 번 부흥회 때는 한 칼에 맞아 죽었는데 이번에는 창으로 찔러도 안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새끼를 치고 결국은 안 됐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실한 경건 생활이 요구됩니다. 자기 괴로울 때나 나와서 기도하려하고 컬컬할 때나 나와서 설교 들으려 하니 죄가 안 죽게 됩니다.
그 다음 성실한 경건 생활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를 이기는 가장 중요한-성령이 죄를 죽이지만- 무엇을 통해서 죄를 죽이시는 가 하면 두 가지를 통해 얘기했는데 첫째는 기도였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늘 열렬한 기도 생활을 유지하고 기도하기 싫을 때도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생활을 그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한 번 정도씩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생활을 그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한번 정도씩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깊이 기도하는 것을 하루의 일과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두 번째 말씀생활을 해야 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말씀 생활을 성경 읽기, 설교를 듣는 것, 성경을 공부하는 것, 그러면서 성경과 친숙해 질 수 있는 좋은 경건 서적을 읽는 것, 그러면서 좋은 경건 서적을 이야기하면서 십자가 아래서 감화력 있는 책을 읽어야 합니다. 막 아무거나 잡식성 동물처럼 읽으면 큰 일 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총론은 끝났습니다.
이제 각 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면 실천지침이 무엇입니까?
실천 요령 첫째는 어떤 죄가 내게 있을 때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마음에 뭔가 하나님의 율법을 거슬려 살고자 하는 죄의 소원 -쉽게 말하면 정욕이 있을 때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정욕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죄를 지을 수 있는 증후에 대해서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3, 4주정도 말씀을 드릴 것 같습니다. 죄의 증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죄를 죽이는 실천적인 삶의 지침 가운데 첫 번째 입니다. 내가 앞에 죄를 죽이는 삶을 살고 그래야 내 영혼이 살리라 할텐데 내 영혼이 자꾸 죽어 가는 것을 느끼고 삶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깊이 돌아보면 결국은 죄가 발견됩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점검을 해야 됩니다. 무엇을 점검해야 되냐하면 이 죄가 어떤 종류의 죄인가 다시 말하면 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죄인가 아니면 뿌리 깊이 박힌 죄악된 습관에서 계속 솟아 나오는 죄인가 이것을 봐야 합니다. 전자인 경우에 예를 들자면 남의 물건을 주웠을 때 갖고 싶은 마음이 들 거 아닙니까. 그 당시에 탐심이 나서 주웠다 할지라도 우발적인 범죄입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나의 죄를 뉘우치고 잘못됐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또 그 주인을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변상을 하고 그러면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 삶에 영향을 안 미치는 것입니다. 근데 그런 종류의 죄가 아니라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같은 죄에 계속 빠지면서 그것이 하나의 도벽이 형성되었을 경우 같으면 이 사람 것을 내가 딱 집어 간 게 겉으로 보기에는 아까 그렇게 집어간 것과 같지만 후자의 경우에 생겨난 그런 도둑질을 전자처럼 해도 죄가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판단을 해야 됩니다.
우리들 주위에 회개하다가 지친 사람들을 못 보셨습니까. 기대를 잃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자기의 죄가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그 죄가 주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껏 제가 가르쳐준 죄 죽임의 교리대로 불편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기 때문에 '지-죄라는 것을 의식하고 정-마음으로 깊이 아파하고, 의- 의지적으로 그 행동을 거두어 들여야겠다' 고 결심을 한 것입니다. 왜? 다시 그 죄에 빠지고 싶어서입니다. 분명히 성경을 보면 회개를 하면 다시 돌아가지 말해야 된다 그러는데 돌아간단 말입니다. 자기가 그때 어떤 착각을 하게 되느냐 하면은 '아 그 정도 눈물 가지고는 안 되는가 보다' 또 '그 정도 깨달음 가지고는 안되나 보다. 그 정도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것 가지고는 안되나 보다' 그리고 자기가 전에 한 그 회개가 진실한 회개가 아니라고 결론을 짓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더 진실하게 회개를 하려고 노력을 하다보니까 그 다음에는 회개해야 하는 대상의 죄가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더 진실하게 더 고통스럽게 회개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자기를 누르면서 무의식중에 외식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회개 자체를 성취하기 위해서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인식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가슴 아파하며 회개하는 이런 것들이 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 정도로 몇 번 반복을 하게 되면은 그 다음에는 꽤 그래도 실력이 있는 신자라고 하더라도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나오는 회개를 통해 약속된 자유와 평화 같은 것들이 정말 있는 지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하늘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는 일당의 무리들이 있습니다. 누구겠어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 회개를 포기할 때 이제 그들에게는 마치 청소도구가 없는 집에 쓰레기를 쏟아 붓는 것 같은 그런 효과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에 회개를 포기한 그리스도인에게 결국 자라는 것은 죄 밖에 없습니다.
지금 말씀 드리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게 아주 평범하고 간단한 영적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수 십 년을 신앙생활을 허송 세월하는 사람들을 저는 많이 봤고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늘 말씀 드리지만 간단한 약도 가지고는 천국을 못 찾아갑니다. 천국을 갈 수 있겠지만 -믿으면 가니까- 하지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의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간단한 것 가지고는 안돼요. 컴퓨터 하나 사오면 이만한 책을 두, 세 권씩 줍니다. 왜 그 한번도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컴퓨터 하나 작동하는 데도 메뉴얼이 많은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사람들이 믿으면 할렐루야 성령 충만, 운수 대통 그런 간단한 공식 몇 개 가지고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덧셈 뺄셈하는 아이들이 63빌딩을 앞에 놓고 체적을 계산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우리들은 이 문제를 풀어야 될 것이냐 얘기죠?
그런데 이 죄를 죽인다라고 할 때에 이 교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뭐냐하면 이 습관적인 죄악입니다. 그게 호세아 선지자의 표현대로라면 패역입니다. 근데 사람이 어떻게 보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성벽 그러니까 도벽, 음주벽 이런 것처럼 어떤 벽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벽이 생기는데 아주 방탕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 있고, 늘 허영에 들떠 사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라면 하나 끓여 먹을 돈이 없는데도 몇 주일씩 모아서 호텔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볶아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 일주일 내내 된장에 찬물만 말아먹던 사람들이 일단 외식만 했다하면 거한데 가서 먹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 아니면 그 반대로 얘기해서 아주 검소한 게 몸에 베인 사람, 아니면 또 늘 어디 가든지 잘 난척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또 반대로 어디를 가든지 기를 못 펴는 사람. 여러 가지 성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주병, 자학증세에 있는 사람까지. 그런데 그건 대부분은 자연적인 성벽입니다. 천성적이고 자연적인 성벽은 상당히 강합니다. 그런데 굉장히 낭비하고 화려한 성벽을 가진 사람이 근검 절약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막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런데 그게 이세상 속에서 함께 있을 때는 그것조차도 잘 변화될 가능성이 잘 없습니다. 낭비벽이 심한 주부를 아무도 말릴 수가 심지어는 남편의 얇은 월급봉투도 그것을 못 말립니다. 쓰다가 쓰다가 모자라면 빚내서 쓰고 남의 이름으로 쓰고 하니까 쓰고 보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 들어오면 이런 습관이나 천성들이 잘 녹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다란 생각은 들지만 충동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서 내가 이렇게 살면 안돼. 내가 여태까지 쓰던 것처럼 이렇게 살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주 부드럽게 꺾입니다. 신앙 밖에서는 절대 아무도 못 꺾습니다. 진짜 꺾기 어렵습니다. 안되진 않지만 꺾기 긴 꺾깁니다.
