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첫사랑을 회고하시는 하나님(렘2:2下) 2001.10.29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1
2.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렘2:13上) 2001.10.30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21
3.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렘2:13下) 2001.11.1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36
4. 악과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렘2:19下) 2001.11.2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57
5. 귀한 포도나무로 살라(렘2:21) 2001.11.3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74
1.첫사랑을 회고하시는 하나님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의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렘2:2下)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전 7세기부터 시작을 해서 주전 6세기까지 예언을 한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 중에서 이 예레미야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예언 사역을 시작한 때에는 요시아 임금 때인 주전 약 627년 경일 것이라고 추산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언 활동을 하면서 586년에 유다가 결국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되는 전 과정을 지켜보아야 했고 멸망된 그 후에도 한동안 예언 활동을 했어야 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보내셔서 전파하게 하신 메시지는 이제 유다가 망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본문을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그 시대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시 국제적인 상황은 이미 722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망하고 남 왕국 유대의 단독 시대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 위쪽으로는 앗수르가 성하고 있었고 그리고 이제 옆쪽인 요단강 건너편인 이쪽으로는 이제 여러분들이 역사에서 배운 바벨로니아, 바벨론이 이제 신흥국가로서 다시 부상을 하고 있었고 그 아래쪽으로는 오래 전부터 강대국이었던 그 애굽이 있었습니다.
앗수르는 여러분들이 아는 바와 같이 강력한 군사력으로서 북 왕국 이스라엘을 삼켜버리고 남 왕국 유다를 사실상 속국처럼 다스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앗수르 제국이 점점 쇠망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바벨론이 부상을 하게 되는데 그때에 이제 남 왕국 유다는 잠시 동안 이 앗수르가 쇠망한 틈을 타서 잠시 동안의 독립을 누리게 됩니다. 사실상 독립을 잠깐 누렸지만 이번에는 앗수르보다 더 강력한 신흥 바벨론 세력에 의해서 침공을 받고 그리고 이제 외교적인 입지가 강대국에 의해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약소국가의 처지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때 이제 남 왕국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으로부터 목 조여오는 심각한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서 앗수르에도 도움을 청하고 그리고 저 멀리 애굽에도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사실 어느 나라도 이 유다를 도와줄 수는 없었고 또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속셈은 결국은 그 도와주는 것을 도구로 하여서 팔레스타인 땅을 삼키고 유다를 속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야심의 각축 점 사이에 끼어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아주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되었으니 바벨론으로 그대로 포로로 끌려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너희를 다시 돌아오게 하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예레미야가 정치가들에게는 반역적인 자로 꼽혔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어린 나이에 부름을 받아서 장시간 사역을 했고 2장의 이 예언을 할 때는 아마도 추측하건 데 40세 정도 되었을 때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말로 다 할 수 없는 정치적인 박해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메시지 그 자체를 변개 하지 아니하고 그 메시지를 붙들고 예언 사역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제 2장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거민들을 향해서 예언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1장에서 자신이 어떻게 소명을 받게 되었고 그리고 유다 나라의 멸망에 대해 두 가지 예언을 계시를 하나님께로 받은 계시를 예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2장에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 즉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본격적인 예언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오늘서부터 이번 한 주간 동안은 2장에 있는 중심구절들을 더듬어가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준엄한 예언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먼저 회고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2절 하반부에 본문을 두 토막으로 나누자면 그 중반부는 첫사랑을 회고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그 뒷부분 즉 “씨뿌리지 못하는 땅, 곧 광야에서 네가 나를 어떻게 좇았음을 내가 기억하노라” 하는 이 하반 절의 부분은 순종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반부는 첫사랑을 회고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후반부는 순종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제목 붙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 본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장엄한 예언을 바라기에 앞서 우선 제일 먼저 첫사랑을 하나님이 회고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때 있었던 그 순종을 회고하신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첫사랑의 때와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거리가 먼 사람이 되었는지 그것을 오늘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이제 여기에 보면 무엇이라고 나오는가 하면 주님이 기억하시는데 뭘 기억하신다고 나오는가 하면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회고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년 때의 우의, 결혼 때의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여기서 말하는 ‘우의’라고 하는 것은 번역이 좀 애매 모호한데 우의라고 하는 것은 친구 사이에 뭔가 이렇게 돈독한 그런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히브리 성경에 보면 이 우의가 ‘헷세드’로 되어 있습니다. 헷세드는 구약 성경에서 거의 예외 없이 ‘인자’ 혹은 ‘자비’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단어를 희랍어로 바꾸면 ‘아가페’입니다. 이 설명은 여러분들이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성경에서 이 헷세드라고 하는 단어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 소년 때의 인자, 즉 헷세드 곧 사랑 아가페의 사랑, 네가 소년 때의 가졌던 그 아가페의 사랑, 그것을 내가 기억한다. 그리고 네 결혼 때의 사랑, 여기서 사랑은 ‘아하바’라는 히브리 단어인데 그야말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헷세드 하고 좀 다른 점은 무엇인가 하면 아하바는 대게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이야기도 하는데 특별히 남녀간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잘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아하바 즉 ‘결혼 때의 사랑’ 그랬는데 사실 ‘결혼’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부분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신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제대로 번역을 하자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렇게 됩니다. ‘너의 소년 때의, 혹은 너의 젊은 때’ 이렇게 번역을 해도 됩니다. ‘나할라’라는 단어인데 네 소년 때의 아가페와 그리고 너의 신부로서 나를 향해 가졌던 그 사랑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궁금한 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글쓰는 습관으로 볼 때 이것은 거의 평행 법입니다. 그러니까 소년의 때는 여기서는 결혼의 때라고 번역을 했는데 그것과 거의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이야기를 하면 네 어렸을 때의, 너의 소년일 적에 가지고 있었던 그 아가페와 그리고 네가 신부로서 나와 결혼한 신부로서 나를 향해 가지고 있었던 그 사랑, 그것을 내가 기억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 소년의 때, 혹은 신부였던 때는 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다시피 요셉이 내려가서 자리를 잡은 다음에 그 요셉의 요청을 받고 야곱과 그 집안의 70여명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내려가서 거기서 있는 동안에 이제 많은 자손들이 430년 동안 번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주 엄청나게 많은 수백만의 사람으로 생육하게 됩니다. 그때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거기에 뭔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그 사람들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깊이 만난 그 족장들의 그 신앙의 역사가 노예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에게 가정교육을 통해서 계속 전수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앙의 교육이 전수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 속에 모종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신앙이 있고 그랬기 때문에 모세가 소명을 받고 애굽으로 갔을 때 아론이 모세를 소개하면서 하나님이 너희를 돌아보셔서 이제 모세를 보내서 너희를 구원하시려고 하신다 그럴 때 그 백성의 우두머리인 장로들이 머리를 숙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사실 하나는 뭔가 신앙의 그 뼈대와 줄기가 아직까지도 흐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굉장한 것이었다고는 우리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만약에 그들의 신앙이 굉장했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그렇게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의 신앙이 있기는 있지만 그러나 아직 얼마나 어리고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상당히 많이 자기네들은 약소 민족으로서 야훼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자기들을 지배하는 어마어마한 나라 애굽의 그 신과 그 종교에 대한 신앙적인 콤플렉스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깡그리 극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10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런 일들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다루시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은 뭔가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뭔가 중심적인 신앙의 줄기들이 내려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10대 재앙을 통해서 모세와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보기 전까지는 그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하잘 것 없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그렇게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가운데 애굽에서의 구원의 역사를 펼쳐주시지 않으셨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의 신앙은 그 애굽에 있는 신앙들과 함께 섞여서 아주 이교 적인 신앙으로 변질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랬는데 그 하나님이 그렇게 여호와에 대한 신앙이 아주 희미하게, 뭔가 있었긴 있었지만 그러나 경건한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주 희미해져가던 그때에 하나님께서 거기에 나일강이 피가 되는 기적부터 시작해서 애굽에 있는 모든 초태생 바로의 처음 난 자식까지 죽임을 당하는 그 초태생의 죽음까지 이르러서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를 전개해가면서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놀랍게 보호하시는 그 대조적인 은총의 역사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이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 어떻게 가야 되는 지도 모르는 그 노예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 가자고 깃발을 높이 들었을 때 애굽에서 지냈던 430년 동안의 비록 노예의 삶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뿌리 깊은 삶을 모두 청산하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 긴 광야를 얼마나 많은 민족과 전쟁을 하면서 헤쳐가야 될지도 모르는 길을 믿음으로 탈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출애굽의 역사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참 훌륭한 것이었고 애굽을 탈출하는 그들의 결단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지만 그러나 역시 그들은 아직 어린 존재들이었습니다. 신앙적으로 어린 존재, 여기서 이야기하는 소년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 소년의 때”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해 나올 때 그 신앙의 감격을 가지고 광야 생활을 시작하던 그때에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소년의 때의 신앙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또 하나 여기에 보면 “결혼의 때에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직역을 하자면 신부로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것입니다. 신부로서 네가 내게 보여준 아하바 사랑.
그러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서로 좋아해서 절정에 달했을 때 이제 결혼합니다. 서로 연애하다가 좋아했는데 결혼을 하는데 그 시점이 이제 발로 차버리고 끝내버려, 한참 만나니까 지겹네. 어디 다른 좋은 사람 없나. 그리고 까치발 뜨다가 그럴 때 진이 빠졌을 때 내가 심심한데 결혼이나 하지.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정에 올랐을 때 결혼을 합니다.
(예화: 신학교에 다니실 때 어느 자매가 나이가 어려 결혼을 했는데 그 자매가 연애를 할 때 헤 어지고 나서 금방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는 이야기)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청년들에게도 가끔 이야기하는데 무슨 연애를 그렇게 꼭 신앙하고 똑같이 연애를 하는 둥 마는 둥 형식적으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제, 아니 왜 그렇습니까? 하려면 좀 뜨겁게, 열심히, 충만하게 그렇게 해야지 그것이 뭔지. 사귄다고 하는데 한번도 같이 다니는 것도 못보고 전화 온지 한 달이 지났다고 하는데 그것도 사귀는 것이냐고 제가 그랬습니다. 그렇게 둘이 죽고 살지 못할 때 그 아하바, 그 사랑을 생각해보십시오. 헤어지고 나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고 만나면 헤어지기 싫고 그리고 꿈에도 그립고, 몇 시간을 만나고 가도 감질이 나고, 그런 것이 바로 신부로서의 사랑, 말하자면 결혼 때의 사랑입니다. 특히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신부로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로서의 교회의 한 그림자입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젊었을 때는 그래도 미모도 좀 있고 하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자는 사람도 있고 즐거운 일도 많고 행복한 일도 많고 젊었을 때 젊은 자매였을 때 얼마나 신납니까? 그러다 시커먼 녀석 하나 만나서 딱 발목 묶여서 이제 도장이 딱 찍히면 그러면 꼼짝없이 집에 앉아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즐거운 곳에서 자기를 오라고 하는 곳도 없고, 옛날에 그렇게 자기를 자주 찾아보던 형제들도 이제는 시큰둥해서 시집간 사람 쳐다 도보지 않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결혼과 함께 대부분 남자들은 이제 밖을 향해서 눈을 돌리게 되고 여자들은 결혼과 함께 넓은 시야를 가졌던 사람들이 다 청산하고 한 남자만 바라보면서 사는 해바라기 같은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중에는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아직 실감이 안 나는 분이 계시겠지만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까? 아침에 출근하고 나서 퇴근할 때까지 집에 앉아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집에 돌아오면 반찬을 차려놓고 밥 먹고 심지어 물먹고 이빨 쑤시는 것도 귀엽게 보입니다. 그러면서 턱을 받치고 한 남자만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결혼 때의 신부입니다. 시집도 안 갔으면서 뭐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고 있습니까? 신령한 말씀을 전할 때는 그런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꼭 이렇게 세상 적인 이야기를 전해야지 만 깊이 동의를 표하니, 그게 바로 신부로서의 그 아하바 사랑입니다. 오직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만 늘 생각하는 그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그 신부의 때는 도대체 언제였을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셔서 구원해주셔서 출애굽을 하게 하십니다. 그 이전에도 물론 하나님이 선택된 백성들과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그 뒤에 있는 노아라든지 아브라함이든지 이런 약속들이 다 존재합니다. 그런데 정식으로 이스라엘을 한 가족이 아니라 한 국가로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애굽에서 나와서 제일먼저 간 곳이 어디인가 하면 홍해를 건너서 시나위 반도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의 시내 산이 있는 그 시내 반도로 가는 것입니다. 그 시내 산아래서 그들이 약 11개월 동안 묵으면서 그러면서 거기서 애굽에서 있었던 모든 구습을 떨쳐버리고 거기서 진짜 거룩한 부흥회를 갖는 것입니다. 그때 거기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주십니까? 그렇습니다. 율법을 주십니다. 율법을 주시면서 하나님이 율법을 반포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서 아멘, 아멘 하면서 거기서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과 혼인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너희는 이제 내 백성이다.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된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러므로 우리 둘은 이제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데 너희들이 이것을 지켜야지 된다 하면서 거기서 율법이 주어지는데 그 율법이 결혼관계를 유비로 해서 말하자면 그것이 혼인서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 혼인서약에 대해서 피를 뿌리면서 아멘,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피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진짜 죽도록 하나님과의 성혼서약을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자기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그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지금 이 예레미야가 회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그때부터 시작을 해서 신앙적인 어린 시기에 가지고 있었던 그 헷세드, 아가페와 그것과 자비와 또 하나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었던 그 하나님과 막 결혼을 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그 신부로서의 하나님을 향한 그 아하바의 사랑, 신혼부부로서의 그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만 기다리는 그 갓 결혼한 신부로서의 애절한 사랑, 그것을 하나님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을 예고하시기 전에 그것을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회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이런 의문이 떠오릅니다. 진짜 우리들이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기록을 다 종합해서 보면 정말 애굽에서 탈출한 그 이후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그렇게 아가페 속에서 살았고 그 하나님을 향한 신부로서 그 아하바의 사랑 속에서 그렇게 애절하게 하나님만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면서 그렇게 살았는가 할 때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통해서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우리들이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반역과 은총의 역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홍해의 위대한 기적을 보고 삼일만에 원망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올라갔는데 거기서 금송아지 만들어놓고 댄스를 추면서 이교의 제사를 드리고 그리고 간음까지 하는 이런 죄악들을 행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도대체 회상할만한 가치가 뭐가 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신실하고 하나님을 향해 애절한 때가 없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하나님이 회상하실 게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이 그때를 그리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예레미야가 예언하던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하나님이 그때를 회상하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를 다 읽어보면 왕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들까지 다 치우쳐서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심판을 마지막으로 확정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두루 하루종일 돌아다니면서 나를 경외하는 사람, 뭐 의인이 50, 45, 20, 10 필요 없고 한 사람이라도 나를 경외하는 사람이 있는가 보라. 한 사람이 있으면 그 한 사람을 인해서 내가 이 성을 멸망하지 않겠노라 할 때 아무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예레미야 시대의 타락이 얼마나 극도의 타락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회상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라도 회상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이것을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무엇인가 하면 우리들의 입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아!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이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만나를 내려주셔서 그렇게 기적적으로 먹이고 살리시는데 어떻게 그 만나를 먹으면서 힘을 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구름기둥을 비쳐주면 그 구름기둥 시원한 그늘 아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기둥을 비쳐주면 그 불기둥을 받으면서 범죄 하면서 우상을 섬기고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가.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을까 하면서 우리는 분노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거의 하나님을 못 만난 종족들입니다. 조상으로부터 희미하게 전해 내려오는 신앙의 정통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모종의 경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거기서 430년을 살면서 그들이 여러분같이 이렇게 은혜 받지 못했습니다. 주일이면 예배의 감격에 빠지고 금요일이면 기도의 감격에 빠지고 화요일이면 전도의 감격에 빠지는 이런 것을 못해봤습니다. 그러니까 잠깐동안에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보면서 확 돌아선 신앙입니다. 그들이 그 애굽에서 살면서 여호와의 신앙을 가진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유지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들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힘들 때 선조들에게 약속하셨던 장엄한 약속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용기를 갖기보다는 어떻게?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살았던 그 안락한 삶을 회고하면서 돌아가고 싶다는 강력한 욕구를 가진 것을 보면 그들이 애굽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런 상황을 모두 고려한 것을 보면 그들이 오랫동안 이방 신들에게 찌들어 살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어떤 은혜의 역사가 잠시 그쳤을 때에 우발적으로 우상을 섬기기 위해서 범죄하고 옛 습관이 패역한 것이 솟아나서 우상을 섬기고 순간적으로 간음하고 그리고 어느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다고 확 낙담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한 것이 나쁜 것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런 날들보다는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못 만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없었던 그 백성들이 당신이 그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실 때 하나님 한 분만을 찬송하면서 애굽을 믿음으로 떠났던 그것을 하나님이 신앙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너무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인정하시는 것도 상대적인 측면이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을 해야지 됩니다. 예를 들자면 태어나서 애가 12달쯤 되어야 걸어다닙니다. 그런데 7달밖에 안 되었는데 서서 한 걸음 두 걸음 걸어 다닙니다. 막 박수를 칩니다. 여러분들보고 박수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아무도 박수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6개월이 되었다 7개월 되었다는 것을 고려를 하면서 생각하니까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7개월 된 애가 일어서서 8개월 때 걸어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을 보면서 박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기적의 역사를 베풀어주셨을 때 그 보여준 믿음의 반응, 그리고 미래에 대한 모든 염려를 떨쳐버리고 나는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사람 모세와 함께 430년 동안 선조들의 뿌리를 묻은 이 애굽을 떠나서 알지 못하는 땅으로 우리는 가리라. 그리고 그 약속의 땅으로 우리가 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며, 거기에는 젖과 꿀이 흐를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리라고 하는 그 신앙을 가지고 애굽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좋게 생각하시고 보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기도 많이 했지만 그러나 또 뭐가 있었는가 하면 그 어린 신앙인데도 항상 범죄 한 후에는 회개와 돌이킴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인간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것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범죄 했을 때 범죄 한 것만 보지 말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울며불며 회개한 광경들을 보십시오. 그 기록들이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 기적을 본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반응을 합니까? 재앙을 만나고 어려움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합니까? 여러분 자신도 안 그랬습니다. 인생에 막다른 곳까지 가서도 항복 안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잘 깨트려져서 그래서 자기가 범죄하고는 주님 앞에 회개하고 뉘우치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에 비하면 오늘날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퍅하고 모진 상태에 비하면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광야 생활의 시작 때 그들의 마음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더욱이 광야 생활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죽고 나서 여호수아에게서 바톤을 인계 받아서 가나안을 정복하는 동안에는 더 더욱 순결한 신부와 같은 그런 신앙으로 하나님을 잘 따랐습니다. 아간과 같은 범죄하는 자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가나안 정복의 전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염두에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지나서 가나안으로 들어오면서 왕국이 정착하기 전까지의 그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가나안 땅을 정복해나가던 그때, 하나님의 마음에는 가장 기억에 남는 그런 때였습니다. 흔히 우리들은 첫사랑을 많이 회고합니다. 여러분들이 우리들은 수시로 뭔가 영적으로 곤고하고 어려울 적마다 처음 사랑을 회고합니다. 주님이나를 어떻게 만나주셨는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떠한지 그렇게 회고를 합니다. 그런데 그 첫사랑을 회고하는 것은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그 첫사랑을 회고하십니다.
자, 보십시오. 남녀가 둘이 뜨겁게 사랑을 했는데 그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졌습니다. 그러면 헤어진 그 사람이 서로를 그리워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그 사랑을 경험한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첫사랑이라고 말한다면 하나님도 여러분들로부터 받은 첫사랑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 아닙니까? 우리에게 첫사랑이면 하나님께도 첫사랑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은 상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린도 전서 13장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설교를 할 때 이것을 아주 상세하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한 남자에게로부터 두 여자가 사랑을 받는다면 서로 시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수천만의 성도가 사랑을 받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으로 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있다면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있기만 하면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게 베푸시는 사랑이 모자란다라고 그렇게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놀라운 특성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어도 내게 하나님의 관심이 저 사람이 너무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 때문에 나는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관심을 덜 받을 것이라는 그런 두려운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랑을 느꼈는데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의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곤고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 생각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신앙의 연조도 있고 남들이 집사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장로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전도사 목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정말 첫사랑의 때가 그리워집니다. 저도 그런 그리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비해서 내가 많이 성숙했는데 정말 내가 그때와 같은 그런 순수함을 내가 유지하고 있는가. 정말 주님만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고, 그래서 찬송가에 보면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정말 주님이 내 인생에 전부이시고 주님이 없는 이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고 이 세상에 있는 친구들이나를 다 버려도 주님이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내 친구가 되어주시면 나는 그것으로서 충분하고 나머지야 아무렴 어떠랴. 주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주님 안에 있어 내가 주님 때문에 행복하다는 그런 고백이 있었던 그 처음 사랑의 때, 주님이 내 인생에 전부인 것처럼 보이고 나머지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던 그런 순수한 첫사랑의 때가 여러분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회상합니다.
신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아니면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참된 은혜로부터 떨어지고 나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 하나님이 수없이 그에게 채워주셔도 그것으로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그 목마름을 해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그런 진실한 신앙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참사랑이 내게 없기 때문에 나는 너무나 불행하고 그리고 나는 너무나 지금 건조하다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느끼게 되면 반듯이 떠오른 것이 무엇인가 하면 첫사랑의 때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때 이 첫사랑의 때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첫사랑의 때에 하나님을 가장 사랑했기 때문에 그 첫사랑의 때가 떠오르기보다는 그 사랑의 첫 경험이 가져다주는 체험의 강도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실 것입니다. 첫 경험의 강도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아주 강력하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화: 딸이 2-3살 때 처음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는데 처음으로 맛을 보더니 맛있었는지 아빠 가 달라고 하니까 커튼 뒤로 가서 숨어서 먹었는데 그 후에도 그 애가 여러가지의 아이 스크림을 먹었지만 그때 숨어서 먹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인데 그것은 강도의 문 제가 아니라 첫 경험의 강력한 인상이 가져다 준 것이었기 때문 이라고 하신 이야기)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처음 주님을 만나고 처음 사랑을 기억하는데 난 그때보다 하나님을 사랑한 때가 많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런데 더 많이 사랑했던 때는 기억이 안 나고 그만큼 사랑했는데 그렇게 절대적으로 내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많이 사랑한 때가 아닌데도 그 첫사랑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실제로 하나님을 첫사랑 때 많이 사랑했다기보다는 첫 경험이 가져다주는 강력함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들 마음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도 남아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감격적이던 때가 여러 번 있었는데 거의 불신자와 다름이 없는 사람이 전도를 받고 나와서 온 첫날 하나님 만나고 깨트려지고 그리고 그 다음주에 새벽 기도회에 나올 때, 그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감격적인가. 여러분들이 그렇게 새벽기도회에 나와도 그렇게 감격하지 않습니다. 나왔나보다. 물론 대견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 정도 감격에, 사람에 따라서 다른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후에도 하나님을 사랑한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 오랜 동안 하나님의 참사랑과 은혜인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전설처럼 조상으로부터 들어오던 그 지식에 의존하면서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에 걸음마를 떼며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으로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라고 고백을 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찬송 받으실 아버지 시라’고 고백을 했을 때 그때 하나님의 첫사랑에 대한 감격이 얼마나 놀라울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첫사랑을 생각하면서 기껏 해야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무기력, 그런데 그렇게 내가 주님을 만났는데 요즘은 이것이 무엇인가 이런 반성과 어떤 자기 부끄러움, 느낌. 한 걸음 더 나아간다고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까.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할텐데 하는 정도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부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우리를 볼 적마다 처음 사랑의 때를 하나님이 기억하시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당신에 의해서 선택된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 당신이 영원히 돌보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 그것이 첫사랑을 회고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마음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참 사랑을 알았을 때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헷세드가 넘쳤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비와 인자가 넘쳤습니다. 정말 우리가 십자가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을 알기까지 우리가 정말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을 사랑한 적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정말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누군가를 위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오히려 우리를 사랑해주는 가족들도 사랑하지 못하고 우리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부모를 향해서도 마음에 미움의 칼을 품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된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자 비로소 강퍅하던 우리들은 인자한 하나님의 성품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자 우리는 하나님의 아가페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 흘리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심지어는 내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며 그를 불쌍히 여기라는 주님의 그 계명이 전혀 무겁지 않게 느껴질 수 있는 그런 헷세드의 마음, 즉 인자의 마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갖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보십시오. 심판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의 때는 강포가 강포를 뒤잇는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강퍅해지고 그리고 하나님과 백성들과의 신의는 모두 사라지고 가정의 관계는 모두 파괴되어지고 종교 지도자들은 모두 타락했고 그리고 그들을 향한 어떤 신뢰도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모두 다 저 먹기 위해서 살아가는 지경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이 멸망된 후에 눈물을 흘리면서 쓴 그 애가서에 보면 하나님의 집이 무너져서 황폐하게 되었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집에서 보물을 꺼내와서 이 전쟁터 어디서 양식을 팔 곳이 없는가 그것을 바꾸러 돌아다니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처음 주님을 만났던 때, 그 사랑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녹였던 때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너무나 오랫동안 죄 가운데 살아오고 강퍅하고 강철같은 마음으로 원망과 한을 품고 살아오던 여러분들의 마음을 십자가의 사랑이 녹였을 때 여러분들은 몰라보게 인자의 은혜를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지체들을 용서하고 그리고 그 지체들을 관용하고 여러분들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쉽게 용서하고 그리고 그들을 인해서 무엇인가 베풀어주고자 하는 그야말로 헷세드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첫사랑의 모든 때는 그럴 수 있었습니다.
제가 21살 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난 뒤에 제일먼저 가슴에 밀려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전에는 이 세상에 내가 제일 불쌍한 줄 알았는데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보니까 이 세상에는 나보다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자기의 아들을 못 박으셨을까. 그러면서 무엇인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그런 소망이 가슴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저만의 체험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속에 있는 일반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연약한 자를 돌아보고 자기 소유를 나눠 가난한 자와 공유하고 고통 하는 자를 위로하고 신음하고 있는 자를 다가가서 격려해주는 이 따뜻한 보살핌과 섬김은 여유 있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참사랑을 아는 지식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의 때에는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정말 오늘날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시대가 마지막으로 치달으면서 광포하기는 이 세상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원수 맺고 한번 마음에 맺힌 상처를 좀처럼 풀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음속의 미움을 내려놓고 사람들을 용서하는 그 헷세드의 마음을 보이기 위해서 지불하는 고통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몸인 교회를 흠집 내는 것이 훨씬 편하다고 생각하는 막 나가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많이 있습니다.
