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우리의 만족이신 하나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챠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편)
녹취자: 백지영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한 이 시인은 2절에서는 공급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은혜 때문에, 그리고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기를 건져주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5절에 와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고 인도하시는 목자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자, 이 5절에 보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셨다.”라고 나옵니다. 사실 ‘주께서’ 라고 되어 있지만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당신께서’, 우리나라 말로는 2인칭을 극존칭 하는 게 없습니다만 그렇지만 그저 영어식으로 한다면, “당신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이런 뜻입니다. 그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주신 것 때문에 이 시인이 가슴이 벅차며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목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식사습관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정확하게 말하면 여러 면에서 동양과 유사한 풍습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식사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렸을 때에는 대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저희 할머니 같은 경우는 한참 가족이 많을 때는 42명이었다고 하니까 엄청나지요 시골에서. 그런데 그 많은 식구들이 같이 밥을 먹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공간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에 밥을 같이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어렸을 때 보면 안방에는 커다란 상이 차려지고 거기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 아버지 이렇게 셋이서 밥을 먹습니다. 어머니도 감히 거기 못 들어갑니다. 그리고 건넌방에는 어머니, 나, 그 다음에 우리 집사람,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내 동생 그러니까 우리 아들입장에서 보면 삼촌, 고모, 그런 사람들하고 같이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며느리들이 따로 모여서 손아래 어린 며느리들이 밥을 먹고, 그 다음에 더 내려가면 집안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마당에다 멍석을 깔고 밥을 먹습니다. 이것은 아주 규칙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내가 올라가고 이렇게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각 상마다 반찬도 조금씩 다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정에 있어서의 위계질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사람이 살다가 보면 어쩔 수 없어서 양반이 상민하고 잠은 같이 잘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밥은 안 먹습니다. 왜냐하면 이 동양에서는 밥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가족이다. 형제가 되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런 풍습이 중국에도 있습니다. 중국에 선교 역사를 하시는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초창기에 지금부터 한 100년 전에 중국에 선교를 들어갈 때는 중국어를 미리 배울 수 있는 어학기관이나 이런 것이 없고, 중국에 방언이 또 워낙 많으니까 그냥 들어가는 것입니다. 들어가서 몸으로 부딪히면서 손짓 발짓 하면서 지도를 보여주면서 우리가 이렇게 먼 곳에서 왔는데 당신들하고 같이 살고 싶다. 왜? 그런 지방의 언어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러고 들어가서 살면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그러면서 어떻게 그 글을 사람들에게 말을 가르쳐 줄 수 있을 지도 연구하고 그러는 사역이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회는 핏줄 사회이니까, 생김새도 다른 눈이 파란 사람들이 멀리서 와서 같이 살겠다고 하니까 금방 결정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라 그러고 나이 많이 드시고 수염이 긴 노인들 마을의 원로들이 모여서 장시간 동안 파란 눈의 외국인들을 우리 공동체에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토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받아들이기로 결정이 나면 활짝 웃으면서 당신들이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아도 좋다고 이렇게 친근하게 베푸니까 다들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공동체에서 같이 살기로 가서 받아들여주었으니까 그 다음에 마을 공회당 같이 생긴 곳에 가서 식사를 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국은 음식에 관한 한 날아다니는 것 중에서는 비행기 빼놓고 물속에 있는 것 중에는 잠수함 빼놓고 다리 달린 것 중에는 책상 빼놓고 모두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몬도가네 식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광동을 가서 탕이 나왔는데 너무 맛있어서 한없이 먹었답니다. 그래서 그 솥뚜껑에 뭐가 들었나 하고 나중에 열어보니까 거북이하고 바퀴벌레를 넣고 끓인 국물이더랍니다. 