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통촉하시는 하나님
“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시 5: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시인 다윗이 악인들에게 에워 쌓여 고통 받는 가운데 하나님께 토로하는 탄원 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간구의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들이 인생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또 어떠한 자세로 고난과 시련을 이겨야 되는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Ⅱ. 환경을 통해 마음을 보이심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잘 모릅니다. 우리가 평생 태어나서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또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 보기에는 모두 그 사람이 그럴 듯해도 마음이 어떠한지는 하나님만이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마음을 우리 자신에게 알리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환경을 종종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상상력과 환경에 의존하기 때문에 환경이 바뀌게 되면 마음이 마음 자신에 대해서 갖는 태도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이 형통하고 평안할 때에 몰랐던 우리의 마음의 정체를 시련과 역경 속에서 발견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A. 하나님이 멀리 계실 때
우리는 종종 역경과 시련을 당하는데도 하나님이 우리로부터 멀리 떠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곳에 계신 거리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떠났다고 말하고 또 주님께서 가까이 오시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말이 정확한 표현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가까이 계셨다가 멀리 떠나셨다면 주님이 떠나신 그 빈자리에는 하나님 말고 누가 계실 것이며, 우리에게 다가오셨다면 우리에게 오기 위해서 떠난 그 곳에는 누가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떤 식으로 장소에 대해 설명하든지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기에는 적합한 말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시는 적도 없고, 가까이 오신 적도 없는데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친근해 하고 순종할 때에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가까이 계신 효과를 나타내 보여주시고, 우리가 주님을 멀리 떠나고 계명을 버리고 불순종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멀리 계신 효과를 나타내심으로서 우리는 주님이 가까이 계시다 멀리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도덕적인 삶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게 되고, 또 고난 속에서도 위로를 경험하는가 하면 평탄한 속에서도 경고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말문을 열자마자 쏟아질 듯이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있는 이 간절한 탄원은 사실 어떻게 보면 진실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죠. 왜냐하면 주께 자신의 마음을 통촉해 달라고 마음을 통촉하시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멀리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님을 멀리 떠났을 때 주님이 멀리 계신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어디에 가서 살 수 있겠습니까?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에는 자비로운 하나님을 만나고, 불순종하고 악을 행할 때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뿐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피하여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은 속임수와 어두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바로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B. 마음을 통촉하시는 하나님
시인이 하나님 앞에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해 달라’ 고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일까요? 도대체 하나님이 시인은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모르고 있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요? 만약에 이 고백이 사실이라면 지금 시인은 하나님 보고 지가 가르쳐 줄 테니까 하나님 좀 배우시라는 뜻입니까? 그렇게 기껏 가르쳐줘야지만 하나님이 고개를 끄떡거리고 학습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우리가 그 분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죠. 그러니까 시인의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해 달라’ 고 하는 이 간절한 기도는 사실은 자신을 위한 기도라고 우리는 귀결 지을 수가 있는 것이죠. 여기에 ‘통촉한다’ 라고 하는 이 번역은 사실 우리말의 통촉이라고 하는 것은 촛불을 밝힌다는 거예요. 어두울 때에는 있는 것도 없는 것 같고, 없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불을 밝혀 보면 있는 줄 알았는데 없고, 없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있는 것들이 많이 있죠.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실 때에 모르시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알리게 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니죠. 시인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존재라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위한 기도죠.
