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다윗의 시입니다. 오늘 다윗은 이 시에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찬송을 올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공평하게 이 세계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영광에 대해서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공평과 의로 다스리지만 하나님을 거스리고 대적하는 인간들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에는 악과 고통이 그치지 않습니다. 마치 악이 선을 이기는 것 같은 무질서가 펼쳐지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그 속에서 고통 받는 자기의 선한 백성들에게 산성이 되시고 환난 날에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다윗은 일평생 하나님 앞에 일평생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애를 썼고 특정한 시간들을 제외하고는 인생의 대부분의 시절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나 시인하게 항상 형통한 길과 행복한 일들만 펼쳐졌던 것은 아닙니다. 악인이 자신을 엄습하여 도망을 가야 하는 때도 있었고 때로는 정처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 때마다 그는 오히려 고난과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배워갔고 그래서 그가 만난 인생의 많은 위기는 하나님의 성품의 현을 타는 활이 되었던 것입니다. 고난이라는 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가락을 이 시인의 마음에 울려 퍼지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악인들이 처처에 날뛰고 시인에게 고통을 주었을 때 조차도 그는 피난처가 되시고 환란 때에 산성이 되시는 주님의 품안에 쉬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은혜를 누리는 기회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환란과 시련을 만나면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가 어찌해야 되는지를 배우게 되었고 그것을 우리가 읽은 본문 10절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하나님을 향한 태도
A. 주를 의지함
첫째로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라고 말입니다. 다윗이 쓴 80편이 넘는 많은 시편들을 돌아보면 그 시편의 모든 주제는 하나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티끌같은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시 속에는 깨어지는 마음이 있고 눈물 흘리는 참회가 있고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어 살게 하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는 마음이 자기를 믿고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고, 악인이 처처에 자기를 애워싸고 그리고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나 그렇게 악한 무리들을 향한 관용과 용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태도는 씩씩하게 하나님 없이 넉넉하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인간은 거짓된 독립심이 강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를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피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심령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만나는 수많은 사건에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고 주님을 의지할 마음을 갇게 만들어 주십니다. 형통할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 분께 감사하게 하고 역경과 시련을 만날 때에는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실망했고 버림 받았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 밖에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인이 고난과 시련의 여정을 통하여 배운 것이었습니다. 아마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장 학습하기 힘든 것, 주님이 우리에게 많이 깨닫게 하셔도 쉬 잊어 버리고 자주 망각하여 미끌어지는 그 지점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의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시편 속에서 시인이 시련을 만나도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고 간절히 매달릴 때 하나님은 그렇게 매달리는 그를 긍휼히 여기면서 의지하는 그 사람이 실망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여 위기와 시련 가운데 건져 주시고 더 이상 인생을 살아갈 힘이 없을 것 같을 때에 자신을 포기하고 주님을 붙들 때 하나님은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작가가 말했듯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라는 것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나빠 보이는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사람은 바로 그 나쁜 일 때문에 이 세상의 풍랑을 인하여 주님께 더 가까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정말 주님 밖에 의지할 데가 없었던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독점적으로 누리는 것 같은 은혜 생활을 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아무것도 내 힘대로 할 수가 없고 의지하고 붙들만한 티끌같은 것도 내게서 모두 사라져서 절망의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그 때에 하나님이 그러한 시련과 고난의 길을 걸어서 벼랑 끝에 오게 한 그 섭리가 낙심하고 몸을 던져 절망의 벼랑으로 떨어지라고 하나님이 데려 오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무릎을 꿇고 더 이상 나를 의지하던 마음을 갖지 말고 거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한분을 의지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거기에 데려 오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벼랑 끝에서 우리를 만나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 해 동안 살아오면서 우리에게 있었던 모든 좋은 일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나쁜 일들은 모두 우리의 악함 때문에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일을 했어도 혹은 우리들이 불순종 했어도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나게 된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이고 복락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자기의 약함을 알고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강함을 알고 주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나를 의지하였기 때문에 나를 사랑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는 것들을 회개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눈물이 가득하도록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우리 자신에게 더 많이 실망합시다. 우리 자신을 더 많이 불신합시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 주님 한분 만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으로 지음 받은 것을 기억합시다. 예수께서 아들로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어떻게 하늘 아버지를 의지하며 사셨는지를 여러분들이 성경을 통해 너무나 많이 듣고 배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셨을 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어린 아이처럼 의지하고 그 분의 손을 붙들고 인생의 길을 걸어가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주님만을 의지하며 우리 인생의 남은 날들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주의 이름을 앎