그러니까 그런 음식이 나왔을 때 서양 사람들이 그것을 도저히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서양 사람들은 자기 의견에 솔직하니까, 저는 싫다고 그러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지면서 험악해 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만주지방에 가면, 우리는 결혼식 때 꼭 국수를 먹는데 거기서는 결혼식에 빠지면 절대로 안 되는 음식이 있는데 뱀 국입니다. 뱀도 조그만 뱀이 아니라 큰 뱀을 동태처럼 토막을 내서 무를 넣고 푹 끓여서 한 그릇씩 주어야지만 결혼식을 했다 그런답니다. 그러니 그런 음식을 어떻게 먹겠습니까. 못 먹는다고 하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지면서 고성이 오고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이방인에게 식탁을 베풀고 그들과 함께 밥을 먹는 이것은 같이 형제로서 가족으로서 살자는 언약의 표시인데, 그런데 같이 살고는 싶은데 가족이 되기는 싫은 것입니다. 그러면 가능성은 하나잖아요? 스파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들의 입회를 허락한 공동체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요 모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죽어가면서 자신들이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이와 아주 유사한 식사를 둘러싼 문화적인 관습이 흐릅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거부가 되어서 도망을 갑니다. 그때에 외삼촌 라반이 아들들과 함께 죽도록 따라옵니다. 그래서 다 죽여 버리고 재산을 다 빼앗으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밤에 나타나셨습니다. “건들지 마라. 절대 그러지 마라.” 거기서 큰 충격을 받고 야곱과 화해를 합니다. 그때 화해를 하면서 돌멩이로 무덤을 쌓습니다. 그래서 ‘여갈사하두다’, 증거의 돌무덤이라는 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 여기 돌무덤이 있다 그리고 다시는 내가 여기를 넘어서 너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보내줍니다. 그때 마지막으로 한 일이 밥을 같이 먹는 것입니다. 원한에 사무쳤던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 경고를 받고 화해하고 보내주면서 우리는 가족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거기서 확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식사에 담겨 있는 뜻입니다.
구약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제 다시 신약에 넘어와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바리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으셨던 중요한 비난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너희 선생님은 어떻게 해서 창기와 세리 이런 죄인들하고 같이 밥을 먹느냐고 그랬더니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라에게라야 의원이 쓸데 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시면서 죄인들과 함께 밥을 드십니다. 예수님의 중요한 봉사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금에서는 잘 이해가 안 되지만 그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에게만 충격이 아니라 창기와 세리들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선지자 같이 생기신 분이 그런 지체 높으신 분이 자기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시는 것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기 같은 사람들을 이 예수님은 진심으로 가족같이 받아들여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3장으로 넘어가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준엄하게 책망을 하신 후에 말씀을 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것이 죄로 말미암아 깊이 잠들어 있는 교회를 깨우시는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축복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교회에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고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큰 복인 것입니다.
자, 이렇게 놓고 보면 밥을 먹는다는 것이 단순히 그냥 밥이 아니라 상을 베푸는 자와 상을 받는 자 사이에 있는 가족관계, 생명적인 연합, 형제됨, 운명공동체적인 사랑, 이것을 밥상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그 안에 숨겨진 의미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셨습니다.” 여기서 ‘상’은 ‘휼한’이라는 히브리단어인데, 밥상입니다. 한 밥상을 차려 주셨습니다. ‘원수’라고 나오는데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복수로 나옵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저 한 사람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시인 다윗을 고통스럽게 하고 그 다윗을 파멸시키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악한 영들이 있었을 것이고, 육적으로는 사울에게 쫓겨 고난을 받을 때서부터 시작해서 다윗의 생애에 두 번에 커다란 반역이 일어나는데 그 중의 한번이 바로 자기 아들 압살롬에 의해서 저질러진 반역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호시탐탐 자신의 목숨을 노렸고 자기는 죄가 없지만 그를 죽여 나라를 빼앗고자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수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여서 그 원수들로부터 공격을 받으며 비통한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그 수많은 구름같이 에워싼 그 원수가 보는 바로 그 앞에서 하나님이 시인에게 밥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베푸시고 그 시인과 함께 겸상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설마 하늘에서 진짜 교자상에 수많은 반찬을 담아서 내려왔겠습니까?