상당히 성숙한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교회 안에서의 다툼과 미움, 시기와 분쟁 질투들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차가운 이념으로 변질된 그의 신앙 관 이외에 어떤 것도 그 사람의 인격 속에서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옛날보다 교회 생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그저 한사람의 흐느끼는 죄인으로서 교회에 나왔지만 이제는 교회에 훌륭한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사랑의 때에 가졌던 그런 절절한 자기 깨어짐, 그리고 거기에서 자기와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아가페를 아는데서 흘러나오는 이 헷세드의 마음, 그래서 자기와 같은 사람을 구원해주신 그 놀라운 은혜가 연약하고 고통받는 자를 돌보고 그 영혼들과 그 지체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은지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상대를 휴지조각 보듯 하며 자기 중심적인 생활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눈앞에 두었을 때 바로 그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강퍅하고 원수 맺기를 잘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과 그리고 다른 사람의 비참함에 대해서 어떤 동정심도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언약 적인 연대의식들이 산산이 부서져버린 그런 콩가루가 된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녹였을 때우리 같은 부족한 사람이 연약한 한 지체라도 섬길 수 있었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우리도 넉넉지 않지만 더 고통받는 지체들을 인해서 우리의 소유의 일부를 덜어서 그들에게 보탬이 되게 했을 때 얼마 안 되는 건네주는 우리의 거친 손을 붙들고 하나님의 사랑에 목 매이는 지체들을 보면서 우리는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기뻤습니까? 우리는 고난이 오면 고난 때문에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된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시련과 어려움이 오면 그 시련과 어려움을 나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사랑하는 형제들, 그리고 나와 함께 눈물을 흘려줄 자매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들이 그런 처음 사랑의 때로 돌아가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의 사랑은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이기적인 사랑의 욕구로부터 멀어지고 자신을 섬기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기쁨으로 아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던 그때를 그리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세워주신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모두 직접 돌보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돌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가페의 사랑으로, 그 헷세드의 자비함으로 그 지체들을 돌보고 섬기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첫사랑을 회고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진실 되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정말 처음 사랑했던 그때처럼 여러분 마음에 이런 아가페를 회복하고 고통받는 이웃과 연약한 지체들을 돌보며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들의 종이 되어서 섬길 수 잇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두 번째는 그 아하바의 사랑입니다. ‘신부로서 네가 내게 보여주었던 그 아하바를 내가 생각하노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하바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만, 여러분들이 그것을 얼마나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전자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므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존재해야 할 그 아가페를 의미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아하바는 나 개인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아주 절대적인 그 애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면 그 사람의 이름 석자가 서럽도록 그리운 이름이 됩니다. 만나면 만나서 눈물을 흘리고 보지 못하면 보지 못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보면 기뻐서 마음이 아리고 보지 못하면 그리워서 마음이 쪼개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아하바의 사랑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에 의해 말씀하시면서 “너희 마음과 뜻과 성품과 내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라고 하였을 때 그 사랑은 이런 아하바의 사랑을 동반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왜 자기가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할례 받지 못한 이방 백성들에게 개처럼 포로로 끌려간 상황을 확정하시고 그렇게 끌려가라고 분부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어서라도 그 백성들에게 회복하게 하시고 싶으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하바의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귀한 줄을 알고 그 주님의 이름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그 사랑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게 된 소수의 백성들이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번성한 왕국의 수많은 백성들의 수보다도 하나님은 훨씬 의미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주님 때문에 마음 아파 보신 적이 있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너무나 크고 놀라워서 주님의 그런 사랑을 내가 받을 자격이 있을까 하고 하나님 앞에 황송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생각해보면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녹는 것 같은 그런 정절을 경험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다면 여러분들은 아직 아하바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서 밥을 먹고사는가가 아닙니다. 주님이 정말 우리에게 관심이 있으신 것은 우리가 죄 많은 이 세상에 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는가 입니다. 정말 우리 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을 볼 수 있을까요? 예의로 대하는 그런 최소한의 애정의 표현 말고 보지 못하며 그립고 그리고 서럽도록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가슴속에 새겨져서 영적인 침체 속에 있을 때는 그 침체 속에서 뵙지 못하는 하나님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은혜의 세계 속에 있을 때는 이렇게 좋은 하나님을 누리고 살지 못하였던 그 옛날에 핍절한 생활을 인해서 후회하며 마음 아파하는 그런 아하바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오랜 인생을 살고 수많은 갈등 속에서 자식들 때문에 헤어지지 못해서 마지못해 사는 부부들처럼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랑 없이 지속해가고 있는 사람들의 그 메마른 삶은 곧 메마른 영적 생활의 원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첫사랑을 회고하시면서 더 마음 아파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둘이 함께 사랑을 했는데 주님은 변함없이 그 사랑을 마음에 품고 계시는데 하나님이 한때 사랑하셨던 우리들은 그런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과는 정반대로 그 주님의 사랑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첫사랑을 회고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통증이 큰 것입니다.
정말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를 향해 느끼는 두려움은 상대방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아직 살아있으면서 자기를 향한 사랑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상대방의 죽음보다도 훨씬 무서운 것이고 더더욱 자신의 죽음보다는 더더욱 무서운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처음 사랑을 회고하십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처음 사랑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오랜 동안 운명처럼 여기며 살았던 영혼의 칠흑과 같은 어두움에서 벗어나서 빛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그 영광을 보면서 그 진리의 말씀 속에서 선명한 깨달음을 발견하고 그 진리를 타고 오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감격을 누리던 처음 사랑의 때가 여러분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때를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랑을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이후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변절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여러분들을 사랑하신 것을 후회하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심지어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오히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원수로 갚으며 하나님의 집을 박차고 뛰어나갔을 때도 방탕한 길로 행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배도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도 여러분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가 침체에 빠졌을 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는 지금도 하나님이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가장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아무리 변함없이 사랑하셔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신다는 객관적인 사실 하나만으로는 안 됩니다. 내가 주관적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내 인생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리 사랑하신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객관적인 사랑만으로는 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자기가 깊이 깨트려지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이렇게 주님을 버리고 멀리 떠났던 나를 주님이 아직도 사랑하시고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제물로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그때 회개하게 될 때 아주 선명한 깨달음이 오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이렇게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이제서야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니까 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탕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고통하며 하나님을 원망할 때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에 빠져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즐거움 같은 것은 폐기처분하고 살아갈 때 그때도 하나님이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총과 그 은총을 배반하면서 살았던 나의 악한 사이를 잇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 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죄악에 죽을 인생을 심히 불쌍히 여기사
저 십자가 높이 달리사 그 고통을 참았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마음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저는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인간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다라는 사실에 대해서 아주 전적인 동의가 가슴속에서 우러납니다. 여러분 가운데 신앙이 돈독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은혜를 많이 맛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찾아오셔서 당신 속에 있는 아하바의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많이 보여주신 사람들이 그랬기 때문에 주님의 그 사랑을 생각하면서 주님 이외에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부당한 것인가를 깨닫고 그것을 부끄러운 줄 알고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먹어도, 먹어도 갈한 목을 축일 수 없고 그리고 마셔도, 마셔도 해갈할 수 없는 이 목마름을 결국은 하나님 자신만이 해결해주실 수 있다라는 그것을 우리들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이런 아하바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눈뜨고 절망과 고통이 올 때, 내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험악한 세상을 헤쳐나갈 힘을 얻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그 아하바의 사랑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런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보며 하나님이 첫사랑을 회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의 연조가 얼마가 됐던지 상관없이 여러분들이 한번 교회에 나가서 왜 날 사랑하시나. 나처럼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주님은 왜 이렇게 사랑하시나. 나 같이 이렇게 더러운 인간이 하나님의 이런 성결한 사랑을 이렇게 끊임없이 받아도 되는가. 왜 날 사랑하시나. 이 쓸모 없는 여러분과 같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그 거의 눈이 멀다시피 한 이 아하바의 사랑 때문에 한번 흠뻑 여러분들의 마음이 녹아지면서 여러분들의 기도의 자리를 눈물로 적셔본 적이 언제 입니까? 찬송을 부르거나 성경을 읽다가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들이 사는 이 땅에 은혜와 긍휼을 내리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이 부서질 것처럼 하나님 앞에 감격하던 그 펑펑 울던 사랑의 감격이 여러분들 언제입니까? 정말 언제입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사랑에는 면역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면역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에는 면역이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의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을 보며 마음 아파하십니다. 아하바의 사랑이 너희에게 있는가. 내가 너희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 없는 존재들이 되기를 원하지만 나를 향해 바쳐야 했을 이 아가페와 아하바의 참 사랑을 너희들이 차가운 형식으로 바꾸었구나. 하나님이 슬퍼하시면서 탄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이 아하바의 사랑을 잃어버렸을까요? 왜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에 대한 참다운 감격을 잃어버렸을까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신앙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을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그리고 그 주님을 위해서라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도 버릴 수 있으리 만치 그래서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른 것들은 마치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정도의 사랑 속에서 우리와 관계를 갖고 싶어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참 사랑을 누가 많이 깨닫던가요? 어떤 사람들이 주님 앞에 견고하게 살던가요? 어떤 사람들이 넘을 수 없는 이 세상에 이 타락한 시대의 벽을 넘어섭니까? 어떤 사람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죄인의 부패한 욕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 아하바의 사랑 속에서 사는 사람,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이런 깊은 감격이 있어서 마음 깊은 중심에 ‘하나님 홀로 계시도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자아의 욕구들이 있지만 그러나 은혜의 눈물로 그것들을 누릅니다. 사랑하는 마음속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죄를 이기면 그는 날마다 죄악 된 이 세상을 벗어나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로 가고 있는 중이며 썩을 육신을 벗어나서 점점 영광스러운 장막으로 다시 태어날 부활의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런 아하바의 사랑을 간절히 회고하시면서 그 아하바의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목매어서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여러분들이 이런 아하바의 사랑을 회복해서 ‘주님’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여러분들의 마음이 뛰고 하나님의 사랑의 터치를 느낄 적마다 여러분들의 사랑이 그 사랑의 감격에 물같이 녹는 것 같은 첫사랑의 은혜 속으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는 하나님이 순종을 회고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실제로 한번 우리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을 돌아볼 것 같으면 그들의 신앙의 생활이 정말 순종하였는가 생각했을 때 우리의 판단과 표준으로 볼 때는 전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들의 생애를 순종한 생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태어난 그 모든 세대가 광야에서 죽은 것을 가르쳐서 그들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여기서 “순종하였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따랐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따랐음을 내가 기억하노라”
이것도 이제 똑같이 두 개의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상대적으로 불순종하던 때가 많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면서 광야 생활을 해왔지만 그래도 지금 예레미야로부터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경고를 들어야 할 의미가 하나도 없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전적으로 타락한 그 처지에서 볼 때는 오히려 하나님이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가 없다고 불평하고 고기 좀 못 먹는다고 투덜대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거슬리며 불순종하던 것은 오히려 애교처럼 느끼실 정도로 그 사랑을 첫사랑이라고 부르실 정도로 그들이 순종하면서 당신을 따랐다고 말해야 할 정도로 그렇게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수시로 불순종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들의 신앙을 어린애에 비쳐본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마음에서 볼 때는 이들이 당신을 잘 따랐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의 타락이 그 하나님의 마음을 더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다시 태어난 세대들이 물론 범죄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가나안을 보게끔 은총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새롭게 하시면서 그들을 가나안 정복에 전사로 사용하신 것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분명히 애굽으로부터 출발한 때부터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이르는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순종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없었지만 어째든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그 처음 사랑의 때가 순종하던 때처럼 기억이 되면서 그들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주님이 야단을 치시면 즉시 돌이켜서 무릎을 꿇고 용서의 은혜를 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가 피를 흘리며 외쳐도 돌이킬 줄 모르는 강퍅한 예레미야 시대에 예루살렘과 유다의 백성들에 비하면 하나님은 차라리 그들이 순종하던 때 당신을 진심으로 따랐던 백성들이라고 말하고 싶으실 정도로 그들과의 첫사랑의 때가 그리워졌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주님을 처음 만나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았을 때에는 정말 순종했습니까? 우리들의 순종이 온전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언젠가도 고백 드렸지만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구원의 확신을 경험한 후 약 4년이 넘는 기간동안 담배피고 술 먹었습니다. 심지어는 삼일 금식하고 금식이 끝나는 기념으로 오비맥주 갔다 놓고 먹었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아니 실화입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내가 주님을 처음 만나고 주님의 참사랑을 알면서 펑펑 울고 감격했지만 내가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벽하게 순종했는가 하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처음 사랑의 때에는 완악함이 급격하게 줄어들게 됩니다. 이 완악함은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서 생겨지는 것입니다. 이게 참 얼마나 우스운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홍당무 같은 것을 보면 적당한 때 그것을 캐내어야 먹지 크는 것이 좋다고 해서, 근수 많이 나가게 가만 내버려두면 속에 뼈가 생겨서 상품 자체가 아무 가치가 없어집니다. 똑같습니다. 꼭 당근 뼈 박힌 것처럼 신앙생활의 연조가 어느 정도 깊어질 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자라가고 하는데 그런 부단한 자기 깨어짐과 하나님의 아하바의 경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 속에서 함께 성장하지 않으면 그 속에서 심이 박히는 것입니다. 강퍅과 패역이 그 속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신앙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처음 믿는 사람들이 회개를 하면 나는 다 해봤다고 하면서 그것이 다 신앙의 초기 증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막 너무 감격해서 어쩔 줄 몰라서 자기가 만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면 처음에는 다 그래. 그렇게 쉽게 막 아하바의 사랑에 들뜨고 이런 것은 미성숙의 표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그렇게 균형 잡히고 성숙한 신자가 되면 거의 요동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 모릅니다.
사슴이 이렇게 뿔이 납니다. 위가 상입니다. 상, 중, 하, 이렇게 나갈 것 같은데 그렇게 안 나가고 상, 중, 하, 이렇게 나갑니다. 그러니까 이 상대가 제일 비싸고 중대가 비싸고 그 다음에 하대는 제일 싼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위는 녹용이 없고 녹각으로 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맨 처음 사슴의 뿔이 딱 솟았을 때 만져보면 딱딱한 것이 아니라 톡톡 치면 움직이는데 말랑말랑 합니다. 그것이 점점 자라서 잘라주지 않으면 그것이 이렇게 자라면서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사람을 받거나 짐승을 받으면 옆구리에 구멍이 날 정도로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과 똑같아 집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사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신앙 인으로서, 여러분과 똑같은 한 사람의 신앙 인으로서 일생을 두고 해결해야 할 가장 심각한 숙제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신앙의 세계에 익숙해지지 않으면서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많이 하면 할수록 성경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도 많이 알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도 점점 조금씩 유능해져갈 것입니다. 사실이 아닙니까? 그것도 일이니까. 하나님 섬기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주일학교를 가르쳐도 오늘 가르친 사람보다 삼 년 가르친 사람이 더 잘 가르칠 것입니다. 그렇게 더 유능해져 가는데, 그렇게 유능해져 가고 더 많이 알아가고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될수록 더 많은 자기 깨어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자기 깨어짐을 유지하면서 사는 그것이 관건입니다.
그래서 한사람이 정말 승리한 인생으로 인생을 마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이 세상에 해놓았는가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마지막 숨지는 순간이 다 되었는데, 그래서 신앙의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고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일평생 하나님을 위해서 섬겨서 엄청난 일을 이루어 놓았는데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기 깨어짐의 세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신앙의 연조가 깊으면서도 그 눈에는 눈물이 흐르지 않는 사람들, 정말 너무나 가슴이 아픈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몰랐더라면 지금이라도 돌이킬 기회라도 있을 것인데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많이 안 것이 아하바의 사랑으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기 위함인데 그에게는 오히려 더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아도 되는 자만심의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많이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유능해진 것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거침돌이 되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살면서 마지막에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면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살다가 죽는 사람이 훨씬 더 개인적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는 이런 하대와 같은 교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여러분, 정말 여러분들이 목사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이 보았습니까? 오랜 동안 교회를 섬겨오고 일생을 바친 교인들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여러분들이 본 적이 있습니까? 머리가 하얀 노인네들이 눈물을 흘리며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더 많이 알았고, 주님의 은혜와 긍휼이 무엇인지를 더 많이 체험하였고, 인생에 더 많은 시간을 주님과 동행하며 살았기 때문에 주님에 관한 헤아릴 수 없는 증언을 더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들 속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아하바의 사랑이 그들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하바의 사랑이 그렇게 떠나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치 버르장머리없는 자녀들이 부모님을 자기 중심적으로 섬기듯이 모든 것은 다 알아서 해줄테니까 뒷방에 가만히 앉아 계시세요. 우리가 언제 옷을 안 사드립니까, 밥을 안 줍니까, 용돈을 안 드립니까? 사실 그것이 효도가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부탁하는데 돈 좀 가지고 있으세요. 자녀들 주지 말고, 그리고 있다가 죽으면 교회에 기증하고 죽으십시오. 왜 바보 같이 다 주고 마지막에 가서 왜 그렇게 삽니까? 처음서부터 자식들에게 기대할 생각은 버리십시오. 길러서 보내면 끝이다. 우리 부모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너희들을 사랑했으니까 너는 네 자식들을 사랑하면서 살아라. 그렇게 하고 독립적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섬기려고 안 됩니다. 뒷방에 있는 노인네처럼 자꾸 우리보고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순종해라 그 순종이 온전한가. 자꾸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가 알아서 해드려요. 때 되면 감사헌금 드리고, 때가 되면 십일조 헌금 드리고, 예수님 생일 되면 감사헌금 드리고 그렇게 하겠으니 좀 가만히 계십시오.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물질이 없으십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인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섬김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관계가 있을 때 그 섬김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회상하시는 것입니다. 아하바의 사랑이 가져온 것은 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종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씨뿌리지 못한 땅 곧 광야에서 너희가 어떻게 나를 따른 것을 내가 기억하노라” 그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씨뿌리지 못한 땅, 그리고 또 광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궁핍과 고난입니다. 궁핍과 고난 속에서 일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 하나님을 잘 따른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의 연조가 깊어지면서 우리들이 빠지는 오류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자기를 합리화하는데 있어서 아주 능숙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못하면서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를 둘러댑니다. 아직 신앙이 어렸고 초보의 시절에는 왜 기도를 못하는가 말하면 그 기도를 해야지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당연한 의무라는 생각을 하기만 하면 가책을 받았는데 이제는 다양한 핑계거리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회피하려고 하는 이런 논쟁하는 정신들이 우리의 신앙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정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처음 인생에 그 고난과 가시밭길 속에서, 어두움 속에서 주님을 만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첫사랑의 때에는 항상 여러분들이 세상으로부터 실망을 하거나 사람으로부터 아픔을 겪었을 때 세상을 혼자 사는 것이 너무나 곤고하고 힘들게 여겨졌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의뢰 적으로 느껴졌고 그 사랑이 정말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곤고하고 어려웠어도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주님의 뜻대로 따르려고 애를 썼습니까?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는 소원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완벽한 순종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래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순종하면서 살려고 애를 썼고 자신의 모든 삶의 부분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려고 애를 쓰는 자기 성찰의 삶을 살았습니다. 신앙이 어리기 때문에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싶었고, 교회 안에서 만나는 가장 작은 교인도 자기보다는 훨씬 선배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도 어떻게 하면 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하나님 내가 어떻게 살아야지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 있습니까? 네게 순종할 마음을 주시옵소서.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분들의 마음은 차가워지고 그리고 순종한 삶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고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하나님을 향한 아하바의 신앙을 대치하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오늘 이런 것들을 인해서 깊이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최선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이지만 차선은 순종하며 살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말씀으로 지적하실 때 아파하는 마음이라도 있어야지 만 그가 소망이 있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그것을 회고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에 그 순종이 완전한 순종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살아가는 순종이 없는 황폐한 삶을 보시면서 첫사랑의 그 불안전한 순종을 그리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생각 없이 주님 앞에 불순종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계획을 해서 하나님을 거슬리면서 살아가는 이 불순종의 죄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하나님의 참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여러분들이 처음 사랑의 때에 가졌던 그 순종의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순종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다시 세움을 입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上)
소년 때의 우의와 그리고 결혼 때의 그 사랑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하나님과의 첫사랑의 추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그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분명히 첫사랑은 우리에게만 회고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도 회고의 제목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어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만 아니라 우리보다도 더 간절하게 하나님은 우리와 나누었던 첫사랑을 기억하고 그리고 그 처음 사랑으로 우리를 열렬하게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인격적으로 알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인격적인 승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누구도 우리의 신앙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조국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에 있어서 인격적인 측면에 대해서 깊이 눈뜰 수 있다면 아마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육적인 그리스도인들로 교회가 가득 차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엄격하게 교회는 그렇게 형식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분명하게 질타하고 그리고 그 사람조차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보다 깊고 진실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면서 남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격적인 승복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면 하고 싶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처음 사랑을 열렬하게 회고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주님과 나누었던 그 처음 사랑에 대해서 하나님께로부터 회고를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애절하고 간절했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한때 사랑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전에 사랑한 것과는 상관없이 남남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그들은 결코 남남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여전히 우리를 향한 그 처음 사랑에 대한 간절한 회고의 마음이 있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간절하고 열렬한 회고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우리가 그 사랑 가운데로 돌아오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그 사랑을 방종의 기회로 삼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점점 더 주님을 멀리 떠났고 그리고 점점 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절하였습니다. 할 수없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처럼 우리를 하나님을 버리고 살아간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지를 우리로 하여금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제 멋대로의 삶을 살면서 살아온 우리의 신앙생활 기간 중에 우리가 행복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승복하게 하시고 우리를 설복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강퍅해지고 우리의 심령이 너무나 오랫동안 굳어져서 평범한 하나님의 은혜 방편을 가지고는 도저히 하나님께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수 없는 날 예배를 드려도 한번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모두 설교자의 책임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당신 앞에 나아오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을 만나주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하나님을 너무나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감각을 모두 잃어버리고 기도의 영도 모두 고갈되었습니다. 기도에 참여하지만 그것은 단지 견디는 것이오, 예배에 참여하지만 그것은 오직 예배가 끝나는 시간을 견디는 것이 되는 그런 처지에까지 내려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따뜻하고 주님을 향한 은혜가 남아 있을 때는 얼마든지 우리를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하나님의 각종 수많은 은혜의 방편들이 이제 우리의 신앙을 회복하는데 별로 도움을 주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는 수없이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우리의 심령에 굳어진 각질을 깎아내시기 위해서 가슴 아파하시면서 우리에게 환난과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죄 가운데 살아가며 주님이 수없이 불러도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실 정도로 그렇게 매정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잠시 고통 가운데 두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영혼과 육체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그 독점적인 사랑의 욕구가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여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않을 때 다가오는 모든 징계와 그리고 환난, 그리고 시련들은 어떻게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하고 열렬한 사랑의 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반대말은, 사랑에 반대되는 감정은 미움이나 고통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정 반대되는 감정은 무관심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사랑에 정 반대는 무관심입니다. 사랑에 정 반대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고 다시 관심을 갖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번 택한 주의 자녀들을 버리실 수가 없어서 끊임없이 우리들을 돌이키기를 원하시나, 그 처음 사랑을 회고하며 그들이 자기에게로 돌아오기를 원하시지만 돌이킬 줄 모르는 그들을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기치 못한 시련과 폭풍을 불러일으키시기도 합니다.
잠시 그런 시련과 환난을 당할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깨닫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불순종과 죄 가운데 살아가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강한 책망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처음 그런 하나님의 책망과 진노가 우리를 향한 진노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순간적으로 절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징계와 그리고 그 속에서 환난을 당하면서 우리를 향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그 진노하시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제 너무나 많은 날 동안 죄 가운데 살았고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떠나왔기 때문에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멀어져버렸고 그래서 이제는 어떤 은총도 하나님께 기대할 수 없다라고 하는 낙망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뒷받침해주는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자 할 때 느끼는 차가운 거절감 입니다.
환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찾고 싶어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거나 주님께 깊이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힘을 빌려서 이 곤고하고 어려운 시련을 피해보기 위한 마음이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상하게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도저히 그 하나님의 따뜻한 숨결을 느낄 수가 없고 하나님의 참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기도 속에서 차가운 거절감이 느껴지는 그런 비참한 상황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말로 버리고 그리고 우리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이 생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잠시는 그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은혜도 기대할 수 없다고 낙심하지만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고 나서 우리의 마음이 정말로 낮아져서 단지 시련과 환난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너져버린 그 관계를 생각하고 그리고 내가 그렇게 부족한 나와의 첫사랑을 열렬히 회고하시는 하나님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게 제멋대로 인생을 살아서 결국은 하나님의 마음에 못박은 인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주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회개할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우리에게 당신의 그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오랜 동안 불순종하며 살아온 우리를 향해 베푸신 그 시련과 환난의 고난이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강렬한 손짓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매맞고 그리고 때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우리를 불러서 다시금 당신의 품에 안으시는 하나님의 그 회복의 은혜를 맛보면서 우리는 예전보다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베푸시는 커다란 심판에 대한 예고와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에 가득 찬 이 책망의 음성은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끝장내고 그들을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그들의 죄의 진상을 보여주시고 그들의 문제에 핵심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적나라하게 들쳐 보이심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이 왜 자신들을 인해서 그렇게 아파하시는지를 깨닫게 만들어주시고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선택된 백성들인 자신들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오늘 새롭게 하나님 앞에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사랑하시고 첫사랑을 열렬히 회고하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즉 유대 예루살렘에 그 백성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 중에 두 가지 죄악이 있는데 첫째는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둘째는 너희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니라” 고 나옵니다. 오늘 이 부분이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과” 그랬는데 이 부분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잇습니다. “생명의 물의 샘인 나를 버린 것, 생명의 물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 생수하고는 좀 다릅니다. ‘생수’ 그러면 우리는 풀무원이나 이런데서 나오는 그런 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생명의 물”입니다. 생명의 물, 퐁퐁 솟아나는 샘, 생명의 물의 샘인 나를 버린 것, 그것이 첫 번째 죄악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죄악은 그들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웅덩이는 물을 저축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닛시바”로 되어 있는데 산산이 깨져버린 것입니다. 그릇이 팍 하고 부서지듯이 탁 깨트려진 웅덩이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오늘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적용시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두 가지 죄가 있는데, 그런데 사실 두 가지 죄가 아니라 한가지 죄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에 보면 이게 전부다 한 문장으로 붙어있습니다. 하나나 두 개가 아니라, 그런데 ‘두 가지 죄악’이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 이것이 한 가지 죄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가 나를 버렸다’ 그것입니다.
