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하여
2009년 9월 9일 수요예배 설교
어미가 참척(慘慽)에 울 때
(눅 7:11-16)
I. 본문의 배경
II. 참척을 당한 어미
III. 어미를 불쌍히 여기심
IV. 살리시는 주님
김남준
어미가 참척에 울 때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눅 7:11-16)
I. 본문의 배경
예수님이 ‘나인’이라는 성에 가시기 전에 가버나움에 가신 기사가 나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장면입니다. 나인이라는 성은 아주 작은 성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가실 때 예수님은 제자들과 동행하셨고 제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동행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듣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거나 또 70인의 전도대처럼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영혼을 구원하던 일에 헌신하던 전도자들의 무리였습니다.
그때 저쪽 성에서 또 많은 일련의 행렬들이 예수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장례행렬이었습니다. 관을 멘 사람들이 앞서 가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어미가 따라오고, 그를 조문하는 가족들과 사랑하는 이웃들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두 행렬이 마주치는 것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한 행렬에는 생명의 주이신 그리스도가 앞서고 영혼을 살리는 전도자들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맞은편 행렬에는 죽은 자가 앞서고 그 죽음에 슬퍼하는 어미와 가족 친지들, 사랑하는 이웃들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행렬과 죽음의 행렬이 만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참척을 당한 어미를 만납니다.
II. 참척을 당한 어미
‘참척’은 요즘은 잘 안 쓰는 어려운 단어인데, ‘참’ 은 ‘비참하다.’ 라고 할 때 쓰는 단어이고, ‘척’도 비통한 고통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참척’이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을 경우를 말합니다. 상과 관련해서 젊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악상’이라고 하고, 나이가 충분히 많으신 부모님이 편안하게 수를 마치시고 숨을 거두시면 ‘호상’이라합니다. 옛날 시골에서는 호상이 나면 복되다고 여겨서 춤까지 췄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인간은 한번은 가는데, 충분히 나이가 드셔서 기력이 없고, 심한 질병에 고통스러워하다가 간 게 아니라 누구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고 편안하게 죽었다고 생각하여 슬프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의도한 것은 아니어도 그 자체를 불효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의 장례에 참여를 안 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부모로서 모진 행동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참척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여자가 참척을 당한 슬픈 사람이었습니다.
자식이 죽었을 때 가슴이 미어지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회심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입니다. 가끔 만나던 친구가 있었는데, 교회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교회에서 수양회를 갔는데, 수영을 워낙 잘해서 수영하면서 배 뒤를 따라갔습니다. 배가 도착해서 강을 건너보니까 그 아이가 없었습니다. 심장마비로 쇼크사 했습니다. 시신을 찾아냈습니다. 그의 부모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장로교 교인이었는데 자식이 죽고 나서 교회를 안 나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우리 아들을 데려갈 수 있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장로님이고 어머니는 권사님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6대 독자였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 죽으면 다섯이나 남았는데 그까짓 것, 10명인데 하나 죽어도 90%는 생존했으니 괜찮다고 부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자식 하나, 하나가 다 하나처럼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이 참척을 당한 어미에게 이 자식은 하나밖에 없는 독자였습니다. 그러니 그 슬픔은 훨씬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쉽게 얘기하면 자식이 다섯이 있는데 하나가 참척을 당하면 슬프기는 하지만 소망은 있습니다. 왜? 넷을 봐서라도 살아야 되니까. 그런데 유일한 혈육입니다. 죽었습니다. 그 슬픔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모릅니다.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데 죽었어도 남편이 살아있으면 다시 낳으면 됩니다. 그런데 여자는 늙었고 남편이 없는 과부입니다. 몇 년을 과부로 살았는지 안 나오지만 어쩌면 아이가 어릴 때 남편을 여의고, 자식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왔을지도 모릅니다. 하필이면 그 여자의 단 하나의 혈육인 이 독자, 외아들이 참척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슬픔은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명색이 목사인데, 신학을 공부했는데 자식이 몇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죽었다고 합니다. 