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절기설교 (2012.09.30 주일오전설교) 광야길을 인도하신 하나님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편 136:16) |
I. 본문해설
시편 136편은 시편의 분류상 찬송시입니다. 특별히 이 찬송시는 4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절부터 3절까지의 서론을 제외하고 나면 136편 전체가 창조주의 위대한 능력에 대한 찬송, 10절부터 15절까지는 출애굽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21절까지는 광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능력, 마지막 절까지는 가나안에 정착하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16절 본문은 14절부터 16절로 이어지는 출애굽의 능력에 대한 찬송 속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한 후에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말하고 이 16절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II. 하나님이 하신 일
A. 애굽에서 구원하심
시인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두 가지로 요약을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어떤 일 때문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셔야 했는데 첫 번째 일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압제에서 건져내신 구원의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 역사 속에서 두고두고 찬송의 제목이 됩니다. 여러모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탈출할 가능성이 전무하였습니다. 그들은 강력한 나라 애굽의 왕, 바로의 권세 아래에 있었습니다. 당시 애굽은 오늘날 미국과 중국, 러시아를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바로는 번성한 이스라엘 민족을 국가 건설을 위한 노동력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였기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하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가나안을 떠나 애굽에 정착한지 4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하나님, 위대한 여호와에 대한 이야기는 듣고 있었지만 그들의 신앙은 매우 침체된 상태였고 하나님의 어떠한 구원의 행동에 대한 기대도 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권고하셨다고 되어있지만 이것은 신앙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구원을 호소하고 새로운 비전을 요구한 것이라기보다는 바로의 압제 속에서 고통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모로 볼 때 그들은 도저히 애굽을 탈출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입법자 모세를 세우시고 그를 지도자 삼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잠자는 신앙을 깨우셨습니다. 그리고 들어본 적이 없는 열 번의 커다란 재앙을 애굽 위에 내리심으로 바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셨고 왕국이 더 이상의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압제에서 놓였고 당당하게 애굽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좋은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홍해 앞 바다로 인도하셨습니다. 뒤늦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준 것을 후회한 바로는 병사들을 시켜서 그들의 뒤를 쫓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병사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불기둥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범접하지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넘실거리는 홍해의 푸른 바다가 있었고 뒤쪽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해 오는 애굽의 병거들과 자신들 사이에 불타고 있는 기적의 불기둥이 있었습니다. 기적의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을 갖도록 호소했고 가야할 길을 가로막고 있는 넘실대는 파도는 하나님을 의심하고 절망하라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절망의 표적과 신앙의 표적 사이에서 그들은 절망의 표적을 선택하고 낙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급기야 지도자 모세를 해칠 기세로 마음속에 있는 불평과 불만을 쏟아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인 큰 능력으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좌우에 물은 벽처럼 섰고 그 물 사이에 마른 길이 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운 기적을 바라보고 감탄하며 그 길을 건넜고 건너편 언덕에 모두 올라갔습니다. 불기둥이 사라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던 애굽의 군병들은 한달음에 홍해바다 한 가운데로 들어왔고 그들이 모두 바다 속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두 물길을 합하여 하나의 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시체는 수면위로 떠올랐고 애굽의 병거들은 물속에 가라앉았습니다. 미리암의 북소리에 맞추어서 약 300만 명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고 장엄한 성가대의 찬양소리는 넘실거리는 홍해 바다 위에 번져갔던 것입니다. 그 찬송의 제목은 “이 세상에 여호와 같은 신이 어디에 있으리오”라고 하는 노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고두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위대한 능력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벅찬 감격으로 마치 자신이 그 역사의 현장에 참여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놀라운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애굽보다 더 큰 세상 나라에서 바로보다 더 위대한 능력을 가진 마귀로부터 우리를 구속해 낼 그리스도 예수의 위대한 구원의 비밀에 대해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감격해 찬양하고 있는 출애굽의 사건, 홍해의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건져내시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하나의 세례 안에 만드실 것을 예표한다는 사실은 더욱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찬송하고 있는 시인의 감격이 이토록 벅찼다면 이 예표가 실제로 이루어진 우리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대한 감사가 얼마나 넘쳐야 될지에 대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추호의 희망도 없는 비참한 상태의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마귀에게 넘겨졌고 그는 큰 능력으로 이 세상을 장악했고 우리는 그의 지배아래 있는 희망이 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어떤 기적이나 놀라운 사건도 기대할 수 없이 운명적으로 마귀의 지배를 받으며 이 세상의 풍조를 좇고 육신의 죄를 따라 생활하던 희망이 없는 인간들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게는 진노의 대상이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혜의 세계에 있어서는 외인이고 이방인에 불과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희망이 없는 가운데 하나님은 입법자 모세를 보내신 것처럼 구원자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셨던 것입니다. 주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사건들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하셔서 우리에게 지혜의 빛을 주시고 그리스도의 비밀스런 복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혜를 믿도록 만들어 주었고 성경의 진리가 우리에게 틀림없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여 하심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놀라운 구원의 은혜 때문에 우리들은 죄와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속에서 모든 경건한 자손들은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출애굽의 사건을 뼈에 새기고 가슴에 아로 새겨 잊지 않았던 것처럼 신약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이루신 복음적 구원에 대한 인상이 그의 마음속에서 흐려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분명하게 보일수록 이 세상은 희미하게 보일 것이지만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흐려지는 만큼 이 세상은 또렷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치하에서 건져내신 후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그들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끔 만드셨습니다. 