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
(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처음과 최종이신 하나님(창1:1) 2003. 9. 14(주일오전) 1
2. 창조의 목적, 하나님 자신(창1:1) 2003. 9. 21(주일오전) 16
3. 하나님의 영광과 창조의 목적(창1:1) 2003. 10. 5(주일오전) 32
4. 본체적 영광과 발산적 영광(창1:1) 2003. 10. 12(주일오전) 49
5. 발산적 영광과 효과적 영광(창1:1) 2003. 10. 19(주일오전) 65
6. 하나님의 영광과 피조물의 존재 목적(창1:1) 2003. 11. 2 (주일오전) 80
7. 선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창1:1) 2003. 11. 9 (주일오전) 93
8. 창조의 목적과 신자의 기쁨(창1:1) 2003. 11. 23 (주일오전) 107
1. 처음과 최종이신 하나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먼저 설교에 들어가기 전에 왜 이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간략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신앙이 특별히 뜨거웠던 때가 있는가 하면 미끄러지는 때도 있었습니다. 열렬해지는 때가 있는가 하면 식는 때가 있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때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싸움은 아직도 제 안에 그리고 여러분 안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왜 그렇게 좀 견고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요동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가. 왜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좀 변함없이 오래도록 그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진지한 견고함이 없는가. 항상 제 마음속에 있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죄에 대해서 탐구하고 그래서 죄 죽임을 실천합니다.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끊임없는 깨어짐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지키고 죄와 더불어 씨름하고 죄의 지배아래 들지 않고 은혜의 지배아래 머물 수 있도록 매일 매일 노력합니다. 그것은 참 좋은 것이고 그것 없이는 결코 우리의 신앙생활이 견고해질 수 없습니다.
아주 소중한 주옥과 같은 진리들이고 그리고 정말 그 진리 중 어느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아마 저나 여러분이나 짐승처럼 이 세상을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너무 자기 자신의 세계만을 들여다보고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 있는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의 근본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근본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진리들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무한하심과 그 영광, 그리고 그 아름다우심을 깊이 찬송하고 그래서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모든 정답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움과 그 무한함, 그 완전하심을 통해서 완전하심을 알고 그분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경험함으로서 인생의 문제가 풀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균형을 이루어야지 됩니다. 하나는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보면서 죄와 싸우고 죄를 죽이는 거룩의 노력이 필요하고 또 하나는 거시적으로 그 하나님 앞에 내 인간이 누구이고 내 위치가 어디인가를 깨닫게 될 때 그만큼 죄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을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부지런히 죄 죽임을 실천하면서 자기와 더불어 씨름하는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깊이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영광에 사로잡히고 무한하심과 완전하심에 감화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 두 가지가 함께 병행할 때 비로소 우리가 견고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얼마 동안 창세기 1장 1절을 묵상하면서 제가 받은 영혼의 유익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35-6세가 되던 해 이사야 40장을 보면서 6개월 동안을 침상에서 울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오, 그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시들고 꽃은 마르나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그 간증을 여기서 다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영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될 때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아무리 죄를 죽이려고 하고 순종하고 마음을 지키려고 애를 써도 자신의 본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아는 정확한 인식이 없으면 이 죄 죽임과 마음지킴, 죄의 지배에 머물고자 하는 모든 노력 이런 것들이 전부다 자기 자신의 의가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위치가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되는 몇 주 동안 계속될 이 시리즈에서는 시리즈 제목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그 목적, 그것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서론을 이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소중한 구절입니다. 성경 66권을 행주에 넣고 꽉 짜서 마지막에 도저히 짜버릴 수 없는 남은 한 구절이 있다면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있기 때문에 요한복음 3장 16절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인간을 창조하셨고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목적을 포기하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을 그대로 내버려두어서는 그 목적이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여러분들에게 교회를 만드시고 끊임없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참 신자로 만드시려고 하는데 참 신자가 되어감으로서 비로서 참 인간이 될 수 있고 참 인간이 되어감으로서 비로소 그 인간은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은 일치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목적과 일치합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해놓으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거셨던 기대는 그리스도의 피로 여러분들을 구원해놓으시고 거시는 기대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항상 우리와 연관되어서 그리고 우리의 삶의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고개를 숙이고 자기 인생에 코 박고 그 행복과 유익을 위해서 진탕 살다가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으면 그때야 고개를 들어서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그 다음에 하나님 다시 하늘에 올라가서 문 닫고 계십시오. 내가 삽니다. 내가 부르면 그때 오십시오. 그리고 인생을 삽니다. 인간이 이렇게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싶지만 그러나 전적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지 않고 다만 하나님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목적에 활용하면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도 자기 인생을 위한 신앙이지 하나님을 위한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신앙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계속될 이 시리즈가 여러분들의 지성에 커다란 충격을 주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충격을 통해서 도저히 끊임없이 죄와 싸워도 떨어버릴 수 없었던 많은 죄악들을 이 창조의 위대한 계획을 여러분들이 지성적으로 깨닫게 되고 그것들을 또한 영적으로 깨닫게 됨으로서 오래되고 지리멸렬했던 죄와의 싸움에도 털어버릴 수 없었던 죄를 털어버리고 그리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여러분들을 돌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이 설교의 목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무한하고 위대하심, 그 영광스러우심과 그 완전하심에 대해서 성경은 많은 묘사를 주고 있지만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그림 같은 묘사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데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또한 처음과 나중이니라” 알파는 희랍어의 알파벳의 첫 번째 글자이고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입니다. 문학적인 상징 표현입니다. 그것은 처음과 마지막, 알파 앞에 문자가 없고 오메가 뒤에 희랍어 문자가 없듯이 하나님이 바로 모든 만물의 궁극적인 시작이시고 또한 모든 만물의 궁극적인 최종이 되신다는 사실을 성경이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만물의 시작이 되시고 또 최종이 되시는가에 대해서 오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먼저 그 하나님이 처음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이신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천지 창조의 궁극적인 원인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학교 다닐 때 생물시간에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계속 물었던 것이 그런 질문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원숭이로부터 나왔다. 원숭이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원숭이 비슷한 고대의 동물들로부터 나왔다. 그것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계속가면 생명체의 기원이 나오는데 아메가 같은 그런 세포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면 그 세포, 생물체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무생물에서 나왔다. 적당한 원소가 있고 방전이 일어나고 그러는 가운데 이게 작용을 일으켜서 아주 하등한 그런 생물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실험을 해서 지금도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까? 선생님이 할말이 없습니다. 그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그럼 그런 전기는 어디서 왔습니까? 또 그런 원소는 어디서 왔습니까? 계속 캐들어 가면 마지막에는 원래 있었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그럼 여태까지 이야기한 것은 전부다 인간은 어디서 왔고 어디서 왔고 쭉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하나도 원인이 없는 것 없이 이야기를 해나가다가 맨 마지막에 가서는 원래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규칙에 맞지 않는가. 그리고 선생님들과 논쟁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간단명료하게 이 수많은 인류가 물어왔던 질문에 답을 줍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끝난 것입니다. 더 이상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는데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히브리 성경에는 브레쉬트 한 시작의 바라 창조하셨다. 에로힘 하나님이, 에타샤마임 브레에타하레츠 그 하늘과 그 땅을 창조하셨다. 여기서 쓰여진 “바라”라고 하는 단어는 대체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동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창조는 재료가 없는 상태에서의 창조였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그럼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는가. 그러나 그게 만약에 그 하나님을 또 창조한 그 누군가가 있다고 할 것 같다면 그러면 하나님이 만물의 궁극적인 원인이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가 대답이 끝입니다.
그러니까 간단한 것입니다. 물질을 만물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볼 것인가 하나님을 만물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은 그 자체가 능력을 주고 있는 것도 아니고 창조의 또 다른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인격체로서 창조의 의지를 가지고 계시고 또 말할 수 없는 지혜로 그 창조의 세계의 비밀들을 엮으면서 당신 자신이 창조 안에서 가지고 계셨던 독특한 목적을 위해서 이 모든 창조의 세계가 기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이 분명히 먼저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은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과 전적으로 구별되신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솜씨로 조각을 해서 사람을 만들어놓았다고 할지라도 그 조각이 아무리 정교하게 이루어졌다고 할지라도 만든 실제 사람과 뛰어난 조각품 사이에는 엄연한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질일 뿐이고 하나는 사람이고 그 작품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둘이 비슷하거나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림을 그렸는데 얼마나 정교하게 사람을 그렸는지 그 그림을 보는 누구도 저것이 그림일 것이라고 생각을 못해서 그 그림에게 말을 걸 정도의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작품을 남겼다고 할지라도 그 그림을 그린 화가 본인과 그림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합니다. 그는 작가이고 사람이며 그의 의해 그려진 그 그림은 단지 그림이고 물질일 뿐입니다.
이 창조의 세계가 바로 하나님과 그런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는 얼마나 넓은지 유사 이래로 누구도 정답을 내놓은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빛이 우주 끝에서 우주 끝까지 150억년을 달려가야지만 갈수 있는 거리라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정도로 안 되고 960 억년을 달려가야지 된다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달려 가봐야 소용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우주가 폭발을 일으키면서 커지고 있기 때문에 달려가면 다시 그 끝이 무한하게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끝이 있다고 한다면 그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구도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 우주의 그 위대한 신비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높이 솟은 몇 천 미터의 산, 그것보다 더 깊은 몇 만 미터의 바다의 물속. 무엇이 살고 있는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 끝없어 보이는 드넓은 우주, 그리고 새조차 날아오를 수 없는 높은 산, 물고기조차 헤엄칠 수 없는 깊은 바다, 끝없이 이루어진 대륙과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별들, 그 무한대에 가까운 별들 중에 한 별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누구도 다른 별에 달을 빼놓고는 가본 적이 없고 누구도 우주의 신비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을 때에라도 높은 산, 우주의 이 창대함을 볼 적마다 그 무한함 앞에서 인간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을 숨 막히게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그 우주도 사실은 하나님과는 도저히 겨룰 수 없는 그런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첫걸음은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이 세상은 세상이라고 하는 인식을 하는 것, 모든 이 어마어마한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피조물과도 겨룰 수 없이 뛰어나고 탁월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신앙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양적으로 크고 그리고 시간적으로 길다고 해서 의미도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산은 인간보다 수백 만 배나 크지만 이 세상의 온 산을 합쳐도 그 존재의 의미는 어린아이 한사람의 생명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온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그것을 무엇에다 쓰겠는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의미에 있어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에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존재의 크기나 수명에 있어서는 만물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추워지면 인간은 춥고 더워지면 인간은 덥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인간이 올라본 산보다는 올라보지 못한 산들이 훨씬 더 많고 인간이 가본 대륙보다는 가보지 못한 오지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의미에 있어서는 이 피조세계보다는 뛰어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의 의미에 비하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과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피조물, 인간이 만들어놓은 모든 물건과 인간이 만들어놓은 모든 작품들 위에 뛰어난 완전히 구별되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셨고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그 구원의 문턱에 서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우리 인간은 발아래 구르는 돌맹이나 오늘 피었다가 지는 들풀과 동창생일 뿐입니다. 모두 그분의 손으로 지은 바 되었고 특별히 죄가 들어온 이후에는 인간의 이 유한함과 초라함, 그리고 불안전함은 죄와 함께 더 강력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죽음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정말 초라한 존재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정말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또한 죽었습니다. 200년 전에 이 땅에 숨쉬고 살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수없이 태어나지만 수없이 죽고 한번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사람들은 다시 살아서 돌아오는 법이 없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증언해주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수많은 인간들이 이 땅을 살다가 다시 죽음이라는 영원한 세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분일뿐만 아니라 지금도 사람을 태어나게 하시고 살아있던 사람들을 죽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것을 거역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천지창조의 궁극적인 원인이시고 그래서 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자신을 의지하고 있다고 하는 깊이 인식하기를 원하시고 또 실제로 하나님은 한번 창조해놓은 세계를 그냥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금도 붙들고 계시고 그들을 지금도 운행하고 계십니다. 그들을 보존하시고 그들을 통치하시며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이 창조의 세계를 질서 있게 엮어 가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뿐만 아니라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가 날고 떨어지는 것, 들에 핀 백합이 잎이 나고 꽃이 피고 그리고 들의 풀들이 마르고 시드는 것, 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쓰러져가는 수많은 곤충들과 그리고 수많은 풀들까지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고 주님이 친히 계획을 가지고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붙들고 그들을 사라지게도 하고 다시 태어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우리가 살아서 숨쉬며 기동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도 주님이 의지를 가지고 우리를 살게 하시고 우리를 예배하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신앙인으로 살게 하시려고 하는 작용을 하나님이 멈추지 않으시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 그 계획은 아주 조화롭고 하모니를 이루는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창조하셨습니다. 영원 전에 하늘을 창조하시고 천사들을 거기에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에게 하늘나라를 전적으로 위탁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천사들은 그 하늘나라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그리고 이후에 창조되게 될 이 땅에 인간들을 섬기기 위해서 부리는 종들로서 창조되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천사들이 인간보다 완전하고 뛰어난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에게 주신 그런 지위는 허락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천사들에게 인간의 존재, 그리고 인간과 맺으신 하나님의 독특한 관계는 천사들에게 있어서 정말 부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창조하시고 하늘에 계셨지만 하늘나라에 묶이실 수 있는 분은 아닙니다. 천국에 계시지만 그분은 이 땅에서 역사하시고 천국에 계시지만 지옥은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은 곳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상징적으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고 불릴 뿐입니다. 하늘에 계시지만 하늘에 묶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만드시고 거기에는 천사를 두셔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만드시고 그리고 이 땅에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피조세계를 만드셔서 거기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져서 또 다른 당신의 나라가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마 외계인이 나타나면 성경이 모두 쓸모없는 문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체가 만약에 우주 어느 공간에 살고 있다면 기독교는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외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없다고도 말하지 않고 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크기에 있어서는 이 지구가 온 우주에 흩어져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수십 억 개의 별 가운데 수백 억 개, 아니 수천 억 개의 별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물리적으로 이 지구가 중심에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믿을 수 있는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이 모든 우주 가운데 지구는 일부에 불과하지만 종교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는 온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정도의 의미를 가진 곳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목성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에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목성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도움이 없이도 하나님 혼자 이루어 가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이 지구를 종교적인 중심지로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해서 하늘에는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만드시고 이 땅에는 지상나라를 만드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려고 창조의 역사를 이루셔서 이 허허벌판인 지구를 만드시고 또 그 위에 아름다운 창조물들로 가득 채우시고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에게도 주시지 않은 독특한 지위를 주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창조의 세계를 다스리고 그 세계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해서 이 지상의 세계에 하나님의 통치가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여기 계셔서 친히 다스리시는 것 같이 인간이 그렇게 이 창조세계를 다스려서 하늘에서는 하늘나라를 통해 천사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땅에서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에 창조의 세계를 다스리는 인간으로 말미암아 당신이 창조하신 온 세계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피조물들을 만드시고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신 다음에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간이 이 땅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의 세계들을 하나님의 마음,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는 지혜로움을 가지고 이 모든 창조의 세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그렇게 섬기며 봉사하면서 살아감으로서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게 창조의 목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이 과연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대신해서 일을 맡기셨다. 그러면 대리자가 되어서 자기에게 맡기신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정도로 그렇게 완벽하게 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인간은 하나님이 되어야지만 가능한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이 되어야지만 그것이 가능하지 인간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죄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지만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빚어진 피조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시지도 않았고 또 될 수도 없고 그래서 인간은 인간의 위치에 있었고 그래서 죄가 없었을 때에도 인간은 불안전한 존재였습니다. 그가 만물들을 이해하는 탁월한 지혜가 있어서 그 지혜는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고 그리고 영광스러운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만물을 향해서 좋은 관리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성품처럼 완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가 없었을 때조차도 그래서 창조 그 자체 속에 이미 인간은 불안전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은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하나님의 중요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이 주목을 해야지 됩니다. 왜냐하면 자 쉽게 이야기하면 잘 이해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은혜가 없었을 때는 제 멋대로 살고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살면서 방탕한 길로 가다가 깨트려집니다. 그래서 도저히 내 인생을 내 힘대로 살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손들고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 앞에 깊이 은혜를 받고 자기가 산산이 깨트려지고 나니까 어떤 마음이 생기는가 하면,
주 없이 살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그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아주 마음이 극도에 달하게 되면 항상 이 가슴속에 눈물이 가득 고입니다. 그리고 정말
주님은 없는 세상 평화없네 오 주 없이 살수 없네
그리고 정말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 마음이 타락하기 전에 아담에게도 있었던 마음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다만 고통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느낄 때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은데 내 안에 있는 죄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그 사이에서 오는 갈등 때문에 고통 합니다. 이런 것은 없었습니다. 이런 것은 없었지만 정말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하나. 나는 도저히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없을 거야. 하나님이 도대체 내가 무엇인데 나같이 이렇게 유한하고 불안한 인간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온 창조세계를 다스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이 창조의 세계의 기능을 유지하도록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을까? 나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어. 정말 주님의 도움이 없이 할 수 없어. 그렇게 해서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주님을 진심으로 의뢰하지 않으면 자신이 이렇게 천사들조차도 흠모하는 이 위치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 절대의존적인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신비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다 따로 따로 창조되었습니다.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짐승 그 다음에 식물과 벌래들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마지막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존재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심으로서 그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하나로 연결이 되도록 핏줄처럼 묶으시는 것입니다. 마치 장인이 보석을 가지고 잘 다듬어서 구슬을 수백 개를 만든 다음에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실로 다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고 팔찌를 만든 것처럼 하나님이 하나하나를 창조하시고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자신으로 그 모든 만물들 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충만하게 하심으로서 이 하나 하나의 피조 된 이 창조물들이 인간과 함께 모두 묶이도록 그래서 핏줄처럼 연결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내가 요즘은 볼 기회가 없지만 가끔 즐거운 동물의 세계를 봅니다. 나는 하나도 안 즐겁습니다. 도대체 누가 즐겁다는 것입니까? 도망가는 짐승을 더 포악한 짐승이 달려가서 한입에 물어뜯어서 내장을 파먹고 그리고 나면 독수리들이 날아와서 쪼아 먹는데 그게 뭐가 즐거운 동물이 됩니까? 이런 것들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하나하나가 피조물들이 다 핏줄처럼 연결되어 있던 것들이 끊어진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모두 나타나십니다. 성부 하나님, 그리고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자 하나님이 모든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성령 하나님이 함께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창조의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성령으로서 모든 피조세계를 핏줄처럼 묶으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조금 어려운 말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묶입니다. 그 증거를 대겠으니까 보십시오.
아담이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와와 함께, 땅이 도와주었습니까? 땅하고 언제 의논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까? 또 무슨 곡식의 씨앗이 열매를 맺는 이런 곡식이나 먹을 수 있는 식물의 씨앗이 무슨 선악과를 따먹는 길을 안내를 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순전히 아담과 하와의 개인적인 선택이었고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땅이 피해를 보면서 그 땅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 땅이 뭘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저주를 받습니다. 그리고 곡식의 씨앗이나 식물들이 뭘 잘못한 게 있습니까? 그런데 열심히 뿌려도 농사를 지어도 가시와 엉겅퀴를 계속 돋아나는 것입니다. 짐승들이 선악과를 따먹는데 무슨 도움을 주었습니까? 그것들이 그 죄에 동참했습니까? 그런 선악과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그 모든 균형들이 깨트려지면서 짐승들이 짐승들을 잡아먹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치열한 약육강식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연을 보면서 평화롭고 아름답다고 그러는데 그 세계를 한번 들어가 보십시오. 평화는 없습니다. 그 속에서 짐승들을 비롯해서 작은 벌래, 그 밑으로 내려가서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먹고 먹히는 그 치열한 생존경쟁과 끊임없는 죽음의 공포들이 피조세계에 모두 어두운 그림자처럼 깃들어있습니다. 그냥 높이 뜬 구름, 높이 솟은 산 이런 것 보면서 우리들이 아름답다, 평화롭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고 그것들이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때 이 모든 피조세계들이, 피조세계 하나하나가 전부 다 거미줄처럼 엮어져서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과 이런 것들이 거기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굉장히 아름답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외국에 가보면, 외국에 안 가 봐도 금강산이나 설악산에만 가도 아름답다고 그렇게 합니다.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으로 따지자면 80 노인네를 보고 너무 예쁘다고 그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괴기영화 같은데 보면 동화처럼 예쁜 집이 있고 예쁜 사람 그 다음에 꽃이 맺고 열매가 맺은 아름다운 과수들이 열린 나무들이 쭉 있는데 뭔가 저주가 임하면서 갑자기 색깔이 이렇게 흐려지면서 잎은 다 떨어지고 열매도 떨어지고 죽은 나무처럼 되고 흉가처럼 변하고 사람들이 해골처럼 변하고 그러는데 죄가 들어옴으로서 그런 변화가 인간과 연관을 맺고 있는 모든 피조물들 속에 그것을 타고 함께 스며들어가면서, 타고 들어갔다기보다는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면서 마치 전기가 나간 것처럼 모두 그런 것들이 끊어지면서 창조될 때 그 아름답고 찬란한 영광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 피조세계의 참다운 영광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인간을 중심으로서 그들은 모두 실핏줄처럼 엮어놓으시고 그 안에 충만하게 계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창조의 영광입니다. 그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스위스가 아름답고 금강산이 아름답고 그것다 쓸데없는 이야기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도 창조의 아름다움을 본래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죄가 그렇게 망가트려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섬기시다가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이 과정이 바로 그렇게 모두 끊어졌던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다시 복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때에는 다시 이제 짐승들이 약육강식을 하고 그러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이게 다시 핏줄처럼 엮어졌던 이 창조의 커뮤니케이션이 회복이 되고 그리고 그 관계 하나하나에 하나님이 다시 충만하게 계셔서 그래서 원래 죄가 들어오기 전에 창조시의 그 찬란한 영광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지 땅은 땅이고 하늘은 하늘인데 도저히 우리들이 이전에 보던 그 하늘, 그 땅이 조금 바뀐 것이라고 그렇게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완전히 질적으로 새로워진 그런 정말 놀라운 창조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계획을 가지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바로 그런 창조의 면류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창조로 돌아가서 존재론적으로 보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 인간 자신 스스로에게 기이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흙으로부터 취하여졌고 그 재료를 사람의 모양으로 빚으신 분은 하나님이셨고 인간이 아니라 그리고 영혼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창조된 영혼을 그 코에 생기를 넣으심으로 육체와 결합시켜서 산 사람이 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함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에 어떤 것들을 보탠 적도 없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존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그로부터의 역사를 통해서 창조되었고 그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수 있는 권리가 없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삶으로 말미암아 행복할 수 있도록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지지를 않았습니다. 여기에 바로 인간이 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하셨는가를 깊이 탐구해야 할 당위성이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결국은 어떻게 보면 사람을 위한 창조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사람부터 창조하고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기 시작했다면 인간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인간이 거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놓으신 다음에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보면 이 모든 이 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준비과정으로 만들어놓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인간을 위한 준비로서 창조된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창조가 인간을 목적으로 창조되었지만 그러나 인간 자신의 행복이 최상의 목표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름다운 열매를 만드신 것은 인간에게 먹게 하심입니다. 물을 만드신 것은 인간에게 마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만족을 주시기 위함이었는데 거기가 끝이라면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데 거기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인간을 그렇게 대우하심으로서 그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순종하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세계가 원래적인 창조의 영광을 간직하고 언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지상세계를 보실 적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그런 세상으로 가꾸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창조의 모든 세계가 인간에게 기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의 궁극적인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그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모든 세계의 궁극적인 최종적인 원인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끊임없이 생각해야지 될 것은 많은 재산을 갖고 많은 권력을 갖고 남보다 많은 지식과 지혜를 소유하고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인간은 분명하게 깨달아야지 할 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이 모든 것들 때문에 누리는 행복과 만족, 그 이상의 목적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으며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않은 것은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서 우리들이 죄, 그러면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속이고 또 부정직하게 살고 뭐 등등의 많은 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악입니다. 죄라는 뿌리에서 매달리는 악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가. 성경이 분명히 정직하게 살라고 하는데 왜 부정직하게 삽니까? 성경은 인간에게 게으를 권리가 없다고 그러는데 게으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삽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중심으로 안 살고 나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창조주 하나님이 자기 뜻을 보이셔도 그것보다 더 중요한 있다고 말해버리면 얼마든지 불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내 뜻이다. 하나님이 부지런히 살아라. 못하겠는데요. 왜? 싫으니까. 정직하게 살아라. 못하겠습니다. 왜? 내가 하기 싫으니까.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모든 악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캐들어 가면 하나님이 창조해놓으실 때에 자기의 자리를 이탈한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정의할 때는 그 죄는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모자라는 것, 혹은 허물 이런 것들로 정의될 수 있는데 그것을 더 뿌리까지 캐고 들어가서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보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만족을 누리고 행복해지는 것이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트려지지 않는 한 그가 하나님을 섬기고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봉사하고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쓸모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의 전적인 희생이나 이런 것들을 원하시는 것, 더 많이 희생하라. 더 많이 나에게 바쳐라.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 이 세상을 창조한 목적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고 그리고 내가 이 피조물 중에 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목적을 따라 사는 것이 내 인생의 참된 영광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얼마나 바치는가. 얼마나 헌신적인가는 나중 문제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이점에 있어서 깊은 인식을 갖고 충격적으로, 그러니까 먼저 지성적으로 충격을 받아야지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시시때때로 예배하고 죄를 죽이고 죄를 죽이게 해달라고 하는데 왜 죄를 죽이게 해달라고 합니까? 죄가 자기 안에 있는 게 고통스러우니까 죄를 죽이게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게 해달라고 하는데 성경을 보니까 공경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복주시니까. 이것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입니다. 죄를 지었는데 고통 가운데 막 울부짖으면서 하나님 앞에 도와달라고 합니다. 왜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괴로우니까. 이 괴로움을 덜어내고 싶은 것입니다. 내 힘으로 덜어낼 수 없으니까 주님의 도움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덜어내 주면 그러면 원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고 싶어 하는 인생의 길에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활용해서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인생 자체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천상의 능력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행복하지 않게 살아가는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그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잠시 이 세상이나 세상이 주는 물질, 그 유익으로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이 최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작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천지창조의 최종적인 목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그의 구원하신 빛을 선전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계속 올라가다가 보면 마지막에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 36절에 보면 만물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느니라 모든 것들이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들에 핀 풀이나, 들에 핀 꽃이나 그리고 벌판의 풀 그리고 하늘을 나는 새들,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나 모든 것들이 각기 제 마음대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거기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 역시 그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악인도 있고 선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일찍 죽는 사람도 있고 늦게 죽는 사람도 있고 명대로 사는 사람도 있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불법을 행하는 사람도 있고 선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각기 자기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인간들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는 살수 없도록 결국은 하나님께서 운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인들도 결국은 심판을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는 훌륭한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이런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마지막 사라질 때까지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 속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의 세계는 두 영혼의 틈바구니 속에 존재하는 그런 유한한 존재일 뿐이고 모든 유한한 존재는 결국은 무한 속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루 있다 사라지는 하루살이 같은 곤충으로부터 7-80년을 사는 인간을 비교하는 것은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격차라고 생각할지 모르고 한 곳에 수억 년씩 서있는 높은 산을 몇 십 년 살다가 죽는 인간과 비교하는 것은 또 하찮을지 모르고 몇 억년 서 있는 산을 수십억, 수백억 년 동안 존재하는 우주의 밤하늘의 별과 비교하는 것은 또 하찮은 것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주를 유한무한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 인간이 너무나 유한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우주가 무한해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수백억년을 존재하는 피조물이든 몇 십 년을 살다가 죽는 인간이든 하루를 살다가 사라져버리는 날 파리든 하나님의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존재들이고 존재의 위대함에 있어서 비추어보면 그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무한해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자신의 팡세에서 무한한 유한한 우주의 침묵이 자기를 두렵게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결국은 영원과 영원 틈바구니 속에 존재하다가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은 다시 무한한 영원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인간의 참된 본분은 바로 인간의 이런 이치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세상에서 코 박고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몰두하며 살지 아니하고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부터 말미암고 그리고 마지막에 어디로 돌아가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이에 자기에게 주신 피조물로서의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참된 본분이고 인간이 이 본분에 열중함으로서 모든 피조물들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기쁨과 만족,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이 되시고 창조세계에서 받는 영광을 통해서 비로소 영광스러워지시는 분이시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 아무런 물질이 존재하지 않고 천사조차 창조되기 이전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셨고 그의 영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이 그 창조의 세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셨고 죄로 말미암아 이 온 땅이 타락하고 더러워졌을 때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셨으며 인간의 범죄와 창조의 질서를 무너트려버린 이 망가진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에 어느 부분도 훼손할 수 없었다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나고 그리고 이 지구상에서 이 피조의 세계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든지 간에 범접할 수 없는 탁월한 영광이시며 그 영광의 본체이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악인이 처처에 횡횡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모두 무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그 본체적인 영광에는 어떤 영향을 끼칠 수도 없고 하나님은 홀로 하나님이실 뿐이고 그의 영광은 영원무궁하고 무한한 뿐입니다.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불행과 고통은 수없이 많습니다. 아마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들에게도 끊임없는 고통과 그리고 견디기 힘든 아픔들이 삶의 현장에 수없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본능적으로 그런 고통들을 피하며 살아보려고 최선을 다해서 몸부림쳐왔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버리기까지 최선을 다하면서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행복해보려고 몸부림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느라고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이 아무리 불행으로부터 벗어나서 행복해지려고 애를 쓴다고 할지라도 그런 노력 속에서 거두는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 땅에 있는 자원을 많이 모으거나 심지어는 남에게 있는 이 땅의 자원을 강탈해서 많이 소유하고 그것을 자기의 것을 삼음으로서 이 지상의 자원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노력밖에는 가져오는 것이 없습니다. 심하면 점도 치고 귀신을 숭배하면서 이번에는 천상의 자원은커녕, 지상의 자원은커녕 지하에 있는 귀신들의 자원까지 힘입어서 이 세상에서 행복해보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지난날 행복했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부귀를 누리고 그리고 근심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던 행복했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존재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 모든 인류가 부러워하는 명예와 권세와 권력을 한손에 넣고 부귀를 누렸던 이 세상의 수많은 임금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올 초에 터키 선교사들을 위한 집회가 있어 이스탄불에 갔을 때 이스탄불 박물관에서 경험한 그 충격적인 경험을 저는 어제 밤에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유리로 만든 투명한 상자 속에 다 낡은 관이 있었고 그 관에 정말 탁월할 정도로 잘 보존된 인간의 뼈가 그대로 누워있었습니다. 머리카락도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거기에 팻말이 붙어 있었는데 시돈 지방에 발견된 시체인데 시돈의 왕의 시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시돈이라고 하는 동리가 있었습니다. 거기의 왕이었습니다. 키는 그저 일 미터 칠십이나 될까 말까하는 정도고 모두 사라지고 뼈만 그대로 관에 원래대로 누워있습니다. 내장은 바짝 말라붙었고 그리고 나머지 살은 다 썩고 머리카락과 그리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저는 특별히 말라붙은 내장을 보면서 한동안 거기서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껏 해야 5-60년 사는 동안에 저 내장을 가지고 그 속에 수많은 생각을 품고 그리고 얼마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열렬하게 살았을까? 그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없고 앙상한 뼈만 남았습니다. 유한이 무한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불행의 궁극적인 뿌리는 죄인데 그 죄의 궁극적인 뿌리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해주실 때에 지정해주신 자리가 있습니다. 거기에 있어야지 됩니다. 거기에 있어야지만 인간이 가장 아름답고 빛나고 그리고 인간도 가장 행복할 수 있는데 그 자리를 인간이 자꾸 이탈하는 것입니다. 이탈하고 살다가 보니까 하나님 앞에 죄송하니까 주일날도 나오고 그리고 헌금도 조금 하고 그리고 뭣도 재주가 있으면 교회에 와서 끄적이면서 봉사도 좀 하고 이러면서 살아가는데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할 때 이 사람에게 주셨던 그 원래의 자리에 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거기로부터 떠나서 살아가는 것인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여러분들을 죽게 하시고 그래서 여러분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난 여러분들을 홀로 흩어져 모래알처럼 살아가게 하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몸 된 거룩한 교회로 불러 그의 한 일부의 지체가 되게 하시고 거기서 목양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사랑과 은혜, 그리고 성령의 위로 속에서 진리와 은혜로 끊임없이 빚어져 새사람이 되게 하신 그 목적도 결국은 그 창조의 원래의 자리에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 앞에 하는 개별적인 순종과 개별적인 헌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정말로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해주셨던 본래의 자리, 죄 때문에 도망쳐 나온 그 자리,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기를 위해서 역사해야지 된다고 믿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이 동물적인 본능과 욕망이 모두 죄의 뿌리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사실을 깊이 회개하고 그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에 나와서 이렇게 점잖게 앉아서 주일 예배를 예배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여기 앉아서 있는 이것을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서 무엇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무엇하고, 주의 용서를 받아서 무엇하고, 성령의 은혜를 무엇 하려고, 무엇을 위해서 그 일을 하려고 합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살던 영혼의 고통과 마음의 근심과 임할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런 은혜의 수단을 사용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독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잃어버렸던 그 자리로 돌아가서 그래서 인간에 남아 있는 인간의 원래 자리를 잃어버리고 불행해진 인간,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모든 아름다운 피조물들과의 관계도 깨트려지고 거기에 깃들어있던 창조의 아름다운 영광도 모두 사라지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이 땅에 나그네 길처럼 되어서 살아가게 된 그 인간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유일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 희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인간에게 원래 주시려고 했던 이탈한 인간의 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인간에게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죄를 짓는 일은 너무나 허무한 일이고 그래서 잠시 있다 모두 사라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그리고 타락할 수 있는데도 기회가 있고 능력이 있어도 안 합니다. 왜 그것이 몰고 올 인생의 불행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선에 대한 추구, 도덕과 그리고 예의바른 삶, 예술, 그리고 학문에 기여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은 인간이 그 자리로 돌아갈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모두 있다가 사라져가는 것들입니다. 예술은 예술가보다 오래 이 땅에 남지만 그러나 그것도 결국은 유한한 것으로서 무한 속으로 언젠가는 돌아갈 것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좋은 사상, 도덕적인 이상 이런 모든 것들도 결국은 유한한 것이고 결코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원래의 목적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누구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또한 직접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그 궁극적인 계획이 무엇이고 그 계획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어느 자리에 세워주셨고 지금 나는 그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정말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진지한 인생의 목적,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고 이제 이런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을 알게 되었는데 이제 내가 살아있는 이 이유가 정말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서 그 하나님이 나를 맨 처음에 이 세상에 지으신 그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인가. 이것을 깊이 점검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경건을 위한 끝없는 노력은 마치 기름 바른 절벽을 오르는 것처럼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온 땅과 하늘위에 뛰어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은 정말 하찮은 피조물임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죄로 말미암아서 도저히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지정해주셨던 자리로 돌아가는 존재들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셔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끔 우리를 고쳐주셨습니다. 이제는 다시는 그 자리를 이탈해서는 안 되고 정말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면서 내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창조세계의 일부분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주님은 나를 지으셨으며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 창조주이시고 내 인생에 참된 행복은 아담이 그러했던 것처럼 내가 이 땅에 살아서 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에 보탬이 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세상에 붙은 수많은 헛된 욕심들을 떨쳐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과 영혼 틈바구니 속에 살면서도 유한한 존재로 살면서도 우리는 무한을 꿈꿉니다. 