1. 하나님이 보시도록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마음이 우리의 육신보고 명령을 하면 말을 잘 듣습니다. 마음이 ‘밥 먹으러 가자’ 그러면 발이 움직이고, 손이 그릇을 받고, 입은 아직까지도 숟가락에 밥을 떠서 막 올라오는 중인데도 입은 자동으로 벌리고, 침샘에서는 침이 솟아나와 온 몸이 어쩌면 그렇게 갈등 없이 서로 협력해서 마음이 원하는 바대로 움직여 줍니다. 그러나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을 하면 마음은 잘 순종하지 않습니다. ‘쟤 미워하지 말아야지’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내일부터는 새해니까 새벽기도 꼭 나가야지’ 마음에 아무리 명령해도 마음이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마음이 명령하는 모든 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마음에 명령해도 더 큰 마음에 그 명령하는 바가 기쁨이 되지 않는다면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하나인 것처럼 보여도 우리의 마음에 있는 명령을 마음에게 명령할 때에 좋고 올바른 명령을 마음이 순종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아니라 둘로 찢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악을 행하고 마음의 욕심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좀처럼 그 마음이 찢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올바른 일을 행하고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려고 할 때 결국 하나인 것처럼 보이던 마음은 물과 기름이 나뉘어지는 것처럼 찢어지는 것이죠. 갈라지면서 비로소 어느 마음이 선한 마음이고, 어느 마음이 악한 마음인지를 발견하게 되고, 왜 마음이 마음에 명령하였는데도 마음이 듣지 않는지를 그 마음의 비밀을 우리들이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궤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려온 발자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부자가 되느냐, 가난한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많은 돈을 벌고 그리고 권력을 잡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삶의 양상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악한 사람은 많은 부귀와 영화, 권력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여 악의 궤적을 그을 것이고, 선한 사람은 또 그것들을 사용하여 선의 궤적을 그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에도 악한 사람은 주어진 환경 안에서 부지런히 악을 행하며 줄을 그으며 살 것이고, 선한 사람은 숨을 거두고 죽는 순간까지 선한 발자취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비결, 부자가 되는 비결, 그런 것을 가르쳐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오히려 본질적으로 그런 것을 가르쳐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이러한 삶의 다양한 양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천지 창조의 목적에 맞게끔 선한 궤적을 그리며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왜 하나의 마음인데도 육체를 위해 명령할 때에는 마음이 잘 들어도, 선한 일을 위해 마음이 마음에 명령할 때에는 두 마음이 되어서 싸움질을 하고 우리의 맘을 찢어놓는지 그 비밀들을 가르쳐 주고, 우리는 그 마음을 도저히 고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진리와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는 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2. 자신이 볼 수 있도록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통촉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히브리말로 ‘빈'(ןיב)이라고 하는 이 동사는 약간 어려운 단어인데 직관하다, 통찰하다, 알다 분별하다, 대부분 판단력과 관련된 지성의 작용을 가르치는 단어에요. 그러니까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통촉해 달라고 할 때에 이 시인이 정말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자기한테 가르침을 받아서 자기 마음을 학습하라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님을 버리고 혹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주님을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느낌을 벗어나서 하나님이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자기의 마음을 직관하고 계신 효과를, 자비의 효과를 자신에게 나타내 보여 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시계 태엽처럼 자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사물과 이 모든 세계에 대한 상들이 육체의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올 때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을 비오는 날 만날 때와 햇빛이 활짝 나는 날 만났을 때의 느낌이 틀립니다. 아침에 맑은 햇살 아래에서 지저귀는 새는 아름답고 노래하는 것 같지만 비가 쏟아질 때 처마 끝에서 비를 쫄딱 맞고 지저귀는 그 새는 아무래도 우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외부의 사물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많은 정보들에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고, 또 한편으로는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생각하면서 꿈을 꾸면 잘 때에도 빙긋 빙긋 웃으면서 사람이 잠을 잡니다만 꿈속에서라도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고 악다구니를 하며 싸우면 인상을 쓰고 이를 악물고 잠꼬대 속에서도 소리를 버럭 지릅니다.