땅바닥에 엎드려 막 우는데 땅을 후벼 파서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나더랍니다. 얼마나 슬프면 그랬을까요? 그래서 누가 그 모습을 보면서 저 목사가 저렇게 우는 것을 보니까 천국이 없는 것 같다고 했는데,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자녀를 향한 사랑이 지극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겠습니까? 참척을 당한 어미의 비참한 마음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기분 좋은 상상은 아니지만 여러분의 자녀 중 누군가 이런 참척을 당했다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아마 삶의 모든 희망이 끊어지는 것 같고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차라리 미울 듯이 여겨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백 명의 부모라면 거의 모든 부모가 죽어간 자식의 목숨과 살아있는 자신의 목숨을 바꿀 수 있다면 기꺼이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영적 참척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육적 참척은 그 아이가 주님을 잘 믿다가 죽은 아이면 하나님이 다시 살리십니다. 잠시 헤어지는 것입니다. 영적 참척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커다란 중생과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살아있는 것 같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참척을 당한 아이입니다. 참척의 상태에 있는 아이입니다. 그리고는 복음을 따라서 정확하게 말하면 이 세상 신이 믿지 못하게 복음의 광채를 그 마음에서 가리고 있고,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형벌을 받고 영원한 심판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참척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식이 참척을 당했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면 그 부모는 마음이 자식에게 가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처음부터 왜 만드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강원도에 있는 카지노 센터입니다. 염려했던 데로 그것을 세운지 10여년이 지나면서 수많은 사람이 자살을 했습니다. 난 지금도 외치고 싶습니다. 그런 것을 왜 만드는가 하고,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잘 나가던 사업가였습니다, 재산이 4백억이나 되는 사업가였습니다. 얼마나 절약하며 애를 썼는지 주차를 할 때도 주차를 하는 한 시간에 공영 주차비를 내는 게 아까워서 직원이 퇴근한 다음에 차를 댈 정도로 알뜰한 사람이었습니다. 신문에 우수중소기업의 특별사례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근데 그 사람이 친구 집에 문상을 갔다가 시간이 잠깐 나니까 강원랜드라고 하는 유명한 곳이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주위에서 “한번 가보겠는가?” 하니까 “한번 구경이나 갑시다.” 하고 따라갔습니다. 거기서 장난삼아서 돈을 몇 십 만원 들여서 돌려봤는데 그날 7백만 원을 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일주일 안에 또 갔습니다. 아마 맨 처음 방문하면 일부러 돈을 따게 해주나 봅니다. 그래서 한 번씩 가면 돈을 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근데 두 번째에 가서 이천만원을 잃었습니다. 자수성가한 사람의 특징이 손해보고 못 배깁니다. 좋게 말하면 사업에 있어서 지독한 승부사적인 기질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대국적인 면을 못 보는 쫌생이같은 기질이기도 합니다. 이천만원을 날렸으면 ‘에이, 자식들.’ 하고 털어버리면 그만인데, 300원씩 주차비를 아껴서 이천만원을 모으려면 얼마나 모아야겠습니까? 그러니까 복수를 하러 간 것입니다. 결국 4백억을 모두 날렸습니다. 한참 돈을 잃고 있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미국에 유학 간 우리 딸이 죽었데. 빨리 와.” 라는데, 사업상 너무 바쁜 일이 있어서 못 간다고 하고 계속 도박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사람들이 나중에는 인간도 아니라고 욕을 합니다. “너는 자식을 전혀 사랑하지 않은 인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식을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자식보다 더 사랑한 게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자식이 죽어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제 새끼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사람도 아마 진짜 그 사람의 고백대로 노름이 아니라 사업상의 일 때문에 출장을 갔더라면 접고 미국으로 갔을 것입니다. 나중에 고백하기를 자기가 왜 그랬는지 그때 내가 죽이도록 밉다는 것입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육신의 자식이 죽었는데 슬퍼할 수 없다는 것은 정신이 다른데 가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신이 다른데 가있어서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랑이 떠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영적인 참척의 상태에 있는 자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많은 부모들은 자기 자식의 마음이 강퍅해서 회심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어머니가 자식의 참척한 상태에 있는 영혼을 위해서 슬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자를 먼저 보낸 이 어미는 말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비통하게 울며 장례의 행렬을 뒤따라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는 어떤 상태입니까? 