요즘은 저도 하는 일이 하도 많으니까 집회를 잘 안다닙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많이 다녔습니다. 한번은 전라도 쪽에 집회를 갔습니다. 오전에 집회를 마쳤는데 장로님이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합니다. 근처인 줄 알았더니 한 40분을 차를 타고 가는데 웬 한정식집입니다. 그런데 그 전라도가 음식이 참 굉장합니다. 먹어도 먹어도 끝없이 나오는데 어디서 끝나는지 알아야 조절을 하지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못 먹겠어서 그래서 그만 두었는데 반도 안 나온 것입니다. 계속 나옵니다. 가격을 보니까 그렇게 비싸지도 않은데, 그 다음서부터는 앉아서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네 명이 먹는 이 상에 그릇이 몇 개나 나올까 그러면서 세어보았는데 200개 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진짜 대단하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예화) 저는 심방을 해도 집에서 밥을 해 주는 것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주부들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식사시간 피해가고, 식사시간에 어쩔 수 없이 해야 된다면 나가서 갈비탕이나 하나 먹자 그러는 주의입니다. 나물 하나만 하려고 해도 시장가서 야채를 사다가 다듬어서 볶고, 남자들은 잘 모르는데 저는 잘 압니다. 그래서 절대 하지 마라 그랬더니 우리 교회 와서 은혜를 많이 받으신 자매 한 분이, 그때 아마 50정도 되셨는데, 그래도 절대로 하겠다니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갔습니다. 그랬더니 큰 교자상에다가 다 차려서 셋이서 들고 들어오는데, 10여년이 지났는데도 태어나서 아직도 그런 상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상을 받는데 가슴이 뭉클합니다. 얼마나 반찬이 많은지 젓가락이 사정거리에 미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앞에 자기가 앉아서 덜어주는데, 제가 마음이 상해서 왜 이런 것을 하느냐고 이걸 할 시간에 성경을 한 장 더 보고 기도를 하지 나 같은 사람이 뭐라고 이것 한 끼를 먹기 위해서 이렇게 여러 사람이 수고를 하게 하느냐고 그랬더니 자매님이 드디어 화가 나셨습니다. “목사님, 기도도 했고 성경도 읽었거든요. 아무 소리 말고 드십시오.” 그래서 하여튼 먹었는데, 이야기를 들으니까 열흘 전서부터 그 점심을 준비를 했답니다. 시장을 봐다가 일주일 전에 김치를 담그고 사흘 전에 밑반찬을 하고 이렇게 해 가지고 계획을 짜고 10일을 걸려서 상을 차린 것입니다.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 같은 인간이 무엇이 간대 이렇게 대접하려고 했던 마음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간증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 깊이 만나고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목사님 우리 집에 한 번 이외에 언제 또 다시 오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준비를 한 것입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어떤 집에 손님이 온다고 할 때 차려오는 식탁은 그 손님을 그 집에서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예화) 딸이 시집을 갔는데, 어떻게 저런 인간을 물어서 결혼을 하나 사위가 죽어도 맘에 안 듭니다. 딸은 그것도 모르고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갔다가 와서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내일 점심때 박 서방하고 간다고 맛있는 것 해 주어야 한다고 그리고는 아침에 남편이 밥 달라고 하니까 밥은 뭘 먹느냐고 아침에 엄마가 점심에 맛있게 해 줄 테니 가자고 그리고는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전 부치는 냄새도 안 나고 조용하고 식구도 없습니다. 엄마 혼자서 아랫목에서 낮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절을 받으시고는 주방으로 가서는 상을 차려 오시는데, 먹다 남은 밥에다가 찬물을 붓고 거기다 수저 하나를 꼽고 귀퉁이 떨어져나간 작은 소반에다가 반찬은 아무 것도 없고 무수한 젓갈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하나 딱 올려놓고, “들게.”하고는 탕 하고 갖다 놓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자네가 싫어. 자네는 내 마음 속에 없어. 우리가 왜 사위와 장모로 인연이 맺어졌는지 나는 너무 슬퍼. 지금이라도 이 결혼 무르고 싶어.” 그런 뜻입니다. 그 밥상이. 사위가 귀해보십시오. 삼일 전서부터 시장을 보고 동네 요리 잘하는 이웃 불러서 전을 붙이고 갈비찜을 하고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감격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시인을 욕했습니까? “너는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한다.”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아서 그 비참하게 도망하는 광경을 보면서 한때는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고 존경하던 백성들이 손가락질 하면서 사울의 집안을 네가 그렇게 괴롭히더니 하나님이 그 죄에 대해서 똑같이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왕한테 흙을 집어서 던졌습니다. 그런 수모를 다 당한 것입니다. 