인간이 이처럼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이 마음속에서 다양한 작용들을 만들어 냅니다. 히브리말로 ‘하기그’(גיגה)라고 되어 있는 이 심사라고 하는 말은 번역하기가 좀 어려운 단어입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란 뜻이죠. 그래서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한숨’으로 번역했습니다. ‘나의 마음의 한숨을 통촉하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저의 마음을 한 번 다시 한 번 눈 여겨 보시옵소서. 제 마음에 아주 떨림, 많은 출렁거림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혼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외부의 환경을 통해서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왜 잔잔하던 내 마음 속에 이렇게 요동치는 고통스런 파문이 일어났는지 연관관계를 보시옵소서. 악인들이 나를 에워 쌓고 저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 대한 미움을 나에게 퍼붓고 있사옵나이다. 그래서 나는 고통과 시련을 만나고 있고, 많은 근심과 걱정이 나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내 마음에 이런 고통스런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나의 잘못된 삶의 질서를 바라보시고, 이 무질서한 삶의 원인이 되는 악인들을 주님이 처결해 주십시오.’ 호소하는 거죠. 그러니까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이 모든 고통스런 환경에서 자기를 건져 달라고 하는 경건한 시인의 절실한 탄원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죠.
(예화) 지금은 길이 많이 좋아졌습니다마는 사고가 많이 나는 도로 중 하나가 서울에서 춘천 가는 길이에요. 밤중에는 차가 별로 없고, 그리고 차들이 열심히 쌩쌩 달렸어요. 그리고 강가를 끼고 돌기 때문에 이제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강원도 쪽으로 갈수록 꼬불꼬불한 길이 많이 나요. 야간에 사고가 나는데 대게 그 길을 잘 아는 차를 따라 가던 차들이 뒤에서 사고를 냅니다. 왜냐하면 밤에는 깜깜하고 지방 도로에는 가로등도 없기 때문에 그냥 앞차의 미등만 보고 운전을 하잖아요. 그러면 장애물이 나온다든지, 아니면 회전해야 될 지형, 지물이 나오면 앞차 운전수는 브레이크에 발을 대게 대고, 살짝 발을 얹기만 해도 뒤에 브레이크 등이 커지면 뒤에 있는 사람은 그거를 보면서 도로 사정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감속을 하는데, 이 춘천에서 살거나 그 길을 오래 다닌 사람들은 어디가면 길이 꺾어지고 똑바로 간다는 것을 머리속에 다 입력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길이 똑발라도 이 사람은 그 똑바른 길 끝에서 확 꺾어진다는 지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속도를 오히려 줄여요. 그리고는 바로 꺾고, 그 다음에 꺾어진 길 같아도 살짝 돌고 나면 똑 바른 길이 나오면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곧장 내달려서 빠른 속도로 다니는 거죠. 뒤에 오는 사람은 처음 거기를 가는 사람이죠. 앞차만 믿고 열심히 가는데 절대 브레이크를 안 밟아, 그러니까 자기도 막 엑셀을 밟는 거야. 저 사람은 속도를 이미 다 줄이고 있는데, 이 사람이 브레이크도 안 밟고 싹 도는데 가보니까, 갑자기 가보니까 확 꺾어지는 길이야. ‘으악’ 하고 브레이크를 밟고는 그 절벽에 부딪쳐 가지고 차가 박살이 나고 그러죠. 나 아는 목사님도 그 길을 오다가 사고가 나가지고 차를 폐차할 정도로 큰 사고를 당했어요. 그런 거죠. 그러니까 힘이 있고, 그리고 능력이 있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살아가야할 삶의 노정에 대해서 그 길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거죠.
(예화) 경춘 도로는 사이클 경기를 하기로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매년 사이클 대회가 열립니다. 40km, 60km 뭐 어떤 때는 100km씩 달리는데 구간이 확정되고 나면 선수들이 제일 먼저 그 쪽으로 이동을 해서 그래서 일주일, 이 주일, 삼 주일 후에 경기하게 될 그 길을 수없이 달려본답니다. 두 가지 효과가 있는데 첫째는 자꾸 달리다 보면 먼 길도 가까워보인다는 것이고 심리적으로,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지형을 익숙하게 숙지해 놓아야지만 다 폐달을 굴러서 에너지를 쏟아서 자전거를 빠르게 했는데 브레이크를 밝으면 그 만큼 체력이 소모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가장 좋은 거는 아까 얘기한 것처럼 스스로 속도를 줄이고 늘려서 스스로 체력의 감소가 없이 이렇게 자전거를 달리는 것이 가장 좋은 주법이란 말이죠. 그거를 위해서 길을 철저하게 숙지를 하는 거죠.