나를 버리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인생을 꾸려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의지하지 않으면 누구를 의지합니까? 세상을, 세상은 뭐 솔직히 의지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아니면 자기 돈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먼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세상과 결별하는 일이 먼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불 신앙과 야합하기 전에 신앙을 버리는 일이 먼저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의 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두 개로 나뉘면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이다. 결국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그렇게 너희와 첫사랑을 회고하고 너희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내가 너희를 심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너희가 나를 버렸다. 이것이 이제 구약 성경에서 두고, 두고 논란거리가 되는 문제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툼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형식은 항상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는 나를 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언제 주님을 버렸습니까, 우리가 언제 안식일을 안 지켰습니까, 절기를 걸렀습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안 드렸습니까?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냐고 하는가 하면 너희들이 마음으로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면 그 모든 절기, 그 모든 안식일, 그 모든 성대한 제사 이런 것들이 다 나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논쟁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드러내 보여주시는가 하면 여호와를 믿는 이 신앙의 영적 특성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것, 절기를 지키는 것, 율법을 지키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아주 소중한 것을 싸고 있는 껍질입니다. 그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제 설명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러니까 헷세드와 아하바의 그런 사랑, 아가페와 아하바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한없는 사랑을 내가 느끼고 그런 아가페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받고, 그것이 헷세드입니다. 그렇게 깊은 감화를 받아서 그래서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면서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분신처럼 생각되어서 그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아가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아하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없이 살수 없는 애절함, 그래서 어제 연애 이야기를 잔뜩 했습니다. 연애를 못한 사람들은 그냥 눈만 끔벅 끔벅 합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절절한 그런 마음, 그 애절한 마음, 그냥 이렇게 길거리를 지나가다가도,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찬송만 불러도 아! 정말 내 인생에 있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나를 사랑하시는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거의 전부다. 저는 한동안 그 찬송을 부르면서 참 많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그것이 아하바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와서 근엄하게 폼잡고 출근부 도장 찍듯이 주보 하나 가지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것이 경외가 아닙니다. 그런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주님을 간절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싸고 있는 형식들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을 지킨다, 뭐를 한다 뭐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까보시니까 빈 껍질입니다. 여러분, 이제 가을이 되면 밤을 많이 먹습니다. 저도 밤을 몇 분에게서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밤을 삶은 것을 따끈따끈 할 때 까면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노랗습니다. 티스푼으로 파먹는 것을 생각하면 군침이 돕니다. 그래서 그런 상상을 하면서 탁 해서 콱 깨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쑥 들어갑니다. 그리고 콱 씹히는 것이 이상하게 식물성분이 아니라 동물성분이 씹힙니다. 까보니까 이빨 자국이 나있는 벌레가 한 마리 있습니다. 시커멓게 다 썩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후회가 되겠습니까, 겉부터 썩었으면 차라리 깨물지도 않는데,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 그것입니다.
주일도 지키고 십일조 생활도 하고 자기는 주를 위해 산다고 건들건들 하고 그렇습니다. 뭐가 있는가 하고 껍질을 까고 보니 속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헷세드도 없고 그리고 아하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도 없고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더 알고 싶어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고 싶어하고 살아있는 날 동안 더 많이 자기를 깎고 다듬어서 주님과의 그 완전한 친교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갈망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벌레를 콱 깨무는 것을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그 불쾌함이 바로 형식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입니다. 오죽했으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성전 문 좀 닫아버렸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안 왔으면 좋겠다. 제발 내 이름을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막 애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버렸다 그러면 무슨 감옥에나 간다든지, 사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열렬히 하나님을 찾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교도소 같은 곳에 한번 가보십시오. 아니 체포되어서 들어가라는 것이 아니라 위문하러 한번 가보십시오. 가보면 얼마나 열렬하게 하나님을 찾는지, 제가 몇 년 전에 서대문 교도소에 갔는데 죄수가 2000명이 있는데 예배당은 160명밖에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추첨을 해서 들어가는데 거기에 들어온 사람들은 너무 너무 애절하게 예배를 드립니다. 내가 보니까 진짜 그 사람들은 내보내고 밖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야지 되겠습니다. 얼마나 애절하게 찾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을 버린 것은 무슨 큰 죄를 지어서 형무소에 끌려간다든지 아주 세상이 알면 깜짝 날 소문난 죄를 저지른다든지 그런 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구약 성경에서 보면 전혀 그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어제 말씀드린 그런 사랑이 그 속에서 역사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솔로몬을 향해서 유언 적인 설교를 남길 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너를 찾으실 것이요, 하나님을 네가 버리면 하나님도 너를 버리시리라.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가 버리는가 둘 중에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버리는 것, 찾는 것 양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 아니면 다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마음이 들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그렇게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과 눈물겨운 사랑을 나누고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설교하고 있는 제 자신도 안 그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은 더더욱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그런 간절하고 뜨거운 사랑이 우리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 살면서 수많은 유혹과 죄,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성품, 이런 것들에 현혹되면서 어느 순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식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와 아하바의 사랑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빠져나갈 때 미치도록 괴로워합니다. 그렇게 너무나 괴롭기 때문에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나니까 나는 너무나 슬픕니다. 나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부귀와 영화,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영광과 내가 누리고 있는 좋은 것들이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게서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주고도 주님의 사랑을 사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도대체 내가 어디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나의 어떤 부분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을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그렇게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잠시 잃어버렸어도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번 다윗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범죄하고 나니까 구원의 기쁨이 사라지고 그리고 마치 주의 성령이 자기에게 떠나가시는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실제로 죄가 그의 내면의 세계 속에 깊이 파고 들어왔고 그의 세계를 초토화시피 했습니다. 예전에 하나님 앞에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기쁨으로 찬양하던 그 목소리는 얼어붙었고 묵상을 하면 떠오르던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위대한 진리들은 이제 더 이상 드러나지를 않았습니다. 법궤가 들어올 때 어린아이처럼 춤추면서 기뻐하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던 그 육체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흐느적거리는 고기 덩어리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거기에서 만족한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말씀이 그를 자극하였을 때 그는 애통해했습니다. 애통하고 하나님 앞에 뉘우쳤지만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예전에 누렸던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경험들이 한번, 첫 번에 회개한 그 순간에 강물과 같이 밀려와서 그 영혼을 압도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가혹하리 만치 긴 세월동안 하나님 앞에 몸부림쳤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눈물로 드리는 수많은 그 탄원의 기록들이 시편에 흩어져 있습니다.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그렇게 예전처럼 사랑하지 못해도 문제를 별로 못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었을 그때에 시인은 자신 속에 사라져버린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는 견딜 수 없이 괴로워했습니다. 아마 그가 왕관과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한순간의 기쁨을 바꿀 수 있었다면 기꺼이 그 왕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 속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한번 하나님의 사랑을 예전처럼 그 처음 사랑을 깊이 맛보고 말할 수 없는 행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아마 자신의 예정된 그 죽음을 이십 년이라도 앞당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범죄했지만 하나님을 버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으니 그들은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로 분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악하고 죄인인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그들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없었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고 형식을 유지하면서 그것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충분하다고 믿었고 하나님의 어떤 사랑도 느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버린 적이 거의 없는 사람들입니다. 몇 년 동안 교회에 다니지 않다가 오늘 처음 나오신 분이 있습니까?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적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열렬히 찾는 사람들입니까? 우리 생각에는 내가 하나님을 열렬히 찾는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버린 사람도 아니라고 하지만 그런 사랑을 성경은 하나님을 버린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열렬히 찾고 하나님의 그 사랑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자 하는 열망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가페가 있을까요? 아하바의 그 애절한 사랑이 그 마음속에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을 열렬히 찾고 간절히 주님과의 그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애절함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은 하나님을 버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을 버린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커다란 고통이오, 비극이 되었을까요? 이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버렸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버린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생명의 물의 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즘은 다 길거리나 심지어 공원에 가도 시멘트로 범벅이 되어 포장이 되어 있으니까 샘을 못 본 사람도 있습니다. 약수터에 줄줄 흘러 내려오는 그런 샘은 샘이 아닙니다. 그것은 샘이 아니라 깨끗한 웅덩이입니다. 어렸을 때는 포장이 안 된 곳이 많았으니까 애들과 막 뛰어 놀다가 이제 깊은 골짜기나 그런 곳도 아닌데 그런데 이상하게 막 애들이 뛰놀다가 야, 여기 샘이 나온다고 한 아이가 소리를 지르면 가봅니다. 그러면 얕은 곳에 전부다 흙탕물이 되어 있는데 한쪽만 맑은 물이 모여있습니다. 그래서 가서 보면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퐁퐁 솟아 나오는데 계속 모래를 움직이면서 물이 솟아나옵니다. 거기 근처에 있는 모래는 흙이 아주 안 섞인 모래입니다. 왜 수없이 물이 솟아 나오면서 진흙 성분을 다 털어 버렸고 그래서 깨끗한 모래가 움직이면서 물이 퐁퐁퐁 솟아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보면서 재미있다고 하면 개구쟁이 녀석이 와서 그게 뭐야 하면서 개미집을 밟듯이 막 밝고 지나갑니다. 그 개구쟁이가 지나가도 그 샘은 조금도 화내지 않고 계속해서 물을 퐁퐁퐁 솟아납니다. 그래서 그 개구쟁이가 지나가고 나서 한 1-20분 있으면 다시 그 주위에 물이 말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깨끗한 물이 됩니다. 물론 입을 대고 마실 수 있는 물입니다. 그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바로 그런 존재이십니다.
그런데 그것도 생명의 물의 샘, 그런데 그렇게 솟아나는 그 물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유지하며 살게 하는 물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회화적인 표현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 물이 당연히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게 합니다. 여기서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공업용수를 쓸 수 있는 그런 물의 솟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먹는 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마임하임’이라고 하는 그 표현이 먹는 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이 생명의 기력을 북돋아주는 그런 종류의 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몸이나 씻고 버리는 물이라면 사실은 세수를 안 해도 살 수 있고 목욕 좀 늦게 해도 살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물은 며칠만 안 먹으면 도저히 살수가 없습니다. 수시로 이 물을 먹어야지 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에게도 역시 하나님이 그런 존재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어서 그렇게 생명 적인 존재가 되는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우선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느낄 수 있을 때에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신앙이 떨어지고 영혼이 침체되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돌보신다고 하는 사실을 거의 새카맣게 잊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깊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깨트려지고 그 은혜에 깊이 젖어들게 될 것 같으면 그때 비로소 자기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할 때도 하나님은 자기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깨닫지 못했을 때 일어났던 많은 일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그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래서 그 일이 일어났구나. 그런 일을 내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사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반응하라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인데 그리고 생각을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서 철이 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끊임없이 인도하시는데 그럼 한번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우리의 생활, 매일매일 살아가는 이 삶의 근원이 하나님이십니다. 죄인들에게도 하나님이 변함없이 은혜를 베푸셔서 이 땅에 살게 하심으로 다시 한번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정말 여러분들의 신앙이 마음속에 깊이 들어가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나면 그러면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전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삶을 살아가도록 여러분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게 만드시는 힘의 모든 근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난하고 궁핍해서 도저히 그 고통 속에 견딜 수 없을 때 여러분들이 누구로부터 공급을 받습니까? 여러분들이 육신 적으로 지치고 피곤할 때 여러분들이 새로운 힘과 원기를 얻어서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어디로부터 제공을 받습니까? 인생을 살아갈 때, 온갖 난관을 만났을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피해갈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여러분들이 그것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이제껏 여러분들의 살아온 모든 인생은 주님의 사랑과 그 은혜의 돌보심에 빚진 인생입니다. 다만 여러분들의 신앙의 깊이와 영적인 깨어 있음에 정도에 따라서 그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분도 있고 거의 느끼지 못하는 분도 있을 뿐이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생수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놀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신앙적인 사람이었는데 그 어느 한순간에 너무나 깊이 타락하거나 혹은 그에게 많이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을 철저하게 실망시키고 주저앉아 있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때 우리는 그 사람을 향해서 깊이 실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는 동안에는 그가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우리의 훌륭한 신앙의 선배요 혹은 스승 모본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이 그를 놓아버리시면 그 역시 아담의 한 후손일 뿐이고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모든 데까지 내려갈 수 있는 비참한 인생일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만약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있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면서도 이 세상에 어느 정도의 품위와 명예를 유지하면서 그렇게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여러분들이 외식하던 외식하지 못하던 간에 결국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렇게 베풀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이렇게 베풀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내려오다가 잠깐 텔레비전을 보니까 쌀이 남아돌아서 그것을 빨리 사달라고 하고 정부에서는 못 사준다고 하고 농민들이 분노하고 쌀값이 떨어졌다고 막 쌀부대를 메고 관청에 와서 집어던지고 관청 사람들이 뜯어말리고 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참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올 봄에 그렇게 가물어서 거의 모를 내지 못할 때 우리들이 얼마나 염려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타들어 가면서 갈라지는 논밭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나. 심지어는 그것을 다 갈아버리고 거기에 다른 것을 심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절망적인 상태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셔서 우리에게 넉넉한 양식을 주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정말 크신 은혜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먹고살도록 만들어주셨는데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만 베풀어주신 사랑이 아니라 해 아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생수의 근원이 되십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까? 하루 세끼를 먹으면서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또 병든 사람들은 죽을병이 아닌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죽을병이 든 사람은 아직도 생명을 연장시켜서 하나님 섬기고 주님 앞에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까?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영하면서 하나님의 이런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를 모두 잃어버렸고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진정한 그 힘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조차도 부인하면서 오늘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 앞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것, 그리고 우리가 기력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 우리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 은혜가 얼마나 감사하고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베푸신 그것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매순간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조차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모를 때도 하나님께서는 쉼 없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서 매순간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보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주님 섬기고 봉사하고 그러면서 주님 섬기면서 사랑하며 살게 끔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생수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은 우리의 실제적인 생활에 면에서도 나타나지만 두 번째로는 더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은 영적 생활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물이시라는 사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다른 선지자들과 비교해서 말한다면, 선지자들을 급수를 매기는 것은 우습지만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약에 급수를 메긴다면 에이급에 속할 정도로 그렇게 구약 신앙의 영적 측면에 대해서 아주 탁월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이 표현 하나만을 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생명의 물의 샘인 하나님입니다.
자, 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결국 그 사람의 인생을 움직이는 조종실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의 신앙의 세계입니다. 신앙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거나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예수를 믿고 신앙의 세계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지금 가지고 있었던 직업을 그만두고 무슨 수도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으면 사람들이 다 아름다워지고 예뻐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코가 올라가거나 눈이 더 찢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썩은 이빨 그대로 있고, 잠잘 때 침흘리는 습관 그대로 있습니다. 처진 눈썹, 거적눈 그대로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그런 것들이 모두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들이 독특한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삶을 그리고 인격을 움직이는 조종실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세계는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에 세계 속에 신앙의 세계라고 하는 조종실이 있어서 그 마음이 신앙의 세계라고 하는 것에 지배를 받으면 신앙적인 인격으로 점점 변해가고 신앙적인 삶으로 점점 나아가지만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지배를 받게 되면 세속적인 인격으로 변해가고 그리고 세상 적인 생활로 나아갑니다. 그 마음이 탐욕에 사로잡히면 탐욕에 이글거리는 아주 이런 인격으로 변하고 그리고 그런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아주 게걸스럽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으로 바뀌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사람됨은 결국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를 통해서 확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보십시오. 그 마음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마음은 무엇인가 하면 그 마음에 있어서 모든 생명력과 원기를 얻는 그 근원에 뿌리가 당신 자신에게 잇대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화: 런던에 오랜 동안 심각한 가문이 있어 오래된 나무들에게 땅을 파서 물을 주어야 할 정도 였는데 그 중에 굉장히 큰 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는 가뭄과 상관 없이 잎이 싱싱하게 잘 자라 식물학자들이 궁금해서 원인을 알아보니 그 나무가 워낙 크니까 큰 만큼 뿌리도 멀리 뻗어나가서 테임즈 강까지 가서 물기를 빨아들여서 살아갔다는 이야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생명의 물의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깊이 뿌리박고 그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서 흘러 들어오는 주님의 생명력을 공급받으면서 살아갈 때, 그때 우리의 인격이 변하고 우리의 삶이 놀랍게 기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사는 공동체 속에 모두 그 한복판을 흐르는 강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선교 적인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이 확장해 가시는 아주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이 주님을 믿고 아주 놀랍게 변화가 됩니다. 그래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그 마음의 세계가 하나님께 잇대어 있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는 진액과 그리고 수액을 빨아들이면서 그러면서 만족함을 누리면서 삽니다. 하나님과 생명 적인 연합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물이 그 사람에게 흘러 들어오기만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놀랍게 빠른 속도로 변해갑니다. 야비하고 더러운 인격이 변해서 고상하고 아름다운 인격으로 변하고, 포악하고 강포했던 그 마음이 변해서 사랑과 자비에 넘치는 마음으로 점점 변해갑니다. 그렇게 놀랍게 변해갑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를 고치고 나면 그것이 자기에게만 그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변화는 한 사람의 내면의 세계 속에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변화는 자기 혼자 감추고 있을 정도로 그렇게 사소한 변화가 아닙니다. 놀랍게 변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가족이 같이 살면 부모들은 벌써 다 압니다. 애들이 학교에 다닌다고 하고, 도서관에 간다고 하고, 대학 다닌다고 그러고 그래도 부모들은 딱 보면 압니다. 제가 요즘 정신 못 차리고 연애하고 다니는구나. 다 압니다. 그것을 모르면 부모 자격이 없습니다. 벌써 눈빛만 보면 압니다. 거울 앞에서 매일 이러고, 아침에 이빨도 안 닦고 학교에 가던 애가 거울 앞에서 이러고 말이지. 벌써 보면 압니다. 남다른 취미 하나만 가져도 그게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숨길 수 없는데,
주 예수 내 마음에 오심 주 예수 내 마음에 오심
물밀 듯 내 마음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마음에 오심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연합되어서 그렇게 살아갈 때 그게 취미 생활에 비하겠습니까?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옵니까? 제가 직장에 다닐 때 낚시에 빠진 사람을 한 사람 봤습니다. 그런데 진짜 신앙의 세계에서 회심의 표징처럼 뚜렷합니다. 모든 인생의 목적인 오직 ‘대어’입니다. 그리고 삶의 모든 구조가 재편됩니다. 그 당시가 벌써 굉장히 오래된 때인데 한 2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때 이만 원이면 상상할 수 없이 큰돈입니다. 갈비탕 한 그릇에 이 백원 할 때니까 이만 원이면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당을 받아서 나가서 양키 장수에게 가서 스위스 칼 요만한 것, 그때는 구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스위스 칼 하면 최고였습니다. 이것 얼마를 줬는지 알아. 이만 원 줬다고 하면 만져보면서 무슨 손톱깎이 만한 것을 이만 원인가, 그것을 왜 샀는가 하면 고기 배를 따려고 산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모두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때 순간접착제가 나왔는데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때 일본에서 처음 나와서 그것도 사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낚시 줄 묶는데 그것을 한 방울만 딱 떨어트리면 기가 막히다 고 했습니다. 인류 문명의 모든 발전도 그 초점이 자기의 그 취미 생활입니다. 다 재편되는 것입니다. 어디에 무슨 새로운 낚시 대가 나왔다 그러면 그냥 외출을 해서라도 가서 사 가지고 왔습니다. 퇴근할 시간이 되면 혼자 장화도 신어보고 모자도 써보고 이것도 들어보고 사무실에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월요일 날 돌아오면 기쁨이 넘치면 일요일날 많이 잡은 날이고 침체에 빠진 날은 다 놓친 날입니다. 나중에 내가 은혜를 받고 보니까 회심의 현상과 너무 비슷합니다.
그것 보십시오. 취미 생활 하나만 있어도 그렇게 사람의 삶을 움직이는데 아니 주님이 그 사람 안에 계시는데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그 하나님이 퐁퐁 솟아나는 그 놀라운 은혜와 기쁨과 사랑,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공급해서 그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시는데 사단이 와서 혹은 내가 잘못해서 장화를 신고 그 샘을 한번 밟고 지나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다시 나와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놀라워, 찬송 부르며 다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숨겨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진실한 변화를 통해서 그 속에서 끊임없이 생수처럼 솟아나는 하나님과의 그 은혜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면 그 사람 하나가 자기의 가족이면 가족, 회사면 회사, 자기 친구면 친구 그 속에서 그 사람이 독보적인 하나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황폐했던 땅과 같았던 많은 사람들이 한강 물에 강이 흘러가기만 하면 그러면 막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 그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시골에 가면 농지 정리 같은 것을 하거나 아니면 농토 개발 같은 것을 할 때 쭉쭉 줄을 그어놓고 그 다음에 수로를 쭉 파서 가운데 물을 확 흘려보냅니다. 그 물은 흘러갈 뿐입니다. 물이 무슨 어디서 꽃씨를 사러 가고, 물이 벌떡 일어나서 새들을 부르러 가고, 물이 무슨 벌레들보고 오라고 하고, 물이 무슨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물은 그냥 조용히 흘러갈 뿐입니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말없이 조용히 흘러갑니다. 그런데 몇 달 흘러가고 나면 거기에 황폐했던 그 땅에 생태계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싶으신가. 그런 근원이 되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살고, 하나님 때문에 용서하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하나님 때문에 아파하고,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하나님 때문에 희망을 갖고, 하나님 때문에 낙심하기도 하고, 하나님 때문에 거룩한 용기를 얻기도 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 죽고,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순교도 하는 삶의 모든 이유와 자기의 존재의 모든 목적과 그리고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모든 원동력이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어지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시면서 까지 여러분들을 구원하셨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맺고 싶으셨던 관계입니다.
