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
녹취자: 박은희
아까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씀하셨지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얼마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물러가는 침체기가 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조심하셔야 될 것은 침체기가 오는 것은 절대로 숙명이 아닙니다. 나는 오히려 우리교회에서도 10년씩 목회자인 나도 저 정도면 ‘이제는 미끄러질 때가 되었는데’ 하는데도 안 미끄러지는 지체들을 여럿 만납니다. 그래서 침체가 마치 사람들은 운명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물론 여러분! 결혼을 해보셔서 알겠지만, 결혼생활은요 사실 좀 깰 때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 연애할 때는 신비하고 그러다가 살아보니까 ‘아이, 이런 인간이였구나 그리고 정말 내가 참 잘못 골랐다.’ 그럴 때도 있지마는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전부다 다 결혼생활 자체가 흔들릴 정도의 그런 권태기나 침체기를 겪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절대로 영혼의 침체에 빠지는 것은 이제 운명이 아니다 숙명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결국은 부패한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버려두면 늘 썩는 음식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침체에 빠지는 사람들 대개 보면 여러 가지 환경적인 것도 있고 많은 것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마지막 파고 내려 가보면 마지막에 딱 하나로 귀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생활을 끈을 어느 시점에서 놓친 것입니다. 놓쳐서 이미 영혼의 공급되는 힘이 없는 상태에서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은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미국을 갔는데 트리니티 신학교라는 아주 유명한 곳인데, 거기에 가서 거기 있는 교수들과 대화를 하다가 아주 재미있는 통계를 제시하더라고요. 뭐냐 학생들 600여 명을 대상으로 앙케트를 냈는데, 그렇게 과중한 공부에 시달리면서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매일 성경을 읽고 성경을 외우는 사람들입니다. 아주 그것을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자기가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은 공부에 압박이 있고 막 이래도 계속 영적으로 성장을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주저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해 가지고 온 것입니다. 사실은 맨 처음 올 때 한 50분 정도 설교하려고 준비하고 왔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가서 제가 짧게 하고 요약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원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시험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시험을 두고 파괴적인 시험이 있고 창조적인 시험이 있다고 그럽니다. 파괴적인 시험은 뭐냐 하면 우리를 처음서부터 파멸로 몰고 가려는 사단으로부터 온 시험이고, 그 다음에 또 다른 종류의 시험은 하나님이 우리를 복주시기 위한 시험이다 그래서 전자의 시험은 우리아 아내 밧세바와 들었던 다윗의 시험이고, 후자의 시험은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을 받았던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이다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실 그 말이 말도 안 되는 말은 아니지만 좀 더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깊이 들어가보면 그게 아니라 오히려 이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중립적인데, 우리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이끌리냐의 따라서 똑같은 중립적인 시련인데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주는 시련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이 그 시련을 당할 때 파괴로 가는 시험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 보십시다.
(예화) 여러분들은 이렇게 모두 좋은 이야기만 했지만 각자 각자가 자기의 삶에 무게를 느끼면서 사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안 느낀다면 무게가 없어서가 아니라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커서 그래서 무게를 못 느끼는 것이지 우리 모두 삶의 무게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달에는 참 감사하고 행복하면서 살았는데, ‘쿵’하고 어떤 사건 하나 일어나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나처럼 불행한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어머니 아버지 동기간 누구 비롯해서 내 인생의 하나도 도움이 안 되고 꼭 마치 나한테 빨대 꽂고 빨아먹는 사람처럼 이렇게 되고, 남의 집은 동기간 때문에 덕도 봤다고 그러고, 부모가 유산도 물려주었다 그러고, 얼굴도 모르는 외삼촌이 죽으면서 유산이 갈 때가 없어서 자기에게 왔다고 그러고 이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철저하게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꼬이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나 혼자 짊어진 짐은 왜 유독 나만 이렇게 어마어마한 짐을 지고 이렇게 살아가야 되나 하는 한계가 ‘확’하고 어느 한순간에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노략질 당하는 것은 한순간이야, 한순간. 우리 모두가 각자 엄연한 삶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오늘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릴려고 합니다. 뭐냐 하면 시험을 당할 때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은 시련을 당할 때 우리 모두 시련이라는 것들을 가지고 있잖아요.? 유혹을 받는 것 그건 이야기 할 것 없고, 그것은 뿌리치면서 살아야 될 성질이고 우리 시련을 받는데 말입니다. 근데 그 많은 시련은 내가 선택한 것도 있지마는 나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내가 그런 집안에서 태어났거나, 아니면 그런 직장에 다니거나, 그런 상황에 내가 있기 때문에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 현실에 내가 왜 있게 되었을까? 