그러면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각자 다 자기가 걸어가는 인생이 옳은 줄 알지만 하나님의 판단과 사람의 생각은 같지 않을 때도 많이 있는 거죠. 자기는 그 길을 최선의 길이고 좋은 길이라고 선택을 해서 가고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최악의 길일 수도 있는 것이죠. 좋고 올바른 길이기 때문에 평화롭다고 생각하지만 최악의 길을 선택했을 때에도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로 가는 배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요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면적으로 거절하고 불순종의 배를 탔는데 순풍의 돛단 것같이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이 지나갔습니다. 악한 자의 형통은 더 커다란 파멸을 불러오기 위한 하나님의 전주곡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제일 먼저 우리가 하나님과 꼭 같은 마음을 품고 무슨 길을 걸어가야 되는지를 1년 동안 생각하는 것이에요. 이 판단을 위해서는 주님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것을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욕심과 아집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고 그리고 그 길을 우리의 삶의 목표로 정하게 될 때에 그때에 그 길은 하나님이 복 주시는 길이 될 것입니다.
(예화) 인천에서 덕적도 같은 섬으로 오가는 배가 있습니다. 배가 지금이야 좋은 배들이 훨씬 많았겠지만 옛날의 나의 경험으로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서 거의 30분의 차이가 나요. 돛단배도 아닌데도 바람이 같은 방향으로 불면 30분 쯤 배가 먼저 도착하고, 반대 방향으로 돌면 30분쯤 늦게 도착해요. 바람이 안 불면 정시에 도착하고 그만큼 쇳덩어리로 된 배인데도 바람의 방향에 그렇게 영향을 받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인생을 살려고 하면 우리의 가는 그 길이 고단하고 많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면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한 해의 목표를 정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으면서 올바르게 자신의 길을 주님의 마음이 반영된 목표를 세울 때, 그때에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한 해를 새롭게 맞이하는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사람들은 새해에 뜨는 해를 바라보고 박주를 치고 주먹을 불끈 잡으면서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스스로 생각을 하고 격려합니다만 은 재작년에도 그렇게 작년을 맞이했거든요. 매년 그렇게 하는 일이죠. 생전 소원이 1월 1일 날 해 뜨는 것을 동해바다에서 보는 건데 은퇴할 때까지는 볼 가능성이 없겠죠. 그리고 방을 구할 수가 없답니다. 방 하나에 그저 5~6만원씩 하던 방들을 20만원씩 30만원씩 받고 사람이 막 백사장에 모레처럼 잔뜩 모이는데 우리는 그렇게 새해를 맞으면 믿는 사람으로서의 독특성이 없잖아요. 그까짓 거 달력 한 장이 뭐라고, 망가진 차가 충청도에서 전라도 들어섰다고 그 선이 무서워서 갑자기 똑바로 갑니까?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의 궤적은 그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이에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들이 자동차를 타고 어디로 가게 되어 있으면 제일 먼저 지도를 보지 않겠어요? 지도를 보니 길이 잘 닦여진 고속도로예요. 그러면 당연히 여러분들은 날렵한 승용차를 택할 것입니다. 밟으면 잘 나가는 그런 승용차를 택해서 그 길을 가겠죠. 그런데 여러분이 택한 길이 길이 있긴 있는데 포장이 안 되어 있고 개울도 건너야 되고, 산을 세 개나 넘어야 하는 산길이라면 여러분들은 예쁜 세단보다는 좀 거칠고 투박해도 차대가 높고 그리고 웬만한 시내 정도는 너끈히 건널 수 있는 사륜 구동의 짚이나 트럭 같은 차를 택해야지만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똑같이 목표가 정해지고 난 다음에는 내 마음이 그 목표를 따라 가기에 괜찮은 성능인지를 한 번 봐야 합니다. 되지도 않는 것 가지고 계획을 세워놓고 그 길을 따라 갈라 그래봐야 결국은 잘못된 길로 가게 마련이죠.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예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1년에 한 번씩, 혹은 2년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합니다. 그런데 몸이 아프면 그런 검진이라고는 상관없이 병원에 가지요. 배가 아파서 왔다고 그랬을 때 의사가 눕혀놓고 가위로 배부터 쪼개는 의사는 없습니다. 머리가 아프다고 자꾸 두통이 난다고 그럴 때 한 번 열어보자고 톱 가지고 오는 의사는 없습니다. 