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간과 공간
(2018년 주일오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8년 3월11일-4월22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7월 26일
목 차
1. 하나님과 시간·공간(창 1:31) 2018.3.11 주일오전 1
2. 시간 공간 안에서 아심(창 22:9-12) 2018.3.18 주일오전 11
3. 믿음과 시간, 공간(약 2:21-22) 2018.3.25 주일오전 23
4. 열매없이 알리라(마 7:20-23) 2018.4.8 주일오전 34
5. 하나님의 현견지를 알 때(눅 22:59-62) 2018.4.22 주일오전 45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1 2018. 3. 11 주일 낮 예배
< 하나님과 시간 · 공간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I. 본문해설
- 엿새 동안의 창조 기사의 마무리임
- 두 세계를 창조하심 : 지상과 천상
- 천사의 섬김 + 인간을 대리자로 삼으심
- 두 세계를 거울처럼 마주보게 하심
- 두 세계를 통해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심
- 지상 세계의 창조와 하나님의 만족하심(창1:31)
- wayar ki tob meod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II. 하나님과 영원
- 흔히 “하나님은 영원하시다”고 한다
- 이때 “영원하시다”라는 말은 시간의 연속을 뜻한다
- 이것은 일종의 인간적인 화법이다
- 하나님은 그런 의미에서 영원한 분이 아니시다
A. 영원에 대한 사유
1. 선적 영원
- 시간의 지속으로 계속되는 선(線)적 영원관
- 하나님은 앞뒤로 끝이 없고, 만물은 한시적임
2. 원적 영원
- 시간의 순환으로 계속되는 원(圓)적 영원관
- 사물들은 윤회함으로 끝이 없고, 서로 순환함
B. 하나님과 영원
1. 본체적 영원 : 하나님
- 하나님은 선적, 원적 영원이 아니심
- 하나님 자신이 영원 그 자체이시다
- 피조물 : 시간과 공간 안에만 있음
- 하나님 :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심
- 인간은 그 영원을 아는 유일한 지상 피조물이다
- 그 영원을 아는 길은 사랑하는 것이다
2. 효과적 영원 : 피조물
- 하나님 외에 영원히 있는 사물들이 있다
- 그것들은 하나님을 덕(德) 입어 영원히 존재한다
- 사물과 영혼이 있는 인간, 또는 사랑 같은 덕들
- 그것들은 영원이신 하나님의 덕을 입음
- 인간의 육체는 변화하나, 영원한 존재다
- 하나님의 성품 따라 영원한 덕을 제시하심
- 현재의 육체는 소멸하나, 육체도 영원한 존재다
III. 시간이란 무엇인가?
- 시간은 세계의 창조와 함께 도입됨
- 사물의 변화와 운동을 통해 측정됨
- 그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변화임
- 삼위 하나님은 그런 변화가 없으심
- 하나님은 시간과 초월한 영원한 존재이심
- 천상과 지상 모두 시간을 벗어나지 못함
- 변화와 소멸, 혹은 영광의 증진을 계속함
-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박막(薄膜)임
- 시간은 인식과 실재에 걸쳐서 있음
- 박막의 현재. 과거와 미래를 못 누림
- 사물 사랑함이 영원한 행복에 못 이름
- 공간은 사랑할 것을 제시하나, 시간은 빼앗아감
IV. 하나님의 보심
- “좋았더라” 유일한 하나님의 판단
- 하나님은 자신과 사물을 어떻게 보시나
a.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보심
b.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보심
- 여러 사건들의 발생과 시간의 배제
- 한 평면 위에 인과관계만이 남게 됨
- 인간도 과거의 기억들은 시간을 배제한 채 본다
- 과거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도 그렇게 보심
- 하나님에게도 정동(情動)이 있는가?
- 안셀무스의 <Proslogion>
“진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자비로우시지만, 당신 자신의 경험을 따르면 자비로우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가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을 보실 때 우리는 당신의 자비의 효과를 느끼나, 당신은 어떠한 정동도 느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 마치 과거→현재, 현재→미래가 감취어진 것처럼 보심
- 이것을 통해 인간과 소통하고 교훈하심
- 우주에서 점과 같은 행성 지구를 생각하라
- 한 인간으로 태어나 이런 저런 일을 겪는 것이 하찮지 않은가?
- 대양에 잠깐 떠오른 파도 위의 물거품 같지 않은가?
- but, 하나님이 그것을 의미 있게 바라보신다
-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사는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다
- 우리 안에 주신 은혜들이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남을 기뻐하심
V. 적용과 결론
- “깊은 오지의 산 속에 피어 있는 들풀들”
- 하나님 앞에 의미 없는 인생은 없다
- 당신의 관념을 시간과 공간에 나타내길 기뻐하심
- 우리 안에 주신 은혜가 표현되게 하자
-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자!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2 2018. 3. 18 주일 낮 예배
< 시간 · 공간 안에서 아심 >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22:9-12)
I. 본문해설
- 첫 범죄 후 아담과 인류의 타락이 계속됨.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주시고 전하게 하심.
- 아담의 아들 셋과 에노스, 무드셀라, 에녹, 노아로 이어짐.
- but, 이스라엘의 실질적 조상은 아브라함이었음.
- 그의 모본은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믿음이었음.
- 오늘 그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시험 받고 있음.
II. 시험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nissa)하시려고” 부르심.
“네 아들…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2)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시는가?
a. 시험하지 않으심(약1:13-14).
b. 아브라함을 시험하심(창12:1).
창조적 시험 vs 파괴적 시험?
마귀로부터 vs 하나님으로부터?
J. Owen : “시험과 시련의 주관적 적용의 차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욕심 때문에 시험이 됨.
이삭 안에서 질서 벗어난 사랑을 보셨을 것임.
사랑의 정점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게 하심
III. 순종하는 아브라함
A. 자원하는 마음
인간적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음에 틀림없음.
그렇지 않았다면, 분부를 허언(虛言)처럼 여겼을 것임.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나무를 쪼개어”(3). 철저한 준비.
길 떠난 날은 그것을 분부하신 이튿날이었을 것임.
미적거리는, 억지로 하지 않은, 자원적 순종이었음.
B. 믿음으로 바침
“100세에 난”(창21:5) 유일한 아들을 제물로 바침.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한 이유를 말함(히11:17-19).
a. 믿음
-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게 한 것은 믿음이었음.
- 히11장 문맥에서 서두는 다음과 같다(히11:3,6).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3)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6)
b. 능력
- 무엇을 믿었을까? 하나님의 능력이었음.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9)
-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셨음.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 대신 제물이 된 숫양 통해 대속의 교리 보여줌.
- 하나님에게 자랑스런 인물이 되고 하늘나라를 상속함.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IV. 시간․공간 안에서 보심
-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
만물을 보시는 다른 방식을 보여줌.
a. 단순지 : 시간과 공간 초월해 보심.
b. 현견지 :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보심.
단순지 없이 全知할 수 없고 현견지 없이 소통할 수 없음.
단순지 없으면 하나님 아니고, 현견지 없으면 인간과 무관함.
單純知로 아시나, 現見知로 인간과 소통하고 교훈하심.
현견지로 아심을 전달함으로 아브라함을 교훈하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이미 아셨음.
그 믿음이 시간 · 공간 안에서 표현되길 원하심.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을 시간 · 공간에서 표현함.
나무와 열매는 일치한다는 사실을 비유로 드심.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8)
하나님과 시간 · 공간에 대한 철학을 보여줌.
좋은 나무와 열매는 상태 아닌, 종류 가리킴(창2:9, 왕하3:19,25).
식용과실 나무라도 상태가 좋지 않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음.
but, 식용과실 나무가 “먹어서는 안 되는” 열매를 맺지는 않음.
“이제야” attah 히브리어로 “지금”이라는 뜻임→現見知
하나님 자신이 직접 교훈하고 격려하시기 위함.
이 일로 아브라함은 영적인 쇄신을 경험하였음.
어떤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갈 지를 확정하게 됨.
시간 · 공간 안에서 표현할 때, 유익을 누린 자는 아브라함.
“사랑합니다.” 고백하고 품에 안기는 순간 새로운 場이 열림
現見知로 보심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줌.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9: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이처럼” 사랑하신 것이 무엇이었나?
독생자를 영원 아닌, 시간 · 공간 안에서 주셨음.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표현하라. 신자의 특권이다.
인간에게 시간과 공간은 무제한이 아니다.
표현하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힘 닿기까지.
예화 : “에이즈에 걸린 부부”
V. 적용과 결론
-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 공간은 편지지다.
- 신자의 오늘은 편지지 한 장이다.
이제 몇 장 안 남았다.
경외함을 표현하자. 기록하자.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3 2018. 3. 25 주일 낮 예배
< 믿음과 시간 · 공간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약2:21-22)
I. 본문해설
-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의 기록임(마13:55)
-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
-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서 박해 받는 가난한 자들
- 교회의 문제 : 핍박과 분열, 세속주의, 실천 없는 믿음
II. 야고보서의 비판과 오해
A. 야보고서의 비판
1. 비판의 요지
-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는 사람들
- 귀신들도 믿고 떠듦 : 역사적 믿음(약2:19)
- 허탄한 자.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임
- 아브라함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해졌음
- 사랑이 없는 삶은 행위 없는 믿음의 결과임
-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음, 믿음으로만 아님
- 행함 없는 믿음은 영혼 없는 몸 같이 불완전한 것임
2. 변질된 믿음
- 참된 영혼의 변화 없는 믿음이 유행했음
- 바울의 칭의 교리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음
- 야고보는 이것을 죽은 믿음이라 주장함
- “믿음으로 구원 받음”의 교리가 은신처 제공함
- 야고보는 폭격하듯이 이러한 논리를 공격함
B. 야고보서에 대한 오해
- 믿음과 행위를 대조시켜 이단을 양산함
- 복음신앙을 떠나 율법적 행위를 강조함
- 야고보서의 신학적 입장을 의심함
- 바울 칭의 교리와의 혼란 야기 : 정경논쟁
- 마르틴 루터(M.Luther). “지푸라기 서신”
III. 시간 · 공간의 문제
A. 네 종류의 믿음
- 역사적, 일시적, 기적적, 구원적 믿음
a. 역사적 믿음 : 도덕적. 영적 반응 없는 지적 동의
b. 일시적 믿음 : 중생한 마음에 뿌리 없는 자극과 흥분
c. 기적적 믿음 : 이적을 자기의, 자기 위한 발생을 믿음
d. 구원적 믿음 : 중생한 마음에 뿌리 내린 능동적 믿음
B. 야보고의 언어 플레이
1. 두 의미로 사용함
- “믿음”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함
a. 당시 유포된 의미
- 스스로 믿음 있다고 생각하나 구원적 믿음이 아님(2:14)
- 따라서 그 믿음은 하나님 사랑에 뿌리 내리지 않음(2:16)
- 지식으로는 동의하나 영혼의 변화가 없음(2:19)
- 문화는 기독교적이나 본성의 거룩한 변화가 없음
b. 원래 고유한 의미
-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
- 중생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림
-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 믿음
- 그리스도와 접붙여져 영적 생명을 누리는 믿음
- 변화된 본성의 사랑과 행위가 일치하려는 믿음
2. 야고보의 의도
- 유행하는 믿음이 참 믿음이 아님을 논증함
- 믿음 = “소위 믿음이라고 불리는”의 뜻임
- 그런 믿음으로는 결코 구원 받지 못함을 논증
-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라는 의미
- 행위가 합쳐져서 믿음이 온전해졌다는 의미 아님
- “온전한 믿음임을 입증했다”는 뜻임
- 이어서 하나님과의 친교가 등장함
- 시간 안에서 표현이 믿음을 객관적으로 입증함
C. 문제의 해결
1. 구원에 이르는 믿음
- 영혼의 변화를 통한 본성의 변화 : 자기사랑-하나님사랑
- 마음에 새로운 성향을 주심 : 성향 안에서 성령이 역사함
- 본질의 변화가 본성의 변화를 동반함
- 안과 밖을 한번에 보는 것은 單純知
- 밖에서 안을 추측하는 것은 現見知
- 영혼의 변화와 생활의 변화는 일치하게 됨
2. 시간 · 공간, 인과 표현
- 내면과 외면의 일치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음
- 독립적 인간의 의지를 배제하지 않으심
- with us and in us, not without us against us.
- 저절로 된다면 인간들 교훈할 필요가 없으심
- 의지 행사에서 깨달음, 회개, 결단, 기쁨을 경험함
- 이로써 하나님은 인간을 교훈하심
a. 단순지로 보심
- 행함 없는 신자 안에 믿음이 없음
- 행함 있는 신자 안에 참 믿음이 있음
- 둘 중 어느 것도 주께 새롭지 않음
b. 현견지로 보심
- 행함 없는 믿음 주께 실망스러움
- 행함 있는 믿음 주께 감격스러움
- 그 기쁨을 우리가 느끼게 전달됨
- 그 안에서 인내, 자비, 긍휼로 정동됨
3. 야고보가 질타한 사람들
a. 그들에게 참 믿음 없음을 입증함
b.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도록 촉구함
- 이것은 생활의 완벽성 문제가 아님
- 믿음의 원리로서 생활을 지배하는가?
- 당시 그들의 생활 원리는 이기심
- 거듭나지 못한 내면의 원리를 입증함
- 거짓 믿음에 속지 말고 참 믿음을 갖으라
IV.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을 기뻐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 심리적 연애 감정 아닌 기쁘시게 하는 삶
- 시간과 공간 안에서 믿음을 표현하라
- 하나님은 무한하시지만, 우리는 유한하다.
- 한정된 시간 · 공간 안에서 믿음을 고백하자!
- 진정으로 기쁨의 삶을 살자!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4 2018. 4. 8 주일 낮 예배
< 열매 없이 알리라 >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0-23)
I. 본문해설
- 산상수훈을 통해 천국 시민의 생활 원리를 가르치심.
- 결론 부분으로서 참 백성과 거짓 백성들에 대한 심판.
- 참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것은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것.
- 참 신자와 거짓 신자를 구별하심 : 나무와 열매.
II. 열매로 사람을 앎
-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는 백성들 : 양의 모습.
- 그들을 분별하는 법과 교훈을 가르치심.
a. 나무와 그 열매는 일치함
b. 열매를 통해 나무를 확인함
- 구약에서 “좋은 나무”라는 표현 3회 등장(창2:9, 왕하3:19,25):유익함.
- 복음서에서 좋은 나무는 식용을 의미:포도, 무화과 ↔ 가시, 엉겅퀴.
- 하나님의 자녀처럼 보이는 자들도 그렇게 구분됨.
- 이것은 이러한 판단으로 남을 심판하라는 것이 아님.
- 예수의 이 가르침은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하라는 뜻임.
-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그릇된 안전감에 빠지지 말아야 함.
- 오히려 구원의 확신을 통해 더욱 온전한 구원을 갈망해야 함.
III. 그날에 있을 심판
-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최종적인 판단이 아님.
-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
A. 부른 자와 행한 자
-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 아니요”
- 입으로 주님을 부른 자가 모두 인정받지 못함.
- 이것은 외적인 종교 생활 전체를 가리키는 것임.
-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자가 들어감.
a. “하늘에 계신”
b. “내 아버지”
- 거짓 신자들은 영혼의 변화 없이 그 뜻을 행치 못함.
- 그 날에 그들이 내세우는 것 “주의 이름으로…”
a. 선지자 노릇함.
b. 귀신을 쫓아냄.
c. 많은 권능을 행함.
-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 아닌 것은 없다.
- 그런 행함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심.
B.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 그것은 사람됨과 행함 사이의 일치임.
- 몹쓸 나무가 변하여 좋은 나무가 되는 것.
- 열매는 나무에서 나오고, 열매로 좋은 나무임을 입증함.
- 사람됨과 행함의 일치는 진실과 선함임.
- 따라서 사람의 악인됨과 행함의 일치는 아님.
