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위해 울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녹취자 : 오희열
I. 본문해설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실 때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예수를 따르는 여자의 큰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모진 매를 다 맞으시고,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계십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자꾸 쓰러지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당신의 몸도 가누지 못하며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있을 때, 여인들은 그 고난을 자신들의 것으로 느끼며 통곡했습니다. 그런 극심한 고난 속에서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자기를 사랑하며, 그래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들을 향하여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바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였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이 너무 가엾고 불쌍해서 통곡하면서 우는데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II.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A. 예루살렘의 딸들
그러면서 “예루살렘의 딸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이중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예루살렘의 딸”이라는 표현이, 히브리 사람들이 잘 쓰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예루살렘의 딸인 촌락들”입니다. 그렇게 보자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딸린 많은 동리들, 촌락들을 두고 그들이 미래에 받게 될 끔찍한 심판을 가슴 아파하시며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 “예루살렘의 딸들아”하는 말씀은 이렇게 통곡과 눈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는 이 여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이 여자들을 부르시는 호칭임에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아”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루살렘과 함께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한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들과 지금 통곡하며 당신의 뒤를 따르고 있는, 당신을 사랑하는 여인들을 향해서 함께 말씀하시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시련과 고난 속에 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말씀이 막히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는 종종 너무 시련과 고난이 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막힌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경험을 미루어 보아도 시련과 고난이 넘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생생하게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때릴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환란과 시련, 고난과 고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 여자들이야말로 지금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슬픔 속에서 사랑하는 예수님의 죽음을 어찌할 수 없이 바라보면서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풍부하게 받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어긋난 길을 가던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주셔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용하십니다. 그 마음이 바로 좋은 마음이고 그 좋은 마음은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다른 사람은 눈을 뜰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만물의 찌끼와 같고 마음의 사형선고를 받은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 때문에 시련과 고난을 이기고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이렇게 사랑함으로 항상 그 말씀을 받아서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나를 위해 울지 말라
두 번째는 “나를 위해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겉으로 보기에는 채찍에 맞고 피 흘리고 비참한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는 끔찍한 고난의 길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우리가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학적인 의미를 가슴에 새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신학적인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 때문에 죄 없으신 분으로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까? 왜 흠 없으신 그분이 고난을 당하고 채찍에 맞으시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형벌 받을 자기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살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들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랑은 받아주었지만 이 여자들이 흘리는 연민의 눈물은 거절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흐르는 눈물은 신학적인 각성을 동반할 때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무엇이고 그분의 죽음이 아직 살아있는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세계를 향하여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은혜로 흐르는 눈물을 씻은 후에는 바로 그 계획에 따라서 대장부와 같이 살아야 합니다. 예수의 사랑은 단지 감상이 아닙니다. 신학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연민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은, 그 감상이 끝나고 나면 십자가의 감격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고백했습니다. 예수 죽음의 신학적인 의미를 실현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마지막 세 번째는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33년 공생애였습니다. 그 후로부터 약 40년 후에 닥칠 미증유의 대 환란을 예수님은 이미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주후 70년에 닥칠 예루살렘의 멸망이었습니다. 디도장군이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함락시킨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이 로마의 군인들에 의해 점령되고 피로 물드는 살육의 보복이 일어날 것을 예수님은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이스라엘에 대한,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원래 예루살렘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학자들의 학설이 구구합니다. 그러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학설은, ‘예루’라는 히브리말로 ‘성’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와, ‘샬라임’이라는 ‘평화’라는 뜻의 단어의 합성어 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유력합니다. 그러면 ‘예루샬라임’은 ‘평화의 도시’, ‘평화의 성’, ‘평화의 도성’입니다. 예루살렘은 바로 이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무엇인지를 이 모든 열방 만민에게 보여주고, 자기 자신이 그 평화를 누리는 은혜의 도시가 되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정의롭고 사랑스럽고 행복한지 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쓰레기 같은 가치관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빛 아래에서 재편된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것, 그 모든 가치관의 중심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제가 전도사 때 일이었습니다.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이미 교수가 되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칠 때에는 마음이 우쭐해지기도 하는데 교회에 돌아와 보면 변화되지 않는 돌덩어리 같은 영혼들을 보면서 주일이면 이 가슴이 칼로 짓이기는 것처럼 괴로웠습니다. 둘 중에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두고 십자가를 내려놓지, 아니면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든지 말입니다. 토요일이면 보따리를 싸서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겠다고 2년 반 가까이를 다녔습니다. 밤 9시 쯤 되어서 좌석버스를 타고가면서 버스 창문을 열고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정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이 길. 신학교를 다닐 때는 가난과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고통을 받고 눈물을 흘렸는데, 교수가 되고 나서는 먹고 살만하니까, 이제는 변화되지 않는 이 영혼들이 십자가가 되어서 교회 마당에 들어설 때마다 겸비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가 뭐냐? 네가 젊은 나이에 학교에서 가르친들, 선생이 된 들, 네가 사역하고 있는 현장을 봐라.’ 하면서 교회에 가서 무릎을 꿇으면 마음이 물처럼 쏟아졌습니다. 그 길이 굉장히 괴로우면서도 이 노래를 부르면서 가는데 눈물이 흐르지만, 이상하게 내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기는 싫었습니다. 그것이 달콤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기는 싫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있으라고 하신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주후 70년에 닥칠 끔찍한 환란을 바라보시면서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예수님 혼자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도 다시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약 40년 후에 짓밟혀 멸망당할 도성을 바라보시면서 그들 때문에 땅에 떨어질 하나님의 이름을 바라보시면서 그렇게 가슴아파하며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날 위해 울지 말아라. 나의 이 죽음은 너희의 생명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란다. 그리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어라.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혹시 민족적인 회개가 일어날지 누가 알겠느냐? 회개 없이 하나님과의 평화 없이, 자녀들에게 닥칠 미래, 너희에게 닥칠 미래를 생각하거라.”하시면서 예수님이 눈물로 유언처럼 이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자, 왜 고난 주간 마지막 집회를 마무리 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셨겠습니까? 놀랍게도 다음 주면 우리 자녀들의 회심집회입니다. 자녀들을 위한 가장 확실한 보험이 무엇이겠습니까? 재산을 물려주는 것도, 공부를 많이 시켜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으로 그의 인생의 모든 일들에 대한 보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공부를 많이 시키고 좋은 회사에 취직을 시키면 먹고 살기는 할 것입니다. 돈을 많이 남겨주면 다른 사람에 비해서 한 30m 앞서서 100m달리기를 시작하는 것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바닥채로 흔들리는 시련을 만날 때 그런 세상의 자원들이 그 사람을 붙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가장 확실한 보험은 그 아이가 자신의 신앙으로 예수를 붙들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확실한 보험은 없습니다. 아까 말한 보험은 돈과 세상에 있는 자원이지만 신앙은 하나님 자신을 붙드는 보험입니다. 그보다 더 확실한 보험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온 인생길이 그것을 증거 합니다. 다양한 일들이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시련과 고난 속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고난과 핍박 속에서 예수를 붙들고 몸부림치면서 살 때,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슴아파보이는 순간순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찬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우리의 기도가 되었고, 한숨이 변하여 우리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그렇게 살게 해야 합니다. 마른땅과 같은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의 눈물이 녹입니다. 그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으로 바꿉니다.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들과 자녀들이 헤치며 살아가야할 일생을 주님 앞에 놓고 부모로서 이 아이에게 신앙을 물려줄 수 있게 해 달라고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부모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