예를 들면 낭비벽을 가진 사람이 계속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게 되면서 생활 보조금이나 받아야되면 능력이 없어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꺾일 수는 있으나 그러나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자식을 포기하고 자식이 부모를 포기하고, 남편이 아내를 포기하고, 아내가 남편을 포기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천성적으로 집안을 깨끗하게 못하는 막 어지르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복 벗어서 여기 휙 던지고, 여기 휙 던지고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도 고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 하면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와서 -이건 안 믿는 집안을 얘기하는 거고- 이 부인은 어려서부터 그런 식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변할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여보 나를 위해 고쳐 줘' 그래도 안 됩니다. 성질을 부리면 변하는 것입니다. 뭐하나 집어던지면서 이것도 집안이라고 치워놨어 그러고 책상이고 이불이고 막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안 살겠다고 딱 사표를 쓰고 가버리기 전에야 적응해야 될 것 아닙니까. 남편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아차 내가 치웠나 이런 일이 있는 것입니다. 저벅 저벅 소리가 나면 '아이구!' 하면서 막 치우는 것입니다. 타율에 의해서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당하는 여성도 에너지가 많이 들지만 남성은 얼마나 에너지가 많이 들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도 적응해 가는 것이 있는 데 화가 조금 밖에 나지 않았는데도 많이 내야지만 이 여자는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또 부수면 자기 돈으로 사다놔야 되잖습니까. 얼마나 경비가 많이 들겠습니까. 그런데도 인내심을 가지고 하면 바뀐다 이것입니다.
한쪽만 예를 들면 여성들이 불공평하다 그럴 겁니다. 제가 직장 다닐 때 남편이 있었는 데 직장 다니면서 부수입이 좀 있었습니다. 월급은 한 이십 만원밖에 안 가지고 왔는데 한달 용돈은 삼십만원이었습니다. 어느 날 여자가 남편이 술 먹고 들어와서 주머니를 뒤지는 에 이건 술집 영수증 등 한 쪽 주머니에서 나오는 게 자기 한달 생활비 보다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오기를 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당신 그러지마. 그러지마' 몇 번을 경고하는 말을 안 듣는 것을 보더니 천 만원 짜리 적금을 딱 깨서는 장롱, 자기 옷, 한복, 애들 옷, 막사가지고 들어오는 데 이거 시위겠지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매일 사 가지고 오더랍니다. 그 여자가 그 천 만원을 모으려고 얼마나 속을 드려 모았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남편 버릇 고치려고 돈을 깨 가지고 가서 별로 필요하지도 않는 것을 몇 십 만원 어치씩 살 때 간 떨렸을 겁니다. 그것도 간 큰 사람이나 남을 고치지 간 작은 사람은 고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나서 한 달인가 사이에 오 백 만원을 썼답니다. 그래서 남편이 안 되겠어서 무릎꿇고 빌었답니다. '여보 내가 잘못 했으니까 내가 앞으로는 안 그럴 게' 그래서 남편의 버릇을 고친 겁니다. 여성분들 이제 만족했습니까?
고쳐져요. 근데 고쳐지는 데 얼마나 어려운지 한 번 보십시오. 술 먹는 남편 술 끊게 하는 여자 있으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인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건 못 말립니다. 그 왜 몰래 약 타서 먹이고 그러기도 합니다. 안 해 봤습니까? 안 죽어요.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 들어오면 아주 쉽게 죽습니다. 은혜 받으니까 담배끊고, 은혜 받으니까 낭비벽이 사라졌습니다. 왜? 이렇게 살면 아무리 내가 번 돈이지만 하나님께서 슬퍼하신다는 사실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순결한 삶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은 내가 벌었어도 쓰는 것은 하나님 마음대로 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아주 순응적이 됩니다.
그러나 아까 말한 죄가 결합된 죄악된 습관은 은혜를 받아도 이렇게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주 도발적이고 도전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이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회개를 똑 부러지게 했는데 왜 자꾸 그 죄가 반복되느냐 그것은 회개가 신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론 그럴 수도 있어요. 근데 실제로 들어가 보면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뭐냐하면 뿌리가 워낙 깊기 때문에 한번의 눈물이나 진지한 원통함 가지고는 그 영향력이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충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제 즉각적으로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왜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생겨진 이 회개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 아주 충동적이고 도발적인 이 사악한 습관이 그렇게 자리하게 되었는가? 그건 대답은 간단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것도 우발적이었습니다. 근데 우발적인 것을 빨리 빨리 처리를 하고 그리고 죄를 처리한 후에 그 죄를 다시는 지어서는 안 된다 하는 경계심을 가지고 그 죄를 두려워했어야 되는 데 용납한 것입니다. 그냥 놔 둔 겁니다. 방치한 거죠.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이런데 가슴에 종기가 생겼다고 가정을 합시다. 종기가 요만큼 솟아났을 때는 불편할 것 아닙니까. 아프고 생활하면서 불편합니다. 종기가 조금 했을 때는 도려내는 것이 생활을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심장까지 번졌을 때는 도려내면 죽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죄가 우발적 어느 정도 뿌리를 내렸을 때는 뽑아 버리면 자유로움을 느끼고 해방감을 느끼는 데 이게 너무 깊이 들어가 있으면 그걸 뽑아 버리면 인생 자체가 뿌리 채 뒤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매일 처리를 했더라면 매우 쉽게 이길 수 있는 죄를 그냥 가만히 둬서 어느 날 보니까 웬만하게 해서는 이길 수 없는 대적으로 변한 것입니다. 우발적으로 죄를 지었을 때는 눈물 흘리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빌고 마음을 새롭게 하면 지워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처리를 안하고 가만히 내버려 둔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일들이 계속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게 점 점 점 점 뿌리를 내리면서 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는 정확하고 진실했는데 안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패역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면은 시각을 달리해서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편에서 봤고 또 하나님 편에서 봤습니다- 죄의 주관자라고 할 수 있는 마귀의 편에서 본 다면은 우발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그 궁극적인 목표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안에 무엇을 만들고 싶은 것입니까? 습관적인 죄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죄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우발적인 죄가 문제가 된다기보다는 뿌리 깊어서 오늘 예배드리고도 반복되고 내일 예배 드리고도 반복되는 그 죄가 여러분들의 영적인 생명을 앗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무서운 것입니다.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사람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비례합니다. 경박한 사람일 수록 죄를 아주 하찮게 생각하고, 주님을 깊이 만나고 교류를 누린 사람일 수록 사소한 죄에 대해서 굉장히 경계심을 갖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꾸 우발적인 죄 속에서 그 죄가 갖고 있는 궁극적인 의도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뿌리를 내리고 싶은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간첩이 획 넘어와서 쫙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한 장 찍어서 사진을 찍어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정부 핵심 부서에 사람들 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맥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는 어마 어마한 영향력을 가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사단의 편이라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번씩 가서 범죄 하게 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자동으로 범죄 하게 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뿌리 깊이 박혀서 패역을 이루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행하도록 하는 것이 우발적인 죄 일 때는 즐거움을 앗아가는 데 죄악된 습관이 뿌리 박힐 때에는 죄를 짓지 안으면 고통스러워 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죄를 범하지 않았을 때는 마귀가 올가미를 씌워서 막 잡아당겨도 막 버티면서 하여튼 끌려가긴 끌려가는 데 안 갈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할 수 없이 끌려옵니다. 그런데 일단 습관적인 죄가 되면 손짓만으로도 끌려옵니다. 그러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죄의 종이 되고, 불의의 병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죄를 이기는 삶의 실천적인 각 론의 첫 번째에 죄와의 싸움에서 그 죄가 어떤 종류의 죄인지 그것을 정확하게 분별해야 된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죄가 만약에 그런 식으로 자꾸 뿌리를 내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우리는 이런 의문이 들잖아요. 그걸 왜 그렇게 내버려뒀을까. 근데 시인 다윗이 바로 똑같은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뭔가 하면은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입니다. 내가 아프고 심기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그러니까 내 상처가 영혼의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그런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썩어서 자신도 맡기 어려운 역겨운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고백을 합니까. 이는 내 병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고 내가 우매하기 때문에 쉽게 얘기하면 '나는 참 바보 같았습니다. 나의 바보 같음 때문에 나의 상처는 깊어 졌고 이제는 썩고 썩어서 악취가 진동하게 되었나이다.'