- 선한 사람됨과 선한 행위의 일치임.
- 하나님이 인류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7)
- 하나님의 사람됨과 하나님께 순종함의 일치를 원하심.
- 그 둘이 일치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 선지자 노릇함, 귀신을 축출함, 권능을 행함 : 주의 일였음.
- but, 그것을 행한 자는 영혼과 본성이 변화되지 않은 악인이었음.
- 그들이 한 일은 “불법(anomia)”임.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 사람됨도 행함도 결함을 지녔음. “불법”(anomia)이었음.
- 예수께서 가르친 하나님 나라의 “법”(法)은 사랑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 사랑과 사랑의 생활은 결국 일치하게 됨.
- 사랑이 없는 실천은 그 원리를 따르지 못한 것임.
- 따라서 그들이 무슨 행동으로 섬기든지 불법한 것이 됨.
- 아무리 선한 행동을 해도 악인이 행하면 위선이 됨.
- 사랑의 법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음.
C. 도무지 알지 못함
- oudepote egnon “결코 몰랐다”
- 동사, 직설법, 제2부정과거시제, 능동태, 1.sg
- 성경에서 “안다”는 선택, 사랑함을 의미함.
- 그들은 처음부터 주님이 모르셨던 사람이었음.
- 심판 날에 있을 그리스도의 단순지를 보여줌.
- 열매 없어도 단순지(單純知) 안에서 그들의 사람됨을 아심.
- 하나님은 모든 것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리는 주께 알려짐.
- 나다나엘을 만나기 전에 미리 아셨던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
- 이것은 신앙 좋았던 사람이 악해진 것을 가리킴이 아님.
- 인간은 현견지로 아나, 주님은 단순지로 아심.
-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야 함.
- 주님의 관심사는 새 사람이 새 삶을 사는 것임.
- 새 사람은 구원을 받아 사랑의 사람이 된 자들임.
- 거기서 살고 싶은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살아감.
- 하나님 나라가 왔으나, 아직 실현되지 않은 사회를 갈망함.
- 행위로 열매 맺기 전에도 그 사람이 누군지 미리 아심(단순지)
- 열매를 맺을 때 그 사람을 아시는 효과를 전달(현견지)
- 거짓 선지자, 불법 행하는 자들은 참 열매를 맺지 않았음.
- 이것이 겉만 번지르르한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이었음.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5:2)
- 사람됨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 행함에 대한 관심을 능가함.
- 구원 받은 신앙은 구원을 방종하게 사는 데 사용하지 않음.
- 오히려 구원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견지를 깊이 의식함.
- 자신이 누군지 객관적으로 성찰함이 신앙의 깊이임.
- 좋은 행위는 은혜를 회고하고, 나쁜 행위는 자신을 반성케 함.
- 은혜로써, 주님은 누구도 자만하거나 포기하지 않게 하심.
IV.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가 누군지 생각하라!
-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지 하나님을 의지하라!
-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 단순지로써 구원을 확신하고, 현견지로써 삶의 열매를 맺으라!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5 2018. 4. 22 주일 낮 예배
< 하나님의 현견지를 알 때 >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 22:59-62)
I. 본문해설
- 예수의 체포와 심문 과정에 대한 기록임.
- 예수님은 체포되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심.
- 제자들은 최후 만찬석상에서 누가 크냐 다툼(눅 22:24).
- 그 때에 예수님 자신은 섬기는 자로 오셨다고 하심.
- 그러면서 베드로에게 닥쳐올 시험을 경고하심.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 but, 그는 옥에 갇히고 죽음을 당해도 주 따를 것을 맹세함.
II. 그리스도를 부인함
- 예수님은 체포되셔서 대제사장 집에 끌려왔음.
- 예수님이 동산에서 끌려가실 때 이미 변심하였음.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눅 22:54)
- 이미 베드로는 ‘죽는 데까지’ 따라 갈 결심이 흔들렸음.
- 예수 그리스도보다 자신의 목숨을 더 사랑했음.
- 제자들의 이런 실패는 이미 기도의 실패에서 예견되었음.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눅 22:44-45)
- 영적인 위기에 맞서는 대신 슬픔에 잠이 들었음.
- 진정한 믿음은 순간의 용기가 아닌 은혜의 힘.
- 은혜가 없을 때 우리는 변덕 심한 굴곡의 삶을 살게 됨.
- 베드로의 높아지고자 함과 변덕. “죽기까지” “멀찌기” “부인하니라”
- 결국 저주하면서까지 명세하며 예수를 부인함.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마 26:74)
- 위기의 순간에 대승하려면 늘 은혜 안에 살아야 함.
- 매순간 전심으로 하나님 은혜에 붙잡혀 살자!
III. 현견지를 의식할 때
-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째로 부인할 때 닭이 두 번째 울었음.
-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61)
- 예수님의 눈빛과 마주칠 때 변화가 일어남.
A. 말씀이 생각남
- 닭이 두 번째로 우는 소리에 예수님의 눈빛과 마주침.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눅 22:61)
-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자 그 분의 말씀이 생각났음.
- 예수님은 이미 단순지로써 베드로의 배신을 아셨음.
- 명백한 예언의 말씀을 주셨으나 베드로는 자기 실패를 몰랐음.
-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기보다는 자만했음.
- 하나님의 단순지보다 자기의 판단을 믿었음.
-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판단을 보여줌.
- 매순간 자기 신뢰를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믿음.
-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신자들의 심리.
- 하나님의 판단을 분명하게 알고 싶지 않음.
- 삶이 말씀 이해와 분리 되지 않는 증거임.
- 다양한 상황을 통해 말씀을 생각나게 하심.
-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 장담하나? 멀찍이 오나? 부인하고 있나?
- 말씀에 무뎌진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심.
- 시련과 고통 속에서 위기 통해 말씀을 깨우치심.
-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라!
B. 잘못을 회개함
-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eklausen (62).
-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 후에 통곡하며 회개함.
- 이것이 참된 회개였는지 확신할 수 없음.
- 베드로는 이후로도 두려움 속에 숨어 다녔음.
- but, 최소한 양심을 깊이 찌른 큰 후회였음.
- 무엇 때문이었나? 주님 현견지를 인식함.
- 믿음이 없어 예수님의 단순지 받아들이지 않았음.
- 베드로에게는 오직 자신 밖에 보이지 않았음.
- 높아짐, 희생 장담, 두려움, 배신.
- 말씀 떠나자 신앙의 일관성이 사라졌음.
- 그러나 닭이 울 때 하나님의 현견지를 의식했음.
- 양심에 찔려 심한 통곡으로 회개하였음.
-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의 현견지를 의식하는 깊이임.
- 단순지에 대한 신뢰만큼 현견지로 하나님 앞에 삶.
- 하나님 보실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입니까?
- 하나님의 시선과 마주치라! 잘못을 회개하라!
IV. 적용과 결론
- 마음이 하나님 떠나자 단순지도, 현견지도 의식하지 못함.
- 주님의 말씀이 생각날 때 하나님의 현견지를 의식함.
- 자신의 실패에 대해 심한 통곡으로 회개했음.
-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라!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2018.3.11 주일오전1)
한 해를 시작하며(2018.01.01. 송구영신예배1)
하나님과 시간 · 공간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 1:3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이 왜 천지를 창조하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행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이 필요했다면 하나님은 불완전한 존재이니 하나님이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세상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창조하셨으니 이는 쓸데없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완전하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지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을 떠나서 이성으로 올바른 생각을 가져보기만 해도 이러한 논리는 얼마나 헛된 것임이 명증해집니다. 최근 예술의 전당에서 자코메티의 청동조각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고독한 존재와 그 실존을 작은 청동 조각 속에서 그려냈습니다. 피카소를 비롯한 위대한 인물들의 저작 예술 작품들을 우리는 높이 칭송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그런 예술 작품이 필요했을까요? 만약에 그 예술 작품들이 없었다면 그 예술가들은 한 인간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무엇이 모자랐기 때문에 그런 예술 작품을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속에 넘치는 예술혼이 그러한 작품들을 만들어내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러한 위대한 예술 작품을 창작했다는 이유로 그들이 뭔가 결함이 있는 인간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그들이 쓸모없는 일을 행했다고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 안에 넘치는 그러한 사랑과 지혜가 이 세상을 창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마치 당신의 예술 작품처럼 바라보시며 즐거워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을 인하여 그 창작자들이 칭송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은 창조된 세계를 인하여 하나님의 완전성을 의심 받기보다는 오히려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시되 두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는 천상의 세계와 또 하나는 지상의 세계입니다. 천상의 세계는 천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당신이 직접 다스렸지만 지상의 세계는 당신의 대리자인 인간을 창조하셔서 그가 당신의 권한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지위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탁월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두 세계는 거울처럼 마주보도록 창조되었으니 이 땅에 있는 모든 물질세계는 천상 세계의 한 그림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 두 세계를 창조하신 것은 당신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통하여 당신 자신이 즐거워하시기 위함이었고, 그 창조주가 당신인 것을 아는 모든 도덕적 피조물들로 하여금 당신을 즐거워하게 하기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6일 동안의 모든 창조를 끝내신 마지막 시점에 이 세상을 바라보시며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좋았더라, 오늘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심히 좋았더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 묘사가 정말 모순이 없는 정확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하루하루 각각 필요한 것들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좋았더라, 좋았더라, 좋았더라”고 되어 있던 하나님의 평가를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로 그렇게 묘사함으로 창조의 기사를 끝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이미 하나님의 관념 안에 있었을 것인데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그것들이 시간과 공간 안에 나타났을 때에 하나님에게 과연 새로운 것이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관념 안에 이미 있는 것들이 창조되었으니 그것은 정확하게 꼭 같은 것이었을 텐데 왜 하나님은 예기치 않은 작품을 본 것처럼 “심히 좋았더라”라고 묘사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II. 하나님과 영원
A. 영원에 대한 사유
우리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과 영원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영원하다’라고 하는 이 말은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시간의 연속을 뜻합니다. 그러면 이 말은 하나님은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가도 계속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일종의 인간적인 화법입니다. ‘하나님은 영원이시다’라고 할 때 그 영원은 그런 의미에서의 영원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숙고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원에 대한 인류의 사유를 한번 되돌아보겠습니다. 영원에 대한 인간의 사유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째는 선적인 영원입니다. 이 선적인 영원은 시간을 계속되는 직선으로 이해하고 시간의 연속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을 영원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영원관이 바로 이러한 직선적인 영원관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비해서 인간은 영원을 원적인 방식을 사유했으니 이게 바로 원적인 영원입니다. 즉, 시간의 순환으로 계속되는 환원의 영원관이니 이것은 원을 그리는 것 같은 영원관입니다. 사물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윤회함으로써 끝이 없고 그것들이 서로 순환함으로써 영원은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자리로 무한히 회귀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불교의 영원관이 바로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B. 하나님과 영원
그러면 하나님과 영원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첫째는 본체적인 영원입니다. 본체적인 영원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은 직선적인 영원이나 혹은 끊임없이 회귀하는 원적인 영원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영원 그 자체이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영원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은 예외 없이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십니다. 그렇지만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할 수 없지만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음은 명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 땅과 하늘 위에 높고 위대하실 뿐만 아니라, 초월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사물들을 당신 안에 두셔서 당신을 벗어나 존재하는 것이 하나도 없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본체적인 영원이십니다. 인간은 그 영원을 아는 유일한 지상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원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영원을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 영원을 압니다. 이 영원을 아는 비결은 그 영원을 사랑함으로써 영원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매일매일 현실에 코 박고 살던 사람이 연애를 합니다. 그리고 한 여성을, 한 남성을 생명보다 더 사랑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면 놀랍게 죽음에 대한 사유가 활발하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영원이라는 말을 연애편지 속에서 자주 쓰게 됩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비록 인간적인 에로스의 사랑이지만 그 사랑이 아가페 사랑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자꾸 사랑과 함께 영원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경험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지평에 도달하게 만들어 줍니다. 때로는 사랑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때로는 그 사랑 때문에 죽음을 초극하는 놀라운 변화를 보이게 됩니다. 모두 영원의 사유에 관한 흔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 본체적인 영원은 하나님 자신이며 인간은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놀랍게 알게 됩니다. 그 아는 것을 말로 모두 묘사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성으로 아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영원은 효과적인 영원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피조물에게 있는 영원입니다. 하나님은 무시무종하신 분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분입니다. 대부분의 모든 사물은 유시유종합니다. 시작도 있고 끝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정하신 어떤 사물은 유시하나 무종합니다. 시작은 있었으나 끝이 없도록 하나님이 특별히 지정하십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기 전까지는 없던 사물이었는데 창조하시고 나니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정하셔서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유시 하나 무종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보고 듣고 맛보고 감촉하고 그리고 맛을 느끼는 이 우리의 오감을 가진 이 육체는 유시유종합니다. 왜냐하면 없다가 태어난 때가 있었고 몇 십 년 후면 우리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다시 입게 될 부활의 그 몸은 육체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영원히 불멸할 육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입고 있는 이 육체는 유시유종한 육체이고, 부활의 날에 입게 될 우리의 부활의 몸은 육체이지만 유시무종한 육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영원히 있는 것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효과 때문에 영원히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덕을 입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영속하는 사물이라고 부릅니다. 사물과 영원히 있는 인간 또는 사랑과 정의 같은 덕들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덧입음으로써 영속하게 되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편의상 영원한 사물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영속하는 사물도 아니고 또 순간에 사라져갈 사물도 아닌 하나님은 본체적인 영원이십니다. 그 분과 같은 의미에서의 영원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물에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원을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나 믿음으로 그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영원에 대한 앎에 도달하게 되고, 거기서 유시유종한 우리 인간의 존재에 대한 참다운 이해가 생겨나게 됩니다. 모든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차이점은 모든 피조물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 안에 있다는 것은 공간 안에 있다는 것이고 공간 안에 있다는 것은 곧 시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III.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시간이란 창조 세계와 함께 도입된 것입니다. 따라서 시간은 사물의 변화와 운동을 통해서 측정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변화입니다. 삼위일체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십니다. 제일 처음 성부가 계셨고, 성부에게서 영원 전에 성자가 낳은바 되십니다. 그리고 그 후에 성부와 성자를 통하여 성령이 나오십니다. 이렇게 해서 성부 성자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되십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에 그렇다면 성부가 계실 때에는 성자와 성령이 없던 때가 있었고, 성자와 성부에게서 성령이 나오시기 전까지는 성부, 성자, 두 위격만 계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색은 모두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자와 성령이 나은바 되시고 나오시기 전에는 성부만 계시고, 또 성령이 나오시기 전까지는 성자와 성부만 계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 안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성부는 성자, 성령 없이 홀로 계셨던 때가 없고, 성자는 성령 없이 계셨던 때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자는 성부에게서, 성령은 성자, 성부에게서 낳은바 되시고 나오시지만 세 위격은 영원히 함께 계신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시간 속에서의 사유에 익숙해진 우리는 이러한 논리를 매우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불후의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가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책이 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 생각하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한 10여 년 전에 이러한 논리를 성도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킬까를 많이 고민을 하다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도움이 되는 한 비유를 발견했습니다.
