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은 우리 안에, 생명은 너희 안에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0-12).
신학을 공부하는 여러분들의 꿈은 신학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신학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의 몸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죠. 학교 다닐 때에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학교에서 영광을 받는 것 같지만 졸업만 하고 험한 교회에 들어가고 나면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우등생이었는지 교회는 성적표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은혜 안에서 목회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해나가서 그리스도의 몸을 아름답게 세우는 데에 이바지하는 인격과 삶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분들은 학교성적과 상관없이 환영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훈련받는 동안 공부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여러 해 동안 저와의 만남을 통해서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나는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들이 공부에 전념하기를 원하고 최소한 2학년 때까지는 이 신학공부에 올인 하도록 오직 기도하고, 작은 무리의 영혼을 돌보고, 그리고 신학공부에 전념하는 이 세 가지만 하도록 나는 강력하게 권고하고 싶고 가능하기만 하다면 여러분들이 공부하다가 건강의 위협을 느낄 정도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졸업을 하고나서 목회를 하고난 지 5년이 지난 후에야 제가 아무것도 목회자로서 지적인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저 같은 후회 없이 목회 사역을 하기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공부하도록 나는 여러분들에게 강력하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모든 목회사역을 위해서 필요한 도구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목회 사역 혹은 선교사역의 본질을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사실 공부와 학업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하기도 하고 그 모든 도구들이 열매를 맺게 만들어주는 원천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행히도 신학교에서 강의실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교를 많이 해본 사람이 설교를 잘한다는 것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설교를 많이 반복한 경험은 설교의 기술을 증진시킬 수 있지만 설교 속에 불 튀는 번갯불과 천둥소리, 활자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성령의 역사 같은 것들은 인쇄될 수도 없고 강연될 수도 없는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손에서 손으로 쥐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오늘 말씀드리려는 이 지침을 깊이 가슴에 새기고 목회를 한다면 그 기간이 오래된다고 해서 훌륭한 종이 되는 것이 아니고 짧아도 온전하게 이 일을 수행한다면 훌륭한 주의 종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사도 바울은 오늘 이 목회사역의 본질을 예수의 죽은 것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목회사역의 본질은 예수 죽으심을 짊어지는 것이라는 것이죠. 오늘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몸에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고 말입니다. 얼핏 보면 이 번역은 우리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으니 결국은 우리가 예수님을 죽인 것과 다름이 없고 그러니 우리의 삶은 예수가 나 때문에 죽으셨다는 가책을 짊어지고 사는 생활이라고 우리를 해석하도록 이끄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희랍어 원문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희랍어 원문에는 ‘예수의 그 죽음’이라고 나옵니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 그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는 것 이것을 통해서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 나타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직역을 하면 ‘예수의 그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는 것’ 이렇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서 그 유명한 ‘콘포로나치 오 크리스티’ 그리스도의 본받음의 교리라는 것이 나왔습니다. 칼빈 선생의 신학적인 위대함은 아마도 이 교리를 아주 아름답고 화려하게 종교개혁의 신학 안에서 재현해낸 것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리는 그 유명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비의 교리 ‘윤여쿤 크리스토’라는 그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 학자들에 의하면 아마도 베르나르도로부터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그 위대한 교리를 화려하게 세워서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세우면서도 신자와 성례전적으로 연합된 교회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이것들을 설명해내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내가 간절히 소망하기는 여러분들이 목회를 하면서 이 교리의 깊은 의미를 터득하고 거기에 자신을 적용한다면 놀라운 성화의 진보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문자 그대로 죽음의 기운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살아있는 것들을 파괴하고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에 매우 건강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학우 중 어떤 형제가 나를 붙들고 그래요. ‘형님 나는 형님의 체력을 볼 때마다 절망을 합니다.’ 이틀정도 밤을 새우는 것은 끄떡없고요. 제 기록이 책상 아래에 오강을 놓고 22시간을 에세이를 그 자리에 앉아서 쓴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세수 한번을 하고 나면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허리를 다치고 나서 그렇게 오래도록 앉아있으면 온몸이 아프고 견딜 수 없이 근육이 아파요. 그것을 통해서 사실은 많이 겸손해졌습니다. 무엇 때문이지요? 육체의 죽음의 기운이 우리의 육체 속에 스며드는 것이죠. 그래서 머리도 빠지고 머리고 하얘지고 허리도 아프고 그 다음에 한번 철야를 하면 회복이 안 되고 밥을 안 먹으면 기운이 없어서 견딜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죽음의 기운이 배어 들어와서 육체의 생명을 파괴하기 때문이에요.