나는 오늘날 영적 침체의 문제를 너무나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난 굉장히 슬픈 사람입니다. 하나의 마치 자기의 영적 침체를 말하면서 무슨 어디 비오면 관절이 쑤셔서 정형외과에 찾아간 것처럼 그렇게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자기의 마음속에 생수 되신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데,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그 힘들이 공급되는 유일한 통로인 하나님과의 그 아름다운 관계, 그 관계를 통해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 생명의 근원이신 그 하나님의 생명력이 나에게 전달되어지지 않은데 어떻게 그렇게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슬프지도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날의 큰 문제는 죄가 많기 때문에 문제이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찾음, 내가 이런 상태를 벗어나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기를 원하는 그런 간절한 목마름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이런 면에 있어서 모두 다 결단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어떤 일들이 생깁니까? 동족간에 공동체적인 연합이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진짜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만 하는 것 가지고는 안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생수의 근원을 회복하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그러면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 말고 살라고 해도 그들은 서로 사랑하면서 삽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지 됩니다. 매일 모여 앉아서 친교의 시간만 갖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잇대어서 거기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처음 사랑의 때가 있었을 것이니까 이런 하나님의 생명력을 누리면서 살아가던 때가 없었을 리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참 기가 막힌 데 여기 ‘근원’이라는 것이 ‘샘’인데 그 ‘샘’이라고 표현한 것이 너무 적절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그리고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전히 영적 생활이 주저앉아버린 그런 때에는 한번 어떤 사람이 밉다고 생각이 되면 결국 원수를 맺고야 맙니다.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생수 되신 하나님께로 공급되는 그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를 잘 믿고 열심히 믿는 사람이라도 혈기가 납니다. 나고 즉시 후회하지만 혈기가 납니다. 그런데 그 혈기가 확 솟아나서 누군가를 나무라고 책망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상처를 줍니다. 그리고 나니까 마음이 확 어두워집니다. 그러니까 벌써 성령님이 슬퍼하십니다. 그렇지만 이제 다시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늘 기도하는 사람이니까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어제 있었던 그 일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마음을 녹이시면서 자기의 사랑 없음을 뉘우치게 하십니다. 그때 자기의 마음속에 가득 찼던 그 흙탕물과 같았던 마음이 기도하면서 주님의 은혜가 내 마음속에 퐁퐁 솟아나면서 그것들이 짝 가려지면서 결국은 그 사람의 잘못이 보이지 않고 나의 과실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에 새벽 기도의 눈물이 마르기 전에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화해하고 그러면서 다시 나를 사랑하시고 새롭게 깎아서 다듬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면서 과오를 딛고 오히려 더 완전한 사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죄를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맛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리지 않은 사람의 내면의 세계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세계가 있습니까? 우리는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안전한데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또 그렇게 은혜의 수단에 참여할 때 내 안에 와 계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어서 그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는 순발력이 있고 그 회복을 통해서 잠시 마음속에 가득 싸였던 더러운 것들이 물러가고 다시금 하나님 자신으로 충만해지는 은혜의 자정력이라고 할까, 하나님의 역사의 기초를 둔 은혜의 자정력이 정말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 동안에는 그는 하나님을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기쁜 사람들일까요? 지금도 기억에 나는데 지금은 이름을 대면 다 아실 정도로 유명한 분이 되셨습니다. 신문에 보면 며칠에 한번씩 얼굴이 나올 정도로 그렇게 유명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예화: 그분이 예전에 전도사 때 할머님 집에서 사시면서 할머니와 전기세 문제로 싸움을 하셨는 데 그분이 얼마 되지 않아 이사를 가시고 며칠 후 그분이 찾아와 할머님께 자신의 잘못을 용서를 빌면서 화해를 했는데 그분이 나중에 하신 말씀이 자기가 그렇게 싸우고 나서 며 칠동안 새벽기도를 하려고 하면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인해서 가 서 화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것이 무엇입니까? 생수의 근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 근원이 없으면 그 노인네 엉터리지. 셈도 할 줄 모르면서 우리가 어리다고, 전도사가 얼마나 가난한지도 모르고 자기 손자도 우리 교회에 보내면서 봐주지도 않고, 이렇게 하면서 지금까지 미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생수의 근원이 없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생수의 근원이 있는 사람들이게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를 둔 은혜의 자정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순간, 순간 솟아나는 자기를 이길 힘이 있습니다. 이런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를 하면서도 그런 것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그러니까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해서 그래서 기도하면서 제 꿈은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3-4000명이 모여도 한 100명이 모이는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잘 돌봄을 받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꿈이고,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 희생하고 포기해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모든 것은 다 양보할 수 있는 용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때 보면 그렇게 한때 은혜를 받고 그러던 지체가 곤고하게 살아갑니다. 교역자 회의 때 누가 요즘 깊은 침체에 빠졌습니다 그런 말이 들려올 때는 너무 괴롭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런 것들을 많이 보면서 느끼는 것은 그런 은혜의 자정력을 우리 안에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교역자가 돕는 것도 한계가 있고, 구역 장이 돕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목사의 중보의 기도도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그 은혜를 잃어버리지 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삶이 무엇인가 하면 생수의 근원 되신 주님을 안 버리는 삶입니다. 그런 은혜의 자정력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여러분 생각할 때 나는 이 세상만큼 신앙생활 하기에 좋은 데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다 자기가 진 십자가가 무거워 보이지만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 십자가는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살면서 저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면서 신앙의 길이 쉬울 리가 없고 고난이 없고 십자가가 없을 리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그런 십자가가 있고 그런 고난과 그런 어려움이 다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 다 있고 그리고 그런 것들로부터 수시로 공격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이 도와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 안에 이 은혜의 자정력, 생수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을 공급받는 그 통로를 막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유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매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으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신앙의 생활입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제사, 그 성대하게 국가 예산을 들여서 치루는 그 절기,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겉으로 폼잡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 사람의 마음속에 오셔서 생수의 근원이 되시고 그래서 끊임없이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유혹을 받는 그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안에 있는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정력을 가지고 그러면서 이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독특한 백성이 되어서 그 사람들이 인류 역사 속에 흐르는 한 강물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던 황폐한 땅에 꽃들이 피어나고 새들이 노래하고 나무들이 쑥쑥 자라나고 거기에 아름다운 새소리들이 들리고 생태계가 보건 되어서 사막과 같은 그 땅이 기름진 땅이 되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생수의 근원 되신 주님을 각 사람, 각 사람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선택에 목적에 부흥하는 삶을 살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의 고난과 어려움이 진정으로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이 무기력해지고 있는 것이 진정으로 외부적인 시련과 환난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무기력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여러분들을 무기력 화시키는 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이고 여러분들의 내면의 세계 속에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접붙인 삶을 버렸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무기력과 친구가 되었고 그리고 시련과 환난 속에서 오히려 작렬하듯이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그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그 은혜,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은혜를 공급받으면서 사는 이것은 내 생명의 존립에 관계된 문제다.’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팔아버리고 몇 푼의 돈을 위해서 팔아버리고, 순간의 기쁨을 위해서 내동댕이쳐버리고, 조금 편한 그 게으름과 타협하기 위해서 그것을 아낌없이 퍼내어 버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삶이 행복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똑같이 여러분들이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런 것들을 공급받으면서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붙들고 언제나 그 충만함 속에 살아서 역경이 오면 그 역경을 뚫고 나가고 고난이 오면 그 고난을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찬송할 수 있는 기회로 바꾸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3.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下)
사실 어제 이 13절을 다 설교하고 싶었습니다만 시간상 전반부만 설교했습니다. 첫사랑을 회고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두 가지 죄악 때문이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삶 전체가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삶이 되었고 그들의 영적인 생활이 하나님 자신의 생명수 되신 하나님 자신에게 잇대어 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은 황폐했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맛을 잃어버린 그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백성들이 이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세우신 선교 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도 자기의 백성들을 심판하셔서 그들을 정결케 만드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간섭하셔서 징계하심으로 그들을 다시 정결케 하셔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생수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버린 죄와 함께 또 다른 죄가 부각되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그 웅덩이는 무엇 하는 웅덩이였을까요? 이 웅덩이는 말하자면 우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웅덩이를 파서 그래서 거기에서 생수를 길어먹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화적인 칸텍스들을 염두에 두고 그리고 하나님을 우물 삼아서 거기에서 생명수의 샘처럼 솟아나는 그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생명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오늘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어제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그런 놀라운 생명의 은혜를 입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방식인데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런 것들을 공급받을 수 없을 때 그때에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무엇인가 자기의 삶을 이어가게 만들어주는 그런 어떤 원천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이 절망을 하는 것은 고난이 많고 위기가 닥쳐서 절망한다기보다는 무엇인가 자신의 삶의 이유와 근거를 찾을 수 없을 때 그때 인간은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통계적으로 보면 먹기 힘들고 가난하고 전쟁이 많은 나라에서는 자살이 별로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라도 주어 먹고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이제 좀 넉넉해진 나라에서 자살율이 훨씬 더 많습니다. 굉장히 높습니다. 그러니까 소위 이야기하는 ‘복지국가’라고 하는 유럽에 있는 나라 속에서 이 자살율이 계속해서 높아져 갑니다. 그러니까 어떤 고난이나 역경, 이런 것 때문에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기보다는 엄격하게 말하면 자신의 삶의 이유와 근거 그런 목적을 발견할 수 없을 때, 그때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 죽음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나 목적, 그리고 근거 이런 것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은 각기 다르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살아가는 그 삶의 근거, 삶의 이유 이런 것들은 그렇게 높은 가치와 무슨 높은 이상 이런 것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에게 왜 살아요? 하고 한번 물어보십시오. 아줌마 왜 살아요? 그렇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뭐라고 대답하는가. 아저씨 때문에 산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옛날에 우리 나라의 여성들은 비극적인 생애를 살아온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시어머니에게 시집살이하고, 남편은 여자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알고 그래서 학대하고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않고 그래서 그 한을 품으면서 살아온 그 부모들이 많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우리 어머니들이 꿋꿋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자식들 때문에 살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자식들 때문에 살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시부모님으로부터도 그렇게 박해를 받고 남편도 자기를 아내처럼 생각을 안 하고 그러니까 어디 마음둘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식들을 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 자식들이 어렸을 때 그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자란 아이가 또 이제 초등학교 간다고 그러고 운동화 신고 뛰어 다니는 것을 보면서 살고 그러다 보니까 이제 처음에는 결혼생활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었지만 의무감 때문에 살았는데 그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죽했으면 그 어떤 시인이 ‘왜 사는가?’ 하고 묻는다면 자기는 뭐라고 했습니까? 그냥 웃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자기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모르는 것을 자꾸 물어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사는가?’ 하고 물을 때 그냥 웃으면 안 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사람들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을 때 너희들은 분명하게 대답할 말을 가져라. 아니 어떻게 그렇게 기쁨이 넘칩니까? 어떻게 그렇게 소망이 넘칩니까? 왜 살아요? 그럴 때 그냥 웃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불신자들이나 할말이 없는 사람들이나 없는 것이지 우린 왜 사는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생수의 근원을 버린 사람들에게는 삶의 목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에 있어서 영적인 침체에 빠지고 나면 삶의 목적이 불분명합니다. 왜 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은혜가 충만하고 그리고 하나님과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정말 날마다 내 영혼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을 배우도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혼의 만족을 얻고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면서 인생을 살아갈 때는 사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그게 왜 희미합니까? 희미한 것이 이상합니다. 분명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날 사랑하사 날 위해 자기의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분명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백성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불행한 사람은 자기가 왜 사는지, 삶의 목적과 이유가 아주 명쾌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그렇게 명쾌한 목적을 따라서 살 때에 그렇게 살 수 있게 하는 어떤 힘들을 하나님께로 공급받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너무 불행하고 가엾은 사람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침체에 깊이 빠져들어서 그래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첫사랑을 회고하며 가슴아픈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성도들에게는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물론 신앙의 형식은 그대로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에게 정말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자꾸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로 하여금 인생을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그 어떤 이유를 계속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개발하고 그리고 거기에서 뭔가 하나님께 두었던 소망을 거기에 두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만족을 누렸던 것을 그런데서 만족을 찾고 하나님께 의뢰하던 것을 그런 것에 의뢰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수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 삶은 원래 누구에게 전형적인 삶인가 하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형적인 삶입니다.
보십시오. 이제 젊었을 때에는 우리의 인생을 움직이는 가장 커다란 동력이 무엇인가 하면 이성에 대한 추구입니다. 그래서 뜨겁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고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주는 이성이 있는데 자살하거나 세상을 등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다가 한 사람이 배신을 하면 자살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그제 텔레비전을 잠깐 보니까 시련을 당한 사람들을 다 모았습니다. 모아서 절벽 꼭대기 같은 곳에 데려가서 거기에 ‘번지점프’라는 것이 있는데 다리가 묶고 뛰어내리면 출렁출렁 하는- 나도 그것을 한번 해봤으면 좋겠는데 -그것을 하는데 밑이 수십 미터인데 거기서 시련 당한 사람들을 이제 세워놓고 마지막으로 뛰어 내리기 전에 말을 하라고 하는데 사실 거기 뛰어내릴 때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죽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가끔 끊어져서 죽습니다. 아니 진짜입니다. 사고가 꼭 납니다. 외국에서도 사고가 나는데 다리 같은 곳에서 뛰어내리는데 사고가 납니다. 100%안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뛰어내릴 때 장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여튼 아무래도 무서울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카만 것을 보면서 막 말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를 두고 도망간 애인에게 욕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도 신기해서 쳐다봤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는가 하면 야, 먼저 사귀자고 한 게 누구냐, 네가 싹수가 노래서 나는 이제 너하고 다시 안 만난다고 하고 갈 때 눈물 펑펑 흘리면서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그런 게 누구냐. 그런데 지금 네가 나를 버리니 네가 잘먹고 잘사는가 보자. 지옥에 가서라도 너를 반쯤 죽일 거다 하면서 나쁜 놈 하면서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훌륭한 치료법이 되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방안에서 술이나 퍼먹다가 음독 자살을 하는 것보다야 백 번 낫습니다. 내가 기부금 낼 용의도 있습니다. 번지점프를 하러 가면,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게 궁극적인 해결이 안 됩니다.
젊었을 때는 그렇게 하다가 더 어렸을 때는 우정입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는 우정입니다. 다른 것 필요 없습니다. 자기를 잘 이해해주고 사랑하는 친구가 있으면 선생님이 미워해도 학교에 다닐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아무리 자기를 인정해주고 사랑해도 친구들이 자기를 ‘왕따’ 시키고 자기를 미워하면 아이들이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노이로제 현상까지 옵니다. 그러다 조금 더 자라면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이성에 대한 열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하나만 생기면 그러면 뭐 펄펄 나릅니다. 갑자기 힘이 솟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해서 막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돈 많이 벌어서 너 맛있는 것 많이 사줄게. 이런 소리나 하고 가서 노가다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서 맛있는 것 많이 사줄게. 이러면서 삶에 대한 계획을 그것을 중심으로 재편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이제 꿈은 이루어지고 결혼을 합니다. 결혼을 하면 이제는 한번 따 놓은 것인데 어디 가겠습니까. 자기 것인데, 맡아놨으니까. 찍어 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사람들이 욕망이 생겨납니다. 어떤 욕망들이 생깁니까? 이제 일에 대한 욕망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자기가 더 많이 인정받고 싶고 그리고 적게 일하면서도 많은 임금을 받는 직장에 그렇게 다니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고 칩시다. 그러면 얼마나 의시 되겠습니까? 요즘 300명 뽑는데 5만 2000명이 왔다고 합니다. 진짜 요즘 젊은이를 보면 난 너무 불쌍합니다. 세상에 어쩌면 그럴 수가 있는지, IMF 터진다고 해서 대학원으로 도망갔더니 끝나고 나니까 IMF보다 더 심한 절벽이 온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어깨를 폈다고 생각을 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 맛에 인생을 또 사는 것입니다. 왜 사는 것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좋은 직장에 다니니까 신나서 인생을 또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 조금 더 지납니다. 그래서 나이가 30대 후반에서 40대가 됩니다. 그러면 이제 그 다음에는 무엇인가 하면 승진하고 다른 사람보다 지위가 높아지고 유명해지는 맛에 사는 것입니다. 명예입니다. 그것 때문에 삽니다. 좀 가난해도 사람들에게 인정 많이 받고 높이 여김을 받으면 아주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더 다닐 수 있는 직장인데 입사 동기가 승진하면 사표 내고 인생의 골짜기에서 고통받는 것도 바로 그때입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제 늘그막에 가서는 돈에 대한 치열한 욕망이 생깁니다. 왜 그런가 하면 또 실제로 제대로 살았으면, 40대 후반부터 50대까지 돈도 좀 모았고 그리고 돈에 대한 집착이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이제는 달려갈 길 바라봐야 황혼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자기를 의탁할 수 있는 것이 물질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지하지 않으면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의지하며 살아야 되는데 내가 나를 의지하게 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물질입니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집착이 아주 굉장히 강해지는 나이가 그때입니다. 그리고 뭔가 이렇게 결핍되고 궁핍한 것을 견딜 수 없어 하고 그리고 뭔가 이렇게 가난해지면 물질적인 누리는 생활이 이렇게 내려가 버리면 그러면 막 견딜 수 없는 그 고통을 느끼면서 인생의 비애를 느끼게 되는 그런 나이도 바로 그런 노년입니다. 그렇게 해서 돈 좀 모으고 이렇게 하면서 그 돈 가지고 사람들에게 대접받으면서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그게 인생입니다.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다 무엇인가 하면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의 또 다른 삶의 근원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삶을 움직이는 근원이 무엇입니까? 그 샘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가게 만들고 오늘도 힘을 내서 열심히 인생을 살게 만드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입니까? 그냥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 억지로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입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내 인생이 오늘도 지루하게 계속되는구나 하는 지겨움 속에 눈을 뜹니까? 아무 희망도 생각도 없이 생명이 붙어있으니까 그저 살아갈 뿐이라는 그런 고백입니까? 무엇이 여러분들을 살아가게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 즉 유다와 예루살렘의 이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심판에 예고를 앞둘 때 그들이 살아가던 삶이 바로 이런 삶이었습니다. 정치가들은 왕국의 번영을 꿈꾸고 제사장들은 탐욕스러운 그 마음을 가지고 안락한 생활을 꿈꾸고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마땅히 드려야 할 의와 신을 버리고 그리고 적당 주의 적인 생활로서 형식적인 종교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고 신성한 의무를 파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쉽게, 쉽게 인생을 살아가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아가게 하는 적절한 세상의 꿈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수의 근원으로 삼고 그리고 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정말 무슨 의미가 있는 인생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고 나면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즐거움, 하나님과의 신령한 관계에서 오는 거룩한 기쁨,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인가 자기를 자꾸 기쁘게 자극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인가 인생에 있어서 활력소 같은 것을 자꾸 찾으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해도 아직 여러분들이 가슴에 아주 그렇게 선명하게 스며들 듯이 다가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거꾸로 뒤집어서 예를 한번 들어보겠으니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때 여러분들이 아! 이해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랐을 때에 다양한 취미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제 제가 낚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실 취미에 미친 사람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낚시 같은 것에 정신이 나간 사람이 있고, 아니면 무슨 프로 야구나 이런 것에 거의 미치다시피 해서 족보까지 다 꿰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있고, 또 제가 직장 생활을 할 때 어떤 사람은 우표 수집의 광입니다. 전 세계는 물론이고 우리 나라의 우표가 외국에 나왔다고 하면 외국까지 나가서 경매를 붙여서 사오고 그런 사람입니다. 그렇게 부자 집도 아닌데, 자기 자녀들을 한쪽으로 몰아서 방 하나를 빼서 세를 놓아서 돈을 빼서 우표 금고를 사는 사람입니다. 뭐 그런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뭐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또 하루에 한번씩 화투를 해서 돈을 잃거나 따지 않으면 밤에 잠이 안 오는 노름중독자들도 있고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예외 없이 그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놀랍게 변화되기만 하면 모두 그런 옛날의 세상에 취미와 자랑을 버립니다.
저는 예수 믿기 전에 젊은 시절에 음악 듣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음악 중에서 팝송의 모든 계보를 거의 다 꿰었습니다. 가수들 이름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다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고 나니까 이제 그런 방송 듣기가 싫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사람의 본성 자체에 변화가 오면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자기의 인생의 근원으로 삼으면서 그런 것들을 다 버리게 됩니다. 보십시오. 예전에 그렇게 좋던 것들이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다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을 버리고 나면 다시 그런 것들에 대한 사랑이 다시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사실 삶의 이유요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무엇이든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편리한 것이면 된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정신과 치료에 과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까 어떤 부인이 아주 심한 우울증 증세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다닐 때는 그래도 공부도 꽤하던 그런 재원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중년이 되어 자녀도 다 커서 이제 가고 그러면서 자기가 왜 사는지에 대한 목적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우울증까지 갔습니다. 의사가 그 사람의 약도 투입하고 치료도 하고 별 것 다 했는데도 결국은 그 사람을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 사람을 치료하였는가 하면 외판원들이 들고 다니면서 파는 영어 회화 카세트가 그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왜 인생에 아무 목적도 발견할 수 없었는데 그냥 그것이 심심해서 하나 사서 듣는 동안에 영어공부 하는 즐거움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활기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여러분 많이 들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그렇게 무 목적하게 살면서 방황하고 그렇게 하지 말고 뭔가 한번 해봐라. 당신도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해서 거기서 뭔가 취미를 붙이고 기쁨을 누리니까 인생이 활기차지더라.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게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훌륭한 인생에 있어서 어떤 원기를 북돋는 훌륭한 방법입니다. 또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모두 실의와 비관 속에 빠져서 음독자살이나 하고 가출이나 하는 세상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런 것이라도 하면서 좀 기분 좋게 활기차게 살아라 그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정도를 가지고 만족을 하지 않고 사람들은 이제 거기에서 도를 더해서 하나님을 향해 적극적으로 범죄 하게 됩니다.
(예화: 미국에서 사역을 하시는 목사님으로부터 들으신 이야기인데, 15년여 전에 한 군에서 해괴 망측한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동네에 살고 있는 부부들이 서로 바꾸어 육체의 욕망을 즐기며 산다는 이야기)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일들이 이 나라에도 즐비하게 일어나서 중학교 1학년 학생들도 스와핑이라는 단어를 다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부인을 다른 사람과 바꿔서 그렇게 지내는 그런 스와핑 현상을 초등학교 학생들도 그 용어를 압니다. 나는 모르는데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이게 진짜 외국에서 굉장히 많이 들어옵니다. 지금 사람들이 이제 포르노에 만족을 못합니다. 포르노는 미국 같은 곳은 거의 무제한으로 다 풀어 났습니다. 물론 이제 엄격하게 차단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고 상당히 많이 개방되어 있습니다. 호텔이나 그런 곳에 들어가도 굉장히 많이 개방되어 있고 성인 전용 관과 같은 곳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는 법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지만 더 일반적으로 누구나 접근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앞에 뿌려져있는 수많은 전단지를 보십시오. 눈뜨고 볼 수가 없고 이제는 그런 것들이 하도 오랫동안 성행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인 우리들도 그런 것을 보면서 뭔가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전화 한 통이면 얼마든지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그런 아주 자유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철저하게 그런 것을 감시해서 뭔가 포르노를 차단하고 그렇게 하는데, 중국은 인터넷을 개방하고 나서 고민이 되니까 말로 30만 명이라는 사람도 있고 60만 명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중국이나 할 수 있는 곳입니다. 30만 명의 인터넷 감시 요원들을 선발해서 하여튼 모두 풀어놓기는 하지만 철저하게 감시를 하고 그 다음에 그런 음란사이트를 근본적으로 다 차단해서 접속을 못하도록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완전히 인해전술입니다. 어마어마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과 편지할 때 ‘열린 교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열린 주식회사 사장 김남준’ 이렇게 합니다. 아니 진짜 언제 편지가 왔는데 ‘열린 상사 회장님 귀하’ 그렇게 왔습니다. 그게 뭔가 하고 뜯어보니까 그렇게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끼리 암호를 하는 것입니다. 수련회는 연수회고, 선교는 홍보고 이런 식으로 통하는 암호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포르노도 이제는 외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의 야한 포르노 정도가지고 만족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 생겨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적인 행위를 겸해서 사람을 무참하게 죽이는 행위를 실제로 촬영을 해서 사진에다 담는 것입니다. 그것을 ‘스너프’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아주 고가에 팔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버리고 뭔가 이 세상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어떤 즐거움이나 기쁨의 원천을 찾으려고 하면 그것이 끝없이 확장되어갑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그렇게 끝없이 확장되어 가면서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 자신에 대한 적대적인 반항 행위로 가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전에 그 상황을 보면 여러분들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천사들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살펴보기 위해서 왔을 때 그 천사들이 남장을 했지만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롯이 받아들여서 문을 딱 닫으니까, 그 히브리 성경에 보면 ‘미켓츠’라고 하는데 사방에서 전부 다 사람들이 모여서 소년으로부터 시작해서 늙은이까지 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그 천사들을 내 놔라. 우리가 그 사람을 상관하겠다. 그 ‘상관’이라는 단어가 성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그만큼 동성연애가 보편화가 됐다는 것입니다. 요즘 트렌스젠더 라고 하는 하리수 같은 사람이 나와서 막 떠들고 국민적인 영웅이 되는데 참 그게 정말 기가 막힌 일입니다. 미국도 이러다가 결국은 동성연애 하는 목사 안수를 주어야지 된다고 까지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생수의 근원으로 삼고 살아갈 때 확정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롯의 집에 와서 다 때려부수듯이 다 덤벼든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동성연애자들이 몰려온 것입니다. 늙은이부터 시작해서 어린애까지 몰려왔는데, 오래간만에 아주 좋은 물건을 만난 것입니다. 그 천사들과 동침하겠으니 그들을 내놔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버린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자, 그럼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목사님, 그게 우리와 뭐 상관이 있습니까? 무슨 내가 여자 집사인데 남자 집사로 받겠습니까? 그런데 상관이 있습니다. 어떻게 상관이 있는가 하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신앙의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수 되신 하나님을 근원으로 삼고 그것이 삶의 이유인 것처럼 기쁨으로 살아갈 때는 더 이상 욕심이 없습니다. 욕심이 있다면 주님을 더 닮는 것,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관심이 거기에 다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냥 교회에 나가면서 매일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면 펑펑 울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맡은 주일학교 어린 학생들이 정말 실족하지 않고 잘 자라기를 원합니다. 더 많은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그런 것 아니면 나는 내 자신에게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건만 나는 왜 이렇게 사람이 사람구실을 못하고 살아갑니까? 지난 기도학교 사경회에도 그렇게 회개를 많이 하고 요셉처럼 기도하며 살겠다고 맹세하고 다짐했건만 지금에 와서는 다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을 더 닮을 수 있을까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처음만 못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보다 더 완전한 사랑 속에서 살 수 있을까요? 이렇게 하면서 고민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무엇인가 확장되는 욕망을 갖기는 한데 그 욕망을 가진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 좋은 것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느 날 집에 갔는데 훌쩍 훌쩍 울기에 신경질이 나서 또 뭐를 잘못해서 훌쩍이고 있어. 그럴 때 눈물 젖은 눈으로 고개를 들면서 여러분의 자녀가 엄마, 그 동안 내가 엄마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어. 아빠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어, 공부는 지지리 못하고 매일 사고나 치고 거짓말이나 치고 그러면서 펑펑 울면서 엄마 새사람 되고 싶어. 엄마 마음에 기쁨이 되고 싶어. 그러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감격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벌써 눈물까지 흘리네.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인데 막 흐느끼면서 왜 우니,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은 것 같아요. 주님은 많이 사랑해주셨는데, 그럴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시겠어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냥 주님을 위해 오늘 하루도 땀을 흘리면서 살았는데 훌쩍이기에 너 왜 우니, 하나님, 전 주님을 위해서 한 게 없습니다. 주님의 구원에 내가 너무 부끄러워요.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런 욕망을 가지면 가질수록 하나님이 너무 사랑스러우십니다. 그러니까 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더 완전한 연합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그것을 양보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점차, 점차 욕망이 늘어납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기도 생활하다가 어느 날 시험에 듭니다. ‘에고, 내가 무슨 예수 믿고 새벽잠 한번 자본 일이 있는가. 새벽기도 그렇게 다녀서 쥐뿔이나 된 게 뭐가 있는가. 된 것도 없고 안 된 것도 없고’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된 것도 없고 안 된 것도 없고 말이지, 그러면서 퍼 잡니다. 그런데 이제 그 다음에는 그것가지고 만족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에 게으름을 부리는 것 가지고는 만족이 안 됩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간섭을 떠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죄를 지어서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기쁨에 버금가는 또 다른 기쁨을 내가 대신 갖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자꾸 범죄하며 사악한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사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악합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세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금욕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에 이것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세상의 즐거움들을 경험하게 될 때에 그때에 아주 신속하게 옛날 그 입맛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억제되었던 그런 죄와 이런 것들에 대한 욕구들이 막 기승을 부리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신없이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그 연합을 잃어버리고 물러간 신앙생활이 그렇게 위험한 것입니다. 한번 물러가면 두 발짝 세 발짝 물러가게 되고 마지막에 하나님을 등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빠진 두 가지 죄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는 세속주의이고 하나는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면 세속주의는 어떻게 구체화되었는가. 세속적인 정치로 말미암아서 나라 전체가 세속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되고 그리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것을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포로 생활을 통해서 그들을 아주 정결하게 연단하기로 하나님이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그 작정에 순종하도록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거역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 방법을 고안해냈는데 그것은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서 바벨론의 치하에서 벗어나 보려고 앗수르를 의지하고 애굽을 의지하면서 이러면서 국가적인 연명을 유지하려고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주의입니다.
여러분, 세속주의가 무엇입니까? 술 먹고 담배 피는 것이 세속주의입니까? 저는 이제는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세속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들이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술 먹고 담배 피는 것을 권장하자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과 다른 아주 중요한 표지라고 할 것 같으면 통곡할 일입니다. 얼마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표지가 없으면 술 먹고 담배를 안 피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을 감별하는 표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용기를 내서 하지 말고, 그래서 가끔 전도하다가 보면 담배 펴서 교회에 못 나가겠다고, 술 먹어서 교회에 못 나가겠다고 하면 나는 서슴없이 이야기합니다. 피면서 나오고, 먹으면서 나오라고 합니다. “주님이 은혜롭게 너를 만나주시면 그것은 저절로 끊게 된다. 결단하고 가고 싶다면 네 속에 결단이 있으면 지금까지 골초가 되었겠는가?” 그런 것이 표지가 아닙니다.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은 뭐 그렇게 술 먹고 담배피고 노름하고 이런 것이 세속주의가 아닙니다.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의지를 세상에서 구하는 것 그것이 모든 세속주의의 근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세속주의의 근원입니다.
언젠가 한번 우리 나라에 고명한 학자인데 한번 같이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이야기를 하는데 그분이 그 당시 상황, 예수 믿는 사람이 대통령이었을 때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굉장히 염려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제는 정치, 요로, 관내 어디든지 다 있는데 문제는 자기네끼리 잘 통하는 그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는 잘 통해서 뭔가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그런 분위기라는 사실을 투덜대면서 많이 표출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다는 그 끈을 이용해서 각종 청탁들이 오가고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그 모임 자체가 어떤 성도의 교제가 아니라 거대한 이익집단으로 변절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종교적인 동기에서 불평 부당하게 일들을 처리하고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 것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서 저도 전적으로 공감을 표하면서 그런 것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당장은 기독교가 이익을 보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사람들이 외면합니다. 그렇게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이제 그런 것들이 세속주의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문제를 처리하고 나아가야 하는데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런 어떤 외교적인 것들을 갖다가 동원하거나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미 버린 그 역사를, 그래서 하나님이 이미 정해놓으신 그 역사의 길이 있는데 그것을 저항해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면서 자기네가 유익의 길로 가려고 하는 것, 하나님보다는 세속적인 권력을 더 많이 의지해서 자신의 국가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던 이런 모든 노력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가 세속주의였습니다.