그래서 유한한 생애를 마감하고 무한으로 돌아갈 때 그 무한은 두려움과 침묵의 무한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그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는 무한으로의 회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살아있는 동안에 그 영원한 세계로 돌아가는 그 무한을 꿈꾸고 그리워하며 살수 있는 담대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얼마 안 되는 생애를 주님이 이 땅에 여러분들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어드리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러분 말할 수 없이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창조의 목적, 하나님 자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지난 시간에 저는 창세기 1장 1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시리즈 1번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시작이시며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마지막이 되신다는 사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어서 하나님이 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답부터 먼저 말씀을 드리자면 천지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사실은 전 이 이야기를 신앙을 갖고 나서 들으면서부터 한동안 마음속에서 반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 사실 이 면에 대해서는 반감까지는 아니었지만 석연치 않은 왜 그렇게 인간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시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이 점에 있어서는 좀 이기적이 아니신가. 당신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창조의 목적이 당신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너무 이기적이 아니신가. 그런 생각을 구원받고도 한동안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사실은 이 창조의 관한 교리들을 좀더 깊이 공부하고 이해하면서 저의 그런 이해가 매우 얄팍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신앙에 관해서 논쟁할 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이 선뜻 동의를 안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러한 의도가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의문점을 깨끗이 풀 수 있기를 바라고 그리고 제가 이 교리를 발견하면서 깨달았던 그런 영혼의 자유함들이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러면 이렇게 창조하신 세상에 창조의 성격의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철학적으로 논쟁이 되는 중요한 이치 가운데 하나가 존재론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것을 꽃이라고 이렇게 존재를 합니다. 그러면 이 존재에 관한 규정이 고정된 것인가, 계속 흘러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을 꽃입니다. 하고 말하고 지금 한 10초 흐르는 사이에 10초 전에 그렇게 했습니다. 좀 철학적인 사고로 발동을 해보십시오. 10초 전에 그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지금 또 이게 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 사이에 또 변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냥 한시도 고정되는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변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꽃도 달리지 않은 파란 풀의 상태였다가 이게 봉우리가 피기 시작하면서 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이게 얼마 있으면 지고 다시 시들어버립니다. 만약에 이것이 꽃입니다. 하며 제가 빠른 말로 안 하고 이, 그러다가 한 삼일 있다가 것, 그러고 또 삼일 있다가 이, 그러다가 또 삼일 있다가 꽃, 이렇게 읽는다. 그랬다면 그 사이에 꽃이 얼마나 변하겠습니까! 전부 시들어지고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존재라고 하는 게 무엇인가? 이게 고정되어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계속 흐르는 양태인가. 이것이 이 철학에 있어서 이 존재가 되는 중요한 논쟁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심으로서 그 철학자들이 궁금해 하는 이 존재에 관한 두 가지 고민을 한꺼번에 모두 풀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존재라고 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으면서 또한 한없이 흘러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가? 하나님 자신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고정된 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성을 자신 안에 가만히 가지고 계시기만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나와서 또 흘러나온 그것이 끊임없이 역사해서 그 흘러나온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인가 하면 좀더 설명을 들어보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충만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이신데 그것을 밖으로 흘러 내보낼 수 있는 그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수많은 이 세상의 피조물들, 크게는 저 위에 있는 우주에 떠있는 어마어마한 별과 우주의 공간부터 시작해서 작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풀과 꽃과 새와 들짐승과 그리고 더 작게는 작은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창조를 하시고 그 창조를 통해서 창조물 속에 당신의 충만한 신성을 그 안에 깃들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깃들게 하심으로서 창조된 사물들을 보면서 그 사물들 속에 충만하게 깃들어있는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신성을 밖으로 드러내서 그래서 밖으로 들어 낸 물건을 통해서 당신 자신조차도 보여주시는 것,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해놓으신 세계를 그냥 내버려두신 것이 아닙니다. 내버려두신다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창조물들을 통치하고 그리고 보존하시고 그것들이 계속 존재하고 목적을 따라서 기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일을 하나님이 계속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우리들은 지금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창조된 세계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것들을 또한 유지하고 보존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고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그 피조물들을 통해 또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바로 창조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서 이 창조세계가 창조에 원래 드러내던 하나님의 그 놀라운 신성의 영광의 광채를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피조세계를 잃어버리고 인간의 눈도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보여주셔도 못 봅니다. 마치 소경이 찬란한 보석의 빛을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도 그 높은 알프스 산 같은 곳을 볼 때 안 믿는 사람들도 그 위에 올라가서 보면 야, 진짜 조물주의 솜씨가 놀랍구나. 그렇게 말합니다. 제가 한번 설악산에 갔는데 설악산이 너무 멋있다고 하니까 옆에 가던 사람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도 예수를 안 믿는 사람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해야지 되는데 조물주께서 설악산을 보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감탄하지만 설악산은 조물주께서 금강산을 다 빚고 흙덩어리가 하나 남아서 아무렇게나 휙 버렸는데 그게 설악산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의 눈에도 금강산을 보면서, 그러니까 노래도 있습니다. 누구의 주제론가. 맑고 고운 산 누가 빚었는가. 그 맑고 고운 산, 그 노래가 있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인데도 창조세계가 그 신성의 충만함을 잃어버렸는데도 그것을 숨길 수 없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원래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이 창조의 세계의 영광이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웠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상상할 수 없는 창조의 찬란한 영광입니다. 그렇게 창조된 세계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천지를 창조하신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실 때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존재하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에 그 창조가 모두 충만한 신성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다 연결이 되어서 그래서 하나로 전부다 묶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것을 잘 들으셔야지 됩니다. 이게 말하자면 하나님 자신이 창조의 목적이라고 하는 문중 후에 나오는 이 세상이 왜 인간의 기준에 적합한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적합한 도덕만이 선에 표준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에 천지창조를 따로 하신 게 아니라 그 속에 충만한 신성을 부어주셔서 신성이 깃들어진 모든 피조물끼리 모두 이렇게 하나의 띠로 묶어지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는 해와 달과 태양계를 비롯해서 가깝게는 구르는 돌맹이와 들짐승들은 물론이고 마지막에는 공기 중에 있는 미세한 미생물까지 아직까지도 다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원소도 새로 발견되고 미생물도 새로 발견되고 물속의 동물도 새로 발견되고 식물도 새로 발견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찾아낸 것은 일부분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직도 얼마나 많은 생물이 있는지, 창조세계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전부다 다 하나님 자신의 충만한 신성으로 연결고리처럼 다 묶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충만하신 신성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를 연구해야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미생물을 연구하다가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크리스천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나 신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은 것을 확대해서 보든지 큰 것을 축소해서 보든지 간에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세상의 피조물들이 아직까지도 창조주 하나님의 그 충만했던 신성의 충만한 영광의 흔적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전부다 하나님께서 하나로 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전부다 묶여서 하나로 다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그것들을 모두 충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은 하나님께로 비롯되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만 또한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계신 것입니다. 충만하게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으로 모두 엮어졌으니까 원래 창조세계는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이게 다 가족입니다. 하나의 가족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갖는 그 관계와는 좀 다르지만 그러나 모두 동창생처럼 하나로 묶어져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다 깨트려져버린 것입니다.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 범죄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악과는 거기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고 따는 그 선악과를 붙들고 있었을 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땅이 유혹한 것도 아니고 유혹은 것은 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새 존재만 정리해버리시면 되는데 이 땅을 저주해버린 것입니다. 이 땅을 저주했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들이 땅으로부터 났습니다. 그러니까 땅을 저주했다는 이야기는 모든 존재의 기반을 하나님이 저주하셨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그런 동창생과 같은 그런 아름다운 관계를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TV 프로 가운데 재미있는 동물의 왕국은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게 뭐 재미있습니까? 미친 듯이 달려가서 물어뜯고 내장을 파먹고 그런 게 그게 뭐가 재미있습니까! 그런 약육강식이 치열한 전투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야생동물의 세계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원숭이는 바나나만 먹는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다람쥐도 잡아먹습니다. 막 피를 줄줄 흘리면서 흡혈귀처럼 그렇게 먹습니다. 개구리는 논에서 우는 줄만 알았습니다. 개구리가 뱀을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황소개구리가 뱀을 통째로 잡아먹습니다. 이게 무슨 재미있는 동물의 왕국입니까? 바닷물 속에 들어가 보면 바닷물 속은 더 치열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별의별 형상을 다하고 숨는데 기가 막히게 와서 잡아먹습니다. 그런 일들이 미생물의 세계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세계에 이르기까지 엄청납니다.
몇 달 전에 타임즈에 뭐가 나오는가 하면 바다 속에 있는 거대한 생물들이 90%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큰 생태계의 문제입니다. 거대한 생물들이 바다 속에 많은데 100-120톤씩 되는 고래부터 시작해서 길이가 17-8미터씩 되는 오징어부터 시작해서 이런 어마어마한 상상도 못하는 엄청난 물고기들이 많은데 그런 것들이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치열한 생존을 위한 투쟁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간에 형제로서의 아름다운 관계가 깨트려진 것입니다.
인간도 자연들을 훼손하고 그러는 것은 모두 타락 이후에 일어난 증상들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서로 대적을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보십시오. 엄청나게, 아니 바닷물이 바다에 있지 왜 육지로 올라옵니까? 개천 물은 개울을 따라 흐를 것이지 왜 멈춥니까? 그리고 비가 적당히 오면 그만 두어야지 왜 한없이 내려서 전부다 농작물을 다 파괴시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인간의 초기역사는 자연과의 끊임없는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역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동창생끼리의 모든 관계들이 철저하게 파괴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미생물들이 인간 속에 들어와서 인체를 파괴하고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회복된 가운데 일어날 피조세계의 놀라운 이 하모니의 회복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어린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을 쳐도 물지 않고 사자와 함께 뒹굴면서 노는 그런 때가 온다. 결국은 상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피조세계가 그렇게 회복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가서는 천국에서 돌아다니는 토끼를 잡아먹는다든지 그런 것은 없습니다. 죽임을 당해야 하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생명나무 실과들을 먹으면서 그렇게 자연주의적인 삶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이 다시 그런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결고리 속에 있었던 것이 죄로 말미암아 산산이 다 부서져버리고 인간은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다스림을 받게끔 되어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전부다 적대시당하고 공격을 당하면서 살아가야 될 그런 처지가 된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래도 불쌍히 여기셔서 인간이 어느 정도 그런 것들을 극복하면서 살수 있도록 이렇게 농사도 짓고 바다의 물고기도 기르고 살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질서를 인간을 위해서 남겨두신 것이고 나머지들은 다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결국은 당신 자신 안에 고정된 충만한 신성을 창조행위를 통해서 밖으로 드러내시고 그것들 속에 자신의 창조에 신성이 깃들고 그것들을 통해서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로 묶으심으로서 하나님이 없는 이 피조세계를 생각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도덕적으로 당연한 논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 세계의 목적이 되신다고 할 때 그것은 피조물인가, 하나님인가 이렇게 맞서는 그런 의미에서의 투정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것들을 당신의 창조의 능력 안에서 모두 끌어안으신 그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에서 인간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셔서 창조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신성한 영광을 채우셔서 모두 연결되게 하셔서 그것을 드러내게 하셨는데 하나님이 더 이상 드러낼 수도 없고 더 이상 어떻게 될 수도 없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인간을 두셔서 인간을 당신의 대리자로 삼으셔서 인간이 많이 노동을 하고 그런 창조주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창조의 질서 한가운데 서서 주님이 맡기신 세상을 잘 돌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이 더 풍성히 드러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런 상태로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 증명을 성경이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그러므로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
만약에 그냥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충분하시고 더 이상 어떻게 인간이 세상이 변해도 하나님께 더 이상 영광을 돌릴 수 없다면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두 사람을 영생 불사하도록 만드셨으니까 둘이 끝까지 영원히 살다가 둘이서 에덴동산을 다스리다가 죽게 하시지 왜 생육하고 번성하고 그래서 온 땅에 충만해지는데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과 인간들조차도 땅에 번성해져서 그렇게 되는 때를 명령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완전했지만, 그리고 창조의 영광을 드러냈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들이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다스리고 관리해 나아갈 때 하나님이 더 많이 창조의 영광을 받으실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년 전에 교회를 공사했던 어떤 분이 어제 왔다가 갔습니다. 오래된 건물이니까 군데군데 수리를 해야겠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다 돌아보더니 목사님, 어쩜 이렇게 일년 동안 교회를 잘 관리를 했습니까? 일년 전과 똑같이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말도 마십시오. 허리가 휩니다. 그냥 교회가 아무도 일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 적이 있습니다. 쓸고 닦고 기름칠하고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교회 건물이 몇 달 안 해봤는데 돈이 들어가는 것이 아까워서 그냥 순식간에 낡아버리는데 나중에 한꺼번에 목돈이 왕창 들어가고 뜯어내고 다시 해야지 됐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부지런히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쉬는 적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합니다. 끊임없이 회의하고 끊임없이 돌보고, 그런데 여러분들은 일주일에 한번이나 일주일에 세 번 보는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볼 때 깨끗하게 단정하게 있는 그것이 그게 장난이 아닙니다. 여러분 집안에 삼일만 청소를 안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돼지우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사는 돼지우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관리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처음 건축의 영광이 많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도 충만한 당신의 신성이 나타나 있었는데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가에 따라서 그 충만함이 더 잘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이 천지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십니다.
이제 이렇게 되다가 보면 여기서 아주 중요한 문제가 대두되는데 그것은 선의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여태까지 생각했던 선이라고 하는 것들은 이런 것이 아닙니까? 선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창조세계의 통합적인 질서 속에서 그 창조의 모든 목적에 부합하는 것으로서의 선이 아니라 이렇게 총체적이지 않고 내 가족에게 이익이 되면 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지는 게 나한테 좋으면 선, 다시 말씀드려서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잘해줍니다. 그래서 많은 존경과 신망을 얻습니다. 그런데 나만 만나면 괴롭힙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고 그러겠습니까, 안 그러겠습니까? 선한 사람이라고 안 합니다. 그것은 그 선의 기준이 누구에게 있기 때문입니까? 자기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선의 기준이 이런 것입니다.
또 그렇지 않으면 선과 선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알고 있는 어느 교수님인데 뭐 굉장히 희한한 분이십니다. 세 개의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과목이 세 개가 아무 상관이 없는 과목입니다. 하나는 법학, 그 다음에 철학, 또 하나는 언어학입니다. 그것도 스페인의 해적들의 언어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아버님이 굉장히 존경받으실만한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선한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젊은 시절에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아주 나쁜 사람으로 왜 모든 사람에게 선하고 모든 사람에게는 잘하는데 자기 가정은 안 돌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선하다고 그러는데 나는 우리 아버지가 싫다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 선이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객관적으로 어느 것이 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개념들은 원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 질서에서 볼 때 선의 개념과 맞을 수도 있지만 안 맞을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때로는 그것들 때문에 정면적으로 역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일부, 또 나 자신의 행복, 내 일부의 집단, 나라, 내 민족,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이런 것들로 맞추어서 선이라고 하는 잣대를 마련하게 되면 그 속에서 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그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그 선을 살아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창조의 목적 여기로부터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중요한 도덕적인 결론들이 여기로부터 끌러져 나온 것입니다. 누구에게 하겠습니까?
또 제가 어디서 읽은 한사람도 아버지가 굉장한 애국자입니다. 그래서 이제 많은 훈장도 받고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존경합니다. 아는 사람들이, 그런데 자기는 그 아버지를 너무 너무 혐오하고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일하는 동안에 가족들은 거의 버림받은 자들처럼 산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러면 그 아버지는 선한 사람인가 아닌가. 이것을 어떻게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천지창조 그 자체가 이렇게 모두 한 하나님에 의해서 통합적으로 창조되었고 창조된 세계가 모두 하나로 묶여져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을 묶고 있는 우주의 궁극적인 창조자이신 그 하나님의 관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의 기준이 안 됩니다.
그럼 그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선이라고 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제가 시편 23편을 설교하면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구절을 가지고 삼주인가 걸쳐서 선에 대해서 제가 한주 설교한 기억이 납니다. 그 선이 무엇인가 하면 “토브”입니다. 그런데 이 “토브”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가 제일 먼저 쓰인 곳이 어디인가 하면 공교롭게도 창세기 1장입니다.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데 빛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인간까지 6일에 걸쳐서 창조하십니다. 창조주가 이루어지면서 항상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 때 그 “좋았더라”가 히브리 말로 “토브”인데 이것은 좋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선 했더라.입니다.
그러니까 “좋다.” 라고 하는 그것은 뭘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내가 집을 하나 짓는데 집을 다 지어놓고 설계도 내가하고 내가 제작을 해서 사람들을 데리고 집을 졌는데 아! 정말 좋다. 제가 가끔 쓰는 말 중에 더 이상 좋을 수는 없어. 그 이야기가 무슨 뜻입니까?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내가 원래에 집을 지으려고 그림을 그리고 설계를 하고 설계를 하는 과정에서 지어지면 이렇게 될 것이다. 이런 집을 짓고 싶다고 한 객관적인 뭐 나름대로의 계획과 목표가 있었는데 그것을 이것이 충분히 성취했을 때 그런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짓는 이 집은 모든 사람이 다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사람마다 취향이 틀린데, 아! 너무 좋다고 그러는 사람도 있지만 뭐 이것도 집이라고 지었냐.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꼭 너같이 지었구나.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의 기준에 맞추어야지 되겠습니까? 그것은 원래 집을 지으려고 의도했던 내 기준에 맞추어서 내가 지었으니까 그게 내가 만족스러우면 나보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당신 자신 안에 고정되어 있는 이 충만한 신성을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통해서 이것들을 밖으로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된 그 피조물들 속에 당신의 충만한 신성이 깃들어서 당신 자신과 당신 자신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세계 사이에 놀라운 전체적인 일치가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물론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피조물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내가 이런 물건들을 잘 만들었어도 나와 이 물건은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다운 물건은 만들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속에 당신의 충만한 신성을 깃들이시고 그리고 그 충만한 신성을 깃들이신 결과는 영광입니다. 그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찬란하게 창조세계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드러내는 것들을 보면서 당신과 당신이 창조하신 물건 사이에 있는 관계가 나다운 것들을 창조하셨다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것입니다. 내 의도대로 되었고 그리고 나다운 것들이 창조되었고 내가 원래 이것들을 존재하게 하고자 했던 그 목적에 이것들이 기여하고 있다. 그것을 하나님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였다고 고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기에서 중요한 도덕적 결론이 나오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 선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하나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원래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던 그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 것들이 언제 깨트려지게 되었는가 하면 인간이 죄를 짓게 되면서 깨트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찬란한 창조의 신성의 영광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눈이 어두워지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 창조세계를 저주하시고 그리고 죄가 역사해서 마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계는 하나님이 그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하늘에는 하늘나라, 땅에는 지상세계를 창조하셔서 창조하신 만물 속에 충만한 신성이 드러나셔서 그래서 당신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목표였는데 이런 것들이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모두 빛이 바래버리고 다 망가져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선의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게 되고 그리고 인간들은 이 저주받은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자연과 투쟁하면서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서 유한한 생명을 이어가게 되었고 그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어두워진 죄악 된 본성을 가지고 창조의 목적대로 사는 것을 괴로워하고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하고 이탈된 가운데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자신이 모든 선과 악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판단 자가 되어서 그것대로 각자 행동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없는 삶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인간을 두셨던 원래의 목적으로부터 인간이 이탈됨으로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이 무엇인가 할 때 대답은 너무나 간단한 것입니다. 아주 너무 간단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그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다른 사람과 이 모든 피조세계가 창조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충만한 신성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도우면서 그 모든 삶은 그것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선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도덕입니다.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럼 어떻게 이런 선을 행하게 하실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됩니다. 아주 굉장히 중요한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중요하지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럼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있는가. 인간은 사실 그런 선을 행하기에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이 모든 세계가 말을 안 듣습니다. 인간이라면 인간의 명령에 순종하던 그런 때가 아닙니다. 이름을 지어줄테니까 너희들 다 둘 씩 둘씩 나와. 그러니까 짐승들이 차례로 다 나오던 이런 것은 다 옛날이야기입니다. 인간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그 창조의 세계를 창조의 원래의 목적에서 다 이탈되어버린 대체적으로 모두 다 이탈되어버린 이것을 돌아가게 하고 그러고 다른 인간들은 돌아가게 하고 또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인가. 성경은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한번 이탈되어버린 인간은 결코 그 목적에 부합하는 존재가 될 수도 없고 삶을 살수도 없고 그러므로 결국은 인간은 선하게 살수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도덕적인 기준으로 볼 때 선한 사람으로 살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기 위한 구속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속의 신비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믿고 구원받을 사람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셨습니다. 그 구속의 사건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고치시는가 하면 아주 놀라운 그 일치가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천지를 창조하신 장면과 인간의 영혼을 재창조 하셔서 그들에게 새 삶을 살게 하실 이 광경이 두개나 놀라운 유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하면 하나님이 충만하신 신성을 밖으로 쏟아내시면서 창조 세계를 만드시고 거기에 신성의 충만한 영광을 깃드시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사람들마다 하나님을 알도록 하신 것처럼 인간이 도저히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예수 믿게 만드셔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구원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존재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 안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끊임없이 끌어내면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이 안에 있는 것들로 존재가 되고 그 존재한대로 안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끌어내면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기름 담아놨던 병은 아무리 조금 나와도 쏟으면 참기름이 나옵니다. 들기름 쏟은 병을 한 방울이 떨어져도 들기름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속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끌어내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다 썩어서 부패한 죄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그 죄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그 죄인이니까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끌어내면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악한 삶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전체적인 목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 쓸데없는 소리라고 합니다. “나는 나대로 살 거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뭐가 선한 것인가? 내게 좋은 것은 선이다, 죄다 하는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나는 이게 좋다. 그리고 인간은 마구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마다 다 그렇게 삽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창조입니다. 망가져버린 그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이 중생이라는 방법으로 다시 regeneration하시는 것입니다, Recreation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생은 곧 재창조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망가진 인간이라고 하는 내면의 우주를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듭나고 창조된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러니까 우리가 거듭나고, 새 사람, 새 하나님의 본성을 입게 된 것 자체가 이 창조 세계에 버금가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들어보십시오. 내가 거듭난 이 개인적이고 영혼 안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만물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데 이제 기여하는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재창조를 통해서 중생하고 나면 그 다음에 거듭난 이 본성을 밖으로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만드신 것처럼 밖으로 그것을 이렇게 끌어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끌어내어진 게 무엇인가 하면 존재가 변화되고 그렇게 끌어내어져서 하나님이 재창조하신 거듭난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하는 삶이 또 하나의 피조물이 되어서 맺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잃어버렸던 창조의 찬란한 영광을 우리의 존재와 삶을 통해서 다시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모두 박살이 나버린 모든 피조물의 관계가 다 끊어졌습니다. 그 커뮤니케이션이 다 끊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을 온 우주가 전부다 회복하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져야지만 그 전에 하나님이 그 구속으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피조물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하나님께서 작은 세계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함께 다시 영적 연합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거룩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합니다. 그 교통이라는 게 매일 만나서 밥 먹고 논다는 것이 아니라 이게 너는 개봉동에 있고 나는 대방동에 있어도 함께 하나님을 믿는 자녀였기 때문에 우리들 속에는 영적인 연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지역교회 열린 교회 안에서만 그런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믿는 모든 사람들 속에 함께 모두 하나로 묶어놓으신 그런 연결이 이루어지고 멀리로는 하늘에 이름이 있는 성도들과도 연합이 이루어지고 이 모든 연합이 다 이루어지고 그 연합의 머리에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연합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이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하실 때 그 연합이 다시 확대가 되어서 다시 이런 피조물들과 찬란한 연결 관계가 회복되면서 죄가 들어오기 전에 그 창조의 찬란한 영광을 다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를 기다리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때 나타날 영광을 미리 조금 맞보면서 살게 하신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제 현실적인 문제가 남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재창조를 하셔서 거듭나게 하셔서 그래서 이제는 우리 안에 우리를 신의 본성에,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해주셨고 우리는 다시 창조시에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그 형상에 놀라운 신성의 영광을 지닌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는 죄가 없었는데 지금은 죄가 남아있습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죄를 그냥 내버려두면 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우리를 돌아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속해주신 이 계획을 따라서 사는 일이 힘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이 주신 그 지침을 따라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끊임없이 죽이면서 성화의 삶을 살게 되면 그러면 우리 안에 죄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거듭난 재창조된 본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인격과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그런 아름다운 창조의 신성의 광채를 가진 삶과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왜냐하면 온 세상을 다 살펴봐도 창조의 원래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 거듭난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새롭게 창조하신 본성으로 흘러나오는 그의 삶과 인격이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영광의 상당부분을 하나님이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이게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다고 하는 것이 이런 모든 사상들의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구속되고 그리고 이 안에 새로운 세계를 거듭남으로 창조하신, 중생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이것들을 밖으로 존재와 삶으로 끊임없이 끌어내어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신자의 삶을 통해 드러내는 이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서의 회기, 즉 선한 것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그 참된 구원의 계획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죄입니다. 오직 그것 하나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에서 뭐라고 그랬는가하면 “선하기를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은 내게 있으나 내가 악을 행하는도다.” 그러면서 갈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이야기하는 그 선이 무엇인가 하면 무슨 수제의연금을 내고 가서 골목 앞 쓸고 새마을 운동한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듭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성 때문에 내 안에는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다고 하는 주도적인 소원이 신자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것과 함께 아직도 죄가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또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고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럼 죄를 없애시고 끝내시지. 뭘 또 아직 남겨 두셔가지고 그러시나. 그것은 나중에 이루어질 일들입니다. 여기는 또 펼치면 너무나 또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니까 이것은 죄와 은혜의 지배에서 죄 때문에 빛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테입을 듣는 것으로 여러분들이 숙제를 내드리고 다시 원 위치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완전히 없애지 아니하시고 남겨두십니다. 그런데 이 죄는 남겨주셨지만 하나님이 이 죄 때문에 창조의 목적으로 더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죄를 이길 수 있는 수단도 공급해주신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은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불순종한다고 할 때 그게 무슨 뜻입니까? 불순종한다면 이런 것이 아닙니까? 목사가 되라고 하는데 가서 풀빵장수하면서 살았다. 이게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교회에서 집사직분을 맡겨주었는데 매일 집만 사러 다니고 진짜 집사노릇은 안 했다. 부동산 투기만 했다. 그렇게 하면서 산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후회합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도 진실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에 대한 전체적인 전망이 없기 때문에 항상 생각하는 것이 이렇게 국부적이고 단편적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견고하고 지속적으로 하나의 푯대를 향해서 살아가는 삶이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겠습니다만 그래서 지성의 도움이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서 신앙의 이치에 대해서 철저하게 깨달아 알 때 그런 것들을 막아주는 것입니다. 제가 실제로 이야기하면 너무 길지만 사실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할 때 나는 집중적인 죄의 공격을 받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쉽게 죽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앞에 그런 기도도 했습니다. 내가 잘은 모르지만 요즘 돌아가는 모든 것들을 볼 때 하나님이 우리나라에서 죄에 대한 복음적인 생각에 대해서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 나만큼 많이 가르쳐준 사람도 많지 않으리라고 믿는데 만약에 내가 이 죄를 못 이긴다면 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죄를 이기겠습니까?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뭘 경험했는가 하면 이 죄를 이기기 위해서 아주 정교한 죄는 무엇이고 죄는 어떻게 죽이고 하는 모든 교리들을 터득하고 싸우는데 이제 이치는 알겠는데 너무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영혼의 실증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됩니다. 그것도 또 새로운 세계지만, 그래서 너무 어렵습니다. 너무 어려운데 어느 한순간에 그런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면서 이 죄가 무엇인지를 가지고 죄 가지고 씨름할 때는 죄가 죽지 않았었는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이 창조의 세계에 장엄함과 그리고 내가 바로 그런 창조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고 거기 세우셨다. 그 생각을 하게 되니까 그 죄가 안 죽는지 자기가 자꾸 죄를 택하니까 안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죽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이 있어도 자신이 죄를 선택하면 그 방법을 아는 것이 죄를 죽이는데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거룩과 무한함,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이 장엄한 창조의 목적과 세계를 인식하게 되니까 어느 한순간에 그 죄를 버릴 수 있는 담대한 용기와 관심사의 전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제가 고민하다가 좋은 비유를 하나 들었습니다. 골목에서 어떤 사람이 풀빵을 팔았습니다. 그 이야기 안 했지요? 했습니까? 안 했지요? 풀빵을 팔았다는 이야기를 했으면 잉어 빵으로 바꾸면 되니까. 풀빵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쏠쏠하게 제법 팔립니다. 그래서 재미를 좀 봅니다. 그래서 이제 기분 좋다. 여기다 내가 풀빵을 차리기를 잘했다. 아 그런데 웬 녀석이 옆에서 바로 또 풀빵이오, 풀빵이요 그렇게 합니다. 아 그런데 하나씩 더 줍니다. 여기에 왔던 손님들이 저리로 갑니다.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그래서 이 자식 너 그럴 수 있냐. 여기 내 구역인데. 이 골목이 어째 네 골목인가. 한번 해볼래. 그래서 대판거리 싸우고 코피가지 났습니다. 그래서 둘이서 인정하는 선에서 할 수없이 끝내고 그리고 할 수 없이 이문은 약하지만 더 주고 더 맛있게 굽고 경쟁을 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조금씩 이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또 한 놈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옆에 있는 두 집에 풀빵과는 격이 다른 풀빵을 판다고하는 것입니다. 밀가루가 다르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이 열이 받습니다. 그래서 셋이서 대판거리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도 계속 보따리를 싸면서 아 진짜 이 일을 힘들어서 못해먹겠다. 저 두 놈의 자식 어떻게 처치를 하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까만 승용차가 오더니 골목에서 서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합니다.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고 인사를 하더니 뭐라고 하는가 하면 청와대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더니 차기국무총리로 내정되셨습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여튼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국무총리는 그것을 며칠 있다 일어날 일이고 내일은 풀빵을 구워서 팔아먹어야지. 이 자식들이 내 구역에 와서 풀빵 구워서 파는 거야. 그리고 멱살을 잡고 싸우겠습니까, 아니면 다 불러놓고 그동안에 내가 미안했다. 왜 내일이면 신문에 날 텐데 얼마나 얼굴이 팔리겠습니까. 아 저 국무총리 나하고 풀빵 때문에 나하고 멱살잡고 골목에서 싸우던 사람이다. 그럴 텐데. 내가 사실 본심이 아니었다. 이 풀빵 기계 너 갖고 이 연탄난로는 네가 가지고 가라. 그리고 사이좋게 살아야지. 왜 그렇습니까? 관심사가 바뀐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어야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장엄한 창조세계와 그의 영광에 대한 묵상과 실제적으로 어떻게 죄를 죽이면서 살아가야지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들이 함께 감화로 역사할 때 우리는 넉넉히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이길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주시는 목적이 결국은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선을 행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 선이 무엇입니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다른 것들을 그렇게 돌아가도록 기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 세상에서 무슨 부를 누리는가, 어떤 높은 지위에 살아가는가, 오십을 살다가 죽는가, 삼십을 살다가 죽는가, 아니면 백 살까지 살다가 산삼 먹고 죽는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살면 그 불순종이라는 말이 결국은 개별적으로 볼 때는 집사 잘하라고 그랬는데 다른 것 하고 주님이 사명을 맡겨주셨는데 사명보다는 다른 것 더 사랑하고 이렇게 개별적인 것이지만 그것들이 나중에 배우게 되겠지만 그 모든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시하시고 행하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계속 시간이 흘러가보면 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비롯한 모든 창조세계를 그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이바지하기 때문에 나에게 개별적인 작은 명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불순종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 불순종하며 살게 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창조의 원래 인간의 위치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하나님은 게으르지 말라. 부지런하게 살아라. 나는 그렇게 못하겠습니다. 왜 내가 힘드니까. 간단합니다. 정직하게 살아라. 나는 그렇게 못합니다. 왜 내가 손해를 보니까. 그러니까 모든 중심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그 기준이 아니라 자기중심으로 다 바뀌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간 결과 끊임없는 죄와 악들이 계속해서 솟아나고 하나님은 그를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창조하시고 그것으로 모자라니까 구속하시고 그것으로 그 위에 구속을 기초로 우리에게 은혜까지 부어주셨는데 그렇게 안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보시기에 너무나 가슴이 아프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려두시는 이유는 혹시 돌이킬까봐. 그래서 인생에 남은 토막 얼마큼이라도 그 창조의 목적으로 부합하고 그 사람을 통해서 예전에 쏟아져 나오는 것들이 온갖 더러운 것과 창조의 목적을 더럽히는 것들이었는데 변화되어서 이제 쏟아져 나오는 밖으로 유출되는 인격과 삶이 그 창조의 아름다운 영광을 드러내게 될 때 그렇게 드러낼 수 없었던 죄인이 나중에 그렇게 드러내는 것을 원래에 드러내는 것들이 있던 사람들의 드러남을 보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생각하십시오.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 나오고 어제 또 누가 얘기를 들으니까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조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살아서 뭐합니까? 집에서 주무십시오. 왜 여기에 와서 좁니까? 여러분들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여기 일주일에 한번씩 나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헌금내고 그리고 교회 어느 구석에 가서 거들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존재 자체가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려는 의지가 별로 없고 그리고 안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 불결한데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 밖에 나무들이 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저는 외국에 가서도 항상 교회의 마당밖에 생각이 안 납니다. 거기 앉아서 커피 한잔을 마시면 정말 좋겠다. 또 우리 교회 커피는 아주 맛이 좋습니다. 그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 나무가 있으니까 아침에는 새들이 날아와서 재잘재잘 노래를 합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새까지 한 20마리 날아와서 재잘 된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도 아름답겠습니까? 더러운 것입니다. 자기 자리를 이탈한 것이 더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더러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더러운 사람이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옵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 잡니다. 그러다가 또 헌금 시간에 깨어나서 헌금을 합니다. 그리고 또 돌아갑니다. 그리고 또 와서 기도도 좀 한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게 존재 자체가 원래 그 자리를 이탈해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섬김은 모두 다 이탈된 불결과 죄에 다 감염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제일 시급한 게 무엇인가 하면 은혜를 받는 것도 목표가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원래 창조의 그 자리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을 때 내게 주셨던 내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의 선인데 그것을 내가 존재하는 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때에 나를 통해서 내가 존재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가장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그곳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불순종하면서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깊이 회개합니다. 회개할 때 여러분들에게 드는 생각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교사를 맡겨주셨는데 농땡이만 치고 애들도 안 돌보고 뭐 나에게 집사를 맡겨주셨는데 집사는 하나도 하지 않고 집만 사러 다니고 이렇게 하면서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해드렸던 것들에 대해서 후회를 할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 기독교에 대한 교리와 사상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이런 창조의 교리의 이해가 없으면 계속 그렇게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쳇바퀴처럼 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는데 어떻게 집사일도 제대로 안 할 수 있는가. 그리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쳇바퀴처럼 도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것들을 이런 교리의 빛을 가지고 성경을 통해서 보면 그 사람 속에 우리 속에 그렇게 죄에 대해서 갈등하고 괴로워하고 후회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실체가 무엇인가 하면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부터 이탈된 삶을 살았다는 것에 대한 후회와 고통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항상 회개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떠오릅니다. 그게 심리적으로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버리시는 처절한 희생을 통해서 그 고난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셨기 때문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진실한 소원이 생겨나는 그곳에 항상 예수님께 대해서 사죄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그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살던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창조의 원래 선한 목적을 따라서 돌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거기로 돌아가지 않고 그 목적으로부터 이탈해서 자기를 모든 선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면서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삶을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 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돌아옵니다
왜 손과 발 못 박히고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셨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멸시와 욕을 받으시고 고난을 받으시면서 까지 죄로 멸망한 우리들을 다시 살리시고 구속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이 아름다운 세계가 그렇게 인간의 한번의 죄로 완전히 그 빛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그 신성에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는 그 본 임무로부터 멀어진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없는 세상으로 존재하는 것을 하나님이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본래적인 영광을 드러내는 그 가치는 외아들인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임으로서 받을 수 있는 희생보다 훨씬 큰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향한 사랑을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그 비참한 죽으신 뒤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 뒤에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이 한번 창조하신 이 창조의 세계가 철없는 인간들의 악한 죄로 인해서 그 충만한 신성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이 망가진 상태를 그냥 두고 싶지 않고 반드시 그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이것들을 돌려놓고 싶어 하시는 그 하나님의 자신의 영광을 향한 뜨거운 갈망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또한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 은혜를 통해서 우리 안에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죄를 누르고 충분히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이런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이 신앙은 절대로 어려운 게 아닙니다. 바보 같이 예수님을, 어떤 지체가 있었습니다.