여러분 암 수술하는 거 한 번 보셨습니까? 좀 기분 나쁜 얘기이지만 제 주위에는 암 환자가 그렇게 많았습니다. 근데 한번 수술을 하면은 한 여덟 시간 수술을 하는데 대야에 하나 나옵니다. 그런데 그 암세포가 그래도 살에 있을 때는 그 살을 잘라 내면 됩니다. 그런데 그 암세포가 두 가지 경우에는 치명적입니다. 하나는 그 암세포가 장기로 파고 들어가면 치명적입니다. 간이나 신장 이런 데로 파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건 잘라내면 안되지 않습니까. 또 하나는 뼈에 암세포가 감염이 되는 것입니다. 뼈를 잘라내야 됩니다. 그런데 뼈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신경조직도 있고 많은 문제들이 나와요 등뼈 일 경우에는 골수를 잘라내야 되는 데 그걸 잘라내면 사람이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없애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못 없애는 것입니다.
지금 시인이 그런 상태가 된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이 시인의 고백을 귀담아 들여야 합니다. '얘들아 한때는 내 죄악이 썩고 썩고 또 썩어서 깊이 생명을 위협하는 단계에까지 가고 심지어는 이제는 내부적으로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고 나니까 그것이 밖으로 터져 버려 가지고 누구도 냄새를 맡으면 알 수 있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가 되었거든. 그런데 그게 내가 무지했기 때문이란다.'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다뤄 보고 싶은 이야기는 이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로 그러면 왜 우리는 그런 죄가 계속 들어와서 그렇게 뿌리를 내리도록 그걸 몰랐을까. 그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이 혼돈된 사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죄가 제일 먼저 들어오는 통로가 어디라고 했어요. 다시 말해 봅시다.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공격하는 곳도 머리이고 사단의 유혹이 공격하는 곳도 머리예요. 머리의 동의가 없이는 웬만해서는 잘 안 합니다. 이것을 훔치면 죄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을 훔칠 수 있게 만드는 비결은 무엇이냐 하면 두 가지가 필요한데 이것에 대한 강한 집착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필요 없는 데도 죄를 짓게 하려면' 야 너 이거 꼭 필요해 이거야 이거' 그러고 이 범죄 해야할 대상에 대한 사랑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죄가 아니라는 생각을 넣어 줘야 될게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말도 안돼는 사고를 하게 해서 혼돈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어떤 마음이 생기느냐 하면은 죄에 대해서 너그러운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말씀에 대해서 예리한 생각을 포기한 사람들이 거룩한 경건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되게끔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참된 것이냐, 참되지 않은 것이냐에 대한 아주 뚜렷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과 똑같으냐하면 성도면 어떠하리 짐승이면 어떠하리 우리도 같이 얽혀서 살고 지고 살고 지다가 한사람은 지옥 가고 한 사람은 천국 가는 것입니다. 흐리멍덩한 사람이 죄와의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마치 눈 가리고 검도 세계 챔피언과 진 검으로 승부를 하는 것만큼이나 바보 같은 것입니다. 마귀는 먼 곳에 화살을 겨누어서 어디가 약점인지를 아는 데 자기는 사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싸우는 것입니다. 용기와 기백으로 싸운다. 아무리 기백 있는 사람도 한방 맞으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고 말한 것입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이 세상 주관자들에게 대함이라'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온전히 맑고 아주 분명한 사고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가지런히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뭘 물어봐도 '몰라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기억이 안나요, 그냥 흐릿해요' 이런 사람들은 죄와의 싸움을 거의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싸움은 싸울수록 뭘 느끼느냐 하면 이렇게 흐리멍덩한 지식 가지고는 안돼는 구나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보다 더 날선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흐리멍덩하게 '승리하면 우리가 이깁니다' 승리하면 우리가 이기는 거지 뭡니까. 똑같은 얘기입니다. '주안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멘 아멘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왜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데 왜 내게는 평안이 없을까? 왜 이긴다는 약속이 있는 데 나는 실패할까? 그러면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아멘 하던 사람이 '기도해도 안되던데' 어떤 기도가 승리를 가져다주는가 왜 어떤 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안 받으시는가. 이런 식으로 캐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천적인 삶 속에서 성경에 대한 지식이 깊어 가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면 천국을 주신다 그러더라. 아멘 하는 게 아니라 그런데 나는 왜 한 번도 그런 마음이 안 들까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대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은 그렇게 뼈저리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데 나는 그러고 싶은 데 왜 안될까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의문이 꼬리를 물고 무는 사이에 어떻게 되냐 하면은 우리를 혼란 속에 에워 둘러싸고 있던 마귀의 괴기들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눈이 침침해져서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이 하나씩 둘씩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때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 저기 숨었구나 기둥인줄 알았더니 하얀 보자기 쓰고 총 들고 있구나' 이게 다 보이는 것입니다.
나는 이 시대에 마귀가 하고 있는 장난 가운데 훌륭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 바쁜 사회생활. 그래서 신경 쓸 수 없게 만들고 그 다음에 이 세상에 대한 즐거움. 생가하기 싫어하는 사조. 이런 모든 것들을 사용합니다. 설교자들을 흐리멍덩하게 만들어서 '승리하면 이긴다' 이런 말들을 하게 만들어서 교회에 나왔는데도 생각이 맑아지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예배드리고 나간 사람에게 앙케트 조사를 했는데 95%가 뭘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데 이게 동물농장이지 교회입니까. 그러니 죄에 대해서 아무도 이길 수 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고를 혼돈케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에 딱 떨어지게 되면 전에 잘 알던 것들을 잘 모르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의 이해가 혼돈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왜 말씀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것은 외부의 입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가슴에서 필요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슴에서 필요로 할 때에 딱 떨어지면 아! 그거구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신문이 오면 막 들여다봅니다. 신문 앉아서 3~4시간 보는 것도 범죄입니다. 근데 발에 무좀이 나서 고생을 하는 데 무좀을 퇴치하는 기사가 딱 난 것입니다. 딱 보고는 읽다 읽다 줄치다가 안되면 오려서 벽에다 붙여 놓는 겁니다. 그리고 외우는 것입니다. 그것 보십시오. 필요가 있어야 이해가 깊어지는 겁니다. 싸우지 않고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을 안 하는데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전쟁할 의사가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 화려한 병기를 갖다 놔두면 '저걸 무거워서 어떻게 들고 다니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뭔가 정보를 필요로 하 때 혼돈이 안 생기고 팍팍 찍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혀 경건한 지식이 필요 없는 개차반 같은 삶을 살다가 거룩한 삶을 살려면, 살아본 적이 없는데, 성도가 되려면 그런 생각 해 본적이 없는 데 그러니까 다 남의 나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울려 퍼질 때 손수건 꺼내어 흐느끼며 눈물 닦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정말 그런 삶을 살려고 분투하여 몸부림을 쳤는데 '아, 그거였구나. 아 세상에 그걸 내가 알았더라면. 그것을 이기려면 이 말씀이어야 하는데 그걸 왜 몰랐을까 한가지 한가지가 뼈에 깊이 새겨지면서 내면세계에서 정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데 죄가 잘못 들어왔다가는 반쯤 죽는 것입니다. 반쯤 죽는 게 아니라 완전히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죠. 그래서 그런 일들이 왜 일어났냐. 결국은 머리가 혼란해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잘못된 관용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는 데 그러니까 용서해 주시겠지. 그렇게 생각하여 여태까지 살아 온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용서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용서받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때 사람들은 그릇된 은혜의 교리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사랑하시는 얘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범죄하고 불순종하는 길로 가면 하나님이 가만히 두지 않으신다는 이야기에는 일부러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왜? 자기에게 불리하니까. 그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형대에 눈을 가리고 세워 놓고 저쪽에서 사격수들이 준비하고 철컥하는 데 아마 저건 공포탄 일거야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자꾸 눈 가리고 이럴 거야 저럴 거야 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됩니다. 그것은 혼란만 더 할 뿐입니다. 사실을 직시해야 됩니다. 현실을 직시해야 됩니다.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이 날 사랑하실 거야' 이런 것들을 되 뇌이면서 몇 년을 살아 왔는데도 죄 가운데서 헤어나지 못하니까 하나님과의 깨어진 평화가 회복이 안돼는 것입니다. 반복적으로 실패하면 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만 갖고는 안되나 보다.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하고 간단한 생각을 포기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교리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놀라운 은혜의 교리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을 버리지 않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불붙는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붙는 사랑을 가지고 계셨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그 설교를 들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망했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요즘 이렇게 살지만 앞으로는 잘 살 거야. 지금은 범죄 하지만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는 범죄 안 할 꺼야. 지금은 헌신 못하고 살지만 다음에는 불꽃처럼 살 거야. 