여러분,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살아갈 때는 정말 우리에게 어떤 고백이 있는가 하면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 하나님은 내 편이시라. 방백과 사람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낫도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주가 아시나니’ 이런 신앙의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러나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으로 삼는 신앙생활에서 이탈한 사람들에게 이런 고백이 없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세속주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세속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는 항상 불순종이 들어옵니다. 대가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항상 불순종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범죄를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불순종과 범죄는 다시 영혼의 무게를 더하고 생수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황폐한 영적 생활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 속에서 은혜의 자정력이 없기 때문에 그는 더더욱 하나님을 의존할 수 있는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그래서 자신의 인생에 모든 문제를 더욱더 세속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니까 결국은 삶이 그 사람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고 황폐한 영혼이 세속주의를 자꾸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할 믿음이 없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못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응답도 얻을 수 없고, 갈 길을 몰라서 물어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어떤 그 사랑을 구하면서 하나님 내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을 수 없을 때 그때 인간적으로 머리를 굴리면서 살아가는 게 그것이 인간사의 일반적인 경험입니다. 그것이 세속주의입니다. 나가서 춤추고 담배 피고 술 먹고 그것이 세속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세속주의 자들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술 담배 입에도 안 대고 그리고 나가서 여러분들이 춤추거나 노래방 다니지도 않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단정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생수 되신 하나님을 근원으로 해서 거기로부터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어떤 힘들을 공급받지 않고 여러분 자신의 인생에 문제를 여러분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세속주의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떨어졌던 악이 바로 그런 악입니다. 그런 죄, 그런 악에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원래 그렇게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 적인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는 생명 적인 관계를 가지고 우리의 문제가 하나님의 문제고 하나님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교회를 박해했을 때 다메섹 가는 도상에서 예수님이 사울을 만나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사울아 사울아 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예수님을 그렇게 만난 적도 없는데 예수님이 ‘너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러니까 그렇게 핍박을 받는 지체들, 지체들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곤고하고 어려운 하나 하나의 아픔이 모두 주님의 아픔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우리입니다. 사실 우리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의 문제이지. 그런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누구든지 자녀들에 대해서 장담할 수 없지만 자녀들을 서울대 보내고 좋은 학교에 유학을 보내고 그러면 그 부모가 자식을 훌륭하게 키웠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솔직히 말해서 좋은 학교에 다니고 외국에 가서 공부하는 그런 자녀들 가운데 물론 부모가 뒷바라지를 해주었으니까 그만큼 되었겠지만 그런데 부모를 똥으로 아는 자식들이 많습니다.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가 부모를 자신과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가 진정으로 부모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나는 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런 아픔과 고통이 있으면 우리 아빠가 제일 아파할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면 ‘효’라고 하는 것은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따위로 해서 되겠는가 해서 막 윽박지르고 사람들로부터 받을 비난이나 예상하게 만들어서 겨우 짜내는 그런 효도 차라리 그런 것 받고 싶으면 돈이나 열심히 모았다가 나중에 애들 의지하지 말고 사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 관계 자체를 즐거워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주님의 문제이고 주님은 그 첫사랑을 회고하시면서 우리가 어두운 길에서 방황하고 고통하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당신의 문제로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을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하려하지 않고 자기의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점점 불순종하게 되고 점점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삶을 계속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세속주의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 모두 사경회에 참석하면서 가장 깊이 인생에 있어서 고통이 되는 일 번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기도 제목이 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 더, 첫 번째 제목이 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 앞에서 느끼는 고통만큼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결국은 세속주의는 하나님과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연합이 끊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속주의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세속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거의 기도하지 않고 또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세속주의 방식으로 살아오면서 자신의 문제를 자기의 힘으로 해결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많은 죄와 불순종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기도의 영을 깡그리 다 고갈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면서 뉘우쳐서 회개하고 기도의 영을 회복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리고 문제 해결을 찾고, 이 문제는 너무 절박한 데 어느 시절에 이렇게 해서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지름길입니다.
보십시오.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것 같지만 하여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여튼 무슨 일이든지 합력 하여 악을 이루는 것입니다. 모든지 하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좋은 것 같으면서도 아무튼 무엇이든지 건드리면 문제가 되어서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들을 비롯해서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는 그런 실패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지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세속주의자가 아닙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세속주의가 아닙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를 정말 믿음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알 수 없는 고난이나 어려움이 닥칠 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잘못된 관계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그 지시하심에 대해서 충실하고 있습니까?
무엇인가 그런 고난이 겹칠 때 그 고난을 통해서 세미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쳐서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린 것을 회개하고 그 생명 적인 연합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근심과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많은 걱정과 그리고 우수사려들이 우리의 마음을 흩어 놓아서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기도의 영도 모두 고갈시켜서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않는지 아십니까? 할 수 없기 때문에 안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할 수 있고 하고 싶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합니다. 밤 11-12시에 퇴근해서 새벽기도에 나와서 기도합니다. 기도할 욕구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기도할 욕구가 없으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자기 중심적으로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 세속주의 적인 생활방식, 사고방식들,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이 먼저 떠오르기보다는 인간의 지혜가 먼저 생각나는 사람,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인가 깨닫기 위해서 기도 제목들을 주시면 마음이 요동치면서 가난해지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 첫사랑의 그 마음보다는 마음은 오히려 더 냉담해지고 머리만 바쁘게 돌아가서 인간의 계략과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는 이런 시도가 결국 세속주의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움직이는 판단대로 행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죄를 짓고 더 많이 불순종해서 우리의 영혼을 고갈시켜야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죄에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약에 심판을 확정하시고 너희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전에 이미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때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에게 이런 재난을 피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만들어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경고를 다 떠내려 보내고 그리고 그 경고는 사실상 그들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심판을 모면하기 위해서 불순종 위에 악을 더 하는 죄를 짓게 되었고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이제는 완전히 버리는, 하나님과 거의 상관없는 백성들로 변질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영이 살아있어서 생수 되신 하나님과 연합 속에서 살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의지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도해야 된다는 것은 아는데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신이 없으니까 내가 기도해도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안 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내가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딱 마음에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렇게 풍랑을 일으키시는구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텐데’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옛날에도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그런데 가서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내가 어렵습니다 라고 기도를 하는데 기도의 문도 열리지 않거니와 하나님이 자기를 도울 것이라는 확신이 안 섭니다. 입에서는 막 소리를 지르고 거품을 무는데 속에서는 차가운 하나님의 거절감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나 오랫동안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것도 말이 되지만 더 큰 원인은 무엇인가 하면 그런 어려움을 허락하실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셨던 반응하고 그런 반응이 맞지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신 반응은 그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당했는데 하나님 앞에 나와서 도와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때 그때 그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겠다든 지, 내가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버렸으니까 너무 슬프구나 이런 것 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자체를 자신의 인생에 답답한 문제를 해결하는 아주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세속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해주시지만 거기에는 반듯이 절차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고 다시 관계가 옛날로 돌아가는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통해서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 떠났던 자기 자녀들을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자기에게로 다시 돌아와서 다시 접붙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을 원하셔서 하나님이 어려움도 주시고 시련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말라는 이야긴가, 아니 기도하라는 이야기인데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 기대감보다 앞서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정직하게 그런 어려움 속에서 왜 이런 어려움과 재난이 내게 찾아왔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인데 주님이 나와의 첫사랑을 회고하시면서 가슴아파하시면서 도 나에게 이런 고난과 역경을 주실까 이것은 결국은 나로 하여금 생수 되신 하나님을 버린 영적인 단절을 청산하고 다시 진실한 회개와 참회를 통해서 다시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로 내가 돌아가고 그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해서 다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그런 참회와 뉘우침의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실제로 우리의 인생에 신앙의 경험을 보면 문제는 A인데 B를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A의 문제를 저절로 해결해주시는 적도 있습니다.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하나님을 그때 찾지 않았을 것인데 앞을 돌아보니 아플 팔자요, 뒤를 바라보니 뒤로 나자빠질 팔자요, 옆을 보니 쓰러질 팔자요 어디를 돌아보아도 자기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제가 삼일 금식하겠으니 이 문제를 해결해주십시오. 다른 욕망은 없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 문제를 해결 받고 싶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동안에 자기는 그 문제만 해결 받기 위해서 왔는데 기도하는 동안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런 어려움을 당한 것이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예기치 못했던 회개를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돌이키면서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동안에 처음에 가지고 왔던 기도 제목은 새카맣게 잊어버립니다. 더 우선적인 문제를 먼저 보게 된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고 역사 하셔서 그래서 다시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얼마 살다가 보니까 그 문제는 기도 제목을 잊어버렸는데 그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그런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세속주의로부터 돌이켜서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의 힘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그런 세속주의로부터 돌이켜야 합니다. 그 세속주의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로, 애굽으로 부지런히 사신을 보내고 아주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고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생수 되신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이 그들을 돕지 않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껏 여러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그 문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리고 세속주의 적인 방식으로 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오면서 결국은 그 세속주의로부터 네가 받은 보답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생수의 원천이 되신 우리 주님을 버린 것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다시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서 그래서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그 은혜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 세속주의 방법을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해보십시오. 이제는 더 많이 하면 할수록 더 많이 세속적인 방법으로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면 할수록 죄와 불순종은 쌓일 것이고 하나님 앞에 느끼는 거절감은 더 절실해질 것입니다. 마치 어리석게도 바위로 가득 찬 동굴에서 손톱에 피가 나도록 손에 각질이 벗겨지고 살이 벗겨져서 손가락 마디마디에 뼈가 드러나도록 그 바위를 긁어대는 어리석은 사람같이 여러분들의 그 피나는 노력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라고, 그 세속주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렇게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그들이 지은 죄가 또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이 아닌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래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확정하신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신들에게 절한 그 죄를 1장 뒷부분에서 낱낱이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수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그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행한 일입니다. 우상숭배였습니다.
여러분들이 가만히 생각하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보고 하여튼 치열하도록 우상을 섬깁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진노하셔서 심판하고 그들을 부수시고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고 주위에 나라를 들어서 그들을 연단 하셔서 거의 나라를 다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만드시고 이렇게 수없이 하나님이 연단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하는 것이 우상숭배였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우리는 이제껏 예수 믿으면서 아직 절에 가서 절 한번 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신앙이 떨어져서 바닥으로 내려가도 술집에 가고 노래방에 갔어도 절에 가서 절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상에게 빌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침체에 빠져도,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은 그렇게 했는지, 그러니까 우상을 섬기는 열심히 꼭 순교자적인 열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박해를 받으면서도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확정되었으니 그리고 꾸준히 합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그렇게 하나님께로 박해를 받을 때 자기를 도와주지 못하는 그 신들을 보면서 배신감도 안 느끼는가 봅니다. 저의 이 문학적인 수사법을 이해하십니까? 또 사경회에 가니까 이상한 말을 한다고 하지 말고,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책망하시고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시고 그래도 그들이 그렇게 우상을 섬기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고 아주 질기도록 이어오는 것입니다. 신앙의 역사는 종종 끊어져도 우상숭배의 역사는 은근과 끈기로 계속됩니다. 그렇게 열심을 품으면서 그렇게 일관되게 섬기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받는 것도 없으면서, 하나님께 받는 책망밖에 없으면서도 그렇게 우상을 섬기면서 일관성 있게 가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열심에 반만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어도 정말 칭찬 받고 복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같이 화끈한 성격이면 하나님과 결별을 하든지, 하나님, 아무래도 우리는 인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저쪽 우상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가든지 그리고 이스라엘을 떠나서 이방 신들을 모신 그 원조 나라로 가서 그렇게 살든지 그런데 그것은 아닙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붙들고 이쪽으로는 우상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마음은 우상에게 주고 형식은 하나님께 드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쩜 그렇게 하나님이 그렇게 집요하게 책망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두들겨 맞은 대부분의 이유가 이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죽도록 우상을 숭배하는가. 뜻을 정했습니다. 나와 내 집은 우상만 숭배하겠노라. 뜻을 정한 것같이 그렇게 열렬하게 우상을 섬겼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번영을 위한 욕구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왜 그러면 그런 해석이 가능한가.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겼던 우상들은 대부분 농경문화와 관련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책이나 성경 사전 같은 곳에 보면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겼던 우상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면 예외 없이 어떤 모습인가 하면 엉덩이가 펑퍼짐하고 젖가슴이 이렇게 크고, 요즘으로 말하자면 푸짐한 여자의 형상을 한 것이 대부분 우상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다산의 개념입니다. 아이를 쑥쑥 잘 낳고 양육을 잘 시키는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부귀와 영화의 상징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옛날에 이발소그림이 있습니다. 이발소마다 가면 뭘 그려놓는가 하면 돼지, 큰 돼지가 배를 쭉 늘여놓고 있으면 새끼들이 새카맣게 달려들어서 젖을 먹는 장면이 있습니다. 검정 색 헝겊에 그린 그림입니다. 가는 곳마다 다 걸어놓았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삼겹살을 좋아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고 돼지를 사랑한다는 그것도 아닙니다. 부귀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는 시야가 오늘날 신앙이 어리고 형식적인 신자들이 하나님을 보는 것과 아주 유사합니다. 자, 신앙이 어린 신자들, 형식적인 신자들이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어느 정도 신앙이 들어가고 나면 하나님은 부귀 영화와 관계가 있는 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정직히 말해서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부귀 영화와 관계가 있습니까? 대답을 안 하네. 그럼 하나님이 가난과 관계가 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부자가 되고 가난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성경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가 되는 것도 정죄 할 이유가 없고, 가난한 것도 하나님의 축복을 못 받은 증거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사소한 문제라고 성경은 보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다운 가치와 목적은 그보다 훨씬 높은데 있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을 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 주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어떤 돈 내고 돈 먹기 식의 어떤 배팅이라기보다는, 그러니까 내가 예수를 잘 믿겠으니 하나님 축복을 주십시오 라는 그런 식이라기보다는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축복해주셔서 잘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도 내가 알코올 중독자의 그 수기를 잠깐 읽고 왔는데 알코올 중독에 걸려 매일 자기 부모나 자기 마누라 때리고 못살게 하다가 예수님 믿고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단정한 마음으로 직장도 다니고 열심히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하나님의 축복이나 그런 것 그만두더라도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매일 술이나 퍼먹으면서 마약이나 하고 살면 그 집안 꼴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단정하게 돌아와서 절제된 생활을 살고 부지런히 일해서 월급 갖다가 집에 주면 먹고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사람을 바꾸어놓아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바로 잘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해주십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잘 믿고 신앙생활 잘하면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어떤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하나님께서 복 주십니다. 그래서 건강한 삶을 살게 하시고 여유 있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또 그렇게 해야지 만 여러분들이 헌금도 많이 하고 그렇게 해야지 교회도 짓고 가난한 사람도 구제하고 그럴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번영에 대해서 관심의 초점을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은 무엇인가 하면 번영과 이 세상에서의 성공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직접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여겨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상입니다. 나에게 와서 나를 기쁘게 하고 제사를 지내라. 그러면 내가 너를 복 준다. 내가 너희 나라에 풍년이 들게 한다. 내가 만사 형통하게 한다.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한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느 목사님이 대만에 가셨는데 중국 사람이 손에 작은 우상을 올려놓고 회초리로 때리면서 지나가기에 왜 그런가 했더니 이게 요즘 복을 안 준다고 하면서 때리는 것입니다. 좀 맞으면서 정신을 차릴 모양이라고, 그러니까 경배도 모두 우상숭배에 그렇게 지겹도록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번영을 약속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복을 줄 것이라고 하는 약속이 얼마나 많이 나와 있는데 왜 바보 같이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우상에게 가서 너희는 원래 하나님의 자녀였는데 우상에게 가서 복을 달라고 그렇게 구차하게 했는가. 원래 너희를 택하신 구속주가 우리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 의지해서 복 받으면 되지 않는가. 성경이 그런 약속을 풍부하게 주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종교에서 번영을 약속한다고 믿어지는 우상들은 한 사람의 자기를 숭배하는 사람의 도덕적인 삶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의롭고 도덕적인 삶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안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그저 제 소원은 돈벼락 맞는 것입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아파트 50평, 이렇게 기도를 하면서 세월을 보내느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예수 믿는 것이 훨씬 더 빠릅니다. 왜 아멘을 안 하십니까? 맞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배운 복음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은 단지 복을 주십시오. 주십시오. 나는 이 세상에서 번영하고 싶습니다. 싶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하나님이 번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살아야 합니다. 기도도 필요하겠지만 우선은 똑바로 살아야 합니다. 똑바로 살아서 하나님이 보실 때, 자기의 자녀처럼 반듯하게 살 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잘 되어 있고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연합된 속에서 살아갈 때는 너 나 사랑하고 그리고 나로 인해서 기뻐하고 나를 영화롭게 하고 그리고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씀을 모두 지키면서 진실하고 의로운 백성으로 살아라. 그러면 내가 너를 이 세상에서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게 만들어주겠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많이 복 줄 것이며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너에게 주고 싶다.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부담이 됩니까, 안 됩니까? 부담이 안 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데, 내 소원이 생수의 근원 되신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인데 내가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데 너 나 더 사랑해라. 그러시는 것입니다. 아! 그럼요. 아무 것도 안 해준다고 해도 나는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라. 그럼요. 주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내 마음에 기쁨이고 주의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 내 마음에 즐거움인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는 그렇게 안 된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 관계가 깨트려졌습니다. 하나님, 내 평생 소원 아파트 60평, 주세요. 빨리요. 네. 금식기도 할까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하나님은 들은 척도 안 하십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아파트 60평, 아파트 80평 그러면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사람이 되어라. 네가 오늘날 살아가는 모습이 짐승과 같으니 지하 사글세방도 너에게는 과분하니라. 짐승에게 우리면 충분하지 무슨 문화주택이 필요합니까?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하나님이나를 기뻐하셔서 복을 주시기 위해서는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생수 되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러니까 의롭고 도덕적인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게 죄 가운데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 복잡하게 여겨진 것입니다. 제물만 갖다 바치면 복 주마. 그러면 얼마나 간단합니까?
여러분 아직 몰라서 그렇지 예수 믿는 인생들 중에 점치러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오늘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는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이 진짜 가서 간음을 행한 것보다도 더 더러운 죄입니다. 실제로 어느 점쟁이가 자기네 가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주 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예수나 똑바로 믿으라고 쫓아보내는 사람도 있답니다.
여러분, 하나도 우습지 않은가 봅니다. 여러분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점괘가 안 나오는데, 당신 예수 믿지? 꼭 반말을 합니다. 당신 예수 믿지 그러면 뭐 믿는다고 까지 할 것 없지만, 가끔 나가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 야, 너는 지조도 없냐. 그렇게 말합니다. 나 같으면 예수만 믿겠다. 예수 믿으면 예수에게 가서 물어보지 왜 여기 와서 얼쩡거리나. 재수 없다. 나가라. 그리고 소금을 확 뿌립니다. 그리고 또 다른 점 집을 찾아갑니다. 잘 들으십시오. 유원지 같은 곳에 가면 손을 집어넣고 출력되는 그런 것이 있는데 그런 모든 것이 다 범죄입니다. 저는 신문에 나오는 오늘의 운세도 안 봅니다. 그것을 왜 보십니까? 그렇게 궁금하면 와서 하나님 앞에 물어보면 되지. 그렇게 자신이 없으면 생수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되지. 그리고 요즘 700에 몇 번으로 걸면 역술인들 30명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전공도 나오는데 진학 담당, 사업 담당, 연애 담당, 가정 파탄 담당 다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목사 전도사가 17명이 있습니다. 왜 그런데다가 전화를 겁니까? 그리고 그 700 전화요금 올려줍니다. 그리고 재미로 한다고 합니다. 재미 좋아합니다.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진짜 여러분 회개해야 합니다. 정말 그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실 수 있습니다. 아니 온 천하만물을 만드신 이가 하나님인데, 그래서 시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너무 곤고하고 어려운 일 당할 때는 어떻게 노래했습니까?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은 주 여호와 나를 도와주시네
왜 눈을 들어서 산을 보며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하면서 산을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산이라고 하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산에 갈 때마다 느끼는데 아무튼 부산에서 오라고 그러면 짜증이 납니다. 부산 사람들에게 미안합니다. 도시가 핫도그처럼 기다랗게 생겨서, 요즘은 고속도로가 생겨서 좀 낫기는 한데 집회 시간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오죽 했으면 한 교회에 갔더니 헬리콥터를 대기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해운대까지 가는데 너무 막히니까. 그런 정도로 짜증이 납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진짜 대통령이나 부산 시장쯤 되면, 가끔 그랬습니다. 운전사에게 나 같으면 저 산을 네 다섯 군데를 한 삼 십 년에 걸쳐서라도 다 들어내고 그냥 뻥 뚫어서 도시를 다시 이렇게 빈대떡처럼 만들어야지 핫도그 같아서 안 된다. 아무리 투자를 해서 지하철을 만들고 해도 안 된다.
옛날에 있던 장 목사님이 심방을 가는데 사십 분동안 일 미터도 못 가고 서 있었던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답답한 속에서 어떻게 사는지, 저것 들어내지.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들어내는 것은 고사하고 산 하나 굴을 뚫는데 이천 억, 삼천 억씩 들어갑니다. 굴 하나가, 그런데 그것을 들어낸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게 그냥 짜증이 나니까 한번 해보는 푸념이지. 어림도 없습니다.
(예화: 대학에 있을 때, 학교인가를 받으려는데 운동장을 만들어야 허가를 내준다고 하기에 알아 보니 그때 돈 30억을 달라고 했는데, 작은 동산이지만 트럭으로 수만 대가 몇 달을 날라 야 할 정도의 큰 일이었다는 이야기)
그 산을 보는 것입니다. 왜 어려움 당했을 때 산을 봅니까? 자기가 이 어려움 속에 처했을 때 자기가 앙망하고 바라보는 그 하나님이 바로 산을 만드신 하나님, 그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아직까지도 가지고 계시며 그 능력으로 마음에 합하시면 자기를 도울 수 있다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펼쳐진 산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음주에 교회 짓는 것이 하도 힘들어서 산을 보로 가려고 합니다. 산을 보면서 이 산을 지으신 하나님의 큰 능력이 정말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당신의 마음에 합하게 여기시면 왜 우리를 안 도우실까? 그게 바로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우상숭배를 보면서 여러분들은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점을 보러 다닌 적도 없고 오늘의 운세를 보면서 감사기도를 드린 적도 없는데 그게 나에게 무슨 해당이 됩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상숭배는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우상숭배의 욕구 그 자체가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세상의 번영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자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오늘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을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과 다시 연합하여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아하바의 사랑 속에서 하나님 의지하면서 주님을 만족하게 해드리면서 정말 뜨거운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 여러분이 이제껏 집착했던 것,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서라도 그 아하바의 사랑으로 돌아가서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서 살고 싶은 그런 소원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 질문에 바로 여러분들이 결단해야 할 부분입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어둡고 캄캄한 그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생수의 근원 되신 주님을 버리고 떠났을 때 우리에게 평강이 없었습니다. 잠시 짜릿한 기쁨이 있는 것 같지만 우리는 가시밭 사이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고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나 멀리 떠났고 그분을 너무나 철저히 버렸기 때문에 그분께로부터 어떤 은총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지금처럼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택한 것은 네가 나를 생수의 근원으로 삼아 나와 더불어 연합을 누리며 나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있는 우상들이 줄 수 있는 번영과 축복을 누리며 나의 뜻을 이루는 나의 종이 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불렀노라. 주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어떻게 여러분들을 도울 수가 없겠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돕지 않으면 누가 그 사랑과 그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오늘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의 깨로 인생을 살아보려는 세속주의 적인 방식,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세상의 탐닉하는 우상숭배 적인 그런 마음들, 이런 모든 것들로부터 여러분들의 인생을 보호해보려고 하지만 그것은 모두 박살난 웅덩이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쏟아 부어도 거기에는 물을 저장할 수 없고 그것이 결코 생수가 될 수도 없고 그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살게 하는 근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하나님만을 생수의 근원으로 삼으며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악과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19下)
이제 첫사랑을 회고하시던 하나님은 어제에 이어서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심판을 예고하시기에 앞서서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계속해서 설명해나가고 계십니다. 그들의 죄는 두 가지였는데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장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땅히 그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생명의 근원이 되는 물에 잇대어 살고 그리고 그 하나님과 부정하게 되어 있었으나 그러나 그들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삶 속에서 버렸고 그리고 그들의 영혼 속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는데 세속주의 삶의 방식과 우상숭배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숭배는 바로 자기의 번영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에 대해서 이미 일어난 일인 것처럼 말하면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주의 거룩한 나라의 자녀들이 왜 그렇게 비참하게 종의 자녀들처럼 포로로 끌려가고 학대를 당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반문하면서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죄악과 패역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생수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 대신에 이방의 우상을 통해서 인생의 번영을 도모하고자 노력했던 그 불 신앙적인 모든 시도들이 가져올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이 하반 절에서 “그런즉”이라고 말하면서 이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심판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내면의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상태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을 알라”
자, 우리는 여기에서 첫째 날 우리가 살펴보았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첫사랑을 회상하시면서 그들에게 있었던 소년 때의 우의와 그리고 결혼 때의 사랑, 다시 말하면 그 아가페와 아하바의 그 사랑을 그리워하시면서 첫사랑을 회고하셨는데 그 아가페와 그 아하바의 사랑은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 사이에 있어야 할 것들입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 그리고 그 절절한 아하바의 사랑,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이 생수 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소유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헷세드, 곧 그 아가페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격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긍휼히 여기셔서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언약공동체 안에 있는 자기의 동료들을 향해서 그 아가페를 베풀면서 사는 이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또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께 아하바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그냥 사랑한다, 좋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한없이 사랑스럽고 그리우며 헤어지면 죽을 것 같은 그런 애절한 사랑, 그런 남루의 사랑과 같은 그 아하바의 사랑을 절절이 가슴에 안고 그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그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고백한 것을 이런 맥락에서 통합적인 사랑을 생각하면서 봐야 합니다. 그냥 이웃에게 구제 행위나 하는 그런 정도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을 이야기할 때 그 배경에 깔고 있는 것이 이런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을 깔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이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삶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아주 명백하게 보일 수 있도록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에 나타난 사랑에 대한 깊은 의미,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리는데 고린도 전서 13장 강해, 24개로 된 것, 그것을 꼭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살 돈이 없으면 다른 테입을 팔아서라도 들으십시오. 왜냐하면 그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명쾌한 입장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러면 그 성경 속에서 흐르는 것이 사랑이라는 게 구속의 대 드라마를 엮어 가는 동맥입니다. 그 사랑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를 못하면 아주 복음과는 거리가 먼 그런데 떨어져버립니다. 그런 문제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 시간이 없어서 다 할 수 없지만 하여튼 그런 문제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3장을 하면서 특별히 첫 번째 두 시간에 걸쳐서 서론을 강론하고 그 다음에 1절부터 들어가서 전부 24개로 되어 있는데 그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듣고 나면 이 성경을 보는 눈이 확 열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통해 드러났고 그리스도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경험했던 그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최초로 주어진 사랑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에서 이렇게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으로 집약되어서 그 배경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고 이리로 들어오면 아주 놀랍게 보입니다.