자, 어떤 존재가 2차원 이외에 다른 차원을 모른다고 칩시다. 1차원과 2차원만을 아는 어떤 존재가 사각형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가 질문을 받습니다. 사각형 위에 사각형이 올라갈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어렸을 때 중고등학교에서 배웠던 수학의 정리를 생각해 봅시다. 선은 무수한 점의 연속으로 이루어지고, 선은 두께와 넓이가 없다고 수학의 정리에 의해서 배웠습니다. 그러면 자, 한 존재가 평면위에 사각형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각형 위에 다시 사각형을 그립니다. 그래도 열 번을 그렇게 그린다고 하더라도 연필의 굵기는 굵어질지 모르지만 수학적인 사각형 선은 넓어지지 않습니다. 결국은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사각형 위에 사각형이 올라갈 수 있는가 라고 질문을 받을 때 그는 불가능하다고 답을 합니다. 왜냐하면 평면에서는 사각형 위에 사각형이 올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백번 올라가도 그것은 네 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사각형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사차원까지를 직접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이상은 가공의 차원입니다. 현대 과학은 물리학은 20차원까지를 이해했다고 하지만 그것을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그려내는 일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수식으로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3차원을 이해하는 현실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2차원에 있는 존재는 사각형이 사각형위에 올라갈 수 없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사각형이 사각형 위에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러나 무한 차원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매우 논리적인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가 이렇게 영원에 대한 설명 없이는 이해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시간은 결국 사물의 소멸 혹은 증진을 통해서 측정이 됩니다.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알게 되고 음식이 부패하고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알게 되고, 자기의 몸이 완전성으로부터 멀어져서 죽음의 기운에 삼키게 되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천상과 지상의 세계 모두 이 시간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천상의 세계는 변화하고 소멸되면서 시간이 흘러감을 보여줄 것이고, 또한 천상은 영광이 증진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시간이 측정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인간이라는 한 존재가 태어났다가 사라지고 인간이 사랑하는 것들도 태어났다가 흘러가고 소멸하는 것들을 보면서 허무를 느낍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을 펼쳐보십시오. 그렇게 생겨난 것들이 흘러가고 변하고 소멸하고, 또 다른 것들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 온 우주는 심포니처럼 웅장한 음악을 들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음악에서 ‘도미솔도’ 이렇게 위아래의 음이 맞아서 한꺼번에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에 대한 이론을 공부하는 것을 화성학이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서 음이 이렇게 계속 진전하면서 앞의 마디와 뒤의 마디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한 소절과 그 다음 소절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서 완전한 음악을 만들어 내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을 대위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한 음악의 완전함은 화성과 대위에 의해서 아름다운 음악이 결정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 아름다운 음악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하나의 음이 ‘도미솔도’ 이렇게 하나로 나오듯이 어느 한 시점에서 존재하는 인간, 자기와 함께 존재하는 역사, 시간, 자기와 함께 존재하는 동시대의 사람들, 심지어는 자연의 만물들과 이렇게 화성학적인 조화를 이루면서 인간은 우주 안에 자신의 존재로 아름다운 노래를 만듭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대위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가 별빛처럼 나타나 찬란한 빛을 그리며 우주 공간을 날고 소멸할 때쯤 되면 또 다른 별똥이 떨어지면서 빛을 발합니다. 이런 것들이 이어져서 우주의 장관인 우주쇼를 연출하듯이 내가 사랑하던 사물들이 태어나서 흘러가서 죽고 그럴 때 또 다른 것들이 태어나고, 또 다른 것들이 꼴을 물으며 태어나고, 있는 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조화를 이룬 것들 중에 어떤 하나가 빠져 나가면서 새로운 것들이 다시 만나면서 예전에 없던 조화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통해서 이 우주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웅장한 심포니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우주적인 음악악과 같은 경륜을 생각하면 오늘 피었다가 들풀처럼 사라져 가는 나의 인생도 이렇게 사라짐으로써 한 음표가 끝나고, 끝남으로써 더 아름다운 음악을 연출해 내는 음표의 운명과 같이 내가 사라짐으로써 소멸함으로써 우주 전체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교향악을 울려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됐다면 죄송합니다.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시간은 모든 것들을 허무하게 하는 것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고요한 우주 공간에 웅장한 하모니를 울려 퍼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 때문에 그 이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아름답게 되고 이미 아름다워진 것들은 소멸함으로써 그 아름다움이 자신에게만 멈추지 않고 우주를 가로지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인식하는 것과 실제 사이에 걸쳐 있습니다. 그래서 저명한 물리학자인 앨버트 아인슈타인도 시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간은 철학적인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현재라고 하는 것은 사실 잡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라고 말하는 그 순간 무수한 현재가 흘러가 버렸고, 그래서 현재는 이미 흘러간 과거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사이에 있는 얇은 방 막과 같은 것입니다. 이미 흘러가 버린 것은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인간이 누릴 수가 없고 오지 않은 것들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고작해야 방 막의 현재만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고 누린다는 것이 덧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들은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소멸해 갈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라져 가고 소멸할 것을 사랑하는 인간도 결국은 소멸할 존재입니다.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으로 사라지고 없어지는 동일한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공간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사랑할 것들을 제시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 갑니다. 결국 인간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만 끊임없이 시간에 의해서 그것들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간이 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공간 때문에 인간은 갇힌 존재가 되고, 시간 때문에 인간은 흘러가고 소멸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현실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심’, 소위 'visio Dei'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것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판단이고, 하나님 이외에는 이것을 판단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IV. 하나님의 보심
그러면 하나님은 자신과 사물을 어떻게 보실까요? 우리 인간은 오직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우리를 봅니다. 과거는 모두 지나갔고 기억만 우리에게 남았습니다. 그 기억 중 어떤 것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희미해져가고 어떤 기억들은 잘못 남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실인 것과 꾸며낸 것들은 종종 우리의 기억 속에서 융합이 됩니다. 서머셋 모옴이 자신의 책속에서 이야기했듯이 픽션과 팩트는 서로 엉켜서 마지막에는 어느 것이 정말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인간의 기억이 전적으로 자율적이기 않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억은 일종의 사회적인 것입니다. 환경과 여건에 의해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기억되도록 그렇게 우리에게 푸시하면서 우리는 그 기억들을 선별적으로 기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과거에 있는 것들은 기억하고 미래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모릅니다. 종종 사람들은 미래의 커튼을 열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보고 싶어 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아리에 줄지어 있는 점집들과 그리고 강남과 홍대 앞에 있는 타로 카페들이 바로 인간의 그런 호기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미래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속임수일 뿐입니다. 왜 하나님이 미래에 대해서 우리 인간에게 미리 가르쳐 주시지 않으실까요? 가르쳐 주셔봐야 우리에게 좋은 일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 보십시오. 만약에 인간의 미래를 보여주셨는데 그의 미래가 꽃길을 지나는 아름다운 낙관의 비전으로 제시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을 의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성공하기로 운명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의 앞날이 좌절과 실패로 얼룩질 것이 드러났다고 칩시다. 어차피 실패와 좌절이 예고되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매달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행복하게 되든 불행하게 되든지 간에 미리 인간이 그것을 알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님. 성경을 보면 비전을 가졌던 사람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요셉 같은 사람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해와 달과 열한별이 절하는 비전을 받았고 그랬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온갖 난관을 헤쳐 하나님 앞에 승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의 추상적으로 보여주신 비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서 그 아내의 유혹을 받을 줄도 몰랐고, 정직하게 행동하면 반역자들을 함께 가두는 감옥 속에 투옥될 것이라는 것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그를 믿음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한 비전을 그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미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과는 다릅니다.
아무튼 인간은 그렇게 시간 안에서만 모든 사물을 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기 때문이 시간과 공간에 매여서 사물을 보시지는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초월적으로 한 번에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단순 지식, 단순한 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여러분을 아셨고, 그리고 여러분을 태어나게 하시기로 작정하셨고, 여러분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셨고, 그래서 적절한 때에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지금 이런 종류의 설교를 한 설교자에게서 듣게 될 것까지 이미 아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내일 여러분 중에 누구를 데려 가실지, 누가 신앙에서 미끄러지실지 누가 마지막까지 승리하게 될지를 모두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새로운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만 우리를 보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교훈하시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당신 자신은 모든 만물을 초월하여 한 번에 보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결코 이렇게 우리에게 반응을 보이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제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난 영원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하나님 주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하여 내가 이러한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나는 이미 영원 전에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난 지루하다. 아무것도 나에게 새로운 것이 없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서 아름다운 섬김의 열매를 남겨드렸을 때 주님은 예기치 않으셨던 것처럼 “오, 네가 이렇게 행하였느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만물을, 인간을 어떻게 보신다는 것일까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한 번에 보시기도 하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새로운 것처럼 보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만물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한 번에 보시지만 어떤 것들을 우리에게 교훈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마치 시간 속에서 우리를 보시는 것처럼 기뻐하고 슬퍼하고 감격하시고 가슴 아파하시는 그런 정동이 있는 분인 것처럼 우리에게 자신을 전달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철학사에서도 매우 유명하게 손꼽히는 중세의 교부 안셀무스의 『프로슬로기온』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자비로우시지만, 당신 자신의 경험을 따르면 자비로우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가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을 보실 때 우리는 당신의 자비의 효과를 느끼나, 당신은 어떠한 정동도 느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참한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 자신은 출렁거리시는 분이 아니고 언제나 불변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분이시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을 비참히 여기시는 것이 느껴지게 하심으로 우리를 역경에서 손잡아 끌어내기도 하시고,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우리의 어깨를 두드려 격려하기도 하시고, 그릇된 길을 걸어가는 우리의 무릎을 꿇려 뉘우치게도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마음, 하나님을 향한 복종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에서 점과 같은 지구의 존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드넓은 우주에서 별 떨기처럼 모여 있는 그 수많은 별들 속에 한 별, 태양,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일곱 개의 위성 가운데 하나인 지구, 그것은 우주 공간에서 거의 점으로도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러한 지구에 태어나 한 인간으로 살면서 이런 저런 일을 겪는 것이 하찮지 않습니까? 우리의 승리, 번영 행복, 기쁨, 사랑, 죽음, 눈물, 혹은 우리의 죄악까지도 어떻게 보면 드넓은 바다에 출렁거리는 파도 위에 거품, 그 위에 터져서 위로 오르는 지극히 작은 물방울 하나와 같지 않습니까? 정말 그 우주 공간에 무한한 침묵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는 파스칼의 고백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무한한 세계의 흐름을 보면서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먹고 마시고 입고 자고 눕고, 오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이러한 모든 사연들이 얼마나 덧없는 것일까 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그것들을 의미 있는 사건으로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마음 한번 올바르게 가지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 일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정말 기뻐하신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한 우리의 인생의 삶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과 우리 사이에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의 마음에 수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은혜들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표현될 때에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언젠가 깊은 오지에 간 적이 있습니다. 탐험가들이 갈 정도의 오지는 아니지만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산 속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계곡 사이에 펼쳐지는 들풀이 있었습니다. 풀밭이 펼쳐지고 거기에 형형색색의 야생화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저는 한 순간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보아주는 사람도 없고, 즐거워하는 이도 없이 이렇게 들판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푸르게 돋아나다가 사라지는 풀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다가 내 마음을 가로지르며 한 줄기 별빛처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신다. 아 그렇구나. 인간은 아무도 이 오지에까지 와서 봐주지 않지만 철을 따라서 풀은 돋아나고, 꽃은 피고, 열매를 맺고, 그 열매는 다시 땅에 떨어져 자신의 종족을 번식시킨다. 아무도 보아준 사람이 없고 어쩌면 이 풀들은 오늘 내가 최초로 만난 인간일 수 있다. 그래도 이 풀들은 허무하다는 생각을 안 하고 피어나고, 꽃이 피어나게 하고 풀들을 자라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걸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의미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지구위에 존재하는 250만종의 생물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존재의 의미는 250만 분의 1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어 하나님을 향해 살고 있는 한 그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의미 없는 인생은 없으며 다른 사람의 인생이 자신의 인생보다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의 주관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모든 만물들을 의미 있게 창조하셨고, 지나가며 보아주는 누구 한 사람 없어도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당신이 보시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의미를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관념을 홀로 간직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세계에 대한 관념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창조를 통해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관념대로 시간과 공간 안에 창조된 세계를 보셨을 때 하나님은 매우 기쁘셨습니다. 당신의 기쁨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들 중 많은 은혜들은 우리 안에서 유산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유산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은혜들은 끝까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표현되었습니다. 신실한 믿음으로, 사랑으로, 교제로, 섬김으로, 사명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것을 보실 때 하나님의 기쁨은 여러분 안에 은혜를 주셔서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을 보셨을 때의 기쁨을 능가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은혜를 시간과 공간 안에 표현하게 하심으로 당신의 기쁨을 더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많이 표현하십시오. 진심이 없이 표현하지 말고 진심을 담아서 표현하십시오. 그런 사랑의 고백을 하며 살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천금 같게 하시네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입니다. 힘으로 말하면 당나귀 하나만도 못하고, 수명으로 말하면 거북이보다도 오래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입니다. 주님이 자기에게 은혜를 주신 것을 아는 사람이고 그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자신의 지성과 의지 속에서 시간과 공간 안에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에 의해 그것들이 표현되는 것을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편지지에 쓰여진 연예 사연처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그 편지를 쓰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비록 소멸할 존재이지만 언젠가 소멸하고 사라진다는 슬픔이 오늘 우리가 살아있는 기쁨을 압도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소멸하고 사라져가는 것은 아쉽지만 그것이 우주 공간 안에 화성법으로, 대위법으로 아주 아름다운 심포니가 되게 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울려 퍼지게 하는데 기여한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하루를, 주님이 주신 은혜를 온 힘을 다해 시간과 공간 안에 그것들을 표현하면서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언젠가 내일은, 혹은 다음 주, 혹은 내년, 혹은 10년 후에 우리가 더 이상 이 연예편지를 쓸 수 없을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아주 진하게, 그렇게 시간과 공간 안에 하나님 앞에 편지를 쓰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를 시간과 공간 속에 표현하며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심히 기쁨을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2018.3.18 주일오전2)
시간·공간 안에서 아심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9-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첫 범죄 후 인류의 타락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했으나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구원 받기 위해서는 당신을 아는 지식의 빛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빛을 아담에게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도 주셨습니다. 아담의 아들, 셋으로부터 시작해서 에노스와 므두셀라, 에녹과 노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지식의 빛을 더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지식을 받아서 자신들이 누릴 뿐 아니라 또한 그 계시를 풍성하게 하여 후대에 전해 주었습니다. 면면히 이어져 오는 이런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빛 때문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II. 시험하시는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조상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성경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는 이 사람의 훌륭한 덕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과 순종의 생활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훌륭한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이 오늘 시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실까요? 혹은 시험하지 않으실까요?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된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서부터 14절 사이에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사람을 시험하시지도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이 시험에 드는 것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라고 시험의 궁극적인 원인이 하나님 아닌 사람에게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진술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성경 본문이 그 반대의 진술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 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시험한다는 것입니까? 안하신다는 것입니까? 성경은 하나의 관점으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계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계시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이 교차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성경은 우리와 상관없는 신화가 되었거나 아니면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인간사는 이야기들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아이가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밤과 낮의 구분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왜 밤이 와?” 엄마는 말합니다. “이제 아침에 해가 떴고 저녁에는 해가 지기 때문이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알고 자란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서 자연을 배웁니다. 자연 과목을 배우면서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해는 가만히 있고 지구가 자전하면서 한쪽은 낮이 되고 또 한쪽은 밤이 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 과학적 사실을 배우면서 해가 지기 때문이야 라고 가르쳐 주었던 엄마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끼는 자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말로는 전자, 해가 뜨고 진다는 말을 현상적 묘사라고 말하고 그리고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은 실제적 묘사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현상적 묘사와 실제적 묘사가 교차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 인간에게 전달해 주는 책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험을 창조적인 시험과 파괴적인 시험으로 구분합니다. 창조적인 시험은 그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힘을 얻고 번영하고 복을 받고 그리고 은혜를 얻는 시험이고, 파괴적인 시험은 우리가 유혹에 떨어지고 죄를 범하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끊어놓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런 종류의 설교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예 더 담대하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발생론적으로 설명합니다. 전자의 시험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 시험이고, 후자의 시험은 아예 처음부터 마귀가 한 시험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은 성경의 질문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가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시험하실 이유도 없고 그리고 시험하실 목적도 없으십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왜 시험을 당하게 되는 것일까요?
