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성케 하시는 하나님
“그가 이르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나의 주인의 아내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창 24:34-36)
녹취자 : 최영순
오늘 본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 헤브론에 있을 때에 일이었고, 오랫동안 해로하던 사라가 죽어서 장사지낸 직후의 일입니다. 그에게 이삭이라고 하는 소중한 아들이 있었고 이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해서 배필을 구하려고 충직한 늙은 종을 밧단아람으로 보냈습니다. 거기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서 아브라함이 살던 고향이었습니다. 가나안에 사는 처녀들 중에서 며느리를 고르지 않고 멀리 메소포타미아까지 종을 보낸 것은 아마도 그곳에 부분적으로나마 여호와를 아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거기에서 며느리를 취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주인 아브라함의 명을 받들고 늙고 충직한 종이 밧단아람으로 갔을 때 거기에서 라반의 딸 리브가를 만났고, 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아내로 주시려고 하는 배필임을 응답받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자기를 보낸 아브라함이 어떤 분인지를 라반에게 소개하는 가운데 늙은 종의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창성하게 하신 하나님을 소개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을 소개하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을 소개함으로써 ‘우리 주인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고, 그분에게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를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경 24장은 아브라함이 늙었을 때도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복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복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우리를 복되게 하는 요소와 복 자체를 혼돈합니다. 행복한 그것이 복이지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물질이나 사물이 복이 아닙니다.
전 아직 못 보았는데 광고에서 가끔 보자니까 가정에서도 안경을 안 쓰고 볼 수 있는 3D TV가 나왔다는데 맞습니까? 여러분이나 나나 촌에 사니까 시골 사람들한테 그런 문화는 시간이 걸려야 되겠지요? 도시 사람들 다 사고 나중에 사는 거니까 그야말로, 평촌이잖아요. 그래서 HD TV나왔을 때도 깜짝 놀라지 않았습니까? 예전의 화면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데 3D TV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상자곽처럼 되어 있어서 줄이 죽죽 그어지고 빨간줄, 파란줄이 잉크처럼 번지던 TV를, 안 나오면 두드리며 보던 사람이 어느 날 큰 3D TV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축구선수가 공을 뻥 차면 소파에 앉아 있다가 피해야 할 정도로 놀라운 텔레비전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것을 처음 보고 있을 때 행복하겠습니까, 안 행복하겠습니까? 행복하겠지요? 그 사람에게 새로운 TV가 생긴 것은 행복입니까, 행복이 아닙니까? 행복입니다. 그런데 선물 받은 사람이 장님이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일을 복되게 하는 것과 복 그 자체를 우리는 구분 없이 받아들이지만 사실은 잘 생각해보면 그것은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눈을 뜨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3D TV는 예전에 상자곽처럼 생긴 것에 비해서 훌륭한 것이고, 따라서 그런 선물을 받는 것은 복일 수 있지만 앞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것은 큰 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능이 좋은 전자식 지팡이를 받는 것이 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원래 복이라는 자체는 존재와 인식 사이를 가로지르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답을 주시는데 하나님 자신이 복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떤 행복을 느끼게 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 속에서 일어나는 삼위의 교통을 닮을 때 그것이 내 정신과 마음, 삶 속에서 실현될 때, 그 때 우리가 복된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단지 복이 물질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복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히브리 단어가 둘이 나오는데 ‘베라카(hk;r;B)’라는 단어와 ‘아쉐르(rv,a})’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베라카라고 하는 단어는 복을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언약 백성과 언약 백성이 아닌 사람들 까지 모두 포괄해서 그 모든 복을 총칭하여 베라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쉐르의 복은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서 누리는 신령한 복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선물을 받았을 때 선물 때문에만 기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물을 받으면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지만 10개 가운데 5개만 필요하고 5개는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은 선물인데도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나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고르러 다녔다는 것, 하잘 것 없는 것이라도 이것을 고르러 다녔다는 것, 택배로 선물이 와도 괜찮은 것이 택배 책을 뒤졌다는 것, 이 분이 무엇을 좋아할까 생각을 하면서 그것을 찾았다는 것, 그 마음이 따뜻하지 않습니까? 늘 집에도 있는 것이고 혹은 내가 가게 나가면 살 수 있는 것이지만 선물을 받았을 때는 남다른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선물을 보면서 우리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전달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이 복에 대해서 약간은 상반되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아직 시대가 어린 아이와 같은 시대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이 만복의 근원이라고 하는 사실을 무지한 인간들에게 깨우치시기 위해서 베라카의 복을 통해서 아쉐르의 복으로 나아가는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구약에서는 물질적이고 환경적으로 하나님이 일반 섭리를 움직여서 사람을 부하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는 일들을 앞서서 행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혹은 복을 받은 당사자에게 깨닫게 하시는 중요한 아쉐르의 복을 가르쳐주는 통로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대표적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 안 듣고 까불고 불순종하면 꼭 흉년이 들거나 전쟁이 일어납니다. 죽도록 고생을 한 후에.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가 잘못되었구나, 아쉐르의 복이 사라지고 나니까 베라카는 한숨에 날아가 버리는구나, 우리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겠구나, 이렇게 다루었던 것입니다.