2000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한 성령 안에서 교회를 이루시고 우리를 그 몸에 접붙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구원의 은혜를 잊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출생의 근본을 잊고 조국을 잊고 심지어 부모를 잊고 자식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때가 온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그로 말미암아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잊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제껏 평생을 살아오며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다 필설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의 은혜가 사라지면 주님께 신세진 것이 없다는 교만이 고개를 들지만 마음이 은혜의 물에 잠길 때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던 사도바울의 그 고백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좋은 것들은 구원의 은혜를 토대로 하여 그리스도의 중보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누군가에게 커다란 신세를 지고 생명을 건짐 받고도 잊어버렸다고 한다면 그는 인간의 도리를 심각하게 저버린 사람이라고 낙인이 찍힐 것입니다. 하물며 이 세상에 잠시 있다 사라질 육체의 목숨을 구해준 분도 아니고, 희망이 없는 영혼의 죽음에서 건져내 살리신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일상적인 것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주님을 향한 감사가 마음속에서 사라진다면 우리가 어찌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매일매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는 자기의 설교 속에서 마른 눈을 가지고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었는지, 주님이 자신을 구원하신 은혜가 얼마나 벅차고 감격스러운 것이었는지를 생각하며 흘리는 성도의 눈물은 세상과 어리석은 사물의 표상들이 씻기고 영원한 하늘 본향의 실체가 떠오르게 할 것입니다. 이때 떠오른 비전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민족의 명절이고 추수의 계절인 가을에 가장 먼저 여러분들의 영혼을 추수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평범한 감사가 아니라 펑펑 흘리는 감격의 눈물로 감사를 드리고 눈물을 흘린 후에는 나의 인생을 무제한으로 주님께 바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광야길을 인도하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건져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지금부터 시작된 것이지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시인은 말합니다.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하신 또 하나의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300만 명에 가까운 이스라엘의 회중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을 올렸을 때 그 찬양은 홍해 위에 메아리쳤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벅찼고 주님을 위하여 무제한의 헌신을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홍해의 감격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고난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광야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큰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한 달반이나 두 달이면 도달할 수 있는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약 40년의 세월을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신 분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고생시키시고 불순종하는 종자들을 모두 죽이신 후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시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위호식하며 번영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찬양) 그러나 한 가지 잊지는 말아라 죄인된 너희를 구원하신 여호와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그 땅의 백성들이 패역했기 때문에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때 하나님의 마음에 갖고 있는 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발달한 문명이 번창하고 있는 세계 중심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이방의 등불과 열방의 횃불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온 땅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타락과 함께 부패했고 세월이 흐를수록 지식의 부패는 심각해졌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기대하고 그 지식이 퍼져 인류가 구원 얻는 것은 하나님도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염되지 않은 계시를 보존하도록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가나안에 들어가 열방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객관적으로는 틀림이 없는 순결한 진리이지만 이 진리는 허공중에 울려 퍼질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성과 의지 속에서 소화되어 그들의 말과 삶으로 퍼질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연단하셔야 했습니다. 불같은 주님의 말씀을 담기에 충분한 연단된 마음이 필요하셨고 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기에 필요할 만큼 그들의 영적인 힘을 연단하셔야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감당하기에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부패하고 썩은 모든 종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새로 태어난 세대들이 주축을 이루며 가나안을 점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으로 들어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보다도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광야와는 비교되지 않는 번영과 평안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 애처롭게 매달리며 신앙의 정절을 지키던 사람들이 평안하고 행복할 때 하나님께 죄 짓고 불순종하는 일은 언제나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번영 속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일은 결핍 속에서 주님께 매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더 밝은 빛을 필요로 하는 결단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치열하게 고난을 당하게 하셨고 시련을 겪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들을 편안하게 하는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고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는 은혜의 능력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시련과 고통의 삶을 이어갈 때 하나님은 크게 두 가지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심으로 이들이 멸망되지 않고 광야의 생활을 승리로 장식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1. 먹이심