이어서 시인은 왜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주의 이름을 아는 자가 주를 의지할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성경에서 주님의 이름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그냥 이름을 빼면 됩니다. 주님의 이름은 곧 주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과 주님을 안다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니라 완벽하게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주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곧 뭘 의미하느냐 하면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향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님을 의지한다는 이런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의지하는 것은 매 순간 나를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고 우리 주님을 의지하여야 하겠다는 우리의 의지적인 결단도 필요하지만 그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의 물에 잠그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김장철에 보면 소금물을 많이 타고 그리고 그 다음에 배추를 담급니다. 가난한 집은 소금 살 집이 없어서 옆집이 하는 김장 날짜에 자신이 하는 김장을 맞추는 것 아십니까. 그 집에서 쓰고 남은 소금물을 얻어다가 자기 배추를 담그는 것입니다. 어쨌든 자기가 돈 주고 산 소금물이든, 빌려온 소금물이든 상관이 없이 단지에다가 생배추를 가득 넣을 때에는 뻣뻣하지만 거기에 물을 부어서 가득 잠그게 되면 그것들이 풀어지면서 아주 야들야들하게 됩니다. 똑같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물에 깊이 잠기게 될 때 우리의 본성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의 의지의 방향이 바뀌고 우리의 지식의 영역이 달라지고 우리의 감정을 움직이는 이유가 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식에 관한한 히브리 사람들은 아주 독특합니다. 그래서 안다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시인이 주님의 이름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지식적으로만 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주님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의 이름을 여러 가지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여호와가 스스로 계시는 존재자를 뜻하는 것이라면 엘로힘은 모든 신들 가운데 뛰어나신 능력의 주님을 의미합니다. 아도나이라는 주는 만물의 주권을 갖으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들을 그 이름에 담긴 하나님의 속성들을 이 시인이 깊이 이해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그 위대하심이 얼마나 탁월하고 놀라운지를 알게 되었고 그렇게 탁월하고 매우 높으신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는 다른 것들을 의지하고 다른 것들을 붙잡으면서 사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주님의 이름을 알았다고 하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이 기독교 신앙의 대의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리고 그 분을 섬기면서 사는 것, 이 세 가지가 우리의 인생의 대의입니다. 알지 못한 분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일 수 없고 만약에 그 분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사랑한다면 그 분을 섬기며 살 수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 위에 탁월하게 거룩하고 높으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사물들 보다 뛰어나게 아름다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마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생의 대의는 신자의 인생의 대의는 숨질 때까지 그 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가고 그 분을 점점 더 많이 사랑하고 그 분을 우리의 호흡이 붙어있는 날 동안 미력이나마 섬기고 그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주님을 알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또 순종하게 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가 가져야 될 신앙의 태도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당신의 이름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의지할 만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기마다 이렇게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주일 예배를 드린 지 3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3일 만에 모여서 고요히 우리의 마음을 모아 주님을 예배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이 당신의 생명에 지장을 초래하십니까. 우리가 주님께 예배 드리지 않으면 주님께 주님이 주님이 아니게 만드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납니까. 아닙니다. 어떠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당신께 영광을 돌리며 살라고 우리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를 위해서 가장 행복하고 복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섬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중심 삼은 삶이 어떠했는지는 불행한 성경의 역사가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배를 받지 않으셔도 당신에게 아무 손해가 없으신 분이지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그렇게 살지 않는 모든 손해를 인간 자신에게 당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 만큼 그 분을 사랑하고 아는 것만큼 그 분을 의지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주시고 그리고 하늘의 놀라운 비밀과 은혜의 세계 각종 아름다운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을 지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지식 때문에 우리 마음이 부유해 진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그러한 지식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주신 그 지식을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에게 알려지시는 것이 당신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불행과 거짓된 독립심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이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은 종종, 예전에는 사람들이 그저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지어주는 대로 약 먹고 놔 주는대로 주사를 맞고 수술해 주는 대로 살다가 안 되면 죽고 운명이려니 그랬습니다. 요즘에는 안 그럽니다. 어느 의사 선생님을 만났더니 환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하는지 특히 좀 이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질병 같은 것들은 의사는 그 하나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공부하는 가운데 하나를 치료합니다. 그런데 그 병에 걸린 사람은 그 하나에만 관심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영어도 잘 하고 하니까 영어, 독일어 뭐 해가지고 사이트를 누비면서 전부다 그 자료를 찾아서 공부를 하는데 대화를 해 보면 어떤 환자는 의사를 능가할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뭐 사실 어떤 하나의 항목에 관하여 몇 년 동안 미친 듯이 매달리면 누구든지 그 정도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이 그 지식을 갖는 것과 자신의 생명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님을 알고 주님을 공부하기에는 나의 환경이 너무 여락해. 