오늘은 연기처럼 살아도 할 수 없어.' 이런 식의 사고 방식으로 살아서 되겠습니까. 은혜의 교리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반드시 그것이 우리를 물러가서 침륜의 상태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죄를 이기는 방법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은혜의 교리에 대해 많이 배우기 전에 먼저 죄에 대한 교리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청교도들이 복음을 들고 나갈 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당신은 희망이 없습니다 에서 시작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충분히 죄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게 해 주고 내가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고 하나님의 불꽃같은 저주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귀담아 들으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주 앞에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여러분들을 죽이도록 하나님께서는 놔두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만약에 그 말이 여러분들에게 받아들여 질 수 없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스라엘이 멸망된 역사를 고소한 마음으로 잘 읽습니까. 그것도 납득되지 말아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불붙는 사랑을 가지고 계셨는데, 예레미야가 가슴이 찢어지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했는데, 이사야가 폐부가 뻐개질 것 같은 아픔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거룩한 선택을 그렇게 예언했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그러고 나라가 망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이방의 땅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야에서 원망하다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엄연한 현실을 그대로 인식하고 액면 그대로 받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입증되지 않습니까.
아무리 여러분이 죄에서 져서 비참한 패배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이제 하나님 앞에 돌아가면 하나님이 받아주십니다. 한번도 과거를 문제삼으시지 않으십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이 시간에라도 통회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여러분을 하나님이 안 받으시겠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뉘우치는 자를 당신의 품에 안으시는 것이 사랑이지 죄를 짓고 하나님을 향해 침을 뱉고 다니고 계속 패역하는 것을 끌어안고 키스하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지 공정한 생각은 아닙니다. 구하고 찾는 자에게 영광이 되신다. 바로 그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이냐. 그게 바로 은혜입니다. '아, 주님 나는 이제 이 가운데 살 수 없습니다. 주님 나는 이 죄 가운데 사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오, 주님 그러나 나는 나의 힘으로 너무나 힘듭니다. 주여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내 어두운 지성에 진리의 밝은 빛을 비추어 주시옵소서. 이길 수 없는 나에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오 성령이여 오셔서 나를 도우소서.' 이렇게 부르짖는 자들을 그래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그리고 깨달을 말씀, 죄와 싸우는 방법, 그리고 이길 수 있는 힘. 이런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그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는 모진 죄의 속박 속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야 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혼돈된 생각 때문에 '모르겠는데요' 이러면서 결국은 죄가 쌓여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발적인 죄들이 점 점점 쌓여서 습관적인 죄악을 형성하고 이제는 그 죄를 지우면 기쁜 것이 아니라 지우면 고통의 상태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패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에 잘못된 위로를 받아들이면서 죄에 대한 관용만 길러오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모든 일들 때문에 죄에 대한 진가를 깊이 살피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결국 그렇게 죄가 뿌리깊은 습관적인 죄로 굳게 박히지 않도록 여러분들은 매일 매일 일어나는 패역이 아닌 죄를 날마다 씻어 버려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총체적인 순종이 필요하고 부지런한 경건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깨닫지 않고 어떻게 자기가 지은 죄를 죄인 줄 알겠으며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애통한 마음으로 자기의 죄를 눈물로 회개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런 일들이 매일 매일 반복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이미 뿌리깊이 박혀있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이 한 시간에 이 모든 대답을 줄 수 없습니다. 이제 뿌리 깊은 죄들을 드러내고 고쳐 가는 과정들을 여러분들은 계속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26. 죄 죽임의 실천적 지침(5)
-각론2:죄에 지고 있는 징후들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사57:17)
죄를 이기는 실천적인 지침을 지난 시간서부터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우리들이 해야할 일은 나의 삶 속에서 죄에 대해서 지고있는 징후가 있는가? 즉,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서 죽고 죄가 내 안에서 왕성하게 살고있는 뚜렷한 조짐이 있는가 그것을 먼저 살펴야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들이 실패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혼돈 가운데서 무엇이 죄고, 무엇이 죄가 아닌지를 분명하게 분간을 해야되는데 흐리멍텅하게 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적당히 하나님의 은혜라 그러면서 적당히 얼버무리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 안에서 죄를 키우는 결과가 된다는 그 말씀이 지난주까지 말했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들이 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징후가 있는지, 물론 우리는 죄에 대해서 완전히 승리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해하여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죄에 대해서 진다는 이야기는 살다가, 어쩌다가 짓는 그런 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들어와서 우리를 꽉! 누르고 지배하려고 하는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지속적인 죄에 눌린 삶이 아닌가! 우리를 점검해야만 합니다. 그래야지만 죄를 죽이는 일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살펴보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만약에 우리가 어떤 죄에 지고있나 하는 것을 살펴보았더니 특정한 죄, 간헐적으로 짓는 여러 가지 죄가 아니라 특정한 죄에 대해서 자주 실패하고 넘어지면 심각한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것도 조금 짓고, 이런 것도 짓고 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더 위험한 건, 똑 같은 죄에 대해서 자꾸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건 위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특정한 죄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굴복하는 그것이 결국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여러분들이 특정한 죄에 대해서, 동일한 죄에 대해서, 혹은 동일한 종류의 죄에 대해서 자꾸 죄를 지으면서 넘어지는 사람의 무기력한 신앙생활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은혜를 받고 '아! ~참 오늘 감사했다. 은혜도 감사했고, 형제들과의 교제도 좋았고, 그래 맞아 내가 아! 진짜 주님 뜻대로 살아야지, 내가 이제 무슨 희망이 있겠어' 그리고 갔는데 동일한 죄에 또 넘어졌습니다. 또 동일한 죄에 넘어지고, 그러면 거기서 순식간에 자신이 그 양심에 손가락질을 받는 겁니다. '봐라! 봐라 너 또 죄 졌잖니,' 그런데 이런 정죄 의식 같은 것이 살아가다가 예기치 않게 짓는 죄로 말미암아서도 정죄 의식이 있지만 늘 콤플렉스에 걸려서 늘 그 이야기가 나오면 자신이 없는 그 죄에 또 넘어졌을 때에는 이 정죄 의식이 배가 되는 것입니다. 더 절망적인 마음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아! 되지 않는구나, 아! 난 안돼, 이런 생각이 이제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계속 실패하고 별로 이기지를 못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 때문에 우리 안에서 가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도 그 은혜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아도 반짝하고 깨닫고는 감동도 있는데 그게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 죄악이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 가지고 땅 전체의 양분을 빨아먹고 있기 때문에 다른 말씀에 어떤 깨달음이 내려가도 그게 뿌리를 뻗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선한 결심은 자꾸 좌절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제 절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특정한 죄에 대해서 계속 실패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 하면, 시간이 점점 흘러 갈수록 죄는 그리스도인이 이기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굉장한 평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가 가끔 은혜를 받는데도 동일한 죄에 계속해서 넘어지니까, 그 죄는 과대평가를 하고, 자기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에 대해서는 과소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으면서도 항상 이 은혜면 이 은혜가 계기가 되어서 내가 이 죄에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안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가면서 결국은 어떤 결과가 오게 되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도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해제, 무장해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와 싸우고 있는 상황이든지, 죄에 대해서 무방비한 상태로 있든지, 아니면 은혜가운데 살든지, 유혹을 받을 때든지, 죄가 겨누고 있는 목표는 똑같습니다. 항상 동일합니다. 