우선 진찰부터 하죠. 청진기로 들어보고 아니면 손으로 꽉꽉 누르면서 아프냐고 물어보는데 당연히 아프지 아파서 왔는데 누르는데 안 아프겠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온도도 재보고, 혈압도 재보고, 당연히 그렇게 합니다. 그래도 파악이 안 되면 내시경을 집어넣어서 배 속을 들여다보고, 그래도 안 되면 X-ray를 찍고, 그래도 안 되겠으면 MRI를 찍고 CT를 찍어서 사람이 못 들어가서 보는 부분까지 모두 촬영을 해서 정확하게 파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저히 이 몸을 가지고 생활을 할 수 없으면 입원을 하라고 말을 하고 그렇게 해서 사람을 고치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우리의 몸뚱아리를 이끌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아니라 이렇게 그려가는 삶의 선과 악의 궤적은 우리의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죠. 그런데 아까 말씀 드렸듯이 마음은 언제나 우리 편이고 우리에게 불리한 것을 좀처럼 숨기지 아니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마치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이 어두움 속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것이에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마음을 객관적인 빛으로 비추어서 그래서 볼 수 있을 때에 우리가 정말 사물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빛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은 새롭고 진귀한 것을 보기 위해서 멀리 여행을 떠납니다만 은 우리가 정말 하여야 할 여행은 우리의 마음속을 여행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우리가 누구인지 자신도 너무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충격 받아본 적 많지요.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정말 놀랍다. 충격을 받아본 적이 있죠. 그죠? 그러고 나서 머리를 쓰다듬은 적은 별로 없어요. 대부분 실망을 하는 거죠. 아,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는가, 그렇게 모르는 거죠. 그래서 자기에 대해서 가장 모르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또 우리를 비추는 X선 투시기가 됩니다. 그래서 말씀은 항상 우리에게 때로는 우리가 찾고 싶었던 것들도 보여주지만 때로는 직면하기 싫었던 우리 자신을 보여주죠.
(예화) 한 10년 전 일이에요. 그 분이 아직도 우리 교회에 열심히 잘 다니셔요. 심방을 갔어요. 그런데 그때는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는 아주 젊은 주부였어요. 심방을 갔어요. 지금도 그 집이 또렷이 기억이 나는데 심방가면 항상 이제 물어보는 말이 있잖아요. 봄이었던 것 같아요. 근데 마루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나, 방인가 그랬는데 방이었는데 ‘그래 요즘 교회에 나온 지 얼마나 됐습니까?’ 그러니까 뭐 ‘한 달쯤 됐다고 그랬나’ 뭐 그랬어요. ‘요즈음 교회에 나와서 어떤 마음입니까?’ 당연히 ‘목사님 정말 요새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럴 줄 알았더니 ‘교회를 갔다 올 때마다 신경질이 나고 화증머리가 납니다’ 그래요. 그래서 나는 교회에 무슨 지체들과의 교제에 갈등이 있다 이렇게 순진하게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도대체 누가 자매를 그렇게 신경질이 나고 화증머리가 나게 만듭니까?’ 그랬더니 ‘여기 있잖아요. 옆에. 목사님 말씀만 들으면 신경질이 나고 화증머리가 납니다’. 그래서 그때 비로소 내가 ‘아, 심방을 성도가 이렇게 받을 수도 있구나.’ 그런 거를 내가 느꼈어요. 그 후에 이 자매가 아주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 회심을 경험했어요. 그러니까 회심하기 전야에 내가 심방을 한 거예요. 회심 전야에, 회심 전야에는 그렇게 혼돈스럽고 막 하나님을 생각하면 신경질이 나고, 분노가 치솟고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전야에 그런 일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 하면 자꾸 말씀의 빛을 비추어서 니 마음이 틀렸다는 것을 자꾸 보여주니까 나는 아직 올바른 마음이 나쁜 마음을 눌러서 올바르게 돌아갈 자세가 안 되어 있는데 자꾸 내 마음이 찢어졌고,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자꾸 보여주니까 나오긴 나오는데, 나와서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그대로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괴로우니까 그러니까 이제 마치 암이라고 판정 받을까봐 배가 따끔따끔하면서도 병원에 절대 안가고 가스명수만 먹는 사람처럼 그렇게 되는 거죠.
