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강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4
녹취자: 백지영
일용할 양식을 생각하다가『미식사』(美食史)에 대한 책들을 몇 권 보면서 ‘정말 재미있구나. 그리고 이것이 정말 올바로 가르쳐져야 하겠구나.’하고 느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양식을 풍족히 주신다고 할 때 이것은 양(量)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맛의 문제나 질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몸에 좋은 식품이라고 하더라도 맛이 없으면 안 먹게 됩니다. 그런데 맛있으면 먹게 됩니다. 그만큼 맛과 질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음식의 맛을 즐기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여기에 세 가지 견해가 있는데 극단적 금욕주의, 극단적 방탕주의, 그 다음에 양쪽을 피해간 성경적인 입장으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음식의 맛을 즐기는 것에 대한 극단적 금욕주의는 즐거움 자체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같은 사람도 말하기를 “음식을 먹을 때는 약을 먹는 것 같은 마음으로 먹는 것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음식의 맛을 즐기는 것을 경계하는 극단적 금욕주의에서는 그것을 경계하는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합니다. 너무 많이 먹는 것을 라틴어로 ‘니미스’(nimis)라고 하고, 미친 듯이 음식을 퍼 먹는 것을 ‘아르덴테르’(ardenter)라고 하며, 또 너무 먹는 것을 탐해서 밥 먹을 시간이 안 되었는데도 밥을 먹는 것을 ‘프레프로페레’(prepropere)라고 합니다. 또 ‘라우테’(laute)라는 말도 있습니다. 프랑스에 갔더니 한 끼 저녁식사가 250만 원짜리부터 파는 식당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1년 전에 예약을 해야 되고 정확하게 예약한 시간에 가지 않으면 취소가 된다고 합니다. 그보다 더 비싼 식당이 유럽에는 즐비하게 많다고 합니다. 그렇게 비싼 음식을 먹을 것을 가리켜서 ‘라우테’라고 합니다. 중세시대 때 사람들을 너무 값비싼 음식을 먹는 것을 정죄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스투디오제’(studiose)라는 단어가 있는데 먹되 맛있는 것만 골라먹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비판적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극단적 금욕주의의 입장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목적은 건강에 있지만 위험스러운 낙(樂)이 시녀처럼 뒤따르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탐식의 낙에 이끌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건강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자 할 때에도 실제로는 그 즐거움이 동기의 목덜미를 잡습니다. 맛과 낙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건강에 유익한 음식이 대체로 유쾌한 맛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음식의 맛을 즐기는 것에 대해서 경계합니다. 4세기 교부 에바그리우스(Evagrius)라고 하는 사람은 탐식이야말로 모든 사악한 마음의 자양분이며 지성의 활동을 오염시키는 주범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금욕주의적인 입장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결국은 음식의 맛을 즐기는 것을 금한 극단적 금욕주의는 물질을 죄악시하고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까지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견해라면, 극단적 방탕주의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음식의 감각에 마음껏 취하도록 자신을 개방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방탕과 탐욕으로 그 욕망의 노예가 되기는 마찬가지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요리사 레이몽 올리비에(Raymond Olivier)라는 사람이 쓴 책에는 고대 로마의 식사의 방탕함을 그리고 있습니다. 식사가 있고 그 다음에 음악, 곧 여흥이 있으며, 그 다음엔 성적인 탐닉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음식에 대한 방탕은 다른 모든 욕망에 대한 방탕을 여는 문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중국에 있는 북경거리에는 ‘첸취더’(全聚德)라는 음식점이 있습니다. 청나라 시대 때부터 요리한 민간 오리 전문점인데 다른 나라가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맛있는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오리를 특별하게 사육하는 것입니다. 새끼오리를 몸을 움직이기 힘든 아주 좁은 통로에서 기르는 것이 맛있는 오리요리의 비법이라고 합니다. 오리가 많이 활동을 하게 되면 지방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지방은 지방끼리, 살은 살끼리 모이지만 운동을 하지 않으면 살과 살 사이에 지방이 배어서 아주 부드럽고 맛있는 식감의 고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맛에 대한 탐닉 때문에 음식을 준비함에 있어서 비인간화의 측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음식의 맛을 한없이 즐기는 쪽으로 가는 식생활의 방탕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은 음식의 맛을 즐기는 것을 정죄하지는 않지만 방탕함을 경계하도록 우리에게 주의를 주십니다. 이러한 음식에 대한 방탕함을 성경은 오히려 악인의 중요한 특징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의 신은 배요”(빌3:19). 무슨 뜻입니까? 끊임없이 탐욕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말하자면 악인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로마시대도 보면 음식을 다 먹을 수가 없으니까 그 많은 음식을 가지고 와서 씹어서 맛만 보고 그 음식 자체를 쓰레기통에 뱉어버리는 방탕함들도 있었으니 음식을 통해서 맛 자체를 즐기려는 것을 극단화하다가 보니까 이런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과식을 하면 3분도 못되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서도 음식을 먹을 때 충분한 음식을 섭취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식탐과 감정이 예전 그대로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 이 사람은 실제로 조금만 먹으면 머리가 아픈 그런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그런 육체의 건강과 탐욕 사이에서 고민을 했던 성도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그림은 장프랑스와 밀레의 ‘만종’인데, 종일 들판에서 일하고 농기구와 몇 개를 갖다놓고 주님 앞에 감사하며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고”라고 할 때 신비한 방법으로 그 음식이 공급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올바른 삶임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더 많은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 자신의 힘으로 공급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나눔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양식을 나누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것에 의하면 그 양식은 순전한 밥한 그릇이나 떡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나누면서 다른 사람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매순간마다 그렇게 하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의 성향이 되어서 몸에 배어있도록 살아가는 것, 그래서 이것이 자연스러운 베풂이 되도록 살아가는 삶이 바로 자비의 삶이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랑의 삶입니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영혼이 활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육체는 방탕에 빠지게 되며 우리의 정신 건강에도 매우 안 좋게 됩니다. 우리들이 어쩔 수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양식을 해결할 때도 있고 또 반대로 다른 사람도 그렇게 도와야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자기 자신이 노등을 함으로써 스스로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을 자신의 즐거운 노동 속에서 받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염려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염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들이 실제로 무엇이 부족하기 때문에 염려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사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있어서 주님이 공급해 주시고 우리는 누리면서 사는 온전한 신뢰의 삶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의존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든지 아니면 나를 의존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나를 향한 의존과 신뢰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과 신뢰에 반비례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 나를 점점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나를 안 믿게 됩니다. 반대로 신앙이 멀어져서 내가 나를 의존하게 되면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이것이 기도생활의 부족 등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으로 우리가 부자일 때에나 가난할 때에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들이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 기도의 의미를 정확하게 안다면, 한 그릇의 밥을 놓고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이 기도 속에서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 양식을 해결하였다고 할지라도, 나의 노동을 통해서 이 식탁이 하나님 앞에 응답되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이 모든 먹을 것들을 주시고 우리에게 오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미약한 존재이고 주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영혼의 좋은 양식인 진리뿐만 아니라 우리 육체를 위한 음식까지도 주님이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모든 은총을 통해 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또 다른 삶의 영역에 있어서도 우리 주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는 주기도문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고 하는 말의 마지막 의미입니다.
이것으로서 이 중요한 기도에 대한 모든 설명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만 대체로 이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이고, 우리가 이런 매일 매일 양식을 구하는 기도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우리를 위한 또 다른 간구인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처럼 또한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를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