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드시고 일으키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시145:14)
이 시편 145편에서는 왕이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내용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45편이 전개되면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복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전반부에는 하나님의 그 위엄 있는 통치가 이 세상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선포한 후에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시작으로 해서 뒤에 쭉 기술해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시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미끄러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켜 세우신다고 말합니다. 어김없이 여기에서도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의 존함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본문의 시작이 왜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로 시작되는 지를 묻는 것은 사소한 질문일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매우 중요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중 이 여호와 야훼는 특별히 하나님이 위대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이시지만은 특별히 그 위대한 능력과 호의를 자기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보여주신다는 뜻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이름과 달리 이 야훼라고 하는 여호와라는 이름은 언약의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하나님의 본명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즉시 이 시인이 미끄러지는 자를 붙드시고 넘어지는 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그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그 애정 깊은 구원 행동이 언약 관계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언약사상은 성경에 명시된 사상인 동시에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고난으로 가득 찬 역사의 현장을 지나면서 사자와 같이 담대하고 견고한 삶을 살게 만들었던 축복된 사상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용어로 아주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니까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지키시고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붙들고 살아간다면 결코 망하지 않으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현장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떤 때는 우리를 뒤흔들어 놓는 이 환경의 커다란 변화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삼킬 듯이 밀어닥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격변하는 환경 속에서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커다란 외적인 환경의 변화와 환란, 시련과 고난 앞에서 우리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느끼고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으로부터 한 6년 전에 밀어닥쳤던 IMF라고 하는 커다란 경제적인 재난을 기억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상상치도 못했던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잘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고 하던 사업들이 모두 망하고 문을 닫고 단란한 가정은 뿔뿔이 흩어지고 사회에서 존경받던 사람들이 거리에 노숙자로 나앉았습니다. 강렬한 몰아닥치는 환경의 변동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디 간들 그러한 일들이 없겠습니까? 저는 요즘 신문지상을 보면서 도대체 우리나라는 어느 지점에 와 있나 하는 걸 느끼게 됩니다. 여러 나라들이 의논을 하고 오가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운명이 그 사람들의 몇 마디의 말에 의해서 오락가락 하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강하게 몰아닥치는 외적인 환경 앞에서 우리 인간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이 아무 힘이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외적인 환경뿐만이 아닙니다. 내적으로 밀어닥치는 갈등과 강력한 내면의 파장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고 하나님 앞에 복종시키며 마음을 지키는 그 일이 때로는 고난으로 가득 찬 환경을 통과하는 거보다 더 어려운 숙제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깨닫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연약한 존재일 뿐임을 그럼에도 불과하고 오늘 시인은 우리와 똑같은 연약함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그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일까요? 무엇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그런 깊은 안정을 느끼도록 만들어주었을까요? 이시의 저자로 믿어지는 다윗은 그야말로 이 내적인 고통과 외적인 환경의 격변을 온몸으로 일생동안 경험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모든 생의 파국 속에서도 그는 진멸되지 아니하고 일어섰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언약의 백성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고 주님이 나를 택하고 부르신 것을 후회하지 아니하실 것이니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그 피로 나를 사셨으니 이제 하나님이 나를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일생을 사는 동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 맺은 이 언약에 충실한 삶을 살 것이다. 그 확신 속에서 살아야 하며 또 다른 삶에 대안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손을 놓아도 그분이 우리를 놓아 주지 아니 할 것이며 우리가 그분의 통치를 벗어나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 통치에서 벗어나게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피로 맺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와의 이 관계에 충실하게 헌신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단 한사람이라도 만약에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각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들이 그 관계를 떠나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서 살면 그 언약 밖에 있는 백성들보다 오히려 더 비참해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었던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애굽에서 건져 낸 바 된 사람들이었고 갈라진 홍해를 건넌 사람들이었으며 한 반석에서 물을 마셨으며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만나를 경험하면서 일생을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버리고 불순종과 범죄로 일관하자 그들은 광야에 모두 엎드려져 죽었으니 그들의 그 마지막이 언약 밖에 있는 백성들보다 더 낫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신앙 바깥에서 찾으려고 하는 그 자체가 그게 이미 하나님을 버리는 행동이에요. 