지하실에 개척교회 할 때인데 전도지를 그때 만들었는데 그땐 교회가 지금하고 비교할 수 없이 가난했으니까 전도지를 카피 쓰는 사람도 나였고, 디자이너도 나였고, 인쇄사도 나였어요. 그래서 이제 컴퓨터로 쳐서 샘물체, 명조체, 뭐 그 다음에 필기체 이렇게 만들어 가지고 그 다음에 이제 복사지에다 주면, 가서 복사 집에 가서 복사해 갖고 와서 한 장씩 나누어서 이제 칼로 잘라서 그것도 돈 아끼려고 하나에다가 두 개 해가지고 잘라서 들고 가서 나누었는데, 어느 자매가 그걸 들고 와서 교회에 등록을 한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심방을 갔죠. “어떻게 등록하게 되었습니까?” 길거리 지나가다가 그 하얀 전도지를 주웠다는 거예요. 근데 그거 보고 자기가 길거리에서 울었다는 거예요. 뭐라고 쓰여 있냐면 내가 지은 거거든요. 이렇게 썼어요. 많은 얘기도 안 쓰고 ‘열린 교회로 오십시오’. 이렇게 해 놓고, 전화번호와 약도 그려놓고 위에다가 간단하게 이렇게 썼어요. ‘바르게 살려고 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고, 바른 길을 알았으나 그렇게 살 힘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께로 오십시오’ 그런데 탁 보니까 자기보고 하는 이야기 같은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렇게 살고 싶은 때는 몰라서 못 살았고, 이젠 그렇게 살면 안 되겠다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 이걸 알았는데 그 다음에는 이번에는 힘이 없는, 살 힘이 없는 거예요. 그 전도지를 듣고, 보고 성령님이 역사하신 거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이게 주님의 부르심인가보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 한동안 신앙생활 잘 하다가 갔어요. 그래서 제일 먼저 한 해라고 하는 것이 뭡니까? 달력 하나 바뀌었다고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자기 암시지 사실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갈 길을 정하고 가치 있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에요.
두 번째는 그 말씀으로 우리를 비추어서 그래서 과연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그 길을 갈만한 자동차의 성능인지 점검을 해야 되요. 그런데 만약에 가라고 하시는 길이 저기 오대산 비포장 도로 산을 서너 개 넘어야 되는 건데 들여다보니까 사진을 찍어보니까 이 차가 형편없이 망가져 있다면 여러분 그대로 운행을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대형 사고를 내는 거죠. 그러면 안 되지 않겠어요? 왜? 우리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복의 근원이 돼야 되거든, 사업을 하다가도 나와 손잡으면 그 사람이 덕을 보고 그리고 리포트라도 같이 협동 작전으로 썼는데 나하고 손잡으면 점수가 잘 나와야지, 잘 되가는 사업에 내가 딱 손을 잡으면 나 때문에 주님이 맛 좀 봐라 해가지고 망가뜨려버리시고, 리포트라도 쓰려고 점수 좀 받아보려고 손을 잡았는데 걔가 보태주는 바람에 리포트가 그려졌다, 공동 연구를 했는데 죽을 쓰게 됐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욕 먹이고 만복의 근원이 아니라 만화의 근원이 되는 거 아니겠어요? 예수 믿는 자의 선교적인 삶이 아니잖아요. 가장 훌륭한 선교는 자기와 관련을 맺는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 지게 되는 것, 그것이 최고의 선교 전략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를 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 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죠.