(예화: 예전에 있던 어느 지체가 은혜를 받으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안 하기에 심방 가셔서 왜 열심을 내지 않고 다니는가 하니까 그렇게 적극적으로 믿으면 하나님 이 자기를 목사를 시키실까봐 불안해서 그랬다는 이야기)
그래서 참된 신앙생활이 자기를 엄청나게 마음이 뭔가 희생해야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많이 희생하면 좋은 신앙생활이 되고 조금 희생하면 조금만 좋은 신앙생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것은 창조의 이런 교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 그것을 자신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손해를 보고 안 보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은 인간을 위해 너무나 가혹한 표현이라고 옛날에 저같이,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인간의 행복 그 자체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충만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으로 모두 묶여져 있는 질서 안에서 원래 인간이 누렸던 그 자리에서 부여받을 수 있는 그 행복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그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탈해서 그래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자기가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자기를 하나님처럼 신격화하면서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는 모든 즐거움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들을 빼앗아버릴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그런 것들은 인간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이런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간 사람들 중에 모두 가난하고 비굴하게 살던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제왕도 참된 신앙을 가지면 이런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제왕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산 사람도 있습니다. 다윗 같은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 높은 사람들도 있고 물론 낮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누리고 살고 얼마나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서 사는가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이 아무리 길어보여도 70이고 길어야 80입니다. 너무 길다고 해봐야 100살입니다. 그때는 모두 하나님이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100살까지 남은 인생 20년은 제대로 기동도 못하는 인생입니다. 살았으나 살았다는 이름만 가졌지 청년시절처럼 그렇게 다니고 싶은데 다니면서 육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의 즐거움대로 살아갈 수 없는 처지에 육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삽니다. 그때 그가 잠시 누리고 있을 그 육체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은 것이고 그가 자랑하는 이 세상의 모든 소유물들은 지푸라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곰곰이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것이 어느 자리인가? 그리고 거기로 돌아가서 내가 그 자리에 서서 그 자리에서 있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영광을 받으실 때 그 안에서 신자들도 함께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도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왜 창조되었는지 모르고 자기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도 모르고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간절하게 자기를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때문에 한없이 행복하고 그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한없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런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기를 얼마나 간절히 갈망하고 계시는지를 너무나 모릅니다. 이런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진실을 알려주기 전에는 영원히 어두움 가운데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주는 그 일이 바로 우리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고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주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성화를 통해서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 드러내야 할 필요성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자주 넘어지게 하고 범죄 하게 하고 불순종하게 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이 세상에 풀빵과 같은 것들에 대한 관심을 잠시 벗어나서 한번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보고 그리고 우리의 존재는 이 땅에 구르는 작은 돌맹이만 못하고 벌레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 인생이라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두 번의 기회는 없고 오직 이때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창조하신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단 한번의 유일한 기회이고 그리로 빨리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여러분들의 남은 인생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하나님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여러분들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들이 드러나는 그런 축복된 삶이 되는 것, 그 목적을 빚나가서 살아가며 맞보는 모든 육체의 즐거움과 정욕의 만족은 그 들에 핀 풀잎에 매달린 꽃과 같고 꽃은 마르고 풀은 시듭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의 행복은 영원합니다.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영광과 창조의 목적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지난 시간에는 천지창조의 목적이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대한 의문이 제기가 됩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무엇 무엇을 위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유익을 받거나 이익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자신을 가리켜서 저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산다고 할 때 그 뜻은 바로 이런 뜻이 아닐까요? 자기를 위해서 재산을 모으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하고, 그리고 많은 명성을 얻으려고 하고, 지식이 모자라니까 지식을 섭취하려고 하고 그래서 보다 더 지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고 이런 것이 바로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충분하시고 스스로 완전히 충족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뭔가를 밖으로부터 더 받아들여야지만 하나님이 온전해지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고 나서 꽤 오랫동안 혼돈을 느꼈던 부분들이 바로 이런 부분들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저 자신의 이야기를 간증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그랬을 때 나는 왜 그렇게 하나님이 이기적이신 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던 이유가 바로 “위함”이라는 이 전치사를 인간 속에서 통용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기적인 분이시구나 하는 인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똑같이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셨다고 할 때 그 “위함”이라는 말에 대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전에 제가 가졌던 그런 느낌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할 때 그것은 만들어진 창조된 피조물로부터 어떤 것을 갈취해서 하나님이 소유한다거나 아니면 피조물들의 어떤 생산된 것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신다거나 그것들을 자기에게 이렇게 모아두심으로서 자신에게 보태심으로서 자신이 유익을 얻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뿐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이 하늘아래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갖든지 간에 이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뿐입니다.
요즘은 아이들이 놀이가 참 많습니다. 그러니까 인터넷도 하지, 게임도 하지요 별의별 것 다 합니다. 옛날에는 무슨 놀이기구가 없었습니다. 그냥 기껏해야 딱지치기나 하고 구슬치기나 하고 항상 애들이 땅바닥에 기어서 노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다 아스팔트가 되어서 놀 수도 없지만 옛날에는 그런 게 별로 없고 그냥 이렇게 구슬치기를 하고 그렇게 놀았습니다. 그리고 또 그런 딱지나 구슬같이 미생물 말고 그리고 놀 수 있는 유일한 장난감이 있었는데 동네에 돌아다니는 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의별 장난을 개를 가지고 다했습니다.
(예화: 어린시절 김정호라는 개구쟁이 친구가 있었는데 낮에 새끼를 난 개가 자고 있었 는데 살며시 가서 그 개의 젖을 빨고 왔는데도 그 개는 알지 못한 채 그냥 자고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 짖어대는데 아마 꿈을 꾼 모양이었다는 이야기)
보십시오. 개가 실컷 늘어지게 처마 끝에서 자다가 갑자기 눈을 벌떡 뜨니까 봄에 해살이 찬란하게 비출 때 태양을 보고 왈왈거리고 짓는다고 해서 그 태양이 빛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자기 자신으로서 완전하고 불변하고 충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에게서 무엇을 가져가고 탈취해 가심으로서 하나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할 때 자기를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말은 절대로 하나님이 이기적으로 피조물을 통해 무엇을 취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어려운 말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을 우리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꾸면 무엇이 되겠는가. 그렇게 바꾸면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어째든 아까 이야기한 것보다는 이게 훨씬 더 쉬운 말입니다. 천지창조는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게 훨씬 더 쉬운 말입니다.
그럼 도대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저는 이것이 굉장히 궁금했고 하나님을 깊이 만남으로 이 영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늘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책도 여러 권 찾아봤는데 가슴에 스며들 정도로 명쾌하게 성경적으로 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해설해낸 책을 많이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중에 몇 권 탁월한 책이 있기는 있지만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기에는 너무 난잡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모든 저의 지적인 탐구의 과정을 거쳐서 여러분들에게 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가장 탁월하고도 좋은 방법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따라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리고 왜 그것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검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성경적으로 볼 때 이 하나님의 영광은 크게 세 가지로 언급이 됩니다. 우선 첫째는 본체적인 영광, 혹은 본유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가리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표현에 영광의 하나님,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분이다.” 라고 할 때 바로 그런 영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발로적 영광이라고 제가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발로적 영광은 본체적 영광을 통해서 흘러나온 발로된 본체적 영광으로부터 흘러나온 영광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가리키는 성경의 구절은 “주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도다.” “여호와의 영광이 주의 전에 가득하였도다.” “주의 영광을 온 땅에 알리소서.” 할 때 그런 영광이 발로적 영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또한 대게 빛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저는 발산적인 영광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본체적 영광, 그리고 혹은 본유적 영광, 그리고 발로적 영광 발산적 영광이 있고 마지막 성경이 언급하는 세 번째 영광이 효과적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발산적 영광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원하는 소원을 가질 때 그때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효과적 영광, 혹은 발산적 영광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반응적 영광이라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주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기를 원하나이다.” “이방 가운데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소서,” “여호와께 영광을 돌릴찌니라” 할 때 이 영광이 바로 효과적 영광, 혹은 반응적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개별적으로 하나씩 들어가서 첫째 이 본체적인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과 관계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체적 영광 혹은 본유적인 영광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하나는 외적인 탁월성과 또 하나는 내적인 완전성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하자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도저히 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는 인간 위에 모든 피조물과 인간 위에 놀랍도록 뛰어난 분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점에서 그런 것들이 설명이 되는데 우선 첫째는 무엇인가 하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분명히 유한한 존재이고 그리고 반듯이 끝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한정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한한 분이십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분이시며 처음도 없고 나중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인간은 알 수도 없고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가 언제 끝나는지 알 수도 없고 알 수만 없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에게는 처음과 끝 자체가 존재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한히 영원하신 처음과 끝이 없고 영원하신 그런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데 그런 영원한 하나님의 존재에 비추어서 볼 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그런 순간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외적 초월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불변성입니다. 이것을 예배용 종이라고 말할 때 말하는 이 순간에 이미 10초 전에 그 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가 둘째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간 속에서 이것은 계속해서 변해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은 그렇게 변하시는 분이 아니라 불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불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 자체는 무한한 존재입니다. 시간적으로 무한할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무한해서 영원하신 분이시고 장소적으로 무한해서 어디든지 다 계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있는 동안 집에 없지만 하나님은 여기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동시에 또한 온 우주를 다스리십니다. 그런 무한한 분이신 동시에 또한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무엇인가에 의존해있습니다. 왜 이런 종이 존재하게 되는가 하면 누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엇을 가지고 만들었는가. 금속을 캐다가 만들었습니다. 그 금속은 땅에서 나왔고 땅은 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농부가 가꾸었고 아름다운 꽃이 되었습니다. 씨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뿌렸습니다. 그 씨는 예전에 있던 꽃에서 채취했습니다. 모든 것들은 이처럼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존재의 근원을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존재의 근원을 계속 추적해가면 마지막에 한분에게서 모두 만나게 되는데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대어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을 추적해가면 마지막에 하나님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도자로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주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그들에게 오셔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 계시해준 가장 영광스러운 계시가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에게 있어서 충격적인 계시였을 것입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무엇에도 존재를 의존하지 않으시는 절대적으로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시다. 이런 특성들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피조물에게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외적인 초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내적인 탁월성입니다. 혹은 내적 완전성입니다. 그러면 내적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처럼 모든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이나 피조물에게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불변하시고 무한하시고 스스로 계시는 이런 성품도 가지고 계시지만 또한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주신 성품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에게도 사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랑이 있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시지만 인간도 좀 참습니다. 의로우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도 의에 대해서 판단할 줄 압니다.
최근에 나온 타임지에 보니까 최근에 동물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원숭이가 공정성에 대한 판단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원숭이에게 먹을 것을 세 개를 주고 자기에게 두개를 계속 주면 이것이 불공정하다. 정의롭지 못하다고 하는 판단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더 말할 나위 없이 그런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하면 인간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사람들이 와서 죄인이라고 하면 짜증이 났습니다. 내가 왜 죄인인가. 경범죄도 진 적이 없는데. 내가 왜 죄인인가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상당히 의로운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십자가를 통해서 그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그 의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고 나면 자신이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의에 비하면 자신의 의는 의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결하고 더러운 것이다.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은 도저히 하나님께 막 바로 올려드릴 수 없을 정도로 불결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자기는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그 사랑도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얼마나 하찮은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 효과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적인 초월성과 내적인 완전성 이 두개가 바로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이고 이 자체가 바로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하나님이 무한하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인간이 얼마나 티끌 같은 존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게 되고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사랑이 얼마나 더럽고 자기중심적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 사랑 앞에서 정말 훌륭하게 살던 사람도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죄인일 뿐이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본체적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 발로적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성경에서 “주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충만하도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치는도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비추사” 이런 표현으로 되어 있는 것인데 이런 것들은 모두 본체적 영광이 밖으로 흘러나온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이 크게 인간에게 경험될 때 두 가지 방식으로 경험되게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보편적으로 경험되고, 또 하나는 개별적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경험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이 창조세계 자체가 하나님의 신성에 영광에 충만한 것을 드러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은 자신 안에 이 본체적인 영광을 홀로 가두고 계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이것을 밖으로 흘러내서 표현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셨는데 그 표현의 방식이 천지창조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천지가 창조된 그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를 그 피조세계가 빛을 비추게 하시고 또 하나님이 창조해놓으신 세계를 계속해서 섭리하시고 통치하시고 가꾸어 가심으로서 그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통해서 매일 매일 당신의 살아계심을 드러낸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것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 때문에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모두 심판하시고 파멸되게 하셨는데 그 모두 심판받은 가운데도 아침에 눈을 뜨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뭘 통해서? 피조세계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이 싫어서 심판하셨는데도 여전히 꽃피고 새 울고 그 다음에 곡식들이 익어가고 땅은 황폐하였으나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그 백성을 향해 보여주시고 계신 그 은총을 자연을 비롯한 모든 피조세계와 심판을 받은 그 민족, 그 구성원 하나하나에 대한 당신의 자비를 통해서 주의 인자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보편적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발로적 영광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시는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정말 이해하기 쉽게 하나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냥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서 새사람이 되고 그리고 축복을 받았더라. 그러면 ‘아, 그거 참 재수가 좋네.’ 그냥 이렇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들어오고 은혜를 받고 나서 가만히 믿음의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교제를 하고 이렇게 보니까 뭐가 보이는가 하면 사람이 변하니까 저 사람의 인생도 변하고 속된 말로 팔자도 바뀌는구나. 그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들여다보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전원이 되어서 하늘의 자원을 공급해주시니까 그 사람이 새사람이 되고 변화가 되고 축복을 받는 이런 것들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아!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그렇다면 저 사람을 저렇게 변화시켜서 새사람을 만드셨다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구나.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발로적 영광을 죄로 인해서 어두워져서 보지 못하던 것들을 깨달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중적으로 우리에게 노력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피조세계 자체가 죄가 들어와서 창조의 원래의 영광에 찬란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치 아름다운 정원이 마법에 걸려서 회색으로 변하고 모두 황폐하게 되어진 것처럼 형체는 남았지만 그 찬란한 본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사물을 관찰해도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게 사물이 망가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보는 것만을 가지고 생각하면 안 되고 성경의 진리와 학문을 통해서 창조의 본래의 모습이 무엇이었는가를 추적해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마치 오염된 강물에 보면 등이 굽은 물고기도 있고 심지어도 지느러미가 둘 달린 고기도 있고 이렇게 기형고기가 태어나지만 그것을 보고 원래 고기가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원래 이것은 망가진 것이고 원래는 어떻게 되었을까를 기형고기를 통해서 원래의 고기의 모습을 추적해가듯이 그렇게 지식을 사용해서 창조세계의 신비를 벗겨가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말씀이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기초로 학문에 도움을 받아가면서 지적인 활동을 통해서 그것들을 파고들어갈 때 본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이제 우리가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피조세계가 죄 때문에 형벌을 받아서, 저주를 받아서 원래의 광채를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것을 보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기가 굉장히 힘들게 되었는데 피조물만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인간의 눈도 어두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소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시신경이 살아있는 소경이 있고 시신경이 죽어있는 소경이 있습니다. 시신경이 완전히 죽어버리면 개안수술도 소용이 없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습니다. 완전한 어두움입니다. 그러나 시신경이 살아있으면 이게 감각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눈을 감으면 우리가 소경처럼 됩니다. 그러나 소경하고는 다릅니다. 왜 눈을 감으면 눈을 감아서 아무 것도 안 보이기는 하지만 내가 지금 빛이 찬란한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지 어두운 방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눈앞에 누가 지나가고 있는지 느낌이 살아있습니다. 빛에 대한 느낌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이 죄로 인해서 어두워지기는 했지만 시신경이 살아있는 소경처럼 어느 정도 상당부분 사물을 인지할 수 있는 이것들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게 됨으로서 이런 껍질이 벗겨지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영적인 거듭남을 통해서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인식 능력을 두개를 주셨는데 신앙과 또 하나는 지성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눈이 뜨게 됨으로서 이 지성이 훨씬 더 온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하나님의 세계에 깃들여있는 발로적인 영광을 보편적인 방법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것보다도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항상 거룩한 분이시지만 그 하나님이 어디든지 계시는 무한하신 하나님이시지만 특정한 장소에 임재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임재하시는 때에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비추게 되는데 거기서 비추는 발로적인 영광의 빛은 아주 굉장히 찬란한 빛이어서 때로 사람들이 거기에 엎드려지게 되고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엄청난 발산적인 효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요점을 이야기하자면 구약성경에서나 신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참된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발산적인 영광이 특정한 장소에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부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 발산하는 영광 자체가 본체적인 영광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니까 발산하는 영광의 빛이 찬란하게 비추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탁월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팽창하고 많은 사람이 모이고 일을 열심히 하고 그런 것이 부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나타나는 발산적인 영광을 경험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부흥이고 그 부흥의 궁극적인 목적은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세계가 돌아가기를 원하는 그 갈망이라고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개별적인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하나님의발산적 영광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자면 이사야 6장에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 스랍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뵙고 찬란한 영광의 빛을 경험하면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경험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런 발산적인 영광을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데 이런 발산적인 영광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최고의 특권이고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이런 발산적인 영광이 나타날 때 가장 기뻐하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발산적인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 발산적인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또 하나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려하거나 돌아간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효과가 각각 다릅니다.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살아가려는 사람들, 혹은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발산적 영광은 커다란 공포와 두려움으로 나타납니다. 그 이유는 발산적 영광이 있는 그곳에서 모든 인간들은 모든 인간과 피조물들을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이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모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은 인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자신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이키려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도저히 자기 자신이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발산적 영광 속에서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무한하심 앞에서 그의 불변하심 앞에서 그의 위대하심 앞에서 자신들을 한없이 초라한 존재로 느끼게 하시기 때문에 그 발산적 영광을 경험한 사람들 중에 자기 자신이 창조의 목적으로 아직 돌아가지 않고 있거나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불신앙의 고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나타남이 커다란 두려움과 공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인데 그 심판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심지어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산아 내 위에 무너지라” 무엇 때문에? 그 산으로 하나님의 발산적인 영광을 대면하는 두려움을 피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 커다란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라고 외쳤을 때 수많은 사람이 두려워 떨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던 이유도 바로 이런 발산적 영광이 세례 요한의 선포 속에 나타났을 때에 그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이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리들은 더 많은 세금을 늑징했고 군병들은 포악을 행했고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조차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도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 막았고 그리고 형식만 있는 율법을 지키고 마음은 죄로 가득 찼기 때문에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은 자신을 그 발산적 영광 앞에서 어떻게 할 수 없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엄위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려고 하거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이 발산적 영광의 나타남은 경건한 두려움도 가져다주지만 왜 그 인간이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경건한 두려움도 가져다주지만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발산적 영광의 찬란한 나타남 앞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던 신자들은 하나님의 그 위대함, 무한하고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고 이 모든 창조의 세계와 특별히 거기에 거하는 그 인간들을 창조의 원래의 목적대로 돌이키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와 권능과 위엄을 발견하기 때문에 평소에 자신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고 창조의 목적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수많은 사람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창조의 원래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한 아직도 죄가 잔존하고 있는 이 세상의 사라진 영광을 위해서 아파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그런 의지를 발견하는 것이 엄청난 위로이며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만약에 생각을 해보십시오. 아주 나쁜 사업을 하면서 돈을 벌어먹고 있는 사람들, 관공서에 뇌물이나 갖다 주고 탈세나 하고 그리고 변태영업이나 하고 이렇게 먹고사는 사람들은 깨끗한 정권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과 타협하고 적당히 뇌물이 통하는 부정직한 정권이 들어오고 편법과 술수가 멀리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하든지 이 나라가 정직하고 깨끗한 나라, 진짜 이만 불 삼 만 불이 안 되고 오 천불 육천불이 되어서 구멍 뚫어진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녀도 한번 정말 의롭고 정직한 나라, 건강하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런 정부가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가고 자신을 포함해서 죄를 지으면 엄벌에 처하는 무서운 법칙주의가 그 법대로 시행된다고 할지라도 타협하지 않는 정직한 정권이 들어서고 양심적인 대통령이 그리고 양심적인 공무원들이 이 나라를 법대로 다스리는 그런 사회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흐느끼고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이 세상도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 앞에 섬기면서 그렇게 살던 사람들에게는 그 하나님의 발산적인 영광이 나타날 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아주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발산적 영광의 나타남이 구약에서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시내 산에 빽빽한 구름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찬란한 영광이 나타났을 때 백성들이 두려움에 벌벌 떨었습니다. 왜 떨었을까요? 그들이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 떨었고 그런데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모세보고 당신이 올라가시오. 우리는 죽을 것 같으니까 당신이 올라가시오. 그러면 자기들은 죽는데 왜 모세보고 올라가라고 하는지. 모세는 올라가면 안 죽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왜 모세는 거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의 나타남이 그렇게 기인한 경험을 통해서 찬란한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역대 하에서 솔로몬 성전이 지어지고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하였고 온 무리들은 박석 깐 그 땅에 엎드려서 우리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그런 기이한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이 찬란하게 나타났다고 할지라도 그것보다도 더 찬란한 발산적 영광의 극치가 신약에 있으니 그 사건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발산적 영광이 찬란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창조세계가 죄로 영광을 잃어버렸다고 그럴 때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이 육체는 그렇게 저주를 받은 이 세상의 피조물 속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에는 모든 사람이 너무나 그 발산적인 영광으로부터 비추는 그 찬란한 빛에 압도할 것이기 때문에 왜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시내 산에서의 그 발산적 영광 앞에서도 모든 백성들은 두려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광채를 감추지 아니하시면 도저히 인간들 곁에 가까이 다가가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이 스스로 인성을 입으셔서 발산적 영광의 신성을 인성으로 감추시고 그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는 다시 찬란하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사도 바울을 만났을 때 한번 그 발산적 영광을 경험하면서 눈이 머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오늘 우리에게도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풀이되는가 하면 영적으로, 예수님을 모르고 막 살았을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도처에서 보여주셔도 그 영광을 인정을 안 합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가장 잘 나타내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직접 몰라도 그리스도 예수를 보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감추어져있는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독생자를 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도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발산적 영광을 통해서 인간이 무릎을 꿇게 되는 이런 사건입니다. 이제 오늘의 설교의 가장 중요점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효과적 영광입니다. 이 효과적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발산적인 영광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효과적 영광 혹은 반응적 영광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본체적 영광과 그 다음에 발산적 영광은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의 임재를 특별히 보여주시는 그곳에서 발산적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나게 되기를 기도할 뿐이지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우리 가운데 이 세상에 안 계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영광은 인간이 보태고 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은 우리들이 보탤 수도 있고 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저기 부산쯤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서울에 있는 열린 교회로 왔습니다. 신앙생활을 한 것을 보니까 정말 너무나 잘합니다. 그리고 어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잘 깨닫고 또 예배를 드리는 태도도 훌륭하고 성도들도 잘 섬기고 사랑하고 너무 훌륭합니다. 그래서 하도 궁금해서 너 어디서 왔니? 부산에서 왔습니다. 제일 궁금한 게 어느 교회에서 왔니? 부산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왔습니다. 나는 그 부산에 있는 교회에 가본적도 없고 거기서 일하는 목회자나 성도들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야 그 교회 참 좋은 교회구나. 왜냐하면 그 교회의 본체는 부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보니까 너희 교회는 참 은혜로운 교회구나. 왜 거기서 오랫동안 신앙생활 한 네가 은혜로우니까. 그러니까 그 교회는 참 은혜로운 교회구나. 가보지도 않고 경험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여기에서 그 교회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구나. 왜 너에게 이렇게 정확하게 말씀해주셨으니 평소에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시는 분이시겠는가. 나아가서는 그 교회 성도들은 참 사랑이 많은가보구나. 왜 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섬기는 것을 보니 네가 가르쳐주지 않았으니 어디서 그것을 배웠겠니. 그러면서 교회의 본체는 부산에 있는데 이름은 여기에 있을 수 있어서 그 이름이 막 이렇게 한없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왔는데 이게 완전히 짐승입니다. 그러면 물어봅니다. 너는 어디서 왔니? 부산에 있는 아무런 교회에서 왔습니다. 그때 느낌을 받는 게 무엇인가하면 서울 열린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던 사람이 부산에 갑니다. 목사님 이제 부산에 이사 왔는데 어느 교회에 갈까요? 그 부산에 어느 교회에 가야지 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런 교회 거기는 가지 마라. 여기서 신앙생활 하는 짐승 같은 사람을 보니까 그 교회는 모두 짐승들만 모여서 사육을 받나보다. 그러니까 가지마라.
그 교회의 본체는 부산에 있고 그 교회의 악함을 경험해보지도 않았는데 여기서는 그 교회의 이름이 지금 업신여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는 별개의 문제이고 어째든 그 이름은 이처럼 영광스러워질 수도 있고 모욕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본체는 그럴 수 없는데 본체적 영광은 그럴 수 없는데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은 높이 오려질 수도 있고 짓밟힐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 모든 이 효과적 영광이 모두 연관된 궁극적인 종착역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아지고 낮아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두신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고 이 세상에 창조된 모든 인간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기도 하고 땅에 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하나님의 이름이 가장 높이 여김을 받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간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여김을 받고 그렇게 높이 여김을 받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게 되었을 때 끝까지 강퍅한 마음이 되어서 그 영광을 대항하는 사람들이 있게 되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특별한 심판을 받기로 하나님 앞에 준비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바는 이런 것이 아닙니까? 이미 본체적인 영광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고 발산적인 영광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고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에 남겨진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 효과적인 영광, 혹은 반응적인 영광을 이 땅에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교회에 와서 너무나 긴 세월동안 성화에 대한 집요한 설교를 들었고 그리고 그 설교 속에서 여러분들은 성장해왔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이 왜 그렇게 성화되어져야 되는지를 바로 이것을 연관시켜서 생각해보십시오. 성화 바로 그 자체는 우리의 존재와 삶이 거룩해져간다는 것인데 그 거룩의 지향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해놓으셨을 때 내게 기대하셨던 바로 그 존재로 돌아가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고 싶으셨는데 그 돌아가게 하는데 무엇인가 기여하면서 사는 삶이 성화의 구성요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그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강력한 경향성과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강력한 마음의 의지와 그렇게 살고 싶은 간절한 소원과 그렇게 살아가지 않은 모든 인생과 피조세계가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것을 아는 이 지성적인 모든 변화가 없이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짐승이 이 세상에 살면서 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고속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그가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고결한 죽으심과 희생의 피가 바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선하다고 생각하셨던 그 원래의 행복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구속의 방법이었다는 사실을 죄인들에게 가르쳐주지 않고 어떻게 죄인들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이해하고 그리로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실명한 소경이 자기를 인도하던 개도 놓치고 자기가 마지막으로 의지하던 지팡이조차 잃어버린 채 위험한 산길을 방황하는 것처럼 그렇게 위험한 것이고 그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스스로 떠났던 원래의 집으로 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완전히 무력한 성태에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세상의 죄를 보면서 너무 분노하면 안 됩니다. 그 죄를 보면서 분노하지만 그 죄를 행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죄인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연민을 가져야지 됩니다.
제가 그래서 말씀드리잖아요. 이 세상이 지금 미친 듯이 쾌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이게 질병입니다.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인간들입니다.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이 세상의 유일한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창조의 목적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창조의 목적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토록 이 모든 세상과 사람들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위해서 그렇게 몸부림치고 가슴아파하고 흐느끼는 그 모든 이유는 그렇게 나뿐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과 피조물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때에만 이 땅에 두신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어떻게 주의 이름을 높이고 어떻게 주의 이름을 송축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노래한다고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그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 앞에서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갈망하면서 살고 그 일을 위해서 추호라도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인생을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비참한 인간이고 그리고 정말 풀 틈 사이에서 피어났다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죽어가는 버러지만도 못한 인생입니다. 빈대만도 못한 인생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일까요? 오늘도 이 땅에는 당신의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창조하시고 죄로 인해 좌절된 창조의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이 땅에 내려오셔서 당신의 몸을 죽이심으로 끊어진 창조의 위대한 계획을 다시 입고 그 목적으로 돌아가 살게 하시기 위해서 이 시간에도 진리를 주시고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모르는 이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가득 차 있습니까?