자, 이런 생각을 해 봅시다. 제가 여러분을 공원 벤치에서 만났습니다. 잠시 여러분과 인사를 나눈 후 가방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갔습니다. 여러분은 매우 경제적으로 궁핍한 분들이었습니다. 묵직한 가방을 들으면서 뭐가 들었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한 30초쯤 망설이다가 까만 가방의 지퍼를 열었습니다. 5만 원짜리 100장 한 묶음이 10개로 뭉쳐진 덩어리가 네 덩어리가 들어있습니다. 2억입니다. 깜짝 놀라서 ‘와’ 하고 다시 지퍼를 닫고 금세 제가 나타났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방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가 손을 내밀 때 여러분은 주저 없이 그 가방을 저에게 건네줄 것입니다. 그 돈이 아깝다고 생각할까요? 안할까요? 안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화장실 간다고 한 제가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안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오전 시간이 모두 지났는데도 안 옵니다. 왠지 경찰서에 갖다 주면 꼭 잃어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습니다. 1년이 지났는데도 그 벤치에 자기 연락처를 남기고 왔는데 연락이 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그 집 앞에 나타났습니다. “어우 죄송합니다. 제가 화장실 갔다가 무슨 일이 있어서 10년이나 걸렸습니다. 주시지요.” 할 때 매우 나쁜 경우는 이것입니다. “다 썼는데요.” 떼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할 수 없이 장롱에 깊이깊이 감추어뒀던 매일 열어보았기 때문에 전혀 먼지가 쌓이지 않은 가방을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건네줄 때 여러분 중에 손이 떨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아까울까요? 안 아까울까요? 그리스도인이 그러면 안 됩니다. 이것은 마음의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시험 거리도 안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시험이 됩니다.
포도주 한 병에 2500만 원짜리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한 번도 그것을 먹어보고 싶은 유혹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그것이 눈에 보이면 유혹 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의 황태자라고 부르는 존 오웬 목사님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깔끔하게 정리하셨습니다. “시험과 시련은 같은 사건에 대한 주관적 적용이다.” 즉,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는데 마음이 욕심을 향하고 있으면 그것이 시험이 되고, 하나님을 향해 올바르게 되면 시험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 시점에서 아브라함에게 상상하기도 싫은 이 끔찍한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그 단서가 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한 번만 하시면 되잖아요. 두 번째 ‘네 사랑하는’ 세 번째 ‘독자’ 그 다음 네 번째 ‘이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상한 마음을 살짝 엿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이렇게 번역하면 딱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이 주셨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는데 그게 ‘웃다’라는 뜻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마음이 이삭에게 기울어졌던 것입니다. 위험할 지경에까지는 오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 기울어져서 그냥 내버려두면 좋지 않은 결과가 올 것을 하나님은 아셨기 때문에 이 일을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시험이 된 것은 순전히 아브라함의 마음이었습니다. 이 관점 자체가 이미 인간 편에서 이것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을 누가 주셨습니까? 그러면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그것을 취하시는 이도 여호와이시니”. 어차피 아브라함은 이삭을 태어나게 하는데 있어서 자기가 한 일이 없습니다. 기적으로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그 아이가 자기 새끼처럼 느껴졌습니다. 자기 소유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려라 할 때 주관적으로 그의 욕심에 이끌려 이 사건이 시험 사건이 된 것입니다. 이삭 안에서 질서를 벗어난 사랑을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정점이 무엇이 있는지를 아브라함에게 알게 하심으로써 그를 일깨우시기 위해 이 시험을 하셨다는 효과를 아브라함이 느끼게 하셨던 것입니다.
III. 순종하는 아브라함
A. 자원하는 마음
이 시험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순종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두 가지 요소를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자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자, 만약에 이러한 명령을 여러분 자신이 받았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녀가 고뿔에만 걸려도 안타까운 게 부모 마음이고 자녀가 여러 날 입원했으면 그 침상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것이 애미, 애비의 마음입니다. 아브라함도 인간이었으니 이삭을 신학교 보내라는 정도의 명령이 아니라 칼로 죽여서 불에 태워 제사로 바치라고 했으니 그가 일말의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그는 하나님의 분부를 허언처럼 여겼을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무를 쪼개고” 이렇게 나옵니다. 제사를 위한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는 장면을 새벽부터 보게 됩니다. 우리는 주제넘게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이 실제로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길을 떠난 것 사이에 열흘, 한 달, 1년이 지났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분명히 이튿날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하루 전날 언제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을까요? 물론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저는 밤중에 나타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가 15장에서 하나님이 다시 아브라함을 만나주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과 언약을 갱신하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이 언약은 창세기 12장에서 이미 주신 언약을 구체화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쪼갠 짐승 사이를 하나님의 임재가 지나가는 그 광경 말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나 하나님의 계시를 본 것도 밤중이었습니다. 그러면 확언할 수는 없지만 일과 복잡한 생활을 모두 끝낸 밤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고 상상하는 것은 전혀 엉뚱한 추측이 아닐 것입니다. 그 밤 그에게는 고뇌의 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적거리거나 혹은 억지로 하는 복종이 아니라 자원하는 순종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보여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생각합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나.’ 그렇습니다. 신문에 날만한 죄를 지은 적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순종하신 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불순종한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마음을 불태워 순종한 적도 별로 없는 그런 삶이 아니었습니까? 주님의 일에 훼방을 놓고 불충성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땀과 눈물과 피를 쏟아 하나님 앞에 헌신한 적도 없는 마치 같이 살기 싫은 부부가 자식들 생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그런 사람처럼 믿음 생활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성경은 오늘 자원하는 마음이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인생이니까 때로는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니까 때로는 시험 받는 때도 올 것입니다. 사람이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심이 자라서 시험 받을 일 없는 사건에 시험을 받는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어야 합니다. 잠시 흔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 중 단 한 번도 흔들림 없이 회심 이후 이제까지 살아왔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잠시 고뇌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한 순간에 결단을 하고 아침 일찍부터 주님께 순종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생활을 그리워하기를 바랍니다.
B. 믿음으로 바침
두 번째는 믿음으로 바쳤습니다. 창세기 21장 5절에 의하면 분명히 이 이삭은 100세에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 유일한 아들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한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히브리서 11장 17절부터 19절 사이에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이 성경의 기록을 살필 때에 그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자녀를 드렸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게 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증인들의 아레나입니다. 그 경기장에서 지금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제 왕이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상급을 주시기 전 그들이 전쟁터에서 어떻게 싸웠는지를 면면히 낭독하게 하십니다. 그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위인들의 위대한 이야기들의 가장 뛰어난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서론적인 문맥에서 히브리서 11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11장 6절은 오늘도 우리의 귓가를 때립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입니다. 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 독자 이삭을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믿음이었을까요? 신실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11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자신에게 주신 이삭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많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자식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을 죽인다고 해도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삭 때문에 자신의 자손을 번성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이삭이 죽으면 어떻게 그 씨가 온 세상에 퍼질 수 있으리요?” 하는 이성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믿음이 있었습니다. 죽어도 하나님은 다시 살리실 수 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더 특별하게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는 그 광경을 지시하는 것이라는 데에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동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마 아브라함과 꼭 같은 심경이셨을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 분이 죽음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밀려오는 쓰나미 같이 당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가지 믿음으로 그 무서운 시련의 시간들을 이겨내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건져내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 피하게 해달라는 그 기도와 연결 시켜서 예수님이 이 기도를 들으신 것은 십자가를 피하기 위한 간구였다고 그렇게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당장 모순이 발견됩니다. 어떤 식으로 들으심을 얻었을까요? 어떤 식으로 예수님의 그 기도가 응답되었을까요? 할 일이 없으셔서 예수님이 한 밤을 온통 새우며 응답될 리도 없는 기도, 십자가를 지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는 뜻이 아니라 부활로 자신의 죽음을 이기게 해달라는 간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훌륭하게 응답이 되었습니다. 그 점에서 아브라함은 그리고 아브라함에 의해 바쳐진 이삭은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에 대한 기대와 실제적 사건의 예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굳게 믿고 자신을 던졌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자랑스러운 인물이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6절은 이렇게 힘차게 증언합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믿고 사십니까? 이성이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쉽게 굴복한다면 여러분은 성도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우리가 추측하고 아는 대로 되어지는 인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묘미를 안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상 너머의 영원한 실제를 바라보며 삽니다. 보십시오. 오늘 아브라함은 비록 자신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이 원하실 때 기꺼이 제물로 드렸습니다. 장난이 아니라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아이를 죽여서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하기로 하였고 그렇게 자신의 아들이 죽임을 당해도 하나님은 능히 다시 살려 내셔서 기존에 자신에게 주신 약속, 이삭으로 말미암아 네 씨가 번성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 이성으로써 그것을 아는 것, 그게 우리의 인생에 힘을 줍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정말 힘을 줍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정말 믿음을 줍니까? 그것이 우리의 삶에 보탬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느냐 귀신도 믿고 떠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나는 신뢰할 수 없지만 나를 붙드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나의 인생을 그 분의 손에 얹을 수 있는 사람, 그분에게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믿음으로 살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미지근한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 가는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좋은 하나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떡이지만 여러분은 결코 거기에 삶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리멸렬하게 하나님 안 믿고 사는 사람하고 다를 바 없는 휘청거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특별히 방송에 나올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적도 없지만 하나님의 이 믿음의 경기장에 기록될만한 그런 칭찬할 것도 별로 없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괜찮은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겨우 그런 정도의 삶을 위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 한 사람의 믿음의 위인의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생생하게 오늘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위해 무엇을 던져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능력에 대한 믿음, 나는 거기에 깃발을 꼽고 오직 그 분을 의지하며 살겠다는 신앙의 외침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원하는 순종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V. 시간․공간 안에서 보심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아브라함을 보신 것입니다. 12절은 하나님에 관한 다소 생경스러운 묘사를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입니다. 예전에는 모르셨던 것처럼 지금 처음 아신 것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만물을 보는 또 다른 방식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을 보실 때에도 시간과 공간에 매이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셔서 얻게 되는 지식을 오성 단순지, 더 쉽게 말하면 그냥 단순지라고 말합니다. 이에 비해서 하나님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사물을 보십니다. 즉, 마치 과거에는 못 본 것처럼 미래에는 아직 보지 못한 것처럼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보시는 것입니다. 또 그 지식을 인간에게 전달하십니다. 이것을 신학 용어로 현견지라고 말하는데 라틴어의 어려운 말을 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용어를 현견지라고 확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단순지로 모든 만물을 보십니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생겼기 때문에 그 길을 이용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 많은 사람들은 영동지방을 가기 위해 태백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강릉이라는 도시는 서울사람들에게 가까우면서도 매우 먼 도시였습니다. 달려가면 3시간쯤이면 도착할 수 있지만 밤중에 눈이라도 쏟아지면 언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관령 아흔 아홉 굽이라는 말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어느 때인가 제가 차를 몰고 도대체 몇 굽이나 되는지 실제로 조사를 하며 대관령을 넘었습니다. 그랬더니 정확하게 일흔 일곱 굽이였습니다. 그때에는 사람과 말, 작은 마차가 다니는 길이었으나 이제는 큰 트럭과 차들이 다니는 고속도로 말고도 그 길로 예전에도 차가 다녔기 때문에 아마 길이 확장되거나 가로지르거나 하면서 아흔 아홉 굽이가 일흔 일곱 굽이로 바뀌었던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이제 작은 소형 승용차를 몰고 이제 태백산을 넘습니다. 횡계에서 이제 대관령 올라가는 길로 들어서서 굽이굽이 지나갑니다. 뒤에 있는 것은 앞으로 갔기 때문에 볼 수 없고, 앞에 있는 것은 산굽이에 가려져 보지 못합니다. 그냥 매 순간 핸들을 틀 적마다 새로운 전경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견지입니다. 그런데 나는 비행기를 타고 태백산을 넘습니다. 그러면 나는 비행기 창문 아래로 내려다봅니다. 작은 승용차, 커다란 트럭, 그리고 중형 승용차, 많은 차들이 횡계에서 출발해서 대관령 골짜기를 일흔 일곱 개를 넘는데 그 산을 건너고 지나고 있는 차들이 일흔 일곱 대가 넘습니다. 그런데 비행기에 탄 나는 한 번에 내려다봅니다. ‘어, 저 차 봐라. 잘 달리네. 한 굽이만 지나봐라 커다란 낙석이 떨어져서 거기에 천천히 가라는 신호가 적혔을 텐데.’ 이런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하늘에서 한 번에 내려다보는 것이 단순지입니다.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지 없이는 전능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견지가 없다면 우리 인간과 소통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단순지가 없다면 하나님이 아니고, 현견지가 없으면 인간과는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단순지로 사물을 보시나 현견지로 인간과 소통하고 인간을 교훈하십니다. 실제로 어찌 하나님에게 모르는 것이 있겠으며 하나님에게는 모르시는 것이나 배워야 할 것이나 잊어버리는 작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현재, 과거, 미래를 불문하고 모든 것들은 현재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물을 영원히 현재로 바라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다. 현재적 과거, 현재적 현재, 현재적 미래가 있을 뿐이지 하나님에게는 지나간 과거나 오지 않은 미래 같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히 현실태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치 시간 속에서 어떤 것들을 모르시고 새롭게 아신 것 같은 효과를 인간들에게 전달하심으로써 인간을 교훈하기도 하고, 책망하기도 하고, 의로 교육하기도 하고, 바르게 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험 사건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이 이 명령을 받고 순종할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가슴을 졸이면서 ‘얘가 불순종하지 말아야 할 텐데’ 라고 생각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러한 믿음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표현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잡아서 죽이려고 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표현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심은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도 명백합니다. 나무와 열매는 일치한다는 사실을 비유로 드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 1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하나님의 철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라는 표현이 구약성경에 모두 3번 등장합니다. 창세기 2장 9절, 열왕기하 3장 19절과 25절입니다. 이 용례에서 좋은 나무는 상태가 아니라 종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쉽게 번역하면 “사람의 몸에 좋은 열매를 제공하는 나무가 먹어서는 결코 안 되는 해로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으며,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좋은 열매를 생산하지 않는 나무가 사람이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런 뜻입니다.
자, 가을이면 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아름다운 배 밭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는지 철이 되자 배는 어린아이 머리통 만하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제 그것을 깨끗이 물로 씻어서 그래서 수건으로 물기를 제거한 다음 과도로 깔기 시작합니다. ‘사각’ 하는 소리와 함께 껍질이 까집니다. 벌써 이미 껍질을 까기 시작할 때 과육에 부딪히는 칼날이 수많은 물방울을 얼굴에 튀겨냅니다. 그리고 다 깎아서 하얀 접시 위에 내어 놓습니다. 그 중에 작은 한 조작을 베어서 입에 물었습니다. 그 하얀 배가 입안에 들어가고 드디어 어금니에 씹혔습니다. 이빨과 그리고 혀 천장과 아래 사이를 오랜만에 맛보는 액체가 가득 채웁니다. 두 번, 세 번 씹자 입안은 그 새로운 향기의 과즙으로 가득 찹니다. 꿀꺽 삼킵니다. 그 신기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서 위에서 당이 되어서 온 몸에 순식간에 퍼집니다. (배가 먹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농사를 그만 뒀습니다. 한 3년 동안 찾는 이 없이 배 밭은 버려졌습니다. 그러면 그 배 밭에서는 이제 예전과 같이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그런 훌륭한 맛의 과즙을 품은 배가 생산되지 않습니다. 아주 볼품없는 돌배 같은 배들이 맺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되는 배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이 바로 마태복음 7장 18절의 말씀이 상태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종류에 관한 말씀이라고 강조 드리는 것입니다.