원수들에게 그런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게 아니라고, 그 원수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그리고 그 시인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이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고 내 아들이고 내 사랑하는 형제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20년 전이었는데, 23편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다가 가슴이 벅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차려 주시고’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말로 ‘아라크’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원래 군인들이 모여서 행군할 때 줄을 맞출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상 위에 올라간 먹을 것 음식의 종류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먹다 남은 밥에 찬물 집어넣어서 숟가락 꼽고 고추장 하나 있는 이런 밥상이 아니라, 수많은 진귀한 요리들을 차려서 그래서 팔을 벌려도 끝이 닿지 않는 큰 상에다가 산해진미를 차려서 왕의 가족들을 대접하는 것처럼 요리를 차려서 이 시인 앞에 놓아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보기에는 이 시인이 짓밟히고 버림받고 깨지고 그랬지만, 사람들에게는 흠모할 만한 좋은 것이 없고 멸시 받을 것 밖에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시인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시인을 깊이 사랑하시고, 원수들이 잠시 득세해서 이를 모욕하고 저주하였지만 때가 되자 하나님은 그 모든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큰 상을 베푸심으로 너희들이 짓밟고 하찮게 여기는 이 다윗이 나에게는 최고의 가족이고 사랑하는 내 자식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 이것은 문학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배가 고픈 어느 날 하늘에서 네 귀퉁이에 줄을 매달아서 어마어마한 200여 가지의 반찬이 올라와 있는 대형 밥상을 구름을 뚫고 이 세상에 내려오는 것 같은 그런 밥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바로 시인이 원수들에게 짓밟히고 핍박을 받고 환난을 만나서 고난으로 가득한 인생길을 걷는 그 날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을 통해서 이 시인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던 은혜의 경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에 말하자면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그 은택을 경험한 그 기록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뭐라고 말합니까?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해서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곤고한 날에 사울의 핍박을 받으며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에게 쫓겨 도망을 달리던 그 날에 가드로 피신하여 아비말렉 앞에서 정체가 드러나자 수염에 침을 바르고 미치광이처럼 행동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던 그 날에 그가 지은 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아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도망갈 때에도 시인은 그 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체험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 어둠 속을 헤매며 버림받은 것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우리는 하나님을 수시로 버려도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이 시인은 깨달았고, 때로는 고난을 통해서 시련을 통해서 환난을 통해서 혹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큰 핍박을 통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너는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한다 너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라고 비난을 받는 그때에도 언제나 하나님은 그 풍성한 영의 식탁을 차려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으로 충만하게 배부르며 그 말씀의 힘을 얻어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이길 수 없는 시련을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극복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여러분은 요즘 하나님 앞에 어떤 식탁을 받고 있습니까? 여러분, 한창 열정적으로 일해야 될 때에 한 달 혹은 두 달동안 거의 식사를 못한다면 생명에 위기가 옵니다. 만약에 우리의 육체가 며칠 밥을 못 먹으면 그렇게 죽을 것같이 힘들고 기력이 쇠한다면,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어떻겠습니까? 육신의 양식은 물과 떡이지만 우리의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먹음으로서 하늘로부터 생명의 은혜와 하나님 사랑의 놀라운 힘이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살다보면 항상 기쁘고 즐거운 날만 있는 것입니다. 눈을 뜨기 어려운 시련, 혹은 그런 것 없어도 왜 그런지 모든 일에 낙심이 되고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은, 특히 갱년기에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정말 반가운 친구가 찾아와서 맛있는 밥 한끼 먹으면 서로 대화를 하면 희망이 생깁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연약한 모든 사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들에 백합화와 같이 그리고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허무한 인간이 동시에 그렇게 바람 앞에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와 같은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그 아픔을 이해하고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랑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그 원수의 목전에서 베풀어주신 그 충만한 말씀의 식탁을 받으면서 그러면서 악인은 나를 저주할지라도 내 육신의 부모는 나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시인이 뼈저리게 체험하고 그것을 생각하니까 내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사랑으로 붙들고 인도해주시는 분은 이 세상에서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니까 가슴에서 벅차오르는 환희가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이 시인이 바로 그런 깊은 감격을 어디서 찾을 수 있었습니까? 