그래서 어떠하든지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해결해보려고 하고 신앙 안에서 문제를 풀어보려고 고민 할 때에 거기에서 믿음이 자라고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섬세하게 인도하시는 지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시인이 그러한 언약의 하나님을 붙들면서 일생을 살아왔지요. 그러나 그도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고 특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우리와 같은 혈육을 지닌 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어찌 미끄러지는 때가 없었겠고 그리고 비굴하게 넘어진 때가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시인은 그렇게 자신도 미끄러지는 때가 있었고 넘어지는 때가 있었는데 그것이 인생의 끝이 아니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45편뿐만 아니라 경건한 이 다윗은 여러 곳에서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엎드려진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넘어진 자를 건지시며 수렁에 빠진 자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시인은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언약 백성의 행복에 대해서 제일 먼저 넘어진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 하나님의 성품을 노래하는데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고 비굴한 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인생을 살면서 여러 번 넘어진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환경의 변화 때문에 넘어진 적이 있는 사람이었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끊어진 것처럼 절망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스스로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넘어진 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신앙의 길에서 미끄러져서 넘어졌을 때 원수들이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그러나 이 시인은 그렇게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렇게 넘어진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었음을 오늘 노래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넘어진 자를 하나님이 붙드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 백성들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렇게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이 붙들어주시는 것에 대해서 깊이 신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탁월한 사랑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 사실은 어떻게 보면 감동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죠.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해 선물로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냐?” 고 반문합니다. 혹은 자신의 죄로 인해서 혹은 연약한 믿음으로 인해서 폭풍처럼 일어나는 환경의 격변을 감당하지 못해서 자신의 인생의 길에서 넘어질 때에 주님이 굳게 그를 붙드시죠. 그걸 보고 우리는 깊이 감격하고 하나님이 내 인생의 깊은 어두움 속에서 이 미끄러지는 자리에서 나를 붙드셨구나 노래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사랑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우리 스스로는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나 있을 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소중하게 생각하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갖지 못할 정도로 자존감을 상실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면 우리가 잘 살 때나 잘 못살 때나 우리는 당신의 피로 사신 백성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에 차이가 있는 거죠. 하나님이 원하시는 간절한 마음은 우리가 넘어질 때에 주님이 붙들어주시는 그 일을 통해서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신앙의 철이 드는 것이에요.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잘났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우리가 그렇게 강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끄지 아니하시고 꺾지 아니하시고 붙들어주십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들으면서 신앙의 길에서 미끄러지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넘어진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넘어진 그 가운데도 그대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오래 동안 은혜에서 멀어지고 부패해서 하나님의 뜻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리 떠나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넘어진 그 지점에서 여러분들을 붙들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릴 때가 있어도 그분은 자기의 언약의 백성들 중 단 한사람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분 안에서 죄인을 용납하시고 넘어진 자를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특별한 은총을 경험했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많이 넘어졌던 사람들이 크게 넘어졌던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증거 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로 시인은 비굴한 자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굴하다는 말은 원어적으로 겸비하다 라고 하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고 마음이 겸비하게 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신다는 것이지요. 