그들은 이런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고 할지라도 이미 그 목적을 알고 계획을 알고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피 흘려 죽이시면서까지 다시 복원하시고자 했던 죄가 끊어놓을 수 없었던 창조의 목적으로의 돌아감에 대한 비밀을 안 사람들이 만약에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한다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네가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을 알고 너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기를 원해도 돌아갈 수 없는 너의 무능한 처지를 위해서 내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너를 구속했는데 네가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받고도 죽는 그 순간까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나에게 항거하였다고 주께서 물어보실 때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은 뭐라고 답하실까요? 정말 그렇게 일생동안 산 사람들이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그 구원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이 그 엄위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드러남 앞에 아마 한조각의 망명정부의 지폐와 같이 힘이 없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분명히 이 효과적인 영광을 향한 갈망은 발산적 영광의 경험을 통해서 이게 불일 듯 일어나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 발산적 영광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인간의 마음속에 효과적인 영광을 향한 갈망으로 바뀌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말하면 어떤 것을 사용하셔서 발산적 영광에 대한 경험이 효과적 영광을 향한 갈망으로 변화되게 하시는가.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지성을 사용하셔서 이렇게 발산적 영광의 경험을 통해 효과적 영광을 향한 갈망으로 바꾸어놓으신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가려고 무릎을 꿇고 진실하게 노력을 하면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키고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없었던 사람인 우리들에게 놀라운 능력을 제공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계획 없이 여기 따라온 사람도 오늘 기도에 다 가셔야지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저녁에 뭘 설교하려고 하는가 하면 말씀의 은혜를 받고 놀랍게 변화되어서 자기 자신의 지성이 새로워졌는데 왜 계속해서 변화되지 않을까? 이 문제를 오늘 저녁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녁때 하려고 하고 그런데 여기서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갈 때 그때에 이것이 성령을 의지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나가면 반드시 여러분 속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너무 답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교회들 중에서 이렇게 풍부하게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 교회가 별로 없습니다. 지금도 심지어 교구에서 한사람을 놓고도 성경공부를 맞춤법으로 가르쳐줍니다. 세상에 그런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교인이 1500명이 되는데 목사 한사람이, 전도사 한사람이 한명을 놓고 시간을 한 시간씩 내어서 둘이 앉아서 성경을 가르쳐주는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못합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을 돌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꾸 못하게 합니다. 한명 놓고 가르치는 것은 하지 말라. 왜냐하면 더 많이 쓰러지는 영혼들을 어떻게 하는가. 그렇게 일주일 내내 해봐야 20명밖에 못하는데 그러면 다른 식구들을 어떻게 돌보는가. 그런데도 너무 답답하니까 교역자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일년 열두 달이 지나가도 예배에 참석하는 것 이상 아무 것도 배우려고 하지 않고 그리고 그 예배시간에도 제대로 듣지 않고 깨닫지도 못한 채 멍하니 돌아갑니다. 그리고 예배시간이 몇 시에 끝나는가만 중요한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럼 누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해야지 된다고 여러분에게 강요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일년 열두 달 가면서 한번도 교회에 안 나온다고 누가 여러분들을 징벌하겠습니까? 마음이 편한대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마지막이 어떠할 것이라고 하는지는 한번쯤은 생각해보면서 결정하십시오.
진리의 말씀을 배워야지 됩니다. 왜 배우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운전면허 따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만큼이나 일년에 한번씩만 공부해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하나님 앞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간 삶을 살 것입니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피를 토하고 설교를 해도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무슨 발전이 있습니까? 예배시간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회개했다. 어떻다는 것입니까? 어차피 삼주후면 다 잊어버리는데 그렇게 해서 다시 돌아가고 또 다른 충격을 기다리고 이게 바로 짐승과 같은 삶입니다. 시인이 119편에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주께 범죄 하지 아니하려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뭔가 품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지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증스럽게 연약함이라고 하는데 연약함은 그런 게 아닙니다. 연약함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부단히 몸부림쳤는데 인간이라고 하는 이 한계성 속에 내제하는 하나님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성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 놀라운 능력이 주어지고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교역자들이 목 놓아서 당신 시험에 들었으니까 시험에 드는 길 배워라. 당신 사랑이 없어서 고통 하니까 고린도 전서 13장을 배우자. 수없이 불러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뭘 바라겠습니까? 그리고 무슨 행복하기를 이 세상에서 바라고 있는지, 없습니다. 인간이 절대적으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 티끌만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가 행복을 누린다면 하나님 없이 누리는 행복이기 때문에 그렇게 누리는 행복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뒤따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가면 성령이 역사하셔서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설령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만 설령 변화가 덜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말씀은 계속해서 배워야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나중에 이 발산적 영광이 찬란하게 경험될 때 그 지식 속에 찬란한 빛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의 주된 재료가 되고 이 성경의 사상에 의해서 통제되고 해명되면서 학문을 공부해나가게 됩니다. 학문을 공부해서 그 학문이 이 성경진리의 통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신비함에 대해서 많은 인식을 갖게 해주었을 때, 그런 지성들을 많이 소유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에게 발산적 영광이 비추게 되면 찬란한 기독교 사상가가 되어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성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뭘 하겠는가. 맞습니다. 죄인들이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지성에 상당부분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머리를 사용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단코 성화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자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성적으로 사용해서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으로 이 창조의 세계에 하나님의 신비한 하나님의 계획과 이런 이해의 폭들을 넓혀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를 보면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 비슷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어거스틴처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파리에서 칼빈을 만난 것처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를 보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이 장엄한 기독교 사상의 틀을 놓고 그리고 이 난쟁이같이 왜소한 기독교의 이 엉터리 기독교가 아니라 진짜 성경에서 말하는 이 성경적인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던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을 따라서 가리키면서 이제 사역을 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었고 동시에 이 세상의 학문에 대한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문적인 지성이 성경에 의해서 통제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많은 지성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발산적 영광의 빛이 비추니까 안 비추었으면 그 지식이나 팔아서 먹고 살다가 대학선생으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발산적 영광의 빛이 찬란하게 비추니까 장엄한 기독교 진리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최초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거스틴, 루터가 칼빈이 그리고 에드워즈가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하나님을 만나도 성경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또 그 성경과 함께 성경의 통제를 받는 가운데 이 세상의 지식에 대해서 학문에 이치에 대해서 얼마나 잘 깨닫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에게 울리는 그 진리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요만한 병에다가 훅 하고 불면 삐! 하는 소리가 납니다. 이만한 병에다가 불면 부응! 하는 소리가 납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울림이 통의 크기에 따라서 다른 것처럼 이 지성의 분량에 따라서 발산적 영광이 경험될 때 찬란한 사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깨달은 한두 가지 진리에 목숨을 거는 것은 총체적인 거룩한 삶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한편으로는 지성적인 공부를 해나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고 3이고 여러분은 고 2 겨울방학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계속 공부해나가야지 됩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 안 됩니다. 발산적 영광이 비추지 않으면 모두 지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무릎을 꿇으면서 내가 많은 것을 배우지만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주님이 나에게 영광을 비추시고 내 어두운 지성과 영혼에 찬란한 주의 빛을 비추어서 창조의 목적이 무엇이고, 그리로 돌아가는 효과적인 길이 무엇이고, 또 그 길을 알고 살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어야지 됩니다. 지성을 사용하셔서 발산적 영광의 경험을 효과적 영광에 대한 갈망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마음을 사용하심으로서 하나님이 발산적 영광의 경험을 효과적 영광을 위한 갈망으로 바꾸어놓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속에 역사하셔서 하나님이 당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인간에게 주면 그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열을 올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뭐라고 그랬습니까? 나는 제사를 원치 않는다. 하나님이 이 세상 신이다. 나는 너희들이 바치는 그 짐승의 피에 질렸고 고기에 신물이 났다. 나는 그런 것 필요 없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들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뜨거운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대통령이 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 몇 십 억으로 불어나면 하나님이 그것을 너무 좋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이 많은 사람들의 소원처럼 한 200년쯤 살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인간뿐만 아니라 들에 핀 풀, 그리고 공기 중에 깃들어 있는 미생물 하나라도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 원래의 목적에 맞는 것을 보고자 하시는 그 소원이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고 이런 사모함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외아들도 아낌없이 주셔서 인간의 구속을 통해서 이 창조의 모든 세계가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오게 되기를 하나님이 열망하셨습니다. 나는 이것을 피를 토하는 열망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피를 토하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이 그렇게 창조의 본래에 목적으로 돌아감으로서 인간이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이기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신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찬란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든 도덕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부류나 일개 집단에만 이익을 가져다주는 그런 종류의 선이 아니라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의 행복을 위한 도덕적 기준으로서 선이고 그 선으로 돌아감으로서만 이 세상은 참으로 세상이 될 수 있고 참으로 세상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그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가장 기뻐할 수 있고 그 하나님을 기뻐하는 그곳에서 하나님은 가장 영광을 받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은 바로 이렇게 모든 피조물과 인간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서의 선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갈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은 이 갈망을 위해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심각한 시금석 하나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말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교회에서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변화를 경험하기도 했고 생애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고 오늘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신앙의 본분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죄와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죄와 타협하지 않고 불법하고 이기적인 이 세상의 조류와 결별하고 오로지 메마른 광야를 굽이쳐 흐르는 한줄기 강물처럼, 어두운 밤하늘을 긋고 지나가는 한줄기 섬광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게 하는 그 모든 거룩한 삶의 원동력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만약에 한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랑은 반드시 이런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은, 선의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 않은 이 세상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나타나야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직도 이 세상에 있는 몇 푼 안 되는 재물 때문에, 남들이 자랑하는 미모나 건강, 안일한 삶의 환경 때문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 세상에 악하고 고통 하는 상태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고통해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이미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에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신 완전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하신 소원이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멸시와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거스르기 위해서 지은 모든 죄를 당신의 말할 수 없이 사랑하는 그 아들의 두 어깨에 짊어지게 하시고 멸시와 욕을 당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심판을 받게 하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우리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는 우리의 죄는 미웠지만 그 목적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당신의 선을 떠난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자기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도 돌아가지 못한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성령님이 역사하게 하셨고 그래서 믿어지지 않는 복음, 남들이 받을 수 없는 은혜를 우리가 받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 헛된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도 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 모두 눈물을 흘려야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얼마나 비참한 인생들일까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창조에 깃든 하나님의 신성에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면서 살아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인생들이 육신의 정욕에 눈이 어둡고 잠시 있으면 쓰러질 심판받을 육신을 위해 종노릇하느라고 지엄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벗어나서 부패한 욕심에 굴복하며 살아가는,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는 이 세상 불쌍한 인간들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지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도 심판에 가까운 이 때에 말할 수 없는 열망으로 인생을 태우며 살아가는 수많은 이 세상의 인간들을 위해서 당신의 이 마음을 전하기를 원하시고 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와 살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본체적 영광과 발산적 영광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면서 그 영광에는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가리키는 본체적 영광이고, 또 하나는 거기로부터 비추어오는 발산하는 영광이고,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그 발산하는 영광을 경험한 사람들이 갈망하는바 온 땅이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그 효과적인 영광이 바로 그 세 가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그 본체적인 영광과 그리고 발산하는 영광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본래에 영광의 하나님이시지만 그 영광의 하나님이 자신 안에 있는 이 영광을 홀로 간직하신 것이 아니라 그 영광이 밖으로 발산하고 흘러넘치게 함으로서 모든 피조물들 안에 창조의 영광의 신성의 충만한 것이 가득 나타나게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 자신의 그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통해서 모든 피조물 특히 그것을 잘 인식할 수 있는 인간들이 그 발산하는 영광에 빛을 인식하고 그때마다 창조의 목적을 되새기면서 원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계획, 곧 그 선한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발산하는 영광의 목적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발산하는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본체의 영광을 당신 자신의 임재를 통해서나 혹은 당신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통해서 발산하는 것인데 그 발산하는 빛을 사람들이 경험함으로서 비로소 그 사람은 효과적인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은 간절한 열망, 여러분들이 잘 쓰는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 소원은 바로 창조의 원래에 목적으로 나도 돌아가고 내 이웃도 돌아가고 넓게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한 갈망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범죄 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창조한 세상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가 가득해서 당신의 임재를 통해서 하나님의 발산하는 영광이 나타나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당신의 창조주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그 충만하게 가득 찬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했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나니까 인간이 모든 피조물과 맺고 있던 그 피조세계의 아름다운 연결, 관계도 모두 끊어진 것입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는 따로 떨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과학의 측면에서 봐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과 사물,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서로 서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 어느 하나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따로 따로 떨어진 것이 없이 온전히 연결된 상태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그 연결하는 매인 스위치가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될 때 인간을 매인 스위치로 해서 모든 피조물들이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천체에 떠있는 온 우주까지 함께 모두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된 상태에서 매인 스위치인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신성의 충만한 영광을 자신의 온 피조세계를 통해서 발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발산하는 피조세계에 그 빛을 보시면서 하나님 자신도 보시기에 아주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선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나니까 자연스럽게 그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끊어짐을 가져왔고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자연적 피조세계와의 관계의 끊어짐을 가져왔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과의 끊어짐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토막토막 끊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모든 피조물이 원래에 하나님이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운 상태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비유를 쉽게 들자면 인간이 매인 스위치가 이 피조세계에 모든 창조물들이 그 매인 스위치에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전구였다면 하나님은 매인 스위치에 공급되는 전기였습니다. 그것이 끊어져버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창조세계 모두가 발산하는 그 영광의 찬란함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고 상당히 많은 부분이 상실되어버려서 아주 적은 흔적만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피조세계,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피조세계도 하나님의 그 영광의 흔적을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원래에 창조시에 비쳤던 그 발산하는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상당 부분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이렇게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피조물들 속에 하나님의 영광만을 앗아간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눈을 어둡게 함으로서 이 피조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신성의 영광을 볼 수 없는 소경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도 그 영광의 빛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또 인간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시력을 잃어버려서 거의 소경과 같은 상태가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발산하는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는 그가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발산하는 영광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알게 될 때만 비로소 창조의 원래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강력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모순, 다시 말하면 창조하신 인간들이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시지만 그러나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잃어버린 이 피조세계와 그 영광의 빛조차도 볼 수 없게 된 눈먼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개선하지 아니하고는 인간은 원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만드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차마 그렇게 살아가는 허무한 인간들을 볼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가 살아온 역사를 가만히 보면 유적지 같은 곳을 보면 어느 나라든지 그 유적이라고 하는 자신들의 역사를 자랑하는 것들은 대게 다 비슷비슷합니다. 어떤 곳들이 있을까요? 크고 높은 엄청난 건축물, 그 다음에 발달한 문명의 흔적, 우리 조상이 이렇게 지혜로웠다. 그 다음에 연장 같은 것들을 훌륭하게 만든 것들을 보관하고 조상들의 기술의 발달이 이 정도에 이르렀다고 자랑합니다. 또 그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역사 안에 존재했던 아주 발달한 인간을 위한 제도들, 정치, 법률 이런 것들에 의한 제도들, 교육 이런 것들이 각 나라가 자신의 역사에 대해서 자랑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낱낱이 다 비판할 시간은 없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그래 수천 년 전에 자기네 할아버지들이 수세식 변소를 쓰고 살아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2000년 3000년 4000년 전에 얼굴도 알지 못하는 조상이 피라미드를 만들고 바벨탑 같은 엄청난 건축물들을 만들어서 그렇게 살아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그 얼굴도 알지 못하는 고대의 조상들이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돌맹이를 깨트려 칼을 만들고 도끼를 만들고 쇠를 녹여서 흉기를 만들고 무기를 만들고 죄인들을 절제시키기 위해서 많은 법을 만들고 사회를 조직적으로 이끌어갔는데 그게 어쨌다는 것입니까?
올 초에 이스탄불에 갔을 때 그 오스만 터키 제국에 영광을 보여주겠노라고 해서 왕궁에 가서 전시실에 저장된 많은 유물들을 보면서 새로운 인상을 가졌습니다. 그 중에 보면 거짓말 안 보태서 다이아몬드가 거의 계란만한 것도 있었습니다. 이중 삼중으로 보완상태가 되어 있고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라나 그러면서 왕관도 각종 보석으로 만든 것이 다 이고 임금이 깔고 앉던 금으로 만든 의자까지 만들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수천, 수십만의 병사들이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고 그리고 왕위가 바뀔 때마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이어졌습니다. 나는 그런 보완상태를 해놓지 않아도 그 중에는 가지고 가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깡통에다가 구슬 박은 것 같은 그것을 갖다가 쓰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미쳤다고 그럴 것입니다. 춥고 치질도 있는데 왜 그 차가운 금 의자에 앉는지, 차라리 누더기를 깔아도 나무로 만든 의자에 앉는 게 낫지 그 추운 겨울에 그 차가운 노란 금으로 만든 의자에 앉았으니 그 왕의 치질이 얼마나 도졌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세상에 있는 많은 피조물들은 그것을 목적으로 하고 벌 떼들처럼 덤벼들어서 그것을 더 많이 소유하고 누리기 위해서 미친 듯이 죽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모두 한곳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허무한데 굴복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죽음과 함께 아무 의미가 없는 그런 목적을 위해서 미친 듯이 살아가다가 불에 날라드는 나방처럼 그렇게 불에 타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정말 인간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가. 그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모든 세계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저는 동일한 것을 느낍니다. 조상들을 엄청나게 자랑합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그래 우리 조상은 움막에 살고 네 조상은 수세식변소를 쓰면서 살았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달라진 게 무엇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관광객이 와서 계속 돈 내고 가니까 그것을 가지고 후손들이 먹고 사니까. 그렇게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모르면 인간들이 그 허무한 일에 굴복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날 살아가는 이 세상의 그 비참함은 죄도 아니고 타락도 아닙니다. 더 비참한 것은 너무나 많은 인간들이 진지하게 살아갑니다. 너무 진지하게 살아가는데 허무한 것을 위해서 진지하게 살아갑니다. 미친 듯이 돈을 법니다. 그런데 왜 버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공부합니다. 왜 학문을 쌓는지도 모릅니다. 미친 듯이 건강식품을 먹고 건강하려고 오래 살려고 애를 쓰는데 오래 살면 왜 오래 사는지 목표도 없습니다. 그렇게 살 빼는 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 몸을 예쁘게 가꾸는데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한 목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 가치도 없는 허무한 것들을 위해서 인간들은 미친 듯이 몰두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멀어지게 됩니다. 창조의 목적으로 그렇게 멀어진 것이 바로 악입니다.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면 바로 그것이 선입니다. 불우이웃 돕기가 선이 아니라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멀어지는 것 이것이 선과 악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든 창조의 목적으로 벗어나는 이 뒤틀린 인간 존재의 모든 비극은 결국 뭐가 시키는가 하면 궁극적으로는 죄가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자체는 정체가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피조세계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목적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것대로 안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하나님이 온 우주의 중심일 때만 그 중심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가장 기뻐할 때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통해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그곳에서 우리 인간이 가장 행복해질 수 있고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이 창조의 의도를 전면적으로 거절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가치는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천상의 자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상의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하면 사람을 죽여서라도 온 우주를 자기중심으로 만들어놓고 싶어 합니다. 그게 바로 악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악의 궁극적인 뿌리가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죄입니다. 그런 죄를 완전히 종식시키지 않으면 인간은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통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데 그렇게 돌아가게 하시는 방법이 발산하는 영광을 깊이 인식함으로서 인간을 그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조금 아까 설명 드린 것을 염두에 두시면 이제 지금부터 전개되는 설교를 아주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잠시 전에 말씀드리기를 하나님의 발산하는 영광을 인식함으로서만 인간이 창조의 원래의 계획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발산하는 영광의 빛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통해서 드러나고 또 그 피조세계에서 발산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인식할 수 있도록 죄로 말미암아 멀었던 눈을 뜨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는 인간이 발산하는 영광을 인식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인간을 그 발산하는 영광을 경험함으로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두 방법으로 고치시면 됩니다. 첫째는 피조세계를 다시 찬란한 창조의 발산하는 영광으로 회복되게 하고 두 번째는 그것을 볼 수 있도록 인간의 소경된 상태를 고치셔서 선한 눈을 갖게 해주시면 그러면 모든 인간들이 발산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고 그 영광을 인식하게 되면, 경험하게 되면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이 두 가지 방법으로 인간이 발산하는 영광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고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우선 첫째로 하나님이 이 피조세계를 고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이 피조세계가 완전히 고쳐지지 않습니다. 피조세계가 창조할 때 원래의 충만한 영광을 온전히 발산하는 때는 언제인가 하면 세상 끝 날입니다. 그 날이 언제인가 하면 우리들이 모두 영화롭게 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 온 피조세계가 다시 태어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이 모든 피조세계가 원래의 창조의 영광만한 영광을 회복하지 못하도록 유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런 상태 속에서 피조세계가 가지고 있는 안타까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에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
그래서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그 날에는 우리만 영화롭게 되어서 찬란한 육체를 입은 부활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시는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창조시에 원래 가지고 있었던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다시 찬란하게 비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스위치를 올리셔서 이 창조세계가 눈부실 정도의 찬란한 빛을 갖게끔 만드는데 그 정도가 어떤 정도인가 하면 인간이 부활의 몸을 다시 입었을 때에 나타나게 될 그 영광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그 찬란한 영광을 보여주신 것처럼 그런 찬란한 빛으로 인간이 다시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데 그런 영광으로 온 피조세계가 발산하는 영광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럼 발산하는 영광을 봐야지만 비로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고 해놓고 피조세계를 통해서 발산하는 영광의 빛이 온전히 회복되는 것이 세상 끝 날이라면 세상 끝날까지는 피조세계를 통해 발산하는 영광을 볼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 중 누구도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런 질문이 제기 됩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답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피조세계가 찬란한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회복하게 되는 것은 세상 끝 날로 유보하셨는데 그 피조세계 가운데 일부를 맛보기로 그 찬란한 영광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그 피조물의 일부가 무엇인가 하면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 방법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접붙이게 함으로서 접붙인 신자들이 다시 접붙여지고 접붙여지면서 모두가 연결이 되는데 그 연결된 아름다운 모습은 맨 처음 피조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을 때에 연결되어 있던 그 연결과 똑같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넓게는 천사들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다 죽은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태어나게 될 믿음의 우리의 후손들까지 연결된 것이고 좁게는 나와 우리 가정, 그리고 교회 이렇게 단위별로 연결이 되어서 하나님이 창조시에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운 연결, 그것들을 회복되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특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나누어갖고 창조된 인간들로부터 원래의 인간의 찬란한 존재로부터 비추어오는 그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품어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이런 의문이 또 생기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교회에 와 예수님의 사람들을 볼 때 눈이 부셔서 볼 수 없을 정도여야지 되는데 그런데 눈이 부셔서 눈을 찡그리게 되는 이유는 무슨 뜻입니까? 이제 여기에서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오게 됩니다. 원래의 죄가 들어오기 전에 창조 그때에 이루어진 연결, 그 연결 즉 커뮤니케이션 속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발산하시는 영광의 그 찬란함은 죄가 없는 상태에서 완전히 밖에도 죄가 없고 안에도 죄가 없는 완전히 죄가 없는 순결한 상태에서 마음껏 발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찬란한 영광을 회복시키시는 것은 세상 끝 날에 하기로 하시고 맛보기로 하나님의 교회가 창조의 발산하는 영광을 회복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해서 우리를 모두 연결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죄의 잔재를 가지고 있는 연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발산하는 영광의 회복으로 복구시키셨는가 물을 때 우리 뭐라고 대답해야지 되는가 하면 ‘얼레딧 밧 낫 ,엣’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됩니다. 이미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또한 아직은 아니다. 왜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는 하나님이 그런 창조의 영광을 복구시키는 일을 하셨는데 그래서 맛보기로 먼저 보여주셨는데 창조세계 전체가 회복되는 일은 영화롭게 되는 그 끝 날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까 말씀드린 대로 다시 돌아가면 그럼 왜 교회가 그렇게 찬란하고 발산하는 영광을 잘 못 나타내는가. 그것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교회를 통해서 발산하는 영광을 나타내신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것이 왜 발산하는 영광으로 안 보이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눈이 아직 뜨여져 있지 않기 때문에 영광이 비추고 있는 데도 못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그리고 영광의 빛이 무엇인지 그리고 교회가 진정으로 비추어야 할 참된 빛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선입견에 선글라스를 쓰고 교회를 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모여서 진정으로 깨트려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래서 거듭나고 회심하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에 대해서 뉘우치고 돌아가기를 결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런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이번 물난리 날 때 얼마나 내놓았나. 많이 내놓으면 이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영광의 빛처럼 비추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는 바지까지 다 벗어서 내놓았다고 그러더라. 그러면 그게 신문에 대서특필이 되면서 그 교회가 뭔가 빛을 비추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떤 차이입니까? 그들이 진정한 영광을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서 그런 영광이 나타나도 사람들이 그게 정말 창조주 하나님을 보여주는 발산하는 빛이라고 하는 것들에 의해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회에서 보는 눈이 정말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교회는 관심의 대상이 안 됩니다. 이상한 신앙을 가지고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는 매스컴에 수없이 오르내립니다. 관심 자체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또 하나는 실제적인 문제인데 교회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죄의 용서를 받고 창조의 원래의 원칙에 따라서 새로운 창조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접붙여져서 이 연결을 회복하고 그 연결을 통해서 하나님이 끊임없이 하늘의 자원을 공급해서 은혜를 주신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지만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죄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이 남아 있는 죄들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의 연합은 결코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원리적으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졌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에 자원들이 공급되기 때문에 완전하지만 그리고 누구도 그 결합으로부터 이탈되거나 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예수의 생명을 지닌 그 상태에서 그 생명을 다시 잃어버릴 수 없다는 점에서 완전하지만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자신들 속에 죄성을 갖고 부패성들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인간이 연합을 이룬 이 교회의 모습은 전멸하는 등과 같습니다. 그래서 찬란하게 빛났다가 그 다음에 또 그 빛을 잃었던 상태에 따라서 찬란하게 발산하는 영광을 나타냈다가 불이 꺼졌다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방배동에 있을 때 감격 속에서 지하실에 올라와서 지상으로 이제 200명이 이사를 했습니다. 다 올라왔는데 예배 시간에 설교를 하려고 하는데 천장에서 이런 등이 비추는데 천장이 그때는 사각박스로 되어 있는데 거기서 빛이 비추는데 교회가 보통 교회가 아닌 게 빛이 분명히 똑같은 등을 달았는데 비추는 빛이 어떤 빛은 푸르스름하고 어떤 것은 불그스름하고 어떤 것은 노르스름하게 비춥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가 하면 아, 이게 특수전구구나. 옛날에 있던 교회가 엄청나게 좋은 것을 많이 해났습니다. 그래서 로비에 들어가니까 산데리아가 있는데 나중에 건축자제상에 가서 보니까 이게 미제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가 한 350만 원 이상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세 개나 두고 갔습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쓰니까 저것도 특수전구를 썼구나. 그래서 내가 아는 목사님께 자랑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 빛이 비추는데 이런 전구가 아니라 켜서 보면 이쪽 박스는 불그스름하고, 저쪽 박스는 노르스름하고, 저쪽 박스는 푸르스름하고 그런 것이라고 하니까 이 목사님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런 것도 있어. 역시 열린 교회구나.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전구가 수명이 다해서 색이 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똑같은 빛을 비추다가 수명이 다해가면서 푸르스름하게 변하고 불그스름하게 변하다가 나중에 툭 하고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게 특수효과인지 알고 감탄을 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결국 이것저것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싹 갈고 나니까 똑같은 빛이 환하게 비쳤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져서 찬란한 창조의 발산하는 영광을 비추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사람 한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고 지식의 참된 빛을 많이 받아서 정말 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신자 되기 원합니다 참 마음으로
그리고 간절히 진실한 신자가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분투하면서 순종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하나의 등불이 찬란한 빛을 내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작은데 그 작은 교회에서 눈부실 정도로 찬란한 빛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빛을 보면서 인간의 원래 돌아갈 참다운 자리가 무엇인지를 그 교회에서 비추는 그 발산하는 영광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게 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교회도 없었지만 -모든 창조세계에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회복을 시키신 것입니다. 교회에 찬란한 빛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크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찬란한 빛이 비춥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그 빛이 모인 사람의 수가 더 많으면 많을수록 어떻게 됩니까? 그 빛은 찬란하게 됩니다. 그래서 등불 하나가 찬란하게 비추면 어두운 밤바다에 등대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 등이 워낙 많아서 환하게 비추면 그 밑에서 축구도 할 수 있고 테니스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찬란한 빛을 보면서 사람들이 창조의 원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삶,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자기의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 모든 가치관의 체계가 잘못된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실은 이것이라고 보여주면 마치 찬란한 불빛이 비추는 그 밑에다가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로 비추는 발산하는 영광의 빛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의 참된 가치는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해설을 넣어주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이 성화에 힘쓰고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이것은 결코 이것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만 진실한 신자가 되면 안 됩니다. 여러분도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지 되고 나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너도 돌아가야지 되고, 너도 돌아가야지 되고 그리고 아직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까지 다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야지 됩니다. 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완전하게 고쳐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 고쳐집니다. 끊임없이 정결하게 살고 끊임없이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내가 진실한 신자가 되려고 많이 노력하면 옆에 있는 사람이 시험에 들어서 죄 가운데 빠집니다. 또 옆에 있는 사람하고 나하고 회복되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면 뒤에 있는 사람이 이제 신앙에서 미끄러집니다. 그러니까 그런 연약함들이 세상 끝 날까지 교회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들이 남아 있는 것은 얼핏 보면 절망적인 것처럼 느껴지고 내가 불이 들어오면 네가 꺼지고 너하고 나하고 들어오면 다른 사람이 꺼지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한번 우리를 불붙여놓으시고 스스로 타오르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피조세계에 전체에 발산하는 영광을 회복시키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의 보증으로서 교회의 연결을 회복시키신 다음에 하나님이 전기를 계속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오랫동안 죄 가운데서 삽니다. 교회가 부도덕해집니다. 타락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 아주 방종합니다. 그리고 예배도 아주 형식적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도 아주 형식적입니다. 바리새인같이 생명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교회에 와서 경건하게 예배를 드릴 때 하고 이 세상에서 피 튀기면서 살아갈 때하고 다릅니다. 교회에서 신자 같은데 밖에 나가서는 가장 야비한 이 세상 사람으로 돌변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에 와서는 주님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고 고백을 하고 그러나 세상에 나아가서는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은 모두 없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때에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이 모든 교회의 연합에 불이 꺼지기 시작합니다. 거의 사위어서 그래서 사람들이 그 빛을 보면서도 별로 차이를 못 느낍니다. 그럴 정도로 그 빛이 거의 사라진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하나님이 강력한 부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통해서든지 사경회를 통해서든지, 예배를 통해서든지 무엇을 통해서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죄인들이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심하게 되고 하나님의 진리의 그 놀라운 뜻들을 깨닫게 되면서 그들이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진 눈의 비늘이 벗겨지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찬란한 발산하는 임재의 그 영광을 이 교회 속에서 경험하게 될 때 그때에 사람들이 다시 자신의 그 죄를 뿌리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소원에 불타게 되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시 꺼져가던 불이 다시 환하게 비추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은혜를 받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목적은 괴로운 것을 면하게 해주려고 진정제로 여러분들에게 놓아주시는 은혜가 아닙니다. 그 은혜를 통해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말씀으로 돌아가고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연합을 통해서 피조세계 속에 찬란한 영광의 빛을 교회가 부분적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그 찬란한 영광, 피조세계에 깃든 그 발산하는 영광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발산하시는 영광의 빛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피조세계를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럼 두 번째 마지막 남아 있는 게 무엇입니까? 그것을 보는 인간의 눈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의 버금가는 일을 인간 안에 행하시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거듭남입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이탈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자적인 구속을 통해서 원래의 목적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회복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발산하는 영광을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이 모든 자기 밖에 있는 사물들을 판단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인식 능력을 주십니다. 그 두 가지 인식 능력은 첫째는 신앙이고, 두 번째는 이성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이성이 처음에는 아주 사이좋게 이렇게 어깨동무를 하고 그리고 함께 공존하면서 살아갑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 없는 상태에 있었을 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아는 것이 우리보다는 훨씬 뛰어났습니다. 지식도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보다는 많았고 훨씬 더 뛰어났고 완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아담과 하와가 아직 죄가 들어온 상태라고 해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안다면 그가 사람일 수가 없고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피조세계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더더욱 하나님에 대해서도 모두 알 수 없었습니다. 만약에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에 의하여 완전히 파악될 수 있다면 무한한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거나 유한한 인간이, 인간이 아닐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래서 공식은 무엇인가 하면 유한은 절대로 무한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 자체를 완전하게 창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죄는 없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완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필요했습니까? 신앙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도 신앙이 있었단 말입니까? 당연합니다. 이 신앙은 죄가 들어온 다음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이 신앙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신앙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입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의 관계입니다. 그 신앙의 눈을 가지고 사물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신앙에 눈이 먼 사람들은 그러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 이렇게 묻지만 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은 “나 여호와는 스스로 존재하느니라.” 고 할 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원래 계신 분이고 누구도 그 하나님을 만들 수가 없고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그렇게 알고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만든 이가 없는데 존재할 수 있으며 어떻게 만든 이가 없는데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없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만든 이가 없는데 스스로 존재 하시는가 라고 이성이 믿음이 없어 물을 때 신앙은 그 이성을 무릎을 꿇게 만들고 네가 설명할 수 없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거기까지는 창조된 우리 인간에게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추론할 수 있도록 이성의 능력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그것은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신앙의 문제라고 해서 이성을 딱 굴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 인식능력의 신앙을 주셨고 또 하나는 이성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능으로 이성을 통해서 사물의 이치를 따지고 추론함으로서 사물을 인식하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이 두 가지인데 이 두 가지가 온전했기 때문에 이 아담과 하와는 창조세계를 보면서 어디서든지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 발산적인 영광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을 보면서 그는 이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가 자신에 의해서 잘 관리되어서 언제까지나 찬란한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인간과 그리고 이 모든 피조세계를 통해서 드러나도록 기여하며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고자 하는 강력한 소원을 가지고 살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더 많으면 많을수록 그 영광의 빛은 더 찬란할 것입니다. 그럴 것이 아닙니까? 아니 전기를 많이 달면 불이 환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이 두 가지 인식 능력을 주셨는데 하나는 신앙인데 이 신앙은 영혼에 직접 관계되어 있고 이성, 곧 지성은 이 영혼에서 비롯된 인격의 활동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 앞에 계명을 어기고 범죄 하게 되니까 영혼이 범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죄를 지어도 영혼에 아무런 효과를 미치지 않는다고 하는 교리를 가진 교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 하면 그것은 곧바로 영혼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것이 큰 죄든지 작은 죄든지 그러니까 영혼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 영향이라고 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이니까 영혼이 죽었는데 눈을 볼 수 있습니까? 시신경이 끊어져버렸는데 아니면 뇌를 파내버렸는데 눈동자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시신경이 완전히 단절되어버렸는데 이 눈동자가 있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영혼이 죽어버리니까 신앙의 눈이 완전히 멀어버린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먼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멀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은 또 인격적인 모든 기능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정의 모든 것과 영혼의 상태는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영혼이 은혜가 충만할 때 생각하는 것과 죄로 가득 찰 때 생각하는 게 틀립니다. 은혜 충만 할 때 느끼는 정서와 죄로 충만할 때 느끼는 정서가 틀리고 은혜로 가득 찰 때에 가지고 있는 이 의지의 힘과 방향이 죄로 가득 찼을 때 의지의 힘과 방향과 다릅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이성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도움을 입어서만 비로소 이성이 정확하게 인식을 할 수 있었는데 신앙이 죽어버리니까 이 자체가 온전하게 작동을 할 수 없는데 이 자체가 죄에 의해서 오염되면서 심하게 망가트려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가 아침에 하나 생각이 났는데 요즘 저는 유리알을 선호합니다만 안경이 무거우니까 플라스틱 렌즈를 많이 사용하고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을 했습니다. 플라스틱 렌즈의 장점은 쓴 것 같지 않고 아주 가볍다는 것입니다. 그런 렌즈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냥 이것을 모르고 두었는데 그런데 손자 녀석이 가지고 가서 불 위에 올려놓고 장난을 친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플라스틱 렌즈가 녹아서 이게 옷감이 구겨진 것처럼 구겨지고 불에 타서 거품이 맺혀서 흔적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길이 막 파도처럼 보입니다. 사람 얼굴이 쭉 옆으로 늘어났고, 이게 사람인지 도깨빈지 모르게 된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그래도 뭔가 비슷한 흔적이 남기는 했는데 그것을 쓰고는 도저히 길을 걸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길이 파도치듯이 구부러지고 말이지 기둥이 막 팔자로 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이성이 남아 있기는 남아 있는데 그런 정도로까지 망가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조세계가 찬란한 영광의 빛을 비추지도 못하거니와 설령 비친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망가져버린 인간의 인식의 도구를 가지고는 그 발산하는 영광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면 그는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조세계를 고치시는 하나님이 이번에는 인간 자신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중생입니다. 그래서 중생 ‘Regeneration is recreation’ 중생은 곧 재창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인간을 우주로 볼 때 그것은 재창조라고 부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똑같은 순서로 거꾸로 변화가 되기 시작하는데 영혼을 고치시니까 신앙의 눈의 시력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 신앙의 영향을 받을 때에 작동할 수 있는 이성의 기능이 상당부분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보면서 비로소 피조세계에 비치는 희미한 빛들을 보면서 발산하는 영광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복종하게 되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캐나다에 갔을 때 집회를 끝내고 그날 목사님이 배려를 해서 로키 산맥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한번에 어느 산 정상으로 올라갔는데 3080미터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거기 올라가니까 눈이 하얗게 쌓여 있고 그 발 아래로 로키의 하얀 눈을 뒤집어쓴 영봉들이 900키로나 끝이 없이 펼쳐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찬양이 나왔습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 하네
만약에 신앙의 눈이 없었다면 그런 찬양이 나오지 않고 아! 좋네, 아! 좋다. 여기서 삼겹살이나 구워먹었으면 좋겠다. 그랬을 것입니다. 보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도 보고 신앙이 있는 나도 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 보면서 좋네. 그러면서 사진만 찍는데 신앙의 눈이 있는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희미하지만 거기서 비치는 발산하는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니구나. 티끌과 같은 존재이고,
그래서 당나라의 시인 진자왕 이라는 사람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천지유유 독창연이치아’ 라 그랬습니다. 천지의 유유함, 천지의 끝없음을 생각하니까 홀로 눈물이 흐르는구나. 그랬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이 신앙이 죽었는데도 그래서 그런 천지의 끝없는 정체,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 천지를 보는 이성의 눈이 워낙 발달해서 거기서 비추는 아주 작은 빛을 본 것입니다.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눈물을 흘리게 된 것입니다.
