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강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2
녹취자: 조종현
시험에 든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시험에 든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시험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창조적 시험이고, 또 하나는 파괴적 시험이다. 창조적 시험은 우리를 축복과 은혜로 인도하기 위한 시험이고, 후자는 우리를 파멸로 데려가기 위한 시험이다.’ 그러나 이 같은 구분은 잘못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시험이나 시련 같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시험 당하는 자가 주관적으로 어떤 신앙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 객관적으로 오는 시험이나 시련을 좋게 활용할 수도 있고, 나쁘게 사용해서 신앙에 손해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사람 요셉이 나옵니다. 이 사람이 애굽에 끌려가서 노예 살이를 하다가 보디발집의 총무가 됩니다. 그러던 중 이 사람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습니다. 좀 전의 분류대로라면 이것은 파괴적인 시험이 되겠지요?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셉은 신앙의 정절을 지켜서 축복으로 인도된 것이 아니라 감옥에 들어가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감옥에 없었더라면 아마 애굽의 총리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사람이 총리가 되었을 때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 그때에 비로소 애굽의 총리직을 감당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입니다. 그럼 이것은 파괴적인 시험이겠습니까? 아니면 건설적인 시험이겠습니까? 여기에서 보면 파괴적인 시험인 것 같은데, 저기에서 보면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시험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관점의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이러한 시험의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마음이 변질되어서 악으로 이끌리게 될 때에 그것은 창조적인 시험이어도 나중에는 그 사람을 파괴하게 되고, 아무리 파괴적인 시험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이길 때에는 창조적인 시험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시험에 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또 마귀의 시험과 신자의 책임과 같은 것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이런 시험에 들고 죄를 짓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다 마귀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성경이 죄의 근원을 이야기 할 때 마귀를 거론합니다.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서 죄에 빠지게 하는 세 요소가 있는데 마귀, 세상, 인간 안에 있는 죄가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영향을 끼쳐서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죄를 짓게 만드는 겁니다. 마귀는 불순종의 아들가운데 역사하는 영이고,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인간들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많은 죄들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마귀 때문에 신자가 죄를 짓는다고 핑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도『기독교강요』에서 설명하기를 신자가 죄를 지으면서 마귀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기에 나는 책임이 별로 없다고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왜입니까? 이때에 흔히 드는 예가 가롯 유다 아닙니까? 가롯 유다가 앉아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린 결정은 예수를 팔아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고 나서 은을 넘겨 받는데 그 액수가 노예의 몸값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한 명의 노예정도 밖에 안 되는 가격에 판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귀가 가롯 유다에게 예수를 팔 생각을 넣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마귀가 예수님을 팔 생각을 집어넣지 않았다면 이 사람은 예수님을 안 팔았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약 이 생각을 베드로에게 집어넣었다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팔았을 텐데, 그러니 가롯 유다만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할 것은 어떤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은혜이고, 어떤 악을 행하는 것은 마귀의 작용이 있을지라도 그 사람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성경도 준비된 마음 속에 역사하고, 마귀도 준비된 악한 사람 속에 역사하기 때문에 결국은 신자는 그것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마귀의 역사는 인간 안에 작용하는데, 이 가롯 유다의 마음이 이미 마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귀가 역사해서 예수를 팔 생각을 품게 된 것이고 그것을 실행함으로 예수님을 배반하게 되었다고 설명해야 옳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시험에 든다는 것을 자기는 아무 책임이 없는데 누가 나를 구렁텅이에 밀어 넣듯이 시험에 들게 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신자들에게 이런 시험을 허락하실까요? 첫째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 내면의 죄로 말미암아서 시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마음속에 죄가 없고 욕망이 없다면 이 세상의 불완전한 상황을 만나도 시험은 안 되는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요소와 밖의 요소가 만나면서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그것을 당신의 지혜와 은혜를 드러내는 일에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시험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면 오히려 이 시험을 당하지 않은 것보다도 더 좋은 결과를 우리의 인생에 가져오게 됩니다.
시험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는 바로 이것입니다. 시험에 들기 전까지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시험에 들고 나서야 ‘우리 안에 이런 것들이 있었구나, 우리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것 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게다가 그런 것을 발견했는데도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도제목이 7가지나 나오지만 그 모든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우리, 갓난아이가 엄마를 전심으로 의존하는 것처럼 그런 의존 속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기도는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양식은 단순히 밥이 아니기에-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모든 조건들이 다 채워져도 그것은 인간의 육체나 정신 일부분을 보호할 뿐이기에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온전히 보전함에 있어서는 우리 자신의 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거룩한 고백입니다. 아무 어려움도 만나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주체성을 가지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의 결과라는 것, 주님이 우리를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은총으로 보호해 주시고 그 시험에서 우리를 수시로 건져주시고 시험을 피할 수 있게 하시고 또 그 시험을 당했을 때는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는 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생의 날들을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모르고 마치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처럼 여겼는지 생각해봅시다. 밥을 먹을 힘이 없을 때까지는 자기 힘으로 먹는 줄 압니다. 자기 힘으로 배변을 하는 동안에는 화장실을 가고 배변을 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하는 줄 알지만 모두 잃어버리고 난 뒤에 비로소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들이 이런 기도를 매일매일 드리면서 주님을 향한 의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주기도문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시간으로서 ‘악에서 구원해달라는 기도’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송영’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주기도문의 삶이 구원받은 신자의 거룩한 소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새기고 감격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