연약해서 미끄러질 듯 넘어지는 자를 넘어지지 않도록 붙드시지만 넘어진 자는 밟아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넘어진 자는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코끝에 생명이 남아있고 하나님이 아직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동안에 그때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희망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밖에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 되요.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자기의 신앙의 수준으로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되고 마음에 안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내 신앙의 수준으로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주님이 나를 이끄시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차라리 고백을 하세요.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여쭤보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여러분들의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해요. 그것이 언약 백성으로서의 도리에요. 그런 와중에서 이 시인이 넘어진 자를 붙들어주시고 그리고 그 쓰러진 가운데 마음이 겸비하게 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다루시고 돌보십니다. 다른 사람이 만약에 이 사실을 노래했더라면 우리는 신뢰하기가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은 영적으로 하늘 꼭대기까지도 올라가 보았고 지옥의 밑바닥까지도 내려가 보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 속에 지낸 젊은 날들과 범죄로 인해서 깊음 가운데서 신음하던 인생을 모두 경험했습니다. 넘어졌으나 아주 넘어지지 아니하고 쓰러졌으나 아주 쓰러지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를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넘어지는 자는 붙들어주시고 그리고 이미 엎드려진 자는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새 길을 걸어가게끔 만들어주시는 회복의 하나님이신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때에 이러한 놀라운 회복을 우리에게 주시는가 하는 것이죠. 그 정답을 오늘 비굴한 때라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들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놓인 환경이 아무리 혼란하고 어지러운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환경을 허락하셨으면 그 환경 속에서 헤쳐 나오고 그 환경을 이용할 수 있는 해답도 하나님이 마련해 가지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 안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는데 있다는 거죠. 시인은 엎드려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를 일으켜 세우시는 것을 경험했으니 마음이 비굴해진 그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일으켜 세우시는 것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일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만은 그러나 실제로 마음이 정말 비굴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는 적이 얼마나 드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너무나 드뭅니다. 여러분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한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했고 그때에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따랐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목양도 잘 받았죠. 그래서 이제는 주일도 잘 지키고 그 남이 볼 때에 열린 교회에 심겨진 한그루에 확실한 나무가 됐어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옛날같이 그렇게 가난하고 겸비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목말라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반쯤 고쳐진 사람이 된 거죠. 그러니까 자연히 열매가 별로 없어요. 말씀을 듣고 공부를 하고 교회 생활을 하는데 그 처음 은혜를 받을 때처럼 그렇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의 은혜가 영혼과 인격 갈피갈피 스며들어서 그래서 사람이 이 악하고 완고한 기질들이 빠져나가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따르는 그 겸비하고 예쁜 마음이 깊이 배어나질 않아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다 이거죠. 그러고는 신앙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마음은 다시 그 완고한 틀을 쫓아서 감동이 없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요. 그것 보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그리고 대화를 해 보면 자신의 영혼에 대한 깊은 근심이 그 안에 없어요. 그리고는 모든 관심사가 쓸데없는 외적인 일들에 집중돼 있어요. 이미 벌써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깊이 살피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던 그 겸비함을 잃어버린 것이죠. 그래서 미끄러지긴 하지만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은혜를 너무나 드물게 경험하고 넘어지는 것은 분명하게 체험하지만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것을 별로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제 마음에 커다란 고통이요, 슬픔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새로 믿는 어린 지체들이 주님을 만나고 은혜 안에서 깊이 변화되어 간다는 그 소식 뿐 만이 아니라 오래도록 주님을 믿으며 살았던 사람이 새롭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오랫동안에 계속 되었던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을 저는 좀 경험해보고 싶어요. 너무나 연약해요.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것은 하나님 앞에 겸비한 마음이 없다 라고 하는 거예요. 가슴이 저리도록 자기 자신의 영혼의 비참한 상태를 깊이 자각하고 그 처음 사랑에서 미끄러진 자신의 영혼의 상태의 아픔을 보고 그런 무기력한 삶을 보면서 하나님이 가슴 아파하실 것을 깊이 생각하는 어린아이 같은 착한 마음, 그게 영혼의 회복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현저히 부족해요.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미끄러지는 사람이 많아도 소리를 내며 넘어지는 사람이 많아도 하나님은 단지 넘어지고 미끄러졌다는 이유로 그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비굴해지기를 기다리시는 거예요. 비굴해지기를 기다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겸비해져서 예전에 하나님과 누렸던 그 사랑의 때를 생각해요. 그러면서 내 마음에서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이런 사랑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 깊이 슬퍼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아파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은 나를 구원할 수 없고 주님의 도움이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이 뒤편에 가면 하나님이 마음이 상하고 중심에 통회하는 심정으로 부르짖는 자들에게 구원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진술해가고 있습니다. 