그래서 뭘 겨누고 있냐 하면 신자에게 있어서 죄는 뭘 겨냥하고 있냐 하면 포기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을 포기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그리고 은혜가 자기 마음속에 심겨지기를 아예 기대조차 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놓고 마음속에서 죄와 정욕이 말하자면 무성하게 자라도록 하는 것이 죄의 목표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죄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끔 마음을 그런 상태로 만드는 것이 죄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을 주체할 수 없는 정욕에 불 붓도록 만들어서, 결국은 생각이 없는 충동적인 삶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도록 만드는 이 그게 결국은 죄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어느 정도 깊어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기도 자기를 향해서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이런 죄는 일년 전 같았으면 지으면서도 막 괴로워 했을텐데, 이젠 웃으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이 점점 엷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는 죄를 짓는 사람이 만족을 하기 위해서는 그 죄는 점점 더 질적으로 악해지고 양적으로 많아져야지만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발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체를 결국은 죄가 지배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은 이 이야기가 그림같이 잘 나와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해놓고, 점층법으로, 문학적으로 볼 때 점층법으로 나와 이렇게 차례대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첫째는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그 뼈라는 말이 히브리 성경에 '에차' 라고 되어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의논하는 것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들과 의논하지 아니하며 어떤 인생을 살아가다가 결정을 해야될 문제가 있을 때 나는 이렇게 믿음에 길을 걸어가는데 판단이 잘 안 설 때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에게 가서 '야! 이럴 때 어떡 해야되지, 아! 그거 후려쳐,' 뭐 이런 식으로 자문을 얻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건 악한 길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악한 꾀를 잠깐 빌려오는 것입니다. 그렇죠? 악한 꾀를 잠깐 빌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안합니다. 그것은 '악으로 가는 길' 첫 번째 길입니다.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그랬는데 여기서 이 죄인은, '호테' 라는 단어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살아가다가 '어머! 내가 오늘도 왜 이런 말을 쓸데없이 해서 형제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 어!~정말 어! 진짜'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뉘우치는 그런 종류의 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이야기하는 죄인은 죄를 짓는 것이 인격의 특징이 되어버린 사람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아! 그 사람, 아예 이야기 할 것 없어, 그 사기꾼인데 뭘 이야기를 해,' 그러니까 그 사람하고 떠오르면 '아! 그 사기 치러 다니는 사람' 그게 탁!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죄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표현은 이상할지 모르지만, 직업적인 죄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젠, 진전된 것이죠? 그렇지요? 악인의 지혜를 빌려오다가 이번에는 그렇게 죄짓는 것이 인격에 특징이 되고, 삶에 자리가 되어버린 그 사람의 길에 선다는 것입니다. 서서 어떡해요, 떠밀리듯이 가는 것입니다. 떠밀리듯이 가고, 아니면 자기가 걸어가기도 하고, 힘이 없을 때는, 뒤에서 밀어주기도 하고 하면서 죄에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진전된 것입니다. 마지막에 이제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그런데 이 앉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좌정하신다,' 라는 말을 사용할 때와 똑같은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거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을 짓고 아예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의 자리에, 오만한자의 자리에,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오만한 자는, 그냥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면서 오만한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없다고 부인하는데서 비롯되는 교만에 물든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신론하고도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이 아니라 세 번째 단계에서는, 하나님을 향해 칼을 드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죄가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 그 궁극적인 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한번에는 그렇게 안됩니다. 한번에는 그렇게 안되니까 서서히 길을 들이면서 그러면서 우리를 죄로 물든 사람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완전히 물들인 다음에 그 다음에 그런 죄악의 길로 깊이 들어가서 하나님을 거슬리며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이 계획만큼 가슴 설레게 하는 계획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 넘치고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되면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다니거나, 아니면 실직을 해서 오고 갈데 없는 그런 사람들이나 아니면 그냥 평범하게 삶의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이 뛴다고, 왜! '아! 예수님만 믿으면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올텐데, 왜! 저러고 사나, 매일 TV만 보고 앉아있지 않으면, 낮잠이나 자고, 왜! 저런 인생을 사나'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아요?
사단의 입장에서는 우리만 보면 가슴이 뛰는 겁니다. '야! 저거를, 저속에 죄가 들어가서 죄가 저것들을 이기기만 하면, 야! 저거, 진짜 정말 훌륭한 도구들인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 군대의 명찰을 들고, 말하자면 빨치산 노릇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훼방꾼들이 되니까, 사단의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힌 전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티머' 라고 하는 그 청교도 후기인걸로 기억되는데 그 양반이 자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그 종교가는 부지런한 종교가는 사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쉴 때도 있지만, 그 졸개들은 쉬지도 않고, 자기 맡은 구역을 떠나는 법도 없고 아주 충성스럽게 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 성직자들이 만약에 마귀만큼 열심히 일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벌써 왔을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아주 충성적으로 일하면서 그러면서 우리를 죄 가운데 끌고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죄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펼치는 첫 걸음이 뭐냐 하면, 유혹입니다. 그리고 그 유혹에 지게 만들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다음에는 동일한 죄에 계속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죄 의식에 빠지게 만들고 죄와 더불어 싸우는 그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싸움인지를 깊이 깊이 가슴에 새겨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움을 포기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가끔, 목회를 하다보면은 죄와의 싸움한 그리스도인들이 가끔 있습니다. 지금 설교를 듣는 사람들 가운데도 아마,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 그 사람들이 형편없는 사람들이냐,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많이 자신의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던 사람들 중에 오히려 죄와의 싸움을 포기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대뜸,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아니! 어떡해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을, 그렇게 죄와의 싸움을 포기하고 자기를 포기하기 전에, 먼저, 죄와 싸워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방법이 잘못되었고, 올바른 지식이 없었고, 혹은 성실하지 않거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결국은 그 싸움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그런데 애를 썼는데도 패배한 경우가 있습니다. 애를 썼는데도 패배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것인가, 율법만 가지고 죄와 싸우려고 하면, 싸움은 계속하는데 철저히 패배하는 것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이, 로마서 7장에서 통탄하고 있는 장면이 바로 그런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와 더불어서 싸우는데, 율법도 죄와 더불어 싸웁니다. 그런데 율법도 죄와 더불어 싸우는데, 그것만을 가지고는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전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렇게 애를 쓰고 막! 기도도 하고 몸부림치면서 했는데, 결국은 졌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어떡해 했냐 하면, 아! 이거 싸워봐야 소용이 없구나 하면서 이제 순응하는 것입니다. 저는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영화나 그런데서 보면 야생에 돌아다니는 그 말들을 길들이는 장면을 하잖아요, 그것도 직업적으로 길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들을 잡아다가 사람이 올라타는 것입니다. 생전 사람을 태워 보지 않은 그 말이 가만히 있냐구요, 그런데 하루정도 밖에 안 걸린다고 합니다. 하루만 지겹게 사람이 달라 붙어 가지고 막 채찍으로 갈기고, 두들겨 패면서라도 하여튼 사람이 안 떨어지고, 이거는 내가 아무리 몸부림 쳐도 내 등에 있는 사람을 못 떼 놓는구나, 하면서 거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게 야생마 길들이는 방법입니다. 처음에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막 애를 썼는데도 결국은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죄 하나를 이기기 위해서는 말하자면, 성자들의 고행과 같은 힘이 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투자를 안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겁이 나서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주 이 간단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몇 년 동안을 죄와 승산도 없는 허무한 싸움에서 몸부림치다가 결국은 죄에게 강탈당하는 그런 사람들을 저는 꽤 많이 봤습니다. 그 사람 눈에는 굉장히 많은 그리스도인이 아주 웃기는 걸로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처럼 이렇게 진지하게 몸부림치면서 싸워본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없습니다. 왜! 아주 훌륭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런 식으로 몸부림치면서 싸울 필요가 없이 아주 그거 보다 더 쉽게 이기기 때문입니다. 그 싸우는 무기 자체가 틀립니다. 그 어떤 무기인지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틀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마구 몸부림 친 것입니다. 몸부림 쳤지만 마지막에는 결국은, 겁탈 당하는 것처럼 죄에게 졌거든요, 그럼 지금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죄가 딱! 고삐 해 가지고 끌고 다니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길들여진 것입니다. 이제 그걸 가르쳐서 신자 길들이기라 그럽니다. 죄가 신자를 길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보니까 확실히 자기보다 뭔가가 다른 것이 있는 것 같애, 자기는 기쁨이 없는데 재는 기쁨이 있거든요. 