신약으로 넘어가면 그런 개념들이 들어오지 않고 반대로 아쉐르의 복을 통해서 베라카의 복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나오는 복의 사건들을 문자 그대로 신약시대에 적용해서 우리에게 공식처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성경해석입니다. 그것은 항상 함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비난받는 번영신앙, 성공주의적 신앙, 엘리트 신앙 이런 것들을 보면 대부분 호소하는 성경 본문을 신약이 아니라 구약에서 가지고 옵니다.
대표적인 것이 5년 전에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그것도 다 온건한 성공주의적이고 번영주의적인 정신을 가진 책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복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의 전개를 구속사적으로 바로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베라카의 복을 통해서 아쉐르를 보이시고, 아쉐르의 축복이 마지막으로 활짝 피어나서 계시적 사건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신약시대에 들어오고 나면 곧바로 인간의 참된 행복을 좌우하는 요소인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내면을 곧바로 가로지릅니다. 그러면서 그것에 하나님의 복이 주어질 때에 그 아쉐르의 복이 파문을 그리듯이 그 사람의 정신과 영혼 내면의 세계를 움직이면서 밖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파문처럼 나타나는 아쉐르의 결과가 베라카라고 설명하는 것이 신약의 복의 개념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느낌이 들이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나와 다르게 행복하게 태어난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재산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야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떤 사람을 보면 인복이 많습니다. 나는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외톨박이가 되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고 힘들게 도움을 청했더니 사람들에게 차갑게 거절을 당하는데 내 친구 누구는 어려움을 당했을 때 서로 돕겠다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서 그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나는 팔자가 사납고, 저 녀석은 삼신할머니가 랜덤으로 인복을 주어서 사람들이 누구를 만나든지 덕을 보게끔 태어났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대개 인복을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위기를 만났을 때 그 때만 보았기 때문에 삼신할머니의 랜덤을 받은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가만히 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가는 평소의 삶의 태도가 사람들과 관계를 잘 갖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필요했을 때 필요에 민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덕을 베풀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위기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덕을 입었던 많은 사람이 메아리처럼 도움의 손길을 펼쳐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 생활을 잘하고, 봉사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거래하듯이 우리에게 축복해주신다고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 기적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부자되게 하실 수도 있고, 좋은데 시집가게 하실 수도 있고 ,아주 훌륭한 미모와 유산을 가진 자매에게 장가를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기적과 같은 방법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예화) 여러 해 전에 캐나다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목사님이 자기네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집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민생활하면서 사는 것이 하도 고달프니까 빚에 쪼들리다가 쪼들리다가 죽어버리려고 강으로 걸어가고 있었답니다. 강다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죽는 것은 새털같이 많은 날 아무 때나 강에 와서 뛰어들면 되는데 마지막으로 목사님께 기도나 받고 죽자’. 그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강을 건너서 목사님 댁에 갔답니다. 목사님은 10시30분쯤 되어 그 시간에 자려고 하는 시간인데 누가 벨을 누르더니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기도를 해달라고 합니다. 