그래서 이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영화로 말하자면 구약은 그림입니다. 그래도 미국에서 만든 영화는 가끔 그래도 헬로우 뭐 이런 말이라도 들릴 것입니다. 아임 쏘리 그런 것도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불란서에서 만든 영화는 듣는 사람이 물론 있겠지만 그런데 대부분 없습니다. 그때는 무엇인가 하면 자막이 필수입니다. 그런데 그림이 구약이라면 밑에 있는 자막은 신약입니다. 그래서 그림만 보면 잘 모릅니다. 그런데 밑에 자막을 집어넣으면 확 다가옵니다. 그런데 자막은 나오는데 화면이 안 나옵니다. 가슴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가 같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신약에 복음에 대한 이해가 확실한 사람들은 구약을 읽을 때 막 구약의 물결이 굽이쳐옵니다. 그래서 구약의 물결 속에서 그냥 수없이 파도치는 복음을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그런 풍부한 하나님의 계시의 다양성을 본 사람들은 신약에서 발견하는, 이렇게 ‘사랑’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 신약 성경 펼치고 사랑 그러면 새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그런 논리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전서 13장을 꼭 들으십시오. 듣고 이야기를 합시다. 자세한 것은 그것을 듣고, 그런데 이제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모든 삶은 바로 그런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그 헷세드의 사랑, 그리고 그 아하바의 사랑, 그 안에서 하나님과 아주 깊은 친교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을 생수의 근원으로 해서 거기로부터 넘쳐나면서 흘러나오면서 자비와 사랑을 베풀고 그리고 하나님 때문에 아주 기쁨에 찬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백성들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대하셨던 바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 피나는 헌신을 통해서 획득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제일 처음에 주님을 믿고 여러분들도 처음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첫사랑이 있었을 때 이랬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르게 보입니다. 저 사람들도 나처럼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겠구나. 그들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그 아하바의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 진짜 워낙 뜨겁게 하나님 사랑하면 이성에 대한 관심도 없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젊은이들에게 우리 교회에서 연애하지 말라고 하니까 대놓고는 못하고 뒤에서 궁시렁 궁시렁 하는데 언제든지 나하고 논쟁합시다. 다 모여서 나를 부르십시오. 내가 300대 1, 500대 1이라도 내가 논쟁할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제 처음 사랑 때도 생각해보면 그냥 날마다 주님의 사랑의 감화로 눈물을 흘리고 왜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셨을까. 정말 이제 나의 남은 인생을 주님의 것이다. 내가 오죽했으면 유년주일 학교 학생들에게 나는 너희들이랑 결혼했다고 했습니다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자매들에 대해서. 그렇게 매일 둘이 싸우고 토라지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전부다 시시 껄껄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애하는 사람들을 정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기왕 시작했으면 하십시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그 아하바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 다른 사랑에 허기지지 않는 속성이 있습니다. 주님이 나만 사랑해주시기만 하면 누구로부터 사랑 안 받아도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세상 사람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사랑의 품으로 피할 수 있는 훌륭한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 전에 친구들이 날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제 주위에 항상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를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왜 자기들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그만 때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배신했다. 일요일날 캠핑을 가자고 해도안 가고, 술 먹으러 가자고 해도 안 가고, 누구 생일이라고 해도 교회에 회의하고 겹치면 안 가고 이러니까 배신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친구들 나를 버려도 예수 나의 힘 되시니 겁날 것 없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나를 버리지 않네
그렇게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분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왜 그렇게 우리들이 마음에 가지고 있는 ‘상처’라고 하는 것, 상처타령을 많이 하는데, 하십시오. 하는데 그것도 결국 어떻게 치유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아하바의 사랑에 의해서 치유됩니다. 그러니까 자라면서 엄마에게 두들겨 맞고, 아빠에게 두들겨 맞고 그러면서 자랐어도 상처보다 더 큰사랑을 받으면서 산 사람은 별로 상처 없습니다. 한 대도 얻어맞지 않고 자라도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을 많이 받을 때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헷세드, 곧 아가페와 아하바의 사랑을 한없이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상처가 치유됩니다. 오직 한길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무슨 모아놓고, 어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실연 당한 사람이 뛰어내리면서 소리지른다고 치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상처가 치유가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실 때 그런 관계 속에서 살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들의 마음속에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 대신 무엇이 있습니까? 악과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 이 성경에 보면 히브리 성경과 좀 다른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아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알아라 그리고 보아라” 여기 하나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조입니다. 알아라 그리고 보아라 무엇을 알고 보는가 하면 그러면서 그 뒤에 구절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알아라. 그리고 보아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난 것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또한 고통이다. 그것을 알아라. 그리고 보아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과 좋은 관계 속에서 살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을 주어서 그 관계 속에서 한없이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는데,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관계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의무를 다 하고 계신데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고 계시는데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런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악과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악’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라하’ 인데 사실 그것을 ‘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 번역이 훨씬 더 마음에 듭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들은 해를 당하고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의 쓴 물을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마라’ 라는 말에 남성형용사입니다. ‘마르’ 라는 단어인데 아주 쓰디쓴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치 고통이 얼마나 진한지 아주 쓴 약을 먹는 것처럼 진저리를 치게 만드는 그 고통입니다.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힌 대비인가 하는 것입니다. 첫날 하나님께서 첫사랑을 회상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생수의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들이 살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후에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나니까 해와 고통이 있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여기에서 아주 재미있는 관찰인데,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않을 때 느끼는 고통과 아예 하나님을 모를 때 느끼는 고통 중에서 어느 고통이 더 큽니까? 전자가 큽니까, 후자가 큽니까? 전자가 훨씬 큽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이방의 백성들은 하나님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안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경험한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에 대한 추억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 고통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은 데서 오는 고통이오, 해로움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오랜 동안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없이 일평생을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것을 자신의 숙명처럼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 그렇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소년 때의 우의가 있었고 결혼 때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고 함께 동행하면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접붙인바 되어서 그 헷세드와 사랑과 아하바의 사랑을 흠뻑 받으면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백성도 누릴 수 없었던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만족과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온 선택된 자녀들입니다. 그것이 첫사랑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여기서 이야기하는 해와 그리고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만들어서 징계를 받게 만드시고 아주 심각하게 다루시면서 연단을 하시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역사 속에서의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하지만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은혜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기도도 안하고 뺀질 대고 그리고 또 살살 불순종하고 그 다음에 경건 생활에 게으르고 그러다가 그 다음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명백한 의무조차도 거부합니다. 예를 들자면 주일날 교회에 나온다든지 정당한 헌금생활을 하는 것도 더 거절하고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행동개시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너를 그렇게 일거리 달라고 애원해서 직장을 구해서 줬더니 이 녀석 두 달도 안 되어서 벌써 주일을 빼먹어. 너 한번 두고보자. 그 다음날 가보니까 회사 앞에 공고가 붙었는데 아무 아무개 짤렸음. 그렇게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랑을 이야기할 때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실 그것보다도 더 우리의 가슴에 짜릿하게 다가오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사랑은 오래 참고’ 그렇게 말합니다. 오래 참는 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오래도록 참으십니다. 헷세드와 아하바는 다 잊어버리고 제 멋대로 살아가는데도 하나님이 계속 두고보십니다. 그렇게 하다가하다가 안 되면 하나님이 행동개시를 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어려운 일을 당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거기서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그렇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행동개시 하시지 않고 그냥 하나님이 가만히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때 이미 벌써 우리의 마음속에 고통과 아픔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습니다. 잠시 세상의 쾌락과 기쁨에 도취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잠깐 잊어버리는 것이지 진짜 우리가 행복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놀이나 어떤 쾌락에 빠져서 잠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그 고통을 마약과 같이 잠시 잊어버릴 수는 있지만 끝나고 나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시 원점입니다. 다시 그것을 대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데서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고통이 시작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네가 나를 버린 것, 그리고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 그것이 곧 너의 해이고 그리고 너의 고통이다. 그것이 너에게 재앙이고, 재앙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됩니다. 그게 너의 재앙이고 그리고 너의 괴로움이다. 하여튼 쓰디쓴 괴로움이다. 우리말로 하면 ‘고초’라고 하면 좋을 것입니다. 너의 재앙이고 곧 너의 고초이다. 하나님이 행동개시해서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포로로 끌려간 것이 아닙니다. 아직 하나님의 행동개시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그 마음속에는 재앙과 그리고 고초가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대하셨던 삶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삶입니까? 하나님은 그 백성을 택하셔서 생수의 근원이 되는 자신에게 접붙여 살게 하시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이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을 누리면서 진짜 가슴 시린 행복 속에서 살게끔 하시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는데 쓰디쓴 고통이 된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제가 연애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러나 또 어떻게 연애를 안 하겠어요. 그래서 제가 연애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결혼 임박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20살이 연애를 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또 20살들은 20살은 사람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누가 사람이 아니래. 사람이지 19도 사람인데 20살에 연애를 시작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몇 살에 결혼을 하겠습니까? 결혼할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연애를 하십시오. 기도 많이 하고 응답해주시는 사람과 연애를 하십시오. 그런데 아주 짧은 시간동안 연애를 하십시오. 3,4,5,8,10,17년 그것은 너무 깁니다. 그 동안에 자기의 영적 생활이 얼마나 많이 파탄이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진짜 믿음으로 사는 형제 자매들은 하나님이 기가 막히게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헐떡이면서 짝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하나님이 스치듯 만나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아주 절묘하게 랑데부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애 이야기도 하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연애를 하면서 둘이 만나면 너무 기쁩니다. 왜 함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같은 생각을 가졌으니까 만나면 매일 부흥회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고 그리고 우리가 주를 위해 살고 갈 때는 손잡고 기도하고 눈물 뚝뚝 흘리고 헤어지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연애입니까? 연애는 항상 둘이서만 하면 안 됩니다. 셋이 해야되는데 거기 하나님도 계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진짜 아하바의 사랑을 간직한 연애가 되는 것이지, 하나님, 잠깐 기다리세요. 연애 몇 년하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진짜 제가 뼈저린 경험에서 여러분들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혼을 합니다. 너무나 서로 좋아하고 행복하고 신앙적으로 동지이고 그리고 만날수록 진짜 기도할수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사람입니다. 둘이 연애를 할 때는 그래도 괴로움이 좀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경전도 있고 그렇지만 결혼을 할 때도 살이 막 빠집니다. 양쪽에 안 믿는 가정에 시달리고 그러다가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들만의 보금자리가 마련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교회에 나오면 남편과 함께 은혜 받고 그래서 감사하고 남편은 열심히 하나님 섬기고 그래서 둘이 같이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고 새벽기도도 나오고 그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집에 가서 새벽 2시까지 잠 안자고 서로 나누고 하면서 들어가도 부흥회, 나가도 부흥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결혼을 해야 합니다. 가서 엉뚱한 사람 만나서 생고생하지 말고, 그렇게 확 피어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과 남편으로부터 받는 그 아하바의 사랑이 여자 속에 가득 할 때 그때 확 피어나는 것입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 들어가면 매일 여보, 오늘 반찬이 왜 그래. 그러면 돈도 못 버는 꼬라지에 그런 소리나 듣고, 그러면서 나올 때 씨! 안 해주면 내가 사먹지. 그러면서 가서 사는 사람은 아하바의 사랑을 아내로부터 못 받으니까 얼굴이 확 피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가난해도 확 피어납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고 내 아내가 사랑하고 내 남편이 날 사랑하는데 뭐가 문제이겠습니까? 확 피어납니다. 기쁨이 넘쳐서 살아갑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처음 사랑을 나누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인에 비교한다면 그 모습입니다. 화장을 안 해도 얼굴이 확 피어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속에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을 진짜 잔뜩 간직하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소명대로 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살도록 분부하시는 그 계획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그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뭘 잘못한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언약의 당사자로서 그 의무를 다 하시면서 일체 오래 참음과 자비와 긍휼로 그들을 사랑하시고 돌보면서 신실하지 못한 그들을 신실하게 대하시면서 그러면서 당신 자신의 역할을 다 해오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들이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면서 오늘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런 헷세드와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그 아하바는 사라지고 대신 재앙과 고초가 가득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기만 하면 괴롭고 하나님만 생각하면 한없이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슨 고통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무슨 괴로움을 주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괴롭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이 선지자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나를 괴롭게 하셨다. 하나님이나를 속이시고 하나님이 나에게 아픔을 주신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는 불변함입니다. 변함이 없으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변함이 없는 영원한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하나님
그래서 신앙생활 할 때 두 가지 사실만 확신하면 어떤 어두움 속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시다.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고치시고 우리를 살리신다는 이 두 가지 확신만 굳게 붙들고 있으면 어떤 위기 속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런 관계를 원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무엇인가 적극적으로 그들을 괴롭히고 그리고 그들을 학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보면 하나님을 버린 것과 그리고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자기 스스로 자처한 것입니다.
사람이 한없는 고통을 당하고 심적으로 견디기 힘든 아픔을 겪으면서 흑암의 그늘 아래 앉는 것은 그 영혼이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한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의 고통과 아픔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고통은 즉시 우리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옵니다. 우리가 하나님 싫어요. 그리고 확 던지면 날라 갔다가 획 돌아서 우리를 때립니다. 불 신앙으로 휙 던지면 휙 날라 가서 자기를 때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그리고 그 하나님께 부종 하여 살아가는 것은 곧 자기를 깊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주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렇지만 일단 주님을 한번 믿고 난 다음에는 ‘일수불퇴’입니다. 하나님이 물러주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바둑 대회 할 때 구단끼리 싸움하는데 백을 쥔 사람이 흑보고 한 수만 물러 달라고 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못합니다. 하나님도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일수불퇴’입니다. 물러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일한 대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냥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하고, 하나님이 대라는 대고, 그리고 하나님 사랑하고 주님을 경외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다른 대안이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없습니다. 가끔 제가 대안이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믿으려면 확실히 믿고 정 믿기 싫으면 관둬라. 관두면 어디로 가는가. 그러니까 그것은 괜히 해보는 말이지, 못 가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수사법 적인 말이지 대안은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일신 신앙을 버리고 역사의 비탈길로 내려갈 때 그때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겼던 그 우상을 택하든지 하나님을 섬기든지 양단간에 결단을 내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그럴 때 그 유일신 신앙을 택하든지 우상을 택하든지 그것이 사실 진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제시하는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죽음이 아니면 빵을 달라. 그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둘 중에 다 좋다는 뜻이 아니라 빵을 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저를 회복시켜주시지 않으려면 저를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그러면 진짜 그래 내가 죽여주지. 이리와. 단칼에, 아니잖아요. 무엇인가 하면 생명을 건 기도입니다. 하나님, 대안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두 가지를 제시하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상 주님이 저를 죽이실 수는 없으시니 그렇다면 하나님 나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십시오.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두 개의 길이 있는 것처럼 말해도 길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뭐 하는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을 거두어버렸고 불 신앙의 길로 걸어가면 마지막에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떠나고 나면 이렇게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아픔이 있을 뿐이구나 그것을 깨닫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가 모두 그것을 깨닫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상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남들이 경험한 것은 도움이 안 됩니다. 자기가 직접 경험해봐야 합니다. 몸소 체험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새카만 정신입니다. 한번에 예전에 그렇게 해서 극심한 고통과 고초를 맛보았으면 ‘아! 주님을 버리고 불순종하면서 생수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버리면 마지막에 내가 어떻게 괴롭고 어떻게 되는가’ 그 생각을 하고 저장 자료로 사용해야 하는데 아닙니다. 금방 잊어버립니다. 마치 해산한 여자가 그 아이를 낳은 그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비유가 좀 이상하지만, 어째든 잊어버리는 것처럼 자기가 죄를 낳고 그 죄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그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에 하나님을 대적한 역사이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불러서 치료하고 고치고 감화시켜서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그 역사가 바로 구원에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가실 수 있으면 가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혼자 우리와 나누었던 첫사랑을 회고하시게끔 내버려둘 때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내버려둠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괴로움과 고통, 그것밖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한순간에는 신앙을 버리고 얻는 기쁨도 있었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거룩한 의무를 게을리 하면서 누린 유익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때 하나님을 버리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면서 맛보았던 아주 큰 세상의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의 번영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길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번영해본 경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우리가 세상으로 나아가고 불순종할 때는 항상 하나님께 있음으로 맛보는 영혼의 만족보다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육체의 참된 기쁨과 만족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용감하게 하나님의 품을 박차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갔을 때 그때 발길을 돌리자마자 고통이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거기는 짜릿한 기쁨도 있고 쾌락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그게 남은 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산을 해보고 나면 남은 게 뭐가 있습니까?
결국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찍혔고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니까 더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 앞에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저축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에 우리의 인생에 의미와 보람과 가치를 두려고 했던 그런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뭐가 남은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대안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범위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맛보면서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이 식을 때는 작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처음 사랑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그 헷세드와 사랑과 아하바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가득했을 때 모자라는 것이 있었습니까? 모자라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늘 찬송에도 있듯이,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주 나의 모든 것, 주님이면 충분합니다. 주님이 아닌 것은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것 보십시오. 그러니까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을 느끼면 벌써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갔기 때문에 그런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우리들이 또 하나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것이, 경외함이 없는 것이 우리에게 재앙이고 고초, 괴로움이고 고통이라고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런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이제 돌이킬 수 없이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된 사람으로서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큰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을 늘 사랑하고 그리고 그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런 사랑과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있을 때는 세상에 있는 것들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을 너무나 깊이 사랑하면 정말 연애할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진짜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모든 취미 생활도 시시해집니다. 그게 무슨 재미가 있는가 합니다. 옛날에 그렇게 좋아하던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어디든지 구실을 붙여서 하여튼 그분을 만날 것을 찾습니다. 연애할 때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구실을 붙여서 둘이 만나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셋이 만나면 하나를 어떻게 하든지 떼어버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둘이서만 만나야지 만나는 것이지, 여럿이 만나면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구실을 붙여서 둘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 관계된 속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정말 주님이 모든 것입니다.
결혼의 문제도 객관적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벌써 어느 한순간에 마음이 확 쏠려버린 다음에 그 다음에 기도하는데 벌써 맛이 간 사람이 기도하면 그게 정당하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가 있는가. 물론 이제 하나님이 그 과정도 하나님이 인도하실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정욕에 의해서 그렇게 움직여져서 눈이 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의 그 아하바의 사랑 속에 사는 사람들은 다 객관적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도 많고 일도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남편도 사랑해야 합니다. 자녀들도 사랑해야 하고 여러분의 일도 사랑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만나는 동료들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아하바의 사랑이 우리 속에 가득 있을 때에는 다른 모든 사랑이 하나님 사랑에 종속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하는 것이 많은데 그런데 언제든지 하나님이 네가 사랑하는 것 나는 싫다. 그러면 언제든지 그것을 아낌없이 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종속되어 있으니까. 그 사랑을 이렇게 쪼개서 나누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늘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을 제일 많이 사랑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의 대상에 첫 번째가 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할 때 주님을 첫 번째로 사랑하게 해달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에 전부이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것, 그리고 주님 때문에 남편도 사랑하고 아내도 사랑하고 애들도 사랑하고 내 일도 사랑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 기쁨을 누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도 객관적이 됩니다. 내가 살아가다가 사랑하는 것이 많이 있는데 항상 그 사랑이 주님을 향한 사랑에 종속되니까 객관적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이게 좋습니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나는 네가 그것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싫다. 그러면 언제든지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갖고 하나님이 뭔가 마음에 나를 불쾌하게 생각하시는 것보다 나는 이것을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온전히 드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언제든지,
사람들이 왜 그렇게 결단을 내리기 힘든가 하면 하나님만을 향한 사랑에 다른 사람들이 종속되어 있지 않으니까 함께 우의를 겨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단이 힘든 것입니다. 그런 사랑 속에서 살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을 자신의 전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있습니다. 고난이 오고 그리고 인생이 고난과 시련이 겹친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점점 원숙해져가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삶 구석구석에 느끼면서 살아가는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유일무일 한 대안입니다. 그것 말고는 인간은 모두 불행해집니다. 그 정도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로 보면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그런 해로움, 괴로움과 고초의 원인이 무엇인가, 왜 그런 괴로움과 고초가 그들 속에 있는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버린 것과 그리고 너희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 그것이 원인이 된 것입니다. 어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버렸다는 것이 이제 ‘아자브’인데 사실 이것은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제일 먼저 쓰인 것이 어딘가 하면 창세기 2장에 보면 “그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할 때 그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버린다는 말로도 쓰여집니다. ‘떠난다, 버린다’ 다 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버렸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여전히 국교가 야훼 종교였습니다. 여호와를 믿는 종교였습니다. 율법이 여전히 있고 제사도 있고 성전도 있고 그리고 종교지도자들도 있고 그리고 모두 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형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기업을 경영할 때 매월 첫 주 월요일 날 예배드리기 싫다는 직원들을 모아놓고 억지로 ‘신우회’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똑바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공의롭게 그리고 자비롭게 기업을 운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원래 예배를 은혜롭게 드리고 월말에 가서 탈세하고 불법을 행하고 그리고 그 다음주에 다시 회개하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미국 국회에서 개원하는 것을 보고 국회에서 대게 부러워하는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국회의원들이 모여서 무슨 의원 시민 회 같은 것 만들어서 정기총회하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똑바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답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뭘 그런 것을 만들어서 그렇게 형식으로 하는 것이 그것이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똑바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봉사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쓴 ‘육적 그리스도인과 영적 그리스도인’의 그 책 표지에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신자가 이 세상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진정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최상의 섬김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세우시려고 의도했던 그 교회의 모습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면 그것이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신 바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너희가 나를 버렸다” 그리고 “너희 속에 나를 향한 경외함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형식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렸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너희는 나를 버렸다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제 모여서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라. 우리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바알만 섬기겠노라. 그런 적이 있는가. 그런 궐기 대회를 한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보고 그 시대 문맥에 찾아가서 이제 너희는 여호와를 믿는 신앙을 버리고 다신교로 가려고 하는가 라고 말할 때맞습니다. 우리의 종교 정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전혀 그렇게 말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 여러분들에게 껍질만 남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구약의 백성들이 나타나서 너는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이렇게 말하면서 이제야 내가 보니 너희들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겠구나. 너희가 세상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고 이렇게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하는구나 이렇게 물으면 여러분들이 너 어쩌면 구약에서 왔는데도 그렇게 신약을 잘 아는가.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우리가 조금 세상을 좋아한다고 해서 우리보고 다신교라고 하는 것은 너무 편협한 종파주의 적인 사고방식이 아닌가. 그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완전한 신자가 어디 있을 수가 있는가. 자기가 언제 완전해보려고 노력을 해봤습니까? 그렇지만 이제 그렇게 사람이 다 악한 것이 아닌가, 그럴 것입니다.
이들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다신교가 아니었고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에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하면 그냥 하나님을 믿는 이 틀은 내버려두고 간식으로 가끔 바알도 섬기고 또 율법도 잠깐 형식은 내버려두고 내용은 좀 빼고 그러고 싶었던 것이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다고 하는 것을 그 시대 백성들은 선지자를 통해 주는 하나님의 음성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면 여기서 뭐가 나타나는가 하면 신앙의 문제를 보는 하나님의 시각과 사람의 시각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시각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형식이 남아 있으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당신만을 향해서 마음을 모아 당신이 그들의 마음에 전부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당신을 떠난 것, 당신을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구약을 한번 쭉 회상을 해보십시오. 신약보다 구약을 회상해보면 구약에 히브리말로 ‘레브’ 혹은 ‘레바브’ 라고 하는 이 마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하면 마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신약보다 사실 구약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분량이 크니까 그렇기도 하지만 마음에 대한 강조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무엇인가 하면 그 마음이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 차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가득 찬 상태가 경외의 상태입니다. 그 경외의 마음 때문에 주님이 주신 말씀대로 살아가고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고난을 받으면서도 지키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인 신앙의 축을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라고 하는 그 축에다가 놓고 본다고 할 것 같으면 거기에서 멀어지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이렇게 전심으로 섬기지 못하는 것도 마음 아파하시지만 하나님께서 더 참지 못하고 분노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 바쳐야 할 마음은 다른 곳에 바쳐진 채 형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훌륭하게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자신감, 이것을 하나님이 참지 못하시는 부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버림과 하나님을 버렸고 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하면 형식만 남고 그 내용 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이 없는 그런 형식만 남은 종교생활,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 앞에 너희가 나를 버렸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판단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우리를 향해서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너희가 나를 버렸고” 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주일은 꼬박꼬박 나오고 헌금도 꼬박꼬박 했습니다. 심지어는 수요예배까지 나오니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사실 교회입장에서 보면 그만큼 성실한 신자도 많지 않은데, 그러나 그 마음 중심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취하거니와 주 여호와는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것이 얼마나 마음이 담겨지지 않은 익숙해진 형식적 신앙생활인지 하는 것은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아십니다. 거기에 헷세드가 있습니까? 거기에 아하바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열렬한 기도가 있습니까? 기도에 은혜가 있습니까? 심지어 기도하지 않아도 갈급함을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상태로 가버렸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하나님은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네가 나로부터 받는 그 열렬한 아하바의 사랑 없이도 어떻게 넉넉하게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는가. 네가 어떻게 나 없이도 그렇게 씩씩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가. 내 사랑을 네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나를 버렸는데도 내 사랑 잃어버린 것이 네 마음에 고통이 되지 않고 내가 네 마음에 그리움이 되지 못한다면 나는 너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면서 배신감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한번 이렇게 적용을 해본다고 할 것 같으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나오고 심지어는 교사로, 구역장으로, 집사로 이렇게 기본적인 의무들을 다하고 있는 그것이 모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있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 거의 사랑하지 않고 그리고 거의 기도의 영이 고갈된 가운데서도 성실한 교회 생활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너희는 나를 버렸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을 버린 삶을 살아오면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처음 사랑이 사라졌고 헷세드와 아하바의 기쁨, 그리고 그 행복들은 모두 추억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괴롭고 오히려 하나님을 생각하면 아픔이 되고 하나님이 이전에 여러분들을 인도해오신 그 선택에 은혜를 회상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고통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분이 이름이 위로가 되었고 예전에는 그분의 성품을 생각하는 것이 기쁨이 되었는데 이제는 아주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우리들이 주님과 그 처음 사랑 속에 살아가서 우리의 마음속에 아하바가 가득했을 때에는 우리들이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마음에 넘치는 기대감으로 예배를 드렸고 어김없이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져주셨습니다. 곤고한 자에게는 넘치는 위로를 주셨고 견디기 힘든 시련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소생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참으로 뉘우치는 사람들에게 사죄의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실패, 우리의 실수까지도 오히려 하나님의 깊은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정력이 우리 안에 역사해서 잠시 식어진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그리고 예배가 끝나면 다시 주님을 향한 충만한 기쁨 가운데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기 위해서 교회당을 등지고 떠났습니다.
지체들은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그리고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이 이 거룩한 성도들의 무리 속에 한 지체로 여겨지는 것이 감당할 수 없는 특권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랑하는 것들을 버리고 이 소박한 교회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한 지체가 된 것에 대해서 한없는 행복감을 느끼면서 살았습니다.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통해서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며 자기 세워진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면서 사는 것이 자신에게 의무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특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의 처음 사랑의 때였습니다.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이 있을 때, 그때 여러분들의 순전한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린아이와 같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여러분들의 얼굴은 사랑을 받는 신혼부부의 얼굴처럼 피어났습니다.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감화를 한 몸에 받으면서 여러분들은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어두운 세상에서 믿음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보시며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어두운 세상에 여러분 한사람 한 사람은 등대와 같이 빛나는 불빛이 되었고 여러분들의 삶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죄악을 향해 치닫던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여러분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왔고 여러분들의 입을 빌어서 들려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며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비록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었지만 항상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이 기쁨이 되었고 하나님에게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면서 사는 여러분들이 한없는 즐거움과 기쁨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주님의 사랑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그 첫사랑을 폐기하고 그 대가로 얻은 것들은 우리에게 올무가 되고 우리의 심장을 찌르는 칼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더 멀어졌고 우리는 마음둘 곳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 낮선 자요, 이 세상에서도 이방인과 같은 그런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되지 않았습니까?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외의 의무를 대신한 결과입니다.