자, 22장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우러러 보이지만 그가 정말로 완전한 사람이었습니까? 이 훌륭한 믿음의 사람, 자기 자식의 목에 칼까지 댈 수 있는 사람이 왜 그랬습니까? 왜 거짓말을 했습니까? 자기의 아내를 목숨이 두려워서 누이동생이라고 속이는 일을 두 번이나 했습니다. 다윗은 안 그렇습니까? 우리 중 누가 나는 회심 이후 단 한 번도 흔들림이 없이 완벽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있다면 넘어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아브라함은 좋은 나무였을까요? 나쁜 나무였을까요? 이제 여러분이 마태복음 7장 18절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자, 이렇게 상상해 보십시오. 울타리가 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울타리를 기준으로 그 울타리 안과 밖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울타리는 동그란 울타리입니다. 이것은 본질에 속한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그 울타리를 넘어서 밖으로 나옵니다. 시간과 공간속으로 물론 이 울타리도 시간 안에 있지만 마음 안에 갇혀 있는 것들이 표현이 되면서 시간과 공간 밖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선한 사람은 그 사람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선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고, 그리고 악한 열매를 계속 맺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본질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완벽한 일치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고, 그것은 사람이 보기에도 시간문제일 따름입니다.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본질과 그 본질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한 번에 알고 계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이런 명령을 받았을 때에 순종할 것인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실제로 그가 모리야 산으로 가서 거기서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버려 놓고 묶인 그 아들을 거기 위에 올려놓고 칼을 뽑았을 때 그것은 하나님에게 새로운 것처럼 느껴지셨던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에게 새로운 것처럼 느껴지는 효과를 우리에게 전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내가 이제야 네가 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여기에서 ‘이제야’ 라는 단어는 히브리말로 ‘아타’라는 단어이고, 이게 ‘에트’ 시간이라는 단어와 서로 동일한 어근이고, 이 ‘아타’는 우리말로 하면 ‘지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미처 모르셨던 것처럼 그렇게 순종하니까 이제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오성지로 모든 것을 아실뿐 즉 단순지로 모든 것을 아실뿐만 아니라 때로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보시는 것 같은 효과를 우리에게 전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뜻을 보이시고 그와 교통하고 그를 교훈하고 격려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얘야, 이삭은 내가 너에게 선물로 준 것인데, 그 사실을 잊었구나. 네 독자 이삭을 향한 너의 사랑이 임계점에 도달했다. 이제 여기서 너는 뭔가를 깨달아야 한다. 이런 심정으로 하나님이 시험을 주신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아브라함은 일생에 잊혀지지 않는 대대적인 각성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건은 12장에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것 다음으로 아브라함의 생애를 흔들어 놓은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아브라함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를 확정하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현견지가 하나님 아니라 사실은 아브라함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한 현견지였음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서로 호감을 갖습니다. 그리고 눈치를 보면서 서로에게 잘 해줍니다. 점점 그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져 갑니다. 둘이 함께 이런 일을 하면 썸을 탄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한 사람이 ‘저는 당신을 너무 사랑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며 그 남자의 품에 안기는 순간 썸은 끝나고 사랑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이렇게 이미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표현했을 때에 자신의 생애도 지축이 흔들리는 놀라운 각성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단순지도 보여주지만 현견지가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줍니다. 사도 바울은 감격에 차서 이 하나님의 현견지에 대해서 로마서 9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긍휼도 완악하게 하는 것도 모두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룬 것입니다. 이보다도 더 우리의 마음을 때리는 결정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여기에서 나오는 ‘이처럼’ 이란 도대체 뭘 가리키는 부사일까요? ‘이처럼’이 무엇입니까? ‘이처럼’이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요한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이처럼’이라고 묘사하셨을까요? 그 묘사는 바로 이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시간과 공간 안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모든 만물을 한 번에 보시는 하나님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인간들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죄를 범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죄를 용서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특정한 시간과 공간속에 오셨습니다. 생명이셨지만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 했고, 영원한 분이시지만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여야 했으니 그 십자가도 장소는 골고다요, 시간은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때였습니다. 보십시오. 독생자를 영원이 아닌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 세상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동시에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나는 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신문 지상을 도배하는 온갖 추잡한 사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들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줍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그것을 표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제일 도움이 되는 충고는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피 어린 고난의 길을 일생 걸어가야 됩니다. 그는 매일매일 신뢰하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도와 준 사람에게 해를 입는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건 이것입니다. 사람은 라이프니치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인간과 인간은 원래 소통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소통이 일어나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이다. 더욱이 사람의 마음은 모든 사람에게 감추어진 비밀이다. 나도 그 사람 마음을 알 수 없고 그도 나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이렇게 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매일매일 잔치합니다. 왜? 그런 줄 알았는데 가끔은 다른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기쁨이 넘칩니다. 그리고 매일 신기해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삶이 좋겠습니까? 이혼 사유가운데 제일 시시껍질한 사유가 성격차이입니다. 난 그런 부부들에게 말합니다. 한 순간의 불꽃처럼 사랑하는 데는 같은 성격이 좋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불길 같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사랑은 공기 같은 사랑입니다. 근데 매일 공기만 있으면 재미없잖아요. 가끔 불꽃놀이를 해야지. 그런 파격의 삶을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의 맛이고 멋이잖아요.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을 향한 경외심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표현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교훈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에 매이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시간과 공간은 무제한이 아닙니다. 표현하십시오.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혹시 내가 잘 해주는 것이 저 사람에게 폭력이 되지 않을지 너무 망설이지는 마시고 선행을 하십시오. 혹시 내가 베푼 선이 그의 기대에 어긋났거나 다른 사람의 선이 나를 불쾌하게 했다면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내일은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초월적인 은혜들을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것들을 표현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그 속에서 숨 쉬는 우리의 승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격하며 믿음으로 살고 기뻐하였던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성경 속에서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단순지로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신뢰했으나 그러나 그런 단순지에 하나님을 신뢰하면서도 현견지 안에서 보시는 하나님을 온몸으로 의식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무엇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할까? 눈을 감으면서 어떤 것들이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여러분의 삶 속에서 표현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의무일 뿐 아니라 신자의 특권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 안에서 그 은혜가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주 고차원의 오락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한 15년 전에 영화 한 편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에이즈에 걸린 남편을 둔 가족들의 이야기였습니다. 15년 전만 해도 에이즈는 거의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AIDS라는 단어를 어떤 사람들은 ‘아이고 이제 다 살았구나.’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공교롭게도 에이즈 의학이 가장 발달한 곳은 미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아프리카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냥 에이즈를 우리의 B형 감염 보균자 정도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정기적으로 주사를 맞으면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생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옹하거나 볼을 부비거나 키스를 하는 것으로는 에이즈가 전염되지 않습니다. 혈액이나 정액을 통해서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15년 전만해도 에이즈는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남자의 부도덕한 행실로 그는 스스로 에이즈에 감염되었습니다. 가족들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긴 토론 끝에 마지막 가족회의를 통해서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그 날이 왔습니다. 자녀들이 세 사람 있었는데 한 사람씩 발언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엄마와 함께 다른 집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세 자녀가 모두 동일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엄마 차례였습니다. ‘참 좋은 생각이다. 너희는 가거라. 그러나 나는 아빠와 함께 정든 이 집에 남겠다.’ ‘왜요?’ ‘시간이 별로 없다.’ 즉 이제 사랑하며 살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모두 용서하고 죽어가는 남편 곁에서 그 남편과 사랑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겠다는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V.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보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시지만 우리에게는 유한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과 공간은 편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두툼한 편지지 책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서너 장 밖에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 마지막 편지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자의 오늘은 편지지 한 장입니다. 이제 몇 장 안 남았습니다. 남은 장수가 모두 장수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언젠가 여러분은 지금과는 달리 휠체어를 타야 되는 때도 올 것이고, 가고 싶은 곳을 자신의 의지대로 갈 수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볼 수 있는 눈은 흐려져 사물을 분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고, 여러분이 중풍이나 혹은 다른 질병에 걸려 말을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남은 편지가 많다고 해서 그 장수대로 남은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살아있고 기동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여러분에게 한 장의 편지지가 주어집니다. 젊은 시절에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개발새발 그리면서 편지지를 낭비했습니다. 그리고 좀 더 나이가 먹어서 신앙이 든 후에는 은혜가 떨어져서 졸다가 쓴 사람 글씨처럼 읽을 가치가 없는 편지글을 남겼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때는 그나마 편지지가 많이 남아 있어서 습작이라도 해보았는데 이제 만져보니 몇 장 남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제 어느 순간에 우리의 손에 펜의 잉크가 떨어지듯이 우리의 혈관의 피가 마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의 혀가 굳어질 것입니다. 편지지가 모두 끝나는 것처럼 우리의 호흡이 멎고, 어느 날 이 모습 그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이제 몇 장 남지 않았습니다. 이 편지를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열애의 편지로 사연으로 가득 채워도 모자랄 편지지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게 사시렵니까? 하나님의 단순지와 현견지에 대한 유장한 철학을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렸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오늘 바로 이 편지지를 마지막으로 만지작거립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 놓여 있는 편지지는 어제 죽은 사람은 받을 수 없는 편지지입니다. 어떻게 살 것입니까? 지금 여러분은 어떤 편지를 써내려가고 있습니까? 정말 이렇게 아브라함처럼 철저한 순종으로 눈물의 편지를 쓰고 하나님께로부터 환희의 답장을 받고 계십니까? 똑바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2018.3.25. 주일오전3)
믿음과 시간 · 공간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약 2:21-2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이 야고보가 예수님의 형제인 것은 마태복음 13장 35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습니다. 야고보 선생이 이 편지를 쓸 때 수신자는 흩어진 유대인들로써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써 가난하며 또 박해를 받고 있는 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썼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박해로 인해서 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했고 세속주의의 풍조가 밀려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미명하에 실천이 없는 것을 정당화 하는 그릇된 안정감이 교회에 팽배했던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아주 엄중히 비판하고 하나님의 신앙을 바로 세우고 있습니다. 동시에 또한 야고보서는 역사적으로 많은 오해도 받기도 하였습니다. 야고보서의 비판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임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귀신들도 믿고 떠드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신학적으로 역사적인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허탄한 자들이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침으로써 진정 그 믿음이 온전해진 것처럼 사랑이 없는 삶은 곧 행위가 없는 삶이고 이것은 믿음을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행위 없는 믿음의 결과이고 따라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만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몸과 같이 불완전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II. 야고보서의 비판과 오해
A. 야고보서의 비판
당시에는 변질된 믿음이 교회 안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수신자들은 유대인들로서 기독교인들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가르침이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면서 많은 오해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행위가 있는 신앙의 삶을 살아보려고 했던 이 사람들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시간이 흘러 신앙이 부패하면서 그들은 오히려 이기심 때문에 행위의 실천을 경시하는 풍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이신칭의의 교리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비판했습니다. 이것을 야고보는 죽은 믿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복된 교리가 오히려 이기심을 가지고 거짓 신앙을 은폐하는 은신처로 사용되었습니다. 야고보서는 마치 적진을 폭격기로 공격하듯이 이러한 논리들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B. 야고보서에 대한 오해
역사적으로 야고보서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믿음과 행위를 대조시켜서 이단들을 양산한다고 하는 비난도 그것들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복음 신앙을 떠나 율법적 행위를 강조하였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야고보가 과연 기독교 신학에 대해서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신학적인 의심들도 있었습니다. 더욱이 바울의 칭의 교리와의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가르쳤지만 야고보 선생은 그런 교리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다시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율법주의로 돌아가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 27권을 확정할 때에 특히 종교 개혁자들이 정경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받아들였을 때에 논쟁이 되었던 책이 바로 야고보서였습니다. 마르틴 루터와 같은 위대한 종교 개혁자들도 이것을 어쩔 수 없이 신약 성경 중 한 권으로 집어넣으면서 그렇지만 다른 성경에 비하여 가치가 적은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주장하였을 정도로 이 야고보서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이제 앞으로 여러분들에게 펼쳐 보이겠습니다마는 이것은 야고보서에 대한 전적인 오해이고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바울의 이신칭의와 함께 한 맥락을 형성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는 성경의 한 책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논증해 보이겠습니다.
III. 시간 · 공간의 문제
A. 네 종류의 믿음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입니다. 이것에 대한 오해 때문에 야고보서에 대한 많은 억측과 그리고 비판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은 네 종류의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인 믿음입니다. 도덕적인 영적인 반응이 없이 역사적으로 있었던 어떤 사실에 대해서 지적인 동의를 하는 것이 역사적인 믿음입니다. 야고보 선생이 너희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느냐 마귀도 믿고 떠드는 믿음은 마귀도 가지고 있다고 질타를 하고 있는 이 믿음이 바로 역사적인 믿음입니다. 일시적인 믿음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어떤 씨는 옥토에, 어떤 씨는 가시밭에, 어떤 씨는 길가에 뿌려졌다고 묘사하셨습니다. 바로 돌짝밭에 떨어진 씨도 있었습니다. 돌짝밭에 떨어진 씨 그리고 가시밭에 떨어진 씨는 길가에 떨어진 씨와는 다릅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아무런 생명의 작용을 하지 않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돌짝밭과 그리고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는 일단 뿌리는 내렸습니다. 그러나 돌짝밭에 떨어진 씨는 햇빛이 내려쬐자 말라버렸고 그리고 가시밭에 떨어진 씨는 자라기는 했지만 그 가시에 에워싸여서 결국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고사해 버립니다. 앞에 있는 셋은 모두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마지막에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30배, 60배, 100배 결실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돌짝밭과 가시밭에 떨어진 씨가 바로 일시적인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중생한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믿음이며 일시적인 정서의 자극과 종교적인 흥분을 통해 무엇인가를 느낀 거 같지만 그러나 영혼까지 변화시키지는 못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기적적인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자신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 또 기적이 자기를 위해서 발생한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구원 얻는 신앙을 동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B. 야보고의 언어 플레이
가장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신앙은 구원적 믿음입니다. 중생한 마음에 뿌리를 내린 능동적인 믿음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옮아가고, 죄와 사망의 법이 끊어지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져 그래서 마음과 삶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경외하면서 살고자 하는 능동적인 믿음입니다. 야고보는 언어 플레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언어 플레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야고보서를 읽으면서 이신칭의의 교리와 모순이 되는 것 같은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언어플레이는 이것이니 믿음이라는 이 중요한 단어를 똑같은 낱말이지만 야고보 선생은 두 의미로 섞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라는 표현이 나왔을 때에 정확히 이 믿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분별해내지 않으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두 가지 의미를 섞어서 사용하며 언어 플레이를 했는데, 첫째는 당시 수신자들에게 유포되었던 의미입니다. 즉, 그들은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나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4절에서 야고보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 믿음은 하나님 사랑에 뿌리를 내리는 믿음이 아닙니다. 지식으로는 동의를 하여 역사적인 믿음이기는 했으나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없기 때문에 거기는 자기 사랑이 하나님 사랑으로 바뀐 흔적이 없습니다. 문화는 받아들여서 기독교적이지만 본성의 거룩한 변화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이 믿음은 그냥 원래의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 그냥 거짓된 믿음, 사실은 믿음이 아닌데 수신자들이 믿음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그런 종류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또 다른 의미로 사용을 하는데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교훈하신 원래의 고유한 의미에서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진정으로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며 중생을 통해 영혼에 뿌리를 내리고 회심을 통해 의식 세계 안에서 그것이 인식된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원리는 바로 생명과 성령의 원리이고, 죄와 사망의 법이 무너진 그 자리에서 생겨난 신자의 내면의 원리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려고 하는 성향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접붙여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는 믿음이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자원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변화된 본성의 사랑과 그리고 그의 밖으로 나타나는 행위가 일치하려고 노력하는 능동적인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고 하지만 가짜인 믿음을 말할 때에도 믿음이라는 단어를 썼고, 참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말할 때도 믿음이라는 단어를 써서 섞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기에서 혼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고보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입니다. 편지를 받고 있는 이 수신자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논증하고 싶어 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라고 한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 너희들이 소위 믿음이라고 부르는, 그러나 사실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닌 그런 종류의 믿음을 뜻한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결코 이들이 구원에 이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한 구절을 오늘 본문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21절이 우리가 읽은 본문에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큰 혼란을 느끼게 하는 발언입니다. 오늘 야고보 선생은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요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그 순종의 행위 때문에 불확실했던 그의 믿음이 온전해졌다든지 그렇게 자기 자식을 제단에 바쳐 죽이려고 하기 전까지는 그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확실한 믿음이 아니었다든지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더욱이 믿음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지만 행위가 거기에 보태짐으로써 비로소 그 믿음이 믿음답게 되었다고 하는 의미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의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갈등을 좀 했겠지만 결국 그 믿음을 따라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단에 바쳤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죽어도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삭을 죽이기 위해 칼을 들었습니다. 그를 막 내리치려는 그 순간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결국 이렇게 됨으로써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단순지 안에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이 일치할 것을 알고 계셨던 하나님이 현견지 안에서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보셨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온전한 믿음임을 입증했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하나님과의 친교가 등장합니다. 시간 안에서 표현된 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객관적으로 입증했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C. 문제의 해결
그러면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문제의 해결에 이르게 됩니다. 첫째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변화를 통한 본성의 변화가 있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갖기 전까지 그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지성적으로는 온 우주의 중심에 자기가 있는 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과 모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데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의지적으로는 실제로 자신을 사랑하여 이 우주 안에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섭니다. 이때 그는 모든 인생의 불행이 이러한 자기 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이 그의 마음속에 새로운 성향을 주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기를 사랑하는 성향에서 바뀌어 하나님 사랑하는 성향으로 이동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혼이 본질적인 변화를 경험함으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본성의 변화를 동반하게 됩니다.