겸비해야 합니다. 교회는 물론 여러분들의 섬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리고 교회는 여러분들이 정말 희생하며 섬겨야 하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그 외적인 의무가 내적으로 겸비해질 영혼의 의무를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할 수 없어요. 여러분들이 교회에 많은 섬김을 감당하면서 그것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겸비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섬김의 원리가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섬기든지 그 일상적인 의무가 마음의 겸비한 깨어짐을 대신하게끔 허락해서는 안돼요. 섬기는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고 섬기는 그곳에서 지체들을 무릎을 꿇고 섬기는 비결을 터득해요. 섬기는 그곳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좋아하시는 지, 싫어하시는 지 파악하고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이키는 눈물을 흘려야 해요. 그렇게 해야지만 우리가 정말 좋은 신자가 되어갈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오늘도 정말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건져내십니다. 우리의 신앙의 과거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나서 미끄러진 때도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그분 앞에 드러내 보이기에는 부끄러운 나만의 과거가 있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죄가 커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적이 있습니까? 주홍같이 붉은 죄, 진홍같이 붉은 죄일 찌라도 하나님은 거기서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죄의 크기가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겸비함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에요.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들을 봐요. 새벽 기도까지 나왔으니까 그래도 마음에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신앙이 있을 것 아닙니까? 거의 기도하지 못하다가 가는 지체들도 봐요. 그래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가까이 가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준적도 있었죠. 그런데 정말 사랑스럽고 부러운 지체들은 새벽마다 겸비한 마음으로 깨뜨려진 심령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기도할 때 그들이 강해보이나요? 아니지요. 약해보이지요. 약한데 자기 자신의 정말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그 부족을 봐요. 온 힘을 쏟아 부어서 능력 있게 살아도 모자랄 텐데 자기 안에 자기가 너무 많아요.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곤고한 가운데 자기 자신의 죄악이 떠올라요. 그러면 정말 능력이 있기는커녕 살아서 존재하는 무게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자신을 발견하게 되요. 그래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죠. 그때에 그런 기도가 들리는 사람이 옆에 이렇게 있으면 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에 은혜 허락 하소서
정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간절히 흐느끼며 울부짖을 때에 그는 강하지 않습니다. 그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 서있는 환경의 풍랑 앞에 나부끼는 촛불과 같아요. 근데 참 신기한 게 말이죠, 우리가 그렇게 겸비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어떤 마음이 생기냐면 정말 이 예수님만 붙들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예수님만 붙들며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이 간절히 생겨나요.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는 거예요. 나는 여러분들을 향해서 아주 간절한 소원이 하나있어요. 요번에도 위임 목사가 되시는데 뭘 좀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다 필요 없으니까 자신들이나 좀 변화되라고 했어요. 정말 다 필요 없어요. 뭐가 필요하겠어요? 나는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어요. 내가 정말 보고 싶은 것은 저택 같은 사택도 아니고 많은 봉급도 아니요, 정말 보고 싶은 것은 그 여러분들이 어린아이 같은 겸비함으로 주님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그 살 깊이 박힌 완고함을 버리고 굳어져가는 마음의 위험을 스스로 알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깊이 오래도록 예수 믿은 여러분들의 마음이 처음 예수님을 만난 어린아이처럼 깨뜨려지고 그분께 속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는 것처럼 예수께 붙어있는 사람. 그래서 내 소원이 무어냐고 주님이 물으실 때 어린아이 같은 눈빛으로 이 세상에서는 내 소원이 오직 하나이니 참되고 진실한 신자가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겸비해진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의 참 목자이신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그렇게 겸비해지기를 얼마나 원하시겠어요. 그 마음이 되기만 하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영원의 깊음 속에서도 주님이 일으켜 세우실 수가 있습니다. 일으켜 세우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미끄러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다시 여러분들을 치료하시고 일으키시는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그걸 기도하십시오. 주님이 얼마나 보고 싶으시겠습니까? 굳어진 마음으로 무뚝뚝하게 의무를 수행하는 그런 신앙생활 말고 처음 사랑했던 때처럼 주님을 향한 애정이 마음의 섬유질 갈피갈피에 배어있는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 그리고 정말 삶의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낙심치 아니하고 예수님의 손을 꼭 붙들고 놓지 않는 절대 의존적인 신앙, 얼마나 하나님 보고 싶어 하시겠어요?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같이 기도하실 때에 우리 이것을 위해서 기도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 우리의 죄와 악함과 마음의 굳어짐과 그리고 마음의 식어짐을 용서해주십시오. 우리 자신의 마음이 우리의 겸비한 심령이 주님께 드리는 제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이제껏 그 하나님 앞에 살았던 여러분들의 삶을 회고해요. 그리고 여러분들의 영혼의 곤고함을 정직하게 고백해요. 그대들은 언약의 백성들이고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붙드시며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