무슨 일인가 물어도 대답은 안하고 기도만 해달라고 하는데 그 얼굴이 하도 곤고해 보여서 목사님이 정말 눈물로 간절히 기도를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주머니를 만져보니 며칠 전에 사놓은 복권이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맞춰 보았는데 그 당시 금액으로 10억 원이 당첨되었습니다. 타자마자 1억을 십일조하고, 1억은 목사님께 가져와서 선한 일에 써달라고 1억을 교회에 내놓고, 나머지 돈으로 빚을 갚고 새 삶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고 제가 처음 들어본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희귀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회심한지 36년이 되었는데 처음 들어본 이야기입니다. 기도를 받고 그 다음날 10억짜리 복권이 당첨되었다는 것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입니다. 안하시는 것은 아닌데 그런 일은 희귀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에 희망을 걸지 말고 오히려 일반적인 일에 희망을 걸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태도를 고치심으로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태도를 고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늘 물질에 인색한 사람들은 1년 내내 곁에 있어도 라면 한 번 사주는 법이 없습니다. 이 사람의 본래 삶의 태도가 짜디짠 소금 같은 인생을 사는 이유는 이 사람의 성질, 경향 자체가 물질에 대해서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한 번쯤은 입술을 깨물고 분식집에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쓰린 마음은 분식집에서 먹은 것이 다 소화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돈 쓰는 것 자체가 상처이기 때문에 고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연히 한 번 하는 일은 이를 악물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결국 삶의 태도는 그의 내면의 정신과 영혼의 경향성에서 나옵니다.
요즘에 기가 막힌 것은 개념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나이든 할머니가 뭐라하면 “예, 그랬습니다. 저랬습니다.”라든지 얘기하면 되는데 그 할머니께 욕을 하고 반말을 하고 또 그것을 촬영을 당해서 인터넷에 떠서 젊은 것들이 개념 없다 욕을 합니다. 며칠 후에는 50세가 훨씬 넘은 아저씨가 버스타고 가다가 앞에 있는 20세 정도 된 처녀에게 핸드폰 한 번만 쓰자 했습니다. 핸드폰은 사생활인데 누가 그것을 빌려주려고 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실례입니다. “싫습니다.” 했더니 아저씨가 욕을 해서 찍혀서 나왔습니다.
그런 일들이 왜 일어났느냐 결국은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물질생활은 부유해지고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 살면서 매일 매일 해내야 할 일은 많은데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답을 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내가 복권 한 장을 사놓고 목숨 걸고 매달리면 하나님이 그것을 당첨되게 해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36년 회심한 이후로 한 번 들은 것처럼 그렇게 희귀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의 태도를 바꿔서 하나님 앞에 복을 누리며 살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화) 제가 신학교 다닐 때에 목사님 한 분을 알았는데 선배 목사님인데 목회를 하시는 분은 아니고 한의원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한의원에 가보니 조그만 채플실을 만들어 기도 제목 놓고 가면 기도해 주고, 주일이면 소수의 사람이지만 모여서 예배도 드리는 목사님이었습니다. 30년 전인데 그 당시에 세단을 타고 다닌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은 생각하기 어려운 생활이었습니다. 목사님은 항상 새로 나온 까만 세단을 타고 다녔습니다.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큰 한의원을 하고 여유 있게 사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부모로부터 유산을 많이 물려받고 부잣집에서 태어난 줄 아는데 먹고 살만해진지가 몇 년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는 돈이 좀 있었지만 신앙이 없어서 방탕하고 타락했을 때에는 끊임없이 고통을 받고 가족들과의 관계도 깨지고 불행한 삶을 살았는데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고 보니까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셔서 의사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환자를 돌보니까 사람들이 자꾸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아무개 가면 의사가 있는데 목사님이라는데 진짜 돈도 별로 안 받으면서 친절하게 해주고 치료 끝나면 안수기도까지 해주더라는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짧은 시간에 아주 부자가 되었습니다. 제 친구 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깊은 병에 드셨습니다. 너무 가엾어서 데리고 갔는데 두 번이나 약값을 안 받고 약을 지어 주시고 치료를 해주셨습니다. 지금도생각하면 고맙습니다.