안과 밖을 한꺼번에 보는 것은 하나님의 단순지입니다. 그러나 현견지는 그렇게 동시에 볼 수 없고 더욱이 인간의 마음은 통찰할 수 없기 때문에 밖에 드러난 것을 통해 안에 있는 것을 추측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견지입니다. 인간은 단순지로 인간의 마음과 그 마음에서 어떠한 행동이 나올지를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드러난 행동을 보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추측합니다. 사람이 일을 할 때 자꾸 덤벙대면 그 사람의 본성이 덤벙거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과격한 행동을 하면 파괴적인 본성이 있다고 믿고 우리는 조심하게 됩니다. 수다스럽고 말이 아주 많으면 그 사람 마음속에는 무언가를 떠벌리고 사람들을 헐뜯는 성향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추측은 대부분 맞지만 맞지 않을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밖에 사람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추측하며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데 이러한 지식들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에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어야지만 비로소 그 열매를 통해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판단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묘목으로 심겨져 있을 때에라도 그 나무가 어떻게 자라고 마지막에 무슨 열매를 맺을지를 한 번에 아십니다. 단순지로 사물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런 점에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신자는 내면의 세계에 혁명적인 변화가 온 사람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내면의 품질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런 내면의 진정한 변화를 경험한 신자는 외면의 생활에서도 내면에 있는 그 변화를 구현해 나갑니다. 내면의 변화와 외면의 변화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내면과 외면의 변화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고 거듭나 참 구원 얻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저절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 사랑을 버리고 남을 위해 희생하고 자비와 긍휼과 용서를 베풀며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한 인간이 독립적이기 때문에 독립적인 인간의 의지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사람 안에 자기 사랑에서 하나님 사랑, 그리고 자기 행복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본성을 우리에게 주시지만 그러나 그 거듭난 본성은 언제나 행사될 때에 우리의 의지와 함께 우리의 의지 안에서 행사되는 것이지 우리의 의지 없이 우리의 의지에 거슬려서 행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구원 얻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저절로 이웃을 사랑하고, 저절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완벽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산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교훈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입니다. 매순간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순간 그 거룩한 본성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는 부패한 자신을 만납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우리는 그 싸움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매순간 행하는 의지의 행사에서 우리는 깨닫고 회개하고 결단하고 감격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바른 길로 교훈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순지로 모든 사물과 사람을 보십니다. 행함이 없는 신자 안에 믿음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한 번에 보십니다. 행함이 있는 신자 안에 참 믿음이 있다는 것도 하나님이 한 번에 보십니다. 둘 중 어느 것도 주님께 새로운 것이 없으니 신앙이 없는 신자가 악을 행할 때나 신앙이 있는 신자가 선을 행할 때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것도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단순지로서만 모든 것을 보실 뿐 아니라 때로는 현견지로 보시는 분인 것처럼 그 효과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십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주님께도 실망스럽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우리에게만 기쁠 뿐 아니라 주님께도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실망과 기쁨을 우리에게도 전달받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책망을 받게 하고 격려를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 자비, 긍휼의 마음의 정동을 겪게 됩니다. 즉, 우리가 남을 향해 오래 참고 또 참으려고 애를 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가치 없는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고 선하게 대해주는 자비를 베풀 때마다 그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것을 이기고 끊임없이 자비를 베풀려고 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자비롭게 대해주셨는지를 경험하게 해주십니다. 고통에 처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깁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비참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려고 하는 의지의 행사 속에서 비로소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얼마나 큰 긍휼을 베푸셨는지를 알게 되며 우리의 마음에는 정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 안에 행위가 없을 것을 한 번에 아시지만 또한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순간순간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을 베푸는 것을 보면서 당신은 감격하고 우리는 그 감격이 느껴지게 함으로서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기로 격려를 받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질타한 사람들은 바로 그들에게 참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서 ‘나는 믿음이 없다. 오오 재앙이로다. 내가 어찌하여야 믿음을 가질꼬?’ 탄식한다면 희망이 있을 텐데 믿음이 없는데 이 사람들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구원 받지 못했는데 이 사람들은 구원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의 행위를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그리스도께 더 착한 사람이라고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두 율법을 가르침을 따라 사는 선한 생활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믿음으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스스로 타락하고 그리고 방탕 하는데 위로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야고보가 질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워진 것을 무너뜨리지 아니하고는 새로운 집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모두 참 믿음이 아니고, 사실은 믿음이 없는 것이며 정확하게 말하면 믿음이 없는 것을 아는 것보다도 더 큰 재앙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심하게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표는 이것이었으니 그들이 자신들이 믿음이 있다고 속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을 갖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생활의 완벽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의 원리로서 그들의 생활이 지배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들의 생활의 원리는 이기심이었습니다. 그 이기심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라 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부자가 교회에 오면 좋은 자리를 내어주는 이런 잘못된 행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과 다름이 없는 똑같은 물질주의에 흐른 세속주의의 모판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믿음이 있노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진정으로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내면의 원리를 이기심을 통해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짓 믿음에 속지 말아야 했습니다. 참 믿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러한 위험은 오직 야고보 선생 시대 때 이 수신자들만 가졌던 위험일까요? 지금은 야고보 선생 같은 사람에 의해서 이런 믿음이 공격을 받고 질타를 당하여야 할 필요성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고보 선생이 있었던 때보다도 지금은 더 심하게 이신칭의의 교리를 거짓된 방법으로 이용하고 그리고 오히려 자신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방종하게 사는 색욕거리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히 잘못된 것이고, 오히려 이런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결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님은 보여줄 것입니다. 허구헌 날 무위도식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일 수 있을까요? 악을 행하며 양심에 찔림이 없는 사람,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며 자기 욕심대로 살면서 괴로움이 없는 사람들이 정말 거듭난 사람들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아무리 유리해도 구원은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삶으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진실성을 표현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이제야 네가 나를 믿는 줄 알았노라 하는 그 기쁨이 여러분들 마음속에 있습니까? 술에 술탄 듯, 물에 물을 탄 듯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있는 것도 결코 아닌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주님도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아닌 그런 삶은 절반의 구원이 아닙니다. 절반의 구원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도 몸과 마음을 드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 싶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순종? 그런 것으로 구원 얻는 게 아니야. 봉사? 봉사 아무리 많이 해도 구원 얻는 것이 아니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 나는 믿거든.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에 구원의 진실성은 자기 생각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지옥에도 천국에도 결코 여기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궁금하실 것입니다. 나의 믿음은 정말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었을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에게 한번 물어 보십시오. 나는 삶으로써 내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표현하고 사는가 말입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삶으로 표현할 때에 하나님이 이제야 네가 나를 믿는 줄을 알았노라고 하는 그 기쁨이 있는지를 한번 반성해 보십시오. 설교자가 연 초부터 끊임없이 무위도식하면서 살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요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정말 살아있는 믿음일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엄마의 목소리를 압니다. 그리고 엄마는 본능적으로 길가의 아이들과 함께 섞여서 놀이를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울음소리가 자기 자식의 울음소리임을 압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정말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각이 없이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여러분들에게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위협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아주 분명하게 오늘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얘기는 구원은 받았지만 좋지 않다 이런 뜻이 아니라 믿음이 있노라고 행함이 없으면 믿음도 아닌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게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이 얘기입니다. 처음부터 그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느꼈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한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떡거리며 지적으로 동의를 할 수는 있습니다. 잠시 참된 영혼의 변화가 없어도 양심이 찔림으로 가슴이 뛰거나 종교적인 어떤 기쁨 속에서 마음속에 즐거운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내 믿음이 정말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 이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쓰다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에 있는 믿음을 가졌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내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입증하면서 살고 싶다. 그렇게 사는 삶이 아니면 나는 인생에 진정한 기쁨이 없다.’라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가 한순간도 어김이 없이 하나님 사랑을 표현하면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도 순간순간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침체로 잠시 마음이 식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계속해서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구원 얻은 신앙이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신자는 신자의 일생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진정한 믿음을 매순간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이 현견지로써 보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기쁨으로 그것을 입증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매일매일 신앙의 감격 속에서 삽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진정으로 믿는 것을 아노라.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아노라. 이제야 네가 나를 위해 충성되게 일하는 것을 아노라.’ 이런 하나님의 현견지 안에서의 감격을 매일매일 느끼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정체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아무리 많이 반성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그 확신을 따라서 믿음으로 매 순간 매 순간 하나님 앞에 그 믿음을 입증하며 살아야 합니다.
IV. 적용과 결론
하나님을 기뻐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심리적인 연애 감정은 그것은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며 산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셨고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가슴이 저미도록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과 공간 속에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봐오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사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은 바로 이것이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믿게 하심으로 우리를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털어놓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고 그 분의 수중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공간을 이미 잃어버렸고, 더 많은 시간을 상실했습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과 공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설교를 하고 설교단을 내려갈 때, 주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방을 들고 돌아갈 때, 해외 선교에 나가서 말씀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거의 예외 없이 생각합니다. 내가 몇 번이나 이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있을까? 내가 몇 번이나 이 교회에서 주일을 지키고 축도할 수 있을까? 내가 몇 번이나 더 이 선교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우리는 더 긴 세월동안 그 일하기를 원해도 하나님은 일정한 한도 안에서 우리에게 공간을 주시고 시간을 주십니다. 종종 우리는 사랑에 빠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을 사랑합니다.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것을 제공하지만 막상 사랑하고 나면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모든 것을 무로 돌아가게 만들고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그것들에 애착하는 나 자신도 사실은 시간 속에서 소멸할 육체를 가질 존재입니다. 쓰러져 가는 것으로서 쓰러져 가는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때로 이런 생각은 말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아냅니다. ‘아, 결국은 이렇게 한정된 공간에 잠시 살다가 한정된 시간에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우리 인간이구나.’
여러분들은 몇 번이나 더 이 설교자의 주일 설교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변이 일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여러분들이 들을 수 있다고 해도 주일 설교를 여러분들이 들을 수 있는 기간은 불과 400번 정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일찍 데려가신다면 그보다 훨씬 더 짧은 횟수만 남아있을 것입니다. 저만 그렇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나와서 연약한 신자들을 돌보며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누구의 부축을 받지 않고 자기 발로 걸어와서 여기에서 예배를 드리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 자기 발로 걸어서 하나님 인도를 받으며 자기 집에 돌아갈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너무나 짧은 시간 밖에는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나의 인생의 막이 내리고, 더 이상 찾는 이들이 없는 시간이 올 텐데 이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가 하고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지만 우리는 유한합니다. 한정된 시간과 공간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냥 허송세월 하라고 주어진 시간과 공간이 아닙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겨우 겨우 누리는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이 당신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현견지 안에서 고백하라고 주신 시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매일매일 감격하며 그 하나님께 진정한 기쁨의 삶을 우리들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지로 모든 만물을 보신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또한 현견지 안에서 우리를 보시는 것처럼 당신의 효과를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줄을 어린 아이처럼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살아있는 이유가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어찌하든지 그 분의 마음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아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혈관의 피가 흐르는 동안에 그리고 우리의 코에 호흡이 붙어있는 동안에 우리의 혀가 우리의 입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동안에 우리는 온몸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선물 구원받은 이 믿음이 우리 안에 정말 있다는 것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표현함으로 하나님이 현견지 안에서 우리를 보시고 매순간 매일 기뻐하실 수 있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흘려보내는 하루하루의 삶은 얼마나 안타까운 것일까요?