첫 번째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먹이신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고 얼마 후 양식은 동이 났고 그들에게 있어서 먹는 문제는 심각하게 대두되었습니다. 3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광야에서 양식을 구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출발해 광야로 들어섰을 때 많은 민족과 나라들은 그들이 광야에 포위되어 결핍에 에워싸인 채 멸망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했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 온유한 이삭,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여 교만을 극복하고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야곱, 보석과 같은 순결한 신앙으로 주님의 섭리를 의지했던 요셉과 같은 마음에 합한 자들에게도 보여주신 적이 없었던 새로운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만나였습니다. 만나가 처음 새벽에 진 주변에 가득 내리던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은 적도 없고 본적이 없는 양식을 경험하며 이것이 무엇인지 서로 반문했고 그로부터 만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잊히지 않는 강력한 사건이었습니다. 돌비와 싹 난 지팡이와 함께 만나 항아리를 법궤에 넣었던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의 사건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매일 변함없이 내리셨고 안식일이 올 때는 그 전날 두 배로 거둘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먹으며 40년 광야 생활을 견뎌 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실한 신앙에 기초해서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할 때만 만나를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원망할 때도 만나를 주셨고, 심지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악을 행했던 육체의 기운도 만나를 먹고 얻은 힘이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잊히지 않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언약에 불성실할 때조차도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에 기초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도 이렇게 먹이셔서 오늘까지 살아오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생 전체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그랬습니다. 올 한해만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올 한 해 동안도 우리의 신앙은 한결같지 않았고 주님을 향한 섬김도 변함없이 계속되지는 않았습니다. 때로는 하나님 원망했고 은혜에 미끄러져서 불성실 했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주님을 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매일매일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신을 신겨서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중 굶주리거나 의복이 헤어지거나 신발을 벗고 맨발로 다닌 적이 없도록 하신 것처럼 우리의 필요한 물질들을 모두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건강한 환경과 건전한 여건도 조성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광야에서 기적의 먹을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궤하신 것은 우리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양식을 누리기도 했지만, 영혼이 핍절하여 인생길에서 엎드려질 것 같은 위기 때마다 지쳐있는 우리의 영혼에 다가오셔서 주님은 말씀을 떠먹여 주셨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진리의 양식으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은 새 힘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우리의 인생을 붙들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의 막다른 길을 만나도 아주 엎드려지지 않았고 인생의 벼랑을 만났지만 그 벼랑에서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폭풍도 지났고 뜨거운 가뭄도 지났고 눈보라치는 인생의 겨울도 지났지만 그때마다 우리를 굳게 붙드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쓰러진 곳에서 말씀의 지팡이를 짚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와 같은 우리의 심령을 군대와 같이 만들어 주셔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승리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교회를 에워싸고 으르렁거리는 때조차도 주님이 큰 팔로 막아주셔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2. 싸우심
주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싸우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길은 험난했습니다. 많은 나라와 왕들이 그들의 갈 길을 막아섰고 오합지졸과 같은 이스라엘로서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큰 나라의 왕들을 치셔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의 종말이 어떠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시편의 찬송가 속에서 나오고 있는 아모리왕 시온과 바산왕 옥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멸망시킬 수 없는 그들을 친히 치시고 꺾으시고 죽이심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싸우시는 위대한 용사임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세상에 창조되었을 때 양과 같은 백성으로 창조되었고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처음부터 의존하며 살아야 할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싸울 능력이 없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해 주셔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이기게 하셨고 질수 밖에 없는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기적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셨고 일반적인 섭리 속에서 영적 전쟁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밟힐 정도로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고 지켜주심으로써 이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 중 한 사람인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라는 사람은 당시 기독교를 모질게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당신들이 우리를 밟으면 우리는 밟힐 것이며, 당신들이 우리를 때리면 우리는 맞을 것이며, 당신들이 우리를 찌르면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대적하여 원수가 되지 말라고 말입니다.” 우리도 똑같았습니다. 우리는 악인에게 고통을 받아도 그를 미워하고 죽일 수 없도록 주님의 사랑으로 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악인은 나를 찌르지만 나는 그의 손을 붙들고 용서하여야 하는 사람들이고 악인은 나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게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고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믿으며 살아야 할 인간들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워주시지 아니하였더라면 우리는 광야의 길에 이미 엎드려졌을 것이고 교회는 모두 풍비박산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원수의 칼날 아래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마귀의 울부짖음 속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켜주셨습니다. 유혹과 시련 속에서 우리의 영혼을 붙들어 주심으로 날마다 이겨 하나님 앞에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용사와 같이 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이번 주에 총신대학에서 채플이 있었습니다. 아동학과 헌신 예배에 저를 불렀습니다. 예배 시간에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제 마음에 강물처럼 밀려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괴로움과 번민,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한 복수심과 미움, 나 홀로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모든 불평과 불만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십니까? 우리 자신의 심령이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모든 괴로움과 고통이 나로서는 필연적으로 짊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의식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강당에 가득 모여서 마음을 모아 찬양했습니다.