Ⅲ. 마음을 쏟아 기도할 때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그런데 분명한 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망가진 마음을 가지고는 막된 삶은 살 수 있어도 온전하고 아름다운 삶은 살 수가 없는 것이에요. 아름다운 삶의 궤적은 아름다운 마음이 그리는 것이고 선한 삶의 발자취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리는 발자취죠.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도 그 마음을 알지 못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비춰주시지 않는 한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우리가 진리의 빛을 받지 않는 한 우리는 영혼과 육체 중 일방적으로 육체만을 편애하게 되는데 우리의 사랑은 육체를 향해 계속 되도 마지막엔 그 육체가 우리의 사랑을 배반한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목적지가 없는 허무한 사랑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죠. 그러니 말씀으로 빛을 받아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리고 주님이 만약에 우리보고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시면 그 비춰주신 그 마음의 빛을 보면서 우리가 그 비춰주신 그 결과대로 우리의 마음을 고치겠다고 생각을 해야죠.
(예화) 그 사람들이 그 성형 수술 하잖아요. 나는 안 해봤는데 그렇게 아프대요. 여기 턱이 이렇게 네모난 사람들은 상세히 설명을 들어보니까 이 턱을 이렇게, 이렇게 잘라서 중간을 빼내 가지고 붙인데요, 이렇게 그러니까 턱이 이렇게 넓어서 네모났게 된 사람들은 여기를 아주 크게 톱니를 집어 넣어가지고 두 줄로 짜서 이 뼈를 뜯어내고 벌어진 뼈를 붙여서 요렇게 만드는 거예요. 무슨 그게 무로 조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 머리통 뼈를 그렇게 잘라내는데 그게 얼마나 아프겠어요?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렇게 아픈데도 사람들은 예뻐지겠다는 일념으로 그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그 예쁘고 아름다움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거잖아요. 그죠?
그러니 여러분 우리의 몸을 고치는 것이 쉽겠어요? 마음을 고치는 것이 쉽겠어요? 그러니 마음을 고칠 때 아픈 건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성형 수술할 때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아도 마음을 고칠 때에는 주님이 함께 해 주셔요. 그래서 성형 수술은 믿음으로 하는 게 아니라 돈과 실력으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의사더라도 실력 있고 실적 있는 의사한테 가서 제대로 해 달라고 해야 해요. 십자가 보고 그냥 찾아가면 안 돼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마음을 고치는 일에 있어서 스스로 의사이신데 주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고침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그 마음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즐겁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고쳐주시는 것이에요. 물론 아픔이 있어요. 아픔이 있지만 고쳐진 후에는 하나님 앞에 정말 아름다운 그런 삶을 살아가게 하는 거죠.