지금으로부터 벌서 한 30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전철을 타고 오는 차 안에서 잡지 한 권을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때는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노동 운동의 투사와 같은 대부였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50이 훨씬 넘는 나이에 신학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 분은 중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대학원 신학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허름한 무인가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복음 전도자의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가 인터뷰 속에서 남긴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드리는 기도가 있다고 했을 때 그 기도는 내 마음을 때렸습니다. “저는 내가 부족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난 부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부탁이 있습니다. 똑똑하고 가진 것이 많이 있지만 게으른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 내보내시고 나를 그 자리에 보내주십시오. 제가 목숨을 바쳐서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섬겨드리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 기도가 완벽하게 응답이 안됐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영원 안에서 “얘들아, 너희 구원 받아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시간과 공간 안에 사시고 그리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멸시와 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위해 희생하고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는 삶이 순간순간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렸던 것은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게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몸을 우리를 위해 화목 제물로 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크게 움직이고 양심에 떨림을 경험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영원 속에만 계신 분이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가슴이 저미도록 아프고 눈물이 흐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분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리고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 헤매는 사람들에게 길을 비춰주시고, 사랑할 힘이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힘을 베풀어 주신 분이기 때문에 그 분과 접촉한 모든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피 흘리시고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깨드려 제물로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현견지 안에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섬겨야 할 때입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에서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으로 살고 안일에 빠져서 일락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하늘의 신령한 기쁨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기쁨의 현견지는 당신을 기쁘게 하면서 시간과 공간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설교하고 싶은 내용은 아직 마음에 많이 있지만 여기서 맺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있는 하루를 소중하게 여깁시다. 공간 안에서 눈 뜨고 시간 안에서 숨 쉬는 것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주님이 시간과 공간 안에 살아가는 우리 때문에 기쁘실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도 주님의 기쁨에 동참하면서 살 수 있도록 우리 온 몸으로 삶을 살아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2018.4.8. 주일오전4)
열매 없이 알리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약 2:21-2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천국 백성의 생활의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부분은 결론 부분으로서 참 백성과 거짓 백성들이 최후의 심판을 받을 것을 예고하십니다.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좁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 길은 매우 좁고 험하여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걸어가는 길도 생명의 길이요, 도착하는 곳도 생명입니다. 넓은 문은 들어가기 쉽고 넓은 길은 친구도 많고 많은 사람이 쉽게 걸어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필시 사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II. 열매로 사람을 앎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심판 받을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이 임하기 전인 지금도 참 신자와 거짓 신자를 구별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 유명한 나무와 열매의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은 열매로 사람을 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거짓 선지자들을 예로 드셨습니다. 그들의 속임수는 훌륭한 성공을 거두었고, 많은 백성들이 속아 넘어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양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의 모습을 하고 그들의 형제인 것처럼 그들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되게 전하였습니다. 많은 백성들은 그 속임수에 넘어가 참 생명에 이르지 못하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하는 법과 교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무와 열매는 일치하게 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나무를 보아서는 그것이 무슨 나무인지를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열매를 통해서는 그 나무가 무엇인지를 반드시 알게 되는 것처럼 거짓 선지자들의 삶의 행위를 보면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와 열매의 비유는 새로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에서 사용된 그런 문학적인 표현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좋은 나무라는 표현은 세 번 등장합니다. 창세기 2장 9절과 열왕기하 3장 19절과 25절에 등장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좋은 나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드실 때 그 유익함을 보다 더 협소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식용으로 먹어서 인간이 유익을 얻을 수 있느냐 입니다. 그 기준에 따라서 그럴 수 있는 나무는 좋은 나무, 그렇지 못한 나무는 나쁜 나무라고 결론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 좋은 증거가 바로 예수님이 포도나무를 가시나무와 짝을 이루어 대조하시고 무화과나무를 엉겅퀴나무와 짝을 이루어 대조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포도나무는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열매를 제공하는 나무입니다. 땅이 좋은 물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물을 잘못 마시면 풍토병에 걸리고 석회가 쌓이고 몸이 굳습니다. 포도는 그런 음료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훌륭한 식물입니다. 더욱이 음료만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포도는 많은 영양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올리브와 포도는 없어서는 안 되는 생존을 위한 매우 중요한 열매였습니다. 이에 비해서 가시나무는 가시 이외에 인간에게 무슨 유익한 열매를 줍니까? 가장 쓸모없는 나무이고, 인간은 그 가시나무를 통해서는 어떠한 유익도 얻을 수 없습니다. 무화과 열매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풍부한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의 주식과 같은 식품이었습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먹을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엉겅퀴는 무슨 열매를 맺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익을 줍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는 식용을 하여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나무이고, 나쁜 나무는 그런 열매를 주지 못하는 나무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참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 섞여있는 사람들도 겉으로 보아서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삶의 행위의 열매를 통해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구별할 수 있으니 그렇게 구별하며 분별력 있게 살아가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판단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자신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나무와 열매의 기준을 가지고 자신을 성찰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된 백성들은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방종하게 사는 기회로 삼습니다. 그러나 참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더더욱 또 다른 높은 구원을 갈망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의 열매를 보면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어떤 사람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라도 여러분 자신은 삶의 열매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자극하여 자신을 객관적으로 살피도록 도와주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삶 속에 반성과 회개라고 하는 것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은 천 길 물속과 같아서 그 마음의 주인인 우리 자신에게조차도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인간 자신은 인간 자신에게 가장 낯선 타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들이 자기를 성찰하며 살아야 할 필요를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하루를 보내고 무의식중에 흘러나왔던 자신의 행동과 행위들을 추적하면서 그런 좋은 것들이 혹은 나쁜 것들이 마음의 어떤 뿌리에서 나왔는지를 헤아리는 성찰과 반성이야 말로 진정으로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의 양심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의 삶을 정밀하게 살펴서 나의 이러한 행위의 열매가 어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지를 성찰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기를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보다 더 앞세우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그날에 있을 심판
이어서 예수님은 그날에 있을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요지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최종적인 하나님의 판단과 같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도 가르치십니다.
A. 부른 자와 행한 자
그러면서 제일 먼저 말씀하시는 것이 부른 자와 행하는 자입니다. 그날에 구원 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예수님께서는 입으로 주님을 받은 자가 모두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이 행동은 단순히 입술의 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여주는 외적인 종교생활 전체를 제유법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겉모습으로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예수 믿는 사람처럼 비슷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들어갈 자격을 얻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자가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먼저 하늘에 계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세계와 만물을 초월하여 온 땅과 하늘위에 높으시고 그리고 위대하신 거룩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모든 삶의 최후의 심판자가 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신자들은 영혼의 변화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무슨 이유로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아가는 것이 이득이 되었기에 그런 삶을 선택했습니다. 교회 안에 많은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러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의 수가 매우 적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까지도 진정한 거듭남과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교회 나오지만 그러나 그것은 신앙의 동기가 여러분들을 교회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드리는 이 주일 예배 한번은 일주일동안 여러분들의 양심을 달래주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 시간에 다른 장소를 택하지 아니하고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그것입니까?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고 교인 흉내를 하루 냈기 때문에 일주일을 양심을 달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오히려 격렬하게 양심의 지탄을 받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위해 십자가 앞으로 나오는 사람을 더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수없이 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움직이지 않는 영혼이 과연 하나님 앞에 구원 받은 사람입니까? 잠자는 것이 무슨 자신의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일주일 내내 영혼의 잠을 자다가 주일날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그들을 찌르면 잠시 게슴츠레 눈을 떴다가 예배가 끝나면 다시 잠든 영혼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일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무위도식하며 사는 것이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과연 변화된 영혼을 가진 구원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그런 식으로 싸구려로 팔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엄청난 행위를 하고 헌신을 하여야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영혼의 변화 없이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내세우는 것,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고 권능을 행한 것도 하나님의 뜻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어떠한 위대한 일을 해도 하나님은 고마워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놀라게 해드릴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한 일은 인간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사고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이 그에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 쫓고 권능을 행한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영혼에는 진정한 변화가 없고 마음에는 뼈가 가득하고 행위로만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람의 모습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하는 일과 그의 변화된 영혼이 일치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준으로 놓고 볼 때에 오히려 이들이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고 권능을 행한 것은 위선이었습니다. 아무리 착한 일이라도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이 악인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위선이라고 부릅니다. 위선에 대해서는 모든 악에 대한 것과 동일한 하나님의 시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행함에 있어서 동기를 중요한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십니다. 이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신자들에게는 참 이 일을 해야 할 올바른 마음의 동기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었을 것이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며,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기회를 제공했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전에는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다투고, 부요해지기를 다투고, 그리고 더 많이 소유해지기를 다퉜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교회에 들어옵니다. 교회에 와서 또 다른 이유로 높아지고 싶어 하고, 더 많이 존경받고 싶어 하고, 더 많이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싶어 합니다. 똑같은 악인인데 운동장만 세상에서 교회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 운동장이 바뀌었고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매우 훌륭한 사람으로 칭찬해 주셔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히려 세상 바깥에서 복음을 듣고 갈 길을 몰라 흐느끼고 있는 끔찍한 죄인들을 더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겠습니까? 결국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외적인 생활로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정말 여러분들의 생활에 있어서는 기독교적인 모습이고 교인과 같은 모습이고, 신자 같은 모습이고, 종종 설교를 들으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기도 하지만 정말 그렇게 변화된 본성을 가진 사람입니까? 어차피 믿는 것대로 다 행할 수는 없다는 말을 튼튼히 붙들고 자기의 부도덕하고 불충한 생활을 정당화하며 살아가는 뻔뻔스러운 그리스도인은 결코 구원 받은 사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도 때로는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악한 것을 심지어 꿈꾸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신자에게는 회개의 눈물이 있습니다. 나의 존재가 주님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데서 오는 서러운 후회, 나의 행하는 것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에 비하여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자책에서 오는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눈물이 있습니까? 언제 여러분들이 마음 깊이 눈물을 쏟아내며 이 모습 이대로 나를 받아달라고, 주님 앞에 더 온전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용서해 달라고, 내가 나인 것이 하나님께 너무나 죄송하다고 빌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시간에는 점심 약속과 집안에 기다리고 있는 많은 일들 대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떠올라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입니까? 그러니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마음은 점점 강퍅해지고 심령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 질병에 가깝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질 때 죄악에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주여, 주여,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만족한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주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선지자 노릇 안하고 귀신 안 쫓아내고 권능을 행치 않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선지자 노릇한 것이 잘못되었고,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을 행한 것이 잘못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일이 이루어지는 방식의 문제가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사람됨과 행함 사이에 일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열매 같은 행동을 하는데 사실은 나쁜 나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좋아 보이지만 그것은 먹을 수 없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몹쓸 나무였던 사람이 좋은 나무 같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이 거듭나고 회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새 본성을 받는 것입니다. 열매는 나무에서 나오고 열매는 그 나무가 좋은 열매임을 입증하는 그러한 존재와 삶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함과 행함의 일치의 기준이 진실과 선함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어떤 사람이 남의 물건을 훔쳐간 다음에 집에 돌아가서 그 물건을 만지작거리다가 양심이 움직여서 내가 그 사람과 얼마나 친한 사이인데 이런 나쁜 짓을 했을까 라고 생각을 하고 그 집을 찾아가서 훔친 물건을 돌려주며 내가 이렇게 잘못해서 당신의 물건을 훔쳤으니 나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것은 그것은 사람됨과 행함의 일치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실하고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것은 해당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자기가 아는 사람을 악한 사람이 찾아갑니다. “내가 네 물건 훔쳤어. 그런데 좀 가져가면 어때? 나는 서로 나누어 가져야 된다고 생각해.” 이렇게 솔직해지는 것은 존재와 행함의 일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인이 자신의 악을 거침없이 바깥으로 쏟아내는 것이어서 행위로 옮기지 않고 마음에 감추고 있는 것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더 큰 심판을 불러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이것이었습니다. 나쁜 사람이 변하여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가시와 엉겅퀴 같은 나무가 포도나무와 무화과처럼 바뀌어서 거기에서 완전히 다른 열매를 생산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방식으로 변화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을 생각나게 합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7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즉,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중요한 뜻은 이것이니 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가 모든 선한 일을 온전하게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나뉜 두 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러니 완전한 사람에게서 완전한 선한 행실이 나오고 완전한 선한 행실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그가 하나님 앞에 완전한 선에 이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매우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꿈꾸는 사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이루어진 사회입니다. 그것을 이 세계 전체에 구현하시기 전에 먼저 맛보기로 작은 사회를 샘플로 만드셨습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세상 사회에서 하던 생활 습관을 그대로 교회에 가지고 들어와서 정치하고, 비웃고, 그리고 방관하고, 사랑의 원리를 전혀 따르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좋은 나무와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된 적이 없는 인간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지 않도록 경계를 삼으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됨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의 일치입니다. 이 사람됨과 행함이 일치를 이룰 때에 하나님 앞에 그 사람은 말할 수 없이 보배로운 존재가 됩니다.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축출하고 권능을 행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이 본성이 변화되지 않은 악한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행한 일은 불법이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불법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아노미야’라는 단어인데 ‘아’는 ‘없다’는 뜻이고 ‘노미야’는 ‘법’이라는 뜻입니다. ‘법’ 혹은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이루실 사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법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모든 윤리적인 교훈 속에 핏줄처럼 흐르는 것이 바로 이 법입니다. 이 법에 대해서 요한복음 13장 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즉, 사람들이 자기 사랑을 버리고 변화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소유함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법 때문에 이웃도 사랑하게 되는 그런 사회를 하나님이 꿈꾸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법이라고 할 때에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이 되는데 하나는 공표된 규칙으로서의 법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이후부터는 이러이러한 쓰레기를 버릴 수 없고 만약 무단 투기하는 사람은 100만원에 벌금에 처합니다.’라고 입법 고지를 합니다. 그리고 법이 명령하는 날짜에 이르면 그 법은 자동으로 작동을 하며 어긴 사람들은 처벌 받게 됩니다. 그것이 법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의미가 아닙니다. 두 번째 법의 의미는 실효적인 힘입니다. 우리가 이런 표현을 씁니다. ‘참새가 방앗간 옆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지.’ 그것은 나라의 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참새 자신 속에 있는 낱알을 좋아하는 본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사랑을 법으로 규정하시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성령이 오셔서 모든 믿는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사람 속에 새 본성을 주시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것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저 사람은 왜 죄를 지었습니까? 죄를 지으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처럼 세상에 달라붙어서 꿀물을 빨아도 옛날에 그 맛이 아닙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일단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사람이고, 이 사람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도 그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안돌아오면서 계속 살면 그에게는 칠흑과 같은 고통의 날, 매일매일 모레를 씹는 것 같은 괴로운 나날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안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과 사랑의 생활은 결국 마지막에 일치하게 됩니다. 사람이 사랑에 빠져서 애인이 생기고 나면 ‘기승전애’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마지막에 애인으로 끝납니다. 사람이 변화를 받고 영혼에 새로운 본성을 부여받아서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지게 되면 ‘기승전하’ 무엇을 하든지 마지막에 하나님으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게 결국 인간의 숨길 수 없는 본성의 변화입니다. 사랑이 없는 실천은 그 사랑의 원리에 의해 지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행한 많은 섬김은 거짓된 섬김이 되어 버렸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조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무슨 행동을 섬기든지 그것은 변화된 인간의 변화된 사랑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법한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행동을 해도 악인이 그것을 행하면 위선이 됩니다. 사랑의 법을 버림으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행하여야 하겠습니까? 먼저 여러분 자신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사람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자연의 모든 만물을 선의로 대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그런 마음의 본성의 진정한 변화가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본성에서 아주 정확하게 그 본성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온전히 행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여러분들을 향한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행위를 관찰하면서 그 행위를 더듬어가서 그 뿌리인 우리 자신의 마음과 영혼이 어떠한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를 지각하면서 거기에서 우리에게 어떤 행위가 흘러나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는 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자일 경우에는 내가 행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니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그것이 후자일 경우에는 하나님이 악을 행한 것이 아니요 내가 스스로 선택하여 나쁜 행실로 기울어졌으니 나의 가슴을 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나의 존재와 삶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 하도록 변화되게 해달라고 회개의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나는 이미 도달했다. 나는 이미 얻었다 함이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그런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기를 위해 고뇌하고 자신의 삶이 무위도식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훌륭한 선한 행실의 삶이기를 목마르도록 간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고민이 있습니까?
침묵 속에서 훌륭하게 올바른 태도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용납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울려 퍼졌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졌으면 그에 대한 영혼의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힘을 다해 예배를 드리고 설교한 후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여러분들을 보면 설교자는 마음이 무너집니다. 내가 살이 있는 낙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어 새 삶을 살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 모든 목회자의 면류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보여드릴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경외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의 행위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도무지 알지 못함
마지막 23절을 다루려고 합니다. 23절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줍니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도무지 알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도무지 알지 못하니’ 희랍어 성경에는 ‘우데포테 에그논(oudepote egnon)’ 이라고 나옵니다. ‘우데포테’라고 하는 이 단어는 영어의 의미가 아주 강한 부정입니다. 영어로 하자면 ‘never’의 정도의 뜻입니다. never를 두 번 정도 반복해야 되는 뜻이라 보면 됩니다. never, never ‘결코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에그논’이라고 하는 말은 ‘알았다’, ‘우데포테 에그논(oudepote egnon)’ 이니까 ‘결코 알지를 못했다.’ 그 뜻입니다. 여기에서 ‘에그논’이라는 동사는 직설법 제 2 부정 과거시제 능동태 1인칭 단수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희랍어에서 ‘에어리스트’라고 불리는 제2부정 과거의 시제가 의미하는 바가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제2부정 과거 시제는 과거의 한 순간에 단회적으로 끝난 사건을 지시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주여, 주여’ 이름을 불렀고 선지가 노릇하고, 귀신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 사람들을 처음에는 예수님이 알고 사랑하셨다가 나중에 나쁜 짓을 하니까 예수님이 ‘에이, 이놈들하고는 관계를 끊어야지.’하고 모르게 되셨다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지금 이들은 예수님 앞에 심판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시점을 조금 뒤로 옮기면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 다음에 귀신을 쫓아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면서 말씀에 감동을 받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면서 저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야 라고 감탄의 박수를 보냅니다. 눈에 띄는 놀라운 기적들을, 권능을 행합니다. 그래서 병든 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지 하고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습니다. 그때도 기준이 아닙니다.