은혜도 있고, 그럼 뭐 그 죄에 대해서 그렇게 자기하고 같이 자기처럼 씨름하고 막 가책 속에서 몸부림치고, 막 얼굴이 바짝 바짝 마르고는 아니거든요, 그렇게 처절하게 싸운 자기는 지고 매일 노는 것 같은 저 사람은 이기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게 동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은 싸움하는 무기자체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투의 원리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죄에 대한 처절한 무기력에 빠지게 될 때에 결국은 이 죄, 이 죄, 막 하면서 그 여러 가지 종류의 간헐적으로 일어난 죄에 대해서 다방면적으로 고민을 하다가 그런 좌절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늘 넘어지는 그 한가지 죄에 계속 반복해서 실패하다가 사기를 잃어버리고, 총을 반납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약에 여러분들이 죄에게 자주 종종 지는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 지는 것이 이상하게 동일한 죄에 대해서만 자꾸 실패를 한다, 그러면 그것은 상당히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것을 아주 심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특정한 죄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굴복할 때에 그때에 이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죄와 싸우긴 싸우는데 이게 머리로만 자꾸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정상적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라 할 것 같으면 죄가 점점 늘어나서 마지막에 결국은 이 사람을 주관하는 상황에까지 가게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는 모두 사라지고 죄가 살아서 그 사람을 이렇게 길들여진 상태에서 죄악에 대한 욕망에 그 가득 찬 그러한 쓸모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그냥, 그냥 좋아만 하면서 유혹을 당하고 죄를 받아먹다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유혹을 받고, 거기에 굴복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 다음에 그 죄를 짓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독특한 괴로움이 신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깊이 빠져있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죄를 가지고 상당히 많이 고민한 것입니다. 안 그런 사람도 없지는 않은데, 그런 사람들은 거듭남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고민하는 것입니다. 괴로워하고, 고민했다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싸움이 있기는 있었다는 것입니다. 싸움이 꼭 이겨야지만, 싸움은 아니잖아요? 죄에 지면서도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죄를 향해서 아주 쫙, 빨려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확대해서 말하면 그것도 싸움은 싸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싸움이 삶으로 나타난다든지 아니면 그 영혼을 파고드는 어떠한 그런 그 갈망을 가지고 죄와 더불어 싸우는 그런 것이 아니라 계속 이 머리 속에서만 싸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싸움이 어떻게 이루어지냐 하면, 이 죄를 지을 때, 죄와 더불어 신자들은 싸우게 되는데 그 싸우는 것이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복음을 무기로 해서 싸우는 방법이 있고, 하나는 율법을 무기로 싸우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무기로 해서 싸우는 것은, 대부분 머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싸움입니다. 아주 쉽게 요약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내가 유혹을 받고, 죄를 짓고자하는 마음이 속에서 생겨나는데 그 죄를 지으려고 이렇게 나아가는데 양심에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안돼! 그럴 수 없어, 그러면 안돼!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럴 수가 있어, 이러면서 양심에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지나가면서 마음속에서 싸움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가냐 하면 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벌하실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머리 속에서 오고 가는 것이 말로는 싸움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실제는 싸울 의사가 있는 싸움이 아니라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면서 이 죄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자꾸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뭐냐 하면, 이런 식으로 죄에 대해서 일단 삶으로서 자신의 영혼과 온 마음을 다해서 죄와 대적해서 싸우려고 하는 실제적인 실천이 없으면, 이 머리 속에서 이렇게 굴리는 이런 것은 아주 엉뚱하게 변합니다. 그래서 어제까지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 그 말도 안돼, 그러던 것들이 한번 생각하고,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반복하는 가운데 그럴 수도 있다는 동의를 머리 속에서 얻어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으로부터 아주 부도덕한 어떤 죄가 행해지게 되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탁! 볼 때는 어휴! 세상에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가 있을까, 저건 말도 안돼, 이러잖아요, 그 사람도 여러분처럼 똑같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처음에,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죄를 짓고자 하는 소원이 있으니까, 그 죄에 대해서 계속 상상하고, 반복해서 생각을 하는 가운데 결국은 이 머리가 동의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럴 수가 있다.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랜 동안의 상상과, 오랜 동안의 반복되는 연산 작용 속에서 그것이 친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가능하겠다, 그렇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좀 유치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예를 들어볼까요? 어느 형제가 죽어 라고 짝 사랑 하는 자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되겠군요. 형제가 하나 있는데 예쁘게 생긴 자매가 있습니다. 예뻐야지만 이야기가 되잖아요, 그런데 이 형제도 동의를 합니다. '어! 저 사람 참! 빼어난 미인이다,'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탁! 다가와서 '저랑 한번 교제 해보시겠어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여자가 그러면 물론 나쁠 리야 없겠지만 말이죠, 그렇게 당돌한 제의를 탁! 받았을 때 그때 아주 흠칫 놀랄 것입니다. 아마 그리고 그 다음에 한참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형제가 오래도록 이 사람을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수 없는 상상을 만약에 해왔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렇게 제의를 탁! 해왔을 때에 그때에 그것이 이미 자기의 상상 속에서는 굉장히 많이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런 사건을 탁! 마주 하면서 야! 어떻게 저렇게 푼수 없는 여자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안합니다. '저 여자 저 겉모습만 멀쩡하고, 저 속에 순 깡통 아니야! 원래 옛말로 미인 깡통이라고 말도 있는데, 그거 아니야?' 그런 생각은 전자의 경우에는 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생각을 안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아주 오랫동안 상상 속에 반복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일이 탁! 일어날 때 그 상황 자체가 아주 친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마귀는 우리에게 우리 타락한 본성을 이용해 가지고 죄에 대한 친숙함을 잔뜩 넣어준 다음에 그 다음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순결함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 앞에 순결함이란, 죄에 대해서 낯선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죄에 대해서 낯선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아까 말씀드리려다 말았습니다만, 머리 속에서 싸움이 일어날 때는 대게 죄를 지을까, 말까 하고 망설이는 동기 그것도 싸움이라고 한다면, 그런 싸움이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을 지으면 하나님이 요절을 내실텐데, 이러한 겁, 두려움, 공포, 이런 것들 때문에 덥석 죄를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흘러가면 결국은 그 두려움도 결국은 해소가 되고 그리고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무기로 해서 죄와 더불어 싸우는 건 이것하고는 다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내가 이 죄를 지으면 범죄를 하게되고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가만히 안둘꺼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말하자면, 율법을 무기로 죄와 더불어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내가 이 행동을 하면 그것은 죄가 될꺼고 하나님의 치밀한 사랑은 다 날라 가버릴 것이다 이게 결국은 복음을 무기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행하고 있는 방향이 다릅니다. 하나는 공포와 두려움을 근거로 해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자꾸 죄와 더불어 싸우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고, 하나는 죄를 지으면 안 받아도 될 형벌이 온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하나님의 참 사랑과 성령 안에서의 이 자유함과 그리고 이러한 놀라운 능력, 어두움에 길을 걸어가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 원수들이 나를 수십 겹으로 에워싸도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고 노래할 수 있는 이 담대함, 이러한 신앙의 자유와 영혼의 참된 만족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 예가 어디에 나옵니까? 창세기에 보면 그 요셉이 보디발에 아내의 내실에 들어가게 되잖아요, 보디발의 아내가 야! 여기서 우리같이 동침하자, 아름다운 소년이었으니까, 뭐 진짜 오랫동안 눈독을 들였겠지요. 그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뭐 보디발의 아내가 거듭난 신자는 아닙니다만 원리는 비슷해요, 그 상황을 요셉은 상상을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상상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가 너무 이상하고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그 히브리 종을 불러 들여서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여기서 동침하자 이렇게 이야기한 그 상황이 머리 속에서 수없이 상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친숙해진 상황이었습니다. 그것보다 더한 일도 상상 속에게 이미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낯뜨거운 이야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친숙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야! 우리 여기서 같이 동침하자 요셉이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이 우리 가만 내버려둘까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요절을 낼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득죄하리이까 그랬습니다.