왜 흘리는 그 눈물이 무엇인가 하면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그 불안, 이 천지가 끝이 없는데 이 끝없는 인간 속에서 나는 무엇인가? 대답을 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uneasiness’ 소위 이야기하는 불안이 나옵니다. 그 불안을 느끼면서, 그런데 불안을 느끼는데 그런데 그 불안을 해소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독창연이치아’ 홀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너무 마음이 정말 창연한 마음이 되어서 처연한 마음이 되어서 거기서 그 불안과 고독 속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그 옆에 있었으면 나는 어제 밤 그대의 눈물을 보았노라. 나는 네가 왜 우는지, 너 우는 너는 대답할 수 없어도 울지 않는 나는 너의 그 눈물의 이유를 말할 수 있다. 그렇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뭘 가르쳐주면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러면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주면 그것이 정답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 놀라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이제 이 중생,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이 중생의 효과가 적어도 두 가지를 가져오는데 우선 영혼의 어두움, 영혼의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고 밝게 해줍니다. 신앙이 생겨나게 됩니다. 신앙이 생겨나게 되면 즉각적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활동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활동을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계획,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이 의지를 가지고 자기의 계획대로 이 세상을 이끌어간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가. 라고 말했을 때 돈 없는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낳아서 인생이 이렇게 망가졌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내가 왜 그렇게 슬픈 인생을 사는가, 그러면 우리 남편 성질이 못되고 돈 못 벌어서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졌다고 생각합니다. 말년에까지 내가 왜 이렇게 고달프게 살아야지 되는가 하면 자식새끼들이 변변치 못해서 그렇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지 되는가, 정치가들이 머저리 같아서 세상이 이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신앙의 빛이 들어오게 되면 자기가 인생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과 불행과 고통이 결국은 뭔가 뜻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그것은 갈 길을 모르는 돼지가 가끔 탈출합니다. 그래서 돌아다니면 돼지를 막대기를 가지고 귀때기를 툭툭 치면서 왼쪽, 오른쪽 하면 돼지가 말을 제일 잘 듣습니다. 궁둥이를 때리는 것보다 귀때기를 치면 말을 제일 잘 듣습니다. 그래서 오른쪽으로 가면 탁탁 때리면 왼쪽으로 가고 왼쪽 때리면 오른쪽으로 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도하듯이 자기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불행과 고통이 하나님이 돼지 같은 자기를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돼지 모는 막대기라는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을 돼지에다 비교해서, 절 포함해서니까. 그래도 여러분들은 깨끗하고 말을 잘 듣는 돼지입니다. 그래서 탁탁 때리면서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그러니까 뭘 깨닫게 되는가 하면 전에는 왜 때려, 왜 때려 하고 하나님 앞에 대들기만 했는데, 하나님도 몰랐으니까 대드는 것도 아니고 뭐가 자꾸 때리니까 더러운 세상, 그러면서 살았는데 이제 탁탁 때리니까 이제 어디로 가라는 뜻인가 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데려가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리적으로 섭리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를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데려가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계속 깨닫게 됩니다.
또 하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우리의 이성의 눈멂에서 벗어나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져서 설명을 해야지 되는데 하나는 신앙이 들어옴으로 이성이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부분이 있고, 또 하나는 계속 배워야지만 회복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보면서 신앙이 없을 때는 그것을 보면서도 정확하게 저것은 산이고 저 산에서 뭐가 많이 나겠다. 이런 것만 알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런데 신앙이 회복됨으로서 저 산을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것과, 이 산은 하나님의 발산하는 영광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그 산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산에서 무슨 식물이 많이 나고, 그 산을 파면 그 산이 언제 생겨난 산인지를 파악하게 되고, 그 산에 무슨 광물이 있는지 그런 것들은 기도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공부를 해야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공부해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 속에 깃들여져있는 찬란한 이 발산하는 영광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공식을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이 지상의 빛이 찬란하게 비추면 비출수록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 발산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많은 빛을 경험하며 더 하나님께 많이 원래의 인간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제 그러면 이제 우리는 그렇다면 그 발산하는 영광,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지 될 것인가?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다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발산하는 영광을 이야기하면서 꼭 빼놓지 않고 이야기해야지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서 발산하는 영광을 찬란하게 비추심으로 거듭남을 통해서 눈을 뜨여진 사람들이 그 발산하는 영광을 보게 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삶에 기여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타나는 발산하시는 하나님의 그 영광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크게 두 가지로 계시가 됩니다. 첫째의 방법과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첫 번째 것은 하나님자신의 임재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 안에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발산하는 영광입니다.
자, 예를 들자면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실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독특한 구분이 없었습니다. 모두 아담의 후손들이었고 창조되어서 다 흩어져서 살던 사람들이었고 물론 믿는 믿음의 계보들이 이어져 내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모두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것이었고 이제 처음 하나님이 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합니다. 그런데 선택받기 전에 이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면 아버지와 함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우상을 만들어서 밥벌어먹고 살던 그런 평범한 그 시대의 죄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이 택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문이 됩니다. 가문이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큰 민족을 애굽에서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택하고 가정을 택하고 민족을 택해서 하나님이 놀라운 특권을 주시는데 그 특권이 무엇인가 하면 그 백성들에게 당신의 임재를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는 보는 사람이 없는 광야나 바다 한가운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그 한가운데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은 술집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주님을 경배하는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바로 탈출했을 때 굉장히 많이 성화된 사람이었습니까? 아, 상당히 위로를 받는다는 뜻이 그들도 그렇게 성화될 수 없었습니다. 왜 이제 하나님을 제대로 안지가 얼마 안 되었고 애굽의 더러운 생활에 푹 젖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의 성화의 수준은 오늘 여러분들의 성화의 수준에도 훨씬 미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성화된 존재를 통해서 비친 발산하는 영광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그들에게 계획을 가지고 그들 자신에게 임재 하셔서 나타나신 효과로서 발산하는 그 빛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특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이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땅에서 물이 솟아나고, 그 다음에 하늘에서 먹을 것이 내리고, 그 다음에 수많은 적군들을 단숨에 무찔러 죽게 되고 그래서 파죽지세로 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흥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 성화의 깊이와는 상관없이 어떤 한순간에 그 백성들에게 나타나서 당신이 그들에게 임재하고 계시다고 하는 것을 찬란한 영광의 빛으로 비추시는데 이게 바로 임재를 통해서 발산하는 영광의 빛입니다. 그것을 보고 가나안을 정복하러 갔더니 벌써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게 라 합과 같은 사람이 그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고 어떤 사람은 자기의 오래된 민족과 조상의 신들을 버리고 자기가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여호와 그 하나님께로 귀의하고자 하는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방법으로 자기의 백성들 속에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피조세계를 통해서,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항상 그런 방법으로만 당신의 발산하는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항시 있는 일이 아니라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들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매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 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금은 어떻게 당신의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피조세계 속에서 나타내시는가? 그 대답이 아까 말씀드린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영적으로 깊이 변화되고 성화된 정도만큼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돌아간 만큼 창조주의 그 창조의 영광의 빛을 그들을 통해서 발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교회의 가장 큰 의무와 일치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로, 그리고 자신의 온 삶으로 그것을 보여주어서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죄인들이 이해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사명은 찬란하게 비추는 것입니다. 어떤 지나간 배는 등대가 필요 없고 포구에 들어가려는 어떤 배는 등대가 필요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등대의 사명이 빛을 비추듯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렇게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에 충만한 것을 발산하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빛을 비춤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교회는 비로소 존재의 목적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그곳에는 인간은 가장 하나님을 기뻐하게 되고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영광을 받으시고 그 영광 받으시는 곳에서 인간은 가장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실제적으로 신자와 교회는 부지런히, 이미 신앙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을 받은 사람들이니까 한편으로는 이 신앙의 눈이 다시 감겨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마음을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전달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 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깃들어있습니다. 이 꽃꽂이를 한 이 속에는 이 꽃꽂이를 통해서 강대를 아름답게 보이게 하려는 사람의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서 뭔가 가을을 나타내려고 하는 마음이 깃들어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 속에 특별히 그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이 성경의 세계 속에는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을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우리들이 해야지 될 것은 계속해서 우리의 신앙에 뜨여져있는 눈이 감겨지지 않도록 계속 하나님의 은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계속 부어지는 그런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우리들이 끊임없이 이 세상에 만물의 이치와 특별히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창조의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가르치시는 진리들을 부단히 터득하고 습득함으로서 그것을 마음에 두고 살아감으로서 이전에 알지 못했던 우리의 이성의 인식의 지평을 계속 넓혀가면서 살아갈 때에 우리가 비로소 이 발산하는 영광을 더 많이 경험하고 그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고자 하는 이 불같은 소원을 우리 안에서 계속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았던 경험을 캐들어 가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성이 은혜받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는 이 지식의 변동이 있을 때에 비로소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함께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공부하고 매일매일 그 말씀을 통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찾지 않는 사람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도 하루에 성경을 한 장도 안 읽는 사람들이 아직도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에 등록하고 몇 달이 흘러갔는데도 새가족반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 쓰레기 같은 세상의 사상을 가지고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결코 마지막 눈감고 죽는 순간까지 단 한번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고 그렇게 창조의 본래의 목적을 왜곡하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여러분들이 느끼는 기쁨과 희열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 세상에서 도둑질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실 수 없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의 인격과 삶 안에서 그 모든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의 질서로 돌아가는 비결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고 어떤 것이 그렇게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삶인지를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주셨고 그 진리들이 오늘날 여러분들의 귀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마음이 여러분들 속에 부어지는 진실한 은혜의 기회를 모두 잃어버리고 여러분들의 지성이 하나님의 그 기인한 하나님의 진리의 빛에 의해 조명을 받고 새로워질 모든 기회들을 잃어버린 채 여러분들이 어떻게 무엇으로 감겨진 신앙의 눈을 뜰 것이며 사라진 이성의 눈멂을 회복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발산하시는 영광을 목격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원래의 목적으로 스스로 돌아갈 수 있다고 여러분들은 믿으십니까? 그런 일들은 결코 일어날 수없을 것이며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죄악이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을 이끌던 개도 잃어버리고 지팡이도 잃어버리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러면서 그 어두움의 길을 걸어서 낭떠러지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비참한 처지에 다름이 아닐 것이고 어느 날 평안하다할 그때에 여러분들은 실족해서 밑도 끝도 없는 그 낭떠러지기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이 아름다운 피조의 세계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 연결된바 되어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인바 되어서 이 모든 망가진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먼저 하나님의 발산하시는 영광의 찬란한 빛을 비출 수 있는 피조물로 다시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값없는 구속으로 다시 살리셨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들이 지성을 닫아 무지 속에 살기를 원하고 신앙의 눈을 감아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는 그 삶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결국 돌아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맛보는 즐거움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히 없는 심판만 남을 것입니다. 회개해야지 됩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도덕적인 생활을 흉내 내는 것이나 정해진 교회에 주일날 꾸준히 출석하고 몇 푼 안 되는 헌금이나 하는 그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누리는 사교적인 삶이나 사람들과의 만남의 기쁨 같은 것들도 신앙의 본질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본래의 목적을 생각하고 우리 인간에 의해서 그 창조의 목적이 깨트려지고 망가져버린 그 죄를 깊이 뉘우치고 그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을 일깨워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일평생을 기여하면서 살고 그래서 자신 때문에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하고 자신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장 충만하게 나타나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삶, 그러다가 유한한 이 세상의 영광을 버리고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는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지향점이고 그것이 바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깊이 참예하고 조금이라도 이 창조의 목적에서 멀어진 것에 대해서 진실하게 참회하고 여러분 때문에 더러워진 이 모든 세상에 대한 악들을 진실로 참회하고 지금이라도 이성에 눈을 뜨고 신앙의 눈을 열어서 창조의 원래에 목적으로 돌아가서 정말 주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지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발산적 영광과 효과적 영광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본체적인 영광이 어떻게 발산하는 영광을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렇게 발산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소원으로 우리를 불타오르게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비치는 발산하는 영광을 경험하게 될 때에 그때에 반응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불신자들의 경우이고, 또 하나는 신자들의 경우입니다. 우선 불신자들은 이 피조세계에서 비쳐오는 하나님의 발산하는 자연적인 빛, 이것을 볼 때에 무엇인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우선은 불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 깃들어 있는 그 발산하는 빛, 그리고 그 빛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그 빛, 그것이 희미하나마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피조세계 속에서 희미하게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은 우선 불신자들은 그 빛을 보게 될 때에 뭔가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희미한 빛을 보기는 보았는데 마음속에 본성의 악함으로 인해서 그렇게 발견하게 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 1장 23절에 의하면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희미하게 경험하고도 그 영광을 오히려 인정하는 대신에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어서 그래서 그 우상을 섬기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이 피조세계를 통해 비추는 발산하시는 영광의 빛이 인간의 죄로 인해서 아주 희미해졌기 때문에 거기에도 영향이 있지만 그것과 함께 인간이 그런 빛을 희미하게 발견하고도 자기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자기의 만족과 행복이라고 하는 이 견해를 바꾸지 않으려고 하는 견해에서 이런 문제가 더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이 대만을 여행하시는데 길거리에 지나가는 어떤 사람이 손바닥 위 에 작은 우상을 놓고 자꾸 때리면서 가기에 물었더니 자기 집안에서 대대로 섬기 는 신인데 복을 주지 않기에 혼을 내고 있는 중이라며 회초리로 머리를 계속 때 리면서 간다는 이야기)
이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우상을 섬기는 그 자체도 파고들어가 보면 치열한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이 세상에서 세상 자원을 긁어모아도 충분하지 않으니까 그런 우상의 힘을 빌어서 어떻게 이 지상에 있는 자원을 긁어모아서 자기가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런 바람에서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우리 조상들의 신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집을 지으면 터를 파고 터줏대감께 제사를 지낼 때 삼층 빌딩 지으면 그 다음날 일어나면 육층으로 올라가게 해달라는 그런 소망 같은 것은 없습니다.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 터줏대감이 심술을 부리지 말고 우리가 잘 그냥 되게 해 달라. 그리고 그 신도 인간의 도덕성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인간도 그 신의 도덕성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미친 듯이 돌아다니면서 신들끼리 싸우고 바람을 피든지 말든지 또 그 신들은 우리가 자기 신들 앞에 정직하고 올바른 삶을 살든지 그런 것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결국은 자기중심적인 우주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는 자신의 만족과 행복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피조세계 속에서 희미하게 인식하는 그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가지고는 그것을 바꾸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경우에는 좀 다릅니다. 신자들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이 불신자와는 전혀 다르게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들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이 뭔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두 가지 능력을 주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는 신앙이었고 또 하나는 지성, 혹은 이성인데 이 두 가지는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었고 타락하면서 이 신앙은 완전히 뭉그러져버렸고 그래서 결국은 이 영향을 받아서 지성까지도 죄로 인해서 심하게 어두워지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지성은 아직 상당부분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한쪽 신앙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이성이 제 구실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신앙이 사라졌으니까 이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보면 한쪽 눈을 못 보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편함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한쪽 눈을 못 보면 서서히 안력이 한곳으로 향하면서 이쪽 눈도 함께 실명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두 번째는 이쪽 눈이 사라지고 이쪽 눈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보기는 보는데 원근이 파악이 안 됩니다. 사물은 보이는데 멀리 있고 가까이 있는 것들이 크기에 의해서만 파악될 뿐 두 눈으로 볼 때처럼 실감나게 입체적으로 안 보입니다. 그런 문제가 있는 것처럼 이 신앙이 뭉그러졌기 때문에 지성이 어느 정도 살아남아 있어도 인식은 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정확히 무엇인지를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고치실 때 어떻게 고치시는가 하면 먼저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완전히 망가진 신앙의 눈을 다시 뜨게 만들어주십니다. 뜨게 만들어주실 때 그 다음에 이것이 확 뜨고 나니까 그 다음에 이 신앙이 없어서 어두웠던 이성의 비늘이 벗겨지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나타난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아름답고 눈부신, 아직까지도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우리를 눈부시게 하기에는 충분한 그 자연의 세계 속에서 비치는 그 하나님의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보면서 절대로 그것을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거나 아니야. 아무리 이 자연의 세계 속이 신비하고 빛이 비쳐도 하나님은 없지. 그런 무지 속으로 돌아갈 수 없게끔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잘 들어보십시오. 아주 신비한 이치가 이 속에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이 신앙이 완전히 캄캄한 어두움입니다.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뚜껑을 딱 열고 빛이 들어와서 눈이 다시 보게 되는 이것은 하나님이 복음을 가지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눈에 빛이 딱 들어오게 되는 것은 오랫동안 공부나 지성적인 탐구가 아니어도 한순간의 빛이 들어오면서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됩니다.
(예화: 신학교 교수로 계실 때 어느 학생이 점심을 사겠노라고 해서 식사를 대접받는 자리에서 그 학생의 고백, 자신이 이전에 조직폭력배의 두목이었다고 하면서 자 기가 이전에 술이 곤드레가 되어서 가는 길에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교 회에 들어가는 그 순간에 갑자기 고꾸라지면서 자신이 회심의 경험을 하면서 장 난처럼 들었던 기독교의 진리들이 선명하게 생각이 나고 그래서 깊은 참회를 통 해 주님 앞에 돌아오고 신학교까지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 사람이 성경을 갖다가 열심히 공부하고 수십 편의 설교를 들으면서 탐구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순간에 성령님이 예전에 어렸을 때 들었던 그 복음을 사용하셔서 복음으로 그의 신앙의 눈을 확 뜨게 해주시니까 아직 지식은 별로 없지만 눈을 확 뜨게 해주시니까 어두움 속에서 찬란한 빛이 들어오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이렇게 사는 것은 죄악이라고 하는 것과, 예수님이 이런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셨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가야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눈을 뜨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어두움이 밀려가게 하시고 신앙의 밝은 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신앙의 밝은 빛이 들어올 때 그때 이 밝은 빛은 지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복음을 받고 변화되고 나면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모르던 사람들이 성경이 막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경이 꿀 송이처럼 달게 느껴집니다.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또 하느냐고 공부를 하면서도 이 세상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그렇게 딱 들어오고 보니까 그 다음에 이 온 우주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학문을 탐구하고 연구해가면 연구해갈수록 놀라운 질서가 그 안에 있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이 모든 지식의 빛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하면서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이 피조세계에서 비추는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지성의 도움을 받아서 더 많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끔 TV에서 다큐멘타리 같은 거 하면 아주 미생물의 세계나 동물의 세계 같은 것을 보면 감탄할 때가 있습니다. 아! 정말 놀랍다. 생각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그 미물들의 세계인데 그 속에서 어떻게 저렇게 신비하게 저런 일이 일어나고 저렇게 해서 창조의 세계가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을까 하며 감탄을 느낍니다. 그게 이 지식의 눈이 뜨여지게 되니까 더 많이 발산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어떤 일이 생기게 되는가 하면 처음에 회심할 때는 신앙의 눈이 뜨여짐으로 말미암아 지성이 덕을 보게 되는데 그다음부터는 그 지성의 빛을 통해서, 물론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지성의 빛을 통해서 성령이 그 지식의 결과로 역사하실 때 신앙의 빛을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 보전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런 놀라운 효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창조의 원래의 질서를 인식하게 되고 그래서 이 신앙이 감화 받게 됩니다. 뭘 통해서? 지성을 통해서.
그러니까 복음에 의해서 깨어나기는 했는데 그 다음에 지성적인 노력을 안 합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이 피조세계도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특별히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인간을 어떤 이치에 두셨고 그 인간이 어떻게 해야지만 창조하신 그 위치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그 비결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은 하나님을 보여주고 동시에 인간이 누구인가를 알게 해주고 동시에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이해시키고 어떻게 존재가 되고 어떻게 살아야만 그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그렇게 하기 위한 비결은 무엇인가 하는 것의 비밀을 담은 책이 이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성경의 교리들을 복음의 교리들을 이 지성을 통해서 계속 깨달아갈 때 그때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 지식의 빛이 거꾸로 신앙으로 들어가서 신앙이 계속 깨어있게 만들고 더 불붙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지식을 통해서 온전해지고 또 이 신앙을 통해서 지식이 온전해져서 점점 더 하나님의 이 피조세계에서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많이 보게 되면서 자기 자신도 그 영광의 빛을 발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발산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될 때 크게 세 가지에 대한 놀라운 인식의 변화가 오게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 자신이고,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이고, 세 번째는 세상에 대한 인식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 광경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예증이 이사야서 6장에 나타납니다. 이사야는 6장에서 성전에 들어가 스랍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놀라운 영광을 경험하기 전에도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광을 경험함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전적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되고 또 그 목적을 위해서 일평생을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사야의 별명을 이렇게 짓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의 사람이다.’ 선지자.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의 선지자라고 부를 정도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6장에 나옵니다. 평소처럼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스랍들을 보게 됩니다. 스랍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천사들입니다. 그 스랍들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경험하게 되니 이것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발산하시는 영광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발산하시는 영광의 빛을 선지자가 깊이 경험하게 되었을 때 예전에 알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대대적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통해서 신앙이 더 놀랍게 깨어나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인식하는 이 지성에 아주 탁월한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그래서 발견하게 된 것이 하나님은 정말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시고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거의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 하나님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시다는 사실을 예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그 발산하시는 영광의 빛을 경험함으로서 뼈 속 깊이 하나님은 정말 거룩하신 분이시고 그 하나님의 영광은 이 거룩의 찬란한 영광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자신은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게 됩니다.
두 번째 새로운 인식이 생겨난 게 무엇인가 하면 그가 뭐라고 고백을 합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 망하게 되었다는 말이 히브리말로 ‘아바드’인데 그냥 적군이 와서 도시 같은 곳을 멸망시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이 망할 것 같은 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강력한 영광을 경험하게 될 때, 그때 이 선지자가 자기가 망할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자기 자신의 본성 속에 있는 말할 수 없는 죄악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그는 자기 자신을 본적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발산하시는 빛을 본 만큼 자기의 죄의 깊은 밑바닥을 보면서 존재 자체가 모두 죄악의 덩어리고 자신 속에는 어떤 깨끗함도 의로움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왜 깨끗함과 의로움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빛이 강렬하게 비치니까 그 빛 거기에서 비쳐오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비하면 자기 자신의 흠 없고 깨끗함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또 하나는 그런 비추는 찬란한 빛을 통해서 예전에는 평범하게 볼 수 없었던 자신의 깊은 죄의 밑바닥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면서 그러면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부정한 자 가운데 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뵈었도다.” 라고 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고백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주 뼈 속 깊이 우러나오는 자기 죄에 대한 전적인 참회를 하나님 앞에 실행하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왜 선지자가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보았을 때 자기의 죄에 대해서 그렇게 무시무시한 인식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죄의 정체가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의 찬란한 빛은 뭘 보여주는가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난 초월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이 내적으로 얼마나 완전한 분이신지를 영광의 빛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빛을 보았는데 그런데 자기 속에 죄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죄는 그런 영광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 속에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에 즉시 뭘 느끼는가 하면 그 영광의 빛이 자기를 심판할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런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 마음대로 지금 없애고 버리고 말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닐 때, 그때 이 죄인이 그 찬란한 영광의 빛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살기를 원하나이다. 감히 내 속에 하나님을 향한 대적, 적대감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살려주십시오. 내가 깨끗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 때문에 두렵다기보다는 자기 속에 있는 죄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니까 이 죄는 더 이상 발산하는 영광의 경험 앞에서는 이게 주관적인 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것을 택한 게 아니라 그 빛을 보면서 아니 이런 죄가 있구나.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 인식이 새롭게 열리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이 열립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그 영광의 빛 앞에서 자기의 죄를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도 신앙생활 하다가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냥 장난삼아서 교회에 갔는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깨달아지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발산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한 다음에 이제껏 찰떡같이 자기가 달라붙어서 살던 죄가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그리고 이것을 빨리 뜯어내고 버리고 싶은 이 죄에 대한 강한 미움, 그리고 이것을 스스로 내가 떼어버릴 수 없으니까 이제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거기서 반드시 참회가 뒤따라오게 됩니다. 그렇게 참회하고 나면 그 다음에 뭐가 떠오르는가 하면 자기처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너무 비참하고 불쌍하다고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경험하게 해주시니까 나는 이렇게 회개하고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왔는데 아직까지도 나처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하나님이 왜 자기를 창조하셨는지 그리고 왜 하나님이 자기를 십자가의 보혈로 구해주셨는지도 모르고 창조의 목적과는 상관이 없이 허망하게 살아가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너무 비참하고 불쌍하다고 하는 연민의 마음이 밀려옵니다. 때로는 이것이 너무 강렬해서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게 되고 그들조차도 못 느끼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 아픔이 내게는 오히려 느껴져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발산하는 영광이 가져온 효과적 영광에 대한 갈망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삶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의 시야로 볼 때는 한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지위를 누리고 그리고 어떻게 얼마나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얼마나 스스로 행복해하면서 인생을 사는가가 인간들의 가장 커다란 관심사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있는 커다란 뉴스, 그리고 큰 기쁜 소식, 우리를 슬프게 하는 가슴 아픈 소식들이 어떤 것들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대부분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커다란 뉴스가 모두 자기의 이익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참된 신앙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발산하는 영광을 경험하게 될 때에 신자는 참으로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창조된 목적이 무엇이고 그리고 그 목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불러일으키시는 것을 경험하고 그래서 그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의 참된 중심점에서 이탈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도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도 말하면서 여전히 중심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창조의 목적에 일부를 내가 돌아가서 나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그 자리에 머물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그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비추는 참 도구가 되기보다는 여전히 내가 주인이고 나 중심이고 그리고 나의 행복이 가장 커다란 것이 되어서 신앙의 세계를 기웃거리지만 목적 자체는 자신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는 사람으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과정 가운데 신앙도 뭔가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를 찾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이 하나님의 진정한 복음의 세계가 가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결코 발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통해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고 싶은 것은 그러면 그렇게 발산하는 영광을 경험하고 나면 이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기를 바라는 갈망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공식으로 우리 안에 생겨나게 되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원리적인 것이고, 두 번째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원리적으로는 이제 이렇게 발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본체의 영광이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비추듯이 하나님의 발산하는 영광을 신자가 경험하게 되면 그 발산하는 영광에 빛을 경험한 신자는 이 모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얼마 전에 제가 설교시간에 예화를 든 가운데 부산에서 어떤 사람이 서울로 이사를 와서 교회에 나왔는데 신앙생활을 잘 하면 교회는 부산에 있는데 그 사람 때문에 여기서 부산에 있는 교회의 이름이 높아지고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못하면 교회만 부산에 있는데 여기서 그 부산에 있는 교회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부산에 있는 교회를 높인다고 해서 진짜 부산의 교회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부산에 있는 교회를 여기서 무시한다고 해서 갑자기 그 교회 지붕이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체는 아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그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본체가 어떠하든지 간에, 여기에서 사람들이 부산에 있는 교회를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그것 때문에 부산에 있는 교회가 무너지거나 지붕이 높아지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 교회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그 교회가 없는 서울에서도 그 교회의 합당한 평가를 자기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내려주기를 원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욕하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은 그 교회를 전혀 사랑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하나님의 본체적인 영광에 합당한 평가가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과 피조물 속에 내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특별히 주님이 택하신 신자들이 정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무엇을 보고 판단하시는가 하면 얼마나 당신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지를 보시면서 평가를 내리시고 그리고 당신 자신의 이름, 그 명예를 위해서 가슴아파하고 그 영광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게 되도록 기여하면서 사는가를 보면서 그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하나님께서 평가하십니다.
다윗이 블레셋과 싸움이 일어나는 곳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골리앗이라고 하는 키가 구척이나 되는 거인이 나와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욕을 하는데 그 사람이 무서워서 누구도 가서 싸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다윗이 홀로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물맷돌을 들고 뛰어나가서 싸울 때 그때 그는 말하기를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나아오지만 나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나아간다. 그렇게 말하게 만들었던 동기가 무엇인가 하면 네가 어떻게 할례도 받지 못한 더러운 이방 백성이면서 주님의 이름에 의해서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욕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욕하는 것은 곧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리고 담대하게 뛰어나가서 오직 다윗 한사람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거스르는 골리앗과 더불어 싸웁니다. 그럼 나머지는 무엇인가? 나머지는 아무도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한사람만 하나님을 사랑했으니 그 사람이 곧 다윗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광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발산하는 영광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는 부흥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이 부흥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도덕적 수준,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당신의 임재를 주고자 허락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찬란한 빛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았던 수많은 죄인들이 그 영광을 보고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주시는데 그 영광의 효과가 뭐가 가져다주는가 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보여준 것이고 그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에 인간이 얼마나 자기가 죄를 짓고 창조의 목적으로 이탈되었는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 압도하는 지식의 빛 때문에 그가 거기 엎드려져서 깊이 하나님 앞에 참회하게 되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구체적인 행동이 회심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은혜를 받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게 함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줍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같은 곳에 보면 초대교회 교인들이 이 발산하는 영광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더니 많은 사람이 그들을 보면서 칭찬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너희들 가운데 계시구나. 부럽다. 그러면서도 너희들이 참 부럽다. 정말 너희들은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들이구나, 라고 깨달으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만들어줍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죄악 가운데서 구해내시고 우리를 이 세상의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까지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신 이유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것은 정말 우리의 공로 없이 우리 모두에게 공짜로 주신 것입니다. 거저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적으로 주신 선물이지 우리로 하여금 자랑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선물과 그 모든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이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사실을 우리는 깨달았는데 아직까지도 신앙의 눈이 감겨져서 그래서 복음에 의해서 뜨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신앙의 눈이 감겨져서 보지 못합니다.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성의 눈이 멀어서 참으로 보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의 목적에서 이탈된 채로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거대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빛이 사라지고 그들 때문에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정말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인간들이 하나님을 원수같이 대적하다가 짐승처럼 심판을 받고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구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직접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당신의 임재를 허락하셔서 부흥의 빛을 비추시고 또 당신 자신의 백성들이 거룩한 삶을 통해서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한 영광을 보여주심으로서 그들을 무릎 끓게 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그런 진리 앞에서 여러분들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오늘도 이렇게 예배를 드리러 나왔습니다.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이 예배를 통해서 영혼에 부어주실 은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존재로 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정말 일주일동안 살았던 여러분들의 삶, 먹고 마시고 입고 생활하고 꿈꾸는 모든 것이 미력이나마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이탈된 채로 살아가는 이 세상을 인해서 가슴아파하는 삶이었습니까? 나를 낳아주셨지만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 부모님을 향해서 가슴아파하는 그런 삶이었습니까?