늘어나는 재물? 높아지는 세상의 지위?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아리따운 궁녀들?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 속에서 자신의 곤고한 영혼을 살려주시는 그 놀라운 말씀의 은혜를 통해서 시인이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영혼의 부흥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체험하고 나니까 하나님 같은 분이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손에서 자신의 인생을 다 그분께 맡기고 그리고 그분의 팔 아래서 한 마리의 어린 양으로 살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좋은 은혜를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십니다. 그 안에 무한한 축복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의충만한 식탁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문맥 자체가 잔치집의 문맥입니다. 여기에서 ‘잔’이라고 하는 것은, 잔칫날 신랑과 신부의 결혼을 축하하면서 질이 놓은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빈 잔에 가득 따라서 ‘부라보’하는 광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잔치집 주인은 찾아온 하객들이 너무 감사하고 자신의 자녀들이 결혼하는 것이 너무 기뻐서 좋은 포도주를 내오고 그것을 가득 가득 따라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흘러넘치는 이 그림은 이 시인의 마음속에서 넘쳐나는 기쁨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 우울하지 않습니까? 사연 있는 사람처럼 와서 조용히 와서 예배 드리거나 졸거나 그러다가 시간이 끝나면 조용히 돌아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아닙니다. 환희, 기쁨, 희락, 감격, 희열, 이런 단어들을 여러분이 신앙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러한 기쁨으로 가득차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은혜의 상태를 이 시인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 속으로 들어가서 시인의 말로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주님이 내게 부어주신 은혜가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같이 정말 기쁩니다. 이제 그만 부으셔도 됩니다. 정말 기쁩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환희,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 더러운 인간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한 식탁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기쁨은 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보면서 이 속에서 깊은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 두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하시는 경륜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원래 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백성들이 하도 왕을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내키지 않았지만 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를 보면 하나님이 “분노함으로 왕을 주셨고 진노함으로 왕을 폐하셨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당신이 직접 통치하시되 세 종류의 지도자들을 사용하셔서 나라를 통치하시고 이 세 지도자들이 주종관계에 있지 않고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려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 제사장, 왕 이 세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서 와서 땅에 있는 인간들에게 전달해 주는 메신저였습니다. 두 번째 제사장은 반대로 죄 지은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용서를 빌며 그 죄인들이 자기를 힘입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제사장이었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나라의 질서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율법을 받들어 통치하는 사람이 왕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일 모두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일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평범한 사람들은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성령을 부어주시면 그 순간에 탁월한 지혜와 능력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이런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그 중요한 일을 감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구약과 신약 사이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경륜의 차이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 속에 성령님이 오셔서 그래서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이것을 성령의 내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약에는 경륜이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내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하실 때 그 사람을 찾아가서 성령이 임하게 하시고 일이 끝나면 하나님이 성령을 다시 거두시는 것입니다. 