결국은 그 생명이 죽음의 기운에 삼키게 될 때 우리의 인생은 마감을 하게 되는 것이죠. 똑같이 영적으로 예수의 죽음이 우리 속에 침투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이천년 전에 죽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오늘 우리 속에 파고들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설명을 해보죠. 여러분들이 언젠가는 회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통렬하게 참회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계셨습니까? 그대들 마음속에 지금 못 박히고 계셨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러지 않았습니까? 현재완료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에스타오르 마이’ ‘Have been XXXX with Christ.’ 라고 그랬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영향력이 성령의 연합하시는 사역 안에서 오늘 우리 속에 재현되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도 우리 속에 그렇게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잘 죽는 것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신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부른 사람들입니다. 항간에 유행하는 노래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찬송을 부르지 마십시오. 그것은 평신도용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들어야 될 찬송은 무엇일까요? ‘당신은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정하신 목회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 자기가 죽어 교회를 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목회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몸은 약60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 세포는 뇌세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세포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고 하는 생성과 파멸을 되풀이하는데 3개월 정도면 우리의 몸의 세포가 모두 교환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몸은 60조개의 전구가 깜박이는 것 같은 생명과 죽음의 작용을 통해서 실존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사실은 생명이 생명 되는 것은 사멸하는 죽음에 의해서 지탱되는 생명이에요. 생물학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의 몸에 세포가 있는데 이 세포는 신기하게 생장하고 분열을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를 어떤 방식으로 얻는가하면 놀랍게도 옆에 있는 세포의 죽음을 통해서 그 에너지를 얻습니다. 정말 묘한 것은 우리 몸에 60조개의 세포가 수시로 죽는데 그 죽음도 같은 종류의 죽음이 아니라 두 종류의 죽음이에요. 그래서 전문용어로 necrosis의 세포사멸과 아포프롭티스의 사멸이 있어요. 신기한 것은 necrosis의 세포사멸은 세포가 생명을 다해서 괴멸하거나 타격을 입어서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아포프롭티스의 세포사멸은 과학도 밝혀내지 못한 이유 때문에 세포가 스스로 자살을 해버리는 것이에요. 자살할 때 나오는 APT라는 화학에너지가 곁에 있는 세포의 공장을 돌리는 에너지가 되요. 이것을 통해서 생성작용을 하고 세포는 분열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 음식을 섭취하고 성장을 하면 그 성장하는 힘으로 어떤 세포는 자살해서 그래서 옆에 있는 세포를 살리는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의 몸에 가끔은 세포들이 뭉쳐서 어떤 세포도 나는 그런 식으로 죽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서로 자기가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세포들이 있어요. 그렇게 되면 세포는 많은 양분을 필요로 해요. 그래서 밖에 있는 양분을 빨아들여서 자기의 세포를 계속 증식시켜요. 그리고 그것이 덩어리를 이루어요. 그것이 암이에요.
어차피 교회 안에는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어도 미끄러진 사람들, 또 완고한 자기고집에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죽지않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는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목회의 영광은 교회의 크기가 아니에요. 그리고 성공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 모든 성공에 대한 집념은 사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아닌 쓰레기에요. 인간의 야망의 쓰레기에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자기 성취의 기회로 삼아보려고 하는 인간 욕망의 쓰레기적인 종교형태에요. 교회의 진정한 가치는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부합하는 몸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삼위일체 안에 있는 비밀스런 구속의 경륜을 시간과 공간속에서 드러냄으로써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하신가하는 것을 알게 함으로 그분을 경배하게 하는 것이고 또 당신의 창조사역과 구속의 사역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지켜보시는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것이 교회의 가치에요. 그렇기 때문에 크게, 많이, 강하게 이런 구호들은 모두 바벨론의 구호들이에요. 하나님을 인간이 멀리 떠난 적부터 인간은 사악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을 본뜨고 능가하고 싶어 했어요. 그것이 바로 크게, 많이, 높이, 성공, 부, 야망, 건강, 축복, 이런 것들로 나타나는 것이에요. 오히려 교회가 추구해야할 진정한 가치는 예루살렘의 가치에요. 그 가치는 다른 것이 아닌 분명하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가치에요. 어두운 밤바다에 풍랑을 만난 배들이 안전하게 도피하기 위해서는 수천발의 조명탄을 쏘아서 항구를 대낮같이 밝힐 필요는 없어요. 어두움은 언제나 다수였고 죄악은 언제나 관영했고 진리는 언제나 소외되었지 대중적이었던 시대는 없어요. 중요한 것은 단 하나의 등대라도 옳게 깜박이고 있다면 수많은 배들이 안전하게 항구에 대피할 수 있는 것이에요. 교회가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간직하고 예수와 더불어 잘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많은 고난들, 요한 칼빈 선생이 기독교강요에서 말한바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모든 고난과 고통을 만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자신의 경험을 투사시키고 그래서 그 고난을 인내하고 감당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그 고난이 우리의 마음속에 묵상되어질 때 그 때에 이천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은 오늘 내가 진 십자가 안에서 재현되는 것이에요. 그 죽음의 기운이 우리의 영혼과 정신 속에 파고들어서 그래서 하나님을 거슬러 살려고 하는 오늘 여기에서 육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그 모든 우리의 몸을 죽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 모든 부패성과 그리고 사악한 욕망, 주님을 거슬러 살고자하는 고집들이 파괴될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주님을 향한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이 꽃피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사랑 안에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 죽음을 기념하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착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목회자에서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큰 교회나 교계에서 모든 사람이 박수를 쳐주는 명성이나 높은 학식이 아니에요. 