나와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진실한 회심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리고 진정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밥벌어먹고 살기에 바쁘고 가정생활을 꾸려가기에 바쁜 내 아내와 남편에 대한 깊은 가슴 아픔,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런 창조의 목적을 이해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신자로서 이런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을 보며 가슴아파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도 누군가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가슴 아파 해주어야 할 그런 대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고 있지만 그들이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인생이 행복해지고 창조의 목적과는 상관이 없이 자신이 온 우주의 주인이 되고 중심이 되어서 만족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인가 신앙으로부터 도움을 좀 받을까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다닙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영원히 하나님의 이 은혜의 복음의 빛은 가려져 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고 믿고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이탈된 아주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진실하게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의의 빛 앞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살고자 하는 그 신자의 삶이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이 하나도 없는 삶이라고 하면 그는 이미 열매로서 자신의 뿌리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쓰레기와 같은 죄인들, 이 세상에서 소문난 불결한 인간들도 개의치 않고 부르셔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알게 하시고 그들로 진실하게 창조의 목적을 이탈한 죄를 회개하시고 그리고 그들을 새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은 소문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품에 안으셨던 그 수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이탈된 채 주님을 대적하며 살았던 원수와 같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고백하기를 “나는 이전에 핍박자요 포행자요 그리고 죄인 중에 괴수였노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자신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숙제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처럼 하나님을 알고 이 세상 끝에서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인해서 아파하는 마음을 다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보십시오. 도대체 신앙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무엇입니까? 오늘날 여러분들이 땀 흘리고 애를 쓰며 추구하는 그 모든 것들이 중심, 어느 중심을 향한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친절과 자비로 모두 이 피조물들을 돌보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탁월한 피조물이라도 인간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피조물이 없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커다란 크기의 피조물이라도 인간처럼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특권이 허락된 그런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차갑게 나는 창조주고 너는 피조물일 따름이니 잔말 말고 나를 공경하라. 엄하게만 말씀하시고 우리를 외면하셨다면 우리는 그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발산하는 영광을 경험함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셨습니다.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참여하고 회심했습니다. 무엇을 위한 회심이었습니까? 진지하게 열심히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일생을 살았지만 그러나 인생에 진실한 핵심이 그게 아니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 형상 볼 때 내 마음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그리고 이 평생에 창조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살던 쓰레기와 같고 개 같았던 내 인생을 바꾸어놓기 위해서 내버려 두었더라면 일평생을 하나님을 대적하며 창조의 목적을 짓밟으며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하다가 지옥의 심판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비참하게 죽으신 그 처절한 형벌을 보면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살아온 모든 삶이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이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끊어져버리고 망가져버린 우리를 원래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우리 인간을 그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아직까지도 남아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이 모든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령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회개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속에는 언제나 이런 생각이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렇게 원리적으로 우리를 변화시켜놓으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 소원을 따라서 살지 않을 때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자기가 교회에 다니고 구원을 받았는데 나는 그런 것 너무 복잡하다. 아무 상관이 없고 나는 그냥 예수님 제대로 안 믿고 내 멋대로 사는데도 나는 이상하게 행복하다. 그 사람은 절대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본성적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는 결단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실제적으로 우리들이 관찰해볼 시간이 되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함으로서 회심을 통해서 정말 그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고 싶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아가야지 되겠다고 하는 강렬한 소원을 불러일으키고 강력한 경향을 심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를 믿으면서 처음 회개할 때 그때 가장 강력하게 부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한번 회심하게 되면 가던 길을 돌이키게는 되지만 계속해서 그 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힘차게 걸어가기 위해서는 처음 하나님 앞에 회심할 때 받았던 그 회심에 은혜를 계속 보존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한번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받는 것도 힘들지만 구원받은 그 회심의 은혜를 계속 보존하며 사는 것은 더더욱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단지 그냥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 라고 하는 복음에 대한 반복적인 학습만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러면 이제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해서 내가 구원받게 되었고 구원받은 나를 넘어트리기 위해서 죄는 어떻게 역사하고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어떻게 은혜를 예비하셨고 하나님은 어떻게 순종하게 하셔서 이 죄를 이기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며 살게 하시는가. 그래서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가 하는 비밀들을 이 말씀에 세계를 통해서 배워나가야지 됩니다. 배워나가지 않으면 심겨진 나무가 더 이상 양분이 없어서 말라죽는 것같이 그렇게 되어갑니다.
그런데 똑같이 한번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면 그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정말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분이고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고 자기는 단지 티끌일 뿐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화로다 나여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할 때 “나를 보내소서” 하는 이 영광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파송이 되게 됩니다.
그런데 똑같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내 위치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아주 잘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은혜 안에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한번 경험함으로서 생겨나지만 그것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한번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안 됩니다. 비록 작은 빛이라도 계속해서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이시고 나는 그분의 손에 의해서 지어진 하찮은 피조물일 따름이며 그래서 나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자각하는 그런 생활을 해야지 됩니다.
어떨 때 그런 자각이 일어나게 되는가 하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깨달으면서 이 지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신앙의 이치를 지성을 통해서 계속 터득해갑니다. 그때 그 지식을 성령님이 사용해서 그래서 식으려고 하는 우리의 신앙에 연료를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계속 불이 탑니다. 신앙이 생생하게 살아있으니까 우리의 지성에 이 신앙이 빛을 더해줍니다. 그래서 이 신앙의 빛을 통해서 우리들이 이성적으로 더 똑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깊이 은혜를 받고 신앙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뭘 갖게 되는가 하면 영적 사고력을 갖게 됩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어려운 일 이면에 어떤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지를 터득하고 그 어려운 자체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통해서 내 인생을 움직이고 계신 하나님을 대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환경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살라고 하는 것들을 깨달으면서 계속 변화되어갑니다.
그런데 신앙이 사라진 사람들은 어려움이 생겨나게 되면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행복해져야지 되겠다고 하는 욕망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더 큰 범죄를 하게 되고 창조의 목적으로 점점 이탈하면서 그러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기는커녕 그 목적을 더더욱 이탈하면서 죄에 죄를 더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가는 곳마다 사거리가 있고 신호등 불빛이 있는데 그 불빛의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사고 날 일이 없습니다. 파란불이면 직진, 빨간 불이면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좌회전 표시가 나오면 좌회전 꺾어집니다. 그런데 아무런 것을 못 깨닫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는 자기 목적지로 빨리 가야지 되겠다는 욕망만이 불 일 듯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판단은 없이 자기 가고자 하는 목적으로만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교통의 상황이 그를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가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다른 것들이 질서 있게 움직이면서 질서 있게 움직이는 것으로 더불어 충돌이 일어납니다. 결국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못 가게 됩니다. 그런데 신앙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섭리, 이 섭리의 궁극적인 종점이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이해가 잘 안 가실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여태까지 근심 없이 살았는데 자꾸 어려운 일이 생기고 고난이 겹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때는 왜 그렇게 되는지 잘 몰랐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잘못되게 추론을 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서 보니까 그때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제멋대로 살았더니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나를 치셔서 정신 차리게 만들고 순종하게 만들었구나. 그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잘 살아있는 사람들은 이 지성의 빛의 도움을 받으면서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상황을 보면서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섭리 속에 깃들어져있는 수많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갑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안 삽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에게 어떤 싸움이, 어떤 숙제가 우리에게 남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경험하고 우리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그 자신도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갈망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주신 그것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속에 끊임없이 죄가 역사해서 유혹과 시험 속에서 이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알면서도 그대로 살아가지 않도록 만들고 또 그렇게 살수 있는 힘을 자꾸 빼앗아갑니다.
여러분, 건강 때문에 요즘 염려들을 많이 합니다. 너무 과로하지 말고, 그리고 적절하게 운동을 하고, 그리고 하루에 한번쯤은 땀을 확 쏟을 정도로 헬스를 하고, 그리고 기름진 음식을 피하면서 골고루 섭취하면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예전에는 그게 건강의 비결이라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내 생각이 바뀌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좋다는 것을 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게으름과, 오래 된 습관과, 갑자기 해야 할 일에 대한 욕심으로 이런 건강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건강을 자꾸 해치게 됩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깊이 창조의 목적을 떠난 것에 대해서 참회했습니다. 그리고 한때는 그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야지 되겠다고 하는 뜨거운 열망, 그리고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그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이탈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나를 구속하신 예수님의 그 보혈을 생각해서라도 그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며 살아야겠다는 간절한 갈망이 내 안에 예전에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서 이것은 영혼이 완전하게 저절로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경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믿음의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보존해주실 때에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그에게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하나님이 발산하시는 영광을 보여주시고 말씀을 통해서 그 영혼의 어두움의 밝은 빛을 비쳐주셔서 수시로 자신 속에 있는 죄를 털어버리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또 돌아가고 싶어 하고 또 참회하고 돌아가고 싶어 하게 하고 이런 열망을 하나님께서 계속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견고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발산하는 그 영광을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경험이 가져다 준 지식 안에서 살면서 반복해서 계속 그 영광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리고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배우고 그리고 그 하늘영광의 빛 안에서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를 힘입으면서 그렇게 살아갈 때에 우리들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낮 동안 정신없이 살면서 온갖 욕심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이 세상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안중에 없는 것처럼 하루를 살다가 저녁 시간에 잠들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그리고 자기를 어떻게 창조의 목적으로 돌려놓고 싶으셨는지를 깊이 깨닫게 될 때 그리고 침대 맡에 엎드려서 마음을 쏟으면서 잠시라도 간절히 기도하게 되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내 인생에 참된 가치와 보람은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 곧 나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피로 구원하신 그 목적으로 돌아가고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나처럼 이런 복음의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또 구원받았어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신의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실상의 불신자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그들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지 되겠다고 하는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사셨던 그 삶은 바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삶이고 어떻게 그 창조의 목적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신 삶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예수님이 계실 때 하찮게 생각했던 것들은 우리들을 위해서도 하찮게 취급되어져야 하고, 이 세상에 주님이 살아계실 때에 소중하고 값지게 생각하신 것은 오늘도 우리에게 소중하게 값지게 생각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의 마음을 끄는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마음을 끄는 많은 관심사들, 욕망에 사로잡힌 삶, 많은 재산을 모으는 일, 그리고 남보다 더 뛰어난 지위를 누리는 일, 그리고 많은 사람보다 더 많은 이 세상의 자원을 소유하고 그 속에서 안주하며 살아가는 일, 그리고 더 많은 이 세상의 헛된 지식으로 사람들보다 위에 서고자 하는 이 세상의 영광에 대한 모든 욕심들 이런 것들은 모두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고 사라지는 세상과 함께 소멸되고 말 가치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이 참된 가치와 질을 우리의 소유나 사회적인 신분으로 따지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구 한 모퉁이를 쓸다가 우리의 인생을 마름하고 가장 하찮은 일에 종사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 이름도 기억되지 않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다가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각사람 각 사람이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 때에 하나님이 그를 가장 기뻐하시고 그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보람을 느끼시고 그렇게 창조된 그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 죽게 하셨던 그 구속의 사건에 대해서도 보람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너무나 냉랭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이곳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고 창조의 목적에 관한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며 주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이탈하며 살아왔던 지난날들에 대해서 회개하고 참다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지만 이 세상에는 그런 착한 마음을 갖는 여러분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수많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을 대적하고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보혈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완고한 불신앙 속에서 회개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데 심판의 날이 가까운데도 그들은 주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삶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만한 사람과 완악한 사람들 때문에 아직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 피조세계를 통해 자기의 백성들을 통해 나타나는 찬란한 빛을 보지 못한 채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알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서 묻혀서 살아가고 있고 그 무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창조하신 사람들,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이 사랑을 알고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알았더라면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가 되어서 창조세계에 한 모퉁이, 한 주안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며 자기를 빚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였을 텐데 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이 쓰레기처럼 이 세상에서 주님의 심판을 받고 죄 가운데 처분되어서 마치 쓰레기가 소각로 속에 들어가듯이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더미 속으로 그렇게 쓸어 넣은바 되고 지옥의 불길은 그들을 태우며 더 치열하게 불붙고 있습니다.
생각 없이 살아가는 동안에도 지옥의 불길은 타오르고 있고 의식 없이 하나님 앞에 욕망과 신앙 사이에서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이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은 지옥을 태우는 연료가 되어서 하나님의 형상들이 쓰레기처럼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것을 생각할 때 그렇게 아프다면 흙으로 빚어 자기의 형상을 나누어주시고 자기 안에 있는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그들의 존재를 통해 찬란하게 비추고자 하셨던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요? 당신의 영광을 빛내는 형상으로 창조하신 그 인간들이 쓰레기처럼 지옥의 불길에 던져지는 그 모습을 보시면서 창조주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으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생명을 버리시고 그들을 통해 복음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하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아직 회개하지 않은 이 세상을 보며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도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보시면서 그렇게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가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리고 인생을 사는 것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주어서 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진정한 피조물의 행복으로 돌아오게 할 것인가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부터 심판 날이 가까운 지금까지 주님의 이 열망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누가 주님을 위해 갈 것입니까? 누가 창조주 하나님의 이 아픈 마음을 위로해드리고 우리가 죽기까지 이 세상에 돌아가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리고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방법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구속을 알리기를 주님의 마음으로 알리겠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일생은 이 세상에서 많은 소유를 이루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안락한 삶을 사는데 그 가치가 있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예수님이 가장 실패한 인생을 사신 분이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평생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그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되게 만들었던 아직도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죄를 미워하고 절망적인 그 죄의 상태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몸 버려 피 흘려 죄 값을 치르고 죽으신 어린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찬송하며 그 구원을 통해서 주신 능력을 힘입어 매일매일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수많은 죄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싫증들과 지식은 있어도 그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는 육체의 게으름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으로부터 이탈된 채 살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은혜를 받고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우리 안에 이미 주셨던 그 영광에 대한 그 경험을 다시 회복하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광야의 길을 걸어가다가 원망하며 죽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백성들처럼 되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다시 태어나서 그리고 믿음으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그 기업을 받았던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새로 태어난 그 많은 이스라엘의 자손들과 같이 그렇게 주께서 우리의 인생을 마름하게 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까지 우리들은 가슴깊이 창조의 목적을 붙잡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우리의 인생에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지 됩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끊임없는 우리의 죄가 우리를 유혹하고 흔들어놓습니다. 우리는 너무 나약하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와 불순종에 쉽게 떨어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창조의 목적을 가슴에 부여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와 같으니 캄캄하고 어두운 밤에 북극성을 바라보고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유혹의 파도와 죄의 물결, 시련의 풍랑이 그 배를 흔들지만 흔들리지 않는 북극성을 바라보고 항해하는 배는 언젠가는 그 폭풍과 시련의 바람을 뚫고 반드시 안전하게 항구에 귀향할 것입니다. 거기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런 창조의 목적을 부여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고 하신 말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하나님의 영광과 피조물의 목적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존재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사실이고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들이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계획을 가지고 창조되었고 의도 속에서 빚어졌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창조의 의도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고 또 그 의도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그럼 그렇게 하나님의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인 그 인간의 참 의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런 하나님을 알아가는 가운데 영광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말씀을 드리자면 발산하는 영광을 앎으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것, 이것이 피조물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삶의 질이 어떠할 것인가 하는 것은 그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정확하게 풍부히 알고 있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경험하는 인간의 많은 고통과 그 악들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서 그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는 그 지식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안다. 라고 하는 말과 완전히 동의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해놓으신 피조의 세계 속에는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에 충만한 것이 깃들어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온 세계에는 하나님의 그 영광의 흔적이 깃들어져있고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는 그 깃들어져있는 영광의 흔적들을 성경 계시를 통해서 명백하게 알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성경 계시는 이 피조세계 속에 깃들어있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파악하는 출입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영광의 충만한 것들을 인간들이 보고 보게 되었을 때에 그 인간들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시며 나는 그 손으로 빚어진 인생의 피조물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거기서 오는 감화를 통해서 자신이 그 하나님의 창조의 찬란한 영광을 회복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갈망을 인간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존재의 목적입니다.
그럼 이제 구체적으로 그런 하나님의 영광의 신성의 충만한 것이 피조세계에 깃들어져있고 그것들을 보게 하는 출입구가 성경의 계시라면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 우리는 그 피조세계 속에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고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를 들면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를 몰랐을 때는 여러분들의 삶이 그렇게 신비해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성경의 계시를 잘 깨닫고 나면 나의 인생에 걸어온 길이 보이는데 어쩜 그렇게 놀랍도록 하나님이 나 혼자 몸부림치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사실은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가고 싶은 길을 막기도 하시고, 가기 싫은 길을 가게도 하시고, 성공하는 것 같았을 때에 실패하게 하셔서 거기서 울부짖게도 하시고 울부짖어서 혼자 버려둔 것처럼 고독감 속에 몸부림칠 때에 위로도 주시고 그래서 결국은 나의 살아온 인생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게 성경 계시를 깨닫고 은혜받기 전까지는 똑같이 살아온 인생인데도 안 보입니다. 그런 이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피조세계 속에 깃들어있는 당신의 영광의 충만한 것, 발산하는 영광의 충만한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셔야지 됩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죽은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감겨져있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더듬어보기가 힘들고 또 그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도 그 창조의 목적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인류의 철학의 역사 가운데서 일반 철학의 방법을 통해서 가장 하나님의 이 계시에 가까이 다가간 철학자를 아리스토 텔레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읽어보면 그가 성경 없이 영혼의 어두운 눈이 뜨여지지 못한 상태에서 인간의 이성만을 가지고 더듬어서 깨닫게 된 하나님의 그 창조의 세계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주일학교 유치부 학생들이 가진 것만도 못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눈을 감은 상태에서 태어난 우리의 영혼의 비늘을 벗기시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은 캄캄하기 때문에 항상 어두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는 자신이 캄캄하기 때문에 태양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아름다운 자연의 세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옷을 입고 다니는지, 인간이 얼굴 속에 깃들어 있는 수천가지의 표정들을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그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불쌍하고 많은 사람들의 동정과 그리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의 어두운 눈을 이렇게 뜨게 해주셔야지 됩니다. 이게 거듭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깊이 회개하고 우리가 거듭나게 될 때에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영혼의 비늘이 벗겨지면서 예전에 볼 수 없게 된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같은 것 믿지도 못하고 그런 것 생각도 못했는데 육체의 두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육체의 두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똑똑하게 그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자신이 죄를 지어서 그 창조주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창조의 계획에서 이탈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눈을 뜨게 될 때에 더 찬란하게 자신의 눈을 가득 채우는 영광의 빛이 있으니 그는 바로 그렇게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한 채로 살아가는 불쌍한 자기와 같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비참한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무릎을 깊이 꿇게 됩니다. 그러면서 정말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신 그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영혼의 눈에 비늘이 벗겨지면서 그것이 보이게 됩니다. 그때 일어나는 변화는 정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은 이 온 우주의 중심이 결코 아니고 이 온 우주의 중심에는 오직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 외아들을 이 세상에 주셔서 자기를 자녀로 삼으셨다는 사실이 깊이 믿어질 때에 그때 그는 이제껏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고 자신의 행복이 온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모든 삶이 죄악의 덩어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제껏 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모든 삶과 존재 자체에 대해서 깊은 불결을 느끼게 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영혼의 눈의 비늘을 벗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이후로는 그렇게 해서 영혼의 비늘을 벗기면서 창조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효과가 계속 미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살아있을 때나 죽어있을 때나 지성 속에서 계속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자신은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극히 작은 피조물일 따름인 것도 부인할 수가 없고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티끌과 같은 존재일 뿐이고 결코 온 우주의 중심일 수 없고 그리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 욕망이 결코 하나님 앞에 옳지 않다고 하는 사실도 그 후로 부인할 수 없게끔 자신의 가슴속에 새겨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옳지 않은 것을 알아도 옳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나. 아닙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보면 담배를 펴는 사람들이 특히 잘 그렇습니다. 몸에 해로운데 왜 그렇게 핍니까? 그러면 그게 몸에 해롭습니다. 하지 마십시오, ‘그래 진짜 건강에 안 좋은 게 사실이구나 하지 말아야지 되겠다.’ 아니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것을 끊고 멀리할 생각을 해야지 되는데 다 그 담배의 해독의 보여주고 그 마지막의 반응이 무엇인가 하면 짧은 세상 하고 싶은 것 하다가 몇 년 죽지, 아니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하는 것입니다.
나는 미국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갑니다. 담배를 펴서 폐가 나빠져서 암에 걸렸다고 소송을 내서 몇 백 억씩 받고 그랬습니다. 아니 그게 몸에 좋은 줄 알고 피었나. 어떤 사람은 맥도널드를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왜 살이 쪘다고, 아니 처먹으니까 살이 쪘지, 아니 그것을 세살 먹은 어린애를 보고 물어봐도 그 기름덩어리 있는 것을 꾸역꾸역 먹으면 날씬이가 될 줄 알았는가. 다 바보 같은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알아도 사실은 아는 것대로 움직일 때보다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의해서 움직일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저도 사실은 목회를 하면서 잘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잘한 게 있다면 하나 있습니다. 성도들이 뭘 주든지 간에 거절하지 않고 잘 먹은 것, 그것도 하늘나라에서 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항상 그렇습니다. 내가 다른 것은 못했어도 적어도 음식을 가지고는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은 없고 모든지 주는 대로 그저 몬도가네 식품만 아니면 그저 꾸역꾸역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 좋습니다. 많이 먹는 게 안 좋습니다. 먹으면 여러 가지 잘못된 현상이 나옵니다. 그래서 배도 나오고 머리도 혼탁해지고 하여튼 안 좋습니다. 그런데 안 좋은데 알면서도 자꾸 식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신은 하나님이 이미 창조하신 일개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성에 창고 속에 차갑게 들어누워 있는 동안에는 알기는 아는데 그렇게 안 삽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한번 하나님이 영혼의 비늘을 벗겨주셔서 하나님의 그 찬란하게 비추는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한번 봄으로서 충분하지 않고 끊임없이 계속 그 영광의 빛을 보면서 무릎을 수시로 꿇으면서 정말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구나.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깊이 감동을 받으면서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앞에 무릎을 꿇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빚어지는 티끌과 같은 인간일 뿐이고 그리고 그렇게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온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없다. 해와 달과 별,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처럼 발아래 구르는 돌맹이처럼 창조세계의 한 동창생일 뿐이고 그리고 자신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는데 자신의 의가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아주 쉬운 말로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은혜를 받으니까 은혜가 자기만족이 아닙니다. 은혜를 통해서 그 은혜가 자기를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그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지 되겠다고 하는 인식을 가져다주기 위해서는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보면서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야지 하는데 그렇게 알게 해주는 훌륭한 도구가 무엇인가 하면 성경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말씀을 배우면서 견고해진 신앙이 지성이 무릎을 꿇고 이 세상에 학문들을 공부해가면 공부해갈수록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사실과 그리고 인간의 모든 학문의 지식의 세계 속에 하나님의 창조주의 신성이 녹아 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이 지적인 활동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의 비늘을 벗기심으로서 우리 신앙의 눈을 뜨게 하시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그 성령의 은혜에 힘입어서 우리들이 부지런히 지적으로 탐구하면서 그 지성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창조세계 속에 그 지식이 없으면 차마 볼 수 없었던 발산하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빛을 발견하면서 그 빛 앞에 수시로 무릎을 꿇고 감히 한 번 더 나아가서 그 찬란한 영광의 지식에 그 빛 앞에서 계속 엎드려있을 때 그때 그가 정말 하나님이 치료하신 피조물에 합당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게 됩니다.
나는 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소망도, 여러분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소망도 많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나는 여러분들을 아주 지성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 제 필생에 꿈입니다. 그런데 그 지성이 어떤 지성인가 하면 하나님과 열렬한 사랑에 빠져서 그 하나님과의 열렬한 사랑에 빠진 냉철한 지성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지적인 추구로 무지한 상태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세계에 비추는 찬란한 영광을 깨닫고 그 지성을 통로로 해서 비추어오는 그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인식하는 것만큼 자기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을 너무나 많이 사랑하고 죄로 말미암아 그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도망쳐버린 옛 자아를 끊임없이 미워하고 그렇게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이탈된 채 불행하게 살아가는 자신을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그 구속하신 능력 있는 역사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목적으로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우리들을 그 보혈의 능력으로 돌아가게 하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고 일생동안 그 사랑에 정말 불같이 뜨거운 사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 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그래서 무릎을 깊이 꿇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서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자원을 뺏으면서 살아가는 이 무지막지한 사람들과는 달리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뜨거운 사랑에 빠진 그런 놀라운 지성적인 그리스도인, 그래서 누가 창조주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어볼 때에 우리 주님을 대신해서 정말 그 명증한 언어로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담아서 진실해질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지금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그대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묻는 사람들에게 내가 왜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고 내가 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아주 새벽에 산에 맺힌 이슬과 같은 명증한 언어로 자신의 체험을 담아서 진술할 수 있는 사람, 사상의 토대 위에 견고하게 서진 쉽게 흔들 수 없는 거목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나 자신을 향해 꿈꾸고 묘목과 같은 여러분들을 향해서 꿈을 꿉니다.
그래서 이제 이번에 우리 출판부 간사도 발령을 냈고 열심히 지금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내년에 가면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구체적으로 이 기독교 신앙과 사상의 이 장엄한 세계로 여러분들을 인도하고 세우기 위해서 우리들은 불철주야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가르치고 배우는 체제를 갖추어서 그래서 여러분의 어두운 눈을 수시로 뜨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목도하고 거기에 무릎을 꿇게끔 그렇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이 둘째 사랑, 셋째 사랑도 없이 첫째 사랑 타령만 하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는 나그네처럼 어두움 속에서 살면서 빛 가운데 살았던 첫사랑의 때를 그리워하다가 소중한 세월을 한없이 흘려보내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이 지성을 통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려면 철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찬란한 영광의 빛을 비추어주심으로서 그 창조주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지성을 사용해서 그 은혜의 세계를 알게 하심으로서 피조세계 속에 깃들어 있는 신성의 영광에 충만한 것을 보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신문을 읽고 TV를 보는 시간보다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그 진리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가기를 정말 힘쓰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크게 두 번째로 이렇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하나님의 그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보게 되면 그 본체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게 됩니다. 그 하나님을 알아가게 될 때 그 지식은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이 열망은 삼중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이 열망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하나님의 발산하는 영광을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면 알게 될 수록 더 많이 그 영광을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왜 공부를 못하는 애들은 항상 공부 좀 해라, 그러면 항상 하는 말이 다했습니다. 그래도 좀 해라. 숙제 없어요. 늘 그렇습니다.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 연세가 많이 드신 은사님이 계셨는데 연로하시니까 사모님이 같이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싶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하고 싶고 사모님이니까 둘이 앉아서 마루에서 고스톱을 치고 싶지는 않으셨겠지만 그래도 좀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싶은데 그냥 머리가 백발이 되도록 서재에 앉아서 계속 책만 보십니다. 그러니 얼마나 짜증이 나시겠습니까? 그래서 핑계 낌에 이제 좀 그러지 말고 좀 쉬십시오. 그러니까 그래 좀 쉬어야지 그러면서 내려와서 누워서 또 책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모님이 아니 쉬라고 하는데 왜 그래요 하니까 그 교수님 하시는 말씀이 여보, 이 책은 쉴 때 보는 책이야. 그러면서 그 책을 뺏으면서 그 연로하신 교수님께 자기 부인이 그렇게 매일 책을 보느냐고, 평생 공부했는데 있는 것 가지고 가르치다 죽지. 그러니까 이 교수님 하시는 말씀이 여보, 천권의 책을 읽어야 한권의 책을 쓰는 것이야. 그래서 책상에 앉아서 읽는 책이 있고 드러누워서 쉴 때 읽는 책이 있어서 쉴 때는 쉬운 책을 읽으며 지식을 섭취하고 휴식이 끝나면 다시 앉아서 지식을 섭취하고 이렇게 하면서 책이 나오는 것이다. 아니 여러분들이 한숨을 쉬실 것 까지는 없습니다. 왜 남이 책을 읽는데 여러분들이 한숨을 쉬십니까?
마찬가지로 지식의 세계도 지식을 섭취할수록 자신이 정말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듯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세계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영광의 빛을 통해서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내가 옛날에는 진짜 몰랐네. 하나님 하면 그 지식은 내가 꽉 잡았다. 이제 하나님은 나에 의해서 파악됐다.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은 너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시편 73편에서 시인이 고백한대로 “나는 깨닫지가 못함이 짐승과 같사오니”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그 찬란한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더 깨닫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갈망으로 생겨납니다.
그런데 또 놀라운 게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알고 싶다고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많이 알고 싶습니다. 하고 사무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서 더 깊이 가르쳐주십니다. 애들이 몇 살 때쯤 그런지 막 말을 배울 때 엄마 이것 뭐야? 하고 물어볼 때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 대답을 잘해주어야지 됩니다. 대답을 잘못해주거나 안 해주면 아이들이 알고자 하는 의지가 꺾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엄마는 모든 것을 다 가르쳐줄 수 있습니까?
(예화: 버스 안에서 엄마와 아이가 가면서 영어로 물어보는 쉬운 말은 다 대답을 했으 나 조금 어려운 단어가 나오자 엄마가 알지 못해 아이를 야단쳤다는 이야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고자 할 때에 우리를 귀찮게 대하시거나 알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를 꺾으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간절히 기도했던 소원이 무엇입니까?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함을 보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하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지성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영광의 발산하는 빛을 보게 하시고 그것을 깨닫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계속 매달릴 때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세계는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찬송가에 뭐라고 합니까?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깊은 바다 보다 깊다
저 큰 바다보다 깊다. 자 너 닷줄을 끌러서 저 한가운데로 가보라
여러분들이 오늘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대해서 알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는 그 지식은 그 하나님의 지식을 그 넓은 바다에 비하면 두 손바닥으로 퍼 올린 한줌의 물 정도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나면 이처럼 하나님의 발산하는 영광을 더 많이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갈망이 생겨납니다. 이게 첫 번째 갈망입니다.
두 번째 갈망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고 싶은 갈망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언감 생신 어떻게 저같이 더러운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그 신성의 충만한 것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겠다니,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자신의 능력을 믿는데서 비롯되는 자만심이 가져다준 갈망이 아니라 자신 안에 주님이 충만하게 살아계심으로서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창조주로서의 영광을 나를 통해서 충분히 드러내시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과의 싸움입니다. 그것이 쉽게 이야기하면 거룩을 향한 분투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의 비늘을 벗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새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도 알고 인간이 그 피조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지성도 밝혀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피조세계 속에 깃들어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무지할 때보다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죄악 된 세상에 둘려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도 죄가 남아 있습니다. 이 둘이 서로 끊임없이 야합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지 못하도록 늘 박해합니다. 그리고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을 주로 인정하는 삶을 살기 보다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사는 것은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그렇게 살도록 자기 속에서 강력하게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자신 안에 이미 계신 주님이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들이 됩니다. 그것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자신이 정말 분투하면서 그 죄를 죽이고 그 유혹을 향해 끊임없이 유혹과 더불어서 싸우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그리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바로 거룩을 향한 분투하는 삶입니다. 성화를 위한 삶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여전히 삶의 목표가 자신의 행복인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주님을 아는 지식에 넘치는 그 능력으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불붙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 세상이 혁명적인 방법으로 바꾸어놓기를 꿈꾸기 전에 먼저 자신이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전투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알고 그 창조주의 위대한 능력을 알고 그 창조의 목적을 이탈해버린 불결한 죄인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그 뜨겁고 열렬한 사랑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불결과 죄, 이 세상에 많은 유혹들로 인해서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그것들과 더불어 싸우며 분투했던 것은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충분히 영광을 드러내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통해서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경험하고 무릎 꿇게 되기를 그래서 궁극적으로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갔던 것처럼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져다준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런 열망 속에서 살아가야지 되는 것이 존재의 목적입니다.