혹은 그가 하나님께 현저히 불순종해서 버림을 받을 때 하나님이 그 성령을 거두시면 성령을 거두시는 것과 함께 구원의 기쁨도 사라지고 심지어는 성령이 떠나실 때 악령이 임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구약에도 성령이 그렇게 오실 때 신약의 성도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 그분과 연합되는 신비한 기쁨은 잘 몰랐겠지만 그러나 확실히 놀라운 환희와 기쁨,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충만함과 놀라운 능력, 지혜 이런 것들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이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시인은 “하나님이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습니다. 그랬더니 가슴이 터질 것같은 환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뜻입니다. 다윗은 일생동안에 세 번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에게 기름 부으신 것은 왕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기름을 부으신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또한 선지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을 때 그 처음 성령이 충만하게 그에게 임하시는 사건은 다윗이 일생동안 잊어버릴 수 없는 체험이었습니다. 그 경험을 하나님 앞에 하고 나니까 정말 영적인 기쁨이 무엇이고 하늘에 계신 위대하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 시인이 아주 절실하게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깊이 감격하며 자신의 영혼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기쁨으로 충만해 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만족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다가 회심을 못하고 중학교 2학년 때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정말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몇 번을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도대체 인생을 왜 살아야 하나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무서웠습니다. 뭐가 무서웠느냐 하면 사람으로 오늘 하루도 살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길가에 피어 있는 잡초들이 부럽고 거기 사이사이 뛰어다니는 가을철의 벌레들이 부러웠습니다. 내가 만약에 저런 것들이라면 이렇게 고통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그러던 날에 저에게 있어서 신앙도 없으니까 구원의 길은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문학작품을 읽어보니까 너무 가슴이 터질 듯 신이 나는 것입니다. 이런 고민을 나만 하는 줄 알았는데 나하고 똑같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고민을 안 하고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내가 훨씬 더 희망이 있는 인간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데, 그 문학작품 속에 답은 없습니다. 수없이 질문만 던질 뿐입니다. 그러면서 고통스러운 세월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밤마다 밤을 새워서 공부를 하는데 저 멀리서 뎅그렁 뎅그렁 하는 종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을 나가보니까 집 뒤뜰에서부터는 한없이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논과 밭이 이어지는데 저 밭 한 가운데 교회 하나가 있습니다. 그 새벽안개를 찢고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 종소리를 하루가 아니라 매일 새벽마다 네시, 네시 반 그때에 듣는 것입니다.
(찬양)
깊이 스며와 닿는 구원의 저 종소리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돌아오라. 너는 돌아 오거라.” 그 종소리를 들으면서 매일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돌아와라. 네가 하나님을 떠나서 얼마나 많은 날들을 방황했느냐. 돌아와라.”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그리고는 어느 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정말 살아계십니까? 살아 계시다면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교회도 안 나간 상태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봄, 여름, 가을까지 버티다가 10월쯤 되던 어느 해에 내 스스로 걸어서 교회를 갔습니다. 그 교회는 우연히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내가 교회를 가면 저 교회를 가야기 그리고 간 교회입니다. 철들고 처음으로 교회를 갔는데 이층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조그만 건물 2층인데 한 20평이나 될까 조그만데 비닐 장판을 깔고 너무 추우니까 톱밥 난로를 피워놓고 누덕누덕 기운 두툼한 방석 위에 교인들이 앉아서 수요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구석에서 삐거덕 삐거덕 소리를 내면서 풍금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조용히 뒤에 가서 무릎을 꿇고 않았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삐거덕 거리는 풍금 속에서 찬송가가 나왔습니다.