(찬양)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우리의 심령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온 영혼도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주인은 영혼이고 우리의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것이라는 깨달음이 오니 마음의 눈물이 흐르면서 근심과 염려들이 마음속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와 더불어 싸워주셨습니다. 마귀가 보기에는 한입에 삼킬 수 있을 것 같고 세상이 보기에는 한발에 짓밟힐 것 같았는데도 주님의 은혜의 힘으로 살아남았고 주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큰 능력으로 시련과 고난을 이기고 역경과 아픔을 딛고 하나님 찬송하며 믿음으로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거미줄 같은 믿음이라도 붙들고 여기에 있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신 은혜 때문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 누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입이 열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살아온 인생의 날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날이었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와 인도하시는 은혜에 보답했다고 말할 수 있을만한 삶이 단 한 조각도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교회의 한 지체가 되어 일생을 주님의 도우심 속에 살아오게 하신 모든 날들이 하나님께 빚진 날들이었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III. 하나님의 인자하심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에게 가슴 아픈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궁핍과 시련 속에 시달릴 때도 있었고 주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핍박을 받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고 낙심할 때도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 저편으로 혹은 또 다른 이유로 떠나보내야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은 것 같은 날들이 왜 없었겠습니까마는 오늘도 생명 있음을 찬양하는 이유는 우리를 모든 슬픔과 시련 속에서 지탱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쓸모없는 인간들에게 어떤 가치가 있기에 큰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할 때뿐 아니라 주님을 향해 독한 마음으로 원망하고 악을 행할 때조차도 주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이끄시고 먹여주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왜 그러셨을까요? 시인은 말합니다.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이로다.”라고 말입니다. 좋은 장점이나 특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인자하심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생길을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인자”라는 히브리 용어는 “헤세드(hesed)”인데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가치 없는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점 때문에 발동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성향적인 성품이자 박애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지속되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 짓고 불순종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 때 하나님은 아낌없이 베푸셔서 좋은 것을 받아 누리며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백성인 우리들에게 베푸신 죄에 대한 끊임없는 용서와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베풂은 다시 그리스도의 교회와 세상 안에서 실현되도록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한한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고 한없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용납하며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가장 악한 자의 영혼이라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지만 내일은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죄를 용서 받게 하셔서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향해 베푸신 용서와 긍휼을 교회 속에서 실현해가게 하셨습니다.
육체와 영혼의 모든 결핍을 채우기 위해 주님이 주신 은혜는 공유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구제와 진리를 깨우침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죄 이외에 고유하게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 티끌만한 좋은 것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우리가 그것을 누리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이것을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많은 우리가 지식을 얻었어도 결코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섬겨야 할 이웃으로 여깁니다. 물질을 많이 얻고 높은 지위를 얻어도 그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지위는 낮은 자들을 위해 사용되고 물질은 결핍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이고 인자하심입니다. 헤세드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을 봅니다. 저녁에는 우리의 불신앙 때문에 잠자리에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에는 그 분의 성실하심 때문에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예전 것은 지나갔고 후패한 사람들은 썩어 멸망하였으나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지는 새 피조물을 우리 자신 안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만입이 다 있으면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다 찬송할 수 있겠으며 고난과 시련의 길에서 엎드려지지 않도록 우리를 붙드셨던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우리가 어찌 찬송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I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민족의 명절인 중추절입니다. 조상들은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이루어 주고 나라와 가족을 지켜준 은택에 대해 알지 못하는 신과 잘못 지정한 신들에게 경배하고 영광을 돌림으로써 하나님 앞에 감사로 인한 범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분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지식을 주셨고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빚진 자 된 존재라는 것을 알려 주셨으니 우리는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립시다. 우리의 마음의 눈을 들어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우리를 모든 마귀의 압제 아래에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합시다.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모든 것들을 어찌 주시지 않겠느냐고 우리 자신을 설득합시다. 우리의 영혼에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너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합시다.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고 변함없이 이끄시는 하나님 의지하여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을 조금 더 걸어갑시다. 우리의 한숨이 변하여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되게 하고 두려움이 변하여 주님을 위한 기도가 되게 합시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이 티끌만큼이라도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고 우리가 거기에 사용되도록 주님을 섬기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