삼중적 갈망의 마지막 세 번째로는 세상을 향한 열망의 갈망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자신이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영광을 경험하고 알게 되면 자신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세계가 그 창조주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던 죄 없던 그 창조의 시기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갈망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비로소 그때 나를 하나님이 구해놓으신 것이 지옥에 안 보내시고 천당에 가게 위해서 구해놓으신 그 정도가 아니라 그냥 나를 구원해놓으신 것은 그냥 내 죄나 회개하고 그리고 그냥 나 자신이 이기지 못해서 겔겔 거리고 살아가는 이런 삶을 위해서 나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 나를 통해 역사하셔서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온 피조세계가 무릎을 꿇게 하는 이런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서 나를 도구로 택하셨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사명입니다. 그것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들이 죄와 하나님의 은혜 이런 것들에 대해서 설교를 많이, 개인의 영적인 생활을 어떻게 이 치열한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그 거룩한 신자가 될 수 있는가를 많이 공부하고 은혜를 받으면서 자칫 잘못하면 신앙이 아주 내제적인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뭔가 하면 아주 소아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들여다보면서 아이고! 죄가 또 있네. 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항상 자기 자신만을 들여다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죄와 은혜의 원리들을 터득하고 자신이 어떻게 자신 속에 있는 죄와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가 하는 그 지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자기를 죄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이 끊임없는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시고 승리하게 만들어주심으로서 자기를 통해 뭘 이루시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한 창조의 세계의 우주적 전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지만 고인 물은 썩습니다. 계속해서 아무 것도 섬기는 것이 없이 자기 자신만 들여다보고 어 죄가 있네, 털어냈네, 또 묻었네, 이게 며칠이나 갈 것 같습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주님이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정결케 하시며 그래서 우리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갔으면 또한 우리는 열심히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된 이 세상이 내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간 것처럼 동일하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신념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어떤 마음가짐이어야지 되는가 하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가,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 온 우주의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최고의 가치이고 내 인생의 가치는 그 창조주 하나님이 원하시는 창조의 질서를 온 세계가 회복하는 그 일에 희생함으로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내 인생에 참된 가치다.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선교라고 하는 퍼스페티브가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끊임없이 질문해야지 되는 게 무엇인가 하면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로 내가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나만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창조의 원래의 질서로 돌아가지 않은 이 비질서와 더불어서 피 흘리기까지 싸워온 삶이 바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모든 피조물들이 타락과 함께 그 창조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아름답고 찬란한 광휘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이 관건을 누가 쥐고 있는가 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습니다. 관건을 인간이 쥐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그 관계가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핵심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아담이 타락하고 범죄 했을 때 창조세계가 그 창조의 영광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괴기영화에나 나오는 것 같은 아름답던 정원이 순식간에 저주받은 정원으로 변한 것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그랬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래도 오늘 우리들이 아름답다고 그러고 멋있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원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인간의 타락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천사의 타락 때문에도 일어나지 않는 이 일이 인간의 타락 때문에 그런 저주가 오게 되었고 창조세계에 아름다운 영광을 일시에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는 그 일을 땅이 도와주었습니까, 구름이 도와주었습니까, 아니면 나무가 도와주었습니까? 누가 도와주었습니까? 인간이 스스로 걸어가서 범죄하고 타락했는데 그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세계가 이 창조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이어서 태어난 수많은 자손들이 모두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한 채로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떻습니까? 이 모든 피조세계를 창조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도록 돌려놓기 위해서는 관건이 되는 것은 인간이 먼저 하나 하나가 변화되어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때 이 세상이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거기서 선교의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는 눈물을 흘리며 복음을 전해도 믿지 않는 강퍅한 죄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이런 죄인들이 있습니다. 창조의 목적이 무엇이고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끊임없이 알려주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아니하고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고집스러운 죄악의 길을 돌이키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누군가가 와서 하나님이 창조의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우리 인간은 그 손으로 지어진 아주 비참한 피조물일 따름이기 때문에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십자가의 보혈을 힘입어서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야지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줄 때에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보다 더 많은 가난한 마음으로 애통하며 가슴을 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중국은 들어갈 때는 기분이 좋게 들어가는데 나올 때는 항상 우울해져서 나옵니다. 왜냐하면 너무 너무 할일이 많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많은 젊은이들이 정말 은혜를 받고 중국의 선교를 위해 헌신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너무 할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돌아올 때는 항상 마음이 아프고 내 딴에는 분투하면서 목회를 하고 산다고 하지만 이렇게 살아서 어떻게 주님을 뵈올 수 있을까?
이번에 제가 간 교회는 교회에 한 200명 모이는 한인교회인데 묘족을 선교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중국에 한 오십 몇 족이 있는데 그 중에 묘족이라고 가장 뒤쳐진 족이라고 봐야지 됩니다. 그런 족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쪽 지방에 내려가면 얼마나 가난하게 사는지 그 산간 지방에 국민소득을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움막을 쳐놓고 가난하게 사는데 이 사람들이 일평생 한번도 세수를 안 한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피부색깔이 사진에 보니까 까마면서 윤기가 났습니다. 탄광에서 나온 사람들처럼, 그 지대가 석탄 같은 게 나오는 지대가 되어서 물이 없습니다. 먹는 물은 저 산을 몇 개 건너서 그래서 그 먼데서 간신히 물지게를 지다가 먹고 사는데 몇 십 년째 그렇게 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거기를 교회를 세운다고 그러면 중국에서 허락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지혜롭게 학교도 없으니까 수십 년 동안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버려진 사람들입니다. 거기에다가 학교를 세운다고 하니까 정부에서 싫다고 할 리가 없습니다.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세워놓으면 선생을 보내줄 줄 알았는데 선생도 안 보내고 너희들이 보내고 월급도 직접 줘라. 물론 그 선생님들은 이제 정부에서 교원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냅니다. 그래서 거기다가 학교를 지어놓고 선생님 네 분인가를 보내고 그리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멀리 떨어진 거기서 돈을 들여서 파이프를 연결해서 학교마당에다 큰 탱크를 만들어놓고 물이 펑펑 쏟아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제 거기서 물을 길어다가 밥을 해먹고 세수를 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하고 교회 식구들이 학교개교하고 하니까 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예수를 은밀하게 전해야지 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나와서 하트를 그리면서 찬송가를 부르면서 영접을 하더랍니다. 그러니 너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랬더니 100년 전에 선교사 두 사람이 거기서 순교를 한 것입니다. 100년 전에 서구 선교사 한사람이 와서 강도에게 습격을 당해서 칼에 찌려 죽었습니다. 그 다음 선교사는 그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아침에 문을 열어보니까 방에서 얼어 죽었다고 합니다. 그게 마지막 끝난 게 100년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100년 동안 너무 오지이기 때문에 아무 선교사도 들어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교회당도 없고,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100년 동안 선교사도 그 후에 한번도 안 들어간 그 동리에서 예배당도 없고 그런 교회의 조직도 없는 그 지역에서 선교사가 순교하고 100년이 지났는데 아무도 와서 이후로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없었는데 거기에서 신앙이 100년 동안 전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 자신들에게 학교를 지어주겠다고 오는 그 분들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알자 모두 하트를 그리면서 묘족말로 찬송가를 불러주었다고 합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너무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는 얼마나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은혜를 많이 받지만 그리고 항상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 산에 올라가서 찬란하게 변화되신 예수님의 모습,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있으신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다 우리 초막 셋을 짓고 살겠습니다. 이랬던 것처럼 그때 그 산 아래서는 귀신들린 사람들이 고통하고 괴로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도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냥 여기 이렇게 나와서 말씀만 듣고 눈물을 흘리고 은혜 받고 막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았으면 그 흐르는 눈물을 씻고 이 세상에서 전사처럼 살아야지 됩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하나
괴론 세상에 할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정말 오늘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이 고민과 괴로움들 중에 사치스러운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도 주님의 형상으로 빚어져서 이 땅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창조주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얼마든지 빛 가운데로 살면서 창조주 하나님께 굴복하며 영광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데 자신이 누구에게 복종하고 어떻게 그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할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고통가운데서 주님을 대적하며 사는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누가 이들에게 가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리고, 누가 이들에게 가서 우리를 창조주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유일한 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서 전해줄 수 있겠습니까?
발산하는 영광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여러분과 제가 아니면 누가 그들에게 갈 것입니까? 누가 일그러진 채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대항하며 살아가는 이 불신하는 세상과 맞대결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 창조주를 알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창조주이신 주님은 세상을 내려다보시면서 당신이 창조하신 목적과 의도대로 그렇게 존재하지 않은 세계를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이 바로 그 모든 무질서의 원흉이고 그 인간이 바로 하나님을 젖혀 놓고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자신이 이 온 우주에 있어서 행복해지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짓밟고 창조의 목적을 왜곡하면서까지 성취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하는 그 오만한 인간을 보시는 창조의 원 저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또 그렇게 하면서 인간이 행복할 수 있습니까? 결코 행복하게 살아가지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이런 세상에 대해서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그렇게 창조의 목적을 이탈한 채 존재하는 세상, 그 교회들을 다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심판을 통해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고, 하나는 사랑의 감화를 통해서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강력하게 심판을 경고하시면 그 심판의 두려움을 보면서 하나님의 그 위대한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911 사태가 났을 때 그것도 참 공교로운 게 다 부서지고 철골 하나가 날아왔는데 땅에 꽂혔는데 십자가입니다. 아직까지도 거기에 보관했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가니까 쌍둥이 빌딩이 싹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 십자가가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온 미국사람들의 마음속에 커다란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돌아가게도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정말 간단하십니다. 왜 당신을 거역하고 대적했던 인간들을 쓸어버리시고 그리고 그 효과로 돌아올 사람들은 뉘우치면서 돌아오게 하시면 한방에 이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시고 기다리십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주인줄도 모르고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들 가운데는 심판에 그날까지 하나님을 대적할 인간들도 있지만 그 대적들 중에는 그 묘족처럼 그렇게 가슴을 찢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고 100년에 한사람씩만 선교를 가고 그리고 거기서 죽어도 100년 동안 그 복음을 보존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그 안에 선택한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악인의 번성함을 보고 창조의 목적을 이탈한 채 살아가는 그 배역 무도한 무리들에 그 반역과 패역을 보면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구원의 때를 위해서 그들의 모욕을 참으시는 것입니다. 기다리십니다.
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지 되겠습니까? 나는 정말 우리가 더 많이 헌신해서 그래서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서 우리가 갈수 있는 곳에는 우리가 가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어둠 가운데 울고 있는 자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보이고 그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고 우리가 갈수 없는 곳에는 사람을 보내어서 그래서 거기에 가서도 우리 하나님의 창조주의 위대함과 그리고 우리 인간의 참된 행복이 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우리가 갈수 있는 곳은 우리가 가야지 되고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는 누군가가 우리의 도움을 받아서 거기로 가서 예수 사랑 전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나타내서 여기서 목이 터져라 외쳐도 들을 수 없는 그곳에 우리의 심정을 가지고 건너가서 우리를 대신해서 피를 토하듯이 외쳐줄 수 있는 누군가가 보냄을 받아야지 않겠습니까? 왜 주님이 참으시니까 참고 정말 기다리고 계시니까,
뿐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고 주님이 창조주이심을 알게 된 사람들 중에 그 창조의 목적으로 이탈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빛의 자녀들이면서도 어둠 속을 걷고 창조주 하나님을 기뻐해야 할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여 내가 숨었나이다.” 라고 말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신자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고 여러분들 가운데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한번 당신의 심판을 행하시고 위엄을 보이시면 아마 그 옆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그런 은밀한 죄를 버리고 빛의 자녀이면서도 어두움을 걸어가는 그 이중적인 삶을 버리고야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참으십니다. 왜 당신의 선택한 자녀 중 단 하나도 그런 멸망과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십니다.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께 맡기신 자중 단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우리 예수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당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끌려 가시면서도 모든 제자들은 흩으셔서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끊임없이 그 주님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그래서 주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에 열매 맺지 못하는 그 무화과나무 같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땅만 버리고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언젠가는 이들이 내가 가르쳐준 대로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오고 그 안에서 나에게 돌릴 그 영광이 지금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고통보다 훨씬 클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이 기대하시면서 우리를 돌이킬 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 이 세상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고 더욱이 스스로 그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이탈해서 죄를 짓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도 하나님이 온 땅과 하늘위에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인내하시면서 기다리십니다. 오래 참으시면서 그는 자기의 백성들이 창조주인 하나님 자신을 알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지식과 마음과 행한 삶이 모두 일치해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그래서 그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창조의 영광의 신성의 충만한 것을 온전히 드러내시고 그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이 온 세상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꿈꿔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정말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면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들의 그런 회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피조물들인 우리들은 우리 때문에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하는 완전한 일치의 삶을 살기를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깊이 뉘우치고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선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오늘 이 시간에 창세기 1장 1절을 가지고 생각해볼 제목은 선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몇 시간에 걸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이 우주와 창조의 세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때에 가진 목적에 부합한 상태에 있는 그것이 바로 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우주에 세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각자각자 존재하고 그 개별적인 것들을 모두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연결시키셔서 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에 충만한 영광을 흘려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의 광휘 ‘splendor’를 드러내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 바로 창조의 목적이었고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바라고 있는 상태가 선한 상태라고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처음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세계 속에서 잘 드러나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완성된 상태와 피조물이 행복을 느끼는 상태가 완전하게 일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충만하게 당신의 심정을 드러내시는 그 상태와 인간이 자기 그 자리에서 한없는 만족을 누리는 상태가 동일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과 인간이 행복하다는 것이 절대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죄가 들어오면서 분리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무슨 뜻인가 하면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인간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자신도 기뻐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지를 가지고 이 세상을 천지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붙들고 계시고 그것들을 움직이시고 그것들을 통치하시는 이 모든 것들이 인간에게 너무나 행복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이해와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천지들을 피조물들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되고자 하는 그 이해와 그 의지, 이것과 정확하게 일치했고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기쁘게 복종했고 그리고 그 복종 속에서 어떤 고통도 인간이 느끼지 않은 최고의 행복한 상태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 죄의 근본적인 정체는 온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고 그리고 가치의 최고의 기준이 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그가 온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라 아니라 자기라고 생각했을 때 이미 하나님이 창조하신 의도대로 가치 판단을 내릴 능력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하는 전제 위에서 자신의 행복이 모든 피조물의 절대 가치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그가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창조의 목적에 돌아가는 그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엄청난 갈등이 깃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이탈되고 도망가는 그 치열한 반역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행복해보려고 애를 썼고 또 자기중심으로 이 온 우주를 생각하려고 애써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죄악 된 삶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참된 가치, 인간이 참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거기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해놓으신 하나님의 의도였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가장 커다란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창조의 불변하는 목적이 바로 인간과 모든 피조물의 선악을 재는 기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원래에 창조해놓으신 이 창조세계의 목적,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님이 가지셨던 선한 의도와 계획, 그것이 바로 이 선의 궁극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고 그 선이 충족되는 곳에서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연말이 다가오면 교회의 직원들과 교역자들은 정신없이 분주해지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내년도를 준비해야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6-7월경부터 저와 교역자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내년도에 대한 계획들이 머릿속에서, 회의를 통해서 구체화되고 완성이 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세워지고 공간들이 재배치되고 교회의 시스템들이 새로이 구축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이곳저곳을 손보고 또 어떤 공간들을 새롭게 고쳤습니다. 고쳐놓고 보니까 너무 좋습니다. 아!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생각보다 훨씬 돈도 덜 들어가고 깨끗하게 고쳐졌습니다. 그런데 아주 만족스럽고 참 좋다.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6월부터 세워놓은 종합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계획에 맞게끔 성취가 되었기 때문에 만족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이 창조한 세계에 하나님이 목적을 두셨는데 그 목적은 바로 당신자신의 영광을 이 모든 피조세계 속에서 온전히 드러내시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그것을 드러내는 상태가 선한 상태이고 그 선한 상태 속에서 인간과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빛 비추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궁금한 게 이것입니다. 선이 바로 그런 것이라면 선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선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 창조의 목적을 구현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선한 삶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선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행동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장기를 끊임없이 떼어주고 마지막에 죽을 때에 많은 재산을 이 세상에 기탁하고 죽으면 우리는 선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는 선한 삶을 살기 싫어도 남들은 그런 선한 삶을 많이 살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이고 또 생각입니다. 그런 것들이 어떤 경우에는 상당부분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 선이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선은 단지 나 하나가 여전히 이 온 우주의 중심이 되고 또 가치의 기준이 내 만족이 되는 상태에서 베푸는 부분적인 선, 이웃을 위한 어떤 해택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존재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온 이 창조를 이루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하나님이 이 모든 창조세계의 중심에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인간이 선택할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향해 적대적이고 도전적인 존재로 태어납니다. 인간은 본성 속에 이미 하나님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중심이 아니라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 되기를 원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복종시키며 살아가려고 하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인간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인간이 어느 순간에 이 온 우주의 창조주는 하나님이시고 그 창조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혁명적인 변화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오직 진리를 사용하셔서 성령님이 오셔서 역사하실 때에만 그 창조주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창조주 하나님이 온 우주의 중심에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창조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리고 이 온 우주에 있어서 하나님이 중심이라는 사실을 인정을 해야지만 비로소 선한 목적으로 돌아가는 삶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삶은 부분적인 가치가 있는 자기가 여전히 온 우주의 중심이 된 상태에서 행하는 선이 아닙니다. 인간을 향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일먼저 피조물이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다만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지은 피조물임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피조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가장 커다란 의무이고 자기도 그렇게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다른 사람도 그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바로 선한 삶입니다.
그래서 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아주 명료한 지성이 필요합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리고 이 세계가 하나님의 어떤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으며 그리고 그 많은 창조된 피조물 가운데 한사람인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는 그 명료한 지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깊이 자신이 한낮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나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정해놓으신 내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불신앙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의 창조주 되심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때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위대하심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도저히 죄로 말미암아 상실해버린 창조의 목적으로 내가 돌아갈 수가 없는데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나를 거듭나게 하셔서 이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주셨구나.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 앞에서 뭘 느꼈습니까? 그 십자가 앞에서 느낀 것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 십자가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과 나를 그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해 못 박히신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이외에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은혜의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창조의 목적을 따라 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포기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한번은 알았었는데 포기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알기는 하지만 여전히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 되고 싶고 그리고 자기가 살아가는 인생이 정말 자기에게 만족을 주는 세상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만족되기를 원하는 욕구자체가 그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굴복된 욕구가 아니라 그 목적을 거스르는 욕구이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그 창조에 부합하는 욕구는 아무리 무한대로 가져도 문제가 안 됩니다.
내가 정말 진리의 말씀을 더 많이 깨닫고 싶다. 아무리 그런 욕구를 많이 가져도 문제가 될 리가 없습니다. 내가 더 많이 기도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고 싶다. 주님이 나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지만 나는 아직도 만족할 수 없고 나는 이 정도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 가지고는 안 되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탐욕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주님을 위해서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다. 불속이라도 들어가서 물속이라도 들어가서 주님의 사랑을 외치고 싶다. 이 열망이 아무리 커도 그것은 탐욕이 아닙니다. 왜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가지고 계신 욕망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런 것이 없어서 하나님이 근심이십니다.
그러나 신앙이 떨어지면서 자신 속에 일어나는 죄의 작용 때문에 창조의 목적을 벗어나는 욕망을 자꾸 갖는 것입니다. 그런 동안에 인간은 점점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해지고 창조의 목적을 이탈해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결과가 어떤 것인가? 그 결과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땅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사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온 피조세계를 직접 다스리는 실질적인 제왕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면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도 자기가 돌보고 있는 이 모든 피조물과 같은 한 일부분일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뭐 나쁜 것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창조의 목적을 이탈하는 어떤 욕망을 가슴에 품기 시작했을 때 자기의 위치가 전혀 만족스러워지지 않았습니다. 뱀의 유혹에 의하면 네가 이 선악과를 따먹으라. 주님은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거짓말이다. 따먹으라. 그리하면 네 존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니까 갑자기 하나님이 당신 마음대로 정해놓으신 목적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것, 그래서 창조세계의 일부가 되는 것,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만족할 수 없게 되자 자신 속에 강렬한 욕망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었습니다. 더 많은 행복을 얻고 싶어 했지만 그것은 창조주가 정해놓으신 그 창조의 자리에서 이탈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놀라운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선택했지만 들어온 결과는 아담과 하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결과가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는 노도와 같이 물밀 듯 밀려들어와서 온 땅을 뒤덮게 되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는 모두 그 빛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던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어졌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던 아내와의 관계도 박살이 났습니다. 자신에게 순종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생각하며 복종하던 자연은 이제 인간을 하찮은 피조물로 취급하기 시작했고 온 피조세계 속에 흐르고 있던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결속들은 산산조각이 나고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이 창조의 세계를 망가트려놓은 그 영원한 형벌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는 죄인의 위치에서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그분의 손으로 티끌로부터 만들어진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피조물이 범죄 해서 주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탈해서 살아가며 불행해졌었다. 그런데 그 불행한 나를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 사실을 내가 현재적으로 마음에 간직하면서 살면 그 창조의 목적을 이탈할 수가 없습니다. 이탈하면 즉시 후회하게 되고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해드린 것에 대해서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조금씩 벗어나다가도 다시 창조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마음속에 많은 쓸데없는 욕망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어떻게 그 욕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늘 말씀드리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돈벌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돈 많이 벌려고 애를 쓰는데 버십시오. 버시는데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봐야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없다고 하면 물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칩시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그 돈 가지고 여러분들이 정말 술 한 병에 몇 천 만원씩 주고 먹고 이런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수 있습니까? 그런 심장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한번 나와 보십시오. 내가 파내주겠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 그렇습니다. 저는 그렇게 돈을 많이 벌어보지도 못했지만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어차피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여러분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돈이 있다고 칩시다. 안 믿는 사람은 그것 가지고 극단적인 자기만족을 위해서 미친 듯이 살아갑니다. 왜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만족이 선이라고 생각하니까 하나님의 영광하고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돈을 가지면 무슨 짓이든지 다 합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위력이 있는 게 돈입니다. 그 돈 가지고 뭐든지 다 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삶을 세계에 있는 부자들이 살아갑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신앙이 없고 정신이 바로 박히지 않은 사람들은 그 돈을 가지고 미친 듯이 살아갑니다. 모든지 이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렇게 못합니다. 절대로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돈이 많다고 해서 아주 분에 넘치는 그런 너무 사치스러운 삶을 살수 있습니까? 살수 없습니다. 왜 첫째는 하나님이 그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이고, 또 교회에서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가 찾아가서 당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 신문에 나왔는데 어느 지체가 간증을 했는데 설교 시간에 별로 설교를 잘 못 들었는데 마지막에 딱 하나만 생각이 났답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게 계속 자기를 찌르더랍니다. 줄거리가 뭔지 모르지만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래서 돈 많이 벌었다. 아니 남자가 돈을 많이 벌면 그것 가지고 바람을 필 것입니까? 아니면 요정을 다닐 것입니까? 아니면 무슨 호화스러운 세계 여행을 갈 것입니까?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쓸데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래도 얘기하는 것은 그래도 많이 벌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남을 주어야지 되니까.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창조의 목적대로 안 씁니다. 그런데 신앙이 있는 여러분들은 씁니다.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그렇게 씁니다. 그러니까 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중심이 되는 이런 삶을 예수 믿고 난 다음에도 사는 것은 당장은 행복해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행복할 것 같습니까?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기 고집대로 방탕하게 살수 있습니다. 살아보십시오. 죽으려면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나. 한번 보십시오. 그것을 내버려두는 사람들은 죽기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죽기까지 그냥 하나님이 심판에 이르도록 내버려둔 사람도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그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하나님이 그렇게 내버려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주위에서 보십시오. 특별히 가장 걸리는 문제가 물질의 문제입니다. 이 물질이 그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제일 먼저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것이 물질이고 그 물질을 통해서 당신의 신성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 물질을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사용하지를 않습니다. 그 이면에는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그 물질을 도구삼아서 내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이 모든 가치는 나를 만족시키는 것에 있다. 라고 하는 나의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된 사상을 실제적인 삶 속에서 구현하는데 자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게 젊음, 지식, 또 물질 이런 모든 것들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거기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 쏟아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교회의 출석을 하든지, 부정하게 번 돈 가운데 일부를 이웃을 위해서 기탁을 하든지, 가끔 자식 결혼식 될 때가 되어서 끌고 나와서 교회에서 목사 주례를 받든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온 우주에 중심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 피조세계의 모습이 우리의 궁극적인 가치라고 말할 때 이것은 그냥 사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소중하다는 거기에 모두 다 자기를 집중시키고 그 소중한 것을 중심으로 우주의 중심인 것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의 모든 구도들이 재편되는 것입니다. 그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선한 삶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이 계속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창조의 목적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목적대로 전심으로 자신의 삶을 다 모아서 그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온 우주에 중심이시고 자기는 그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에 의해서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그냥 그런가보다. 그렇다고 그러더라. 예수 믿는 사람 그렇게 말해야지, 하고 여기다 집어넣고 그 다음에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자기는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은 그렇게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삶이 뭘 가져다주는가 하면 끊임없는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를 짓게 되고 또 죄를 지어서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왜 가끔 나와서 나 좀 용서해주고 나 좀 사랑해달라고 울부짖는데 그것은 진실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삶의 방향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용서해주셔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시면 그 평안을 힘입어서 다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는 삶에 힘을 보태줍니다. 그러니까 삶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면서 또 하나님께로부터 사랑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중간지대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가, 세상을 사랑하는가. 창조주 하나님이 내 인생에 중심자리에 오셨는가, 내가 중심에 있는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양단간의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쌍한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주이시고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중에 그것을 아니라고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 말해보십시오. 그러면 여기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세상에 가서 자기 좋은 대로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짐승처럼 미친 듯이 자기만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마지막에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각보다 커다란 고통과 견디기 힘든 영혼의 공허감 이외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남의 이야기 말고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를 예를 들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았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어두움 속을 해매면서 살았던 날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불순종하면서 어두움 속에서 살았던 날들이 있는데 신앙으로 돌아온 다음에 그날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의미가 있습니까? 나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고통 하다가 죄가 주는 떡 한 덩어리 먹고 해죽거리며 웃다가 그것이 끝나고 나면 다시 죄 때문에 더 커다란 고통을 당하고 아파하면서 짐승처럼 괴로워하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다 주님이 건져주셨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게 인생이 가져다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래서 성경이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간다고 말했습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시리즈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결단을 해야지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이 모든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을 고백을 하든지, 아니면 나는 창조주가 필요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우주의 중심에는 내가 홀로 있을 뿐이다. 그렇게 고백을 하든지 양단간에 결단을 해야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하나님과 죄 사이에서 방황하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사는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선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선한 삶이고 또 그런 사람이 바로 선한 사람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들이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은 또한 그럼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삶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창조세계 속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싶어 하셨던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그것이 인간의 존재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선한 것이라고 하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온 우주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때에 비로소 창조의 원래에 광휘 splendor 온전히 드러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 창조의 광휘를 온전히 드러내게 되는 그때가 되기 전까지는 사실 하나님의 창조주의 영광을 이 세상이 인정하는 모든 일들이 인간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먼저 믿은 우리들이 존재에 있어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야지 되고 생활에 있어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야지 된다고 하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성화의 영역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존재에 있어서 그 사람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인격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충만한 신성,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이 피조물을 창조하셨을 때에 그 피조물속에 하나님의 신성이 깃들였듯이 인간의 존재와 이 사람이 밖으로 쏟아 내놓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악인은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고 그 다음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을 내느니라. 쉽게 요약을 하면 악인은 악을 행하고 선인은 선을 행한다. 그런데 그것은 마음속에서 쌓여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악하던 사람이 선하게 변화되어갈 때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것들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어떤 죄를 짓게 되면 그러면 여러분 안에 죄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선한 일을 행했는데 그 선한 일을 행한 이유는 여러분 속에 선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삶을 보면 선과 악이 50대 50의 비율로 쭉 나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게 선이 지배적이거나 악이 지배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으로 돌이키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존재가 그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으로 변화되어야지 됩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핵심에는 영혼의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드신 가운데 달란트의 비유가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남겼는데 다섯 달란트를 맡을 종을 향해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말씀하셨고 한달란트를 그냥 묻어두었던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착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내면의 존재적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다음에 충성되다 고 하는 것은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외적 삶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또 악하다고 하는 것도 역시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게으르다고 하는 것도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만약에 분리될 수 있다면 아마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착하나 게으른 종이여, 악하지만 충성된 종이여,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분리가 안 됩니다. 그래서 악한 종에게서는 게으른 삶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그리고 착한 종에게서는 충성된 삶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분리가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머리에다가 빨간 띠 두르고 데모한다고 해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변화를 받고 새사람이 되어가야지 됩니다. 그런데 신자들의 경우에는 어떤 신학자의 표현에 의하면 거듭남,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남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에 등뼈가 부러져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사단의 등뼈가 부러져버리고 그래서 펄펄 뛰면서 신자들이라도 그를 삼킬 자를 찾도록 그렇게 열렬하게 역사하던 그 마귀가 등뼈가 부러진 것입니다. 그리고 거의 반신불구가 되어서 침을 흘리면서 바닥에 질질 기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손에 들어오는 죄인들을 잡아서 역사하고 그리고 그 죄인들을 놓지 않고 신자들이라고 해도 삼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똑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죄가 그 마귀처럼 펄펄 뛰면서 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 그 순간에 등뼈가 부러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엎드려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거듭난 우리의 새사람이 그 마귀를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 등뼈가 부러진 이 반신불수가 된 이 죄의 세력을 머리를 짓밟고 그리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서 거의 영향을 못 미치게끔 그 머리를 깨고 짓밟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창조하신 새 성품을 따라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수 있게끔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안에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부패한 본성이 그 창조주 하나님처럼 자기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자꾸 기대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에 굉장히 커다란 만족을 느끼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암시를 계속 자기 안에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이 죄의 세력들을 머리를 깨트리고 짓밟았던 발들의 힘이 점점 빠지게 만들고 이 죄가 다시 힘을 얻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죄의 계획은 우리를 점점 악한 사람으로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지 않고 그 목적에 도전하는 사람으로 살고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신자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서 자기가 제법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오해하게 함으로서 사실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아가는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고 싶은 것이 죄의 계획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어야지 되는가 하면 변화되어야지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 하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그런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그것을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은혜를 통해서 그 사람을 새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래서 처음 거듭날 때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아무리 많고 세상의 지위가 많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승승장구 하고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창조의 목적을 이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물질과 이 세상의 명예 같은 것은 그 자체 안에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고 이탈되게 하는 그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매개체일 뿐입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창조의 중심으로 삼으려고 하는 그 욕구가 우리 안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누구도 거기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있습니까? 누구든지 자유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빛이 되어서 우리에게 우리가 그 창조주 하나님 앞에 정말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피조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저는 꽃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정말 아름다움을 뽐내던 꽃일수록 시들어갈 때 그 모습이 너무 흉합니다. 왜 꽃 중에서도 보면 꽃인지 아닌지 그렇게 특징이 없는 그런 꽃들이 있습니다. 들에 핀 들국화 같은 것, 이런 것들은 시드는 모습이 그렇게 사람을 흉하게 느끼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장미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또 향기를 발하던 백합은 특히 그렇습니다. 시들어갈 때 그 모습, 너무 싫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미친 듯이 살아가는데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다 일시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의 욕망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 이 세상의 영광을 추구해서 어느 정도 그것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너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 건강한 것도 너무 뽐내지 마십시오. 건강한 것도 나중에 나이가 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오히려 젊었을 때 펄펄 날던 사람이 나중에 연약해지고 나면 사람들보기에 너무 측은합니다. 호랑이같이 펄펄 뛰던 인간이었는데 지금 저렇게 등뼈 부러진 고양이 마냥 그렇게 사는구나. 젊었을 때부터 골골하던 사람은 아이고, 그래도 아직도 기력이 꽤 남았네.