그때도 기준이 아니라 더 뒤로 갑니다. 더 뒤로 가면 이 사람들이 이제 막 성장해서 하나님의 사람인 것처럼 흉내를 내고, 교회를 다니고, 제사에 참여하고, 의식을 행합니다. 더 뒤로 갑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더 뒤로 갑니다. 그럼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이 사람들이 태어날 것이 주님에게 작정되었고, 그리고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을 하나님이 예정하십니다. 그때에도 예수님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열매를 보고서야 예수님이 ‘아! 이 사람들은 내가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제 내가 알겠구나! 나는 너희를 모르는 자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주님이 모르셨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설교제목이 “열매 없이 알리라”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매 없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매 없어도 그 사람을 꿰뚫어 보시는 그리스도의 단순지 안에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열매 없이도 열매를 보시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초월적인 단순지 안에서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한 번에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모두 알려주시지 않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지상에 계실 때에도 종종 당신의 신의 성품 안에서 이런 놀라운 단순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47절에는 나다나엘을 부르시기 전에 그를 이미 알고 계셨던 그리스도의 지식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그를 알고 교제하고 그의 행위를 살피지 않으셨는데도 한 번에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나다나엘을 보시며 사기성이 없는 참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한 번에 아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라고 하셨을 때 신앙이 좋았던 사람이 악해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인정을 취소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현견지로써 사람을 알지만 주님은 단순지로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의 변화되지 않는 영혼과 본성을 위선적인 열매로 감추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소망이 없는 짓입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우리가 모두 새 사람이 되어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새 사람은 새로운 사랑의 사람이고 새 삶은 사랑의 법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사람이 자신의 마음과는 다른 세상에 살면서 그런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 이 땅의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부분적으로는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왔고, 세상에 임했으나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나라를 그리워하고 갈망하며 상한 심령으로, 그리고 굶주린 자로, 목마른 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주님의 기대입니다.
거짓 선지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참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참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습니다. 겉으로 선지자 노릇을 흉내 내고, 귀신을 쫓아내는 흉내를 내고,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을 행하는 흉내를 낼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두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 갔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바로 겉만 번지르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생활이었던 것입니다.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눈물로 하나님의 기대와 이스라엘 백성의 현실 차이를 고발합니다. 이사야 5장 2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라고 하나님의 탄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땅을 파고, 돌을 제하고, 그리고 극상품 포도나무로 여러분들을 심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망대를 세워 침입자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그 안에 술틀을 파서 좋은 열매로 아름다운 음료를 만들어 하나님과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좋은 포도는커녕 한 번 맛본 사람이 모두 뱉어버리고 땅에 던져버리는 들포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살아서 마지막 심판대에 우리가 그 분을 무슨 면목으로 뵈올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됨에 대한 주님의 관심은 그의 행함에 대한 관심을 능가합니다. 구원받은 신앙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방종하게 사는데 활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단순지 안에서 자신이 구원받았고, 그분에게 아신 바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오히려 매 순간 하나님의 현견지를 깊이 인식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말했습니다. “너와 나 밖에 없으니 한 번 즐긴들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또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 현견지로 요셉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단순지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해와 달과 열한별이 자신에게 절하게 되는 날이 오게 할 것이라는 것을 믿었지만 그 믿음이 확고하였기 때문에 바로 둘 밖에 없는 그 방에서 하나님의 현견지를 뼈저리게 의식하며 죄짓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깊이가 신앙의 깊이입니다. 좋은 행위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셨던 은혜를 회고하게 하고, 나쁜 행위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악을 행했던 자신을 반성케 함으로써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자신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님을 찾기에 목마른 사람들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은혜로써 붙드십니다. 죄의 길에서 돌이키는 사람들을 은혜로 붙드시고, 그리고 자신의 존재의 미천함에 인하여 고뇌하며 하나님 앞에 열매 맺는 삶을 살기를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을 자만하게 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그들을 붙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떨까요? 예수 믿는 사람의 흉내를 내고, 수없는 시간 동안 예배당을 들락거렸는데, 그 날에 ‘우데포테 에그논’,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을 듣는다면 그 날에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오늘날 이 예배드리는 광경이 어떤 추억으로 스쳐 지나갈 수 있습니까? 이 미래의 일을 지금 현견지로 인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거짓 선지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을 따라 다니는 거짓 신자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가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그러면 여러분들은 마지막 날에 우리 주님께 어떤 평가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우데포테 에그논’이라는 이 말씀을 안 듣고 싶다면 그럼 여러분들은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자신의 영혼과 본성의 변화 여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행위를 통해 추적해서 내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고뇌하고 주님께 은혜를 구하며 회개하는 죄인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찬양)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
주님은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떠들썩한 종교행사에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그의 얼굴을 구하며 용서를 빌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바로 거기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단순지로서 구원을 확신하고, 현견지로써 삶의 열매를 맺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현견지를 알 때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 22:59-6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체포되고 심문 받으시는 광경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체포되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자신을 모두 쏟아 붓는 간절한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임박한 자신의 십자가를 능히 감당하고, 또 이 땅에 남겨진 제자들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도록 간절히 매달리셨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은 철없게도 서로 누가 높으냐고 다투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오시는 것은 섬기는 자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가르치심으로 그들의 교만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1절에서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를 굳게 하라”하였습니다.
II. 그리스도를 부인함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경고의 말씀을 하찮게 여기고 자기를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버려도 옥에 갇히는 데까지 죽는 데까지라도 예수를 따라가겠노라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하는 제자들 중 한 사람의 배신에 의해 체포되어 대제사장의 뜰에까지 끌려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대제사장의 뜰에까지 끌려가셨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이것은 철저한 신앙의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이 실패는 우연한 것이 아니었으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산에 있을 그때에 이미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54절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합니다.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미 실패했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체포되어 끌려가실 때에 베드로는 멀찌감치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이미 죽는 데까지 따라 가겠다고 하는 그의 결심은 간 곳이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훨씬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이러한 실패는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실패에서 예견된 바였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에서 45절은 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다음과 같이 대조합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영적인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아직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지만 십자가의 고통은 이미 예수님의 영혼 속으로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시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생명이신 그분에게는 죽음이 거리가 먼 것이었고,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이신 그 분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끊어지는 것은 비록 육체만이라고 할지라도 영혼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밀려오면 밀려올수록 예수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기도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기까지 이 이야기는 땀 속에 피가 묻어나왔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러한 경험을 해보지 못했지만 일주일씩 금식 기도를 하고 난 후에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그야말로 영혼과 육체의 고혈을 짜서 하나님 앞에 더욱 간절히 매달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영적인 위기에 맞서는 대신 오히려 슬픔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 슬픔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만드는 경건한 슬픔이 아니라 슬픔의 감상이었습니다. 이런 감상은 경건의 토대를 허물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거룩한 삶을 좀먹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순간 용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속적으로 그 분의 말씀에 붙들리는 은혜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견고히 붙들어 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해 일관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더욱이 그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뚜렷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 삶이 더욱 일관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질 때 그때 우리는 변덕이 심한 굴곡진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한때는 누가 더 높으냐고 다투더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셨더니 예수를 위해 죽는 데까지 따라 가겠다고 합니다. 대제사장 말고의 귀를 쳐서 칼로 떨어 뜰이더니 그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체포되시니까 비겁하게 예수님 멀찌감치 떨어져서 망보듯이 쫓아갑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까지 맹세하며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마태복은 26장 7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이 울더라” 위기의 순간에 대응하려면 늘 은혜 안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쟁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데도 국민들이 엄청난 세금을 내고 나라는 그것을 국방 예산으로 씁니다. 평범한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가지고 그 귀중한 젊은이들을 징집하고, 그들을 힘들게 훈련을 시키고,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월급을 주고, 퇴직금까지 주고 그리고 어쩌면 한 번도 쓰지 않고 폐기할 첨단 무기를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 구입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무기를 개발하고 그 무기를 생산합니다. 어마어마한 예산이 들어갑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지만 언젠가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질 때 그때에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온 나라가 며칠 만에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그 한 순간을 위해서 장고한 세월을 매일매일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나머지 백성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신앙도 꼭 같습니다. 한순간 훌륭하게 영적인 위기에 대응하여 승리한 것은 하루였다고 하더라도 그 승리하는 하루를 위해서 그는 참으로 긴 세월동안을 하나님의 은혜로 그 순간을 대비하며 산 사람입니다. 이와 반대로 한 순간에 무너진 사람은 그 나쁜 일이 그날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랜 세월동안 그의 마음이 은혜로부터 멀어져 마음이 부패하고 그리고 그러한 실패를 충분히 준비했던 것입니다. 누가 자신이 베드로보다 훌륭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한 때 자기를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회개하고 배와 그물을 모두 버리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온갖 고생을 하며 3년을 예수님과 함께 섬겼고,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었고 모든 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는 영적인 권세를 부여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실패한 사람으로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을 그때에만 하나님의 사람이지 주님이 놓으시면 그는 그저 평범한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주를 배반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현견지를 의식할 때
오늘 우리들이 정말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다음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현견지를 의식할 때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그때에 두 번째로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몸을 돌이켜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눈빛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멸시와 조롱, 배신감에 이글거리는 분노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냥 따뜻한 눈빛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베드로가 당신을 배반하기 전에도 그럴 것을 아셨고, 그를 위해 기도하셨고 그가 돌이킬 것을 아셨고, 그 후에는 형제를 굳건하게 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A. 말씀이 생각남
예수님의 눈빛과 마주쳤을 때 베드로의 마음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이것을 성경은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닭이 두 번째로 우는 소리에 예수님의 눈빛과 마주쳤습니다. 누가복음 22장 61절은 말합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예수님인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를 흘리시기까지 기도하실 때에도 베드로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체포되어 고통을 받으며 끌려가실 때에도 베드로의 마음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포박 당한 채 심문을 받으실 때 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 몸에 고난의 흔적인 역력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베드로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목숨을 예수보다 사랑했고 그래서 비겁한 배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이켜 그를 바라보시는 순간 두 눈이 마주쳤고, 그러자 베드로의 온 마음이 떨리며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단순지로서 베드로의 배신을 알고 계셨습니다. 명백한 예언의 말씀을 주셨으나 베드로는 자기가 실패할 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보다는 자기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단순지 보다는 자기의 판단력을 굳게 믿다가 실패하였습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판단을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책상 앞에 앉아서 성경책에 빨간 줄을 긋는다고 해서 성경을 많이 터득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많은 책이 있지만 성경처럼 독특한 책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학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은 문을 굳게 닫지만, 비록 학식이 모자라도 자신의 삶 전체로서 그 분을 경외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을 엽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는 신자들의 심리는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설교를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경건 서적을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이해하고자 하는 갈망이 없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오직 하나, 하나님의 판단을 분명하게 알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알아도 어차피 그렇게 안 살 텐데 살지 않는 사람에게 그것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더하는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진 신자들이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피하려하고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삶 전체를 지성과 함께 묶어 그 말씀을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열리는 책입니다.
(예화)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를 틀었습니다. 누가 나와서 여성이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온 마음으로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그 마음에 묶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은 하루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하여야 하는 일입니다.” 불교 방송이었습니다. 이교도들도 그 진리를 터득했습니다. 올바른 앎이 있다면 그것을 마음에 묶지 않는 한 결코 그가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교도들도 그 사실을 아는데 진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습니까? 그러니까 삶이 변덕스러운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기독교 신앙의 분위기에 있을 때는 예수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지만 잠시 후에는 세상을 향한 사랑을 끊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은혜를 갈망하면서도 죄에 가깝고 죄에 있으면서도 은혜를 그리워합니다. 원래 죄인의 마음 그 자체가 ‘컨트래딕션()’입니다. 수많은 모순율들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이 죄인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 위에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지식도 현저하게 결여되었을 경우에는 사실 껍질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제 그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다양한 상황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때려 주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게도 하시고, 평안했던 우리의 삶이 흔들려 풍파를 만나기도 합니다. 모두 우리의 마음을 때려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자리에서 여러분들은 누가 높은지를 다투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실패를 예고하시는데 여러분들은 죽는 데까지 갈 수 있겠다고 장담하고 있습니까? 막상 예수 그리스도가 체포되셨을 때 두려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 따라오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앞에 계시는데 그 분의 등 뒤에서 그 분을 부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지 않을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꽃밭을 걷던 우리들을 가시밭길로 내몰기도 하시고 잔잔한 바닷가를 산책하던 우리를 배에 태워 큰 파도가 뒤움치는 바다 한 가운데 보내시기도 합니다. 그 속에서 위기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깨우쳐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 마음이 떨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눈빛과 마주쳤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무시했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눈빛과 다시 마주쳐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잘못을 회개함
마지막 두 번째는 잘못을 회개한 것입니다. 6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희랍어 성경에 이 동산은 ‘에클라우센’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흐느끼거나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지르며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 후에 그는 깊이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슬픈 사람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밖으로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이게 참된 회개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베드로는 이렇게 펑펑 울고 뉘우친 후에 죽는 데까지 예수를 따라간 것이 아니라 결국은 예수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후로도 두려움 속에서 숨어 다닌 것을 보아서 이 뉘우침이 진정한 회개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눈빛과 마주친 그 순간에 그는 양심에 깊은 찔림을 경험한 큰 후회를 하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보지 못하던 어리석던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눈빛과 마주치자 말씀이 생각났고,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주님의 현견지를 인식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믿음이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단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오직 자기 밖에 보이지 않았고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사랑한 것은 자신의 목숨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관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요동치면서 교만하고 높아졌다가 혹은 희생을 장담했다가, 두려워했다가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사라지자 신앙의 일관성도 함께 사라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새벽닭이 울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빛과 마주쳤고 이 때 하나님의 현견지를 의식했습니다. 양심에 깊은 찔림을 경험하고는 밖에 나아가 심한 통곡으로 뉘우쳤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의 지식에 뿌리를 내린 깊이입니다. 단순지 안에서 그 분을 깊이 신뢰함으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 단순지를 모두 설명할 수 없어도 그 분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 때문에 그 단순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자신의 신앙을, 인생을 얹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현견지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매순간 하나님이 보시는 눈빛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옷깃을 여미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지 안에서 담대한 확신을 가졌다면 최후의 승리를 믿게 되었다면 현견지 안에서 매순간의 승리가 바로 나의 믿음과 순종이 없이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매순간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단순지로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만큼 현견지로써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는 새벽닭이 울 때 예수님의 눈빛을 보았고, 그 따뜻한 눈빛을 보면서 양심의 큰 찔림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심한 통곡과 눈물로 뉘우쳤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들의 삶의 환경 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려주십니다. 그 이유는 두려워 떨거나 자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새벽에 우는 닭소리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눈빛과 마주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깊이 생각나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 누가 요동치지 않고 예수만을 위해서 살고 따라갔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라는 교부는 말하기를 인간은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잘못한 사람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잘못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야 합니다. 헛된 영광, 헛된 기쁨, 희망이 없는 바램을 따라 사는 마지막 결과가 아무것도 아닌 허허로운 삶이었음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스도 없는 삶은 희망이 없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은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삶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보다 자신의 목숨을 사랑했지만 새벽닭이 울 때 그의 양심의 깊은 찔림을 경험하며 지옥 같은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과 마주치지 아니하였더라면 더 뻔뻔스러운 배신의 길을 걸어갔을 베드로가 오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것입니다. 연약하여 또 잘못할지라도 지금은 양심의 깊은 찔림을 경험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눈빛과 마주쳐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IV. 적용과 결론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자 베드로는 하나님의 단순지도 현견지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눈은 어두워져 끌려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멀찌감치 따라가며 목숨을 위해서는 하시라도 예수를 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닭이 울 때 예수 그리스도의 눈빛과 마주쳤고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현견지를 의식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그의 양심을 깊이 찔렀고 그는 자신의 실패에 대해 심한 통곡과 눈물로 뉘우쳤습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말씀이 생각나 잘못을 뉘우쳤다면 여러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새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매일매일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현견지를 온 마음으로 의식하며 신앙의 옷깃을 여미고 오늘 하루를 잘 살아서 그 분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려고 하는 착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이렇게 말씀이 생각나서 뉘우치고 새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