정말 우리의 마음에 주님이 주시고 싶어하시는 그 아하바는 간 곳이 없고 오히려 주님 때문에 고통을 느끼고 하나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찔려 쓰디쓴 고초를 머금어야 하는 이런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고도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이렇게 하고도 어떻게 우리가 우리를 위해 못 박혀죽으신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에 최고의 가치는 보이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주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더하여 갈수록 사랑의 깊이는 더하고 사랑의 깊이를 더할수록 우리가 주님을 닮은 성품이 되며 주님이 우리를 용납하고 사랑하셨던 것처럼 할 수 없는 죄인들을 품고 용납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이며 최고의 의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진지하게 사랑하는 이 경외의 정신을 버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었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온갖 이 세상에서의 번영을 위한 욕망과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세속주의 적인 사고방식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들은 열심히 살아도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의 삶에 초점이 될 수 없었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이용해서 이 세상에서 자기 번영을 위해서 노력하는 무지한 사람들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정원에 아름다운 포도나무를 심었지만 들 포도를 내었고 쓸모 없는 포도를 맺어서 주님의 땅만 더럽히는 존재들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이제까지 걸어온 신앙의 길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여러분 한사람 한 사람 지금은 여러분의 마음이 다 나누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어떤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도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만큼까지 이 길을 걸어와서 지금 이 순간에도 거덜난 여러분들의 영적 생활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물을 저장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에서 소망을 가졌던 자신의 옛 일들을 뉘우치며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께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눈물짓는 여러분들이 있기까지 여러분들이 걸어온 신앙의 길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긴 세월동안 헤아릴 수 없는 찬양을 불렀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했으며 셀 수 없는 많은 햇수를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동안에 여러분들은 다양하게 주님을 만났고 하나님 앞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깨트려지는 은혜도 받았을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상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소중하다는 것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자신의 생명을 주어 우리에게 하나님을 위한 화목 제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어떠함도 여러분도 아마 맛보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여러분들이 인생을 걸어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과 나누었던 사랑의 기억들을 천천히 더듬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처지에서 여러분들을 만나주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여러분들을 어두운 세상 속에서 건져내셔서 십자가의 사랑의 품으로 불러들이셨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이곳까지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지만 주님이 먼저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주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던 그때에 주님께서 오셔서 여러분들에게 구원의 길을 보이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게 구속의 은혜를 안 이후로 하나님은 한번도 당신의 신실함을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변함없이 곤고할 때나 시련을 당할 때나 여러분 곁에 계셨고 심지어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때에도 그 어두운 가시밭길에도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함께 있기 위해서 산 넘고 물 건너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줄 모르고 강퍅해진 여러분의 마음을 향해서 수없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녹이는 초청을 여러분들에게 행하셨습니다. 설교자를 통해 설교를 들려주시고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눈물 흘리며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에 여러분들의 이름이 아픔이 되게 하셔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섬기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도와야할 깊은 부담을 느끼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여러분들은 사람에게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모든 것들이 여러분들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모든 일들이 원래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라고 생각합니까? 여기 하나 하나마다 여러분들의 이름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이 달려있고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파괴하고 멀리 세상으로 나아갔지만 여러분들의 이름을 잊지 못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피맺힌 초청의 음성이 묻어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잊었지만 주님은 한순간도 우리를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기다리시는 것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한 속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렇게 긴 세월동안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이 돌이키지 않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저를 만나게 하셔서 오늘 저를 통해서 당신의 마음을 여러분들에게 전해주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하시렵니까? 마지막으로 이제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시렵니까?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그 수많은 초청 중에 하나로 여기면서 또 회피하고 지나침으로 다시 또 하나님을 버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고통이오 쓰라린 아픔이 되는 그런 어두움의 길로 걸어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지난 모든 잘못들을 뉘우치고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를 부르셔서 이제 하나님이나를 돌이키게 하시는데 하나님, 이제 나를 더 이상 하나님의 인격적인 설복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 녹이소서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 녹이소서
여러분, 언제까지 하나님이 여러분의 문밖에서 두드리며 돌아오라고 눈물 흘리도록 만드시겠습니까? 못 박힌 주님의 손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드릴 때 그것이 어찌 주님 자신을 위함이시겠습니까?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이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으로부터도 버림받은 비참하게 포로 되어 끌려가는 여러분들을 바라보고 차마 견디지 못해 하시는 하나님의 눈물 젖은 음성을 여러분들이 지금 이 밤에도 외면한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더 돌이키기 힘든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제 걸어온 모든 길을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생수의 근원이 되는 주님을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남아 있었지만 저는 주님의 시각에서 보면 저는 주님을 버렸고 주님의 이름을 노래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아하바의 사랑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저에게 고통과 아픔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용서해주십시오. 이제 제가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제껏 참으신 주님, 나를 용서해주시고 오늘 여기서 내 생애 위대한 전환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귀한 포도나무로 살라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렘2:21)
지난 시간에는 우리의 진정한 악과 그 궁극적인 원인이 여호와를 버리고 그리고 그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 그것이 곧 악이고 고통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들이 좀 진지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을 나누던 첫사랑의 때의 이스라엘이 변하여 이제 하나님의 마음에도 한없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는 존재가 되어버린 상황을 한탄하시면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21절 이하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물론 이런 탄식은 이미 2장 앞부분부터 시작되었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이제 하나님의 탄식은 절정을 향해 치닫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존귀한 목적과 그리고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림으로 도달하게 된 아주 비참한 상태를 비교하시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그 신앙이 없는 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얼마나 현격하게 바꾸어놓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를 새롭게 점검하고 그리고 우리도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살펴서 이스라엘이 떨어졌던 그 범죄와 잘못에 흐르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챙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사랑의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에게 한없는 사랑의 대상이 되었고 그리고 기쁨에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외심이 사라지고 나자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존재는 이제 견디기 힘든 고통과 그리고 재앙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을 범죄 한 이후에 두려워하며 숨었던 아담과 하와와 같이 그렇게 이들은 스스로 범죄하고 불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참 사랑하시는 그 은혜를 대면할 용기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태양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항상 그 그림자를 필연적으로 떨칠 수 없듯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 앞에는 불안과 근심과 두려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웁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의 길이는 자신의 존재보다 훨씬 길어서 자신의 힘으로 그 그림자를 떨쳐버릴 수도 없고 지나칠 수도 없습니다. 항상 그런 불안과 두려움을 달고 다니는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어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은 무엇이며, 또 이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세속주의와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생수 되신 하나님을 철저하게 떠난 후에 도달하게 된 비참한 상태는 무엇인지를 우리들이 한번 살펴봄으로서 오늘 우리의 신앙의 귀감으로 삼고자 합니다.
약간은 어려워 보이는 이 본문을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해설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말 성경에 나와 있는 본문을 조금 더 상세하게 손질하고 그리고 설명을 한 후에 해설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이 본문에 대한 경험을 풍부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연필을 들고 한번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제 얼굴 보지 말고 성경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에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천천히 읽겠으니 귀퉁이에 기록을 하면서 어느 부분이 틀린지 성경 가장자리에 한번 써보십시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 말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심었다”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강조어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너를 심었다” 이렇게 나옵니다. 강조어법입니다. “바로 내가” 혹은 “나 하나님인 내가” “바로 내가” 이렇게 강조가 되고 그리고 “내가 너를 심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인가 하면 귀한 포도나무, 여기는 ‘쇼레끄’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학자들은 ‘샤라끄’라는 철자의 단어에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주 존귀한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런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포도나무는 포도나무인데 그냥 포도나무가 아니라 정성 된 특상 품의 포도나무를 가르칠 때 쓰는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했는가 하면 곧 귀한 포도나무로 혹은 매우 귀한 포도나무로 혹은 특상 품의 포도나무로 너를 심었다. 그런데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순전한 참 종자 이렇게 나오는데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믿을만한 종자” 이렇게 나옵니다. ‘에메트’ 인데 영어 성경에서 ‘faithfulness’라고 많이 번역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신뢰함의 씨, 그 모든 것 중에서 그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제라 ‘에메트’라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뭐라고 번역되어 있는가 하면 참 종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이라고 번역된 그분이 에메트 인데 이 에메트가 히브리말로 믿음입니다. 믿음의 종자, 신앙적인 믿음을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예레미야가 'words play'를 하는 것입니다. 재담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단어를 가지고 씨를 앞에 붙여서 믿음의 씨 그러면 믿을만한 씨, 종자, 족보 있는 종자가 되지만 또 에메트는 신앙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아는 신앙을 철저히 버렸기 때문에 너희들의 그 씨는 사실은 믿음의 씨다. 그것을 가지고 믿음의 씨라는 것과 믿을만한 종자라고 하는 한 단어를 가지고 두 개를 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그런 말을 합니다. 눈에 눈이 들어가니 눈물이 눈물인가 예를 들면. 그런 식으로 재담을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글쓰기에 있어서 아주 선지자들이 잘 쓰던 수사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찔리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도 없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없이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살아가는데 너희들의 씨는 신앙의 씨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종자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동시에 그 뜻은 ‘신앙의 종자’라는 뜻도 되지만 ‘믿을만한 종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면적인 효과를 노리는 하나의 수사법입니다. 아주 기가 막힌 것입니다.
참이라고 말하기보다도 믿을만한 종자, 곧 특상 품의 포도나무로 너희를 심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냐, ‘에이크’ 너희가 변했다. 어떻게 ‘리’ 나를 대해서 그 다음에 ‘쏘레’ 타락한 것으로 변했다. 그러니까 오염된 것, 더럽혀진 것으로 변했다. 그 다음에 무엇인가 하면 ‘게펜노끄리아’ 그렇게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게펜도 포도나무입니다. 그런데 여기 포도나무인데 뒤에 나오는 포도나무하고 앞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틀립니다. 어떻게 틀리는가 하면 게펜노끄리아 여기 뭐라고 했는가 하면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으면 어찜이뇨 라고 되어 있는데 악한 가지에 줄을 치고 악한 가지가 아니라 무엇인가 하면 오염된 더러운 가지가, ‘가지’라는 말은 여기 없습니다. 더러운 것이 됨은 어찜이뇨 그래서 어떻게 보는가 하면 이방포도나무 즉 더러운 것이 됨은 어쩐 일이뇨 그런 뜻입니다. 이제 의미가 상당히 다를 것입니다. 이방 포도나무에 더러운 것이 됨은 어찜이뇨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기에서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보면 이런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인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인 내가 너를 믿음의 종자, 믿음의 씨앗 곧 특상 품의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그런데 어찜이뇨. 내게 대하여 변했다. 어떻게 이방 포도나무 곧 더러운 것으로 변했다. 어째서 그랬는가. 이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본문을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하면 그럼 이제 거기에 귀한 포도나무라 할 때 그 특상 품 포도나무에 그 단어와 이방 포도나무라고 할 때 그 포도나무는 아예 단어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오는 악한 포도 가지로 변했다 그랬을 때 여기는 더러운 것으로 변했다고 했는데 이게 뭘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의 의식 법적으로 볼 때에 그 불결한 물건이 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치 똑같은 음식물이지만 이방 신에게 제사를 드렸던 그 음식이 거기 무슨 흙을 넣거나 오물을 집어넣지는 않았지만 제의 적으로 볼 때 그것이 율법 상 더럽게 된 것처럼 이 포도나무가 그렇게 더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선택된 성결함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제 해설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그 특상 품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랬을 때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아주 최상품의 포도나무인데 그 포도나무하고 악한 포도나무, 그것은 완전히 질이 다른 포도나무입니다. 마치 왜 그 포도원 같은 것을 하다가 포도 주인이 생각이 바뀌어서 안 가꾸고 내버려두고 어디로 가버린 포도원이 있습니다. 그래도 거기 포도가 맺히기는 맺힙니다. 그것과 농부가 잘 이렇게 가꾸어놓은 거봉의 종류가 틀립니다. 똑같은 품질인데 조금 이렇게 발육이 덜 되었거나 종자는 똑같은데 조금씩 달라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 되어 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아예 단어 자체가 다릅니다.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아까도 잠시 언급했듯이 특상 품의 포도나무를 주님이 심으신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지방에는 포도가 굉장히 많고 잘되는 지방입니다. 하나님은 참 공평하십니다. 물을 구하기가 힘드니까 그 포도로 즙을 짜서 그래서 먹습니다. 그래서 그 포도주가 그쪽 지방으로 많이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물과 관계가 있습니다. 물을 그냥 먹으면 풍토병에 걸리고 그리고 물이 좋은 물이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많은 포도를 갖다가 이제 밟아서 포도즙을 짜서 저장을 해서 물 대신에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 때 당신이 우리를 위해 흘릴 보혈을 가리키면서 “이 잔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곧 우리의 문맥에서 보면 그게 포도주가 아니라 사실 물입니다. 밥과 물입니다. 등가번역을 한다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없이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그런 음료입니다. 우리는 포도주가 없어도 얼마든지 삽니다. 몇 달 가도 포도주 안 먹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포도주가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아주 극상품의 포도를 하나님이 심었는데 그들이 신앙을 버리고 타락하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이 심어놓은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주 불결한 포도가 되어서 그래서 믿음의 백성이 거기에 접근하면 오히려 의식적인 불결과 더러움을 입게 되는 그런 포도나무로 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해놓은 계획은 정 반대였습니다. 그들을 성결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서 거기에 접촉하는 모든 백성들이 그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고 성결해진 백성들이 되게 하려고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키면서 “참 종자”라고 이야기가 나오는데 순전한 참 종자, 그것을 믿음의 씨, 믿음의 종자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없고 하나님을 버렸고 그리고 세속주의와 우상숭배, 이렇게 다양하게 다 말하지만 선지자를 이 단어를 여기서 상용함으로서 암시적으로 그들이 아하바의 신앙을 잃어버린 다양한 요인들이 있는데 그것을 다 싸잡아서 하나로 말하자면 그들이 신앙을 버렸다. 믿음을 버렸다. 에메트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에메트가 곧 신실한 에메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을 버리게 되면 그 사람의 신실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진실함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된 상태를 의미하면서 너희들이 그 믿음을 다 버렸지만 하나님이 너희를 심을 때는 신앙의 씨로서 너희를 심으신 것이다. 그것을 재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21절에 대한 이해를 가지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선지자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심었다” 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상당히 여러 군데 나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총체적으로 하나의 나무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나무에 비유하는 것이 굉장히 적합하고 이스라엘의 번영도 포도나무에 번성으로 묘사되는데 여러분 포도원에 가서 한번 이렇게 보십시오. 그러면 신기한 게 포도 원에는 항상 줄이 있습니다. 줄을 십자가처럼 만든 막대기를 여러 개를 해놓고 줄을 계속 칩니다. 그래서 꼭 옛날에 국수공장 앞뜰에 국수걸이를 만들 듯이 쭉 줄을 치게 만듭니다. 포도나무가 여기 하나 심겨졌는데 가지를 이렇게 딱 올려놓으면 이게 한없이 뻗어나갑니다.
그러니까 여기 포도나무 하나 심고 저기 하나 심었는데 이 포도나무에서 넝쿨이 뻗어가면서 저쪽 나무와 만나고 그 나무에서 다시 저쪽으로 뻗어서 그 옆에 있는 나무와 만나서 이렇게 밑에서 보면 나무는 듬성듬성 심겼는데 위에서 딱 보면 전부다 포도넝쿨로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생각이 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넝쿨 아래 내려가 보면 싱그러운 포도가 당도가 높아서 하얗게 되어서 가득 달려있는 것입니다. 사실 남의 포도나무인데 내가 신이 납니다. 그것을 이제 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심을 때 그 땅은 요만합니다. 그 나무하나 심는데 몇 제곱센티미터나 땅에 들어가겠습니까, 요만큼 밖에 안 들어갈 것입니다. 밑에서 뿌리는 퍼지지만, 요만한 것 하나 심었는데 줄기를 쭉 뻗으면서 한없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 보면 에스골 골짜기가 나오는데 그 에스골이라는 말 자체가 ‘클러스터’입니다. 덩어리입니다. 구약 시대부터 포도 원에 포도농사가 엄청나게 잘 되는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내가 안 가봤으니까 잘 모릅니다. 그렇다고 구약 시대에 가봤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째든 쭉 늘어졌는데 지금도 한 송이에 4.5킬로 내지 6킬로 짜리 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상상도 못합니다. 그것은 매달기 위해서 뭔가 이렇게 바쳐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도 안 놀라십니다.
한번 6킬로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린애를 낳으면 3킬로밖에 더 됩니까. 그 두 명만 합니다. 포도송이 하나가 어린애 두 명만 하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굉장한 것입니다. 신기합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에 포도송이를 두 사람이 꿸 체에 들었다는 이야기가 뻥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그렇게 포도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 같은 게 아닙니다. 그냥 가서 아무도 없는 땅에 가서 우리 여기에 개척을 하자 그리고 깃발을 꽂고 그리고 나라를 만들고 그리고 개척을 한 그것이 아닙니다. 미국 사람들이나 영국 사람들이 호주나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차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그 당시에 거기가 말하자면 바벨론 문명의 발산지 와 그 다음에 아래로 내려가면 이집트 문명의 발산지, 말하자면 세계 문명의 역사에 배꼽이 되는 그런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로 말하자면 강남이 개발될 때 반포와 같은 곳으로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인류 문명의 역사가 쭉 여명이 밝아오면서 그 기름진 땅에 사람들이 다 들어서서 이제 자기 나라를 건설해가고 있을 때 그 문화가 얼마나 찬란했는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 보면 벌써 주전 3500년 내지 3800년 전에 벌써 문자가 발견됩니다. 물론 이것은 이제 반 그림 문자입니다. 그리고 벌써 한 2500년 정도만 내려오면 물자 사용이 활발했고 아브라함 시대로 내려오면 상거래 하면서 영수증을 주고받을 정도입니다. 진흙으로 찍은 토판에 재판 기록도 나오고 어마어마한 문서들이 발견이 됩니다. 그때 우리는 이제 곰이 마늘을 먹고 그럴 때입니다. 그런 정도로 발달을 했으니까 그 땅을 다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이라는 종자들이 결국은 그 시대도 통신 이런 것이 활발하게 오갔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주전 18세기경으로 내려가도 저쪽 바벨론에서 쓰여진 문서가 이집트에서 발견이 되고 이집트에서 쓰여진 문서가 저쪽에서 발견이 됩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통신이 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외교 문서들이 오고간 흔적을 보여줍니다. 그런 정도로 발달한 세상이니까 그 기름진 땅들을 다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쪽으로는 지중해가 있어서 그쪽으로 많은 해양민족들이 넘어와서 도시를 건설하고 하면서 전부다 이미 노른자 땅이니까 강남 개발에 노른자 땅처럼 이미 투기꾼들이 다 와서 사느라고 복부인들이 와서 치마를 펼치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땅에 하나님이 히브리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히브리’라는 말리 원래 ‘이브리’입니다. 이브리는 원래 무엇인가 하면 ‘아바르’라는 단어인데 아바르가 ‘건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거기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그냥 떼거지로 강을 건너오니까 건너온 작자들이다 고 해서 이브리, 히브리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쪽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애굽을 생각을 해도 애굽이 강대국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애굽에 대해서도 그렇게 속국과 같은 의식을 안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그 애굽에서 벽돌이나 짓고 똥이나 푸던 그 노예들이 무슨 장엄한 군대가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면 떼거리 난민들이 애굽을 탈출해서 메뚜기 떼처럼 쓸고 온다고 그럴 때 사실 관심도 없었습니다. 숫자가 좀 많기는 했지만 그렇게 신경 쓸 정도에 전세가 아니었습니다. 벌써 이때는 철기문화가 들어왔을 정도니까. 히타이트 족속이 바로 여기 구약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헷 족속입니다. 그런 정도로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동해온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쳐도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게 간단한 족속이 아닙니다. 광야를 지났다고 되어 있는데 광야를 지나면서도 많은 전쟁을 치릅니다. 그것을 보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광야라고 해서 모두 텅 빈곳이 아니라 점령이 되어 있지 않고 비어있는 지역도 있었지만 그러나 대부분이 모두 다 누군가의 영토이었기 때문에 지나올 때 그처럼 힘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쳐들어오면서 계속해서 전쟁을 치르는데 예상을 깨고 선전을 합니다. 그 떼거지들이, 그래서 발달한 병기를 가지고 나가서 싸우는데 해괴한 일들이 일어나면서 전쟁에 참패를 하면서 그 떼거지들이 광야를 헤매고 돌아다니는 것을 누구도 통제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미 이제 그런 소문들이 강 건너까지 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애굽이 그들에게 거리적으로는 꽤 먼 곳이었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렇게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기 때문에 애굽에서 일어난 소문들이 많이 전파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히브리 사람을 만난 적도 없는데 기생 라합이 벌써 믿음을 갖습니다. 소문을 듣고 믿음을 갖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남들은 소문을 듣고도 믿음을 가졌는데 설교를 듣고도 믿음을 안 가지면 기생 보기에 창피한 노릇입니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불순종했기 때문에 방황하고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만 궁극적으로 그곳으로 쳐들어갑니다. 쳐들어갈 때 그 땅이 비어 있었습니까? 비어 있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강을 건너고 보니까 여리고 성이 보입니다. 간단한 성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성입니다. 그 당시에 축성 술이 라고 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 스핑크스니 이런 모든 것들이 모세 때부터 올라갑니다. 그때 벌써 어마어마한 피라미드를 지었습니다. 그게 불가사의입니다. 어떻게 돌맹이 하나에 2.5톤이 되는 것을 25000개씩 쌓아서 그렇게 어마어마한 것을 지었을까. 그 근처에서는 돌도 없는데. 그러니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추정하는 것은 그것을 운반하기 위한 운하를 사막 한가운데로 팠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도 사막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 한가운데로 파서 그 물을 타고 돌맹이를 떠다가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정도의 건축술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축성 술로 쌓아올린 그 여리고 성을 바라보면서 더군다나 그 성을 바라본 세대는 애굽의 성을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세대였으니까. 그것을 보고 기가 막힌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믿음의 종자였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믿음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누가 나보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예화: 지방에서 우연히 만난 제자가 물건을 사드리겠다고 해서 싫다고 했는데 강권적으로 권하 면서 있는 것이라고는 돈밖에 없다며 영지버섯을 사주었다는 이야기)
하여튼 정말 우리에게 하나님이 너 이것 해라. 그럴 때 예, 하나님 제가 믿음밖에 더 있습니까. 제가 원래 믿음의 종자가 아닙니까?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멘도 안 하십니다. 한번은 설교를 하다가 왜 아멘을 안 하는가 하고 따졌더니 앞에 앉아 있던 자매가 너무 몰두한 바람에 아멘 하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위로하느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어째든 간에 이 사람들이 있는 것은 믿음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하는 것입니다. 돌아라. 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러니 이게 무슨 비슷한 일이 일어나야지 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싸울 용기를 갖지. 글쎄,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과 전쟁을 했데. 어디서, 여리고 성을 쳐들어왔데. 그래서, 졌데. 그래 양쪽에서 사상자가 많이 났겠네. 아니 한쪽만 났데. 왜 그러니까 그냥 도니까 무너졌데. 그러니까 그 가나안에 있는 모든 족속들에게 두려움이 확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전쟁을 하는 기술이나 또한 무기나 이런 것들로 볼 것 같으면 사실 가나안 원주민과 그리고 이스라엘 그 떼거리들과의 싸움은 오늘날 탈레반 정권과 미국 싸움과 비슷합니다. 다만 차이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동굴이 없었다는 것, 그것밖에 없습니다. 아직 무슨 말인지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정도의 차이만 있지 진짜 정말 그런 정도의 싸움입니다. 그 싸움이 될 수가 없는데 이겨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가나안을 정복해간 것입니다. 순식간에, 약 5년 정도의 어간에 가나안을 싹 쓸어버리고 거기에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세계 전쟁의 역사에서도 신기원을 이룰만한 사건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이스라엘의 국가 건립의 역사를 보는 구약 성경의 기자들은 그 사건을 어떤 식으로 해석을 했는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셨더니 싸움을 해서 이겼더라.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갖다 심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다른 것이 심겨져있는데 그냥 슬슬 다른 종자가 들어와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면서 오랜 세대에 걸쳐서 우월한 특성 때문에 그렇게 몰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느 날 오셔서 죄악이 관영하구나. 애네 들 쓸어버려야겠다. 그리고 이 땅은 내가 선택한 너희들에게 주마. 그리고 한번에 하나님이 확 쓸어버리고 땅을 파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으신 것으로 그렇게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런 단어를 여기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국가 건립에 하나님의 은총 적인 역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도저히 자신들과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개명한 세계에 들어와서 떠돌던 떨거지들로서 여기에 번듯한 국가를 건립한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 적인 은총의 소산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콱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이 선지자도 똑같은 역사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너희가 짓지 않은 집에서 살고 너희가 심지 않은 포도를 먹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한가지를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는 말아라 죄인 된 너희를 구원하신 여호와를
우리에게 한번 적용해보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보면 우리 가족들이 거의 믿지 않는데 내가 예수님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우리 가족 누구보다 착했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그럼 돈이 많고 부유했습니까? 아니면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뇌하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하나님이나를 택하셔서 우리 집안에서 제일먼저 나를 믿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이 동리에서 나를 먼저 믿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주권 적인 은총입니다. 우리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나를 구원하셔야 했나. 왜 하나님이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이면 나를 택하셔서 먼저 주의 복음을 알고 주의 자녀가 되게 하셨을까? 나 자신에게 그렇게 선택될 만한 어떤 좋은 점들이 있었을까를 연구하는 것은 시간낭비입니다. 우리는 그 오묘한 섭리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왜인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은총을 베푸시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그래서 거기에 거의 심어 놓다시피 하신 것입니다.