주님이 목회자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은 목회를 하면서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것이에요. 그 일을 위해서 목회자는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오늘날 우리는 이 시간에도 사랑하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분쟁들을 봅니다. 교회가 교회를 고소하고 목회자와 성도들이 법정에 서고 이런저런 추문으로 얽혀서 교회가 끊임없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 현장에서 우리들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도 그런 고통을 느끼니 그를 피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통은 무엇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교회의 현장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죽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멸시를 받고 기꺼이 죽기를 원하고 자신이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로와질 수 있다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는 그렇게 상처를 받지 않은 텐데. 그렇게 피터지게 싸우고 분쟁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는 다시 한 번 교회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대신 십자가로 현저히 능욕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죽기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이 썩어서 한 알의 밀알이 됨으로써 우리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 것처럼 그렇게 여러분도 교회를 위해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섬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래 교회를 섬기면 목회의 경험을 쌓게 되고 목회에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은 목회사역의 본질을 전적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에서 섬겼느냐가 목회사역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섬겼느냐하는 것이 목회사역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영혼을 섬기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는 가슴 아프게도 고백합니다. 그래서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한다.’
목회사역의 두 번째 본질은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생명의 역사야말로 목회사역의 본질인 것입니다. 여러분 큰 교회를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도 좋은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부러워해야할 것은 목회의 영광, 진정한 목회의 영광은 여러분들이 어느 곳에서 영혼을 섬기든지 여러분들 안에 있는 진리로 말미암아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변화 받은 영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던 영혼들이 그대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나의 참 임금은 우리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에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 회심의 역사, 그 영광스러운 회개의 역사, 그 아름다운 영혼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목회사역의 꽃입니다. 그 교회당이 화려한 예배당이 아니고 여러분들의 이름이 교계에서 박수쳐주는 이름이 아닌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어느 한곳에 주님이 보내주시는 목장에서 양떼들을 붙들고 그들을 피붙이처럼 여기며 그리스도예수의 복음을 그들에게 가르치기를 남의 가게에서 사다 먹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그 복음을 먹고 그 피로 소화시켜서 그래서 영혼 하나하나를 가슴에 품고 앞섶을 풀어 젖을 물리는 엄마처럼 그렇게 영혼들을 먹이고 그 영혼들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여러분들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하며 살 때 그 목회지는 큰 목회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목회사역에서 이런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이 일들이 나타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훌륭하게 훈련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런 일들이 그치고 있다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오래 그런 자세로 교회에 남아있어도 여러분들의 목회사역을 위한 결코 아름다운 준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야 될까요?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영혼이 회개하고 주님을 만나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교회에 충성하기를 바라지 않는 목회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일은 모든 교회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피를 바르십시오. 그대들이 교회에서 섬기는 그 섬김에 피를 바르라는 것입니다. 그냥 가서 봉사하는 것, 마음을 드려서 열심히 섬기는 것, 그것 말고 피를 바르라는 것입니다. 이 목회지가 미래를 위한 훈련의 장소가 아니라 이것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마지막 섬길 교회, 그리고 내게 맡겨진 이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될 수 있다면 나는 여기서 죽어도 좋습니다. 일천한 목회의 경험이지만 17년 세월을 개척하고 지내오면서 아주 평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목회자가 뜨겁게 땀을 흘리면 교인들은 겨우 움직이기 시작하고 목회자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 교인들은 겨우 이마에 땀이 솟기 시작합니다. 목회자가 말씀의 칼을 맞고 강대에 엎드려 피를 쏟으면 겨우 교인들은 울기 시작합디다. 액체의 섬김입니까? 그대들의 영혼의 섬김에 땀이 있습니까? 솟구치는 눈물이 있습니까? 쏟아지는 피가 있습니까? 그 흐르는 피를 여러분들의 설교에 바르고 영혼들을 위한 기도에 바르고 심방하는 발에 바르고 영혼들 하나하나 가르칠 때 여러분들의 입술에 바르십시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언제나 이 벌레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주님이 못 박히신 것과 이렇게 주님을 섬기며 사는 작은 섬김의 생애는 덤으로 사는 주님 몫인 인생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날마다 여러분에게 말하십시오.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를 살려주셨으니 나의 남은 생애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 육체가운데 채우는 삶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영원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분 앞에 서는 그날 우리들이 피 묻은 전투복을 입고 그분을 만날 수 있도록 그렇게 온전한 피 흘림의 섬김이 있는 여러분의 삶이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