여기에 보면 형벌이란 그런 얘기가 안나옵니다. 요셉의 그 고백이 함축하고 있는 뜻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이제껏 까지 이렇게 자유함 가운데 노예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증거와 사랑하나로 여태까지 살아서 억울하게 이 노예생활까지 왔는데 내가 그 하나님 앞에 죄를 얻고 그 하나님 앞에 이러한 놀라운 교통과 사랑을 잃어버리면서까지 지을 수 있는 죄가 내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상황으로 가만히 돌아가서 요셉의 마음이 되서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가 그렇게 이야기할 때 내가 어찌 큰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 득죄하리이까 할 때 요셉은 지금 간음한 자들을 쳐죽이는 하나님의 몽둥이나 칼이 생각이 난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이렇게 동행하면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령한 삶을 살았는데 당신과 자면 한번에 날라 간다, 내가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몽둥이나 칼이 아니라 내가 이런 하나님을 향한 따뜻한 사랑과 이 놀라운 은혜를 잃어버리고 내가 살수가 있겠는가 이게 바로 복음을 무기로 해서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리 엄격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손톱만큼 죄를 지으면 단칼에 베어버리시는 하나님이라고 상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상상은 죄에 대해서, 형벌에 대해서 머리로만 싸우는 과정이 지속되면은 아주 쉽게 타협해서 결국은 여러분들이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하나님이 우리가 죄 가운데 행해도 웃고 계실 수만 없는 분이라고 하는 이상한 교리로 도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싫은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이냐 하면 범죄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도 거리가 대낮 같으면 죄를 지어도 내놓고는 못합니다.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야지만 죄를 이길 수는 있지만 우선 지식이라도 매우 분명하게 밝으면 마귀들이 그렇게 내놓고 발로 차고 굴리고 그러지는 못합니다.
사람을 개처럼 죄의 줄에다 매어 가지고 끌고 다니면서 발길로 차고 그러지는 못합니다. 그건 다 어두움 속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맨주먹 붉은 피로 죄와 더불어 싸운다는 것은 죄로서는 아주 환영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 아무리 와봐야 다 소용없으니까.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오늘 죄 죽임의 교리를 듣고 있습니까? 죄와의 싸움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얻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대충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왜? 우리는 죄에 대해서 일곱 달째 공부를 하면서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듣고 또 듣고 또 들으면서 이 죄를 어떻게 죽이는지에 대해서 깊이 상고하고 또 그럴 수 있게 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급도 주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약도 좋은 것 가지고 있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하늘 나라에서 상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외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지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가 환영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한국에 와서 돈 쓰고 가는 사람들을 상을 줘야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배우고 그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만약에 그것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지금 아까운 시간을 허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죄와의 싸움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우리가 더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천국 그 천국 안에서 맛보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다스리심, 그 통치하심 아래서 맛보는 그런 놀라운 행복, 이런 모든 것들을 맛보게 해주는 진정한 원천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죄와 싸움에서 이기는데서 비롯됩니다.
결국은 시인들이 시인이 또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했던 신앙의 선배들이 하나님 앞에 형벌 받는 것 보다 더 무서워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구원의 기쁨을 내게서 거두시고 주의 성령의 거룩한 감화를 내게서 사라지게 하시는 것을 , 왜냐하면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아래서 살던 신자는 형벌이 무서워서 하나님께 피한 사람이 아니라 처음에는 그렇게 피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안에서 하나님의 품안에서 형벌이 문제된 것을 느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안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이 이야기하고 있는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윗이 죄를 짓고 나서 극도의 불안과 공포 속에 휘말리며 괴로워할 때에 가장 무서워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우리 민족을 죽이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나 병들게 하면 안됩니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구원의 기쁨 거둬 가시고 성령을 자기에게서 거둬 가실 것 같은 그런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왜, 구원의 기쁨 속에서 여태까지 살아왔고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 자기에게 충만하게 임한 그 하나님의 영 때문에 다른 사람은 맛 볼 수 없는 하나님과의 놀라운 교감을 맛보고 궁창에 가득 찬 하나님의 신실함과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눈 깜박거리며 지날 수 있는 들에 핀 백합이나 아름다운 꽃들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움직임을 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그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화목과 그 놀라운 교제가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날라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아니 그게 사라져 버리는데 심판을 받아서 죽어버리든지 말아버리든지 그게 지금 문제냐?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 그 놀라운 은혜, 그 충만한 하나님의 자비하심 이러한 은혜 속으로 들어가기를 소원하고 뭐 매일 잘하는 말로 첫사랑을 회복하고 싶다 그러고 처음 뜨거웠던 그 신앙으로 들어가고 싶다 그러고, 그 처음 열렬했던 그 하나님을 향한 그 순결한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면서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건 신앙이 아니라 천박한 종교적인 연애감정입니다. 사랑하고 연애감정하고는 다릅니다. 몇 주전에도 여기서 결혼식을 했습니다. 일평생 서로 사랑하고 약속할 수 있습니까? "네" 하고 약속했습니다. 그것은 연애감정하고 다른 것입니다.
이제는 공적으로 고백을 하면서 그 사랑의 고백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것이 어떠한 길이든지 간에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삶으로서 인생 길을 헤쳐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결국은 소위 이야기하는 처음사랑 그것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모르지만 요즈음 사는 것이 하도 후지니까 옛날이 그리워지는 것 아닙니까? 그 처음 사랑을 타령만 하다가 결국은 둘째 사랑도 못해보고 침몰되는 것처럼 그렇게 마치 장작불 연기 나는 앞에서 눈을 비비는 것같이 그렇게 보람도 없고 고통스러운 신앙생활을 하다가 인생이라고 부끄럽게 얼른 마쳐버리는 그러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그런 하나님과의 놀라운 교통, 주님과의 평화로 말미암는 그 축복스러운 하나님과의 교통과 하나님과의 순결한 사귐, 이런 것들은 연애감정을 통해서 오는 것 아닙니다.