자, 좀더 설명을 진전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그 주위에 이스라엘 백성과 비슷한 민족이 있었습니까?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도 좋을만한 백성들이 주위에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방나라와 함께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과 친교 하는 장면들이 나오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어떤 세속적인 방법으로 자기들을 보호해보려고 하는 한 노력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이 굳이 무슨 다른 커다란 강대국을 의지해서 우호관계를 맺고 그들과 더불어 딸과 아들을 교환해서 연 흥을 하고 그렇지 않았습니다. 뭔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판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가서 정복해서 그들을 복속 시키기는 했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어놓으셨을 때 동료도 없고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살아갈 동지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에 심어놓으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이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히브리 성경에 보면 “너로 말미암아”라는 그 말이 ‘배카’인데 “너 안에서”입니다. ‘인유’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 “인유 네 안에서 복을 받으리라” ‘아브라함 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아브라함을 정적으로 해서 이제 계속해서 생산될 그 언약의 백성들의 동아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동아리에 들어오게 됨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이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혈연에 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공동체 자체가 혈연적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이것은 제가 몇 번 설교했습니다. 혈연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신앙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자손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앙이 없으면 할례까지 받았는데도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백성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피와는 상관이 없는 백성들인데도 나중에 할례와 신앙의 고백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들어온 사람들이 다 12지파로 적절하게 배분이 됩니다. 우리 등록하면 교구에 배분되듯이 거기도 이렇게 유다 지파, 무슨 지파 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씨 자체가 유다 지파 그것이 아니라도 거기 가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동체였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심어놓으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까 비유로 든 포도나무를 심을 때 그 농부의 마음과 똑같은 것입니다.
자,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10센티 간격으로 포도나무를 심는 바보 같은 농부는 없습니다. 뭘 기대하기 때문에, 이 가지가 옆으로 길게 뻗어나가면서 성장하고 열매를 맺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몇 미터씩 떨어트려서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 가지 위로 쭉 올라와서 사과처럼 몇 게 매달리다가 만다고 한다면 통탄할 노릇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거기에 심어놓으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 모든 팔레스타인에 있는 그 발달한 문명을 가진 나라에서 가장 소수처럼 보이는 것이었고, 주위에 어디에도 그와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통적인 신앙의 기반을 가지고 있는 민족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심었습니다. 지극히 소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기에서 성장해 나오는 작은 나무의 포도가지가 십 수 미터씩 뻗어나가서 포도넝쿨로 우거지게 만들 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적은 무리였지만 이 무리가 선교 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뻗어나가고 뻗어나가서 그래서 결국은 수많은 나라에 영향을 미치리라고 하는 그런 기대, 그래서 그들이 돌아와서 그 언약의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런 선교 적인 성과를 보시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거기에 심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심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하나님을 믿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소수라는 사실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포도나무와 같이 이렇게 뻗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소수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인해전술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소수가 문제가 아니라 종자가 문제입니다. 종자가 참된 종자이면 이게 처음에는 미미하게 시작하는 것 같아도 이게 뻗어나가서 줄기 가지가 뻗어나갈수록 거기에서 아름다운 포도열매들이 맺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땅을 온통 포도로 뒤덮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포도들이 떨어져서 다시 그 씨가 흩어져서 다시 뿌려져서 다시 포도농사를 일구고 거기에서 나오는 넝쿨들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다시 넝쿨이 되어서 들판 전체를 포도로 뒤덮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기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거기에 심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작은 민족 이스라엘을 향해서 가지고 계셨던 그 기대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애굽의 한 동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그 떨거지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기대는 동네 적인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세계적인 기대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엄청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려고 하는 마음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 팔레스타인 땅에 심으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이 그저 예수 믿고 마음이 컬컬하면 교회에 와서 훌쩍이고 그리고 위안을 받고 그리고 다시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가고 그러다 또 마음이 괴로우면 와서 가벼운 위로를 받고 그러면서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걸어가는 인생의 길에 있어서 어떤 위안거리를 가지라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신자로 만드시고 여러분들을 교회의 회원으로 부르신 것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이 보기에 하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아주 귀한 특상 품의 포도나무로 심으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향해서 이런 놀라운 기대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한 사람의 가치를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가꾸어져서 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되어서 지금은 묘목과 같지만 그가 어떻게 성장해서 어떻게 괄목할만한 선교 적인 성과를 성취하는 존재가 될지 이 세상의 삶에 전 영역에 있어서 그런 선교 적인 성과를 성취하는 존재가 될지 하는 것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귀하게 쓰임 받았던 베드로를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나 잡으면서 한 망태 많이 잡아서 오는 날은 낄낄거리며 오고 그리고 못 잡아온 날은 어깨를 축 늘어트려서 가족들에게 볼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 가난한 어부로서 일생을 마칠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 주님을 만났더니 주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이방 선교의 새 문을 여는 효시가 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예수님 부활 후에 세우셔서 사실상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하시고자 하셨던 사역의 뒤를 잇게 하는 위대한 인물로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비록 신자답지 못하고 형편없이 살아가는 것 같아도 우리는 일단 그 사람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최후의 심판을 당할 때 가라지라고 인정을 받고 주님이 이렇게 까불러서 훅 하고 털어 내 버리시는 쭉정이와 같은 존재가 될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그것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그것을 장담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분별하는 그 사람은 알곡이라고 누가 또 장담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일단은 그들 모두다 주님의 사랑 받는 자녀이며 또 조만간 그런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셨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용납하고 사랑하면서 그가 진실한 신앙을 갖고 참된 신자가 되기를 갈망하는 그런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고 돌보고 그를 섬겨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든 그 포도나무 한 그루가 엄청난 선교 적인 영향력을 행할 것을 기대하시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거기에 심으시고 예루살렘에서 그들을 만나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한 사람, 한 사람 택하셔서 주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예수의 피로 여러분들을 구속하셔서 주의 진실한 자녀가 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셨습니다. 그것은 결국 여러분들에게 거신 하나님의 기대가 선교입니다. 이 선교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단순히 이렇게 전도해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 그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뭔가 여러분들의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의 영향력을 사람들에게 확산시키려고 부른 그런 존재들입니다. 그런 선교 적인 효능을 가진 존재들로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자라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잘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포도나무가 쭉 자라서 그래서 그 포도나무가 줄기 가지가 무성해서 쭉쭉 뻗어나가면 포도송이도 얼마나 탐스럽게 자라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뿌리가 튼튼하고 줄기가 튼튼하면 포도 알맹이도 아주 실하고 그리고 당도도 높은 그런 포도가 영구는 것입니다. 주렁주렁 여물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무엇인가 하면 포도 원 밭에 가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포도가 익어 가는 철에는 포도 덩어리를 위에다 매달아주는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내버려두면 가지가 찢어지니까 그 포도를 실에다 매달아서 위에다 매답니다. 계속해서 자라라고. 그 일을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내려다보면 새카만 포도가 몇 십 트럭은 될만한 그 포도가 그 넓은 포도밭에 가득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루 수 얼마 안 되는 포도나무가 그렇게 엄청난 포도를 맺는 것과 같이 그렇게 선교 적인 성과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해내시고 택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소명은 그런 선교 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단순한 전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찬송에 보면 그런 찬송이 있습니다.
널 보는 이마다 주 생각하리
여러분들을 보는 사람마다 주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보면서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 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선교 적인 효과입니다. 그것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썩어 가는 세상에서 소금은 아주 독특한 존재로서 부패하는 모든 것들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썩지 않는 물건에는 소금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 모르지만 예를 들면 이런 유리컵 같은 것들은 궤짝에다 넣고 썩지 말라고 거기에 소금을 붓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영향을 안 줍니다. 그러나 썩을 위험이 있는 모든 물건에는 소금은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면 고기라든지 두부라든지 뭐 아니면 생선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절대적으로 영향을 줍니다.
또 예수님께서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향해서 절대적인 영향을 줍니다. 여기에 모두 불이 꺼지고 촛불 하나만 켜져 있어도 여기에 있는 모든 공간을 다 밝힐 수 없고, 이곳에 가득한 어두움을 모두 몰아낼 수는 없지만 이 어두운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한들거리는 촛불 하나에 영향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 세상에 두셨을 때 그렇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선교 적인 성과입니다. 선교 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사는 존재들로 주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진실한 신자가 되고 성화에 길에 대해서 배우고, 구원의 도리에 대해서 배우고, 교리를 배우고, 자기를 날마다 죽이려고 애를 쓰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교훈 받고, 책망 받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함을 받고 하는 그 모든 과정이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이런 소명을 이 세상에 살면서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해주신 은혜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잘 받으면 선교 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면 세상에 아무런 선교 적인 존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선교 활동을 좀 했는데 하면서 제가 깨달은 사실은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에서도 익명의 신자로 살고 싶고 세상에서도 익명의 신자로 살고 싶어합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보면 한참 이야기하다가 보면 몇 달 사귀었는데 사실 저도 교회에 다닙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신자인 것처럼 가장하는 예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훨씬 낫습니다. 훨씬 솔직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인 것처럼 오해를 해도 그 사람은 즉각 자기의 정체를 밝힙니다.
사실 저는 교회에 안 다닙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다 세상 사람들이 다 세상 사람인줄 알아도 저 사실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이 아니라 크리스천입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사실을 제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선교 적인 성과를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기대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선교 적인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교 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살지 못하면 그는 자기를 심으신 그 구원의 소명에 부합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한번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정말 소명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어디서든지 여러분들이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의 삶은 자기 자신의 신앙의 고백, 선포와 어울리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화: 알고 있는 어느 공무원이 출근할 때 항상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을 부르며출근하 는데 퇴근할 때는 뇌물을 받고 퇴근한다는 이야기)
자기가 크리스천이라고 사실은 선포하면서 삶은 그 삶을 뒷받침 해주지 못할 때 솔직히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아침에 나올 때 아리랑 부르고 나와서 그리고 챙겨서 가면 오히려 하나님의 명예를 덜 손상하시겠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소명을 따라 살지 않으면 그럼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살다가 죽는 그런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더 좋은 집에 살고 맛있는 것 먹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고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지지리 가난해서 생고생을 하면서 풀 죽도 제대로 못 먹어서 핏기 없이 그렇게 살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는 시골에서 기르는 똥개이고, 또 하나는 강남의 부유층들이, 난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강아지를 파마를 시키고 이빨 스케일링을 하고 귀를 뚫어서 귀걸이를 달아주고 옷을 짜서 입히고 하는데 그 개는 하나도 안 행복합니다. 그것은 다 자기 욕심입니다. 개가 뭐 행복하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사료 회사에서 나오는 제품 잔뜩 먹고 당뇨병에 걸리고 진짜입니다. 그리고 무슨 췌장암에 걸리고 그래서 결국은 죽어갑니다. 개는 개같이 살아야지, 그렇게 해서 잔인하게 그렇게 하는지, 그 개가 에쿠스 4500cc 타고 리본을 묶고 이렇게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서 스케일링한 이빨을 내놓으면서 왕왕 짖으면서 저 밖에 쓰레기통 뒤지는 똥개를 보고 지나간다고 칩시다. 죽으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알리는 도구로서 그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지 않으면 우리의 흑망성쇄는 마치 강아지가 에쿠스를 타는가, 쓰레기통을 뒤지는가, 농촌에서 복날을 기다리는 것과, 아니면 암 걸리기를 기다리면서 사료를 먹는 강남의 아파트에 치와와인가 그런 차이가 있을 뿐이지 개 신분에 무슨 변화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참된 보람을 어디다 두어야 할 것인가 하면 하나님이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나라, 즉 그분의 왕국을 위한 소명을 성취하는데 무엇인가 자기의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 모두 선교사가 되고 목사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두들 목사가 되면 누가 와서 설교를 듣겠습니까? 다 설교하겠다고 하지.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소수지만 그러나 그들만이 선교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화: 직장에 다니실 때 천사와 같은 자매가 있었는데 주님의 살아 계심을 삶을 통해사랑을 드 러내 보여주므로 많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소명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
여러분, 우리 모두 이 세상에서 일은 조금 하고 돈은 억수로 받는 그런 편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살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훌륭한 대기업에 기업가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기업에서 정문을 지키는 수위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대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은행의 은행장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고 전파하는 그 일은 자기가 하고 있는 세상 적인 일에 크기나 가치에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얼마나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그런 선교 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사는가. 그것이 왕국에 목표이고, 왕국을 위해 부름을 받은 소명의 목표이고, 또 우리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우리 각자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그런 부르심을 따라서 살기 위해서 우리들이 기도의 영을 회복하고 싶어하고 우리가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참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이지 우리가 심심하고 답답해서 여기 나와서 한풀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목표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쓰레기입니다.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자신도 불행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도 계속 불행합니다. 그렇게 육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목적을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내 자리에서 나의 소명이 무엇인가. 그것이 크던 작던 모두가 소중한 소명입니다. 왜 하나님이 거기에 여러분들을 심으셨으니까 그 소명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소명을 따라 여러분들이 살아왔는지, 그 소명이 여러분들의 삶에 동기가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세 번째로 어떻게 함으로서 그런 소명을 다 할 수 있겠는가. 그것에 오늘 정답이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엇으로 심었다고 했습니까?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다. ‘쇼레끄’ 특상급의 포도로 심었다. 이 이야기를 오늘 꼭 해야지 만 명절 때 배만 들어오는 불행한 사태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다.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 교인이 100명도 안 모였을 때 어느 집에 갔는데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배를 딱 하나를 깎아놓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먹으면서 나는 배가 좋더라. 나는 하여튼 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랬습니다. 물론 전혀 안 좋아하는데 가식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실 좋아했습니다. 그 말 한 마디하고 나서 명절 때만 되면 배만 들어옵니다. 이번에도 들어온 배가 개수로 한 200개는 될 것입니다. 그것을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다른 교역자들도 주고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먹은 것은 몇 개 안 됩니다. 사실 배만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과도 안 들어옵니다. 사과라도 들어오면 섞어서 먹을 텐데 사과도 안 들어옵니다. 올해는 딱 한 궤짝 들어왔습니다. 배가 6-7짝 들어옵니다. 아무리 좋아해도 그렇지 들어오면 감사합니다. 성도들이나를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참 감사하다. 그런데 이제는 배는 그만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말을 못합니다.
전에 저쪽 교회에 있을 때는 전도사였을 때 어느 집에 갔는데 돼지고기를 구어 왔습니다. 그날 점심을 세 번이나 먹었는데 구역을 세 군데를 인도했는데 11시, 12시, 1시였습니다. 그런데 11시집에도 밥을 차렸고 12시집에도 차렸는데 1시집에 갔는데 또 차렸습니다. 그런데도 먹은 척을 안 하고 그것을 소명을 완수했습니다. 부지런히 먹었는데 첫째 집은 국수였고, 두 번째 집은 돼지고기 삼겹살이었고, 세 번째 집은 수제비였습니다. 그래서 중복이 안 되었으니까 그래도 감사했습니다. 돼지고기를 너무 맛있게 먹고 나는 돼지고기가 좋다고 했더니 소문이 뭐라고 났는가 하면 김남준 전도사는 소고기는 못 먹는데. 이렇게 소문이 났습니다.
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포도가 그렇게 맛있어졌습니다. 이제 큰일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포도를 애호한 사람으로서 경험담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종류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거봉 보다 약간 작았습니다. 그런데 거봉은 대부분이 약간 브라운 색을 띠고 있는데 이것은 새카맣습니다. 그런데 탁 씹으면 씨가 없는 그런 포도가 있습니다. 거봉과 같은데 기가 막힙니다. 하여튼 먹어보십시오. 굉장히 맛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제가 사먹었는데 선물을 한 두 번 받고, 딱 요만한 게 6,000원입니다. 손에 딱 들어올 정도입니다. 사실 간 떨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한 두 번 샀습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먹었던 포도에 모든 맛에 대한 비교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절대’라고 말합니다. 서로 대가 이어지는데 딱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쇼레끄의 포도입니다. ‘절대 특상품’ 써 붙여 있는데 이것 보다 맛있는 포도가 있으면 돈 다 돌려줄게 이렇게 찍혀 있는 그런 포도입니다. 그런 포도로 하나님이 심으신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들이 터득하는 원리가 무엇인가 하면 그런 선교 적 소명, 그런 왕국의 소명을 완수하면서 보람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고품질을 유지하는 포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인지 거의 눈치를 챘을 것입니다. 진실하고 참된 신자, 여기서 이야기하는 제라 에메트 믿음의 종자, 신앙을 가진,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을 깊이 부종하는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에 굳게 사로잡혀서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접붙여 사는 성도들, 그런 존재로서 쇼레끄의 포도가 될 때 그때 그 포도가 쭉 뻗으면서 귀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인이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요만한 것 한 송이가 6,000원하는데 이런 것들이 막 몇 트럭씩 달렸다고 할 때 그것 팔면 집사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런 포도가 달려있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그렇지 못한 포도가 맺혔을 때는 어떻게 하나. 땅을 버리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나무가 쭉 자라서 가을이면 잎을 다 떨어집니다. ‘낙엽’이라고 우리들이 그렇게 말하는데 그 나뭇잎이 다 떨어지는데 그게 자연의 아주 오묘한 섭리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나무가 넓은 잎사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름동안에는 이게 성장을 하면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할 일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나뭇잎이 달려 있으면 밑에서 계속 해서 수액을 빨아먹으면서 그 영양을 공급해주어야 합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면 나무 자신은 그것을 축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겨울이 오면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을이 되어서 나무로서 소명을 완수한 다음에는 이파리를 다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공급할 영양이 없게끔 만들어서 그 다음에 땅으로부터 빨아들이는 그 영양을 겨울을 나기 위해서 자기를 철저하게 자기 안에 비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겨울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겨울을 너끈히 이긴 다음에 이제 밑에서 빨아들이는 넘치는 생명력으로 싹을 트이면서 그러면서 다시 가지와 이파리를 만들어서 가을에 열매를 맺는데 까지 고난을 겪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화: 공원에서 인부들을 시켜 나무에 달려 있는 복숭아를 따버리기에 아깝다는 생각에 왜 그런 가 하니 그 이유는, 다 뜯어버려야지 어린 나무가 튼튼해져서 몇 년 후에 과실다운 과실을 얻을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나무도 버리고 땅도 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진실하게 변화 받은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잘 자라면 그들을 통해서 교회가 비옥해지고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잘 이루어져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 자라면 그들 때문에 교회가 망가지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왕국의 소명을 따라서 사는 많은 사람들의 소명을 다하는 삶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중요한 도구가 되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런데 이제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심으실 때에 그 씨가 제라 에메트, 믿을만한 씨앗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최상급의 포도나무로서 심으셨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넓게 보면 이스라엘의 국가 건립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 적인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을 우리 개인에게 적용시켜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거듭나게 해주셨을 때, 또 성화의 경험에서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처음 사랑,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을 가지고 주님께 부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가운데 신앙생활 할 때 그때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특상품의 포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런 하나님이 생각하는 헷세드와 아하바를 느끼던 관계에서 멀어져서 하나님이 생각하면 그것이 고통이 되고 마음에 고초가 되는 그런 관계가 되어버리고 하나님을 버리고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없을 때는 이미 쇼레끄의 포도가 아니라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방인의 오염된 포도, 더럽혀진 포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되는 그런 불결한 포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하고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주도록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결단하고 그리고 예전에 길에서 돌이키고 그리고 다시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고 이런 모든 것들이 무엇인가 하면 아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쇼레끄의 포도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우리를 만들어놓으셨던 그 품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왕국의 소명이 완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제가 육적 그리스도인과 영적 그리스도인의 책을 썼습니다. 겨울 사경회 때 전한 말씀을 그 동안에 연구한 것을 다 보태서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꼭 그것을 갖고 스터디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제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신자가 이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real christian, 진실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충분한 것입니다. 세상이 그것을 필요로 하고 또 세상은 그런 그리스도인으로서 충분해야 합니다.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은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모이는 교회는 정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해나가는 훌륭한 사령탑이 될 수 있습니다. 어디서든지, 그것을 여러분들이 굳게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진실한 신자가 되려고 하는 고민이 없이 하나님의 일만 하려고 하는 사람은 잘못된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서 그냥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취미 생활로서 좋은 것 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침에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골목을 쭉 씁니다. 저도 그런 것 많이 해봤습니다. 그런 것 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보수를 바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웃을 뜨겁게 사랑해서 내가 잠을 덜자고 이 사람들이 깨끗한 땅을 밟게 해야지 하는 그런 동네 적인 소명을 가지고 하는 것 아닙니다. 아니고 자기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영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릅니다.
그러니까 잘 기억하십시오. 자신은 진실한 신자, real christian이 되어야겠다 라고 하는 그 진지한 고민과 갈망이 없으면서 단지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진실한 신자가 되기에는 너무나 넘기 어려운 두터운 벽을 말하자면 ‘섬김’이라고 하는 보상적인 행위를 통해서 심리적으로 보상적인 만족을 누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피하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처음 사랑을 하나님께로 받고 그 사랑이 느꼈을 때에 우리들이 쇼레끄의 포도였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랑이 빠져나가면서 우리는 점점 더 불결한 포도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돌이켜서 우리의 존재가 어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존재인가를 확인하고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리고 아하바의 사랑, 그런 하나님의 헷세드의 은총을 입으면서 살아갔던 지난날 그 은혜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진정한 소망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면서 주 앞에 깊이 뉘우치고 아버지 앞에 회개하는 그런 진실한 삶을 통해서 그 사람의 삶이 다시 쇼레끄의 포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심겨질 때에 받았던 그 믿음이라는 상표, 믿음의 종자라고 하는 그 브랜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아갈 때 그가 비로소 왕국의 소명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수많은 고민거리가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의 고민에 비하면 거의 가치 없는 고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하면 내가 real christian이 될 수가 있는가.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을까.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없으면 이 세상에 사는 의미도 없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놓으신 계획을 성취할 수도 없고 심지어는 행복할 수도 없고 우리 자신이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이 삶이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신에게 재앙이 되고 고통이 되는 그런 이상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와 그 크신 구속의 사랑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에 고통이 되고 슬픔이 되는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 마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요즘 교회 건축하느라고 고생이 많지요? 그렇게 말하는데 아직 땅도 안 팠습니다. 건축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고생이 되겠지만 그것도 안 하고 밥 먹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예배당이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멋있게 지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여러분들이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 그것보다 더 큰 목표는 없습니다. 또 여러분 모두가 진실한 자가 되는 것보다도 더 고상한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나 자신이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진실한 신자가 될 수 있다면 그리고 여러분들을 버리는 것에 그것이 도움이 된다면 나는 백 번도 여러분들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여기에 불러주신 분은 여러분들의 투표가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되기 원합니다 참 마음으로 참마음으로
신자 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정말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최고의 행복은 정말 진정한 의미의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그런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몸부림치는 그 사람들만이 신자로서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존재 그 자체가 훌륭한 선포가 되어서 그래서 어두운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제가 캐나다에 갔을 때 오셔서 설교하신 할아버지 목사님, 그 분은 우리 나라에 유명한 구약 학자이십니다. 목회에서도 학교에서도 정말 그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신 분이십니다. 정말 제가 살아 계신 분들 중, 몇 분 중에 존경하는 한 분이십니다. 전 그분을 뵈면 그냥 모습을 뵙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됩니다. 목사님, 오늘 채플 설교가 있습니다. 그러면 오! 그래 그리고 성경을 가지고 창가에 서셔서 성경을 보십니다. 너덜너덜한 성경을 펼치십니다. 그리고 쭉 읽으시고 그리고 올라가셔서 설교하십니다. 다른 교수님들은 원고를 하얗게 써서 이렇게 한줌 쥐고 올라가십니다. 그럼 막 떨어트리면서 설교하는데 그분은 올라가셔서 성경을 손에 들고 인격으로 설교하십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해야한다 그러면 그대로 젖는 것입니다. 하여튼 참 그분의 걸어가시는 모습도, 그래서 한때는 말이 그분의 목소리를 닮았다고 했는데 어째든 그렇게 모방하고 싶을 정도에 그런 감화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들 만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 말 안하고 그냥 지나가기만 해도 보기만 하면 나의 마음을 찌르는 사람, 아무 말 안하고 그냥 웃고 서 있기만 해도 내 마음을 다 들여다보는 것처럼 내 마음이 깊이 찔리는 사람, 나에게 무엇인가 구구 절절히 진리를 가르쳐주지 않아도 보기만 하면 그 사람처럼 살고 그 사람처럼 되고 싶은 우리의 정신적인 스승, 그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부단한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쇼레끄의 포도로 남기를 갈망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그런 선교 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천지를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하나님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을 보고 하나님이 놀라시겠습니까. 개미가 몇 달 동안을 몸부림을 치면서 동료들을 모아서 쌓아올린 개미탑을 한발에 밟으면서 지나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시켜드리되 우리들이 하고 있는 사업에 규모나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일에 크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바벨탑이 무너진 것을 보십시오.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을 보십시오. 오히려 주님의 마음에 감동은 한 사람이 하잘 것 없는 신자인 여러분들이 정말 목사도 아니고 한 시대를 움직여놓은 위대한 선교사도 아니고 위대한 한국교회 한 역사를 이루어놓은 장본인도 아닐지라도 역사가 여러분들을 모두 잊고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여러분 자신이 쇼레끄의 포도로 남기를 원하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부단한 자기 깨어짐 속에서 하나님께서 맨 처음 여러분들을 심어놓으실 때에 확보하셨던 그 좋은 품질, 믿음 표 품질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때 그는 진실한 신자가 될 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어두운 세상에 등불을 삼으시고 썩어져 가는 세상에서 여러분들을 소금으로 삼으셔서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로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의 일생이 결국 무엇입니까? 그렇게 주님이 생명을 허락하시는 날 동안 우리가 부른 찬송처럼,
그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며 사는 그게 신자의 삶이 아닙니까? 주님이 좀 오래 두시면 오래두신 대로 쇼레끄의 포도로 남으려고 몸부림치면서 자신의 왕국의 소명을 완수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일찍 불러 가시면 일찍 불러 가시는 대로 특산품의 포도로 이 세상에 남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보여주면서 살고 그러다 인생에 황혼이 깃들여서 주님이 오라고 하시면 우리가 수고하던 이 땅에 일들을 모두 놓고 주님께로 가는 그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쓰시든지 그분의 손안에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쓰실 지에 대해서 특별히 여기에 젊은 형제 자매들에게 내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떤 일에 쓰실 것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꿈을 꾸지 마십시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며 살든지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하나님이 무슨 일에 날 쓰실 지 그것 말고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서 내가 쓰임을 받을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진실한 신자로 살아갈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이 넘칠 것이고 생수의 근원이 되신 주님과 접붙여 살면서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세계 속에 그 주님으로 말미암아 끊임없는 생명의 능력들을 공급받을 것입니다. 험악한 세상을 믿음으로이길 것이고 유업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사랑으로이길 것입니다. 곤고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말씀의 빛을 쫓아서 사는 진실한 인격의 사람들로 남아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는 아주 분명한 한 이정표로 여러분의 존재의 목적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어디로 흩어지든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면서 살든지 주님의 세워진 그 자리에서 주님이 심겨놓은 그 쇼레끄이 포도로서 그런 왕국의 소명을 따라서 살아서 결국은 주님이 거기에 우리를 세우신 것이 주님의 마음에 참 기쁨이 되도록 그래서 우리 때문에 그렇게 포도나무가 열매 맺히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었던 땅에 줄기 가지가 뻗어서 수많은 열매를 맺혀서 우리가 심겨지지 않은 땅도 그 포도의 맛을 보이게 하며 거기서도 주님이 우리로 말미암는 열매를 거두게 하는 그런 목적을 위해서 오늘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사는 동안만 우리는 행복합니다. 이번 사경회도 여러분들에게 이런 소명을 회복시켜주시려고 주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