혹은 이 시련과 고난과 시험이 강물처럼 가득한데 내가 무슨 주님에 대해서 배우고 공부를 하랴,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아는 그 지식 안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자신의 인생의 모든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배웠고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배우는 그 순간순간 마다 자기를 의지하는 마음을 버려 우리 주님을 의지할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탐구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그렇게 알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드러내 보여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의지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나는 가끔 심방을 하면서 교회 온지 1년이 되엇습니다. 2년이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빼놓지 않고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만약에 2년 전에 당신을 만난다면 2년 후에 당신이 그렇게 방황하는 자신에게 뭐라고 충고 하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사람이 주님을 알아온 2년 동안의 성과가 얼만큼이 되었는가를 아주 잘 보여줍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한해가 저물어 가는데 작년에 주님을 알던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수준을 오늘 생각할 때 진보가 있었습니까. 그래서 예전보다 주님을 알게 되었고 주님을 더 의지하게 되었고 그래서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내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에 대한 정체를 더 잘 깨닫게 되셨습니까.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C. 주를 찾음
마지막 시인이 배운 하나님을 향한 태도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찾는다 라는 이 단어는 아주 독특하고 풍부한 그림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것은 그냥 찾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온 뜻을 다해서 간절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아주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면 한번 휘 돌아보고 없네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화) 제가 시계가 하나 있었습니다. 비싼 시계는 아니고 99년도인가에 개척하고 처음 한달 안식 휴가를 받아서 그래서 여행을 가서 백 몇 십불인가 이 백불 약간 안 주고 산 스와치 시계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국방색 줄로 되어 있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끼고 다니면 점잖고 화려하지는 않아도 시계가 이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고 비행기를 탔을 때 승무원들이 지나가는 말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목사님, 시계가 참 예쁩니다’ 그랬었습니다. 하도 애용을 해서 끈이 다 낡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수소문을 하고 수소문 해서 몇 년 전에 끈을 바꿔 끼웠습니다 그것도 다 낡아서 다시 예비로 나뒀던 끈을 맸으니까 십한 이년 이상 찼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잃어버렸습니다. 어디에 잃어버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소중히 간직허거나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잃어버렸습니다. 옆에 놔두고 시계 차고 설교를 못 하니까 벗어서 가방에 넣어 놓고 차에다 두고 그랬는데 어디 갔는지 없어졌습니다. 그게 있을 때에는 잘 몰랐는데 없어지고 나니까 그렇게 허전 할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것을 찾아 보라고 부탁을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똑같은 시계는 없습니다. 더 화려한 시계도 싫고 지금 그게 그 때는 그렇게 안 그리웠는데 요새는 그렇게 그립습니다. 어디 있는지 꼭 찾고 싶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생각도 안 납니다. 기도원에 떨구었는지 생각이 안 납니다. 비슷한 곳에라도 생각이 나면 찾아 보겠는데 찾다 찾다 지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일년 가까이 시계 없이 다니는데 이 손목에 다른 시계를 끼우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항상 여기에 보면 손때 묻은 시계가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그 시계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아니 그게 열열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몇 시이지?’ 이렇게 보면 없을 때도 또 생각을 하게 돼고 시계 선전이 나와도 생각이 나게 돼고 그렇습니다. 아마 다른 시계를 안 찰 것 같습니다. 그게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마치 자식을 잃어버린 어미처럼 그렇게 간절하게 찾는 것. 그것입니다.
(예화) 가슴 아픈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어느 학생이 박사 논문을 거의 끝내 가고 있었는데 소매치기가 가방을 날치기해서 오토바이로 도망을 가는데 그 가방 속에 완성되어 가는 박사 논문을 디스켓에도 담아 놓은 것이 없고 프린트 해 놓은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정신없이 공부만 했으니까 그 노트북 속에만 들어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학생이 그 잃어버리고 나서 너무 괴로워 하다가 2년 반을 할 수 없이 더 공부를 하고 졸업을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간절히 찾았을까. 제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일 같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요새는 책 같은 것 쓰지도 못하지만 쓸 때에는 매일 매일 다운 받아서 항상 USB에 끼워 놓습니다. 잃어버릴 까봐서. 그게 바로 찾는 것입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가 죄인이라면 언젠가 용서 받을 것이고 그가 무능하다면 언젠가 하나님이 능력을 주실 것이고 그가 지혜가 없다면 언젠가 지혜로워 질 것이고 그가 성깔이 있고 까다로운 사람이면 언젠가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이 아까우시겠습니까. 무엇이 아까우시겠습니까. 그래서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예화) 제가 요즘은 덜 다니지만 옛날에 부흥회를 많이 다녔습니다. 9명 모인 교회에 집회를 간 적이 있습니다. 3일 동안. 그런데 얼마나 간절히 간절히 원하는지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못 가겠다고 하려다가 마지막에 우리 교회 전 교인이 9명입니다. 도무지 못하겠다고 못했습니다. 9명 교회에 갔습니다. 15명이 모였습니다. 예상을 깨고. 그래서 열심히 했습니다. 엊그제 팩스가 한 장 왔는데 ‘목사님, 여기 지방 먼 곳인데 우리 지방에서 하는 교사 세미나에 와 주십시오.’ ‘못 간다고 그래라’ ‘이번이 6번째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간다고 그래라.’
III.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간절함은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에게 아까시는 것이 없습니다.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아끼시는 것이 없습니다. 죄가 있으면 용서해 주실 것이고, 무능하면 능력을 주실 것이고 성격이 거칠면 온유하게 해주실 것이고 물질이 없으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는 사람에게는 그 모든 것을 주셔도 결국 그것을 간절히 찾는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늘 많이 해 주셨던 말씀이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으리라.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않으리라. 마지막에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어 너와 함께 하게 할텐데 내가 너희와 함께 하는 양식이니라, 방식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승천하시면서도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또 다른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IV. 결 론
하나님은 오늘도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더욱이 그가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시련을 당한다는 이유 때문에 무지하다는 이유 때문에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알고 주님을 간절히 찾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해가 저무는 12월입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