자기가 정말 그것을 원하면 집요하게 그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내가 그것을 가로막을까? 그러면서 처절하게 탐구해 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놀라운 교통을 내가 원하고 그리고 내가 그런 속에서 살았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런 관계 속으로 불러주시기를 뜨겁게 열망하고 계시는데도 왜 그런 교통이 일어나지 않을까에 대해서 답을 얻은 사람 있으면 한번 말해보세요. 대부분 질문은 하는데 대답을 못 얻고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이 결국은 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일곱 달이나 죄 죽임에 대해서 설교를 들었는데 저것을 들으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덜 받겠구나 저렇게 살면 하나님 앞에 벌을 덜 받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이 죄 죽임의 교리의 핵심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과의 놀라운 교제에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적인 교제에 있는 것입니다. 난 그런 사람들을 보면 참 존경스럽습니다.
(예화) 형이 뺑소니 차량에 의해 죽음으로서 그 동생이 범인을 추적해 가는 과정의 이 야기.
그래서 잡혔습니다. 얼마나 집요합니까? 이게 바로 한 사람이 복수심에 불타니까 그렇게 집요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술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금을 캐고 귀중한 금속을 캐는 사람들이 이쪽으로 엘리베이터를 달아서 별로 튼튼해 보이지도 않는 그런 엘리베이터를 타고 갱목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게 걸쳐있는 그러한 탄광을 수백 미터 아래로, 수백 미터 옆으로, 수백 미터 하면서 그렇게 내려가면서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매우 중요한 것이 묻혀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집념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찾으라,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으라, 그러면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그럼 무엇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못 찾게 하느냐 이러면서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시고 나도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운데서 살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고 그 꿈만 이루어진다면 무엇을 먹고 마시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라는 고백이 있는데도 왜? 나는 이렇게 밖에 안 사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이 죄가 안팎에서 하나님의 그런 교통을 가로막고 있다라고 하는 정확한 성경적인 답이 들려올 때 그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깊이 탐구하고 마치 형을 치어 죽이고 도망간 그 차를 찾기 위해서 일만 여대나 되는 그 차를 탐문하면서 수색했던 그 동생의 열정과 같이 반드시 하나님께선 자기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고 상주시는 분이시라면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추구해 가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당신의 거룩한 영광과 만남과 교제를 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러한 복음을 무기로 해서 죄를 이기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주실 이 놀라운 하나님과의 화해, 그 평화에서 말미암는 말할 수 없는 영혼의 참된 기쁨들을 사람들이 사모하지 않거나 사모해도 아주 조금밖에는 사모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위해서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들을 위해서는 피를 말리는 노력도, 이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하나님과의 진정한 평화,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러한 놀라운 평강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던 죄를 어떻게 나의 마음과 삶 속에서 제거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노력하다가 금방 자포자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아주 날카로운 분이라면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목사님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평화는 그렇게 피를 말리는 추구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습니까?" 그렇게 물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무슨 하나님이 심술쟁이처럼 그렇게 생각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원래 그런 분이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들이 당신의 그 좋은 품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숨어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 멀리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죄악된 길로 걸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숨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 멀리 온 것입니다.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가기 위해서 애를 쓰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갈려고 하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돕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혼자 버려 두시는 적이 있다고 말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죄와 더불어 싸우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고자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외롭게 홀로 버려 두시는 적은 없습니다.
완전히 무지 가운데서 그릇된 길로 걸어가서 잘못 싸우지 않는 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죄와 싸우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받습니다. 그러한 죄와 더불어 싸우려고 하는 그 사람의 신실한 노력, 그 자체를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이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자, 그럼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다. 그리고,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만 사랑한다. 그런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여러분 상상 속에 그리고있는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뭐라고 생각하든지 제멋대로 자기 꿈을 타고 살아가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은 나는 가책 받지 않는데 저 사람은 윤동주 시인의 말대로, 바람에 나는 잎새에도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루도 기분이 그럴싸했다. 어- 참 좋다. 그리고 드러 누었는데 어- 오늘 진짜 좋은 날이네, 교인들도 많이 오고, 와- 뭐 헌금도 많이 나오고, 야- 오늘 좋은 날이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아- 말씀을 듣고 열광하던 그 사람들 중에 변해보지 못한 저 구석에 있는 영혼들은 오늘 이 저녁에 무엇을 할까? 자기 성취가 아니라 주님이 자신에게 섬길 기회를 주셨는데도 하나님의 섬김이 다하지 못해서 영혼에게 유익이 미쳐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그런 예배자들이 모인 교회 또 그런 예배자들이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신실한 사람은 하나님이'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러면 '하나님 정말 이렇게 밖에 못살아서 죄송합니다. 주님이 저에게 주시는 은혜는 너무나 크고 우리가 주님 앞에 산 삶은 너무나 초라합니다. 주님 이것도 삶이라고 내놓으니 하나님 얼굴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주님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긍휼로 나를 받아 주시옵소서' 그런 사람이 신실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 사람이 신실한 사람이고, 그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고,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싸우는 것은 무슨 형벌을 면하기 위해서 그런 식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래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아!~ 주님의 사랑과 그 은혜 속에 살고 싶다라고 하는 이 목마름을 구체화시켜야됩니다. 구체화! 타령만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난 제일 답답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텅 빈 머리를 가지고 박수를 치면서 노래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내가 왜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렸을까? 내 삶은 왜 이렇게 무기력할까? 하나님 내가 돌아가려면 어찌해야합니까? 하나님에게 물어봐야지 주님이 가르쳐 주실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시험에 든 사람들에게 최고의 선물은 -아침에 뭐라고 그랬어요?- 지혜입니다. 지혜. 그래서 걸어온 길이 잘못된 길이였지만 가슴아파하고 후회하지만,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길도 많습니다. 그런 것들은 또 우리들이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디서 넘어졌는지, 왜 하나님의 그 뜨거운 사랑을 내가 잊고 살아가는지, 그리고 왜 그것을 그렇게 간절히 찾기를 원하는 대도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사이를 가로막았는지 호세아 선지가 말한 '너희의 죄가 너희의 길을 가로막았다'고하는 그 말씀이 무엇을 구체적으로 의미하는지 그러면서 하나씩 찾아가야 됩니다.
요즘은 그런 것을 안 합니다. 옛날에 제일 하기 싫은 일이 할머니가 '남준아, 실패 좀 잡아라' 타래실을 사 가지고 이렇게 붙드시고 있으면 감으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따라서 이렇게 합니다. 그럼 어떤 때는 타래가 별로 안 좋아서 막 굴러 가지고 덩어리로 엉키잖아요 그때도 어린 마음에 막 잡아 땅기고 잘라버리고 싶지만 어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풀어나갑니다. 돋보기를 또 꺼내고 결국은 자르면 바늘에 이어서 사용하지를 못하니까 자르지를 말아야지 그래서 하나씩 풀어내어서 한 올도 버리지 않고 실패에 다 감으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머리가 텅 빈 채로 막 박수가 두들겨 치고, 고래 고래 소리지르고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오랜 숙제, 하나님 내가 어떡하면 이렇게 죄와는 떨어질 수 없는 것이 신자의 처지라고 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미 복음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그 죄를 거의 완전하게 제압하고 그 죄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거룩의 빛 앞에서 사는 길을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고 많은 사람들이 살다 갔고, 지금도 살고 있는 동지들이 있는데 “하나님 내게도 그런 삶을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찾아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죄죽임의 교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