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밀칠려고 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안 해 보았겠습니까? 나는 왜 이런 가정에 태어났을까? 나는 왜 이런 나라에 태어났을까? 나는 왜?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본적 없지마는 나는 왜 이런 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하고 있을까? 우리 목사님은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한테 2교구를 맡겼을까? 안하겠지, 안하겠지만 그러면서 상담하면서 ‘너도 또 2교구야? 딴 데는 그렇게 좋은 사람들 가는데, 2교구는 왜 그렇게 글자 그대로 2등만 되는 사람만 와도 괜찮을 턴데 왜 이럴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그대로 해줍니다. 어떤 때는요 어느 정도로 괴로웠냐 하면 이게 내가 직면하며 살아야한다는 현실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 괴로워서 끊어버리고 싶고, 예수 믿고 나서도 어떤 때는 그냥 오늘 저녁에 조용히 눈을 감고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안 되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받아들이고 이게 나와 헤어질 수 없는 나의 일부이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현실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은 들어보십시오. 주신 것은 내가 이것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면 여기서 아주 찬란한 빛이 난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너무나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신앙을 우리들이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화) 저희들이 결혼하기 전에 제가 중학교 다닐 때에 우리 아버님이 김장로랑 같이 춘천에서 살으셨습니다. 춘천에는 그때에 뭐가 많았냐 하면, 섬유공장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섬유공장 하니까 그게 뭡니까? 누에를 치는 장사가 많았습니다. 누에를 치면 누에가 27일 인가 만에 이제 애벌레에서 변해서 고치를 남기고 나오쟎아요? 마지막에 그 애벌레가 변해서 나방이 되는 것입니다. 나방이 되면 거기에서 꽁지를 이 고치에다 매달고 몸뚱이부터 튀어나와가지고 날겠다고 막 날개를 합니다. 그게 이제 그러다가 죽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을 공장에서 버리면 애들이 그것을 갖다가 프라이팬에다 볶아 먹습니다. 나방! 되게 맛있습니다. 아주 메뚜기 맛하고 똑 같습니다. 뭐 같은 곤충인데. 그런데 그러면서 막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그게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며칠 걸리는데 그 과정을 통해서 이 꽁지가 여물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그런데 그것을 불쌍해서 쑥 빼주잖아요? 그러면 결국 못 납니다. 꽁지가 질척질척해가지고 땅 바닥에 딱 붙어가지고 날갯짓 막 하다가 그냥 죽어버립니다. 우리들은 항상 하나님께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한 다음에 양탄자 위에 걷고, 빨간 카펫 위에 걷고, 스포트라이트 받고, 트로피 받고, 그리고 건배하고, 그리고 임금의자 같은데 앉아서 하나님 찬송하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를 믿어서 복을 받는다.’ 라고 할 때에 인생이 완전히 변하여 금시발복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예수를 안 믿었더라면 그냥 불행한 이유로 밖에 남지 않았을 바로 그것을, 우리를 예수 믿게 하셔서 하나님 바라보게 하시므로서 우리를 불행할 수밖에 없게 하는 그 요인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불이 나는 광경을 여러분들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불이나면, 집이나 이런 것들이 타며는 타는 물건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다 각기 다른 냄새, 다른 소리 ,다른 빛깔을 내면서 탑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플라스틱 같은 것들은 붉은 불꽃을 내는가 하면 거기에 무슨 구리 같은 것들이 탈 때에는 파란 빛을 내면서 막 타오릅니다. 그리고 나무에도 종류에 따라서 각각 다른 냄새를 내면서 타오릅니다. 어떤 나무는 탈 때 좋은 향기를 내면서 태우지만 플라스틱은 유독가스를 생산하면서 탑니다.
이처럼 다양한 빛깔들을 내면서 타오르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황 상황자체에, 우리에게서 이것을 끊어버리고 싶어 하는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독특하게 주시는 앞으로 은혜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교회에서 언젠가 정서장애아를 가진 부모가 나와서 그 열린 뉴스에서 인터뷰하고 간증하는 것을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부부들이 우리교회에 여럿 있습니다. 사실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 그럴 때에는 부모의 마음은 무너져 내리잖아요? 그래서 요즘들은 ‘영아살해’라 그래서 아이들이 적합하지 않다고 그러면 속에서 그냥 몇 개월씩 된 아이를 막 죽여 버립니다. 살인입니다. 그런데 이 부모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고 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을 통해서 부모가 너무나 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런데 그 부모들은 그것을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이 시련은 얼마나 그렇게 변화될 가능성이 많은 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시련이 커서 망한 그리스도인, 시련이 너무나 크고, 시험이 크기가 커서 주저앉은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모든 시험을 주관하시는 통치자이시고, 또 그 시련을 우리에게 극복할 힘도 주실 수 있고, 피할 길도 주실 수 있고, 그것을 막아 주실 수도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시험이 너무나 커서, 시련이 너무나 강해서, 우리들이 무너지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무능한 분이시다 라고 하는 고백이라 이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이것입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은혜를 위한 방편이었는데, 우리가 우리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부패하고 신앙에서 물러갔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복주시고 변화시켜주실 그 놀라운 것들이 우리에게 시련이 되었던 것입니다.