그게 바로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복에 대해서 예수님이 직접 강론을 하셨는데 구약사람들로서는 생경스럽게 느껴지는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파산선고 받은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애통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복이 있다, 핍박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 이렇게 예수님이 복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이것은 결국은 진정한 아쉐르의 복의 관점에서 인간이 무엇 때문에 바뀐 삶을 살고 고쳐진 인격과 태도로 베라카의 축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그 근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강론입니다. 신앙은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많은 우양과 은금과 약대와 나귀를 주신 그래서 거부가 되게 해주신 이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다 생각하지만 말고 일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영혼 안에, 마음 안에 역사하셔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온유하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심으로써 복을 얻게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원래 아브라함은 갈대아우르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을 때 첫 번째 명령은 “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는 분부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문맥에서 보면 그것은 사실은 죽음을 선고하시는 명령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땅을 중심으로 농작물을 지어서 소득을 얻고, 땅을 중심으로 지연과 혈연에 얽혀서 서로를 보호하며 사는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일평생 자신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서 가진 고백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땅에 들어와 우거하는 자요 나그네로라’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유리방황하면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한 땅은 있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직접 주실 땅이 아니라 430년 후에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주실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나그네 생활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진정한 소망이 이 땅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해서 칭찬하기를 ‘그가 다른 본향을 찾았다. 이 땅에 있을 때 나그네라고 자처하였으니 이는 본향 찾는 자임을 말해주는 것이다.’라고 칭찬했습니다. 내세신앙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려면 땅을 차지하고 땅을 계속 불려서 노예를 시켜 경작을 해 소작을 많이 하는 것이 당시에 부자가 되는 비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뼘의 땅도 없이 유리하는 나그네였습니다. 어느 동네에 가든지 삯을 주고 땅을 빌려서 거기에 우거하고 사라가 죽었을 때에도 막벨라 굴을 사서 거기에 묻어야 했습니다.
이런 나그네였는데도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셨더니 많은 우양과 은금과 약대와 나귀를 거느린 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님이 망하게 하시기로 뜻을 세우신 사람과 주님이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절대로 창성하게 복된 복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던 아브라함을 일반 섭리 속에서 놀랍게 복을 주셔서 커다란 창성의 부를 누리게 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사람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요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되겠다” 고 하신 그 약속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업으로 여기며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큰 복은 아브라함이 받았던 실체적인 복, 즉 그의 영혼과 마음에 내리셔서 언약에 충실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셨던 영적인 복에 비하면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은 복은 모두 해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것이라면 복이 아니라 고난이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없는 복은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아서 우리의 인생을 파괴하기 시작할 것이며,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고난은 지금은 고난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난보다 더 좋은 것들로 하나님이 바꾸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은 족장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족장 중 누구도 이렇게 가는 곳마다 단을 쌓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를 보여준 것이었으니 그는 예배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한 해가 바뀌었어도 물론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실 수도 있지만 십중팔구는 여러분이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작년에 실패했던 사람이 올해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바꿀만한 어떤 은혜의 힘들이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쉐르의 복으로 우리를 고치시고 바꾸시고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주님의 은혜로 채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변화되어서 바뀐 삶의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하고, 이웃을 대하고 ,교회를 대하고, 자신을 대하고, 이 세상에 물질을 대할 수 있을 그 때에 정말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많은 복을 주어서 거부가 되게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그렇게 늘어나는 자신의 제물에 마음이 치우치지 않고 오히려 늙을수록 하나님께 마음이 치우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님은 넉넉히 그에게 물질을 맡기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 물질의 축복에 취해서 쾌락에 빠지거나 주님이 조금 높여주셨을 때에 권력에 취해서 교만해진 사람들은 시험에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작은 것을 맡겨보시고 시험해 보신 후에 더 큰 것을 그에게 맡겨보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원리입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라반에게 다시 한 번 감격에 찬 목소리로 자랑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의 주인의 부인 사라가 노년에 내 주인에게 아들을 낳았는데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100세가 되도록 아브라함에게는 자기의 유산을 상속해줄 적자가 없었습니다. 