(찬양)
마음이 곤한이여 돌아와 돌아와
눈물이 확 쏟아지면서 태어나며 생전 처음으로, 아 이게 평화구나! 아, 평화구나! 마치 멀리 집을 떠났다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온 것같이 그렇게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생전 처음 평안을 느꼈습니다.
10월에 교회를 나갔는데 교인 전체가 30명도 안 됩니다. 다 노인네들입니다. 그런데 젊고 멀끔한 청년이 교회에 자기 발로 걸어 나와서 등록을 했으니까 목사님이 얼마나 좋으시겠습니까? 그런데 목사님은 또 50이 훨씬 넘으셔서 신학을 하신 노인네입니다. 한 달밖에 교회를 안 다녔는데 어느 날 날 부르시더니 자네는 언제 교회를 다닌 적이 있느냐고 그래서 저는 기어 다닐 때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다녔다고 그랬더니 이번에 세례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니 제가 이제 믿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세례를 받겠느냐고 말씀드렸더니 자네 오랫동안 교회 다녔기 때문에 받아도 된다고, 목사님이 그러시는데 어떻게 감히 반항을 합니까?
그래서 그리고 나서 그 다음날서부터 밤마다 교회 나와서 기도를 했습니다. 가슴이 뛰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 한 구석에 나와서 예수를 믿는 것까지는 용납을 하겠는데, 세례는 예수님과 결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같이 이렇게 막돼먹은 인생을 살던 인간이 하나님 부인하고 무신론을 찬양하던 이 인간이 어떻게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을까 밤마다 와서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결국은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1975년 11월 추수감사 주일이었습니다. 조그만 예배당인데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그때는 가난하고 몸도 아프고 그랬습니다, 앉았습니다. 목사님이 세례를 주시는데, 처음 경험하는 데 물에다 손을 찍으시고 내 머리에 바르시면서,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시는데 그 순간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하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확 내려와서 온 몸을 감사니까 몸이 공중으로 붕 뜬 것 같은 신비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내가 왜 그 지난 날 그렇게 몇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면서 그렇게 인생에서 방황을 했을까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의 진정한 행복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내가 왜 그 품을 떠나서 그렇게 방황하고 하나님 부인하면서 악하게 살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때리시거나 나를 형벌주시지 않으시고 이 순간에 찾아오셔서 나 같은 죄인을 받아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을 했습니다. 세례를 받는 순간에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왜 지난 날 그렇게 주님을 부인하고 무신론에 빠져서 주님의 가슴에 못을 박으며 그렇게 방황하며 살았을까 하는 것에 대한 후회의 눈물과 이렇게 모질게 예수님을 대적했던 더러운 죄인을 자존심도 없으신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다시 받아주시는구나 이런 사랑을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을까 하면서 한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한참을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다가 눈을 떠보니까 예배는 끝났고 사람들은 대부분이 흩어졌습니다. 휑한 예배당에 홀로 앉아서 눈물을 닦고 보니까, 11월 셋째 주쯤 되었던 것 같은데 날이 굉장히 추워서 벌써 성에가 끼었습니다. 유리창도 아니고 비닐로 막은 거기에 얼음이 끼었습니다.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데 아무 고민도 고통도 없고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이 더러운 죄인을 이렇게까지 사랑해 주시니까 내가 일생을 사는 동안에 이 예수님을 사랑해야지, 어떻게 하든지 내 사는 일생동안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일생을 주님을 섬기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찬양)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막 감격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 그럴 때 그것이 정말인지 거짓인지를 구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순수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가장 놀라운 증거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어디서 오는 사랑이냐 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은혜가 됩니다. 그 은혜는, 우리의 마음속에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유혹에 지는 법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입니다. 이 사랑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기름 부어주시는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자기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시인의 마음속에서 기쁨이 충만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노예와 같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인격적인 신앙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한 식탁으로 우리의 영혼의 만족을 얻고, 그리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사랑을 경험함으로써 여러분의 심령이 그 기쁨의 잔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교회를 사랑하며 영혼들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며 이렇게 일생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