얘기가 나왔으니까 방금 예화로 든 예증으로 든 그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치라는 아브라함이 받았던 명령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다시 인치시고, 이름을 아브라함이라는 이름답게 하나님 앞에 복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쟎아요? 자, 그럼 생각을 해 보십시오. 어느 사람이 지존하신 하나님이 거역할 수 없는 엄명으로 “네 자식을 모리아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죽여서 나에게 제사로 드려라.”라고 할 때에, 그것이 우리에게는 정말 놀라운 축복의 수단이 될 것입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말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하나님 앞에 번제로 받은 사건이 없었으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 속에 있는 믿음을 충분히 끌어내셔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불행해지고, 오히려 하나님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그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런 불행한 시험이 아니었더라면 주실 수 없는 복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잖아요?
(예화) 우리교회에 은혜 많이 받은 자매가 한번 새벽기도 끝나고 내가 하도 바쁘니까 시간을 내서 거기 벤치에 앉아서 나한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잠깐. 뭐냐 하면 파출부로 나가서 일을 하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파출부로 나가면 사람들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취급을 안 하거든요. 파출부를 막 대하고 왜 이렇게 했냐고 그러고 그렇게 할려면 오지 말라고 그러고. 그런데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표를 가지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든지 다른 사람보다 더 희생해야 됩니다. 그러면 사람이 느껴지는 것이 있잖아요? 똑같은 돈 주고 썼는데 저 사람 뭡니까 마음가짐이 틀리더라. 처음에는 똑 같이 무시했지만 “다음 주에도 오슈! 다른 사람 부를 필요가 없겠네. 아줌마가 계속 오슈!” 그러면 나중에 이제 말이 통해지면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우세요?” 이제 “사실, 내가 이렇게 좋은 집에 살지만......” 이야기 나오는 거예요. “네, 기도 해줄께요.” 그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돈도 적고 가난하게 살고 우리 집에 와서 걸레질이나 하면서 일당 받아 가는데, 나보다 더 행복해 보인다 말입니다. 그래서 상담을 하는 거예요. 어느 날은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거예요. 성경을 공부하는 거예요 이제 선생님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뭐라 했냐하면 항상 새로운 집으로 갈 때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일을 행하실까 기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그러면 그런 삶의 목표의식이 있으면 당장 받는 시련이나 부당한 대접 그건 문제 안 됩니다. 솔직히 우리가 먹고살게 없어서 화장품이라도 팔겠다고 이걸 들고 가서 문을“딩동~!딩동”하는데 “아이! 시끄러 죽겠네, 도대체 잡상인이 여기 왜 들어 오냐?”고 그러고 문을 ‘쾅’ 닫으면 얼마나 비감하겠어요? 그런데 뭐냐 하면 나 저보다 더 잘살거든! 뭐 잘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주신 은혜가 더 크거든! “딩동”거립니다. 열린 교회에서 왔습니다. “방황하지 말고 예수 믿으십시오.” 그러고 문을 ‘쾅’ 닫으면서 “쓸데없는 여편네들이 돌아다니면서” 그러고 욕을 해도 우리는 돌아서면서 마음이 넉넉한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는 높은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비참하다거나 비굴하다거나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것을 정리해보면 오늘 성경을 보면 “시험을 만나면 기뻐해라” 그이유가 뭐냐 하면 세상에 누가 괴로움이 좋고 시련이 행복하다는 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 다 지난다음에 하는 이야기지, 강아지도 밟으면 깨갱거리는데 누가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라가셔서 이것 좀 지나가게 해줄 수 없냐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 하셨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런 괴로움과 고통과 친근해 질수 없는 것입니다. 지나온 다음에 ‘아, 그때 나 참 괴로웠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괴로웠어도 그때가 하나님 앞에 행복한때였구나.’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지 당시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다 행복할려고 하고 좋아질려고 하고 그렇게 생각하지 불행하고 괴로울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 이겁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속에서 기뻐하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 이냐하면 현실을 보면서 거기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찾아서는 누구도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사업의 위기가 오고, 직장에서 쫒겨나게 되고, 그다음에 아내가 덜컥 병이 들어서 눕고, 내가 지금 사망선고를 받고, 아이들이 가출을 하고, 위기가 닥치고 이러는데 어떻게 거기서 행복할 수 있습니까?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한 것이지, 현실에서 희망을 찾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넘어서. 그래서 나는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내가 믿음으로 살면 반드시 이 말도 되지 않는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아름답게 사용해 주실 것이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가족구원에 대해서 우리 5월달에도 계속 설교했잖아요. 그러면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 교회에서 어느 교인이 나한테 그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도 가족들의 회심을 강조하니까, 가족들이 회심하지 않으면 자기가 죄인인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든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은혜냐? 