자녀가 참척되었다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림을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 속에 마음에 있는데 속사람은 관에 누워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슬프지 않습니까? 리처드 백스터라고 하는 청교도 목사는 자기의 책 속에서 “회심하지 못한 영혼을 위하여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 울어주어야 할 만큼 불쌍한 사람이다.” 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향한 눈물은 자신의 영혼을 위한 눈물과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영혼이고, 그 형상의 원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슬퍼하는 마음의 핵심은 죽은 영혼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의 혈육인 자기 자식이고 핏줄입니다. 그 자식이 참척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중생하고 회심한 자식이 죽었을 때는 슬퍼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 다시 만나니까. 여러 해 전에 우리 교회에서도 어린아이 하나가 먼저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가기 전에 엄마 아빠가 손을 꼭 잡고, “너 먼저 하늘나라에 가서 기다려. 엄마 아빠가 갈게.” 영문도 모르면서 애는 “응, 엄마 알았어.” 라고 대답하지만 소망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 영원히 계속될 하늘가족으로서의 삶이 어떻게 슬픔과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서 불안 속에서 살고 있는 가족의 삶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는 이미 말이 없고 자기의 죽은 육신의 상태를 위해서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III. 어미를 불쌍히 여기심
예수님께서는 참척당한 어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틀림없이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다가올 때 이웃이나 제자들로부터 이 여자에게 죽은 아들이 청년이며 또 독자이며 어미는 과부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누가가 그 정보를 여기에다 적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여자가 얼마나 슬프게 울었는지 오늘 성경은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러셨습니다. 이 과부가 열렬히 기도했다는 이야기도 안 나오고, 이 과부가 예수님께 큰 믿음을 가지고 다가왔다는 이야기도 안 나옵니다. 주님이 사람을 살리고 고치는 기적을 보여주실 때, 여러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에게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봐라. 믿으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단다.” 또 어떤 때는 “저렇게 간구하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는가?” 를 보여주십니다.
여기서는 뭘 보여주시고 싶으셨을까요? 여자가 기도했다는 이야기도 안 나오고, 예수님이 ‘봐라, 이 여자의 믿음이 이스라엘에서 제일 크구나.’ 이런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믿음의 중요성이나 간구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여자가 한 일이라고는 오직 무엇 밖에 없는가 하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한 것 밖에 없습니다. 이 기사는 우리가 믿음을 가져야 할 필요, 열렬히 간구해야 할 필요를 교훈하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참척당한 상태에서 누구도 도울 자가 없어서 통곡하고 있을 때, 아들을 주권적으로 살려주심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커다란 자비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주권적으로 주님이 부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뚜껑이 닫힌 상태에서 오고 있는 죽은 아들을 보신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죽은 청년이 불쌍해서 예수님이 살려주셨다는 것 보다 참척에 목매어우는 과부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통곡하는 과부의 울부짖음이 얼마나 애처로웠으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면서 “울지 말라.” 말씀하셨을까요? 여러분도 이렇게 말씀해주실 필요가 있을 정도로 참척당한 자식을 위해서 울고 있습니까? “그만 울 거라. 울지 말거라. 죽은 네 아들보다 우는 네가 더 불쌍하구나.” 이런 마음으로 주님이 울지 말라고 말씀하리만치 그렇게 자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먹을 때나, 잘 때나, 누울 때나 참척의 상태에 있는 자식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십니까? 참척의 상태에 있는 자식을 위해 해야 할 어미의 의무가, 아비의 의무가 큰 집을 짓는 것이라면 돈이 없는 사람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유창한 글을 써서 참척의 상태에 있는 아이에게 바치는 것이라면 글재주가 없는 어미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는 것은 마음으로 참척의 상태에 있는 자기 새끼를 불쌍히 여기기만 하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이 어미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죽은 자기 자식에 대한 불쌍한 마음과 또 한편으로는 이제 하나밖에 없는 자기 자식을 잃어버리고 홀로 외톨이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이중적인 슬픔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신대원 1학년 때 시골로 전도활동을 갔습니다. 