또 젊었을 때 얼굴이 아주 예쁜 것도 너무 자랑하지 마십시오. 왜 아니 내가 못생겨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자랑할 게 못됩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유명한 배우들이 자기의 말년을 매스컴에 공개를 안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젊었을 때 그 아름다운 이미지를 전 세계의 팬들의 가슴에 그냥 남겨두고 그냥 사라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이지 이십대 때 꽃 같은 아름다움이 사십대에 시들고 오십대에 변질되고 육십 대 칠십대 그렇게 망가져가는 그 과정을 모두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말 아름답던 머리 속에 남았던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도 청소년 때 그렇게 밤이면 잠 못 이루게 하던 그런 배우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야 나를 알지도 못하지만 나는 아무튼 그 어렸을 때 그랬습니다. 이름을 대라면 한 열 대명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가끔 늙은 모습이 나오면 내가 싫습니다. 그리고 너무 비참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원래 못생긴 사람은 좀 낫습니다. 왜 별로 젊었을 때도 특징이 없었는데 나이 드니까 조금 특징이 없구나. 그러니까 그게 그냥 젊어서는 못생겨서 못생겼고 나이가 들어서는 못생기고 그러니까 그렇게 크게 인간으로 하여금 이렇게 허무함을 느끼게 만들지 않습니다. 저 같은 그런 경우가 그런 점에 있어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보고 그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어쩌면 그렇게 하나도 안 변하시는지, 해서 내가 무슨 소리인지 안다. 내 마음속으로, 내가 무슨 뜻인지 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저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또 낫지 않아도 말은 그렇게 해야지,
그러니까 하나님 없이 추구하는 영광과 이 세상의 번영이라고 하는 것은 그 꽃이 시들고 나면 더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정말 비참해집니다. 여러분, 인간이 죄를 찾아갈 때도 그 사람이 추해보이지만 죄에 의해서조차도 버림을 받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더 비참해집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이기는 방법은 끊임없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의 목적대로 살게 하시고 그 창조의 계획을 좇아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 은혜에 의해서 우리의 속사람이 점점 더 창조의 원래에 의도하셨던 그런 존재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하게,
이 세상에 임금들이 꽃으로 꾸몄을 저 황금의 면류관은 광채를 잃겠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모두 이슬과 같이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정말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이해한 사람의 특징이 있는데 그 사람의 가치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 거룩 속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실제의 삶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점이 무엇인가 하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 속에 어떤 부분이 아니라 전 포괄적인 삶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이 가만히 이렇게 차렷 자세를 하고 부동자세로 이렇게 전구처럼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연결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피조물들은 끊임없이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비록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살았지만 여전히 먹을 것을 먹고 그리고 활동하고 부부생활도 하고 그리고 뭔가 끊임없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를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영광을 드러내는 상태를 유지하고 더더욱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동을 해야지 되었습니다. 그 명령이 바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고 그것들을 다스리라.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당신의 영광을 계속해서 드러내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그 사람이 살아가는 이 아담과 하와의 모든 삶이 다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 속에 맞물려 있었지 어떤 삶이 따로 이렇게 구획이 지어져서 그런 삶과 안 그런 삶이 따로 구분이 지어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죄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예배도 따로 생기게 되었고 또 신앙과 실제의 삶, 무슨 그런 구분이 생기게 되었지 처음에는 전 포괄적인 삶이 모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삶 이었습니다. 모든 삶이 하나님을 충만하게 의식하고 그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도 그런 모든 삶을 포괄하는 그 속에서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중적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십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거짓말하면 안 되고 회사에 가서는 거짓말하고, 교회에서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정신으로 하나님께 경배하지만 가정에 가서는 폭력을 휘두르고 그리고 제멋대로 살아가고 이런 식의 삶, 이런 것은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온 세상에서의 중심에 계시다고 하는 그 사실을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 앞에 이루어질 수 있는 삶이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심으로 우리에게 회복시키시고 싶으셨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온전히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칸막이를 치고 살아가는 이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만약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죄악 된 삶을 살았으면 교회에 와서 깊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고 그 새사람이 되고 회개했으면 그렇게 변화시켜주신 하나님의 그 변화의 은혜를 가지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결심한 그 결심을 따라서 살아가야지 됩니다.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이동하면 이동하는 그 경로를 따라서 창조주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삶을 여러분들이 살아야지 됩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쳤는데 그 구약교수가 들어와서 창조에 관해서 답을 쓰라고 그랬더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러면서 답안을 쭉 썼습니다. 그래서 A학점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 자연과학개론시간에 와서 그 교수가 답을 쓰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예수를 제대로 안 믿는 사람인데, 일반 과목이니까, 공통과목이니까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썼더니 전부다 진화론을 쓰고 나온 것입니다. 신학생들이,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너희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 아냐. 그러니까 김남준 교수가 문제를 냈을 때는 하나님이 보신다고 생각하고 그 자연과학개론 교수가 문제를 냈을 때 교수가 보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네 입장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가, 아니면 진화했는가. 뭔가 이것입니다. 네가 만약에 진화했다고 믿으면 그러면 내 답안에도 진화라고 써야지. 그리고 창조했다고 믿으면 네가 그 과목 때문에 낙제를 할지라도 선생님이 몰라서 그렇지 세상은 창조된 것입니다. 그리고 써야지 되지 않은가. 설마 그것 하나 틀렸다고 그래서 네가 낙제를 당하겠는가. 설마 낙제를 당한다고 그래도 그 학교에서 너를 쫓아낸다고 그래도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모두 내려다보고 계시는데 하나님이 창조한 게 아니라 세상 홀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답안을 써내려갈 수가 있는가. 세상에서도 그런 사람을 쓸개 없는 사람이라고 그러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고도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실제의 삶에 있어서 진짜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안 계셨으면 좋을 뻔 그렇게 느껴지는 그런 삶을 여러분들이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교회에 가두고 자기는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 사는 그런 삶이 여러분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죄와 고통 이외에 무엇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여기에서 그렇다면 이제 이 세상에는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래서 그것을 믿게 되어서 그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또 그 뜻대로 못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그렇게 살게 하시지만 그러나 아예 처음부터 그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삶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복음전파의 삶입니다. 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해서 창조주 하나님이 누구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창조했고 그 인간이 어떻게 그 창조의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켰으며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받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셨는지를 인간에게 알게 하기 전에는 누구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철학과 수많은 인간의 사상과 그리고 인간의 많은 그 지식들이 결코 그 인간을 원리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창조의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거기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벗어나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지 됩니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 뜻대로 안 살고 자기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세상에는 주님이 온 창조세계의 주인이신 것과 인간은 그 창조주에 의해 지은바 된 티끌만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해줄 때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았던 불행했던 자신의 삶을 뉘우치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오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밖에 있는 당신의 많은 양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들도 인도하여 나와 함께 있어야 하리라”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하는데 그것은 명확하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영혼을 죽게 하는 행복을 추구하고 살 것인가, 아니면 영혼을 살게 하는 행복을 추구하며 살 것인가. 영혼을 죽게 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이탈한 가운데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주님께 불순종하면서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 동안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우리로 하여금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며 살게 하던 모든 하늘의 자원은 바닥이 난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에 있어서는 캄캄한 어두움과 죄로 말미암은 가시와 엉겅퀴에 부디 끼는 인생을 살게 되고 그 대가로 얼마간의 제물과 이 세상의 명예와 자신의 만족을 누린다 한들 궁극적으로 그것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아담과 하와의 창조의 결말을 통해서 타락의 결말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만약에 그런 삶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그분이 온 우주의 중심이신 이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고 나는 그 창조세계의 한 일부분일 따름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그 창조세계에 일부분일 뿐 나 같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시는 고난을 통해서라도 내가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신다. 내가 티끌과 같은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한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서 보석과 같이 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빛날 수 있도록 예수님이 길을 열어주셨다. 생각하면 정말 너무나 감사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쓸모없는 죄인, 이글거리는 욕망에 타는 눈빛으로 더러운 가슴을 부여안고 죄를 추구하면서 살면 결국은 죽임당한 짐승처럼 그렇게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고 지옥에 불붙는 영원한 형벌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그런 비극적인 인간에 불과합니다. 내 눈을 뜨게 해주셔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온 땅과 하늘위에 뛰어난 지존하신 하나님의 위엄을 보게 하셔서 그래서 그 창조주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주 하나님 앞에 한 위치를 지키며 나같이 쓸모없고 더러운 죄인을 통해서 발산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나타내보이고자 하는 하나님께 정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나는 오늘 말합니다. 창조의 목적을 이탈하고 은밀한 죄 가운데서 아직까지도 양보하지 않는 자신의 인생의 주권 때문에 어두움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대들에게 나는 말합니다. 행복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을 포기하고 그리고 우리 하나님이온 땅과 하늘 위에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내가 그분의 그 창조의 세계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보석처럼 이 창조의 세계에 빛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신다. 생각하고 마지막에 고통밖에는 가져다준 것이 없는 그 죄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여러분들을 깨끗이 씻어서 하나님이 제 자리에 갖다놓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 버리어 사람들에게 밟혔던 여러분들을 깨끗이 씻어서 정말 주님의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는 훌륭한 하나님의 기쁨의 도구가 되도록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되기를 그래서 여러분도 행복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 창조의 목적과 신자의 기쁨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처음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할 때에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에 큰 평안이 오고 그리고 또 예수님을 믿으면 정말 이렇게 혼자서 살아가기 어려운 인생에 길에서 예수님 때문에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들이 기독교 신앙을 택하게 됩니다. 물론 그 뒤에는 우리의 선택보다는 하나님의 강한 은혜의 계획이 먼저 있었고 그 계획을 따라서 우리가 신앙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이제 교회에 들어와 보니까 진정으로 그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정말 행복하고 기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왜 그럴까? 왜 예수님을 믿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십자가의 피로 용서를 받은 사람들의 삶이 저렇게 우울하고 그렇게 기쁨이 없을까? 물론 이제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많은 이차적이고 삼차적인 표면적인 이유들을 캐들어 가보면 그 모든 이유는 한 가지 궁극적인 이유로 집약이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우리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행복해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신자들에게 약속하고 있는 최고의 행복이 무엇인가 하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 인간에게 약속하고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구성이 되는데 우선 내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그 하나님과 아주 깊은 연합 속에서 사는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즉 죄 가운데 불순종하며 살다가 어느 날 깊이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그 예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을 합니다.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십자가에서 자기와 같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그때에 놀라운 기쁨이 샘솟게 되고 그리고 아주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자신의 내면 안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연합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내적인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과 그 하나님과 결합된 가운데서 우리는 그 결합을 통해서 하늘에 신령한 자원들을 공급받고 그런 공급 때문에 이길 수 없는 고난을 이기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런 내적인 연합,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핵심입니다. 그런 연합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마음속에 항상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기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행복, 성령의 위로로 말미암은 진실한 희락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하게 됩니다. 이런 내적인 연합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핵심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또 하나의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내적인 하나님과의 연합과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실제적인 생활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증명을 해보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깊이 회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와 연합을 경험합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절대자이셨는데 은혜를 받고 보니까 그 하나님이 요즘 내 마음에 계십니다. 너무 행복하고 기쁩니다. 그런데 그 행복과 기쁨이 잠시입니다. 왜 실제 살아가는 삶이 어느 순간엔가 마음이 부패하면서 그 창조주 하나님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고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 때문에 불순종하는 삶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깁니다. 주님의 명령을 거스릅니다. 불순종합니다. 죄를 짓습니다. 그런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그는 결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게 되면 그 삶은 출발 자체가 이미 이 내면에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연합을 잊어버린 데서 그런 삶이 나왔지만 또 반대로 그런 불순종의 삶, 죄악 된 삶을 살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지은 죄가 영혼에 영향을 끼치면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연합을 방해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에게 많이 부어질 때에는 이런 우리의 범죄와 불순종이 즉각적으로 아주 크고 결정적으로 우리의 내면의 상태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힘들어지게 됩니다. 그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려고 애를 쓰면 우리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창조의 목적을 이탈해서 행복해지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보여준 것과 똑같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셔서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모든 것들을 관리하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실제적으로 그는 거의 왕의 대리자와 같은 처지에서 모든 피조물들을 그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보고 간수함으로서 창조세계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신성에 영광에 충만한 것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그의 존재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지 모르겠는데 어째든 실증이 났습니다. 영혼에 실증이 난 것입니다. 무슨 실증이? 그렇게 창조주 하나님이 자기를 만들어놓으신 그 감격적이고 그 아름다운 지위에 대해서 실증이 난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아니 죄도 없었다면 어떻게 실증이 들어오게 되었는가. 이 실증의 문제는 죄와 결합이 되면서 실증이 증폭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죄가 들어온 다음에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 아주 쉽게 실증을 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도 6개월이 되기 전에 다시 토해놓았던 자기의 죄악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6개월은 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3개월도 못갑니다. 3개월은커녕 오늘 저녁에 눈물을 흘리고 또 내일 아침에는 죄를 짓기 위해서 땀을 흘립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이 실증의 가능성은 인간에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으로서 완전하게 창조하셨지만 하나님처럼 무한한 존재로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얼마든지 영혼에 실증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 실증을 느끼니까 그 다음에 행복해지고 싶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창조주께서 만들어놓으신 자리에서 행복해지는 것은 이미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행복을 찾으려고 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유혹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어라 그러면 하나님처럼 된다. 그러니까 한번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자리에서 이탈해서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무엇일까? 그렇게 된다면 내가 얼마나 행복할까? 그것에 대해서 가슴이 뛰기 시작해서 선택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지 않는다는 말도 거짓말이고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도 거짓말이었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선택한 결과 인간은 가장 비참한 자리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시던 영광스러운 그 위치를 상실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불행한 죄와 고통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른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그 경향성 자체가 문제입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내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아름다운 영적인 연합을 이루며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주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속하신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그런 삶을 살아갈 때에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지 거기에서 이탈해서 그런 것과는 관심이 없이 어떻게 신앙 때문에 혹은 신앙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에 파멸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이제 이어서 우리들이 생각해봐야 할 것은 그러면 이 내적인 연합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적인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이시고 우리도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우리의 영혼과 영이신 하나님이 연결되는 것, 이것이 곧 영생입니다. 이 연결은 통해서 인간은 하늘의 자원을 끊임없이 공급받으면서 창조주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원래의 자리에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됨으로서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창조하신 그 목적에 부합하는 존재가 되고 또 그런 삶을 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영이신 하나님과의 연합을 가진 사람들인가, 안 가진 사람들인가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이 연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원리적인 연합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실제적인 연합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분이 계셨는데 아들을 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가기 전까지는 이 아이가 아빠를 참 좋아하고 그리고 아빠를 사랑하고 존경했는데 외로운 처지에 이 아이가 가족을 떠나서 6년 정도 거기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조기유학을 갔지만 가까운 친척이 있어서 그를 따뜻하게 돌봐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 부모의 품을 떠난 그 아이의 상실감이나 이런 것들은 그 예민한 시기에 우리가 그렇게 별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많은 어려움들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도 이제 바쁘니까 매달 갈 수도 없고 목회도 하시니까 일년이면 한번 정도 가서 일주일씩 같이 있다가 오는데 한번은 갔더니 이 아이가 자기와도 함께 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안방으로 가면 애는 건너 방으로 가고 거실로 가면 위로 가고 위에 가면 내려가고 계속 쫓아다니니까 문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얘기를 하자고 그래도 안 하고,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은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그 순간에 우리는 모두 원리적으로 그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리적으로 영적인 연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셔서 깊은 회심과 함께 거듭났을 경우에는 그렇게 원리적인 연합과 실제적인 연합이 한꺼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내 영혼이 원리적으로 연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 하나님이 나와 연합된 것을 느끼고 그 안에서 무한한 행복과 기쁨을 맞보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그렇게 원리적으로 이루어진 그 연합과 접붙임은 영원무궁토록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아이를 미국에 보내고 그 아이가 아빠를 사랑할 때가 있었고 싫어할 때도 있었고 그랬지만 여전히 그 아이가 법적으로 그 목사님의 아들임에는 틀림이 없고 목사님이 죽으면 남은 유산도 그 자녀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는 관계는 변동이 없지만 아버지가 참으로 아들을 아들로서 느끼고 아들이 참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로 느끼게 되는 그런 실제적인 아름다운 연합,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행복하고, 또 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행복하고 아버지는 그 아들이 있어서 그 관계를 행복해하는 실제적인 연합의 관계는 이게 많아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슨 부모자식이 천륜이라고 그러는데 그럴지는 모르지만 가까이 있어야지 됩니다. 가까이,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다고 할 뿐 아니라 마음으로 가까이 이렇게 사랑하면서 살 때 비로소 그 천륜이 천륜다운 천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있으면서도 그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들은 자기의 몸을 칼로 찌르는 것입니다. 나중에 여러분들은 아주 견디기 힘들 정도로 외로운 날들을 보낼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일에 미치고 돈버는데 정신이 없어서 자식이 늘 있고 어쩌다 한번만 나타나서 보여주어도 그저 감지덕지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면 진짜 여러분들이 이제 자녀들과의 관계가 그리워지고 생각이 날 때에는 그렇게 처신하면서 일생을 살아서는 자녀들이 여러분이 죽어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립니다. 그것을 알아야지 됩니다. 단지 천륜 그것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저의 친척이 한분 돌아가셨는데 그냥 상가 집에서 울음소리는 안 나고 계속 껄껄거리면서 친구들과 술 마시고 웃는 소리만 났습니다. 시골에서 어느 할아버지가 한복을 입고 오셨습니다. 지팡이를 흔들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놈의 자식들아, 울어라, 좀 울어. 못 울어. 그때서야 친구들과 돌아앉아서 껄껄거리고 웃던 상주들이 모두 나와서 한 줄로 서서 아이고, 아이고! 그 할아버지가 가니까 다시 원이치가 되었습니다. 그런 부모가 되고 싶습니까?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깊이 자녀들을 사랑해주어야지 됩니다. 그래서 원리적으로만 네가 내 아들이다 그것 말고 실제적으로도 내 아들이다. 혹은 내 딸이다. 이런 것을 자녀들이 느끼면서 살아야지 됩니다. 좀 빗나간 이야기지만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원리적인 연합이 있지만 법적으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임이 우리 안에서 증거 되는 이 놀라운 은혜는 이것은 항상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사람은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이것을 ‘인치심’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는데 이것들은 일생에 한번으로 충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역사해주셔서 그래서 우리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된 것 때문에 우리가 참으로 행복하고 우리의 모든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더불어 결탁되어 있다고 하는 것, 이런 것들 속에서 살아야지만 신자가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 실제적인 연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실제적인 연합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원리적인 연합은 거듭남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실제적인 연합은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통해서 실제적인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은 그런 실제적인 연합이 손상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껍질이 됩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원리적인 연합은 거듭남의 결과이지만 실제적인 연합은 주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많은 실제적인 연합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만약에 거듭남을 통해서 원리적인 연합이 이루어졌어도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정욕을 따라서 살고 싶어 합니다. 창조의 목적을 벗어난 어떤 행복을 찾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실제적인 연합들이 자꾸 훼손됩니다. 그래서 어떨 때에는 그게 너무 많이 훼손되고 나면 내가 구원받았는가 하는 것도 의심이 될 정도로 확신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가 말하기를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 아버지가 사랑해주시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그 사랑 속에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실제적인 연합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매우 친근하던 때가 아, 오늘도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구나. 주님이 나를 위로해주시는구나. 이런 것을 경험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너무나 멀리 느껴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가 외인이 된 것 같은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때문에 그런 실제적인 연합이 깨트려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일평생 숙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것이 우리들의 최고의 본분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과 뜻과 성품과 심지어는 우리의 목숨까지 걸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 일에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릴 때 주님과의 사랑이 있는 그곳에 바로 실제적인 연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연합 속에서만 우리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리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 이게 결코 부분적인 삶이 아니라 통전적인 삶입니다. 통전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입니다. 전체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통전적인 것입니다. 이 원리가 이런 원리입니다. 우리는 육체와 그리고 영혼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라고 하는 기능들이 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혼의 상태는 우리의 마음과 심지어는 우리의 육체까지 모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비록 피곤하고 약간 힘들게 살아도 성령의 은혜로 충만해지면 얼굴은 계속 야위는데 이 속에서 신령한 기쁨이 배어서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비록 얼굴은 좀 야위었지만 그 얼굴 속에서 기쁨과 평안이 보입니다. 힘은 없지만 그러나 평안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영혼이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연합을 상실하면 살은 많이 쪘으나 그러나 이 속에 불안함과 괴로움이 그 살집 사이로 계속 흘러나옵니다. 곤고함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우리의 영혼의 상태는 마음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육체까지 모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똑같이 돈을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이런 아름다운 연합 속에서 충만한 삶을 살 때에 돈을 쓰는 경향과 은혜가 떨어지고 영적인 연합이 실제로 깨트려졌을 때 그 돈이 사용되는 그 경향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릅니다. 경험을 많이 해보셨군요?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돈은 그래도 있는데 내가 그런 은혜를 많이 받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아름다운 영적인 연합을 가지고 있으면 이것은 영혼의 문제입니다. 그 영혼이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마음이 또 그의 실제적인 삶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돈만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구제하고 싶고 그리고 테이프를 사서 듣고 싶고 책사고 싶고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고 싶고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돈이 많이 있는데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좋은 옷 입을 수 있습니다. 입고 싶지 않습니다. 뭐 비싼 음식 먹고 싶고 그러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습니다. 능력은 되는데 경향이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연합이 깨트려지고 죄로 가득 차게 되면, 은혜가 고갈되고 죄로 가득 차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전부다 옛날에 그런 경향성이 바뀌게 됩니다. 돈만 보면 가서 나쁜 짓 하고 싶고, 왜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된 가운데 기쁨을 얻으려 해도 자본이 필요합니다. 뒷돈이 필요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돈이 있으면 죄를 짓는데 아주 편리합니다. 그리고 정욕을 따라 사는 이게 아주 유익이 됩니다. 범사에 유익한 것입니다. 돈이, 그러니까 그 돈을 밑천으로 창조에 목적에 계속 저항하면서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된 채로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하나님과의 이 아름다운 영적인 이 연결은 영혼 안에 일어나는 것이지만 이것은 영혼 안에 가만히 묶여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자신의 마음과 모든 지성과 기관에 영향을 미치고 마지막으로 육체까지 영향을 미쳐서 우리의 몸을 뚫고 밖에까지 흘러나오고 싶은 것입니다. 무엇으로? 삶으로 흘러나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동역자들을 만나면 뭐 좋은 일이 꼭 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시간이 없어서, 정말 그렇게 해야지 되는데 정말 시간이 없어서. 그때마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그런 소리 하지마라. 아무리 시간이 없다고 그래도 우리 인간들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한다. 결국은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너무 하고 싶으면 여건이 막아도 결국은 합니다. 왜 마음의 경향성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합니다.
사업을 하던 어떤 사람이 매일 바쁘다고 오래 전의 일입니다. 매일 바쁘다고 정신이 없어. 심지어는 정말 죽으려고 해도 죽을 시간이 없어. 그렇습니다. 그래도 의정부 어디에 자장면 맛있게 하는 집이 있다고 하니까 그것을 먹으러 갑니다. 자기가하고 싶은 것은 합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없다는 소리 하지 말고 시간, 하면 나에게 얘기하지 말고 부지런히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혼의 상태가 마음 그 다음에 육체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게 결국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 존재자체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이해와 의지를 밖으로 계속해서 나타내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게 결국은 창조로 나타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그 관계를 어떻게 하든지 밖으로 계속 나타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사람됨과 그 사람의 삶은 나누어질려야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이 진실하면 그냥 죽어라고 바보같이 욕을 먹으면서도 진실한 삶을 삽니다. 사람이 약간 거짓되면 하여튼 위험을 무릅쓰고 거짓을 행합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사람이 진지하면 농담을 할 때도 항상 진지하게 듣습니다. 그래서 가끔 사람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의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 이것이 통전적인 것이지 부분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의 변화가 따로 있고 삶은 다시 훈련을 받고 뭘 해야지 되. 다른 영역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그런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통전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참다운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의 영적인 연합을 이루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의 결과로 그 연합이 곤고해지게 될 때 그때에 하늘로부터 이 신령한 자원들이 계속 흘러들어오게 되고 그 흐르는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당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또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그랬습니다. 그런 연합 속에서 경험하는 그런 현상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여기에서 바로 죄의 문제가 대두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해서 영적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여졌을 때 그리고 이제 원리적으로 이런 연합을 갖게 되었을 때 그때 경향성 자체는 정말 하나님을 뜨겁고 진실하게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의 연합을 경험하게 됩니다. 미성숙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런 연합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뜨거운 하나님과의 사랑이 결합되고 그 사랑을 통해서 그 결합이 이제 자기에게 실제적인 것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왜 예수 믿고 거듭났지만 죄로부터 용서를 받았지만 그러나 우리 안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부패성들이 있습니다. 죄가 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가에 따라서 작아지기도 하고 지배력이 커지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 살아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그것들을 스스로 정복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끔 하나님이 장치를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안 합니다.
그런데 이 죄가 역사합니다. 이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고 그리고 하나님 밖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창조에 궁극적인 목적이고 이 세상에 최고의 가치는 자기의 만족과 행복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것들이 이 속에서 계속해서 성장하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머리로서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내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 위치를 직시해야지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지만 그러나 마음은 그렇게 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의 삶은 머리로부터 흘러나온 삶이 아니라 가슴으로 우리의 내면의 세계로 흘러나오는 것이 삶입니다. 그래서 머리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이 마음자체, 내면의 세계 자체가 하나님과의 그런 연합을 이루고 자기를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게 되니까 거기서 그런 삶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 전체가 불순종과 죄로 가득 찬 삶이 되니까 그 삶이 다시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가고 밖에 있는 더러운 것이 안으로 들어와서 계속해서 순환하면서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이탈된 하나님과의 연합과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연합을 상실한 사람들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머리로는 희미하게 창조의 원래의 목적이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지 된다고 믿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그 하나님께 정면적으로 도전하고 거기에서 뭔가 기쁨을 삯으로 받으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거기에서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잠시 행복을 느끼지만 그 행복은 더러운 죄가 가져다주는 먹입니다. 삯입니다. 그것이 다시 자기의 영혼을 죽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풀이됩니다.
살다가 너무 괴로우니까 교회에 와서 위로를 받고 싶은 것입니다. 무슨 위로를 해주겠습니까? 어떻게 위로를 해주겠습니까? 그 관계를 돌이키고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그런 삶의 방향들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아야지만 하나님의 위로가 주어지지, 어떻게 하나님이 위로를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길도 먼데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선악과를 따먹고 얼마나 팔이 아프고 그것을 쳐다보느라고 얼마나 팔이 아팠겠나. 삼가 명복을 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에서 끊임없이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돌아오라. 마음을 돌이키라 네 자신을 하나님께 돌이키라. 계속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기독교 신앙의 원리를 다 무시해버리고 예수 잘 믿고 복 받고 싶다. 그 성공하는 비결이 뭔가. 예수 잘 믿고 나도 한번 좀 예수 때문에 힘 좀 펴는 삶을 살고 싶다. 비결이 뭔가. 성공사례를 나에게 가르쳐달라. 이렇게 되면 문제가 복잡해지게 됩니다. 진정한 신앙의 본질로 접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상 앞에 복을 비는 것 같은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인 모든 자원에 빈궁함, 그 모든 죄의 결과인 악과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포괄적인 구원이고 통전적인 구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늘날도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도 한때는 그렇게 방황하고 지금도 역시 똑같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피조물에 원래 위치는 이탈한 채로 위로받고 싶어 하고 그리고 그렇게 이탈한 채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로 복을 받기를 원하고 주님이 자신의 인생을 밀어주시기를 원하고 하는 그런 축복을 기대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아직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행복한 날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진정한 하나님과의 연합이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하늘의 신령한 자원들을 공급받고 그 자원을 공급받아서 물론 그 자원 속에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잘 믿고 그러면 물질도 주시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하늘의 자원이 되어서 땅에 자원을 하늘의 자원으로 사용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머뭇거립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창조의 목적에 이탈된 채로 이 세상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주 더러운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면서 그 연합이 자신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쳐서 자신의 존재는 물론이거니와 생활하는 삶 모든 것들이 점점 더 온전히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가 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을 보면서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더럽게 되어진 많은 사람과 삶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때 그것을 아파하고 그렇게 돌아갈 수 있게 하나님께 간절히 갈망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입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많은 재산을 들이고 그래서 집을 예쁘게 지었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갈 때 예쁘게 지어놓은 집에 들어가면 편한 게 아니라 좀 불편합니다. 조심스럽습니다.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이 깨끗이 된 상태를 주인은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돈을 들여서 집을 깨끗이 지었습니다. 좋은 나무인 원목으로 바닥을 깔고 좋은 칠을 하고 그리고 예쁜 벽지로 벽을 바르고 고급스러운 등들을 해놓고 하얀 색깔로 칠을 해서 예쁘게 해났습니다. 화장실도 만들어놓고 창고도 만들어놓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집을 누구를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전혀 그 집을 거저 살라고 은혜로 빌려주었는데 이 사람은 도대체 그렇게 집 주인이 이 집에 특성은 이런 것이고 이 집을 사용할 때는 이렇게 사용하라고 다 가르쳐주었는데 그것은 귀뚱으로도 듣지 않고 용도에 맞지 않게 그 새로 지은 집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세수는 세면대에 해야지 되는데, 내가 아는 누가 있는데 어느 근로자가 한국에 처음 와서 화장실에 들어가더니 변기뚜껑을 열더니 거기에다 머리를 감더랍니다. 진짜 머리감기에 참 좋습니다. 거기다 세수를 하고 그리고 싱크대에다 똥을 눕니다. 그리고 예쁜 탁자위에 올려놓은 유리병에 오줌을 누고 그러면 그 주인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지금은 많이 덜합니다. 처음에 교회를 지어놓고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저 여건은 저렇게 해서 만들어났는데 사람들이 그대로 사용을 안 하는 것입니다. 다른 용도로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럴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해놓으시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모두 용도에 맞게 만드시고 피조물들을 모두 그렇게 제 자리에 놓으신 것입니다. 그대로 안 합니다. 그때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세상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괜히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래서 보내신 것입니다. 왜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안에 성령님을 주셔서 그래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주님과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가게 될 때에는 이 세상을 보면서 그렇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을 보면서 너무 마음 아파하게 됩니다. 그래서 슬퍼하게 됩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이 땅에서 주신 하늘자원과 이 땅에 모든 자원을 사용해서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거스르는 피조물들을 창조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중에서 제일 으뜸이 무엇인가 하면 사랑입니다. 가장 으뜸이 사랑입니다.
그 사람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기쁜 복음을 듣고 그리고 그가 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가 자신이 이 세상에 창조의 죽이심이 아닌 것과 자기 인생에 참된 가치가 자기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어야 합니다. 그게 선교입니다. 그게 전도입니다. 그것을 나만 아니라 내 가족만이 아니라 내 이웃에게도 이 사실을 전해서 그 이웃이 그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 위치로 돌아가야지 됩니다. 피부색깔이 다르고 그리고 살아가는 삶의 풍속이 다른 이방인들에게도 이 복음이 전해져서 그러니 어떤가 하면 주님이 주신 이 땅에 있는 자원을 부지런히 선교비로 보내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자원들, 하늘자원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그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내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고 심지어는 내 부모, 내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고 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기의 행복을 구하며 살아가는 그 인생의 마지막에 무엇인가를 우리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외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자원들이 그렇게 하늘자원과 이 땅에 있는 모든 자원들이 그렇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진정으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경향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에 영광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자기들은 그 손에 의해서 창조된 가장 작고 연약한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창조된 이후에도 모든 아름다운 햇빛과 공기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원들을 하나님 때문에 누리며 살면서도 인생을 살면서도 단 한번도 창조주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 그리고 자기와 같이 죄 때문에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수 없도록 완전히 불구가 된 인생을 위해서 영광을 버리고 이 낮고 더러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입니다. 그 죄악 가운데서 우리를 찾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 그들을 생각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하든지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고 입을 열어서 우리의 말로 보여주고 우리가 사랑을 베풀면서 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그래서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의 창조주 되심을 인정하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해지기를 그것을 갈망하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진정한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자기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밖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간절한 갈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처음 가르쳐주신 기도가 무엇인가 하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하는 그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세 개 같지만 결국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하는 한 기도로 집약이 됩니다. 그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뜻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기도제목입니다. 이 기도의 제목 때문에 예수님은 새벽마다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고 깊은 밤에도 그것을 위해 기도하셨고 예수님의 전 삶은 바로 그 기도제목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초점이 맞추어진 삶이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간절한 기도,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가 우리 속에서 가슴을 찢으며 흘러나오지 않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먼저 어느 정도 창조의 목적에 이탈된 채로 예수 믿는 흉내를 내며 살아가는 이 삶에 상당부분 만족하고 있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의 이 기쁨에는 일시적인 기쁨이 있고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일시적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이 땅에 있는 자원 때문에 누리게 되는 기쁨입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기쁨은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고 그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존재가 되는 데서 오는 행복입니다. 그런데서 오는 행복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증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들이 이 모든 시리즈를 끝내면서 마지막에 가장 하나님 앞에 영원한 기쁨 속에서 행복을 누리며 사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우리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내적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이 아름다운 연합을 곤고히 지키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이 연합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께 순종하며 살면서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더 아름다운 연합을 가꾸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죄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 앞에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넘어트립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부패한 욕망을 불어넣어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강하게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그런 죄보다도 더 큰 은혜의 방편들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허무한 죄와 악의 소원들이 가슴에 밀려오지만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 받고 마음을 지키려고 하고 다시 성령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 힘쓰면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믿어지고 사랑하던 쓸모없던 것들은 우리에게 정말 그 쓸모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소원이 다시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죄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능히 죽이고 이길 수 있는 은혜의 수단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이 허락해주십니다. 그래서 진짜 여러분들이 여러분 안에서 죄가 역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많은 은혜의 수단들은 죄를 이기기에 충분한 능력의 도구들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끊을 수 없는 죄의 사슬에 매어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속에서 단번에 그 죄를 버립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기도하고 부지런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그 뜻대로 살고자 애를 쓰는 진실한 삶을 매일매일 살아가야지 됩니다.
10-20년씩 예수를 믿어도 영혼의 변화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끔씩 심방 가서 항상 이야기합니다. 말해보라고 하면서 당신이 이제껏 15년을 신앙생활을 했지만 여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한 모든 노력들이 운전면허를 따려고 애를 쓴 만큼 되겠는가, 안 되겠는가? 나는 여러분들이 더도 그만두고 일년에 한번씩 운전면허 새롭게 따는 것만큼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노력을 해도 여러분들의 삶은 엄청나게 변화가 될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에 이탈해서 죄 가운데 살고 고통에 쓴 열매를 거두는 그런 삶이 뭐가 좋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지고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서 행복하면 좋겠는데 아담과 하와처럼 행복할 것이라고 죄를 선택했지만 마지막에 행복하지 않고 가시와 엉겅퀴만 내고 피눈물 나는 인생을 살아가고 그 슬픔과 비극을 후손에까지 물려주었습니다. 버려야지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죄를 이기며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내적인 연합을 이루면서 살고 그리고 이렇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나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뜻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삶이 비록 지금 오늘 내게 죽음이 오고 나를 이 세상에서 주님의 나라로 부른다고 할지라도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면서 자신 안에 이루어진 그 창조의 목적이 자신 밖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세상을 고치고 치료하는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을 동안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구속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빚진 자가 되어서 그래서 힘닿는 데까지 끊임없이 자기 속에 있는 죄와 더불어 싸워서 내적 연합을 이루고 그리고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계속해서 자신도 살고 또 내 밖에 있는 사람들도 살고 이 온 세계가 창조주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면서 살아가는 삶,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하늘의 자원들을 이 일을 위해 사용하고 이 땅에서 직업 활동을 해나가면서 주시는 모든 땅의 자원들을 또한 이 일을 위해 쓰고 이 일을 위해 수고하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바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이 비록 이 세상에서 유명하지 않고 하찮은 사람들 같으나 그러나 자기를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여러분들이 삶이 결코 작은 자의 삶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안겨드리는 여러분의 인생 전체가 이 하나님을 떠나 피조세계를 고치는 그런 아름다운 생애가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