99세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100세에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이것은 거의 기적적인 출생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아이를 하나 더 낳자고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후사를 주셨던 큰 감격을 우리의 신앙적인 측면에 적용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많든지 적든지 유산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재산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죽어서는 그 재산을 아마 여러분의 자녀에게 물려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육체로 낳은 자식은 여러분의 물질은 상속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앙은 상속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정신 차리고 여러분 자녀의 신앙을 돌보지 않는다면 여러분으로서 가문의 마지막이 될지 모릅니다. 가문의 문을 닫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슬픈 일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여러분의 재산을 많이 모아서 자식에게 물려주었다고 칩시다. 신앙의 가문으로서는 여러분이 마지막 사람이 되어서 문을 닫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세상에서의 가문은 세상과 함께 끝나고 자손의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지만 영적으로 이 믿음의 가문은 주님 오시는 날 까지 지속되어야 할 가문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먹고 사는 일에 마음을 쏟느라고 자식들의 신앙을 돌아보지 못한 것은 얼마나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100세에 아이를 낳았을 때에야 아브라함은 날아갈 것처럼 기뻤을 것이고, 늙은 종에게도 그것은 가슴시린 감동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육체의 자식은 몸으로 낳았지만 영혼의 자식은 마음이 없으면 낳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쏟아서 자기의 자식의 회심을 위해 영적인 재출생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한 해 동안에도 오랫동안 기도하던 자기의 자녀들이 회심에 이르렀기 때문에 행복해 하는 부모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그들은 안 먹어도 배불렀고, 쉬지 않아도 피곤치 않으며 이 세상에 많은 돈과 물질이 없었어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행복한 부모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을 물려줄 후사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올 한해에는 아직 회심하지 못한 자녀들을 가진 여러분이 뜻을 세우고 이것을 제일 일순위에 세우고 우리의 믿음의 가문을 이어갈 후손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꿈꾸는 것 같이 여러분의 자녀들이 회심하고 은혜에서 미끄러진 자들이 다시 은혜를 받고 여러분과 꼭 같은 신앙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천국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에 회심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도 아버지 하나님의 자식들이고 그들이 회심하지 않고 있는 동안은 우리 모두 그들이 집을 떠난 탕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불신자가 아니라 미래의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하나님 앞에 출생하는 기쁨을 우리 주님께 안겨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이 교회에 믿음의 자녀들이 출생하여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기뻐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위해서 힘쓰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하나님만이 언약 백성의 소망이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의지하고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 의지하며 삽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도 시련과 고난을 지나며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올 한 해가 작년보다 어려운 때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확신합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어느 해도 쉬운 해가 없었고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면 어떤 시련과 난관이 기다리고 있는 해에도 우리는 기쁨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본질적인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그런 혜안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님이 망하게 하시기로 뜻을 세우신 사람과 주님이 복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신앙의 태도를 보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실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니 만약에 여러분이 이것을 부인하면 사실상 무신론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한 해를 시작하는 첫 주일에 뜻을 세웁시다. 예배가 무너졌던 사람들은 예배를 다시 세우기로 다짐합시다. 기도가 무너졌던 사람들은 다시 기도의 단을 쌓기로 결심합시다. 섬김이 없이 무위도식하면서 주님에게 근심거리가 되었던 사람들은 오네시모와 같이 변화되어서 주님이 바라보실 때에 예전에는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에게 꼭 필요한 심복이 되었노라고 칭찬을 들을 수 있도록 뜻을 세웁시다. 아무것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고 불평과 불만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회개하고 남이 나에게 어떤 이익을 줄까를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내게 이미 주신 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이웃에게 흘러가고 지체들에게 흘러가서 내가 살아있는 것이 남을 섬기는데 유익이 될지 생각하고 자기희생을 위한 뜻을 세웁시다.
우리의 행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영광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주님 중심의 삶을 삽시다. 그러면 주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이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더해주실 것입니다. 올 한해를 이렇게 신앙중심으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