얼마 전에 중국에 갔을 때 얘기 들으니까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한국인 성형 외과의사래요. 그것도 압구정 출신이라고 써 붙일 때에 아마 거기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기래요. 근데 얼마나 재미있느냐면 김희선, 김태희 사진을 가져와서 요대로 해달라고 그런데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도저히 그 판이 안 되는 사람들이 그걸 가져와서 해달라고 한 대요. 어떻게 그거를 할 수가 있겠어요? 그거 절편을 가지고 송편이야 만들 수 있겠지만 시루떡 가지고 어떻게 송편을 만들겠어요. 판 자체가 틀린데. 그렇게 모든 고통과 물질적인 출혈을 감내하고도 그렇게 예뻐지고 싶어 하는 거죠. 근데 사람들이 마음이 그렇게 예뻐지고 싶어 한다면 이 세상은 특히 교회는 얼마나 달라질까요? 어느 자매가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해요. “목사님, 예전에 우리 교회에서 이런, 이런 일로 봉사하던 그 언니 있잖아요.” 직원이었어요. “그래” “아우 그 언니 신경질 나게 예쁘게 생겼어요.” “걔가 이쁜데 왜 니가 신경질이 나냐?” “우리 지체들이 다 신경질 난대요. 걔만 보면”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아무아무개 마음이 참 예쁜 형제 있는데 너는 그 형제 볼 때마다 신경질이 나냐?” “그런 적 없대요“ 그게 바로 육적인 사고방식이죠.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의 궤적이 우리의 삶을 그려갑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진단하면 하나님이 은혜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평생 동안을 자신의 마음을 고쳐보려고 애를 써도 잘 안 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한 번 확 만지고 지나가면 하나님이 그 마음을 고쳐주셔요. 정말 놀랍게 고쳐주셔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에요. 그래서 거기에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거예요. 이 시인처럼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 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니 오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이다
원래 기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에요. 괜히 소리를 지르고, 막 떠들어서 남의 기도 방해하고 괜히 쓸데없이 몸을 흔들고, 의미도 알 수 없는 말을 자기 혼자 중얼중얼 거리고 이런 것들은 전부다 미신적인 기도예요. 오히려 조용히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한 마디를 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진액이 묻어나도록 언어를 끌어올려야 하는 거죠. 충분히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어야 되요. 그러나 종종 마음속에서 주님을 향한 갈망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쏟아놓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정동이 일어나고 그 정동 속에서 언어가 폭포처럼 솟구치는 것을 경험할 때 우리는 시인들이 종종 그런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던 경험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 오늘 이야기하는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달라는 이 기도, 히브리말로 ‘카라’인데 멀리 떨어진 사람을 자기를 주목하며 볼 수 있도록 알리려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을 ‘카라’라고 해요. 그 단어가 여기에 사용되었어요. 우리가 그래 본 적이 얼마입니까? 솟구치는 기도의 언어를 느끼면서 마음이 복받혀 주님께 울부짖는 적이 언제입니까? 간절히 목이 쉬도록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목 놓아 기도해 본적이 언제이지요? 은근한 영혼의 실증과 육체의 게으름 속에 함몰된 채, 기도할 때도 안하는 것처럼, 안할 때도 기도하는 것처럼 그렇게 외식과 경건과 삶 사이에 그런 식으로 방황하면서 산 적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런 식의 삶으로써는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은 오늘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두루 살피시고 그들이 당신께 돌아와 당신께 도움과 은혜를 간절히 찾으며 자기의 마음을 통촉해 달라고 주님을 부르짖을 때까지 거기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렇게 부르짖는 사람들 가장 가까이 오셔서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지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지혜의 은혜를, 인내가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참고 견딜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벌판에 홀로 선 것처럼 버려두실 때가 있습니다. 당신께 가까이 오게 하시기 위하여 잠시 떼어놓으신 적이 있고, 당신의 사랑의 품 안에서 그 사랑의 참 맛이 얼마나 달콤한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먼저 쓴 맛을 보게 하시기도 하십니다.
Ⅳ. 결론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한 해를 주님과 함께 동행 하시겠습니까? 실패한 그 길로 홀로 떠나시겠습니까? 오늘 마음속에 손을 얹고 결단을 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주님 없이 홀로 떠나는 길을 택한다면 나도 여러분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지난 한 해 동안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주님과 함께 동행 하려고 한다면 주님은 여러분들의 손을 잡아 드릴 것입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마음에 뜻을 또렷이 세워요. 나 같으면 그냥 집에 가서 뭐 간절히 나 찾는 사람도 없는데 일주일 동안 교회에서 출퇴근하겠구만, 새벽에 간절히 주님을 찾고 그래서 10번 동안에 주님을 정말 깊이 만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꿈꾸지 못했던 주님이 주신 길을 발견하고 고쳐져서 그래서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2011년도 그 사경회에 부어주신 새해말씀 때문에 내가 여기에 서 있게 되었노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