동리에 있는 아녀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녀자들 중 한 분과 길거리에 잠깐 앉아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다 전하고 났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정말 사람이 죽으면 천국과 지옥으로 갑니까?” “그럼요.” “예수를 안 믿으면 심판을 받아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정확합니다.” “한번 지옥에 떨어진 사람은 다시 천국으로 갈 기회가 있나요?” “없습니다.” 그랬더니 정색을 하고 “저는 더더욱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깜짝 놀라서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모시던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은 예수를 안 믿고 죽었는데 그러면 그분들은 지옥에 가셨을 텐데 내가 지금 당신의 말을 듣고 믿으면 천국을 가는데 내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지옥에서 그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내가 있는 그곳이 어떻게 천국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할 말을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반응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그렇게 고통을 받고 있으면 자식 된 도리로서 차라리 거기 내려가서 같이 고통을 받고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도 자신의 혈육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고 한동안 정리가 안 되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 아녀자의 논리로 말한다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 네 자식은 죽어서 참척의 상태에 있다가 지옥에 있다고 치자. 또 지금 참척의 상태에 있다. 그런데 네가 지금 주님과 동행하며 산다고 치자. 그리고 미래에 하늘나라에 간다고 치자. 네 자식이 없이 간 그 나라가 천국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면 네가 진정으로 부모의 마음을 가진 자인가?” 이렇게 묻고 싶은 것입니다.
IV. 살리시는 주님
주님께서 관에 가까이 다가가셔서 손을 대시고 청년에게 명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죽었던 자가 일어나고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 절망에서 큰 기쁨으로 변하는 놀라운 사건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주님 앞에 곧 혹은 잠시 후에 갈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부르실 것입니다. “너희 가족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물으실 때 “주님. 여기에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도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잠시 믿음의 싸움을 다 싸운 후에는 곧 주님 앞에 올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부모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두 가지만 해주면 다 해준 것입니다. 그 아이가 이 사회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교육시켜주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믿고 회심하게 해주었으면 부모로서는 할 거의 모든 일을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일은 첫 번째 일이 토대가 되어 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소망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살리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식을 사랑해도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 자신의 큰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살려주셨고, 믿지 않았는데도 살려주신 이유는 혹시 우리의 자녀가 예수 믿고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잘 믿고 잘 기도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식을 인하여 참척의 상태에서 슬피 우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은 영혼으로 참척되어있는 우리 자식들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사랑의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입니다. 믿었어도 내가 믿고 자식이 믿어서 우리 자식이 구원받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그 무한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회심의 놀라운 역사를 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물어보십시오. 특히 나이 많이 들어서 예수 믿게 된 자식이 있는 부모를 찾아서 가보십시오. 부모가 피눈물을 흘리든지, 목회자가 눈물을 흘렸든지, 주위에 누가 대신 흘렸든지 거기는 반드시 애통하는 눈물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육신으로 자식을 낳을 뿐만 아니라 영으로 다시 한 번 자식을 낳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가리켜서 옥 속에서 복음 안에서 내가 낳은 자녀라고 부른 것처럼 여러분들은 육신으로 자식을 낳아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영혼으로 자신의 자식을 깊이 참척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위하여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그게 부모의 도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