당신이 변화 받지 않았더라면 맨날 그런 자기 남편위해서 기도도 안하는 사람들이 대개 ‘남편은 어떻게 주님께 돌아오셨습니까?’ ‘그 인간은 안돼요. 하나님이 한 대 갈기셔야지’ 그건 안 된대.” 그런 사람들이 대개 자기 남편위해 기도도 안하는 사람입니다. 자식들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우리들의 경험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심히 봉사하고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복 주실 때 우리는 교만할 수 있습니다. 변화되지 않은 우리 가족을 보면서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눈물로 매달리면 결국은 뭐냐 하면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그런 가족들이 오히려 나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이야 여러분들 자신은 지금 전부다 자기 자신을 양이라고 소개 했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염소도 있습니다. 자기들은 염소라도 그냥 양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이동원 목사님이 사석에서 어느 사람이 그랬습니다. “목사님, 다른 교회 양들을 다 뺏어갔다고 동네 목회자들이 싫어합니다.” 그랬더니 이동원 목사님이 나보고 그럽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봤는데, 나는 자기네 양 한 마리도 가져 온 적이 없어. 염소만 우리교회로 왔어.” 그런데 다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회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려움이 닥치고 괴로운 일들이 왜 없겠습니까? 그렇죠? 있으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매달리면서, 오늘 성경에 기록 된 대로 ‘내게 이것을 헤쳐갈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은혜를 주십시오.’라고 기도 하지 않는 동안에는 그게 그냥 괴로움의 원인 일뿐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일 뿐이지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결국 두 개입니다. 지성의 총명함과 의지의 힘입니다. 이두가지를 하나님이 은혜로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고, 매달리고, 아버지 앞에 간구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매달리면, 그러면 오히려 그것 때문에 나의 침체되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게 되고, 고통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도 시련 속에서 원망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사단의 궤계입니다. 누구도 여러분들은 시련을 당할 때 그 시련을 가져다준 원인을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누구 때문이야.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누구도 원망하면 안 됩니다.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이것이 나의 일부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부끄럽지 않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온 것도 하나님이 이렇게 나에게 모자라는 것, 시련과 역경을 통해서 주님께 온 거잖아요? 그래서 내가 말씀드리잖아요? 예수 믿을 이유가 있는 사람만 예수 믿었지, 안 믿어도 되는 사람 중에 예수 믿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라고 하는 것은 항상 아픔이었지 기쁨이 아니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와서 신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어떻게 봐야 될지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고 있는 이 삶의 모든 무게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것을 품으십시오. 그리고 그 품었을 때 아프고 힘듭니다. 그때가 어느 때냐 하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고 은혜를 구해야 될 때, 그래서 지혜를 구하고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의 그런 시련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새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 그걸 풀고 나면 끝날 것 같지요? 그러면 잠시 시간이 지나면 또 미끄러지기 시작합니다. 또 다른 시련이 어떤 때는 돈으로 시작했다 돈으로 돈으로 돈으로 이렇게 나가는 것은 없습니다. 돈으로 시작되었다가 물질로 축복을 받으면 그다음에 정신적인 고통, 모든 것들이 다 나아지면 자녀들의 아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옮겨 가면서 하나님은 강하게 우리들을 훈련시키면서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아, 그렇구나! 이 세상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셔서 형통하게 하셔도 이세상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아니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 은혜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믿음 생활 해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 까지. 그 이외에 쉬운 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모든 것은 거짓입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를 안 믿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에 대해서 말할 때 “제일 행복한 것은 안 태어나는 것, 두 번째 행복한 것은 빨리 죽는 것, 그리고 그것도 못한다면 세 번째 행복이 있는데 좋은 법대로 정의를 가르쳐주는 국가에서,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고 하는 부모 밑에서, 인간의 참된 길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을 만나서, 그 가르침을 따라 똑같이 살려는 좋은 친구들과 어울린다면, 그것이 세 번째 행복이다.” 그러는데 그 충족 불가능 하거든요.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격려하면서 믿음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이기면서 살 때, 그때에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시련거리가 그것을 극복할 때에는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우리에게 비춰주는 그러한 훌륭한 도구들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